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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차별 연기대전-장미전쟁 1

2018.01.03 조회 422 추천 3


 무차별 연기대전-장미전쟁 1권
 -1화-
 
 
 “······.”
 소극장 무대 앞의 관객석에 여자가 하나 웅크리고 있었다. 굉장한 미인이었다. 눈매는 얼핏 보면 날카롭지만 눈망울이 아름다웠다. 코의 곡선과 턱 역시 도도한 매력이 흘렀다.
 그녀는 후드티와 반바지 차림으로 무대를 노려보고 있었다. 대충 차려입은 옷이지만 그녀에게는 어딘지 범접할 수 없는 위엄과 기품이 흘렀다.
 “분노도 슬픔도, 무대 밖에선 결코 밖으로 드러내지 않아야 해. 나는 배우야. 나는. 절대로······ 절대로. 크윽.”
 말과는 달리 그녀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눈물이 주륵 흐르고 아랫입술을 깨물고 오열했다.
 모든 것이 무너져 내렸다. 그녀의 발밑에는 스포츠 신문들의 스캔들 기사가 대문짝만 하게 나와 있었다.
 
 - 강철의 여왕 강한나 정사 장면 유출
 - 강철의 여왕의 마음을 녹인 상대는 재계의 재벌 3세 유부남
 - 도도한 척하던 강철의 여왕 사고 치다! 마약 투여 혐의도 있어!
 - 외곽의 별장에서 마약을 투여하고 광란의 파티. 본보 독점 보도
 - 방송사 최악의 스캔들을 일으킨 강한나(24) 출연 정지 결정. 한편 소속사에서는 계약 위반을 이유로 그녀에게 소송을 제기
 - 여성 단체에서 강한나 씨의 부도덕한 스캔들에 대해 성명을 발표해······.
 
 24살의 여배우 강한나. 그녀는 이름보다 별명이 더 유명했다.
 강철의 여왕 강한나.
 그 기묘한 별명이 붙은 이유는 신문이나 방송을 대하는 그녀의 태도 때문이었다.
 강한나는 결코 무대나 영화 촬영장 밖에서 자신의 성격을 드러내지 않는다. TV 인터뷰나 기타 등등 매체에서 무표정한 얼굴로 무감정하게 말했었다.
 심지어 팬들과 직접 만나는 영화 시사회나 관객 인사에도 무슨 평론하는 사람처럼 무미건조한 톤으로 이야기했다. 웃음 따윈 없었다.
 하지만 타고난 미모와 극중의 배역을 보고 그녀에게 반한 사람들은 점점 많아졌다.
 그래서 붙은 별명이 연기 로봇이었다가 그녀의 강렬한 연기를 보고 반한 사람들이 강철의 여왕이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
 “나는 잘못되지 않았어. 흐윽. 나는······.”
 강한나가 그렇게 한 이유는 극에 몰입하지 못하는 그 어떤 요소도 제거하기 위해서였다.
 그녀는 예능 프로그램에도 나가지 않았고 인터뷰도 거절했다. 그건 엑스트라에서 출발한 신인 때부터 마찬가지였다.
 한편 소속사에서는 그녀의 태도에서 신비주의 전략을 발견하고 일부러 모든 인터뷰와 예능 출연을 금지시켰다. 매니지먼트로는 그게 더 먹혀들었다.
 강한나에게 주변이나 마케팅은 아무래도 좋았다.
 영화, 연극, 뮤지컬, 어떤 현장의 어떤 배역이든 신성한 작업이었다. 그녀는 오직 배역만을 위해 자신의 인생까지도 포기했다.
 연기는 그녀의 모든 것이었으며 인생을 포기하더라도 양보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 고생의 대가로 그녀가 나온 영화나 연극은 강렬한 연기에 모든 배역이 씹어 먹혔다. 하다못해 비중 없는 배역이라 할지라도 사람들은 그녀를 발견하고 그녀의 연기에 환호를 보냈다.
 심지어 베테랑 연기자도 그녀와의 공연을 피할 정도였다.
 강철의 여왕.
 그녀는 수많은 영화제의 여우주연상을 휩쓸고 해외 영화제까지 도전했었다.
 “나는······ 나는······.”
 하지만 스캔들 한 번에 모든 것이 무너져 내렸다.
 스캔들 한 번에 그녀를 지지했던 팬들도 그녀의 주변에 있었던 사람들도 모두 떠나갔다.
 아무도 그녀의 외침을 믿어 주지 않았다. 신비주의의 유리가 깨지고 모든 게 가식이었다고 사람들이 비웃었다.
 사실 강한나의 성격상 그런 짓은 불가능했다. 인생까지 내던지고 연기에 매달리는 그녀였다.
 그녀는 술도 담배도 피우지 않았다. 마약은 더더군다나 어처구니없는 누명이었다.
 섹스, 마약, 음주 운전까지.
 강한나는 이것이 ‘누군가’가 씌운 누명이라고 항변할 수도 없었다.
 “이유경! 이유겨엉! 용서하지 않겠다! 이유경!”
 모든 것이 함정이었다.
 쫑파티에서 어쩔 수 없이 와인을 한 잔 마셨을 뿐인데 그녀는 외곽의 별장에서 발가벗겨진 채 발각되었고 하필이면 파파라치가 그 장면을 찍었다.
 그 스캔들을 만들어 낸 사람. 그녀는 또 다른 여왕을 떠올리면서 이빨을 부드득 갈았다.
 꽃들의 여왕 이유경.
 강철의 여왕이 강한나의 별명이었다면 꽃들의 여왕은 이유경이었다.
 그녀 역시 24세로 강한나와 동갑이지만 이미 연기 경력에서 강한나와는 출발 지점이 달랐다.
 이유경은 집도 알아주는 재벌이었고 어릴 때부터 유명한 아역 배우 출신이었다. 또 온화하게 생긴 얼굴과 따뜻한 ‘겉’성격 탓인지 주변에는 같은 나이 또래부터 원로 연기자까지 수많은 여배우들과 인맥이 있었다.
 이유경의 미모와 신분은 그 엄청난 인맥을 형성하는 데 도움이 됐다.
 강한나가 타고난 배우였다면 그녀는 정말로 타고난 여왕 스타일이었다.
 동그란 눈동자와 공주님을 연상케 하는 얼굴이 팬들의 마음을 콱 사로잡았다. 잇따라 주말 TV극을 꿰차면서 인지도도 몸값도 강한나와 더불어 종종 2인의 여왕이라고 불렸다.
 강철의 여왕과 꽃들의 여왕.
 하지만 이번 스캔들은 꽃들의 여왕 이유경이 판 함정이었다.
 유부남 재벌 3세는 이유경의 친척이었고 기자들 역시 그녀가 움직였다. 현실에서도 진짜 여왕은 이유경이었다.
 “이유경. 내가······ 내가 너에게 한 번이라도 나쁜 짓을 한 적이라도 있었나? 왜······ 대체 왜!”
 꽃잎 속에 숨은 꽃들의 여왕의 본모습은 음험하고 악랄했다. 이제 여왕은 하나밖에 없으며 강한나는 왕관을 빼앗기고 거리로 끌려 나온 여왕이었다.
 강한나는 작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가 오열했다.
 가녀린 어깨가 들썩이고 강철의 여왕이 아닌 인간 강한나가 완전히 무너졌다.
 철의 껍질 안에는 연약한 스물네 살의 여자가 있었다.
 그녀는 무대에 손을 짚으면서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전라의 동영상이 돌아다니는 건 차라리 사람을 찔러 죽이는 게 나을 정도였다.
 간통과 마약 투여 혐의로 경찰에 소환당할 때마다 굴욕적으로 터지는 플래시. 배우나 강철의 여왕이 아니라 24살의 여자가 감당하기엔 너무 가혹한 시련이었다.
 또한 고등학생 때부터 7년 동안 쌓아 온 모든 것이 그녀를 배신했다.
 소속사는 그녀에게 소송을 걸었고 그녀의 소중한 매니저 역시 등을 돌렸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강한나에게 손가락질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자신의 어머니와도 같은 연극 무대에 엎드려 펑펑 울었다. 이곳이 그녀에게 세상의 종말이며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지옥도의 한가운데였다.
 “강철의 여왕 강한나가 이런 꼴이라니 다들 비웃을 거야.”
 뚜벅뚜벅.
 그때 뒤에서 누군가가 걸어왔다.
 그녀는 밑에 떨어진 야구 모자를 눌러쓰고 선글라스를 꼈다.
 “흥. 눈이 부은 꼴은 보여 주기 싫다? 명색이 여배우시라 그건가.”
 “······.”
 “걱정 마. 기자 나부랭이나 쓰잘데기 인물은 아니니까.”
 남자는 머리를 쓸어 올렸다.
 날카롭게 생긴 미남자였다.
 넥타이가 없는 정장을 말쑥하게 차려입은 모습이 굉장히 멋있었다. 키도 180 이상은 될 것 같았다.
 그 사내는 키를 이용하여 간단히 강한나의 모자를 휙 빼앗아 썼다.
 탐스러운 갈색 머리가 모자 때문에 스르륵 밑으로 내려왔다. 아찔할 정도로 아름다운 아가씨였다.
 남자는 그 모습을 보고 움찔하고 눈살을 찌푸렸다. 치명적으로 아름다웠다.
 “하필이면 오랫동안 우승을 못 했었던 레드삭스의 모자냐? 다음부터는 양키즈 같은 모자를 쓰라고. 재수 없게.”
 “당신 누구야?”
 “알면 뭐 하게? 어이구. 노려보는 모습 보니까 무서운데?”
 이곳은 유명 연예인들이 출연하는 뮤지컬 극장들과 다른 곳이었다. 사람들은 이런 곳을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배우들이 연극 연습 도중에 짬짬이 거리에 나가서 티켓을 팔지 않으면 아무도 오지 않는 곳이었다.
 길을 잘못 들어올 리도 없었다. 폐가처럼 음울한 기운이 떠도는 곳이라 잘못 들어왔다고 해도 금방 나갈 것이었다.
 “여기가 어디냐. 여기가 내 인생의 끝이라면 이 팔을 놓아라. 이제 그만 쉬고 싶다. 내 권도 한갓 바다 위에 뜬 조각배. 내가 지나쳐 온 세상이 허깨비들 놀음이었단 말인가?”
 “템페스트······ 2막 1장. 알론조의 노래.”
 난데없이 사내는 셰익스피어의 템페스트에서 난파당한 왕의 대사를 건넸다.
 강한나는 선글라스를 벗고 그를 쳐다봤다. 퉁퉁 부은 눈이지만 그녀의 눈은 생동감 있게 남자를 쳐다보고 있었다.
 “당신 누구야?”
 “오즈의 마법사의 동쪽 마녀. 아, 신데렐라의 마녀도 좋겠어. 차림은 마녀가 아니지만 그런 걸로 하자고. 아니지, 파우스트의 메피스토가 더 낫겠네. 차림도 정장이고 하니. 소원을 들어드리지. 영혼을 파시겠소?”
 “······.”
 남자는 대답 대신 담배를 입에 물고 강한나의 머리에 모자를 돌려주었다. 마치 왕관처럼 그녀의 머리에 모자가 얹혀졌다.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하지. 다시 천하를 잡지 않겠나?”
 “뭐?”
 톡.
 담뱃재가 휴대용 재떨이에 떨어지고 담배 연기가 솔솔 피어오른다.
 그녀를 알던 사람들도 아주 보기 드문 장면이었다. 강한나가 입을 벌리고 얼빠진 얼굴로 무대 위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사내는 꽤 잘생겼지만 어딘지 정신이 나간 것 같았다. 셰익스피어의 대사를 읊다가 난데없이 천하를 잡자고 말했다.
 그리고 남자가 뒤이어 한 말은 강한나를 더 어이없게 만들었다.
 “승패는 병가에서도 기약할 수 없는 것이고(勝敗兵家不可期)! 부끄러움을 안고 참는 것도 바로 영웅이로다(包羞忍恥是英雄)! 강남 사람들은 뛰어난 인재도 많았으니(江南子弟多材俊)! 흙먼지를 일으키고 다시 오면 또 모르는 일이었을 것을(卷土重來未可知)!”
 무슨 무협 소설 대사처럼 초패왕 항우의 이야기를 했다.
 그가 한 이야기는 후대의 시인이 항우의 비참한 패배를 보고 아쉬워하면서 남긴 시였다. 군데군데 운율을 깨고 단어를 바꿔 쳤지만 강한나는 남자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이해했다.
 항우는 한고조 유방에게 밀리고 끝의 끝에 자살했다. 그가 읊은 시는 만약 항우가 그의 고향인 강동으로 가서 훗날을 기약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모른다는 내용이었다.
 “아, 역시 설명해 줘야 하나?”
 “흥. 난 댁 같은 바보가 아니야.”
 “이야. 역시 강철의 여왕이야. 내가 사람 보는 눈이 있어. 은근 귀여운 구석이 있는데, 강한나? 난 정말로 강철로 된 여자인 줄 알았는데 말야.”
 “쓸데없는 소리는 집어치워. 당신 뭐 하는 사람이야?”
 “당신의 신하. 제갈량이 되어 주지.”
 “뻔뻔한 것도 정도가 있어야지.”
 강한나는 오만한 눈으로 남자를 쏘아봤다.
 그 자연스러운 태도는 여왕이라는 별명에 걸맞았다.
 남자는 한순간 그녀의 눈빛을 보고 움찔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눈빛이었다.
 “과연 눈은 죽지 않았군. 역시 당신에게 걸길 잘했다니까.”
 “뭐를?”
 “내 돈. 강철의 여왕, 당신에게 다시 왕관을 바치지.”
 남자는 휴대용 재떨이에 담배꽁초를 톡 떨구고 다시 양복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러고는 마치 연극배우가 무대 인사를 하듯 우아하게 고개를 숙였다.
 “웃기시는군. 개소리 좀 집어치워 주겠어?”
 “그래, 차라리 화를 내. 그게 당신에게 어울려.”
 “뭐라고?”
 “당신은 강철의 여왕이니까. 그까짓 스캔들 따위 강철의 여왕답게 딛고 일어서.”
 “······.”
 “오히려 캐릭터적으로 그게 맞는다구. 좆이나 까라, 세상아! 지옥에서 기어오르는 강철의 여왕을 맞이하라!”
 남자는 무대에서 내려와서 강한나의 턱에 검지를 올렸다. 정말로 여왕을 보는 것 같았다.
 그녀는 다시 기품 있고 도도한 표정으로 남자를 올려다봤다. 남자는 그 눈빛을 보면서 다시 움찔했다.
 “이거야 원, 베테랑 연기자도 그 눈을 보고 물러설 만해. 당신의 눈빛은 살아 있어. 우리 여왕 폐하, 권토중래하시지?”
 “······.”
 이쯤 되면 놀리는 건지 아니면 진짜로 그러는 건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사내는 어딘지 야수 같은 매력과 지적인 섹시함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분명 오글거려야 하는 상황인데도 마치 연극배우처럼 이곳을 여왕과 ‘신하’의 무대로 만들고 있었다. 무너진 무대에서 남자는 천연덕스럽게 강한나의 거리 안으로 들어왔다.
 강한나는 속으로 피식 웃고 이왕 연기로 승부를 걸었다면 거기에 응해 주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았다. 배우로서의 본능이 움직였다.
 “호오. 경(卿)은 내가 항우처럼 죽기라도 할 줄 알았나?”
 “아니, 여왕 폐하. 당신이 죽을 리는 없지. 당신에게 연기란 죽음보다 더 위대한 거니까. 내가 당신에게 무대를 주겠어. 대본을 주고 배역을 주지.”
 “그거 재미있군. 하지만 내가 다시 연기해야 하는 이유는?”
 “강철의 여왕으로서의 마음을 잃지 마. 복수해야지? 이유경이었나? 천하의 쌍년이더군. 아, 불경스러움을 용서하소서, 여왕 폐하.”
 “쓸데없는 도발이야. 그럼 내가 화를 낼 줄 알았나?”
 “그 간악한 여자에게 당하고 이대로 주저앉으시려나이까?”
 장난스러운 말투와 달리 이 사내는 놀랍게도 스캔들의 진실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강한나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고 오만한 눈으로 사내를 쏘아봤다.
 “정말로 말하는 거야. 난 당신에게 왕관을 되돌려줄 거야. 그리고 캬아, 꽃들의 여왕과 부딪치는 거지. 그 와중에 돈을 버는 게 내 목적이고.”
 “······.”
 “눈매가 매서운데? 난 말야. 그 날카로운 눈이 사랑스럽다니까? 모르는 사람은 모르는 당신만의 매력이지.”
 쪽.
 두 사람만의 연극은 순식간에 끝났다. 남자는 강한나의 이마에 가볍게 키스하고 어린아이처럼 무대 위에 걸터앉았다.
 강한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울다 퉁퉁 부은 얼굴도 그렇고 방금 전의 어이없는 상황극도 그렇고 남자의 황당한 행동이 너무 어이가 없었다.
 ‘이 남자, 대체 뭐야?’
 
