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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비가 1

2018.01.18 조회 386 추천 0


 용비가 1권
 서장
 
 
 혈세강호(血洗江湖).
 난세무림(亂世武林).
 이백 년 전의 강호무림을 가장 적절하게 표현한 말이다.
 면면히 그 맥(脈)을 이어온 강호무림은 정(正)과 사(邪)의 갈등과 야망 그리고 끝도 없는 복수극으로 항상 혈풍(血風) 속에 허덕였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지칠 줄 모르고 강호무림을 질타하던 혈풍이 서서히 사라지며 전례 없는 평온히 지속되고 있었다.
 실로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치고 숨통이 막혔던 혈풍에 시달리던 강호인들은 그 이유를 몰랐다.
 아니, 너무도 끔찍스런 혈풍이 가시고 찾아온 평화였기에 그것만으로 만족할 뿐 구태여 그 이유를 알려고 들지 않았다.
 허나, 그 같은 평화도 강호무림에선 오래도록 지속될 수 없는 것일까?
 강호인들이 오랜만에 안도의 숨을 몰아쉬고 있을 즈음 다른 세 곳에서는 뜻밖의 혼란으로 난세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 세 곳은 명문대파이자 무림의 태산북두(泰山北斗)라 일컬어지는 소림사(少林寺)와 역시 명문대파인 무당파(武當派), 강호 전역에 흩어져 있는 비렁뱅이의 집단 개방이었다.
 무엇 때문에 그 세 곳에 새삼스런 혼란이 야기되고 있는 것일까?
 거기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바로 이 세 곳을 이끌어왔던 각파의 수뇌인물들이 감쪽같이 잠적한 때문이었다.
 
 소림파 장문인 혜원선사(慧園禪師).
 무당파 장문인 육일도인(六逸道人).
 개방방주인 학발비응(鶴髮飛鷹).
 
 그들의 잠적으로 인해 세 파에서는 그야말로 청천벽력 같은 충격을 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말 한마디 없이 다만 장차 각파를 이끌어갈 다음 대 지존을 지목한 서찰 한 장만을 남기고 사라진 그들.
 삼파 장문인이 한날 한시에 사라진 까닭은 무엇 때문인가?
 삼파의 제자들은 그 이유를 몰라 안타까울 뿐이었다.
 그런데 십일(十日) 후 감쪽같이 사라진 삼파 장문인이 어느 한곳에 모습을 나타냈다.
 그곳은 바로 강서성(江西省) 남단에 우뚝 선 여산(廬山)의 호계(虎溪)라는 곳이었다.
 그들이 출현하면서 호계에선 일대 경천동지할 혈투가 벌어졌다.
 일 대 삼의 대혈투.
 태고의 정적을 간직한 채 잠잠하기만 했던 여산은 갑작스런 혈투로 요란하게 진동했다.
 그러나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여산의 또 다른 곳에서도 생사결단의 혈투가 벌어지고 있을 줄을 말이다.
 그곳은 호계로 들어가는 입구로 한 선비 같은 노인과 흉악하게 생긴 노인이 참으로 가공할 혈투를 벌이고 있었다.
 선비 같은 노인은 백초만에 흉악한 노인을 제압했다.
 그리고 제압한 직후 흉악한 노인에게 무슨 말인가를 남기고 표표히 사라져 갔다.
 이에, 흉악한 노인은 긴 탄식과 함께 사라지는 선비노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힘없이 어디론가 발길을 돌리고 떠나갔다.
 반면 일 대 삼의 치열한 혈투는 어떠한가?
 며칠이 흘렀음에도 전혀 멈출 기미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악에 받친 저주의 소리가 여산을 울려놓더니 하나의 인영이 유령처럼 번뜩이며 사라졌다.
 삼파지존은 모두 손을 멈춘 채 암울한 표정으로 사라지는 인영을 바라보았다.
 까닭 모를 탄식이 그들의 입술 사이로 흘러 나왔다.
 그러다 일제히 등을 돌리고 호계의 깊숙한 곳으로 발길을 옮기기 시작했다.
 한바탕 난리를 겪은 호계는 그렇게 해서 옛 정적을 되찾게 되었다.
 언제 혈투가 벌어졌었느냐는 듯 고요히.
 그런데 그로부터 삼 년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정적을 갈무리한 호계의 깊숙한 곳에서 각기 다른 세 마디의 웃음소리가 호계를 진동시키며 터졌다.
 “크하하하······.”
 “우하하하······.”
 “아핫핫핫······.”
 그들은 누구인가?
 그리고 무엇 때문에 이렇듯 통쾌하게 웃어대는 것인가?
 그 후 일년··· 십 년··· 백 년······.
 무심히 세월은 흘렀다.
 그 세월의 흐름 속에 여산의 정적도 계속되었다.
 지금부터 십일 년 전.
 여산에서 공전절후(空前絶後)의 대혈투가 있은 지 백구십여 년이 흐른 후 여산의 어느 절봉 위에서 열여섯 명의 복면인과 청수한 노인 한 명이 또 치열한 혈투를 벌인 적이 있었다.
 십육 대 일이라는 숫자부터가 무모한 혈투임을 증명하듯 청수한 노인은 몇 초도 못 넘기고 복면인들에게 격패당하여 아득한 절봉의 낭떠러지로 한 점 낙엽처럼 떨어져 내렸다.
 열여섯 명의 복면인들은 그 즉시 절봉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무서운 일이었다.
 또다시 감겨오는 정적에 여산은 말이 없었다.
 신(神)의 저주를 받은 산인가?
 끔찍한 혈투가 이곳 여산을 몇 번이나 진동시키고 있는 것이다.
 
 
 1장 참회동(懺悔洞)의 괴노인(怪老人)
 
