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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야 1

2017.12.13 조회 326 추천 3


 소야 1권
 제1장 천룡보의 골칫덩이
 
 
 “야, 바보야! 너, 열셋 더하기 열넷이 얼만지 알아?”
 “치잇! 형은 왜 맨날 나한테 바보라고 그래?”
 “크흐흐···, 그야 네놈이 바보니까 바보라고 부르지. 방금 형이 낸문제를 맞춰 봐! 맞추면 바보라고 안 할게.”
 “열셋 더하기 열넷? 열셋이 뭐야? 그리고 열넷은?”
 “크하하하···, 이런 바보 같은 놈. 나이가 몇인데 열셋하고 열넷도 몰라? 임마, 나는 세 살 때 알았어. 한데, 너는?······.”
 “꼭 나만 가지고 그래. 형은 얼마나 잘났다고···, 아아악! 이런 제기랄!”
 한쪽 뺨에 긴 상흔이 있는 십 세 정도 된 더벅머리 소년은 땅바닥에 삐죽 솟아 있는 돌부리를 있는 힘껏 걷어차다 자신의 발을 감싸쥐며 비명을 질렀다.
 “으하하하하···, 바보 같은 녀석! 그러니 바보 소릴 듣는 게야.”
 소년의 뒤쪽 준수하게 생긴 청년 하나가 비릿한 조소를 머금은 채 팔짱을 끼고 있었다.
 “으이그···, 제기랄!”
 “크하하하···, 바보! 어제도 그걸 걷어차더니···, 정말 바보야!”
 돌을 걷어찼던 소년은 절뚝이면서 대꾸도 없이 너른 마당을 가로질러 사라졌다. 이곳은 천하의 모든 무인들이 동경하는 천룡보(天龍堡) 후원이었다.
 돌을 걷어찬 소년은 천룡보주인 구화신협(九華神俠) 추강(秋剛)의 다섯 아들 가운데 가장 막내인 추혁린(秋赫璘)이었다. 그리고 그를 보고 비웃은 소년은 넷째인 추군재(秋君宰)였다.
 따로 무림제일신협으로 불리는 구화신협 추강은 현 무림에 있어 독보적인 존재였다. 그의 나이 불과 약관에 출도한 이후 지금까지 이천칠백여 회의 비무를 승리로 이끈 전사(戰士) 중의 전사였으며, 기린아(麒麟兒) 중의 기린아였다.
 어린 나이에 우연히 전대 고인의 무공기서(武功奇書)와 한 뿌리의 인형설삼(人形雪蔘)를 얻어 일약 고수가 된 그는 강호를 횡행하면서 수많은 염문(艶聞)을 뿌린 끝에 일곱에 달하는 꽃같이 아름다운 부인을 두었다.
 이것은 그에게 전설의 미남자인 송옥이나 반안과 비교될 만한 준수한 외모 때문이기도 하였지만 능란한 화술(話術)과 부드러운 성격 때문이었다. 그의 일곱 부인들 가운데에는 쟁쟁한 문파의 여식들도 있었고, 무림기인의 손녀나 여식도 있었다.
 천룡보를 개파할 때까지 그에게는 부인이 여섯뿐이었다.
 마지막으로 얻은 부인, 즉 골칫덩이 추혁린의 모친은 천룡보가 자리하고 있는 금릉 제일기원인 금화원(錦花院) 최고의 기녀였던 산호(珊瑚)라는 기명을 지닌 지옥교(池玉嬌)였다.
 산호부인으로 불리는 그녀는 대취한 구화신협을 시중들던 중 수태하게 되었고, 불과 여덟 달 만에 추혁린을 출산하였다.
 천룡보 수뇌부들 중엔 누군가가 꾸민 간계인 줄 알고 그녀가 들어오는 것을 반대하였으나 그날 밤 그녀가 청백지신이었다는 것을 아는 구화신협이 그녀를 받아들인 것이다. 아무튼 신호부인이 낳은 유일한 아들인 추혁린은 천룡보의 골칫덩이였다.
 그에게는 네 형제말고도 두 명의 누이들이 더 있었다. 그런 그들 여섯은 모두 부친을 닮아서인지 문일지십(聞一知十)의 총명을 지닌 기재(奇才)들이었다. 그러나 추혁린은 아니었다.
 어린아이들이나 익히는 소학을 떼는 데만 꼬박 오 년이 걸릴 정도로 둔재 중의 둔재(鈍才)였다. 그것도 그의 모친인 산호부인이 밥 먹는 시간과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곤 하루종일 붙어 있으면서 매로 다스렸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다른 형제들을 가르쳤던 유림제일지(儒林第一知) 곽청(廓淸)은 추혁린에게 두 손 두 발을 다 들고 가르치는 것을 포기하였다.
 산만하기 이를 데 없어 한자리에 오래 앉아 있지 못하며, 늘 엉뚱한 것을 묻기 일쑤였고, 장난은 어찌나 심한지 하루라도 의복이 말짱할 날이 없을 정도였기에 그런 것이다.
 하라는 공부는 전혀 하지 않고 하루종일 개미집을 파헤치지 않나, 날아다니는 나비를 잡겠다며 막대기를 휘둘러 모든 창문을 박살내는 일도 많았다.
 그의 얼굴에 있는 상흔도 그의 덜렁대는 성품 때문에 생긴 것이다. 형제 중 가장 맏이인 하토신검( 土神劍) 추인룡(秋?龍)이 검법을 수련할 때 그의 뒤에서 구경하다 바닥에 떨어진 쇳조각이 햇살에 번쩍이자 그것을 주우려 다가섰다가 입은 상처였다.
 이것을 늘 미안하게 생각하는 그는 언제나 추혁린에게 관대하였다. 따라서 천룡보 내원에서 그에게 다정하게 대하거나 관대하게 대하는 사람은 모친인 산호부인과 하토신검뿐이었다.
 나머지 형제 자매들은 늘 그를 돌대가리라며 놀리기 일쑤였고, 아예 상대조차 하지 않으려 하였다. 간혹 그를 불러 세워 말을 걸 때가 있었는데, 그것은 심심하여 그를 놀리려 하는 경우였다.
 이러한 사실을 아는 산호부인은 늘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 청백을 바칠 때 외에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처소를 찾지 않은 무정한 지아비와 하나뿐인 자식이 늘 천덕꾸러기처럼 지내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오늘도 추군재는 심심하던 차에 추혁린을 불러 세워 그를 놀리고 있었다.
 태어난 이후 지금까지 산학(算學)이라곤 접해 보지 못한 그에게 그런 것을 물었으니 올바른 대답이 나올 리 없었다.
 사실 추혁린이 뗀 소학(小學)이란 것도 억지로 인정받은 것이다. 글자는 하나도 모르고 소리만 외웠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그 뜻을 알 리 없었다.
 하지만 단 하나, 그가 뜻을 알고 있는 구절이 있었다.
 
 父生我身 母鞠吾身
 腹以懷我 乳以哺我
 以衣溫我 以食活我
 恩高如天 德厚似地
 爲人子者 曷不爲孝
 
 아버지 날 낳으시고, 어머니 날 기르시니,
 배로써 나를 품어 주시고, 젖으로 나를 먹이시며,
 의복으로 따뜻하게 해 주시고, 음식으로 나를 살려 주시니,
 은혜 높은 것이 하늘과 같고, 덕 두터움이 땅과 같도다.
 사람의 자식된 자로 어찌 효도를 하지 아니하리요.
 
 바로 소학의 첫 구절이었다. 이것만은 읽고 쓸 줄 알았으며, 그 뜻을 알았다. 그에게 남다른 효심이 있어서가 아니고 수만 번이나 되풀이하여 암송한 첫 구절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아는 것이 이것뿐이기에 틈만 나면 이것을 읊조려 형제들의 놀림감이 되곤 하였다. 다른 아이들 같으면 이미 사오 세에 떼었을 그것을 아직도 입에 달고 사니 그럴 만도 하였다.
 추혁린의 형들 가운데 첫째인 하토신검은 올해 이십삼 세이며 부친의 검법을 그대로 전수받아 무림의 후기지수 중 수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차기 보주로서 손색이 없다는 평을 받고 있었다. 그는 이미 일가를 이뤄 두 명의 부인이 있는데, 그의 성품은 한일하고 담대하였다.
 둘째인 귀영섬도(鬼影閃刀) 추무경(秋武卿)도 혼례를 올렸는데, 그는 천룡보 내에서 부친을 제외하곤 가장 고강한 도법의 소유자였다. 올해 이십이 세가 된 그의 성품은 다소 차가운 구석이 있으며, 심술궂을 때가 많다. 그는 늘 하토신검을 못마땅해한다.
 셋째인 표향공자(飄香公子)는 올해 이십일 세로 신법(身法)과 암기술(暗器術)에 있어 일가를 이루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그는 남들이 있는 곳에서는 무한히 선량한 척하지만 실상은 형제들 가운데 가장 잔인한 성품을 지녔다.
 넷째가 추혁린을 가장 괴롭히는 형인 창해신창(滄海神槍) 추군재인데, 올해 열여덟 살이 되었다. 그의 성품은 아직 드러나지 않았으나 성장함에 따라 둘째나 셋째 못지않을 성품이었다. 그는 창(槍)을 다루는 데 일가견이 있다.
 이들 모두 준수한 외모와 총명한 두뇌, 그리고 나이에 비해 절륜한 무공을 지니고 있으며, 든든한 배경을 지녔다.
 추혁린의 누이 가운데 첫째는 올해 십구 세가 된 천향선자(天香仙子) 추혜지(秋慧芝)이다. 그녀는 외호에서 알 수 있듯 만개한 장미처럼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하여 요즘 천룡보의 문턱은 드나드는 매파(媒婆)들의 발걸음으로 온통 닳아 버릴 지경이다.
 그러나 콧대가 세고 자존심이 높기로 이름난 그녀는 매번 청혼을 거절하였다. 그녀는 부친과 같은 천하제일인이거나 보위를 물려받을 황자(皇子)가 아니면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녀는 늘 허리춤에 끼워 넣고 다니는 한 자루 연검(軟劍)으로 떨어지는 나뭇잎을 육십사 쪽으로 가르는 재주를 지녔다. 다시 말해, 검법에도 일가견이 있다는 것이다.
 세인들은 모르나 천향선자는 성품이 다소 독선적이고 안하무인인 구석이 많았다. 그렇기에 천룡보 내에서는 그녀를 가시 돋친 장미라고 부르길 주저하지 않았다.
 둘째는 이제 십칠 세가 되어 꽃처럼 피어오르는 벽라옥녀(碧羅玉女) 추진진(秋秦珍)이었다. 그녀 역시 언니를 닮아 오만한 구석이 많은 소녀였다. 하지만 아직 세상 물정을 모르기에 다소 순진한 구석도 있었다. 그녀는 편법(鞭法)의 달인이었다.
 이렇듯 쟁쟁한 형제와 누이들 틈에서 자라는 추혁린은 그들에게 있어 언제나 수치였다. 어떻게 그토록 뛰어난 부친과 아름다운 모친 사이에서 태어난 그가 그토록 아둔할 수 있으며, 어떻게 그토록 평범한 얼굴을 지녔는지 정말 모를 일이라고 수군댔다.
 자기들끼리 있을 때면 추혁린은 부친의 자식이 아니라 어쩌면 기원을 찾았던 난봉꾼의 자식일지도 모른다고 하였다. 그렇기에 그토록 무시하고 심술궂게 대하는 것이었다.
 천룡보의 보주이자 자타가 인정하는 천하제일인인 구화신협은 보의 업무 외에도 무림맹주로서 홀로 무림을 경영하다시피 하기에 언제나 눈코 뜰 새 없을 정도로 바빴다. 따라서 비록 자식이라 할지라도 그가 부르기 전에는 그를 볼 수 없었다.
 그런 그는 예전에 자식들을 모아놓고 이렇게 말하였다.
 
 “너희들이 알다시피 이 아비는 약관 나이에 강호로 나와 천신만고 끝에 오늘날을 이룩하였다. 천룡보는 아비에게 있어 너무도 중요한 존재이다. 따라서 차후 후계자를 선정할 때 이 아비는 나이와 서열을 무시하겠다. 너희들 가운데 정말 강한 자가 나온다면 기꺼이 넘겨주겠으나, 만일 그렇지 못하면 다른 사람이 천룡보를 맡게 될 것이다. 부지런히 무공을 연마하고 학문을 닦아 이 아비가 기쁘도록 해 다오.”
 
 말의 요지인즉, 강자만이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첫째와 둘째는 눈에 보이지 않는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다.
 셋째는 다소 방관하는 눈치를 보였으나 그 역시 후계자 경쟁에서 비켜날 마음은 없는 듯하였다.
 이 모든 것은 그들의 모친과 모친의 친족들 때문이었다.
 하토신검의 모친은 무림의 명문세가로 알려진 서문세가(西門勢家)의 장중주인 수화요정(秀花妖精) 서문혜(西門惠)였다. 올해 사십이 세가 된 그녀는 수화부인(秀花婦人)으로 불렸다.
 귀영섬도의 모친은 천약선자(千藥仙子) 주규방(朱圭芳)으로 강호제일 신의들이 모여 있는 화타곡(華陀谷) 제일기재로 추앙받던 여인이었다. 곡주의 수제자이기도 한 그녀는 구화신협이 비무에 승리를 쟁취하기는 하였으나 심한 내상으로 인하여 주화입마의 위기에 빠져 있을 때 그를 구해준 여인이었다.
 사십일 세인 그녀는 부인들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미모를 자랑하여 지금 보아도 도저히 사십 세를 넘겼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절염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표향공자의 모친은 무시 못할 세력인 사천당가의 금지옥엽인 당문일수(唐門一手) 당문옥(唐文玉)이었다. 올해 사십일 세인 그녀는 구화신협과 가장 먼저 사랑을 속삭인 여인이었다.
 하지만 강호행을 하던 그가 우연히 음약에 취해 신음하는 수화부인을 발견하여 인연을 맺는 바람에 두 번째로 밀린 것이다.
 따라서 원래 자신이 차지하였을 자리를 차지한 그녀 알기를 사갈처럼 여기고 있었다.
 천향선자의 모친은 당금 대명제국의 승상 진호부(晋虎阜)의 둘째 여식인 월하혜문(月下慧文) 진희라(晋姬羅)였다.
 뛰어난 학문을 지녀 한림원 학사가 울고 갈 지경이라 하는 그녀는 올해 삽십구 세였다. 비교적 부드러운 성품을 지니고 있으며, 산호부인에게 유일하게 친절히 대하는 여인이었다.
 벽라옥녀의 모친은 강호 한복판인 호북성 무한에 자리잡은 무적검회(無敵劍會) 회주의 외동 손녀인 검치(劍痴) 조약빙(趙葯氷)으로 올해 삼십팔 세였다.
 무적검회는 검법에 미친 사람들의 집단이었다.
 그들은 좌수검법(左手劍法)을 익히기 위하여 스스로 오른손을 잘라내는 일도 서슴지 않으며, 여인의 경우에는 검을 휘두르는 데 거치적거린다며 한쪽 유방을 도려내기까지 하였다.
 검치부인이라 불리는 그녀는 특이하게도 쌍검을 사용하는데, 검법만 가지고 따진다면 구화신협에 전혀 밀리지 않을 정도의 고수라 하였다.
 오래 전 무적검회에 도전장을 던진 구화신협은 회주인 무영검(無影劍) 조금산(趙金山)과의 비무를 할 때 만일 자신이 지면 무적검회에 무릎을 꿇을 것이나 회주가 패할 경우 손녀를 달라는 조건을 붙였었다. 당시 수화부인과 천약선자와 함께 강호삼미(江湖三美)로 불리던 그녀는 그의 영준한 모습을 보고 부친이 패배하기를 은근히 바란 불효여식이었다.
 오늘날 천룡보가 이처럼 강호제일의 방파가 될 수 있었던 이유 가운데 하나는 바로 무적검회의 전폭적인 지지 때문이었다.
 비무에서 패한 무영검이 호탕한 웃음과 함께 손녀를 기꺼이 넘겨주었던 것이다.
 늘 추혁린을 못살게 구는 추군재의 모친은 창술에 있어서 강호 일절로 소문난 구창궁(九槍宮) 궁주인 팔방풍우(八方風雨) 강만준(姜滿濬)의 여식인 용녀(龍女) 강호미(姜昊薇)였다.
 올해 삼십팔 세인 그녀는 다른 부인들이 다 낳는 자식을 보지 못해 노심초사하다 추군재를 낳고야 소원을 풀었다며 대성통곡한 여인이었다.
 아무튼 천룡보 내원에서 기거하는 사람들은 단 한 사람만 빼놓고는 모두 미남미녀였고, 기재들이었다. 이들 모두는 오만하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는데, 세인들은 그런 그들이 충분히 그럴 자격을 갖추고 있다고 인정하고 있었다.
 
 천룡보가 마치 태산준령처럼 우뚝 서 있기에 중원무림을 상징하는 칠파일방은 상대적으로 위축된 듯 보이나 실상 그들은 하나도 변한 것이 없었다. 소림을 위시한 무당, 화산, 곤륜, 아미, 청성, 점창, 개방은 전에 없을 정도로 활발히 제자들을 받아들여 세력이 확장되는 중이었다.
 한 가지 흠이라면 강호의 기재들 중 대부분이 이들 칠파일방의 제자가 되는 것보다는 천룡보의 흑의무사가 되기를 원하였기에 천룡보 제자들에 비하면 약간 자질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천룡보에서는 제자들의 신분을 여섯 단계로 나누고 있었다.
 금의(錦衣) 무사가 가장 위이고, 그 아래로 홍삼(紅衫), 황삼(黃衫), 자삼(紫衫), 백삼(白衫), 흑삼(黑衫)의 순이다. 걸치고 있는 의복의 색으로 신분을 나타냈기에 어디에서든 상대의 신분을 즉각 알 수 있다. 또한 모든 의복에는 천룡보의 상징인 흑룡과 황룡이 승천하는 듯한 문양을 수놓게 하였다.
 가장 하급인 흑삼무사라 할지라도 강호에 나가면 그 어느 누구도 그를 무시하기는커녕 존경의 눈빛을 보냈다. 그도 그럴 것이 천룡보 흑의무사는 칠파일방의 당주급과 맞먹을 정도의 무공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금의무사는 세 명뿐인데 각기 일 인 당 세 명의 홍삼무사가 배정되어 있고, 홍삼무사에게는 세 명의 황삼무사들이 수하로 배정되어 있다. 황삼무사는 여섯 명의 자삼무사들을 거느리고 있으며, 자삼은 다시 아홉 명의 백삼무사들을 휘하로 거느린다.
 마지막으로 백삼무사 역시 일 인 당 아홉 명의 흑삼무사를 거느리고 있기에 천룡보는 그야말로 무림 역사상 이루지 못 하였던 어마어마한 문파라 할 수 있었다.
 수뇌부를 제외한 숫자만도 일만삼천여 명에 달하는데, 그 중 가장 약한 자가 칠파일방의 당주급이라면 말 다한 것이 아닌가!
 금의무사 위로는 세 개의 전이 있는데 각기 천룡전(天龍殿), 주작전(朱雀殿), 백호전(白虎殿), 현무전(玄武殿)이 그것이다.
 이 중 현무전은 별동대로 내원의 호위와 보주 일가의 경호를 맡고 있는데, 남독(南毒) 태류극(太流剋)이 전주를 맡고 있다.
 천룡전주는 구화신협의 막역한 친우인 인검(忍劍) 차진서(車辰瑞)이고, 주작전주는 과거 전대 거마였던 수라혈귀(修羅血鬼) 노군충(盧?充)이다. 백호전주는 무림의 일대기인이었던 운룡일학(雲龍一鶴) 부연(夫淵)이었다.
 천룡전주를 제외한 나머지 셋은 구화신협과의 비무에 패한 후 그의 인품에 매료되어 스스로 수하를 자청한 결과 각 전을 맡고 있는 것이다.
 
