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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신 1

2017.12.14 조회 380 추천 3


 바람의 신 1권
 제1장 말괄량이 길들이기
 
 
 “이보게, 저 계집은 어떨까? 맛이 제법 괜찮을 것 같은데?”
 “어디···? 어떤 계집? 맛있어 보이는 게 들어왔나?”
 “저기, 저 늘씬하게 빠진 계집이 자네 눈에는 안 보이나?”
 “이, 이런 미친놈! 너는 저 계집, 아니 저분 소저가 누구이신지나 알고 그 따위 망발을 지껄이냐?”
 주청 구석 탁자에 앉아 출입하는 여인들을 살피며 나름대로 점수를 매기는 등 은밀한 품평을 하던 두 장한 가운데 하나가 맞은편에 앉아 있는 장한의 머리통을 쥐어박으며 나무랐다.
 “소저···? 이 사람아! 소저라니? 계집이란, 제아무리 반반하게 생겨도 그저 계집일 뿐이야 계집이 조금 반반하다고 사내대장부가 어찌 계집의 미모에 홀려 헛소리를 하는가? 그리고···.”
 “이, 이보게! 미친 소릴랑 하지도 말게. 으으···! 이젠 죽었다.”
 두 장한 가운데 하나가 한참 침을 튀며 떠들고 있을 때 맞은편에 있던 장한의 눈에는 은은한 두려움이 배어들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싸늘한 소녀의 음성이 터져 나왔다.
 “흥! 뭐라고···? 방금 무엇이라 하였더냐?”
 “흐흐! 그렇지 않아도 한번 꼬셔 보려고 했는데 제 발로 왔네?”
 “엇! 어, 언제 왔지? 소, 속하가 소, 소저를 뵈옵니다. 이, 이보게! 어, 어서 소저께 인사드리지 않고 무엇을 하고 있는가?”
 나무라던 장한은 즉각 오체복지를 하며 여전히 앉은 채 음탕한 시선으로 소녀의 위아래를 훑어보고 있는 장한을 잡아당겼다. 십육칠 세 정도로 보이는 소녀는 싸늘히 굳은 표정이었다.
 미녀가 많기로 소문난 이곳 서안(西安)에서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극미(極美)한 아름다움을 뿌리고 있었다.
 “흥! 네놈이 방금 무어라 지껄였느냐고 물었다.”
 “뭐···! 네놈? 그러는 네년은 누구냐? 제법 반반하다고 유세를 떠는 모양인데 까불면 뒈지는 수가 있어. 이게 어디서···?”
 장한은 여전히 고개를 뻣뻣하게 들고 소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천년고도(千年古都)인 서안은 예전 당나라 시절 수도였기에 십만이 넘는 인구가 있어 수많은 기원이 있는 곳이다. 기녀라 함은 사내에게 웃음이나 몸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직업이다. 그런 기녀가 만일 박색(薄色)이라면 어떤 사내가 찾아가겠는가?
 따라서 기녀는 여염집 여인들보다는 월등한 미모를 지니고 있어야 하였다. 색을 밝히기로 이름난 장한은 눈앞의 소녀가 털도 안 뽑고 날로 삼켜도 비리지 않을 만한 미모를 지니고 있자 은근히 회가 동했다. 사내가 이런 생각을 품는 것은 여인의 차림 때문이었다. 여염집 여인들이라면 잘 걸치지 않는 화사한 궁장을 걸치고 있어 마실 나온 기녀로 오인한 것이다.
 그래서 여느 때처럼 시비를 붙인 뒤 적당히 두들겨 패고 그 다음엔 끌고 나가려 마음먹었다. 사람들은 주먹이 무서워 따라오지 못할 것이고, 그 다음엔 원하는 바를 마음대로 이룰 수 있게 될 것이다. 물론 여인은 억울하다고 하겠으나 기루에서 몸을 파는 기녀의 말을 곧이 믿어줄 사람들은 별로 없을 것이다.
 장한들은 이곳 서안에서도 주작대로 부근의 점포를 보호해 준다는 명목으로 술값과 화대를 갈취하는 자들이었다.
 “뭐라고, 네년···? 지금 방금 네년이라고 지껄였느냐? 네놈이 죽고 싶어 환장을 한 모양이구나. 좋아, 일어나라!”
 소녀의 입에서 앙칼진 고함이 터져 나오자 오체복지하고 있던 장한이 기겁을 하며 입을 열었다.
 “소, 소저! 저놈이 눈이 멀어 소저가 뉘신지도 모르고 망발을 한 것입니다요. 한 번만,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흥! 눈이 멀었다고? 내가 보기엔 멀쩡한데? 호오···! 그러고 보니 눈뜬장님이라는 이야기이구나. 그렇다면 눈알은 필요 없겠군. 좋아, 오늘은 필요도 없는 눈알을 뽑아주지.”
 두려움 때문인지 안색이 하얗게 변한 장한을 힐끔 바라본 소녀는 양손을 허리춤에 올려놓으며 싸늘한 안광을 빛냈다.
 “뭐라고? 뭐, 이런 빌어먹을 계집이 다 있어? 이게 좋게 좋게 해주려니까 어디에서 엉기는 거야? 정말, 뒈지고 싶어?”
 “아이고, 여보게! 어서 엎드려 빌게. 자네는 이분 소저가 누구신지 정말 모른단 말인가?”
 오체복지하고 있던 장한이 바지춤을 잡아당기며 자꾸 눈짓을 하는데도 장한은 막무가내였다.
 “야, 이 빌어먹을 놈아! 자꾸 소저, 소저 하는데 이 계집이 본방의 악귀나찰인 혈나찰(血羅刹)이라도 된다는 거냐? 왜 갑자기 안 하던 짓을 하고 지랄이냐?”
 “뭐? 뭐라고? 방금은 또 뭐라고 하였느냐?”
 “크크크! 이 계집이 귀가 먹었나? 나, 현무대협(玄武大俠) 장독구(張督九)로 말하자면 이 세상에서 흑룡방의 악귀나찰인 혈나찰 외에는 아무것도 두려울 것이 없는 사람이다, 왜?”
 척하니 팔짱을 낀 장한은 웬 계집이 이리도 싸가지 없이 구나 싶은 마음에 은근히 노화가 치솟았다. 그래서 여차하면 한 방 갈겨 기절시킨 후 끌고 가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다. 이 순간 소녀의 안광은 더 이상 싸늘해질 수 없을 정도로 차가워졌다.
 “흥! 방금 본녀를 흑룡방의 악귀나찰인 혈나찰이라고 하였느냐? 네놈이 아예 죽으려고 환장한 게로구나.”
 “크크크! 이거 완전히 미친 계집 아냐? 현무대협이라는 본좌의 명호를 듣고도 감히 고개를 빳빳하게 쳐들고···.”
 “챠앗! 죽어랏!”
 장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허리에 손을 얹고 있던 소녀의 좌수가 앞으로 뻗어 나오는가 싶더니 이내 진초록 빛깔을 띤 무엇인가가 섬전의 속도로 허공을 가르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허리띠인 것처럼 보이나 실상은 천잠사로 만든 채찍이었다.
 평상시엔 부드럽기 이를 데 없어 하늘하늘하나 이 순간엔 내공이 실려 있기에 단단하기가 철주(鐵柱)나 마찬가지였다.
 쐐에에에에에엑―!
 “허억! 이, 이건···? 새, 생사편(生死鞭)? 아이고, 소생이 잘못했습니다요. 하,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촤아아아악―!
 “아아악! 아이고, 잘못했습니다요. 살려주십시오.”
 채찍을 보자마자 바닥에 엎드린 장한의 등에 그것이 작렬하고 신음이 터져 나온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는 생사편에 대한 소문을 수없이 들었기에 즉각 그녀의 신분을 짐작한 것이다.
 쐐에에에엑! 촤아아악―!
 “아아악! 잘못했습니다요. 소저, 한 번만 살려주십시오.”
 장한은 반항할 마음조차 없는지 엎드린 채 날아드는 채찍을 고스란히 맞으며 비명과 애원만 할 뿐이었다. 이때 주청에는 장한 둘과 소녀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녀가 들어서고 장한이 시비를 거는 순간 슬금슬금 빠져 나갔기 때문이었다.
 소녀는 이곳 서안의 밤을 지배하는 흑룡방주의 외동여식인 화령옥녀(花翎玉女) 주연경(朱燕瓊)이었고, 장한들 둘은 흑룡방 외원 소속 행동대원들이었다.
 흑룡방은 정사마(正邪魔) 어느 곳에도 소속되지 않은 문파였다. 아니, 문파라기보다는 암흑가의 조직이다. 흑룡방은 서안에 소재한 수천에 달하는 주루와 기원, 각종 점포와 전장 등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걷어들이는 은자로 유지된다.
 방주는 전설처럼 전해지는 싸움꾼인 혈전왕(血戰王) 주업(朱業)이다. 올해 사십오 세인 그는 십 세 이후 지금껏 단 한 번도 패배를 한 적이 없는 인물이다.
 그의 주무기는 파천권(破天拳)이라 불리는 기형병기로 손가락에 끼워 사용하는 것이다. 그것에는 보기만 해도 섬뜩한 느낌을 주는 날카로운 쇠침들이 박혀 있어 스치기만 해도 선혈이 솟구치게 된다. 하여 그와 대적하였던 인물치고 선혈이 낭자하지 않은 자가 없었다. 그렇기에 그의 외호가 혈전왕이 된 것이다.
 그의 외호에 임금 왕(王)자가 끼어 있는 이유는 그가 황족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당금 천자와는 육촌지간이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서안의 밤을 지배하지만 관부에서 전혀 손댈 수 없는 가운데 이만한 성세를 누리는 것이다.
 이렇게 성장한 흑룡방은 이제는 관부에서 건드리고 싶어도 건드릴 수 없을 정도로 커버린 상태이다.
 또한 그의 신분이 이미 만천하에 소문나 있기에 무림의 문파도 웬만한 일 가지고는 흑룡방에 시비를 거는 일이 없다.
 그에게는 일곱 아들과 딸이 하나 있다. 그 가운데 막내인 화령옥녀는 눈에 넣어도 아파하지 않을 만큼 애지중지하는 그야말로 금지옥엽(金枝玉葉)이자 장중주(掌中珠)였다.
 부친의 총애를 받으면서 성장한 그녀는 어려서부터 무공에 탁월한 재능을 보여 많은 무공 교두들로부터 각종 무예를 사사받은 바 있었다. 그렇기에 십팔반 병기 모두에 일가견이 있으나, 거치적거리는 것을 싫어하는지라 생사편이라 불리는 천잠사(天蠶絲)로 만든 채찍만 지니고 다닌다.
 이제 겨우 십육 세이지만 그녀의 내공은 반갑자를 상회한다. 어렵게 구한 만년영지를 복용한 결과이다. 혈전왕이 하나뿐인 여식의 무병장수를 위해 만금을 주고 구한 것이었다. 그렇기에 천잠사로 만든 허리띠가 꼿꼿한 채찍으로 변할 수 있는 것이다.
 “아아악! 속하가 눈이 삐었습니다요. 한 번만··· 아아악!”
 불과 세 번의 채찍질이었건만 장한의 등 부위의 의복은 갈기갈기 찢겨 있었고, 맨살이 드러난 그의 등에는 시뻘건 자국이 마치 뱀처럼 이어져 있었다. 맞을 때마다 죽을 것만 같은 엄청난 통증이 느껴졌지만 흑룡방의 혈나찰이라 불리는 화령옥녀의 분을 풀려면 그대로 맞고 있어야만 하였다.
 꽃처럼 아름다운 화령옥녀에게 혈나찰이라는 다소 끔찍한 외호가 생긴 것은 안하무인인 성격 때문이었다. 그녀에게 있어 이 세상에서 무서운 사람이라곤 황궁에 있는 천자뿐이었다.
 불면 날아갈세라, 만지면 꺼질세라 애지중지하는 혈전왕은 물론 그녀의 일곱 오라비들조차 그녀의 비위를 맞추기 위하여 쩔쩔매는 형편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올바른 길을 가르쳐 줄 수 있었을 유일한 사람인 모친은 그녀를 낳으면서 난산 끝에 심한 하혈로 이승을 떠났다.
 혈전왕은 어린 여식이 모친도 없이 홀로 성장하는 것이 안쓰러웠기에 각별한 애정을 쏟은 것이다.
 그런 그녀에게 천적이라 할 수 있는 인물이 하나 있긴 있다. 하지만 그 사람이 누구라고 밝힌다면 아마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일개 하인이기 때문이다.
 흑룡방에는 많은 하인들이 있다. 그 가운데 올해 십삼 세가 된 소년이 하나 끼여 있었다. 구본홍(九本弘)이라 불리는 그의 아비 역시 하인이었다. 그 아비의 아비 역시 하인이었다.
 소문에 의하면 큰 죄를 지은 자의 후손이라고 하였다.
 구본홍은 천출(賤出)이다.
 강호에는 천출로 분류되는 부류가 여럿이 있다. 백정이 그렇고, 무당이 그러하며, 천기(賤妓)가 그러하다.
 마지막으로 죄 지은 자의 후손으로 대대로 종복(從僕) 생활을 하여야 하는 자들이 바로 천출이다.
 다시 말해 먹고 살 것이 없어 스스로 하인이 되기를 자청한 자와 죄를 지어 신분이 강등당한 하인과는 차이가 있다.
 전자는 언제든지 하인 생활을 청산할 수 있지만 구본홍과 같은 사람은 하인 생활을 청산할 방법이 없기에 천출로 분류되는 것이다. 이들은 사람들로부터 개 취급도 제대로 받지 못하면서 삶을 영위하여야 한다. 따라서 그런 천출과 화령옥녀가 천적지간이라고 한다면 누가 믿겠는가?
 흑룡방 내에서는 무서울 것이 없는 화령옥녀와 일개 하인인 그가 천적지간이 된 것은 불과 삼년 전부터의 일 때문이었다.
 그때 역시 안하무인인 그녀가 보기엔 자신보다 세 살이나 어린 구본홍이 좋은 장난감이었다.
 시비들이 있었으나 그녀들 모두는 화령옥녀보다 적어도 열 살 이상 많았기에 야단칠 꺼리가 전혀 없었다. 하지만 당시 불과 열 살인 그는 모든 것이 실수투성이였다. 그런 그를 일부러 자신의 서동으로 배속시킨 그녀는 그를 괴롭히는 재미에 살았다.
 한겨울에 눈이 어른 키만큼 쌓였을 때 맨발로 산에 가서 딸기를 따오라는 명을 내렸다. 엄동설한에 딸기가 있을 리 있겠는가? 빈손으로 온 그는 혹독한 매질을 당하였다.
 여름에는 있지도 않은 능금을 먹고 싶다면서 잘 익은 것으로 따오라는 명을 내렸다. 구본홍은 당연히 설익은 푸른 능금만 만지작거리다 돌아왔고 기다리고 있는 것은 매질이었다.
 봄에는 단물이 뚝뚝 떨어지는 배를 먹고 싶다고 하였고, 가을에는 봄에나 나는 산나물을 캐오라며 맹수들이 득실대는 산으로 보내기도 하였다. 그렇기에 깊은 산중에서 수없이 맹수들의 먹이가 될 뻔하였고, 낭떠러지에서 떨어진 것만도 이십여 차례나 되었다. 팔다리가 부러진 것 역시 서너 번이나 있었다.
 이밖에도 별별일을 다 겪은 구본홍은 견디다 못해 꾀를 내지 않을 수 없었다. 아직 어린 나이이기에 시비들의 처소를 마음대로 들락거릴 수 있었던 그는 어느 날 시비들이 재잘거리는 소리를 듣다가 자신의 무릎을 내리쳤다. 그때 그녀들은 뭐가 제일 무서운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던 중이었다.
 하나는 맹호가 제일 무섭다 하였고, 다른 하나는 누군가가 자신이 수욕하는 것을 훔쳐보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몸서릴 치듯 부르르 떠는 모습을 본 그는 그날부터 화령옥녀가 수욕을 할 때마다 작은 구멍을 통하여 들여다보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그것은 별 효과가 없었다. 자신이 들여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떤 치도곤을 당할지 모르기에 숨소리조차 내지 못하였다. 그렇기에 화령옥녀 본인이 이러한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기 때문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 것이다.
 당시 그는 대체 왜 수욕하는 것을 훔쳐보는 것이 제일 무서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발가벗은 그녀의 나신은 볼 것이 전혀 없기 때문이었다. 자신과 다른 점이 있다면 아랫도리에 있어야 할 것이 없다는 것 외에는 전혀 다를 바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던 중 또 다른 상황을 직접 목격할 수 있었다.
 시비들 가운데 인물이 제법 반반하게 생긴 여인이 있었는데 당시 그녀를 못살게 구는 사내가 하나 있었다.
 그는 틈만 나면 그녀에게 다가가 주위를 살핀 후 아무도 없다는 것이 확인되면 그녀의 둔부며 가슴을 주물럭거렸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기겁을 하며 도주하거나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는 주저앉아 눈물만 뚝뚝 흘릴 뿐이었다.
 그녀는 시비들 가운데에서도 제법 앙칼지기로 소문난 쌀쌀맞은 여인이었기에 그녀의 이런 반응은 그에게 있어 참으로 의아한 것이었다. 평소의 그녀라면 펄펄 뛰거나 죽인다고 쫓아다닐 것이라 생각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장면을 여러 번 목격한 구본홍은 죽을 각오를 하였다.
 아무런 힘도 없는 시비야 사내에게 이런 꼴을 당해도 변변한 반항조차 못하였지만, 앙칼진 성품의 화령옥녀에게 그런 짓을 하였다가 어떤 처벌을 받을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화령옥녀의 괴롭힘을 더 이상 당하지 않으려면 방법은 그 수밖에 없다 생각하였기에 죽을 결심까지 한 것이다.
 하여 여러 번 좋은 기회를 맞이하였으나 그때마다 망설이다가 돌아서곤 하였다. 후환이 두려웠던 것이다.
 그러던 중 그는 또 다른 시비가 다른 사내에게 같은 꼴을 당하면서 제자리에 주저앉아 우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전에 그녀는 그 사내를 볼 때마다 세상에 뭐 저런 놈이 다 있느냐는 듯한 경멸에 찬 시선을 보내곤 하였었다.
 그런데 며칠 후 그녀는 그 사내 앞에서라면 누구보다도 다소곳한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사내가 뭔가를 이야기하면 꼼짝도 못하고 그가 하자는 대로 하는 것 같았다.
 어느 더운 여름날, 구본홍은 비장한 결심을 하고 홀로 독서삼매경에 빠져 있는 화령옥녀에게 살금살금 다가갔다.
 평상시 같으면 그의 이러한 움직임을 즉각 감지할 수 있었을 것이나 그녀는 한참 서책의 내용에 빠져 있었다. 그것은 시비들 사이에서 몰래 돌려보는 연애를 주제로 한 글이었다.
 한참 사랑하는 연인과 달콤한 입맞춤을 하는 장면을 보고 있던 그녀는 숨죽인 채 서책을 보고 있다가 느닷없이 가슴과 둔부를 주무르는 손길을 느끼고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아악! 누, 누구···? 아니, 너는···? 이, 이런 미친놈!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너 거기 못 서? 야, 임마! 거기 서란 말이야!”
 너무도 더운 날씨였기에 조금 전 수욕을 마친 그녀가 걸치고 있는 의복이라고는 엷은 침의와 비슷한 것뿐이었다.
