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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가스 1

2018.01.02 조회 554 추천 3


 기가스 1권
 프롤로그
 
 
 화성 옛 서울 시티의 허름한 지하 술집.
 이곳은 2차 화성 전쟁의 퇴역병들이 주로 모이는 곳이었다. 옛 화성의 붉은 기병(Red cavalry Corps), 연방 육전군의 강하엽병, 우주 함대의 오퍼레이터 등등. 다들 왕년의 활약은 시궁창이 되어 이곳에서 술로 달랬다. 더 이상 그들은 영웅이나 군인이 아니었다. 그저 골치 아픈 쓰레기들일 뿐이었다.
 온갖 쓰레기들의 집합소인 그 술집 가운데엔 테이블이 하나 놓여 있었고 거기에 모든 스포트라이트가 향하고 있었다. 휘리리릭. 리볼버가 그 탁자 위에서 돌았다. 사람들은 침을 꿀꺽 삼키고 리볼버의 총구 끝이 향하는 방향을 쳐다봤다. 탁자의 옆에는 시체가 몇 구나 쓰러져 있었다.
 탁. 긴 머리의 사내가 리볼버를 잡았다. 그의 앞에 앉아 있는 털보 녀석은 술에 취해 낄낄낄 웃고 있었다. 러시안 룰렛. 맨 정신으로는 이 엄청난 긴장감을 버틸 수 없었다.
 “이번에도 살 수 있을까? 흐흐흐흐, 네놈의 운도 여기서 끝일 거다.”
 “······.”
 찰칵. 한 발이 장전돼 있는 리볼버의 실린더가 키릭 움직였다. 세이프였다. 긴 머리 사내 앞에 있는 털보 놈의 표정이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졌다. 방아쇠를 잡아당긴 건 벌써 네 번째. 통합 45구경 콜트 파이슨에는 총 6발이 들어간다. 이제 50 대 50의 싸움이었다.
 털보 녀석은 울기 일보직전이었다. 만약 재수 없게 자신이 걸리면 반반 확률의 리볼버를 잡아당겨야 했다. 긴 머리 사내는 놈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면서 울지도 웃지도 않았다. 그저 콜트 파이슨을 탁 놓고 한 바퀴 돌렸다. 빙글빙글. 마치 영겁의 시간처럼 리볼버가 돌고 있었다. 털보나 긴 머리 사내에게 돈을 건 사람들은 다시 침을 꿀꺽 삼키면서 리볼버의 총구가 어디 설지 지켜보고 있었다.
 달그락. 마침내 총구는 털보를 가리키면서 서 버렸다. 반반의 승부. 옆에는 자동 소총을 든 게임 매니저가 턱을 끄덕거렸다. 목숨을 담보로 한 게임이다. 털보는 돈을 있는 대로 탁자에 올리면서 두 손을 들었다.
 “포, 포기. 나, 나는 먹은 돈을 토해 내겠어.”
 “아니, 포기해선 안 돼.”
 “이, 이봐 긴 머리. 도, 돈이 문제야? 돈이라면 내가 꽁지돈을 써서라도 줄게. 배상금이 얼마든 내겠어. 난 못 해, 못 한다구! 봐봐. 오줌까지 지리고 있어.”
 테이블 아래로 털보 놈이 꼴사납게 오줌을 질질 흘리고 있었다. 긴 머리 사내는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반반. 그에게도 마찬가지 확률이었다. 만약 털보가 살아남는다면 마지막에 권총의 방아쇠를 잡아당겨야 할 건 자신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털보의 배상금을 받고 게임을 끝내게 된다. 하지만 긴 머리 사내는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털보는 덜덜 떨면서 옆에 서 있는 게임매니저를 쳐다봤다. 게임매니저 역시 다시 턱을 으쓱거렸다. 게임은 계속된다. 방아쇠를 당겨야 한다. 털보는 질질 짰다. 이미 테이블 밑에는 시체들이 널려 있었다. 자신도 그 꼴이 된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솟구쳐 오르는 것이다.
 쓰레기다. 사람의 목숨이 쓰레기처럼 버려지고 있다. 마치 전쟁터로 되돌아온 듯 화성군 마크를 어깨에 문신으로 새긴 털보 녀석이 울었다. 어쩔 수 없었다. 게임 매니저에게 죽나 방아쇠를 당기다 죽나 결말은 매한가지였다.
 틱. 하지만 놀랍게도 놈은 살았다.
 “으하하······ 으하하하하! 으아아아아아! 봤느냐! 난 살아남았다! 봤냐구! 크하하하하하!”
 여기저기서 긴 머리에게 건 놈들이 아우성치고 싸움질이 벌어지기 직전이었다. 게임매니저가 천장을 향해 총을 타다다다 쐈다. 일순간 분위기가 사그라지고 다들 침을 꿀꺽 삼켰다. 이곳을 관리하는 놈들은 악명 높은 이탈리아 마피아 알만조 패밀리였다.
 “어이, 긴 머리. 배상금을 토해 내시지. 아니면 죽든가.”
 “······.”
 긴 머리는 테이블 옆에 쓰러져 있는 열 구 정도의 시체를 바라봤다. 전부 이 기이한 사내에게 도전하다 죽은 놈들이었다. 이 긴 머리 사내의 운도 오늘은 이것으로 끝인 것처럼 보였다. 이제 막대한 배상금을 내면 방아쇠를 안 당기고 살 수 있었다. 하지만 사내는 오히려 칩들을 ‘거는 쪽’에 더 걸었다.
 “어? 이봐, 내 말이 안 들리는 거야? 게임 끝났다고.”
 “아직 한 발이 이 리볼버에 들었다.”
 “이 미친 새끼가? 죽고 싶어 환장했나?”
 “아니. 난 죽지 않아.”
 “뭐?”
 뭐라고 말릴 사이도 없었다. 놈은 다시 리볼버를 돌리고 탁 손으로 그걸 잡았다. 총구는 긴 머리 사내 쪽을 향해 있었다. 자살 행위였다. 긴 머리 사내는 ‘돈을 더 내고’ 레이즈를 걸었고 그 권리로 총을 한 바퀴 더 돌렸는데 자신을 쏘려고 하는 것이다.
 술집의 모든 쓰레기들은 이 긴 머리 사내를 쳐다보고 있었다. 한 번도 걸리지 않았다. 그 운이 이 사내에게 다시 한 번 통할 것인가? 리볼버는 자동 권총과는 다르다. 하나하나가 약실이고 고장도 나지 않는다. 다섯 번을 당겼으니 이제 한 번 더 당기면 반드시 발사될 수밖에 없었다.
 긴 머리 사내는 천천히 리볼버를 들어서 머리에 겨눴다. 바텐더는 오늘 치워야 할 시체가 하나 늘었구나 하고 연필로 장부에 빗금을 그었다.
 틱.
 하지만 리볼버는 격발하지 않았다. 마주 앉아 있는 털보도 게임을 주관하는 마피아 떨거지도 구경하는 모든 사람들도 입을 떡 벌렸다. 긴 머리 사내는 리볼버를 테이블 위에 던지고 걸린 칩들을 쓸어 담았다.
 “자······ 잠깐. 잠깐만. 속임수 아니야? 이거 속임수 같은데? 어이, 패밀리! 확인해 봐! 확인해 보라구!”
 털보가 길길이 날뛰었다. 방금 전 죽음의 문턱을 갔다가 온 사람이니만큼 더더욱 날뛸 만했다. 하지만 얼떨떨하긴 마피아 놈들도 마찬가지였다. 총은 그들이 준비한 것이다. 격발 불능이 날 리가 없었다. 다른 놈이 잽싸게 리볼버를 까서 안에 든 총알을 확인했다. 총알은 정확히 총구에 물려 있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은 공이치기가 탄알을 때리는 소리를 들었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이봐! 잠깐만! 거기 서!”
 “······.”
 긴 머리 사내는 듣지 않았다. 그저 칩 움큼을 휙 하고 위로 던졌다. 다시 술주정뱅이와 퇴역병 쓰레기들이 난리를 피웠다. 자동 소총을 천장에 난사해도 소용없었다. 자그마치 100달러 칩도 여기저기 흩뿌려진 상태였다.
 “이 새끼가아아아아아아!”
 긴 머리 사내는 미친 듯이 칩을 줍는 사람들을 보면서 멀뚱히 서 있었다. 마피아 놈들은 참을 수 없었다. 이건 자신들 패밀리에 대한 도전이며 이걸 내버려 뒀다간 화성에서 도박 장사는 다 한 거였다. 긴 머리 사내는 마치 자신을 쏴 달라는 듯 움직이지 않았다.
 자동 소총이 긴 머리 사내에게 향했다. 하지만 어이없게도 방아쇠를 누르자마자 털보의 머리통에 자동 소총탄이 정신없이 처박혔다. 분명 긴 머리 사내를 겨눴다. 또다시 긴 머리 사내의 뒤에 있던 놈이 긴 머리 사내를 노렸다. 탕탕탕. 세 발의 총탄은 한 발도 사내를 맞히지 못했다.
 대신 자동 소총을 쥔 그놈이 눈알에 총알을 맞고 쓰러졌다. 기이한 일이었다. 거리는 10여 미터. 못 맞히는 게 이상한 거리였다. 그런데도 긴 머리 사내는 기적처럼 단 한 발도 맞지 않고 우뚝 서 있었다.
 비로소 알만조 마피아 패거리들이 와르르 쏟아져 나오면서 칩을 주우려는 놈을 걷어차고 밖으로 내쫒았다. 탕탕탕! 각양각색의 총기가 좁은 술집을 가득 메우는데도 사내는 꿈쩍하지 않았다. 그리고 연이어 동료들을 쏘는 마피아 조직원들. 피떡이 되어 바텐더에게 나가떨어지고 총에 맞아 신음하면서도 자신의 동료들을 조준했다.
 분명 전부 저 기이한 긴 머리 사내를 쏘려고 했다. 하지만 저 사내는 단 한 발의 총탄도 맞지 않았다.
 “······.”
 앗 하는 순간에 술집의 조직원들은 모두 바닥에 나뒹굴었다. 칩을 줍던 쓰레기들도 마치 성자를 보는 듯한 얼굴로 긴 머리 사내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사내는 무표정한 얼굴로 테이블 위의 리볼버를 주워들었다. 여전히 아까의 한 발이 실린더 안에 남아 있었다.
 “소대. 돌입.”
 그 순간 옛 화성군의 특무 부대 복장을 한 녀석들이 일제히 술집 안으로 쳐들어왔다. 그들은 마피아 놈들의 목을 따고 칩을 주우려던 쓰레기들의 목도 땄다. 같은 화성군이라고 외쳐도 소용없었다. 얼굴을 덮는 헤드 모듈을 쓴 놈들은 총검으로 이 술집에 있는 모든 놈의 숨통을 끊어 버렸다.
 아니, 딱 한 명은 살아 있었다. 바텐더는 부들부들 떨면서 카운터 뒤에서 알만조의 직통 번호를 눌렀다. 그에게 리볼버를 든 사내가 저벅저벅 다가갔다.
 그리고 총을 겨눴다.
 “뭐······ 뭘 바라는 거요?”
 “알려라.”
 “예? 그게 무슨······.”
 탕. 의뭉스럽게 번호를 누르려던 바텐더의 손이 꺾였다. 아까는 격발되지 않았던 리볼버가 멋들어지게 총알을 내뱉은 것이다. 바텐더는 어찌 된 상황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긴 머리 사내는 옛 화성군의 군복 허리띠에 리볼버를 꽂아 넣고 말했다.
 “알만조에게 전해라. 우리가 돌아왔다고.”
 “크으으윽······ 우, 우리라뇨?”
 “화성군 특무 부대 이-오공일 킨더가튼.”
 “예?”
 킨더가튼 소대.
 그건 전장의 도시전설에 가까운 명칭이었다. 불침번의 목을 따는 화성군의 특무 부대라든지 연방군의 본부를 폭파한 전설의 화성군이라든지. 그런 게 있다더라 하는 도시전설이 되어 알음알음 서울 시티에 떠돌 뿐이었다.
 그 전설의 킨더가튼이 마침내 현실이 되어 화성에 나타난 순간이었다.
 “바이파이. 알만조. 지구의 개새끼들. 이제 최강이 누군지 각인시켜 주마.”
 
 
 1장 All D’s Blues
 
 
 인류가 가장 먼저 개척한 천체에는 아름다운 구조물이 있었다. 기하학적으로 만들어진 동심원의 달 거주구였다.
 달 궤도권의 거주구는 지구에서도 볼 수 있었다. 기묘한 다각형을 이루고 있는 아름다운 꿈의 도시. 여기서 살 수 있는 사람들은 화성의 오르페우스지역처럼 꽤나 돈이 있는 사람들이다. 깨끗한 물과 쾌적한 주거시설. 음식도 원한다면 지구에서 오는 천연 식품들을 먹고 마실 수 있었다.
 하지만 달에게도 그림자는 있었다. 달의 경우는 그것이 달의 앞면이냐 뒷면이냐로 갈렸다.
 늘 지구를 볼 수 없는 반대편 광산은 개발이 덜 된 곳이다. 웰즈의 타임머신처럼 몰록과 엘로이로 나뉘어져 있는지도 몰랐다. 달 거주구의 아름다운 풍경과 이 깊숙한 광산은 천당과 지옥 정도의 차이였다. 사람들은 그래서 달의 뒷면을 이렇게 불렀다.
 바텀 루나(Bottom lunar)라고.
 바텀 루나에서도 광산은 언제나 그렇듯이 온갖 쓰레기들이 몰리기 마련이었다. 술주정뱅이, 마약중독자, 비렁뱅이 들. 개중에는 구겨진 양복을 입고 있는 광산 엔지니어도 있지만 대개는 하층민들이었다. 지독한 패배주의와 인생의 끝자락을 떠돌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 광산의 밑바닥에서 따라락 마작패가 오가고 중국인들의 왁자지껄한 대화 소리가 들렸다. 정식 마장은 아니었다. 흑사회가 이 마장을 잡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저쪽에는 월면 경찰-루나 폴리스도 마작을 치고 있었다. 부패와 패배주의가 맴도는 패배자들의 전당이었다.
 “쩌 와즈 하이 잉러! 이띵 쭈오 선머 다오구이!(이 꼬마 녀석 또 이겼어! 이 새끼 어떤 수작을 부리고 있어!)”
 “에헤이. 진정들 하셔요. 설마 내가 속임수를 쓴다고 생각하는 거야?”
 “스더. 니······ 니······.”
 “아이야······ 보라구. 난 웃통을 벗고 있는데 어떻게 속임수를 쓰냐고?”
