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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이 계속 나와 1-1권

2018.01.05 조회 1,128 추천 4


 유물이 계속 나와 1권
 
 
 
 프롤로그: 99번의 회귀
 
 
 
 이제는 이면 세계라고 부르는 이 낯선 세계에 끌려온 지도 10년이 흘렀다.
 이면 세계의 종말을 막으면 그리운 지구로 돌려보내준다는 약속을 믿고 함께 싸운 지도 10년이 흘렀다는 것이다.
 그리고 패배했다.
 기존에 이면 세계에서 거주하고 있던 토착민들과 연합해 결성된 군대는 죽음의 군단 앞에서 처참하게 패배했고, 생존한 연합은 ‘희망의 빛’이라는 전설의 유물을 찾아 수색대를 보냈다.
 전설에나 등장하는 희망의 빛에 기대야 할 만큼 연합의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그리고 수색대장에 임명된 사람은 살아남은 이주민 중에 유일한 고고학자 클래스였던 최서준이었다.
 죽음의 군단 점령지 깊숙한 곳에서 수색이 개시되었고, 마침내 서준은 희망의 빛에 대한 단서를 찾았다.
 하지만 수색대는 어떤 유적에 진입하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군단의 추격을 받게 되었다.
 “대장! 이대로는 유물을 회수할 수 없습니다!”
 수색대 전투조장 차경철이 소리쳤다. 그의 말대로 이대로는 유물을 회수하기 힘들었다. 바로 뒤에서 적이 추격해 오고 있었다.
 곧 따라 잡힐 것이고 전력 차이가 압도적이니 얼마 버티지 못하고 죽을 것이다.
 “여긴 전투조가 맡겠습니다. 대장은 내려가서 희망의 빛을 찾아요!”
 “하지만 여기 남으면.......”
 서준은 뒷말을 잇지 못했다. 여기 남으면 반드시 죽는다. 모두 입을 다물고 있었지만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걱정 마세요. 우린 최정예라서 쉽게 당하지 않아요.”
 서준의 걱정스러운 시선에 경철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군단 정찰대다!”
 후방에서 다급한 외침이 전해졌다.
 “어서, 어서 내려가세요!”
 경철은 창을 들어 올렸다.
 “반드시 희망을 찾아올게요!”
 서준의 다짐에 경철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를 보며 조용히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전투조를 후방에 남겨두고 한참을 이동했다.
 유적은 결코 만만한 존재가 아니었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함정과 고대의 파수병이 수색대를 괴롭혔고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허억, 헉.”
 서준은 거친 숨을 내뱉었다. 몸은 피 투성이었고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용병 클래스의 이진성이 그나마 마지막까지 함께했지만 좀 전에 과다출혈로 쓰러지고 말았다.
 유감스럽지만 쓰러진 그를 데리고 갈 여유는 없었기 때문에 서준은 홀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거대한 공동 안에 들어갈 수 있었다.
 중앙에는 돌로 만든 관이 있었고, 그 옆에는 작은 제단과 비석이 있었다.
 서준은 함정을 경계하여 주변을 철저하게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함정이 몇 개 있었지만 간신히 해제할 수 있었다.
 그는 관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옆의 비석에 적힌 글귀를 읽었다.
 
 [희망이 여기에 빛을 두고 가노라.]
 
 고대어였지만 고고학자 클래스인 서준은 읽을 수 있었다. 비석 옆의 제단에는 회중시계가 놓여 있었다. 서준은 만약을 위해 주변을 살폈지만 함정은 없었다.
 “감정!”
 회중시계를 집어든 서준은 스킬을 발동시켰다. 빛 무리가 회중시계에 깃들었고 곧 눈앞에 정보창이 떠올랐다.
 
 [희망의 빛]
 유물
 EX
 이면 세계의 희망이 남긴 빛. 낡은 시계의 모습이지만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 다만, 그 횟수는 100번으로 한정된다. 회귀자가 죽지 않는 이상, 희망의 빛은 회귀자에게서 떨어지지 않는다. 양도는 불가능하다.
 사용횟수 : 1/100
 
 “설마가 사람 잡네.......”
 서준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설마 진짜 존재할 줄은 몰랐다.
 ‘내가 이것을 테렌시아까지 가져갈 방법이 없다.’
 서준은 이를 악물었다. 수색대가 전멸하면서 희망의 빛을 간신히 손에 넣었지만 이것을 연합의 수도가 있는 테렌시아까지 가져갈 방법이 없었다.
 고민하는 사이에 닫혀 있던 돌문이 박살나고 언데드들이 쏟아져 나왔다.
 ‘결국 내가 쓰는 수밖에 없나.’
 서준은 몰려오는 언데드들을 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그리고 희망의 빛을 들어 올렸다.
 보통 이런 유물을 사용하는 방법은 마력 주입. 해골병이 던진 날카로운 창이 서준의 목을 꿰뚫기 직전에 희망의 빛이 가동되었다.
 
 ***
 
 첫 번째 회귀. 서준은 회귀에 성공하였고, 모두에게 상황을 설명했지만 믿지 않았다. 미친놈 취급을 받았고 결국 이면 세계는 다시 멸망했다.
 다섯 번의 회귀를 거치면서 그는 깨달았다. 남들의 도움을 바랄 순 없다. 스스로 강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10번째 회귀, 이면 세계 곳곳의 유물을 찾기 위해 떠났다.
 25번째 회귀, 대륙 북부의 모든 유물을 발굴했다.
 35번째 회귀, 대륙 서부의 모든 유물을 발굴했다.
 45번째 회귀, 대륙 동부의 모든 유물을 발굴했다.
 ...
 55번째 회귀, 대륙 남부의 모든 유물을 발굴했다.
 60번째 회귀, 대륙 중앙의 모든 유물을 발굴했다.
 90번째 회귀, 죽음의 군단의 다섯 군주 중 최약체인 칠흑 군주 테일러 블랙을 죽였다.
 97번째 회귀, 다섯 군주를 모두 죽였다.
 98번째 회귀, 드디어... 죽음의 군단장 크레이스와 마주했다.
 
 “커헉!”
 서준은 붉은 피를 토해냈고 죽음의 기사들이 그를 포위했다.
 “제기랄!”
 자신을 포위한 죽음의 기사들을 보며 서준은 이를 악물었다. 평범한 죽음의 기사라면 어떻게든 해보겠지만 놈들은 크레이스의 친위대로 평범한 죽음의 기사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다.
 부상이 심각한 지금 그들을 상대할 여력은 없었다.
 ‘한 번의 기회뿐인가.......’
 서준은 주변을 살폈다. 크레이스의 친위대는 당장에라도 달려들 것 같았다. 그는 조용히 머릿속으로 두 가지 경우를 생각했다.
 하나는 재생의 빛이라는 이름의 유물 포션을 마셔서 모든 부상을 회복하고 싸우는 것. 다른 하나는 희망의 빛을 이용해 마지막 회귀에 희망을 걸어보는 것이다.
 고민 끝에 서준은 입가에 미소를 떠올리고 뭔가를 들어 올렸다.
 “다시 보자. 죽일 놈들아.”
 그가 들어 올린 것은 회중시계였다.
 
 
 
 제1장 시험 의식
 
 
 
