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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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요일선 1권 (1)

2018.01.10 조회 533 추천 0


 # 一章
 
 
 
 끼이익.
 허름한 장원의 낡은 문이 힘없이 삐걱거렸다.
 오랫동안 기름칠을 하지 않은 모양인지, 듣기 거북한 소리가 연신 귓가를 긁는다.
 “이것도 여전히 시끄럽네.”
 낡은 문을 열고 소년이 걸어 나왔다.
 아직 약관이 되지 않아 앳된 얼굴 사이로 늠름한 사내의 흔적이 드문드문 묻어나 보였다.
 내리쬐는 햇볕이 따사롭다. 새하얀 피부가 상할세라 소년은 서둘러 등에 걸쳤던 죽립을 머리에 썼다.
 어렴풋이 드러나 보이는 콧잔등 아래를 제외하곤 소년의 얼굴이 감쪽같이 가려졌다.
 “휴우, 이게 얼마 만이야.”
 소년의 나이 이제 열아홉.
 세상을 알기도 전에 집을 나왔다.
 마치 엊그제 벌어진 일처럼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건만 벌써 많은 시간이 흘러 버렸다.
 “이제는 다들 물러갔으려나?”
 소년은 죽립을 살짝 들추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어디에서도 이상한 낌새는 찾아볼 수 없었다.
 지나다니는 사람들조차 소년에게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마치 보이지 않는 사람처럼 그저 무덤덤하게 지나다닐 뿐이다.
 “하긴, 보이지도 않는 곳을 지금까지 의심하진 않을 테지.”
 소년의 입가에 배시시 미소가 그려졌다.
 계단을 걸어 내려왔다.
 짧은 순간 발끝으로 기이한 울림이 스치고 지나갔다. 진법에서 벗어났음을 알리는 일종의 신호였다.
 그제야 사람들이 이상한 시선으로 소년을 힐끗거렸다. 아무것도 없던 자리에서 뜬금없이 사람이 나타났으니 기이하다 여기지 않으면 그것 역시 이상한 일일 터.
 소년은 대수롭지 않게 흘려 넘기며 기분 좋게 중얼거렸다.
 “모르는 사람들인데도 반갑네, 진짜.”
 등자나무 아래에서 휴식을 취하는 늙은 촌부들 하며, 짐을 나르며 바쁘게 움직이는 사내들과 빨랫거리를 들고 종종걸음을 걷는 아낙들, 삼삼오오 몰려다니는 아이들까지 보자니 괜스레 코끝이 시큰거린다.
 자신도 저들처럼 평범하게 살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소년은 추억을 삼키며 천천히 길을 걸었다.
 사람 냄새 물씬 나는 시장터에 다다르자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울렸다.
 주변을 살피니 만두 가게가 시야에 들어왔다. 성큼 다가가 만두 한 봉지를 샀다.
 뜨뜻한 만두를 한입 베어 물자 머리가 쭈뼛거릴 만큼 기분이 좋아졌다.
 값이 싼 만큼 고기보단 야채로 속이 가득 채워졌다.
 소년은 굳이 불평하지 않았다.
 몇 푼 하지 않는 음식에 많은 걸 바랄 수도 없거니와, 사실 지난 몇 년 동안 이보다 맛있는 음식은 먹어 보지도 못했다.
 오죽하면 눈가에 물기가 축축이 차오를 만큼 감동했을까.
 소년은 게 눈 감추듯 하나를 우겨 넣고, 또 하나를 입에 물었다.
 그사이 마을을 지나 숲길로 접어들었다.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숲길은 그대로였다. 어차피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길이 아니었으니 그만큼 손이 탈 일도 적었을 것이다.
 자신은 변했는데 어렴풋이 떠오르는 추억은 여전히 그 모습 그대로다. 괜스레 아련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만두 한 봉지를 순식간에 비우고 주변 경관을 살피다 보니 어느새 숲길의 끝이 나왔다. 제법 길이 험해 힘이 들었을 텐데도 소년은 지친 기색 하나 보이지 않았다.
 처음 태연한 모습 그대로 소년은 숲길의 끝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 너머로 넓게 펼쳐진 도시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이제야 돌아왔구나.”
 소년은 조그맣게 고향에 대한 감회를 읊조렸다.
 오랜만에 돌아온 고향을 보는 것치고는 또래답지 않게 차분한 모습이다.
 소년이 깊게 눌러쓴 죽립 아래를 살짝 들췄다.
 새하얀 얼굴 위로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도통 모를 묘한 표정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다만 표정이 스쳤던 자리에는 의미심장한 미소가 여운처럼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럼 가 볼까?”
 소년은 다시 죽립을 깊게 눌러썼다.
 유유자적 숲길을 걸을 때처럼, 가벼운 걸음으로 천천히 고향으로 들어섰다.
 떠난 지, 칠 년 만의 귀향이다.
 
  * * *
 
 석태石台는 장강에서 뻗어 나온 지류와 관도를 잇는 주요 길목이 맞닿는 곳에 위치한다. 지리적인 측면에선 상권이 발달할 기반을 갖췄으나 실상은 그저 한적한 도시에 지나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황산黃山 일대로 사람들이 몰렸기 때문이다.
 남궁세가南宮世家가 터를 잡은 그곳으로 드넓은 관도가 깔렸다. 많은 상단들이 석태가 아닌 황산 일대에 자리를 잡은 까닭이다.
 그렇다고 상단들이 석태를 등한시하지는 않았다. 거대 상단에 밀려난 이들이 황산과 석태를 이으며 주기적으로 행상行商을 꾸렸다.
 이문이 적을 뿐, 꾸준히 이익을 보았다. 그것이 세월이 흐르면서 어느덧 일례一例가 되었다.
 석태는 큰 발전이 없을 뿐 그래도 도시의 규모를 갖췄다.
 인구도 제법 된다. 그들 대부분이 토착민이나, 다도茶道를 즐기는 외부인들도 간혹 눈에 띈다.
 이것이 떠나기 전, 소년이 기억하는 고향의 모습이었다.
 시간이 많이 흘렀다 해도 급작스레 큰 발전을 이룰 수는 없다. 소년은 누구보다 그에 관한 속사정에 밝았다.
 추측은 믿음으로, 더 나아가 확신으로 변한 지 오래다. 고향 땅을 밟을 때에도 그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그런데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다. 소년은 눈앞의 생소한 광경에 입이 다물리지 않았다.
 “뭐야, 이거?”
 죽립을 위로 치켜든 소년의 표정이 떨떠름했다. 눈으로 보고 있지만, 이게 현실인가 싶을 정도로 믿기 힘들었다.
 고향이 변했다.
 강산이 변하기에는 조금 모자라나 그래도 마을 담장이 한 뼘 정도 높아질 법한 세월이 흘렀다.
 마차 한 대가 겨우 지나다니던 소로小路가 족히 서너 개는 합쳐진 듯 커졌다. 주변 집들은 담장 한 뼘이 아닌, 층이 한둘씩 더 올라갔다. 흔하던 촌부들은 어디 가고, 멀쩡히 차려입은 상인들이 더 눈에 든다.
 소년은 멍하니 주위를 살피다 뒤에서 들려오는 비키라는 소리에 황급히 옆으로 물러났다. 거대한 마차가 소년이 있던 자리를 쏜살같이 지나쳤다. 이것도 전에는 보기 힘든 일이다.
 도무지 믿기지가 않았다. 대체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소년은 서둘러 자신의 집으로 향했다.
 발걸음이 그리 탐탁지 않았다. 석태의 변화에 왠지 자신의 가문이 관련이 있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익숙하던 길도 변했다. 때문에 몇 번을 헤매다 바삐 움직이던 아낙을 잡아 길을 물었다.
 간신히 찾아온 고향 집.
 칠 년 만에 마주한다는 애잔함은 없었다. 그보다 석태의 변화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의 충격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고향 집을 가리키는 현판을 읽으며, 소년은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淸越樓청월루
 