 ***
 
 “흐흑! 어머니, 소자를 왜 바보로 낳으셨어요?”
 천룡보 후원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자그마한 전각에서 아직 어린 소년의 울먹이는 음성이 들렸다.
 “휴우···, 또 왜 그러느냐? 또 형들이 너를 놀렸느냐?”
 깊은 한숨과 함께 터져 나온 인자한 여인의 음성은 바로 산호부인의 음성이었다.
 “흐흑! 조금 전 넷째형이 또 놀렸단 말이에요.”
 “군재가?”
 “흐흑! 그래요. 그 형은 나를 볼 때면 언제든···, 흐흐흑! 어머니, 나는 왜 이렇게 바보예요? 왜 나를 바보로 낳으신 거예요?”
 소년은 굵은 눈물을 연신 소매로 닦아내며 모친에게 물었다.
 형들과 누이들 모두가 미남미녀인데다 총명하기 이를 데 없는데 왜 자신만 그러는지 정말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휴우···, 이 모든 게 이 어미의 죄다. 그때 그렇게 하지만 않았던들···, 휴우! 미안하구나. 하지만 이제 와 돌이킬 수도 없으니······.”
 산호부인은 십 년 전 린아를 회임(懷妊)하였을 때를 떠올렸다.
 천하의 영웅과 하룻밤 인연을 맺은 그녀는 몇 달 후 자신이 회임한 것을 알고 너무도 놀랐다. 회임은 기녀로서 모든 것을 박탈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때 그녀는 금화원의 원주인 연화부인이 건넨 단약(丹藥) 하나를 받아먹었다. 그것은 몹시도 독한 약으로 태아(胎兒)를 떨어뜨릴 때 쓰는 약이었다.
 어차피 천한 기녀의 신분이니 설사 아이를 낳는다 하더라도 천하의 영웅인 천룡보주가 인정하리라고 생각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단약은 아무런 효험도 보이질 못하였다.
 결국 여덟 달 만에 추혁린을 낳은 산호부인은 고심 끝에 천룡보를 찾았고, 의외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아무튼 그 단약 때문인지 추혁린은 성장이 늦었다. 그래서 십 세가 되었으나 아직까지 칠팔 세 정도밖에 자라지 않았다.
 그리고 두뇌도 형들처럼 영특하지 못했고, 얼굴 또한 못생기지는 않았으나 어디에 내놓을 정도는 못 되었다.
 “휴우! 이 모든 것이 이 어미의 죄이구나. 용서하거라.”
 아직 어린 소년은 모친의 말이 이해되지 않았으나 그저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도 적이 안심이 되는지 금방 울음을 그치고 잠들었다. 그런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는 산호부인의 옥용에서는 눈물이 흘렀다. 자신의 처지가 비관되어서이고, 아들의 장래가 걱정되어서였다.
 무림이 어떤 곳인지 전혀 모르던 그녀는 이곳 천룡보에 머무는 지난 십 년 동안 너무도 놀라는 일이 많았다. 어른 키로 한 길은 족히 될 곳을 휙휙 넘나드는 것은 경악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녀가 놀란 것은 은밀히 진행되는 암계(暗計)였다.
 아무런 욕심도 없는 그녀는 보주의 여섯 부인들과 천룡보 수뇌부들, 그리고 그녀들의 친정 세력들이 벌이는 은밀한 암투를 수없이 보아왔던 것이다.
 다행히 그들은 산호부인에게 아무런 배경도, 아무런 욕심도 없다는 것을 아는지 간혹 그녀를 밀정(密偵)으로 이용하곤 하였다. 여섯 곳 모두가 그러하였기에 절로 모든 내막을 알게 된 것이다.
 사실 산호부인은 분명 보주의 부인이지만 누구도 그녀를 그만한 대접을 해 주지 않았다. 그저 시녀들보다는 조금 높은 수준으로 인정할 뿐 거의 다른 부인들의 시녀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따라서 그 동안 알게 모르게 많은 눈물을 흘렸다. 이렇게 하려고 천룡보에 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처음엔 아들만 넘겨주고 나가겠다고 하였었다.
 다시 금화원으로 돌아간 그녀는 자신 때문에 기원이 문을 닫아야 할 처지에 놓이자 할 수 없이 되돌아온 것이다.
 천하제일인의 아내가 있는 기원에서 술을 마실 만큼 배짱이 큰 사내가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천룡보의 흑삼무사들이 철통같이 에워싼 채 아무도 들여보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천룡보 내에서 산호부인에게 유일하게 정으로 대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현무전주인 남독 태류극뿐이었다.
 일흔의 나이인 그는 그녀를 마치 자신의 여식처럼 생각이라도 하였는지 간혹 산호각을 들여다보고 필요한 물건들을 말없이 넣어주곤 하였다. 그래서인지 추혁린도 그만은 따랐다.
 하지만 남독은 늘 그에게 냉정하게 대하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려 하였기에 가까이 할 수 없던 사람 중 하나였다.
 현재 천룡보는 눈에 보이지는 않으나 여러 파벌로 나뉘어 이합집산을 끊임없이 하고 있었다. 아직 보주가 정정하기에 누구도 표면으로 드러내 놓지는 않았으나 누가 후계자가 될 것인가에 따라 처우가 달라진다 생각하였던 때문인지 끊임없는 줄서기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린 추혁린이 잠든 사이 산호부인은 무엇인가를 고심하다 시비로 하여금 현무전주를 불러달라 하였다.
 “현무전주가 칠부인을 뵈오이다.”
 “어서 오세요. 야심한 시각에 오시라 하여 정말 미안해요.”
 “무슨 말씀···, 속하는 보주의 수하이니 의당 부인의 수하나 마찬가지외다. 상전이 수하를 부르는데 어찌 시간이 따로 있겠소이까?”
 남독은 백염을 쓰다듬으며 마치 자상한 부친이 여식을 바라보는 듯 부드러운 눈길로 산호부인을 보고 있었다.
 “의논드릴 일이 있어요. 그건······.”
 산호부인의 입술이 가볍게 움직이기 시작하자 놀랍게도 남독의 귀로 전음이 전해졌다.
 당구삼년폐풍월(堂狗三年吠風月)이라는 말이 있다.
 산호부인이 이곳 천룡보에 머문 지 어언 십 년 가까이 되었기에 그녀는 남몰래 무공을 익혀 왔다.
 남독이 몰래 전수해 준 운기토납 방법대로 늘 운공을 한 결과였다. 하루종일 할 일이 없던 그녀였기에 무공의 기초가 전혀 없던 그녀가 불과 십 년 만에 전음술을 쓸 정도가 된 것이다.
 산호부인의 전음을 심각한 표정으로 듣고 있던 남독의 얼굴에 우려의 빛이 드러났다. 누구도 드러내 놓고 말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천룡보에서는 금기로 여겨지고 있는 것을 요구하였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혁린에게 무공을 가르쳐 달라는 것이었다.
 유달리 경쟁이 심한 천룡보의 다른 부인들과 아들들은 혹시라도 추혁린이 누군가에게 무공을 배울 것을 염려하여 그에게 아무것도 가르치지 말라는 암시를 끊임없이 보내곤 하였었다.
 비록 추혁린이 바보라 할지라도 감히 자신들의 경쟁자로 부상하는 것을 막고자 하는 의도였다.
 “흐음···, 알겠소이다. 속하가 나름대로 방법을 찾아볼 터이니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며칠 후 추혁린은 모친의 심부름으로 현무전으로 향하였다.
 “잊으면 안 된다. 남독 할아버지에게 가되 거기에 간다고 말하면 안 된다. 누가 물으면 그냥 놀러간다고 해야 한다.”
 홀로 중얼거리며 현무전을 찾는 추혁린은 모친의 심각한 얼굴을 기억하고 모처럼 긴장하였다.
 “린아야! 만일 이것이 밝혀지면 우리 모자는 어쩌면 이곳에서 쫓겨날지도 모른다. 제발 조심해라.”
 조금 전 들었던 모친의 음성이 귀에 쟁쟁하자 추혁린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나름대로 결심을 하였다.
 “알았어요. 죽어도 말하지 않을게요.”
 과연 얼마나 지켜질지 모르는 결심이었으나 추혁린은 제법 결연한 모습이었다.
 “허허허···, 어서 오시오, 소주!”
 “헤헤···, 안녕, 할아범!”
 “허허허···, 예에, 소주 덕분에 잘 있었습니다.”
 추혁린과 남독은 마치 친 조손 관계인 것처럼 부드러웠다.
 남독으로서도 보주의 다섯 아들 가운데 가장 편하게 대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그였다. 다른 아들들은 모두들 가슴 깊이 야심(野心)을 품고 있기에 자칫 한 마디 말이라도 잘못하면 후환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남독은 그답지 않게 주위의 눈치를 살피더니 슬그머니 전음을 보냈다.
 “소주! 오늘부터는 매일 이곳에 오셔야 합니다. 오시긴 오시되 절대로 이 할아범과 두 마디 이상의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
 추혁린은 남독이 왜 이런 말을 하는지 몰랐기에 의아하다는 눈빛을 보냈지만 입은 열지 않았다.
 “이 할아범도 소주의 형님들이 늘 소주를 놀리신다는 것을 압니다. 소주는 그게 싫으실 거구요. 이 할아범은 소주께서 결코 바보가 아니시라는 것을 잘 압니다. 그건 어느 누구도 소주께 학문이나 무공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늘부터 이 할아범이 학문과 무공을 가르칠 터이니, 소주께서는 그저 이 할아범이 시키는 대로만 하시면 됩니다. 그렇게 하시겠습니까? 그렇게 하기만 하면 아마 형님들께서도 놀랄 것입니다.”
 추혁린은 남독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눈빛을 반짝였다.
 자신이 바보가 아니라고 말해 주는 두 번째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이제부터 학문과 무공을 배워 언젠가는 형들을 깜짝 놀라게 해 주자는 그의 말에 흥미가 당겼던 것이다.
 “그럼······.”
 막 말을 꺼내려던 추혁린은 남독이 손가락 하나를 세워 자신의 입술에 대며 조용히 하라는 몸짓을 하자 움찔거리며 멈췄다.
 “소주, 벌써 잊으셨습니까? 여기 와서 이 할아범과는 하루에 두 마디 이상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아하···, 엇!”
 알았다는 듯 크게 고개를 끄덕이던 추혁린은 자신이 또 입을 열려하였다는 것을 자각한 듯 얼른 손으로 입을 막았다.
 “허허···, 잘하고 계십니다, 소주. 오늘부터 할아범이 소주를 가르칠 터이니, 저쪽에 가서 하고 싶은 것을 하시면서 노십시오.”
 “······?”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뜨려던 추혁린은 이내 알았다는 듯 남독에게서 대략 이십여 보 정도 떨어진 곳의 화단에 가서 작은 나뭇가지로 마치 개미집이라도 파헤치는 듯 이리저리 쑤석이고 있었다.
 “소주! 오늘부터 그곳에 이 할아범이 작은 환단 하나씩을 놓아두겠습니다. 앞으로는 매일 그것을 복용하셔야 합니다. 여기에 오시면 그것부터 복용하신 후 지금부터 이 할아범이 가르쳐 주는 대로 하십시오. 아시겠습니까?”
 추혁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여전히 흙을 파헤치고 있었다. 이날 그는 대략 반시진 정도 현무전에 머물렀다 돌아갔다.
 그리고 다음 날 현무전에 온 추혁린은 어제 자신이 흙을 파헤치며 놀았던 그곳에서 자줏빛을 띤 작은 환단 하나를 발견하곤 얼른 그것을 입 안에 털어 넣었다.
 ‘크흐으···, 써!’
 
 “무슨 일이 있어도 꼭 남독 할아범이 시키는 대로 하여야 한다. 알겠느냐? 네가 그렇게 일 년만 하면 아버님께서 너를 몹시도 칭찬하실 게야.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 어미는 너무도 실망하여 매일 눈물만 흘리게 될 거다. 알겠느냐?”
 
 너무도 쓴 환단을 뱉어 버리려던 추혁린은 모친의 음성이 귓가에 울리는 듯하자 억지로 삼켰다.
 “허허허···, 소주, 장하십니다. 앞으로도 그렇게 하셔야 합니다. 아시겠습니까?”
 추혁린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세상 누구보다도 모친인 산호부인을 사랑하는 그는 모친을 위해서라면 못할 것이 없었다.
 늘 한숨과 눈물뿐인 자신의 얼굴에 환한 미소를 띠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아들이라 하였기에 그는 지금 조금은 우쭐해져 있었다. 이렇게 현무전을 찾아와 한 시진씩 놀다가는 날이 이어졌지만 웬일인지 남독은 추혁린에게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았다. 그저 쓴 환단을 잘 삼킨다는 말뿐이었다.
 대략 석 달이 지나자 추혁린은 제아무리 쓴 약이라도 웃으면서 삼킬 수 있게 되었다. 남독이 준 환단은 매우 이상하였다.
 분명 몸에 좋은 것이라 하였거늘 먹기만 하면 복통을 느끼게 하였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요즘 복용하는 환단은 처음의 것보다는 훨씬 더 썼으며, 먹기만 하면 배가 몹시 아팠다.
 하지만 아픈 기색을 보여서는 안 된다는 남독의 말이 있었기에 그저 흙만 파헤치고 있을 뿐이었다.
 추혁린은 모르고 있었으나 기실 남독이 복용시키는 환단에는 독(毒) 성분이 섞여 있었다. 처음 복용하였던 것에 비하면 지금은 거의 십여 배는 더 섞여 있었다.
 만일 처음부터 이런 환단을 복용하였다면 어쩌면 창자가 끊기는 듯한 격심한 통증 때문에 데굴데굴 굴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점차 그 양을 늘려 왔기에 이렇듯 복통만 느끼고 있는 것이다.
 다시 두 달이 조금 더 흐른 후부터는 더 이상 쓰지 않았다.
 석 달 열흘, 그러니까 현무전에서 환단을 먹기 시작한 날로부터 꼭 백 일이 지난 후부터는 제법 향기가 풍기는 환단으로 바뀌었기에 추혁린은 점점 현무전에 놀러오는 것이 즐거워졌다.
 전에는 먹기만 하면 배가 아픈 환단을 먹어야 했기에 꾀를 부리고 안 오려 하였었다. 그때마다 눈물짓는 모친의 모습을 보고 할 수 없이 이곳에 오곤 하였던 것이다.
 “허허허···, 정말 장하십니다. 이제부터 이 할아범이 소주에게 하라는 대로 하십시오. 그렇게 하시겠습니까?”
 “헤헤헤···, 알았어.”
 마치 놀면서 혼자 중얼거리듯 자그마한 음성으로 중얼대자 남독의 노안에는 희미한 웃음이 번졌다.
 “허허···, 좋습니다. 우선 바닥에 사람의 모습을 그리실 수 있겠습니까? 가능한 잘 그려 보십시오. 아, 아니 그렇게 말고 우측으로 조금 더 튀어나와야지요.”
 남독의 말에 작대기로 사람의 모습을 그리던 추혁린은 그의 전음에 따라 자신의 그림을 조금씩 바꾸었다.
 달콤한 향이 나는 환단을 먹기 시작한 지 꼬박 백 일이 지나서야 추혁린은 사람의 모습을 정확히 그릴 수 있게 되었다.
 누가 보면 바보 혼자서 아무런 의미도 없는 그림을 그리며 노는 듯한 모습이기에 현무전을 바쁘게 오가는 그 어느 누구도 그에게 말을 걸거나 이상하다는 눈으로 보지 않았다.
 “허허허···, 이제 되었습니다. 자, 그럼 이제부터 이 할아범이 말하는 곳에 점을 찍어 보십시오.”
 마치 따뜻한 햇살을 즐기는 듯 태사의에 푹 파묻혀 있는 남독은 눈을 가늘게 뜨고 추혁린이 그린 그림의 한 부분에 점을 찍도록 하였다. 그것은 혈도(穴道)의 위치였다. 남독이 말하는 부분에 정확히 점을 찍는 데는 꼬박 삼십여 일이 걸렸다.
 “허허···, 잘하시었습니다. 역시 소주는 바보가 아니었군요. 그럼 이번엔 이 할아범이 말하는 부위에 점을 찍으시고 소주의 몸 중 어느 부위인지 가리켜 보십시오.”
 “헤헤···, 정말이지? 나, 바보 아니지?”
 자신의 몸 중 어디가 혈도고 어디가 아닌지 가리는데는 이백여 일이 걸렸다. 그 동안 남독은 지독히도 머리가 나쁜 추혁린에게 단 한 번도 꾸지람을 하지 않고 끈기를 가지고 칭찬하며 다독였다. 만일 그가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인체 삼백육십오 개의 혈도 위치를 가르치는 데 꼬박 십 년은 걸렸을 것이다.
 추혁린은 자신에게 바보가 아니라 하면서 늘 칭찬을 아끼지 않는 남독과 있을 때면 모든 것이 자신 있는 듯 주저함이 없었다. 과거에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다음에 배운 것은 사람의 몸에 흐르는 기혈이 어떤 경로를 통하는지였다. 기경팔맥(奇經八脈)과 임독양맥(任督兩脈), 그리고 십이중루(十二重樓)에 대한 것이었다.
 그 사이 환단은 다시 쓴 것으로 바뀌었으나 추혁린은 이제 쓴 것을 느끼지 못하는지 마치 아무 맛도 없는 것을 씹듯 그렇게 우적우적 씹어 삼켰다.
 혈도와 기혈의 움직임에 대한 모든 것을 알게 된 것은 처음 온 날로부터 이 년이 다 된 어느 날이었다.
 그날 추혁린은 남독의 아낌없는 찬사를 들으며 우쭐하였다.
 “허허허···, 소주, 정말로 대단하오. 이 할아범은 소주께서 이 모든 것을 익히는 데 꼬박 십 년은 걸릴 줄 알았는데···, 정말 대단하오. 오늘부터는 다른 것을 배우시게 될 것이오.”
 “헤헤···, 정말이지? 우히히, 너무 좋아.”
 실제가 그랬다 지독한 둔재인 추혁린이 기혈의 움직임을 모두 배우는데 불과 일 년밖에 안 걸리리라고는 전혀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다. 삼백육십오 개의 대소 혈도와 기경팔맥, 그리고 임독양맥과 십이중루의 상관 관계는 의술에 입문한 의생(醫生)들조차 꼬박 반년 이상은 익혀야 하였다.
 이 모든 것은 칭찬의 힘이었다. 하루에 한 시진 동안 이곳 현무전에 와서 나뭇가지로 땅바닥에 낙서나 하는 것 같았지만 실상 추혁린은 자신의 거처로 가서 하루종일 그림을 그리며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며 골똘해 있었다.
 그것은 남독에게서 칭찬을 듣기 위함이었다. 오로지 그 일념으로 외우기도 힘든 혈도의 이름을 외웠고 어떻게 쓰는지도 배운 것이다. 그러나 남독은 추혁린이 혈도의 명칭을 쓸 수 있다는 것을 몰랐다. 아마 그것을 알았다면 놀라 자빠졌을 것이다.
 그 동안 쓴약과 단약을 교대로 복용한 추혁린은 이제 제아무리 쓴약을 복용해도 더 이상 복통을 느끼지 못했다.
 남독이 그에게 독이 함유된 약을 계속하여 복용시킨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처음 산호각을 방문하였을 때 산호부인으로부터 추혁린을 회임하였을 때 독한 약을 복용하였기에 아들의 머리가 저토록 아둔한 것이 아니냐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날 그는 금화원 원주로부터 문제의 약과 같은 약을 받았다. 그리고 그 성분을 조사해 보았다.
 그 안에는 별것 아니지만 분명 독성분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에 남독은 고심하다 이독제독(以毒制毒)이라는 평범한 원리 속에 어쩌면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품었다. 독성분 때문에 뇌에 이상이 생겨 그런 것이라면 다른 독으로써 그를 제독시킨 후 영약(靈藥)으로 훑어내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그렇기에 추혁린에게 독약과 영약을 교대로 복용시키며 점차 그 강도를 강하게 하였던 것이다.
 요즘 추혁린이 먹은 환단은 범인은 물론 무림인이라 할지라도 복용 즉시 중독되어 죽을 수밖에 없는 지독한 독약이었다. 하지만 이미 내성이 생겼는지라 그에게 아무 이상 없었던 것이다.
 아무튼 인체에 대하여 모든 것을 알게 되자 남독은 하나의 내공 구결을 전수해 주었다. 놀랍게도 그것은 강호에서 실전된 것으로 알려진 소림의 달마역근경(達磨易筋經)이었다.
 
