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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병들의 대지 1권 - 1

2018.01.23 조회 1,089 추천 9


 용병들의 대지 1권
 
 목차
 프롤로그
 Chapter 1 각성
 Chapter 2 인연
 Chapter 3 추적
 Chapter 4 복귀
 Chapter 5 신고식
 Chapter 6 위기 중첩
 Chapter 7 이상 현상
 
 
 
 
 
 
 프롤로그
 
 
 
 
 
 
 
 
 
 
 
 
 
 한 사람이 두 사람이 되고, 두 사람이 세 사람이 되고, 세 사람이 네 사람이 되었다. 사람들은 모이고 모여 혈족을 이루었고, 혈족이 모여 부족이 되었으며, 부족이 모여 왕국이 되었고, 왕국이 모여 제국이 되었다.
 모이고 흩어지고, 지키고 쓰러지고, 침략하고 합병하면서 사람들은 노예가 되었고, 평민이 되었고, 귀족이 되고, 왕족이 되고, 황족이 되었다.
 세상을 유지하는 절대 다수는 평민이었고 귀족과 왕족, 황족은 세상 권력의 중심이 되었다.
 그들은 강력한 무력과 행정력으로 나라를 다스렸으며, 세상 사람들은 그들을 위정자, 혹은 노블이라 불렀다. 노블들은 세상의 정점에 서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하나 그러한 노블조차도 감히 침범할 수 없는 영역이 있었으니 그것은 다름 아닌 아츠 월드라는 곳이었다.
 아츠 월드는 기사와 마법사, 용병들로 이루어진 또 다른 세계라 할 수 있었다. 환상처럼 실존하는 세계. 그곳은 오로지 가진 바 무력과 실력으로만 모든 것을 평가받았다.
 아츠 월드에는 오롯이 기사만이 존재하는 에퀘스의 성역, 마법사만이 존재하는 바벨의 탑, 그리고 제국에 대체 얼마만큼 존재하는지 모를 정도로 모래알처럼 널린 용병들의 세계가 존재했다.
 에퀘스의 성역은 일곱 개로 대지의 성역, 불의 성역, 물의 성역, 바람의 성역, 태양의 성역, 공간의 성역, 강철의 성역이 존재했으며, 그들은 각자 한 지역의 패자로서 일가를 이루며 오히려 귀족보다 더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또한 이런 에퀘스의 성역과는 다르게 순수한 마법사로만 이루어진 바벨탑이 있었으니 물의 바벨탑과 불의 바벨탑, 바람의 바벨탑, 그리고 대지의 바벨탑이 존재했다. 그들 또한 에퀘스의 성역과 다르지 않게 최고의 가문을 만들기 위해, 혹은 가문의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끊임없는 노력을 경주하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국에 모래알처럼 흩어져 있으며 한데 모이지 못한 존재, 가장 낮고 가장 천시 받는, 오로지 죽음에 이르러서만 갈 수 있다는 안식의 대지에 대한 전설만을 믿고 있는 용병들이 존재했다.
 그리하여 하나의 제국에 두 개의 세계가 존재하게 되었다.
 노블과 아츠 월드.
 두 세계는 때로는 협력하고 때로는 척을 지며 제국을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다.
 
 ***
 
 “크허억!”
 한 명의 사내가 검붉은 핏물을 흩날리며 튕겨 나갔다.
 쿠드득!
 “쿨럭!”
 서너 개의 두꺼운 나무를 부러뜨리고 흙먼지를 일으키며 마지막으로 나무둥치에 부딪쳐 한 움큼의 선혈을 토해내는 사내였다. 토해낸 선혈에는 조각난 내장 부스러기까지 섞여 있어 심각한 부상을 입었음을 내포하고 있다.
 사내는 나무둥치에 기대 뻥 뚫린 복부에서 흘러나오는 내장을 꾸역꾸역 집어넣으며 억지로 몸을 일으켜 세우려 했다.
  그런 사내의 머리 위로 그림자가 드리웠다. 그에 사내는 억지로 일으키려던 몸을 멈추고 그림자의 주인공을 바라보았다.
 부상을 입은 사내의 눈이 파르르 떨리고 얼굴이 창백하게 변하며 경직되었다.
 사내의 눈앞에 있는 자, 그자의 얼굴이 부상을 입은 사내와 똑같았다. 하지만 미묘하게 풍기는 분위기에서 차이가 났다.
 심각한 부상을 입은 사내의 표정은 당혹스러워하고 의문에 가득 차 있음이 분명했다.
 “너, 너는······?”
 “바로 너지.”
 “어떻게······?”
 거울을 보는 것같이 똑같이 생긴 두 사내, 일란성 쌍둥이보다 더욱 똑 닮은 두 사내였다. 그림자의 사내가 부상을 입은 사내를 보며 진득한 미소를 떠올리며 입술을 일그러뜨렸다.
 이어 그림자의 사내는 어깨를 으쓱이며 별거 아니라는 듯 입을 열어 친절하게 답을 해줬다.
 “이 우주에는 수없이 많은 차원이 있지. 점인 1차원, 선인 2차원, 공간을 담은 3차원, 시공간을 담은 4차원, 그리고 서로 다른 세계이면서도 같은 세계인 평행 차원······.”
 “······?”
 밑도 끝도 없이 차원을 설명하는 자신과 똑같은 사내를 보며 부상을 입은 사내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중에는 서로 절대 가까이 할 수 없는 평행 차원이 수없이 많아. 그리고 그 평행 차원 속에는 언제나 또 다른 내가 존재하지. 그런데 여기서 재미있는 점은 말이야, 그 평행 차원, 혹은 다른 차원 속에 살아가는 나를 완벽하게 흡수하면 여러 곳에 흩어진 힘을 하나로 모을 수 있다는 것이지.”
 “히··· 임?”
 차가운 시선으로 죽어가는 사내를 보며 그림자의 사내는 팔을 굽혀 손바닥이 하늘을 보도록 뒤집었다.
 빠지지직!
 그의 손에 무언가 모이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푸른색의 구체가 만들어지며 밤을 환히 밝히는 듯했다. 죽어가는 사내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러다 푸른 구체를 소환한 사내의 왼손이 죽어가는 사내를 향해 쭈욱 뻗었다.
 “너는 나야. 그래서 나에게 힘이 되어주면 돼. 죽어도 죽은 게 아니라는 것이지.”
 “크으으, 끄아아악!”
 그에 죽어가는 사내의 정수리로부터 연기와 같은 것이 나와 마치 빨려 들어가듯 그림자 사내의 왼손으로 향했다. 그와 함께 죽어가는 사내의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며 격렬하게 뒤틀리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사내는 마치 미라처럼 변해가기 시작했고, 이내 피부와 뼈까지 수축되어 마침내 바늘 끝과 같은 한 점이 되어 사라져 버렸다. 완벽하게 사라졌다. 그가 흘린 피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쓰러진 사내는 사라졌고, 연기와 같은 하얀 무언가를 빨아들인 사내의 전신에 흰색의 휘광이 퍼져가며 손을 축 늘어뜨린 채로 눈을 까뒤집으며 고개를 쳐들었다.
 그의 신형이 스르르 떠올랐다.
 “흐으∼ 흐하아아∼”
 마치 마약을 한 사람처럼 기이한 탄성을 흘리는 사내였다. 그러는 동안 사내의 전신에서 뿜어지던 백색의 휘광이 점점 사그라졌고, 마침내 사내의 신형이 다시 대지에 닿았다.
 “후우우∼”
 길게 한숨을 내쉰 사내는 만족한 듯 손을 들어 보였다.
 “크크큭! 얼마 안 남았군.”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어두운 하늘을 바라보는 사내. 그러다 문득 다시 고개를 내린 사내의 얼굴이 섬뜩하리만치 날카롭게 변해 있었다.
 “디멘션 게이트 오픈!”
 스스슷!
 그의 외침에 어두운 공간이 일렁이면서 검푸른 일그러짐이 모습을 드러냈다.
 사내는 지체 없이 그 일그러진 공간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일그러진 공간 속으로 사내가 사라졌고, 사내가 사라지자마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깨끗하게 본래의 모습을 회복하는 어두운 공간이었다.
 
 
 
 
 
 Chapter 1 각성
 
 
 
 
 
 
 
 
 
 
 
 
 
 “크큭, 크크크큭! 쿨럭!”
 혼자 미친 듯이 웃던 그는 급기야 한 움큼의 핏물을 게워냈다. 점점 희미해지는 의식 사이로 그의 앞에 다가오는 한 인영이 보였다. 기이하게도 그와 똑같이 생긴 사내였다.
 그의 앞에 선 사내는 죽어가는 그의 머리 위에 손을 올렸다.
 그의 머리 위에 딱 달라붙어 있는 손바닥으로 자신의 모든 것이 빠져나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사, 살고 싶다. 나는 살고 싶단 말이다. 살고 싶어.’
 어느새 그의 손에는 한 사람을 충분히 죽일 수 있는 소형 단검이 들려 있었다.
 이해 못 할 일도 아니었다.
 이곳은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던 전장의 한가운데였으니 말이다.
 “나아······.”
 “뭐?”
 잘 안 들리는 모양이다. 그에 죽음의 그림자가 내려앉은 사내는 더욱더 필사적으로 입을 열었다.
 “사아알고오오······.”
 “뭐라고?”
 그의 머리 위에 손을 올리고 있던 이는 인상을 찌푸리며 그에게 귀를 가져다 대었다. 평소라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약간의 자비심이랄까?
 ‘한 번쯤은······.’
 그렇게 생각했다. 이미 그는 회생 불능이다. 생명력이 꺼져가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이다. 비릿한 미소를 떠올리며 죽어가는 사내의 머리채를 잡고 귀를 가까이 대었다.
 “사알고오··· 싶다고오오, 이 새끼야아아아∼!!”
 그때였다.
 미라처럼 마르며 죽어가는 사내의 손이 번개처럼 휘둘러졌다. 어디서 그런 힘이 생겨났을까?
 죽어가던 사람이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일격이었다. 그의 일격이 방심하고 있던 사내의 정수리를 아주 정확하게 내려쳤다.
 퍼어억!
 순간 머리채를 잡고 있던 사내의 정수리에서부터 진득한 핏물이 흘러내렸다.
 주륵!
 머리를 지나고 이마를 지나 미친 듯이 깜빡이는 눈꺼풀까지 다다른 핏물이 바르르 떨렸다.
 “살고 싶다고, 이 개새끼야∼”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명확하게 전달되는 목소리.
 죽어가던 사내는 그의 정수리에 박힌 소형 단검을 빼 들고 다시 정수리를 찔러갔다.
 콰직!
 두 번, 세 번.
 연속으로 공격이 성공했다.
 하나.
 턱!
 네 번째에 막혔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이미 죽어 싸늘한 시체가 되었어야 할 치명상을 입고도 살아남아 소형 단검을 내려치는 그의 손을 굳게 잡아챘다. 하지만 단검을 쥔 사내는 이대로 끝낼 수 없다는 듯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와드득!
 이빨로 목을 물어뜯었다. 최후의 일격.
 도저히 상대조차 되지 않는 상대에게 치명타를 먹였다.
 소형 단검을 쥔 그의 손목을 잡고 있던 사내의 손이 스르르 풀렸다.
 “끄으, 끄르륵!”
 목을 물어뜯은 그의 입에서 가래가 끓는 듯한 소리가 새어 나왔다.
 하지만 그는 결코 입을 떼지 않았다. 마치 쏟아지는 핏물을 모두 마셔 버리겠다는 듯 독한 눈빛을 쏘아내면서 말이다.
 사내는 짐승처럼 흔들어댔다.
 “즈에··· 기······.”
 뚜둑!
 사내의 전신이 가늘게 떨리며 서서히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완전히 손목이 풀려났음을 느낀 그는 다시 소형 단검으로 죽어가는 사내의 가슴을 찔러댔다.
 퍼억! 퍽! 퍼억!
 사내의 한 번씩 가슴을 찍을 때마다 풀썩이며 진저리를 쳤다. 소형 단검을 든 사내는 허무하게 죽어가는 사내를 보며 킬킬거렸다.
 “쿨럭! 염병할··· 새끼. 힘도 없구만. 후욱!”
 사내가 죽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일까, 아니면 힘이 다했을까? 내려치는 행위를 멈춘 사내가 하늘을 바라보며 거친 숨소리를 내뱉었다. 그의 상태는 그야말로 엉망진창이었다.
 손은 시뻘겋다 못해 검은색을 띠고 있고, 그의 복부에선 창자와 핏물이 꾸역꾸역 밀려나오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살짝 들어 자신의 구멍 난 배를 무심히 바라보더니 다시 어둠이 가득한 하늘을 향해 머리를 떨어뜨렸다.
 “35년이라······. 잘 산 건가?”
 그의 눈이 서서히 감겼다. 들려 있던 그의 손이 죽은 사내의 손등 위로 힘없이 떨어졌다.
 툭!
 그 위로 물 한 방울이 떨어져 내렸고, 이내 그 수를 늘리더니 적막함을 달래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슬퍼함인지 세상을 빗속으로 잠겨들게 했다. 그 빗속에서 두 사내는 나란히 죽음을 맞이하는 듯했다.
 쏴아아!!
 비가 더욱 거세지기 시작했다. 마치 하늘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손가락 굵기만 한 빗방울이 한 치 앞도 확인할 수 없을 정도로 쏟아졌으며, 처절하던 전장의 상처를 모두 씻어 내리고 있었다.
 쿠르르르! 콰콰가강!
 급기야는 천둥이 치고 번개가 내리치면서 어둠 속을 대낮처럼 환하게 밝히기도 했다.
 그 지독한 장대비 속에서 머리가 꿰뚫리고 심장이 박살 난 자의 싸늘한 시체에서 기이한 현상이 일어났다.
 붉은색, 녹색, 푸른색, 검은색, 노란색, 흰색, 그리고 공간을 일그러뜨리는 투명한 막의 일곱 가지 색상이 한데 어울리다 다시 각각의 색으로 둥근 구슬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일곱 개의 구슬은 죽은 사내의 주변을 맴돌다 하늘 높이 치솟아 올랐다.
 아니, 일곱 개의 구슬 모두가 치솟아 오른 것이 아니었다. 붉은색과 흰색, 그리고 공간을 일그러뜨리는 투명하고 둥근 구슬은 솟아오르지 않고 마치 떠나기 싫다는 듯 여전히 죽은 자의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이 세 개의 구슬을 제외한 나머지 네 개의 구슬은 마치 튕겨 나가듯이 사방으로 흩어지며 치솟아 올랐다.
 일곱 개의 구슬이 솟아난 시체는 마치 자신의 임무를 다했다는 듯 서서히 대지에 흡수되듯 스며들었고, 하늘 높이 솟아오르지 않고 남아 있던 세 개의 구슬은 망설이듯 일렁이다 복부가 뻥 뚫려 푸르스름하게 죽어가는 시체에 스며들었다.
 그에 장대 같은 폭우 속에 붉고 흰 광망이 교차로 생성되며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하늘 높이 치솟아 오른 녹색, 푸른색, 검은색, 노란색의 구슬은 서로를 배척하듯이 거세게 밀어내며 사방으로 퍼져 나가 마치 유성처럼 긴 잔상을 남기며 장대비를 뚫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꽈르르릉! 콰콰카강! 버버번쩍.
 사라진 네 개의 구슬이 향한 곳으로 각자의 색을 의미하는 기이한 번개의 다발이 내리쳤다.
 북으로는 검푸른 번개가, 남으로는 녹색이, 동으로는 푸른색의 번개가 내리쳤고, 서쪽으로는 샛노란 번개가 내리쳤다.
 누군가 보았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외쳤겠으나 다행히도 지금 시체가 널린 이 평원에서는 살아 있는 사람을 단 한 명도 찾아볼 수 없었다. 네 개의 구슬이 사라지고도 평원에는 여전히 차가운 장대비가 쏟아져 내렸다.
 무거운 빗소리와 어둠만이 내려앉은 대지에 다시 한 번 빛들이 터져 나와 어둠을 물리치고 있었다. 바로 복부가 꿰뚫린 시체에서 흘러나온 빛으로 붉고 하얀빛이 전신을 물들이기를 수차례 반복했고, 뻥 뚫린 복부가 스스로 회복되며 파리하게 죽었던 얼굴색이 느릿하게 그 혈색을 되찾기 시작했다.
 