 그래도 나름 무가武家를 지향하던 가문이 기루로 변했다.
 아직 이른 시간임에도 여인네들이 지나다니는 게 훤히 보인다. 마주치는 족족 눈웃음을 치는 게, 본능적으로 기녀임을 느꼈다.
 “설마 처자식을 죄다 이쪽으로 만들어 버린 거야?”
 소년의 머릿속으로 부친의 얼굴이 그려졌다.
 그가 아는 부친이라면 능히 그러고도 남을 위인이다. 자신이 집을 떠났던 이유 역시, 알고 보면 그와 무관치 않았으니 말이다.
 “호호, 공자!”
 소년이 멀뚱히 자리에 서 있자, 먹잇감을 노리듯 여인 하나가 총총히 걸어왔다.
 사내를 유혹한다는 향낭香囊을 품은 모양인데, 아쉽게도 현재 소년은 그 정도에 혹할 만큼 정신이 남아 있지 않았다.
 “누님, 마침 잘 왔어요.”
 여인이 뭐라 말을 하기도 전에 소년이 먼저 나섰다.
 “여기 언제 생겼대요?”
 뜻밖의 물음에도 여인은 당황하지 않았다.
 화장으로 숨겨진 이면으로 적지 않은 연륜이 엿보였다. 분칠로 희미하게 가렸다지만, 가까이서 보면 주름 자국 역시 눈에 들어왔다.
 나무는 그 속을 보며 세월을 짐작하고, 여인은 숨겨진 주름으로 나이를 엿본다고 했던가. 이는 소년이 지난 세월 동안 보고 배운 가르침 중의 하나이기도 했다.
 “호호, 공자는 타지에서 왔나 봐? 오 년 됐어요. 인근에서 우리 청월루만큼 역사가 깊은 곳도 없지요. 그만큼 밤바람도 황홀하답니다.”
 눈웃음치는 모습이 자연스러웠다. 사내라면 방심이 흔들릴 법도 하건만, 소년은 여전히 그에 대해선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 전에 있던 곳은 어떻게 됐죠?”
 “만마방?”
 소년이 기다리던 반응이 나왔다.
 “흐음, 공자도 그쪽에 줄을 댈 심산이구나?”
 여인의 눈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슬쩍 소년의 코앞까지 다가온다 싶더니, 죽립의 끝을 살짝 들췄다.
 죽립에 가렸던 소년의 눈이 여인과 마주쳤다.
 소년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반대로 눈웃음 짓던 여인의 얼굴은 조금씩 굳어져 갔다.
 “말해 봐. 만마방 말이야.”
 조금 전만 하더라도 꼬리 치려던 여인의 기색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지금은 명령을 기다리는 수하의 그것처럼 조신하기 이를 데 없었다.
 “오 년 전에 중심가로 옮겼어요. 예전 오가장원에 지금 그들이 있어요.”
 오가장원은 소년도 익히 아는 곳이다.
 낙향한 학사 내외가 고향 땅에 돌아와 지은 장원이지 않은가.
 자식들이 제법 잘되어서 석태에서 가장 큰 장원을 짓는 걸로 한동안 떠들썩했던 기억이 난다. 그때 부친이 은근히 배앓이를 했던 것 같은데, 기어코 그 건물을 손에 넣은 모양이다.
 “그런데 줄을 댄다는 건 무슨 말?”
 “만마방이 현재 석태 제일의 문파니까요. 허드렛일이라도 만마방에서 한다 하면 석태 땅에서 누구도 무시하지 못한답니다.”
 여인의 대답에 소년은 어이가 없었다.
 만마방은 한낱 역참驛站이나 주변에 정보를 전하는 자질구레한 일을 도맡던 곳이었다. 수십 년 동안 주변 눈치나 살피고 가랑이 밑을 지나다니던 곳이, 이름 앞에 제일이라는 말을 붙임에 거리낌이 없다는 사실이 한편으로는 우습기도 했다.
 여인을 통해 알아낼 수 있는 건 그게 전부였다.
 겉으로는 떠들썩하지만 켕기는 게 있는지, 속사정은 뒷얘기에 밝은 기녀조차 알지 못할 만큼 꽁꽁 싸맨 것 같았다.
 “고마워요, 누님. 이제 가 봐도 돼요.”
 소년이 손짓하자 여인이 기품 있는 동작으로 인사를 건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청월루의 다른 여인들과 주변을 지나던 몇몇 사람들이 놀란 반응을 보였지만, 두 사람은 대수롭지 않게 헤어졌다.
 소년은 몸을 돌려세웠다.
 발걸음은 여인이 언급했던 오가장원으로 향했다. 주변의 시선이 조금 느껴졌지만, 길을 걷다 보니 그것도 얼마 가지 않았다.
 다행히도 이번에는 길을 헤매지 않았다. 대로변으로 나와 가장 큰 건물을 찾으니 그곳이 바로 오가장원, 아니 이제는 현판을 바꾼 만마방이었으니.
 “도대체 얼마나 해 먹은 거야?”
 멀찍이에서 만마방을 응시했다.
 정문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
 허리에 검을 찬 사내들도 있고, 상인으로 보이는 행색들도 자주 눈에 아른거린다. 본업인 역참도 여전한지 건장한 말들도 말발굽 닳도록 문지방을 넘어 다녔다.
 소년이 알기로 만마방은 결코 이렇게 성장할 수 없다. 지난 기억을 되새기면 이유는 명백했다.
 바로 자신 때문이다.
 안휘성을 절반이나 장악한 제천회諸天會.
 칠 년 전, 제천회의 석태 분타주로 찾아온 이가 바로 독수나찰毒手羅刹 홍염랑紅焰娘이다.
 그녀는 당시 고작 나이가 열둘에 불과했던 소년에게 구애를 보냈다. 부친이라는 작자는 가문의 성세를 위한답시고, 흔쾌히 자식을 늙은 여우에게 보내고자 손을 썼다.
 소년은 어쩔 수 없이 그녀와 부부의 연을 맺어 십 년 동안 살을 맞대고 살았으나, 마지막은 음양흡기공陰陽吸氣功이라는 사악한 술수에 정기를 빼앗기고 목내이가 되어 쓸쓸히 죽음을 맞이했다.
 숨을 거두기 직전, 삶에 대한 후회보다 후련함을 느꼈다.
 악녀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에 죽음이 도리어 반갑기까지 했다.
 그런데 소년은 죽지 않았다. 놀랍게도 멀쩡히 다시 살아났다.
 그것도 열두 살의 어린 시절, 홍염랑과 혼사를 치르기 바로 전날 밤에 말이다.
 단지 꿈이라 하기에는 너무도 생생했던 기억들.
 십 년의 세월 동안 처절히 학대당했던 악몽이 되살아나, 도저히 타인의 뜻에 이끌려 혼사를 치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남몰래 집을 나섰다.
 만마방의 정보와 안휘성 일대에서의 제천회의 위세를 생각한다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을 소년은 저지르고 말았다.
 다행히 우연을 가장한 필연, 그것이 중첩되면서 소년은 무사히 악녀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그것이 벌써 오래전의 일이 되어 버렸다.
 소년은 누구보다 홍염랑의 성격을 잘 안다. 일방적인 관계였지만, 어쨌든 같이 보낸 세월이 얼마인가.
 자신이 사라지면 그 분노는 고스란히 만마방이 짊어질 게 뻔했다. 애초에 홍염랑은 만마방을 자신의 손아귀에 넣을 생각이었고, 이전의 생生에서는 실제로 그랬던 여자다.
 그런데 눈앞의 만마방은 달랐다.
 폭삭 망했다면 이해라도 했을 것을, 지금은 그 위세가 이전보다 몇 배는 커져 버렸다. 이제는 가문의 이름 앞에 석태 제일이라는 말이 당연하게 따라붙었다.
 소년은 선뜻 만마방에 발을 들이지 못했다.
 자신이 나타났다고 반가워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까.
 자식 걱정에 속병을 앓고 계실 어머니를 제외하면 말이다.
 솔직히 만마방이 아무리 성시를 이룬다고 할지라도 소년에게는 큰 위협이 되지 못했다. 단지 그 뒤에 웅크리고 있을 제천회, 정확히는 홍염랑의 의중이 마음에 걸려 망설일 뿐이다.
 오고 가는 사람들 중에 적당한 사람들을 잡아야겠단 생각이 든 것도 그런 연유였다.
 한참을 노상을 서성거리던 소년의 이목에 적당한 인물이 들어왔다. 얼굴이 왠지 모르게 낯이 익었다. 아마 자신의 많고 많은 이복형제들 중에 하나일지도 모른다.
 이제 서른쯤 되었을까.
 턱부리에 돋아난 수염은 가지런히 정리가 되었고, 겉보기에는 인상도 나쁘지 않았다.
 다만 나이답지 않게 폭이 넓은 회백색 장포를 걸친 모양새가 한껏 거드름을 피우는 졸부의 과시욕을 연상케 했다. 주변 사람들이 넙죽 허리를 숙일 때마다 으스대는 꼴이, 영락없이 소년이 기억하는 부친과 판박이다.
 소년은 어슴푸레 떠오르는 기억에서 사내의 정체를 찾았다.
 그는 만마방의 둘째이자, 소년의 이복형인 왕우王優였다.
 이름과 함께 어릴 적 그에게 숱하게 괴롭힘을 당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이유도 유치하기 짝이 없다. 소년이 후처의 자식이라는 것이었다.
 솔직히 맏이를 제외한 모든 형제가 만마방주가 들인 후처들의 소생이다. 저 역시 같은 처지임에도, 그런 사실은 쏙 감춘 채 그저 어린 동생들을 못살게 굴기 바빴던 녀석이다.
 잔뜩 거드름을 피우는 모양새가, 무던한 큰형을 밀어내고 자신이 부친의 뒤를 이을 욕심을 부리는 게 눈에 훤히 보였다.
 이전 생에서 만마방이 홍염랑의 손아귀에 들어가는 데 그가 보여 주었던 눈부신 활약도 덩달아 떠올랐다.
 망연자실한 부친의 면전에서 광폭하게 웃어 젖히던 모습 하며, 살려 달라는 큰형을 사정없이 내치며 손수 목을 베었던 것까지.
 마지막으로 홍염랑의 옆에 있던 소년에게 다가와 아부를 떨어 대던 모습이 눈앞의 왕우와 겹치듯 보였다.
 ‘제천회 놈들까지 달고 다닐 줄이야.’
 왕우의 주변으로 만마방의 복장을 한 무사들이 보였다.
 그저 보기에는 만마방의 무사들이라 오인할 수 있지만, 검파劍把에 매달린 푸른 명주실은 암암리에 홍염랑의 수족임을 증명하는 일종의 표식과도 같았다.
 제천회의 무사라는 자들이 만마방의 방주도 아니고 그 아들의 호위를 선다는 건 벌써부터 왕우가 저들에게 단물을 건네고 있음을 의미했다.
 ‘저 정도면 적당하지.’
 다른 이도 아니고, 제천회와 직접 손을 잡은 것으로 보이는 왕우다. 그간의 사정을 듣기에는 더할 나위 없는 먹잇감이었다.
 소년은 저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은밀히 뒤를 따랐다.
 주변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왕우의 행보가 점차 인적이 드문 길로 접어들었다.
 왕우를 알아본 골목패가 넙죽 인사를 한다. 석태의 밤거리를 장악한 놈들조차 왕우의 손아귀에 들어갔음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었다.
 한참을 돌고 돌던 왕우가 멈춘 곳은 담장이 높은 어느 구석진 장원이다.
 현판조차 걸리지 않은 것 하며 대낮임에도 으스스한 분위기를 내는 것이, 일반인들이 쉬이 발걸음하기 힘든 장소였다.
 문이 열리고, 왕우와 그 일행이 장원으로 들어갔다. 뒤를 따르던 소년도 주변을 살피다 훌쩍 담을 넘었다.
 장원은 높은 담장에 비해 규모가 작았다. 다만 장원 안에는 스무 명 남짓 되는 골목패가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저들을 이용해 감추고 싶은 것이 있단 얘긴데.’
 으슥한 장원에 골목패까지 동원해서 감출 정도면, 어지간한 것은 분명 아닐 것이다.
 그때였다.
 “저거 뭐야?”
 빈둥거리는 것 같으면서도 꽤나 눈치가 밝은 자들이 숨어서 움직이던 소년을 발견했다.
 “하하, 들켰네.”
 새하얀 목덜미를 긁으며 소년은 어색하게 웃음 지었다.
 주변으로 골목패가 우르르 몰려들었다.
 순식간에 사람들로 에워싸인 소년은 두려운 기색 하나 없이 골목패를 향해 말했다.
 “왕우에게 볼일이 있는데, 좀 비켜 주면 안 될까?”
 왕우의 이름에 골목패가 움찔거렸다.
 그 이름이 저들에게 통했나 싶었으나, 이내 흉흉한 안광을 뿌리는 골목패의 반응에 소년은 역시나 하는 한숨을 내쉬었다.
 “너네들 이러다 다치면 책임 안 진다?”
 경고를 해 보지만, 돌아오는 건 차가운 비웃음이었다.
 “어쩔 수 없지.”
 소년이 짝짝 손뼉을 쳤다.
 신기루일까.
 마주친 손뼉 사이로 붉은 아지랑이가 피었다가 사라지는 듯했다. 이를 눈치채지 못한 골목패가 으르렁거린다.
 “놈을 잡아라!”
 누군가의 외침에 근처에 있던 서너 명의 사내들이 달려들었다.
 소년은 마주치던 양팔을 활짝 폈다.
 손에서 이질적인 감각이 느껴진다 싶더니 어느새 두 명의 사내가 나가떨어졌다.
 그사이 뒤에서 달려들던 사내가 주먹을 뻗었다.
 소년은 뒤에 눈이라도 달린 사람처럼, 상체를 숙이며 어렵지 않게 그것을 피했다.
 주먹이 엉뚱한 곳을 때리는 동안, 소년은 사정없이 왼발을 뒤로 날렸다.
 귓가로 부들부들 숨넘어가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를 애도하기에는 인사를 나눌 사람이 너무 많았다.
 사내들의 집단 공격에도 소년은 요리조리 피하면서 사정없이 그들을 쓰러뜨렸다. 어찌나 동작이 신출귀몰하던지 나중에 가서는 자신이 어떻게 쓰러졌는지도 모르는 이들까지 생겨났다.
 짧은 시간에 스무 명이나 되는 골목패를 모두 쓰러뜨린 소년이 죽립 아래로 입을 삐죽거렸다.
 소란을 피웠으니 왕우가 눈치를 채지 못했을 리 없다.
 역시나 그를 호위하던 제천회의 무사들이 어느새 검을 빼 들며 소년의 앞으로 다가왔다.
 멀찍이에서 왕우가 소리쳤다.
 “네놈은 누구냐!”
 “알아서 뭐하게.”
 소년이 대뜸 받아쳤다.
 자신을 놀린다고 여겼던지, 왕우는 얼굴을 찌푸리며 발악하듯 외쳤다.
 “저 새끼 입부터 조져!”
 그 모습에 소년이 피식거렸다.
 “제천회 놈들을 똘마니처럼 다 부리고, 왕우 너 많이 컸다?”
 “뭐, 뭣?”
 왕우는 소년이 자신의 이름을 아는 것보다, 자신의 호위를 맡은 이들이 제천회의 무사라는 사실을 안다는 것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는 세 명의 무사들도 마찬가지였다.
 복색도 만마방의 것으로 바꾸고 행동했다. 자신들이 제천회 사람임을 아는 건, 석태 분타에서도 소수의 몇몇 이들과 왕우가 전부다.
 그런데 죽립을 쓴 정체불명의 사내가 자신들을 아는 듯 말하고 있으니 어찌 놀랍지 않으랴.
 “죽립을 벗어라.”
 무사들 중 하나가 고압적으로 말했다.
 “싫어.”
 소년이 재빠르게 대답했다.
 “그럼 직접 벗겨 주지.”
 “그게 가능할까?”
 소년이 실소를 터트리자, 그것을 신호 삼아 무사 하나가 검을 내리그었다.
 쇄에에-!
 검이 묵직하게 허공을 갈랐다.
 제천회의 독문무공은 제룡검帝龍劍이다. 분연히 허공을 수놓는 검식이 촘촘하게 소년을 압박했다.
 예상대로 그는 제천회의 상승무공을 익힌 무사였다.
 상당한 실력이지만 그 동작 하나하나가 소년의 눈에는 가소롭게 비쳤다.
 소년 역시 제룡검을 알고 있다.
 그것도 십 년, 아니 지금의 생까지 더하면 무려 십칠 년 가까이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저들은 짐작도 못 한다는 게 문제랄까.
 “고작 그걸로 날 상대하려고?”
 소년은 피할 틈이 없는 와중에도 능숙하게 몸을 틀었다.
 석태에 머무는 제천회의 고수들 중 이처럼 신묘한 움직임을 보이는 자들은 몇 되지 않는다.
 눈 깜짝할 사이에 소년이 무사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황망히 피하려 하지만 소년이 더 빨랐다. 벼락같이 무사의 손목을 때렸으니, 무사가 그 충격에 들고 있던 검을 놓쳤다.
 “어이쿠!”
 떨어지는 검을 가볍게 낚아챈 소년이 슬쩍 그것을 휘둘렀다.
 서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무사의 가슴 부근에서 시뻘건 핏줄기가 왈칵 뿜어져 나왔다.
 소년의 죽립 위로 뜨거운 핏물이 후두두 떨어졌다.
 멀쩡한 몸이 순식간에 허물어지자, 지켜보던 다른 무사 둘이 이번에는 동시에 움직였다.
 여전히 그들의 손에서는 제룡검이 펼쳐졌다.
 “허굉이 허투루 가르쳤을 리가 없는데? 너네 제룡검 누구한테 배운 거야?”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소년의 한마디에 무사들의 안색이 대번에 바뀌었다.
 자신들의 소속을 아는 것도 모자라 검술과, 제천회에서도 아는 자가 극히 드문 허굉의 이름까지 들먹였다.
 “도대체 네놈은······.”
 스윽.
 소년은 무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의 목에 거침없이 검을 쑤셔 넣었다.
 “미안. 저놈 도망가려고 한다.”
 무사들과 대치하는 와중에 왕우가 도망치려는 모습이 언뜻 시야에 들어왔다.
 “이, 이놈이!”
 졸지에 홀로 남게 된 무사가 광분한 듯 세차게 달려들지만, 이성을 잃은 그의 동작에는 허점이 수두룩하게 드러났다.
 “너도 그만하자.”
 소년의 검에서 무사들과는 차원이 다른 제룡검이 펼쳐졌다. 웅장한 기세와 더불어 벼락처럼 몰아치는 힘이 단번에 무사의 검을 부쉈다.
 털썩.
 마지막 남은 제천회의 무사마저 속절없이 쓰러졌다.
 도망치려던 왕우가 마지막 그 모습을 보다, 피가 묻은 소년의 검에 그만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하여튼, 겁은 많다니까.”
 소년이 들고 있던 검을 내던지고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아무렇게나 날아가던 검은, 소년이 의도했던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공교롭게도 한 줌의 숨을 부여잡고 숨을 헐떡이던 무사의 심장에 사정없이 박혀 들었다.
 “사, 살려 줘!”
 “안 죽여, 인마. 걱정하지 마.”
 잔뜩 겁에 질린 왕우를 안심시키며, 소년이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여기 무슨 일 있었냐?”
 “무, 무슨?”
 “내가 오랜만에 여길 왔거든. 그런데 변해도 너무 변했어. 이렇게 변할 곳이 아닌데 말이지. 그걸 물어보려고.”
 “그럼 고작 그런 이유로?”
 그게 궁금해서 사람들을 저 지경을 만든 것이냐!
 소년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자, 차마 뒷말을 잇지 못했다.
 체념한 듯, 왕우가 그간의 일을 설명했다.
 중간중간 말을 바꾸려 할 때면 귀신같이 알아내는 소년의 모습에, 결국 제천회와의 비밀스러운 이야기까지 모두 꺼내야 했다.
 소년은 왕우를 통해 비로소 진실을 알게 되었다.
 자신이 알던 지난 생과 달라진 지금의 석태의 모습.
 이 또한 자신으로부터 비롯된 일이었다.
 소년이 홍염랑을 피해 도망치자, 그녀는 미친 듯이 자신을 찾아 헤맸다고 한다.
 제천회의 늙은 장로들에게까지 손을 벌렸고, 그로 인해 결국 총단으로 불려 갔다.
 그 뒤 제천회의 석태 분타는 총단의 명을 따라 만마방을 비롯한 여러 군소 문파들과 교분을 맺었는데, 이런 기회를 틈타 소년의 부친이 다른 문파들을 따돌리고 명실상부 제천회의 협력자로 급부상하게 되었다는 게 이야기의 골자였다.
 소년의 부친은 다른 방파들이 언젠가 위협이 될 거라 여겼던지, 제천회의 힘으로 그들을 하나씩 쳐 냈다. 그 힘은 고스란히 만마방에 흡수되었는데, 그 결과가 지금의 모습이다.
 만마방이 석태 제일의 문파가 되자 제천회가 은밀히 움직였다. 큰형을 대신해 만마방을 집어삼키려던 왕우는 그런 제천회의 좋은 먹잇감이 된 셈이다.
 결국 왕우는 만마방에서 몰래 빼돌린 재물들을 제천회에 넘겼고, 그들의 보호 아래에서 점차 힘을 키워 나갔다.
 이 장원이 바로 그렇게 빼돌린 재물들을 보관하는 곳이었으며, 때마침 오늘이 그것을 저들에게 넘기는 날이었다.
 “그럼 홍염랑은 총단에 있단 소리네.”
 “그, 그렇다.”
 석태에 홍염랑이 없다는 얘기에 소년은 어깨에 힘이 빠졌다. 그녀에게 복수하겠다는 일념하에 고향 땅을 찾았지만 정작 당사자가 없다 하니 허탈하기 그지없었다.
 어차피 그녀가 없다면 이곳에 오래 머물 이유도 없다. 소년은 곧바로 석태를 떠나고자 마음먹었다.
 “나 노잣돈 좀 줘.”
 이대로 떠나자니 왠지 왕우가 제천회에 바치려던 돈이 아깝단 생각이 들었다. 이왕 넘겨줄 거, 제천회보다는 그래도 형제가 낫지 않겠냐는 혼자만의 속어림으로 소년은 태연히 돈을 요구했다.
 왕우의 얼굴이 크게 구겨지는 건 당연지사.
 그는 품에서 전낭을 꺼내 소년에게 전했다.
 왕우가 건네는 묵직한 전낭을 허리춤에 매달고, 소년은 대뜸 그의 품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무, 무슨 짓······!”
 왕우가 발악을 해 보지만, 소년의 완력을 당해 내진 못했다.
 고사리 같은 여린 손이라 생각하기 힘들 만큼의 악력에, 왕우는 그의 손이 지나친 자리가 욱신거리는 통증을 느꼈다.
 “저 안에 몰래 숨겨 둔 거 더 있잖아. 푼돈이나마 잘 쓸게.”
 족히 삼백 냥은 됨 직한 전표를 흔들며 소년이 죽립 너머로 씩 미소 지었다.
 소년의 얼굴을 보지는 못했지만, 그의 입가에 떠오른 득의양양한 표정을 왕우도 느꼈으리라.
 뒤돌아서서 떠나는 소년의 등을 향해 왕우는 구겨진 얼굴로 소리쳤다.
 “도대체 네놈은 누구냐!”
 소년은 걸어가는 와중에 손을 들어 흔들었다.
 “왕전.”
 나지막이 뇌까리는 소년의 대답을 듣지 못한 왕우가 무슨 용기가 났는지 바락바락 뒤에서 욕을 해 댄다.
 형제의 날 선 욕지거리에, 소년은 만면에 웃음을 드리운 채 가던 길을 멈추고 바닥에 나뒹구는 돌멩이 하나를 집었다.
 이후 퍽 하는 소리와 꼴까닥 넘어가는 단말마를 끝으로 주변이 조용해지자 소년은 그제야 스스럼없이 자리를 벗어났다.
 얼굴에 드리운 미소와 달리 소년의 속내는 마냥 편치만은 않았다. 독사들이 우글거리는 곳에 홀로 계신 어머니를 뵙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아직은 자신을 숨겨야 했다. 괜히 나섰다가 홍염랑의 마수가 어머니께 미칠 것을 염려하니 차마 숨어서라도 만날 수가 없었다.
 모정慕情으로 인한 공허한 심정을 잊고자, 홍염랑과 관련된 옛 기억을 떠올렸다. 어느새 석태를 떠난 홍염랑의 모습이 대신 그 자리에 채워졌다.
 “기다려라, 홍염랑. 조만간 찾아갈 테니까.”
 당장 제천회 총단으로 달려가 홍염랑을 찾기는 요원한 일이다.
 지난 세월 동안 누구도 무시하지 못할 힘을 얻었다. 하나, 석태 분타라면 몰라도 단신으로 제천회 전체를 대적하기에는 아직 무리인 것이 사실이다.
 그러기 위해선 분명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다.
 “결국 거기로 가야 하나.”
 어차피 홍염랑의 문제 말고도 소년이 해야 할 일이 하나 더 있다. 그의 스승은 제자의 개인사를 두고 아량을 베풀 위인은 결코 아니었으니.
 제자를 곁에 두고 시종처럼 부려 먹는 걸 낙으로 사는 인물이, 선뜻 소년을 세상에 내보낸 것만으로도 충분히 귀찮은 일을 맡겼음을 반증한다.
 “이왕지사 하는 김에 제천회도 같이 손 좀 보겠습니다, 스승님.”
 소년은 구만장천九萬長天에서 오롯이 제자를 지켜보겠다는 스승을 향해, 들리지는 않겠지만 예의상 낮게 읊조렸다.
 해걷이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저무는 석양을 지표 삼아 소년은 그렇게 돌아온 지 하루 만에 고향인 석태를 벗어났다.
 
