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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의 도시 1화

2018.01.29 조회 933 추천 7


 영웅의 도시 1
 
 저자의 말
 
 
 대한민국은 4강(强)에 둘러싸인 분단국가입니다. 그들의 이해에 따라 국가의 안위가 위협받을 수 있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나는 새로운 땅, 시베리아의 광대한 땅에 한민족의 새로운 영토를 건설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바로 ‘고려리아’.
 러시아의 고려인, 중국의 조선족, 일본의 조선인에다 남북한의 이주민을 대량으로 받아들인 ‘고려리아’는 한민족의 자긍심과 능력을 한껏 충족시켜줄 새로운 조국이 될 것입니다.
 『영웅의 도시』는 새로운 ‘대한민국’의 개척사이며 ‘개척소설’입니다.
 ‘대야망’을 품은 ‘기업가’와 청년 김상철의 ‘고려리아 개척사’는 독자 여러분께 야망과 긍지를 심어드릴 것이라고 감히 자부합니다.
 
 
 『영웅의 도시』는 15년 전인 1986년에 10권으로 출간되었던 것을 이번에 개작하여 재출간합니다.
 그것은 아직도 ‘고려리아’의 가능성이 남아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고려리아’를 건설할 능력이 있는 민족입니다.
 ‘고려리아’는 언제나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2011년 4월 이원호
 
 
 차례
 
 
 저자의 말
 
 
 버림받은 사내
 시련과 도전
 대륙으로
 웅대한 꿈
 빙하 속의 사투
 유혹
 기지 탈출
 폭발하는 대지
 탐욕자
 하바롭스크의 밤
 전화위복
 야망의 함정
 두 여인
 격동하는 대지
 
 
 버림받은 사내
 
 
 10월 중순의 어느 날.
 비스듬한 오후의 햇살을 받은 잔디밭 한쪽은 이미 그늘이 졌고 교정 안은 정적에 덮여가는 시간이다.
 도서관 앞에 우두커니 서있던 김상철이 문득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이윽고 어깨를 편 그는 큰 걸음으로 성큼성큼 계단을 내려와 정문을 향해 발을 옮겼다. 바람에 흩어지던 낙엽이 맨땅을 스치고 지나면서 메마른 소리를 냈다. 그가 학교 정문 맞은편의 미도 카페에 들어선 것은 6시 5분 전이었다.
 이미 환하게 불을 밝힌 카페 안은 손님이 가득 차 있었으므로 카운터 앞에 멈춰선 김상철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곧 벽 쪽에 앉아 있는 한지은의 옆모습이 보였는데 진청색 정장 투피스 차림으로 불빛을 받은 귀걸이가 반짝거렸다.
 다가간 김상철이 앞자리에 앉자 한지은이 머리를 들었다.
 생각에서 깨어난 듯 멍한 표정이었다.
 “뭘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김상철이 묻자 한지은은 잠자코 앞에 놓인 커피 잔을 쥐었다. 한지은은 국제여대 4학년으로 같은 졸업반이었지만 김상철의 군복무 기간만큼 어린 스물둘이다. 종업원이 다가왔으므로 김상철은 커피를 시켰다.
 “난 영어보다 일어가 떨어져.”
 테이블 위에 팔을 기댄 김상철이 한지은을 바라보았다.
 “특히 회화보다 문법이 말이야.”
 이제 취업시험은 두 달밖에 남지 않았다. 그때 한지은이 손에 들고 있던 커피 잔을 내려놓았다.
 “오빠, 왜 아버지 이야기를 하지 않았어?”
 퍼뜩 머리를 든 김상철이 한지은을 보았다. 외면한 채 한지은이 말을 이었다.
 “어젯밤 내가 얼마나 놀란 줄 알아? 나뿐만이 아냐, 엄마는 지금도 누워 계셔.”
 “······.”
 “너무해, 나한테까지 비밀로 하다니······.”
 “드디어 탄로가 났군.”
 김상철이 입술만 비틀며 웃었다.
 “가능하다면 끝까지 감추고 싶었는데. 그래서 그것 따지려고 만나자고 한 거야?”
 “우리 집안이 어떤 상황이 되어 있는지는 잘 알 거야.”
 한지은의 얼굴은 하얗게 굳어져 있다.
 “지난달에 우리 집에 왔을 때 오빠는 거짓말을 했어. 아버지가 시골에 계신다고.”
 “대전은 서울보다 시골이거든.”
 김상철의 아버지 김영환은 지금 대전 교도소에서 복역 중이다. 작년 가을, 나라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세무 공무원 비리 사건의 공범으로 징역 5년형을 선고 받은 것이다.
 한지은은 시선을 내린 채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긴 속눈썹 밑으로 곧게 콧날이 뻗은 서구형의 미인이다. 김상철은 찻잔을 들어 식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한지은을 만난 지는 2년이 채 안 되었지만 그동안이 김상철의 삶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이 될 것이다. 요즘은 한지은을 만나는 것만이 유일한 즐거움이다.
 김상철이 찻잔을 내려놓고 한지은을 보았다.
 “미안하다, 널 속여서. 그리고 네 부모님한테도.”
 “······.”
 “그래, 언제 탄로 날지 항상 불안했지만 말할 수는 없었어.”
 “내가 이해하지 못하리라고 생각했어?”
 “무엇을 이해한단 말이야?”
 김상철이 쓴웃음을 지었다.
 “넌 신문도 안 봤냐? 그때 사람들의 이야기도 못 들었어? 나는 전철 안이나 식당에서 이런 놈들은 총살시켜야 한다고 말하는 것을 들으면서 살아 왔어. 이해 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야.”
 “······.”
 “감추는 수밖에 없었어. 아버지가 저지른 일이니까 자식은 상관없다는 이해나 동정은 받고 싶지도 않아.”
 “······.”
 “난 그런 돈으로 학비를 내고 용돈을 썼으니까 모른다고 할 처지도 못 돼.”
 “······.”
 “가능한 한 숨기는 수밖에 없어, 살아가려면. 하지만 언젠가는 들통이 나겠지, 지금처럼.”
 잠자코 있던 한지은이 입을 열었다.
 “아버지는 오빠가 정직하지 못하다고만 하셨어.”
 “유감이라고 말씀 드려.”
 김상철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 먼저 갈게.”
 시선이 마주치자 김상철이 이제는 정색하고 머리를 끄덕였다.
 “잘 지내.”
 
