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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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랑권 1권 (1)

2017.12.11 조회 2,816 추천 22


 #序. 비뢰도秘牢島의 보물
 
 
 
 
 동사군도東沙群島.
 쏴아······!
 휘영청, 하늘에 붉은 달이 뜨고 잠겼던 삼선도三仙島의 적벽에 다시 물이 빠졌다. 어둠 속에 급속도로 바닷물이 밀려 나가는 정경은 으스스하기까지 하다.
 그리고 그 동부洞府가 시커멓게 형체를 드러내는 순간.
 “찾아라!”
 “하아아압!”
 초조하게 지켜보던 무림인들은 또 새카맣게 몸을 날려 절지 속으로 뛰어들었다.
 주어진 시간은 이각뿐.
 일종의 호기심이거나 유희일 수도 있었지만 표정들은 사뭇 비장하기까지 하다.
 
 남해의 한복판.
 천험의 자연이 만들어 낸 크고 작은 섬들이 운집한 동사군도의 삼선도에는 매우 신비한 동부가 하나 있었다.
 십 년에 한 번, 월력으로 간만의 차가 가장 큰 자정에 물이 빠질 때 섬의 북쪽, 적벽赤壁 아래에 모습을 드러내는 대동부가 그것이었다.
 들어가 본 이들의 말에 따르면 천하에 보기 드문 기경奇景의 종유동이라 했다.
 하지만 끝까지 들어갔다가 나온 이는 없었다.
 거미줄 같은 미로가 얽힌 지극히 깊은 동부로서 자칫하면 길을 잃기 쉽고, 남해의 복판이라 빠진 물이 다시 차오르는 것은 이각여, 그 안에 나오지 못하면 꼼짝없이 동부 속에 갇히기 때문이었다.
 십 년에 한 번 물이 빠지는 만큼 갇히면 죽을 도리밖에 없는 죽음의 동부인 셈이었다.
 숨길 비, 감옥 뢰, 그래서 비뢰도秘牢島로 불리기도 했다.
 한데 이 동부 속에는 신비에 못지않은 또 하나의 상당한 전설이 있었다.
 송대宋代 제일의 기인으로 일컬어진 포산자砲散子 순우기淳于旗가 들어가 우화했다는 전설이었다.
 제나라 태창공의 후손이자 명문 순우세가의 출신인 인물이었지만 명리에 뜻을 두지 않고 선도禪道에 심취해 천하를 주유하며 독보적인 포산어검을 완성해 절정의 경지를 이뤘다고 전해지는 이인. 만년에 동사군도로 온 그가 이 동부에서 우화하여 해선海仙이 되었다고 전해졌던 것이다.
 어쩌면 실종인지도 모른다.
 혹자는 득도한 그가 우화의 자리로 이곳을 택했다고 하고, 혹자는 기경에 심취된 그가 너무 깊이 동부로 들어가 빠져나오지 못한 채 사망한 것이라고 했지만 무엇이 진실인지는.
 이때부터 망막대해에 위치한 이 섬은 무림인들에게 대단히 유명해졌다.
 진실이 무엇이건 간에 순우기에게는 제자가 없고 타에 진전을 전하지 않아 동부 속에 포산절기를 남겼을 것이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와 함께 십 년에 한 번, 물이 빠질 때마다 무림인들이 구름처럼 삼선도로 몰려가 치열한 각축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기경에의 호기심과 함께 순우기의 진전을 찾고자 함이었다.
 그러나 그의 종적을 찾은 사람은 없었다.
 동부가 깊고 물이 빠지는 시간이 너무 짧았기 때문이었다.
 허욕을 가진 사인邪人들이 진전을 찾으러 들어가 미로에 갇혀 무수히 죽은 것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일지신마一指神魔, 백인도장百刃道長, 만겁마군萬劫魔君 등 천하에 이름난 거마들도 상당수.
 그럼에도 백 년이 지난 오늘에 이르기까지 전설은 무림인들을 불러들였고, 동부가 드러날 무렵 찾아온 무림인들은 계속 위험 속으로 뛰어들고 있었다.
 십 년에 한 번, 기회는 언제나 이각뿐이었다.
 
 쉬익-!
 섬광이 뻗어져 나가는 듯한 굉장한 경공신법.
 알려진 대로 동부는 지극히 복잡한 미로迷路로 형성되어 있었다. 들어가는 입구는 하나였지만 들어가면 곧 둘로, 셋으로 갈라져 있었고, 거기에서 또 넷으로, 다섯으로 갈라져 거미줄처럼 사방으로 뒤엉켜 있었다.
 지극히 깊기도 했다.
 어떻게 이런 동부가 형성된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초입에서부터 오 리里가량은 그냥 복잡한 평지의 동굴과 같았다.
 다른 것은 바닷물이 차서인지 온갖 해초들과 산호, 홍합, 소라류가 엉켜 있고, 문어 같은 두족강의 연체류들이 신비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후 막히지 않은 통로를 찾아 오 리가량을 지나면 뻗어 오른 경사가 시작되었다. 갈수록 경사가 가팔아지고 계속 올라가면 마침내 바닷물이 차지 않는 지역이 나왔다.
 칠흑같이 컴컴한 어둠 속에 온갖 기기묘묘한 형상의 종유석이 뒤덮인 거대한 동부였다.
 천장에서부터 흘러 내려와 기둥을 이루는 등 탑 모양, 꽃 모양, 사람 모양, 각종 동물 모양 등 수천 년의 자연이 만들어 낸 온갖 형상의 종유석들이 널려 있는 비경인 곳이었다.
 그러나 한가하게 이를 감상하고 있을 사람은 없었다.
 일반의 동굴이라면 모르되 밀물이 시작되면 꼼짝없이 죽음을 맞이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물이 차는 곳이 오 리임을 알고 보면 물고기가 아닌 다음에야 숨을 참고 잠수해 나갈 수도 없다.
 수천 명의 무림인들이 뛰어들었지만 이곳까지 들어온 사람조차 소수였다.
 초입에서부터 수없이 갈라지고 상당수가 막히기까지 한 거미줄 같은 미로라 대부분이 바깥쪽에서 헤매고 있었으므로.
 하지만 쏘아 가는 사내는 실로 과감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사방이 칠흑같이 어둡고 동부 역시 거미줄 같은 미로로 형성되어 있었음에도 아무것도 거칠 것이 없다는 듯 바람같이 곳곳의 미로를 휘돌아 앞으로 쏘아 가고 있었던 것이다.
 오십가량의 나이, 부리부리한 눈에 흑색에 은빛 용 무늬가 있는 장포를 입고 길게 자란 수염을 중간 중간 묶어서 내려뜨린 위맹한 웅자의 중년인이었다.
 칠 척에 달하는 키에 절구통 같은 묵중한 체구, 솥뚜껑만한 손이 위엄을 한층 더 돋보이게 해 주고 있었으며, 쏘아 나가는 경공신법의 속도나 몸에서 뿜어 나오는 무형의 잠력이 천하의 고수高手임을 알려 주고 있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리 고수라도 오 리나 물이 차오르는 미로나 다름없는 동부는 일반과 똑같이 위험하기 마련인데 그는 어떻게 이렇게 과감하게 움직일 수 있는 것일까.
 주위를 살피지도 않고 앞만 보고 쏘아 나가고 있는 모습이 흡사 동부 속을 잘 아는 것 같았고, 어느 한 점을 목표로 해 나아가는 것만 같이 보이니.
 아니, 그는 분명히 동부를 잘 아는 것 같았다.
 증거로 중년인은 물이 빠짐과 함께 동부로 뛰어들어 한 번도 막힌 곳으로 들어서거나 헤매지 않고 단숨에 여기까지 왔고, 더 정확히, 그가 이곳을 잘 안다는 것을 입증이라도 하듯 오래잖아 그의 눈앞에 실로 대단한 정경이 나타났다.
 진입한 지 반 각!
 섬광 같은 속도로 이리저리 휘돌아 미로 속을 질주하던 중년인의 앞에 직경 이십 장가량의 천연으로 이루어진 막다른 석부石府 같은 곳이 나타났던 것이다.
 그리고 이곳에는······ 놀랍게도 빛이 있었다.
 거쳐 온 모든 곳이 칠흑 같은 어둠이었지만 유독 이 동부에만 푸르스름하게 빛이 비치고 있었던 것!
 그리고 석부의 끝에는······ 자연적으로 이루어진 넓적하고 큰 암반 같은 것이 있었고, 암반 위에는 얼마나 오래된 것인지 알 수 없는 네 구의 백골이 있는 게 보였다.
 세 구는 좌정해 앉아 있었고 한 구는 산산이 부서져 흩어져 있었는데, 백골들의 앞에는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양피지로 된 세 권의 책자, 죽간, 푸른 비취로 된 한 쌍의 옥패, 얼핏 보기에도 예사롭지 않게 여겨지는 고검 등이 놓여 있었다.
 다시 보니 빛 역시 자연적인 게 아니라 함께 놓인 주먹만 한 야명주가 뿜어내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역시 여기였구나!”
 용포 중년인의 눈에 순간 엄청난 희열의 빛이 떠올랐다.
 백 년을 이어 온 신비! 제대로 장소를 찾은 것이라면 여기가 곧 순우기가 우화했거나 사망한 곳인 셈이다.
 하지만 단정할 수는 없었다. 그러기에는 증거가 없고 백골이 네 구이기 때문이었다. 더 일찍 진전을 찾아 들어왔지만 빠져나가지 못한 채 죽게 된 인물들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곳이 순우기의 우화처라 확신하는 눈치였다.
 “드디어 찾았다. 처음 동부에 들어온 게 열일곱 살 때였는데 이제야. 삼십 년 만에 뜻을 이룬 것이로구나.”
 뭉클해하는 모습으로 포권과 함께 네 구의 백골을 향해 허리를 숙여 보였다.
 “어느 분이 순우도인이신지는 알 수 없으나 후배 왕평산王坪山이 인사드리오이다. 하늘이 홍복을 내려 진전을 거두고자 하니 모쪼록 해량해 주시기를.”
 후인으로서 고인에게 예의를 갖춘 것이었다.
 미루어 성품 역시 넉넉한 인물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이때였다. 보물을 앞에 둔 채 머뭇거린 것이 실수였을까.
 “헛헛, 남해용왕南海龍王 일가가 대를 이어 동사군도를 오가며 보물을 찾고 있다더니 사실이었던가 보군! 하나 기진이보를 앞에 두고 우물거리는 것은 현명한 일이 아니지.”
 쉬익!
 돌연 허리를 숙인 왕평산의 뒤쪽, 석부의 입구 쪽에서 하나의 남색 인영이 번개같이 쏘아들었다.
 얼마나 속도가 빠른지 말을 하고 있었지만 웃음소리조차 끝나기 전에 백골들의 앞으로 날아가 휙, 놓여 있는 물건들을 가로챘을 정도였다.
 “흡?”
 당연히 예의를 갖추고 있던 왕평산의 안색이 홱 돌변한 것은 이를 필요도 없었다.
 “누구냐!”
 그러나 늦어 있었고, 삽시간에 유물들을 챙긴 남의인은 그를 향해 번개같이 일 장을 날리기까지 하고 있었다.
 “껄껄! 나는 날세. 천하의 기진이보는 주인이 따로 없으니 다시는 이런 실수 하지 말게.”
 “감히!”
 쾅-!
 순간 석실 속에 천지가 진동하는 듯한 폭음이 일어나며 와스스 천장에서 뿌옇게 돌가루가 쏟아져 내렸다.
 왕평산이 마주 쌍장을 날려 받아친 것이었다.
 “크······!”
 그러나 손해는 역시 왕평산이 본 것 같았다. 남의인은 작정하고 공력을 끌어 올려 출수했지만 왕평산은 그러지 못해 양팔과 가슴이 으스러지는 듯한 충격을 받고 퍽퍽, 대여섯 걸음이나 뒤로 밀려나고 만 것이다.
 그만치 남의인의 공력이 심후하기도 했다.
 다시 보니 왕평산와 거의 유사한 칠 척에 가까운 키.
 그러나 정체는 알 수 없었다. 얼굴을 면사로 가리고 있었고, 삽시간에 밀려나는 왕평산의 머리 위를 훌쩍 뛰어넘어 석부 입구 쪽으로 쏘아 갔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멀리 가지는 못했다.
 “대단해! 하나 그러는 자네 역시 말이 많은 것 같군!”
 남의인이 막 석실을 벗어나려는 찰나 석부의 입구 쪽에서 똑같이 면사로 얼굴을 가린 또 다른 백의 인영이 불쑥 나타나며 그에게 정면으로 쌍장을 날렸기 때문이었다.
 우르르릉!
 벽공장력! 또한 얼마나 심후한 공력인지 격출되자 장력에서 뇌성이 울릴 정도였다.
 “어느 녀석이!”
 남의인 역시 안색이 돌변할 것은 당연지사였다.
 매우 영리한 자로서 왕평산을 미행해 와 유물을 가로채 달아나려 했던 것 같은데 또 다른 방해자가 나타났던 것이다.
 어쨌건 머뭇거릴 수는 없었다.
 놀라는 사이 나타난 백의인의 장력은 코앞까지 날아오고 있었고 위력마저 이만저만한 게 아니었다.
 “하아아압!”
 쾅-!
 급급히 좌수를 뻗어 그 역시 백의인의 장력을 받아 냈다.
 “앗······!”
 하지만 준비 못한 왕평산이 손해를 봤듯이 그 역시 손해를 봤다. 서둘러 맞받아치긴 했으나 백의인의 공력 역시 보통 심후한 게 아니라 부딪치는 순간 바로 눈에 불이 튀는 듯한 충격을 받고 퍽퍽, 연거푸 너덧 걸음을 밀려나고 말았다.
 충격에 싸안고 있던 유물까지 놓쳐 책자, 옥패 등이 한꺼번에 허공으로 날아오르기까지 했다.
 하지만 와중에도 휙, 죽간만큼은 낚아챘다.
 동시에 백의인도 벼락같이 신형을 날려 좌측으로 날아간 양피 책자 하나를 우선 차지했다.
 그런데 재차 몸을 번뜩여 그가 두 번째 비급을 낚아채려 하는 순간이었다.
 “세상의 기진이보에는 주인이 따로 없다라, 그것참 좋은 말이로군.”
 펑! 펑!
 “헉!”
 석부 속에 다시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대체 어디서 이런 고수들이 나타났는지 뒤쪽에서 또 청색, 흑색, 두 개의 인영이 빛살같이 쏘아들며 우르르 그에게 장력을 퍼붓더니 각자 책자 하나씩과 옥패를 가로챘던 것이다.
 “복불복이다. 함께 발견한 것이니 일단 나눠 가지자꾸나! 시간이 없으니 다음에 보기로 하고!”
 그러고는 비룡번신飛龍翻身, 나타난 속도보다 더 빨리 몸을 뒤집어 휘잉, 번개같이 다시 석부 밖으로 쏘아 나갔다.
 “이런 도적들!”
 당연히 왕평산도 남의인도 백의인도 모두 안색이 홱 돌변했다. 이야말로 버마재비가 매미를 노리고 뒤에서 참새가 노린 속에 매까지 덮쳐든 꼴이다.
 “섰거라!”
 무섭게 호통을 토하며 빛살같이 신형을 날려 앞서 나간 흑, 청의인을 뒤쫓기 시작했다.
 그러나 멈칫, 왕평산만은 한 호흡을 늦추게 되었다.
 추적하려다 보니 발밑에서 반짝이는 작은 물체 하나.
 죽간, 책자들과 함께 놓여 있던 옥패였다.
 책자 한 권과 함께 이를 낚아챈 것은 뒤에 나타난 두 사람 중 흑색 면사를 쓴 자였는데 뜻밖에 모두가 아니었던 것이다.
 엮은 줄이 삭아 한 쌍이었던 것이 따로 떨어진 느낌.
 왕평산은 서둘러 그것을 주워 들고 앞서 나간 자들을 추적해 신형을 솟구쳤다.
 그러나 따라붙기에는 늦어 있었다.
 감쪽같이 미행해 왔을 정도의 실력들에, 안타깝게도 기혈이 뒤집히며 목에서 뜨끈한 무엇이 치밀어 오르고 있었다.
 싸울 작정을 하고 나타난 자들과 달리 불시에 날아든 장력에 손해를 본 것이지만, 어쨌건 이런 자들이라면 모두 하수가 아닌 셈이다.
 입증이라도 하듯 나갔을 때는 모두 자취도 보이지 않았고, 우왕좌왕 초입에서 헤매는 자들만 남아 있었다.
 “어처구니없군. 세상에 뭐가 이런 일이!”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눌러 참을 도리밖에 없었다.
 설마 이런 일이 발생할 줄은 몰랐지만 정체를 감춘 그들과 달리 드러내고 움직였던 스스로를 탓할 수밖에.
 사실 그런 것이었다.
 유사 이래 기진이보 쟁탈전으로 유혈극이 벌어진 게 한두 번도 아니되, 뺏기지 않았다 해도 목격자가 있는 이상 진전을 차지했다면 바로 말이 퍼져 나갔을 것이고, 화근이 되어 삼선도를 벗어나기도 전에 운집한 자들의 집중 공격을 받고 살신지화를 당할 수도 있었다.
 이만하길 다행이라 치부할 수밖에.
 찾은 곳이 정확히 포산자의 우화처인지도 알 수 없었다.
 단정할 수 없다 했듯 그럴 경우라면 부질없는 물건으로 목숨만 잃는 것이기도 하다.
 
 휘영청 떠 있는 붉은 달.
 쏴, 하는 소리와 함께 오래잖아 빠지는 듯했던 물이 다시 밀려왔고, 적벽은 삽시간에 중간까지 잠겨 철썩였으며 언제 나타났냐는 듯 동부 역시 감쪽같이 사라졌다.
 백 년을 간직해 온 삼선도의 비밀.
 포산자의 진전은 여전히 동부 속에 남아 있는 것일까.
 유출된 것이 맞다면 누가 가져간 것이 진짜일까.
 아직은 아무것도 확실한 게 없었다.
 세월이 흘러 진전을 찾은 사람이 비검을 번쩍여야만 알 수 있을지.
 어둠과 함께 이 밤의 일은 일단 흑막 속에 묻혔다.
 