 서책을 읽던 중 저도 모르게 몸이 뜨거워지는 것 같고, 양볼 역시 달아오르는 것 같아 혹시 누군가가 눈치채면 어떻게 하나 하는 불안한 마음에 찬물로 수욕을 한 그녀였다. 수욕을 하는 짧은 동안에도 다음이 어떻게 전개되었을까 하는 궁금함 때문에 내의도 걸치지 않은 채 서둘러 서책을 잡았던 것이 화근이었다.
 자신의 단단한 살과는 달리 물컹한 기분을 느꼈던 구본홍은 이 순간 죽어라고 도망가고 있었다. 화령옥녀는 당장이라도 녀석을 쫓아가 요절을 내야 한다는 마음이었지만 이제 막 요조숙녀가 되려는 판국에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여 황급히 의복을 걸쳐 입은 그녀는 너무도 분한 나머지 굵은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마침 부근을 지나던 혈전왕은 여식의 이러한 모습을 이상히 여겨 자초지종을 물었고, 그녀는 있는 그대로를 털어놓으며 대성통곡을 하였다.
 잠시 후 구본홍은 혈전왕과 화령옥녀의 면전으로 불려갔다. 그곳에서 그는 자신은 전혀 모르는 일이라고 시침을 뗐다.
 노발대발하여 소리치는 화령옥녀와 혈전왕의 계속되는 신랄한 추궁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방금 전까지 마방(馬房)에서 말들에게 건초(乾草)를 먹이고 있었다며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거의 반시진 가까운 심문이 이어졌지만 구본홍은 끝까지 오리발을 내밀었다. 당시 십 세를 조금 넘긴 그의 모습을 한동안 지켜보던 혈전왕은 그가 아직 음양의 이치를 모를 뿐만 아니라, 감히 상전인 여식에게 그런 해괴한 해코지를 하였을 것이라 상상을 할 수 없었기에 그 일은 그냥 넘어가게 되었다.
 물론 화령옥녀 본인은 마치 미친 암망아지처럼 펄펄 날뛰었으나 누구도 그녀의 말을 곧이 믿는 사람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흑룡방에서 구본홍은 아직 어리기는 하지만 성실함을 인정받고 있었다. 태어난 이후 한 번도 거짓말을 한 적이 없다 믿었기에 그의 말이 사실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이후 화령옥녀는 그가 가까이 다가설 때마다 경계의 눈초리를 보냈다. 물론 구본홍은 자신이 언제 그랬느냐는 듯 공손한 자세를 유지하였다. 한 달 가량이 지날 무렵 한참 콧노래를 부르며 수욕을 하던 화령옥녀는 문틈 사이로 보이는 까만 눈동자를 보고 또 한 번 기겁하며 소리쳤다. 그는 물론 구본홍이었다.
 당시 그녀는 막 거웃이 돋기 시작한 때였으며, 가슴도 하루가 다르게 솟고 있었기에 시비들에게도 자신의 몸을 보여주지 않던 때였다. 괜스레 창피하다 느꼈기 때문이었다.
 수욕을 마친 그녀 앞에 무릎을 꿇고 앉은 구본홍은 모진 추궁을 받았으나 이번에도 끝까지 아니라고 우겼다.
 사실 눈동자만 봤지 다른 것은 볼 수 없었던 그녀는 자신이 추궁받는 것이 너무 억울하다는 듯 항변하는 그를 보고 자신이 잘못 본 것이 아닌가 하는 마음이 들 정도였다.
 이번엔 흑룡방의 모든 사내들의 행적이 조사되었다. 하지만 그녀가 수욕할 당시 모든 사내들은 방주의 훈시를 듣기 위하여 집합해 있었기에 의심받을 사람은 전무하였다.
 결국 남는 것은 구본홍뿐이었다. 하지만 심증은 있으나 물증이 없었기에 유야무야 덮어졌다. 그러나 그녀의 그에 대한 의심의 눈초리는 더욱 예리해질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그에게는 도저히 이룰 수 없는 임무가 계속하여 부여되었고, 실패할 때마다 모진 매질이 기다렸다.
 매를 맞는 동안 그의 눈에선 전과는 다른 빛이 났지만 아무도 이것을 눈치채는 사람은 없었다.
 두 달 가량이 지났을 무렵 이번엔 오수(午睡: 낮잠)를 즐기던 화령옥녀가 내의 속으로 파고드는 손길을 느끼고 또다시 기겁하며 깨어났다. 화들짝 놀라며 깨어난 그녀는 이번에도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구본홍은 그런 그녀를 놀리기라도 하듯 힐끔힐끔 바라보며 괴소를 머금은 채 줄행랑을 놓았다.
 혈전왕에게 사실을 일러바쳤으나 이번에도 억울하다는 표정을 짓는 그의 가증스러운 모습에 펄펄 뛸 수밖에 없었다.
 봉긋한 젖가슴을 어찌나 세게 움켜쥐었는지 시퍼런 멍이 들어 있었으나 부친에게 그것을 보여줄 수는 없었기에 무죄 방면되는 그를 그냥 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 일이 있은 이후 다시는 자신 가까이 다가설 수 없도록 엄청난 일들이 그에게 부여되었다. 거의 삼백여 마리의 말이 있는 마방 청소를 단 하루 만에 끝내라고 하거나, 아름드리 통나무를 하루 만에 장작으로 만들라는 일이 부여되기도 하였다.
 그에게 부여되는 임무는 어린 소년이 감당하기엔 불가능에 가까운 일뿐이었다. 하지만 구본홍은 이러한 모든 일들을 이를 악물고 완수해 냈다.
 수시로 쌍코피가 터지고, 도끼를 들고 장작을 패다 혼절하는 일이 생겼지만 정신이 들 때마다 자신에게 부여된 임무를 완수하기 위하여 혼신의 힘을 다하였다.
 이러한 모습을 지켜보던 다른 하인들이 이를 측은히 여겨 도움의 손길을 펼치려 하였지만 그는 이를 완강히 거절하였다.
 그의 이러한 모습을 우연히 보게 된 혈전왕은 이후에도 유심히 살폈다. 그리고는 그의 성실, 근면함에 내심 탄복을 금치 못하였다. 이렇게 반년 정도 아무 일도 없이 시간이 흐르자 화령옥녀의 관심은 차츰 그에게서 벗어났다.
 서안에 새로 부임한 부주의 독자 금후린(金侯麟) 때문이었다. 그녀보다 두 살이 많은 그는 높은 학문과 무공, 그리고 빼어난 외모로 서안의 규중처자들을 홀리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그의 나이 오 세 때 이미 사서삼경을 줄줄이 암기할 정도의 신동으로 소문났던 그는 수많은 무공 교두들을 갈아치우며 무공을 익힌 것이 소문나 천자가 직접 그의 무공을 시험하고 상으로 황궁무고의 무공비급을 포상하였다 하여 유명해진 인물이었다.
 올해 사십칠 세인 서안부주 금성현(金成賢)의 외동아들인 그는 옥수공자(玉樹公子)라는 외호를 지니고 있었다.
 외모가 뛰어난 사내를 지칭하는 임풍옥수(臨風玉樹) 가운데 뒤의 두 글자를 따온 것이라 하였다.
 그녀와 그의 만남은 새로 부임한 부주가 혈전왕을 알현하기 위하여 예방하였을 때였다. 제아무리 서안 전체를 다스리는 부주라 할지라도 황족에게 잘못 보이면 하루아침에 자리를 잃을 수 있기에 늘상 있는 일이었다.
 의례적인 대화가 오가는 동안 화령옥녀의 시선은 그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 그녀의 이런 시선이 싫지 않은지 금후린 역시 그녀의 옥용을 주시하고 있었다. 이러한 모습을 본 방주와 부주는 둘이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며 추후 사돈을 맺는 것이 어떻겠느냐며 짐짓 너스레를 떨기도 하였다.
 서안부주 금성현은 황족과 사돈지간이 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전혀 없었다. 그것은 혈전왕도 마찬가지였다.
 옥수공자 금후린에 대한 소문을 귀가 따갑게 들어왔던 그인지라 뛰어난 영재인 그를 사위로 맞아들일 경우 득이 있을 뿐 실은 없다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부주와 방주가 술잔을 나누는 동안 같이 산책을 한 화령옥녀는 이날 이후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눈만 감으면 금후린의 준수한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부주의 예방 이후 부친으로부터 은근한 암시를 받았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혹시 금후린과의 혼사가 있을지도 모르니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의미의 말이었다. 황족의 혼사는 천자의 윤허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그렇기에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정혼을 하였으면 싶었지만 천자의 의중을 모르기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아무튼 덕분에 구본홍에 대한 관심이 소홀해질 즈음이었다.
 천지사방이 백설로 뒤덮인 어느 날이었다.
 지난밤 내린 폭설로 인하여 우마의 통행이 불가능해지자 방주는 즉시 눈을 치울 것을 명했다. 흑룡방의 전 인원이 동원되어 눈을 치우는 동안 화령옥녀는 혹시 있을지 모르는 옥수공자의 방문을 대비하여 수욕을 마친 후 머리를 매만지고 있었다.
 콧노래를 부르며 빗질을 하던 그녀는 느닷없이 더듬는 손길에 화들짝 놀라며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큼지막한 태사의 뒤에서 갑자기 사내가 튀어나오며 젖가슴을 덥석 움켜쥐었기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었다.
 또 다른 손은 언제 들어왔는지 궁장 아랫자락 사이로 파고들며 거웃으로 뒤덮인 비궁을 막 덮치려는 순간이었다.
 “아아악! 누, 누구야···? 이, 이런 미친놈! 또 너야? 밖에 아무도 없어요? 아무도 없어요? 누구든지 빨리 들어와 봐요.”
 창졸간이었지만 화령옥녀의 섬섬옥수는 사내의 손목을 움켜쥐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젖가슴과 비궁을 덮치려는 손을 꽉 누른 채 소리쳤으나 사내들은 물론 시비들까지 몽땅 눈 치우기에 바쁜 순간이었는지라 어디에서도 대답이 없었다.
 “이 손은 놓는 게 좋을걸? 누가 들어와서 보면 어쩌려고?”
 구본홍은 현행범이건만 여유 만만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의 기대대로 말이 끝남과 동시에 팔목을 움켜쥔 섬섬옥수에서 힘이 빠지고 있었다. 누구든 들어와서 이 꼴을 보면 무슨 망신인가 싶었던 것이다. 아직 어린 나이이지만 소문이 나면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게 될 것이다.
 게다가 만일 이 일이 옥수공자의 귀에 들어가기라도 한다면 그와의 혼사는 아마 없었던 일이 되어버리고 말 것이다.
 “나가! 빨리 나가란 말이야! 이 나쁜 놈! 아아아아앙···!”
 앙칼지게 소리치는 화령옥녀의 봉목에서는 굵은 눈물이 굴러 떨어지고 있었다.
 “후후! 또 한 번 방주님께 일러 봐!”
 돌아서서 나가는 구본홍의 입에서 튀어나온 소리는 그녀의 방심(芳心)을 갈가리 찢기에 조금의 모자람도 없었다.
 지금껏 매만지던 머리카락이야 어떻게 되건 말건 양 무릎 사이에 고개를 처박은 채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힐끔 바라본 구본홍의 입가에는 만족스런 미소가 어려 있었다.
 제아무리 혈전왕에게 일러바친다 하더라도 그는 믿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순간 구본홍은 자신이 맡은 구역의 눈을 치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할 것이기 때문이다.
 현장 조사를 하게 되면 그곳은 말끔하게 치워져 있을 것이다. 남들보다 먼저 일어나 부지런히 눈을 치워 둔 덕이다.
 그의 말대로 화령옥녀는 이번에도 부친에게 일러바쳤다. 하지만 그는 믿지 않았다. 사춘기에 도달한 그녀가 변덕을 부려 짐짓 그를 괴롭히기 위하여 꾸민 일로 치부되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번에도 불려갔고, 계획대로 눈을 치우고 있었노라 답변하였다.
 총관이 즉시 이를 확인하였고, 어린 소년의 능력을 짐작한 그는 그 시간에 눈을 치우고 있었을 것이라는 대답을 하였음은 물론이다. 억울한 것은 화령옥녀뿐이었다.
 아무도 자신의 말을 믿어주지 않기 때문이었다.
 이후 그녀의 요청으로 그녀의 곁에는 늘 호위가 따라다녔다. 또한 구본홍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사람도 생겨났다.
 하지만 얼마 안 가 묵묵히 자신의 일만 하는 그를 더 이상 감시할 필요가 없다 하여 모든 인원은 철수되고 말았다.
 물론 구본홍은 앙심을 품은 그녀의 말도 안 되는 트집 때문에 혹독한 매질을 당하며 살아야 하였다.
 또다시 여름이 찾아와 하루에도 서너 번씩 수욕을 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더운 어느 날, 시원한 욕조 속에 몸을 담근 채 콧노래를 부르던 화령옥녀의 봉목이 있는 대로 크게 떠졌다.
 요즘은 이틀이 멀다 하고 찾아오는 옥수공자와의 달콤한 시간을 보내느라 마냥 행복하던 그녀였기에 수욕을 하면서도 콧노래가 절로 흘러 나오던 터였다.
 “아악! 누, 누구···? 이, 이런··· 또? 밖에 누구 없어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화령옥녀의 나신은 이미 소녀의 몸이 아니었다. 그녀의 나이 불과 십육 세에 불과하였으나 몸만은 이미 성숙한 여인의 그것과 전혀 다를 바 없을 정도로 잘 발달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런 그녀의 뭉클한 유방과 울창한 숲이 뒤덮고 있는 곳에 사내의 억센 손길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손의 임자는 당연히 구본홍이었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끝이었다.
 “후후! 아무리 소리질러 봐야 소용없을걸? 모두들 너무 더워 곯아떨어졌으니까. 후후! 그리고 전에도 말했을 텐데? 지금 누가 들어오면 누가 더 창피할까? 난 아냐! 들키더라도 죽지 않을 만큼 터지는 것 외에는 없지. 하지만 넌 아닐걸? 옥수공자인지 뭔지 하는 기생오라비같이 생긴 놈하고 당장 끝나게 될 거야.”
 “······!”
 화령옥녀는 그의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는 즉시 입을 다물었다.
 “후후후! 황족이 천출 태생인 하인과 이러고 있다는 것이 세상에 알려지면 아마도··· 후후! 다음은 네 상상에 맡길게.”
 “대, 대체 왜 이러는 거야? 너, 나하고 무슨 원수진 일 있어? 왜 몇 년 동안이나 나한테 이러는 거야?”
 화령옥녀는 자신의 가슴과 비궁이 그의 손에 점령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밀어내기조차 하지 못한 채 눈물만 글썽였다.
 “왜 이러느냐고? 후후! 그건 네가 잘 생각해 봐. 그동안 네가 나한테 어떻게 했는지를··· 호오···! 이건 되게 말랑말랑한데?”
 구본홍은 물컹물컹한 융기를 연신 주물럭거렸다. 아직 음양의 이치를 모르기는 전과 다를 바 없었으나 그 느낌만은 매우 신선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제, 제발 이거 좀 놔줘! 놔주고 말하면 안 돼?”
 화령옥녀는 이 순간 누군가가 들이닥치기라도 한다면 큰일이 날 것이라는 것을 충분히 짐작하기에 큰소리도 치지 못한 채 애원하는 투로 말을 하였다.
 “후후! 어림도 없는 소리! 기분이 좋은데 왜 놔줘? 후후! 우리 엄마 젖도 이랬을까?”
 구본홍 역시 화령옥녀와 마찬가지로 어려서 모친을 잃었기에 단 한 번도 여인의 유방을 만져본 일이 없었다. 그렇기에 이 순간 그는 모친의 젖을 만지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의 기분일 뿐 당하는 화령옥녀는 전혀 아니었다.
 이제 겨우 열세 살밖에 되지 않은 소년에게 자신의 소중한 그것이 마치 떡 주물러지듯 주물러지자 당황스러우면서도 분노가 샘솟고 있었던 것이다.
 “이이··· 나쁜 놈! 빨리 안 놔? 안 놓으면···.”
 “후후! 안 놓으면? 왜, 소리라도 치려고? 후후! 그럼 마음대로 해봐. 우와! 그러고 보니 네 배꼽 무지하게 깊다. 어? 여긴 또 왜 이래? 한번 만져봐도 되겠지?”
 “어머낫!”
 구본홍의 손을 떼기 위하여 웅크리고 있던 몸을 일으키는 순간 그의 시선은 하복부로 향하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울창한 흑림에도 시선이 가게 되었다. 더 이상 침범할 수 없도록 바짝 오므리고 있던 허벅지가 약간 벌어졌기에 손이 자유로워진 그의 손이 흑림을 더듬으려 다가오자 당황한 화령옥녀는 재빨리 욕조 안으로 몸을 집어넣을 수밖에 없었다.
 거웃이 나기 시작한 이래 단 한 번도 외인에게 보여준 적이 없던 나신이었다. 그런데 오늘 겨우 열세 살밖에 안 된 그에게 모든 것을 보여주게 된 그녀의 심정은 미칠 것만 같았다.
 “그, 그만해! 제, 제발! 뭐든지 시키는 대로 할게!”
 “후후! 정말? 뭐든지 시키는 대로 할 거야?”
 아직 치기(稚氣)가 가시지 않은 구본홍은 원하는 소리가 튀어나오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미소를 베어물었다.
 “그, 그래! 뭐든지 시키는 대로 할게. 그러니 이 손은 놓고 제발 다른 데를 쳐다봐!”
 “믿어도 될까? 에잉! 영 믿을 수가 없으니···.”
 두 개의 융기 모두를 그의 우악스런 손에 잡힌 화령옥녀는 울고 싶어졌다. 하지만 아직 어린 소년 앞에서 눈물을 보이기엔 그녀의 자존심은 강해도 너무 강했다.
 “정말이야! 뭐든지 네가 시키는 대로 할게. 그러니 제발···!”
 “좋아! 앞으로 단둘이 있을 때면 내게 주인님이라고 불러. 그리고 뭐든 내가 시키는 대로 다 하고, 알았지?”
 “주인님? 네가 나의···?”
 “왜, 싫어? 싫으면 그만두고. 나야 뭐 죽을 때까지 이렇게 붙잡고 있으면 되지 뭐.”