 다시 눈을 떴을 땐 98번이나 본 익숙한 광경을 앞에 두고 있었다. 아니, 한 번 더 회귀를 했으니 99번이었다.
 숲 속, 그리고 정신을 잃은 사람들과 한쪽에 가지런히 쌓여 있는 무기의 산. 100번에 가까운 회귀를 할 동안 질릴 정도로 보아온 똑같은 모습이었다.
 회귀를 할 때마다 중간 과정은 변해도 시작점은 그대로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회중시계를 점검해 보니 마치 수백 년은 흐른 듯한 모습이 되어 금세 부서져 버렸다.
 “으으, 머리야.”
 “여긴 어디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사람들이 하나둘씩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고, 이내 주변을 둘러보더니 혼란스러워했다. 지구에서 갑자기 납치되어 끌려온 만큼 그들에겐 혼란을 진정시킬 시간이 필요했다.
 이면 세계는 불친절했다.
 보통 이런 판타지 소설을 보면 튜토리얼 전에 안내자가 등장해서 간단한 설명을 해주지만 이면 세계의 시험 의식에는 그런 게 없었다.
 아마 이면 세계로 끌려오면서 ‘마력’이라는 것을 얻은 것도 설명받지 못했을 것이다.
 회귀를 하지 않고 처음 이면 세계에 온 다른 이들은 그저 정신을 차려보니 낯선 공간에 와 있는 것이다.
 오직 스스로를 믿고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혼란스러운 정신을 수습할 동안 서준은 조용히 무기가 쌓여 있는 곳 근처로 이동했다. 바로 무기를 집으면 쓸데없는 의심을 살 수 있었다.
 물론 무기 근처로 자리를 옮기는 것만 해도 의심을 사기엔 충분했지만 최소한의 이변에 대비할 필요가 있었다.
 이번이 99번째 회귀. 98번의 회귀를 할 동안 대부분이 같은 행동을 반복했지만 가끔씩 전혀 다른 행동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기 때문에 이에 대비를 하는 것은 필수였다.
 “슬슬 때가 되었나?”
 서준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젠 모든 사람이 정신을 차렸다. 그들은 처음 보는 공간에 낯선 사람들과 남겨졌다는 것에서 극도의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들 중에는 노골적으로 무기 더미를 힐끔거리는 자들도 있었다.
 특별한 변수가 없다면 슬슬 조석우라는 이름의 남자가 사람들을 규합할 차례였다.
 “여러분! 잠시 집중해 주세요!”
 혼란스러운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침착한 목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려 보니 예상대로 익숙한 얼굴의 남자가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있었다.
 조석우였다.
 그는 사람들을 불러 모아 현 상황에 대한 자기 나름대로의 추측을 전파했다. 벌써 99번째 듣는 것이지만 이면 세계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상황에서 추측한 내용치고는 나름 정확했다.
 “저기에 무기가 있는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닐 겁니다! 우선은 무장할 필요가 있습니다!”
 석우의 도움으로 혼란스러운 마음을 진정시킨 사람들은 무기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무장하라는 석우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무기를 챙긴 서준은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상황을 살폈다.
 “절대로 선량한 사람을 향해 무기를 겨눠서는 안 됩니다! 우리를 지키기 위해서만 써야 합니다!”
 석우가 소리쳤다. 무기를 든 사람들에게는 최소한의 규칙이 필요했다. 그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모두에게 규칙을 부여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서준은 이를 악물었다.
 석우가 지금 선한 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그것이 가면이라는 것을 서준은 잘 알고 있었다.
 98번의 회귀 중 그가 살아남았을 땐 늘 ‘불신의 악몽’이라는 참사를 일으켰었다. 당시 그는 적대 길드를 토벌하기 위해 그들이 죽음의 군단과 내통한다고 민중을 선동시켰다.
 그 결과, 하이페리아에서 1천 명이 넘는 사람이 목숨을 잃었었다.
 “이제 식량을 찾아보죠. 얼마나 머물게 될지 모르니까 식량을 찾는 게 중요할 것 같습니다.”
 모든 이가 무장을 끝냈다는 것을 확인한 석우는 자연스럽게 무리의 리더가 되어 다음 행동을 지시했다. 그에 반발하는 이도 있었지만 이미 숫자에서 차이가 난다는 사실을 깨닫고 고개를 숙였다.
 석우가 몇 명의 사람과 함께 뭔가를 논의하고 있는 동안, 서준은 뭔가의 접근을 감지하고 검을 뽑았다.
 “이봐요! 함부로 검을 뽑지 말라고 했잖아요!”
 회의를 하고 있던 석우가 항의하듯 소리쳤지만 서준은 무시했다. 설명할 시간이 없었다.
 98번 회귀를 할 동안 98번의 습격을 받았다. 대부분이 고블린의 습격이었고, 그중 열 번은 오크, 두 번은 오우거였다.
 ‘다행히 오우거는 아닌 것 같네.’
 기척이 가벼운 것으로 보아 오우거는 아닌 게 분명했다.
 서준은 안도했다.
 두 번의 오우거 습격에서는 너무 많은 사람이 죽었다. 지금의 서준은 많은 전투 기술을 익혀놔서 이길 순 있겠지만 심각한 부상을 입을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시험 의식장에 있는 특별한 유물을 발굴하기 힘들어진다.
 “캬르르륵!”
 “크르르륵!”
 기분 나쁜 웃음소리와 함께 수풀 속에서 고블린 무리가 튀어나왔다. 고블린은 무장한 성인 남성 한 명이 어렵지 않게 처리할 수 있는 마물이었지만 문제는 그 수가 많았다.
 무엇보다 실전이 처음인 자들에겐 어려운 상대일 수도 있었다.
 “꺄아아악!”
 상황 판단이 늦어 멍하니 서 있던 여성의 목에 고블린이 던진 날카로운 단검이 꽂혔다. 그녀는 붉은 피를 흩뿌리며 쓰러졌고, 바로 옆에 있던 여성이 그 피를 뒤집어쓰고 비명을 내질렀다.
 “캬르륵!”
 그런 그녀의 배에 고블린이 창을 휘둘렀다. 뾰족한 창끝에 복부가 열리고 내장이 쏟아졌다.
 “침착하세요! 모두 모여서 상대해야 합니다!”
 석우는 침착하게 사람들을 통솔했고, 서준도 본격적으로 전투를 시작했다. 그는 언제나 고고학자 클래스를 고집해 왔지만 회귀를 반복하다 보니 웬만한 전투 기술은 대부분 익힐 수 있었다.
 전투는 금방 끝났다. 애초에 고블린은 까다로운 상대도 아니었고, 석우가 적절하게 지휘를 하고 서준이 활약한 덕분에 큰 피해 없이 끝날 수 있었다.
 “언제 또다시 공격받을지 모르니 계속 움직여야 할 것 같습니다.”
 석우의 말에 모두 동의하는 분위기였다.
 “북쪽으로 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이번 회차에 석우는 북쪽을 향해 움직일 것을 결정 내렸다. 무기 옆에 나침반 같은 장비도 있었기 때문에 북쪽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슬슬 흩어져야겠군.’
 지금 서준의 최대의 목표는 이곳에서만 구할 수 있는 유물을 발굴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남쪽에 있었다.
 그동안 회귀를 반복하면서 석우가 북쪽이 아닌 남쪽으로 행로를 정할 때도 있었기 때문에 우선은 기다려 보았지만 북쪽으로 가는 것이 결정 났으니 이제 흩어져야 할 시간이었다.
 “잠깐만요. 거기 당신, 어디 가는 거죠?”
 서준이 무리에서 떨어지려는 기색을 보이자 석우가 날카로운 시선을 보내며 물었다. 모두의 시선이 서준에게 향했다.
 “흩어지면 죽습니다. 좋은 말로 할 때 이쪽으로 오세요.”
 서준은 눈살을 찌푸렸다.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강압적인 태도였다.
 ‘저놈이 있어야 우리들이 안전하다.’
 모두가 제 몸만을 챙기고 있던 혼란스러운 전투 상황에서 석우는 우연찮게 서준이 무력으로 고블린을 처치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는 함께 있는 것만으로 생존율이 올라가는 귀중한 전력이었다.
 “개인적인 볼일이 있어서 말이야.”
 서준은 석우의 말을 무시했다. 그의 말을 들어야 할 이유는 없었다.
 ‘저 새끼가?’
 석우는 이를 악물고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화가 났지만 아직 진 것은 아니었다. 그는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여러분! 저자를 막아야 합니다!”
 “굳이 그래야 할 필요가 있을까요?”
 건장한 체격의 남성이 질문했다. 고블린과의 전투에도 남성의 옷에 피가 조금 묻었을 뿐, 그에게 상처는 없었다.
 “물론입니다!”
 석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검지로 서준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저자가 다른 무리에 우리의 정보를 팔아넘기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런 곳에선 정체불명의 괴물들보다 인간을 더 경계해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가 약해졌다는 정보를! 다른 무리에게 알리면 끔찍한 일이 벌어질 겁니다!”
 석우의 목소리를 높이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생존을 위해 무기를 들고 서준을 포위했다.
 “순순히 함께 가시죠.”
 다른 사람들을 완벽히 부하로 만든 석우는 의기양양해졌다.
 “겨우 9명이서 나를 막을 수 있을까?”
 서준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하며 석우를 노려보았다. 눈빛에서 느껴지는 지독한 살기에 석우는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얼어붙은 석우를 뒤로하고 서준은 무리를 떠났다. 그에게서 흐르는 살기를 느낀 것인지 그 누구도 그를 막지 못했다.
 곧 때가 올 것이다
 
