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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먼 나이트 1권 (1)

2018.01.10 조회 1,224 추천 10


 프롤로그
 와아아아아!
 거대한 함성과 함께 푸른 물결과 검은 물결이 어지러이 뒤섞였다.
 서걱!
 단칼에 검은 투구가 하늘로 치솟았다.
 퍼억!
 “크악!”
 묵직한 방패에 안면을 가격당한 푸른 투구로부터 짧은 고통의 신음과 함께 붉은 핏물이 터져 나왔다. 거기서 끝내지 않고 검은 기사는 피로 물든 검으로 푸른 갑옷을 입은 기사의 목을 단칼에 베어 냈다.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팽팽히 맞선 두 세력의 지옥 같은 전투가 이어지는 전장의 한가운데에서 갑자기 푸른 빛과 함께 푸른 갑옷을 입은 한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빛과 함께 등장한 푸른 기사의 모습에 멈추지 않을 것 같았던 전투가 거짓말처럼 멈추었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은 공간 속에서 푸른 기사가 천천히 검을 뽑아 들었다.
 뜨거운 태양에 비치는 은빛 검신이 은은히 빛을 발했다. 이어 그런 푸른 기사를 향해 한 검은 기사가 피로 가득 물든 검을 든 채 그대로 땅을 박차고 달려 나갔다.
 이윽고.
 파앗!
 푸른 기사가 발로 땅을 구름과 동시에 전광석화와 같이 한 검은 기사를 훑고 지나갔다.
 검은 기사는 언제 지나갔는지 파악조차 하지 못한 채, 그대로 검을 쥔 채 자신을 스치고 지나간 푸른 기사를 향해 몸을 돌렸다. 아니, 돌리려 했다.
 “······.”
 하지만 검은 기사는 몸을 채 돌리기도 전에 상체가 기울어지는가 싶더니 그대로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와아아아!”
 단숨에 검은 기사를 일도양단한 푸른 기사의 모습에 푸른 갑옷의 병사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내질렀다.
 그리고 다시금 시작된 전투.
 푸른 빛과 함께 나타난 푸른 기사는 거침없이 전장을 누볐다.
 누구보다 빨랐고, 누구보다 강했으며, 누구보다 빛났다.
 그의 검에 두려울 정도의 강함을 뽐내던 검은 기사들조차 몇 합을 버티지 못하고 그대로 차가운 전장에 몸을 눕혀야만 했다.
 태양이 산 아래로 사라져 간다. 붉은 황혼 아래 전장은 이미 검은 기사들의 시체로 산을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그 위로 푸른 망토를 휘날리며 붉은 석양을 바라보는 푸른 기사가 있었다.
 푸른 기사는 잠시 석양을 바라보는가 싶더니 이내 뒤돌아 지옥과도 같은 붉은 전장에서 살아남은 푸른 물결을 향해 우렁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승리했도다!”
 “와아아아아아!”
 승리의 함성이 전장에 가득 울려 퍼졌다.
 그와 함께 푸른 기사를 칭송하듯 그의 이름이 전장 가득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병사들은······. 역사는······. 그를 이렇게 기억할 것이다.
 왕의 기사, 혹은······. 서먼 나이트라고.
 B.B 프로젝트
 
 
 
 
 
 
 
 
 
 
 
 “하아······.”
 따분했다. 매일 똑같은 일상.
 그의 이름은 이창준. 스물일곱 살의 꽃다운 나이에 그는 누구나 알 만한 수도권의 대학을 졸업함과 동시에 대기업에 취직했다. 그 이후 탄탄대로를 걸어온 그는 취업한 지 3년 만에 대리에 오르는 쾌거를 이룩했다.
 모두가 그를 부러워했다. 이제 장가만 가면 되겠다는 말들이 들려왔다.
 하지만 창준은 아직 장가를 가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연애야 하고 싶지만, 지금 그는 연애조차 귀찮았다. 그가 갈구하는 건 그런 평범한 것들이 결코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게임을 선택했다.
 그렇다. 창준은 황금 같은 주말에 집에서 홀로 열심히 게임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따분해진 것인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더럽게 덥네.”
 뜨거운 햇살이 싫어 커튼을 쳐 놓고 어두운 방 안에서 선풍기 한 대에 의지해 게임을 했지만, 가만히 앉아만 있음에도 땀이 비 오듯 흘렀다.
 급격히 진행된 지구 온난화로 인해 20년 전보다 평균 기온이 무려 1도가량 올랐다고 하더니, 체감상으로는 1도가 아니라 10도가 더 오른 것같이 더웠다.
 “아······. 이럴 때 게임처럼 마법을 쓰면 얼마나 좋을까?”
 그는 보기에는 그저 평범한 직장인이었지만, 알고 보면 굉장히 마니악한 망상주의자였다.
 그렇다고 그가 남들이 보기에 확 드러나는 행동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가 좋아하는 것은 비단 게임뿐만이 아니었다. 현실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것들. 검, 마법, 초능력 등 영화나 만화, 소설에서나 볼 법한 것들을 끊임없이 상상하곤 했다.
 하지만 그는 상상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창준이 선택한 게 바로 게임이라는 것이었다.
 게임 속 캐릭터는 그가 상상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었다.
 검을 쓰고 싶다면 기사나 전사가 되면 되었고, 마법을 쓰고 싶다면 마법사, 초능력을 쓰고 싶다면 염동술사와 같은 캐릭터를 선택해 플레이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게임마저도 직장을 다니고 나서부터는 좀처럼 할 시간이 나지 않았고, 그는 점점 게임 세상에서 뒤처질 수밖에 없었다.
 온라인 게임은 직장인들을 배려하지 않는다. 게임 폐인들이 강한 건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게임을 하는 사람치고 강해지고 싶지 않은 이는 없었고, 보다 강해지기 위해 레벨 업을 하거나 좋은 아이템을 위한 사냥을 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하지만 창준은 고작해야 주말밖에 할 시간이 없었다.
 그렇다고 그가 어디 게임만 하는가? 소설은 물론, 만화에 애니메이션까지 다 챙겨 본다. 그러니 게임을 할 시간조차 그리 많지 않았다.
 “그냥 게임을 접을까? 쩝.”
 어차피 할 시간도 거의 없었고, 남들은 계속해서 레벨 업을 하고 아이템도 좋아지건만 그는 아직도 제자리걸음이었다.
 어떤 때는 직장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폐인들처럼 게임에만 몰두할까도 생각했다. 꽤 오래전부터 등장한 생계형 게이머라는 것을 해 볼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세월이 흐르고 시대가 변하니 기술력이 발달해 게임 또한 많은 발전을 이뤘다. 보다 현실감 있고, 보다 다양한 소재의 게임들이 개발되니 자연히 게임 산업이 발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사실 창준으로서는 지금의 게임들에 모두 만족할 수는 없었다. 사실 창준은 몇십 년 전부터 비슷한 수준의 게임들에 질려 가고 있었다. 그가 생계형 게이머를 하지 않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아니, 게임은 즐기라고 있는 것 아닌가? 그런데 그런 게임으로 먹고산다면 그건 더 이상 즐기는 게 아니게 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큰 이유는 역시 요즘 게임에조차 만족을 못 했기 때문이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장르 문학 소설을 읽었고 그중에서도 특히 게임 판타지 소설을 좋아했다.
 가상 현실에 접속해 자신의 손으로 화려한 마법을 날린다든가 화려한 갑옷을 입고 중세 시대의 기사들처럼 진검을 휘두른다든가 하는, 그야말로 꿈만 같은 게임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항상 생각했다. 그리고 ‘혹시나 몇십 년 후에는 정말 가상 현실 게임이 나올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도 가져 보았다.
 ‘······가상 현실 게임은 얼어 죽을.’
 그 이후 달라진 건 예전보다 나아졌다고 말하는 그래픽과 안경이나 진동 의자 등의 힘으로 게임을 보다 입체적으로 즐길 수 있는 4D 게임이 출시된 게 전부였다.
 실제로 가상 현실 게임이 실현될 가능성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의견이었다.
 “그래, 소설을 믿은 내가 병신이지.”
 소설로 인한 그의 폐해는 또 있었다.
 모든 소설의 단골손님인 기연을 통해 얻는 수많은 능력들!
 그는 대학 시절 기연을 찾아 여행을 떠난 적이 있었다. 산속은 물론, 동굴이며 인터넷에 떠도는 신비한 곳을 돌아다녔다.
 ‘······기연은 개뿔.’
 세상에 사람의 발이 안 닿은 곳이 없다는 게 딱 맞는다더니 가는 곳마다 사람이 있었고 소설에서나 볼 법한 기연의 기적 따위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상상만 하는 것이 아닌, 그런 것들이 실제로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지독한 망상주의자였다. 하지만 창준의 주변 사람들은 물론이고, 친구며 가족들조차 창준이 그런 망상주의자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창준 또한 알고 있었던 것이다. 게임이며 애니와 같은 것들을 하고 보는 사람들을 세상이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는지를.
 그는 지극히 망상주의자이면서도 남들의 시선을 의식했다.
 세상에서의 그는 지극히 평범하다.
 친구들과 술자리를 가질 때는 여자와 회사 생활의 이야기에 열을 올린다. 사회생활에서 꼭 필요한 술자리에서는 적절히 분위기를 띄우며 비위를 맞추어 준다.
 하지만 창준의 행동들을 자세히 관찰한다면 그가 망상주의자라는 것을 충분히 포착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것은 다른 사람들은 결코 눈치챌 수 없는 자그마한 행동으로 나타났다.
 괜스레 팔을 뻗어 손바닥을 펼쳐 보이거나, 볼펜을 잡고 이리저리 팔을 휘저어 본다거나, 괜히 아무 의미 없이 스텝을 밟아 본다는 식의 알 수 없는 행동으로 상상을 표현했다.
 또한 더울 때는 아이스 필드 같은 게임 속 마법을 속으로 읊조린다. 그리고 왠지 집으로 한 번에 가게 해 주는 텔레포트나, 사자나 호랑이와 비슷한 소환수를 소환하고 싶은 순간에는 여지없이 그의 망상주의적 ‘덕후’ 기질이 드러났다.
 그런 그에게 일상은 언제나 따분할 뿐이었다.
 그렇게 지루함을 느낀 게임을 끄고 컴퓨터마저 끄려던 순간.
 띵동.
 메일이 왔다는 알림음에 컴퓨터를 끄려던 움직임을 멈춘 창준은 별생각 없이 메일함을 열었다.
 ‘또 스팸 메일이겠지.’
 이놈의 스팸 메일은 아무리 지우고 차단을 걸어도 계속해서 온다. 그러다 보니 메일함 관리는 오래전에 그만두었는데, 이참에 정리나 해 보자 하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들어간 메일함.
 
 -새로운 메일 1,531건이 도착했습니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메일함을 열기도 전에 기가 질리게 만드는 메일의 양에 창준의 입에서는 절로 욕이 튀어나왔다.
 “미친······. 염병을 떠네.”
 그래도 딱히 할 일이 없었기에 차근차근 메일을 지워 나가고자 메일함을 연 창준은 메일의 제목을 보면서 헛웃음을 지었다.
 “여고생은 공부하게 좀 놔둬라. 아줌마는 집안일 해야지.”
 쓸데없는 멘트(?)를 날리며 메일을 지워 가던 창준은 어떤 메일에서 마우스를 멈추었다.
 “이게 뭐야?”
 
 -축하드립니다. 귀하께서는 B.B 프로젝트 테스터에 합격하셨습니다.
 
