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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마혈세전 1

2017.12.21 조회 952 추천 6


 색마혈세전 1권
 제1장 탄생
 
 
 영락 십 년, 연왕(燕王) 주체(朱逮)가 보위를 찬탈(簒奪)한 지 벌써 십 년의 세월이 지났는지라 모든 정변이 정리되어 황궁도 중원무림도 평온함을 되찾은 지 이미 오래였다.
 중원의 서쪽 사천성(四川省) 중심에 위치한 성도(成都)는 북경에서 서남향으로 약 사천 리나 떨어진 도읍이지만 쾌적한 날씨와 비옥한 토양으로 곡식과 채소가 풍부하게 생산되는 산지이다.
 따가울 정도의 일광(日光) 또한 풍부한 곳인지라 매운맛이 나는 사천요리는 종류도 많았고, 맛 또한 기가 막혀 일품으로 소문나 있었다.
 관에서조차 이곳으로 부임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뇌물을 바쳐야 한다는 소문이 떠돌 정도로 살기가 좋은 곳이었다. 하여 이곳 양민들은 고향을 등지는 법이 없었다.
 성도는 유비가 천하를 셋으로 나누자는 무후(武侯) 제갈공명(諸葛孔明)의 뜻을 받아들여 촉(蜀)을 세우고 조조와 손권에 대항했던 곳이다. 하여 이곳에 삼국시대 촉나라 재상이었던 제갈공명의 사당이었는데, 그의 사후 충무후(忠武侯)란 시호를 받았기에 무후사라 불렀다.
 무후사는 남북조시대에 세워졌으며 명조초(明朝初) 유비의 사당인 소열묘(昭烈廟)와 병합되었지만, 그의 명성이 주군인 유비를 능가하였기에 계속 무후사라는 이름을 지킬 수 있었다.
 무후사는 유비전(劉備殿), 제갈량전(諸葛亮殿), 문신무장랑(文臣武將廊) 등의 주요 건축물로 이루어졌으며, 역사적 인물의 망상(望像:찰흙동상), 비각(碑閣), 종(鐘), 북(鼓)등이 있어 지난 세월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었다.
 경내(境內)에는 유비의 봉분인 혜능(惠陵)이 있는데, 높이가 사 장이고 둘레는 무려 육십 장이나 되었다.
 문신무장랑에는 유비의 부하였던 조자룡과 마초, 황충, 등지, 등윤 등의 망상이 실물 크기와 흡사하게 만들어져 있었고, 유비전에는 유비상 좌측에 제갈량의 유명한 출사표가 새겨져 있었다.
 하지만 향화를 올리는 방문객은 거의 대부분 줄을 서서 제갈량전에 들었다. 그래서 이곳은 향화가 끊이지 않는 곳으로 유명하였다.
 
 무후사에는 오늘 따라 방문객이 많아 기다란 줄을 서며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건만, 수십여 명의 삼엄한 호위를 받으며 비단화복(緋緞華服) 가슴 복판에 금사(金絲)로 당(唐)자가 수놓아져 있는 인물이 들어서자 모두들 비켜섰다.
 육 척 신장에 당당한 체격을 한 그는 날카로운 광망(光芒)을 발하는 안광을 드러내고 있었고, 툭 불거져 나온 태양혈(太陽穴)은 그가 높은 무공을 지녔음을 짐작하게 하였다.
 범상치 않은 기도를 발하는 이십대 중반의 사내의 손에는 굵은 향이 들려져 있었다. 그가 천천히 제갈량전으로 다가서자 줄지어 서있던 방문객들은 서둘러 허리를 숙이며 비켜났다.
 그는 사천성에서는 현령보다 더 위세가 당당한 사천당가의 가주였고, 폭발물을 만드는데 신의 손을 지녔다고 해서 비폭장신(飛爆匠神)이란 외호로 불리는 당무천(唐武天)이었다.
 사실 유비전에 가서 향화를 올리고 싶었지만, 세가의 가주나 문주가 나라를 세운 유비전에 향화를 올린다면 반역죄로 처단을 하였기에 제갈량전을 찾은 것이다.
 그는 약관의 나이에 자신보다 한 살 더 많은 한우림(瀚宇林)과 혼례를 올렸지만 오 년만에 부인이 회임(懷妊)을 하여 만삭(滿朔)이 되었기에 순산(順産)과 태어날 아이가 영특하길 기원하기 위해 무후사를 찾았던 것이다.
 향화를 올리고 향이 타기를 기다리던 당무천은 지난 과거를 회상하며 미소를 지었다.
 
 사천성에서 가장 큰 화원인 만화원(萬花園)의 원주 한우림은 어려서부터 화초를 정성스레 가꾸는 것으로 이름나 있었다.
 그녀의 나이 십팔 세가 되던 해 홀로 지내던 부친이 이승을 떠나자 만화원주직을 승계하게 되었다. 그 즈음 그녀의 화초 재배술은 중원천지에서 가장 뛰어난 경지에 달하고 있었다.
 방년의 나이가 된 그녀는 화용월태(花容月態) 침어낙안(侵魚落雁)이란 표현이 부족할 정도의 미녀로 소문나 있었다.
 그녀는 한 뿌리에서 나온 화초에 서로 다른 꽃을 피워냈기에 이화접수(異花接手)란 외호로 불렸다. 언젠가 대명의 황제인 영락제가 사람을 보내 그녀의 화초를 구입해 갔다는 소문이 퍼지며 더욱 유명해졌다.
 
 당무천의 부친인 수라추혼(修羅追魂) 당천화(唐天華)는 화탄(火彈) 제조에 관심이 많았다. 그러던 그는 새로운 화탄 제조실험을 하다 실수로 화탄을 떨어트리는 불의의 사고로 생을 마감했다. 원숭이가 나무에서 떨어진 셈이다.
 부친상을 당한 당무천은 조화(弔花)를 구하기 위해 만화원으로 수하를 보냈으나 빈손으로 돌아오자 분개하여 만화원을 찾았다.
 당무천이 씩씩거리며 만화원으로 들어설 때 허름하면서도 수수한 의복을 걸치고 머리에 낡은 두건을 두른 여인이 호미를 들고 화초를 가꾸고 있었다.
 그녀가 바로 만화원주인 한우림이었다.
 “낭자가 만화원주요?”
 당무천이 거친 음성으로 말하자 찾아 온 이유를 짐작하였는지 여인은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자신의 신분과 꽃을 보내지 않은 이유를 밝혔다.
 “그래요! 소녀가 바로 만화원주 한우림이에요. 공자께서 오신 이유는 충분히 짐작해요. 허나······.”
 여인의 음성은 은쟁반에 옥구슬 구르는 듯하였고 당당하였다.
 화초는 꽃이 피는 시기가 정해져 있는데 가을에 피는 국화를 당장 내놓으라는 억지에 최소한 하루만 기다리라고 하였더니 화를 내며 그냥 돌아가 버렸다는 말이었다.
 그녀의 말에 당무천은 아무런 이의도 제기할 수 없었다. 국화가 피기에는 너무도 이른 봄이었기에 그는 말없이 당가로 돌아가야만 하였다.
 다음날 아침 당가에는 활짝 핀 국화가 수천 송이나 배달되었고, 덕분에 당무천은 분묘를 국화로 도배하다시피 치장하여 효자란 칭송을 들을 수 있었다.
 무사히 부친상을 치르고 안정을 되찾아갈 즈음 그는 고마움을 표하기 위해 다시 만화원을 찾았다. 이는 꽃을 보내준 것보다는 전에 보았던 그녀의 미모에 이끌려 찾은 것이었다.
 수하들을 거느리고 만화원을 찾았을 때 한우림은 그들이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들의 발에 짓밟힐 화초가 염려된다는 이유였다.
 홀로 안내된 당무천은 내실에서 이화접수 한우림이 손수 장만한 차를 마실 수 있었다. 차를 따르는 그녀의 섬섬옥수(纖纖玉手)는 곱고 우아하였으며, 부드러워 보였다. 또한 소매를 걷고 차를 따르고 있었기에 희디흰 팔목이 드러났는데 매끄럽고 탄력이 넘쳐 보였다.
 쪼르륵-!
 당무천은 두건을 벗고 마주앉은 한우림의 경국지색(傾國之色)의 용모를 보며 자신이 왜 이곳에 왔는지 모를 지경이 되었다.
 ‘아! 세, 세상에··· 정말 아름답구나··· 저런 여인과 평생을 함께 할 수 있다면······.‘
 머리카락은 삼단처럼 검었고, 머리숱이 많고 둔부에 닿을 정도로 길었으며 은은한 광택과 향기가 흘렀다. 감히 만져볼 수는 없었지만 그녀의 머릿결은 젖은 비단처럼 부드러울 것 같았다.
 넋을 잃고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뜨거운 시선을 감당하기 어려워 그녀가 고개를 숙이며 옥용을 붉히자 더욱 아름답게 보였다. 한 동안 말없이 앉아 있던 당무천의 입에서 침묵을 깨며 느닷없는 말이 튀어 나왔다.
 “소저! 소, 소생과 혼례(婚禮)를 올려주시겠소?”
 “예에······?”
 그녀가 놀라는 표정을 짓자 당무천은 느닷없는 자신의 말에 스스로 실책을 깨닫고 사과했다.
 “어엇? 소, 소저······! 고마움을 표하러 왔다가 소저가 너무 아름다워 소생도 모르게··· 죄송하오!”
 “호호호호······!”
 사과인지 칭찬인지 모를 말을 더듬거리며 말하는 당무천을 바라보던 한우림이 웃음을 참지 못하고 교소를 터트리자 그는 더욱 당황하여 몸둘 바를 몰라했다.
 둘 사이에 잠시 적막이 흘렀고, 너무도 당혹스러워 고개를 숙이고 있던 둘이 거의 동시에 고개를 드는 순간 시선이 마주치자 마치 최면에라도 걸린 듯 그대로 정지되었다.
 그녀 역시 사천 사람인 탓에 그의 사람 됨됨이를 익히 알고 있었는지라 호감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느닷없는 청혼(請婚)의 말에 그 역시 자신처럼 당황하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여 먼저 입을 열었다.
 “저, 저··· 소녀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세요. 일생이 걸린 중대사를 쉽게 결정할 수 없으니······.”
 그날 당무천은 원하는 답을 얻지 못하고 어깨를 늘어트린 채 돌아갔는데 눈만 감으면 아름다운 그녀 생각이 간절하여 틈만 나면 만화원을 찾았고, 결국 그녀와 새록새록 정을 쌓는 사이로 발전하게 되었다.
 반년이 지난 후 만화원을 찾은 당무천은 드디어 혼례를 승낙하는 답을 듣고는 서둘러 돌아가 마치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혼례준비를 하여 그녀를 아내로 맞이했다.
 
 그가 무후사를 나서 당가로 돌아가고 있을 때 높은 담 너머로 산모(産母)가 출산을 하며 지르는 신음(呻吟)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가모의 침실에선 당무천을 애타게 부르는 한우림이 마지막 산고의 고통에 못 이겨 신음을 토하고 있었다. 침실 안은 금은보화로 온갖 치장을 하여 화려하기 이를 데 없어 웬만한 부호(富豪)들의 침실도 비교하지 못할 정도였다.
 신음은 극에 달해 있었고 이제 출산은 마지막 단계에 접어들고 있는 모양이었다.
 “으으으으윽! 으으으으으윽······!”
 “마님······!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힘을 주세요!”
 시비들이 힘을 더 주라며 격려하는 소리가 들리고 약 일 각쯤 지나자 아이가 세상 밖으로 나왔는지 고고성이 울려 퍼졌다.
 “응애······! 응애······!”
 힘차게 세상을 향해 고고성(呱呱聲)을 터뜨리는 아이를 시녀들이 따뜻한 물을 적신 건포로 조심조심 닦아주자 기분이 좋은지 잠시 후 울음을 멈추었다.
 “매월(梅月)아! 남아냐? 여아냐?”
 산모가 힘없는 목소리로 물어보자 매월이라는 시녀가 크게 웃으며 답했다.
 “호호호······! 가모님! 수고하셨어요. 장군감을 나으셨으니 경하드려요.”
 희소식을 숨죽이고 기다리던 식솔들에게 주모께서 아들을 순산하셨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가주의 모친인 귀면파파(鬼面婆婆) 반추하(潘秋河)가 맨발로 뛰어들며 덩실덩실 춤을 췄다.
 젊었을 때 천상옥녀(天上玉女)라 불릴 정도로 미모가 출중했던 반추하는 부군인 당천화가 실수로 광천뢰를 떨어트렸을 때 근처에 있다가 전신에 생명에 지장을 줄 정도의 화상을 입었었다.
 간신히 목숨은 건졌지만 상처가 아물며 피부가 오그라들어 끔찍하게 보이는 안면을 지니고 있어 듣기에도 거북한 귀면파파란 별호로 불렸다.
 “네 이름은 당혁린(唐奕麟)이다. 조부께서 살아 생전에 지어 놓은 이름이지만 네게 딱 맞는 이름이구나! 흘흘흘······!”
 한참 동안 손자를 안고 춤을 추던 귀면파파가 자애스런 눈빛으로 말했다.
 “아가야! 정말 수고했구나······! 이렇게 잘 생긴 아들을 낳을 거면서 왜 그토록 시어미의 간장을 녹였누······? 정말 고맙구나······!”
 고부간에 다정스레 대화를 나누고 있는 중에도 외원(外院)의 마구간 옆, 하인들이 살고 있는 작고 허름한 방에선 신음성이 끊이지 않고 새어 나오고 있었다.
 
 위세가 하늘을 찌를 듯한 당가에 이런 곳도 있을 가 싶을 정도로 허름한 방에는 삼십 대 중반으로 보이는 구레나룻을 기른 건장한 체격을 가진 사내가 흙바닥에 거적을 깔고 누워 있는 여인의 손을 잡고 어쩔 줄 몰라하고 있었다.
 풍성한 몸매의 여인은 태산만큼 부풀어 오른 배를 움켜쥐고 신음을 토하고 있었다.
 “아아악······! 여보! 너무 고통스러워요.”
 같은 말을 수없이 반복하는 여인은 비 오듯 땀을 흘려 의복이 축축하게 젖어 있었고, 몹시 지친 듯 보였다. 그러나 사내의 손을 잡은 여인의 손아귀에는 일반 여인의 힘이라고는 믿지 못할 엄청난 힘이 들어가 있었다.
 사내는 산고를 겪는 아내가 지금 어떠한 고통 속에 있는지 먼저 자식을 본 다른 사람들에게 들어 잘 알고 있었다.
 “여보! 힘내구려. 이제 조금만 더 힘을 주면······.”
 “아아악······!”
 사내는 말하는 도중 갑자기 아내가 비명을 지르며 눈을 뒤집고 흰자위만 보이자 너무 놀라 펄쩍 뛰었다.
 “여, 여보······!”
 화들짝 놀란 사내가 다급하게 아내를 부를 때 양수가 터져 나왔는지 거적을 흠뻑 적셨다.
 “아아아아악······!”
 만 하루 동안 산고를 지켜보던 사내도 이미 지칠 대로 지쳐 있었으나, 아이의 머리가 보이기 시작하자 어디서 힘이 솟는지 아내를 격려했다.
 “여보! 힘줘······! 아이의 머리가 보여. 그러니 더 힘을 주라고······.”
 “으응······! 으응······!”
 사내의 격려를 받은 여인은 혼신의 기력을 모아 힘을 주기 시작했고, 아이는 모친이 힘들어한다는 것을 알기라도 하는지 너무도 쉽게 빠져 나왔다.
 “어엇! 여, 여보, 나왔어! 나왔다고······.”
 사내는 가쁨에 겨워 말을 잇지 모하고 있었다. 헌데 아이가 고고성을 터트리지 못하자 깜짝 놀라 살펴보니 아이의 목에 탯줄을 감겨 있었는데, 자궁을 빠져 나오며 질식했는지 전신이 새파랗게 보였다.
 황급히 사내가 목을 감은 탯줄을 풀고 아이의 입을 벌리자, 세상의 기운을 모두 흡입하려는지 가슴이 부풀도록 숨을 들이마시고 마침내 우렁차게 울기 시작했다.
 “응애······! 응애······!”
 아이가 울기 시작하자 그제야 사타구니를 바라본 사내의 입이 함지박만큼 벌어졌다.
 “으하하하······! 아들이구나! 아들······! 하하하······!”
 여인은 너무도 기뻐하는 사내를 바라보며 미소만 지을 뿐 말할 기력도 없는 듯 보였다. 사내가 탯줄을 끊고 아내의 산후조리를 하는 동안에도 아이는 우렁차게 울고 있었다.
 전신이 새파랗게 변해 있었던 아이의 피부는 붉은 홍조를 드리우고 있었는데, 가슴부위에 있던 도화(桃花)모양의 붉은 점이 슬며시 사라졌다.
 
