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함
뒤로가기버튼 천혈마도 [E]

천혈마도 1

2018.01.29 조회 496 추천 1


 천혈마도 1권
 서언
 
 
 이제 나는 하나의 이야기를 시작하여야 한다.
 혼돈(混沌)과 죄악(罪惡), 그리고 죽음의 시(詩)와 절망의 노래만이 전염병처럼 만연했던 그 암울했던 시대(時代)의 이야기를······.
 처절했던 피의 수레바퀴도 이제는 그 행진을 멈추었고, 모든 것은 점차 망각의 수렁으로 파묻혀 갔다.
 사람들은 아무도 그 처절했던 피의 잔혹사(殘酷史)를 기억하려 하지 않는다.
 그 어떤 사가(史家)도 그때의 이야기만은 무림사(武林史)에 기록하기를 꺼려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이 이야기를 하여야만 한다.
 이것은 오늘날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이라 불리는 나의 무용담(武勇談)을 자랑삼아 회고하고자 함이 아니다.
 다만, 세월의 흐름에 따라 어쩌면 자칫 방심하고 흐트러질지도 모르는 만천하 무림인들의 가슴속에 언제까지고 살아 있어야 할 불멸(不滅)의 경종(警鍾)을 이 이야기로 대신코저 소원할 뿐이다.
 정말이다.
 과거와 같은 시대는 결단코 재현되지 않아야 한다.
 창검(蒼劍)과 무제한적 폭력만이 법처럼 통용되었던 그런 비극의 시대를 우리는 두 번 다시 경험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는 절대 잊혀져서는 안되는 것이다.
 눈(雪)······.
 소담스럽게 떨어져 내리는 함박눈을 바라보며······.
 이제 나는 하나의 이야기를 시작하여야 한다.
 
 
 서장
 
 
 그 날······.
 명조(明朝) 정덕원년(玎德元年) 구월 초엿새.
 훗날 무림에 중대한 의미를 부여하는, 그리고 한 빛나는 청춘의 파멸을 예고하는 그 미몽(迷夢)의 일대 사건은······.
 천지간을 한순간에 뒤집어 버릴 듯한 가공할 폭풍뇌우(暴風雷雨)와 더불어 그 막(漠)을 올리고 있었다.
 
 ***
 
 어둠의 일각을 새파랗게 베어 내며 작렬하는 낙뢰(落雷).
 온 땅덩어리를 그대로 휘말아 올릴 듯 미친 듯이 몰아치는 가공할 폭풍!
 폭우······!
 하늘과 땅을 단숨에 하나로 연결시키는 무시무시한 비벼락이었다.
 그리고······.
 비명!
 “으아아아악!”
 
 ***
 
 ― 한 사람이 죽었다!
 
 이것은 사실 별로 대단한 일이 아닐는지도 모른다.
 넓디넓은 중원대륙.
 그 넓은 대륙 안에서는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이 태어나고 죽어가니까······.
 더구나 시기와 음모, 그리고 살인으로 날이 새고 저무는 무림세계에서 누구 한 사람쯤 죽는 것은 길바닥의 개미 한 마리를 밟아 죽인 것만큼이나 지극히 평범한 일에 속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경우가 틀렸다.
 틀려도 보통 틀린 게 아니었다.
 간밤의 뇌성폭우가 어쩐지 심상치 않다는 생각이 들더니만······.
 자욱이 움터 오는 새벽 미명과 더불어 전 중원에 울려 퍼진 외마디 일성(一聲)!
 
 ― 그가 죽었다!
 
 사람들은 귀를 의심했다.
 설령 하룻밤 사이에 하늘과 땅의 위치가 바뀌었다거나 바다가 육지로 변해 버렸다는 말이 있었다면 믿었을지언정 그 이야기만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믿을 수 없게도 사실이었고, 그때부터 오랜 세월 동안 정상궤도를 달려온 천하무림의 운명은 서서히 그 흐름을 달리하기 시작했다.
 
 ***
 
 죽은 사람은 무림인이었다.
 무림인이었으되 그는 신이라 불렸으며, 그가 있으므로써 이 시대의 무림은 평온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런 그가 죽었다.
 죽은 사람은 억만금을 줘도 살아날 수 없다.
 그것은 다시 말해 한 위대한 인간의 시대가 완전히 마감 되었음을 알리는 것이었으며, 또한 삼십팔 년을 지속해 온 무림 대평화시대가 운명적으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음을 시사하는 것이기도 했다.
 대역천지겁(大逆天之劫)······!
 그로 인해 한 청춘이 철저한 파멸의 길로 접어들어야만 했던······.
 삼 년 전의 일이었다.
 
 
 1장 떠나는 자와 남는 자
 
 
 부슬··· 부슬······.
 비(雨).
 짙은 안개비가 송화가루처럼 흩뿌렸다.
 사방 몇십 리에 걸친 이 일대는 벌써 며칠째 이렇듯 온통 희뿌연 물안개에 휩싸여 있었다.
 대초원.
 멀리 마치 연자색의 융단을 깔아 놓은 듯한 초지(草地)가 일망무제(一望無際)로 펼쳐져 있고, 그 앞으로 갖가지 이름 모를 야생화와 잡초가 숲을 이루고 있었다.
 가늘게 뿌려지는 안개비와 더불어 이러한 모든 것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절로 한 수 시상(詩想)을 떠올리게 하는 그림 같은 풍경이었다.
 정오 무렵.
 더욱 짙어지는 안개비 속에서 사위는 무저무중(無底無中)의 깊은 정적 속에 잠겨 들었다.
 이때였다.
 가벼운 말발굽 소리와 함께 대초원 저 끝으로부터 한 대의 마차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꿈속 같은 우막(雨幕)을 헤치며 서서히 대초원을 가로질러 오는 마차······.
 한 필의 늙은 말이 끌고 있는 형편없이 낡고 초라한 마차에는 두 명의 사내가 타고 있었다.
 타고 있는 마차만큼이나 초라하기 이를 데 없는 행색의 두 사내.
 한 명의 사내는 노려보듯 전방을 주시하며 말을 몰고 있었고, 또 한 명은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 이따금씩 술호로를 입으로 가져갔다.
 두 사람 모두 아무 말이 없는 가운데 마차는 막 초원을 벗어나 숲길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이었다.
 “드디어 내지(內地)로 들어섰군.”
 마차를 몰던 사내가 중얼거리듯 입을 열었다.
 그러자 옆의 사내도 기다렸다는 듯 대꾸했다.
 “그렇지요? 벌써 피부에 와 닿는 공기의 감촉부터가 다르지 않습니까!”
 “공기의 감촉이 어떻기에?”
 “잘 좀 음미해 보십시오. 부드럽고 은밀한 것이 마치 처녀의 숨결같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역시 자네는 술이 과한 모양일세. 다소 쌀쌀하기만 할 뿐 내가 느끼기에는 그저 그런데 말이야.”
 “쯧쯧··· 둔감하시긴··· 하기야 저 나이 먹도록 언제 한 번이라도 처녀를 안아 봤어야 뭘 알아도 알지, 안 그렇습니까?”
 “······!”
 사내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 사내.
 서른 살 가량 되었을까?
 전체적으로 그의 얼굴은 매우 잘생긴 편에 속했다.
 그러나 얼굴은 병적이라 해도 좋을 만큼 창백했고, 더부룩하게 자라 있는 턱수염과 더불어 어딘지 모르게 초췌하면서도 나약해 보이는 인상을 풍기고 있었다.
 처음 보는 사람은 그를 닭모가지 하나 비틀 힘조차 없는 사람으로 보기 십상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본다면 그것은 실로 엄청난 착각이었다.
 비단 착각일 뿐만 아니라 무서운 오해라고도 말할 수 있었다.
 그의 행색이나 첫인상이 비록 나약해 보이는 것은 사실이나 그는 결코 나약하다고는 말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담효기(潭孝寄).
 군살과 근육질이라곤 눈을 씻고 봐도 찾아볼 수 없는 마른 몸매로 보아 권각(拳脚)이나 외문무공(外門武功)을 익힌 사람같지도 않고······.
 그의 몸 어디에서도 검(劍)이나 도(刀) 따위의 병장기는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내는 엄연한 무인이었다.
 또한, 단 하루라도 무림의 밥을 먹은 사람이라면 이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것은 마치 불교를 믿는 사람이 석가모니의 이름을 모르는 것과 마찬가지라 할 수 있는 것이었다.
 담효기의 옆에 앉아 홀짝홀짝 술을 마시고 있는 사내는 그보다 예닐곱 살쯤 어려 보이는 청년이었다.
 그런데 이 청년이 입고 있는 옷은 실로 해괴한 것이었다.
 옷감이나 천 따위로 만들어진 것은 결코 아니었으며, 질기면서도 거무튀튀한 빛깔을 띠고 있는 것이 아무리 봐도 돼지가죽을 벗겨 만든 일종의 돈피의(豚皮衣) 같았다.
 그리고 얼굴.
 비에 젖고 헝클어진 머리카락 새로 드러나 보이는 그의 얼굴은 일견 평범해 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무심히 스쳐 보았을 때의 얘기다. 만약 누군가 복장이나 행색 따위를 무시하고 단지 얼굴만을 관심 있게 본다면······.
 그렇게 관심 있게 보고 나서도 이 얼굴을 평범하다고 결론지어 버릴 수 있다면, 그 사람은 틀림없이 천하에서 가장 잘생긴 사람이 아니면 장님이 분명할 것이다.
 이 사내.
 흔히 말하는 미남의 전형을 거의 완벽에 가까운 수준으로 갖추고 있었다.
 붓으로 그린 듯 날카롭게 뻗어 올라간 한 쌍의 검미(劍眉), 우단처럼 부드러우면서도 한없이 맑고 깨끗한 수묵빛 동공, 빚은 듯 우뚝 솟아오른 콧날과 얇고 선이 뚜렷한 입술······.
 그렇다.
 아무렇게나 헝클어뜨린 머리카락과 땟구정물로 뒤덮이다시피 한 초라한 행색의 이면에는 이렇듯 아름다운 얼굴이 진흙 속의 보석처럼 감추어져 있었다.
 마치 장마철에 눈부신 태양이 비구름으로 가리워져 있듯이······.
 양무수(陽武粹).
 연장자로 하여금 마차를 몰게 하고, 자신은 한껏 여유있는 자세로 술을 마시며 분위기를 감상하고 있는 이 예절 모르는 사내는 그런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마차는 야생화가 무더기로 만발해 있는 숲의 한복판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그곳으로 들어서자 싱그러운 꽃내음이 축축한 안개비에 실려 훅하니 마차로 풍겨왔다.
 그 내음과 얼굴에 와 닿는 물안개의 상쾌한 감촉을 즐기며 양무수가 중얼거리듯 입을 열었다.
 “이것으로써 그 삭막하고 멋대가리 없었던 북해(北海)에서의 생활은 깨끗이 청산되는 겁니다. 보이느니 눈과 얼음 뿐이요, 사시사철 바람만 휘몰아치는 그 춥고 쓸쓸한 북해에서의 생활이 말입니다.”
 북해.
 말인 즉 이 두 사내는 북해에서 왔다는 얘기다.
 감회가 서린 듯한 양무수의 음성에 담효기는 묵묵히 마차만 몰 뿐이었다.
 “북해에서의 삼 년··· 돌이켜 생각해 보면 삼십 년보다 더 길고 지루했던 세월이지요······.”
 “······.”
 줄곧 전방만 응시하고 있던 담효기의 시선이 처음으로 허공을 향했다.
 이리저리 일렁이는 안개비 사이로 잔뜩 찌푸린 잿빛 하늘이 동공 가득 밀려들어 왔다.
 삼 년······.
 그러고 보니 꼭 삼 년 만이다.
 비참하고도 절박했던 이유로 제각기 중원을 등져야만 했던 이 두 사내는 꼭 삼 년 만에 중원으로 들어서고 있는 것이다.
 얼마쯤 더 갔을 때였다.
 어디선가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양무수는 귀가 번쩍 뜨이는 모양이었다.
 “좋아, 좋아, 물은 여전히 흐르고 있군, 그래······.”
 갑자기 기분이 유쾌해진 모양이다.
 양무수는 또 한 모금의 술을 들이키고 난 후 담효기를 힐끗 쳐다보았다.
 “어떻습니까? 아직도 생각이 바뀌지 않았습니까?”
 “······.”
 밑도 끝도 없는 질문 같았지만 담효기에게 있어 그 의미는 상당한 것이었다.
 순식간에 무엇엔가 짓눌린 듯한 표정이 되어 마차를 세우는 담효기의 표정에 그것이 역력히 나타나고 있었다.
 “같이 갑시다. 뭐 그렇게 자꾸 어렵게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단지······.”
 말을 하다 말고 양무수는 입을 다물었다.
 담효기의 얼굴에 한 줄기 희미한 미소가 떠오르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양무수는 북해를 떠나 여기까지 오는 동안 지금과 같은 말을 열 번도 더 했다.
 그럴 때면 담효기는 늘 지금처럼 희미한 미소만을 지어 보이곤 했다.
 웃고 싶은 마음은 눈꼽만큼도 없으면서 억지로 웃어 보이는 그 미소가 담고 있는 의미는 거부였다.
 양무수의 눈에 우울한 그림자가 스쳐 지나갔다.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담효기가 어째서 중원을 등져야만 했고, 또 무엇 때문에 다시 돌아가기를 거부하는지······.
 양무수는 한동안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느릿느릿 상체를 일으켰다.
 “됐습니다. 여기서부터는 걸어가겠습니다.”
 “······.”
 담효기의 동공에 짧은 파장이 일어났다.
 이별······.
 마침내 그 순간이 다가온 것이다.
 담효기는 문득 가슴 한구석이 아련하게 아파 오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은 얼굴로 담담하게 말했다.
 “아닐세, 이 숲이 끝나는 곳까지 더 바래다주겠네. 이런 날씨에는 자칫 길을 잃기 십상이거든······.”
 말고삐를 쥔 그의 손이 가늘게 떨리는 것을 보면서 양무수는 싱긋 웃었다.
 “내 자신도 믿지 못할 기억력이긴 하지만 한 번 왔던 길을 잊어버릴 정도는 아닙니다. 고작 삼 년 만인데요, 뭘.”
 “그래도 이 늙은 말이 자네보단 정확할 걸세. 길을 모를때는 늙은 말의 지혜를 빌리라는 말도 있지 않나?”
 담효기는 발길로 말의 엉덩이를 툭 차면서 말을 이었다.
 “이놈이 좀 비실비실해 보이긴 하나 그 동안 혼자서 얼마나 술 심부름을 잘해 왔나. 술을 구하러 간답시고 갔다가 중도에서 눈구덩이에 처박혀 잠을 자 버린 자네보다는 백배 낫다는 얘기지.”
 둘은 동시에 웃음을 떠뜨렸다.
 평소 때의 그들이라면 하나도 웃을 일이 아닌데도 미친 듯이 웃어 젖혔다.
 그것은 코앞에 닥쳐온 이별의 아픔을 억지로 내색해 보이지 않으려는 두 사내의 마지막 발버둥인 것 같아 보이기도 했다.
 “······.”
 “······.”
 웃음이 멎고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담효기가 힘없는 목소리로 침묵을 깨뜨렸다.
 “다시 한 번 말하네만······.”
 “······?”
 “이제라도 늦지 않았네. 오랜만에 먼 길 여행한 셈치고 이대로 돌아가면 되는 것일세.”
 “······!”
 “아직도 내 말을 모르겠나? 자네는 지금 스스로 무덤을 파는 거나 마찬가지란 말일세. 아니, 어쩌면 화약을 쥐고 불구덩이 속으로 뛰어들어 가고 있는 지도 모르지.”
 “······!”
 호로병이 빈 모양이다.
 양무수는 호로병을 거꾸로 세워 마구 흔들어 대고 있었다. 그의 그러한 모습은 마치 한 방울의 술이라도 더 짜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담효기가 미소로써 거부의 의사를 표현했다면, 양무수는 이런 식으로 대답을 대신하고 있는 것이었다.
 담효기의 얼굴에 쓸쓸한 기색이 감돌았다.
 이제 그가 해야 할 말은 한마디밖에 없었다.
 “잘 가게, 무수 형······.”
 순간, 양무수는 호로병을 멀찌감치 휙 던져 버리더니 훌쩍 마차에서 내려섰다.
 그런 다음 마치 몸이라도 푸는 듯 앉았다 일어났다를 반복하고서 고개를 이리저리 흔들어 보다가 느닷없이 담효기를 향해 불쑥 손을 내밀었다.
 “조심해서 돌아가십시오.”
 “······!”
 담효기는 묵묵히 손을 뻗어 양무수의 손을 마주 잡았다.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미적지근한 체온의 흐름이 있었다.
 “조심하게, 무수 형! 이유야 어찌 됐든 자네는 전 무림인이······.”
 “염려마십시오. 제가 누굽니까?”
 “물론 나는 자네의 실력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네. 하지만······.”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될 날이 있을 겁니다.”
 양무수는 손을 빼면서 싱긋 웃어 보이곤 이내 몸을 돌려 걸음을 떼 놓기 시작했다.
 사람의 뒷모습은 누구를 막론하고 얼마쯤은 초라해 보이기 마련이다.
 내키지 않는 이별을 하고 돌아서는 사람의 모습은 더욱 더 그렇게 보이기 마련이다.
 양무수는 그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서인지 그는 되도록 빠른 걸음으로 안개비 속으로 파묻혀 가고 있었다.
 헐렁한 돼지가죽 옷이 자욱한 우막에 가려 거의 안 보일 정도로 멀찌감치 갔을 때에야 비로소 그는 힐끗 뒤를 돌아다보았다.
 말고삐를 꽉 움켜잡은 채 허공을 응시하고 있는 담효기의 모습이 망막 속으로 비춰졌다.
 늙은 말과 초라한 마차······.
 창백한 얼굴과 덥수룩한 수염······.
 양무수는 무슨 말인가를 하려다 말고 천천히 멈추었던 발걸음을 다시 떼어놓기 시작했다.
 “······!”
 안개비가 눈(目) 속으로 스며들어 간 것이리라.
 여전히 허공을 바라보고 있는 담효기의 눈가로 엷은 물기가 번져 나오고 있었다.
 정말이지······.
 지독한 안개비였다.
 