 츠츠즛!
 기이한 소음이 흘러나오면서 공간을 일그러뜨리며 투명한 막과 같은 것이 시체의 정수리에서 생성되었다.
 그 막은 타원형으로 시체의 전신을 감싸더니 대지를 뚫을 듯 쏟아지는 장대비를 튕겨내기 시작했다.
 투두두둑!
 쏴아아아!
 하나 장대비는 계속되었다. 마치 전장의 모든 피를 씻어 내려는 듯이 말이다.
 몇날 며칠 동안 계속된 장대비가 그쳤다. 세상은 다시 평온을 되찾았고, 세상의 모든 것을 씻어낸 듯 싱그러운 푸름을 드러내었다.
 꿈틀!
 질퍽한 시체 속에서 꿈틀거림이 있었다.
 “크윽! 쿨럭!”
 사내가 기침을 토해냈다.
 “후우우∼”
 그리고 길게 한숨을 내쉰 그의 감겨 있던 눈이 서서히 떠지기 시작했다. 그는 눈을 뜨고도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고 그저 하늘을 바라볼 뿐이었다.
 “살아··· 있는 건가? 끄으응!”
 앓는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몸을 일으켜 세우다 문득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곤 눈을 크게 떴다.
 “뭐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분명 자신은 회생 불능의 상처를 입었었다. 복부가 뻥 뚫려 내장이 흘러나오고 24개에 달하는 갈비뼈 중 멀쩡한 것이 하나도 없을 정도였다.
 열두 살에 용병을 시작해 23년 동안 이어왔다. 그동안 상처 하나 입지 않았다면 그것은 용병질을 제대로 못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자신은 여전히 마나를 각성하지 못한 유저급 용병 중 러너일 뿐이었다.
 그냥 3년 이상 된 용병에게 주는 비웃음 가득한 호칭인 러너 말이다. 그렇게 23년을 살아왔다. 그 와중에 손가락 두 개도 잃었다. 그런데 뻥 뚤렸던 복부는 둘째 치고 잘려 나갔던 손가락마저 새로 생겨 있었다.
 ‘그러고 보니······.’
 몸이 이상했다.
 외부의 변화도 놀라웠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자신의 내부에서 느껴지는 이 이질적인 기운이었다.
 ‘이건 분명······.’
 그는 23년간 무수히 많은 용병을 만났고, 서적으로는 접할 수 없는 귀중한 경험을 했다. 그리고 지금 자신의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에 대해서도 어렴풋이 들은 적이 있고 또한 직접 본 적도 있다.
 그는 이곳이 전장인지 아닌지는 관심 없었다.
 ‘마나! 이건 분명 마나다!’
 그랬다. 35년의 삶 동안 그렇게도 원하던 마나가 느껴지고 있었다.
 전신에 충만한 이 느낌은 마나가 분명했다.
 마나가 전신을 휘감고 돌았다. 그것은 쾌감이었다.
 단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는 쾌감이었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다 죽은 기사 옆에 버려진 잘 단련된 검을 집어 들었다. 손으로 전해지는 감각이 나쁘지 않았다.
 “크으윽!”
 그런데 그때 갑자기 머리가 깨질 것 같은 지독한 고통이 찾아왔다.
 그는 전신을 벌벌 떨면서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그대로 질척한 땅바닥에 머리를 처박으며 몸부림을 치기 시작했다.
 “끄아아아악!”
 목청이 터져라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도 머리가 깨질 것 같은 고통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그리고 이내 사내는 흰자위를 보이며 거품을 물고 전신을 가늘게 떨었다.
 
