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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투 1

2017.12.11 조회 424 추천 1


 대투 1권
 제1장 더럽게 입맞춤은 왜 해?
 
 
 “에이, 왜 때려? 난 반드시 해내고야 말 테야!”
 “크크! 웃기는 놈! 네깟 놈이 해내긴 뭘 해? 꿈 깨라 꿈 깨!”
 남루한 의복을 걸친 팔구 세 가량 된 소년 하나가 눈빛을 빛내며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있었다.
 “꿈? 그게 과연 꿈일까?··· 아냐! 난 해낼 거야! 반드시 해 내고야 말겠어! 두고 봐! 내가 해내는지 못해 내는지!”
 “크크크! 웃기는 놈! 넌 정말 웃기는 놈이야!”
 대략 십 사세쯤 되어 보이는 소년이 별 우스개 소리를 다 들었다는 듯 소년의 머리를 또 쥐어박고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아얏! 왜 때려? 난 할 수 있단 말이야! 두고 봐. 반드시 해내고야 말 테니까. 그때 가서 나한테 돈 꿔 달라고 빌지나 마!”
 “뭐라고? 킬킬킬···! 정말 웃기는 놈이군! 세상이 반쪽 나기 전에는 네놈에게 그런 부탁 안 할 테니까 아예 걱정 붙들어 매!”
 홀로 남은 소년은 쥐어 박힌 자리를 쓰다듬으며 뭔가를 이루겠다는 의지로 이글거리는 눈빛을 빛내고 있었다.
 천년고도(千年古都)인 섬서성(陝西省) 서안(西安)에 자리 잡은 천양원(千養院)에는 일천에 달하는 고아들이 있었다.
 소년은 이곳 천양원에 의탁하고 있는 고아인 고연악(高衍岳)이었고, 그의 머리를 쥐어박은 소년은 기원주(奇原周)였다.
 고연악이 최초로 이곳에 몸담은 것은 생후 백 일도 안 되었을 때였다. 추운 겨울 성명만 적혀 있는 종이와 허름한 강보에 쌓인 채 문 앞에 놓여 있었다.
 마치 지렁이가 기어다니는 것처럼 지독한 악필로 쓰인 그것은 요리상 위를 덮는 종이인 듯 하여 아마도 그의 모친이 기녀가 아닌가 하는 추측만 할 수 있게 하였다.
 천양원에 몸담은 후 고연악은 다른 고아들과 마찬가지로 하는 일 없이 지내면서도 안 쑤시고 다니는 데가 없을 정도여서 적어도 수십 년을 저잣거리에서 산 사람처럼 영악해졌다.
 천양원주인 전대 천자의 태태감(太太監)을 지냈던 원익서(元益瑞)는 어릴 적 불의의 사고로 고환을 잃은 후 황궁으로 들어가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던 사람이었다. 신체적 결함 때문에 자식을 볼 수 없던 그는 유난히도 아이들을 좋아하였다.
 선황이 붕어(崩御)하고 새로운 천자가 등극하자 미련 없이 황궁을 박차고 나온 그는 평생 모은 재물로 이곳에 천양원을 마련하고 오갈 데 없는 고아들을 보살피는 낙에 살고 있었다.
 올해 세수 팔십에 다다른 그는 너무도 늙어 혼자서 많은 아이들을 홀로 돌볼 수 없자 아이들로 하여금 서로를 보살피도록 하였다. 다시 말해 일천에 달하는 고아들을 효과적으로 보살피기 위하여 서로가 서로를 돌보게 하였다.
 고아들 중 스스로 자신을 돌볼 능력이 있다 판단되는 십육 세가 넘은 고아는 주루나 기원 등에 나가 동생들이 먹을 양식을 구해오도록 하였다. 이들은 사 년 간 천양원을 위해 봉사함으로서 그 동안 자신이 받은 은혜를 되갚도록 하였다. 그리고 나이 이십이 넘으면 천양원을 떠나 자신의 길을 가도록 하였다.
 이들은 대형(大兄)이라 불렸으며 일백팔십 명이었고 현재 기루나 서원, 객잔, 전장 등에서 허드레 일을 하고 있었다.
 나머지는 아홉 명의 중형(中兄)과 팔십일 명의 소형(小兄)들이 맡아 동생들을 보살폈다. 중형은 아홉 명의 소형들을 보살폈고, 소형들은 각기 아홉 명의 동생들을 보살피도록 하는 것이 천양원의 조직이었다.
 이렇게 하여 현재 정확히 일천이라는 숫자를 유지하고 있었다.
 기원주는 고연악을 비롯한 아홉 아이들을 담당하고 있었다.
 이들 대형들과 형들은 동생들의 투정을 받아주면서도 성실하게 보살폈기에 천양원의 일천 식솔은 그야말로 친형제지간이나 다름없다 할 정도로 의가 좋았다.
 “치잇! 형은 맨날 저래··· 난 분명히 해낼 수 있단 말이야!”
 고연악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사라지는 기원주의 뒷모습을 보면서 나직이 중얼거렸다. 조금 전 그는 기원주에게 자신은 장차 이 세상에서 제일 가는 거부(巨富)가 되겠다고 말하였다. 그랬더니 이렇게 알밤만 맞은 것이다.
 천양원의 밤은 그야말로 이야기꽃이 만발하는 곳이었다.
 하루 종일 일을 하고 돌아온 일백팔십일 명의 대형들이 세상에서 보고들은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고연악이 어린 나이이면서도 세상사를 환히 꿰뚫는 것이다. 그들이 전하는 이야기는 황궁 이야기와 유림의 이야기, 상인들의 기막힌 상행위에 대한 이야기와 무림에 대한 이야기, 도둑들의 이야기와 협잡꾼들의 이야기 등등 그야말로 세상의 모든 이야기들이 망라되어 있었다.
 어린 고연악이 그 가운데 가장 재미있게 듣는 이야기는 바로 상인들의 이야기와 무림의 이야기였다. 이런 이야기는 주로 기원이나 주청에서 일하는 대형들의 입을 통해서 듣기 마련이다.
 하늘을 날아다닌다는 무림인의 이야기는 어린 소년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하고도 남았다. 몇 마디 말로 천금을 희롱한다는 상인들의 이야기 역시 호기심을 자극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 세상 어디에건 사고가 발생하는 것은 한낮보다는 밤이 월등히 많다. 그렇기에 아이들의 눈과 귀를 잡아매기 위한 이러한 이야기는 사고예방에 너무도 효과적이라는 것을 잘 알기에 이러는 것이었다. 아무튼 대형들의 이러한 이야기 덕분인지 적어도 천양원에서 밤에 일어난 사고는 단 한 건도 없었다.
 아직 어린 고연악은 대형들이 이야기하는 가운데 아이들의 흥미를 유발시키기 위하여 과장하고 있다는 것을 이때는 몰랐다.
 그렇기에 대형들은 어린 그의 뇌리에 무림인이라면 누구든 하늘을 날아다니는 것은 물론, 장풍을 내뿜으면 집채만한 바위가 박살나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는 것은 짐작조차 못하고 있었다.
 
 ***
 
 도탄에 빠져 신음하던 천하는 건문제(建文帝)를 치고 등극한 연왕(燕王) 주체(朱逮)가 자신의 허물을 덮으려 베푸는 선정(善政)에 힘입어 급속도로 회복되어가고 있었다.
 또한 국방에 힘을 쏟았기에 대명제국 건국 이후 어수선한 틈을 타 마음대로 침입하여 생활하던 변경의 이민족들이 국경 밖으로 쫓겨나갔고, 이로 인해 엄청난 넓이의 농토가 늘어났다.
 당연히 소출이 늘어 벌써부터 태평성대를 노래하는 양민들도 상당수 있었다. 간혹 부서진 성곽을 보수하기 위하여 노역에 동원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예전과는 달리 품삯이 한 푼도 떼이지 않고 나오기에 천자를 칭송하는 노래가 여기저기에서 불렸다.
 하지만 황궁의 사정은 그렇지 못하였다. 권력을 움켜쥐기 위하여 정쟁(政爭)을 일삼는 무리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초대 천자인 홍무제(洪武帝) 주원장(朱元章)을 도와 대명제국을 건국하였던 늙은 개국공신들과 연왕을 도와 황위찬탈을 주도하였던 소장파 공신들 간에 보이지 않는 알력이 작용하면서 무고한 많은 사람들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야만 하였던 것이다.
 어제까지 화려한 관복을 걸치고 거드름까지 피우며 입궁하였던 고관대작들이 하루아침에 대역죄인이 되어 참수형을 당하거나, 황량한 유배지로 쫓겨갔고, 그들의 일족들은 관노(官奴)가 되거나 짐승만도 못한 삶을 영위하여야 하였다.
 이들 대부분은 개국공신과 소장파 공신들 사이에서 거취를 결정하지 못하고 있던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양측에서는 어차피 자신들의 사람이 될 수 없다면 남의 사람이 될 것이 분명하다 생각하였기에 음모를 꾸며 이렇게 되도록 만든 것이다.
 이를 보다 못한 천자는 황궁을 북평(北坪)으로 옮기고 그곳의 지명을 북경(北京)으로 개칭하였다. 또한 화려무비한 황궁인 자금성(紫禁城)이 그곳에 지어졌다.
 이것은 늘 침탈을 일삼는 북방 이민족들을 보다 빠르게 견제하기 위함이기도 하였지만, 사실은 문무백관들로 하여금 새로운 체재를 정비하게 하여 잠시나마 정쟁(政爭)을 일삼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또 다른 정쟁의 중심에는 구문제독(九門提督)과 승상(丞相)이 있었다. 각기 문(文)과 무(武)를 대표하는 둘은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지 못해 으르렁대곤 하였다. 이를 보다 못한 천자는 승상의 손녀를 구문제독의 손자와 혼례를 올리도록 명을 내렸다.
 그들은 죽기보다도 싫은 혼사였지만 감히 어명을 거스를 수는 없었기에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혼사를 치렀다.
 이로 인해 정쟁을 일삼던 상대의 수뇌와 졸지에 사돈지간이 되자 겉으로는 모든 알력이 사라진 듯 하였으나 실은 그게 아니었다. 겉만 아물어 보였을 뿐 실상 속은 곪을 대로 곪아 언제 터질지 모르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황궁 안은 귀계(鬼計)와 음모가 횡행하는 복마전(伏魔殿)이 되고 만 것이다.
 이러한 승상 종관두(宗冠杜)와 구문제독 곽인부(郭仁釜)에게는 각기 혼사를 치르지 않은 손자가 하나씩 있었다.
 구문제독의 뒤를 이을 재목감으로 낙점 된 무심공자(無心公子) 곽호규(郭豪奎)와 유림의 대들보로 욱일승천 하듯 학문을 키우는 만박서생(萬博書生) 종두린(宗斗璘)이 바로 그들이었다.
 십이세 동갑인 이들 둘은 황궁에 머물면서 천자의 유일한 여식인 천혜공주(天慧公主) 주옥련(朱玉蓮)의 방심을 얻기 위하여 각축을 벌이고 있었다.
 누구든 공주의 방심을 얻는 쪽이 승리자가 되리라는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었다. 천자의 총애를 받는 그녀를 차지한다는 것은 천자의 총애를 받는다는 것과 동일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공주의 나이 이제 겨우 십 세이기에 혼사가 이루어지려면 아직도 먼 훗날의 일이었다.
 그러는 사이 승상의 외손자이자 구문제독의 증손자인 곽연(郭然)이 태어났다. 생후 삼십 일도 채 안 되었던 그와 그의 부모가 의문의 실종을 당하자 구문제독과 승상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그들을 찾았다.
 그 결과 처참한 모습으로 죽어 있는 손자와 손녀의 시신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어디에서고 곽연의 시신은 찾을 수 없었다. 감쌌던 포대만 놓여 있을 뿐 감쪽같이 사라졌던 것이다.
 누가 흉수인지 전혀 짐작도 못하는 가운데 시간을 흘러갔고 황궁 안의 정쟁은 점점 더 도가 깊어지고 있었다.
 
 ***
 
 강자존(强者尊) 약자멸(弱者滅)의 법칙이 면면이 이어지는 무림에는 믿지 못할 신화들이 전해지고 있다.
 팔백 년 전 천하를 피의 소용돌이에 빠지게 하였던 천마(天魔) 기천승(奇擅昇)이 신화의 주인공 가운데 첫째였다.
 단 두 개의 육장(肉掌)만으로 천하를 혈겁에 잠기게 하였던 그는 백만 마도인들을 규합하여 창건한 월영마교(月影魔敎)의 교주로서 천하를 독패하다시피 하였다.
 따로 천하제일장(天下第一掌)으로 불리는 그는 중원의 정과 사의 씨를 말리려는 듯 가히 파죽지세로 무림을 유린하였다.
 월영마교의 가공할만한 공세에 십 중 구 이상의 무림인들이 비명횡사하여 무림이 말살될 위기에 처했을 때 그는 홀연히 사라졌다. 그리고 지난 팔백 년 동안 누구도 그의 시신을 보았다는 사람이 없었다.
 혹자는 정파무림과 혈전을 벌인 끝에 양패구사하였다고 하고, 또 다른 자는 살육에 염증을 느껴 불문에 귀의하였다고 하나 오래 전의 일인지라 누구도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이 없었다.
 월영마교의 가공할 힘에 눌렸던 정과 사가 다시 원상 회복되는데 걸린 시간은 거의 오백여 년이 걸렸다.
 너무도 철저하게 궤멸 당하다시피 하였던 때문이다.
 천마 기천승의 독문무학인 월영진천장법(月影震天掌法)은 팔백 년이 지난 현재에도 그것을 능가하는 장법이 없을 고금무적장법이었다. 천마 생전에 뇌성을 동반한 이 장법에 으스러져 죽은 무림인들의 수효는 가히 부지기수라 할 정도로 많았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에 의하면 당시 칠 갑자 정도의 내공을 지니고 있던 천마는 단 일장에 그를 상대하기 위하여 몰려든 정파의 군웅들 가운데 무려 오백여 명을 몰살시켰다고 한다.
 이때 단 칠 성의 내공만을 사용하였다 하니 만일 그가 십이 성 모두를 사용하였다면 어떤 결과가 빚어졌을지 가히 추측이 갈 것이다.
 
 두 번째 신화의 주인공은 놀랍게도 무공이 전혀 없는 일개 의원이었다. 전설의 신의인 화타나 편작 조차 그의 앞에서라면 옷깃을 여며야 할 것이라고 소문난 오백 년 전 신의 역천활의(逆天活醫) 독고황(獨孤皇)이 바로 그였다.
 설사 천수를 다하여 늙어 죽은 시신이라 할지라도 부패하지만 않았다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젊은이들 못지 않게 정력적으로 일을 하게 하였다. 제 아무리 난치의 고질을 지닌 자라 할지라도 그를 만나면 새 생명을 찾았다.
 정사마를 가리지 않고 누구든 다친 자를 치료하였기에 그의 생전에 무림인들은 그에게 극고의 공경을 보였다.
 그의 명호가 천하에 자자하게 된 일은 사파의 거두였던 염라독잔(閻羅毒殘) 갈민시(葛敏諡)를 치료하고 부터였다.
 날 때부터 한쪽 팔과 한쪽 다리가 없던 염라독잔은 잔인한 성품 때문에 수많은 살상을 저질렀다. 이로 인해 그는 무림공적으로 몰려 정파군웅들의 협공을 당한 끝에 처참한 시신을 남긴 채 죽었다.
 수급이 완전히 잘려졌기에 그의 죽음을 확인한 군웅들이 모두 사라지고 난 뒤 우연히 이곳을 지나던 역천활의는 신묘한 솜씨로 그를 살려내었다. 잘라졌던 수급이 다시 어깨 위에 자리를 잡게 되었고, 흘러내렸던 창자들이 다시 뱃속으로 넣어졌다.
 뿐만 아니라 날 때부터 없던 그의 한쪽 팔과 한쪽 다리가 새로 생겨났다. 그리고 흉악하기만 하였던 그의 외모는 졸지에 천하제일미남자가 되었다.
 죽음에서 생환(生還)한 염라독잔은 놀라운 의술을 접하고는 즉각 역천활의의 시종이 되기를 자처하였다.
 그를 따라 십 년 간 강호를 주유하면서 의술을 익힌 염라독잔은 신묘한 의술로 활수성의(活手聖醫)라는 외호를 얻었다.
 그의 천수가 다하던 날 그는 천하인들에게 젊은 시절 자신의 죄를 낱낱이 밝혔다. 활수성의가 바로 염라독잔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정파군웅들은 즉각 역천활의라는 외호를 만들었다.
 신묘한 의술로서 죽은 자를 살려낸 것은 물론 잔인무도한 성품이었던 염라독잔를 바꾸어 놓은 신묘한 의술을 기리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얼마 후 그는 홀연히 사라졌다.
 
 세 번째 신화의 주인공은 삼백 년 전의 기인인 만생학유(萬生學儒) 계무근(桂?瑾)이었다. 그의 행적은 한마디로 기이함의 연속이었다.
 온통 바위투성이인 바위산의 정상에서 낚싯대를 드리웠고, 깊이가 수십 길은 족히 되는 동정호 한 복판에 석탑을 세우겠다고 돌을 운반하기도 하였다.
 또한 나무가 쇠보다 단단하다며 쇠를 부술 나무를 찾아 다녔고, 안개가 잔뜩 낀 날이면 일출을 보겠다고 험산을 올랐다.
 뿐만 아니었다. 사내도 아이를 낳을 수 있다며 온갖 주술을 배우고 다녔고, 여인들 역시 밭을 갈 수 있다면서 보는 여인마다 쟁기를 지고 밭을 갈도록 하였었다.
 어떤 때에는 짐승들과 대화를 하겠다며 심산을 헤매기도 하였고, 물고기들이 뭍에서 살 수 있도록 돕는다며 숱한 물고기들을 뭍으로 끌어 올렸었다.
 세인들은 그런 그를 보고 손가락질을 하였지만 유림의 학사들은 아니었다. 어떻게든 그에게서 가르침을 받으려고 쇠 신이 닳도록 그의 뒤를 따랐던 것이다. 천문지리는 물론 온갖 학문을 섭렵하여 더 이상 배울 것이 없을 정도였던 것이다.
 일개 학사인 그가 무림의 전설로 남은 이유는 단 한가지였다.
 돌멩이 몇 개만 있으면 하늘을 가릴 정도로 고절한 진법의 대가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무림에 또 다른 전설로 전해 오는 진법의 대가 귀곡자(鬼哭子)라 할지라도 그에게서 한 수 배워야 할 정도라 하였던 것이다.
 그는 생전에 차천진보(遮天陣譜)라는 희대의 진법서를 저술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 세상 그 어느 누구도 그것을 보았다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이것에 대하여 약간은 알려져 있는 것이 있었다. 누구든 이것을 얻어 그 안의 내용을 익히기만 하면 천자제일의 진법가가 될 것이라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 신화의 주인공은 불과 백여 년 전의 기인인 무적검객(無敵劍客) 도진서(陶盡瑞)였다.
 일개 낭인에 불과하였던 그는 정사마의 고수들과 닥치는 대로 비무를 하는 가운데 검법을 완성시켰다.
 따로 고독랑검(孤獨郞劍)이라는 외호를 지닌 그는 삼만이천칠백여 회의 비무를 끝으로 봉검(封劍)을 하였다.
 봉검의례를 행하는 동안 그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는 전 무림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하였다.
 검법의 극이라 생각하였던 이기어검(以氣御劍)의 단계를 넘어서 심검(心劍)과 무검(無劍)의 화후에 올랐다는 말 때문이었다.
 그의 말대로라면 그는 무림의 역사이래 그 어느 누구도 이루지 못하였던 지고무상한 화후에 오른 것이다.
 또한 이것은 그가 단순히 무적검이 아니라 영세제일검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였기 때문이었다.
 정사마를 가리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검법을 완성시키느라 혼례도 올리지 않았던 그는 백여 세의 나이에 홀로 태산으로 올랐고 그 후 그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세인들은 그가 죽었을 것이며 어딘가에 그의 독문검법인 파천검법(破天劍法)이 기록된 무적검결(無敵劍訣)이 있을 것이라며 태산 전체를 샅샅이 뒤지고 또 뒤졌다.
 무려 십만에 달하는 무인들에 의하여 태산은 안 뒤져진 곳이 없을 정도로 뒤져졌다. 하지만 그 어느 곳에서도 무적검결은 발견되지 않았다. 실망한 무림인들이 돌아간 뒤로도 엄청난 수효의 무인들이 계속하여 태산을 방문하였으나 뜻을 이룬 사람은 단 하나도 없었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차츰 그 열기는 덜해졌으나 아직도 태산은 북적대는 인파를 볼 수 있을 정도였다. 무적검결만 얻으면 천하제일인이 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이렇듯 신화와 더불어 유수한 세월을 보낸 현 강호는 우후죽순처럼 일어나는 신흥 방파들과 자신들의 세력을 유지하려는 기존 방파들 간의 치열한 각축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강호의 정파를 수호하는 구파일방은 홍무제 주원장을 도와 대명제국을 건국하기 위하여 몽고족들을 몰아내면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되었기에 몰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이들로 이루어진 정천맹(正天盟)을 능가할 방파는 없었다.
 다시 말해 구파일방 하나 하나는 그리 강하다고 볼 수는 없으나 이들 전체가 뭉쳐져 있는 정천맹은 강하다는 것이다.
 반면 지난 삼백 년 간 착실하게 세력을 구축한 축융이화보(祝融梨花堡)와 오행철마궁(五行鐵魔宮)이 각기 정과 마를 대표하고 있었다. 이들 둘 보다는 다소 규모가 작기는 하나 결코 만만치 않은 방파들이 있었다.
 만사부(萬邪府)와 칠성검문(七星劍門), 그리고 봉황홍예전(鳳凰虹霓殿)이 바로 그들이었다.
 만사부는 천하 사파인들이 결집한 방파였다. 그러나 축융이화보와 오행철마궁을 상대하기에는 다소 역부족인 그런 세력이다. 하지만 무림의 태산북두를 자처하는 소림과 무당을 합친 것만큼의 세력은 지니고 있었다.
 칠성검문은 남해에 위치하여 있기에 강호에 그 모습을 별로 드러내지 않는 방파이나 현 강호에서는 가장 강한 검법을 지닌 문파라고 자타가 인정하는 방파이다.
 마지막으로 봉황홍예궁은 모든 것이 비밀에 쌓인 방파로 여인들로만 이루어진 방파였다.
 이들 일맹(一盟), 이강, 삼약이 미묘한 균형을 이루고 있는 강호에 새롭게 발돋움하는 방파 중 눈에 뜨이는 방파는 오래 전에 멸문 당한 것으로 알려졌던 북해빙궁(北海氷宮)과 하오밀문(下午密門)이었다.
 중원의 북쪽 사시사철 얼음으로 뒤덮인 동토의 한 구석에 자리잡은 북해빙궁은 이백여 년 전 강호를 제패하겠다고 나섰다가 처참하게 패퇴한 방파였다.
 하오밀문은 구파일방과 마찬가지로 몽고족들을 몰아내기 위하여 엄청난 선혈을 흘린 덕에 유명무실한 방파가 되어 버렸었는데 서서히 기지개를 켜고 일어서려는 중이었다.
 이외에도 강호에는 서문세가와 남궁세가, 그리고 제갈세가와 사천당문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 넷은 모두 그 세력이 너무 작아 방파라 하기에 부족함이 많았다.
 