 
 2장 전가(傳家)의 보도(寶刀)와 어떤 소년
 
 
 폐허.
 대도(大都) 금릉성(金陵城) 외곽 오십여 리 떨어진 산기슭에 펼쳐져 있는 이곳.
 흡사 천 번의 전쟁이 휩쓸고 간 땅 같다고나 할까?
 사방 어디를 둘러봐도 풀 한 포기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온통 시커먼 빛깔로 죽어 있는 을씨년스럽기 이를 데 없는 폐허였다.
 그러나 무너져내린 담장과 숯덩이 같은 돌기둥 따위가 무척 길게 이어져 있어 전날 이곳이 누렸던 영화와 번성함이 결코 예사롭지 않았던 것임을 쉽게 짐작케 한다.
 그 속의 두 사람.
 멀찌감치에서 바라보고 있는 사람은 일신에 거무튀튀한 돈피의를 걸치고 있는 양무수였고, 폐허의 가운데 석상처럼 우뚝 서 있는 사람은 백의경장을 입고 있는 열대여섯 살 가량의 소년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옛 싸움터를 답사하다가 허무에라도 휩싸였음인가?
 소년은 근 반 시진이 넘도록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 소년의 모습은 양무수로 하여금 닥치는 대로 강호의 고수들과 좌충우돌하며 부딪혔던 자신의 무예수업 시절을 생각나게 해주었다.
 상대가 누구이며, 상대의 무공이 어떠한가 따위는 아예 신경조차 써 본 적이 없는 그였다.
 싸움의 결과를 염두에 두어 보았던 적도 맹세코 단 한 번도 없었다.
 그저 닥치는 대로 부딪치고, 깨지고, 터졌으며, 그러한 과정이야말로 자기 발전에 가장 빠른 지름길이며 유일무이한 방법이라고 굳게 믿었던 양무수였다.
 그러나 소년은 조용하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조용하다.
 저 또래의 나이에 동(動)과 광기(狂氣)로 치달았던 자신에 비해 지금의 저 소년은 너무도 고요한 정(靜), 그 자체로 양무수의 눈에 비춰지고 있었다.
 ‘정식으로 무예를 쌓은 것 같지는 않고··· 어쨌든 좋은 공부를 하고 있구나!’
 양무수는 문득 폐허더미 안으로 걸음을 떼어놓기 시작했다. 특유의 호기심이 발동한 탓이었다.
 그런데 거리가 조금씩 가까워지면서 양무수는 소년의 등 뒤에 가죽끈으로 비스듬히 메어져 있는 거의 키만한 한 자루의 장도(長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좋은 칼이다.’
 일견하는 순간 예사롭지 않은 칼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무릇, 무인은 좋은 무기를 보게 되면 그 사람의 이전 경력까지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소년은 은연중 어릴 때부터 각지를 돌아다닌 낭인(浪人)의 냄새만을 풍겨 낼 뿐, 장도의 임자다운 품위나 기도는 아직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
 인기척을 느낀 것이리라.
 소년은 흠칫하며 고개를 돌렸다.
 당연히 양무수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고 그를 발견하는 순간 소년의 눈에는 언뜻 놀람의 빛이 스쳐 지나갔다.
 시커먼 돼지가죽 옷에, 허리춤에 아무짝에도 쓸모 없어 보이는 목검(木劍) 한 자루만을 달랑 꿰어찬 채 느릿느릿 다가오는 이 장발의 사내를 보고 그저 무심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흔치 않을 것이다.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가 하는 문제는 둘째다.
 우선 일신에 걸친 옷이나 전체적인 행색부터가 상식을 벗어나고 있었다.
 차라리 누더기를 입으면 입었지, 어떻게 다른 짐승도 아닌 돼지의 가죽을 벗겨 옷을 만들어 입었단 말인가?
 게다가 저 목검.
 설마하니 코흘리개들처럼 병정놀이라도 하다가 왔단 말인가?
 아무리 봐도 썩은 무조차 베어 내지 못할 것 같은 저 따위 몽둥이나 다름없는 목검은 무엇 때문에 보란 듯이 옆구리에 꿰차고 있단 말인가?
 마침내 소년의 바로 앞에까지 다가온 양무수는 천천히 소년의 아래위를 훑어보기 시작했다.
 아직 어린티를 완전히 벗지는 못했지만 체구는 그런 대로 어른의 수준에 육박하고 있었다.
 느닷없이 괴상한 사람이 다가와서 자신을 뜯어보자 소년도 따라서 양무수의 전신을 차근차근 훑어보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한순간이었다.
 각자 아래에서 위로, 위에서 아래로 눈길을 옮겨가던 두 사람의 시선은 급기야 어느 지점에 이르러 정통으로 딱 마주쳤다.
 “······!”
 “······!”
 두 사람은 서로 상대방의 눈만 빤히 응시하면서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참으로 묘한 장소에서 묘한 사람끼리의 만남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길 얼마 만이었을까?
 문득, 마치 약속이나 했던 것처럼 두 사람의 얼굴에 슬며시 웃음이 번져 나왔다.
 웃으면서 양무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
 “괴상한 녀석이군.”
 “그렇게 말하는 사람도 완전히 정상적인 것 같지만은 않아 보입니다.”
 당돌하지만 밉지 않은 태도였다.
 “여기서 뭘 하고 있지?”
 “이유도 없고 목적도 없습니다. 그저 지나다 들렀을 뿐입니다.”
 “음······.”
 양무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턱짓으로 소년의 등뒤를 가리켰다.
 “그건 어디서 났지?”
 “가문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보도(寶刀)입니다.”
 그 말에 양무수는 고개를 약간 기우뚱했다.
 “말하자면 전가(傳家)의 보도(寶刀)라는 얘긴데, 그런 걸 물려받기엔 아직 네 나이가 좀 어린 것 같지 않나?”
 소년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혈혈단신인데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럼 고아란 말인가?”
 “오래 전에 양친을 잃고 지금까지 유랑생활을 즐기고 있지요.”
 “······!”
 양무수의 눈이 일순 미묘하게 빛났다.
 고아!
 이 얼마나 춥고 배고픈 운명인가?
 이 처량하고 서글픈 운명을 즐긴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이 세상을 통틀어 이 소년밖에 없을 것이다.
 양무수는 이 대목에 이르러 갑자기 소년에 대한 친밀감이 왈칵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나하고 비슷한 처지군. 그런데 너는 아버지와 어머니 중 누굴 더 좋아했나?”
 딴에는 소년과의 사이에 어떤 공감대를 형성해 보고자 한 질문이었다.
 그 자신 역시 이 넓디넓은 세상천지에 피붙이라곤 단 한사람도 없는 혈혈단신의 천애고아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양무수의 일방적인 생각이었을 뿐, 소년의 얼굴에는 왜 자꾸 아픈 곳만 찌르냐는 듯 약간 불만스러운 기색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잘 모르겠습니다.”
 양무수는 화제를 바꾸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는 자신의 옆구리에 찬 목검을 툭툭 쳐 보이며 말했다.
 “이 목검도 가문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보물이라면 믿겠나?”
 소년은 이제 노골적으로 짜증스러워 하는 기색을 드러내며 목검은 아예 쳐다보지도 않았다.
 “관심 없습니다.”
 양무수는 가볍게 미간을 찌푸렸다.
 “좋지 않은 버릇이야. 네 또래에는 길바닥의 돌멩이나 풀잎 하나라도 그냥 지나쳐 보아선 안되는 법이야. 그러고 보니 아직 이름도 묻지 않았군. 네 이름이 뭐지?”
 “모벽강(暮壁强)!”
 소년은 내뱉듯 대꾸한 뒤 입을 꾹 다물었다.
 이젠 어떠한 질문에도 대답하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엿볼 수 있는 표정이었다.
 “모벽강이라······!”
 양무수는 나직이 되뇌이더니 또 무슨 말인가를 하려다 말고 힐끗 어깨너머로 고개를 돌렸다.
 소년 모벽강의 시선이 자신의 뒤쪽으로 옮겨지면서 얼굴이 싸늘하게 굳어지는 것을 본 때문이었다.
 멀리 서너 명의 인물이 사방을 살피며 사냥개처럼 전진해 오고 있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양무수는 다시 모벽강에게 눈길을 던졌다.
 “아는 사람들이냐?”
 “아는 정도가 아니지요. 날 쫓고 있는 자들이니까요.”
 양무수는 흠칫했다.
 “쫓기고 있는 몸인가?”
 모벽강의 얼굴에 싸늘한 조소가 번졌다.
 “아무 것도 아닌 일이긴 하지만 쫓고 있는 자들이 있으니 그런 셈이지요.”
 “그럼 어서 도망쳐야지, 왜 이렇게 가만히 있느냐?”
 “제가 왜 도망쳐야 합니까?”
 “쫓기고 있으니까.”
 “쫓기고 있으면 반드시 도망쳐야 하는 겁니까?”
 “······?”
 양무수는 그만 어리둥절해지고 말았다.
 세살박이 코흘리개도 알고 있는 지극히 당연한 이치를 오히려 따지듯 되물으니 더 이상 할 말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러나 곧이어 흘러 나오는 모벽강의 음성은 어째서 그렇게 억지스런 말을 해야만 했는지를 설명해 주고 있었다.
 “도망쳐도 소용없어요. 제가 아무리 도망을 쳐도 저 자들은 끝내 저를 찾아내고야 말 테니까요!”
 완전히 체념했다는 뜻이었다.
 양무수는 잠시 모벽강을 응시하다가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다가오고 있는 자들은 모두 네 명이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탈바가지라도 뒤집어 쓴 듯 흉측하고 추악한 얼굴들을 하고 있었다.
 펄펄 끓는 물에 남만산(南蠻産)의 독충 몇 마리를 집어 넣고 그 물에 정성껏 세수를 하면 이런 얼굴들이 될까?
 양무수는 이 얼굴들이 선천적으로 타고났다기보다 약물이나 화상 따위의 외적인 영향으로 망가진 것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한편 사냥개처럼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다가오는 그들의 눈에는 태양의 역광을 받고 서 있는 양무수와 모벽강의 모습이 아직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양무수와 모벽강을 발견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저기 있다!”
 한 소리 날카로운 외침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 네 명의 추면인은 어느새 양무수와 모벽강의 주위에 내려서고 있었다.
 “흐흐흐··· 그럼 그렇지. 네까짓 놈이 뛰어 봐야······!”
 그들은 득의의 흉소를 터뜨리다 말고 웬 낯선 사내 하나가 목표물 옆에 우뚝 버티고 서 있자 잠시 흠칫하는 기색들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뿐이었고, 그들은 곧 거리낄 것이 없다는 듯 흉흉한 눈빛을 모벽강에게 집중시켰다.
 모벽강을 정면으로 마주보고 선 추면인이 대뜸 위압적인 어투로 입을 열었다.
 “꼬마, 순순히 말할 때 가자. 내 말 알아듣겠지?”
 “······.”
 모벽강은 냉랭한 눈으로 허공만 바라볼 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어디 해볼 테면 해보라는 듯 당돌하고 오만하기 이를 데 없는 태도였다.
 그런 그의 태도에서 양무수는 또 한 번 자신과 비슷한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었고, 그것이 마음에 들어서라도 부득불 나서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연스럽게 모벽강의 앞을 막아서며 마주선 추면인에게 말을 건넸다.
 “도대체 무슨 일인데들 그러시오?”
 추면인은 섬뜩한 눈빛을 양무수의 얼굴에 꽂았다.
 “넌 뭐냐?”
 망가진 얼굴 때문에 정확한 나이는 알 수 없지만 어림잡아 삼십대 중반쯤의 나이일 것이다.
 그렇다면 양무수보다 몇 살 위인 것은 사실이지만, 단지 그런 이유만으로 하는 말투치고는 상당히 귀에 거슬렸다.
 양무수는 귓구멍을 새끼손가락으로 후벼 대며 심드렁한 어투로 대꾸했다.
 “나는 말하자면 보다시피 남들처럼 눈 두 개에 입 하나를 가진 사람인데··· 그건 그렇고 너는 아무에게나 말버릇이 그 모양이냐?”
 “······!”
 추면인의 눈이 커졌다.
 설마하니 이렇게 대담한 반응이 있으리라곤 예상치 못한 것이다.
 “지금 그 말··· 특별히 못 들은 걸로 해주겠다. 그러니 두 다리 멀쩡할 때 어서 가 봐. 알겠나?”
 목소리 빛깔이야 어찌 됐든 상관없다.
 문제는 양무수가 가장 듣기 싫어하는 타이르는 듯한 투의 어조라는 데 있었다.
 양무수는 새끼손가락을 툭툭 털어 내며 피식 실소를 터뜨렸다.
 “생긴 상판에서 하는 짓거리에 이르기까지 도무지 마음에 드는 구석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작자들이군. 이거야 원 속이 뒤틀려서 봐줄 수가 있어야지!”
 “쓸데없이 아무 일에고 끼여들었다가 밥숟가락 놓는 사태가 허다하다는 건 알고 하는 말이겠지?”
 양무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날뛰다가 어느날 갑자기 염라대왕을 면회하러 가는 망둥이들도 세상에는 꽤 많다고들 하더군.”
 “······!”
 추면인은 어이가 없다는 듯 양무수의 전신을 새삼스레 훑어보더니 흉측한 웃음을 입가에 매달았다.
 “엄청나게 무식한 놈이군. 감히 탈명사귀(奪命四鬼) 앞에서 말장난을 하려 들다니······!”
 창!
 탈명사귀의 첫째인 대귀(大鬼)는 마침내 등에 찬 귀두도(鬼頭刀)를 사납게 뽑아 들었다.
 양무수는 시퍼런 광채를 흩뿌리는 귀두도를 힐끗 보고 나서 또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제법 협박이 되고 있다. 그런데 다음 순서는 뭐지?”
 그는 정말 다음 순서가 궁금하다는 표정이었다.
 대귀는 기막히다는 눈으로 자신의 형제들을 쳐다본 뒤 쿡쿡 실소를 터뜨렸다.
 “이제 보니 정상이 아닌 놈이었군. 어쩐지 대십전성(大十全城)의 탈명사귀 형제들을 몰라본다 했더니만······!”
 순간 양무수의 동공에 기이한 광채가 번뜩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눈앞의 이 위인들이 누구인가는 애초부터 관심 밖의 일이었다.
 이 하늘 아래 돼먹지 않은 외호(外號)를 가지고 거들먹거리며 살아가는 자들이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으니까.
 그러나 방금 대귀가 들먹거린 족보까진 양무수로서도 무관심할 수만은 없었다.
 
