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함
뒤로가기버튼 재벌 매니지먼트 [E]

재벌 매니지먼트 1-1권

2017.12.14 조회 10,683 추천 54


 # 프롤로그
 
 열심히 살아왔다.
 마지막 학력고사에 하향 지원하라는 주변의 말에 굴하지 않고 최고의 대학에 합격했고,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이 무너지고 김일성이 죽는 걸 본 후 입대한 군대에서 강릉 침투 사건으로 최악의 군 생활을 보냈다.
 아··· 제대할 때쯤 터진 IMF는 뭔가······.
 1식 4찬에 뭘 줄일 게 있다고 군대 밥을 1식 3찬으로 줄인단 말인가.
 꼬인 세대는 군대에서도 꼬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말이다.
 그나마 국방부 시계는 국가부도사태가 와도 잘 흘러갔고, 1997년 12월 31일 그토록 그리던 전역이 다가왔다.
 하지만 복학한 대학에서 빼앗긴 봄의 훈풍, 다시 고등학교로 돌아간 듯 ‘열공’했다.
 도서관 자리는 새벽에 가야 맡을 수 있을 정도로 치열한 다툼과 심리전이 있었으며, 가까스로 확보한 자리에서 코피 쏟도록 공부했다.
 졸업할 때, 사상 최대의 실업난이라는 게 어떤 건지 몸소 느꼈다.
 이건 정말 아니다 싶어 다른 길을 모색했다.
 때마침 국가에서도 벤처 사업이라는 걸 밀었다. 이에 편승하여 창업했다.
 무데뽀 정신으로 기업을 일구고 드디어 주류 사회에 편입하나 싶었는데 그때 터진 서브 프라임 모기지 사태.
 그 이후 기다려 온 불경기의 끝은 없었다.
 제2의 외환위기, 제2의 금융위기 등등, 매년 반복되는 위기로 눈앞에 닥친 일만 처리하기 급급했다.
 어느새 청춘을 반납하고 일한 대가는 병으로 남았다.
 나름대로 정석을 지키며 좋은 일 한다고 살아왔지만, 아쉬움이 가득했다.
 수술대 위에서 지난날을 그렸더니, 그토록 잘못된 선택을 했으니 여기까지 온 게 아닌가··· 후회만 남는다.
 그래서 그런지 죽음과 맞닿았을 때, 그동안 도와줬던 사람들이 부추기는 말을 던진다.
 ― 이대로 끝낼 순 없습니다!
 ―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서 바로잡으시길!
 ― 다시 오실 날을 기다리겠습니다!
 ― 바로잡을 수 있는 기억을 전달해 드리겠습니다!
 ― 부활하시어 보여 주십시오! 가진 것을 빼앗기지 마십시오!
 수많은 음성이 한꺼번에 귀에 들어왔다가 빠져나가고 있었다.
 죽음 후에 만난 영혼들의 목소리로 파악되었다.
 “하겠다. 다시 하겠다. 다시 하고 싶다. 다시 하게 해 줘! 제발!”
 이렇게 대답을 던진 그 순간!
 정적이 흘렀다.
 마지막으로 들리는 목소리는······.
 
 【재벌 육성 튜토리얼이 시작하였습니다!】
 
 
 # 1회. 영종도 신공항
 
 1
 
 【재벌 육성 튜토리얼이 실행되었습니다.】
 
 감정 없는 기계음을 들린다.
 이제 장면이 펼쳐질 것이다. 꿀꺽, 마른침이 목으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짜증 났지만, 요즘에는 이 시간이 가장 들뜬다.
 오늘은 무슨 장면이 보일까?
 잠시 후, 쉬이이잉! 굉음과 함께 비행기가 뜨고 있었다.
 그러면서 들리는 방송 내용은 ‘인천공항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라는 방송.
 영어, 일본어, 중국어도 나온다.
 그런데 인천에 공항이 생겨?
 아니 정확히는 영종도다. 빠르게 지나가는 뉴스와 신문이 눈과 귀로 입력되었다.
 
 『수도권, 대규모 국제공항 건설』
 『영종도 인근 신공항 연내 계획』
 『최근 인천에 편입된 영종도와 용유도 땅값 한 달 만에 70.4% 치솟아』
 『영종도, 2천 년대 국제 자유 도시로 육성』
 
 이게 참 고역이다. 그 정보를 모두 기억하기가 쉽지 않으니까.
 핵심 정보를 놓치지 않고 다 기억하기 위해서 안간힘을 써 봤다.
 그리고 머릿속으로 꾹꾹 눌러 담았을 때, 드디어 감정 없는 기계음이 다시 들렸다.
 
 【영종도 땅을 확보하십시오.】
 “어떻게?”
 【강만호가 가지고 있을 겁니다. 그가 팔지 않게 하면 됩니다.】
 
 강만호라······.
 이번에도 또 그였다.
 잠시 눈을 감았다. 아니 때가 되어 감긴 것이다. 이는 다시 뜨기 위해서 감긴 거나 마찬가지.
 꿈에서 현실로 빠져나가는 동안······.
 “오빠? 오빠?”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2
 
 눈을 뜬 김승재의 눈에 한 소녀의 얼굴이 보였다.
 소녀의 이름은 강미나.
 누운 채로 그녀의 얼굴을 이렇게 자세히 보니 정말 예쁘다는 생각만 들었다.
 하얀 피부, 도톰한 애교 살, 눈꼬리가 약간 처진 귀여운 강아지상······.
 그녀는 아버지 친구의 딸이다.
 아직 열다섯 소녀라지만, 어떻게 클지 저절로 기대될 정도로 예쁜 얼굴에서 다시 한 번 걱정스러운 음성이 들려왔다.
 “오빠, 괜찮아?”
 “나 혹시 코 골았니?”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한동안 아무 말 안 하고 눈 감고 있었는데··· 어? 잠깐, 오빠 진짜 잔 거였어?”
 그녀는 놀란 눈을 더 크게 뜨고 승재를 바라봤다.
 그는 대답하지 않고 살짝 웃었다.
 이런 일이 처음은 아니다.
 작년 3월부터 본인도 모르게 잠에 빠졌고, 그 때문에 사고를 당할 뻔한 적도 있었으니.
 “기면증이래.”
 “기면증?”
 “응. 나도 모르게 잠에 빠지는 병.”
 거기다 이상한 꿈을 꾼다. 잠에서 깨면 마치 인생을 한 번 더 산 것처럼 삶의 무게가 어깨를 짓누르기도 했다.
 재밌는 건.
 누군가의 인생을 거시적으로 들여다본 첫 번째 꿈에서 ‘재벌 육성 튜토리얼’이라는 말을 들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잘못 들었나 했다. 하지만 그다음부터 꾼 꿈에서 주문한 것을 완수하면, 보상으로 또 다른 미래의 장면을 보여 준다.
 가끔은 누군가의 인생 일부분도 영상으로 재생된다. 꽤 친숙한 느낌에 가끔 자신의 미래가 아닐까 생각해 본 적도 있었다.
 ‘어쩌면··· 진짜 그럴 수도······.’
 어쨌든 이번에 주문한 내용은 영종도 신공항의 부지 확보.
 지금의 김포 공항보다 훨씬 큰 규모의 공항이 그곳에 건설된다는 미래의 장면과 정보를 머릿속에 입력했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가까운 미래부터 시작해서 굉장히 먼 미래까지 그려졌다.
 그래서 옆에 미나가 있는 것도 모르고 잠시 생각에 젖었는데······.
 “그게··· 병이야? 왜 그런 거지?”
 꿈에서 나온 목소리를 되새기던 그의 귀에 미나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다시 흘러들어 왔다.
 “나도 몰라. 어느 날 갑자기 그렇게 됐어.”
 “자주··· 그래?”
 “아니, 다행히 자주는 안 그래.”
 더 나이가 들었다면, 할 수 없는 질문이 그녀의 입에서 나왔다.
 반대로 승재는 고작 열여섯의 나이인데도 자기 기분을 다스리며 그녀가 묻는 말에 순순히 대답해 주었고.
 “언제부터 그랬는데?”
 그 때문에 그녀는 계속 물을 수 있었다.
 “작년.”
 “조심해야겠다······.”
 “맞아, 그래서 안전한 길로만 학교 다니고 있지.”
 세 번째 기면증을 겪고 병원에 갔었다.
 기면증으로 확진받은 그때, 의사는 스트레스가 과하면 발생할 수 있다고 말했다.
 당시 그 말을 듣고 의아해했던 승재.
 단순하게 살았었는지는 몰라도, 어린 그에게 그다지 큰 골칫거리가 발생한 적은 없었다.
 오히려 기면증을 한 차례 겪을 때마다 점점 생각이 많아지니, 원인과 결과가 바뀐 게 아닌가 싶었다.
 옛 상념은 여기까지.
 밖에서 미나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나야, 가자!”
 그의 이름은 강만호.
 작년 이후에 승재의 집을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미나와 함께 밖으로 나가니, 술 한잔 걸친 그와 아버지가 눈에 보였다.
 강만호는 방에서 나오는 승재를 보며 미소를 보였다.
 “승재야, 오늘은 뭐··· 없니?”
 “에헤이, 오늘도냐? 오늘도야?”
 승재의 아버지, 김정주는 강만호를 살짝 비꼬았다.
 작년에 적극적인 투자로 주식에서 큰 이득을 남긴 강만호를 내심 부러운 눈으로 보면서.
 원인은 승재였다.
 아직 여물지도 않은 나이였지만, 승재는 꽤 논리적으로 주식 종목을 분석했고, 그것에 넘어가서 강만호가 투자한 것이었는데, 실제 크게 이익을 남겼다.
 당시 김정주에게는 결단성이 없었다.
 그래서 정작 투자 시기를 놓친 것이건만······.
 “왜 이래? 내가 그래서 승재 대학까지 학비 댄다고 했잖아.”
 “하아··· 됐다, 됐어. 우리가 그지냐? 등록금을 왜 너한테 받아? 괜히 애··· 무당 만들지 말고 빨리 가라.”
 말은 그렇게 하지만, 김정주는 역시나 배 아픈 표정을 여실히 드러냈다.
 그 와중에 강만호는 승재에게 찡긋 눈짓했다.
 밖에서 보자는 의미였다.
 승재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이상하게 꿈을 꾼 후에 가장 자주 만나는 사람이 바로 강만호다.
 오늘도 좀 믿기 힘든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은데, 과연 또 한 번 그가 신뢰해 줄까?
 