 
 
 #기재奇才
 
 
 
 
 남룡북패동사서도南龍北覇東士西刀, 칠정일괴삼절사세가七正一怪三絶四世家.
 현 무림에 최강자가 누구냐 물으면 사람들은 모두가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정확히 일인자가 누구냐 물으면 또한 아무도 대답할 수 없을 것이었다.
 까닭은 금시 무림처럼 무武가 절정을 이루고 고수가 많을 때가 드물었으며 이렇게 평화로운 때 역시 없었기 때문이다.
 선덕宣德 십 년, 유사 이래 전쟁과 내란에 시달려 왔던 중원이었으나 주원장이 명明을 일으키고 영락제永樂帝가 천하를 평정한 이래, 짧은 생을 마감한 홍희제洪熙帝와 더불어 선덕제宣德帝가 등극하면서 모든 전쟁을 끝내고 양 대에 거쳐 선정을 베풂으로 안정의 극치를 이룬 때문이었다.
 부국강병에 천하가 태평성세인데 강호 무림인들 어찌 혼란할 수 있을까.
 걸핏하면 감정 하나로 충돌하곤 했던 무림 방파들도 치세에서는 잠잠할 수밖에 없었다.
 나라가 안정됨으로 치안이 강화되어 멋대로 칼부림을 할 수 있는 세상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여전히 녹림적綠林賊들이 횡횡하고 있긴 했지만 제외하고는 내적으로 힘을 키우고 질서를 지켜 방파별로 크게 무武가 상승하는 등 충돌이 사라져 있었던 것이다.
 이렇다 보니 천하가 모두 백白이었으며, 충돌이 없는 만큼 누가 일인자인지도 알 수 없었다.
 보이는 무위 정도로만 강약을 가늠할 뿐이었다.
 
  * * *
 
 산서山西 양천陽泉.
 동북에서 뻗어 내린 태행산맥을 측면에 끼고 자리한 이곳에는 무림에 매우 명망 높은 장원이 하나 있었다.
 양천장陽泉莊, 혹은 양천보陽泉堡라 불리는 곳으로, 무림에서 이름이 높다면 대세가이거나 방파일 것이지만 그렇지도 않은 곳이었다.
 크지 않은 규모에 가솔조차 백여 명, 이렇다 할 세력 역시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양천장은 화북 일대는 물론 중원 전역에서도 이름이 높았는데, 까닭은 장주인 려지원黎之元 때문이었다.
 그는 매우 신비한 인물이었다.
 양천에서 멀지 않은 태원성太原城의 임하任河 출생, 알려지기로는 공동崆峒의 속가제자라 했지만 실제 그에 대해 정확히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가 어릴 당시는 원元과의 오랜 전쟁과 내전, 영락제의 막북정벌 등으로 세상이 들끓던 시기라 장성長城과 가까운 태원은 전쟁터나 같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화를 피해 향리를 떠났는데 그의 부모 역시 그랬다는 설이고, 차후 하남 송주에 안착해 공동 출신의 이인을 만나 무예를 배웠다고 전해지지만 그 스승이 누구인지도 밝혀진바 없었다.
 그럼에도 믿기지 않을 만치 무예는 고강했다.
 스무 살 초반, 약관의 나이에 무림에 출도해 각처의 비무, 논검 대회들을 휩쓰는 등 천하를 주유하며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 번도 패배가 없었던 것이다.
 스물다섯 살에 천하의 고수로 이름난 막북의 일인자 금룡수괴걸禽龍手怪傑 공손무기를 격패시켰다는 소문도 돌고 있었고, 흑도 최고의 유객遊客이라 불리는 무천검武天劍 조운과도 우열을 가리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돌고 있었다.
 천하 어디엔들 명리를 멀리하는 이인이 없을까마는 이 정도가 되면 스승이 누군지 모두가 궁금해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진면모를 숨기고 지낸다 해도 제자가 이 정도가 되면 이만저만한 실력자가 아닐 것인데, 공동의 속가에 이만한 후인을 키워 낼 정도의 인물이 있을까 싶은 의문이 드는 것이다.
 그러나 특별한 무엇은 아니었다.
 의문이긴 했지만 그는 매우 충후한 성품을 지닌 인물로서 무림을 주유하는 동안 한 번도 불의한 적이 없었으며, 살상을 자제해 원수조차 만든 일이 없었다.
 자연과 호걸, 무예를 좋아해 각처를 돌며 고수들과 손 속을 겨루고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돕는 유협으로 지내 왔던 것이다.
 이에 천하인들은 그에게 임하협검任河俠劍이라는 별호를 줬고, 마침내 동사東士의 대명을 부여했다.
 남룡북패동사서도南龍北覇東士西刀 중 동사가 바로 그였던 것이다.
 언급되었듯 현 무림 최고의 서열을 가진 인물들을 일컫는 것으로서, 모두가 내로라하는 방파 및 세력을 지닌 인물들이었다.
 칠정일괴삼절사세가七正一怪三絶四世家만 해도 소림, 무당을 위시한 칠대문파, 개방, 사대세가를 뜻하는 것이니 서열에 들어가기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알 법한 일인데, 그중 려지원이 한자리를 차지했던 것이다.
 그만치 무예가 빼어나고 충후한 인물이었던 것.
 그러나 무림에서의 그의 활동은 그리 길지 않았다.
 십 수 년간 강호를 주유하며 대명을 떨쳤으나 서른 즈음에 천산신녀로 이름 높던 여걸 송설하를 만나 혼인하게 되었고, 직후 무림을 떠나 임하로 돌아와 가정을 꾸렸다.
 하지만 주위의 사람들이 그냥 두지 않았다. 거친 태행산맥을 낀 태원 지역은 거의가 치외법권이나 다름없는 곳으로서, 세상에 죄를 짓고 숨어들어 간 많은 사인들과 화적들이 횡횡하는 곳이라 언제나 치안이 불안했다.
 이에 양천의 사람들은 누누이 그에게 지역을 맡아 안전을 지켜 주기를 찾아가 부탁했다.
 혼인 후 안정되게 살기를 택한 려지원은 줄곧 부탁을 거부했으나 오 년 전, 태행산을 근거지로 오랫동안 살육과 약탈, 방화를 일삼아 오던 적혈랑迹血狼이라 불리던 화적들의 습격으로 일대의 마을들이 불타고 많은 양민들이 살해되면서, 태원자사의 부탁으로 결국 향용 신임을 받고 양천보를 맡았다.
 양천을 영역으로 한 방파의 주인이 된 것이었다.
 하지만 세勢를 키우거나 하지는 않았다.
 양천보는 전부터 있었던 지역의 작은 방파로서 적혈랑 무리를 소탕하러 나섰던 전 보주 이세명이 횡사하면서 주인을 잃은 곳으로서, 소문이 나자 많은 호걸들이 찾아왔으나 돌려보내고 원래 있던 무사들과 양천의 젊은이들 백여 명만으로 장원을 운영했던 것이다.
 그래도 주위는 안정되었다.
 려지원이 영역을 맡았다는 소문이 나면서부터 녹림적들이나 사인들이 얼씬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사실 양천은 크지도 부유하지도 않은 곳이었는데, 천하에 대명이 쟁쟁한 고수가 지역을 맡은 다음에야 실없이 들어가 행패를 부리거나 할 바보도 없다.
 더 좋은 것은 무림을 주유할 당시 보여 줬던 려지원의 인품으로서 명성을 떨쳤으되 원수를 만든 적이 없었던 그에게는 흑백 양도 모두에 많은 친구들이 있었고, 이에 사인들조차 양보해 더욱 문제 될 일이 없었다.
 