 
 -2화-
 
 
 그사이 뚜벅뚜벅 뒤에서 남자 구두 소리가 들리고 또 다른 남자가 그녀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야, 김승준 이 바부탱아. 또 뜬구름 잡는 소리만 피우니까 안 되는 거야. 이 빌어먹을 수전노 새끼.”
 “시끄럽다, 게이 새꺄. 우희민 너 또 니 남자친구한테 내 험담이나 하지 마라. 니가 30대 여자 주부냐?”
 “우우우, 시발롬이. 확 덮쳐 버릴까 부다. 김승준 니 엉덩이가 맛나 보이긴 했어. 아무튼 한나 씨, 저 녀석 말은 저렇게 해도 믿을 만한 놈이에요.”
 점점 더 어이없어졌다.
 강한나에게 뽀뽀한 사람은 김승준. 이상한 남자.
 안경을 쓴 사내는 우희민. ······게이?
 우희민은 자연스럽게 강한나의 앞에 다가와서 정중하게 명함을 건넸다.
 그도 굉장한 미남이었다. 역시나 김승준처럼 키도 크고 안경을 쓴 모습이 이지적이라 여자들에게 인기 있을 스타일이었다.
 김승준이 야성적인 매력이라면 우희민은 지적인 스타일의 남성이다.
 “강한나, 괜찮아. 그 새끼 게이야.”
 “시끄러워. 이런 식으로 아웃팅하는 게 어딨냐? 가뜩이나 외로운데 널 먹어 버릴까 부다.”
 “어이구, 그러셔요. 내 엉덩이는 널 위해 예비되어 있었어.”
 김승준은 엉덩이를 팡팡 두들겨서 우희민을 약 올렸다. 우희민은 하아 하고 한숨을 쉬고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꽤나 시끄러운 콤비였다.
 강한나는 우희민이 건넨 명함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매니지먼트?”
 “아, 뭐 그런 거야. 이번에 한국에 돌아와서 돈 좀 벌어 볼라고 하거든. 우리 여왕 폐하가 도와줬음 하는 거지.”
 강한나는 명함을 우그러뜨려서 김승준의 얼굴에 던져 버렸다.
 명함을 던지는 행동도 도도하고 아름다웠다.
 갈색 머리가 찰랑거리고 김승준은 멍하니 명함을 맞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는 뭐가 좋은지 싱글싱글 웃었다.
 “돈? 알 텐데. 냉정하게 말하지. 나는 상품 가치가 없어. 약쟁이에 유부남을 꼬신 여자로 몰리는 판이야.”
 “괜찮아. 대중은 멍청해. 어떤 일을 저질러도 감동적인 일화 몇 개면 ‘아아~ 그럴 수도 있지.’ 하고 용서해 버리거든.”
 “난 그딴 짓 안 해.”
 “나도 바라지 않아. 우리 여왕 폐하께서 가족이 어떻고 이 허름한 극장에서 어떻게 부모님과 궁핍하게 살았고 얼마나 연기 혼을 불태웠는지, 그까짓 싸구려 와이드 쇼에서 질질 짜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거든. 나의 강철의 여왕은 그래선 안 돼.”
 “······.”
 이 사내는 이곳이 강한나가 어린 시절 살았던 곳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녀의 부모님은 평생을 연극 일을 하다가 교통사고로 죽었다. 이곳은 그녀의 고향이자 정신적인 부모님이었다. 그러나 그걸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강한나는 계속 두 사람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봤다.
 나이는 그녀보다 두세 살 많을까? 잘생긴 것도 잘생긴 거고 각각 다른 매력을 뽐내고 있었다.
 김승준이 야성적인 매력을 슈트로 얽어매고 있다면 우희민은 차가운 도시 남자의 모습이었다.
 금속제 안경테와 맞춤 정장, 넥타이가 딱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이라는 걸 잘 드러냈다.
 “당신들이 나를 어떻게 도울 수 있는데? 그리고 나더러 뭘 어쩌라고? 이 스캔들에서 나는 혼자야.”
 “정면으로 맞서 싸워. 저 게이 새끼랑 내가 도울 거야. 일단 우리와 계약을 맺고 보도 자료부터 뿌려야지. 그다음은 전 계약사와의 소송. 소송은 저 희민이가 알아서 할 거야. 저 새끼 변호사거든. 그리고 자살 따윈 꿈도 꾸지 마. 난 악덕 소속사 사장이 꿈이었으니까.”
 “새꺄, 또또 개소리한다.”
 우희민은 다시 한숨을 폭 내쉬고 양복 깃에 있는 변호사 배지를 보여 줬다.
 강한나는 점점 더 어이가 없었다.
 물론 자살하려고 이곳에 온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소속사의 버림을 받고 혼자였다. 일평생 연기만을 위해 달렸기 때문에 주변에 친구도 뭣도 아무것도 없었다.
 미심쩍었다. 나쁜 사람들은 아닌 것 같지만 강한나에게 세상은 언제나 가혹했다.
 사실 소속사의 노예 계약 때문에 그녀는 집 한 채도 없었다. 지금 사는 집도 이제 소속사와의 법정 공방이 계속되면 비워 줘야 했다.
 모든 것은 연기를 위해.
 그녀는 오직 연기 하나에만 매달린 바보였다.
 “그다음은?”
 “그다음은 전쟁이지, 크크크크. 여배우들끼리의 피 튀기는 전쟁이라니, 상상만 해도 재미있지 않아? 그래서 내가 제갈량이라고 한 거야, 나의 여왕이시여.”
 “아니, 나는 댁들을 못 믿겠어. 당신들이 바라는 게 뭐야?”
 “돈.”
 김승준은 팅 하고 오백 원짜리를 강한나에게 튕겼다.
 “당신은 상품 가치가 있어.”
 “아직 이해 못 하나 본데······.”
 “아니,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어. 말했잖아? 사람들은 언더독이 다시 재기하는 걸 누구보다 바란다고. 당신이 눈물을 짜고 지랄을 안 해도 대중은 여왕이 재기하는 모습을 바랄 거야.”
 “······그럴 리가.”
 “이건 내 후원자의 지론이야. 아무것도 없는 놈을 건들지 마라. 그놈은 가장 무서운 놈이니까. 지금 너의 모습이지.”
 “······.”
 “넌 강하다. 세상 사람들이 바라는 드라마틱한 점도 그런 점 때문이야.”
 “날 얼마나 안다고?’
 “알 만큼은 알지.”
 처음으로 강한나가 김승준의 눈동자를 피했다.
 강렬하고도 아름다운 눈동자였다. 그녀는 드라마나 영화 등에서 수많은 미남자들과 연기 호흡을 맞췄지만 김승준이라는 남자보다 강렬한 눈은 없었다.
 “알 만큼은······ 어쨌든 우리가 여왕의 재기를 돕겠다는 거야. 무엇보다 난 개인적으로 당신의 팬이거든?”
 “······.”
 “미국에 있을 때 당신의 영화를 봤어. 당신의 연기는 최고였지. 그냥 악역이 되어야 할 캐릭터가 오히려 불쌍해지더군. 그런 당신이라면 할 수 있다. 그냥 연기하면 돼. 당신의 인생을 연기해. 희대의 악녀가 된 지금 그 악녀를 연기해 보라고. 당신에게 강철의 여왕이라는 역할이 주어진 것뿐이야.”
 강철의 여왕.
 하지만 강한나 자신은 한 번도 그 별명에 대해서 신경 쓴 적 없었다.
 사내의 말은 또 다른 충격이었다. 인생을 연기하라. 그녀는 다시 눈물을 닦고 그들을 쳐다봤다.
 “난 당신을 최고의 자리로 올릴 거야. 그 과정에서 돈은 엄청나게 벌 거고. 이야~ 들려? 돈 벌리는 소리가?”
 “시끄러워, 이 사기꾼 같은 새꺄. 그러니까 더 이상하잖아?”
 “내가 뭘? 그리고 사기꾼과 일류 펀드 매니저는 한 끗발 차이라고. 공평한가, 아니면 돈을 들고 튀느냐.”
 김승준이라는 사내는 말을 마치고 미소를 띠웠다.
 “김승준이라고 했나? 당신은 어떤 쪽인데?”
 “어떤 쪽일 것 같아?”
 김승준과 강한나는 대등한 위치에서 서로를 쳐다보고 있었다.
 “오히려 믿음이 안 가잖냐, 이 사기꾼 새끼. 하여튼 경영대 출신 놈들은 다 저렇다니까. 한나 씨. 이런 놈과 계약을 체결하는 거 나 같아도 안 믿겨질 거예요. 하지만 김승준이 잘하는 게 딱 하나 있지요. 돈 냄새 맡는 거. 그것만큼은 귀신이에요. 완전 개죠.”
 “애먼 사람 개로 만들지 마, 게이 새꺄.”
 “알았다, 샹놈아.”
 강한나는 구겨서 버린 명함을 다시 주워 들었다.
 J's Enter.
 제이스 엔터. 연예 기획사다운 이름이었다.
 “설마 이 J가 준은 아니겠지?”
 “푸하하하하. 우희민! 거봐, 이상하다고 그랬지? 그냥 무슨무슨 기획으로 하는 게 더 나을 거라니까. 고풍스럽고 좋잖아?”
 “시끄러, 우리 쭌. 쮸쮸쮸쮸.”
 말투가 거칠고 좀 오글거리긴 했지만 어딘지 같이 있으면 유쾌해지는 사람들이었다.
 강한나는 다시 김승준을 쳐다봤다.
 “그럼 제갈량 씨, 들어나 볼까? 나를 어떻게 권토중래시키겠다는 거지?”
 “지금 인기 폭발 중인 주말 대하 사극에 넣어 주지.”
 “뭐?”
 대하 사극.
 엄청난 대자본이 투입되는 만큼 대하 사극은 각 텔레비전 방송국의 주력 중의 주력이었다.
 불륜과 마약 등으로 시민 단체에서 난리가 난 강한나가 파고 들 만한 배역이 있을 리가 없었다.
 각 방송사의 대하 사극은 제작 발표회 이전부터 파고들지 않으면 배역을 딸 수 없었다.
 “하아? 당신 제정신이야?”
 “물론 주요 배역이라곤 하지 않았어.”
 “그럼?”
 “나랑 같이 보조 출연으로 가는 거야.”
 “엑스트라······.”
 무슨 꿍꿍이인지 모르지만 김승준은 낄낄 웃으면서 강한나의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건 시험이야. 너의 상품 가치를 대중들이 받아들이게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시험.”
 “연기로 증명하라는 거군.”
 강한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
 엑스트라는 단역과 달리 ‘대사’가 주어지지 않는다.
 아마 이 사람이 시험 삼아 준다는 엑스트라 역시 쉬운 배역은 아닐 것이다.
 그녀 역시 현장에서 고등학생 때부터 엑스트라로 시작했다.
 사실 그녀는 세상 사람들이 알고 있듯이 여왕 따위가 아니었다. 흔히 20대 여배우가 걷는 길 따윈 걷지 않았다. 그녀는 바닥의 바닥에서부터 기어 올라온 진짜 여배우였다.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 걸어야 할지 바닥부터 무너져 내린 기분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김승준이 걸어야 할 길을 제시하고 있었다.
 “대신 조건이 있어. 현장에서 당신이 ‘강한나’라는 걸 들키지 말라는 것. 아무리 우리 힘이라도 들키면 재기는 물 건너가는 거야.”
 “배역으로만 인정받으라는 건가?”
 “그래. 대중은 당신의 자세를 볼 거야. 그리고 당신의 패기도. 하지만 들키지 않고 먼저 인정받는 게 중요한 거지.”
 김승준은 강한나 건너편에 있는 우희민을 쳐다보면서 고개를 끄덕했다. 두 남자는 마치 강철의 여왕을 사이에 둔 사이좋은 신하처럼 보였다.
 “좋아. 해 볼게. 나는 그 어떤 배역이라도 최선을 다하니까.”
 “그것도 알고 있지. 보조 출연 하시는 분에게 들었거든. 엑스트라에게 주는 빵 하나랑 우유 한 개로 하루를 때웠다면서? 낮에는 극장을 지키고. 대단한 아이야.”
 기이한 정보력이었다. 그 이야기는 단 한 번도 강한나가 말한 적 없었고 그렇다고 인터뷰나 방송에서 떠든 적도 없었다.
 강철의 여왕은 시시콜콜하게 자기 얘기를 하지 않았다.
 “이류나 삼류라면 그런 이야기가 미담일 테지만 당신에게는 그까짓 신파극은 필요 없어. 당신은 당신의 힘으로 일어선다. 스스로도 잘 알 거야. 이 위기는 당신 혼자의 힘으로 일어서지 않으면 안 돼. 우리가 해 줄 수 있는 건 무대를 마련하고 배역을 찾아 주는 것까지야. 그리고 당신의 재기 과정에서 돈을 벌 뿐이고.”
 “······.”
 강한나는 그 말이 마음에 들었다.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서고 양옆에 있는 놈들은 그녀의 매니지먼트를 하면서 돈을 번다. 나머지는 아무래도 좋았다.
 아니, 딱 한 가지는 남아 있었다.
 “나······ 이유경에게 복수하고 싶어. 기회가 된다면 그 여자를 연기로 짓밟을 거야.”
 “좋아. 그 정도 투지는 있어야지, 나의 여왕님.”
 “다 좋은데 그 웃기는 말투 좀 집어치워 줄래? 누가 보면 오타쿠인 줄 알겠네.”
 “너부터 존댓말하면.”
 “······.”
 두 사람은 다시 서로를 쏘아보기 시작했다.
 그 분위기를 부드럽게 끼어드는 사람은 우희민이었다.
 “야 이 빌어먹을 놈의 김승준. 너나 나한테 반말 처하지 마라. 한살이나 어린 게.”
 “씨끄러. 친구 먹었으면 친구 쭉 먹는 거지. 안 그래, 칭구칭구?”
 “아오, 개자식. 쭌 넌 자식 낳으면 진짜 장유유서고 나발이고 그런 소리 하지 마라.”
 “싫어. 미국식으로 너한테도 맞먹으라고 가르칠 거다.”
 “새끼가 한 끗을 안 져요, 한 끗을.”
 강한나는 두 사람을 쳐다보면서 얼굴이 새빨갛게 되더니 마침내 웃음을 터뜨렸다.
 “푸하하하하하.”
 강한나가 7년 동안 스태프에게도 매니저에게도 한 번도 보여 주지 않은 얼굴이었다.
 그녀는 멋진 두 남자를 옆에 앉힌 채로 깔깔 웃고 있었다.
 “이야, 겨울과 강철의 여왕께서 웃으시니 해동 육룡이 나라샤.”
 “닥쳐, 쭌 이 병신아. 오바 좀 하지 마. 오타쿠 소리 듣고도 용비어천가는 또 뭐야?”
 강한나는 이 웃기는 콤비가 썩 마음에 들었다. 그녀는 깔깔 웃으면서 박수까지 쳤다.
 이 극장에 들어올 때만 해도 그녀의 모든 인생은 끝날 것 같았지만 이제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어떻게 되든 더 나빠질 건 없었다. 그녀는 유부남을 파렴치하게 꾀어내서 마약까지 하게 만든 악녀였고 그걸 혼자서 뒤바꿀 방법은 전혀 없었다.
 그녀는 이 웃기는 남자들과 함께 한번 일해 보고 싶어졌다.
 ‘엑스트라라 이거지. 어차피 7년 전과 다를 바 없는 거야. 바닥에서부터 다시 올라가는 거다.’
 강한나. 강철의 여왕.
 그녀는 다시 앞으로 걷고 있었다.
 