 “B.B 프로젝트······?”
 왠지 진득한 스팸의 냄새가 흐른다. 어차피 스팸 메일의 대부분이 이런 식으로 관심을 끌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내용을 확인해 보고 싶었다.
 그렇게 창준은 메일을 열었고, 내용을 본 순간 그의 얼굴로 의아함이 떠올랐다.
 “뭐지?”
 보통 스팸 메일이라면 사진이나 광고 같은 것들이 뜨기 마련. 그런데 이건 그냥 글자만 적혀 있었다. 그렇다고 내용이 길지도 않았기에 창준의 의혹은 커져만 갔다.
 하지만 그런 의혹도 잠시.
 “이, 이건······.”
 내용을 확인하는 순간, 의혹이 경악으로 변해 갔다. 그리고 유독 한 문장에서 눈을 떼지 못했는데, 창준의 눈에 비친 문구는 그가 그토록 바라고 바라던 꿈과 같은 것이었다.
 “가상 현실 게임이······. 가능해진다고?”
 얼마나 꿈꿔 왔던가. 지루한 일상을 오로지 망상으로 버텨 온 나날들.
 “이거 혹시······. 사기 아니야?”
 막상 가상 현실 게임이 실현될 수 있다고 하니 믿기지 않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렇게 경악에서 의심으로 넘어온 창준은 충격에서 벗어나며 다시금 내용을 읽어 나가던 중, 익숙한 단어 하나를 발견했다.
 “가만. 회사명이······. 우리 회사잖아?”
 창준이 다니는 회사는 대기업이었고, 나름 IT업계에서도 알아주는 곳임에는 분명했다. 하지만 이런 프로젝트를 한다는 소리는 들어 본 적이 없었다.
 “테스터는 또 언제 뽑은 거지? 그리고 난 테스터에 지원한 기억도 없는데?”
 모든 것이 의문투성이였지만 사기라고 하기에는 빈틈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뭐, 가서 확인해 보면 되겠지. 마침 모이는 장소도 회사니······. 사기면 아무도 없을 테고······. 그런데 언제지?”
 어차피 할 일도 없었던 창준이었기에 속는 셈 치고 가 보자 마음먹은 그가 이내 날짜를 확인하더니 서서히 얼굴이 굳어졌다.
 “이, 이거······. 오늘이잖아!”
 일주일 전에 온 메일이었기에 이제야 확인한 창준은 급하게 옷을 챙겨 입었다. 그러고는 컴퓨터를 끌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그대로 문을 나섰다.
 이 메일이 사기일지도 모른다는 우려보다 가상 현실 게임이 실현될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훨씬 더 컸기에 가능한 행동이었다.
 
 
 
 “저, 저기요?”
 좁고 어두운 방 안, 그곳에서 한 남성의 떨리는 목소리가 조용히 울렸다.
 잠시 후.
 파앗!
 “읏.”
 방의 위에서 밝은 빛이 뿜어져 나왔다. 하지만 그 빛은 지극히 좁은 곳만을 비추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빛이 비추는 곳에는 수술대처럼 놓인 침대 위로 한 청년이 누운 채 갑자기 들어오는 빛줄기에 빠르게 눈을 감았다.
 잠깐의 시간이 지나고 빛에 익숙해졌는지 서서히 눈을 뜬 청년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연신 눈동자를 굴리며 불안에 떨고 있었다.
 “저기······. 아무도 어, 없어요?”
 두 동공은 크게 확장된 채 사정없이 움직였고, 떨리는 입술로 내뱉은 그의 말투가 그의 심리 상태가 얼마나 불안한지 여실히 보여 주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청년의 말에 돌아오는 것은 방 안을 맴돌다 돌아온 그의 목소리뿐.
 마치 1분이 한 시간처럼 느껴지는 두려움의 시간 속에 드디어 방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 여여여여기요!”
 청년은 방문이 열림과 동시에 느껴지는 인기척에 다급하게 구원 요청을 했지만, 방 안으로 들어온 존재의 발걸음은 여유롭기만 했다.
 이윽고 발광하는 청년의 앞까지 다가온 존재는 빛이 들어오지 않는 어둠 속에서 입을 열었다.
 “이창준 씨?”
 “예, 제가 이창준입니다! 이것 좀 풀어 주십시오. 이게 도대체 무슨 짓입니까!”
 그 청년은 다름 아닌 창준이었다. 그는 어쩌다 이런 곳에 누워 있게 된 것일까.
 
 창준은 반신반의한 상태로 택시를 타고 빠르게 회사에 도착했다. 사실 의심보다는 기대감이 더 컸던 터라 회사에 도착하면서 긴장감과 함께 주체할 수 없는 흥분으로 빠르게 심장이 뛰었다.
 ‘가상 현실 게임, 가상 현실 게임······.’
 그의 머릿속에는 오래전부터 의심보다는 ‘가상 현실 게임’이라는 단어만이 꽉 들어차 있을 뿐이었다.
 아무튼 그렇게 긴장과 흥분을 가지고 모이라는 장소에 도착한 창준은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 뒤 크게 실망했다.
 “역시 사기였어. 제길······.”
 사기였다는 아쉬움보다 더 큰 상실감을 받은 창준은 홀로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문이 열리는가 싶더니, 흰 가운을 입은 한 중년의 남성이 들어섰다.
 “······어?”
 갑작스러운 남성의 등장에 놀란 표정으로 서 있는 창준에게 그 남성이 다가오더니 서류를 뒤적이며 말했다.
 “흠, 혹시 테스터로 오신 겁니까?”
 “예······? 방금 뭐라고······.”
 “B.B 프로젝트의 테스터 말입니다. 아, 여기 있군요. 이창준 씨?”
 “······.”
 아무도 없을 때까지만 해도 사기인 줄만 알았다. 그런데 막상 이렇게 직접 들으니, 머리에 해머를 맞은 것 같은 엄청난 충격에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런 창준이 답답했는지, 아니면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인지 남성은 서류만을 뒤적거리며 말을 이었다.
 “맞군요. 우선 테스터에 합격하신 것을 축하합니다. 테스트를 시행하기에 앞서 작성해야 할 것들이 있으니, 우선 이 서류를 보시고 사인해 주십시오.”
 그렇게 몇 장의 서류를 건네받은 창준은 애써 흥분을 가라앉히며 서류를 읽어 나가기 시작했다.
 ‘시술 동의서······?’
 테스트를 하러 왔는데 갑자기 웬 생뚱맞은 시술 동의서란 말인가?
 의문을 품고 서류를 모두 읽은 창준은 살짝 얼굴을 굳힌 채 말했다.
 “이 시술이라는 거 말입니다······. 나중에 문제 생기고 그러는 거 아닙니까?”
 사실 동의서에는 이렇다 할 설명이 없었다. 그저 테스트에 반드시 필요한 절차라는 내용이 전부였던 것이다. 게다가 시술이라는 단어 자체가 일단 몸에 손을 댄다는 뜻이었기에 창준이 불안해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하지만 정작 질문을 들은 남성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한 말투로 대꾸할 뿐이었다.
 “단지 컴퓨터를 장착하는 것뿐입니다. 가상 현실을 구현하기 위한 조건이죠.”
 “······그래요? 나중에 문제 생기고 그러는 건 확실히 아니죠?”
 “물론입니다. 여기 서류에 보시면 다 보장되니 걱정 마십시오.”
 “그렇다면야······.”
 남성의 설명을 들은 창준은 조금 망설이는가 싶더니 이내 거침없이 사인을 끝냈다.
 그렇게 간단한 절차를 마치고 창준은 어떤 방으로 인도되었고, 남성의 말대로 시술대 위에 올랐다.
 그런데 갑자기 가죽끈으로 손과 발을 묶는 것이 아닌가?
 “이, 이걸 왜······?”
 “그럼 잠시 뒤에 시술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니, 시술을 하는 건 알겠는데, 왜 묶는······.”
 “잠시만 있으면 시술자가 들어올 겁니다. 그럼.”
 이 남성은 창준의 의사 따윈 안중에도 없는 듯 자신의 할 일만 마치고는 유유히 방을 빠져나갔다.
 
 그렇게 창준은 지금 어둠 속에 가려진 존재가 오기까지 짧지만 억겁과도 같은 시간을 보내야 했던 것이다.
 이번에 들어온 사람은 아까 창준을 이곳에 묶고 나간 남성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죄송해요. 다른 테스터의 시술을 끝내고 오느라 조금 늦었네요.”
 “······예? 다른 테스터요?”
 약간 놀란 목소리로 묻는 창준의 물음에 드디어 어둠 속에 가려졌던 자의 모습이 드러났다.
 검고 긴 생머리에 오뚝하게 솟은 코, 갸름한 턱 선에 조그마한 입술까지······. 연예인보다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젊은 여성이었다.
 ‘우리 회사에 이런 여자가 있었어? 아니, 그보다 여기 진짜 우리 회사 맞아?’
 회사 건물임에는 분명하다. 설마 자기 회사도 못 찾아오겠는가. 물론 그가 다니는 회사라 해도 건물 구석구석까지 가 보았을 리는 없었다.
 “그런데 이건 왜 묶은 겁니까?”
 “아, 혹시나 해서요.”
 ‘혹시나? 도대체 무슨 짓을 하려고······.’
 미소 짓는 여인의 모습은 천사처럼 아름다웠지만, 그녀의 말은 섬뜩하게 느껴졌다.
 “그럼 시술을 시작할게요.”
 “자, 잠깐만요. 그러니까 이건 왜 묶은······.”
 “남자가 그렇게 무서워하면 매력이 없답니다. 금방 끝나니까 그때까지 한숨 푹 잔다고 생각하세요.”
 “잠깐······. 그러니까······. 내······가 왜······.”
 언제 마취를 한 것인지 창준은 희미해져 가는 여인의 모습을 뒤로한 채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여긴 어디?
 
 
 
 
 
 
 
 
 
 
 
 “으음······.”
 멀어졌던 의식이 돌아왔다. 창준이 이제 막 마취에서 깬 탓에 힘겹게 눈을 뜨며 인기척을 냈다. 그러자 그 인기척에 반응하듯 옆으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어났어요?”
 “으음······. 여기는······?”
 “아직 마취가 덜 풀렸나 봐요. 조금 있다가 일어나세요.”
 ‘······마취?’
 여인의 대꾸에 창준이 잠시 생각하는가 싶더니 이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 난 여기 묶여······. 어라?”
 어느덧 창준을 옭아매던 가죽끈은 이미 모두 풀린 상태였고, 창준은 현 상황의 설명을 요구하듯 여인을 바라보았다.
 여인은 창준의 의도를 금세 파악한 듯 웃으며 다시금 입을 열었다.
 “시술은 끝났어요. 왼쪽의 팔목을 보시겠어요?”
 “팔목······? 헛? 이, 이게 뭡니까?”
 여인의 말에 따라 눈으로 왼팔을 타고 내려가던 창준은 이윽고 얇고 가는 은색의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깜짝 놀라며 물었다.
 “어? 이거······. 안 빠지는데요?”
 본드로 붙여 놓은 것 이상으로 피부에 딱 달라붙어 있는 팔찌에 당황한 듯 창준이 묻자, 여인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시술을 한 이유가 이것 때문이에요. 아무래도 그냥은 붙이기 힘드니까요.”
 “그럼 이거······. 못 떼는 겁니까?”
 “시술로 다시 떼어 낼 수는 있어요. 하지만 시술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뗀다면······.”
 “뗀다면······?”
 말끝을 흐리는 여인의 모습에 창준이 조금은 긴장한 표정으로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리고 잠시 후, 그녀에게서 들려온 대답은 창준을 충격에 빠뜨리기에 충분했다.
 “죽을지도 몰라요.”
 