  * * *
 
 유월이 시작되었으니 늦봄, 혹은 초여름일지도 모른다.
 화사하게 태행산을 물들였던 철쭉, 개나리, 진달래 등은 졌지만 산은 끊임없이 온갖 꽃들을 피워 냈고, 양천장의 주위는 나날이 짙푸르러 가는 녹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런 속에 멀리 장원이 보이는 산기슭의 넓은 초지에는 어디서나 볼 수 있듯, 좋은 계절을 맞이해 열 살 안쪽의 그만그만한 아이들이 몰려나와 놀고 있었다.
 으레 그렇듯 패거리는 둘이었다. 남자아이들 따로 여자아이들 따로.
 원래 이 나이의 여자아이들은 심심하다.
 밖으로 나와도 특별히 할 만한 놀이가 없어 꽃을 따 화관을 만들거나 소꿉장난 정도를 했고, 활발하게 노는 사내아이들을 부럽게 바라볼 정도였다.
 그런들 사내아이들은 그들에게 관심이 없다. 더 나이가 들면 모를까, 같이 놀기에는 행동도 굼뜨고 툭하면 운다.
 남녀가 유별한 세상이라 자칫 잘못 어울렸다가는 얼라리 꼴라리도 되고.
 이런 관계로 여자아이들은 뒷전에 제쳐 두고 저희들끼리만 씩씩하게 노는 것이다.
 한데 그중에서도 유독 홀로 떨어져 쓸쓸해 보이는 여자아이가 하나 있었다. 어려도 여간 눈에 뜨이지 않는 모습의 여덟 살 나이가량의 소녀였다.
 한족 전통의 옥색 단삼에 눈같이 뽀얀 살결, 초롱거리는 눈, 초승달 같은 섬세한 눈썹하며, 여간 복스러운 게 아닌 모습이었다. 장차 얼마나 미인이 될지 알 수 없을 정도의.
 차림새로 보아 지체 역시 낮지 않아 보였다.
 어쩌면 이로 인해 홀로 떨어져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는데, 단삼 소녀는 함께 어울리기를 원하는 눈치였지만 가까이 가기라도 할라치면 다른 아이들이 자꾸만 피했다.
 부러운 눈으로 한쪽에 떨어져 놀고 있는 아이들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무찔러라!”
 “돌격!”
 “야아!”
 와당탕!
 “아구구······!”
 한편 사내아이들은 전쟁놀이에 한창이었다.
 한데 이 녀석들, 무가武家의 아이들이라 그런지 어려도 하는 짓들이 벌써부터 여간이 아니다.
 이 또래의 사내아이들은 흔히 하는 놀이였지만, 초지 언덕에 그럴싸하게 돌을 쌓아 진지를 만들고 삼십여 명이 패를 나누어 성城 차지 놀이를 하는 것 같았는데, 본 것이 있어서인지 팔에 청홍靑紅의 완장을 차고, 희한치도 않게 대나무로 엮어 만든 호구까지 입은 모습으로서 목검에 봉까지 들고 부딪치고 있었다.
 그조차 그냥이 아니었다.
 목검과 봉의 끝에는 어느 것이나 회칠이 된 천을 감은 상태로 맞으면 몸에 회칠이 되도록 해 탈락자를 끌어내는 제대로 된 놀이를 하고 있었다.
 더욱이 놀라운 것은 몸놀림이기도 했다.
 무가의 아이들인 만큼 어른들이 하는 것을 흉내 낸 것이라 보면 되었지만 부딪치는 과정에서 앞 곤두, 뒤 곤두질 등 상당한 묘기까지 나오고 있었던 것.
 누구나 하는 놀이이되 아주 마구잡이로 하는 장난이 아닌 셈이었다.
 그러나 뭐 승부에 가서는.
 팍!
 “앗······!”
 “야, 진송, 가슴에 맞았어! 어서 빠져!”
 “무슨 소리! 이건 회칠을 하다가 실수로 묻은 거야! 팔에 스쳤어!”
 “거짓말하지?”
 “진짜라니까?”
 “에라! 이 사기 소자야!”
 와당탕!
 “어이쿠!”
 역시 아이들은 아이들이다 싶었다.
 준비까지는 잘했지만 규칙은 둘째, 지기도 싫고 놀이 자체가 즐거우므로 누구나 탈락되기 싫어해 제대로 맞아 회칠이 되어도 안 맞았다고 빡빡 우기는 놈, 어떻게든 끌어내려고 으르대는 놈, 나갔다가도 슬그머니 들어오는 놈 등 반칙이 생겨 뒤죽박죽이 되었고, 이렇다 보니 영 승부가 가려지지 않은 채 나중에는 전부가 허옇게 몸에 회칠을 하고 아웅다웅이다.
 “야, 저것들 치사하다! 몇 번씩 맞고도 안 나간다! 나갔다가도 털고 막 들어오고!”
 “그러는 너넨 어떻고? 몸을 보란 말이야. 하나라도 회칠이 안 된 사람 있나! 너네들이 먼저 시작했어!”
 그냥 웃을 수밖에.
 하지만 뭐 힘들여 성까지 만들어 놓고 하는 승부라 아주 가려지지 않는 건 아닌 것 같았다.
 “그만. 됐으니 다들 물러서.”
 소동을 부리는 중에도 양쪽의 대장들은 당장 싸움에 들어서지 않고 의젓하게 진영의 좌우에 앉아 아이들을 살피고 있었는데, 다툼이 생길 때쯤에야 자리에서 일어섰다.
 한데 하는 짓이 여간 아니라 했듯 이때부터 더 상당하다 싶은 일이 시작되었다.
 “우리가 이긴 싸움이다. 하지만 인정하지 않으니 역시 둘이서 승부를 내야 할 것 같다.”
 “대장전이다!”
 “야아······!”
 바로 그랬다. 일반의 세계도 그렇지만 이 나이 때의 아이들에게는 대장이 더욱 중요해서 자신들이야 몇 번을 죽든 대장이 지지 않으면 무조건 산다(?).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게 대장들의 싸움이었는데 바로 그 대장전이 시작되려 하고 있는 것이다.
 보자 홍군의 대장은 백의를 입은 네모꼴의 얼굴에 귀티가 나는 듬직한 모습의 소년이었고, 청군의 대장은 청의에 시원한 검미를 지닌 호리호리한 체형의 잘생긴 아이였다.
 둘 다 열 살 정도로 대장답게 또래의 아이들보다 키도 한 뼘이나 더 훌쩍해 보였다.
 “하나 마나 우리가 이긴다! 서진혁徐陣赫 별거 아니다!”
 “웃기지 마라! 양강梁康은 더 별거 아니다! 기껏해야 마사부馬舍夫의 손자다!”
 “맞다! 나중에 양강도 마사부가 될 거다!”
 “우······!”
 당연지사처럼 대장들이 나서자 양쪽의 녀석들은 서로의 대장을 응원하면서 상대를 깎아내리기 시작했는데 마사부란 말을 돌보는 마구간지기를 칭하는 것이었다.
 눈치를 보니 호리호리한 청의 소년이 양강인 것 같았고 조부가 마사를 돌보는 사람인 듯했다.
 특이한 예 같았다. 아이들이라 해도 이런 경우 거의 대장이 될 수 없는데 청의 소년은 되어 있는 것 같았고, 대장이다 싶게 야유를 받고도 주눅 역시 들지 않았다.
 “자식들 시시하게.”
 어차피 이런 정도는 나이 든 사람들도 하는 것이라 그냥 한번 픽 웃은 후 백의 소년을 향했다.
 “혁이, 한 달이 지났는데 실력이 좀 는 거야? 또 먼저처럼 맥없이 뻗는 거 아냐?”
 반면 백의 소년은 어딘지 좀 긴장되어 보였다.
 청의 소년에게 자주 패해 온 듯한 눈치.
 하지만 부하들의 응원도 있고, 심호흡을 하며 곧 자신감을 보였다.
 “당연하지. 그땐 손에 땀이 나서 칼을 놓쳤을 뿐이니까. 오늘은 권법으로 하는 게 어때?”
 권법.
 뜻밖의 이야기가 나오는 것 같았지만 청의 소년은 별것 아니라는 듯 웃었다.
 “뭔가 새로운 것을 배운 모양이군. 그렇게 해. 지면 한 달 동안 진지는 또 우리 차지가 되는 거다? 계속 담쌓을 돌을 날라 와야 해?”
 백의 소년의 눈썹이 삐죽 올라갔다.
 “반대가 될 거다! 오늘은 틀림없이 이길 테니!”
 더불어 매우 특이한 동작을 하기 시작했다.
 “합!”
 힘차게 기합을 토하며 휙, 허리를 젖혀 번개같이 뒤 곤두, 앞 곤두를 넘는가 싶더니 크게 팔을 휘저어 허공을 치고 할퀴고 휙휙 발을 날려 연속 차기를 하는 등 바람 같은 동작으로 어떤 권법의 기수식 같은 것을 선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도저히 이 나이의 아이들이 해 보일 것 같지 않은 몸놀림으로서 속도 역시 상당히 빠르다.
 “사권연기蛇拳練氣!”
 더불어 힘 있게 다리를 어깨너비로 벌려 기마 자세를 취하고 다섯 손가락을 모은 채 양 손목을 구부려 마치 살모사가 똬리를 틀고 있는 듯한 자세를 취했다.
 실로 대단한 일로서 외침도 그렇고, 정수인지는 알 수 없지만 틀림없는 북퇴北腿! 소림의 나한오권羅漢五拳 중 하나로 일컬어지는 사권연기의 자세임에 분명했다.
 말이 쉬울 뿐 쉬운 권법이 아니었다.
 “사권이다!”
 “꺄악! 멋있다!”
 순간 보고 있던 소년들의 입에서 일제히 탄성이 터져 나왔고 어느새 몰려온 여자아이들까지 기성을 토했다.
 이 권법이 어떤 것인지 아는 눈치였다.
 청의 소년 역시 그런 것 같았다.
 “역시 새 수법을 배운 거군!”
 그러나 곧 심호흡과 함께 그 역시 상당한 몸놀림을 보이기 시작했다.
 “하아압!”
 훙훙훙! 두 주먹을 강하게 정권으로 틀어잡고 번개 연타를 지르는가 싶더니 앞차기, 옆차기, 휘돌려 차기에 연속 곤두질을 치며 백의 소년 앞까지 짓쳐 가 휙, 겨룰 자세를 잡았는데, 몸을 비스듬히 두고 양 주먹을 들어 대각선으로 둔 모습이 호랑이가 먹이를 덮쳐 가는 듯한 형상이다.
 “나왔다! 우리의 호권虎拳!”
 “야아······!”
 그러자 소년들은 다시 기성을 터뜨리기 시작했는데, 이쯤 되면 정말 할 말이 없을 정도다 싶었다.
 호권연골虎拳練骨.
 청의 소년이 보인 것은 또한 천하에 대명이 쟁쟁한 나한오권 중 범의 움직임을 연구해 창안했다 전해지는 호권의 기수식임에 틀림없었던 것이다.
 처음부터 장난만은 아니다 싶은 느낌이 들긴 했었지만 이들 둘은 특히 제대로 무예를 배운 모습을 보이고 있었던 것!
 “야압!”
 파파파파!
 대결이 시작되었고 더불어 이들이 제대로 무예를 배웠음이 이때부터 더욱 확실히 드러났다.
 쨍, 하는 기합과 함께 두 소년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와다닥 서로에게 닥쳐 가 권각을 날리기 시작했는데, 역시 손 속이 예사롭지 않다.
 선공은 청의 소년으로부터.
 거리가 좁혀지자 대뜸 가위차기를 날리는가 싶더니 연거푸 허리를 틀어 뒤차기에 발을 바꿔 옆차기, 뛰어 앞차기까지 한꺼번에 구사해 냈고, 보태어 정권 지르기에 팔꿈치 치기 등 폭우 연타를 퍼붓기 시작했는데 동작 하나하나가 고리가 연결되듯 자유스럽다.
 어린 만큼 위력은 그렇다 쳐도 단단히 수련을 한 몸놀림임이 확실한 모습이었다.
 백의 소년 역시 마찬가지였다.
 같은 나한권이라 해도 호권과 사권은 특징이 크게 달랐는데, 호권은 힘과 속도를 위주로 한 권격과 차기를 함께 구사해 상대를 무너뜨리는 권법이었다.
 반면 사권은 손을 뱀의 머리 형상으로 만든 후 손끝과 구부려진 고권(손목)으로 전문적으로 상대의 급소를 치고, 뱀의 특성대로 상대를 휘어 감기까지 하는 권법으로서 호권에 비하자면 보다 유하고 탄력적인 특성이 있었다.
 중심을 낮춰 잡은 채 발조차 상대를 후려 넘어뜨리는 용도로만 사용해 북퇴라기보다 손[掌]을 많이 사용하는 남권南拳에 가까운 까다로운 권법으로 또한 그 특성을 제대로 보여 주고 있었다.
 청의 소년의 공격이 가해져 올 때마다 탄력적으로 허리를 젖혀 피하거나 손을 휘저어 막으면서 오히려 날아온 팔다리를 휘감아 가는가 하면, 밀착하듯 청의 소년에게로 들러붙으면서 뱀이 먹이를 채듯 순간적으로 허리, 가슴의 급소를 노리고 목과 턱밑을 쳐 가는 등 상당한 기량을 과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위력은 그렇다 쳐도 역시 쉽게 생각할 실력이 아닌 것.
 “이야!”
 “최고다, 진혁대장! 해치워 버려! 호권은 사권에 비할 바가 아니니까!”
 차고, 막고, 지르고, 찍고, 휘어 감고! 두 소년은 한 덩어리가 되다시피 휘돌아 가며 삽시간에 이삼십 합이 넘게 공방을 주고받았고, 묘기가 나올 때마다 둘러선 아이들은 입에 거품을 물고 기성을 토했다.
 자신들의 대장이어서가 아니라 그만치 두 소년의 기량이 상당했던 것이다.
 그러나 호권은 사권에 비할 바가 아니라는 말이 나오고 있듯이 백중지세라 보기는 어려웠다.
 호권이 약하거나 청의 소년의 수련도가 떨어져서가 아니라 천하의 모든 무예에는 극성이라는 게 있었는데, 호권에게는 바로 이 사권이 극성이기 때문이었다.
 특성을 설명했듯 청의 소년이 전개하는 호권은 힘과 속도를 위주로 한 강력한 차기와 정권 공격이 특징이었는데 사권에게는 우선 차기가 잘 먹혀들어 가지 않았다.
 까닭은 사권의 자세가 다리를 크게 벌려 구부린 낮은 기마 자세이기 때문이었다.
 같이 선 높이라면 휘둘러 차기를 비롯한 옆차기, 뛰어차기 등 갖가지 각법이 큰 효과를 보겠지만 상대의 자세가 낮으므로 무효한 차기가 여럿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 뱀이 머리를 세워 흔들 듯 순간순간 전 굴기, 후 굴기 등으로 유동성 있게 자세를 바꿔 가며 공수를 겸하므로 이래도저래도 각법으로는 공략하기 까다로운 권법.
 더욱이 구부린 손으로 방어와 함께 휘어 감고, 찍고, 낮은 자세에서 순간적으로 회전하며 발을 후리기까지 함으로 서툴게 공격하다가는 바로 역습을 당해 나뒹굴게 되어 있었다.
 그러면 남은 것은 정권 공격인데, 이 역시 사권의 앞에서는 그리 힘을 쓸 수 없었다.
 남권과 유사하다 했듯 사권의 특징이 발보다 손을 위주로 하는 권법이라 휘어 감고, 치고, 찍기까지 하는 갖가지 수법이 있어 지르고 후려치는 단순한 정권보다 훨씬 정교한 면이 있기 때문이었다.
 자칫 서툴게 주먹을 날리거나 하다가는 역시 구부린 손목에 휘감겨 역습을 당하게 된다.
 그대로 독니를 가진 뱀의 머리이자 낫이라 생각하면 되는 것이었다.
 “야아압!”
 파파파파!
 “흡······!”
 이런 문제점들로 인해 오래잖아 청의 소년 역시 섣불리 공격을 감행해 가지 못하게 되었고, 더불어 백의 소년의 기세가 살아나기 시작했다.
 공격이 머뭇하자 집요하게 청의 소년을 따라붙으며 뱀 같은 손끝으로 급소를 노리고 발을 휘저어 다리를 후리는 등 계속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청의 소년이 아주 밀리는 것은 아니었다.
 연방 쉭쉭대며 코끝을 스치는 독니 같은 손.
 극성이라 할 사권을 만나 과감히 공격을 해 갈 수는 없었지만 나름대로 몸을 좌우로 흔들어 백의 소년의 공격을 피하는 등 순간적인 발차기로 역습을 가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나 백의 소년이 기선을 잡고 있는 것만은 확실했다.
 잘 버티긴 했지만 청의 소년이 하고 있는 것은 숙련도에 의지한 임기응변인 반면, 백의 소년은 확실한 술수로 승기를 잡아 마음 놓고 공격을 감행하고 있었으므로 이대로라면 역시 패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청의 소년으로서도 승부수를 던져야만 했고, 결국 정면 승부를 내기로 결심을 한 것 같았다.
 “야압!”
 파파파파!
 각법을 포기하고 속도에 의지한 정권 공격으로 맞붙다시피 하여 백의 소년의 사권에 정면으로 맞서기 시작한 것이다.
 “하!”
 파파팍!
 “흡······?”
 그러나 다시 이야기해도 두 권법의 특성상 주먹만을 쓰는 것이라면 호권은 사권을 능가하기 어려웠다.
 입증이라도 하듯 청의 소년이 정면으로 맞서 주먹을 퍼부어 오자 기다렸다는 듯 백의 소년은 후굴기로 상체를 뒤로 빼 피하는가 싶더니 순간적으로 전굴기로 전진, 휘익! 번개같이 구부린 오른손을 안에서 바깥쪽으로 휘저어 날아든 청의 소년의 팔을 휘감아 냈다.
 사권의 특징으로서 청의 소년의 한 팔을 제압한 것이다.
 여기에서 그가 팔을 꺾거나 발을 후리거나 할 것 같으면 청의 소년은 꼼짝없이 당하고 마는 것이다.
 하지만 이때, 실로 괴상한 일이 생겼다.
 팔을 제압당한 만큼 놀라야 할 것은 분명히 청의 소년이어야 할 것인데, 오히려 백의 소년이 눈이 휘둥그레지며 짧은 경악성을 토했던 것이다.
 그러나 팔이 휘감긴 형태를 보면 그다지 이상할 게 없었다.
 전광석화 같은 순간이었지만 백의 소년이 팔을 휘감는 찰나 청의 소년이 실로 예상 밖이라 할 변화수를 썼던 것이다.
 휘감기에 역휘감기.
 질러 간 것은 주먹이었지만, 백의 소년이 팔을 휘감음과 함께 쳐 갔던 주먹을 느닷없이 권拳에서 조爪로 바꿔 휘휙, 감고 들었던 백의 소년의 팔을 휘돌리듯 한 바퀴 더 감아 꽉! 오히려 역으로 그의 팔을 갈고리같이 움켜잡았던 것이다.
 “하아압!”
 하지만 문제는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이대로라도 팔을 제압당한 것은 백의 소년이 되는 셈이었는데, 그러고도 청의 소년의 수법은 다 끝나지 않아 한 호흡에 발끝으로 땅을 차며 백의 소년의 팔을 낀 채 휘익! 그대로 번개 같은 앞 곤두를 친 것이었다.
 차륜맹전車輪猛轉!
 우드드득!
 “악!”
 “으앗······!”
 찰나 찌르는 듯한 비명과 함께 여기저기서 경악성이 터지면서 실로 작지 않은 소동이 벌어졌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게 휘감은 상대의 팔을 끼고 몸을 곤두박질쳤으니 백의 소년의 상태가 어떻게 되겠는가?
 팔이 으스러지는 섬뜩한 소리! 비명과 함께 백의 소년은 그대로 팔이 한 바퀴 비틀려 맥없이 쓰러져 나뒹굴었다.
 분명히 살초였다. 상대에게 치명상을 입히는 착골분근錯骨分筋의 수법 중 하나.
 “아······!”
 입증이라도 하듯 쓰러진 백의 소년은 얼굴이 파랗게 변해 신음조차 제대로 못 내고 바닥을 기고 있었는데 휘감겼던 팔이 맥없이 축 늘어진 채 멋대로 덜렁대고 있었다.
 “팔······팔이 부러졌다!”
 더불어 보고 있던 아이들이 우르르 주위로 몰려와 사색이 된 채 마구 소리를 질러 대기 시작했고.
 “진혁아!”
 그러나 누구보다 이 자리에서 놀란 사람은 다름 아닌 청의 소년 같았다.
 기고 있는 백의 소년 못지않게 낯빛이 파랗게 변해 마구 소리를 지르며 그를 끌어안았다.
 “몰랐어! 미안해. 설마 이게!”
 밀리는 싸움을 하다가 경험 없이 어떤 초식을 전개했던 것 같은 눈치로 이런 결과가 생길 줄 몰랐던 듯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백의 소년의 팔은 이미 축 늘어져 있고, 그야말로 숨이 멎는 듯한 표정이 되었다.
 한데 이때였다.
 “녀석들이 위험한 장난을 하고 있구나. 비켜 보거라.”
 “앗······!”
 가뜩이나 경악과 당황스러움으로 어쩔 줄 몰라 하던 아이들에게 더욱 당황스러운 일이 벌어졌다.
 법석을 떨던 뒤쪽에서 중후한 음성과 함께 예기치 못했던 두 개의 커다란 인영이 나타났던 것이다.
 앞장선 사람은 육 척의 후리후리한 키에 짧고 단정한 수염을 기른 남색 장삼을 입은 청수한 풍도를 지닌 마흔 살가량의 중년인이었고, 뒤쪽에 선 사람은 또한 비슷한 나이에 고슴도치 수염의 위맹한 모습을 한 대한이었다.
 두 사람을 본 아이들의 표정은 더욱 백지장이 되었다.
 “장주님이다!”
 “으아······!”
 누구라 할 것도 없이 소리를 지르며 뿔뿔이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치기 시작했다.
 자신들이 한 것은 아니지만 백의 소년의 팔이 그렇게 된 상태에 어른들이 나타났으니 놀랄밖에도 없다. 청의 소년의 경우는 아예 도망치지도 못한 채 완전히 고드름이 되어 버렸고.
 그러나 중년인은 꾸짖을 생각을 하지 않고 먼저 쓰러져 기고 있는 백의 소년의 상태부터 살폈다.
 “조금만 더 돌아갔으면 큰일 날 뻔했군.”
 그러고는 두어 번 고개를 끄덕이더니 늘어진 백의 소년의 팔을 잡아 우드득, 다시 비틀었다.
 “악!”
 순간 백의 소년은 지독한 고통에 한 번 더 자지러지는 비명을 내뱉고 말았는데 그래도 다행한 일이 생겼다.
 부러진 줄 알았던 팔이 탈구만 되었던 듯 다시 원위치에 맞춰졌던 것이다.
 그래도 어깨가 크게 부어오르고 있어 들쳐 안아 고슴도치 수염의 장한에게 맡겼다.
 “의원에게 데려가게. 심하게 비틀려 인대를 다쳤어. 침을 맞히고 탕약을 지어 먹이게.”
 “명.”
 장한은 백의 소년을 안고 바로 신형을 솟구쳐 멀찍이 보이는 장원으로 쏘아 갔다.
 비로소 중년인은 시선을 청의 소년에게로 돌렸다.
 “이름이 어떻게 되느냐?”
 “양······양강······!”
 청의 소년은 완전히 얼굴이 파랗게 되어 고개조차 들지 못하고 있었다. 분명히 날벼락이 떨어질 차례인 것이다.
 하지만 중년인은 여전히 나무랄 생각이 없다는 듯 부드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계속 물었다.
 “몇 살이냐?”
 “아홉 살······!”
 “보기보다 어리구나.”
 중년인은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데 그의 다음 말.
 “분명히 공동의 음풍조陰風爪였다. 독응회전毒鷹回轉의 수법이지. 너는 그 수법을 누구에게 배웠느냐?”
 실로 대단한 이야기가 나왔다.
 공동의 음풍조!
 정확히 청의 소년이 손을 쓰는 것을 보고 묻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것은 실로 예사의 무예가 아니었다.
 강호 무림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공동파가 칠대문파에 속해 있음을 알 것이지만, 예부터 공동의 무예는 칠대문파 중에서도 독랄하기로 소문이 나 있었다.
 도를 닦는 선도가禪道家의 하나인 곳이었지만 어울리지 않게 무예 자체는 사도邪道에 가까울 정도로 독랄했던 것이다.
 까닭은 방파의 생성에 있었다.
 소림이나 무당 등 다른 칠 파들은 모두 특정한 어느 한 인물이 중심이 되어 방파가 세워졌지만 공동파는 특정한 조사祖師가 없었던 것.
 다소 복잡한 내력을 지닌 곳으로서, 정확히 기원을 말하자면 공동파는 감숙의 공동산에 위치해 있고, 정기가 높다 알려진 이 산에는 고래古來로 많은 기인이사들과 도인들이 칩거하며 수양을 쌓았다.
 도중 수양을 쌓던 인물들 간에 하나둘 친분이 생기기 시작해 차를 마시고 자리를 같이하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큰 줄기를 이뤄 창파된 것이 공동파였던 것이다.
 시작조차 차를 마시던 산꼭대기의 작은 정자였다.
 이렇다 보니 일반의 정통 도가와는 상당한 차이점이 있어 공동파는 시작부터 정사正邪에 대한 특별한 관념이 없었다.
 선線이 굵다고 해야 할지, 문파를 세웠으되 여타의 도가처럼 한길에 집착하지 않고, 각처에서 오는 인물들을 맞아들여 제각기 추구하는 의지에 따라 자유분방하게 수양을 쌓을 수 있게 했던 것이다.
 도가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유儒, 불佛, 도道의 구분 역시 없었다.
 이로 인해 지향하는 바와 학문의 폭이 대단히 넓고 다양해, 일반 잡학에서부터 천문술수, 지리역학, 음양팔괘, 기문둔갑에 이르기까지 각종 학문이 다 소장되어 있다는 소문도 있었고 이념조차 만류귀종이었다.
 세상의 학문 중 버릴 것은 하나도 없고 마지막에 가서는 모두가 하나가 된다는 이념이었다.
 따라서 무예 역시 대단히 방대하고 복잡했다.
 각계의 이인들이 합심해 세운 곳이라 정파에서부터 사파의 것에 이르기까지 온갖 무예가 다 있었으며, 이를 집대성시켜 만든 것이 저 유명한 혼원일기공混元一氣功을 비롯한 소양공小陽功, 음풍조陰風爪, 단망인斷網印, 초상비草上飛, 위타복마검법衛陀伏魔劍法, 팔보간선八步趕蟬 등으로서, 사도의 것까지 인용되어 지극히 독랄한 점이 있었던 것이다.
 당연히 소림, 무당의 절기에도 밀리지 않았다.
 출범할 당시부터 모인 인물들 중에는 소림, 무당의 기예를 지닌 기인들도 많았고, 이를 응용해 창안한 무공들인 터라―정확히 파훼식이 된다― 서툴게 맞섰다가는 바로 허를 찔려 격패당할 정도였던 것이다.
 일러 청의 소년이 사용한 것이 음풍조라면 맹금猛禽들이 먹이 사냥하는 것을 바탕으로 한 응조수들을 복합해 만든 것으로써, 사권에 있어서는 완전히 파훼식이나 같았으므로 백의 소년이 당한 것은 당연하다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공동파에서는 여간해 이 무예들을 속가에 전하지 않았다. 독랄하기도 하거니와 이런 문제점으로 인해 한동안 천하 각 파와 시비가 생겼을 정도로써, 지금도 걸핏하면 논란이 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청의 소년은 대체 누구에게 이 수법을 배웠을까.
 “그건······ 그건······!”
 파랗게 변한 표정으로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런 그를 보며 중년인은 계속 온화하게 물었다.
 “괜찮으니 말해 보거라. 꾸짖지 않겠다.”
 그러자 비로소 청의 소년은 울 듯한 표정으로 대답을 했는데, 더불어 실로 뜻밖의 말이 나왔다.
 “장주님에게서······!”
 “뭐라?”
 순간 중년인의 표정이 얼떨떨하게 변했다.
 “무슨 소리냐? 마을이 머니 우리 양천장의 아이임에 틀림없을 것인데, 설마 나를 이야기하는 것이냐?”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이 되었지만 그러나 청의 소년은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석 달 전 위사님들께 시범을 보이실 때······ 연무장을 쓸고 있어서······!”
 “뭐?”
 순간 중년인의 표정이 더욱 얼떨떨해졌다.
 석 달 전.
 그러고 보니 그런 적이 있었던 것 같았다.
 전개한 것을 한눈에 알아봤듯 실제 그는 이 무예를 잘 알고 있었고, 당시 수하들을 가르치며 각파 무예의 장단점을 비교해 시전해 보인 적이 있었던 터인데 그것을 훔쳐 배웠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중년인은 믿기지 않았다. 그때 자신은 이 무예를 딱 한 번 시전해 보였기 때문이다.
 대단히 복잡한 술수로서 한 번 본 것으로 습득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해가 가지 않는데 사실이란 말이냐?”
 “예.”
 “허허!”
 중년인은 자신도 모르게 너털웃음 짓고 말았다. 설마 아홉 살 된 아이가 자신의 앞에서 거짓말을 할 리도 없고, 역시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니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러면 그렇다고 치고, 몇 수나 배웠느냐?”
 “사 식 이십사 초 모두······!”
 “허허허!”
 중년인은 다시 웃었다. 더욱 믿기지 않는다.
 “한 번 보여 준 것으로 전부를 배웠다는 소린데, 어디 한번 해 보거라. 절대 혼내거나 하지 않겠다.”
 “그럼······!”
 그러자 청의 소년은 잔뜩 망설이는 모습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서서 괴이한 자세를 잡았다.
 다리를 어깨너비로 벌린 후 손을 갈고리처럼 해 오른팔은 하늘로, 왼팔은 땅으로 해 독수리가 날개를 펼치듯 비스듬히 대각선의 대칭을 이룬 자세.
 그대로 매가 나는 모습과 같다.
 더불어 몸을 움직여 가며 유연히 양손을 놀리기 시작했는데, 그 또한 신비롭다.
 휘돌리고, 움켜쥐고, 찍고, 할퀴고, 내리치고.
 또한 맹금들이 자유롭게 하늘을 날며 먹이를 채거나 싸우는 듯한 모습으로서, 발과 몸도 함께 움직였다
 순간순간 휘돌고, 찍고, 백의 소년과 대결할 때 보여 줬듯 앞 곤두, 뒤 곤두에 순간적으로 옆 곤두를 치기까지 했다.
 역시 자유롭게 허공을 날며 싸우는 맹금들의 모습이다.
 “허······!”
 끝나기까지 무려 반 각이 걸렸는데, 결국 중년인의 얼굴이 놀란 빛으로 가득 찼다.
 완전한 것은 아니었지만 전개하고 있는 것은 분명히 공동의 음풍조였던 것이다.
 훔쳐 배웠다는 게 사실인 듯했다.
 그러나 보다 문제는 펼쳐진 게 자그마치 반 각이란 점인데, 느린 동작으로 했다 쳐도 반 각에 걸쳐 펼쳐지는 복잡한 수법을 한 번 보는 것으로 습득했다는 것이 역시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
 이해가 가지 않아 한번 시험해 보기로 했다.
 “대단하구나. 분명히 음풍조다. 수리들이 사냥하는 것을 토대로 만들어진 각 각파의 응조수鷹爪手들을 복합해 창안된 대단히 정교한 무예지.”
 자리에서 일어나 다리를 어깨너비로 벌렸다.
 “모두 칠 식 사십이 초이고, 전 사식과 후 삼식으로 되어 있다. 네가 본 것은 전 사식이다. 잘 보도록 해라.”
 더불어 느릿한 동작으로 움직이며 그 역시 손을 갈고리같이 해 휘젓기 시작했다.
 움켜잡고, 비틀고, 찍고, 밀고 당기는 등의 동작들이 청의 소년이 한 것보다 훨씬 더 복잡했다.
 발과 다리 역시 함께 움직였는데 걸고, 차고, 찍고, 똑같이 앞 곤두, 뒤 곤두에 도약까지 모두 들어가 있었다.
 시전한 시각은 청의 소년이 한 것과 비슷한 반 각 정도.
 청의 소년은 집중해 눈을 반짝이며 그가 하는 것을 봤다.
 시전을 마친 중년인은 다시 물었다.
 “이게 후 삼식이다. 총 십팔 초로 전 사식보다 짧지만 훨씬 변화가 많고 복잡하지. 얼마나 외웠느냐?”
 묻는 자체가 우습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희한치도 않게! 집중해 봤던 청의 소년은 또 뜻밖의 대답을 했다.
 “거의······.”
 중년인은 그만 골이 띵해졌다.
 “해 봐라!”
 “예.”
 순간 정말 웃기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해 보라는 말과 함께 청의 소년은 곧 중년인이 했던 몸짓을 하기 시작했던 것인데, 말도 안 되게 이 동작이 진짜 그가 한 것과 비슷한 것이다.
 완전하지는 않았지만 거의 유사하다 할 정도로 시늉을 하고 있었던 것!
 “허허허······!”
 보고 있던 중년인은 그만 자신도 모르게 또 너털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직접 보면서도 믿기지 않았다.
 표정이 굳어진 채 다시 말했다.
 “유사하다. 하지만 정확하지 않다. 이리 오너라. 한 번 더 해 보자꾸나.”
 더불어 청의 소년을 불러들여 앞에 세운 후 끌어안듯 뒤에서 양손을 잡고 천천히 함께 움직이기 시작했다.
 자세와 틀린 점을 바로잡아 주면서 일식에서부터 칠식까지 모두를 다시 한 번 펼치게 한 것이다.
 그런 후 심각하게 말했다.
 “이제 다시 해 보거라. 느리게 하지 않아도 좋다. 최대한 빠르게 해 봐라.”
 “합!”
 파앗!
 순간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아니, 중년인은 기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청의 소년은 바로 힘찬 기합과 함께 음풍조를 전개하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이번에는 진짜 완벽하다.
 빠르게 몸을 놀리며 전개하기 시작하자 휙휙 소리와 함께 주위가 온통 매화꽃 같은 조영爪影으로 가득할 정도다.
 ‘기재구나!’
 비로소 중년인은 자신이 천하의 기재를 찾았음을 알았다.
 좀 더 재능을 시험해 보고 싶어졌다.
 “어디, 그러면 이번에는 이것도 한번 보거라.”
 더불어 그는 또 다른 수법을 시전해 보이기 시작했다.
 기괴하기 그지없는 보법步法으로 나아가는 듯 물러서고 물러서는 듯 전진하며, 좌로 우로, 어디로 갈지 모르겠다는 듯 갈팡질팡하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하는 괴상한 보법!
 총 여덟 걸음으로 원을 그렸는데, 나아가든 물러서든 돌아가든 한결같이 우물쭈물하고 멈칫거려 대체 왜 저러나 하는 의문이 들 정도의 것으로써, 워낙 동작이 그렇다 보니 이것은 오히려 음풍조보다 외우기가 더 어렵다.
 어디서 멈칫대고 우물거리는지 순서를 잘 모를 정도.
 하지만 결과에 가서는!
 “어떠냐, 이것은? 외울 수 있겠느냐?”
 “굉장히 복잡하지만 대강······!”
 역시 놀라운 일이 생겼다.
 집중해서 본 청의 소년은 그의 동작을 되새기며 움직이기 시작했는데 이게 또 거의 유사했던 것이다.
 “팔보간선八步趕蟬이라 한다! 버마재비가 매미를 잡는 것에서 착상된 보법으로 특별한 무엇이 있어 보이지는 않을 것이지만 각종 무예에 응용할 수 있고 강적을 만나 몸을 지킬 수 있는 보법이다! ‘창파 이래 공동이 자랑할 것은 오직 이뿐’이라 할 정도의 보법이지.”
 결국 중년인은 찬탄성을 터뜨렸다.
 저도 모르게 또 틀린 점을 바로잡아 주며 심각한 표정이 되어 물었다.
 “공동파는 원래 소림이나 무당보다 더 진산절기를 전하지 않는다. 지극히 신랄해 거의가 살수에 속하기 때문이다. 장난이라도 함부로 써서는 안 되는 것이지. 무예를 좋아하는 것 같은데, 바르게 배워 볼 생각이 있느냐?”
 “배우고는 싶지만······!”
 울 듯했던 청의 소년의 표정이 어느새 많이 풀려 있었다.
 그러나 우물쭈물, 질문에 대답하지 못한 채 꾸벅 인사를 하고는 쌩! 언덕 쪽으로 도망치고 말았다.
 “흠.”
 중년인은 구태여 잡지 않았다.
 어차피 양천장의 아이라면 찾기 어렵지 않은 것이다.
 비로소 시선을 저만치 측면으로 돌리며 누군가를 불렀다.
 “군아君兒.”
 “응!”
 그러자 뜻밖이라면 또 뜻밖의 일이 생겼다.
 도망친 남자아이들과는 달리 시선을 돌린 곳에는 아직도 옹기종기 여자아이들이 서서 이쪽을 보고 있었는데 부르자 홀로 있던 그 옥색 단삼 소녀가 쌩 하고 달려온 것이다.
 “멀리 나오지 말라고 했는데, 또 엄마를 걱정시키는구나.”
 중년인은 소녀를 안아 어깨에 걸터앉히며 물었다.
 “아까 그 아이, 아는 아이이냐?”
 소녀는 눈을 초롱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마사를 돌보는 양정 할아버지의 손자야.”
 “마사?”
 중년인은 다시 멈칫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일찌감치 마사부 이야기가 나왔듯 단삼 소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애들의 대장이고 굉장히 머리도 좋아. 학관에서 나이 많은 오빠들하고 사서四書를 읽어.”
 아홉 살에 사서.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중년인은 당연하다 생각했다.
 단번에 팔보간선을 암기했을 정도의 기억력을 가진 소년 아닌가. 픽, 실소 지으며 장원 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서둘러 양정을 만나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의 이름이 려지원이었다.
 천하에 대명이 자자한 동사東士.
 단삼 소녀는 그의 딸로서 려문군黎文君이라 했는데 그를 찾으러 나왔다가 청의 소년을 발견하게 된 것이었다.
 