 
 -3화-
 
 
 세 사람이 다시 만난 건 3일 후 보조 출연자들이 있는 곳이었다.
 “어라? 빨리 왔네?”
 “기본이니까요.”
 강한나임을 들키지 말 것. 가장 어려운 주문이었다.
 그녀는 김승준들에게 자신의 의지를 확실히 보였다.
 탐스럽고 긴 머리칼이 싹둑 잘려져 아줌마들이 주로 하는 파마머리가 되어 있고 입의 위아래에는 보형물을 넣었다.
 피부는 더 가관이었다.
 어떻게 한 건지 30대의 피부를 메이크업으로 만들었다. 자세히 보면 눈가의 기미나 다크 서클은 그림을 그리듯 펜슬과 브러시로 그려 넣은 것이다.
 턱에 붙인 보형물이나 생활에 찌든 주름살 역시 얼핏 보면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굉장한 메이크업 기술이군.”
 “날 버리지 않은 사람이 딱 한 명 있거든요.”
 강한나는 어깨를 으쓱하고 뒤쪽에 선 선글라스를 낀 메이크업 아티스트를 가리켰다.
 마술 같은 솜씨의 결과 그 도도하고 아름답던 강철의 여왕이 약간 예쁜 동네 아줌마처럼 되었다. 가까운 거리가 아니라면 자세히 봐도 그녀인지 모를 지경이었다.
 “이만하면 만족해요?”
 “셜록 홈즈가 따로 없군.”
 “······.”
 “그래, 만족해. 내 말을 잘 들었군.”
 “그래요. 재기하는 ‘강한나’라는 걸 연기해 주겠어요. 당신이 어떤 길을 인도할지는 모르지만요.”
 꽤나 오만한 여자였지만 강한나라면 다르다. 그녀의 오만함과 도도함은 신분이나 재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연기에 대한 열망과 현장을 지배하는 아우라가 벌써부터 어른거렸다.
 아니, 그녀는 이 대기 장소에 나와 있을 때부터 이미 ‘연기’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김승준은 그녀가 존댓말을 쓴다는 것과 목소리 톤이 변했다는 걸 이제야 알아차렸다.
 너무 자연스러워서 느끼지 못했던 부분들이 자세히 보니 눈에 들어왔다.
 얼핏 봐도 그녀의 등은 적당히 굽어 있다. 낭랑하고 도도한 목소리가 아니라 어딘지 애들한테 말 들으라고 버럭버럭 소리를 지를 것 같은 목소리였다.
 그냥 관찰하고 흉내 내는 것이 아니다. 그녀가 온전히 ‘그 배역’이 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즉, 강한나가 지금 연기하고 있는 건 생활고에 찌든 아줌마 주부였다.
 ‘맙소사. 과연 이 아이가 마음먹으면 스캔들이나 나발이고 주변 상황은 아무 문제도 안 되는 모양이군. 10여 년의 나이 차를 연기로 커버하다니······ 설마 이런 식으로 철저하게 연기할 줄은 나도 몰랐는데.’
 머리로는 이미 그녀의 연기 변신을 꿰뚫어 봤지만 막상 당하는 김승준에겐 마법 같은 일이었다.
 심지어 반응이나 사소한 몸동작 같은 것도 그가 본 강한나와는 달랐고 목소리마저도 그녀를 떠올릴 수 없었다. 조사를 통해 성우 수업을 잠깐 받았다는 걸 몰랐다면 변조한 게 아닌가 싶었을 정도였다.
 마치 눈앞에 서 있는 것이 강한나가 아니라 그냥 아주머니가 아닌가 하는 착각마저 들었다.
 김승준은 당황한 기색을 애써 감추며 그녀의 파마머리를 손가락으로 매만져 봤다. 모발의 윤기나 탄력은 완전히 포기한 완벽한 아줌마 파마였다.
 그 파마머리에서도 강한나의 각오와 연기력이 느껴졌다.
 그 순간 강한나는 그가 머리를 만지건 말건 지금 이 연기를 유지하면서 오직 어떤 배역이 주어질지만 생각하고 있었다.
 ‘극중극이야. 나는 지금 40대 아주머니가 또 다른 연기를 하는 극중극 속에 들어와 있는 거야.’
 무서울 정도의 집중력이었다.
 강한나의 처절함은, 또 의지는 그 어떤 대형 배역을 맡았을 때보다도 더 무시무시했다.
 “아저씨. 이제 우리가 가야 할 현장은 어디예요?”
 “그냥 무턱대고 믿고 나온 거야? 당신을 납치하거나 험한 곳으로 끌고 왔다면 어떻게 할 뻔했어?”
 “난 아저씨를 믿었으니까요.”
 쿵.
 눈을 마주 보며 그 말을 들은 김승준은 한순간 강한나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보았다.
 나이는 30대.
 그저 그런 가정주부가 되었지만 연기에 대한 열정을 잊지 못해 새벽에 무작정 나온 사람.
 그저 그런 안 팔리는 엑스트라.
 강한나가 이미 연기를 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녀는 지금 이 순간 정말로 ‘아줌마’였다.
 사람들이 강한나의 연기에 열광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였다. 강한나는 한번 몰입하면 아예 다른 사람이 된다.
 잠시 김승준이 멍해 있는 사이 강한나가 발을 디뎠다. 김승준이 말릴 사이도 없었다.
 그녀는 아줌마 행세를 하면서 방송 스태프로 보이는 사람들에게 다가갔다. 그들은 열심히 촬영 기자재를 싣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
 대답은 없었다. 다들 핫팩을 만지작거리면서 뚱한 얼굴로 새로 온 사람을 쳐다볼 뿐이었다.
 하지만 김승준은 강한나의 돌발 행동에 속이 타는 것 같았다.
 여기는 방송국 앞이고 보도실의 기자들이 왔다 갔다 한다. 만약 들킨다면 다이렉트로 뉴스 보도가 될 수 있었다.
 재기를 위해서 연기만으로 강한나임을 들키지 말라고 주문하기는 했지만 그건 만전의 준비가 끝난 세트장 안에서의 이야기였다.
 이렇게 바깥에서부터 도발적인 행동을 벌이라고 말한 적은 없었다.
 ‘미치겠구만. 강철의 여왕이다 이거냐?’
 “저······ 처음 오는 거라서. 오늘 우리는 어디로 가는 건가요?”
 강한나는 이 사극팀이 연출하는 작품에 출연한 적이 몇 번 있었다. 스태프들 중에 그녀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으면 그대로 끝이었지만, 그녀를 알아보거나 말을 붙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완벽히 소심한 엑스트라 아줌마 취급을 당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아닌 평범한 질문과 행동이었지만 그 하나하나가 불꽃 튀는 연기였다. 김승준은 자신이 피상적으로 알고 있던 연기나 연극에 관한 관념이 송두리째 붕괴하는 것 같았다.
 김승준은 오열하거나 감정을 폭발시키거나 하는 게 명연기인 줄 알았다.
 그러나 이제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이야말로 무시무시한 연기력이라고 느꼈다. 그녀의 모습은 촬영장에 처음 나온 사람 그 이하도 이상도 아니었다.
 결국 우물쭈물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지켜보던 엑스트라 출연자 한 분이 다가왔다.
 “애기 엄마. 스태프들은 바쁘면 우리한테 일일이 대답 안 해. 현장을 잘 모르는 모양이네. 반말이나 찍찍 하지 않음 다행이지.”
 “예? 아, 예······.”
 보다 못한 50대쯤 되는 아주머니 하나가 그녀를 끌고 같은 연기자들이 출연하는 곳으로 데리고 갔다. 거기서는 사람들이 졸지에 애기 엄마가 된 강한나를 반겨 주었다.
 핫팩도 나눠 주고 간단한 요깃거리도 나눠 주었다.
 강한나는 핫팩의 따뜻함 때문에 눈물을 흘릴 뻔했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푹 수그렸다. 별거 아닌 친절이었지만 그녀에게는 따뜻하게 다가왔다.
 인간(人間).
 그녀는 먹먹한 인간의 따뜻함을 겨우 이 핫팩 하나로 느끼고 있었다.
 한 달 동안 그녀를 괴롭혔던 스캔들에서 자신의 편은 아무도 없었다.
 그저 그녀는 충격적인 사건의 주인공일 뿐, 강한나라는 인간은 완전히 말살되었었다.
 사람들은 아름다운 강철의 여왕이 땅에 떨어진 그 사건을 즐겁게 바라볼 뿐이었다.
 덕분에 강한나는 일순간 연기가 깨질 뻔했다.
 이 사람들은 비록 연기나마 자신을 이야깃거리나 술자리에서 씹는 대상이 아닌 인간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갑자기 목이 메어 왔다.
 그녀는 고등학생 때부터 오직 연기에 대한 일념 하나로 수많은 사람들에게 보살핌을 받았었다. 지금 이 순간 그때의 순간순간들이 떠오르고 있었다.
 강한나는 꾹 참았다.
 지금 그녀는 외줄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감정에 휩싸여 연기가 깨지면 재기는 물거품이 되는 상황이었다.
 지금 이건 단순한 연기가 아니라 방송국 전체에 대한 도발이자 김승준이 낸 시험에 대한 답안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의 옆으로 그녀를 펜으로 난도질 했던 연예부 기자가 스쳐 지나갔다.
 ‘정신 차려라, 강한나. 이곳은 적진 한가운데야. 저 자칭 제갈량에게 나는 능력을 보여야 해.’
 강한나가 고개를 들었을 때는 다시 어쩔 줄 모르는 아줌마의 표정으로 되돌아왔다.
 강한나를 데리고 온 아주머니는 캐릭터 담요를 건네면서 그녀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강한나가 잠시 말을 하지 않은 걸 낯가림한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애기 엄마가 많이 추운 모양이네.”
 “예······ 조금. 처음 나온 거라.”
 “일단 이거 덮으시구랴. 다음부터는 꼭 이런 걸 챙겨 와야 돼. 우리는 아무도 안 챙겨 주니까.”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뒷문으로 들어가는 밴을 쳐다봤다.
 강한나 역시 저 밴으로 세트장에 들어간 적 있었다.
 일류 배우들은 굳이 담요나 식량을 챙기지 않아도 된다. 배우를 따라다니는 매니저며 스태프들이 많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혼자였고 혼자서 일어서야 했다.
 아주머니는 강한나에게 이런저런 사연을 묻고 싶어 했지만 굳이 묻지는 않았다.
 “오늘 어디 가는지는 알고 왔어?”
 “아뇨. 어디인가요?”
 “아마 단양 촬영지나 민속촌일 거야. 버스 타 봐야 아는데 나도 잘은 몰라.”
 “그렇군요. 저 처음 나와서 그러는데 뭘 찍는 건가요?”
 “아, 온 사방에 포스턴데 그것도 몰라? 초짜들은 하여튼.”
 추위 때문에 덜덜 떠는 중년 남자가 턱 끝으로 버스 옆면의 포스터를 가리켰다.
 아닌 게 아니라 크게 ‘원경왕후’라고 쓰인 광고판이 눈에 들어왔다.
 주말 몇 시. 그리고 그 옆에는 출연진들의 사진이 찍혀 있었다.
 ‘원경왕후······.’
 원경왕후는 태종 이방원의 부인이었다. 원경왕후 민씨가 주인공인 사극은 만들어진 적이 없었다.
 보통 정복 전쟁과 비극적인 왕자의 난 때문에 태종이나 정도전을 주인공으로 하는 콘텐츠는 많았기 때문에 원경왕후가 주인공인 드라마가 나올 구석이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버스 옆의 출연진들을 노려봤다. 주인공인 원경왕후를 연기한 사람들이 의미심장했다.
 이 원경왕후의 젊은 시절을 연기한 것이 아이돌 그룹 출신인 노아경이었고, 그 바통을 30회가 지나면서 원로 배우인 주화진이 넘겨받았다.
 노아경은 지금도 가요 프로그램에서 1위를 하는 아이돌 그룹의 2인자였고 꽃들의 여왕 이유경의 심복 중의 심복이랄 수 있는 아가씨였다.
 이유경의 팬클럽에서 그녀를 부르는 별명은 2인자 노아경.
 강남에 있는 미용실에서 벌어지는 그들의 사교 클럽의 총무 같은 존재였다.
 당연히 강철의 여왕과는 적대적인 사이였다. 강한나와는 여러 번 만난 적이 있었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언제나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노아경은 언젠가 나에게 당했었지. 앙심을 품고 있을 거야.’
 또한 지금 원경왕후를 연기하는 주화진 역시 이유경의 입김이 미치는 인맥 안이라는 이야기가 있었다.
 이유경의 고모가 원로 배우였기 때문에 이런저런 인맥으로 연예계가 연결된다. 아이돌이나 가요계는 물론이고 연예계 전체가 의외로 좁은 곳이었다.
 ‘저 고약한 아즈씨는 저들이 나온다는 걸 알고 데려온 거였군.’
 강한나는 슬며시 김승준을 노려봤다.
 정말로 고약한 시험이었다. 그냥 들키지 말라는 것도 아니라 그녀를 가장 잘 아는 이유경 라인의 배우들 속에서 들키지 말란 거였다.
 이건 들키게 되면 재기가 물 건너가는 정도가 아니라 이유경에게 감당 못 할 비난과 비웃음을 받게 된다.
 김승준은 그걸 알면서도 여기에 그녀를 데려온 것이다. 어딘지 속이 배배 꼬인 남자였다.
 ‘나쁜 남자 같으니라구.’
 이윽고 촬영 기자재들과 출발 준비가 끝났는지 조연출 중에 한 명이 뭐라뭐라 팀들에게 지시를 전했다.
 그리고 원경왕후의 연출이 방송국 계단에서 내려와서 합류했다.
 “어이, 조연출들. 오늘 촬영 스케줄은 조금 타이트하니까······ 어? 너는? 어라아! 이야, 너를 여기서 보게 될 줄이야?”
 연출이 보조 출연자들이 서 있는 곳을 우연히 바라보면서 반갑다는 듯 인사했다.
 강한나는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그녀의 정체가 발각된 줄 알았다.
 하지만 총연출이 아는 체한 건 강한나가 아니라 저쪽에 있는 김승준이었다.
 “야, 김승준이! 뭐야, 정말 오랜만이네? 어디 얼굴 보기 힘들어서 살겠냐?”
 “이야, 형님 오랜만이네요. 세계를 여행 돌다가 여기까지 굴러왔습니다.”
 “새끼, 또 그놈의 역마살이냐? 그나저나 네 형님은 잘 계시고?”
 그때 김승준의 표정이 왠지 야수처럼 변하는 걸 강한나는 놓치지 않았다.
 ‘형?’
 “뭐, 다들 그냥저냥 사시죠.”
 “이 녀석 농담은? 그냥저냥이 그 정도냐? 나도 니네 형제들처럼 그냥저냥 살아 봤으면 좋겠다.”
 보면 볼수록 기이한 사내였다. 놀랍게도 원경왕후의 총연출과도 아는 사이였다.
 심지어 나이가 지긋한 총연출은 새파란 김승준이 ‘형님’이라 부르는데도 별 거리낌 없이 대했다.
 강한나는 그쪽을 보면서 김승준이 어떻게 괴롭혀 올지 대충 짐작이 갔다. 보조 출연이라지만 정말 곤란한 배역을 줄 것 같았다.
 “아무튼 여기 무슨 일이냐?”
 “웬걸요. 오늘은 엑스트라로 용돈벌이 하러 온 거예요.”
 “엥? 용돈벌이라고? 네가?”
 총연출은 뭔가 어이가 없다는 눈으로 김승준의 모습을 아래위로 살폈다.
 “에헤이, 실은 제가 요새 사업을 벌이는 게 있어서 현장 조사차 온 거거든요.”
 “흠. 또 도깨비 같은 짓거리를 할라 그러냐?”
 “하하. 뭐, 비슷한 거지요.”
 총연출은 영 믿기지 않는다는 투로 고개를 갸웃했다.
 팡팡.
 그러더니 김승준의 어깨를 치고 뭐라뭐라 귓속말로 이야기하더니 연출부가 타는 버스에 올라탔다.
 하지만 김승준은 연출부가 타는 버스에 오르지 않았다.
 출발 때부터 보조 출연자와 연출부, 촬영팀은 출발 선상이 다르다. 배우들은 개별 스케줄로 현장에서 만나고 보조 출연자들은 다른 버스로 이동한다.
 김승준은 비니 모자를 눌러썼다.
 “흐흐흐. 강한나 일생일대 최고의 연기를 놓칠 수 있나? 이건 나밖에 못 보는 건데.”
 그는 강한나가 다른 사람이 된 걸 보고 전율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곤란한 상황에서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했다.
 “나도 성격 좋은 놈은 아니라니까, 흐흐.”
 김승준은 엑스트라가 있는 곳으로 쪼르르 되돌아와서 남자 배우들과 담배를 나눠 피웠다.
 입은 좀 험해도 굉장히 사교적인 사내였고 그 바람에 벌써 각양강색의 보조 출연자들과 격의 없이 로또 복권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어딘지 외골수인 강한나와는 완전히 다른 남자였다.
 그녀는 사람들을 대하는 데 서툴기 짝이 없었다. 사람들을 만나는 건 연기와는 다르다.
 그녀가 핫팩으로 몸을 데우고 있을 때쯤 슬며시 그녀를 도왔던 메이크업이 다가왔다.
 “신기한 아저씨네.”
 “······.”
 두 사람은 김승준을 바라보면서 한동안 말이 없었다.
 김승준이 있는 곳에는 한바탕 웃음소리가 왁자지껄 피어났다. 그는 사람 좋게 핫팩들을 돌리고 벌써부터 친한 척을 하더니 다시 강한나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메이크업은 강한나에게 말을 걸었다.
 “한나야. 나는 네가 이대로 무너지는 걸 원하지 않아.”
 “알아. 언니는 나에게 모든 걸 걸었으니까.”
 “······아무튼 무사히 돌아와라. 현장에서 또 보자.”
 메이크업은 그녀의 등을 팡 때리고 등을 돌렸다. 그녀 역시 김승준과 우희민에게 물든 건지도 몰랐다.
 그러나 이제 겨우 한 고비를 넘었을 뿐이다. 강한나는 위가 쓰리는 것 같았다. 한순간도 안심할 수 없다.
 메소드 연기론의 원조인 스타니 슬랍스키가 주장한 대로였다.
 자신을 버려야 한다.
 흉내 내기로는 그 인물이 될 수 없다.
 시험으로서 이보다 더 위협적인 시험은 있을 수 없었다. 메이크업이 쓸데없는 말을 한 탓인지 그녀의 눈앞에 보이지 않는 칼날이 그녀를 겨누고 있는 것 같았다.
 ‘이 싸움은 나 자신 강한나를 버리는 싸움이 되지 않으면 안 돼.’
 그녀는 버스에 인쇄되어 있는 노아경의 사진을 바라보면서 이를 갈았다.
 여자로서 치욕적인 스캔들을 뒤집어씌우는 그 장소에 노아경도 있었다.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사람을 모함했다.
 등 뒤에서 사람을 찌른 거나 마찬가지였다.
 때론 슬픔보다 분노가 유용할 때가 있었고 강한나에게는 바로 지금 이 순간이었다.
 이윽고 보조 출연자들이 타는 전세 버스가 서고 사람들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버스에 올랐다.
 “아, 아주머니 저 여기 앉을게요, 흐흐흐. 젊은 처자랑 남자는 자석처럼 떡하니 끌어당기걸랑요?”
 “아이고, 총각 때문에 애기 엄마 바람나겠네.”
 뒷좌석에서 와하하 하고 웃음이 터졌다. 벌써 김승준은 보조 출연자들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었다.
 “······.”
 김승준은 턱하니 강한나의 옆에 앉았다. 두 사람은 별 이야기는 하지 않았고 오히려 김승준은 뒤에 있는 사람들과 이런저런 사는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다가 수다가 자연스레 사그라지고 사람들은 잠을 청하기 시작했다. 다들 수다보다 체력을 생각했다. 엑스트라들은 일류 배우들과는 완전히 대우가 달랐다.
 주연급들은 대기하는 장소에서 편히 쉴 수 있고 따로 언제쯤 부른다고 연락해 주지만 이들은 그런 게 없었다. 부르면 나가야 하고 촬영이 언제까지 길어질지도 알 수 없었다.
 야간 촬영이라도 있으면 추운 데서 벌벌 떨면서 기다려야 한다.
 드럼통에 불을 피우거나 모닥불을 피워 주긴 하지만 이건 사극이라 의상에 불이 붙으면 큰일이기 때문에 그들은 불가에 함부로 다가가지도 못한다.
 ‘이건 체력 싸움이기도 해.’
 보면 볼수록 김승준의 시험은 혹독한 것이었다.
 첫 번째는 그녀가 최고의 자리에서 자존심을 꺾고 엑스트라를 연기할 수 있느냐.
 두 번째는 연기력을 총동원해 정체를 들키지 않고 적진 한가운데에서 살아 돌아올 수 있느냐.
 세 번째는 체력 싸움에서 버틸 수 있느냐.
 무슨 연기자를 시험하는 게 아니라 고대의 장군을 시험하는 거나 다름없었다.
 거기에 하나 더.
 연출과의 인맥으로 고약한 배역을 줘서 그녀를 괴롭힐 게 뻔했다.
 ‘이 아즈씨 생각할수록 얄밉네?’
 