 
 
 창준이 회사를 빠져나왔을 때는 이미 깜깜한 밤이었다.
 꽤 오랜 시간이 흘러서야 회사를 나선 그였지만, 회사에 들어섰을 때와는 사뭇 다른 표정을 짓고 있었다.
 창준은 왼팔에 찬 팔찌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연신 씰룩이는 입가는 주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누가 보면 미친 사람이라고 오해할 정도로 창준의 정신 상태는 심각해 보였다.
 “으흐흐, 히히히.”
 급기야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괴기스러운 웃음소리는 섬뜩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는 모두 창준이 극도의 흥분 상태라 나타나는 현상들이었다.
 기쁨, 환희, 행복······
 이런 단어들이 창준의 표정에서 하나하나 묻어 나왔다.
 “오오오!”
 창준은 팔찌를 보며 연신 감탄을 터트렸다.
 하지만 그가 보고 있는 것이 정확히는 팔찌가 아니었다.
 ‘정말 이거라면 가상 현실 게임도 꿈만은 아니다!’
 불과 몇 시간 전만 해도 시술에 대한 두려움으로 몸서리를 쳤던 그였다. 솔직히 침대에 묶이기까지 했는데 불안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창준 또한 그때만 해도 온 것을 후회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술이 끝나고 이 팔찌의 기능에 대해 듣고 실제로 써 보니 이것만큼 획기적인 물건도 없었다.
 통칭, Brain Link Personal Computer.
 약칭으로는 BLPC, 혹은 BB(Brain Bracelet)라고 불리는 이 작은 컴퓨터는 그야말로 인류가 낳은 가장 획기적인 미래 과학의 산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것은 단순한 다기능 컴퓨터가 아니었다. 이 팔찌의 이름에 브레인이라는 단어가 괜히 들어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브레인 링크.
 이 팔찌에는 미세하고 가는 연결 끈이 있어 장착함과 동시에 신경을 통해 장착자의 뇌와 연결된다.
 그렇다고 이 연결 끈을 통해 컴퓨터의 기능이 뇌로 보내지는 것은 아니다. 철저히 컴퓨터로 입력된 정보만을 바로 뇌로 전달한다.
 이 컴퓨터의 장점은 그뿐만이 아니다. 이 컴퓨터의 모니터는 컴퓨터와 연결된 뇌를 통해 그대로 동공에 투영되면서 장착자의 눈에만 보이도록 되어 있었다.
 따라서 화면에 따른 사생활 침해로부터 보호해 주기도 하고, 입체적 영상으로 보다 현실적인 모니터링을 즐길 수 있게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눈을 통해 어느 제품이나 문제 등을 스캔하여 뇌를 통해 컴퓨터로 전달하면 컴퓨터에서 제품의 정보를 검색하여 보여 주거나 문제를 풀어 주기도 한다.
 인터넷은 물론, 간단한 게임들도 가능하니 창준에게는 그야말로 천상의 컴퓨터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팔찌가 특별한 이유는 현재 창준을 포함한 수 명만이 착용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 팔찌는 전 세계에 발표되기 전 임상 실험(?)을 목적으로 테스터들에게만 특별히 주어진 것이었다.
 문제는 이 팔찌가 한 번 장착된 후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었지만, 방수도 되고 굉장히 튼튼해 부서지지도 않았다. 거기에 가볍기까지 하니 딱히 불편한 점도 없었다.
 다만 단점이라면 매주 개발자를 찾아가 점검을 받아야 한다는 것인데, 그깟 단점쯤은 이 팔찌의 성능이 모두 커버를 해 주고 있었으니 불만은 없었다. 게다가 공짜 아닌가.
 만약 테스트가 무사히 끝나면 이 팔찌는 완전히 창준의 것이 된다.
 “흐흐, 이게 실용화만 되면 가상 현실 게임도 금방 나온다 이거지······!”
 의심과 기대를 품고 들어갔던 회사. 하지만 회사를 나온 창준의 가슴은 기대와 희망을 넘어선 미래의 현실을 품고 있었다.
 그렇게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으로 돌아가려던 순간.
 “어라······? 왜 이렇게 어지럽지? 아직 마취가 덜······. 깼나······?”
 창준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갑자기 정신이 몽롱해지기 시작하더니, 마치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빠르게 정신을 잃어 갔다.
 
 
 
 정신을 잃어 가는 것 같으면서 마치 마약을 투여한 것처럼 몽롱했지만, 이상하게 완전히 정신을 잃지는 않았다.
 하늘에서 내려온 썩은 동아줄이라도 잡고 있는 것 같은 묘한 느낌이 들던 중 갑자기 그의 정신이 수면 위로 빠르게 올라오고 있음을 느꼈다.
 그렇지만 여전히 몸이 뜻대로 움직여지지 않았고 눈조차 잘 뜨이지 않았다.
 분명한 건 죽지는 않았다.
 이상하리만치 강한 풀 내음이 그의 코끝을 간지럽혔다.
 ‘······풀 냄새? 여긴 도시 한복판인데?’
 도시라고 풀이 없는 건 아니지만, 있는 것이라고는 큰 대로와 숲처럼 놓인 빌딩들이 전부인 이곳에 이토록 강한 풀 내음이 나는 건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서서히 몸의 감각이 돌아오듯 조금씩 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감긴 눈으로 강렬한 빛이 스며들어 왔다.
 ‘빛? 분명 밤이었는데······?’
 달빛이 이렇게 강할 리가 없다.
 ‘아······. 자동차 라이트가 있었지.’
 그는 지금 상황을 대충 추리했다.
 갑자기 이유 모를 빈혈에 쓰러졌다. 그 모습을 본 주변 사람들 중 한 명이 119에 신고를 했고 앰뷸런스가 도착했다는 추리가 완벽히 이루어졌다.
 ‘그런데 이 풀 냄새는 도대체 뭐지? 이 주변에 꽃집이라도 있었나?’
 아무렴 어떤가. 아무튼 나름 완벽한 추리에 스스로에게 감탄한 창준은 눈을 뜨려 하다가 왠지 모를 쪽팔림에 그냥 몸을 움직일 수 있음에도 가만히 누워 있었다.
 휘이잉.
 도시에서는 좀처럼 느낄 수 없는 시원한 바람이 그의 뺨을 스치듯 지나갔다. 햇살과 같은 자동차 라이트는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따스했다.
 ‘그런데 왜 안 실어 가는 거지?’
 앰뷸런스가 왔으면 환자를 실어 가야 정상 아닌가?
 그러고 보니 이상한 상황이 또 있었다.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앰뷸런스가 왔는데 그 시끄러운 사이렌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밤만 되면 언제나 정신없는 유흥가가 마치 모두 문을 닫기라도 한 듯 고요하기 그지없었다.
 이상한 점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상하리만치 따스한 땅바닥. 거기다 풀 위에 누워 있는지 폭신하기까지 했다.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한 창준은 쪽이고 뭐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눈을 떴다.
 눈부신 빛에 잠시 시야가 마비되어 주변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빛에 점점 적응해 가면서 주변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
 끝없이 펼쳐진 푸른 평야.
 쏟아져 내리는 따스한 햇살.
 그와 함께 눈앞으로 번쩍이는 은빛 항연.
 “뭐, 뭐야······?”
 ‘내가 미친 건가? 아니면 사후 세계?’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수많은 상상들과 함께 충격으로 멍하니 서 있던 창준의 뒤통수로 알 수 없는 말이 들려왔다.
 “adkjaljlfksl.”
 멍하니 앞을 바라보던 창준은 갑작스러운 여인의 목소리에 퍼뜩 놀라 뒤돌아보았다.
 백옥같이 새하얀 피부. 오뚝하게 솟은 콧날에 갸름한 턱선, 치명적으로 붉고 작은 입술.
 주먹만 한 작은 얼굴을 가진 여인이 푸른 갑옷을 입은 채 차가운 눈동자로 창준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야말로 완벽한 전장의 여신과 같은 포스를 풍기는 여인이 창준을 보며 또다시 무언가 말을 하기 시작했다.
 “afskasldkfsljf.”
 “도대체 뭐라는 거야? 그리고 여긴 뭐지? 영화 촬영이라도 하나?”
 도무지 알 수 없는 것투성이에 믿을 수 없는 이 현실 앞에 순간 ‘내가 미쳤나.’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분명 기분 좋게 회사를 나섰다. 그런데 갑자기 정신이 혼미해지더니 다시 눈을 떠 보니 영화에서나 볼 법한 장소에 서 있다.
 게다가 눈앞의 미녀와 양옆으로 끝없이 이어진 푸른 갑옷의 향연에 창준은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저기요, 여긴 어디죠?”
 이대로 미쳐 있을 순 없어 용기를 내어 미녀를 향해 물었지만, 그녀는 이제 아예 창준에게서 고개를 돌려 오른편에서 말을 타고 있는 중년의 남자에게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afdslfkas. slkfasldf?”
 “Um, Summon Knight sadflskd······.”
 “어? 방금 서먼 나이트라고 한 거 같은데?”
 서로 알 수 없는 말로 대화를 나누는 것을 그저 멍하니 지켜보던 창준이 영어와 비슷한 발음의 단어가 나오자 재빨리 대화에 끼어들듯 물었다.
 그러자 놀란 미녀와 중년의 남성이 창준을 보더니 다시금 알 수 없는 언어로 말을 걸어왔다.
 “salfjdlsak? Summon Knight······?”
 “서먼 나이트? 그게 뭐 어쨌다고? 서먼 나이트가 뭔데? 영화 제목인가?”
 알아듣는 단어라곤 서먼 나이트밖에 없으니 그저 고개를 위아래로 세차게 흔들며 대화를 해 보려 노력했다.
 차라리 영어라면 이해하겠는데, 영단어라고는 서먼 나이트가 전부였고 나머지는 어느 나라의 말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창준의 말을 알아들은 것일까? 갑자기 중년의 사내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뒤를 향해 또다시 무언가를 말하기 시작했다.
 ‘······뭐지?’
 잠시 후, 푸른 사슬 옷을 입은 한 청년이 큼지막한 상자 하나를 창준 앞에 던져 놓고는 다시 무리 안으로 사라졌다.
 “뭐 어쩌라고? 이거 나 준다는 거야?”
 말이 안 통하니 손짓 발짓으로 보디랭귀지를 시전하자 중년의 사내가 용케 알아먹은 듯 다시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꽤나 고급스러워 보이는 상자에 창준은 이 상황에서도 상자 안의 내용물이 굉장히 궁금했다.
 그는 기대감에 천천히 상자에 손을 가져가 조심스레 뚜껑을 열었다.
 그 안에는 눈앞의 미녀나 일렬로 쭉 늘어선 선두의 남자들이 입고 있는 푸른 갑옷과 함께 햇빛에 은은히 빛나는 검 그리고 푸른빛의 방패가 놓여 있었다.
 정교하면서도 고급스러움이 물씬 풍기는 물건들이었지만, 창준은 잔뜩 실망한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이걸 어디다 쓰라고 주는 거야? 설마 나더러 엑스트라라도 하라는 건가?”
 여전히 지금 이곳을 영화를 촬영하는 장소로 알고 있는 창준으로서는 그저 짜증만 날 뿐이었다.
 아무리 고급스러워 보이면 뭘 하겠는가, 창준은 자신이 이곳에 왜 있는지조차 몰랐다.
 하물며 갑자기 바뀐 풍경에 뭐가 뭔지도 하나도 모르는 상황에 이 옷을 입으라면 누가 좋다고 입겠는가?
 물론 그가 줄곧 상상해 왔던 것임에는 틀림없었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이걸 입으라는 건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창준이 상자를 멍청히 쳐다보고만 있자, 중년의 사내가 무언가 뜻을 전달하려는 듯 손을 움직였다.
 “뭐? 이거 입으라고?”
 옷 입는 시늉을 하는 모습에 창준이 단박에 그 뜻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창준은 절대로 이 옷을 입을 생각이 없었다.
 “그러니까 내가 왜 이걸 입어야 되는데?”
 창준이 손짓으로 의문 가득한 의사를 표하자, 중년의 사내는 이윽고 창준에게서 시선을 떼며 전방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뭐야 도대체? 여기 감독 어딨어? 스태프는?”
 영화배우라고 생각한 중년의 사내와의 대화(?)가 끝나자, 창준은 이내 감독이나 스태프들을 찾으려 이리저리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감독이나 스태프는커녕 촬영에 필요한 장비들조차 보이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현대에 볼 법한 물건이나 건물 같은 건 단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허허벌판이라지만 이렇게 아무것도 없을 수가 있단 말인가?
 창준은 어떻게든 이 상황을 파악하려 최대한 머리를 굴렸다.
 ‘아무리 봐도 영화 촬영 같지는 않은데······. 그러면 도대체······. 아! 설마······!’
 갑자기 떠오른 가정. 그것은 바로······.
 “가상 현실 게임?”
 가상 현실이라면 가능했다.
 ‘설마 이 팔찌에는 이미 가상 현실이 구현되어 있었던 것일까? 그런데 어떻게 들어왔지?’
 막연히 가상 현실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생각뿐 모든 것이 의문투성이였다.
 그렇게 창준이 어리바리하게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그때, 멀리서 거대한 고동 소리가 들려왔다.
 뿌우우우우우!
 그러자 푸른 갑옷을 입고 있는 진영에서도 그와 같은 고동 소리가 울려 퍼졌다.
 “뭐, 뭐야?”
 고동 소리가 울리자 선두에 쭈욱 늘어서 있던 말들이 갑자기 투레질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말 위에서 푸른 갑옷을 입은 자들이 검과 방패를 들어 올리며 긴장감을 유발시켰다.
 “어, 어어······.”
 갑자기 변하는 두 진영의 기세에 창준이 당황한 듯 안절부절못하며 서 있을 때 은빛 갑옷을 입은 반대편 진영으로부터 거대한 움직임이 일자 대지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두두두두두두!
 “저, 저거 설마······. 이쪽으로 오는······.”
 그러자 창준이 서 있던 푸른 갑옷의 진영에서 아까 창준과 대화를 나누던 중년의 사내가 검을 들어 올리더니 사자후와 같은 목소리로 외쳤다.
 “asjlfdksflaskdf!”
 “와아아아아!”
 중년 사내의 목소리와 함께 뒤로 거대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자, 잠깐만······.”
 함성과 함께 푸른 갑옷의 진영마저 돌진하기 시작하자, 그 안에 치인 창준마저 그들에게 떠밀려 앞으로 돌진하는 신세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으, 으아아아아!”
 얼떨결에 수많은 병사들 사이에 끼어 돌진하게 된 창준은 온갖 비명을 지르며 자빠지지 않기 위해 냅다 앞을 향해 달려 나갔다.
 그리고 잠시 후, 은빛 갑옷의 진영과 충돌하자 평화롭던 평야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돌변했다.
 서걱!
 “크아악!”
 촤악!
 사방으로 피가 튀어 올랐다. 주인을 잃은 머리가 하늘에 떠올랐다 떨어져 내렸고, 함성과 고통의 절규가 뒤섞여 그야말로 지옥을 방불케 했다.
 “뭐, 뭐야 이거······. 아무리 가상 현실이라지만 이건 너무 리얼하잖아······? 가상 현실인데 이런 건 자체 모자이크 같은 거 안 하는 거야?”
 가상 현실이 무엇인가? 만들어진 세계다. 물론 현실성을 최대한 반영했다면야 이 모든 것들이 당연하겠지만, 이건 수위가 너무 과했다.
 충격에 휩싸인 창준은 떨리는 눈동자로 멍하니 서서 지옥의 현장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런 창준에게 이미 붉게 물들어 버린 은빛 갑옷을 입은 기사 하나가 다가와 섰다.
 “아아······.”
 눈동자의 떨림은 전염되듯 상체를 지나 하체에까지 전달되었다. 서 있기조차 벅차게 후들거리는 다리는 창준의 공포가 어느 정도인지 여실히 느끼게 해 주고 있었다.
 그렇게 창준이 공포로 꼼짝도 하지 못하고 있을 때, 이미 피로 가득 물든 은빛 갑옷의 기사가 다가왔다.
 “나, 난 아니야······.”
 스윽!
 은빛 갑옷의 기사가 서서히 검을 들어 올렸다.
 “으으으······.”
 얼굴로 오는 심한 경련과 함께 공포로 가득 물든 창준이 땅바닥에 주저앉으며 신음을 흘렸다.
 “사, 살려······.”
 난생처음 죽음의 공포를 느낀 창준은 도망칠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그저 얼어붙은 몸으로 은빛 갑옷의 기사를 떨리는 눈동자로 바라보는 것밖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잠시 후······.
 기사의 검이 창준의 두개골 위로 떨어져 내렸다.
 촤아악!
 그렇게 창준의 의식이 다시금 아득히 멀어져 갔다.
 