 <오심향천(五心向天) 만념집일(萬念集一) 도인토납(導引吐納) 공제관상(功諸關箱) 근력호환(筋力互換) 전요위장(轉堯爲壯) 폐목명심(閉目冥心) 악고정사(握固靜思) 고정연기(固精練氣) 운전기절(運轉奇絶) 양기화신(養氣化神) 상행십이중루(上行十二重樓) 신환허(神還虛) 허화삼화취정(虛化三花聚精)······.>
 
 이날부터 추혁린은 죽으라고 이것을 외웠다. 아직 무슨 뜻인지 모르지만 일단 이것을 완벽히 암송하여 잠을 자면서도 읊을 정도가 되어야 한다 하였기 때문이었다.
 요즘 들어 부쩍 칭찬을 아끼지 않는 모친과 남독의 격려 덕에 그가 이것을 다 외우는 데 불과 이십여 일밖에 걸리지 않았다. 암송이 끝나자 이번엔 훨씬 어려운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달마역근경의 오의(奧意)를 체득(體得)하여야 했던 것이다. 남독이 일러주는 대로 천천히 기혈을 운행시키면서 그 뜻을 알아가는 데 걸린 시간은 거의 일 년이었다.
 십이 세가 되었으나 아직 십 세 소년 정도의 체구밖에 안 되는 추혁린은 여전히 형들의 놀림감이었다. 하지만 전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믿는 구석이 생겨서인지 놀림을 당하고도 이제 더 이상 울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는 횟수가 줄어들자 이제는 놀리는 것도 시들해지는지 그의 형들은 그 보기를 마치 소가 닭 보듯 하였다. 이렇게 된 것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추혁린을 괴롭히는 일보다 훨씬 더 흥미진진한 일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천룡보에는 크다면 크고 작다면 작은 변화가 있었다.
 제일 부인인 수화요정 서문혜와 제이 부인인 천약선자 주규방 간에 냉랭한 기류가 흐르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의 원인은 천약곡에서 얻은 한 뿌리 만년하수오(萬年何首烏) 때문이었다. 구화신협의 생일에 그것을 보냈는데, 이것을 수화요정이 아들인 하토신검에게 냉큼 먹여 버린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귀영섬도가 격렬한 항의를 하였다.
 당시 구화신협은 무림맹의 맹주로서 할 일 때문에 출타 중이었고 아직 돌아오지 않았는지라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이것으로 인해 원래부터 수화요정을 미워했던 용녀 강호미가 노골적으로 천약선자의 편을 들고 있었다. 전에는 보이지 않던 부인들 간의 암투가 겉으로 드러나는 계기가 된 것이다.
 이것의 파급 효과 때문인지 강호에서는 서문세가가 구창궁과 천약곡의 연합 세력과 사사건건 대립하고 있다고 하였다.
 만년하수오를 복용한 하토신검의 내공이 전에 비하여 대략 일 갑자 정도가 늘었기에 이제 천룡보 차기 보주는 따놓은 당상이라 생각하였는지 수화요정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시침을 떼고 있어 천룡보의 내원에는 냉랭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이번 사건과는 전혀 무관한 산호부인은 거의 매일 이곳저곳으로 불려 다니며 서로 상대의 정황을 염탐해 올 것을 요구받고 있었다. 만일 하토신검이 차기 보주가 된다면 어쩌면 나머지 형제들은 보를 떠나야 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기에 거의 필사적이었다.
 어느새 수화부인과 월하혜문, 그리고 벽라옥녀가 한편이 되었고, 천약선자와 용녀, 그리고 당문일수가 한편이 되어 팽팽하게 맞서는 형국이 되어가고 있었다. 다시 말해 천룡보 내원이 두 쪽으로 갈라진 것이다.
 아들은 없고 딸만 있는 월하혜문과 벽라옥녀가 안정을 선택한 반면, 아들뿐이기에 후계자로 발탁되기 위한 공작이 한참이던 나머지 세 부인들은 격한 투쟁을 선택한 것이다.
 이러는 사이 아무런 배경도, 아무런 욕심도 없는 산호부인만이 무사태평하였다. 아무런 힘도 없는 그녀였기에 어느 누구도 그녀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는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아무 때나 편리할 때 오라가라 할 수 있으며, 때로는 상대에 대한 염탐을 할 도구로밖에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산호부인은 천룡보 내를 마음대로 휘젓고 다니게 되었다.
 추혁린이 달마역근경에 대한 오의를 깨우쳤을 즈음 그에게 약간의 변화가 일기 시작하였다. 전에 비하여 두뇌가 약간씩 좋아지고 있었던 것이다. 남독이 그에게 복용시킨 단환 때문이었다.
 그가 태아였을 때 모친이 복용한 낙태환의 영향으로 두뇌에 만들어졌어야 할 혈관들이 제대로 생성되지 않았기에 둔재 중의 둔재일 수밖에 없던 그의 신체에 변화가 생긴 것이다.
 처음 먹었던 독단이 낙태환의 독을 제압하여 더 이상 해독을 끼치지 못하는 가운데 나중에 복용한 영단이 다시 독단의 독을 제압하였기에 일어난 변화였다.
 게다가 달마역근경의 오의를 깨우치면서부터 체내의 진기가 미약하기는 하지만 천천히 흐르면서 그간 막혀 있던 기혈들을 천천히 뚫기 시작하였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아 가기 시작하였다.
 덕분에 일 년은 족히 걸려야 간신히 이해할 수 있던 것들이 반년으로 줄었고, 점차 그 기간은 짧아지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을 아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오직 하나, 남독 외에는 없었다.
 어찌 된 일인지 남독은 독인(毒人)이면서 소림사의 무공에 대하여 밝았다. 그래서 요즘 추혁린은 세수경(洗髓經)이라는 것을 습득 중이었다.
 남독은 이제 이것을 익히면 골수가 깨끗이 씻겨져 영특한 머리를 지니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이에 추혁린은 밤낮을 잊고 그것에 매달렸다. 더 이상 남들에게서 바보라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아서였다.
 세월은 유수처럼 흘러 추혁린은 십오 세가 되었다. 그 동안 천룡보를 시끄럽게 하였던 부인들 간의 문제는 구화신협이 돌아오고 나서 해결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수면 아래로 내려갔을 뿐이었다. 여전히 부인들의 해묵은 감정은 앙금처럼 쌓여 서로 간에 보이지 않는 질투와 시기의 눈빛이 오가고 있었던 것이다.
 추혁린이 남몰래 무공 연마를 하는 동안 그의 형들과 누이들 역시 무공 연마에 몰두하였다. 한 가지 변한 점이 있다면, 천향선자 추혜지가 혼례를 올려 보를 떠났다는 것이다.
 그녀는 평소의 꿈대로 당금 천자의 둘째 아들과 혼례를 올렸다. 그녀는 보위를 이어받을 황자비가 되지 못한 것을 억울해하는 모습이었으나 그런 대로 만족한 듯 웃으면서 떠났다.
 또 하나의 변화라면 넷째인 창해신창 추군재가 정혼을 하였다는 것이다. 그의 상대는 산서성(山西省) 태원부(太原府)에 자리잡고 있는 만상각(萬商閣)의 금지옥엽(金枝玉葉)이었다.
 만상각은 천하의 상권을 장악하고 있는 북상(北商) 은희도(殷熙導)가 머무는 곳으로 그에게는 불면 날아갈세라, 만지면 꺼질세라 애지중지하는 무남독녀 외동딸인 옥화비연(玉華飛燕) 은연경(殷娟卿)이 있었다. 그녀는 올해 십오 세였다.
 이번 혼사는 그쪽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천하 무림을 장악하다시피 한 천룡보와 전략적인 제휴를 함으로써 지속적으로 상권을 유지하기 위함이었다.
 일단 정혼이 이루어지자 그때부터 창해신창은 전과 다르게 어른스러워졌으나 여전히 추혁린을 놀리는 재미에 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현무전 마당에서 놀던, 아니 은밀히 무공을 연마하던 추혁린은 머릿속으로 무공 구결을 외우며 천천히 산호각으로 향하고 있었다.
 “하하하···, 린아야, 거기 멈춰 봐라.”
 “어? 혀, 형님···, 왜?”
 추혁린은 늘 자신을 괴롭히는 추군재가 불러 세우자 말을 더듬었다. 이상하게도 그가 부르기만 하면 아무렇지도 않다가도 심리적으로 위축되기 때문이었다.
 “크크크···, 이 형님이 부르는데 왜라니? 네놈에게 볼일이 있어서이지. 맞고 싶어? 빨리 이리 안 와?”
 “아, 알았어. 갈게. 가면 될 것 아냐.”
 추혁린은 비칠거리는 몸짓으로 추군재에게 다가갔다.
 “크흐흐흐···, 너 지금부터 아무도 몰래 이것을 들고 나가 금화원에 가서 미향(微香)이라는 기녀를 찾아 전해 줘라. 알았지? 그러면 앞으로 안 놀릴게. 대신 이건 비밀이다. 알았지?”
 추군재는 품에서 곱게 접은 서찰 하나를 꺼내 건네면서 은근한 말투로 말을 건넸다. 태어난 이후 처음으로 자신에게 이런 말투를 쓰자 추혁린은 약간 당황한 듯 대꾸하였다.
 “정말 이것만 갖다 주면 되는 거야? 그러면 안 놀릴 거야?”
 “그래! 대신 아무도 모르게 해야 한다. 알았지? 만일 누구에게든 들키기만 하면 넌 그날로 없어질 줄 알아.”
 역시 추군재였다. 그는 자신의 손으로 목 아래쪽을 베는 시늉을 하며 눈빛을 날카롭게 빛냈다. 올해 이십삼 세가 된 그는 육 년 전부터 남몰래 기원을 드나들고 있었다.
 상대는 미향이라는 기녀였다. 그녀에게 동정을 바친 날 추군재는 남녀 간의 음양화합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거의 매일 그곳을 드나들다시피 하고 있었다.
 금화원주는 천룡보의 넷째 아들이 미향에게 단단히 홀렸다는 것을 알고 그녀에게 다른 손님을 받지 않게 하였다.
 예전에 그러하였듯 어쩌면 또 하나의 기녀가 천룡보와 깊은 인연을 맺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렇게 되기만 하면 금화원은 대를 이은 천룡보의 엄호 아래 마음놓고 장사를 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추혁린은 형으로부터 더 이상 놀림을 당하지 않을 수 있다는 기쁨에 얼른 서찰을 품고 천룡보 밖으로 향하였다.
 “아니, 오공자 아니십니까? 어디 나가시려고요?”
 “응! 잠깐만 나갔다 올게.”
 “안 됩니다. 보주께서 모든 공자님들께 금족령(禁足令)을 내리셨다는 것을 잊으셨습니까? 속하는 내보내드릴 수 없으니 이만 돌아가십시오.”
 수문위사는 추혁린을 보고 빙그레 미소지었다. 그러나 그 웃음은 좋아서 웃는 것이 아니었다. 천룡보의 골칫덩이인 바보 추혁린을 비웃는 것이었다. 천하제일인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같은 나이 때 자신보다도 훨씬 못하다는 것에 대한 은근한 우월감 때문이었다. 무공은 물론 생긴 것도 그렇고, 두뇌도 그러하였다.
 “안 돼! 형이 나갔다 오라고 했단 말이야. 그러니 잠깐만 나갔다 올 수 있게 해 줘.”
 “허어···, 안 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나가시려면 보주님의 허락을 받아 오셔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전엔 절대로 내보내드릴 수 없습니다.”
 수문위사는 자신이 감히 보주의 아들을 제지할 수 있다는 것에 쾌감을 느끼는지 완강하였다.
 “안 돼! 안 된단 말이야. 밖에 나갔다 오지 않으면 형한테 혼난단 말이야. 그러니 나가게 해 줘!”
 “속하는 안 된다고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정 나가시고 싶으시면 보주님의 허락을 받아 오십시오. 그러기 전에는 절대 내보내 드릴 수 없습니다.”
 수문위사와의 실랑이는 무려 이각에 걸쳤으나 추혁린은 도저히 그를 이길 수 없었다. 만일 그냥 들어갔다가는 추군재에게 어떤 일을 당할지 모르는 그는 할 수 없이 물러섰다.
 그리고는 천룡보 가장 안쪽 산호각의 뒷벽으로 다가갔다.
 언젠가 엄청난 비가 쏟아진 후 무너져 버린 것을 보수공사한 곳인데, 그때 일하던 일꾼들이 대강대강 축대를 쌓는 바람에 그 중 하나가 움직인다는 것을 기억한 것이다.
 무려 반시진이란 시간을 허비한 끝에 움직이는 것을 찾은 그는 혼신의 힘을 다하여 그것을 빼냈다. 그리고는 그곳을 통하여 밖으로 향하였다.
 덕분에 그의 몰골은 엉망이 되었다. 워낙 좁은 틈 사이를 비집고 빠져나가야 하였기에 머리카락은 물론 얼굴과 의복에도 흙이 잔뜩 묻은 것이다.
 밖에도 여전히 천룡보였으나 그곳에는 추혁린의 얼굴을 알아보는 사람이 없었다. 외단 소속 제자들은 내단에 발을 들여놓을 수 없기 때문이고, 지금껏 단 한 번도 외출을 한 적이 없기에 그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었다.
 추혁린은 이리저리 돌아다니던 중 밖으로 향하는 문을 발견하고는 그곳으로 향하였다.
 
 
 제2장 연서(戀書) 분실 사건
 
 
 “어? 네녀석은 누구야? 언제 들어왔어?”
 수문위사는 처음 보는 소년이 다가오자 깜짝 놀라는 듯하였다. 아침서부터 근무를 하고 있었지만 추혁린이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요즘 천룡보 외단은 심심치 않게 일어나는 도난 사건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처음엔 보 내의 누군가가 도벽이 있는 줄 알고 삼엄한 감시를 한 적이 있었다. 그러자 한동안 전혀 도난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었는데 어느 날인가부터 또다시 도난 사건이 벌어졌다.
 그래서 외단 소속 무사들은 은밀히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는 한편 보 내를 드나드는 외부인들에 대한 감시도 병행하였다. 그러던 중 어느 날 드디어 도난 현장이 목격되었다.
 놀랍게도 도둑은 이제 겨우 십 세 안팎인 소년이었다. 하지만 잡을 수는 없었다. 자신의 행각이 발각되었다는 것을 감지한 소년이 재빠르게 외단과 바깥 세상을 구별하는 담장에 뚫린 작은 구멍을 통하여 도주하였기 때문이었다.
 그 구멍은 제아무리 작은 소년이라고는 하지만 도저히 사람이 빠져나갈 수 있을 구멍으로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담장의 높이는 무려 이 장에 달했으며, 위에는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침입자를 대비한 기관이 설치되어 있었기에 소년을 발견하였던 흑의무사는 따라갈 수 없었다.
 그 후 외단에서는 자그마한 체구의 소년들이 돌아다니면 유심히 바라보곤 하였다. 혹여 무엇인가를 훔치러 들어온 게 아닌가 싶은 의구심 때문이었다.
 “비켜 줘! 나, 지금 나갈 거야!”
 “뭐라고? 네녀석은 대체 어떻게 이리로 들어온 거냐? 구멍이란 구멍은 다 막았다고 하는데···, 너, 이리로 와 봐!”
 “왜 그래, 씨! 나, 지금 나갈 거라니까.”
 “이 녀석이! 감히 어른한테 어디서 배워먹지 못한 말버릇이냐? 네녀석의 아비라는 작자가 대체 누구냐? 가서 단단히 따져봐야겠다. 빨리 말해! 대체 어떤 놈이 네 아비냐?”
 수문위사는 어린 소년의 말버릇에 화가 치솟았다. 제아무리 수문위사라지만 강호에 나가면 어디에서든 대접받는 천룡보 흑의무사인 자신에게 반말을 함부로 찍찍 내뱉는 소년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아이! 나, 지금 나가야 한다니까? 형 심부름으로 잠깐 나갔다 오면 돼. 그러니까 너무 무서운 얼굴 하지 마.”
 “아니, 이 녀석이? 네놈은 존댓말이라고는 해 보지도 않았느냐? 이 녀석이 정말 보자보자 하니까 버르장머리가 없구나. 안 되겠다. 너, 이리로 와 봐! 네녀석의 아비라는 놈과 어미라는 년을 잡아 따져봐야겠다.”
 “어어어? 놔! 이거 놓으란 말이야!”
 수문위사가 거칠게 멱살을 틀어쥐자 추혁린은 발버둥을 치며 그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려고 안간힘을 썼다.
 “대체 무슨 일이냐?”
 수문위사와 추혁린이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사이 주변을 지나던 백삼무사 하나가 거만스런 표정으로 다가와 있었다.
 “앗! 햐, 향주님. 언, 언제 나오셨습니까?”
 “본좌가 묻지 않았느냐? 대체 무슨 일이냐고?”
 백삼무사의 말에 흑삼무사는 얼른 고개를 숙이며 지금까지의 일을 대충 설명하였다. 그 사이 곁에 있던 추혁린은 때는 이때다 싶었는지 얼른 천룡보 밖으로 튀어나갔다.
 “아니? 저, 저 녀석이? 게 섰지 못하겠느냐?”
 백삼무사는 추혁린이 튀어나갈 것이라고는 전혀 상상도 못했는지 흑삼무사의 보고를 듣던 중 화들짝 놀라며 소리쳤다.
 “이, 이런? 소, 속하가 당장 나가서 저 녀석을 잡아올 터이니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흑삼무사는 말을 마침과 동시에 추혁린이 사라져 간 방향을 향하여 쏜살처럼 달려갔다.
 천룡보 앞에는 워낙 드나드는 사람들이 많기에 하나의 저잣거리가 자연스럽게 형성되어 있었으며, 오가는 사람들이 매우 많아 혼잡하였다. 추혁린은 재빨리 사람들 사이로 파고들며 연신 뒤를 돌아보았다.
 “네 이놈, 게 섰거라! 모두들 저놈 잡아라! 도적이다!”
 분명 천룡보 흑의무사가 분명한 자의 입에서 도적이라는 소리가 나오자 저잣거리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저잣거리를 배회하며 행인들의 주머니를 터는 소매치기 집단이 출현한 것으로 오인한 것이다. 흑의무사가 놓칠 정도라면 필경 엄청난 솜씨를 자랑하는 소매치기라 생각하였기에 혹시 없어진 것이 없나 확인하느라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혼신의 기력을 모아 도주하며 연신 뒤를 돌아보던 추혁린은 그만 방향 감각을 잃었다. 예전에 모친으로부터 금화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들었었는데, 이 순간 그것을 까먹었을 뿐만 아니라 어른들 틈에 끼여 이리저리 왔다갔다하는 바람에 순간적으로 어디가 어딘지 잊었던 것이다.
 “야! 임마, 거기 서! 안 서? 잡히면 죽는다!”
 뒤를 보니 흑의무사가 맹렬한 속도로 사람들을 헤치며 전진하는 것을 본 추혁린은 혼비백산하여 이리저리 방향을 틀며 도주하던 중 누군가가 잡아당기는 힘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거기엔 십이삼 세 정도 된 몰골이 형편없는 소년 하나가 있었다.
 “누, 누구······?”
 “빨리 이리 와! 이쪽으로 오면 안전해!”
 소년의 강한 팔 힘에 이끌려 따라간 곳은 저잣거리 한복판에서 경단을 만들어 팔던 장사치의 수레 밑이었다. 수레 밑으로 들어간 소년은 능숙하게 수레 밑 나무판자를 열어제치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빨리 와! 설마 잡히고 싶어 그러는 건 아니지?”
 소년의 새까만 눈동자를 본 추혁린은 두말 않고 그를 따라 들어갔다. 판자가 다시 덮이자 칠흑 같은 어둠이 있을 뿐이었다.
 “따라와! 여기서부터는 안전할 거야!”
 “여, 여긴 대체 어디야?”
 “하하···, 안심해. 여긴 우리밖에 모르는 곳이야. 이제 조금만 가면 환한 곳이 나오니 따라오기나 해.”
 앞에 선 소년은 추혁린이 자신과 비슷한 체격을 하고 있기에 자신과 같은 연배인 줄 아는 모양이었다.
 “자, 다 왔어. 여기야. 이제 안심해도 돼!”
 소년과 도착한 곳은 땅 속인지 여기저기 횃불이 걸려 있었다.
 “아, 아차! 큰일났다.”
 무심코 자신의 품을 더듬던 추혁린은 넷째형이 주었던 서찰이 없어졌다는 것을 발견하고 사색이 되었다. 아직 금화원에 도착하여 미향이라는 기녀에게 그것을 전달하지도 못했는데 잊어버린 것을 알면 진짜 죽이려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치자 그의 안색은 급속도로 창백해졌다.
 “왜 그래? 뭐 때문에 그래?”
 “서, 서찰을 잃어버렸어.”
 “서찰······?”
 “그, 그래! 그걸 알면 날 그냥 내버려두지 않을 텐데······.”
 추혁린이 당황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자 소년은 뭘 그런 것 가지고 걱정하느냐는 듯 환한 미소를 지었다.
 “하하···, 걱정하지 마. 애들 시켜서 찾아보라고 할게.”
 “애들······?”
 “그래, 이래봬도 내 밑에 똘마니들이 넷이나 있어. 걔들 시켜서 찾아보라고 할 테니, 걱정하지 마.”
 소년은 별일 아니라는 듯 그의 어깨를 툭툭 치고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같은 시각 추혁린을 찾아다니던 흑의무사는 저잣거리 바닥에 떨어져 있는 예사롭지 않아 보이는 서찰을 주워들었다.
 