 멀리 자신의 집에서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오자 비폭장신 당무천은 가마를 메고 있는 수하들을 다그쳤다.
 “출산한 모양이다. 빨리 가자!”
 가마를 메고 있는 수하들의 발놀림이 빨라져 분진을 날리며 쏜살처럼 가고 있었다.
 아이의 울음소리가 얼마나 우렁찬지 정문 밖까지 들려오자 당무천은 몹시 흡족하게 생각하였다. 하지만 그 울음소리의 주인은 전삼(全三)과 홍아영(紅娥瑛)이라는 하인의 아이였다.
 정문을 들어서고 나서야 아이의 울음소리가 두 군데서 들려온다는 것을 알아차린 비폭장신 당무천은 미소를 지었다.
 ‘으음······! 맞아, 전삼도 오늘내일한다는 소리를 듣고 내가 착각을 했군. 가문에 경사가 겹쳤구나! 내 자식이 귀하다면 그들에게도 몹시 귀한 자식이겠지······?’
 그가 미소를 지은 채 서둘러 내원으로 통하는 문을 넘어서자 귀면파파가 금방 출생한 손자를 비단보로 얼싸안고 그들 반겼다.
 “가주! 대를 이을 건강한 아들을 보았소. 이 어미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구려. 지하에 묻히신 부친도 가주가 대를 이은 것을 알면 기뻐할게요.”
 귀면파파가 아이를 건네주자 당무천이 조심스레 받아들었는데, 아이는 금방 울던 것을 멈추고 아비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시키는 듯 하였다.
 “하하하······! 너를 세상사람 모두가 부러워 할 정도로 잘 키워주겠다. 헌데 네 이름을 뭐라 지을까?”
 누워 있던 한우림이 아픈 배를 잡고 피식 웃었다.
 “호호······! 가주, 그렇게 기뻐하는 모습을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 것 같네요. 그런데 아이를 낳은 소첩에겐 한마디 말도 없다니 섭섭하네요. 아이의 이름은 어머님께서 혁린이라 지어주셨어요.”
 당무천이 누워 있는 한우림에게 미소를 짓고 다가가 이마의 땀을 닦아주며 말했다.
 “부인 미안하오! 너무 기뻐 잠시 부인을 잊고 있었구려. 고맙소! 부인이 너무 사랑스럽구려······.”
 미소짓던 한우림이 정색을 하며 입을 열었다.
 “가주! 어머님께서 계신데 말을 가려서 하세요.”
 귀면파파가 그녀의 땀에 젖은 섬섬옥수를 꼭 쥐며 말했다.
 “아가야! 괜찮다. 오늘 같이 기쁜 날 가주가 그리하는 건 괜찮으니 다른데 신경 쓰지 말고 산후조리나 잘하거라.”
 귀면파파가 당무천을 바라보며 물었다.
 “가주! 부친께선 가주가 대를 이을 자식을 보면 당혁린이라고 짓겠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오. 물론 자식의 이름을 부모가 지어주어야겠지만 이미 고인이 되신 부친을 생각하여 그리 부르도록 하오.”
 당무천은 무후사에서 돌아오며 수없이 많은 이름을 작명하고 어떤 것이 좋을까 행복한 고민을 했었는데, 선친께서 지으셨다는 이름도 자신의 마음에 들었기에 아이를 번쩍 들며 말했다.
 “하하하······! 당혁린! 앞으로 사천당가를 번성시킬 네 이름이 당혁린이다. 하하하······!”
 그날 당가에서는 아이를 낳은 가모의 산후조리를 위해 정숙(靜淑)을 유지하라는 가주의 엄명이 내려졌다. 그리고 무슨 일인지 당무천이 마구간지기를 불러 전삼은 지체 없이 발에 불이 나도록 뛰어왔다.
 “하하하······! 전삼! 자네도 자식을 보았다니 축하하네. 그런데 아이의 이름은 지었는가?”
 가주의 축하를 받는 전삼은 황송해서 쩔쩔맸다.
 “가주! 소주께서 태어나셨음을 경하(敬賀)드리옵니다. 소인은 글을 몰라 아직 이름을 짓지 못했습니다요.”
 당무천은 빙그레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 린아와 한날에 태어난 것은 전생에 깊은 인연이 있는 것 같으니 특별히 아이의 이름을 지어주겠네. 청명한 가을에 태어났으니 소추(昭秋)라 지으면 어떻겠나?”
 전삼은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감사합니다요. 가주! 그대로 따르겠습니다요. 정말 감사합니다요.”
 당무천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총관을 불렀다.
 “총관!”
 가주의 조카벌인 총관 추혼철갑(追魂鐵匣) 당천수(唐天手)가 나타나 부복을 하였다.
 “가주! 찾으셨습니까?”
 당무천이 전삼을 가리키며 말했다.
 “전삼의 처가 산후조리를 하는데 모자람이 없도록 하게. 그리고 한달 간 푹 쉬게 하게나. 물론 전삼도 쉬게 하고··· 마구간 치우는 일을 당분간 다른 하인에게 시키도록 하게.”
 “존명!”
 추혼철갑은 전삼과 함께 나갔다.
 전삼은 머리가 좀 둔하기는 했으나 근력이 좋았고, 우직한 성품에 게으름 피는 일이 없어 온갖 궂은일을 거의 도맡아하였기에 당가에서 그를 싫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종복의 몸이라 혼례를 올릴 나이가 한참이나 지났지만 아무도 그에게 시집을 오려는 사람이 없어 노총각으로 나이를 먹어갔었다. 이를 측은히 생각한 총관 당천수가 거금을 들여 홍루(紅樓)에서 몸을 팔던 기녀 홍아영을 사왔다.
 그렇게 하여 전삼과 맺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녀는 처음엔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점차 그의 성실함과 근면함이 마음에 들어 차츰 그를 좋아하게 되었다. 이제 홍아영은 전삼과 더불어 당가에서 제일 부지런한 종복(從僕)이 되어 있었다.
 전삼은 총관의 덕택에 장가도 들고 아이까지 낳게 되었다며 감사의 말을 올렸고, 가주께서 친히 이름을 지어주셨다며 침까지 튀기며 자랑했다.
 당가의 총관인 당천수는 항상 좌수에 철로 만든 장갑(掌匣)을 끼고 있었는데, 독사(毒沙)와 독침(毒針)을 뿌리는 그의 독술은 경지에 올라 추혼철갑이라 불렸다.
 그는 광에 들러 전삼에게 작은 주호(酒壺:술병)를 내주었다.
 “이보게 전삼! 오늘은 기쁜 날이니 술이나 한잔 마시게. 가주께서 명을 내리셨으니 내일부터 한 달간은 쉬어도 좋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사라지는 전삼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그의 얼굴에는 흐뭇한 미소가 번졌다.
 다음날 아침 내원에서 시중을 드는 시비들이 전삼 내외가 기거하는 방으로 조반을 차려 가지고 왔는데, 갖가지 요리와 전복과 동자삼을 넣어 만든 죽을 가지고 왔다.
 홍아영은 삼을 넣어 약간 쌉싸롬한 맛이 났지만 배가 부를 때까지 죽을 비웠다. 게눈 감추듯 죽을 먹던 홍아영이 고개를 들고 그제야 생각이 났는지 전삼에게 말했다.
 “여보! 이렇게 맛있는 죽은 처음 먹어봐요. 그런데 음식이 너무 많아 남으니 당신도 좀 드세요.”
 전삼은 홍아영이 맛있게 죽 그릇을 비우는 것을 보며 답했다.
 “후후······! 나는 당신이 맛있게 먹는 것만 봐도 배가 부르오. 그리고 이런 기름진 음식에 길들여진다면 나중에 골치 아픈 일이 벌어지니 먹지 않겠소. 그러니 어서 당신이나 많이 드시오.”
 홍아영이 조반을 마치고 조금 누워 있으려니 아이가 잠에서 깨어 울음을 터트렸고, 젖을 물려주자 작은 입을 오물거리며 열심히 빨아대었다.
 아이는 배불리 먹었는지 슬며시 눈을 감더니 쌕쌕거리며 잠이 들었고, 이런 모습을 바라보던 전삼이 몸을 일으켰다.
 “여보! 가주께서 우리를 이렇게 아껴주시는데 놀고 지낼 수는 없지 않겠소······? 힘들더라도 좀더 열심히 일을 해서 은혜를 갚아야 하니 무슨 일이 생기면 부르시오.”
 홍아영은 밖으로 나가는 전삼이 평생 일만하고 마음 편히 쉰 적이 단 한번도 없기에 말리고 싶었으나, 말린다 하더라도 소용없음을 알고 미소만 짓고 있었다.
 
 ***
 
 성도 저잣거리 맨 끝엔 보름마다 우시장(牛市場)이 섰다. 소는 농사에 꼭 필요하기에 많은 소들이 거래되었다.
 관도에는 수많은 인파로 붐비고 있었는데 어디선가 가느다란 초적(草笛) 소리가 들려왔다.
 삐리리-!
 사십 대 후반으로 보이는 텁석부리 장한(壯漢)의 손엔 고삐가 쥐어져 있었고, 황소의 등에 올라탄 소년이 부는 초적(草笛)에선 듣기에도 매우 상쾌한 음률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소년은 체격이 커 십오 세 정도로 보였는데, 치기(稚氣) 어린 눈동자는 소년의 나이가 더 어리다는 것을 짐작하게 하였다.
 피부색은 약간 검은 듯 했으나 귀밑까지 뻗친 짙은 검미가 마치 붓으로 그린 듯 시원하게 보였고, 까만 눈동자의 안광은 깊은 심연의 깊이를 느끼게 하였으며, 오똑하게 솟은 콧날과 붉은 입술은 소년의 인상을 더욱 돋보이게 하였다.
 소년이 입에서 초적을 떼고 장한에게 물었다.
 “아버지! 총관께서 이놈을 은자 이십 냥에 팔라고 했으니 더 좋은 값으로 팔아 어머니 선물을 사면 어떻겠어요?”
 장한은 소년에게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소추야! 아비는 평생 정직하게 살았단다. 만일 더 좋은 값을 받는다면 당연히 총관께 드려야지 맘대로 사용하면 되겠느냐?”
 소년은 사천당가의 하인 전삼의 아들 전소추였고, 십이 세의 나이라곤 도저히 믿기지 않을 만큼 체구가 당당했다.
 전소추는 부친의 말에 빙그레 미소지으며 입을 열었다.
 “헤헤헤······! 아버지! 총관께서 스무 냥을 넘게 받으면 제 맘대로 써도 좋다는 허락을 하셨어요. 그러니 이번만큼은 소를 팔 때 제가 나서서 팔도록 해주세요.”
 전삼은 전소추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오늘만 눈감아주겠다. 하지만 이런 일이 반복되면 눈 밖에 날것이니 다음부터는 총관께 무리한 요구를 하지 말거라.”
 “헤헤! 알았어요. 아버지!”
 전소추는 다시 초적을 입에 물고 흥겨운 가락을 연주하며 우시장으로 향했다. 거기는 이미 입추의 여지도 없이 인파로 북적댔기에 구석진 곳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우시장엔 황소뿐 아니라 물소도 거래되었다. 하지만 물소보다는 육질이 좋아 황소의 가격이 높았다. 보통 스무 냥 안팎에 거래가 성사되었는데, 전소추가 타고 온 황소는 뿔도 가지런하게 자라났고, 다른 소에 비해 무게가 더 나가는 편이었다.
 거간꾼이 나서서 매매를 성사시키고 일 할을 떼어 갖는 것이 통례였지만, 전소추는 남에게 일 할을 떼어 주고 싶지 않아 우시장이 떠나가도록 소리를 질렀다.
 “황소 사세요. 털에 윤기가 반지르르한 이 황소를 사세요.”
 어린 소년이 팔러왔다고 생각했는지 싸게 사려는 사람들이 황소를 보며 투덜거렸다.
 “이런! 덩치만 컸지 별 쓸모가 없겠군.”
 전소추는 투덜거리는 사내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아저씨는 농부가 아닌 것이 확실해요. 이 소는 발굽도 튼튼하고 발목이 굵어 힘이 무척 강해요. 여기에 계신 분들 모두 잘 알고 계실 텐데 아저씨만 모르시는 것 같군요.”
 트집을 잡아 소를 싸게 구입하려다가 어린 소년에게 핀잔을 받자 사내는 슬그머니 사라졌다.
 전소추는 소의 체형과 뿔, 귀, 꼬리부분에 흠잡을 곳이 없다고 설명했고, 특히 힘이 세어 밭을 일구는데 최고라고 말했다. 구입하려는 사람들은 대부분 농민이었기에 이견이 있을 수 없었다.
 한 농민이 소의 등을 툭툭 쳐보며 말했다.
 “스물두 냥을 줄 테니 내게 팔아라······.”
 전소추는 그 사람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아이참! 만일 아저씨 집에 보물이 있는데 헐값에 팔라고 하면 파시겠어요?”
 완곡한 거절의 뜻이었다. 다른 농민이 나서서 스물넉 냥을 불렀지만 전소추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한 냥씩 대금이 올랐지만 그때마다 전소추는 고개를 저었고, 결국 스물여덟 냥을 부른 사람에게 고삐를 넘겨주었다.
 “아저씨! 운이 무척 좋으세요. 이 같이 튼튼한 소는 성도에 몇 마리 없을 거예요.”
 전소추는 은자를 건네 받아 전삼에게 주며 말했다.
 “아버지! 이제 저쪽 저잣거리로 가서 선물을 사야겠어요.”
 전소추는 전삼의 손을 잡고 사람들 틈으로 빠져나가 장신구를 파는 곳으로 향했다.
 전삼은 스물넉 냥만 받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스물여덟 냥을 받자 입이 벌어졌다.
 “하하하! 추아가 생각보다 좋은 값에 소를 넘겼구나. 이 아비는 목이 컬컬하니 곡주(穀酒)나 한 잔 해야겠다.”
 전삼은 전소추에게 은자 세 냥을 쥐어주고는 객잔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그러자 전소추는 장신구를 파는 곳으로 달려가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며 구경을 했다.
 이것저것 물건값을 물어본 후 철비녀(鐵婢女)와 동그란 동경(銅鏡), 그리고 빤짝거리는 작은 노리개 한 쌍을 샀다.
 모친의 발가락이 보일 정도로 닳은 목혜(木鞋)를 보고 마음이 아팠기에 부드러운 혁피화(革皮靴)도 한 켤레 구입했다.
 대나무로 만든 기다란 담뱃대와 반질반질 윤이 나는 바둑돌 그리고 바둑판을 구입하니 구리동전 삼 문밖에 남지 않았다.
 여기저기 먹거리가 많아 먹고 싶었지만 삼 문으론 만두 두 개밖에 살 수 없었다. 그것을 순식간에 먹어치운 전소추는 부친이 술을 마시고 있는 객잔 앞에서 나오기를 기다렸다.
 미시(未時) 끝 무렵이라 배에선 꼬르륵 소리가 들렸지만, 저잣거리에서 산 물건들을 만져보니 시장기가 사라졌다.
 전삼이 모처럼 저잣거리에 나와 곡주를 마음껏 마셨는지라 몹시 취한 상태로 객잔을 나오자 전소추는 얼른 부축하였다.
 부친의 체구가 장대하여 힘에 부쳤지만, 선물꾸러미를 든 전소추는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당가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전삼이 전소추의 부축을 뿌리치고 갈지(之)자로 흐느적거리며 혀 꼬부라진 음성으로 말했다.
 “좋구나, 좋아······! 야, 이놈아! 아비가 좀 취했기로서니 네게 부축을 받을 정도는 아니다. 넌 당가를 위해 목숨을 버릴 각오로 열심히 일해야한다. 그래야 가주께 은혜를 갚는 것이다. 알았지?”
 “알았어요. 어서 가기나 해요.”
 
 전소추는 사천당가의 장자(長子)인 당혁린과 한날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가주와 총관을 비롯한 대부분의 식솔들에게 종복으로서는 과분한 대우를 받아 항상 명랑하고 쾌활하였다.
 그리고 가주의 특별 배려로 당혁린과 같이 수학(修學)하였기에 마치 친형제와 같은 우애(友愛)를 쌓아왔다.
 전소추는 글을 읽히는 것을 무척 좋아하였기에 당혁린의 거처 서가(書架)에 있던 사서삼경(四書三經)과 제자백가(諸者百家)등 일반 서책은 물론 적은 수량이었지만 불경(佛經)과 산해기서(山海奇書)와 같은 기이한 내용을 적은 서책도 접했었다.
 당가에서 종복에겐 무공을 전수하지 않았으나, 당혁린은 자신이 익힌 무공 중 일부를 남몰래 전소추에게 전수하곤 하였다.
 물론 내공심법 같은 것은 전수해주지 않았지만 암기술(暗器術)이나 용독술(用毒術), 해독술(解毒術) 등의 구결은 전소추의 뇌리 속에 깊이 각인(刻印)되어 있었다.
 전소추는 가끔 당가에서 멀리 떨어진 산 속에 들어가 연습을 하였고, 지금은 나는 새를 떨어트릴 정도로 암기술을 익혔다.
 비록 내공이 없는 상태에서 시전하는 것이었지만 작은 돌멩이만 있다면 너무 먼 거리의 표적이 아니라면 무엇이든 맞출 수 있는 경지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어린 전소추가 당가의 무공을 배우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였다.
 그런 전소추는 상전과 종복의 신분을 구분할 정도의 나이가 들자 당천빈을 대하기가 조심스러웠다. 하지만 당혁린은 전소추와 함께 지내는 시간이 즐거워 늘 그를 가까이 하려고 하였다.
 당혁린에겐 세 살 어린 당초혜(唐草慧)라는 누이가 있었는데, 전대(前代)를 통 털어 당가에 그와 같은 미모를 지닌 소녀는 없을 정도로 예쁜 소녀였다.
 남들이 없을 때에는 당초혜 또한 전소추를 오라버니라 부를 정도로 사이가 좋았기에 맛있는 것이 생기면 그에게 갖다주곤 하였다.
 