 인도계 젊은이였다. 짙은 눈썹과 날카로운 눈동자가 굉장히 매력적인 사내였다. 그는 웃통을 벗고 자신의 가슴과 등을 찰싹 때렸다. 저쪽에서 팔짱을 끼고 있던 덩치가 다가왔다. 중국어로 욕을 시부렁거리던 놈이 덩치를 보고 조용히 입을 닫았다.
 인도계 청년은 다시 마작패를 섞었다. 그 순간 그의 손 바로 옆으로 나이프가 쾅 하고 박혔다. 덩치였다.
 “거 아자씨들 피곤하게 사시네. 속임수를 못 밝히면 당신들 손 날아간다는 거 알지?”
 “아니. 네가 털어먹은 돈만 일만이야.”
 “그래서 어쩌라고. 먹은 돈을 토해 내라는 거야? 좀 봐줘라. 다 박봉에 시달리는 사람들끼리.”
 중국인과 러시아인이 흐흐흐흐 웃었다. 광산 노동자의 월급은 뻔할 뻔 자였다. 월급을 받고 여자를 하나 사고 생활비로 이래저래 날리면 그걸로 끝이다.
 저축? 그런 건 저 반대편 밝은 쪽의 거주구 사람들이나 하는 것이다. 하루 벌어서 하루를 태우고 끝낸다. 사설 경마나 도박장에서 돈이나 따면 그나마 형편이 풀린다.
 사람들의 이목이 덩치와 인도계 청년에게 쏠렸다. 인도 청년은 싱글싱글 미소까지 띠우고 있었다.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의자의 등 뒤에는 하와이안 셔츠와 용무늬가 그려진 스카잔(일본에서 유래한 싸구려 용무늬 잠바의 통칭)이 펄럭거렸다.
 “초대하지.”
 “어디로?”
 “VIP실로. 칩을 가지고 따라와.”
 “헤에, 영광인데? 판돈이 큰 빕쁘룸이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
 “그럼 이야기가 빠르지.”
 그는 칩을 쓸어 담아서 하와이안 셔츠에 보자기처럼 싸매고 용무늬 잠바도 어깨에 턱 걸쳤다. 쓸데없는 근육이 하나도 없고 여기저기 흉터가 난 것이 이 청년 역시 어지간한 아수라장을 헤쳐 온 모양이었다.
 “니 쓰러······.”
 “에헤이, 재수 없는 소리 하기는. 돈을 쥐고 있는 한 안 죽는다고. 아자씨, 원한은 없으니까 다음에 또 즐겁게 치자고? 아, 이건 빕쁘룸으로 가는 기념품.”
 청년은 100달러짜리 칩을 던지고 덩치의 뒤를 따랐다. 뒤에서 중국어로 뭐라 뭐라 소리가 들렸다. 그는 중국어를 잘 모르지만 그 뜻은 알고 있었다.
 ‘넌 그 사람을 따라가면 죽는다.’
 덩치는 가다가 말고 청년에게 담배를 건넸다. 지구산 최고급 시가였다. 청년은 담배를 보고 도리도리 고개를 흔들었다.
 “몸 생각하는 건가?”
 “아니, 돈 생각. 담배 중화제나 수술을 받을 돈이 없걸랑.”
 덩치는 피식 웃고는 놈이 추파춥스를 꺼내는 걸 바라봤다. 먹는 형태의 마약일지도 몰랐다. 이런 합성 마약은 광산 지역에서 굉장히 유명했다. 말하자면 담배도 상류층이나 피울 수 있는 기호품이라는 뜻이다.
 소년은 추파춥스를 빨면서 주변을 날카롭게 살폈다. 보일러실 같은 풍경이 점점 사라지고 점점 고급스런 중국 장식이 보였다. 붉은색 등롱이라거나 기왓장을 올린 중국풍의 거리가 드러났다.
 광산 노동자가 올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치파오를 입은 여자가 요염하게 인도 청년을 유혹하고 알 수 없는 중국 노래가 울려 퍼졌다. 그 고급스러운 중화가 한쪽으로 한약방처럼 보이는 곳으로 덩치가 들어갔다.
 ‘뒤에 한 놈이 따라붙고······ 오케이. 이번은 진짜로군.’
 청년은 배짱 좋게 중국 접대부와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덩치의 뒤를 따랐다. 좁은 한약방. 뭔가 알 수 없는 한약재 냄새가 확 풍기고 좁은 골목으로 들어섰다.
 빨간 문. 인도 청년은 몇 번 본 적이 있는 문이었다.
 “들어가.”
 “아, 칩은 어떻게 하지?”
 “칩은 필요 없어.”
 “오케이. 간단해서 좋구만요?”
 청년이 들어간 후 덩치가 문을 닫았다. 문 안쪽은 또 별세계였다. 저쪽에는 작은 폭포가 쏴아아 내려오고 바위와 작은 정자까지. 천장에는 푸른 하늘 홀로그램이 좍 펼쳐져 있었다. 마치 중국의 한 풍경을 그대로 가져온 듯한 풍경이었다.
 “이야······ 굉장하네. 돈 좀 많이 들었겠어?”
 “후후. 그야 당연하지요. 이리로 오세요.”
 “아가씨 혹시 남친 있어?”
 “꼬시는 기술이 별로네요. 좀 더 노력해 보세요.”
 “쳇. 맨날 이런 식이라니까.”
 치파오를 입은 야시시한 아가씨가 인도 청년의 손을 잡아끌었다.
 “니 찌아오 선머밍즈?”
 “아그니.”
 “헤에. 귀여운 이름이네?”
 “웬걸? 우리 동족의 말로는 불의 신을 일컫는 말이거든?”
 “불이라도 쏠 수 있는 거야?”
 “아니, 유감스럽게도.”
 여자는 까르르 웃었다. 웃을 때마다 가슴이 아래위로 흔들리고 젖가슴이 살짝살짝 닿는 것이 일부러 청년을 자극하고 있었다. 아그니는 쭉 뻗은 여자 다리를 쳐다보다가 다시 날카롭게 주변을 살폈다.
 ‘무장 호위병은 대략 열여섯. 스마트건도 있네. 힘들겠구만.’
 그는 헤벌쭉 여자에 취한 흉내를 내면서도 주변의 풍경을 분석했다. 그는 혼자다. 하지만 전혀 위축되거나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여자는 아그니를 정자로 안내했고 거기에 앉아 있는 두 명의 노인과 한 명의 젊은이가 아그니를 천천히 쳐다봤다. 한 명은 아까 판에 앉아 있었던 러시아계였다. 아그니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러시아인을 쳐다보다가 다시 여자들 쪽을 쳐다봤다. 쫙 갈라진 치파오 사이로 야들야들한 다리가 보였다.
 “여자도 상품으로 나오나?”
 “원한다면.”
 “흐흐흐. 그거 참 좋구만. 여기나 목성 거주구나 진짜 여자 맛은 보기 힘드니까. 자, 빨리 합시다. 위에서 하도 쪼여 대서 이 몸도 바쁘고 댁들도 이래저래 바쁠 테니까.”
 “배짱 한번 좋군.”
 “인생 별거 있나. 다 그런 거지. 자자, 판은 다 깔려 있으니 패나 돌려 봅시다.”
 두 명의 노인들은 흐흐흐 웃으면서 패를 돌렸다. 자동이 아니다. 다라라라락. 각자 패를 손바닥으로 섞으면서 서로를 쳐다본다.
 굳이 판에 대해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룰은 일본식 리치 마작. 제3차 대전 때 지도상에서 사라져 버린 일본이 남긴 몇 안 되는 유산이었다.
 패가 돌았다. 점수봉이 왔다 갔다 하면서 긴장감이 한껏 올랐다. 어느새 몇 판이 흐르면서 오라스. 아그니는 싱글싱글 웃으면서 패를 집어 들었다. 이번 판에 리치나 쯔모로 화료하면 그는 단독으로 톱이었다.
 그는 늘어선 마작패들을 바라봤다. 대삼원 일발직전이었다. 아그니에게 필요한 것은 중(中)자 두 발이었다.
 버림패들을 봤다. 이미 중은 하나가 버려졌다. 누군가 한 명이 대삼원을 경계해서 그 패를 계속 쥐고 있을 수도 있고 아직 뽑지 않은 패에 섞여 있을 수도 있었다.
 “이야, 젊은 친구가 운이 좋구만?”
 “헤에. 달 뒤편에서 광석이나 캐는데 뭐가 좋아. 이렇게 내 인생이 풀렸다면 나도 고생은 안 했을 거라고.”
 “부야오 커타오.(체면 차리지 마시지.)”
 “난 중국어 잘 못해.”
 판을 봤다. 이미 몇 순배 돌기도 전에 러시아계 청년이 리치 상태에 있었다. 아그니는 놈이 버린 패들을 살펴봤다.
 ‘이야이야, 이거 살 떨리네. 쓰안커를 노리는 거냐?’
 역만을 처맞으면 아그니의 승리도 장담할 수 없었다. 그는 점수봉을 보면서 침을 꿀꺽 삼켰다. 그는 천천히 패를 집어 들었다. 만자패 3. 예감이 들었다. 러시아 놈의 완성패다. 이걸 버리면 죽는다. 하지만 버리지 않으면 하나 남은 중자패를 기다릴 수 없다.
 아그니는 혀를 쯧쯧 찼다. 그리고 버림패에 있는 중자를 눈으로 노려봤다. 그걸 바꿔치기할 있다면 아그니의 승리였다.
 “빨리 진행하지?”
 “급할 거 없잖아? 나는 근무 들어가야 하는데도 이 지랄이고만.”
 “들어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해? 네가 얻은 돈을 다 토해 낼 때까지 갈 수 없을 거야.”
 “역만을 처맞아도 난 안 끝나는데? 잊었어? 나는 오늘 굉장히 운이 좋다구.”
 턱. 이젠 골동품에 가까운 화약총이었다. 토가레프. 권총 손잡이의 별이 얼마나 만졌는지 번들거려서 거의 지워지려 했다. 저쪽에서도 자동 소총을 든 호위병들이 움직였다. 말만 하면 아그니는 끝장나는 순간이었다.
 “가만 두시게. 게임은 게임. 끝날 때까지 손을 대지 않는 것이 우리 사회의 룰.”
 “캬. 할아버지들, 말 한번 잘 통해서 좋구만.
 아그니는 계속 만자패 3을 쥐고 주변을 노려봤다. 점점 가드들이 오고 있었다. 눈치를 보니 도박판 때문만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그니는 시종일관 여유로웠다. 이건 그의 선배가 끼친 영향일 것이다.
 아까 아그니에게 치근댔던 차이나 걸이 두 명의 노인 중 한 명에게 소곤거렸다. 표정은 바뀌지 않는다. 하지만 아그니는 폐를 찌르는 듯한 무시무시한 감각을 맛봤다. 자칫 잘못하면 죽는다. 그는 계속 만자패를 만지작거렸다.
 “흐흐흐흐······ 타스 씽지엔차(그는 성간 짭새야).”
 “하하하. 하오지우 부찌엔러. 쩌머 용간더 차.(오랜만에 보는군. 이런 용감한 짭새) 위에징 이징 워먼더 소우씨아(월경은 이미 우리 편이지). 찐라이 하이메이 찌엔미엔 쩌머 하오더 징관라오예(요새는 이런 용감한 경관 나리를 못 봤었지)······.”
 “타 쯔부쯔다오, 뿌넝 삐카이 쩌거 씨엔징.(저놈, 이 함정을 피할 수 없다는 걸 알까?)”
 “타 삐쉬위샹. 커스 타 하이 메이요 위샹 쩌머 리하이.(그는 위기를 예견했겠지. 하지만 이렇게 지랄 같을 줄은 몰랐을 거야.)”
 러시아 놈도 두 명의 이야기를 듣더니 피식 웃었다. 중국어를 모르는 아그니는 그들의 대화가 뭐건 별로 상관 안 했다. 이미 분위기로 알 수 있었다.
 ‘정말로 날 팔다니.’
 어차피 예상한 일이었다. 이 작전은 회사 내의 이중 첩자를 잡기 위한 수작이었다. 그는 고개를 뿌득거리면서 두 명의 중국 노인을 노려봤다.
 “확인 안 할 건가? 일단 판은 끝내고 보지.”
 “호오, 관대하시네. 근데 이기면 판돈은 주는 거야?”
 “하오단, 하오단. 배짱 좋군. 우리가 누군지는 아는 건가?”
 “바텀 루나의 주인. 쌍둥이 형제 신대룡, 신대운. 흑사회 네트워크의 달 관할자.”
 “허허허. 아는데도 배짱을 부리는 건가?”
 “남자는 배짱 빼면 남을 게 없거든.”
 “좋아. 아주 좋아. 마음에 들었어. 그럼 돈으로 갈구는 건 어떻겠나?”
 “흐흐흐. 거 좋지. 근데 나는 평범한 광부라고. 돈으로 갈궈 봤자 희귀 광석 몇 개 정도만 빼돌릴 텐데?”
 “지랄.”
 “거 러시아 양반 성격 한번 꼬장꼬장하시네?”
 “지랄 말고 패나 까 펴. 죽는 마당에 선물로 네 무덤에 넣어 주지.”
 “아이고오 관대하셔라. 눈물이 다 나네.”
 똑. 딱. 그는 말을 하면서 끝에 시계 소리를 내면서 혀를 찼다. 그가 마지막에 노려봤던 곳은 버림패가 있는 곳의 중자와 자신의 손의 3만.
 아그니는 이가 빠진 대삼원에 마지막 중자를 끼워 넣었다. 달칵. 마작패를 쓰러트리면서 가볍게 말했다.
 “대삼원 역만.”
 “뭐······ 뭐라고? 너는 분명 삼만을 들고 있었을 텐데 어떻게?”
 러시아인이 당황한 눈으로 버림패를 바라봤다. 어이없는 일이었다. 버림패에 어느새 3만이 두 개나 들어 있는 게 아닌가? 쓰안커를 노리는 사람을 두고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러시아 놈은 토가레프를 들어서 아그니를 조준했다.
 “무슨 수작을 부린 거냐?”
 “에헤이. 내가 속임수라도 썼다는 거야? 보라구. 나는 웃통을 까고 있다구.”
 “이 새끼! 어떻게 삼만과 중을 바꿔친 거냐!”
 “아하, 내가 삼만을 들었다고? 그걸 넌 어떻게 아는 건데?”
 러시아 놈의 말문이 막혔다. 이 도박은 사기도박이었다. 마작패 뒤의 상처나 패턴을 분석해서 인공 지능이 알려 주고 적절하게 승률을 조작했다. 바텀 루나의 도박은 다 이런 식이었다.