 
 강서성(江西省) 상단에 위치한 여산(廬山).
 그곳 여산에 전인미답(全人未踏)의 험지인 계곡 하나가 있었다.
 이름하여 호계(虎溪).
 세인들은 이렇게 명명하였다.
 호계의 주위는 그야말로 구절양장(九折羊腸)이라 날쌘 원숭이조차 근접하길 꺼리는 험지 중의 험지였다.
 허나, 자연의 오묘무쌍한 능력은 그렇듯 험준한 험지라 해서 좌시하진 않았다.
 둥근 불덩이가 서서히 서녘 하늘 저 끝으로 넘어가는 유시(酉時) 무렵, 거부 없이 드러나는 저 장엄한 광경!
 비록 인접(人接)은 물론이요, 원숭이의 접근조차 꺼리는 호계였으나 은은한 석양(夕陽)을 받고 나타난 호계의 절경은 참으로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나무는 흔하게 찾아볼 수 없고 대부분 기암절곡(奇岩絶谷)으로 이루어졌지만 하나하나 형태가 기기묘묘(奇奇妙妙)하여 두려운 대상의 계곡이 아니라 도리어 대자연의 위대한 섭리에 절로 고개를 수그리게 하는 것이다.
 한데 유시로 접어들고 얼마 되지 않아 청삼인 한 명이 천천히 이곳 호계로부터 걸어나오고 있는 것이었다.
 얼굴을 보니 약 사십대의 중년인쯤 되어 보였다.
 중년인은 전인미답의 험지가 아무런 장애도 되지 않는 듯 여유 있게 걸음을 옮겨놓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실로 놀라운 일이다.
 사방이 온통 기암절곡투성이라 길이 나 있을 리는 만무하건만 놀랍게도 중년인은 계속 여유 있게 호계를 멀리하고 걷고 있었다.
 얼마쯤 걸어나왔을까?
 호계도 이젠 저 먼 곳으로 밀려나 종적이 묘연한 채 갈무리되고 있었다.
 문득 중년인이 걸음을 멈추었다.
 졸졸졸······.
 그의 바로 곁에선 티끌 하나 찾아볼 수 없는 물줄기가 계곡을 따라 흐르고 있다.
 “아, 실로 세월은 빠르구나··· 벌써 육 년여의 세월이 흘렀으니······.”
 감격에 찬 눈빛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던 중년인이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이어, 그는 계곡의 물 옆에 쭈그리고 앉아 쉼 없이 흐르는 맑은 물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일순, 중년인의 입가에 소리 없는 미소가 감돌더니 이내 눈빛이 경이롭게 변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정교한 인피면구구나. 내가 감쪽같이 사십대 중년으로 변할 수 있다니······.”
 나직이 중얼거리며 그는 조심스레 얼굴을 쓰다듬어 보았다.
 “음··· 사부님께서 건네주신 두 개 인피면구 중 집히는 대로 써본 것인데 졸지에 사십대 중년인이 됐군. 나머지 하나는 이보다 젊은것인 듯하니 이후에 그것도 한번 써봐야겠어. 그나저나 사부님은 이런 기막힌 것을 어디서 얻으셨을까?”
 그렇다면 그는 실제 사십대 중년인이 아니란 말인가?
 틀림없다.
 방금 중얼거린 소리를 보면 그는 지금 인피면구를 뒤집어쓰고 사십대 중년인으로 변한 게 틀림없다.
 하면 그의 실제 나이는 얼마나 되며 얼굴은 어떻게 생겼을까? 그 또한 인피면구를 썼으니 알 수 없었다.
 “어두워지기 전에 길을 떠나야겠군.”
 대충 흩어진 옷매무새를 고치고 좀 전처럼 유유자적하게 걸음을 옮기는 중년인이다.
 그는 오랜만에 대하는 자연의 신비함에 넋을 잃은 듯 걸으면서도 시종 사방으로부터 눈길을 떼지 않았다.
 그렇게 또다시 얼마를 걸었을까?
 “으― 음―.”
 느닷없이 어디선가 깊은 탄식소리가 들려왔다.
 중년인은 흠칫했다.
 잠잠한 두 눈에선 날카롭기 그지없는 신광(神光)이 번뜩였다. 유유자적하게 움직이던 발걸음은 어느새 우뚝 멈춰져 있었다.
 중년인은 방금 소리난 쪽을 향해 번득이는 신광을 던졌다.
 혹시 자신이 잘못 들은 게 아닌가 해서였다.
 그때였다.
 “휴우······.”
 이번엔 조금 전처럼 신음 섞인 탄식이 아니라 애절함이 절절이 배인 한탄 같은 것이 들려왔다.
 ‘누굴까?’
 중년인은 뇌리를 사로잡아 오는 의혹을 떨쳐내지 못하고 바삐 소리난 쪽으로 다가갔다.
 그곳은 하나의 동굴로 처음 중년인이 말소리를 들은 곳과도 이십 장 정도 떨어진 곳이었다.
 “엇?”
 막상 동굴 앞에 당도하고 난 중년인은 기절할 듯이 놀라고 말았다.
 입구의 이 장 둘레에 너절하게 흩어져 있는 백골(白骨)을 목격한 때문이다.
 흐르는 세월의 위력을 감당하지 못하고 그나마 제 본래 형체를 고수하지 못한 추상(醜相)으로 변해 있으니 보기만 해도 소름이 오싹 끼치는 백골들이었다.
 소름 끼치는 일은 비단 그뿐만이 아니었다.
 백골이 흩어진 곳에서 좌측으로 삼 장 떨어진 바위 위에 죽은 지 얼마 되지 않는 인간의 육신이 처연히 뒹굴고 있는데 좀처럼 형체를 찾아볼 수 없었다.
 썩어 문드러질 대로 문드러져 이름 모를 괴충들이 새카맣게 달라붙어 있기 때문이다.
 ‘저··· 저럴 수가······.’
 중년인은 그것을 발견한 순간, 등줄기의 작게 패인 골로 식은땀이 주르르 흐르고 있음을 의식했다.
 무슨 말로 표현해도 부족하리만큼 끔찍한 상황이나, 중년인은 대장부다운 기개를 꺾지 않으려는 듯 애써 경동하는 심신을 달래고 있었다.
 슬금슬금 자취를 감추기 시작한 낙조도 이젠 엷은 홍기만을 남기고 사라졌다.
 인적 없는 산 속.
 사위는 황량하기만 했다.
 바로 그때였다.
 중년인이 놀란 심신을 겨우 달래고 두 걸음 물러서는 바로 그 순간,
 “크흐흐흐······.”
 시커멓게 주둥이를 벌린 동굴 속으로부터 돌연 으스스한 괴소가 울려나왔다.
 그뿐이 아니었다.
 그로 하여금 그렇게 충격만 받고 있도록 내버려두지 않는 괴변이 연속적으로 터졌다.
 슈― 욱―!
 가히 천근(千斤) 쇳덩이라도 꿰뚫을 수 있는 무서운 경기가 동굴 속에서 몰아쳐 나온 것이다.
 “우웃!”
 중년인은 자신도 모르게 놀라 부르짖으며 미처 피할 수도 없는 경기를 되는대로 맞받아 쳤다.
 쾅!
 이십 장 둘레를 웅웅거려 놓을 만큼 엄청난 굉음이 터졌다.
 “윽―!”
 그와 동시에 중년인은 괴로운 신음을 토해냈고 네 걸음이나 물러나는 꼴이 되었다.
 다행히 쓰러지지 않고 서 있지만 휘청거리는 모습하며 거친 숨을 뿜어내는 태도가 낭패함을 여실히 나타내주었다.
 이때였다.
 동굴 안으로부터 탄성에 가까운 말소리가 들려오질 않는가?
 “놀랍도다. 노부의 오성(五成) 장력을 받아내는 사람이 있었다니··· 실로 이백 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로다.”
 경탄하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다시 말소리가 흘러 나왔다.
 “자, 다시 일장을 받아랏!”
 중년인은 아연실색했으나 일시도 방관하지 못하고 전신내공을 극도로 끌어올렸다.
 바로 그 찰나,
 쌔― 앵―!
 매서운 파공성이 들리며 방금 몰아친 경기보다 거센 경기가 돌풍처럼 휘몰아쳐 왔다.
 중년인은 안간힘을 다해 몰아쳐 온 경기에 대항했다.
 그러나 중년인은 큼직한 바윗덩이 앞의 무기력한 계란에 불과했다.
 퍽―!
 굉음도 아닌 둔한 음향이 한차례 허공을 가르는가 싶더니 중년인은 강풍에 흩날린 낙엽처럼 맥없이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혼절해 버렸다.
 “크핫핫핫······.”
 천지를 진동시키는 광소가 물살처럼 동굴 입구를 뚫고 터져 나왔다.
 광소는 동굴 입구를 향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어, 한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괴인이었다.
 귀신같은 봉두난발(蓬頭亂髮)에 알몸인 괴인.
 “크핫핫핫······.”
 모습은 전혀 사람 같지 않으나 터뜨리는 광소를 보니 사람임이 분명하다.
 괴인은 뭐가 그리도 호쾌하고 즐거운지 사방이 떠나갈 듯 광소하다가 비로소 뚝 끊었다.
 이어 가슴팍까지 어지럽게 흘러내린 머리카락 사이로 눈빛을 빛내더니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아··· 얼마 만에 대하는 하늘인가. 이 맑은 공기······.”
 흠뻑 숨을 들이마시고 바쁘게 사방을 둘러보았다.
 “이백 년··· 이백 년 만에 대하는 나무들, 돌 조각··· 변했어. 참으로 많이 변했어······.”
 갑자기 괴인은 무엇을 생각했는지 쓰러진 중년인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고맙다. 누구인지 모르나 아무튼 고맙다. 넌 내 생명의 은인(恩人)이야. 그러니 이대로 방치해 둘 수가 없지.”
 알 수 없는 말을 혼자 중얼거리던 괴인은 악귀(惡鬼)의 그것처럼 전율스런 손톱이 달린 우장을 내뻗어 중년인의 몇 군데 혈도를 톡톡 쳤다.
 이어, 죽은 듯 쓰러져 있던 중년인은 원기를 되찾은 듯 뒤척이며 눈을 떴다.
 “윽······.”
 괴로운 신음과 함께 억지로 상체를 일으키던 중년인이 검붉은 핏덩이를 한 움큼 토해냈다.
 가까스로 일으킨 상체가 다시 젖혀졌으나 양팔을 땅에 짚으며 겨우 일으켰다.
 그는 눈앞에 버티고 서 있는 괴인을 보고 자지러질 듯 놀랐다.
 “다··· 당신은 누구요?”
 괴인이 예의 소름 끼치는 괴소를 흘렸다.
 “흐흐흐··· 나 말이냐? 네가 보다시피 이렇게 말할 줄 아는 사람이다. 흐흐흐······.”
 “······.”
 중년인은 그만 할말을 잃고 괴인을 멀거니 응시했다.
 그는 지금 괴인의 흉측하게 생긴 몰골을 보고 놀라는 한편 크게 실망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 자신에 대한 실망이었다.
 육 년 간 동굴 속에서 두문불출하고 절학을 터득하는데 온 심혈을 기울여왔건만 강호에 나오자마자 보기 좋게 낭패를 당했으니······.
 기가 막히면서도 자신에 대한 실망이 이만저만 크질 않았다.
 그때 괴인이 요상하게 히히덕거리며 말을 뱉고 있었다.
 “히히히··· 얘야, 정말 고맙다. 죽지 않고 살아줘서 고맙다. 히히히······.”
 실의에 잠긴 중년인이 의아한 듯 힘없이 물었다.
 “이것 보시오. 고맙다니 뭐가 고맙단 말이오?”
 “죽지 않고 살아줘서······.”
 “뭐라고요?”
 괴인은 왕눈을 뜨고 자신을 바라보는 중년인에게 묘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흐흐흐···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보다 당신은 무엇 때문에 날 쳤소? 그리고 내가 죽지 않고 살아줘서 고맙다니 그게 무슨 말이오?”
 중년인은 노기등등한 목소리로 다그쳐 물었다.
 한데, 괴인은 전혀 불쾌하지 않은 듯 그저 감개무량한 한숨만 연발하며 넋두리처럼 중얼거렸다.
 “아··· 내가 이백 년 만에 저 하늘을 대한다면 믿을 사람이 있을까?······.”
 “이백 년이라고?”
 중년인은 깜짝 놀랐다.
 그러자 괴인은 다시 중년인을 바라보며 제법 심각하게 말하는 것이었다.
 “너는 내게 하늘을 보도록 해준 은인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 너의 상세를 치유해주마.”
 그가 중년인의 곁으로 바싹 다가오자 중년인은 본능적으로 물러나려 했다.
 보기만 해도 끔찍스러운데 가까이 달라붙자 숨이 탁 막히는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물러날 수 없었다.
 괴인에게 격중당한 장력으로 가볍지 않은 내상을 입은 까닭이었다.
 “어리석은 짓은 생각도 마라. 보아하니 넌 이제 갓 사십에 이른 듯한데 목숨이 아깝지도 않느냐? 나는 아까운 목숨을 연명코자 자그마치 이백 년을 꾹 참아왔다.”
 괴인은 말을 끝내고는 진기를 끌어올리며 우장을 중년인의 명문혈(命門血)에 갖다댔다.
 일순, 중년인은 강렬한 기세로 파고드는 진기에 놀라 자신도 모르는 사이 몸을 틀었다.
 “멍텅구리 같은 녀석, 좀 얌전히 못 있느냐?”
 신경질적이긴 하나 감히 거역할 수 없는 위압감에 중년인은 말없이 괴노인을 바라보며 내심 중얼거렸다.
 ‘도대체 이 괴노인은 누구일까? 자꾸 이백 년을 운운하는데 정말 그가 동굴에서 이백 년 동안 있었단 말인가?’
 생각하는 사이 괴인은 그의 명문혈에서 손을 거둬들이고 있었다.
 “흐흐흐··· 내 모양이 이러니 보기도 징그럽겠지. 하지만 어떠냐? 같은 남잔데······.”
 괴인은 주절주절 중얼거리며 중년인 앞으로 바싹 다가왔다.
 중년인은 멍청히 괴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아무리 봐도 정말 사람 같지 않군.’
 중년인이 내심 중얼거릴 때 괴인의 나직한 말이 귓속에 파고들었다.
 “얘야, 내 재미있는 얘기 하나 들려주랴?”
 중년인은 ‘얘야’라는 말이 새삼 귀에 거슬리는 듯 오만상을 찡그렸다.
 허나, 괴인은 그의 불쾌감 따위엔 아랑곳도 않고 계속 자기 할말을 이어갔다.
 “이백 년 전 나는 나의 사제로부터 호계(虎溪)에서 일대 혈전(血戰)이 있으니 꼭 와달라는 전갈을 받았다. 그때 나는 강호를 떠나 깊숙한 산중에 은거하고 있었다. 그러나 하나밖에 없는 사제의 간청을 저버릴 수가 없었지. 그래서 난 약속한 기일에 호계로 향했다.”
 “······.”
 중년인은 왠지 모를 호기심에 괴인의 말에 점점 빠져들었다.
 “그런데 노부가 때맞추어 호계로 들어섰을 무렵, 웬 백발 성성한 노인이 출현했다. 그는 나를 발견하자마자 껄껄 웃으며 구음신마(九陰神魔)냐고 물었다. 노부는 백발노인이 내 신분을 알고 있는 사실에 놀랐으나 기분이 몹시 상해 그에게 그 자리에서 도전했다. 그러자 백발노인은 의외로 쉽게 노부의 도전을 받아들였다. 그 후 생각해 보니 모든 게 계획적이었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아무튼 그와 한바탕 치열한 격투를 벌였는데 원통하게도 그에게 백초만에 패하고 말았다.”
 당시 일을 회상하자 새삼 분기가 솟구치는지 그러잖아도 흉측한 얼굴을 제멋대로 씰룩거렸다.
 마치 지옥의 야차처럼.
 “그때 백발노인은 노부보고 충분히 죽일 수 있으나 살려준다는 조건으로 한 가지 약속을 했다. 나로 하여금 이곳 동굴 속에 들어가 있으되 우연이든 필연이든 누구든지 이 근처를 지나다 노부가 후려치는 오성 장력을 받아내는 사람이 있으면 약속을 파해하고 동굴을 나와도 좋다는 약속이었다.”
 “아······.”
 중년인은 저절로 신음 같은 탄식을 불어냈다.
 괴인이 다시 말했다.
 “너도 들어봐서 알겠지만 약속치고는 얼마나 무모한 약속이냐? 이런 산중에서 사람을 만난다는 자체도 힘든 일이거니와 노부의 오성 장력을 받아내는 사람을 만나야 한다니 말이다. 내 솔직히 말하지만 이백 년 전만 해도 노부의 오성 장력을 받아내는 사람은 무림에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운 좋게도 임자를 만나 백발노인에게 패하고 말았지만······.”
 여기서 잠시 말을 끊은 괴인은 땅이 꺼질 듯 무겁게 탄식했다.
 “그 약속은 무모하다못해 죽음을 알리는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노부는 결코 약속을 저버리지 않았다. 백발노인이 무서워서라기보다는 어엿한 남아대장부로서 졸렬함을 보이지 않기 위해서였다.”
 중년인은 괴인의 말을 들으며 무엇인가 느끼는 바가 있어 총총히 염두를 굴렸다.
 ‘음··· 백발노인이 누구인지는 모르나 이 괴노인을 영원히 동굴 속에 감금시키기 위해 그 같은 약속을 한 모양이구나.’
 “흐흐흐······.”
 괴인이 으스스하게 웃더니 이내 냉소하며 말했다.
 “흥! 백발노인, 그놈이 노부를 햇빛도 보지 못하게 매장시켜 버리려고 작정했지만 하늘은 끝내 노부를 버리지 않았다. 이렇게 노부로 하여금 햇빛을 보도록 안배해 주셨으니 이 얼마나 감격스런 일이냐? 이백 년 동안 몇 놈이 이 근처를 지나기에 신음과 탄식으로 유인해서 장력을 날렸더니만 끽소리도 못 내고 모두 죽어버렸다.”
 말하면서 그는 삼 장 떨어진 바위 위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기 저 시체도 너처럼 유인돼서 왔다가 내 장력을 감당하지 못하고 죽은 놈의 시체다. 어쩌면 그렇게 머저리 같은 놈들만 나타나는지··· 끽소리도 못 내고 그놈들이 죽을 때면 노부는 분통이 터질 것 같았다.”
 ‘결국 이 백골들은 괴인의 장력을 받아내지 못하고 죽은 사람들의 흔적이구나.’
 갑자기 괴인이 을씨년스럽게 낄낄거렸다.
 “낄낄낄··· 이제부터 무림은 노부의 품안에 안겨 있다. 품안을 벗어나려고 발버둥쳐도 이미 당겨진 화살인 걸 어쩔 테냐? 낄낄낄······.”
 일순, 중년인은 무섭게 내리친 돌덩이에 부딪치기라도 한 듯 눈앞이 아찔했다.
 ‘무림이 자기 품안에 들어 있다니? 보아하니 이 괴인은 개세마두가 분명하구나. 이 일을 어찌한담. 나로 인해 동굴을 빠져 나온 이 괴인이 강호에 나가면······. 너무 큰 과오를 범했구나.’
 자책하며 생각을 굴리고 있을 때였다.
 “낄낄낄··· 무림은 내 것이다. 내 품안에 들어 있다.”
 괴인은 미친 듯 외치며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목숨은 노부가 특별히 살려주겠다. 그것은 생명의 은인에 대한 최상의 배려다. 알겠느냐? 낄낄낄······.”
 사람의 웃음이라고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괴소를 연방 흘리더니 괴인은 감쪽같이 중년인의 앞에서 사라졌다.
 괴인은 햇빛이 몹시도 그리웠던 모양이다.
 노을이 여리게 깔린 서쪽을 향해 사라진 걸 보면.
 그리고 창피함 따위는 아랑곳 않는 듯 알몸인 상태 그대로 사라진 것이다.
 중년인은 혼 빠진 사람처럼 멍청히 서녘 하늘을 응시했다.
 “혈풍(血風)의 조짐인가? 사부님께선 강호에 혈풍이 끊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항시 염두하고 강호의 안녕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 바치라고 하셨는데 난 조금 전 그 괴인의 이 장도 받아내질 못했다. 그런데 무슨 능력으로 그런 엄청난 책임을 짊어질 수 있단 말인가?”
 중년인은 힘없이 중얼거렸다.
 “이왕 엎질러진 물이니 앞으로 일어날지도 모르는 혈겁에 만반의 준비를 하는 수밖에.”
 그는 낭패한 표정으로 걷기 시작했다.
 ‘우선 이곳을 떠난 후 생각하자. 어쩌면 아버지께서 집에 돌아와 계실지도 모른다. 육 년 전 아무도 모르게 집을 떠나왔으니 아버님께서 오셨다 해도 얼마나 걱정하실까?’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는 중년인의 발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얼마를 걸었을까?
 돌연, 중년인의 눈빛이 예리하게 번득였다.
 “이런 바보 좀 보게. 왜 진작 그 생각을 못했을까? 신법을 전개했으면 벌써 여산을 벗어나고도 남았을 텐데······.”
 중년인은 강호 경험이라곤 조금도 없는 듯 이제야 경공술을 생각해낸 모양이었다.
 일단 신법을 생각한 중년인은 주저하지 않았다.
 동굴 속에서 익힌 신법을 유감없이 떨쳐냈다.
 한번 지면을 박찰 때마다 이십 장씩을 힘들이지도 않고 훌쩍훌쩍 뛰어넘으니 어디 허공의 새인들 부러울까?
 도리어 비조(飛鳥)가 그를 부러워할 지경이었다.
 이각도 되지 않아 중년인은 여산을 훨씬 벗어나고 있었다.
 그는 어느 관도에 당도해서 신법을 거두었다.
 아무래도 사람이 왕래하는 길인 만큼 눈에 띄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미 때는 초경(初更) 무렵이었다.
 사방에 땅거미가 내려앉은 지도 꽤 오래되었다.
 중년인은 고을이 보이는 동쪽을 향해 걸어갔다.
 고을과 이백여 장 떨어진 곳쯤을 갈 때였다.
 갈래길이 한 개로 만나는 지점에 웬 묘령의 여인이 걷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중년인은 비록 여인과 가깝게 붙어 가진 않았지만 그녀의 일신에서 차가운 냉기가 흐름을 느꼈다.
 사실이었다.
 면사 속에 가려진 두 눈에서 서릿발같은 눈빛이 은연중 빛을 발하고 있었다.
 ‘이상한 일이로군. 몸매를 보니 젊고 아름다운 여인이 분명하건만 어째서 이렇듯 찬 기운이 감돌까?’
 그 까닭을 알 리 없는 중년인은 내심 의혹을 금치 못하며 계속 걸었다.
 면사여인도 묵묵히 계속 걸었다.
 어느덧 고을의 객점 앞에 당도했을 때 중년인은 멈춰 섰다.
 여인은 그를 본 척도 하지 않고 제 갈 길만 가고 있었다.
 여인의 뒷모습이 점차 어둠 속으로 사라져갔다.
 중년인은 알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에 말려들어 사라지는 여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걸음걸이가 범녀(凡女)와 달리 가벼운 것을 보면 무림인이 틀림없구나··· 그나저나 내가 왜 이러지? 어리석게 괜한 일에 신경을 쓰다니··· 오늘은 이곳에서 하루 묵고 내일쯤······.’
 중년인은 두어 번 도리질을 한 후 서둘러 객점 안으로 들어갔다.
 
 ***
 
 남창현(南昌縣).
 나날이 융성을 거듭하는 고을이다.
 부근의 세인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남창현이 그렇듯 나날이 융성하는 연유는 강서성(江西省)에서 호남성(湖南省)까지 늘씬하게 쭉 내리 뻗은 구령산맥(九嶺山脈)의 영기(靈氣)를 이어받은 때문이라고.
 틀린 표현은 아니었다.
 고을 나름대로 발전하고자 노력한 때문인지도 모르나 남창현은 분명 여느 고을과 달리 융성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이러한 남창현에는 항시 사람의 자취가 끊이질 않았다.
 워낙 번화한 성시(盛市)인지라 야심한 시각을 제외하면 항시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이 남창현의 번화가에서 조금 떨어진 어느 한곳.
 그곳엔 바람에 흔들대는 잡초 중에도 의연히 서 있기를 고집하는 나목(裸木)인 양 홀로 우뚝 선 장원(莊院)이 있었다.
 멀리 삼십 장 떨어진 곳에서 눈길을 던져도 확 들어오는 현판의 글이 보였다.
 
