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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룡겁 1

2018.01.24 조회 255 추천 2


 쌍룡겁 1권
 서장
 
 
 <한 시대(時代)는 오직 한 명의 영웅(英雄)만을 필요로 한다.
 한 시대(時代)에 두 명의 영웅(英雄)이 있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강(强)과 약(弱)은 누르고 눌리며 조화를 이룰 수 있으나, 강(强)과 강(强)은 결코 조화를 이룰 수 없다.
 타협 또한 있을 수 없다.
 강(强)과 강(强)은 그저 서로 부딪쳐 깨질 뿐이다.>
 
 그는 늘 빛이었고, 나는 늘 어둠이었다.
 그는 늘 일인자(一人者)였으되, 나는 늘 이인자(二人者)였다.
 그러나 나는 정말이지 한 번도 일인자의 권좌(權座)에 오르고자 마음먹은 적은 없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그가 일인자라면 나는 언제까지고 이인자의 자 리에 만족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나의 친구였으니까.
 
 그는 언제나 조용하고 기품이 있었다.
 결코 큰소리로 말하는 법도 없었고, 크게 웃는 법도 없었다.
 그에겐 무심한 침묵만으로도 주변을 압도하는 천부적인 위엄이 있었다.
 굳이 애쓰지 않더라도 사람들이 스스로 따라와 주는 신비한 매력이 그에겐 있었다.
 그를 만나는 사람들은 누구나 그에게라면 무엇이든 다 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아니, 어떻게 하면 더 줄 것이 있을까 하는 희한한 고민까지 자초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그는 하나의 열병(熱病)이었다. 사람들의 마음을 감당할 수 없는 열기(熱氣)로 들끓게 하는.
 그래서 그는 늘 빛이었다.
 어딜 가나 그 빛은 늘 보석처럼 눈부시게 빛났으며, 그 빛의 주변엔 늘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모여드는 사람들 속에서 그는 자연스럽게 일인자로 군림(君臨)했고, 그의 부탁이나 명령이라면 사람들은 목숨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내 친구였다.
 빛을 친구로 하고 있다는 것은 너무나 기쁜 일이었다.
 어떻게 그런 사람을 친구로 할 수 있는 것인지 생각만 해도 기뻐서 잠이 오지 않을 지경이었다.
 더구나 그는 항상 내 곁에 있었다. 죽음의 그 순간까지도 우린 함께 있기로 맹세했다.
 그러므로 나는 천하에서 가장 행복한 사나이였다.
 훗날, 천하에서 가장 행복한 사나이가 오히려 가장 불행한 사나이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을 뿐······.
 
 ***
 
 그녀가 눈을 반짝거렸다.
 “그렇다면 당신은 뭐죠?”
 나는 머뭇거리지 않고 즉각 대답했다. 아주 자랑스럽게.
 “나는 이인자지.”
 그녀가 즉각 반박했다.
 “이인자는 자랑거리가 될 수 없어요. 이인자는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아요. 아시겠어요?”
 그녀의 반박은 날카롭다.
 “이인자란 일인자의 빛에 가린 하나의 어둠일 뿐이란 말이에요.”
 그녀의 말은 조금도 틀리지 않는다. 세상에 이인자인 것을 자랑스러워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인자는 언제나 일인자가 되길 꿈꾸고 있다. 그게 인간이다.
 그러나 나는 정말로 이인자인 것을 만족스러워했다.
 “어둠··· 후후, 그래. 빛이 그의 것이니, 어둠은 당연히 나의 것이지. 왜냐하면 나는 이인자이니까.”
 다시 말하지만, 정말로 나는 이인자인 것을 만족스럽게 생각한다.
 그녀는 여전히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왜죠? 왜 당신은 모든 것을 그에게 다 양보하는 거죠?”
 그녀의 빛나는 눈이 더욱 뜨거운 빛을 내뿜는다.
 “양보가 아니야. 그의 것을 건드리지 않을 뿐이지. 그가 내 것을 건드리지 않는 것처럼.”
 확실히 그것은 양보가 아니다. 설명할 수 있는 말은 오직 한 단어밖에 없는 것이다. 우정이라는 것!
 “아니예요. 당신은 양보하고 있는 거예요. 제가 보기에 당신은 마음만 먹는다면 그가 가진 모든 것을 충분히 당신 소유로 만들 수 있어요.”
 확실히 그렇다. 내가 마음먹으면 난 그의 자리를 차지할 수가 있다. 하지만 우정이 용납치 않으리라.
 우정이 양보하도록 권하고 있다. 우정이 모든 것을 그의 소유가 되도록 권하고 있다.
 나는 우정의 힘에는 너무도 무력한 존재였다.
 “그렇게 해서 내가 얻는 게 뭘까?”
 이번에는 내가 반박했다.
 “많죠. 일인자의 권좌와 보장된 미래와······.”
 “틀렸어. 나는 다만 친구를 잃을 뿐이야.”
 “친구? 바보로군요, 당신은. 당신에게 친구는 처음부터 없었어요.”
 맞다. 난 영원히 바보가 되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 대가로 우정을 지킬 수가 있었다.
 바보만이 가질 수 있는 유일하고 소중한 그 우정을.
 
 ***
 
 그 사람은 어둠 속에서 태어났어요.
 빛의 화신처럼 태어난 그의 친구와는 정반대였죠.
 그의 친구가 구문제독부(九門提督府)라는 당대 최고의 명문가(名門家)에서 세상의 온갖 축복을 받으며 태어났을 때, 그는 천하디천한 빈민굴의 홍등가(紅燈街)에서 그를 낳은 여인조차도 원하지 않았던 사생아(私生兒)로 태어났어요.
 그의 친구가 따뜻한 비단 강보에 싸여 귀족들의 축복을 받고 있을 때, 그는 악취로 가득한 시궁창에 버려져 정신 없이 구정물만 삼켰어야만 했어요.
 후훗··· 묘한 대조죠.
 그야말로 극(極)과 극을 달리는 정반대의 삶을 살아 가는 두 사람은 전혀 어울릴 수가 없을 것처럼 보였죠.
 그렇게 출생부터 빛과 어둠으로 갈라져 있던 두 사람이 어떻게 훗날 친구가 될 수 있었는지는 정말 모를 일이에요.
 운명(運命)의 안배가 아니었겠냐구요?
 글쎄요. 어쩌면 맞는 말일지도 몰라요. 조금은 서글프고 우울한 운명의 안배였긴 하지만 말이에요.
 아시죠? 권불십년(權不十年),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는 말.
 권세는 십 년을 못 가고, 열흘을 넘기는 꽃이 없다는 말이 그렇게 꼭 들어맞을 줄은 아무도 짐작 못했을 거예요.
 맞는 말이었어요.
 영원할 것만 같았던 당대 최고의 명문 구문제독부가 그렇듯 하루아침에 몰락할 줄 누가 알았겠어요?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던 정적(政敵)과의 당쟁(黨爭)에서 결국 패배하고 말았다더군요.
 당쟁에서의 단 한 번의 패배는 곧 몰락과 직결한다는 권력세계의 철칙이 또 한 번 증명되었다고 당시의 사람들은 곧잘 말하더군요.
 믿어지지 않는 가문의 몰락이 자신과의 정반대 삶을 살아온 사람과의 우정을 잇게 해 주었지요.
 전화위복이었는지, 아니면 또 다른 운명의 안배가 숨어 있었던 것인지 알 수 없는 노릇이긴 하지만, 두 사람은 그렇게 만난 거예요.
 
 그는 북경(北京)의 암흑가(暗黑街)를 지배하고 있었어요.
 불과 열여섯의 나이로 그 비정하고 잔혹한 어둠의 거리를 그는 제왕(帝王)으로 군림하고 있었던 거죠.
 그 특유의 배짱과 용기, 그리고 적에 대한 야수 같은 잔인성과 집요한 승부 근성 등이 이루어 낸 결과였어요.
 몰락한 친구를 그는 어둠의 거리로 받아들였어요.
 만약 그 두 사람이 운명으로 맺어진 친구관계가 아니었다면, 그리고 그의 양보가 없었더라면, 북경의 암흑가에는 그야말로 끔찍한 유혈사태가 일어났을 거예요.
 제왕의 자리는 어차피 하나뿐이었고, 두 사람 모두는 충분히 제왕의 자질을 갖추고 있었으니까요.
 암흑가의 사람들은 우두머리를 선택하는 본능적인 후각을 지니고 있어요.
 그것을 보면 그의 친구는 확실히 대단한 인물이었어요. 암흑가의 사람들이 가장 싫어하는 상류사회의 귀족적인 향기를 풍기고 있으면서도 단숨에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으니까요.
 사람을 휘어 잡는 그 불가사의한 매력은 사실 눈부신 것이었어요.
 오죽하면 암흑가의 빛이라고까지 불렸겠어요.
 일인자와 이인자, 두 사람의 그런 관계는 끝없이 계속되었어요.
 그 사건, 북경 전체를 발칵 뒤집어 버린 그 사건을 일으킨 후, 함께 종신수(終身囚)가 되어 사천(四川)의 지옥성(地獄城)에 구금되기 전까지도 말이에요.
 후훗··· 글쎄요.
 아마 모르긴 해도, 그들은 지옥성에서도 만겁뇌(萬劫牢)라고 불리는 그 어둠 속에서도, 일인자와 이인자의 관계를 계속 유지하고 있을 걸요?
 
 ***
 
 일인자(一人者)와 이인자(二人者), 그리고 빛과 어둠.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될 수밖에 없다.
 삶과 죽음의 명료하고 확고한 차이처럼 두 사람의 운명은 전혀 상반된 길 위에 서 있었다.
 스스로 이인자이길 자처한 인물, 그를 야우혈랑(夜雨血狼)이라고 부른다.
 밤비 속을 홀로 헤메는 고독한 늑대, 입가에는 피가 묻어 있다.
 사냥감을 찾아서 홀로 방랑하는 늑대의 습성을 그는 지니고 있는 것이다.
 비는 밤새도록 내린다.
 우정이라는 찬란하고 고귀한 포장에 싸인 일인자라는 선물을 받은 또 한 인물은 아주 당연하게, 그리고 자연스럽게 선물을 받았다.
 다른 속셈은 없다. 그는 그저 우정을 받아들인 것뿐이다.
 거기에 무슨 의미를 부여할 수는 없는 것이다.
 
 
 1장 삼년, 그것이 주는 의미(意味)
 
 
 1
 
 
 어둠(暗).
 먹물을 뿌려 놓은 듯 칠흑 같은 어둠 속이다. 따라서 이 곳이 어디인지는 알 수가 없다.
 숨막힐 듯한 정적과 중압감이 이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마치 억겁을 이어 온 것처럼 그렇게.
 도대체 이 터질 듯한 중압감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시작해라.”
 나직한 음성이 어둠 한 귀퉁이를 뒤흔들며 울려 퍼졌다.
 형용할 수 없는 위엄이 담긴 오십대 사내의 음성이었다.
 그러자 어둠 어디선가에서 또 다른 음성이 차분하고 명확하게 울려 나왔다.
 “가능한··· 우리는 천하의 모든 젊은이들을 분석, 검토해 보았습니다. 그 중에서 일단 십오 세 이하와 이십오 세 이상은 대상에서 제외시켰습니다. 그 이유는 말씀드리지 않아도 잘 아시리라 사료됩니다.”
 약간 쉰 듯한 그 음성에는 상대에 대한 극경(極敬)의 념(念)이 서려 있었다.
 “분석 결과, 일단 물망에 오른 숫자는 도합 팔십이 명이었습니다. 이것은 예상보다 훨씬 많은 숫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필요로 하는 사람은 오직 일 인(人)뿐입니다. 그 중에서 최후의 일 인을 선택해야만 했습니다.”
 공손하기 그지없는 그 음성은 잠시의 여유를 두고 어둠 속에 신비로운 여운을 풍기며 계속 이어졌다.
 “철저히 검토, 조사한 결과 그 중 팔십 명은 제외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머지 두 명, 여기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문제라면?”
 최초의 위엄 어린 음성이 어둠을 무겁게 뒤흔들었다.
 “총력을 기울였습니다만, 우리로선 도저히 그 두 명의 우열을 가릴 수 없었습니다. 이것은 수십 번을 거듭 분석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야말로 백중지세입니다. 결국 최후의 일 인(人)은 우리로선 선택이 불가능하다고 결론지었습니다.”
 쉰 듯한 음성이 더욱 공손하게 변해 이어졌다. 그러더니 어느 순간, 음성이 갑자기 뚝 끊겼다.
 정적, 숨막힐 듯한 정적이 다시 아우성치며 어둠 속으로 들이닥쳤다.
 “이제··· 그들을 소개하겠습니다.”
 음성이 다시 이어진 것과, 어둠을 찢어 내며 두 개의 불꽃이 선명하게 나타난 건 거의 동시였다.
 불꽃은 신비로우리만큼 새파란 청광(靑光)을 발했다.
 두 불꽃 간의 거리는 다섯 자 남짓. 새파란 불빛 사이로 하나의 기다란 흰 천이 어둠 속에서 정사각형의 구멍을 뚫은 듯 나타났다.
 동시에 흰 천 위로 차츰 하나의 그림(畵)이 형체를 이루어 갔다.
 그것은 전신(全身)을 그린 인물화(人物畵)였다.
 화중인(畵中人).
 일견, 십육칠 세 남짓 되었을까?
 일신에는 눈처럼 흰 백의(白衣)를 걸치고 있었다.
 도대체 이 사람이 정녕 인세(人世)의 속인이란 말인가?
 투명하도록 흰 피부에 조물주가 빚은 듯한 단아한 이목구비, 입가에는 봄날의 춘광(春光)처럼 잔잔한 미소가 걸려 있다.
 잘생겼다는 표현만으로는 도저히 그 신비로운 아름다움을 형용할 수가 없다.
 그렇다. 그 불가사의한 매력은 보는 이의 영혼을 송두리째 받아들일 것만 같았다.
 그에 덧붙여 황족(皇族)같이 잘 정제된 귀품(貴品)과 선택된 자만이 지닐 수 있는 고귀한 위엄을 소유했으니··· 어찌 이것을 불과 십육칠 세 나이의 소년이 지닐 수 있는 기도라 할 것인가?
 그림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시선을 도무지 뗄 수 없게 만드는 미청년(美靑年)이었다.
 그리고 그림 밑으로는 용필휘지의 글씨가 쓰여 있었다.
 
 <성명(姓名):백무결(白無缺).
 별호(別號):신품대공(神品大公).
 생년월일(生年月日):홍무 이십삼 년(二十三年) 구월 십 일(九月十日), 당년 십칠 세.
 출신(出身):전(前) 구문제독(九門提督) 백자흠(白子欽)의 독자(獨子).
 무공수위(武功水位):무(無).
 특기사항(特記事項):천하만학(天下萬學)에 능통한 초특급 수재(秀才)로서, 금기시서화예(琴期詩書畵藝) 및 온갖 잡학(雜學) 분야에서도 이미 입신지경의 화후를 소유했음.
 기타:현(現) 사천(四川) 지옥성(地獄城) 만겁뇌 수인번호(囚人番號) 일만사천 번(一萬四千番)으로 종신수 복역 중.>
 
 화중인이 종신형을 살고 있는 죄수라는 것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 그토록 잘난 사내가 어떻게 죄수일 수가 있는 것인지.
 “그 밖의 자세한 사항은 조금 전에 드린 별첨지(別添紙)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스스······.
 일순, 그림과 글씨가 동시에 사라졌다.
 이어서 두 번째 그림이 새파란 불꽃 아래로 나타났다.
 이번에도 전신상(全身像)을 그린 인물화(人物畵)였다.
 역시 십육칠 세 가량 되었을까?
 장내의 어둠 속은 갑자기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기이한 분위기로 바뀌었다.
 그림 속에는 해 저무는 석양(夕陽) 무렵, 황야의 언덕에 우뚝 선 소년이 있었다.
 일신에는 먹물 같은 흑의(黑衣)를 걸쳤다. 그래서인지 더욱 희어 보이는 피부에 입술은 등지고 있는 황혼처럼 붉디붉다.
 그러나 어깨 위에 비껴 앉은 황혼빛과 어두운 그림자가 덮힌 얼굴이 어쩐지 깊은 고독감을 전해 주고 있었다.
 약간 음울하게 느껴지는 깊숙한 두 눈동자가 마치 차가운 겨울 밤하늘의 별(星)을 보는 듯하다.
 더없이 냉철하고 이지적으로 느껴지는 극치의 아름다움이었다.
 뭐랄까? 흰 설원(雪原)을 밟고 포효하는 한 마리 고독한 늑대라고 나 할까?
 전신 구석구석에 배인 고독한 기운으로 가슴이 뭉클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 고독의 저변에는 형용할 수 없는 강인한 기질이 숨겨져 있었다.
 어쩌면 그것은 일단 손을 대면 반드시 끝장을 내고야 마는 승부사적 기질 같은 것인지도 몰랐다.
 그리고 글씨, 이 신비로운 두 번째 화중인(畵中人)의 그림 아래에도 어김없이 용필휘지의 글씨가 쓰여 있었다.
 