 근데 아그니는 불가능한 승률을 뛰어넘어 역만을 만들었다.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저 밖에서도 이곳에서도 아그니는 고비 때마다 위기를 벗어났었다.
 “네놈 설마 그, 그냥 바이파이(federal Bureau of InterPlanet Investigation-연방 성간네트워크 수사국)가 아니었던 거냐?”
 “설마 바이파이의 초능력 특수 부대······.”
 “기가스······?”
 “에헤이, 나는 기가스는 아니거든?”
 아그니는 웃통을 벗은 채로 그들을 노려봤다. 반응은 훨씬 빨랐다. 러시아 놈이 아그니의 머리통을 총으로 쏴버렸다. 똑딱. 혓소리가 나면서 아그니는 자신의 아래를 내려다봤다. 그리고 그의 눈이 향한 곳은 정자의 위였다.
 파앙. 어이없게도 1미터 안에서 겨눈 총이 빗나갔다.
 아그니는 의자와 함께 밑에 생긴 포탈로 점프했고 그의 모습이 나타난 곳은 바로 정자의 천장 아래였다. 뻑. 아그니는 의자로 러시아 놈을 그대로 후려쳤다.
 “아아, 굉장히 진부하지만 당신들은 변호사를 선임할 수 있고······.”
 나무 의자가 러시아 놈의 머리통에 직격하면서 나뭇조각이 흩뿌려지고 러시아 놈은 권총을 떨어뜨렸다. 그걸 시작으로 사방에서 중국어 고함 소리가 들렸다. 화약총과 레일 건을 든 차이나 마피아들이 보스를 지키기 위해 몰려들었다.
 개중에는 중국인이 아닌 놈들도 꽤 있었다. 퇴역병들이었다. 2차 화성 전쟁의 여파로 화성군이든 행성 연방군이든 잘린 군인은 넘쳐났다. 그들이 택할 수 있는 직장은 결국 뻔했다.
 “보스들이 있다! 조심해서 쏴라!”
 정자의 기둥이 스마트 자동 소총으로 투다닥 하더니 구궁 하고 쓰러졌다. 하나하나의 탄자가 미사일이나 마찬가지인 스마트 자동 소총탄이 웃통을 벗은 아그니를 노리고 달려들었다.
 그리고 두 번의 똑딱 소리가 울려 퍼졌다. 부서진 의자를 든 아그니가 혓소리를 치자 그의 몸은 다시 바닥으로 쑥 하고 들어갔다. 마치 바닥에 보이지 않는 맨홀이 있어서 거기로 휙 뛰어드는 모습이었다.
 “그다음이 뭐더라? 묵비권이 있어서 닥치고 있을 수가 있으며.”
 퍽. 놀랍게도 아그니의 모습이 다시 나타난 것은 총을 쏘는 호위병들의 뒤쪽이었다. 깜짝 놀란 호위병들이 등 뒤로 총을 돌렸지만 늦었다. 팔극권의 붕권이었다. 총을 돌리던 조직원이 붕권을 옆구리에 처맞고 옆으로 붕 떠버렸다. 타다다다. 날아가면서 총알이 제멋대로 튀고 동료들에게 볼링 핀처럼 처박혀 버렸다.
 아그니는 총이 별로 두렵지도 않은지 뒤이어 옆 놈에게 철산고를 먹여 버렸다. 으드득 갈비뼈가 부러지면서 또 한 명이 동료들 쪽으로 볼링공처럼 날아갔다. 아무리 팔극권이라고 해도 있을 수 없는 장면이었다. 사람이 공처럼 날아서 벽에 부딪치고 갈비뼈가 으스러졌다.
 “히이이익! 뭐, 뭐야, 이놈!”
 그 후엔 벽으로 쑥 굴러 들어가서 천장에서 떨어졌다. 태권도의 격파 시범을 하듯 총을 든 호위병의 어깨뼈를 손날로 부숴 버렸다. 으드드득 뼈 부서지는 소리가 오싹하게 들렸다. 겨우 몇 분도 안 되는 시간에 최일선 호위병들이 전부 쓰러졌다.
 다시 똑딱 하고 아그니는 쌍둥이 보스 앞으로 돌아왔다. 거물은 거물이었다. 바텀 루나의 지배자들은 박수까지 치면서 아그니를 쳐다봤다.
 “아무튼 다 알아들었지? 어차피 법정은 갈 일 없지만 난 미란다 고지를 다 알렸다고.”
 “재미있는 친구야. 안 그래?”
 “그러게. 재미있는 친구야. 씽찌엔따라오예(성간 나리님) 이호우 전머빤?”
 “뒤는 어떻게 할 거냐고? 글쎄.”
 “중국어는 못 알아듣는다는 설정이지 않았나?”
 “에이, 그 정도는 눈칫밥으로 알아듣지. 내가 바이파이에서 먹은 눈칫밥이 얼만데.”
 아그니는 시종일관 여유만만했다. 곧 2차 경호대가 몰려오고 바텀 루나 전체와 싸워야 할지도 모르는데도 그는 두려워하지 않았다.
 “너, 기가스인가?”
 “에헤이. 기가스는 아니라니까. 기가스라면 막막 공작비로 엄청난 돈이 지급되고 그러는걸? 이래 봬도 박봉이라구. 말단 중의 말단이랄까. 뭐, 그런 거야.”
 “호오······ 그럼 넌 누구지?”
 “바이파이 9과.”
 “9과?”
 “에헤이. 또 시치미 떼시기는. 신대룡, 신대운. 당신들을 초능력 부정 사용 및 기타 등등 9호 사건 위반 혐의로 체포합니다.”
 “아하, 그 9과로군. 초능력 사냥꾼들.”
 분위기가 점점 험악해졌다. 아그니는 여유만만했지만 시시각각 차이나 마피아의 공격 부대 흑룡이 다가오고 있을 것이다. 신씨 형제는 시간을 끌면서 아그니에게 말을 걸었다.
 “넌 등급이 뭐지?”
 “아아, 불행하게도 9과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지. 올 D의 블루스.”
 “올 D의 블루스?”
 “당신들도 가이아스 크래들 출신이라면 알 텐데? 연방의 초능력자 등급표. 아아, 불쌍하게도 나는 전부 D란 말이지. 공간 전송 능력 D, 염동력 D, 신체 강화 능력 D.”
 “그런 것치곤 제법 하지 않았나?”
 쌍둥이 노인은 아그니가 난장판으로 만들어 놓은 주변을 가리켰다. 16명의 가드는 아그니에게 당해서 끙끙대고 있었다. 러시아 놈이 정자의 잔해를 부수면서 대신 대답했다.
 “소문을 들었어. 9과 에이전트 중에 올 D의 능력을 가지고 B급 이상의 초능력자들을 사냥하는 놈이 있다고. 그놈의 총합 능력은······ B.”
 “호오. 강호에도 소인의 명성이 꽤나 퍼진 모양이외다? 부끄럽네? 으휴. 그렇게 유명해졌으면 과장님은 내 월급이나 올려 줄 것이지, 쳇.”
 “시끄러워, 연방의 개새끼. 네 좆같은 얼굴을 내 손으로 뭉개 줄 테다.”
 “헤에. 입 한번 더럽네?”
 “전쟁이 그렇게 만들었거든.”
 놈은 쇄골 아래에 찍혀 있는 화성군의 문신을 보여 주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네 플래시 포인트는 잘 알았다.”
 아그니는 시치미를 뗐다.
 “플래시 포인트? 그게 뭔데?”
 “초능력의 발현 조건! 흥, 네놈의 운도 여기까지다. 네 플래시 포인트는 혀를 시끄럽게 딱딱거리는 것. 그걸로 공간 전송 포탈을 만들어 내는 거지. 안 그래?”
 “헤에, 눈이 썩지는 않았네. 맞아, 내 플래시 포인트는 간단하지. 하지만 맨이터하고 선배 외에는 제대로 공략해 낸 역사가 없단 말씀. 괜히 올 D의 블루스라고 부르는 게 아니라니까?”
 “맨이터? 그게 누군데?”
 “아, 그런 게 있어. 그놈 진짜 강했지. 쳇. 선배는 그놈이 어떻게 죽었는지 나한테 가르쳐 주지도 않았다구. 세 명의 공간 염력자가 말이야, 목성의 정상에서······ 아, 그런 이야기는 됐어. 수다를 떨려면 루나트라즈에 가서 이야기하라구.”
 아그니는 손바닥을 펴서 까딱까딱 오라는 시늉을 해 보였다.
 ‘저놈도 초능력자구만.’
 땀에 탄탄한 근육이 번들거리고 아그니는 천천히 영춘권 자세를 잡았다. 평균 능력은 D에 모든 능력을 합친 총합 능력 B. A랭크 이상의 초능력자를 만나면 앗 하는 순간에 박살 날 만한 능력들이었다. 하지만 아그니는 그런 것치고는 전혀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초능력은 단순히 능력의 강약만으로 승부가 결정되지 않는다. 총합 능력 역시 단순히 어떤 것을 어떻게 움직이거나 조작할 수 있다는 수치에 지나지 않았다. 초능력자 간의 결투는 영리한 놈이 이길 뿐이었다.
 그리고 이 아그니는 영악함이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꾀돌이였다.
 마치 서부영화에서 총을 뽑기 전의 장면 같았다. 쌍둥이 노인은 흥미롭다는 얼굴로 둘의 대결을 지켜봤다. 시간을 끌면 끌수록 아그니에게 불리했다. 이곳은 바텀 루나의 가장 깊숙한 곳이었다.
 “그래, 네 말대로야. 시체에 대고 물어봐 주지!”
 “그러시든지?”
 놈은 다시 총알을 쐈다. 핑. 그런데 허공에서 총알의 각도가 기묘한 방향으로 꺾였다. 핑핑핑. 총알이 보이지 않는 벽에 튕겨서 이해할 수 없는 각도로 계속 꺾였다.
 ‘네놈의 능력도 심플하구만? 근데 간단하지만 녹록하지는 않네.’
 그는 왜 러시아 놈이 권총을 올려놨는지 이제야 깨달았다. 러시아 놈은 총알을 순간적으로 조작할 수 있는 초능력자였다.
 ‘비등록 초능력자겠지. 과연 저 쌍둥이 형제가 자신만만해한 이유가 있었어. 총알만 충분하다면, 또한 탐지 능력자나 인공 지능이 있다면 사각이 없는 총탄을 날릴 수 있다. 그럼 플래시 포인트는······.’
 초능력자 간의 대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초능력의 발현 조건이었다. 플래시 포인트는 능력과 일치하는 것도 있고 전혀 딴판인 것도 있었다. 또한 알아챌 수 없는 행동도 있고 크게 눈에 띄는 행동도 있었다.
 하지만 어떤 능력을 가진 초능력자든 특정한 행동을 취하지 않는 한 능력을 발현할 수 없었다. 그것이 인간 능력의 발화점, 플래시 포인트였다.
 물론 그 플래시 포인트를 씹어 버리고 공격할 수 있는 수단이 없는 건 아니었다.
 공간 염력.
 초능력자들의 정점에 서 있는 능력.
 공간 염력자들은 주변의 오브젝트를 마치 항성 주위를 맴도는 행성들처럼 다루면서 초능력자들을 압도할 수 있었다. 공격과 방어가 동시에 이루어지고 상대의 공격 루트를 모두 차단하는 최강의 능력이었다. 아그니는 공간염력의 정점에 서 있는 사람을 생각하고 피식 웃었다.
 “선배는 지금쯤 목성에서 뺑이치고 계시겠지?”
 아무튼 러시아 놈의 플래시 포인트는 아그니만큼이나 눈에 띄었다. 손을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처럼 꺾어서 총알이 튕기는 방향을 지정하고 있었다. 아그니는 플래시 포인트에 더해 놈의 능력 특성까지 한 방에 알아차렸다.
 ‘능력은 즉응성. 능력 범위는 시야가 미치는 곳인가?’
 아그니는 일부러 코너로 달려 들어갔다. 그런 아그니의 모습을 조그만 구(球) 모양의 픽시(Pixy)가 따라갔다. 보병용 다목적 정보 위성을 다룰 줄 아는 걸 보면 역시 러시아 놈은 화성 전쟁의 참전자였다. 러시아 놈은 뒤이어 픽시와 연결된 헤드 모듈을 썼다.
 ‘제기랄, 좌표 사격도 가능한 거야? 피할 수도 없네? 아이구야, 이거 저 쌍둥이가 득의만만한 이유가 있었군!’
 놈은 토가레프를 하늘로 쏘고는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처럼 각각의 총알의 각도를 재지정했다. 타임 온 타깃(Time on target)처럼 각각의 총알들이 아그니가 있는 곳으로 한 방에 들이박혔다. 파박. 포병 사격이 한데 박힌 듯한 모습이었다. 바닥의 자재들에서 먼지가 좍 피어오르고 아그니의 혓소리가 딱 하고 울려 퍼졌다.
 “쥐새끼 같은 놈! 하지만 난 네놈의 능력 범위를 이미 파악했다! 넌 눈에 닿는 곳만 포탈을 열 수 있어! 내가 네 능력의 능력 범위를 파악한 이상 끝이다! 얼마든지 피해 보거라! 다람쥐 쳇바퀴를 돌듯이!”
 “아이고, 거 과묵한 성격인 줄 알았더니······ 남자가 입이 싸면 인기가 없다구.”
 퇴로는 이미 차단되었다. 마치 그걸 알리기라도 하는지 몇 발의 총탄이 핑핑 허공에서 직각으로 꺾여서 입구 쪽으로 틀어박혔다. 아그니는 화약식 자동 소총과 쓰러져 있는 놈들을 쳐다봤다. 권총보다는 자동 소총, 자동 소총보다는 스마트 자동 소총이다. 하지만 놈은 다른 사람에게 총을 쏘게 하지도, 그렇다고 자신이 중화기를 가지고 있지도 않았다.
 ‘능력 한계를 안 건 당신뿐만이 아니거든? 자신이 쏜 총알이 아니면 각도 조절을 못하는 모양인데······ 그렇다면 소리구만. 격발음으로 집중하고 타이밍을 잡는 거야.’
 또 하나의 능력 한계가 있었다. 토가레프의 탄창은 무한이 아니었다.
 플래시 포인트와 능력 한계. 공격 목표, 그리고 공략 방법. 아그니는 이 짧은 시간에 모든 것을 알아 버렸다.
 바이파이 제9호 사건 수사과. 줄여서 9과.
 같은 초능력자들에게는 초능력 사냥꾼으로 불리는 자들에게 상대 초능력자의 능력을 읽고 그걸 무력화시키는 건 일도 아니었다. 더군다나 저 러시아 놈이 운이 없었던 건 아그니가 꼬맹이 때부터 바이파이 9과의 컨트랙트 스위퍼로 활약해 온 베테랑 요원이라는 점이었다.