 
 한 시간 후, 김상철은 영등포의 떠들썩한 음식점 안에서 안인석과 마주앉아 있다. 안인석은 김상철과 고등학교 동창으로 전공은 다르지만 같은 대학이다. 얼굴선이 곱고 해사한 안인석은 김상철과 성격도 대조적이었지만 둘이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단짝이다.
 안인석이 찌푸린 얼굴로 김상철을 바라보았다.
 “야, 너 왜 이렇게 마셔? 무슨 일 있어?”
 소주 한 병을 혼자 금방 비운 김상철이 두 병째를 따르고 있다.
 “무슨 일은, 뻔한 일이지.”
 김상철이 머리를 돌려 옆쪽 테이블을 쏘아보았다. 사내 네 명이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떠들썩한 소음을 일으켰다. 말끝마다 욕설이 따랐고 목청껏 소리를 질러 댔는데 주위의 손님들은 이맛살을 찡그리면서도 나서는 사람이 없다.
 김상철이 안인석에게로 머리를 돌렸다.
 “지은이가 아버지 일을 알게 되었어.”
 “지은이가 말이야?”
 상체를 앞으로 숙인 안인석의 눈이 커졌다. 아마 김상철의 집안 사정을 제일 잘 아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안인석일 것이다. 그는 김상철이 한지은에게도 아버지 사건을 감추고 있다는 것을 안다.
 “그래, 뭐라고 그래?”
 “지은이만 아는 게 아니고 그쪽 집안에서 모두 알게 되었단 말이다.”
 “······.”
 “날더러 정직하지 못하다고 했다는데, 지은이 아버지가······ 어머니는 자리를 펴고 누웠고.”
 “젠장, 잠자려고 누웠겠지, 정직하게 말했다면 상 주려고 했다더냐?”
 안인석이 소주잔을 들어 반쯤 마시고 내려놓았다.
 “그래, 지은이는 어때?”
 “어쩌긴, 헤어졌지.”
 “헤어진 건 알아, 네가 지금 혼자 있는걸 보면.”
 말은 가볍게 받았지만 안인석의 표정이 긴장되어 갔다.
 “상철아, 너, 설마.”
 “앞으로 만나지 않을 거다.”
 “······.”
 “언젠가는 끝날 일이었어. 아버지의 사건이 일어났을 때부터.”
 “아마 그랬겠지. 날 만나자고 했던 걸 보면, 이해하고 자시고 할 상황이 아니니까.”
 “······.”
 “내 형편에 지은이는 과분했어.”
 “이 자식아, 쓸데없는 소리 마.”
 그러자 술잔을 내려놓은 김상철이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네 놈이 어떻게 안단 말이냐? 내 미래를.”
 “그래, 하긴 그렇다.”
 머리를 끄덕인 안인석이 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내 그의 앞에 내려놓았다.
 “이달분 미리 가져왔다.”
 “고맙다.”
 봉투를 집어넣은 김상철이 술잔을 들었다. 아버지가 구속된 후로 안인석은 김상철에게 매달 150만 원의 생활비를 건네주고 있었다. 김상철의 어머니는 그것이 고둥학생 두 팀의 가정교사를 해서 벌어오는 돈으로 안다. 10억이 넘는 세금을 횡령했다고 발표된 김영환 씨가 항소심에서 추징금 4억에 징역 5년을 언도받은 바람에 집안은 거덜이 난 것이다.
 안인석의 부친 안문세 박사는 강남 영동대로에 있는 문세병원의 원장이다. 안 박사는 안인석의 씀씀이가 헤퍼진 것을 알았지만 공사가 다망하여 미처 캐묻지 못하고 있다.
 옆자리의 사내들이 다시 왁자하게 소리치며 웃었고 그 위압적인 분위기에 음식점 안이 조용해졌다. 김상철 비슷한 나이로 보였지만 모두 짧은 머리에 체격이 컸고 가끔씩 주위를 훑는 시선들이 매서웠다. 건달일 것이다. 아마도 근처의 나이트클럽이나 오락장을 무대로 노는 주먹들로 보였다.
 “하지만 난 지지 않을 거다.”
 단숨에 술잔을 비운 김상철이 손등으로 입술을 훔치고는 안인석을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그리고는 머리를 돌려 옆자리의 사내들을 바라보았다.
 “야, 이 시발놈들아, 좀 조용히 못해?”
 다음 순간 음식점 안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사람들은 숨을 죽인 채 김상철을 바라보았는데 네 사내도 예외가 아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김상철이 사내들의 식탁 앞에 가 섰다. 그러고는 한 마디씩 자근자근 말했다.
 “일어나는 놈 있으면 죽인다. 먼저 말을 하는 놈이 있으면 그놈부터 죽인다.”
 그러자 안쪽에 앉아 있던 눈이 가늘게 찢어진 사내가 벌컥 의자를 제치며 일어났다.
 그 순간 김상철의 몸이 튕겨지듯 공중으로 떠오르더니 발이 날아가 사내의 턱을 차올렸다. 그리고는 떨어져 내리면서 옆에서 몸을 세우는 사내의 뒤통수를 주먹으로 내려쳤다. 한손으로 탁자를 짚은 김상철의 몸이 다시 제자리에 바로 섰을 때 턱을 채인 사내는 의자와 함께 땅바닥에 누워 있었고 뒤통수를 찍힌 사내는 식탁 위에 코를 박고 엎어져서 움직이지 않았다.
 “움직이면 죽어.”
 남은 두 사내를 손가락 끝으로 가리키며 김상철이 낮게 말했다. 음식점 안은 기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김상철이 안인석에게로 눈만을 돌렸다.
 “계산해라, 가자.”
 그리고는 다시 두 사내를 바라보았다.
 “너 이 새끼들, 내가 누군지 알아?”
 누군지 알 리가 없는 두 사내가 얼이 빠진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너 이 새끼들, 작년에 신문도 안 봤어? TV도 안 봤느냔 말이다.”
 그러자 안인석이 그의 팔을 끌었다.
 “그만 가자.”
 “이 새끼들, 대한민국이 떠들썩했는데도 나를 몰라본단 말이야?”
 그는 안인석에게 끌려 음식점을 나왔다. 밖은 화려하고 혼잡한 영등포의 번화가였다. 서두르며 김상철을 끌고 인파를 헤쳐 나가던 안인석이 뒤를 힐끔거리더니 이윽고 걸음을 늦추었다.
 “나 참, 기가 막혀서.”
 그가 김상철을 흘겨보았다.
 “치려면 그냥 치지, 왜 그 따위 공갈을 치는 거야?”
 “무슨 공갈?”
 술이 깬 얼굴로 김상철이 그의 시선을 받았다.
 “왜, 내가 틀린 말 했냐?”
 