 죽음의 군단을 막기 위해서는 인류의 암 덩어리와 같은 존재들을 제거할 필요가 있다.
 불신의 악몽을 일으킨 원흉 조석우 또한 암세포 같은 존재였지만 지금 당장 그를 제거하기엔 힘이 부족했다.
 석우는 강하지 않았지만 문제는 그의 주변을 지키고 있는 추종자들이었다.
 100번에 가까운 회귀를 경험하면서 수많은 전투 기술을 익혔지만 지금 서준의 몸은 단련되지 않은 평범한 대학생의 몸이었기 때문에 전투 능력을 확실하게 끌어내지 못할 게 분명했다.
 암세포들을 제거하기 위해선 강해질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서준은 회귀를 반복하면서 단 한 번도 빼먹지 않은 안정적인 길을 걷기로 했다. 바로 유물을 얻는 것이다.
 서준이 이면 세계에 끌려왔을 때만 해도 유물에 대한 관심이 거의 없었다. 이주민과 토착민 간의 1차 내전 이후 유물이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게 밝혀졌지만 그는 유물에 대해 조금 관심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여러 번의 회귀로 서준은 유물에 지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고, 지금 이 시험 의식장에는 유물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이 전무할 것이다.
 ‘슬슬 움직여야겠군.’
 밤이 찾아왔으니 슬슬 움직일 시간이었다. 시험 의식장에는 밤에 흉포성을 띄는 마물들이 없었다. 어둠 속에 몸을 움직이는 게 여러모로 안전했다. 반복되는 회귀를 경험하면서 직접 겪어보기도 했다.
 어둠의 장막이 몸을 가려주고 있었지만 서준은 신중하게 몸을 숨겨가면서 이동했다. 목적지는 제법 떨어져 있었다. 그래서 밤에 주로 움직이긴 했지만 해가 떠 있을 때도 분주하게 움직여야만 했다.
 “캬르륵!”
 시험 의식이 시작되고 이틀째 되는 밤, 서준은 다섯 마리 정도 되는 고블린 무리를 발견하게 되었다. 이미 거하게 식사를 끝냈는지 엉망이 된 사람 시체 두 구도 볼 수 있었다.
 서준은 가방을 점검해 보았다.
 기본으로 지급되는 식량은 소량이었기 때문에 아껴 먹었지만 이미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시험 의식에서 식량을 얻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였다. 버려진 민가를 뒤지거나 마물을 죽여서 주머니를 뒤지는 것이다.
 다만 수십 번의 회귀를 반복하면서도 시험 의식장에 출몰하는 마물들이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식량을 가지고 다니는 이유는 알아내지 못했다.
 ‘다섯 마리 정도면 혼자서도 충분하다.’
 서준은 현재 자신과 고블린 무리의 전투력을 냉정하게 비교했다. 다섯 마리 정도는 충분히 이길 자신이 있었다. 그는 침착하게 검을 뽑고 접근했다.
 대학생 수준의 신체 능력을 가지고도 기척을 죽이는 방법은 많았다. 더군다나 불침번을 맡은 고블린은 배부른지 하품을 하며 반쯤 졸고 있었다. 누워서 자고 있는 고블린들도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충분히 거리를 좁힌 서준은 수풀에서 뛰쳐나가며 불침번 고블린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끄륵!”
 불침번 고블린이 피를 쏟으며 쓰러졌지만 녀석들은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다. 고블린은 둔하고 어리석기 때문에 거점이 아닌 숲에서 야영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경계심이라곤 없었다.
 자고 있는 적을 처리하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었다. 서준은 발걸음을 옮겨 가면서 고블린의 목에 칼날을 쑤셔 박았다. 마지막에 조금 예민한 고블린이 깨어나 저항을 시도했지만 고블린 한 마리를 죽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서준은 고블린의 주머니를 뒤져 식량과 식수를 확보했다. 식수 조금과 육포 몇 개, 그리고 소량의 과일 열매가 나왔다.
 “충분하군.”
 습득한 식량을 점검한 서준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양이 많지는 않았지만 혼자서 남은 기간을 버티기엔 충분했다.
 식량을 확보한 뒤, 간단한 경보 장치를 만들어두고 잠시 잠을 청했다. 주로 밤에 이동하면 잠을 잘 시간이 부족하기 때문에 적절하게 조절할 필요가 있었다.
 다음 날 아침이 찾아올 때까지 숙면을 취한 서준은 짐을 대충 챙긴 뒤, 목적지를 향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리고 3일째 되는 날 아침에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 동굴은 변함없네.”
 서준은 동굴 입구에서 섰다. 묘한 감정에 휩싸였으나 고개를 젓는 것으로 떨쳐냈다. 인류의 암세포를 제거해서 궁극적으로는 죽음의 군단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차지하기 위해선 서둘러 움직여야 했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다. 실수는 없어야 해.’
 서준은 결의에 찬 눈빛으로 동굴 입구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이제 희망의 빛은 사용할 수 없다. 마지막 기회였기 때문에 지금까지의 다른 회귀와 비교해서 가장 빠르고 완벽하게 움직여야 했다.
 그는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으며 동굴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해서 그런지 수십 번 와본 곳임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압박감과 긴장감이 느껴졌다. 동굴 안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자 두 개의 통로가 나타났다.
 그것을 보고 서준은 미소를 지었다.
 단순히 운을 시험하는 첫 번째 관문이었다. 오른쪽으로 가면 초보자의 몸으로는 절대로 통과할 수 없는 파수병과 함정들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치명적인 부상을 입고 회귀를 해야만 했다.
 시험 삼아 오른쪽으로 간 적이 몇 번 있었지만 모두 통과하지 못했다.
 그에 비해 왼쪽은 두 번째 관문까지 아주 안전하게 이어져 있었다. 모험을 할 필요는 없었기 때문에 서준은 왼쪽 길로 향했다.
 동굴 안은 어두웠지만 마법등으로 보이는 조명이 일정 간격마다 배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길을 따라가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어느 정도 걷다 보니 계단이 나왔다. 이제 계단을 내려가면 두 번째 관문이 시작될 것이다. 두 번째 관문은 함정으로 이루어져 있다. 돌파하는 길을 알고 있다고는 하지만 자칫 잘못하면 끝이었다.
 회귀를 반복할 때마다 도전했지만 세 개의 관문 중에 가장 목숨을 잃을 확률이 높은 관문이었다.
 “후우!”
 서준은 심호흡을 하는 것으로 마음을 안정시켰다. 그리고 침착하게 계단을 내려갔다, 계단이 끝나는 부분부터 함정이 시작되었지만 서준은 함정을 건들지 않고 통과하는 법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상처 없이 통과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관문에 도달하였다.
 거대한 문이 보였다. 서준이 그곳으로 여유롭게 발걸음을 옮기자 거대한 몸집의 골렘이 나타나 문을 막아섰다.
 [모험자여. 두 개의 관문을 통과한 그대에게 감탄하며 마지막 시험을 내리겠노라.]
 마지막 관문을 지키는 파수병이었다. 재밌게도 마지막 시험은 파수병과의 전투가 아닌, 파수병이 내는 문제를 맞히는 것이었는데 그 문제는 회귀를 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맞출 수 없는 것이었다.
 [시험에 통과하지 못하면 죽는다. 이 점을 명심해라.]
 “알았으니까 빨리 문제를 내주면 좋겠군.”
 [자신감이 넘치는군. 그렇다면 말해보아라. 칠흑 군주의 진명을.......]
 파수병이 내는 문제는 변하지 않았다. 죽음의 군단을 이끄는 다섯 군주 중 하나인 칠흑 군주의 진명. 회귀를 하지 않았다면 절대로 맞출 수 없는 문제였다.
 누군지는 몰라도 이 유적을 설계한 이는 지독하게도 초보자들에게 유물을 주기 싫었던 모양이다.
 [어서 말하라.]
 파수병이 창을 들어 올렸음에도 불구하고 서준은 여유로운 표정이었다. 그는 답을 알고 있었다.
 “칠흑 군주의 이름은 테일러 블랙이다.”
 서준의 말이 끝나자 파수병은 창을 치우고 옆으로 비켜섰다.
 파수병이 비켜서자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열렸다. 분명 내부는 상당히 어두웠지만 들어서기 무섭게 곳곳에 배치되어 있던 마법등이 켜지며 어둠을 몰아냈다.
 빛이 어둠을 몰아내자 중앙의 제단이 눈에 들어왔다. 제단에는 투박한 모습의 검이 꽂혀 있었다.
 서준은 주변을 경계하며 제단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기억대로라면 더 이상의 위험 요소는 없었지만 더 이상 회귀를 할 수 없기 때문에 만약에 대비하는 것이었다.
 “후우.”
 무사히 제단에 도달한 서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제단에 꽂힌 검을 뽑아 들었다. 제단은 돌로 이루어져 있었지만 검을 뽑는 것은 쉬었다.
 마치 흙더미에서 검을 뽑아내는 것 같았다.
 옆에는 검집이 있었다. 수십 번 회귀를 반복한 경험이 있었기에 어렵지 않게 검집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제단에 유물에 대한 설명이 있었지만 읽을 필요 없었다. 이미 그는 검의 이름과 효과를 외우고 있었다.
 “또 함께하는군... 로엘.......”
 검을 들어 올린 서준은 검의 이름을 부름과 함께 아련한 그리움 가득한 눈동자를 움직여 검신을 훑었다.
 검의 이름은 로엘.
 유물 등급은 C급이다.
 고대의 대장장이 로엘이 죽기 전에 만든 검으로 이름과 함께 마력을 부여해 하급 에고가 생성된 검이다.
 로엘은 마력을 해산시킬 수 있는 힘이 있으며 계약을 성공적으로 하게 되면 전체적인 신체 능력을 향상시켜 주는 유물이었다.
 그 상승 폭이 크진 않지만 초보자 시절에는 주력으로 사용할 만했다.
 장비하고 있는 것만 효과를 보는 아이템과 달리 유물은 계약만 하면 차원 주머니 안에 넣어둬도 효과를 볼 수 있기 때문에 성장한 후에도 버리지만 않으면 신체 능력 상승의 효과를 볼 수 있었다.
 [나와 계약하겠는가?]
 마력을 주입하여 로엘을 깨우기 무섭게 검에서 딱딱한 목소리가 공명하듯 울렸다. 익숙한 목소리에 서준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입을 열었다.
 “계약하겠다.”
 [좋다.]
 로엘은 흔쾌히 허락했다.
 유물이긴 하지만 C급이라는 낮은 등급 탓인지 그는 따로 계약자에게 시험을 보게 하진 않았다. 등급이 높은 유물들은 계약을 할 때 아주 어려운 시험을 통과해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의식을 거행하겠다.]