 3
 
 강화도의 밤은 추웠다.
 특히, 1월의 바람이 세차게 불어오기에 더더욱 그랬다.
 바람을 맞는 딸아이를 아랑곳하지 않고, 강만호는 다시 한 번 승재에게 물었다.
 “흠··· 영종도에 신공항 가능성이 있다고?”
 현재 그의 관심사는 주식이었지만, 승재의 입에서는 엉뚱한 내용이 흘러나와 그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더구나 그는 영종도와 인천 부근에 땅까지 있었다.
 돈도 안 된다고 생각한 그곳을 주식 투자하려고 팔아 치울까, 최근 고민하고 있었는데······.
 “그냥 느낌이에요.”
 “느낌이라니? 항상 느낌으로 말하던 녀석이 아니잖아. 그러지 말고 네 생각을 말해줘 봐.”
 어렸을 때 말고 작년에 다시 승재를 만난 강만호는 처음에는 나이답지 않은 큰 키에 놀랐고, 그 나이에도 논리 정연하게 자기주장을 관철하는 언변에 또 한 번 놀랐다.
 인천에서 사업에 실패한 데다가, 아버지가 세상을 뜨는 바람에 고향인 강화도로 다시 온 강만호.
 언젠가 친구 김정주를 만나 집에서 술 한잔 기울일 때, 당돌하게도 승재 이 녀석은 주식을 입에 담고 있었다.
 ― 만약 제 말대로 횡재하신다면, 저에게 기념으로 대우 자동차 주식 한 주만 주십시오.
 당시엔 녀석의 말을 그냥 흘려들었다.
 하지만 막상 투자할 시점이 되자, 나름대로 논리 정연하게 자동차 회사의 주식을 사 놓아야 한다고 승재가 말한 것을 흘려들을 수가 없었다.
 ― 한국의 자동차 시장이 양적으로 팽창할 것 같지 않나요?
 당시 열다섯 살인 소년의 입에서 나올 이야기라고는 믿기지 않았다.
 선택은 자유였다. 김정주는 주식을 도박이라 여기며 아들의 말을 무시했고, 강만호는 ‘에라, 모르겠다.’라고 말하며, 아버지의 유산 중 일부를 현금화해서 자동차 3사와 관련 주에 투자했다.
 김정주와 그의 차이는 배포였다.
 그리고 결과는 대박으로 나타났다.
 일 년 사이 대한민국의 자동차 등록 대수가 100만 대가 넘은 팽창기가 도래했다.
 강만호는 크게 이득을 남겼고, 여전히 자동차 3사의 주식을 보유한 상태였다.
 찰나의 옛 생각은 누군가의 목소리로 금세 깨졌다.
 “아빠, 추워··· 가자.”
 안타깝게도 딸아이가 재촉하고 있었다.
 그걸 들었는데도 녀석은 같은 말은 반복한다.
 “어쨌든, 정부에서 신공항 부지 발표를 앞두고 있잖아요. 아직 그곳 땅값이 비싸지 않으니 약간 확보해 두셔도 괜찮을 거 같아요.”
 “내가 땅은 가지고 있는데······.”
 “그럼 더 잘됐네요. 그거 파시지 마시고 가지고 계시다가, 이번에 발표하면 되니까요.”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다. 만약 여유 자금이 있다면, 더 땅을 사라고 권유하고 싶지만, 거기까지는 강만호에게 더 리스크를 감수하라는 의미라서, 이 정도가 딱 좋다.
 역시나 강만호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이 말을 던졌다.
 “아니, 그래도··· 수도권 신공항이잖아. 영종도가 무슨 수도권이니? 거기 땅값··· 사실 똥값이야.”
 “그러니까 더 크게 벌 수 있죠. 그리고 사람 많은 곳은 오히려 소음 공해 때문에 공항을 더 건설할 수 없을 거예요. 김포 공항을 더 확장 안 하고, 새 공항을 만들겠다는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이잖아요. 거기다 서해안이라면, 나중에 중공(中共 : 중국 공산당)하고 어떻게 될지도 모르니.”
 이 또한 모를 소리다.
 인구 많고 경제 발전이 낙후된 그 공산국가와 뭐가 어떻게 돌아갈 것 같다는 소리인지.
 딸아이의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가는 강만호는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도 승재의 말을 무시하기는 꺼림칙해서, 며칠 후 인천에 있던 복덕방 주인에게 땅에 관심이 보이는 사람이 있다는 연락을 받았지만, 그는 잠시 놔두자고 했다.
 이게 현명한 선택이 될 줄은 그 역시 몰랐다.
 하지만 1월 26일 TV 앞에서 뉴스를 보던 그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 오늘 교통부에서 수도권 신공항 후보지를 발표했습니다. 시흥과 화성, 그리고 영종도를······.
 
 따르르르르릉
 그때 전화가 울렸다.
 강만호는 숨을 죽이고 전화를 받았다.
 승재였다.
 (제 말이 맞죠?)
 목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승재가 선한 미소와 함께 즐거워하고 있는 표정을 그리고 있다는 것을.
 
 
 # 2회. 스티브 잡스와 빌 게이츠
 
 1
 
 또 눈이 감겼다. 정말 자기 맘대로다.
 어떨 땐 그냥 장면만 보여 준다.
 규칙성이라도 있으면, 미리 대비하고 안전한 곳에 있을 텐데.
 
 【재벌 육성 튜토리얼이 실행되었습니다.】
 
 다행히 이번에는 바깥이 아니었다.
 책을 읽던 중이었으니까, 엎어져 자겠지.
 오늘은 또 뭘까?
 기다림은 금세, 바로 눈앞에 미래가 그려진다.
 몇 년 전까지 집에 있었던 흑백텔레비전 같은 영상이다.
 아니 파란색이다. 주가지수가 떨어지고 있었다. 이건 예상했던 바다. 현재 너무 많이 올라, 거품이 아닌가 싶었으니까.
 다음 영상은 아파트가 세워진다.
 내가 어떻게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심 시티 게임에서 건물 올라가듯이 빠르게 세워진다. 아주 많이.
 정말 많이···, 그리고 빨리······.
 여긴 어디? 분당 신도시다.
 이 또한 어떻게 알았느냐고?
 한 아파트에 들어오면서 주변 환경을 보고 알았다.
 신기하게도 그냥 알게 되었다.
 마치 지금 보이는 장면의 인생이 주인공인 내 위주로 흘러갔기에 장면을 보면 기억 세포가 반응한다고나 할까?
 나는 그 아파트에 들어가 903호 앞에 섰다.
 “휴우······.”
 낮은 한숨 한 번 내쉬고.
 딩동, 딩동! 벨을 누르자 그가 나왔다.
 현실의 나는 놀라겠지만, 꿈속의 나는 천연덕스럽게 그를 불렀다.
 “장인어른······.”
 장인어른? 그래, 맞아.
 입술이 두껍고 볼살이 붙은 그가 나의 장인어른이었어.
 후덕한 인상의 강만호에게 괜히 가족 같은 친숙함을 느낀 게 아니었단 말이지.
 현실의 나는 외칠 거다.
 이럴 수가! 그럼 미나랑 결혼한다는 건가?
 그럼 그 결혼은 행복할까?
 잘 모르겠다. 일단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은······.
 “죄송합니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내가 미안하지. 자네가 더 힘들 거 아니야··· 어쨌든 빨리 데리고 가.”
 “네······.”
 “녀석에겐··· 다음부터 와도 문 안 열어 준다고 했어.”
 “네······.”
 “그래··· 그럼··· 들어와······.”
 책망하는 목소리는 전혀 없었다. 사실 그는 그런 사람이다.
 배포와 인덕을 갖춘.
 그래서 잘나가셨지. 사업을 시작하고 쭉쭉.
 아, 집으로 들어가면서 미나가 어떻게 성장했는지 보고 싶다.
 어렸을 때 미인이 커서 꼭 예쁘다는 법은 없던데.
 봐야 기억나는 내 기억 세포 때문에 그녀의 얼굴은 전혀 떠오르지 않는다.
 그래서 빨리 보고 싶다. 정말 보고 싶다.
 그런데······.
 
 【주식을 정리하십시오.】
 “뭐야? 더 보고 싶어.”
 【주식을 정리하십시오.】
 “제기랄, 역시 안 보여 준다는 거지?”
 【주식을 정리하십시오.】
 “알았어! 내 거 말고 아저씨 주식 말이지?”
 【그렇습니다. 주식을 정리하십시오.】
 
 느낌이 온다. 이게 오늘 꿈에서 나온 지령이다. 물론 꼭 실행하지 않아도 된다. 그럼 아마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는 걸 볼 수 있으니.
 이미 몇 차례 해 봤다. 일부러 ‘목소리’의 뜻을 거부했더니, 다른 주문을 내렸다.
 문제는 그게 좋은 방향인지 알 수 없다는 점이다.
 괜히 더 꺼림칙했다.
 그 이후로 ‘목소리’의 주문에 따르려고 애썼다.
 이제 눈이 감긴다.
 늘 그렇지만, 다시 현실로 돌아오기 위한 과정이 되풀이된다.
 
 2
 
 눈을 떴더니 조금 전 보던 엘빈 토플러의 『제3의 물결』의 내용이 시야에 가득 들어왔다.
 아니 글자만 읽혔고, 승재의 머릿속에서는 몇 가지 당혹스러운 정보가 떠다니고 있었다.
 ‘아저씨가 장인어른? 그럼 나는······.’
 강만호에게는 외동딸 미나 하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먼 미래에 승재는 미나와 부부가 된다는 뜻?
 마침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승재야? 승재야? 네가 제일 좋아하는 아저씨 오셨다!”
 아버지의 목소리가 방문 밖에서 들려왔다.
 승재의 아버지는 등대지기다.
 한 달에 약 일주일 정도만 집에 오셔서 머물고 가신다.
 아버지가 집에 머무는 기간에는 꼭 강만호도 찾아온다.
 오늘이 바로 그때인가 보다.
 밖으로 나간 승재는 예전과 다른 눈빛으로 강만호를 보았다.
 “오셨어요?”
 “그래, 네 아버지 핑계 대고 사실 너 보러 왔다.”
 후덕한 웃음을 보이는 그가 참 정겹다.
 그래서 오늘은 아버지의 옆이 아닌 그의 옆에 앉았다.
 강만호도 그게 좋은지 잠시 후 승재에게 소주잔을 주며 이렇게 말했다.
 “승재야, 너도 한잔할래?”
 그때 안주를 내오던 승재의 어머니 최수진이 눈을 살짝 흘겼다.
 “아이고, 애한테··· 왜 그러실까? 그러지 마세요.”
 “그런가요? 제수씨가 하지 말라면, 따라야죠. 하하하.”
 호탕한 웃음소리를 낸 후 그가 입에 들었던 술잔을 털어 냈다.
 그러고 나서 승재에게 눈짓했다.
 이따가 보자는 의미라는 걸 모를 리 없었다.
 잠시 후 밖에서 그는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영종도가 신공항 후보지로 되었더구나. 안 팔길 정말 잘했어. 오히려 복덕방에 전화해서 땅을 좀 더 알아보고 있단다. 아무튼··· 고맙다.”
 승재는 씨익 웃었다.
 “어차피 개발되려면 한참의 시간이 흘러야 할 겁니다.”
 “그렇겠지. 그런데 팔았다면, 그 기다리는 것도 하지 못했을 거 아니냐?”
 그의 목소리에서 진한 고마움을 느낀다.
 뿌듯했다. 그에게 도움을 받기만 했던 느낌을 꿈속 장면에서 포착할 수 있었는데, 반대로 승재가 그에게 도움을 줄 수 있었으니.
 “저··· 아저씨?”
 “그래? 왜?”
 “아저씨는 저를 왜 믿으세요?”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그러나 강만호는 질문의 의도를 파악했다.
 그래서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이렇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처음 네가 투자하라는 이야기를 듣고 막상 주식 투자하려고 들어갔을 때, 그냥 하기는 내심 꺼려지는 점이 있더라. 늘 그렇지만, 이런 때는 두 가지가 머릿속에 맴돌거든. 그냥 잃는 셈 치고 버려? 아니면, 더 시간을 두고 조사해 볼까?”
 “······.”
 “곰곰이 생각해 본 결과, 둘 다 문제가 있었어. 돈을 버릴 셈 치고 투자하는 것만큼 멍청한 놈도 되기 싫었고, 투자 시기를 놓쳐서 막상 다 오른 다음에 땅을 치는 바보도 되기 싫었다. 그래서 투자하면서 조사를 병행했지.”
 왜 믿느냐는 질문에 충분한 답변을 한 것 같았다.
 그리고 사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 시기 강만호는 거의 서울 증권 거래소에서 살다시피 했다.
 그의 말대로 시기를 놓쳐서는 안 되니, 들어오는 정보로 즉각적 투자를 행했던 것이다.
 물론 승재 역시 그에게 정확한 정보 전달을 위해 계속 노력해 왔다.
 꿈에서 본 장면의 관련 정보를 모으기 위해서 책, 신문, 잡지, 뉴스 등을 읽고 시청하는 데 시간을 매우 많이 투자하곤 했으니까.
 하지만 결정적으로 꿈 자체가 믿을 만한 정보를 준다.
 그래서 말했다.
 “그럼 한 가지 더 말씀드려야 할 거 같아요.”
 “그래? 뭔데?”
 흥분이 잔뜩 새겨진 목소리.
 이번에 승재가 뭘 알려 줄까?
 그런데 승재의 다음 말을 듣고,
 “슬슬 주식 시장을 관망하면서 정리하셔야 하지 않을까요?”
 그는 의문스러워했다.
 “주식을?”
 “네. 곧 주가지수 1,000을 넘어가면, 조정을 받는 시기가 꽤 길어질 것 같아요. 아무래도 차익 실현을 할 사람과 더 올라가기 힘들다는 경계 심리가 나온다고 봐야 해요.”
 늘 느끼지만, 소년이 내뱉을 용어가 아니라는 생각에 강만호는 숨을 들이마셨다.
 일단 승재가 이야기한 부분은 그가 생각한 바와 비슷했다.
 그래서 보유한 주식을 정말 정리해야 할지 갑자기 고민이 생기던 차에 확실히 결정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아무리 몇 번 승재의 말이 정확하게 들어맞았다고 해도, 계속 오르는 장에서 주식을 정리하기란 쉬운 결정이 아니었는데······.
 “그럼 주식을 판 돈으로 뭘 하는 게 좋을까? 인천이나 영종도 땅을 좀 더 확보하려고는 하지만, 교통부에서 신공항 발표한 이후로 꽤 오르고 있어서······.”
 “아저씨······.”
 “응?”
 승재가 자기를 부르는 소리에 강만호는 잠시 멍했다.
 내가 지금 애한테 너무 의존하는 것 아닌지 생각도 들었다.
 그때 이어지는 승재의 목소리.
 “아저씨는 꿈이··· 그러니까 어떤 꿈을 가지고 계세요?”
 “······.”
 반대로 물어야 하지 않나? 그가 승재에게 꿈이 뭐냐고······.
 하지만 강만호는 승재를 그저 소년으로 대하지 못했다.
 단지 몇 차례 소년에게 조언을 얻었기 때문이 아니라, 알게 모르게 강력한 인연의 끈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솔직히 나··· 사업하고 싶다. 한 번 실패해서 더 그럴 수도 있겠지만, 나도 대현이나 대우의 회장처럼 바닥에서 시작해서 큰 회사를 만들어 가고 싶어.”
 “그럼··· 서울로 가셔야겠네요.”
 “그렇지··· 서울로··· 언젠가는 갈 생각이었다.”
 그 말을 듣고 묘한 표정으로 강만호를 바라보는 승재.
 그 역시 언젠가 서울에 가고 싶었다.
 그러나 등대지기인 아버지가 직업을 포기할 생각이 없으시니, 성인이 될 때까지 이곳을 벗어나기는 요원할 것 같았다.
 그렇다면 미래를 ‘내식’대로 준비하는 것은 어떨까?
 그동안 앞에 서 있는 강만호에게 많은 조언을 해 왔으니, 꿈대로 미래가 이어진다는 걸 확신하게 된 승재는 항상 ‘공짜 조언’만 할 수는 없었다.
 “분당과 일산 신도시가 올해 말이나 내년에 분양을 시작한다는군요.”
 아까 꾼 꿈에 힌트가 있었다.
 분당 신도시. 어마어마하게 지어지는 아파트들.
 승재는 그 장면을 보며 눈치챘다.
 몇 차례 신문에서 접하기도 했고······.
 “응? 분당? 일산?”
 “아마 상당히 집값이 올라갈 거예요. 주식을 판 돈은 거기에 살짝 묻어 두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요?”
 다시 고민을 안겨 주는 승재의 말이다.
 정부가 대규모 주택 도시를 성남과 고양 등에 계획한다는 뉴스를 그는 신문에서 읽었지만, 몇 년 전 과천처럼 미분양이 속출할 거라는 예상이 많았다.
 승재의 말은 주식을 판 돈으로 부동산을 하라는 이야기였다.
 거기다 승재는 당돌하게도 한마디 덧붙이기까지 했다.
 “그리고 만약··· 나중에 차익이 많이 남는다면, 저도 같이 신도시로 이사 갔으면 좋겠습니다. 옆에서 계속 아저씨의 꿈을 돕고 싶으니까요.”
 “······.”
 “즉··· 같은 꿈을 꾸고 싶다는 말입니다.”
 같은 꿈을 꾸고 싶다!
 참 신기하다.
 왜 그럴까? 소년의 그 말을 듣는 순간 강만호의 가슴이 몹시도 부풀어 올랐다.
 “같은 꿈이라··· 같은 꿈··· 그럼 좋다. 네 꿈은 혹시 뭐지?”
 소년은 그 질문을 받고 아까보다 더 진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말 그대로 같은 꿈이요. 대현이나 대우의 회장처럼 바닥에서 시작해서 큰 회사를 만들어 가고 싶다고 하셨죠?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마찬가지이기는 하지만 약간 달랐다.
 소년의 머리에 떠오르는 얼굴은······.
 언젠가 꿈속 먼 미래에서 봤던 빌 게이츠와 스티브 잡스였으니까.
 