 ― 대십전성(大十全城)!
 
 그렇다.
 삼 년을 북해에서 보낸 사이에 천하의 주인은 그렇게 바뀌어 있었다.
 그러므로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이 이름을 듣고도 모르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틀림없이 뱃속의 태아가 아니면 죽은 사람이 분명할 것이다.
 원래 양무수가 중원을 등지기 전까지만 해도 중원천하는 순우(淳于)라는 성씨를 가진 한 절대적인 인간과, 그의 위대한 추종자들로 결집된 절세제일가(絶世第一家)라는 한 가문에 의해 주도되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양무수가 이 땅을 등지기 바로 직전.
 그 절세제일가를 이끌어 가던 천하제일인 순우좌(淳于座)는 죽었고, 그 죽음을 시작으로 절세제일가의 세력 또한 급격히 쇠약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삼 년이 지난 지금.
 얼마만큼의 난세가 있었고 무슨 사건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천하의 주인은 대십전성으로 결정되어 있었다.
 양무수가 대초원을 지나 여기까지 오는 두 달여 기간 동안 귀동냥한 것을 대충 종합해 보면······.
 대도(大道)와 대의(大義)를 가장 중시했던 전대의 천하제일인 순우좌와는 달리 대십전성의 성주이자 현재의 천하제일인은 철저히 자기 자신만의 뜻을 앞장세우는 사상초유의 절대강자라고 했다.
 그의 말은 곧 무림의 법이고, 질서이자, 도덕이었으며, 그는 일체의 타협도 모르는 철인 같은 위인이라고 했다.
 또한 일원이궁삼전사각십팔당삼십육방(一院二宮三殿四閣十八堂三十六房)의 미증유적 거세를 자랑하는 대십전성은 철저히 그의 손이고, 발이며, 천하의 구심점이 되어 있다고 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탈명사귀의 대귀가 그 어마어마한 이름을 들먹거린 것은 다분히 의도적이었다.
 조금이라도 제정신을 가진 자라면 당연히 꽁무니를 뺄 것이며, 또 그렇게 함으로써 불필요한 힘의 소요를 억제하려는 의도였던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들은 양무수가 어떤 위인인지를 너무도 모르고 있었다.
 이 하늘 아래의 그 어느 것에도 제재를 받지 않으려는 강골(强骨)의 근성과 더불어, 일단 한 번 손을 댄 일에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반드시 끝장을 보고야 마는 지독한 승부사적 기질로 충만해 있는 사람이 양무수라는 사실을 아예 상상조차 하지 못한 것이다.
 양무수는 잠시 무엇인가 생각하는 듯하더니 불쑥 대귀를 향해 말했다.
 “그런데 너는 그 칼을 언제까지 그렇게 들고만 있을 작정인가?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고만 있자니 지루해서 말이야.”
 대귀는 처음에 그가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를 몰라 자신도 모르게 들고 있는 귀두도를 힐끗 쳐다보았다.
 그러나 곧 상대가 자신을 놀리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급기야 분통을 터뜨렸다.
 “미친놈!”
 동시에 수중의 귀두도가 날벼락처럼 허공을 찢었다.
 슈우욱!
 분노로부터 비롯된 이 일초도법은 비단 흉맹할 뿐 아니라 쾌속하기 짝이 없었다.
 더구나 상대방인 양무수는 아직도 전혀 무방비 상태인지라 졸지에 허리가 두 동강 날 것처럼 보였다.
 ‘이제 보니 정말 미친놈이었잖아?’
 우두커니 서 있기만 하는 양무수를 쳐다보며 대귀의 얼굴에는 어이없어하는 미소가 떠올랐다.
 이 따위 미친놈을 상대로 지금까지 많은 말을 한 자신이 부끄럽게까지 생각됐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대귀는 느닷없이 무엇인가 자신의 면상을 향해 날아드는 것을 보았다.
 그 속도는 자신이 귀두도를 휘둘러 가는 속도를 최소한 다섯 배는 앞지르고 있었다.
 퍽!
 대귀의 몸이 붕 떠올랐다가 멀찌감치 나가떨어졌다.
 쿵!
 도대체 무엇이 어디서 날아온 것일까?
 썩은 짚단처럼 나동그라진 대귀는 일어날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슬그머니 손을 자신의 얼굴로 가져갔다.
 미적지근하면서 끈적끈적한 점액이 손안 가득 느껴졌다.
 뭔가 딱딱한 돌 부스러기 같은 것도 섞여 있었다.
 그것이 피와 이빨 부스러기라는 것을 알게 된 것과, 마치 수천 개의 바늘이 한꺼번에 파고들어 오는 듯한 고통이 전신으로 휘몰아친 것은 거의 동시의 일이었다.
 “으아악! 와아아악!”
 그제서야 비명이 터져 나왔다.
 순식간에 앞이빨이 몽땅 부러진 채, 짓뭉개진 입술을 감싸쥐고 땅바닥을 미친 듯이 구르는 대귀의 모습은 마치 선불맞은 멧돼지를 방불케했다.
 이 갑작스럽고 터무니없는 상황에 나머지 탈명삼귀는 얼떨떨한 눈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내 사태가 심상치 않다고 깨달은 그들은 일제히 귀두도를 뽑아 들었다.
 “이놈!”
 “어디서 굴러먹던 개뼈다귀냐?”
 살을 에일 듯한 도망(刀網)을 형성하며 그들은 폭풍처럼 양무수의 전신을 휩쓸어 갔다.
 휘이잉!
 파파파!
 그들은 이미 이런 합공에 이골이 난 듯, 창졸간에 펼친 공세임에도 불구하고 양무수의 전신을 정확히 삼 등분으로 나누어 찌르거나 베어 가고 있었다.
 양무수는 그러한 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의 이런 모습은 마치 눈앞에 전개되고 있는 상황이 자신과는 하등의 상관도 없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
 순간, 모벽강의 입에서 다급한 외침이 터졌다.
 “형!”
 비로소 양무수가 움직이기 시작한 것도 그때였다.
 움직였다곤 했으나 그는 단지 왼쪽 다리를 축으로 몸을 반 바퀴 정도 돌리면서 약간 상체를 뒤로 젖혔을 뿐이었다.
 그 동작은 비단 크지도 않았을 뿐더러 속도는 빠르기는 커녕 오히려 완만하게까지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탈명삼귀의 세 자루의 귀두도는 모두 목표물을 거의 일발의 차이로 빗나가고 있었다.
 탈명삼귀가 그것을 느꼈을 때는 이미 양무수의 좌권쌍퇴(左拳雙腿)가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번뜩이고 난 후였다.
 퍼퍽!
 뻑!
 소리······.
 뒤이어 꼬리를 물고 터져 나오는 또 다른 성질의 소리.
 “으아아악!”
 “와아악!”
 순식간에 피범벅이 되어 한꺼번에 울부짖는 네 명의 비명소리로 인해 그렇지 않아도 을씨년스럽던 폐허는 삽시간에 지옥의 아수라장이 되어 버린 것 같았다.
 “······!”
 모벽강은 넋을 잃고 양무수를 쳐다보았다.
 언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양무수는 호흡 하나 흐트러짐도 없다.
 비록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강호의 산전수전 다 겪어온 모벽강이었지만 이렇게 빠르고 가공할 무예의 소유자는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순간, 난생 처음 보는 가공할 무예의 소유자는 싱긋 웃으며 말을 던져 오고 있었다.
 “조금 전에 나를 뭐라고 불렀지?”
 모벽강은 흠칫 정신을 차리더니 가볍게 얼굴을 붉혔다.
 “죄송합니다. 얼떨결에 저도 모르게 그만······.”
 “앞으로는 반드시 ‘님’ 자를 붙여서 부르도록 해라. 알겠나, 소강(小强)?”
 소강.
 이름 앞에 ‘소’ 자를 붙여서 부른다는 것은 곧 사랑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일종의 애칭인 것이다.
 모벽강은 얼떨떨한 눈으로 양무수를 바라보며 믿을 수 없다는 듯 반문했다.
 “방금 그 거짓말··· 믿어도 되는 정말입니까?”
 양무수는 싱긋 웃으며 그의 머리를 가볍게 쥐어박았다.
 “앞으로 이 형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무조건 진리처럼 생각하는 습관을 기르도록 해라. 내 말 알겠나?”
 “알겠습니다, 형님!”
 모벽강은 얼른 허리를 굽혔다.
 “가자, 소강.”
 “알겠습니다, 형님!”
 모벽강은 벌떡 허리를 일으켜 세웠다.
 우스꽝스러운 동작 같았지만 황급히 하늘을 우러르는 모벽강의 눈꼬리에는 한 방울 눈물이 보석처럼 매달려 반짝이고 있었다.
 