 로엘의 선언과 함께 소량의 마력이 서준에게 흘러 들어갔다. 그의 몸에서도 마력이 흘러나와 로엘에게 흡수되었다.
 [계약이 끝났다.]
 로엘이 계약이 끝났다는 것을 알렸다.
 마력을 주고받는 행위 자체가 일종의 계약이었던 것이다.
 로엘과 계약을 끝낸 서준은 제단의 뒤로 발걸음을 옮겼다. 뒤에는 밖으로 통하는 우회로가 있었다.
 마법등이 어둠을 밝히고 있는 통로를 따라 한참을 걷자 처음 들어왔던 동굴 입구를 통해 나올 수 있었다. 동굴 밖을 나오기 무섭게 서준은 눈살을 찌푸렸다.
 수십 번 회귀를 반복하면서 전투 기술 말고 얻게 된 것이 하나 있다. 바로 날카로운 감각이었다. 그리고 그 감각이 지금 서준에게 경고하고 있었다.
 밤하늘 아래 어두운 수풀을 따라 날카로운 적의가 느껴지고 있었다.
 “좋은 말로 할 때 나오는 게 좋을 거다.”
 단순히 말만 그렇다는 게 아니라는 걸 보이기 위해 서준은 검을 뽑아 들었다.
 “그러지 않으면 내가 찾아가서 다 죽여 버릴 테니까.”
 싸늘한 살기가 느껴졌다.
 수풀이 요동치고 무장한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들의 중앙에는 너무나 익숙한 얼굴의 남자가 입꼬리를 끌어 올린 채 서 있었다.
 조용히 석궁을 서준에게 겨누는 그는 그동안 회귀를 반복하며 지겹게 만나고 죽여 왔던 선동자 조석우였다.
 “좋게 말할 테니... 모든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세요. 그렇게 하면 당신이 공정한 재판을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해 주겠습니다.”
 “공정한 재판이라니 무슨 소리지?”
 “시치미를 떼는 군요. 오늘 오후에 합류한 사람들을 습격한 사람과 당신의 인상착의가 일치합니다. 자아, 순순히 그 검을 넘기세요.”
 그렇게 말하며 로엘을 보는 석우의 눈동자엔 탐욕의 빛이 번뜩였다. 본능적으로 로엘이 아이템이라는 것을 알아본 것이었다.
 ‘못 보던 장비다. 분명 저 동굴 안에는 던전이 있어......!’
 석우는 동굴 안에 던전이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고, 거기서 나온 서준이 가지고 있는 검이 특별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사람들을 선동하였다.
 정의감에 넘치는 사람들은 많았고, 그들에게 적절한 당근은 지급하면서 완벽한 아군으로 만드는 것에 성공했다. 지금 모인 17명의 사람은 석우의 사병이나 다름없었다.
 “그럴 수 없다면......?”
 서준은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계획의 첫 번째 단추라고 할 수 있는 로엘을 넘겨줄 수는 없었다. 아니, 그럴 생각조차도 없었다.
 로엘은 계약되어 있었고, 계약을 파기시킬 수 있는 자가 현재 석우의 곁에 있을 리가 없었다. 직업은 선별 시험이 끝난 뒤에야 얻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당신을 죽이는 수밖에 없겠군요.”
 석우은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리고 모두를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여러분! 저 악인만 처단하면 정의 점수가 충분히 쌓입니다! 그럼 우린 천국으로 갈 수 있습니다!”
 석우는 선동과 거짓말에 능숙했다. 정의 점수는 이 세계엔 없는 시스템이었다. 아무래도 거짓말로 사람들을 홀린 것 같았다.
 ‘어차피 잘되었군. 조석우는 반드시 죽여야 하니까.’
 석우는 인류의 암 덩어리 그 자체였다. 승리를 위해서 최대한 빨리 그를 죽일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찾아와 주니 고마웠다.
 “경고한다. 나는 지금부터 조석우를 죽일 거다.”
 서준의 눈동자가 빛났다.
 “방해하면 죽인다.”
 서준은 이미 자신을 포위하고 있는 자들의 얼굴을 확인했다. 냉정한 말이지만 그들 중에 군단과의 전쟁에서 크게 기여하는 자는 없었다.
 한마디로 죽여도 상관없는 자들이었다. 굳이 죽이고 싶지는 않지만 방해한다면 망설임 없이 죽일 것이다.
 서준이 한 걸음 앞으로 향했다. 그의 살기 어린 말 때문인지 무기를 들고 경계할 뿐 쉽게 움직이는 자들은 없었다.
 “어서! 어서 저자를 죽이세요!”
 석우가 다그친 뒤에야 움직이기 시작했다. 가진 거라곤 용기밖에 없는 것 같은 세 명의 남자가 서준에게 달려들었다.
 “죽인다고 말했다.”
 세 명이 목숨을 잃는 데에 5초도 걸리지 않았다.
 수십 번의 회귀를 반복하면서 이미 그의 전투 기술은 극의에 달해 비효율적인 움직임은 없었다.
 평범한 대학생에 불과한 신체 능력이 문제였지만 로엘이 그의 능력이 최대한 발휘될 수 있도록 신체 능력을 향상시켜 주었다.
 로엘에 의한 신체 능력 향상은 전체적인 유물 수준에서는 작은 수준이었지만 초보자들의 수준에서는 엄청난 차이였다.
 “으, 으아아악!”
 “도망쳐!”
 석우가 모은 사람들은 훈련받은 병사들이 아니었다.
 건장한 체격의 남자 세 명이 순식간에 목숨을 잃고 쓰러지자 석우의 선동과 집단행동으로 잠시 망각했던 두려움이 다시 고개를 들었고 흩어지기 시작했다.
 “상명아!”
 석우는 누군가를 다급하게 호출했다.
 거대한 방패와 글라디우스 같은 검을 든 남자가 서준의 앞을 막아섰다.
 강상명.
 훗날 석우의 오른팔이 되는 남자다.
 서준의 눈동자가 살기에 물들었다. 반드시 죽여야 하는 제거 대상 중 하나였다. 그는 로엘을 꽉 쥐고 휘둘렀다.
 상명은 방패를 들어 올려 로엘을 막았다.
 쾅!
 “큭!”
 막기는 했지만 그 충격이 상당했는지 상명은 거대한 체구에도 불구하고 비틀거렸다. 그의 자세가 무너지자 서준은 방패를 밟고 뛰어올라 뒤를 점했다.
 “이런!”
 “잘 가라.”
 상명이 다급하게 몸을 돌리려 했을 땐 이미 로엘이 그의 목을 노리고 있었다. 로엘이 목을 꿰뚫자 상명은 힘없이 쓰러졌다.
 상명을 죽인 서준은 몸을 돌려 석우에게 향했다.
 그는 도망치지 않았다. 아니, 도망치지 못했다. 다리에 힘이 풀린 것인지 주저앉아 있었다.
 두려움에 질려 손에 든 장전된 석궁을 쏠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떨리는 눈동자엔 두려움이 차올랐다.
 그 모습에서 문득 그가 죽을 때마다 보였던 반응이 생각났는지 서준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번졌다.
 석우는 언제나 선동과 거짓말로 현혹한 자신의 친위대를 전투에 내보내고 위험한 상황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래서 실전에 약했고 언제나 죽음을 앞두었을 때 눈물을 보이곤 했다.
 하지만 그의 눈물이 서준을 망설이게 하진 않았다.
 수십 번 회귀를 반복해 석우의 죽음을 12번이나 지켜보면서 그의 눈물이 악어의 눈물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를 죽인 12번 모두 단기적으로나 장기적으로나 이면 세계에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그를 죽이는 게 옳은 일이다.
 “사, 살려주세요. 살려주면 뭐든 하겠습니다.”
 석우의 애원에 서준은 고개를 저었다. 몇 번째 회귀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석우를 죽이려다가 새 사람이 되겠다는 그의 말을 듣고 살려준 적이 있었다. 그는 분명 갱생하겠다고 했지만 불신의 악몽은 또다시 일어났다.
 수십 번의 회귀를 반복하면서 깨달은 또 한 가지는 석우를 절대로 믿으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과거, 그리고 미래의 너를 원망해라.”
 서준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끝맺으며 로엘로 석우의 목을 쳤다. 목을 깊게 벤 것으로 모자라 심장마저 찌른 뒤에야 그는 로엘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식량을 얻기 위해 시체들을 뒤졌다.
 “어디 보자.”
 서준은 시체들에서 챙긴 식량을 점검했다.
 식수와 마른 과일, 그리고 육포 등으로 전부 시험 의식에서 구하기 쉬운 것들이었지만 양이 많아서 일주일은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제 시험 의식이 이틀 정도 남았으니, 충분히 버틸 수 있다.
 그는 식량 외에도 유용하게 쓸 수 있는 작은 단검을 몇 개 챙겼다.
 “다음은 검은 고블린의 극독인가?”
 시험 의식장에서 얻을 수 있는 아이템은 두 개가 있었다. 하나는 유물 아이템인 로엘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검은 고블린 부락에서 얻을 수 있는 극독이었다.
 검은 고블린의 극독은 초반에 얻을 수 있는 독치고는 치명적이고 무색무취였기 때문에 유용하게 쓰일 수 있지만 독을 주로 사용하는 검은 고블린을 상대하는 건 워낙 까다롭다. 하지만 시험 의식을 치르는 사람들 중에서는 그 존재를 아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경쟁자는 없을 것 같았다.
 “서둘러야겠군.”
 서준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극독을 구할 수 있는 검은 고블린 부락은 남쪽으로 몇 시간만 걸으면 도착할 수 있었다. 잠을 자지 않고 새벽이 밝아 올 때까지 발걸음을 옮긴 끝에 그는 검은 고블린 부락을 발견할 수 있었다.
 “로엘, 사주 경계.”
 -사주 경계를 시작한다.
 로엘의 주변으로 푸른빛이 살며시 퍼져 나갔다. 주변에 마력이 깔려 적의 접근을 감지해 줄 것이다.
 서준은 몸을 숨겼다.
 지금 부락에는 검은 고블린이 20마리 정도 보였는데, 그들을 전부 상대하는 것은 아직 무리였다.
 검은 고블린은 치명적인 독을 사용하기 때문에 상처 없이 완벽하게 제압할 필요가 있는데, 그러기엔 20마리는 조금 많은 수였다.
 로엘에게 피를 먹여서 숨겨진 기능을 해방한다면 손쉽게 정리할 수 있지만 부작용이 엄청나기 때문에 해방하기 꺼려졌다.
 ‘일단은 기다려 볼까.’
 서준은 로엘에게 사주 경계를 맡기고 잠시 휴식을 취했다.
 휴식을 취하던 서준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부락을 우르르 빠져나가는 기척을 느끼고 수풀 밖으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15마리 정도 되는 수의 검은 고블린들이 부락을 벗어나고 있었다.
 ‘사냥이군.’
 서준은 검은 고블린의 습성에 대해 완벽히 알고 있었다. 한 번에 저 정도의 수가 나간다는 것은 사냥일 확률이 높았다. 그리고 검은 고블린은 보통 사냥을 나가서 다시 돌아올 때까지 하루는 걸린다.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기를 기다린 뒤, 서준은 부락으로 내려갔다. 남은 검은 고블린의 수는 아마 여섯에서 일곱 마리 정도일 것이다.
 충분히 상대할 수 있는 숫자였다.
 “케륵, 케륵!”
 어설프게 만들어진 보초탑에서 망을 보고 있던 검은 고블린이 알 수 없는 언어로 침입자의 출현을 알렸다.
 “시끄럽군.”
 보초가 아무리 난리를 쳐도 부락에서 나올 수 있는 고블린의 수는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겁이 나지는 않았다. 하지만 시끄러웠기 때문에 단검을 하나 던져 보초 역을 맡은 검은 고블린을 침묵시켰다.