 
 -4화-
 
 
 강한나는 얄미웠는지 자고 있는 김승준을 흘겨봤다.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찬찬히 살펴보면 꽤나 미남자였다.
 그녀는 갑자기 3일 전의 뽀뽀를 생각하고 또 연기가 깨질 뻔했다.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세간의 평가와 달리 무대 밖에선 섹스는커녕 키스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오직 배역으로 키스 연기를 해 본 게 전부였다.
 ‘이, 잊지 마, 강한나. 나는 오늘 처음 단역으로 온 30대 아줌마야. 그걸 잊으면 안 돼.’
 그녀는 다시 자신의 배역에 집중하면서 김승준을 바라봤다.
 볼수록 기이한 남자였다.
 사람들과 허물없이 어울리고 더더군다나 강한나의 거리에 거리낌 없이 들어왔다.
 강철의 여왕이라는 그녀의 별명은 괜히 붙은 게 아니었다.
 여배우라는 아우라와 원래 그녀가 가지고 있는 독특한 분위기 때문에 남자든 여자든 그녀의 거리 안으로 들어오기는 쉽지 않았다.
 그녀와 이야기를 하고 신체가 맞닿을 수 있는 거리에 들어올 수 있는 건 오직 연기할 때뿐이었다.
 강한나의 따뜻한 웃음도 친밀한 손길도 어디까지나 연기할 때만 느낄 수 있었다.
 근데 이 김승준이라는 남자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그녀의 거리 안으로 들어와서 이렇게 머리를 기대고 졸고 있었다.
 강한나가 손가락으로 찔러서 저쪽으로 머리를 돌려도 덜컹거리는 버스 덕분에 머리가 다시 사르르 그녀의 어깨로 되돌아왔다. 결국 그녀는 보이지 않게 한숨을 쉬고 차창 밖을 쳐다봤다.
 ‘미워 죽겠네.’
 
 이윽고 보조 출연자를 실은 버스는 세트장에 도착했다.
 무진(霧盡) 시.
 전에 대하 사극에서 쓰고 남은 세트를 그대로 보존해서 촬영장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버스가 주차장에 서자마자 클립보드를 든 보조 출연 관리 반장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 오늘도 잘해 봅시다. 수당은 몇 달 후에 나오는 거 아시죠? 끝나고 막 달라고 떼쓰면 안 됩니다? 방영하고 난 뒤에 돈 나오는 거예요? 그리고 이번 제발 도망들 좀 가지 마세요. 왕자의 난 촬영할 때 대학생들이 단체로 도망가서 얼마나 애먹었는지 알아? 그래서 이젠 현장에서 쯩 받을 거니까 도망쳐도 소용없어. 내가 지옥 끝까지 추노질할 거여.”
 넉살 좋은 출연 반장의 너스레에 사람들은 와하하 웃었다.
 이곳까지 오는 보조 출연자들은 이미 신분 확인이 다 끝난 사람들이기 때문에 현장에서 신분증 검사 같은 걸 할 리가 없었다.
 하지만 보조 출연자들이 도망가는 경우가 워낙 많다 보니 촬영이 끝날 때까지 맡아 두겠단 얘기였다.
 그 후 주차장에 내려서는 연출부 쪽의 사람이 와서 당장 필요한 배역을 말해 주고 의상을 어디서 받아 가라고 말해 줬다.
 하지만 사람들이 속속 의상을 받거나 모닥불로 떠나가는 와중에 강한나는 혼자 떨고 있었다.
 신분증 검사.
 물론 신분증은 가지고 있다. 문제는 그걸 꺼냈다간 강한나인 것이 들킨다.
 ‘어떡해야 하지?’
 사람들은 출연 팀장에게 신분증을 맡기고 내렸다. 달달 떠는 그녀의 앞에는 어느새 김승준이 서 있었다.
 “어, 형님! 아까 감독님이 형님 여기 나온다 그러더니 진짜였네요?”
 “이야, 김승준이. 오랜만이다? 너 웬일이냐?”
 “그냥 용돈벌이나 할라고 왔죠, 형님.”
 “쌔끼, 내 그럴 줄 알았어. 너 망할 줄 알았다. 떡볶이 집도 망하고 미국 갔다면서?”
 “헤헤헤. 뭐, 사람이 없다가도 있고 있다가도 없고 그런 거죠.”
 “알았어. 너도 예외 없다. 쯩이나 내놔.”
 “에헤이. 언제부터 현장에 쯩을 받았다고. 사무실에 서류 다 있잖아요? 그게 아니라도 우리 사이에 왜 그러실까?”
 “알았다, 짜샤. 감독님에겐 인사드렸고?”
 “예. 아까 뵀어요. 그럼 저는 가도 되죠?”
 “어. 너는 죽었어. 병졸 역할 빡세게 맡길 거니까 그렇게 알아.”
 얼마나 발이 넓은 걸까? 만나는 사람마다 숫제 다 형님이었다. 강한나는 그의 뒤에서 기묘한 표정을 지었다.
 다음은 강한나의 차례였다.
 그녀가 적당한 연기를 하려는 순간 먼저 내려간 김승준이 출연 반장을 불렸다.
 “그 아줌마 아까 이야기해 보니까 처음이기도 하고 도망칠 것 같지는 않더만요.”
 “아, 그래? 그럼 그렇게 하고 넘어갈 줄 알았냐?”
 “뭐, 도망치지 않게 제가 잘 감시할 테니까 괜찮을 거예요.”
 출연 반장은 강한나와 김승준을 쳐다보더니 고개를 펜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김승준의 수 또한 교묘했다. 처음 보는 사이인 김승준과 강한나가 붙어 있을 수 있는 구실을 마련한 것이다.
 “하아. 참 신참들이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 오늘은 씬이 씬이다 보니 사람이 많이 필요하니까 어쩔 수 없구만. 김승준이 네가 책임진다고 했으니까 이 아줌마 도망치면 니 수당 작살나는 거다?”
 “아오. 또또 그런다. 내가 사람 보는 눈은 확실하다니까?”
 “퍽이나다, 새끼. 옛날에 공포 영화 찍을 때 건물에 있는 거 무섭다고 혼자 도망쳤으면서.”
 기다리던 사람들이 다시 와하하 웃음을 터뜨렸고 김승준은 놀림을 당하면서도 싱글싱글 웃음을 지었다.
 그사이 강한나는 출연 반장에게 꾸벅 인사하고 버스에서 내렸다.
 익숙한 현장이었지만 그녀는 이미 시동이 걸려 있었다. 무진 시 촬영 현장에 처음 온 엑스트라처럼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김승준은 그 모습을 보면서 소름이 돋았다. 표지판을 바라보는 모습, 어리바리하게 사람들에게 끼지 못하는 모습.
 전부 다 보조 출연이라곤 해 보지 못한 30대 아마의 행동이었다.
 “미친 디테일이군.”
 이렇게까지 연기할 줄은 김승준도 몰랐다. 그가 건 조건은 강한나임을 들키지 않는다였지 세세한 디테일까지 연기하라는 아니었다.
 저 독한 아가씨는 이미 작정하고 나온 것 같았다.
 그녀는 쭈뼛쭈뼛 김승준에게 다가왔다. 그 모습까지 다른 사람을 보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이······ 이제 어떻게 하면 돼요?”
 “아? 이제 저랑 같이 대기하다가 같이 가시면 됩니······ 아니, 이게 아니데?”
 저도 모르게 존댓말이 튀어나왔다. 김승준조차도 생판 처음 보는 사람을 대하는 듯 행동하게 될 정도였다.
 그리고 그녀는 김승준을 졸졸 따라서 배역을 확인하고 의상을 받으러 갔다.
 “어······ 김승준 씨. 그리고 김승준 씨 외 1인은 이 의상이에요.”
 “김승준 외 1명이요?”
 강한나가 다시 물어봤지만 의상 담당자는 귀찮다는 듯 손으로 가라는 시늉을 했다. 그는 전달받은 대로 나눠 주기만 할 뿐 인적 사항까지는 알지 못했다.
 그렇게 등록한 본인인 김승준도 별다른 설명 없이 의상만 척 강한나에게 내밀었다.
 역시나 김승준이 그냥 평범한 배역을 줬을 리는 없었다. 옷에 붙은 이름에는 ‘원경왕후 궁녀 2’라는 태그가 붙어 있었다.
 김승준은 강한나에게 귓속말로 속삭였다.
 ‘그거 주화진 아줌씨와 붙어 댕기는 역이야. 한번 죽어 보라고. 그 아줌씨도 연기 괴물이니까.’
 잘생긴 얼굴이 그렇게 얄미울 수 없었다.
 하지만 강한나는 귓속말을 듣고도 다시 우물쭈물할 뿐이었다.
 김승준은 흐흐 웃으면서 그녀를 탈의실과 메이크업하는 곳으로 이끌었다.
 “어이, 아줌마. 여기예요.”
 “아, 저요?”
 공동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그녀의 단 하나뿐인 동맹군이 저쪽에서 손을 흔들었다.
 그녀는 선글라스를 끼고 메이크업하는 사람들 사이에 끼어들어 있었다.
 일 때문에 내려온 건 아니었다. 오직 강한나를 돕기 위해 내려왔다.
 메이크업 아티스트 이준희.
 그녀는 한때 강철의 여왕의 전속 메이크업 아티스트였었다. 업계에서 그녀의 솜씨는 정평이 나 있었다.
 하지만 보조 출연자들과 반장까지도 다들 바빠서 강철의 여왕이고 이준희고 알아볼 상황이 아니었다.
 보조 출연자들의 메이크업은 너무 튀어서도 안 된다. 마치 풍경화에서 먼 풍경을 대충 그리듯이 이들의 메이크업은 대충대충이었다.
 무슨 전쟁터처럼 빨리 촬영에 투입되어야 할 배역들이 후다닥 화장을 받고 현장으로 뛰었다.
 “자, 곧 슛 들어갑니다! 빨리 달려요! 원경왕후께서 기다리십니다! 아티스트분들 빨리 끝내 주세요! 감독님 빡치셨어요!”
 “예! 알았어요! 아까부터 닦달하지 마요!”
 “아오! 지금 원경왕후가 저를 망나니에게 보내서 목을 칠 기세란 말이에요!”
 메이크업 아티스트들도 웃음을 터뜨렸다.
 주화진의 성격은 불같았고 맘에 안 들면 현장을 열두 번도 뒤엎는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현장에 있는 사람들은 주화진의 본명보다 그녀의 카리스마 있는 연기 때문에 원경황후라고 더 많이 불렀다.
 가뜩이나 바쁜 손놀림이 더 빨라졌다. 강한나의 얼굴을 매만지고 화장을 적당히 손보고 있는 이준희의 손도 빨랐다.
 “주화진의 바로 옆이라며? 그 할망구 나도 현장에서 본 적 있어. 조심해야 할 거야.”
 “알아.”
 “그럼 됐어. 오케이 출격.”
 강한나 출격.
 김승준의 영향일까? 군사 용어나 여왕과 관련된 단어들이 연이어 등장했다. 이준희도 그게 우스웠는지 어이없어 웃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 저기요, 뭐 하시는 거예요? 아직 보조 출연자 많이 남았잖아요?”
 “아,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쫌 맡아 줘요. 아까 뻐스에서 물을 너무 많이 마셨나 봐요.”
 이준희는 옆쪽에 적당히 핑계를 대고 김승준의 옆으로 다가갔다.
 강한나는 연출부 사람을 쫓아서 세트장으로 달렸다. 김승준과 이준희 두 사람은 그 모습을 빤히 지켜보고 있었다.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군. 어이, 기획사 양반. 당신도 볼 거지?”
 “물론. 나는 벌써부터 심장이 두근거린다구. 주화진 아줌씨에게 들킬까 안 들킬까?”
 “당신도 고약한 사람이로군. 그 여자 지랄 같은 성격에 이유경과 무슨 친분 관계가 있다는 소문도 있어.”
 “후후. 메이크업 씨 당신은 저 여왕님을 믿지 못하는 것 같군.”
 “여왕님?”
 “그래, 강철의 여왕님.”
 이준희도 김승준을 묘한 얼굴로 지켜봤다. 김승준은 뭔가에 홀린 듯 강한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도대체가 정체를 알 수 없는 남자였다. 부끄럽지도 않은지 여왕님 여왕님 부르는 게 습관이었다.
 이윽고 두 사람은 세트장에 다다랐고 강한나, 아니 보조 출연자로 처음 나온 아줌마가 저 앞에 서 있는 걸 쳐다봤다.
 오직 이 현장에서 이준희와 김승준만이 느낄 수 있는 팽팽한 긴장감이었다.
 때마침 이곳에는 주화진을 인터뷰하기 위한 TV 연예 프로 기자들과 신문 기자들도 나와 있었다.
 “기획사 아저씨. 한 걸음만 잘못 삐끗하면 한나는 끝이야.”
 “거, 재수 없는 소리 하시네. 그녀는 이겨 낼 거라고. 내가 돈 냄새를 맡는 건 귀신이거든. 그리고 그녀는 여왕님이야. 왕후에게도 안 질 거야.”
 “······여왕님 여왕님 하면서 부끄럽지도 않아? 당신 굉장히 이상한 거 알아?”
 “흐흐흐. 닥치고 지켜보자고.”
 드디어 저 뒤에서 원경왕후 역의 주화진이 등장했다. 시간관념이 꼼꼼한 그녀이니만큼 정확히 연출부가 정한 촬영 개시 시간에 등장했다.
 약간의 차질 때문에 보조 출연 연기자들이 늦은 걸 감안하면 그녀는 새벽 3~4시부터 준비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굉장한 아줌씨야.”
 김승준은 주화진의 카리스마에 혀를 내둘렀다.
 강한나의 카리스마도 굉장한 것이지만 30여 년을 넘게 드라마에서 군림한 여배우의 관록은 남달랐다. 아직 슛 사인은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그냥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주눅 들게 만드는 눈초리였다.
 강한나가 한순간, 한순간을 연기하고 있다면 주화진 역시 이미 이 장소에 들어오기 전부터 ‘원경왕후’였다.
 주화진은 잠시 감독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바로 연기해야 할 자리에 들어왔다.
 “잠깐. 감독님.”
 주화진의 눈길이 자신 뒤에 서 있는 보조 출연자들에게 향했다.
 지켜보는 이준희와 김승준은 싸늘한 긴장감을 느꼈다. 재수 없으면 초장부터 주화진에게 들킬 수도 있는 순간이었다.
 “너. 옷고름이 잘못되었다. 그리고 너는 저고리 꼴이 그게 뭐냐? 치맛단이 먹었잖느냐? 그리고 너는 네가 왕후를 할 셈이냐? 뒤로 더 물러서라. 너는······.”
 강한나의 차례에서 주화진은 고개를 삐딱하게 쳐다봤다.
 보이지 않는 불꽃이 튀기는 것 같았다.
 하지만 주화진은 별다른 지적 없이 턱하니 중전의 자리에 앉았다.
 특별히 지적할 만한 구석을 못 찾은 모양이었다.
 그리고 슬슬 리허설 준비에 들어갔다.
 이제부터 그들이 연기해야 할 장면은 진땀이 날 만한 장면이었다.
 태종 이방원에게 동생들을 잃은 원경왕후 민씨가 태종에게 내 동생들이 무슨 죄가 있냐면서 대드는 장면이었다.
 “자, 일단 리허설 들어갑니다. 스탠바이!”
 연출부의 스탠바이 사인이 떨어지고 슬레이트가 탁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근데 기획사. 내가 역사를 잘 몰라서 그런데 대체 무슨 장면이야?”
 “태종 이방원이······.”
 “그게 누군데?”
 “······.”
 김승준은 뜨악한 눈으로 이준희를 쳐다봤다.
 “그래, 나 무식한 거 알어. 그러니까 자세히 설명해 주라고.”
 “쉽게 말하면 조선의 왕이 처갓집 처남들을 전부 죽여 버린 거야.”
 “에엥? 정말로? 왜 그런 건데?”
 “우리 시대에도 처갓집이 파워가 세면 남자가 어떻게 되지?”
 “아······.”
 “그래서 오늘 이 장면이 이 드라마 전체에서 중요한 분기점이야. 주화진이 연기한 왕후는 이 사건 이후 아무 힘이 없어지거든. 그래서 저 주화진이 잔뜩 독이 오른 거고.”
 “그렇군.”
 이준희는 그제야 이해하겠다는 투로 현장을 바라봤다.
 “그럼 이제 강한나가 어떻게 반응할지 보자구, 흐흐.”
 세트장에선 대본을 들고 최종적으로 점검하고 이방원 역의 중년 배우와 동선까지 점검했다.
 그 후 짝짝짝 박수 치는 소리가 들리고, 스탠바이. 슬레이트를 치는 것과 동시에 본게임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시작되자마자 모두의 예상을 깨는 장면이 나왔다.
 주화진, 아니 원경왕후가 앞에 있는 상을 확 뒤집어엎어서 태종의 얼굴에 집어던졌다.
 다과상이 엎어지고 태종은 의연한 태도로 그녀의 애드리브를 받아 넘겼다.
 “이야······ 주화진 걸물은 걸물이네. 이건 생각도 못 했는데.”
 “뭐가 생각도 못 한 거야?”
 “생각해 봐. 아무리 국모라고 해도 감히 왕한테 저랬다구. 게다가 옆에서는 아랫것들이 보고 있는데도 저런 행동을 할 줄이야.”
 그사이 주화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서 태종을 노려봤다.
 태종 역시 베테랑 연기자였다. 태종, 원경왕후 두 사람 사이의 감정선이 눈에 잡히는 듯 보였다.
 “노린 거군. 일부러 태종을 당황하게 하려고 대본과 다르게 한 거야. 당하는 입장에서는 진짜 당황하는 감정이 나올 테니까. 그래서 연기적인 우위를 잡으려고 하는 건가?”
 “아아, 그건 알겠어. 한나도 종종 그 지랄을 해서 연출부한테 욕 처먹었으니까.”
 “그래?”
 김승준은 휘파람을 불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태종도 굉장한데? 밀리지 않는걸?”
 아직 대사는 시작도 안 했고 동작 역시 실행된 건 다과상을 집어던진 것과 원경왕후가 일어선 것밖에 없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함부로 침을 삼키지도 못했다.
 중년 연기자 둘이 서로를 쏘아보는 눈길에는 원망, 분노, 슬픔, 모든 것이 소용돌이치면서 눈빛만으로 감정이 전달되고 있었다.
 
