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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색기 1

2017.12.20 조회 378 추천 3


 십색기 1권
 제1장 오타신공(誤打神功)
 
 
 “야, 이놈아! 자고로 우리 속담에 한 가지 재주가 특출한 자는 반드시 성공한다 하였다. 하지만 재주가 많은 놈은 굶어 죽기 십상이라고 했어. 웬 줄 알아? 한 우물을 파야 물이 나오는데 한꺼번에 여러 우물을 파봐라, 무엇 하나 제대로 되겠느냐?”
 “치이! 그래도 아니에요. 제자는 이것저것 해 보고 싶은 게 너무 많단 말이에요.”
 “그래? 대체, 어떤 재주를 익히고 싶은 건데?”
 “헤헤! 우선은 말 잘하는 재주를 익히고 싶어요.”
 “말 잘하는 재주? 그래, 그것을 익혀 무엇하게?”
 “헤헤! 주선루(酒仙樓)에 있는 점소이 형이 그랬는데요. 말 잘하는 재주를 배워두면 이 다음에 커서 어른이 된 다음에 아주 아주 예쁜 낭자들을 꼬실 수 있다고 그랬어요.”
 “뭐라고? 이런···! 어린놈이 벌써부터? 좋아, 그건 그렇다 치고 그 다음엔 또 무엇을 익히고 싶으냐?”
 “헤헤헤! 다음엔 당연히 아주 아주 예쁜 낭자들이랑 잘 놀아야 하니까 노는 재주를 익혔으면 좋겠어요. 음! 우선은 비파(琵琶)나 슬(瑟), 소(簫)라도 배우고 싶어요.”
 “쯧쯧쯧! 이놈이 이 다음에 커서 뭐가 되려고···? 에고, 이놈아! 정신 좀 차려라. 그게 마음대로 되는 줄 알아?”
 “헤헤! 그런데 그 여자들이랑 잘 놀려면 은자가 많아야 한대요. 그래서 돈 버는 재주도 익히고 싶어요.”
 “얼씨구···? 에구, 이 녀석아! 네 마음대로 해라.”
 “의원 할아버지가 그러시는데 돈 버는 데에는 의술(醫術)만큼 좋은 게 없대요. 아무리 수전노라도 아프면 돈을 아끼지 않는다고 한대요. 그래서 의술을 익힐 거예요.”
 “의술을? 허허! 이제야 제대로 된 게 하나는 나오는구나.”
 “히히! 그리고 상술(商術)도 익힐 거예요. 전장(錢場)에 있는 아저씨가 그러는데요. 버는 돈을 잘 굴리면 더 큰돈이 된대요.”
 “상술을 익히겠다고? 허허! 녀석 점점 더 쓸만한 소리를 하는구나. 암, 장사만큼 많은 돈을 벌어들이는 것도 없지.”
 “히히! 그렇죠? 그런데 의술이나 상술을 익히려면 우선은 글자를 읽고 쓸 줄 알아야 한대요. 그래서 학문도 익히겠어요.”
 “그래? 그것도 제법 쓸만한 생각이다. 아암···! 학문을 닦는다는 것은 좋은 일이지. 그런데 그건 누가 가르쳐 줬냐?”
 “헤헤! 그건 고서점(古書店)에 있는 할아버지가 그러셨어요.”
 “음! 그 늙은이가···?”
 “예, 그 할아버지가 그러셨어요. 다음엔 멋있는 검법과 도법, 그리고 창법 등 무공을 익힐 거예요.”
 “검법, 창법, 도법? 그걸 익혀서 무엇하게?”
 “히히! 그걸 익혀서 못된 짓을 하는 놈들을 혼내주려고요. 멋있잖아요. 히히! 멋있으면 여자들이 줄줄 따른다면서요?”
 “뭐라고? 이런 어린놈이··· 어휴! 생각하는 것하고는··· 사부가 보기에 네놈은 이 다음에 커서 틀림없이 색마가 될 거다.”
 “색마(色魔)요? 그게 뭔데요? 좋은 건가요?”
 “흐흠! 아, 아니다. 네놈은 아직 몰라도 된다. 좋아, 지금까지 말 잘하는 재주와 잘 노는 재주, 음률(音律), 그리고 의술과 상술, 학문과 무공을 익히겠다고 말했다. 또 있느냐?”
 “또요? 헤헤! 당연히 또 있죠. 으음! 그런데 뭘 더 익힐까? 뭘 익혀야 하지? 에이, 그건 나중에 생각할 거예요.”
 “에라, 이놈아! 네놈 혼자 다 해 처먹어라.”
 지금껏 속에서 치미는 것을 억지로 누르고 있던 노인은 소년이 얄밉다는 듯 머리통을 냅다 쥐어박고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엉덩이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 냈다.
 “에이, 씨! 왜 때려요? 왜 맨날 때리기만 해요?”
 “야, 임마! 두고 보자보자 하니까··· 네놈이 방금 말한 건 세상의 모든 것을 익히겠다는 것이야. 안 그래?”
 “에이, 그럼 안 되요? 안 되냐고요?”
 “에라, 이놈아! 해라, 해! 혼자서 다 해먹고 살아라. 하라는 것도 제대로 못하면서··· 에잉, 쯧쯧쯧!···”
 노인은 어림도 없는 꿈을 꾸는 제자를 보며 혀를 찼다.
 이곳은 중원의 서남쪽에 위치한 운남성(雲南省) 난찬강(瀾澯江)과 무량산(無量山) 사이에 있는 소읍(小邑)인 누천촌(漏天村)에서도 가장 후미진 구석에 위치한 조그마한 야산 위였다.
 노인은 무림의 거물이 되기 위하여 청운의 꿈을 안고 강호로 출도하였다가 개망신만 당하고 이곳으로 도망치다시피 숨어든 오타신군(誤打神君) 호문기(湖聞奇)였다.
 평범한 집안의 자제였던 그는 젊은 시절 우연히 고향 야산을 배회하다 오래 된 고목 옆 구덩이 속으로 빠져들게 되었다. 사내치고는 유난히 담력이 약했기에 그것을 키우기 위하여 남몰래 그곳을 찾았다가 당한 일이다.
 그곳은 오래된 무덤들이 있는 곳이기에 평상시에는 사람들의 발길이 아주 드문 곳이었다.
 그가 빠져든 곳은 만들어진 지 적어도 오백 년은 된 무덤 속이었다. 겁에 질렸고, 당황한 그는 그곳을 빠져 나오기 위하여 발버둥치던 중 우연히 낡은 목궤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 안에는 표지가 삭아버린 한 권의 상고기서가 있었다.
 지금은 사용되지 않는 언어인 과두문(??文)으로 기록된 그것을 이십여 년에 걸쳐 어렵게 익힌 호문기는 자신의 일 장에 집채만한 바위가 갈라지고, 아름드리 고목이 부러지는 모습에 자신감을 얻고 출도하였다. 하여 출도한 이후 제법 명성을 쌓았다. 그래서 얻은 외호가 운남신협(雲南神俠)이었다.
 그런데 무림에 나간 이후 거의 이십여 년 동안 승승장구하던 그에게 심각한 문제가 생겼다. 팔 성 정도 익혔을 때에는 아무런 이상도 없었으나 그 이상이 되자 장력이 원하는 방향으로 나가지 않고 엉뚱한 방향으로 향하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엔 아주 작은 차이로 빗나갔다. 하지만 그 정도는 점점 더 심해졌다. 결국 그는 자신이 의도한 목표에 한 번도 장력을 격중 시키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그래서 얻은 불명예스런 외호가 바로 오타신군(誤打神君)이었다. 그리고 그가 익힌 무공을 오타신공(誤打神功)이라 불렀다.
 이것은 강호인들이 그를 조롱할 때 쓰는 말이었다.
 절치부심(切齒腐心)한 그는 어떻게든 예전으로 돌아가고자 노력하였으나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더욱 빗나가기만 하였다. 결국 코앞의 목표물조차 적중시키지 못하게 되자 놀림감이 될 수밖에 없었다.
 무림인들은 물론 하찮은 주루의 점소이나, 구걸로 연명하는 거렁뱅이들까지 조롱하자 이를 견디지 못한 그는 결국 쓸쓸히 이곳으로 낙향하였다. 갈 만한 곳은 오직 고향뿐이었던 것이다.
 그가 돌아 왔을 때 이곳에는 골치 아픈 존재가 있었다.
 푸주한(소, 돼지 따위의 짐승을 잡아 고기를 파는 사람)의 셋째 아들인 곽삼(郭三)이 바로 그였다.
 그는 평상시에도 다소 난폭했지만 술만 마시면 세상 무서울 것 없는 개망나니로 변해 온갖 못된 짓을 다하고 있었다.
 주루의 기물을 부수는 것은 예사이고, 지나가는 여인들을 희롱하였고, 늙은 부친을 두들겨 패는 패륜까지 서슴지 않았다.
 희미하게나마 호문기가 강호에 나가 제법 명성을 얻었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는 촌장은 다시 이곳에서 살고 싶으면 개판을 치고 있는 곽삼을 따끔하게 혼내주라는 요구를 하였다.
 자신의 장력이 원하는 대로 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아는 그는 내키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곽삼을 징계하기 위하여 나섰다가 또 한번 웃음거리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곽삼을 겨냥한 장력이 형편없이 빗나가 멀리 떨어져 있던 촌장의 가슴팍에 작렬하였기 때문이었다. 한 번의 실수를 만회하기 위하여 내친 장력은 이번엔 하나밖에 없는 주청의 기둥에 맞았고, 주청은 폭삭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마지막으로 내뻗은 장력은 누천촌에서도 입심 세기로 이름난 노파의 주둥이에 정통으로 격중되었다. 결국 그녀는 모든 이빨이 부러져 더 이상 수다를 떨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웃음거리가 된 그는 마을 가장 외곽에 위치한 이 야산으로 도주하다시피 숨어들어 매일같이 술에 절어 살았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곳은 촌락에서 그리 멀지는 않으나 평상시에 사람의 발길이 뜸한 곳이다. 그가 빠져들었던 공동묘지 너머이기 때문이었다.
 오 년 전 호문기는 풀이 죽은 채 강호를 떠나 이곳으로 오던 중 난찬강 강가에서 갈대로 엮은 바구니에 담긴 채 홀로 울고 있는 아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
 아이의 곁에는 퉁퉁 불어버린 여인의 시신이 있었는데 그녀의 손은 바구니를 받쳐드는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아마도 아이의 모친인 듯싶은 그 여인은 바구니가 가라앉지 않도록 죽어서도 그 자세를 유지한 것이다.
 무공을 익히고 강호를 횡행하느라 혼례를 올리지 못한 그는 대를 이를 욕심에 소년을 데리고 와 자신의 자식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누천촌의 그 어느 누구도 이 말을 믿지 않았다.
 호문기는 머리카락이 매우 드문 사람이다. 다시 말해, 대머리였다. 호씨 사람들은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 어렸을 때부터 머리숱이 유난히 적었지만 소년은 머리숱이 아주 많았던 것이다.
 게다가 호문기는 주먹코에 메기 입술을 하여 추악하다고까지는 할 수 없으나 무지하게 못생겼는데 소년은 누천촌에서는 볼 수 없을 정도로 귀엽게 생겼다. 하여 그를 제자라고 소개할 수밖에 없었다. 그 아이가 바로 조금 전의 소년이었다.
 사람들은 소년을 호득강(湖得江)이라 불렀다. 호씨가 강에서 얻었다는 뜻이었다. 소년은 이 성명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매일같이 다른 이름을 지었다. 그리고는 사부에게 물었다.
 “사부님! 이팔돌이란 이름은 어때요?”
 “이팔돌? 무슨 뜻으로 지은 건데?”
 “몰라요. 하지만 호득강보다는 듣기가 그럴 듯하잖아요.”
 “헐헐! 녀석, 차라리 호득강이 낫다. 이팔돌이 뭐냐? 그걸 거꾸로 발음하면 돌팔이가 된다. 에구, 그걸 이름이라고 지었어? 쯧쯧··· 이 녀석아! 그럴 시간이 있으면 무공 연마나 열심히 하라고 이 사부가 얼마나 당부했냐?”
 “그, 그래요? 그럼, 왕천악(王天岳)은 어때요?”
 “왕천악? 에구, 녀석아! 왕천악이 뭐냐? 참, 유치찬란하기도 하다. 차라리 왕질악(王質惡)으로 지어라. 그게 더 낫겠다.”
 “왕질악? 왕질악··· 흐음! 이게 더 나은가? 왕질악! 왕질악! 괜찮은 것 같은데. 거꾸로 하면··· 으악! 안 돼요. 악질왕이라니요? 사부님! 순진한 제자를 악질 왕으로 만드시려고 작정하셨어요?”
 “헬헬! 그럼 질악순은 어떠냐? 이 이름은 괜찮냐?”
 “사부님! 질악순을 거꾸로 하면 순악질이잖아욧! 지금 제자를 놀리시는 거죠? 에이, 이제부턴 사부님 하고는 안 놀래요.”
 “에구, 이 녀석아! 그러니까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무공 연마나 하라고 했지? 임마, 이름은 나중에 천천히 지어도 돼!”
 “에이, 씨! 또, 왜 때려요?”
 호득강은 자신의 머리를 쥐어박는 사부를 흘겨보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오타신군은 다른 것은 죄다 빗나가도 제자의 머리통을 쥐어박는 것만은 절대 실수하지 않았다.
 장력을 날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헬헬! 그만 떠들고 어서 운기조식이나 해라.”
 “싫어요! 사부님한테 장법(掌法)을 배우면 몽땅 빗나간다고 다들 배우지 말래요.”
 “뭐라고? 어떤 녀석이 그런 소리를 해? 내 이놈을 당장···”
 “헹! 누구긴 누구예요? 마을 사람들 전부가 그래요.”
 놀리는 듯한 웃음을 지으며 혓바닥을 날름거리는 소년을 본 오타신군의 얼굴은 붉으락푸르락하고 있었다.
 하나밖에 없는 제자 역시 자신을 놀린다 생각한 탓이다.
 지금껏 호득강은 오타신군으로부터 하나의 심법(心法)을 전수 받았을 뿐이다. 그나마 익힌 지 얼마 되지도 않는다.
 술 심부름을 하러 촌락에 갈 때마다 어른들이 사부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정작 그것밖에 못 배운 더 큰 이유가 있었다.
 만취 상태일 때 자신을 징계하려 하였다는 이유로 곽삼이 술만 마시면 이곳을 찾아와 행패를 부리기 때문이었다. 거의 매일 술을 마시기에 매일 오는 셈이다.
 곽삼에게는 무공이 전혀 없었지만 타고난 신력이 있었다.
 아름드리 나무도 그의 도끼질 몇 번이면 힘없이 꺾이고 말 정도로 강한 힘을 지닌 그는 오타신군이 아무리 노력해도 자신을 때릴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수시로 행패 부리러 왔다. 하여 그를 피해 숨어 있느라 무공을 가르칠 시간이 부족하였던 것이다.
 그나마 오타심공(誤打心功)이라도 가르친 것은 최근 들어 곽삼이 다른 데 정신이 팔려 있기 때문이었다. 혈기왕성한 그는 요즘 누천촌에 하나뿐인 의원의 여식에게 푹 빠져 있었던 것이다.
 “이놈! 어서 결가부좌를 틀지 못하겠느냐?”
 사부의 노한 음성이 터져 나오자 소년은 지금까지의 태도를 버리고 즉각 결가부좌를 틀었다.
 그러면서 중얼거리듯 한마디 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제기랄! 이거 배우면 안 되는데··· 이거 배우면 나도 이 다음에 완전 개망신만 당할 텐데··· 에이, 안 되는데···”
 “뭐라고? 이 녀석이 방금 뭐라고 중얼거렸냐? 이 사부가 지금은 요 모양 요 꼴이지만 왕년에는 강호를 주름잡던 명숙이셨다. 지금 네놈이 배우는 것은 노부에게 운남신협이라는 외호를 얻게 한 무공이니 추호의 게으름도 피우지 말아야 한다. 알겠느냐?”
 “아, 알았어요. 할게요. 하면 되잖아요.”
 호득강은 여간해서는 화를 내지 않는 사부의 불호령이 무섭다는 듯 즉각 눈을 반개(半開)한 채 호흡을 골랐다. 그러면서 왼손은 손바닥을 위로 향하게 하여 결가부좌한 다리 한 가운데에 놓고, 오른손은 무릎 밑으로 늘어뜨리면서 다섯 손가락을 폈다.
 이것은 부처가 깨달음에 이르는 순간을 상징하는 수인(手印)으로서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이라는 것이다.
 석가모니(釋迦牟尼)가 보리수 아래에 앉아 성도(成道)할 때 악귀의 유혹을 물리친 증인으로 지신(地神)을 불러 자신의 깨달음을 증명하였다는 내용에서 유래한 수인이다.
 왜 이런 자세를 취해야 하는지는 모르나 이 자세를 취하기 위해서는 의자 같은 것 위에 앉아 있어야만 하였기에 호득강은 사부가 앉아 있는 나무로 만든 긴 의자의 끝에 앉아 있었다.
 잠깐 동안 이 모습을 본 오타신군은 제자가 자신의 명에 따라 운기조식에 열중한 것이 대견하다는 듯 흐뭇한 미소를 짓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와 동시에 의자의 한쪽이 번쩍 들렸고 동시에 호득강은 그대로 엎어질 수밖에 없었다.
 쿵-! 우당탕탕!
 “으윽! 사부님, 일어나시면 어떻게 해요? 아이고, 코야! 이런, 이마가 깨졌네. 으악! 이 피···! 사부님! 피 좀 봐요. 이게 다 사부님 탓이에요. 제자를 골탕먹이려고 일부러 그러신 거죠?”
 소년은 운기조식 중이었기에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내공이 거의 없는 상황이었기에 주화입마되는 화는 면했지만 이마가 깨지고 코피가 터지는 것만은 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아, 아니다. 사, 사부는 아무 생각 없이··· 미안하다.”
 오타신군은 제자의 양쪽 콧구멍과 이마에서 흘러나오는 선혈을 보며 미안한지 뒤통수를 긁었다. 그러자 그의 어깨로 허연 비듬이 마치 한 겨울에 눈 내리듯 줄줄 쏟아져 내렸다. 유난히 씻기를 싫어하기에 대머리이지만 비듬이 있었던 것이다. 이 모습을 본 소년은 그 와중에도 더럽다는 듯 이마를 찌푸렸다.
 “에이! 사부님 때문에··· 오늘은 기분이 안 좋아서 무공 수련은 이만 할래요. 불만 없으시죠?”
 “그, 그래. 오늘은 그만해라. 가서 마음대로 놀고 와도 좋다.”
 오타신군은 미안하다는 듯 놀아도 좋다는 손짓을 하였다.
 “헤헤! 그럼 이따 봐요. 제자는 놀러갑니다.”
 “응! 그, 그래. 실컷 놀다 오너라.”
 멀어져 가는 제자를 본 오타신군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하나뿐인 제자가 무공 배우기를 싫어하는 이유를 알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자신처럼 남들의 웃음거리가 될까 싶어 주저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오타심공은 아무런 이상이 없다.
 번번이 의도한 바와는 전혀 다른 곳으로 장력이 빗나가는 것을 이상히 여긴 그는 알고 있는 지식을 총동원하여 자신의 무공을 수십 번도 더 점검한 바 있었다.
 그 결과 오타심공에는 전혀 이상이 없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만일 심법에 이상이 있다면 운기조식을 하는 도중에 통증이 느껴지거나 주화입마되기 마련인데 전혀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심공은 중원의 다른 심공보다 더 심오하면 심오했지 부족하지 않았다.
 일 갑자 내공이란 한 사람이 쉬지 않고 육십 년 동안 운공조식을 해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단 한 번도 기연이라는 것을 만나지 못한 오타신군은 반 갑자 내공을 지니고 있었다.
 그가 이십 년 동안 무공을 연마하고, 다시 이십 년 동안 강호를 횡행하였지만 운기조식한 시간만 가지고 따지면 불과 십 년도 채 될까말까 하였다. 따라서 그의 내공은 십 년 이하여야 정상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반 갑자 내공을 지니고 있는 이유는 심법(心法)의 현묘한 효능 때문이었다.
 사실 오타심공은 다른 심공에 비하여 세 배 이상 뛰어난 것이다. 그렇기에 그의 내공이 반 갑자에 이르는 것이다.
 문제가 있다면 장법에 있었다.
 우연히 얻은 상고기서의 내용 중 공교롭게도 진기를 발경(發勁)하는 방법이 기록된 부분만 글씨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뭉개져 있었다. 불과 서너 글자이지만 그 부분이 명확하지 않기에 대충 추측하여 장법을 연성한 것이 화근인 모양이었다.
 하여 어떻게든 오류를 바로 잡아보려 무척이나 애를 썼지만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 그렇기에 삼십 년 내공을 지니고도 곽삼과 같은 자의 행패를 피해 몸을 숨겨야 하는 처지인 것이다.
 장법 외에는 익힌 무공이 전무하기 때문이었다. 만일 경신술(輕身術)이라든지, 권법(拳法), 지법(指法) 등을 익혔다면 이럴 필요가 전혀 없었을 것이다.
 “으음! 그게 뭔지 빨리 알아내야 하는데··· 휴우! 하지만 아무리 살펴도 모르겠는걸 어쩌지? 에라, 모르겠다. 가서 술이나 먹어야겠다. 이럴 땐 그저 술이 최고야!”
 골치 아픈 생각을 오래 하는 것을 질색하는 오타신군은 초옥 안으로 들어가 벽에 걸린 주호(酒壺:술을 담는 호로)를 꺼내 들고는 이내 이맛살을 찌푸렸다.
 “뭐야, 이거? 젠장! 술이 한 방울도 없잖아? 이 녀석 어디 갔어? 참, 조금 전에 놀러갔지? 에잉, 하필이면 이럴 때에··· 젠장! 할 수 없지. 에이, 귀찮아!”
 잠시 투덜대던 오타신군은 주호를 들고 누천촌으로 향했다. 귀찮지만 주청에 가서 술을 받아오기 위함이었다.
 오타신군에게 무공 이외의 재주가 있다면 그것은 사냥이었다. 태어난 이후 활이라고는 만져보지도 못했고, 유엽비도(柳葉飛刀) 역시 다뤄본 적이 없는 그는 활투(活套:올가미)를 잘 놓았다. 짐승의 발자국만 보면 어느 방향으로 향했는지, 어디를 잘 다니는지를 아는 그가 설치한 활투에는 짐승들이 적지않게 걸려들었다. 하여 고기는 먹고, 가죽은 벗겨서 잘 말린 다음 주청에 가져다주었다. 대신 원하는 만큼 술을 받기로 한 것이다.
 주청의 장방은 그가 잡은 짐승의 가죽에 흠집이 없으므로 반년에 한 번 큰 마을에 가서 이를 팔아 짭짤한 수입을 올렸다.
 어린 호득강이 매일 갈 수 없기에 한 번 가면 사흘치 술을 받아오곤 하였는데 깜박 잊은 것이다. 그것은 어제 찾아 왔던 곽삼 때문이었다.
 선불 맞은 멧돼지처럼 씩씩거리는 그를 본 오타신군과 호득강은 늘 숨던 곳에 숨은 채 숨죽이고 있었던 탓이다. 이리저리 찾아다니며 설치던 그가 떠드는 소리로 미루어 의원의 여식으로부터 딱지를 맞고 술을 한잔 마시고 화풀이를 하려 이곳을 찾은 모양이었다.
 “에구, 내 팔자야··· 늘그막에 이게 웬 고생이람? 에구구구···”
 오타신군이 신세타령을 하며 사라질 때 언덕 너머에서 곽삼이 어슬렁거리며 올라서고 있었다.
 