 ***
 
 “흐음! 대체 어떻게 해야 그럴 수 있을까?”
 고연악은 손으로 턱을 괸 채 멍한 시선으로 서천을 붉게 물들이고 있는 낙조(落照)를 바라보고 있었다. 늘 같은 일과를 반복하는 그로서는 이 같이 공상에 잠겨 있는 시간이 너무도 많았다. 아직 어린 나이이기에 할 일이라곤 전무하기 때문이다.
 천하제일 거부가 되기 위해선 필수적으로 문자를 알아야 하였기에 그것을 배우고 싶기는 하였으나 원주는 너무 늙어 거동조차 못할 정도였기에 자리보전하는 것도 힘겹게 보였고, 천양원에는 글을 아는 형들이 없기에 아무도 가르쳐줄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매일 저잣거리를 쏘다니며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다가 우연히 새로운 소일거리를 찾았다.
 그것은 바로 서안에서 가장 유서 깊은 서원(書院)인 운중서각(雲中書閣)을 방문하는 일이었다. 그곳의 각주는 천양원주와 버금갈 정도로 늙은 학사였다. 세수 구십이 가까운 그의 소일거리는 책을 엮는 것이었다.
 너무도 오래된 운중서각의 지하창고에는 가히 산더미 같다 표현해도 좋을 만큼 많은 파지들이 쌓여 있었다. 그것들의 짝을 맞춰 책으로 다시 엮는 것이 그의 일이었다.
 그것이 파지로 있을 때에는 아무런 가치가 없으나 일단 그의 손을 거쳐 한 권의 서책으로 변모하면 비싼 값에 거래가 되었다.
 능숙한 솜씨로 파지 더미에서 짝을 찾아내는 것은 아마 팔십 년 경력을 쌓은 그가 아니면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모든 짝을 찾아낸 후 그것을 엮기 위해선 바늘에 실을 꿰어야하는데 늙어 진물이 흐르는 눈으로는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의 이러한 애로사항을 해결해준 사람이 바로 고연악이었다. 어린 나이이기에 눈이 밝은 그는 각주가 원할 때마다 바늘에 실을 꿰어 주면서 대신 글을 배우고 있었다.
 뭔가 새로운 일이 없나 싶어 이리저리 저잣거리를 쏘다니던 중 바늘에 실을 꿰기 위하여 한참을 고생하던 각주를 보고 그것을 대신해 준 것이 인연이 된 것이다.
 그런 후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 그 일을 대신해 주는 대신 글자를 배우기로 한 것이다. 다행히 영특한 두뇌를 지녔는지 각주의 가르침을 별로 어렵게 생각하지 않고 마치 마른 솜이 물을 빨아들이듯 그렇게 학문을 익히고 있었다.
 오늘도 운중서각에 들러 하루를 소일하고 돌아 온 고연악은 나른한 봄 저녁을 보내며 공상의 세계로 빠져들고 있었다.
 “천하제일 부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장사를 하는 게 제일 빠를 텐데··· 흐음! 장사라··· 과연 내가 할 수 있을까? 무공이라는 것도 익히고 싶은데··· 하늘을 훨훨 날아다닌다면 얼마나 기분이 좋을까? 무림인들처럼 한 주먹에 바위를 깰 수 있을 정도라면 호랑이도 안 무서울 텐데··· 그럼 태령(泰嶺)으로 놀러갈 수도 있을 거고··· 소림사라는데도 가 볼 수 있을 텐데···”
 태령은 서안 남쪽에 위치한 거대한 산맥이었다. 이곳에는 온갖 기화이초가 만발하였고 특히 경치가 아름답기로 소문난 곳이다. 그러나 흉폭한 짐승들이 많아 아름다운 절경을 구경한 사람은 몇 안 되었다. 서안을 다스리는 부주가 그 절경에 취해 일 년에 한번 군졸들을 대동하고 태령의 절경을 유람하곤 하였기에 이렇게 소문이 난 것이다.
 “하하하! 녀석, 또 공상을 하는구나?”
 “어? 형, 또 왔어? 또 머리통을 때리려는 거지?”
 “후후후! 녀석 그렇게 맞는 것이 싫으면 공상 좀 작작해라. 네놈이 아무리 그래봐야 부자가 되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지나가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야. 넌 대형들 이야기도 못 들었어? 하루종일 뼈 빠지게 일해봐야 남는 게 없다는 소리···”
 고연악의 곁으로 다가선 기원주는 그의 곁에 쭈그리고 앉으며 가볍게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이것은 그가 최고로 기분 좋을 때 하는 버릇이었다.
 “어, 형! 오늘 무슨 기분 좋은 일 있었어?”
 “기분 좋은 일? 우리 같은 놈들에게 기분 좋은 일이 뭐가 있겠냐? 하긴, 원주께서 동생들을 잘 보살핀다고 머리를 한번 쓰다듬어 줬으니 그게 기분 좋은 일이라면 기분 좋은 일일 거야.”
 “헤헤! 형, 그러지 말고 이야기 해봐! 대체 무슨 일인데 입이 그렇게 쭉 찢어졌어? 얼굴도 벌겋고···”
 눈치 빠른 고연악은 기원주에게 뭔가 좋은 일이 있기에 이토록 싱글벙글한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바싹 다가앉았다.
 “후후후··· 좋아, 특별히 너한테만 이야기하지. 후후후··· 조금 전에 소향(小香)이 하고 입맞춤을 했어.”
 “뭐? 입맞춤? 에이 더러워··· 그게 무슨 좋은 일이라고···”
 잔뜩 기대를 하였던 고연악은 기원주의 말을 듣자마자 눈썹을 찌푸리며 얼른 고개를 돌렸다.
 이제 겨우 열 살이 된 그로서는 당연한 생각이었다.
 입맞춤을 하면 분명 침이 묻을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더럽다고 생각한 것이다. 아직 음양의 이치를 모르기 때문이었다.
 “후후! 더러워? 녀석··· 하긴, 아직 어리니 뭘 모르지··· 이 녀석아, 너도 이제 조금만 더 커봐! 킬킬! 아마 네놈은 나보다 더할 거야. 자, 이 형님은 이제 꿈나라로 간다. 너는 여기서 또 이루어지지도 않을 공상이나 하거라.”
 기원주는 제법 어른스러운 발걸음으로 자신의 처소로 향하였다. 이곳 천양원에는 육백여 명의 소녀들과 사백여 명의 소녀들이 있었다. 거의 대부분이 그저 그런 인물이었지만 소향과 연교(燕嬌)라는 두 소녀만은 달랐다.
 기원주와 마찬가지로 십육 세가 된 소향은 피어나기 시작하는 한 떨기 꽃봉오리였고, 십이 세가 된 연교는 맺히기 시작한 꽃망울이었다. 그녀들은 천양원의 꽃이었고 모든 소년들의 집중적인 관심을 받고 있었다.
 언제나 소향의 근처를 배회하며 어떻게는 그녀의 마음을 얻기를 바라던 기원주가 드디어 수백 대 일의 경쟁을 물리치고 꿈을 이룬 모양이었다.
 “쳇! 더럽게 입맞춤을 왜 해? 에이 더러워! 퉤퉤퉷!”
 사라져 가는 기원주를 바라보던 고연악은 머릿속으로 자신이 입맞춤을 하는 상상을 하다 진저리를 치며 침을 뱉었다.
 그리고는 다시 어떻게 하면 천하제일 거부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한 생각에 잠겨들었다. 이것은 지난 이 년간 단 한시도 그의 뇌리를 벗어나지 않던 상념이었다.
 아무 것도 가진 것도 없고 나이마저 어린 그로서는 상상으로나마 천하제일 거부가 되는 방법을 생각해보는 이 시간이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어머! 너 또··· 여기서 또 쓸데없는 생각만 하고 있지?”
 한참 상념에 잠겨 있던 고연악은 곁에서 들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거기엔 깜찍하게 생긴 소녀가 있었다.
 그녀는 스스럼없이 고연악의 곁에 쪼그려 앉으며 입술을 삐죽였다. 천양원의 두 꽃 중 하나인 연교였다.
 그녀는 원주가 외출을 하였다가 연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호수의 다리 아래에서 주워왔기에 이런 이름을 지닌 것이다.
 원주는 그런 연교를 키우면서 자신의 성을 주었기에 그녀의 성명은 원연교였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녀를 그렇게 부르지 않았다. 연교라는 이름이 훨씬 더 정감이 가기 때문이다.
 “어? 누나 왔어?··· 여긴 웬 일이야? 이 시간에?”
 “응! 원주 할아버지가 아파서 문안 갔다가 나오는 길이야.”
 연교의 말에 고연악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천양원주가 아픈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벌써 몇 년 째 거동을 못할 정도의 중병을 앓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매일 문병을 가는 사람은 연교뿐이었던 것이다.
 “많이 좋아지셨어?”
 “아니! 어제하고 똑 같아··· 얼마 못 사실 것 같아.”
 왠지 풀 죽은 음성을 들은 고연악은 연교의 어깨를 부드럽게 토닥이며 위로의 말을 건넸다.
 “회자필반이라는 말이 있어. 너무 가슴 아파 하지마.”
 “회자필반? 그게 뭔데?”
 글 모르기는 고연악과 마찬가지인 연교의 말에 그는 그 동안 배운 것들을 총동원하여 그 의미를 설명해 주었다. 그제야 의미를 깨달은 연교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며칠 후면 연교는 천양원을 떠나게 되어 있었다.
 서안에서 가장 유명한 기원인 매향원(梅香院) 원주의 양녀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매향원주는 한때 서안 제일기녀라 칭하던 옥서시(玉西施) 구본경(九本瓊)으로 젊은 시절에는 그녀의 손목을 한 번 잡아보는데 은자 만 냥을 써야 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흐르는 세월을 이길 수는 없기에 이제 그녀의 머리에도 흰 서리가 내려 있었다. 그래서 요즘은 백상선자(白霜仙子)라 불렸다. 그녀는 천양원이 처음 생길 때부터 적지 않은 후원을 해왔기에 천양원의 부원주라 하여도 과언이 아닌 사람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원주가 연교를 부탁하였던 것이다.
 아직 어린 연교는 이제 매향원으로 가면 뛰어난 솜씨를 지닌 스승들로부터 금기서화(琴棋書畵)를 배울 것이고, 아울러 가무(歌舞)까지도 배우게 될 것이라며 들떠 있는 상황이었다.
 늘 사내아이들의 관심을 받아 왔지만 연교가 가장 친근하게 생각하는 소년은 바로 고연악이었다.
 그는 다른 아이들처럼 경박하지도 않았고, 가까워지려고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았다. 늘 과묵하게 입을 다문 채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한 그의 눈빛 때문에 오히려 연교가 가까이 다가섰기에 그나마 대화를 하는 것이다.
 “너 알고 있어? 이제 며칠 후면 내가 가야한다는 거!”
 “그럼, 알고 있지.”
 “그럼, 넌 내가 가는데도 하나도 슬프지 않아?”
 “슬프긴 뭐가 슬퍼? 매향원은 엎어지면 코 닿을 데 있는데··· 아무 때나 누나가 보고 싶으면 가면 되잖아.”
 연교는 자신이 떠나야 한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고연악이 왠지 미워졌다. 그는 늘 이런 식이었다.
 다른 사내아이들은 자신과 가까워지지 못해 안달인데 거꾸로 자신이 나섬에도 불구하고 늘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듯한 냉정함을 보였던 것이다.
 “······!”
 한참을 말이 없던 연교는 토라진 얼굴로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서서 자신의 처소로 향하였다.
 그런 그녀의 내심으로는 자신이 매향원으로 간 뒤 만일 고연악이 찾아오기라도 한다면 모른 척 할 심산이었다.
 ‘흥! 두고 봐. 다시는 아는 척을 안 할 테니···’
 연교가 사라짐에도 고연악은 고개한번 돌리지 않고 멍한 눈빛이 되어 있었다. 어떻게 하면 천하제일 거부가 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상념에 잠긴 것이다.
 “여기에서 이렇게 있다가는 아무 것도 안 된다. 잘 돼 봐야 주루의 점소이가 고작이다. 흐음!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하나? 무작정 여길 떠나면 보나마나 굶어죽을 텐데···”
 고연악은 아직 밥벌이를 할 수 없는 자신의 나이가 원망스러웠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천하제일거부가 되는 길로 가고 싶은데 주위 여건이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좋아! 일단 문자를 웬만큼 배울 때까지는 여기에서 버틴다. 문자를 모르면 상행위를 할 수 없으니··· 그 다음엔··· 죽이 되건 밥이 되건 무조건 떠난다. 그 길만이 가망성이 있어!”
 다음날부터 고연악은 운중서각에 있지 않는 시간엔 주루의 한 귀퉁이에서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들을 귀담아 들었다.
 그러던 중 그에게 또 하나의 소일거리가 생겼다. 그것은 서안제일의 대장간인 묵가장(墨家場)을 기웃거리는 것이었다.
 땅땅! 땅땅! 따땅! 따땅!···
 모루에 놓인 시뻘겋게 달궈진 쇠를 익숙한 솜씨로 내리치는 대장장이 묵노인의 망치는 단 한번도 헛손질이 없었다.
 수십에서 수백여 번의 망치질이 끝나면 한 자루의 호미가 만들어지거나 예리한 날을 가진 검이나 도가 만들어졌다.
 묵가장을 드나들기 시작한지 보름이 지나고 나서야 고연악은 그가 망치질을 하면서 무언가를 중얼거린다는 것을 알아보았다.
 
 <망치질 백 번이면 호미를 만들고, 망치질 천 번이면 검을 만든다네. 망치질 만 번이면 호걸을 만들고, 망치질 십만 번에 영웅을 만든다네. 에헤라! 십만 번이 다 되었건만 잠룡(潛龍)은 눈이 멀어 에헤라! 눈뜨고도 못 보네!···>
 
 고연악은 나지막이 들려오는 중얼거림을 들으면서 그게 대체 무슨 뜻인가 싶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 의미를 알 수 없었다. 그저 묵노인이 일을 하면서 흥을 돋구기 위해 하는 노랜가 싶은 그는 매일 매일 묵가장에 들렀다.
 그러던 중 그의 눈에서 이채가 뜨이는 날이 있었다.
 호미를 만들 때와 검이나 도를 만들 때 불의 세기가 다르다는 것이 느껴졌던 것이다. 농기구를 만들 때에는 불꽃이 청색에 가까웠지만 병장기를 만들 때에는 백색에 가까웠던 것이다.
 또 하나 다른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늘 같은 높이에서 내리쳐지는 망치의 속도가 다르다는 것이다. 완급에 따라 각기 다른 것을 생산하는 묵노인의 이런 모습은 누군가 아주 자세히 관찰하지 않고는 도저히 발견할 수 없을 정도의 미약한 차이였다.
 다른 하나가 있다면 그것은 망치가 허공을 가를 때 아주 작은 파공음을 낸다는 것이다. 얼마나 빠른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이러한 사실을 발견한 고연악은 더욱 자세히 살폈다. 그러자 늘 일정한 박자를 이루고 있는 망치가 교묘한 각도로 움직인다는 사실하나를 더 발견할 수 있었다.
 호미를 만들 때에는 그저 위아래로만 움직였지만 병장기를 만들 때에는 망치가 내려오면서 기묘한 각도로 휘어지면서 가속도를 붙인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그러고 보니 호미 백여 개를 만들어 내는 동안 새로 만들기 시작한 검은 아직도 제 형체조차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호미를 만들 때에는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았지만 검을 만들 때에는 두어 번의 망치질만 하여도 이마에서 땀이 흥건히 솟고 있었다.
 무언가 분명 다르다는 것을 느끼기는 하였지만 그 이유를 알 수 없었기에 안력을 높이곤 하던 그는 묵가장에 드나들기 시작한지 반년만에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모루(대강간에서 쓰는 받침용 쇳덩이)에 가려 보이지 않던 허름한 마의 속에 감춰진 배의 움직임이 틀렸던 것이다.
 호미를 만들 때에는 숨을 들이쉴 때 배가 들어가고 내쉴 때 나왔는데, 검을 만들 때에는 정 반대로 움직였다.
 “대체 왜 이런 차이를 보이는 거지?···”
 다시 반년의 시간이 경과한 후 그는 또 하나의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묵노인은 숨을 들이쉬거나 내 쉴 때 가슴의 기복이 전혀 없었다. 그리고 망치를 내리칠 때에는 숨을 멈추곤 하였다.
 “이상하다? 나는 숨을 들이 쉴 때마다 가슴이 움직이는데? 저렇게 숨을 쉬면 뭐가 달라지지? 어디 나도 한번 해봐?”
 이때부터 고연악은 묵노인이 쉬는 숨을 그대로 따라 쉬었다. 처음엔 너무도 천천히 숨을 쉬는 그를 따라하던 고연악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하곤 하였다. 보통 사람들이 다섯 호흡을 할 때 단 한번 숨을 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처음엔 따라하기 너무도 어려웠으나 차츰 시간이 흐르면서 고연악은 그와 똑 같은 속도로 숨을 쉴 수 있게 되었다. 숨을 들이 쉴 때에는 아랫배를 천천히 내밀고, 내쉴 때에는 반대로 천천히 집어넣었다. 그 중간 중간 숨을 멈춘 채 한참을 있어야 하였다.
 묵노인의 망치질은 그렇게 호흡을 멈춘 상태에서만 하였다.
 일 년이 흐르는 사이 고연악은 남들이 이십 호흡을 할 때 단 한 호흡만 해도 될 정도가 되어 있었다. 따라서 달릴 때에도 그의 호흡은 범인보다 한참 느렸지만 달리는 속도만은 다른 아이들에게 전혀 뒤지지 않았다.
 그 사이 고연악은 눈을 감고도 묵노인이 휘두르는 망치가 어떤 변화를 일으키는지 훤히 알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기기묘묘한 각도로 휘어지는 망치는 정확히 다섯 동작이었다.
 일 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건만 묵노인은 단 한번도 고연악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묵묵히 망치질만 거듭할 뿐이었다.
 그것은 고연악도 마찬가지였다. 단 한번도 그의 시선을 끌려 하지 않은 채 언제나 앉는 자리에 앉아 있다 돌아오곤 하였던 것이다. 그 세월 동안 묵노인은 단 한 자루의 검도 완성시키지 못하였다. 처음 보았을 때 뭉툭한 쇳덩이였던 것이 차츰 검의 모양을 잡아가고 있을 뿐이었다.
 한 가지 특이한 일은 검을 만들다 일을 마칠 무렵이 되면 언제나 대장간 바닥의 흙을 걷어 내고 그 안에 그것을 보관하곤 한다는 것이다. 다른 것들은 완성이 되기 전까지는 작업하던 자리에 그대로 두곤 하였으나 그것만은 예외였다.
 그가 더 이상 묵가장을 찾지 않게 된 것은 더 이상 묵노인이 대장간에 나오지 않을 때부터였다. 마지막 며칠 동안 숫자를 헤아리며 망치질을 하던 그는 정확히 십만 번의 망치질을 끝으로 더 이상 일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 동안 고연악은 사서삼경을 줄줄 읽어 내릴 실력을 갖추게 되었다. 이제는 너무도 늙어 노쇠해진 운중서각의 각주가 더 이상 일을 하지 않았기에 그곳에도 더 이상 드나들지 않았다.
 