 마치 세상을 오래 산 사람처럼 느물느물대는 구본홍을 일견한 화령옥녀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알았어. 그렇게 할게. 그러니 이제···.”
 “알았다는 눈치가 아닌데? 어떻게 주인님한테 반말을 해?”
 “뭐라고? 난 너보다 세 살이나 많아.”
 “그래서? 그게 어떻다고? 네 시비들도 너보다 나이가 많은데 너한테 꼭 존댓말을 쓰던데?”
 “···! 아, 알았어요. 주, 주인님! 그러니 이제 제발···.”
 “후후! 좋았어. 앞으로 단둘이 있을 때면 반드시 지금처럼 해야 해. 알겠지?”
 “알았어요. 그러니 이제···.”
 구본홍의 손이 거두어지자 화령옥녀의 시선은 급작스럽게 표독하게 변하였다. 이것을 본 그는 다시 손을 뻗었다.
 “네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아. 그게 어디 주인님을 바라보는 모습이냐? 좀더 공손한 눈빛으로 봐야지.”
 “아, 알았어요. 안 그럴게요. 안 그러면 되잖아요.”
 “후후! 좋아. 난 이제 간다. 넌 하던 수욕이나 마저 마쳐. 알았지? 헌데 오늘 보니까 네 몸은 정말 괴상하게 생겼어. 언제부터 이렇게 변한 거야? 어디 한번 더 만져볼까?”
 “주, 주인님! 제, 제발···.”
 그의 손이 다시 다가오는 것을 보고 사색이 다된 그녀의 입에서 다급한 애원의 말이 터져 나오자 그는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에잉! 촉감이 괜찮았는데··· 난 간다!”
 말을 마친 구본홍은 욕실 바닥의 널빤지를 들어내고는 밑으로 사라졌다. 오늘을 대비하여 미리 뚫어 놓았던 것이다.
 이날 이후 화령옥녀는 구본홍의 장난감이 되었다.
 그녀의 아랫배에 있는 점 이야기만 꺼내면 고양이 앞의 쥐처럼 고분고분해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아직 어려 어떤 것이 세상살이인지를 정확히 모르나 그녀는 이미 혼기를 맞이하고 있기에 그것이 소문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를 충분히 짐작한 탓이다.
 그녀는 그와 단둘이 있는 순간을 없애기 위하여 부단히 노력하였다. 하지만 용변을 보기 위하여 해우소를 찾았을 때나, 홀로 수욕할 때에는 누가 같이 있어 줄 수 없는 순간이다.
 둘 다 적어도 아랫도리는 벗어야 한다는 공통점이 있기에 언제 그가 튀어나와 민망스런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게 될지 모르기에 그녀의 공포심은 극에 달할 수밖에 없었다.
 또 하나, 깊은 밤 홀로 잠을 잘 때였다. 어려서부터 홀로 잠드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있는지라 누가 옆에 있으면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하는 그녀였다. 그렇기에 처음 며칠간은 시비를 불러들였으나 몇 날 며칠을 잠을 못 자 눈이 퉁퉁 부어오르자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홀로 잠을 이뤄야만 하였다.
 깊은 잠에 취해 있을 때야말로 아무런 방비도 할 수 없는 순간이 아니던가!
 하여 매일 밤 불안한 마음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잠이 들곤 하였다. 그녀의 이런 기대는 충분히 충족되었다.
 아랫도리를 까 내리고 해우소에 앉아 있을 때 구본홍이 나타난 것은 정확히 서른일곱 번이나 되었다.
 수욕을 하는 동안 나타난 횟수는 스물여섯 번이다.
 마지막으로 깊은 잠에 취해 아무것도 모른 채 잠들었다가 소스라치게 놀란 경험은 무려 마흔네 번이나 되었다.
 그때마다 가슴의 융기를 떡 주무르듯 주물러대는 그의 손길 아래에서 입술을 깨물지 않을 수 없었다. 누구라도 본다면 개망신이기에 소리조차 칠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화령옥녀에게는 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이 구본홍이 되고 말았다. 언제든 그가 원하면 마음대로 할 수 있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런 불쌍한 처지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대명제국의 황족 가운데 하나인 그녀가 천출인 구본홍의 노리개가 된 이후 그녀의 성격은 점점 더 앙칼지게 변모하였다.
 하여 얻은 외호가 바로 혈나찰이었다.
 그녀는 외인들이 자신을 혈나찰이라 부르는 것을 지극히 싫어하였다. 그렇기에 장한의 등에서 선혈이 솟구치고 있건만 이를 악물고 생사편을 휘두르고 있었던 것이다.
 덕분에 구본홍은 무척이나 편한 나날을 지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불과 반년간이었다. 견디다 못한 그녀가 부친인 혈전왕을 조르고 또 졸랐기 때문이었다.
 흑룡방에서는 매년 신년하례를 하러 황궁으로 향한다. 그때에는 당연히 방주와 그의 일곱 아들, 그리고 화령옥녀가 동행한다.
 그곳으로 향하기 전 흑룡방에서는 미리 사람을 보낸다.
 황궁의 상황을 미리 살피기 위함이었다.
 황궁에서는 혹시 있을지 모르는 모반에 대비하여 모든 출입 인물들에 대한 언동과 누가 누구를 만나는지를 세심히 살핀다.
 만일 모반과 연루되었다는 의심을 받게 되면 그 순간부터 그는 지겨운 인생으로 전락하게 된다. 황족이라 할지라도 매사를 일일이 보고하여야 함은 물론 황궁에서 파견한 인물의 지시를 받아야 하는 처지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그 일은 전적으로 총관인 정검(情劍) 곽후인(郭厚仁)을 보내왔다. 세수 칠십을 훌쩍 넘긴 그는 외호처럼 한 시대를 풍미한 풍류남아였다. 젊어서는 전설의 미남자인 반안이나 송옥과 같이 절륜한 외모로 수많은 여인들의 가슴을 설레게 한 인물이다.
 그는 변화무쌍한 여심을 읽듯 황궁의 움직임을 세세히 살펴 지금껏 단 한 번도 실수를 하지 않도록 하여왔던 인물이기도 하다. 하지만 흐르는 세월은 어쩔 수 없어 그의 머리는 온통 백발이 되어 있었다. 마침 그가 중병을 앓아 운신조차 힘든 지경인지라 혈전왕은 다른 인물을 파견하지 않을 수 없던 상황이다.
 이때 구본홍을 동행시키자는 것이 그녀의 요청이었다.
 혈전왕으로서는 이를 거절할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
 이번에 파견될 수석호법의 시중을 들어줄 종복이 어차피 필요하였는지라 그녀의 요청은 흔쾌히 허락되었다.
 명을 받은 구본홍의 얼굴에는 묘한 빛이 흘렀다.
 하나는 당분간 화령옥녀를 괴롭히는 재미를 더 이상 누릴 수 없다는 아쉬움과 천하에서 가장 호화롭다는 황도(皇都)를 구경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는 기쁨의 빛이었다.
 ‘후후! 그 계집이 농간을 부렸군. 좋아, 당분간은 그냥 놔두지. 하지만··· 후후! 영원히 잊지 못하도록 해주지.’
 구본홍은 아주 어려서부터 도와주는 이 없이 홀로 성장하였다. 그의 부친은 혈전왕의 명을 받아 흑룡방을 떠난 지 거의 십여 년이 되었다. 따라서 불과 두 살 때부터 홀로 모든 것을 처리하여야만 하였다. 그렇기에 아직 어린 나이이지만 생각만은 어른 못지않게 조숙하였기에 이런 말투를 사용하는 것이다.
 황도로 향하기 하루 전, 구본홍은 은밀히 화령옥녀의 규방을 찾았다. 그곳에서 그는 곤히 잠들어 있는 그녀를 한동안 보고 서 있었다. 지난날 자신을 괴롭힌 벌로 그녀에게 못할 짓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안 한 바는 아니었다. 하여 이쯤에서 손을 뗄 생각도 하였으나 그렇게 하였다가는 또 전과 같이 고달픈 인생을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를 악물고 찾은 것이다.
 이제 황도로 떠나면 당분간은 서로 얼굴 볼 일은 없을 것이다. 그 기간이 얼마나 될지는 모르나 자신이 그녀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확실히 각인시키기 위해선 오늘 밤 무언가를 하여야 한다 생각하고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잠시 후 화령옥녀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잠에서 깨어났다. 또다시 악몽과도 같은 순간이 되풀이되고 있기 때문이었다.
 엷은 침의 사이로 파고든 억센 손이 불룩 솟은 융기를 떡 주무르듯 주무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둔부도 마찬가지였다.
 어려서부터 너무 많은 일을 하였기에 구본홍의 손은 십삼 세 소년의 손이라고 하기엔 너무 컸고, 거칠었으며, 억셌다.
 “주, 주인님! 오늘은 또 왜···?”
 낮에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있으면 그녀를 찾곤 하던 그였다. 화령옥녀는 오늘은 자신이 잘못한 것이 하나도 없다 생각하였기에 마음 편하게 잠자리에 든 터였다.
 또한 내일이면 지긋지긋한 그가 황도로 떠날 것이기에 오늘 밤만 지나면 완전한 자유를 누리게 될 것이라는 기대에 들떠 잠시 잠 못 이루고 전전반측(輾轉反側: 잠을 이루지 못해 이리저리 뒤척이는 것)하다가 간신히 든 잠이었다.
 “몰라서 물어? 네가 나를 황도로 쫓아 보내려는 속셈이었다는 것을 전혀 모를 줄 알았어?”
 “그, 그건··· 아, 아니에요. 소녀가 그런 게 아니에요.”
 “후후! 아니긴 뭐가 아니야?”
 속셈을 들킨 화령옥녀는 한눈에 보기에도 잔뜩 겁에 질려 있었다. 구본홍은 자신이 넘겨짚은 것이 사실이라는 확신이 들자 괴소를 베어물었다.
 “흐흐흐! 그런 발칙한 꾀를 냈으니 벌을 받아야 해. 안 그래?”
 “아악! 그, 그래요. 소녀가 잘못했어요. 한 번만 용서해 줘요.”
 화령옥녀는 유실을 지그시 꼬집는 그의 우악스런 손길에 아미를 잔뜩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좋아! 스스로 잘못한 것을 알았으니 벌을 받아야 해. 지금 즉시 홀랑 벗는다, 실시!”
 “예에? 뭐, 뭐라고요?”
 “왜? 귀가 먹었어? 어서 몽땅 벗으란 말이야.”
 “어, 어떻게···? 창피하게···.”
 “크흐흐! 너의 알량한 몸뚱이는 지금껏 수도 없이 봐왔어. 그런데 뭐가 창피하다는 거야? 빨리 안 벗어? 내가 벗겨 줄까?”
 “아, 아니에요. 버, 벗을게요.”
 화령옥녀는 성난 구본홍의 얼굴을 보며 황급히 스스로 의복을 벗어 내렸다. 걸치고 있는 것이라고는 젖가리개와 고의, 그리고 침의(寢衣)뿐이기에 완전한 나신이 되는 데 걸린 시간은 불과 일 다경도 채 되지 않았다.
 “좋아! 이제 조금 옆으로 가 봐!”
 그의 명에 순순히 침상의 한 켠으로 비켜 앉자 구본홍 역시 의복을 홀랑 벗은 후 그녀의 곁에 누웠다. 그리고는 강제로 그녀의 머리를 잡아당겨 자신의 어깨에 기대게 한 후 입을 열었다.
 “오늘은 여기서 자고 간다. 불만 없지?”
 “아, 알았어요.”
 이미 그의 장난감이나 다름없는 처지라는 것을 모르지 않는 화령옥녀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만일 그의 말을 듣지 않으면 큰소리로 사람을 부를 것이고, 그러면 자신만 개망신당할 것이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지금껏 한번 발을 들여놓으면 끝도 없이 빠져든다는 수렁 속으로 자신이 잠겨든다는 느낌에 치를 떨었으나 이제와 후회해 보았자 아무 소용도 없는 일이었다.
 구본홍이 이러는 이유는 이렇게 하면 여인들이 확실하게 사내의 말을 잘 듣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흑룡방은 결코 명문정파가 아니었다. 서안의 야간 치안을 담당한다는 명목 하에 상인들로부터 은자를 뜯어내는 집단이기에 흑룡방에 속해 있는 사내들 대부분은 색을 즐기는 편이었다.
 물론 여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정숙한 여염집 처녀가 몸담을 만한 곳이 전혀 못되는 곳이었다. 그렇기에 겉으로 드러내놓고 그러는 것은 아니지만 흑룡방의 밤은 여기저기에서 신음성이 터져 나오는 곳이었다. 하여 아직 어리지만 구본홍은 거의 매일 사내와 계집이 내는 소리를 들으며 성장하였다.
 하지만 아직 순진한 구석이 남아 있기에 다른 사내들처럼 남들이 있는 방문에 구멍을 내고 들여다보는 짓은 하지 않아 아직 남녀상열지사(男女相悅之事)가 정확히 어떤 것인지를 모르고 있었다. 그저 사내와 계집이 이렇게 알몸이 된 채 서로를 끌어안고 밤을 지새우기만 하면 아이가 생기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다시 말해 오늘은 화령옥녀로 하여금 회임을 시키려는 목적에 스며든 것이다. 그렇게 되기만 하면 어쩔 수 없게 되므로 죽을 때까지 자신을 괴롭히지 않고 말을 잘 들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 것이다. 아직 어린 나이이기에 자식이 생긴다는 것이 어떤 것이라는 것을 전혀 짐작도 못하기에 이런 생각을 한 것이다.
 한편 화령옥녀는 자신의 곁에 누운 구본홍이 어떤 짓을 할지 몰라 까만 밤을 하얗게 지새우지 않을 수 없었다.
 낮에 무슨 고된 일을 하였는지 자리에 눕자마자 코를 골며 잠든 그의 모습을 지켜보던 그녀는 스르르 자리에서 일어선 후 일장에 그를 내리쳐 죽일 생각도 해보았다. 하지만 자신의 침상에서 그가 알몸인 채로 죽어 있었다는 소문이 번지면 그야말로 엄청난 일이라 생각하였기에 힘없이 손을 내려놓아야만 하였다.
 자다 일어나서 자신이 의복을 걸치고 있는 모습을 보면 무슨 소리를 할지 몰라 의복도 걸치지 못한 채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던 그녀의 봉목에선 어느새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혼기가 꽉 찬 규중처자의 알몸을 수없이 주물럭거린 소년이 비록 나이가 어리다고는 하나 엄연한 사내이기에 자신의 청백이 이미 깨졌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어 흘리는 눈물이었다.
 “흐흑! 흐흐흑···!”
 “으으음···! 어? 왜 그래? 왜 아침부터 울고 난리야? 초상이라도 났어? 으음! 그러고 보니 내가 가는 것이 슬퍼서 그래? 그렇다면 나말고 다른 놈을 보내라고 해!”
 “아,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어쩌다 이렇게 되었나 싶어 자신의 불행한 처지를 비관하며 흐느끼던 화령옥녀는 얼른 섬섬옥수로 눈물을 훔쳤다.
 “호오···! 그러니까 내가 가기는 가야 한단 말이지?”
 “주, 주인님! 사내란 모름지기 천하를 주유해 봐야 한다고 들었어요. 지금껏 서안을 떠나본 적이 없으시니 이 기회에···.”
 “알았어, 알았다고. 이리 가까이 와 봐!”
 “아얏! 아, 아파요!”
 얼떨결에 가까이 다가앉았던 화령옥녀는 유두가 떨어져 나갈 정도로 아프자 나직한 비명을 질렀다.
 “흐흐! 갔다가 올 테니 잘 있어. 알았지? 조금만 있으면 재미있는 일이 생길 거야.”
 “재미있는 일이요?”
 “하하! 두고 보면 알아. 그럼 난 간다.”
 구본홍은 같은 침상에서 발가벗은 채 밤을 지새웠으니 이제 조금만 지나면 그녀의 배가 서서히 불러올 것이고, 열 달이 되면 아기가 생길 것이라는 순진한 생각에 싱긋 미소까지 지어 보인 후 마루 밑을 통하여 사라졌다.
 “흐흐흑! 흐흐흐흑···!”
 그가 사라지고 난 뒤 잠시 동안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화령옥녀는 눈물을 떨구며 흐느꼈다. 그가 말한 재미있는 일이란 자신이 그의 노리개로 전락하였다는 소문이 번질 것이라는 것으로 짐작한 탓이다. 자신이 꾀를 부려 그를 황도로 보낸 앙갚음을 하려는 것으로 오인한 것이다.
 “흐흑! 소문만 내 봐! 네놈을 지옥 끝까지 쫓아가서라도 반드시 죽여버리고야 말겠어.”
 잠시 흐느끼던 그녀의 눈물 젖은 옥용이 들리는가 싶더니 나직하면서도 결의에 찬 음성이 터져 나왔다.
 오늘 화령옥녀는 구본홍이 떠나는 모습을 보고 주청에 들러 차나 한잔하려 하였다. 그가 떠나고 나면 속이 시원할 것만 같았는데 막상 떠나고 나자 앞으로의 일이 걱정되었기에 어떻게 할 것인가를 곰곰이 생각해 보려는 것이었다.
 물론 자신의 규방에서도 충분히 생각을 가다듬을 수 있으나 그곳보다는 왁자지껄한 주청에서 홀로 찻잔을 기울이며 생각에 잠기는 것도 괜찮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 탓이다.
 또 하나, 혹시 자신과 관련된 소문이 있는지 알기 위함이기도 하였다.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는 말이 있듯, 한번 번지기 시작한 소문은 제아무리 천자라 할지라도 막을 수 없다.
 하지만 원천을 봉쇄한다면 어쩌면 가능한 일일 것이다. 만일 구본홍이 소문을 내기로 마음먹었다면 누군가에게 이야기하였을 것이고, 그것이 차츰 번지기 시작할 것이다.
 소문을 내는 자를 발견한다면 그를 추궁하여 누구에게 들었는지를 묻고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다 판단되면 모조리 잡아들이라는 명을 내릴 참이었다.
 이것이 오늘 아침 그녀가 침상에서 생각해 낸 묘안이었다.
 그러던 차에 자신에게 혈나찰이라 하는 졸개를 발견하자 분기탱천하여 생사편을 휘두르고 있는 것이다.
 “아아악! 사, 살려주십시오. 으으으윽···!”
 이십여 차례나 채찍에 맞은 장한은 애원의 말을 꺼내다가 그대로 혼절해 버리고 말았다. 제아무리 단단한 몸을 지녔다고는 하나 내공이 실린 채찍질을 견뎌내기엔 무리가 있기 때문이었다.
 