 ***
 
 그는 그 순간 자신의 깊고 깊은 무의식의 세계로 빠져 들어가고 있었다. 얼마나 깊이 들어갔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어느 순간 그의 눈앞에는 알 수 없는 자가 확대되듯이 투영되고 있을 뿐이었다.
 ‘저··· 저자는!’
 그의 의식 깊은 곳에서 자신과 똑같은 모습을 한 자가 미친 듯이 폭풍을 일으키며 난동을 부리고 있었다. 난동을 부리는 사내의 주변으로는 끊임없이 환경이 변하고 있었다.
 때로는 거대한 산맥이 나타났고, 때로는 바다가, 때로는 울창한 숲이, 때로는 눈바람이 몰아치는 광활한 평원이 나타나기도 했다.
 하나 그 모든 것은 사내에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주먹질 한 번에 산이 무너졌고, 발길질 한 번에 바다가 갈라졌으며, 분노한 외침에 공간이 일그러졌다.
 사내는 끊임없이 손과 발, 그리고 이 세상에서 볼 수 있는 모든 무기를 소환하며 공간을 부수었다.
 그러다 문득 아무도 없던 황량한 공간에 자신 말고 또 다른 존재가 있는 것을 눈치채고는 그를 향해 맹렬하게 분노를 터뜨렸다.
 “네놈! 네놈이었구나! 우주에서 가장 강한 존재가 되겠다고 나를 속인 놈이! 죽어라!”
 꽈르르릉!
 “어디냐? 숨지 말고 나서라!”
 사내의 눈에 핏발이 서 있으며 그의 분노는 전혀 가라앉지 않고 있었다. 여전히 공간은 변하고 있고, 나타나는 모든 공간을 부수고 있었다.
 “네놈!”
 파아앙!
 공간을 가르고 사내의 주먹이 얼이 빠져 제대로 대항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그를 향해 쇄도했다.
 우뚝!
 사내의 갑작스러운 공격에 그는 무엇을 어떻게 해볼 도리도 없이 그저 선 채로 눈을 질끈 감았다. 하나 그의 눈 바로 앞에서 미친 듯이 공간을 부수던 사내의 주먹이 멈췄다. 그리고 조용하게 입을 열었다.
 “네놈은 그놈이 아니로군.”
 그에 질끈 감았던 눈을 슬며시 떴다. 그의 눈앞에는 수백, 수천 번은 고련했을 굴강한 모습의 정권이 확대되어 있었다.
 스르륵!
 “네놈도 당한 것이냐?”
 “무엇을?”
 “만나지 못했나? 전 차원을 이동하며 평행 차원 속에서 살아가는 또 다른 자신을 죽여 그 힘을 흡수해 신의 반열에 들고자 하는 미친놈을 말이다.”
 “만··· 났소.”
 “그래? 그럼 죽은 게로군.”
 “죽지는 않았소.”
 그에 눈을 크게 뜨는 사내. 그의 얼굴이 짧은 시간에 수십 번을 변했다. 그러다 앓는 소리를 내며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자네가 주인인 게로군.”
 “주인? 무슨······.”
 “그자를 죽였다면 그자가 지금까지 흡수한 힘을 그대가 흡수했다는 것을 의미하니 그대가 주인인 것이지.”
 “그게 무슨······.”
 아직도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는 그를 보던 사내가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이야기가 길어질지 모르니 앉아.”
 “아! 뭐······.”
 그에 마치 거대한 골렘을 보는 듯한 사내의 옆에 슬그머니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나는 901차원 타이탄 행성의 옵티머스인 고르곤 가이잘라스라고 한다.”
 “나는··· 제이니스 제국의 유저급 용병 아론이오.”
 “유저급?”
 아론의 전신을 훑어본 고르곤이 다시 입을 열었다.
 “마나를 다루지 못하는 것인가?”
 고르곤의 질문에 침중한 표정을 해 보이며 아론이 답을 했다.
 “그렇소.”
 “그자가 방심했나 보군.”
 마치 전후 사정을 한눈에 꿰고 있다는 듯이 말했다. 그리고 고르곤의 전신에서 가느다란 실과 같은 것이 아론의 머리 위로 스멀스멀 다가와 흡수되었다.
 “흐음, 그렇게 된 것이로군. 어쨌든 내 복수를 또 다른 내가 해준 것이군.”
 허탈하다는 듯이 혼잣말을 하는 고르곤.
 아론은 지금 한껏 위축되어 있었다. 마치 오거 앞의 고블린처럼 어떤 행동도, 어떤 말도, 어떤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납작 엎드려 있을 뿐이다.
 “긴장하지 않아도 된다. 나는 너다. 네가 살고 있는 세상과는 전혀 다른 901차원의 나지. 다른 차원에 살고 있는 내가 이렇게도 나약한 모습이라는 것이 한심스럽기 그지없지만 어쨌든 너는 나의 복수를 해줬고, 살아남았으며, 육체를 가지고 있으니 네가 진정한 강자이다.”
 “그런··· 가?”
 아론은 상대가 자신을 해칠 의사가 없어 보이는 것에 안심하며 은근슬쩍 말을 놓았다.
 고르곤은 그런 그의 모습이 그나마 사내답다고 여겼는지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자신이 살던 차원에도 용병이라는 것이 있었다. 그리고 자신을 앞에 두고 이렇게 빠르게 얼굴색과 태도를 바꾸는 자는 없었다. 그것이 마음에 들었다.
 적어도 강자 앞에 약세를 보이거나 꼬리를 마는 그런 비겁한 자는 아니라는 것이니 말이다.
 “그래, 역시 그래야지. 그 정도의 강단도 없이 어찌 그 간악한 놈을 죽일 수 있었을까? 하지만 나에게는 이제 시간이 별로 없군.”
 “무슨······.”
 “그냥 들어. 이제부터 나의 힘을 너에게 전해주겠다. 나의 힘은 불멸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사라지지 않는 생명의 힘, 그리고 그 속에서 탄생한 절대의 무력을 너에게 주겠다.”
 “그··· 크크, 허어억!”
 순간 답답한 비명이 아론의 입술을 뚫고 흘러나왔다.
 아론은 분명 이것은 허상이고 꿈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느껴지는 이 지독한 고통은 허상이라 할 수 없었다. 실제의 고통이었다.
 하지만 그 고통은 오래가지 않았다. 짧은 시간 전달되어 왔고, 고르곤의 경험과 지식이 홍수처럼 밀려들어 오기 시작했다. 수십 년, 혹은 수백 년, 아니, 수천 년의 모든 것이 아론에게로 각인되고 있었다.
 “흐어어어∼”
 아론은 자신도 모르게 긴 한숨을 토해내었다. 하지만 아론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전해주는 고르곤은 점점 말라가고 신장마저 줄어들고 있었다. 탱탱하던 그의 피부는 가뭄이 든 것처럼 쩍쩍 갈라졌고, 붉은 머리카락은 회색으로 탁하게 물들어갔다.
 “아마도··· 또 다른 내가 더 있을 것이다. 그가··· 너에게 모든 상황을 전달해 줄 것이다.”
 마지막 남은 힘까지 모두 넘겨준 고르곤은 먼지가 되어 사라져 갔고 아론은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전히 눈을 감은 채 가느다란 숨을 내쉬고 있었다.
 힘을 받아들인 아론의 전신의 피부가 벗겨지고, 근육이 찢어지고, 혈관이 허공으로 튀어 오르며 뼈가 제멋대로 뒤틀리기 시작했다. 뒤틀리던 뼈는 이내 다시 조립되듯 맞춰져 하나의 신체를 이루어가고 있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무려 열 번의 분해와 조립, 그리고 재생이 계속되었다.
 스흐흐흐∼
 기괴한 소리가 처음과 달리 평온한 모습을 하고 있는 아론의 전신에서 일어났다.
 번쩍.
 그리고 마침내 아론의 눈이 떠졌다. 그는 빠르게 일어나 경계하는 자세로 주변을 훑어보았다.
 “후우∼”
 그러고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곤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901차원의 나라니······.”
 말도 안 되는 꿈을 꾼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본 아론은 그것이 꿈이 아니라는 것을 실감하고 있었다. 그는 심장에 희미하게 자리 잡고 있는 피닉스의 문양을 보았다.
 손을 들어 자신의 가슴을 어루만져 보았으나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하지만 알 수 있었다. 이 피닉스의 문양에 901차원의 자신이자 옵티머스인 고르곤 가이잘라스의 모든 것이 자리하고 있음을 말이다.
 아론은 잠시 동안 그렇게 앉아 있다 그제야 주변을 살펴보았다.
 시체만이 가득한 곳.
 며칠간 계속된 비에 젖은 시체가 심한 악취를 풍기고 있었다. 하지만 아론은 그런 것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이 죽어서 퉁퉁 불어터지고 악취가 심한 죽은 기사의 몸을 뒤적거렸다. 뭔가 쓸 만한 것이 있나 찾아보려는 것이다.
 ‘부피가 큰 것은 제외시키고······.’
 돈이 들어 있는 금화 주머니와 빗속에 문드러진 살 속에 박혀 있는 반지와 목걸이 등 챙길 수 있는 것은 모두 챙겼다. 그리고 주변에 있는 다른 시체로 눈을 돌렸다. 그런 그의 행동은 한참 동안 지속되었다.
 툭!
 그러다 지쳤는지 아론은 무신경하게 한 시체를 툭 치고 일어났다.
 그는 허리를 펴고 일어서며 긴 대검을 등에 차고 몇 개의 손도끼와 단검을 주렁주렁 매달았다. 그리고 빠르게 이동했다.
 그렇게 이동하면서 그는 연신 시체를 뒤졌고, 무언가를 주섬주섬 챙겼다.
 빠르게 이동한다고는 하지만 그런 행위 때문인지 얼추 해가 지고 어둑해질 즈음이 되어서야 전장을 벗어날 수 있었다.
 전장을 벗어나자 숲에 들어설 수 있었다.
 ‘여명 작전 시 우회하던 회색의 숲인가?’
 회색의 숲, 그리고 여명 작전.
 순간 두 가지의 사실이 떠오른 아론은 인상을 찌푸렸다.
 여명 작전이란 드래고나스 산맥 아래로 진출한 시베리아 제국의 첨병에 대한 기습 전투이다. 하지만 기습임에도 불구하고 회색의 숲을 관통하는 것이 아닌 우회하는 작전이었다.
 그것은 바로 회색의 숲을 지배하고 있는 회색 몬스터 때문이었다.
 특히 회색의 숲 중심을 지배하고 있는 회색 오크과 바질리스크는 회색의 숲 자체를 난공불락의 숲으로 만들고 있었다.
 관통하기보다는 우회하는 것이 오히려 더 시간이 단축된다 할 정도로 말이다.
 시베리아 제국은 드래고나스 산맥 북쪽 얼어붙은 동토를 기반으로 살고 있는 30여 개의 부족을 통합한 바이큰족의 수장 윌리엄 에레스가 건국한 제국으로 호시탐탐 기름진 제이니스 제국을 노리고 있는 필생의 적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 그들이 강성해진 힘을 무기 삼아 남하를 시작했고, 드래고나스 산맥의 최남단까지 진출해 제이니스 제국을 압박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에 북부 방면군 예하 동부군 사령관은 기습을 계획하였고, 무려 석 달이라는 긴 시간 동안 회색의 숲을 우회하여 적의 부대를 기습한 것이다.
 여명 작전은 성공도 실패도 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시베리아 제국은 더 이상의 남하를 중단했고, 제이니스 제국은 그들이 남하를 중단한 사이 숲을 중심으로 좌우로 저지선을 만들어 경계선을 구축했기 때문이다.
 ‘특히나 회색의 숲의 중심에 위치한 바질리스크와 회색 오크는 상상을 초월한다고 했지.’
 그런데 그는 지금 그 회색의 숲에 들어서고 있었다.
 두려움이란 없었다. 자신에게는 이미 고르곤의 모든 힘이 흡수되고 각인된 상태였다. 거기에 자신은 23년 동안 깨닫지 못하던 마나까지 얻었다. 회색 오크든 바질리스크든 단박에 박살 낼 수 있을 힘이 전신의 근육에 꿈틀거리고 있었다.
 회색의 숲을 가로지르며 그는 빠르게 힘을 각인시켰고, 또한 용병 생활의 오랜 경험으로 먹을 것과 편히 쉴 쉘터를 찾아냈다.
 회색의 숲은 그리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었다.
 쉘터를 찾기까지 수없이 많은 몬스터와 험하기 그지없는 숲 등의 모든 것이 그의 발걸음을 저지했다. 또한 각성한 능력을 각인하면서 이동하니 더욱더 그러했다.
 동물이 버리고 간 동굴을 쉘터로 삼은 그는 밖으로 나와 끼닛거리를 찾기 시작했다. 상당한 시간이 흘렀고, 그는 한 끼를 먹고 남을 정도의 멧돼지까지 잡을 수 있었다.
 타닥타닥!
 핏물을 제거한 멧돼지가 노릇하게 잘 익어가고 있다. 과거였다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니, 불가능한 일이라 할 수 있었다.
 물론 경험을 토대로 동굴을 찾아낼 것이고, 덫을 놓아 동물을 잡았을 것이다. 하나 설마 혼자 몇 백 킬로그램이나 나가는 멧돼지를 잡고 철저하게 가려져 있는 동굴을 단번에 발견했을 리는 만무했다.
 “또 다른 존재가 내 안에 있다고 했는데······.”
 잘 익은 멧돼지의 다리를 잡고 손칼로 저며 입으로 쑤셔 넣으며 웅얼거리는 아론이다. 자신의 내부에 몇 명의 존재가 있을지 몰랐다. 확실한 것은 그중 한 명의 자신이 자신의 모든 것을 넘겨주고 사라졌다는 것이다.
 멧돼지 다리를 질겅거리며 하나씩 곱씹어보는 아론. 그러다 문득 자신이 주렁주렁 매달고 있던 무기가 사라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뭐지?’
 순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 물론 새롭게 각성한 힘 때문에 흥분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자신이 시체에서 챙긴 무기류를 잃어버리고도 깨닫지 못했다는 것은 인정할 수 없었다.
 용병이란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 특히나 과거의 자신처럼 마나조차 깨닫지 못한 유저급의 용병에게 있어서는 말이다. 때문에 마나를 깨달은 익스퍼트의 용병들과 달리 유저급의 용병들은 무기를 주렁주렁 달고 다니기를 서슴지 않았다.
 무기가 많을수록 살아남을 확률이 높았고, 때에 따라서는 무기를 팔아 생필품, 혹은 기타 전투에 필요한 장구를 살 수 있었다. 그러하기에 전투가 끝나고 죽은 시체를 뒤지는 것을 망설이지 않던 아론이다.
 그런데 아무리 변했다 해도 자신의 목숨과도 같은 무기가 사라졌음에도 아무것도 인식하지 못했다는 것은 무언가 감각에 이상이 생겼다고밖에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의 몸에 어떤 이상이 생겼는지 알 수 없었다.
 오랫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그는 마침내 생각하는 것을 포기했다. 도무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문득 멧돼지의 살을 자르기 위해 들고 있는 칼의 길이가 너무 짧아 조금 긴 칼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때 그의 손을 뚫고 나온 하나의 날카로운 칼이 보였다. 아론은 멍하니 갑자기 솟아난 그 칼을 바라봤다.
 “······.”
 놀라움에 잠시 멍하니 있던 아론은 이내 깨달았다. 자신이 챙긴 무기를 자신이 흡수했다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더 놀란 것은 이 모든 것을 마치 미리 알고나 있었다는 듯 대하고 있는 자신 때문이었다.
 ‘평정심.’
 그의 놀람은 평정심에 의해 산산조각이 났고, 아론은 말없이 잘 익은 멧돼지를 게걸스럽게 먹기 시작했다. 그는 어느새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인정하고 있었다.
 우적우적.
 아론은 말없이 고기를 자르고 씹어 먹었다. 성인 남성 몇십 명이 충분히 먹고도 남을 멧돼지를 혼자 모두 해치웠다. 그런 후 가볍게 트림을 한 아론의 눈동자가 더욱더 심유해졌다.
 밤은 더욱 어두워졌고, 그가 피워놓은 불은 더욱 맹렬하게 타올랐다. 그러면 그럴수록 아론의 생각은 점점 더 깊은 심연 속에 빠져들었다.
 ‘아직도 혼란스럽기는 하지만 이제 대충 알겠다. 내가 각성한 힘을.’
 그리고 하나의 결과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 결과가 도출되자마자 그의 뇌리 속으로 선명하게 각인되어 떠오르는 몇 가지 사실이 있었다. 그 사실들은 순차적으로 떠올랐는데,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역시 자신이 죽인 또 다른 자신의 생각과 그에 따른 전승이었다.
 전승이라는 글자가 떠오르는 그 순간 그는 머리가 빠개질 듯한 고통 속에서 다시 깊고 깊은 심연 속으로 빠져들었다.
 
 ***
 
 “왔나?”
 깊은 심연 속에서 자신을 반기는 자가 있었다. 자신과는 조금 다른 얼굴을 하고 있으며 희끗한 짧은 머리와 강장한 모습을 하고 있는 자였다.
 “이미 알고 있겠지만 평행 차원 81차원, 지구의 대한민국에 살던 백두산이라고 한다.”
 “또 다른 나인가?”
 “사라진 존재와 대화를 한 모양이군.”
 “901차원의 타이탄 행성의 옵티머스 고르곤 가이잘라스라고 하더군.”
 “그렇군.”
 “백두산 너는 나에게 뭘 전승해 줄 거지?”
 아론은 이제 망설이지 않았다. 이미 자신의 정신 속에 살아 있는 이들은 육체를 가질 수 없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나는 두 가지의 능력을 전수해 줄 것이다. 하나는 21세기 지구의 지식과 1203차원의 워딘 행성의 나이자 너이던 자의 능력이지.”
 “동시에?”
 “아니. 먼저 1203차원 워딘 행성의 능력을 전해주지.”
 “더 오래 살고 싶은 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것이겠지. 그리고 내가 전해줄 것은 무력이나 능력이 아닌 지식이야. 간단하게 전달해 주기에는 너무나도 방대하지.”
 “그런가?”
 고르곤 역시 수없이 많은 경험과 지식을 전해줬다. 그때 만약 고르곤의 불멸이라는 능력을 전승하지 않았다면 자신은 머리가 터져 죽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능력을 전수받는 것과 지식을 전수받는 것은 그만큼 큰 차이가 있었다.
 “확실히 많이 달라졌군.”
 백두산이 뚫어지게 아론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에 아론 역시 변한 자신의 모습을 인지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한 명뿐이지만 삶과 지식이 모두 전승되고 각인되었다. 변하지 않으면 그것이 오히려 더 이상한 것 아니겠나?”
 “그것도 그렇군.”
 그와 동시에 백두산의 정수리에서 하얗고 실체 없는 연기가 아론의 정수리를 향해 날아들었다. 아론은 저항하지 않았다. 이미 한 번 겪어봤기 때문이다. 다시 깨질 것 같은 통증과 함께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사라지는 고통.
 “이번 능력은······.”
 “공간에 관한 모든 것이지.”
 “그렇군.”
 간단하게 인정해 버리는 아론. 그런 아론의 태도에 살짝 고개를 갸웃거리는 백두산이다.
 “왜? 생각보다 저항이 없어서 그런 것인가?”
 “그렇지. 아무리 겪어봤다고 하지만 너무 담담하군.”
 “······.”
 “난 23년 동안 용병으로 이 세상에서 뒹굴었지.”
 “그 말은 남들보다 생각이 유연하다는 것이겠군.”
 “유연?”
 “아! 말뜻을 모르는 것인가? 뭐 그럴 수도 있겠지. 어쨌든 적응력이 뛰어나다고 할 수 있는 게로군.”
 “그렇다고 할 수 있지. 때로는 비굴할 정도로 비겁해야 하고, 때로는 알고도 모른 척해야 하는 것이 약한 자가 오랫동안 살아남는 조건이니까.”
 “그도 그렇군. 어쨌든 오늘의 만남은 이것으로 끝내야겠군.”
 “너의 것은 전승하지 않나?”
 “지식이란 우격다짐으로 집어넣는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니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모두 사라졌는데 너는 왜 더 오래 존재할 수 있지?”
 아론의 질문에 백두산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한 명의 희생 덕분이지.”
 “희생이라면······.”
 “지금 너에게 전승한 공간에 관한 모든 능력을 가지고 있던 자.”
 “그렇군. 하면 얼마나 오래 존재할 수 있나?”
 “길어야 일 년, 짧으면 6개월이겠군. 그조차도 안 될 수 있고.”
 “그동안 그 방대한 지식을 전해줄 수 있나?”
 “이곳에서 흐르는 시간과 현실에서 흐르는 시간은 전혀 다르니까. 대략 100분의 1 수준이라고 할 수 있겠군.”
 “심심하지는 않겠군. 하면 너를 만날 때마다 그 고통을 겪어야 하는가?”
 “그렇지는 않을 거야.”
 “그나마 다행이군. 머리가 깨지는 고통은 정말 참기 힘들거든.”
 “그래, 그렇지. 어쨌든 다음에 보지.”
 “그러지.”
 “아! 그리고.”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지려 하던 백두산이 아론의 정신을 다잡았다.
 “왜 그러지?”
 “중요한 것을 빼먹어서 말이지.”
 “중요한 것?”
 “그래. 어쩌면 너의 생명과도 직결될 수 있는 일이지.”
 “생명이라······.”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네가 죽인 차원을 넘나들던 놈에게서 떨어져 나온 파편은 너에게 흡수된 세 개가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지.”
 “더··· 있다는 것인가?”
 “총 일곱 개야. 그중 세 개가 너에게 흡수된 것이지.”
 “나머지 네 개는 나에게 흡수되지 않았다는 말이군. 그런데 그게 문제가 되나?”
 “너에게 흡수돼 이제는 하나가 되어버린 힘과 나머지 네 개의 힘은 끊임없이 서로를 탐할 것이다.”
 “서로를 탐한다는 것은······.”
 “다른 힘을 흡수하기 위해 어떤 행위도 서슴지 않는다는 말이겠지.”
 “하지만 내가 더 유리한 것 아닌가?”
 “글쎄. 그건 모를 일이지. 만약 너보다 훨씬 강대한 힘과 세력을 가진 자가 너처럼 서너 개의 힘을 흡수했다면? 아니면 한 개의 힘을 흡수해 너보다 약하지만 일국의 제왕이라면?”
 “그건······.”
 말문이 막혀왔다. 자신은 세력도, 사람도, 권력도, 돈도 없다. 아직 완성하지 못한 세 개의 힘만 존재할 뿐이다.
 “내가 강해져야 하겠군.”
 “그것도 아주 많이.”
 아론의 말을 백두산이 받았고, 아론은 쉴 틈 없이 그 뒷말을 이었다.
 “돈도, 사람도, 세력도, 그리고 전승 받은 모든 힘도 말이지.”
 “그래. 전해줄 말은 다 전해줬으니 이제는 조금 쉬고 싶군. 너는 아직 모든 힘을 소화시키지 못했기에 나와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이 짧거든.”
 “그래, 쉬어라.”
 