 반 시진 후.
 “장주님.”
 “어서 오십시오, 양 노인.”
 장원으로 돌아온 려지원은 곧 사람을 보내 양정을 청했다.
 “마사에 갈 때마다 뵈면서도 청한 것은 처음 같군요. 오시게 한 것은 중한 이야기를 좀 나누었으면 싶어서입니다. 슬하에 양강이라는 손자가 있으시지요?”
 양정은 오순 후반의 순하게 생긴 노인이었다. 손자의 이름을 거론하자 크게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분명히 소인의 손자입니다. 혹시 무슨 실수라도 저질렀사온지?”
 려지원은 포권을 취해 보였다.
 “아닙니다. 우연히 바깥에서 노는 걸 보았는데 기재라 할 정도로 똑똑하더군요. 무예에 특출한 재질을 지닌 듯하여 거두어 큰 인물로 만들었으면 하는 마음이 들어 청한 것입니다. 보잘것없는 사람이나마 제게 맡겨 주시지 않으시겠는지요?”
 천하의 동사 려지원이 손주를 제자로 맞이하고 싶다고 한 것이었다.
 명성도 그렇고 누구라도 기뻐할 듯한 일인 것.
 하지만 뜻밖의 일이 있었다.
 양정의 반응이 별로였던 것이다. 이야기를 듣고 멈칫하는 표정을 짓는가 싶더니 무겁게 허리를 숙였다.
 “배려는 감사하지만 바라는 바가 아닙니다. 무림은 워낙 험한 세계이오라. 소인은 강이가 학자가 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양천장으로 오기도 한 것이옵고요.”
 “학자로 키우기 위해 양천장으로 온 것이라고요?”
 특이한 이야기를 한 것이다.
 그러나 양정의 다음 말로 까닭은 이해되었다.
 “원래 삼강진三崗鎭에 살았었습니다. 오 년 전 혈적랑 무리의 습격으로 마을이 타 버렸사온데, 그때 아들 내외도 화를 당했습지요. 그렇다 보니 혼자 벌어 공부를 시키기 어렵더군요. 하지만 양천장은 무료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고, 그로 인해 취직해 마사를 돌보게 된 것입니다.”
 종이 한 장이 쌀 한 말 가격인 세상이었다. 여간하지 않고서는 글공부를 하기 쉽지 않았는데, 성에서 떨어져 생활하는 특성으로 무림 방파들은 대부분 내부에 학당을 두고 훈장을 초빙해 아이들을 가르쳤고, 양천장도 그랬다.
 어쨌건 화적의 습격으로 아들 내외까지 죽었다니 손자를 무림인으로 만들 마음이 없을 것은 더욱 확실하다.
 려지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포권을 취해 보였다.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무예를 익힌다고 반드시 무림인이 된다는 법은 없지 않겠습니까. 천하에는 절기를 지니고도 드러내지 않고 지내는 이인들이 부지기수로 많고, 문무를 겸비한 재자들 역시 모래알처럼 많습니다. 진정으로 손자를 위하신다면 문무를 겸하게 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저 역시 무림인으로 만들고자 하는 뜻은 아닙니다.”
 틀리는 말은 아니었다.
 그래도 양정은 선뜻 대답하지 못했는데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언제가 되어도 송곳은 주머니를 뚫고 튀어나오게 마련, 당사자는 평범히 살고자 해도 실력을 가진 한 세상이 그냥 두지 않았다.
 그러나 청하는 게 장주인 만큼······.
 “생각해 보겠습니다. 강이의 의향도 물어봐야 할 것 같사오니 시간을 좀 주셨으면 합니다.”
 내키지 않았으나 양정은 일단 허리를 숙여 보였고 려지원 역시 서두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대답 기다리겠습니다. 다시 일러도 특출한 재능이 보이거니와, 자칫 사인들의 눈에 띄거나 그릇된 길을 가게 되면 크게 후회할 일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기 전에 바르게 가르쳐 정도를 걷게 하는 게 옳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역시 틀리는 말은 아니었다.
 양정은 손자가 무예를 배움으로 일어날 문제들을 우려하고 있었지만 당장만 해도 그는 놀이 도중 타의 팔을 으스러뜨릴 뻔한 상태가 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하아압!”
 쉭쉭쉭······!
 입증이라도 하듯 같은 시각, 소년 양강은 유감없이 계속 재능을 보이고 있었다.
 려지원에게서 도망친 그는 언덕배기 위, 놀이 삼아 만든 진지에 있었는데, 쉬지 않고 음풍조를 반복해 연습하고 있었다.
 처음의 것은 완전하지 않았던 전 사식, 바르게 교정된 속에 후 삼식까지 마저 배우게 됨으로 잊기 전에 습득하고자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던 것.
 변함없이 손발을 놀릴 때마다 주위에는 무수한 조영爪影들이 매화꽃이 바람에 휘날리듯 일어났다.
 대단한 일로서, 화북華北에 위치한 상당수의 방파들이 그러하듯 원래 양천장의 특기할 무예는 북퇴였다.
 려지원이 오기 전부터 있었던 곳이라 화북 무림 대부분의 방파들과 유사하게 소림사의 영향을 받아 나한권과 복마검을 인용한 검법을 수련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코 쉽게 생각할 무예가 아니었다.
 나한권만 해도 용, 호, 사, 학, 표, 다섯으로 되어 있었고, 제대로 습득하면 음풍조보다 못하다고 할 수 없었다.
 사권이 조수보다 약세라 백의 소년이 당했다 해도 다섯 중에는 용권이 있었다. 같은 조수로서 다섯 권을 모두 응용하면 어떤 승부가 벌어진지 모른다.
 다만 소림사에서도 진산절예를 속가에 유출하지 않아 정수인가 하는 게 문제일 뿐.
 비교해 지금 양강이 펼치고 있는 것은 수식이 완전히 갖춰진 절기인 것이라 큰 조화를 보이고 있었던 것.
 보다 대단한 것은 역시 양강이라는 이 소년의 재질이었다.
 아홉 살의 나이로 이런 복잡한 무예를 이해하고 수련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는데 한번 훔쳐본 것으로 받아들였고, 실전에 응용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려지원이 제자로 받아들일 생각까지 한 것이겠지만 분명히 적잖은 기재성이 있는 게 확실한 것이다.
 “앗!”
 와당탕······!
 하지만 팔보간선만큼은 제대로 되지 않았다.
 반복해서 음풍조를 연습한 양강은 계속해서 이 보법을 연습하기 시작했는데, 동작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던 것이다.
 나아가는 듯 물러서고 물러서는 듯 나아가며, 좌로 우로 우물쭈물, 갈팡질팡하는 움직임들이 보통 힘든 게 아니었던 것.
 조금만 빠르게 하다 보면 발이 꼬여 넘어지곤 했는데, 모르는 사람이 보면 술에 취해 중심을 잃고 어디로 갈지 모르는 채 비틀거리는 주정꾼의 모습과 같다.
 그러나 ‘창파 이래 공동파가 자랑할 것은 오직 이뿐’이라 한다 했듯 실제 이 보법의 효능은 대단했다.
 기억하고 하면서도 제대로 해내지 못하고 넘어질 정도로 난해한 이 보법은 완전해지면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진퇴를 자유자재로 바꿨다.
 좌로 우로, 나아가다가도 물러서고 돌다가도 언제든 역회전이 가능했다.
 우물쭈물 갈팡질팡하는 듯한 동작에 묘가 있었다. 중간 중간에 경계 시점을 넣어 언제건 방향을 바꿀 수 있게 했던 것이다. 그런 만큼 적에게 있어서는 나아갈지 물러설지, 좌로 돌지 우로 돌지 종잡을 수 없게 하는 점이 있었고.
 허虛 중에 실實이 있고 실 중에 허가 있는 보법으로 숙련된 당사자는 바람처럼 진퇴가 자유롭지만 적으로서는 상대가 어떻게 움직일지 예측조차 하기 어려운 보법인 것이다.
 이로 인해 무림인들은 누구나 이 보법을 얻기를 갈망했고, 또한 많은 무림인들이 사용하기도 했지만, 그러나 시늉일 뿐 정수는 거의 없었다. 공동에서 최고라 할 진산절기를 내놓을 리 없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이 역시 정수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진짜일 경우라면 이 소년은 공동 최고의 절기 두 가지를 얻은 셈이다. 어리긴 했지만 그 역시 이 보법의 가치를 알아낸 것 같았다.
 “세상에 이렇게 힘든 보법이 있다니. 시늉하는 것조차 이렇게 어려운데 완벽해지면 누가 움직임을 간파할 수 있을까.”
 하면 할수록 어려운 느낌이 드는 보법에 빠져 열 번, 스무 번, 끊임없이 연습했고 해가 저물 때서야 움직임을 멈췄다.
 송송 얼굴에 맺힌 땀방울.
 “다 필요 없어. 진짜 이거 하나면 돼. 사마귀의 움직임을 보고 만들었다니 그들이 정말 이렇게 움직이는 걸까? 찾아서 직접 좀 봐야겠어.”
 처음보다는 익숙해져 있었지만 해 봤자 고작 기본이었다.
 정해진 기본을 곧이곧대로 시늉만 하는 것으로서, 제대로 체득하려면 수년은 걸릴 것 같다고 생각하며 연방 고개를 갸웃거렸다.
 묘하지만 이즈음 음풍조에 대한 관심은 흔적조차 없었다.
 
