선물함
뒤로가기버튼 역천

1화

2017.12.07 조회 3,182 추천 19


 오래 묵은 한은 어찌 삭여야 하는가.
 
 지우지 못한 수치심은 어찌 눌러야 하는가.
 
 잊을 수 없는 죗값은 어찌 치러야 하는가.
 
 삭일 수 없는 원한은 어찌 되갚아야 하는가.
 
 그때로 되돌아가지 않고서는,
 
 대체 무슨 방법이 있단 말인가.
 
 一. 일야멸문지화(一夜滅門之話)
 
 
 
 
 
 나른한 오후였다.
 
 등줄기에 닿은 석벽은 적당히 따스해서 눈꺼풀을 끌어 내렸다.
 
 “으음······.”
 
 나이는 열두셋 정도 되었을까?
 
 벽에 기대어 졸고 있던 소년의 입가에는 어느새 한 줄 맑은 침이 주룩 흘러 있었다.
 
 졸음이 아니라 이미 깊은 잠이라고 해야 할 정도다.
 
 “자냐?”
 
 소년의 앞에선 한 남자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이는 서른두엇이나 되었을까?
 
 청년이라기엔 늙고, 중년이라기엔 젊은 그 남자.
 
 그는 소년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자는 척하는 거면 당장 일어나라. 그렇지 않으면 불벼락이 떨어질 테니.”
 
 “드르렁······.”
 
 “좋은 대답이군.”
 
 남자는 이를 빠득 소리가 나게 갈며, 소년의 정수리에 대고 손을 휘둘렀다.
 
 딱콩!
 
 “악!”
 
 밤톨 씹어 부수는 소리와 함께 외마디 비명이 들려왔다.
 
 소년은 벌떡 일어나서 주위를 휘휘 둘러보았다.
 
 잠에서 덜 깬 눈치다.
 
 “벼, 벼락이다!”
 
 “오냐, 벼락이다.”
 
 소년은 엄한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는 남자를 보며 고양이 앞의 쥐처럼 잔뜩 오그라들었다.
 
 “······으, 으윽. 곽 사형······.”
 
 “고신(高信) 네가 잠에서 깨니까 참 좋구나. 사형 소리도 한 번 더 듣고. 응?”
 
 “헤헤헤헤.”
 
 소년, 고신은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으이구, 이 철딱서니 없는 것아.”
 
 그런 고신을 보며 신검문(神劍門)의 대제자 곽소는 혀를 찼다.
 
 “우리 신검문이 하남에 자리 잡고 명문으로서 위세를 떨쳐 온 것이 어언 삼십 년이다. 그런 대신검문의 제자라는 놈이 대낮부터 이리도 늘어져 잠만 자서야 쓰겠냐? 사부님께서 보셨다면 꿀밤 몇 대로는 끝나지 않으실 거다.”
 
 “헤헤, 사부님은 모르시잖아요.”
 
 “뚫린 입이라고 나불대기는.”
 
 딱!
 
 좀 전보다 곱절은 강한 충격이 고신의 후두부를 강타했다.
 
 “아이······ 고······.”
 
 “이제 잠이 좀 깨냐?”
 
 “예에.”
 
 곽소는 고신의 어깨를 톡톡 두들기며 말했다.
 
 “그럼 가서 수련이나 해라. 벌써 다른 사람들은 점심 먹고 오후 수련에 들어간 상태다.”
 
 곽소가 가리킨 곳은 수련장이었다.
 
 문파 전각들 틈새로 널찍이 트인 그 공터에서는 수많은 무인들의 우렁찬 기합이 들려왔다.
 
 “얍! 합!”
 
 늙고 젊음을 막론하고, 제자들은 모두 구슬땀을 흘리며 무공 수련에 정진하고 있었다.
 
 “신명만리(神鳴萬里)!”
 
 “삼단삼절(三斷三絶)!”
 
 신검문이 자랑하는 무림십대검공(武林十大武功) 신명검(神鳴劍)은 물론이고, 가장 초급 무공인 삼단검(三斷劍)까지. 모든 이들이 제게 주어진 무공을 최선을 다해 참오(參悟)하고 있었다.
 