 ***
 
 살며시 눈을 뜬 아론은 눈을 뜨자마자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시간이 얼마 흐르지 않은 것 같았다.
 피워놓은 불 위에는 기름기를 흘리며 익어가고 있는 멧돼지가 있었으며, 자신이 손에는 여전히 한 움큼 뜯어낸 멧돼지 살이 들려 있었다.
 알 수 없는 것투성이였다. 하지만 그러한 와중에도 심연 깊은 곳에서 만난 백두산이라는 인물과 나눈 대화 속에서 많은 것을 알게 된 아론이다.
 ‘가장 큰 힘을 가진 세 명만이 존재했고, 그중 두 존재가 사라져서 나의 전신에 녹아들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힘은 짧으면 6개월, 길면 1년 동안 서서히 나에게 전승될 것이다. 결국 나는 그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세상을 발아래에 두고 오시할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된 것이로구나.’
 새벽녘이 되어서야 결론을 내렸다. 자신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졌다. 중요한 것은 그런 결론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흔들림, 혹은 놀람조차 없다는 것이다.
 그는 이제는 다 타고 재만 남은 화톳불을 보다 슬며시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기회일까? 기회이겠지. 다시 살아갈 수 있는.”
 밤새 한숨도 잘 수 없었다. 자신이 변했다고 느끼는 그 순간 기회라는 단어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기회.
 단 한 순간도 머릿속에서 지우지 않던 단어이다. 그 단어가 지금 이 순간 가장 크게 사내의 뇌리를 지배했다. 얼마나 가지고 싶던 것이던가? 얼마나 열망하던 단어던가? 그런데 죽음을 맞이하는 그 순간 자신에게 그 단어가 주어진 것이다.
 “강해져야겠군. 죽기 싫으면 말이야.”
 무척이나 담담하게 입을 여는 아론의 음성은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어둠 속에서 불보다 뜨겁게 타오르는 그의 눈동자였다. 그렇게 그는 이 모든 것을 인정했고, 적응해 가려 했다.
 그 누가 다시 살아난 상황에서 다시 죽고 싶겠는가? 아론도 마찬가지였다. 살고 싶었다. 미친 듯이 살고 싶었다. 과거였다면 포기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자신은 힘이 있지 않은가? 전승된 힘과 그 힘을 활용할 수 있는 힘이 있지 않은가?
 ‘그러니 악착같이 살아야지. 그리고··· 과거처럼 나약하게 살고 싶지는 않아.’
 처음 죽음에서 다시 정신을 차린 지 근 한 달 만이고, 회색의 숲에 들어온 지 20여 일 만의 일이었다. 결심이 서자 그의 행동은 뚜렷하게 여유로워졌다. 그는 이 기회에 회색의 숲에 대해서 구석구석까지 파악하며 이동하고 있었다.
 백두산으로부터 지식을 전승받고, 전승된 공간의 힘과 불멸의 힘을 체화시키기 시작했다. 혼자였다면 두 힘을 제대로 전승하기에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론은 백두산의 도움으로 스펀지가 물을 흡수하듯 빠르게 체화시켜 나갔다.
 불과 20여 일이 지났지만 아론은 많은 것을 흡수할 수 있었다. 그의 움직임은 불과 20여 일 전의 유저 단계 중 러너의 용병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그렇게 빠르게 모든 것을 흡수해 나가는 도중 마침내 그는 새로운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전투다!’
 스팟!
 그것을 느끼는 순간 여유롭게 움직이던 아론의 신형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뀌이익!”
 “취이이익! 인.간. 죽.어.라!”
 몇 십의 오크와 몇 명의 인간이 거친 숨을 내쉬며 싸우고 있었다. 하지만 압도적으로 인간들이 밀리고 있었다. 인간의 수보다 오크의 수가 월등히 많았고, 인간들은 그저 보기에도 낭패스러운 모습이었다.
 하지만 인간들은 필사적으로 오크들과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살기 위해서 말이다. 벌써 몇몇의 오크가 죽임을 당했다. 그럼에도 오크들은 물러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욱더 흉성을 폭발시키며 인간들을 압박했다.
 “크아악!”
 “죠온!”
 한 용병이 피를 흘리며 비명을 지르자 그 모습을 본 동료가 다급하게 외쳤다. 하나 불가항력이었다. 어느새 몇 마리의 오크가 달려들어 항거 불능에 달한 용병의 목을 물어뜯고 심장을 뽑아 올렸다.
 “크아악! 죽어! 죽어, 이 새끼들아!”
 그 모습을 본 한 용병이 미친 듯이 검을 휘두르며 전투 와중임에도 불구하고 죽은 용병을 뜯어 먹고 있는 오크를 향해 쇄도해 들어갔다.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카앙!
 “끄윽!”
 낡은 배틀 엑스가 용병의 진로를 막았고, 용병은 그 힘을 견디지 못하고 비척거리며 물러났다.
 “크르르륵! 취이익!”
 나직한 울음이 비척거리며 물러난 용병의 귓가로 전해졌다. 순간 용병은 전신이 싸늘하게 식어가는 느낌을 받고 부지불식간에 전면을 바라봤다.
 시퍼런 근육질의 장대한 체구의 오크가 살점과 피가 덕지덕지 붙어 있는 아래 송곳니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것은 비웃음이었다. 그리고 둘의 눈이 마주치는 그 순간 오크의 거대한 배틀 엑스가 용병을 향해 쇄도했다. 용병의 얼굴은 암울하게 일그러질 수밖에 없었다. 막을 힘이 없었다. 이미 지칠 대로 지친 몸에 방금 전의 일격으로 검을 제대로 쥘 수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그 상황을 은밀하게 지켜보고 있는 이가 있었으니 다름 아닌 아론이었다.
 ‘살려야 하지 않겠나?’
 전투 상황을 바라보고 있는 아론의 머릿속에서 들려오는 음성, 바로 백두산이었다.
 ‘왜 그래야 하지?’
 ‘넌 강자니까.’
 ‘강자라······. 내가 강자가 된 것인가?’
 ‘그렇지. 너도 이제 인지하고 있을 텐데? 이 세계에서 너를 어찌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것을.’
 ‘그래, 알지. 그런데 저 전투에 내가 나서야 하는 이유는 모르겠군. 강자라서? 강자라면 무조건 그래야 하나?’
 ‘흠, 그런가? 그럴 수도 있겠군. 그러면 묻지.’
 ‘무엇을?’
 백두산과 아론은 문답을 이어갔다.
 ‘어떻게 살고 싶은 거지?’
 ‘그야······.’
 ‘잘난 체하는 놈 눌러주고 싶지 않나? 쥐꼬리만 한 권력을 믿고 날뛰는 놈들에게 통쾌하게 한 방 먹이고 싶지 않나? 아니면 알량한 지식으로 평생을 모아온 돈을 가로채는 놈을 패주고 싶지 않나?’
 ‘그래, 그러고 싶군.’
 백두산은 아론의 생각 구석구석까지 알고 있었다. 이미 서로의 정신을 공유하고 있음에 아론이 백두산이고 백두산이 아론이 되어버렸다. 하나 백두산의 존재감은 점점 옅어지고 있었다. 최소 6개월이라는 시한부의 시간이 밤낮 구별 없이 존재함으로 인해 머물 수 있는 시간이 극명하게 단축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강자의 권리지.’
 ‘그런 놈을 혼내주는 것이?’
 ‘아니, 네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이.’
 ‘그래, 그렇군.’
 ‘하지만 또 하나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 있지.’
 ‘염두?’
 ‘권리에는 반드시 의무가 따른다는 것이지.’
 ‘글쎄, 꼭 그래야만 하나?’
 ‘뭐 싫으면 어쩔 수 없고 말이야. 그리고 분명한 것은 지금의 너는 네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거야. 네가 하고 싶은 것을 말이야.’
 ‘내가 하고 싶은 것······.’
 백두산의 마지막 말을 되뇌는 아론이었다. 그의 시선이 다시 이제는 거의 끝나가고 있는 싸움을 바라보았다.
 “그래. 내가 하고 싶은 대로, 가슴이 시키는 대로.”
 그리고 그가 움직였다.
 