 부친과 함께 당가에 돌아온 전소추는 먼저 총관을 찾아 담뱃대를 전하고 모친에게 달려갔다.
 전삼은 술에 만취해 비틀거리며 소를 판 대금을 전했다.
 “딸꾹! 헤헤헤······! 총관께 감사드립니다요. 소추에게 은자 이십 냥만 가져오라고 하셨다기에 남는 돈으로 술을 한잔했습니다요.”
 당천수는 전삼이 준 대금이 의외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어? 대체 얼마에 팔았는데 이렇게 많이 가져왔나? 소추에게 마음대로 쓰라고 했거늘······.”
 전삼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총관! 소추녀석은 이 아비보다 똑똑해 소를 제값 이상을 받고 팔았습니다요. 딸꾹······! 제 어미에게 줄 선물을 샀으니 아마 그것으로 족할 겝니다.”
 당천수는 딸꾹질을 하는 것을 바라보며 나직이 혀를 찼다.
 “쯧쯧쯧······! 술을 많이 마셨군. 가서 쉬게나.”
 “헤헤······! 알겠습니다요.”
 돌아선 전삼이 비틀거리면서 흥얼흥얼 노래를 부르며 마구간으로 향하자 당천수는 담뱃대를 매만지며 미소지었다.
 ‘음······! 다음에도 소추를 딸려보내야겠군.’
 전삼이 마구간 옆의 침소에 돌아왔을 때 전소추가 모친의 발에 혁피화를 신겨주며 하는 말이 들려왔다.
 “어머니! 이것을 신으면 발이 아프지 않다고 하니 이제 목혜는 버리세요. 다음엔 더 좋은 걸 사드릴게요.”
 홍아영은 철비녀를 꽂고 동경에 얼굴을 비춰보며 웃었다.
 “호호호······! 이렇게 반짝거리는 동경에 내 얼굴을 비춰보는 것도 오랜만이구나. 동경만으로도 행복한데 게다가 철비녀와 부드러운 혁피화까지 선물하다니······! 고맙구나··· 이제 어미의 발이 아프지 않을 거야.”
 전삼이 방문을 열어제치며 들어와 벌렁 누우며 말했다.
 “여보! 소추가 사 가지고 온 것이 그리도 좋소······? 딸꾹! 이렇게 좋아할 줄 알았으면 술을 마시지 말고 당신에게 선물을 한 가지 더 해줄걸 그랬소. 딸꾹! 소추야! 내 것은 없냐······?”
 전소추는 전삼에게 이불을 덮어주며 답했다.
 “아버지는 은자 한 냥으로 술을 드셨잖아요. 힘드실 테니 쉬세요. 저는 잠깐 다녀올 곳이 있어요.”
 전삼은 취기에 못 이겨 금방 잠들었고, 코를 골았다.
 드르렁-! 드르렁-!
 홍아영이 나가보라고 손짓을 하자 전소추는 마구간을 나와 내원(內院)으로 달려갔다. 거기엔 커다란 연못이 있었는데 형형색색의 물고기들이 한가로이 노닐고 있었고, 중앙에 작은 가산(假山)도 있었다.
 가산은 폭이 좁은 운교(雲橋)로 연결되어 있었고 온갖 화초로 뒤덮여 있었다. 가산에 있는 정자에서 글을 읽던 당혁린은 전소추가 내원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 서책을 내려놓았다.
 “소추야! 여기야 여기······.”
 전소추가 교각을 건너 당혁린에게 다가서며 말했다.
 “소주! 소인이 저잣거리에 나갔다가 선물을 샀어요. 변변찮은 물건이지만 제 성의를 생각해서 받아주세요.”
 바둑돌과 바둑판을 내밀자 당혁린은 몹시 마음에 든다는 표정을 지었다.
 “소추야! 이곳은 아무도 없는데 어릴 때처럼 그냥 이름을 불러라. 네가 날 그렇게 대하니 거북하잖아······?”
 전소추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소주! 장차 가주가 되실 분에게 무례를 범할 수는 없어요. 사리분별 할 나이도 들었고, 어차피 종복의 신세를 벗어날 수 없으니 이제 하찮은 저를 친구로 대하시는 것은 그만 두세요.”
 전소추의 말을 듣던 당혁린이 언성을 높였다.
 “소추! 내가 언제 널 종복으로 대한 적이 있었어? 만일 네 신분 때문이라면 아버님께 말씀드려 종복의 신분을 면하게 해주겠어··· 한번만 더 소주란 칭호를 쓴다면 다시는 널 보지 않을 것이니 그리 알고 나를 전처럼 친구로 대해 줘. 알았지?”
 전소추가 입장이 난처하여 고개를 들지 못하자 당혁린은 자신이 너무 심하게 말을 한 것 같아 미안해하였다.
 둘 사이에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흐르는 동안 때마침 그곳을 지나던 당초혜가 운교를 건너왔다.
 “오라버니들!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 거예요?”
 당혁린과 전소추가 다소 어색한 분위기를 모면하려는 듯 미소를 짓자, 당초혜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전소추가 들고 있는 장신구를 바라보며 웃었다.
 “호호호······! 오라버니 손에 들려 있는 것은 여인들이나 쓰는 장신구잖아? 누구의 물건이지?”
 전소추가 장신구를 내밀며 머리를 긁적였다.
 “아씨 드리려고 소인이 샀어요.”
 장신구를 건네 받은 당초혜는 이리저리 살펴보며 기뻐했다.
 “우와······! 정말 예쁜데? 정말 날 줄려고 샀단 말이지······?”
 당초혜는 자신의 머리에 꽂혀 있는 오색영롱한 보석이 박혀 있는 장신구를 떼어내고 전소추가 선물로 준 것을 꽂으며 물었다.
 “오라버니! 나 예뻐? 호호··· 난 이담에 오라버니와 혼례를 올릴 거야. 그래도 괜찮지?”
 당혁린은 밝게 미소를 지은 당초혜를 바라보며 답했다.
 “그럼! 너만 좋다면 소추와 혼례를 올리는 것을 이 오라비는 반대하지 않을 거야.”
 당초혜는 얼굴을 붉히더니 뒷걸음질 쳐 운교를 건너며 말했다.
 “오라버니가 예쁜 것을 줬다고 어머님께 자랑할거야.”
 당초혜가 멀리 달려가는 것을 본 당혁린이 전소추를 직시했다.
 “소추! 우린 어렸을 때부터 벗으로 살아왔어. 네가 날 대하는 태도가 바뀐지도 벌써 사 년의 세월이 흘렀지··· 하지만 네가 어떻게 생각하든 나는 널 영원히 벗으로 대하겠다.”
 그의 말에 전소추는 콧날이 시큰해지고 눈물이 글썽여 그것을 감추려고 하늘을 올려보았다. 푸른 하늘에 떠가는 구름을 바라보던 전소추가 입을 열었다.
 “혁린! 네가 날 벗으로 대해주는 것을 고맙게 생각한다. 내가 만일 당가의 종복이 아니었다면 나도 마음 편히 널 벗으로 대할 수 있었을 거야. 훗훗······! 하지만 현실은 우리 사이를 갈라놓고 있고, 우린 이제 이 상황을 받아들여야 할 때가 지났다는 것을 잘 알고 있잖아? 휴우······! 나도 마음속으론 너와 영원히 벗으로 지내고 싶다. 하지만······.”
 당혁린은 전소추의 손을 마주 잡고 미소를 지었다.
 “알았다. 알았어······!”
 둘은 상대의 눈을 바라보며 무언의 대화를 나누는 듯 하였고, 그날 이후 전소추는 당혁린을 철저히 종복의 신분으로 대했다.
 하지만 당혁린은 전소추를 언제나 웃으며 반겼고, 가끔 그를 불러 엉성한 솜씨로 바둑을 두곤 했다.
 
 가주 당무천에겐 독심수라(毒心修羅) 당무룡(唐武龍)이란 배다른 동생이 있었다. 선대가주 당천화가 젊었을 때 동정호를 여행하다가 평소에 잘 마시지 않던 술을 접하고 대취하여 그곳을 구경나온 여인을 취했던 것이다.
 술김에 벌어진 일이었지만 책임감이 남달랐던 당천화는 여인의 부모에게 허락을 받아 그녀를 당가로 데려왔다.
 그녀는 박색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천상옥녀와 같이 뛰어난 미모를 지니지도 못했다. 그저 수수할 뿐 더도 덜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어쩌다 한번씩 갖는 잠자리에서 요부(妖婦)처럼 행동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아 나중엔 당천화가 스스로 자신을 찾게 만들었다. 일년 후 그녀가 남아(男兒)를 낳았는데, 그가 바로 당무룡이었다.
 그가 열 살 되던 해에 생모는 전염병에 걸려 목숨을 잃었고, 그때까지만 해도 형제의 우애도 깊고, 밝고 명랑하던 당무룡은 차츰 성격이 괴팍해져만 갔다. 부친이 자신보다 형을 더 총애(寵愛)한다는 강박관념이 그의 뇌리를 지배했기 때문이다.
 당무룡은 부친에게 사랑 받으려고 이를 물고 당가의 가전무공을 익혔고, 그의 용독술(用毒術)과 암기술(暗器術)은 이미 그때부터 당무천의 경지를 뛰어넘고 있었다.
 전 가주 수라추혼 당천화는 장자인 당무천보다 당무룡이 더 무공이 뛰어나다는 것을 알고 가주직을 누구에게 물려줄 것인가를 고민하였었다.
 당무천은 동생보다 용독술과 암기술이 뒤떨어졌으나 성품이 뛰어나 따르는 사람들이 많았고, 당무룡은 성격이 괴팍하여 그를 가까이 하려는 사람들이 적었기에 고민을 거듭했다.
 결국 사천당가를 위해서는 가주의 무공이 막강해야 했지만 장래를 위해 당무천을 차기(次期) 가주로 낙점 하였다.
 당천화가 당무천에게 가주직을 승계 시키려는 이유는 그가 당무룡에 비해 비록 무공은 약했지만, 폭탄제조에는 자신보다도 폭발력이 더 우수한 광천뢰를 만들어냈기 때문이었다.
 그런 당천화는 장자에게 가주직을 잇게 하겠다는 발표도 하기 전에 당무천이 만든 광천뢰와 자신이 만든 광천뢰를 비교하다가 실수로 폭발하는 바람에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그 당시 사천당가의 대부인 천상옥녀(天上玉女)는 붕대로 전신을 칭칭 감은 채 장로들과 상의하여 당무천을 가주로 결정했다.
 그 후 당무룡은 부친의 장례가 끝난 후 사천당가를 떠나 자취를 감췄다. 당시 많은 세인(世人)들은 그가 가주직을 형에게 전해준 것을 시기하여 떠났으니 언젠가 돌아와 당가를 접수할 것이 분명하다는 소문이 파다했었다.
 그런 당무룡이 얼마 전 어린 남매를 앞세우고 당가으로 돌아왔다. 그가 돌아왔다는 기별을 받은 당무천이 의사청(議事廳)에서 그들을 반갑게 맞이했다.
 “무룡아! 잘 돌아왔다. 네가 떠나 우형(愚兄)이 무척 섭섭했는데 돌아오니 마음이 든든하구나. 이 아이들이 조카냐?”
 당무룡은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가주! 소제가 어리석었습니다. 이제 당가를 위해 모든 것을 걸겠습니다. 이 아이들은 제 자식들입니다.”
 당무룡은 자신의 하의 춤에 몸을 숨기고 있던 자식들을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백부(伯父)께 인사 올리거라.”
 당무룡의 자식들은 당무천에게 쪼르르 다가가 대례를 올렸다.
 “백부님! 안녕하셨어요? 아버지께 말씀 많이 들었어요.”
 당무천이 아이들을 좌우 무릎에 앉히며 물었다.
 “너희들 이름이 뭐냐?”
 사내아이의 눈은 약간 위로 치켜 올라가 있었는데, 어린아이의 눈초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할 기이한 안광을 발하고 있었다.
 “저는 당혁기(唐奕麒)구요. 제 누이는 당빙옥(唐氷玉)이라고 해요. 그런데 여기서 살아도 돼요? 그 동안 산서성(山西省)의 태원현(太原縣)에서 살았는데 어머니께서 갑자기 돌아가셨어요.”
 당무천은 몹시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조카들을 끌어안았다.
 “그럼! 되고 말고······! 너희들도 분명 당가의 후손이니 이곳에서 살도록 하렴.”
 당무천의 명으로 그들이 머물 전각을 새로 짓는 동안 당혁기는 당혁린과, 당빙옥은 당초혜와 같이 생활하였다.
 당혁기는 부친 당무룡에게 무공을 배워 무공만큼은 나이가 어리지만 이미 당혁린의 경지를 뛰어넘고 있었고, 당빙옥은 생긴 것은 깜찍했지만 하는 짓은 매우 잔인하였다.
 독술을 연마한다는 핑계로 토끼나 오리와 같은 작은 짐승을 일부러 중독 시킨 후 죽는 모습을 관찰하곤 하였던 것이다.
 당초혜는 그녀가 하는 짓을 보고 매우 진저리를 치며 하루라도 빨리 전각이 지어지길 원했다.
 당혁기는 당혁린에게 형이라 호칭을 하였지만 자신보다 무공이 약한 것을 알자 약간 깔보는 듯한 태도를 취하였다. 이는 당혁린이 무공에 정진하는데 있어서 좋은 자극이 되었다.
 굴러온 돌에 채일 수 없었던 당혁린은 부친과 호법들을 졸라 무공연마에 매달렸던 것이다.
 당무천은 당혁린이 무공을 제대로 전수 받기를 원하자 식솔을 풀어 인형설삼(人形雪蔘)을 힘들게 구해 복용한 후 가주의 침실을 통해야 들어설 수 있는 원형으로 만든 석실 중앙에 당혁린을 정좌시키고 장로들이 그 주위에 빙 둘러앉게 하였다.
 장로들은 흔쾌히 돌아가며 자신들의 공력을 당혁린에게 아낌없이 나누어주어 그가 인형설삼의 약효를 완전히 흡수하게 하였다. 덕분에 당혁린은 생사현관(生死玄關)이 타통되어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무려 이 갑자나 되는 공력을 지니게 되었다.
 가주에게만 전해지는 무공을 익히기 위해 당혁린이 연공실 들어간지도 벌써 두 달이나 훌쩍 지났다.
 
 
 제2장 부모님의 횡사
 
 
 당무룡이 자식들을 거느리고 온 이후 당가에서 일하는 종복들은 너나할 것 없이 괴로움에 시달려야했다.
 당무룡이 지나치게 혹독하게 대하는 것은 둘째 치고라도 당혁기와 당옥빙 남매의 처사는 도를 지나친 것은 물론 오만방자하기 이를 데 없었다.
 불과 한달 만에 그들이 머물 만독각이라 이름 붙인 호화로운 전각이 새로 지어졌고 그곳에서 일할 종복들이 배치되었다.
 정결하기로 소문난 당무룡은 먼지하나가 발견되면 태형을 가하였기에 팔, 다리가 부러진 종복들의 비명소리가 들리곤 했다.
 당무천은 내심 종복들이 안쓰럽기도 했지만 그들을 나무라지 않는 대신 은밀히 부상당한 종복들을 치료하게 하였다.
 부상당한 그들이 치료를 받는 동안에 다른 종복들이 배속 받아 일하다가 또 트집을 잡혀 부상을 당하곤 했으니 당가의 종복 중엔 몸 성한 이가 별로 없었다.
 전소추의 부모 전삼과 홍아영이 몸이 성한 이유는 마구간을 워낙 잘 치웠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장정 세 사람 분의 일을 전삼 혼자 감당하였기에 누구도 마구간 담당이 되고 싶지 않았으나, 이젠 몸 성히 지내는 그를 부러워하였다.
 당혁기와 당빙옥은 자신들의 침소를 청소하는 종복들을 괴롭혔는데, 자신들이 물건이 없어졌다고 혼내는 일이 다반사였고, 그들을 중독시켜 괴로워하는 것을 보고 깔깔대고 웃기도 했다.
 물론 총관에 의해 수시로 가주에게 보고가 되었으나 당무천은 그들에게만큼은 너무도 관대하였다.
 당초혜는 당혁기와 당빙옥에게 정을 붙일 수 없어 될 수 있는 대로 그들 남매와 마주치는 것을 피했다.
 그러던 어느 날 오라버니 당혁린이 언제 연공을 마치고 나올지는 전혀 몰랐기에 몹시 심심하였던 당초혜가 마구간을 치우고 있던 전소추를 찾았다.
 그는 땀을 뻘뻘 흘리며 마구간을 정리하고 있어 당초혜가 마구간 앞에 쭈그리고 앉아 자신을 주시하고 있음을 몰랐다.
 “오라버니!”
 전소추가 아침 일찍 산에 올라 베어온 말에게 먹일 풀을 한아름 들고 소리가 들린 곳을 바라보니 당초혜가 해맑은 미소를 짓고 있는 것을 보고 자신도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씨께선 이런 누추한 곳에 나오시면 안됩니다. 그리고 어른들이 들으시면 소인이 화를 당하게 되니 오라버니라 부르지 마시고 소추라고 불러주십시오. 헌데··· 무슨 일로 이곳까지 납시었습니까?”
 당초혜가 토라진 듯 입을 뾰쪽하게 오므리며 말했다.
 “오라버니! 이곳은 아무도 없는데 왜 그래······? 흥! 이제 내가 미워진 거지······?”
 전소추는 싱긋 미소지으며 안고 있던 건초를 내려놓고 이마에 흐른 땀을 쓱쓱 닦으며 말했다.
 “아씨처럼 예쁜 사람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아참! 소인의 어머님만 빼고요. 그러니 화를 푸시고 말씀해 보십시오.”
 당초혜는 사촌오라버니 당혁기와 사촌동생 당빙옥과 어울리기 싫다는 이야기를 하자 전소추가 그녀의 말을 잘랐다.
 “아씨! 그들은 아씨의 일가 친척입니다. 지금은 어려서 그런 것이니 그들에게 정을 주시도록 하세요.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사이가 좋아질 것이고 그때는 지금처럼 행동하진 않을 겁니다.”
 당초혜는 전소추의 말을 듣고 반박했다.
 “흥! 오라버니가 몰라서 하시는 말이야. 말이 사촌이지 쳐다보는 눈길이 마치 독사 같이 느껴지니 눈도 마주치기 싫은 걸? 그러니 내가 그들을 피하는 것이야··· 근데, 하던 일을 멈추고 나와 같이 바깥 구경을 하면 안 돼······?”
 전소추가 도 다시 싱긋 미소를 지었다.
 “후후, 아씨! 바깥구경은 가주께 허락을 받으시면 소인이 모시겠습니다.”
 당초혜는 부친 당무천이 오라버니가 연공실로 들어간 이후 자신에게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아 소외된 느낌을 받고 있었는데 이번 기회에 부친에게 바깥 구경을 하고 싶다는 핑계를 대고 애교를 부릴 심산으로 안채로 뛰어갔다.
 전소추는 당초혜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뒷모습을 바라보다 말에게 먹일 풀을 들고 다시 일하기 시작했다.
 마구간 옆엔 오백 년 된 고목이 있었는데 둘레가 이 장 정도로 굵었으며 높이가 십 장 이상 될 정도로 높았다. 고목은 여러 곳이 썩어 들어갔지만 매년 꽃을 피우고 잎사귀도 무성하게 자라 여름이면 전삼 내외에게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주었었다.
 그 고목 중간 움푹 패어진 곳에 체구가 작은 인영이 차가운 안광을 발하며 전신을 부르르 떨며 앉아 있었다. 그 인영은 바로 당빙옥이었다.
 ‘흥! 우리 남매를 독사와 같다고 입에 올리다니 기회만 생기면 초혜언니와 저놈을 혼내주어야겠어. 흥! 세상에서 제일 예쁜 사람이 네놈의 어미란 말이지······?’
 누가 지켜보는지 모르는 전소추는 열심히 일을 하고 있었고, 곧 전삼 내외도 나와 마구(馬具)를 손질하고 말에게 먹이 주는 것을 거들었다. 그들은 힘든 일을 하면서도 미소를 지우지 않았으며 대화를 나누며 가끔 박장대소를 하기도 하였다.
 고목 위에 있던 당빙옥은 어린 나이에 어머니와 떨어져야 했기에 행복하게 보이는 그들 가족에게 심한 질투심을 느꼈고, 그들을 행복을 짓밟아 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당빙옥에게 기회는 의외로 빨리 돌아왔다.
 당초혜가 총관과 함께 마구간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전삼 내외와 전소추는 하던 일을 멈추고 고개를 숙여 예를 취했다.
 “총관께서 아씨와 함께 웬일이십니까?”
 추혼철갑 당천수가 명령했다.
 “전삼! 아씨와 내가 탈 말을 준비해주게. 그리고 준비가 되면 소추는 말을 끌고 문 앞에서 대기해라.”
 총관의 명을 받은 전삼은 명을 받기가 무섭게 안으로 뛰어들어가 화려한 안장을 얹어놓고 양손에 고삐를 쥔 채 나타났다.
 검은 윤기가 흐르는 체구가 당당한 흑마와 그보다는 약간 작지만 잡티 하나 없이 눈처럼 흰 백마를 끌고 나온 전삼은 전소추에게 고삐를 넘겨주며 나직한 소리로 말했다.
 “소추야! 아씨의 말이 발정기가 되었는지 요즘 갑자기 날뛰곤 하니 오늘 낙마하시지 않도록 잘 모셔라.”
 전소추는 가끔 당초혜의 나들이에 동행을 해왔는지라 밝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버지! 저 말들을 누구보다 잘 아시면서 왜 그런 말씀을 하세요? 절대 그런 일없을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전소추가 말들을 끌고 정문으로 나가자 총관과 당초혜가 기다렸다는 듯 마상으로 사뿐히 올라탔다.
 “소추야! 나도 오랜만에 나서는 것이니 저자거리에 새로 생긴 곳이 있으면 안내하거라.”
 총관의 명을 들은 전소추가 웃으며 답했다.
 “후후··· 총관께서 가시자고 하신 곳은 아씨께서 가실 곳이 못됩니다. 그러니 쌍류하로 가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당초혜가 궁금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소추! 내가 가보지 못하는 곳이라니 어떤 곳이지?”
 총관이 옆에 있어 하대를 하는 당초혜는 무척 미안한 표정을 지었고, 전소추는 입에 올리기 힘들다는 표정을 지으며 어물쩍 넘어가려 했다.
 “아······! 그러니까 그게······ 홍(紅)”
 추혼철갑 당천수는 전소추의 입에서 튀어나올 말을 짐작한 듯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허험! 소추야 되었다··· 네 말대로 쌍류하로 가자꾸나.”
 전소추가 앞장을 서고 말을 탄 총관과 당초혜가 그 뒤를 천천히 따랐다.
 “호호호······! 오랜만에 외출하니 가슴이 확 트이는 것 같네.”
 당초혜는 나들이를 하게된 기쁨에 재잘대며 즐거워했다.
 그들이 사라지는 것을 고목 위에서 지켜보고 있던 당빙옥의 두 눈이 사악한 빛으로 반짝였다.
 ‘호호호······! 오늘로서 저 소추라는 놈의 행복이 사라지겠지?’
 당빙옥은 전삼 내외가 안으로 들어가길 기다렸다가 고목의 구멍에서 빠져 나와 어디론가 사라졌다.
 한참 후 다시 모습을 드러낸 당빙옥은 마구간 안으로 들어가 전소추가 해온 풀 속에 무엇인가를 뜯어 잘게 만든 후 섞어 놓더니 조그만 약병을 열고 근처에 뿌렸다.
 전삼 내외는 안에서 식사를 하고 있었고, 그녀가 나타났다 사라진 시각이 극히 짧았기에 그녀가 다녀간 것을 보지 못하였다.
 하지만 급히 떠나느라 자신의 발자국이 남겨진 사실을 깨닫지 못한 당빙옥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콧노래까지 부르며 자신의 처소로 들어가 규방(閨房) 안에서 책을 큰 소리로 읽기 시작했다.
 잠시 후 외원(外院)의 마구간에선 식사를 마친 전삼 내외가 전소추가 베어온 풀을 말들에게 나눠 먹였다.
 한동안 풀을 맛있게 먹던 말들이 갑자기 전신을 부르르 떨더니 침을 흘리며 날뛰기 시작했다.
 히히힝-! 히히힝-!
 한두 마리가 아니고 모든 말들이 한꺼번에 날뛰기 시작하니 마구간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영문을 모르는 전삼부부는 말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다가갔다가 그만 뒷발질에 가슴을 채여 쓰러졌다.
 “아악-! 으아악-!”
 히히힝-! 히히힝-!
 말들은 순한 동물이라 절대 살아 있는 생물을 밟지 않는다고 알려졌지만 시뻘겋게 물든 말들은 눈에 뵈는 것이 없는지 좁은 마구간에서 펄쩍펄쩍 뛰며 쓰러져 있는 전삼 내외를 마구 짓밟았다. 급기야는 마구간의 기둥과 벽을 차 무너트려 버렸고, 그중 몇 마리는 아름드리 서까래에 깔려 죽었다. 나머지는 뛰쳐나와 사방으로 흩어져 날뛰기 시작했다.
 놀란 외원에 있던 식솔들이 뛰쳐나와 말들을 잡으려 하였으나 너무도 사납게 날뛰는 말들에 채여 부상만 입게 되자 멀찍이 피해 어쩔 줄 몰라하며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그 말 중에는 붉은 기가 도는 한혈마(汗血馬) 한 마리 끼어 있었는데 그놈은 가주가 특별히 아끼는 애마였다.
 한혈마는 사방에 몸을 부딪치며 날뛰다가 마구간 근처 고목을 머리로 받아 뇌수와 피를 흘리며 죽고 말았다.
 내원에서 이 소동을 듣고 무사들이 나와 말들을 진정시키려 했지만 그들 역시 아무 소용이 없었다. 바라만 보고 있는 사이 결국 모든 말들은 피를 토하며 하나 둘씩 절명하였다.
 당무천이 소식을 듣고 나왔을 때는 이미 상황이 종료된 상태였고, 여기저기서 다친 식솔들의 신음소리가 나고 있었다.
 무사들이 쓰러진 마구간의 잔재를 들어내자 전삼 내외의 참혹한 시신이 드러났다.
 형체(形體)를 알아 볼 수 없을 만큼 짓이겨진 전삼 내외의 시신은 무사들의 무심한 손길에 의하여 수습되었다.
 당무천은 말들의 죽은 모습을 보고 즉시 중독되어 그랬다는 것을 알아챘기에 배를 가르게 하였다. 말의 위와 내장을 갈라 보니 풀들이 가득 들어 있었는데 소량이었지만 특이한 향이 나는 풀이 섞여 있었다.
 광혼망령초(狂魂亡靈草)라는 독초가 바로 그것이었다.
 말의 사료로 먹이는 잡초와 비슷하게 생겨 일반인은 구별하지 못하는 풀이었지만 소량만 먹어도 일각의 시각이 지나면 미쳐 날뛰다 피를 토하고 죽는 맹독을 지닌 독초였다.
 사천지방에선 거의 발견되지 않았지만 유독 성도현 주변 야산에 자생하고 있어 군락을 이룬 곳도 있었기에 이곳에선 쉽게 구할 수 있는 독초(毒草)라 당가에서도 많이 사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만일의 사고를 대비하여 당가에선 광혼망령초가 자생하는 곳에 절진을 쳐서 외부와 차단을 하여 위험요소를 미연에 방지하고 있었다.
 마구간을 맡은 전삼 내외뿐 아니라 당가의 식솔을 비롯한 성도현 사람들 중 광혼망령초를 모르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전에 이것을 먹은 짐승들이 미쳐 날뛰는 것을 여러 차례 목격한 사람들은 그 근처엔 얼씬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한 광혼망령초가 죽은 모든 말들의 배마다 들어 있었다.
 그 정도 양이면 말들이 미쳐 날뛰는 것은 당연하였기에 당무천은 혀를 차며 내원으로 들어갔다.
 “쯧쯧쯧······! 당가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것은 지나던 개가 웃을 일이다. 모두 함구하고 밖으로 소문이 퍼지지 않도록 조심하도록 해라. 그리고 총관이 올 때까지 아무도 현장에 접근하지 못하게 막도록 해라.”
 대전으로 돌아온 당무천은 태사의(太獅椅)에 앉아 이마에 손을 얹고 신중히 생각하고 있었다.
 ‘흐음······! 전삼 내외는 누구보다 광혼망령초에 대해 잘 알고 있었는데 절대 그들이 실수로 섞어 넣지는 않았을 것이다. 외원을 지키는 무사가 근무교대를 하며 먹이 주는 것을 보았다고 했는데 말들이 중독되어 날뛰기 시작한 것이 그 즉시라니 그것이 좀 이상하구나···’
 당무천은 수하를 불러 서둘러 총관을 찾아오라는 명을 내렸다.
 
