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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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2017.12.07 조회 3,579 추천 43


 
 
 프롤로그
 
 
 
 
 
 깎아지른 낭떠러지 위, 검은빛 일색의 거대한 성이 웅장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완전히 포위된 건가.”
 
 그 성의 중심부에 위치해 있는 첨탑에서 뵈울레이트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어디를 보아도 인간의 모습이 보였다. 마치 바다의 물결처럼 인간들은 지평선까지 이어져 있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숫자였다.
 
 수백 년을 살았지만 이렇게나 많은 인간을 본 건 그도 처음이었다.
 
 “전 대륙의 인간들이 모두 몰려온 모양이야. 이번 전투에 모든 걸 건 거겠지.”
 
 뵈울레이트의 옆에 빛이 번쩍이더니 누군가 나타나 그렇게 말했다. 백금발을 길게 기른 여성이었다. 그녀를 본 뵈울레이트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여왕님, 제가 밖으로 나오시면 안 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아직 전투가 시작되지도 않았잖아. 나오면 좀 어때?”
 
 “그래도 언제 전투가 시작될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밖은 위험······.”
 
 하지만 뵈울레이트는 끝까지 말을 잇지 못했다. 갑자기 여왕이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 왔기 때문이었다.
 
 “단둘이 있는 거 참 오랜만이다. 그치?”
 
 “그렇군요.”
 
 “둘만 있을 때는 존대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잖아.”
 
 “······알았어.”
 
 “안아 줘.”
 
 “······.”
 
 “빨리!”
 
 여왕의 재촉에 뵈울레이트는 한 번 한숨을 쉬더니 그녀를 끌어안았다.
 
 뵈울레이트의 품에 안겨 눈을 감은 채 여왕이 넌지시 말을 꺼냈다.
 
 “이번 전투에서 우리가 살아남을 가능성이 얼마나 있는지 솔직하게 말해줘.”
 
 “······백분의 일도 되지 않을 거야.”
 
 “당신과 3명의 군단장들이 있는데도?”
 
 “그 2배가 있더라도 힘들어. 인간들의 수가 너무 많아.”
 
 “그럼 우리 모두는 이제 죽을 수밖에 없겠네.”
 
 “아니.”
 
 뵈울레이트는 여왕을 안고 있는 팔에 힘을 주었다. 그는 놀란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여왕에게 나지막이 말한다.
 
 “당신은 죽지 않아. 내 모든 걸 걸고 당신만은 살리겠어.”
 
 “그럼 당신은 죽겠다는 거야?”
 
 “내 죽음으로써 당신을 살릴 수 있다면 기꺼이. 그리고 당신도 알고 있겠지만, 나나 군단장들은 죽어도 죽는 게 아니잖아. 당신만 살아 있다면 말이야.”
 
 “그래도······.”
 
 여왕이 감정이 북받친 듯 말을 잇지 못했다. 뵈울레이트는 그런 여왕의 머리를 말없이 쓰다듬어 주었다. 여왕이 이윽고 입을 열었다.
 
 “고마워, 뵈울레이트. 당신 덕분에 결심을 할 수 있었어.”
 
 “결심? 그게 무슨······.”
 
 뵈울레이트가 이해할 수 없는 여왕의 말에 되물었을 때였다.
 
 “컥!”
 
 뵈울레이트는 심장을 가르는 날카로운 통증에 신음을 흘렸다. 어느새 그의 왼쪽 가슴엔 날카로운 단검 한 자루가 박혀 있었다.
 
 평범한 무기라면 심장이 뚫리더라도 금방 회복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불가능했다.
 
 그를 찌른 것은 마신이 축복이 깃들어 찌른 상대를 반드시 죽이는 여왕만의 무기였기 때문이다.
 
 “어째서······?”
 
 뵈울레이트는 무릎을 꿇은 채 가슴을 움켜쥐며 ‘왜?’라는 뜻을 담고 있는 눈빛으로 여왕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여왕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하염없이 눈물만을 흘리고 있었다. 뵈울레이트의 의식은 거기서 끊어졌다.
 
 
 
 1. 민섭의 다짐
 
 
 
 
 
 ‘하아, 이렇게 죽는 건가?’
 
 민섭은 지금 죽어 가고 있었다. 가파르기 그지없는 산길에서 굴러떨어진 결과였다.
 
 그의 팔과 다리는 뼈가 부러지다 못해 튀어나와 있었고 날카로운 나뭇가지 하나가 배를 관통하고 있었다.
 
 즉사하지 않은 것이 이상할 정도로 처참한 상황이었다.
 
