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아가 되는 병
서(序)
3월 13일.
수연은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녀는 보험 약관이 들어 있는 파일을 가방에 넣었다.
영업을 나가야 할 시간이었다.
마지막으로 베이지색 정장 마이를 걸쳤다.
사이즈가 조금 작아 불편했지만 이 옷은 그녀의 전투복이었다.
동생이 용돈을 모아 사줬기에 더욱 소중했다.
수연은 책상 위에 놓인 가족사진을 바라보았다.
기쁘게 웃는 자신과 무표정한 동생이 그곳에 있었다.
수연이 이 일을 시작한 지도 곧 3년이었다.
그녀는 2년 하고도 반년이 더 지나서야 성과를 내기 시작했다.
회사의 벽에 붙은 그래프엔 별을 세 개나 달고 있는 수연의 이름이 빛나고 있었다.
점심시간마다 동료들은 그녀에게 비법을 물었다.
그때마다 수연은 배시시 웃을 뿐이었다.
그것은 아무에게도 알려줄 수 없는 그녀만의 비밀이었으므로.
늦겨울의 바람은 아직 차가웠지만 수연은 곧 봄이 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번 달에도 별을 달면 그녀와 그녀의 동생은 새 집으로 이사 갈 수 있으리라.
그렇게 되면 녹물 때문에 매일 아침 그 추운 화장실에서 발을 동동 구르는 비극도 없을 터였다.
후우.
그녀는 입김을 불어 시린 손을 녹이며 발을 떼었다.
포근한 이불에 폭 감겨 하루 종일 게으름만 피워도 행복할 것만 같은 그런 추운 날이었다.
수연이 사라진 바로 그날은.
기(起) (1)
“아니, 직원이 외근을 나갔다가 실종됐는데 회사에서 아무것도 안 해주는 게 말이 돼요?”
“죄송합니다. 규정상 저희가 고객 정보는 알려드릴 수가 없어서요.”
“어려운 부탁드리는 거 아니잖아요. 그냥 누나가 어디로 갔는지, 누굴 만나러 갔는지만 알려달라니까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규정이라는 게 참······ 저도 정말 도와드리고 싶은데······.”
마침내 수빈의 울분에 찬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자신도 모르게 쥐어진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실종된 누나를 찾을 수 있는 아주 작은 실마리도 얻지 못한 것에 대한 분노였다.
“씨발, 아저씨 딸이 없어져도 그럴 거야? 규정 때문에 집에서 TV 보면서 쉴 거냐고? 어? 그럴 거냐고!”
수빈이 도를 넘기 시작하자 그를 말리는 손길이 있었다.
함께 온 친구 선우였다.
선우는 수빈의 어깨를 잡고 그를 말렸다.
“야 그만해. 이제 그만 가자.”
“가긴 어딜 가. 이거 놔.”
수빈은 선우의 손에서 벗어나려 발버둥 쳤다.
그러나 그보다 체격이 훨씬 좋은 선우에게서 벗어나는 건 불가능했다.
“너 계속 그러면 수연 누나 돌아와서 쪽팔려서 어떻게 일을 하겠냐.”
“일할 필요 없어. 이딴 회사 그만두라고 할 거야.”
말은 그렇게 했지만 수빈은 이내 씩씩거리는 콧소리만을 낼 뿐 잠잠해졌다.
선우에게 잡혀 엘리베이터까지 온 수빈에게 벽에 걸린 그래프가 보였다.
익숙한 이름이 눈에 띄었다.
『설수연.』
누나의 이름이었다.
다른 사람들보다 훌쩍 높은 그래프 위에는 큼직한 별이 세 개나 붙어 있었다.
수빈은 저 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수연은 별이 붙을 때마다 자랑스럽게 사진을 찍어 보내곤 했으니까.
‘저딴 게 뭐라고.’
왈칵하고 가슴속에서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랐다.
수빈이 주머니를 뒤져 사진을 한 장 꺼냈다.
수연의 책상에서 가져온 사진이었다.
환하게 웃는 수연과 뿌루퉁한 표정의 자신이 보였다.
누나와 단둘이 찍은 사진이었다. 그리고 가족사진이기도 했다.
열일곱 살의 겨울, 부모님이 교통사고로 돌아가신 이후로 그의 가족은 수연 딱 하나였으므로.