 그 시각 쌍류하의 계곡 커다란 나무 그늘 밑으로 흐르는 시원한 물에 발을 담근 당초혜와 전소추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었다. 가끔 작고 예쁜 물고기들이 그들이 담근 다리 사이로 한가롭게 헤엄을 치고 지나기도 하자 당초혜가 잡아달라고 졸랐다.
 아직 유월이라 수온이 차가웠지만 전소추는 즉시 종아리 깊이의 물 속으로 뛰어들어 물고기를 잡느라 이리저리 헤집고 다녔지만 맨손으로 잡기엔 너무 빨랐다.
 법석을 떠느라 물이 흐려지자 당초혜가 새하얀 치아를 드러낸 채 웃었다.
 “소추! 그래가지고 어떻게 고기를 잡겠어? 물이 흐려지면 고기가 숨쉬기가 나쁠 거야. 이제 그만하고 나와.”
 전소추는 머쓱해져서 머리를 긁적이며 물가로 나와 당초혜의 곁에 앉았다.
 “아씨가 원한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생각했는데 작은 물고기 하나 잡지 못하니······.”
 당초혜는 전소추가 의기소침(意氣銷沈)해 있자 그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아잉······! 흙탕물이 되어 발이 지저분하게 되었으니 닦아줘.”
 전소추는 흙탕물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맑은 물이 흐르자 앙증맞은 발을 닦아주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당초혜는 간지러운지 발을 빼며 소근거렸다.
 “오라버니! 난 이다음에 오라버니에게 시집을 갈 건데 그때도 지금처럼 내 발을 닦아줄 수 있어요?”
 전소추는 고개를 저으며 정색했다.
 “아씨! 나이가 들면 저 같은 하찮은 종복이 아씨의 발을 보는 것만으로도 벌을 받아야 할텐데 그리 하기에는 신분 차가 너무 높습니다.”
 “흥! 내가 싫은 거구나······?”
 당초혜는 뾰로통해져서 돌아앉자 그는 그렇게 하겠다는 약조를 할 수밖에 없었다.
 “하하! 알았어요. 그렇게 할 터이니 이제 그만 화를 푸세요.”
 “호호호! 그럼 약속한 거야··· 알았지?”
 당초혜가 해맑은 미소를 지며 돌아앉았는데 그런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는 전소추도 같이 따스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사실 나이가 어려 사랑은 모르지만 둘 사이에는 깊은 정이 흘러 넘쳐 세상 만사를 잊은 듯 즐겁게 대화를 계속하고 있었다.
 쌍류하에 도착하자마자 전소추에게 아씨를 잘 모시고 있으라는 명을 내린 총관은 급히 숲 속으로 말들을 끌고 들어가 지루하게 교미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어야 했다.
 그곳으로 오는 동안 백마가 발정기가 되어 암내를 풍겨 흑마가 흥분하여 날뛰곤 하여 하마터면 낙마를 당할 뻔하였었다.
 총관은 전소추와 당초혜는 아직 어려서 말들의 교미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을까 노심초사하여 자신이 끌고 왔던 것이다.
 이윽고 격렬히 교미를 마친 말들이 떨어지자 당천수는 숲 속에서 말들을 끌고 나와 나무에 고삐를 묶어 놓은 후 물장난을 하던 당초혜와 전소추 곁으로 다가왔다.
 “어흠······! 소추야, 내가 없는 동안 무엇을 하였느냐?”
 전소추는 어색케 하는 총관을 바라보며 키득거리며 말했다.
 “킥킥킥······! 총관께선 말들 때문에 시간을 빼앗기셨네요. 아씨께서 기다리시느라 지치셨어요. 해가 떨어지기 전에 돌아가려면 서둘러야겠어요.”
 총관은 시간이 없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섰다.
 “아씨! 이제 물기를 닦아내고 당혜를 신도록 하세요.”
 전소추는 소매로 물기를 대강 닦은 후 목혜를 신고 마른 수건을 당초혜에게 가져다주었지만 오랜만에 쌍류하에 나온 그녀는 떠나기가 아쉬운 듯 선뜻 일어나지 않았다.
 기다리던 당천수가 다가와 서둘러 그녀의 발에 뭍은 물기를 닦아주고 있는데 갑자기 하인의 목소리가 다급하게 들려왔다.
 “헉헉······! 총관! 지금 당장 급히 들어오시라는 가주의 명이 있으셨습니다.”
 당천수가 돌아보니 하인은 얼마나 숨가쁘게 달려 왔는지 전신에 땀이 흘러 볼썽 사나울 정도였다.
 “웬 호들갑이냐? 무슨 일이기에 가주께서 나를 급히 찾으신다는 게냐?”
 하인은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내며 말했다.
 “크, 큰일났습니다요. 가주께서 명을 전하는 즉시 총관을 황급히 모셔오라는 엄명을 내리셨습니다. 빨리 가보시지요.”
 당천수는 전소추에게 당초혜와 말을 타고 오라는 말을 남긴 후 하인의 소매를 잡고 허공으로 솟구쳐 사라졌다.
 전소추는 집안에 무슨 일이 있으랴 생각했는지 말을 천천히 몰다가 불안한 느낌이 들자 당초혜에게 물었다.
 “아씨! 소인과 누가 더 빨리 달릴 수 있나 해보시겠어요?”
 “호호······! 좋아요.”
 따그닥-! 따그닥-!
 전소추가 달리기 시작하자 당초혜도 박차를 가해 그의 뒤를 따랐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기마술에 능통한 그녀는 곧 그를 스치듯 추월하고 앞서서 내달렸다.
 “아씨! 같이 가요.”
 그들은 반 시진이 지나서야 당가 근처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말에서 내린 전소추가 흑마와 백마의 고삐를 쥐고 정문으로 향했는데 분위기가 이상했다.
 평시에 활짝 열려 있던 정문이 굳게 닫혀 있었던 것이다.
 쿵쿵쿵-!
 문을 두드리자 무사가 문을 열어주었고, 그들이 들어서자마자 문을 급히 닫아 버렸다. 그는 당초혜에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아씨께선 빨리 내원으로 향하시라는 명이 내렸습니다. 소추는 말의 고삐를 내게 넘겨주고 대전으로 향하거라.”
 당초혜가 내원으로 달려가자 전소추도 대전으로 달려갔다.
 대전엔 당가의 가주를 비롯한 원로와 총관이 모여 숙의(熟議)를 하고 있었다. 전소추가 대전 앞에 모습을 보이자 그가 왔음을 알리고 대전에 들어가게 하였다.
 그는 영문을 몰라 쭈뼛쭈뼛 고개를 숙인 채 들어갔다.
 “소인 소추이옵니다. 찾으셨습니까?”
 가주 당무천이 전소추를 측은하게 보며 물었다.
 “소추야! 사실대로 말해야한다. 새벽에 네가 산에 가서 말에게 먹일 풀을 베어왔느냐?”
 전소추는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예! 소인이 베어왔습니다.”
 대전 안에 있던 중인들이 혀를 차는 소리가 들리자 전소추는 고개를 들었는데 모두 노기를 띈 모습이었다.
 총관 당천수가 광혼망령초를 전소추에게 보여주며 물었다.
 “소추야! 이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겠지?”
 전소추는 괜한 걸 물어본다는 듯 답했다.
 “제가 어찌 그것을 모르겠습니까? 성도에 살면서 광혼망령초를 모르면 천치(天癡) 게요? 광혼망령초는 잎 뒤에 아주 작은 가시가 있어서 쉽게 구분할 수 있거든요.”
 총관이 고개를 저으며 물었다.
 “소추야! 우리가 외출한 사이 네가 베어온 풀을 먹은 말들이 모두 죽었고, 말의 뱃속에서 광혼망령초가 나왔다.”
 전소추는 크게 놀라 숨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예에······? 그, 그럴 리가 없어요. 지난봄에 말들에게 먹일 풀을 베어오는 곳에 새순이 돋을 때 광혼망령초는 모두 뽑아 버렸어요. 지금 그곳에 가셔서 확인해 보세요.”
 가주 당무천은 전소추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충직했던 전삼과 마찬가지로 어릴 때부터 그는 거짓말을 입에 담는 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찌되었건 말은 두 필만 남겨 놓고 모두 죽어 버려 세인들의 우스개 거리가 되었기에 확실하게 진상을 파헤쳐야 했다.
 가주의 명으로 전소추가 풀을 베었다는 곳을 헤매고 다녔지만 그 근처에선 아무도 광혼망령초를 발견할 수 없었다.
 총관 당천수는 이미 마구간을 샅샅이 뒤지고 다닌 후 그곳의 흔적과 족적(足跡)을 파악하여 가주에게 전음으로 보고하였다.
 ‘가주! 현장에서 폭혈미혼분(爆血迷魂粉)이 소량 검출되었습니다. 그리고 작은 족적이 있어 따라가 보니 당빙옥의 규방으로 이어졌습니다. 설마 나이 어린 조카께서 장난하지는 않았겠지만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고 판명되면 또다시 형제간 곤란을 겪으실 겁니다. 전삼 내외에게는 미안하지만 그들의 실수로 죽은 것으로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총관의 전음을 들은 당무천은 안색이 하얗게 변색되었고 머리 속이 텅 비어지는 것 같았다. 총관의 말이 사실이라면 도저히 수습이 되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당무천은 아래에서 꼼짝하지 않는 전소추를 바라보았다.
 이미 날이 어두워져 대전 안엔 불을 밝혔고, 그때까지 자신의 부모가 누군가의 음모에 의해 처참히 돌아 가셨으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한 채 대전에 고개를 숙이고 무릎을 꿇고 앉아 있던 전소추는 빨리 자신의 결백이 밝혀지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전소추를 바라보는 당무천은 어찌할 가를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소추야! 네가 혜아와 나들이를 하는 동안 풀을 먹은 말들이 미쳐 날뛰다가 너의 부모가 말발굽에 깔리는 사고를 당했다.”
 전소추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고 가주를 바라보았다.
 “예에······? 지, 지금 뭐라 말씀하셨습니까? 사고를 당하셨다고요? 어, 어디에 계십니까······? 크게 다치시지는 않으셨겠지요?”
 전소추는 너무나 놀라 계속 질문을 퍼부어 대었고, 당무천은 계속하여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총관 당천수가 전소추에게 다가가 입을 열었다.
 “소추야! 네 부모는 이미 죽었다. 네 말대로 초지엔 광혼망령초가 없었지만 말들의 배에는 분명 들어 있으니 너의 부모가 모르고 베어와 먹인 것이 분명하구나.”
 전소추는 총관의 말에 도리질을 하며 외쳤다.
 “아, 아니에요! 그럴 리가 없어요. 부모님께서 돌아가실 리가 없어요. 흑흑흑······! 우리 부모님을 살려주세요.”
 전소추는 울부짖다가 혼절하였고 그 모습을 보는 가주와 총관은 가슴이 찢어지는 슬픔을 맛봐야했다.
 ‘아······! 내가 가문의 위명(威名) 때문에 저 어린것에게 거짓말을 하여 한을 심어주다니 잘한 짓인지 모르겠다.’
 누군가 책임을 져야 하는 일이었기에 총관은 스스로 총관직을 사직하겠다는 뜻을 전해 올렸으나 가주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랜 고심 끝에 가주는 전소추를 당가에서 쫓아내 떠나게 하라는 명을 내렸고, 전소추가 혼절에서 깨어나기도 전에 정문에 내다 버렸다. 혼절에서 깨어난 전소추는 무사에게 가주의 명을 전해 들었지만 부모님의 시신이라도 보게 해 달라고 비오듯 눈물을 흘리며 떠나질 않았다.
 그 소식을 들은 총관은 자신이 지니고 있던 은자 백오십 냥과 금원보 하나를 들고 나와 전소추의 손에 쥐어주며 말했다.
 “소추야! 이제 넌 당가의 식솔이 아니니 이곳에서 떼를 써도 들어줄 사람이 없을 게야. 그러니 멀리 떠나거라··· 내 너의 부모의 시신은 잘 합장해 줄 테니 다시는 사천 땅을 밟지 말거라. 그리고 넌 이제 종복의 신세를 면했으니 네가 알아서 생활해야 한다. 많지는 않지만 떠나면 이것을 밑천 삼아 자리를 잡고 잘 살기 바란다. 이제 그만 가거라······.”
 전소추는 금원보와 은자를 도로 돌려주며 말했다.
 “흑흑흑······! 총관어르신!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셨는데 어째서 절 내쫓는 것입니까? 이런 금붙이는 모두 소용없으니 부모님을 도로 살려주세요.“
 총관은 전소추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제 넌 떠나거라. 조금 있으면 날이 밝아올텐데 네가 이곳에서 울고 있으면 당가에 이상한 소문이 날 것이고 그것은 가주께 죄를 짓는 일이다. 알겠느냐?”
 총관은 전소추의 소매 속으로 은자와 금원보를 넣어주었다.
 “소추야! 될 수 있으면 멀리 떠나거라. 다시는 이곳에 발을 들이지 말기를 부탁한다.”
 전소추는 총관에게 대례를 올린 후 가주가 머무는 전각을 향해서도 대례를 올렸다. 마지막으로 그 동안 부친이 일하던 마구간이 있던 곳을 향해 대례를 올린 전소추는 힘없이 돌아섰다.
 ‘친구여 안녕······! 얼굴도 대하지 못하고 떠나는 날 용서해라. 초혜! 다시는 너의 예쁜 얼굴을 못 보겠구나··· 흐흑! 아버님, 어머님······! 흐흐흑······!···’
 전소추는 속으로 눈물을 삼키며 터덜터덜 걸음을 옮기며 어디로 떠날 것인가를 생각해보았다.
 태어나면서 당가에서만 자란 전소추는 부모에게 일가 친척이 없어 갈 곳을 정하지 못하고 배회하다 걸음을 멈춘 곳은 무후사(武侯寺) 앞이었다.
 전에 부친의 손을 잡고 무후사를 방문했던 적이 있던 전소추는 자신도 모르게 무후사를 찾은 것에 대해 감사했다. 돌아가신 부모님을 위한 분향을 올려야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유비전에 들려 서둘러 분향을 마친 전소추는 제갈량전으로 향했다. 날이 밝지 않아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고 어둠 속을 터덕터덕 걷는 전소추의 마음은 무겁기만 했다.
 제갈량전 안에는 희미하지만 사물을 분별할 정도의 밝기로 등불이 켜져 있었다. 총관이 준 은자 열 냥을 선뜻 제단에 바치고 분향을 올렸다.
 “흐흑! 아버님, 어머님 부디 극락왕생하세요······.”
 엎드려 부모님이 편히 망자의 세상으로 떠나게 해달라고 기원하던 전소추는 향이 타오르며 연기가 곧게 솟아오르는 것을 보고는 자신의 막막한 앞길도 곧게 뻗기를 기원했다.
 종복의 신세에서 벗어나 자유인이 되었건만 오라는 곳은 없고 반길 사람 하나 없는 처량한 신세를 생각하며 한숨만 푹푹 내쉬던 전소추는 이제 이곳을 보는 것도 마지막이란 생각에 제갈량전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오래 전에 축조된 건축물이었지만 관리를 잘해 옛것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화려하였고, 제갈량의 망상 또한 얼굴에 난 잔주름까지 세밀히 만들어져 있었다.
 제갈량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던 그는 두 눈의 채색(彩色)이 잘못되었는지 한쪽이 다른 쪽보다 흐릿한 것 같이 느껴졌다.
 예(禮)에는 어긋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먼지 때문인 줄 알고 닦아주려고 제단을 밟고 올라선 전소추는 팔이 닫지를 않아 털어 낼 수 없자 망상의 팔 부분을 밟고 흐리한 눈을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이내 먼지가 제거되어 본래의 색을 되찾았고 전소추는 만족한 듯 망상의 두 눈을 비교해보았다.
 이번엔 밝아 보였던 눈이 더 흐릿해 보여 전소추는 이왕 올라선 김에 먼지를 털어 내려고 손을 뻗어 눈을 문지르는 순간 망상의 팔이 아래로 급격히 향하자 그만 균형을 잃고 말았다.
 철커덕-!
 끄르르릉-!
 순간 제단이 좌우로 벌어지며 깊이를 추측할 수 없을 정도의 어두운 공간을 만들어 내었고, 전소추는 무엇에 이끌리듯 어두운 공간으로 떨어졌다.
 “으아아아악······!”
 끄르르릉-!
 전소추의 신형이 어둠의 공간으로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제단은 순식간에 다시 합쳐졌고, 누구도 그 속에 공간이 있다는 것을 알리지 않겠다는 듯 분진이 일어나 제단을 덮고 있었다.
 “으아아악······!”
 계속 비명을 질러대며 한없이 떨어지던 전소추는 떨어지는 속도를 줄이기 위해 사방을 향해 손을 휘저었지만 손에 잡히는 것이라곤 물기를 머금은 미끄러운 이끼가 전부였다.
 그래도 살기 위해 필사적으로 사지를 움직였고, 두세 번 정도 사지에 엄청난 충격이 가해졌다.
 “으아아아아악······!”
 그때마다 비명을 질러대던 전소추는 의식이 점점 혼미해졌고 사방이 좁아지는 것을 느꼈다. 이대로 곧 부모님 곁으로 간다는 생각이 들자 마음이 편해지자 비명을 멈추고 양손을 머리위로 향한 채 떨어졌다.
 점점 좁아지던 사방은 이내 사람 한 명이 겨우 빠져나갈 정도로 좁아지자 가속도가 붙던 속도를 조금씩 줄여주었건만 빠른 속도로 떨어지는 것을 완전히 멈출 수 없었다.
 다행히 원형의 암굴은 인공적으로 만들어졌는지 매끄러웠고, 그 위에 이끼가 두껍게 자라 있어 충격을 완화 시켜주고 있었다.
 한참을 수직으로 떨어져 내리던 전소추는 암굴이 완만한 경사를 이루며 휘어져 있다는 것을 느낌과 동시에 붙잡고 있던 의식의 끈을 놓고 말았다.
 쿵-!
 전신이 으깨지는 듯한 지독한 고통에 의식을 잃고 있었던 전소추는 두 눈을 떴다.
 “으윽······! 여, 여기가 어디지? 으으윽······!”
 빛이 눈을 자극하자 어둠 속을 빠져 나오느라 열려 있었던 동공이 수축하며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잠시 후 전소추는 불빛이 말로만 듣던 야명주(夜明珠)라는 것을 알았고, 자신이 바닥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여기가 유, 유부(幽府)인가······?”
 몸을 일으켜 세우려고 하였으나 전신 곳곳에 성한 곳이 없었고, 엄청난 통증 때문에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어디가 망가져도 단단히 망가진 모양이었다.
 “으윽······! 내가 죽었다면 통증이 없을 텐데 어째서 아프지? 내가 아직 죽지 않았단 말인가······?”
 한동안 누워 있던 전소추는 천장에 야명주가 일렬로 박혀 있는 것을 보고 자신이 어떤 곳의 통로의 끝에 있다고 판단하고 간신히 몸을 뒤집어 기어가기 시작했다.
 “살, 살아야한다······! 내가 죽지 않았다면 부모님이 억울하게 돌아가신 이유를 반드시 밝혀야한다!”
 고통을 참고 이를 물고 기어가는 전소추는 초인(超人)의 의지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의지만으로 버티기엔 고통은 너무도 엄청나 다시 의식의 끈을 놓아야만 했다.
 똑-! 똑-!
 머리위로 떨어지는 물방울이 그의 의식을 되찾게 해주었지만 이미 며칠의 시간이 지난 뒤였다. 의식이 돌아오자 배에선 꼬르륵 소리가 들려왔고, 이젠 고통보다 배고픔이 더 그를 괴롭혔다.
 이때 간신히 고통을 참고 사방을 더듬던 전소추의 손에 무엇인가 잡혔다. 시원한 물기를 머금은 이끼였다.
 전소추는 맛도 볼 겨를 없이 우적우적 이끼를 씹어 넘겼고, 자신의 손에 잡히는 곳의 이끼를 모두 뜯어 삼킨 후에야 어느 정도 갈증과 허기를 면했다.
 “으음······! 이제야 살 것 같구나.”
 워낙 양이 적었기에 아직 여전히 배고픔을 달랠 수 없었던 전소추는 어떻게든 움직여 보려고 애를 썼다.
 전소추가 삼 장 정도 전진하였을 때 갑자기 복통이 일어났다.
 “으아악······! 아이고 배야. 내가 먹은 이끼가 독 이끼였나······?”
 뱃속에서 마치 수백 개의 빙칭(氷槍)을 삼킨 듯 인세에서 겪지 못할 엄청난 고통이 일어나 전소추는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고 있었다.
 “아아아악······!······.”
 고통을 참지 못한 전소추가 양손을 뻗어 사방을 휘젓고 있었는데 갑자기 뭔가 뜨겁고 물컹거리는 것이 잡혔다.
 자신도 모르게 입에 가져가 물어뜯자 뜨겁고 비릿한 액체가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그러자 전소추는 이제 살았다는 듯 빨아대기 시작했다. 손에 잡혀 있는 것은 무엇인지 모르지만 빠져 나가 려 몹시도 꿈틀거렸지만 전소추는 죽지 않겠다는 의지 하나로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꿀꺽-! 꿀꺽-!
 마지막 한 방울까지 모두 삼킨 그는 물컹거리는 것이 축 늘어지자 그제야 손을 놓았고, 그것이 두 자는 됨직한 선홍색 뱀의 유난히 하얀 비늘로 덮여 있는 목 부분이라는 것을 알고 놀라 던져 버렸다.
 “이, 이런······!”
 뱀의 머리에는 왕관과 같은 돌기가 있었고, 몸통을 따라 금색의 비늘이 양쪽으로 길게 나 있었으며, 목에는 백색의 비늘이 있었는데 전소추가 물어뜯은 곳이 바로 그곳이었다.
 일단 뱃속이 따뜻해지며 빙창(氷槍)으로 찌르는 듯한 고통이 사라지자 살 것만 같았다. 그런데 따뜻하기만 했던 뱃속에서 이번에 엄청난 열기가 일어나며 뜨거워지는 것이 아닌가?
 “으아악······! 뜨, 뜨거워······!”
 전소추는 또다시 복통을 견뎌내지 못하고 바닥을 굴러야했다.
 손에 이끼가 잡히자 다시 뜯어먹고 뱃속이 청량해짐을 느끼자 다시 얼음 창으로 쑤시는 듯한 고통이 찾아왔다.
 전소추는 본능적으로 뱀이 떨어져 있는 곳으로 다가가 씹어 삼키려 했지만 워낙 비늘이 단단하여 먹을 수 없었다.
 백색의 비늘이 있던 곳은 전소추가 입에 물어 상처가 나 있었기에 머리를 잡고 가죽을 벗긴 후 허겁지겁 씹어 넘기고 있었는데, 뱀의 뱃속에 있었는지 단단한 구슬이 같은 것이 치아에 씹혔지만 개의치 않고 삼켜 버렸다.
 다시 불에 타는 듯한 고통이 찾아왔건만 한줌의 기운도 남지 않은 그는 꼼짝도 하지 못하고 혼절했다.
 전소추의 전신은 시커멓게 변색(變色)되었다.
 우드득-! 우드득-!
 한 시진 정도가 흐르자 전소추의 전신의 피부가 벗겨지더니 저절로 혈관이 꿈틀거리고 뼈마디가 제멋대로 뒤틀리기 시작했고 전신이 늘어났다 줄어들기를 반복했다. 그 와중에 걸치고 있던 의복은 모두 찢겨져 나가 완전한 나신(裸身)이 되어 버렸다.
 잠시 뒤 전소추의 전신에서 서서히 서기(瑞氣)가 흘러나오며 바닥에서 조금씩 떠오르기 시작했다.
 태어날 때 있었던 가슴 부위의 도화모양의 붉은 점이 완연히 드러나 서기와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퍼퍼퍽-!
 생사현관(生死玄關)과 임독양맥(任督兩脈)이 타통(打通)되었고, 허물을 아홉 차례나 벗겨내고 나서야 바닥에 내려앉았다.
 그의 몸은 그가 이곳에 들어올 때와는 판이한 육 척의 키에 만지면 미끄러질 것과 같은 팽팽한 피부로 변했다.
 또한 태양 빛에 그을려 검게 보이던 피부색은 약간 창백하다 싶을 정도로 변했고, 먹물로 그린 듯한 짙은 눈썹에 오뚝한 코, 붉은 입술은 그의 오관을 더욱 준수하게 변했다.
 그가 혼절하고 있는 사이에 무림인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탈태환골(脫胎換骨)이 이뤄졌고, 불괴지체(不壞之體)가 되었건만 막상 그는 자신에게 이러한 기가 막힌 기연(奇緣)이 일어난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또 다시 한참 뒤에야 의식이 돌아왔는지 눈을 뜬 전소추는 사물이 대낮처럼 보이자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떠보았는데 혼절하기 전에는 밝게 보이지 않았던 사물이 훤히 보이자 신기해했다.
 “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그것도 잠시, 전신에 일던 고통이 사라졌음을 알아채곤 기쁨에 겨워 손을 짚고 일어나려 했다.
 쿵-!
 전소추의 신형은 붕 떠오르더니 일 장 높이의 천장에 머리를 박고 돌가루와 함께 떨어져 내렸다.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영문을 모르던 전소추는 그제야 자신의 머리를 만져보았는데 상처하나 없이 말짱하자 고개를 갸웃거렸다.
 “으응? 내, 내가 어떻게 천장까지 날아올랐지······?”
 전소추는 자신의 사지를 휘둘러보다 전신에 충만 된 기운이 철철 흘러 넘치는 것을 알고 환호성을 쳤다.
 “이얏호! 이젠 상처가 나았으니 여길 빠져나가야겠다.”
 전소추는 일단 사물이 환하게 보이자 주변을 살폈다.
 자신이 먹은 이끼가 보였는데 처음 보는 청태(靑苔)였다. 그리고 자신이 벗어놓은 허물을 만져보며 무엇인가 궁금해했지만 그게 무엇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뱀은 가죽만 남겨둔 채 모두 먹었기에 뱀의 이름이 무엇인지도 알 수가 없었고, 다만 그것들을 복용하였기 때문에 자신이 부상을 회복하고 기연을 만났다는 것은 짐작할 수 있었을 뿐이다.
 하지만 자신이 무려 이 갑자의 내공을 얻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더욱이 탈태환골하며 몇 배나 커져 버린 자신의 양물(陽物)은 나이가 어려 음양화합의 조화를 모르는 전소추에게는 거추장스럽기만 하였다.
 “그런데 왜 몸이 이렇게 커 버렸지······?”
 처음 자신이 떨어져 내린 곳으로 가보니 천장에 시커먼 구멍이 보였는데 체구가 커진 지금은 그곳으론 빠져나갈 수 없다고 판단되자 야명주가 곧게 박혀 있는 통로를 따라 걸어 들어갔다.
 통로엔 이끼가 잔뜩 끼어 있었는데 자신이 먹은 푸른색의 청태는 거의 없었고, 시커멓게 말라죽은 이끼가 대부분이었다.
 전소추는 이끼를 떼어내고 안의 재질을 살폈지만 그저 표면을 곱게 다듬어 놓은 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지독히도 오랫동안 떨어져 최소한 자신이 지표면에서 천 장 이상 아래로 추락했을 것이란 생각에 불안한 마음이 가득했다.
 하지만 호흡을 하기에 전혀 어려움이 없고, 자신이 서 있는 곳이 인위적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은 그에게 빠져나갈 수 있다는 희망을 던져주기에 충분했다.
 “으음! 누군가 이곳을 만들었다면 분명 어딘가에 나갈 길이 있다는 것일 거야······.”
 통로는 그리 길지 않았다.
 오십 장 정도의 곧게 뻗은 통로의 끝은 반대쪽과 마찬가지로 막혀 있었고, 막힌 벽에는 이끼가 울퉁불퉁하게 자라 있다는 것이 틀릴 뿐이었다.
 전소추가 이끼를 제거하기 시작하자 문자가 음각(陰刻)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 제갈가주지묘(諸葛家主之廟) >
 