 <구양세가(歐陽世家).>
 
 이 네 글자가 마치 학무(鶴舞)의 비룡(飛龍)처럼 유연하고도 강한 필체(筆體)로 박혀 있었다.
 구양세가.
 번화가와 동떨어진 곳에 홀로 자리잡고 있으나 저 장대하고 웅엄한 위용은 감히 그 어느 건물도 뒤따를 수 없을 듯하다.
 황궁(皇宮)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듯하니 그 이상의 표현은 필설로 굳이 나타낸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구양세가는 원래 조정중신(朝廷重臣)들의 사가(史家) 중 하나였다.
 그러므로 인근 남창현의 사람들은 구양세가를 마치 황궁 떠받들 듯 위하며 존경을 한시도 잊지 않았다.
 기실, 구양세가의 월동문(月洞門) 높이에 걸린 현판이 일국(一國)의 황제가 직접 하사한 것이고 보면 과연 구양세가가 어느 만큼의 위치에 있는지 짐작하고 남음이 있을 것이다.
 지금은 이미 타계한 몸이지만 초대(初代) 가주(家主)였던 구양훈(歐陽勳)은 전대(前代) 황제가 재직할 당시 조정의 아홉 개 요직(要職) 중 하나인 형부상서(刑府尙書)에 몸담고 있었었다.
 그처럼 높은 관직(官職)에 몸담기를 어언 사십여 년.
 그는 막 고희(古稀)를 넘길 무렵 나이의 한계를 통감하고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그 후 그가 백성들에게 베푸는 진덕(眞德)은 여전히 관직에 몸담아 있을 때와 다를 바 없었다.
 오히려 그는 더욱 따뜻한 정으로 백성을 보살피니 그 영명(英名)은 남창현을 화살같이 꿰뚫고 호남성과 강서성 전역으로 퍼지더니 마침내 호북성(湖北省)과 안휘성(安徽省)까지 퍼져나갔다.
 구양훈의 인품이 그토록 후덕하고 보니 세인들은 갈수록 그를 흠모했고 존경해 마지않았다.
 한데, 천운(天運)이란 어쩔 수 없는 것인가!
 심성이 후덕하고 선(善)한 그에게 한 가지 안타까운 일이 있었다.
 자손(子孫) 복(福)이 없었던 것이다.
 나이 오십에 겨우 얻은 아들에게서 끝내 손자(孫子)를 보지 못했으니······.
 그것은 유난히 가문(家門) 존속을 따지는 명문대가(名門大家)에 있어 크나큰 근심이 아닐 수 없었다.
 천운을 탓하는 것은 어쩌면 인간이 털어놓는 불만 중 가장 우둔한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보다 나은 행복(幸福)을 추구하는 것이 인간이 간직한 본능 중에도 빼놓을 수 없는 본능이기에 어쩔 수 없이 누군가에, 무엇인가를 원망하는 습성이 몸에 박혀 있다.
 구양훈도 인간일이지라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남모르게 한숨과 탄식으로 세월을 뒤로하다가 결국 그토록 간절히 기다리던 손자를 보지 못한 채 이승을 떠나고 말았다.
 그렇다고 구양세가가 자손을 보지 못한 까닭에 불행하거나 멸문(滅門)의 길에 접어든 것은 절대 아니었다.
 비록 구양훈이 이승을 하직했지만 그가 미처 풀지 못한 한탄의 응어리가 결국엔 찬란한 햇빛으로 화했으니 지하에 묻힌 구양훈도 비로소 홀가분하게 안도하리라.
 허나, 인간사(人間事) 모든 것이 공평하고 평탄하지 못하듯 연년세세(年年世世) 화목한 가정은 존재할 수 없는가!
 그 많은 사람들의 선망을 송두리째 받고 있던 구양세가가 점차 짙은 암운(暗雲)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그러니까 구양훈이 이승을 하직하고 구 년쯤 지난 후부터였다. 그 뒤부터 구양세가는 참으로 괴상망측한 분위기 속에 젖어들기 시작했다.
 언제쯤인가 구양세가의 가족들이 하나 둘 모습을 감추더니 숱하게 많은 식솔(食率)들도 절반 이하로 크게 줄어들었다.
 그리고 짙은 암운을 뚫고 울려오는 저 요사스런 웃음소리······.
 살아 있는 육신 중 일부인 입술을 가르고 터져 나온 여인(女人)들의 웃음이었다.
 듣기만 해도 사뭇 역겹기 그지없어 분노를 유발시키는 저 요염한 여인들의 웃음은 한시도 구양세가에서 끊이질 않았다.
 아니 날이 갈수록 그 농도를 더해 갔으니 이 어찌 망측스런 일이 아니랴.
 구양세가.
 선량한 사람들의 존경을 행여 한치라도 놓칠세라 번성하던 구양세가는 이제 왕년의 구양세가가 아니었다.
 선망의 대상이 아니라 경원과 질시의 대상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누구 때문인가?
 무엇 때문인가?
 세인들은 구양세가를 경원하고 질시하면서도 그 이유만은 알 수 없어 의문을 앙금같이 깔아놓고 있었다.
 세월유수(歲月流水)라.
 물 흐르듯 흘러가는 세월은 온갖 사건을 연줄연줄 이어놓고 억겁의 구멍 속으로 빠져갔다.
 이미 오래 전에 차가운 한풍(寒風)을 몰아내고 유유히 들이닥친 춘기(春氣)가 온 대지를 포근히 감싼 지 오래였다.
 이 날 술시(戌時) 무렵이었다.
 세인들의 발길이 차단된 지 오래인 구양세가로 묵묵히 걸어오는 한 사람이 있었다.
 균형 잡힌 몸매에 훤칠한 키.
 단정한 청의(靑衣) 차림.
 뒷모습만 보아도 호쾌한 남아대장부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허나, 알고 보니 그것은 잠깐의 엉뚱한 추측이었다.
 호쾌한 풍채와는 달리 그의 얼굴은 병색이 완연했다.
 나이는 대략 이십오 세쯤 보였는데 어찌하여 듬직한 체격과 달리 안색은 이렇듯 초췌한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어느덧 청의청년과 구양세가와의 거리는 점점 좁혀져 갔다.
 이십 장··· 십오 장··· 십 장······.
 그러자 의아한 일이 발생했다.
 묵묵히 걷고 있는 청의청년의 병색 짙은 얼굴이 기이하게 꿈틀거렸고 수심(水深)같이 맑은 눈에선 비수처럼 날카로운 빛이 번뜩였다.
 너무도 으스스한 살기(殺氣)!
 한데도 이상한 것은 안색은 여전히 핏기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초췌한 것이다.
 갑자기 변화한 눈빛과는 극히 대조적인 것을 누구나 그를 보았다면 알 수 있으리라.
 마침내 청의청년의 살기충만한 눈빛은 월동문 위의 현판에 고정되었다.
 찰나, 그의 두 눈에 흐릿한 안개 같은 것이 덮이는 듯했다.
 물방울이 맺힌 것이다.
 그러한 눈빛은 천천히 월동문 우측 방향으로 옮겨가 오랫동안 손질하지 않은 채 방치된 담을 뚫고 있었다.
 순간 핏기 없는 입술이 벌어지며 나직한 말소리가 흘러 나왔다.
 “죽일 놈들··· 남의 멀쩡한 집을 억지로 차지했으면 제대로 손질이나 하고 살 것이지 저 지경이 되도록 두다니······.”
 나직한 중얼거림은 그의 형형한 눈빛 못지않게 살기충만했다.
 잠시 입술을 봉한 그가 다시 탄식과 함께 중얼거렸다.
 ‘휴우··· 집이 이 모양인 것을 보니 아버님께선 아직도 돌아오시지 않은 모양이구나.’
 혹시나 하며 걸었던 기대감이 무너진 것에 실망한 듯 터져 나온 탄식이 유난스레 암울했다.
 이윽고 그가 멈춰 섰다.
 구양세가와 육 장 남짓한 거리를 둔 곳이었다.
 뒷짐을 지고 쓸쓸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무한히 어두운 공간.
 맑은 하늘은 고사하고 큰 성광(星光)도 보이지 않았다.
 청의청년의 눈이 살기 대신 고뇌에 찬 빛을 발했다.
 “아··· 이곳을 떠난 지도 벌써 육 년이 흘렀구나······.”
 무엇인가 회상하는 모양이다.
 “세상에 나처럼 기구한 운명을 타고난 사람도 있을까? 늦게나마 나를 낳으신 어머님은 산후(産後)조리를 잘못한 까닭에 세 살배기 나를 남겨놓으시고 돌아가셨다고 하셨지······.”
 누가 곁에 있어도 쉽게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웅얼웅얼 중얼거리는 청의청년이다.
 홀연 그가 허공에서 시선을 거두고 구양세가의 월동문 쪽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아··· 저 사람은 오노인(吳老人)이구나. 육 년 만에 보니 더욱 늙은 것 같군.’
 격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내심 이렇게 중얼거린 그는 자신도 모르게 그쪽을 향해 걸어갔다.
 ‘그래도 지난날 내게 가장 잘 대해준 사람은 오노인뿐이었지.’
 다시금 뇌리로 생각을 굴릴 때였다.
 “거기 누구요?”
 약간 구부정한 허리로 월동문에 나타난 노인이 놀란 듯 말을 던져왔다.
 그제야 청의청년은 노인과 일 장 떨어진 곳에서 멈춰 섰다.
 노인이 흠칫 경계하는 태도를 보이며 물어왔다.
 “누굴 찾아왔기에 여기서 서성거리는 것이오?”
 “······.”
 청의청년은 우두커니 선 채로 백발노인을 바라보았다.
 감개 어린 빛이 그의 두 눈에서 물결처럼 일렁이고 있다.
 이에 경계의 눈초리로 그를 마주보던 백발노인이 다소 굳어진 표정으로 말문을 열려고 할 때였다.
 “저, 혹시 이 집이 무림현자(武林賢者)라 불린 구양대협의 집이 아닌지요?”
 청의청년이 먼저 입을 열었다.
 백발노인은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하다 곧 끄덕였다.
 “그렇소. 하지만 그분은 이미 십여 년 전에 출타하시고 아직 돌아오지 않으셨소.”
 ‘아··· 내 추측이 틀림없었구나······.’
 청의청년이 실망을 금치 못하고 있을 때, 잠깐 말을 중단한 백발노인이 감정 없는 말투로 물어왔다.
 “그럼 공자는 그분을 찾아온 것이오?”
 청의청년은 정색하며 대답했다.
 “실은 그게 아니라 그분의 외독자인 구양준(歐陽俊)을 찾아온 것이오.”
 일순, 백발노인의 눈빛이 섬전처럼 번뜩였다 사라졌다.
 극히 짧은 순간의 변화였다.
 그러나 청의청년은 마치 무엇에 한방 얻어맞은 듯 놀랐다.
 ‘그러고 보니 저 노인도 무림인(武林人)?’
 너무 뜻밖의 사실을 알아챈 마당에 그는 잠시 망연한 생각에 사로잡혔다.
 이내 백발노인의 묵직한 탄식이 그의 귓속을 후비고 들어왔다.
 “휴우··· 구양공자께서도 계시지 않소이다. 육 년 전 갑자기 실종되었소.”
 넋두리인 양 중얼거리다 노인은 고개를 번쩍 들고 예의 무뚝뚝한 말투로 질문해왔다.
 “그런데 구양공자는 왜 찾으시오? 그리고 그분과는 전부터 알고 있는 사이요?”
 한꺼번에 두 가지 질문을 던져왔다.
 청의청년은 무슨 생각인가 깊이 굴리는 듯하다 정색하고 담담히 응수했다.
 “그와는 전에 함께 글공부하던 친구요. 마침 이 지방에 볼일이 있어 왔던 중 친구가 생각나서 들러본 것이오.”
 말을 하면서도 청의청년의 눈길은 전면의 구양세가를 둘러보고 있었다.
 “무림현자인 구양대협과 구양공자마저 없으면 이 집은 누가 관장하고 있소?”
 청의청년이 주위를 둘러보며 말하고 있는 바로 그때였다.
 백발노인의 눈빛이 괴이쩍게 빛나며 우장이 빠르고 날렵하게 한 번 움직이는 듯했다.
 그러더니 언제 움직였느냐는 듯 우장은 원래 위치인 등뒤로 돌아가 있는 것이 아닌가?
 이윽고 그가 유유히 돌아서면서 말했다.
 “젊은 양반, 괜한 것 물어보면 살신지화(殺身之禍)를 당하게 되오. 어서 조용히 물러가시오.”
 이어 그는 한차례 거친 기침과 함께 월동문 샛문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으음······.”
 청의청년은 신음을 발하면서 물끄러미 샛문 쪽을 주시하였다. 그리고 총총히 생각을 굴렸다.
 ‘저 오노인은 분명 고절한 무공을 소유하고 있다. 그렇다면 무슨 목적으로 이곳에······.’
 일말의 진하디진한 의혹이 그의 눈에 역력히 나타났다.
 ‘그렇지. 그는 구 년 전쯤 이곳에 갑자기 찾아와 정처 없이 떠도는 몸이라며 잔일이라도 해줄 테니 의탁(依託)하게 해달라고 통사정했었다. 그러자 그놈들은 무슨 꿍꿍이 속셈인지 허락해 준 것 같은데··· 모를 일이구나······.’
 청의청년은 한동안 그렇게 선 채로 내심 중얼거렸다.
 이윽고 그의 눈이 열 번쯤 끔벅거렸을 시간이 흐른 뒤, 청의청년은 예리한 시선을 샛문에서 거두고 천천히 돌아서더니 왔던 길로 되돌아 걷기 시작했다.
 청의청년이 삼십 장 밖으로 멀어졌을 때였다.
 구양세가의 월동문에서 슬그머니 내밀어지는 머리통 하나가 있었다.
 강렬한 눈빛의 주인공.
 그는 바로 조금 전 자취를 감춘 백발노인이었다.
 청의청년을 대할 때의 흐릿한 눈빛과는 천양지차(天壤之差)인 강렬한 눈빛의 백발노인.
 그는 급히 오른손을 들어올려 펴보았다.
 뜻밖에 그의 손바닥에는 괴이한 모양의 물건 하나가 놓여 있었다.
 바로 자죽(紫竹)으로 된 패였다.
 그것도 두둥실 구름을 타고 나는 신선 같은 노인이 새겨진 죽패였다.
 “아앗!”
 죽패를 내려다보던 백발노인이 자지러질 듯이 놀랐다.
 강렬하게 빛나던 두 눈은 일시 두려운 빛으로 변했고 안색은 하얗게 질리다시피 했다.
 “이놈의 늙은이가 도둑질로 한평생을 보내왔더니 이젠 죽을 때가 된 모양이구나··· 감히 개방의 최고 신물(信物)인 자죽령패를 훔쳐내다니··· 아··· 정말 큰일이구나······.”
 그는 심히 경악한 마음을 어찌 감당할 수 없는 듯 안절부절못했다.
 “에그··· 무영신투(無影神偸) 오원(吳遠)··· 너도 이제 죽을 때가 다가온 모양이구나······.”
 계속 중얼거리며 그는 손바닥 위의 죽패를 이리저리 자꾸 뒤집어 보았다.
 “이 자죽령은 이백 년 전 개방의 방주이자 무림삼성(武林三聖) 중 한 분이신 학발비응(鶴髮飛鷹)께서 소지하신 신물로 개방의 지고무상한 영패라고 했거늘··· 아······.”
 노인은 탄식하고는 의혹 어린 시선으로 청의청년이 사라진 방향을 뚫어질 듯이 응시했다.
 “병색 짙은 그 청의서생은 도대체 누구일까··· 누구기에 자죽령패를 몸에 지니고 다닌 것일까? 눈빛은 어디서 많이 본 듯하건만··· 도무지 생각이 나질 않는구나······.”
 돌연 그는 중얼거리다 말고 자죽령패를 재빨리 품속으로 집어넣었다.
 “내가 이러고 마냥 서 있을 때가 아니지.”
 두렵고 조급한 탓일까?
 급히 몸을 틀고 안으로 사라지는데 빠르기가 마치 번개를 무색케 했다.
 
