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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을 떠나다 - 01

2018.01.27 조회 72,829 추천 789


 고향을 떠나다
 
 “왔으면 이쪽으로 앉아. 커피? 차? 어느 쪽이 좋지? 뭐, 차 밖에 없지만.”
 “역시 잉글랜드인이라면 차를 마셔야겠죠? 차로 한 잔 부탁드리겠습니다.”
 
 도안은 불안감에 지금 당장이라도 터질 것만 같은 심장을 부여잡으며 애써 태연한 기색을 유지하려 했다.
 자신의 지난 시즌 성적과 과거의 큰 부상, 이후 정체된 성장과 성장에 비해 애매한 나이를 생각하면 감독의 호출은 절대 긍정적인 신호일 수 없었다.
 
 “후우... 그렇게 불안해하는 모습을 보니 내 가슴이 다 아프네. 참, 이럴 때마다 느끼지만... 감독이라는 것도 못 할 짓이야.”
 “......”
 
 아무리 불안한 기색을 애써 숨겨도 도안은 한 달 뒤에 겨우 스무 살이 되는 어린 선수였다.
 이 바닥에서 스무 살은 대략 미래에 대한 판단이 내려지고 냉정하게 가치가 매겨지는 나이지만, 사회로 나가보면 아직 성인이라고 하기도 어려운 나이.
 리버풀 리저브팀의 알렉스 잉글소프 감독은 자신이 지도하던 어린 선수의 표정을 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지만, 다른 이야기부터 시작하면 결론을 기다리다가 쓰러지겠다. 결론부터 먼저 말하는 게 나을 것 같네.”
 
 잉글소프 감독은 쉽게 말을 꺼내지 못했다.
 이미 이 시점에서 도안은 자신의 운명을 눈치챘다.
 아마 자신은...
 자신이 사랑하고 또 사랑하는 이 팀을, 멜우드와 안필드를 떠나게 될 것이었다.
 
 “구단은 너를 로더럼 유나이티드로 임대 보내기로 했다. 피지컬이 조금 부족할 뿐, 이미 네 테크닉은 리그1은 물론 챔피언십에서도 통할 수준이니까 크게 어렵진 않을 거야. 일단 리그1으로 가서...”
 “후우... 당연히 완전이적 옵션이 붙어있겠죠?”
 “...그래. 7.5만 파운드 정도 된다고 들었다.”
 
 도안의 계약은 앞으로 1년 후에 만료될 예정이었다.
 1년 후에 계약 만료인 선수를 완전이적 옵션이 포함된 임대 계약으로 내보낸다는 것.
 말이 좋아 임대 계약이지, 방출이나 마찬가지였다.
 그것도 이적료는 고작 7.5만 파운드.
 수천만 파운드로도 부족해 억 단위까지 거론되는 현대 축구 이적시장에서 초라하기 짝이 없는 액수였다.
 지금 도안의 가치는 딱 그 정도 수준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너한테 부족한 건 딱 한 가지고, 다른 또래 선수들보다 뛰어난 부분들은 당장 생각나는 것만 해도 너덧 가지는 돼.”
 “......”
 “네 오른발은 또래에서 적수를 찾기 힘들 정도로 정교하고, 그라운드를 읽는 시야나 변수를 만들어내는 능력 같은 건 베테랑이 환생한 게 아닐까 의심될 정도지. 클래식 플레이메이커로서 너보다 더 재능이 뛰어난 선수는 나도 거의 못 봤다.”
 
 리버풀이 최근 들어 이런저런 놀림을 많이 받아도 프리미어리그에서 가장 찬란한 역사를 자랑하는 명문 클럽 중 하나라는 건 부정할 수 없었다.
 비록 지금은 이렇게 쫓겨나지만, 한때 도안은 그런 리버풀에서 큰 기대를 걸었던 빛나는 재능이었다.
 타고난 발재간을 앞세운 테크닉과 패싱 능력에 나이답지 않은 넓은 시야까지 갖춰 부진에 빠진 리버풀의 새로운 동력이 되어줄 것이라는 평가까지 받았다.
 하지만 2년 전 있었던 그 일로 모든 게 변해버렸다.
 