 
 # 3회. 미래의 내 아내
 
 1
 
 지난번엔 나오지 않더니, 이번에는 목소리가 등장했다.
 
 【재벌 육성 튜토리얼이 시작된 지 1년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부터 보상으로 원하는 미래의 장면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
 
 나쁘지 않다. 아니 좋다. 벌써 무엇을 보고 싶다고 말해야 하는지 고민이 생겼다.
 현재 제일 궁금한 것은 미나였다.
 진짜 나는 그녀와 결혼한 것인가?
 아니다. 잠시 생각해 보자. 저번에 거의 확실한 사실이 드러났는데, 굳이 미나와의 결혼 생활을 보여 달라고 할 필요는 없다.
 추론할 수 있는 건 아끼고, 차라리 새로운 걸 보여 달라고 하면 좋겠다.
 
 “분당 신도시 아파트가 얼마나 가격이 오르는지 알고 싶어.”
 【바로 보여드리겠습니다.】
 
 차라라라락.
 두꺼운 파일의 낱장이 하나하나 넘어가듯이, 내 눈에 분당 신도시 아파트 부동산 가격 변화가 보였다.
 매일, 매달, 매년 변화하는 평당 가격.
 다 외우기 힘들었기에, 필요한 부분만 발췌해서 연 단위로 머릿속에 담으려고 애썼다.
 1991년 입주부터, 1992년, 1993년, 1994······, 2007년······, 2017년······.
 
 “응? 2017년이 끝이야?”
 【그 이상은 보여 드릴 수 없습니다.】
 “왜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나는 ‘목소리’가 부탁해 봤자 들어주는 존재가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차라리 아까 봤던 장면을 머릿속에 담으려고 더 노력하는 게 낫겠다 싶었다.
 꿈에서 깨면 상당 부분 기억에서 소실되니 말이다.
 순간 또 한 번 들려오는 목소리.
 
 【강만호가 분당 신도시 설명회에 가도록 해 주십시오.】
 “응? 뭐? 아니, 그럼 굳이 내가 보여 달라고 안 해도, 분당 신도시에 관련한······.”
 
 허탈했다. 어차피 분당 신도시 관련 일이 다음에 해야 할 일이었다면, 그냥 다른 장면을 보여 달라고 할걸.
 하지만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는 법.
 이제 때가 되었다. 눈이 감긴다······.
 
 2
 
 이번 주문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뭔가 지난번 서로의 꿈을 확인한 후에, 승재는 강만호가 자기를 어린 소년이 아닌 미래의 동반자 정도로 보고 있다는 걸 알았다고나 할까?
 물론 그렇다고 그가 맹목적으로 승재의 의견만을 받아들이기만 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언론 말고도 자체적으로 소식통을 수집했고, 그 결과 영종도 돌아가는 방향이 매우 긍정적이라는 걸 알았기에 또 한 번 승재의 전망을 머릿속에 입력한 것일 뿐.
 확신이 들면 행동이 빠른 게 그의 장점이었다.
 그는 주식을 정리하기 시작하면서 인천과 영종도 땅을 구매했다.
 그 상황에서 승재가 분당 신도시 설명회에 가 보라고 했으니, 먹히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 봄 방학은 쏜살같이 흘러가고, 드디어 개학 날이 되었다.
 등교하기 위해서 문을 나서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오빠?”
 미나였다.
 “웬일이야?”
 “오빠랑 같이 가려고.”
 “응?”
 “앞으로 계속. 혹시 모르잖아. 오빠··· 그 병 때문에······.”
 조금 컸다는 걸까? 미나는 조심스럽게 승재의 병을 언급한다.
 물론 언제 어디서 기면증이 발병할지 모르는 일이다.
 강화도에 아직 차가 많지는 않지만, 최근 몇 달 사이 늘기는 했고, 위험 요소 또한 급증한 셈이었다.
 그렇지만 늘 이렇게 데리러 와 준다는 것은 몹시 부담스러운 일.
 승재는 재빨리 입을 열었다.
 “괜찮아.”
 “아니야. 내가 같이 가 줄게. 그리고 아빠한테 오빠 그 병 이야기했더니, 나한테 꼭 같이 다니라고 했어.”
 “······.”
 승재는 할 말이 없었다.
 아직 순수한 그녀가 선한 의지로 그를 보호하기 위해 왔을 수도 있겠지만, 강만호가 더 권했을 가능성이 컸다는 생각에 웃음만 나왔다.
 ‘이게 인연인가······.’
 미래를 본다는 게 꼭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걸 느꼈다.
 선택의 기회가 틀어박혀 있었다. 결국, 꿈에서 본 장면대로라면, 승재는 미나와 결혼하는 시나리오대로 흘러간다.
 이렇게 재미없을 수가······.
 차라리 다른 재밌는 생각을 하는 게 낫겠다.
 그래서 승재는 잠시 수도권 신도시 계획 뉴스를 떠올렸다.
 먹고사는 게 힘든 사람은 그저 가볍게 넘길 소식이겠지만, 승재에게 돈이 있다면 반드시 분양을 받고 싶은 뉴스였다.
 그리고 분양 뉴스를 떠올리다가 생각의 흐름은 다시 꿈에서 봤던 분당 신도시 아파트로, 마지막에는 그 아파트에 살게 되는 강만호에게 이르렀다.
 이러다 보니 옆에서 말없이 걷던 미나와 다시 연결될 수밖에 없었다.
 ‘제길······.’
 공교롭게도 그때 미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년에는 어떻게 하지?”
 “응?”
 “내년에는 오빠가 고등학교 가잖아. 누구랑 같이 다니지?”
 그 생각하느라 말을 안 했었구나.
 승재는 곧 자기를 걱정해 주는 그녀의 마음에 고마움을 느꼈다.
 “혹시 오빠 친구들은 알아?”
 “아니.”
 쉽게 꺼낼 이야기가 아니었다. 다행히 학교에서는 아직 발병한 적은 없었고.
 “그렇구나. 그럼 빨리 친한 친구한테 털어놓는 게 좋지 않을까? 오빠가··· 현수 오빠랑 가장 친하잖아.”
 “그렇기는 한데······.”
 아직 어려서 그런가? 아니면 단순해서?
 이런 병을 누군가에게 쉽게 털어놓을 수 없다는 점을 미나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냥 누군가가 나에게 많이 신경 쓰는 건 싫어.”
 순간, 우뚝.
 그 말을 듣고 가던 발길을 멈춘 미나는 승재를 바라봤다.
 그녀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미안해··· 오빠······.”
 “응?”
 “생각해 보니, 내가 그 병에··· 걸렸다면, 내 친구들한테 이야기를 못 했을 거 같아. 아유··· 바보, 그것도 모르고 오빠한테······.”
 그녀가 잠시 주먹으로 자기 머리를 때리는 걸 보고 승재는 웃었다.
 생각해 보니 그녀가 어린 게 아니라, 그가 과도하게 생각이 많은 것이다.
 그녀처럼 생각을 단순화했다면, 현수에게 털어놓는 건 어렵지 않았을 텐데······.
 