 보기만 해도 흐뭇해질 멋진 모습이지만.
 
 “······성실도 해라.”
 
 좀 전까지 졸던 고신은 투덜거렸다.
 
 그러자 곽소는 손을 들어 올려 또다시 꿀밤을 먹였다.
 
 딱!
 
 “아야야, 머리 나빠지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세요!”
 
 “못된 꾀만 부리는 머리는 좀 나빠져도 수련에 지장 없다.”
 
 “좀 쉬엄쉬엄 해야 무공도 늘죠. 이게 효율적인 거라니까요?”
 
 “인석아, 딴 사람들도 너처럼 효율적인 무공 연마했다가는 우리 신검문도 천무문(天武門)처럼 하룻밤 사이에 멸문당하겠구나.”
 
 “처, 천무문?”
 
 오싹했다.
 
 고신은 몸을 떨었다.
 
 “그 얘기는 갑자기 왜 꺼내시는 거예요. 그 흉험한 일야멸문지화(一夜滅門之話)를······.”
 
 천무문의 일야멸문(一夜滅門).
 
 그것은 역사라기보다는 야사에 속하는 얘기였다.
 
 지금으로부터 육십 년 전,
 
 하남 땅에 천무문이라 불린 문파가 있었다.
 
 백 년이라는 세월 동안 유구한 명성을 이어 온 문파로, 긍지와 실력을 모두 갖춘 명문 중의 명문이었다.
 
 문도의 숫자는 많지 않았으나 하나하나가 정예였고, 특히 문주인 천무령(天武令) 상우천(尙旴天)은 당대의 천하제일인으로 불린 절대 고수였다.
 
 그러나 그들의 이름은 지금 모두 옛것이 되어 있었다.
 
 왜냐하면 더 이상 천무문도, 천무령 상우천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강호에 흔히 있는 일처럼 타 문파와의 항쟁으로 인해 세력이 꺾인 것도 아니다.
 
 문파 내부의 내분으로 자멸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천재지변이 있어 땅 밑으로 쑥 꺼진 것도 아니다.
 
 도무지 알 수 없고 알아내지 못한 이유로, 어제저녁까지 멀쩡히 있던 문파가 오늘 아침에 멸문당해 불타고 있었다.
 
 생존자 하나조차 없이 모조리 죽었고 흔적 하나 없이 모두 불타 버렸기에, 그 누구도 그 일의 전말조차 알지 못했다.
 
 그저 하룻밤 사이에 문파가 멸망당할 정도의 재앙이 있었으리라 짐작하며 호사가들의 입에나 오르내릴 뿐.
 
 혹자는 지옥의 악귀들이 문파를 괴멸시켰다고 전하고, 옥황상제가 벼락을 떨어뜨려 그리했다고 하기도 했다. 허나 그 누구도 그 얘기를 허무맹랑하다고 타박하지 못했다.
 
 왜냐면, 그 누구도 답을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야말로 괴담의 영역에 드는 괴사가 천무문의 일야멸문지화였다.
 
 유난히 겁이 많은 고신에게 있어 일야멸문지화는 무섭기 짝이 없는 얘기였다.
 
 “흐흐흐. 겁쟁이들 냄새를 귀신같이 맡는 악귀들이 네 겁쟁이 냄새를 맡고 스멀스멀 기어올지도 모르지. 그렇게 되면 우리 신검문이 위험해지게 되는 것도 모두 신이 네 탓이 되겠구나.”
 
 “으, 으윽.”
 
 “그래. 그러고 보니 오늘 잠마련(潛魔聯)이 서신을 보내 왔었지? 잠마련에 속하여 강호일통(江湖一統)에 들거나 아니면 멸문당하거나 둘 중 하나를 고르라고. 그것도 그 악귀들의 입김이 닿은 건지도 모르지.”
 
 고신의 몸은 누가 봐도 눈에 띌 정도로 떨리고 있었다.
 