사진을 보던 수빈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수빈은 입을 꾹 다물고 치밀어 오르는 눈물을 참아내려 노력했다.
누나가 보고 싶었다. 사진 속의 수빈이 뿌루퉁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사진 속의 자신에게 화를 냈다.
‘웃어. 이 새끼야.’
수빈은 이 사진이 누나와 둘이서만 찍은 유일한 것임을 알고 있었다.
사진을 찍자고 수연이 이야기할 때마다 수빈은 괜히 부끄러워서 귀찮다는 핑계로 거부해 왔었다.
이제가 돼서야 후회가 됐다.
왜 그토록 누나의 부탁에 애처럼 굴었을까.
사진이라도 맘껏 찍을 것을.
‘뭐 그리 어려운 부탁이라고.’
수빈의 마음에 후회가 파도처럼 밀려 들어왔다.
누나가 마지막으로 본 자신의 얼굴이 이 무뚝뚝한 표정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 그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했다.
‘누나. 이제 사진 찍자는 대로 다 찍어줄게. 빨리 돌아와라. 응? 제발 돌아와 주라.’
수빈은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에 앉아 있었다.
그는 창밖을 바라보며 자신에게 있던 사건들을 곱씹었다.
수연이 사라진 것은 3일 전이었다.
그날 아침은 평소와 다를 바가 없었다.
수연이 수빈보다 먼저 일어나 아침 식사를 준비했다.
수연은 그를 깨워 밥을 먹이고 학교에 절대 늦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수연은 수빈이 사준 베이지색 정장을 입고 출근을 했고, 수빈은 그녀가 나가자마자 다시 잠이 들었다.
늘 그렇듯이 학교에 늦었고, 평소처럼 수업을 빠졌다.
집에 돌아오자 수연에게서 전화가 왔다.
「누나 갈 때까지 저녁식사 준비해 둬. 나 오늘 진짜 밥하기 싫으니까 안 해놓으면 죽을 줄 알아!」
그렇게 말한 수연은 결국 그날 오지 않았다.
처음 수빈이 느낀 감정은 짜증이었다.
저녁식사를 다 준비해 뒀는데 말도 없이 오지 않다니.
마침 TV에서 20대 여성 피살 사건이란 뉴스가 흘러나왔지만 그는 무감각하게 채널을 돌렸다.
그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일이라 믿었으므로.
하지만 일이 늦는 것이라 믿었던 수연은 결국 그날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 다음 날도 오지 않았다.
수빈은 어제가 돼서야 뒤늦게 경찰에 신고를 했다.
왜 신고를 이렇게 늦게 했느냐 누가 묻는다면 수빈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어제 아침, 날이 밝자마자 수빈은 경찰서를 향해 뛰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수빈은 경찰에 신고하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그것은 정말 순진한 생각이었다.
「실종? 그냥 가출 아니에요?」
힘겹게 적어내린 수연의 실종신고서를 본 경찰은 그렇게 말했다.
귀찮음과 짜증이 섞인 목소리.
그 말을 듣는 순간 수빈은 경찰은 누나를 찾는 데 아무 도움이 안 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수연을 찾는 일이 오롯이 그의 몫이란 예감을 강하게 느꼈다.
덜컹.
버스가 과속방지턱을 넘었다.
수빈은 고개를 돌려 옆자리에서 잠든 친구를 보았다.
자신보다 손 한 뼘은 더 큰 친구 선우가 그곳에 있었다.
중학교, 고등학교를 함께 나오고 대학까지 이어진 질긴 인연이었다.
선우는 오늘 자신을 돕기 위해 학교까지 빠진 참이었다.
하지만 누나를 찾는 일은 요원해 보였다.
‘누나······.’
수빈은 눈물을 참기 위해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어둠이 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서울의 밤하늘엔 작은 별 한 조각도 보이지 않았다.
어느새 잠에서 깬 선우가 수빈을 툭툭 건드렸다.
버스에서 내릴 시간이었다.
버스에서 내리자 기다렸다는 듯이 전화기가 울렸다.
수빈은 다급하게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설수빈 씨 되시나요?]
“예. 그런데요.”
[여기는 경찰서인데요. 어제 오전에 설수연 씨 실종신고 하셨죠?]
“네! 저희 누나 찾았어요?”