 ***
 
 결국 용병은 눈을 질끈 감을 수밖에 없었다.
 ‘끝인가?’
 수많은 상념이 순식간에 용병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어떤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물론 아주 촌각의 순간이었다. 하나 그 촌각의 순간 자신은 죽을 수밖에 없음에도 그 끔찍한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뭐지?’
 그러면서 살짝 눈을 떴다. 그리고 용병은 볼 수 있었다. 피딱지가 덕지덕지 묻어 있는 오크의 배틀 엑스를 막고 있는 손을 말이다.
 “······?”
 순간적으로 멍해지는 용병. 오크의 신장은 대략 190 정도. 보통 사람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컸다. 그리고 바위를 연상시킬 만큼 단단한 초록색 동체를 자랑하는 오크가 내려치는 배틀 엑스는 막는다고 해서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꾸어엉!”
 잠깐의 상념을 깨는 소리가 있었다. 그제야 자신의 앞을 다시 제대로 바라보는 용병. 그의 눈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홉떠졌다. 거대한 동체의 오크가 마치 가랑잎처럼 검은 녹색의 피를 토해내며 훌훌 날아오르고 있었다.
 파앙!
 그리고 공기가 찢어지는 듯한 소리가 들려오더니 몇몇의 오크가 끈 떨어진 연처럼 연거푸 이리저리 부딪치며 녹색의 피를 게워내고 있다.
 “인.간. 취이익! 죽.어.랏!”
 그제야 살아남은 오크들이 정신을 차렸는지 용병들을 내버려 둔 채 새롭게 나타난 자를 향해 달려들었다. 하나 사내는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움직였다. 그런 사내를 향해 여러 방향에서 배틀 엑스가 날아들었다.
 그중 정면으로 날아오는 배틀 엑스 안쪽으로 파고들더니 가볍게 오크의 손목을 휘어잡아 팔을 돌려 팔꿈치 부분을 툭 쳤다.
 뿌득!
 “뀌이이익!”
 돼지 멱따는 듯한 소리가 들려오며 오크의 팔이 기이하게 꺾였다. 하나 사내의 공격은 거기에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사내는 비명을 지르는 오크를 허깨비처럼 스쳐 지나갔다.
 “······!”
 단말마의 비명이 터지며 목을 감싸 쥐는 오크. 감싸 쥔 손을 통해 녹색의 핏물이 흘러나왔다. 하나 그것이 시작이었다. 그의 신형은 눈으로 좇을 수 없을 정도로 빨랐고, 그의 모습이 잠깐 멈춘 그 순간 오크들은 여지없이 죽음을 맞이했다.
 “취이익! 이, 인.간. 강하다!”
 “도, 도망쳐라! 취이익!”
 세 마리쯤 남았을까? 오크들은 압도적인 사내의 무력에 겁을 집어먹기 시작했다. 그리고 종내에는 죽은 동료들을 내버리고 도망을 선택했다.
 하나 사내는 결코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가는 오크를 향해 바닥에 널브러진 배틀 엑스와 부러진 검 몇 개를 툭툭 차올린 후 손으로 툭 밀었다.
 쐐에엑!
 그저 툭 쳤건만 공기를 찢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뀌이익!”
 세 번의 외마디 비명이 터졌다. 그리고 정적이 감돌았다. 오크들이 죽은 것을 확인한 아론은 돌아서 입을 열었다.
 “괜찮나?”
 묵직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에 용병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아론은 고개를 끄덕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용병은 세 명이 살아남아 있었다. 그중 두 명은 기식이 엄엄해 시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끄륵!”
 “커, 컥!”
 아론은 치명상을 입은 두 용병의 목에 손을 대어보더니 살짝 고개를 저었다.
 “죽··· 었소?”
 “······!”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는 아론. 그에 용병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긴 한숨을 내쉬었다.
 “북부 방면 동부군 제1용병 만인대 5천인대 5백인대 9조장 맥심이요.”
 “6백인대 10조 부조장 아론.”
 “그······.”
 뭔가 말을 하려다 마는 맥심. 그것은 듣지 않아도 알 일이었다. 조장과 부조장. 한 끗 차이지만 군대라면 결코 허용될 수 없는 벽이 존재했다. 하지만 아론은 그런 벽을 간단하게 허물고 있었다.
 그러나 맥심 9조장은 결코 입을 열 수 없었다. 왜냐하면 일단은 아론이 자신의 생명을 살려준 것이고, 오크 열 마리를 순식간에 제거해 버리는 그 솜씨는 결코 부조장으로 있을 만한 실력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오크 열 마리를 단숨에 제거했다. 익스퍼트에 오른 자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 분명 무언가 곡절이 있음이 분명한 자다.’
 맥심의 생각은 바로 그것이었다. 상당히 유화해서 한 생각이지만 저런 대단한 실력에 부조장이라면 꼴통이거나 타협을 싫어하는 유형일 것이 분명했다.
 “어쨌든 고맙소.”
 “일단 여기를 벗어나지. 걸을 수 있겠나?”
 “끄응!”
 아론의 말에 맥심이 대답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으나 쉽지가 않았다. 언제 입었는지 모를 상처가 허벅지에 나 있었다. 지금까지의 상황이 상황인지라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뼈가 훤히 보일 정도로 깊은 상처였다.
 아론은 슬쩍 그런 맥심의 모습을 보더니 무언가를 꺼내 휙 하고 맥심에게 던졌다.
 “절반은 마시고 절반은 뿌려.”
 엉겁결에 그것을 받아 든 맥심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하급 포션도 아니고 상급 포션이었다. 기사나 귀족들이 사용한다는 상급 포션 말이다.
 “고, 고맙소.”
 그러면서 바로 병의 마개를 따고 절반 정도를 들이켰다. 쓰디쓴 하급 포션과는 달리 향긋하고 청량한 냄새가 흘러나왔다. 입을 떼었을 때는 아쉬움에 입맛까지 다실 정도였다. 그리고 곧바로 허벅지의 상처 부위에 솔솔 뿌렸다.
 치이이익! 부그르르르!
 “크으윽!”
 쩍 벌어진 상처에서 흰 거품이 일기 시작하면서 참을 수 없는 극통이 전해져 왔다. 하지만 그 극렬한 통증은 오래가지 않았다. 실로 순식간이라 할 수 있었다.
 그와 함께 창백하던 맥심의 혈색이 서서히 돌아오기 시작했다.
 상당한 출혈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포션 한 병에 빠르게 정상을 찾아가고 있는 모습이다.
 그렇게 약간의 시간이 흘렀다.
 “이제 그만 일어나지? 피 냄새를 맡은 몬스터들이 몰려올 수 있는데.”
 “아, 알겠소.”
 땅을 짚고 일어나던 맥심은 의외로 가뿐한, 아니, 오히려 오크들과 드잡이를 하기 전보다 훨씬 몸이 가벼워진 것 같은 느낌에 감탄했다.
 “역시 상급 포션이구려. 비쌀 텐데······.”
 “사람 목숨만 하려고. 움직이지.”
 아론은 그렇게 간단하게 대꾸하고는 걸음을 옮겼다. 그런 아론의 모습을 바라보는 맥심.
 ‘희한한 사람이군.’
 이 시대의 용병에게 있어 상급 포션은 하급 용병의 목숨값보다 비싸다.
 유저 수준, 그러니까 마나를 발현하지 못하는 전쟁 용병 중 이제 시작한 이의 고용비는 5브론즈이고 경력이 좀 되는 러너는 1실버였다.
 5인 가족 한 달 생활비가 8실버 50브론즈인 것을 감안하면 결코 적은 금액이 아니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겨우 외상을 치유하는 역할밖에 하지 못하는 하급 포션은 한 병에 보통 1실버 정도한다는 것이다.
 중급은 10실버이고, 어지간한 내상은 씻은 듯이 치료하는 상급의 경우는 무려 100실버, 그러니까 1골드나 한다는 말이다. 때문에 지금 저 아론이라는 용병이 자신에게 준 상급 포션은 무려 1골드나 하는 것이다.
 5인 가족이 아끼면 1년은 족히 먹고살 수 있는 그런 어마어마한 금액이다. 자신과 같은 러너급 용병은 언감생심 손이 떨려 살 수도 없는 그런 포션을 사람 목숨이 달렸다는 이유로 던져준 것이니 희한하다 여기지 않을 수 없었다.
 어쨌든 맥심은 말없이 아론의 뒤를 따랐다. 아론은 상당이 빨리 움직였다. 그런데 그렇게 움직이면서도 교묘하게 몬스터를 피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확실해. 익스퍼트야. 절대 유저가 아니야.’
 맥심은 확신했다.
 툭!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도중 맥심은 무언가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것을 느꼈다. 가로막은 것이 아닌, 빠르게 움직이던 아론이 멈춰 서면서 그의 등에 부딪친 것이지만 말이다.
 아론이 검지를 들어 입술에 대었다.
 그에 맥심은 무언가 심상찮음을 느끼고 몸을 웅크리며 아론이 주시하는 쪽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다만 용병질을 하며 경험한 것에 비추어 지금의 상황이 상당히 위화감을 주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희미하게 듣고 맡을 수 있었다. 숲 속에서 전해지는 바람 속에 숨겨진 비릿한 혈향과 무기가 부딪치는 소리를 말이다.
 그 소리는 극도로 긴장해야 들을 수 있을 정도로 희미했다. 그것도 그 혈향과 싸움 소리에 숲을 지배하던 풀벌레나 새소리가 나지 않고 적막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아론은 움직이는 도중에 그 모든 것을 잡아내고 있었다. 그러고는 은밀하게 움직여 나가기 시작했다.
 그의 뒤를 따라 움직이는 맥심에겐 아직까지도 그저 아련하게 소리가 들려올 뿐이었다. 어느 방향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아론은 정확하게 한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조심하며 따라가는 맥심은 이내 숨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만큼 아론의 움직임은 빨랐다.
 “후욱! 후욱!”
 마침내 거칠게 숨을 내쉴 즈음이 되어서야 아론의 움직임이 멎었다. 그에 맥심은 곧바로 걸음을 멈추고 숨을 고르며 전방을 주시했다. 일단의 무장한 이들과 몬스터들이 드잡이를 하고 있었다.
 그냥 척 보기에도 낙오된 용병들이었다. 하지만 수가 조금 많았다. 적어도 몇십 명은 되어 보였다. 하지만 그러함에도 안전하지 않았다. 그들이 드잡이를 하고 있는 몬스터는 오크만이 아니었다.
 오크들이 타고 다니는 다이어 울프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불행하게도 지금 드잡이를 하고 있는 낙오된 용병들은 오크 정찰대나 혹은 어떤 사정으로 인해 군락을 옮기는 오크 집단과 맞붙은 것 같았다.
 “수가 너무 많소.”
 맥심의 말에 아론이 그를 바라봤다. 그에 슬쩍 아론의 시선을 회피하는 맥심. 그의 얼굴에는 약간의 죄책감이 깃들어 있었다. 그리고 아론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같은 백인대 아닌가?”
 “그······.”
 말을 잇지 못하는 맥심.
 “아무리 등 돌리면 적이라는 용병이라고 해도 그건 아니지.”
 “크음. 그, 그래도 너무 많은데······.”
 여전히 선뜻 나서지 않는 맥심이다.
 “그럼 여기서 지켜나 봐.”
 아론은 맥심을 탓할 생각은 없었다. 그는 이미 자신의 조원들을 모두 잃었다. 의협심이 강했다면 기사를 하지 용병을 할 이유가 없었다. 어차피 그에게서 그런 의협심을 바라는 것도 아니었다.
 또한 오크는 가장 흔한 몬스터였다. 하지만 상위 몬스터들마저도 집단으로 군락을 이루고 있는 오크는 어찌할 수 없었다. 빠른 번식력과 두려움을 모르는 투기는 한 마리면 모르나 그 수가 더하면 더할수록 두려움을 주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오거나 트롤마저도 몇 마리 이상의 오크는 피해가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자신의 영역을 침범하거나 지극히 배가 고플 때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그런 오크 집단과 마주쳤으니 아무리 난전에 능한 용병들이라 해도 결코 쉽지 않은 상대가 될 것이 뻔했다.
 그리고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여기저기에 피를 흘리고 쓰러져 있는 용병들과 오크들의 시체가 보였다. 하지만 오크의 시체보다는 용병의 시체가 더 많았다. 마치 한 개 백인대 전체가 낙오된 것처럼 말이다.
 “꾸어어엉!”
 그중 거의 2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체구의 오크가 커다란 함성을 질렀다. 지금까지 전투에 참여하지 않고 그저 거대한 다이어 울프의 등에 탄 채 지켜만 보고 있던 오크이다. 그런데 전투를 치르는 양상이 답답했는지 마침내 커다란 함성을 내지르며 전장으로 뛰어들었다.
 대장 오크가 타고 있던 다이어 울프는 바닥에 착지하면서 한 용병의 목을 물어뜯었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죽어버린 용병. 대장 오크의 거대한 배틀 엑스가 휘둘러짐에 운 없게 그 주변에 있던 두 명의 용병이 한꺼번에 잘려 나갔다.
 “끄아악!”
 비명 소리가 난무했다.
 “취에엑!”
 막 한 마리의 오크가 목이 잘려 죽었다. 그런 오크를 발로 차 밀고 있는 한 용병이 있다.
 “대장! 도망쳐야 해!”
 “이런 쓰벌.”
 대장이라고 불린 자는 가래침을 탁 뱉어냈다.
 “죽을 때 죽더라도 일단 정리 좀 하고 가자.”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어! 빨리!”
 “이 새끼야, 죽은 놈들 뭐라도 들고 가야 할 거 아냐?”
 “씨벌. 죽은 놈은 죽은 놈이고 내가 죽게 생겼구만.”
 “이런 니미.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냐? 내 검에 죽고 싶냐?”
 “염병.”
 대장이라는 자와 말다툼을 하던 용병이 육두문자를 내뱉으며 근처 오크들을 향해 배틀 해머를 내려쳤다.
 콰직!
 그것을 보고 용병대장 역시 일반인은 두 손으로 들어야 할 대검을 마치 쌍검처럼 휘두르며 격렬하게 돌진해 나갔다. 그가 향하는 방향은 바로 대장 오크가 있는 쪽이었다.
 “야, 이런 씨발 돼지들아! 비켜! 비키란 말이다!”
 그는 자신이 가는 길 앞에 거치적거리는 것을 모두 베어 넘겼다. 그 실력이 일반 유저 단계의 용병들과는 비할 바가 못 되었다.
 그의 그런 모습은 기어코 대장 오크의 눈에 띄게 되었다. 대장 오크는 그런 용병대장을 보며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며 웃었다.
 “취이익! 죽인다.”
 “죽여 봐, 이 돼지 새끼야!”
 후우웅!
 들고 있던 배틀 엑스를 집어 던지는 오크 대장.
 용병대장은 살짝 몸을 숙여 배틀 엑스를 피해냈다. 하지만 오크 대장의 공격은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들고 있던 배틀 엑스가 하나가 되었지만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는 듯 날아오르고 있었다.
 쉬아아악!
 용병대장은 다급하게 대검을 들어 막았다.
 콰아앙!
 “큭! 이런 염병!”
 손이 짜르르한 것이 보통 힘이 아니었다. 잠시 당황한 용병대장은 양손에 하나씩 들고 있는 대검에 마나를 시전했다.
 “넌 죽었어, 이 돼지 새끼야!”
 “크르르!”
 그에 날카롭게 웃는 오크 대장. 오크 대장도 알고 있었다. 인간들의 기준으로 오러 포스라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인간들이 시전하는 오러 포스는 한계가 있었다. 고작해야 10분. 그 정도로는 자신을 어떻게 할 수 없었다.
 오크 대장은 어느새 자신이 날린 배틀 엑스를 집어 들었다. 양손에 나누어 쥔 배틀 엑스.
 콰앙! 콰앙!
 연속으로 내려치는 배틀 엑스. 용병대장은 오러 포스를 시전했음에도 불구하고 다급하게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이미 기세는 상대가 잡고 있었다. 기세도 기세지만 내려친 배틀 엑스를 통해 느껴지는 통증이 그야말로 상상 이상이었다.
 ‘돼지 새끼가 힘만 세가지고는······.’
 생각은 그렇게 했지만 상황은 여전히 좋지 못했다. 한 번 기선이 잡히고 밀리기 시작하자 도무지 돌파구가 보이지 않았다.
 죽은 용병들의 물품을 몇 개 챙긴 용병대장은 어금니를 꽉 깨물며 뒤도 돌아보지도 않고 외쳤다.
 “도망쳐! 도망치란 말이다!”
 주변을 살펴볼 것도 없었다. 그러기에는 자신이 처한 상황이 너무나 위태위태했다. 그래도 자신이 대장 오크를 붙잡고 있으면 다른 오크들의 행동에 조금이나마 영향을 끼칠 수 있기 때문에 외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리 쉽지 않았다. 이미 오크들은 계속 충원되고 있었다. 슬쩍 주변을 훑어본 용병대장의 얼굴이 침중하게 굳었다.
 ‘씨발. 그 새끼 말을 듣는 게 아니었어. 날 죽이려고 발악하는 놈인데··· 염병.’
 쉬아악!
 배틀 엑스가 떨어져 내렸다. 대검을 X 자로 만들어 막아냈다.
 까가가각!
 강철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압도적인 힘이다. 한 손으로 내려치는 오크 대장과 두 손으로 버티고 있는 용병대장.
 “크르르.”
 오크 대장의 입이 좌우로 쭈욱 찢어졌다. 아주 즐겁다는 듯이 웃고 있는 것이다. 내려치고 있는 어깨 근육이 부풀어 오르며 핏줄기가 툭툭 불거졌다.
 가가가각!
 배틀 엑스의 날카로운 날이 내려오는 속도가 가속되었다.
 “흐읍!”
 얼마 남지도 않은 마나를 한껏 시전했다. 하나 역부족이었다.
 ‘씨발! 여기서 죽는 건가?’
 죽음을 직감했다. 하지만 그는 아직 죽을 운명이 아닌 모양이었다.
 콰아앙!
 귀를 먹먹하게 할 정도의 거대한 폭음이 터지며 오크들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그에 초록색 근육을 꿈틀거리며 마지막 일격을 준비하던 오크 대장의 시선이 그곳으로 향했다.
 용병대장은 그 순간을 이용해 쌍검에 힘을 주어 밀어내며 옆으로 굴러 오크 대장의 공격권에서 벗어났다.
 그러면서 용병대장은 오크 대장을 쏘아보았다. 하지만 오크 대장의 관심은 이미 새롭게 나타난 자에게로 향해 있었다.
 본능적으로 눈앞의 용병대장보다 새로이 나타난 자가 더 위험하다는 것을 느낀 것이다.
 오크 대장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주 잠깐의 시간에 자신이 이끌고 온 오크 전사의 수가 티가 나도록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꾸어엉!”
 오크 대장은 포효했다. 참을 수 없는 분노가 들끓었다. 그에 오크 대장은 미친 듯이 새로 난입한 인간을 향해 뛰어들었다.
 “취이익! 죽.어.랏!”
 아론을 향해 쇄도하는 오크 대장. 아론은 흘깃 그런 오크 대장을 보며 몸을 움직였다.
 상대할 가치조차 없다는 듯이 오크 전사들을 주살하기 시작했다. 말 그대로 주살이었다.
 잡히는 대로 찌르고, 베고, 박살 냈다. 두 번도 없었다. 무조건 한 번이었다. 순식간에 그 많던 오크의 수가 인간들보다 줄어들었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취이익! 인.간!”
 콰직!
 “뀌이익!”
 몇 번의 움직임으로 오크 전사의 수를 열 마리 이하로 낮춰 버린 아론이 자신을 부르는 오크 대장을 바라봤다.
 “죽.엇!”
 어찌나 분노했는지 오크 특유의 콧소리마저 없었다.
 까딱!
 그때 아론이 손을 들어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그에 오크 대장은 콧김을 내뿜고 눈이 벌게질 수밖에 없었다. 한 줌도 안 되는 인간에게 도발당하고 있는 것이다.
 앞뒤 볼 것도 없었다. 오크 대장은 배틀 엑스를 풍차처럼 휘둘렀다.
 터덕!
 하지만 아론은 아주 가볍게 오크 대장의 배틀 엑스의 날을 잡아버렸다.
 “취이익!”
 아론은 천천히 배틀 엑스를 벌렸다.
 오크 대장은 안간힘을 쓰며 배틀 엑스에 힘을 담았다. 하지만 인간의 힘은 상상을 초월했다. 자신이 어찌할 수 없을 정도였다. 오크 대장은 무감정한 인간의 눈동자와 시선이 부딪쳤다.
 척추를 타고 공포가 흘렀다. 그에 인간이 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힘과 힘이 맞부딪쳤다.
 그것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용병대장이나 살아남은 용병들은 심장이 튀어나올 것처럼 놀랐다.
 ‘저게 가능한 거였어?’
 ‘말도 안 돼. 어떻게······.’
 ‘역시 그는 상급의 익스퍼트임이 분명해.’
 뒤늦게 전투에 참여한 맥심은 확신했다. 그러한 용병들의 반응과 다르게 막상 당하는 입장의 오크 대장은 아론의 서늘한 웃음을 보는 그 순간 죽음을 직감했다.
 