 <보고 싶은 미향에게.
 그대를 보고 싶은 마음 때문에 잠 못 이루는 밤이 너무도 많구려. 지난 며칠 간 그대의 아리따운 옥용을 보지 못해 몸살이 날 지경이오. 내일 밤 자시에 그대의 처소를 방문할 터이니 기다려 주오. 너무도 보드라운 그대의 교구에 내 손끝이 스칠 때면 나의 마음은···, (하략).
 그대를 너무도 은애(恩愛)하는 재(宰).>
 
 “아, 아니 이건 내원의 사 공자님의 서찰? 그렇다면 아까 그 꼬마 놈이 이젠 내원에까지 드나든단 말인가? 어쩐지 요 며칠 잠잠하다 싶더니···, 안 되겠다. 어서 이 사실을 알려야 한다.”
 생각을 마친 흑의무사는 눈썹이 휘날리도록 천룡보를 향하여 날 듯이 뛰어갔다. 그가 들고 들어간 서찰은 즉각 내원을 책임지고 있는 현무전으로 보내졌다.
 현무전주인 남독 역시 서찰을 읽는 즉시 제일부인인 수화부인을 비롯한 모든 부인들의 처소에 들러 혹시 도난당한 것이 없는가를 물었다. 다행히 도난당한 물건이 없다 밝혀졌으나 내원은 때아닌 삼엄한 경계에 놓이게 되었다.
 하토신검을 비롯한 보주의 자제들의 처소에는 초절정 무공비급들이 여러 권 놓여 있기 때문이었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창해신창 추군재는 고개를 들고 다닐 수 없게 되었다. 가장 먼저 제일부인인 수화부인의 매서운 질책을 받아야 하였다. 그리고 월하혜문은 물론 검치부인에게까지 불려가 색이나 밝히는 색한(色漢)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다음은 당문일수와 천약선자에게서도 욕을 먹었다. 마지막으로 모친인 용녀 강호미로부터 종아리에 피가 날 정도의 매질을 당하고 나서야 간신히 풀려났다.
 한 마디로 개망신을 당한 것이다. 어디에고 화풀이를 할 수 없던 그는 칠칠맞은 추혁린이 돌아오기만 하면 요절을 내리라 마음먹고 연신 이를 갈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
 
 “뭐야? 아무것도 훔친 게 없다고? 그럼 왜 도망쳤어? 훔친 게 없는데 왜 도망쳤느냐고?”
 십팔구 세 정도 되는 청년의 눈빛은 불량스럽기 이를 데 없었다. 수하로부터 천룡보에서 무엇인가를 훔쳤다가 발각된 소년 하나를 데리고 있다는 보고를 들은 그는 그 좋아하는 마작(麻雀) 판을 떠나 이곳으로 왔다. 그런데 막상 아무것도 훔친 게 없다 하자 은근히 부아가 치솟은 것이다.
 “쫓아오는데 잡히면 안 될 것 같아서······.”
 “뭐야? 네놈은 아무 죄도 짓지 않았는데 누가 쫓아오면 무조건 도망친단 말이야? 너, 머리가 어떻게 된 놈 아니냐?”
 “아, 아녜요.”
 청년은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과 함께 사나운 표정을 지으며 추혁린을 계속하여 노려보고 있었다.
 “좋아, 그건 그렇다고 치고 네놈은 대체 누구냐? 금릉에서는 처음 보는 놈 같은데? 너, 혹시 다른 데서 여기 물이 좋은지 나쁜지 알아보라고 해서 온 놈 아냐?”
 “아녜요. 그리고 좋은 물, 나쁜 물이 뭐예요? 난 그게 무슨 말인지도 몰라요.”
 “허어···, 이 자식 봐라? 네놈의 얼굴에 있는 흉터를 보아하니 분명히 어디선가 제법 굴러먹은 놈 같은데, 사실대로 이실직고하지 못해? 너, 누가 보내서 왔냐?”
 청년은 추혁린이 자못 의심스럽다는 투로 그를 아래위로 째려보고 있었다.
 사실 금릉은 황궁이 이전해 간 이후 약간 쇠락한 맛은 있지만 아직까지는 중원의 그 어느 동네보다도 물 좋은 동네라 할 수 있는 곳이었다. 따라서 청년이 속한 소매치기 집단은 호의호식할 수 있는 곳이기에 호시탐탐 노리는 자들이 많았다.
 지금까지는 일치단결하여 이곳을 노리고 온 놈들을 묵사발을 만들어 놓았기에 아직까지 암흑가를 장악하고 있지만 언제 깨질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작년 봄, 금릉의 암흑가를 휘어잡으려고 온 자가 있었다. 한쪽 눈을 어디에서 잃었는지 검은 안대로 가리고 다니던 인상 고약한 자였다. 그는 무림에 몸담았었는지 제법 고강한 무공을 지니고 있었다. 그때 청년이 속한 조직은 무려 구십여 명이 목숨을 잃거나 병신이 되었다.
 다행히 애꾸는 조직의 두목이라 할 수 있는 야황사(夜皇士) 우치구(禹治丘)가 심각한 부상을 입으면서 내리친 낭아곤의 위력 덕분에 조직을 지킬 수 있었다.
 밤이면 황제 부럽지 않다는 의미를 지닌 야황단(夜皇團)이란 그럴 듯한 이름하에 모여 있는 사람들의 수효는 사백이 넘었다.
 이들은 평상시에는 각기 활동하면서 매일 일정 금액을 상납하였다. 그러나 유사시가 되면 야황사의 명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대항하는 조직력을 보였다.
 이것 덕분에 지금껏 금릉의 암흑가를 주름잡고 있었던 것이다.
 조직의 하부에서 상납된 은자는 관부 아전들이나 관졸들에게 뇌물로 바쳐지곤 하였다. 그렇기에 죄를 짓고 하옥되더라도 비교적 편안한 뇌옥 생활을 할 수 있었으며, 형량도 적은 편이었다.
 또 하나 야황단이 이곳을 무대로 마음놓고 활동할 수 있는 중요한 이유는 바로 천룡보의 존재였다.
 중원무림을 일통하다시피 한 천룡보는 정파에 속하기에 마도(魔道)나 사도(邪道)에 몸담고 있는 자들은 금릉에 발걸음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랬다가는 박살이 날 것이 뻔하기 때문이었다.
 이런 야황단에는 하나의 금기가 있었다.
 무림 최강의 문파인 천룡보와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대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랬다가는 야황단이 제아무리 강하다 하더라도 하루 아침에 괴멸될 것이기 때문이다.
 “난 천룡보에서 왔어.”
 “알아, 임마! 네놈이 천룡보에서 도망쳐 나왔다는 건 들어서 알아. 내가 묻는 건 네놈이 진짜 어디에서 왔느냐는 것이야?”
 청년은 멍청해 보이는 추혁린의 태도에 짜증이 나는 듯했다.
 “진짜야. 난 천룡보에서 왔어.”
 “이 빌어먹을 자식이! 지금 누구 놀리는 거야? 다시 한 번 묻겠다. 어디서 왔어? 이번에도 거짓을 고하면 아예 죽여 버릴 테야.”
 청년의 태도와 눈빛이 추군재와 너무도 흡사하다는 것을 눈치챈 추혁린은 겁먹은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진짜야. 난 천룡보에서 왔다니까?”
 “이런···, 빌어먹을! 에잇!”
 퍼어억―.
 “으흐윽!”
 청년은 짜증난다는 듯 추혁린의 복부를 세차게 걷어찼다.
 “빌어먹을 자식! 이런 놈들은 좋은 말로 하면 말을 안 들어. 꼭 매를 맞아야 정신을 차린다니까? 다시 묻겠다. 어디에서 왔느냐? 만일 이번에도 헛소리를 하면 네놈은 죽는다.”
 “나, 난 천룡보에서 크윽······!”
 말을 하던 추혁린은 또다시 청년의 발에 걷어채여 한쪽으로 굴러 떨어진 후 혼절해 버렸다.
 “어쭈? 이거 순 약골 아냐? 좋아, 너는 이 녀석을 가둬 둬. 나는 일단 나갔다 온다. 알았지?”
 “존명!”
 청년의 말에 추혁린을 안내하였던 소년은 마치 무림인처럼 포권을 하며 대답하였다. 그는 자신이 봉 잡는 줄 알고 신나서 보고하였다가 이런 결과가 빚어지자 겁을 잔뜩 먹고 있었다.
 성질 더럽기로 유명한 광견(狂犬) 유소빈(劉召彬)은 자신이 좋게 본 사람에게는 한없이 잘해 주지만 한 번이라도 눈밖에 나면 질릴 정도로 해코지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이건 분명 우리를 우습게 알아서 한 짓이렷다?”
 “아, 아닙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흥! 아니긴 뭐가 아냐? 이 아일 좀 봐! 네년의 그 못난 아들 덕분에 이 아이가 어떻게 되었느냐고?”
 “죄, 죄송합니다.”
 산호부인은 산호각에서 외로운 마음을 달래기 위하여 칠현금(七絃琴)을 타던 중 용녀부인의 부름을 받고 용녀각에 내키지 않는 걸음을 하였다.
 용녀부인은 성격이 편협하여 평상시에도 대하기가 껄끄러웠기에 가급적이면 부딪치고 싶지 않은 여인이었다. 똑같이 구화신협의 부인이건만 그녀는 유독 산호부인을 시녀 다루듯 다루는 여인이었기 때문이다.
 웬일인지 용녀각의 분위기는 살벌하다는 말이 맞을 정도로 심상치 않은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용녀부인이 늘 머무는 처소의 문은 활짝 열려 있었고 용녀각 소속 시비들은 종종 걸음을 하며 바쁘게 왔다갔다하고 있었는데, 그녀들의 표정이 굳어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필시 현재 천룡보를 시끄럽게 하는 창해신창 추군재와 미향이라는 기녀와의 염문 때문이리라 생각한 그녀는 대체 왜 자신을 부르는지 처음엔 몰랐다. 이번 일은 분명 그의 잘못이며 변명의 여지가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용녀각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산호부인은 느닷없이 날아드는 서책에 맞아 한쪽 눈에서 불똥이 튀는 듯하였다. 그리고는 듣기에 거북할 정도의 질책이 쏟아졌다.
 듣자하니 추군재가 혁린에게 서찰을 전달하라는 심부름을 시켰다 한다. 여기까지는 중원의 어느 가정에서나 흔히 형이 아우에게 심부름을 시키기에 누구를 탓할 일도 아니었다.
 문제는 전달시키려 한 서찰이 노골적인 연서(戀書)라는 것과 그것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고 흑의무사의 손에 들어갔다는 것이다. 당연히 외단으로부터 시작된 소문이 삽시간에 온 천룡보를 뒤덮어 이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하긴 가장 정보에 둔감한 산호각까지 소문이 전해진 것을 보면 아마도 금릉 전체가 알고 있는 일인지도 몰랐다.
 “흥! 죄송하다면 다야? 이제 보주께서 돌아오시면 이 아이가 어찌 될 것 같은가? 네년도 그 동안 귀가 있어 들었을 것이다. 보주께서 후계자를 정하실 때 어떤 기준으로 선발한다고 하셨는지···, 네년의 그 못난 자식 때문에 창창하던 이 아이의 앞날이 완전히 망가졌어.”
 산호부인은 너무도 어이없는 트집이라고 느꼈으나 여기서 그것을 따질 수 없었다. 자신도 자식을 키우기에 용녀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죄, 죄송합니다. 린아 그 아이를 단단히 교육시켜······.”
 산호부인의 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악에 받친 용녀부인이 한바탕 악담을 쏟아냈기 때문이었다.
 “흥! 한 번 엎질러진 물을 다시 담을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천한 기녀 주제에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발을 들여놓아?”
 악담은 끝이 없었다. 분명 모든 잘못은 추군재가 한 것이다. 한낱 기녀에 현혹되어 하라는 공부는 게을리하면서 색만 밝히려 한 것이다. 그러나 모든 잘못은 추혁린의 실수 때문에 기인한 것으로 몰아가던 용녀의 눈에서 싸늘한 안광이 흘렀다.
 “흥! 네 자식놈은 잘못을 저지르고도 반성할 줄 몰라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다. 이것은 분명 네년이 자식 교육을 잘못한 탓이다. 그러니 오늘 네년에게 따끔한 맛을 보여 주지. 여봐라! 지금 당장 들어와 이년을 끌어내 형구에 묶어라.”
 “······!”
 산호부인은 용녀의 분노에 대항하여 보았자 좋은 것이 없다 판단하여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 사이 대기하고 있던 시비들이 우르르 달려와 그녀를 끌고 나갔다.
 그리고는 즉각 태형(笞刑)을 집행할 때나 쓰는 형구(刑具)에 묶였다. 지금까지 여섯 부인들로부터 수모 당하기를 밥먹듯 하였던 산호부인이었지만 이렇게 형구에 묶이는 것은 오늘이 처음인지라 겁도 났지만 이것은 부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형님, 아우도 보주의 부인이에요.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이 무슨 짓입니까?”
 “뭐라고? 형님? 내가 어째서 네 형님이냐? 흥! 지금껏 말하지 않았다만 이것만은 분명히 알아둬라. 나를 비롯한 나머지 부인들 모두 네년이 감히 산호각을 차지하고 앉아 있는 것이 눈에 가시처럼 시었다. 천한 기녀 주제에 감히 누구에게 형님이라고 하는 것이냐? 여봐라. 저년을 매우 쳐라!”
 노기충천하여 펄펄 뛰는 용녀의 명이 떨어졌건만 어느 누구도 감히 형(刑)을 집행할 수 없었다. 산호부인은 보주가 인정한 엄연한 그의 부인이기 때문이었다. 보주의 부인이라면 자신들에게도 상관이 되는데, 어찌 상관에게 매질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무엇들 하는 게야? 어서 형을 집행하라!”
 “저···, 부, 부인. 어떻게 속하들이······.”
 “흥! 못하겠다는 게야? 좋아, 그렇다면 먼저 네놈에게 형벌을 가하지. 상관의 명에 복종하지 않는 죄를 명령불복종이라 하지? 본보에서 명령불복종을 어떻게 처벌하는지 네놈의 입으로 말해 보아라. 네놈부터 다스려 주지.”
 “그, 그게······.”
 현무전 소속 흑의무사는 땀을 뻘뻘 흘리며 곤란해하였다.
 명에 따르자니 매우 꺼림칙하고, 그렇다고 명을 따르지 않자니 엄청난 형벌이 기다리고 있었다. 천룡보에서 명령불복종은 태형 일백 대였다. 그 정도라면 제아무리 장사라도 엉덩이가 터지고 골반뼈가 으스러져 하반신 불구가 되거나 아예 죽을 정도였다.
 “아직도 집행을 못하겠더냐? 여봐라. 형구를 한 벌 더 준비하고 지금 즉시 현무전 소속 백의무사 하나를 데리고 오너라.”
 “조, 존명! 하, 하겠습니다.”
 시비 하나가 빠른 걸음으로 나가려는 듯하자 흑의무사는 마른침을 삼키며 얼른 대답하였다.
 “그래? 좋아, 그럼 지금 즉시 집행하라.”
 “하, 한데 몇 대나······?”
 “그만하라 할 때까지 매우 쳐라.”
 “조, 존명!”
 사내가 길이 여섯 자에 폭이 반 자 가량 되는 곤장을 치켜들자 형구에 묶여 있던 산호부인이 입을 열었다.
 “너무하오. 어찌 같은 부인으로 이렇게 할 수 있단 말이오? 게다가 우리 린아가 잘못한 것이라곤 서찰을 흘린 죄밖에 없소. 그런데 어찌 이렇듯 심한 모욕을 주는 것이오?”
 “뭐라고? 같은 부인? 심한 모욕? 흥! 아직 정신을 못 차렸구나. 여봐라. 무엇을 하는 게냐? 지금 즉시 매우 쳐라!”
 “예이······!”
 대답과 동시에 흑의무사가 들고 있던 곤장이 허공에 곡선을 그리는가 싶더니 이내 산호부인의 둔부에 내리꽂혔다.
 휘이이익― 짜아악―.
 “아아아아아악······!”
 용녀의 성품이 어떠한지 훤히 짐작하는 흑의무사의 곤장에는 힘이 잔뜩 실려 있었다. 만일 사정을 보아가며 슬슬 한다면 자신이 치도곤을 당할 것이라는 것을 짐작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단 한 대였지만 둔부의 살이 터지기라도 하였는지 의복으로 붉은 선혈이 배어들기 시작하였다.
 “멈추라고 할 때까지 계속하라.”
 흑의무사는 처음에 한 대 때리는 것이 어려웠다. 하지만 이미 곤장을 내리친 이상 모든 것이 끝났다 싶은 그는 전력을 다하여 곤장을 휘둘렀다.
 그럴 때마다 산호부인은 비명과 함께 용녀에게 부당한 처사에 대한 항의를 하였다. 하지만 그때마다 냉소와 더불어 매우 치라는 소리만이 있었을 뿐이다.
 석양이 질 무렵 시작된 형벌은 어둠이 완전히 깔릴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미 삼십여 대를 맞은 산호부인은 혼절하였는지 곤장이 둔부에 내리꽂힐 때 잠시 꿈틀할 뿐 별 반응이 없었다.
 한편 내원을 책임지는 현무전주 남독은 수하로부터 엄청난 보고를 듣고 즉각 달려왔다. 분명 부당한 처사가 분명하지만 감히 용녀를 말릴 수는 없었다.
 뿐만 아니었다. 다른 부인들 모두 이 소식을 듣고 왔다. 그 가운데에는 수화부인도 있었다. 그녀는 선혈이 낭자한 채 곤장을 맞고 있는 산호부인의 처참한 몰골을 보고 잠시 이맛살을 찌푸렸을 뿐 말릴 기색은 없었다.
 지금 용녀가 벌이는 작태는 스스로 무덤을 파는 것과 같다는 것을 능히 짐작하는 그녀는 이 기회에 아예 용녀를 비롯한 천약선자와 당문일수 패거리를 엮어서 영원히 후계자에 대한 꿈도 꾸지 못하게 하겠다는 계략을 꾸미고 있었다.
 천약선자와 당문일수 역시 현장에 있었으나 한 번 노화가 치솟으면 아무도 말릴 수 없다는 용녀가 분기탱천한 상태라는 것을 알고 입을 다물고 있었다.
 결국 아무도 산호부인의 편은 없었다. 상대방에 대한 분위기 등을 정탐하려 이용할 때만 부드럽게 대해 주고 막상 일이 벌어지자 모두 냉정히 고개를 돌린 것이다.
 참다 못한 남독이 한 발짝 나서며 입을 열려는 순간, 흑의무사의 곤장이 산호부인의 둔부가 아닌 허리 어림으로 강력하게 내리쳐지고 있었다. 전력을 기울여 곤장을 내리치던 그가 디딘 발 아래 작은 돌 조각이라도 있는지 움찔하는 순간에 일어난 일이다.
 휘이이익― 뻐어억!
 “아아아아악······!”
 뼈가 으스러지는 괴이한 소리와 함께 비명을 지른 산호부인은 혼절한 듯 엎어졌다.
 “부인, 이미 혼절한 듯싶소이다. 이대로 계속하다간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울 듯싶으니 이만 진노를 푸십시오.”
 남독이 나서 말을 하자 한동안 산호부인을 노려보던 용녀가 냉소를 터뜨린 후 안으로 사라졌다.
 “무엇들 하느냐? 어서 부인을 풀어 드려라!”
 남독의 명에 안타까운 시선으로 산호부인을 바라보던 산호각 소속 시비들이 우르르 달려가 형구의 끈을 풀었다.
 “흐흐흑! 이, 이미 돌아가셨나 봐요.”
 “뭐라고?”
 싸늘하게 식기 시작한 산호부인의 몸을 더듬던 시비 하나가 울음을 터뜨리자 남독은 깜짝 놀라 그녀의 맥문(脈門)을 짚었다.
 시비의 말대로 이미 황천으로 향하였는지 전혀 맥이 뛰지 않자 남독은 황급히 자신의 약지를 물어 선혈 몇 방울을 그녀의 입에 흘려넣었다. 독공을 익히기 위하여 수많은 독물들을 섭취한 남독의 선혈은 지독한 독이었다.
 하지만 때로는 독도 약이 되는 법이다. 과연 효과가 있었는지 산호부인이 긴 한숨을 몰아쉬자 다시 맥이 뛰기 시작하였다.
 “휴우······!”
 한숨을 내쉰 남독은 황급히 그녀를 산호각으로 옮긴 후 명문혈(命門穴)에 장심(掌心)을 밀착시켰다. 그는 산호부인이 결코 회생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제아무리 튼튼한 사내라 할지라도 태형(笞刑) 오십 대를 넘기기 힘들다 하였다. 그런 곤장을 무려 삼십여 대나 맞는 동안 둔부의 살이 터져 나갔고, 골반뼈가 으스러지면서 장기(臟器)에 심한 손상이 가해진 상태였다.
 거기에 마지막으로 내리쳐진 곤장 때문에 허리뼈가 으스러져 설사 살아난다 하더라도 하반신을 전혀 쓸 수 없는 상황이었다.
 어찌나 이를 악물고 참았는지 산호부인의 이빨은 모두 으스러져 있었다. 이빨 사이에 끼여 있던 입술은 반쯤 잘려져 나간 상태였다. 그곳으로부터 흘러내린 선혈이 이미 앞섶을 흥건히 적셔 놓아 그녀는 마치 지옥에서 생환(生還)한 악귀나찰(惡鬼羅刹)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부인, 정신차리십시오.”
 남독의 장심에서 쏟아져 나온 진기는 산호부인의 체내로 흘러 들어감과 동시에 마치 우물에 조약돌을 던진 듯 사라져 버렸다.
 이것은 명문혈을 비롯한 허리 어림의 경락이 모두 파괴되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으으으···, 으으으······!”
 미약한 신음을 토하던 산호부인의 봉목(鳳目)이 열린 것은 대략 반시진이 지난 후였다.
 “이제 정신이 드십니까?”
 “여, 여긴?”
 “안심하십시오. 산호각입니다.”
 “린아, 우리 린아는 어디에······?”
 정신을 차린 산호부인이 제일 먼저 찾는 사람은 역시 하나뿐인 아들이었다.
 “수하들로 하여금 공자님을 찾으라 하였으니 곧 돌아오실 겁니다. 아마도 겁이 나 어디론가 가신 모양입니다.”
 “으으으···, 말씀해 주세요. 저는 이미···, 이미 늦었죠?”
 “아닙니다. 지금부터 약을 쓰고 요양을 잘하면······.”
 “거짓말하지 마세요. 제 몸은 제가 잘 알아요. 기경팔맥이 모두 끊겼고, 단전도 파괴된 듯싶어요, 전주님!”
 남독은 순간적으로 안광이 밝게 빛나는 산호부인의 모습을 보고 회광반조(回光返照) 현상임을 알아보고 안타까웠다.
 “말씀만 하십시오.”
 “지금까지 말은 안 했지만 전주님은 돌아가신 제 부친 같았어요. 그 동안 잘 대해 주셔서 너무 감사해요.”
 남독은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기에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으으으···, 무척 고통스러워요. 전주님! 우, 우리 린아를 잘 보살펴 주세요. 이제 그 아이는 고아나 마찬가지······.”
 말을 하던 산화부인의 목이 힘없이 아래로 떨어졌다. 기어이 목숨을 잃은 것이다.
 “부인! 부인! 정신차리십시오, 부인!”
 산호부인의 시신을 잡고 흔드는 남독의 노안에서 굵은 이슬이 한 방울 맺혔다. 말은 안 했지만 그 역시 산호부인이 남 같지 않았었다.
 