 
 
 “으아아아!”
 한 미친놈이 회사 앞의 바닥에서 머리를 부여잡고 뒹굴고 있었다. 마치 머리가 쪼개진 것처럼 머리를 부여잡고 회사 주변이 떠나가라 소리를 지르며 바닥을 뒹구는 미친놈의 모습에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뭐지?”
 “어디 다친 거 아닐까?”
 “119 불러야 되는 거 아냐?”
 그렇게 실제로 몇몇 사람은 급하게 119에 신고를 했고, 몇 사람은 조심스레 창준에게 다가가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내 머리! 내 머리가, 내 머리가······. 어?”
 한 남성의 말에 정신을 차린 것인지 바닥을 열심히 뒹굴던 미친놈이 자신의 머리를 이리저리 만져 본다.
 “나 살아 있어······?”
 언제는 혼자 미친 듯이 바닥을 구르며 금방이라도 죽을 것같이 소리를 질러 대더니, 이제는 자신의 존재 자체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냥 미친놈이었네.”
 모여든 군중은 갑자기 멍해진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미친놈을 보며 다시금 제 갈 길을 가기 시작했다.
 “나 정말 살아 있는 거 맞죠? 하하하, 하하하하하!”
 그렇게 몇몇 사람들의 욕설이 들려왔지만 그런 것 따위는 상관없다는 듯 이 미친놈은 그저 미친 듯이 웃어 젖히며 살아 있음을 만끽했다.
 
 
 
 
 “······내가 어떻게 살아 있지?”
 창준은 아직도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이 믿기지가 않았다.
 ‘분명 감촉까지 있었는데?’
 시퍼런 검이 그의 머리를 가르는 순간, 창준은 죽음의 끝에서 그의 삶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자신의 머리를 가른 차가운 검의 감촉이 여전히 머리 위로 남아 있었다.
 자신은 분명 죽었다. 아니, 죽었어야 정상이다.
 ‘설마 여기는 사후 세계인가······?’
 여기가 현실인지조차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창준이 보는 주변의 모습은 분명 이곳이 현실임을 다시 한 번 알려 주고 있었다.
 ‘진짜 가상 현실이었던 거야?’
 따스한 햇살.
 그 끝을 알 수 없는 대평원.
 도시에서는 좀처럼 느낄 수 없는 강한 풀 내음.
 햇빛에 비쳐 더욱 찬란했던 은빛과 푸른빛의 대격돌!
 그와 함께 눈으로 선명히 보이는 붉은 피와 코로 스며드는 진득한 피의 향.
 그리고 인간의 살갗이 베이는 섬뜩한 소리가 여전히 창준의 감각을 자극하고 있었다.
 ‘그게 정말 가상 현실이라고······?’
 얘기 들은 바로는 아직 가상 현실이 구현된 것은 아니었다. 이 팔찌는 아직 미완성된 상태였고, 테스트가 끝나고 실용화되면 가상 현실 게임 개발에 착수할 것이라고 들었다.
 게다가 가상 현실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생생히 느껴지는 감각에 저도 모르게 몸이 떨려 왔다.
 무엇보다 검이 자신의 머리를 파고들 때 느껴진 감각은 그것이 결코 가상이 아님을 알게 해 주었다.
 “그게 가상이 아니면 도대체 뭐냐고?”
 답답한 마음에 소리를 버럭 질러 보았지만, 그 어디서에도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래, 분명 마취가 덜 깨서 헛것이 보였던 거야. 하하하, 그래, 말도 안 되지. 갑옷에 검이라니. 무슨 중세 유럽 시대도 아니고 말이야. 요즘 시대에 누가 갑옷에 검을 써?”
 분명 헛것을 본 것이 분명하다. 아무리 판타지가 좋아 검과 마법이 있는 세계를 꿈꾼다지만, 이 세계는 이미 과학이 모든 것을 지배하고 있다.
 그는 오늘 본 것이 한낱 꿈에 불과하다고 생각해 버렸다.
 “들어가 잠이나 자야겠군.”
 너무 큰 충격을 받은 탓일까, 생각을 정리하니 갑자기 피곤함이 몰려왔다.
 그렇게 창준은 급격히 피로해진 정신을 애써 부여잡으며 집을 향해 무겁게 걸음을 옮겼다.
 
 
 
 집으로 돌아온 창준은 급속도로 몰려오는 피로에 못 이겨 씻기는커녕 옷을 입은 채 그대로 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그가 다시 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이미 해가 중천에 뜬 시간이었다.
 평소에 여섯 시간 이상은 자 본 적 없는 그였지만, 오늘은 굉장히 피곤했는지 무려 평소의 두 배나 되는 시간을 더 잤다. 그래도 덕분에 어느 정도 피로가 풀렸다.
 “하아암.”
 하지만 여전히 찌뿌둥한 몸으로 긴 하품을 하며 침대에서 일어난 창준은 담배 냄새로 절어 있는 옷을 벗고 욕조에 물을 담아 목욕을 준비했다.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니 몸이 나른해지는 게 남아 있던 피로마저 말끔히 풀리는 것 같은 기분과 함께 얼굴로 미소가 번졌다.
 “역시 주말이 최고구나!”
 비록 새벽에 맞은 얼굴이 부어오르기는 했지만, 나른함이 그런 작은 고통쯤은 충분히 잊게 해 주고 있었다.
 하지만 창준은 새벽에 있었던 일들이 아직도 머릿속에서 맴돌고 있었다.
 “하아······.”
 꿈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생생했던 기억.
 영화나 게임에서나 볼 법한 광활한 평야.
 눈부신 햇살에 빛나는 은빛과 푸른빛의 격돌.
 그리고 그 안에서 느낀 죽음의 공포.
 그때를 생각하니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있음에도 한기가 올라오듯 소름이 돋았다.
 꿈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생생하고, 그렇다고 또 꿈이 아니라고 하기에는 무어라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하아, 어차피 꿈인데 내가 뭔 생각을 하는 거지.”
 생각을 털어 내려는 듯 고개를 휘저은 창준은 꿀맛 같은 주말을 어떻게 보낼지에 대한 생각으로 즐거운 휘파람을 불었다.
 “휘휘휘-. 어제는 못 했지만 오늘은 꼭 잡아야지-.”
 그의 유일한 피로 회복제와도 같은 온라인 게임.
 어차피 여자 친구도 없고 딱히 할 일도 없다. 평일에 등골 휘어라 일했으니 주말에는 자신에게 상을 주어도 괜찮지 않겠는가?
 그는 게임을 할 생각에 잔뜩 신이 나 있었다.
 “슬슬 나가 볼······. 으음, 갑자기 왜 이렇게 졸리지?”
 욕조에서 너무 오래 누워 있던 탓일까, 갑자기 몽롱해지는 바람에 창준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리고 보니 이 느낌······.’
 어디선가 느꼈던 적이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런 걸 생각해 낼 정신조차 남아 있지 않은 창준은 이윽고 깊고 깊은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정신이 몽롱해지기 시작했다.
 