 
 
 
 Chapter 2 인연
 
 
 
 
 
 
 
 
 
 
 
 
 
 쫘아악!
 오크 대장의 양팔이 좌우로 좌악 펴졌다. 그와 동시에 아론의 발이 들리며 발바닥으로 오크의 가슴께를 밀듯이 차올렸다.
 “쿠어어엉!”
 비명이 터져 나왔다. 어느새 오크 대장의 동체는 녹색의 핏물을 게워내며 끈 떨어진 연처럼 훌훌 날려가고 있었다.
 우지끈, 와드득!
 날려가던 오크 대장의 동체가 나무에 부딪히자 나무들이 여지없이 박살 나고 부서져 내렸다. 하지만 아론의 공격은 그대로 끝나지 않았다. 날려가는 오크 대장과 나란히 움직이며 손과 발을 움직였다.
 퍼버버벅!
 “뀌이이익!”
 날려가면서도 연신 비명을 지르는 오크 대장. 그 와중에 아론의 신형이 휘돌아 치며 발뒤꿈치가 그대로 오크 대장의 두툼한 목에 직격했다.
 뿌드드득.
 “쿠워억!”
 오크 대장의 목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한참이나 멀리 떨어져 있는 용병들조차도 확연하게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목이 기괴하게 꺾인 오크 대장의 거대한 동체는 마치 종잇장처럼 날아 거대한 아름드리나무에 부딪치면서 피떡이 되어 그 형체조자 제대로 알아볼 수 없을 지경이 되어버렸다.
 “꿀꺽.”
 그것을 바라보는 용병들은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특히나 용병들을 이끌던 용병대장의 놀람은 더했다.
 ‘저건 순수한 근력이다.’
 그랬다. 지금 아론은 마나라고는 전혀 쓰지 않고 그저 순수한 근력만으로 오크 대장을 박살 내버렸다. 그 자신은 오러 포스를 사용하고도 압도적으로 밀렸건만 말이다.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강자.’
 지그시 어금니를 깨물었다. 솔직히 세상을 떠도는 수천만의 용병 중 익스퍼트에 오른 용병은 겨우 10% 정도이다. 그 수에 비해 지극히 적았다. 그리고 자신은 그 10%의 익스퍼트의 용병 중 말석이나마 마나를 깨달은 자로서 상당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용병 만인대에서 백인대장이라도 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자부심은 지금 이 순간 송두리째 무너지고 있었다. 솔직히 참담했다. 전력을 다해도 우위를 점하지 못하고 목숨이 경각에 달릴 정도로 밀렸는데 순수하게 육체 능력으로 오크 대장을 죽이다니 말이다.
 “취, 취이익. 도, 도망치자.”
 “무서운 인간이다. 취이익!”
 자신들은 상대조차 되지 않은 대장이 죽자 오크들은 주춤주춤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이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내달렸다. 그런 오크들을 보며 용병들은 쫓지 않았다. 솔직히 쫓을 힘조차 없었다.
 그저 멍하게 죽은 오크 대장과 도망치는 오크들을 바라볼 뿐이었다.
 “끄으응!”
 그에 용병대장은 앓는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나 아론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고맙수.”
 용병대장의 말에 아론은 말보다 그의 전신을 훑어보다 주변에 널브러진 오크들과 용병들의 시체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말없이 주변에 떨어진 무기를 집어 들고 땅을 파기 시작했다.
 퍽! 퍼억!
 한번 땅을 내려칠 때마다 큼지막한 구덩이가 생겨났다. 아론의 그런 행동을 지켜보던 맥심이 합세했고, 살아남은 용병 중 움직일 수 있는 이들은 모두 일어나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용병대장 역시 말없이 그 행위에 동참했다. 죽은 용병들을 묻을 구덩이는 금방 완성되었다. 용병들은 죽은 용병들의 무기나 기타 자질구레한 소지품을 모두 빼냈다. 죽은 자들은 죽은 자이고 산 사람은 살아야 했다.
 한 명 두 명 구덩이 속으로 집어 던져졌고, 마지막 용병의 시체까지 던져졌다. 아론은 주변의 마른 나뭇가지를 모아 시체 위에 놓고 부싯돌로 불을 붙였다. 매캐한 검은색 연기가 피어올랐다.
 시체는 한참 동안 타올랐다. 살아남은 용병 모두 말을 잃었다. 그저 멍하니 타오르는 시체를 바라볼 뿐이었다. 하지만 이것 역시 아주 잠깐의 평화요 휴식일 뿐이었다.
 “낙오병이유?”
 “그런 셈이지.”
 “5천인대 5백인대장 제라르요.”
 “6백인대 10조 부조장 아론.”
 “그······.”
 제라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아무리 용병 부대라고 하지만 계급은 계급이다. 그런데 겨우 부조장 주제에 백인대장에게 말을 툭툭 놓고 있다. 뭐 물론 전쟁 용병이라는 것이 자신의 직속상관이 아니면 콧방귀도 뀌지 않는다는 것은 안다.
 하지만 그것도 십인대장 급에서나 그렇지 백인대장 정도 되면 달라진다. 하지만 제라르는 별다른 말을 할 수 없었다. 그에 제라르의 시선이 맥심에게로 향했다. 조원이면 몰라도 조장 정도는 익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제라르의 시선을 느낀 맥심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도 잘 모르겠다는 표현이다. 그에 제라르는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분명 맥심 역시 그의 도움으로 여기까지 온 것 같군. 적어도 천인대장 이상의 실력인데 말이지.’
 돌아가는 상황을 되짚어보면 분명했다. 오크 대장쯤 되는 몬스터의 목뼈를 부러뜨려 죽였으니 못해도 오천인대장은 하고도 남을 실력이라 할 수 있었다.
 “그래도 백인대장인데······.”
 불만은 제라르의 옆에 있던 용병의 입에서 나왔다. 그에 아론이 그 용병을 슬쩍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너무나도 담담한 목소리. 어떤 감정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하기에 오히려 더 섬뜩하게 느껴지는 아론의 목소리였다.
 아론은 용병의 대답조차 듣지 않고 주변을 훑어보았다. 대략 스무 명 정도가 살아남았다.
 “어쩔 텐가?”
 아론이 물었다.
 “뭘?”
 지기 싫었는지 제라르가 뚱해져 입을 열었다. 그런 제라르를 보며 아론은 속으로 헛웃음을 지었다.
 “따로 갈까?”
 “그······.”
 제라르 역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피곤에 절어 있는 용병들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며칠 동안 제대로 된 식사나 휴식조차 취하지 못했다. 그리고 오늘 하루 종일 악착같은 오크들과 드잡이를 했다.
 사실 자신도 지쳤다. 1백에 달하던 백인대도 이미 절단난 지 오래였고 말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자신과 저들은 아론이라는 자의 실력을 보았다. 입을 떡 벌리고 침을 뚝뚝 흘리면서 말이다.
 자신들을 이끌어 이 지옥 같은 회색의 숲을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자는 자신이 아니라 저 아론이라는 자라는 것을 내심 인정하고 있었다.
 “같이··· 갑시다.”
 “덮고 출발하지.”
 제라르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아론은 다 타고 이제 시꺼먼 재만 남은 시체에 흙을 들이부었다.
 살아남은 용병들 역시 말없이 그의 행동에 동참했다. 그 작업 역시 순식간에 끝이 났다.
 “출발한다.”
 아론은 쉴 틈을 주지 않았다. 하지만 누구도 아론의 말에 토를 달지 않았다. 피 냄새가 진득하게 남아 있는 곳에 오래 남아 있어봐야 좋을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왜 몬스터들이 꼬이지 않지?’
 제라르는 순간 짧은 의문이 들었다. 오크들과 용병들의 피 냄새가 사방 천지에 진동했다. 오크보다 하급의 몬스터든 상급의 몬스터든 피 냄새를 못 맡을 리 없지 않은가? 인간보다 수백, 수천 배에 달하는 후각을 가지고 있는 몬스터들인데 말이다.
 지금도 그랬다. 이동하는 내내 어떤 몬스터도 볼 수 없었다. 험난하기 그지없는 숲길이다. 그런데 마치 평지를 가는 것 같은 이 느낌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제라르는 슬쩍 앞에 가고 있는 용병들의 얼굴을 살폈다.
 그들은 아직 지금의 상황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앞사람의 뒤꿈치만 쳐다보면서 걸음을 힘겹게 옮기고 있을 뿐이다. 사실 제라르 자신도 익스퍼트의 실력자가 아니었다면 저들과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하급이기는 하지만 익스퍼트이기에 익스퍼트에 오르지 못한 용병들보다 수배는 빠른 회복력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자신은 조금 더 여유가 있었다. 문득 가장 선두에 서서 용병들을 이끌고 있는 아론을 바라봤다.
 ‘도무지 알 수 없군. 저런 사람이 있다는 말은 들어보지도 못했는데 말이야.’
 행동 하나하나가 물 흐르듯 자연스럽다. 단박에 스무 명에 이르는 용병들을 휘어잡았다. 처음엔 자신을 두둔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얼마 되지 않아 그런 이들까지 모두 그를 지지했다. 어느새 자신은 백인대장이 아닌 그저 용병의 일원이 되어 있었다.
 “휴식!”
 “끄으응!”
 “후우∼”
 그에 용병들은 저마다 앓는 소리를 내며 자리에 퍼질러 앉았다. 아론은 잠시 그들의 상태를 살펴본 후 제라르에게 다가왔다.
 “무슨 작전이었지?”
 “무슨······.”
 “아무런 작전 계획도 없이 백인대를 회색의 숲으로 들이밀지는 않았을 테니까.”
 “그건······.”
 “말할 수 없나?”
 아론의 말에 제라르는 슬쩍 옆을 둘러보았다. 주변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 그가 이내 목울대를 움직이며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회색의 숲을 중심으로 좌우로 보급 부대가 있다는 정보에 의해 좌측 보급 부대를 기습하려는 작전이었수.”
 “그런데 보급 부대는 없고 오히려 몬스터에게 기습을 당한 것이로군.”
 “그렇소.”
 “역정보에 당한 것인가?”
 “그럴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소만.”
 약간 썩은 표정으로 아론의 말에 답하는 제라르였다. 그런 제라르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아론. 그에 제라르는 당황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왜 그러는 거요?”
 “팽(烹)당한 거로군.”
 “팽?”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되묻는 제라르.
 “버려진 것이란 말이지.”
 “그······.”
 아론의 말에 제라르의 얼굴이 순식간에 여러 번 변했다. 전혀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어떻게 예상되는 지점에 도착했는데 보급 부대는커녕 오크 군락지만 있었다. 순간 제라르는 누군가의 얼굴이 떠올랐다.
 자신과 항상 사사건건 부딪치는 3백인대장 크루소와 5천인대장 대런 마이어였다.
 ‘씨부랄 새끼들. 아무리 마음에 안 든다고 백 명을 사지로 몰아넣다니.’
 일그러지는 제라르의 얼굴에 아론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할 건가?”
 “······.”
 여전히 말이 없는 제라르였다. 이대로 돌아간다면 아마도 자신은 책임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들이 작정하고 자신을 몰아붙인다면 결국 자신은 죄인이 될 수밖에 없고, 즉결 처분을 당할지도 모른다.