 일찍이 고아가 되어 떠돌다가 우연한 기회에 불문에 투신하게 된 그는 부단히 노력한 끝에 불과 약관을 갓 넘긴 나이에 소림사 계율원(戒律院) 소속 수율승(守律僧)이 되었다.
 수율승이란 평소 강호로 떠돌아다니면서 문하 제자들의 공과 잘못을 사찰하는 신분이기 때문에 무공은 말할 수 없이 고강하고, 견문 또한 다른 사람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넓어야 하였다. 따라서 소림 역사상 약관의 나이에 수율승이 된 승려는 손으로 꼽을 만큼 희귀하였다.
 강호로 나온 그는 협행을 하는 한편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무이산(武夷山)에 올랐던 그는 일출의 장관을 구경하던 중 머리에 세 개의 금관을 쓴 듯하였으며, 선혈처럼 붉은색과 황색이 어우러진 독사에게 물리고 말았다.
 세상의 온갖 괴상하고 기이한 것들만 기록하여 놓은 산해경(山海經) 서차삼경(西次三經)에 기록된 바에 의하면, 그것은 삼관혈황사(三冠血黃蛇)라는 것이었다.
 삼관혈황사는 지독한 절독을 함유한 독사로 이것에 물리면 남녀를 불문하고 끓어오르는 욕정을 참을 수 없게 된다 하였다.
 끓어오르는 욕정을 참을 길이 없어 발광하듯 무이산 자락을 누비던 그는 깊은 산 속에서 작은 움막 하나를 발견하였다. 그것은 사냥꾼이 사용하는 움막으로 거기엔 사냥꾼의 여식이 있었다.
 당시 이십 세가 되었던 그녀는 무지막지한 파계승에 의하여 청백을 잃게 되었다. 소림의 수율승이었던 광오화상(廣悟和尙)은 모든 것이 끝난 후 정신을 차린 뒤 자신이 저지른 일에 망연자실해 있었다. 파계를 한 것이다.
 그때 사냥을 나갔다가 심한 부상을 입은 여인의 부친이 며칠 만에 돌아왔으나 금방 숨져 버렸기에 수율승이면서 스스로 수계(守戒)를 하지 못한 과오와 여인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 그는 그곳에 정착하였다. 그리고 열 달 뒤 그녀는 여아를 낳았다.
 단란한 가족으로 지낸 것은 불과 이 년뿐이었다. 괴이한 질병에 모녀가 모두 죽어 버리자 광오화상은 무이산을 내려오려다 자신의 신체에 괴상한 현상이 이는 것을 발견하였다.
 삼관혈황사 때문인지 어느새 그는 독인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때부터 그는 보통의 음식은 섭취할 수 없는 몸이 되었다. 그가 먹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독물들뿐이었다.
 무이산의 모든 독물들을 다 잡아먹은 그는 천천히 북상하였다. 그가 막 사문이 있는 숭산 어귀에 도달하였을 때쯤 그는 이제 더 이상 독물을 먹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때 그의 선혈은 모두 지독한 독혈로 변모해 있었다.
 이유야 어떻든 스스로 파계를 하였다는 자괴감에 젖은 그는 감히 사문으로 들어갈 생각을 못하고 대신 사문에서 가까운 복우산(伏牛山)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자신의 외호를 남독(南毒)으로 고쳤다.
 그곳에서 무공을 연마하며 세월을 보내던 중 식량을 구하기 위하여 남소현(南召縣)의 저잣거리를 돌아다녔다. 산에서 채집한 약초를 건량(乾糧)으로 바꾸기 위함이었다.
 이때 우연히 누군가와 비무하는 청년을 발견하였다.
 비무를 지켜보는 동안 남독은 그의 무공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고 홀로 중얼거렸는데, 그만 이것을 그가 듣고 말았다. 그는 바로 구화신협 추강이었다.
 자존심이 상한 그는 즉각 비무를 청해 왔다.
 남독은 죽은 딸이 살아 있다면 사위로 삼고 싶을 만큼 준수한 청년을 보고 호감을 지니고 있었기에 말없이 이에 응하려 하였다. 그 순간 청년은 당돌하게도 비무에서 패한 자는 수하가 되자는 제안을 해 왔다. 과거, 불과 약관의 나이에 수율승이 될 만큼 강했던 남독은 청년에게서 호승심을 느끼고 비무에 응했다.
 결과는 남독의 패배였다. 청년은 그의 예상을 뛰어넘는 경지에 도달해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가 창안만 해 놓고 단 한 번도 시전해 보지 않은 독공을 펼쳤다면 아마 패자는 청년이었을 것이다.
 만일 그것을 펼쳤다면 남소현 주변 십 리 안에 있던 모든 생물들은 죽었을 것이다. 본시 불문의 제자인지라 살생하기를 즐겨하지 않았기에 차마 이것만은 시전할 수 없었던 것이다.
 아무튼 비무에 패한 남독은 흔쾌히 약속을 지켰다.
 청년은 당시 무림이 떠들썩하도록 위명이 쟁쟁하던 구화신협 추강이었으며, 홀로 늙어간다는 것에 대한 고독감 때문에 괴로웠던 것이다. 그 후 천룡보가 창건되었고 남독은 현무전의 전주로 임명되었다. 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구화신협은 남독이 자신과 비무에서 양보를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렇기에 가장 편한 현무전에 그를 임명한 것이다.
 남독은 싸늘하게 식어가는 산호부인의 시신을 보는 동안 예전의 일이 생각났다. 무이산 이름 없는 계곡의 움막에서 고통에 겨워 신음하다 죽어간 바로 자신의 아내의 모습이 떠오른 것이다. 그녀 역시 산호부인처럼 고통에 겨워하다 죽었다.
 천룡보에 머무는 동안 남독은 산호부인을 남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스스로 속하를 자청하면서도 한편으론 죽어 버린 자신의 딸이라 생각하였기에 그토록 그녀에게 다정하게 대했던 것이다.
 
 ***
 
 “뭐, 뭐라고? 네, 네가 정말 천룡보의 다섯째 공자인 추혁린이란 말이야?”
 광견 유소빈은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놀랐다. 추혁린의 정체를 알기 위하여 고문을 하던 중 너무도 놀라운 소리를 들은 것이다.
 정말 추혁린의 말대로 그가 천룡보의 오공자라면 상대를 잘못 만나도 한참 잘못 만난 것이다.
 감히 천하제일인의 자식을 두들겨 팬 것으로 모자라 고문까지 하였다는 것을 알게 되면 야황단은 그야말로 아침 햇살을 맞은 이슬처럼 사라져야 할 것이다.
 “맞아요. 그러니 날 어서 풀어 줘요. 빨리 돌아가지 않으면 어머니께서 걱정하신단 말이에요.”
 “그, 그럼 왜 도망친 거야?”
 “그건······.”
 추혁린은 추군재의 심부름 건부터 시작하여 모든 것을 소상하게 밝혔다. 모든 이야기를 들은 광견은 일이 심각하게 되었다 생각하는 한편 추혁린을 이곳으로 인도한 소년을 내보내 과연 그의 말이 사실인지 여부를 알아보라 하였다.
 그 결과 현재 추혁린을 찾기 위해 천룡보 고수들이 금릉을 샅샅이 훑고 있다 하였다.
 “이런 제길! 하필이면···, 천룡보 오공자가 열다섯 살이 되었다는 것은 알지만 저토록 체구가 작아 열세 살로 보일 줄 누가 알았어? 그나저나 이 얘기가 단주의 귀에 들어가면? 으으으···, 이제 난 꼼짝없이 죽었다.”
 추혁린의 말이 모두 사실이라는 것을 알자 전신에서 소름이 돋는 듯한 전율감에 휩싸인 채 한동안 중얼거리던 광견은 심각한 얼굴이 되었다.
 ‘저 녀석을 죽여 여기에 묻어 버리면 아무도 모른다. 호삼(胡三) 저 녀석도 자신이 눈이 삐었었다는 것을 이제는 알았을 터이니 발설의 위험은 없다. 하지만 어떻게 하지? 만일 그랬다가 사실이 발각되면 우리 야황단은? 으으으···, 큰일이다.’
 “향주님!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소문이 돌고 있어요.”
 “이런 빌어먹을 놈! 그깟 소문은 들어서 뭘 해?”
 광견의 짜증난다는 듯한 얼굴을 본 호삼이란 소년은 얼른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곧 열리고 말았다.
 “천룡보의 칠부인이 어제 죽었대요.”
 “뭐라고 칠부인이? 가만, 칠부인이라면···, 저 녀석의······?”
 이때 양 손이 천장에 박힌 쇠고리에 묶여 대롱대롱 매달려 있던 추혁린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뭐, 뭐라고? 조, 조금 전 무어라 했어?”
 “야! 너희 엄마가 어제······.”
 호삼이란 소년은 자신이 주워들은 대로 소상하게 이야기하였다. 이야기가 계속되는 동안 추혁린의 두 눈에서는 굵은 눈물이 비 오듯 쏟아져 나왔다. 제아무리 바보라 하지만 자신의 모친이 죽었다는 데 멀쩡하게 있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이런 제길! 그렇다면 우리가 이 녀석을 붙잡고 있는 바람에 칠부인이 죽었다는 얘기잖아? 이거 정말 큰일인데? 어떻게 하지? 우와! 열 받아. 호삼 저 빌어먹을 놈이 엉뚱한 짓을 하는 바람에 이렇게 된 거야. 저놈을 확···, 아냐. 지금은 아냐. 일단 앞으로 어떻게 할지를 먼저 생각해야 해!’
 광견은 일이 심각하게 꼬인다는 것을 직감하고 깊은 고심에 잠겼다. 아마도 그의 일평생 가운데 오늘처럼 곤혹스런 날이 없었을 것이다. 또한 오늘처럼 많은 생각을 한 날도 없을 것이다.
 그 동안 추혁린은 거의 발광하듯 그렇게 울부짖고 있었다.
 부친이란 사람은 그가 부르기 전에는 볼 수도 없는 사람이다. 그리고 천룡보 내에서는 남독과 모친을 제외하곤 그 어느 누구도 자신에게 다정하게 대해준 사람이 없었다.
 그렇기에 그의 슬픔은 너무도 컸던 것이다. 울다가 혼절해 버린 추혁린을 내려놓은 광견의 눈이 번쩍 뜨인 것은 거의 두 시진이 지나서였다.
 “야, 이제 그만 울어. 그런다고 돌아가신 어머니가 살아오시는 것도 아니잖아. 그나저나 너, 큰일났다. 지금 밖에서는······.”
 광견은 자신이 짠 각본을 소상히 설명하였다.
 현재 밖에서 추혁린을 찾고 있는 이유는 모친을 죽게 한 용녀부인이 그를 찾아 죽이기 위함이라는 설명이었다.
 “그러니까 얼른 도망가. 듣자하니 네 모친의 묘소는 현무전주가 만들었다고 하더라. 지금은 일단 도망을 갔다가 나중에 힘을 기른 다음에 다시 와. 지금 천룡보로 갔다가는 개죽음을 당할 거야. 그건 아마 네 어머니께서도 원치 않으셨을 거야. 알았지?”
 “흐흐흑···, 흐흐흐흑!”
 “어디 갈 데는 있어? 있다면 우리 아이들을 시켜 네가 그곳까지 갈 수 있도록 도와줄게. 그리고 이건 얼마 안 되지만 가지고 가. 가다 보면 배도 고플 것이고······.”
 광견은 최대한 친절한 말투와 행동으로 추혁린을 구워삶았다.
 단순한 그는 광견의 말이 모두 사실인 것으로 알고 어디로 갈 것인가를 생각하였다. 한참 후 그는 고개를 들었다.
 전에 현무전에 들러 무공을 배울 때 언젠가 남독이 지나가는 말로 복우산에 대하여 언급한 일이 있었다.
 복우산 깊은 곳으로 가면 상동곡(常冬谷)이라는 계곡이 있다 하였다. 그곳은 남독이 천룡보에 몸담기 전 오랜 동안 무공 수련을 하며 지내던 곳이었다. 어제 처음 천룡보 밖으로 나왔던 추혁린에게는 세상 밖에서 이름이라도 들어본 곳은 그곳뿐이었기에 사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다른 소년들로 하여금 호위를 하게 하여 주겠다는 것을 억지로 거절한 추혁린은 광견에게서 적지 않은 은자가 든 전대를 받아 든 후 그곳을 떠났다.
 떠나기 전 광견은 무엇인가를 가지고 와 물에 갠 후 그것을 얼굴에 발랐다. 역용약(易容藥)이라는 것으로 그것을 바르면 설사 천룡보의 무사들이라 할지라도 못 알아볼 것이라 하였다.
 그렇게 추혁린은 금릉을 떠났다. 그가 사라진 후 무려 반년 동안이나 남독은 현무전 수하들을 총동원하여 금릉을 뒤지고 또 뒤졌다. 하지만 어디에서고 그를 발견할 수는 없었다.
 
 ***
 
 중원의 북쪽 태원부에는 고루거각(高樓巨閣)들이 처마를 잇댄 채 거대한 규모를 자랑하는 장원이 있었다.
 그 장원은 천하 상권을 한 손에 거머쥔 거상(巨商)인 북상 은희도가 머무는 만상각(萬商閣)이었다.
 만상각은 그 이름처럼 만 명의 상인이 평생 모은 재물을 쏟아 부어야 만들 수 있을 정도로 화려한 전각군들로 이루어진 엄청나게 거대한 장원이다.
 태원부의 반을 차지하고 있는 만상각은 내원과 외원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내원은 외원의 크기에 정확히 세 배에 달한다.
 외원에는 평상시에 머무는 인원이 대략 만여 명 정도 되는데 반해 엄청난 크기인 내원에는 단 세 사람만이 머물고 있다.
 만상각주인 북상 은희도와 그의 내자인 화령선자(花翎仙子), 그리고 금지옥엽인 옥화비연 은연경이었다.
 내원은 천하의 절경들을 축소하여 만든 가산(假山)만 해도 이십여 개에 달하였으며, 기화요초(琪花瑤草)들이 심어져 있어 그야말로 세외도원경(世外桃源境)과 같은 아름다운 곳이었다.
 옥화비연은 이 세상에서 가장 화려하게 장식된 전각인 옥화전(玉華殿)에 머무는데, 이곳에서 마치 은쟁반에 옥구슬 굴러가는 듯한 영롱한 옥음(玉音)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아버님, 소녀는 짐승 같은 그 작자와 혼례를 올릴 마음이 없어졌어요. 그러니 파혼(破婚)한다는 전갈을 보내세요. 아셨죠?”
 북상은 여식의 말에 이견(異見)을 달 수 없었다.
 수하들의 보고에 의하면 여식의 정혼자였던 창해신창이 비록 막강한 배경과 영특한 두뇌, 그리고 고강한 무공을 지닌 고수라고는 하나 성품이 오만불손할 뿐만 아니라 잔인무도하고, 색을 밝힌다 하였다.
 금릉 금화원의 기녀 미향은 차치해 두더라도 자신이 머무는 전각의 모든 시녀들을 이미 건드렸을 것이라는 보고였다. 이러한 사실은 천룡보 내에서도 모르는 일이라고 하였다.
 사내를 아는 여인과 사내를 모르는 여인은 분명 차이가 있다.
 이러한 것을 잘 아는 만상각에서는 천룡보 여인들에게 각종 방물을 파는 노련한 여상인들을 파견해 둔 바 있었다.
 그녀들의 보고에 의하면 창해신창에게 청백을 잃은 시비들이 한둘이 아니라는 것이다. 매달 달거리를 하던 시비들이 달거리를 멈추는가 하면 때로는 낙태를 시킬 요량인지 독한 약을 주문하기도 하였다고 하였다.
 이러한 것은 비단 천룡보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장사를 함에 있어 주도권을 잡기 위해서라면 상대의 사소한 습관까지 파악한 후 접견하는 것이 북상의 버릇이었기에 천하의 거의 모든 대소방파가 이와 비슷한 감시 아닌 감시하에 놓여 있다 하여도 과언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러한 모든 것을 종합한 결과 창해신창의 진실한 정체가 드러난 것이다. 게다가 보주인 구화신협이 외출하였다가 돌아온 후 무자비한 매질로 칠부인이 비명횡사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보나마나 모종의 조치가 취해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창해신창이 천룡보의 차기 보주가 되는 일은 요원한 일이 될 것이다.
 “하하하···, 경아야, 너는 이 아비가 무엇이라 생각하느냐?”
 “아버님요? 아버님은 물론 중원 최고의 상인이시죠.”
 “하하···, 그럼 이 아비가 지금껏 단 한 번이라도 밑지는 장사를 한 적이 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더냐?”
 “호호···, 알았어요. 역시 아버님의 주특기는 제 얼굴에 금칠하기군요. 소녀는 아버님만 믿을 터이니 알아서 처리해 주셔요.”
 옥화비연은 부친의 의도를 짐작하고 환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창해신창과의 혼담은 완전히 없었던 것이 될 것이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게 된 것이다.
 여식이 나간 후 북상은 깊은 고심에 잠겼다.
 ‘흐음, 천룡보와 이렇게 인연을 끝내는 것은 결코 좋은 일이 아니다. 자칫 그들의 기분을 상하게 하면 앞으로 장사하는 데 많은 애로 사항이 있을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북상의 굵고 시커먼 검미는 잔뜩 찌푸려진 채 펴질 줄 모르고 있었다. 이런 표정은 무엇인가 큰일을 결정할 때의 버릇이었다.
 “맞아! 그에게 또 하나의 자식이 있다고 하였지?”
 자신의 무릎을 내리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북상은 그 동안 괜한 일로 고심하였다는 듯 만면에 환한 미소를 지었다.
 “좋아! 그런 방법이 있었어. 그렇게 하면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다. 크하하하, 역시 난 타고난 상인이야.”
 옥화전에서는 북상의 만족함이 가득 배인 호탕한 웃음소리가 오래도록 울려 퍼졌다.
 