 “지금 너에게 부족한 건 피지컬, 딱 하나야. 재활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까 앞으로 분명 좋아질 거다. 피지컬만 가다듬으면 다시 돌아올 수 있어.”
 
 2년 전 훈련 중에 당한 살인 태클은 도안에게 오른쪽 전방 십자인대 완전파열이라는 불쾌한 선물을 주었다.
 덕분에 군 면제 판정을 받아 성인이 된 이후에도 이중국적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지만, 빼앗아간 것은 너무나도 많았다.
 
 “그럴 수 있을까요? 안 그래도 피지컬이 프리미어리그 수준에 크게 미달하는 선수였는데, 다리는 박살이 나고 한창 성장할 때 14개월이나 재활에만 매달렸죠. 근거 없는 희망이라는 건... 너무 아픕니다, 감독님.”
 
 분명 패스를 무기로 하는 공격형 미드필더는 수비라인이나 중원에 비해 피지컬의 중요성이 덜했다.
 하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였다.
 수비형 미드필더라는 천적이 나타난 이상 옛날과 달리 최소한의 피지컬이 필요했는데, 도안의 경우 툭 치면 억하고 날아가기 일쑤였다.
 원래도 유스팀 내에서 바닥에 가까웠던 피지컬인데, 부상 이후로는 20세임에도 U-17팀의 피지컬 평균치에 못 미치는 수준이었다.
 아무리 킥이 좋고 패스가 좋아도 그라운드에만 나서면 굴러다니기 바쁘니 장점을 보여줄 수가 없었다.
 게다가 동네 자체가 거칠고 위험하기로 유명한 휴이턴 출신답게 쉽게 달아올랐고, 그럴 때면 빈약한 피지컬로도 걸어오는 싸움을 피하지 않고 파이팅 넘치게 달려들다 보니 제 기량을 발휘하는 게 더욱 불가능했다.
 부상 복귀 이후 출전한 리저브 팀에서의 성적은 평균 평점 5.37.
 아무것도 안 했을 때의 평균 평점인 6.0에도 크게 못 미치는 수준이었다.
 
 “그래도 포기할 건 아니잖아. 포기할 거냐? 여기까지 왔는데? 피지컬, 진짜 피지컬 딱 하나라고.”
 
 잉글소프 감독은 도안을 상당히 아끼는 편이었다.
 최근 잉글랜드에서 찾아보기 힘든 스타일과 창의성을 갖춘 미드필더였고, 무엇보다 축구를 대할 때 누구보다 열정적이었기 때문에 좋아할 수밖에 없었다.
 고지를 눈앞에 둔 상황에서 피지컬 딱 하나가 발목을 잡으니 도안은 물론이고 주변인들조차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렇죠... 포기할 건 아니죠. 포기하기엔 너무 멀리 와버리기도 했고.”
 "너도 알겠지만, 지금 당장 네가 이 팀에서 뭔가 해내긴 어려울 거야. 하지만 팀은 너를 포기하지 않았어. 이번 임대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준다면 다시 한 번 프리미어리그를 노리고 축구를 계속할 수 있을 거야. 우리도 로컬 보이인 너를 소중하게, 아깝게 생각한다."
 
 도안은 유소년 시절부터 모든 걸 축구에 바쳤다.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매달렸고, 인생의 모든 초점을 축구에 맞추고 살아왔다.
 여유로운 집안도 아닌 만큼 이제는 정말 축구밖에 없었다.
 다행히 리버풀은 완전히 망가진 도안을 방출하는 게 아니라 임대를 통해 마지막 기회를 주었다.
 리버풀로부터 받은 마지막 이별 선물이었다.
 
 “하아... 나는 정말 네가 잘 되었으면 좋겠다. 언젠가는 꼭 프리미어리그에서 다시 만나고 싶다.”
 “저도 그러고 싶습니다. 꼭 안필드의 그라운드를 밟고 싶었는데...”
 