 
 3장 여왕이라 불리는 소녀
 
 
 탈명사귀는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끈질기게 따라오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들에게 있어서 모벽강을 잡아가는 일은 단순히 먹고사는 문제가 아니라 죽고 사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으로 그들은 자신들이 하고자 하는 일이 영원한 희망사항으로만 그칠 줄 뻔히 알면서도 이렇게 따라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양무수.
 그는 지금 새순이 파랗게 깔려 있는 강둑길의 한복판에 모벽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서 있었다.
 강은 다가올 여름을 예고라도 하듯 짙푸른 색깔을 띠고 있었고, 그곳으로부터 미풍이 불어올 때마다 싱그러운 풀내음이 콧속을 신선하게 자극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아까부터 자꾸 콧구멍을 후벼 대는 양무수의 얼굴을 바라보며 모벽강은 마침내 입을 열었다.
 “형님!”
 “왜?”
 “혹시 콧병 같은 거 앓고 있는 거 아닙니까?”
 양무수는 콧구멍에서 손가락을 쑥 뽑았다.
 그런 다음 그는 그 손가락을 허벅지 옷자락에 쓱쓱 문지르며 자못 심각한 어투로 말했다.
 “알아 둬라. 내가 이렇게 자꾸 콧구멍을 후비는 건 술이 몹시 먹고 싶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신경쓰지 말고 어서 물어 본 말에 대한 대답이나 쏟아 놔라.”
 “알았습니다. 신경쓰지 않고 제가 알고 있는 대로만 쏟아 놓겠습니다.”
 모벽강은 생각을 정리하는 듯 잠시 침묵하다가 이윽고 차분히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그날은 좌우지간 억수 같은 폭우가 쏟아졌습니다. 그야말로 천지를 온통 집어삼킬 듯한 기세로 말입니다. 그리고 그 폭우 속에서 절세제일가는 활활 잘도 타올라 갔습니다.”
 “······!”
 “폭우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내부로부터 사전에 철저히 준비되었던 계획적인 방화 앞에선 하늘도 속수무책이었던 것이지요. 아까 형님과 제가 처음 만났던 그 자리···그 유명했던 절세제일가는 그날 그렇게 깨끗이 전소되어 완전히 잿더미로 변해 버린 것입니다.”
 “그럼 그때 절세제일가의 식솔들은 모두 어떻게 되었느냐?”
 “싸움 전부터 대십전성과 결탁해 있던 배신자들이야 당연히 대십전성의 개들이 되었고, 나머지는 화마(火魔)와 대십전성의 무차별적인 기습 앞에 대부분 사망했다고 들었습니다. 후후··· 어이없는 몰락이었죠. 아무리 순우좌 천하제일인이 없는 절세제일가라 해도 그토록 무기력하게 천하지존의 자리를 내놓으리라고 어느 누가 상상인들 해보았겠습니까?”
 “······!”
 무엇 때문이었을까?
 무심한 척 강물에 시선을 주고 있는 양무수의 눈가에 보일 듯 말 듯 미세한 경련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니까 살아 남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는 얘기냐?”
 모벽강은 피식 실소를 흘렸다.
 “후후··· 아마 모르긴 해도 절세제일가가 무너진 그 폐허는 한 백 년쯤 지나면 중원에서 가장 비옥하고 기름진 옥토로 변해 있을 겁니다. 그 많은 사람들을 태워 묻었으니 말입니다.”
 “······!”
 양무수는 그 말에 슬그머니 모벽강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닮았다.
 모든 사람들이 입에 담기를 꺼려하고, 무림사가(武林史家)들조차 붓을 들어 기록하기를 꺼려하는 그 엄청난 사건의 전말을 간단하고도 흥분됨 없이 얘기해 버리는 이 열다섯 인생의 냉정함.
 양무수도 그랬다.
 아니, 조금이라도 더했으면 더했지, 절대 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금의 양무수는 철없이 날뛰었던 그때 그 시절을 뼛속 깊이 뉘우치고 있었지만 눈앞의 이 소년에게 굳이 그런 말을 해주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양무수는 다시 강물로 시선을 던지며 조용히 물었다.
 “순우좌··· 그가 죽고 나서 절세제일가를 이끌어 가던 사람은 누구였느냐?”
 “총사(總師)로 있던 사마풍(司馬風)이었습니다.”
 “백혈공자(白血公子) 사마풍!”
 “그렇습니다. 그는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순우좌의 대를 이어 절세제일가를 여전히 천하제일의 위치에 머물 수 있게끔 잘 이끌어 나갔죠. 좀더 정확히 말한다면 대십전성의 움직임이 다소 늦어진 데 대한 덕을 보았다고 말하는 것이 옳겠습니다만······.”
 “내가 듣기로는 사마풍은······!”
 “그렇습니다. 그는 아직도 살아서 절세제일가의 패잔세력을 규합, 재기를 도모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제가 생각하기에 그의 재기는 결단코 불가능합니다.”
 모벽강은 아예 단정적으로 말했다.
 일찍 부모를 여의고 어려서부터 낭인생활을 해서인지 이 소년은 나이를 훨씬 상회하는 풍부한 식견과 소견을 지니고 있었다.
 “······!”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양무수는 느릿하게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구름 한 점 없이 파랗게 개인 하늘······.
 그러나 그 하늘을 바라보는 양무수의 눈에는 어쩐지 어두운 그림자가 먹구름처럼 짙게 드리워지고 있었다.
 그렇다.
 양무수.
 그는 원래 절세제일가와는 도저히 뗄래야 뗄 수 없는 어떤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가 중원에 돌아오자마자 절세제일가의 옛 터전을 먼저 찾아온 것도 그런 관계 때문이었다.
 폐허더미로 변한 그곳을 가 보았을 때 그의 심정은 오히려 담담한 편이었다.
 그것은 오는 도중 얻어 들은 소문을 단지 눈으로 확인해 보는 절차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벽강으로부터 당시의 전말을 듣고 난 그는 처음 소문을 접했을 때보다 비록 그 충격의 강도는 덜했을망정 더 지속적인 고통이 가슴속 깊은 곳으로부터 피어오르고 있음을 느꼈다.
 양무수는 몇 가지 더 궁금한 것이 있었지만 그만 묻기로 했다.
 자꾸만 묻다 보면 자신과 절세제일가와의 관계, 그리고 자신이 중원을 등져야만 했던 이유 따위의 이야기로까지 발전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묵묵히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그의 귓속으로 모벽강의 음성이 파고들었다.
 “형님!”
 “보다시피 난 지금 콧구멍을 후비고 있지 않다.”
 “그게 아니라 저는 지금까지 형님의 이름조차 모르고······.”
 “소강!”
 “예.”
 “궁금해도 조금은 참고 기다릴 줄 아는 습관을 기르도록 해라. 아무리 궁금한 게 많아도 세월이 가노라면 알기 싫은 것도 다 알게 되는 것이 세상살이고 인생살이니까 말이야.”
 모벽강은 씁쓸하게 웃었다.
 “궁금해도 참고 기다리는 습관··· 형님의 말은 무조건 진리처럼 생각하는 습관··· 아무래도 저는 앞으로 다양무쌍한 습관을 가지게 될 것 같군요.”
 “녀석!”
 양무수는 천연덕스럽게 대답하는 모벽강의 코끝을 가볍게 비틀고 나서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그건 그렇고 현재 대십전성을 다스리고 있는 위인은 도대체 어떻게 생겨 먹었다더냐?”
 “위인이라고 말씀하신 겁니까?”
 “그럼 그 어른이라고 말하랴?”
 모벽강은 소리 내어 웃었다.
 “후후후··· 아마 당금무림에서 그 사람을 위인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형님 한 사람밖에 없을 겁니다.”
 이어 모벽강은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기 시작했다.
 “천하제일인··· 그것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존경과 흠모를 받는 대상은 될 수 있으되, 막강한 힘과 권력만 행사하는 자리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약육강식이 최고의 원칙인 무림에서야 힘이 첫번째 우선 순위겠지만 그에 걸맞은 인품이 뒤따라서 결코 나쁠 것은 없겠죠.”
 “무슨 서두가 그렇게 길고 거창하냐?”
 “죄송합니다. 좌우지간 그런 면에서 볼 때 대십전성의 성주이자 현 천하제일인이기도 한 십전대제(十全大帝) 단목천(端木天)은 힘에서는 단연 우위에 서나 인품으로는 전대의 천하제일인인 순우좌보다 아래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비단 저뿐만 아니라 모든 무림인의 공통된 견해입니다. 따라서 강호의 일각에선 아직도 순우좌를 기리며 절세제일가의 멸문을 비통해 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양무수는 가볍게 미간을 찌푸렸다.
 “십전대제 단목천, 그 자가 정말 그렇게도 강한 인간이냐?”
 “사람들은 그를 무림개사(武林開史) 이래 최강의 실력자라고 평가하고 있는데 결코 과장된 이야기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길래 천하를 주름잡는 기라성 같은 거물급 고수들이 모두 그의 발아래선 숨도 크게 내쉬지 못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모벽강의 말을 듣는 순간 양무수는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단목천이란 절대강자의 모습이 저절로 상상되는 것 같았다.
 ‘단목천··· 십전대제 단목천······!’
 양무수는 하늘로 눈길을 던지며 조용히 그 이름을 되뇌어 보았다.
 바로 그때였다.
 “으아아악!”
 “컥!”
 느닷없이 등뒤 멀지 않은 곳으로부터 처절한 비명 소리가 줄지어 터져 나오는 것이 아닌가!
 모벽강은 깜짝 놀라면서 몸을 돌렸지만 양무수는 지루하리만치 느릿하게 고개만 어깨너머로 돌렸다.
 십여 장 떨어진 곳의 나무 그늘 아래에서 네 명의 추면인이 목을 감싸쥔 채 차례로 쓰러지고 있는 광경이 시선 속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탈명사귀였다.
 감싸쥔 목덜미에서는 시뻘건 핏물이 손가락 사이로 꾸역꾸역 흘러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쓰러진 바로 뒤쪽에는 언제 어디서 나타났는지 한 대의 마차가 조용히 모습을 드러내 보이고 있었다.
 눈처럼 흰 두 필의 설리총(雪離聰)에다 자체가 온통 각양각색의 꽃으로 뒤덮여 있는 아름답기 이를 데 없는 꽃마차······.
 마부는 보이지 않는 대신 마차의 바로 옆에는 막 옆구리의 검자루에서 손을 떼고 있는 한 사람이 있었다.
 일신에는 칙칙한 회의(灰衣)를 걸쳤다.
 서 있고, 움직이고 있으니까 산 사람이 분명했지만 이건 누가 보더라도 시체나 다를 바 없는 몰골이었다.
 뼈에 껍질을 발라 놓은 듯 지독하게 깡마른 체구도 그러하거니와, 부패한 듯 푸르죽죽한 피부와 움푹 꺼진 동공은 섬뜩하게도 암울한 회색빛을 띠고 있어 아무리 잘 봐줄래야 이미 숨이 끊어진 지 오래 된 시체로밖에 봐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양무수는 유심히 그를 바라보면서 미미하게 눈살을 찌푸렸다.
 그의 경험에 비추어볼 때 이런 유(類)의 위인은 대체로 살인을 밥먹듯 해대는 지독한 냉혈한이 틀림없다.
 자신은 물론이고 바로 옆에서 자신을 낳아준 친부모가 죽어가고 있어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지켜볼 수 있는 그런 차가운 심장을 가진 위인인 것이다.
 그러나 양무수로 하여금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땀······.
 놀랍게도 저 시체 같은 회의인의 이마에 분명히 몇 개의 땀방울이 맺혀져 있는 것을 발견한 때문이었다.
 그리고 저런 위인으로 하여금 땀을 흘리게 하는 원인이 바로 뒤의 꽃마차 안에서 흘러 나오는 음성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내는 데는 별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더 이상 변명의 여지는 없다고 생각해요. 나는 분명히 당신에게 이 일을 맡겼음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저 머저리 같은 작자들에게 일을 대행케 했어요.”
 “죄송합니다. 그래서 속하가······!”
 “당신이 당신의 수하 몇 명을 죽인 것과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요. 문제는 내가 이 일을 지시한 지 벌써 만 하루가 지났음에도 아직 완수되지 않았다는 데 있어요. 이 점에 관해서 당신은 마땅히 문책을 받아야 해요.”
 달콤한 음성이었다.
 마치 쟁반에 옥구슬이 굴러가는 듯한 짤랑짤랑한 옥음으로 보아 이 음성의 주인은 결코 스무 살을 넘지 않은 소녀임이 분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달콤한 음성에는 듣는 사람의 마음을 얼어붙게 만드는 무서운 힘과 위엄이 적절하게 잘 조화되어 있었다.
 꽃마차에서 잠시 아무런 말이 없자 회의인의 이마에선 더욱 많은 양의 식은땀이 흘러 나오고 있었다.
 이윽고 마차에서 다시 옥음이 흘러 나왔다.
 “좋아요. 앞으로 일 각의 여유를 더 주겠어요. 당신은 이 일 각 안에 반드시 임무를 완수하세요. 내 말 알아들었죠?”
 순간, 회의인의 눈가로 한 줄기 안도의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아가씨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그는 마차를 향해 크게 절을 한 뒤 말고삐를 쥐고 천천히 강둑길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묵묵히 마차를 보고 있던 양무수는 문득 기이한 표정을 떠올리며 옆의 모벽강을 쳐다보았다.
 어쩐지 모벽강의 몸이 가늘게 떨리고 있는 듯한 느낌이 전해져 왔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모벽강은 온몸을 가늘게 떨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얼굴에선 단 한 점의 핏기도 찾아볼 수 없었다.
 “아는 자냐?”
 모벽강은 다가오는 마차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저 자는 대십전성의 서열 십팔 위에 올라 있는 염라향도(閻羅香刀) 구등사(歐藤祀)라는 자입니다.”
 “그래?”
 양무수는 약간 뜻밖이라는 표정을 떠올리며 힐끗 회의인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강호에서 활동중인 무인들의 숫자를 어중이 떠중이 다 합친다면 최소 백만을 헤아린다.
 그 중에서 두 자리 숫자의 상위에 올라 있다는 것은 한 마디로 불세출의 고수라 표현해도 절대 지나친 말이 아닌 것이다.
 그리고 대십전성이라는 천하최강의 거세(巨勢)에서 서열 십팔 위라 함은 곧 천하무림의 서열 십팔 위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그런 어마어마한 거물로 하여금 식은땀을 흘리며 절쩔매게 만드는 저 마차 안의 소녀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
 이런 의문을 떠올리고 있는 양무수의 심정을 읽기라도 한 듯 때마침 모벽강의 음성이 그의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저 마차 안에는 바로 십전대제의 딸, 악마보다 더하면 더했지 조금도 뒤질 게 없는 단목경(端木卿), 그 악독한 계집이 타고 있는 게 분명합니다.”
 “······!”
 “지독한 년··· 설마하니 저 년이 이렇게까지 적극적으로 나를 찾아 나설 줄은 몰랐습니다.”
 최대한 침착하려고 애쓰는 마음과는 달리 모벽강의 음성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단목경이라······!’
 양무수는 이제 본격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다가오는 마차를 주시하기 시작했다.
 단목경(端木卿).
 대십전성의 성주이자 명실공히 자타가 인정하는 천하제일인 십전대제 단목천의 무남독녀.
 오만하고 아름다우며 병적으로 자존심이 강하다는 당년 십팔 세의 소녀.
 어머니가 없는 그녀는 대십전성의 여왕으로 불린다.
 또한 그녀는 스스로 여왕을 자처하고 있었다.
 사실 십전대제의 천금(千金)이라는 신분은 여왕이라 불리기에 조금도 손색이 없는 것이었다.
 더구나 그녀는 구태여 그런 신분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그렇게 불릴 수 있는 또 하나의 요건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미모······.
 혹자는 서슴없이 이 시대 최고의 미인이라 말하고 있었고, 혹자는 인류 탄생 이래 조물주의 최고 걸작이라고 부르짖고 있었으며, 혹자는 대륙천하를 밝혀주는 또 하나의 태양이라고까지 극찬에 극찬을 거듭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렇듯 고귀하고 아름다운 여왕이 오늘 이런 장소에 나타났다는 것은 실로 파격적이고 충격적인 일대의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서서히 다가오던 마차는 마침내 양무수가 있는 곳에서 오장 가량의 거리를 두고 멈추어 섰다.
 일 각.
 마차의 여왕은 일 각 이내에 임무를 완수할 것을 염라향도 구등사에게 명령했다.
 일 각은 절대 길다고 말할 수 없는 시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등사는 전혀 서두르는 기색이 없었다. 자신의 실력을 믿고 있다는 뜻이다.
 구등사는 말고삐를 놓고 삼 장 가량을 더 다가온 뒤 암울한 회색빛 시선을 양무수의 얼굴에 꽂았다.
 “떠나라. 필요한 건 저 꼬마놈뿐이니까.”
 인간의 감정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전혀 실려 있지 않은 무심한 음성.
 그래서 더욱 공포스럽다.
 그러나 지금 그 음성을 듣고 있는 사람은 양무수였다.
 양무수는 피식 웃었다.
 “방금 그 말 나 보고 한 말인가?”
 “······!”
 반말이다.
 구등사는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생전 처음 보는 사람으로부터 반말을 들어본 기억이 없었다.
 더구나 자신보다 연하의 사람이 지금처럼 시작부터 대뜸 반말을 해올 수 있는 일이 이 땅에 존재하리라곤 상상조차 해보지 않았던 그였다.
 “죽지 못해 환장을 한 놈이었군.”
 행동은 말을 훨씬 앞지르고 있었다.
 말이 끝났을 때 갈고리처럼 오므려진 그의 손은 이미 양무수의 목젖에 거의 와 닿고 있었던 것이다.
 전광석화(電光石火)!
 어떤 경우에 쓰라고 만들어 놓은 말인지 실감나게 해주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구등사의 쇠갈고리 같은 손아귀에 쥐어진 것은 양무수의 목젖도, 옷자락도 아닌 한 줄기의 실체 없는 공기뿐이었다.
 전혀 움직인 것 같지 않은데 석 자 가량 물러나 있는 돈피의의 사내가 회색빛 동공 속으로 투영되어 왔다.
 혼자도 아니고 모벽강의 손까지 잡고 조용히 서 있는 그의 모습은 마치 원래부터 지금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처럼 보이게 했다.
 “······!”
 구등사는 얼떨떨한 눈으로 허공을 움켜잡고 있는 자신의 손을 쳐다보았다.
 대수롭지 않게 시도한 듯 했으나 기실 마흔아홉 명의 목뼈를 부러뜨린 관록을 자랑했던 자신의 일절(一絶) 염라혈조(閻羅血爪)라는 금나수법이 최초의 실패를 경험하는 순간이었다.
 구등사는 놀람과 당혹이 깃든 시선을 양무수의 얼굴에 꽂았다.
 “네놈은 누구냐?”
 양무수는 여유있는 웃음을 지어 보였다.
 “알아맞춰 봐. 내가 누구일 것 같은가?”
 구등사의 눈에 한 가닥 긴장의 빛이 스쳤다.
 저 여유만만한 태도하며 방금 목격한 바 있는 절묘한 신법 한 수!
 ‘심상치 않은 놈이다!’
 그렇다고 해서 겁을 집어먹은 건 아니었지만 문제는 시간에 있었다.
 이미 부여된 일 각의 반이 지나가 버린 이 판국에 저 놈은 남은 시간 정도는 충분히 때우고도 남을 위인 같았다.
 구등사는 서서히 자신의 손을 뱃가죽 쪽으로 가져갔다.
 막 그 손을 움직이려는 순간이었다.
 “잠깐 기다려요.”
 천하에서 가장 권위 있는 마차로부터 흘러 나온 한 줄기 음성.
 그와 동시에 발작 직전의 구등사가 얼어붙듯 동작을 정지했다. 뒤이어 그는 마차가 있는 곳을 향해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분부 계시오이까?”
 한없이 듣기 좋고 교태 어린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지금 생각해 보니 나는 저 멋지게 생긴 아저씨의 얘기를 아버지에게서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아요.”
 “예?”
 놀란 것은 구등사뿐만이 아니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양무수는 온몸에 흐르는 피가 싸늘하게 식는 느낌이었다.
 ‘단목천이 나를······?’
 교태로운 음성은 대단히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는 듯 가벼운 웃음기를 담고 이어져 나왔다.
 “단벌 돼지가죽 옷에 쓸모도 없어 보이는 막대기 같은 목검··· 그래요, 맞아요. 아버지의 말이 맞는 것 같아요. 아버지는 그의 모습을 얘기하면서 또 한마디 덧붙이셨어요. 그는 우리 대십전성에 있어 은인이나 다름없는 사람이라고······.”
 양무수의 눈빛이 짧게 흔들렸다.
 
 ― 그는 우리 대십전성에 있어 은인이나 다름없는 사람이라고.
 
 그 한마디는 양무수의 머릿속을 마치 쇠망치로 후려치는 것과 같은 효과가 있었다.
 그러나 그의 표정은 여전히 담담했고 입 밖으로 흘려내는 음성 또한 그지없이 담담한 것이었다.
 “너는 사람을 잘못 보았다. 나는 네가 누구라는 것도 이제 처음 알았거니와 네 아버지란 사람하고는 아직 콧배기조차 마주친 적이 없는 사람이다.”
 순간, 구등사의 얼굴이 푸르르 떨렸다.
 그는 지금까지 저 지고무상한 여왕에게 서슴없이 반말을 하는 사람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아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당장 날벼락이 떨어지고 조상 십 대의 무덤까지 깡그리 파헤쳐질 엄청난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그러나 믿을 수 없게도 마차에서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듯 처음과 다름없는 음성을 쏟아 내고 있었다.
 “처음부터 일면식도 없는 사람에게 반말을 하시는군요. 그럼 더욱 맞아요. 아버지는 말했어요. 그는 천하에서 가장 특이한 두 사람 중의 하나이며, 또 그 두 사람이 어딘가에서 돌아오면 꼭 한 번 만나 보시고 싶다고······.”
 “······!”
 양무수는 또 한 번 가슴이 쿵하고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 천하에서 가장 특이한 두 사람.
 