 대신 서안 외곽에 위치한 도살장인 육가장(陸家場)에 출입하기 시작하였다. 육가장은 서안에서도 유명한 도살장이었다.
 황소를 잡거나 돼지를 잡을 때 육가장의 장주인 일수도살(一手屠殺) 육연평(陸然平)은 그의 외호처럼 단 한 번의 손질로 가축들을 도살하였다.
 그가 쓰는 것은 도신(刀身)의 날이 다 닳아서 뭉툭해 보이는 낡은 도였다. 도신도 닳았건만 그것은 단 한번에 가축들의 숨골을 베어냈다. 그렇기에 육가장에서 도살되는 소나 돼지들은 비명조차 지르지 않았다. 도살을 할 때마다 늘 시뻘건 선혈이 튀기곤 하였지만 일수도살의 의복은 언제나 백설처럼 희었다.
 이상하게도 그가 있는 곳으로는 선혈이 튀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이 이상하여 이곳을 찾은 것이다.
 일수도살 역시 언제부터인지 고연악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만도 하건만 단 한번의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는 묵노인에게서 배운 호흡법으로 숨죽인 채 일수도살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였다. 이것은 묵가장을 드나들면서부터 생긴 습관이었다.
 무엇을 보건 세심하게 관찰하는 버릇이 생긴 것이다.
 육가장을 드나들기 시작한 지 불과 반년만에 고연악은 그가 다른 도부와 다른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은 속도였다!
 그가 휘두르는 도는 다른 도부들이 휘두르는 도에 비하여 적어도 열 배는 빠른 움직임을 보였다. 따라서 남들이 한 번 도를 휘두를 때 그는 다섯 번이나 도를 휘둘렀다.
 처음엔 이것이 보이지 않았으나 안력(眼力)을 높이고 관찰한 결과 발견한 것이다. 아마도 서안에서 일수도살 육연평이 도살을 할 때 다섯 번에 걸쳐 도를 휘두른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한가롭게 그를 관찰할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후후후! 일수도살이 아니고 이제 보니 오수도살이구나···’
 고연악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시는 육가장을 찾지 않았다. 그가 마지막으로 사라질 때 육연평은 흐르는 땀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은 채 흐뭇한 미소만 지어 보였을 뿐이다.
 그 후 일수도살은 더 이상 도살장에 나타나지 않았다.
 
 열두 살을 넘긴 고연악은 단 한번도 매향원을 찾지 않았다.
 연교가 보고 싶지 않았던 것은 아니나 괜히 그녀를 찾아간다는 것이 쑥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이제 떠날 때가 되었어! 마지막으로 연교를 보고 떠나자!”
 허름한 마의를 걸친 고연악은 들판에 피어 있던 야생화를 한 묶음 꺾어 정성스럽게 꽃다발을 만들었다. 그리고는 그것을 등뒤에 숨긴 후 매향원을 찾았다.
 “뭐라고요? 천양원의 연악이 왔다고요? 아얏!···”
 나이 든 침모로부터 고연악의 방문 사실을 전갈 받은 연교는 너무도 놀라 바늘에 찔렸는지 선혈이 한 쌍의 원앙이 한가롭게 노니는 풍경을 수놓던 천에 번지는 것도 모른 채 입만 벌리고 있었다. 고연악이 누구이던가?
 지난 이 년간 거의 매일 그가 오기만을 기다리지 않았던가!
 이곳 매향원으로 거처를 옮긴 연교는 원주로부터 요조숙녀가 되는 수업을 받으며 하루가 다르게 변모해갔다.
 불학무식이던 그녀는 어느새 사서삼경은 물론 금기서화를 자유자재로 다루게 되었고, 가무에도 일가견을 이룰 정도가 되어 가르치는 스승들을 놀라게 하였다.
 처음 이곳에 들 때 덕지덕지 앉은 때로 지저분하던 그녀는 어느 새 대가댁 규수 못지 않은 소녀로 변모해 있었다.
 말괄량이라고 해도 충분했을 거친 행동은 조신한 행동거지로 변모해 있었고, 방년(芳年)의 소녀라고 하기엔 너무도 부족함이 많던 그녀는 천상옥녀(天上玉女)라 불러도 충분할 만큼 깜찍한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이제 일 이년 후면 천하의 사내들이 모두 탐낼 천하절색의 면모를 어느 정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침모! 그는 지금 어디에 있죠?”
 한 걸음에 고연악이 있는 곳으로 뛰어가려던 연교는 침모의 엄한 눈초리를 보고 자신이 취하려던 행동에 잘못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낯을 붉혔다.
 요조숙녀는 어떠한 일이 벌어져도 정숙함과 더불어 우아함, 그리고 청초함을 유지하여야 한다는 가르침을 잠시 잊었던 것이다.
 “잘 못 했어요. 소녀가 그를 보러 가도 되나요?”
 “헬헬! 그럼, 그래도 되고 말고···”
 연교가 옷매무새를 손보고 머리를 매만지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흐뭇한 미소를 머금은 침모는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흥! 그 동안 한번도 나를 찾아오지 않더니 웬 바람이 분 거지? 어디 두고 보자!’
 고연악이 왔다는 말에 반가움을 감추지 못하였던 연교는 그를 만나러 가는 사이 지난 이 년 동안 한번도 자신을 찾지 않았던 그의 무정함에 내심 토라졌다.
 “우, 우와!··· 이, 이럴 수가! 누나, 정말 누나야?”
 고연악은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이 년 전 지저분하던 연교의 모습만 상상하던 그의 눈에 비친 그녀는 더 이상 예전의 그녀가 아니었다.
 걸치고 있는 의복만 해도 다 헤어진 허름한 마의가 아니라 질 좋은 능라비단으로 지은 화려무비한 궁장이었다.
 게다가 의복에 걸린 패옥들은 그가 세상에 태어난 이래 단 한번도 보지 못한 진귀한 물건이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그의 놀라움 중 극히 일부분이었다.
 무엇보다도 그를 놀라게 한 것은 피어오르는 장미처럼 아름다워진 연교의 옥용이었다. 섭생이 좋아 그러는지 키도 한 자는 커져 있었다. 과거에는 자신이 내려다보았으나 이제는 올려다 보아야할 정도가 된 것이다.
 “호호호! 연악이 왔구나?··· 그런데 여긴 웬일이야? 이년 동안 한번도 안 오더니··· 무슨 일로 왔는지 모르지만 나는 지금 조금 바쁘거든··· 그러니 얼른 용건만 말해!”
 미소를 짓는 연교의 얼굴은 반가움이 가득 배어 있었다. 그러나 아직 어린 그는 그녀의 옥용에 배인 반가움을 읽기에는 너무도 어렸다. 그녀는 과거에도 늘 웃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뭐, 뭐라고? 바쁘다고?···”
 ‘흥! 바쁘긴 뭐가 바빠? 그 동안 한번도 안 왔지? 어디 두고봐!’
 연교는 짐짓 얼굴을 싸늘하게 굳힌 후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 바빠. 그러니 얼른 용건만 말해.”
 고연악은 자신을 보면 기뻐할 줄 알았던 연교가 안색을 싸늘하게 굳히자 오랜만에 그녀를 볼 수 있다 생각하여 잠시 들떠 있던 마음이 가라앉는 것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저잣거리를 헤매는 동안 상대가 자신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품을 때의 모습이 어떻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얼른 말해봐! 나 바쁘다고 했잖아!”
 이 순간 연교는 짐짓 다그침으로 그를 골탕 먹인 후 맛있는 음식을 나눠 먹으며 그 동안 왜 안 왔는지를 물으려 하였다.
 “으응! 아, 알았어. 그렇게 바쁘다면 나중에 올게.”
 고연악은 자신을 반길 줄 알았던 연교의 태도가 예전과 다르게 싸늘하다는 것을 느끼고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기에 즉각 몸을 돌려 밖으로 향하였다.
 매향원 원주의 양녀가 되어 변해버린 그녀와 여전히 고아 신세를 면치 못하는 자신의 처지를 비교해 보고는 자괴감 때문에 도망치듯 나간 것이다. 그가 있던 자리에는 그가 애써 꺾은 야생화 한 묶음이 주인을 잃은 채 떨어져 있었다.
 “어머! 얘! 여, 연악아!”
 연교는 갑자기 밖으로 튀어 나가는 고연악을 불렀지만 그가 누구이던가?
 천양원의 수많은 동년배 소년들 중에서 가장 달음박질을 잘하기에 비율서(飛栗鼠:날다람쥐)라고 불리는 그의 신형은 어느새 매향원의 정문을 나서 인파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여, 연악아! 연악아! 거기 서! 나, 안 바빠! 하나도 안 바빠!”
 연교는 침모의 가르침도 잊은 채 허둥지둥 그의 뒤를 쫓았지만 그녀의 발걸음은 느려도 너무 느렸다.
 “히잉!··· 미워! 왜 그냥 가는 거야? 기껏 찾아 왔으면서···”
 연교는 자신의 싸늘했던 말투와 표정이 그를 내쫓았다는 사실도 잊은 채 울상을 지었다. 그런 그녀의 손에는 그가 꺾어온 야생화 한 다발이 들려 있었다.
 이 년을 기다렸던 만남치고는 너무도 싱겁고 너무도 허망했다.
 연교가 자신의 허물을 깨달은 것은 거의 한 달이라는 시간이 흐른 뒤였다. 그런 그녀의 규방에는 화려한 다른 기물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이 있었다.
 고연악이 가져왔던 야생화가 바짝 말라 초라한 모습으로 동경 위에 얹혀져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녀에게 있어 이 세상 무엇보다도 소중한 물건이었다.
 한편 도망치듯 매향원을 벗어나 인파 속으로 스며 든 고연악은 변해도 너무 변해버린 연교의 태도에 내심 노화가 치밀었다.
 그래도 자신은 서안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보고 싶은 사람이 바로 그녀였다. 그러나 그녀는 좋은 의복에 좋은 음식을 먹으면서 과거의 상냥함을 잃고 도도하게 변해버렸기에 그의 마음에 상처를 준 것이다.
 ‘치잇! 좋아, 천하제일의 거부가 되어 돌아오겠어! 그때도 도도할 수 있는지 두고 보자! 매향원? 그 옆에다 매향원보다 백 배는 더 큰 기원을 세울 거야! 그래서 반드시 망하는 꼴을 보고야 말겠어! 흥! 그때 아무리 잘못 했다고 빌어도 용서하지 않을 거야!’
 고연악은 자신의 뺨을 따뜻하게 적시는 것이 바로 눈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주 어렸을 때를 제외하곤 한 번도 흘려보지 못하였던 눈물이었다. 그것은 그의 결심이 더욱 단단하게 해지는데 일조를 하였다.
 이를 악 문 고연악은 정처 없는 발걸음을 옮겼다.
 마땅히 갈 곳이 없었고, 누구에게도 자신이 오늘 천양원을 떠날 것이라는 이야기를 한 적이 없기에 밤이 되기 전에는 자신을 찾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자신에게 늘 따뜻하게 대해주었던 기원주가 마음에 걸렸으나 천하제일 거부가 되기 위해선 사사로운 정쯤은 단호히 끊을 수 있는 결단력이 있어야 한다 생각하였기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다.
 천년고도인 서안은 어린 소년이 단숨에 빠져나갈 수 있을 정도로 작은 성읍이 아니었기에 점심나절에 길을 떠난 고연악은 배에서 꾸르륵거리는 소리가 들릴 때쯤에야 간신히 외곽까지 갈 수 있었다.
 
 관제묘(關帝廟)!
 
 전신(戰神)으로도 불리는 관운장의 넋을 기리기 위하여 세워 둔 관제묘는 천년고도에 걸맞게 웅장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러나 일 년에 몇 번 명절날에만 사람들이 드나들기에 관제묘는 대체적으로 쇠락해 있었다. 무성하게 돋아난 잡초들은 사람들의 발걸음이 얼마나 뜸했는지를 극명하게 증명하고 있었다.
 어른 키의 열 배는 족히 될 아름드리 기둥이 받치고 있는 가운데 누군가 엄청난 필력으로 쓴 관제묘라는 글자를 보면서 고연악은 피식 실소를 머금었다.
 옻칠을 한 나무판에 돋을 새김으로 써 놓은 글자는 금을 입혔는지 황금색이었지만 군데 군데 새똥이 묻어있었던 것이다.
 “휴우! 벌써 배가 고프면 대체 어떻게 하자는 거야? 지금 이걸 먹으면 내일 아침엔 뭘 먹지?”
 고연악은 품에 있는 건량을 만지작거렸다. 제 아무리 천하제일거부를 꿈꾸는 야망에 찬 소년이라고는 하나 아직 소년이기에 그가 준비한 것은 달랑 한끼를 때울 정도의 건량(乾糧) 뿐이었다.
 “에라! 모르겠다. 먹고 죽은 귀신은 때깔도 곱다는데··· 나중에 어떻게 되겠지···”
 고연악은 관제묘 주위를 둘러보았다. 편히 앉아 먹을 만한 곳을 찾기 위함이었다.
 
 
 제2장 고구려인 고선지(高仙芝)
 
 
 영안방(永安幇)!
 
 고연악은 다 허물어져 가는 장원을 발견하고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거미줄이 그득하고 왠지 귀기(鬼氣)어린 모습이건만 아무런 두려움도 느끼지 못하는지 썩은 문을 밀쳤다.
 삐이익― 삐이꺽―!
 적어도 지난 백 년 동안 아무도 건드리지 않았는지 엄청난 양의 먼지가 쏟아져 내린 후 썩은 문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한 사람이 간신히 지날 정도로 열렸다.
 장원의 안쪽은 예상대로 잡초 투성이였다.
 어른 키로 한 길은 족히 될 잡초 사이로 무너져 내린 전각은 금방이라도 귀신이 튀어나올 듯 하였다.
 “아앗! 저, 저건···? 휴우···!”
 한 발을 내디디려는 순간 머리가 세모꼴인 독사 한 마리가 황급히 수풀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본 고연악은 놀란 가슴을 쓸어 내리며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섰다. 자세히 살피니 수풀 속에는 수십 마리의 독사들이 또아리를 틀고 있었다.
 얼마나 사람의 출입이 없었기에 이토록 마음대로 뱀들이 활개를 치는지 가히 짐작할 만하였다. 적어도 수백 년은 족히 되어 봄직한 고택인 영안방은 글자 그대로 폐허였다.
 천천히 발걸음을 옮긴 고연악은 겁도 없이 누군가의 서실인 듯 무너져 내린 마루 한 귀퉁이에 자리를 잡고 품속의 건량을 꺼내 우물거리면서 주위를 살폈다.
 썩어서 무너져 내린 전각의 안쪽에는 튼튼하기로 이름난 자단목(紫檀木)으로 만든 서가가 보였고 거기엔 반쯤 썩어버린 서책들이 즐비하게 꽂혀 있었다.
 ‘후후! 서가가 너무 튼튼하니까 다른 건 다 무너져도 저것만은 무너지고 싶어도 무너질 수 없었던 모양이군···’
 연신 우물거리면서 서가로 다가간 고연악은 썩어서 만지기만 하여도 부서질 정도로 낡은 서책들 가운데 유독 말짱한 모습을 한 한 권의 서책을 뽑아 들었다. 서책은 제목도 없었기에 표지를 넘긴 그는 전서체로 쓰인 글씨들을 천천히 읽어내려 갔다.
 