 3
 
 뜻밖에 현수에게 털어놓을 수 있었던 시기는 빨리 왔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거라 예상했지만, 몇 주 후에 드디어 학교에서 발병한 것이었다.
 체육 시간 전, 선생님이 나오시기 전에 갑자기 쓰러진 승재를 현수가 양호실로 업고 갔다.
 그러다가······.
 “현수야.”
 “엉? 너 괜찮아?”
 “응. 괜찮아. 아무렇지도 않아. 그러니까 내려 주라. 쪽팔린다.”
 양호실까지 가기 전에 현수의 등에서 깬 승재는 힘을 주며 그의 등에서 내렸다.
 그래도 고마웠다.
 사실 가끔 ‘목소리’가 등장하지 않는 꿈속에서 현수를 볼 수 있었다.
 꿈에서의 그는 많은 것을 털어놓을 수 있는 평생의 친구였다.
 “괜찮아. 잠깐만 내리자.”
 “진짜 괜찮은 거야?”
 “어차피 양호 선생님, 이따가 오후에 오시잖아.”
 “그렇지······.”
 작은 규모의 중학교라서 양호 선생님도 파견 근무로 일주일에 세 번, 그것도 오후에만 온다.
 따라서 지금 양호실에 들어가 봤자 아무 소용이 없었다.
 대신 승재는 현수에게 자기의 병을 털어놓았다.
 “기면증? 그런 병이 있어?”
 “응. 그러니까··· 가끔 내가 이렇게 기절한 것처럼 보여도, 너무 걱정은 하지 마.”
 이제 와 생각해 보니 현수에게 이 말을 털어놓고 싶지 않았던 근본적 이유는 자격지심이었다.
 남과 다르다는 것은 또래에게 감추고 싶은 비밀이었다.
 현수는 안됐다는 눈으로 승재를 바라보며 말했다.
 “새끼야, 진작 이야기하지. 내일 아침부터 내가 너네 집에 갈게.”
 “그럴 필요는······.”
 “됐어, 엉아가 갈 테니까, 걱정 붙들어 매라.”
 승재는 더 거절하지 않았다.
 왠지 모르지만, 매일 아침 오는 미나가 더 불편했기 때문이다.
 당장 오늘 수업이 끝나고 말해야겠다고 마음먹었는데, 뜻밖에 미나는 현수에게 이런 제안을 건넸다.
 “그럼 등교할 때는 내가 할 거니까, 하교할 때는 오빠가 해라.”
 “그럴까? 사실 내가 늦잠을 잘 자서··· 살짝 걱정했는데, 잘됐네.”
 자발적으로 둘이 분담하는 걸 보며 승재는 쓰게 웃었다.
 마음 편하게 현수가 승재를 전담했으면 좋겠는데, 그걸 도움 받는 사람이 표현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것보다 이번 꿈속에서 드디어 승재는 미나를 볼 수 있었다.
 둘은 결혼했다.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원하지 않은 임신으로 인해 부부가 되었고, 부부 생활도 원만하지 못했다.
 이쯤에서 승재는 잠시 고민해 봤다.
 ‘이게 과연 내 미래를 보여 주는 게 맞을까?’
 미래란 운명과 직결되어 있었다.
 그걸 따르지 않으면, 다른 방향으로 가게 될 게 뻔하다.
 미나와 부부가 되기 싫다면, 일정하게 거리를 두고 미래의 운명을 바꿔 버릴 수도 있다.
 따라서 꿈속에서 보이는 미래의 장면들에 강한 의구심이 생겼다.
 이것은 반발 심리로 돌변했다.
 즉, 굳이 미나와 결혼할 필요는 없다.
 승재를 믿어 주는 유일한 어른인 강만호와 특별한 인연을 이어 가는 문제가 있었으나, 꼭 미나와 부부의 연을 맺는 게 해답은 아니라고 결론을 맺었다.
 ‘그나저나··· 꿈속에서··· 나는 참 못난 남편이었구나.’
 승재의 눈빛에 회한이 스며든다.
 그리고 꿈에서 봤던 미래를 만들지 않겠다는 각오가 새겨진다.
 
 
 # 4회. 라면이 주는 위화감
 
 1
 
 그렇게 한 달쯤 미나와 현수와 함께 평화롭게 등하교가 이루어졌다.
 어느 날 집에서 전화벨이 울리더니,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승재야··· 전화 받아.”
 “네?”
 “만호 아저씨, 너 바꿔 달란다.”
 어느 순간 강만호와 친하게 지냈던 것을 어머니는 알았기에 아무렇지도 않게 승재에게 전화기를 넘겼다.
 꼬불꼬불한 선을 길게 늘이면서 수화기를 귀에 가져다 댄 승재.
 “네, 전화 받았습니다.”
 대답하자마자 곧바로 강만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 분당이다.)
 “아··· 네······.”
 분당이라는 말에 승재는 지난번 그에게 말했던 것이 떠올랐다.
 설명회에 한 번 방문하는 것이 좋겠다는 권유.
 (정말 사람들 많이 모였더구나. 그리고 분양 계획은 내년으로 확정되었고······.)
 원래 계획보다 조금 늦춰진다는 뉴스는 승재 역시 신문으로 읽었다.
 강만호는 그걸 알려 주려고 전화한 것일까?
 (여기 와서 느꼈다. 어쩌면 네 말대로 분양만 받는다면, 엄청나게 돈이 될 거라는 사실을. 그래서 나도 차명을 동원해서라도 몇 채 사들이려고 한다. 그리고 또··· 이건 네가 절대 거절하면 안 되는 건데··· 앞으로 네가 나를 계속 도와준다면, 내가 너한테 그중 한 채를 선물로 주마.)
 “······!”
 어렵게 결심한 듯했다. 하긴 아직 소년에 불과한 승재에게 물질적인 보상을 한다는 건 쉽지 않았으리라.
 어쨌든 통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승재는 자기도 모르게 가슴 속에 꿈틀대는 욕심이 생겨났다.
 그는 곧바로 목소리에 힘을 실었다.
 “도와 드릴게요.”
 
 2
 
 공중전화 박스에서 나온 강만호는 잠시 가슴을 진정시켰다.
 아까 설명회 현장의 분위기를 보며 들뜬 마음으로 혹시 잘못된 판단을 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봤다.
 그럴 수도 있었다. 아까 일부 사람들이 서로 대화하는 것도 듣긴 했다.
 ― 너무 많이 짓는 거 아니야?
 ― 그러게, 아무리 그래도 사람들이 쉽게 서울을 떠나겠어?
 틀린 말이 아니다.
 점점 서울 집중 현상으로 인해서, 아무리 가까운 경기도라도 서울 사람들이 살던 곳을 쉽게 떠나지 않을 확률이 높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자꾸 감이 좋아질까?
 이런 감 때문에 잘못된 선택을 했고, 그로 인해서 사업에 실패하는 쓴맛을 보았는데 말이다.
 ‘아니야, 그건 순수하게 내 감에만 의존한 거고, 이번 건··· 그 녀석이 조언한 거지. 지금까지 그 녀석이 조언한 거치고 손해 본 건 없었어.’
 나이와 경험을 떠나서, 어렸을 때부터 경제 감각의 천재성을 보여 주는 승재.
 반드시 품고 가야 할 인재라는 것을 또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녀석에게 아파트를 준다는 것은 일종의 투자라고 생각했다.
 우연히 중첩되어 그로 인해 번 돈만 해도 아파트 하나 값 이상은 충분히 나온다고 봤으니까.
 특히, 지난번에 보유한 주식을 매각하면서 또 한 번 소름이 끼쳤다.
 친구와 만나기 위해서 마포로 이동한 후, 신문을 보았을 때 발견했다.
 드디어 자동차 주를 포함해서 본격적으로 주식 시장이 조정을 받기 시작했다는 것을.
 ‘이 녀석··· 도대체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어차피 천재란 나이와 상관없이 빛을 발한다.
 승재는 학교에서도 전교 1등을 단 한 번 놓친 적이 없었다.
 시골 벽지 학교라지만, 그를 가르치는 선생들도 수재라는 말을 몇 차례 했다고 김정주에게 들었다.
 ‘그러고 보니, 그 친구가 올 때가 됐어.’
 이제는 김정주가 집에 오는 날이 더 기다려진다.
 그 핑계를 대고 승재를 만나러 갈 수 있으니 말이다.
 지금은 일단 다른 친구와 만나고 있는 강만호.
 마포의 한 술집.
 부글부글 끓는 돼지 김치찌개를 앞에 두고 화통을 삶아 먹은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신문 좀 그만 봐 인마, 오랜만에 만났으면 이야기 좀 해야지. 자꾸 신문만 보냐?”
 대학 동창 박수근이다.
 현재 대기업 과장으로 근무하는 중이고, 강만호의 동기 중에는 가장 잘나간다.
 그런 그도 신세 한탄하고 있었다.
 “하아··· 언제쯤 과장 꼬리표를 뗄지 모르겠어······. 나보다 어린놈이 치고 올라가는 걸 보면, 속이 상한다, 젠장······.”
 벌써 흰머리가 많이 보인다.
 그만큼 고생했다는 의미였다.
 그가 안쓰러워서 강만호는 이렇게 말을 던졌다.
 “그러니까 너도 독립해.”
 “독립? 그게 쉬운 줄 아냐? 이제 우리 경제가 한풀 꺾였단 말이지······. 진짜 잘나갈 때 사표 내고 나갔어야 했는데······. 아, 아쉽네. 솔직히 이제는 네가 부럽다. 이번에 주식으로 돈 많이 만졌다며?”
 “그냥··· 조금. 아, 근데 혹시··· 너 이번에 분당이나 일산에 신도시 생기는 거 알지?”
 강만호도 슬슬 서울 사람들의 심리가 궁금했다.
 과연 신도시가 생기면 이사 갈까?
 “알지··· 근데 직장에서는 신중하게 보는 입장이던데? 왜? 이번에는 부동산으로 크게 벌게?”
 강만호는 속으로 웃었다.
 갑자기 영종도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미 그곳의 땅값은 조금씩 꿈틀대고 있다.
 이 친구에게 한 번 넌지시 이야기를 꺼내 볼까?
 “뭐··· 좀 관심은 있지. 분당도 그렇고··· 영종도도······.”
 “영종도? 너, 혹시··· 거기 신공항 이야기를 들은 거야? 거긴 아니지.”
 “응? 거긴 아니야? 뭐 들은 거 있어?”
 “딱 봐도 아니지. 수도권 신공항을 왜 그 섬에 하겠어. 더 가까운 시흥도 있고··· 화성도 있는데?”
 옳은 말이다. 사실 강만호도 처음 승재에게 이야기 들을 때, 살짝 떨떠름했다.
 그러나 그때는 아예 영종도가 후보에도 없었을 때다.
 이미 후보에 오르고 땅값이 꿈틀댄다는 것은 냄새 맡은 부동산 투자자들이 있다는 건데······.
 “아, 몰라, 몰라, 몰라. 난 영종도에 그냥 올인하다 죽을래. 넌 그냥 라면 회사에서··· 쭈우우욱 라면이나 팔다 죽어라. 으하하하하.”
 
 3
 
 다음 날 오후 늦게 마지막 남은 주식을 싹 정리하고 현금화한 강만호는 드디어 강화도로 돌아왔다.
 오는 동안 친구 녀석의 말이 귓가를 어지럽혔지만, 이상하게 승재의 말에 더 신뢰가 갔다.
 마음이 흔들리기 전에 녀석을 다시 한 번 봐야겠다.
 그래서 강만호는 어차피 녀석의 아버지인 김정주에게 제안할 것도 있고 해서, 등대에서 돌아오는 날만 기다렸다가 승재의 집을 찾아갔다.
 “매번 술상 차리게 해서 미안합니다, 제수씨.”
 “에이, 아니에요. 미나 때문에 우리 승재 학교 가는 게 아주 안심이 되네요. 그리고 저 사람도 미나 아빠만 오면 좋아하는데요, 뭘.”
 강만호는 웃었다.
 김정주는 아마 자기보다 술을 더 좋아하는 게 분명하다.
 지금도 소주잔을 넘치게 따르는 걸 보며 입맛을 다시는 김정주.
 그런 그를 향해 살짝 운을 띄우기 시작했다.
 “부탁이 있는데 말이야.”
 “······.”
 “내가 이번에 분당에 아파트를 분양받으려고 한단 말이지.”
 “그래? 흠··· 이사 간다는 이야기네.”
 살짝 서운하다는 식의 목소리가 김정주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가뜩이나 사람이 별로 없는 강화도에서 마음 맞는 친구 하나가 떠난다니 그런 마음이 드는 건 당연했다.
 김정주는 소주 한 잔을 입에 털어 넣고 물었다.
 “근데, 무슨 부탁?”
 “한 채가 아니라, 가능한 한 많이 분양받으려고 하거든?”
 “하, 이 자식. 정말 돈지랄하는 거냐?”
 “아, 그건 아니고. 아무튼, 너도 청약 통장 하나 있지?”
 “있기야 하지······.”
 “그럼 좀 쓰자. 내가 값은 치러 줄게. 넉넉히··· 응?”
 “그래? 흠··· 뭐, 당장 이사 갈 일도 없고··· 좋아, 그러지 뭐······.”
 어차피 돈이 없어서 분양받을 수도 없는 김정주는 깊이 생각도 하지 않고 곧바로 결정해 버렸다.
 그러고 나서 잠시 아내의 눈치를 보더니 목소리를 낮췄다.
 “그런데··· 그··· 주식 말이야.”
 “응?”
 “이번에 다시 꺾였잖아.”
 “그··· 그렇지, 조정 기간이라고 하더라고.”
 “조정받고 다시 오른다던데, 최소 2,000까지는 갈 거라고······.”
 “그럴 수도 있고, 근데 설마··· 너?”
 “쉬잇!”
 김정주는 다시 한 번 손가락을 입에 갖다 댔다.
 TV 드라마에 몰입하고 있던 아내가 들을까 심히 두려워하는 표정으로.
 “나도 너처럼 주식으로 재미 좀 보려고. 와이프 몰래 이번에 투자한 게 있어서 말이야.”
 “어···디다 했는데?”
 “삼영.”
 “삼영 식품?”
 삼영 식품은 라면 시장에서 높은 시장 점유율을 지닌 회사였다.
 그리고 며칠 전에 본 대학 동창 박수근이 다니는 곳이기도 했고.
 “내가 생각해 봤는데, 라면 소비량이 계속 늘잖아. 이건 절대 떨어질 리가 없을 거 같아서.”
 이 또한 옳은 말이다.
 강만호는 지난번에 박수근에게 삼영 식품의 인지도와 시장 지배력이 얼마나 엄청난지를 들었다.
 당시 주식으로 돈 좀 만진 강만호에게 꿀리지 않겠다며 술이 들어가자 그 말을 내뱉었는데, 얼마나 지루하던지······..
 그러나 투자는 돌다리도 두드려 봐야 하는 법.
 여기서 돌다리란 바로 승재였으니, 혹시 몰라서 강만호는 그에게 당부했다.
 “나쁘지는 않은 거 같은데··· 그래도 승재한테 잘 물어봐.”
 “묻긴 뭘 물어. 그동안 어린애가 몇 번 소 뒷걸음으로 쥐 밟은 건데······.”
 “아니야, 새꺄. 내 말 명심하고 꼭 물어봐. 알았지?”
 강만호의 질문에 대답도 하지 않고 소주잔을 다시 한 번 홀짝이는 김정주.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서 집에 갈 때 방에서 공부하던 승재를 불러냈다.
 “네? 무슨 일로······.”
 이번에도 또 무언가를 얻고 싶었을까?
 밖에 나오자마자 승재는 강만호를 향해 용건을 물었는데······.
 “네 아버지가 삼영 식품에 투자한다는데··· 혹시 몰라서······.”
 순간.
 승재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4
 