 “아이고야. 우리도 직장 보험을 가입시켜 주든가 하지, 맨날 몸으로 때우네.”
 아그니는 돌입 타이밍을 잡았다. 타이밍은 놈이 탄창을 가는 순간. 똑딱. 포탈이 열리면서 놈의 총구 역시 포탈 쪽으로 향했다.
 그런데 아그니가 연 포탈의 위치가 실로 기묘했다. 입구는 총알이 날아오는 방향. 출구는 바로 놈의 등 뒤였다.
 “흥, 포탈을 이용해서 날 죽일 셈인가? 네 수는 꿰뚫어 봤다고 했을 텐데!”
 팡. 놈은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총알을 꺾었다. 방향을 잃은 총알이 천장으로 튀고 러시아 놈은 토가레프의 탄창 멈치를 눌렀다. 좌르륵.
 “이······ 이런, 제기랄!”
 아그니의 모습이 천천히 나타났다. 놈이 탄창을 가는 순간은 완전히 무방비 상태였다. 하지만 놈 역시 산전수전을 다 겪은 갱 나부랭이였다. 아뿔싸. 그는 장전하려던 총을 버리고 품에서 또 하나의 토가레프를 꺼내 들었다.
 탕! 당황해했던 것도 연기였다. 놈은 자연스럽게 왼손을 지휘자처럼 휘두르면서 총구를 아래로 내린 채로 바로 총알을 발사했다. 보이지 않는 벽에 부딪친 것처럼 총알이 바닥에 아슬아슬하게 닿기 전에 방향이 꺾여서 아그니에게 날아왔다.
 “난 말야, 닌법(忍法) 이런 거 좋아하거든?”
 똑딱. 아그니의 몸이 바닥으로 진짜 닌자가 사라지듯 쑥 내려갔다.
 “그 지랄은 아까 봤을 텐데! 두 번은 안 통한다!”
 “헤에, 과연 그럴까?”
 놈은 천장을 보면서 아래로 총을 쐈다. 순전히 언제 어느 방향으로 오든 맞힐 수 있다는 자신감이었다. 팡팡팡. 순식간에 발사한 세 발이 새로 생겨나는 포탈 출구로 향했다. 다시 출구에서 튀어나온다면 영락없이 당하게 된다.
 “이름하야 열파참······ 은 아니고 수둔의 술!”
 “······?”
 놈의 총알들은 난데없이 쏟아져 내리는 폭포수에 휩싸여 어디로 날아가는지도 모르고 사라져 버렸다. 쌍둥이 노인들은 호수 한가운데에 생긴 소용돌이를 쳐다봤다.
 “쩌 씨아뻬이 쭈오 쩌양. 쩐 랴오뿌치. 쩐 메이샹따오(저 후배 저렇게 하다니 정말 굉장하군. 생각도 못 했어).”
 “타 이징 잉러(이미 이겼어).”
 “이르 쟝 슈러(언젠가는 지겠지).”
 이미 승부는 결정되었다. 두 명의 쌍둥이는 새로운 호위병들에게 둘러싸여 어디론가 사라졌다. 러시아 놈은 하늘에서 쏟아져 나온 폭포에 손이 꺾이고 중심까지 잃었다. 비틀. 손에서 떨궈진 토가레프는 파도에 휩쓸려 저쪽으로 떨어지고 놈은 발목에 있는 서브웨폰까지 꺼내 들려고 했다.
 그때 물에 섞여서 아그니가 떨어졌다. 놈이 총을 들어 올리기도 전에 아그니의 발이 어깨에 처박혔다. 윽 하는 소리와 함께 러시아 놈의 균형이 쓰러지고 아그니는 착지와 동시에 멋지게 팔꿈치를 놈의 명치에 먹였다.
 “잊었어? 신체 강화 D. 쇠를 부수거나 하지는 못하지만 사람을 때리면 쪼끔 아프다구.”
 놈의 입에서 구토가 터져 나왔다. 복싱 챔피언의 펀치가 제대로 들이박힌 듯한 모습이었다. 결국 놈이 쥐고 있던 예비용 권총이 떨어지고 아그니는 그제야 주위를 살폈다.
 놈들의 지원군은 없었다. 러시아 놈이 우웩 하고 다시 토하는 소리와 폭포 소리만이 촤아아 들릴 뿐이었다.
 “아차차. 이거 또 파크한테 제대로 갈굼당하겠는데? 목표물 두 명을 다 놓치다니······ 그래도 정보가 새고 있다는 건 알아냈으니 다행이네.”
 아그니는 의자에 걸려 있는 하와이안 셔츠를 입고 어깨에 용무늬 잠바를 둘렀다. 그리고 추파춥스를 다시 까서 입에 넣었다.
 “어이, 아자씨. 아까 미란다 고지는 했으니 더 듣고 싶지는 않겠지?”
 “시······ 시끄러워. 나······ 나는 지지 않았어.”
 “그냥 그쪽이 이긴 걸로 치자구. 나는 이기든 지든 그쪽을 체포하면 그만이니까. 당신이라도 데려가야지 파크의 무시무시한 잔소리를 쪼끔이라도 덜 듣지.”
 “어디로······ 데려가는 거냐.”
 “루나트라즈. 그 감옥 아래에 있는 초능력자의 지옥. 여기서 그닥 멀지 않아.”
 “······.”
 아그니는 언제 차이니즈 마피아가 들이닥칠지 모르는데 여전히 여유만만이었다. 그는 케이블 타이로 러시아 놈의 손을 묶고 추파춥스를 건넸다.
 “난 마약은 안 해.”
 “······야, 마약 아니거든? 그냥 사탕이여. 난 담배는 안 피우니까.”
 러시아인의 표정이 한층 더 기묘해졌다. 하와이안 셔츠와 용무늬 잠바, 거기에 삼선 쓰레빠는 영 어울리는 모습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 엉망진창 패션이 눈앞의 청년에게는 이보다 더 어울릴 수 없었다.
 아그니는 용무늬 잠바를 펄럭이면서 막대 사탕 자루를 담배처럼 후후 불었다.
 “아, 맞다. 루나트라즈. 근데 꼭 거기로만 가는 건 아니야. 삼 년 전에 목성에서 수많은 초능력자들이 무덤으로 가는 바람에 9호 사건에 한해서는 공백 상태거든.”
 “9호 사건?”
 “에헤이. 아무리 비등록 초능력자라도 그렇지 9호 사건도 모르는 거야?”
 러시아인은 물에 쫄딱 젖은 쥐새끼 모양으로 아그니를 쳐다봤다. 아그니는 한숨을 쉬고는 이마에 손을 올렸다.
 “초능력과 관련된 상해, 절도, 살인, 강간, 방화 등 오 대 중죄 사건을 말하는 거야. 보통은 9과가 처리하지만 때론 다른 부서나 회사에서 컨트랙트 스위퍼에게 외주를 주지. 아, 나도 그 일 했는데 굉장히 힘들어. 한번은 편의점에서 착시 능력으로 사기 치는 놈을 잡아오라더구만.”
 “아니, 그보다 커······ 컨트랙트? 컨트랙트 스위퍼는 뭐야?”
 “각 기관마다 쓸데없는 일들을 처리하기 위해 뒷구멍으로 고용하는 초능력자 청소부.”
 “왜 그래야 하는데?”
 “이를테면 까다로운 반정부 조직의 제거라든가 불가능 사건을 이용해야 할 때 스위퍼를 쓰지. 총을 쓰면 증거가 남지만 당신의 능력 같은 걸 쓴다면 불가능 사건으로 분류돼 미스터리가 되어 버리니까.”
 “그렇군······ 말 그대로 청소부(Sweeper)인가.”
 “그래. 바이파이, FIPSA(Federal InterPlanet Security Agency-행성 연방 성간네트워크 안전 보장국), 마약 수사국, 기타 등등 연방 기관은 모두 컨트랙트 스위퍼를 고용하고 있어. 간편하고 편하니까.”
 “······.”
 “어때? 내 보기엔 당신 능력이라면 금방 정규직이 될 것 같은데.”
 러시아인은 더 이상 묻지 않고 아그니를 바라보기만 했다. 꽤나 이야기하는 걸 좋아하는 청년이었다. 어딘지 친근감도 느껴지고 적의가 느껴지지 않았다.
 아그니는 의자에 걸터앉아서 뭔가를 기다렸다. 타다다다. 멀리서 중화기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아아, 참 빨리도 오시네? 벌써 죽었으면 어떻게 할라고.”
 “뭐, 뭐야? 누가 오는 건데?”
 “바이파이 직속 특수 부대 블랙 스와트.”
 ‘트.’라고 말할 때 펑 하고 붉은 문이 작살나고 검은 칠로 도장된 중장기병이 두 대나 먼저 들어왔다.
 중장기병.
 우주 함대 때문에 지상전 교리는 완전히 뒤바뀌었다. 아무리 탱크나 요새로 막아도 궤도권에서 쏟아져 내려오는 궤도 폭격을 당해 낼 수 없다. 2차 화성 전쟁 때 템페스트의 주포는 화성군 세바스토 폴 요새의 심장부를 직격해서 30,000이 넘는 화성군을 증발시켰다. 엄청난 함대의 포격, 폭격 전력 앞에서는 지상을 지키고 종심을 두텁게 하는 모든 지상 작전이 무의미했다.
 결국 지상전의 왕좌는 외골격(Exoskeleton) 슈트, 즉 엑소슈트를 입은 인간 크기 중장기병들의 독무대였다. 인공 지능의 보조를 받아 각종 중화기들을 달고 고속으로 움직이는 중장기병들은 보병들에게 새로운 위협이었다.
 그 중장기병의 오른손 위에 달린 개틀링 레일 건이 촤르륵 돌아가고 그 뒤로 검은 방탄강화복을 입은 사람들이 좍 쏟아져 들어왔다. 뒤에는 케이블 타이에 머리에 포대를 둘러쓴 주요 체포자들이었다. 아그니는 두 대나 되는 검은 중장기병에게 손을 흔들었다. 마치 중세의 갑옷을 입은 듯한 중장기병은 다리에 달린 캐터필러로 바닥을 짓씹으면서 아그니에게 다가왔다. 중장기병의 등 뒤에는 사람 한 명이 올라탈 수 있는 보병 지휘관석이 있었고 거기에 탄 바바리코트 양복쟁이가 말을 걸었다.
 “아그니, 그놈은 뭐냐?”
 “그냥 평범한 초능력자. 아무튼 실적은?”
 “주요 간부 열세 명 체포. 행성 분리주의자들의 연관 증거 확보. 테러리스트 네트워크나 머신건 전도사들에 대한 증거 약간. 파크의 말대로 신씨 형제에게서 테러 자금이 흘러나왔어. 또 군 쪽의 밀수 무기에 대한 정보도 있었고 바텀 루나 전체의 마약 조직에 대한 알파 독에 대한 정보도 있었지. 역시나 마약국과의 거래거리도 넘쳐난다.”
 “오케이. 장사 다 끝났구만요. 파크한테 정말 힘들었다고 나 대신 전해 줄래요? 그 아즈씬 요새 정말 성격이 드러워졌다고요.”
 “아그니. 그런 건 본청에 가서 본인이 직접허쇼.”
 “거참, 붙임성 없기는.”
 바바박 하고 잔해를 튕기면서 블랙 스와트의 중장기병이 아그니의 뒤를 스쳐 지나가고 중화기를 장비한 스와트팀이 러시아인을 확보했다.
 “아참. 그 사람 제가 추천했다고 파크한테 말해 주세요.”
 아그니는 러시아인의 뺨을 툭툭 손바닥으로 두들기고 들어왔던 입구로 향했다. 바텀 루나의 성은 쑥대밭이 되어 있었다. 블랙 스와트에게 당한 중국인들이 중국어로 욕지거리를 내뱉고 아그니는 추파춥스를 쭙쭙 빨면서 도박장을 나섰다.
 
 아그니의 모습이 다시 나타난 건 탑 루나의 관공서 빌딩이었다. 바텀 루나와 달리 늘 지구에서 보이는 달의 거주구는 찬란한 빛의 도시였다. 탑 루나는 마치 빛의 탑처럼 건물들이 비죽비죽 늘어서 있는 것으로 유명했다. 지구에서는 탑 루나의 밝은 모습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아그니는 마치 상아로 만든 탑 같은 곳을 바라보다 휘파람을 불었다. 온통 바바리코트 일색인 연방의 성간 수사국에서 쓰레빠를 찍찍 끌고 다니는 그의 모습은 가관이었다. 이 껄렁한 수사관이 익숙하다는 듯 장난스레 경례를 붙이는 사람도 있었고 먹을 걸 건네는 사람도 있었다.
 아그니의 목에는 지구, 화성, 목성 세 행성의 문양이 새겨진 바이파이의 배지가 걸려 있었다. 그게 없었다면 영락없이 마약상이나 깡패, 뭐 그런 걸로 보이는 청년이었다. 다만 날카로운 눈매와 꽤나 잘생겨 보이는 턱 선이 이 청년이 제법 바람기가 있다는 걸 드러내 보였다.
 아그니는 여직원이 건넨 초콜릿 바를 으적거리면서 제2 지구 작전과장이라 써진 문을 열었다.
 “새꺄, 넌 노크도 없냐?”
 “에헤이. 파크, 목성에서 꼬박꼬박 당신 식당에서 매상 올려 준 단골손님한테 이러기야?”
 “어이구. 내가 말하느니 죽지.”
 파크는 이런저런 문서들을 뒤적거리다가 아그니에게 넥타이를 집어던졌다.
 “뭐셔, 이건?”
 “낫살 좀 처먹었으면 네 꼴을 보고 다녀라? 여기가 무슨 해변이냐?”
 “기분이란 게 중요한 거유. 하얀 고양이든 검은 고양이든 일만 잘하믄 되지.”
 “아아, 이 녀석 그놈과 같이 다니면서 쓸데없는 잡지식만 늘어났다니까?”
 “선배는?”
 “목성에서 좆뺑이 치고 있지, 흐흐흐흐.”
 “내 그럴 줄 알았지. 9과의 얼굴 마담이 되더니 꽤나 많이 팔려 다닌다니까. 그 사건 이후로 목성은 쳐다도 안 본다더니 결국 끌려갔군, 으흐흐흐흐.”
 “크흐흐흐흐. 녀석 이번엔 막 가기 싫다고 떼까지 썼다니까.”