 악귀가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죽은 것도 두렵지만, 더욱더 두려운 것은 바로 산 자들.
 
 “자, 잠마련······.”
 
 잠마련!
 
 요 근래 요원의 불길[燎原之火]처럼 그 기세를 드높이는 사파의 절대 강자였다.
 
 나날이 번창해 온 신검문은 이제 구파일방에 비견되는 성세를 얻어 십대 문파의 반열에 들려 할 정도였다.
 
 허나 문제는, 잠마련은 구파일방 전체와 상대하더라도 밀리지 않을 정도라는 것이다.
 
 정파의 최고 고수가 검신(劍神), 신도(神刀), 신권(神拳)의 삼신(三神)이라면, 사파의 최고 고수는 마신(魔神), 마귀(魔鬼), 마의(魔醫)의 삼마(三魔)라고 할 수 있었다.
 
 하나같이 인지(認知)를 초월한 절대 고수 중의 절대 고수다.
 
 그리고 잠마련의 무서운 점은 거기에 있었다.
 
 잠마련주 마신검(魔神劍) 신탐(申探).
 
 흑면마귀(黑面魔鬼) 흑무살(黑武殺).
 
 생사마의(生死魔醫) 우필(羽匹).
 
 단신으로 천하를 다툴 수 있는 세 절대 고수.
 
 사파의 삼대 고수가 모두 한 문파 안에 있는 것이다.
 
 호부 밑에 견자 없는 법인데, 어찌 명장 밑에 약졸이 있겠는가?
 
 일개 대(隊)라 하더라도 중견 문파를 능히 멸문시킬 수 있었고, 일개 단(團)은 구파일방에 필적했다.
 
 수적으로 따지면 사파인의 사 할.
 
 실제 전력으로 따지면 사도의 팔 할이 몰려 있다고까지 일컬어지는 거대 집단이었다.
 
 마도에서 이름난 고수들은 대개가 그곳에 집결해 있는 것이었다.
 
 곽소는 스산하게 목소리를 깔며 말했다.
 
 “저 흑면마귀가 오늘 밤이라도 나타나 암중에 널 해치워 버릴지도 모르는 노릇이지. 그런데도 무공 수련을 게을리 할 생각이 드느냐?”
 
 고신은 몸을 바르르 떨었다.
 
 무공 수련이 문제가 아니다.
 
 흑면마귀.
 
 재질을 알 수 없는 흑면을 쓰고 검은 옷으로 온몸을 감싼 그는, 천하의 그 누구도 본모습을 본 적이 없다는 악귀 중의 악귀였다.
 
 그가 이곳에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것은 그저 생각만으로도 몸이 떨리는 일이다.
 
 그때였다.
 
 물컹.
 
 무언가 따스하면서도 부드러운 것이 고신의 등에 닿았다.
 
 가슴이었다. 여성 특유의 부드러우면서도 단단한 가슴이 고신의 등에 닿은 것이었다.
 
 고신은 점차 떨림이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그 대신 몽롱한 기분이 머릿속을 사로잡았다.
 
 “왜 그렇게 떨고 있니? 오한이라도 들었어?”
 
 아련하고 달콤한 향기가 목소리에서 묻어 나왔다.
 
 그리고 이런 매혹적인 목소리는 그가 알기로 단 한 사람에게만 허락된 것이었다.
 
 “괜찮아요, 장 사저.”
 
 신검비화(神劍秘花) 장초림(張初林).
 
 이제 곧 열여섯 번째 생일을 맞는 그녀는 신검문주의 금지옥엽 외동딸이었다.
 
 미려한 외모에 고운 심성. 신검문 밖으로는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는다는 신비함까지 더해져 사해사화(四海四花)의 하나라 불리는 미인이었다.
 
 그녀의 고운 눈에 질책하는 빛이 어렸다.
 
 “곽 사형, 아무리 고 사제가 훈련을 게을리 하였어도 그렇지. 어른이 되어서 어떻게 아직 어린 고 사제에게 겁을 주실 수 있나요? 그것도 문파의 중대사를 가지고.”
 