 삼영이라··· 삼영 식품이라······.
 왠지 모르게 위화감이 들었다.
 꿈에서 본 듯 안 본 듯.
 그러나 느낌만으로 아버지에게 조언하기는 힘들었다.
 삼영 식품은 우량주였다.
 시간이 갈수록 많이 오른 것은 아니지만, 점진적으로 상승 곡선을 그리고 있었으니까.
 승재는 아버지 성향을 잘 안다.
 지금까지 승재가 언급했던 주식을 매수했더라면 분명히 큰 이득을 남겼을 텐데, 주식을 도박 이상으로 언급하며 승재가 입에 담는 것도 매우 꺼렸다.
 완고한 분이다. 학생의 본분은 공부만 하면 된다고, 괜히 어릴 때부터 일확천금을 바라보다가 패가망신한다는 말을 몇 차례 했는데, 지금 와서 승재가 그 사실을 알게 된다면 체면이 살지는 않으리라.
 ‘많이 투자하시지는 않으셨으면 좋겠는데······.’
 승재 집안의 경제권은 어머니가 가지고 계신다.
 아버지의 봉급만으로 세 식구가 살아가는 셈이니 어머니가 아끼고 아껴서, 따로 아버지에게 여윳돈이 있을 리는 만무하다고 여겼다.
 따라서 그렇게까지 많이 투자하리라 보지는 않았다.
 거기다 아버지를 자주 보지도 못하고, 쉽게 물어보지도 못하니 일단 마음속에 묻어 놓은 채 상황만 보고 있다가······.
 이게 꿈속에서 다시 등장한 때는 여름 방학을 맞이한 다음 날이었다.
 
 【재벌 육성 튜토리얼이 실행되었습니다.】
 
 5
 
 아, 밥 먹다가······.
 엄마가 꽤 걱정하시겠어.
 최근 ‘목소리’의 등장은 없었다.
 그래서 녀석이 등장하니 뜻밖에 반갑다.
 원하는 장면이 있었기 때문이다.
 
 【용유도 땅의 추가 확보로 인한 보상이 있습니다. 원하는 장면을······.】
 
 감정 없이 묻는 기계음이 끝나기도 전에 나는 말했다.
 “삼영 식품 관련 뉴스.”
 곧바로 아지랑이처럼 영상이 등장한다.
 
 ― 비누나 윤활유 원료를 사용하는 공업용 수입 쇠고기 기름으로 라면 마가렛 쇼트닝 등을 만들어 시판한 (주) 삼영 식품이 검찰에 적발됐다.
 신문을 읽는 동안 귀에 사람들의 목소리도 흘러들어 왔다.
 “공업용 우지라니! 먹는 걸 이런 거로 튀겨? 개새끼들, 토할 거 같아.”
 “와아··· 씹···, 욕 나오네.”
 “삼영 라면이라고? 집에 있는 거 버리라고 해야겠어. 졸라 양심도 없지.”
 
 순식간에 파노라마처럼 공업용 우지 라면이 업계에 어떤 영향력을 미치고 지나갔는지 사건이 나열된다.
 나는 아찔했다. 일단 최초의 발생일이 11월 3일.
 투서로 인해서 신문에 특종이 흘러나왔고, 검찰의 수사가 시작되었다.
 삼영 식품 부회장이 구속되었고, 회장은 두문불출 논현동 자택에서 며칠 동안 나오지 않았다.
 몇 가지 기억할 걸 머리에 꾹꾹 담았다.
 현실에서 반드시 떠올리기를.
 그러느라 새롭게 받은 ‘미션’도 흘려들었다.
 
 【16비트 컴퓨터를 확보하세요.】
 
 다시 눈이 감긴다.
 
 6
 
 번쩍, 눈을 뜬 승재는 자신이 방바닥에 누워 있다는 걸 깨달았다.
 정확히는 밥 먹다가 쓰러진 거다.
 다행히 어머니가 상을 빼놓았기에 그의 몸에 음식물이 묻지는 않았다.
 “승재야, 괜찮아?”
 늘 그를 걱정하는 어머니의 목소리에 승재는 일어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를 바라보며 어머니가 물었다.
 “왜?”
 “저, 잠깐··· 미나네 갔다 올게요.”
 “응? 거긴 또··· 왜? 밥이나 다 먹고 가지.”
 “거의 다 먹었잖아요. 죄송해요. 갑자기 급한 일이 생각나서······.”
 그 길로 문밖으로 나와 승재는 달리기 시작했다.
 머릿속으로 꿈속에서 나온 여러 내용을 정리하면서······.
 좁게는 아버지가 투자한 주식을 재빨리 환매하는 것에서부터, 넓게는 삼영 식품의 위기를 알려 주고 싶었다.
 ‘8년 후에 공업용 우지가 결백하다는 판결이 나오지만, 삼영 식품은 이미 만신창이가 된다. 이건 공정하지 못한 거야. 바꿔야 해.’
 승재와 크게 상관없는 회사일 수도 있었지만, 왠지 모르게 바꿔야 한다는 생각이 계속 머릿속에 휘몰아쳤다.
 그래서 미나네 집에 도착해서 벨을 누르고, 강만호를 만났을 때.
 “헉, 헉··· 아저씨··· 헉, 헉··· 그··· 삼영 식품에 친구분이 있다고 하셨죠?”
 “응?”
 문을 열자마자 내뱉은 승재의 말에 강만호는 의아해했다.
 그러다가 삼영 식품은 김정주가 주식 투자한 곳이라는 걸 알고서 눈빛을 빛내며 말했다.
 “일단 들어와서 말해.”
 승재는 고개를 끄덕이며 안으로 들어갔다.
 마침 미나가 잠옷 바람으로 방에서 나오다가.
 “으악! 아빠! 오빠가 왔다고 말했어야지!”
 승재를 보고 소리를 지르며 재빨리 다시 들어갔다.
 요즘 그녀가 사춘기를 겪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지금 승재의 관심사와는 거리가 있는 일.
 승재는 다시 한 번 강만호에게 물었다.
 “삼영 식품에 계신다는 그 친구분이요.”
 “그래. 그런데 갑자기 왜? 혹시··· 삼영에 무슨 일이 있니?”
 그는 승재가 회사 이름을 언급할 때는 반드시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걸 아는 사람이다.
 한마디로 돈과 결부되는 일이었다.
 그런데 강만호의 질문에 대답도 하지 않고, 승재는 잠시 호흡을 가다듬으며 다시 그에게 물었다.
 “죄송한데, 아저씨··· 그분이 어떤 일을 담당하세요?”
 “자재과장인데······.”
 “자재과장······.”
 승재는 살짝 힘이 빠졌다.
 그 정도면 절대 낮지 않은 위치였지만, 그렇다고 회사에 결정권을 좌지우지할 위치도 아니었다.
 ‘그래도 모른다.’
 승재는 눈빛을 빛냈다.
 “아저씨, 잠깐 제 말 좀 들어봐 주실래요?”
 눈앞에 있는 강만호를 설득해 보려고 마음먹었다.
 열여섯 살짜리 소년의 말을 믿어 주는 어른은 그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뭔데 그래? 정말 궁금해 죽겠다.”
 “라면이요··· 삼영 라면 그거 쇠기름으로 튀긴다는 거 아세요?”
 “응? 잘 모르겠는데?”
 알 리가 없다. 관심을 둔 적이 없으니까.
 “쇠기름으로 튀겨요. 그런데 말이에요. 그 쇠기름 앞에 공업용이라는 말이 들어가면 어떻게 될까요? 그러니까··· 비누나 자동차 윤활유로 사용하는 기름이요. 그런 기름으로 라면을 튀긴다면··· 아저씨, 그 말 듣고 라면 드시고 싶으세요?”
 곧바로 강만호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그리고 그때쯤 옷을 차려입고 나온 미나 역시 눈살을 찡그리며 외쳤다.
 “우웩이야, 오빠. 진짜야? 삼영 라면을 그런 기름으로 만드는 거야?”
 “아니. 절대 아니야. 삼영의 라면은 2, 3등급 쇠기름으로 튀기고 있어. 하지만 이게 미국에서는 공업용으로 사용되고 있어서, 투서 한 방이면 곧바로 이미지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거지. 지금 너처럼.”
 “맞아 입맛 완전히 떨어졌어. 아무리 내가 라면을 좋아해도 그렇지, 공업용이라는 말은··· 으······.”
 “맞아. 사람들은 ‘공업용’이라는 말을 듣고 삼영 라면을 사 먹고 싶지 않을 거야.”
 이쯤에서 승재가 다시 강만호를 보았다.
 그런 그를 보며 새삼 참 많이도 조사했다는 생각이 강만호의 머리를 스쳤고······.
 “안 되겠어. 그 친구를 만나야겠다.”
 “잠깐만요, 아저씨.”
 언급했던 친구에게 전화를 걸려고 수화기를 들던 강만호를 제지한 승재.
 무작정 찾아와서 했던 말을 믿어 주어서 고맙기는 하지만, 대책 없이 말을 던지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니었다.
 “뭐라고 하실 건데요?”
 “응? 그거야··· 조금 전에 네가 말했던 것처럼······.”
 “제가 했다고 하실 건가요?”
 “당연··· 아, 걔가 믿지 않으려나?”
 중학교 3학년짜리 어린 애를 믿어 주는 어른은 오직 승재의 눈앞에 있는 강만호밖에 없을 것이다.
 승재를 겪어 봐서이기도 했지만, 사실 강만호가 마음이 열려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당장 승재의 아버지도 아들을 약간 아는 것 많은 어린아이 취급한다.
 그게 정상이다. 아무리 잘나 봤자, 소년의 지혜는 꼰대의 힘에 눌릴 수밖에 없다.
 따라서 승재는 강만호에게 이렇게 일렀다.
 “절대 저에게 들었다는 말은 하지 마세요. 그냥 조금 전에 제가 말했던 이야기처럼······.”
 “알았다. 너처럼··· 일어날 법한 일을 상상하도록 만들어서 설득해 보마. 솔직히··· 그 친구를 실업자 만들기는 싫거든.”
 라면 하나로 실업자가 될까?
 그럴 수도 있었다.
 삼영 식품의 주력은 라면이었고, 당장 타격을 입는다면 회복하기가 쉽지 않았다.
 실제로 승재의 꿈속에서 이 사건은 8년 후에 무죄판결이 나왔지만, 삼영 식품은 망하기 일보 직전까지 갔었다.
 승재는 왠지 모르게 그걸 바꿔 보고 싶었다.
 더불어 아버지가 얼마를 투자했는지 모르겠지만, 그의 첫 주식 투자가 안 좋은 기억으로 남지 않기를 바랐다.
 