 
 
 몽롱했던 정신이 돌아오자 희미한 빛이 창준을 반겼다.
 그런데 무언가 느낌이 이상했다. 분명 그는 따스한 목욕물에 몸을 담근 상태였다. 그런데 이상하게 살갗이 차가웠다.
 “으음, 내가 깜빡 잠들었었······. 응? 뭐야? 왜 내가 바닥에······?”
 “safjlksdjlf?”
 “헉! 누, 누구······?”
 창준은 갑자기 들려오는 목소리에 놀란 듯 헛바람을 들이켜며 목소리의 주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창준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인지 목소리의 주인인 노인은 그저 신기한 표정으로 그를 보며 중얼거렸다.
 “오! sasdkfjlsdksf. slfjalskfsd?”
 노인이 창준의 말을 못 알아듣는 것처럼 창준 또한 노인, 이그리암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이, 이거······. 꿈은 아니지?”
 창준은 지금 상황이 믿기지 않는 듯 스스로 볼을 꼬집었다.
 “꿈이 아니야······?”
 무언가를 자꾸만 중얼거리는 창준의 눈동자는 불신으로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그 모습을 지그시 바라보던 노인 옆의 여인이 이내 손가락으로 창준을 가리키며 말했다.
 “dfds······! sfssdaf?”
 “······응? 뭐라는······.”
 서로 말을 못 알아먹으니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다.
 여인은 짧게 한숨을 내쉬며 대화하기를 포기했고 결국 노인이 나서서 청년에게 보디랭귀지를 통해 의사를 전달했다.
 그런 노인의 모습에 창준은 살짝 인상을 찌푸리면서 보디랭귀지를 해석했다.
 “옷? 옷이 뭐······.”
 ······없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그는 그저 가운데 남자의 상징만을 덜렁거리고 있었다. 벌거벗은 채 절세의 미녀 앞에서 당당히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 순간, 참을 수 없는 부끄러움이 그의 정신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언어를 배우다
 
 
 
 
 
 
 
 
 
 
 
 “······미치겠네.”
 말 그대로 창준은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건데······?”
 그냥 꿈이라고 생각하면 좋겠다. 그런데 지금 상황을 꿈이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현실적이었다.
 창준은 지금 어떤 노인에게 이끌려 방 안에 갇힌 신세가 되었다.
 물론 단순한 안내일지도 모르지만, 지금 창준은 그런 세심한 판단 따위를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꾸욱.
 “악!”
 이곳이 꿈속이라는 가정하에 창준은 여러 가지 시도를 해 보기로 했다.
 다시금 볼을 꼬집는 것부터 시작한 창준은 볼이 얼얼해질 때까지 꼬집어 보았지만 환경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더럽게 아프네. 도대체 여긴 어디냐고······.”
 조금이라도 좋으니 상황 파악이라도 되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지금 창준이 할 수 있는 상황 파악이라고는 주변의 사물들을 보는 것밖에는 없었다.
 방의 내부는 단순했다. 하지만 창준의 눈에는 그 무엇 하나 익숙한 것이 없었다.
 우선 그의 앞에 놓인 투박한 디자인의 나무 탁자와 지금 그가 앉아 있는 나무 의자의 까칠한 감촉이 엉덩이를 매우 불편하게 만들었다.
 창준의 오른편 구석엔 딱 성인 한 명이 누울 정도의 침대와 바로 옆으로 조금은 낡아 보이는 3단 서랍장이 놓여 있었다.
 게다가 창문은 벽의 끝자락에 붙어 있는 것인지 위로 나지막이 작은 빛들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어두운 방의 내부를 양 벽의 옆에 걸린 횃불이 은은하게 비췄다.
 ‘여기······. 감옥인가?’
 아무리 봐도 감옥 같은 분위기의 방에 창준은 점점 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또 보면 감옥치고는 너무나도 깔끔하고 방도 넓었으며 갖출 건 다 갖추고 있었으니 딱히 감옥이라고 보기에도 힘들었다.
 방에서 벌거벗은 채 불안감에 안절부절못하던 창준은 나지막이 심호흡을 하며 중얼거렸다.
 “후우, 침착하자. 일단 여기는 꿈이 아니다. 아무리 봐도 현실이야. 그럼 도대체 여기는 어디지?”
 이미 주변을 파악한 창준은 이번에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파악해 보기로 했다.
 우선 창준은 이곳 사람들과 말이 통하지 않는다. 오로지 몸의 대화를 통해서만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상황.
 “······정말 환장하겠군.”
 뭔 말이 통해야 상황을 파악하든 뭘 하든 해 볼 것 아니겠는가?
 그리고 아까는 워낙 당황스러워 미처 생각지 못했지만, 이곳에서 본 여인과 할아버지의 모습은 다소 충격적이었다. 한국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복장을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입고 있는 두 사람에게서 강한 이질감이 느껴졌다. 같은 인간이건만 마치 외계인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그럴 리가 없잖아!”
 정신을 차려 보려 해도 창준의 마음은 초조해져만 갔다.
 낯선 곳에서의 불안감과 두려움이 그를 무겁게 짓눌렀다.
 자신만의 이런저런 생각에 그의 정신이 점점 미쳐 가고 있을 때 즈음, 방의 문이 열리며 그를 방에 가뒀던(?) 푸른 로브의 노인이 옷가지와 함께 들어섰다.
 “aflskdjflaks.”
 “이거 입으라고요?”
 말이야 당연히 못 알아들었지만, 옷을 건네는 모습에서 충분히 늙은 사내의 뜻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창준 또한 계속 벌거벗은 채로 있기 민망했기에 재빨리 옷을 집어 주섬주섬 챙겨 입기 시작했다.
 중세 유럽 시대에서나 볼 법한 투박한 천 옷을 시작으로 여자들이나 신을 법한 긴 부츠까지 신은 창준의 모습은 나름 봐 줄 만했다.
 무엇보다 옷을 차려입으니 아까의 초조함이 조금은 사라졌다.
 적어도 옷을 주는 걸 보니 자신을 적대한다거나 그런 건 아닌 것 같단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창준의 옷은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았던 빈티지풍의 긴 부츠에 누리끼리한 천 옷이었지만, 그 나름대로 멋이 느껴졌다.
 노인은 그런 창준을 보며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헛기침과 함께 입을 열었다.
 “허엄! afskjlasfa.”
 “저기······. 무슨 말인지 잘······.”
 창준은 최대한 늙은 사내에게 밉보이지 않기 위해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하지만 역시 두 사람은 아무런 말도 알아들을 수 없었고, 결국 보디랭귀지를 통해 서로에 대해 알아보는 방법밖에는 없었다.
 “afdsfs 이그리암safldk.”
 “······이그리암?”
 ‘이그리암’이라는 단어를 유독 세게 발음하는 늙은 사내의 말에 눈치 하나는 빠른 창준이 재빨리 되물었다. 그러자 늙은 사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을 가리키더니 다시금 말했다.
 “이그리암.”
 “아, 할아버지 이름이 이그리암이에요?”
 “라쑤타!”
 “아, 그렇다는 말인가? 라쑤타?”
 “오오!”
 창준이 정확히 그의 단어를 따라 하자 탄성을 지르며 신기한 듯 쳐다봤다.
 왠지 지식을 배우는 원숭이가 된 것 같은 느낌에 창준은 심히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그래도 이렇게 얘기가 통한다는 것이 신기하기도 했다.
 “이그리암? 전 이창준입니다.”
 “리······찬줌?”
 “아니, 이! 창! 준요!”
 “이창준?”
 “오오······. 네.”
 그래도 보디랭귀지로 통성명을 했다는 것이 참 신기하지 않은가?
 아무튼 이렇게 하나의 커다란 벽을 넘자, 창준은 왠지 자신감이 붙었다.
 “여기는 어디에요?”
 창준이 손을 펼쳐 보이며 이곳이 어디인지 물었고 이그리암이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afsdadaf 마를렌 safsdf.”
 “마를렌?”
 그렇게 창준과 이그리암은 어렵게 대화를 이어 갔고 창준은 아주 조금이지만 이곳에 대해 파악할 수 있었다.
 ‘저 할아버지의 이름은 이그리암이고, 이곳은 마를렌이다. 그런데 지구에 마를렌이라는 나라가 있나?’
 마를렌이라는 단어가 나라를 뜻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노인의 말로 추측하기로 이곳이 마를렌이라는 곳이었고 창준의 지식에 마를렌이라는 장소는 없었다.
 그리고 이그리암과 대화를 나누면서 알게 된 사실이 있었다.
 ‘서먼 나이트? 서먼 나이트가 영어라면 소환 기사라는 뜻인데······. 소환 기사? 가만······. 소환? 기사?’
 섣불리 모든 것을 판단할 수는 없겠지만, 지금까지 그가 파악한 대로라면 이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창준이 이그리암과의 대화로 골머리를 썩고 있을 때, 이그리암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문 쪽으로 향했다.
 “어, 어디 가세요?”
 “slafkslkd.”
 창준이 벌떡 일어서며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지만, 이그리암은 그런 창준에게 여기 있으라는 신호와 함께 방문을 빠져나갔다.
 창준은 그런 이그리암을 보며 망연자실했지만, 어디 갈 수도 없었기에 다시금 쓰러지듯 자리에 앉았다.
 
 
 
 “내 피 같은 주말이······.”
 창준이 의자에 몸을 기댄 채 볼록 튀어나온 배 위에 손을 올려놓고 한탄 어린 말을 중얼거렸다.
 지금쯤 방 안에서 그동안 쌓아 둔 욕구를 해결하고 있어야 하건만 어딘지도 모르는 창문 하나 없는 밀폐된 공간에서 죄수처럼 갇혀 있으니 한탄이 나올 만도 했다.
 “······자살이라도 할까?”
 급기야 극단적인 생각까지 들었지만, 창준이 단순히 죽겠다고 그러는 것은 아니었다.
 ‘전에 분명 머리가 갈렸는데 원래대로 돌아갔잖아? 그럼 죽으면 원래대로 돌아갈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럴듯한 가정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 가정이 너무 지랄 맞는단 것에 있었다.
 “그렇다고 자살하는 게 말이 돼?!”
 ‘자살도 용기 있는 놈만이 할 수 있다고······.’
 창준은 스스로 죽고 싶은 마음도, 그럴 용기도 없었다.
 무엇보다 죽었다가 살아난다고 한들 그 기분이 결코 좋을 리가 없다.
 창준은 그때의 머리가 갈리는 감촉을 떠올릴 때면 아직도 몸이 부르르 떨릴 정도였다.
 마치 1분이 한 시간 같다. 감옥에서 독방을 쓰는 죄수들의 심정이 그와 같을까? 사무치듯 밀려오는 고독에 그냥 돌아 버릴 것 같았다.
 그에게는 이 방뿐만 아니라, 이 알 수 없는 세상 모두가 감옥의 독방과 같았다.
 아는 사람도 없다. 그렇다고 말도 통하지도 않는다.
 사람이 있었지만 철저히 혼자가 되어 버린 듯한 느낌은 그를 점점 미치게 만들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끼이익.
 굳게 닫혀 있던 방문으로 다시금 이그리암의 모습이 보이자, 다 죽어 가던 창준의 얼굴이 화색을 띠었다.
 “할아버지!”
 금방이라도 질질 짤 것 같은 얼굴로 이그리암에게 다가오는 창준의 모습은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그 모습에 이그리암은 황당해하면서도 이내 입가로 미소를 그리며 말했다.
 “아무래도 여기는 빛도 들어오지 않으니 좀 그랬겠구먼. 미안허이. 일단 자리를 좀 옮기지.”
 창준은 여전히 이그리암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왠지 미안해하는 표정을 보니 대충 무슨 말을 했는지 짐작이 갔다.
 그렇게 감격하는 그를 향해 이그리암이 따라오라는 시늉을 하며 방문을 다시 나서려 하자, 창준은 이번에도 갇힐까 두려워 냉큼 이그리암의 뒤를 따랐다.
 이그리암의 뒤를 따르면서 창준은 처음보다는 확실히 여유가 생겼는지 주변을 둘러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여긴 전기가 없나?’
 어두운 복도를 비추고 있는 것은 오로지 횃불뿐.
 현대의 필수인 전기는커녕 과학적인 요소는 그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런 창준의 모습을 힐끔거리며 바라보는 이그리암의 두 눈동자에는 호기심이 가득 어렸다.
 긴 복도를 지나던 중 화장실이 가고 싶어 이그리암에게 의사 표현을 하자, 그는 금방 창준의 의사를 이해하고는 화장실로 창준을 데려갔다.
 이윽고 도착한 화장실.
 사실 화장실에 대해 그리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전선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기에 전기가 들어오는지도 의심스러웠고, 거대한 공간을 비추는 것이라곤 전구가 아닌 횃불들이었기에 화장실도 ‘푸세식’일 거라고 막연히 생각했다.
 하지만 화장실에 들어온 창준은 그야말로 입을 떡하니 벌릴 수밖에 없었다.
 의외로 깨끗이 정돈된 화장실의 바닥은 대리석이 말끔히 깔려 있었고, 좌변기는 아니었지만 냄새조차 나지 않았다.
 비록 과학이 발달하지는 않은 듯했지만, 이들 또한 다른 여러 가지 방법으로 생활의 편의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화장실에 감탄하며 다시금 이그리암을 따라 한참을 이동한 창준이 슬슬 건물 내부에 질려 갈 때쯤, 이그리암이 한 방 앞에 멈춰 서며 이내 문고리를 잡고 열었다.
 “······어? 여긴······.”
 이그리암을 따라 방 안으로 들어선 창준은 입이 다시금 떡하니 벌어졌고 돌아가는 눈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영화에서나 볼 법한 거대한 돔 형식의 원형 방이었는데, 빼곡히 들어찬 책들은 장관이 따로 없었다.
 창준이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서재의 책들을 보며 감탄하고 있을 때 이그리암이 그를 향해 손과 입을 동시에 놀리며 말했다.
 “지금부터 자네에게 이곳의 언어를 가르쳐 줄 것이네.”
 그 말뜻을 어림짐작으로 알아들은 창준의 얼굴이 순간 묘하게 변했다.
 ‘말을 가르쳐 주겠다는 건가······?’
 창준은 한국어 이외에 다른 언어는 잘 쓸 줄 모른다. 간단한 영어 회화라면 몰라도 역시 유창한 회화는 할 수 없었다.
 하물며 한국어도 제대로 모르건만 언어를 제대로 배울 수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 나라의 언어를 배우는 것이 매우 중요했다. 어떻게든 상황을 파악하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는 단서를 찾기 위해서는 말이 통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창준은 이윽고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이그리암이 만족스러운 듯 함께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아. 그럼 당장 시작하지!”
 그렇게 창준의 제2외국어(?) 공부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하루하루가 너무나도 길게 느껴지는 시간이 어느덧 한 달이나 흘렀다.
 이제는 체념을 넘어 해탈의 경지에 올라선 것인지 창준의 표정은 그리 나빠 보이지 않았다. 다만 조금 멍한 것이 얼이 빠져 있는 사람 같기는 했다.
 하지만 그로 인해 창준은 날이 갈수록 언어 실력이 늘어났다. 고작 한 달 해서 난생처음 듣는 말을 얼마나 할 수 있겠냐마는 진짜 하루 종일 언어만 배우니 확실히 한눈에 들어올 정도로 실력이 늘었다. 게다가 원어민(?)과의 일대일 과외이지 않은가? 안 늘려야 안 늘 수가 없는 것이다.
 창준의 노력도 노력이었지만 그를 가르친 이그리암의 노력 또한 컸기에 이토록 빨리 언어 실력을 쌓아 올릴 수 있었다. 그리고 오늘, 언어 공부를 마친 이그리암은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창준에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언어 공부는 이 정도면 된 듯싶군. 아직 부족한 점이 많기는 하지만, 그거야 쓰다 보면 차츰 자연스럽게 될 테니······.”
 “그, 그렇다면······!”
 창준의 얼굴에 급화색이 돌았다.
 “음? 뭐가 ‘그렇다면’인가? 언어 공부는 끝났으니 이제 왕국의 역사나 문화 같은 지식을 배워야 하지 않겠는가?”
 “······.”
 입을 굳게 다문 창준의 얼굴은 다시금 검게 죽어 갔다.
 