 ***
 
 근원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오래 된 무림엔 철칙(鐵則) 하나가 있다. 강자존(强者尊), 약자멸(弱者滅)이 바로 그것이다.
 정(正), 마(魔), 사(邪)가 늘 대립하는 강호는 때로는 마나 사가 득세하기도 하나, 결국에는 정이 그들을 눌러 평화를 유지하게 하였다. 하여 사필귀정(事必歸正)이라는 말이 생겨나게 되었다.
 은원을 위한 대결이나, 무공의 고하를 가늠하는 비무, 그리고 명예를 위한 비무가 하루에도 수백 혹은 수천 번이나 이루어지고, 적지않은 사상자가 발생되는 곳이 바로 무림이다. 따라서 수없이 많은 은원이 난마(亂麻)처럼 엉켜 있는 곳이다.
 이러한 무림이 간혹 대립 관계를 풀고 서로 협력하는 경우가 있었다. 전례 없는 대살성(大煞星)이 나타나 정사마(正邪魔) 모두를 핍박하는 경우이거나, 이민족의 침입이 있을 때였다.
 너무도 넓어 그 끝을 알 수 없다는 중원의 변방에는 적지않은 이민족들이 호시탐탐 기름진 옥토(沃土)를 탐냈다. 따라서 그들의 침입이 종종 있었다. 이럴 때마다 일치단결한 무림은 관을 도와 그들을 물리치는 데 앞장섰기에 무사히 막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경우도 종종 있었다.
 
 고대에는 이족(異族)들의 끊임없는 국경 침범과 약탈로 얼룩졌고, 서진(西晋) 말기에는 오호(五胡)로 통칭되는 흉노(匈奴), 선비(鮮卑), 저(?), 갈(?), 강족(羌族)이 본토로 직접 들어와 나라를 세우기도 하였다. 이때를 흔히 오호십육국 시대라고 한다.
 이후 한족(漢族)과 호족(胡族)의 연합적인 체제 하에 수(隨)와 당(唐)이 건국되기도 하였었다.
 그러다 송대(宋代)에 잠시 한족의 왕조가 성립되는 듯하였으나 정강의 변(靖康의 變:북송이 금(金)에 의해 멸망된 사건. 정강은 흠종(欽宗)의 연호. 요를 멸망시킨 금이 1123년 연경 부근의 6주를 송에게 할양해 줄 때 송과 맺은 약속을 송이 이행하지 않자 송의 수도인 개봉(開封)을 공격하였다. 이에 송은 세폐(歲弊)의 지불, 영토 일부의 할양 등을 조건으로 화의를 맺었다. 그러나 송이 약속을 위반하였으므로 금군이 재침하여 개봉을 함락시키고(1126), 이듬해 휘종(徽宗:上皇)?흠종을 비롯하여 황후?태자?비빈?대신 등 3천여 명을 포로로 하고, 많은 재물을 약탈하여 만주로 가지고 가니, 송 왕조는 일단 멸망하였다(북송). 그때가 정강 원년(1127)이었으므로, 이 사건을 정강의 변, 혹은 정강의 난이라 한다. 휘종 등은 결국 북만주에서 서거하였고 흠종의 아우 고종이 남경 응천부(南京應天府:河南)에서 즉위하여 송 왕실을 재건하였다.)을 통해 송(宋)은 여진족(女眞族)이 세운 금(金)에 의해 멸망하고 말았다. 강남으로 밀린 이때를 남송(南宋) 시대라 하였다.
 가장 최근에는 전 무림이 합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몽고족(蒙古族)의 침입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그리고 중원에는 원(元)이 세워져 백여 년 간이나 그들의 지배를 받았다.
 이외에도 중원을 노린 이민족들은 많았다. 돌궐(突厥)과 거란족(契丹族)이 있었고, 말갈족(靺鞨族) 외에도 상당수가 있었다.
 몽고족에 의하여 중원이 정복당한 것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삼백 년 전 멸망한 아수라혈천궁(阿修羅血天宮) 때문이었다.
 궁주인 수라신군이 중원 제패를 선언하자 그의 휘하들은 파죽지세로 강호의 제 문파들을 흡수 통합하거나 멸문시켰다.
 이로 인하여 강호 정파라 할 수 있는 구파일방과 명문세가들은 물론 마도와 사파까지도 정기가 거의 말살되다시피 하였다.
 결국 정사마의 모든 문파들이 합심 단결하여 아수라혈천궁을 공격한 끝에 멸문시킬 수는 있었지만 많은 고수들이 이승을 하직하는 바람에 절정 무공 대부분이 실전(失傳)되었다.
 이에 정사마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기분으로 백 년 간 상호 불가침한다는 선언을 하였다. 그 사이에 크게 줄어든 문파의 성세를 다시 키우겠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정고일척(正高一尺) 마고일장(魔高一丈)이라는 말이 있듯 가장 먼저 문파의 재건에 성공한 마도무림은 사파와 정파를 또다시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자신의 식솔을 죽이고 자신의 목에 칼을 들이미는데 가만히 있을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겠는가?
 이에 정과 사는 마도에 대항하여 혼신을 다하였다. 수십 년에 걸친 대격돌 끝에 정사마는 양패구상을 당했다. 간신히 복원한 세력 가운데 태반을 유실 당하게 된 것이다.
 크게 성세가 줄어든 정사마는 또다시 은인자중(隱忍自重)하는 세월을 보냈다. 그러다가 이번엔 사파무림이 들고일어났다.
 다시금 중원 무림은 혼전 속으로 빠져들었고, 그 성세 역시 줄어들고 말았다. 이럴 즈음 몽고족이 치고 내려왔기에 힘 한번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정복당한 것이다.
 몽고족이 다스린 백여 년 간은 대몽항쟁의 기간이었다.
 처음 정복을 당했을 때에는 정사마를 초월하여 핍박받는 한족들을 위한 항쟁을 하면서 많은 무림인들이 비명횡사하여 성세가 크게 줄었으나 한동안 은인자중하면서 세력을 키웠다.
 그러다가 대명제국을 건국한 홍무제(洪武帝) 주원장(朱元璋)을 도와 몽고족을 몰아내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때에도 많은 인명 손실이 있었기에 현 무림은 또다시 성세가 많이 줄어 있었다.
 하여 대몽항쟁의 주 세력이었던 구파일방 및 명문세가들의 성세가 크게 줄어든 대신 무림에는 새로운 문파들이 창건되어 눈부신 성장을 거듭하고 있었다.
 흔히들 일부(一府), 이보(二堡), 삼궁(三宮)이라 부르는 문파가 바로 그들이었다. 이들을 한꺼번에 지칭할 때에는 무림육세(武林六勢), 혹은 강호육세(江湖六勢)라고 불렀다.
 그 가운데 가장 신비한 곳은 단연코 일부(一府)로 불리는 자하석부(紫霞石府)이다. 어디에 있는지, 누가 부주인지, 언제 생겼는지 모든 것이 미궁 속에 있는 문파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비밀 속에 감춰진 자하석부가 강호제일신비로 불리게 된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발원지가 어딘지 알 수 없는 노래 때문이었다.
 
 < 하늘 끝 구름도 오르지 못하는 곳엔 푸른 깃털을 가진 벽붕(碧鵬)을 타는 선인들이 있다네. 선약(仙藥)이 지천으로 널린 그곳엔 늙은 사람도 없고, 죽는 사람도 없다네. 자하(紫霞)의 아름다움 속에 불광(佛光)을 지닌 선인들이 노닌다네. >
 
 얼핏 듣기엔 별 내용이 없는 듯하지만 가만히 음미해보면 엄청난 내용을 유추해 낼 수 있다.
 첫째, 하늘 끝 구름도 오르지 못하는 곳이라는 구절이다.
 무림의 기인들이 간혹 높은 산에 은거하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구름조차 미치지 못할 정도로 높은 곳에 있는 경우는 없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곳은 보통 만년설로 뒤덮여 있으며, 매서운 추위만이 있는 곳이다. 또한 공기가 희박하여 호흡하기조차 힘든 곳이다.
 하여 그런 곳에 사람이 있다면 내공과 경공이 공전절후의 경지에 있기 전에는 곤란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 벽붕을 타는 선인이란 구절이다.
 세상의 온갖 괴이한 것들을 집대성한 산해경(山海經)에 기록되어 있기를 벽붕은 사납기가 세상 최고로, 이무기나 맹호 같은 것들을 잡아먹고 살며 사람의 힘으로는 길들일 수 없다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을 타고 다닌다 함은 엄청난 능력의 소유자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증명하는 것이다.
 셋째, 늙은 사람도 죽는 사람도 없다는 구절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자하석부의 사람들이 반노환동(返老還童)의 경지에 다다랐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세월의 힘을 이겨내 장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경지에 도달하려면 무림인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노화순청(爐火純淸)은 물론 삼화취정(三花聚頂)과 오기조원(五氣造元)까지 넘어선 등봉조극(登峰造極)에 이르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엄청난 고수들의 집단이라는 것이다.
 넷째, 불광을 지닌 선인이라는 구절이다.
 불광이라 함은 석가모니(釋迦牟尼)의 머리 뒤쪽에 생기는 광배(光背) 혹은 후광(後光)을 의미한다.
 부처도 아닌 사람의 머리 뒤에 이러한 빛 무리가 생긴다는 것은 어쩌면 등봉조극을 훨씬 넘어선 신화경(神化境)이나 조화지경(造化之境)에 이르렀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여 무림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자하석부에 들기를 열망하여 무림제일신비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항간에서는 또 다른 소문이 나돌고 있었다. 그것은 자하석부가 어쩌면 날조된 것인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무림 역사상 지고무상한 경지인 신화경이나 조화지경에 도달한 사람은 전무하였다. 그것은커녕 흔히들 노화순청의 경지에 든 사람조차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였다.
 소림사의 달마대사나 무당의 장삼봉진인, 그리고 몇몇 고인들을 빼고 나면 노화순청의 경지에 든 사람은 없었다. 따라서 그들을 능가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아마도 누군가가 잘못 알고 만든 노래이거나, 의도적으로 누군가를 속이려 만든 노래라는 것이 그들의 의견이었다.
 워낙 설득력이 있기에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자하석부의 존재 자체를 아예 부인하기도 하였다. 만일 정말로 그런 선인들이 있다면 속세에 알려지기를 지극히 꺼릴 텐데 코흘리개 아이들조차 노래로 부를 정도가 되었겠느냐는 것이다. 아무튼 존재유무를 떠나 그곳은 무림의 신비로 자리잡은 지 오래 되었다.
 무림일비로 불리는 자하석부를 제외한 나머지 이보, 삼궁은 현 무림에 상존(常存)하는 문파이다.
 
 강남 무림에서 일어서 욱일승천의 기세로 성장하는 패룡보는 풍광 아름답기로 이름 난 계림(桂林)에 있다.
 평지에 우뚝우뚝 솟아 있는 산봉우리들, 맑고 깨끗한 강물과 수없이 많은 정교하고 신비로운 동굴들, 그리고 기이하고 아름다운 바위들이 절로 감탄사를 터뜨리게 하는 곳이 계림이다.
 사람들은 흔히 하늘 밖에 기봉(奇峰)이 옥석인 양 늘어섰고, 천만 개의 홀(笏)이 허공에 깔렸다며 찬탄한다.
 계림에 들어서면 천지신명이 아니면 도저히 만들 수 없는 화려한 조각 세계에라도 들어선 듯 한눈에 안겨드는 천봉만악(千峰萬岳)이 모두 정교롭게 보인다.
 이곳의 산수는 산봉의 수려함과 암석과 동굴의 기이함으로 유명한데 모두 달나라의 궁전이나 선경과 같다.
 어떤 것은 산정 부분에 매달린 채 구름과 안개에 가리워 신비롭고, 어떤 것은 강물 위에 가로누워 바위와 물이 한데 어우러져 상쾌하며, 또 어떤 것은 산 속 깊이 자리하여 마치 선궁이나 미궁 같아 신비감을 더해간다.
 예로부터 계림은 산수로서는 천하제일이라는 의미로 산수갑천하(山水甲天下)라 불렸다. 이러한 아름다운 풍광과 어우러져 계화(桂花) 향기가 코끝을 스치면 매혹 당한 사람들로 하여금 차마 발을 떼지 못하게 하는 곳이 바로 계림이었다.
 패룡보는 이러한 계림의 수없이 많은 동굴들 가운데 존재한다고 한다. 워낙 동굴이 많은 곳이며, 자욱한 안개와 구름으로 인하여 어느 동굴에 자리잡고 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았다.
 하지만 많은 사실들은 알려져 있었다.
 보주는 올해 삼십칠 세인 일검진천(一劍振天) 천무진(闡茂秦)이고, 그의 슬하에는 삼남삼녀가 있다고 하였다.
 하나같이 영기발랄한 준재라 하였다. 그 가운데 그의 장남이자 소보주인 도마검(屠魔劍) 천호광(闡護廣)은 올해 십칠 세로 강남무림의 후기지수 중 발군으로 소문나 있었다.
 그것은 그의 손에 전대마두인 흡혈편복(吸血??) 노걸직(盧杰稷)의 오른손목이 잘렸기 때문이었다.
 세수 칠십에 다다른 흡혈편복은 오십 년 전 강호에 출도한 이래 수없이 많은 악행을 저지른 악인이었다. 그의 취미와 특기는 살인이었고, 그의 양식은 젊은 여인의 선혈이었다.
 그런 그가 계림에 들어서자마자 지나던 여인을 죽이고 피를 빨아먹는 모습을 본 천호광은 즉각 검을 떨쳐 그를 징계하였다.
 백전노장이자 강호의 늙은 생강인 흡혈편복은 자신의 애병인 흡혈편(吸血鞭)이 가닥가닥 끊기는 것으로도 부족하여 손목마저 잘리자 이를 갈며 도주하였다. 이때 천호광의 나이 십오 세 때였다. 이로 인하여 도마검이라는 외호를 얻은 것이다.
 정도 사도 마도 아닌 패(覇)를 숭상하는 패룡보주는 일찌감치 자식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실력을 갖추는 자에게 후대를 맡기겠다고 공언한 바 있었다.
 현재로서는 도마검이 가장 뛰어나지만 두 아우에게 언제 추월 당할지 모른다고 하였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그의 두 아우 역시 만만치 않은 실력자라 하였다.
 보주의 여식들은 강호 나들이를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기에 알려진 바가 전혀 없었다.
 현재 패룡보는 반경 오백여 리를 주름잡고 있었다.
 
 패룡보와 더불어 무림이보로 불리는 군림보(君臨堡)는 공자(公子)가 살았던 산동성(山東省) 곡부(曲阜)와 제남부(濟南府) 사이에 자리잡은 태산(泰山)의 아랫자락을 깔고 앉아 있었다.
 태산은 주봉인 대종(垈宗)을 대악(大岳)으로도 부르는데 높이는 불과 오백여 장밖에 되지 않지만 오악의 으뜸인 동악(東岳)으로서 도가(道家)의 설(說)에 따라 제왕이 된 사람이 산꼭대기와 산기슭에서 봉선의식(封禪儀式)을 행하는 곳이다.
 산정(山頂)에는 태산부군(泰山府君)의 여식인 벽하원군(碧霞元君)을 모신 옥황묘(玉皇廟)가 있다.
 원래 군림보가 창건된 곳은 이곳저곳으로 교통이 발달된 곡부 부근의 야산이었다. 그런 그들이 다소 불편한 이곳으로 옮긴 까닭은 보의 명칭을 보면 알 수 있다.
 천하를 제패한 진시황을 비롯하여 한무제와 당현종 등이 봉선지례를 올린 태산을 깔고 앉음으로써 자신들도 천하무림을 일통할 야망에 불타고 있다는 것을 만천하에 공포한 것이다.
 잠룡신군(潛龍神君)으로 불리는 군림보주 노관억(盧冠?) 역시 패룡보주와 마찬가지로 삼십칠 세밖에 되지 않았다.
 전대보주인 부친이 삼 년 전 의문의 실종을 당했기에 비교적 젊은 나이에 보주직에 오른 것이다.
 그런 그에게는 사남일녀가 있었다. 일찌감치 소보주에 임명된 장남 노민부(盧敏赴)는 타고난 신력 때문에 곡부항우(曲阜項羽)라는 외호로 불린다. 웬만한 무림인은 들지도 못할 삼백 근 짜리 철부(鐵斧) 한 쌍이 그의 애병이었다.
 언젠가 태산 부근을 지나던 괴인 하나가 있었다. 무림인들은 그를 부를 때 철관마(鐵棺魔)라고 불렀다. 그가 끌고 다니는 오 척이 채 되지 않는 철관 때문에 이러한 외호로 불리는 것이다.
 사십여 년 전부터 강호를 횡행한 그는 누구든 마음에 들지 않으면 살수를 펼쳤다. 산 채로 포획된 자는 그의 철관 길이에 맞춰져야만 하였다. 다리가 잘리는 극심한 고통 속에서 신음하다 죽어가야만 하였던 것이다.
 무림에는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저잣거리에서 기예를 선보이는 것으로 먹고살던 비검왜타(飛劍矮駝)라는 무림인이 있었다. 천형(天刑)을 타고 태어난 그는 광명정대한 성품이었는데 재주를 부리면서 철관마를 빗대어 우스개 소리를 한 적이 있었다. 이것을 들은 그는 즉각 비검왜타를 생포하였다.
 그런데 그의 키가 불과 사 척밖에 되지 않자 철관에 엎어놓고는 망치로 두들겨 그의 굽은 등을 곧게 폈다.
 물론 그의 굽었던 척추는 산산이 부서졌고, 그러는 동안 지독한 고통 속에서 비명을 지르다 죽어갔다. 저잣거리 한 복판에서 벌어진 이 사건 때문에 철관마는 일약 무림의 공포로 떠올랐다.
 비검왜타의 무공이 구파일방 장문인에는 못 미치지만 적어도 호법급에 해당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진 때문이다.
 하여 누구든 철관을 질질 끄는 소리가 들리면 즉각 몸을 숨기거나 꿀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문 채 고개를 조아려야 하였다.
 안 그랬다가는 산 채로 다리가 잘려나가는 극심한 고통 속에 잠겨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런 철관마가 무고한 양민의 다리를 자르는 모습을 본 곡부항우는 즉각 한 쌍의 철부를 뽑아들었다.
 사람들은 이를 보고 젊은 청년 하나가 공연한 공명심 때문에 비명횡사하는 꼴을 보겠구나, 하며 안타까워 하였다.
 하지만 곧 쌍수를 치켜들며 환호성을 질렀다.
 철관마의 애병인 유성추(遊星鎚)가 철부에 부딪쳐 산산이 부서짐과 동시에 그의 다리 한쪽이 잘려나갔기 때문이었다.
 그 동안 악명 높았던 철관은 철부에 의하여 완전히 찌그러져 다시는 사람을 담을 수 없게 되었다.
 남은 다리 하나마저 잘라버리겠다는 곡부항우의 말에 철관마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공포의 빛이 떠올랐다. 그리고는 손이 발이 되도록 빌고 나서야 간신히 풀려날 수 있었다.
 이 사건으로 곡부항우의 명성이 온 강호에 알려졌다.
 