 
 2장 무영신투(無影神偸)
 
 
 <진미루(眞味樓).>
 
 검은 글씨 세 개가 붉은 바탕 위에 적혀 있다.
 남창현의 중심가에서 조금 벗어난 곳에 위치한 주루.
 주루인 까닭인지 문 바로 앞에는 향긋한 술 냄새가 물씬 풍기고 있었다.
 때는 일경(一更) 무렵.
 진미루는 많은 손님들로 붐볐다.
 손님이 많으니 시끄러운 것은 당연했지만 누각 후원에 즐비하게 자리잡은 객방(客房)은 몇몇 군데서 나직한 대화가 흘러 나올 뿐 그런 대로 조용한 편이었다.
 어느덧, 일경이 훌쩍 지나버리고 이경(二更)이 되었다.
 바로 이 즈음 먹물을 풀어놓은 듯 짙은 야색(夜色)을 뚫고 비호(飛虎)같이 진미루로 날아오는 야행인(夜行人)이 있었다.
 다행히 칠흑 같은 어둠 속이라 그를 발견한 이는 없었지만 설혹 발견했다고 하더라도 그가 사람이라고 여긴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다만 순식간에 곁을 스친 바람이라고 여길까?
 그렇듯 절륜적인 신법(身法)을 지닌 야행인은 삽시간에 진미루의 객방이 있는 지붕 위로 내려섰다.
 내려서는 동작 또한 엄청나게 가벼워서 흡사 지면에 내려앉는 먼지 같았다.
 야행인은 복면을 하고 있었다.
 복면한 얼굴에서 두 줄기 화등(火燈) 같은 신광이 번쩍였다. 그 눈빛은 순식간에 맨 끝의 객방으로 옮아갔다.
 “저기 불이 밝혀진 방이 분명할 텐데······.”
 실낱같은 음성으로 중얼거린 복면인은 그쪽을 향해 잠시 귀를 기울였다.
 “이상하구나··· 어찌 아무 인기척이 없을까? 혹시 점소이가 내게 잘못 가르쳐준 것은 아닐까?”
 곁에 바싹 붙어 있지 않고는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는 그의 목소리.
 거기엔 후회와 자책의 기운이 십분 갈무리되어 있었다.
 “그래, 나는 무슨 수를 쓰든지 그에게 물건을 돌려줘야 해. 휴우··· 도대체 그 청의서생은 누구일까? 아무튼 가까이 다가가서 살펴보도록 하자.”
 여기까지 중얼거린 복면인은 처음 지붕 위에 내려설 때와 마찬가지로 사뿐히 지면에 내려섰다.
 그리고는 남의 보물을 노리고 침입한 밤손님처럼, 생생한 쥐를 발견하고 군침 흘리는 고양이처럼 슬그머니 불켜진 방 앞으로 접근해 갔다.
 순간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말소리가 들려왔다.
 (오노인, 들어오시오. 나는 당신이 자죽령패를 꺼내갈 때부터 이렇게 될 줄 알았소.)
 느닷없이 방안에서 모기소리 만한 전음(傳音)이 들려오는 게 아닌가?
 복면인은 까무러칠 듯이 놀라며 그 자리에서 굳어지고 말았다.
 ‘오노인? 나를 오노인이라고 부를 사람은······.’
 경악한 가운데 짙은 의혹을 느끼던 그는 번뜩 한 가지를 기억하고 더욱 질색했다.
 ‘그렇구나.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눈빛이라고 여겼더니··· 아!’
 그때 또다시 들려오는 전음이 그를 힐책하고 있었다.
 (오노인! 본인이 모시러 나가야 들어오겠소?)
 감히 거역할 수 없는 위압감이 가득한 전음이었다.
 복면인은 선뜻 움직이지 못하고 어찌할까 망설였다.
 한데, 망설이는 그가 답답한 때문일까?
 눈앞의 방문이 갑자기 확 열렸다.
 “아······.”
 복면인은 순간적으로 착잡한 탄식을 토해냈다.
 그리고 무엇을 결심한 듯 방안으로 급히 들어섰다.
 “웃!”
 복면인은 까무러칠 듯이 경악하며 하마터면 문 밖으로 자빠질 뻔했다.
 방안에 정좌한 채 자신을 보고 있는 세 노인.
 복면인은 그들을 보고 질겁하며 놀란 것이다.
 그가 어찌나 크게 놀랐던지 콧잔등 밑의 복면이 코끝과 맞닿을 정도로 높이 들썩였다.
 “앉으시오.”
 세 노인과 등을 돌린 채 앉아 있던 청의청년이 던진 한마디는 그의 심장을 송곳으로 찔러오는 듯 충격적이었다.
 “이럴 수가······.”
 복면인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벌린 입을 다물고 연거푸 고개를 도리질했다.
 “소림 장로(長老)이신 요공선사(了空禪師)··· 무당장문인 청송자(靑松子)··· 개방방주 불노신개······.”
 이때 돌아서 앉은 청의청년이 냉정한 소리로 말을 던져왔다.
 “오노인, 언제까지 그렇게 복면을 하고 있겠소?”
 복면인은 뜨끔했다.
 ‘돌아앉아 있으면서 어떻게 내가 복면한 것을 알았을까?’
 자신은 지금 생시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착각하며 자신도 모르는 사이 복면을 벗어내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더듬거리는 투로 말했다.
 “혹시··· 공자께선 육 년 전에 실종되었던 구양공자가······.”
 “당신은 무영신투 오원?”
 복면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놀라 부르짖은 사람은 가운데 앉은 육순(六旬) 정도 되는 노인이었다.
 바로 그 순간, 맞은편 벽을 향해 있던 청의청년이 앉은 자세 그대로 몸을 돌렸다.
 이십 세 전후의 영준한 미청년이었다.
 얼굴엔 재기(才氣)가 넘쳐흐르고 부릅뜬 호안에선 노기마저 줄기줄기 뻗치고 있었다.
 얼마 전 구양세가에 나타났던 핏기 없는 얼굴이 아니었다.
 막 절반을 넘긴 반달처럼 수려한 이마부터 턱 끝까지 열혈남아(熱血男兒)의 의연한 기가 서려 있으니.
 무영신투 오원은 그만 납덩이가 되고 말았다.
 이 마당에 입이 있다고 무슨 말을 하겠는가.
 청의청년이 호안을 날카롭게 빛내며 칼로 무 베듯 단호히 내뱉었다.
 “그렇소. 내가 바로 육 년 전에 사라졌던 구양세가의 일점혈육(一點血肉) 구양준(歐陽俊)이오.”
 “오······.”
 착잡한 심경이 거미줄처럼 얽히며 나타난 무영신투 오원의 얼굴은 감히 청의청년을 마주 대하지 못하고 숙여졌다.
 허나, 구양준의 날카로운 호안은 잠시도 무영신투의 머리통에서 거둬질 줄 몰랐다.
 “나는 그래도 당시 학대받을 때 내게 제일 잘 대해준 사람이 당신이기에 언젠가 그 은혜를 갚으려고 했었소. 그런데 알고 보니 당신은 너무도 철저히 자신을 위장시켰소. 고절한 무공과 신분을 속이고 일부러 구양세가에 침투했다니······.”
 경멸로 충만한 말이었다.
 아울러 무영신투 오원에게 있어서 가슴을 찌르는 송곳 같은 말이기도 했다.
 불노신개를 비롯한 삼파지존(三派至尊)들은 구양준의 말에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무영신투를 쏘아보았다.
 역시 경멸에 찬 눈빛으로 싸늘하기 그지없다.
 무영신투 오원은 이 순간 마치 뜨거운 가마솥에 앉아 있는 기분이었다.
 낯이 화끈 달아오르더니 이젠 온 몸뚱이가 뜨거워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여전히 떨군 고개를 들지 못했다.
 후회막급이었다.
 죽으려고 환장해도 단단히 환장했지.
 어찌하여 늘그막에 자죽령패까지 욕심을 냈나?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벌떡 일어나 방문을 박차고 도주하고 싶었다.
 아무래도 자신은 이 자리에 오래 머물러 있을 수가 없는 중죄인이니까.
 무영신투 오원.
 지금 나이를 헤아려 본다면 구십(九十)이 넘은 노령이다.
 그는 남의 물건을 훔치는 데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아마 중원무림(中原武林)에서는 그의 귀신같은 손속을 따를 자가 없을 것이다.
 무영신투라는 외호(外號)만으로도 그의 존재를 익히 알겠지만 그는 근 팔십 년 동안이나 강호전역에 이름을 날려왔다.
 한데, 기이한 일은 강호에 떠도는 그에 대한 소문이었다.
 남의 물건을 훔치는 자들이 모든 이들에게 나쁘게 인식되는 것은 당연지사겠으나 무영신투 오원만큼은 달랐다.
 도리어 그는 좋은 평판을 받고 있는 처지였다.
 배부른 무림인들의 금품을 탈취해서 빈민들에게 주니 가난한 이들에게 고마운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허나, 이 순간만큼은 그에 대한 평판이 호의 도움을 주지 않았다.
 ‘빌어먹을.’
 새삼스레 자신의 행동을 혐오하는데 구양준의 음성이 다시 그의 귀를 때려왔다.
 “말하시오. 무엇 때문에 신분을 숨기고 구양세가에 잠입한 것이오.”
 무영신투는 찔끔한 듯 고개를 들었다.
 그러더니 이내 무엇을 생각했는지 다시 떨구고 말이 없다.
 “끝내 입을 봉할 셈이오?”
 “······.”
 뼛속 힘줄까지 잘라내듯 날카로운 호통이었으나 무영신투는 여전히 대꾸가 없다가 비로소 품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이어 떨리는 손으로 끄집어낸 것은 바로 자죽령패였다.
 순간 불노신개의 근엄한 안색이 싹 바뀌었다.
 어느새 그의 엉덩이는 바람 든 공처럼 퉁겨 올랐다.
 “이놈! 네놈이 감히 자죽령패를 도둑질하다니··· 죽으려고 환장한 모양이구나.”
 노발대발 소리치며 불노신개는 사정없이 일장을 휘둘러대고 있었다.
 창졸간의 무시무시한 급습.
 방안은 삽시간에 터져 나갈 듯 엄청난 경기(勁氣)로 충만했다.
 그때였다.
 구양준이 앉은 자세 그대로 살짝 한 손을 내뻗으며 말했다.
 “장문인,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그러자 무섭게 일렁이던 경기가 거짓말처럼 말끔히 구양준의 장심(掌心)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절로 경악할 놀라운 일이었다.
 불노신개는 그만 안색이 창백하게 굳어지고 말았다.
 ‘아··· 노부의 이갑자 공력이 깃든 장력을 힘 하나 들이지 않고 해소시키다니······.’
 경악한 것이 어찌 그뿐이겠는가?
 방안에 있던 나머지 이파지존 역시 경악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구양준을 주시했다.
 나이 이미 백삼십여 세에 이르러 흡사 환생한 부처 모습 같은 요공선사는 눈도 깜박이지 않고 구양준을 주시한 채로 생각했다.
 ‘난 단지 사존이신 혜원대사(慧園大師)의 영패가 찍힌 요지(要指)를 개방에서 보내 급히 이곳까지 왔는데··· 아! 대체 이 시주는 누구일까?’
 기실 구양준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이곳에 온 그이고 보면 뜻밖의 상황을 목격하고 경악한 것은 지극히 당연했다.
 무당장문인인 팔순(八旬)의 청송자도 마찬가지였다.
 그 역시 존인 육일도인(六一道人)의 영패가 찍힌 요지를 받고 부랴부랴 이곳으로 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 삼파지존이 이렇듯 경악하는 마당에 표정 하나 바뀌지 않은 사람은 무영신투였다.
 그는 개방주인 불노신개가 일장을 격출할 때에도 눈 하나 깜박이지 않더니 구양준의 놀라운 무공을 목격하고도 역시 그러했다.
 철석간장을 가진 탓인지 아니면 불노신개의 일장을 충분히 받아낼 수 있고 또한 구양준의 무공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긴 탓인지.
 그가 품은 생각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무영신투는 처음 자세에서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이 구양준만 바라보고 있었다.
 마침내 무엇을 결심했는지 꼭 다물었던 입을 벌려 말하기 시작했다.
 “이제 와서 숨긴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소인 애당초 구양세가에 들어간 것은······.”
 무영신투가 설명한 자초지종은 대략 다음과 같았다.
 본래 그는 나쁜 마음으로 구양세가에 침투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다만 도둑이 제 버릇 남 못 준다는 말이 있듯이 물건에 욕심이 생겨 그랬던 것이다.
 호계삼소도(虎溪三笑圖)를 무림현자 구양영숙(歐陽永淑)이 입수했다는 소문은 벌써부터 강호에 떠돌던 터라 우연히 그 소문을 듣고 스스로 종이 되길 자처하여 구양세가에 들어왔다. 비록 가주인 구양영숙은 행방이 묘연하여 집안에 없었지만 무영신투는 그가 필시 집안 어디엔가 비도를 숨겨두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래서 계속 머물며 틈나는 대로 구양세가의 구석구석을 살폈다.
 그런데 그가 운이 없어서인지······.
 진정 집안에 호계삼소도가 없어서인지 거의 십 년이 다 되도록 그는 목적을 달성할 수 없었다.
 그러던 중 오늘 술시 무렵, 구양세가 앞에서 기웃거린 구양준과 만났을 때 첫눈에 그가 예사로운 인물이 아님을 간파했다. 그래서 무엇이든 소지품을 꺼내보면 그의 신분을 알 수 있을 것 같아 자신이 익히 써오던 탈취법을 귀신같이 펼쳤더니 놀랍게도 자죽령패가 나온 것이다.
 결국 그는 그 자리에서 자신의 행동을 후회했고 무슨 수를 쓰든지 빨리 돌려주어야겠다고 마음먹은 후 이곳으로 달려온 것이다.
 