 전소추는 글을 읽고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서다 엉덩방아를 찌었다.
 “아이쿠······! 이런··· 내가 빠진 곳이 무덤이었단 말인가?”
 전소추는 공포감이 밀려드는 것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는 아직 십이 세의 어린아이였고, 가끔 어른들이 하는 귀신이야기를 들었는지라 무서워 견딜 수 없었다.
 “엉엉엉······!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여기에 빠졌지? 난 그저 먼지를 털어 주려고 한 것뿐이었는데······.”
 한참동안을 공포에 떨며 울던 전소추는 지쳐 잠이 들었다.
 꾸르르르릉-!
 진동음에 잠을 깬 전소추는 막혀 있던 벽이 위로 올라가는 것을 보고 뒤로 물러났는데, 통로보다 밝은 빛을 내뿜고 있는 안에서 사람의 형체가 나오는 것을 보고 소리쳤다.
 “아아악······! 귀, 귀신이닷.”
 전소추는 양손으로 눈을 가리고 머리를 숙여 계속 절을 올리며 중얼거렸다.
 “영면(永眠)을 깨워 죄송합니다. 제발 절 살려주십시오.”
 안에서 나온 사람의 형체가 전소추가 엎드려 있는 곳으로 유령처럼 다가왔다.
 “엉······? 너는 제갈세가의 사람이 아닌 것 같은데 어떻게 이곳에 어떻게 들어왔느냐?”
 창노한 음성이 들리자 전소추는 자신이 겪은 일을 소상히 아뢰고 자신을 살려달라고 부탁했다.
 괴인은 묵묵히 전소추의 말을 듣고 있었는데, 청태(靑苔)와 홍사(紅蛇)를 복용하였다는 말을 듣고는 흠칫 놀라는 표정이었다. 이윽고 전소추가 말을 마치자 괴인은 전소추를 뚫어지게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소년은 고개를 들라.”
 전소추는 무서움을 떨치고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선풍도골의 인자하게 생긴 노인이 자신을 주시하고 있었다.
 “귀, 귀신이 어떻게 신선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지······?”
 노인이 혀를 차며 전소추에게 말했다.
 “쯧쯧쯧······! 이놈이 이곳으로 떨어지며 뇌의 기능이 상실되었나? 산 사람하고 죽은 귀신하고 혼동을 하다니··· 따라오너라!”
 노인이 뒤돌아서 안으로 향하자 전소추는 엉거주춤 일어나 도살장에 소처럼 뒤를 따라 들어갔다.
 노인과 전소추가 안으로 들어서자 육중한 문은 저절로 닫혔다.
 꾸르르르릉-!
 노인을 따라가는 전소추는 그곳도 통로이며 천장과 벽뿐 아니라 바닥에도 무수한 구멍이 나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궁금증이 일었지만 입을 다물고 따라가던 전소추는 노인이 통로의 끝에서 빨리 오라는 손짓을 하자 급히 뛰어갔다.
 노인이 우측 벽에 있는 칠성모양의 움푹 꺼진 곳을 장(掌)으로 이상한 순번(順番)으로 누르자 미세한 진동이 일어났고, 좌측면에 있던 반장 두께의 벽이 위로 올라갔다.
 스르르릉-!
 노인이 좌장(左掌)으로 누른 곳도 있었고, 우장(右掌)으로 누른 곳도 있었으며 양장(兩掌)모두 한 번에 누른 곳, 두 번 세 번 겹치게 누른 곳도 있었지만 전소추는 모두 뇌리에 깊이 새겨두었다.
 “기억할 수 있겠느냐?”
 노인은 일부러 보이기 위해 천천히 한 것 같았고, 전소추가 고개를 끄덕이자 안으로 들어섰다.
 이번엔 제법 규모가 큰 석실이었는데, 바닥엔 백석(白石)과 흑석(黑石)이 바둑판 모양으로 놓여져 있었다.
 노인은 전소추가 무공을 전혀 모른다고 이야기하였기에 전소추를 허리에 꿰고 백석과 흑석을 이곳 저곳을 밟으며 석실을 통과했다. 전소추의 체중은 무거웠지만 노인은 전소추를 마치 마른 장작과 같이 가볍게 느끼는 것 같았다.
 처음에는 전면 중앙에 있는 세 번째 흑석을 밟았고, 그 다음엔 흑석의 좌측에 있는 백석을 다음엔 우측 네 번째 있는 백석, 그 다음엔 전면 다섯 번째 있는 흑석을 밟았고, 한동안 그런 수순을 밟더니 점점 빨리 발걸음을 빨리 떼며 통과하며, 오 장 거리를 사뿐히 박차 날아가기도 했다.
 전소추는 자신이 직접 돌을 밟고 건너는 것이 아니라서 노인이 밟은 곳을 기억하기 위해 애를 썼다. 노인이 석실 반대편에 도착하여 전소추를 내려놓으며 다시 물었다.
 “이번에도 기억할 수 있겠느냐?”
 전소추는 자신이 모두 기억을 했다고 생각하여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뒤돌아 바둑판 모양의 바닥을 쳐다보니 도대체 어느 곳을 밟았는지 기억을 할 수 없었다.
 엎드려서 본 것은 노인의 발과 돌의 색이었기 때문이다.
 전소추가 한숨을 내 쉬었다.
 “휴우······! 전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노인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웃었다.
 “후후후······! 네가 기억을 하지 못한다면 진법을 완벽하게 깨우치지 전엔 이곳을 빠져나갈 생각을 버려야 할 것이다.”
 노인을 따라 원형의 석실과 팔각형 석실을 조심스럽게 통과한 후, 철로 만든 문을 지나 넓은 대전으로 들어선 전소추는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자 고개를 숙이며 일일이 예를 취했다.
 “소인 전소추가 여러분께 인사 올립니다.”
 노인이 전소추의 귀를 잡아당겨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이놈아! 인사를 올리려면 제대로 해야지··· 저기 분향하는 곳이 있으니 향을 피우고 예를 올리거라.”
 전소추는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모두 산 사람이려니 했다가 노인의 말을 듣고 자세히 바라보니 위패가 하나씩 서 있는 것을 알고 실수를 했음을 알았다.
 전소추는 제단에 마련된 향을 피워 청동향로에 꽂고 물러나 대례(大禮)를 세 번 올렸다.
 “영면에 드신 제갈가의 가주님들께 미천한 소인 전소추가 인사 올립니다.”
 전소추가 예를 마치고 노인의 발 아래에 엎드려 간청했다.
 “할아버지! 소인은 미천한 출신이지만 이곳에서 나가 부모님이 돌아가신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 제발 이곳을 벗어날 방도를 가르쳐 주십시오.”
 노인이 전소추를 바라보며 혀를 찼다.
 “쯧쯧쯧······! 이곳은 곧 죽을 사람만 드는 곳이니라··· 나가는 방법은 조금 전 네가 들어온 곳으로 나가야 하느니라. 이곳을 벗어나기 위해선 지혜와 무공을 겸비해야 하는데, 넌 아직 지혜도 모자라고 무공도 익히지 못했으니 나갈 수 없구나······.”
 전소추는 눈물을 흘리며 더욱 간절히 애원했고, 노인은 측은히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노인은 울며 애원하는 전소추의 모습에서 그의 중후한 인간성을 느낄 수 있었는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입을 열었다.
 “내게 구배지례(九拜之禮)를 올리겠느냐?”
 “예에······?”
 전소추는 노인이 대체 왜 구배지례를 요구하는 지를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러면 이곳을 벗어날 방도를 알려 줄 것 같았다.
 전소추는 무림에 대하여 아무 것도 모르기에 그것이 사부가 제자를 맞이할 때 하는 예식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전소추는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며 벌떡 일어나 경건한 모습으로 노인에게 구 배를 올렸다.
 노인은 흐뭇한 표정으로 전소추를 바라보며 말했다.
 “노부는 제갈세가의 오십이 대 가주 제갈황(諸葛皇)이다. 죽기 전에 뭔가 아쉬움이 남았었는데, 수명(壽命)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널 힘껏 가르치겠다. 허허! 이건 아마도 조상들의 뜻인가 보구나······.”
 전소추는 자신을 가르치겠다는 제갈황의 말을 듣고 즉시 무릎을 꿇었다. 미련하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사부님! 감사합니다.”
 노인은 전소추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자상한 목소리를 토했다.
 “오냐······! 내게 남겨진 시간이 별로 없으니 지금부터 당장 널 가르쳐야겠구나.”
 노인이 전소추에게 이곳을 만든 유래와 이유를 말하자 경청하는 전소추의 표정은 진지하기만 하였다.
 