 1백 명에 가까운 용병들을 잃고 겨우 스무 명 남짓만 살아 돌아왔으니 말이다. 잘못된 정보나 작전쯤이야 그 둘이라면 충분히 조작할 수 있었다. 그렇게 되면 자신은 빼도 박도 못하고 꼼짝 없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지.”
 “정말··· 방법이 있수?”
 “있지.”
 “그런데 말이우······.”
 “왜? 의심스럽나?”
 끄덕.
 제라르는 자신의 감정을 속이지 않았다. 솔직히 의심스럽지 않은가?
 같은 만인대라고는 하지만 솔직히 안면도 없는 자신을 위해 도움을 줬다는 것이 말이다.
 사실 아론은 제라르를 도와주려고 한 것이 아니었다. 그가 맥심을 살려주고 제라르와 그 일행을 구해준 그 근본에는 바로 백두산이 있었다.
 ‘그를 끌어들일 수 있으면 끌어들여.’
 ‘꼭 그럴 이유가 있나?’
 ‘혼자보다는 둘이 나아. 그리고 어려움을 함께한 사람이 오래가는 법이기도 하고.’
 ‘물론 그렇기는 하지만 그를 끌어들이지 않아도 별 상관이 없을 것 같은데 말이지.’
 ‘그렇기는 하지만 쉽게 갈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굳이 어렵게 갈 필요는 없지. 그리고 네가 이 세상에서 그 누구도 감히 어쩔 수 없는 무력을 가지게 되었다고는 하지만 다굴에는 장사 없는 법이고, 네 상대가 과연 한 명이 될지 네 명이 될지 모를 상황이라면 그를 끌어들이는 것이 옳다.’
 ‘그건··· 그렇군.’
 ‘그리고 결정적으로 저 사람은 너에게 없는 것이 있지.’
 ‘그게······.’
 ‘바로 사람을 끌어들이는 힘. 붙임성이 좋고, 부하들을 휘어잡을 줄 알지. 물론 너의 카리스마가 제라르보다 처진다는 것은 아니야. 하지만 그들을 융화시키는 것은 제라르보다 조금 모자라지.’
 ‘그건··· 인정하지 않을 수 없군.’
 백두산의 말이 백번 옳았다. 자신은 제라르처럼 살갑지 못했다. 어쩌면 그래서 고립되고 미움을 받았는지도 모른다. 누구 말대로 곧 죽어도 쓸데없는 자존심이었다.
 또한 자신은 태생적으로 말이 많은 타입이 아니었다. 말하기보다는 들어주는 타입이라 할 수 있었으니 용병처럼 괄괄한 세계나 누군가가 튀는 것을 싫어하는 귀족이나 기사들이라면 자존심이 강한 그를 좋아하기보다는 오해하기 딱 좋은 성격이었다.
 실제로도 그랬다. 23년이라는 오랜 용병 생활 속에서 자신과 살갑게 대화한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사실 거의 없었다. 그는 스스로의 자격지심도 있었고, 결국 세상은 혼자 살아가는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제는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 전승받은 힘을 잘 사용하겠다고 했으니 잘 사용하라고.’
 ‘그래, 너는 언제나 옳군.’
 ‘내가 옳은 것이 아니라 네가 문을 닫고, 생각을 닫고 산 것이다. 세상에 독불장군은 없다. 내가 저번에 이야기하지 않았는가? 만부부당(萬夫不當, 만 명의 남자가 덤벼도 당하지 못함)의 여포도 결국 세력이 없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고 말이야.’
 ‘그래, 들었지. 알았다.’
 아론은 백두산과 끊임없이 의식을 교류하면서 실로 많은 것을 배우고 있었다. 실제로는 전승이겠으나 끊임없는 대화 속에서 지식을 전수받으니 백두산이 스승이고 자신은 제자였다. 그리고 점점 아론은 백두산의 가르침 속에 자신이 스며드는 것을 느꼈다.
 결국 아론은 백두산의 의견에 따르기로 했다. 그래서 지금의 상황이 만들어진 것이기도 하다. 아론은 백두산의 몇 수 앞을 내다보는 의견에 동의한 것이다. 백두산이 아무리 옳다고 해도 아론이 행하지 않으면 그만인 일이다.
 “알겠지만 일단 나는 일개 부조장에 있을 정도의 실력은 절대 아니지.”
 “그야······.”
 맞는 말이었다. 다른 이들이 그런 말을 했다면 미친놈이라고 했겠지만 이미 실력을 보았다. 그때 아론이 제라르의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움찔.
 살짝 몸을 떠는 제라르.
 “그냥 때로는 마음 가는 대로 하고 싶을 때가 있어. 변덕이라고 해도 상관없고.”
 “······.”
 아론의 말에 말없이 그를 빤히 쳐다보던 제라르가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입을 열었다.
 “솔직해집시다. 원하는게 뭐유?”
 이번에는 아론이 제라르를 바라봤다. 그의 눈빛에 살짝 움찔하더니 어깨를 펴고 턱을 들어 보이는 제라르였다. 쉽지 않을 것이라는 무언의 도전이다. 그런 제라르를 보며 아론은 슬쩍 고개를 끄덕였다.
 “공을 세우게 해주지. 어차피 어느 정도는 짐작했겠지만 나도 복귀하면 군령에서 그리 자유롭지 못하거든.”
 “서로 상부상조하자는 말이오?”
 “그렇지. 나는 겨우 부조장이지만 너는 백인대장이니까 나보다 끗발이 있겠지.”
 “뭐··· 그렇지만······.”
 사실 아론의 말이 맞았다. 어떤 방법일지는 모르지만 저렇게 확신하는 데는 연유가 있을 것이다. 게다가 자신에게 불리한 일도 아니다.
 “그런데 말이우.”
 “묻고 싶은 게 있나?”
 “고작해야 스물 중반으로밖에 안 보이는데 말이지.”
 나이를 묻는 것이다. 용병들은 그렇다. 안 되면 나이 앞세우고, 실력 앞세우고, 세력을 앞세운다. 뭐 용병만 그런 것도 아니니 문제될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그것이 불만이라는 것은 분명했다.
 “대충 대륙력 2975년생 쯤이다.”
 “허······.”
 아론의 말에 할 말이 없어진 제라르. 대부분의 용병은 자신이 난 날을 모른다. 알면 용병질 안 한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이다. 그러니 용병들 사이에서 나이라는 것은 별 의미가 없었다. 그럼에도 아론은 스스럼없이 대충 출생년도를 입에 담았다.
 “형님!”
 그리고 제라르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
 아론은 당황하지 않았다.
 “그래, 오늘은 여기서 머물 테니 준비해라.”
 “알겠수.”
 제라르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영락없이 죽음을 면치 못할 상태에서 그 죽음을 면할 방법을 알려주고 공을 세울 수 있게 해주겠다는데 망설일 이유가 없잖은가?
 그리고 그런 사람에게 잘 보여서 나쁠 것은 없었다.
 ‘사람 살아가는 게 다 그렇지, 뭐. 3백인대장처럼 실력은 쥐뿔도 없으면서 누군가를 시기하고 대원들의 공을 가로채는 것도, 5천인대장처럼 상납금을 바라는 것도 아닌데 뭐 어떠냐. 그리고 솔직히 저런 대단한 실력자 한 명쯤 알아두는 게 신상에 이롭지.’
 딴에는 그런 계산이 깔려 있는 ‘형님’이었다. 물론 아론이 그것을 모를 리 없었다. 어차피 이 회색의 숲을 벗어나는데 혼자보다는 여럿이 더 낫기 때문이다. 원래 과거의 자신이었다면 이런 제안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맥심이라는 용병을 살려주지도 않았을 것이고, 다수의 오크들과 드잡이를 하는 용병들의 싸움에 끼어들지도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이 해결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단순히 정의감으로 나서기에는 자신의 목숨이 오히려 경각에 달릴 수 있었다.
 익스퍼트에 오르지 못한 용병들의 삶이란 가늘고 길게, 그리고 조금은 비겁하게 사는 것이 정석이다. 약한 자에게는 있는 놈들처럼 으스대고 강한 자에게는 철저하게 허리를 숙이며 간이라도 빼줄 듯이 해야 한다.
 그래야 오래 살아남을 수 있었다. 물론 아론 자신이 그렇게 살아왔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가늘고 길게, 그리고 조금은 비겁하게 살아온 것은 사실이다. 힘이 없으니까. 그렇기에 열두 살에 용병을 시작해서 지금까지 살아온 것 아니겠는가?
 하지만 지금은 조금 변했다.
 ‘모든 것이 그때부터였지.’
 아론이 생각하는 그때. 바로 자신이 죽음을 맞이하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자신을 죽인 자, 아니, 자신의 의외의 일격에 죽음을 맞이한 자. 그자는 단순히 자신과 닮은 사람이 아닌 또 다른 자신이었다. 말도 안 되는 사실이지만 죽음에서 깨어난 후 알게 되었다.
 자신이 죽인 자가 또 다른 차원의 자신이라는 것을 말이다. 이 세상에는 수없이 많은 차원이 존재했고, 그 차원 속에는 다양한 방법으로 살아가는 자신이 존재했으며, 그런 자신의 존재를 흡수하면 전 차원을 지배할 막강한 힘을 가지고 종내에는 신의 반열에 오를 수 있다는 믿을 수 없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솔직히 아직도 심정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전혀 이해가 되지는 않지만.’
 아직도 이해되지는 않았다. 실감할 수 없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자신의 손에 의해 순간의 방심으로 죽음을 맞이한 그자가 남겨준 지식과 힘에 의해 자신이 다시 살아났다는 것은 말이다.
 ‘그리고··· 살아난 이후 나는 달라졌지.’
 완벽하게 달라졌다. 이 세상에 없는 지식이 머리를 가득 채웠다.
 ‘81차원 지구의 나, 901차원 타이탄의 나, 1203차원 워딘의 나. 그리고 그들에게, 혹은 나에게 흡수되어 버려 흔적조차 남기지 못하고 사라진 수없이 많은 나.’
 자신의 몸속으로 흡수된 붉은색 구슬과 흰색의 구슬에는 수없이 많은 자신의 존재가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능력은 자신을 살려내는 데 사용되었고, 최종적으로 자신에게 흡수된 능력은 몇 개 되지 않았다.
 ‘그런 대단한 인물이 방심을 하다니. 하긴 뭐 그럴 수도 있겠지. 태양이 밝아오기 바로 직전이 가장 위험하듯 그 또한 모든 것을 이루기 바로 직전, 가장 위험한 순간에 방심했으니까. 어찌 보면 천운이라 할 수 있지.’
 천운도 그런 천운이 없었다. 어쩌면 평생 쓸 운을 그날 한꺼번에 다 쓴 것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자신에게는 여전히 운이 따라주고 있었다. 회색의 숲에서 용병들을 만난 것 자체가 운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우선은 천천히 적응해 나가는 것이 좋겠지.’
 천천히, 아주 천천히 바꿔 나가면 된다. 급히 먹은 음식이 체하는 법이다. 그리고 과거에도 많이 봐왔다. 급격한 성장이 어떤 견제와 압박을 받는지 말이다. 급하게 서두를 이유가 없었다.
 아론은 자신과 협상을 끝낸 제라르가 용병들을 다독이면서 하룻밤 묵을 공간을 만들고 있을 때 발걸음을 돌려 숲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용병들과 거리가 어느 정도 벌어졌을 무렵 아론의 신형이 잔상을 남기면서 쭉 늘어났다.
 그러다 종내에는 주변과 완벽하게 동화되어 그 모습을 찾기 어려울 정도가 되었다. 그가 모습을 감춘 바로 그때 한 마리의 거대한 뿔을 가진 엘큰이 모습을 드러냈다. 엘큰은 커다란 눈망울로 주변을 조심스럽게 훑어보더니 위험 요소가 없다는 것을 확인했는지 고개를 숙여 풀을 뜯었다.
 슉!
 그 순간 어두운 공간에서 아무런 기척도 없이 엘큰의 목 위로 떨어져 내리는 그림자가 있었다.
 슈칵!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엘큰은 힘없이 무릎을 꿇고 무너져 내렸다. 어둠 속에서 떨어져 내린 존재는 다름 아닌 모습을 감춘 아론이었다. 그는 엘큰을 말없이 바라봤고, 그의 옆으로 공간의 일그러짐이 생성되었다.
 아론이 손을 움직이자 그의 손을 따라 죽은 엘큰이 따라 움직이며 일그러진 공간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고는 손을 한 번 슬쩍 휘저으니 주변을 감돌고 있던 혈향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편하긴 하네.”
 의미 모를 말을 한 후 그는 다시 어둠 속으로 빠르게 동화되었다.
 