 ***
 
 “크흐흐흑! 뭐해? 빨리 앉아!”
 “사, 사부님···! 안 됩니다. 그러시면 정말 안 됩니다.”
 “노부가 세상을 더 살아 무엇하겠느냐? 그런 꼴을 당하고 어찌 살라는 말이냐? 무림인은 명예로 먹고산다. 명예가 땅바닥에 떨어진 이상 사부는 세상을 살 아무런 이유가 없다. 어차피 죽으면 썩을 살이다. 그러니 너는 그저 이 사부의 말만 따르면 된다.”
 “사부님! 이러지 마십시오. 예? 제발··· 사부님!”
 호득강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사부가 세상을 버리려 하기 때문이었다. 현재 오타신군의 얼굴은 엉망진창이었다.
 마을로 술을 사러갔던 그는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가는 법이 없듯 주청에서 대취하도록 술을 마시고 돌아왔다.
 갈 지(之)자 걸음으로 비틀거리는 그의 앞을 막아선 것은 개망나니 곽삼이었다. 그 역시 적지않게 취해 있는 상황이었다.
 점찍어 두었던 의원의 여식이 포목점 아들과 혼례하기로 완전히 결정되었다는 말에 노화가 하늘 끝까지 솟았는데 이를 해소할 곳을 찾지 못하자 다시 온 것이다.
 “끄으으윽! 어? 너, 너는 누구냐? 왜 노부의 앞을 가로막는 것이냐? 비켜! 끄으으윽! 노부는 이만 가서 자야겠다. 끄으윽!”
 “크크크! 늙은이, 잘 걸렸다. 그 동안은 쥐새끼처럼 잘도 피해 다녔지만, 크크크! 오늘은 절대 도망 못 간다. 챠아앗!”
 “으으윽! 왜, 왜이래? 으아아악!”
 퍽! 퍼억! 퍼퍼퍼퍽! 퍼억! 퍽! 퍽퍽퍽!
 “아악! 아아아악!···”
 느닷없는 공격에 놀랄 사이도 없이 뒤로 자빠진 오타신군의 복부에 올라탄 곽삼의 주먹이 작렬하자 연신 비명을 지르던 그는 끝내 혼절하고야 말았다. 워낙 술에 취해 있었기에 반 갑자 내공이 있으면서도 일개 범인에게 당한 것이다. 그래서 오타신군의 얼굴이 이토록 엉망이 된 것이다.
 머리카락은 완전한 봉두난발이었고, 눈두덩은 퉁퉁 부어 올랐으며, 콧잔등은 움푹 주저앉았다. 게다가 쌍 코피가 터져 선혈이 낭자하였고, 이빨이 몽땅 부러지면서 입술이 온통 터져 버렸다.
 눈뜨고는 볼 수 없을 정도로 참혹한 모습이 된 사부에게 달려간 호득강은 황급히 수건을 찬물에 적셔와 정성스럽게 닦아냈다. 어슬렁거리는 곽삼이 무서워 숨어 있다가 튀어나온 것이다.
 간신히 정신을 차린 오타신군은 참을 수 없는 치욕감 때문에 한동안 오열을 터뜨렸다. 생각해 보라. 육십을 넘긴 노인이 이제 겨우 약관 정도 된 새파란 애송이에게 무참하게 두들겨 맞은 후 혼자서 울고 있는 모습을!
 게다가 자신은 무공을 익힌 무림인이고, 상대는 아무리 신력을 지니고 있다고는 하지만 일개 범인(凡人)이다. 지독한 고통 때문에 만취되었던 술에서 깬 오타신군은 너무도 창피하여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다며 자진하겠다고 칼을 찾았다.
 한 번도 사람이 죽는 것을 본 적이 없는 호득강은 너무도 무서워 황급히 칼을 숨겼다. 잠시 칼을 찾던 오타신군은 포기했는지 털썩 주저앉은 후 한동안 또 울음을 터뜨렸다.
 그리고는 이번엔 느닷없이 호득강으로 하여금 가부좌를 틀고 앉으라는 소리를 하였다. 대체 왜 그러느냐는 물음에, 자신은 세상을 살기 싫으나 너는 아직 앞날이 창창하니 지닌바 내공을 개정대법(開頂大法)으로 주겠다는 것이었다.
 이제 겨우 심법의 걸음마를 뗀 호득강이었지만 개정대법을 펼치면 결과가 어떻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무공 배우기가 싫어 요리조리 빼는 제자를 달래 어떻게든 자신의 무공을 가르치려던 오타신군이 무림에 관한 많은 이야기를 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호득강은 적어도 십 년 이상은 무림에서 굴러다닌 정도의 내용을 습득하게 되었다.
 개정대법을 펼쳐 모든 내공을 건네면 모든 진력이 고갈되어 죽음에 이른다는 것을 아는 호득강은 펄쩍 뛰며 물러섰다. 그러면서 죽어도 그렇게 할 수 없다고 하였다.
 하지만 오타신군의 고집 또한 만만치 않았다.
 자신은 어차피 죽을 목숨이니 그깟 내공을 지니고 죽으면 무엇하겠느냐며 빨리 앉을 것을 요구하였다.
 “크흐흐흑! 세상 사람들의 손가락질이 싫어 낙향을 했건만 애송이한테 얻어터지기나 하고, 제자라고 있는 놈도 사부 알기를 개똥만도 못하게 여겨 한 번도 말을 듣지 않으니··· 크흐흐흑! 나는 세상을 살 가치조차 없어. 크흐흐흐흑!”
 쿵! 쾅! 쿵! 쾅! 쾅쾅!
 혼잣말을 하던 오타신군이 기둥에 대고 이마를 박아대자 삽시간에 선혈이 낭자한 모습으로 화했다.
 간신히 말라붙었던 선혈 위로 또 다른 선혈이 흘러내리는 모습은 지옥의 악귀나찰을 보는 것과 흡사하였다.
 “사, 사부님! 이러지 마세요. 흐흑! 사부님의 깊은 뜻을 제자가 왜 모르겠습니까? 하지만, 하지만 사부님께서 돌아가시면 제자는 어찌 살라고··· 흐흐흑!”
 “강아야! 사부는 너를 돌봐줄 자격조차 없는 늙은이다. 나와 함께 있으면 너도 사부처럼 사람들의 놀림감이 될 게야. 그러니 일찌감치 떨어지는 것이 낫다. 세상에 나가면 사부보다 훨씬 더 뛰어난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게다. 너는 총명하니 스스로 네 앞길을 개척할 수 있을 게야.”
 “아닙니다. 사부님! 제자는 사부님 없이 살 수 없습니다. 그러니 제발··· 흐흑! 사부님···”
 호득강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연신 굴러 떨어지고 있었다.
 누구보다도 사부의 고집을 잘 아는 그였다. 한번 하겠다고 마음 먹으면 끝장을 내지 않고는 배기지 못하는 성품인 사부는 자신이 아무리 말려도 기어코 죽음을 택할 것이다.
 하지만 맥놓고 있을 수만은 없기에 만류하는 것이다.
 “휴우! 사부가 너에게만은 이 이야기를 하지 않으려 했는데, 할 수 없구나. 지금부터 사부의 말을 잘 들어라. 사부는···”
 아무리 말을 해도 듣지 않는 제자를 설득하기 위하여 오타신군이 택한 것은 자신의 과거를 털어놓는 것이었다.
 무공을 익히느라 사십이 다 된 나이에 강호에 출도한 그는 우연한 기회에 마도인들에 의하여 공격받아 부상당한 여인을 구한 적이 있었다. 꽃처럼 아름다운 여인은 지금은 멸문당한 유성보(流星堡)의 천금인 행화선자(杏花仙子) 유옥교(劉玉嬌)였다.
 너무도 심한 부상을 입은 그녀를 구하기 위하여 깊은 산중에서 거의 석 달을 머무는 동안 오타신군의 내심엔 연모의 정이 생겨났다. 하지만 이를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행화선자의 당시 나이가 불과 이십이었기 때문이었다.
 나이 이십에 장가를 갔다면 그만한 딸이 있을 것이기에 차마 자신의 진심을 털어놓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한편 행화선자는 친혈육도 아니건만 자신을 위하여 온갖 정성을 쏟는 오타신군에게 미안하고 고맙다는 감정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 역시 배나 차이나는 나이 때문에 그 이상의 감정은 없었다. 그러나 날이 지나면서 차츰 호감을 품게 되었다.
 하지만 자신의 감정을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그러는 가운데 부러졌던 다리는 차츰 아물어갔다.
 다리가 모두 나으면 하산을 하여야 한다는 것을 잘 아는 오타신군은 안타까웠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한편 행화선자는 매일 밤 상처에 앉은 딱지를 떼어냈다. 그와 헤어져야 할 시간을 조금이라도 늦추기 위해서였다.
 그러는 사이에 다리는 낫고 말았다. 오타신군은 자신의 감정을 숨긴 채 아무렇지도 않은 듯 서둘러 하산하자고 하였다.
 결국 유성보로 돌아간 행화선자는 애타는 연모지정을 억누른 채 우울한 나날을 보냈다. 오타신군 역시 그녀를 도저히 잊을 수 없었기에 유성보 주변을 배회하는 나날을 보냈다.
 그러는 동안 술을 배운 그는 만취하는 날이 많았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만취한 채 골아 떨어졌다가 새벽녘에야 깨어난 오타신군은 놀라운 소식을 들었다.
 밤사이 유성보가 궤멸 당했으며 행화선자가 누군가에게 납치되었다는 것이었다. 놀라서 튀어나간 그는 흉수의 흔적을 어렵게 찾았고 그날부터 끝없는 추적을 하였다.
 그렇게 반 년이 지났을 무렵 오타신군은 오대산 깊은 계곡에서 그렇게도 그리던 행화선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녀는 흉수인 마군자(魔君子)라는 자에게 더럽혀질 대로 더럽혀진 뒤 수없이 복용한 최음제 때문에 색녀가 되어있었다.
 하여 요사스런 웃음소리와 더불어 격렬한 요분질로 마군자의 수하들과 한참 즐기던 중이었다.
 놀란 표정을 지은 채 말이 없던 오타신군을 보고 제정신을 차린 그녀는 시퍼렇게 날이 선 비수로 스스로 심장을 찔렀다.
 황급히 다가간 오타신군에게 자신을 더럽히고 색녀로 만든 마군자를 죽여줄 것을 부탁하고는 이내 절명하고 말았다.
 분노한 오타신군은 즉각 마군자를 찾아 비무를 청했다. 그리고는 십만 초에 이르는 대접전을 펼쳤다. 승부는 무승부였다.
 그러나 그것은 실상 무승부는 아니었다. 오타신군은 전력을 다했으나 마군자는 불과 칠 성 만으로 대결에 임했기 때문이었다. 당시엔 운남신협이라는 외호가 강호를 진동시킬 때였다. 그런 그를 상대로 심심하던 차에 재미로 상대를 하면서 철저히 조롱함으로써 마군자라는 명호가 강호를 진동하도록 하려 한 것이다. 이후 수없이 도전하였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끓어오르는 분노를 삭일 수 없던 오타신군은 술을 끊고 더욱 무공에 정진하였다. 그런데 이때부터 조금씩 장력이 빗나가기 시작하였다. 무공 연마를 하면 할수록 더욱 빗나가기 시작하였으나 사랑하는 정인의 복수를 위해 도전하였던 그는 개망신만 당했다.
 만인환시리에 미친 개 두들겨 맞듯 그렇게 두들겨 맞은 그는 만천하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이후로도 몇 번이나 더 도전하였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마군자는 도저히 넘을 수 없는 벽이 된 것이다. 결국 실망한 그는 참담한 심정으로 중원을 떠나 누천촌으로 돌아 온 것이다.
 “크흐흑! 사부는 이제 너무 늙어 그자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하지만 너라면 다를 것이다. 아직 나이가 어리니 지금부터라도 무공 연마에 박차를 가하여 이 사부의 원한을 갚아다오. 흐흑!”
 “사, 사부님···! 아앗! 사부님, 이러시면··· 읏!”
 지금껏 비장한 표정으로 말을 하는 사부의 마음을 달래주기 위하여 다가앉았던 호득강은 경악성을 터뜨렸다.
 마혈에 이어 아혈까지 제압당했던 것이다.
 “강아야, 지금부터 하는 말을 잘 들어라!”
 ‘으읏! 사부님, 안 돼요! 안 돼! 사부님! 절대 안 돼요!’
 호득강은 정수리를 타고 들어오는 뜨거운 진기의 느낌에 깜짝 놀랐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폭포수처럼 쏟아져 들어오는 진기는 혈맥을 따라 성난 노도처럼 쇄도하기 때문이었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오타심공을 운기해라. 그 길만이 사부의 죽음을 헛되지 않게 하는 것이다. 알겠느냐?”
 귓가로 들려오는 사부의 창노한 음성에 호득강은 눈물만을 흘릴 수 있을 뿐이었다. 개정대법이 시작된 이상 중도에서 멈출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흐흑! 사부님! 사부님···! 흐흐흑!’
 속으로 눈물을 삼키는 동안 폭포수처럼 쏟아져 들어오던 뜨거운 진기가 어느샌가 멈췄다는 것을 느낀 호득강은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제압 당했던 마혈과 아혈이 개정대법이 진행되는 동안 풀려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사부님! 사부님! 아아아앙! 사부님···!”
 오타신군의 맥은 이미 끊겨 있었다. 싸늘하게 식어가는 시신을 부둥켜 안은 호득강은 끝없는 오열을 터뜨렸다.
 
 
 제2장 세상 속으로
 
 
 “흐흑! 사부님. 제자, 이만 하직 인사를 드리겠습니다. 흐흑! 열심히 무공을 연마하여 사부님의 원수는 반드시 제자의 손으로 갚고야 말겠습니다. 사부님! 흐흐흐흑···!”
 새로 만들어진 초라한 봉분 앞에 무릎꿇고 앉은 호득강은 한참을 오열한 후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대례를 올렸다.
 이때였다. 등뒤에서 술에 잔뜩 취한 곽삼의 음성이 들려왔다.
 “음하하하! 이런 쥐새끼 같은 늙은이··· 어디서 감히 잔꾀를? 야, 꼬마야! 네놈의 사부라는 작자는 어디에 있느냐?”
 아직 태양이 중천에 떠 있는 한낮이건만 곽삼은 벌써 대취 상태였다. 오늘 아침, 점찍어 두었던 여인이 기어코 혼례를 올리자 혼례식장에서 개판을 친 것으로도 모자라 다시금 오타신군을 두들겨 패려고 온 것이다.
 “뭐라고요? 보고도 몰라요?”
 “이런! 싸가지 없는 놈이···? 어서 말해! 네놈의 사부라는 늙은 작자는 어디에 숨어 있느냐?”
 “흥! 사부님은 돌아가셨어요. 무덤이 보이지도 않나요?”
 “크헤헤헤! 이런 맹랑한 꼬마를 봤나? 지금 나더러 이걸 믿으라는 말이냐? 크크! 늙은이하고 짠 모양인데 까불지 말고 어서 말해. 안 그러면 네놈도··· 크크크! 지금 본인은 매우 기분이 나쁘다. 따라서 바른대로 말하지 않으면 애고 어른이고 할 것 없이 확···! 그러니 어서 그 늙은이가 어디에 숨었는지 말해!”
 곽삼은 흰자위가 희번덕거리는 눈으로 잔뜩 힘을 주어 부라렸다. 예전 같으면 호득강도 이런 모습에 잔뜩 겁을 먹고 오돌오돌 떨었겠으나 지금은 아니었다. 누구 때문에 사부가 세상을 하직하였는가?
 그렇지 않아도 오타신군이라 놀림 받은 것 때문에 살아갈 가치조차 없다며 자학(自虐)하던 중 씻을 수 없는 결정적인 치욕을 안겨 주었기에 스스로 목숨을 끊다시피 한 것이 아니던가!
 그렇기에 그를 바라보는 시선이 고울 리가 없었다.
 “어쭈? 이런 빌어먹을 놈이···? 너, 한번 뒈져볼래? 이런 쥐방울만한 놈이 그런 눈으로 째려보면 어떻게 할 건데?”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가히 곱지 않다는 것을 느낀 곽삼은 어린 것을 차마 때릴 수는 없다는 듯 주먹을 움켜쥔 채 부르르 떨었다.
 “나쁜 놈! 언젠가 네놈을 반드시 죽이고야 말 거야!”
 “뭐라고? 이런 빌어먹을 놈이? 보자보자 하니까. 좋아, 어리다고 봐주지 않겠어. 이놈!”
 화난 곽삼이 주먹을 휘두르자 호득강은 재빨리 몸을 굽혔다. 주먹이 헛되어 허공을 가르자 분기가 치민 곽삼의 주먹은 점점 빨라졌다. 하지만 이에 맞을 호득강이 아니었다.
 사부의 주먹에 수없이 머리통을 쥐어 박히는 동안 이를 피하기 위하여 몸을 움직이느라 제법 민첩해진 몸으로 이리저리 피했던 것이다.
 “으으으! 이놈! 거기 안 서? 죽인닷! 거기 서!”
 한 번도 소년을 때리지 못하자 곽삼의 분기는 극을 넘어서고 있었다. 사실은 만취상태였기에 눈앞의 소년이 둘로도 보이고 셋으로도 보였기에 제대로 때리지 못한 것이다.
 아니었다면 맞아도 몇 번은 맞았을 것이다.
 한편 호득강은 곽삼의 분노가 점점 더 심해진다는 것을 깨닫고 덜컥 겁이 났다. 이러다간 사부 대신 자신을 때리러 매일 올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결국 곽삼은 소년을 때리려다 지쳐 쓰러진 뒤 곯아 떨어졌다.
 