 보초를 침묵시킨 서준은 로엘을 뽑았다. 검은 고블린들이 몰려나오고 있었다.
 “케륵!”
 선두의 고블린 세 마리가 독침을 쏘았다.
 검은 고블린은 매우 치명적인 극독을 사용하기 때문에 서준은 전력을 다해 회피했다. 그리고 단숨에 검은 고블린 선두와 거리를 좁혔다.
 “케륵!”
 검은 고블린이 대롱을 놓고 허리춤에서 작은 단검을 뽑아 들었다. 동시에 서준이 로엘을 휘둘러 목을 쳤다.
 검은 고블린의 목이 바닥에 떨어질 때쯤에 서준은 다른 검은 고블린의 가슴에 로엘을 쑤셔 넣고 있었다. 짧은 순간 두 마리의 검은 고블린을 죽인 서준은 전투를 계속했다.
 검은 고블린들은 서준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마지막까지 필사적으로 저항하던 검은 고블린조차 로엘을 휘둘러 반 토막 낸 서준은 부락의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무기고로 보이는 움막에서 극독을 조금 챙길 수 있었다. 가방에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많이 챙길 수는 없었다.
 “살... 려주세요.......”
 챙길 건 다 챙겼다. 사냥을 나간 놈들이 돌아오기 전에 부락을 이탈하기 위해 발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가녀린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 그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검은 고블린은 인육을 즐기지만 가끔 나중에 먹으려고 사냥해 온 먹잇감을 부락으로 데려오는 경우가 있었다.
 허름한 움막 안으로 들어가자 여자가 한 명 있었다.
 ‘창천의 마녀 이지혜?’
 서준은 그녀를 한 번에 알아보았다. 그녀는 창천의 마녀 이지혜였다. 반복되는 회귀에서 그녀와 늘 같은 전장에서 함께했기 때문에 그녀의 얼굴은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이런 전개는... 최악이다.’
 반복되는 회귀에서 창천의 마녀 이지혜가 시험 의식에서 검은 고블린에게 납치되는 경우가 몇 번 있었다.
 서준은 기억하고 있었다.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에 서준은 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검은 고블린에게 납치되었던 경우는 많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된 이상 이지혜에게 빚을 씌워 두는 것도 괜찮을 것 같군.’
 구해주지 않고 내버려 둬도 그녀는 구조될 것이다. 그녀가 납치되고 서준이 구해주지 않은 모든 경우에서 그녀는 구출되었으니까.
 하지만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이대로 내버려 두면 구출은 되겠지만 트라우마 때문에 창천의 마녀가 타락하게 된다.
 그녀가 타락했던 회차에서는 늘 군단에게 유리하게 흘러갔었다.
 “괜찮으십니까?”
 서준의 물음에 지혜는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초췌해 보였지만 해를 입은 것 같지는 않았다.
 “곧 사냥조가 돌아올 겁니다. 서둘러 이탈하죠.”
 서준은 로엘로 그녀를 속박하고 있는 밧줄을 잘라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검은 고블린 부락을 벗어나며 지혜는 서준에게 연신 감사하다고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에서 진심이 느껴졌다. 하긴 검은 고블린들에 의해 조각조각 찢겨 요리될 운명에서 구해졌으니 당연히 고마울 것이다.
 지혜는 검은 고블린의 습성을 잘 알지 못했지만 바보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들이 무슨 목적으로 자신을 부락까지 데리고 왔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서준이 구해주지 않았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그것을 생각하니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조금만... 조금만 쉬면 안 될까요?”
 쉬지 않고 계속 달려서 그런지 지혜는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서준도 로엘로 인해 신체 능력이 향상되지 않았다면 지금쯤 제법 숨이 거칠어졌을 것이다.
 “아직 안전하지 않습니다. 조금 더 이동해야 합니다.”
 검은 고블린들이 사냥을 나가면 보통 하루 정도는 있다가 돌아오지만 그렇지 않는 경우도 가끔 있었다. 그리고 만약 그들이 일찍 돌아온다면 부락이 공격당했다는 것을 알고 습격자를 찾기 위해 주변을 수색할 것이다.
 아직 그들의 수색 범위를 벗어나지 못했다.
 “이제 안전합니다. 쉬어도 좋아요.”
 한참을 더 달려 어떤 숲의 깊숙한 곳까지 들어간 서준은 안전하다고 판단하고 멈춰 섰다.
 “하아!”
 서준의 말에 지혜는 그제야 거친 숨결을 내뱉으며 주저앉았다. 그 모습을 보며 서준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평범한 여자였다면 진작 쓰러졌을 테지만 그녀는 훗날 창천의 마녀라고 불리게 되는 여자답게 평범한 여자와는 달랐다.
 “그러고 보니 저는 당신의 이름도 모르네요.”
 시간이 지나 호흡을 가다듬고 여유를 되찾은 것인지 그녀는 서준을 보며 희미한 미소를 보였다.
 “이름... 가르쳐 줄 수 있어요?”
 “제 이름은 최서준입니다.”
 어차피 빚을 지게 만들려면 이름 정도는 알려줘야 하기 때문에 서준은 순순히 이름을 알려주었다.
 지혜는 그의 이름을 기억하기 위해 입술을 달싹이며 서준의 이름을 중얼거리는 것을 반복했다.
 “로엘, 사주 경계.”
 -사주 경계를 시작한다.
 주변에 적은 없는 것 같지만 서준은 만약을 위해 로엘에게 사주 경계를 명했다.
 푸른 마력이 사방에 퍼지고 로엘의 사주 경계가 시작되었다. 서준은 지혜가 있는 곳으로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는 바위에 앉아 쉬고 있었다.
 서준은 말없이 그녀의 근처에 자리 잡고 앉았다.
 다른 안전한 곳으로 옮기기엔 시간이 늦었기 때문에 이곳에서 밤을 보낼 생각이었다.
 “제 이름은... 이지혜라고 해요.”
 시간이 조금 지나고 긴장이 조금 풀렸는지 지혜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훗날 창천의 마녀라고 불리게 되는 그녀의 이야기는 반복되는 회귀 속에서 몇 번이고 들어서 자세히 알고 있었지만 딱히 다른 할 것도 없었기 때문에 지혜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날은 공강이라서 아르바이트를 하기 위해 편의점으로 갔어요. 그리고 아르바이트가 끝난 게 10시쯤이었을 거예요. 집 근처에 도착한 기억은 있는데 그 다음부터는 기억이 없어요.”
 서준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험 의식장에 끌려온 사람들의 공통점이 하나 있는데 바로 일상생활을 하던 도중에 갑자기 기억이 끊겼다는 것이다.
 그리고 당연히 그 다음 기억은 시험 의식장에서 시작된다.
 “너무나 혼란스러웠어요. 정신을 차려보니 낯선 곳에 낯선 사람들과 있는데 설명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거든요.”
 보통 게임을 처음 시작하면 튜토리얼이라는 게 있거나 길을 제시해 주는 요정과 같은 존재들이 있다. 하지만 이면 세계의 시험 의식은 불친절했다.
 아무런 설명도 없이 마물이 가득한 낯선 곳에 낯선 사람들과 함께 간단한 무기만 지급하고 풀어 놓는 게 그들의 방식이었다.
 어쩌면 설명 없이 인간의 본능을 시험하려는 게 그들의 의도일지도 모르겠다.
 서준은 대답이 없었다.
 두 눈을 감고 나무에 기대어 쉬고 있는 게 얼핏 보면 자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도 했지만 지혜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가기 위해 입을 열었다.
 “처음엔 다들 혼란스러웠지만 어떤 오빠가 침착하게 사람들을 잘 설득했어요. 떠난 사람들도 있었지만 15명이 조금 넘는 수의 사람들이 남아서 함께하기로 했어요.”
 몇 번은 들었던 이야기였지만 서준은 속으로 감탄했다. 보통 이런 상황에서 정신을 수습하고 다른 사람들을 규합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보통 시험 의식 시작과 함께 10명에서 30명 정도의 무리가 한 장소에서 시작하는데, 의견이 맞지 않거나 악한 자에 의해 분열이 일어나는 경우가 많았다.
 “사람들 수가 많아서 그런지 그동안 아무 일도 없었어요. 그 검은 놈들과 마주치기 전까진.......”
 지혜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녀는 감정이 격해진 것인지 잠시 말을 멈추고 심호흡을 했다. 이윽고 그녀는 다시 말을 이어가기 위해 입을 열었다.
 “갑자기 숲 속에서 뭔가가 날아왔어요. 저는 너무 무서워서 땅에 엎드렸어요. 정신을 차려보니 대부분이 쓰러져 있었어요. 죽지는 않았지만 일어나지도 못했어요.”
 “아마 독침을 썼을 겁니다. 작은 바늘에 불과해서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기엔 무리가 있지만 독이 묻어 있으니 스치기만 해도 움직이지도 못한 채 쓰러져 천천히 죽어가죠.”
 서준이 간단하게 설명했다.
 “그랬던 것 같아요.”
 지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숲 속에서 작은 괴물들이 나타나서 숨이 붙어 있는 사람들을 찔러 죽이기 시작했어요. 저는 도망쳤지만.......”
 서준은 대답 대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혜는 입을 닫고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지만 뒷내용은 대충 예상할 수 있었다.
 “그래도 서준 씨 덕분에 최악의 경우는 면해서 다행이에요.”
 대화가 끊기고 1시간 정도 지난 후에 다시 대뜸 그녀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서준을 보며 말했다.
 지혜가 혼자 떠드는 것에 가까웠지만 늦은 시간까지 대화는 끊이지 않았고 새벽이 되어서야 지혜는 잠들었다.
 잠든 지혜를 보며 서준은 미소를 지었다.
 그가 알고 있는 창천의 마녀는 심할 정도로 과묵했다. 언제나 꼭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면 입을 열지 않았다.
 하지만 창천의 마녀가 되기 전의 지혜는 수다스러웠다. 어쩌면 두려운 일을 겪고 난 직후 찾아온 긴장감을 녹이기 위해 수다스러운 면을 연기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시험 의식장에서 모을 수 있는 유물과 아이템은 전부 모았기 때문에 서준은 5일째 되는 날까지 그녀를 지켰다.
 일정 시간마다 거점을 옮기며 몸을 숨겼고 곧 5일째 되는 날 아침이 되었다.
 생존자들의 몸을 빛 무리가 휘감았고 각자 초보자들의 도시로 순간 이동 했다.
 