 
 제2장 황궁에서 얻은 기연
 
 
 “자, 지금부터 본좌가 하는 말을 잘 들어라. 일단 황궁에 발을 들여놓은 이후 절대 해서는 안 되는 것이 몇 가지 있는데···.”
 흑룡방 수석호법인 지옥혈견(地獄血犬) 종자백(宗自栢)의 잔소리는 끝이 없었다. 한번 찍히면 설사 지옥 끝까지 따라가서라도 반드시 상대를 요절내고야 만다는 그였다.
 지금까지 그의 이런 잔소리는 해도 너무한 것이었다. 서안에 있는 흑룡방의 정문을 나서는 순간부터 지금까지 했던 소리를 하고, 또 하고, 또 하고 하였던 것이다.
 사실 지옥혈견은 단 한 번도 황궁 구경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매사가 조심스러워진 그는 총관인 정검 곽후인을 찾아가 가르침을 청한 바 있었다. 그런데 그가 누구이던가, 세수 이미 칠십을 훌쩍 넘긴 사람이 아니던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노인들의 잔소리란 끝이 없는 것이다.
 그것은 늙은 사내보다 노파가 심하면 심했지 덜하지 않다. 오죽하면 노파심(老婆心)이라는 말이 있겠는가!
 정검 곽후인은 분명 사내였지만 잔소리 하나만은 웬만한 노파 뺨칠 정도였다. 하여 황궁행이 결정된 이후 지옥혈견은 줄곧 정검의 처소에서 잔소리를 들어야 하였다.
 지엄한 황궁의 법도를 조금이라도 어기면 주공인 혈전왕 일가에 누를 끼치는 일이기에 지옥혈견은 그야말로 화염지옥에 빠져도 견딜 수 있는 인내심으로 그의 잔소리를 들어야 하였다.
 그것이 그대로 수행원들에게 전달되고 있었던 것이다.
 “흠! 그러므로 이번 황궁 출입시에는 홍아(弘兒), 너만 수행하도록 해라. 알겠느냐? 그러니까 너는···.”
 한참 잔소리를 늘어놓던 지옥혈견은 혈기왕성한 수하들을 대동하고 들어갔다가 자칫 궁녀들에게 추파라도 던져 개망신을 당할 수도 있다는 판단 아래 아직 어린 구본홍만 데리고 들어가기로 결정하였다. 그와 동시에 지금껏 그의 잔소리를 듣던 사내들은 일제히 떨어져 나갔다.
 황궁 안에 발을 들여놓지 않는 이상 자신들은 더 이상 지겨운 잔소리를 듣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들의 표정은 황궁 구경을 놓친 아쉬움보다는 잔소리에서 해방되었다는 기쁨 때문인지 잔뜩 찌푸려졌던 이맛살을 편 모습이었다.
 한편 구본홍은 지옥혈견이야 떠들거나 말거나 호화스런 황도의 풍물을 구경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고개를 두리번거리면서 바라보는 곳마다 서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규모를 지닌 고루거각들이 즐비하였다.
 황도의 중심부에 위치한 등과대로(登科大路)는 사두마차 열 대가 동시에 지날 수 있을 만큼 넓은 도로였다.
 이 등과대로 좌우로 고루거각들이 처마를 잇대고 있는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순간 지옥혈견 역시 잔뜩 긴장한 모습으로 전면을 살피고 있었기에 구본홍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해 있지 않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혀를 조금이라도 잘못 놀리거나, 의심받을 행동을 하였을 경우 엄청난 재앙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정검의 말을 떠올리고 있었기에 잔뜩 긴장한 것이다.
 이제 곧 원단이 다가오겠기에 고루거각들의 지붕에는 백설이 덮여 있었지만 등과대로에는 눈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정갈한 모습이었다.
 수없이 지나치는 인파 사이를 헤치고 들어간 곳은 황궁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호화스런 객잔이었다.
 “흐음! 영빈객잔(迎賓客棧)이라··· 과연··· 과연···!”
 칠층 누각으로 이루어진 객잔은 겉으로 보기에도 어마어마한 규모일 뿐만 아니라 화려하기 이를 데 없는 모습이었다.
 기둥마다 용솟음치는 용들이 양각되어 있었는데 지금이라도 승천할 듯 너무도 생생한 모습이었다. 뿐만 아니었다. 금분을 입힌 기둥들은 석양을 받아 찬란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헤헤! 어서 옵쇼. 저희 객잔으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그 역사가 무척이나 오래되어···.”
 객잔 입구에 있던 점소이가 얼른 달려오며 구본홍이 쥐고 있던 말고삐를 빼앗듯 받아 쥐며 간사스런 웃음을 지었다.
 “허허! 되었다. 말에게 좋은 먹이를 듬뿍 주고 우리는 좋은 자리로 안내하거라.”
 “헤헤! 흑룡방에서 오셨군요?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이곳 영빈객잔은 정검이 매년 들르는 곳이었기에 흑룡방의 문장인 가슴의 흑룡을 보고 즉각 신분을 파악한 모양이었다.
 “헌데 전에 오시던 어르신은 이번엔 안 오신 모양입니다.”
 “허허! 그래, 이번엔 본좌가 대신 왔지.”
 잠시 후 일행은 이층에 마련된 창가 좌석에 앉을 수 있었다. 밖은 아직 엄동설한인지라 매우 추웠지만 안쪽에 지펴놓은 화로에서 이글거리는 열기가 뿜어져 나오기에 창문을 열어 두어도 그리 춥지 않은 좌석이었다.
 곧 음식이 나왔고 술까지 곁들여졌기에 지옥혈견을 비롯한 장한들이 먹고 마시는 동안 배를 채운 구본홍은 신기한 듯 두리번거리면서 주위를 살피느라 여념이 없었다.
 주청 내부에 있는 인원은 대략 백여 명 정도 되었다.
 그 가운데에는 관복을 걸친 관료들이 대부분이었으나, 상인으로 보이는 자들도 상당수 있었다. 나머지는 무림인인 듯 병장기를 휴대한 자들이 있었으나 그들의 수효는 얼마 되지 않았다.
 주청의 가장 안쪽 자리에는 늙은 노파와 붉은 피풍(皮風: 겨울의 추운 바람을 막기 위하여 가죽으로 만든 의복)을 걸친 이제 열서너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소녀 하나가 있었다.
 구본홍의 시선을 끈 것은 바로 그 소녀였다. 화령옥녀와 견주어도 전혀 밀리지 않을 깜찍한 모습이었기 때문이었다.
 지옥혈견을 비롯한 사내들이 한참 침을 튀겨 가며 과거에 있었던 무용담을 떠벌리고 있을 즈음 심심해진 그는 해우소로 가는 척하며 슬며시 자리를 떠 소녀가 있는 곳으로 향하였다.
 하지만 그녀의 곁에서 음식을 먹고 있는 추괴(醜怪)한 노파의 쭈글쭈글한 모습을 본 그는 돌아서지 않을 수 없었다. 노파는 꿈에서나 볼 수 있었던 무서운 귀신의 모습과 흡사하였던 것이다.
 호호백발인 머리카락이 그러하였고, 진물이 흘러내리는 눈과 온통 주름투성이인 얼굴, 마지막으로 노인치고는 너무도 붉은 입술과 그 사이로 보이는 숭숭 빠진 이가 어우러진 모습은 너무도 흉측하게 보였던 것이다.
 “그러니까 혜아야, 세상 사내들은 몽땅 늑대고 도둑놈이라는 것을 절대로 잊으면 안 된다. 알겠지?”
 “알았어요, 사부님!”
 노파의 말에 소녀는 잘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방심하면 큰일나. 그러니까 앞으로는 정신 바짝 차리고··· 어? 넌 왜 거기에 있느냐? 어서 가지 못해?”
 한참 소녀에게 뭔가를 주입시키려던 노파는 주변에서 얼쩡거리는 구본홍을 발견하고는 빨리 사라지라는 듯 손을 휘둘렀다.
 “여긴 아무나 드나드는 주청인데 왜 할머니가 가라 마라 하시는 거죠? 전 지금 배가 불러서 운동을 해야 돼요. 헌데 저기 일행이 있어 밖으로는 나갈 수 없고···.”
 “뭐라고? 이놈이 감히···? 빨리 내 눈앞에서 사라져. 만일 없어지지 않는다면··· 네놈의 다리몽둥이를 분질러놓고 말 거야.”
 노파의 손에 들려 있던 젓가락이 분질러지는 것을 본 구본홍은 슬금슬금 물러서지 않을 수 없었다. 대나무로 만든 그것은 웬만해서는 부러지지 않는 청죽(靑竹)으로 만든 것이었다.
 절개를 상징하는 그것은 몹시도 질겨 억지로 분지른다 하더라도 매끈하게 부러지는 법이 없는 것이다. 헌데 그것이 마치 도끼로 자른 것처럼 매끈하게 잘려 나갔던 것이다.
 “보아라! 저 어린놈이 벌써부터 근처에서 어슬렁거리지 않느냐? 자고로 사내란 젊으나 늙으나 밝히기는 매한가지이니라. 그러니 정신 똑바로 차리도록 하여야 한다. 알겠지?”
 “사부님! 그럼 제자는 이 다음에 어떻게 혼례를 올리죠?”
 “헬헬! 그건 걱정하지 말아라. 때가 되면 이 사부가 알아서 다 구해 줄 터이니, 알겠지? 그러니 너는 무공연마에만 온 정신을 쏟으면 된다. 자, 이제 음식도 다 먹었으니 어서 가자.”
 “알았어요. 이것만 마저 먹고요.”
 소녀는 남은 만두를 입 안에 집어넣고 우물거리면서 약간 떨어진 곳에서 바라보고 있는 구본홍을 향하여 생긋 미소를 지었다. 너무도 깜찍한 모습에 저도 모르게 한발 내디디려던 그는 노파의 엄한 눈길에 찔끔하며 또다시 물러서지 않을 수 없었다.
 ‘이크! 마귀할멈 같으니···.’
 구본홍은 내심 투덜거리면서 객잔 밖으로 나가는 소녀를 멍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노파가 들고 있는 용두괴장(龍頭怪杖)을 본 사람들은 슬금슬금 물러서고 있었다.
 강호의 경험이 전무한 구본홍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기에 다른 사람들 역시 노파의 흉측한 몰골 때문에 겁이 나서 그러는 줄로 알고 혓바닥을 날름거렸다.
 ‘헹! 마귀할멈 같은 노파 같으니··· 에구! 저 계집애는 뭐가 좋다고 저런 노파를 사부로 모셨담? 쯧쯧···!’
 구본홍이 마귀할멈으로 보고 있는 노파는 강호에서도 아주 유명한 노파였다. 그녀의 외호는 한빙파파(寒氷婆婆)였다.
 지금으로부터 칠십여 년 전 강호에는 말하는 꽃이란 의미인 해어화(解語花)라는 외호를 지닌 절세미녀가 있었다.
 그녀는 막강하던 철검문(鐵劍門) 문주의 일점혈육이었다.
 그녀의 나이 방년 십칠 세 때 부친과 함께 강호행을 하던 그녀는 임풍옥수가 따로 없을 멋진 청년을 만나게 되었다.
 소림사 방장인 법허선사의 속가제자인 그는 생사불검(生死佛劍)이라는 외호를 지녔으며 약관의 나이에 무림비무대회를 제패한 신예고수였다. 둘은 첫눈에 반하여 봉밀(蜂蜜)처럼 달콤한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당시 무림에는 해어화와 미모를 견줄 만한 미녀 하나가 더 있었다. 남서시(南西施)라 불리던 그녀는 금릉성주의 여식이었다.
 우연히 그녀를 만나게 된 생사불검은 매정하게도 해어화를 버리고 그녀와 혼례를 올려버렸다. 이를 알게 된 그녀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슬픔을 느끼고 강호에서 사라졌다.
 너무도 속이 상한 나머지 하룻밤 만에 새까맣던 머리카락이 온통 백발로 변한 뒤였다. 그리고는 이십 년 만에 다시 나타났다.
 그녀가 사라질 즈음 그녀의 무공은 보잘것없었으나 다시 나타났을 때에는 절세고수로 변모하여 있었다. 강호로 나온 그녀는 제일 먼저 생사불검을 찾았다. 자신을 버린 원수를 갚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그는 십 수 년 전 의문의 실종을 당한 뒤였다.
 복수할 상대를 잃은 그녀는 누구든 사랑을 배반하는 자를 만나면 절대 용서하지 않았다. 덕분에 그녀의 손속에 한 많은 이승을 떠난 바람둥이들과 색마들이 부지기수였다.
 그녀는 매정한 사내들을 응징하기에 앞서 스스로 변명할 기회를 주었다. 또한 늘 삼초를 양보하였다. 하여 명문정파나 무림세가의 제자들이 수없이 죽었음에도 일체의 항변을 할 수 없었다. 거기엔 몇 가지 이유가 있기 때문이었다.
 첫째는 누가 보기에도 늘 공정하게 처리하였기 때문이었다.
 둘째로는 암수를 사용하거나 누군가와 합공을 한다든지 하는 일이 전혀 없었다. 무림에서는 하루에도 수십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된다. 원한 때문이기도 하지만 비무를 하던 중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는 일이 다반사였다. 따라서 정당한 비무로 목숨을 잃었기에 항의할 수 없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녀의 한 맺힌 과거를 동정하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한빙파파라는 외호를 얻었고, 소면악의(笑面惡醫) 마달군(馬達君)과 더불어 무림이괴(武林二怪) 중 하나가 되었다.
 그녀의 신물이나 다름없게 된 용두괴장은 웬만한 병장기로는 상대할 수 없는 기물이었다. 겉으로 보기엔 그저 나무를 깎아 만든 것처럼 보이나 실상은 상고시대 때 살던 철각룡(鐵角龍)의 등뼈로 만들어졌기에 마치 금강석처럼 단단하기 때문이었다.
 가공할 내공이 실린 용두괴장이 허공을 가르면 마치 얇은 병장기가 내는 것과 같은 파공음을 내기에 구파일방의 장문인들조차 그녀와 조우하면 한 수 양보해야 할 정도였다.
 그러던 그녀가 돌연 사라진 것은 십 수 년 전이었다. 그리고는 얼마 전 어린 소녀와 함께 나타났다.
 덕분에 십 수 년 간이나 여인들을 농락하던 바람둥이들이나 색마들은 그녀만 보면 도주하기에 바쁘게 되었다. 이곳 황도에는 교언영색(巧言令色)으로 여인들을 후리는 사내들이 유달리 많은 곳이었다. 하여 요즘 그들에겐 비상이 걸린 상태였다.
 조금 전 구본홍이 보았던 사내들이 바로 그런 자들 중 일부였다. 그는 이러한 사정을 전혀 모르기에 그녀를 보고 마귀할멈 운운한 것이었다.
 “엇! 이게 뭐지?”
 구본홍은 소녀가 앉았던 자리에 놓여 있는 자그마한 비단주머니를 발견하고는 슬그머니 집어들었다. 한빙파파가 사라진 주청에서는 한창 사내들의 음담패설이 난무하고 있었기에 그의 이런 행동을 눈여겨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비단주머니를 열어볼 생각도 하지 않은 채 품에 쑤셔 넣고는 슬그머니 제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일행은 여전히 황궁에 대한 지옥혈견의 연설을 듣고 있던 중이었다.
 ‘흐음! 이건 나중에 만나면 돌려줘야지. 후후! 고 계집애 되게 깜찍하게 생겼던데···.’
 이것이 바로 구본홍의 성품이었다. 보통 사람 같으면 호기심 때문에라도 비단주머니를 열고 내용물을 확인하여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 귀중품이 들어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를 고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구본홍은 아예 열어보지도 않고 나중에 만나면 돌려줄 생각부터 하고 있었다.
 어려서 여러 사람들의 눈치를 보아야 하였던 그는 선하다기보다는 어떤 면으로는 매우 영악하였다. 그렇다고 그가 선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험한 세파를 헤치고 살아 남으려면 그렇게 하지 않고는 안 되기 때문에 그런 쪽으로 발달된 것이다.
 그렇기에 화령옥녀를 그렇게 다룬 것이다.
 잠시 후면 돌아올 줄 알고 잔뜩 기대에 들떠 있던 구본홍은 지옥혈견이 자리에서 일어서도록 소녀가 오지 않자 약간은 실망한 상태였다. 그렇다고 그를 따라나서지 않을 수 없었기에 그의 뒤를 따르면서 연신 뒤를 살폈으나 깜찍한 소녀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다음날 잔뜩 멋을 부린 지옥혈견의 뒤를 따르는 구본홍은 이제 잠시 후면 으리으리한 황궁 내부를 구경할 수 있다는 기대에 잔뜩 부풀어 있었다.
 자금성(紫禁城)이라 이름붙은 황궁은 천자를 상징하는 별자리인 자미성(紫微星)과 왕성을 뜻하는 금성(禁城)이 합쳐져 만들어졌다는 설명을 들은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웅장한 궁성을 바라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전대 천자인 영락제(永樂帝) 때 완공된 이것은 십사 년에 걸친 대역사 끝에 지어졌다 하였다.
 팔백여 개의 궁전과 구천이백여 개의 방이 있다는 자금성은 외조(外朝)와 내정(內庭)으로 구분되어 있다.
 외조에는 태화전(太和殿), 중화전(中和殿), 보화전(保和殿) 등 천자의 집무궁전이 있고 내정에는 건천궁(乾天宮), 교태전(交泰殿), 곤녕궁(坤寧宮) 등이 있는데 천자와 황족들이 기거한다 하였다.
 자금성의 바닥에는 모두 벽돌을 깔았는데 땅 밑을 뚫고 들어올지 모르는 침입자를 대비하기 위하여 사십여 장 두께로 깔려 있다 하였다. 성벽 밖에는 너비 십사 장 정도 되는 해자(垓字)가 파여 있다고 하였다. 가히 철옹성(鐵甕城)이라 할 만하였다.
 지옥혈견은 정검에게서 들은 지식을 자랑이라도 하려는 듯 구본홍에게 연신 황궁에 대한 설명을 하였다.
 흑룡방에서라면 한낱 종복인 그에게 이런 소상한 설명을 해주는 일은 아마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곳 황궁에서 흑룡방 수석호법이란 자리는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니었다.
 아무도 눈길조차 주지 않는 것은 물론 만나는 사람마다 정중한 포권을 하기에도 바쁜 일개 신민일 뿐이다. 따라서 잘난 척을 하고 싶은데 대상이 없기에 이러는 것이다.
 덕분에 구본홍은 황궁 구조에 대한 소상한 설명을 들으며 천천히 걸었다. 이곳에 들기 전 황궁에서는 걸음걸이조차 세속과 다르다면서 천천히, 그러면서도 기품 있게 걸어야 한다고 한참을 교육받았기에 그의 걸음걸이는 평상시와는 사뭇 달랐다.
 구본홍은 억지로 걷는 걸음걸이가 생경하여 죽을 맛이었지만 지옥혈견의 엄한 시선 때문에라도 괴상한 걸음걸이를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걷는 자세는 결코 편해 보이지 않았다.
 두 발은 천천히 움직이면서도 양손은 양쪽 허벅지에 밀착시킨 채였기 때문이었다. 구경을 하느라 좌우로 시선을 돌릴 수만 있을 뿐 그의 머리는 전면을 향한 채 꼿꼿하게 고정되어 있었다.
 오문(午門)을 지나고, 금수교(金水橋)를 지날 무렵부터는 지옥혈견 역시 바짝 굳은 표정을 지은 채 좌우로 눈알만 굴릴 뿐이었다. 천자에게는 수많은 혈족들이 있기에 지옥혈견과 같은 형편에 놓인 사람들이 한둘이 아닌지 많은 사람들이 그와 비슷한 모습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이러한 모습을 본 구본홍은 내심 웃음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으나 억지로 참지 않을 수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오가건만 대화를 나누거나 소리를 내는 사람은 전무하였기에 질식할 것만 같은 적막에 잠겨 있었기 때문이었다.
 ‘젠장! 이러고 사람이 어떻게 살아? 아이고, 미치겠네. 이건 걸음걸이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다니··· 그런데 대체 황궁무고는 어디에 있는 거야? 무림인들의 말에 의하면 황궁 안 어딘가에 분명히 있다고 들었는데··· 아까 수석호법께서 설명할 때에도 황궁무고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는데 한번 물어볼까? 아냐, 괜히 입을 열었다가 경을 칠지도 몰라. 나는 그저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면 되니까 일단 따라가기만 하자.’
 겨 묻은 개가 똥 묻은 개를 보고 나무란다는 말이 있고, 제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남의 눈의 티를 본다는 말이 있듯 본인 역시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을 정도로 바짝 얼어붙은 모습으로 걷는 구본홍의 안면은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억지로 참느라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잠시 후 지옥혈견은 황공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금의위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정검이 제아무리 소상하게 설명을 하였다 하더라도 불과 며칠만에 사소한 모든 것까지 설명할 수는 없다.
 하여 지옥혈견은 금실로 수놓아진 의복을 걸친 금의위가 무척이나 높은 직급의 인물인 것으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안내하는 자는 금의위 가운데에서도 가장 낮은 직급에 속하는 자였기 때문이었다.
 “여기서부터는 종복을 대동할 수 없으니 혼자 따라오시오.”
 “아, 알겠소이다. 홍아, 너는 여기에서 기다리고 있거라.”
 높은 사람의 앞이라 그런지 지옥혈견은 다정다감한 음성으로 말을 한 후 뒤도 돌아보지 않고 금의위를 따라 들어갔다.
 홀로 남게 된 구본홍은 내정을 구경할 기회를 놓쳤다는 사실에 입맛이 무척 쓴지 잠시 인상을 찌푸린 채 멈춰 있다가 차라리 잘되었다는 듯 싱긋 미소를 지으며 돌아섰다.
 이제부터는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에 토를 달 사람이 전무하였기에 내친김에 황궁을 좀더 자세히 보려는 것이었다.
 하여 이곳저곳을 자세히 둘러본 그는 아홉 마리의 용이 있는 거대한 벽 앞에 멈춰 섰다.
 “우와! 정말 대단하군. 누가 만들었는지 정말 대단해···.”
 그가 연신 감탄사를 터뜨리고 있는 곳은 바로 구룡벽(九龍壁)이라 명명된 곳이었다. 아홉 마리 용이 제각기 다른 자세를 취하고 있는 그곳에서 한참을 감탄하다 뒤로 돌아섰을 때 제법 먼 곳에 있던 금의위 가운데 하나가 손짓하는 모습을 본 구본홍은 식지(食指)로 자신을 가리키며 눈을 크게 떴다.
 나를 부르는 것이냐는 몸짓이었다. 그러자 금의위는 그렇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오라는 손짓을 취하였다.
 “이런, 제기랄! 여긴 들어오면 안 된다는 팻말 때문인 모양이군. 가만, 지금 가면 치도곤을 당할 텐데 어쩐다?”
 구본홍은 구룡벽 삼 장 내로 접근하지 말라던 팻말의 글귀를 떠올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황궁에 들기 전 무엇이든 제아무리 사소한 잘못을 한다 하더라도 황궁 내에서는 엄한 처벌이 뒤따른다는 것을 상기하였기에 도주하려는 것이다.
 그러던 중 금의위가 도저히 따라오지 못할 곳을 발견한 그는 싱긋 미소를 지으며 나가는 척하다가 즉각 그곳으로 전력질주를 시작하였다. 그러자 그가 나올 것으로 믿고 있던 금의위가 깜짝 놀라며 즉각 그의 뒤를 따르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 사소한 일로 소란을 피우면 금의위 역시 처벌받을지 모르는 일이기 때문인 모양이었다.
 잠깐 사이에 구본홍은 자신을 따르는 네 사람의 금의위를 보고 깜짝 놀라며 재빨리 보아두었던 곳으로 몸을 날렸다. 아마도 전음을 주고받은 모양이었다.
 구본홍이 숨어든 곳은 태화전과 중화전 우측에 있는 용정(龍亭)이라는 현판을 달고 있는 정자 비슷한 전각이었다.
 다른 곳은 모두 정갈한 상태였지만 그곳만은 수북한 백설이 쌓여 있었다. 그것으로 미루어 용정은 아무나 드나들 수 없는 곳이라는 판단을 내린 것이고, 무엇보다도 전각 자체가 바닥에서 대략 한 자 정도 높이 들어올려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직 소년인 자신은 그 사이로 파고들 수 있지만 어른인 금의위는 절대 따르지 못하리라는 판단이 선 것이다.
 “꼬마야, 멈춰라! 거기 서! 멈추란 말이야! 멈추지 않으면 안 돼. 거긴 들어가면 안 돼! 이런, 빌어먹을···! 빨리 나와. 너 이 녀석, 빨리 나오란 말이야. 안 나오면 혼난다.”
 용정 가까이 다가선 금의위는 마룻바닥 사이로 파고드는 구본홍을 끌어내기 위하여 허리를 잔뜩 숙인 채 팔을 뻗었다. 그러나 그의 신형은 이미 용정의 중심부로 파고드는 중이었다.
 용정의 바닥은 외부만 한 자 높이이고 안쪽으로 들어가면 대략 석 자 높이 정도 되었기에 빠른 속도로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잠시 팔을 뻗었던 금의위들은 그것으론 안 된다는 것을 깨닫는 즉시 창을 찔러 넣었으나 그마저도 소용이 없었다.
 잠시 후 금의위의 숫자는 수십여 명으로 늘어났다.
 하지만 아무리 숫자가 많다 하더라도 용정의 중심부에 있는 구본홍을 끌어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잠시 무언가를 상의하는가 싶더니 금의위들은 일제히 사라졌다. 그리고는 잠시 후 무언가를 들고 왔다. 그것은 활이었다. 만일 밖으로 나오라는 명에 따르지 않으면 그것으로 구본홍을 쏘려는 것이다.
 “으악! 저걸로 나를 죽이려고? 안 돼! 어떻게 하지···? 나가면 분명 경을 칠 텐데··· 으와! 정말 큰일이군. 뭐 좋은 수가 없을까? 에이, 괜히 가까이 다가가서··· 어떻게 하나? 아아아앗···!”
 당황하여 어쩔 줄 몰라하던 구본홍이 얼떨결에 만진 것은 널빤지를 받쳐주는 들보와 들보 사이에 걸쳐져 있던 작은 쇠막대였다. 무심코 그것을 잡아당기자 바닥이 갈라지면서 그 사이로 떨어져 내렸기에 다급성을 지른 것이다.
 그가 떨어져 내린 후 곁에 있던 흙더미가 무너져 내리며 그가 빠진 곳을 덮어버렸다.
 쿠웅―!
 “아아아악!”
 구본홍은 둔부에서 느껴지는 둔중한 충격과 함께 비명을 지르고는 그대로 혼절해 버렸다. 그도 그럴 것이 떨어져 내린 높이가 거의 오 장에 가까운 높이였기 때문이었다.
 “끄으으으응! 으으으! 으으으으···! 여, 여긴? 여긴 어디지?”
 자신의 손가락조차 볼 수 없을 정도로 칠흑 같은 어둠에 싸여 있기에 아무것도 볼 수 없던 그는 더듬더듬 이것저것을 더듬어 보았으나 차디찬 바닥 외에는 아무것도 만져지지 않았다.
 떨어진 충격 때문인지 아직 일어설 수조차 없던 그는 지렁이처럼 꿈틀거리면서 무작정 앞을 향하여 기어갔다.
 인공이 가미된 것이 분명한 편평한 바닥을 기다가 지쳐 잠들었다가 깨어나면 다시 기기를 무려 사흘간이나 계속하였지만 여전히 손에 닿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심한 갈증과 배고픔 때문에 돌아버릴 지경이 된 그의 손에 마침내 무언가가 닿았다. 부드러우면서 축축한 것이 닿자 무작정 뜯어낸 그는 즉시 입으로 가져갔다.
 “으와, 써! 으으··· 퉤퉤퉤!”
 아무런 냄새도 풍기지 않는 그것은 마치 소태처럼 썼다. 하여 입 안에 넣었던 것을 뱉어낸 그는 기진하여 잠이 들고 말았다.
 한참 후 잠에서 깨어난 그는 무의식적으로 일어서려 하였으나 떨어지면서 허리를 다쳤는지 일어설 수 없었다.
 “으으윽! 허리가 부러진 건 아닐까? 젠장! 사내가 허리가 부실하면 나중에 큰일난다고 하던데···.”
 나직이 투덜거린 구본홍은 또다시 기어갔다. 우측엔 계속하여 쓴맛이 나는 이상한 것이 있었고, 좌측엔 여전히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게 거의 십리는 기어간 것 같은데 변한 것이 하나도 없자 죽을 것만 같은 갈증 때문에 미칠 것만 같던 구본홍은 결국 쓰기만 한 것을 입 안에 우겨 넣지 않을 수 없었다.
 “으으! 써···! 퉤퉤퉤!”
 너무도 쓰기에 또다시 뱉어버리고 한참을 기었으나 그래도 마찬가지이자 결국 그것을 또다시 먹을 수밖에 없었다.
 배고픔과 갈증을 더 이상 이겨낼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떨어져 내린 지 엿새가 지난 날이었다.
 우걱, 우걱, 우걱, 우걱···!
 정신없이 먹었지만 여전히 맛은 지독하게도 썼다. 배가 부를 때까지 먹고는 밀려드는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곯아떨어졌다.
 드르렁! 드르르렁! 퓨우···! 음냐, 음냐, 드르렁! 드르르르렁! 퓨우···! 드르렁! 드르르렁! 퓨우···! 음냐, 음냐···!
 이틀이나 잠에 취해 있다 깨어난 구본홍은 자신이 원형 석실 한 귀퉁이에 누워 있다는 것을 깨달음과 동시에 일어나 앉았다.
 “어! 여긴 대체 어디지? 맞아! 황궁이었지. 헌데 이런 곳도 있었나? 혹시··· 맞아! 어쩌면 여기가 황궁무고라는 곳일지도 몰라. 어? 내가 왜 이렇게 커진 거야? 그리고 전에는 아무것도 안 보였는데··· 이상하다, 허리도 많이 아팠는데··· 어! 이건 뭐지?”
 구본홍은 전과 달리 건장한 청년처럼 커진 신체가 이상하였다.
 전에는 하도 궂은일을 많이 하여 손아귀만 억셌지 섭생이 시원치 않아 같은 나이의 소년들보다 마르고 작은 편이었는데, 지금은 육 척 장신에 탄탄한 신체로 변해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둘러봐도 빛이 흘러들어오는 곳이나 횃불, 그리고 야명주(夜明珠) 같은 것이 없건만 사방이 훤히 보이는 것도 이상하였다. 마치 백주대낮처럼 모든 것이 선명하게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중 손에 잡히는 이상한 것을 발견하고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았다. 마치 매미 날개 같은 그것은 반투명한 물체로 촉감이 매우 부드러웠다.
 구본홍 본인은 까맣게 모르는 일이지만 허공에서 떨어져 내림과 동시에 허리에 심각한 손상이 있었다. 그렇기에 일어설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허리가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가 죽음과도 같은 깊은 잠에 취한 사이 그의 신체에서는 묘한 반응이 있었다. 첫째는 그의 체내 혈맥을 타고 흐르던 미약한 진기의 움직임이 갑작스럽게 증폭되면서 마치 성난 파도처럼 기경팔맥과 전신 혈도를 타고 돌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하여 잠든 사이 그의 전신 곳곳이 솟아올랐다 꺼지기를 수없이 반복하였다. 이 과정에서 체내에 쌓여 있던 온갖 독소와 노폐물들은 모공을 통하여 체외로 배출되었다.
 뿐만 아니라 무림인이라면 누구나 소원하는 막혀 있던 임독양맥(任督兩脈)과 생사현관(生死玄關)까지 단숨에 타통되어 버렸다.
 그 과정에서 허리의 부상은 말끔하게 치료되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그의 피부가 한 꺼풀씩 벗겨지기 시작하였다.
 아홉 차례나 계속하여 뱀이 허물을 벗듯 피부가 벗겨지는 동안 전신 근육이 꿈틀거리면서 점차 커져 갔다. 정작 본인은 모르고 있었지만 엄청난 기연을 만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모든 현상의 근원은 그가 먹은 쓴맛을 내는 것 때문이었다.
 원형 석실의 벽면에는 습기 때문인지 진초록 빛깔을 띤 이끼 같은 것들이 가득히 있었다. 그 가운데 극히 일부분만이 자줏빛을 띠고 있었는데 그가 뜯어먹은 부위가 바로 그곳이었다.
 기껏해야 어른 손바닥 서너 개를 합친 것 만한 부위였다.
 그것의 정확한 명칭은 지령석태(地靈石苔)였다.
 세상의 온갖 해괴한 것들만을 기록한 산해경(山海經) 대황남경편(大荒南經篇)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송산지저(宋山之低) 묵암지처(墨暗之處) 유자석태(有紫石苔) 명지령석태(名地靈石苔) 인세불현(人世不現) 천고영약(千古靈藥)··· 범인어식(凡人於食) 무병장수(無病長壽) 백세득자(百世得子)―하략.
 송산 아래 빛 한점 없는 곳에 자색을 띤 이끼가 있다. 그것의 이름은 지령석태로 한 번도 인세에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나타나기만 한다면 그것은 천고영약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범인이 이를 복용한다면 평생 무병장수할 뿐만 아니라 세수 백 세에도 자식을 볼 수 있으며, 젊음을 유지하는 효용이 있다. 만일 이를 무인이 복용한다면 탈태환골(脫胎環骨)하여 능히 백년 내공을 얻게 될 것이다.>
 