 “사람은 말이다. 모름지기 남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야 하는 법이란다.”
 
 죽음을 목전에 뒀기 때문일까. 돌아가신 아버지가 입버릇처럼 하시던 말씀이 민섭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남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삶이라······.’
 
 민섭은 입에서 피를 흘리며 자조했다. 자신의 삶은 그 말과 전혀 반대였던 탓이다.
 
 중학교까지는 그래도 괜찮았다. 하지만 고등학교에 들어간 뒤부터 상황은 완전히 틀어졌다.
 
 “뭐야, 이 새끼는?”
 
 우연히 같은 반 일진 재혁과 어깨를 부딪쳤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녀석은 그 이유 하나를 들어 민섭을 미친 듯이 구타했다.
 
 그 후로 민섭은 소위 말하는 빵셔틀이 되었다. 자신의 용돈으로 재혁과 녀석의 친구들이 먹을 것을 사다 바쳐야 했고 가끔 심심풀이로 구타를 당하곤 했다.
 
 몇 번이나 담임에게 자신의 처지를 하소연해 봤지만 아무 소용없었다.
 
 재혁은 영악하게도 선생님들 앞에서는 절대 속을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품행을 단정히 하는 건 물론이고,민섭과 달리 성적도 우수해 선생님들 눈에 재혁은 모범생 그 자체였다. 그러니 말을 한다 해도 먹힐 리가 없었다.
 
 민섭이 지금 이렇게 된 것도 재혁 때문이었다.
 
 녀석의 여자 친구인 민아가 실수로 떨어뜨린 지갑을 주우러 산 밑으로 내려오지만 않았다면 이렇게 될 일도 없었을 것이다. 아니, 아예 설악산 수학여행을 오지 않았어야 했다.
 
 민섭은 어차피 재혁 때문에 제대로 즐기지도 못할 수학여행임을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아무리 누나가 설득했다고 해도 대체 자신이 무슨 생각으로 수학여행에 올 결심을 했는지 후회가 몰려왔다.
 
 ‘미안해, 누나······.’
 
 부모님 대신 지금껏 자신을 키워 준 누나를 떠올리자 민섭은 눈물이 흘렀다.
 
 커서 남부럽지 않게 호강시켜 주겠다고 굳게 약속했건만,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할 것 같았다.
 
 의식이 점점 흐려지며 눈이 감겼다. 그는 이대로 눈을 감으면 끝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도저히 버틸 수가 없었다.
 
 그리고 결국, 민섭의 두 눈은 완전히 감겼다. 오르내리던 가슴이 움직임을 멈췄다. 그의 몸이 싸늘하게 식어 갔다.
 
 이변이 일어난 건 그 순간이었다.
 
 붉은 빛의 구체가 하늘 저편에서부터 날아왔다. 그리고 구체는 마치 무엇에 이끌리기라도 한 듯 죽은 민섭의 육체에 빨려 들어갔다.
 
 멈춰 있던 민섭의 가슴이 다시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잠시 후, 그의 눈이 떠졌다.
 
 눈을 뜬 민섭이 당혹스런 표정으로 자신의 몸을 내려다봤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민섭, 아니 민섭의 몸에 들어온 뵈울레이트는 당혹을 금치 못했다.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정신을 차려 보니 한 인간의 몸에 들어와 있었다. 이것은 여왕이 한 일이 틀림없었다.
 
 ‘나를 전생시킨 건가.’
 
 뵈울레이트 같은 고위 마족들은 죽는다 해도 마신의 대리인인 여왕의 의지만 있으면 얼마든지 새로운 육체에서 전생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뵈울레이트는 그녀를 위해 목숨을 내던질 각오를 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싸우기도 전에 여왕이 자신을 전생시킨 것이다.
 
 ‘어째서······ 대체 왜 나를 전생시킨 거지.’
 
 뵈울레이트는 당장에라도 여왕을 찾아가 묻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새로 얻은 몸의 상태가 너무 처참했기 때문이다.
 
 뵈울레이트는 먼저 몸 상태를 점검했다.
 
 ‘왼팔과 오른쪽 다리는 부러져서 움직일 수 없어. 머리의 고통은 어디에 부딪힌 것 같군. 출혈량으로 볼 때 앞으로 몸이 버틸 수 있는 시간은 일이 분이 한계야.’
 
 파악이 끝나자 뵈울레이트는 멀쩡한 오른팔을 눈앞으로 가져 왔다.
 
 뵈울레이트는 오른손에 의지를 집중했다.
 