[아. 안타깝게도 그건 아니고요. 저희가 설수연 씨 핸드폰을 발견했어요. 회사에서 좀 멀리 떨어진 공사장에서 발견됐는데, 정황상 단순 실종이 아니라 사고로 전환하고 수사를 해야 할 것 같아서 연락드렸습니다.]
“사고요?”
[네. 요즘 그 주변에서 좀 안 좋은 일들이 있었는데, 설수연 씨도 같은 사건에 휘말렸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이거든요.]
“아······.”
수빈의 입에서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누군가 목을 졸라 성대를 움켜쥔 것 같았다.
수빈은 뭐라 대꾸할 말을 찾았지만 입에서 나오는 건 ‘아’ 하는 탄식뿐이었다.
[물론 100% 설수연 씨가 사고에 휘말렸단 것은 결코 아니니까, 크게 걱정하지는 마시고요. 어디까지나 가능성이니까요. 저희도 최대한 노력해서 좋은 소식 들려드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통화는 그렇게 끊어졌다.
수빈은 끊어진 핸드폰에서 들려오는 반복적인 통화음을 들으며 멍하니 서 있을 뿐이었다.
옆에서 그런 수빈을 묵묵히 기다리던 선우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에게 물었다.
“무슨 전화야?”
“어, 어? 경찰서.”
“경찰서? 누나 찾았대?”
“아니······ 누나는 못 찾고, 누나 핸드폰은 찾았는데. 실종에서 사고로 전환한대.”
“사고? 누나한테 무슨 일 생긴 거야?”
“아직은 모른대. 그냥 가능성이라고······ 가능성이 있어서 그렇대.”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의 통화 종료 버튼을 겨우 누른 수빈은 그만 핸드폰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허리를 숙여 떨어진 핸드폰을 주우려던 그는 다리의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수빈은 일어서려 노력했지만 몸에 힘을 줄 수가 없었다.
선우가 재빨리 그를 부축하며 말했다.
“일단 집으로 돌아가자.”
한쪽 어깨를 부여잡은 선우가 이끄는 대로 끌려가던 수빈의 눈에 아파트 놀이터가 들어왔다.
늦은 시간임에도 사람이 있었다.
붉은 머플러를 두르고 머리칼을 위로 질끈 묶은 여자가 보였다.
며칠 전부터 놀이터에 있던 여자였다.
머플러로 얼굴을 반이나 가린 그녀는 낡은 가죽 그네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아무리 차가운 바람이 불고 해가 져도 움직이지 않았다.
두 다리에 못이라도 박힌 양, 그녀가 하는 일이라고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뿐이었다.
빨간 머플러 사이에서 빛나는 두 눈동자가 지나가는 사람들을 집요하게 쫓았다.
수빈의 눈이 그녀에게서 떨어지질 않았다.
“저 사람은 누굴 기다리는 걸까?”
수빈에게서 그런 말이 툭 튀어나왔다.
“뭐?”
선우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답했다.
“놀이터에 있는 저 여자 말이야. 며칠 전부터 저기 앉아 있던데 왜 그러는 걸까?”
“저 사람? 그러고 보니 아침에도 본 것 같은데. 어? 이쪽 본다.”
어느샌가 그녀가 수빈과 선우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수빈은 또 엉뚱한 소리를 늘어놓았다.
“저 여자가 기다리는 사람은 올까? 오면 좋겠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수연 누나 별일 없을 거야. 실없는 소리 할 힘 있으면 다리에 힘이나 줘. 아까부터 비틀거리는 게 불안불안하다 야. 또 자빠지면 버리고 갈 거야.”
선우는 아파트 입구까지 수빈을 질질 끌다시피 해서 데려갔다.
수빈은 후들거리는 다리를 움직여 계단을 올랐다.
세 번의 시도 끝에야 그는 현관문의 비밀번호를 제대로 입력할 수 있었다.
침침했던 거실에 문이 열리며 빛이 들어왔다가 이내 문이 닫히며 다시 캄캄해졌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수빈의 가슴에 쿵 하고 들이닥쳤다.
방이 평소보다 더 어두웠다.
수빈은 현기증이 이는 것을 느꼈다.
눈앞이 캄캄해지고 방향감각이 상실되는 그 찰나의 순간.
그의 머릿속에 울리는 생각은 단 하나였다.
‘누나가 있는 곳으로 가고 싶다.’
수빈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소파에 몸을 던졌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