 파크도 아그니도 낄낄대면서 허연 양복을 입은 사람을 놀렸다. 아그니는 김치 스낵을 으적거리면서 파크의 사무실을 살폈다. 목성 시절의 초라한 일식집(?)과는 완전히 달랐다. 블라인드 밖에는 비서진이 세 명이나 있었고 그가 부릴 수 있는 병력 역시 상상을 초월했다.
 “이야······ 바이파이의 넘버 파이브, 실세 다 됐네. 아자씨도 출세했다.”
 “시끄러워. 속 쓰려 죽갔다. 둘째 딸 사립 대학교 보낼라면 열심히 일해야지.”
 “푸흐흐, 이번엔 둘째 딸이야? 나는 결혼하면 그냥 공립고 보낼 거야.”
 “시발롬. 꿈꾸고 있네. 누가 하와이안 셔츠를 입은 녀석이랑 결혼이나 해 준대냐?”
 아그니는 플래시 포인트를 똑딱 터트려서 파크의 곁으로 다가왔다.
 “따님을 저에게 주시는 건?”
 “차라리 내 배를 찔러라, 새꺄. 애지중지 기른 내 딸을 너한테 주느니 차라리 내가 죽고 만다.”
 “에이, 재미없어. 역시 선배나 버디가 있어야 놀려 먹는 재미가 있는데. 근데 갈굴라고 부른 거유? 그런 거면 빨랑 갈구시고.”
 “네가 놓친 신씨 형제 말이냐?”
 파크는 손가락을 튕겨서 블라인드를 내리고 여러 가지 정보들을 3차원 디스플레이에 띄웠다. 아그니가 찍은 신씨 형제의 모습과 그가 4개월 동안 잠입 근무를 하면서 모은 정보들이 좌르륵 떴다. 도박판에서 돈의 흐름부터 기밀로 여겨질 사안들까지.
 배신자를 잡는 작전치고는 이번 아그니의 임무에서 굵직굵직한 건더기들이 많이 걸렸다.
 “칭챙총 놈들. 불독에게 목성에서 물린 후 삼 년······ 세를 거의 회복했어.”
 “그러게. 비등록 초능력자 네트워크하고도 관련 있는 것 같아. 내가 잡은 러시아계는 아무것도 모르던데?”
 “음, 신씨 형제가 비등록 초능력자들을 숨겨 주고 빼돌린다는 거야?”
 “아무래도 그렇겠지. 그건 댁이 분석하는 거고······.”
 빡. 파크는 아그니의 뒤통수를 때렸다. 그는 익숙하다는 듯 손을 벌리고 한숨을 쉬었다. 왠지 어릴 때부터 다들 아그니의 뒤통수를 때리는 걸 좋아했다.
 “나야 뭐 언제나 동네북이지 뭐.”
 “니 뒤통수는 맨들맨들해서 때리기 좋다구. 그보다 신씨 형제의 능력은?”
 “잘 모르겠어. 그냥 지켜보다가 어느 순간 사라졌어.”
 “음······ 알았다. 수고했다, 아그니.”
 “웬일이래?”
 파크는 아그니에게 수고했다는 말을 거의 하지 않았다. 아그니는 불길한 예감이 스치고 지나갔다. 원래대로라면 거물을 놓쳤다는 잔소리가 몇 시간이고 계속되어야 했다.
 “차라리 때려, 응? 뒤통수 맨들맨들하다매? 얼릉 때리고 끝내자?”
 “달리아. 들여보내요.”
 파크는 아그니의 알랑방귀를 뿌리치고 비서에게 누군가를 들여보내라고 말했다.
 “오······ 훌륭한 가슴······.”
 퍽. 다시 파크가 아그니의 뒤통수를 때렸다. 아그니는 성질을 부리려다가 넋을 잃고 가슴을 쳐다봤다. 아닌 게 아니라 정말 훌륭한 가슴이었다. 까만 여성 정장에 톡 도드라진 가슴 라인이 예뻤다. 아그니는 정장여자의 가슴을 바라보다가 오른쪽 가슴에 꽂힌 신분증을 쳐다봤다. 노란 빗금이 쳐진 바이파이의 마크. 이 마크는 신참이라는 표시였다.
 “아니아니아니, 아자씨 이봐요, 아자씨. 나더러 지금 병아리 교육을 시키라는 거야?”
 “그래. 몇 달간의 휴가 임무로는 딱이잖냐? 병아리 교육이 끝나면 다시 임무를 재할당할게.”
 “아니아니아니, 이거는 아니지이? 이봐요 이봐요, 아자씨. 이야, 당신 진짜 사기꾼이야. 나보고 지구에서의 쌔끈한 휴가를 주신다매요? 흑흑흑. 이번만 잘하면 지구의 안전 가옥에서 예쁜 아가씨들과 보내게 해 준다매요? 그날 밤 그 침대에서의 약속은 모두 거짓이었나요오오오?”
 “시, 시끄러, 새꺄. 오해할 만한 소리는 하지 말라고!”
 정장 여자는 아그니의 너스레를 보고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어찌 보면 평범해 보이지만 웃는 모습만큼은 누구보다 예뻤다. 까만 뿔테 안경을 쓰고 있어서일까? 좀 맹하게 보이는 구석이 있지만 커다란 눈망울이나 예쁜 콧날 역시 천생 미인상이었다. 거기다 동양계만이 가질 수 있는 신비한 분위기도 한몫했다.
 “앙? 뭐야? 웃었어? 이봐, 신참. 내가 웃겨? 웃기는 거지? 그런 거지? 오호라. 웃으셨단 말이지? 그럼 조직의 쓴맛을 보여 줄까나?”
 “시끄러워, 이눔아. 너야말로 조직의 쓴맛을 보기 전에 병아리 교육 잘 시켜.”
 “이봐요, 아자씨. 내가 파리예요? 그냥 서류 더미로 후려치는 거면 몰라도 아오, 직장 내 인권 위원회에 제소할까 부다.”
 “해라, 이눔아. 9과의 에이전트라는 놈이 그것도 모르냐?”
 팍팍. 파크는 목성에서처럼 아그니의 종아리며 등짝을 파리채로 후려쳤다. 이곳은 1급 관공서다. 파리가 있으려야 있을 수도 없었다.
 둘이 싸우는 모습이 익숙하면서도 어딘지 정겹게 느껴졌다. 도저히 고비를 참지 못한 병아리 아가씨가 푸학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아그니는 앞으로 고생문이 활짝 열렸다는 투로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맹한 구석이 있는 아가씨는 다시 새초롬하니 입술을 다물었다.
 “파크 아자씨. 일부러지? 그지? 일부러 이런 신참을 붙여 놓은 거 아니야?”
 “그래, 일부러다. 천방지축 날뛰는 너에게 족쇄를 걸어 놓은 거지. ‘엄마’를 붙여 놨으니 이제 나도 안심하고 잘 수 있겠지.”
 “파트너 없는 게 훨씬 나았는데······ 이번엔 또 뭘 걸 거여? 옆집에서도 벌써 내기 걸렸죠?”
 “흐흐흐흐. 뭐, 그런 거지. 이번엔 난 삼 주에 걸었다고.”
 “작전과장이 그러기유? 막막 직위를 이용해서 내기를 걸다니.”
 “꼬우면 너도 이 자리로 올라오든가.”
 “아아아아, 여러분. 여러분은 권력의 폐해를 보고 계십니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파크는 싸구려 일식당에서 김치 볶음밥을 만들 때가 훨씬 어울린다구.”
 아그니의 너스레에 다시 귀여운 아가씨의 입술이 씰룩거렸다. 아그니는 한숨을 푹 쉬고 고개를 수그렸다.
 “당신 이름이 뭐야?”
 “한수진.”
 “엥······ 수쥔? 반가워 한수쥔.”
 “아니아니, 수우지이인.”
 “······.”
 “그, 그 뜻을 보자면 빼어나다는 뜻하고 참되다는 뜻이 합쳐져······.”
 “아아, 중국인이나 당신들 민족은 인디언처럼 이름에 뜻을 붙인다는 것쯤은 나도 알고 있다구. 파크. 설마 같은 소수 민족이라고 우대해 준 거 아니야?”
 “설마.”
 모종의 사건으로 망국의 운명을 탄 나라. 일본인만큼이나 그 나라 사람들도 꽤 많은 편이었다. 달과 라그랑주 포인트를 담당하는 제2 지구 작전과장 파크의 본명은 박경웅. 한국인이라는 사람들은 의외로 많은 수가 살아남아서 요직에도 올랐다.
 “에이, 난 몰라. 그냥 진으로 부를게.”
 “저는 그쪽을 뭐라 부르면 될까요?”
 “그냥 아그니.”
 “교관이나 시니어(Senior-선배)가 아니라요?”
 “여기가 경찰 학교냐?”
 편하게 부르라는 아그니의 말에 진이 새초롬하니 웃었다. 웃는 모습이 예쁜 미인이었다.
 “저······ 저 새끼. 하여튼 외눈박이한테 쓸데없는 연애 기술만 처배워서······ 잊지 마라. 직장 내 연애는 금지다.”
 “누, 누가요?”
 “외눈박이랑 하울링 울프랑 깨진 거 알지? 다 그런 거여. 이 빌어먹을 곳에서 사랑 따윈 할 게 못 돼.”
 다른 사람도 아니고 파크의 말이니 더 묵직하게 들렸다. 파크는 자신의 곁을 떠난 레이첼이라는 여자를 생각하면서 담뱃불을 붙였다. 곱슬머리에 육감적인 몸매를 가진 여자. 그 레이첼은 목성에서 최대 규모의 초능력자 전쟁이 벌어졌을 때 그레이 킹이라는 리더를 따라갔었다.
 파크는 레이첼을 사랑했던 건지 아니면 컨트랙트 스위퍼였던 그녀를 지배하려고 했던 건지 도무지 분간할 수 없었다. 그녀에겐 파크와의 불장난은 계약직, 컨트랙트 스위퍼에서 벗어나기 위한 끈적끈적한 육체관계 이상도 이하도 아닌지 몰랐다.
 “선배(Old man)는 차페이라는 사람한테서······.”
 “새꺄, 그 얘기는 금지잖아. 널 공간 염력으로 찢어 버릴 거다.”
 “예이예, 알았습니다. 근데 오늘은 이만 쉬어도 될깝쇼?”
 “지랄. 오늘부터 병아리 안내부터 해.”
 “하아아아아아. 알겠습니다요. 월급은 짜지, 이것저것 귀찮은 건 막막 시키지. 쳇쳇.”
 아그니는 투덜대면서 다시 용무늬 잠바를 어깨에 둘렀다. 버릇이었다. 알록달록한 하와이안 셔츠와 용무늬 잠바, 삼선 쓰레빠는 아그니의 트레이드마크였다.
 두 사람이 바깥으로 나오자 여기저기서 야유와 함께 농담이 쏟아졌다.
 “어이, 뉴비. 아그니 옆에서 얼마나 버틸지 내기 걸린 거 알아?”
 “아그니! 나는 세 달에 걸었다?”
 “이번 뉴비는 이야, 쌔끈한 아가씨인데?”
 “시체 처리반에서 뉴비 시체 좀 고만 보내 달라더라~!”
 문서를 정리하던 9과 소속 바바리맨들이 일제히 아우성치면서 아그니를 놀렸다. 아그니는 귀찮다는 듯 대충 대꾸하면서 손까지 흔드는 여유를 보였다.
 “거, 할 일들 열나게 없는 모양이시네. 환경 미화 대회라도 열라고 위에다 찌를까 부다. 파크한테 참 잘했어요 도장 받을라면 존나게 뺑이치셔야 할걸?”
 “거 새끼, 성격하고는. 아무튼 너도 걸어도 돼. 니 월급 개털 아니냐?”
 “됐수다. 마작은 질리게 쳤어. 당분간 도박판엔 안 갈 거여.”
 “너 또 속임수 썼지? 패 바꾸는 거 다 봤어. 조심해라. 9호 내사과에서 널 눈독들이고 있어.”
 “거, 말은 똑바로 합시다. 언더커버 임무를 수행하다보니 그렇게 된 거지. 쳇. 그리고 날 잡으려면 9호 내사과가 다 뭐야? 지구 청색 함대 정도는 불러 와야 할 거유. 째째하게 내사과 버러지들이라니. 퉷.”
 “크크크. 배짱만은 기가스라니까.”
 “만은? 보슈. 내가 기가스가 돼서 선배처럼 여자나 후리고 다닐 테니까.”
 “그 옷으로? 푸하하하하.”
 “아이고. 댁들이나 변태 같은 바바리옷 좀 그만 입어. 내 하와이안 셔츠가 훨씬 낫겠다. 그거 입고 유치원이나 사립 여고 이런 데 가면 안 되는 거 알지?”
 다시 웃음이 터졌다. 아그니와 바바리맨들은 걸쭉한 말을 주고받았다. 치안의 최전선인 바이파이라는 분위기보다는 그냥 평범한 직장 같았다. 진은 자신이 배속받은 곳이 전에 생각한 분위기와 달라서 다시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배당률이 어쩌고저쩌고 몇 달째에 걸면 이긴다는 둥 소리까지 나오면서 아그니와 진에게 이죽거렸다.
 “근데 선배······ 아니, 아그니. 이런 내기는 신참이 오면 늘 하는 거예요?”
 “아니. 그만큼 내 파트너가 위험하다는 거야.”
 “······.”
 굳이 묻지도 대답하지도 않았다. 아그니와 진은 바이파이의 옆집으로 가로질렀다. 옆집은 속칭 ‘뒷방’과는 분위기가 완전 달랐다. 여기야말로 라그랑주 포인트와 달의 전 지구를 통할하는 치안의 핵심이었다. 아그니는 마약상처럼 보였고 뒤에 선 진은 그를 체포한 사복 경관처럼 보였다.
 “보통과랑은 나중에 주차 위반 문제나 그런 자잘한 건 때문에 얼굴 익히는 게 좋을 거야. 저쪽에서는 우리를 무슨 유령 정도로 여기지만.”
 “네, 선배.”
 “난 시니어라는 말을 듣기엔 한참 젊다구. 당신 나이 몇인데?”
 “스, 스물넷.”
 “뭐야. 어린 줄 알았더니 연상이잖아?”
 “에? 선배는 몇인데요?”
 “스물하나. 경찰밥은 댁보다 훨씬 많지만 말이야.”
 아그니와 진은 경찰 전용 출입구가 아니라 일반인용 게이트를 통과했다. 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동기들과 들어올 때는 분명 경찰 전용 출입구를 이용했다. 거기엔 별다른 검문이 없었다.
 삐이이이. 경보가 살짝 울리는데도 둘은 그냥 게이트를 통과했다. 50세쯤 되어 보이는 흑인 여성 경관은 노래를 부르는 듯한 목소리로 아그니를 희롱했다.