 은은한 붉은 빛이 손바닥으로부터 흘러나왔다. 고위 마족으로서 자신이 지니고 있는 고유 능력이 발동된다는 증거였다.
 
 ‘다행히 되는군.’
 
 붉게 물든 손을 바라본 뵈울레이트는 상반신을 일으켰다.
 
 마치 무언가를 찾는 것처럼 주위를 둘러보자 성인 20명은 있어야 둘러쌀 수 있는 어마어마한 거목이 눈에 보였다.
 
 ‘다행이군. 이 정도로 큰 나무라면 몸을 치료하는 데 들어갈 기운을 얻을 수 있겠어.’
 
 겨우 몸을 일으킨 뵈울레이트는 그나마 멀쩡한 왼쪽 다리 하나만으로 껑충껑충 뛰며 거목에 다가갔다.
 
 피를 너무 흘린 탓에 한 번 뛸 때마다 현기증으로 인해 눈앞이 아찔했다.
 
 힘겹게 나무 앞에 도착한 뵈울레이트가 오른손을 펼쳐 거목에 갖다 대었다.
 
 ‘흡수.’
 
 손바닥에서 흘러나온 붉은 빛이 거목 전체를 휘감았다. 나뭇가지들이 크게 휘청거렸다.
 
 우수수수!
 
 마치 거목이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몸을 떠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붉은빛이 거목을 휘감고 있는 동안 뵈울레이트의 몸에서는 변화가 일어났다.
 
 배를 관통하고 있던 나뭇가지가 빠져나오고 구멍 난 상처가 메워졌다. 부러진 팔과 다리의 뼈가 저절로 맞춰지고 찢어진 근육과 피부가 재생되었다.
 
 “후우······.”
 
 뵈울레이트는 가벼운 숨을 내쉬며 거목에서 붉은빛을 거두었다. 아니, 거두려 했다. 그러나 그는 손을 뗄 수 없었다. 갑자기 거목에서 어마어마한 기운이 몰려들어 왔기 때문이다.
 
 ‘큭, 단순히 오래 산 나무가 아니었던 건가?’
 
 그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그의 몸으로 기운이 쏟아져 들어왔다. 마족의 강인한 육체라면 몰라도 지금 그의 몸은 인간의 그것.
 
 이렇게 커다란 기운이 한꺼번에 들어오면 수용은커녕 터져서 죽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빌어먹을!’
 
 뵈울레이트가 붉은빛을 거두기 위해 애를 쓰는 동안, 결국 거목의 기운이 그의 전신을 가득 메웠다. 그럼에도 기운은 끝없이 몸으로 들어왔다.
 
 이윽고 기운을 견디지 못한 육체가 조금씩 팽창하며 고통이 밀려왔다.
 
 ‘토, 통각을 차단해야······ 아, 안 되잖아?’
 
 뵈울레이트는 육체의 감각을 임의로 끊어 고통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이 육체는 원래 자신의 육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육체의 감각은 마치 남의 옷을 입은 것처럼 거북해 생각대로 조절할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나 적응을 한다면 가능하겠지만 전생한 직후인 지금은 무리였다.
 
 ‘크으윽.’
 
 뵈울레이트는 이를 악문 채 고통을 견뎠다. 너무 악문 탓에 이빨 사이로 피가 흘러나왔지만 그것을 느낄 정신조차 없었다.
 
 견디지 못한 피부와 근육이 찢어지고 피가 분수처럼 치솟았다.
 
 그때 뵈울레이트도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찢어진 피부와 근육을 거목의 기운이 다시 회복시킨 것이다. 그러한 현상은 몸 곳곳에서 쉴 새 없이 일어나고 있었다.
 
 팽창을 견디지 못한 육체가 부풀어 찢어지면 거목의 기운이 회복시키는 것을 반복했다. 고통을 견디지 못한 뵈울레이트는 이미 실신한지 오래였다.
 
 나약한 인간의 육체가 가져다주는 고통은 아무리 수백 년을 살며 별일을 다 겪은 뵈울레이트라도 견디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가 정신을 잃은 동안에도 육체는 회복과 팽창을 반복했다. 그러며 새로운 육체는 더욱 굳건해져 갔다. 회복될 때마다 육체가 거목의 기운을 모두 받아들이기 위해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얼마 후, 언제까지고 계속 이어질 듯했던 변화가 끝을 맺었다. 붉은빛은 뵈울레이트의 손으로 모두 빨려 들어가며 사라졌다. 그는 자신이 흘린 피로 흥건히 젖은 바닥에 쓰러졌다.
 
 휘감고 있던 붉은빛이 사라지고 드러난 거목의 모습은 그야말로 처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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