 
 
 # 二章
 
 
 
 武士 募集무사 모집
 
 뜬금없이 궁검보躬劍堡에서 무사들을 모집하기 시작했다.
 궁검보는 강서성江西省 남창南昌에 뿌리를 내린 유수의 가문으로, 대대로 외침이 적어 일대에선 손꼽히는 무가로 인정받았다.
 문파 내에는 이백여 명이 웃도는 무사들이 상주하고 있다. 주변에서 딱히 위협하는 세력도 전무하니 결원이 생길 리도 없었다.
 그래서일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번 일을 두고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다.
 그건 궁검보의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궁검보의 정문 옆으로 모집을 알리는 방이 붙었다. 그 옆에는 모집을 위해 나온 공노지孔露蜘가 귀찮은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자리를 잡았다.
 궁검보가 자랑하는 무력 집단 삼월조三月組.
 그중에서도 세 번째에 위치한 망월望月의 부조장인 그가 왜 이런 허드렛일을 맡아야 하는지 영문을 알지 못했다.
 위에서 시키는 통에 어쩔 수 없이 하긴 하지만, 멀쩡한 수하들을 두고 굳이 자신을 찍은 저의가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뭔가 떠오를 것만 같으면서도 안개가 낀 것처럼 흐리멍덩했다. 그래서 더 짜증이 난 건지도 모른다.
 신경질 가득한 그의 얼굴에 지레 겁을 먹었는지, 방을 붙인 지 꽤 지났음에도 찾는 이 하나 없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소속이 없는 무사들은 큰 싸움이 벌어질 때에야 돈을 번다. 이렇게 태평한 날에 푼돈이나 받으며 괜히 한곳에 얽매여 있을 천치는 애당초 없는 셈이다.
 궁검보에 속한 무사들이야, 오래전부터 이곳 무공을 배워 발목이 잡힌 사람들이 대부분이라 크게 상관이 없었다.
 문제는 새롭게 들이는 자들 중에 실력이 괜찮은 이가 이런 곳을 찾겠냐는 거다. 추측하건대, 쭉정이들만 들끓다가 유야무야 넘어갈 공산이 컸다.
 “그러니까, 그런 일을 왜 내가 해야 하는 건데?”
 목구멍으로 차오른 말을 그대로 내뱉었다.
 옆에서 정문을 지키던 호위들이 움찔하며 최대한 공노지와 멀어지려 발버둥을 쳤다.
 “이봐요.”
 푹 고개를 숙이고 있던 공노지 곁으로 사람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파리만 날리던 자리에 마침내 쭉정이로 예상되는 사람 하나가 다가왔다.
 애석하게도 반갑게 맞아야 할 공노지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뭐요?”
 평범한 사람이라면 우물쭈물한다거나 냅다 뒤돌아 가야 정상인데, 다가온 이는 전혀 그런 쪽으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도리어 공노지에 버금가는 어투로 태연히 말을 건넸다.
 “여기 무사 모집한다면서.”
 “그런데?”
 “받으라고.”
 힐끗거리며 두 사람을 살피던 호위들이 저마다 속으로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공노지의 성격상 무슨 사고가 나도 크게 날 법한 상황이 벌어졌다.
 그들의 예상과 다르게 공노지는 쉽게 욱하지 않았다.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그저 자신이 맡은 일을 수행할 뿐이다.
 “이름, 출신, 나이, 병기, 수준.”
 호위들은 그제야 한시름 놓으면서도, 혹시나 모를 돌발 상황에 대비해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왕전王顚, 요산樂山, 열아홉, 검劍, 적당히.”
 부르는 대로 받아 적던 공노지가 결국 고개를 든다. 예상했던 대로 그의 표정이 그리 곱지 않았다.
 공노지는 아니꼬운 눈길로 앞에 선 자의 인상착의를 훑었다.
 백의에 다갈색 죽립을 썼다.
 호리호리한 체형에서는 무공을 익힌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었고, 허리춤에 덜렁거리는 검은 시장 바닥에서 싸게 내다 파는 흔한 종류였다.
 “얼굴 좀 까 보지?”
 겉으로 드러난 외형도 그렇고 열아홉이라는 나이도, 공노지로 하여금 저절로 말을 놓게 만들었다.
 자신을 왕전이라 밝힌 이가 죽립을 뒤로 넘겼다.
 타오르는 태양 아래 새하얀 피부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피부와 대조되는 짙은 검미劍眉와 오뚝한 콧날, 그 아래 붉은 입술이 조화를 이뤄 꽤나 준수한 용모다.
 자신을 왕전이라 소개한 그는, 바로 며칠 전 석태를 떠났던 그 소년이었다.
 “너 거짓말하면 죽는다? 거기 달고 있는 거, 진짜 익혔어?”
 아침부터 열이 뻗쳤는데 제대로 한 놈 걸렸다.
 이런 쭉정이는 단단히 혼이 나야 정신을 차린다는 미명 아래, 공노지가 불같은 눈으로 왕전의 허리춤을 쏘아봤다.
 “말했잖아, 적당히라고.”
 공노지가 으르렁거리자, 왕전이 고깝다는 눈초리를 짓는다. 그 모습이 기가 차 공노지는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터트렸다.
 “이 새끼가 진짜.”
 기어코 공노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리부리한 눈매와 뭉툭한 코끝, 거기다 두툼한 입술이 영락없이 ‘나 성격 더럽다’라는 인상을 물씬 풍겼다.
 덩치는 또 얼마나 큰지, 앉아 있을 때는 몰랐으나 일어서니 족히 육 척에 달하는 장신이다.
 소매 사이로 드러나는 근육도 큼직하고, 넙데데한 두 손은 잘못 맞았다간 염라대왕 발치까지 날아갈 기세다.
 그럼에도 왕전은 태연자약했다.
 “신청은 된 거지?”
 “되긴 개뿔. 실력도 봐야겠다. 이 몸이 세 번 공격할 테니 어디 한번 막아 봐라. 막으면 합격이요, 맞으면 황천길이다!”
 공노지가 붕붕 팔을 휘두르며 어깨를 풀었다.
 조용하던 왕전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냥 넘어가면 안 될까?”
 “누구 맘대로! 궁검보가 네놈 장난질 받아 주는 곳이라 생각했더냐?”
 “그건 아니지만.”
 “잔말 말고 어디 한번 받아 봐라!”
 왕전이 뭐라 말을 할 새도 없이, 공노지가 거대한 손을 움직였다.
 부우웅.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제법 묵직했다.
 그저 쭉정이에게 겁을 주겠다는 정도에서 벗어난, 어느 정도 진심이 담긴 일 권拳이었다.
 “귀찮은데.”
 자신에게 위험이 닥쳤다는 사실을 모르는지, 멀뚱히 그 모습을 지켜보던 왕전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손을 들었다.
 퍽.
 왕전의 얼굴을 묵사발로 만들 줄 알았던 공노지의 손이 허공에서 뚝 멈춰 섰다.
 곱디고운 왕전의 손에 막혀, 힘껏 말아 쥔 공노지의 주먹은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뭐, 뭐야?”
 말도 안 되는 상황에 공노지가 자신도 모르게 말을 더듬거리며 소리쳤다.
 “세 번은 귀찮으니까, 이걸로 끝내자.”
 원하는 대답 대신 왕전이 엉뚱한 말을 꺼냈다.
 공노지는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며 일갈을 내지르고 싶었지만,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건 꾸역꾸역 삼켜지는 처절한 비명이었다.
 “꺼, 꺽.”
 눈 깜짝할 사이에 왕전의 주먹이 공노지의 복부로 틀어박혀 들었다. 연약한 주먹이 얼마나 아프겠냐 싶으나, 눈이 벌겋게 충혈되고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채 질질 침을 흘리는 꼴을 보면 그것도 아닌 모양이다.
 털썩.
 왕전이 손끝으로 공노지의 머리를 밀자 그는 뒤로 기우뚱거리다 이내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탁탁.
 왕전이 가볍게 손을 털고는, 옆에서 얼굴이 경악으로 물든 호위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여기 금자생金子生이란 분이 계시다고 들었는데, 기별 좀 넣어 주겠어요?”
 “네? 아, 네.”
 호위 중 하나가 익숙한 이름을 떠올리며 황급히 궁검보 안으로 들어갔다.
 왕전은 다시 시선을 공노지 쪽으로 돌렸다.
 충격이 꽤 컸을 텐데, 어느새 호흡을 가다듬으며 왕전을 죽일 듯 노려보고 있었다.
 “금 총관님은 왜 찾는 거지!”
 자신이 당했다는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함인지 아니면 진짜 궁금했던지는 몰라도, 공노지의 물음에 왕전은 그저 미소로 대신했다.
 ‘가만, 놈이 요산 출신이라 했던가?’
 그제야 공노지가 왕전의 말을 떠올리며 눈을 부릅떴다.
 “설마 네놈······!”
 공노지가 무슨 말을 꺼낼 새도 없이, 안에 들어갔던 호위가 부랴부랴 뛰어나왔다.
 “모셔 오라십니다. 안으로 드시지요.”
 깍듯한 호위의 안내를 받으며, 왕전은 그 뒤를 따랐다.
 정문을 넘어서기 전.
 왕전은 공노지를 향해 웃음을 띠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이런 염병할!”
 공노지는 무슨 생각이 들었던지, 왕전이 사라지고 나자 욕설을 내뱉으며 발로 땅을 굴렀다.
 “네놈들, 이 사실을 소문냈다간 내 가만두지 않을 것이야!”
 마지막으로 호위들의 입단속까지 시킨 공노지는, 다시 자신의 자리에 가서 앉았다.
 몸은 궁검보 정문 앞에 있지만 마음은 왕전의 뒤를 따라 들어간 지 오래다.
 그의 정신이 도착한 곳은 궁검보 총관의 집무실 앞.
 그 시각 총관의 집무실로 왕전이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 * *
 