 “미안하게 되었군, 사매.”
 
 “사과할 사람은 제가 아니지 않나요?”
 
 곽소는 얼굴을 찌푸렸으나, 장초림의 얼굴은 단호했다. 사과하지 않으면 다시는 보지 않겠다고 말할 기세였다.
 
 “장 사매도 그렇게 고 사제만 싸고돌 일이 아니야. 사매가 그리 싸고도니 고 사제가 이리 게을러지지 않는가.”
 
 “고 사제는 아직 어리잖아요.”
 
 “휴, 이거 정말 당할 수 없군.”
 
 곽소는 한숨을 푹 내쉬더니 고신을 향해 말했다.
 
 “내가 잘못했다. 인석아, 그치만 너도 좀 열심히 무공 좀 닦아라. 장 사매가 언제까지 네 뒷감당을 해 줘야 하느냐.”
 
 “곽 사형!”
 
 “아, 알았어, 알았어. 고신, 이 사형이 좀 심했던 것 같구나. 미안하다.”
 
 곽소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그대로 몸을 돌려 저 멀리로 사라져 갔다.
 
 고신은 자신이 짝사랑하는 연상의 미녀를 향해 말했다.
 
 “제가 잘못한 거였는데······.”
 
 “괜찮아, 넌 아직 어리잖니.”
 
 “하지만 장 사저는 저보다 두 살 많을 뿐이잖아요.”
 
 “그래도 내가 누나인걸? 사남매 관계를 떠나서도 말이지.”
 
 신검문에서 가장 어린 사람이 고신이라면, 두 번째로 어린 사람은 장초림이었다.
 
 신검문에서 태어난 장초림과, 갓난아기일 적에 신검문에 의탁된 고신.
 
 같은 처지로 함께 자라난 그들에게 있어 두 살밖에 안 되는 나이 차이는 큰 의미가 없었다.
 
 신흥 문파인 탓에 유달리 어린애가 적은 신검문에서 그들은 단둘뿐인 ‘같은 또래’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장초림이 고신을 감싸는 것은 사남매의 관계라기보다는 오히려 누나 동생 사이의 관계에 가까운 것이다.
 
 “하지만 정말로 흑면마귀가 나타나면 어떻게 하죠?”
 
 “아버님이 해치워 주실 거야, 아버님은 강하시니까.”
 
 “하지만 문주님이 제 곁에 없으실 때 흑면마귀가 나타나면요?”
 
 “그때는 소리쳐서 도와달라고 하렴.”
 
 “하지만 만약 아혈이 막히면요? 누군가 암습을 하면 먼저 아혈부터 막고 보잖아요.”
 
 다른 사람이 들었다면 명색이 무술 배우는 놈이 겁도 많다고 꾸짖을 일이었지만, 장초림은 달랐다.
 
 고신의 얘기를 귀 기울여 들은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그럴 수도 있겠구나.”
 
 “그렇죠?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이걸 갖고 다니렴.”
 
 장초림은 고신을 향해 뭔가를 내밀었다.
 
 고풍스러운 모양새를 한 새 모양의 쇳덩이였다.
 
 허나 고신은 그것이 단순한 조각이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입가에 작은 구멍이 나 있기 때문이었다.
 
 “이게 뭔가요?”
 
 장초림은 고신에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봉황효(鳳凰嚆)라고 해. 신호용 피리란다.”
 
 “피리요?”
 
 찬찬히 쇳덩이를 살펴본 고신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말했다.
 
 “어디다 바람을 불어야 하나요?”
 
 “바람을 불어 넣을 필요는 없어. 아혈이 막히면 어차피 바람도 못 불잖니?”
 
 장초림은 새의 머리 부분을 꾹 눌렀다가, 손을 슬며시 떼었다.
 
 그러자 새가 빽빽 높은 소리를 내며 울었다.
 
 요란한 그 소리에 고신은 귀를 틀어막았다.
 
 

이용약관 유료이용약관 개인정보처리방침 청소년보호정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