 얘기는 대략 여기서 매듭지어졌다.
 묵묵히 그가 하는 말을 듣고 있던 구양준은 검미를 몇 번 꿈틀거렸을 뿐 표정에는 변함이 없었다.
 무영신투는 자초지종을 설명한 마당에서도 대죄(大罪)를 감당할 수 없는지 제대로 고개를 들지 못했다.
 잠시 후 그의 음성이 다시 이어졌다.
 “구양공자님, 두 번씩이나 대죄를 범한 이 몸이 어찌 무사하길 바라겠습니까? 죄에 대한 대가는 무엇이든 달게 받겠습니다.”
 어느덧 그의 노안에서 맑은 물방울이 두 방울 뚝 떨어져 내렸다.
 “하지만 구양공자님, 이 늙은 놈이 지은 죄를 씻을 수 있도록 마지막 기회를 주십시오.”
 “······?”
 “이제부터라도 구양세가의 충복(忠僕)이 되겠습니다. 그리고 솔직히 살겠으니 이 늙은 놈의 간청을 부디 수락하여 주십시오.”
 구양준은 만감이 복잡하게 교차한 표정으로 무영신투를 주시했다.
 ‘진실로 잘못을 뉘우치고 있군. 그의 표정과 말로써 그것을 잘 알 수 있다. 하지만······.’
 그의 고개는 가벼이 좌우로 흔들리고 있었다.
 “당신의 의도는 십분 헤아리겠으나 사양하겠소.”
 무영신투는 뜻밖인 듯 눈꺼풀을 높이 치켜올리다 이내 고개를 내둘렀다.
 “안됩니다. 저는 이미 마음속으로 공자님을 주인님으로 모시겠다고 결심을 했습니다. 그러니 제발 저의 간청을 거두어주십시오.”
 통사정하며 매달리는 무영신투는 조금 전과 너무 판이한 행동을 보이고 있었다.
 구양준은 그가 이렇게 강경하게 나올 줄은 생각도 못했다는 표정이었다.
 “구양공자님, 아니 주인님! 저는 지금 이 순간부터 죽어 시체로 방밖을 나가기 전엔 결코 움직이지 않을 것입니다.”
 삼파지존은 누구 하나 입을 열지 않고 고집불통으로 나오는 무영신투를 쳐다보았다.
 얼마간 난감한 표정으로 무영신투를 주시하던 구양준이 짧은 탄식성과 함께 말을 꺼냈다.
 “당신의 뜻을 받아들이겠소. 허나, 절대로 나를 주인이라고는 부르지 마시오. 그리고 옛날처럼 당신을 오노인이라 부를 테니 우선 편히 앉으시오.”
 무영신투는 감격한 듯 눈물을 주르르 흘리며 황송해했다.
 “주인··· 아니 구양공자님, 정말 감사합니다. 늙은 놈을 용서해 주시다니······.”
 그는 조심스레 구양준의 뒤로 물러가 앉았다.
 잠시 방안에 침묵이 감돌았다.
 두 번의 숨을 몰아쉴 시간도 되지 못해 침묵을 깬 사람은 구양준이었다.
 “우선 제가 세 분에게 요지를 보내 이렇게 오시라고 한 것을 사과 드립니다.”
 침착하고 점잖은 그의 말에 삼파지존은 그제야 자신들의 위치를 깨닫고 마음을 바로 가다듬었다.
 그때 소림의 요공선사가 말했다.
 “사실은 장문인인 공공대사(空空大師)께서 오셔야 하는데 지금 폐관중이라 빈승이 온 것이오.”
 말하면서 그는 눈앞의 이 젊은이가 사존의 영패를 통해 이곳까지 불렀음을 깨닫고 새삼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도대체 이 젊은이는 사존과 어떤 관계일까?
 삼파지존의 의혹은 한결같이 똑같았다.
 구양준이 가볍게 손을 저었다.
 “까닭이 있어 못 오신 걸 어찌하겠습니까? 괜찮으니 염려 마십시오.”
 그는 다시 불노신개와 청송자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세 분이 궁금히 여길 테니 요점부터 간단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삼파지존은 숨을 죽이며 가슴을 졸였다.
 
 ***
 
 “저는 혜원선사(慧園禪師)와 육일도인(六逸道人), 학발비응(鶴髮飛鷹) 탁방(卓芳) 등 세 어른의 공동제자입니다.”
 “뭣이라고요?”
 듣고 있던 삼파지존의 안색이 대변하며 그들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아······.”
 등뒤에 앉은 무영신투도 적잖게 경악하며 황소 눈처럼 부릅뜬 눈으로 구양준의 전신을 두루 주시했다.
 혜원선사.
 육일도인.
 학발비응 탁방.
 그들은 이백 년 전의 인물로 각각 소림파와 무당파, 개방에 몸담고 있으면서 무림삼성(武林三聖)이라 불린 기인(奇人)들이 아닌가.
 그들이 이제껏 살아 있었다니······.
 그리고 이 눈앞의 젊은 청년이 그들 세 사람의 공동제자라니······.
 각기 자기 문파사존의 영패가 찍힌 요지를 받고 온 삼파지존이나 그들은 백년 전의 사존이 살아 있으리라고는 실로 상상도 못한 일이 아닌가!
 “시주가 진정······.”
 소림의 요공선사가 놀란 심정을 애써 진정시키고 말하려 할 때 구양준이 입을 열었다.
 “세 분, 고정하시고 앉으십시오. 제가 자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구양준이 담담히 토해낸 이 말에 벌떡 일어났던 삼파지존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본 후 어정쩡하게 다시 앉았다.
 구양준은 지그시 두 눈을 내리 감았다.
 이어 지난 일을 회상하는지 표정이 곤혹스레 변했으나 곧 치켜 떠진 눈과 함께 완화되었다.
 “조금 전에도 말씀드려 알고 계시듯 저는 구양세가의 일점혈육으로 무림현자 그분은 저의 아버님이십니다.”
 이렇게 시작한 구양준의 말은 차분한 투로 계속 이어졌다.
 “제가 지내온 어린 시절은 차후 기회가 있을 때 말씀드리기로 하고 세 분 사부님을 저 혼자 모시게 된 까닭을 말씀드리겠습니다.”
 “······.”
 “······.”
 “육 년 전이었지요. 부친께서 집에 안 계신 이후 저는 줄곧 모진 매에 시달리며 살아왔습니다. 아직까지 구양세가를 제멋대로 주무르고 있는 그놈들에게 말입니다.”
 차분하게 시작된 말은 점차 떨리고 있었다.
 기억조차 하기 싫은 참담한 과거이기에 말하기가 이렇듯 힘겨운 것일까.
 그러나 구양준은 자초지종을 설명하기 위해 그 좋지 못한 기억을 되살려내야 했다.
 “어느 날 황혼 무렵이었습니다. 그 날도 평소와 예외는 아닌지라 그자들에게 두들겨 맞고 집안을 벗어나서 어느 한적한 곳에 가 서럽게 울고 있었습니다.”
 문득 듣고 있던 무영신투가 탄식했다.
 “휴··· 어리석은 위인··· 그자들의 못된 소행을 보고도 채우지 못한 욕심 때문에 말리질 못했으니······.”
 당시 상황을 가까이서 목격한 무영신투는 아직도 그 광경이 눈앞에 생생한 듯했다.
 그래서 지금 후회막급하게 넋두리처럼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구양준은 뒷전에서 들려오는 그의 중얼거림을 똑똑히 들었지만 개의치 않고 하던 말을 이었다.
 