 <성명:설유흔(雪幽痕).
 별호:야우혈랑(夜雨血狼).
 생년월일:홍무 이십삼 년(二十三年) 시월 십오 일(十月十五日), 당년 십칠 세.
 출신:북경(北京) 천향림(賤香林).
 무공수위:불명(不明). 단, 무수한 실전을 통해 극히 실용적인 권격무예(拳擊武藝)를 구사하는 것으로 알려졌음.
 특기사항:불과 십육 세의 나이 때 북경의 암흑가를 장악. 이는 사실상 단신으로 해낼 수 없었던 불가사의한 위업으로 판단되며 배후세력이나 조력자(助力者)에 대해 계속 조사 중.
 기타:신품대공 백무결과 절친한 친구 사이. 현재 만겁뇌 수인번호 일만삼천구백구십구 번(一萬三千九百九十九番)으로 종신수 복역 중.>
 
 “나머지는 역시 별첨지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이상입니다.”
 파팟-!
 어둠 속에서 조용한 목소리가 이어진 뒤 불이 꺼지자,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먹물 같은 어둠이 다시 몰려들었다.
 태고 이전의 정적이 장내를 무겁게 짓눌렀다.
 “묘한 일이군.”
 최초의 위엄 어린 음성이 독백처럼 느릿하게 이어졌다.
 “생년월일도 거의 비슷하다. 한 명은 전 구문제독의 독자, 또 한 명은 싸구려 홍등가의 부랑아 출신··· 그들이 어찌 친구가 되었단 말인가?”
 불가사의한 일은 도처에 널려 있다. 그러나 이런 일은 극히 드물다.
 인간은 서로 견제하는 동물이다. 서로 견제하면서 자신이 가진 것을 잃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 애를 쓸 뿐만 아니라, 자기 것을 늘리기 위하여 다른 사람의 것을 빼앗으려 드는 것이 인간인 것이다.
 이런 식으로 설명하면 전혀 다른 류(類)의 인간은 결코 어울릴 수가 없다. 이것이 인간만이 갖는 특성인 것이다.
 그러므로 전혀 다른 두 종류의 인간이 친구가 되었다는 사실이 도무지 이해될 수가 없는 것이다.
 “세상은 너무나 묘해. 그들이 어찌 친구가 되었단 말인가?”
 하지만 이 사람의 목소리에는 불가사의한 두 사람의 우정에서 기이함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섣불리 단정할 수 없는 어떤 기묘한 의미가 깃들여 있음을 희미하게 깨닫고 있다는 냄새가 풍기고 있었다.
 “별첨지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그들은 불과 칠 세 때 아주 사소한 시비 끝에 대판 싸웠다고 합니다. 그 싸움이 두 사람을 친구 관계로 묶어 놓은 듯합니다.”
 “죄명(罪名)은 무엇이라고 그랬지?”
 “황궁(皇宮) 관부고수(官府高手) 사십 인과 북경 암흑가에서 충돌해서 그들을 깡그리 죽였다고 합니다. 더욱이 죽은 관부고수들 중에는 사인방(四人幇)이······.”
 숨을 고르는 듯 잠시 말소리가 끊어졌다가 다시 이어졌다.
 “다시 말해서, 당금 황궁의 최고 권력자 사 인(人)의 아들들로 구성된 귀족(貴族)들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쉰 듯한 음성이 차분하게 어둠을 흔들어 놓은 순간, 최초의 위엄있는 음성이 탄성을 담고 나직이 울려 퍼졌다.
 “허어, 그랬나? 이유는?”
 “흔히 있는 관부(官府)와 암흑가 사이의 사소한 충돌로 사료됩니다.”
 “음······.”
 나직한 침음과 함께, 장내에는 한동안 폭풍 전야의 적막이 흘렀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어떻게 하시겠어요?”
 옥음(玉音), 별안간 어둠 속에서 신비감을 주는 맑고 매혹적인 여인(女人)의 옥음이 울려 퍼졌다. 듣는 이의 폐부 속까지 시원하게 씻어 낼 듯 아름다운 음성이었다.
 이 어둠 속에는 도대체 어떤 인물들이 모습을 감추고 있는 것인지?
 “보아하니, 두 아이 모두 이 시대를 이끌어 가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왕재(王才)들이다. 그러나······.”
 최초의 위엄 있는 음성이 산악 같은 기운을 담고 이어졌다.
 이 시대를 이끌어 가기에 조금도 부족하지 않은 왕재(王才)라는 말 때문이었을까?
 어둠 속을 무겁게 감돌고 있는 공기가 가벼운 파동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 파동을 가라앉히려는 듯 위엄을 담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한 시대는 오직 한 명의 영웅만을 필요로 한다.”
 영웅이 두 사람일 필요는 없다. 산 속에 두 마리의 호랑이가 있을 필요가 없는 것처럼.
 그러나 영웅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
 별안간 찾아온 침묵이 한동안 이어졌다.
 그 침묵은 무엇인가를 결정하려는 시간의 흐름이었다.
 결정은 힘들었다.
 둘 다 놓치기 어려운 인물들이었으며, 둘 다 영웅으로서 충분한 자질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므로 한순간의 잘못된 결정으로 인하여 모든 것이 허사로 돌아갈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결정은 내려졌다. 그 어둠 속에서.
 
 어둠이 부르르 진저리치듯 뒤흔들렸다.
 “기한은 삼 년(年), 선택권은 모두 너에게 맡기겠다.”
 결정이 난 것이다. 그러나 이 결정은 어딘지 미흡한 느낌이 있었다. 어둠이 항상 불안을 내포하고 있듯이, 인간사를 결정하는 일 또한 언제나 완벽하지 못한 것이기에.
 “최선을 다하겠어요. 실망시켜 드리지 않도록······.”
 여인(女人), 그것도 아직 이십대를 넘지 않은 소녀(少女)의 맑디맑은 음성일진대··· 그 조용하고 매혹적인 음성이 끝나는 순간이다.
 팟-!
 어둠 한 곳에서 환한 불이 켜지고, 이어서 눈이 부시도록 밝고 휘황한 불빛이 하나씩 차례로 켜졌다.
 파파파팟-!
 비로소 실내의 어둠이 사라지고, 어둠의 정체가 드러났다.
 그 어둠 속에 삼 인(人)이 있었다. 두 사람의 운명을 결정한 삼 인이었다.
 
 
 2
 
 
 황야(荒野).
 앞뒤 어딜 봐도 풀 한 포기, 수목 한 그루 찾아볼 수 없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그저 먼지와 자갈, 모래의 끝없는 벌판뿐이었다.
 휘이잉-!
 그리고 황량한 사풍(沙風), 한 채의 거대한 성(城)은 바로 이 사천(四川) 땅 황량한 광야의 한복판에 우뚝 세워져 있었다.
 성(城)이라곤 했으나, 그 규모는 실로 끝에서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웅대했다. 솟아오른 성벽만도 물경 십 장은 넘을 지경이었다.
 온통 거무튀튀한 빛 일색의 이 성(城)은 멀리서 보면 마치 거대한 괴물이 웅크리고 앉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한 무리의 까마귀 떼만 성 위를 어지럽게 비행하고 있을 뿐, 낮게 가라앉은 잿빛 하늘이 무겁기만 하다.
 
 <지옥성(地獄城)>
 
 높다란 성문(城門)에 걸린 편액엔 그렇게 쓰여 있었다.
 여기가 바로 그 곳이었던가?
 지옥성(地獄城).
 유배(流配)의 성(城).
 인간사회에선 도저히 놔 둘 수 없다고 인정된 자, 또는 나라에 대한 대역(大逆)이나 모반(謀反) 등으로 인한 중범자들이 유배되는 곳.
 한 마디로 이 곳은 죽음의 감옥이다.
 피가 마르고 뼈가 부서지도록 일만 하다가 죽어 가야 하는 곳.
 당연히 탈출이란 애초부터 있을 수 없었다. 탈출은 곧 죽음으로 이어진다. 그것도 성치 못한 몸뚱이로 죽어 간다. 몹시도 처참하게.
 이 성(城)이 세워진 이래 지금까지 숱한 죄인들이 탈출을 시도했다. 그러나 무사히 빠져 나갔다는 말은 그 누구도 들어 보지 못했다.
 상상해 보라!
 성을 둘러싼 사방 이천 리(里) 반경에 먹고 마실 것은 아무것도 없다. 있다면 우글거리는 독충(毒蟲)과 맹독(猛毒)을 품은 숱한 종류의 독물(毒物)뿐.
 또는 바윗덩어리도 순식간에 삼킨다는 유사하(流沙河)만이 도처에 널려 있을 뿐이다.
 유사하는 모든 것을 빨아들이며 쉬지 않고 맴도는 모래강이었다.
 폭은 백 여 장이나 되었으며, 길이는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새들조차도 이 곳에서는 되돌아갈 지경이었다.
 아무것도 먹지도 마시지도 못한 인간이 이천 리에 달하는 죽음의 벌판을 걷고 또다시 유사하를 건너 탈출할 수 있는 경우란 도대체 전무한 것이다.
 뿐이랴? 설혹, 어떤 자가 천운(天運)이 좋아 이 저주의 땅덩어리를 벗어났다고 치자. 그러나 그 때부터 그는 엄청난 죽음의 공포에 시달려야만 한다.
 천추검단(千秋劍團).
 일명 죽음의 추적대. 오직 추적과 살인(殺人)만을 전문적으로 가르치고 배웠다는 자금성 최대의 비밀추적군단(秘密追跡軍團)을 일컫는 명칭이다.
 아직까지 이들의 표적이 되고도 살아남았다는 사람은 누구도 없었다.
 십 년 전의 일이었다.
 삼 년이란 긴 세월을 계획하고 또다시 거기에 맞게 완벽한 준비를 끝낸 탈주자가 있었다.
 그러나 유사하를 건너기 직전에 천추검단에 사로잡혀 지옥성으로 끌려갔다.
 그가 받은 형벌은 오체분시(五體分屍)였다.
 머리와 양쪽 팔, 양쪽 다리에 묶인 밧줄을 다섯 마리의 소가 서로 다른 방향으로 당겨서 찢어 죽이는 참혹한 형벌이었다.
 그렇다. 지옥성을 탈출했다면 이들의 첫번째 추적 대상으로 명부(名簿)에 오를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지옥성(地獄城).
 이 곳을 벗어날 수 있는 유일무이한 방법은 단 하나, 그건 죽어서 시체가 되는 길뿐이었다. 시체는 가차없이 성 밖으로 버려지게 되므로.
 이야기는 한 시대(時代)와 두 명의 영웅(英雄)을 동시에 조명하게 되는 운명적인 이 이야기는, 어쩔 수 없이 이 곳에서 시작될 수밖에 없다.
 
 ***
 
 지옥성의 거대한 문이 열리면서 성 밖에서 마차 한 대가 들어왔다. 북경에서 압송되어 온 죄수가 실린 함거(函車)였다.
 마차 위에 실린 울타리 속에는 머리를 길게 풀어 헤친 죄수가 타고 있었는데, 그 몰골이 비참하기 짝이 없었다.
 겨우 치부만 가리고 있는 누런 마의(麻衣)는 도저히 옷이라고 할 수도 없었으며, 양쪽 손목은 쇠사슬로 묶여 있었고, 목에 걸린 목쇄를 두 손으로 간신히 받치고 있었다. 발목에도 족쇄가 감겨져 있어,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발목을 조여들어 지독한 고통을 주었다.
 따라서 죄수는 옴짝달싹 못하고 북경에서 지옥성까지 먼 길을 마차 위에서 흔들려 왔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수의 움푹 꺼진 눈은 시퍼런 안광을 쏟아 내고 있었다.
 형리(刑吏)들은 움푹 꺼진 눈에서 쏟아지는 시퍼런 눈빛을 보고, 그가 대역죄인이리라고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성명(姓名):마등(馬騰).
 연령:삼십오 세.
 죄명(罪名):살인 2건, 사기도박 구십구 건, 폭력상해 삼백육십삼 건, 강간 사십오 건, 인신매매 총 백팔십이 건 외 다수.
 특기사항:난폭자(亂暴者)로서 탈출의 명수인 바, 요주의 인물.
 형량:종신(終身).>
 
 “마등이라······.”
 제법 호화로운 실내였다.
 육중한 서탁(書卓) 위에 놓여진 한 장 조서.
 조서에는 관서(關西) 지방에서 악명을 떨치던 한 흉인(凶人)의 신상이 비교적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대머리에 기름이 줄줄 흐르는, 비대한 체구의 금의노인(錦衣老人).
 그의 허리춤엔 하나의 금빛 호패(號牌)가 달려 있었다.
 삼십 년 동안 지옥성을 관장해 온 구유대인(九幽大人) 왕옥상(王玉上)의 신분을 나타내는 호패다.
 언제나 그래왔듯이 왕옥상의 얼굴엔 따분하고 거만한 표정이 잔뜩 어려 있었다.
 자금성에 들어가면 겨우 종칠품(從七品) 죄수장(罪囚長)의 직급에 불과하나, 이 지옥성 내에서 왕옥상이라는 이름은 삼만이 천여 명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흔드는 절대군주와도 같았다.
 그래서 왕옥상의 거처는 지옥성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호화롭고도 넓은 정실이었다.
 “오랜만에 제법 거물(巨物)이 들어왔군.”
 지금 구유대인 왕옥상은 교의에 깊숙이 등을 기댄 채 단하(壇下)에 우뚝 서 있는 육중한 체구의 사나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왕옥상의 입가에 희미한 비웃음이 떠올랐다.
 “자네 같은 거물이 잡히기란 쉽지 않은 일인데··· 그래, 어쩌다 잡히고 말았나?”
 마등, 외눈에서 뿜어지는 눈빛이 마치 야수 같다고 하여 독목혈리(獨目血狸)라 불리는 이 사내.
 그는 왼쪽 뺨 깊숙이 파인 지렁이 같은 흉터를 징그럽게 실룩이며 씹어 뱉듯 대꾸했다.
 “재수가 없었소. 빌어먹을!”
 “재수라······.”
 왕옥상은 야릇한 웃음을 떠올렸다.
 “혹시 인과응보(因果應報)라곤 생각하지 않나?”
 “인과?”
 마등은 힐끔 왕옥상의 전신을 훑어보더니, 발 아래로 가래를 뱉어냈다.
 “카악- 퉤에!”
 왕옥상의 눈썹이 잔뜩 찌푸려졌다.
 “나는 지금까지 살면서 그런 과일이 있다는 말은 한 번도 못 들었소.”
 완전히 동문서답이었다.
 깨끗한 바닥의 융단 위에 싯누런 가래가 엉겨 붙었다.
 붉은 모피 융단의 탐스런 광택 위에서 그것은 기묘한 부조화를 이루어 냈다.
 왕옥상은 그것을 힐끔 본 뒤 중얼거렸다.
 “융단을 새것으로 갈아야 할 것 같군.”
 나직한 혼잣말, 그러나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한쪽 구석자리의 서기가 뭔가를 급히 기록했다.
 
 <융단 새것으로, 내일 오전까지.>
 
 문득, 왕옥상의 시선이 몹시 무료한 빛을 띤 채 허공으로 향해졌다.
 “이것 봐, 황충(黃忠).”
 마등의 등 뒤에 우뚝 서 있던 중년인이 즉시 허리를 굽혔다.
 “예!”
 이 인물은 매우 강직한 인상을 풍겼다. 황충은 간수장의 직책을 맡고 있는 인물이었다.
 “이 자 말이야.”
 왕옥상은 턱짓으로 마등을 가리켰다.
 “예.”
 “궁전으로 보낼까 하는데··· 남는 자리가 있을까?”
 황충의 강직한 얼굴이 흠칫 굳어졌다.
 궁전은 지옥성에서도 가장 나쁜 곳이었다. 따라서 가장 죄질이 나쁜 죄수들만 수용되고 있었다. 정식 명칭은 구십구호(九十九號) 뇌옥으로서, 지하에 자리잡고 있었다.
 “자리는 있습니다만, 궁전이라면 바로 구십구호 뇌옥······.”
 “됐네. 그럼 데려가게.”
 왕옥상은 간단하게 말했다. 가래침의 대가였던 것이다.
 왕옥상은 궁전이 어떤 곳인지 몰라 조금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곧 표정을 바꾸었다.
 이제는 더 이상 두려워할 것이 조금도 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알겠습니다.”
 황충은 급히 입을 다물었다.
 “가자.”
 황충은 마등과 함께 밖으로 향했다.
 “이건 자네를 위해서 하는 말인데, 구십구 호에 가거든 몸가짐을 조심하게. 여기서처럼 가래침을 뱉는다거나 하는 일 따위는 절대 없어야 할 것이네.”
 왕옥상이 느물느물 웃으며 마등의 뒷등을 향해 말했다.
 마등은 막 문 밖으로 나서다 말고 우뚝 멈추어 섰다.
 그는 왕옥상을 힐끔 돌아보더니 피식 냉소를 흘렸다.
 그는 또 한 차례 가래침을 탁 뱉었다.
 “ㅌ!”
 가래침이 왕옥상의 발 밑으로 날아와 떨어졌다.
 왕옥상은 또다시 눈썹을 찌푸렸다.
 쿵-!
 마등이 나가고 문이 닫혔다.
 황충에게 이끌려 나간 마등은 대기하고 있던 옥리(獄吏)들의 발길에 차여 궁전이라고 불리는 구십구 호 뇌옥으로 끌려갔다.
 “녀석······.”
 왕옥상은 서탁(書卓) 위에 두 발을 턱 올려놓았다. 곧이어 그의 살찐 눈꺼풀이 스르르 감겼다.
 그는 내일 아침 딛게 될 새 융단을 생각하고 있었다. 마등의 일은 벌써 까맣게 잊은 듯.
 한쪽 구석자리에 앉아 있던 서기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또 한바탕 난리가 일겠습니다.”
 “그럴 테지.”
 “그런데 왜 하필이면 구십구호(九十九號)로······.”
 “뭐가 잘못됐나?”
 “전번에도 조춘달(曹春達)이라는 놈을 그 곳에 넣었다가 아예 반송장이 되어서 나왔지 않습니까? 당시 놈에게 사용된 치료비만도 무려 은자 두 닢······.”
 왕옥상이 피곤하다는 표정으로 한쪽 얼굴 근육을 찡그렸다.
 “새 융단은 가능한 푸른색이었으면 좋겠어. 붉은색은 너무 오래 봤더니, 싫증이 나서 말이야.”
 서기는 입을 꾹 다물었다. 이어, 그는 몹시 걱정스럽다는 눈길로 마등이 나간 문을 쳐다보았다.
 ‘쯧, 지지리도 재수 없는 놈 같으니. 나, 당결(唐訣)은 다시 널 보지 않기를 원한다!’
 그것은 진실이었다. 그가 두 번 보는 인물은 언제나 시체(屍體)였으니까.
 탁-!
 서기 당결은 조용히 붓을 내려놓았다.
 마등의 운명이 결정된 것이다.
 