 <고구려인(高句麗人)으로 태어나 중원을 위해 견마지로(犬馬之勞)를 아끼지 않은 결과가 겨우 이것뿐이란 말인가?
 오호라! 원통하고, 또 원통하도다!
 오늘 이승을 떠날지언정 나는 한 점 부끄럼 없이 세상을 살았노라. 이제 몸은 죽어 중원에 묻힐 것이나, 내 혼백만은 동쪽 조상의 고향으로 가고 싶구나.>
 
 “고구려인···? 대체 누구지?”
 고연악은 서책의 첫 장에 쓰인 비통한 심정을 토로한 글을 읽고 잠시 숙연한 마음이 되어 나머지를 읽어 내렸다.
 서책에는 고구려인 고선지(高仙芝)의 시신을 안장한 사람이 쓴 것이라는 글이 있었다. 그의 죽음에 대한 비통함을 안고 썼기에 원통함이 하늘에 사무쳤는지 다른 것과 달리 오랜 기간이 지났음에도 전혀 썩지 않은 상태였다.
 서책을 모두 읽는 고연악은 고선지라는 인물이 양귀비(楊貴妃)를 총애하였던 것으로 유명한 당나라 현종 시절의 장수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또한 안록산(安祿山)의 난을 평정하기 위하여 동관(潼關)에 진지를 구축하다 그에게 악심을 품은 환관 변영성(邊令誠)의 무고한 모함 때문에 억울한 참수형을 당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과거 운중서각을 드나들 무렵 유난히 옛 이야기를 좋아하던 그는 신당서(新唐書)와 구당서(舊唐書), 그리고 송나라의 사가(史家)인 사마광이 남긴 자치통감(自治統鑑)을 읽은 기억이 났다.
 그리고 보니 그것들의 첫 장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고선지는 고구려인이다(高仙芝 高句麗人也)”
 
 그때는 그것들이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었다.
 관심 밖의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것들에는 오래 전 멸망한 해동(海東)의 강국 고구려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없었다. 그러나 그의 행적에 대한 설명은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당나라의 중급 장군인 사진교장(四鎭校將) 고사계(高舍鷄)의 아들인 고선지는 본시 고구려인이었다.
 북위(北魏)의 쇠락을 뒤로 수(隨) 나라가 강성한 모습으로 일어 설 무렵 북쪽에는 북주(北周)와 북제(北齊), 그리고 남방의 진(陳) 등이 힘 겨루기를 하고 있었다.
 힘을 비축한 수나라는 중원을 통일하고자 하는 야망에 불타고 있었다. 이때 북제와 무력 대결을 벌이던 북주의 군사들이 엉뚱하게 고구려의 영토인 요동지역을 들이치는 사태가 벌어졌다.
 당시 고구려의 왕인 평원왕은 사위인 온달과 더불어 침입을 격퇴함은 물론 배찰산(拜察山)에서 적들을 토벌하고, 산서성(山西省) 부근 유림관까지 이르러 북주군(北周軍)을 크게 깨트렸다.
 그 후 더욱 강성해진 고구려는 영양왕 시절, 일 만에 달하는 말갈(靺鞨) 기병까지 동원하여 수나라의 북방 거점인 영주를 공격하였다.
 이것은 대륙을 재통일하려는 야망에 불타던 수 문제의 고구려 침공을 미리 견제할 목적이었다. 강맹한 힘을 보여 줌으로서 다가서지 못하게 하려던 것이었다.
 결국 수 문제는 웬만한 준비로는 고구려를 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군비를 모았다. 뒤 이어 즉위한 수 양제는 수나라의 모든 병사들을 모아 고구려를 침공하도록 명을 내렸다.
 무려 일백 십삼만 삼천 팔백에 달하는 대군이 고구려의 영토를 짓밟으며 들이닥치자, 고구려는 각처의 성곽을 거점으로 수성전(守城戰)을 펴는가 하면, 적의 행군대열을 깊숙이 끌어들인 후 다시 기만책을 펴며 역공하는 방식을 취했다.
 수적인 열세 때문이었다.
 북변의 을지문덕(乙支文德)이 이끈 육전부대의 항전과 더불어 평양 근처의 고건무 부대는 용감하게 싸워 수나라 수군선단(水軍船團)을 유인하여 무력화시키는데 성공하였다.
 이후 을지문덕은 적의 별동부대를 살수(薩水)로 끌어들여 살수대첩(薩水大捷)이라는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삼십만에 달하던 수군(隨軍) 가운데 살아 돌아간 자는 불과 이천 뿐이었다. 인세(人世)에 다시없을 전무후무할 대첩이었다.
 그리고는 도주하는 수군(隨軍)의 배후를 쳐 태원(太原)과 유주(幽州)까지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과거 고구려의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이 차지했던 만큼은 아니지만 엄청난 영토확장을 하였지만 예봉이 꺾인 수나라는 이를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 후 힘을 모은 수 양제는 수 차례 공격을 거듭하였으나 번번이 실패였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또 다시 군사를 일으켜 치려하였으나 고구려군의 용맹 때문에 겁에 질린 군사들이 덤벼 보았자 전멸이라는 생각에 탈영을 일삼을 정도였다.
 고구려와의 전투로 말미암아 쇠약해진 수나라가 멸망한 후 천하를 차지한 당(唐) 태종(太宗) 이세민(李世民) 역시 북방의 호랑이인 고구려를 치기로 마음을 먹고 대군을 동원하였다.
 그냥 두었다가는 언제고 중원을 차지하기 위하여 남하할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당나라 주력부대는 맹렬한 공격으로 요동(遼東)지역 무순(撫順) 부근 개모성(蓋牟城)과 대연만(大連灣) 북안(北岸)에 인접한 전략적 요충지인 비사성(卑沙城)을 함락시켰다.
 그리고는 여세를 몰아 요양(療養)에 자리잡은 요동성(遼東城)과 요양 동남쪽에 자리잡고 있는 백암성(白巖城)까지 차지한 후 곧바로 안시성(安市城)을 향하여 진격하였다.
 전략적 요충지에 자리잡은 안시성을 빼앗길 경우 엄청난 영토가 사라질 것을 저어한 고구려에서는 당시 병력으로서는 십오만이라는 엄청난 병력을 출동시켰다. 그러나 이들은 안시성에서 불과 팔 리 정도 떨어진 곳에서 대패하고 말았다.
 수적인 열세를 극복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고립무원(孤立無援)이 된 안시성은 완강히 저항하였다.
 너무도 완강한 저항에 예봉이 꺾인 당군(唐軍)은 안시성을 포기하고 훨씬 동남쪽에 있는 봉황성(鳳凰城:오골성(烏骨城)을 치려하였다. 그러나 그랬다가는 자칫 배후를 공격당할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또 다시 안시성 공략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연인원 오십만 명이 동원되어 두 달간이나 엄청난 높이의 흙산을 쌓은 당군은 하루에 적어도 예닐곱 차례씩 전력을 기울여 공격하였으나 번번이 실패를 거듭하였다.
 워낙 강력한 저항에 맞부딪쳤기 때문이었다.
 마지막날 또 다시 공격 명령을 내리던 당 태종은 안시성 성주인 양만춘(楊萬春)이 쏜 화살에 한쪽 눈을 실명하게 되었고, 그것 때문에 시름시름 앓다가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
 당 태종의 뒤를 이어 황제에 즉위한 고종은 부친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고구려 내부의 정세가 혼란한 시기를 틈타 침공하였고 결국 고구려는 패망하고 말았다.
 당나라는 고구려의 마지막 왕인 보장왕과 이십 만에 달하는 고구려인들을 강제로 끌고 갔다. 용맹한 고구려인들이 언제 다시 뭉쳐 공격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끌려가자 평양성에는 어린아이와 노인들만 남았다.
 당나라가 건국된 지 정확히 오십 년이 되는 해였다.
 중원 내륙 깊숙한 황무지로 끌려 온 고구려인들은 여기저기 흩어져 삭막한 황무지를 개간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뭉쳐 있으면 언제 반란을 일으킬지 모른다는 생각에 그들은 철저히 분산되었다.
 강회이남, 산남지방, 병주와 양주 등 등격리사막(謄格里沙漠)과 토번고원(吐藩高原) 사이의 하서회랑지대(河西回廊地帶)에 놓인 척박한 황무지로 보내진 것이다.
 이들 가운데 보장왕과 소수의 고구려인들만이 운 좋게도 당시 당나라의 수도였던 장안(長安), 다시 말해 현재의 서안(西安) 부근에 정착하게 되었다. 그들은 인질이었다.
 그들이 머무는 곳이 바로 고려곡(高麗谷)이었다. 고구려의 산천과 비슷한 형상을 한 곳이기에 이곳에 머문 것이다.
 고선지의 조부 역시 끌려온 이들 가운데 하나였다.
 조국에서 수만 리나 떨어진 이역만리까지 끌려온 일가는 온갖 고초를 겪어야만 하였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이들은 또 다시 단결병이란 이름으로 차출되어 남쪽의 토번군(吐藩軍:티벳군)과 북쪽의 돌궐(突厥:위그르) 유목민을 제압하는 병사로 동원되었다.
 당나라 변방을 다스리는 하서도호부(河西都護部)가 있던 양주까지 끌려간 고선지의 부친인 고사계가 당군의 장수가 되자 생활은 조금 나아졌다. 그러나 이민족의 장수라는 호칭인 호장(胡將)이라는 수식어는 어디를 가든 떨어지지 않았다.
 얼마 후 무위를 떠난 고씨 일가는 안서도호부(安西都護部)로 이동하라는 배속 명령을 받아 더 서쪽으로 이동하여 고창(투르판)에 이르게 되었다.
 이곳은 서역과의 교통로인 천산남로와 북로가 나뉘는 곳이다.
 또한 이곳은 무위에서 말을 타고 한 달은 이동하여야 간신히 도착할 엄청나게 먼 거리였다.
 점차 고구려에서 멀리 떨어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안서도호부 전체가 고창을 떠나 더욱 서쪽에 있는 고차(庫車:쿠차)까지 이동한 것이다.
 만리장성 밖의 황량한 황무지에 도착한 고선지는 조부와 부친으로부터 고구려의 검술을 전수 받아 열심히 연마한 결과 불과 약관의 나이에 안서군의 유격장군(遊擊將軍)이 되었다.
 이곳은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을 저술하여 신라에 불교문화를 꽃 피우게 한 신라승 혜초(蕙草)가 다녀간 곳이었다.
 전인완(田仁琬), 개가운(蓋嘉運)이 그곳 절도사(節度使)로 있을 때에는 빛을 보지 못하던 고선지는 부몽영찰(夫蒙靈樽)의 신임을 얻어 언기진을 다스리는 언기진수사(焉耆鎭守使)가 되었다.
 그 후 고선지는 불과 이천의 군사만을 이끌고 떠나 천산산맥 서쪽에 자리 잡은 소국(小國) 달해부(達奚部)를 정복하였다. 이로 인해 그는 안서부도호(安西副度護)로 승차(陞差:진급)하였다.
 이어 언기진과 같은 규모인 네 개의 진을 다스리는 사진도지병마사(四鎭度知兵馬使)에 올랐다.
 고구려의 청년이 천산금로(天山錦路)를 지배하게 된 것이다.
 이 무렵 그는 자신의 검술을 더욱 갈고 닦아 그 어느 누구와 대적을 해도 이길 정도로 변모해 있었다.
 이 시기에 토번(吐藩)의 국왕이 북으로는 돌궐(突厥)과 관계를 맺고, 소발률국(小勃律國:현재의 길기트)의 왕에게는 공주를 시집보내 동맹을 맺는 사건이 벌어졌다.
 본시 당의 지배를 받던 소발률이 토번으로 넘어가자 당군(唐軍)은 세 차례나 원정을 떠났지만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이에 당 현종은 고선지를 행영절도사(行營節度使)에 임명하고는 원정하도록 명령하였다.
 일만에 달하는 수하들을 이끌고 떠난 그는 소륵(카슈카르)와 총령수착(타쉬쿠르간)을 거쳐 파미르고원을 넘었다.
 석 달이 조금 지난 후 오식닉국(五識匿國:현재의 Shingnan지방)에 도착한 고선지는 군사를 셋으로 나눠 토번의 대군이 주둔해 있는 연운보(連雲堡:현재의 아프가니스탄)로 향하였다.
 장장 삼천 리에 달하는 대 장정 끝에 연운보를 궤멸시킨 고선지는 잠시도 쉬지 않고 험난하기로 이름난 야신계곡(힌두쿠시 준령의 일부분, 현재 파키스탄령)을 넘어 소발률국의 수도 아노월성(阿弩越城)으로 향하였다.
 험난무비한 다르코트 정상을 넘으려하자 황제가 감군(監軍)으로 보낸 환관 변영성은 두려움 때문에 더 이상 진군하려 하지 않았다. 이때 고선지는 그의 소심함을 조롱하며 칠천의 군사와 함께 당당히 진군을 하였다.
 연운보에서 빙하로 둘러싸인 다르코트 정상까지 불과 삼 일만에 진군한 고선지는 수하 장졸들을 독려한 후 단숨에 소발률을 정복하였다. 그리고는 소발률과 토번이 통하는 유일한 통로인 길기트강 위에 걸쳐진 등교를 끊어버렸다.
 이제 토번과 소발률은 더 이상 왕래를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안서도호부로 돌아온 고선지는 영웅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의 공을 가로채려던 부몽영찰은 자신에게 먼저 보고 하지 않고 황궁으로 먼저 보고한 고선지를 보고 ‘개 창자를 먹을 고려 노예 놈’이라고 욕을 하였다. 같은 당나라 장수였지만 그에게는 여전히 일개 오랑캐인 고구려인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조정에서는 그의 공을 높이 사 홍로경어사중승(鴻路卿御史中丞)에 앉히고, 부몽영찰 대신 안서도호부의 절도사를 맡겼다. 이어서 특진겸좌금오대장군동정원(特進兼左金吾大將軍同正員)이 되었다.
 이때 소발률 정복에 겁을 집어먹은 불름(동 로마), 대식국(大食國:아라비아)를 비롯한 칠십이 개 국(國)이 항복을 하였다.
 그가 있음으로 해서 한족(漢族)은 천산금로를 비롯한 광활한 서역 땅을 모두 차지하게 된 것이다.
 이후 고선지는 십만에 달하는 병사들을 이끌고 석국(石國:타쉬켄트)를 정벌하였다. 석국의 국왕을 잡아 장안(서안)으로 금의환양한 고선지는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가 되었다.
 또한 황제로부터 황궁인 대명궁과 가까운 거리에 위치한 선양방(宣揚幇)이라는 대 저택을 하사 받았다. 당시 장안성은 황궁과 이어진 주작대로(朱雀大路)를 중심으로 좌우에 일백팔 개의 방이 세워져 있었다. 이중 선양방은 당시 재상이었던 양귀비의 오라비인 양국충(楊國忠)의 저택과 담장 하나 사이였다.
 그에 대한 당 현종의 총애를 가히 짐작할 만하였다.
 장안의 군신들이 석국의 국왕을 참살하자 서역의 각국이 연합군을 편성하여 석국(타쉬켄트)의 서북쪽 나사(羅斯:탈라스)의 대 평원으로 진격하였다. 이에 현종은 고선지로 하여금 이를 막기 위하여 칠만 정벌군을 이끌고 다시 출전하게 하였다.
 적은 삼십만이었고 아군은 고작 칠만 뿐이었다.
 그러나 백절불굴의 맹장인 고선지와 휘하 장수들은 조금도 뒤로 밀리지 않은 채 닷 새 동안이나 치열한 접전을 벌렸다.
 대평원은 시산혈해를 이루었고,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마지막 날 고선지의 군에 편입되어 있던 갈라록(葛邏祿:카를루크)부족이 반란을 일으켜 적의 편에 섬으로 해서 일패도지(一敗塗地)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 불과 몇 천의 수하만을 이끌고 돌아 온 그에게 현종은 불가항력이었다며 오히려 위로의 말을 건넸다.
 일생 처음 패배를 당하여 다소 의기소침해 있던 고선지에게 황제는 전투를 벌일 필요가 적은 하서절도사(河西節度使)에 전임시키고, 우우임군대장군(右羽林軍大將軍)에 봉하였다.
 곧이어 밀운군공(密雲群公)에 봉작(封爵)하고 또 다른 저택인 영안방(永安幇)을 하사하였다.
 당조가 생긴 이래 이민족에게 봉작한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이듬해 안녹산이 범양(范陽)에서 난을 일으키자 토적부원수(討賊副元帥)가 되어 이를 진압하기 위하여 떠난 고선지는 먼저 나가 패전하고 돌아 온 봉상청(封常淸)과 교대하였다.
 반란군이 쳐들어오자 지형에 유리함이 없다 판단한 백전노장인 고선지는 담당지역이었던 협주(陜州)를 떠나 동관(潼關)으로 작전상 후퇴를 하였다.
 아군의 수효에 반해 반란군의 수효가 월등히 많았기 때문에 정면승부를 낼 경우 패할 것이 분명하였기 때문이었다.
 오랜 전투 경험으로 동관의 지형을 이용하면 적은 병력으로도 대군을 무찌를 수 있다는 것을 꿰뚫어 본 것이다.
 이때 그는 자칫 동관이 함락되면 반란군에게 막대한 군자금이 생길 것을 우려하여 동관 안에 있던 황실창고를 열어 수하들에게 이것을 나누어주었다. 그런데 이것이 화근이 되었다.
 이를 본 환관 변영성은 예전에 자신이 다르코트에서 당했던 수모를 기억해 내고 현종에게 과장하여 보고를 하였던 것이다.
 고선지는 곧 황실창고를 탐했다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진중에서 참형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때 수하 군사들이 일제히 누명이라고 소리를 쳤으나 참수형은 그대로 집행되었다.
 구당서(舊唐書)에는 이 죽음이 모함 때문이었으며, 고선지는 의연한 죽음을 맞이하였다고 명명백백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맞아! 이분이 바로 그 분이셨군···”
 고연악은 자신의 뇌리를 스치는 구당서의 내용을 떠올리고는 고개를 위아래로 크게 끄덕였다.
 일개 오랑캐인 한족(韓族)이 유사이래 그만한 지위에 오른 적도 없을 뿐만 아니라 그와 같은 전공을 세운 적도 없었다.
 처음 그것을 읽었을 때 고연악은 머릿속으로 장검을 뽑아들고 말을 탙 채 수 없이 많은 적들 사이를 질풍처럼 누비며 질주하는 영웅을 떠올렸었다. 그렇기에 그의 기억 속에 고선지 존재가 뚜렷하게 남아 있었던 것이다.
 “흐음!··· 어디에 이 분의 유해가 있는지는 모르나 안다면 이분의 고향인 해동 땅에 묻어 드리고 싶구나···”
 고연악은 흠모의 빛이 그득한 눈빛이 된 채 다시 서책을 들여다보았다. 서책의 마지막 부분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오늘 본장(本將)이 죽으면 수급은 동관의 가장 동쪽에 묻어달라고 하였다. 누구든 이것을 본다면 본좌의 혼백이나마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해 주길 바란다.>
 이게 장군의 유언이었다. 나는 장군님의 유명을 따를 것이다.
 