 
 # 5회. 소액 주주의 아들
 
 1
 
 삼영 식품의 자재과장, 박수근은 다시 강만호와 만나게 되었다.
 똑같은 마포 술집, 그때와 같은 안주인 돼지 김치찌개가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아, 그때 네 말 들을걸. 영종도 땅값 꽤 올랐다면서?”
 지난번 만난 후 그사이에 부동산 시장이 꽤 변했다.
 분당이 아직 분양도 하기 전인데 슬슬 끓어오르고 있었고, 신공항은 영종도가 가장 확률이 높다는 언론 보도가 연일 그를 아쉽게 하는 뉴스였다.
 “아직 모르지. 네 말 대로 화성이나 시흥으로 결정 날 수도 있잖아.”
 “그럼 지금 팔아야 하는 거 아니야?”
 “그건 또 나중에 후회할까 봐 못 하겠어. 아무튼, 그건 그렇고······.”
 강만호는 드디어 용건을 꺼내기 시작했다.
 “너네 회사 라면을 쇠기름으로 튀긴다면서?”
 “응? 응··· 맞아. 우지를 사용하지.”
 살짝 말을 더듬는 박수근.
 소주 몇 잔 들어간 후에 슬슬 용건을 꺼낸 강만호의 기색이 꽤 진지해 보였다.
 심지어 강만호는 누가 들을까 봐 머리를 숙이고 목소리까지 낮추었다.
 “내가 듣기로··· 그 우지가 공업용이라고······.”
 박수근의 눈살이 살짝 찌푸려졌다.
 옳은 말이기는 하지만, ‘공업용’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거부감이 와 닿았던 것이다.
 “인마, 그렇게 말하면··· 딱 오해받기 좋지.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어? 우리가 쓰는 건 2등급 우지야. 1, 2등급이면 그냥 먹어도 될 정도의 쇠기름이라고.”
 “그래, 맞아. 그런데 방금 네가 말했잖아. 딱 오해받기 좋다고.”
 “······.”
 “그거 누가 몰래 검찰 같은 데 찌르면 어떻게 할래? 아니, 그것보다는 신문에 1면으로 난다면? 사람들이 어떤 ‘오해’를 할까?”
 “······!”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문제였다.
 아니 왜 생각을 안 해 봤을까?
 치열해지는 라면 시장.
 다른 회사를 죽이고 점유율을 높이려는 경쟁 회사들.
 적자생존, 이미 이곳은 밀림이다.
 삼영은 순진한 생각으로 안정적인 길만을 걷다가 시장 지배력을 급속하게 빼앗기고 있었다.
 만약 이 상황에서 저런 모략까지 받으면 회사가 얼마나 흔들릴지 짐작조차 못 하겠다.
 “현재 쓰고 있는 우지를 얼마나 비축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방법이 있다면··· 기름을 바꿔서 사용하는 게 좋지 않을까?”
 “그··· 그러네······.”
 그가 너무 쉽게 인정하는 바람에 강만호는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이제 친구로서 할 도리는 다했다고 여긴 그는 조용히 소주잔을 들어 건배를 청했다.
 “어쨌든 잘 전달되었으니··· 이제는 네 책임이야. 알았지?”
 이제는 자기 책임이다. 이제는······.
 조직 사회에서 이런 말이 가장 무섭다.
 당연히 그때부터 마시는 술맛은 매우 썼고, 정신은 점점 말짱해졌다.
 그러다가.
 ‘이거··· 어쩌면 기회가 될지도 모르겠어······.’
 그의 눈빛이 반짝였다.
 
 2
 
 만년 과장 박수근의 사내 평가는 유능과 무능 사이였다.
 시키는 대로 일은 그럭저럭 잘해내지만, 딱 그만큼이었다.
 그런 그에게 강만호의 조언은 기회의 갈림길이 될 수 있었고, 다음 날부터 기회를 노렸다.
 ‘아, 괜히 이런 거 말했다가··· 일만 만든다고 한 소리 듣는 거 아니야?’
 그는 쉽게 결단을 내릴 수 없었다.
 늘 그렇듯이 타성에 젖어 버린 중년은 일을 만들기보다는 주어진 일을 처리하는 것만으로 벅찬 회사 생활이었기에.
 그러나 자재부에서 일하는 그의 업무 특성상 우지의 재고량이 쌓이면 쌓일수록, 마치 폭탄을 안고 있는 느낌을 받았다.
 결국, 8월 초 휴가를 마치고 복귀해서 부장에게 어렵게 말을 꺼냈다.
 “흠··· 그러게요··· 박 과장님 말이 맞아요. 공업용이라는 그 말이 이렇게 어감이 좋지 않을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조 이사님께 말씀드려야겠어요.”
 다행이었을까? 그보다 나이 어린 부장은 곧바로 위험성을 파악했다.
 그는 곧바로 윗선에 보고했고, 며칠 안에 지휘 계통을 거쳐서 부회장까지 올라갔다.
 사실 서두른다고 서둘렀지만, 이것조차도 시간이 걸렸다.
 회사 조직이라는 게,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방식은 늘 이랬다.
 어쨌든, 부회장이 회의를 소집했다는 소식이 박수근의 귀에 들어가자 설렘과 불안함이 그의 마음을 감쌌다.
 그리고 다음 날 오전 그를 부른다는 소식에 황급히 부회장실로 갔다.
 곧 그를 발견한 비서가 노크하며 안으로 전달했다.
 “부회장님, 박수근 과장 왔습니다.”
 회사 생활하면서 단독으로 부회장을 맞대면한 건 손에 꼽는 박수근.
 그것도 중요한 업무로 만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심장이 제멋대로 펌프질을 하고 있었다.
 그런 그의 귀에 드디어 부회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라고 해.”
 심호흡 한 번 내쉰 박수근이 문을 열고 들어갔다.
 부회장 최성준은 삼영 식품 창업주이자 회장의 맏아들이었다.
 그를 보면 느끼는 점 하나.
 공부 잘하는 수재보다 부모 잘 만나는 범재가 더 나은 세상이라는 현실.
 술자리에서는 늘 투덜댔지만, 막상 재벌 2세 앞에서는 위축될 수밖에 없는 격차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부···르셨습니까?”
 “그래, 박 과장. 당신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어. 고마워.”
 최성준은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박수근은 재빨리 두 손으로 잡았다.
 그보다 세 살이 적었지만, 라인을 잘 타야 한다는 생각만 가득했다.
 그런 그의 귀에 들려오는 부회장의 묵직한 음성.
 “그런데 말이야.”
 “······.”
 “박 과장도 알다시피 아직 수입한 우지 재고가 많이 남았고, 생산 라인도 곧바로 없앨 수는 없어서··· 참, 머리가 아프네.”
 삼영 식품은 공업용 우지를 활용해서 튀김 기름이나 마가린 등까지 제조해 왔다.
 따라서 단순히 라면을 튀기는 기름을 바꾸는 과정은 결코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까 회의를 거쳐서 앞으로 팜유를 사용하기로 했어. 그러나 내년부터 그렇게 될 거야. 솔직히 지금 당장 그냥 없앤다는 건··· 회사로서도 손해가 크잖아. 안 그래?”
 계속 이어지는 최성준의 낮은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박수근은 속으로 안타까운 탄성을 내뱉었다.
 위험을 감수하고 일단 올해만 우지를 사용하겠다는 부회장의 뜻을 읽었기 때문이다.
 당장에라도 누군가 검찰에 찌른다면, 아니 검찰보다 더 무서운 언론에 투서라도 날린다면, 회복할 수 없는 타격을 입을 수도 있는데······.
 “우선 총무부에서 기자들에게 싹 연락할 예정이야. 혹시 우리 회사와 관련된 사항이 있으면, 언제든지 먼저 고지해 달라고. 미리 조심하는 거니까, 큰 문제는 없으리라고 봐. 그리고··· 박 과장 의견은 내가 잊지 않을게. 이번 우지 다 쓰고 나서 위험 요인까지 없어진다면··· 아마 빼앗긴 시장 점유율은 다시 찾아올 수 있을 거야. 자, 마지막으로 이거··· 금일봉이야.”
 박수근의 눈앞에 흰 봉투가 내밀어졌다.
 두툼했다. 꽤 집어넣은 것 같았다.
 봉투를 받아 드는 그의 얼굴에 어색한 웃음이 떠올랐다.
 
 3
 
 보통 감정 없는 기계음이 들리지 않을 때는 내가 ‘미션’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을 때였다.
 오늘이 그랬다.
 지난번에 컴퓨터를 확보하라는 기계음의 말을 흘려들었더니, 장면만 재생된다.
 캄캄한 밤, 멀리서 파도 소리가 들려오는 강원도 삼척의 철벽 부대······.
 전역을 앞두고 거의 마지막 보초를 서고 있던 나는 그를 부른다.
 “야, 신병.”
 “이병! 최훈!”
 “아, 새꺄, 시끄러, 귀청 떨어지겠어.”
 “시정하겠습니다!”
 “무슨 시정은··· 됐고, 너 부잣집 아들내미라며?”
 얼굴에 부티가 흐르는 그는 몸 전체에 흐르는 살집만 아니었다면, 꽤 잘생겼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바싹 군기가 든 신병이라 입에서 줄줄 내뱉는다.
 삼영 식품의 막냇손자란다.
 아니 근데 그런 부자도 군대에 오네.
 거기 거의 망해 가는 회사라서 군대 못 뺀 건가?
 어차피 야간 보초 시간을 빨리 보내려면 노가리 까는 게 최고.
 나는 그냥 대놓고 물어봤다. 왜 군대 안 뺐느냐고.
 “할아버지가 무조건 군대는 갔다 와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아, 새끼··· 좀 조용조용히 말하라니까.”
 “시정하겠습니다.”
 “그래, 딱 그 정도··· 그런데 할아버지가 군대는 갔다 와야 한다고 했다고? 와, 재벌도 가끔 정신이 똑바로 박히신 분이 계시네.”
 “네, 그렇습니다.”
 자기 할아버지를 칭찬하니 곧바로 풀어지는 신병 나부랭이에 나는 입가에 미소를 그린다.
 뭐, 상관없다. 나는 그저 이 지루한 시간만 때우면 되니까.
 “계속 더 해 봐.”
 “네?”
 “어쭈··· 이 새끼, 금세 빠져 가지고··· 너네 집 이야기 좀 더 풀어 보라고, 새끼야!”
 “네, 알겠습니다!”
 그날 녀석은 짧은 시간 내에 함축적으로 자기 이야기를 풀어 냈다.
 나쁘지 않았다.
 재벌에 관한 선입견이 살짝 지워지는 순간이었다.
 특히, 녀석의 할아버지가 꽤 맘에 들었다.
 재벌이라고 특권 의식 갖지 말고 일찍 막냇손자를 군대에 밀어 넣었다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 않은가.
 자식에게 회사도 안 물려준단다. 이른바 전문 경영인 체제로 간다는데, 아마 그건 녀석의 큰아버지, 즉, 장남 최성준이 경영을 잘못해서 그런 결정을 내리지 않았나 싶다.
 중간에 녀석은 내가 공업용 우지 이야기를 하자.
 “그런데 말입니다. 솔직히 라면 사건은 좀 억울합니다.”
 “그래? 아니 왜?”
 “그거 얼마 전에 무죄로 확정되었습니다.”
 “잉? 정말?”
 몰랐다. 그럴 수밖에 없다. 정보가 늦은 군대에 있기도 했지만, 공업용 우지 사건 이후에 솔직히 관심도 없었다.
 “정말 억울합니다. 인체에 무해한 거였는데···, 그거 다른 회사에서 공작했다는 말도 있었습니다. 정말 억울합니다.”
 바싹 들었던 군기가 풀렸나? 아니면 진짜 분해서였을까?
 녀석의 목소리에 ‘한’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내 꿈은 여기서 끝났다.
 