 애가 끓는 듯한 심정.
 양정이 문제점을 깨닫게 된 것은 려지원을 만난 지 이각이 지나지 않아서였다.
 “녀석아, 대체 어쩌려고 네가······!”
 려지원을 만나고 마사로 오자 당주로 있는 서문식이란 인물이 찾아와 크게 주의를 주고 갔던 것인데, 백의 소년의 부친이었다.
 아이들 간의 장난이라 해도 팔이 골절되는 등 심줄을 다쳐 어깨가 퉁퉁 부어서 온 아들을 보고 좋아할 사람이 없는 만큼 주의를 당부했던 것.
 “잘못했어요, 할아버지······!”
 비로소 양정은 어려도 손자가 무예를 지닌 것을 알았다.
 아이들과 칼싸움 놀이 따위를 하곤 하는 것을 보았으므로 아주 모르지는 않았지만 정도가 넘어 있었던 것으로 왜 려지원이 불렀던 것인지 안 것이다.
 어둑해서 양강이 돌아오자 나무라기 시작했고, 양강은 양강대로 코가 쑥, 빠졌다.
 “이야기해 보거라. 장난이라도 서 당주 아들의 팔을 그 정도로 꺾어 놓았다는 것은 예삿일이 아닌데, 언제부터 무예를 수련하기 시작한 것이냐?”
 양강은 다시 울 듯한 표정이 되었다.
 “재작년 초부터······ 애들이 모두 하고 있어요. 학관에서 놀 때도 하고, 밖에서도 해요. 그래서······ 연무장 청소를 하면서 틈틈이 훔쳐보고 배웠어요.”
 “배워 쓸모가 없는 것이거늘.”
 양정은 크게 한탄했다.
 그러나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라고 했다.
 조부인 사람이 손자의 총기를 모를 리 없고, 가진 게 없어 공부를 가르치고자 왔지만 하필 무가였던 것이다.
 무가가 아니라도 남자아이들은 흔히 칼싸움이나 전쟁놀이를 하곤 하는 터인데, 이런 아이들이 어른들이 하는 것을 시늉하지 않을 리 없었다.
 멀리하게 하자면 양천장을 떠나야 했는데 그러자면 또 공부를 시키기가 어렵다. 그렇다면 역시 려지원의 말에 따르는 게 옳지 않을까.
 천하에 흉흉한 게 무림인 만큼 배우지 않았으면 했지만 이미 넘치기 시작한 것, 바르게 가르쳐 문무文武를 겸비한 재사로 키우는 것이 옳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하에 이름 높은 려지원이라면 사실 스승으로 훌륭했고.
 애가 끓었지만 나무라는 것을 그만두고 무겁게 물었다.
 “낮에 장주님께서 부르셨었다. 너를 제자로 거두었으면 하는 말씀을 하시더구나. 솔직히 말해 보거라. 무예를 배우고 싶으냐?”
 조부의 표정이 너무 어두우므로 양강은 계속 울 듯한 심정이었지만 솔직하게 대답했다.
 “사실 좋긴 해요. 하다 보면 새가 되어 날아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거든요. 신이 나고 세상과 하나가 되는 것 같은 느낌까지 들어요.”
 몰아沒我.
 속이 탔지만 양정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아침 장주님께로 가거라. 그러나 무림인은 안 된다. 살벌한 곳이라 무슨 일이 생길지 알 수 없지. 보다 글공부에 치중해 포숙아鮑叔牙 같은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구나.”
 관중管仲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제나라의 유명한 현사들로서 우정이 두터워 관포지교管鮑之交라는 말까지 나왔을 정도인 친구들.
 관중은 문무, 용맹을 겸비해 바탕으로 환공을 섬겨 천하를 제패하는 위업을 세웠지만 포숙아는 온건한 문사였다.
 그러나 관중의 삶은 언제나 위험해 많은 어려움을 넘긴 반면, 포숙아는 어진 마음으로 무난한 삶을 살며 여러 차례 죽을 고비에 처한 관중을 구해 주기까지 했다.
 마침내 출세도는 관중이 훨씬 높아졌으나 양정이 그를 말하지 않은 것은 손자가 험한 일에 휩쓸리지 않고 무난한 삶을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 아니었을까.
 “그렇게 하겠어요. 반드시 글공부에 더 열중할게요.”
 뜻을 헤아렸는지 알 수 없지만 양강도 그러겠노라 약속했다.
 좋아하면서도 려지원이 무예를 배우겠느냐 물었을 때 우물쭈물했던 까닭을 양정에게서 찾을 수 있었다.
 
 
 
 #양천장의 혈겁
 
 
 