 다음날부터 호득강은 공포의 시간을 보내야만 하였다. 우려대로 곽삼이 거의 매일 찾아왔기 때문이다. 언제 찾아와 행패를 부리려 할지 모르기에 늘 긴장하여야만 하였던 그는 결국 누천촌을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사부의 유품인 무공비급과 자신을 처음 발견하였을 때 바구니 안에 담겨 있던 목패를 챙겨든 그는 정처 없는 발길을 옮겼다.
 언젠가는 반드시 돌아와 사부로 하여금 비명횡사하게 한 곽삼을 혼내주고야 말겠다는 결심을 한 직후였다.
 운남성은 사시사철 여름만이 있는 곳이다. 그리고 하루에 한 번 꼭 비가 오는 곳이다. 그렇기에 습도가 높아 나뭇잎이 썩으면서 독무(毒霧)가 피어오르는 곳으로 잘못 들어갔다가는 장독(?毒) 때문에 죽을 수 있는 곳이다.
 울창한 수풀을 헤치고 조심스럽게 한발 한발 놀린 끝에 운남성과 귀주성의 경계에 걸쳐 있는 조몽산(鳥夢山) 자락에 다다라서야 안심하게 된 그는 물어 물어 북(北)으로 향하였다.
 그러는 동안 만들어진 지 제법 오래 되었는지 손때가 묻어 시커먼 빛을 띠고 있는 목패를 만지작거리면서 대체 자신이 누구의 자식인지 궁금해졌다. 그것의 전면에는 썩 좋은 솜씨는 아니지만 하늘 천(天)자가 쓰여 있었고, 뒤에는 구름 문양이 돋을 새김으로 파여져 있어 어떻게 보면 범상치 않다는 느낌을 주었다.
 하여 호득강은 어쩌면 자신이 명망 높은 가문의 자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무림에는 원한을 품은 흉수들에 의하여 명문세가가 멸문 당하는 일이 간혹 있었다. 그럴 때마다 우연인지 살아남은 자가 있었고, 천신만고 끝에 고강한 무공을 익혀 원수를 갚은 뒤 가문을 재건하였다는 이야기가 많이 나돌았다.
 그렇기에 자신이 고귀한 가문의 자식일 것이라는 밑도 끝도 없는 추측을 하며 걸었기에 열 살짜리 소년으로서는 먼 길을 별 탈 없이 갈 수 있었다. 때로는 이 같은 일들 모두가 자신이 강해지기 위한 일련의 과정이라는 생각을 하여 일부러 편한 길을 놔두고 힘든 길을 택하기도 하였다.
 사부로부터 무공을 익히는 사람들은 지옥과 같은 고련을 거쳐야 진정한 고수가 된다는 소리를 여러 번 들은 탓이다.
 그 동안 견디기 힘든 것이 있었다면, 이 세상에 기댈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고독감과 더불어 두려움이었다. 말상대조차 없이 늘 혼자 있어야 했기에 고독감은 그렇다 하더라도 두려움은 그만한 나이의 아이라면 누구나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밤이 되면 지친 심신을 달래기 위해서라도 쉴 곳을 찾아야 하였다. 뱀과 독충이 지천으로 널린 곳인지라 잠을 자면서도 경계를 게을리 할 수 없었던 것은 그래도 좀 나았다. 주의만 하면 별 위험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운남성을 벗어날 무렵부터는 아니었다. 아무리 주의를 해도 굶주린 산짐승으로부터의 위험을 배제시킬 수 없기 때문이었다.
 높은 나무에 올라가 칡 같은 것으로 몸을 묶고 자는 날은 행복한 날이었다. 대부분의 짐승들은 그곳까지 올라오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나무가 없는 곳에서는 동굴을 찾아 들어가야 하였다. 한번은 은신할 동굴을 찾던 중 튀어나온 늑대 때문에 혼비백산하며 거의 구르다시피 올라갔던 산을 도로 내려갔었다. 다행인 것은, 놈이 막 새끼를 낳았기에 따라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안 그랬다면 꼼짝없이 놈의 먹이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또 한가지 어려움이 있었다면 그것은 먹는 것이었다.
 편한 관도를 놔두고 힘든 밀림을 뚫고 지나온 것도 바로 그것 때문이었다. 울창한 숲 속에는 각종 과실이 주렁주렁 달려 있기에 힘들지만 그 길을 택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따먹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독사나 독충에게 물릴 위험이 높기에 아주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운남성을 지나 조몽산 자락으로 들어설 무렵부터는 먹을 것을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과실은 거의 없었고, 있다면 작은 산짐승을 사냥하여 먹는 방법뿐이었다.
 사부가 짐승을 잡기 위하여 활투 놓을 때 이를 주의 깊게 살피지 않았다면 꼼짝없이 굶어 죽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아직은 솜씨가 부족하여 실패를 거듭하였기에 먹는 날보다 굶는 날이 많았던 것이다.
 한번은 커다란 늑대가 걸린 적이 있었다.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렁대는 놈 가까이 다가갈 수 없던 그는 결국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뱃가죽과 등가죽이 맞붙을 정도로 허기가 졌으나 놈을 잡기 전에 먼저 잡아먹힐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흐으음! 이제 오타신공은 완벽하게 익혔어. 그런데 왜 자꾸 장력이 이상하게 나가는 거지? 대체 왜 그럴까?”
 개정대법으로 무려 삼십 년이나 되는 공력을 주입 받았기에 호득강은 어렵지 않게 장력을 내칠 수 있게 되었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할 일이라곤 그것 외에는 없었기에 부지런히 운공조식을 하며 장법을 익혔기 때문이었다.
 처음엔 장력이 원하는 방향으로 나가는 듯하더니 차츰 빗나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는 익히면 익힐수록 더 빗나가더니 결국 전혀 상상치 않은 방향으로 뻗치기 시작하였다.
 전면을 겨냥하고 장력을 날리면 좌측으로 날아가거나 우측으로 날아갔다. 어느 한 방향이라면 차라리 오조준(誤照準)을 해서라도 어떻게 해 보겠는데 도대체 방향을 종잡을 수 없는 곳으로 장력이 뻗쳐나가기에 도저히 제어를 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마지막으로 장력을 뻗어낸 곳은 늑대가 활투에 걸려 버둥대고 있을 때였다. 너무도 배가 고팠기에 노린내가 나겠지만 놈을 잡아먹으려고 무수한 장력을 날렸음에도 불구하고 단 한 번도 격중되지 않았기에 입맛만 다시고 돌아선 것이다.
 “젠장! 정말 천하에 쓸모 없는 무공이군. 에이···!”
 말도 안 되는 무공을 남기고 간 사부가 원망스러워 바닥에 있는 작은 돌부리를 걷어찬 호득강은 이제 다시는 장력을 사용치 않겠다 생각하며 우거진 수풀을 뚫고 지나갔다.
 그런 그가 모르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 조몽산에는 흉폭한 늑대들이 제법 많다는 사실이다. 하여 웬만한 담력을 지닌 사람은 입산하기를 꺼려하는 곳이었다. 약초를 캐는 심마니들도 적어도 십여 명이 되지 않으면 입산하지 않았으며, 각종 무기를 휴대하여야만 들어서는 곳이 바로 조몽산이었던 것이다.
 이것을 모르는 호득강은 풀잎을 떼어 초적(草笛)을 만든 뒤 아무렇게나 불면서 천천히 전진하였다. 다행히도 며칠 동안 아무런 일도 없이 지날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호득강은 작은 나뭇가지들이 심하게 부러져 있으며 이파리들이 수북하게 떨어져 있는 곳을 지나게 되었다. 경험으로 미루어 적어도 며칠 전에 떨어졌는지 잎사귀들은 바싹 말라 있었다.
 “음! 짐승이 있는 모양인데··· 어떻게 하지? 돌아갈까? 이 정도면 꽤 큰놈 같은데···”
 손가락 굵기의 나뭇가지들이 마구 널려 있는 바닥을 살피던 그는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바닥이 어지럽기에 무슨 짐승의 발자국인지 쉽게 식별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중 제법 큰 흔적을 발견한 그는 눈빛을 빛냈다.
 “곰인가? 아니! 이것은···? 피잖아? 부상을 당했나?”
 잎사귀 중에 선혈이 말라붙은 것을 발견한 호득강은 눈빛을 반짝였다. 그것은 한 방향으로 점점이 이어지고 있었는데 만일 부상당한 곰이 흘린 피라면 오랜만에 포식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전진하였다.
 대개가 그렇듯 부상당한 짐승은 흉폭해지기 마련이다. 죽었다면 식량으로 쓸 것이나 그렇지 않다면 거꾸로 곰의 식량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기에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는 사이 그의 뒤쪽에서 무엇인가가 다가오는지 수풀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러나 바람에 잎사귀 비벼지는 소리 때문에 호득강은 이러한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바람이 앞에서 뒤로 불고 있었기에 아무런 냄새도 맡을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그렇게 대략 이십여 장 정도를 전진하였을 무렵 무엇인가가 꿈틀댔다는 느낌에 잽싸게 몸을 숨겼다. 그리고는 고개만 삐죽 내밀어 조심스럽게 전면을 살폈다. 대략 오 장 정도 떨어진 전면에 있는 나무 등걸 옆으로 확실히 무엇인가 움직이는 것이 있다는 것을 확인한 그는 잔뜩 긴장한 채 안력을 돋궜다.
 이 순간 죽은 곰이라면 모처럼 포식을 할 것이나 아니라면 필사의 도주를 하여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식은땀이 흘렀다.
 잠시 후 그는 앞에서 움직이는 것이 곰이 아니라 사슴이라는 것을 확인하고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곰 고기는 질기고 노린내가 심한 반면 사슴고기는 담백하면서도 쫄깃하기 때문이었다.
 “좋았어! 이번엔 제대로 해봐야지. 후후후!”
 조심스럽게 주위를 살핀 호득강은 사슴이 지나갈 만한 길목을 발견하고는 천천히 이동하였다. 그리고는 품에 지니고 있던 끈으로 활투를 설치하였다. 그런 그는 지난 며칠 간 굶었기에 입안에 침이 감도는지 연신 침을 삼키고 있었다.
 이윽고 활투의 설치가 끝나자 호득강은 천천히 이동하여 사슴의 배후로 돌아갔다. 그리고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야아아아아아!···”
 후다다다닥!
 크허어어어엉!
 “으악! 이게 뭐야? 아이고···”
 호득강이 일어나며 고함을 지르자 놀란 사슴이 튀어감과 거의 동시에 등뒤에서 들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던 그는 경악하며 튀어갔다. 놀랍게도 집채만한 곰이 벌떡 일어난 채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슴이 활투에 걸렸는지를 확인하는 것보다는 제 목숨 보전하는 것이 더 급했던 호득강은 전력을 다하여 숲 사이를 빠져 달려갔고, 곰은 그 뒤를 바짝 추격하고 있었다.
 이제 겨우 열 살 된 소년이 곰의 추격을 따돌린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평범한 소년의 경우였다.
 누천촌 야산에서 생활하였던 그는 다른 소년들과는 달리 각력(脚力)이 제법 좋은 편이었다. 또한 평상시에도 숲 속에서 놀기를 좋아하였기에 산길을 마치 평지처럼 달릴 수 있었다.
 그렇기에 맹렬한 속도로 추격하는 곰에게 잡히지 않고 달릴 수 있었다. 미련한 게 곰이라고 하였던가?
 하지만 그의 뒤를 따르는 곰은 전혀 미련하지 않았다. 잠시도 속도를 늦추지 않고 따라오는 곰은 호득강이 이리저리 신형을 옮겨 따돌리려 하였으나 거의 직선으로 따라오고 있었던 것이다.
 대략 일각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 호득강은 조몽산 깊숙한 곳에 자리한 절벽으로 향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으와! 사람 살려! 사람 살려! 으와와!···”
 비명을 지르며 도주하던 호득강은 갑작스럽게 전면의 시야가 탁 트임을 발견하고는 달리는 속도를 약간 늦추었다.
 본능적으로 절벽이 있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가 멈춘 곳은 절벽의 거의 끝 부분이었다.
 “이런! 안 되겠다. 뒤로··· 아앗! 큰일이닷! 아아아악!”
 뒤로 돌아서는 순간 추격하던 곰이 덮치고 있었다. 이를 본 호득강은 즉각 엎드렸다. 동시에 곰은 그의 신형 위로 스치듯 지나고 있었다. 무사히 위기를 벗어나는가 싶은 순간, 호득강은 육중한 무엇엔가 거세게 강타 당한 느낌에 길고 긴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는 즉각 절벽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곰이 그의 신형 위로 스치듯 지나던 마지막 순간 뒷발에 머리를 얻어맞으면서 함께 절벽으로 떨어져 내린 것이다.
 높이가 적어도 이백여 장은 되는 높디높은 절벽 아래는 거친 바위들만 놓여 있는 황무지였다.
 퍼억! 꾸웨엑! 쿠웅!
 집채만한 덩치의 곰이 먼저 바닥에 떨어짐과 동시에 선혈이 사방으로 튀는 순간 호득강의 신형이 그 위로 떨어져 내렸다.
 그런 그의 머리에서는 선혈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곰의 뒷발에 강타 당하면서 날카로운 발톱 때문에 이마가 터졌기 때문이었다.
 “으으으···! 으으으···!”
 대략 반 시진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 호득강의 입에서는 미약한 신음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만일 곰 위로 떨어지지 않았다면 꼼짝없이 죽었어야 하나 곰의 시체가 완충작용을 하였기에 다행히 죽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으으으으! 으으으으···!”
 반 시진 정도 시간이 더 흐르자 호득강의 눈이 떠졌다.
 이마에서 흐른 선혈 때문에 세상이 온통 시뻘겋게 보이자 그는 자신이 죽어 지옥으로 온 것으로 착각하였다.
 “으으으! 사부님··· 으으! 여긴? 지옥인가? 으으윽! 아픈 걸 보니 지옥은 아닌가 본데. 으으으윽! 끄으응!”
 억지로 몸을 일으키려던 호득강은 극심한 통증 때문에 혼절해 버리고 말았다.
 
 그가 깨어난 것은 다음날 아침이었다.
 쪼로로로롱! 찌르르르릉! 찌릭 찌릭···!
 이름 모를 산새들이 지저귀는 소리에 깨어난 호득강은 힘겹게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폈다. 마치 누군가에게 흠씬 두들겨 맞은 것처럼 안 쑤시는 데가 없었지만 자신이 죽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는 느낌이었다.
 “여긴 어디지? 끄으응! 무지하게 아픈데··· 으윽!”
 한참을 아픈 부위를 쓰다듬고서야 간신히 몸을 일으킨 그는 삭막한 황무지 한가운데 자신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다.
 그가 떨어져 내린 곳은 아주 좁은 협곡이었다.
 한쪽은 또 다른 절벽이 있는 듯하지만 다른 한곳은 아닌 듯하였다. 다시 말해 나갈 길이 있다는 것이다.
 “끄으으응!”
 몸을 일으킨 그는 주변에 널려있는 삭정이들을 주워 모았다. 먹어야 살기 때문에 곰을 구워 먹으려는 것이다.
 잠시 후 나무 꼬챙이에 적당한 크기로 잘라진 곰 고기를 꿴 그는 연신 바람을 불어넣고 있었다.
 바싹 마른 삭정이에 불이 붙자 그제야 한숨을 몰아 쉰 그는 가슴 부위에서 느껴지는 뻐근함에 의복을 벗고 가슴을 살폈다.
 “으으윽! 부러진 모양이군. 하긴 저렇게 높은 곳에서 떨어졌으니··· 이만하길 다행이라고 생각하자.”
 까마득해 보이는 절벽을 올려다 본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죽지 않고 살아있는 것만도 다행이라 생각될 정도로 높았기 때문이다.
 “쩝! 쩝쩝쩝! 쩝쩝! 우적우적! 쩝쩝!”
 노린내가 심하게 낫지만 워낙 굶주렸기에 호득강은 소리를 내며 곰고기를 뜯어먹고 있었다.
 한참 후 배가 올챙이처럼 튀어나오자 부른 배를 쓰다듬는 그의 얼굴엔 만족의 빛이 어렸다.
 “끄으으으윽!”
 거나하게 트림까지 한 그는 어슬렁거리며 주위를 살폈다. 떨어지면서 입은 부상 때문에 아직 운신하기에 불편함이 있었고, 먹을 고기도 있기에 며칠 더 있다 가려는 것이다.
 예상대로 한쪽은 절벽이었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이곳은 바위 투성이나 그 아래에는 깊은 연못이 있다는 것이다.
 “쩝! 목이 마른데··· 할 수 없지.”
 이곳저곳을 돌아본 그는 먹을 수 있는 잎사귀를 뜯어 우적우적 씹었다. 즙은 빨아먹고 나머지는 뱉었다. 이렇게 하면 심한 기갈은 견딜 수 있다는 사부의 가르침 대로 시행한 것이다.
 
 이날 밤 호득강은 좁다란 동혈 안에 누워 모처럼 편한 잠을 잤다. 동혈 바로 앞에 짐승의 접근을 막기 위한 모닥불을 피워두었기에 마음 편히 잘 수 있었던 것이다.
 “하아암! 아아, 잘 잤다.”
 오랜만에 숙면을 취한 호득강은 기지개를 켜고 밖으로 나와 또다시 곰 고기를 구워먹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이렇게 사흘을 더 지낸 그는 곰의 시체가 부패하기 시작하자 미련 없이 그 자리를 떴다.
 “여기가 어디지? 어라! 또 여기잖아? 에이, 이틀 동안 완전히 헛걸음했네. 젠장! 어디가 어딘지 알 수가 있나. 북쪽으로 가야하는데··· 할 수 없군. 밤이 되길 기다리는 수밖에···”
 이름 모를 계곡을 떠나 이틀 동안이나 걸은 호득강은 자신이 또다시 계곡의 입구로 돌아와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특별한 이정표 같은 것이 없는 숲을 헤치고 다니면서 이리저리 방향을 바꾸는 바람에 되돌아 온 것이다.
 밤에는 별을 보며 방향을 잡을 수 있다 판단한 그는 동혈 속으로 들어가 깊은 잠을 자고는 밖으로 나왔다.
 “후후! 저게 북극성(北極星)이라고 하셨지? 저걸 따라가면 북쪽으로 간다고? 좋아, 이제부턴 저 별만 따라간다.”
 오타신군의 가르침을 잊지 않은 호득강은 북극성이 있는 방위를 따라 숲을 헤치고 전진하였다.
 그런 그의 등에는 곰 가죽이 있었다. 워낙 큰 놈이기에 놈의 가죽 중 일부만 잘라온 것이다. 냄새 때문에 다른 짐승이 다가오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이러한 예상은 적중하여 별다른 어려움 없이 숲을 헤치고 지난 그는 새벽녘에 이르러 관도를 발견할 수 있었다.
 “우와! 이제 살았다. 휴우, 하마터면 죽을 뻔했네.”
 관도는 숲과는 달리 걷기가 편하지만 좌우를 잘 살펴야 하는 곳이다. 다른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만일 짐승이라도 만나면 도주하기가 결코 용이하지 않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짐승도 거치적거리는 것이 없기에 쉽게 따라잡기 때문이다.
 일단 걷기가 편해지자 좌우를 살피며 천천히, 가급적이면 소리를 내지 않고 걸었다.
 깊은 밤, 교교한 월광만이 관도를 비치는 곳을 걷는 호득강은 어디선가 갑자기 짐승이나 귀신이 덮칠 것만 같아 와락 두려움이 솟았지만 이를 악물고 참았다. 조그만 소리가 들려도 등골이 서늘해지면서 식은땀이 흘렀지만 한시바삐 산을 넘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마음 같아서는 큰 소리로 노래라도 부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랬다가는 짐승의 밥이 되기 딱 알맞기 때문이다.
 하여 귀를 종긋 세운 채 전진하던 어느 순간이었다.
 호득강의 신형이 얼어붙은 듯 굳어 버렸다. 좌측 숲 속에서 무슨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었다. 만일 짐승이라면 즉각 도망가야 하지만 오금이 저려 한 발짝도 옮길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무, 무슨 소리였지? 지, 짐승인가? 아니면 귀신···?’
 아직 어린 소년이었기에 그의 공포는 극에 달했다. 그렇기에 손발은 물론 전신이 덜덜 떨리고,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다.
 ‘뭐, 뭐지···? 뭘까? 설마 귀신은 아니겠지? 으으, 무서워!’
 생각을 하는 동안에도 무엇인가가 움직이는지 바스락대는 소리가 들려오자 잔뜩 겁에 질려 부들부들 떨던 그는 무엇인가 무기가 될 만한 것이 없나 더듬었다.
 하지만 애초부터 지니지도 않은 무기가 있을 리 없는 법!
 아무것도 방어할 만한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이제는 죽었구나 싶은 생각이 들자 갑작스럽게 모든 것이 편해졌다.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기 때문이었다. 그와 동시에 지금껏 억눌려있던 용기란 놈이 슬그머니 고개를 치켜들었다.
 ‘대체 뭐였지? 분명 무언가가 있는데···’
 이 순간 분명치 않던 소리가 좀 더 분명하게 들렸다.
 그것이 사람이 내는 소리인지 아니면 짐승이 내는 소리인지, 그도 아니라면 귀신이 내는 소리인지 불명확하였지만 분명 신음소리 비슷하였다.
 ‘신음소리? 그렇다면 누가 부상을 당한 건가?’
 호기심이 동한 호득강은 천천히 소리의 근원을 쫓아 숲 속으로 들어갔다. 울창한 수풀을 헤치면서도 극도의 경각심을 조금도 늦추지 않았기에 식은땀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으으으···! 으으으으!···”
 ‘이건 분명 사람 소리야!’
 멀지 않은 곳에서 분명 사람이 내는 소리라는 것을 확인한 그는 좀 더 다가갔다. 짐승이나 귀신이 아니라는 것만으로도 용기가 솟았을 뿐만 아니라 반갑기까지 하였다. 지난 며칠 간 눈을 씻고 보려해도 사람을 구경한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으으으! 으으으···!”
 “아니? 어디 편찮으세요?”
 예상대로 소리는 사람이 내는 소리였는데 잔뜩 웅크리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호득강은 황급히 다가갔다.
 “으으으! 누, 누구···? 으으으···!”
 평범한 흑의를 걸친 사람은 나이를 많이 먹은 노인이었다.
 “할아버지! 저는 호득강이라고 해요. 헌데 어디 아프세요?”
 “으으···! 호득강? 으으으···! 여긴 어떻게···?”
 “지나던 길이에요. 제가 도와드릴 일은 없나요?”
 “으으! 말이라도 고맙구나. 으으으! 부, 부탁이 있다.”
 그의 도움으로 간신히 몸을 편 노인이 가슴과 복부에는 각기 한 자루씩 검이 박혀 있었다.
 “할아버지, 우선 이걸 빼야···”
 “으으! 아, 아니다. 그, 그걸 빼면 바로 죽어. 으으! 그건 그렇고 이, 이걸··· 으으! 안 되겠다. 으으! 네가 내 품을 뒤져봐라.”
 노인이 품에 있는 무엇인가를 꺼내려 한다는 것을 눈치챈 호득강은 즉각 그의 품을 뒤져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끄집어냈다.
 “노, 노부가 죽으면 소, 소검을 가지고 개봉부(開封府)로 가서 운, 운학장(雲鶴莊), 으으···! 운학장에 가서 경아(卿兒)를 찾아라. 그, 그리고 곤륜산의 해룡(海龍)이 울었다고··· 그, 그리고 은자와 나머지 것들은 수고의 대가로 네, 네가 가져···”
 “할아버지! 할아버지! 정신 차리세요. 할아버지! 할아버지!”
 알 수 없는 말을 힘겹게 잇던 노인의 머리가 힘없이 떨어지자 흔들어댔으나 죽었는지 꼼짝도 않았다. 이 순간이었다.
 끄르르르릉! 끄르르르릉!
 “앗! 늑대···?”
 멀지 않은 곳에서 늑대소리가 들리자 호득강은 황급히 주변을 살폈다. 과연 예상대로 오 장 가량 떨어진 곳에서 한 마리 늑대가 다가오고 있었다.
 “으앗! 안 돼! 으와아···!”
 잡히면 죽는다는 것을 아는 호득강은 노인이 말한 소검을 들고 냅다 달리기 시작하였다. 그야말로 위기의 연속이었다.
 한참 정신 없이 달리던 호득강은 아무것도 따라오지 않는다는 느낌에 멈춰 섰다. 그런 그의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방금 전에 죽은 노인, 누구인지조차 알 수 없는 노인의 시신은 지금쯤 늑대가 게걸스럽게 뜯어먹고 있을 것이다.
 덕분에 목숨을 구했다는 느낌보다는 시신조차 온전히 남길 수 없던 노인이 왠지 불쌍하다는 느낌이 들어 흘리는 눈물이었다.
 “흐흑! 할아버지, 부디 극락왕생하세요. 어! 이건···?”
 한참을 눈물을 흘리며 노인의 명복을 빌던 그는 소검을 품에 넣으려다 손에 들린 혁낭(革囊)을 보고 깜짝 놀랐다.
 워낙 경황이 없던 순간인지라 그것도 들고 온 것이다. 그것의안에는 자그마한 책자 하나와 은자가 들어 있었다.
 “응! 이건 뭐지? 뭘까···?”
 낡디 낡은 소책자는 종이가 아닌 양피지에 누가 장난이라도 친 듯한 괴상한 것만 가득 있었다. 쪽수로 따지면 이십여 쪽 정도 되는 것에는 쐐기 같은 그림만 잔뜩 있었던 것이다.
 “어! 이건···?”
 한참 동안이나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책자를 덮으려던 호득강은 마지막 쪽에 쓰여 있는 한줄기 글귀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 인연이 있는 자는 얻을 것이다. >
 