 궁검보의 총관 금자생은 학사풍의 사십 대 중년인이다.
 왜소한 체격과 달리 다부진 눈매와 고집스러운 입매가 그의 깐깐한 성격을 서슴없이 말해 주는 듯했다.
 “어서 오십시오. 주인님께 연통을 받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궁검보에서 총관의 위치는 남달랐다.
 전통적으로 보주의 권위가 강한 문파지만, 작금의 보주는 노환으로 제대로 업무를 보지 못했다. 그런 보주를 대신해 문파의 대소사는 대부분 금자생의 머리와 입을 통해 결정 나는 경우가 많았다.
 흐르는 세월만큼이나 금자생의 권위는 높아 갔고, 지위를 떠나 대부분의 식솔들이 그를 경시하지 못했다.
 그런 인물이 아직 약관도 되지 않은 이를 극진히 대하는 건 좀처럼 볼 수 없는 진풍경이다. 보주의 세 아들조차 이런 대접을 받지 못했으니, 놀랍지 않다면 거짓말이리라.
 “왕전입니다.”
 왕전이 자신을 소개했다.
 “금 모某가 소주小主를 뵙습니다. 주변의 이목 때문에 제대로 모시지 못해 죄송합니다.”
 마치 자신의 주인을 대하는 것처럼, 금자생은 왕전에게 예의를 갖춰 머리를 숙였다.
 “그런 말 마세요. 그런데 정문에 있던 사람은······?”
 “아, 공노지를 보셨습니까. 저를 대신해 소주를 모시라 보냈는데 혹 무례를 범하진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워낙 성격이 걸걸한 구석이 많은 친구라서 말입니다.”
 허허거리며 너털웃음을 짓는 금자생의 이마에 살짝 실핏줄이 생겼다가 사라졌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눈치 빠른 그가 왕전의 말뜻을 놓칠 리 만무했다. 나중에 단단히 혼을 내 놓겠다는 다짐을 속으로 삭인 채, 서둘러 왕전을 자리로 안내했다.
 왕전이 자리에 앉자, 금자생이 손수 차를 끓였다. 귀한 찻잎을 우려내는지 청아한 향이 금세 은은하게 퍼졌다.
 “고향은 다녀오셨습니까?”
 앞서 주인으로부터 왕전의 행보에 대해 접한 터라 금자생은 눈앞의 소년이 어디를 들렀다가 왔는지 대략 짐작하고 있었다.
 “네. 많이 변했더군요.”
 “그럴 겁니다. 석태의 변화는 이곳 남창에까지 많은 영향을 끼쳤으니까요.”
 후르릅.
 왕전이 차를 마시며 입가를 적셨다.
 “주인님께 말씀을 들으셨을 거라 생각합니다.”
 왕전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의 스승이 뿌리를 둔 요산, 그곳은 애초에 세상과 연을 맺지 않은 심처深處였다. 그런데 오랫동안 이를 불만스러워하던 몇몇 이들이 그 뜻을 저버리고 세상으로 뛰쳐나갔다.
 요산에서는 급히 그들의 뒤를 쫓았으나, 어찌 된 영문인지 세상에 나온 직후 그들의 흔적은 묘연해졌다.
 요산의 여러 인물들이 세상에 나와 이 잡듯 돌아다녔지만 끝내 그들의 종적을 찾지 못하고 발길을 돌렸다.
 모두가 포기하고 돌아갔으나, 왕전의 스승은 달랐다.
 분명 중원에서 그들에게 동조한 세력이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렇지 않고선 그들을 찾지 못한 일을 설명할 수 없었다.
 도망친 자들이 암중비약暗中飛躍할 것이라 여긴 그는 중원에 자신의 그림자를 여럿 심었으니, 그들 중 하나가 바로 궁검보의 총관으로 지내는 금자생이었다.
 “놈들은 찾았습니까?”
 “제가 미력하여 아직도 그자들을 발본색원拔本塞源하지 못했습니다. 허나.”
 금자생이 잠시 뜸을 들였다.
 그의 성격상 확실한 얘기가 아니면 결코 입 밖으로 먼저 말을 내지 않는다. 이렇듯 망설이는 것은 심증은 있으나 물증은 아직 찾지 못했음을 의미했다.
 “제천회 쪽이 조금 미심쩍긴 합니다만.”
 금자생의 입에서 제천회가 나오자 왕전이 눈을 반짝거렸다.
 “제 독단으로 일을 진행하기에 제천회는 아무래도 위험부담이 너무 큰지라, 지금은 주인님의 하교를 기다릴 수밖에 없습니다.”
 “하죠.”
 “네?”
 왕전의 거침없는 태도에 금자생이 저도 모르게 반문했다.
 “의심이 가면 당연히 쑤셔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차피 스승님께서 제게 일을 살피라 하셨으니 별문제는 없을 겁니다. 더구나 마침 그쪽에 볼일도 있으니 잘됐네요.”
 “볼일이라 하심은?”
 “어릴 적에 빚을 진 사람이 하나 있어서요. 공교롭게도 제천회에 숨어 있다는군요.”
 왕전은 홍염랑에 대해 두루뭉술하게 넘겼다.
 금자생은 뭔가 궁금한 것이 있는 듯 보였지만, 자세히 캐묻지는 않았다. 그보다 왕전의 목적이 이번 일에 부합하니 앞으로 일을 진행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을 거라 내심 안도했다.
 “그런데 여긴 괜찮습니까?”
 금자생이 눈치 빠르게 그 속뜻을 짐작하고는 왕전을 안심시켰다.
 “일을 꾸며도 의심할 겨를이 없을 겁니다. 현재 궁검보의 상황은 일촉즉발이라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보주는 노쇠하고, 세 아들들은 그 자리를 탐하며 서로 헐뜯고 있는 중이지요. 조만간 큰 사달이 날 것입니다.”
 “제천회를 건드리기 전에 우선 이곳부터 정리를 하는 게 좋겠군요. 지금 어느 쪽을 염두에 두고 계시죠?”
 왕전의 물음에 금자생이 궁검보의 사정을 간략하게 전했다.
 “맏이는 오만하며 책상물림에 지나지 않고, 둘째 역시 가진 힘을 믿고 안하무인으로 행동합니다. 막내는 두 형들에 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야말로 무능하기 짝이 없는 작자입니다.”
 금자생의 눈가에 묘한 감정이 스치고 지나갔다.
 왕전은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잘 안다. 자신이 홍염랑에게 가지는 심정과 흡사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금자생은 궁검보의 일가를 향해 적개심을 내비쳤다. 그것은 그의 입을 통해 보다 명확해졌다.
 “이번 후계 다툼을 빌미로 그들 모두를 제거할 생각입니다.”
 왕전은 금자생의 대답에 고개를 휘휘 내저었다.
 지켜보던 금자생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왕전은 짐짓 그것을 못 본 척 넘어갔다.
 “귀찮게 그럴 필요 있나요? 주변에 괜한 의심을 살 수도 있지 않습니까?”
 금자생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왕전은 말은 않지만 그의 속내가 마뜩잖다는 걸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그럼에도 뭐라 토를 달지 않고 그 뜻에 따르고자 했다. 과연 자신이라면 홍염랑에 대한 감정을 저버릴 수 있을까.
 결국 왕전이 한 가지 제안을 내밀었다.
 “정 그렇다면 하나만 남겨 두죠. 이곳을 움직일 명분을 위해선 그래도 보주의 씨앗 하나 정도는 남아 있어야 안심이 됩니다.”
 그제야 금자생이 얼굴에 드리웠던 어두운 장막을 한 꺼풀 걷어 냈다. 그와 동시에 한편으로는 눈앞의 어린 소년이 두렵다는 생각도 들었다.
 자신이야 궁검보와 은원恩怨이 있다지만, 왕전은 전혀 관계가 없는 인물이다. 그럼에도 사람의 목숨을 장기짝처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모습은 왠지 모르게 섬뜩한 기분마저 불러일으켰다.
 마치 왕전의 스승이자 자신의 주인을 처음 만났을 때 느꼈던 기억이 되살아나는 듯했다.
 두 사람의 외형은 다르지만, 느낌은 너무도 빼닮았다.
 세상의 인과因果를 따르기보다, 자신의 감정에 충실한 모습.
 과연 그 스승에 그 제자란 생각이 든다.
 “막내 쪽으로 자리를 주선하겠습니다.”
 금자생은 이왕 살려 줄 것이라면 자신들의 말을 잘 듣는 인형이 낫다고 판단했다.
 그건 왕전도 같은 생각이었다. 다만.
 “그래도 다들 한 번씩은 말을 섞어 봐야죠.”
 왕전이 슬그머니 미소를 지었다.
 그의 눈빛이 점점 요사스럽게 물들어 가자, 금자생은 그 힘을 피부로 느끼며 감복한 얼굴로 머리를 숙였다.
 “명을 따르겠습니다.”
 왕전의 등장으로 그동안 움트려던 음모의 씨앗이 본격적으로 싹을 틔웠다. 그리고 그 뿌리가 서서히 궁검보 깊숙이 파고들기 시작했다.
 결과는 이미 두 사람에 의해 정해진 채로 말이다.
 
  * * *
 
 궁검보는 남창 일대에서 손꼽히는 문파다.
 주변에 벌여 놓은 사업은 순탄하게 흐르고, 최근 십 년 이내로 부침도 없어 항상 적절한 전력을 유지했다.
 각기 쉰 명으로 구성된 삼월조는 인근에서 위명을 떨칠 정도이며, 그에 속하지 못한 무사들도 삼월조의 공백이 생길 시 곧바로 충원될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었다.
 명문 대파에 비해 수적으로나 개개인의 실력 면에선 꽤나 차이를 보이지만, 각자 자신의 직분에 맡게 정돈된 모양새는 군소 방파라 마냥 무시할 수 없었다.
 이 모든 것이 총관 금자생의 혁혁한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자연히 보주의 신망이 두터워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고, 궁검보의 모든 식솔들이 그를 존경해 마지않았다.
 그럼에도 속으로 곪아 가는 상처까지는 그도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그가 주도적으로 그렇게 만들었다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보주의 세 아들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후계 구도.
 그들은 마지막 조각을 맞추기 위해 금자생에게 손을 벌렸다.
 금자생이 그들 중 하나와 손을 잡는다면 싸움의 승률이 크게 오를 것이란 건 누구보다 그들 스스로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애달픈 구애에도 금자생은 움직이지 않았다. 보주를 들먹이며 철저히 중립을 지켰다.
 매번 자신들을 돌려세우는 금자생의 행동은 자존심으로 들추면 괘씸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반대로 생각하면 더할 나위 없는 충신이다.
 그들에게 비치는 금자생의 모습은 후자에 가까웠다. 그러니 매번 거절할 것을 알면서도 차마 미련을 버리지를 못했다.
 그런데 호시탐탐 그의 동정을 살피던 그들의 귓가로 뜻밖의 소식이 전해졌다.
 총관이 직접 무사를 모집했고, 한 명이 합격했다.
 응시한 자는 몇 명 되지만 대부분 공노지가 돌려세웠다는 얘기가 들리는 걸로 봐서, 그 한 명은 시험을 통과했다는 의미가 된다.
 삼월조를 구성하는 세 개의 조.
 현월弦月, 언월偃月, 망월望月.
 이 중 현월은 대공자의 수하들이며, 언월은 이공자를 따르는 모양새였다. 마지막 망월은 삼공자가 아닌, 총관의 수족들이나 다름없었다.
 총관 금자생의 능력도 그렇지만 그를 얻으면 망월도 고스란히 손에 쥘 수 있다. 더더욱 금자생에게 목을 맬 수밖에 없는 현실적 이유가 된다.
 보주의 세 아들들은 서둘러 사람을 시켜 새롭게 들어온 무사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총관이 그저 할 일 없이 일을 벌인 건 아닐 터, 촉각을 세울 만한 무슨 일을 꾸미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들이 발 빠르게 움직이는 시각.
 왕전은 느긋하게 금자생을 따라 망월의 처소를 방문했다.
 