 ***
 
 서녘하늘에 불타던 노을이 점점 사라지고 있을 무렵, 구양세가와 십여 장 떨어진 한적한 고목 아래서 홀로 흐느껴 우는 소년 한 명이 있었다.
 “흐흐흑······.”
 무엇이 저렇듯 서러울까?
 이제 열 서너 살쯤 되어 보이는 남루한 차림의 소년.
 소년은 그렇게 쭈그리고 앉아 운 지 오래된 듯 눈자위가 퉁퉁 부어 있었다.
 누구든 소년의 이 애절한 울음소리를 들으면 가슴이 절로 뭉클할 텐데 근처엔 사람의 그림자 하나 얼씬거리지 않았다.
 소년의 고적한 심정을 달래주려 함인지 한차례 속절없이 찬바람이 쏴아 불어왔다.
 처량 맞게 서녘하늘을 응시하던 소년이 갑자기 불어온 바람에 흠칫한 듯 무심히 우측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허허허허······.”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한 백발노인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지 않은가!
 “어?”
 깜짝 놀란 소년은 자신도 모르게 눈을 왕방울처럼 뜨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허허허··· 얘야, 너는 어찌하여 울고 있는고?”
 “······?”
 선풍도골(仙風道骨)의 풍모를 지닌 백발노인은 소년이 당황한 기색을 띠자 한걸음 가까이 다가서며 더욱 인자한 투로 말하는 것이었다.
 “두려워하지 말거라. 나는 나쁜 사람이 아니니라.”
 잔주름이 가득한 노안(老顔)에는 부처의 자애로운 미소가 잔잔히 번져 나왔다.
 소년은 이러한 백발노인을 대하자 온 긴장이 풀어지는 것은 물론이고 그나마 꾹꾹 참은 설움이 와락 복받쳐 오르는 기분이었다.
 이어 백발노인이 다시 말했다.
 “얘야, 말해보거라. 어째서 혼자 울고 있었느냐? 그리고 네 이름은 무엇이냐?”
 “어르신, 저는 구양준이라 합니다.”
 그 동안 따뜻한 인정(人情)에 굶주려 온 소년 구양준은 백발노인의 인자한 말에 이끌려 냉큼 자신의 이름을 밝히고 백발노인이 묻지도 않은 말을 술술 들려주었다.
 자신의 신분내력과 무엇 때문에 이곳에 와 울고 있는지.
 그리고 자신의 아버지인 무림현자 구양영숙이 집을 떠난 일이며 지금 집안을 독차지 한 채 떵떵거리는 자들이 어떤 자들인지도 백발노인에게 모두 얘기했다.
 그것은 백발노인이 전혀 생각하지도 않은 대답임과 동시 구양준이 난생처음으로 한꺼번에 많이 늘어놓은 말이기도 했다.
 듣고 있던 백발노인의 노안에 어두운 그늘이 지는 듯했다.
 허나 그것도 잠깐.
 구양준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게 번뜩였다.
 그것은 분명 경악함을 뜻하는 눈빛이었다.
 ‘음! 이 아이는 범상한 아이가 아니구나. 저 얼굴에 은연히 흐르는 영기(靈氣)··· 아! 보기 드문 인재로고······.’
 아니나 다를까?
 백발노인은 경이함을 떨쳐내지 못하고 암암리에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윽고 그는 아직도 서러움이 가시지 않은 듯 흐느끼는 구양준을 바라보며 넌지시 말을 건넸다.
 “얘야, 혹시 너는 무공을 배우고 싶지 않느냐?”
 무공이란 한마디에 구양준은 귀가 번쩍했다.
 무공!
 그것이 무엇인지 그는 너무도 잘 알고 있다.
 허나, 그는 전혀 할 줄을 모른다.
 가끔 배우고 싶다는 충동을 절실히 느껴온 터지만 그에게 있어선 허공에 뜬 달이었다.
 물론 부친인 구양영숙은 강호에서 내로라하는 일류고수였으나 나이 어린 그에게 가르쳐줄 생각도 않고 오직 학문에 몰두하도록 훈계해 왔다.
 그나마 그런 부친마저 집을 떠나고 나자 구양준은 날마다 하늘에 뜬 달을 잡아 보았으면 하고 간절한 소망을 키워왔다.
 늑대 같은 작자들이 집안을 거머쥔 채 발광할 때면 더더욱 그런 소망이 어린 그의 내부에서 강렬히 불꽃을 튀겼다.
 실로 얼마나 배우고 싶었던 무공인가!
 백발노인이 넌지시 건네 온 한마디는 나이 어린 그의 심장을 활활 불살라 놓기에 충분했다.
 “어르신, 방금 무공이라고 하셨지요?”
 백발노인은 구양준의 태도가 의외라고 여겼던지 그를 빤히 쳐다보고는 이내 그렇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
 구양준은 한차례 나직한 탄성을 토해내고 넙죽 백발노인 앞에 엎드렸다.
 “어르신, 오늘 당장 어르신의 제자가 되겠습니다. 그리고 열심히 따를 테니 부디 버리지 말아주십시오.”
 백발노인의 가슴에 송곳처럼 와 닿는 간절한 애원이었다.
 “허허허··· 녀석, 뭐가 그리도 급하냐? 매사엔 순서가 있는 법이니라. 그러니 쓸데없이 서두를 필요는 없다.”
 예의 인자한 투로 내뱉곤 백발노인은 무릎을 꿇은 채 앉아있는 구양준의 머리를 향해 우장을 슬쩍 내밀었다.
 “어··· 어?”
 구양준은 꿈꾸듯 경호성을 터뜨리며 벌떡 일어났다.
 자력(自力)에 의해서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머리통 위에서 강하게 작용하는 흡입력에 의해 졸지에 꼿꼿하게 선 꼴이 된 것이다.
 “듣자하니 넌 저 집에서 특별한 볼일도 없는 것 같구나. 이 길로 곧장 떠나자.”
 무슨 의도에서인지 이렇게 말한 후 백발노인은 구양준을 옆구리에 끼었다.
 “녀석아, 불만은 없겠지?”
 “어르······.”
 구양준이 눈알을 왕방울처럼 뜨며 뭐라고 말하기도 전 백발노인은 어느새 삼십 장 밖의 우거진 송림(松林)을 뚫고 있었다.
 구양준은 삽시간에 정신이 아찔하고 눈이 뒤집힐 것만 같았다.
 백발노인은 구름 속을 비호처럼 꿰뚫고 있었다.
 자신도 덩달아 그 속을 꿰뚫고 있었다.
 기막힌 일이었다.
 그렇게 약 이틀간 쉬지 않고 달린 끝에 백발노인은 어느 심산유곡(深山幽谷)의 동굴 앞에서 멈추었다.
 백발노인은 그제야 옆구리에 끼었던 구양준을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어떠냐? 오는 동안 구경 많이 했느냐?”
 구양준은 아직도 정신이 멍하고 귀가 얼얼하여 마치 꿈속을 헤매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어르신, 여기가 어디입니까?”
 “허허허··· 동굴 앞이지 어디이겠느냐? 자, 나를 따라오너라.”
 백발노인은 성큼 안으로 걸음을 옮겨 놓았다.
 사방을 두리번거리던 구양준은 백발노인이 십여 걸음 안으로 들어간 후에야 재빨리 뒤따라갔다.
 동굴 안은 매우 기묘한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이십여 걸음 걸어가니 돌연 사각형의 모서리인 양 좌측으로 확 틀어지고 좁았던 둘레가 점차 넓어졌다.
 구양준은 어떻게 이런 동굴이 있을까 하는 경악을 금치 못하며 빠르게 백발노인의 뒤를 따랐다.
 굽어진 동굴 안으로 삼십여 걸음 옮겼을까?
 그들은 비로소 동굴의 막바지에 이르렀다.
 “어떠냐? 마음에 드느냐?”
 “예··· 어르신······.”
 “이곳은 노부가 이미 오래 전부터 알고 있던 곳이란다. 따져보면 매우 유서 깊은 곳이지.”
 이렇게 말하는 백발노인은 구양준이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들고 대견한지 구양준을 바라보는 눈길이 만족함으로 충만했다.
 “앉거라. 좋든 싫든 너와 나는 이곳에서 함께 생활해야 한다.”
 구양준이 사방으로 두리번거리던 눈길을 거두고 백발노인의 맞은편에 앉았다.
 “시간을 지체할 수 없으니 우선 네게 들려줄 얘기부터 꺼내겠다.”
 구양준은 무릎을 꿇은 채 미동도 않고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지금부터 백구십사 년 전의 일이었다. 이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호계라는 곳에서 구음마경(九陰魔經)을 터득한 희세 대마두 천지일존(天地一尊)과 세 명의 절세고수가 공전절후의 대혈전을 삼주야(三晝夜)동안 치렀다. 그것도 세상에 종말을 고하듯 억수같이 쏟아지는 폭우 속에서 말이다.”
 “아······.”
 구양준은 무공의 위력이 도대체 얼마만큼 굉장한 것인지 확실하게 모르지만 삼주야 동안 폭우 속에서 쉬지 않고 싸웠다는 말에 저절로 탄성을 발했다.
 ‘천지일존이라는 자는 과연 대단한 사람이구나.’
 구양준이 내심 중얼거릴 때 백발노인의 말은 계속되었다.
 “천지일존과 당시 겨루었던 세 사람은 바로 노부와 앞으로 너의 사부가 될 두 분이시다.”
 “저의 사부님이 될 분들이시라고요?”
 “그렇단다. 차차 알게 될 터니 듣기나 해라··· 그 대마두는 찰거머리처럼 끈덕져서 도무지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더니 삼 일째 밤이 되는 날 양패구상(佯敗俱傷) 후에야 겨우 싸움을 멈추었느니라.”
 “······.”
 구양준은 들을수록 신기하고 놀라웠다.
 “대혈전은 거기서 끝난 셈이나 진짜 문제는 그 후에 있었다. 그 대마두가 심한 내상을 입고 떠나며······.”
 구양준이 급히 물었다.
 “내상을 입었으면 뒤쫓을 것이지 왜 쫓지 않았습니까?”
 백발노인이 씁쓸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실로 우리 세 사람도 엄중한 상세를 입은 상태였다. 그자가 떠나면서 협박하듯 말하길 언제고 반드시 자신의 극랄함을 강호무림에 알릴 것이라고 했다. 그자의 인간됨으로 보아서 그 말이 결코 허튼소리가 아님을 우리 세 사람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 세 사람은 장차 닥쳐올 혈겁에 대비해 만반의 준비를 갖추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랬군요.”
 “제일 먼저 우리가 한 일은 하나의 비급을 창안하는 일이었다. 온갖 심혈을 기울여 삼 년 동안 겨우 만들어낸 것이 태허반야신공(太虛般若神功)이지.”
 구양준이 놀라운 듯 고개를 끄덕이다 입을 떼었다.
 “어르신, 아니 노신선(老神仙)은 누구이며 나머지 두 분은 또 어느 분들입니까?”
 구양준은 백발노인의 말을 듣고 그가 결코 범상치 않은 인물임을 깨닫고 호칭까지 바꾼 것이다.
 백발노인은 싱겁다는 듯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 나보고 노신선이라고? 아니다. 난 그저 나이 많은 늙은이에 불과하느니라. 그리고 그 두 분 중 한 분은 소림의 십오대 장문인인 혜원선사(慧園禪師)이시고 또 한 분은 무당의 십삼대 장문인인 육일도인(六逸道人)이시고 노부는 거렁뱅이 집단인 개방의 구대 방주로 학발비응(鶴髮飛鷹)이라고 한다.”
 “아, 어르신께서······.”
 구양준은 그의 신분을 알고 새삼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태허반야신공이 창안된 후 우리는 두 번째 준비태세에 돌입했다. 혜원선사와 육일도인은 바로 이 동굴에서 계속 신공을 연마했고 노부는 그 신공을 이어받을 인재를 구하고자 강호 전역을 헤맸다. 그 기간이 자그마치 백년하고도 육십 년이 흘렀으니 결코 짧은 기간은 아니지.”
 이 말에 구양준의 눈이 당장 휘둥그래졌다.
 “그럼 어르신의 연세가 벌써 이백 세를 넘기셨단 말입니까?”
 학발비응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얘야, 너는 노부를 어르신이라 부르지 마라. 어차피 난 너의 사부고 또 넌 나의 제자가 아니더냐?”
 말하는 그의 표정이 갑자기 침통해졌다.
 “혜원선사와 육일도인은 이미 이승 사람이 아니다. 허나, 너는 그 두 분 역시 사부로 모셔야 한다. 비록 얼굴은 마주 대하지 못했지만 노부가 너를 제자로 택한 후부터 사제(師弟) 관계는 벌써 성립되어 있었다. 말뜻을 알겠느냐?”
 “명심하겠사옵니다.”
 “그 후 노부는 두 분이 타계한 뒤에도 혹시 하는 일말의 기대감에 쉬지 않고 강호를 뒤지며 다녔다. 그러나 역시 허사였다. 어쩔 수 없이 노부는 인재가 없음을 한탄하고 이곳의 위치를 적은 비도(泌圖) 호계삼소도(虎溪三笑圖)만 어느 이름 없는 동굴에 남겨두고 돌아왔다. 그때가 지금부터 약 이십 년 전이었지. 당시 노부는 이곳에 도착하기 전 강호에 한 가지 소문을 퍼뜨렸다.”
 “소문을요?”
 “그렇다. 바로 호계삼소도를 얻는 사람은 세상에서 다시없는 절학을 익히게 될 것이라고 말이다.”
 “아··· 그랬었군요······.”
 “허나, 노부는 이곳에 와서도 도무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호계삼소도를 이름 모를 동굴에 넣어 인연을 기다리긴 했지만 그 또한 기약할 수 없는 아득한 일이기 때문이다. 해서 틈나는 대로 각파와 개방을 드나들며 살폈으나 결과는 끝내 같았다.”
 암담했던 지난 일을 상기하자 학발비응은 입가에 쓴웃음을 떠올렸다.
 “얘야, 너는 지성이면 감천이란 말을 알고 있겠지? 노부가 똑같은 결과를 얻으면서도 찾아 헤매자 하늘이 날 버리지 않고 너를 보내주었구나. 사실 노부는 며칠 전 장차 닥쳐올 혈겁을 한탄하며 천기(天氣)를 살피는데 구령산맥 쪽에서 알 수 없는 서기가 뻗쳐올랐다. 그래서 괴이한 생각에 그곳으로 갔었는데 뜻밖에 너를 만난 것이다.”
 “아······.”
 구양준은 그저 신기할 뿐이었다.
 학발비응의 신분도 신분이려니와 자신과 그런 인연으로 만났다는 사실이 더욱 신기했다.
 ‘별난 인연도 다 있구나······.’
 
 
 3장 사라진 호계삼소도(虎溪三笑圖)
 
 
 객방에서 구양준의 말을 듣고 있던 네 사람은 일제히 약속이나 한 듯 탄성을 질러냈다.
 “아, 그랬구나······.”
 “세상에··· 그럴 수가······.”
 요공선사 등 삼파지존은 그저 탄성에 탄성을 거듭할 뿐 할말조차 잃었다.
 잠시 후, 육순으로 보이는 개방의 불노신개가 지그시 두 눈을 내리 감고 중얼거렸다.
 “호계삼소도가 절세적 무공을 익힐 수 있는 비도임은 소문을 들어 알았는데 사존들에 의해서 만들어졌다니 실로 뜻밖일 따름이오.”
 청수하게 생긴 무당의 청송자가 조용히 그 말을 받아 이었다.
 “빈도 역시 같은 생각입니다. 그나저나 천지일존이란 자가 얼마나 고강한 무공을 지녔으면 그분들 셋이서도 당해내지 못했는지······.”
 그때 무영신투는 구양준의 등뒤에서 연신 중얼거렸다.
 “구음마경이라고··· 구음마경······.”
 구양준이 다시 침중한 어투로 말했다.
 “그 후 저는 오 년 동안 사부님으로부터 태허반야신공에 수록된 무공을 전수 받았고 삼파(三派)의 무공 역시 틈나는 대로 익혔습니다. 뿐만이 아니라 세 분 사부께서 각고 참수하신 절세무공도 모두 전수 받았습니다.”
 “······!”
 “······?”
 삼대지존의 놀랍고도 부러운 시선을 한몸에 받고 구양준은 자신이 전수 받은 무공 등에 관해 간단히 들려주었다.
 혜원선사는 소림비전인 달마삼검(達魔三劍)을, 육일도인은 양의검법(兩義劍法)을 더욱 심후하게 참수한 양의검법의 후삼절초(後三絶招)를, 학발비응은 풍뢰사식(風雷四式)을 전수해 주었다는 것이다.
 특히 학발비응보다 먼저 타계한 혜원선사와 육일도인은 자신들의 비전절기를 빠짐없이 학발비응에게 전수해주고 공동제자를 만날 경우 그에게 모두 전수해주는 것은 물론 기회가 허락하면 자신들의 본파 제자들에게 전수해 달라고 신신당부했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지난 일을 말하는 구양준의 표정이 갑자기 비통해졌다. 그러자 그의 입을 통해 흘러 나온 말도 점차 비통해지고 있었다.
 “몇 개월 전이었지만 학발비응 사부님께서 전에 없이 엄숙한 모습으로 절 부르시더니 자신의 천수(天壽)도 이젠 다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시면서 사부님이 백 수십 년 동안 강호를 돌다보니 어떤 무서운 세력이 암흑 속에 꿈틀대고 있는 것 같다고 하시며 비록 각파의 세력이 방대하긴 하나 그들을 상대하기엔 힘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무서운 세력이라고?”
 무당장문인 청송자가 놀라 중얼거렸다.
 소림의 요공선사와 개방의 불노신개 역시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기야 현 무림이 암중의 어떤 세력에 의해 압력당하고 있음을 백지처럼 모르는 그들도 아니다.
 다만 구양준의 입을 통해 확실하다는 단정이 떨어지자 새삼 경동했다고 할까.
 구양준이 다시 말했다.
 “아울러 사부님께선 저보고 하산하면 각파를 단합시켜 닥쳐올 혈겁에 대비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그렇게 하려면 우선 삼파의 수뇌를 만나야 하고, 또한 자신을 비롯한 두 분 사부님의 무공을 각파에 전수시켜 달라고 간곡히 부탁하셨습니다. 그래야 먼저 떠나신 두 사부님의 숙원이 풀어질 것이라고 하시면서 말입니다.”
 “······.”
 비통에 찬 구양준의 음성은 잠시 끊어지는 듯하다가 곧 이어졌다.
 “한데 그렇게 말씀하시던 사부님께서 느닷없이 저의 혈도를 봉쇄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명문혈(命門穴)과 백회혈(百會穴)에 뜨거운 진기가······.”
 목이 메었다.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었다.
 “아미타불··· 개정대법을 시전하셨구나······.”
 구양준이 울먹이며 말을 잇지 못하자 소림의 요공선사가 불호와 함께 탄성을 토했다.
 “무량수불··· 진실로 훌륭하신 분들이구나. 자신들의 안위는 생각지 않고 그런 엄청난 소임을 해내시다니······.”
 무당의 청송자도 침중한 도호와 함께 찬탄을 아끼지 않았다.
 얼마간 방안은 침통한 기운이 감돌며 찬물을 끼얹은 듯 고요해졌다.
 이윽고 구양준이 격동을 억제하려는 듯 윗입술을 깨물고 품속에서 무엇인가를 끄집어냈다.
 세 권의 책자였다.
 “이것들은 제가 하산하여 오는 도중 만든 것입니다.”
 구양준은 말하며 그것들을 하나씩 삼파지존 앞에 놓았다.
 “돌아가시거든 제자들과 더불어 심혈을 기울여서 익히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돌아가신 사부님들의 지고한 뜻인 만큼 결코 저버려선 아니 됩니다. 제가 오늘 여러분을 뵙자고 당돌하게 부른 까닭도 실은 이것들을 전해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직접 찾아뵈어야 예의인 줄 잘 알고 있지만 여건이 여의치 않아 그랬으니 너그럽게 이해해 주십시오.”
 요공선사가 당치않다며 급히 손을 내저었다.
 “그런 말씀은 하지 마십시오. 사숙님, 감지덕지(感之德之) 고마워할 쪽은 도리어 저희 쪽입니다.”
 “사숙님이라고요?”
 구양준은 크게 당황했다.
 원칙적으로 따지자면 의당히 그렇게 불러야 했다.
 그들의 사존을 사부로 모신 제자이니 의당 불노신개와 요공선사는 사숙이라 불러야 했고, 청송자는 사숙조(師淑祖)라고 불러야 했다.
 그럼에도 난생처음 듣는 말이기에 마치 웬 꼬마가 자신보고 아버지라 부르는 것처럼 어색하기만 했다.
 “말씀 낮추십시오. 심히 듣기 민망합니다.”
 얼굴을 붉히며 난색하자 청송자가 정색하며 나섰다.
 “사숙조님, 민망하다니 당치 않습니다. 사존의 제자이시면 마땅히 저희의 윗분이거늘··· 예를 사양치 마십시오.”
 “여러분의 뜻은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일파의 지존이며 장로이신데 어찌 제가 감히 그 같은 예를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그냥 이름을 불러주십시오.”
 난처한 기색으로 구양준이 한 말이었으나 굳은 의지가 담긴 의연한 말이었다.
 ‘사존의 곧은 성격까지 본받으셔서 저렇듯 의연하며 겸허하시구나.’
 삼파지존은 각자 이런 생각을 하며 구양준의 기품에 새삼 존경을 더했다.
 불노신개가 말했다.
 “사숙님, 인륜(人倫)은 천리(天理)를 따르는 법입니다. 저희 예를 거절하지 마십시오.”
 구양준은 그들 세 사람의 얼굴에서 쉽게 굳힐 것 같지 않은 의지를 발견하고 암암리에 쓰게 웃었다.
 ‘정말 난처하구나. 비록 배분으로 따지면 내가 이들보다 높으나 나는 이제 갓 출도한 강호의 햇병아리인데··· 음, 할 수 없지. 절대 거만해지지 말고 최대한의 예로써 이들을 대하는 수밖에······.’
 그때 그의 이런 심정을 헤아리기라도 한 듯 청송자가 웃으며 말했다.
 “사숙조님, 각대 문파를 단합시키는 것은 우리가 책임지겠으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고맙습니다.”
 구양준이 엷은 미소로 사의를 표하자 소림의 요공선사가 하마터면 잊을 뻔했다는 듯 급히 나섰다.
 “사숙님, 강호를 횡행하시게 되면 본파를 꼭 찾아주십시오. 바쁘시더라도 꼭 찾아주셔야 합니다.”
 “물론입니다.”
 “빈도도 같은 생각입니다. 사숙님.”
 청송자의 간절한 당부가 담긴 말에 구양준은 웃음으로써 그러마고 약속했다.
 “사숙님······.”
 마침 그와 눈이 마주친 불노신개도 정색을 하며 한마디하려는데,
 “물론 개방에도 들려야지요. 그러기에 앞서 방주님께 한 가지 드릴 부탁이 있습니다.”
 불노신개가 다그쳐 물었다.
 “그게 무엇입니까?”
 “현 강호의 정세를 탐색하려면 아무래도 개방의 빠른 소식통을 이용해야 될 것 같습니다. 그러니 수고스럽더라도 제자들에게 명령하여 강호의 정세를 감시하고 추호라도 이상한 기미가 있으면 즉시 제게 알려주었으면 고맙겠습니다.”
 “그야 여부가 있겠습니까? 한데 사숙께선 어디다 거처를 정할 셈입니까?”
 “제 집 두고 어디 있겠습니까?”
 “그럼 구양세가에······.”
 “그렇습니다.”
 불노신개는 흠칫하며 나머지 이파지존의 얼굴을 힐끔 돌아보았다.
 모두들 뜻밖이라는 표정이었다.
 구양세가가 근 몇 년 사이 요상하게 변하여 전 무림의 경멸의 대상이라는 걸 너무 잘 알고 있는 그들이기 때문이다.
 허나, 구양준은 전혀 그들의 놀란 표정에 신경 쓰지 않는 듯 자신의 할말을 계속했다.
 “제가 그곳에 계속 머물러 있다고는 장담할 수 없는 법입니다. 제가 없더라도 여기 무영신투 오노인에게 연락하면 알아서 수시로 대처할 테니 부탁대로 해주십시오.”
 “명심하겠습니다.”
 삼파지존이 한꺼번에 대답했다.
 “그럼······.”
 구양준이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는 이 길로 사사로운 일 한 가지를 처리할 게 있어 떠나야겠습니다. 다음에 다시 뵙기로 하지요.”
 하면서 여전히 무릎을 꿇은 채 앉아 있는 무영신투를 바라보며 서둘러 말했다.
 “오노인, 속히 날 따르시오.”
 “예, 주인님······.”
 무영신투가 대답하며 일어나기도 전 구양준은 어느새 창문을 통해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주인님······.”
 나직이 부르는 무영신투의 여음이 안에 감돌지도 않았는데 그 역시 귀신처럼 사라졌다.
 번갯불을 방불케 하는 기막힌 신법이었다.
 방안에 앉은 삼파지존은 잠시 멍했다.
 하지만 그도 잠깐.
 세 명 중 나이가 가장 많은 개방의 불노신개가 다소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입을 떼었다.
 “사숙님의 얘기를 듣고 보니 아무래도 무림이 평온할 것 같지 않소. 그러니 돌아가는 즉시 사숙님의 말을 따르도록 합시다.”
 “옳은 말씀입니다. 요즘 무림 기운이 심상치 않다고 여기긴 했지만 듣고 보니 결코 방관해서는 안될 것 같습니다.”
 무당 청송자의 진지한 말을 이어 소림 요공선사도 같은 생각임을 표했다.
 “두 분의 말씀이 백 번 지당합니다. 그런데 빈승의 생각에 우리 삼파(三派)에서 고수를 엄선하여 구양세가를 비밀리에 보호했으면 하는데 두 분 생각은 어떠하십니까?”
 “구양세가를 보호하자구요?”
 불노신개의 물음에 요공선사가 선뜻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했다.
 “그렇습니다. 사숙님이 저렇듯 강호무림을 위해 힘쓰면 어둠 속에 도사린 사(邪)의 무리들이 절대 구양세가를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구양세가가 그자들에 의해 해를 입기 전 우리가 보호하자는 뜻이지요.”
 같은 처지에 같은 웅심(雄心)으로 뭉친 삼파지존.
 그들이 어찌 이런 제의에 반의(反意)를 표하겠는가?
 삼파지존은 당장 의기투합했다.
 그리고는 곧장 자기 문파로 돌아갔다.
 