 
 제3장 무공입문(武功入門)
 
 
 전소추는 제갈황이란 노인의 이름이 무림에서 얼마나 대단한 명성을 떨쳤는지 알지 못했다.
 그는 올해 세수 일백이십으로 무림에서 활동할 땐 약관(弱冠) 에 천하제일뇌(天下第一腦)라고 불렸고, 사십엔 중원을 침공한 남황(南荒)의 독중독인(毒中毒人)들을 물리치기 위해 중원 백도들이 결성한 백도연합맹(白道聯合盟)의 총사(總師)로 혁혁한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오 년 전 그가 영면에 들자 제갈세가에서는 무림의 구파일방의 장문인들과 정사마의 수뇌까지 초청하였다. 그들 모두가 참석한 가운데 성대한 장례식을 행하였는데 이곳에 아직까지 살아 있는 것이었다.
 사실 제갈세가에서 오늘날까지 후대들에 의해 분향이 피어오르고 있을 뒷산에 있는 분묘들은 밀납인형(蜜蠟人形)이 들어 있는 가묘(假廟)였다.
 그 것은 제갈세가의 율법 때문이었다.
 죽기 전 사천의 무후사 밑에 있는 제갈가주지묘에 들어와 자신이 가장 자신하는 무공과 책략을 기술하여야 했기 때문이다.
 제갈세가를 세상에 널리 알린 촉한(蜀漢)의 승상이었던 무후(武侯) 제갈량(諸葛亮)은 그의 나이 오십사 세 때 전장(戰場)에서 죽었다고 알려졌으나, 그는 사리사욕을 접고 이곳의 지하에 거대한 석실을 만드는데 남은 여생을 바쳤다.
 자신이 알고 있는 기관지학과 진법을 교묘히 설치하였고, 이곳을 무사히 들어오는 방법은 가주에게만 전하게 하였다.
 가주가 될 내정자는 어려서부터 뇌에 박히도록 선조들부터 이어온 율법대로 설사 하늘을 가리는 재주가 있다 하더라도 제 이인자의 자리에 만족해야 하였다.
 제갈량은 후손들이 뛰어난 지략과 무공을 이용해 세상을 어지럽히지 못하도록 제동을 걸어놓은 것이었다.
 이곳에 발을 들여놓은 가주는 다시는 밖으로 나갈 수 없다는 제갈량이 남긴 글귀가 있어 단 하나도 다시 강호로 나간 자가 없었다. 덕분에 한 번도 무림의 공적으로 몰리지 않은 후손들은 편안한 삶을 영위하였고, 무림에서 숭배 받는 세가(勢家)로서 위치를 확고히 할 수 있었다.
 이곳에 있는 위패 뒤에는 각자 자신의 모습을 밀랍을 이용해 만들어 세워 놓았고, 밀납 인형 뒤엔 좌화한 시신들이 있었다.
 무공이 강한 가주들은 우화등선(羽化登仙)하여 자신의 시신을 마치 생자(生者)처럼 유지하고 있었으나, 대다수의 가주들은 오랜 세월이 흐른 탓에 가루로 변해 있었다.
 그리고 위패 아래엔 자신들이 기술해 놓은 서책이 두 권씩 놓여 있었다. 각자의 무공비급과 진법과 책략을 기술한 서책이었다.
 세상사람들이 만일 제갈세가의 무공비급들이 이곳에 있음을 안다면 피비린내 나는 혈겁이 일어났겠지만 지금까지 온전히 보존할 수 있었던 까닭은 따로 있었다.
 처음 제갈량은 팔진도(八陣圖)를 이용해 이곳을 난공불락의 요새처럼 꾸몄으나, 지금은 후손들에 의해 점점 더 무서운 기관과 진법이 설치되었기 때문이다.
 가주들은 기력이 쇠하기 전에 후대의 가주에게 자신의 모든 심득(心得)을 전한 후 이곳으로 들어와 자신의 할 일을 마치고 영면에 들었다. 후대의 가주들은 모두 뛰어난 머리로 모든 난관을 뚫고 이곳에 들어와 자신이 해야할 일을 마치고 영원한 잠에 빠졌던 것이다.
 사실 후대로 접어들며 점점 더 뛰어난 지략이 생겨났고 무공 또한 발전을 거듭하였기에 전소추의 사부 제갈황은 그곳에 있는 모든 선대 가주보다 뛰어나다고 단언할 수 있었다.
 이곳으로 들어오려면 일출 전 아무도 없을 때 제갈량전의 망상의 좌측 눈을 누른 후 우측 눈을 눌러야 제단을 통한 암로(暗路)로 빠져들어 내려오며 수십여 개의 기관을 작동하는 손잡이 중 세 개의 손잡이만 건드려야 암로를 벗어난 통로에서 압사(壓死)를 면할 수 있었다.
 전소추가 천운(天運)으로 떨어져 내리며 부딪친 것이 바로 기관작동을 정지하게 하는 손잡이였다.
 만일 한 개만 더 건드렸어도 전소추는 밀려드는 벽에 피 떡이 되는 끔찍한 경우를 당했을 것이다.
 또 전소추가 무공을 익히고 있었다면 무력으로 문을 열었을 터이고 아무런 일이 없다하여 마음놓고 안으로 들어서면 사방에서 쏘아지는 강철로 만든 독화살과 암기에 고슴도치의 형상이 되었을 것이다.
 바둑판 모양이 바닥에 있던 석실에는 혼돈미리환상진(混沌迷離幻想陣)이 설치되어 생로를 벗어나면 감히 상상도 못할 환상에 빠져들게 심신이 쇠하여 뼈만 남기게 되어 있었다.
 원형의 석실에선 입구 정 중앙에서 천장과 바닥 중앙에 있는 작은 돌출부를 향해 이 갑자 이상의 지공을 쏘아야만 기관작동을 멈추게 할 수 있었다.
 물론 허공을 날아간다고 해도 무림인의 눈으로도 잘 보이지 않는 세사(細絲)를 모두 건드리지 않고 통과할 수 없었다.
 세사가 하나라도 끊어진다면 만관(萬貫)의 화약이 폭발할 것이고 폭발력에 의해 시신조차 간수하지 못할 신세를 면치 못하기 때문이었다. 그밖에도 수많은 관문이 있었다.
 마지막 팔각형 석실이 팔진도를 이용해 제갈량이 직접 만든 석실이었고, 역대 가주들에겐 그곳이 가장 통과하기 쉬운 곳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진법의 문외한인 전소추는 지금으로선 이곳조차 통과하지 못할 것이 분명하였다.
 전소추는 사부가 자세히 말해주는 이곳을 만든 이유와 설치된 기관의 무서움을 듣고 천우신조(天佑神助)로 자신이 살아났음을 천지신명께 감사 드렸다.
 제갈황은 전소추의 머리를 시험하기 위해 문제를 내기 시작했고, 그는 많이 배우지는 못하였으나 둔한 편이 아니었기에 그런 대로 답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제갈황이 내는 문제는 점점 어려워지자 이해조차 하지 못해 쩔쩔매고 있었다.
 제갈황은 범인(凡人)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 전소추를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를 고민하다가 그의 손을 끌고 대전의 반대편 끝에 있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
 전소추는 대전의 안쪽에 여러 개의 석실이 만들어져 있었다.
 제갈황은 그 중의 한 석실의 문을 열었는데 약향(藥香)이 진동하는 방이었다. 수많은 작은 항아리가 봉해진 채 놓여져 있었고 저마다 독특한 향을 피어 올리고 있었다.
 그 항아리 중에서 몇 개의 뚜껑을 열고 환단(丸丹)을 꺼내든 제갈황은 전소추를 데리고 침실로 향했다.
 “소추야! 이곳에서 잠시 쉬고 있거라. 사부는 해야할 일이 생겼구나.”
 전소추는 제갈황이 빠져나간 석실을 둘러보았다.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무척 정갈스러웠고, 고색창연한 가구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침상도 있었지만 사부가 사용하는 것이라 올라갈 엄두도 못 내고 오기를 기다렸는데, 몇 시진이 지났지만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전소추는 자신이 겪은 일을 생각하다가 바닥에 쭈그리고 깜빡 잠이 들었다.
 “소추야! 일어나거라.”
 전소추가 눈을 떠보니 제갈황이 침상에 걸터앉아 자신을 깨우고 있었다. 자신이 사부의 침상에 누워 있는 것을 알고 화들짝 놀라 침상에서 내려왔다.
 “죄, 죄송합니다. 허락도 없이······.”
 제갈황은 전소추가 쭈그려 자는 것을 보고 침상에 올려놓았고, 피곤함에 지쳐 있던 그는 신체가 들려지는 것도 모르고 깊은 잠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잠에서 깬 전소추는 무척 개운하여 머리가 맑아진 상태였고, 제갈황은 그때를 기다렸던 것 같았다.
 제갈황은 전소추를 데리고 연무관이라 새겨져 있는 석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곳은 모두 쇠보다 단단하다는 청강석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중앙에 높이가 한 자 정도 되는 얕은 좌대(座臺)가 있었다.
 제갈황은 전소추를 좌대에 앉게 한 후 그의 맥을 짚었다.
 전소추의 맥박은 힘차게 뛰고 있었고, 제갈황도 무엇인지 모를 정도로 이상한 기운도 함께 흐르고 있었다.
 제갈황은 전소추에게 청태와 홍사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소추야! 네가 먹은 청태의 이름은 극음빙청태(極陰氷靑苔)라는 것으로 천 장 땅 속의 음유(陰幽)한 곳에서 천음마의(天陰魔蟻)라는 개미가 키우는 것으로 그것을 먹은 사람은 일각(一刻)의 시각이 흐르기 전에 얼어죽게 만들며 해약이 없다고 알려진 것이다. 다행히 홍관금선사왕(紅冠金線蛇王)이라는 극양(極陽)의 영물과 같이 복용하였기에 네가 살아날 수 있었다. 홍관금선사왕은 인세에서 구경하기 힘든 영물이고 무엇이든 녹여 버리는 극독(極毒)을 지니고 있고 대단히 흉폭하여 잡을 수 없는 영물인데 천음마의를 잡아먹고 잠들어 있는 사이 무공도 익히지 않은 네가 하나뿐인 약점 목 부분을 물어뜯어 네게 먹힌 것이다. 만일 그 놈이 눈을 뜨고 있었다면 넌 그곳에서 혈수로 녹아 있었겠지··· 어찌 되었건 그것들 덕분에 네 몸 안에는 엄청난 극음과 극양, 극독의 기운들이 부딪치며 철골과 같은 단단한 뼈와 질긴 피부, 무공을 익히기에 적합한 신체로 탈바꿈해 놓았다. 네가 아직 적절히 운용(運用)을 하지 못하지만 네 신체에는 이 갑자의 내공이 흐르고 있다. 이 환약을 복용하고 결가부좌를 취해라.”
 전소추는 좌대에 올라 결가부좌를 한 후 제갈황이 전해주는 커다란 환약을 입에 넣었다.
 향긋한 향과는 달리 몹시 써서 목으로 넘기기 힘들었지만 타액(唾液)과 닿자 액체로 녹으며 저절로 넘어갔다.
 “우우욱······!”
 전소추는 토하려는 것을 입을 막고 간신히 참아내고 자세를 바로 하였다. 입에서 쓴 기운이 사라지자 머리 속이 텅 비는 것과 같은 기이한 기분에 사로잡혔는데 제갈황의 목소리가 머리 안에서 들리는 것 같았다.
 “소추야! 네게 먹인 것은 너의 뇌(腦)를 평소보다 수십 배 이상의 기능을 행하게 해주는 잠혈폭뇌단(潛血爆腦丹)이다. 기회는 한 번뿐이니 잘 새겨들어라. 지금부터 너의 머리 속에 제갈가의 가전무공만 빼고 모든 지식을 주입시킬 것이니라.”
 제갈황은 전소추에게 혜광심어(慧光心語)로 자신의 지식을 전수하기 시작하였다.
 먼저 일반 서적의 내용과 뜻풀이로 시작하여 불경과 같은 난해(難解)한 글이 전소추의 뇌에 각인(刻印)되었다.
 수많은 서책의 내용을 쉬지 않고 혜광심어로 말하고 있는 제갈황은 몹시 힘들어하였지만 결코 멈추지 않았다.
 다음엔 바둑을 두는 법부터 시작하여 하오배들이나 하는 잡기(雜技)에 대한 것을 심어주더니, 팔진도를 비롯한 무림에 전해 내려오는 모든 진법과 기관 토목술에 대해 가르쳤다.
 정도의 무공은 구파일방의 기초적인 무공부터 시작하여 단계를 높여갔고, 무림을 쟁패한 세가들의 무공까지 전수하였고, 황실의 무공 또한 전수하였다.
 마도와 사도의 무공이라고 예외가 될 수는 없었다.
 제갈황은 사람이 어떻게 그 많은 책을 외우고 이해했는지 불가사의(不可思議)할 정도로 끊임없이 혜광심어로 전소추의 뇌에 모든 것을 각인시켰다.
 칠 주야동안이나 쉬지 않고 혜광심어로 전소추를 가르친 제갈황의 목소리는 점차 작아지더니 급기야는 아주 가늘게 변했다.
 “소추야! 이제 사부가 알고 있는 것을 모두 네게 전하였다. 내 품속에 서찰이 있으니 그것을 읽고 그대로 행하기 바란다.”
 그 말을 끝으로 제갈황의 목소리는 멈춰졌고, 전소추는 온갖 지식으로 꽉 찬 머리를 정리하기 위해 잠시동안 명상에 빠진 듯 하다가 눈을 떴다. 머리 속은 온통 뒤죽박죽이었고 혼돈에 빠져 있는 듯했으나, 점차로 정리가 되고 있었다.
 일단 마음을 추스른 후 가르침을 내린 사부에게 감사의 말을 올리기 위해 뒤돌아 섰다.
 “으, 으헉······! 사, 사부님······!”
 제갈황의 모습은 하얗던 머리카락이 모두 빠져 있었고, 헐렁한 장포(長袍) 속의 피부는 쪼그라들 대로 쪼그라들어 뼈 위에 주름진 가죽만 남아 있는 상태였다.
 전소추를 위해 목숨을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진력과 잠력(潛力)까지 격발시킨 탓이었다. 전소추는 좌화해 영면에 든 서부의 시신을 붙잡고 울음을 터트렸다.
 “흐흐흑······! 사부님! 못난 저 때문에 이렇게 일찍 영면에 드시다니··· 흐흐흐흑······!”
 전소추는 울부짖다가 혼절하였고 깨어나면 다시 통곡을 하다 혼절하곤 하였다. 이미 돌아가신 사부께서 운다고 다시 환생하시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어린 전소추는 그렇게 해서라도 영면에 드신 사부께 용서를 구하고 싶었다.
 이곳에선 주야를 구분할 방도가 없었고, 어느 정도의 시각이 흘렀는지는 모르지만 전소추는 사부의 품안에 있던 서찰을 꺼내 읽기 시작하였다.
 