 빛 한점 없는 어둠 속에서만 자라는 지령석태는 완벽한 습도가 유지되어야 자라나는데, 백년은 족히 자라야 약효가 있는 것이다. 백년을 채우지 못한 것은 진초록 빛을 띠고 있는데 이를 복용하면 전신에 발진이 돋고 고열로 신음하다 죽게 된다.
 구본홍이 처음 입 안에 넣었다가 너무 써서 뱉은 것은 진초록 빛을 띤 것이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겨우 어른 손바닥 서너 개를 합친 면적만큼 밖에 없는 자색 빛깔의 지령석태를 복용한 것은 그야말로 천우신조라 아니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무공을 전혀 익히지 않은 덕에 영원한 젊음을 유지할 수 있는 신체로 탈바꿈하게 되었으며, 동정(童貞)을 잃지 않았기에 순수한 원양지체(元陽之體)가 되기도 하였다.
 지령석태는 음습한 지저에서 땅의 정기를 흡수하며 성장하는 것이다. 대략 일백년에 걸쳐 음기(陰氣)에 해당하는 그것을 흡수하다 보면 극에 이르게 되는 순간이 있는데 이때 진초록에서 자색으로 빛깔이 바뀌게 된다.
 마성(魔性)이 극에 이르면 더 이상 그것에 지배를 받지 않는 극마지경(克魔之境)에 이르듯 음기가 포화상태가 되는 순간 몽땅 양기(陽氣)로 변환하게 되는 것이기에 색깔이 바뀌는 것이다.
 본시 음기였던 것이기에 양기로 변환된다 하더라도 음양이기와 상충(相衝)하지 않기에 천고영약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구본홍의 체내로 흡수된 지령석태의 영효는 그에게 마르지 않는 정력을 지니게 하는 것이다.
 또 하나 겉으로 드러난 변화가 있다면 그의 오관이 단정해졌다는 것이다. 허물 벗기를 하는 동안 불균형하였던 오관이 제자리를 찾아 정확한 대칭을 이루었기에 전과 다르게 준수한 외모를 지니게 된 것이다.
 “여기가 대체 어디지? 아무것도 없으니··· 어! 저건?”
 아무것도 없는 원형 석실 내부를 두리번거리던 그는 반대편 벽 쪽에 다른 곳과 달리 약간 들어간 곳을 발견하고 가까이 다가갔다. 석실 내벽은 온통 진초록 이끼로 뒤덮여 있기에 웬만한 안공으로는 도저히 식별할 수 없는 차이였으나 지령석태를 복용한 덕에 예리한 시선을 지닐 수 있게 된 것이다.
 “여기가 밖으로 나가는 출구인 모양이군.”
 구본홍은 서둘러 이끼를 뜯어내기 시작하였다. 오랜 세월 동안 자생한 이끼는 그 두께만 해도 거의 두 치는 족히 되었다.
 손가락을 찔러 넣고 뜯어내기 시작하자 예상외로 잘 뜯어졌다.
 만일 지령석태를 복용하기 전이었다면 어림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복용한 덕에 신력(神力)이라 할 수 있는 근력을 지니게 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직 진초록인 지령석태는 서로 엉겨붙어 있기에 질기기 이를 데 없는 것이었다. 반면 완전히 숙성되어 자색을 띠게 되면 밑이 들뜨기에 쉽게 뜯어진다.
 이 상태로 대략 사흘이 지나면 서서히 말라붙게 되는데 닷새가 지나면 완전한 흑색으로 변하고 바위처럼 단단해진다.
 이것은 사람이 도저히 복용할 수 없다.
 구본홍이 그것을 뜯어먹은 것은 완전히 숙성된 지 이틀이 지났을 때였다. 절묘하게 시간을 맞춰 복용한 것이다. 또한 그렇기에 그토록 쉽게 복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건 뭐지? 에이, 문이 아니고 글씨잖아···.”
 지령석태가 떨어져 나간 자리에는 누군가가 새겨놓은 글자들이 빼곡하게 음각(陰刻)되어 있었다.
 
 <어서 오너라. 이곳 인연동(因緣洞)에 든 것을 환영하노라.
 이곳에 발을 들여놓은 이상 그대는 십색마교(十色魔敎)의 대를 이을 후인이다. 본 교주는 한창때 화화공자(花花公子)라 불리던 십색마교의 제이십팔대 교주인 무영신군(無影神君) 고두호(高斗豪)라는 어르신이다. 백년의 세월을 격하고 후인을 만나게 될 것을 생각하면 감개가 무량하고 또 무량하도다.
 본 교주의 노년에 천기를 짚어본 바 이곳에 들 후인이야말로 본교의 무궁한 발전에 크게 기여할 것임이 틀림없기에 이곳에 본교의 무공을 남긴다. 부디 본교의 성세를 사해팔황에 널리 떨치기를 바라 마지않노라.
 십색마교 제이십팔대 교주 무영신군 고두호>
 