 
 -5화-
 
 
 “무슨 낯으로 예까지 오신 겝니까.”
 “중전······.”
 “무슨 낯으로 예까지 오셨냐고 물었습니다.”
 흡사 분노를 참는 원경왕후를 보는 것 같았다.
 이미 감정은 다과상을 집어던진 것만으로 폭발했고 그다음은 시녀들도 있으니 주상의 체면을 위해 참고 또 참는 모습이었다.
 김승준은 원경왕후의 뒤에 있는 강한나를 쳐다봤다.
 ‘참을 수 있을까? 너라면 여기서 어떻게 할 거냐? 엑스트라는 표정이나 행동 연기밖에 못 해. 그나마도 극을 위해서 절대로 튀어서는 안 되지. 걸어 다니는 배경이나 마찬가지니까. 자, 강한나. 너는 어떻게 할 거냐? 여왕님 당신의 가치를 보여 줘. 나에게 길을 보여 줘.’
 이 시험은 강한나가 어디까지 버틸 것인가 지켜보는 자리였고 상품으로서 어느 정도 가치가 있는가 확인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김승준은 강한나에게 따로 바라는 것이 한 가지 있었다.
 오늘 여기서 들킨다고 해도 김승준은 그녀를 구해 낼 셈이었다. 신분이 들킨다면 또 그때는 미리 생각해 둔 방책이 있었다.
 ‘바닥부터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몇 달간 모든 일이 끊어지고 ‘자숙’하고 있는 중이고 어떤 경우에도 일류 여배우가 바닥부터 시작하는 경우는 없었다.
 김승준과 우희민의 능력이라면 이 엑스트라에 출연한 그녀의 행동을 커버하는 것도 가능하다.
 또 엑스트라 출연이 방송 금지 위반인지의 여부도 불분명했다. 그녀는 멋들어지게 많은 사람을 속이고 보조 출연자로서 이 자리에 있었다.
 하지만 강한나의 선택은 의외의 것이었다.
 김승준은 단박에 그녀가 튀는 연기를 해서 난리가 날 것을 예상했지만 강한나는 전혀 다른 연기를 보여 주고 있었다.
 “어이, 메이크업 씨. 보여?”
 “뭐가 또?”
 “잘 봐봐. 강한나는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
 배경이지만 조금 더 디테일한 배경이었다.
 다리는 뒤로 향해 있었고 표정이 살아 있었다.
 그러나 김승준이 다르다고 말한 건 그런 디테일한 연기가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은 당황한 나머지 전부 날아간 다과상과 태종을 바라보고 있지만, 오직 강한나 혼자만이 분노하는 원경왕후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른 사람이 그냥 돌발 행동에 놀란 것이라면 그녀는 잘 드러나지는 않지만 원경왕후의 시녀로서 왕후를 걱정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내명부의 시녀는 오랫동안 주인을 섬기게 된다.
 김승준은 어이없게도 말없는 그녀의 연기 하나로 궁녀 2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
 
 ‘주상에게 저런 걸 던진 우리 주인님 어떡하지? 큰일 났네. 며칠 전에는 왕비님의 동생들이 처형되었다는데 설마 우리 왕비님도 죽는 거 아니야? 주상은 무지막지한 분이신데······.’
 
 즉, 그녀는 돌발 상황에서 아무도 모르게 배역에 맞는 연기를 하고 있었다.
 총감독도 그 사실을 눈치챈 건지 강한나 쪽을 바라봤다.
 들키지 말라는 건 생각해 보면 터무니없는 요구였다. 그녀는 별거 아닌 연기로도 밝게 빛나고 있었다.
 “빌어먹을 정도로 빤짝거리는군······.”
 강한나는 그러면서도 배경으로서의 본분은 잊지 않았다. 모든 에너지는 원경왕후에게 흐르고 있었고 그녀의 연기는 원경왕후를 빛내는 배경일 뿐이었다.
 잠시 연출부 쪽에서 수군거리더니 오케이 사인이 떨어졌다.
 “컷! 오케이! 좋았어요, 우리 왕후님! 최곱니다! 계속 그렇게 갑시다! 한 번 더 갈게요. 소품!”
 소품이 잽싸게 달려와서 어질러진 소품들을 정리하고 깨진 찻잔을 바꿨다. 아마도 이 애드리브는 연출부와 합의하에 벌어진 일인 것 같았다.
 이번엔 태종에게 카메라가 돌려지고 태종의 클로즈업과 이런저런 감정 연기를 찍었다.
 TV 드라마는 오케이 사인이 나와도 편집을 위해 다른 각도에서 또다시 같은 장면을 연기하기도 한다.
 그리고 김승준은 아주 잠깐이지만 주화진과 강한나의 눈이 마주치는 걸 볼 수 있었다.
 ‘이거 끝내주는군. 여왕님 고전하겠는데?’
 슥.
 아주 짧은 시간에 주화진은 강한나의 위치와 자세, 그리고 표정을 살피고는 애매한 말을 하나 던졌다.
 “호오.”
 또다시 태종이 문을 열고 들어온다. 그리고 이번에 주화진은 다과상에 손을 쓸어서 그 위에 있는 물건들을 냅다 강한나가 있는 쪽으로 집어던졌다.
 김승준의 옆에서 이준희의 딸꾹질 소리가 들렸다. 이 또한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장면이었다.
 꿀꺽. 김승준도 침을 삼키면서 주화진과 강한나를 쳐다봤다. 그가 생각한 것 이상의 대결이었다.
 “그래, 아줌씨. 아줌씨라면 우리 여왕님의 연기에 반응할 줄 알았어.”
 “히끅. 뭐······ 뭐라고?”
 “흐흐흐. 내가 보고 싶었던 장면이 펼쳐질지도 몰라. 메이크업 씨, 단단히 각오하는 게 좋을걸?”
 촬영장의 분위기는 일순간에 찬물을 끼얹은 듯했다.
 주화진이 지금 한 짓은 폭거였다.
 아무리 감독인 연출과 합의했다곤 하지만 지금은 다른 각도에서 태종의 얼굴 샷을 따기 위한 재촬영이었다.
 즉, 가능한 한 오차 없이 오케이 컷과 동일하게 연기해야 편집할 때 편한 것이다.
 TV 드라마와 연극 무대가 다른 점이 바로 이 부분이었다.
 때론 편집의 힘으로 커버할 수 없는 일이 생기기도 하지만 아예 연기 동선을 바꾸는 건 상대 배역인 태종은 물론 연출부에도 굉장한 실례였다.
 장면의 연속성에 문제가 발생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첫 컷에서는 찻잔이 태종의 발치에 구르고 있는데, 이번에는 강한나의 무릎에 맞고 기둥 쪽에 떨어져 있었다.
 이러면 시청자들의 입장에서는 찻잔이 공간 이동이라도 한 것처럼 보이는 현상이 벌어지게 된다.
 잘 편집한다고 해도 때론 옥의 티라고 부르는 현상이 발생하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김승준은 연출부 쪽을 바라봤다. 아이러니하게도 연출 쪽은 오히려 싱글싱글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리고 컷이 떨어지지 않는 한 배우는 장면에 몰입해야 한다.
 사람들의 눈이 자연스럽게 주화진과 궁녀에게 쏠렸다.
 
 “······.”
 배경이 튀어서는 안 된다. 지금 이 장면의 주인공은 당연히 태종과 원경왕후다. 극 초반부터 애증으로 치고받았던 둘의 갈등 관계가 최고조로 오르는 순간이었다.
 만약 강한나에게 이목이 집중된다면 그걸로 끝이었다.
 주화진은 이미 몇 수 앞을 내다보고 강한나를 이 악몽에 끌어들였다. 마치 주화진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오호라? 감히 재미있는 연기를 했겠다? 엑스트라 아가씨, 한번 네가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볼까?’
 