 
 
 제2장 가벼운 유적 탐사
 
 
 
 빛 무리가 몸을 뒤덮었다. 환한 섬광에 시야가 물들어 눈을 감았다 뜨니 백색의 공간에 와 있었다.
 백색의 공간에는 한 명의 남자가 서 있었다.
 흰 배경과 대조되는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는 이면 세계의 기초 지식을 알려줄 안내자였다.
 이제는 지겹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익숙해진 이 풍경에 서준은 자신도 모르게 눈살을 살짝 찌푸리고 말았다.
 수십 번 회귀가 반복되어도 담당 안내자는 바뀌지 않았기 때문에 이름은 당연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케이젠이었다.
 “너무 놀라지 마세요. 당신에게 해를 가하진 않을 겁니다.”
 케이젠은 서준이 눈살을 찌푸린 게 두려움에 그런 것이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제 이름은 케이젠입니다. 일단 여기 앉으시죠.”
 그가 손을 허공에 대고 휘젓자 의자 두 개가 생겨났다. 두 사람은 마주 보고 의자에 앉았다.
 이제 곧 케이젠이 설명을 시작할 것이다.
 수십 번이나 들었던 설명이었기 때문에 건너뛰어도 상관없을 것 같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괜히 설명을 건너뛰면 안내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해 주목을 받게 될 수도 있다.
 주목을 받는 것은 크게 문제될 게 아니었지만 주목을 받은 상태에서 엄청난 위업을 이어서 달성하면 안내자들의 개입을 받게 된다.
 그것은 좋은 의미일 수도 있지만, 반대일 수도 있다.
 서준의 행보 특성상 언젠가는 개입을 받게 되겠지만 그 시기를 앞당겨 봤자 좋을 건 없었다.
 “우선 관대한 주신의 방침에 따라 질문을 받도록 하겠습니다.”
 케이젠의 말에 서준은 이면 세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연기하기 시작했다.
 “여긴 어디고, 우리는 왜 끌려온 겁니까?”
 “여기는 로쿨스 차원계입니다. 먼저 도착해 살아가고 있는 당신들의 선배들은 이면 세계라고 부르는 것 같더군요.”
 케이젠이 지루한 설명을 시작했다. 이미 아는 것을 반복해서 듣는 것은 고통스러웠지만 참을 수밖에 없었다.
 “왜 여기에 있는지 궁금해 하셨죠?”
 케이젠의 눈이 반짝였다.
 서준은 이미 답을 알고 있었지만 케이젠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궁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집중하는 척했다.
 “그건 신이 당신들을 팔았기 때문입니다.”
 “신이 우리를 팔았다고요?”
 서준은 놀라는 척했다.
 그러자 케이젠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서준의 반응을 즐기는 것 같았다.
 ‘역시 안내자는 속이기 쉽군.’
 서준은 속으로 케이젠을 비웃었다.
 안내자는 신이 아니었기 때문에 서준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그들은 어디까지나 안내자일 뿐이다. 물론 무력이 조금 강하긴 하지만.
 “그렇습니다. 그쪽의 신이 당신들을 팔았어요. 마침 우리의 주신께선 병사들이 필요했기 때문에 당신들을 ‘구입’한 겁니다.”
 케이젠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신들의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었으나, 반복된 회귀로 인해 알게 된 점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이면 세계의 주신은 매우 다급한 상황에 처해 있다는 것이었다.
 정확한 이유는 짐작할 수 없었지만 아마도 죽음의 군단과 관련되어 있는 것 같았다.
 “당신들에겐 자유가 있습니다. 그리고 저희 안내자들은 지상의 상황에 최대한 개입하지 않도록 노력을 기울일 것입니다.”
 ‘절대 개입하지 않겠다는 말은 이번에도 하지 않는군.’
 케이젠의 말에 서준은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개입하지 않겠다는 말은 절대로 하지 않는 안내자들이었다.
 “저희는 자유를 억압하진 않겠지만 당신들에겐 의무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죽음의 군단이 침략했을 때 맞서 싸울 의무입니다.”
 케이젠은 그 외에도 몇 가지 설명을 했지만 중요하지 않은 것이었기 때문에 대충 듣고 한 귀로 흘려보냈다.
 “그럼 이제 당신에게 직업을 부여하겠습니다.”
 케이젠은 말을 마치며 허공에 대고 손을 휘저었다.
 거대한 책이 그의 앞에 나타났다.
 케이젠이 소환한 책은 시험 의식에서 서준의 행보가 기록된 책이었다. 이제 안내자인 그는 서준의 행보를 보고 직업을 부여할 것이다.
 “흐음, 어디 한번 볼까요.”
 케이젠은 책의 페이지를 빠른 속도로 넘겼다. 그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바쁘게 움직였다.
 “이거 상당히 애매하군요.”
 순식간에 두꺼운 책을 완독한 케이젠은 눈살을 찌푸리며 애매하다고 말했다. 그런 그의 반응 또한 수십 번 회귀를 반복할 동안 거의 9할 이상 봐왔던 것이었다.
 “고고학자가 가장 적합할 것 같은데... 고고학자치고는 너무 전투적입니다.”
 “고고학자로 부탁합니다.”
 “고고학자는 전투력이 약합니다. 그래도 좋습니까?”
 “네. 저는 괜찮습니다.”
 서준은 강력하게 고고학자 직업을 희망했다. 그것은 유물을 사용할 때 마력이 거의 소모되지 않고 위력을 극대화하는 고고학자의 특성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당신에게 고고학자라는 직업을 부여하겠습니다.”
 케이젠은 서준의 머리 위에 손을 올렸다. 그가 뜻을 알 수 없는 주문을 외우자 전신에 전기가 통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짧은 순간, 의식은 끝났다.
 “끝났습니다. 정보라고 외쳐 보시겠습니까?”
 “정보.”
 