 
 제3장 대체 여기가 어디야?
 
 
 “휴우···, 여기서 상동곡(常冬谷)은 얼마나 멀까?”
 금릉 시가지를 벗어난 추혁린은 파립(破笠)을 위로 슬쩍 들추며 끝없이 뻗어 있는 관도를 바라보았다. 오가는 행인들이 적지 않았기에 가는 길은 그리 심심지 않을 것 같았다.
 그는 모친의 죽음을 알고 쏟아지는 눈물을 닦을 새도 없이 호삼의 안내로 이곳까지 오게 된 것이다.
 길을 가는 동안 추혁린은 모든 사실을 냉정한 눈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우선 자신의 출생부터가 축복받은 것이 아니었다.
 술 취한 부친의 실수로 태어난 자신으로 인해 모친은 십 수년 간이나 온갖 굴욕을 다 당하면서 오로지 자신 하나가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에 살다가 비참한 최후를 마쳤다.
 형들과 누이들이 있지만 어느 누구 하나 자신에게 따뜻하게 대해준 사람이 없었다. 또한 부친의 다른 부인들 역시 단 한 번도 다정한 말을 건네거나 자신을 안아 준 적이 없었다.
 부친의 얼굴을 본 지 얼마나 되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저 흑염이 무성하다는 것밖에는 얼굴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자신은 천애고아나 다름없는 셈이었다. 의지할 곳이라고는 하나도 없다는 것을 느낀 그는 공연히 샘솟는 눈물을 닦으며 처량한 기분에 젖었다.
 그럴 때면 소학(小學)의 첫 구절에 자신이 가락을 붙인 노래를 부르곤 하였으나 마음에 들지 않아 그것도 그만뒀다.
 배운 학문도 없고, 그렇다고 뛰어난 무공도 지니지 못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아무것도 없었다.
 낙담한 추혁린은 지금으로선 상동곡으로 가는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자각하고는 터덜터덜 발걸음을 옮겼다. 가는 길은 너무도 멀었다. 마침 꽃이 한창 피는 늦은 봄이었기에 망정이지 만일 추운 겨울이었다며 꼼짝없이 얼어죽어야 하였을 것이다.
 처음엔 객잔이라는 곳에서 먹고 잤다. 하지만 나날이 줄어가는 은자를 보고 불안한 마음에 먹는 것만 그곳에서 해결하고 잠은 아무 곳에서나 잤다. 태어난 이후 처음 해 보는 고행인지라 추혁린의 몰골은 형편없었다. 제대로 씻지 못해 어떤 객잔에서는 거지로 몰려 내쫓기기까지 하였다.
 그렇다고 얻은 것이 하나도 없느냐 하면 그것은 아니었다.
 세상의 인심이라는 것을 몸으로 체득했고,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세상을 살아가는지를 눈으로 보면서 하나하나 알아갔다.
 그리고 객잔에서 음식을 먹을 때에는 천하각지에서 일어나는 가지각색의 일들에 대한 소문을 들을 수 있었다. 그 결과 중원에는 천룡보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정도무림과 마도무림, 그리고 사도무림의 해묵은 감정의 골이 깊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사사건건 대립한다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아직은 천룡보의 입김이 크기에 대규모의 싸움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추혁린이 복우산 권역에 도착한 것은 여름이 다 갈 무렵이었다. 아직 어린 나이였기에 걸음이 느렸고, 오면서 너무도 신기한 것들을 많이 보고 느꼈는지라 늦은 것이다.
 “후와···, 이건 보통 산이 아닌걸? 이 넓은 곳에서 어떻게 상동곡이라는 곳을 찾지?”
 추혁린은 무려 삼백 리에 걸쳐 펼쳐져 있는 복우산을 보고 기가 질렸다. 지금까지 그는 복우산이 그저 조그만 산이고 거기만 가면 상동곡을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던 터였다. 한데 막상 복우산의 전경이 모두 보이는 곳에 도착하자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기가 질렸다.
 한동안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던 그가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발걸음을 옮긴 것은 자신에게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을 상기한 직후였다.
 복우산으로 접어든 지 거의 한 달이 다 되어가건만 아직 상동곡을 찾지 못한 그는 천천히 섶을 헤치며 전진하고 있었다.
 처음 입산을 하였을 때 스르르 똬리를 풀고 숲으로 사라지는 뱀을 보고 놀랐기에 길이가 대략 일 장 가까이 되는 긴 막대를 꺾어 미리 자신이 갈 곳을 헤친 후 전진하고 있었던 것이다.
 “휴우! 여기도 아닌가? 할아범이 말하길 두 개의 봉우리가 나란히 있는 곳 사이로 가면 다른 곳과 달리 몹시 추운 곳이 있다 하였는데···, 어쨌든 다른 곳으로 가 봐야겠군.”
 상동곡은 추혁린의 중얼거림처럼 두 개의 봉우리 사이에 있는 자그마한 계곡이었다. 그가 이곳을 찾는 이유는 예전에 남독이 머물면서 온갖 살림을 다 준비해 두었다는 말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곳에는 폭설로 인하여 외출이 불가능해질 때를 대비하여 적어도 십 년 이상을 충분히 버틸 수 있는 벽곡단( 穀丹)이 준비되어 있다 하였다.
 또 하나 그의 발걸음이 그곳으로 향하려는 이유는 무공비급 때문이었다. 남독이 상동곡에 머물 당시 그는 자신이 그곳에서 늙어죽을 것이라 판단하여 자신이 지닌 바 무공을 집대성한 비급을 모종의 장소에 보관하여 두었다고 하였다.
 그것을 찾으려는 것이 바로 추혁린의 진정한 목적이었다. 그것을 찾아 모든 것을 익힌 후 모친을 비명황사케 한 용녀와 추군재를 징벌하고 싶다는 마음이 강했던 것이다.
 
 ***
 
 “무엇이? 방금 무어라 하였소?”
 오랜 외출에서 돌아온 구화신협은 남독으로부터 놀라운 소식을 전해 듣고 즉각 용녀와 추군재를 지존전으로 불러들였다.
 그리고 사실 여부를 따져 묻자 용녀는 태연스럽게도 산호부인 정도가 죽은 것을 가지고 뭘 따지느냐는 식의 대답을 하였다.
 “호호···, 상공, 그 못난 것과 그 천한 것이 그렇게 된 건 어쩌면 우리 천룡보를 위해서 잘된 일인지도 몰라요. 안 그래요? 혁린 그 아이는 도저히 상공의 아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닮지도 않았고, 멍청하기 이를 데 없었잖아요? 그리고 산호, 그 천한 것은 상공이 거느리기엔 너무도 천박했고요.”
 “으으으···, 진정 그것이 당신의 진심이오?”
 구화신협은 너무도 어이없는 대답에 이은 용녀의 태도에 분기탱천하였으나 억지로 노기를 누르고 나직이 물었다. 용녀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대신 입을 연 것은 넷째 아들인 추군재였다.
 “하하···, 아버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소자가 혁린 그 아이를 대신하여 두 배로 효도를 하겠습니다. 사실 그 아이는 너무도 멍청해서 동생이라고 하기에 창피하기까지 하였던 차였습니다. 차라리 없어진 것이 다행입니다. 그러니 심려하지 마십시오. 소자가······.”
 “무어라······?”
 구화신협은 십육 년 전 자신이 금화원에서 산호부인과 인연을 맺었을 때를 상기하였다. 대취한 자신을 위하여 조신하게 굴던 그녀의 아리따운 자태와 그 후의 행동은 자신을 감동시켰었다.
 제아무리 기녀라고 하지만 그녀는 홍루(紅樓:몸을 파는 기녀들이 있는 곳)에 속한 기녀가 아니었다. 금화원은 지금도 금릉 한복판에 있지만 결코 기녀들에게 몸을 팔라 강요하는 곳이 아니었다. 엄격히 말하면 술을 마시면서 금기서화(琴棋書畵)를 즐기는 청루(靑樓:몸을 팔지 않는 기녀들이 있는 곳)였다.
 그날 밤 산호부인이 그렇게 된 것은 거의 겁탈에 가까운 자신의 행동 때문이라는 것을 알기에 자책감을 느껴 그녀를 부인으로 인정하였었다.
 그 후 천룡보로 거처를 옮기게 하였으나 단 한 번도 찾지 않았다. 왠지 그녀와 마주하면 자신이 저지른 어처구니없는 실수가 자꾸 생각날 것만 같아서였다. 또한 어찌 생각하면 금릉에서 제일 잘 나가는 기녀를 자신이 망쳐 버렸다는 느낌도 들어서였다.
 처음 천룡보로 들어오던 날, 그는 산호부인으로부터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다. 자신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하여 낙태를 시킬 요량으로 독한 약을 복용하였다는 것이 그것이었다.
 그래서 그것으로 인해 추혁린이 아둔하다 생각하던 그였다.
 다른 모든 자식들이 하나같이 잘나고 영특한 반면, 그만이 그런 것이 자신 때문이라는 자책감을 느끼던 그였기에 강호로 발걸음을 할 때마다 혹시 천하의 영물(靈物)이라도 구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을 복용시켜 천형(天刑)에 가까운 굴레로부터 자식을 풀어주고 싶은 부정(父情) 때문이었다.
 하지만 영물이란 것이 어디 원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인가?
 제아무리 구하고자 하는 일념이 강하다 하더라도 하늘의 뜻이 없으면 구할 수 없는 것이 영물이기에 구경도 못하던 차였다.
 전에 천약곡에서 보내왔던 만년하수오(萬年何首烏)는 분명 영물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장자인 하토신검이 복용해 버렸다고 하기에 안타깝기는 하였지만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아직 인연이 닿지 않아서라고 애써 위안을 하던 그였다. 늘 산호부인 모자에게 미안한 감정을 지니고 있었으나 단 한 번도 밖으로 표출시킨 적이 없던 그는 용녀와 추군재의 말에 그만 대노하고 말았다.
 “이노옴! 네놈이 감히 아비 앞에서 망발을 하다니···, 네놈은 듣자하니 하라는 공부는 하지 않고 색만 밝힌다고 들었다. 이 아비에게 있어 정말 쓸모 없는 자식은 바로 네놈 같은 자식이다. 썩 나가거라. 그리고 다시는 천룡보에 발을 들일 생각을 하지 말거라. 너는 이 순간부터 더 이상 내 자식이 아니다. 그리고 부인도 나가시오! 나에게는 부인과 같이 오만방자하고 남을 귀히 여길 줄 모르는 사람은 필요 없소. 이제부터 부인과 나는 더 이상 부부가 아니니, 그리 아시오.”
 구화신협이 성난 얼굴로 노성(怒聲)을 토하자 용녀와 추군재는 안색이 창백하게 변하였다. 방금 자신들이 들은 이야기가 정녕 구화신협의 진심이라면 자신들은 이제 더 이상 그와 아무런 연관도 없는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
 “사, 상공! 소첩은······.”
 “시끄럽소. 이제부터는 내게 상공이라는 말도 하지 마시오. 당장 나가시오.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마시오. 알겠소? 만일 내 집에 다시 발을 들인다면 그때는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오.”
 “아, 아버님! 소자는 아버님의······.”
 “무어라? 아버님? 내가 방금 말하지 않았더냐? 앞으로 내게 아버님이라고 부르지 마라. 나는 조금 전부터 너희 모자와 같은 사람들은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다. 지금 당장 나가거라.”
 말을 마친 구화신협은 찬바람이 씽 돌 정도의 냉엄한 표정을 지으면서 밖으로 나가 버렸다.
 한편 용녀와 추군재는 얼이 빠졌는지 한참을 꼼짝도 않았다. 그런 그들이 제정신을 차린 것은 용녀각 소속 시비들과 하인들이 잔뜩 짐을 꾸려 가지고 나타났을 때였다.
 밖으로 향하면서 즉각 용녀각을 비우고 전각을 허물어 버리라는 구화신협의 명에 따라 이렇게 된 것이다.
 그 시각 천룡보의 내원은 살벌한 기운이 감돌았다. 그의 다른 부인들 모두 불려가 일이 그렇게 진행되도록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심한 질책을 받는 중이기 때문이었다.
 앞으로 만일 이러한 일이 발생된다면 그것이 누구이건 즉각 인연을 끊겠다는 그의 말에 모두들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가 천룡보 수뇌부들을 소집시킨 자리에서 놀라운 발표를 하였기에 더욱 눈을 동그랗게 뜰 수밖에 없었다.
 
 “이제까지 결정을 미루었던 천룡보 차기 보주는 혁린 그 아이이니, 그렇게들 아시오. 그리고 지금 즉시 본보는 모든 역량을 다 동원하여 그 아이의 행방을 찾으시오. 그리고 군재 그 아이의 정혼은 이 순간부터 무효이오. 대신 북상(北商)의 여식은 혁린 그 아이와 정혼하기로 하였소. 알겠소?”
 구화신협이 발표를 한 후 자신의 침소로 사라지자 장내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한동안 움직일 수 없었다. 설마 보주의 노기가 이토록 엄청날 것이라고는 전혀 상상도 못하였던 때문이었다.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남독이었다.
 “무엇들 하시오? 어서 보주님의 명에 따라 소보주님을 찾아야 하지 않겠소? 자, 우리는 이제 나갑시다.”
 남독의 말을 들은 천룡전주 인검과 주작전주 수라혈귀, 그리고 백호전주 운룡일학은 정신이 드는지 황급히 밖으로 향하였다.
 사 전주 모두가 밖으로 향하자 수화부인을 비롯한 다섯 부인들은 서로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 가운데 특히 아들을 두었기에 그 아들을 차기 천룡보주로 만들려던 수화부인과 천약선자, 그리고 당문일수의 표정은 볼 만하였다.
 지금껏 반목과 질시를 밥먹듯 하면서 해 왔던 모든 일들이 물거품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귀영섬도와 표향공자 역시 멍한 표정이었다. 단 하나,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짓고 있는 사람은 장자인 하토신검뿐이었다.
 그는 자신보다 윗대에서 일어난 참사에 대하여 좋은 감정을 지니고 있지 않았다. 다시 말해 용녀가 산호부인을 죽인 것에 대하여 말은 하지 않았지만 심한 반감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이날 일어난 일련의 상황 때문에 천룡보는 한 차례 태풍이 휩쓸고 간 듯한 분위기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천약선자와 당문일수는 각기 자신들의 아들인 귀영섬도와 표향공자를 데리고 친정으로 가 버렸다. 자신의 자식이 천룡보의 차기 보주가 될 수 없다면 더 이상 천룡보에 머물 이유가 없다는 것이 그녀들의 뜻이었다.
 수화부인 역시 친정인 서문세가로 가 버렸다. 하지만 하토신검은 자신의 처소에 처박혀 여전히 검법 수련을 하고 있었다.
 구화신협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그들과 인연을 끊는다고 무림에 공포하였다. 결국 산호부인의 죽음으로 인하여 구화신협은 다섯 부인과 네 아들을 잃은 것이다.
 곧 천룡보 내원은 대대적인 공사에 들어갔다. 구화신협이 머무는 지존전과 하토신검이 머무는 수화각, 그리고 월하혜문의 처소인 월하각과 검치부인과 벽라옥녀가 기거하는 검치각을 제외한 모든 전각을 허물고 그곳에 정원을 만드는 공사였다.
 이것은 구화신협이 그녀들과의 인연을 완전히 끊는다는 것을 대외적으로 보여주는 처사였다.
 산호부인과 추혁린이 머물던 산호각만은 대대적인 중수를 거쳐 지존전에 버금가는 전각으로 변하였다.
 이 일이 진행되는 동안 강호에는 놀라운 소문이 돌았다.
 구창궁이 가장 먼저 천룡보와의 인연을 끊는다는 발표를 하였고, 이어서 화타곡과 사천당가 역시 인연을 끊는다는 발표를 한 것이다. 서문세가만은 아직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고 있었다.
 잠잠하던 무림이 급작스런 회오리에 휘말린 듯 어수선한 분위기로 변하였다. 하지만 구화신협은 여전히 무림맹의 맹주였고 무림 최강자였다.
 
 ***
 
 “하하하···, 드디어 찾았다.”
 추혁린은 상동곡을 발견하고 기쁨에 겨워 웃음을 터뜨렸다. 그곳은 남독이 말한 그대로였다. 오랫동안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아 다 쓰러져 가는 움막이었지만 기거하기엔 충분하였다.
 상동곡은 사시사철 계절의 변화가 없는 곳이다. 한여름에도 냉기가 흘러 뭇 짐승들의 발걸음이 없는 곳이기에 늘 겨울이라는 뜻의 상동곡이란 이름이 붙여져 있는 것이다.
 당연히 추운 계절을 버틸 수 있는 침엽수만이 있었다.
 아직 초가을임에도 불구하고 쌀쌀함을 느낀 추혁린은 움막 안에서 서툰 솜씨이기는 하나 사슴 가죽으로 만든 의복을 찾아 걸쳤다. 움막은 지상으로 튀어나와 있는 곳보다 계단을 딛고 내려가야 들 수 있는 지하 부분이 훨씬 더 넓었다.
 지하실 바닥에는 솟아나는 냉기를 가리기 위하여 여러 겹의 가죽으로 뒤덮여 있었고, 벽에는 선반이 걸려 있었다. 거기에는 각종 짐승의 가죽들과 벽곡단이 들어 있는 단지들이 놓여 있었다. 또한 사냥을 위한 각종 도구와 각종 곡식들도 있었다.
 이것을 보고 추혁린은 남독이 이곳을 택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가 떠난 지 이십여 년이나 흘렀건만 벽곡단들은 물론 곡식들까지 아직도 먹을 수 있을 정도였던 것이다.
 본시 불문의 제자였던 그는 추위를 이기기 위한 의복 마련과 먹기 위하여 할 수 없이 사냥을 하였으되 필요 이상의 살상을 하고 싶지 않아 이토록 추운 곳을 거처로 삼은 것이다.
 지하실의 가장 은밀한 구석의 벽을 파보자 남독의 말대로 목궤(木櫃) 하나가 있었다.
 “후후···, 남독 할아범이 무심코 했던 말도 이렇게 생각나는 걸 보면 난 바보가 아니란 말씀이야! 좋아, 할아범이 무얼 남겼는지 이제 한 번 볼까?”
 추혁린은 다 썩어서 퀴퀴한 냄새를 풍기는 목궤의 뚜껑을 열어제쳤다. 안에는 신패로 보이는 하나의 목패가 놓여 있었다.
 목패의 전면에는 바탕에 불상이 조각되어 있었으며 불(佛)자가 쓰여 있었고, 뒤에는 수율(守律)이라는 글자와 함께 칠(七)이라는 글자가 쓰여 있었다.
 “이건 뭐지?”
 목패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던 추혁린은 일단 그것을 갈무리해 두었다. 그것은 바로 소림의 수율승에게 주어지는 신패였다. 이것이 있으면 소림과 관련된 사람들의 공과(功過)를 따져 상을 주거나 죄를 물을 수 있는 막강한 권력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것을 모르는 추혁린은 이것을 아무렇게나 품 속에 쑤셔 넣은 것이다.
 