 도안은 안필드만 바라보고 달려온 자신의 꿈이 좌절된 순간이라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앉아있었고, 잉글소프 감독은 매년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은 상황에 조용히 한숨만 내쉬었다.
 한 시즌이 끝나고 다음 시즌 준비에 들어가는 6월의 일상적인 풍경이었다.
 
 ***
 
 “이제 이곳도 마지막인 건가...”
 
 애써 마음을 정리하고 감독실을 나선 도안은 10년이 넘도록 청춘을 바쳐온 멜우드 트레이닝 센터를 한 바퀴 둘러보았다.
 ‘유소년-1군 일관화 전략’이 시행되어 1군과 같은 포메이션, 전술로 훈련받기 시작할 때까지만 하더라도 언젠가 유스 소속이 아닌 1군 소속으로 멜우드에서 훈련받을 수 있을 거라 믿었다.
 하지만 오늘, 그 꿈이 무너졌다.
 
 ‘내가 리버풀을 떠나게 되다니... 상상도 해본 적 없는데.’
 
 도안은 리버풀 소속 유스 선수이기 이전에 열정적인 리버풀의 팬, 콥의 일원이었다.
  리버풀 외곽의 휴이턴에서 태어나 로컬보이로 자라왔고, 자라면서 리버풀을 사랑하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증오하는 전형적인 콥이 되었다.
 
 ‘솔직히 몰랐던 건 아니지... 아니, 애써 머릿속에서 지우려 했던 거지만.’
 
 십자인대 부상은 습관이 되기 쉬웠고, 아무리 성공적으로 재활하더라도 피지컬의 상당 부분을 잡아먹는 건 감수해야 하는 부상이었다.
 안 그래도 피지컬이 형편없었는데, 십자인대 부상에 14개월이나 쉬고도 잔류가 가능할 만큼 리버풀은 만만하지 않았다.
 
 “아니, 이게 누구야? 이제 곧 떨거지가 되는 그분 아니신가?”
 
 감상에 빠져있던 도안을 현실로 끌고 온 건 비아냥과 적의가 가득 섞인 목소리였다.
 목소리만 들어도 누군지 알 수 있을 정도로 오랜 시간을 함께 한 동료이자...
 20년이라는 짧은 인생에서 최악의 악연으로 엮인 사이였다.
 
 “또 무슨 일이지, 개리? 얼마나 쓸데없는 시간을 보낼 수 있는지 실험하는 중인가?”
 “아니지, 아니지. 그래도 10년이나 함께 한 동기가 팀을 떠나는데 인사 정도는 해야 하지 않나, 싶어서 그런 것뿐이라고. 뭐, 떠난다기보다는 쫓겨나는 거겠지만.”
 “하여튼 쓸데없이 매일 날 따라다니는 걸 보면 너도 참 부지런해? 그 정도 부지런함이면 진작 성공하고도 남았어야 하는데 말이지.”
 
 대화의 느낌만 봐도 알겠지만, 두 사람은 말 그대로 상극이었다.
 1993년생으로 나이도 동갑이고 2002년 리버풀에 입단한 입단 동기, 게다가 휴이턴의 거의 비슷한 동네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이임에도 이상할 정도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
 
 “오오, 내 친구가 드디어 헛된 꿈에서 벗어나 현실로 돌아가는 날인데 내가 어떻게 안 나올 수가 있겠어? 하하하. 내가 말했었지? 리버풀은 너 같은 잡종이 들어올 수 있는 데가 아니라고.”
 “푸하하하, 조상부터가 앵글족, 색슨족 잡종인 앵글로색슨한테 그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는데. 그리고 말했지만, 나는 이중국적일 뿐, 부모님 두 분 다 토종 한국인이신데 말이야. 황인. 얼마나 머리가 나쁘면 수십 번을 들어야 이해할까?”
 