 “흐음! 동관의 가장 동쪽?··· 과연 이분의 말씀대로 그곳에 유해가 있을까?”
 고연악은 벌써 수백여 년 전에 죽었지만 고선지의 유해가 왠지 동관 가장 동쪽에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갔다.
 그의 생애에 있어 그와 원한을 지닐만한 사람이라곤 그에게 정복당한 사람들인 이민족뿐이라고 생각되었던 것이다.
 그가 세운 전공만 가지고 따진다면 한족(漢族)의 그 어느 누구도 세우지 못한 전공이었기에 중원인이라면 누구든 이것을 알기만 한다면 흠모의 빛을 띄우면 띄웠지 원한을 품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지금껏 제 아무리 역사적으로 혁혁한 명성을 떨친 장수들이라 할지라도 대부분은 지장(智將), 덕장(德將), 맹장(猛將) 중 하나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고선지만은 지장이며, 덕장이었고, 아울러 맹장이라고 자치통감에 기록되어 있었다.
 동관이라면 서안에서 동쪽으로 사백여 리 가량 떨어진 곳에 있는 곳이다. 그리고 제법 관도도 잘 닦여 있다고 들었다. 그래서 고연악은 동관으로 가볼 생각을 품게 되었다.
 어차피 마땅히 갈만한 곳이 없던 처지였던지라 더 이상 다른 생각도 품지 않았다.
 “좋아! 한번 가 보기나 하지. 나야 뭐 밑질게 없으니까···”
 자리에 벌렁 누운 고연악은 이내 가늘게 코를 골며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꿈에서 그는 날카로운 검을 뽑아들고 종횡무진 전장을 누비는 고선지 장군의 꿈을 꾸었다.
 그가 깨어난 것은 이른 새벽이었다.
 상쾌한 공기와 더불어 이름 모를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를 들으며 깨어난 고연악은 지난 밤 꿈이 너무도 생생하였기에 잠시 멍한 표정이 되어 있었다.
 “흐음!··· 고구려? 좋아, 한번 알아보자.”
 궁금하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던 고연악은 동관으로 향하기 전 고려곡을 먼저 구경하기로 하였다. 고구려 사람들이 살았던 그곳은 다행히도 동관으로 향하는 길목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왔던 길을 되짚어 고려곡으로 향하는 그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어제는 목적지가 없었기에 여기저기 기웃거리느라 많은 시간을 허비하였지만 목적지가 생긴 지금 매일 보다시피 하던 것을 다시 볼 필요는 없었기에 빠르게 서안의 저잣거리를 통과하였다.
 “아차! 아무리 관도가 잘 닦여 있지만 동관까지 가려면 중간에 노숙을 해야 하는데··· 들짐승이라도 나타난다면?··· 좋아! 일단 거기에 한번 가 봐야겠군.”
 서안을 한 번도 벗어난 본 적이 없는 고연악은 천양원에 머물 때 대형들이 한 이야기 중 늑대나 이리 등에 대한 이야기가 떠 오른 것이다. 그것들은 생기기는 개와 비슷하지만 몸집이 조금 더 크고 흉폭하기 이를 데 없다고 하였다. 그것들은 굶주리면 사람도 잡아먹기에 조심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동관까지 가는 동안 혹시라도 그것들과 조우라도 할라치면 꼼짝없이 그것들의 먹이로 전락하여야 한다는 생각에 고연악은 묵가장으로 향하였다.
 지금까지 단 한 마디 말도 나누어 본 적이 없지만 아마도 묵노인은 자신을 알아 볼 것이고, 사정을 말한다면 호신용 쇠붙이 하나쯤은 거저 얻을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안에 계세요?”
 늘 타오르던 불이 꺼진 묵가장은 을씨년스럽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괴괴한 적막 속에 잠겨 있었다. 언제 비웠는지 묵가장에는 남아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발끝에서 풀썩이는 먼지를 바라보며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며 묵노인을 찾던 고연악은 묵가장이 완전히 비워졌으며, 대장간에 있던 모든 기물들도 치워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대체 어디로 가신거지? 돌아가셨나···? 아냐, 돌아가셨다면 다른 사람이 나타나 대장간을 운영했겠지··· 흐음!··· 대체 왜 이사를 가셨을까? 그나저나 어떻게 한다···?”
 고연악은 대장간이 있던 곳으로 되돌아오며 괴이하다는 듯 머리를 갸웃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묵가장은 서안에서도 제법 장사가 잘 되는 대장간이었다.
 농기구는 물론 서안의 군졸들에게 지급 될 병장기까지 만들어내느라 정신이 없던 곳이 아니던가!
 그런데 이렇듯 비워져 있는 것이 못내 이상하였던 것이다.
 “어떻게 하지? 소도라도 한 자루 얻어가려고 왔는데···”
 고연악은 대장간 여기저기에 버려진 기물들을 슬쩍 슬쩍 들추며 혹시 뭐라도 없는가 싶어 한참을 뒤졌다. 그러나 필요한 것은 어디에도 없었다.
 육가장을 다니느라 오랫동안 묵가장을 찾지 않았기에 이곳이 이렇게 비워진 것을 몰랐던 고연악은 할 수 없다는 듯 축 늘어진 어깨로 묵가장을 벗어났다.
 “젠장! 어디서 쇠붙이를 얻지?··· 에잉!··· 아, 참! 혹시···?”
 한참을 걷던 고연악은 무엇인가 떠올랐다는 듯 다시 묵가장으로 날 듯이 뛰어갔다. 그리고는 이내 대장간으로 들어가 바닥의 흙을 파헤쳤다.
 “우와···! 있다! 있어···!”
 잠시 후 고연악은 천으로 둘둘 말려 있는 무엇인가를 끄집어 내었다. 그것은 묵노인이 무려 십만 번의 망치질을 하며 만들던 바로 그 검이었다.
 “하하! 아마도 어디론가 이사를 가면서 깜빡 잊은 모양이구나. 좋았어! 이 정도면 어엇!···”
 기쁨에 겨워 흰 천을 펼치던 고연악은 한 자루 검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것은 고색창연한 검갑에 넣어져 있었는데 검을 뽑자 즉각 주위의 공기를 서늘하게 냉각시킬 정도로 예리한 검날이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우와! 이런 검이··· 이건 틀림없는 명검일 거야! 히히! 수지 맞았는데···? 어디 보자 허리에는 안될 거고··· 등에다 맬까?”
 얼굴이 비칠 정도로 잘 닦여진 검은 고연악이 사용하기에는 다소 길었다. 그렇기에 등에 비끄러매었다.
 그리고는 이내 멋있는 모습으로 검을 뽑으려고 허리를 약간 숙이곤 검의 손잡이를 잡아 당겼다. 그러나 검은 반도 채 뽑히지 않았다. 팔이 짧은 고연악은 등에 검을 매면 그것을 뽑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내곤 검미를 찌푸렸다.
 “이런 제길!··· 검을 뽑을 수 없잖아··· 어떻게 하지?”
 주루에서 보았던 무림인을 흉내내어 단 숨에 검을 뽑으려던 고연악은 아직 자신은 너무 어려 그럴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젠장! 이러면 멋이 없는데··· 에이! 할 수 없지···”
 고연악은 검을 자신의 어깨에 걸쳤다. 그리고는 여러 번 검을 뽑는 연습을 하였다. 양손으로 검갑과 손잡이를 쥔 자세로는 팔이 짧아 도저히 검을 뽑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자신이 검을 뽑을 수 있는 방법이 단 두 가지라는 것을 깨달았다.
 하나는 바닥에 검을 내려놓고 손잡이만 잡아당기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어깨 위에 검을 걸쳐놓았다가 허공에 휘저어 검갑이 떨어져 나가게 하는 방법뿐이었다.
 “젠장! 이러다 검갑이 남아나질 않겠군··· 아, 참! 그러면 되겠구나. 헤헤! 그러고 보면 나도 꽤 쓸만한 머리란 말씀이야···”
 바닥에 검을 내려놓고 검을 뽑는 것은 유사시엔 취할 수 없는 방법이었다. 그렇기에 검을 휘둘러 절로 검갑이 벗겨지게 하는 방법을 취하려던 고연악은 검갑이 날아가 바닥에 떨어질 때마다 흠집이 생긴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자신이 보기에 천하제일의 명검 같은 이것을 어쩌면 다른 사람들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아직 어린 나이이기에 누구든 빼앗으려고 마음만 먹는다면 꼼짝없이 빼앗기고 말 것이라는 생각에 일석이조의 계책을 생각해낸 것이다.
 그것은 검갑을 감고 있던 천으로 다시 그것을 감아두는 방법이었다. 그리고 유사시에 검을 휘두르면 검은 뽑혀질 것이다.
 “헤헤! 좋았어. 자, 한번 해보자!”
 고연악은 텅 빈 대장간에서 수십 번이나 검을 뽑는 연습을 하였다. 그 결과 자신이 원하는 대로 검이 뽑혀졌다.
 “좋아! 이제 떠나야지··· 이러다간 산 속에서 자야한다.”
 묵가장을 떠난 고연악은 길을 가는 동안 묵노인의 망치질과 일수도살 육연평의 칼질을 머릿속에 떠 올렸다.
 유사시에 맹수라도 덤벼든다면 즉각 반응하여야 한다는 생각에 그는 다각도에서 그것들이 덤벼들 때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천년고도에서 뻗어나간 관도답게 잘 닦여진 관도를 따라 가는 행인들은 생각보다 많이 있었다. 일반 양민들도 있었고, 학문을 닦는 서생들도 여럿 있었다. 또한 상인들도 있었으며 병장기를 휴대한 무림인으로 보이는 사람들도 있었다.
 고연악은 그 중 무림인들의 움직임을 유심히 관찰하였다.
 그들 가운데 가장 강해 보이는 사람의 움직임은 과연 다른 사람들과는 차이가 있었다. 언제든 발검(拔劍)을 할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낼 수 있었던 것이다.
 사실 이것은 무공을 익히지도 않은 이제 십이 세가 된 고연악이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묵가장과 육가장을 드나들면서 예리한 안목을 익혔기에 이러한 것을 알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아저씨! 여쭤 볼 것이 있는데 아저씨는 무림인이세요?”
 사람 좋아 보이는 인상을 지닌 중년의 사내에게 다가간 고연악은 스스럼없이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런 그의 표정은 순진무구 그 자체였다. 이것은 오랜 동안 저잣거리를 드나들면서 체득한 처세였다. 이런 표정을 지으면 어떤 어른이던 화를 내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된 것이다.
 “뭐라고?··· 허허! 이 녀석, 그건 왜 묻느냐?”
 일행과 함께 길을 가던 중년의 무림인은 느닷없는 물음에 그를 예리한 눈초리로 바라보면서 빙긋 미소를 머금었다. 소년이 전혀 무공을 익히지 않았으며 순진하다고 짐작한 것이다.
 그는 모르고 있었으나 중년의 사내는 무림에 명성이 쟁쟁한 고수였다. 무림세가 중 하나인 남궁세가 가주 일월검(日月劍) 남궁경(南宮庚)의 조카인 섬전검(閃電劍) 남궁일기(南宮壹基)였던 것이다. 그는 현재 행협을 하며 강호를 주유하는 중이었다.
 
 남궁세가는 호남성(湖南省) 형산(衡山) 자락에 자리잡은 주정(朱亭)이라는 곳에 있는 무림세가로 그 역사가 오백 년이 훨씬 넘은 유서 깊은 무림의 가문이다.
 남궁세가의 제 이십오대 가주인 일월검은 올해 칠십이었는데 육순이 되던 해에 이미 비전절기인 제왕무적검법(帝王無敵劍法)을 극성까지 익힌 검법의 달인이라고 소문나 있었다.
 그의 아우의 일점혈육인 섬전검은 그의 외호처럼 쾌검술을 사용하는 무인으로 섬전십삼검뢰(閃電十三劍雷)를 팔 성이나 익혔다고 한다. 그의 검은 어찌나 빠른지 상대가 발검하기도 전에 이미 상대의 요혈에 검이 닿을 지경이라고 하였다.
 “아저씨! 아저씨가 혹시 무림인이시면 혹시 제게 검법을 가르쳐 주실 수 있나요?”
 무림이 어떤 곳인지는 아나 자세한 내막을 전혀 모르는 고연악은 자신이 방금 한 말이 얼마나 무례한 것인지 모르고 있었다.
 무림에서는 자신의 절기를 타인에게 전수하는 경우가 몇 가지 있는데 그 중 하나는 그의 제자가 되는 것이다.
 또 하나는 그의 수하가 되는 것이다. 이 경우 무공을 전수 받은 수하는 그의 곁을 떠날 수 없다. 물론 피를 나눈 혈족이라면 사정이 다르다. 아주 특별한 경우, 그러니까 구명지은을 입었을 경우 무공을 전수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매우 드문 일이었다.
 이 네 가지 경우 외에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자신의 무학을 타인에게 전수하지 않는다. 자신의 무공이 적에게 노출 될 경우 자칫 자신의 목숨이 위태롭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무림에 몸담은 사람은 타인에게 무공을 가르쳐 달라는 말을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연악이 순진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건네자 섬전검은 사정을 짐작하였는지 빙긋 미소지으며 물었다.
 “후후후! 무공을 배워서 무엇에 쓰려는 것이냐?”
 “헤헤! 실은 제가 얼마 전에 검을 한 자루 얻었어요. 그런데 이걸 쓰는 방법을 몰라서···”
 머리를 긁적이는 고연악의 표정은 영락없이 순진한 소년 그 자체였기에 섬전검은 또 다시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 검을 얻었으니 이제 검법을 배우겠다?··· 후후! 말을 탔으니 이제 견마 잡히고 싶은 모양인 게로구나?”
 “아, 아니에요. 실은 제가 동관까지 가는데 들짐승이라도 나타나면 그것들을 쫓아내기 위해서 그러는 거예요.”
 “동관? 아무 것도 없는 거기엔 무엇 하러 가느냐?”
 섬전검은 오래 전 폐허로 변해버린 동관을 가겠다는 소년이 다소 이상하였다. 과거엔 전략적 요충지였으나 천하가 통일된 이후에는 그곳에서는 더 이상 전투가 벌어질 수 없는 곳이다.
 그렇기에 동관은 버려졌고 아마도 지금쯤이면 어른 키로 한 길은 족히 될 잡초들만 무성할 것이다.
 부근에는 마을도 없고, 그렇다고 경치가 뛰어난 곳도 아니니 굳이 찾아갈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헤헤! 사실 저는 거기에 가면 옛날 당 나라 때···”
 고연악은 나름대로 고선지 장군에 대한 설명을 하였다.
 물론 거기에 묻혀 있을 지도 모르는 그의 유해를 거두기 위함이라는 것도 이야기하였다. 모든 이야기를 다 들은 섬전검은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후후! 고선지 장군은 정말 대단한 분이시지. 그분의 유해를 거두고 싶어 간다고 하니 내가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자, 어디 새로 얻었다는 검을 뽑아 보도록 해라!”
 “헤헤! 아저씨 고맙습니다. 챠앗!”
 말을 마친 고연악은 기다렸다는 듯 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검갑이 숲 안으로 날아가 버렸다.
 “하하하! 녀석···, 하긴 검이 네겐 좀 버겁겠구나. 좋아! 여긴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관도니 숲 속으로 가자. 여보게들! 자네들은 여기에서 잠시 쉬고 있게. 이 아이에게 검법의 기본을 가르치고 나올 것일세!”
 “하하하! 걱정 마십시오.”
 곁에서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들은 섬전검의 일행은 관도 곁 바위에 걸터앉으며 웃었다.
 그들 역시 고선지 장군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는지라 소년이 왠지 기특하다는 생각을 품던 중이었다.
 그 사이 섬전검은 너무도 우스꽝스런 모습으로 검을 뽑자 크게 웃으며 성큼성큼 걸어서 숲 안으로 들어갔다.
 “아니···? 너, 그 검 좀 보자!”
 숲 안으로 들어가 검갑을 주워들은 섬전검은 고연악이 들고 있는 검을 보고는 화들짝 놀랐다. 조금 전에는 검갑이 날아가는 모습을 보느라 검을 보지 못하였던 것이다.
 “이, 이건···? 이건 전설처럼 전해지는 무영검귀(無影劍鬼) 초진상(草晋祥)의 애검인 벽혈검(碧血劍)···! 어떻게 네가 이걸···?”
 고연악으로부터 검을 건네 받은 섬전검은 얼마나 놀랐는지 부르르 떨기까지 하였다. 무림의 사대신화 중 첫째로 불리는 팔백 년 전의 천하제일장 천마 기천승보다도 이백여 년이나 앞서 일세를 풍미하고 홀연히 사라졌던 검법의 대가가 있었다.
 그가 바로 섬전검이 언급한 무영검귀 초진상이었다.
 그가 강호를 활보할 당시 누구도 그의 검 아래 삼 초를 버틴 사람이 없었다. 그러던 중 자신의 상대가 없음을 한탄하며 어디론가 사라졌고 그 후 그의 종적은 어디에서고 발견되지 않았다.
 그의 존재가 잊혀지기 시작한 것은 영세제일검인 무적검객 도진서의 출현 이후였다. 사람들이 무영검귀보다 무적검객이 더 강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벽혈검이라니요? 아닌데요. 그건 제가 묵가장에서···”
 고연악은 원래부터 있던 검이 아니라 묵가장의 묵노인이 그 검을 만들었다는 설명과 함께 어떻게 얻었는지도 이야기하였다.
 “그럼 여기 있는 이 벽혈이라는 글씨는 뭐지? 흐음···! 이 검은 예사 검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 다음부터는 그 어느 누구에게도 이 검을 건네지 말거라. 알겠느냐?”
 좋은 검이라면 천 리를 마다 않고 찾아가, 값을 따지지 않고 구해 수집하는 것이 취미인 섬전검은 은근히 벽혈검이 갖고 싶었으나 차마 순진한 어린 아이에게서 그것을 빼앗을 수는 없었기에 돌려주며 주의를 주었다.
 그제야 검을 제대로 살핀 적이 없던 고연악은 검의 손잡이 부분에 음각 되어있는 벽혈이라는 글씨를 읽을 수 있었다.
 “벽혈검? 후후! 이름 좋은 데··· 좋아! 앞으로 이놈을 벽아(碧兒)라고 부르자.”
 “좋아! 이제부터 검법의 기초를 알려주마. 잘 들어라!”
 “예!”
 “후후! 검이란 베기만 할 수 있는 도와 달리 찌를 수도 있고 벨 수도 있는 병장기이다. 검법을 익히는 것은 다른 병장기를 다루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렵다. 그렇기에 검을 만병지왕(萬兵之王)이라고 한다. 검을 시전함에 있어···”
 고연악은 섬전검이 말 한마디라도 놓칠 새라 귀를 쫑긋 세우고, 두 눈에서 빛을 내며 그야말로 세이경청(洗耳敬聽)을 하였다.
 섬전검은 고연악이 아직 어린 나이이기에 검을 자유자재로 휘두를 수 없으며, 아직은 누구와도 손속을 나누지도 않을 것이기에 지극히 기초적인 것을 가르쳤다.
 위에서 아래로 내리긋는 직도황룡(直道黃龍)과 태산압정(泰山壓頂), 좌에서 우로 혹은 우에서 좌로 긋는 횡소천군(橫掃天軍), 전후좌우를 어지럽게 베는 팔방풍우(八方風雨), 목표한 곳을 검극으로 찌르는 화룡점정(畵龍點睛)을 배우는데 걸린 시간은 불과 일 각이었다.
 하긴 아무런 변식도 포함되어 있지 않은 가장 기초적인 초식이니 더 이상의 시간이 걸렸다면 아마도 이상할 것이다.
 고연악은 가장 기본적인 초식이지만 진지한 자세로 검을 휘둘렀고 이 모습을 본 섬전검은 어릴 때 자신의 모습을 보는 듯 하여 기특하다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
 “하하! 그 정도면 맹수들은 물리칠 수 있을게다. 혼자서 할 수 있겠느냐?”
 “헤헤! 아저씨 정말 고맙습니다.”
 고연악은 연신 검을 휘두르며 감사의 인사를 잊지 않았다.
 “하하! 그럼 나중에 인연이 닿는다면 한번 더 보자꾸나.”
 말을 마친 섬전검은 몸을 날려 즉각 숲 밖으로 향하였다. 이를 본 고연악은 입을 벌린 채 다물 수 없었다. 마치 쏜살처럼 나무와 나무 사이를 뚫고 지나는 섬전검의 신법에 놀란 것이다.
 “세, 세상에···! 무림인들은 모두 날아다닌다고 한 대형의 말이 사실이었군··· 좋아! 나도 반드시 저걸 배우고야 말겠어.”
 동관까지의 사백 리 길이 까마득하게 멀게만 느껴지던 고연악은 신법을 사용하면 금방 갈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이런! 안녕히 가시라는 말씀도 못 드렸네···”
 잠시 후 그는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머리를 긁적이며 관도로 걸어 나왔다. 조금 전에 배운 검법은 눈을 감고도 휘두를 수 있다 생각하였던 때문이다.
 서서히 석양이 지자 사위는 점차 어둠 속으로 밀려들기 시작하였다. 예전 같으면 밤에 홀로 관도에 있는 것이 두려웠을 것이나 현재는 아니었다.
 첫째 뱃가죽이 등에 달라붙을 정도로 지독한 공복감 때문이었다. 배가 고파 죽겠는데 어둠이 대수이겠는가!
 둘째는 낮에 배운 검법 때문에 든든한 마음이 들어서였다.
 셋째는 휘영청 밝은 달이 월광을 뿜어 관도가 그리 어둡지 않기 때문이었다.
 관도를 따라 주린 배를 움켜쥐고 밤새 걸음을 옮긴 고연악은 다음날 새벽 무사히 위남현(渭南縣)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곳을 거쳐 험준한 준령인 대산(岱山)을 넘으면 동관이 있다.
 위남현은 대산에서 나는 약초의 집산지로 유명한 곳이었다. 따라서 서안처럼은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로 늘 북적이는 곳이었다.
 “으으! 배고파···”
 새벽이었지만 부지런한 사람들은 이미 부산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객잔과 주루의 점소이들은 혹시 있을지 모르는 손님을 맞이하기 위하여 빗자루를 들고 여기 저기를 쓸고 있었다.
 객잔이나 주루의 인심이 얼마나 야박한지 잘 아는 고연악은 그것들을 지나쳐 제법 큰 장원들이 밀집해 있는 곳으로 향하였다. 지금껏 단 한번도 음식을 구걸해 본 적이 없던 그는 잘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고약한 인심을 지녔는지를 몰랐기에 이곳에 발을 들여놓은 것이다.
 아마도 허름한 집들이 즐비한 곳으로 발을 옮겼다면 벌써 음식을 먹고 있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부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의 배고픔과 그들이 얼마나 힘들게 살아가는지를 모른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들은 딱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서 동병상련(同病相憐)을 느끼기에 비교적 인심이 후하다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한 시진 가까이 이 집 저 집을 기웃거리며 돌아다녔으나 어느 한 집 만만하게 보이지 않았기에 차마 문을 두드릴 수 없던 고연악은 밤새 걸어왔기에 너무도 지친 상태였다.
 뱃속에서는 음식을 넣어 달라고 연신 꼬르륵 소리를 냈고, 난생 처음 장거리를 걸어 천 근처럼 무거워진 눈꺼풀은 자꾸만 내려왔다. 어깨에 걸친 벽혈검도 이제는 너무도 무겁게 느껴져 어깨를 짓누르는 듯 하자 고연악은 지나던 저택의 뒷문 가 후미진 곳에 털썩 주저앉았다.
 발바닥에 물집이라도 잡혔는지 근질근질 거리다 가도 따가운 느낌이 왔으나 그것을 살펴보기도 전에 벽혈검을 베개삼아 잠이 들어버리고 말았다. 너무도 피곤하였던 것이다.
 삐이꺽―!
 “에그머니나···! 여기에 웬 거지가···?”
 문이 열림과 동시에 누군가가 발을 내딛다가 물컹한 느낌이 들자 즉각 발을 빼며 호들갑을 떨었다.
 “으으응!··· 누, 누구?···”
 깊은 잠에 취해 있던 고연악은 누군가가 자신의 둔부를 밟자 무의식적으로 묻고는 또 다시 잠에 취해버렸다.
 “어머! 얘, 일어나! 일어나란 말이야! 아씨께서 나가셔야 하는데 이렇게 길을 막고 있으면 어떻게 해? 빨리 일어나지 못해?”
 시비 차림의 여인이 잠든 고연악의 몸을 연신 흔들며 잔소리를 하자 반쯤 잠에서 깨어난 그는 눈을 반개한 입을 열었다.
 “으으응! 대체 왜 이러는 거야··· 난 너무도 피곤해서 잠을 자야 하니까 귀찮게 굴지마! 음냐! 음냐!···”
 자신이 잠든 곳을 천양원이라 생각하였는지 고연악은 귀찮다는 듯 손을 휘저은 후 다시 자려고 고개를 묻었다.
 “이런! 빌어먹을 거지새끼 같으니··· 빨리 안 일어나? 너 오늘 한번 죽어 볼래? 빨랑 일어나! 얼른 못 일어나?”
 시비는 화가 났는지 발로 고연악의 둔부를 걷어찼다.
 퍽, 퍽, 퍼억―!
 “으윽! 이런 젠장 대체 왜 이러는 거··· 어? 여, 여긴 어디지?”
 자신의 잠을 방해하는 것에 대한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던 고연악은 이곳이 천양원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잠시 말을 잇지 못하였다. 자신이 잠든 것조차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야! 이, 빌어먹을 놈아! 대체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여기에서 잠을 자는 거야? 빨리 꺼지지 못해?”
 주근깨가 잔뜩 박힌 얼굴의 시비는 이제 십칠팔 세 정도 되어 보였고, 그녀의 뒤에서 말 없이 지켜보고 있는 소녀는 십이삼 세 쯤 되어 보였다.
 잠시 자신이 있는 곳이 어딘가를 생각한 고연악은 너무도 피곤해 골아 떨어졌던 자신이 어처구니없는지 머리를 긁적이며 주위를 둘러보다 시비 뒤의 소녀를 보게 되었다.
 “햐아···! 넌 연교 누나처럼 예쁘구나. 여기가 네 집이니?”
 “뭐라고? 이 빌어먹을 놈이 감히 누구에게···?”
 “호호! 그냥 놔둬. 몹시도 피곤했나봐!”
 “어머! 아씨··· 이런 놈은 그냥···”
 말을 하던 시비는 소녀가 손짓을 하자 얼른 입을 다물었다.
 마치 인형처럼 깜찍하게 생긴 소녀는 적어도 이곳 위남현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소녀였다.
 그녀의 부친은 위남현으로 매집되는 모든 약초들을 사들였다가 천하의 약재상들에게 도매를 하는 사람이었다.
 당연히 엄청난 거금을 보유한 거부였다. 그러고 보니 고연악이 잠들었던 장원은 서안의 고루 거택과 비교하여도 조금의 손색이 없을 정도로 잘 지어진 장원이었다. 이 장원의 주인은 만금약왕(萬金藥王) 남기서(南起瑞)였다. 소녀는 그의 장중주(掌中珠)인 홍예옥녀(虹霓玉女) 남부용(南芙蓉)이었다.
 만금약왕은 이곳뿐만 아니라 천하 각지에 산재한 만약원(萬藥院)의 원주이었다. 다시 말해 천하의 모든 약재는 일단 그의 손을 거쳐야 다른 약재상에게 넘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삼백여 년 전 일개 돌팔이 의원이었던 그의 조상이 이곳에 자그마한 약포를 차린 후 대를 물려 가는 동안 욱일승천의 기세로 그 규모가 커져 천하의 모든 약재들을 독점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만금약왕은 천하에서도 손꼽히는 거부였다.
 올해 갓 사십을 넘긴 그의 금지옥엽(金枝玉葉)인 홍예옥녀는 매일 새벽 이슬에 젖은 상태로 있는 약재들을 선별하여 구매하고 있었다. 완전히 마른 한 낮이 되면 도저히 식별할 수 없기에 이른 새벽에 나서야 하였다.
 아직 어린 나이이기는 하나 그녀의 뇌리 속에 담기지 않은 약재란 없다. 어떤 약재이든 겉모양만 보면 그 상품의 질을 가늠하는 눈썰미는 지녔던 것이다. 오늘도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난장(亂場)으로 향하려다 고연악을 밟은 것이다.
 “얘! 너는 집이 어디니? 왜 집에 안 가고 여기서 잔 거야?”
 홍예옥녀는 약재를 감별할 때처럼 안광을 빛내며 물었다.
 “나, 나는 집이 없어! 길을 가다 너무 피곤해서 깜박 잠이 든 모양이야! 그런데, 너 참 예쁘게 생겼다. 이름이 뭐니? 그리고, 나 지금 몹시 배가 고픈데 혹시 먹을 거를 조금 줄 수 없겠니?”
 고연악은 너무도 배가 고파 길가의 돌덩이가 잘 익은 오리 구이로 보일 지경이었기에 체면불구하고 먹을 것을 청하였다.
 “뭐라고? 집이 없다고? 그럼 거지 아냐? 어머! 재수 없어··· 먹을 걸 달라고? 흥!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 거지에게 줄 건 없어!”
 고연악이 한꺼번에 여러 가지 질문을 하였듯 홍예옥녀 역시 한꺼번에 많은 말들을 내 뱉었다. 그런 그녀의 얼굴에는 조금 전과는 달리 아침부터 재수 없다는 표정이 역력하였다.
 지금까지 그녀는 아침에 집을 나서서 처음 본 사람이 거지일 경우 재수가 좋았던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 이상하게도 그런 날이면 약재를 감별하는 안목에 이상이 생기는지 형편없는 약재지만 제 값을 치르고 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렇게 하여 손실을 입은 날이면 하루 종일 기분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모든 약재 매입을 끝낸 뒤 귀가할 때 거지를 처음 보면 반대로 재수가 몹시도 좋았다. 그 날 아침 헐값에 사들인 약재가 비싼 값에 팔리곤 하였던 것이다. 그렇기에 그 거지는 그 날 점심 때 포식을 하는 수도 많았다.
 이런 경우가 너무도 많았기에 그녀는 아침에 거지를 보면 아미를 찡그리고 짜증을 내곤 하였다. 그런데 오늘은 아예 거지의 엉덩이까지 밟았으니 얼마나 재수가 안 좋을지 뻔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이토록 심한 말을 한 것이다.
 “뭐, 뭐라고? 내가 거지라고? 이, 이런···!”
 “흥! 네가 거지가 아니면 누가 거지야? 아침부터 모르는 사람한테 와서 밥이나 달라고 구걸하는 주제에···”
 “뭐, 뭐라고? 구, 구걸···?”
 고연악은 자신이 거지 취급을 당하자 화가 머리끝까지 치 솟았다. 그러나 홍예옥녀의 곁에서 여차하면 주먹을 날리려는지 소매를 걷는 시비의 팔뚝이 웬만한 사내들 보다 굵다는 것을 보고는 화를 낼 수 없었다.
 “으으으···! 나한테 감히 거지라니··· 야! 아무리 없이 산다고 하지만 난 지금까지 단 한번도 구걸해 본 적이 없어. 그런데도 내가 거지야? 조금 전 나한테 거지라고 했던 말, 취소해!”
 “흥! 이제 보니 너는 거짓말도 아주 잘 하네··· 난 오늘 널 처음 보았고, 너 역시 날 몰라! 그런데 조금 전, 넌 분명히 나한테 먹을 걸 달라고 했어. 그건 분명히 구걸이야! 그런데도 한 번도 구걸을 안 했다고? 흥! 정말 거지같은 게··· 에이! 오늘 얼마나 재수가 없을라고··· 퉤퉤! 자, 빨리 가자!”
 “예! 아씨··· 야! 임마 넌 빨리 꺼져. 여기서 조금만 더 얼쩡대면··· 알지?”
 홍예옥녀가 재수 없다는 듯 침을 뱉고 나서자 시비는 짐짓 주먹을 흔들어 보이고는 얼른 그녀의 뒤를 따랐다.
 잠을 자다 졸지에 봉변을 당한 고연악은 이를 부드득 갈며 멀어지는 두 여인의 뒤를 보며 주먹을 휘둘렀다.
 “이런! 빌어먹을··· 계집들만 아니었다면··· 흐이유! 주먹이 운다 주먹이 울어! 에이 재수 없어. 아침부터 싸가지 없는 계집과 실랑이를 벌이다니··· 에이! 잠이나 더 자야겠다.”
 치솟는 분기 때문에 주먹을 휘두르며 공연히 땅 바닥을 거칠게 걷어찬 고연악은 선 깬 잠이나 다시 자야겠다는 듯 벽혈검을 베고 다시 누웠다.
 