 
 밤.
 그러나 세상의 일이란 마음 같지가 않다.
 그대로라면 려지원은 빼어난 제자를 얻고 양강은 문무를 겸비한 현사가 될 길이 열렸을 것이지만 이 밤, 실로 생각지도 못한 사악한 일이 벌어졌다.
 이경 무렵이었다.
 모두가 잠든 시각, 낮까지만 해도 맑은 날씨였으나 비가 오려는지 어두워지면서부터 구름이 밀려와 주위는 칠흑같이 어두웠다.
 양천장 역시 어둠 속에 휩싸여 있었다.
 밤이라도 은원이 복잡한 무림 방파들은 불을 밝히고 안팎에서 주위를 경계했지만 양천장은 특별히 그러지도 않았다.
 얼마간의 경비무사가 없지는 않았지만 크지 않은 장원에 적이라 할 사람이 없는 려지원이라 구태여 그래야 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한데 문득.
 스스슥, 스스스스······!
 칠흑의 어둠을 뚫고 홀연 양천장의 뒤편 거친 태행산의 숲 속으로부터 시커멓게 두건을 뒤집어쓴 한 무리의 흑의 인영들이 소리 없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수효가 무려 삼백이 넘고 있었다.
 한결같이 검은 경장 차림에 병기를 움켜잡고 있는 모습으로, 앞에는 똑같이 두건으로 얼굴을 가린, 흑색 장삼을 입은 칠 척 체구의 후리후리한 사내가 무리를 이끌고 있었다.
 푸른 불이 흐르는 듯한 눈빛에 전신에 무형중의 잠력이 숨 막히게 물씬거리는 모습.
 말조차도 없었다. 다가오자 섬뜩하게 주위를 한 번 둘러본 후 그냥 한 번 손을 까닥했다.
 그러나 이야기가 끝나 있는 듯 나타난 무리는 즉각 행동을 개시했다.
 손짓과 함께 빠르게 양천장을 에워싸듯 담 주위 요소요소로 이동해 매복하며 칼자루를 움켜쥔 것이다.
 더불어 장삼인은 턱짓으로 한 번 더 휙 양천장을 가리켰고, 함께 나타나 옆에 있던 사내가 냉막하게 명령했다.
 “모두 죽여라. 파리 한 마리 빠져나가게 해서는 안 된다.”
 쉭쉭-!
 “흡! 웬 자들이냐?”
 촥촥촥!
 “아아아악-!”
 찰나 찢어지는 비명과 함께 정적이 깨지며 실로 악랄한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매복했던 흑의인들이 일제히 담을 뛰어넘는가 싶더니 닥치는 대로 장원 안쪽을 지키던 무사들을 베어 젖히기 시작한 것이다.
 “습격자다! 일어나라! 침입자가 있다!”
 “와아······!”
 둥! 둥! 둥!
 “크아아악!”
 여기저기에서 검붉은 피가 튀어 오르는 속에 삽시간에 양천장은 벌집을 쑤셔 놓은 듯 북새통이 되었다.
 잠에 빠져 있다 말고 침입을 안 무사들이 허둥지둥 뛰어나와 흑의인들과 맞서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승부는 가려져 있는 것이나 같았다.
 어느 방면의 자들인지는 알 수 없지만 기습에 나선 자들이 불리한 싸움을 할 리는 없다.
 흑의인들은 일찌감치 양천장을 치기 위해 온 것이고, 양천장의 무사들은 자다 말고 날벼락을 맞은 상태였으며 수효조차 턱없이 부족했다.
 언급되었듯 크지 않은 장원에 이렇다 할 영역을 가진 곳이 아니라 무사들이 백여 명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무위 역시 양천장의 무사들에 비해 월등히 높은 게 확인되었다.
 “하아압!”
 펑!
 “으아아악······!”
 일거수일투족, 어둠을 가르고 신형을 번뜩일 때마다 여기저기에서 뛰어나온 무사들이 힘도 쓰지 못하고 쓰러지고 있었는데 흡사 파리 잡듯 해 보일 정도다.
 그것은 정말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다.
 아무리 강약을 고려해 준비해 온 기습이라 해도 수뇌들이라면 모르되 휘하라면 이리 큰 차이가 날 리 없을 것인데, 양천장의 무사들은 아예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인 것이다.
 오래는 아니라 해도 자그마치 천하의 동사 려지원이 지도하는 무사들인데도 그랬다.
 하나같이 수월찮은 공력을 지닌 느낌으로써 경공이 바람처럼 빨랐고, 병기를 휘두를 때마다 검풍이 일어날 정도.
 더욱이 지독히 악랄했다.
 대체 무엇 때문에 습격을 했는지, 무슨 원수가 졌는지 알 수 없지만 이들은 무사들뿐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것은 모두 베어 젖히고 있었다.
 도처의 별원, 숙소들을 차고 들어가 부녀자에 아이들까지 모조리 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말들부터 죽여라!”
 촥촥!
 히히히히힝······!
 마사 역시 재앙을 당했다. 말을 타고 달아날 것을 우려해 습격하자마자 십여 명이 마사를 덮쳐 말들의 목을 모조리 베어 내고 있었던 것으로 삽시간에 마사 안이 구르는 말들의 목과 핏물로 질펀해졌다.
 더불어 또 다른 재앙도 벌어졌다.
 “무슨 짓이냐? 말 못하는 짐승들이 무슨 죄가 있다고!”
 촥!
 “아악!”
 양정.
 마사를 돌보는 이 노인은 마사 옆에 거처가 있었는데 느닷없이 일어난 비명과 함성 등에 놀라 달려 나왔다.
 그가 말을 베던 흑의인들에게 단번에 목이 잘린 것이다.
 뿜어지는 피!
 “할아버지!”
 더불어 찢어지는 비명이 함께 터졌다.
 양강이었다.
 양정에 뒤따라 거처에서 달려 나왔던 것인데 눈앞에서 조부의 목이 피를 뿌리며 잘려 튀어 올랐던 것.
 사방에 깔린 시체, 질펀한 피, 날아가는 할아버지의 목!
 소년의 충격이 어떻겠는가.
 “나쁜 놈들아!”
 낯빛이 파랗게 변해 일시 몸이 굳어지는 듯하더니 양강은 정신없이 흑의인들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이것은 무모함에 지나지 않았다.
 상상을 넘어선 상황에 이성을 잃었다 봐야겠지만 상대는 검을 들고 있었다.
 퍽!
 “악······!”
 아니라 해도 겨우 아홉 살, 제아무리 천하의 기재라 해도 키도 체격도 작은 그가 허수아비처럼 무사들을 베어 내는 공력을 지닌 고수들에게 무슨 힘을 쓰겠는가.
 윙 소리와 함께 바로 얼굴에서 피가 튀는가 싶더니 바로 줄 끊어진 연처럼 허공을 날아 핏물로 범벅이 된 마구간 속, 말들의 사체 속으로 떨어졌다.
 칼을 휘두른 자가 고꾸라지는 그의 복부를 걷어차 하얗게 의식이 비워짐과 함께 날아가 처박혔던 것이다.
 후두둑, 후둑, 하늘에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거의 일방적이라 할 정도의 학살.
 그러나 완전히는 아니었다.
 “하아아압!”
 펑! 펑! 펑!
 “크아아악······!”
 “대관절 웬 놈들이냐!”
 도처가 양천장 사람들의 피로 물들고 있었지만 장원의 중심에서만큼은 반대 양상이 벌어지고 있었다.
 한 쌍의 중년 남녀가 또한 허수아비처럼 습격자들을 베어 내며 밀어붙이고 있었던 것이다.
 려지원과 그의 처 송설하였다.
 똑같이 자다 말고 날벼락을 맞아 잠옷 차림으로 뛰어나온 상태로 습격자들과 맞서고 있었던 것이다.
 약관에 무림에 출도해 한 번도 패한 바가 없었던 것으로 알려진 동사!
 “사死!”
 펑-!
 “으악······!”
 격분한 그의 손 속은 실로 무서웠다. 양천으로 오기까지 무수한 호걸들과 수를 나누었지만 적敵이 없다 할 정도로 인명을 해친 적이 없는 것으로 알려진 그였으나 지금의 경우는 완전히 달랐다.
 사방에서 수하들이 살해당하고 있는 만큼 전부가 살수, 검이 번뜩일 때마다 폭우 같은 검영이 퍼부어졌고, 손이 허공을 가를 때마다 산악 같은 격공장력이 터져 나가고 있었다.
 신형을 번뜩일 때마다 두셋씩의 습격자들이 팔다리가 조각나고 어육처럼 사지가 뭉개져 고꾸라지고 있었던 것이다.
 “하압!”
 차앙!
 “크아!”
 소나기같이 뿌려지는 피!
 처인 송설하의 무예 역시 보통이 아니었다.
 천산파의 적전제자이자 신녀라 불렸을 정도의 실력을 지녔던 여인으로서 려지원 정도는 아니었지만 검장을 날릴 때마다 빗발치듯 한 검영, 장영이 퍼부어져 나가며 똑같이 침입자들을 어육으로 만들고 있었다.
 변방의 작은 장원이었지만 천하 고수가 둘이나 있었던 것!
 그러나 놀라운 것은, 재론할 필요도 없이 습격자의 실력들이 극악하다는 점이었다.
 다시 되새겨도 양천장이 어떤 곳인지 몰랐다면 모를까, 알고 온 자들이 무덤을 팔 리는 없고, 입증이라도 하듯 오래잖아 송설하 역시 비극을 당했다.
 “내외가 다 고수라는 말이 있더니 과연 그런 것 같군. 하지만 이런 실력으로 천하 서열이라는 것은 허명에 불과하다.”
 음성.
 돌연 흑의인들을 밀어붙이며 맹공을 퍼붓던 그녀의 뒤쪽에서 유부에서 흘러나오듯 감정이라고는 한 오라기도 실리지 않은 음산한 음성이 들리는가 싶더니 난데없이 시커먼 인영 하나가 서 있는 게 보였다.
 그것은 실로 괴상한 일이었다.
 원래 없었던 자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낼 때는 허공을 솟구쳐 오거나 하기 마련인데 이 인영은 연고도 없이 서 있었다.
 분명히 없었던 자인데 허공을 투과해 나타난 것처럼 원래부터 그 자리에 서 있었다는 듯 형체를 드러내었던 것이다.
 “웬······!”
 비어진 등! 당연히 송설하의 가슴이 철렁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한창 접전을 치르던 차에 느닷없이 등 뒤에서 기척이 들린 것이니.
 “누구냐!”
 쉭! 번개같이 허리를 비틀어 신형을 돌리며 방어 자세를 취했다.
 퍽!
 “아악-!”
 하지만 이미 늦어 있었다. 뒤에 나타나 말을 하기까지 적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던 상태에 뒤늦게 몸을 돌려 방어를 할 수 있을까.
 돌아서 모습을 확인하기도 전에 번쩍! 푸른 섬광이 횡으로 어둠을 가르는가 싶더니 그대로 송설하의 수급이 핏물과 함께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는 허공으로 치솟았다.
 지독히 쾌속한 손 속!
 “설하!”
 얼마나 빠른 살수였던지 함께 있던 려지원조차 목이 튀어 오르고서야 처의 죽음을 알았을 정도였다.
 불과 팔 장밖에 떨어지지 않은 위치였음에도 송설하의 비명이 터지고서야 문제가 생겼음을 알았던 것이다.
 “하아아압!”
 펑펑펑펑펑!
 “크아아악!”
 연거푸 산악 같은 장력을 날려 주위의 흑의인들을 밀어내고 정신없이 송설하의 곁으로 솟구쳐 왔다.
 한들 송설하의 목은 이미 떨어진 상태다.
 “설하······!”
 안색이 핼쑥하게 변해 쓰러진 아내의 시체를 잡았다.
 쏘아 오자 인영은 휘청 몸을 움직여 삼 장 밖으로 물러섰는데, 비로소 보자 그는 무리를 이끌고 나타났던 흑삼인이었다.
 어둠 속에서 계속 쏟아지는 푸른 불이 이는 듯한 눈빛! 어느새 손에 넉 자 반의 시퍼런 장검을 쥐고 있었다.
 쏴아! 점점 더 세차게 퍼부어지기 시작하는 빗줄기.
 “이럴 수가······!”
 아내의 시체를 안은 려지원의 안면이 무참히 일그러졌다.
 살해된 양천장의 모두가 같은 심정이겠지만 도저히 믿기지조차 않았다. 불과 수각 전만 해도 체온을 나누며 곤한 잠에 빠져 있었던 아내가 퍼부어지는 비 속에 시체가 된 것이다.
 “······정말 악독하구나.”
 발작하듯 쏟아져 나오는 무시무시한 눈빛! 으드득, 이를 갈며 려지원은 다시 자리에서 일어서 흑삼인을 향했다.
 “내 무림에 출도하여 지금껏 한 번도 그릇된 일을 한 적이 없었거늘, 대체 네놈들은 누구냐? 무슨 원한이 있기에 이런 악독한 살수를 쓰고 있는 게냐.”
 피가 머리 꼭대기로 몰리는 느낌이었지만 초인적인 인내로 누르며 물었다.
 눈 깜박할 사이 신녀로 불리던 처를 베어 내었을 정도로 강적인 셈이다. 절대 흥분은 금물인 것.
 흑삼인 역시 지독한 냉정함을 보이고 있었다. 려지원이 만만한 인물이 아닌 만큼 서두르지 않고 고른 호흡을 유지하며 말문을 열었다.
 “개인적인 원한은 없다. 그냥 네가 오지 말아야 할 곳에 왔다는 게 문제였지. 너는 여기에 있어선 안 되었던 것이다.”
 여기.
 려지원의 안면이 더욱 무시무시하게 일그러졌다.
 “설마 양천장을 말하는 것이냐? 이런 하찮은 장원이 뭐가 대단해서!”
 양천장을 말한 게 맞다면 분명히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산서山西의 벽지, 크지도 않은 현락에 자리한 이곳이 사실 살겁의 까닭이 되어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흑삼인은 계속 이해하지 못할 소리를 했다.
 “물론 장원도 대단한 것이 아니지. 중요한 것은 그냥 네가 왔다는 것뿐이니. 더 자세한 것을 알고 싶으면 염라대왕에게 가서 물어라.”
 려지원의 눈이 핏물이라도 굴러떨어질 듯 시뻘겋게 충혈되었다. 속을 보일 자들이 두건을 쓰고 나타났을 리도 없고, 더 물어야 소용도 없다.
 “기필코 실토하게 될 것이다.”
 극한으로 공력을 끌어 올리며 검을 들어 똑바로 흑삼인을 겨누었다.
 “아랫것들을 상대하는 걸 보니 허명뿐으로 보이던데, 어디 가르침을 받아 보기로 하지.”
 흑삼인 역시 눈을 번쩍이며 정면으로 려지원을 향했다.
 팔상八狀. 허리를 곧게 펴고 발을 여덟팔 자 형상으로 놓은 채 검을 비스듬히 아래로 드리운 자세였다.
 번쩍이는 눈과 눈!
 “하아아압!”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쩡!’ 하는 외침과 함께 순간적으로 쉬익, 연기로 화해 서로를 향해 마주쳐 갔다.
 “터!”
 후와와와왕!
 선공은 려지원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접근하는 순간 몇 차례나 검을 휘둘렀는지 폭우보다 더한 검영을 일으켜 마주쳐 오던 흑삼인을 뒤덮었던 것이다.
 한데 이때 실로 뜻밖의 일이 있었다. 누가 생각해도 려지원이 맹공을 퍼부은 만큼 흑삼인 역시 검을 휘둘러 반격을 가하거나 해야 할 것이었는데, 그러지 않고 그가 몸으로 퍼부어 오는 려지원의 소나기 공격을 맞이했다는 것이다.
 아니, 최소한 려지원이 보기에는 그랬다. 한순간 퍼부어진 검영 속에 그가 휩쓸리는 것을 분명히 목격했으니.
 하지만 놀랍게도 그것은 환각이었다.
 검영의 폭우에 뒤덮임과 함께 경이롭게도 쏘아 왔던 신형이 연기가 꺼져 버리듯 퍽, 사라져 버렸고, 사라졌는가 싶은 순간 그의 모습은 어느새 려지원의 측면으로 돌아가 있었다.
 “하-!”
 콰차차창!
 “흡!”
 더불어 려지원의 공격에 이어 그의 장검이 치솟아 오르며 또한 소나기 검영이 퍼부어졌고, 비로소 귀청을 찢을 듯한 금성이 터지며 산지 사방으로 불꽃이 튀어 나갔다.
 천만뜻밖에도 려지원이 선공을 하는 듯했지만 오히려 수세가 되고 말았던 것!
 공격을 막아 내면서 려지원은 비로소 왜 신녀의 명성까지 얻었던 처가 속수무책으로 당했는지를 알았다.
 “설마 이형환위移形幻位?”
 바로 그것이었다.
 나타날 때부터 유령이 움직이는 듯한 모습을 보였던 흑삼인은 천하에서 보기 드물다 할 정도로 대단한 신법을 지녔던 것으로, 그가 전개한 것은 분명히 이형환위라 일컬어지는 신법이었다.
 소림의 것이라는 설도 있고 곤륜, 혹은 화산의 것이라는 설도 있으나 정확히 내력을 설명하자면 칠대문파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신법으로서 은나라 당시, 헌원황제를 깨우쳤다는 기인 광성자가 창안한 것으로 알려진 절기였다.
 구태여 따지자면 무산파巫山派의 것이라 봐야 했는데, 광성자가 무산에서 득도했고, 이를 기려 세워진 게 무산파이니 그렇게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이 신법은 무산파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무산파는 광성자를 시조라 하고 있지만 실제 무산파를 창파한 것은 광성자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를 숭상한 사람들이 세운 방파일 뿐으로 절전된 신법인 셈이다.
 최종적으로 사용한 사람은 북송 말, 양산박의 백여덟 호걸 중 하루에 천 리를 달렸다는 신행태보神行太保 대종戴宗으로 알려져 있고, 얼마나 빠른지 땅을 줄여서 나가는 것 같다고 하여 축지법이라고도 했는데, 짧게는 허공을 투과하듯 움직여 보는 사람에게는 그 자리에 있는 듯한 착시 현상까지 일으킨다는 신법!
 이렇다 보니 나타날 때도 그 자리에 서 있었던 듯한 느낌을 줬던 것으로 여간한 실력이 아니고서는 이런 고수의 움직임은 간파하기조차 힘들다.
 려지원마저 환각을 봤을 정도인 만큼 송설하가 간파하지 못했을 것은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너는 어디에서 그 신법을 배웠느냐!”
 하지만 천하의 동사 역시 괜히 동사가 아니다. 려지원에게도 그에 못지않은 천하의 절기라 할 보법이 있었는데 찰나 그의 발놀림이 미묘하게 변했다.
 방어와 함께 발이 좌우로 교차된다 싶더니 어떻게 움직였는지 휘청, 어느새 흑삼인의 눈앞을 벗어나 좌측면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팔보간선이로군!”
 흑삼인 역시 려지원이 쓰는 보법을 알아본 것 같았다.
 “하!”
 후와와왕!
 “흡······!”
 하지만 기선은 여전히 그가 잡고 있었다. 려지원이 측면으로 돌아가자 번쩍, 순간적으로 그 또한 신형을 번뜩여 꼬리를 물듯 려지원을 따라붙었고, 더불어 또 벼락같이 검영의 소나기를 퍼부어 내고 있었다.
 신법만큼이나 빠른 쾌검으로서 막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신랄한 수법.
 “하아아압!”
 콰차차창!
 그러나 려지원은 역시 녹록하지 않았다.
 그가 어떤 신법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간파한 만큼 순간 재차 발을 교차시켜 좌측면으로 돌아갔던 몸을 우측으로 돌리며 마찬가지로 폭우 같은 검영을 퍼부었고, 찰나 서로의 칼이 뒤얽히면서 불꽃을 튀기는가 싶더니 흑삼인의 몸이 또 유령같이 좌로 돌아가며 무수한 검영을 쏟아 냈다.
 좌로 번쩍, 우로 번쩍, 격렬히 부딪치고는 있으되 검 대 검의 대결이 아니라 흡사 신, 보법의 겨룸과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써, 사람은 보이지도 않고 두 무더기의 시퍼런 검영들만 빗발치듯 휘돌아 가며 불꽃을 튀기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윙, 흑삼인의 장검이 순간적으로 려지원의 상투를 날려 봉두난발로 만드는가 하면 곧바로 쉭, 려지원의 칼끝이 그의 눈앞을 스치고 휘돌아 가는 섬뜩한 상태!
 가히 백중지세伯仲之勢라 할 정도의 대결이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불리한 것은 역시 려지원일 수밖에 없었다. 다시 되짚어도 려지원이 전개하고 있는 것은 절묘한 발놀림으로 상대에게 어디로 움직일지 간파할 수 없게 하는 팔보간선의 보법이었고, 흑삼인이 전개하는 것은 빛살과 같은 속도의 절정의 이형환위였다.
 둘 다 장점이 있으나 려지원이 불리할 수밖에 없는 것은 속도 자체에서 흑삼인을 따르지 못한다는 것인데, 바꾸어 말하자면 흑삼인이 피하거나 거리를 두려 할 경우에는 따라잡을 수 없다는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려지원으로서는 근접해 있을 때 그를 잡아야 한다는 어려움이 있었던 것!
 “놈!”
 콰차차차차차창-!
 “으아앗!”
 경각하는 순간 려지원의 손 속이 크게 달라졌다.
 지금까지 한 게 흡사 실력을 가늠하기 위한 것이기라도 했던 것처럼 순간 천둥치는 듯한 호통과 함께 바로 수법을 바꾸었던 것인데, 찰나 그의 검이 극악하다 싶을 정도의 검영을 토해 내기 시작했다.
 지금까지도 손을 쓸 때마다 소나기 같은 검세가 일어나긴 했지만 느닷없이 검세가 확 달라지면서 이럴 수가 있나 싶을 정도로 상상도 못 할 검기를 뿜어내기 시작했던 것!
 번쩍번쩍번쩍! 전 방위로 칼끝을 번쩍이며 흡사 수백 개의 유성이 한꺼번에 퍼부어지듯 한 칼날의 폭풍을 일으켰던 것이다.
 얼마나 신랄한 수법인지 흑삼인도 이를 다 피하지 못해 가슴에 난도질을 당하듯 한 검상을 입고 대경실색의 외침을 토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치명상은 아닌 것 같았다.
 분수 같은 피를 뿌리긴 했지만 그대로 빛살 같은 신법을 지니고 있어 찰나 불꽃이 튀기듯 물러서므로 치명상을 피했던 것!
 한데 문제는 직후 터져 나온 그의 외침이었다.
 “뭔가, 이건! 혹시 백인마검百刃魔劍?”
 위기에서 벗어난 그는 또한 려지원이 전개한 이 수법이 무언지를 알아본 듯 눈을 치켜뜬 채 단말마 같은 외침을 토했는데 이것은 또한 예사의 검법이 아니었다.
 무림에 존재하는 최악의 것이라 할 정도인 검법으로서 구십 년 전 천하를 피로 적셨던 살인도장殺人道長의 것이었다.
 백인도장白刃道長이라 불린 인물의 것으로, 원래는 곤륜의 제자였으나 기연으로 홍화마교洪化魔敎의 조종祖宗 검마劍魔가 남긴 진전을 얻어 운룡검법에 합쳐 만든 것이라 전해진다.
 이후 그는 이 검이 천하제일 것임을 증명하겠노라, 도처의 고수들과 부딪치기 시작해 무수히 피를 뿌렸다.
 수법이 너무 악랄해 부딪칠 때마다 각처의 명사들이 칼끝의 이슬로 사라졌고 이로 인해 천하의 공분을 사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그치지 않고 조유북해모창오朝有北海暮蒼梧, 장삼풍에 도전해 무당에까지 올라갔다.
 그러나 직전 삼풍도장은 벽덕도장에게 장문인 직을 물려주고 문파를 떠난 상태였고, 시비가 붙어 또 무당의 사람들과 충돌해 무수한 제자들이 죽었다.
 이 일로 무당과 곤륜이 크게 충돌할 뻔까지 했는데, 결국 곤륜에서 그를 문적에서 지우고 더 이상 문제를 일으키지 못하게 하겠다 약속한 후 연대해 그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도가의 제자에서 천하의 공적共敵이 된 것이다.
 하지만 그를 잡기는 불가능했다. 도처에서 그는 곤륜, 무당의 제자 등 협의지사들과 충돌했으나 그때마다 무수히 많은 인명만 희생되었을 뿐 끝내 제압하지 못했다.
 그랬던 그가 마지막으로 모습을 보인 곳은 남해의 동사군도였다. 천하의 이인이라 불렸던 순우기가 은거해 있던 곳으로서, 포산비검에 도전하겠노라 찾아갔던 것이다.
 하지만 순우기 또한 이미 비뢰동으로 들어가 우화했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었는데, 그것을 끝으로 그의 모습은 무림에서 자취를 감췄다.
 세인들은 순우기를 만나 싸우다 죽었다고도 했고, 혹은 그를 찾아 비뢰동으로 들어갔다가 갇혀 죽었다고도 했다.
 무엇이 진실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 백인마검이 려지원의 손에서 재현되었다는 것.
 사실이라면 세상이 벌컥 뒤집힐 노릇이었다.
 “놈-!”
 하지만 려지원은 말이 없었다.
 접전도중. 아니라 해도 처를 살해한 자와 무슨 대화를 하겠는가.
 “하아아압!”
 콰차차차창!
 “흡······!”
 흑삼인을 따라붙으며 연방 유성이 쏟아지는 듯한 검망을 빗발치듯 퍼부어 냈다.
 더불어 전세도 크게 역전됐다. 처음에는 백중지세였던 접전이었으나 이때부터는 부딪칠 때마다 흑삼인은 연거푸 여기저기에 크고 작은 검상을 입고 피를 쏟으며 밀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곧 자신의 유리한 점을 찾았다.
 불리하다 싶자 정면으로 충돌하지 않고 검세가 밀려오기 전 벼락같이 좌우, 혹은 뒤로 물러서며 거리를 두고 번뜩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대단한 검이었지만 역시 려지원은 그를 따라잡지 못했다.
 “허명일 뿐이라더니 어째서 피하고만 있느냐! 썩 가까이 오너라!”
 무시무시하게 구겨진 표정으로 호통을 토하며 사력을 다해 발끝에 힘을 실어 번쩍번쩍 그를 쫓아 움직였다.
 한데 더욱 경악할 일은 바로 직후에 일어났다.
 “그야말로 놀랄 일이로군. 오랫동안 보이지 않더니 설마 네가······! 한들 절기를 얻은 게 너만은 아니지!”
 펑-!
 “으아아악!”
 청천벽력.
 놀란 표정으로 이리저리 신형을 번뜩이며 피해 다니던 그가 한순간 기회를 노려 쏘아 오는 려지원을 향해 손가락을 퉁겼는데, 찰나 그의 손가락에서 또다시 내용을 알 수 없는 시퍼런 번갯불 같은 섬광이 터져 나와 쫙, 허공을 가르는가 싶더니 그대로 려지원의 가슴을 들이쳐 버렸던 것이다.
 순간 진짜 번갯불이라도 맞은 듯 려지원은 처절한 비명을 토하며 푹, 가슴에서 연기까지 뿜으며 고꾸라지고 말았다.
 불행히도 그는 이를 피할 수 없었다.
 경계하고 있었다면 모를까 혼신지력으로 흑삼인을 따라붙고자 가던 상태에서 뿜어진 괴공이었기 때문이다.
 “너······!”
 상태 역시 최악이었다. 손끝에서 뿜어졌으니 지공指功일 텐데, 천하에 무슨 이런 지독한 지공이 있는지 격중된 가슴이 시커멓게 탄 채 뻥 뚫려 연신 콸콸 검붉은 선혈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러나 고통은 둘째, 흑삼인이 그의 검을 보고 놀랐듯 그 역시 이 괴이한 지공이 무엇인지를 알아본 듯 찢어지게 눈을 치켜떴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간 일발의 차이로 흑삼인은 그의 검을 피했으나 그는 지공을 피하지 못했고, 가슴을 관통당해 돌이킬 수 없는 상태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설마······ 여기에서······!”
 똑같이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무엇인가를 말하려고 했지만 그러나 너무 큰 상세를 입어서인지 두어 번 입을 벙긋거리다 푹,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대체 이 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연거푸 펼쳐진 천하의 기공들과 동사의 패배.
 하지만 아무 감흥 없다는 듯 흑삼인은 거듭 섬뜩하게 눈을 번쩍이며 냉소 지었다.
 “그러고 보니 제거해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있었던 거군. 피차 입장은 같은 거다.”
 빗발이 점차 더 굵어지고 있었다.
 