 4
 
 승재는 눈을 떴다. 갑자기 머릿속을 망치로 얻어맞는 기분이 들었다.
 그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건은 절대 우연이 아니다.
 뭔가 거미줄처럼 얽혀 있었다.
 지금도 그랬다. 삼영 식품의 주식을 산 아버지, 그곳 자재과장을 친구로 둔 강만호, 그 집안 막냇손자까지······.
 꿈속에서 봤던 인물이 현실과 우연히 겹친다?
 그럴 리 없다. 이건 필연이다. 꿈속 장면은 미래가 아니다.
 ‘내가 살아왔던 삶이다!’
 이제야 비로소 전생을 느끼는 승재.
 그렇다면 꿈속에서 던진 메시지 역시 단순하지 않을 것이다.
 일어날 불행한 일을 막고 새로운 방향으로 흐름을 바꾸어 놓아라!
 강력하게 전달받고 있었다.
 좋아. 그렇게 할게. 지난 삶이 어떤 방향으로 풀렸는지는 모르겠지만, 같은 상황에서 두 번 다시 실패하지 않겠다.
 몸을 일으켜 미나의 집으로 향하는 승재.
 원래 오늘은 강만호의 집에 시대의 신문물(?) 컴퓨터가 들어오는 날이었다.
 미나의 생일 선물인데, 이걸 다루는 그녀의 능력이 한계에 봉착했기에 도움을 요청받았다.
 컴퓨터를 처음 본 순간 느낀 감정은 아련함이었다.
 잃었던 것을 다시 발견한 느낌?
 평생을 함께해 왔던 친구와 재회한 기분?
 그럴 수밖에 없었다. 꿈속에서 승재는 IT로 기회를 얻고, IT로 몰락했으니까.
 상념은 여기까지.
 승재는 우선 그녀에게 물었다.
 “기사한테 설명은 들었어?”
 “응··· 듣기는 했는데, 솔직히 무슨 말인지는 잘 모르겠어.”
 “옆에서 나도 들었다만······.”
 미나의 대답에 이어 강만호도 눈에 불가항력의 빛을 품고 말했다.
 “도무지 우리나라 말을 하는 건지······.”
 그들의 말을 귀로 흘려들으면서 승재는 자리에 앉아 입을 열기 시작했다.
 “8비트 컴퓨터라······.”
 관심은 계속 있었기에, 승재는 이미 신문을 통해 16비트 컴퓨터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반갑다, 녀석아······.’
 지금 만지는 모델은 대우 전자에서 출시한 MSX2 CPC―400s.
 승재는 웃었다.
 어차피 16비트가 아직 많이 상용화된 것도 아니었고, 사실 초보자용으로는 8비트가 무난했다.
 어려운 말로 설명해 봤자 알아들을 리가 만무한 초보자들.
 그래서 승재는 미소를 짓고 하나, 하나 천천히 조작법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와아··· 아까 그 사람보다 더 설명 잘해. 그지 아빠?”
 “응? 응··· 그렇구나. 근데, 승재야. 너 컴퓨터 만져 본 적 있니?”
 “아니요. 하하하.”
 “그런데······?”
 “신문으로 봤어요.”
 “신문으로?”
 신문에 컴퓨터 관련 기사가 나오는 것은 강만호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알 수 없는 용어로 쓰인 그 기사를 보면서 대충 넘어갔다.
 한데 기사만 보고도 컴퓨터를 이렇게 잘 조작할 수 있다니, 믿기지 않았다.
 아무리 세대 차이를 감안해야 한다지만, 승재는 뭔가 미스터리한 구석이 있었다.
 “자, 타자 연습부터 하는 게 좋을 거야.”
 그는 한메 타자 연습을 화면에 띄워 주고 나서 시선을 돌려 강만호에게 말했다.
 “아, 참··· 아저씨.”
 “응?”
 “그때··· 그 삼영 식품 일은 어떻게 되었나요?”
 “아··· 뭐··· 그 친구가 위에는 알렸다고는 하는데··· 그 이후에는 별 소식은 없어.”
 매번 같은 대답이다.
 승재 역시 같은 반응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아, 네······.”
 “알려 줬으니까, 알아서 하겠지. 원래 무소식이 희소식 아니겠니?”
 그럴 수도 있지만, 왠지 모르게 꺼림칙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던 승재.
 “혹시 모르니까··· 나중에 저희 아버지에게 삼영 식품 주식··· 환매해 달라고 말씀해 주세요.”
 “응?”
 “불확실할 때는··· 그 종목 주식을 안 가지고 있는 게 현명한 선택이잖아요.”
 “그렇긴 하지.”
 “저번에 공업용 우지 이야기하시면 잘 받아들이실 거예요. 아무래도 제가 이야기하는 것보다 아저씨가 말씀하시는 게 더 낫잖아요.”
 그건 그랬다.
 고지식한 꼰대의 피가 흐르는 김정주는 아들은 아직 어린아이일 뿐, 언젠가 오히려 승재의 말을 우선하는 강만호가 큰코다칠 거라는 말을 몇 번 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승재 이야기를 하지 않고 타일렀다.
 “그거··· 크게 오르지도 않는 건데 팔아 버려.”
 “아, 이 자식, 너 나 무시하냐?”
 “아니, 그런 게 아니라··· 근데, 도대체 얼마나 넣은 거야?”
 “백만 원.”
 “백만 원?”
 금액의 가치는 보유한 사람의 경제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당연히 강만호는 김정주의 주머니 사정을 잘 아는 사람.
 저 돈을 모으기 위해 얼마나 오래 용돈을 아껴야 했을지 가늠도 되지 않았다.
 결국, 이런 일은 확실히 하는 게 좋았다.
 다음 날 그는 다시금 친구 박수근에게 전화로 연락했다.
 그런데.
 “뭐? 아직도 공업용 우지를 쓰고 있다고?”
 “저 왔습······.”
 때마침 승재가 오늘도 미나의 컴퓨터 사용법을 봐주기 위해서 집에 들어오는 상황이었다.
 순간적으로 승재를 바라보는 강만호.
 그의 눈에 승재의 얼굴이 와락 우그러지는 게 보였다.
 그는 재빨리 박수근과의 전화를 마무리하고 승재에게 말을 걸었다.
 “어쩌지? 네 아버지한테 다시 이야기해 볼까?”
 승재는 잠시 생각해 보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아뇨. 그러지 말고··· 그 아저씨 한 번 만나게 해 주시면 안 될까요?”
 “뭐?”
 “그것도 아니네요. 차라리 그쪽 회사 회장을 만나야겠습니다.”
 강만호의 눈과 눈 사이가 좁혀졌다.
 ‘아직 애긴 애야··· 이렇게 무모한 생각을 할 줄이야.’
 강만호는 살짝 의아해했다.
 승재의 아버지가 산 주식은 사실 오르고 있었다.
 다만 승재 말대로 ‘공업용 우지’가 언론에 흘러들어 간다면, 큰 이미지 타격을 입을 텐데, 실제 일어나리라고 장담하기는 힘들지 않은가.
 어차피 무슨 수로 회장을 만날까?
 저러다 말겠지 생각하며 그는 오늘 자 신문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5
 
 삼영 그룹 최강룡 회장은 몇 년 전 그룹 일선에서 물러났다.
 지병이 있었고, 아들인 최성준이 회사를 볶아 먹든 삶아 먹든 신경 쓰지 말라는 의사 친구이자 대학병원장의 강권에 어쩔 수 없이 관심 없는 척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아들이 운영하는 방식이 맘에 들지 않았다.
 누굴 닮았는지, 뒤에서는 맹추격하고 있는데, 돌다리만 두드린다.
 삼영이 후발 업체에 따라잡히는 꼴을 보노라면 다시 지병이 악화하는 느낌이었다.
 어쩔 수 없이 다른 데 신경 쓰기 위해 노력했는데, 요즘은 일 순위가 막냇손자 다이어트시키기.
 “훈아! 훈아!”
 고작 국민학교 5학년인데 몸무게가 68kg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뒷동산을 오르내리며 방학 때 살을 왕창 빼게 하는 게 최 회장의 목표.
 손자를 재차 부르는 그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훈아! 막내야! 운동 가자.”
 바로 나오지 않는 대답에, 최 회장은 몇 차례 손자를 불렀고, 그제야 쭈뼛쭈뼛 비대한 몸을 지닌 5학년짜리 아이가 등장했다.
 “할아버지··· 저··· 정말 힘든데······.”
 “이 녀석이! 네 건강 때문에 그런 거다. 잔말 말고 빨리 가자.”
 손자의 투정을 일축하고 경호원 둘과 함께 다시 산에 오르는 최강룡 회장.
 잠시 후 그의 눈이 빛났다.
 ‘저··· 저··· 나쁜 녀석들······.’
 또 그 녀석들이다.
 최 회장에 의해 ‘나쁜 녀석’이라 정의된 두 소년이 뒷산 약수터에서 카스텔라를 먹고 있었다.
 벌써 며칠째다. 하필이면 손자 살을 빼고 있는데, 저렇게 카스텔라를 맛있게 먹으니, 더더욱 훈이 녀석이 운동을 안 하려고 한다.
 옆을 보니 실제로 먹고 싶어 죽겠다는 표정에 입을 벌리며, 침까지 질질 흘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눈이 마주치자, 찔끔하며 입을 다물었다.
 안쓰러웠다. 마음도 안 좋았다.
 괜히 다이어트시킨다고 조손간에 위화감만 더 생기는 건 아닐까?
 그때였다. 카스텔라를 먹고 있던 한 녀석이 다가와 훈이 녀석에게 건넸다.
 “먹을래?”
 손자는 또 한 번 할아버지를 바라본다. 간절한 눈빛을 담아서.
 ‘그래, 이번 한 번이다.’
 최 회장은 얄밉다는 눈으로 카스텔라를 든 녀석을 한 번 쏘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최훈은 얼른 손을 내뻗었다.
 그리고 카스텔라를 입으로 가져가려는 순간.
 “아, 잠깐. 먹기 전에 한마디만.”
 “······.”
 “그거 음식 솜씨 좋기로 유명한 우리 엄마가 특수한 기름으로 만든 거거든? 그 기름이 바로 공업용 쇠기름이야.”
 그의 말에 재빨리 경호원이 최훈의 카스텔라를 빼앗았다.
 경호원의 머릿속에 ‘공업용’이 새겨진 순간, 그걸 먹게 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순식간에 먹을 것을 영문도 모르고 빼앗겨 버린 최훈은 할아버지를 보았다.
 그런데 최강룡 회장은 이미 딱딱하게 굳어진 얼굴이었다.
 그 상태로 물었다.
 “넌 누구냐?”
 질문을 받자, 카스텔라를 들고 있던 녀석이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최강룡 회장님.”
 “······!”
 ‘나를 알고 있어?’
 살짝 놀란 최 회장. 겉으로는 여전히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그런 그의 귀에 녀석의 침착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제 이름은 김승재고요. 삼영 식품 주식을 보유한 어느 소액 주주의 아들이기도 합니다.”
 