 
 2장 흑가(暗黑街)의 빛
 
 
 1
 
 
 지옥성(地獄城).
 총 칠천팔백 개의 뇌옥으로 이루어진 이 곳은 크게 남옥(南獄)과 북뢰(北牢)로 분리되어 있었다.
 남옥은 십 년 이하의 장기수(長期手), 또는 행형(行刑) 성적이 우수한 모범수들로 채워졌다.
 북뢰가 그 이상의 종신수나 사형수들로 채워진 것은 물론이었다.
 남옥에 비해 북뢰는 한마디로 살벌한 곳이다. 먹고 자는 것 등에 커다란 차이가 있는 것도 당연하다.
 그런데 언제부턴지 이 북뢰의 한 뇌옥이 죄수들 간에 궁전(宮殿)이라 불려졌다.
 구십구호 뇌옥이 특별히 화려하다거나 특이해서가 아니다. 이유는 오직 하나, 죄수 중의 왕자(王子)로 불리는 두 명의 인물이 그 곳에 있기 때문이었다.
 
 “아, 글쎄··· 그놈의 계집이 말이야. 여간 앙탈을 부려야지.”
 “그래서?”
 “그래서는 뭐가 그래서야? 죽도록 두들겨팼지.”
 “그러니까 고분고분하던가?”
 “말도 마! 보기엔 비쩍 마른 게 순 악다구니만 살았는지, 그렇게 얻어맞고도 끝까지 날 받아 주지 않더군.”
 “저런 흉악한 계집 같으니. 그래서?”
 “죽여 버렸지. 그런데 말이야, 죽은 계집하고 그 짓 하는 것도 색다른 맛이 있던데.”
 “그러니까 너보고 사람들이 그러잖아.”
 “뭐라고?”
 “마른 하늘에서 날벼락이 떨어지면 제일 먼저 맞아 뒈져야 할 놈이라고.”
 “뭐가 어째?”
 “하하하······!”
 칙칙하고 어두컴컴한 통로, 통로 양쪽으로는 거미줄 같은 뇌옥이 연이어 있었다.
 손바닥만한 창문 새로는 온갖 음담패설과 웃음소리가 연신 흘러나왔다.
 그러나 유독 단 한 곳, 예외인 뇌옥이 있었다.
 흡사 텅 빈 곳인 듯 조용하기만 한데······.
 
 <제구십구호(第九十九號)>
 입구(入口)의 표찰에는 그렇게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무수한 동정 어린 눈길을 받으며 마등이 안내된 곳은 바로 이 구십구호(九十九號) 뇌옥이었다.
 철커덩-!
 철문이 굳게 닫히는 소리를 등 뒤로 들으며 독옥혈리 마등은 뇌옥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두 눈에 음산한 냉기를 담은 채 주위를 힐끔 둘러보았다.
 휘이잉-!
 문을 열자, 안에서 습한 바람이 비릿하고 역한 악취를 풍기며 날아왔다.
 마등의 얼굴을 가린 긴 머리가 바람에 날렸다.
 “이런 우라질! 진짜 궁전이로구만.”
 마등이 킬킬거렸다. 킬킬거리는 마등의 얼굴에서 시퍼런 안광이 이글거렸다.
 “꾸물거리지 말고 빨리 들어가라, 이 놈아!”
 옥리가 마등을 밀었다.
 덜커덩-!
 마등이 천천히 안으로 들어가자, 등 뒤에서 철문이 닫혔다.
 오랫동안 발목을 죄고 있던 족쇄가 풀려 있었기 때문에 마등의 몸이 잠깐 비틀거렸다.
 휘이잉-!
 또다시 역한 악취를 잔뜩 품은 바람이 불어 왔다.
 안으로 들어가자, 머리 위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무덤 속보다 더 지독한 곳이었다.
 시간이 조금 지나서 겨우 어둠에 익숙해진 마등의 눈에 비로소 내부가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칙칙한 습기가 가득한 내부에 대략 열 대여섯 명의 죄수들이 각양각색의 자세로 앉아 있었다.
 “음······?”
 문득, 마등의 표정이 기이하게 변했다. 바로 그가 서 있는 입구 옆, 대여섯 명이 모여 앉아 머리를 맞댄 채 무언가에 몰두하고 있었던 것이다.
 매우 진지하고 심각한 표정들이다.
 그들의 시선이 집중된 뇌옥의 바닥 아래, 두 마리의 이가 서로 꿈틀거리며 뒤엉켜 싸우고 있었다.
 누군가의 몸에서 피를 빨아 먹었는지 통통하게 살찐 두 마리의 이. 말하자면 이 싸움이었다.
 마등의 표정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한낱 이들의 싸움을 보는 것치곤 표정들이 너무 심각했다. 더욱이 자신이 들어섰는데도 고개 하나 쳐드는 놈이 없었다.
 ‘이 자식들이······.’
 마등은 맨 앞 인물의 옆구리를 냅다 걷어찼다.
 “비켜, 이 자식아!”
 퍽-!
 “아이쿠!”
 비명을 지른 사내가 한 바퀴 빙글 뒹굴고 나서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리고 마등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이 싸움에 몰두하고 있는 다른 죄수들은 아예 쳐다볼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대략 사십여 세 가량 되었을까?
 장작개비처럼 마른 몸매에 뱀눈을 지녔다. 눈꼬리가 약간 쳐져 있어 어딘가 잔인하고 음독한 인상을 풍기는 얼굴이었다.
 그는 곧 어리둥절한 눈빛으로 중얼거렸다.
 “지··· 지금 내 옆구리에 뭐가 왔다 간 거냐?”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 마등의 발이 또 한 차례 그의 턱에 작렬했다.
 “비키라고 했다!”
 퍽-!
 “억!”
 장작개비처럼 마른 뱀눈의 인물이 붕 떠서 구석 바닥에 나가떨어졌다.
 콰당-!
 그의 입 근처가 묵사발이 된 채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그는 한 차례 부르르 몸을 떨더니 축 늘어지고 말았다.
 “형편없는 자식 같으니!”
 그제야 다소 울화가 가라앉은 듯, 마등은 흉물스럽게 웃으며 주위를 쓱 둘러보았다.
 대충 이 정도의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으니, 자신을 보는 눈이 틀려졌으리라 생각하면서.
 그런데 어찌 된 판국인가?
 주위의 분위기는 티끌만큼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주위는 여전히 쥐죽은 듯 조용하기만 했다.
 이 싸움은 심각하게 계속되는 중이었으며, 잠을 자던 인물은 눈조차 뜨지 않았다.
 한 마디로 주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상관없다는 태도들이다. 아니, 아예 관심조차 없다는 모습들이었다.
 “음······.”
 마등은 어처구니가 없다 못해 약간은 질리는 느낌마저 들었다.
 그가 주춤거리며 빈 자리를 찾아 벽에 등을 붙이고 자리에 앉았다.
 바로 그 때였다. 실내 모든 사람의 시선이 처음으로 마등에게 향했다.
 “흑······!”
 마등의 입에서 가늘게 숨 넘어가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마등은 불현듯 전신에 소름이 쫙 끼치는 것을 느꼈다.
 눈빛!
 그 눈빛들은 그로선 매우 생소하고 특별한 것들이었고, 전율스럽도록 차갑고 싸늘했다.
 마치 수만 개의 바늘 끝이 마등의 전신에 쑤셔 박혀 드는 것처럼.
 이어 그 얼굴들에는 약속이나 한 듯 하나같이 노골적인 비웃음이 떠올랐다.
 ‘이··· 이것들이······.’
 마등은 자신도 모르게 주춤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거의 동시에, 마등은 마치 보이지 않는 힘에 이끌리듯 어느 한 시선과 눈길이 마주쳤다.
 그 시선은 뇌옥 한복판에서 마등을 주시하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말없이 마등을 주시하는 차가운 눈길.
 마등의 몸이 부르르 진동했다.
 냉혹하고 고요한 눈빛. 고요하다곤 했으나 그 눈빛 속엔 언제 터질지 모를 무서운 폭발력이 함유되어 있었다.
 “으음······!”
 마등의 입에서 가는 신음성이 흘러 나왔다.
 생전 처음 보는 눈빛이었다.
 마등은 오랜 경험과 본능으로 알 수 있었다. 저런 눈빛의 소유자는 진정 무서운 인물이다.
 마등은 숨을 죽이고 가만히 그 눈빛의 주인을 살폈다.
 도대체 어떤 놈이기에 내가 그깟 눈빛에 기가 죽는단 말인가?
 어둠 속에서 쏘아보는 눈빛의 주인을 살피던 마등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청년, 아니 소년이라는 표현이 더 적합하리라.
 깎아 빚은 조각처럼 아름다운 얼굴인데, 흐트러진 장발 아래 창백한 안색이 마치 어둠의 화신인 양 음울한 체취를 발한다. 그러나
 좀 더 자세히 보자니, 자유분망한 기질이 담겨 있어 다분히 낙천적인 듯도 보였다.
 나이는 겨우 십육칠 세 정도 되었을까?
 그러나 그에겐 나이를 상회하는 관록과 더불어 은연중에 상대를 압도하는 위엄이 서려 있었다.
 그 무형의 압박감 탓이었을까?
 마등은 왠지 가슴 속에 찬바람이 이는 느낌이었다.
 마등 같은 어둠의 인간들에게 가장 중요한 건 첫인상이었다.
 첫인상에서 최초로 느끼는 건 관록이었다. 그 무형의 압박감은 바로 어두운 세계에서의 관록이었다.
 또한 일견하는 순간, 그 관록은 자신의 그것과도 비교되게 마련이다.
 그런데 뭔가?
 고작해야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듯한 저 애송이에게 단번에 압도되고 말다니?
 마등이 무형의 압박감에 눌려서 가만히 숨을 죽이고 어찌해야 할지 궁리하고 있을 때였다.
 “쟤, 뭐냐?”
 그에게서 낮고 탄력 있는 음성이 조용히 흘러 나왔다.
 옆에서 누군가가 공손히, 그리고 재빨리 대답했다.
 “새 식구인 모양입니다.”
 “그래?”
 그는 곧 무심한 신색으로 두 눈을 스르르 내리감더니 말했다.
 “요즘에는 신고식을 저렇게 하게 되어 있나?”
 “아닙니다. 쟤가 뭘 몰라서······.”
 “모르면 가르쳐 줘야지.”
 그의 입술에서 찬바람이 이는 듯 서늘한 음성이 흘러 나왔다.
 “이봐, 잔비(殘飛).”
 마등에게 얻어맞고 축 늘어져 있던 뱀눈의 중년인이 씨익 웃으며 눈을 떴다.
 그는 곧 입 언저리를 문지르며 부스스 일어나 앉았다.
 “예.”
 “처음부터 다시 해라.”
 “알겠습니다.”
 잔비는 번들거리는 뱀눈으로 마등을 힐끔 올려다보았다.
 
 
 2
 
 
 마등의 안색이 납처럼 창백하게 변했다. 죽은 듯이 늘어져 있던 자가 멀쩡하게 일어나서 앉았기 때문이 아니었다.
 잔비(殘飛)!
 바로 그 이름 때문이었다.
 마등 자신 또한 관서(關西)의 암흑가를 주름잡던 거물(巨物)이었다.
 관서가 얼마나 넓은 땅인가?
 그 넓은 땅에서 거물 노릇을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잔비라니?
 잔비, 그 이름을 들은 적이 있었다.
 낙양의 암흑가에 도무지 상존 못할 악인(惡人)이 하나 있으니, 그가 곧 낙양 암흑가의 대부(代父)이며 일단 눈에 거슬리는 자는 남녀노소 신분 여하를 막론하고 반드시 두 눈을 멀게 해야 직성이 풀리는 독종이라고 하지 않던가.
 그의 양쪽 소맷자락에서 한꺼번에 폭출되는 삼십육 개의 비도(飛刀)는 여지껏 단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었다. 때문에 혈견휴(血見休) 비도탈명(飛刀奪命)이라고 불리는 사내가 바로 잔비였다.
 피를 보는 일을 하루도 거르지 않는다고 해서 혈견휴(血見休)라는 별호가 붙었다던가.
 또한 비도가 번쩍거리는 순간, 하나의 목숨이 이 세상에서 사라지기 때문에 비도탈명(飛刀奪命)이라고 했다던가?
 ‘맙소사!’
 그 거물 중의 거물이 바로 이 장작개비 같은 위인이었을 줄이야.
 갑자기 마등의 사지가 후들거리기 시작했고, 등줄기에서는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다··· 당신이······?”
 잔비는 묵묵히 일어나 담요로 창살을 가렸다.
 마등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일그러진 얼굴로 잔비에게 애원의 눈길을 보냈다.
 “혀··· 형님······.”
 잔비의 삐죽 튀어 나온 턱에 씨익 웃음을 흘렀다.
 그 웃음은 마등에게 공포감을 주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난 너 같은 촌놈을 아우로 둔 기억이 없다.”
 “혀··· 형님! 소··· 소제가 눈이 어두워··· 제발 살려 주십시오!”
 마등은 구슬픈 목소리로 더듬거리며 애원을 했다.
 “겁낼 것 없어. 이 곳에 들어오면 누구나 다 너 같은 실수를 범했으니까.”
 “제··· 제발······!”
 마등은 무너지듯 털썩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이마가 깨지도록 머리를 바닥에 처박았다.
 퍽-!
 잔비의 발끝이 흉기처럼 마등의 명치에 꽂혔다.
 “욱!”
 마등의 육중한 몸이 새우등처럼 휘어졌다. 동시에 그의 두 눈이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만큼 크게 확산되었다.
 그가 앞으로 고꾸라지려는 찰나, 이번에는 뼈다귀로 뭉쳐진 듯한 주먹이 그대로 그의 턱에 작렬했다.
 꽈득-!
 “아욱!”
 턱이 젖혀지며 마등의 몸이 뒤로 넘어가려 했다. 그러나 몸뚱이가 넘어가기 전에 다시 복부에 발끝이 쑤셔들듯 박혔다.
 “웨엑!”
 마등이 앞으로 휘청하며 뱃속의 오물을 쏟아 내는 순간, 다시 번개같이 주먹이 턱에 작렬했다.
 퍽- 퍽-!
 턱, 아랫배, 턱, 아랫배··· 그것은 잔인하다기보다 차라리 절묘하다고 해야 할 타법(打法)이었다.
 마등은 쓰러질 수조차 없었고, 연신 앞으로 꺾였다 뒤로 젖혀졌다 하며 완전히 떡사발이 되고 말았다.
 벌써 몇 번이나 선 채로 혼절했다 깨어나기를 반복했는지 모른다.
 그래도 잔비의 손과 발은 잠시도 쉬지 않았다.
 “끄륵··· 끅······.”
 마등의 입에서 괴상한 소리가 흘러 나왔다.
 만약 그 상태가 조금만 더 계속되었더라면 마등은 완전히 미쳐 버렸을지도 몰랐다.
 비로소 그가 아무런 고통조차 느낄 수 없을 지경이 되었을 때, 잔비는 손을 툭툭 털며 뒤로 물러섰다.
 쿵-!
 마등은 뻣뻣하게 굳은 자세로 바닥에 고꾸라졌다.
 잔비는 초죽음이 된 마등의 머리채를 거머쥐더니, 질질 끌고 중앙의 소년 앞에 다가왔다. 바로 그 무형의 압박감으로 마등의 기를 죽여 버린 그 눈빛의 주인에게로.
 소년은 기다리기가 지루했던 듯 따분한 어조를 나직이 흘려 냈다.
 “이제 끝났나?”
 잔비는 공손히 대답했다.
 “예.”
 “또 깨어나면 딴소리 하는 거 아닐까? 예전의 너처럼 말이야.”
 잔비는 마른 턱에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헤헤··· 아마 그렇지는 못할 겁니다.”
 한편, 마등은 비몽사몽 간에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몽롱한 의식 상태에서도 그의 가슴은 놀라움으로 물들었다.
 도대체 누군가?
 저 소년이 누구길래, 낙양 암흑가의 대부 비도탈명 잔비가 저렇듯 양처럼 고분고분하단 말인가?
 마등은 퉁퉁 부어 오른 눈두덩이를 힘겹게 치켜떴다. 그리고 소년을 올려다보았다.
 마등의 흐릿한 시선이 소년의 시선과 부딪쳤다.
 예의 그 냉혹하고 고요한 눈길.
 소년은 처음으로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떠올렸다.
 그저 한 줄기 희미한 미소에 불과했건만, 마등은 그것을 보는 순간 저 미소는 어떤 불가능한 일이라도 능히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신비의 마력(魔力)을 지니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어째서 그런 느낌이 들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낙양의 암흑가를 지배하는 비도탈명 잔비를 순한 양처럼 다스리는 힘을 가진 소년이기에 아무 저항 없이 그렇게 느꼈을 뿐이었다.
 소년이 물었다.
 “이젠 내가 누군지 알겠나?”
 마등은 엉겁결에 급히 대답했다.
 “아, 압니다.”
 “누구지?”
 마등의 안색이 핼쑥하게 변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소년을 모르니까.
 소년은 재차 고요한 어조로 말했다.
 “내가 누구냐고 물었다.”
 “그··· 그게······.”
 그의 뒤통수에 잔비의 발끝이 무자비하게 내리꽂혔다.
 뻑-!
 마등은 눈앞에서 찬란히 피어나는 불똥을 보았다. 그의 몸이 앞으로 확 처박혔다.
 “우욱······!”
 그의 입에서 피거품이 새어 나왔다. 그러나 고통을 느낄 겨를도 없었다. 뒤에서 잔비의 억양 없는 어조가 무심히 들려 왔던 것이다.
 “너 혹시 졸고 있는 게 아니냐?”
 마등은 다급히 퉁기듯 벌떡 일어섰다.
 “아, 아닙니다!”
 마치 짐승이 흐느끼는 듯한 울부짖음이었다.
 소년이 그런 그를 힐끔 응시했다. 여전히 질식할 듯한 무형의 압박감을 담고서.
 “내가 누구냐?”
 “모, 모릅니다.”
 마등의 전신에 식은땀이 쫙 흘렀다.
 그의 대답에 소년의 눈살이 가볍게 찌푸러졌다.
 “몰라?”
 마등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사, 살려 주십시오!”
 마등은 코와 가슴을 바닥에 처박고 납작하게 엎드렸다.
 소년은 그를 지그시 응시하더니 피식 웃었다.
 “안심해. 너 죽일 놈, 여기 없다.”
 “고··· 고맙습니다!”
 “좋아, 인사성이 밝아 귀여워해 주고 싶어졌다.”
 “귀여워해 주십시오!”
 마등은 저승문에서 되살아난 듯한 표정으로 부르짖었다.
 “이런 미친 놈! 귀여워해 줘? 정말 웃기네.”
 잔비가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내뱉었다.
 “자··· 잘못했습니다.”
 “됐다.”
 소년은 의외로 부드러운 어조를 흘려 냈다.
 “물러가.”
 “가, 감사합니다.”
 마등은 소년의 정체를 묻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았으나, 감히 묻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잔비가 그의 머리채를 덥석 움켜 잡았다.
 마등은 머리카락이 몽땅 뽑혀 나갈 지경이었지만 아무 내색도 할 수가 없었다.
 “따라와, 이 녀석아! 더 이상 설형님 앞에서 주접떨지 말고.”
 “아, 알겠습니다.”
 그래도 마등은 머리채를 잡힌 채로 넙죽 소년에게 절을 했다. 어쩐지 소년에게만은 최대한의 공경을 보여야만 될 것 같았던 것이다.
 이어, 그는 몸을 일으키려다 말고 갑자기 멈칫 벼락에라도 맞은 듯 몸이 굳어지고 말았다.
 - 설형님!
 그의 두 눈이 찢어질 듯 부릅뜨여진 건 다음 순간이었다.
 “바··· 방금··· 설(雪)······.”
 그제사 무언가가 생각난 듯 잔비에게 더듬거리며 묻는데, 잔비는 씨익 냉소를 지으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돌대가리 같은 놈! 이제야 눈치를 챈 모양이군.”
 마등의 사지가 사시나무 떨리듯 부들거렸다.
 “그··· 그러니까, 분명히······.”
 “그래, 이 녀석아! 밤비(野雨) 속의 붉은 늑대. 북경(北京) 암흑가의 황제이신 야우혈랑(夜雨血狼) 설유흔(雪幽痕)이 바로 저분이시다.”
 “부··· 붉은 늑대!”
 마등의 눈자위가 홱 돌아갔다.
 숱한 잔비의 발길질에도 의식을 잃지 않았던 그가 완전히 실신해 버린 건 결코 그의 탓이 아니었다.
 야우혈랑 설유흔!
 바로 그 이름 때문이었다.
 마등은 속으로 목이 터지도록 부르짖었다.
 - 하늘이시여, 제가 아직까지 살아 있게 된 것을 감사드립니다!
 쿵-!
 의식을 잃으면서 그의 가슴 속에서 소리 없는 외침이 울려 퍼졌다.
 - 야우혈랑 설유흔을 만났다!
 잔비, 그는 냉막한 눈길로 혼절해 버린 마등의 몸을 응시했다.
 그는 곧 마등의 축 늘어진 몸뚱이를 질질 끌고 가 한쪽 구석에 처박았다.
 “시시껄렁한 촌놈 같으니······.”
 그리고 정적.
 예의 그 죽음 같은 정적이 다시 계속되기 시작했다. 마치 무덤 속 같은 정적이.
 그리고 그 정적 속에서 한 쌍의 눈빛이 불꽃처럼 소리 없이 타올랐다. 어둠을 밝히는 불꽃으로.
 