 ***
 
 칠흑 같은 어둠에 잠긴 구양세가.
 삼경이었다.
 사위(四圍)는 먹물 속에 빠져든 듯 고요한데 군데군데 환하게 밝혀진 방문 사이로 요사스런 웃음이 넘실대며 흘러 나오고 있었다.
 “호호호······.”
 “흐흐흐······.”
 간드러진 여인의 교소와 짐승같이 음흉한 사내의 음소(淫笑).
 가까이 목격하지 않아도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짐작할 만하다.
 바로 이 무렵.
 한 줄기 연기인 양 소리 없이 구양세가의 담을 뛰어넘는 인영이 있었다.
 어둠 속에 번뜩이는 눈빛을 보니 그는 평범한 사람이 아닌 듯했다.
 포악한 짐승의 눈빛보다 더욱 날카롭게 번뜩이는 두 줄기 한광(寒光)!
 청의(靑衣)를 입고 있는 그는 얼마 전 진미루(眞味樓)를 떠난 구양준이었다.
 무영신투는 그와 이미 약속이 되어 있는 듯 구양세가에서 가장 높은 담 위에 올라가 감시하고 있었다.
 그의 두 눈도 구양준 못지않게 날카로워 개미 한 마리조차 구양세가에서 빠져 나가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듯했다.
 그때 구양준은 어느 전각(殿閣)을 향해 귀신처럼 접근하고 있었다.
 불이 밝혀진 채 휘장이 쳐져 있는 곳, 은은히 들리던 교소와 음소가 노골적으로 울려나오는 곳이었다.
 “훗훗훗······.”
 “크흐흐흐··· 고것 참······.”
 걸걸한 사내의 목소리가 잠깐 뱉어졌다 끊어지며 여인의 비음과 신음이 일률적으로 새어나왔다.
 구양준은 그 전각 앞에서 우뚝 멈춰 섰다.
 일순 그의 전신에서 아무도 제지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살기(殺氣)가 뻗쳤다.
 ‘임호칠(林虎七), 바로 네놈이었구나. 네놈은 오늘 이런 날이 올 줄 꿈에도 몰랐겠지.’
 내심 경멸의 비웃음을 날리며 구양준은 부서져라 방문을 확 열어 젖혔다.
 쾅!
 찰나, 전라(全裸)의 두 남녀(男女)가 한 덩어리로 얽혀 있는 진풍경이 드러났다.
 “웬 놈이냐?”
 경악에 찬 호통이 터지며 육중한 체구의 사내가 알몸의 여인에게서 떨어졌다.
 그것은 순식간의 변화였다.
 추함을 꺼리는 것이 또한 인간의 본능인가.
 호들갑스레 상체를 일으킨 여인은 달팽이처럼 움츠리고 있었다.
 그녀 역시 자지러질 듯 놀란 것은 말할 나위 없다.
 구양준은 성큼 방안으로 들어섰다.
 “이놈! 이곳이 어디라고 감히······.”
 임호칠이라 불리는 육중한 체구의 사내는 자신의 처지가 알몸이란 것도 잊은 듯 버럭 성을 내며 소리질렀다.
 하기야 쾌락 절정의 상태에서 재를 뿌리고 말았으니 분노가 극에 달한 것은 이해할 만하지만······.
 “흥!”
 갑자기 몰아닥친 한풍처럼 싸늘한 냉소가 구양준의 입 밖으로 토해졌다.
 “임호칠! 눈깔이 달렸거든 내가 누구인지 똑똑히 보거라.”
 말과 함께 그의 오른손 식지와 엄지가 턱 끝으로 갔다.
 순간 매미의 엷은 옷처럼 흰 것이 손끝을 따라 허공으로 올려졌다.
 그리고 나타난 얼굴은 조금 전의 파리한 얼굴이 아닌 혈색이 감돌고 살기충만한 장부의 얼굴이었다.
 “아악―!”
 임호칠이 괴성을 지르며 침상으로 바짝 밀착했다.
 “네놈은 그 어린 잡종 놈······.”
 찰싹!
 “욱―!”
 임호칠은 미처 말끝도 맺지 못하고 눈앞에 서너 개의 별빛이 어른대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생각지도 않은 신음을 토하며 뒤로 자빠지니 여인은 더욱 소스라치게 놀랐다.
 
 돌연 구양준의 뇌리로 지난 일들이 주마등처럼 휙휙 스쳐 지나갔다.
 그는 세 살 때 모친(母親)을 잃었다.
 때문에 부친 밑에서 양육되다 여섯 살 되서야 계모인 강홍련(姜紅蓮)을 만나지 않았던가?
 그리고 그의 나이 여덟 살 되던 해 어느 날 부친인 구양영숙은 그를 자신의 서재로 불렀었다.
 그러면서 말하길 만약 자신이 출타한 후 다른 사람이 못살게 학대해도 꾹 참고 견딜 것이며 나이 열네 살이 되도록 돌아오지 않으면 아무도 모르게 중앙대청의 첫번째 주춧돌을 파내라고 했다.
 그리하면 필시 무엇이 나올 것이니 그것을 파내 지시대로 하라고 당부하지 않았는가.
 그 후 어린 자신이 감당해온 고통스런 순간들.
 계모인 강홍련의 무지한 학대!
 부친과 의형제(義兄弟)지간이라며 구양세가에 거식(居式)해 왔던 소면유객(笑面流客) 장각(張角)의 잔혹한 학대!
 게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소면유객이 데려온 하인이란 작자들.
 임호칠과 정두규(丁斗奎)가 얼마나 가혹하게 굴어왔던가.
 생각하는 자체조차 소름 끼쳤다.
 구양준은 임호칠을 단숨에 삼켜버릴 듯 노려보며 소리쳤다.
 “임호칠! 계모와 소면유객은 지금 어디 있느냐?”
 임호칠은 구양준의 무시무시한 위세에 기가 죽은 듯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조금 전의 사나운 늑대 같은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다만 고양이 앞의 가련한 쥐새끼에 불과했다.
 “이놈! 내 말이 들리질 않느냐?”
 살벌한 노호를 발칵 질러대자 임호칠의 반지르한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버렸다.
 그가 겨우 입술을 떼었다.
 “이··· 일년 전 그들은 어디론가 떠나버렸습니다. 그··· 그러면서 이곳을 저희보고 지키라고······.”
 더듬더듬 여기까지 뱉어버리더니 잠깐 말을 끊고는 이내 큰소리로 뱉어냈다.
 “그들 두 사람은 절정의 무공을 지닌 사형제지간이었습니다.”
 “뭣이!”
 구양준의 살기충만한 얼굴에 일말의 놀라운 빛이 서렸다.
 ‘음, 놈들이 진작부터 수작을 꾸민 게로군.’
 얼굴에 서린 놀라운 빛도 순식간에 사라지고 구양준의 낯빛 다시 싸늘해졌다.
 “정두규는 지금 어디 있느냐?”
 “벼··· 별당(別堂)에 있습니다.”
 “오냐, 이놈! 알려줘서 고맙긴 하다만 네놈에게 진 빚을 갚지 않을 수가 없구나.”
 “뭐··· 뭣······.”
 퍽!
 “윽―!”
 한차례 탁한 음향에 짧은 비명이 터지고 거대한 임호칠의 체구는 방바닥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입에서는 게거품이 일 듯 검붉은 선혈이 왈칵왈칵 쏟아지고 있었다.
 이때 달팽이처럼 몸을 움츠리고 있던 전라의 여인은 입술을 파르르 떨며 미친 듯 고개를 흔들었다.
 “사··· 살려주세요. 제발 목숨만은······.”
 구양준은 날카로운 시선을 그녀의 사색이 된 얼굴에 고정시키고 냉소했다.
 “흥! 탕부(蕩夫)와 놀아난 당신이 살아나길 바라다니··· 더러운 오명을 남기고 사느니 진작 죽는 것이 나을 텐데.”
 “악―!”
 여인의 찢어지는 비명이 방안을 질타했다.
 구양준은 침상을 더 이상 돌아보지 않았다.
 황망히 방안을 빠져 나왔다.
 그리고 섬전 같은 신법으로 눈 깜박할 사이 당도한 곳은 뒤채의 별당 앞이었다.
 “크흐흐··· 오냐! 그래··· 흐흐흐··· 어르신네가 오늘 너희를 하늘나라로 데려가 주마.”
 “정말이세요?”
 “호호호··· 두고보면 알겠지··· 뭘 그래?”
 음탕한 괴소와 교소.
 앞채의 임호칠이 묵었던 처소보다 농도가 한층 짙다.
 “죽일 위인들!”
 구양준은 저주 서린 냉갈을 터뜨리고 방문을 요란하게 열어 젖혔다.
 콰― 쾅!
 “으잉? 웬 놈이냐?”
 역시 전라인 돼지 같은 사내가 요염한 여인들을 좌우 양쪽에 끼고 있다가 발딱 일어났다.
 “저런 방정맞은 놈! 이놈아, 미쳤느냐? 이곳이 어디라고?”
 조물주의 실패작처럼 제멋대로 생겨먹은 사내의 안색이 썩은 돼지간처럼 변하며 구양준을 일격에 쳐죽일 듯 대들었다.
 “흥!”
 구양준은 소름 끼치는 코웃음을 날리고 살짝 옆으로 피했다.
 쾅!
 그 바람에 죄 없는 벽만 못생긴 사내 정두규의 일장 세례를 받고 말았다.
 “정두규! 생긴 대로 잘 노는구나. 하지만 그따위 쾌락도 오늘로써 끝이닷!”
 구양준은 더 두고 볼 필요도 없다는 듯 사납게 우장을 휘둘렀다.
 파― 팍―!
 “윽―!”
 그의 휘둘러진 우장이 남긴 결과는 너무나 자명했다.
 탁한 음향과 처절한 단말마.
 또 있다면 무엇이겠는가?
 무기력한 인간의 한 개 몸뚱이를 차갑게 식히며 혈수(血水)를 자아내는 것.
 인간이 인간을 그렇게 벌한다는 것은 참으로 끔찍한 일이나 이미 원한에 사무쳐 있는 구양준으로서는 보류해볼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탕녀(蕩女)인 당신들도 탕부를 따라가시지.”
 팍― 팍!
 “으― 윽!”
 “윽―!”
 알몸의 두 여인은 미처 침상에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비명을 토한 채 죽어갔다.
 분한 까닭인가?
 창졸간의 급변 때문인가?
 두 여인은 각기 눈을 부릅뜬 채 감지도 못했다.
 그때였다.
 웅성웅성······.
 구양세가의 사방이 소란스러웠다.
 그리고 구양준이 있는 별당으로 달려오는 무수한 발자국소리가 들려왔다.
 