 
 
 가장 큰 언어의 장벽을 깨고 나니 그다음부터는 언어를 배울 때보다는 훨씬 수월하게 이루어졌다. 어차피 문화나 역사라고 해 봤자 중세 시대와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았기에 어느 정도는 지식을 가지고 있는 창준에게는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자네······. 배움이 굉장히 빠르군.”
 “뭐······. 어느 정도는 알고 있던 것들이었습니다.”
 “호오, 그런가?”
 이제는 제법 자연스럽게 말하는 창준의 모습에 이그리암이 흐뭇한 미소를 그렸다.
 “이 정도면 이제 가르칠 필요는 없겠어.”
 “······저 이제 졸업하는 건가요?”
 “졸업이라······. 허허, 뭐 그렇다고 해 두지. 아무튼 그동안 고생했네.”
 “그럼 저 이제 돌려보내 주는 겁니까?”
 한 달이 넘는 시간 동안 밀폐된 공간에 갇혀 있으니 창준으로서는 미칠 지경이었다.
 그가 그동안 버틸 수 있었던 건 필사적으로 언어를 익혀 자신의 의사를 제대로 전달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수준이 되었을 때 당당히 자신의 의사를 밝힌 창준은 들려오는 이그리암의 대답에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렸다.
 “음? 돌아가? 어디로 말인가?”
 “어디긴요! 그야 당연히 제 집이죠!”
 “집에 가고 싶다라······. 그 전에 묻고 싶은 게 있네.”
 “······뭔데요.”
 창준의 되물음에 잠시 뜸을 들인 이그리암이 다시금 물었다.
 “자네는 어디서 온 건가?”
 ‘······참, 빨리도 물어본다.’
 “한국에서 왔습니다.”
 “한국? 특이한 이름이구먼. 그리고 보니······. 자네 이 세계에 대해 전혀 모르는 것 같던데, 설마······. 이 대륙 사람이 아닌 건가?”
 창준이 배움에 있어 가장 난해했던 것이 있었으니 바로 역사였다.
 ‘라모스’라 불리는 대륙. 그리고 이어지는 역사는 창준에게는 너무나도 생소한 이야기였다.
 그래도 창준은 ‘지구라는 이름을 이들은 그저 라모스라는 다른 명칭으로 부르는구나.’라고 생각할 뿐이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그냥 이름을 다르게 부르는 것치고는 환경이 너무나도 이질적이었다. 요즘 시대에 누가 검을 들고 싸우겠는가? 온갖 최첨단 무기들이 판을 치는 마당에 검이라니?
 하지만 무엇보다 이질적인 것은 바로 이 세계가 모두 왕국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이었다.
 왕국이 무엇인가? 바로 왕이 다스리는 국가를 왕국이라고 한다.
 요즘 시대에 왕이 있던가?
 물론, 왕에 비견되는 대통령이나 국무총리 등이 있다. 뿐만 아니라, 몇 나라는 여전히 왕이라는 상징적인 인물이 존재했다. 하지만 이는 왕과는 엄연히 다르다. 국가의 대소사를 맡는 것은 비슷하겠지만, 왕은 모든 이들의 가장 위에 있는 존재, 즉 이곳은 민주주의 사회가 아닌 철저한 계급 사회라는 것이다.
 ‘뭐야? 그럼 내가 과거 중세 시대라도 왔다는 거야?’
 그럴 가능성도 없지 않다.
 어쨌든 이 세계에 관해 어느 정도 배운 그에게 주변 국가의 이름들은 너무나 생소했다.
 지도 또한 이상했다. 도무지 지구라고는 보이지 않는 지형을 이루고 있으니, 이쯤 되면 이곳이 지구가 아니라고 의심할 만했다.
 “저기······.”
 그렇게 창준이 조심스레 입을 열려는 찰나.
 “허허허, 그럴 리가 없지! 대륙 사람이 아니라니. 나도 늙었나 보구먼.”
 이그리암이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자신의 가정假定을 부정했다.
 그 또한 믿기지 않으리라. 그것은 창준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내 창준은 서서히 자신이 반평생 동안 상상하던 그것과 비슷한 일임을 느꼈다.
 ‘설마 이거······. 차원 이동은 아니겠지?’
 판타지 소설에서 밥 먹듯이 나오던 바로 그 소재, 차원 이동!
 솔직히 지금은 그것을 빼고는 이 상황을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창준은 긴장감에 조심스레 침을 삼키곤 이그리암에게 조용한 음성으로 물었다.
 “할아버지, 혹시······. 마법이란 거 있나요?”
 “음? 마법? 허허허! 자네 무슨 소리를 하는 겐가?”
 “하하하, 그렇죠? 제가 좀 멍청한 질문을 했군요. 있을 리가······.”
 “당연히 있지! 자네 농담이 심하구먼.”
 “······.”
 있단다. 마법이라는 게 있단다.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 말하는 이그리암의 대꾸에 창준은 기어이 멘탈 붕괴가 온 것처럼 멍하니 허공을 바라볼 뿐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럼, 마, 마법사도 있겠네요?”
 잔뜩 흥분한 표정으로 묻는 창준의 모습에 이그리암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당연하지 않은가? 마법이 있는데 마법사가 없을 리가 없지.”
 “오······오오오!”
 지금 이 순간, 창준은 처음으로 지금의 현실이 꿈이 아니길 간절히 소망했다.
 무려 한 달이 넘은 시점이니 꿈이 아님에는 분명했지만, 이러다 또 한 번에 확 깨는 게 꿈 아니던가.
 단순히 마법사라는 단어만 들어도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 이토록 심장이 뛴 적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창준은 지금 극도의 흥분 상태였다.
 “그럼 마법사는 어디에······.”
 애써 마음을 진정시키며 마법사에 대해 물어보려던 창준은 무심코 이그리암의 복장을 바라보았다. 푸른 로브에 항상 이상한 지팡이를 들고 다니던 그의 모습이 어쩐지 낯이 익었다.
 “······어? 서, 설마 할아버지······.”
 왜 여태까지 눈치채지 못했단 말인가?
 투박한 디자인임에도 무언가 있어 보이는 푸른 로브. 딱히 거동이 불편해 보이지 않음에도 언제나 오른손에 붙어 있듯 들려 있는 이상한 형태의 지팡이. 판타지 영화 속의 마법사를 연상시키는 희고 긴 수염까지.
 그는 누가 보아도······
 “마법사······?”
 “허허, 맞네. 그리고 난 이 마를렌 왕국의 수석 마법사지, 에헴!”
 “······헐.”
 진짜 마법사란다. 그것도 그냥 마법사가 아닌 수석 마법사.
 잠시 멍하니 이그리암을 쳐다보던 창준은 다시금 흥분으로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수석 마법사란다.
 수석이 괜히 붙었겠는가? 왕국 최고의 마법사란 소리가 아닌가.
 창준은 이 순간 한 달 넘게 고생하면서 느껴 왔던 서러움과 한탄이 한 방에 날아감을 통감했다.
 이윽고 창준은 이그리암의 쭈그러진 손을 두 손으로 움켜쥐며 말했다.
 “저에게······. 저에게 마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마법
 
 
 
 
 
 
 
 
 
 
 
 창준은 이그리암을 따라 복도를 걷고 있었다.
 “그러니까 제가 마법을 배우는 데 왜 왕의······. 아니, 폐하의 허락이 필요한 겁니까?”
 창준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자신이 마법을 배우겠다는데 어째서 왕의 허락이 필요하단 말인가.
 하지만 이그리암은 그런 창준을 한심하단 눈동자로 바라보더니 이내 짧은 한숨과 함께 대꾸했다.
 “자네······.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구먼. 하긴, 언어도 다른데 모르는 게 당연한가?”
 그렇게 잠깐 숨을 고른 이그리암이 다시금 말을 꺼냈다.
 “자네가 어떻게 이곳에 왔다고 생각하나?”
 “······!”
 그동안 정신이 없어 잊고 살았다. 자신이 어째서 이 세계에 온 것이며, 또 어떻게 오게 된 것인지······
 그렇게 창준이 멍청한 표정을 짓고 서 있자, 이그리암이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자네는 소환된 것이라네.”
 “소······환이라뇨?”
 왠지 예감이 불길했다. 그리고 그 예감은 기분 나쁠 정도로 들어맞았다.
 “자네는 서먼 나이트로서 이곳에 소환된 것이네.”
 