 
 3장 월영십팔객(月影十八客)
 
 
 1
 
 
 정녕코 죽음이 아니면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자.
 반드시 죽여 버려야겠다고 마음을 굳혀 버린 자.
 도저히 한 하늘 아래선 같이 살아갈 수 없다고 인정되어 버린 자.
 있나?
 그런 사람 있으면 하늘을 보라.
 십오야(十五夜) 만월(滿月)이 두둥실 걸린 그런 밤하늘을 보라.
 월영(月影).
 달빛 그림자 길게 드리우며 그들은 나타날지니, 소원을 말하라.
 지닌 바 황금이 적으면 그대의 목숨이 사라질 것이요, 지닌 바 황금이 풍족하다면 모든 소원이 그들을 통해 이루어질 것이다.
 십오야의 월영이 그대를 비추리라.
 그대의 삶은 바로 월영의 것, 그대의 죽음도 바로 월영의 것.
 월영이 그대를 비추리라.
 
 ***
 
 전설(傳說), 그것은 환상(幻想)이며 신비(神秘)였다. 또한 전율이며 공포(恐怖)였다.
 월영림(月影林), 어디에 있는지는 모른다. 어떤 인간들로 이루어진 곳인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알고 있는 건 단지 이 하나의 사실뿐.
 - 황금(黃金)만 주면 어떤 불가능도 가능케 하는 이 시대 최강의 전문 살수조직(專門殺手組織)!
 그렇다. 월영림(月影林)은 전문적인 직업 살수조직이었다.
 살인(殺人)의 천재(天才)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그 천재들은 언제부터인지 세인들 간에 월영도객(月影刀客)이라 불리고 있었다.
 지난 이백 년 이래 이들에게 청탁되었던 일이 한 번이라도 실패했다는 말은 농담 삼아서라도 들린 적이 없었다.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은 그뿐이었다.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신비의 단체, 환상을 실현하는 신화창조의 단체.
 월영림(月影林)은 그런 곳이었다.
 그런데 서찰, 어떤 경로를 통해 알게 되었고 누가 갖다 놓았는지도 모르는 서찰이 월영림을 찾아왔다.
 분명코 누군가의 죽음을 청탁하는 살인청구서일 터······.
 십오야의 달(月)이 휘영청 밝던 시각, 사자(死者)들의 고향이라 일컫는 북망산(北邙山) 어귀의 한 무덤 앞에 이 서찰은 놓여졌다.
 무엇이 들었는지 알 수 없는 거무튀튀한 빛깔의 다섯 목궤와 함께.
 달빛 아래 드러난 서찰의 글씨.
 
 <수신(受信):월영림 문주(門主) 친전(親前).
 청탁 내용:종신수 이 인(人)의 구출에 관한 건(件).
 구금 장소:사천(四川) 지옥성 제구십구호 뇌옥.
 구출 대상:신품대공(神品大公) 백무결, 야우혈랑(夜雨血狼) 설유흔.
 소요 기간:일 개월(個月).
 대가:황금(黃金) 백 관, 성사 후 황금 백 관 추후 지급 예정.
 기타:일단 지옥성 밖으로 구출해 내는 것으로 귀림(貴林)의 임무는 종결된 것으로 간주되며, 그 후 이 인(人)의 처리 문제는 귀림에 전폭적으로 위임함.
 화(花)>
 
 화(花), 꽃이라는 이름의 신비인이 월영림을 통해서 지옥성의 두 소년을 구해 달라고 청탁해 온 것이다.
 대가로 다섯 개의 목궤 속에 황금 백 관이 들어 있었다.
 일이 성공되면 또 다시 다섯 개의 목궤에 황금 백 관이 실려 올 것이다.
 그러나 지옥성에서 살아 있는 사람을 구해 낸다는 것은 꿈 같은 일이었다.
 하지만 서찰은 분명히 말하고 있었다. 불가능을 가능케 하라고.
 서찰과 함께 도착한 다섯 개의 목궤 속에는 청탁금 황금 백 관이 정확하게 들어 있었다.
 지금까지 이런 거금의 청탁금을 내놓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황금 백 관은 능히 성(城) 하나를 통째로 살 수가 있는 거금이었다.
 천하에서 황금 백 관을 대가로 월영림에 청탁할 수 있는 자는 결코 흔치 않았다.
 화(花), 그는 누굴까?
 그런데 서찰과 함께 다섯 개의 황금 목궤가 월영림에 도착한 바로 그 시각이었다.
 
 ***
 
 지옥성주(地獄城主) 구유대인 왕옥상은 전형적인 관료 출신으로서, 특유의 자존심과 긍지가 대단한 위인이었다.
 그의 취미는 식도락(食道樂)이었다.
 황량한 오지(奧地)를 지키다 보니, 별다른 취미는 생각할 수도 없었는지도 모른다.
 술은 그의 체질에 맞지 않았다. 색(色)도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먹는 것을 즐길 뿐이었다.
 지금 그는 자신의 집무실에서 저녁식사를 즐기고 있었다.
 무엇인가 음식을 입에 넣고 씹는 순간만이 그에게 최고의 행복한 순간이었다.
 그가 지금 입 안 가득히 넣고 오물거리며 씹고 있는 것은 후뇌요리였다.
 후뇌는 그가 가장 좋아하는 요리로, 원숭이 골에 백삼십 종의 양념과 마흔일곱 가지 살코기를 버무린 진귀한 요리였다.
 상 위에는 아직 반이나 남은 원숭이골이 접시에서 흰 김을 모락모락 피워 내고 있었다.
 웬만큼 비위가 좋지 않고는 못 먹는다는 원숭이골을 왕옥상은 천천이 음미하듯 즐겼다.
 옆에는 서기 당결이 시립해 있었다.
 당결은 왠지 몹시도 초조한 표정이었다.
 가슴에 모아진 그의 두 손에는 한 통의 서찰이 들려져 있었다.
 왕옥상은 두 손으로 후뇌(後腦)를 받쳐 들었다.
 후뇌의 식사는 밑바닥에 깔린 국물을 마시는 것으로 끝이 난다.
 당결은 그가 얼른 그것을 마시길 기다리는 듯했다.
 그러나 왕옥상은 마시려다 말고 힐끔 곁눈으로 그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거, 어디서 주웠다고 그랬나?”
 당결은 기다렸다는 듯 수중의 서찰을 들어 보이며 황급히 대답했다.
 “성주님의 침상 머리맡에서입니다.”
 왕옥상은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다.
 “내 침상 속에서? 거긴 왜 들어갔나?”
 “오늘 아침 말씀드린 이불을 새것으로 갈기 위해서였습니다.”
 “아, 그랬었지. 잊고 있었군.”
 왕옥상은 눈을 가늘게 떴다. 이어 그는 후뇌요리를 천천히 마시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는 접시를 식탁 위에 내려놓은 채 등받이 깊숙이 상체를 파묻었다.
 그리고 통통하고 하얗게 살찐 손으로 후식(後食)인 호박씨를 하나씩 집어서 까먹기 시작했다.
 아주 조심스럽게, 그리고 정성을 다해 씨를 까서 한 알씩 입 안에 넣고 오물거리다가는 생각난 듯 꿀을 가미해서 만든 수박 화채를 한 모금씩 마셨다. 그러다가는 손을 옮겨 땅콩을 꿀에 묻혀 씹어댔다. 그리고 다시 만두 열다섯 개와 포도 한 송이를 먹어치운 뒤 에 길게 트림을 하고 나서야 오랜 식사를 끝냈다.
 왕옥상이 거의 한 시진 반이나 식사를 하는 동안, 당결은 수없이 침을 삼키는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왕옥상이 식사를 끝내자, 당결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당결은 습관처럼 재빨리 상 위의 그릇들을 치웠다.
 상이 모두 치워지자, 왕옥상은 식탁 위에 두 발을 척 올려놓았다.
 그는 느긋한 표정으로 지그시 눈을 감으며 말했다.
 “읽어 봐.”
 당결은 즉시 서찰을 펼치고 읽어내리기 시작했다.
 서찰을 잡은 그의 손이 미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 내용인 즉, 아래와 같았다.
 
 <거두절미하고 본론만 말씀드리겠소.
 만약 그대가 계속 지옥성주로서 식도락을 즐기고자 한다면 보다 더 정신을 차려야 할 것이오.
 아시겠소? 지금 지옥성 내에는 희대의 대탈출계획이 진행 중이오.
 수천, 아니 수만의 죄수가 이 일에 가담되어 있으며 그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이 일을 진행해 왔소.
 짐작컨데 탈출 시기는 한 달 이내가 될 듯하오. 만반의 준비가 있어야 될 것이오.
 귀하의 식도락을 존중하는 사람으로부터>
 
 “이··· 이상입니다.”
 당결은 하얗게 질린 표정으로 왕옥상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왕옥상은 여전히 느긋하기 그지없었으며, 안색 하나 변함이 없었다.
 “내 식도락을 존중한다고? 아주 좋은 사람이로군.”
 “그··· 그렇습니다.”
 당결이 억지로 웃음을 지으며 왕옥상의 비위를 맞췄다.
 배가 잔뜩 부른 왕옥상은 잠이 쏟아지는 듯 눈을 내리감았다.
 당결은 숨을 죽이고 왕옥상이 잠이 들었는지 숨소리를 듣기 위해 애를 썼다.
 “으음······!”
 별안간 왕옥상이 눈을 떴다. 하지만 눈에는 잠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그는 눈을 껌벅거리며 불쑥 입을 열었다.
 “이봐.”
 “예!”
 “혹시 이쑤시개 같은 거 없나?”
 “이··· 있습니다.”
 당결은 호주머니를 뒤적뒤적하더니 이쑤시개를 찾아 건넸다.
 이쑤시개를 즉시 대령하지 못한 죄로 봉록(俸祿)이 일 할(割)이나 깎였던 그는 이런 시시껄렁한 것까지 챙기고 다녀야 했다.
 왕옥상은 이쑤시개를 힘있게 잡더니, 이빨 구석구석을 쑤셨다.
 이윽고 그는 이쑤시개에 뽑혀 나온 음식 찌꺼기를 탁 뱉고 나서 말을 꺼냈다.
 “이번 달엔 제육호 요리사의 봉급에서 은자 두 냥을 공제토록.”
 “예?”
 “너무 질긴 고기를 넣었어. 양념도 약간 짠 것 같고 말이야.”
 “아, 알겠습니다.”
 당결은 급히 품에서 장부를 꺼내 기록했다.
 그가 막 붓을 놓으려는 순간, 왕옥상의 음유한 음성이 그의 귓속을 파고 들었다.
 “오늘이 며칠인가?”
 “육월(六月) 십칠일(十七日)입니다.”
 “음······.”
 왕옥상은 나직한 침음성을 흘려 내더니, 이어 나른한 음성으로 말했다.
 “내일 날이 밝는 대로 일급전령(一級傳令)을 어황감찰부(御皇監察府)로 띄우도록.”
 당결의 눈빛이 반짝 빛났다.
 “내용은 무엇입니까?”
 “천추검단(千秋劍團)에 모처럼 일거리가 생길 것 같다고 해라.”
 “알겠습니다.”
 당결은 즉시 허리를 꺾었다.
 “쯧쯧, 불쌍한 녀석들 같으니.”
 왕옥상은 다시 스르르 눈을 내리감았다.
 “탈출을 모의한다 이거지? 그거 재미있겠군. 모처럼 재미있는 일이 생겼어. 요사이 아주 지루했는데.”
 말은 그렇게 하고 있었으나, 그의 머릿속은 어느 새 이불 속으로 기어 들어가 자고 싶은 생각으로 가득했다.
 “이봐, 이 서찰을 누가 보냈는지 짐작이 되나?”
 왕옥상이 졸음이 가득한 눈으로 당결을 힐끔 쳐다보며 물었다.
 “저··· 전혀 짐작이 되지 않습니다.”
 “멍청하긴, 짐작할 수 없다는 건 당연한 게 아닌가? 나도 짐작이 안 되는데, 네놈이 무슨 재주로 짐작할 수 있겠어!”
 “마··· 맞습니다요.”
 “난 지금부터 자야겠다. 그러니 일을 모두 뒤로 미뤄.”
 왕옥상은 입이 찢어지도록 하품을 하고서 의자에서 비대한 몸뚱이를 간신히 일으켜 세워 뒤뚱거리며 침상으로 옮겼다.
 
 ***
 
 탈출은 없다고 했다. 애초부터 꿈도 꾸지 말라고 했다.
 단 하나 유일한 탈출은, 죽어서 그 시체가 버려지는 것이라 했다.
 이것은 지옥성이 생겨난 이래 단 한 번도 바뀐 적이 없는 절대(絶對)의 철칙이었다.
 그런데 오래 전부터 이 절대에 도전코자 하는 전무후무의 대탈출 계획이 귀신도 모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그것은 수만 죄수들의 왕자(王子)로 불리는 이 인(人)이 종신수로 이 곳 지옥성에 들어오면서부터 시작된 일이었다.
 