 “인연이 있는 자는 얻는다고? 그런데 대체 뭐라 쓰여진 거지? 젠장, 도대체 뭔지 알아볼 수나 있어야지. 가만, 사부님께서 전에 이렇게 생긴 걸 뭐라고 얘기해 주셨는데···”
 전에 오타신군은 오타신공이 기록된 무공기서를 보여준 적이 있었다. 이에 호득강은 마치 올챙이가 기어가는 듯한 그림만 잔뜩 있는 것을 보며 그게 무슨 글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것이 상고시대 때 사용하던 과두문이라면서 그것과 더불어 쐐기 같이 생긴 문자도 있었다는 이야기도 해 주었었다.
 “맞아! 그럼 이게 바로 설형문자(楔形文字)? 우와! 그럼 무지하게 오래된 거네?”
 감탄사를 터뜨린 호득강은 그것을 품 안 깊숙이 갈무리하였다.
 “으음! 과두문과 설형문자를 배워야 하는데··· 그런데 누구한테 배우지? 에이, 일단 사람들이 많은 데 가보면 알겠지.”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예기치 못한 물건을 얻은 것이다.
 
 ***
 
 무려 석 달이나 걸리는 대장정 끝에 귀주성(貴州省)의 성도인 귀양(貴陽)에 발을 들여놓은 호득강은 연신 두리번거리면서 감탄사를 연발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로서는 처음 보는 풍광(風光)이 너무도 많았기 때문이었다.
 “우와! 어떻게 이층으로 건물을 지었지? 대단하다. 우와! 저건 또 뭐야? 우와! 멋있다. 우와! 정말 끝내준다······”
 천신만고 끝에 조몽산을 넘고도 멀고 먼 길을 지나온 끝에 당도한 귀양은 수많은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한참을 구경하던 그는 객잔에서 여러 사람에게 물은 끝에 사천성(四川省) 성도(成都)에 있는 천유장(天遊莊)에 천하제일학사가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황궁에서 황사(皇師)로 재직하다 낙향한 그는 천충학사(天衝學士) 동방호(東方皓)라 하였다. 하늘을 찌를 듯 높은 학식을 지녔다 하여 그런 외호가 붙여졌다 한다.
 일찍이 약관에 대과에 응시한 그는 장원급제를 하였을 뿐만 아니라, 한림원(翰林院)의 요직을 두루 거쳐 원주까지 지냈기에 천하유림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다 하였다.
 이것을 가르쳐 준 사람들은 서생이 아니라 상인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말을 할 때면 존경과 흠모의 빛을 보였다.
 이것으로 미루어 그의 학문이 얼마나 깊은지를 짐작할 수 있던 호득강은 즉각 사천성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지금으로서는 학문을 익히는 것이 급선무이기 때문이다.
 사부는 자신의 학문이 부족해 과두문을 완벽하게 해독할 능력이 없어 잘못되었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여러 번 한 적이 있었다. 그러면서 기회가 닿는다면 반드시 과두문을 완벽하게 익혀 오타신공의 불명예를 씻어달라는 말을 했었다.
 하여 일단 과두문과 설형문자를 익히겠다 마음먹었기에 주저 없이 사천성으로 발걸음을 옮긴 것이다.
 이번엔 혼자서 가는 길이 아니고 귀양에서 성도로 가는 표차 행렬에 묻어 가는 것이기에 큰 위험은 없을 것이다. 그것은 은자 닷 냥의 힘이었다. 주루에 있던 상인이 가르쳐 준 덕이었다.
 어린 소년이 학문을 익히기 위하여 혼자서 멀고 먼 성도까지 가겠다고 하자 이런 방도를 일러준 것이다.
 물론 은자는 죽은 노인의 주머니 속에 있던 것이다.
 
 ***
 
 무림삼궁은 수라마궁(修羅魔宮)과 사신궁(死神宮), 그리고 벽하옥녀궁(碧霞玉女宮)을 지칭하는 말이다.
 
 수라마궁은 마도문파로 절강성(浙江省)에 있는 천하제일색향인 항주(杭州) 진회하(秦淮河) 외곽에 자리잡고 있다.
 올해 칠십 세가 된 마도계의 살아 있는 전설인 독비혈마(獨臂血魔) 조량아(趙亮衙)가 궁주인 그곳은 대명제국이 건국된 이후 창건된 문파로 욱일승천의 기세로 커 가는 중이다.
 강호에 이렇다 할 마도문파가 없던 참인지라 백만 마도가 모두 수라마궁으로 운집하고 있다는 소문이 나돌기에 어쩌면 현 무림에서 가장 강한 방파일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었다.
 총단에는 이 각(閣), 사 전(殿), 팔 당(堂)이 있으며, 삼백여 개의 향(鄕)과 일천여 개의 분타가 온 강호에 널려 있다고 한다.
 부궁주는 궁주의 장자가 맡고 있으며, 그의 일곱 아들이 호법이라고 한다. 현재 수라마궁은 천하에 산재한 기원과 객잔, 전장과 도박장 등의 오할을 차지하고 있기에 엄청난 부를 소유하고 있는 셈이다.
 
 사신궁은 천하에 산재한 사파무림의 총본산인 곳이다.
 총단은 섬서성(陝西省)의 성도인 서안(西安) 아래쪽에 자리잡고 있는 태령(泰嶺) 신무곡(神霧谷)에 자리잡고 있다고 한다.
 궁주는 올해 육십 칠 세 된 사사흑객(賜死黑客) 부욱현(扶郁峴)이라는 자로 각종 사공(邪功)에 능하다 하였다.
 그의 휘하에는 구로(九老)가 있는데 이들이 대강남북에 산재한 천하 사파인들을 휘어잡고 있다고 하였다.
 사신궁은 중원 상계 중 절반을 차지하는 금적전장(金積錢場)의 후원을 받고 있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었다.
 또 다른 소문으로는 수많은 살수들을 보유하였으며 은밀히 살인청부업으로 축재(蓄財)하고 있다 하였다.
 
 삼궁 중 가장 마지막에 있는 벽하옥녀궁은 명칭에서 알 수 있듯 여인들로만 이루어진 방파이다.
 강서성(江西省) 동남쪽에 위치한 무이산(武夷山) 깊은 자락 속에 있다는 그곳은 제법 오랜 역사를 지닌 방파이다.
 별 볼일 없이 약 오백여 년 동안이나 명맥을 유지하던 중 현 궁주인 철심자사(鐵心雌獅) 옥연경(玉娟卿)에 의하여 성세가 커져 당당히 무림삼궁에 포함될 수 있었다.
 철심자사는 외호에서 알 수 있듯 철의 심장을 지닌 배포 두둑한 여장부이다. 젊은 시절 대설산(大雪山)으로 무공연마를 위해 떠났던 그녀는 그곳에서 한 권의 상고기서를 얻음과 동시에 인형동자삼(人形童子蔘) 한 뿌리를 얻었다고 한다.
 그것으로 일약 내가고수가 된 그녀는 강호로 돌아온 이후 그야말로 파죽지세로 도전하는 사내들을 물리쳤다.
 젊은 시절, 한동안은 무림제일화로 불리던 그녀였기에 그녀의 방심(芳心)을 얻으려는 많은 사내들이 있었다.
 그런 그들에게 그녀가 내건 조건은 한 가지였다.
 자신보다 열 살 이내의 나이 차이를 보이는 사내라면 누구든 자신과 비무하여 승리를 쟁취하라 하였다. 그러면 그의 여인이 되겠다고 한 것이다. 하지만 그 어느 누구도 그녀를 제압할 수 없었다. 하여 올해 육십을 넘긴 그녀는 여전히 혼자였다.
 그렇게 하여 철심자사라는 외호를 얻은 것이다.
 소궁주는 그녀의 제자인 비연옥녀(飛燕玉女) 소지향(蘇芝香)이다. 이제 겨우 열두 살밖에 안 되었지만 지닌바 재능이 하늘을 찌를 듯하다 하여 벽하옥녀궁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다. 아무튼 벽하옥녀궁은 삼궁 중 유일하게 정파에 속하는 문파였다.
 이밖에도 큰 세력은 지니지 못하였지만 무림인들의 입에 회자(膾炙)되는 인물들이 있었다.
 사수(四秀)와 오괴(五怪)가 바로 그들이었다.
 사수는 일각수(一角秀) 추용무(秋龍武), 인요복수(人妖卜秀) 고지미(高芝美), 천산일수(天山一秀) 전혁치(全赫治), 유운도수(遊雲刀秀) 곽일비(郭溢泌)를 지칭하는 말이다.
 
 일각수 추용무는 검술에 관한 한 천하제일이라는 자부심 속에 살아가는 인물이다. 그가 하는 일은 천하에 내노라 하는 검사들과의 비무였다. 단 조건이 있었다.
 한 번 비무를 할 때마다 은자 백 냥씩을 걸어야 하였다.
 지금껏 그에게 도전하였던 검사들은 무수히 많았으나 아직까지 승리를 하였다는 자는 단 하나도 없었다. 하여 검사들 가운데 뿔처럼 솟아올랐다는 의미에서 일각수라는 외호를 얻은 것이다.
 현재 그는 강호를 떠돌며 협행을 하는 가운데 틈틈이 비무를 한다 하였다.
 
 인요복수는 사수 가운데 유일한 여인이다. 나이 어린 묘령의 소녀이건만 그녀의 특기는 점(卜)이었다.
 길흉화복을 점쳐주는 그녀의 점괘는 지금껏 틀려본 적이 없다 하였다. 누구든 점을 치려면 은자 백 냥을 건네야 하였지만 언제나 무수한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최근 들어 그녀는 점을 봐주고 은자를 받지 않는다. 대신 무공구결을 복채로 요구한다 하였다.
 
 천산일수는 지금은 유명무실해진 문파인 천산파의 장문인이다. 그런 그가 사수 가운데 끼게 된 것은 그의 탁월한 경공술 때문이었다. 전 강호의 그 어느 누구도 그의 경공술을 따르지 못한다고 인정하였기에 사수 가운데 낀 것이다.
 
 유운도수는 도법에 관한 한 천하제일이다.
 흘러가는 구름처럼 정처 없이 떠도는 그는 많은 도전자들로부터 비무신청을 받았다. 그리고는 한 번도 지지 않고 있었다.
 세인들은 검에 관한 한 천하제일인 일각수와 그가 대결을 벌이면 누가 이길 것인가를 궁금해하였다.
 
 오괴는 청랑수(靑狼獸) 왕인명(王仁明), 도귀(賭鬼) 태야연(太倻淵), 설산반인(雪山半人) 유기서(劉騎緖), 거령호녀(巨靈胡女) 달단금(達但金), 주태백(酒太白) 반두진(潘斗晋)을 이르는 호칭이다.
 
 청랑수 왕인명은 사람들과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다.
 그가 좋아하는 것은 오로지 한 가지,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흉폭하다 할 수 있는 청랑(靑狼)뿐일 것이다. 청랑은 북해에서 서식하는 푸른 빛 털을 지닌 늑대로, 중원에서 가장 사납다는 혈랑(血狼)들마저 꼬리를 말고 도주하게 하는 놈이다.
 어떤 연유에서인지는 모르나 그는 어릴 적부터 청랑들 틈에서 자라났다고 한다. 청랑의 젖을 먹고 성장한 그는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물론 강자만이 대접받는 세계이기에 엄청난 혈전을 치른 이후였다. 그래서 그의 전신에는 온통 상처 투성이이다.
 청랑 한 마리의 공격력은 웬만한 고수로서도 감당하기 힘들 정도라 한다. 워낙 날쌔고 흉폭하면서도 조직적으로 대응하는 것을 본능적으로 터득하고 있기 때문이라 하였다.
 그가 움직이는 곳에는 늘 적어도 천여 마리의 청랑들이 있다 하기에 세인들은 그만 나타나면 슬금슬금 도주하기에 바쁘다. 그가 인세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오로지 술을 마실 때뿐이다.
 그런 그가 오괴 가운데 하나가 된 것에는 결정적인 이유가 있었다. 약 삼십여 년 전 처음으로 인세에 모습을 드러낸 그는 당시 변방을 지키던 대장군의 여식을 납치해갔다.
 이에 군사들을 이끌고 추격을 하였던 그 장수와 병사들은 갑주와 병장기만 남긴 채 모두 사라졌다. 모두 청랑들의 먹이가 되었다는 것을 안 것은 그 후의 일이다. 일 년 후 다시 돌아 온 여인은 자신이 경험한 일을 털어놓았다.
 짐승들의 세계에서는 강자만이 암컷을 차지한다. 따라서 강자는 암컷 가운데 원하는 상대를 고를 수 있다.
 우연히 숲 속으로 나물을 캐러 들어갔던 여인을 발견한 청랑수는 그녀를 자신의 암컷으로 지적하였고, 실행에 옮긴 것이다.
 둘 사이에 아이가 태어나자 여인은 고향을 다녀오게 해달라고 간청을 하였고, 허락을 받아 돌아온 것이다. 그녀는 약속한 날에 다시 돌아갔다. 만일 자신이 돌아가지 않으면 고향이 완전 쑥대밭이 될 것이라는 말을 남겨놓고서.
 이에 사람들은 비로소 청랑의 무서움을 알게된 것이다.
 
 도귀 태야연은 천하의 그 어느 누구도 따를 수 없는 도박의 지존이었다. 제아무리 출중한 도박 실력을 지닌 고수라 할지라도 그와 반 나절만 있으면 전 재산은 물론 부인과 여식, 그리고 속옷까지 몽땅 잃었다.
 좋게 말하면 도박사고 나쁘게 이야기하면 일개 노름꾼인 그가 무림오괴에 낄 수 있었던 이유는 그의 도박 실력 때문이었다.
 많은 무림인들을 상대로 도박을 하는 동안 적지않은 양의 무공비급을 땄고, 그것을 연성하여 고수가 되었던 것이다.
 그가 지닌 무공 가운데에는 얼굴 근육을 움직여 용모를 달리하는 절정환용술이 있기에 그의 진면목을 아는 사람이 극히 드물다고 하였다. 하여 그가 도귀인지도 모르고 도박을 하였다가 신세를 망친 사람이 한둘이 아니라고 하였다.
 그를 알아볼 수 있는 한가지 방법이 있다면, 도박을 하는 동안 좌측 새끼 손가락으로 가볍게 탁자를 두드리는 버릇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만일 도박장에서 상대가 새끼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리거든 잃은 것은 생각하지 말고 즉각 일어나라는 말이 있다.
 안 그랬다가는 그에게 먼저 당한 사람들처럼 전 재산은 물론 부인과 여식, 그리고 속옷까지 몽땅 잃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설산반인 유기서는 난쟁이다. 외호를 보면 알 수 있듯이 키가 불과 사 척 정도밖에 되지 않지만 우습게 알고 덤볐다가는 큰코다치기 십상이다. 나이는 불과 삼십 정도로 보이나 실상 그의 나이는 세수 일백이십을 훨씬 넘기고 있다 하였다.
 무림 역사상 보기 드물게 반노환동(返老還童)의 경지에 올라선 고수이기 때문이었다. 들리는 말로는 그의 내공이 얼추 이 갑자는 넘었을 것이라 하였다.
 그의 독문무공은 설산지(雪山指)라 부르는 지법이다. 막강한 내공을 바탕으로 뿜어지는 지력은 웬만한 고수들의 장력을 뚫고 쇄도하기에 상대하기 여간 힘든 게 아니라고 한다.
 이밖에도 다른 무공을 섭렵하고 있다고는 하나 지금까지는 설산지 이외에는 사용해 본 적이 없기에 알려진 바가 없었다.
 