 ***
 
 “모, 몬스터닷!”
 “어디?! 어디?!”
 “비사앙! 비상!”
 스무 명 남짓의 용병들이 편히 쉬고 있다 경계를 서던 용병의 외침에 부리나케 무기를 들고 나섰다. 그들이 도착했을 때 어둠 속에서 거대한 뿔이 보였다.
 “저게··· 무슨 몬스터지?”
 제라르가 물었다. 거대한 뿔이다. 마치 왕관과도 같은 거대한 뿔을 가진 몬스터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런 몬스터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 글쎄요.”
 그의 곁에 착 달라붙어 있던 맥심이 입을 열었다. 이곳은 몬스터들이 득시글거리는 회색의 숲이다. 자신들이 알지 못하는 새로운 몬스터가 나오지 말란 법은 없었다. 제라르가 손짓으로 좌우로 벌리라는 명령을 내리자 용병들이 충실하게 그 명령을 따랐다.
 제라르는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몬스터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말이다. 지금 이 순간 자신을 돕는 것인지 바람마저도 마주 불어오고 있었다. 가까이 가면 갈수록 몬스터의 체구가 생각보다 작다는 것이 느껴졌다.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 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인가?”
 “···형님이우?”
 “그럼?”
 “후와아!”
 그에 한숨을 푹 내쉬는 제라르였다. 한순간에 긴장감이 풀리면서 전신의 힘이 쭈욱 빠져나가는 듯했다.
 “이 야밤에 어딜 갔다 오는 거유?”
 “굶을래?”
 “그야 뭐······.”
 “받아라.”
 쿠웅!
 그러면서 아론은 어깨에 메고 있던 엘큰을 툭 내려놓았다. 족히 5백 킬로그램은 될 듯했다. 그에 제라르가 눈을 홉떴다.
 “어디서 잡은 거유? 피 냄새는? 몬스터는?”
 숨도 쉬지 않고 물어보는 제라르였다. 그의 물음에 아론은 그저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그의 곁을 지나칠 뿐이었다. 그에 인상을 찡그리며 제라르가 투덜거렸다.
 “거참, 그 양반 성격 하고는. 말 좀 해주면 어디 덧나는가? 에효!”
 그러면서 그의 시선은 이미 전혀 무게감이 없다는 듯이 툭 던져 놓은 엘큰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침이 고였다.
 “고놈 참 실허네. 얘들아!”
 매복한 채 공격을 준비하고 있던 용병들을 불렀다. 그에 용병들이 매복을 풀고 앞으로 나섰다. 그들도 보고 들어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제라르가 나서라는 말을 안 하니 계속 매복하고 있었을 뿐이다.
 “포식 한번 해보자.”
 제라르의 말에 용병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도대체 며칠 만에 먹는 고기인지 모른다. 스무 명이라고는 하지만 아론이 잡아온 엘큰은 스무 명이 충분히 먹고도 남을 양이다.
 용병들은 소란스럽지 않게 엘큰을 요리하기 시작했다. 될 수 있으면 냄새가 퍼져 나가지 않도록 주의에 주의를 기울였고, 연기가 나지 않는 싸리나무를 이용했다.
 그나마 이곳이 개활지가 아니라 숲 속이고 교묘하게 가려져 있는 동굴이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불조차 피우지 못해 생고기를 먹을 뻔했다.
 게걸스럽게 엘큰을 먹고 있는 용병들을 바라보며 제라르가 아론의 곁으로 다가왔다.
 “형님은 다 드셨소?”
 “대충.”
 여전히 말을 아끼는 아론이다. 이제는 그런 아론의 성격을 이미 다 파악했다는 듯이 피식 웃고는 자신의 용건을 꺼내는 제라르였다.
 “아까 한 말 있잖소.”
 “······.”
 말해보라는 듯이 나뭇가지 하나를 들어 불을 이리저리 쑤시는 아론이다.
 “거··· 공을 세우게 해주겠다는 말 말이오.”
 “그랬지.”
 “어떤 공이오?”
 “알고 싶나?”
 “알고 싶소.”
 “별로 어렵지는 않아.”
 진짜 별로 어렵지 않다는 듯이 말을 하는 아론의 모습에 제라르는 정말 그런 공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말없이 아론의 입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회색의 숲 중앙에 바위산이 하나 있다.”
 아론의 말에 제라르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느냐는 듯이 입을 열었다.
 “거 무슨··· 시베리아 제국은 회색 숲 부근에서 남하를 멈춘 거 아니우?”
 “너희들 시베리아 제국의 비밀 보급 기지를 확인하기 위해 작전을 펼친 것 아니었나?”
 “그렇긴 하우만······.”
 “어디라고 했지?”
 “그건······.”
 말을 흐리는 제라르. 생각해 보니 작전 지역의 정확한 위치를 전달 받지 못했다. 단지 회색의 숲 어딘가에 있을지 모른다는 첩보를 확인하기 위해 자신들을 파견했다. 제라르는 그저 회색의 숲 외곽 지역만 돌면 괜찮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러다 몬스터들과 조우해서 도망치다 어찌어찌해서 외곽에서 벗어나 이곳까지 오게 되었고, 위험지역까지 들어서게 된 것이었다. 기실 자신들이 이렇게 깊숙하게 들어온 줄도 몰랐다. 도망치느라 바빴으니까 말이다.
 “봤수?”
 “거길 지나쳐 왔으니까.”
 “······.”
 지나쳐 왔다는 아론의 말에 의심의 눈초리가 된 제라르다. 하지만 아론은 그런 것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다시 말을 이었다.
 “아직 목책이 완성되지 않았어. 그리고 그 주변에는 바질리스크 둥지가 몇 개 있거든.”
 “바질리스크는··· 사막에 사는 몬스터 아니우?”
 “포레스트 바질리스크야.”
 “그건 또 어떻게 아는 거유?”
 “몇 마리 잡았으니까.”
 “그걸··· 잡았다고? 바질리스크가 무슨 동네 똥개도 아니고······.”
 “석화 브레스만 잘 피하면 비만 똥개쯤 되지.”
 “아니 그게······.”
 “여하튼 그놈들을 아직 제대로 설치 안 된 목책을 향해 몰이하면 돼.”
 “···그게 쉬운 일이유?”
 “그럼 어렵냐? 소리만 지르면 되는데?”
 “······.”
 아론의 말에 할 말을 잃은 듯 그저 아론을 멍하게 바라보는 제라르였다. 소리 지른다고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달려나갈 바질리스크가 대체 어디 있단 말인가?
 사막 바질리스크나 포레스트 바질리스크나 어차피 똑같은 바질리스크 아닌가?
 바질리스크는 중형 몬스터다. 석화 브레스라면 오거조차도 옴짝달싹 못 하게 할 수 있을 정도로 막강했고, 여섯 개의 발로 달리기 시작하면 익스퍼트 최상급의 기사라도 홀로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막강한 중형 몬스터이다.
 그런 몬스터를 똥개 취급하고 있는 아론의 말에 어이없을 수밖에 없었다.
 “그게 말이 되는 소리유?”
 “말이 아니면?”
 “···진심인 거유?”
 “농담으로 보이나?”
 “그건······.”
 “날 믿는다면 따라와라.”
 “······.”
 아론의 말에 복잡한 심사를 내비치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 제라르. 용병을 믿는다? 그것도 만난 지 하루도 안 된 용병을? 차라리 심장을 꺼내 가져다 바치라는 말과 같았다. 자신도 용병이지만 용병은 믿을 게 못 된다.
 물론 오랜 시간 호흡을 맞추고 함께했다면 가능할 법도 하다. 용병들에게 있어서 형님, 동생은 그저 친밀함을 나타내거나 과시하기 위해서, 혹은 바라는 것이 있을 때나 사용하는 범용적인 단어일 뿐이다.
 그런데 자신을 믿으라고?
 ‘믿으라고? 뭘 보고? 그래, 확실히 실력은 대단하다. 어쩌면 최상급일지도 모르고 말이지. 하지만 그것 외에는?’
 그러다 문득 그가 자리를 비웠을 때 맥심과 한 이야기가 떠올랐다.
 ‘아무런 조건 없이 상급 포션을 줬다고 했지?’
 하지만 그것도 믿을 바가 못 되었다. 자신이 아는 맥심은 허풍이 심하고 약간의 비겁함이 함께 공존하는 사람이니까 말이다. 자신에게 유리하게 해석하는 면이 없지 않아 있었다. 그래서 곧이곧대로 그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무리의 장이 부하를 믿지 않으면 대체 어떻게 지휘를 하느냐고 묻는다면 믿을 사람을 믿는 것이지 모두를 믿는 것은 아니라고 답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방법이 없지.’
 이곳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방법이 없었다. 분명 아론은 자신을 비롯한 스무 명을 이끌고 이 지긋지긋한 회색의 숲을 벗어날 실력이 있었다. 그것은 오크들과 드잡이를 하고 교묘하게 가려진 이 동굴을 발견할 때까지의 여정에서 확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단 한 번도 몬스터와 조우한 적이 없다.’
 몬스터 천지인 곳에서 몬스터와 단 한 번도 조우한 적 없다는 것은 자신들을 안내한 아론의 실력이 그만큼 출중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들은 적 있지. 상급 정도 되면 마나를 퍼뜨려 주변을 마치 손바닥처럼 들여다볼 수 있다고 말이야. 그리고 기세라는 것이 있어 강자임을 드러내 몬스터들이 접근하는 것을 막는 방법도 말이야. 그럼······.’
 결심이 섰다.
 “알겠수. 우리가 할 일이 뭐유?”
 “유인은 내가 한다.”
 “하면······.”
 “중앙의 보급기지에 있는 병사들을 끌어내야지.”
 “스무 명으로 말이오?”
 “이곳은 숲이지.”
 “그렇긴 한데······.”
 “싸우라고 안 했다. 유인하라고 했지.”
 “그야 그렇지만······.”
 “그 후 내가 지정한 곳에서 대기하면 된다.”
 “그것으로 끝이오?”
 “적어도 적의 군사 기밀이 담긴 문서 정도는 획득해야 하지 않겠나?”
 “그러면 좋겠지만······.”
 “그래야 공이라고 할 수 있지. 밝힐 수도 없는 적 병력을 얼마쯤 죽였다고 공이라고 할 수는 없지. 그 정도는 얼마든지 부정할 수 있으니까 말이지.”
 “그도 그렇수만······.”
 “싫으면 말고.”
 그렇게 말하고 훌떡 누워버리는 아론이었다. 그런 아론을 착잡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제라르.
 믿을 수도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살기 위해서는 그를 따라야 했고, 용병이기에, 그리고 그 가진 바 실력에 비해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무력 또한 의심스럽기 그지없었다.
 ‘에라이! 한 번 죽지 두 번 죽냐? 그냥 가자.’
 결국 제풀에 지쳐 버린 제라르.
 “하겠수.”
 “그래, 그럼 쉬어둬.”
 그러면서 눈을 감아버리는 아론과 그런 아론을 멀뚱히 바라보는 제라르.
 그는 고개를 살짝 저은 후 자리를 벗어났다.
 자리를 벗어난 제라르에게 맥심이 다가왔다.
 “무슨 말을 그리 오래 한 거요?”
 “작전 계획이지.”
 “이곳을 벗어나는 것이 아니고 말이오?”
 “이곳을 벗어나면? 그 후에는?”
 “그야······.”
 뻔하다. 질책을 받을 것이다. 겨우 조장 자리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조장 자리도 잃을 것이고, 백인대 자체가 사라질지도 몰랐다.
 ‘어쩌면 일당이 깎일 수도 있을 것이고.’
 이미 일당 중 어느 정도는 조장이나 오십 조장, 혹은 백인대장에게 상납하는 것이 일반화된 상황이다. 그나마 제라르 백인대장은 그런 상납은 받지 않았다. 그런 면에서 다른 백인대보다 훨씬 돈 모으기가 쉬운 5백인대였다.
 “그리고 말이야, 그가 아니고서 이 회색의 숲을 벗어날 자신은 있고?”
 “그야 뭐······.”
 말을 흐리는 맥심.
 솔직히 자신 없었다. 1백 명에 달하는 백인대로도 벗어나지 못한 회색의 숲이었다. 그나마 회색의 숲 중심부가 아니어서 회색 오크를 만나지 않아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일반적인 오크보다 배는 크고 호전적인 회색 오크는 세 마리면 오거와도 맞상대한다 할 정도로 과격한 몬스터였다. 아마도 이 회색의 숲 전체적으로 봤을 때 회색 오크와 바질리스크가 가장 강력한 무리가 아닐까 싶었다.
 “딴 생각 말고 작전에 집중해.”
 “아, 예. 뭐······.”
 “머리 굴리지 말란 말이다. 머리 굴리는 것도 살아야 가능한 일이니까.”
 “뭐 그렇기는 하지만······.”
 “그리고 하나 더 경고하는데 이곳을 벗어나게 되면 상황을 조작할 생각은 마라.”
 “아니, 내가 언제······.”
 “넌 내 휘하에 있어. 조원이라면 몰라도 조장 정도의 성향은 다 꿰고 있다 이 말이지. 네놈이 조원들에게 정기적으로 상납받은 것도 그 액수가 별로 크지 않아서 눈감아주긴 했다만 그 알량한 위세를 믿고 계속 혓바닥 굴리면 죽는 수가 있다.”
 제라르는 살아남은 스무 명의 용병 중 가장 혀가 간사한 맥심에게 단단히 일러뒀다. 맥심 역시 백인대장이 그런 말을 하자 자라목이 되어 움츠릴 수밖에 없었다. 이미 자신이 한 짓거리를 다 아는 판국에 조용히 그의 말을 듣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나 원 참. 다른 백인대장은 더 받지 못해서 안달이구만. 그리고 솔직히 나만 그러냐고? 다들 하는 건데 말이지.’
 불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제라르가 있는 5백인대에서는 그것이 허용되지 않으니 자신은 죄인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니 입을 꾹 닫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용병들의 눈초리를 보니 자신의 그런 행태를 다 알고 있다는 듯한 눈초리이니 몸조심해야 했다.
 기실 조장은 그저 조금 더 경력이 있는 사람으로 뽑아 앉히는 것이 다반사다. 익스퍼트 하급 정도는 백인대장부터니까 말이다. 그러니 일반 조원들이 작정하고 덤빈다면 맥심도 결국 당할 수밖에 없었다.
 본진이었다면 이런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지만 이곳은 본진이 아니라 회색의 숲이다. 자기 자신 하나 죽이고 묻어도 뭐라 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저 그런가 보다 하는 것이지. 그리고 지금 백 명 중 스무 명만 남았으니 거기에 한 명 더 추가된다고 해도 어색할 것은 하나도 없는 일이었다.
 “내 말이 무슨 말인지 잘 알아들었지?”
 “알았소.”
 “한 번 더 말하지만 본진에 합류해도 적용되는 말이야.”
 “알았다잖소.”
 “그래? 그럼 가서 쉬어. 내일은 조금 힘들 테니까.”
 “알았소.”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걸어가는 맥심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제라르는 나직하게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이제 정리가 끝났다. 단단하게 일러두었으니 경거망동은 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문제라면 과연 아론이 계획한 대로 진행되느냐 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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