 <회한록(悔恨錄)>
 
 이번에 집어든 것은 그리 오래 된 것으로 보이지 않는 얇은 서책이었다.
 “이건 뭐지? 회한록? 누가 얼마나 한이 깊었기에 이런 것을 남겼을까?”
 추혁린은 쪼그려 앉은 채 그것을 펼쳐 보았다.
 <사문을 눈앞에 두고 찾을 수 없는 심정을 아는가?
 본인은 회한에 찬 지난 과거를 기록함으로써 조금이나마 마음속의 슬픔을 달래고자 이것을 남긴다.
 본인은 불과 육 세의 나이에 전염병으로 부모를 잃었다. 그 후 천하를 떠돌던 중···, 하략.>
 
 놀랍게도 회한록의 저자(著者)는 바로 남독(南毒)이었다.
 추혁린은 회한록을 읽어가던 중 저자가 바로 그임을 알고 그가 왜 그토록 소림의 무공에 정통하였는지 알게 되었다.
 회한록 아래에 있던 서책은 소림의 무공을 바탕으로 얻은 심득을 기록한 것이었다. 소림칠십이절예 가운데 무려 육십여 가지를 연성하였던 그는 이곳 상동곡에 머물면서 무료함을 달래던 중 그것들을 혼합하여 하나의 무공을 창안한 것이다.
 금강보리항마장(金剛菩提降魔掌)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것은 나한십팔장(羅漢十八掌)과 항마십삼장(降魔十三掌), 그리고 수미불면장(須彌佛面掌)과 보리옥룡인(菩提玉龍印), 거기에 대력금강장(大力金剛掌)과 복마장법(伏魔掌法) 등의 장점만을 취합하여 만든 초절정 장법이었다.
 이때까지 추혁린은 금강보리항마장을 연성할 경우 소림칠십이예(少林七十二藝) 중 적어도 삼십육예(三十六藝)를 달통한 것과 같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남독이 소림칠십이예 중 자신이 연성한 것들을 모두 기록해 두지 않은 것은, 사문의 무공은 사문의 허락 없이 절대로 외인에게 알려서는 안 되기 때문이었다.
 이날부터 추혁린은 금강보리항마장을 연성하기 시작하였다.
 모두 여섯 초식으로 되어 있는 이것은 황룡출수(黃龍出水), 쌍룡도미(雙龍掉尾), 유룡퇴보(遊龍退步), 연자급수(燕子汲水), 선학량시(仙鶴?翅), 탄사천구(彈射天狗)로 되어 있었다.
 황룡출수는 물 속에 잠겨 있던 황룡이 승천하듯 느닷없는 출수를 할 때 유리한 초식이고, 쌍룡도미는 두 팔을 연신 휘저으며 장력을 발출하는 수법이었다.
 유룡퇴보는 놀랍게도 뒤로 물러서며 시전하는 초식으로 이는 수세에 몰렸을 때 전세를 뒤집는데 더없이 좋은 초식이었다.
 연자급수는 마치 제비가 물을 마시듯 위에서 아래로 내리찍는 듯한 초식으로 이는 위에서 아래로 공격할 때 사용하는 수법이었다. 선학량시는 두 팔을 벌렸다 오므려 합장하듯 하며 장력을 내뿜는 수법으로 강력한 장력을 발출한다.
 마지막으로 탄사천구는 여러 발의 화살을 쏘아 개를 잡듯 장력을 연속하여 발출하는 수법이었다.
 한 가지 다행인 점은 남독으로부터 문자에 대하여 배웠기에 모르는 글자가 없다는 것이다. 배가 고프면 벽곡단으로 허기를 메웠고, 잠은 짐승들의 털가죽으로 만든 포근한 잠자리에서 잤다.
 완전하지는 않지만 금강보리항마장의 연성을 끝낸 것은 이 년이 지난 후였다. 그것은 비급에 모든 동작들이 서툴기는 하지만 자세한 도해(圖解)가 그려져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만일 그렇지 않고 글자만 쓰여 있었다면 아마도 이십 년은 족히 걸렸을 것이다. 남독은 비급을 저술할 때 마치 추혁린 같은 바보가 이것을 보리라고 짐작을 하였던 모양이었다.
 하여튼 이제 추혁린은 자신이 원하는 시기에, 원하는 곳에 장력을 격중시킬 수 있는 정도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내공이 일천한 관계로 위력은 거의 없다시피 하였다.
 그 동안 한 가지 달라진 점이 있다면 남독이 먹였던 독단과 영약이 효력을 발휘하였는지 그의 두뇌는 예전의 두뇌와는 판이하게 달라진 것이다. 예전 같으면 십 년은 족히 걸렸어야 할 것이 이제는 불과 반년 만이면 익힐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두뇌가 뛰어나냐 하면 그것은 아니었다. 아주 바보였던 것에서 범인과 비슷한 수준으로 올라선 것뿐이다.
 또한 나이보다 왜소했던 체격이 이제는 정상인과 같아졌기에 추혁린은 이제 늠름한 청년의 모습이 되어 있었다.
 “후후···, 이젠 웬만큼 익혔으니 슬슬 하산해 볼까? 아냐, 그 전에 할 일이 있다. 대체 무슨 연유로 여기만 이토록 추운 것인지 확인해 봐야지.”
 이 년을 머물면서 늘 의구심에 잠겨 있던 것을 드디어 확인해 볼 시간이 된 것이다.
 일단 다른 곳으로 나가본 그는 밖은 아직 더운 초가을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다시 상동곡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입김이 날 정도로 싸늘하다는 것을 즉각적으로 체감할 수 있었다.
 “분명 무언가가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차이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흐음, 무엇 때문이지?”
 예전과 같이 멍청한 눈빛이 아닌 이제는 예리하다고 표현해도 좋을 그런 눈빛으로 상동곡을 샅샅이 살핀 그는 고개를 좌우로 갸우뚱거렸다.
 육안(肉眼)으로는 도저히 그 원인을 알 수 없었던 것이다.
 “흐음, 대체 무엇이 원인이지? 겉으로는 추울 이유가 전혀 없다. 그렇다면 혹시 땅 속에······?”
 추혁린은 상동곡이 이토록 추운 이유가 분명 땅 속에 무엇인가가 묻혀 있어 그렇다 생각하고 움막의 지하로 들어가 보았다.
 그리고는 지금껏 느끼지 못하였던 이상한 점을 발견하였다.
 천룡보에 있을 때 그곳 지하실로 내려가 보면 늘 축축한 습기가 그득하여 반나절만 있으면 의복이 축축하게 젖는다는 느낌을 받았었는데, 이곳은 전혀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흐음···, 이상하다. 대체 무슨 이유 때문일까? 정말 이상해!”
 이토록 이가 시릴 정도로 춥다면 의당 땅 속이라 할지라도 흙들이 얼어붙어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을 발견한 그는 눈빛을 반짝였다. 어딘가 구멍이 있으며 그곳으로부터 냉기가 흘러나온다 생각한 것이다.
 “좋아! 한 번 찾아보자.”
 추혁린은 지하실에 있는 모든 물건들을 위로 끄집어 올렸다. 그러던 중 지하실 가장 안쪽 바닥에서 가장 심한 냉기가 느껴지자 그곳을 파기 시작하였다. 약 두 자 가량을 파들어가자 차갑기 이를 데 없는 커다란 바위가 있었다.
 그 바위에서 엄청난 냉기가 스며 나온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즉각 주위를 파들어갔다. 사방 일 장 정도 크기였기에 그것을 움직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흙 속에 손이 닿음과 동시에 마치 얼어붙을 듯한 냉기가 느껴지자 황급히 손을 뺀 그는 굵은 나뭇가지의 끝을 다듬은 후 그것으로 팠다.
 무려 보름 간이나 팠으나 아무런 성과도 없었다. 이때까지 파들어간 깊이만 해도 거의 십여 장은 족히 되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깊이 파들어가면 갈수록 냉기가 점점 더 심해진다는 것이었다. 두터운 가죽 의복을 두 겹이나 껴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절로 이가 부딪쳐 소리를 낼 정도로 춥자, 입김으로 손을 녹여가며 파들어가던 추혁린은 나직이 중얼거렸다.
 “분명 이 아래에 무언가가 있어. 그렇지 않고서야 이처럼 추울 수가 없지. 아앗!”
 그 순간 추혁린은 땅 속을 파들어가다 그만 밑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놀랍게도 지하에 암동(暗洞)이 있었던 것이다.
 쿠웅!
 “으으윽······!”
 무방비 상태에서 곤두박질치듯 떨어져 내린 그는 나직한 비명을 질러야 하였다. 무려 일 장이 넘는 높이였기 때문이다.
 “으으! 여, 여긴 대체 어디지? 왜, 이리 캄캄해?”
 살을 에일 듯 차가운 냉풍이 휘몰아치는 가운데 추혁린은 사방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서 있는 곳 주변을 제외하고는 보이는 것이 없었다. 자기 키의 두 배 가까이 되는 천장에서 흘러드는 희미한 빛 이외에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구멍은 그가 떨어져 내린 구멍이었다.
 “큰일이다. 나갈 만한 길이 없다면······?”
 추혁린은 아직 일 장 높이를 뛰어오를 만한 능력이 없기에 떨어져 내린 구멍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직감하고 나직이 침음성을 터뜨렸다. 하지만 그는 곧 모든 것을 잊고 천천히 더듬으며 움직여 갔다. 원래 바보였던 그였기에 매사에 낙천적인지라 이런 행동이 가능했던 것이다.
 “으으으···, 추워! 으드드드드득······!”
 전진하면 할수록 점점 더 매서운 냉기가 옷깃을 파고들자 잔뜩 웅크린 채 전진하던 그는 황급히 뒤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곳이라고 다를 바 없이 매서운 추위가 느껴졌다.
 이제 죽기살기로 움직여 암동의 끝에 도달하지 않으면 얼어죽을 것이라는 판단을 내린 그는 이를 악물고 전진하였다.
 “으으으···, 추워! 만일 끝에 갔는데도 나갈 길이 없다면······?”
 더 이상은 생각하고 싶지 않은지 말끝을 흐렸다.
 이곳의 흙은 위의 흙과는 달리 꽝꽝 얼어붙어 있어 마치 철벽 같았기에 흙을 파고 들어가 추위를 피할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암동은 점차 좁아지면서 종래에는 기어가지 않으면 안 될 정도가 되어 버렸기에 전진 속도가 점차 느려졌다.
 얼어붙은 손발은 물론 무릎이 말도 못할 정도로 시렸고, 코끝과 귀 역시 얼어붙어 아예 감각이 없어졌다.
 “으드드드드! 빠, 빨리 가야 해! 으드드드득······!”
 추혁린은 스스로를 독려하며 재빨리 손발을 놀린다고 놀렸으나 이미 얼어붙은 손발이 마음대로 움직일 리는 없는 법.
 점차 전진 속도가 느려져 종래에는 한 시진에 겨우 이십여 장을 전진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암동은 끝이 없는 듯 보였다. 추위와 허기, 그리고 갈증에 허덕이던 추혁린의 눈에서 반짝이는 희망의 빛을 발한 것은 암동에 떨어져 내린 지 거의 열 시진이 지난 후였다.
 좁았던 암동이 다시 넓어지며 칼날같이 매서웠던 바람이 약간 부드러워진 듯한 느낌이 든 직후였다. 하지만 그것은 감각의 차이일 뿐 대기는 여전히 살을 에일 듯한 냉기를 머금고 있었다.
 얼어붙어 움직일 때마다 통증이 전달되는 무릎을 억지로 세운 그는 이제 죽기살기로 전진하는 수밖에 없다는 판단에 본능적인 움직임으로 나아갔다. 다시 한 시진 정도가 지난 후 추혁린은 처음으로 두 갈래로 갈라진 암동의 입구에 도착하였다.
 “으으···, 추워! 어디로 가지? 어디로 가야 하지?”
 둘 다 냉풍이 불기는 마찬가지인지라 쉽사리 판단이 서지 않던 그는 둘 중 약간 더 넓은 암동을 택한 후 안으로 들어갔다. 상대적으로 그곳이 조금 덜 추운 듯 느껴져서였다.
 그리고 칠흑 같은 어둠 속인지라 자신의 손가락조차 보이지 않는 상황이었지만 워낙 어둠 속에 오래 있다 보니 이주 미약하기는 하지만 그쪽이 약간은 밝은 듯싶었기 때문이었다.
 “얼어죽을 때 얼어죽더라도 조금 환한 곳이 났겠지. 으으으, 이러다 꼼짝없이 얼어죽고 말겠군.”
 삶의 의욕을 잃었는지 추혁린은 죽음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제 한 시진 정도만 더 이곳에 있으면 얼어죽을 것이라는 예감이 그의 뇌리를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그의 판단이 맞았는지 대략 반시진 정도 전진할 무렵부터는 점점 더 환해지는 듯하였다. 일각 정도 더 전진하였을 때 추혁린은 처음으로 희미하기는 하지만 손을 볼 수 있었다.
 마치 나무 막대처럼 꽁꽁 얼어붙은 손은 기어가는 동안 상처라도 입었는지 선혈이 얼어붙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무릎 역시 선혈이 얼어붙어 있었다. 다행히도 감각이 없을 정도로 얼어붙어 있었기에 그 동안 통증을 느끼지 못한 것이다.
 “후우! 후우···, 너무 추워!”
 미지근한 입김을 불어 얼어붙은 손을 부드럽게 하고 싶었으나 그것은 마음일 뿐 입김은 바로 얼어붙는지 전혀 온기를 느낄 수 없었다. 이런 가운데 그는 전방을 주시하며 천천히 나아갔다.
 한참 후 그가 도착한 곳은 누군가가 다듬은 듯한 커다란 석문 같은 것의 앞이었다. 그곳으로부터 쏟아져 나오는 냉기는 지금까지의 냉기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차가웠다.
 “대, 대체 여, 여기 어디지?”
 혀까지 얼어붙었는지 발음조차 제대로 되지 않는 상황이었지만 호기심을 느낀 그는 석문에 손을 댔다가 황급히 떼었다.
 마치 뜨겁게 달아오른 철판에 손을 댄 것처럼 찌르르한 느낌이 느껴져서 였다. 하지만 이곳이 아니면 나갈 곳이 없다 판단하였던 그는 석문에 등을 대고 힘껏 밀어붙였다.
 그러자 짐승 가죽 표면의 부드러운 털들이 얼어붙으며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얼마나 차가운지 가히 짐작할 만하였다.
 끼이이이이이익―.
 혼신의 힘을 가하여 밀자 석문은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천천히 열렸다. 그와 동시에 열린 문틈 사이로 휘황한 빛과 더불어 차갑기 이를 데 없는 가공할 냉기가 쏟아져 나왔다.
 한참 동안 석문을 열기 위하여 혼신의 힘을 가하였기에 이마에 솟아나려던 땀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즉각 머리가 깨어질 듯한 통증을 느꼈으나 문 열기를 멈추지 않았기에 반각 만에 사람 하나가 간신히 비집고 들어갈 만한 틈이 생겨났다.
 “후와! 후와···, 으드드드드득! 으으, 추워!”
 힘쓰는 것을 멈추자 즉각 전신이 얼어붙을 듯 냉각됨을 느낀 그는 무작정 문 안쪽으로 들어갔다.
 너무도 추워 잔뜩 웅크린 채 눈동자만 굴리며 안을 살피려던 그는 천장에 박혀 있는 둥근 구슬에서 휘황한 빛이 쏟아져 들어오자 잠시 동안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태에 있었다.
 한참 후 비로소 사물이 보이기 시작하자 그것을 살피려던 그는 깜짝 놀라고야 말았다.
 “아앗! 여, 여기에 사, 사람이······?”
 놀랍게도 이곳은 지하 암동에 사람의 손길이 가미된 석실이며 사람들이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모두 세 사람이었는데, 그 중 하나는 대략 칠십 정도로 보이는 승포를 걸친 승려였고, 다른 하나는 우아한 궁장을 걸치고 머리를 구름처럼 틀어 올린 여인이었다.
 여인은 삼십 정도 되어 보였는데 무척이나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나머지 하나는 화려한 문양의 금의를 걸친 육십 정도 된 풍채 좋은 노인이었다. 세 사람은 얼어붙은 듯 보였다.
 이마에 계인(戒印)이 선명한 승려는 금의를 걸친 노인을 향하여 기마자세를 취한 후 두 손을 앞으로 내밀고 있었고, 금의노인은 한쪽 다리를 든 채 한 손은 머리 위에 또 다른 한 손은 손끝을 모은 채 승려를 향해 막 공격하려는 모습이었다.
 여인은 품에서 무엇인가를 꺼내려 하였는지 한쪽 손은 품에 들어 있었고, 다른 한 손은 허리춤에 닿아 있었다.
 처음엔 이들이 살아 있는 줄 알고 화들짝 놀랐지만 추혁린은 이들이 얼어죽은 시신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을 소모하지 않았다. 숨을 쉬고 있다면 의당 입김이 나올 터인데 전혀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제법 똑똑해진 결과였다.
 그는 세 사람의 존재보다 대체 어디에서 이토록 차가운 냉기가 흘러드는지 더 궁금하였기에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앞쪽은 허연 얼음으로 뒤덮여 있고, 뒤쪽은 비교적 덜한 상태의 흑의노인 하나를 더 발견할 수 있었다.
 염소수염을 길러 다소 간사스럽게 보이는 흑의노인은 무엇인가를 집어들려다 그대로 얼어붙은 듯한 모습이었다.
 그 밖에도 하나의 인물이 또 있었다. 석실의 가장 안쪽 석탁에 앉아 있는 백발백염의 노인이 바로 그였다.
 나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늙은 그 노인은 유림의 학사들이 즐겨 입는 문사복을 걸치고 있었는데, 무엇인가를 기록하다 굳었는지 붓을 든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추혁린은 냉기가 샘솟는 곳이 바로 간사해 보이는 염소수염을 지닌 흑의노인이 있는 곳이라는 것을 감지하고 억지로 그곳으로 신형을 움직여 갔다.
 얼마나 추운지 움직이는 것 자체가 엄청난 고통이었다. 하지만 이를 악물고 다가간 그는 흑의노인이 알 수 없는 물질로 만든 철궤 비슷한 것에 손을 대고 있었는데, 그것이 삼분지일쯤 열려 있는 상태라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살을 에일 듯한 냉기는 바로 그곳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너무도 추웠는지라 추혁린은 아무 생각 없이 흑의노인이 들고 있는 철궤의 뚜껑을 힘껏 눌러 닫았다. 그러자 즉각 냉기가 훨씬 줄어드는 듯한 느낌이 들자 자신의 판단이 맞았다는 것이 기쁜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안면 근육이 이미 얼어붙은 상태였기에 그것은 그의 생각일 뿐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
 잠시 후 훨씬 냉기가 줄었다는 느낌이 들자 그제야 양 손을 마주 비비며 입김을 불어 언 손을 녹이려 하였다. 그러나 아직은 냉기가 워낙 강했기에 좀처럼 곱은 손이 펴지지 않았다.
 대략 반시진 정도 더 시간이 지난 후에야 간신히 손가락을 펼 수 있던 그는 천천히 석실을 둘러보았다. 아까와 같은 추위는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기에 덥다는 느낌마저 받고 있었다.
 가장 먼저 변한 것은 얼굴 부분이 얼음으로 뒤덮여 있던 흑의노인이었다. 얼음이 녹아 내리면서 그의 진면목이 그제야 드러난 것이다. 간사스러워 보였던 흑의노인의 진면목은 전혀 간사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중후한 멋이 풍겨나고 있었던 것이다.
 “대체 왜 이렇게 된 거지?”
 나직이 중얼댄 추혁린은 서탁의 노인에게 다가갔다. 거기엔 노인이 쓰다 만 것으로 보이는 서책이 있었다.
 