 무림오괴 중 하나로 불리는 거령호녀 달단금은 설산반인의 부인이었다. 칠 척 장신인 그녀는 중원인이 아니다.
 서역 출신으로 벽록색 눈을 지니고 있었고, 머리카락은 은가루를 입힌 듯 은색이었다. 어떻게 부부지연을 맺었는지는 모르나 지독하게 못생기고 난쟁이인 설산반인과 엄청난 거구인 거령호녀의 금슬은 천하에서도 알아주는 금슬이다.
 그러나 그것은 겉으로만 보이는 모습이다. 항상 붙어 다니면서도 그녀는 늘 설산반인을 의심한다.
 다시 말해 의부증이 있다는 것이다. 잠시라도 한눈을 팔면 다른 계집을 꼬드기려 한다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느 여인이든 그와 눈만 마주치기만 해도 잡아먹을 듯이 달려든다.
 대신 누구든 부군을 조롱하거나 욕을 하면 뼈마디가 욱신거리도록 두들겨 맞아야 한다. 솥뚜껑 만한 그녀의 손에 한번 맞으면 턱뼈가 으스러지기 일쑤이고, 어깨를 잡히면 어깨뼈가 부러질 정도이다. 설산반인에게서 배운 설산지도 적절히 사용할 줄 알기에 웬만한 무림인들은 이들 부부만 보면 슬금슬금 도망가게 된다.
 자신의 부군인 설산반인에게만 상냥하지 타인에게는 절대 그렇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조금이라도 눈에 거스르는 것이 있으면 즉각 참견하고 나서기 때문이다.
 
 무림오괴 중 마지막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주태백 반두진은 천하의 모든 주루에서 쌍수를 들고 환영하는 대주가이다.
 언젠가는 술 마시기를 밥 먹는 것보다도 좋아하는 거령호녀가 그와 술내기를 한 적이 있었다. 지는 사람이 술값을 모두 치르고 일 년 동안 양껏 마시게 해주는 조건이었다.
 그때 그녀는 어떻게 오 척 단구(短軀)인 그의 어디로 그 많은 술이 들어가는지를 이해할 수 없다며 고개를 흔들며 패배를 자인하였다. 웬만한 술꾼이라도 한 달을 꼬박 마셔야 할 정도인 일흔 일곱 동이의 술을 마시고도 더 달라고 소리치는 그의 주량을 도저히 따라갈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만일 그랬다가는 죽을 것만 같았던 것이다.
 대주가라 자부하던 그녀는 스물 네 동이의 술을 마시고 완전히 골아 떨어졌었다. 그리고 한참을 자고 일어났는데도 여전히 같은 자세로 앉아 술 가져오라고 소리를 치는 그를 보았으니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기에서 진 거령호녀는 약속대로 일 년 동안 그의 술값을 모두 지불하였다. 은자로 구만 냥이었다. 은자 열 냥이면 사 인 가족이 한 달 동안 배 부르고 등 따습게 지낼 수 있는 가치가 있으니 얼마나 많이 마셨는지 가히 짐작이 간다.
 약속한 일 년이 지난 후 거령호녀 부부는 앞으로 평생 동안 다시는 보지 않겠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마지막 날 그가 마신 술이 무려 일백 삼십 육 동이나 되었던 것이다. 그것도 주청의 술이 모두 떨어졌기에 망정이지 만일 더 있었다면 그것마저 모두 마셨을 것이다.
 그가 무림오괴에 끼게 된 것은 단순히 주량 때문만은 아니다.
 그가 펼치는 주전공(酒箭功)의 놀라운 위력과 더불어 정확성 때문이었다. 직선거리로 거의 백여 장 가까이 나가는 술 화살은 떨어지는 낙엽의 정 중앙을 정확히 관통시킨다. 따라서 가까이 있다면 바위도 관통시킬 위력을 지니고 있다.
 
 ***
 
 “아저씨! 아직 멀었나요?”
 “하하! 녀석도··· 이제 거의 다 왔어. 저녁 나절이면 성도에 도착하게 될 것이다. 하하! 그렇게 지겨웠냐?”
 “아직도요? 으이그, 지겨워···!”
 달그락거리면서 전진을 거듭하는 표차에 엉덩이만 살짝 걸친 채 두 다리를 흔들던 호득강은 지겹다는 표정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귀양으로부터 성도까지의 거리는 직선 거리로만 따져도 무려 일천 오백여 리가 넘는 멀고먼 길이다.
 표차에 실린 것은 육중한 무게를 지닌 철광석이다. 이것은 사천성에 자리잡은 무림세가인 사천당문으로 갈 것이다.
 그 동안 수없이 많은 고개와 언덕, 그리고 진창을 지났다. 그렇기에 하루 평균 삼십여 리밖에 전진을 할 수 없었다.
 게다가 귀중품이라도 실렸는지 알고 수시로 달려드는 산적들 때문에 그렇지 않아도 오래 걸리는 길이 더욱 지체된 것이다.
 귀양을 떠나온 지 두 달 하고도 열흘이나 지나는 동안 하는 일 없이 표사와 쟁자수들의 잡담이나 들어야 했던 그로서는 무척이나 멀고 지루한 길이었다.
 한가지 다행인 것은, 천하의 거의 모든 표물을 독점 운송하다시피 하는 대륙표국(大陸驃局) 소속 표사와 쟁자수들이었기에 아주 막돼먹지는 않아 얻는 것도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세상을 살아가는 요령 같은 것이었다.
 어디에 가서는 어떻게 해야하고, 어디에 무엇이 있으며, 어떻게 해야 사람들의 환심을 살 수 있는지 등등이었다.
 무림에 대해서는 조금은 알고 있었지만 이런 것은 전혀 모르고 있었기에 무척이나 흥미진진하였다.
 하여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자신들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호득강을 본 쟁자수 가운데 하나가 자신에게도 열 살 먹은 딸이 있는데 마음에 드니 이 다음에 크면 사위가 되라 하였다.
 이 말을 들은 호득강은 주저하지 않고 그러겠다 하였다.
 그 말이 있은 이후 다른 사람들이 상스러운 욕을 하거나 험한 일을 시키는 따위의 일은 전혀 벌어지지 않았다.
 추심자(醜心者)라 불리는 그는 비록 표사들 아래 직급인 쟁자수였지만 모두들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그의 외호를 있는 그대로 풀어보면, 마음이 추악한 놈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이것은 그의 외모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준수하다고는 할 수 없으나 왠지 쟁자수와 같은 일을 하기엔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중후하였던 것이다.
 그의 성명은 연부경(燕阜炅)이고, 여식은 연소혜(燕小慧)라 하였다. 평상시에는 별 말이 없는 그였지만 여식 이야기만 나오면 눈빛을 빛내면서 은근히 자랑스러워 하였다.
 아직 어리지만 어찌나 총명하고 깜찍한지 사천성의 모든 표사와 쟁자수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하고 있다 하였다.
 현재 그녀는 대륙표국의 사천지부가 있는 덕양현(德陽縣)에 있다 하였다. 그러면서 성도에서 학문을 닦는 동안이라도 여가가 생기면 꼭 들르라는 말을 하였다.
 “하하! 알았지? 그러니까 천유장에서 학문을 닦다가 짬이 나면 꼭 한번 와야 한다.”
 “헤헤! 알았어요. 꼭 갈게요. 나중에 모르는 척이나 하지 마세요. 아셨죠?”
 “오냐! 알았다. 꼭 오기나 해라.”
 추심자는 무엇 때문에 호득강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금쪽 같은 여식의 배필로 점찍었는지 무척이나 다정스럽게 대해주었기에 호득강 역시 그와는 스스럼없이 대화할 정도로 친숙하다 느끼고 있었다.
 이러한 기분은 사부 외에는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추심자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동안 표차는 무사히 사천당문 앞에 도착하였다. 길고 긴 장정의 대단원이 내려진 것이다.
 호득강은 천하제일학이라는 천충학사를 찾아 천유장으로 향했고, 추심자는 덕양으로 향하였다. 그렇게도 술을 좋아하던 그였지만 오랜만에 여식을 본다는 마음에 들떠서인지 동료들이 술 한잔 하라는 권유도 뿌리치고는 종종 걸음으로 사라졌다.
 
 
 제3장 과두문을 배우기 위하여
 
 
 “아저씨, 제발 들어가게 해 주세요.”
 “허어! 안 된다는데 왜 자꾸 귀찮게 구느냐? 어서 썩 꺼져라.”
 “아저씨, 그러지 말고 한 번만 뵙게 해주세요. 예?”
 “이 녀석이···? 장주께서 너같이 하찮은 놈에게 내어줄 시간이 있는 줄 아느냐? 어서 썩 꺼져라.”
 천유장은 천하제일학이 머무는 장원이었지만 강호의 여느 장원과는 사뭇 달랐다. 무림의 방파와 다를 것이 없었던 것이다.
 대부분 학사들이 머무는 곳은 누구나 드나들며 고담준론을 나누거나 시문(詩文)을 즐길 수 있지만 이곳만은 수문위사도 있고, 드나드는 사람의 신분도 철저하게 따졌다.
 호득강은 수문위사들의 완강한 거절에 지난 사흘 간이나 매일같이 애원해야 하였다. 혹시 임무 교대를 하고 다른 사람이 오면 조금 나을까 싶었으나 전혀 그렇지 않았다. 누구라고 할 것도 없이 모든 수문위사들의 완강한 거절에 봉착하여야 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만한 난관 때문에 물러서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질기게 조르는 중이었다. 그냥 돌아가기엔 너무 기대가 컸고, 못 들어가게 하면 할수록 더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생긴 탓이다.
 “아저씨! 그러지 말고 한 번만 들어가게 해 주세요. 저는 장주님을 뵈려고 운남성에서 이곳까지 왔단 말이에요.”
 “허어! 안 된다고 해도 자꾸 그러냐? 한번 맞아봐야 정신을 차릴 거야? 어서 썩 꺼져! 한 번만 더 귀찮게 굴면 애라고 봐주지 않을 거다. 알았어? 어서 썩 꺼져!”
 귀찮다는 듯 밀어내는 수문위사의 태도에 어린 호득강의 마음은 찢어지는 듯하였다. 설마 천하제일학이라고 불리는 사람을 찾았다가 이처럼 문전박대(門前薄待)를 당할 것이라고는 전혀 상상도 못했기 때문이었다.
 “아저씨! 그러지 마시고 한 번만···”
 “이런, 빌어먹을 놈이? 빨리 안 꺼져? 지금까지는 어리다고 봐줬지만··· 빨리 꺼졋! 에잇!”
 쿵! 우당탕탕!
 “으으으윽···!”
 수문위사가 거칠게 밀어젖힘과 동시에 호득강은 호되게 나뒹굴며 신음을 토했다. 잠시 후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의복에 묻은 흙먼지를 털어 내며 입술을 삐죽였다.
 “에이, 씨···! 안되면 말로 하지 왜 밀어요? 내가 뭐 돈을 달라고 왔어요? 아니면 훔쳐갈 게 있나 보러 왔어요? 용무가 있어 찾아 왔다는데도 이처럼 사람이나 패고··· 에이! 씨··· 학문을 익힐 데가 뭐 여기밖에 없는지 알아요? 빌어먹을··· 가요, 가! 더러워서 가요! 에이, 잘 먹고 잘 사슈. 그리고 아저씨! 아저씨는 평생 남의 집 문지기나 하고 사슈! 에이, 퉤퉤퉤!”
 멀고 먼 길을 온 끝에 이처럼 박대를 당하자 분기가 치솟은 호득강은 입에서 나오는 대로 지껄이고는 뒤로 돌아섰다.
 “뭐, 뭐라고? 이 녀석이···? 너, 방금 뭐라고 그랬냐?”
 소년의 입에서 이 같은 소리가 나올 것이라고는 전혀 상상도 못하던 수문위사 역시 화가 솟는지 언성을 높였다. 이때였다. 문의 안쪽에서 누군가가 나오며 짜증 섞인 음성을 토했다.
 “무슨 일이냐? 무슨 일인데 이처럼 소란을 떠는 것이냐?”
 “앗! 소, 소장주님!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방금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밖으로 나온 사람은 대략 사십 정도 된 서생 차림의 중년인이었다. 눈 꼬리가 위로 살짝 치켜 올라갔고, 매부리코에 얇은 입술을 지닌 그의 얼굴은 감히 수문위사 따위가 큰 소리를 냈다는 것이 무척이나 못마땅하다는 표정이었다.
 “소, 소장주님! 그게··· 그게···”
 대하기가 무척이나 어렵다는 듯 말꼬리를 흐리자 소장주라는 자의 발이 섬전처럼 그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이놈! 무슨 일인지 빨리 말하지 못하겠느냐?”
 “아이쿠! 아이구 아야야···”
 “흥! 또 맞고 싶으냐?”
 “아, 아닙니다요. 저, 저 녀석이 며칠째 장주님을 뵙게 해달라고 하도 귀찮게 굴어서 조금 밀쳤더니 욕을 해서 그랬습니다요.”
 “뭐라고? 욕? 저 어린 녀석이 본 장에 욕을 했단 말이냐?”
 “그, 그렇습니다요.”
 수문위사는 걷어 채인 것이 무척이나 억울하다는 표정이었다. 시킨 대로 임무에 충실했을 뿐인데 맞았으니 그럴 만도 하였다.
 이곳 천유장은 자격 요건이 갖춰지지 않은 사람은 절대 출입시키지 말라는 엄명이 있었다. 천충학사의 쟁쟁한 명성을 듣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었다. 많을 때에는 하루에 백여 명 이상이 찾아올 때도 있었다.
 그 가운데 대부분은 그저 천충학사와 대화라도 한번 해보는 것이 소원인 사람도 있었고, 대체 어떻게 생겼기에 그처럼 높은 학식을 지녔는지 궁금해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다시 말해 천충학사가 직접 만날 이유가 전혀 없는 사람들이었다.
 당연히 수문위사들은 고압적으로 변해갔고, 때로는 적지않은 은자를 뇌물로 받고 안으로 들여보내 주기도 하였다. 물론 안으로 들어가면 또 한 번 심사를 하여 천충학사와 직접 대면하게 해 주거나, 아니면 적당히 핑계를 대고 돌려보냈다. 따라서 은자만 들이고 정작 목적을 이루지 못하는 사람들도 상당수 있었다.
 돌아 나오면서 수문위사에게 주었던 은자를 돌려달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껏 은자를 돌려 받은 경우는 지극히 드물었다. 따라서 그들에 대한 원성이 자자하였다.
 오늘 임무교대를 한 수문위사는 지금껏 호득강을 세 번이나 보았다. 처음엔 이제 겨우 열 살밖에 안 된 소년이 장주를 만나게 해달라 하자 기도 안 찬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에게서는 죽어도 은자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경험상 알기 때문이었다.
 어제도 호득강을 보았으나 그때는 좋은 말로 타일렀다.
 너 같은 것을 만날 시간이 어디 있겠느냐며 이곳을 찾는 고관대작들에 대한 설명도 제법 소상하게 하였었다. 그런데 또 찾아오자 짜증이 난 것이다. 그래서 가볍게 밀쳤는데 저 만큼 나가떨어지는 모습을 보고 조금 미안하던 차였다.
 이때 욕설 비슷한 소리가 들리자 저도 모르게 고함을 친 것이고, 때마침 출타를 하려던 소장주인 빙선서생(氷扇書生) 동방극(東方剋)에게 재수 없게 걸려 정강이가 깨지도록 걷어 채인 것이다. 그렇기에 저만치 걸어가는 호득강이 곱게 보일 리 없었다.
 “흠! 감히 어린놈이 본 장에 대고 욕을 했다는 말이지? 무엇하고 있느냐? 냉큼 가서 저 녀석을 잡아오지 못하겠느냐?”
 “존명! 네 이놈, 게 섰거라!”
 수문위사는 분풀이할 곳이 생겼다는 듯 황망히 튀어 나가 호득강의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아앗! 왜, 왜 이래요? 아파요! 이것 놔요!”
 “이놈! 감히 욕을 했겠다? 에잇!”
 “아악! 왜 때려요? 그리고 내가 언제 욕을 했어요? 아악!”
 두 번이나 거칠게 걷어 채이자 호득강은 크게 소리쳤다. 그래야 지나던 사람이 볼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그가 모르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 이곳 성도에서는 천유장의 위명이 쟁쟁해도 너무 쟁쟁하다는 것이다. 하긴 거의 매일 성주가 직접 문안을 올 정도이니 그럴 만도 하였다.
 잠시 후 호득강은 물에 빠진 생쥐처럼 달달 떨고 있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냉혹하게 생긴 중년인이 자신을 노려보고 있으니 오금이 저리고 오줌이 찔끔거릴 정도였다.
 차라리 무슨 말이라도 한다면 이렇게까지 공포스럽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아무런 말도 없었다. 그저 냉혹한 시선으로 어서 네 죄를 네가 불어라, 하는 듯하였던 것이다.
 한참 동안이나 노려보았으나 아무런 말도 없이 눈만 내리깔고 있는 호득강을 본 빙선서생의 눈에는 ‘호오! 이놈 봐라.’ 하는 의미의 눈빛이 비치고 있었다.
 지금껏 천유장의 그 어느 누구도 자신의 싸늘한 눈빛과 접하면 지은 죄를 순순히 불지 않고는 배기지 못했는데 어린놈이 의외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네 이놈! 네가 정녕 본 장에 대고 욕을 하였느냐?”
 한참을 기다려도 아무런 말이 없자 먼저 말을 꺼낸 것은 빙선서생이었다. 그런 그의 음성은 살벌하다고는 할 수 없으나 싸늘하기 이를 데 없었다.
 “저는 욕을 한 적이 없습니다.”
 “호오! 그래? 그런데 왜 네가 욕을 했다고 했을까?”
 “저는 천유장에다 대고 욕을 한 적이 분명히 없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누구에게 무어라 하였느냐?”
 빙선서생의 음성이 약간 부드러워졌다 느낀 호득강은 자초지종을 소상히 털어놓았다. 이제 겨우 열 살밖에 안 된 소년을 상대로 화를 내는 것이 자신의 체신이 떨어지는 것이라 생각하였기에 어투가 약간 부드러워진 것이다.
 “호오! 그러니까 운남성에서 이곳까지 혼자서 걸어왔다는 말이지? 그리고 이곳에 온 목적은 과두문을 익히기 위함이라고?”
 “그렇습니다. 돌아가신 사부님의 유명(遺命)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이 그것 뿐이라 생각하였습니다.”
 호득강은 자신이 오타신군의 제자라는 사실을 굳이 감추지 않았다. 이곳이 무림의 방파라면 모르되 학사가 머무는 장원이기 때문이었다. 한 가지 숨긴 것이 있다면 그것은 설형문자를 배우고 싶다는 것이다. 한꺼번에 두 가지 모두를 이야기하면 가르쳐 주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가도 없어질 것만 같아서였다.
 한동안 말없이 호득강을 내려다보며 무슨 생각인가를 하는 듯한 표정을 짓던 빙선서생의 입이 열린 것은 한참 후였다.
 “좋아! 네놈을 받아들이지. 과두문은 본인도 알고 있는 문자이니 네 녀석 정도는 충분히 가르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와라!”
 “정말이십니까? 가,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하하! 이 녀석아, 미리부터 감사할 필요는 없다. 남들은 수만금을 들여서 제자가 되려고 발버둥치는 곳이 바로 본 장이다. 따라서 그냥 가르쳐 줄 수는 없다. 오늘부터 너는 본인의 서동 노릇을 해야 할 것이다. 하는 것을 봐서 가르칠 만하다는 판단이 섰을 때 가르칠 것이다. 감사는 그때 가서 해라.”
 “알겠습니다. 혼신을 다해서 견마지로를 아끼지 않겠습니다.”
 “견마지로(犬馬之勞)? 그런 말도 아느냐? 하하하! 그래, 본 장에 와서 어떻게 장주님에게서 학문을 익히려 하였느냐?”
 “예! 소인은 장주님의 서동이 되어···”
 “서동? 하하! 이 녀석, 정말 꿈도 야무졌구나. 장주님의 서동이 되려면 최소한 사서삼경(四書三經)과 제자백가(諸子百家) 정도는 달통해야 간신히 될 수 있는 자리이다. 너 같은 무지렁이가 어떻게 어려운 서책들을 분류할 것이며, 장주께서 원하시는 부분을 펼쳐서 보여드릴 수 있겠느냐?”
 호득강의 말에 빙선서생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지나면서 이런 모습을 본 하인들은 놀랍다는 표정을 지으며 호득강을 바라보고 있었다.
 빙선서생 동방극은 어려서부터 가히 천재라 불릴 만한 재목이었다. 삼 세 때 이미 사서삼경을 줄줄이 암송하였으며, 일곱 살 때에는 제자백가를 두루 섭렵하였다. 이후 학문일도에 매진하는 동안 그는 부친과 거의 버금갈 만한 학문을 쌓았다.
 그런 그를 보면서 주위 사람들은 과시(科試)에 응시만 하면 장원급제는 따 놓은 당상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단 한 번도 과시에 응시한 적도 없으며, 관직에 연연해하지도 않았다. 이런 소문을 들은 천자는 친히 천충학사를 불러 자식이 왜 과시에 응시하여 장차 나라의 동량이 되려 하지 않느냐는 이유를 물은 바 있었다.
 이때 천충학사는 자식이 관직에는 뜻이 없으며 그의 유일한 소망은 수 년 이내에 부친인 자신을 학문으로 누르는 것이라 하였다. 이 소리를 들은 천자는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천하의 그 어느 누구도 천충학사보다 박학다식할 수는 없을 것이라 생각하던 터였기 때문이었다.
 이에 천충학사는 자식의 학문이 자신을 능가하였을 때에는 관직에 나설 것이니 심려하지 말라는 말을 하였었다.
 아무튼 그럴 정도로 뛰어난 학문을 지닌 그의 유일한 단점은 싸늘해도 너무 싸늘하다는 것이다. 하인이건 누구건 조금만 실수를 해도 절대 용서해주는 법이 없는 그였다. 그리고 자신의 식솔에게도 다정한 표정을 지어준 적이 없었다.
 이것은 그가 애용하는 섭선(攝扇)이 늘 찬바람을 일으키기 때문이라 하여 그에게 빙선서생이라는 외호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평소에 전혀 웃음을 짓지 않는 그의 입에서 너털웃음이 터져 나오니 놀랍다는 표정을 지은 것이다.
 “그래, 네 사부라는 오타신군에 대한 이야기는 들은 적이 있다. 아직도 강호에 있다면 무림사수 안에 낄 수 있을 정도로 고강한 무공의 소유자라고 하였었지.”
 “소인의 사부님이 정말 그렇게 강하신 분이셨나요?”
 “아암! 강하고 말고··· 네 사부가 강호에서 활동할 때에는 아무도 함부로 할 수 없을 정도였지. 하지만 장력이 자꾸만 이상하게 발출되는 바람에 오타신군이라는 불명예스런 외호로 불렸지.”
 빙선서생은 무림인도 아니면서 무림에 대한 것을 제법 많이 알고 있는지 반 각 가까이나 오타신군에 대한 일화를 이야기하였다. 그럴 때마다 호득강은 놀랍다는 듯 반문하였다.
 늘 술에 절어 있으면서 세상을 비관하던 사부가 큰소리 칠 때마다 괜한 허풍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일파의 장문인 못지 않은 무공의 소유자였다고 하니 놀라지 않으면 이상할 것이다.
 “자! 여기가 오늘부터 네가 묵을 곳이다. 오늘은 일단 쉬고 내일 아침 일찍이 본인의 처소로 오너라. 저곳으로 오면 된다.”
 이날 호득강은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이제 과두문과 설형문자를 배우고 나면 오타신공의 잘못된 부분을 바로 잡을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사부가 죽으면서 개정대법으로 넘겨준 내공이 있기에 그것만 제대로 익히고 강호에 출도해도 일파의 장문인 못지 않은 무공을 지니게 된 셈이다. 따라서 말로만 듣던 강호를 횡행하면서 약자를 도와주고 악한 자를 물리치는 행협(行俠)을 행할 수 있으리라는 공상 속에 잠겨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음 날 호득강은 별다르게 한 일이 없었다.
 그저 제목을 일러주는 서책을 서고에서 꺼내 주고 다 본 것은 제 자리에 꽂아 두기만 하면 되었다. 워낙 서고 정리가 잘 되어 있었고, 체계적으로 분류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빙선서생의 서동 노릇을 하던 사람은 그의 막내 여식인 유리옥녀(琉璃玉女) 동방취(東方翠)라고 하였다. 올해 열한 살인 그녀는 뛰어난 두뇌와 아름다운 용모를 지니고 있으나 흠이 있다면 부친과 마찬가지로 상당히 쌀쌀맞은 성격이었다.
 오늘부터 호득강이 서동노릇을 할 터이니 이제 오지 않아도 된다는 부친의 말에 가타부타 대답도 없이 돌아서는 그녀를 본 호득강은 대하기가 결코 쉽지 않은 상대라 느꼈다.
 그런 그의 예상은 적중하였다.
 오다가다 마주칠 때마다 공손하게 절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정강이가 까질 정도로 걷어 채이거나, 일과 후에는 자신의 부름에 늦었다면서 호된 벌을 주었다.
 회초리로 종아리를 맞는 것은 그래도 좀 나았다. 제대로 쉴 틈조차 없는 생활을 하도록 만들곤 하였기 때문이었다.
 현재 호득강의 의복은 하나뿐이었다. 전에 입고 있던 것은 너무도 낡아 여기저기가 너덜너덜하게 헤어진 것이었다. 이것을 본 빙선서생이 명해 한 벌의 의복을 얻어 입었다. 순백색을 띤 그것은 문사들이 즐겨 걸치는 문사복을 줄여서 만든 것이었다.
 빙선서생은 워낙 지저분한 것을 싫어하는 성품이었기에 자신의 주변을 오가야 하는 그에게서 풍기는 냄새가 역겹다면서 매일 수욕을 하도록 명을 내린 직후에 지급한 것이다.
 처음 이것을 받았을 때 호득강은 뛸 듯이 기뻤다. 세상에 태어난 이래 처음으로 새로 지은 의복을 입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의복 때문에 겪어야 한 일은 너무도 끔찍하였다.
 천유장에는 얼추 사백여 명의 사람들이 기거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 일부는 내원이라 불리는 곳에서 생활하는 사람들로 천충학사와 그의 일족, 그리고 그들의 수발을 드는 사람들이었다.
 나머지는 천자가 친히 하사한 식읍(食邑)에서 농사를 짓는 하인들과 호위무사 등이었다.
 따라서 이십여 군데가 넘는 해우소(解憂所)가 있었다.
 유리옥녀가 호득강에게 내린 벌은 바로 해우소들을 치우도록 하는 것이었다. 사실 그것을 치우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작대기 끝에 바가지를 엮은 후 그것으로 다른 통에 퍼담은 후 내다 버리기만 하면 되었다.
 내다 버리는 곳도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인분 위에 재를 부어 퇴비를 만든 후 농사에 이용하므로 냄새도 별로 나지 않기에 장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호득강이 곤욕을 치른 것은 바로 냄새 때문이었다. 저녁나절 해우소를 치우고 나면 지독한 악취가 의복에 배어 가까이 다가만 가도 사람들이 코를 쥐고 도망갈 정도였다.
 물론 인분(人糞)을 치우다보면 가끔은 몇 방울이 튀기도 하였다. 그런 다음 날 빙선서생의 곁으로 다가가면 냄새가 난다고 불호령이 떨어지곤 하였다. 하여 해우소를 치운 직후 냄새가 사라질 때까지 의복을 빨고 또 빨아야 하였다.
 문제는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젖은 의복을 걸치고 다닐 수 없기에 밤새도록 그것이 마르도록 화덕 곁에서 꾸벅꾸벅 조느라 수면 부족에 시달려야 하였던 것이다.
 때로는 너무 졸아서 의복이 불에 타는 불상사가 생기기도 하였다. 당연히 유리옥녀로부터 호된 야단을 받았다. 한가지 다행인 점은 그녀가 새 의복을 지급해 준다는 것이다.
 그런 날은 어김없이 해우소 청소를 명 받았다. 따라서 깨 있어도 멍할 때가 많아졌다. 이것 때문에 빙선서생으로부터 적지않은 꾸지람을 들어야 하였다. 그럴 때마다 이런 식으로 하면 과두문을 가르쳐주기는커녕 당장 내쫓겠다며 윽박질렀다. 하여 손이 발이 되도록 빌고 나서야 간신히 용서받곤 하였다.
 결국 병든 병아리처럼 틈만 나면 졸던 그에게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명이 떨어졌다. 그것은 성도에서 동남쪽으로 일백육십여 리 정도 떨어진 아미산(峨嵋山)에 다녀오라는 것이다.
 