 “무공? 여기에 무공구결을 남겼단 말이야?”
 무영신군이 남긴 글귀를 읽은 그의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다.
 흑룡방에는 무공을 익힌 자들이 많이 있었다. 그들은 무공을 익히지 않은 자와는 확연히 달랐다. 높이가 일 장이 넘는 담장 위로 훌쩍 날아오를 수도 있었고, 병장기를 휘두르면 경풍이 발생되어 가까이 다가서기도 전에 밀려나기도 하였다.
 하여 어떻게든 그것을 익히고 싶었으나 아무도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었다. 하긴 아직 어린 소년에게 진지한 자세로 무공을 가르쳐 주려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 것인가!
 게다가 구본홍은 천하디천한 종복이었다. 아무나 걷어차도 감히 항변조차 할 수 없는 그에게 누가 무공을 전수해 주겠는가?
 무공을 익히고 싶었으나 기회가 없던 그는 화령옥녀가 무공 교두에게 무공을 전수받을 때면 약간 떨어진 곳에서 지켜보곤 하였었다. 물론 그녀가 심부름을 보냈을 때에는 그렇게 할 수 없었기에 그가 알고 있는 무공 초식은 서로 연결이 전혀 되지 않는 것들이었다. 띄엄띄엄 배웠기에 그러한 것이다.
 아무도 가르쳐 준 바 없는 문자를 알고 있는 것도 사실은 무공을 익히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것 역시 화령옥녀의 어깨너머로 배운 것이다. 하지만 그 열의만은 대단하여 모르는 글자는 거의 없을 정도였다.
 구본홍은 서둘러 원형 석실의 모든 이끼들을 뜯어내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석벽 가득히 문자들이 새겨져 있었다.
 그러던 중 여러 개의 문을 발견한 그는 첫 번째 문으로 들어갔다. 거기엔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침상과 수백여 개의 단지들이 놓여 있었다. 안에 든 것은 허기를 메워 줄 벽곡단( 穀丹)이었다. 한 사람이 적어도 백년은 먹을 분량이었다.
 또 다른 석실엔 두 개의 못이 있었다. 크기로 보아 하나는 마실 물이고 다른 하나는 수욕을 하도록 한 모양이었다.
 또 하나의 석실에는 높이와 길이가 각기 일 장 가량 되는 서가가 줄을 잇고 서 있었다. 그 수효는 정확히 일백팔 개였는데 서가 하나당 천여 권의 서책이 꽂혀 있으니 대략 십만 권 가량의 서책들이 있는 셈이었다.
 마지막 석실에는 십팔반 병기들과 의복 등이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었고, 큼지막한 철궤 하나가 놓여 있었다.
 안에 든 것은 휘황찬란한 빛을 발하는 온갖 금은보화였다.
 “우와! 이 정도면 엄청난 거부 소리를 듣겠군.”
 이날 이후 구본홍은 침식을 잊고 무공연마와 독서에 빠져들었다. 가장 마지막 석실에 놓여 있는 양피지에는 대성을 이루기 전에는 외부로 나갈 수 없다 기록되어 있었다.
 그것은 다른 석실의 문과 같은 모습이었는데 손잡이가 없었다. 겉으로 보기엔 그냥 석벽이었으나 그곳 외에는 밖으로 향할 수 없다 하였다. 물론 떨어져 내렸던 구멍으로 다시 나가는 방법도 있었을 것이나 그것은 어림도 없는 일이다.
 애초 이곳에 떨어져 내리기 전 그의 체구는 왜소하다 표현해도 좋을 만큼 작았었다. 하지만 지금은 성인과 마찬가지인 몸집이다. 떨어져 내린 그 구멍은 환기를 위한 작은 구멍이었기에 그곳을 통하여 밖으로 나갈 수는 없는 것이다.
 인연동의 위치는 자금성 외벽의 아래였다.
 이곳에 황궁이 지어지기 전 무영신군은 이미 이 석실을 축조하였다. 지저 오십여 장 깊이에 있는 지하암동을 개조하여 만든 것으로 위에 황궁을 축조하면서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떨어져 내린 직후 혼절하였기에 구본홍이 모르고 있었으나 애초에 인연동의 환기구는 비스듬하며 구불구불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또한 중간중간 기관도 설치되어 있었다.
 짐승들이나 빗물의 유입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
 십색마교에서는 인연동 부근에 황궁이 축조된다는 소식을 듣고 석실이 발각될 것을 우려하여 제자들로 하여금 황궁 축조에 가담토록 한 바 있었다. 하여 구불구불하던 환기구 중 일부를 제거한 뒤 용정 아래에 환기구가 위치하도록 하였다. 그리고는 사람들의 범접을 막기 위하여 흙을 북돋워 두었다.
 그렇기에 지금껏 온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용정은 오로지 천자와 황후만이 오를 수 있는 곳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지금껏 발견되지 않은 것이다.
 아무튼 이렇게 인연동 내에서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십색마교의 원래 명칭은 색마교(色魔敎)였다.
 천하에 산재한 바람둥이들이 모여서 만든 집단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색마교라는 명칭을 사용할 수는 없었다.
 그랬다가는 당장 무림공적으로 지목되어 끊임없는 공격에 직면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여 앞에 열 십(十)자를 추가한 것이다. 그것의 의미는 천하의 모든 여인들을 몽땅 차지하겠다는 의미를 지닌 완전한 숫자인 것이다.
 요염함과 관능적임, 청초함과 우아함, 풍염함과 현숙함, 고고함과 고아함, 마지막으로 지성미와 백치미까지를 두루 갖춘 여인을 두고 흔히 십전완미(十全完美)의 미인이라고 하지 않던가!
 그런 의미의 ‘십’자를 포함시킴으로써 문파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으려 하였던 것이다.
 과연 색마 집단다운 교령이었다.
 아무튼 십색마교는 이렇게 출발하여 한때에는 그 성세가 대단하였었다. 그때가 바로 무영신군이 교주로 있을 때였다.
 이 세상 어떤 여인의 빙심(氷心)이라도 녹일 수 있는 교언영색과 방중술, 그리고 막강한 무공을 지니고 있던 시기였다.
 명문정파는 물론 마도와 사도문파에서 조금이라도 중요한 위치에 있는 여인이라면 십색마교 제자의 은밀한 유혹을 받았다. 물론 그럴듯한 신분으로 위장한 뒤였다.
 뼈와 살이 온통 불타버릴 것만 같이 뜨거운 밤을 지새우던 여인들은 지극한 쾌감의 바다에 빠져 허우적대면서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무공구결을 털어놓았다. 이것이 바로 백여 년 전 한동안 십색마교를 천하제일방파로 만들었던 근원이었다.
 하여 십색마교의 무공은 구파일방과 무림세가, 마도와 사파의 거의 모든 무공이 망라된 것이었다. 물론 장점은 극대화시키고 단점은 보완한 것이다. 그렇기에 무영신군이 한때 천하제일인이나 앉을 수 있는 옥좌에 앉을 수 있었던 것이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고 권불십년(權不十年)이라는 말이 있듯 십색마교가 천하를 지배한 것은 정확히 십년이었다.
 근원도 알 수 없던 십색마교가 욱일승천(旭日昇天)의 기세로 무섭게 성장하는 것을 시기의 눈으로 바라보던 강호의 모든 방파들은 은밀한 조사를 시작하였다. 그들이 사용하는 무공이 왠지 자파의 무공과 유사한 점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 자파의 여제자나 여식들 가운데 요직에 있는 여인들 몇몇이 청백을 잃었으며, 외부로 사문의 무공을 유출시켰다는 자백을 받아냈다. 전 강호에서 거의 동시에 이러한 일이 일어났기에 십색마교는 즉각 무림공적으로 지목되었고, 총공세를 당했다.
 제아무리 강한 무공을 지닌 제자들로 이루어진 문파라 할지라도 노도(怒濤)와 같이 몰아닥치는 전 무림인들의 파상적인 전면 공세에는 당해 낼 수 없었다. 하여 십색마교는 삼 일 만에 강호에서 사라졌다. 이것은 공식적인 일이다. 일만에 달하는 십색마교 제자들 가운데 무영신군을 비롯한 수뇌부 이십여 명의 시신은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었지만 그렇게 발표된 것이다.
 십색마교를 치기 위하여 강호의 모든 정파와 마도, 그리고 사파가 모여 급조한 척살마교단(擲殺魔敎團)의 단주인 당시 소림사의 장문방장 법허선사(法虛禪師)가 엄청난 인원을 동원하고도 색마들을 섬멸하지 못하였다는 지탄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당연히 천하인들은 색마들이 모두 사라졌다며 쌍수를 들고 환호하였다. 그리고 척살마교단은 즉각 해체되었다.
 속이야 어찌되었건 겉으로는 소기의 목적을 이루었기에 더 이상 조직을 운영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무림인들이 자파의 무공을 훔쳐간 십색마교를 그대로 둘 리 없었다. 하여 이후에도 천하 곳곳을 샅샅이 뒤지는 엄청난 수색작업이 있었다. 하지만 무영신군 등은 하늘로 솟았는지 땅으로 꺼졌는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이때가 바로 인연동이 축조되던 시기였다. 모두들 지저 암동에서 세월을 축내며 석벽에 무공구결을 기록하고 있었던 것이다.
 석벽에 기록되어 있기를 천기를 짚어 후인의 출현을 고대한다고 기록되어 있었으나 그것은 사실과는 달랐다.
 무영신군이 천하제일인에서 졸지에 쫓기는 신세가 된 것을 감추기 위하여 허장성세를 부린 것이다. 구본홍은 모르고 있으나 원형 석실의 한 귀퉁이에는 이십여 구의 고루들이 있다.
 그것은 바로 무영신군 등 십색마교의 수뇌부들의 시신이다.
 이십여 명 중 살아서 밖으로 나간 사람은 단 하나뿐이었다.
 그는 무영신군의 노복인 추왜타(醜倭駝) 갈호진(葛湖振)이었다.
 가장 강하며 교주인 무영신군이 아닌 그가 최후의 생존자가 된 것은 그의 왜소한 체구 때문이었다. 본시 천연적인 지하암동을 인연동으로 개조하면서 설계를 잘못하여 자신들이 있는 곳에서 빠져 나갈 수 있는 길을 만들어 두지 않는 실수를 저질렀다.
 있다면 오직 하나, 높이 한 자에 너비 칠 촌 가량의 환기를 위한 구멍뿐이었다. 전신의 뼈마디를 축소시켜 일시적으로 체구를 작게 만드는 축골공(縮骨功)을 모르는 바는 아니나 그것은 길어야 일각 정도밖에 시전할 수 없는 것이다.
 환기구의 길이는 무려 오십여 장에 달하는 것이었다. 축골공을 시전하면 내공을 사용할 수 없기에 도저히 일각 안에 빠져 나갈 수 있는 거리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내공의 반만 사용해도 같은 크기로 줄어들 수 있는 추왜타가 선택된 것이다.
 처음의 계획은 외부로 나간 뒤 밖에서 사람들을 동원하여 인연동을 파괴하여 안에 갇힌 이들을 구출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임무는 완수되지 못하였다.
 통로를 빠져 나가기는 하였으나 워낙 좁은 곳이었기에 통로를 빠져 나가는 동안 완전히 기진맥진한 추왜타는 소모된 진기를 보충하기 위하여 운기조식에 들어갔다.
 무림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운기조식 중에는 누가 슬쩍 건드리기만 하여도 주화입마에 빠지게 된다.
 자연적인 동혈을 인연동으로 개조하느라 뚫려 있던 동혈을 하나 막은 것이 있었다. 그 안에는 본의 아니게 갇혀 굶주린 수십여 마리의 쥐들이 있었다. 추왜타가 운기조식에 몰두하여 있는 동안 굴을 뚫고 나온 놈들은 그의 품속에서 풍기는 건량(乾糧)의 냄새를 맡고 미친 듯이 달려들었다.
 덕분에 추왜타는 주화입마에 빠지고 말았다. 그리고는 그대로 열흘 동안이나 사투를 벌여야 하였다. 간신히 정신을 차린 추왜타는 바닥을 기다시피 밖으로 향하였다.
 그리고는 품속의 은자로 인력을 구하려 하였으나 모든 것을 거리의 무뢰한들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그가 구걸로 얻은 은자로 간신히 인력을 구한 뒤 다시 인연동으로 돌아왔을 때에는 이미 모든 것이 끝나 있을 때였다. 시신 썩는 냄새가 진동하자 추왜타는 눈물을 흘리며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이후 혼신의 노력으로 십색마교의 명맥을 유지하던 중 황궁 축조 소식을 듣고 제자들을 파견하여 인연동을 보호하였다.
 그토록 공을 들였던 인연동도 인연동이지만 영면에 잠든 무영신군의 유해가 드러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이런 젠장! 또 그러네. 대체 뭐가 잘못된 거야?”
 이년간이나 서실에 처박혀 온갖 서책을 두루 섭렵한 구본홍의 모습은 예전과는 사뭇 달랐다. 머리카락은 허리까지 자라 있었고, 가슴을 뒤덮을 듯한 수염이 돋아 있었다. 무엇보다도 달라진 것은 바로 그의 안광이었다. 전과는 달리 세상만사를 모두 꿰뚫고 있는 듯한 현묘한 빛이 흘러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석벽의 무공구결 중 가장 처음 읽어본 것은 만묘신공(萬妙神功)이라는 심법이었다. 그것을 읽던 중 수없이 나타나는 혈도의 명칭에 곤혹스러워진 그는 즉각 서실로 달려갔다.
 그것이 대체 무엇인지 알아보기 위함이었다. 거기에서 의서(醫書)를 펼쳐든 그는 그 내용에 흠뻑 빠져버렸다.
 그것을 읽다가 모르는 것이 나오면 또 다른 서책을 펼쳤고, 거기에서도 궁금한 것이 있으면 또 다른 서책을 펼쳤다. 하여 지난 이년간 그가 읽은 서책은 무려 삼천여 권에 달하였다.
 흑룡방에 머무는 동안 체계적으로 학문 익히기를 갈망하던 그인지라 모르는 것을 새로 익히는 재미에 푹 빠져 지냈던 결과였다. 덕분에 이제 그 어느 누구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학식을 지니게 되었다.
 글을 읽을 줄 모르는 바보와 한림원 학사의 눈빛은 다르다. 그의 뇌리에 학문이 켜켜이 쌓이게 되었기에 눈빛이 변한 것이다.
 모든 학문을 두루 섭렵한 후 석벽을 마주보며 결가부좌를 틀고 있던 구본홍의 입에서 나직한 투덜거림이 연신 터져 나오고 있었다. 석벽에 기록된 대로 운기를 하였다 하면 즉각 사내의 상징인 하물이 부풀어오르기 때문이었다.
 아직 십색마교의 실체를 모르기에 지금과 같은 곤혹스런 현상이 분명 뭔가 잘못된 것이라 짐작한 그는 몇 날 며칠 동안 석벽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대략 십여 일이 흐른 뒤 구본홍의 얼굴에는 멋쩍은 미소가 어렸다.
 “후후! 이건 정말 대단하군··· 과연 만묘신공이라 할 만해! 사내가 아니라면 익힐 수 없는 것이 유일한 흠이군.”
 구본홍은 무공구결에 아무런 하자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뒤 운기행공에 들어갔다. 그러자 전과 같이 하물이 꼿꼿하게 일어섰다. 만묘신공은 운기조식을 하는 동안 사내의 정력을 극대화시킴은 물론 하물을 단련시키고, 안공마저 증진시킨다.
 또한 뇌의 기능 역시 극대화시켜 행공을 하면 할수록 총명하게 해주는 효용마저 지니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행공을 하면서도 사방을 살피거나 말을 할 수도 있을 뿐만 아니라 내공까지 사용할 수도 있다. 무엇보다도 다른 심법과 다른 점은 행공을 시작하는 즉시 전신 혈도들이 절로 위치를 바꾸게 된다는 것이다.
 명문정파의 심공 대부분은 익히기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내공 증진이 더딘 것이 흠이다. 반면 마공의 경우에는 속성이 가능하다. 하지만 오랜 세월이 지난 뒤를 비교해 보면 마공이 정공만 못하다. 내공의 정순(精純)함에서 뒤떨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묘신공은 이러한 단점도 없었다. 내공 증진이 여타 마공과 같이 빠를 뿐만 아니라 정순하기도 하다.
 그렇기에 구본홍이 감탄사를 터뜨린 것이다.
 반년간이나 만묘신공을 운용한 결과 구본홍의 안광은 또다시 변모하였다. 전에는 총기가 어린 눈빛이었으나 이번엔 평범해도 너무 평범한 모습으로 변한 것이다.
 그사이 둔재(鈍才)도 아닌 그렇다고 수재(秀才)도 아닌 그저 평범 그 자체였던 그의 두뇌는 엄청난 변화를 겪었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그의 두뇌는 갈고 닦아져 영롱한 빛을 내는 금강석처럼 반짝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심법을 운기할 때 이외에는 전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서실의 서책들을 두루 섭렵하였다. 인연동 내에서는 그것 외에는 딱히 할 만한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서실에는 기반(基盤)이 없었고, 비파(琵琶)나 칠현금(七絃琴)도 없었다. 또한 종이와 붓도 없었지만 금기서화(琴棋書畵)에 달통하게 되었으며, 천문지리(天文地理)와 진법까지 익혔다.
 다시 말해 사람의 두뇌에 담을 수 있는 모든 것이 담겨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 안에는 십색마교의 자랑인 환희열락대법(歡喜悅樂大法)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것은 가히 천하제일의 방중술이었다. 수백 년을 면면히 이어 온 십색마교의 모든 색마들이 지닌 바 모든 기량들을 모두 모아 장점만을 취합하여 농축시킨 그것은 어떤 여인이라도 쾌락에 젖어 울부짖게 만드는 효용이 있는 것이다.
 설사 철천지원수 관계라 할지라도 일단 환희열락대법에 걸리게 되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 품에 매달리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제3장 환희열락대법
 
 
 그것은 음양화합을 하는 동안 여인에게 쾌락만을 선사하는 단순한 방중술이 아니었다. 눈짓이나 가벼운 미소, 심지어는 은밀히 속삭이는 음성만으로도 여인을 절정에 달하게 할 수 있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여심을 사로잡는 지상최고의 대법이었다.
 이것을 익히는 동안 구본홍은 과거 자신이 화령옥녀에게 하였던 짓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흑룡방을 떠나기 전날 그녀와 같이 발가벗은 채 밤을 보낸 것만으로는 회임시킬 수 없다는 것도 깨달았다.
 “제기랄! 이젠 세월도 많이 지났으니 다시 만나면 잡아먹으려 하겠군. 젠장! 이젠 전처럼 그럴 수도 없으니···.”
 언제 어느 자세로도 만묘신공을 시전할 수 있는 단계에 도달하자 출운신룡검법(出雲神龍劍法)이라는 삼초식의 검법구결을 마주보고 선 구본홍은 그 현묘함에 혀를 내둘렀다.
 제일초 출룡파미(出龍破尾)는 검을 운용함에 있어 경중(輕重)과 완급(緩急) 등 모든 묘용이 망라되어 있는 검초였다.
 제이초 쾌섬(快閃)은 오로지 빠르기만을 추구하는 쾌검초였다. 상대가 발검하기도 전에 먼저 상대의 인후를 베거나 꿰뚫을 수 있는 것이다. 마지막 제삼초는 만변(萬變)이라는 것으로 이것은 공격보다는 방어에 더욱 효용이 있는 것이다.
 다음에 익히기 시작한 것은 신법(身法)이었다. 무영신군 본인이 모든 경신법들을 망라하여 창안한 것으로 그의 외호에 무영(無影)이란 두 글자가 들어가게 한 결정적인 것이다.
 일 갑자 내공을 지닌 무인이 일 도약에 오를 수 있는 높이는 대략 오 장 정도 된다. 하지만 비룡신법(飛龍身法)이라 이름붙은 이것을 시전하면 단숨에 이십여 장을 치솟을 수 있게 된다.
 게다가 섬전의 속도를 낼 수 있기에 웬만한 안력을 지닌 사람들은 시전자의 신형조차 제대로 볼 수 없다.
 그가 마지막으로 익힌 것은 단 일초식뿐인 초마금강지(超魔金剛指)라는 것이었다. 무엇이든 관통시킬 수 있는 이것의 특징은 원하는 방향으로 지력이 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거대한 바위 뒤의 물체에 타격을 입힐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외에도 암벽을 타고 오를 때 사용할 수 있는 벽호공을 익혔고, 축골공 등도 익히게 되었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구본홍은 점차 절정고수로 변모해 갔다. 이제 그에게 부족한 것이라면 실전 경험과 세상 물정에 대하여 밝지 못하다는 것뿐이다.
 “후후! 이제 이곳을 떠날 때가 되었군. 좋아, 이제 한번 시험해 볼까? 자, 린아야! 능력 좀 발휘해 봐라.”
 구본홍은 외부로 통할 수 있다는 석벽 앞에 선 후 장검을 뽑아들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고색창연한 그것은 간장(干藏), 막사(莫邪), 어장(魚藏), 거궐검(巨厥劍) 같은 신병이기처럼 보였다.
 자세히 살펴보면 손잡이 끝 부분에 붉고 푸른 두 가지 색상의 수실이 달려 있는데 그 끝에는 황색과 녹색의 구슬이 달려 있었다. 석자 일곱치에 달하는 검신은 다른 검과는 달리 마치 생선 비늘 같은 가느다란 홈들이 파여 있었다. 하여 구본홍은 은린검(銀鱗劍)이라는 이름을 붙였고 린아라 부르고 있었다.
 양발을 어깨 넓이만큼 벌리며 심호흡을 한 구본홍은 석벽을 노려보며 전신 내공을 끌어올렸다. 그리고는 중(重)의 묘용을 생각하며 검신으로 진기를 주입시켰다.
 “챠아앗! 출룡파미(出龍破尾)!”
 쐐에에에에엑! 콰아아아앙―!
 예리한 파공음에 뒤이은 엄청난 굉음이 터져 나옴과 동시에 자욱한 분진이 한참 동안이나 시야를 가렸다. 구본홍은 혹시 석벽이 부서지지 않았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초조한 마음으로 전면을 주시하였다. 하지만 분진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석벽에는 만일 한 번에 파괴하지 못한다면 적어도 일 년 이상 더 무공을 수련한 뒤 재차 시도하라는 글귀가 있었다.
 이곳 인연동에서 무공과 학문, 그리고 절세기연까지 만나기는 하였으나 이제 더 이상 이곳에 머무르고 싶은 마음은 없었기에 그의 눈빛엔 초조함이 감돌고 있었다.
 “우와! 만세! 만세···!”
 한참 후 뻥 뚫린 석벽을 바라본 그는 환호성을 질렀다. 이제 무료하기만 한 이곳을 나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후후! 그 계집애는 잘 있을까?”
 뚫린 구멍을 통하여 통로를 따라 걷던 구본홍은 문득 화령옥녀의 옥용이 떠오르자 싱긋 미소를 머금었다.
 모친은 자신을 출산하면서 이승을 떠났고, 부친은 혈전왕의 명을 받아 아주 어릴 때 흑룡방을 떠났다기에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먹고 살기에도 바쁜 판에 일개 하인의 자식에게 따뜻한 정을 베풀 사람이 누가 있었겠는가?
 그러나 그녀만큼 그에게 관심을 쏟은 사람은 단 하나도 없었다. 물론 그 관심이라는 것이 괴롭힘이었다는 것이 문제이긴 하였다. 하지만 떠나기 전 삼년 동안은 충분히 그 원수를 갚은 셈이 아니던가? 하여 막상 인세로 나가려는 순간이 되자 그녀의 옥용이 떠올랐던 것이다.
 “후후! 지금쯤이면 그 기생오라비처럼 생겼던, 그런데 누구였더라···? 아, 맞아! 옥수공자라고 했지? 서안부주의 자식이니 평생 호의호식은 하겠군. 이곳에 한 오년쯤 갇혀 있었으니 이제 스물한 살이 되었겠구나.”
 통로는 무척이나 길었으나 거의 반시진이나 이리저리 방향을 바꿔가며 밖으로 나왔을 때는 월광만이 교교한 때였다.
 “흠! 공기가 무척 상쾌하군. 헌데 지금은 대체 언제쯤일까? 가을인가? 아니면 봄인가?”
 세상은 너무도 시원한 날씨였다. 그는 모르고 있었으나 현재는 세인들 모두가 옷자락 사이로 파고드는 북풍한설(北風寒雪)을 막기 위하여 잔뜩 웅크리고 다니는 겨울의 한복판이었다.
 지령석태를 복용한 결과 만독불침(萬毒不侵) 및 한서불침지체(寒暑不侵之體)가 되었기에 서늘하다고 느낄 뿐이었던 것이다.
 “자, 그런데 이제 어디로 간다?”
 막상 밖으로 나왔으나 마땅히 갈 곳이 없던 구본홍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어느 한곳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곳은 높은 성벽으로 둘러쳐진 황도였다.
 
 ― 얘! 너 그 소식 들었어?
 ― 뭐? 무슨 소식?
 ― 아, 왜 있잖아. 최근에 새로 나타난 다신(茶神)!
 ― 어머! 얘, 황도에서 그 사람을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니? 생긴 것도 준수하다던데··· 한번 봤으면 좋겠다, 얘!
 ― 그래, 우리 같이 가서 한번 볼까? 이 시간이면 다빈루(茶斌樓)에 있을 거야. 어서 가야 가까이 가서 볼 수 있어.
 ― 그래, 어서 가자. 늦게 가면 가까이 가지도 못한대.
 