 <아아, 우리 오황(五皇)이 한낱 신외지물(身外之物) 때문에 다투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백 년을 이어 온 우정이 깨지는 것을 본 노부는 참담한 기분에 이 글을 남긴다. 저주받은 마물(魔物)인 빙극정령(氷極精靈)이 있으면 이곳 오황동(五皇洞)의 날씨를 바깥 세상처럼 변하게 할 수 있다는 미리신모(迷理神母)의 말을 믿은 것이 잘못이었다.
 우리 오황이 힘을 합쳐 천신만고 끝에 그것을 구해 왔건만 빙극정령과 극염정령(極炎精靈)을 얻을 수만 있다면 영세제일인이 될 것이라는 천외성승(天外聖僧)의 무심한 말 한 마디 때문에 우리의 우정은 깨어졌다.
 수라마신(修羅魔神)의 눈빛이 변했고, 투왕(偸王)의 거동이 수상했다. 게다가 미리신모(迷理神母) 역시 이상야릇한 눈빛을 흘렸다.
 노부 문성학유(文聖學儒)가 제아무리 말리려 하였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뒤늦게 자신의 실언(失言)을 깨달은 천외성승이 나선 것은 최후의 패착(敗着)이었다.
 그의 나섬으로 인해 눈치만 보던 삼 인이 일제히 행동을 개시한 것이다. 아아, 이것으로 우리의 우정이 끝이란 말인가?
 이것이 정녕 백 년에 걸친 돈독한 인연의 끝이란 말인가?
 노부는 아무런 힘이 없기에 구경만 할 수 있을 뿐이다.
 빙극정령이 밖으로 나간다면 천하는 한바탕 피바람이 불 텐데, 그것을 막으려면······.>
 
 문성학유라는 백발백염의 노인이 남긴 글은 이것으로 끝이었다. 먹물을 듬뿍 묻혀 계속 글을 써 내려가려 하였으나 그 순간 얼어붙은 모양이었다.
 “도대체 빙극정령이라는 게 뭐지? 이 글대로라면 그것 하나 때문에 이렇게 된 모양인데······.”
 추혁린은 문성학유가 남긴 글의 의미를 짐작할 수 없었다. 그가 만일 석실 안의 다섯 사람이 한때 무림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했던 인물인지를 알았다면 아마도 놀라서 기절하였을 것이다.
 
 오백여 년 전, 무림은 다시없는 태평기를 맞이하였다.
 정파의 종주인 소림사 방장 천외성승(天外聖僧)은 달마대사(達磨大師) 이후 최고의 경지에 오른 인물이었다.
 소림에 비전되어 오던 칠십이절예를 몽땅 극상승까지 익힌 최초의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는 추측할 수 없는 내공까지 겸비하였기에 정파무림에서는 그에게 천외성승이란 외호를 붙여 주었고, 추앙해 마지않았다.
 한편 마도무림의 종주는 수라마신 형악기(炯顎琦)였다. 불과 삼십의 나이에 천하 마도를 일통한 그는 마도무림의 신이었다.
 백만 마도는 기꺼이 그가 창건한 수라마교(修羅魔敎)에 입문하였고 그의 명이라면 설사 끓는 기름 속일지라도 뛰어들 정도로 절대적인 충성을 바쳤다. 사분오열(四分五裂)되어 있던 중원 마도는 구백여 년 전 마교가 붕괴된 이후 처음으로 일통된 것이다.
 사도무림은 놀랍게도 여인의 몸이었던 미리신모 초옥교(草玉嬌)에 의하여 일통되었다. 온갖 사술(邪術)에 능한 그녀는 천하제일미(天下第一美)라는 칭송을 들었으며, 사도무림의 종주(宗主)답지 않게 미리신모라는 흉악하지 않은 외호를 얻었다.
 그녀의 미모에 홀린 많은 무림인들이 사문을 버리고 스스로 그녀가 창건한 미리만사궁(迷理萬邪宮)에 입문하는 것을 서슴지 않았다. 이에 많은 문파에서 반발하였으나 그곳으로 가 항의할 수 없었다. 미리신모가 그들을 유혹하거나, 그들에게 입문을 권한 적이 단 한 번도 없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사도무림은 미리신모라는 걸출한 종주를 만나는 바람에 늘 정과 마에 시달리던 과거를 잊을 수 있었다. 정파와 마도와 함께 균형을 이루며 중원무림을 정립(鼎立:예전엔 솥의 다리가 셋이었음)시켰던 것이다.
 투왕 하문악(河文岳)은 모래알 같던 하오밀문(下午密門)을 재정립시킨 인물이었다. 신투문(神偸門)의 제자였던 그는 놀라운 투술로 천하의 거의 모든 기진이보(奇珍異寶)를 훔쳤다.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상계에 진출하여 중원상계는 물론 서장(西藏)의 상권(商權)까지 한 손에 거머쥐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막대한 부를 축적한 그는 예전 신투문을 지배하였던 하오밀문을 재건시키는 데 심혈을 기울인 결과 불과 십 년 만에 하오밀문이 재창건된 것이다.
 문성학유 백유흠(白裕欽)는 당시 유림(儒林)의 총수(總帥)였다. 높은 학식과 인품으로 모든 유생들의 존망(尊望)을 한몸에 받은 그는 천자의 스승이기도 하였다.
 그의 말 한 마디에는 적어도 세 가지 이상의 진리가 담겨 있다 하여 수많은 유생들이 마치 굶주린 개 떼처럼 그의 뒤를 졸졸 따라다닌 것은 너무도 유명한 일화(逸話)였다.
 워낙 박학다식하였기에 천하의 모든 학문을 꿰뚫은 그는 천문(天文)과 지리(地理), 그리고 진법(陣法)에 일가(一家)를 이루었다.
 그 중 진법은 전설처럼 전해져 오는 진법의 대가인 귀곡자(鬼哭子)와 견줄 만하다는 평이었다. 따라서 단 한 점의 내공도 없지만 무림인 그 어느 누구도 그를 해할 수 없었다.
 조약돌 세 개면 하늘을 가리고, 흔들리는 갈대 잎으로도 소리를 가뒀으며, 내딛은 발자국으로도 빛을 가린다는 그를 어찌 해하겠는가? 그를 어찌해 보려던 무림인들은 지옥 같은 진세에 갇혀 울부짖다 용서를 빌고서야 간신히 풀려날 수 있었다.
 이들 다섯을 강호에서는 무림오황(武林五皇)이라고 불렀다. 각기 한 방면에서 최고를 이룬 이들이 만난 것은 무림의 평화를 염려하던 천외성승의 정중한 초청장 덕분이었다.
 숭산 소실봉 기슭에 지어진 소림사 방장실에서 회합한 이들은 첫눈에 서로가 서로에게 일문의 종사될 자격이 충분하다는 것을 인정하였다. 하지만 한 산에 두 호랑이는 없는 법!
 호승심 강한 수라마신의 제의로 비무를 한 이들은 수만 초를 겨루어도 결판이 나지 않자 또 한 번 감탄하였다. 누가 누구보다 조금이라도 강하다는 말을 할 수 없을 정도였던 것이다.
 다음 해 같은 장소에서 또다시 회합이 이루어졌고, 그때도 우열(優劣)은 가려지지 않았다. 이렇게 하기를 십 년, 아무리 해도 승부가 나지 않는 동안 이들에게선 묘한 우정이 돋아났다.
 고수는 고수만이 알아보는 법!
 서로를 인정한 이들은 종파를 떠나 친우(親友)가 되었다. 이때 이들의 나이가 공교롭게도 모두 칠십이었다.
 이들의 우정 덕분에 무림이 그토록 태평성대를 누렸던 것이다.
 무림오황은 무림이 좀더 성장하려면 후대를 위해 자신들이 용퇴(勇退)하는 것이 마땅하다며 어디론가 사라졌다.
 이들이 사라진 후 무림인들 사이에서는 이들이 모종의 장소에서 비무를 하다 양패구사하였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났다.
 하여 수많은 무림인들이 이들이 남긴 유품(遺品)을 얻으려고 혈안(血眼)이 되어 돌아다닌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때 이들은 이곳 오황동에서 유유자적한 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그러는 한편 정사마의 무공을 망라한 초극강의 무공을 만들려 하였다.
 오황동은 사시사철 온난한 기후를 지녔기에 변화가 거의 없었다. 이러한 것에 지루함을 느낀 미리신모가 빙극정령을 구해 오면 계절의 변화를 줄 수 있다 하였다.
 만사에 지루함을 느끼기는 모두가 마찬가지였던 터라 북해(北海)의 오지를 넘어 극점(極點)에서 빙극정령 한 조각을 구해 왔다.
 이때 무림오황은 두 마리 빙룡(氷龍)과 악전고투를 벌여야 하였다. 그것들은 빙극정령의 수호영물들이었다.
 두 마리 빙룡 중 한 마리는 빙기를 모아 빙극정령에 보태는 역할을 하였고, 다른 한 마리는 극염기(極炎氣)를 모아 빙기가 더욱 성세를 더하도록 하였다. 검은 것 옆에 있어야 흰 것이 더욱 하얗게 보이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빙극정령을 들고 이곳 오황동에 온 오황은 빙룡의 내단을 복용하고도 무려 십 년 간이나 운기조식을 한 끝에야 간신히 내상을 치료할 수 있었다.
 빙극정령은 천하에서 가장 추운 극점의 빙기가 수십억 년 간에 걸쳐 조금씩 모인 것으로 만지는 순간 전신을 얼어붙게 만들 정도로 차가운 것이었기에 이들은 그것을 만년온옥(萬年溫玉)으로 만든 함에 넣고 그것을 또다시 자염순철(紫?純鐵)로 만든 철궤 속에 넣었다.
 만년온옥만으로는 도저히 그것의 빙기를 가릴 수 없기 때문이었다. 자염순철은 화산의 분화구에서만 구할 수 있는 희귀 광물로 늘 뜨겁고 식는 법이 없는 철이었다. 그러나 이것 역시 빙극정령의 냉기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기에 문성학유가 그 안에 진세를 설치하였다. 그제야 간신히 빙기를 억제할 수 있었다.
 이 일은 만일 오황에게 추측 불허할 만한 내공이 없었고, 서로 협력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오황이 빙궤(氷?)라 이름 붙인 이것을 열면 즉각 엄청난 냉기가 쏟아져 나오는데, 만일 뚜껑을 완전히 열면 사방 백 리가 즉각 엄동설한과 같은 냉기 속에 담겨지게 된다.
 그렇기에 빙궤를 열되 반드시 삼푼 정도를 열어야 한다.
 그래야 흘러나오는 빙기의 양이 줄어 만물이 얼어붙는 불상사가 생기지 않는 것이다.
 한편 빙극정령과 정반대되는 성질을 지닌 극염정령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는 사시사철 열하(熱夏)의 계절인 곳에 있는 사막에서 구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사막 가운데에서도 화산의 분화구 안에만 있는데, 세상에서 가장 뜨거운 열기를 담고 있다 하여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뜨거운 물건이다.
 빙극정령은 온 천하에 단 하나뿐이지만 극염정령은 조건만 맞으면 어디에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유사 이래 이 물건을 찾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가까이 다가간 사람은 즉각 한 줌 재로 변하게 만드는 물건인데, 필요할 리가 있겠는가?
 설사 필요하다 할지라도 열기를 막을 수 없으면 죽어야 하였기에 누구도 이것을 구하려는 마음조차 먹지 않았다.
 막강한 내공을 지닌 오황이 이처럼 얼어죽은 것은 방심 때문이었다. 수라마신과 천외성승이 손속을 나누는 사이 미리신모가 사술로써 이들 둘을 제압하려는 순간 투왕이 빙궤를 집어들다 그만 뚜껑이 삼분지일쯤 열린 것이다.
 이때 참담한 마음으로 글을 남기던 문성학유는 미처 진세를 펼칠 시간이 없었기에 오황이 동시에 얼어죽은 것이다.
 추혁린이 석실에 발을 들여놓고도 얼어죽지 않은 이유는, 오백여 년 간 빙궤의 냉기가 넓게 퍼지면서 처음보다는 냉기가 많이 줄어든 탓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빙극정령의 냉기가 줄어들었느냐 하면 그것은 아니었다. 지금이라도 다시 빙궤의 뚜껑을 열면 즉시 한 덩이 얼음으로 변해 버릴 정도로 가공할 냉기를 여전히 지니고 있는 것이다.
 
 추혁린은 흑의노인의 손에 있는 철궤를 열면 즉각 엄청난 냉기가 쏟아져 나온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그것을 손에 닿지 않는 선반 위에 올려놓았다.
 놀랍게도 그것은 차갑기는커녕 약간 미지근하였다.
 어느새 석실은 냉기가 완전히 가시고 부드러운 훈풍(薰風)이 불고 있었기에 그는 자신의 가죽 의복을 벗은 후 석실을 둘러보려 하였다.
 “후와! 이제야 좀 살 것 같네.”
 이때였다.
 쿠웅― 쿵!
 연속하여 무언가가 바닥에 떨어지는 듯한 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려본 추혁린은 서 있던 노승과 금의를 걸친 노인, 그리고 흑의노인과 여인이 바닥에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아, 얼었던 게 녹아서 균형을 잃으니까 쓰러진 거구나. 쯧쯧, 이럴 줄 알았으면 미리 내려놓는 건데······.”
 추혁린은 그것들이 분명 시신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하나도 겁나지 않는지 다가가서 그들의 시신을 옮기려다 바닥에 떨어진 물건을 발견하였다.
 승려의 곁에는 푸른빛이 감도는 옥으로 만든 불장이 있었다. 바로 소림의 방장 신물인 녹옥불장(綠玉佛杖)이었다. 그리고 일백팔 개의 알로 이루어진 염주가 있었다. 추혁린은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나 그것은 소림의 보배인 백팔보리항마주(百八菩提降魔珠)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참선을 할 때 사념(邪念)이 들지 않도록 하는 효용과 함께 모든 마공과 사공에 대항하여 이것을 지닌 자를 보호하는 효능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작은 서책 한 권이 있었다.
 
 <무상보리항마지(無上菩提降魔指)>
 
 비급을 넘겨보니 거기엔 깨알만한 글씨들과 아울러 손가락 하나를 앞으로 뻗고 있는 각양각색의 자세들이 그려져 있었다.
 “후후···, 이것도 무공비급인 모양이군.”
 금의화복(錦衣華服)을 걸친 노인에게선 하나의 철환(鐵環)과 수라지존경(修羅至尊經)이라는 무공비급을 얻었다.
 철환에는 지옥을 관장하는 아수라의 모습이 섬세한 솜씨로 조각되어 있었고, 안쪽에는 ‘존(尊)’이라는 글자가 파여 있었다. 이것은 바로 수라마교의 지존신물인 지존환(至尊環)이었다.
 천하를 놀라게 할 정도로 우아한 아름다움을 지닌 여인에게선 봉황이 양각되어 있는 지환(指環) 하나와 미리신경(迷理神經)이라는 무공비급 하나가 나왔다. 그리고 혈죽(血竹)으로 만든 피리 하나를 얻었다.
 흑의노인에게선 역시 하오밀경(下午密經)이라는 한 권의 비급과 손바닥만한 옥패 하나가 나왔다. 옥패의 전면에는 놀라운 솜씨로 조각한 사람의 손이 조각되어 있었고, 뒤에는 ‘황(皇)’이라는 글자가 파여 있었다.
 이것이 바로 천하에 산재한 모든 신투들을 비롯한 하오밀문도들의 생사여탈권을 가진 지고무상한 신위를 지닌 영패였다.
 문성학유에게선 두툼한 서책 한 권과 더불어 하나의 양피지를 얻었다. 서책은 두 권을 하나로 묶어 두었는데 전반부에는 진법에 대한 것들을 기술하여 놓았는지 어지러운 점들이 찍혀 있는 그림으로 가득하였고, 뒤에는 무공비급인 듯 여러 자세를 취하고 있는 그림과 더불어 많은 글자들이 쓰여 있었다.
 추혁린은 노인들의 시신을 한 곳에 모아 따로따로 안장한 뒤 각기 아홉 번의 절을 하였다. 왠지 그렇게 해야 할 것만 같은 생각이었기에 세 번이 아닌 아홉 번의 절을 한 것이다.
 예상치 못했던 곳에서 죽을 고비를 넘긴 끝에 천고의 기연을 만났으나 그는 무림오황이 누구인지, 그리고 그들이 남긴 유품들이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 모르기에 담담한 마음으로 시신들을 안장(安葬)시킨 후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석실은 굉장히 넓었다. 사방 백여 장은 족히 될 이곳은 천연적인 동부에 손질을 가한 것이 분명해 보였다. 석실의 가장 바깥쪽에는 일곱 개의 석실이 약간씩 떨어진 채 있었다.
 석실의 문에는 각기 정(正), 사(邪), 마(魔), 잡(雜), 문(文), 식(食), 휴(休)라는 글자가 파여 있었다. 먼저 정(正)이라 쓰인 석실을 열어본 추혁린은 은은한 향 내음을 맡고 이곳이 천외성승의 거처라는 것을 짐작하였다.
 선반에는 수백여 권에 달하는 불경들이 가지런히 꽂혀 있었고, 작은 불상과 각종 불구(佛具)들이 정갈하게 놓여 있었다.
 사(邪)라 쓰여 있는 석실에는 여인들이나 쓰는 동경(銅鏡)과 각종 화장도구 등이 있어 이곳이 미리신녀의 거처임을 알 수 있었다. 마(魔)는 바로 금의화복을 걸쳤던 수라마신의 거처였으며, 잡은 흑의노인인 투왕의 거처였다.
 마지막으로 문성학유의 거처인 문(文)이라 쓰인 석실은 다른 곳에 비하여 엄청나게 넓었다. 높이 일 장에 길이가 오 장에 달하는 서가(書架)들 수백여 개가 끝도 없이 놓여 있는 것을 본 추혁린은 그만 기가 질리고 말았다.
 아무리 적게 잡아도 수십만 권은 족히 될 서책들을 보고 질린 것이다. 그것을 어찌 한 인간이 읽었으랴 싶은 생각도 들었다.
 식(食)이라 쓰인 석실에는 작은 샘이 있었으며, 수백 개는 됨 직한 단지들이 놓여 있었다. 단지 안에는 벽곡단들이 그득하였기에 식량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다 싶어 빙그레 미소지었다.
 마지막으로 휴(休)라 쓰인 곳에는 수욕하기에 알맞은 커다란 웅덩이가 있었다.
 모든 곳을 둘러본 그는 나갈 길이 있는지 알아보기 위하여 자신이 들어왔던 암동으로 향하였다. 그리고는 이틀 만에 돌아왔다.
 나갈 만한 곳은 오직 한 곳뿐이었다. 두 갈래로 갈라진 곳에서 자신이 들어왔던 곳이 아닌 다른 통로를 백여 장 정도 가면 우렁찬 폭포수 소리가 들려왔다.
 그곳은 바로 폭포수 바로 뒤에 뚫려 있는 동혈의 입구였다. 동혈 안에서 폭포수 소리를 듣지 못한 것은 아마도 그것 역시 얼어붙어 있었기에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추혁린은 그 폭포수를 보고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곳은 바로 상동곡의 가장 안쪽에 있던 폭포수 뒤였다.
 상동곡에는 얼어붙은 폭포수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이것인 모양이었다. 세찬 물줄기 때문에 자세히 살피지는 못하였으나 적어도 백여 장은 내려가야 바닥으로 갈 수 있다는 것을 짐작한 그가 힘없이 돌아온 것이다.
 원래 이곳을 벗어나는 방법은 두 가지뿐이었다. 하나는 자신이 떨어져 내렸던 구멍을 거슬러 올라가는 방법이 있었다. 하지만 이 방법은 이제는 실행이 불가능한 방법이었다.
 워낙 어둡기에 이제는 그곳을 발견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빙기가 사라지면서 잔뜩 물을 머금었던 흙들이 무너져 내려 통로가 아예 막혀 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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