 
 제3장 월 일 할에 복리이자
 
 
 “어머! 얘··· 너, 아직까지···? 빨리 안가? 너 때문에 오늘 내가 얼마나 손해를 봤는지 알아? 빨라 가!”
 약재 매입을 마치고 돌아온 홍예옥녀는 쿨쿨 코까지 골며 누워있는 고연악을 보자 화가 솟았다. 아침에 거지인 그를 보았기에 오늘도 어김없이 손해를 보았던 것이다.
 해조(海藻:듬북)은 해대(海帶:참다시마)와 아주 유사한 약재이다. 본초강목(本草綱目)에 기록되어 있기를 해조는 성질이 차고 맛이 쓰면서 짜기는 하나 독이 약간 밖에 없는 약재이다.
 이것은 결핵(結核)이나 산기(疝氣)로 음낭(陰囊)이 처진 것과, 음낭이 붓고 아픈 것을 치료하며, 열두 가지 수종(水腫)을 낫게 하는 효능이 있는 약재이다.
 또한 이것은 오줌이 잘 나가게 하는 데에도 쓰인다.
 반면 해대는 산기를 치료하고 수기(水氣)를 내리면 영류와 기가 뭉친 것을 낫게 하며, 굳은 것을 부드럽게 풀어지게 하는 약재이다. 이것은 해조와 아주 비슷하지만 굵기가 약간 굵고, 길다.
 이것들 두 가지는 모두 바싹 말린 상태로 유통이 되며, 너무 길기에 적당한 크기로 잘라서 운반하므로 웬만한 안목으로는 구별하기 힘든 약재들이었다.
 가격은 해조가 해대보다 다섯 배쯤 비쌌다. 오늘 홍예옥녀는 일 년만에 들여왔다는 해조를 오백 근이나 구입하였다.
 당연히 해조의 값이 치러졌다. 값을 치르고 흐뭇한 마음에 해조를 면밀히 살피던 그녀는 자신이 구입한 것이 바로 해대라는 것을 알고 길길이 뛰었다.
 그러나 그녀에게 이것을 판 상인은 그것이 해조라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 그녀가 먼저 ‘이것은 해조군요’ 했던 것이다.
 약재를 판 그에게 잘 못이 있다면 해조가 아니라 해대라고 말을 했어야 하는 것뿐이다. 그러나 실상 그는 그것이 해조인지 해대인지 모르는 자였다.
 사실 그것을 팔려고 하였던 상인은 위남현에 당도하기 전에 산적을 만나 지니고 있던 모든 집을 빼앗겼다. 다시 말해 해대를 팔러온 상인은 상인이 아니라 산적이었다는 것이다.
 남의 재물이나 털어서 먹고사는 일개 산적이 약재에 대한 지식이 있다면 그것은 이상한 일일 것이다.
 당연히 아무 것도 모르는 그는 자신의 두둑한 전대를 두드리며 흐뭇한 미소를 지은 채 도망친지 오래였다.
 물건을 판 자를 찾아오라고 하였으나 사라진 그를 찾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가급적이면 오랫동안 거래를 하였던 사람들만 상대하던 그녀였지만 이곳은 내륙도 아주 깊숙한 내륙이었다.
 평생 바다라고는 본적도 없는 사람들만 사는 곳이다.
 그런 이곳으로 바다에서 나는 약재를 장이 설 때마다 지고 올 수는 없는 일이다. 그렇기에 처음 본 자였지만 약재를 매입하였던 것이다. 사실 그가 가지고 온 해대는 극상품이었다.
 눈앞에 좋은 물건이 있으니 거래를 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판단에 매입을 한 것이다.
 자신이 큰 손해를 보았다는 것을 깨달은 홍예옥녀의 뇌리로 가장 먼저 스치고 지난 것이 바로 거지 소년이었다.
 아침에 그를 보았기에 오늘 이토록 재수가 없다며 이를 부득부득 갈면서 돌아오던 그녀는 여전히 자신의 집 앞에 큰 대자로 누워 잠을 자는 그를 보자 참아 두었던 노기가 치솟았기에 보자마자 달려왔던 것이다.
 퍽, 퍽! 퍼퍼퍽!···
 화가 솟은 홍예옥녀는 화려한 문양이 수놓아진 당혜(唐鞋)에 먼지가 묻는다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고연악의 둔부어림을 연신 걷어찼다.
 “아! 아야! 누, 누구야? 누군데 이래? 어? 넌···?”
 “야, 이 빌어먹을 자식아! 오늘 너 때문에 내가 얼마나 큰 손해를 보았는지 알아? 빨리 일어나. 그리고 어서 꺼져!”
 잠자다 두 번째 날벼락을 당한 고연악은 아무런 짓도 하지 않은 자신 때문에 손해를 보았다는 말이 언뜻 이해가 되지 않았는지라 잠시 입을 다문 채 그녀만 바라보고 있었다.
 “뭘, 그렇게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어? 빨리 가! 빨리 가란 말이야! 너 때문에 내가 얼마나 콘 손해를 입었는지 알아? 아버님께서 아시면 또 꾸중을 들을 거란 말이야!”
 사실 만금약왕은 자신의 금지옥엽인 홍예옥녀를 짐짓 혼내는 경우가 있었다. 바로 오늘처럼 실수를 하였을 때였다.
 세상을 주름 잡을 엄청난 부를 축적하였기에 무엇이든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었던 그는 여섯 명이나 되는 아름다운 부인을 두고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엄청난 부(富)를 축적하였기에 그는 적어도 위남현에서는 제왕과 다름이 없었다.
 그런 그에게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일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대를 이어줄 후사를 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홍예옥녀의 모친인 첫째부인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잉태조차 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 첫째부인마저 벌써 십 년이 훨씬 넘도록 잉태조차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은밀히 기방을 드나들면서 여러 기녀들과 동침하였으나 그녀들 역시 회임(懷妊)을 못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홍예옥녀는 모르고 있으나 만금약왕에게는 여섯 부인들 외에 무려 칠십여 명이나 되는 첩들이 있었다.
 그녀들은 그의 보살핌 속에서 어떻게든 회임을 하여 그의 애정을 독차지하려 혼신의 힘을 기울이고 있으나 별무소용이었다.
 경도(經度:월경)을 살펴 가임기간(可妊期間)이 되면 그에게 알려 같이 밤을 지새우나 회임을 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천하의 약재를 관장하는 그였기에 수하들로 하여금 용하다는 의원이란 의원은 거의 모두 불러들였지만 그들은 고개만 좌우로 흔들고 돌아갔다. 여인들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만금약왕 본인의 신체에 이상이 있기에 회임을 시킬 수 없다는 것이 그들의 공통 된 진단이었다.
 그렇기에 하나뿐인 여식에게 어쩌면 모든 것을 물려주어야 할 것이라는 생각에 그녀를 훈련시키는 중이었던 것이다.
 하여 홍예옥녀가 약재 감별에 실패할 때마다 눈물이 쏙 빠지도록 야단을 치곤 하였다.
 “야! 네가 손해 본 게 왜 나 때문이야? 내가 뭘 어쨌다고··· 세상을 살다보니 정말 별꼴을 다 당하는 군. 네가 어디 가서 무슨 짓을 했는지 몰라도 그건 나하고 아무런 상관도 없어.”
 고연악의 말에 홍예옥녀는 씩씩거리면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그가 잘못 한 것은 전혀 없다.
 있다면 아침에 자신의 눈에 뜨인 것뿐!
 그렇기에 더 이상 발작 할 수 없던 그녀는 내심 어떻게 하면 그를 골릴 수 있을지를 생각하느라 대답을 않고 있었다.
 “왜? 왜 그렇게 노려봐? 배가 고픈데 무슨 음식을 줄까 생각하는 중이냐? 이왕이면 많이 줘. 지금 배가 몹시 고프니까.”
 “흥! 내가 왜 너 같은 거지에게 음식을 줘? 나는 일하지 않는 사람은 음식을 먹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야.”
 “뭐라고? 일하지 않는 사람은 먹을 자격도 없다고···?”
 고연악의 말에 홍예옥녀는 지지 않겠다는 듯 고개를 바싹 세우며 입을 열었다.
 “그래!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 사람은 먹을 자격이 없지.”
 “그래? 그럼 넌 무슨 일을 하는데? 설마 너 같은 꼬마 계집애가 밥 먹을 만큼 일을 하지는 못할 텐데···”
 “뭐라고? 고마 계집애···? 흥! 돈이 있으니까 먹지. 너도 돈 있으면 돈주고 사먹어!”
 “뭐라고···? 야, 내가 돈이 있으면 너 같은 계집애에게 왜 음식을 달라고 했겠냐? 돈이 없으니까 그렇지.”
 고연악은 모든 것을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하기에 아무렇게나 말하는 홍예옥녀가 자신을 놀린다는 생각에 버럭 소리를 쳤다.
 “흥! 거봐! 돈은 없고, 일은 못하고··· 그러니까 네가 거지지!”
 “뭐! 거지? 너, 또 한번 거지라고 하면 가만 안 있는다!”
 “흥! 그럼 거지한테 거지라고 하지. 뭐라고 해? 정 배가 고프면 네가 들고 있는 거라도 팔아. 그러면 되잖아.”
 홍예옥녀는 말을 하던 도중 고연악이 들고 있는 것이 한 자루 검이라는 것을 눈치챘다.
 손잡이 끝에 달린 홍색과 황색이 섞인 수실을 보았던 것이다.
 “뭐? 이걸 팔아? 안 돼, 이게 없으면 동관까지 못 가!”
 “그래? 그럼 쫄쫄 굶으면서 동관까지 가봐! 너는 신외지물(身外之物)이라는 말도 몰라? 그깟 검이 무어 그리 중요하다고··· 그 검을 판다면 내가 특별히 사 주지.”
 “뭐라고? 이걸 너한테 팔라고? 내가 미쳤냐? 이게 어떤 검인데··· 흥! 팔아도 너한테는 안 판다.”
 “그래? 그럼 가봐! 이제 더 이상 여기서 얼쩡거리지 말고.”
 고연악과 설전을 벌이던 홍예옥녀는 이제 더 이상 상대하고 싶지 않다는 듯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이때 고연악은 내심 신외지물이라는 말을 곱씹고 있었다.
 그녀의 말대로 신외지물은 목숨을 부지하는 것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동관까지 가려면 아직도 까마득하게 남았는데 거기까지 굶으며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랬다가는 가는 도중 아사(餓死)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었다.
 재물이 얼마나 사람에게 중요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는 그런 순간이었다.
 ‘이런 제길! 바보같이 사람은 먹어야 산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다니··· 돈이 웬수군.’
 쪼르르륵! 쪼르르르르륵!
 생각하는 동안에도 뱃속에서는 음식들 넣어달라고 요란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이런! 빌어먹을··· 어떻게 하지···? 어제 그 아저씨가 이건 예사로운 것이 아니라고 하였으니 이걸 팔면 아마 은자 열 냥은 족히 될 거야. 그걸로 일단 배를 채우고 대장간에서 그냥 다른 싸구려를 하나 살까? 그래, 그래야겠다!’
 고연악은 자신이 왜 이제야 이런 생각을 하였는지 아둔하다 생각하였기에 머리를 긁적이며 돌아섰다.
 한편 문으로 들어서려던 홍예옥녀는 아무리 생각해도 약이 올랐다. 아침에 그를 보았기에 손해를 보았고, 그것으로도 부족하여 조금 후부터 부친에게 혼날 생각을 한 것이다. 그래서 자신에게 이런 악운을 만들어 준 고연악을 골려줄 방도를 생각하였다.
 “어머! 아씨, 쟤가 저걸 팔기는 팔려는 모양이네요.”
 “뭐, 뭐라고?···”
 상념에 잠겨 있던 홍예옥녀는 시비의 말에 고개를 돌려 멀어지는 고연악을 보았다. 그가 가는 방향이 바로 대장간 쪽이라는 것을 짐작한 그녀의 뇌리로 이 순간 번득이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자 즉각 입가에 교소를 베어 물었다.
 “호호! 좋아, 너는 지금부터 본원의 모든 사람들을 동원···”
 홍예옥녀의 말에 시비는 재미있겠다는 듯 미소를 머금고는 사라졌다. 그녀는 즉각 만약원의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위남현의 모든 곳을 방문하게 하였다.
 아마 오늘 위남현의 그 어느 누구도 고연악의 검을 매입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위남현 사람들은 모두 만약원과 적지 않은 인연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빌어먹을··· 분명 예사 검이 아니라고 했는데··· 왜들 안 사려는 거야? 제기랄! 어디에 가서 이걸 팔지?···”
 두 시진 가까이 위남현의 주루나 객잔, 심지어는 기원이나 전장까지 돌아다닌 그는 그 어느 누구도 자신의 검을 사겠다는 사람이 없자 투덜거렸다.
 사람들마다 벽혈검을 뽑아 보고는 처음 보는 좋은 검이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누구도 사겠다는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만약원에서 이 검이 탐났기에 그것을 사지 말라고 한 것으로 오인한 것이다.
 “아까 그 계집애라면 혹시 살까?”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는 동안 이제 이곳을 떠나 동관 쪽으로 향하면 적어도 백 리 이내에는 인가가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아직 과실이 열릴 계절이 아니기에 만일 이 상태로 길을 떠났다가는 꼼짝없이 굶어 죽는다고 하였다.
 위기감을 느낀 고연악은 어떻게든 검을 팔려하였으나 아무 런 소용이 없자 최후의 방법으로 만약원으로 향하였다.
 약재를 취급하는 곳이기는 하나 호위무사들이 적지 않게 있다는 소문을 들은 것이다.
 무림인이라면 누구나 좋은 병장기를 지니기를 원한다는 것을 알기에 만약원을 찾은 고연악은 모든 호위무사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것을 보고만 있어야 하였다.
 그들은 벽혈검이 몹시도 탐이 났으나 만약원의 장중주가 찍어 놓은 것을 살만한 배짱이 없었던 것이다. 만일 그랬다가는 밥줄이 끊길 판이기에 입맛만 다신 것이다.
 “야, 너 아직도 안 갔어? 여긴 대체 왜 들어 온 거야?”
 아침에 보았던 시비는 짐짓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나가라는 손짓을 하였다. 하지만 여기에서 마저 검을 팔지 못하면 꼼짝없이 굶어 죽게 생긴 그는 나갈 수가 없었다.
 이제 위남현에서 벽혈검을 보지 못한 사람은 단 두 명뿐이었다. 하나는 만약원의 원주인 만금약왕이었고, 다른 하나는 바로 홍예옥녀였다.
 “저, 원주님을 뵙게 해 주실 수는 없나요?”
 “원주님을? 너 같은 꼬마가···? 대체 무슨 이유로 원주를 뵈려하는 것이냐?”
 “저, 이 검을 팔려고 하는데요.”
 초조한 심정이 된 고연악이 느닷없이 벽혈검을 뽑자 서늘한 예기가 밀려드는 것을 느낀 시비는 뒤로 물러서며 입을 열었다.
 “어, 어디에서 검을 함부로 뽑는 것이냐? 당장 그 겁을 집어 넣지 못해?”
 “아, 알았어요. 이것을 팔려고 하니 원주님을 뵙게 해 주세요.”
 “뭐라고? 이, 이런 미친 놈! 네놈은 그 분이 얼마나 바쁘신 분인 줄 모른단 말이냐? 원주님은 한가롭게 검이나 구경하고 계실 시간이 없다.”
 “그, 그럼 아까 그 쬐그만 계집애라도···”
 “이런 경을 칠···! 어디서 아씨께 함부로 그런 호칭을 쓰는 게냐? 그러고 보니 네놈은 그 검을 팔 생각이 없는 모양이로구나?”
 “아, 아닙니다. 아까 그 작은 소저라도 만나게 해 주십시오.”
 고연악의 다소 고분고분해진 말투를 들은 시비는 내심 모든 것이 뜻대로 되어가자 기분이 좋았다.
 이제 그는 홍예옥녀에게 안내될 것이고, 검은 헐값에 팔리게 될 것이다. 그러면 벌써 몇 시진 째 짜증만 내는 그녀의 기분이 풀릴 것이라 생각하였지만 시비는 짐짓 싸늘한 음성을 토했다.
 “흥! 알았다. 그럼 따라와라! 대신 아씨를 만나거든 지금처럼 고분고분한 말투를 써야 한다. 알겠냐?”
 “알았어요.”
 시비의 뒤를 따르는 고연악의 입은 댓 발은 튀어 나와 있었다.
 자신과 같은 연배인 계집애이고, 악다구니를 퍼 분 그녀에게 고분고분하게 대해야 한다는 것이 못내 분했던 것이다.
 그러나 어쩌랴!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 말이 있듯 너무도 허기졌기에 모든 것이 음식으로 보이는 이 마당에 체면을 따지다 굶어 죽을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니던가!
 ‘좋아! 오늘은 성질을 죽여주지··· 나중에 반드시 돈을 벌어 오늘의 일을 되갚아 주겠어!’
 