 [최서준]
 고고학자
 
 눈앞에 이름과 직업으로 구성된 정말 간략한 정보가 나타났다.
 “정보가 보이시죠? 주신께서 특별히 지구에서 온 인류가 이해하기 쉽도록 배려해 주신 겁니다.”
 케이젠은 자랑스럽게 말했지만 서준은 너무나 간단한 정보창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어쩌면 이곳의 주신은 상당히 게으른 신일지도 모르겠다.
 “다른 사람의 정보도 볼 수 있지만... 대상이 먼저 자신의 이름과 직업을 말하지 않으면 정보는 노출되지 않습니다.”
 “그래도 거짓말을 하는 것 정도는 알 수 있겠군요.”
 “네? 네. 물론입니다. 거짓말을 한다면 정보가 노출되지 않으니까요. 다른 질문 있습니까?”
 “없습니다.”
 케이젠의 물음에 서준은 고개를 저었다.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었다. 서둘러 로렌스로 가서 근처의 유물을 몽땅 발굴해야만 했다.
 “그렇다면 로렌스로 보내 드리겠습니다. 시험 의식 통과 보상으로 1골드도 함께 드리죠. 가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제가 충고 하나 하겠습니다.”
 “말씀해 보세요.”
 “사람을 죽여도 좋지만 행적이 고발되어 치안청에 등록되면 무법자가 됩니다. 무법자가 되면 살인을 할 때마다 강력한 힘을 얻지만 반대로 다른 사람들이 무법자를 죽여도 힘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모두에게 사냥당할 겁니다.”
 “제가 사냥당할 일은 없을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케이젠은 미소를 지었다.
 “그럼 보내드리겠습니다. 로렌스로!”
 다시 한 번 밝은 빛이 서준을 덮쳤다.
 
 그가 다시 눈을 떴을 땐 로렌시아 지방 최대의 도시인 로렌스의 워프 게이트가 있는 광장에 도착해 있었다.
 지혜를 기다릴까 생각했지만 그녀를 위해서라도 이대로 헤어지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로렌스는 안전한 곳이고 그녀는 재능이 있으니 이제 보호해 주지 않아도 될 것이다.
 광장을 벗어나기 위해 발걸음을 옮기는 서준을 향해 검은 망토를 입은 두 명의 남자가 거리를 좁혔다.
 “잠깐만요.”
 서준이 발걸음을 멈추자 검은 망토와 제복을 입은 남자 2명이 빠른 걸음으로 거리를 좁혔다.
 “이번 시험 의식 통과자죠?”
 남자의 물음에 서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들의 문장과 제복을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그동안 회귀를 반복하면서 수없이 많은 시험 의식을 치렀다. 그리고 시험 의식이 끝날 때마다 어김없이 여러 길드에서 그에게 가입 권유를 해왔다.
 길드 입장에서는 세력 확장을 위해 한 명이라도 더 많은 길드원을 확보하는 게 좋기 때문에 뛰어난 실력의 길드원을 확보하는 데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회귀를 할 때마다 가입을 권유한 길드는 달라졌기 때문에 소속을 알기 위해서는 문장과 제복을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확실하진 않지만 처음 가입을 권유한 길드가 어디냐에 따라 흐름이 달라졌기 때문에 확인은 필수였다.
 개인적으로 황금 사자 길드였으면 싶었다. 황금 사자 길드가 처음 가입을 권유했던 회차는 전부 비교적 밝은 분위기였으니까.
 ‘제기랄.’
 마치 복권을 긁는 듯한 묘한 긴장감 속에서 그는 제복의 문장을 확인한 욕설을 내뱉고 말았다.
 까치독사 길드였다.
 불길함을 상징하는 까치독사를 상징으로 여기는 길드답게 그들이 가입 권유를 한 회차는 온갖 피비린내 나는 사건으로 얼룩져 있었고, 변수도 가장 많았다.
 서준이 막지 않는다면 이번에도 반복될 것이다.
 ‘조금 힘들겠군.’
 까치독사 길드의 가입 권유... 시작부터 힘든 앞날을 예고 받는 것 같아서 불길했다.
 “네. 그렇습니다만......?”
 서준은 차가운 태도를 보였다. 일명 까치독사 루트에 돌입한 이상, 그에게 더 이상의 여유는 없었다. 최대한 빨리 움직일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길드 가입 권유는 귀찮을 뿐이었다.
 “혹시 우리 길드에 들어올 생각 없어요?”
 “네. 없습니다.”
 “그러지 말고 잘 생각해 보세요. 저희 길드에 가입하면 여러 혜택이 있어요.”
 서준의 단호한 대답에 까치독사 길드원은 흔들리는 기색을 보였으나 이내 표정을 다듬고 재차 권유했다.
 “아뇨. 생각 없습니다. 바쁘니까 이만 가보겠습니다.”
 서준은 그들에게서 몸을 돌려 발걸음을 재촉하기 시작했다. 강경한 모습에 까치독사 길드원들도 더 이상 그를 붙잡지 않았다.
 특별히 강한 마력도 느껴지지 않고 평범해 보이는 서준은 길드에 있어서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되는 인물이었다.
 그를 영입하기 위해 많은 시간을 투자하는 것보다는 같은 시간을 투자해 만만한 초보자 여러 명을 영입하는 게 더 이득이었다.
 까치독사 길드원들에게서 벗어난 서준은 여관이 많이 위치한 상업 구역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영주님이시다! 길을 비켜라!”
 한창 바쁘게 발걸음을 옮기던 그는 화려한 갑옷을 입은 로렌시아 지방의 영주 라딘 로렌스 후작과 휘하 기사들의 행진에 옆으로 물러서야만 했다.
 아마도 워프 게이트가 있는 광장으로 향하는 것 같았다. 토착민 귀족들은 성장 속도가 빠른 이주민들을 중히 쓰고 있었다.
 귀족의 휘하에 들어가면 수습 기사의 자리는 보장되어 있었고, 그 이후부터는 자신의 역량에 따라 더 성장할 수도 있었다.
 지금 지나가고 있는 기사 중에서도 이주민으로 보이는 이들이 제법 보였다.
 ‘길드나 영지군, 둘 다 내게는 필요 없다.’
 분명 초보자에게 있어서 길드 가입 권유나 영지군 입대 제안은 매력적이다. 길드 같은 경우엔 초보자 시절 가장 중요한 잠자리와 안전이 보장된다.
 영지군의 경우 잠자리뿐만 아니라 소량의 봉급까지 주어진다.
 초보자들에겐 분명 매력적이었지만 서준에겐 필요 없었다. 영지군에 입대하면 엄청난 자유의 제약이 있기 때문이었다. 길드는 그나마 나았지만 그 역시 마찬가지로 행동에 제한이 있었다.
 당장 1골드가 있으니 그걸로 여관에서 숙박을 해결하고 차근차근 사냥과 유적 발굴을 통해 돈을 벌 생각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고고학자는 일종의 히든 피스였다.
 유적 발굴은 어렵고 오래 걸리긴 해도 많은 돈을 모을 수 있었다.
 진혁은 대륙의 모든 유물을 발굴해 본 적이 있으니 발굴에 걸리는 시간은 상당히 줄어들 것이고 단기간에 많은 돈을 모으는 것이 가능했다.
 ‘1회차였다면 길드나 영지군 입대를 선택했겠지만 지금은 필요 없다.’
 서준은 다시 한 번 마음속으로 다짐하듯 곱씹으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여관이 있는 곳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이윽고, 그는 허름한 여관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건물은 허름해 보이지만 회귀를 반복할 때마다 숙박을 해결한 곳으로 가격이 싸고 음식도 맛있었다.
 “어서 오세요!”
 문이 열리는 소리에 허름한 외관과는 어울리지 않는 귀여운 외모의 여자아이가 뛰어와 밝은 목소리로 반겼다.
 그 모습에 서준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로렌스의 바람’ 여관의 주인인 하비의 딸, 세린이었다. 그녀의 밝은 미소에 서준은 경직되고 조급한 마음이 풀리는 것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아버지는 어디 계시니?”
 “지금 불러올게요!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그녀는 종종걸음으로 주방으로 향했다.
 세린이 주방으로 들어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앞치마를 입은 하비가 걸어 나왔다.
 “방 있습니까?”
 ‘로렌스의 바람’ 여관은 허름한 외관 때문에 가격이 매우 저렴함에도 불구하고 이용객의 수가 매우 적은 편이었다.
 그래서 더 마음에 들었다. 시끄러운 것은 싫으니까.
 “보다시피 방이라면 아주 많다네. 얼마나 머물 생각인가?”
 “한 달 동안 머물 생각입니다.”
 서준이 대답했다. 우선은 이곳을 거점으로 삼을 생각이었다. 경험에 의하면 장기 숙박을 하면 조금 할인을 해주기 때문에 회귀를 할 때마다 가능하면 장기 숙박을 하는 편이었다.
 “30일이면 60실버인데... 장기 숙박이기도 하고, 자네도 초보자로 보이니까 50실버에 해주겠네.”
 “감사합니다.”
 “열쇠를 주겠네. 잠시만 기다리게나.”
 하비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열쇠 꾸러미를 가지고 나왔다. 그는 열쇠 꾸러미를 뒤적이더니 202호라고 적힌 열쇠를 서준에게 건넸다.
 “여기 있네. 혼자 쓰기엔 충분할 것이야.”
 “감사합니다.”
 “제가 안내해 드릴게요!”
 세린은 해맑은 미소를 보인 뒤, 계단을 올라갔다. 서준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채 그녀를 따라갔다.
 회귀를 할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그녀는 정말 밝았다.
 “여기에요!”
 그녀는 복도를 지나 202호 앞에 멈췄다. 서준은 말없이 주머니에서 5쿠퍼짜리 동전을 꺼내 그녀에게 주었다.
 “헤헷! 고맙습니다!”
 세린은 미소를 지었고 서준도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경쾌한 발걸음으로 1층으로 돌아갔다. 오랜 만에 받는 팁에 기분이 좋은 것 같았다.
 