 얼마나 흘렀을까.
 “할아버지!”
 지옥 같은 어둠 속에서 양강은 의식을 되찾았다.
 깨어나 보니 온 전신이 피투성이였다.
 다행히 칼날은 급소를 피해 간 것 같았지만 자상을 입어 왼쪽 뺨에서 피가 흘렀고, 도륙된 말들의 사체 속에 떨어져 그 피로 목욕을 한 듯한 꼴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야말로 혈해에서 올라온 아수라 같은 꼴이었다.
 그러나 그 정도는 약과, 주위의 정경은 더 끔찍했다.
 혈해나 다름없는 구유 사방에 뒹구는 말들의 사체, 바깥에는 쏟아지는 비, 어둠, 잘린 할아버지의 목, 사방에 깔린 시체!
 공포, 완전히 지옥이나 같았다.
 “할아버지······!”
 흐르는 게 빗물인지 핏물인지 모를 정도의 어둠 속에 주저앉아 양정의 머리를 안고 펑펑 눈물을 쏟으며 무섭게 몸을 떨었다.
 그러나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수는 없다. 누구라도 생존자를 찾아야만 했다.
 “여기 사람들이 죽었어요! 할아버지께서도!”
 일단 양정의 시체를 처마 밑으로 끌어 놓고 정신없이 장원 안쪽으로 달려 나갔다.
 “이럴······ 수가!”
 하지만 눈에 보이는 것은 절망뿐이었다.
 끊임없이 어둠 속에 쏟아져 내리는 비.
 나가니 바깥 역시 온통 피 칠이 되어 있었는데 보이는 건 전부 팔다리가 잘린 시체다.
 남자, 여자, 어른, 아이.
 주검들은 끝도 없었고, 전부가 아는 얼굴들이었다.
 눈도 감지 못한 채 도륙되어 나뒹구는 친구들의 머리도 보였다.
 세상에 이렇게 끔찍한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살아 계신 분 아무도 안 계세요?”
 공포 속에 눈물을 쏟으며 마구 장원의 내채 쪽으로 달렸다. 혹시라도 안쪽에는 생존자가 있을까 싶어서였다.
 하지만 없었다.
 불시에 시작된 습격은 양천장을 완전히 피로 씻어 냈고, 살아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다.
 한데 장원의 중심을 지나 내채 속까지 들어갔을 때였다.
 턱!
 “헉······!”
 극도의 공포에 물들어 들어가던 그의 발목을 별안간 누군가가 잡는 듯했다.
 “쿨룩······!”
 이어 가래가 끓은 듯한 기침 소리가 들렸고, 순간 양강은 또 비명 같은 외침을 토하고 말았다.
 “장주님!”
 내채에도 사방에 잘린 팔다리와 시체들만 즐비했는데, 보니 발을 잡은 것은 가슴이 시커멓게 탄 채 구멍이 뚫린 피투성이의 남자, 려지원이었다.
 천만뜻밖에 그가 아직까지 생존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살아 있는 목숨이라 할 수는 없었다.
 가슴에 구멍이 난 아래 온몸의 피를 쏟아 하얗게 변해 버린 백납 같은 얼굴이 시체나 다름없는 꼴이었기 때문이다.
 “너였구나······! 아이야······ 너······ 양강이라고 했지······?”
 몸을 일으키지도 못한 채 간신히 말했다.
 “네가······ 살아······ 있었다니······ 하늘이······ 도운 것 같다.”
 너무 놀라 양강은 숨이 멎는 듯했지만 계속 눈에서 푹푹 눈물이 솟았다.
 “장주님, 살인자들이 왔어요. 나쁜 놈들이······!”
 할 말이 없어 하는 말에 지나지 않는 셈이었다. 그 살인자들에 의해 려지원 역시 가슴에 구멍이 뚫려 있었으니까.
 힘겹게 계속 입을 벙긋거렸다.
 “안다······! 폐맥······ 귀식공龜息功으로 간신히······ 숨만 유지······! 나도 곧······ 죽는······다. 시간이 없으니······ 들어라······! 내실······ 들어가면······ 거실 바른편 벽에······ 서가가······ 있다. 밀면······ 밀실······ 문군이······ 있을 거다······!”
 그의 딸!
 “힘들겠지만······ 어떻게든 광서廣西······ 평복平福······ 십만대산十萬大山······ 자운곡紫雲谷으로······ 가거라······! 가서······ 무진노인霧塵老人을 찾아······ 이형환위······ 벽력지霹靂指를 쓰는 자가 나타났다······ 전해라. 그들이······ 다시······ 올 거다. 가기까지······ 절대······ 아무도 믿지······ 말고······ 철저히······ 신분을 감춰야······ 살신지화를 피할 수 있다······! 할 수······ 있겠느냐······?”
 처참한 모습이었다.
 “그럴게요, 장주님! 하지만 돌아가셔서는 안 돼요!”
 양강의 눈에서 계속 펑펑 소나기 같은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려지원이 살아난다는 것은 있기 어려웠다. 지금까지 살아 있는 것만도 기적이나 다름없었는데, 미루어 그는 귀식공을 아는 것 같았다.
 거북이 물속에서 호흡을 끊는 것을 기인해 창안된 진기한 심법으로서, 이 심법을 아는 사람은 유사시 전신의 혈맥을 폐하고 호흡을 끊어 동면에 들어가듯 극한의 상황에서도 최대한 오랜 시간을 버틸 수 있었는데, 흑삼인에게 당한 직후 이 심법을 전개했던 것 같았다.
 그러나 한계가 있었다. 가슴이 뚫린 속에 그만큼 피를 흘린 만큼 공력이 흩어지면 숨이 멎고 마는 것.
 증명이라도 하듯 귀식에서 깨어나 다시 말을 시작한 그의 입에서 콸콸 마저 남은 시커먼 핏물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회광반조回光返照라 할지, 귀식에서 깨어나 진력을 다시 사용함으로 움직일 수 있는 것 같았다.
 사력을 다해 상체를 일으키더니 양강을 끌어안고 등의 영대혈靈臺穴에 손을 붙였다.
 “제자로······ 맞아들이고······ 싶었······는데······ 줄 수······ 있는 것은······ 이뿐······!”
 더불어 그의 장심에서 무언지 알 수 없는 불줄기 같은 뜨거운 기운이 양강의 영대혈을 따라 몸속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헉!”
 갑작스러운 열기에 양강의 눈이 찢어질 듯 치켜뜨였다.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대명을 감안해도 려지원은 어디에서 이런 많은 무예를 배웠나 싶을 정도로 놀라울 만치 다양한 무공과 심법을 아는 듯했는데, 그가 이양공移讓功까지 지닌 것 같았다.
 자신의 혼원진기를 타에 건네주는 심법으로서 어린 양강으로서는 이 열기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으나 그가 최후의 힘을 모아 이양입밀移讓入密의 수법을 전개한 것이다.
 천하의 동사가 아홉 살 된 소년에게 혼신공력을 전해 주고 있었던 것!
 그러나 오래가지는 못했다.
 처음에는 불줄기 같은 엄청난 열기가 양강의 체내로 쏟아져 들어와 단전丹田에 뭉쳐지는 듯했지만 곧 미온으로 변해 툭 하고 중도에서 끊겼다.
 “밀실에······ 상자······ 비수를······ 써라······!”
 더불어 이 말을 마지막으로 털썩! 려지원은 몸을 눕히며 정말 완전히 숨이 끊어지고 말았다.
 “장주님!”
 양강의 안색이 다시 하얗게 변했다. 어린 그로서는 정말 이 밤에 일어난 일들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그냥 모든 게 끔찍하고 처참했으며 악몽이나 같았다.
 “정신 차리세요! 제발!”
 펑펑, 공포 속에 연거푸 흘러내리는 억수 같은 눈물.
 그러나 려지원은 숨이 끊어졌고, 또한 마냥 울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습격자들이 다시 올 것이라 하지 않았던가.
 려지원이 더 이상 움직이지 않자 다시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거처인 내원 안으로 들어갔다.
 말한 대로 안에는 어느 집이나 그렇듯 거실 한쪽에 장식 도자기 및 책들이 꽂힌 서가가 있었다. 힘줘 옆으로 밀자 이중 벽으로 된 듯 과연 뒤에 작고 컴컴한 밀실이 하나 나왔다.
 “양강!”
 그리고 속에는 이른 대로 낮에 초지에서 본 옥색 단삼의 소녀가 있었다.
 려문군.
 밝혀진 대로 려지원의 딸로서 습격과 함께 여기에 숨게 한 것 같았다.
 평소 금고로 사용한 듯 그밖에도 밀실 속에는 여러 도검刀劍 등 각종 물건들과 작은 검은색 상자가 하나 있는 게 보였고, 지시에 따라 양강은 서둘러 그것을 집어 들었다.
 “빨리 나와!”
 “무서워! 왜 그래? 피가······!”
 려문군은 겁에 질려 양강을 보자 완전히 얼굴이 사색으로 변했다. 그렇지 않을 수 없는 게 모습이 완전히 혈인이나 다름없는 상태인 것이다.
 양강은 눈물을 펑펑 흘리며 려문군의 손을 잡아 끌어냈다.
 “빨리 도망쳐야 해. 살인자들이 왔었어. 장원의 사람들이 다 죽었어! 도망치지 않으면 우리도 죽어!”
 “악-!”
 바깥으로 나오자 려문군은 몸이 굳어지는 모습으로 마구 비명을 질렀다. 지옥이 따로 없는 것이다.
 “소리 지르지 마, 제발!”
 양강은 려문군을 끌어안다시피 해 정신없이 장원의 서쪽 담 쪽으로 갔다.
 한참을 가자 담 아래에 예전에 물을 끌어들였던 도랑인 듯 작은 구멍이 나 있었는데, 아이들이 알고 평소 바깥으로 드나든 것 같았다.
 빠져나온 양강은 려문군을 끌고 초지를 가로질러 서쪽 숲으로 달려갔다.
 늘 놀았던 곳이라 잘 아는 눈치로써 얼마간 들어가자 또한 체구가 작은 아이들이나 기어 들어갈 수 있을 듯한 잡초에 가려진 조그만 바위굴이 하나 보였다.
 들어가자 의외로 안쪽은 넓어 천연으로 된 석실과 같았고, 개구쟁이들이 소굴처럼 썼는지 속에는 전쟁놀이에 쓰던 호구, 목검, 석회 등 갖가지 물건들이 있었고 한쪽에 허름한 옷가지도 몇 놓여 있었다.
 “어서 갈아입어. 장주님께서 정체를 숨겨야 한다고 하셨어.”
 양강은 계속 눈물을 흘리며 서둘러 피범벅이 된 옷부터 갈아입었다.
 려문군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다행이라 할지 숨어 있었던 관계로 직접 혈겁을 겪지는 않았지만 잠깐이나마 밖으로 나와 목격한 시체들하며, 컴컴한 어둠이 끔찍하게 무서운 것이다.
 “그럴게.”
 무조건 시키는 대로 남자아이들의 옷으로 갈아입었고, 그러고 난 얼마 후였다.
 “샅샅이 뒤져라! 모두 죽인 줄 알았더니 려지원의 딸을 놓친 것 같다! 여덟 살이다! 멀리 가지는 못했을 거다!”
 쏟아지는 비 속에 갑자기 바깥 여기저기에서 인기척이 들리기 시작했다. 려지원의 짐작이 맞았던 듯 흑의 두건인들이 다시 나타나 장원과 도처를 뒤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자체만 해도 엄청난 공포였다.
 “무서워······!”
 “말하지 마.”
 두 소년 소녀는 서로를 부둥켜안고 밖의 기척을 살피며 눈물로 밤을 지새웠다.
 여덟, 아홉 살.
 말이 쉬울 뿐이지 나이가 많은 소년들이라도 이런 상황에서는 혼을 잃기 쉬웠는데 기적이다시피 어려움을 이겨 내고 있었던 것이다. 소년이라 부르기도 어려운 나이임에도.
 
 
 
 #대장도大長道, 십만 리
 
 
 
 
 이틀.
 “도륙? 려지원이 죽었다고?”
 도처가 벌컥 뒤집히기 시작했다.
 천하에 이름 높던 동사 려지원과 처, 식솔들이 도륙되었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한 것이다.
 살겁이 알려진 것은 다음 날 오전이었다.
 양천장에 부식을 대던 사람들이 물건을 가져왔다가 처음 현장을 목격했고, 신고와 함께 양천 관아에서 포사들이 달려오는 등 엄청난 소동이 벌어졌다.
 그러나 흉수가 누구인지는 실마리조차 잡지 못했다.
 도착하니 널린 것은 양천장 사람들의 조각난 시체들뿐, 습격자들은 털끝만 한 흔적도 남겨 놓지 않았던 것이다.
 말들까지 다 베어 재꼈을 정도의 악랄한 살겁, 생존자도 없었다.
 아니, 딱 한 사람이 있는 것 같다고 알려지긴 했다.
 려지원의 딸.
 하직下職 사람들의 아이들까지 파악할 수는 없었으나 려지원에게 딸이 있다는 것은 상당수 알려져 있었던 터인데 시체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실종 상태였고, 관아는 양천장을 폐쇄해 사람들의 출입을 금함과 함께 곧 사방에 방榜을 붙여 사라진 려지원의 딸을 수배했다.
 워낙 잔인한 살겁이라 양천 일대의 모든 사람들이 소스라쳤지만 가장 크게 소란이 일어난 곳은 역시 강호 무림이었다.
 천하 서열에 올라 있던 려지원이 살해당한 것이니 그렇지 않을 수도 없었다.
 대체 누가 그만한 고수를 친 것일까.
 크지는 않다 해도 수하들 백여에 하직까지 모조리 도륙되었음을 알고 보면 분명히 개인이 한 것은 아니었다.
 세력을 가진 누군가가 포위 공격을 했다고 봐야 했는데, 그 정도의 힘을 가진 고수는 극히 드물다.
 가장 먼저 의심받은 것은 함께 천하 서열에 올라 있는 남룡북패서도였지만 그러나 그들은 곧 혐의를 벗었다.
 혈겁이 벌어지던 날 밤 모두 제자리에 있었던 게 확인되었던 것이다.
 사건의 실마리를 쥐고 있는 것은 실종된 려지원의 딸 하나뿐인 셈이었다.
 소문과 함께 려지원과 친분이 있던 인물들이 사방에서 달려와 관아와 함께 추적에 나서기도 했다.
 그러나 소문을 듣고 달려오기까지 걸린 시간이 있어 한 달이 더 지난 후의 일이었고 역시 아무런 소득을 얻지 못했다.
 원수라 할 사람이 없었던 려지원이라 사건은 더욱 미궁에 빠지고 있었다.
 