 하지만 강한나는 결코 물러서지 않았다. 주화진이 먼저 포문을 열었고 강한나도 그에 맞서 싸웠다.
 강한나는 이번에도 적절한 연기를 했다.
 그녀는 이번엔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 그냥 얼어붙은 것처럼 떨어진 찻잔과 깨진 주전자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생각해 보면 이 또한 궁녀 2라면 할 수 있는 당연한 반응이었다.
 주인이 자신에게 물건을 집어던진다?
 당시는 조선 초기였다. 궁녀라곤 해도 원경왕후를 모셨다면 조선 건국, 왕자의 난 등을 옆에서 지켜봤을 것이다.
 그녀의 표정에는 이런 일은 몇 번이나 있었다는 권태감도 보이고, 주인의 화를 이렇게라도 풀어서 다행이라는 안도감도 보였다.
 그녀의 별거 아닌 행동과 연기가 원경왕후의 위엄과 그녀가 지금 얼마나 더 화가 났는지 알려 주고 있었다.
 그리고 또 돌발 행동이었다.
 “까르르르!”
 원경왕후는 광기에 휩싸인 것처럼 하늘을 쳐다보면서 웃었다. 이 또한 미리 맞춰진 연기가 아니었다.
 주화진은 주상을 보면서 대사를 던지고 있었지만 실제로 상대하는 건 강한나였다.
 아무 반응 없는 궁녀 2로 인해 더 화났음을 보여 주며 강한나를 끊임없이 흔들고 있었다.
 “무슨 얼굴로 예까지 오셨냐고 묻지 않았습니까?”
 “······.”
 “주사앙! 무슨 얼굴로 예까지 오셨냐고 물었소!”
 그러나 강한나는 이번에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흔히 사람들이 생각하는 연기라면 뭔가 ‘행동’해야 한다는 편견이 있다.
 놀랍게도 24살의 여왕님은 여백으로 물러서야 할 때를 잘 파악하고 있었다.
 만약 여기서 자신의 행동으로 왕후가 화났다고 여겨 쓸데없이 반응을 보인다면 지금 찍은 장면이 NG였다.
 거북한 시간이 흐르고 있지만 컷 사인은 떨어지지 않았고, 어이없게도 강한나의 옆에 있던 궁녀 3이 벽에 손을 짚으면서 쓰러져 버렸다.
 영 딴판 곳에서 사태가 터진 것이다.
 “노굿! 노굿! 이야, 아쉽네! 전에 찍은 장면보다 이게 더 좋았는데 말이야!”
 연출이 아쉬운 듯 턱수염을 쓰다듬고 NG 사인을 냈다.
 아마 쓰러지고 싶었던 건 그 보조 출연자뿐만 아니었을 것이다. 뜻밖의 행동들로 연출부, 촬영팀, 조명까지 전부 다 긴장했다.
 팽팽하게 당겨진 끈이 끊어지듯 여기저기서 후우 하는 한숨 소리가 들렸다.
 역대급 두 배우가 격돌했던 순간이었다.
 다들 영문을 모르겠지만 뭔가 굉장한 걸 봤다고 느끼고 있었다. 태종 역할의 배우가 한숨을 내쉬더니 주화진에게 다가갔다.
 “어휴, 화진 씨. 애드립이 너무 많잖아? 그러니까 보조 출연분들이 긴장하지. 연출부에서도 한소리 할걸?”
 “미안미안.”
 “또 신참 털기야? 작작 좀 하지그래. 당신도 성격이 엉카이 나쁘다니까. 쓸 만한 아이들을 짓밟아서 되겠어?”
 “시끄러워. 조용. 당신은 말이 너무 많아.”
 “후우. 알았어, 알았어. 우리 원경왕후님, 여전히 감정을 잡겠다는 거지?”
 “······.”
 원경왕후는 이제 예상 못 한 주목에 수줍어하고 있는 보조 출연자 아줌마, 강한나를 흘끗 다시 쳐다봤다.
 그녀는 원경왕후의 주화진과 거의 대등하게 맞서 싸웠다.
 한 번은 적극적인 연기로.
 다른 한 번은 여백의 연기로.
 빤히 그 모습을 쳐다보던 태종이 문 밖으로 나가고 잠시 세트장을 정리하는 사이, 주화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은 촬영 중도 아닌데도 주화진의 몸짓은 원경왕후 그 자체였다. 그녀는 강한나를 노려보면서 그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몇몇 사람을 제외하면 이 충돌을 지켜보고 있지 않았다.
 “기획사 싸장님, 살 떨리네. 저쪽에 저거 연예 프로 기자들 아니야? 지금 들키면 다이렉트로 연예 프로에 방영되는 거잖아?”
 “쉿. 호들갑 떨지 마, 메이크업. 다른 사람들은 모르지만 지금이 하이라이트라구. 우리 여왕님은 굉장한 여자야. 들킬 리가 없어.”
 척.
 주화진은 강한나의 앞에 서서 그녀를 빤히 쳐다봤다. 딱히 강한나를 알아본 건 아니었다.
 “연출님! 이 아이한테 나중에 대사 한마디 주실 수 있나요?”
 술렁거림이 스태프들 전체로 퍼져 나갔다.
 주화진은 또 파격적인 행동을 했다.
 배우가 일개 무명 보조 출연자의 연기에 신경 쓰거나 아니면 연출부에 대사 한마디를 달라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물론 협의를 많이 하는 감독의 경우는 배우의 의견을 받아들여서 대본을 고치기도 한다. 특히 쪽 대본으로 나오는 드라마의 경우 배우의 발언권이 우선시되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사극 같은 경우 대본을 중시하는 입장이라 그건 연출부의 권한이었고, 주화진 정도 되는 경력이 없으면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또한 보조 출연자가 대사를 받는다?
 대사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연기자에게 엄청난 차이였다. 연기도 대사에 맞춰서 아무리 작은 역이라도 캐릭터가 부여되고 근본적으로 달라지지 않으면 안 된다.
 과장하면 그냥 세워져 있는 배경과 살아 숨 쉬는 인간 정도의 차이였다.
 연출의 눈이 강한나, 주화진, 마지막으로 김승준에게 향했다.
 그리고 연출은 뭔가 알았다는 표정으로 김승준에게 손가락질했다.
 연예 사업에 뛰어들었다는 김승준.
 하필이면 그와 함께 있던 아가씨가 문제를 일으켰다. 단순한 문제가 아닐 거라 퍼뜩 느낀 것이다.
 “오케이. 대신 화진 씨, 우리나 그 아가씨나 너무 괴롭히지는 마.”
 “알았어요. 내 스타일 아실 텐데?”
 “아, 정시 출근 정시 퇴근? 크흐흐. 우리 화진 씨가 최고 개런티를 받는 이유가 있다니까? 오케이. 그럼 막내야. 적당한 배역을······.”
 “또, 감독님. 굉장히 주제넘은 거라는 건 잘 압니다만 그 대사 제가 만들어서 넣을 순 없을까요?”
 자연스럽게 연출의 눈에 분노의 빛이 맴돌았다.
 아무리 엄청난 경력을 자랑하는 주화진이라고 해도 일개 단역의 대사를 정해서 지정한다는 건 명백히 월권 행위였다.
 극을 이끌어 가는 건 연출이나 감독의 몫이지 배우의 몫은 아니다.
 주화진은 지금 연출은 물론 ‘작가’의 권한까지 침범하려 하고 있었다.
 아주 중요한 대사 하나를 집어넣고 빼는 데 때론 몇 시간의 릴레이 회의를 할 때도 있었다.
 게다가 원경왕후를 집필한 작가는 꽤나 거물 소설가였고 멋대로 대본이 바뀌면 클레임이 들어올 게 뻔했다.
 “대신이라긴 뭐하지만 다음에 감독님 작품에 불러만 주신다면 어떤 역에 어떤 장소건 달려가겠습니다.”
 “그건······ 으음.”
 “카메오라고 해도 좋고 단역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제 개런티를 깎아도 상관없어요. 아니, 감독님의 작품이라면 개런티 없이 그냥이라도 상관없습니다.”
 또 폭거였다.
 주화진 정도 되는 배우는 차기작의 대본을 먼저 보고 선택한다.
 물론 연출 역시 굉장히 베테랑이었지만 주화진 정도의 카리스마 여배우와 연이어 작업하는 건 소속사나 이런저런 사정들로 꽤 힘든 편이었다.
 작품이 흥행하면 때론 개런티 문제로 연출가와 배우 사이가 틀어지기도 했다.
 거기에 개런티도 필요 없다는 말까지 튀어나왔다.
 그 역시 소속사와 상의해 봐야 하는 문제지만 주화진은 거침없었다. 연출가의 구겨진 체면을 세우기 위해서라면 그 정도 파격은 있어야 했다.
 연출가는 다시 후우 하고 한숨을 짓더니 이내 빙긋 웃었다.
 “좋아. 나야 화진 씨랑 다시 작업할 수 있다면 영광이지.”
 “오히려 제가 폐를 끼쳐서 죄송합니다.”
 “대신 원작자에게는 화진 씨가 말해 주겠어?”
 “그분 역시 이해해 주실 겁니다.”
 주화진은 90도로 연출에게 머리를 숙였고 항명(?) 사건은 그것으로 일단락되었다. 오랜 시간 현장에서 구른 주화진은 연출의 체면을 세워 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었다.
 그 장면을 보고 연예 기자들을 중심으로 술렁거림이 퍼져 나갔다.
 콧대 높은 주화진이 저 정도의 저자세를 보이면서 ‘시험’하고 싶은 인물은 과연 누구란 말인가?
 보조 출연 관리 반장도 연출부도 긴장된 얼굴로 주화진과 강한나를 쳐다봤다.
 다른 의미로 강한나에게 모든 이목이 집중되었다. 그녀는 다시 보조 출연자 아줌마로 되돌아와 주화진의 시선을 피했다.
 주화진은 피식 웃더니 다시 촬영 현장으로 되돌아왔다.
 “나도 메이크업으로 강한나를 오래 따라다녔지만 이런 적은 처음이야. 이거······ 걸리면 어떻게 하지? 이제 그냥 끝나진 않을 분위기잖아?”
 “상관없어. 지금을 즐기자구. 주화진이 단독 결투를 신청한 거야.”
 김승준의 눈에는 주화진과 강한나가 보이지 않는 칼로 서로를 겨누고 있는 것 같았다.
 ‘이거야말로 무차별 연기 대전 아니겠어? 흐흐흐.’
 