 위의 대화는 요즘 황도의 여인들 사이에서 주로 오가는 대화였다. 얼마 전 황도에 새로 나타난 젊은 청년은 준수한 용모와 막대한 자금력으로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되기 시작하였다.
 황도에서도 제법 큰 장원 하나를 구입한 청년은 대대적인 공사를 시작하였다. 전에 있던 것들은 모두 허물어 버리고 최고급 자재들로 새로 지어지기 시작한 장원은 오층 누각을 중심으로 수십여 개의 전각들로 채워져 갔다.
 거기에 들어가는 집기들은 호화의 극치를 이루는 것들이었다. 발목까지 푹 빠질 정도의 융단을 깔았고, 보옥(寶玉)을 깎아 만든 궁등이 걸렸으며, 서탁이나 팔선탁, 태사의 등은 황도에서 구할 수 있는 최상품으로 선택되었다.
 그가 가장 유명해진 이유는 십색장(十色莊)이라 이름붙인 장원에서 기거할 시비들을 뽑으면서였다.
 음식을 만들거나 청소를 하는 등 허드렛일을 할 시비였지만 지닌 바 미모가 탁월해야 하였다. 나이는 십오 세 이상 이십일 세 미만으로 금기서화(琴棋書畵)에도 재능이 있어야 하였다.
 선발된 시비는 석 달에 한 번 새경을 받는데 황도의 다른 장원에서 지급하는 것의 열 배라 하였다.
 뽑을 인원은 총 일백여 명이었다. 하여 세인들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시비들을 선발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비로소 십색장의 주인인 청년이 나타났다.
 막연한 호기심으로 구경을 왔던 여인들은 그의 준수한 외모를 보고는 한눈에 반하여 스스로 시비가 되겠다고 나서기도 하였다.
 그 가운데에는 관부 요직에 있는 고관대작의 여식들도 끼여 있어 한바탕 난리가 벌어졌었다.
 석 달에 걸친 시비 선발을 하는 동안 청년은 매일 미시(未時) 무렵에 등과대로 한 켠에 자리한 유서 깊은 다루(茶樓)인 다빈루에 나타났다. 그곳에서 한 잔의 차를 청하여 마시고는 늘 황금 한 냥을 놓고 나가곤 하였다.
 덕분에 다빈루는 늘 만원이다시피 하였다. 아침서부터 그가 늘 앉는 자리 부근의 탁자를 차지하기 위한 여인들이 밀어닥쳤기 때문이었다. 하여 때로는 서로 머리끄덩이를 잡아당기며 자리다툼을 하는 웃지 못할 촌극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정확히 미시에 나타난 청년이 이 각 가량 머물다 떠난 후에도 여인들은 좀처럼 자리를 뜨지 못하였다.
 그는 매일 다른 차를 주문하여 마시면서 차에 대한 품평을 하곤 하였다. 그는 차의 기원과 산지(産地), 채취 시기, 보관 상태, 물의 온도 등등 그야말로 차에 대하여 모르는 것이 없었다.
 하여 다빈루 장방은 그를 시험할 요량으로 가히 차의 천품(天稟)이라 할 수 있는 천지차(天池茶)와 비교적 저급품인 작설차(雀舌茶)를 섞어 내온 적이 있었다.
 “흐음! 이것은 강소성 오현에서 출산된 천지차 팔할 오푼에 안휘성 황산에서 출산된 작설차 일할 오푼을 섞은 것이구려. 천지차는 보관 상태가 양호하나, 작설차는 그렇지 못한 것이 흠이오. 찻잎이란 새벽에 따는 것이 좋은데 이것은 해가 중천에 떠 있을 때 채취한 모양이오. 맛과 향, 그리고 물의 온도는 그런대로 괜찮소이다. 허나 오늘 찻값은 전부 치를 수 없소이다.”
 말을 마친 청년은 은자 한 냥을 꺼내놓고는 다빈루를 나섰다.
 평생 차와 함께 살아왔던 장방은 입을 벌린 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멍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리고는 일각의 시간이 흐른 뒤에야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아아! 노부 평생에 처음 보는 다신(茶神)이로고···.”
 청년의 품평이 정확하였다는 말을 대변하는 이 말로 인하여 청년에게는 십색다신(十色茶神)이라는 외호가 만들어졌다.
 십색장에 기거하는 다신이라는 의미였다.
 이후 다빈루는 더욱더 많은 인파가 몰려들었다. 평소 다도(茶道)에 조예가 있어 세인에게 가르침을 주던 사람들도 그의 한마디 한마디에 무릎을 치며 감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사람들은 누구나 남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산다. 그렇기에 남보다 잘났다는 것을 보이기 위하여 차의 맛도 모르면서 차를 좋아하는 것처럼 구는 사람도 있다. 황도에서는 차에 대하여 잘 안다는 자는 학문도 뛰어나다는 말이 있었다.
 그렇기에 황궁의 고관대작들은 물론 제법 거들먹거리던 학사들, 그리고 만금을 희롱하는 거부들 역시 다빈루에 발을 들여놓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청년이 품평하고 간 차와 똑같은 것을 주문한 후 거기에 대하여 추가 설명을 하곤 하였다. 자신이 십색다신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은연중에 나타내기 위함이었다.
 청년이 다빈루에 발걸음을 하는 이유는 그곳이 황도 최고의 다루(茶樓)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여인들의 발걸음이 많은 곳이기 때문이었다. 세인들은 짐작도 못하나 배짱 좋게 지체 높은 가문의 여식을 시비로 두겠다는 심보였던 것이다.
 청년은 바로 구본홍이었다.
 인연동을 빠져 나올 때 가지고 나온 철궤 안의 재물은 일개 성을 통째로 사고도 남을 엄청난 금액이었다.
 한 알에 황금 백만 냥을 호가한다는 칠채묘안주(七彩猫眼珠)가 일백여 개나 있었고, 엄지손가락만한 금강석 또한 이백여 개나 있었다. 이외에도 피독(避毒)의 효용이 있는 피독주와 방원 일 장 내에는 단 한점의 먼지도 쌓이지 않게 한다는 피진주(避塵珠) 같은 것이 수십 알이나 있었다.
 그것들은 값을 매기기조차 힘든 그야말로 기진이보(奇珍異寶)였다. 십색장은 칠채묘안주 한 알을 처분한 것으로 지은 것이다.
 청년이 공식적으로 선발한 시비는 석 달 동안 세 명뿐이었다. 그녀들은 지금껏 황도삼미(皇都三美)라 불리던 여인들이었다.
 북경일화(北京一花) 계도연(桂蹈燕)은 그녀의 이름처럼 춤추는 제비 같은 발랄한 성격을 지닌 여인이었다.
 올해 십칠 세로 몰락한 전직 고관 가문의 일점혈육이었다. 자존심 강하기로 이름난 그녀였지만 중병을 앓는 모친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선 은자가 필요하였던 것이다.
 그녀는 구본홍의 의복을 담당하는 시비였다.
 추수투신(秋水投身)이라는 다소 괴이한 외호를 지닌 여미지(呂薇芝)는 외호처럼 가을 호수 같은 눈빛을 지닌 여인이었다.
 올해 십팔 세인 그녀가 이렇게 불리는 것은 그녀를 보는 사내라면 누구나 추수 같은 눈빛에 몸을 던지고 싶은 충동이 들기 때문이었다. 겁이 많은 듯 눈망울이 큰 그녀는 빈한한 학사 가문의 여식이었다. 그녀 역시 기울어진 가세를 바로잡기 위하여 체면을 벗어 던지고 스스로 시비가 되겠다고 자청한 여인이었다.
 그녀는 음식을 담당하였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시비가 된 여인은 놀랍게도 현직 대장군의 여식이었다. 충현대장군(忠賢大將軍) 진문기(晋聞奇)는 하나밖에 없는 여식이 생판 알지도 못하는 사내의 시비가 되겠다고 선언하였을 때 노발대발하였다. 그러나 그녀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그것은 자업자득(自業自得)이었다.
 워낙 애지중지 키우느라 모든 것을 오냐오냐하였기에 여인치고는 기가 드셌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의복 등을 챙겨 장군부를 나서자 즉각 부녀지간을 절연하겠다고 선포하였다.
 어릴 때부터 유달리 무공에 관심이 많았던 그녀는 다른 소녀들이 길쌈 등을 하며 부덕(婦德)을 쌓을 때 한 자루 검을 휘두르던 여인이었다. 하여 검서시(劍西施)라 불리는 진옥혜(晋沃慧)는 다빈루를 찾았다가 구본홍의 풍도를 보고 한눈에 반해 시비가 되겠다며 십색장을 찾은 여인이었다.
 그녀의 성품은 한마디로 자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하여야 한다는 그런 성품이었기에 여인의 몸이지만 저돌적으로 밀어붙인 끝에 시비로 발탁된 것이다. 그와 가까이 지내다 보면 연정이 생기리라 믿었다. 후일 그의 반려가 된다면 인연을 끊겠다던 부친도 용서하리라는 계산도 깔려 있었다.
 그녀는 그의 병장기를 담당하는 시비였다.
 사람들은 황도 최고의 미인 셋 모두를 시비로 거둔 십색다신을 부러워하였다. 그 가운데 아직 혼처를 정하지 않은 여인들의 부러움은 도를 넘어 질투로 이어지고 있었다.
 중원에서는 주인이 시비의 청백을 거두는 일이 비일비재하였다. 부인이 없다면 부인이 될 수도 있고, 있다면 첩으로 승격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십색다신의 나이는 정확하지는 않으나 아직 약관을 넘기지는 않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었다. 또한 혼례를 올리지 않았기에 그의 시비가 된다면 장차 부인이 될 확률이 매우 높았다.
 막대한 부와 준수한 외모, 그리고 박학다식한 구본홍은 현재 황도 최고의 신랑감이었다. 그렇기에 그의 마음을 사로잡고 싶어하는 여인들의 심정은 매우 조급해졌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의 시비가 되고 싶은 마음에 평소 알고 지내던 인맥을 총동원하여 압력을 넣는 우스운 일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평상시 누군가가 남의 시비가 되라고 하였다면 대체 자신을 어떻게 보기에 그런 망발을 하느냐며 노발대발할 여인들조차 어떻게 하면 시비가 될 것인지를 연구하고 있었다.
 황도에서 정말 웃지 않고는 볼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반면 사내들은 십색다신을 볼 때 흠모와 더불어 질시의 눈길을 보냈다. 모든 여인들이 그만을 바라보기 때문이었다.
 오늘도 다빈루를 찾은 구본홍은 늘 앉던 자리로 향하였다.
 “허허! 어서 오시게. 오늘은 어떤 차를 준비할까?”
 칠십을 훌쩍 넘긴 장방은 사람 좋은 미소를 머금으며 다가섰다. 그가 손님에게서 직접 주문을 받는 것은 구본홍 외에는 없었다. 제아무리 고관대작이라 할지라도 다빈루의 총관이자 장방의 아들이 나섰을 뿐이다.
 “오늘은 북원차(北苑茶)를 음미하고 싶은데 가능한지요?”
 “허허! 이 사람아, 다빈루를 무엇으로 아는가? 황궁에 없는 것도 우리에겐 있네. 좋아, 주문대로 복건성 북원에서 출산되는 것으로 준비함세. 허허! 물으나마나 알고 있겠지만 송나라 시절엔 조정에 진상되던 놈이지. 허허허···!”
 잠시 후 김이 모락모락 솟는 찻잔을 든 구본홍은 한 모금을 머금고는 입 안에서 맛과 향을 음미하고는 목구멍 속으로 넘겼다.
 “하하! 역시 장방의 솜씨는 일품입니다.”
 “허허! 오늘은 한마디 안 할 셈인가? 여기 있는 이 사람들 모두 자네의 품평을 듣고자 기다리고 있다네.”
 구본홍은 싱긋 미소를 지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변엔 온통 지분 냄새를 풍기는 여인들뿐이었다.
 그녀들은 그의 시선을 받으려 초롱초롱한 눈빛을 빛내고 있었다. 보아하니 오늘 모인 여인들 역시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고관대작이나 거부들의 여식들인 모양이었다.
 ‘후후! 콧대 세기로 이름난 여인들이 한낱 시비가 되려고 애쓰는 모습을 세인들이 본다면 뭐라고 할까?’
 구본홍은 실소를 머금은 채 평상시처럼 주변을 둘러보다가 시선을 딱 멈췄다. 낯이 익어 보이는 여인이 보였던 것이다.
 ‘누구지? 어디서 많이 보았던 얼굴인 듯한데··· 누구더라? 흐음! 누굴까? 혹시···? 맞아! 후후후, 그동안 많이 예뻐졌군.’
 여인은 바로 화령옥녀 주연경이었던 것이다.
 오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 치기는 사라진 대신 성숙함과 요염함이 배어 있었다. 원단 무렵 신년 하례식을 하러 황도로 왔던 그녀는 정혼자인 옥수공자 금후린의 만류로 주저앉았다.
 그의 부친인 서안부주 금성현은 황족인 화령옥녀와 자식의 정혼에 힘입어 단숨에 천하의 병권(兵權)을 장악한 구문제독의 부관이라 할 수 있는 사마대장군(司馬大將軍)에 봉해졌다. 이 자리는 모든 관병들의 발이라 할 수 있는 말을 관리하는 자리였다.
 구문제독부에는 말 이외에도 군량(軍糧)을 담당하는 대장군과 병장기를 담당하는 대장군이 있었다. 이들을 통칭하여 삼사(三司)라 불렀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된 것이다.
 이들은 적어도 구문제독부에서는 가히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라 할 수 있는 고관대작들이었다.
 옥수공자 금후린은 일 년 전 대과에 장원급제하여 천하의 준재들만이 들 수 있다는 한림원(翰林院)에 몸담고 있었다.
 지금껏 한림원 학사들은 여인들의 우상이라 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들 가운데 누구든 혼례만 올리면 장차 귀부인인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현직 고관대작들 가운데 문신들은 거의 모두가 한림원 출신이었다. 무신이라 할지라도 상층부는 한림원 출신이다. 그들은 문무를 겸비하였기에 그만한 자리에 있는 것이다.
 한림원은 대과에 장원과 차석으로 급제한 자들만이 들 수 있는 곳이다. 다시 말해 준재 중의 준재들만이 받아들여지는 곳이라는 것이다.
 사마금가장(司馬金家莊)은 황도에서도 손꼽히는 대저택이었다. 전각의 수효만 해도 얼추 일백여 개를 헤아린다.
 호위하는 관병의 수효가 일천을 헤아리고, 하인들의 수효만 해도 삼백여 명이나 되지만 워낙 넓은 곳인지라 때로는 적막감이 감도는 듯함을 느끼는 곳이다.
 화령옥녀는 사마금가장에 머물던 중 황도를 떠들썩하게 하는 십색장에 대한 소문을 듣고 오늘 처음으로 찾아온 것이다.
 구본홍은 상대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자 미소를 지었다.
 세상에서 자신을 가장 잘 안다 하여도 과언이 아닐 그녀조차 알아보지 못한다면 중원 천하에서 누가 알아보겠는가!
 사실 천출 출신이라는 것이 알려지면 세인들은 십색장에 돌을 던질지도 모른다. 제아무리 많은 재물을 지니고 있고, 박학다식(博學多識)하다 하더라도 천출은 영원한 천출이기 때문이다.
 이 순간 화령옥녀는 황도의 모든 여인들이 흠모한다는 십색다신의 얼굴을 보고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어디선가 본 듯하지만 전혀 생각이 나지 않기 때문이었다.
 ‘저분은 대체 누굴까? 분명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인데··· 흐음! 누구지? 그나저나 정말 잘생겼어.’
 화령옥녀는 저도 모르게 자신의 정혼자인 금후린과 눈앞의 청년을 비교하였다. 금후린이 냉정하면서도 이지적으로 생겼다면 청년은 서글서글하면서도 부드러워 보였다.
 이 순간 구본홍은 그녀가 혹시 자신을 알아보는 것이 아닌가 하는 마음에 잠시 흠칫하였다. 순간적으로 그녀의 눈빛이 몽롱해지다가 마치 별빛처럼 반짝였던 것이다.
 ‘이런···! 알아차렸단 말인가? 기억력도 좋군. 내가 생각해도 엄청 많이 바뀌었는데··· 좋아, 그렇다면 그 수밖에 없겠군.’
 사실 그는 그녀를 보는 순간 반가운 마음이 들어 아는 척을 할 뻔하였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자신의 신분이 만천하에 드러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이를 자제하였다.
 대대로 하인으로 살아왔다는 것이 못내 억울하던 그였다. 사람들로부터 무시당하는 것도 싫었었다. 하여 황도가 떠들썩하도록 십색장을 짓고, 소문을 내어 황도삼미를 시비로 거두었다.
 설마 대단한 시비까지 두고 있는 사람이 천출이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자신을 알아보는 듯한 눈빛을 본 그는 뭔가 특단의 대책을 세우지 않으면 다시 천한 하인이 되어야 한다 생각하고 잠시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흐음! 영악한 계집! 너의 영특한 두뇌를 원망해라.’
 구본홍은 다시 한 번 주위를 둘러보는 듯한 몸짓을 하다가 시선이 마주치자 슬그머니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 저, 미소···.’
 화령옥녀는 청년의 부드러운 눈빛을 마주하는 순간 뇌리가 텅 비는 듯 잠시 아찔한 기분을 느끼고 옥용을 붉혔다.
 지난 백여 년 동안 단 한 번도 시전되지 않았던 환희열락대법이 시전되었기에 일순간에 매료되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이 세상 어떤 여인이든 대법에 걸리게 되면 사랑의 포로가 되지 않을 수 없다는 대단한 미혼공에 사로잡힌 것이다.
 이후 구본홍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 찻잔을 내려놓은 뒤 방금 전 마신 북원차에 대한 품평을 늘어놓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가 사라진 뒤에 자리를 뜬 사람들은 모두 사내들이었다.
 그의 곁에 있던 여인들은 물론 제법 먼 곳에 있던 여인들까지 모두 움직이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중 어떤 여인의 음성이 터져 나왔다.
 “나는 지금 당장 십색장으로 갈 거야. 가서 공자님의 시비가 되고 싶다고 말씀드릴 거야. 아무도 말리지 마!”
 “어머! 아씨,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승상께서 아시면 큰일나요. 그렇지 않아도 아씨를 잘 살펴보라는 말씀이 계셨는데··· 어머! 가, 가지 마세요. 쇤네들이 큰일나요.”
 음성의 주인공은 바로 승상부의 금지옥엽인 부용옥녀(芙蓉玉女) 초수향(草琇香)이었다. 그녀는 올해 십육 세로 승상부의 재원(才媛)이었다. 학문으로는 한림원 학사와 견줄 만하였고 시서가무(詩書歌舞) 또한 능통하였다.
 자존심 강하기로 따진다면 황도의 그 어떤 여인도 그녀를 당할 수 없을 정도였으며, 평상시 사내 알기를 발톱 사이의 때만도 못하다 여기던 그녀였다.
 그녀는 오늘 처음 십색다신을 보러 왔다. 황도 전역에 퍼진 소문을 오늘 아침에야 처음 들었던 것이다. 황궁과 버금갈 구중심처에서만 머물기에 그곳까지 소문이 번지는 데에는 시간이 걸린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의도적인 것이었다.
 현직 승상인 만박거유(萬博巨儒) 초인강(草?崗)은 누구보다도 소문이 빨리 전해지는 사람이다. 저잣거리에 도는 소문은 민심을 그대로 반영하기 마련이다. 천자를 대신하여 국사의 거의 대부분을 처리하는 그는 십색다신의 소문을 듣고 변복(變服)을 하고 다빈루를 찾은 적이 있었다.
 혹세무민(惑世誣民: 세상 사람들을 현혹하여 속임)하려는 자가 아닌가 싶었던 것이다. 과거에도 황도를 떠들썩하게 하는 사기꾼들이 여럿 있었다. 겉만 번드르르한 그들은 세 치 혀로 사람들을 미혹시킨 후 주머니를 털어 갔다.
 며칠 동안이나 다빈루를 찾았던 승상은 승상부에 돌아간 후 엄명을 내린 바 있었다. 소문이 안으로 흘러들어 부용옥녀가 외출을 한다면 엄벌에 처한다는 것이 그것이었다.
 같은 사내가 본다 하더라도 십색다신은 현혹될 만큼 준미한 청년이었다. 그리고 적어도 차에 대한 그의 해박한 지식은 세상만사를 꿰뚫고 있다는 자신조차 탄복할 수준이었다.
 하지만 근본을 알 수 없었기에 그런 명을 내린 것이다.
 만일 여식이 다빈루를 찾아 그를 본다면 보나마나 현혹될 것이다. 만일 그와 사련(邪戀)에 빠져 신세를 망치게 된다면 아비된 자로서 어찌 그 꼴을 보겠는가!
 하지만 그의 그런 조치는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다.
 더 이상 읽을 서책이 없다면서 늘 무료해 하던 부용옥녀는 소문을 듣는 즉시 평범한 의복으로 바꿔 입고 몰래 빠져 나왔다.
 나중에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시비들은 맨발로 튀어나와 온 저잣거리를 헤매던 중 다빈루에서 그녀를 찾았다.
 사실 시비들 역시 소문은 들었으나 다빈루를 찾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매인 몸이기에 짬을 낼 수 없었던 것이다. 하여 떡 본 김에 제사지낸다는 말이 있듯 다빈루에 발을 들여놓은 김에 십색다신을 보고 한참 동안이나 입을 벌리고 있었다.
 승상부를 찾은 많은 청년들을 보아왔지만 십색다신과 같이 준미한 청년은 처음이었던 것이다.
 그것도 잠시, 그녀들은 입에서 곧 경악성을 토해내야 하였다. 부용옥녀가 엄청난 선포를 해버렸기 때문이었다.
 만일 그녀가 십색장의 시비가 된다면 자신들은 어쩌면 오마분시(五馬分屍)형에 처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더 이상 감탄하고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아악! 아, 아씨! 가시면 안 돼요.”
 치맛단을 붙잡고 십색장을 향하여 달리는 부용옥녀의 뒤로 여덟 명의 시비들이 필사적으로 따르는 모습을 보는 여인들의 표정은 일순간 바뀌었다. 오늘 다빈루를 찾은 여인들 대부분은 고관대작의 여식들이었다.
 매번 십색다신을 볼 때마다 그에게 매료되어 그의 시비라도 되어 평생을 그의 곁에 머물고 싶다는 생각을 하여 왔지만 그래도 자신의 신분을 자각하고 애써 자제하던 그녀들이었다.
 하지만 이 순간 여인들 모두는 무언가를 결심하는 눈치였다. 그리고는 한 여인이 밖으로 튀어나감과 동시에 우르르 쏟아져 나갔다. 그녀들은 일제히 십색장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었다.
 오늘 황도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등과대로를 따라 고관대작의 여식들이 마치 경주라도 하듯 달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람에 치맛단이 벌어지든 말든, 신고 있던 당혜가 벗겨지든 말든, 엎어져 무릎에서 선혈이 흐르건 말건, 흔들림 때문에 비녀가 빠져 삼단 같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날리건 말건 오로지 앞만 보고 달려가고 있었다.
 