 
 # 6회. 다시 실패하지 않겠다
 
 1
 
 김승재라고? 소액 주주의 아들이라고? 한참 생각했다. 던진 말의 의도가 무엇인지.
 그러다가 의미를 깨닫고 머릿속에 직격탄을 맞았다.
 손해 보고 싶지 않다는 뜻 아니겠는가.
 “푸하하하하하하······.”
 승재의 당돌한 의사 표현에 갑자기 웃음이 터져 나왔다. 주체할 수 없었다.
 경호원 둘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고, 손자 녀석은 어쩔 줄 모르는 얼굴이었다.
 그러다가 웃음을 그치고 부드러운 표정으로 돌변한 최 회장이 입을 열었다.
 “카스텔라를 만들 때 사용한 공업용 우지는 어디서 얻었느냐?”
 “그게 중요한 건 아닙니다.”
 “그렇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네, 투자자로서 손해 보고 싶지 않은 게 중요할 뿐이죠.”
 눈을 똑바로 뜨며 말하는 승재의 대답에 최강룡 회장은 탄식을 흘렸다.
 “어린 너도··· 알고 있는데, 도대체 그놈은······.”
 장남 최성준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일선에서 물러났다지만, 최 회장에게 소식을 전하는 이는 있었다.
 공업용 우지에 관한 일은 얼마 전에 들었다.
 어떻게 처리하나 보고 있었는데, 일단 아들놈은 그걸 팜유로 바꾼다는 결론을 냈다.
 그 결정 자체는 나쁘지 않다. 문제는 타이밍. 그걸 내년에 한다고? 왜지? 문제를 알았으면 바로 해치워야 하는 거 아닌가?
 조금 전 승재의 행동에 카스텔라를 빼앗은 경호원들이 그 답이다.
 공업용이라는 말 자체에 심한 거부감을 나타냈다.
 만약 소비자라면? 그들이 공업용 우지를 알게 된다면?
 거의 회사가 흔들릴 것이다.
 어쩌면 다행이다. 미리 알았으니, 복귀할 명분을 얻게 되었다.
 여기까지 생각이 닿은 최 회장은 눈을 가늘게 뜨고 승재를 바라보며 말했다.
 “회사에 월급 도둑이 많구나. 그 녀석들 줄 돈을 너에게 줘도 아깝지가 않아.”
 “고작··· 말입니까?”
 여전히 녀석은 당돌하다. 신기한 게 이런 승재의 태도가 여간 맘에 드는 것이 아니었다.
 이어져서 귓속에 들어오는 돌직구까지도 말이다.
 “전 오늘 회장님께 큰 예방주사를 놓았습니다. 그에 대한 대가가 너무 가볍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뭐라고?”
 최 회장의 눈썹이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왔다.
 요놈 봐라. 좋아, 이 꼬맹이 녀석, 어디까지 가는지 한번 보자.
 잠시 최 회장의 표정을 살피며 승재는 다시 말을 이어 갔다.
 “아마 회장님은 제 이야기를 듣고 다시 경영 일선에 복귀하시겠죠. 그렇게 된다면, 공업용 우지를 바로 팜유로 바꾸는 것은 물론이요, 경쟁사에 빼앗긴 시장 점유율을 회복하게 될 것입니다. 솔직히 이 정도라면, 제가 삼영을 살린 거나 마찬가지인데··· 고작 그 정도로 때우시려고 하십니까?”
 옆에 있는 경호원들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저 당돌한 녀석을 막아야 해?
 도무지 최 회장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니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었다.
 그때 최 회장이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드디어 웃음을 내비쳤다.
 “그래, 이름이 뭐라고 했지?”
 “김승재입니다. 소액 주주의 아들이고······.”
 “좋다, 김승재. 네 나이가 몇이냐?”
 “열여섯입니다.”
 “열여섯?”
 체구가 커서 고등학생쯤으로 알았는데, 옆에서 멀뚱히 쳐다보는 손자 녀석과 불과 네 살 차이다.
 이미 자식과 손자들을 키운 최 회장은 저 나이에 절대 저런 말을 할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어린 녀석이지만, 벌써 싹수가 보이는 놈이다.
 당연히 앞으로도 지켜보고 싶기도 했고.
 “그래··· 그럼 넌 뭘 원하느냐?”
 승재는 잠시 머릿속으로 셈해 봤다. 뭘 달라고 해야 나중에 후회하지 않을까?
 승재는 노인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아까 말은 광오하게 던졌지만, 상대가 자신을 과욕을 부린다고 보지 않을 정도로 하는 게 좋을 듯싶었다.
 “일단 컴퓨터 하나를 선물로 주십시오.”
 생각해 보니 아직 깨지 못한 꿈속 목소리의 미션도 남아 있었다.
 “컴퓨터라······.”
 컴퓨터는 200만 원이 넘는 고가의 제품이다.
 다소 비싸기는 하지만, 부담스럽지는 않을 정도로 적당했다.
 이게 끝이 아니다.
 “혹시 저희 부모님이 오해하실지 모르니, 장학금 형식으로 말이죠. 어차피 제가 학교에서 전교 1등을 하고 있으니, 받을 명분은 충분합니다. 둘째, 만약 삼영이 이 기회를 통해 빼앗긴 점유율을 되찾고, 생산량이 늘어 공장을 짓게 된다면, 제가 사는 강화도에 생산 공장을 지어 주십시오. 지역 경제가 활성화될 터이니, 보람이 느껴질 것 같습니다.”
 생산 공장의 증설 또한 개인적 욕심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조건을 말하면서 본인의 현재 학교 성적과 사는 곳까지 다 읊고 있었다.
 이 또한 대단하다. 이렇게 오늘 벌써 몇 번이나 놀랐는데도 계속 새롭다.
 그래서 또 물었다.
 “좋다. 일단 네가 바라는 것을 다 해 주마. 그런데 하나만 더 묻겠다.”
 “말씀하십시오.”
 “자꾸 시장 점유율을 되찾을 거라는 식으로 말하는데, 혹시 네가 생각한 방법이 있느냐?”
 승재는 웃었다. 꿈속의 최훈 이병이 이야기한 것처럼 확실히 범상치 않은 노인네였다. 고작 열여섯 살 소년을 대화 상대로 대우해 준다. 아니 그 이상이다. 귀를 열고 조언까지 받겠다는 의미니까.
 승재는 잠시 시선을 돌려 최훈을 보았다. 꿈속에서였지만, 녀석과 잠시라도 인연이 닿았던 것에 감사했다.
 ‘잠시가 아니었을지도······.’
 승재는 꿈을 전생이라고 믿고 있으니, 최훈과의 인연은 계속 이어졌을 가능성이 컸다.
 일단 처음에 어린 최훈을 봤을 때부터 남다른 정이 느껴졌다. 그렇다면 꽤 오래 교분을 나누지 않았을까?
 “아마 회장님이 복귀하셔서 제일 먼저 하실 일은 상품 개발이겠죠? 그러고 나서 조직 개편을 하실 거고, 그 이후에 생산 라인 증설··· 그런데 이쯤에서 주의하실 게 있습니다. 바로 미군 부대 납품이죠.”
 “음··· 네가 그것까지도 알고 있느냐?”
 삼영이 우지 파동으로 휘청일 때, 제대로 카운터펀치를 맞은 사건이 경쟁사에 미군 부대 납품을 빼앗긴 것이다.
 ‘이걸 꿈속에서 당신 손자가 이야기해 줬다면, 믿으실 건가요?’
 이건 이병 최훈을 통해 들은 이야기였다.
 놀란 최 회장을 보며 승재는 속으로 웃었다.
 “미국은 절대 공업용 우지를 먹을 것으로 사용하지 않습니다. 아이러니하죠. 그 우지를 만든 나라가 정작 식용으로는 쓰지 않는다는 점이··· 그만큼 그 나라의 기업도 어감이 주는 위험성을 알았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
 “어쨌든 납품의 위험성도 공업용 우지 때문이니, 회장님이 잘 해결하시리라 믿습니다. 그러나 그게 끝이면 곤란하죠. 제가 찾아뵌 것은 최고 결정권자의 미지근한 판단 때문입니다. 아시겠지만, 미래를 위해서라도 사람을 잘 인선해야 합니다. 따라서 저는 전문 경영인 체제를 말씀 올립니다.”
 “······!”
 또 한 번 놀라는 최 회장. 승재가 언급한 전문 경영인은 그가 오래 고민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특히, 자식 중에 믿고 맡길 놈이 없다는 게 이번에 여실히 드러났다.
 그래도 당대 기업 총수들이 핏줄이 아닌 전문 경영인에게 맡기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고, 최 회장 역시 사람이다 보니 선뜻 그런 결정을 내릴 수 없었건만······.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회장님 앞에서 제가 무례하게 굴었던 점, 아무쪼록 넓은 마음으로 용서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녀석은 아까 자기를 소개했던 것과 같이 고개를 깊숙이 숙이며 인사했다.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이 장면을 지켜보던 현수 역시 얼떨결에 같이 인사하고 떠났다.
 사실 붙잡고 싶었다. 소년의 이야기를 더 듣기를 바랐으니까.
 그만큼 아쉬웠으나, 이제부터는 최 회장 본인이 매듭을 풀어야 할 시각이다.
 집으로 와서 당장 출근 준비하고 회사로 직행했다.
 자고로 편견 없는 사람이 대성한다. 그리고 그런 사람은 행동이 빠르다.
 최강룡 회장이 그랬다. 맨땅에서 일궈 온 기업을 그냥 이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었으니, 그는 재빨리 서슬 퍼런 지시를 내렸다.
 곧바로 공업용 우지가 전량 폐기되었고, 팜유로 대체되었다.
 전광석화. 그가 일선에서 복귀해 한 일은 정말 빨랐다.
 어느 정도 일을 수습할 때쯤 그에게 비서실장이 와서 보고했다.
 “김승재 학생의 할아버지 명의로 땅이 있습니다. 임야인데, 용도 변경하면 공장용으로는 가능할 겁니다.”
 땅값이 거의 똥값이다.
 어제 미군 부대와 새로운 납품 계약까지 맺었는데, 보답치고 너무 미안할 지경이다.
 “일단 언론에 흘려. 삼영이 공장 증설 때문에 강화도에 투자할 거라고. 그 녀석 할아버지 땅 근처로 알아보고 있다고. 노골적으로 말이야.”
 “네, 알겠습니다, 회장님.”
 땅은 가격이 어느 정도 치솟을 때 사야겠다.
 그 전에 녀석에게 선물을 직접 전달해야지.
 여기까지 생각한 최 회장의 얼굴에 벌써 설렘이 돋는다.
 딱 한 번 봤는데, 이리도 마음을 빼앗은 사람이 있을 줄이야.
 
 
 2
 
 여름 방학이 끝나고 개학할 무렵.
 울퉁불퉁한 강화도 시골 길을 달리는 차가 있었다.
 덜컹거리는 차 안에서 불편하지도 않은지 손자 녀석은 창밖을 바라본다.
 “할아버지, 그 형아는··· 정말 시골에 사네요.”
 “그러게.”
 “그런데 정말 대단한 형아예요. 이런 시골인데도 그렇게 똑똑하다니.”
 “그러게.”
 최 회장은 손자의 말에 같은 말만 반복했다.
 손자의 말이 그의 마음이다.
 아무리 세상이 도시를 중심으로 빠르게 변한다고는 하지만, 시골에서도 인물은 있었다.
 아니 당돌했던 녀석의 모습은 그 이상이다.
 조목조목 논리적으로 이야기하던 얼굴이 눈에 선했다.
 ‘녀석, 깜짝 놀라겠지?’
 꼭 애늙은이 같다. 그래서 이렇게 불쑥 찾아가 컴퓨터를 내밀면 어떨지 녀석의 얼굴이 참 궁금해진다.
 그러나 실망스럽게도(?), 승재는 전혀 놀라지 않았다.
 “약속이 늦는 분이시네요. 전 바로 컴퓨터 설치해 줄 줄 알았는데······.”
 할 말이 없었다. 그럼에도 그가 밉지 않은 건 왜일까?
 아마 막냇손자 녀석을 보는 정감 어린 눈빛 때문일 것 같다.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너 이름이 최훈이랬지?”
 “네? 네······.”
 승재는 최훈을 보며 정겨운 미소를 짓는다.
 그런 그에게 최 회장은 툭하고 이 말을 던졌다.
 “나중에 대학 들어가면··· 저 녀석 과외 선생 좀 해 다오.”
 “그건 그때 가서요.”
 승재의 말은 아랑곳하지 않고, 최 회장은 계속 말했다.
 “시장 점유율은 다시 가파르게 올라가고 있다. 내가 지병이 있긴 하다만, 버틸 만하니, 아마도 네가 클 때쯤이면 우리 회사는 꽤 성장해 있을 거야.”
 “그러겠죠.”
 “나는 이미 전문 경영인 체제로 들어가기로 마음먹었다. 어떠냐? 네 꿈이 어느 정도의 크기인지 모르겠지만, 나중에 그 자리를 노려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텐데······.”
 “그것도······.”
 “······.”
 “그때 가서 보겠습니다.”
 승재는 결국 최 회장이 떠날 때까지 원하는 답을 주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썩 내키지 않았다.
 분명 삼영 그룹도 작은 회사는 아니지만, 그가 가야 할 길은 바로 IT였다.
 이유는 간단하다.
 ‘이번에는 절대 실패하지 않을 테니까······.’
 
 <『재벌 매니지먼트』 1-2권에 계속>

이용약관 유료이용약관 개인정보처리방침 청소년보호정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