  * * *
 
 늦은 밤, 궁검보 내 망월의 처소가 환하게 불을 피웠다.
 삼월조의 거처는 중앙에 위치한 보주와 그 혈연들의 처소를 에워싸듯 외곽으로 드넓게 자리했다.
 그중에서도 망월은 북동쪽에 자리를 잡고 궁검보의 후미를 책임졌다.
 다른 건물들과 다르게 구석진 곳에 위치하다 보니, 시끄러울 일이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런데 망월의 처소에 난데없이 소동이 벌어졌다.
 이유인즉슨, 그동안 공석으로 머물던 망월의 조장 자리가 드디어 주인을 찾았다는 소문이 흘러들어 온 탓이다.
 그동안 내심 내부 승진을 갈망하던 부조장 공노지를 비롯해 망월의 호기로운 무사들은 실망을 금치 못했다.
 그렇다고 불평을 늘어놓는 이는 하나도 없었다. 그들에게 있어 정신적 지주가 되는 총관이 정한 일에 괜히 부산을 떨며 왈가왈부 떠들 수는 없다 여겼음이다.
 “새로 오는 조장이 누군지 아시오?”
 망월의 지낭智囊을 자처하는 모개毛改가 공노지의 곁으로 다가갔다.
 망월의 너른 수련장에 두루 모인 조원들 모두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면서도 귀는 공노지 쪽으로 쫑긋거렸다.
 “몰라, 인마.”
 공노지가 퉁명하게 대답했다.
 평소 그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으나, 모개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망월에는 질책을 아끼지 않는 금자생이 유일하게 칭찬을 마다하지 않는 사람이 모개다. 그만큼 눈치가 보통을 넘어선 그에게, 공노지의 행동은 확실히 수상쩍어 보였다.
 “아는 모양인데?”
 모개가 손가락으로 공노지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평소였으면 감히 하늘 같은 부조장의 몸에 손을 대냐며 불호령을 쳤을 공노지가 오늘은 웬일인지 조용했다.
 ‘설마······ 혹시 그놈인가?’
 공노지는 낮에 봤던 희멀건 얼굴을 떠올렸다.
 호리호리한 몸으로 자신의 주먹을 가볍게 막았던 일 하며, 단숨에 복부를 진탕시켰던 그 괴력까지 덩달아 기억이 났다.
 “끄응.”
 자신도 모르게 앓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맞은 자리가 지금도 욱신거리는 착각마저 들 정도로 충격이 컸다.
 공노지의 행동이 심상치 않자 모개를 비롯한 다른 망월의 조원들이 슬그머니 공노지 곁으로 몰려들었다.
 “뭐야, 이놈들아!”
 개미 떼처럼 몰려드는 모양새가 수상쩍어 공노지가 일갈을 내뱉었다. 원체 자주 접하다 보니 몇몇 움찔하는 이가 있었지만, 대부분은 대수롭지 않게 받아넘겼다.
 “왔소!”
 처소의 담장 너머에 나가 있던 조원 하나가 부리나케 달려왔다.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쏠린 건 자명한 일.
 뭔가 대단한 것이라도 본 것처럼 우쭐거리던 조원이 은근한 어조로 자신이 본 걸 풀어 놓았다.
 “총관께서 이쪽으로 오고 계시오. 옆에 낯선 이가 하나 있던데, 아마 그치가 새로 올 조장인가 보오.”
 망월의 막내나 다름없는 여상呂尙 녀석의 보고에 다른 조원들 모두 기대 어린 눈빛으로 저만치 떨어진 문을 힐끗거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림자가 일렁거리더니 총관 금자생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뒤를 따르는 낯선 이도 있었으니.
 ‘역시 저놈이었던가!’
 공노지는 익숙한 그 얼굴을 보며 오만상을 찌푸렸다.
 “모두 다 모였나?”
 금자생이 망월 무리를 향해 다가왔다. 웅성대던 장내가 삽시간에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보주 할아비가 온다 할지라도 들어 먹지 않을 위인들이 총관에게는 조상님 모시듯 조심스러운 모습을 보였다.
 “공 부조장.”
 금자생이 공노지를 불렀다.
 그의 딱딱한 어조에서 공노지는 느낄 수 있었다. 또 자신이 무슨 실수를 했음이다.
 다행히 이번에는 무엇을 잘못했는지 미리 짐작할 수 있었다. 바로 눈앞의 저 왕전이란 놈 때문일 테다.
 “네, 총관 어른.”
 공노지가 일어나 앞으로 다가갔다.
 쿵쾅거리며 지축이 울릴 법한 체구답지 않게 조심스러운 발걸음이었다.
 지켜보는 조원들 사이에서 킥킥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공노지가 발끈해 보지만, 차마 사달을 벌이지는 못했다.
 “수고했네. 망월조장께서 자네를 좋게 보신 모양이야.”
 “네?”
 따끔한 훈계를 기다리던 공노지에게 뜻밖의 칭찬이 전해졌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을 지으며, 자연히 왕전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자신을 향해 싱긋 웃는 젊은 놈의 얼굴이 시야에 확 들어왔다.
 아마도 쭉정이 놈이 돌려 말한 모양이다. 지금 상황에서는 고마워해야 마땅한 일이나 웃는 낯짝이 마음에 들지 않아 잠시 가슴 한구석에 묻었다.
 “자, 모두 주목.”
 금자생에게 모든 시선이 모였다.
 “망월조는 예전부터 조장의 자리는 공석으로 비웠다. 오래전 이미 너희에게 사정을 전한바, 이분이 누구이신지 다들 알고 있으리라 믿는다.”
 금자생에게는 죄송한 말이오나 망월조원들은 그 말을 선뜻 이해하지 못했다. 망월에 조장이 없는 이유는 그만한 실력을 갖춘 이가 없어서라는 말도 안 되는 얘깃거리밖에 더 있었나.
 모두 그렇게 생각할 때, 누군가 탄성을 터트렸다.
 “아, 혹시?”
 그중에 그나마 기억이 제대로 박힌 인물이 있었다. 모개였다.
 “요산에서 오신다는 그분입니까?”
 금자생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너밖에 없다는 흐뭇한 시선에, 모개가 나이답지 않게 히히히 소리 내며 웃었다.
 이어 공노지에게 옮겨진 금자생의 시선, 거기엔 책망의 빛이 강하게 서려 있었다.
 ‘그걸 잊고 있었다니.’
 공노지가 그 기억을 떠올린 건 왕전과의 일이 있은 직후였다.
 금자생이 요산과 인연이 있다는 건 익히 들어 아는 사실이나, 이후 자주 접할 기회가 없다 보니 그동안 까마득히 잊고 지냈다. 뒤늦게 아차 싶어 봤더니 이미 일은 벌어진 뒤다.
 애당초 망월은 궁검보에 어울리는 무사들이 아니었다.
 앞선 두 조가 궁검보의 비전무학을 체계적으로 익힌 정통이라 보는 것과 달리, 망월은 굴러먹던 놈들을 한데 모아 급조한 조직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쭉정이들을 이만큼 키워 낸 게 바로 총관 금자생이다.
 사람들은 그의 진실된 힘을 알지 못했다.
 망월의 조원들조차 함부로 입에 올리지 못하는 그 힘은, 솔직히 궁검보 제일 고수라는 삼월조의 두 조장들조차 하룻강아지로 만들 것이란 얘기가 망월 내에서 은연중에 나돌 정도였다.
 망월을 정식으로 삼월조에 편입시키던 당시 총관은 말했다. 요산에서 자신보다 더 대단한 분이 오시는 날, 망월은 진정한 보름달이 되어 어둠을 밝힐 것이라고.
 그게 벌써 오 년 전 일이었다.
 일 년 전의 일도 깜깜하게 생각하는 공노지인데 오 년 전의 일을 번뜩이는 것은 초원에서 염소 똥 개수 세는 것만큼이나 쉬운 일이 아니라며 스스로를 위안했다.
 그래 본들, 금자생과의 오붓한 독대는 피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렇다. 이분이 바로 이 몸의 작은주인이시자, 너희가 목숨을 바쳐야 할 그분이시다.”
 왕전은 사람들의 시선을 느끼며, 여전히 입가에 떠오른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자신이 챙겨야 할 사람들이 생겼다는 것.
 처음에는 마냥 귀찮다고 여겼는데 막상 닥치고 보니 기분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
 “왕전이라 한다. 앞으로 잘 부탁해.”
 짧은 자기소개에 숨 죽이며 있던 조원들이 하나같이 천둥 같은 함성을 내질렀다.
 궁검보 전체가 들썩일 정도로 소리가 컸지만, 망월 거처의 담장 너머에는 고즈넉한 적막만 흘렀다.
 지이잉.
 소리에 반응을 보이며 허공에서 기이한 울림이 일었다.
 어둠에 가려 보이지 않으나, 투명한 막이 망월의 거처를 둥그렇게 감쌌다. 금자생이 펼쳐 놓은 진법이 어떤 말소리도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게끔 사전에 철통같이 막아 버린 것이다.
 “정식으로 임명을 받으신 겁니까?”
 조원들 중의 하나가 궁금하다는 듯 묻는다. 금자생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곧 전체 회의가 열리겠지만 그건 염려할 필요 없다. 이미 보주의 재가를 받은 것이나 다름없으니.”
 뒤로도 조원들의 물음은 계속되었고, 금자생은 귀찮은 기색 하나 없이 대답을 해 주었다.
 그리고 공노지는 그제야 자신이 무사 모집에 동원되었던 내막을 깨달았다.
 사실 무사 모집을 할 이유는 없었다. 그건 확실하다.
 그저 왕전이라는 새로운 조장을 궁검보에 들이는 데 명분이 필요했음이다. 무사 모집은 단지 그것을 만들기 위한 요식행위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단지 자신의 사람을 들이기 위해 거창하게 소문을 냈던 것은 아무리 총관이라 할지라도 월권이나 다름없었다. 그럼에도 누구 하나 금자생의 행동에 시시비비를 따지는 사람은 없었다. 사전에 그런 얘깃거리가 나오지 못하도록 틀어막은 것이리라.
 거기다 만약을 대비해 공노지를 움직였다. 망월의 새로운 조장을 미리 살피라는 일종의 배려와 함께 망월 이외의 자들이 괜한 구설을 만드는 것을 차단하고자 했음이다.
 성정이 그렇고 그런 공노지와 사달을 벌일 인물은 궁검보 내에서도 몇 되지 않는다. 금자생은 공노지가 치른 무사 모집이라면 누구도 이렇다 군소리를 내뱉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이 금자생의 생각대로 흘러갔다. 금자생의 설명과 함께 무사 모집의 속사정도 대략 밝혀졌다.
 의문이 풀린 탓일까, 사람들의 말수가 조금씩 잦아들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일단 궁금한 건 다소 해소된 모양새였다.
 한동안 침묵을 지키며 조용히 있던 공노지가 조원들을 대신해 마지막 물음을 던졌다.
 “앞으로 어쩌실 요량이오?”
 사내라면 마땅히 포부가 있어야 하는 법.
 공노지는 정확히 왕전의 눈을 보며 대답을 종용했다.
 “별거 없어.”
 이번만큼은 금자생이 아니라 왕전이 직접 대답했다.
 거침없이 흘러나오는 맑은 음색에는 어떠한 두려움도 느껴지지 않는 호쾌함이 담겨 있다.
 “우선 궁검보를 정리하고, 남창 일대를 장악한다. 어쭙잖은 잔챙이들을 모두 걸러 낸 뒤······.”
 두근두근.
 왕전의 계획은 모두의 예상에서 가볍게 벗어났다.
 그럼에도 공노지를 비롯해 모든 망월조원의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헛소리라 하기에는 너무도 당차다.
 더구나 총관 금자생이 작은주인이라 떠받드는 존재가 아닌가.
 진탕되는 가슴 한구석에서 뻗어 나온 오싹한 전율이 몸서리치듯 전신을 옭아맸다.
 “제천회를 우리가 접수한다.”
 제천회의 이름이 등장하면서, 고조되었던 분위기가 막힌 둑이 무너지듯 펑 하고 폭발했다.
 왕전은 웃고, 금자생은 감복했으며, 망월조의 모든 이들이 말도 안 되는 헛소리에 전율을 느꼈다.
 
 왕전은 궁검보를 장악하기 위해, 우선 후계 구도에 있어 좋은 먹잇감이라 불리던 망월을 거저 얻었다.
 제천회에 다가서기 위한 첫 행보가 조용히 시작된 것이다.
 
 
 
 # 三章
 
 
 
 궁검보의 하루는 여느 날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잠깐 반짝했던 무사 모집에 관한 일들은 무사들 사이에서 술안줏거리로 곱씹힐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총관의 독단과 합격한 한 명의 무사에 대한 이야기가 내부적으로 돌긴 했지만, 보주의 허락이 있었다는 뒷얘기와 세 아들들이 문제 삼지 않으려는 움직임을 보이면서 그마저도 흐지부지 넘어갔다.
 그보다 왕전은 망월의 새로운 조장이 되었음에도 궁검보 어디에서도 그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다.
 총관의 엄명으로 당분간 망월 내에서도 쉬쉬거렸다 한들, 보의 주요 인사들마저 이를 모르진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얘기가 없다는 건 다소 의외였다.
 그보다 호위를 섰던 이들의 입을 통해 공노지가 낭패를 보았다는 소문만이 바람에 흩날리는 꽃잎처럼 궁검보 안에서 넘실거렸다.
 “이놈의 자식들을 그냥!”
 그 소문은 결국 당사자의 귀에까지 전해졌다.
 공노지가 노발대발 들고 일어서자, 망월의 무사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어 그를 뜯어말렸다.
 뿔난 황소를 진정시키고 나자 모두 한시름을 놓는다.
 “너무 열 내지 마쇼. 망월에 해가 된다면 총관께서 진즉에 막으셨을 테지. 그냥 그러려니 하고 내버려 둡시다.”
 “뭐, 인마?”
 망월에서 공노지 다음으로 불리는 우모치優模治가 옆에 달라붙어서는 복장을 박박 긁었다. 공노지가 발끈하자 슬그머니 자리를 피하려는 것이 더 얄밉다.
 “근데 조금 이상하지 않소? 총관께서 이런 얘깃거리를 그냥 두시는 게 말이오.”
 “그러고 보니 어째 소문이 다른 것들보다 더 빨리 퍼지던데? 하루 사이에 공 부조장 귀에까지 들어왔다는 건, 궁검보 안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알았다는 얘기잖아.”
 조원들이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가만 듣고 있자니 공노지도 이상하단 생각이 들긴 했다.
 “그런데 왜 내 앞에서 그 얘기를 자꾸 꺼내고 지랄이셔들?”
 이들의 행동은 마치 당사자가 열불이 나 죽으려는데 그 앞에서 냅다 기름을 퍼붓는 것과 다를 게 없었다.
 이럴 거면 처음부터 말리지나 말든가.
 “이런 몹쓸 머리들 같으니라고.”
 듣고 있다가 답답했던지, 모개가 공노지의 울화는 가볍게 무시하고는 대화에 끼어들었다.
 “다 조장 때문이잖아.”
 사람들이 그게 무슨 말이냐는 눈으로 모개를 쳐다봤다.
 “잘 들어 봐, 이 친구들아. 대뜸 무사를 모집한다고 사람 하나를 뽑았어. 그런데 며칠 안 있어 그 사람이 망월의 조장이라고 하네. 댁들 같으면 가만히 있을까? 아니지. 생짜배기 하나를 들여서 조장이라 시키니, 망월을 두고 손가락질하는 놈들도 있을 게 자명한 일!”
 듣고 보니 또 그렇다.
 총관 금자생이 아니라면, 자신들조차 선뜻 왕전을 조장으로 인정하진 않았을 것이다. 지금이야 공노지마저 제압한 실력까지 알았으니 반대할 이유가 없지만, 그게 아니라면 분명 내부에서 무슨 얘기가 돌았을 게 뻔하다.
 “그 말인즉슨, 새로 들인 무사가 공 부조장보다 강하다는 걸 미리 저들 머릿속에 집어넣는다는 말이지? 나중에 내가 망월의 조장이오 하며 떡하니 나타나도 수긍할 수 있도록 말이야.”
 “그렇지. 우모치가 그래도 머리가 좀 돌아가는구먼.”
 모개와 우모치가 마주 보며 껄껄 웃었다.
 “결국 그놈, 아니 그 조장 하나 제대로 앉히려고 날 이용했단 말인가?”
 “어쩌겠소. 이미 우리 모두가 충성을 맹세한 분인데 그 정도는 감내해야지.”
 모두가 옳다며 이구동성 소리친다.
 그 꼴들이 보기 싫어 공노지는 자리를 피하려고 몸을 일으켰다.
 “마침 있었네.”
 그때 공노지의 앞으로 일의 원흉! 왕전이 처음 모습 그대로 태연하게 걸어왔다.
 “오셨습니까.”
 공노지를 제외한, 자리에 있던 망월의 조원들이 모두 왕전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됐어. 그보다 공 부조장.”
 “네?”
 “나 여기 구경하고 싶은데, 자네가 안내 좀 하면 안 될까?”
 “······지, 지금 말입니까?”
 이상한 소문이 절정에 달한 이때에 궁검보 내부를 활보한다?
 생각만으로도 절로 몸서리가 쳐진다.
 “조장님, 부조장은 좀······.”
 모개가 잽싸게 달려가 사정을 전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왕전의 입가에 짓궂은 미소가 서렸다.
 “그래도 어쩔 수 없어. 총관이 공 부조장에게 부탁하라고 하던걸.”
 “하아.”
 맑은 하늘에 어울리지 않는 한숨 소리가 새어 나온다.
 결국 공노지가 결정을 내렸다.
 “갑시다.”
 그의 우락부락한 어깨가 오늘따라 유난히 처량해 보였다.
 