 “어이, 아그니. 총기 가지고 다니는 거 아니야?”
 “이봐, 아줌마. 내가 총 가지고 다니는 거 봤어? 그리고 내 가장 무서운 총기는 바지 안쪽에 있수다. 검색해 보시겄수?”
 “체리보이 주제에 허세 부리시기는? 경험하고 싶으면 언제든 내 방으로 와?”
 “시끄러 빅 마마. 헛소리 처할라면 이거나 먹어.”
 욕질을 할 줄 알았더니 초콜릿 바를 툭 던져 줬다. 아그니에겐 바이파이가 집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뒤를 따르는 진에게도 왠지 엄마에게 투정을 부리는 다 큰 아들처럼 보였다.
 “건물 밖으로 나가면 웃지 마. 누구를 만나든 얕잡혀 보이면 그걸로 끝이니까.”
 “예, 예, 선배.”
 “아, 쫌······.”
 따콩. 아그니는 빙글 뒤돌아서 진의 이마에 꿀밤을 놨다. 그녀는 불의의 기습에 꺄읏 하는 귀여운 신음 소리를 냈다.
 “앞으로 실수하면 한 대씩이야. 그리고 연장자지만 이 바닥 뭐 그런 게 있나? 대접받으려면 그에 맞게 행동하고. 하아아아······ 적지 좀 마라. 내가 선생이여 뭐여? 이런 건 외우라구. 무슨 유치원에서 박물관 견학 온 것도 아니고.”
 아그니는 진의 수첩을 덮었다. 이 여자는 종이 수첩을 쓰고 있었다. 고개를 끄덕이자 안경이 주르르. 맹하면서도 귀여운 구석이 많은 아가씨였다. 다만 이제 당장 작전에 투입되어 손발을 맞춰야 할 아그니로서는 한숨이 절로 튀어나왔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바이파이 배지를 벗어서 주머니에 대충 넣고 추파춥스를 입에 물었다. 그 모습을 보고 진은 긴장했다. 막대 사탕 형태의 마약은 많고도 많았다.
 “걱정 마, 마약 아니니까. 진짜 사탕이야. 먹을래?”
 “아······ 아뇨.”
 “그리고 배지 떼. 탑 루나라도 바이파이에 원한을 가지고 있는 놈들은 많고도 많아.”
 진은 허둥지둥 겉옷 위에 있는 신분증을 뗐다. 그 바람에 가슴이 흔들리고 터질 듯한 블라우스 단추 사이로 야시시한 브래지어가 얼핏 보였다. 아그니는 헛기침을 하면서 딴 데로 시선을 돌렸다. 맹해 보이지만 굉장히 매력적인 아가씨였다.
 아그니는 추파춥스를 와그작 씹어 버리고 막대기를 담배처럼 오물거렸다.
 “경찰 학교에서 배운 건 다 잊어. 현장에서 물러난 아자씨들이 하는 소리래 봐야 뻔하지. 감을 믿어라? 의심하지 마라?”
 “예? 하지만······.”
 “살해당하는 경관 숫자는 통계로 제대로 집계되지 않아. 자세한 건 걸으면서 말할게. 아휴······ 그리고 웃옷 좀 벗어라.”
 “예······ 예? 예?”
 진은 귀엽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옷이 그거밖에 없어? 나 사복 경찰요 하고 써 붙이고 다니는 것 같잖아? 그런 건 저 바바리맨들이 뉴스 카메라 앞에서 압수 수색할 때 입는 거라구. 우리는 거리에서 쏘다녀야 해. 재킷은 벗어서 조기다 맡겨. 오프할 때 찾아가면 돼.”
 “아······.”
 그녀는 손바닥을 주먹으로 살짝 내리치면서 납득했다. 다시 안경이 주르륵 콧잔등으로 흘러내렸다. 일부러라면 굉장한 노력이 필요한 버릇들이었다. 아그니는 다시 억장이 무너져라 한숨을 쉬었다. 귀엽고 매력적인 여자가 아니었다면 아그니는 대번에 펀치를 날렸을지도 몰랐다.
 “하여튼 난 미인한테 너무 약하다니까?”
 “예? 선배, 뭐라구요?”
 “아, 제발 쫌.”
 웃옷을 벗으니 가슴이 더욱더 도드라져 보였다. 귀여운 얼굴에 육감적인 몸매는 좀 반칙이었다. 아그니는 막대 사탕 자루를 씹으면서 천천히 앞으로 걸었다.
 거리의 풍경은 탑 루나의 식당가로 바뀌어 있었다. 이곳은 관공서 거리보다 다양한 사람들이 많았다. 여권 갱신을 위해 온 광부, 라그랑주 포인트에서 온 농부, 회사원, 부자, 관광객 등등. 도드라졌던 아그니와 진 역시 어느새 거리의 풍경에 녹아들었다. 좀 기묘한 조합이긴 했지만 그들을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아그니는 거리를 걸으면서 업무 기본 절차와 문서 처리 방법, 보통과와의 협조 관계 등등 시시콜콜한 부분까지 의외로 똑 부러지게 설명했다. 진은 보통과라는 말이 나올 때마다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대다수의 말은 이해할 수 있었다.
 “근데 왜 거리에서 설명하는 거죠?”
 “잘 들어, 진. 더블 크로스(Double cross)야. 도청의 위험이 있다구.”
 “더······ 더블 크로스? 도청기요?”
 “그래, 이중 첩자. 바이파이 청사 안도 마냥 안전하지만은 않다구. 이렇게 계속 이동하면서 이야기해야 엿들을 방법이 없지.”
 진은 그제야 주위를 두리번거렸고 아그니는 한숨을 쉬면서 진의 어깨를 두들겼다. 그러고는 그녀의 정수리를 잡고 앞을 바라보게 했다. 아그니는 그녀보다 5센티미터는 컸다.
 “아무리 초짜라지만 자꾸 이럴래? 우리가 미행당할 수도 있어.”
 “미행까지요?”
 “꼭 이중 첩자가 아니라도 다른 연방 기관과 우리 회사는 물리고 무는 사이니까. 아무튼 우리 에이전트의 명단이 유출되었어. 뭐, 보통과의 경관이랑 뒤섞여서 잘 모르겠지만······.”
 “아······ 그래서 아까 일반인 게이트를? 근데 보통과요?”
 “그래. 당신을 믿어도 좋을지 어떨지 모르겠어. 당신 웃옷에서 도청기가 나왔거든.”
 “예? 에? 정말요?”
 아그니는 그녀의 표정을 날카롭게 살폈다. 그의 구형 TA-331 통신기에 빅 마마의 분석 통신이 떠 있었다. 도청기의 형태는 부착형. 그녀의 양복 안감에 붙어 있었다.
 “제······ 제가 의심받는 건가요?”
 “아니, 꼭 그런 건 아니야. 그냥 믿어도 좋을지 모르겠다는 거지. 그래서 시험을 해 볼까 해.”
 어느새 주변 풍경은 으슥한 뒷골목이었다. 때마침 탑 루나는 보름달 기간. 3일 정도는 지구 북극권의 백야처럼 낮이 계속되는 시간이었다.
 다만 빛이 있으면 어두움도 있다. 상아 같은 거대하고 하얀 건물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곳은 유난히 어두웠다. 아그니의 얼굴이 TA-331의 불빛에 비쳤다. 이렇게 보면 꽤나 잘생긴 얼굴이었다. 아그니는 그 순간 허리춤에 손을 올리고 뭔가를 번개처럼 꺼내고 있었다. 진은 깜짝 놀라면서 다리에 있는 서브웨폰을 꺼내 들었다. 스미스&웨슨 M36 치프 스페셜. 여자의 작은 손에도 착 들어가는 작은 리볼버였다.
 그녀는 이 선배라는 자를 너무 믿었다. 경찰 학교의 늙은 교관이 한 말이 떠올랐다. 모든 사람을 의심하라.
 “손들어!”
 “하아아아아아아아아아. 일단은 합격.”
 아그니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고 진은 리볼버를 겨누면서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그녀로서는 알 도리가 없었다.
 “에? 합격? 이, 일단은요?”
 “도청기. 그거 내가 붙인 거거든.”
 “엥? 으에에에에에에에?”
 “어떻게 눈치를 못 까냐. 당신의 동공 정보 심리 정보 역시 분석이 끝났어. 상황을 주고 반응 상태를 보는 건데······ 정말 의외네. 총을 꺼낼 줄이야. 능력자들은 총을 쓰지 않고 바로 덤벼드는데. 아, 아니다. 당신 혹시 그 러시아 놈처럼 총기와 관련된 능력인가?”
 “뭐가 의외예요? 느······ 능력요?”
 똑딱. 아그니의 플래시 포인트, 능력 발화점이 터지면서 그의 몸이 그녀의 옆에서 쑥 튀어나왔다. 진은 파앙 하고 저도 모르게 방아쇠를 당겼고 총알이 건물 벽으로 튀었다. 아그니는 그녀의 리볼버를 간단하게 뺏어 들었다. 진은 어리벙벙한 얼굴이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도 모르는 눈빛이었다.
 “어······ 어······ 어떻게······ 어······ 어······ 바, 방금 저기 서 있었는데 어떻게······?”
 “엥? 나야말로 묻고 싶은데? 당신 9과로 배속되었으니 9호 사건을 경험하거나 아니면 초능력자 아니었어?”
 “초오느응력자아아아아?”
 “엥?”
 아그니는 고개를 갸웃거리다 다시 한숨을 쉬었다.
 “뭔가 착오가 있었나 보네. 잠시만. 잠시만 기다려.”
 “예······ 예······ 얼마든지······.”
 아그니는 다시 리볼버를 그녀에게 돌려주고 TA-331의 버튼을 눌렀다. 이내 하품하고 있는 파크의 모습이 떴다. 아그니는 길길이 날뛰면서 파크에게 욕질을 했다. 진은 진대로 무기를 고대로 돌려준 아그니가 희한했다. 그는 방아쇠울에 손가락을 집어넣지도 않고 마치 오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검지와 엄지로 집어 들었었다.
 ‘이상한 사람이야······ 근데 꽤 잘생긴 듯도.’
 아그니는 야성적인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진은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이제 겨우 바이파이로 채용되었다. 아까 연애는 금지라던 작전과장의 으름장을 그녀는 잊지 않았다.
 한참을 통화하던 아그니가 다시 그녀 곁으로 되돌아왔다. 뭔가 일이 제대로 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당신 초짜야?”
 “엥? 에······ 예.”
 “아니아니, 경관 어쩌고저쩌고 무슨 시민의 선서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라구. 초능력자나 초능력 발현 현상을 한 번도 본 적 없는 거야?”
 “도통 무슨 소리신지······.”
 “아오, 이 빌어먹을 파크! 도대체 초짜를 데리고 나보고 어쩌라는 거여? 이런 우라질 누무! 바텀 루나에 사 개월이나 짱박혀 있었음 됐지! 이젠 생초짜를 데리고 있으라고오오오!”
 “저기······.”
 씩씩거리던 아그니는 어느새 진정하고 머리를 쓸어 올렸다.
 “하아······ 밥이나 먹으러 갑시다요. 잘하는 한국집이 있어.”
 “엥? 아? 예······.”
 한국집이라는 소리에 진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아그니는 그녀가 그러거나 말거나 먼저 앞장서서 휘적휘적 걸었다. 그녀는 다시 발목에 리볼버를 집어넣고 아그니의 뒤를 따랐다.
 진은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가장 이해가 안 되는 건 아그니가 아까 보여 준 움직임이었다. 아그니는 분명 그녀의 전방 4미터 앞에 서 있었다. 근데 어느 순간 옆에서 나타나서 그녀의 총을 뺏어 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윽고 둘은 대로변에서 멀지 않은 허름한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소수 민족 출신인 진에게도 낯익은 풍경이었다. 한글로 대폿집이라 써져 있는 글자. 안쪽에는 드럼통을 개조해서 만든 테이블이 서너 개 널려 있고 벌써부터 밀조 막걸리를 마시는 사람들이 널브러져 있다.
 “이 시발롬들아 문 닫구 들어와? 짭새 떴다 하면 다 끝장나는 거 알아 몰러?”
 “하아. 욕쟁이 할머니 컨셉 영 텄다는 거 몰라? 욕을 하려면 좀 정감 좀 있게 하든가. 행성 연방 공용어로는 영 안 어울리그든. 그냥 쌩으로 욕하는 것 같단 말야.”
 “아니 시발롬아 누가 니한테 그런 것까지 걱정해 달라 그러드냐?”
 “에헤이. 거, 밥 하나 먹으러 왔는데 욕까지 들어야 한다니. 퉷. 그냥 나갈까?”
 “나가긴 어딜 나가냐 시발롬아. 기다려 봐.”
 할머니는 아그니와 욕질 배틀을 하듯이 주절거리다가 막걸리 주전자를 탕 하고 내려놓았다.
 “할매, 나 술 안 마시는 거 몰라?”
 “누가 니놈더러 마시라고 했다냐? 츠자, 이런 놈팽이랑 같이 다니지 말라고. 즈으기 광산에서 일허는 것 같은디 한잔 마시고 딱 잊는 것이 좋아. 옷도 보아하니 탑 루나에서 번듯한 직장을 가지고 있는 듯헌디······ 으, 아깝다. 처자가 아까워.”
 “아오 쫌. 시끄러우니까 밥이나 줘.”
 숫제 메뉴는 주문받지도 않았다. 아그니도 주머니에서 몇 달러를 꺼내서 그냥 카운터 옆에 달린 소쿠리에 넣었다. 쿨하다면 쿨하고 기묘하다면 기묘한 풍경이었다.
 “여긴 도청의 위험이 없어.”
 “예? 왜요?”
 아그니는 창밖 허름한 가게 위로 내달리는 모노레일과 굵직한 기간 통신망을 가리켰다. 탑 루나를 가로지르는 모노레일 밑에 바텀 루나 못지않은 빈민촌이 형성되어 있었다. 이곳은 늘 전파 불안 지역이고 우범 지역이었다.
 “아마 광역 통신도 제대로 안 먹을걸? 군용 통신기정도 되지 않음 안 될 거야. 할매도 꾸리한 장사를 몇 개 하고 있어서 경찰에는 찌르지 않을 거고.”
 명색이 경찰이 경찰 걱정을 하고 있었다. 진은 자신의 통신기를 꺼내서 점검했다. 아그니의 말대로 먹통이었다.
 “자, 그럼 국밥이 나오기 전에 잘라서 말할게. 모든 걸 잊고 보통과 짭새가 되려 한다면 내가 말해 줄게. 파크가 아니어도 보통과에는 꽤 아는 사람이 있으니까.”