 
 
 서먼 나이트.
 마를렌 왕가의 수호자이자, 왕국 제일의 기사만이 차지할 수 있다는 명예로운 칭호가 바로 서먼 나이트다.
 하지만 서먼 나이트가 유명한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바로 마를렌 국왕과의 관계 때문이다.
 “그러니까 할아버지 말씀은 제가 그 테레시아라는······.”
 빠악!
 “악!”
 “이놈이! 폐하의 존함을 함부로 부르다니, 죽고 싶은 게냐!”
 ‘염병! 그놈의 폐하 타령은······.’
 한국에서는 대통령 이름을 막 불러도 뭐라 하는 사람 하나 없건만, 여기서는 꼬박꼬박 ‘폐하’라는 단어를 붙여야 하니 짜증이 날 만도 했다.
 “그러니까 폐하께서 서먼 나이트를 소환했는데 내가 소환됐다. 뭐, 이거 아닙니까?”
 “맞네.”
 “그리고 전 서먼 나이트로서 폐하를 지켜야 할 의무가 있는 거고?”
 “그렇지.”
 이는 아무리 생각해도 불공평했다. 그저 소환되었다는 이유만으로 목숨을 바쳐 왕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단다.
 ‘······그럼 나는? 내 목숨은?’
 마를렌 왕국에서는 그것이 당연한 것일지 몰라도 민주주의 사회에서 살던 창준에게는 전혀 당연한 일이 아니었다.
 아니, 자기 목숨 챙기기도 바빠 죽겠건만, 남을 위해 목숨을 바치란다.
 뭐, 가족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버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강제로 소환된 것도 모자라, 생판 남을 위해 목숨을 바치라는 게 말이나 될 법한 소리인가?
 그것도 목숨만 바치라면 다행이다. 무보수로 일까지 하라니, 창준으로서는 미치고 팔짝 뛸 따름이었다.
 ‘여기는 노동부 같은 거 없어? 날로 먹겠다는 게 말이 돼?’
 일한 만큼 받아먹는 건 상식 중 상식!
 하지만 이곳의 상식은 창준이 알고 있는 상식과는 조금 다른 것 같았다. 일단 서먼 나이트로서 계약이 성립되는 순간, 창준은 영원히 왕의 부하가 되는 것이다. 즉, 왕이 까라면 까야 하는 게 창준의 운명이었다.
 ‘뭐 이런 개 같은 경우가······.’
 이제는 목숨도 보장 못 한다. 거기에 개처럼 구르다 죽을 운명에 놓였으니, 욕이 나올 만도 했다. 그리고 처음 이 세계로 소환되었을 때 보았던 광경이 모두 현실이었다는 사실에 소름이 돋았다.
 ‘가만, 이거······. 개 같은 경우가 아니라 진짜 내가 개가 된 거잖아?’
 심하게 말하면 그냥 개, 순화하면 ‘펫’ 정도랄까?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야 하는 기구한 운명에 빠져 버린 창준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을 때 다시금 이그리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네는 영광으로 생각해야 할 것이네. 기사라면 그 누구라도 되고 싶어 하는 서먼 나이트의 자격을 얻었으니 말이야.”
 “······.”
 과연 펫이 된 걸 영광으로 알아야 할까?
 게임을 보면 거의 단골손님처럼 나오는 소환수.
 소환수들이 어떤가? 주인 대신 싸우고, 맞아 주고, 마지막에는 목숨까지 바치는 것이 그들의 역할이다.
 ‘······영광은 얼어 죽을······. 그깟 영광, 거저 준다고 해도 사절이다.’
 하지만 이 생각들 역시 이그리암에게 맞는 것이 두려워 그저 마음속으로 투덜거릴 뿐이었다.
 “에헴, 아무튼 난 그래서 자네가 처음에 마법을 배우겠다고 했을 때, 혹시나 기사가 아닌 마법사의 재능이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했었네. 하지만 지금 보니 그것도 아닌 것 같군.”
 노골적으로 실망한 표정을 짓는 이그리암의 모습에 창준은 그저 어처구니가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사람 앞에서 대놓고 실망 가득한 표정을 짓는단 말인가.
 아무튼 그렇게 두 남자가 대화를 하는 사이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해 있었다.
 
 
 
 마를렌 왕국은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했고 과거에는 강국으로서 대륙을 호령했지만, 언젠가부터 나라를 지키는 데에만 급급하게 되었다.
 결국 강국들 틈 사이에 끼어 제대로 날개를 펼쳐 보지도 못했던 마를렌 왕국. 그럼에도 왕국이 포기하지 않았던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다름 아닌 기사 양성이었다.
 보통 기사 한 명을 키우는 데 이루 말할 수 없는 노력이 필요했다.
 기사란 명예롭고 특별한 존재.
 대륙 최강국이라 일컬어지는 루터스 제국마저도 기사가 겨우 1,000명이 채 안 될 정도로 그 수가 적었다.
 50년 전만 해도 마를렌 왕국이 보유한 기사의 수는 채 100명을 넘기지 못했다.
 하지만 선왕들의 노력으로 왕국이 늘린 기사의 수만 무려 100명에 달했고, 지금은 거의 200명에 가까운 기사들을 보유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많은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현왕, 테레시아의 존재는 단연 독보적이었다.
 왕국 최초의 여왕.
 왕국 최고의 기사.
 왕국 최연소 왕.
 그녀를 따라다니는 수많은 수식어들이 지금 테레시아의 위치를 확실히 알려 주고 있었다.
 더욱이 최고의 기사로 세간에서는 그녀에게 ‘기사왕’이라는 칭호를 붙여 주기까지 했다.
 이제는 그녀가 여자라고, 어리다고 깔보는 자들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물론 여전히 여자란 이미지에 따른 고정관념이 남아 있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럼에도 테레시아는 여자가 아닌 기사로서, 혹은 왕으로서의 역할 또한 충실히 해내며 그 영향력을 점차 넓혀 가고 있었다.
 그렇게 그녀는 오늘도 홀로 집무실에 앉아 충실히 왕의 업무를 보던 중이었다. 그때 문으로부터 노크와 함께 이그리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폐하, 신 이그리암입니다.”
 “아, 들어오세요.”
 그녀는 왕이 된 후로 나이를 막론하고 반말을 사용했다. 이 또한 신하들의 간청에 의해 그리된 것인데 단 한 명, 이그리암에게 만큼은 존댓말을 사용했다.
 단, 공개적인 자리에서는 반말을 썼다.
 그녀의 허락이 떨어지자 집무실의 문을 열고 들어서는 이그리암을 맞이하려던 테레시아는 뒤이어 따라 들어오는 창준의 모습에 의아한 표정을 띠었다.
 그녀는 이미 이그리암에게 창준의 모든 것을 보고받았다.
 언어를 빠르게 습득해 머리가 좋다는 평은 받았지만, 그 외에 특별한 점은 없었다.
 한번은 이그리암에게 말해 창준에게 검을 들어 보게 시킨 적이 있었다. 그런데 창준은 검을 받자마자 상당한 검의 무게에 제대로 자세조차 잡지 못했다.
 서먼 나이트가 제대로 검조차 쥐지 못하다니.
 그 보고를 받은 테레시아는 그냥 역소환할까 생각하기도 했지만, 이그리암을 생각해 그냥 놔두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그리암이 갑자기 서먼 나이트를 데리고 왔으니 무슨 일인가 의아했던 것이다.
 “무슨 일이죠?”
 그래도 역시 창준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인지 말투부터 차갑기 그지없는 테레시아의 물음에 이그리암이 대꾸하려는 찰나 뒤에 있던 창준의 놀란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저 여자가 폐하······. 헉, 왕이라고!”
 창준의 개념 없는(?) 발언에 그녀는 순간 눈이 가늘게 좁혀지며 살짝 인상이 찌푸려졌다.
 그와 동시에 이그리암의 스태프가 창준의 머리를 강타했다.
 빠악!
 “끄악!”
 “이노옴! 감히 폐하께 그 무슨 말버릇이더냐? 어서 무릎을 꿇고 빌지 못할까!”
 “쓰읍, 갑자기 왜 때려······.”
 툭!
 “억!”
 빠악!
 “크억!”
 퍽!
 “윽!”
 맞은 것에 대해 불만을 외치려 하는 순간, 이그리암은 스태프로 창준의 무릎 뒤쪽을 쳤고 저도 모르게 무릎을 꿇은 창준의 뒤통수로 다시금 날아든 스태프에 그만 머리를 바닥에 처박고 말았다.
 그야말로 전광석화와도 같은 움직임으로 창준을 무릎 꿇리고 사죄까지 시킨 이그리암이 헛기침을 하며 테레시아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폐하, 이 녀석의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그러죠.”
 언제나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을 보여 주던 테레시아마저 사람을 패 놓고 아무렇지 않은 척 웃으며 말하는 이그리암 앞에서는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무슨 일이세요?”
 그녀는 말하면서 서서히 머리를 드는 창준을 힐끔거리듯 쳐다보았다.
 왕이 된 후 좀처럼 보기 힘들었던 그녀의 그런 모습에 이그리암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이 녀석에게 마법을 가르쳐 볼까 합니다.”
 “······마법을요?”
 의외의 대답에 테레시아가 아름다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다시금 무표정으로 돌아온 그녀가 머리를 비비는 창준을 바라보더니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괜히 헛수고하는 것 같은데요.”
 “흠, 저도 그렇게 생각하기는 합니다만, 혹시 모르지 않습니까? 이 녀석이 의외로 마법에 재능이 있을지 말입니다.”
 “알았어요. 경의 뜻대로 하세요. 단, 마법에도 별 재능이 없다면 그를 역소환하겠어요.”
 그녀는 이상하게 저 인간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단지 서먼 나이트라서가 아니었다. 왜 사람마다 첫인상이라는 것이 있지 않은가. 그녀는 그냥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렇다고 다른 특별한 점이 있는 것도 아니고, 왕인 자신에 대한 예의조차 없다. 그래서인지 딱히 그에 대해 신경을 쓰고 싶지도 않았기에 그저 이그리암이 하자는 대로 대충 허락만 해 주었다.
 그런데 그녀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창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역소환······? 가만. 나 그럼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말이야······요?”
 잔뜩 흥분한 표정으로 언성을 높이며 묻던 창준은 이그리암이 다시금 스태프를 들어 올리는 모습에 애써 존댓말을 붙였다.
 그런 창준의 모습에 이그리암이 스태프를 다시금 내려놓으며 아차 하는 표정과 함께 그의 말에 대꾸했다.
 “아, 아직 말 안 했군. 뭐, 당연한 것이겠지만 소환이 되었으니 당연히 역소환도 될 수 있지. 이는 폐하의 고유 권한이지만 말이야.”
 이그리암의 말을 들은 창준은 순간 머리에 해머라도 맞은 것처럼 멍해져 채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왕성의 복도로 두 사람의 발자국 소리만이 적적히 울려 퍼졌다.
 둘은 저마다 상기된 표정으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중 푸른 로브의 노인인 이그리암은 방금 전 테레시아와의 대면 이후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허허, 내가 서먼 나이트를 가르치게 될 줄이야.’
 사실 이그리암은 그다지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서먼 나이트는 기사다.
 아무리 내놓은(?) 기사라지만 그래도 명색이 서먼 나이트.
 그녀가 자신을 많이 의지한다고 해도 이는 별개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상황이 묘하게 흘러갔다. 그저 역소환하고 끝낼 줄 알았건만 테레시아는 오히려 흥미롭다는 듯한 표정과 함께 의외의 조건을 내걸었다.
 
 -네가 마법을 단 하나라도 쓸 수 있게 된다면 돌려보내주지.
 