  * * *
 
 “여어, 이게 누구야. 공 부조장 아니신가?”
 공노지는 왕전을 이끌고 궁검보를 돌아다녔다. 만나는 사람들마다 족족 수군덕거리는 통에 그들의 말소리가 귀에 못처럼 박힐 정도였다.
 그럼에도 공노지는 참고 또 참았다. 공연히 화를 내 저들의 장단에 맞춰 주고 싶은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런데 이번만큼은 그 생각을 곱게 접어 하늘 위로 날려 버렸다. 눈앞에 나타난 망할 종자를 보고 난 직후의 일이다.
 망월과 함께 삼월조에 속하는 언월.
 그곳의 부조장 심병춘沈炳春이 알은체하며 다가왔다.
 삼월조가 궁검보의 힘이라 불리지만, 기실 그들 사이에는 묘한 거리감이 존재했다.
 현월은 대공자의 수하를 자청하며 궁검보 최강이라 자부하는 높은 콧대를 지녔다. 당연히 언월과 망월을 향한 시선 또한 평등이 아닌, 아랫것을 보는 정도다.
 언월은 그곳 조장의 성격 탓에 오로지 힘을 숭상한다.
 그들이 이공자를 택한 건 별다른 이유가 없었다. 대공자는 자신들과 맞지 않고, 삼공자는 척 보기에도 영 아니다. 결국 남아 있는 이공자를 선택했는데, 그것이 지금까지 줄곧 이어져 왔다.
 대공자를 견제하는 이공자의 입장 탓에 언월도 자연히 현월을 맞수로 여기고 있었다.
 그에 반해 망월은 언월조차 자신들의 아래로 여겼다.
 언월의 심병춘은 평소 특히 망월의 부조장이자 조장 대리의 역할을 하는 공노지를 아니꼽게 보는 인물 중 하나였다.
 심병춘이 뜬금없이 나타나 길을 가로막는 것이, 마치 소문을 주워듣고는 비웃으려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더 열불이 나는 공노지다.
 “낄낄, 네놈 젖비린내 나는 녀석한테 깨졌다며? 어디 가서 궁검보 이름 들먹이지 마라. 쪽팔린다, 이 새끼야.”
 “좋게 말할 때 저리 가시지. 지금 기분 별로니까.”
 공노지가 나지막이 뇌까렸다.
 다른 놈은 몰라도 심병춘에게만큼은 저런 소리를 듣기 싫다. 하는 행동도 못마땅한데, 자신을 두고 매번 이상한 짓거리나 해 댔으니 좋게 보일 리 만무했다.
 “침 질질 흘리면서 살려 달라고 빌었다며? 거기 가랑이에 달라붙은 거 떼 버려. 사내새끼가 고작 어린놈한테 맞고 짜는 게 말이 되냐?”
 작정을 하고 왔는지 심병춘의 말은 거침이 없다.
 왕전은 옆에서 그저 두 사람을 지켜봤다.
 두 사람은 서로 티격태격 말다툼을 벌이더니 급기야 검을 빼 들기 직전까지 가면서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지켜보는 입장에서 말리는 게 당연한 일이나, 왕전은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굳이 자신이 아니더라도 누군가 두 사람을 제지할 것이다.
 “멈춰라.”
 지금처럼 말이다.
 “에이, 쌍!”
 짧은 한마디에 김이 팍 샜다는 얼굴로, 공노지와 심병춘이 인상을 썼다. 단정한 외모의 삼십 대 중반의 검수가 나타나자 보인 반응들이다.
 나타난 이의 이름은 언소백彦昭栢.
 대공자의 측근인 현월의 조장이 직접 자리에 나타났다.
 “두 사람, 보 내에서 대련을 제외한 싸움은 불허함을 모르는가?”
 낮지만 힘이 있는 목소리다.
 은연중에 깔려 있는 권위에 찬 말투 또한 남달랐다.
 “여긴 웬일이시오?”
 심병춘이 퉁명하게 물었다.
 언소백은 아니꼬운 눈길로 그를 쏘아보더니 이내 시선을 돌려 왕전을 바라보았다.
 “대공자께서 찾으신다. 따라와라.”
 왕전을 대하는 언소백의 언행에 공노지가 발끈했다.
 “이보······.”
 “그러죠. 안내해 줘요.”
 왕전이 공노지의 말을 자르며 대답했다.
 공노지가 왜 물러서냐는 눈빛을 보내지만, 왕전은 가볍게 무시했다.
 “주제 파악이 빠르군.”
 반대로 언소백은 왕전의 반응에 흡족해했다.
 당최 알다가도 모를 상황에 공노지는 어떻게 대응하지 못하고 하는 수 없이 왕전의 뒤를 따랐다.
 “잠시만.”
 심병춘이 언소백과 왕전의 앞을 가로막았다.
 “이게 무슨 짓이지?”
 언소백이 차가운 어조로 심병춘을 노려보았다.
 심병춘은 찔끔거리며 한발 물러서면서도, 또박또박 자신이 할 말을 꺼냈다.
 “저 애송이는 우리가 먼저 데려가야겠소.”
 그 역시 왕전을 가리켰다.
 애초에 왕전을 데리고 오라는 명을 따라 왔다가 공노지가 보이자 잘 만났다 싶어 냉큼 시비를 건 것이었다.
 “가소롭군. 그게 지금 나한테 하는 말이렷다.”
 “그럼 이 자리에 언 조장 말고 또 누가 있소?”
 “호기가 지나치면 오히려 독이 된다는 걸 군양이 말하지 않더냐.”
 “흥, 언 조장이 입에 담을 이름은 아닌 것 같소?”
 처음 물러서던 기세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심병춘의 눈에 투쟁심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냉랭한 비소를 터트리며, 언소백이 검파에 손을 가져갔다.
 “괜한 사달 만들지 말고 그냥 이공자한테 직접 찾아뵙는다고 전해.”
 이번에는 왕전이 두 사람을 막았다.
 대뜸 말을 놓는 왕전의 행태에 심병춘은 인상을 쓰다가 이내 코웃음 치는 소리와 함께 휙 몸을 돌려세웠다.
 언소백이 나선 이상 자신이 힘을 내세울 수 없음을 모르지 않는다. 왕전의 제안에 군소리 없이 따른 것도, 그 정도면 자신의 본분을 다했다고 생각했음이리라.
 “따라와라.”
 언소백은 자리를 떠난 심병춘의 행동이 여전히 못마땅한 눈치였으나, 더 이상 그에 관해 따로 언급하지 않았다.
 그리고 왕전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길이 없던 공노지는, 뒤를 따르는 내내 그 의중을 생각하기 바빴다.
 그러는 사이 일행은 대공자의 처소에 도착했다.
 착착.
 현월의 무사들이 언소백을 발견하고는 절도 있게 예를 올렸다.
 기백 넘치는 모습에 공노지가 부러운 듯 바라봤다. 애석하게도 망월에서는 단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일이다.
 “주군, 그를 데려왔습니다.”
 엄연히 궁검보주가 살아 있음에도 언소백은 대공자를 주인이라 칭했다.
 어찌 보면 상당히 불경스러운 일이나, 현재 궁검보에서 이를 두고 죄를 논할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게 더 큰 문제였다.
 “뫼시라 하십니다.”
 처소의 문 앞을 지키고 있던 무사가 대신 대답했다.
 언소백이 고개를 끄덕이며 왕전에게 눈길을 보냈다. 냉큼 들어가지 않고 뭐 하냐는 추궁의 눈빛이었다.
 피식.
 왕전은 그 모습에 소리 없이 웃었다.
 같이 있던 공노지는 그 웃음을 보며 순간 몸에 소름이 돋는 느낌을 받았다.
 자신도 저 웃음을 본 적이 있다. 기억을 떠올리니 복부에서 다시금 통증이 이는 듯 착각마저 들었다.
 왕전은 성큼 언소백의 옆을 지나쳤다.
 “호기가 지나치면 독이 된다고 했지? 그런데 말이야, 너무 콧대가 높은 것도 그리 좋은 게 아냐. 그러다 보면 언제고 부러트릴 사람이 나타나기 마련이거든.”
 낮은 목소리는 오로지 언소백의 귓가에만 전해졌다.
 “뭐라?”
 언소백이 그답지 않은 모습으로 낮게 소리쳤다.
 눈썹 끝이 꿈틀거리는 것이, 여간 화가 난 게 아니다.
 툭.
 왕전이 그런 언소백을 주먹으로 쳤다.
 사람들의 이목을 숨긴 교묘한 동작이었으나, 다른 사람은 몰라도 공노지는 똑똑히 그 광경을 지켜봤다.
 “읍!”
 숨이 멎을 것만 같은 충격은 지금도 잊히지가 않는다. 그저 가볍게 느껴졌던 주먹에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충격을 받지 않았던가.
 언소백도 분명 그런 통증을 느낄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도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이 고통스러워 보였다. 그런데 공노지가 지난번 당했을 때보다 반응이 더 격해 보이는 건 단순한 착각일까.
 왕전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태연히 대공자의 거처로 걸음을 옮겼다.
 공노지는 귓등으로 들려오는 현월 무사들의 말소리를 무시한 채, 망연자실한 얼굴로 왕전과 언소백을 번갈아 살폈다.
 ‘저게 무공이야, 사술이야?’
 지금 그의 머릿속으로는 왕전이 보였던 기이한 힘에 대한 의구심밖에 들지 않았다.
 공노지가 멍하니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든 사이, 왕전은 대공자의 처소로 성큼 들어섰다.
 
  * * *
 
 “대체 그게 뭡니까?”
 왕전이 대공자와 만나고 이공자를 찾은 뒤에야 공노지가 품고 있던 의문을 내비쳤다.
 “뭐가?”
 “그 주먹 말입니다.”
 공노지가 왕전의 손을 가리켰다.
 “아, 이거?”
 그제야 왕전이 배시시 웃으며 알은척을 한다.
 무슨 말만 했다 하면 웃는 것이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나, 그보다 급한 건 과연 주먹의 정체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었다.
 단순히 권공拳功이라 치부하기에는 아무래도 이상한 점이 많았다.
 “혹시 사술을 부리는 거 아닙니까?”
 “어, 맞아.”
 왕전이 순순히 수긍했다.
 귀를 기울이던 공노지의 얼굴이 시뻘겋게 변했다. 왕전이 자신을 놀린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대저 무공을 익힌 무인이라 하면, 자신의 무공을 두고 사술이니 허접스럽니 하면 기분이 상하기 마련이다.
 뭔가 특이한 것만 눈에 뜨이면 가장 먼저 나오는 것이 사술 운운하는 말이다. 배움이 얕고 경험이 미천한 이들이 종종 주절거리는데, 실제로 무인들 중에 사술을 부리는 자는 극히 드물었다.
 사술이 무엇인가.
 단어 그대로를 생각하면 남을 속이는 수단이란 말이다.
 무림에서는 무리武理에서 벗어난 전혀 다른 힘으로 통용된다.
 당연히 그런 게 있을 리 만무했고, 있다손 치더라도 사악한 술수로 무공을 대체하는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왕전의 주먹 어디에서도 이상하다는 느낌은 받지 않았다. 이러니 사술이라고 시인하는 왕전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대답하기 싫으면 싫다고 하십시오. 멀쩡한 놈 앞에 두고 약 올리는 것도 아니고, 진짜.”
 “이거 진짠데.”
 공노지의 골이 난 얼굴을 보며 왕전은 피식 웃었다.
 어차피 조만간 망월 전체를 두고 얘기를 할 생각이다. 그때 가면 모두 알게 될 테니, 벌써부터 약 오른 수하의 기분을 맞춰 주려 괜히 입이 아플 필요는 없다 여겼다.
 “이제 볼일도 다 봤으니 그만 돌아갑시다.”
 궁검보를 둘러보는 것이야 진즉에 끝이 났다. 두 공자들이 부르는 통에 시간이 지체되었으니 이제는 처소로 돌아가는 게 당연한 수순일 터.
 “아직 한 군데 남았다.”
 “또 어디를요?”
 공노지가 신경질적으로 반응했다.
 “저기.”
 왕전이 손으로 한 곳을 가리켰다.
 공노지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손가락의 끝을 정확히 살폈다. 손가락이 향하는 곳은 궁검보의 막내, 삼공자의 처소였다.
 “사, 삼공자?”
 어찌나 놀랐던지 입안에서만 돌던 말이 사정없이 흘러나왔다.
 대공자나 이공자에 비해 별 볼일 없는 작자가 바로 궁검보의 삼공자다.
 내세울 수 있는 건 형들보다 나이가 어리다는 것뿐.
 그마저도 연륜을 운운하는 어른들에게 씹어 먹힐 좋은 먹잇감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자를 찾겠다니.
 그것도 부르지도 않았는데, 먼저?
 “참말입니까?”
 “난 농은 좋아해도 허언은 하지 않아.”
 왕전의 표정에는 진심이 묻어났다. 그러니 더더욱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에이! 갑시다, 가.”
 머리 아프게 생각할 게 뭐가 있으랴.
 공노지는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왕전을 이끌고 삼공자의 처소로 향했다.
 그 뒤를 따르는 왕전의 눈가에 묘한 빛이 일렁거렸다.
 그것은 삼공자와 마주하면서 더욱 짙어졌다.
 
  * * *
 
 조양선趙楊先은 왕전이 자신을 찾아온 영문을 알지 못했다.
 애당초 세력이며 능력 모두 다른 두 형들에 비해 현저히 떨어진다. 거기다 삼월조의 무사들은 고사하고, 그를 위해 일을 하겠다는 이들조차 많지 않았다.
 간신히 삼월조에 들지 못한 수하 십여 명을 두었지만 이들도 그에게 충성을 한다고 믿을 수는 없는 게 당금의 현실이다.
 총관이 무사 모집을 한다기에 반짝 관심을 보였지만, 그를 대신할 눈과 귀가 부족하다 보니 제대로 알 길이 없어 미련을 버렸다.
 보주가 유난히 아낀다는 막내일지라도, 삼공자의 위치는 손에 쥐이는 건 아무것도 없는 빈자리나 매한가지였다.
 어릴 적부터 아버지의 자리가 몹시 탐이 났다.
 권력욕?
 조양선도 처음부터 그런 게 있었던 건 아니다. 그저 어릴 적부터 형들이 그 자리를 노리는 것을 지켜보며 그것이 마치 대단한 것인 양 알고 지낸 것이 전부다.
 나이가 들면서 자신의 행동이 얼마나 유치한지 깨달았다.
 하지만 유치한 그 행동에, 욕심이 생겼다.
 마치 자신은 그럴 능력이 없는 무능한 사람처럼 여기는, 주변 사람들의 시선에 발끈해 더더욱 보주 자리에 연연하게 되었다.
 하지만 막상 욕심을 부리기 시작하니 두 형들을 대적할 방도가 선뜻 보이지 않았다.
 맏이라는 명분을 갖춘 큰형과 형제들 중 유일하게 검술에 재능을 보인 작은형과 달리, 조양선은 아무것도 할 줄 아는 게 없었다.
 형제들과의 까마득한 차이를 실감하니 점점 자신감이 사라졌다. 이제는 포기해야 하나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한계를 절감했다.
 그런 차에 왕전이 나타났다.
 그가 먼저 자신을 찾았다는 사실에 막연한 기대감을 가졌다. 사그라지던 심지의 불씨가 다시금 타오르는 것처럼, 그의 가슴에서도 조금씩 불씨가 피어올랐다.
 “농담이 지나치십니다.”
 왕전을 바라보며 조양선이 짐짓 겸양을 떨었다.
 그의 외형은 겉보기에도 다른 두 형들에 비해 왜소하기 짝이 없었다. 체형도 그렇거니와, 마주하면서 전해지는 느낌 또한 평범함을 넘어서지 못했다.
 그래서 왕전은 다른 형제들이 아닌, 조양선이 마음에 들었다.
 금자생의 의견대로 이만하면 자신의 생각대로 움직이기에 제격이었다.
 “아까운 시간 허비하면서 농담 따위를 하려고 온 게 아닙니다.”
 “허면, 정말 내게 힘을 주신다고요?”
 왕전이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 하하하.”
 조양선이 웃음을 터트렸다.
 저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손사래까지 치며 한참을 웃었다.
 “하하, 미안합니다. 여태껏 들어 보지 못한 말인지라, 힘을 보탠다는 말이 너무 낯설게 느껴져서 말입니다.”
 웃음의 여운이 남은 채로 조양선이 말을 이었다.
 “그런데 혼자서 힘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약간은 비꼬는 어조이나, 그의 입장에선 능히 그럴 수 있는 물음이다. 내심 왕전이 자신을 두고 장난을 친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누가 혼자라 했습니까? 망월이 공자를 도울 것입니다.”
 왕전이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망, 망월이요?”
 웃음이 나와야 하는데 오히려 쏙 들어갔다. 그만큼 기가 찼음이다.
 조양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고스란히 얼굴에 드러나 보였다.
 “들어와.”
 왕전이 밖에 있는 공노지를 불렀다.
 드드륵.
 문이 열리고, 공노지가 들어왔다.
 그를 알아본 조양선의 눈동자가 방울만큼 동그랗게 변했다.
 “정······말입니까?”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농담이 아니라고.”
 왕전이 손짓하자 공노지가 복잡한 얼굴을 감추며 조양선 앞에 부복했다.
 “앞으로 망월이 공자를 보필할 겁니다.”
 “하, 하하.”
 다시 웃음이 나왔다.
 이번에는 의미가 조금 달랐다.
 기뻤다. 가슴이 뛰고, 머리 뒤끝이 쭈뼛거릴 만큼 전율을 느꼈다.
 가슴속에 피어나던 불씨가 조금씩 주변을 밝히는 기분이다. 보이지 않던 깜깜한 주변이 조금씩 형체를 갖추는 느낌이 드는 것만 같았다.
 “당신은 대체 누굽니까?”
 총관이 들인 무사 왕전.
 그것이 조양선이 알고 있는 왕전의 전부였다.
 “망월의 조장 왕전입니다.”
 왕전이 조양선과 눈을 맞추며 특유의 밝은 미소를 보였다.
 순간이지만 왕전의 눈동자가 붉게 변했고, 마주하던 조양선의 눈가에도 옅은 붉은 기가 맴돌았다.
 “흐흐흐.”
 조양선의 웃음소리가 묘하게 변했다. 공노지는 눈치채지 못했지만 왕전은 알 수 있었다.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왕 조장.”
 조양선이 스스럼없이 손을 내밀었다.
 “저야말로.”
 왕전은 거침없이 그 손을 마주 잡았다.
 