 
 2
 
 
 눈(眼), 시퍼렇게 멍이 든 데다 퉁퉁 부어 올라 거의 감기다시피 한 눈.
 마등은 욱신거리는 통증을 이를 악물고 참으며 하나뿐인 그 눈에 더욱더 힘을 주었다. 창살에 바짝 얼굴을 들이댄 채.
 그에게 주어진 임무는 간수들이 오는 것을 감시하는 일이었다.
 통나무처럼 뻣뻣이 선 채 이러고 있자니 그것도 죽을 맛이었다.
 안 보겠지 싶어 잠시 눈을 감았다가 이미 다섯 번이나 엉덩이에 불이 났다.
 만약 한 번만 더 들키면 아예 이빨을 몽땅 뽑아 버리겠다는 잔비의 말이었다.
 마등은 그 말을 상기하며 필사적으로 버티었다.
 ‘젠장, 내가 어쩌다가 이런 문지기로 전락하게 되었는지 모르겠네.’
 한심했다. 더더욱 한심한 것은 자신을 벌써 두 시진째 이렇게 세워 놓고 정작 뒤쪽의 인물들은 꼼짝도 않고 누워 있다는 점이었다.
 하는 일도 없이 무덤 속처럼 고요하기만 한데, 감시는 무슨 놈의 감시가 필요하단 말인가?
 ‘나쁜 놈들 같으니. 괜히 헛고생만 시키고 야단들이야.’
 마등은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으하하······!”
 “와핫핫······!”
 돌연, 죽은 듯 누워 있던 인물들이 일제히 일어나 앉으며 광소를 터뜨리는 게 아닌가?
 마치 미친 작자들처럼 목이 찢어져라 터뜨리는 광소였다.
 마등은 깜짝 놀랐다.
 느닷없이 모두 함께 돌아 버리기라도 했단 말인가?
 그러나 마등은 감히 고개를 돌려 바라다볼 수조차 없었다.
 ‘광소를 터뜨릴 때 뭔가 마찰음이 들린 것도 같은데··· 뭘까?’
 마등은 괴이한 생각이 들었으나 호기심을 애써 억눌러 참았다.
 돌연, 광소 소리가 거짓말처럼 뚝 그쳤다. 이어 나직한 음성이 들려 왔다.
 “수고하셨습니다, 형님.”
 몇몇 인물들의 공손한 음성이 이어졌다. 그 속에는 설유흔의 조용한 음성도 있었다.
 “늦었구나, 무결(無缺).”
 마등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무··· 무결?’
 들은 적이 있었다. 아니, 들은 정도가 아니라 귀에 못이 박히도록 쟁쟁한 명성이었다.
 밤비 속의 붉은 늑대 설유흔이 이끄는 북경 암흑가에 나타나 손끝 하나 까딱이지 않고 제왕의 자리에 등극(登極)한 인물이 있으니···
 그는 야우혈랑 설유흔의 가장 절친한 친구요, 암흑가의 빛으로 불리우는 신비스런 기품의 소유자라고.
 신품대공(神品大公) 백무결!
 ‘바··· 바로 그란 말인가?’
 마등은 입 안이 바싹 타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등 뒤의 인물들이 한 곳으로 몰려가 뭔가 심각한 회의를 하기 시작하였다. 알아듣기 어려울 만큼 조그마한 목소리들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철커덩-!
 육중한 철문 소리가 통로 저편 끝에서 들려 왔다. 이어, 열려진 철문으로 눈부신 햇살과 더불어 일단의 무리들이 들어섰다.
 선두의 인물은 각진 네모꼴의 얼굴에 강직한 인상의 중년인(中年人)이었다.
 그는 금의무복 차림에 금빛 수실이 달린 장검을 옆구리에 차고 있었다. 바로 간수장 황충이었다.
 마등은 나직한 어조로 황급히 신호를 보냈다.
 “와, 왔습니다!”
 그러나 등 뒤에선 쥐죽은 듯 고요함만이 흐를 뿐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마등이 힐끔 곁눈질로 돌아보니, 처음 그가 돌아올 때와 똑같은 상황이었다. 눕고, 앉고, 자고, 이 싸움 시키고.
 마등은 좀 더 고개를 돌리려 했다. 신품대공 백무결을 보기 위해서였다.
 그 때 마등의 귓속을 찔러 드는 잔비의 송곳 같은 음성이 있었다.
 “나쁜 놈, 죽고 싶으면 무슨 짓인들 못해.”
 “음······!”
 마등은 기겁하여 다시 창살에 눈을 갖다 붙였다. 등골이 절로 오싹해졌다.
 ‘귀신 같은 놈, 내 머리만 쳐다보고 있나?’
 마등이 이를 부드득 가는 그 순간이었다. 황충이 수옥위사들을 거느리고 천천히 복도를 들어왔다.
 뚜벅- 뚜벅-!
 음산한 발소리, 오면서 그들은 각 뇌옥 안을 힐끔힐끔 뱀 같은 눈으로 훑어보았다.
 이윽고 황충 일행은 구십구호 뇌옥 앞에 당도하자, 일제히 멈추어 섰다.
 순간, 마등의 시선과 그들의 눈길이 딱 마주쳤다.
 황충은 안을 보고 싶었으나, 좁은 창살을 가린 마등의 얼굴 때문에 볼 수가 없었다.
 황충의 얼굴에 당혹이 스쳐갔다.
 기실, 가장 요주의 뇌옥이 구십구호(九十九號)였고, 다른 곳은 건성으로 지나친데 불과했다.
 황충은 눈썹을 찌푸리며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거기서 뭐하고 있는 건가?”
 마등은 그렇지 않아도 심사가 잔뜩 뒤틀린 판국이었다. 그는 퉁퉁 부은 눈을 험상궂게 일그러뜨렸다.
 “꺼져.”
 “이봐, 자리로 돌아가 앉······.”
 “꺼져, 이 자식아!”
 살기(殺氣) 어린 외침, 마등의 눈은 붉게 충혈된 채 광기(狂氣)로 번들거렸다.
 황충의 눈빛이 차가운 검날처럼 예리해졌다.
 “명령이다. 즉시 네 자리로······.”
 말은 이번에도 채 이어지지 않았다. 마등의 울부짖는 듯한 괴성이 터진 때문인데······.
 “이 자식아, 보면 모르겠나? 내 자리는 지금 서 있는 이 곳이란 말이다. 명령이고 나발이고 어서 꺼지란 말이다, 이놈아!”
 “음······!”
 황충의 안면 근육이 괴이하게 일그러진 채 실룩였다.
 입장이 바뀌어도 완전히 바뀐 것이다. 누가 죄수이고, 누가 죄수를 지키는 입장인지 알쏭달쏭하기조차 했다.
 일순, 뇌옥 여기저기서 왁자지껄한 웃음이 울려 퍼졌다.
 “쿡쿡······!”
 “하긴 그 말도 맞는 말이다. 저 위인의 자리는 틀림없이 지금 서 있는 창살일 테니까.”
 “킬킬··· 정말 재수 좋은 작자군. 구십구호에 들어간 것도 복이 터졌는데, 창살이란 안자리까지 차지하다니.”
 웃고 지껄이고 난리들이다.
 마등은 급기야 분통이 폭발했다.
 “어떤 잡종놈이 주둥이를 나불대느냐?”
 그러자 맞은편 뇌옥 창살에서 하나의 눈이 불쑥 나타났다.
 소름끼치도록 새파란 녹안(綠眼)은 말하고 있었다.
 “너, 지금 누구더러 잡종놈이라고 했느냐?”
 “너······.”
 “큭큭··· 실수한 거다, 너. 나중에 작업장에선 가능한 이 녹혈인도(綠血人屠) 어르신과는 마주치지 않도록 조심하거라.”
 말과 함께 녹안(綠眼)이 스르르 맞은편 창살에서 사라졌다.
 마등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충격을 받았다.
 “녹··· 혈······.”
 녹혈인도(綠血人屠) 관불사(官不死).
 온갖 사공(邪功)의 달인(達人)이며, 취미로는 여인의 시체를 파헤쳐 시간(屍姦)을 즐긴다는 흉마(兇魔).
 그 흉명(凶名)은 강호인이라면 삼척동자도 다 알고 있었다.
 악(惡)의 극단(極端)이라 일컬어지는 백골음풍장(白骨陰風掌)의 달인(達人).
 ‘아아, 도대체 이놈의 지옥성엔 어찌 저런 자들만 우글거리고 있단 말이냐?’
 마등은 사지에 맥이 쭉 빠지는 기분이었다.
 그러다 문득 그는 황충과 다시 눈길이 마주쳤다.
 마등은 애꿎은 분풀이라도 하듯 굶주린 늑대처럼 소리쳤다.
 “너, 아직도 안 갔냐?”
 “뭐······?”
 무엇을 생각했음인가?
 황충은 묵묵히 마등을 응시하다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몸을 돌렸다.
 그는 곧 뇌옥위사들과 함께 철문 밖으로 사라졌다.
 철컹-!
 두꺼운 철문이 굳게 닫히고, 다시 내부는 어두컴컴한 정적으로 뒤덮였다.
 ‘빌어먹을······.’
 마등은 퀭한 눈으로 맞은편 창살을 응시했다.
 “마등이라 했나?”
 조용한 가운데, 사람의 마음을 잡아끄는 기이한 힘이 담긴 음성이 울려 퍼졌다.
 음성이 들려 온 곳은 바로 그의 뒤쪽이었다.
 마등은 대번에 그것이 바로 신품대공 백무결의 음성일 것이라고 직감했다.
 “그··· 그렇습니다.”
 “이리로 오라.”
 “예? 아, 예예!”
 마등은 몽유병 환자처럼 멍한 신색으로 엉거주춤 돌아서서 비실비실 안쪽으로 걸어갔다.
 중앙에 야우혈랑 설유흔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앉은 한 인물이 보였다.
 신품대공 백무결!
 마등은 얼어붙은 듯 우뚝 멈춰 섰다.
 청년, 역시 소년이란 표현이 덕 적합하리라.
 그런데 도대체 이 사람이 인세의 속인인가? 천상(天上)의 옥인(玉人)인가?
 눈이 부시도록 잘생긴 모습. 아니, 잘생긴 정도가 아니었다.
 단 한 번 마주침으로써 보는 이의 영혼마저 송두리째 빨아들일 듯한 눈빛에, 불가사의한 매력을 느끼게 하는 입가의 희미한 미소는 또 어떤가?
 거기에 황족(皇族)마냥 잘 정제된 기품과, 천부적인 것으로 보이는 고귀한 위엄을 풍기고 있었다.
 손끝 하나, 옷깃 하나에도 상류사회(上流社會)의 귀족적(貴族的) 향기가 자연스레 서려 있었다.
 ‘미치도록 잘생겼군!’
 언뜻 마등의 뇌리에 스쳐간 생각이었다.
 저런 인물이라면 설혹 지옥에 갖다 놔도 보석처럼 찬연히 그 빛을 잃지 않을 것이며, 수천 수만 군중 속에 파묻힌다 해도 단박에 눈에 띄일 것이 확실했다.
 어둠의 화신인 듯한 설유흔과는 극히 상반된 기품과 기질이 마등을 숨조차 쉬지 못하도록 만들고 있었다.
 마등은 순간적으로 설유흔과 백무결을 번갈아 보며 기이한 혼란 속에 빠져들었다.
 뭐랄까? 둘 다 환장하도록 잘생겼는데도, 그 아름다움은 근본부터가 판이하게 달랐다.
 한쪽을 보면 화려한 꽃들이 피어 오르는 봄(春)이고, 또 한쪽을 보면 차가운 서북풍이 휘몰아치는 삭막한 광야의 겨울(冬)이다.
 ‘빛(光)과 어둠(暗)······.’
 마등의 돌머리에 언뜻 그렇게 생각이 스친 건 기적이었다.
 그래서였을까?
 두 사람은 어찌 보면 극히 잘 어울리는 상대였고, 달리 보면 바로 곁에 붙어 앉았는데도 까마득히 떨어져 앉은 듯 무관해 보였다.
 “부··· 부르셨습니까?”
 자신도 모르게 신음처럼 흘러 나온 마등의 음성.
 빛(光)이 조용히 미소했다.
 “그렇다. 내가 불렀어.”
 그렇다. 암흑가의 빛, 신품대공 백무결. 바로 그였다.
 “너, 지금 선 채로 자냐?”
 만약 잔비의 이 날카로운 음성만 없었더라면, 마등은 언제까지고 백무결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을 것이다.
 소스라치게 놀란 마등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그 자리에 넙죽 부복했다.
 “마등, 삼가 신품대공의 존체를 뵈오!”
 거창한 인사였다.
 백무결의 얼굴에 흰 선 하나가 그어졌다. 웃음이었다.
 우아한 가운데 절정의 품격이 느껴지는 그 특유의 웃음.
 그 웃음을 보고 있노라면 누구나 어떤 곤란함도 사소한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신비의 마력을 느낀다.
 말하자면, 암흑가 사람들의 마음을 휘어 잡은 가장 큰 무기가 바로 이 웃음인 것이다.
 웃으면서 백무결은 단아한 음성을 흘려 냈다.
 “편히 앉아도 좋아.”
 “감사······.”
 마등은 고개를 들고 앉으려 했다. 그 순간이었다.
 우두둑-!
 손마디 관절을 꺾는 소리가 마등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힐끔 뒤를 보니, 잔비가 흉측한 미소를 떠올린 채 노려보고 있었다.
 ‘젠장······.’
 마등은 약간 고개만 들고 어색한 웃음을 떠올렸다.
 