 “하······ 하지만······.”
 “전산 착오나 뭐 그런 걸로 온 거 아니야?”
 “아뇨, 무슨 적성 검사를 통과했다고 그러던데······.”
 “비등록 초능력자일 수도 있다는 건가. 골치 아프네······.”
 “비등록이요?”
 “······.”
 아그니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 아가씨가 초능력 대응팀이 아닌 보통과로 간다면 알 필요가 없는 이야기였다. 그는 난제를 떠넘긴 파크를 원망하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욕질과 함께 순대국밥이 턱턱 등장했다.
 “미안. 첫 식사치고 이래서.”
 “괜찮아요! 저 순대국밥 진짜 좋아해요!”
 다시 안경이 주르륵. 게다가 순대국밥의 김 때문에 안경이 뿌옇게 되어서 숟가락을 제대로 집지도 못했다. 정말 귀여운 구석이 많은 아가씨였다.
 ‘현장 에이전트로서는 거의 낙제점이지만.’
 고추 양념을 넣고 깍두기도 아삭아삭 집어 먹는다. 둘은 으적으적 소리까지 내면서 맛나게 순대국밥을 먹었다. 순대국밥은 의외로 구하기 힘든 음식이었다. 내장이나 피 따위를 ‘배양육’으로 만드는 회사는 없었다. 결국 순대 같은 내장은 지구에서 소비되는 자연육의 내장을 들여오거나 그도 아니면 재생 비닐이었다.
 “여기 순대는 진짜 소 순대야. 비싼 거라구. 꼭꼭 씹어 먹어.”
 “소······ 순대요? 선배는 괜찮아요?”
 아그니는 코로 순댓국을 뿜을 뻔했다. 아마도 파크에게 그가 인도계라고 들은 게 분명했다. 아직도 인도계 중에는 계율을 지키는 사람이 많았다. 우주 시대가 되어도 여전히 신자는 신자였다.
 “걱정 마, 나는 무신론자니까.”
 “아항.”
 왠지 머리를 슬슬 쓰다듬어 주고 싶은 여자였다. 그녀는 안경을 블라우스 자락에 닦고 다시 헤에 웃었다. 두 사람이 순대국밥을 비우는 건 얼마 걸리지 않았다.
 “간만에 잘 먹었네요.”
 “별말씀을. 이제 돌아가는 절차를······.”
 왠지 고아원에 아이를 맡기는 엄마 같았다. 아그니는 피식 웃으면서 어떻게 이야기를 꺼낼까 망설였다. 그 순간 아그니의 TA-331 구형 통신기에 비상경보가 떴다. 아그니는 잽싸게 이어폰을 끼고 음성으로 돌렸다.
 아니, 그건 별 소용이 없었다. TV에 긴급 통신으로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담배를 피우던 순대국밥집 할매도 튀어나와서 뉴스를 쳐다봤다.
 “루나트라즈 폭동······ 이거이거 우리 집도 당분간은 바빠지겠네.”
 최악의 범죄자들이 튀어나온 순간이었다.
 
 
 2장 루나트라즈 폭동
 
 
 “할매, 돈은 넣어 놨어. 그리고 이건 팁.”
 “지랄을 한다. 돈도 없는 젊은 놈이.”
 “에헤이. 언제 다시 올지 모르니까 넣어 둬.”
 할매는 피식 웃으면서 아그니와 진을 배웅했다.
 “선배, 뭐가 어떻게 된 거예요?”
 “루나트라즈가 털렸어. 행성 분리주의자들이다.”
 행성 분리주의자. 행성 연방이 제일 골치 아파 하는 대규모 테러 조직이었다. 이들의 주장은 간단했다.
 각 행성의 정부를 ‘국가’로! 연방 정부의 통치를 거부한다.
 1, 2차에 걸친 화성 전쟁 역시 행성 분리주의 운동의 일환이었다. 중개 무역으로 부를 축적한 화성은 자꾸 행성 연방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연방은 화성의 희소 자원들과 지정학적인 위치를 무시할 수 없었다. 목성. 그리고 목성에서 외우주까지. 화성이 가로막히면 지구는 고립된다.
 2차 화성 전쟁이 지구의 승리로 돌아가고 분리주의 조직은 점점 잡다해져 갔다. 옛 개신교계 테러리스트들인 머신건 전도사들과 연합하기도 하고 목성에서는 분파인 공산주의자들이 큰 소동을 일으키기도 했다.
 “왜 행성 분리주의자들이 그레이 킹을······.”
 “회색의 왕? 그레이 킹이 뭐예요?”
 “······.”
 아그니는 이 처자에게 회색의 왕에 대해 말해 줘야 할지 어떨지 감이 오지 않았다.
 회색의 왕-그레이 킹.
 아그니의 선배 외눈박이, 그리고 연방 사상 최악의 연쇄 살인마 맨이터와 함께 삼각 균형을 이루던 최강의 초능력자. 이 셋은 공간 염력의 소유자였다.
 당연히 루나트라즈에 갇혀 있는 가지각색의 초능력자 중 제일 위험한 자. 능력만이라면 그 누구도 회색의 왕을 막을 수 없었다. 어떻게 외눈박이가 맨이터를 죽이고 이 사내를 확보할 수 있었는지 바이파이 상부에서도 의문이었다.
 “전 에이전트에게 알린다. 일급 비상사태. 그레이 킹 도주! 우주항에 일급 비상사태! 전권을 보통과에서 이전받아서 제이 지구 작전과장 파크가 지휘한다!”
 아그니의 군용 통신기에 상부에서 내려오는 작전 문서들이 좌르륵 떴다. 뒤에서 달려오는 진은 그 문서들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이젠 보통과로 갈 수 없었다. 하필이면 1급 비상사태에 그레이 킹 탈출이라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지금 통신기로 들어오는 일련의 대응 절차들은 당연히 옆집에는 비밀이었다.
 둘은 중앙 지구로 가는 모노레일에 올라타서 숨을 골랐다. 이미 테러 경보로 열차 안에 탄 사람들은 잽싸게 안전한 곳으로 대피하고 있었다.
 “제길. 진, 당신 뭘 잘해?”
 “요리랑 청소 정도일까낭? 저 중화 요리도 꽤 잘해요.”
 “아오. 속 터져. 내가 지금 일등 신붓감 선발하는 줄 알아? 전투 능력을 말하는 거지!”
 “아유······ 선배, 진작 말하시지.”
 진은 아그니의 TA-331을 뺏어 들고 자신의 파일을 로그인해서 보여 주었다. 기계를 다루는 솜씨도 나쁘지 않았다.
 “허······ 사격 만점, 생존 기술 만점, 인공 지능 해킹 가능? ······당신 뭐 하는 여자야?”
 “에헤헤. 부끄럽사옵니다.”
 농담을 하는 건지 어떤 건지 알 수 없었다. 진은 다시 주르륵 내려오는 안경을 추어올리고 방실방실 웃었다. 문서에 따르면 이 아가씨는 권총부터 소형 군함의 함포까지 자유자재로 다룰 줄 알았다. 거기에 2등 항해사 면허와 우주용 단좌 전투정 면허까지. 한마디로 이 아가씨는 모든 병기를 다룰 줄 안다는 이야기였다. 스물네 살에 이 모든 과정을 통과했다는 건 다른 의미로 초능력인지도 몰랐다.
 ‘사격술이라. 딴 건 몰라도 요건 냄새가 난다. 뭐가 병아리 교육이냐. 내 파트너로 찍어 놨구만.’
 아그니는 총을 쏘지 못한다. 남이 쏜 총을 이용하는 것과는 별개로 방아쇠를 당기지 못했다. 그 때문에 수많은 상처들이 생겼다. 파크는 아그니의 약점을 아주 잘 알고 있었고 그 부분을 채우기 위해 진을 붙여 준 것이다.
 “하이튼 그 아자씨는 김치 볶음밥이나 만들 것이지.”
 “우왕. 그거 저도 좋아하는데.”
 “시끄러워. 진,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다. 너도 작전에 참여해야 해.”
 넉살이 좋은 걸까 아니면 배짱일까? 진은 씨익 웃고 있었다. 아그니는 이마에 손을 올리고 한숨을 쉬다가 우주 공항으로 향하는 모노레일로 그녀를 이끌었다.
 펑. 벌써 축제가 벌어진 모양이었다. 푸른색의 연기. 아그니는 연기만 보고 컨트랙트 스위퍼가 당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계약 청소부의 개목걸이에는 특수한 화약이 들어 있다. 관계자들은 폭발 연기만 보고 제꺼덕 알 수 있었다.
 “도대체 몇 명이 어떻게 침입한 거야?”
 루나트라즈는 당연히 바텀 루나에 있었다. 하지만 그곳의 우주 공항은 우주군이 관리한다. 루나트라즈를 탈옥할 수 없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탑 루나의 공항으로 오기도 전에 함대의 궤도 폭격을 처맞으면 끝이었다. 아니, 대부분은 루나트라즈 외곽의 함대 주둔지는커녕 바로 위에 있는 루나트라즈 교정국 수비대도 뚫지 못했다.
 “하지만 그레이 킹이 있다면 다르겠지.”
 자세한 상황은 들어오지 않지만 공간 염력자들을 여러 번 상대해 본 아그니는 알 수 있었다. 맨이터, 그리고 외눈박이. 그들의 능력은 신에 비견될 만한 정점이었다. 더군다나 그레이 킹은 순수한 위력이라면 그 둘보다 더 뛰어나다고 일컬어지는 자였다.
 “세상에······.”
 아그니의 상상 이상이었다. 4년 만에 감옥에서 풀려난 회색의 왕은 자신의 존재를 전 행성에 각인시키고 있었다. 함대 진형을 이루고 있는 소형 구축함 하나가 달의 안정 궤도 아래로 점점 떨어져 갔다. 구축함 안에서는 궤도 회복 불가라는 인공 지능의 소리가 정신없이 들리고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제3 지구 돔에 처박혔다. 군함은 웬만해서는 안정 궤도 이하로 떨어지지 않는다. 누군가의 수작이었다.
 투명한 돔이 퍼벅 하고 깨져 나가고 달의 중력에 이끌려 파편이 터진 계란처럼 아래로 쏟아져 내렸다. 탑 루나의 거주민들은 무슨 종말이라도 온 것처럼 비명을 지르고 안전한 곳을 찾아 거리를 내달렸다.
 이 장면은 오직 바이파이의 에이전트만이 볼 수 있었다. 저 멀리 바텀 루나에서 오는 모노레일 열차에 누군가 타고 있었다. 열차의 옆구리에는 행성 분리주의자들의 문구가 스프레이로 써져 있었다.
 인류에게 자유로운 행성을! 자유 행성 동맹 만세!
 아그니는 이를 부드득 갈았다. 동맹은 행성 분리주의자들 중에서도 제일 과격한 놈들이었다. 머신건 전도사들과 함께 톱을 달리는 과격 단체다. 당연히 루나트라즈에도 많은 수가 갇혀 있었다.
 “어떻게 그레이 킹을 탈출시켰는지 알겠구만. 행성 분리주의자들이 감옥에서 폭동을 일으키고 위가 아닌 아래로 내려갔어. ‘바닥’으로.”
 아그니는 초조하게 창밖을 쳐다봤다. 탑 루나 역시 언제 계엄령이 떨어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바이파이든, 군부든 모두 목성에서 있었던 9호 사건의 악몽을 떠올릴 것이다. 만약 그레이 킹을 탈출시키게 되면 연방과 군부의 위신은 땅에 떨어지게 되고 난공불락 루나트라즈의 명성도 금이 가게 된다.
 군은 역시 최강의 카드를 꺼내 들었다. 지구 궤도권을 순항하는 인류 최강의 함대, 지구 청색 함대가 서서히 달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궤도 폭격을 퍼부으면 그레이 킹이라도 당해 내지 못한다. 대신 달의 기간 통신망이나 외곽 시설 역시 화성의 서울 시티 꼴이 날 것이다.
 아그니는 시계를 쳐다봤다.
 “지구 청색 함대가 도착하는 시간이······.”
 “십사 분 오십삼 초. 바텀 루나 출신이라면 다 알고 있어요.”
 “맥브라이드 스캔들······.”
 방실거렸던 진의 표정이 잠시 어두워졌다.
 맥브라이드 스캔들. 2차 화성 전쟁의 막바지. 달 최대의 군함 도크인 ‘난나 드라이브 야드’의 이전과 관련해서 문제가 일어나자 맥브라이드는 그곳을 궤도 폭격으로 밀어 버렸다.
 결국 전쟁은 승리했지만 같은 연방의 일원이었던 바텀 루나 외곽의 소수 민족들은 그 승리에서 소외당했다. 소문으로는 궤도 폭격이 아니라 독가스를 썼다는 이야기도 있고 바텀 루나에서는 아직도 의견이 갈라져 있었다.
 아무튼 바텀 루나 출신이라면 14분 53초라는 시간을 결코 잊지 않는다. 입에서 입으로 아버지에게서 자식으로 전해지는 피의 역사였다.
 “진 당신 바텀 루나 출신이었어?”
 “예. 바텀 루나에서도 외곽지구요.”
 다시 방긋 웃었다. 굉장히 이상한 아가씨였다.
 아그니는 자기가 잠복해 있었던 바텀 루나를 떠올리면서 어깨를 으쓱했다. 이런 귀여운 아가씨가 그런 험한 곳 출신이라니 어울리지 않았다. 아그니는 대충 그녀를 파크처럼 지구 고급 주택가 출신이라고 생각했었다.
 딴생각하는 것도 잠시, 또 사태는 급변하기 시작했다. 아그니의 예상대로였다. 아직 함대가 진영을 갖추기 전에는 궤도 폭격을 들이부어도 소용없었다.
 “세상에······ 선배 제가 지금 보고 있는 게 사실이에요? 궤도 폭격이라니······.”
 “어. 명색이 회색의 왕인데. 왕의 귀환인데 이 정도는 약과지.”
 구축함과 순양함 일곱 척에서 맥주 깡통 같은 궤도 폭격 폭탄들이 쏟아져 내렸다. 이 깡통은 일정 고도에서 분해되어 엄지손가락만 한 탄자들로 분해된다. 이 탄자들이 미세한 곳까지 파고들어 연쇄적으로 터지는 것이다.
 이 궤도 폭격 앞에 재래식 전술은 아무 의미도 없었다. 탱크건 비행기건 지상군은 주역(宙域)을 확보하고 있는 우주 함대에겐 그저 개미만도 못한 존재인 것이다.