 
 
 # 四章
 
 
 
 궁검보의 대회의장.
 병색이 완연한 보주로 인해 그동안 싸늘한 바람만 불던 대회의장이 오랜만에 궁검보 사람들의 열기로 북적거렸다.
 상석에 비스듬히 누운 노인을 중심으로 좌측에는 총관 금자생과 노년의 가신들이, 우측으로는 궁검보의 세 공자들과 삼월조를 비롯해 궁검보를 지탱하는 무사들의 수좌들이 자리했다.
 하얗게 센 머리카락만큼이나 흰 옷자락을 늘어뜨린 채, 궁검보주 조강趙鋼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모두 들으오.”
 “충!”
 잔잔하던 공기에 힘찬 파동이 일었다.
 조강은 그 힘을 온몸으로 느끼며, 파리해진 얼굴 사이로 한 줄기 만족감을 드리웠다.
 “무릇 자리란, 오래 비워 둘수록 그 빈자리가 크게 느껴지는 법이오. 보의 자랑인 삼월조가 그동안 혁혁한 공을 세웠음에도 내 마음 한구석이 허전하지 않았던 날이 없었소.”
 조강은 길게 말을 하기 힘들었던지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내 이를 슬피 여겨 총관을 재우쳤음에, 작금에 이르러서야 그 자리에 어울리는 새로운 주인을 찾을 수 있었소. 이런 기쁜 소식을 그대들과 함께 나누고자 하니 모두 박수로 망월의 조장을 환영해 주기 바라오.”
 “충!”
 “망월조장은 들라.”
 낮지만 위엄이 서렸다.
 넓은 대회의장에 작은 반향反響이 일었고, 굳게 닫혔던 문이 열리면서 궁검보의 무복을 차려입은 왕전이 성큼 안으로 들어섰다.
 저벅저벅.
 힘찬 발걸음으로 조강의 앞에까지 다가갔다.
 노신들의 얼굴에는 못 미더운 기색이 은연중에 내비쳤고, 세 공자들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저마다 의미심장한 얼굴로 왕전을 주시했다.
 무사들의 수좌들 중에서는 왕전과 일면식이 있는 현월의 조장 언소백이 노신들과 다를 바 없는 눈빛으로 새로운 이를 견제했다.
 “망월조장 왕전, 보주께 인사드립니다.”
 왕전이 예의를 갖춰 고개를 숙였다.
 신입 무사임을 감안한다면 무릎을 꿇고 예를 보이는 것이 옳으나, 궁검보에서 삼월조장은 장로와 비견되는 권위를 지녔다. 원래대로 순차를 가졌다면 문제가 없겠지만, 단번에 망월조장에 올랐으니 어느 것을 택하든 애매하기는 매한가지였다.
 못마땅한 자들에겐 이 역시 좋은 힐난의 대상이나, 조강이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으니 대신해 나설 수도 없는 요량이다.
 그사이 왕전은 고개를 들고 궁검보주 조강을 바라보았다.
 ‘늙은 호랑이군.’
 젊을 적에는 혈기왕성한 성격으로 주변을 휘젓고 다녔으며, 나이가 들면서는 주변에서 감히 눈을 붙이지 못할 위엄을 보이며 궁검보를 탄탄히 이끈 사람이다.
 지금은 병환 중이라 볼품없는 모습이나, 이 자리의 누구도 그런 조강을 가벼이 여기지 않는 것을 보면 확실히 난사람임이 분명했다.
 ‘당신이 키워 놓은 이곳, 잘 써먹고 저치에게 돌려주지.’
 왕전이 세 공자들을 힐끗거리며 만면에 미소를 띠었다.
 “신임 망월조장의 나이가 올해 열아홉이라 했던가?”
 조강이 기분 좋은 얼굴로 말문을 열었다.
 “네, 보주님.”
 “허허, 정말 대단해. 그렇게 젊은 나이로 저 험궂은 놈과 대적했다니. 말로만 들어선 믿을 수가 없군그래.”
 우측 가장 말석에 웅크리고 서 있던 공노지의 어깨가 꿈틀거렸다. 자신을 두고 하는 말이라 화가 나면서도 쪽이 팔려 제대로 낯을 들 수가 없었다.
 “과찬이십니다.”
 왕전은 짧게 겸양을 떨었다.
 “아닐세, 아니야. 공노지라면 삼월조에서 능히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고수가 아닌가. 자네에 대한 기대가 크네. 앞으로 망월을 잘 좀 부탁함세.”
 “성심을 다해 받들겠습니다.”
 왕전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던지 조강은 연신 마른 웃음을 터트렸다.
 웃음이 그치자 조강은 다른 이들과 인사를 나누도록 배려했다.
 왕전은 금자생과 가벼운 인사를 나누었고, 가신들의 날 선 축하에 매번 자신을 낮췄다. 대공자의 덕담과 이공자의 화통함을 뒤로하고, 삼공자와는 짐짓 짧은 인사로 대신했다.
 대회의장의 모든 이들과 한차례씩 인사를 나눈 왕전은, 앞으로 자신의 자리가 될 우측으로 향하며 주위를 쓱 훑었다.
 이들 모두가 궁검보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중 자신에게 도움이 될 자들과 아닌 자들을 구분했다.
 짧은 시간이지만 결정에 있어서 길고 짧음은 그리 중요치 않았다. 어차피 금자생이 오랜 세월 공을 들여 적절히 인선을 마련했다. 결정을 내리는 것이 쉬운 이유다.
 ‘총관 뜻대로 하죠.’
 왕전은 금자생에게 눈짓을 보냈다.
 금자생이 알겠다며 미약하게 고개를 움직였다.
 대회의장에 드리웠던 잠깐의 정적을 깨고, 노년의 가신들 중 장로 심학수沈鶴秀가 성큼 한 발짝 앞으로 나왔다.
 “보주께 한 말씀 아룁니다.”
 반백의 머리만큼이나 연륜이 묻어나 보이는 주름살이 곱게 굴곡을 그렸다. 조강과 함께 궁검보에 평생을 바친 인물이나, 그동안 직접 나서서 발언을 한 적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말해 보시게.”
 조강의 허락이 떨어지자 심학수가 평온한 빛으로 대답했다.
 “삼월조는 보의 근간이라 해도 모자람이 없습니다. 이들은 앞으로도 보를 위해 충성을 다해야 마땅하나, 이를 위해선 서로를 믿고 협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생각합니다. 오늘 새로운 망월의 조장이 왔으나 이 자리에 모인 대부분이 뜬소문만 접했을 뿐 그의 진실된 모습을 보지는 못했습니다.”
 “허면?”
 조강이 짧게 반문하자, 심학수는 더욱 자세를 낮췄다.
 “삼월조 다른 조장들의 의견을 받아, 망월조장의 실력을 보의 무사들에게 내보일 필요가 있다 사료되옵니다.”
 화기애애하던 대회의장의 분위기가 삽시간에 찬물을 쏟아부은 것처럼 싸늘하게 식어 갔다.
 그에 반해, 왕전은 자신을 두고 하는 말인지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아니, 마치 그러길 기다렸다는 것처럼, 어느새 입가에는 알게 모르게 은은한 미소까지 머금었다.
 궁검보의 장로 심학수.
 그는 금자생의 막역한 지우知友이자, 두 사람의 계획을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이들 중 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이 시벌 놈의 새끼들 같으니라고.”
 공노지가 씩씩거리며 망월의 처소로 들어왔다.
 낮 시간의 일과를 보내던 망월의 조원들이 무슨 일인가 고개를 돌리다가, 그게 공노지인 걸 확인하고는 이내 무시하고 일상으로 돌아갔다.
 “무슨 일 있소?”
 평소 사소한 일이라도 궁금한 건 알아야 직성이 풀리는 모개가 그의 곁으로 접근했다.
 “조장이 정식으로 임명됐다.”
 “그건 잘된 일이잖소. 그런데 얼굴은 왜 우거지상이시오?”
 “같잖은 늙은이들이 되도 않는 소리를 하잖아.”
 주변에 있던 조원들이 그제야 공노지에게 관심을 보였다.
 평소 혼자서 헛짓을 하던 것과 달리 이번 일은 망월과 관련이 있는 사안이었다.
 “가신들이 뭐라고 합디까?”
 근육질의 상체를 훤히 내보인 채로, 우모치가 냉큼 다가왔다.
 궁검보주 조강과 젊은 시절을 함께 보냈던 이들은 나이가 들자 장로라는 신분으로 보주의 가신으로 눌러앉았다. 개중 몇몇은 나름 신망을 받고 있지만, 대부분이 권력에서 손을 떼지 않으려는 노년의 고집으로 옹골찬 사람들이었다.
 “실력을 안 봐서 인정을 못 하겠단다.”
 “임명됐다면서? 그럼 끝난 거 아냐?”
 우모치가 모개를 향해 의문을 띄웠다. 모개도 그것까지는 모르겠다는 얼굴로 공노지의 입을 바라볼 뿐이다.
 “보주께서는 당연히 임명을 하셨지. 이 몸을 꺾은 사람인데 응당 그 정도는 돼야 하지 않겠어?”
 이제는 제 입으로 꺾었다는 말을 저렇게 서슴없이 하다니.
 모두의 시선에 잠시 민망함을 느꼈던지, 공노지가 헛기침을 하고는 이내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이 가신들이 실력을 확인할 때까지 임시를 붙이자고 하잖아. 그래서 총관께서는 삼월조 내에서 비무를 벌이자 제안하셨고, 보주께서도 이를 허락하셨다.”
 “호오라, 그럼 우리 저놈들이랑 싸우는 거요?”
 우모치가 공노지의 얘기에 반색하고 나섰다.
 그동안 할 일 없이 빈둥대던 나날의 연속이었는데 오랜만에 괜찮은 거리가 생겼으니 기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으랴.
 기실 이런 반응을 보인 건 우모치뿐만이 아니었다. 망월의 다른 조원들도 눈을 반짝이며 공노지의 말을 반겼다.
 “흥, 좋기도 하겠다. 너희가 저놈들 상대가 된다고 생각하냐?”
 공노지의 비웃음에 모두 입을 씰룩거렸다.
 같은 삼월조이지만 다른 두 조와 달리 망월이 제대로 대우를 받기 시작한 건 몇 년 되지 않는다.
 총관을 통해 그에 못지않게 힘을 키웠다고는 하지만, 궁검보의 절학을 이전부터 익힌 다른 두 조에서 보기에는 여전히 자신들보다 몇 수 뒤처진다고 여기는 게 작금의 현실이다.
 공노지가 언월의 부조장 심병춘과 대등한 실력을 보이면서 그나마 그런 풍토가 많이 누그러졌지만, 아직도 저들의 뇌리에는 그런 생각이 지워지지 않았을 터.
 공노지는 그것을 빗대어 조원들의 속내를 들쑤셨다.
 “그게 뭐 겁난다고! 하면 되잖소!”
 우모치가 당당히 외쳤다.
 평소 몸보다 머리 쓰기를 즐기는 모개 또한 그의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만만하게 볼 게 아냐, 인마. 삼월조가 돌아가면서 붙는 게 아니라 저쪽 두 개 조를 우리 망월이 상대해야 하는 거라고.”
 “뭐, 뭐요?”
 조원들의 안색이 대번에 굳어졌다.
 다른 조와 맞붙어도 뒤지지 않을 거란 자신감도, 그것이 하나가 아닌 둘이란 말에 소리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총관께서는 그냥 보고 계셨소?”
 “오히려 부추기셨지.”
 이게 웬 날벼락이란 말인가!
 망월의 유일한 버팀목이라 할 수 있는 금자생이 그런 결정을 내리도록 도왔다고?
 “우리도 문제지만 공 부조장은 어떻소?”
 “뭐가?”
 “병춘이 그놈 하나 잡는 것도 버거운데 현월의 만성이 놈은 어찌 상대하려오?”
 “그러니까 시벌이지. 아, 짜증 나.”
 공노지의 얼굴이 괴상망측하게 일그러졌다.
 “어쩌긴 어째. 모두 잡아 족쳐야지.”
 망월의 조원들이 말도 안 되는 이야깃거리로 웅성거리는데 그 자리로 왕전이 소리 없이 다가왔다.
 “조장!”
 모두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그 말이 흘러나왔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는 몰라도, 왕전을 높이는 게 이상하리만치 자연스러웠다. 자신들도 자각하지 못하는 사이에 벌어진 일이라 누구도 이를 이상히 여기는 사람이 없었다.
 그나마 낯부끄러운 첫 대면을 가졌던 공노지가 유일하게 어색해했지만, 그건 표현의 문제일 뿐 마음은 다른 이들과 전혀 다르지 않았다.
 “모두 얘기들 들었지?”
 “이건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잠자코 있던 모개가 나섰다.
 혼자서 생각이 많은 만큼, 이것이 얼마나 불합리한 일인지 누구보다 잘 알았다.
 “안 되면 되게 만들어야지.”
 왕전은 태연히 대답했다.
 “설마요.”
 공노지가 옆에서 초를 치듯 고개를 내저었다.
 딱.
 왕전의 가벼운 손놀림이 공노지의 뒤통수를 스쳤고, 공노지는 눈알이 튀어나올 듯한 얼굴로 고통스러워했다.
 “이거 엄살일까, 아니면 진짜 아픈 걸까?”
 왕전이 넌지시 묻는다.
 장난이라 하기에는 그 모습이 너무도 현실감이 있어 누구도 의심을 하지 못했다. 그나마 공노지 자리를 호시탐탐 노리던 우모치가 호기롭게 말했다.
 “엄살이죠, 뭐.”
 “뭐? 에잇!”
 아픈 와중에도 공노지가 우모치를 노려봤다.
 “그럼 직접 경험해 보면 알 테지.”
 왕전이 우모치에게 다가가 공노지에게 했던 것과 똑같이 손을 휘둘렀다.
 “컥!”
 공노지보다 더 격한 반응이 우모치의 입을 통해 흘러나왔다.
 모두 믿기지 않는 광경에 숨을 꼴딱 삼키며 그저 숨 죽이며 지켜봤다.
 “이, 이거 뭡니까?”
 눈가에 눈물까지 글썽이며 우모치가 힘겹게 말했다.
 “사술邪術.”
 왕전이 이전에 공노지에게 했던 것과 동일한 대답을 내놨다. 거짓말하지 말라고 소리치려던 공노지도 이제는 점점 그 말이 괜한 소리는 아닐 거라는 쪽으로 접어들었다.
 “정말입니까?”
 모개가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물었다.
 왕전이 고개를 끄덕이며 손가락을 딱 하고 튀겼다. 그러자 망월의 처소 전체로 투명한 막이 둘러쳐졌다.
 다른 이들이 들으면 안 되는 얘기를 하고자 함이다.
 금자생이 만든 진법을 왕전이 곧잘 사용하는데도 누구 하나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이 없었다. 마치 당연시되는 듯한 분위기 속에서 왕전이 말을 이었다.
 “총관이 너희에게 강해지라며 가르쳐 준 게 있을 거야.”
 망월의 조원들은 처음에는 저마다 어쭙잖은 실력을 지닌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그들을 한데 모아 금자생이 하나의 비법을 전수했는데, 왕전이 지금 그걸 얘기했다.
 금자생의 뿌리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것이라 해서, 망월 내에서 이른바 요산기樂山氣라 불리는 그것은 망월의 조원들에게 부족한 내공을 대신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덕분에 궁검보의 무공을 뒤늦게 익혔지만 다른 조에 크게 뒤처지지 않는 수준까지 도달할 수 있게 되었다.
 “사실 그것도 일반적인 무공의 궤와는 다르지 않아? 사람들이 말하는 사술처럼 말이야.”
 곰곰이 생각하니 그 말이 맞다.
 요산기는 일반적인 내공심법과 달랐다.
 굳이 운기를 통해 내공을 쌓지도 않는다. 그저 자신들이 한데 모여 있으면 차곡차곡 힘이 쌓였다.
 다만 서로가 느끼는 기운이 한계에 도달하면 그 정도가 미약해지는데, 지금 망월의 조원들이 그런 상태에 근접해 있었다. 그러니 발전도 더디고, 여전히 다른 삼월조의 경쟁자들을 뛰어넘지 못하는 것이다.
 “나도 총관과 같은 곳에서 왔으니 사술을 부리는 건 당연한 일이잖아. 안 그래?”
 웃음 짓는 얼굴과 달리 왕전의 몸에서 거대한 기운이 끓어올랐다.
 평범한 사람들은 느끼지 못할, 기에 민감한 자들도 이질적인 기분이 들 뿐 자세한 건 알지 못하는 신묘한 힘이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왔다.
 다른 이들은 몰라도 망월의 조원들은 이것을 잘 안다.
 금자생이 처음 자신들에게 건네주었던 바로 그것, 요산기다!
 다만 그 힘은 엄연히 차이가 있었다.
 금자생의 것이 고요한 연못이라면 왕전은 굽이치는 급류와 흡사했다.
 그 힘이 어찌나 거칠게 날뛰던지, 피부로 느끼는 동시에 숨이 멎을 것만 같은 거대한 압박이 모두를 뒤덮었다.
 “흐윽!”
 그중에서 가장 성취가 빨랐던 공노지가 다른 이들보다 더한 고통을 느꼈다. 성취가 빠르다는 건 그만큼 느끼는 것도 많다는 것이고, 그것이 공노지를 더욱 힘겹게 만들었다.
 “어때, 짜릿하지?”
 이미 금자생을 통해 경험했던 일이나 그때보다 더한 고통에 모두 어렵사리 고개를 내저었다.
 왕전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점차 기운을 갈무리했다. 그제야 모두 거친 호흡을 하며 한결 편하게 숨을 몰아쉬었다.
 “하루에 두 번씩, 나흘 동안 계속해서 반복한다. 그럴 일이 없어야겠지만, 만의 하나 나중에 힘쓸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 꾸준히 수련해서 강해지자고.”
 이미 다른 삼월조와의 비무가 결정된 상황에서 왕전은 애매모호한 말을 꺼냈다.
 하지만 당장 누구 하나 그 말을 귀담아듣는 이가 없었다. 왕전이 발산한 기운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그들의 정신은 벅찰 지경이었다.
 아직 약관도 되지 않은 소년이지만, 망월의 조원들이 느끼는 왕전의 모습은 그야말로 태산과도 같았다.
 궁검보주가 그저 진흙 뭉치로 여겨질 정도이니, 생각에 따라선 두렵기까지 했다.
 “모개.”
 왕전의 부름에 지척에 있던 모개가 조용히 다가왔다.
 다리는 아직 후들거리지만, 다행히 호흡은 안정되어 말을 하는 데 별 무리는 없었다.
 “사람들 눈을 피해서 어디 좀 다녀와야겠다.”
 “어딜 말입니까?”
 “내가 하려고 했는데, 지금 여길 두고 가기가 좀 그렇잖아.”
 왕전은 모개만 알도록 다음 말은 전음으로 대신했다.
 어차피 다른 이들은 몸속에 차오른 막대한 요산기에 정신을 차릴 새도 없었지만, 왕전은 그럼에도 신중히 말을 전했다.
 모개가 놀란 얼굴로 급히 고개를 숙이는 걸 보면서, 왕전은 씩 웃으며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그러자 진탕되듯 노닐던 기운이 잠잠해질 뿐만 아니라 마치 자신이 원래 가지고 있었던 것처럼 빠른 속도로 몸속의 기운과 융화되었다.
 “감사합니다, 조장!”
 아직도 힘겨워하는 동료들과 달리 모개는 단번에 그 과정을 지나쳤다.
 금자생도 이 정도의 신묘한 힘을 내보였던 적은 없음을 상기한다면, 왕전의 실력이 얼마나 높은지 도무지 가늠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감사는 뭘, 어차피 다 필요한 일인데.”
 모개가 깊숙이 고개를 숙이는 걸 가볍게 지나치며, 왕전은 장난기 다분한 눈으로 주변을 쓱 둘러보며 툭 한마디 내뱉었다.
 “줄 때 제대로 받아먹으라고!”
 그날, 망월의 모든 조원들은 왕전 덕분에 생애 처음으로 과식의 위험성을 누구보다 톡톡히 느끼는 하루가 되었다.
 