 
 3
 
 
 “말씀은 고맙습니다만, 이 상태가 좋습니다.”
 “그대의 가장 자신있는 장기는 무엇인가?”
 마등은 잠시 생각하더니, 멋쩍은 표정을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
 “워낙 다양해서··· 하지만 그 중 손꼽으라면 아무래도 공갈, 협박입니다.”
 “음······.”
 백무결은 잠시 생각하더니 부드러운 억양으로 물었다.
 “듣자하니 탈출에도 상당히 조예가 있다던데?”
 “그렇습니다.”
 “탈출 횟수는?”
 “여섯 번입니다.”
 마등이 주저 없이 대답했다.
 “이번에도 해치울 생각은 없나?”
 백무결은 입가에 야릇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게······.”
 마등의 신색이 침통하게 굳어졌다.
 “청성파(靑城派)와 개방( )의 문옥(門獄), 거기다 가장 탈출이 어렵다는 자금뇌옥(紫禁牢獄)까지도 거뜬히 빠져 나온 저입니다. 그러나······.”
 “그러나?”
 마등은 외눈을 껌벅껌벅하더니 한숨을 푹 내쉬었다.
 “자신없습니다. 이 곳 지옥성만은 도저히 자신이 서질 않습니다.”
 백무결은 문득 옆의 설유흔을 힐끔 응시했다.
 그는 무표정했다. 어찌 보자니 잠들어 있는 것도 같았다.
 “탈출은 대개 어떤 식으로 했나?”
 백무결은 다시 마등에게 시선을 보냈다.
 “한 번은 감시자의 주위가 흐트러졌을 때 때려눕히고, 나머지는 모두 땅굴을 통해서였습니다.”
 “땅굴?”
 백무결은 두 눈에 언뜻 이채를 떠올렸다.
 “그렇습니다. 저는 본래 광부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광산(鑛山)에서 자라나서 이십 세 이전까진 줄곧 땅만 파는 게 제 직업이었습니다.”
 “흠······.”
 백무결은 의미심장한 눈빛을 발했다.
 “그렇다면 땅 파는 솜씨만은 더욱 발전했겠구나.”
 “발전이라기보단······.”
 마등은 어깨를 으쓱거리다 말고, 갑자기 외눈을 부릅 치뜨더니 안색을 딱딱하게 굳혔다.
 “그··· 그럼 혹시?”
 신음처럼 마등의 입에서 일성이 터져 나왔다.
 백무결은 조용히 미소지었다.
 “그대의 형량(刑量)은?”
 마등의 이마에 식은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조··· 종신형입니다.”
 “설마하니 이 곳에 뼈를 묻고자 하는 건 아닐 테지?”
 “하, 하지만 이 곳은······.”
 “그래, 지옥성이지. 요행히 이 곳을 벗어난다 해도 살아서 중원 땅을 밟을 확률은 거의 없다.”
 마등의 눈이 커졌다.
 “음······!”
 “사방 이천 리(里)는 모래땅(沙土)이고, 게다가 유사하(流沙河)와 맹독(猛毒)들을 뿌리치고 벗어나기란 완전히 불가능하지.”
 “그··· 그걸 아시면서도······.”
 마등은 이마의 식은땀을 훔쳐 내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백무결은 잠시 뭔가를 생각하듯 조용히 침묵했다.
 그 때였다. 이제껏 말이 없던 설유흔이 눈을 감은 채로 억양 없는 음성을 흘려 냈다.
 “마등.”
 마등은 황급히 그를 향해 넙죽 머리를 처박았다.
 “예, 형님!”
 “너는 사람이 살아가는 데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전혀 예상치 못했던 질문이었다.
 하지만 대답을 지체했다간 또 어디가 작살날지 모르는 일이 아닌가?
 마등은 급히 생각나는 대로 대답했다.
 “술과 여자! 그리고 돈과··· 또······.”
 설유흔은 피식 웃었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더니 옆으로 힐끔 턱짓을 했다.
 “잔비.”
 “예.”
 잔비는 마등을 험악한 눈빛으로 응시하더니, 설유흔을 향해 공손히 대답했다.
 마등은 전신을 부르르 덜었다.
 ‘조··· 좀 더 신중했어야 하는 건데······.’
 그러나 설유흔의 입에선 전혀 엉뚱한 소리가 흘러 나오고 있었다.
 “나, 냉수 한 그릇만 주겠나?”
 “예.”
 잔비는 즉시 한쪽 구석의 물통에서 물을 한 쪽박 가득 떠 왔다.
 “줘라.”
 설유흔은 턱짓으로 마등을 가리켰다.
 “예.”
 잔비는 쪽박을 지체 없이 마등에게 건넸다.
 마등은 그만 얼떨해지고 말았다. 그는 비로소 어제부터 자신이 물 한 방울 마시지 않았다는 것을 상기했다.
 잔비가 눈빛을 차갑게 굳혔다.
 “받어, 녀석아.”
 “미, 미안해서······.”
 “이 자식이?”
 마등은 신속하게 쪽박을 두 손으로 받았다. 그는 단숨에 쭉 물을 들이마셨다.
 시원했다. 냉쾌(冷快)한 기운이 전신 구석구석 싸늘히 퍼지는 느낌이었다.
 마등은 설유흔을 향해 비굴스러울 정도로 웃음지었다.
 “감사합니다, 형님!”
 설유흔은 거의 무표정했다.
 “방금 네가 마신 게 뭔지 아나?”
 “무··· 물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 물 없인 단 하루도 살아갈 수 없다. 맞나?”
 “맞습니다.”
 “지옥성은 분명 사막 한가운데 있다. 맞나?”
 “맞습니다.”
 “사막이란 원래부터 물이 날 수 없는 곳이다. 그런가?”
 “맞습니다.”
 묻는 설유흔의 음성도 기계적이었으나, 마등은 거의 정신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만 있었다.
 설유흔의 억양 없는 음성은 뭐랄까?
 더없이 나직하면서도, 지극히 차갑고, 말할 수 없이 산뜻하며, 또 한 칼로 자르듯 명료했다.
 그렇다. 듣는 이로 하여금 확고한 믿음을 느끼게 하는 음성, 전형적인 명령투의 그 음성이 계속 이어졌다.
 “그런데도 넌 지금 분명히 물을 마셨다. 아니, 이 곳 지옥성의 죄수들이라면 소량이나마 매일 물을 마신다. 이 점을 어떻게 생각하나?”
 마등은 생각해 볼 것도 없다는 듯 즉시 대꾸했다.
 “그건 이 지옥성에 물이 있다는 결론입니다.”
 “지형적 조건으로 보아 수만 명이 마시는 물의 양을 밖에서 운반해 온다는 건 불가능하다. 이건 또 어떻게 생각하나?”
 “아······!”
 마등의 표정이 심각하게 굳어졌다. 그는 곧 흠칫 몸을 떨더니 외눈을 번쩍 빛냈다.
 “그··· 그럼······”
 “그렇다. 이 지옥성에는 물이 솟아나고 있다. 그것도 적지 않은양이.”
 마등는 꿀꺽 침을 삼켰다
 “혀··· 형님이 말씀하시는 건?”
 “물은 땅에서 솟아나게 마련이다.”
 말을 마침과 동시에, 설유흔의 시선이 처음으로 마등을 향해 정면으로 고정되었다.
 마등의 얼굴이 서서히 어떤 흥분으로 뒤덮였다.
 설유흔이 물었다.
 “알겠나?”
 “압니다.”
 마등의 목소리는 조금 전과 달랐다. 조금 전에는 아무 의미도 없었지만 이제는 흥분되어 있었고, 힘이 담겨 있었다.
 “말해 봐.”
 “이 지옥성 땅 밑 어딘가에는 분명 거대한 지하수맥(地下水脈)이 흐르고 있습니다!”
 “계속해.”
 설유흔의 두 눈이 암천장공(暗天長空)에서 빛나는 별(星)처럼 신비로운 빛을 발했다.
 마등은 흥분한 어조로 정신 없이 말을 이었다.
 “물(水)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게 마련입니다. 곰곰이 생각해 본 결과, 지옥성이 있는 이 곳은 한마디로 고원지대(高原地帶)입니다.”
 “그 놈 제법이군. 계속해 봐.”
 “따라서 만약 이 곳을 흐르는 지하수맥을 따라가노라면 필경 무산삼협(巫山三峽) 중 어딘가에 당도하게 될 것입니다.”
 마등의 말이 끝나자, 설유흔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보일 듯 말 듯 스쳐 갔다. 그에게서는 극히 보기 드문 미소였다.
 그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매일 쓰는 물은 지옥성의 가장 중심부에 위치한 지옥정(地獄井)이란 곳으로부터 운반되어 나오고 있다. 철통 같은 경계가 펼쳐져 있음은 물론이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러자 마등은 생각하고 자실 것도 없다는 듯 당장에 외침성을 발했다.
 “땅굴을 팝니다! 지옥정까지, 귀신도 모르게 말입······.”
 퍽-!
 “우욱!”
 말하다 말고, 마등은 비명과 함께 앞으로 홱 고꾸라졌다.
 잔비가 그의 뒤통수를 걷어찬 것이다.
 “멍청한 녀석 같으니! 목소리가 너무 커.”
 “조, 조심하겠습니다.”
 아픔도 모르는 듯, 마등의 얼굴엔 기쁨과 흥분의 웃음이 가득했다.
 설유흔은 희미하게 미소했다.
 “잔비.”
 “예.”
 “큰일을 하실 분이다. 작업장에 가거든, 각별히 신경을 써서 보살피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공손한 대답과 함께, 잔비는 죽은 듯 엎드려 있는 마등의 머리채를 와락 움켜잡았다.
 “너, 자냐?”
 “아, 아닙니다.”
 “그럼 얼른 일어나, 이 녀석아!”
 “알겠습니다!”
 마등이 반사적으로 허리를 펴는 그 순간이었다.
 뎅- 뎅- 뎅-!
 멀리서 육중한 쇠종 소리가 울려 오기 시작했다. 취침 시간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종소리였다.
 
 ***
 
 “남옥(南獄) 쪽 사정은 어떻든가, 무결?”
 설유흔은 팔을 괴고 누워 백무결을 응시했다.
 성자(聖子)의 얼굴인 양 고요한 침묵 속에 잠겨 있는 백무결의 옆모습은 언제 보아도 아름답기만 하다.
 모든 죄수들이 깊은 잠에 빠진 늦은 시각, 눈을 뜨고 있는 이는 그들 두 사람뿐이었다.
 고요한 정적이 끈적끈적한 여운으로 두 사람을 휘감았다.
 “십 년(年) 이상의 행형수(行刑囚) 육천칠백 명이 이 일에 가담하기로 결정했다.”
 백무결은 맑고 잔잔한 눈길로 설유흔을 마주 보았다.
 “육천칠백이라······.”
 설유흔은 피식 웃었다.
 “많기도 하군 그래.”
 “마흔아홉 개의 비밀통로와 열두 개의 도주로. 그 곳으로 육천칠백 명이 한꺼번에 탈출을 감행한다. 여지껏 지옥성이 생긴 이래 이런 대규모의 탈출은 처음일 것이다. 아마 꽤나 볼 만할 거야.”
 백무결의 신색은 왠지 어두운 빛이었다.
 “그러나 그들 중 살아남을 수 있는 자는 어쩌면 아무도 없을지도 모른다.”
 “상관할 것 없어. 어차피 생사(生死)를 도외시한 도박이니까.”
 “유흔, 북뢰의 지하수로(地下水路)를 이용한 탈출은 가능하다고 생각하나?”
 설유흔은 잠시 침묵했다.
 문득, 그는 서서히 일어나 정좌(正坐)의 자세로 앉았다.
 “어쩌면 그것 또한 실패로 끝날지도 모른다. 그러나······.”
 깊숙한 그의 시선이 허공을 향했다. 허공에 꽂힌 그의 시선이 강렬한 빛을 발했다.
 “해야 한다. 선택의 여지는 없다.”
 나직한 가운데 칼로 자르듯 명료하고 산뜻한 어조였다.
 - 해야 한다! 정말로 선택의 여지는 없는 것이다!
 그것은 백무결도 마찬가지였고, 마등도 그랬으며, 잔비도 똑같았다. 평생을 뇌옥 속에서 보내야 하는 그들에게 길은 오직 하나뿐이었던 것이다.
 설유흔은 겨울 하늘에 차가운 별처럼 빛나는 시선을 백무결의 얼굴에 고정했다.
 “삼만여 명 죄수의 집단탈출. 천추검단 아니라, 제 할아비라도 그 많은 인원을 다 어쩌지는 못한다.”
 “음······.”
 “규모를 크게 잡은 것도 바로 그런 점을 노린 것이다. 내 말 알겠나? 설혹 생존자 중 우리 두 사람이 포함되지 않는다손 치더라도 이 일은 충분히 한 번쯤 시도해 볼 만한 가치가 있지 않느냐?”
 설유흔은 빙긋 웃었다.
 웃음, 이 하늘 아래 설유흔의 웃음을 이처럼 자주 대할 수 있는 인물은 오직 백무결뿐일 것이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무슨?”
 “만약 네가 내 친구가 아닌 적(敵)이라면, 이후의 내 일생은 몹시 피곤할 것 같다는······.”
 “싱겁긴.”
 설유흔은 툴툴 웃더니 벌렁 자리에 누웠다.
 “그 따위 시시껄렁한 얘기할 시간이 있으면 눈이나 좀 붙여 둬. 내일부턴 더욱 바빠질 것 같으니까.”
 “그래야겠지.”
 백무결은 묵묵히 설유흔의 누운 얼굴을 응시했다.
 정적, 바윗덩어리 같은 정적이 두 사람의 몸 위로 무겁게 내려앉았다.
 
 
 4장 십오야(十五夜)··· 탈출(脫出)의 밤
 
 
 1
 
 
 부글부글······.
 끓는 것은 유황(硫黃)이다.
 지하 백여 장의 깊고 깊은 거대한 암굴 속.
 흡사 하나의 지하광장과도 같은 이 곳은 자욱한 회백색 연기로 가득 차 있었다.
 중앙에는 시뻘건 유황(硫黃)이 둥근 거품을 뿜어 내며 끓어오르고 있었다.
 이름하여 유황연(硫黃淵).
 이 곳은 한마디로 인간지옥(人間地獄)과도 같았다.
 끓는 유황의 열기만도 가히 살인적인데다가, 회백색의 연기는 인체에 극히 해로운 유독성(有毒性) 기체였다.
 그 속에서 나무토막 같은 인간들이 벌레처럼 꿈틀거리고 있는 것이다.
 이 곳은 북뢰의 죄수 중 종신수와 사형수(死刑囚)들의 작업장이었다.
 남뢰의 죄수들처럼 그나마 햇빛 창창한 채석장(採石場)에서 맑은 공기를 마시며 일하는 게 이들의 소원이라면 소원이었다.
 드르륵-!
 손에는 무엇으로 만들었는지 유황에도 녹지 않는 긴 장대의 두레박 같은 물건을 들고, 죄수들은 그것으로 유황을 퍼다가 한쪽에 놓인 큰 철통에 쏟아 붓곤 했다.
 철통에는 긴 줄이 연결되어 있었다. 유황이 다 차면 철통은 기관장치에 의해 위로 올라갔다.
 드르륵-!
 누구 하나 입을 여는 죄수는 없었다. 모두가 그저 기계처럼 같은 동작만 반복할 뿐이었다.
 지독한 유황 냄새로 인해 안색은 밀랍처럼 창백하기만 했다. 더욱이 이미 오래 전에 죽어 버린 얼굴들처럼 모두가 무표정했다.
 대략 팔구천여 명 정도.
 상상할 수 있겠는가? 썩은 부패물이 고인 장독 밑바닥에서 수천 마리의 벌레들이 꿈틀거리는 모습을.
 그렇다. 죄수들이 꿈틀거리는 모습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유황연의 허공 오십여 장 위 불쑥 돌출한 암벽 위, 두 명의 위사(衛士)가 편한 자세로 앉아 바둑을 두고 있었다.
 아래쪽의 처절한 상황과는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특별히 감시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두 위사는 자신들에게 주어진 최대 과제가 바둑을 두는 것인 양 진지하게 몰두하고 있었다.
 때문에 그들은 보지 못했다.
 죄수들··· 삶의 의욕이라던가, 기타 인간의 표정이라곤 티끌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던 그들의 눈빛이 가끔씩 어떤 기대와 흥분으로 번뜩번뜩 빛나는 것을.
 “으아악······!”
 돌연, 한 소리 처절한 단말마의 비명이 장내를 뒤흔들었다.
 일순, 두 위사는 흠칫 아래를 응시했다.
 그러나 그들은 이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계속 바둑을 두었다.
 “으아아······!”
 그 처절한 비명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죄수들의 시선이 유황연에 일제히 집중되었다.
 한 사람, 육십 세 가량의 늙은 죄수가 유황연의 끓는 용암 속으로 가라앉는 중이었다.
 늙은 죄수가 끔찍한 고통과 공포로 물든 절박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사, 살려 줘! 나, 나 좀 살려 줘!”
 그러나 그를 거들떠보는 인물은 한 사람도 없었다.
 죄수들은 무표정하게 하던 일을 계속할 뿐이었다.
 “으아아! 나, 나 좀······!”
 앙상한 손의 허위적거림에 유황 속으로 자취를 감추는 데에는 별로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모든 것이 전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아니, 있다면 하나··· 바둑을 두던 위사 중 한 명이 장부를 꺼내 어느 이름 위에 붉은 줄 하나를 죽 그은 것뿐이었다.
 “에이, 귀찮아.”
 “정신 차려. 자네의 대마(大馬)가 모조리 협살당하기 직전이야.”
 
 <수인번호(囚人番號):육천칠백삼십오 번(六千七百三十五番).
 성명(姓名):냉조상(冷操相).
 별호(別號):단섬마도(斷閃魔刀).
 나이(年齡):육십이 세(六十二歲).
 기타:위의 자는······.>
 
 방금 죽은 자의 인적사항이었다.
 
 딸랑- 딸랑-!
 유황연의 휴식은 위사가 흔드는 방울 소리로부터 시작된다.
 한 시진, 죄수들은 이 시간 동안 간식으로 지급되는 만두 하나를 먹고 대부분 잠을 잔다.
 부르르······.
 괴괴한 정적에 휩싸인 채 유황 끓는 소리만이 장내에 울려 퍼졌다.
 그는 비교적 위사의 눈길이 닿지 않는 으슥한 곳의 돌벽에 기대앉아 있었다.
 그 옆에는 마등이 외눈을 굴리며 웅크리고 있었다.
 문득, 잔비는 만두를 어기적 씹으며 특유의 스산한 음성을 발했다.
 “슬슬 시작해 보지 그래?”
 “알겠습니다.”
 마등은 힐끔 위사 쪽을 올려다보더니, 들고 있던 만두를 수십 조각으로 잘게 쪼개었다. 이어 그것들을 돌벽 앞 바닥에 여기저기 뿌렸다.
 잔비의 각진 얼굴이 순간, 의혹으로 물들었다.
 “너, 지금 뭐하냐?”
 마등의 표정은 매우 진지했다. 그는 잔비의 질문에 툭 쏘아붙이듯 대꾸했다.
 “형님은 모르면 가만히나 계슈.”
 ‘엉?’
 잔비는 갑자기 변한 마등의 어투에 얼떨떨해지고 말았다.
 “너, 지금······.”
 그의 말은 채 이어지지 않았다. 마등이 고개를 홱 돌리며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기 때문이다.
 “자꾸 말 시킬 거요? 형님이 보시기엔 내가 지금 한가하게 장난이나 칠 사람으로 보이오?”
 “이··· 이게?”
 잔비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좋아, 좋아. 내가 참지.”
 이어, 기묘한 표정으로 다리를 쭉 뻗으며 괴소를 흘렸다.
 “젠장, 그저 무식한 죄가 있다 보니 이런 경우엔 별수가 없군.”
 마등은 외눈을 예리하게 번뜩이며 널려진 만두 조각들을 보고 있었다.
 도대체 무얼 하는 것일까?
 스스······.
 돌연, 미세한 기음(奇音)이 울려 퍼졌다.
 잔비가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쳐다보니, 주위의 돌틈에서 벌레들이 스물스물 기어나오고 있었다.
 붉은색에 전갈 모양의 벌레 떼들.
 마등의 외눈에 기광이 빠르게 스쳤다.
 ‘옳거니!’
 그가 내심 쾌재를 부르고 있을 때, 벌레 떼들은 만두 조각을 물고 다시 돌틈으로 기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마등은 예리하게 그것들을 훑어보더니 벌레 떼가 기어나온 돌벽
 앞으로 다가갔다.
 그의 동작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은밀하고 가벼웠다.
 그는 돌벽을 이러저리 훑어본 뒤 귀를 바짝 갖다 대었다. 이어, 그는 벽을 가볍게 손가락 마디로 두드려 보았다.
 탁- 탁-!
 견고한 소리가 울렸다.
 ‘이 곳은 아니고······.’
 그는 다시 옆으로 몇 발자국 이동했다. 그의 손이 재차 조심스럽게 벽을 두드렸다.
 탁- 탁-!
 ‘역시 막혔다!’
 위사의 날카로운 감시의 눈길을 피해야 함은 물론이고 엉거주춤한 자세에서 온갖 신경을 써야 하니, 그것은 실로 피곤하기 그지없는 중노동이었다.
 그러길 얼마나 지났을까?
 퉁- 퉁-!
 마등의 손끝에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탄력 있는 음향이 전해져 왔다.
 마등의 외눈이 번쩍 기광을 발했다.
 ‘여기다! 이 안에는 틀림없이 비어 있는 공간이 있다!’
 마등은 전율 같은 흥분을 느꼈다. 그는 본능적으로 위사들 쪽을 응시했다.
 위사들은 아예 보이지도 않았다.
 “형님.”
 마등의 얼굴이 가볍게 굳어졌다.
 “왜?”
 잔비가 실눈을 뜨며 그를 응시했다.
 “쟤들 어디 간 거요?”
 “어디 가긴? 우리도 쉬는데, 쟤들이 쉬지 않겠느냐?”
 잔비는 상체를 부스스 일으키며 힐끔 물었다.
 “어떠냐? 뭐 좀 발견했나?”
 마등은 씨익 웃었다.
 “내가 누구요?”
 “누구긴, 녀석아! 구십구 호에서 가장 말단 죄수지.”
 잔비는 얼굴 근육을 징그럽게 실룩이며 냉소했다.
 “흐흐··· 돌아가면 설형님께 잘 말씀드려 주시오. 이 마등이 정확히 한 달 이내에 시원한 물가로 안내해 드리겠다고.”
 마등이 흉물스럽게 웃었다.
 “그, 그럼······?”
 “어디 가서 삽이나 하나 구해 주슈. 내일부터 본격적인 작업에 착수할 테니까.”
 “이 귀여운 놈!”
 잔비의 비쩍 마른 얼굴이 희열로 물들었다. 그는 마등의 어깨를 힘있게 덥석 잡았다.
 “내 이름을 걸고 보장하마.”
 “뭘 말이오?”
 “만약 이 곳을 벗어나게 된다면 낙양 암흑가의 부총수(副總帥) 자리는 네놈 차지다.”
 “저, 정말이오?”
 마등의 외눈이 찢어져라 크게 부릅뜨여졌다.
 암흑가의 부총수(副總帥), 더욱이 낙양 암흑가 정도라면 그건 아무나 오를 수 있는 권좌(權座)가 아니었다.
 마등의 놀라움과 기쁨이 극에 달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이 잔비는 결코 허튼 소리를 하지 않는다.”
 잔비는 소리 없이 괴소를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오······.”
 “넌 그만한 능력이 있는 놈이다. 부족한 건 이 잔비가 채워 주면 될 테고.”
 “고··· 고맙소, 총수(總帥)!”
 마등은 거북이처럼 땅에 머리를 처박고 넙죽 절했다.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세월이었다. 하지만 한 달 후면 이 지긋지긋한 지옥성과도 끝이다!’
 잔비는 한(恨)과 희열이 범벅된 눈빛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그는 태어난 이래 처음으로 하늘에 감사했다.
 일인자(一人者)와 이인자(二人者), 빛과 어둠으로 불리는 암흑가의 두 제왕(帝王)을 만나게 해 준 하늘에.
 그렇다. 야우혈랑 설유흔이 계획을 입안(立案)하고 신품대공 백무결이 보충, 마무리한 대규모의 탈출계획은 완벽했다.
 적어도 잔비와 북뢰 죄수들이 보기에 이 어마어마한 대탈주 계획은 충분히 실현 가능성이 있었다.
 그리고 수십 개의 비밀통로와 도주로를 만들어 놓고 최종적으로 지하수맥에 관한 건을 계획하면서, 이 마등 같은 전문가가 들어와 준 건 정말 행운이었다.
 그러나 잔비는 몰랐다. 이 완벽한 계획에 실로 결정적인 오차가 생기고 있다는 것을 그는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지옥성주 왕옥상, 그에게 자신들의 움직임이 샅샅이 전해지고 있음을.
 