  * * *
 
 화순和順.
 “강아, 나 다리 아파.”
 양강과 려문군은 분주히 걷고 있었다.
 사건이 일어난 지 열흘이 지난 시점.
 장원을 빠져나왔던 둘은 바위굴에서 밤을 지새운 후 날이 밝음과 함께 기척을 살펴 하염없이 남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대로大路도 아닌 일반 논밭 길이었다.
 미루어 인근 마을의 아이들 같은 모습으로서 추적을 피하기에는 이보다 좋은 방법이 없다.
 하지만 아무리 걸어도, 걸어도 길은 끝이 없다.
 세상이 대체 왜 이리 넓은가.
 열흘을 걸었지만 아직도 화순이니 겨우 이백 리를 지나온 셈이다.
 어쩔 방도도 없었다.
 이 나이의 아이들에게 있어 세상이란 정말 끝도 없는 곳이었고, 작은 벌판조차도 우주만 해 보인다. 새벽부터 걸어도 이삼십 리만 가면 해가 저물 정도다.
 더 문제는 려문군이기도 했다.
 남자아이라 양강은 그래도 좀 나았지만 려문군의 경우는 아예 걷지를 못했다. 딸이라도 무예를 가르치는 무가가 적지 않았지만 좀 더 나이가 든 다음의 일로써 체력도 무엇도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다.
 마음까지 약해서 툭 하면 찔찔 운다.
 혈겁이 일어난 후 하루도 울지 않은 날이 없었다.
 사실 그렇지 않을 수도 없었다.
 어른이라도 이런 고생이라면 힘들지 않을 수 없는데, 밤마다 숲에서 떨며 노숙을 하고 장원을 나온 후로 끼니조차 제대로 먹은 적이 없다.
 객잔에서 자고 사서 먹으면 될 것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여덟아홉 살이 그럴 나이가 되는가.
 받아 줄 사람도 없었고, 그럴 생각조차 하지 못할 나이라 보는 게 더 정확하다.
 다행히 여비는 가지고 있었다. 밀실에서 가지고 나온 상자에 있었던 것으로 속에 다수의 금자金子와 비수匕首 하나가 들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게 금자라는 점이 또 발목을 잡고 있었다. 이 시대의 화폐는 푼이라 불리는 각刻과 전錢, 냥兩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백 푼이 일 전이고, 십 전이 은자銀子 한 냥이었다.
 더 위에 있는 게 금자로서 은 열 냥이 금자 한 냥, 말굽 은 하나(은원보, 열 냥)에 논이 세 마지기로서 하필이면 들어 있었던 게 전부 열 냥짜리 금원보였던 것이다.
 푼이라면 모를까 이런 엄청난 재물을 아이들이 쓴다는 자체가 말이 안 되었고, 남에게 보이기라도 했다가는 당장 살신지화를 입기 십상이었다.
 이 나이의 아이들이 가장 사서 먹기 좋은 게 길거리에서 파는 떡이나 만두 정도였지만 그조차 사 먹지 못하는 것이다.
 사 먹기는커녕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마을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무 뿌리를 캐어 먹으며 외곽의 논밭으로만 걷는 형편이니 당연히 려문군이 찔찔거릴 수밖에 없다.
 이렇다 보니 양강은 더욱 힘이 들었는데, 그러나 여자아이들에게 약함을 보이기 싫어하는 남자아이들의 천성이라고 할까, 힘이 드는 만큼 더 용기를 내고 있었다.
 “조금만 참아. 곧 화순성이 나온다고 그랬어. 꽤 멀리 왔으니 조금 안심해도 될 거야. 거기서 뭐든 방법을 써 보자.”
 “배도 고프고 발이 아파서 걷지 못하겠는걸.”
 “그래도 참아야 해. 살인자들이 쫓아오고 있을지 몰라. 어떻게든 자운곡까지 가야 해. 장주님께서 무진노인을 찾을 때까지 아무도 믿지 말라고 그랬어. 신분을 드러내면 죽는다고.”
 죽는다는 말에 려문군은 덜컥 겁을 먹은 표정이 되었다.
 “자운곡이 어딘데? 얼마나 가야 해?”
 하지만 양강인들 거기가 어디인지 알 리가 없다.
 “나도 몰라. 광서에 있대.”
 “광서는 어딘데?”
 “몰라. 그냥 할아버지에게 들은 적이 있는데 우리가 사는 중원은 남칠북육서오南七北六西五, 열여덟 개 성省으로 되어 있고, 광서는 남쪽 끝에 있다고 하셨어.”
 그야말로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어째서 려지원이 광서로 가라고 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산서와 광서는 중원의 끝과 끝, 자그마치 십만 리에 달하는 거리였다.
 아이들에게는 백만 리나 같은 것으로 간다는 자체가 불가능에 가깝다고 봐야 했다.
 “먼 거지?”
 더 문제는 가고 있지만 려문군도 무진노인이 누군지 모른다는 것이다. 친분이 있다 해도 여덟 살짜리 딸에게 그런 것까지 말할 리가 없는 만큼 무작정 그냥 가고 있는 것으로써, 듣자 바로 걸음을 멈추며 삐죽삐죽 또 울려고 하는 기색이다.
 여간 난처한 문제가 아니었다.
 한두 번도 아니고 이럴 때마다 다 받아 줄 수도 없으므로 양강은 어쩔 수 없이 잔뜩 눈에 힘을 줬다.
 “또 울려고? 잘 들어, 너! 아는지 모르겠는데, 난 원래 여자애들이랑은 안 놀아. 툭하면 이렇게 울어서!”
 울 듯했던 려문군의 얼굴에 멈칫하는 기색이 떠올랐다.
 누구라도 짐작할 일이지만 원래 둘은 친하거나 한 사이가 아니었다.
 마구간지기의 손자와 장주의 딸의 차이가 있는 것으로, 양강이 그를 아는 것은 려지원의 딸이기 때문이고, 려문군이 양강을 아는 것은 그가 남자아이들의 대장이기 때문이었다.
 이래저래 좀 유명해서 안다고 봐야 했다. 그러나 전쟁놀이를 할 때도 그랬듯 남자아이들은 여자아이들과 늘 따로 놀았는데 대장인 만큼 양강은 더욱 그런 점이 있었고, 려문군 역시 그것을 알고 있었다.
 떠나서라도 려문군은 외톨이였다. 장주의 딸이라 조금만 실수해도 어른들로부터 주의를 받는 만큼 여자아이들까지 려문군을 피했던 셈이다.
 양강은 일단 이 점을 주지시킨 후 계속 말했다.
 “그래도 사정상 지금은 같이 가야 하는데, 자꾸 이러면 같이 갈 수 없어! 광서가 어딘지도 모르고 나도 힘들단 말이야! 거기로 가는 것도 너 때문이야! 장주님께서 부탁하셨어. 아니었으면 소림사로 갔을 거야! 센 무예를 배워서 원수를 갚아야 하니까. 장주님뿐 아냐. 사람들이 다 죽었어. 진혁도 아이들도 위사님들도! 우리 할아버지까지 다 돌아가신 거야! 자꾸 울고 하면 어쩔 수 없이 우린 각자의 길을 갈 수밖에 없어.”
 려문군의 얼굴이 핼쑥해졌다.
 지금의 려문군에게 있어 가장 무서운 소리였다.
 보다 무서운 것은 말을 하는 양강의 표정이었는데, 아이라 해도 정말 무서웠다. 사방이 조각난 시체로 뒤덮여 있었던 지옥 같았던 밤! 그는 직접 그것을 봤고 칼까지 맞았다. 아직도 뺨에 천이 대어져 있었다.
 떠올리며 하는 말이라 그대로 한의 빛이 눈에서 뻗어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저도 모르게 얼굴이 비틀리면서 그렁, 오히려 자신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러니까 정말 울지 마. 우린 어떻게든 광서로 가야 하고 한도 갚아야 하니까! 약속할 수 있지?”
 푹, 려문군의 눈에서 결국 또 눈물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왔다.
 “알았어. 안 울게. 혼자 두고 가지 마. 무서워.”
 “······.”
 양강의 눈에서도 또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리고 혹시 모르니까 누가 물으면 오빠라 해. 아니, 지금부터 그렇게 불러. 그래야 의심을 피할 수 있지. 할 수 있지?”
 “할게. 말 잘 들을게.”
 그러기를 한참, 이윽고 양강은 진정했다.
 “가자. 늦기 전에 화순성에 도착해야 해. 이대로는 안 될 테니까. 힘들지?”
 양강은 등을 댔다.
 “업혀.”
 아이들의 대장, 나이에 비해 양강은 한 뼘 정도 컸고, 려문군은 여자아이라 작았다.
 “그래도 돼?”
 “난 괜찮아.”
 정말 심하게 발이 아팠던지 려문군은 양강에게 업혔고, 둘은 다시 오순도순 길을 가기 시작했다.
 다행한 점이 있었다.
 자신도 원인을 모르고 있었지만 혈겁이 있던 날 밤 이후로 양강은 지친 적이 없다는 점이었다.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으나 려지원이 죽기 전 혼원진기를 건네줬기 때문이었다.
 훔쳐 배울 수 있는 초식들과 달라서 내공심법이 없는 한 제대로 활용하거나 할 수는 없었지만.
 
 한 시진 후.
 “다른 데 가지 말고 여기 꼭 숨어 있어. 성에는 혼자 들어가야 해.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
 “빨리 와야 해, 오빠?”
 “응.”
 이윽고 둘은 화순성에 도착했다.
 성이 보이자 양강은 일단 려문군을 주변 숲, 은밀한 곳에다 꼭꼭 숨겼다. 살인자들이 려문군을 찾고 있다는 것을 정확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혼자서 성안으로 갔는데, 들어서자 역시 바로 문제점이 보이고 있었다.
 대부분의 성이 그렇지만 성문 안에는 방을 붙이는 방문대榜文臺가 있었고, 거기에 려문군을 찾는 방문이 붙어 있었던 것이다. 내용을 보니 양천 관사에서 찾고 있다는 것 같았다.
 관사라면 믿을 수 있을 것이지만 그러나 어린 생각에도 양강은 가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될 것 같으면 려지원이 신분을 감추고 광서로 가라 할 이유도 없고, 떠나서라도 양천장의 아이들에게 있어 려지원은 신神과 같은 존재였다.
 살겁이 일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무림에서 가장 강한 사람으로 알고 있었고 실제 천하의 고수이기도 하다. 양천장의 무사들 역시 결코 포사들보다 약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 그들이 남김없이 조각난 시체로 변했는데 관사로 가서 뭘 할 것인가.
 당장은 도움이 될지 모르겠지만 관사에서 계속 돌봐 줄 리도 없고, 결국은 밖으로 내보내 누군가에게 맡기거나 할 것인데 정체가 밝혀지므로 또 살인자들이 찾아오기 쉬웠다.
 못 본 것으로 하고 무조건 안으로 들어갔다.
 번화한 성은 몹시 낯설었다.
 성이라 해야 지방인 곳이라 실제로는 그리 번화하지 않았지만 양정을 따라 양천현의 장터에 몇 번 가 본 것이 전부인 터라 그에게는 도회지나 같았다.
 더욱이 소름 끼치는 공포가 마음속에 존재하고 있어 사람들을 정면으로 보기조차 힘들었다.
 하지만 물러설 수 없었다. 어떻게든 광서로 가야 하는데 이 상태로는 광서는커녕 굶어 죽기 십상이다.
 그래도 다행히 화폐의 단위와 가치를 알고 있었다. 현으로 갔을 당시 양정이 한 푼을 줘 월병(과자)을 사 먹었는데 그게 열 개나 되었다.
 백 푼이 한 전이고, 열 전이 은자 한 냥, 은자 열 냥이 금자 한 냥에 가진 게 전부 열 냥짜리 금원보였는데, 단위를 아는 만큼 이게 얼마나 큰 재물인지 모를 리 없었다.
 문제는 이것을 어떻게 쓸 수 있는 푼돈으로 바꾸느냐였다.
 이 시대 화폐를 바꾸는 곳은 금전장金錢莊으로서 좋기로는 어른들에게 부탁하는 게 좋았지만 아이가 금원보라면 이건 난리가 날 일이었다.
 흉인을 만나면 큰일 날 수 있고, 곧은 사람을 만나도 당장 집으로 가자 할 수 있었다.
 일단 조심해서 사람들이 없는 곳으로 가 금원보를 비수로 한 냥 정도 잘랐다. 려지원이 쓰라 했던 것으로, 내력은 알 수 없었지만 이 비수는 서부인徐夫人이라는 검명이 손잡이에 새겨 있었고 퍼렇게 서슬이 일어날 정도로 지독히 예리했다.
 무딘 칼로도 잘리는 게 금인 만큼 가볍게 잘렸고, 일단 그것을 따로 넣고 여기저기로 다녔다.
 한참 다니다 보니 저만치 길 옆에 객잔을 겸한 주루가 하나 보였는데 거기에서 양강은 걸음을 멈췄다.
 앞에 손님들의 말[馬]을 받아 구유에 묶는 열대여섯 살가량의 점원이 오가는 게 보였던 것이다.
 아주 착해 보이지도 않고 악해 보이지도 않는 인상으로서 양정과 함께 현락으로 갔을 때 주루에서 음식을 먹은 적이 있었는데, 이들이 매우 싹싹하다는 기억이 있었다.
 나이가 많지 않다는 점에서 한참 그를 살피다가 이윽고 쿵쿵대는 가슴을 누르며 다가갔다.
 “형, 잠깐만 이것 좀 봐 줘.”
 “뭔데?”
 “이거 주웠는데 금자 같아. 맞지?”
 “헛······!”
 세상에의 첫 도전! 슬그머니 금자 조각을 그에게 보였다.
 많은 사람을 상대하는 점원이 금자를 못 알아볼 리 없고, 바로 눈이 휘둥그레졌다.
 “주웠다고? 이리 줘 봐!”
 “싫어.”
 양강은 터지는 듯한 가슴으로 휙, 얼른 금 조각을 치웠다.
 “내가 주웠으니까 내 거야. 그런데 쓸 수가 없어. 돈으로 바꿔 주면 형한테 반 줄게.”
 “반이라고?”
 반만 해도 은자가 다섯 냥, 엄청난 액수다.
 그 역시 두려운지, 점원은 급히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해 주지! 어디서 주웠어?”
 “성문 앞에서. 바꿀 수 있어, 형?”
 “문제없어! 그런데 임자가 알면······! 완전히 비밀로 해야 한다?”
 “반 줘야 해?”
 “따라와.”
 일이고 뭐고 때려치우고 점원은 누가 볼세라 얼른 양강을 끌고 금전장으로 갔다.
 “절대 비밀로 해야 해?”
 이후의 일은 쉬웠다.
 점원은 주인이 환전해 오라 한 것으로 해서 금자를 환전했고, 양강은 백 푼과 사십 전을 받았다.
 문제가 생길까 봐 몹시 우려하는 표정이었는데 양강으로서는 오히려 다행이었다.
 “그리고 물어볼 게 있어. 형, 광서가 어딘 줄 알아?”
 “광서성 말이냐? 그건 왜?”
 “멀다고 들었는데 얼마나 먼가 해서.”
 “십만 리 거리라고 들었다. 중원의 남쪽 끝이야.”
 “십만 리? 그럼 양천은?”
 “거긴 별로 안 멀지. 이삼백 리 정도니.”
 양강은 비로소 완전히 문제가 생겼음을 알았다.
 양천에서 여기까지 열흘이 걸렸는데, 십만 리나 된다면 십수 년을 걸어야 한다는 뜻이 된다.
 가슴이 철렁해서 물었다.
 “어떻게 가는지 알아?”
 “그야 모르지. 듣자니 육로로 가면 끝도 없어서 정주鄭州에서 배를 타고 항주杭州로 가야 한다더군. 거기서 또 배를 타고 가야 한다고. 그게 제일 빠르고 편하다더라.”
 “고마워. 환전 일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야.”
 양강은 얼른 자리를 떠났다.
 더 머뭇거려야 피차 도움이 안 되는 것이다.
 쓸 수 있는 돈이 생긴 만큼 당장 먹을 만두와 건식, 모포, 지도 등을 샀다.
 이것만 해도 얼마나 다행한 일인 것인지.
 
 “바꿨구나, 오빠!”
 초조하게 기다리던 려문군은 양강이 돌아오자 뛸 듯이 기뻐하며 꾸역꾸역 만두를 마구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열흘 만에 음식다운 음식을 먹는 셈이었다.
 그러나 양강은 걱정이 태산이었다.
 “이젠 배고프지 않을 거야. 잠자리는 문제가 되겠지만 모포도 샀어. 그런데 다른 문제가 생겼어. 광서가 생각보다 먼 것 같아.”
 “안 울게. 두고 가지 마. 오빠만 있으면 돼.”
 호칭하기 시작하자 려문군은 쉽게 양강을 오빠라고 불렀다. 한 살이라지만 나이도 위고 아이들의 대장인 점을 인정하는 눈치였다. 늘 혼자라 외로움도 탔던 것 같고.
 이런 려문군을 보며 양강은 자신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다. 과연 자신이 십만 리나 되는 길을 갈 수 있을까.
 그러나 용기를 냈다.
 “같이 갈 거야. 어떻게든 가고야 말 테니까. 절대 혼자 두고 가지 않을게.”
 말을 하는 시선이 허공을 향해 있고 주먹이 꽉, 움켜쥐어 있었다.
 스스로에게 한 약속임을 알 수 있었다.
 
 정상으로 시작된 십만 리 대여정의 시작.
 “아저씨, 좀 타도 돼요? 동생이 다리가 아프대요.”
 “어디로 가는데?”
 “심부름요. 석갑현에 가요.”
 “이십 리나 떨어진 곳인데 애들을 심부름 보내? 난 진촌까지밖에 안 간다.”
 “거기까지만이라도.”
 행보가 조금 빨라졌다.
 지도를 산 게 도움이 된 것으로 양강은 인근 마을들의 명칭들을 외웠다. 걷다 지나가는 우마차 같은 게 보이면 얻어 타고 이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말한 대로 잠자리만큼은 여전히 힘들었지만 환전 후부터 배는 곪지 않았고, 형편이 한결 나아진 셈이었다.
 둘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수배가 문제였지만 아이들의 얼굴은 대부분 거기서 거기. 용모파기가 대강인 시대였고, 남자아이의 옷을 입고 있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가난한 집의 여자아이 같았기 때문이었다.
 너무 고운 게 문제긴 했지만 고생을 해 적당히 부스스해지고 있었고, 남매로서 움직이고 있어 더욱 의심받을 바가 아니었다. 여전히 밤만 되면 찔찔대는 모습을 보였으나 약속한 대로 려문군도 처음처럼 걷다 말고 울거나 하진 않았다.
 “합!”
 쉭쉭······!
 보다 변하고 있는 것은 양강이었다.
 화순에 들른 후부터 작정을 한 듯 노숙을 할 때면 려문군에게 잘 자리를 만들어 준 후 끊임없이 음풍조와 팔보간선을 반복해 연습하며 비수를 휘둘렀다.
 어떻게든 용기도 내어야 했지만 그에게도 믿을 것은 지닌 비수 한 자루뿐이었다.
 려지원이 일반 비수를 금고 속에 넣어 두지는 않았을 것이나 다시 봐도 이 비수는 예리했다.
 밤에도 날에서 푸른빛이 돌 정도였고, 휘두를 때마다 무지개 같은 섬뜩한 푸른 광망을 뿜어냈다.
 보는 이에게 으스스한 느낌을 줄 정도.
 더 좋은 것은 양강의 기세氣勢였다.
 갈수록 자세가 안정되고 있었을뿐더러 손발을 놀리는 속도가 전과 비교할 정도가 아니었다.
 음풍조를 연습할 때는 바람 소리가 날 정도로 주위가 조영으로 가득 찼고 비수를 휘두를 때는 푸른 섬광이 몸을 가릴 정도였으며 팔보간선 역시 갈수록 빨라지고 있었다.
 려지원의 진기가 도움이 되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양강 역시 점차 이 점을 깨닫는 것 같았다.
 다만 안 좋은 점은 눈빛이었다. 그만한 일을 겪은 다음에야 누구라도 그럴 수밖에 없겠지만 갈수록 더 눈에 살기가 짙어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자상이 아물어 오래잖아 붙였던 얼굴의 천을 떼어 내었는데, 왼쪽 뺨에 세로로 검흔이 남았다.
 수련할 때나 살기가 비칠 때마다 이 상처가 붉게 변하기까지 했다.
 이대로라면 려지원도 놀란 재질이 희대의 마왕을 만들어 내는 게 아닌지 걱정될 정도였다.
 추적하고 있으리라 여겨지지만 살겁 이후 두건인들은 잠적한 것처럼 완벽히 보이지 않는 상태였다.
 
 정주鄭州.
 날씨가 타는 듯 뜨거워졌다.
 양강과 려문군이 하남 정주에 도착한 것은 두 달 후였다.
 화순에서 정주는 아주 멀지 않았다. 말을 탈 경우라면 엿새 거리였지만 그러나 아이들의 걸음에 고작해야 우마차를 얻어 탈 정도라 두 달이나 소요된 셈이었다.
 그만치 아이들에게 있어 세상은 큰 것이었다.
 도착한 정주는 더욱 그랬다.
 중원의 중북부, 거친 용이라 불리는 황하黃河를 끼고 자리 잡은 정주는 북위시대부터 십삼 개의 왕조가 도읍으로 삼았던 중원에서 가장 크고 발달한 도시로서 여기가 바로 저 유명한 장안長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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