 도안은 한국에서 이민 온 교포 1.5세로 잉글랜드 국적을 가진 아버지와 이민 이후에도 한국 국적을 보유한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선천적 이중국적자였다.
 한국 나이 21세로 만 18세가 넘었지만, 14개월짜리 부상으로 인해 합법적으로 병역을 면제받았고, 한국에서는 한국 국적만 행사하겠다는 ‘외국 국적 불이행 서약’을 하고 이중국적을 유지하고 있었다.
 
 “뭐, 평소였다면 화를 냈겠지만, 오늘은 내 친구가 현실로 돌아가는 기쁜 날이니 넘어가도록 하지. 친구의 기쁜 일에 내가 도움을 줬다는 게 참 행복하네.”
 “이 새끼...”
 
 휴이턴은 잉글랜드 내에서 가장 가난한 도시 중 하나인 리버풀 내에서도 가장 가난한 지역으로, 잉글랜드의 가장 가난한 지역 TOP 10에 가볍게 뽑힐 정도였다.
 마약과 범죄가 만연해있고, 청년의 1/4이 실업자일 정도로 치안이 무너져 이 지역 사람들은 거칠기가 이루 말할 데 없었다.
 이 지역 출신 축구선수인 조이 바튼은 “살아남으려면 공격성을 지닌 채 살아야 하는 곳”이라고 표현했고, 바튼은 물론 스티븐 제라드, 토니 히버트 등 이 지역 출신 축구선수들은 명성에 걸맞게 전부 거친 플레이를 펼쳤다.
 도안과 개리 콜드웰 역시 이 지역 출신으로 남들이라면 주먹질이 오갈 도발을 당해도 비웃음과 함께 넘어갈 만큼 대가 센 편이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내가 무릎을 아작내주지 않았다면 앞으로도 몇 년이나 시간을 낭비했을 거 아니야? 그러니까 너는 나한테 고마워해야... 윽!”
 
 휴이턴 출신의 특징은 몸의 대화를 꺼리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도안의 주먹은 한 줌 망설임도 없이 개리 콜드웰의 얼굴로 향했다.
 다른 건 몰라도 자신의 커리어를 망친 놈이 그걸 가지고 이죽거리는 건 참아줄 수 없었다.
 얕보이면 죽는다는 것.
 휴이턴이 도안에게 가르쳐준 소중한 교훈이었다.
 
 “이 개새끼가!!”
 “뭐, 이 새끼야! 입만 털지 말고 덤벼! 휴이턴 사내가 그리 입이 가벼워서 되겠냐!”
 
 휴이턴 사내 둘이 모여 독설을 주고받았고, 이미 한 번 주먹이 나간 상황.
 이후의 일은 정해져 있었다.
 11년의 동행을 끝내게 된 날, 도안은 평생의 악연인 개리 콜드웰과 격렬한 몸의 대화를 나누었다.

작가의 말

- 댓글, 추천은 제게 큰 힘이 됩니다.


게시판은 일찌감치 만들어놨지만, 1권 분량을 쌓아두고 연재를 시작하려 좀 늦었습니다.

아무래도 복학한 만큼 학기 중에는 집필 속도가 늦어질 것 같아서 비축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거든요.

어쨌든 이제 비축분도 쌓았으니 시작하려 합니다.

언제나 그랬듯...


이번에도 잘 부탁드립니다!!






댓글(56)

필로스    
신작 축하합니다!
2018.01.27 12:28
권씨일가11    
축하요
2018.01.27 16:01
권씨일가11    
정주행 후 댓글이에요.. 기대하고 있어요.. 재미있는 글과 미에크님의 성실연재 기대해요
2018.01.27 16:01
아라지리아    
오 드디어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2018.01.28 00:56
AgentJ    
오랜만입니다!!
2018.01.28 11:07
가린군    
믿고 보는 미에크산 ! 신작 축하드리며 재미있는글 기대할께요.
2018.01.29 08:46
이충호    
음....
2018.01.30 12:05
사막여우12    
선작! 잘봤습니다.
2018.01.30 14:52
adsfera    
으어.. 쪽지 좀 보내주시지.. 지금 알았어요ㅠ
2018.01.30 19:28
[탈퇴계정]    
격렬한 몸의 대화...!
2018.01.30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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