 이것은 테레시아가 창준에게 한 말이었다.
 아무튼 그녀의 말에 이그리암은 자동적으로 창준에게 마법을 가르칠 권리가 생겼다.
 왕의 허락이 떨어지자, 그는 지체 없이 창준을 데리고 자신의 연구실을 향해 가고 있었다.
 그리고 창준은 이그리암과는 다른 의미로 상기된 표정으로 그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살던 창준에게 이곳 왕의 위엄 따위는 알 바 아니었다. 만약 그 왕이라는 사람이 나이 좀 먹고 딱 보는 순간 위압감이 느껴질 정도의 위엄이 느껴졌다면 또 모른다.
 그렇다고 테레시아에게 왕으로서의 위엄이 없느냐?
 그건 또 아니었다. 확실히 어딘가 모르게 느껴지는 왕으로서의 위엄이 확실히 있어 창준으로서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그 깊고도 차가운 푸른 눈동자를 볼 때면 섬뜩함마저 느껴졌다.
 하지만 역시 왕이라는 개념에 익숙하지 않은 창준인지라 자신보다 어린 여자가 왕이라는 사실을 쉽사리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이렇게 된 거 반드시 마법을 배우고야 말겠다!’
 아까는 충동적으로 말을 내뱉었지만 막상 내뱉고 나니 이는 그의 꿈을 이룰 절호의 찬스라는 생각에 다시금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중학교 때부터 무려 12년간 얼마나 꿈꿔 왔던가?
 그저 꿈인 줄만 알았다. 그런데 마법사가 될 수 있다니!
 그러고 보면 테레시아 덕에 마법사가 될 가능성을 얻은 것이니 고마워해야 할 대상이었다.
 ‘흐흐, 마법만 배우면······. 비행기나 자동차 따위는 필요도 없겠군. 씻을 필요도 없을 테고, 물이며 불이며 언제든 필요할 때마다 만들 수 있겠지? 아파도 병원비 나갈 일도 없겠어. 이참에 가서 의사나 해 봐?’
 창준에게 마법이란 만능이었다.
 하늘을 날고, 공간 이동으로 자유롭게 이동한다.
 마법으로 몸을 씻고, 아프면 마법으로 모든 병을 치유한다.
 창준은 상상만으로도 행복했다.
 어디 그뿐인가? 양아치 같은 놈들은 가볍게 엉덩이에 불을 붙여 주면 된다.
 여차하면 세계 정복은 물론, 세계가 인정하는 히어로가 될 수도 있다.
 그것이 창준이 생각하는 마법사라는 존재였다.
 어쨌든 둘은 그렇게 서로만의 즐거운 상상에 한창 취한 채 이동했고, 어느덧 어느 방문 앞에 멈춰 서 있었다.
 “여기가 내 연구실이네.”
 “이곳이 마법사의 연구실······.”
 두근거리는 기대감 속에 드디어 문이 열리고 밝은 빛과 함께 방 안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
 창준에게 보이는 것은 거대한 창문으로 보이는 바깥세상이었다.
 한 달이 넘는 시간 동안 단 한 번도 바깥 구경을 해 보지 못한 그로서는 바깥의 풍경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마치 63빌딩에서 내려다보는 풍경같이 모든 것들이 작게 보였다. 이는 왕성이 그만큼 높다는 것이 아니라 왕성이 높은 언덕 위에 세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창가로 보이는 바깥의 모습은 현대를 산 창준에게는 너무나도 생소한 것이었다.
 “내가 정말 중세 시대라도 와 있는 건가······?”
 비록 멀어서 자세히는 볼 수 없었지만, 수도 없이 뚫린 잘 다듬어진 길 위로 수많은 사람들이 움직였다.
 빼곡히 세워진 수많은 건물들이 마치 왕성을 감싸듯 둥근 원처럼 둘러싼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그 어마어마한 규모에 창준은 방 구경이고 뭐고 창가로 다가가 바깥 구경을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렇게 창문을 통한 바깥 구경이 길어지자, 이그리암이 결국 참지 못하고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커흠! 이제 그만 이리 오지 그러나?”
 “아······.”
 아이처럼 굴었던 것에 대한 부끄러움 때문이었을까? 머리를 긁적이며 이그리암이 앉아 있는 테이블에 앉은 창준에게 그제야 방 내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예상외로 소박한 내부를 둘러보던 창준에게 이그리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자네······. 수학 좀 할 줄 아나?”
 “갑자기 수학을 왜······.”
 창준은 어렸을 때부터 수학과 거리가 멀었다. 그래서 지금은 최소한의 산수, 즉 사칙 연산 정도밖에는 할 줄 몰랐다.
 “마법에 가장 중요한 게 바로 연산 능력이란 말이지. 그래서 말이야, 머리가 나쁜 놈은 절대 마법사 못 해.”
 “······.”
 창준은 시작도 하기 전에 마법사에 대한 꿈을 접어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자, 그럼 이론 수업부터 해 볼까?”
 이그리암의 목소리는 잔뜩 들떠 있었다.
 반면 창준은 앞으로 배울 마법에 대한 기대감보다는 불길함이 앞섰다.
 ‘왜 마법에 연산 능력이 필요한 건데······?’
 단순한 더하기, 빼기일 수도 있다. 그런데 왠지 굉장히 복잡할 것 같았다.
 ‘설마 진짜 수학 같은 게 나오는 건 아니겠지?’
 세상은 참 신기하다. 불길함이 현실이 되는 경우가 많으니 말이다.
 이번에도 왠지 그 불길함이 현실이 될까 조마조마한 가운데 이그리암이 몇 권의 책을 창준의 앞에 내려놓았다.
 “이게 바로 마법의 입문서네.”
 두껍다. 무슨 책의 두께가 대백과사전 수준이다.
 문제는 이게 입문서란 점이다. 책을 펼치기조차 두려운 이 책을 입문서라고 한다면 도대체 그 뒤에는 얼마나 더 두꺼운 책이 등장할 것이란 말인가.
 ‘여기서 약해지면 안 돼!’
 창준은 고개를 흔들며 다시금 마음을 다잡았다.
 그토록 바라고 바라던 마법을 배울 기회가 왔지 않은가? 마법을 배우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고작 이깟 책(?) 앞에서 무릎을 꿇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 할아버지······. 설마 사기꾼은 아니겠지?’
 괜스레 싹트는 의심. 그저 보기만 해도 질릴 것 같은 책 때문에 생긴 작은 의심이었다.
 그리고 그 의심은 곧 말이 되어 튀어나왔다.
 “할아버지, 진짜 마법사······. 맞죠?”
 “이놈이! 지금 날 의심하는 게냐!”
 복장이야 얼마든 사기 칠 수 있지 않겠는가?
 사기꾼이 되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겉만 번지르르하고 이빨만 잘 까면 다 사기꾼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아니, 의심하는 게 아니라요. 그럼 마법 한 개만 시범으로 보여 주십시오.”
 “아니긴 뭐가 아니냐? 대놓고 의심하고 있지 않느냐?”
 “그러니까 마법 한 개만 보여 달라니까요. 그럼 의심 자체가 싹 사라질 거 아니겠습니까?”
 “흠······. 뭐, 좋다. 썩 좋은 기분은 아니다만, 내가 마법이란 걸 네놈에게 확실히 보여 주도록 하지.”
 창준은 심장이 터질 듯이 뛰었다.
 게임이 아닌, 그렇다고 영화도 아닌 실제 마법을 본다.
 그렇게 잔뜩 부풀어 오른 기대감과 함께 이그리암이 스태프를 들며 무언가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잔잔한 고요함과 함께 심장이 터질 듯한 긴장감이 공존하는 공간으로 이그리암이 나지막이 읊조렸다.
 “분열.”
 그의 손에서 푸른 빛이 분열되듯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오!”
 그렇게 1분이 흐르고 다시금 이그리암의 입이 움직였다.
 “재조합.”
 흩어졌던 푸른 빛이 뭉치며 하나의 거대한 문양을 그려 나갔다.
 창준이 그토록 기대했던 멋진 문양의 마법진이 이그리암의 양손에서 아름답게 빛났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재조합’이라는 단어를 중얼거리고 무려 3분이라는 시간 동안 가만히 서 있기만 하는 이그리암의 모습에 창준의 감탄이 점점 잦아들었다.
 그렇게 창준이 다음 단계를 기다리다 지쳐 갈 즈음.
 “융합.”
 양손에 그려진 푸른빛이 서서히 겹쳐지며 새로운 마법진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오······. 하암.”
 아까보다는 확실히 작아진 감탄사와 함께 하품마저 새어 나왔다.
 “가속.”
 융합된 두 개의 마법진이 미친 듯이 돌아갔다. 그와 함께 마법진이 강렬한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오오오!”
 드디어 마법이 구현되려는 듯 금방이라도 터질 듯한 빛을 뿜어내는 마법진의 모습에 아까의 지루한 표정은 어디로 가고 다시금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눈앞의 늙은 마법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드디어 이그리암이 눈을 번쩍 뜨며 소리쳤다.
 “라이트 볼!”
 파앗!
 시동어와 함께 마법진의 빛이 이그리암의 오른손으로 빠르게 모여들더니 이윽고 작은 빛의 구체를 형성했다.
 “정말 마법이······.”
 창준은 이그리암의 오른손에 영롱히 떠 있는 빛의 구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저 상상 속에서나 볼 수 있을 줄 알았다.
 아무리 게임이나 영화에서 본다고 한들 그것은 말 그대로 보는 것뿐. 과학이 발달하면서 그런 것쯤이야 얼마든지 CG를 통해 만들어 낼 수 있다.
 물론 그런 것들로 사람들의 상상력과 대리 만족을 채워 줄 수는 있겠지만, 창준에게는 아니었다.
 그는 언제나 실제로 구현되는 마법을 꿈꿔 왔다. 그리고 그 염원이 실현되는 순간, 창준은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만 같았다.
 ‘이게 마법······!’
 비록 캐스팅 시간이 엄청나게 오래 걸려 지루하기까지 했지만, 라이트 볼이라는 마법이 구현되는 순간 아까 느꼈던 지루함마저 사치로 느껴졌다.
 넋이 나간 표정으로 마법을 바라보는 창준의 모습에 이그리암이 자부심 가득한 표정과 함께 웃음을 터트렸다.
 “허허허, 보았느냐? 이것이 바로 마법이다.”
 “저, 정말 굉장합니다! 그런데 이 마법은 무슨 마법인가요? 던지면 펑 터지거나 그런 건가요?”
 “잉? 그게 무슨 소리인가? 펑 터지다니? 이게 무슨 대포라도 되는 줄 아는가?”
 황당한 표정으로 대꾸하는 이그리암의 말에 창준은 조금 당황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럼 이 마법은 뭡니까?”
 “뭐긴······. 언어 배웠잖은가? 라이트 볼, 빛의 공이라는 뜻이지. 빛의 공이 하는 일이 뭐겠는가?”
 “설마······. 에이! 아니죠?”
 무려 5분이나 캐스팅해서 구현한 마법이다. 게다가 수석 마법사라는 사람이 고작 이런 마법이나 쓰려고 5분이라는 시간을 투자할 리 없다.
 적어도 창준은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이그리암은 창준이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겠다는 듯 다시금 대꾸했다.
 “뭐가 아닌가? 라이트 볼, 어둠을 보려면 뭐가 있어야 하는가?”
 “······.”
 아니길 바랐다.
 무려 5분이나 캐스팅을 했고 이마에는 땀까지 송골송골 맺혀 있었으며 캐스팅 시 화려하면서도 복잡한 마법진이 나타났다. 그렇게 구현된 마법이 고작 어둠을 밝히고자 만든 빛이란다.
 “하, 하하하······.”
 물론 아무리 캐스팅 시간이 길고 어렵게 마법을 구현했다고 해도 분명 대단하긴 한 것이다.
 어쨌든 무에서 유를 창조해 냈지 않은가.
 하지만 창준이 상상하던 마법은 결코 이런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할아버지······. 이런 거 말고 뭐 그런 거 없나요? 불화살이나 하늘에서 번개를 뿌린다든가······.”
 왜 있잖은가? 소설에서 보면 마법으로 수만의 대군을 몰살시킨다거나, 하늘에서 번개를 뿌려 태워 버린다든가 하는 것들 말이다.
 ······솔직히 그 정도까지 바라진 않았다.
 그래도! 그 정도는 아니라도 본디 공격을 위한 마법이야말로 마법의 꽃이라고 생각하는 창준이었다.
 하지만 이그리암은 창준의 질문에 오히려 멍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대꾸했다.
 “불화살? 하늘에서 번개를 뿌려? 허허허. 자네, 뭔 소리를 하는 겐가? 마법사가 무슨 신이라도 되는 줄 아는가?”
 “······그럼 쓸 수 있는 마법이 뭔데요?”
 “여러 가지가 있지! 가령 밤에 어둠을 밝힐 수도 있고, 불로 요리를 해 먹을 수도 있겠지. 물을 만들어 씻을 수도 있을 테고······. 흐음, 또 뭐가 있더라······.”
 “······.”
 태연하게 마법의 용도에 대해 설명하는 이그리암의 말을 듣던 창준은 깨달았다. 이 세계의 마법이 어떤 식으로 쓰이고 있는지.
 그리고 그 사실은 창준을 실망시키기에 충분했다.
 ‘······이런 마법을 정말 배워야 할까?’
 지금 이 순간, 인생의 반을 마법사라는 꿈을 가지고 살아온 그는 처음으로 그 꿈이 흔들림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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