 온갖 진귀한 기물들로 가득한 화려한 정실의 푹신해 보이는 태사의에 거만한 자세로 앉아 있던 홍예옥녀는 고연악이 건네는 검을 받아 들며 입을 열었다.
 “호호! 네가 웬일이니? 나한테는 검을 안 판다더니··· 어머! 이건 꽤 괜찮아 보이는 데? 너, 혹시 어디에서 훔친 건 아니야?”
 비아냥거리는 말투로 말을 하며 검갑에서 검을 뽑은 홍예옥녀는 시퍼런 날과 서늘한 예기가 느껴지자 잠시 말을 멈췄다.
 ‘뭐? 훔쳐? 이런! 빌어먹을 계집애 같으니··· 오늘은 내가 아쉬우니 참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오늘의 수모를 톡톡히 갚아주지···’
 이곳 만약원은 분명 무림과는 상관없다. 그러나 드넓은 이곳에는 많은 무림인들이 있었다.
 무림인들이라 하여 질병을 전혀 앓지 말라는 법은 없다. 또한 그들의 혈족 모두가 무림인이지도 않다. 그렇기에 무림의 대소방파 중 많은 문파들이 만약원의 은혜를 입었다.
 제 아무리 고절한 의술을 지닌 의원이라 할지라도 약재가 없으면 질병을 다스리기 어려운 법이다.
 만일 그 약재 중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 없는 것이거나, 정말 구하기 힘든 것이 포함되어 있다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만약원은 무림의 제 문파에서 약재가 필요하다 할 때마다 정사마(正邪魔)를 가리지 않고 그들에게 필요한 약재를 공급하여 주었다. 무림의 문파들은 당연히 제 값을 치렀지만 그들은 만약원에 감사하는 마음을 지닐 수밖에 없다.
 만일 만약원에서 그들에게 나쁜 마음을 먹고 그들이 필요로 하는 약재 공급을 안 할 작정이었다면, 아마도 그들은 그 어느 곳에서도 필요한 약재를 공급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적어도 약재 분야에서만큼은 만약원의 존재가 천하제일이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만약원에서 호위무사를 모집할 때 무림의 대소방파에서 아낌없이 제자들을 보냈던 것이다.
 어릴 때부터 엄중한 호위 속에서 성장한 홍예옥녀는 사실 잡다한 무공을 섭렵하는 중이었다. 그렇기에 그녀의 일신에는 제 문파들의 잡다한 무공이 있었다.
 그 가운데 특히 소림사의 달마삼검의 오묘한 무리에 심취해 있던 그녀인지라 단번에 벽혈검이 결코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알아본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타고난 장사꾼이었다.
 “호호! 좋아, 이 검을 사기로 하지.”
 “그래? 사 준다니 고맙군. 하지만 그것을 팔기 전에 이거 하나만은 분명히 해두고 싶어.”
 “호호! 그게 뭐지?”
 내심 마음에 드는 검을 얻게 되었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진 홍예옥녀는 얼굴 가득히 미소를 머금었다. 그 모습은 마치 아침 햇살에 방긋 피어오르는 한 떨기 부용처럼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나는 지금 허기 때문에 그 검을 팔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내가 되 살 수 있도록 해줘! 안 그러면 굶어 죽어도 안 팔아!”
 “뭐라고? 나중에 이걸 다시 사겠다고?”
 홍예옥녀는 모처럼 마음에 드는 검을 얻었나 싶었으나 언젠가는 다시 넘겨주어야 한다는 그의 말에 자신이 방금 미소를 머금은 것이 잘못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제기랄! 조금만 참았으면 되는데···’
 “그래! 내게 그 검은 너무도 중요한 것이야. 그러니 나중에 내가 원할 때 다시 판다는 문서를 만들어 줘!”
 “호호호! 그래···? 좋아! 하지만 이것 하나만은 알아 둬! 본원은 전당포가 아니야. 네가 혹시 알지 모르나 여기는 장사를 하는 곳이야. 그러니 우리가 네게 구입한 그 값에 다시 팔 수는 없어.”
 고연악은 영악스런 홍예옥녀의 얼굴을 힐끗 바라보고는 힘없이 입을 열었다. 몇 끼를 때울 음식값 때문에 검을 파는 것이 못내 억울해 호기를 부렸으나 나중에 다시 살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기 때문이다.
 “좋아! 그렇게 할게. 먼저 얼마를 줄 건지 말해봐!”
 “호호호! 어디 보자··· 으음! 은자로 이십 냥 줄게.”
 “으, 은자 이십 냥···?”
 고연악은 은자 이십 냥이라는 말에 잠시 입을 다물 수 없었다.
 태어난 이래 지금까지 단 한번도 은자라는 것을 만져 보지도 못한 그로서는 은자 이십 냥은 매우 큰 금액이었다.
 그렇기에 잠시 그것으로 몇 끼의 식사를 때울 수 있을지 계산하는 중이었던 것이다.
 “왜? 적어···? 좋아! 그렇다면 특별히 은자 삼십 냥을 주지. 삼십 냥 이상은 단 한푼도 더 줄 수 없으니까 팔 건지 말 건지 말해봐!”
 ‘사, 삼십 냥? 소면 한 그릇에 닷 푼이니까 삼십 냥이라면··· 우와! 대, 대단한 금액이다.’
 속으로 계산을 마치 고연악은 두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검은 팔기로 하지. 자, 이제부터는 나중에 내가 살 때 얼마를 내야하는지를 이야기하기로 해.”
 “호호호! 좋아. 조금 전에 말했듯 산 금액에 그냥 팔면 분명 우리가 손해야! 그 돈을 다른 사람에게 빌려주면 이자를 받을 수 있으니까. 맞지?”
 “그래, 맞아!”
 고연악을 할 말이 없었다. 그녀의 말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호호호! 좋아. 자, 지금부터 잘 들어.”
 홍예옥녀는 고연악을 놀릴 절호의 기회가 온 것이 기분 좋은 듯 눈빛을 빛내며 입술에 침을 묻혔다.
 “검을 되찾으려면 네가 판 금액인 삼십 냥에 월 일 할의 이자를 내야 해.”
 “뭐? 일, 일 할? 무슨 이자가 그렇게 비싸? 고리대금업자들도 그렇게는 안 받잖아.”
 고연악의 퉁명스런 말에 홍예옥녀는 자신이 알 바 아니라는 듯 냉정한 눈길로 한동안 그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흥! 싫으면 말아. 나는 이따위 검 필요 없으니까. 순전히 네가 불쌍해 보여서 적선하는 셈치고 검을 사려고 했는데 네가 싫다면 할 수 없지. 자, 도로 가져가!”
 홍예옥녀는 고연악이 어느 정도 절박한 지를 짐작하고 있는지라 배짱을 퉁겼다. 그런 그녀의 의도는 정확히 적중하였다.
 ‘이런! 빌어먹을 계집애··· 약점을 쥐니 눈에 뵈는 게 없는 모양이군. 좋아, 오늘은 내가 참는다. 하지만··· 하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이 수모를 갚는다.’
 고연악은 배에서 연신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남과 동시에 창자가 서로 달라붙어 소화시키는지 속이 쓰리자 얼른 입을 열었다.
 “좋아, 그렇게 할게!”
 ‘호호! 네 녀석은 이제 내 밥이야. 흥! 어디 두고 보자.’
 모든 것이 제 뜻대로 진행되자 홍예옥녀는 빙글빙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호호호! 좋아, 그럼 거래는 성립되었어. 잠시만 기다려. 계약서를 만들어 주지.”
 말을 마친 그녀는 탁자 위의 종이에 수려한 필체로 글을 쓰며 입을 열었다.
 “네 이름은 뭐지? 계약서에는 반드시 이름이 들어가야 해!”
 “내 이름? 내 이름은 고연악이야! 높을 고, 넘칠 연, 큰산 악.”
 “호호! 이름만은 정말 그럴 듯 하군. 좋아, 조금만 기다려.”
 
 <계약서
 매도인:고연악(高衍岳)
 매수인:홍예옥녀(虹霓玉女) 남부용(南芙蓉)
 상기 매도인과 매수인은 오늘 벽혈검을 거래하면서 다음과 같은 사항에 합의한다.
 ― 벽혈검의 매도 가격은 은자 삼십 냥으로 한다. 매수인은 벽혈검을 매수함과 동시에 현금으로 지급한다.
 ― 매도인은 언제고 값을 치른 후 검을 다시 매입할 수 있다. 이 기간 동안 매도인은 매도가에 월 일 할의 이자를 가산하여 지급하기로 한다.
 ― 이자는 복리(複利)로 가산된다.
 영락 십일 년 오 월 십일 일>
 