 <소추야!
 사부는 이곳에서 오 년이란 기나긴 세월을 홀로 보냈다. 어차피 한 달 정도 남아 있는 수명이었는데 널 만나 잠시동안이나마 고독감을 떨칠 수 있어 행복했다.
 사부는 이 글을 쓰며 고뇌를 할 수밖에 없었다.
 한 달 동안 너와 같이 지낼까 생각해 보았지만 너는 제갈가의 사람이 아니기에 남보다 뛰어난 뇌를 지니지 못한 것이 아쉽구나. 평생을 이곳에서 무공을 익힌다해도 빠져나가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이 방법을 택하였다.
 사부는 너의 심성이 곧다는 것을 알기에 정사마의 무공을 모두 전수시켰다.
 마도와 사도의 무공은 빠른 시일 내에 익힐 수는 있어도 주화입마(走火入魔)에 빠지기 쉬운 결점이 있으니 시일이 오래 걸리더라도 정도의 무공을 극성까지 익힌다면 이곳을 빠져나가는데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너의 뇌에 각인 시킨 모든 서책의 내용과 무공비급은 서실(書室)에 있으니 참고하여 수련을 게을리 하지 말거라.
 배가 고프면 연무관을 나서서 오른쪽 끝에 있는 석실로 들어가 보거라. 그 곳에 지하수가 솟아나는 작은 연못과 지령석균(地靈石菌)이 자라고 있으니 그것을 복용하거라. 연못은 수온이 몹시 차서 빙어(氷魚)들이 서식하고 있다.
 당부하고 싶은 것은 나의 시신을 쉰두 번째 자리에 안치시켜주고 제갈가의 무공만큼은 익히지 말기를 부탁한다.
 부디 무공을 대성해서 이곳을 벗어나기를 기원한다.
 이곳을 벗어나면 내가 너의 사부였다는 것과 이곳의 비밀은 네가 무덤 속에 들어갈 때까지 지켜줄 것을 믿는다.
 