 ***
 
 정확히 닷새 뒤인 육월(六月) 스무여드레 날, 왕옥상에게 두 번째로 한 통의 서찰이 은밀히 전달되었다.
 
 <물(水)이오. 아시겠소?
 지옥정(地獄井) 아래를 흐르는 거대한 지하수맥(地下水脈)이오. 북뢰 최고의 거물(巨物)들은 바로 그 곳을 통해 귀하와의 인연을 끊고자 하고 있소.
 각별히 신경을 써 주십사 하는 뜻에서 두 번째 서찰을 보내 드리는 바이오.
 귀하의 체면을 극히 존중하게 여기는 사람으로부터>
 
 
 2
 
 
 “어떻게 생각하나?”
 불쑥 흘러 나온 왕옥상의 질문에 서기 당결은 어리둥절해지고 말았다.
 “무슨··· 말씀이신지?”
 “이 필체 말이야. 마치 용(龍)이 꿈틀대듯 수려하지 않나? 물론 용(龍)이 좀 병든 것 같긴 하지만.”
 “글쎄······.”
 당결은 눈을 껌벅거리더니 고개를 내밀고 힐끔 응시했다.
 그러나 그는 애시당초 필체 따윈 보지도 않았고, 단지 표정을 조금이라도 더 진지하게 보이도록 노력하며 기계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정말 훌륭한 필체입니다.”
 말은 그렇게 했으나 당결은 내심 왕옥상의 종잡을 수 없는 성품을 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젠장!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이 서찰은 도대체 누가 쓴 것이며, 어떻게 이 곳으로 두 번씩이나 들어왔는가에 대해 의문을 가져야 할 게 아닌가 말이다!’
 그렇다. 왕옥상은 정작 그처럼 중대한 문제에는 관심조차 두지 않는 듯했다.
 왕옥상은 오랫동안 서찰을 보고 있더니,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결정했다.”
 “무슨?”
 당결은 어떤 기대의 빛을 만면에 띠고 물었다.
 “평소 식도락 외에 한 가지쯤 더 취미를 가질 생각이었어. 그런데 그게 이제 생각났다.”
 왕옥상은 가느다란 눈을 좁히며 흡족한 음성을 흘려 냈다.
 당결은 기가 탁 막혔다. 그러나 그는 습관처럼 고개를 숙이며 공손히 물었다.
 “잘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떤 취미를?”
 “서예(書藝), 다시 말해 붓글씨를 공부하는 거다.”
 “그··· 그렇습니까?”
 “내일 아침 본좌의 침상 위에는 틀림없이 문방오우(文房五友)가 놓여져 있어야 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당결은 품에서 장부를 꺼내 기록하려다 말고 문득 의아성을 흘려냈다.
 “방금 문방··· 오우(五友)라 하셨습니까?”
 “답답한 친구 같으니. 설마하니 몰라서 묻는 건 아닐 테지?”
 “자, 자고로 문방사우(文房四友)라 해서 붓과 벼루, 먹, 종이를 일컫는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만······.”
 당결의 말은 채 이어지지 않았다. 왕옥상이 탁자를 내리치며 소리를 질렀기 때문이다.
 “이 바보야! 자고로 무슨 일을 할 때는 뭔가 먹어야 더 잘 될 게 아닌가?”
 “아······!”
 그제야 당결은 퍼뜩 깨달아지는 것이 있었다.
 “알겠습니다.”
 그는 재빨리 장부에 기록했다.
 
 <문방오우(文房五友)>
 
 ‘쉽게 말하자면 식사를 한 끼 더 늘리자는 것이군!’
 기록하면서 당결은 내심 한탄했다.
 왕옥상은 거구를 자리에서 일으키며 한탄했다.
 “에이, 답답한 친구 같으니.”
 문을 열려다 말고, 그는 뒤를 힐끔 돌아보며 생각난 듯 물었다.
 “어황감찰부에선 아직 아무 연락도 없나?”
 “연락이 있었습니다. 내일 오후까지 육백 명의 천추검단 인물들이 당도할 것이라고 합니다.”
 당결의 신색이 흠칫 굳어졌다.
 왕옥상의 가느다란 두 눈에 일순 독사처럼 차가운 광망이 떠올랐다.
 “탈출 규모가 규모인 만큼 전폭적인 추가 증원군이 필요할 것 같다고.”
 “알겠습니다.”
 “피곤하군.”
 쾅-!
 왕옥상은 문을 닫고 나갔다.
 당결은 굽혔던 허리를 폈다. 왕옥상이 사라진 문을 응시하는 그의 입가로 야릇한 미소가 스치고 지나갔다.
 ‘약간 모자란 듯하면서도 머리 쓸 건 다 쓰는 게 기특하단 말이야.’
 언뜻 스쳐 간 생각이었지만, 당결은 어쩌면 왕옥상이 처음부터 이 지옥성을 다스리기 위해 태어난 인물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스쳐 지나는 빛이라고도 하고 흐르는 물과 같다고도 하며, 그래서 붙잡지 못하는 게 세월이라 했던가?
 유월(六月)은 어느 새 지났고, 폭양(爆陽)이 이글거리는 칠월(七月)의 성하(盛夏)가 성큼 지옥성 위에 다가왔다.
 그 동안 지옥성은 외견상 그저 보통 때와 조금도 달라진 게 없었다.
 그러나 정중동(靜中動)이라고나 할까?
 두 개의 소리 없는 움직임이 은밀히 추진되는 가운데, 시간은 계속 흘러 칠월(七月)하고도 십오 일(十五日)로 접어들었다.
 그리고 지독한 무더위가 지옥성에 찾아왔다.
 그 무더위는 마등의 작업을 힘들게 만들었다. 그러나 마등은 잠시도 쉬지 않았다.
 하루 종일 땀에 젖어 있으면서도 손을 멈추지 않는 마등을 바라보며 잔비는 몹시 기뻤다. 그리고 속으로 다짐했다. 마등에게 반드시 부총수 자리를 주리라고.
 
 ***
 
 오늘, 오늘이다.
 지하수맥(地下水脈)으로 통하는 땅굴이 완성된 지 이틀이 지났다.
 최종 마무리를 비롯, 재점검을 완료한 지도 이미 하루가 지났다.
 십오야(十五夜)의 만월(滿月)이 하늘 한복판에 걸리는 시각, 우리는 행동을 개시할 것이다.
 “왜들 먹지 않는 건가?”
 이 곳은 구십구 호 뇌옥, 어두운 정적 속으로 설유흔의 음성이 조용히 울려 퍼졌다.
 점심식사로 각자에게 지급된 주먹밥 한 덩이, 평소라면 게눈 감추듯 먹어치웠을 그들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웬일인지 누구 하나 먹으려 하지를 않았다.
 모두 눈을 감고 죽은 듯이 앉아 있기만 했다.
 긴장, 흥분, 그것 때문이리라.
 설유흔의 입술 언저리가 가볍게 실룩였다.
 언뜻 그것은 미소처럼 보였는데, 자세히 보자니 그는 정말 웃고있었다.
 “갑자기 도(道)를 닦는 고승들이 된 것 같군. 표정들이 너무 엄숙해. 그러나 먹기 싫어도 먹어 두라고. 먹어야 작업장에 갈 게 아닌가?”
 작업장!
 그 말이 떨어진 순간, 모두의 눈이 번쩍 뜨여졌다.
 작업장이란 말이 갖는 의미, 그것은 곧 탈출이었다.
 어둠 속에서 무섭도록 새파랗게 빛나는 눈빛, 눈빛들!
 그렇다. 살고자 하는 도박(賭博)이다. 그것도 목숨이 걸려 있는 도박이었다.
 그러니 배를 채워야 할 게 아닌가?
 “으적··· 으적······.”
 “꾹.”
 모두가 약속이나 한 듯 일제히 주먹밥을 입 안에 쑤셔 넣더니, 정신 없이 씹어 삼켰다.
 마등과 잔비도 입 안 가득 주먹밥을 집어 넣고 씹어 대고 있었다.
 설유흔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옆으로 시선을 던졌다.
 백무결이 그림처럼 단아한 모습으로 눈을 감은 채 정좌해 있는 모습이 보인다.
 그도 긴장하고 있는 것일까?
 그 준수한 얼굴이 왠지 굳어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무릎 앞에는 주먹밥 한 덩이가 그대로 놓여 있었다.
 스윽-!
 설유흔은 그 주먹밥을 집어 그에게 내밀었다.
 “받아라, 무결.”
 “······!”
 “먹어 둬, 힘을 내야 할 테니까.”
 “힘이라······.”
 백무결의 감겨져 있던 두 눈이 천천히 뜨여졌다. 어둠 속에서 그의 눈빛이 고요하게 빛을 발했다.
 그는 설유흔을 깊숙이 응시하며 나직이 입술을 떼었다.
 “유흔.”
 설유흔은 희미하게 미소했다.
 “제왕답지 않은 모습이야.”
 “유흔, 너는······.”
 설유흔은 손을 들어 백무결의 말을 막았다.
 “아무 말도 하지 말자. 지금은 단지 이 한 덩이 주먹밥을 먹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한 덩이의 주먹밥이 주는 의미, 백무결은 그 의미를 알고 있었다.
 한 덩이의 주먹밥에 그들의 삶과 죽음이 걸려 있는 것이다.
 설유흔은 백무결의 손을 잡아 주먹밥을 쥐어 주었다.
 “나는 미친 듯이 휘몰아치는 태풍을 좋아한다. 그러나 그 태풍의 눈(目)은 거짓말처럼 잔잔한 법이지.”
 “그래······.”
 백무결은 주먹밥을 한 입 베어 물고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태풍의 핵(核), 태풍의 중심(中心), 나는 그것이 제왕(帝王)의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웃음, 그 어떤 어려움도 사소한 것으로 만들어 버릴 듯한 설유흔의 웃음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언제나 강한 설득력을 함유한 웃음이기도 했다.
 ‘저 웃음이 나를 꼼짝 못하게 만들고 있어. 정말 마력적인 웃음이다, 유흔.’
 백무결은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그의 입가에도 햇살처럼 맑고 잔잔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설유흔의 눈빛에 만족감이 떠올랐다.
 “그래, 바로 그거다. 너는 언제나 그렇게 웃고 있어야만 되는 사람이다.”
 그는 주먹밥을 먹기 시작했다.
 그가 식사를 하는 모습은 매우 특이했다. 그는 마치 쌀 한 톨 한 톨을 입 속에서 헤아리듯 음식을 정성껏 섭취했다.
 그는 정말 맛있게 식사를 즐기고 있었다. 굳이 냄새 나는 주먹밥이 아니더라도, 설유흔은 언제나 음식을 보물처럼 소중히 다루었다.
 그렇다. 누구든지 그가 식사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그 음식이 아무리 하찮고 맛없는 것이라도 왕성한 식욕을 느끼게 될 것이다.
 밤비(夜雨) 속의 붉은 늑대.
 백무결은 절친한 친구인 그의 그런 모습에서 언제나 새로운 면을 발견하곤 한다. 그리고 그러한 것들은 왕왕 백무결을 감동 속으로 몰아넣곤 하는 것이다.
 백무결도 설유흔을 따라 주먹밥을 먹기 시작했다. 먹으면서 그는 지난날을 회상했다.
 언제였던가?
 그 비가 쏟아지던 그 밤, 갈 곳을 잃은 자신이 북경 암흑가를 찾아갔을 때 설유흔이 자신의 손을 따뜻하게 잡으면서 한 말을 그는 결코 잊지 못한다.
 - 어딜 갔다 이제야 오는 거냐? 설마하니 너는 네 집이 어 디라는 걸 잊어먹었던 건 아닐 테지?
 진실로 아름다운 자는 어떤 순간이든 그 아름다움의 색(色)을 바꾸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야우혈랑 설유흔은 확실히 이 땅의 그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그만의 독특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그 아름다움을 지닌 그가 바로 내 친구인 것이다. 그를 친구로 둔 것이 내 인생을 전혀 다르게 바꿔 놓았지.
 ‘후훗······.’
 백무결의 입가에 문득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 그는 갑자기 전신의 피가 뜨겁게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래, 이 지옥성에서 살아 나가야만 한다. 살아야 하는 것만이 내가 존재하는 유일한 이유라야 한다!’
 식욕이 있고 없고는 문제가 아니였다. 백무결은 여느 때보다 더 열심히 음식을 씹어 삼켰다.
 그런데 어느 순간이었을까?
 음식을 먹던 그의 동작이 딱 정지되었다.
 뭔가 씹힌 것 같다. 매우 질긴 것이었다.
 설마하니 오늘이라고 고기를 넣었을 리는 없고··· 또한 혓바닥에 느껴지는 감촉도 고기는 아니었다.
 ‘종이?’
 백무결은 설유흔을 바라보았다. 설유흔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도 음식을 씹다 말고 백무결과 시선이 마주쳤다.
 두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 조심스럽게 입 속에 손을 가져갔다.
 그러나 집히는 것이 있었다.
 천천히 꺼내 보니, 그것은 꼬깃꼬깃 접혀진 종이였다.
 설유흔과 백무결의 얼굴이 문득 돌처럼 굳어졌다.
 “······!”
 설유흔은 힐끔 주위를 응시했다. 아무도 자신을 보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종이를 펼쳤다. 단 두 글자였다. 휘갈겨 쓴 듯한 글씨가 선명하게 나타났다.
 
 <부동(不動)!>
 
 부동(不動), 움직이지 말라는 말.
 경고였다.
 설유흔의 고요하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그는 뒤통수를 쇠망치로 얻어맞은 듯한 느낌이었다.
 그는 힐끔 백무결을 응시했다. 백무결 또한 굳어진 얼굴로 그를 마주 보았다.
 설유흔의 입술이 실룩 떼어졌다.
 “너도?”
 백무결은 회의 어린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설유흔의 미간이 깊게 파였다.
 도대체 누가 경고를 보낸 것일까?
 어떻게 탈출계획이 누설된 것일까?
 첩자가 있다!
 결론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탈출계획을 알고 있는 얼굴들을 하나씩 떠올려 보았다.
 그 때였다.
 “혹시 돌이라도 씹으신 게 아닙니까?”
 등 뒤에서 불쑥 들려 오는 음성, 설유흔과 백무결은 흠칫 음성의 주인을 되돌아보았다.
 잔비가 걱정스러운 듯한 신색을 짓고 있었다.
 “아니다. 어서 식사나 해.”
 설유흔은 평소의 나직하면서도 위엄 있는 일성을 흘려 냈다.
 “알겠습니다.”
 잔비는 공손한 대답과 함께 등을 돌렸다. 뇌옥 안이 워낙 어두운데다 쪽지가 작아서 그는 미처 보지 못한 듯했다.
 잔비가 다시 식사를 계속하자, 설유흔과 백무결의 시선이 재차 복잡하게 뒤엉켰다.
 - 뭔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
 두 사람의 눈빛은 똑같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들의 손에 식은땀이 축축이 배어 들었다. 불길한 예감이 그들을 무섭게 사로잡았다.
 이윽고 터질 듯한 긴장 속에서 먼저 입을 연 건 설유흔이었다.
 “주먹밥이 많이 남았군. 다 먹어 둬. 남기지 말고.”
 부지중에 흘러 나온 한 마디에 설유흔은 희미한 웃음으로 답했다.
 백무결의 얼굴 근육이 실룩 경련했다. 그 역시 따라 웃고 있었던 것이다.
 “너도······.”
 그러나 웃는 건 입술뿐이었다. 두 사람의 눈빛은 시간이 흐를 수록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져 갔다.
 