 
 -6화-
 
 
 배우끼리는 연기하는 동안 상대방의 저력을 느낄 수 있는지도 모른다.
 겉모양이 어떻든 누구든 무대 위에 있는 한 아무 상관 없었다.
 주화진은 강한나가 누구든 정체가 뭐든 궁녀 2에게 연기 결투를 신청한 것이다.
 이윽고 촬영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연출부의 오케이 사인이 연방 떨어지고 벌써 시간은 점심이 되었다.
 김승준과 강한나는 궁궐 세트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서 밥을 먹었다.
 “어떠신가, 우리 제이스 엔터 1호 배우.”
 “······.”
 “이봐, 여왕님. 주화진이랑 정면으로 부딪치게 되는 거잖아?”
 강한나는 여왕이라는 말에 고개를 갸웃하면서 그를 빤히 쳐다봤다.
 “여왕님? 오글거리네요. 나는 별 느낌 없어요. 어떤 소감을 바라는 건데요?”
 “하아. 이런 칠칠치 못한 아가씨 같으니라구.”
 김승준은 강한나의 입술에 묻은 밥풀을 떼어 먹었다.
 이제 그녀의 얼굴을 봐도 어디가 연기고 어디가 진짜인지 이제는 모를 지경이었다.
 강한나는 여전히 적당히 거리를 둔 채로 김승준에게도 처음 만난 아줌마의 연기를 하고 있었다. 벌써 아홉 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다른 사람을 쭉 연기하는데도 피곤한 기색이 없었다.
 ‘강한나. 무서운 아이. 정말 괴물 같군.’
 두 사람이 제육덮밥을 다 먹었을 무렵 옆에서 메이크업 이준희가 다가왔다.
 그녀는 말없이 강한나의 메이크업을 다시 고치고 그녀의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주화진의 진영에 가서 염탐하고 왔어.”
 김승준이 음료수를 먹다가 그대로 뿜어 버렸다.
 “뭐야. 당신 때문에 걸릴 수도 있잖아? 당신 여왕님의 전속인 적도 있었다면서? 당신 얼굴을 아는 사람도 있었을 거 아니야?”
 “에이. 사람이 워낙 많은데 내가 누군지 어떻게 알아. 또 나도 현장 밥 좀 먹은 사람이라구. 걱정 마. 들키지는 않았으니까.”
 “그걸 믿으라구?”
 “아, 그럼 믿지 말든가. 생긴 건 기생오라비처럼 생겨 갖구.”
 “그래도 난 댁처럼 뚱뚱하지 않거든?”
 “이게에? 여왕님, 이 녀석 당신 신하라며? 목 좀 치면 안 될까? 뎅강? 응?”
 김승준과 이준희는 어딘지 깨알 같은 호흡을 보여 주는 콤비였다. 강한나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웃음을 터뜨릴 뻔했지만 끝내 자신의 연기를 잃지 않았다. 굉장한 집중력이었다.
 “암튼암튼.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주화진이 얘한테 줄 대사를 들었어. 암것도 아니던데?”
 “뭐였는데?”
 “뭐라더라? ‘알겠사옵니다.’ 이거 하나뿐이야.”
 “앞의 상황은?”
 “그건 나도 잘 모르고.”
 천하의 주화진이 연출에게 굴욕적으로 머리를 숙이고 얻은 기회였다. 간단한 대사지만 그렇게 간단할 리 없었다.
 대사 앞뒤로 있는 상황이 중요했다.
 같은 말이라도 상황과 분위기에 따라 전혀 다르게 연기해야 한다.
 벌써 강한나는 입을 오물거리면서 다양한 ‘알겠사옵니다’의 상황을 상정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김승준이 강한나의 손목을 잡았다.
 “명색이 대여배우가 건 결투야. 그렇게 간단할 리 없잖아? 미리 생각해 봤자 소용없어.”
 “알아요.”
 쿵.
 김승준은 그녀의 미소에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이준희의 이런저런 분장들로 강한나의 도도한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런데도 김승준은 그녀의 모습에 완전히 두근거렸다.
 더더욱 그를 혼란스럽게 만든 건 저 웃음이 강한나의 것이 아니라 그녀가 지금 연기하는 어떤 가상의 인물의 웃음이라는 점이었다.
 “이런이런. 상품에 손을 대선 안 되지.”
 “뭐라고요?”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여왕님, 뭐 필요한 거 없어?”
 “없어요.”
 다시 활짝 웃었다.
 거짓웃음이라는 건 안다. 그런데도 김승준의 심장은 세차게 두근거렸다.
 “궁녀 2! 촬영 들어갑니다! 스탠바이하세요! 궁녀 2! 스탠바이하세요!”
 연출부 막내가 이례적으로 궁녀2를 찾으러 왔다.
 보통 보조 출연자들은 연출부의 요청으로 출연 반장이 관리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막내의 모습은 마치 주역을 부르는 듯한 모양새였고 더군다나 ‘존댓말’까지 쓰고 있었다.
 막내 역시 뭔가 낌새를 눈치챈 것일까?
 스탠바이하라는 소리가 이준희나 김승준의 귀에는 결투를 준비하라는 소리로 들렸다.
 다시 강한나가 일어섰다.
 그녀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촬영장에서 보여 준 모습 그대로 연출부 막내의 뒤를 따랐다.
 촬영장 전체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이미 소문은 오전 내내 퍼져 있었다. 주화진이 데스 매치를 걸었다는 이야기부터, 무슨 숨겨 둔 딸이라는 등 별 소문이 다 퍼진 상태였다.
 보통 사람이라면 현장의 압력에 짜부라질 텐데 그녀는 이 상황에서도 ‘보조 출연’이라는 상황을 멋지게 연기했다.
 초짜들은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잘 모르기 때문에 중압감을 느끼지도 못한다.
 어쩌면 강한나가 촬영장에 온 순간부터 ‘초짜 아줌마’를 연기한 이유도 그런 연유 때문일지도 몰랐다.
 김승준이 주변을 살펴보니 다른 보조 출연자들까지 구경 나와 있었다. 보통 출연하는 부분이 아니면 쉬거나 자거나 할 사람들이 죄 몰려온 것이다.
 담배를 피우던 보조 출연자 관리 반장도 슬쩍 김승준에게 다가왔다.
 “어이, 김승준이. 저 여자 대체 뭐야? 연출부에서 난리가 났다고?”
 “흐흐흐. 저도 잘 모르겠네요.”
 진짜 김승준의 심정이었다. 도대체 어떤 게 진짜 강한나고 어디가 가짜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한편 주화진이 ‘데스 매치’ 장소로 뽑은 장소는 원경왕후의 몰락을 그린 장소였다.
 원래는 원경왕후 혼자 괴로워하는 장면이었지만 아주 짧은 대사 ‘알겠사옵니다.’가 덧붙여져 있었다.
 즉, 원래 없던 배역이 생겨난 것은 아니고 단지 한 줄의 대사 알겠사옵니다가 붙은 것이다.
 김승준은 곁눈질로 별로 볼 것도 없는 대본을 보고 싸한 기분을 느꼈다.
 ‘저 주화진이 그냥 넘어갈 리 없어.’
 설상가상이었다. 저쪽에서 연예부 기자들이 술렁거리더니 갑자기 박수 소리가 들렸다.
 난데없이 노아경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녀는 샌드위치나 가벼운 간식거리를 스태프들에게 돌리면서 연예 프로그램 관계자들과 인터뷰를 했다.
 저 여우가 그냥 온 건 아니다. 드라마 원경왕후가 시청률 고공 행진을 하고 또 때마침 자신의 새 청춘 로맨스 영화가 개봉하기에 홍보차 온 것이다.
 그녀는 과연 꽃들의 여왕 이유경의 2인자였다.
 167의 키에 걸맞은 우아하면서 섹시한 원피스와 잡지에서나 나올 것 같은 코트, 장갑이 예뻤다.
 얼굴은 또 아이돌 그룹의 미모 담당답게 아찔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이거 어쩌지? 주화진은 몰라도 노아경은 한나의 얼굴을 알아볼 텐데?”
 “걱정 마. 지금의 우리 여왕님은 자기 부모가 와도 몰라볼 거야.”
 이유 없이 두근거리는 김승준의 심장이 그걸 증명하고 있었다. 지금의 강한나는 누군지도 모르는 다른 사람이었다.
 한편 노아경이 세트장에 등장한 이후 모든 분위기가 그녀에게 흘러갔다.
 그런 노아경은 세트장 안쪽을 보고 주화진에게 공손히 인사했다.
 “어머, 선생님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뵙네요! 시장하실 텐데 식사 좀······.”
 다시 스산한 기운이 맴돌았다. 오직 연출만이 킬킬대면서 노아경과 주화진을 쳐다봤다.
 주화진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바로 이런 상황이었다.
 제작 발표회나 기자 회견 장소에서라면 몰라도 배역상 주화진과 노아경이 서로 ‘현장’에서 마주칠 일은 거의 없었다.
 노아경은 20~30대의 젊은 원경왕후, 주화진은 조선 건국 이후의 원숙한 왕후를 연기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노아경은 또 아이돌 그룹의 리더였다.
 그동안 30회까지 젊은 시절을 촬영했을 때 모든 스태프들이 아이돌 출신의 노아경에게 맞춰 줬을 것이다.
 그녀는 30회 이전의 촬영장 생각을 하면서 주화진의 ‘현장’ 안으로 쑥 들어왔다. 다른 사람의 촬영장이 아니라 자신의 촬영장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즉, 노아경은 스탠바이에 들어간 ‘원경왕후’를 능멸하고 있었다.
 “너어! 스탠바이 들어간 거 안 보이냐!”
 “예?”
 “네년이 여기가 어느 안전이라고 죽으려고 환장한 게냐! 가암히!”
 퍽.
 주화진은 노아경이 건넨 샌드위치를 그녀의 얼굴에 집어던졌고 꽃단장하고 온 그녀는 두세 걸음 물러서다가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얼굴에 양상추가 붙고 소스가 튀었다.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얼어붙었다.
 주화진에게 아이돌 가수고 나발이고 없었다. 프로 의식으로 똘똘 뭉친 대배우는 그녀가 누구건 일면식이 있는 사람이건 뭐건 진짜로 사약이라도 내릴 기세였다.
 “서, 선생······ 서, 선생님.”
 “나는 네 선생도 아니고! 내가 네 선생이면 스탠바이 때 이렇게 하라고 가르치더냐! 현장의 분위기를 모르는 게냐! 그렇다면 그 역시 네 죄고, 저 TV 앞에서 뭔가 꿍꿍이가 있어서 이 나를 끌어들이려 했다면 그 역시 네 죄렷다!”
 주화진, 아니, 원경왕후는 뭘 들지도 않았고 손가락질을 하지도 않았는데 노아경은 완전히 패닉 상태가 되었다.
 그냥 서서 노려보는데도 왕후의 위엄이 노아경을 짓눌렀다.
 오줌을 지리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주화진은 무슨 원경왕후가 그녀의 몸에 빙의한 것 같았다.
 양상추 조각을 떼 내는 노아경은 이제 눈물까지 흘리기 직전이었다. 현장의 분위기가 급속도로 얼어붙었다.
 “워워워. 중전이 참으시오, 참아. 캄다운, 캄다운. 애가 모를 수도 있는 거지.”
 “······.”
 급기야 같은 원로 배우인 태종이 달려 나와서 주화진을 진정시켰다.
 하지만 이미 굴욕적인 장면은 TV 카메라에 그대로 찍혔다.
 노아경이 그냥 연기자라면 모르지만 그녀는 현업 아이돌 그룹의 가수였다. 주화진에게 혼쭐이 났다고 이런저런 구설수가 되어 기사가 나갈 게 뻔했다.
 잠시 정적이 흐르고 태종 역할의 베테랑 연기자가 또 그 상황을 잘 마무리하려고 했다.
 “아이고, 우리 젊은 마누라도 고생했네. 괜찮아. 늙은 마누라 성미가 고약해서 말이지. 아, 나도 이런 젊은 마누라랑 연기하면 좋을 텐데.”
 스태프들 사이에서 웃음소리가 터졌다. 주화진도 태종의 얼굴을 봐서 한소리를 더 하려다가 그냥 넘어갔다.
 이 상황에서 노아경을 더 공격했다간 태종 역할을 맡은 배우의 체면도 깔아뭉개게 된다.
 주화진은 의자에 앉으면서 강한나를 노려봤다.
 이 또한 주화진에게는 의외였다. 아까 주화진의 돌발 행동으로 난리가 났을 때는 당황해하지 않았던 궁녀 2가 이번에는 당황해서 벽에 손을 짚고 있었다. 주화진이 예상한 행동은 아니었다.
 “······.”
 주화진은 오호라 이것 봐라 하는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더니 알 듯 말 듯 해하는 미소를 보냈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메이크업 이준희는 속이 바짝바짝 탈 지경이었다.
 “기획사, 괜찮을까?”
 “아마도. 주화진이라는 저 여걸,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사람은 아닌 것 같다. 적어도 이유경의 편은 아니야.”
 김승준은 담배 생각이 간절했다.
 노아경과의 해프닝은 전초전이었고, 저 여배우가 지금 맞상대하려는 건 강한나였다. 김승준은 저 주화진과 강한나가 어떻게 싸울지 궁금해졌다.
 노아경은 결국 굴욕감을 참으면서 현장에서 물러나 대기실로 향하고 다시 연출부의 스탠바이 사인이 들렸다. 방금 전의 해프닝 때문인지 다들 바싹 긴장하고 있었다.
 연출은 다시 악마 같은 웃음을 씨익 하고 지었다.
 이미 주화진과 이런저런 협의가 되어 있었다. 과연 어디까지 저 의문의 보조 출연자를 데리고 갈 건지 연출은 신나하고 있었다.
 지금 찍는 이 신은 원경왕후의 몰락이었다.
 왕권 강화 때문에 두 동생들이 죽고 남은 두 동생과 심지어 아들들도 태종에게 죽어 나갈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어쩌면 원경왕후에게 태종은 피에 미친 살인마이며 악귀처럼 보일 수도 있었다.
 그걸 잘 드러내기 위한 귀중한 씬이었다.
 이윽고 모든 준비가 끝나고 막내가 슬레이트를 칠 준비를 했다.
 긴장감 하나만큼은 무슨 서부극의 결투 장면 같았다.
 궁녀 1, 3, 4는 자리에 없었고 오직 주화진과 강한나만의 맞대결이었다.
 한편 강한나는 이 긴박한 상황에서 무대의 한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누군가의 실수로 이곳에 있어선 안 되는 물건이 하나 있었다. 그녀는 슬레이트를 치기 직전 김승준을 바라보면서 살짝 흐릿한 미소를 보여 주었다.
 “여왕님이 뭔가 기발한 생각을 하는 모양이군.”
 김승준은 그녀의 눈이 어디를 향했는지 바라봤지만 도저히 뭘 보고 웃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사이 탁 하고 슬레이트가 쳐지고 본격적으로 주화진과 강한나가 격돌했다.
 
 
 -7화-
 
 
 “주상께서 누구의 힘이 있었기에 이곳까지 올 수 있었단 말인가? 우리 여흥 민씨가 없었다면! 어디 조선이 있으리오! 태상왕께서도 내게 이럴 수 없는데 어찌 주상이! 주상이! 네가!”
 주화진의 연기는 상상 이상이었다.
 폭포수처럼 흘러나오는 그 연기도 연기지만 완벽한 발성과 목소리가 사람들을 주눅 들게 했다.
 “내 동생들은 무엇을 위해 태어났단 말인가! 아아, 내 동생들아······ 어린 시절 나와 함께 자랐던 내 동생들아······ 이방원아! 이방원아! 어찌 네가 이럴 수 있단 말이냐! 어찌 네가 나에게 이럴 수 있단 말이냐아!”
 오늘 유난히 주화진은 돌발 행동이 심했다.
 대여배우는 일어서더니 그대로 머리에 쓴 가체머리를 패대기쳤다.
 연출은 별로 당황하지 않고 그녀를 쳐다봤다. 약속되었거나 아니면 그녀의 연기가 연출의 허용 한도라는 뜻이었다.
 원경왕후는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씩씩대다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김승준은 저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접전이었다.
 주화진은 과격한 돌발 행동으로 강한나를 뒤흔들었지만 강철의 여왕은 그 별명답게 긴장 따윈 하지 않았다. 뒤에 있는 강한나 역시 주어지지 않은 돌발 행동을 했다.
 아니, 애초에 그녀에게 허락된 행동 지문 따위는 없었고, 대사만 단 하나 주어졌을 뿐이었다.
 척.
 그녀는 옆에 떨어져 있는 활을 자연스럽게 슬그머니 주워 들었다.
 “저, 저게 왜 저기 있어? 소품팀이 안 치운 거야?”
 “망했다. 연출부에서 난리 치는 거 아냐?”
 사실 조선 건국 이후 왕후의 공간에 활이 있을 이유는 별로 없었다.
 그러나 NG라면 NG일 텐데 연출부는 움직이지 않았다.
 두 사람은 파격과 돌발 행동이 벌어지면서도 아슬아슬하게 대본과 연출이 원하는 그림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제 현장의 분위기는 술렁거리는 말소리도 안 들렸다.
 그리고 강한나는 아직 궁녀 2라는 ‘배경’에서 벗어나지 않은 상태였다.
 마치 원래 대본에 그런 지문이 있었던 것처럼 빈 활을 자연스럽게 원경왕후에게 건넸다.
 김승준은 속으로 웃음을 터트렸다.
 주화진이 깔아 준 판을 강한나가 거부할 리 없었다.
 가체머리를 집어던지는 돌발 행동에 지문에도 없는 소품 활을 건네는 걸로 주화진에게 대응했다.
 또 그녀의 연기는 ‘엑스트라 궁녀 2’로서 위화감이 전혀 없었다. 아무 표정도 없고 움직임도 눈에 띄지 않았다. 정말로 활을 가져다주기 위한 배경일 뿐이었다.
 그리고 오직 현장에 있는 사람들만 강한나가 주화진의 돌발 행동에 돌발 행동으로 대응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화면상으로는 지금 모든 장면이 매끄러웠다.
 연출과 상황을 보던 집필진의 작가는 그 모습을 보면서 뭐라뭐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직 노굿 사인은 떨어지지 않았다. 의외의 일이었지만 연출도 작가도 정말 기묘한 표정이었다.
 “기획사 싸장님,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쉿. 오디오에 잡음 드가면 안 돼. 지금 본격적으로 싸움이 걸렸어.”
 주화진은 강한나가 활을 건네자마자 활을 집어 들고 주저하지 않고 빈 활을 튕겼다.
 겉으로는 전혀 이상하지 않은 장면이었다.
 애초에 원래부터 대본상에 빈 활을 쏘는 장면이 들어 있던 것 같았다.
 현장에 있는 사람들은 퉁퉁 빈 활이 우는 소리를 들으면서 보이지 않는 화살이 태종에게 날아가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그 전에도 후궁 문제로 주상인 태종과 싸운 상태였다. 수많은 아이를 낳아 줬지만 더 이상 여자로서의 매력은 없었다.
 또한 정치적 파트너로서 일궈 온 자부심도 동생 둘이 태종의 손에 죽으면서 사라져 버렸다.
 원경왕후에게 남아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그저 빈 활을 주상에게 쏠 수밖에 없었다.
 주화진의 멋들어진 연기로 그런 심정이 모두에게 전해졌다.
 퉁.
 마지막으로 활 튕기는 소리가 들리고 원경왕후도 아무 대사도 없었다. 그녀가 원한 것은 단 한 줄의 대사를 강한나에게 던져 주는 것이었고 주화진 역시 더 이상의 대사를 늘릴 수는 없었다.
 턱.
 탁자 위에 활이 놓이고 기다리고 기다리던 주화진의 대사가 거의 쥐어짜듯 흘러나왔다.
 큐 사인이었다.
 “물러가라.”
 “알겠사옵니다.”
 강한나는 주화진에게 공손히 인사하고 조심조심 문밖으로 나왔다.
 “컷!”
 연출부에서 기세 좋게 컷 사인이 나오고 연출이 벌떡 일어나서 박수를 쳤다. 연출은 칭찬에 굉장히 인색한 사람이었다.
 “화진 씨, 아주 좋아!”
 “아뇨. 죄송하지만 아까 말씀드린 대로 딱 한 번 더 갈 수 있을까요?”
 연출은 주화진에게 다가와서 속삭였다.
 “솔직히 긴가민가했는데 좋은 장면이 나왔어. 빈 활을 쏘는 건 작가조차 생각하지 못한 장면이었거든. 30화 때의 활극과 대비해서 몰락하는 원경왕후의 모습을 드러내는 데 효과적이야. 화진 씨, 이보다 더 좋은 장면이 나올 수 있겠어?”
 “그 부분은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또 고집이시다? 스케줄을 생각해 달라고. 이미 대사를 집어넣은 것만으로도 나한테 미안하지 않아?”
 연출은 허리를 숙여서 주화진과 눈을 마주쳤다.
 주화진의 눈빛은 여느 때보다 더 생동감 있게 빛났다.
 아역 교체, 청년역 교체에 이어 30화 이후 그녀는 이 드라마를 훌륭하게 이끌어 왔지만 그녀의 연기에선 어딘지 ‘권태감’이 느껴졌다.
 그리고 저 아가씨를 발견하고 그녀는 되살아났다.
 “저 아이를 한 번 더 보고 싶습니다.”
 “도대체 저 아이는 뭐야? 김승준도 그렇고 화진 씨도 그렇고 무슨 엄청난 빽이라도 있는 거야?”
 주화진은 저 옆에 조용히 서서 기다리는 강한나를 쳐다봤다.
 “제가 묻고 싶군요. 저 아이는 대체 뭡니까?”
 “그럼 정말 우연히 찾아온 보조 출연자란 말야? 저 실력에?”
 마치 마법과도 같았다.
 두 사람도 당연히 강한나의 얼굴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저 수수하게 생긴 여자가 강철의 여왕이라곤 전혀 짐작하지 못하고 있었다.
 “가능성이 있는 아이예요. 만약 그냥 보조 연기자라면 제 손으로 키우고 싶어요.”
 “흐음, 확실히. 좋아, 화진 씨. 단 한 번뿐이야. 난 빈 활을 쏘는 장면을 내보낼 거고 이건 폐기될지도 몰라. 그리고 당신이 저 아이가 맘에 들었건 말건 절대로 저 아이를 카메라 중심에 놓는 일은 없을 거야.”
 “당연하지요. 저 아이는 ‘배경’으로서의 연기를 하고 있어요. 어디의 연극밥을 먹어 본 아이 같더군요. 저렇게까지 자신을 억제하면서 저항하기가 쉽지 않은데.”
 처음에 가체머리를 집어던진 건 강한나를 끌어내기 위해서였다. 만약 거기서 오버스러운 연기로 대항했다면 아웃이었다.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 화진 씨 덕분에 스케줄이 많이 단축되긴 했지만 또 늘어날지도 모르니까. 잊지 말라고. 댁들 배우와 달리 우리 연출과 편집들은 시간과 싸우는 사람들이라는 걸.”
 “오케이. 걱정 마세요. 저 주화진입니다. 억지를 부리는 건 이번뿐입니다.”
 여배우로서의 프라이드였다.
 연출은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 뒤로 돌았다.
 주화진이 처음에 건 조건은 한 번의 씬을 더 찍는 것이었다. 별수 없이 연출은 원래 자리로 되돌아왔다.
 이윽고 분장팀들이 다시 그녀의 머리를 되돌리고 소품을 정리했다.
 다시 원래대로 되돌아오는 데는 약 10여 분의 시간이 더 흘렀다.
 “스탠바이.”
 아까 노아경의 일도 있고 다시 삼엄한 긴장감이 흘렀다. 강한나는 주화진과 현장에서 단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들은 지금 이 순간도 들리지 않는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오직 일류 배우들만이 다다를 수 있는 무언의 경지였다.
 “오케이! 갑시다!”
 원경왕후의 머리를 정리하던 분장팀과 메이크업팀이 세트장에서 잽싸게 빠져나오고 카메라들이 일제히 원경왕후에게 집중했다.
 사람들은 마침내 다시 시작된 주화진의 연기를 보고 침을 꿀꺽 삼켰다.
 “아······ 아까랑 톤이 완전히 다르잖아? 기획사, 저래도 되는 거야?”
 “저 아줌씨······ 우리 여왕님을 시험하고 있군.”
 김승준은 아까와 완전히 달라진 주화진의 연기를 보고 씩 웃었다.
 “주상께서······ 누구의 힘이 있었기에 이곳까지 올 수 있었단 말인가? 우리 여흥 민씨가 없었다면, 어디 조선이 있으리오.”
 그녀의 표정은 처연하게 탁자 위를 쳐다보고 있었다. 완전히 똑같은 대사였지만 느낌은 완전히 달랐다.
 “내 동생들은 무엇을 위해 태어났단 말인가······ 아아. 내 동생들아. 어린 시절 나와 함께 자랐던 내 동생들아. 이방원아. 이방원아. 어찌 네가 이럴 수 있단 말이냐. 어찌 네가 나에게 이럴 수 있단 말이냐아······.”
 완전히 꼭 같은 대사를 쳤지만 아까와는 완전히 달랐다. 가체머리가 날아가지도 않았고 격한 움직임 따위도 없었다. 원경왕후는 그냥 의자에 몸을 뒤로 젖히고 한숨 소리까지 토해 냈다.
 아까의 연기가 배신당하고 분노가 폭발하는 연기라면 이번에는 모든 것을 잃고 자신의 시대가 끝났다고 생각하는 것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그 처연한 모습은 늘 강하고 호탕했던 원경왕후의 모습이나 그걸 연기하는 주화진의 모습과 대비되어 더더욱 처량하게 보였다. 자신의 시대가 이제 끝나가지만 그걸 바라볼 수밖에 없는 마음이 절절하게 느껴졌다.
 이제 앞으로 원경왕후에게 남겨진 것은 양녕대군이 폐세자가 되고 세종대왕이 즉위하는 사건들이었다.
 태종은 대놓고 여자놀음을 할 것이고 사랑은 끝난다.
 이제 뭐 하나 그녀의 뜻대로 되는 것도 없고 그저 시대의 흐름에 몸을 맡길 뿐이다.
 분노. 혹은 처연함.
 어느 쪽이든 말이 되는 연기였고 어떻게 편집하느냐에 따라 극의 향방이 바뀌는 연기였다.
 “저 여자 혼자서 극을 지배하려고 하고 있어. 당했군. 어쩐지 고개까지 숙이더라니.”
 연출은 턱을 쓰다듬으면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가끔 그런 배우들이 있었다. 원래 극을 이끌어 나가는 건 배우가 아니라 연출이었다.
 특히나 TV 드라마의 경우는 편집이 중요하기 때문에 연극처럼 배우의 결정적인 연기 하나가 극을 뒤집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지금 주화진은 강한나는 물론이고 연출, 작가와 파워 게임을 하고 있었다.
 자, 나는 이렇게 두 가지 연기를 했다. 이 뒤의 이야기는 어떻게 쓸래? 어떻게 이끌어 갈래? 이 둘 중의 연기 중에 너희는 무엇을 고를 것이냐? 어떤 게 더 재미있을 것이냐?
 물론 어느 정도의 대본은 이미 써져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주화진의 폭거로 이제 연출과 작가는 판단을 내려야 했다.
 원경왕후의 분노에 맞출 것인가.
 아니면 여자로서의 일생과 처연함에 포커스를 맞출 것인가.
 과연 일류 배우의 일류 연기였다.
 원경왕후는 끝내 눈물까지 흘리면서 탁자에 고개를 파묻었다.
 이제 거기에 맞춰서 연기해야 하는 강한나의 역할이 중요했다.
 강한나는 뭘 덮어 주거나 원경왕후의 몸에 손을 대선 안 된다. 그렇다고 일개 궁녀가 원경왕후의 거대한 아픔을 이해할 수도 없다.
 이에 그녀는 우물쭈물하면서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연기를 보였다.
 “······오케이. 1번 카메라 궁녀 2 클로즈업.”
 일개 단역에게 클로즈업은 물론이고 얼굴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카메라를 들이대는 법은 없었다.
 그러나 연출은 그렇게 지시했다. 주화진이 도전했다면 연출 역시 그녀에게 포문을 열었다.
 그리고 강한나는 여전히 엑스트라의 배경 연기를 하고 있었지만 주화진의 큐 사인이 떨어지지 않았다.
 숨 막힐 듯이 정적이 이어졌다. 마치 서부극에서 총을 쏘기 일보직전의 상황과 비슷했다.
 연출, 주화진, 강한나.
 세 명 모두 권총에 손을 올리고 큐 사인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퍽.
 드디어 승부수를 걸었다.
 주화진은 다시 탁자 위에 있는 두루마리 따위를 강한나에게 집어던졌다.
 “물러가라!”
 그런데 원경왕후의 표정에 궁녀에게 화를 내면서도 미안해하고 있는 표정이 그대로 나타났다. 이 또한 의외였다.
 그리고 여기서 강한나가 승부를 걸었다.
 궁녀 2는 주인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 그런 은은한 미소를 띠우면서 자리를 벗어났다.
 “예······ 알겠사옵니다.”
 파격에는 파격으로, 절제에는 절제로.
 그녀는 완벽한 배경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퇴장했다.
 전혀 다른 느낌의 두 씬을 찍으면서 한 번도 자신의 역할을 넘어 오버하지 않은 것이다.
 그야말로 꽃무늬 병풍 같은 연기였다.
 “오케이, 컷! 화진 씨, 좋았어!”
 주화진도 일어서서 연출부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짝짝짝짝!
 무슨 극이 종영한 것도 아니고 연극이 막을 내린 것도 아닌데 사람들은 박수를 쳤다.
 강한나는 세트 밖에서 주화진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고 주화진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의 오늘 대결은 그걸로 끝이었다.
 