 ‘담 형까지······!’
 담 형이란 바로 담효기를 말하는 것이다.
 양무수는 문득 단목천이란 인물에 대해 알 수 없는 두려움 같은 것을 느꼈다.
 자신은 전혀 의식하지 않았는데도 그는 이미 오래 전부터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마음껏 요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기이한 두려움과 끈적끈적한 굴욕감에 휩싸여 보기는 처음이었다.
 “언제고 한 번 저희집에 들려주세요. 아저씨같이 멋진 사람은 언제라도 쌍수를 들어 환영해드릴 용의가 있으니까요.”
 소녀는 한 차례 간드러진 교소를 터뜨리고 나서 말을 이었다.
 “아저씨는 아까도 말했다시피 우리 대십전성의 은인이에요. 그러니까 이제는 저 어린 녀석을 데리고 가는 것도 더이상 참견하시지 않을 거예요.”
 “······!”
 양무수는 묵묵히 마차를 바라보다가 모벽강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모벽강은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억지로 두려움을 참고 있는 중이었지만 양무수를 마주보는 눈에는 한 가닥 짙은 의혹의 빛이 떠올라 있었다.
 대십전성의 은인 운운하는 말을 생각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마주보고 있는 두 사람 사이로 소녀의 음성이 파고들었다.
 “당신, 이제 저 녀석을 잡아 와요.”
 구등사에게 한 말이었다.
 “예!”
 구등사는 대답에 이어 양무수를 힐끗 일별한 뒤 천천히 모벽강을 향해 걸음을 떼어놓았다.
 모벽강은 양무수를 뚫어지게 쏘아보다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체념이었다.
 그 체념의 저변에는 여직껏 믿었던 사람에 대한 배신감과 분노 같은 것이 깔려 있는 것을 양무수는 읽을 수 있었다.
 양무수는 씁쓸하게 웃으며 입을 떼었다.
 “거기 서!”
 그것은 모벽강에게 한 말이 아니라 다가오는 구등사를 향해 한 말이었다.
 구등사는 멈칫하더니 얼굴을 기묘하게 일그러뜨렸다.
 “방해하지 않기로 한 걸로 알고 있는데······!”
 “어디서 헛소리를 들은 모양이군.”
 “······!”
 구등사는 약간 곤혹 어린 눈길로 마차를 돌아보았다.
 마차에서는 아무 말도 없었다.
 구등사는 그 침묵을 마음대로 해도 좋다는 허락의 의미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할 수 없지. 죽는 것이 그렇게 소원이라면 소원대로 해줄 수밖에······.”
 구등사는 무심하게 뇌까리며 뱃가죽에서 무엇인가를 꺼내 들었다.
 그것은 하나의 넓고 네모 반듯한 철판이었다.
 얼핏 보기에 엉덩이를 깔고 앉으면 딱 좋을 것 같은 방석모양의 철판······.
 그러나 그것은 오늘의 구등사를 대십전성의 서열 십팔 위에 올려 놓은 그의 독문애병(獨門愛兵)인 동시에 이 시대의 살인마를 상징하는 염라대왕의 최명부(催命符)이기도 했다.
 염라향도(閻羅香刀).
 철판의 이름이었다.
 그 염라향도를 부드럽게 어루만지면서 구등사는 음산한 미소를 입꼬리에 피워 올렸다.
 “이름은?”
 “네 아버지다!”
 “미친놈!”
 동시에 한 줄기 검은 빛살이 형용할 수 없는 속도로 양무수의 목덜미를 향해 폭사되었다.
 번― 쩍!
 소리도 없었다.
 한 줄기 검은 광채가 일었다 싶은 순간 철판은 어느새 양무수의 목덜미와 지척간의 간격을 남겨두고 있었다.
 그러나 구등사는 바로 그 절호의 순간에 우뚝 몸을 멈추어야만 했다.
 그의 염라향도는 아직 목표물에 닿지도 않았지만 한 자루의 목검은 어느새 구등사의 목젖에 와 닿아 있었으므로······.
 말이 목검이지, 고수의 손에서는 언제라도 보검 이상의 효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
 구등사는 삼혼칠백(三魂七魄)이 모조리 몸 밖으로 쏟아져 나가는 느낌이었다.
 도저히 지금의 상황을 믿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온통 회의와 불신으로 뒤덮인 채 뻣뻣하게 굳어 있는 구등사의 귓속으로 한 소리 간단명료한 음성이 파고들었다.
 “가 봐!”
 음성과 함께 목검이 목에서 떨어져 나갔다.
 구등사는 그제서야 한 차례 부르르 몸을 떨었다.
 전의는 고사하고 들고 있는 염라향도마저 무겁게 느껴질 정도의 극심한 무력감이 전신을 짓눌러 왔다.
 그는 목젖을 떨며 간신히 입을 떼었다.
 “너··· 너는··· 도대체······!”
 그러나 그는 불현듯 들려오는 옥음으로 인해 얼른 하던 말을 멈추어야 했다.
 “가요, 당신!”
 구등사의 안색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아가씨······!”
 “당신 같은 사람이 하나 더 있어도 그의 적수는 되지 못해요. 어서 와서 마차나 끌어요.”
 “······!”
 구등사는 무슨 말인가 하고 싶은 눈치였지만 입을 꾹 다물고 힘없이 마차를 향해 발걸음을 ㅇ겨 놓았다.
 이윽고 그가 말고삐를 거머쥐자 마차 안에서의 음성이 이번에는 양무수를 향해 흘러 나왔다.
 “아저씨는 조만간 틀림없이 우리집을 들르게 될 거예요. 기다리겠어요.”
 그 말을 끝으로 마차는 천천히 강둑길을 내려가 숲속으로 사라져 갔다.
 양무수는 묘한 감정에 휩싸여 있었다.
 그것은 마치 막 잠을 자려다 누군가에 의해 억지로 깨워진 것 같은 떨떠름한 기분 같은 것이었다.
 “단목경이라······!”
 “아비 잘 만난 덕에 하늘 높은 줄 모르는 시건방진 계집이지요.”
 양무수는 모벽강을 돌아보았다.
 “너는 어쩌다 저런 시건방진 계집의 표적이 되었나?”
 “어제 금릉성을 지나가는데 저 건방진 계집을 태운 마차가 지나가더라구요. 그래서 잘 만났다 싶어 마구 욕을 해댔죠.”
 “뭐라구 말이냐?”
 “너는 세상에서 가장 음탕하고 못생긴 년이다! 너는 길바닥에 버려진 개똥보다 못한 추악한 년이다!”
 “바로 코앞에서?”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제 목소리가 워낙 커서 들렸던 모양입니다. 그러고 나서 저는 죽자사자 달아났죠, 뭐!”
 “녀석······!”
 양무수가 가볍게 머리를 쥐어박자 모벽강은 멋적은 듯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러다 문득, 모벽강은 무엇을 생각했는지 두 눈을 기묘하게 빛내며 양무수를 쳐다보았다.
 “형님.”
 “소강.”
 “예!”
 “두 번째 습관, 벌써 잊지는 않았을 테지?”
 “궁금한 것도 조금은 참고 견딜 줄 아는 습관을 길러라··· 그거 아닙니까?”
 “가자.”
 노을······.
 저 멀리 사라져 가는 두 사람의 어깨 위로 핏물 같은 노을이 자욱하게 내려앉고 있었다.
 
 ***
 
 배(船).
 유유히 흘러가는 강물을 따라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속도로 한가롭게 미끄러져 가고 있는 한 척의 배.
 뱃머리 갑판에는 지금 대여섯 명이 둘러앉아 뱃길 여행의 따분함을 잊으려는 듯 한창 투전놀이에 열중하고 있었다.
 하늘은 그지없이 쾌청하고 쏟아져 내리는 햇살은 기분 좋을 만큼 따스하다.
 드물도록 좋은 오 월의 날씨였지만 투전놀이에 정신을 다 빼앗기고 있는 이 패거리들에겐 그 따위 날씨쯤은 전혀 관심거리가 될 수 없었다.
 지금 그들에게 있어선 손에 쥐어진 두 장의 골패(骨牌)만이 삶의 전부인 동시에 운명, 그 자체일 뿐이었다.
 때문에 그들은 아까부터 자신들의 주위를 맴돌며 투전판을 힐끔힐끔 곁눈질해 보는 사람 하나가 있다는 사실은 아예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그는 부리부리한 호안(虎眼)에 곰같이 턱수염이 북실북실한 마흔 살 가량의 중년인이었다.
 장우림(張雨林).
 그런 이름을 가지고 있는 이 중년인은 사실 천하의 그 누구보다도 도박을 좋아하는 도박광이었다.
 간단히 말해서 도박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그런 위인이었다.
 그런 도박광이 바로 면전의 투전판에 선뜻 끼여들지 않고 멀리 보이는 강 대안(對岸)의 풍광을 감상하는 척하면서 곁눈질로만 투전판을 힐끔힐끔 훔쳐보는 데는 다음과 같은 세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판돈의 규모였다.
 아무리 광이라고 하나 기껏해야 은자 몇 푼 오고가는 이런 차원 낮은 판에 끼여든다는 것은 아무래도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두 번째는 도박의 종류였다.
 도박의 왕은 뭐니뭐니 해도 마작이다.
 망해도 마작이고 흥해도 마작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말이다.
 마작에 익숙해 있는 이 손에 만약 골패 따위의 저질 도박기구가 쥐어진다면 어쩐지 심장이 간지러울 것 같았다.
 세 번째는 환경조건.
 물론 뱃전에서의 도박이 그런 대로 묘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역시 골방이 제격이다.
 후끈한 열기와 자욱한 연초 내음이 없는 곳에서의 도박은 종이 없이 측간에 가는 것처럼 어쩐지 허전하다.
 육덕 좋은 계집들이 애타게 대기하고 있는 방이 바로 옆에 붙어 있는 골방이라면 더 더욱 좋은 것은 두말할 나위조차 없는 것이고······.
 어쨌든 이런저런 이유로 투전판에 끼여들지 못하고 눈알만 열심히 굴려대던 장우림은 이제 훔쳐보는 재미마저도 지루해졌다.
 신성하다고까지 생각하고 있는 도박을 이렇듯 초라하게 즐기고 있는 이 패거리들에 대한 묘한 분노마저 느끼면서 그는 서서히 갑판을 거닐기 시작했다.
 거닐면서 그는 부리부리한 호안으로 열심히 주위를 살펴 보았다.
 그럴 듯한 건수를 찾고 있는 눈이 분명할진데······.
 문득, 그의 두 눈이 기이한 광채를 번뜩였다.
 시선이 멎은 곳은 선미(船尾).
 그곳의 갑판은 상당히 넓었다.
 갑판의 한쪽에는 쇠밧줄로 묶은 대나무 짚더미가 수북이 쌓여 있었고, 나머지 공간에는 도합 일곱 명의 사람이 눕거나 앉아 있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흐음··· 제법 개성이 뚜렷한 녀석들이군.’
 장우림은 마침내 건수를 찾아냈다는 듯 흥미로운 눈길로 선미의 칠 인을 하나씩 살펴보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시선이 향한 곳은 대나무더미 위에 앉아 있는 백의 차림의 청년이었다.
 그런데 오오······.
 눈부신 햇살 아래 적나라하게 드러나보이고 있는 이 청년의 용모를 무슨 말로 형용하랴!
 피부는 속이 환히 들여다보일 듯 희디흰 옥부.
 깊고 서늘한 눈은 추수 같고, 거문고의 현처럼 정교한 입술에 정성들여 세공한 듯 우뚝 솟아오른 콧날이라니······.
 실로 어디 한 군데 흠잡을 곳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전형적인 귀족형의 미청년이었다.
 문득 장우림의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스쳐갔다.
 저런 정도의 인물이라면 설혹 수천, 수만의 군중 속에 파묻혀 있더라도 단박에 눈에 뜨일 것 같았다.
 ‘징그럽게 잘생긴 녀석이군.’
 장우림의 시선이 두 번째로 향한 인물.
 그는 화상(和尙)이었다.
 반들반들한 대머리에 일신에 걸친 황색 법의가 결정적으로 그의 신분이 화상임을 말해 주고 있었다.
 백의 미청년과 비슷한 또래인 스무 살 가량의 나이에, 축 늘어진 눈꼬리와 메기처럼 두툼한 입술을 가지고 있는 젊은 화상.
 장우림의 오랜 강호 경험은 한눈에 이 화상이 사이비 땡추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 다음 눈길이 간 세 번째 인물은 역시 같은 또래의 젊은 도인이었다.
 그러나 이 또한 하고 있는 복장과 행색만 그러했을 뿐, 오히려 이 젊은 도인에게선 앞의 화상에게서 느꼈던 것보다 더욱 강렬한 사이비의 냄새를 맡을 수가 있었다.
 네 번째 인물.
 역시 스무 살 안팎으로 보이는 그는 엄청나게 뚱뚱한 몸을 가지고 있었다.
 얼마나 뚱뚱한지 목은 아예 있는지 없는지 분간조차 할 수 없었고, 어디까지가 상체이며 어디서부터 하체가 시작되는지 아무리 살펴봐도 구별하기가 불가능했다.
 이목구비 또한 두툼한 비곗살로 온통 뒤덮여 있는지라 얼핏 보면 이건 무슨 사람의 얼굴이 아니라 잔뜩 부풀어오른 찐빵을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쯧쯧··· 저것도 사람이라고······.’
 장우림은 안됐다는 듯 혀를 차며 다섯 번째 인물에게 시선을 옮겼다.
 순간, 장우림의 눈에 한 줄기 기광(奇光)이 스쳐갔다.
 다섯 번째 인물은 무섭도록 깡마른 체구에 헐렁한 흑의무복을 망또처럼 걸치고 있었다.
 독수리처럼 날카로운 눈매와 종잇장처럼 얄팍한 입술.
 예리하게 휘어진 매부리코와 쭉 빠진 하관.
 장우림은 그를 보는 순간 마치 시퍼렇게 날이 선 한 자루의 칼날을 보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가장 기분 나쁘게 생겨먹은 녀석이군.’
 장우림은 얼른 나머지 두 사람이 있는 곳으로 눈길을 옮겼다.
 거기에는 돼지 가죽을 옷 대신 걸쳐 입고 벌렁 드러누워 있는 장발의 사내와 키보다 더 커 보이는 장도를 멘 십오 세 가량의 소년이 앉아 있었다.
 ‘별볼일 없는 떠돌이 녀석들이군.’
 꾀죄죄한 행색과 옷차림새가 그것을 말해 준다.
 장우림은 다시 앞서의 오 인을 차례로 바라보다가 백의미청년에 이르러 시선이 딱 멎었다.
 보면 볼수록 잘생긴 녀석이다.
 자신의 사회적 신분이나 위치를 놓고 볼 때 최소한 저 정도는 되어야 자신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자격을 갖추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심사숙고 끝에 마침내 대상을 결정한 장우림은 백의미청년이 앉아 있는 대나무더미를 향해 성큼성큼 걸음을 떼어 놓기 시작했다.
 막 선미에 당도하는 순간, 갑자기 누군가의 음성이 기다렸다는 듯 그의 고막 속으로 파고들었다.
 “저 사람은 대십전성의 악양지부(岳陽支府)를 책임지고 있는 비사신도(飛師神刀) 장우림이라는 사람입니다. 정확하게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대십전성에서의 서열은 아마 이십사 위나 아니면 이십오 위일 것입니다.”
 ‘엉?’
 장우림은 멈칫하며 얼른 음성의 주인을 찾았다.
 음성으로 미루어 짐작컨대 그 말을 한 사람은 장도를 멘 소년이 분명했다.
 아니나 다를까!
 급히 돌아보는 시선 속으로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소년의 모습이 쏟아져 들어왔다.
 ‘저놈이 감히 누구의 이름을 함부로······.’
 장우림은 두 눈을 무섭게 부라리다 말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 이내 표정을 누그러뜨렸다.
 어차피 잘된 일이다.
 그렇지 않아도 어떻게 하면 이 일곱 녀석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릴 수 있을까 고민스러웠는데 이 어린 녀석은 그러한 고민을 자연스럽게 해결해 준 것이었다.
 ‘기특한 놈······.’
 장우림은 안색이 대변해 있을 나머지 여섯 녀석의 얼굴을 상상하며 느긋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모두 무관심하다.
 아예 듣지도 않았다는 표정이요, 자세들이 아닌가?
 그러고 보니 방금 말했던 어린 녀석조차 자기를 빤히 쳐다보고만 있을 뿐, 외경(畏敬)의 태도라든가 두려워하는 기색 따위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 아닌가?
 장우림은 그만 머릿속이 혼란해지고 말았다.
 ‘내가 지금 어느 동네에 와 있는 거냐?’
 적어도 악양 내에서는 황제로 통하는 그 자신이며, 대십전성의 서열 이십오 위라면 어지간한 군소방파(群小幇派)의 문주(門主)나 방주(幇主) 따위는 감히 고개조차 들지 못하는 거물 중의 거물이 아닌가 말이다.
 그런 자신이 다른 사람들로부터 이토록 철저히 무시되어 본 적은 아직까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비사신도 장우림.
 그는 부리부리한 외양에 걸맞는 호방한 성품의 인물이었다.
 ‘강호의 신출내기들이라 아직 내 이름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모양이군. 좋아, 그렇다면 잘 일깨워 주는 것이 선배로서의 도리······.’
 장우림은 문득 표정을 근엄하게 가다듬고 백의청년에게 다가갔다.
 “이것 봐, 자네 나하고 얘기 좀 할 수 있겠나?”
 먼 곳을 바라보고 있던 백의청년의 고개가 서서히 장우림을 향해 돌려졌다.
 순간, 장우림의 큰눈이 더욱 커졌다.
 아아··· 얼굴!
 멀리서 볼 때도 아름답더니만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보자니 더욱 아름답다.
 아예 미치도록 아름답다.
 눈부신 햇살을 정면으로 받아서인지 마치 빛무리에 휩싸인 듯 보이는 이 얼굴은 마치 사내의 얼굴도 이만큼 아름다울 수 있다는 사실을 대변해 주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한참 동안 넋을 잃고 바라보던 장우림의 입에서 문득 이런 말이 흘러 나왔다.
 “자네 정말 사내인가?”
 백의청년의 얼굴에 흰 선 하나가 그어졌다.
 웃음이었다.
 시리도록 맑고 투명한 웃음······.
 이 웃음 속에는 사람의 마음을 사정없이 잡아끄는 불가사의한 매력이 보석처럼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웃으면서 그가 입을 열었다.
 “마침 적적하던 참이었습니다. 고마운 분이 찾아 주셨군요.”
 생긴 대로 논다더니 음성까지 귀를 즐겁게 해주었다.
 장우림은 즐거워졌다.
 호방한 성격일수록 아름다움에는 약한 법이다.
 “나는 자네가 계집이었으면 좋겠네. 정말 잘생긴 얼굴이야······.”
 “감사합니다.”
 “음! 좋아, 예의도 바르군. 한데 자네는 계속 그대로 올라 앉아 나와 얘기할 셈인가?”
 “저는 이대로가 편하고 좋습니다.”
 일순, 장우림의 한쪽 눈썹이 찡긋 움직였다.
 연장자를 위에서 내려다보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분명히 예법을 무시하는 처사다.
 그러나 장우림은 방금 한 말도 있고 해서 입이 째져라 호방한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핫··· 좋아, 좋아, 정말 마음에 들었다. 만약 자네가 내 말을 듣고 거기에서 내려왔다면 난 서슴없이 자네를 줏대 없는 기생오라비라고 불렀을 게야.”
 이어 그는 지극히 우호적인 미소를 머금은 채 부드럽게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자네는 혹시 내가 누군지 조금이라도 알고 있나?”
 그 말에 백의청년은 약간 계면쩍어하는 기색을 떠올렸다.
 “죄송합니다. 제게는 아직 이렇다 할 강호 경험이 없어서······.”
 ‘역시 신출내기였군.’
 장우림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난 뒤 나머지 사내들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아는 녀석들인가?”
 “이쪽 네 사람은 동문수학한 제 친구들입니다.”
 “그럼 저기 벌렁 누워 있는 녀석과 어린 꼬마놈은?”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백의청년의 말투는 언제나 매끄럽고 정중했으며 또한 조용했다.
 높은 곳에 앉아 있는 것만 아니라면 도대체 눈에 거슬리는 게 없었다.
 이때였다.
 “야, 임마! 너 그 돈 제자리에 다시 갖다 놓지 못해?”
 “이새끼 이거 이제 보니 순 사기꾼 아냐!”
 “죽여! 손목을 끊어 버려!”
 누군가 손재주를 발휘하다가 들킨 모양이었다.
 투전판의 사내들이 거친 욕설을 내뱉으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고 있었다.
 일어선 사내들은 아직도 그 자리에 앉아 있는 한 사내를 에워싸고 당장이라도 때려죽일 듯한 기세였다.
 장우림은 잠시 그 광경을 지켜보다가 미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뱉어 내는 욕설만 살벌했을 뿐, 은자 몇 푼 오고가는 사내들이고 보면 이 사건은 곧 흐지부지 끝날 것이라고 전문가다운 예상을 했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앉아 있는 사내가 은자 몇 개를 꺼내 놓으면서 뭐라고 말을 하자 일어섰던 사내들은 언제 욕을 했냐는 듯 누그러진 표정을 지으며 다시 하나 둘 자리에 앉고 있었다.
 ‘그럼, 그렇지. 제까짓 놈들이······.’
 장우림은 다소 실망한 기색과 함께 시선을 거두다 말고 갑자기 어떤 생각이 떠올라 급히 백의청년을 향해 물었다.
 “자네 혹시 도박 좀 할 줄 아나?”
 백의청년은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모릅니다.”
 “한 가지도 할 줄 모른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장우림은 애석하다는 듯 혀를 끌끌 찼다.
 “쯧쯧··· 그 즐겁고 화끈한 도박을 할 줄 모른다니··· 그렇다면 자네가 가장 즐기는 취미는 무엇인가?”
 “······.”
 백의청년은 잠시 침묵했다. 그는 잠시 무엇인가 생각하더니 이윽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제가 가장 즐기는 취미는 그림을 그리는 것입니다.”
 장우림은 그 말에 크게 실망한 빛을 떠올렸다.
 “그림이라면 붓을 들고 산이나 꽃 따위를 그리는······.”
 “그렇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런 그림을 그리는 게 아니라 자라나고 움직이는, 즉 생명이 있는 그림만을 그립니다.”
 장우림은 눈살을 찌푸렸다.
 “자네,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겐가? 어떻게 그림이 자라나고 움직일 수 있단 말인가?”
 “있습니다.”
 백의청년은 자신에 찬 어조로 말을 이었다.
 “정 믿지 못하시겠다면 이 자리에서 한 번 그려 보일 수도 있습니다.”
 “이 자리에서 당장?”
 “그렇습니다.”
 백의청년이 하도 자신 있게 말하는지라 시종 불신하고 있던 장우림은 슬그머니 호기심이 당겼다.
 그가 비록 그림에 관심을 가진 사람은 아니었지만 살아 움직이는 그림이라는 말이 호기심을 자극했던 것이다.
 “좋아, 그렇다면 한 번 자네의 솜씨를 구경하기로 하지. 한데 그림을 그리자면 아무래도 붓과 종이가 있어야 할 게 아닌가?”
 백의청년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번졌다.
 “아닙니다. 저는 그림을 그릴 때 항상 이것으로 그립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그는 자신의 옆구리를 툭툭 쳐 보였다.
 검.
 그러고 보니 그의 옆구리에는 손잡이와 검집이 온통 시꺼먼 한 자루의 묵검(墨劍)이 매어져 있었다.
 장우림은 다시 백의청년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니까 그 숯덩이 같은 검으로 살아 움직이고 생명이 있는 그림을 그린다··· 이 말인가?”
 “선배님의 눈에는 이것이 검으로 보일지 모르겠습니다만 제게는 붓이나 마찬가지입니다.”
 “······!”
 장우림은 어이없다는 눈으로 그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다가 피식 실소를 터뜨렸다.
 ‘생긴 것 하고는 영 딴판인 놈이었군. 얼굴이 반반해서 귀엽게 봐주려고 했더니 이건 어딘가 완전히 잘못돼도 크게 잘못된 녀석이었어······.’
 그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면서 천천히 몸을 돌렸다.
 이상한 놈하고 장시간 많은 대화를 주고받아서인지 갑자기 골치가 다 욱씬거리는 것 같았다.
 그가 막 걸음을 떼어놓으려는 순간이었다.
 백의청년의 조용한 음성이 뒷덜미로 부딪쳐 왔다.
 “움직이지 마십시오.”
 “그냥 돌아가 주는 것도 천지신명께 감사해라.”
 “잠시만 선배님의 목을 빌리겠습니다. 제 말을 믿지 않는 선배님을 위해서 저는 반드시 그림을 그리기로 결심했으니까 말입니다.”
 “내 목에 그림을······?”
 장우림은 일순 얼떨떨한 얼굴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는 흉험한 안광(眼光)을 뿜어내며 비릿한 조소를 입가에 떠올렸다.
 “말하자면 이 하늘 같은 어르신네의 목을 무슨 화선지인양 착각하고 있다는 얘긴데··· 정말 안되겠군. 따끔한 맛을 좀 봐야겠어.”
 그렇게 말하면서 그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백의청년의 허리춤에서 한 줄기 묵빛 섬광이 폭사되었다.
 장우림은 그것이 무엇인지 미처 깨닫기도 전에 갑자기 목덜미가 따끔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마치 벌에 쏘이기라도 한 듯 지극히 짧은 순간에 대뇌를 스쳐간 느낌이었다.
 그 느낌을 마지막으로 대뇌는 물론 장우림의 신체 내부에 있는 모든 기능은 일체 그 활동을 중지하고 말았다.
 즉사였다.
 쿵!
 육중한 거구가 통나무처럼 뻣뻣하게 뒤로 넘어가는 바람에 뱃전이 다 기우뚱거렸다.
 거물은 그래서 거물인 모양이다.
 동시에 시체의 목줄기에서 시뻘건 핏물이 푹하고 솟구쳐 나오더니 바로 옆의 갑판 위에 한 송이 붉은 혈화(血花)를 그려 놓았다.
 그리고 나서 출혈은 거짓말처럼 뚝 멎었다.
 꽃.
 느닷없이 생겨난 한 송이 붉디붉은 혈화를 바라보면서 백의청년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보십시오. 한순간에 자라나서 활짝 피고 움직이는 얼마나 아름다운 그림입니까.”
 그는 천천히 허공으로 눈길을 옮기며 나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장미··· 아시고 계시겠지만 참고 삼아 일러드렸습니다.”
 아아··· 장미!
 그렇다.
 극렬하리만치 붉은 빛으로 활짝 피어난 이 한 송이 혈화는 분명히 장미꽃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문득, 백의청년의 중얼거림에 뒤이어 여직껏 무관심하게 딴전만 피우고 있던 네 명의 사내가 일제히 한마디씩 내뱉기 시작했다.
 “나무관세음··· 장미는 화중지왕(花中之王)이라 했으니 죽은 사람에게는 최고의 시주가 되었도다. 나무관세음··· 내 사랑하는 여인이여······.”
 “무량수불··· 아무도 손대지 말라. 저 자의 품속에 있는 돈은 이미 오래 전에 빈도의 것으로 점찍어 놓았음을 선포하노라!”
 “쯧쯧··· 투전판에나 끼여들지, 여기엔 뭘 얻어먹겠다고 비실비실 기어 왔는지······.”
 “죽고 싶으면 무슨 지랄인들 못해. 한마디로 미친새끼지, 뭐.”
 마지막 말을 한 사람은 장우림이 칼날 같다고 느낀 흑의무복의 청년이었다.
 그 청년은 말을 마치고 벌떡 일어나 시체에게 다가서더니 대뜸 시체를 들어 강물 속으로 던져 버렸다.
 첨벙!
 새하얀 물보라가 사방으로 튀어올랐다.
 “별 시시껄렁한 녀석이 사람 귀찮게 만들고 있어.”
 청년은 강물을 향해 침을 탁 뱉고는 다시 원래의 위치로 돌아갔다.
 그것뿐······.
 일곱 명의 사내가 차지하고 있는 선미의 갑판은 다시 쥐죽은 듯한 고요함을 되찾았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
 