 낡은 외관과는 달리 방은 제법 깨끗했다. 그는 식수와 같은 무거운 짐을 풀어 놓고 방을 나섰다.
 “벌써 나가는 겐가?”
 계단을 통해 1층으로 내려가자 테이블을 닦던 하비가 호기심 어린 눈동자로 질문을 던졌다.
 “네. 일을 해서 돈을 벌어야죠.”
 “광장에 가보게. 게시판에 의뢰가 많을 것이야.”
 “감사합니다.”
 서준은 하비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지만 광장의 게시판으로 향하지 않았다. 지금 시기에 꼭 필요한 의뢰는 하나였다.
 그는 광장으로 향하는 대신 장비 상점으로 향했다. 그리고 남은 50실버 중에 30실버를 투자해서 가죽 갑옷과 기본적인 장비를 갖췄다.
 로엘이 있었기 때문에 검은 따로 구입할 필요가 없었다.
 이면 세계에선 토착민이나 이주민은 초보자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 투자가 필요했다.
 이미 회귀를 반복하면서 수십 번 들렀던 상점이었기 때문에 가격과 품질이 괜찮은 장비를 구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기본적인 장비를 갖추는 것으로 초보자의 모습을 완벽하게 벗어던진 서준은 땅거미 길드 하우스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지금쯤 땅거미 길드는 중심 도시 근처의 로렌스 숲에서 고대 엘프군의 유적으로 향하는 동굴이 발견하고, 탐사 인원을 모집하고 있을 것이다.
 서준은 고고학자의 직업을 가지고 있으니 어렵지 않게 유적 탐사대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땅거미 길드 하우스는 장비 상점에서 가까운 곳에 있기 때문에 곧 도착할 수 있었다.
 서준은 문을 열고 들어가 성큼성큼 걸어갔다. 땅거미 길드 하우스는 익숙했기에 안내원의 도움은 필요 없었다.
 그는 거침없이 걸어가 탐사대 모집원 앞에 앉았다.
 “죄송하지만 전투원은 더 이상 받지 않고 있어요.”
 모집원을 맡은 여성이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서준의 장비만 보고 당연히 전투원일 것이라 판단한 것이다.
 그녀는 토착민으로 보였는데, 길드의 사무직을 토착민이 맡아서 하는 것은 쉽게 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
 이면 세계에서 토착민과 거주민의 사이는 제법 긴밀했기 때문에 서로 협력이 잘 되고 있었다.
 “탐사원으로 신청할 겁니다.”
 “탐사원이요? 실례지만 성함과 직업을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신가요?”
 그녀는 확인을 위해서 서준의 이름과 직업을 물었다. 이주민이 스스로 밝힌다면 토착민도 정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최서준, 고고학자.”
 “확실히 고고학자이시네요. 탐사조장님을 불러 올게요.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이윽고 탐사조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역시 많이 본 얼굴이었다.
 “반가워요. 탐사조장을 맡고 있는 하준태예요.”
 완전 무장한 서준과는 다르게 준태는 가벼운 무장을 제외하면 전형적인 모험계 직업의 장비를 착용하고 있었다.
 그는 지금 밝히진 않았지만 모험가 직업이었다.
 “최서준입니다. 반갑습니다.”
 “실례가 안 된다면 다시 한 번 이름과 직업을 말해줄 수 있으세요?”
 “최서준이고 고고학자입니다.”
 준태는 두 눈을 가늘게 뜨고 어딘가를 주시했다. 서준의 정보를 확인하고 있는 것이었다.
 “고고학자가 확실하군요. 그럼 계약서를 작성하시겠어요?”
 서준이 고개를 끄덕이자 준태는 계약서와 펜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렸다. 계약서 내용은 모두 알고 있었기 때문에 대충 훑어보는 척을 하고는 작성을 시작했다.
 빠른 속도로 빈칸을 채우고 있는 서준을 보며 준태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서준 씨의 임무는 유적에서 발견되는 아이템의 감정 및 유적 탐사 보조입니다.”
 “탐사가 끝나면 유적에서 조금 머물러도 됩니까?”
 서준이 확인차 물었다. 로렌스 숲의 고대 엘프군 유적에는 숨겨진 공간이 있었고 그곳에 윈드 부츠라는 D급 유물이 있었다.
 “물론 그러셔도 됩니다.”
 준태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유적의 탐사가 끝나는 순간 계약은 끝나기 때문에 혼자 유적에 잔류한다는 것을 막을 이유는 없었다.
 “다만 그렇게 하시면 저희가 안전을 보장해 줄 수 없어요.”
 “제 몸은 제가 지킬 수 있습니다.”
 “나중에 죽고 나서 원망하면 안 됩니다.”
 준태는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서류를 챙겼다. 그리고 의자에서 일어나며 다시 입을 열었다.
 “내일 아침 9시에 남문으로 오시면 돼요.”
 서준은 고개를 끄덕였고 준태는 콧바람을 흥얼거리며 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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