 “자! 여기에 네 이름을 적어.”
 홍예옥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계약서를 고연악의 눈앞으로 디밀었다.
 “아, 아니? 복리로 한다는 건 합의한 적 없잖아?”
 “호오! 글자도 읽을 줄 알아? 나는 네가 까막눈인 줄 알았는데··· 어쨌든 글을 읽을 줄 안다니 더욱 잘 되었네. 자, 이 계약서의 내용에 합의한다면 수결을 하고 은자를 받아가. 만일 합의 못한다면 지금 당장 검을 가지고 여기서 나가!”
 “이, 이런 나쁜 계집애!”
 “뭐? 계집애?··· 이 계약서에 합의 못한다면 너하고 더 할말 없어. 그러니 빨리 결정해. 그리고 나한테 계집애라고 한 것도 취소하고···”
 말을 마친 홍예옥녀는 짐짓 계집애라는 말 때문에 화가 났다는 듯 벌떡 일어나며 벽혈검을 고연악에게 내밀었다.
 ‘나쁜 계집애··· 두고 봐! 언젠가는 네 눈에서 눈물이 흐르도록 해 주지··· 으드드드득!’
 자신의 약점을 잡고 괴롭히는 그녀의 처사에 고연악은 내심 이를 갈면서도 계약서에 수결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너무도 배가 고파 금방 죽을 것 같았고, 막 세상에 빙글빙글 돌기 시작하였기 때문이었다.
 “좋아! 거래를 하지. 하지만 여기에 추가할 것이 있어.”
 “추가? 그게 뭐지?”
 “만일 내가 검을 찾으러 왔는데 검이 없거나 흠이 있다면 어떻게 할건지 그게 빠져 있어. 그걸 써넣어.”
 “호호! 이제 보니 너 머리가 제법 도는구나. 그런걸 다 생각해 내다니··· 좋아! 어떻게 써 줄까?”
 홍예옥녀는 자신도 생각 못한 것을 생각해 요구하는 고연악이 결코 멍청한 아이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며 그의 의사를 물었다. 특별히 생각나는 것이 없기 때문이었다.
 “좋아! 이렇게 적어. 만일 검을 잃어버렸을 경우에는 네가 일 년 동안 내 종이 된다고 써. 그리고, 검에 흠이 생겼을 경우에는 벽혈검과 상응하는 검 백 자루를 준다고 써.”
 “뭐라고? 이, 이런 미친 놈···! 어디다 감히···?”
 홍예옥녀는 너무도 어처구니없는 요구에 잠시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자신이 누구이던가!
 만약원의 금지옥엽인 자신을 감히 종으로 부린다는 말을 쓰라는 말에 노화가 치솟아 버럭 성질을 부리려던 그녀는 고연악의 눈빛이 이글이글거리는 것을 보고 잠시 주춤거렸다.
 자신이 검을 사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직감한 것이다.
 만일 고연악이 벽혈검을 전에 만났던 섬전검에게 팔겠다고 하였다면 아마도 그는 은자 이천 냥쯤은 우습게 내 놓았을 것이다. 어쩌면 삼천 냥도 지불할지 모르는 일이었다.
 벽혈검은 결코 예사로운 병기가 아니었던 것이다.
 남몰래 무공을 익힌 홍예옥녀는 비록 섬전검만큼은 아니나 검을 볼 줄 아는 안목이 있었다. 그렇기에 벽혈검의 가격이 적어도 은자 오백 냥은 족히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것을 은자 삼십 냥에 구입한다면 얼마나 이익이겠는가!
 그리고 그것을 만일 누군가에게 대여를 한다면 일년 동안 적어도 은자 백 냥은 족히 받아낼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일 년 후 고연악이 검을 찾겠다고 온다면 그가 지불하여야할 은자는 이자를 포함하여 구십사 냥하고 한 푼을 가져와야 한다. 애초에 준 은자에 두 배 반 가량의 이자가 붙는 것이다.
 만일 이 년이 걸린다면 원금과 이자를 합쳐 삼백이십사 냥하고도 팔 푼을 가져와야 한다. 원금에 거의 열 배에 달하는 이자가 붙는 것이다.
 세월이 더 흐르면 흐를수록 이자는 엄청나게 불어나게 된다. 그것이 복리의 무서움이 아니겠는가!
 보아하니 고연악은 집도 절도 없는 모양이었다. 게다가 나이도 어려 아무도 그에게 일을 시키려 하지 않을 것이다.
 설사 일을 시킨다 하더라도 그가 받을 수 있는 품삯은 얼마 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을 가지고 먹고살며 은자를 모아 검을 찾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녀는 머릿속으로 복잡한 생각을 한 후 빙긋 미소를 지었다.
 “좋아! 네 뜻대로 해 주지.”
 홍예옥녀는 두 말 없이 고연악이 원하는 대로 기입한 후 수결을 하고 은자 삼십 냥을 건넸다.
 “자, 받아! 은자 삼십 냥. 이제 거래는 성사 된 거야.”
 “좋아! 거래는 성사되었어. 검을 잘 보관해. 반드시 찾으러 올 테니까. 알았지?”
 “호호! 걱정 마. 돈이나 많이 벌어. 그래야 검을 찾지···”
 고연악은 평생 자신이 들고 다닐 것이라 생각하였던 애병을 팔아야 한다는 현실에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마지막으로 벽혈검을 바라보았다.
 “호호호! 지금부터 이것은 내 검이야. 그러니 검을 보려면 한 번에 은자 한 냥을 내!”
 홍예옥녀는 검을 얼른 뒤로 감추었다.
 “이런 지독한···! 좋아, 잊지마. 내 이름은 고연악이야! 반드시 검을 찾으러 올 거야.”
 “호호호! 언제든지··· 자, 이제 거래 끝이니까 이만 가!”
 만약원을 나선 고연악은 허탈한 마음이 들었지만 우선 급한 것은 주린 창자에 음식을 넣는 일이라는 것을 잊지 않았기에 가까운 주청으로 들어가 가장 싼 소면을 시켰다.
 은자가 살아가는데 있어 얼마나 중요한 지를 깨달은 그는 소면 한 가락이라도 흘릴까 조심스레 먹었고, 국물까지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마셔 버렸다.
 “꺼어억―! 이제야 살 것 같군.”
 텅 비어 있던 위장 속이 가득 차자 세상 모두를 얻은 것만 같은 기분에 잠시 벽혈검을 팔았다는 것을 잊고 있던 그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곁을 더듬었다. 벽혈검을 잡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이미 팔아 버린 그것이 있을 리 만무한 일!
 “이런 젠장!··· 에이, 일단 호신용 검을 한 자루 사자!”
 주청을 나선 그는 은자 한 냥을 주고 평범한 검 한 자루를 구입하였다. 그것이 가장 싼 것이었다.
 예전에 누군가가 쓰던 것인 듯한 그것은 여기저기 녹이 슬어 있었다. 또한 군데군데 이빨까지 빠져 있었다.
 한 냥을 더 주면 그런 대로 깨끗한 검을 살 수 있었지만 이미 재물이 어떤 것인지를 톡톡히 체감한 그는 자신이 호사를 부릴 처지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기에 그것을 구입한 것이다.
 아마도 그것은 그 대장간에서 처치 곤란한 흉물이었던지 대장장이는 녹을 떨궈 주었고 날까지 세워 주었다. 그러자 들짐승들을 상대할 만해졌다.
 “좋아! 일단 동관으로 가자!”
 뱃속이 든든해지고 비록 검갑도 없는 보잘것없는 검이지만 그것을 쥐자 다시 기가 살아난 그는 가는 동안 먹을 건량을 구입한 후 즉각 위남현을 빠져나갔다.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긴 결과 고연악은 십삼일만에 동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우와···! 여기가 바로 동관이구나.”
 성곽의 돌들이 아무렇게나 허물어져 내려 마치 작은 동산처럼 보이는 곳에 당도한 고연악은 이곳이 바로 동관이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좋아! 가장 동쪽이라고 했겠다? 그런데 동쪽이 어디지?”
 그가 도착한 시간은 이미 해가 져서 사위가 어슴프레한 어둠 속으로 막 잠겨들기 시작할 무렵이었기에 방향 식별이 곤란한 고연악은 황급히 주변을 살폈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딱 한번 굶주린 늑대인지 이리인지 하는 짐승과 조우하였던 그는 그것을 물리치기 위하여 수 없이 검을 휘두른바 있었다. 그때는 거대한 나무 아래 움푹 파인 다소 아늑해 보이는 곳에 잠자리를 잡고 있을 때였다.
 섬전검에게 배운 태산압정과 횡소천군, 팔방풍우와 직도황룡, 그리고 화룡점정 초식을 마구 섞어 시전하던 중 운 좋게도 검극이 놈의 가죽을 뚫고 들어간 적이 있었다. 그러자 놈은 즉각 비명을 지르고 사라졌다.
 그때 그는 나무 아래가 결코 안전한 곳이 못 된다는 교훈을 얻었기에 올라가 잠을 잘만한 나무를 찾는 것이었다. 그가 생각하는 나무는 결코 쉽게 찾을 수 있는 나무가 아니었다.
 첫째, 자신이 올라가도 끄덕 없을 나무여야 하였다.
 둘째, 올라가서 잠을 잘만한 굵은 가지가 있어야 하였다.
 셋째, 잠을 자다 밑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주변과 밑에 다른 굵은 가지들이 있어야 하였다.
 넷째, 혹시 짐승이 나무를 기어오르더라도 다른 곳으로 이동할 수 있으며 검을 휘두를 수 있어야 하였다.
 다섯째, 짐승들이 다가오는지를 살필 수 있으며 뛰어 오르더라도 닿을 수 없을 정도로 높아야 하였다.
 이런 모든 조건을 충족시키는 나무를 찾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기에 거의 반 시진 가까이를 소진한 후에야 간신히 잠자리를 마련할 수 있었다.
 수백 년 동안 인적이 끊겼던 동관에는 제법 울창한 숲이 있었다. 그리고 근처엔 고연악이 우려하던 들짐승이 있는 모양이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늑대가 울부짖는 소리를 들은 것이다.
 밤새 든 눈으로 불안에 떨던 그는 아침 햇살이 온 누리를 비치기 시작하는 새벽 무렵에야 간신히 눈을 붙일 수 있었다. 그리고 그가 깨어난 것은 해가 중천에 떠 있을 무렵이었다.
 나무에서 내려 온 그는 해가 떴던 동쪽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하였다. 동관의 동쪽 끝만 찾으면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였던 그의 생각은 완전히 빗나갔다.
 오래 전 성곽이 무너져 내리면서 동쪽 끝이 어디인지 모호해졌던 것이다. 서안에 있던 과거 당 현종이 혁혁한 전공을 세운 고선지에게 하사한 장원인 영안방에서 본 서책의 내용을 유추해보면 그의 유해가 묻힌 곳은 분명 성곽의 안쪽이었다.
 그런데 성곽이 무너지면서 어디가 안이고 어디가 밖이었는지를 살피기 어려웠던 것이다.
 하루 종일 굵은 나뭇가지로 이곳저곳을 뒤적이던 그는 준비해 온 건량으로 배를 채운 후 부지런히 돌아다니며 살폈다.
 또 다시 밤이 되자 나무 위에서 잠을 청하던 그는 어제와는 반대로 바뀐 바람 때문에 찾아 온 늑대 두 마리 때문에 또 다시 뜬눈으로 밤을 지새워야 하였다.
 새벽이 되어서야 간신히 눈을 붙인 그는 어제와 마찬가지로 여기저기를 쑤석이며 돌아 다녔지만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성과가 있었다면 과거 동관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었다는 것을 증명할 부서진 병장기들을 여럿 발견하였다는 것뿐이었다.
 “제기랄! 언제 여길 다 뒤져보지? 얼마나 깊이 묻었는지도 알 수 없으니··· 그냥 갈까? 아니야! 사내 대장부가 한번 마음먹은 일인데··· 아직 건량이 남아 있으니 삼 일은 더 뒤져보자. 그래도 못 찾는다면 할 수 없지··· 다음에 다시 오는 수밖에···”
 마음을 다잡은 고연악은 부지런히 흙더미를 파헤치는 한편 혹시 달려들지 모르는 늑대를 경계하여야 하였다.
 그러는 동안 그의 뇌리로는 이곳에 오기 전 보았던 고려곡의 전경이 떠오르고 있었다.
 
 처음 고려곡이 있다는 곳에 도착한 그는 깜짝 놀랐다. 삐죽삐죽한 기암괴석들이 즐비하였으며 너무도 험준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온통 바위로 이루어졌기에 나무 한 그루 없었다.
 “해동 땅이 이처럼 거칠고 황량하단 말인가?”
 오 월의 따가운 햇살에 그대로 노출 된 채 주위를 둘러본 고연악은 풀 한 포기 없는 황량한 곳을 둘러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람이 살기에는 너무도 적합하지 않은 곳이던 것이다.
 “흐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런 곳에서는 사람이 살아갈 수 없는데··· 여기가 아닌가? 그럼 대체 어디가 고려곡이지?”
 그의 말대로 온통 바위뿐인 계곡에는 아무런 인적의 흔적이 없었다. 편히 앉아 쉬거나 잠을 잘 수 있을 정도로 편평한 곳도 없었다. 이런 곳이라면 제 아무리 생존능력이 강한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도저히 살 수 있을만한 곳이 아니었다.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이곳은 짐승들조차 살아갈 수 없을 그야말로 척박하기 이를 데 없는 곳이었다.
 한가지 이상한 점이 있다면 그것은 바위들의 모양이었다.
 오랜 세월 동안 침식을 당한 바위들은 대부분 끝이 둥글둥글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곳의 바위는 마치 누군가가 도끼로 쪼개어 놓은 듯한 모양들뿐이었던 것이다.
 한참을 배회하던 고연악은 계곡의 끝에 펼쳐진 울창한 초지를 발견하고는 한 달음에 그곳까지 다가갔다.
 “우와···! 이 험난한 협곡 뒤에 이런 곳이 있었다니···”
 협곡을 지나면 야트막한 동산이 이어지는 가운데 울창한 수림이 우거져 있고, 한 줄기 계류가 흘러내리는 곳이 있었다.
 마치 황량한 사막 한 가운데 녹주(綠洲:오아시스) 같았다.
 수림으로 둘러싸여 아늑한 느낌을 주는 곳에는 중원에서는 전혀 볼 수 없는 건축 양식으로 지어진 전각들이 있었다.
 전각의 주위에는 지푸라기로 엮어 만든 지붕을 얹은 자그마한 집들이 여러 채 있었다.
 “와아···! 정말 아기자기하구나. 이런 곳에서 살면 무지하게 오래 살겠네··· 그런데 아무도 없나?”
 이미 오래 전에 인적이 끊긴 듯 괴괴한 적막 속에 잠겨 있는 자그마한 촌락을 한 바퀴 돌아본 고연악은 아무도 살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즉각 길을 떠났다.
 의식주만 해결 될 수 있다면 텅 비어 버린 이곳에서 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그것은 고선지의 유해를 해동 땅에 안치한 후의 일이어야 하였다.
 “후후! 다음에 어른이 되면 여기에 와서 살아야지···”
 길을 나선 그는 고려곡의 사방이 험준한 산악지대에 둘러싸여 있으며 입구라고는 들어갔던 곳뿐이라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험준한 산악은 세찬 비바람을 막아줄 것이다. 이런 곳은 일단 농사가 잘 지어진다. 그렇다면 일단 먹는 것은 해결되는 셈이다.
 아직 어린 고연악은 모르고 있었으나 고려곡은 완벽한 장풍득수(藏風得水)가 이루어진 길지(吉地) 중의 길지였다.
 오래 전 고려곡에 살았던 고구려인들은 하늘과 땅과 사람을 한 몸으로 생각하였기에 결함이 있으면 조산(造山)하여 보호하고, 지나치면 유화하는 가산(假山)을 조성하였다.
 하여 지형의 흉상을 막거나 수구(水口)를 막기 위하여 동수비보(洞數裨補)를 하였고, 앞산에 화기가 넘치면 연못이나 해태상(海苔像)을을 설치하는 등 화기비보(火氣裨補)를 하였다.
 또한 국가왕업의 흥망은 지덕의 성쇠가 좌우한다고 생각하여 절, 불상, 탑 등을 조성하는 산천비보(山川裨補)를 하였으며, 지명을 조화롭게 구성하기 위하여 지명비보(地名裨補)를 하였다.
 오래 전 고려곡에 살던 고구려인들은 자신들의 조상 전래의 방식대로 여러 비보를 하였고, 그 결과 지금과 같은 모습을 하게 된 것이다. 사실 처음 고구려인들이 이곳에 터를 잡았을 때 이곳은 지금과 같은 모습이 아니었다.
 야트막한 구릉들이 이어져 마치 고구려 땅에 온 듯한 착각을 주었기에 이곳을 택하였지만 황량하기는 고연악이 둘러본 험지나 다를 바 없었던 것이다.
 고구려인들이 고려곡을 버린 것은 오래 전의 일이었다.
 당이 멸망하고 송이 들어섰고, 후에 다시 원이 중원을 차지하면서 감시 소홀해지자 고려곡을 떠나 해동 땅으로 집단 이주를 하였던 것이다.
 이곳이 제 아무리 잘 가꾸어진 곳이라고는 하나 원래의 고향인 해동 땅만은 못하다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 후 아무도 이곳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이 없었다. 이곳의 존재가 잊혀진 것이다.
 하긴 짐승도 살 수 없을 정도로 황량한 계곡 안에 이렇듯 기름진 옥토가 있으리라고 누가 생각하겠는가!
 “후후후! 나중에 장가를 가면 꼭 거기에 가서 살아야지···”
 땅을 파던 고연악은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내며 싱긋 미소를 지었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신당서와 구당서, 그리고 자치통감에서 읽었던 내용들을 상기한 그에게 있어 고구려인 장수 고선지는 신과 같은 존재로 각인되어 있었다.
 공교롭게도 자신과 성이 같기에 혹시 자신이 그의 후손은 아닐까 하는 상념에 젖어보기도 하였다. 부모조차 모르는 그로서는 그게 사실이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칠일 째 폐허가 된 동관의 이곳저곳을 파헤치던 중 고연악은 문득 딱딱한 무엇인가를 느끼고 이맛살을 찌푸렸다.
 “에이! 또 돌멩이인가?··· 어쭈! 이번 것은 제법 큰데? 좋아,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두고 보자!”
 흙더미 속에 묻혀 있는 딱딱한 것은 예상보다도 훨씬 컸다.
 지금까지 땅 속에 묻혀 있던 돌덩이들은 대부분 사방 두 자를 넘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 것은 길이가 거의 여덟 자는 족히 되는 듯 하였다. 그리고 폭은 석 자 가량 되는 듯 하였다.
 “혹시 이게 고선지 장군의 유해가 담긴 관일지도 몰라. 그렇지 않고서는 이럴 수가 없지. 좋아! 힘을 내자. 끄응차···!”
 자신이 목적하였던 물건이라고 생각이 들자 어디에서 그런 힘이 솟았는지 땅은 급속도로 파헤쳐졌다. 그리고 그것이 온전히 드러나는 데에는 꼬박 이틀이 걸렸다.
 그의 예상대로 그것은 거대한 석관이었다.
 이토록 시간이 오래 걸린 것은 석관 위에 적지 않은 바위들이 여러 개 있었기 때문이었다.
 “후와! 후와!··· 이제 되었다. 이게 그거야 할 텐데···”
 거친 숨을 몰아쉬며 이마의 땀을 닦은 고연악은 잠시 숨을 고르고는 즉각 관의 뚜껑을 열었다.
 무게가 대단한 관 뚜껑을 여는데 걸린 시간 역시 반나절은 족히 걸렸다. 너무도 무거웠기에 굵은 나뭇가지를 밀어 넣고 여러 차례 움직여야 했었다.
 “이, 이런 비어 있잖아?”
 관 속이 텅 비어 있다는 것을 확인한 고연악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제기랄! 그럼 이게 아니었단 말인가? 휴우! 그럼 대체 어디에 묻혀 있는 거야? 이제 먹은 것도 별로 없는데···”
 지니고 왔던 건량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 그는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이때는 서녘으로 뉘엿뉘엿 해가 지는 그런 때였다.
 크르르르르릉―!
 “아앗! 느, 늑대닷! 어쩌지? 여기에서 나무까지는 꽤 먼데···”
 관 속에 담긴 것이 무엇인지 확인하는 것에 몰두하던 그는 시간이 이렇게 된 것을 미처 모르고 있었다. 어느새 다가왔는지 두 마리 늑대는 양쪽에서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시뻘건 혈안이 된 그것들은 먹이 감이 도주할 퇴로가 없다는 것을 알기라도 하는 듯 침을 질질 흘리면서 다가서고 있었다.
 “이런! 제길··· 할 수 없군.”
 고연악은 도주할 길이 없다는 생각이 들자 즉각 검을 뽑아 들었다. 그런 그의 눈에는 두려움과 초조함, 그리고 자신 없음이 배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두 마리 늑대는 거의 송아지만 한 놈들이었던 것이다. 그들에 비하면 석 자 반밖에 안 되는 검은 초라하기 이를 데 없어 보였다.
 “좋아!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다! 누가 이기나 두고 보자. 짜식들! 감히 날 뭘로 보고··· 덤벼! 덤비란 말이야!”
 마음을 다잡은 고연악은 두 손으로 검을 쥔 채 다가서는 늑대들을 노려보았다. 늑대들은 그런 그가 가소롭다는 듯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입맛을 다시며 다가섰다.
 크르르르릉―! 끄아아아아앙―!
 고연악과 대략 일 장 정도의 거리를 남겨 두었던 두 마리 늑대는 거의 동시에 도약하며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낸 채 쏜살 같이 그의 동체를 덮쳐갔다.
 “챠앗! 죽어랏 횡소천군! 팔방풍우!”
 그러자 즉각 고연악의 검이 사방을 빗살처럼 베어갔다.
 아직 어린 소년이기는 하나 지금까지 길을 오는 동안 적지 않게 연습을 하였기에 제법 날카로웠다. 그러나 그의 검이 이토록 빠른 것은 현재 일생일대의 위기에 봉착해 있다는 것을 자각하였기에 본능적으로 움직이기 때문이었다.
 다가서던 늑대들은 허공에서 교묘히 몸을 틀어 검의 영향권 밖으로 물러났다가 재차 도약을 하였다.
 “이런 나쁜! 죽엇! 태산압정! 화룡점정!”
 재빨리 양쪽에서 다가오는 늑대들에게 검을 휘두르자 그것들은 검에 맞으면 안 된다는 것은 아는지 즉각 곁으로 피했다.
 고연악과 두 마리 늑대의 공방전은 날이 저물고 달이 뜰 때까지 계속되고 있었다. 한 가지 다행인 점은 월광이 제법 교교해 그가 사물을 식별하는데 어려움이 없다는 것이다.
 만일 온통 어둠뿐인 삭망이었다면 당해도 벌써 당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고연악이 처음과 같이 멀쩡한 상태는 아니었다.
 수 차례나 날카로운 늑대의 발톱에 할큄을 당했기에 의복이 갈기갈기 찢겨져 있었고, 당연히 전신 여기 저기에 적지 않은 상처가 생겨 있었다.
 그곳으로부터 선혈이 조금씩 배어 나오고 있었다. 묶어 두었던 두건도 어디론가 사라져 온통 봉두난발이 되어 있었다.
 또한 늑대들이 다가서려 할 때마다 결코 가볍지 않은 검을 휘둘렀기에 숨이 턱까지 차 오르고 있었다.
 “헉헉···! 빌어먹을 놈들! 덤벼! 덤비란 말이야! 오늘 네놈들을 죽여 버리고야 말겠어! 헉헉···!”
 어느새 늑대들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졌는지 고연악의 두 눈에는 핏발이 잔뜩 서 있었다. 처음 늑대들이 다가설 때에는 그놈들 보다 먼저 밀려드는 노릿한 냄새 때문에 정신이 아찔할 지경이었으나 이제는 그것마저 무감각해져 있었다.
 그가 갑자기 용감해 진 것이 아니라 너무도 지치고 화가 나 있는 상황인지라 이렇게 된 것이다.
 늑대들과의 혈전을 벌이는 동안 관 속으로 돌덩이며 굵은 나무토막들이 여러 개 쏟아져 들어가 있었다.
 “덤벼! 이 빌어먹을 자식들아! 빨리 안 덤벼? 죽여버리겠어!”
 끄르르르릉―! 크와와아아앙―!
 늑대들 역시 눈앞의 먹이가 완강히 저항하자 극도로 분노해 있는 상태였다. 게다가 다가서다 몇 차례나 검에 찔려 상처를 입은 상태였기에 더 하였다.
 상처 입은 짐승이 원래 더 난폭한 법이 아니던가!
 “챠아아앗! 횡소천군! 화룡점정! 아아아앗!···”
 케엑!
 우르르르릉! 와당당당탕―!
 캥! 깨갱!
 “아아아악! 안 돼! 크헉!···”
 고연악은 전력을 다하여 두 마리 늑대가 다가오자 전과 같이 맹렬한 기세로 검을 휘둘러 먼저 한 놈의 공세를 차단 한 후 재빨리 돌아서며 다가서는 놈의 몸통을 겨냥하고 검을 찔렀다.
 이때 물러섰던 늑대가 다시 다가서며 관을 열기 위하여 지렛대로 쓰던 굵은 나뭇가지를 발판 삼아 다시 도약하려는 순간 검은 다가서던 놈의 몸통을 찔러들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이럴 경우 즉각적으로 몸을 빼던 늑대였지만 이번은 전력을 다하여 도약하였다. 그렇기에 자신의 몸 깊숙이 검이 찔러들며 엄청난 통증을 유발시키고 있었지만 도저히 방향을 선회할 수 없어 그대로 고연악의 신형을 덮쳐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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