 아미산의 많은 봉우리 가운데 금정봉(金頂峰)은 높이 일천 장이 넘는 봉우리로 구파일방 중 하나인 아미파(峨嵋派)가 있다.
 원래 이 산은 많은 수효의 호랑이들이 살고 있었으나 오래 전 사성법사가 놈들을 제압하고 그곳에 복호사(伏虎寺)를 건립하였다. 이곳이 바로 아미파의 근원지이다.
 아미산에는 이밖에도 많은 사찰과 암자들이 있는데 보국사(報國寺), 만불사(萬佛寺), 뇌음사(雷音寺), 중봉사(中峰寺), 만년사(萬年寺), 회불사(會佛寺), 선봉사(仙峰寺), 과선사(過仙寺), 대승사(大乘寺), 화장사(華藏寺), 와운암(臥雲庵), 명월암(明月庵)이 있고, 신수각(神水閣), 청음각(淸音閣), 순양전(純陽殿), 초전(初殿), 접인전(接引殿) 등이 있다.
 호득강에게 내려진 명은 이 가운데 청음각과 만년사 사이에 있는 백룡동(白龍洞)에서 천룡(天龍)을 잡아오라는 것이다.
 처음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는 매우 놀랐다. 인세에 용(龍)이 있었으며 매우 위험한 것이라는 이야기만 들었기에 자신이 어떻게 용을 잡느냐며 펄쩍 뛰었다. 자신더러 가서 죽으라는 소리와 진배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유리옥녀가 말한 천룡은 진짜 용이 아니라 매우 오래 묵은 오공(蜈蚣:지네)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약방에서는 오공을 천룡이라고 부른다며 얼마나 놀려댔는지 모른다.
 천유장에서 천룡이 필요한 이유는 활유(? )라고도 하고, 토와(土蝸)라고도 부르는 벌레 때문이었다. 언제 천유장에 들어왔는지 모를 그것은 암수한몸으로 새끼를 많이 치는데 애써 가꾼 기화요초들을 모조리 갉아먹는다 하였다. 그런데 천룡이 있으면 닿기만 해도 모조리 죽어버린다며 그것을 구해오라는 것이었다.
 그에게 내려진 명은 오공을 가능한 많이 잡아오라는 것이다.
 이에 길을 떠난다는 말을 하러 빙선서생에게 들렀다.
 몇날 며칠이 걸릴지 모르겠다고 하자 그는 오타신공의 구결이 적힌 비급을 놓고 가라고 하였다. 갔다 오는 동안 그것을 살펴보고 어떤 글자를 가르쳐야 할지 알아두겠다는 것이다.
 이에 호득강은 반가운 마음으로 비급을 남겨 놓고 먼길을 떠났다. 천유장에 몸담은 지 무려 반 년 만에 처음으로 과두문을 배울 수 있다는 희망에 부풀었기 때문이었다.
 