 “후후! 반드시 올 것이다··· 지매(芝妹)! 지매!”
 “예? 아, 예! 소녀, 대령하여 있사옵니다.”
 십색장 중심부에 있는 오층 누각 중 사층에 자리한 십색다신의 서실 밖에 시립해 있던 추수투신 여미지는 그의 부름이 있자 즉각 안으로 들어서며 은쟁반에 옥구슬 굴러가는 듯한 옥음(玉音)을 토했다. 그런 그녀의 추수 같던 눈빛은 이 순간 밤하늘의 별처럼 빛나고 있었다. 그것은 연정이 듬뿍 담긴 눈빛이었다.
 북경일화에 이어 시비가 된 그녀는 요즘 행복해 미칠 지경이었다. 흠모하는 그의 곁에 머물 수 있기 때문이다.
 시비에게 하대하지 않는 주인은 매우 드물다. 특히 젊은 사내일수록 더하다. 조금이라도 반반하다면 기회를 보아 청백을 거두는 일이 비일비재한 요즘, 늘 부드럽고 정중하게 대하는 구본홍은 다른 사내들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느끼고 있었다.
 언제나 다정하게 대해 주는 그가 언젠가는 자신을 거둘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에 행복한 것이었다.
 시비라 하더라도 북경일화를 비롯한 추수투신과 검서시는 다른 평범한 시비들과는 달랐다. 그녀들은 내원이라 부르는 이 오층 누각 중 사층과 오층에서만 시비의 신분이었다.
 삼층은 북경일화가, 이층은 추수투신이, 일층은 검서시가 머무는 공간이었다. 각 층마다 각기 열 명씩의 시비들이 있었다. 그녀들 역시 만만치 않은 미모를 지닌 여인들이었지만 그래도 황도삼미보다는 약간 떨어졌다. 그녀들은 시비의 시비인 셈이다.
 황도삼미는 구본홍이 귀가하면 늘 그의 곁에 있었다.
 그가 서실에서 독서삼매경에 빠져 있을 때면 그녀들 역시 서책을 잡고 있었다. 물론 문자들은 거의 눈에 들지 않고 있었다. 곁눈질로 그를 바라보느라 여념이 없기 때문이다.
 아무튼 구본홍의 부름에 화들짝 놀란 추수투신은 그의 시선이 부담스러운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후후! 뭘, 그리 놀라시오?”
 “어머! 아, 아니에요.”
 “후후! 아니라니 다행이오. 그나저나 오늘 밤부터는 식솔이 하나 더 늘 것 같소이다. 음식을 할 때 참고하시오.”
 “예? 누, 누가···?”
 “후후! 서동(書童)을 하나 거둘까 하오.”
 “서, 서동이요? 그렇다면 소년인가요?”
 “후후! 지매와 같은 여인이오. 조금 있으면 알게 될 것이오.”
 “아, 알았어요. 그렇게 할게요. 헌데 거처는···?”
 “하하! 사층을 쓰게 하시오. 서동이니 서실에 머무는 것이 가장 편할 것이오.”
 말을 마친 구본홍은 싱긋 미소를 지은 후 밖으로 향하였다.
 담장 밖에서 수많은 여인들의 아우성치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그 소리는 시비가 되기 위한 관문에 도전할 터이니 문을 열라는 소리였다.
 십색장이 유명해진 것은 바로 시비를 선발하기 위한 관문을 설치하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모두 세 가지 관문이 있는데 첫째는 미모를, 둘째는 학식을, 마지막 셋째는 무공을 시험하였다.
 첫째와 둘째는 반드시 시험하지만 셋째는 원하는 경우에만 국한시켰다. 따라서 셋째 관문은 당락에 크게 좌우되지 않았다.
 현재 십색장에는 사십여 명의 시비들이 있었다. 그 가운데 황도삼미는 내원시비라 불렸고, 나머지는 외원시비라 불렸다.
 이밖에도 십색장의 살림을 총관하는 총관이 있었다.
 구본홍이 처음 황도로 와 쓸 만한 장원을 물색할 때 우연히 주루에서 만나 알아봐 준 사람이었다. 그는 이제는 몰락해 버린 거상의 재산을 총관하던 총관이었다고 하였다.
 신산귀수(神算鬼手)라 불리는 그는 외호에 걸맞게 산학(算學)의 대가이며, 도박에도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었다.
 세수 육십오 세인 신산귀수 민경부(閔景阜)는 거상의 사망 후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찾지 못하여 도박장을 전전하였다. 물론 도박의 대가답게 승승장구하여 엄청난 재물을 모았다. 일억 냥에 가까운 어마어마한 금액이었다.
 그런 그를 알거지로 만든 사람이 있었으니, 천하제일도(天下第一賭)라 불리는 무면도왕(無面賭王) 조수기(曹秀基)가 바로 그였다. 그는 외호처럼 얼굴이 전혀 알려지지 않은 사람이다.
 신산귀수는 그와 같이 몇 날 며칠 동안이나 마작을 하였지만 정작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 하였다.
 어찌되었건 구천오백만 냥에 달하던 은자를 모두 잃은 그가 주청에서 술로 시름을 달래던 중 구본홍을 만난 것이 인연이 되어 십색장의 총관이 된 것이다. 이외에도 십색장 외원에 머무는 하인들의 수효도 거의 오십여 명에 달하였다.
 백여 명에 가까운 대식구였지만 십색장도 사마금가장 못지않게 한적한 곳이었다. 워낙 넓기 때문이다.
 “자자! 낭자들, 줄을 서십시오. 이렇게 무작정 밀고 들어온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번호표를 받으시고 호명하는 대로 들어오십시오.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면··· 어어어? 아아아악!”
 십색장 정문에서 몰려든 여인들에게 질서를 호소하던 하인은 여인들의 힘에 밀려 몇 발짝 뒤로 밀리는가 싶더니 벌렁 자빠졌고, 그 위로 여인들이 우르르 지나쳤다.
 대략 헤아려도 이백여 명이 훨씬 넘는 숫자였다.
 여인들이 모두 들어서고 난 후 자빠져 있던 하인의 표정은 그야말로 볼 만하였다. 제아무리 가벼운 여인이라 할지라도 수백여 명이 밟고 지나쳤기에 현재 그의 갈비뼈는 모조리 금이 갔거나 부러진 상태였다. 정강이뼈와 팔뼈 역시 무사치 못한지 퉁퉁 부어 올라 있었다. 그런 그의 표정은 고통에 겨움과 더불어 뭔지 알 수 없는 묘한 빛이 떠올라 있었다.
 “흐흐흐! 봤다, 봤어. 으으윽···! 흐흐! 봤어! 봤어! 으으윽···!”
 뭘 보았다는 것인지 알 수 없으나 그의 만면에는 평생 소원이라도 이룬 듯한 희열의 빛이 흐르고 있었다.
 “십색다신니임―! 어디 계세요? 어디 계세요?”
 사방팔방으로 흩어지며 구본홍을 찾던 여인들이 일제히 멈춘 것은 마치 귓가에 대고 말을 하는 듯한 사내의 부드러운 음성이 귓전을 스친 직후였다.
 “하하! 낭자들, 그렇게 계시면 소생이 심사하기가 어렵소이다. 먼저 번호표를 받으시고 순서대로···.”
 구본홍의 말은 중간에서 끊길 수밖에 없었다.
 여인들이 이구동성으로 그의 말을 잘랐기 때문이었다.
 “좋아요! 그런데 번호표는 어디 있나요? 어서 주세요. 그런데 어떤 기준으로 나눠주실 건가요?”
 “모두 한곳에 계시니 특별히 어느 분에게 먼저 드릴 수 없을 것 같소이다. 그러니 이곳에서 번호표를 던질 터이니 먼저 잡으시는 분이 임자요. 자! 받으시오.”
 사실 십색장에서 이런 일은 오늘이 처음이 아니었다.
 현재 십색장 외원 소속 하인들 오십여 명은 거의 대부분이 갈비뼈에 금이 간 상태였다. 하루에 한 명씩 차례로 당한 것이다.
 하지만 그들 모두는 히죽히죽 웃고 있었다. 뒤로 자빠진 상태에서 자신의 위로 지나는 여인들의 무엇인가를 본 모양이었다.
 이러한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에 섣불리 다가갔다가는 여인들에게 둘러싸여 아무것도 못하게 된다는 것을 능히 짐작하는 구본홍은 늘 지붕 위에서 번호표를 던졌다.
 “와와! 비켜, 비켜! 이건 내 거야!”
 “무슨 소리? 내가 먼저야. 야, 이건 내가 먼저 집었다고! 헌데 왜 잡아당기고 난리야? 빨랑 안 놔?”
 “잡소리 하지 마. 이건 내 거야. 아아아아악! 안 놔? 아악!”
 삽시간에 난장판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순번이 빠른 번호표를 차지하기 위하여 니전투구(泥田鬪狗)를 벌이는 동안 여인들의 의복이며 머리는 엉망으로 변해 갔다. 평상시 같으면 어림도 없을 일이나 현재 여인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십색장의 시비가 되어야 하겠기에 체면 불구하고 난장판을 벌인 것이다.
 “어머! 큰일이네. 이 꼴이 대체 뭐지? 에이, 안 되겠다. 얼른 가서 갈아입고 와야지.”
 잠시 후 십색장은 조용해졌다. 앞다퉈 번호표를 집어들려던 대부분의 여인들이 몰골이 엉망인 채 면접을 보면 무조건 탈락할 것이라 생각하였는지 썰물처럼 물러간 것이다.
 남은 여인들의 수효는 불과 이십여 명이었다. 그녀들은 다른 여인들보다는 명망 높은 가문의 여식들로 제대로 된 훈육을 받았기에 아귀다툼에 참여하지 않은 여인들일 것이다.
 ‘후후! 이제 좀 조용하군.’
 이런 식으로 벌떼처럼 몰려든 여인들을 여러 번 보낸 바 있는 구본홍은 싱긋 미소를 지으며 주렴으로 사방이 가려진 전각에 발을 들여놓았다.
 사실 여인들 가운데 일부는 십색장에서 요구하는 요건에 부합되지 않는 여인들이 있었다. 그녀들은 그저 가까이서 십색다신을 한 번 더 보려는 욕심에 거의 매일 찾다시피 하는 것이다.
 나이 많은 신산귀수가 나서자 여인들은 차례대로 안으로 들어서고는 이내 실망스런 표정을 지었다.
 또 하나의 주렴이 시야를 막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는 이내 긴장하는 눈치였다. 즉석에서 시 한 수를 지어 보라는 말에 잠시 머뭇거리던 여인은 자신이 없다며 돌아섰다. 시제로 내놓은 것이 괴상망측하였기 때문이었다.
 남녀간의 정이나 풍광을 읊으라는 것이 아니고 돌, 바둑, 비파, 낙엽 등등 특정한 물체를 지정하였기 때문이었다.
 이십여 여인들 가운데 둘째 관문까지 통과한 여인은 불과 하나였다. 가장 마지막으로 들어온 것은 기다리던 부용옥녀였다.
 그녀가 들어섬과 거의 동시에 검서시의 전음이 있었다.
 (주인님! 그녀는 승상의 일점혈육인 부용옥녀예요. 그녀를 받아들이시면 승상부에서 난리가 날 거예요. 설마 그녀를 서동으로 받아들이려고 하시는 것은 아니시겠죠?)
 검서시의 전음엔 경계의 빛이 그득하였다.
 지금껏 황도삼미는 암중으로 치열한 각축전을 벌였었다. 누가 먼저 그의 품에 안기느냐에 따라 부인이 되기도 하고 첩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었다. 최근 세 여인들은 모종의 합의를 하였다. 너무도 피곤한 신경전은 이제 그만 하자는 것이었다.
 대신 누가 먼저 그의 품에 안기든 다른 여인들까지 책임지자고 하였다. 다시 말해 셋 모두 그의 내자가 되기로 마음먹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자신들 못지않은 미모와 학식을 지닌 부용옥녀가 느닷없이 나타나자 위기감을 느낀 것이다.
 또한 승상의 여식이라는 위치는 결코 무시할 만한 위치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하여 경계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능히 짐작하고 있던 구본홍은 쓴웃음을 지으며 알았다는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후 입을 열었다.
 “하하! 어서 오시오.”
 “······!”
 발을 들여놓던 부용옥녀는 듣기 좋은 부드러우면서 나직한 음성을 듣는 순간 전율이라도 스치고 지나는지 흠칫 떨었다.
 부용옥녀는 삼단 같은 머리결과 시원한 이마, 그린 듯한 아미(娥眉)와 오뚝 솟은 코, 앵두 같은 입술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절세미녀였다. 그녀가 황도삼미에 끼지 못한 것은 그녀들만 못한 미모 때문이 아니었다. 워낙 구중심처에 기거하고 있기에 세인들이 그녀를 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누가 보아도 한눈에 반할만한 미녀였기에 구본홍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흐음···! 첫 관문은 통과요. 이제 둘째 관문이오. 낭자, 시 한 수를 지어 보시오. 시제는 콩으로 하되 두(豆)자를 넣어서는 아니되오. 하실 수 있겠소?”
 “······!”
 탈락한 여인들이 남 잘되는 꼴을 어찌 보겠는가?
 전각을 나선 여인들 모두 입을 다문 채 나갔기에 이런 시제가 나오리라는 것을 전혀 짐작 못한 그녀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후후! 승상부에서 얼마나 잘 가르쳤는지 한번 두고 봐야지.’
 검서시의 말대로 승상의 여식을 시비로 거둔다면 아마 제 명에 살기 어려울 것이다. 검서시는 본인이 직접 부친과 담판을 짓고 왔기에 가능했지만 부용옥녀는 아니었다. 섣불리 그녀를 시비로 받아들였다가는 꼬장꼬장한 성품의 승상이 어떻게 나올지 모르는 일이었다. 하여 일부러 어려운 시제를 낸 것이다.
 세상에 누가 있어 콩을 시제로 시를 지어 보았겠는가?
 부용옥녀는 당황스러운지 잠시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먹물을 듬뿍 묻힌 붓을 들고는 일필휘지(一筆揮之)로 써 갈겼다.
 
 <宇 在 天 皇 第 一 章 穀 中 此 物 大 如 王
 介 介 全 黃 蜂 轉 蜜 團 團 或 黑 鼠 瞋 ?
 新 抽 臘 甑 盤 增 菜 潤 入 晨 廚 鼎 減 糧
 當 時 若 奪 周 家 栗 不 使 夷 齊 餓 首 陽
 
 글자는 천황(天皇) 제일장에 있고,
 곡식 중에 제일 커서 왕과 같도다.
 하나하나 모두가 꿀에 굴린 것 같고, 둥글둥글한 모양에
 간혹 검은 점은 쥐가 두 눈 부릅뜬 것 같구나.
 섣달 시루에 길러 뽑으니 좋은 반찬이요,
 물에 불려 밥솥에 넣으니 그 아니 좋을쏜가.
 당시에 만약 주나라 곡식이 아니었다면
 백이와 숙제 수양산에서 굶어죽진 않았을 텐데.>
 
 필체는 여인의 글답게 부드러우면서도 섬세하고, 미려(美麗)하였다. 웬만한 공부로는 어림도 없을 일이다.
 “하하! 대단하오. 낭자의 문장이 소생을 탄복시켰소이다. 보아하니 사략(史略: 역사를 간략히 기록한 책)을 읽으신 모양이오.”
 “그래요. 사략 초권(初券) 제일장은 태고복희신농(太古伏羲神農)―<하략> 이렇게 되지요.”
 부용옥녀는 막힘 없이 사략 초권을 암송하였다.
 “하하! 미모와 문장은 그만하면 되었는데 혹시 셋째 관문에도 도전하실 의향이 있으시오?”
 구본홍은 그녀를 떨어뜨릴 방도를 찾지 못하였기에 무공에서 트집을 잡아 탈락시키려는 속셈이었다. 자칫 미모와 학문으로 탈락시켰다가는 어떤 반발이 있을지 몰랐기 때문이다.
 “그것이 시비가 되는 데 영향을 줄 수 있다면 하겠어요.”
 “흐음! 보아하니 지체 높은 가문의 규수인 듯한데 어찌 한낱 시비가 되려 하시오?”
 “십색장 내원시비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지요. 황도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황도삼미만이 간신히 내원시비가 되었어요. 소녀가 그렇게 된다면 앞으로 황도사미로 바뀌지 않겠어요?”
 부용옥녀 역시 여인은 여인이었다. 자신이 황도사미 가운데 하나가 되지 않으면 누가 되겠느냐는 완곡한 표현이었다.
 여인이라면 누구나 약간의 허영심이 있는데 그녀 역시 예외는 아니었던 것이다.
 “후후! 그렇다 하더라도 시비는 시비가 아니오?”
 “호호! 그렇기는 하지요. 하지만 황궁의 시비라 할지라도 열 명의 시비를 거느리지는 못하지요.”
 여인들이 십색장 내원시비가 되기를 갈망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비록 시비라는 명칭이 들어 있기는 하나 그것은 여느 시비와는 차원이 달라도 한참 달랐다.
 내원시비는 열 명의 시비를 거느림은 물론 온갖 부귀영화를 다 누린다. 게다가 자유를 속박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시비라고는 하지만 제가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겉만 시비이지 속을 들여다보면 엄청난 재화를 보유하고 있는 십색장의 안살림을 맡아서 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자리였다. 게다가 십색다신은 온 황도의 여인들이 흠모하는 사내였다. 재수가 좋고, 연분이 닿으면 장차 십색장의 진짜 안주인이 될 수 있는 가능성도 충분히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여인들이 앞다퉈 내원시비가 되려는 이유는 언제든 그만두어도 좋기 때문이다. 십색다신은 시비 가운데 누구든 원하지 않는다면 아무 때나 가도 좋다고 공언을 한 바 있었다.
 하지만 아직 내원은 물론 외원시비들 가운데 떠났다는 여인은 아무도 없었다. 모든 것이 만족스럽고 다른 여인들 모두가 부럽다는 눈으로 바라보는데 나갈 여인이 누가 있겠는가?
 오히려 우쭐한 마음이 들어 저잣거리를 지날 때면 고개를 바짝 치켜 든 채 당당한 걸음으로 나 보란 듯 걷곤 하였다.
 걸치는 의복은 대갓집 여인들조차 걸치지 못할 질 좋은 비단이었다. 게다가 교구에서는 은은한 사향(麝香) 냄새가 풍겼다. 그것은 같은 부피의 황금과 값이 맞먹는다는 극상품이었다.
 하여 그녀들이 지날 때면 시비가 되지 못한 여인들의 부러움에 찬 시선을 한 몸에 받곤 하였다.
 “알고 계실지 모르겠으나 지금까지의 성적이라면 외원시비는 가능하오. 허나 삼관문에서 탈락하면 그마저도 할 수 없게 되오. 그래도 좋소이까?”
 구본홍은 말도 안 되는 트집을 잡아 부용옥녀를 돌려보낼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 순간 그녀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느라 여념이 없었기에 반발도 하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렇게 할게요. 십색장의 내원시비가 되지 않을 바에는 이곳에 머물 생각은 없어요.”
 ‘이런···! 나한테 단단히 반한 모양이군.’
 구본홍은 내심 쓴웃음이 나왔으나 웃을 수 없었기에 약간 안색을 굳힌 채 말을 이었다.
 “삼관문은 이러하오. 이곳에서···.”
 구본홍이 즉석에서 생각해 낸 관문은 해괴망측한 관문이었다.
 앞으로 석 달 이내에 산동성 제남부 남쪽에 있는 태산을 갔다오라는 것이다. 무공을 조금이라도 익혔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기에 부용옥녀는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다녀오기만 하면 내원시비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생각하였던 것이다.
 “좋아요, 그렇게 하지요. 헌데 무엇을 증표로 삼지요?”
 “그곳에 가면 무림의 기인인 만패기사(萬敗棋士)라는 분이 있소. 그분은 지금껏 백석(白石)을 쥐고 이겨 본 적이 없는 사람이오. 그분과 바둑을 한판 두고 오면 되오.”
 “만패기사요?”
 “그렇소이다. 바둑을 두되 반드시 백석(白石)을 쥐셔야 하오. 그리고 반드시 져줘야만 하오. 그후 서찰을 전달하면 되오.”
 “바둑을 져주고 서찰을 전하라고요? 그렇게만 하면 되나요?”
 부용옥녀는 점점 알 수 없는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하하! 그렇소이다. 그럼, 잠시만 기다리시오.”
 말을 마친 그는 무엇인가를 써서 봉한 후 그녀에게 건넸다.
 “알겠어요. 다녀오겠어요.”
 부용옥녀의 신형이 사라지고 난 뒤 구본홍은 미소를 머금었다.
 승상부의 천금인 그녀는 호승심이 강하기로도 이름난 여인이었다. 그녀의 특기는 바로 바둑이었다.
 천하제일석학이라고도 할 수 있는 승상에게 연패를 안겨주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었다. 처음엔 지고도 땡깡을 부리는 여식이 귀여워 일부러 져주곤 하였다.
 하지만 요즘은 아니었다.
 승상이 제아무리 이기려 해도 도저히 이길 수 없는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바둑을 두고 오라고 하였으니 보나마나 희희낙락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녀의 생각일 뿐이다.
 만패기사 석장원(石長源)이 왜 무림의 기인으로 불리겠는가?
 중원의 서쪽 곤륜산에서 온 그는 사십여 년 전부터 천하의 고수들을 찾아 비무하는 한편 바둑을 두어 왔다.
 비무 전적은 전패였다. 하여 만패기사라는 외호를 얻은 것이다. 단 한 번도 이기지 못하면서 늘 패배를 하지만 누구도 그를 미워하는 사람이 없었다.
 자신의 전적에 승리를 추가해 주니 싫을 리가 있겠는가?
 바둑을 둘 때는 언제나 백석만을 쥐었다.
 상대가 강하건 약하건 언제나 아슬아슬한 차이로 패배했다.
 하여 세인들은 어쩌면 그의 바둑 실력이야말로 가히 국수(國手)급일지도 모른다고 했다.
 코흘리개조차 아슬아슬한 차이로 승리를 거머쥐었다. 그러면서도 단 한 번도 백석을 놓은 적이 없었다. 만일 상대가 백석을 쥐겠다고 하면 아예 바둑을 두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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