 十有五而志千學,
 三十而立,
 四十而不惑,
 五十而知天命,
 六十而耳順,
 七十而從心所欲, 不踰矩.
 
 ― 십오 세에 학문에 뜻을 두고, 서른에는 그 기초를 세우며, 사십에는 어떤 유혹에도 넘어가지 않으며, 오십에는 하늘의 뜻을 알고, 육십에는 매사에 순종하며, 칠십에 가서는 뜻대로 행하여도 도에 어긋남이 없어야 할지니······.
 
 언제 들어도 지당하고 합당한 공자의 말씀이다.
 인류의 역사가 계속되는 한 만고불변의 귀감이 되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명언 중에서도 명언인 것이다.
 그런데 이런 명언 중의 명언을 실로 해괴하게 바꿔 놓았음은 물론, 그 바꾼 명언을 일생의 죄우명으로 삼고 한평생을 살아온 네 명의 노인이 이 땅에는 있었다.
 
 ― 십오 세에 돈을 벌기 시작해서 스물에도 벌고, 서른에도 벌고, 마흔에도 벌고, 오십에도 벌고, 육십에도 벌어야 하며, 칠십이라도 어찌 놀까 보냐. 벌어도 더 벌 것은 오직 돈뿐인가 하노라.
 
 금전사로(金錢四老).
 하늘과 땅이 강서제일(江西第一)의 거부(巨富)라고 인정해 버린 네 마리의 황금벌레.
 그들은 돈이 많다.
 얼마나 많은지는 그들 자신도 모를 정도다.
 그러나 그 많은 돈 중에서 거저 생긴 돈은 한 푼도 없다.
 일생의 좌우명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그들은 가히 미친 듯이 벌고 또 벌었다.
 안 쓰고 버는 데는 당해 낼 재간이 없다.
 오늘날 그들을 강서제일의 거부라고 부르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사람들은 그들 금전사로의 주변에 어떤 변화가 서서히 일기 시작하는 것을 발견했다.
 온갖 멸시와 냉소와 조소를 받으며 미친 듯이 벌어들였던 돈!
 그 금싸라기 같은 돈을 금전사로가 이번에는 물 쓰듯 쓰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어느 날인가······.
 금전사로의 가장 첫째인 금로(金老) 이적산(李積山)이 사람들을 모아놓고 이런 말을 했기 때문이었다.
 
 ― 아아··· 우리는 실패했다. 우리는 그 동안 버는 일에만 신경을 썼지, 우리가 늙었다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늙으면 필연적으로 죽게 된다는 사실도 우리는 최근에야 깨닫는 일생 일대의 우를 범하고야 만 것이다. 그래서 이르노니··· 만약 너희들 중 불로장생에 도움이 될 만한 것을 가지고 있으면 무엇이든 가지고 오라. 내 시가보다 몇 곱절 후하게 값을 치르리라!
 사람들은 벌떼같이 금전사로를 찾아갔다.
 금전사로는 전문가를 고용하여 그들이 가져오는 영약기초(靈藥奇草) 따위를 면밀히 검토했으며, 일단 조금의 효험이라도 있다고 판단되면 그야말로 상상 이상의 후한 값을 치렀다.
 돈!
 무제한으로 풀려 나오는 어마어마한 돈!
 사람들은 열광하고 감탄했으며, 대도(大都) 남창(南昌)은 금전사로가 쏟아내는 막대한 돈으로 인해 그 어느 때보다 풍성하고 넉넉한 황금기를 누리고 있었다.
 그런 금전사로들에게 불로장수에 기막힌 비방이 있다며 낯선 이방인 두 명이 찾아온 것은 햇빛도 따사로운 유월 초아흐렛날의 정오 무렵이었다.
 