 지금 아그니와 진이 보고 있는 건 그런 전술을 뿌리부터 무시하고 있었다. 마치 하늘을 손으로 북북 찢어서 흩날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힘으로 폭격 탄자들이 고고도에서 퍼버벅 터져 버렸다. 공간이 일그러지면서 폭발압 역시 제멋대로 허공에서 춤을 췄다.
 “그레이 킹의 공간 염력······.”
 그레이 킹에게 공간은 그저 애들이 쭈쭈뿌뿌하면서 놀곤 하는 장난감일 뿐이었다. 하늘의 벽지를 으지직 벗겨내듯 폭발압 자체가 파도처럼 휩쓸려서 모노레일 위를 비껴갔다. 파바바바박! 고요한 달의 바다에 잔해들이 미친 듯이 처박히면서 거대한 모래 폭풍이 일어났다. 고성능 정찰기의 카메라에도 그레이 킹이 탄 모노레일의 모습이 사라져서 보이지 않았다.
 “이런 제기랄! 보이지 않는다!”
 “이 멍충이들아! 인공 지능더러 모노레일의 궤도를 쫓으라고 하면 되잖아! 어차피 모노레일은 구간 단선 되어 있다! 언젠가는 멈춰 설 거야!”
 “하지만 구간 단선 된 구간을 저 열차가 넘었잖슴까!”
 거기서 함대 관계자들의 통신이 끝났다. 보통 사람들의 상상력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루나트라즈의 관계자들은 바보가 아니었다. 루나트라즈에서 나오는 모노레일은 유사시엔 아예 트랙을 꺾어 버릴 수 있었다. 하지만 저 모노레일은 탑 루나 시가지 23킬로미터까지 다다랐다.
 “에이이잇! 저 모노레일 하나 어쩌지 못하다니! 청색 함대가 오면 우리 주둔 함대의 수치다! 갈아엎어 버려!”
 “하지만······ 탑 루나에도 여파가······.”
 “시끄러워! 이미 구축함 한 척이 돔에 처박혔다! 너나 내 모가지로는 끝나지 않아!”
 지휘관이 결정을 내리자 반응은 빨랐다. 다시 궤도 폭격과 하부 포대를 모두 이용해서 지상을 갈아엎었다. 감속 추진액이 퍽퍽 터지면서 미사일 역시 허공을 어지럽게 수놓았다.
 모래 기둥이 퍽 하고 솟아올라서 달의 궤도권 밖으로 벗어난다. 마치 자석으로 쇳가루를 가지고 놀 때처럼 달의 궤도권에 모래로 멋들어진 호선이 여러 개 그려졌다. 퍽퍽퍽. 순양함은 아예 함체를 아래로 기울여서 대구경 순양 함포까지 쏟아붓고 있었다.
 “흐흐흐흐흐흐흐흐흐흐.”
 바이파이의 비밀 회선이었다. 아그니는 깜짝 놀라서 회선 확인을 다시 했다. 진은 마치 3D 영화를 보는 듯 아그니와 바깥의 상황을 쳐다보고 있었다.
 “고마운 사 년이었다, 외눈박이. 봐라! 나는 돌아왔다!’
 찌이이이잉. 그걸 마지막으로 탑 루나의 모든 회선이 일시에 셧다운되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투명한 돔의 창 너머로 모노레일의 1자 궤도가 마치 창처럼 순양함으로 쏘아져 오르는 장면을 목격했다.
 모래 먼지 속에서 솟아오른 창은 마치 북유럽 신화의 궁니르처럼 순양함의 배를 푹 찔렀다. 대단위 반응 장갑도 소용없었다. 충격을 이기지 못한 반응 장갑이 거울이 깨지듯 순양함의 선수 끝에서부터 좌라라락 터져 나갔다.
 오렌지색의 불꽃이 한껏 폭발했다가 공기압이 스러지면서 같이 사라지고 온갖 잔해들이 탑 루나의 돔에 부딪쳤다. 거미줄 같은 금이 탑 루나의 돔에 좍좍 퍼졌다. 로봇들이 긴급 보수액을 들이붓자 아름다운 탑 루나의 풍경은 뿌옇게 변했다.
 아그니는 왜 탑 루나의 통신이 셧다운되었는지도 알 수 있었다. 회색의 왕은 회색의 달 모래 먼지 사이로 거대한 통신탑마저 뽑아서 날려 버렸다. 그의 별명인 회색의 왕에 딱 어울리는 광경이었다.
 통신탑에 동물의 내장처럼 각종 전선들과 통신 모듈이 한데 날아가 또 다른 구축함에 처박혔다. 그 폭발이 결정적이었다. 탑 루나의 작은 돔 하나가 케슬러 신드롬(큰 물체가 데브리에 부딪치면서 더 많은 데브리가 생겨나는 현상)으로 거의 유성우처럼 늘어난 우주 쓰레기들을 견뎌 낼 수 없었다.
 거기에 행성 분리주의자들이 호응해서 각각의 기간 통신망을 폭발시켰다. 펑펑펑. 돔 내부에서 폭발이 일어나면서 탑 루나 시가지는 혼란의 극에 달했다.
 “아, 아······ 전에 혼자서 청색 함대랑 싸워도 이길 거라더니······ 빌어먹을 그레이 킹. 농담이 아니잖아, 농담이.”
 마침내 작은 돔은 수복 한계를 이기지 못하고 터져 버렸다. 보수용 점착액을 부어도 소용없었다. 계란 껍데기처럼 밖에서 안으로 움푹 파이더니 이번엔 안에서 바깥으로 터져 나갔다. 사람들이 마치 개미처럼 밀착형 우주복을 입지 않은 채 밖으로 쏟아져 나가고 뒤이어 절명해 버렸다. 끔찍한 장면이었다.
 진은 그 광경들을 날카로운 눈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바텀 루나출신이라서 그럴까? 그녀의 표정은 아무 변화가 없었다.
 달의 모래 먼지는 이쪽 돔에서도 볼 수 있었다. 사막의 모래 폭풍처럼 저쪽에서 데브리들과 함께 밀려와서 다다다다닥 기분 나쁜 소리를 냈다. 금방이라도 이 거대 돔 역시 부서질 듯한 느낌이었다.
 아그니는 겁먹지도 않고 회색의 모래 폭풍을 노려봤다.
 “근데 이거 지나치게 화려한데······ 사이먼의 스타일이 아니야. 그는 불필요한 인명 살상을 좋아하지 않았어.”
 “예? 그게 무슨 소리예요? 사이먼은 또 누구예요?”
 “그레이 킹의 본명.”
 통신은 먹통 상태였다. 아그니는 머리를 굴렸다. 모래 폭풍 속에서 엉성한 행성 간 로켓 ‘하나가 솟아올랐다. 드럼통에 쇠파이프, 간이 앵글로 대충 만들어진 우주선. 다만 분사 모듈만큼은 굉장히 멋들어진 군용이었다.
 흔히 생각하는 유선형의 우주선은 군용이 많았다. 민간용으로는 굳이 대기권 진입을 할 필요가 없었다. 각각의 행성마다 궤도 엘리베이터가 몇 대씩이나 건립되어 있고 위험한 대기권 강하를 할 필요가 없었다.
 그냥 버스를 타듯 행성 간 우주선으로 지구에서 화성까지 간 후에 거기서 궤도 엘리를 타고 궤도권 밑으로 내려오면 그만이었다. 그래서인지 대기가 없는 행성 간의 이동은 대개 저런 고물스러운 우주선이 일반적이었다.
 “탈출용 우주선을 숨겨 놓으셨다? 그것도 달의 고요의 바다 한가운데에? 궤도 폭격을 맞을지도 모르는데?”
 “선배 지금 장기 두는 것 같아요.”
 “뭐, 비슷한 거지. 아무리 봐도 그레이 킹을 탈출시키기엔 너무 엉성해. 엉성한 방법이야. 까딱 잘못했다간 궤도 폭격으로 모두 죽는다구.”
 아그니는 시계를 쳐다봤다. 이미 청색 함대의 기함 템페스트의 길쭉한 앞대가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지구에서 달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는다. 화성이 반란을 획책할 수 있었던 것도 지구에서 달까지 꽤 거리가 있기 때문이었다.
 어느새 시간은 13분 20초 경과. 지구 청색 함대는 공간 도약 기능이 있는 군함도 몇 척 있었다.
 도약 추격이 아니어도 라그랑주 포인트의 행성 간 결전 병기 라그나로크라거나 청색 함대의 일제 포격 한 방이면 저 걸레 같은 우주선은 먼지가 되어 스러진다.
 “진. 당신이라면 어떻게 탑 루나를 탈출하겠어?”
 “글쎄요? 저라면 음······ 음······ 음······ 음? 선배 생각은요?”
 “질문에 질문으로 대답하기 있기 없기?”
 “있기?”
 아그니는 그녀의 이마에 꿀밤을 놨다. 놀리는 재미가 있는 여자였다. 연상이라는 기분은 들지 않았다. 그는 아우우 하면서 불평하려는 진을 바라보다가 생각을 정리했다.
 잔대가리라면 아그니도 빠지지 않는 인물이었다. 차기 팀 리더나 목성 지구의 작전과장으로 거론되기도 했었다. 아직 스물한 살의 새파란 나이가 문제였다. 다만 컨트랙트 스위퍼 시절까지 합치면 그의 현장 경력은 거의 10년 8개월이었다. 그런 아그니가 수상한 점을 놓칠 리 없었다. 놈은 뼛속까지 형사였다.
 “지구 청색 함대가 올 거라는 건 누구나 알고 있어. 거기에 대놓고 우주선을 쏴 올리는 쇼를 한 거다. 통신망을 박살 내 놓고서······ 아아, 앨런 아자씨가 아주 여러 사람 망쳐 놨다니까? 다들 잔대가리만 살살 돌아가고 말이야. 그 양반 수법을 고대로 흉내 냈네.”
 “앨런 아자씨는 또 누구예요?”
 “있어, 욕쟁이 아저씨. 그 아저씨처럼 창의적인 욕설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지, 암.”
 앨런 스미시. 아그니에게도 잊을 수 없는 추억을 남긴 사람이었다. 목성 제9호 사건에서 목성을 거의 뒤엎은 남자였다. 아그니는 정상 결전에서 있었던 일들은 하나도 모르지만 뭔가 그 욕쟁이 아저씨가 일을 쳤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외눈박이는 앨런 스미시가 그냥 죽었다고 했다. 바이파이 9과에서만 볼 수 있는 문서에서도 사망이라고 나와 있었다.
 하지만 아그니는 이 앨런 스미시가 죽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목성 샌드힐 묘지에서의 격전이나 앨런이 정보망을 가지고 논 걸 떠올리면 죽음마저도 속일 인간이었다. 아그니는 다시 피식 웃었다.
 “바이파이, 핍사, 마피아 할 것 없이 전부 엿을 처먹였지, 흐흐흐. 그건 굉장히 통쾌했어. 그것도 혼자서. 내가 그 정상 결전을 봤어야 하는 건데, 쳇.”
 게다가 삼류 잡지 따위에서는 지구에서 바이파이 요원 자니 비 굿, 혹은 앨런 스미시를 봤다는 기사도 나왔었다. 수염이 부숭부숭하고 저화질로 찍힌 사진이지만 아그니는 그 사진을 보고 피식 웃었었다. 사진이 찍힌 위치가 재미있는 곳이었다.
 “그 아저씨 꿈이 분명 지구에서 요트를 수리하는 거였지?”
 “혼자서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시는 거예요? 그리고 우주 공항은 왜 보고 있어요?”
 “아, 그냥 옛날 생각. 내가 말하는 욕쟁이 아저씨라면, 화려하게 눈을 돌려놓고 후후후, 저길 이용할 거야.”
 “아이참. 뭔가 좀 알아먹을 수 있게 말해 줘 봐봐요.”
 “다시 물어볼까? 탑 루나를 가장 안전하고 평범하게 벗어나려면 어떻게 할까?”
 “그야 여권을 가지고······ 아? 아?”
 둘은 동시에 우주 공항을 바라봤다. 행성 간 우주선, 모래 먼지. 특히 모래 먼지. 모든 것은 앨런 스미시스러운 혼란이었다.
 이미 우주 공항은 마비 상태였다. 일거에 통신망이 작살난 데다가 언제 돔이 데브리에 박살 날지 몰랐다. 이미 소형 돔 하나가 박살 났다. 대피하려는 사람들로 공항은 지옥처럼 변해 있었다.
 아이들을 데려가 달라고 말하는 엄마. 저쪽에서는 벌써 울고불고 연인들이 키스하고 난리였다. 마치 난파선 위의 사람들처럼 사람들이 아우성치는 소리로 정신이 없었다.
 아그니는 사람들이 잔뜩 줄 서 있는 곳을 피해 사람들이 별로 없는 구석 쪽 게이트로 갔다. 정부 요원들만이 이용할 수 있는 게이트였다. 모래 먼지를 뒤집어쓴 일곱 명의 바바리맨이 통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성간 수사국 요원이오.”
 “배지나 신분증, 문제없습니다. 통과하세요, 요원님.”
 “어이쿠, 수고하십니다. 공항 직원분들도 난리구만요.”
 “뭐, 그렇죠. 소문으로는 무슨 죄수가 탈주했다던데······.”
 “저희도 그것 때문에 바깥에서 이 지경이 되었다구요.”
 바바리 사내들은 미세 먼지를 탁탁 털었다. 달의 모래 먼지는 굉장히 위험한 것들이다. 의료용 나노머신이 없다면 먼지를 들이키는 것만으로도 폐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 된다. 그걸 잘 아는 공항 직원들은 눈살을 찌푸리면서 입과 코를 가렸다.
 “일단 우리 측 대장과 합류하여 새로운 작전을 짜야 할 것 같습니다, 치프.”
 “음······ 아무래도 그래야겠지.”
 게이트 직원은 모래 먼지로 회색이 되어 버린 일곱 명을 바라보고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치프는 감사하다는 듯 박하 사탕까지 선물하면서 씨익 웃었다.
 상어 이빨.
 앞니가 뾰족한 것이 어딘지 뱀파이어가 생각나는 남자 같았다. 일자로 된 스포츠 고글을 쓰고 매너 있게 인사하는 연방 요원 사이먼 피들러. 그는 여유롭게 가방까지 둘러메고 자신의 동료들을 불렀다.
 “가자.”
 “저 사람들은 뭐야! 왜 게이트를 통과하는 거야!”
 “그래! 저 사람들은 뭐냐구! 우리도 빨리 탑 루나를 벗어나고 싶다구!”
 “저분들은 연방 요원입니다. 이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청색 함대로 가실 거예요.”
 “그런 게 어딨어! 연방 요원이면 다냐!”
 “바바리 새끼드으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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