  * * *
 
 달무리 진 야심한 시각.
 궁검보에서 꽤 떨어진 으슥한 강가로 사내의 그림자가 일렁거렸다. 어둠으로 물들었던 그림자가 달빛을 머금자 삼십 대 초중반 사내의 모습을 그려 냈다.
 그림자의 주인은 설렁설렁 무복을 차려입은 생김새가 꽤나 건들거려 보이지만, 바닥에 남겨지는 일정한 족적은 그가 평범치 않음을 은연중에 드러냈다.
 사내가 걸음을 멈췄다.
 주위 어디에도 인기척이 없음을 확인하고, 품에서 종이를 꺼내 들었다.
 달빛을 머금은 종이 위로 검은 글자가 떠올랐다.
 범인이라면 눈을 가늘게 뜨고 확인을 해야 간신히 보일 정도이나, 사내는 아무렇지도 않게 글자를 읽어 내려갔다.
 
 良禽擇木양금택목
 
 좋은 새는 나무를 가려서 둥지를 튼다는 말이다.
 “자기를 알아봐 주는 주인을 선택하라?”
 사내가 무심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처음에는 허튼소리로 넘기려 했지만, 누가 무슨 의도로 이것을 자신에게 보냈는지 관심이 동했다. 더욱이 지금 사내의 입장에서 보면 꽤나 의미심장한 말이 아닌가.
 이 자리에 온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종이 겉면에 적힌 시각과 장소에 맞춰 왔으나, 여전히 사람의 흔적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오셨습니까?”
 “······!”
 사내는 겉으로는 여전히 무심한 얼굴이나 속으로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느껴지지 않던 기운이 어느새 자신의 바로 등 뒤에서 나타났다.
 이는 상대가 사내보다 고수라는 반증이다.
 “누구냐.”
 평소 그의 성정답게, 두려움은 곧 호승심으로 바뀌었다.
 “망월조장 왕전입니다, 모 조장님.”
 사내, 언월의 조장 모군양毛君陽이 이번에는 놀라움을 숨기지 못하고 급히 뒤를 돌아봤다.
 아직 약관도 되지 않은 나이임에도 삼월조의 하나인 망월조장에 오른 핏덩이가 눈앞에 서 있었다.
 대회의장에서 짧게 인사를 나눴으나, 그때와 지금의 느낌은 분명 달랐다. 상대를 가볍게 여겼던 마음이 사라지고, 대신 그에 대한 의문으로 가득 들어찼다.
 “이게 무슨 짓이지.”
 노여움이 깃든 한마디.
 왕전은 대수롭지 않은 듯 차분하게 말했다.
 “이미 짐작하고 계셨잖습니까.”
 왕전의 시선이 모군양의 손에 들린 종이로 향했다.
 “주인을 선택하라? 자네가 아직 보의 사정에 어두운 건가, 아님······.”
 “알면서도 그러는 거죠.”
 왕전이 이어 말하며 성큼 모군양의 지척까지 다가왔다.
 숨을 쉬면 상대방의 호흡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운 거리.
 그 사이로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자네가 선택한 사람은 누군가?”
 “없습니다.”
 “뭐?”
 모군양으로서는 예상치 못한 대답이었다.
 “그저 셋 중의 한 사람을 이용할 뿐이죠.”
 그제야 왕전이 하고자 하는 말뜻이 온전히 이해가 갔다.
 “삼공자군.”
 재능은 없고 욕심만 많은 삼공자 조양선.
 능력이 모자라니 뒤에서 움직이는 데에도 그만이다.
 그런데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왕전이 자신에게 전했던 종이의 글, 양금택목이 다시금 머릿속으로 떠올랐다.
 주인을 새로 선택하라는 건 이공자를 버리고 삼공자를 선택하라는 말이 아니었다. 그건 삼공자가 아니라, 왕전 자신을 따르라는 의미였다.
 “자네에게 그만한 능력은 있고?”
 “확인해 보시겠습니까?”
 왕전이 태연히 반문했다.
 스르릉.
 모군양은 대답 대신 자신의 검을 꺼내 들었다.
 “이공자에 대한 충정이 보기보다 대단하시군요.”
 “뭐, 충정까지야. 그나마 붙어 있기 편한 곳이라 머무를 뿐.”
 모군양의 한마디에 왕전이 눈을 빛냈다.
 “그렇다면 그냥 오시죠?”
 “그 자리가 볕이 잘 드는 양지陽地인지 끈적거리는 습지濕地인지는 살펴봐야 하지 않겠나.”
 처음과 달리 모군양의 모습에는 여유가 넘쳤다.
 “그래서 실력을 보여 봐라?”
 “왜, 겁이라도 나는가.”
 왕전이 고개를 끄떡이며 짐짓 너스레를 떨었다.
 “눈앞에 흉기가 아른거리는데 겁이 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죠.”
 “거짓말이 서투르군.”
 “그게 또 제 매력입니다.”
 왕전이 웃고, 모군양도 따라 웃었다.
 두 사람이 웃는 와중에 한차례 강바람이 불었다.
 늦은 시각의 서늘한 바람이 두 사람 사이의 열기를 잠시 가라앉혔다.
 스윽.
 그것도 잠시, 왕전이 허리춤에서 덜렁거리던 검을 빼 들었다.
 모군양의 입가에 미소가 사라지고, 식었던 분위기가 점점 달궈지기 시작했다.
 “궁검보의 풍양검風楊劍을 쓰겠네.”
 모군양은 놀랍게도 궁검보에서 가주의 직계들만이 접할 수 있다는 상승무공을 익혔다. 이는 이공자가 언월을 잡고자 내밀었던 뇌물이고, 모군양은 이를 마다하지 않았다.
 굳이 얘기하지 않아도 될, 그것도 비밀로 해야 할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그만큼 최선을 다하겠다는 스스로의 결의나 다름없었다.
 그 뜻을 십분 헤아린 왕전은 입가의 미소를 지우고는 무미건조한 얼굴로 모군양을 다시 마주 보았다.
 
 잠시 후.
 월훈月暈을 머금은 강가의 반짝임이, 날카로운 쇳소리와 함께 어두운 밤 그늘 속에서 여느 때보다 유난히 짙어져 갔다.
 
 
 
 # 五章
 
 
 
 요산기를 힘의 원천으로 삼는 곳.
 사람들은 그곳을 요산이라 부른다. 그래 봤자 아는 사람이라곤 그곳 사람들과 왕전을 제외한 극소수의 인물이 전부였다.
 왕전은 요산의 사람이 되었지만, 정작 그곳에 발을 들인 적은 딱 한 번밖에 없었다.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기 위해 잠깐 찾았을 때가 전부였다.
 스승을 만난 곳은 요마산장妖魔山莊이라는 정체불명의 장소였고, 그 담장 안에서 오랫동안 수련을 쌓았다.
 몇몇 사람들이 요산계주樂山界主라는 우두머리의 말을 무시하고 일탈을 꿈꾸며 요산을 떠나 세상으로 나간 후 요산계주는 다른 이들에 대한 감시를 강화했고, 불만을 가지는 사람들에 한해 세상과 연결된 하나의 문을 열어 주었다.
 요산에서 감당키 힘든 인물들을 밖으로 내몰아 내부의 안정을 챙기려는 목적 또한 있었으니, 이 두 가지가 바로 요마산장이 세워진 이유였다.
 그런 만큼 요마산장의 경계는 요산 못지않게 삼엄했다.
 전체에 거대한 진법이 쳐졌으니, 얼마나 많은 손이 오고 갔는지 짐작하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금자생이 궁검보 내에 일부 펼쳐 놓은 진법과는 차원이 다른 그것은, 외부의 시선을 피하고 내부에서 쉽게 밖으로 나서지 못하도록 제한을 두었다.
 때문에 왕전은 칠 년의 세월 동안 완벽하게 세상과 단절된 힘든 생활을 보내야 했다. 한데 이것이 또한 홍염랑의 시선을 가로막아 주었으니 참으로 공교롭지 않을 수 없었다.
 요마산장을 찾는 사람들이 있듯, 당연히 그들을 감시하는 인물도 따라붙었다. 제아무리 진법이라 할지라도 그들이 마음만 먹는다면 어떻게 뚫지 못한다고 확신할 수는 없는 문제가 아닌가.
 앞서 그런 전례가 있었던 터라 더욱 각별히 주의를 해야만 했다.
 그래서 요산을 나섰던 이가 바로 왕전의 스승, 혈사血邪였다. 요산계주의 절친한 친우이자 그 부인의 오라비라는 존재가 직접 나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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