 ***
 
 “혹, 삼시충(三時蟲)이라고 들어보셨는지요?”
 화상.
 염주알을 굴리며 묻고 있는 화상의 표정은 진지하다 못해 엄숙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리고 화상의 뒤에는 믿을 수 없을 만치 뚱뚱한 청년이 결코 화상에 못지 않은 엄숙한 표정으로 지그시 눈을 감은채 우뚝 서 있었다.
 금로 이적산은 스스로를 광유(狂儒)라고 밝힌 뚱보청년을 힐끗 올려다 본 뒤 다시 마주앉은 젊은 화상을 바라보았다.
 사승(邪僧)이라고 했다.
 승려의 법명치고는 어째 좀 이상했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삼시충이라고 하셨소?”
 “그렇습니다. 나무관세음··· 내 사랑하는 여인이여······.”
 이게 무슨 해괴한 소린가?
 금로는 얼떨떨했지만 역시 신경쓰지 않아도 될 일이라고 생각하고 옆에 나란히 앉아 있는 세 형제들을 바라보았다.
 “혹시 너희들 중에는 삼시충이라고······.”
 은로(銀老), 철로(鐵老), 동로(銅老)······.
 각기 그렇게 불리는 세 노인은 모두 고개를 가로저었다.
 금로는 멋적은 미소를 머금고 자칭 사승이라고 말하는 화상을 향해 말했다.
 “아무도 들어보지 못했다고 하는구료.”
 사승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엄숙하게 입을 열기 시작했다.
 “나무관세음··· 원래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삼시충이라는 형체 없는 벌레를 가지고 태어납니다. 그리하여 삼시충은 인간과 더불어 한평생을 체내에서 기생하는데 무턱대고 기생만 하는 게 하니라 진실로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곤 한답니다.”
 “중요한 임무라 하심은······?”
 “그것은 그 사람이 행하는 일을 체내에서 빠짐없이 지켜보았다가 매년 칠월의 경신일(庚申日)만 되면 그 사람이 잠든 틈을 타서 몰래 체내에서 빠져 나와 천계(天界)의 옥황상제께 그간 일 년간 지켜본 일 중에서 악행만 골라 일러 바치는 일입니다.”
 “예?”
 “그러면 옥황상제께서는 삼시충의 그간 노고를 치하하는 반면, 악행을 범한 그 사람에게는 그에 상응하는 벌을 내리게 됩니다.”
 “버··· 벌을?”
 “벌이란 다름이 아니라 원래 하늘이 내려준 백이십 년의 수명에서 악행에 상응하는 만큼의 목숨을 단축시켜 버리는 것입니다.”
 사승은 땅이 꺼져라 탄식하며 말을 이었다.
 “사람이 죄를 짓지 않고 산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한 일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백이십 년이라는 천수를 모두 누리지 못하고 대부분 일찍 죽는 것입니다. 나무관세음··· 내 보고 싶은 여인이여······.”
 “······?”
 금로와 나머지 삼로는 어리둥절한 눈으로 서로를 마주보았다.
 어찌 듣자니 황당한 소리 같고, 또 어찌 듣자니 일리도 있는 것 같았다.
 금로가 물었다.
 “정말 그런 괴이한 벌레가 사람의 몸, 아니 내 몸안에 살고 있단 말이오?”
 “비단 노시주뿐만 아니라 빈승의 몸에도 삼시충은 있습니다. 나무관세음······.”
 “허어······.”
 금로는 그만 낭패한 표정이었다.
 그러자 금전사로의 둘째가 버럭 노성을 터뜨렸다.
 “이것 보시오, 스님! 당신은 무슨 불로장생의 절세비방이 있다며 우리를 이런 산속에까지 데려와 놓고 이제 보니 비방은커녕 오히려 걱정거리만 더해 주고 있지 않소?”
 “가만 있게, 둘째!”
 금로는 깜짝 놀라 황급히 그를 제지했다.
 “자네는 그 나이를 먹고도 어찌 성질이 그 모양인가? 설마하니 저 스님이 우리와 무슨 원수지간이라고 걱정거리만 안겨드리겠는가?”
 그는 은로를 엄중히 꾸짖은 뒤 은근한 미소를 사승의 얼굴에 던졌다.
 “노부의 말이 틀렸소이까, 스님?”
 “나무관세음··· 그렇지 않아도 빈승은 지금 막 삼시충의 횡포를 막는 비책과 불로장생의 절세비방을 말씀드리려는 참이었습니다. 나무관세음··· 내 사랑, 내 여인이여······.”
 이어 사승은 품에서 목탁을 꺼내 힘껏 두드리며 장중한 목소리로 염불을 풀어 내기 시작했다.
 “강장보정회춘진언··· 옴마니반메움··· 수리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
 딱! 딱!
 푸르디푸른 숲속.
 따사로운 유월의 하늘 속으로 장중한 목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진다.
 천고의 절세비방은 속된 인간들의 냄새가 베어 있는 집 같은 곳에서 말하게 되면 당장 그 효험이 사라진다 하여 외딴 이곳 산속까지 따라나선 금전사로는 망연히 사승의 입만 바라보고 있었다.
 이때였다.
 사승의 뒤에 장승처럼 우뚝 서 있는 광유가 번쩍 눈을 떴다. 이어 그는 크게 놀라는 표정을 짓더니 목소리를 낮추어 황급히 금전사로에게 말했다.
 “그렇게 가만히 듣고만 계시면 어떡합니까?”
 금전사로는 흠칫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럼 어떻게 하오?”
 “쯧쯧··· 이렇게 답답할 데가······.”
 광유는 행여 사승이 들을까 크게 두려운 듯 더욱 목소리를 낮추었다.
 “마침내 시작하신 겁니다. 그것도 좀체 잘 하시지 아니하시는 강장보정회춘진언(强腸保精回春眞言)을 시작으로 말입니다. 이것은 전례 없는 파격이요, 여러 어르신들의 크나큰 홍복(洪福)인 즉, 어서 스님처럼 결가부좌를 틀고 앉아 경건하게 자세를 가다듬으십시오.”
 금전사로의 얼굴에 흥분의 빛이 물결쳤다.
 “오오··· 강장보정회춘진언! 벌써 그 이름만 들어도 십 년은 젊어지는 것 같도다! 한데 불경 중에 그런 진언이 있기는 있는 거요?”
 순간, 광유는 손가락을 세워 황급히 입술로 가져갔다.
 “쉿! 조용히들 하십시오. 그러다 스님이 듣기라도 하면 어떡하시려고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움찔하는 금전사로를 향해 광유는 빠르게 말을 이었다.
 “어르신의 풍부한 식견은 과연 명불허전(名不虛傳)이군요. 사실 불경 중에 강장보정회춘진언이란 진언은 없습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아아··· 이 말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광유는 크게 곤혹스런 표정으로 중얼거리더니 깊은 탄식을 내쉬며 말했다.
 “저는 감히 더 이상 입을 놀리지 못하겠습니다. 하지만 이것 하나만은 알아 두십시오. 만일 스님께서 지금 하시는 모든 진언, 아니 행위가 불경에 기초를 둔 것이라면 그것은 다른 스님도 모두 할 수 있는 것으로써 절대 절세의 비방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제발···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흐흠······.”
 “하긴 이 사람 저 사람 다 알고 있다면 어찌 비방이라고 말할까 보냐······.”
 금전사로가 수긍의 빛을 나타내자 광유는 돌연 초조한 얼굴로 다그치듯 말했다.
 “어서 결가부좌를 틀고 스님의 금옥(金玉) 같은 진언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다행히 오늘은 스님께서 흥이 나셨기에 망정이지, 여느 때 같으면 천금을 준다 해도 입 한 번 벙긋 하시지 않는 분입니다.”
 금전사로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결가부좌를 틀기 시작했다.
 이 결가부좌라는 자세는 안 해본 사람이 취하자면 극히 어려운 자세였다.
 광유는 끙끙거리며 결가부좌를 잘 틀지 못하는 그들을 친절하게 도와주었다.
 그리하여 마지막으로 철로의 자세를 잡아 주고 막 구부렸던 허리를 펴는 순간이었다.
 돌연 사승의 염불과 목탁이 뚝 멎었다.
 “······?”
 “······?”
 이제 막 자세를 잡고 본격적으로 진언을 귀담아들으려 했던 금전사로는 의아한 얼굴로 사승을 바라보았다.
 사승은 지그시 눈을 감은 채 한참 동안 침묵하더니 이윽고 천천히 눈을 뜨며 말문을 열었다.
 “혹시 생즉시사(生卽是死) 사즉시생(死卽是生)이라는 말을 들어 보셨습니까?”
 “그, 글쎄요.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는 말은 여러 차례 들어보았소이다만······.”
 “같은 방법으로 해석하시면 됩니다.”
 금로는 이마를 깊게 찌푸리며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사는 것이 곧 죽는 것이고 죽는 것이 곧 사는 것이다··· 맞소이까?”
 사승은 허연 이를 드러내며 싱긋 웃었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 중 후자는 오늘 빈승이 여러 노시주께 나무관세음을 대신하여 말씀드리는 이른바 불로장수의 절세비방이기도 합니다.”
 금전사로는 서로를 쳐다보았다. 아직도 사승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광유가 문득 품에서 무엇인가를 꺼내면서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소생이 그림으로써 설명을 드려야만 이해를 하실 것 같군요.”
 슬그머니 뒤쪽으로 고개를 돌려 본 금전사로는 일제히 두 눈을 부릅떴다.
 칼!
 예리한 날은 분명히 칼의 그것인데 모양은 마치 활처럼 휘어진 섬뜩한 형태의 기형검이었다.
 금전사로는 그제서야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 보니 네놈들은······?”
 말은 다 이어지지 못했다.
 목이 댕강 잘려 허공으로 둥실 떠오르는데도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므로······.
 피!
 거의 한순간에 네 개의 목둥지에서 분수처럼 뿜어 나오는 피······!
 그것을 바라보면서 광유는 꿈꾸듯 뇌까렸다.
 “꼭··· 난초 같지?”
 “말 같지도 않은 소리 하지 마. 세상에 붉은 난초가 있단 말은 아직 들어 보지 못했어.”
 “그럼 네가 보기엔 뭐 같은데?”
 “꼭··· 난초 같애······.”
 “호호호··· 그것 봐. 역시 땡추는 그래봐야 내 수준이라니까······.”
 광유는 흡족한 웃음을 흘리며 기형검을 품속에 다시 넣고 나서 이번엔 조그맣고 푸른 약병 하나를 꺼냈다.
 그런 다음 그는 약병의 마개를 뽑아 네 구의 시신에 기울이면서 중얼거렸다.
 “아무 이유도 없이 죽었다고 생각할까봐 하는 말인데··· 사실 당신들이 죽어야 하는 이유는 모두 세 가지나 되오. 그 첫째는 당신들이 대십전성인지 뭔지 하는 곳에 이미 오래 전부터 암암리에 자금을 대 주고 있었기 때문이고, 둘째, 당신들은 그 위대한 공자님의 말씀을 너무도 저질스럽고 수치스럽게 바꿔 놓고 그걸 인생의 죄우명입네 하고 지금껏 살아왔소. 다른 사람에게는 몰라도 오직 공자님 한 분만 믿고 살아가는 이 광유에게 있어 그것은 결단코 용서해서는 안되는 일이었소. 마지막 세 번째 이유는··· 용서하시오, 우린 사실 오래 전부터 네 명이 한꺼번에 그려내는 그림이 어떤 것인지 미치도록 보고 싶었소. 다른 건 몰라도 이 점만은 매우 미안하게 생각하오.”
 말을 하는 동안 네 구의 시신은 검은 연기를 내며 순식간에 한줌의 싯누런 액체로 녹아 내리고 있었다.
 금전사로.
 그토록 불로장수를 꿈꿔온 이 돈 많은 늙은이들은 결국 이렇게 허망한 최후를 맞이하고 만 것이다.
 이때 잠자코 있던 사승이 입을 열었다.
 “다 됐으면 가자. 우리가 이러고 있는 시간에도 색도(色道)와 귀랑(鬼郞) 두 녀석은 더욱 눈부신 개가를 올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참, 그렇지!”
 광유는 그 말에 번쩍 정신이 드는 것 같았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누가 오고 있다!”
 사승이 그의 말을 잡아 끌며 재빨리 근처의 풀숲으로 몸을 날렸다.
 “뭐야! 누가 온다고 그래?”
 “여자··· 너도 내 코 잘 알지?”
 “확실히 여자냐?”
 “숨 소리 죽이고 있어. 혹시 또 알아? 재수 좋으면······.”
 사승은 입을 다물었다.
 나뭇가지가 크게 흔들리면서 두 개의 인영이 허공에서 떨어져 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남일녀.
 사내는 오 척 단구(短軀)에 유난히 큰 머리통을 가진 난장이 모습의 중년인이었다.
 반면 그와는 대조적으로 그 옆의 여인은 단지 보는 것만으로도 사내의 말초신경을 자극하기에 충분한 터질 듯한 몸매와 화려한 용모를 지니고 있었다.
 여인은 일신에 몸에 꽉 끼는 홍의를 입고 있었는데 그것은 마치 자신의 풍만한 육체를 과시하기 위해 일부러 그런 옷을 입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
 “분명히 연기가 났는데······.”
 난장이는 코를 벌름거리며 주위를 둘러보다가 번뜩 눈빛을 빛냈다.
 바로 눈앞.
 싯누런 황수와 더불어 네 개의 동전이 떨어져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었다.
 그는 급히 동전을 집어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놀람에 찬 음성으로 말했다.
 “이건 금전사로의 신물(信物)이 아닌가?”
 “어머, 그렇군요. 그런데 어떻게 이것이 이런 곳에 떨어져 있죠?”
 놀라고 말하는 동작 하나 하나에도 숨막힐 듯한 색기가 느껴진다.
 사승은 조용히 숨을 들이켰다.
 난장이는 싯누런 황수를 힐끗 쳐다보면서 중얼거리듯 말했다.
 “지독한 돈벌레들··· 대십전성에 빌붙어 아부를 해대더니 결국 이렇게 죽고 말았군!”
 여인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럼 저 누런 물이 바로······?”
 “화골액(化骨液)으로 녹여 버렸다는 얘기야. 그렇지 않고서는 그들의 신물이 이런 곳에 떨어져 있을 리 만무하지.”
 단정적으로 말하는 난장이의 말에 여인은 아미를 살짝 찡그렸다.
 “그렇다면 이들은 혹시 천하제일의 대도인 화의도수(花衣盜帥)를 만나기 위해 이리로 왔던 것은 아닐까요?”
 “그럴지도 모르지. 그 희대의 대도는 분명 이리로 도망쳤으니까.”
 이야기는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지만, 그것을 알 리 없는 난장이는 심각하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화의도수, 그놈이 순우좌 전대 천하제일인의 유품인 천잠보의(天潛寶衣)를 훔쳐 도망친 사실이 이미 강호의 전역에 알려져 있으니, 금전사로는 그것을 화의도수로부터 막대한 돈을 주고 사들여 단목천에게 갖다 바치려고 했다면 앞뒤의 상황은 정확하게 들어맞는 셈이다.”
 “그렇다면 금전사로는 왜 이렇게 죽임을 당했다는 말인가요?”
 “그건 나도 모른다. 아니, 알고 싶지도 않다. 문제는 그 화의도수인지 하는 작자야. 우선 그놈을 잡아야 해. 제 한몸을 보신하기 위해 가장 위대하셨던 고인의 유품까지 훔쳐낸 그런 놈은 하루 빨리 잡아야 한다구.”
 여인은 그 말에 한숨을 내쉬었다.
 “벌써 보름째예요. 그 자는 정말 스스로 잡혀 주기 전에는 아무에게도 붙잡히지 않을 그런 위인이에요.”
 이때 돌연 누군가의 음성이 불쑥 그 말을 받았다.
 “여인이여, 정말 그런 자가 있는가?”
 
 
 4장 절대쾌검(絶代快劍)
 