 주화진은 퇴장하고 보조 출연자 사이로 사라지는 강한나를 의미심장한 눈으로 쳐다봤다.
 ‘저 아이는 누구지?’
 사실 주화진은 많이 놀라고 있었다.
 그녀의 이런 폭거에 맞서 싸운 사람은 거의 없었다.
 젊은 배우라면 소속사의 치마폭에 싸여 징징댔었고 그녀와 비슷한 경력의 배우라도 화를 내면서 촬영장을 빠져나가기 일쑤였다.
 거의 몇십 년 만에 주화진의 연기 대결에 저 이름 없는 엑스트라가 정면으로 맞서 싸운 것이다.
 승패는 둘째 치고 주화진은 저 당돌한 아가씨가 궁금해졌다.
 ‘대체 어디서 나타난 아이야?’
 
 
 -8화-
 
 
 “화진 씨, 이동합시다.”
 “예. 실례 많았군요, 감독님.”
 “별말씀을. 대신 다음부터는 꼭 저랑 상의해요. 알았죠?”
 그 뒤로는 조정에서 하륜 등의 인물들과 이야기를 나누거나 이런저런 태종의 일화들을 차례로 촬영했다. 상상 외의 강행군이었다.
 그리고 어느새 해가 지고 타닥타닥 불타오르고 있는 모닥불 옆에서 쉬고 있는 강한나의 옆으로 김승준이 되돌아왔다.
 “이야. 오랜만에 했더니 빡세네.”
 “승준 씨, 오늘 촬영은 이게 다인가요?”
 “나도 모르지. 근데 출연 반장님 보니까 이만 정리하려는 것 같은데?”
 아까 그 유쾌했던 출연 반장이 연기자들에게 뭐라뭐라 이야기하고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베테랑 보조 출연자들은 벌써 짐을 싸고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메이크업 이준희도 피곤했는지 강한나에 기대서 쿨쿨 졸고 있었고, 두 사람이 핫바를 으적이면서 멍하니 촬영현장을 쳐다보고 있노라니 저쪽에서 누군가가 다가왔다.
 “저기. 궁녀 2분, 지금 시간 되시나요?”
 “예? 예. 또 촬영인가요?”
 강한나는 또 촬영인 줄 알고 치맛자락을 잡고 일어서려 했다.
 “아뇨. 촬영은 아니고 그냥 개인적으로 시간 되시면 저희 누님과 만나 보시겠습니까?”
 “누님이라뇨?”
 “화진 누님이요.”
 졸고 있던 이준희도 깜짝 놀라서 그 사람을 쳐다봤다.
 “화진 누님이 아가씨를 좀 봤으면 한다는군요. 아, 물론 철수 시간 때문에 곤란하시다면 저희 차로 서울까지 데려다 드리죠.”
 “······.”
 이 또한 파격이었다. 주연 배우가 이런 식으로 보조 출연자의 편의를 봐주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강한나는 말없이 김승준을 쳐다봤다.
 이제 강한나의 시험은 보조 연기자들 버스로 서울로 되돌아가면 끝이었다. 그런데 최후에 주화진이 이렇게 다가올 줄은 아무도 몰랐다.
 “······.”
 강한나가 순진무구한 얼굴로 김승준을 올려다봤다.
 그는 애써 그녀의 눈길을 외면하면서 앞에 있는 매니저의 태도를 살피고 있었다.
 ‘발각된 건 아니군. 그렇다면 아까 그 대결의 결과를 복기하려고 부르는 건가?’
 김승준이 이렇다 할 대답을 하지 못하자 강한나는 비틀거리면서 일어섰다.
 대배우의 부름에 응하는 엑스트라.
 당연한 결과였다. 보조 출연자 중에는 언젠가 데뷔하리라는 꿈을 가진 신인 배우들도 많이 있었다. 강한나가 주화진의 요청에 응한다고 해도 납득할 수 없는 건 아니었다.
 “아, 잠깐. 저도 거기에 따라가면 안 될까요?”
 “댁은 누구신데요?”
 “이 아가씨의 기획사 사람입니다.”
 “기획사?”
 매니저 양반은 김승준과 강한나의 얼굴을 바라보며 신인 배우들을 떠올렸다.
 패키지라고 해서 유명한 배우에 자사 소속사의 유망주를 캐스팅시켜서 얼굴을 알리는 방법이 있긴 했다.
 그러나 보통 패키지를 하려면 신인 배우들은 PD나 제작부에 직접적으로 교섭하지, 이런 식으로 말없이 보조 출연으로 난입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또한 보조 출연부터 한다고 해서 TV에 반드시 나오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편집 과정에서 별로다 싶으면 잘려 나가는 게 태반이었다.
 매니저 양반은 눈앞에 있는 사람이 강철의 여왕이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못하고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 저도. 저도 갈게요.”
 “······댁은 누군데요?”
 “이 녀석의 메이크업이에요.”
 “······.”
 가지가지 한다는 표정이었다.
 아줌마로 분장한 강한나에겐 그 예리한 아름다움 따위는 없었다. 더군다나 아직도 아줌마 배역에 몰입하고 있는 중이라 딱히 스타성이 보이지도 않았다.
 그런데 메이크업까지 데리고 다닌다고 하니 기가 찰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강한나를 데려가야 했기에 매니저는 별수 없이 어깨를 으쓱하고 먼저 앞장섰다.
 곧 세트장을 가로질러 주연 배우들만이 쓸 수 있는 간이 대기실에 다다랐다.
 희한하게도 주화진의 대기실에는 그녀의 이름이 아니라 ‘왕후마마’라고 적혀 있었다.
 “당신들은 여기서 기다리세요.”
 “에헤이. 꽤 소중한 아이라서 말이죠. 주화진과 상대해서 제대로 남아나는 신인 연기자들이 있겠어요?”
 “음······ 누님은 궁녀 2분만 불렀는데. 뭐, 소속사분이라고 하셨으니 그게 맞겠네요.”
 매니저는 후우 하고 한숨을 내쉬고 어깨를 으쓱했다.
 어딘지 매니저의 고충이 이해가 갔다.
 달칵.
 문이 열리고 단아하게 꾸며진 실내가 보였다. 주화진은 분장을 정리하고 우아하게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앉아.”
 “······.”
 말은 그렇게 해도 티 테이블 앞에 있는 의자는 단 하나뿐이었다.
 강한나는 조심조심 의자에 치마를 정리하고 앉았다. 주화진의 매니저도 강한나의 ‘스태프’들도 국가 원수 옆에 서 있는 사람처럼 긴장하고 있었다.
 “바쁘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하지. 그때 왜 활을 건넨 거지?”
 “예······ 그건 그냥.”
 “그냥은 아닐 텐데?”
 “아마. 원경왕후라면 그렇게 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호오. 배역을 읽은 건가?”
 “아니요. 그때는 그냥 그렇게 생각했을 뿐입니다.”
 오늘 가장 문제의 장면이었다.
 주화진이 요구한 것은 단 한마디의 대사.
 하지만 그녀는 보조 출연 주제에 멋지게 배역을 소화해 냈다.
 “혹시 이 원경왕후의 30화 이전을 본 적 있나?”
 “아니요.”
 “당신이 오늘 한 행동은 작가나 연출이 생각하지 못한 부분을 짚었어. 그것도 뼈아프게. 지금쯤 연출과 작가는 난리가 났을 거야. 그걸 아나?”
 “아니요.”
 후룩.
 커피가 목을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강한나의 앞에도 커피가 있었지만 그녀는 커피에 손대지도 못했다.
 “30화 이전에는 이 이야기는 원경왕후의 활극이었지. 정사에도 없는 산적 습격씬과 원경왕후가 산적에게 아이들을 구해 오는 씬도 있었어. 나쁘진 않아. 원경왕후를 재조명하면서 필요한 씬이라고 생각하니까.”
 “······.”
 “하지만 그 대목에서 빈 활을 쏘는 건 나도 생각 못 했어. 그 산적 습격 씬과 연결해서 진짜 활을 쏘던 원경왕후가 이제 빈 활을 쏘게 되면서 자연스레 정치 일선에서 물러서게 된다는 표현으로 받아들일 수 있지. 나도 오늘 현장에 들어서기 전까지 원경왕후의 몰락을 어떻게 표현할지 감이 안 잡혔거든? 근데 거기서 당신의 연기가 이 극을 보다 생동감 있고 완결성 있게 만든 거지. 또 앞으로 다가오는 폐세자의 갈등의 여운도 남았고.”
 “예······.”
 “궁녀 2 당신은 편집 포인트와 이 극의 향방까지 아귀가 맞게 돌아가게 한 거야.”
 “과찬의 말씀이에요.”
 “아니!”
 주화진은 커피 잔을 강하게 티 테이블에 내려놓았고 몇 방울의 커피가 튀어 강한나의 손에도 묻었다.
 말은 나긋나긋하지만 이준희와 김승준은 다시 아까 치열했던 연기 전투 현장으로 되돌아온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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