 
 3
 
 
 바로 그 시각, 대청(大廳).
 지옥성 중심부에 위치한 이 곳은 매우 우아하고 화려했다. 특히 새로 바꾼 지 얼마 안 되는 푸른색 융단은 마치 잔디를 깔아 놓은 듯 일품이었다.
 바로 지옥성주 왕옥상의 집무실이었다.
 그런데 왕옥상은 평소처럼 자신의 등의자에 편히 앉은 모습이 아니었다.
 어디 속이라도 불편한 걸까?
 평소의 그다운 위엄과 여유는 간 곳이 없고, 그는 마치 아기처럼 얌전한 표정으로 자신의 의자 옆에 서 있었다.
 두 손을 모으고 다소곳이 서 있는 그의 모습은 마치 비대한 하마 한 마리가 서 있는 듯한 느낌을 던져 주었다.
 왕옥상의 전용의자에는 다른 인물이 앉아 있었다.
 백의인(白衣人), 삼십오륙 세 가량 되었을까?
 일견키에도 범상치 않은 신태의 수려한 중년인이었다.
 송충이같이 짙은 눈썹은 그의 성품이 매우 대범하다는 것을 말해 주었으며, 우뚝 선 콧날과 굳게 다문 입술에서는 반대로 냉철한 일면이 엿보였다.
 특히 한 쌍의 호목(虎目)에서 일렁이는 횃불 같은 정광(精光)은 이 위인의 무공수위가 예사롭지 않음을 대변하고 있었다.
 그리고 금빛 수실이 달린 옆구리의 용각장검(龍刻長劍)과 그 옆에 장식처럼 달린 하나의 호패는 이 인물의 신분까지도 확실하게 밝혀 주고 있었다.
 
 <황(皇)>
 
 그렇다. 그 한 글자는 그가 황실 소속의 어황감찰부(御皇監察府)의 수석감찰(首席監察)임을 알려 주고 있었다.
 세상 사람들은 이 인물을 잘 알지 못한다. 수석감찰이라는 직분 자체가 극비의 신분을 요하기 때문인데, 왕옥상 같은 존재에게는 너무도 잘 알려진 게 바로 어황감찰부 수석감찰이다.
 초검릉(楚劍陵).
 무공으로 따지자면 황실과 군부(軍府)를 통틀어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극강(極强)의 무예고수(武藝高手)이며, 관부의 서열로 따지자면 십일 위(十日位).
 지옥성주 왕옥상이 구백이십칠 위(九百二十七位)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 둘의 관계가 어떠하리라고 쉽게 상상하고도 남을 위치였다.
 실로 왕옥상에게는 중천의 태양 같은 인물이 이 곳 지옥성에 등장한 것이다.
 그것은 전례 없는 지옥성의 대탈출계획을 황궁에서도 얼마나 중요시하고 있는지 단적으로 증명해 주는 사건이었다.
 초검릉은 지금 죄수 인명부(罪囚人名簿)를 읽고 있었다.
 두툼한 책자가 천천히 한 장씩 넘겨지길 얼마나 지났을까?
 문득 그의 호목에 섬광 같은 이채가 스쳐 갔다.
 
 <수인번호(囚人番號):일천삼백구십구 번(一千三百九十九番).
 성명:설유흔.
 별호:야우혈랑(夜雨血狼).
 생년······.>
 
 초검릉은 다 읽지 않고 또 한 장을 넘겼다.
 사삭-!
 초검릉의 얼굴을 가만히 지켜 보는 왕옥상의 기름진 얼굴에 땀방울이 맺혔다.
 왕옥상이 이렇게 긴장한 것은 근래에 이르러 처음 있는 일이었다.
 책장을 넘긴 초검릉은 빠른 눈길로 또 한 명의 수인의 기록을 읽고 있었다.
 
 <수인번호:일천사백 번(一千四百番).
 성명:백무결.
 별호:신품대공······.>
 
 아주 잠깐 동안 초검릉의 두 눈에 여린 광채가 번쩍 스치고 지나갔다. 특히 구문제독 백자흠이란 글에서 오랫동안 그의 시선이 머물렀다.
 “신품대공 백무결이라······.”
 비록 몰락했다고는 하나,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당대 최고의 권력을 자랑하던 대명제일의 세도가(勢道家)가 아닌가.
 구문제독 백자흠이란 이름은 아직도 모든 사람의 뇌리에 생생히 남아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초검릉은 한동안 백무결의 신상기록을 살펴보더니, 책자를 덮었다. 그 뒤는 읽어 볼 필요도 없었다.
 초검릉은 느릿하게 왕옥상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그러니까, 이번 대탈옥 계획의 주모자는 바로 이 두 명이라 이건가?”
 전형적인 명령투의 음성에는 듣는 상대를 조이는 위엄이 담겨 있었다.
 왕옥상은 바짝 긴장하고 있던 참이라 지체 없이 비대한 허리를 굽혔다.
 “그렇습니다, 수찰각하(首察閣下).”
 “묻겠다. 이 모든 상황을 사전에 파악했으면서도 그 두 주모자를 왜 제거하지 않았나?”
 “그건 그 두 주모자의 특성 때문입니다, 수찰각하.”
 “특성?”
 “그들은 대륙의 암흑가를 지배하는 제왕(帝王)들입니다. 굳이 거물들이라고 할 수 없건만, 이 지옥성의 전 죄수들은 그들을 거의 신(神)처럼 맹종하고 있습니다.”
 왕옥상의 대답은 침착했으며, 조금도 막힘이 없었다.
 “만약 섣불리 잘못 건드렸다면 이 지옥성은 말 그대로 시산혈해(屍山血海)의 지옥으로 변했을 것입니다, 감찰각하.”
 초검릉의 수려한 얼굴에 차가운 조소의 빛이 떠올랐다.
 “신처럼 맹종한다? 그럼 당연히 그 시산혈해의 지옥에는 그대의 시신도 끼여 있었을지도 모르겠군.”
 왕옥상의 얼굴에 맺혀 있던 땀방울이 떨어졌다.
 “그··· 그럴 겁니다.”
 “왕옥상, 그대는 세 가지 실수를 했다. 그 첫째는 설유흔과 백무결 같은 자가 지옥성에 들어왔을 때 왜 병사(病死)하지 않았느냐 하는 점이다.”
 “벼··· 병사(病死)······.”
 왕옥상의 가느다란 눈이 당혹으로 가득 물들었다.
 “그들같이 건강한 강골(强骨)들이 어찌 병이 들어 죽······.”
 초검릉의 무심한 어조가 비수처럼 왕옥상의 말문을 막았다.
 “멍청한 늙은이, 그렇게도 머리가 안 돌아가는가?”
 왕옥상은 이마에 식은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그··· 그런 것은 규칙에 어긋나지 않습니까?”
 왕옥상의 비대한 거구가 부르르 진동했다.
 “그래서 병사(病死)다. 두 번째 실수는 그들 같은 위험인물들을 철저하게 다른 죄수들과 격리시키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 그럼 세 번째 과오는 무엇입니까?”
 초검릉은 무표정하게 그를 응시했다.
 “그건 그대가 너무 살이 쪘다는 점이다.”
 “······!”
 왕옥상의 얼굴이 누런 돼지간 빛으로 변했다.
 초검릉이 느릿하게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일어서면서 그는 왕옥상에게 조용히 말했다.
 “앉으시오, 성주.”
 초검릉의 말투가 갑자기 바뀌었다. 조금 전의 위압적인 말투에서 이제는 부드럽게 바뀐 것이다.
 그것이 왕옥상을 더욱 긴장시켰다.
 “그, 그 자리에 말입니까?”
 초검릉의 손가락이 의자를 가리켰다.
 “그렇소. 이건 당신의 자리가 아니오?”
 갑자기 변한 말투도 그렇거니와··· 왕옥상은 영문을 알지 못해 그야말로 미치고 환장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어쩔 것인가?
 그는 감히 더 묻지 못하고 엉거주춤 자신의 등의자에 엉덩이 끝을 걸치고 앉았다.
 초검릉은 천천히 등의자 뒤로 걸어가며 물었다.
 “지금 시각은?”
 “시··· 신시(申時)가 거의 다 되어 있습······.”
 “고개를 돌리지 마라.”
 왕옥상이 황급히 고개를 돌리며 대답하려는 순간, 차갑게 흘러 나온 초검릉의 음성이었다.
 다시 원래의 싸늘하고 위압적인 말투로 되돌아간 것이다.
 “예, 예, 수찰각하!”
 “현재 죄수들의 상황은?”
 “모··· 모두 작업장에 모여 있습니다.”
 왕옥상은 넋 나간 얼굴로 신음처럼 대답했다.
 그의 전신은 어느 새 비 오듯 흐르는 땀으로 흥건히 젖어 있었다.
 평소 그토록 여유만만하던 표정은 완전히 우거지상으로 변한 지 오래였고, 입술을 푸들푸들 떨고 있는 모습이 금세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한 신색이었다.
 “작업장이라······.”
 등 뒤에서 나직한 음성이 독백처럼 들려 온 것과, 왕옥상이 목 부위에 차가운 감촉을 느끼고 혼비백산한 것은 거의 동시에 벌어진 일이었다.
 손(手), 초검릉이 뒤에서 그의 살찐 목을 어루만졌기 때문이다.
 초검릉은 눈썹을 가볍게 찌푸리더니, 곧 중후한 음성을 흘려 냈다.
 “비몽(秘夢), 거기 있나?”
 순간, 어디선가 마치 어린 소동(小童)의 음성처럼 극히 투명하고 맑은 어조가 들려 왔다.
 “부름 계시오이까?”
 왕옥상은 경황 중에도 급히 주위를 살폈다. 그러나 대청 어디에도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비몽.
 이 이름은 왕옥상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일명 죽음의 추적대라 불리는, 오직 추적과 살인(殺人)만을 업(業)으로 알고 살아가는 황궁 최대의 비밀추적군단. 바로 그 조직의 단주(團主)가 비몽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는 것을.
 소문으로는 아무도 비몽을 본 적이 없으며, 그 지닌 바 능력 또한 추측이 불가능하다는 그림자 없는 인간이라고 했던가?
 초검릉은 지금 그 신비의 사나이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어찌 되었나?”
 “지옥성 주변 이백 리 이내에는 어황팔천특위대(御皇八千特衛隊)가 물샐틈없이 포위망을 구축 완료했습니다. 그리고······.”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비몽의 투명한 음성이 신비롭게 이어졌다.
 “문제의 지옥성 안팎에는 천추검단 팔백 명이 이미 한 시진 전부터 매복해 있습니다.”
 “마흔아홉 개의 비밀통로와 열두 개의 도주로 쪽은?”
 “역시 준비가 끝났습니다. 개미 새끼 한 마리도 빠져 나가지 못할 것입니다.”
 너무나 맑고 깨끗해 오히려 섬뜩한 느낌을 주는 음성이었다.
 “상황을 보건대, 아마 놈들은 오늘 밤을 기해 행동을 개시할 게 틀림없다. 한 명도 놓치지 않도록 각별히 신경을 써야 할 것이다.”
 초검릉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더니, 냉혹한 일성을 흘려 냈다.
 “알겠습니다.”
 음성이 멀어지듯 희미해지더니, 어느 순간 완전히 사라졌다.
 정적, 대청에는 잠시 쥐죽은 듯한 정적이 찾아들었다.
 초검릉은 두 눈에 깊숙한 정광(精光)을 빛내다가 문득 탁자 위를 응시했다.
 “그리고 이것 말인데······.”
 그의 섬세한 손이 왕옥상의 뒷덜미를 빠져 나와 두 통의 서찰을 가리켰다.
 그것은 바로 일전에 왕옥상에게 전달된 문제의 서찰이었다.
 “아직도 발신인을 알아 내지 못했다고 했나?”
 “그, 그렇습니다.”
 왕옥상은 땀으로 축축이 젖은 얼굴을 황급히 숙였다.
 초검릉의 손(手)이 순간, 다시 그의 살찐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그 모습은 주인이 애견(愛犬)을 쓰다듬는 광경을 연상시켰다.
 초검릉의 입술이 조용히 열렸다.
 “당결.”
 “예!”
 언제 그 곳에 있었는가?
 한쪽 대청의 구석진 곳에서 당결이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허리를 굽혔다.
 초검릉은 무심한 어조로 독백하듯 분부했다.
 “내일 중으로 전령(傳令)을 발송토록.”
 “저··· 전령입니까?”
 “내용은 한시바삐 지옥성 관리자의 교체가 이루어져야겠다는 것이다. 아울러 현 관리자는 지옥성의 뇌옥에 죄수로 수감된다.”
 왕옥상의 얼굴이 핼쑥하게 탈색되었다.
 “이,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는 자신도 모르게 부르짖었다.
 그로서는 어째서 지옥성 성주인 자신이 죄수로 탈바꿈해야 되는 것인지 그 이유를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초검릉은 왕옥상의 목덜미 비곗살을 거칠게 움켜쥐었다.
 왕옥상의 비대한 거구가 등의자에서 들어올려진 건 그것과 동시였다.
 “흑··· 수찰각하!”
 “이유는 직무태만(職務怠慢)이다.”
 음성은 한 점 감정도 없는 무심한 것이었고, 그 음성보다 더 무심한 건 초검릉의 전율스럽도록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왕옥상의 기름진 얼굴이 사색이 되었고, 당결의 메마른 얼굴에는 희색이 감돌았다. 순식간에 서로의 입장이 천양지차로 벌어진 것이다.
 초검릉이 뒷짐을 지고 왕옥상의 침상으로 걸어갔다. 그 뒷모습을 왕옥상이 넋 빠진 얼굴로 쳐다보고 있었다.
 반 시진 뒤에 왕옥상의 비대한 몸을 감싸고 있던 비단옷이 모두 벗겨지고 잿빛의 죄수복이 입혀졌다.
 그리고 당결의 발길에 엉덩이가 한 차례 채인 뒤, 뇌옥으로 끌려갔다.
 그 동안 초검릉은 왕옥상의 넓은 침상 위에서 눈을 붙이고 있었다.
 그 다음으로 밤이 찾아왔다. 그 탈출의 밤이.
 
 
 5장 두 명의 탈옥자(脫獄者)
 
 
 1
 
 
 휘잉-!
 삭풍 한 가닥이 사막을 쓸고 지나가자, 달빛 속으로 은사(銀砂)가 어지럽게 날렸다.
 달(月), 서천(西天)을 밝히며 휘황한 만월(滿月)이 서서히 떠올랐다.
 달빛은 은편처럼 잘게 뿌려지며 사막을 은백색(銀白色)으로 물들였다.
 사막의 밤은 언제나처럼 그렇게 시작되었다.
 아직 달빛이 미치지 않는 어느 사구(沙口) 아래 어둠이 검은 장막처럼 깔려 있고, 그 어둠의 일부분인 양 유령처럼 서 있는 십여 명의 인영(人影)이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먹물처럼 검은 야행복(夜行服) 차림이었다.
 그들의 숫자는 도합 십팔 인(人).
 빠끔히 뚫린 복면 사이로 칙칙한 회색빛을 발하는 그들의 눈빛은 귀기가 감돌았다. 마치 사자(死者)의 그것인 양.
 그래서인지 그들의 전신에서 풍기는 기도에는 죽음의 냄새가 배어있었다.
 복면의 중앙 미간 부분에는 조그맣게 달(月) 모양의 문양이 수놓아져 있었다.
 수놓아진 달(月)은 오늘 밤 떠오르는 달과 마찬가지로 만월(滿月)이다.
 장내에는 죽음 같은 침묵이 흘렀다.
 누구도 말이 없고, 누구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휘이잉-!
 건조한 모래바람 한 줄기가 장내를 스쳐갔다.
 동시에 바람에 실려 왔는가?
 마치 땅 속에서 솟아나듯, 하나의 흑영(黑影)이 십팔 인(人)의 면전에 유령처럼 나타났다. 아니, 나타났다고 느껴진 순간 흑영은 어느 새 그 자리에 깊숙이 부복하고 있었다.
 “십팔호(十八號), 문주(門主)님을 뵈오.”
 십팔 인(十八人) 가운데 중앙의 한 복면인이 한 올의 감정도 실려 있지 않은 무미건조한 음성을 흘려 냈다.
 “어찌 되었나?”
 “문주님의 계획대로 되었습니다.”
 “그러면······?”
 “그렇습니다. 지금 초검릉이 이끄는 어황감찰대는 모든 도주로와 탈출구를 철통같이 봉쇄했습니다.”
 “성내(城內)의 상황은?”
 “탈출 봉쇄에 거의 총력을 기울인 듯합니다. 몇몇의 위사(衛士)가 남아 성내(城內)를 감시하고 있을 뿐, 텅 비어 있는 상태나 다름없습니다.”
 “그런가?”
 문주라 불린 복면인의 두 눈에 가느다란 광채가 스쳤다. 그 눈빛은 어떤 만족감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찰나지간의 변화일 뿐, 복면인의 두 눈은 곧 무심(無心)의 잿빛으로 되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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