 
 밤.
 잡목 숲으로 둘러싸인 공지 위로 교교한 달빛이 내려앉고 있었다.
 공지에는 굳이 밤을 도와 산길을 재촉할 필요가 없는 사람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사실 눈앞에 우뚝 솟아 있는 복호령(伏虎嶺)은 비단 산세가 거칠고 험할 뿐 아니라 밤이 되면 사나운 맹수가 수도 없이 들끓는 곳이라 웬만한 무림인들도 밤에는 넘어 가길 꺼려하는 곳이었다.
 공지에 있는 사람은 대략 스무 명.
 동행이 있는 사람은 모닥불을 지펴 놓고 무리를 이루어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지만, 동행이 없는 사람은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거나 아니면 멀찌감치 떨어져 드러누운채 휴식이나 잠을 청하고 있었다.
 달빛······.
 그리고 별빛······.
 타닥타닥 타오르는 모닥불 소리와 함께 산속의 밤은 점점 깊어 가고 있었다.
 이야기를 주고받던 사람들도 어느새 제 편한 대로 나가 떨어졌고, 쌓아 둔 짐짝 앞에 파수꾼처럼 둘러앉은 상인들만이 여전히 초롱초롱한 눈빛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좀더 시간이 흐르자 상인들도 순번제를 정해 짐을 감시하기로 하고 두 사람만 남긴 채 제각기 짐더미 옆에서 잠을 청했다.
 우횡(尤橫)과 전곡(田谷).
 소싯적에 몇 수의 권각술(拳脚術)을 익힌 게 유죄가 되어 첫번째 파수꾼이 된 이 두 사람은 우두커니 서로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전곡의 두 눈에도 서서히 졸음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그것을 본 우횡이 말했다.
 “잠이 오는 모양인데 잠시 눈 좀 붙여 두게.”
 “자네는 졸리지 않나?”
 “음, 나는 이상하게 노숙만 하면 잠이 오지 않고 마누라하고 집 생각만 자꾸 난단 말이야. 아무래도 이번 장사만 끝나면 집으로 돌아가야 할까봐.”
 “그래, 사실은 나도 그럴 참이었어.”
 두 사람은 애수와 감상에 젖은 얼굴이 되어 씁쓰레한 고소를 주고받았다.
 이때였다.
 돌연 숲 저쪽에서 두런두런 말 소리가 들려왔다.
 말 소리는 점차 가까와지고 있었다.
 “좋아요. 당신이 나를 따라 다니는 건 말리지 않겠어요. 그러나 제발 나를 좀 가만히 내버려둬요. 알겠어요?”
 “여인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는 결코 그대를 괴롭히고자 하는 게 아니도다. 일단은 그대가 보름 동안이나 찾아다니며 고생을 하고 있는 그 화··· 화······.”
 “화의도수!”
 “그렇다. 화의도순지 뭔지 하는 녀석을 잡아 그대의 고생을 확실히 종식시켜줌과 동시에 그로 인해 그대와 조금이라도 더 가까워지고 싶어 하는 것이 이 부처님의 큰 뜻이니라. 나무관세음······.”
 네 사람.
 달빛으로 인해 더욱 요염해 보이는 풍만한 몸매의 홍의여인 옆으로 젊은 화상 사승이 그림자처럼 달라붙어 있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들어서는 사람은 광유와 난장이 중년인이었는데, 기이하게도 난장이의 얼굴은 눈두덩이와 양쪽 얼굴이 낮보다 배는 부풀어올라 있었다.
 그들이 나타나는 것을 본 우횡과 전곡은 황급히 시선을 교환하더니 얼른 아무 곳에나 누워 자는 척했다.
 일견하기에도 자신들의 얄팍한 권각술이 먹혀들지 않을 위인들이었다.
 눈을 감은 그들의 귓속으로는 여전히 괴상한 대화가 들려오고 있었다.
 “이것 보세요. 당신은 그렇게도 주제를 파악하지 못하나요? 아니 도대체 출가한 당신이 나 혁요랑(赫妖狼)을 가까이해서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거예요?”
 “여인이여, 그대는 부처의 자존심을 아는가?”
 “그게 뭐죠?”
 “나도 모른다. 하지만 여인이여, 이것만은 기억하라. 나는 그대를 처음 보는 순간 내 마음속에 있는 모든 자존심을 팽개쳤노라.”
 여인 혁요랑은 이제 골머리가 다 욱씬거리고 있었다.
 아아······!
 도대체 어디서 이런 괴상한 작자가 나타나 하루종일 사람을 이토록 피곤하게 만든단 말인가?
 찰거머리도 이런 찰거머리가 없었다.
 혁요랑은 자기보다 나이도 어려 보이는 이 징그러운 화상의 음성만 들어도 이젠 온몸에 왕소름이 무더기로 돋아나고 있었다.
 무력 동원을 해보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그 바람에 애꿎게 피해를 본 사람은 셋째 오라버니인 혈인객(血印客) 공백수(空帛水)뿐이었다.
 혁요랑은 지금까지 공백수가 누구에게도 그렇게 비참하게 얻어터지는 광경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이건 아예 상대도 되지 않았다.
 아무리 혼신의 힘을 다 했어도 광유인지 뭔지 하는 저 괴물 같은 작자에겐 아예 씨도 먹혀들지 않았던 것이다.
 문득, 광유는 주위를 휘휘 둘러보며 다가오다가 우횡이 새우처럼 웅크리고 있는 곳에서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이 작자는 눈도 없나? 왜 사람이 가고 있는 길목에서 자고 있어?”
 순간, 우횡은 허리 어림이 끊어져 나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광유의 발길질에 채인 것이었다.
 그러나 우횡은 터져 나오려는 비명을 가까스로 삼키고 후다닥 기어 다른 곳으로 가서 누웠다.
 그러자 이번에는 왼쪽 어깨가 불칼로 지진 듯 화끈해졌다. 이번에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으아아아악!”
 우횡은 어깻죽지에 불이 붙은 채 어둠 속으로 미친 듯이 달아났다.
 광유는 피식 실소를 터뜨렸다.
 “웃기는 작자군. 비키란다고 어디 누울 데가 없어 장작불 위에 누워?”
 전곡은 모르는 척하고 있었다,
 하지만 생각과는 달리 그의 몸은 마치 사시나무처럼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이 작자는 몹시 추운 모양이군.”
 말과 함께 전곡은 자신의 몸이 둥실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공자께서 그러셨지. 배고픈 자에게는 먹을 것을 주고, 추운 자에겐 옷을 주라고··· 하지만 나는 가진 옷이 없으니 천상······.”
 둥실 떠올랐던 몸이 갑자기 밑으로 뚝 떨어지는 것을 느끼면서 전곡은 눈을 번쩍 떴다.
 불!
 시뻘건 장작불이 독사의 혓바닥처럼 그의 몸을 휘감아 오고 있었다.
 “으아악! 으아아악!”
 전곡은 전신에 불이 붙은 채 공지 위를 미친 듯이 뒹굴다가 몇 점의 불덩이를 달고 우횡이 사라져 간 쪽으로 정신없이 도망쳤다.
 비록 순전히 타의에 의한 것이긴 했지만, 이렇게 해서 우횡과 전곡은 예정을 훨씬 앞당겨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자고로 여인과 힘없는 자는 되도록 문 밖 출입을 삼가하는 것이 장수의 비결이라고······.”
 “나무관세음께서 말씀하셨다.”
 사승이 불쑥 말꼬리를 가로채자 광유는 눈을 부라리며 그를 노려보았다.
 “땡추, 너 지금 실수한 거다. 그 말은 어디까지나······!”
 “나무관세음께서 하신 말씀이다.”
 “너··· 계속 실수하는 거다. 그 말은 누가 뭐래도······!”
 “공자보다 더 위대한 광유 어른께서 하신 말씀이다.”
 “하하하핫··· 땡추, 역시 너는 둘도 없는 나의 친구다.”
 혁요랑은 귀를 두 손으로 틀어막고 미친 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이젠 머리가 아픈 정도가 아니라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는 것 같았다.
 만약 이대로 한 시진만 이 괴상한 작자들과 더 있다간 완전히 미쳐 버릴 것 같았다.
 ‘아아··· 오라버니들은 어째서 아직도 오지 않고 있단 말인가······!’
 오라버니?
 그렇다.
 그녀와 공백수가 두 명의 괴상한 자들을 이곳으로 데려온 것은 다분히 의도적이었다.
 그녀와 공백수를 포함하여 도합 여섯 형제를 형성하고 있는 그들은 오늘밤 바로 이 복호령 앞 공지에서 만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망할 자식들··· 어디 나중에 두고보자······!’
 밤은 지루하게 깊어 가고 있었다.
 광유와 사승은 앞뒤도 맞지 않는 괴상한 대화를 주고받으며 낄낄거리느라 조금도 지루하지 않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지만 옆에서 듣고 있는 혁요랑은 거의 미치기 일보 직전의 상태까지 몰려 있었다.
 ‘아아··· 틀렸어. 오라버니들이 오기 전에 나는 완전히 미쳐 버릴 것 같아······!’
 혁요랑은 발작적으로 헝클어진 머리칼을 손으로 쓸어 넘겼다.
 순간, 그녀의 동작이 얼어붙듯 멈추어지는가 했더니 금시 죽을 것 같던 얼굴에 생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멀리······.
 자욱한 어둠을 헤치며 서서히 이쪽으로 다가오는 두 개의 인영을 발견한 때문이었다.
 어두운 밤인데다 거리가 있어 아직 그 모습이 확실하게 보이진 않았지만 어렴풋한 형태만으로도 그녀는 둘째 오라버니인 신기수사(神機秀士) 우문량(宇門兩)과 넷째인 철권(鐵拳) 소남붕(小南鵬)이라는 걸 알아볼 수 있었다.
 “오라버니―!”
 미친 듯이 달려가며 소리치는 혁요랑의 눈에선 눈물까지 흘러내리고 있었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호들갑스러우냐?”
 점잖게 말하며 혁요랑을 품에서 떼어내는 청의중년인.
 용모도 청수하거니와 일신에는 함부로 대할 수 없는 단아한 기품이 느껴진다.
 신기수사 우문량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얼굴 전체가 고슴도치 같은 수염으로 뒤덮여 있는 위맹한 인상의 중년인이 어깨에 커다란 포대자루 하나를 걸머지고 있었다.
 철권 소남붕.
 혁요랑은 소맷자락으로 눈물을 찍어 내더니 마침내 입을 열기 시작했다.
 “둘째 오라버니, 글쎄 제 말 좀 들어 보세요. 세상에 이렇게······!”
 그녀는 막 호들갑스럽게 지껄이다 말고 슬그머니 입을 다물었다.
 신기수사 우문량의 얼굴이 왠지 딱딱하게 굳어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여섯 형제 중 가장 무공이 높고 마음이 너그러운 우문량이다.
 형제들을 대할 때면 항상 부드러운 웃음이 얼굴에서 떠날 줄을 모르던 그였다.
 그런 우문량의 얼굴이 이렇게 굳어 있다는 것은 뭔가 심각하고도 중대한 사태가 발생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공백수가 그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슨 일이라도······?”
 “······!”
 우문량은 대답 대신 옆의 철권 소남붕을 향해 가볍게 턱짓을 해 보였다.
 그러자 소남붕은 메고 있는 포대자루를 거꾸로 하여 무엇인가를 땅바닥에 쏟아 놓았다.
 순간, 혁요랑과 공백수는 깜짝 놀라 주춤 한 걸음씩 물러났다.
 시체!
 포대자루 속에서 나온 건 뜻밖에도 한 구의 시체였다.
 그것도 몸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의 사내 시체······.
 공백수는 놀람과 의혹에 찬 시선을 우문량에게 던졌다.
 “이 자가 누굽니까?”
 우문량은 허공으로 눈길을 던지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천하제일의 대도 화의도수(花衣盜帥) 뇌경룡(雷敬龍)··· 바로 그 자다.”
 “예?”
 “내 간단히 경위를 설명하겠네. 나와 넷째는 얼마전에 구절노인(九絶老人)을 만났었네.”
 “구절노인이라면 바로 순우좌 전대 천하제일인의 죽마지우이신······.”
 “그렇네. 고우(古友)의 유품이 도난당했다고 하니 발벗고 찾아 나서신 것이었지.”
 “오오··· 역시 구절노인이십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셨습니까?”
 “어떻게 되고 말 것도 없었네. 나와 넷째가 그 분을 만났을 때 그 분의 발아래엔 저렇게 발가벗겨져 죽어 있는 화의도수의 시체가 놓여 있었으니까.”
 소남붕은 자신의 무릎을 탁 쳤다.
 “그렇다면 화의도수는 구절노인으로부터······.”
 “나도 그렇게 생각했었지. 그러나 그게 아니었어. 구절노인께서도 이미 죽어 있는 시체를 발견했을 뿐이라고 말씀하셨으니까.”
 “예? 그, 그럼 누가······!”
 “마침 그때 대형(大兄)과 막내도 그 자리에 나타났지. 누구보다도 강호의 경험이 풍부한 대형은 구절노인과 여러 각도에서 의견을 나눈 결과, 현재 화의도수를 쫓고 있는 자들중에서 이 화의도수를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을 만한 고수는 없다는데 의견이 일치되었네. 더구나 도검수화불침(刀劍水火不侵)의 천잠보의(天潛寶衣)를 입은 화의도수를 말일세.”
 “음······!”
 공백수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또 무슨 말인가를 하려다 말고 옆으로 주르륵 밀려 나갔다.
 광유와 사승이 불쑥 끼여들어 오면서 그를 옆으로 밀어낸 것이었다.
 “어디 보자. 엉? 이 작자가 옷은 왜 이렇게 홀랑 벗고 있지?”
 “이게 바로 화의도순지 뭔지 하는 그 문제의 도둑놈인가?”
 우문량이나 소남붕은 아예 쳐다보지도 않고 두 사람은 시체를 모닥불가로 끌고 가 세밀하게 살펴보기 시작했다.
 우문량은 가볍게 미간을 찌푸렸다.
 “셋째, 저들은 누구인가?”
 “그게 저······!”
 공백수는 얼른 대답하지 못하고 슬그머니 손을 들어 시퍼렇게 멍든 눈두덩이를 가렸다.
 “저들이 누구냐고 묻지 않는가.”
 그러자 오직 이때만을 기다려 왔다는 듯 혁요랑이 재빨리 입술을 나풀거리기 시작했다.
 딴에는 손짓 발짓 해 가며 오늘의 경험담을 열심히 쏟아 놓고 있었지만 듣고 있는 우문량의 표정은 시중 차분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윽고 혁요랑으로부터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우문량은 시체를 살피고 있는 사승과 광유의 뒤로 천천히 다가갔다.
 “무엇을 알아냈나?”
 광유가 쭈그리고 앉은 그대로 힐끗 그를 올려다보았다.
 “당신은 누구요?”
 “나는 고세육기(蠱世六奇)의 둘째 우문량이라고 하네만 그렇게 묻는 자네는 누군가?”
 “우리가 누군가는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오. 한데 고세(蠱世)란 무슨 뜻이오?”
 “말 그대로 세상을 속인다는 뜻이지.”
 “세상을 속이는 여섯 명의 기인이라··· 어째 좀 이상한 것 같군.”
 “뭐가 이상하단 말인가?”
 “나도 모르오.”
 “······!”
 우문량의 눈썹이 미미하게 찌푸려졌다.
 이때 혁요량이 냉랭한 콧방귀를 날리며 끼여들었다.
 “매사가 다 저런 식이니까 둘째 오라버니께선 더 이상 말을 하실 필요가 없어요. 저 자들은 한마디로 미친 작자들이에요.”
 그러자 이번에는 사승이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여인이여, 그대는 어째서 우리를 미쳤다고 말하는가? 아까도 말했지만 우리는 어디까지나······!”
 “듣기 싫어요!”
 혁요랑은 아예 음성만 들어도 소름이 끼치는지라 귀를 틀어막으며 날카롭게 소리쳤다.
 광유는 그런 그녀를 힐끗 쳐다본 뒤 다시 우문량에게 시선을 던졌다.
 “물읍시다. 이 홀랑 벗고 죽어 있는 작자가 정말 천하제일의 도둑놈이라는 화의도수가 맞소?”
 “틀림없네.”
 “그렇다면 당금무림에 이 자를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을 만한 자가 누구라고 생각하오?”
 “십전대제 단목천. 그러나 그가 화의도수를 죽이진 않았다고 생각하네.”
 “그럴 테지. 당대의 천하제일인이 전대 천하제일인의 유품을 탐낸다는 것은 체면상 아름답지 못한 일이니까.”
 이때 돌연, 다시 그 시체를 살피던 사승의 입에서 짤막한 외침이 터졌다.
 “찾았다!”
 “역시 땡추는 이번에도 나를 실망시키지 않는구나.”
 광유와 우문량은 일제히 사승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잘 봐!”
 사승은 시체의 목줄기를 한차례 쓰윽 어루만지더니 돌연 손가락 두 개를 집게처럼 오므려 시체의 인후(咽喉) 부위에 대고 쫙 벌렸다.
 그러자 아무런 상처도 없었던 매끄러운 목줄기의 살갗이 한 치의 길이로 가늘게 벌어졌다.
 사승은 다시 시체를 뒤집어 인후와 꼭 일치되는 목 뒷부분의 아문(亞門)을 같은 식으로 벌리자 역시 거기에도 한 치 길이의 미세한 틈이 나타났다.
 사승의 시선이 힐끗 우문량을 향했다.
 “보셨소? 이것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빠른 쾌검(快劍)에 번개같이 목을 관통당한 흔적이오. 한 가지 묻겠는데 천잠보의란 어떤 옷이오?”
 “안에 받쳐 입는 속옷이네. 그러니 옷 밖으로 드러난 부분과는 상관이 없지.”
 우문량은 별로 놀라는 기색이 아니었다.
 이미 사승이 밝혀낸 사인은 구절노인에 의해서도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화의도수라는 작자는 오직 머리와 목에만 신경을 써도 절대 죽을 염려는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오.”
 “그랬을 테지.”
 “아마 모르긴 해도 천하제일의 대도로 불릴 정도면 신법 또한 독보적인 경지에 이르러 있을 터··· 그러나 상대는 그런 화의도수의 목줄기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일검에 관통시켰소. 당신은 이 정도의 절대쾌검(絶代快劍)을 구사할 만한 자가 누구라고 생각하시오?”
 그의 말이 막 끝나는 순간이었다.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내가 해주지.”
 한 소리 중후한 음성과 함께 두 개의 인영이 허공에서 뚝 떨어져 내렸다.
 한 명은 눈이 하나밖에 없는 희끗희끗한 반백머리의 초로(初老)였고, 또 한 명은 얼굴에 곰보자국이 덕지덕지 붙어있는 지독하게 못생긴 추녀였다.

이용약관 유료이용약관 개인정보처리방침 청소년보호정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