 말로만 듣던 아미산은 결코 운남성에서 보아왔던 그런 평범한 산이 아니었다. 산세도 가파를 뿐만 아니라 아미의 비구니들이 다니는 길을 제외한 길은 과연 호랑이가 살만한 그런 곳이었다.
 유리옥녀가 말하길 천유장에 많고 많은 하인들 가운데 자신을 보내는 이유는 이곳에 아미파가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아미산에 도착한 이후 호득강은 왜 자신을 보냈는지 알 수 있었다. 청정도량이 있는 아미산은 허가된 사내 이외에는 입산이 금지되어 있었다. 만일 젊고 잘 생긴 사내들이 무시로 드나든다면 비구니들의 수양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분심(分心)이 들어 번뇌에 얽매이게 될 것이다.
 하여 아미산 인근 양민들은 약초를 캐거나 땔나무를 구하러도 아미산에는 들지 않았다. 이는 과거 강호에 혈겁이 있었을 때 아미파에서 구원의 손길을 펼친 것에 대한 보답이라 하였다.
 처음 아미산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 호득강은 비구니 하나를 만날 수 있었다. 무슨 일로 왔냐는 말에 천유장에서 심부름을 보내 왔다면서 준비해온 서찰을 건네자 두 말 없이 통과시켰다.
 만일 호득강이 청년이었고, 천유장에서 오지 않았다면 아마도 입산을 허락지 않았을 것이다.
 보국사와 복호사 앞을 거쳐 순양전과 신수각, 그리고 중봉사를 지나는 길은 험해도 보통 험한 길이 아니었다.
 한 발짝만 잘못 내디뎌도 깎아지른 듯한 낭떠러지 아래로 돌멩이처럼 추락하고 말 만한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던 것이다.
 겨우 열 살밖에 안 된 호득강에겐 너무도 위험하고 힘겨운 일이었지만 조심조심하면서도 혼신의 힘을 다하여 산을 올랐다. 밤이 되기 전에 청음각에 도착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었다.
 이곳 아미산은 신기하게도 비구니들에게는 짐승들이 덤비지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예외 없이 덤비므로 해가 떨어지기 전에 가야한다는 말을 들었기에 죽을힘을 다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만추지절(晩秋之節)로 접어든 아미산에는 천하에 이름난 아미팔경이라는 것이 있는데 성적만경(成積晩磬), 나봉청운(羅峰靑雲), 쌍교청음(雙橋淸音), 대평제운(大坪諸雲), 홍춘효우(洪椿曉雨), 구로선부(九老仙府), 상지야월(象池夜月), 백수추풍(栢樹秋風)이 그것들이다.
 그 가운데 하나인 성적만경은 성적사로 개명된 복호사에서 매월 일일과 십오일에 저녁 예불을 알리기 위하여 치는 종소리를 말한다. 느리게 열여덟 번을 치고, 빠르게 열여덟 번을 치는 식으로 모두 백팔 번을 치면 저녁 예불이 시작된다.
 뎅! 뎅! 뎅! 뎅! 뎅!······
 “후와! 어디서 치는 종소린데 여기까지 들리지?”
 중봉사를 지나 한참 땀을 뻘뻘 흘리면서 청음각으로 향하던 호득강은 멀리서 들리는 범종소리에 잠시 귀를 기울였다.
 그것은 심신을 맑게 해주는 공능이 있는지 거칠었던 호흡도 서서히 정상을 되찾아갔고, 흐르는 땀도 식혀주는 듯하였다.
 “저녁 예불이 시작되는 것을 알리는 모양인데, 이러다가 늦겠다. 해 떨어지기 전에 못 가면 꼼짝없이 한데서 자야한다.”
 잠시 종소리에 심취해 있던 호득강은 화들짝 놀라면서 잰걸음으로 산등성이를 타고 올랐다.
 아미의 비구니들은 경공을 익혔기에 길이 아니더라도 수월하게 갈 수 있지만 아직은 어린 그에겐 너무도 험난한 길이었다.
 어른 키 만한 바위가 앞을 가로막는가 하면 울울창창한 수림의 가지들과 가시넝쿨 때문에 멀리 돌아가야 하기도 하였다.
 그러는 가운데 사위는 어두워지기 시작하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멀리 있는 풍경이 보였으나 삽시간에 어둠이 스며들자 호득강은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혼신을 다하여 전진 또 전진하였다. 아까 만났던 비구니가 말하길, 오늘 안에 백룡동에서 오공을 잡은 후 하산한다는 것은 어른이라 할지라도 어려운 일이므로 반드시 청음각에서 하룻밤을 유(留)하라 하였다.
 그러면서 친절하게도 쪽지에 재워주라는 글귀까지 써 주었다.
 “헉헉! 빨리 가야해! 헉헉!”
 어두워지면 사나운 짐승들이 먹이를 찾아 돌아다닌다는 것을 잘 알기에 공포감이 엄습하면서 식은땀이 흐르는 동안 그의 손은 온통 생채기가 났다.
 나뭇가지에 긁히고 뾰족한 바위 때문에 까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너무도 급한 마음에 전혀 고통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기에 손에서 선혈이 흐르는 것을 까맣게 모른 채 서둘러 숲 속을 빠져나갔다. 인적이 드물어서 그런지 아미산은 너무도 울창해 전진하는 것이 결코 용이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잠시라도 지체하다가 흉폭한 늑대나 호랑이라도 만나면 꼼짝없이 짐승의 밥이 될 것이기에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도 손과 발을 재게 놀렸다.
 “헉헉! 헉헉! 불빛이 왜 안 보이지? 빨리 가야 하는데. 헉헉! 벌써 도착했어야 하는 거 아냐? 혹시 길을 잘못 들었나?”
 힘겹게 제법 높은 바위 위에 올라선 호득강은 사방을 휘휘 둘러보며 방향을 가늠하였다. 하지만 있어야할 불빛은 보이지 않았고 사방이 깜깜하여 어디가 어딘지 구분할 수 없었다.
 이 순간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한 청음각에서 새어나오는 불빛은 거대한 바위로 가려져 보이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큰일이네. 어떻게 하지? 젠장! 어디가 어딘지···, 허어억!”
 잠시 투덜대던 그는 멀지 않은 숲 속에서 빛나는 눈동자를 발견하고는 헛바람을 들이켰다. 그것은 분명 짐승의 눈에서 발하는 빛이며 숫자로 보아 한두 마리는 아닌 듯하였다.
 하늘에는 여인의 눈썹 같은 조각달만이 떠 있었고, 구름이 잔뜩 끼어 있어 몹시 어두웠다. 호신을 위한 것이라고는 오공을 잡기 위하여 준비한 집게 몇 개가 전부인 그로서는 꼼짝없이 짐승의 먹이로 전락하기 일보직전이었다.
 아미의 비구니들은 한참 저녁 예불을 하고 있을 터이고, 이곳은 사내들에게 입산을 허락하지 않는 곳이니 구원의 손길이라고는 애초부터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어, 어떻게 하지? 어, 어떻게 할까?”
 오금이 저리고, 정신이 아득해지면서 자칫 소변이라도 지릴 듯한 상황이었기에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아 잠시 주춤하는 사이 짐승들은 만만하다 판단하였는지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안 돼! 지금 죽기는 너무 억울해! 나는 아직 세상을 살아보지도 못 했단 말이야! 사부님의 원수를 갚아야 하고, 장가도 가야해! 어, 어떻게 하지? 호득강아, 호득강아, 침착하자!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살 수 있다고 하였어. 정신을 차리자!”
 스스로를 격려하기 위하여 두 손으로 뺨을 서너 차례 치는 동안에도 짐승들은 점점 다가와 이제는 구역질나는 노린내가 느껴지는 순간 앞 뒤 가릴 것 없이 바위 위로 뻗쳐 있는 나뭇가지를 잡아당기며 기어올랐다.
 끄르르릉! 으르르릉! 끄르르르! 으헝!
 찌익! 찌이이익!
 “아아아악! 사, 사람 살려! 사람 살려! 아아아악!”
 호득강은 무엇인가가 물어뜯는다는 느낌에 화들짝 놀라며 튀어 올랐다. 나뭇가지에 매달리는 순간 쇄도한 늑대가 둔부를 물면서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의복 찢기는 소리가 난 것이다.
 “허억! 으아아악! 사람 살려! 아무도 없어요? 사람 살려!”
 허겁지겁 가느다란 나뭇가지를 잡고 오르는 순간 또다시 늑대들이 덤벼들면서 신고 있던 신발을 물어갔다. 다행히 반쯤 벗겨진 상태이기에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꼼짝없이 발이 뜯겨 나갔거나 밑으로 떨어져 먹이가 될 뻔한 순간이었다.
 으르르릉! 끄르르릉! 크허헝!
 “헉헉! 헉헉!··· 으악! 이 피! 아악! 사람 살려! 사람 살려요!”
 간신히 굵은 가지가 있는 곳에 도달한 호득강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엉덩이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손을 댔다가 화들짝 놀랐다. 제법 많은 양의 선혈이 흘러나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 참! 이럴 때 쓰라고 준 것이 있었지.”
 겁에 질려 한참을 비명을 지르던 호득강은 천유장을 떠나기 직전 총관이 건넸던 것을 기억하였다. 혹시라도 오공에게 물리거나 상처가 나면 바르라고 준 금창약이었다.
 어두웠기에 상처가 얼마만한지 전혀 감잡을 수 없던 호득강은 지니고 온 금창약의 절반 정도를 뜬 후 엉덩이에 대고 비볐다.
 “으윽! 으으으윽! 흐으으윽! 으윽!···”
 손이 움직일 때마다 지독한 통증이 느껴졌으나 비명을 질러봐야 아무런 소용도 없다는 것을 알기에 이를 악물고 통증을 참을 수밖에 없었다.
 손으로 만져보니 제법 상처가 크다 느껴져 이러다 과도한 실혈(失血)로 죽는 것이 아닌가 싶은 마음에 겁이 와락 솟아오름과 동시에 식은땀이 비 오듯 흐르고 있었다.
 언제 올랐는지 그가 있는 곳은 제법 높은 곳이라 늑대들은 도저히 오를 수 없는 높이였다. 아마도 정신 없이 오르다 보니 그렇게 된 모양이었다. 밑을 내려다 보니 늑대들이 조금 전에 흘린 선혈을 핥아먹으면서 연신 위를 바라보며 으르렁대고 있었다.
 “으으! 큰일이군. 어떻게 하지?”
 늑대들은 먹이를 놓친 것이 분하다는 듯 연신 으르렁거리면서 주위를 떠나지 않고 있었다. 원숭이가 아닌 이상 언젠가는 나무에서 내려 올 것이라 생각하였는지 이빨을 드러내며 어서 내려오라는 듯 소리를 지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날 호득강은 밤새 추위와 더불어 공포에 질려 있어야 하였다. 삼경 무렵이 되자 늑대들이 일제히 울부짖었는데 그 소리에 혼백이 달아날 지경이었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그 소리를 듣고 이십여 마리의 늑대들이 더 나타났던 것이다. 그러던 그들이 새벽 무렵 갑작스럽게 사라지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그는 눈을 크게 뜨지 않을 수 없었다.
 어디에서 나타났는지 화등잔 만한 눈을 가진 두 마리 맹호가 나타나 주변을 맴돌며 포효하였기 때문이었다.
 다음 날 아침, 이름 모를 산새들이 날이 밝았음을 알리려는 듯 지저귀기 시작할 무렵에도 호득강은 나무 위에서 벌벌 떨고 있었다. 맹호들이 전혀 떠날 생각을 안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니 자신이 어제 올랐던 바위가 맹호들의 서식처 바로 위라는 것을 깨닫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허비되지 않았다.
 새끼 호랑이들이 바위와 바위 사이에서 기어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젠장! 어떻게 하지? 으아! 미치겠네. 하필이면···”
 호랑이들은 낮에는 자고 밤에만 움직이는 동물이다.
 하지만 낮에라도 먹이가 코앞으로 지나가면 덤비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내려갈 수 없는 노릇이었다.
 밤이 된다 하더라도 먹이가 나무 위에 있다는 것을 뻔히 아는 호랑이들이 다른 곳으로 갈 리 만무한 일이다. 그러므로 호득강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놓인 것이다.
 반나절 동안이나 궁리를 하였지만 방법이 없었다. 주위를 살피니 이곳은 비구니들이 다니는 통로와는 상당히 먼 듯하였다. 따라서 누가 와서 구해준다는 것은 기대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휴우···! 이러다 여기서 굶어 죽겠네. 안 되겠어. 천상 그 방법 뿐이야. 잘 살펴야 해! 썩은 걸 잡으면 꼼짝없이 죽는다.”
 늦은 오후가 되자 배도 고프고 목도 마른 호득강은 목숨을 건 모험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밑으로는 내려갈 수 없으니 나뭇가지라도 잡고 움직이기로 한 것이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숲이 무척이나 울창하여 나뭇가지만 잘 잡고 움직이면 어쩌면 위기를 넘길 듯하였던 것이다. 또 하나 다행인 것은 호랑이들이 따라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결국 호득강은 그들의 시야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밑으로 내려섰다가는 무슨 꼴을 당할지 모르겠기에 또 하루를 나무 위에서 지내야 하였다.
 다음 날 아침 주위를 면밀히 살핀 그는 지난 밤 살폈던 방위로 냅다 달리기 시작하였다. 어디에서 호랑이나 늑대가 튀어나올지 모르기에 혼신의 힘을 다하여 달린 끝에 어두컴컴한 동굴이 있는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헉헉! 헉헉! 여기가 백룡동인가? 헉헉! 헉헉!”
 안쪽으로 이십여 보 정도를 걸어 들어가자 사물을 식별할 수 없을 정도로 어두웠다. 동혈이 급격하게 꺾였기에 외부의 빛이 들어올 수 없어 그런 모양이었다.
 준비해 온 홰에 불을 붙인 후 안쪽으로 더 들어가자 동혈의 벽면에서 물이라도 스미는 듯 습기가 가득하였다.
 “어! 여긴 박쥐는 없나? 이런 덴 대부분 박쥐들이 있는데···”
 홰의 불빛에 반사된 종유석들은 태고의 아름다움을 비로소 뽐낼 수 있다는 듯 영롱한 빛을 흩뿌리고 있었다.
 “후와! 멋있다. 이런 데 이런 것들이 있다니···”
 한참을 넋을 놓은 채 아름다운 종유석들을 감상하던 그는 벽면으로 기어가는 오공을 발견하고는 자신의 이마를 쳤다.
 “아, 참! 깜빡했네. 오공을 잡으러 왔었지?”
 준비해온 집게를 꺼낸 호득강은 방금 전 발견한 오공을 잡으려 다가갔다. 위기를 느꼈는지 오공의 움직임이 급작스럽게 빨라지자 호득강은 번번이 헛손질을 할 수밖에 없었다.
 얼마 후 그는 오공을 잡을 수 있게 되었다. 놈들의 움직임을 미리 파악하니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그러는 사이 호득강은 저도 모르게 동굴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우와! 여긴 엄청나게 많군. 좋아! 몽땅 잡아 주지.”
 열 살밖에 안 된 호득강은 아직 어린 소년답게 벌레 잡는 재미에 빠져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배가 고픈 것도 목이 마른 것도 잊은 채 한참을 잡고 나니 준비해온 주머니가 불룩해지자 그제야 손을 멈춘 그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후후! 이젠 됐어. 허어! 그러고 보니 되게 배가 고프네. 에이, 이럴 줄 알았으면 조금만 잡는 건데. 어? 저건 뭐지? 아앗!”
 막 돌아서려던 호득강은 무엇인가 네 개의 빛이 반짝이자 호기심 때문에 고개를 돌렸다가 경악하며 뒤로 물러섰다.
 동굴의 안쪽에서 조그맣게 빛나던 것이 갑작스럽게 커진다 느낀 순간 엄청나게 큰 오공을 발견한 것이다.
 대부분의 오공이 길어야 반 자 가량 되었다. 몸통 굵기도 굵어봐야 어른 손가락 굵기의 절반 정도였다. 그런데 눈앞의 오공은 그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컸다.
 길이는 거의 일 장에 달하고, 몸통의 둘레는 반 장은 족히 될 정도였다. 아울러 스물 한 쌍의 다리는 두께만 해도 한 자는 족히 되어 보였고, 네 개의 눈에서는 시퍼런 빛을 발하고 있었다.
 아가리 옆에 달린 긴 턱다리와 꼬리에 달린 두 개의 다리는 짙은 갈색을 띠고 있었는데 반들반들 윤이 나고 있었다.
 호득강은 주춤거리면서 연신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조그만 것들은 겁나지 않지만 눈앞의 것은 벌레라고 하기엔 너무 큰 괴물이었기에 두려움이 앞섰기 때문이었다.
 겁을 주려고 횃불을 앞으로 내밀어 흔들어댔으나 놈은 전혀 두렵지 않은 듯 여전히 거리를 좁히고 있었다.
 “비켜! 오지 마! 저리 가! 오지 말란 말이야!”
 횃불에 반사된 네 개의 눈에서 발하는 빛은 어린 소년을 공포로 몰아넣기에 충분하였다. 호득강은 겁에 질린 채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면서 도주할 기회를 노렸다.
 그러나 이 순간 그는 자신이 결코 지네보다 빠를 수 없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두 개의 다리로 뛰는 것과 마흔 두 개의 다리로 움직이는 것 중 어느 것이 빠르겠는가?
 사실 이놈은 보통 지네가 아니었다. 아미파가 생기기 이전부터 이곳 백룡동 깊숙한 곳에서 살아왔던 놈으로 놈의 먹이는 멋모르고 날아드는 박쥐였다. 생각해 보라. 땅바닥을 기어다니는 오공이 어찌 박쥐를 잡아먹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워낙 크고 민첩하기에 박쥐는 물론 동굴 속으로 들어오는 각종 동물을 잡아먹으면서 천 년을 넘게 산 영물이었다.
 이곳 백룡동은 사람들이 드나들 이유가 전혀 없는 곳이었기에 놈이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놈의 아가리에 달려있는 턱다리에 쏘이면 맹호라 할지라도 즉각 마비되기 마련이다. 그런 후 느긋하게 먹이를 잡아먹으며 살아온 놈이었다. 동굴 깊숙한 곳에 있던 놈은 호득강이 오공들을 잡으면서 내는 소리를 듣고 기어 나온 것이다.
 “으아아아아아! 사람 살려! 사람 좀 살려요!”
 한동안 주춤거리며 물러서던 호득강은 멀리 동굴 입구가 보이자 혼신의 힘을 다하여 질주하였다. 그와 동시에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괴물 역시 그의 뒤를 바짝 따랐다. 과연 마흔 두 개의 발로 움직이는 속도는 가히 섬광과 같다고 할 수 있었다.
 순식간에 거리가 좁혀지며 막 물리려는 순간 뒤를 흘낏 돌아보았던 호득강은 놈의 날카로운 턱다리 끝이 보이자 재빨리 종유석을 돌아나갔다. 그리고는 종유석이 보일 때마다 재빨리 방향을 바꿨다. 과연 이 방법이 효과가 있는지 약간 거리가 벌어질 무렵 그는 동굴 입구에 당도할 수 있었다.
 무엇 때문인지는 몰라도 동굴의 입구는 무척이나 밝았다.
 “아앗! 으아아아악!”
 엉덩이 부근에서 묵직한 통증이 느껴짐과 동시에 동굴을 벗어난 호득강의 입에서는 길고 긴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혼절한 것이다. 끈질기게 뒤를 따르던 괴물은 더 이상 따라오지 않는 듯하였다.
 대신 호득강이 있는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던 호랑이가 다가왔다. 냄새를 맡고 따라온 모양이었다.
 두 마리 호랑이는 혼절한 호득강을 어떻게 먹을 것인가를 상의하는지 여유 있는 움직임으로 다가왔다.
 이 순간 혼절의 나락으로 떨어져 있던 호득강은 자신이 위기에 처했다는 것을 모르기에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
 크허허허헝! 끄르르르릉! 깨앵! 깨앵!
 먹이를 구한 것이 기쁘다는 듯 포효를 한 뒤 호득강의 다리를 물려던 호랑이들은 무엇엔가 몹시 놀랐다는 듯 비명을 지르고는 황급히 동굴 속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동굴 속에서는 괴상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깨앵! 깨앵! 우적, 우적! 우적! 우적!
 무엇엔가 놀라 뒤로 후퇴하려던 오공이 동굴 안으로 들어온 호랑이들을 턱다리로 찔러 중독시킨 후 날카로운 이빨로 씹어 먹는 소리였다. 어처구니없게도 백수의 제왕인 호랑이가 한낱 오공에게 먹히는 소리였다.
 대략 반 시진 정도 시간이 흐른 뒤 동굴 속은 잠잠해졌다.
 “끄으으응···!”
 혼절에서 깨어난 호득강은 자신이 아직도 살아있다는 것이 신기하다는 듯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자욱한 운무만이 있을 뿐 아무런 이상이 없자 자리에서 일어섰다.
 “으으윽!”
 의복에 묻은 먼지를 털기 위하여 무의식적으로 엉덩이 부분을 치던 그는 나직한 비명을 질렀다. 상처를 잊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호득강이 괴물과 호랑이로부터 목숨을 구할 수 있었던 것은 천우신조(天佑神助)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미산에는 팔경 이외에 기이한 것이 하나 더 있었다.
 불규칙적이기는 하지만 가끔가다 빛 무리가 생겼다 사라지곤 한다는 것이다. 세인들은 이를 보고 아미불광(峨嵋佛光)이라고 불렀다. 마치 부처님의 머리 뒤에서 빛나는 광배(光背)처럼 보이기 때문이었다. 언제 어느 곳에서 생기며, 얼마나 오랫동안 빛을 발할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하였다.
 그런데 그가 동혈의 입구를 벗어나는 순간 그곳에 순간적으로 아미불광이 생겼다. 이것을 본 오공은 먹이가 눈앞에 있지만 본능적으로 어둠 속으로 숨느라 다시 동굴 안으로 후퇴하였다.
 이 순간은 괴물의 턱다리가 호득강의 둔부를 찌르던 순간이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늑대에게 물리는 바람에 움푹 패인 상처 부위를 찌르게 되었다. 그곳은 금창약이 잔뜩 발라져 있었던 곳이기에 괴물의 독이 치명적이질 못한 것이다.
 같은 순간 호득강의 신형이 아미불광에 휩싸이면서 체내의 독은 모두 타버렸다. 이 직후가 호랑이가 그의 다리를 물던 순간이었다. 괴물처럼 영악하지 못했던 호랑이들은 그의 다리를 물어 양쪽으로 찢으려다 찌르르한 느낌에 놀라면서 즉각 후퇴하여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가 괴물의 먹이가 되어 버린 것이다.
 “어! 다리에 상처는 뭐지? 아까는 없었는데··· 뭐가 물었나?”
 잠시 어리둥절해 있던 호득강은 남아 있던 금창약을 양쪽 다리에 있는 상처에 바르며 중얼거렸다.
 상처의 모양으로 보아 어디에 긁히거나 찔린 것은 아닌 것이 분명하였다. 동물의 이빨 자국인 듯하나 혼절한 사이에 호랑이가 물었다는 것을 전혀 모르는 그로서는 의아할 뿐이었다.
 “어서 하산해야지. 이러다 또···”
 호득강은 오공들을 잡아 둔 주머니를 챙겨든 채 종종걸음으로 하산을 시작하였다. 그는 이곳 아미산에서 여러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다는 사실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하산하는 동안 또다시 밤이 찾아오자 호득강은 지체 없이 나무 위로 올라갔다. 예상대로 늑대들이 주변을 어슬렁거렸으나 아침이 되자 모두 사라졌다.
 호득강은 또다시 나뭇가지를 이용하여 이동하다가 비구니들이 다니는 길이 나타나자 그제야 내려섰다.
 
 ***
 
 “수고는 했는데, 왜 이렇게 늦게 왔어? 너, 어디서 놀다왔지?”
 “아, 아닙니다요. 소인은 죽을 고생을 하고 간신히 오공을···”
 “흥! 믿을 수가 없어. 네놈은 어디에서 분명 놀다가 왔어. 그런데도 감히 변명으로 이를 감추려고 해? 흥! 네놈은 그 벌로 오늘부터 열흘 동안 해우소를 말끔하게 청소해 놓아야 해! 알았어?”
 “예! 알겠습니다.”
 양쪽 허리춤에 손을 올린 채 앙칼진 음성을 토하는 유리옥녀를 본 호득강은 더 이상 구구한 변명을 하지 않았다.
 해봤자 들어주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그랬다가는 더 큰 벌이 내려진다는 것을 뻔히 알기 때문이었다.
 이날부터 열흘 동안 호득강은 한숨도 잘 수 없었다. 냄새나는 의복을 빨아 말려야 하였기 때문이었다.
 물론 피곤에 지쳤기에 두 번이나 태워먹었고 회초리로 종아리 백 대를 맞는 대신 새 의복이 지급되었다.
 천신만고 끝에 잡아 온 오공들 덕인지 정원에 있던 벌레들은 모두 사라졌다. 그러자 유리옥녀는 정원에다 닭을 풀어놓았다.
 닭들은 즉각 포식을 하였고 나날이 살이 쪘다.
 “호호호! 저놈들 꽤 통통해졌네. 야! 너, 이리 좀 와봐!”
 “예? 저요?”
 “그래 임마! 지금 거기 너 말고 누가 있냐? 어쭈, 어서 안 와?”
 검지손가락 하나를 세워 까딱이는 유리옥녀를 본 호득강은 황급히 다가와 고개를 조아렸다.
 백룡동을 다녀 온 이후 부쩍 심술궂어진 그녀였다. 하여 하루에 한 번 이상은 그녀에게 호된 꾸지람을 들어야 하였다.
 지금 같은 경우 한 번 더 반문했다 하면 즉각 해우소 열흘 청소라고 하거나 드넓은 마장(馬場)의 말똥을 치우라는 소리가 튀어 나왔기에 잠시도 지체하지 않고 튀어 온 것이다.
 “지금 즉시 저놈을 잡는다. 실시!”
 유리옥녀가 가리킨 것은 천유장에서 가장 사나운 수탉이었다.
 호득강은 즉각 두렵다는 표정을 지었다. 놈은 얼마 전 암탉을 노리고 들어왔던 오소리의 눈을 쪼아 죽인 놈이다.
 얼마나 사나운지 개는 물론 고양이들조차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는다. 가까이 다가갔다가는 단단한 부리에 쪼여 눈알이 터지기 일쑤라는 것을 경험상 아는 모양이었다.
 그것은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천유장 사람치고 놈에게 가까이 가려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언제 활개를 치고 날아올라 얼굴을 쪼아댈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겁먹은 표정을 지은 것이다. 어른 얼굴까지도 날아오르는 놈이니 이제 겨우 열 살 된 그의 얼굴로 날아올라 날카로운 발톱으로 할퀴고 쪼아대는 것은 일도 아니기 때문이었다.
 “예에? 저, 저놈을 잡으라고요?”
 “아니, 그놈 옆에서 졸고 있는 암탉을 잡아!”
 “아, 암탉을요? 무엇 하려고···?”
 “호호! 오공을 먹어서 그런지 살이 통통하게 올랐으니 오랜만에 포식 좀 하려고 그래. 그러니 어서 잡은 다음에 털을 뽑아!”
 “예에? 터, 털을 뽑으라고요?”
 “그래! 왜, 뭐가 잘못됐어? 뭐하고 있는 거야? 어서 잡아!”
 유리옥녀가 잡으라는 놈은 암탉 가운데 가장 날쌘 놈으로 요즘 수탉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었다. 하여 잡는 것도 어려울 뿐만 아니라 수탉의 공격을 받을 위험성이 무척이나 컸다.
 호득강이 계속 주춤거리자 유리옥녀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어서 안 잡아? 빨리 잡아! 털을 몽땅 뽑은 다음에 주방으로 갖고 가서 라조기(辣椒鷄)를 만들어 보내라고 해!”
 “라, 라조기요?”
 “뭐해? 빨리 안 잡아? 혼나고 싶어?”
 “아, 아닙니다. 잡겠습니다.”
 호득강은 이날 천신만고 끝에 암탉을 잡기는 잡았었으나 수탉에게 수 없이 할큄을 당한 끝에 놓치고 말았다.
 이러한 모습을 보고 배를 움켜쥔 채 깔깔대며 웃던 유리옥녀는 만신창이나 다름없는 그에게 열흘 간 해우소 청소를 명했다.
 다음날 또 암탉을 잡으라던 그녀는 이번엔 산더미 같은 말똥을 치우라는 명을 내렸다. 덕분에 전신은 상처투성이가 되었다.
 이래저래 잠 못 자는 밤이 많아지자 호득강은 오타신공을 운기한 채 젖은 의복을 말리는 나날이 계속되었다. 운기조식을 하면 피곤이 덜하고 졸음도 쏟아지지 않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그의 단전에는 진기가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다.
 
 ***
 
 “흐음! 그 동안 수고가 많았다. 오늘로써 네가 본 장에 온 지 이 년이 되었다. 그 동안 수고를 감안하여 내일부터는 과두문을 가르칠 터이니 정신 바짝 차리고 배워야 한다. 알겠느냐?”
 “저, 정말이십니까? 아이고,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열두 살이 된 호득강은 수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를 바라보는 빙선서생의 얼굴에는 의미심장한 미소가 어려있었다.
 “분명히 말하지만 한 번 이상 같은 말을 반복하지 않을 것이니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할 것이다.”
 “예! 알겠습니다.”
 “좋다. 이만 가보거라.”
 “예!”
 총총히 물러서는 빙선서생의 뒤에다 대고 연신 절을 하는 모습을 본 유리옥녀는 낼름 혀를 내밀었다.
 그런 그녀의 얼굴에는 네까짓 것이 배우기는 무엇을 배우겠느냐는 듯한 조소가 어려 있었다.
 다음날부터 호득강은 빙선서생에게서 과두문을 배울 수 있었다. 하지만 어려움이 많았다.
 현재 사용되는 문자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상고시대 문자를 배우려니 막히는 부분이 무척이나 많았던 것이다.
 게다가 그는 자신의 말처럼 한 번 한 말은 절대 반복하지 않았다. 당연히 수박 겉 핥기 식이 되어버려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지식들만 뒤죽박죽으로 섞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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