 ***
 
 ‘저런!’
 높은 담 위에서 사방을 감시하던 무영신투는 안되겠다 싶었다.
 그는 급급히 중앙 누각의 대들보 위로 신형을 날렸다.
 “모두들 조용하시오!”
 그의 이 같은 외침은 웅성거리는 중인들의 머리 위를 빗살처럼 그으며 뱉어졌다.
 때문에 중인들이 소스라치게 놀란 것은 당연했다.
 “아앗! 오노인이 아닌가?”
 “세상에 오노인도 무림인이었다니··· 게다가 저렇듯 기막힌 신법을 펼쳐 보이다니······.”
 왜냐하면 그들은 구양세가에서 함께 생활하던 오노인이 일개 하인에 불과할 뿐 무공을 지니고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해 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믿을 수가 없구만······.”
 중인들은 조금 전에 들려왔던 비명소리를 잠시 망각한 듯 이 순간은 그저 오노인의 무공에 놀라 술렁거렸다.
 그때였다.
 휘― 익!
 미풍에 흩날리는 낙엽처럼 그들 앞에 절세의 미청년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앗! 저 사람은 또 누구야?”
 중인들 중 누군가 연쇄적인 괴변에 기겁하고 소리쳤다.
 그들의 시선은 너나할것없이 모조리 나타난 미청년에게 집중되었다.
 그 찰나 외침이 또다시 터졌다.
 “앗! 저분은 육 년 전에 실종하였던 소가주님!”
 나이 지긋한 노복(老僕)의 외침이었다.
 “앗! 그렇구나.”
 “소가주님!”
 절세의 미청년.
 무림현자 구양영숙의 일점혈육 구양준.
 구양세가의 하인들은 그 동안 쌓인 울분과 한을 발산시키려는 듯 여기저기서 환호했다.
 그들은 인간의 탈을 뒤집어쓴 임호칠과 정두규에게 개처럼 대접받아온 터이니 가히 이 순간의 기분을 짐작할 만하다.
 경악이 이내 환성으로 변해 심야의 넓은 마당이 떠나갈 듯 요란한데, 하인들 틈에 끼여 있던 네 명의 간사하게 생긴 대한이 서로 눈짓을 주고받더니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다. 그들의 표정을 보니 떫은 감 씹은 후의 그것처럼 이지러져 있으며 얼굴 구석구석 두려움으로 충만했다.
 그들은 모든 이들의 시선이 심야의 불빛처럼 출현한 구양준에게 쏠려있자 기회는 바로 이때다 싶었던 모양이다.
 허나, 두 줄기 비수 같은 눈빛이 막 신형을 날리려는 네 사람에게 박혔다.
 “어림없는 짓!”
 이렇게 일갈한 사람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 구양준이었다.
 다음 순간, 구양준이 장내에서 훌쩍 날아오르더니 네 줄기 예리한 지풍이 허공을 갈랐다.
 “윽―!”
 “으윽―!”
 “악!”
 “카악!”
 네 마디 처절한 비명이 거의 같은 순간 밤하늘에 퍼졌다.
 시각으로 따지자면 눈 한 번도 깜박이지 않을 극히 짧은 순간의 변이었다.
 몰려든 하인들은 놀라 벌린 입을 다물 줄 몰랐다.
 그러나 그도 일시뿐.
 그들은 곧 네 장한의 죽음이 깨소금맛이라는 듯 한마디씩 했다.
 “고놈들 끝내 천벌을 받았군.”
 “그놈들에게 아부하며 뒤꽁무니만 졸졸 따라다니더니 마땅히 받을 대가를 받은 것이야.”
 “어휴, 그놈들··· 두 놈 따라 우리를 못살게 괴롭히더니만 십 년 묵은 체증이 다 내려가는 기분인걸······.”
 죽은 자를 놓고 이런 말을 뱉어내는 걸 보면 하인들 가슴마다 얼마나 큰 원한의 응어리가 맺혀 있었는지 충분히 이해가 갔다.
 구양준은 다시 원래 자리로 되돌아 우뚝 선 채 장내의 하인들을 둘러보고 있었다.
 언제 움직여 네 사람을 격살시켰냐는 듯 추호의 흐트러짐도 없이 의연하다.
 옛날 일을 회상한 탓일까?
 그의 준미한 얼굴에 온갖 생각이 엇갈려 소리 없이 피어나고 있었다.
 “소가주님!”
 “소가주님······.”
 갑자기 그를 바라보고 있던 하인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그러더니 서럽게 흐느껴 우는 자도 있는 것이 아닌가.
 구양준은 변하지 않은 충복들의 성심에 감탄해 마지않았다.
 ‘음! 선량한 사람들. 이들도 나 못지않게 놈들에게 시달림을 받아온 까닭이겠지. 이젠 염려 마시오. 내 당신들을 앞으로 덩굴 속의 과수처럼 보호하리라.’
 이런 생각은 진작 의도한 바는 아니나 반드시 해야 할 일인 양 구양준은 굳게 결심하였다.
 이어, 그는 엎드린 충복들에게 그간의 경위를 대충 묻고 앞으로 구양세가를 더욱 보살펴 달라고 신신당부했다.
 충복들은 하나같이 그러마고 굳은 결의를 보였다.
 실로 구양준에게 있어서는 오랜만의 가슴 뿌듯한 일이니 감개무량한 생각이 온 뇌리를 떠나지 않고 있었다.
 구양준은 충복들을 내려다보며 다시 입을 떼었다.
 “내 여러분께 무영신투를 소개해 드리겠소.”
 이 말에 하인들은 그제야 무영신투란 존재를 의식하고 일제히 그에게 눈길을 돌렸다.
 잠시 가라앉았던 경이의 빛이 그들 눈마다에서 일렁거렸다.
 “여러분들은 모두 오노인이 무공을 지닌 고수일 줄은 몰랐을 것이오. 하지만 오노인은 피치 못할 사정 때문에 자신의 신분을 속이고 우리 구양세가에 왔던 것이니 널리 이해하기 바라겠소.”
 침중하면서도 위엄 있는 구양준의 말은 장내에 있는 하인들의 가슴속으로 파고들었다.
 “앞으로 여러분들은 본인이 이곳에 없을 때 오노인의 지시에 따라주기 바라겠소.”
 “명심하겠습니다. 소가주님!”
 지극한 충성심을 입 밖으로 발산해내려는 듯 하인들은 우렁차게 대답했다.
 
 이날 밤.
 사방은 쥐죽은듯 고요한데 구양세가의 어느 한곳만 유독 불이 밝혀져 있었다.
 지난 날 가주(家主)였던 구양영숙이 사용한 서재였다.
 그곳엔 지금 구양준과 무영신투 오원이 마주보고 앉아 있었으며 구양준의 바로 앞에는 금빛 화려한 금합(金盒) 하나가 놓여 있었다.
 때마침 구양준이 곤혹스런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십일 년 전 아버님께서 떠나시며 당부하시길 내 나이 열네 살이 될 때 중앙 누각의 첫번째 주춧돌 밑을 파보라고 하셨는데 바로 이것을 두고 하신 말씀이셨구나.”
 중얼거리는 그의 표정은 점차 암울하게 변해갔다.
 실종된 부친 생각이 별안간 답답하게 뇌리를 조여온 때문이리라.
 “흐― 음―!”
 답답한 심중을 떨쳐내기라도 하려는 듯 크게 심호흡을 한 후 금합을 향해 양손을 뻗어갔다.
 그의 양손이 미미하게 떨렸다.
 덜컥―!
 소리와 함께 빈틈도 없이 굳게 닫힌 금합 뚜껑이 열렸다.
 그러자 제일 먼저 구양준의 시야로 들어온 것은 한 장의 서찰이었다.
 구양준은 서찰을 들어냈다.
 서찰 바로 밑에는 조그마한 양피지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앗! 이것은······?”
 구양준은 양피지를 본 순간 깜짝 놀라며 나직한 외침을 터뜨렸다.
 양피지 위에 한 폭의 산수화와 호계삼소도(虎溪三笑圖)라는 다섯 글자가 적혀 있질 않은가.
 구양준은 재빨리 그 밑에 쓰여진 작은 글씨를 읽어내려 갔다.
 
 <인연이 있어 이 비도를 얻게 된 자여!
 그대는 무림삼성(武林三聖)의 무학을 얻을지니 절학을 모두 연마한 후에는 무림정의(武林正義)를 위해 힘쓰기 바라노라.
 
 ― 혜원선사, 육일도인, 학발비응.>
 
 “음. 학발사부님이 어느 은밀한 동굴에다 이 비도를 두고 오셨다는데 정말 아버님이 이 비도를 얻으셨구나.”
 그때 금합 안을 들여다보던 무영신투도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감탄을 토해냈다.
 “아! 이것이 바로 호계삼소도로구나.”
 무공을 숨기면서까지 구양세가에 하인으로 잠입한 목적이 바로 이 호계삼소도를 탈취하는 데 있었던 무영신투이고 보면 그의 놀라움을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구양준은 천천히 비도를 집어들으며 다시 중얼거렸다.
 “정말 묘한 인연이로군. 아버님께선 비도를 얻으시고 나는 비도 없이 세 분 사부님의 절학을 직접 이어받았으니······.”
 중얼거리는 동안 비도는 그의 손에 의해 무참히 구겨지고 있었다.
 이어 구겨진 비도는 그의 왼손 손바닥 위에 놓여졌고 오른손 손바닥이 합장하듯 그것을 덮었다.
 “이것을 그대로 남겨 두었다간 자칫 악인의 수중으로 들어갈지도 모른다. 그러면 세 분 사부님께서 잠드신 호계가 어지러워질지도 모르니 아예······.”
 합장한 두 손이 허공에서 두 번 흔들렸다.
 “앗!”
 일순 무영신투는 소스라치게 놀라 비명을 질러댔다.
 두 번 흔들렸다 떨어진 구양준의 두 손바닥을 보니, 방금까지 있었던 호계삼소도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게 아닌가.
 그렇다면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호계삼소도가 발이 달린 생물체가 아닌 바에야 훌쩍 허공으로 사라졌을 리도 만무한데······.
 허나 그것이 결코 외부로 사라지지 않았음을 말해주듯 구양준의 빈손바닥에서 희끄무레한 먼지 몇 점이 소리 없이 방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실로 절정에 달한 내공수위로구나. 질기디질긴 양피지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다니······.’
 무영신투가 방바닥의 먼지를 내려다보며 여전히 놀라움을 떨쳐내지 못하고 있을 때, 구양준은 그의 놀라움 따위엔 아랑곳없이 먼저 들어냈던 서찰을 펼치고 있었다.
 
 ― 사랑하는 아들 준아!
 
 이렇게 시작된 서찰은 구양준으로 하여금 흥분과 격동을 억제하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이 아비는 조상님들의 높은 뜻을 어기지 않기 위해 학문을 닦는데 하루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런데 열 살 되던 어느 날.
 내가 집 앞에서 놀고 있는데 백발노인 한 분이 표연히 나타나 인자한 웃음을 머금고 내게 표지 없는 한 권의 책을 내밀었다. 그러면서 말씀하시길 너와 노부는 전생의 인연이 있으니 이것을 잘 읽어보도록 해라, 하곤 번개같이 사라지셨다. 비록 자취를 감추시긴 했지만 신선 같은 그 백발노인에게 깊은 존경을 느낀 나는 그 후 이름 없는 책자를 탐독하는데 심취했다. 한데 몇 년이 지난 후 알고 보니 그 책자는 무학비급이었다.
 나는 호기심과 큰 기대감으로 강호활동에 나섰다. 물론 이 아비는 선행만 해온 까닭에 무림현자(武林賢子)란 외호도 무림인들이 붙여준 것이다. 따지고 보면 내게 너무 과분한 외호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하늘의 어인 가호인지 사 년 전 이름 없는 어느 동굴에서 우연히 비도 하나를 입수해서 살펴보니 바로 왕왕 소문의 주목이 되고 있던 호계삼소도가 아니겠느냐.>
 
 구양준은 입술을 굳게 봉한 채 계속 읽어내려 갔다.
 
 호계삼소도를 수중에 넣은 구양영숙은 연속 얻은 기연에 기쁨을 주체하지 못했다.
 그는 곧장 호계로 찾아가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그의 결심을 가로막는 한 가지 장애가 있었다.
 어미를 잃은 채 불쌍하게 자라는 네 살배기 아들이었다.
 어쩔 수 없이 호계로 떠나는 것을 보류하고 구양세가에 몸담고 있길 일년하고도 반년이 지난 어느 날.
 뜻밖에 그를 찾아온 사람이 있었다.
 구양영숙이 강호에서 활동할 때 의형제로 지낸 소면유객 장각이라는 사람으로 웬 절세미모의 중년여인을 데리고 온 것이다.
 구양영숙은 반갑게 그들을 맞이했다.
 그러자 소면유객은 데려온 중년여인을 구양영숙에게 소개하는데 자신의 먼 친척이고 조실부(早失夫)한 과부라는 말을 덧붙였다.
 이후, 지나는 길에 잠깐 들렸다고 말했던 소면유객 장각은 구양세가를 떠날 생각을 않고 아예 눌러 살고 있었다.
 그 사이 일찍 부인을 잃고 쓸쓸히 지내던 구양영숙은 미모의 중년여인인 강홍련과 급속도로 가까워졌고 마침내는 재혼(再婚)하게 되었다.
 부부지연(夫婦之緣)을 맺은 지 서너 달쯤 지났을까?
 구양영숙은 부인이 된 강홍련의 행동이 아무래도 이상하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그것은 자신이 잠깐 출타한 틈에 그의 서재를 은밀히 뒤졌음을 알아채고부터였다.
 사람이란 본시 의심을 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는 법.
 강홍련에 대해 일단 의심을 하고 나자 날이 갈수록 의심은 심해(深海)처럼 깊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인가.
 구양영숙은 참으로 기겁할 광경을 목격했다.
 그것은 의제(義弟)인 소면유객 장각과 부인인 강홍련이 은밀하게 만나는 것을 목격한 것이다.
 아뿔싸!
 구양영숙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으나 두 남녀의 상봉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구양영숙은 차츰 이상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예감은 말할 나위도 없이 소면유객 장각과 강홍련이 비도를 노린 나머지 계획적으로 자신에게 접근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그 예감은 두 남녀의 잦은 밀봉(密逢)에 의해 확실해지고 있었다.
 이에 구양영숙은 그들과 계속 함께 있을 수 없음을 깨닫고 호계삼소도에 그려진 약도를 따라 호계에 가기로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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