 - 사부 제갈황 ->
 
 전소추는 사부의 시신을 조심스럽게 안고 연무관을 빠져 나와 대전으로 향했는데, 그의 두 눈엔 사부를 잃은 슬픔의 눈물이 하염없이 흐르고 있었다.
 시신을 자리에 안치하고 구배지례를 올린 전소추는 사부의 영혼이 극락에 갈 수 있도록 기원하고 서실로 향했다.
 서실의 문을 열고 고서(古書)에서 나는 눅눅한 냄새를 맡으며 들어선 전소추는 서가(書架)에 꽂힌 수많은 서책의 양을 보고 놀랐다.
 천장 높이의 서가는 열 칸이었고, 서책들이 빈틈없이 꽂혀 있었으며 서가 하나의 길이는 대강 십여 장이나 되는 것 같았다.
 그런 서가가 무려 오십여 개나 되었으니 대략 백만 권의 서책이 서실에 있었던 것이다.
 어려서부터 독서를 좋아한 전소추지만 서책의 양에 먼저 기가 질려 혀를 내둘렀다.
 “우와······! 엄청나게 많구나!”
 천장에 야명주가 세 개나 박혀 있는 곳은 다른 곳보다 밝았고, 백옥으로 만든 서탁(書卓)과 의자(椅子)가 있었다.
 전소추는 서책을 뽑아들기 전에 서실을 천천히 돌아다녔다.
 일반 서적과 불경(佛經), 지리서(地理書), 사서(史書), 진법서(陣法書), 정도의 무공비급(武功秘?), 마도와 사도의 무공비급 등이었으며, 가장 뒤쪽의 서가에는 고대문자가 적혀 있는 고서(古書)들이 놓여 있었다.
 오래되어 손상될까봐 꽂지 않은 모양이었다.
 지하 일천 장 땅속에 위치한 서실의 습기를 피하기 위해 곳곳에 숯과 쌀, 소금이 커다란 그릇 속에 담겨져 있었다.
 전소추는 일반 서책이 꽂혀 있는 서가에서 사서삼경을 먼저 꺼냈다. 당가에서 이미 읽어본 서책이라 다시 읽어보고픈 충동이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첫 장을 넘기는 순간 전소추의 뇌에서 반응이 즉각 왔다.
 제갈황이 혜광심어로 전해준 책의 내용과 뜻풀이가 발동한 탓이었다. 전소추는 그저 눈 도장을 찍는 것 같이 책장을 넘기며 안의 내용을 보고 있으면 저절로 뜻풀이까지 또렷하게 떠올랐다.
 사서삼경을 다 읽고 책을 덮는데 배에서 소리가 났다.
 쪼르륵-!
 칠 주야 동안 아무 것도 먹지 못해 배고픔을 알리는 신호를 보내는 것이었다.
 서실을 나와 제갈황이 가르쳐준 곳으로 가서 문을 여니 그 곳은 천연적인 커다란 지하 광장이 눈앞에 펼쳐졌다.
 중앙엔 연못이 자리잡고 있었고, 바닥엔 지령석균(地靈石菌)이 깔려 있었다. 바닥에 자생하고 있는 탐스럽게 자란 지령석균을 한 움큼 뜯어낸 후 덥석 베어 물었는데, 맛이 너무 써서 도저히 삼키지 못하고 뱉어냈다.
 “퉤퉤······! 아이고······! 산에서 먹던 이끼와는 전혀 맛이 다르구나! 어쩌지? 먹을 게 이것 밖에 없으니 큰일났네.”
 전소추는 연못으로 달려가 고개를 숙인 채 물을 마셨는데, 목구멍을 넘어간 연못의 물은 오장육부를 얼릴 정도로 차가웠다.
 “이곳에 오래 있었다간 전에 먹어보았던 음식에 대한 향수로 견디지 못하겠구나.”
 전소추는 연못에서 한가로이 노니는 물고기를 발견하고 입맛을 다셨지만 물이 너무 차서 들어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이 갑자의 내공을 지니고 있지만 운용하는 방법을 모르니 지금은 물고기가 화중지병(畵中之餠)이나 다름없었다.
 물가에 앉아 지령석균을 억지로 삼키고는 몇 모금의 물로 허기를 달래야 했다. 그 일은 고통을 수반하는 일이었지만 먹지 않는다면 뼈만 남기게 될 것이 분명하였기에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삼키려 애썼다.
 “끄윽······! 이제 배를 채웠으니 글이나 읽어야겠다.”
 서실로 돌아온 전소추는 서책을 꺼내 독서를 하다가 배가 고프면 지령석균과 몇 모금의 물로 허기를 달랬다. 그것의 맛은 매우 쓰지만 정신을 맑게 해주고 원기를 북돋아주게 하였다.
 무공을 익히는 무인(武人)의 내공을 늘려주는 희세의 영약이라는 것을 미처 알지 못하였다.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지만 머리 속에 온통 뒤죽박죽 하던 지식들이 정돈되기 시작했다.
 혼란스럽기만 하던 전소추는 일반서적이 있는 서가의 책을 전부 읽은 후에는 맑은 눈빛을 유지할 수 있었다.
 불경이 꽂혀 있는 서가의 경전은 내용도 어렵고 이해하기도 힘들었지만 자신도 모르게 깊이 빠져들었다.
 그 불경 중에는 소림사 장경각(藏經閣)에도 없는 불경들이 섞여 있었고, 불경을 읽는 전소추의 모습은 점차 대사찰(大寺刹)에서 수도하는 불승(佛僧)을 닮아 가는 듯하였다.
 전소추의 윤기가 흐르는 흑발(黑髮)이 허리 아래까지 치렁치렁 자랐을 때 불경을 모두 독파(讀破)하였다.
 전소추는 염화시중의 미소를 머금은 채 자신이 읽은 불경을 모두 제자리에 꽂아놓고 지리서가 있는 서가 앞에 섰다.
 지리서들은 무척 많은 사람들이 시대별로 도해(圖解)와 함께 기술해 놓은 것이었고, 제각각 나름대로 특성이 있었다.
 중원 전체에 자라고 있는 식물의 분포를 나타낸 것도 있었고, 동물의 분포를 나타낸 것도 있었다.
 각 지역의 금맥(金脈)과 철맥(鐵脈), 옥(玉)과 같은 광산에 대한 것도 있었으며, 기이한 약초가 자라고 있는 서식지를 표시해 놓은 곳도 있었다.
 지금은 이미 쇠해 없어진 문파가 위치하고 있던 자리를 표시해 놓는 것도 있었고, 최근에 만들어진 방파까지 빠짐없이 표시해 놓은 커다란 지도(地圖)도 있었다.
 중국 대륙을 감싸고 있는 해도(海圖)는 근거리에 있는 섬들의 이름과 거리를 표시해 놓고 있었다.
 주변국가의 지리를 국가별로 따로 서술해 놓은 서책도 있었는데 해동국(海東國), 왜(倭), 몽고(蒙古), 남황(南荒)등 변황삼십육국(邊荒三十六國)의 지리서였다.
 전소추는 서책의 내용과 도면을 완전히 이해하고 모든 내용을 줄줄이 말할 수 있을 때까지 읽고 또 읽었다.
 약초의 분포를 그려 놓은 서책은 약초의 효능 또한 기술해 놓았는데 지령석균에 대한 이야기도 나와 있었다.
 지하 천 장 밑 한빙담(寒氷潭)의 근처에서만 자라나는데 맛은 매우 쓰지만 혈맥(血脈)을 보호하고 뇌(腦)를 맑게 해주며, 일반인이 장복하면 질병 없이 장수(長壽)하고, 무공을 익히는 무인에겐 내공을 증진시킬 수 있는 영약(靈藥)이라는 것이었다.
 한빙담 가에서 지령석균을 입에 넣고 우물거리던 전소추는 책의 내용을 기억하곤 쓰디쓴 그것을 달게 먹었다. 그러나 쓴 것은 여전하였다.
 하루는 자신이 이곳에 들어온 지 얼마나 되었을까 생각하다가 벌떡 일어나 서실로 향했다. 하루라도 빨리 이곳을 벗어나려면 서가에 있는 무공을 익혀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공을 익히기 전에 먼저 모든 지식을 쌓고 싶었다.
 이곳을 벗어나 일가(一家)를 이룬다면 자식들에게 무식한 아버지라는 소리는 듣기 싫었던 것이 이유였다.
 돌아가신 아버지 전삼은 사람은 성실하고 정직하였지만 모두에게 무식하다는 놀림을 받은 것을 어린 전소추의 마음에 커다란 상처로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서실로 돌아온 전소추는 먼저 사서(史書)를 꺼내들었다. 그리고는 그대로 독서삼매경에 빠졌다.
 하(夏), 은(殷), 주(周), 진(秦), 전한(前漢), 후한(後漢), 서진(西晉), 동진(東晋) 시대를 거처 당(唐)이 시작되었고, 송(宋), 원(元)의 시대를 지난 후에 지금의 명조(明朝)시대가 된 것이 흥미진진하였다.
 그 시대의 제후(諸侯)와 왕들의 업적들이 자세히 적혀 있었고, 굵직굵직한 사건들이 열거되어 있었다. 간혹 서민들의 이야기도 섞여 있었는데, 각 시대마다 복장과 풍습이 지금과는 너무나 대조가 되어 가금 피식 실소를 터뜨리기도 하였다.
 사부 제갈황이 전소추의 뇌에 서책 속의 모든 내용을 각인 시켰다고는 하나 자신의 눈으로 확인을 하고 체계를 잡아야 했기에 이곳에서만 반년 이상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특히 만문독해진경(萬文讀解眞經)은 모든 문자를 풀이하는 귀중한 서책이었고 그 책을 보는데 오랜 시간을 보내야했다.
 거기엔 고대문자인 갑골문(甲骨文), 용형문(龍形文), 설형문(楔形文), 상형문(象形文), 과두문(??文)와 천축국(天竺國)의 범어(梵語)를 해독하는 풀이가 있었다.
 그것을 완전히 소화해 내느라 걸린 시간은 전소추가 무공을 익히는데 커다란 도움을 주게 될 것이다.
 다음은 진법서가 꽂혀 있는 서가를 찾았다.
 당가에서 당혁린이 진법을 설치하고 보여준 탓에 얼마나 무서운 위력을 보이는지 알고 있었던 그는 자신도 진법(陣法)을 익힐 수 있다는 생각에 들떠 있었다.
 다행히 맨 처음 꽂혀 있는 표지도 없는 고서(古書)에는 진법의 유래와 기초가 상세히 기술되어 있었다.
 오랜 옛날 미개한 원시인들은 사나운 동물의 습격을 피하기 위해 울타리를 만들어 자신을 보호했는데, 점차 함정(陷穽)도 만들어 놓고 나무를 뾰쪽하게 깎아 밖으로 향하게 하여 적의 습격을 막아 식솔들을 보호한 것이 진법이 시작된 유래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진(陣)의 기초는 태극(太極)으로 시작했는데 태초(太初)에 태극으로부터 만물이 형성되었고, 이때의 태극이라는 것은 음과 양이 서로 분화되지 않고 맞물려 있는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모든 것이 함께 어우러진 상태를 말하며 태극은 만물의 근원을 의미 한다는 내용을 읽은 전소추는 마저 읽어내려 갔다.
 음(陰)과 양(陽)으로 나뉘는 양의(兩意), 천지인(天地人)의 삼재(三才), 태양, 소양, 태음, 소음의 사상(四象), 금목수화토(金木水火土)의 오행(五行)이 있으며 동서남북(東西南北) 사방과 천지(天地) 즉 상하(上下)로 인간이 움직일 수 있는 모든 방위를 통칭하는 육합(六合)과 칠성(七星), 고대(古代) 복희씨(伏羲氏)가 지었다는 여덟 가지 괘(卦)인 건태이진손감간곤(乾兌離震巽坎艮坤)의 팔괘(八卦)는 주역에서 자연계와 인사계의 모든 현상을 음양을 겹쳐 여덟 가지 상으로 나타낸 것으로 육십사효(六十四爻)로 나뉜다고 적혀 있었다.
 팔괘의 방위와 중간의 중궁(中宮)을 합한 구궁(九宮), 십방(十方)에 대해서도 자세히 서술되어 있었다.
 물론 그것들을 역(逆)으로 풀이한 내용도 있었다.
 결국 진법은 그 것들을 이용하여 무궁무진하게 만들 수도 파훼(破毁)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모든 진법은 기초가 되는 그것들의 범주를 벗어날 수 없는 것을 깨달은 전소추는 막힘 없이 진법들을 익혀나갔다.
 정파(正派)의 진법들을 먼저 익힌 전소추는 사마외도(邪魔外道)의 진법들도 섭렵했다. 사물을 이용한 진법들은 이해하기 쉬웠으나, 살아 있는 생물을 이용한 진법은 이해하기 힘들었다.
 날아다니는 새들을 이용한 진법이나 곤충을 이용한 진법은 그 것들을 조정할 수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특히 여인들이 나신(裸身)으로 색혼진(色魂陣)은 더더욱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이가 어려 아직 여체의 신비에 대해 알지 못한 탓이었다.
 분진(粉塵)을 이용한 진법과 살아 있는 식물을 이용한 진법도 괴이하기는 마찬 가지였다. 분진은 시간이 경과하면 저절로 가라앉을 것이고 식물은 자라면서 변형되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 거의 일 년의 시간을 보내야 했던 그는 마지막 진법서를 내려놓으며 한숨을 쉬었다.
 “휴우······! 진법은 한도 끝도 없는 학문이다. 대부분 사람의 마음을 현혹시키는 진법이다. 후후후······! 이제 어떠한 절진(絶陣)이라도 나를 가둘 수는 없을 것이다.”
 그는 기관과 토목학에 대한 공부에 다시 빠져들었다.
 자신이 이곳에 들어올 때 보았던 진법과 기관이 얼마나 무서운 위력을 발하는지 확실히 실감할 수 있었다.
 막상 자신을 가둔 이곳을 빠져나가는 방법을 확실히 깨달았지만 기연으로 인해 얻은 내공을 자유롭게 쓸 수 있어야 하며 게다가 뛰어난 경신술을 익히지 못한다면 만사휴의(萬事休矣)라는 것도 동시에 깨달았다.
 결국 무공을 익혀 자신이 지니고 있는 공력을 마음대로 발휘하여야 했고, 축골공(蹙骨功)과 경신술(輕身術), 하늘을 나는 비공술(飛空術)을 완벽히 익히지 못한다면 이곳을 벗어날 길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전소추는 무공을 익혀야 했다.
 전소추는 먼저 정도의 무공비급이 있는 서가를 찾았다.
 이미 불경을 익히며 부동심(不動心)을 자신의 것으로 소화한 그였지만 비급의 내용을 보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말로만 듣던 상고시대의 무공조차 제대로 시전하려면 오랜 시간을 연마해야한 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특히 내공심법(內功心法)을 아무거나 익힌다면 상승무학을 익히지 못한 다는 것도 알아내었다.
 그는 닥치는 대로 비급들을 읽고 깨우쳤으나 섣불리 내공심법을 운용하지 않았다. 자신에게 맞는 것을 찾으려 했기 때문이다.
 자신도 모르게 지령석균과 한빙담의 영수(靈水)를 수년간 장기 복용하였기에 단전에 응결된 내공은 이미 삼 갑자 가까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먼저 무당파의 실전 절기인 양의심공(兩意心功)을 극성으로 익혀 마음을 둘로 나눌 수 있게 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자신이 먹은 극음빙청태(極陰氷靑苔)와 천음마의(天陰魔蟻), 한빙담의 영수는 극음(極陰)의 성질을 띤 기운이었고, 홍관금선사왕(紅冠金線蛇王)과 지령석균은 극양(極陽)의 성질을 띤 기운이었기에 불의 신이라 불린 축융(祝融)의 축융화보(祝融火譜)에 있는 축융화극신공(祝融火克神功)과 천 년 전 중원천하를 얼음으로 얼려 버린 빙제(氷帝)의 빙하태음신공(氷河太陰神功)을 동시에 익히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사부도 없이 양의심공을 익히는 것은 사막에서 바늘 찾기보다 어려웠다. 하지만 전소추는 한 달여 만에 익혔고 그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었다.
 무당파의 양의심공은 도를 닦는 도인들조차 수십 년간 정진하여야 겨우 심득을 얻을까 말까한 절기였기 때문이었다.
 일단 양의심공을 이용해 정도의 모든 무공비급을 읽고 깨우친 전소추는 연무관의 좌대에 올라 결가부좌를 취하고 축융화극신공의 내공구결대로 진기를 유통시켰다. 곧 삼매경에 빠진 그의 몸은 달궈진 쇠처럼 붉게 달아올랐고, 그의 머리 위엔 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석실이 온통 김으로 뒤덮일 때쯤 그의 머리 위엔 세 개의 둥그런 화륜(火輪)이 떠올랐다가 그의 콧속으로 스며들었다.
 대주천을 마친 전소추는 엄청난 기운이 단전에서 솟구치는 것을 알고 기뻐했다.
 곧 그는 빙하태음신공의 연공에 들어갔다. 그러자 그의 몸이 급속도로 냉각되며 주변을 얼려 나갔다. 안색은 차갑다 못해 파리하게 변하였고, 석실 안에는 성애가 끼기 시작하였다.
 머리 위엔 세 개의 빙륜이 빙글빙글 돌고 있었고, 대주천을 마칠 때쯤 그의 콧속으로 스며들었다.
 전소추는 단 한 번의 대주천만으로 축융화극신공과 빙하태음신공을 오성(五成)까지 연성하였고, 이는 축융과 빙제가 보더라도 믿지 못할 괴변이라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전소추는 둘 다 따로 대성한다면 나중에 합치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쉬지도 않고 두 신공을 동시에 운공하기 시작했다.
 양의심공으로 둘로 나뉜 그의 뇌는 좌측과 우측으로 나뉘어 신체에 명을 내렸고, 곧 그는 몸의 절반은 붉게 나머지 반은 파랗게 변한 채 각기 다른 성질의 신공이 운기(運氣)되고 있었다.
 전소추는 둘로 나뉘어진 부분이 따로 익힐 때와는 다르게 생전 처음 극심한 고통이 수반되자 멈추고 싶었으나 지금 멈춘다면 주화입마되어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이를 물고 정신을 가다듬었다.
 화도(火刀)와 빙창(氷槍)으로 찌르는 듯한 고통이 점차 사라지며 상쾌하게 느껴질 때는 전소추가 고통을 인내하며 삼십삼 주천을 마친 이후였다.
 그의 머리 위엔 얼음 같기도 하고 불같기도 한 이상한 기운의 고리가 다섯 개가 돌고 있었고, 그의 표정은 마치 득도한 고승(高僧)같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눈을 뜨자 우측은 홍안(紅眼)이었고, 좌측은 청안(靑眼)이었다.
 처음 본 사람은 놀라 자빠질 괴이한 양안을 지니고 있었지만 정작 본인은 너무도 상쾌하고 개운하여 날아갈 것만 같았다.
 “으하하하······! 성공이다. 그 누구도 합치지 못했던 극양신공과 극음신공을 합쳤다.”
 전소추는 자신이 연성한 신공을 펼쳐 보이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 우수(右手)를 천천히 뻗었다.
 쓔우우욱-!
 우르르릉-!
 그의 장심에 화가(火氣)를 띤 강기가 모이더니 전면 벽을 향해 뻗어나갔다. 석벽을 강타한 강기는 연무관을 진동시켰고, 석벽은 불로 지진 듯한 두 치 깊이의 장인이 새겨졌다.
 우수를 보고 미소를 띤 전소추가 좌수를 내밀었다.
 쓔우우욱-!
 우르르릉-!
 이번에도 연무관을 진동시킨 그의 장강(掌?)은 두 치 깊이의 장인을 찍어 놓았고 그 주위는 온통 얼음으로 뒤덮여 있었다.
 양수(兩手)를 한 번에 뻗고 싶었지만 연무관의 울림이 심상치 않아 그만 둔 전소추는 앞으로 전력을 다해 연습하는 일을 삼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전소추는 자신이 무공을 익혔지만 초식을 능숙하게 시전하려면 오랜 시간 연마를 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거의 쉬지 않고 무공연마에 힘썼다.
 구파일방의 무공초식과 백도의 무공초식은 각기 특성을 살리는 일이 중요했다. 초식의 변화가 심한 것도 있었고 단순한 것도 있었지만 익히기 힘든 것은 마찬가지였다.
 일단 정도의 무공을 익힌 후 사마외도의 무공을 익힐 요량으로 서실엔 가지도 않고 연무관과 침실, 민생고를 해결하기 위해 한빙담을 찾았다.
 수면 중에도 한쪽 뇌는 항상 깨어 있었고, 오로지 무공만 생각하고 있었다. 심지어 지령석균을 먹으면서도 무공을 연마하고 있었으니 하루 종일 무공을 익힌 그는 남들보다 몇 배 뛰어난 경지에 접어들고 있었다.
 무공 입문은 늦었지만 그는 상상도 못할 빠르기로 정도의 무학(武學)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있었고, 시간은 쏜 화살처럼 흘러가고 있었다.
 그의 긴 머리카락은 거의 무릎까지 치렁치렁 내려와 발가벗은 몸을 가려주고 있었다. 지령석균과 한빙담의 영수만 마신 까닭에 약간 여윈 듯 보였다.
 한빙담의 가장자리에 선 전소추는 물 속에서 유유히 유영하는 빙어(氷魚)를 향해 손을 뻗었다.
 물 속을 노닐던 빙어가 움칫 움츠리며 도망을 가기 위해 꼬리를 힘차게 움직였지만, 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가 손으로 딸려왔다.
 빙어를 양손에 한 마리씩 쥔 전소추가 대소를 터트렸다.
 “하하하······! 과연, 천수회인공(千手廻引功)은 절묘하구나. 화중지병(畵中之餠)으로 보였던 이놈들을 이제야 먹어보겠구나.”
 전소추는 좌수에 쥔 빙어를 날로 입에 넣고 씹었다.
 몹시 차가운 빙어는 쫄깃쫄깃 씹히는 감촉이 일품이었고, 비린내는커녕 달콤한 향이 났다.
 우수에 쥔 물고기는 삼매진화를 일으켜 구웠는데, 너무 강력한 화기가 일어나 껍질이 모두 시커멓게 타 버렸다.
 “아이고 아까워라. 몇 년만에 먹는 고기인데 태워 버리다니······.”
 전소추는 조심스럽게 타버린 껍질을 벗겨내고 입에 넣었는데 살점이 입에 살살 녹는 맛이 기가 막혔다.
 “우와······! 정말 맛있구나. 쩝쩝쩝··· 몇 마리 더 먹고 싶지만 나중을 위해 참아야지······.”
 전소추는 물을 먹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가 얼굴을 가린 머리카락을 위로 쓸어 올렸다. 그때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던 그는 자신의 눈빛이 상이한 빛을 발하는 것을 보고 크게 놀랐다.
 ‘이런······! 남들이 보면 괴물이란 소리를 듣겠구나. 부지런히 수련하여 빨리 십이성(十二成)을 이뤄야겠구나!’
 그는 즉시 연무관으로 달려가 축융화극신공과 빙하태음신공을 동시에 운기하여 운공에 들어갔다.
 삼매경에 빠진 그의 전신엔 서기가 맴돌았고, 서로 다른 기운인 음과 양은 그의 전신 세맥을 거침없이 두드리며 강건하게 만들고 있었다.
 전에는 반으로 나뉘어 서로 상충하던 두 기운은 이제 조금씩 화합을 하는지 서로 밀쳐내지 않고 융화하고 있었다.
 아직 두 눈의 색은 조금 다르게 보였지만 처음 괴이하게 보일 때보다는 많이 누그러져 있는 상태였다.
 코밑과 턱엔 뻣뻣한 수염(鬚髥)이 자라났고, 양물 주위와 겨드랑이에 거뭇거뭇한 터럭이 나기 시작했을 때에 정도의 대부분 무공초식을 자유롭게 시전할 수 있었다.
 그 때가 되서야 다시 서실을 찾은 전소추는 사마외도의 무공비급을 꺼내들었다.
 비급의 내용을 읽던 그는 고개를 저었다. 익히기는 쉬웠지만 익히는 방법에 문제가 많은 사악한 무공이었던 것이다.
 그는 많은 비급들 중에서 잔인한 수법의 무공을 가려내었고, 시신이나 여인과 어린아이를 이용해 익히는 무공은 비급을 찢어 버리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눌렀다.
 이 모든 것이 제갈세가의 것이지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자각하였던 것이다. 또한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는 말이 있듯이 자신이 강호에 출도하였을 때 사마외도들을 효과적으로 물리치기 위해선 그것들도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속으로는 엄청난 위력을 지닌 마공(魔功)이나 사공(邪功)이라 할지라도 자신이 익힌 정도의 무공만으로도 모두 상대할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전소추는 사마외도의 무공비급들을 서탁에 차곡차곡 쌓아 놓았다. 그는 양의심공으로 한쪽 뇌로는 읽는 동시에 다른 쪽의 뇌로는 그것을 이해하고 익히는데 할애하였다.
 이미 무수한 무공을 익힌 전소추는 그것들을 오득(悟得)하면서 매우 놀라워하였다. 그 중엔 자신이 익힌 정도의 무공보다 강한 위력을 지닌 무공이 섞여 있었던 탓이었다. 하지만 혹독한 수련 끝에 모두 자신의 것으로 소화할 수 있었다.
 비록 능수능란하게 펼치지는 못하였으나 무공을 익히는데 걸림돌이 되는 것은 없었으며, 그 무공들의 장단점을 파악하여 파해(破解)할 수 있는 경지까지 올랐다.
 전소추가 아쉬워하는 부분은 의술에 대해 거의 문외한이라는 것이었다.
 물론 영초나 영물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었지만 얼마의 분량을 쓰고 어떻게 배합하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무공을 전부 익힌 전소추는 맨 마지막 서가에 먼지를 뒤집어 쓴 채 놓여 있는 고대문자가 적혀 있는 죽편을 집어들었다.
 금방이라도 바스러질 것 같아 조심스레 펼친 전소추는 그 죽편의 내용이 상고시대의 무공을 기술해 놓은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선비삼일 괄목상대(刮目相對)라고 시대의 흐름에 따라 현재는 옛것보다는 훨씬 발전되어 현재의 것보다 나을 것이 없다고 판단하였다.
 다만 정신감응으로 타인과 의사소통(意思疏通)을 할 수 있다는 것만은 매우 놀라웠다. 그러나 쌍방 모두 익혀야 제대로 소통이 되는 단점이 있는 것이 아쉬운 부분이었다.
 원시부족간에 사용되어 이름조차 없었지만 두 사람이 익힌다면 전음입밀(傳音入密)이나 육합전성(六合傳聲)보다 쉽게 배울 수 있는 것이었다.
 이제 전소추는 자신이 익힌 모든 무공을 유효 적절하게 시전할 수 있게 연마하는 일만 남았다.
 수백 종의 경공술과 십팔반병기(十八班兵器)를 이용한 무공들도 익혀야 했고, 암기술과 변장(變裝)을 위한 역용술(易容術), 그리고 기환술(奇幻術) 등도 익혀야했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그의 무공은 급속도로 비약하였지만 그곳엔 십팔반병기와 암기가 없어 제대로 시전해 볼 수 없었다.
 물론 제갈세가의 가주들 앞엔 그들이 사용하던 병기가 진열되어 있었지만 자신은 결코 이곳의 주인이 아니라는 생각에 그것들을 건드릴 마음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전소추는 자신의 내공 화후가 삼 갑자여서 어검술(御劍術)과 같은 상승무공과 막대한 내공을 가져야 펼칠 수 있는 무력답공(無力踏空)같은 경신술을 간신히 흉내 정도가 되자 이곳을 떠나고픈 마음이 절로 생겨났다.
 한빙담의 빙어는 전소추가 잡아먹어 숫자가 현저히 줄어들어 그 많던 것들이 이제 겨우 수십 마리가 남았을 뿐이었다.
 다음 제갈세가의 가주가 들어와 자신의 일을 마치기 위해 생활하려면 최소한 빙어들이 자연 번식될 정도의 수효는 남겨 놓아야 된다고 생각하였기에 먹고 싶어도 참았다.
 오랜 세월이 흐른 후 연무관에선 수십 개의 희미한 인영이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의 속도로 경신술을 펼쳐내고 있었다.
 분명 제갈가주지묘에 살아 있는 자는 전소추 뿐이었지만 지금 연무관 안에는 남녀노소를 비롯해서 제각각 다른 모습을 한 수십여 명의 인원이 있었다.
 휘리리릭-!
 수십여 명의 모습이 한곳으로 몰려드는가 싶더니 움직임을 멈췄다. 제각각 다른 모습과 자세를 취하고 있었던 분영은 전소추가 변체환용술(變體幻容術)과 이형환위보(移形換位步)를 동시에 펼친 결과였다.
 “하하하······! 이제 이곳을 떠날 때가 되었구나······!”
 길게 자란 장발로 자신을 가리고 있던 전소추의 모습은 약간 마른 듯 보였고, 안색은 몹시 창백하게 보였다.
 그가 그렇게 보이는 것은 지령석균과 한빙담의 영수만 장기간 복용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가끔 빙어를 잡아먹긴 했어도 영양분을 골고루 섭취하지 못한 까닭이기도 하였다.
 무공을 연마하는 동안 자란 치렁치렁한 머리는 발목까지 내려와 약간 거추장스러웠지만 의복이 없는 전소추는 장발을 의복인양 나신을 가리운 채 서 있었다.
 흐트러진 머리카락 사이로 그의 오관이 드러나 있었는데 절세미남에 못지 않은 그런 대로 준수한 모습이었다.
 그의 가슴에 있는 활짝 핀 도화모양의 붉은 점은 명치를 가리운 채 기이한 체향(體香)을 뿜어대고 있었다.
 전소추는 자신이 읽은 괴이지(怪異誌)에서 수 천년에 한번 도화성(桃花星)의 정기를 받은 사내 아기가 태어나는데 그 신체는 천향지극색염지체(天香至極色艶之體)라고 불리며 스스로 원치 않아도 수많은 여인들이 따른다는 내용을 본적이 있었다.
 그의 안광은 내공 화후가 깊어져 안으로 갈무리가 되었는지 평범하게 보였고, 홍색과 청색을 띄던 안광도 자세히 살펴보지 않으면 느낄 수 없을 만큼 희미해져 있었다.
 다만 그가 축융화극신공과 빙하태음신공을 따로 펼칠 때만 그의 눈빛은 홍색과 청색으로 물들여졌는데, 최근 들어 두 개의 신공을 어느 정도 서로 융합시켜 새로운 경지에 올라 있었다.
 아직 이름조차 짓지 못한 그의 신공은 한기와 열기가 합쳐 서로 몸을 꼰 두 마리 용(龍)의 형태로 그의 장심에서 뻗어나갔으며 청강석으로 만든 벽에 다섯 치 깊이의 선명한 장인(掌印)을 새겨놓곤 하였다.
 장인이 새겨진 석벽의 주위는 살짝만 건드려도 가루로 부서져 내렸다. 아마도 처음 연무관을 만들 때 일 장 두께의 청강석을 이용하여 만들지 않았다면 벌써 무너져 내렸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무공초식을 익히는 동안 내공을 사용 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한 가지 이상한 점은 전소추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엄청난 분량의 지령석균과 한빙담의 영수를 복용하였는데, 단전에 축척만 될 뿐 내공이 더 이상 증진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의 효능 때문인지 그의 삼 갑자의 내공은 마르지 않는 샘처럼 언제나 줄지 않고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서고에 있던 서책의 내용을 모두 뇌리에 각인시킨 전소추는 서책들을 원래의 위치에 꽂아놓고 문을 닫고 나왔다.
 몇 모금의 한빙담 영수와 한 줌의 지령석균으로 허기를 달랜 전소추는 그 안의 물건이 모두 원위치 되었는가를 꼼꼼하게 살피더니 대전으로 나와 자신의 사부의 유체가 모셔진 자리로 가서 구배를 올렸다.
 “사부님! 이제 이곳을 떠나 세상으로 나가겠습니다. 이곳에서 익힌 무공은 힘이 없어 억울한 사람들을 위해 사용하겠습니다.”
 벌떡 일어선 전소추는 기관을 작동하여 팔각형의 석실로 나가는 문을 열었다. 온갖 기관과 진법을 익힌 전소추에겐 그곳을 벗어나는데 문제 될 것이 없었다.
 자칫 한발만 잘못 딛어도 기관이 작동하는 낭패를 보겠지만 그에게는 제갈가주지묘가 후대에까지 안전하게 남겨져 있게 하여야 한다는 사명이 있었다.
 잘못 건드려 기관이 작동한다면 사부 제갈황에게 엄청난 누를 끼치는 일이었기에 그는 조심스럽게 신형을 움직였다.
 원형의 석실과 바둑판무늬가 있는 석실을 빠져 나온 전소추는 어기부운(御氣浮雲)의 경신술로 오십 장 거리를 사뿐히 날아와 석문을 열었다.
 자신이 이곳에 떨어져 내릴 때 처음 왔던 곳으로 나온 전소추는 어렸을 때 입었던 갈기갈기 찢어져 부스러진 의복 옆에 은자 일백사십 냥과 금원보 하나가 떨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훗훗······! 이곳을 빠져나가면 제일 먼저 의복부터 사 입어야겠구나······!”
 한동안 자신이 떨어져 내린 천장에 시커먼 입을 벌리고 있는 구멍 앞에서 주위를 둘러보며 회한에 젖었던 그는 축골공을 시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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