 
 다음 날 아침, 가방에 도시락을 넣던 어머니가 갑자기 손을 멈추더니 눈을 감았다. 작은 체격에 몸도 약해서 근래에 들어 자주 일을 쉬었으면서도 병원에는 한사코 가지 않으려고 한다. 옷을 입던 김상철이 어머니에게로 다가갔다.
 “어머니, 또 아파?”
 어머니가 눈을 떴다.
 “아니다. 조금 피곤해서.”
 “병원에 가자니까 그러네. 정말 왜 이러는 거야?
 “아픈 데가 있어야 갈 거 아니냐? 본래 몸이 약해서 그래.”
 “그러니까 병원에 가야 돼. 오늘 나하고 같이 가.”
 “오늘은 일 때문에 안 돼.”
 어머니가 김상철에게 가방을 건네주었다.
 쉰둘이면 아직 팔팔한 나이지만 어머니의 피부는 거칠었고 주름살이 깊어서 환갑이 지난 노인처럼 보인다. 어머니도 나갈 채비를 했다. 작년부터 파출부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어머니, 이번 아버지 면회는 제가 갈 테니까 어머니는 쉬어.”
 김상철의 말에 어머니가 눈을 둥그렇게 떴다.
 “얘 좀 봐, 난 가만 있으면 가슴이 떨리고 어지러워, 움직여야 돼.”
 “글쎄, 그러니까 집에서 쉬란 말이야.”
 “안 돼.”
 머리를 저은 어머니가 단호하게 말했다.
 “늬 아버지는 내가 봐야 돼.”
 마치 주일날 교회에 가는 사람처럼 어머니는 빠짐없이 교도소에 면회를 갔고 그것이 다음 면회일까지의 정신적인 양식이 되어 온 것 같다. 입맛을 다신 김상철은 가방에 책을 담아 넣고는 일어섰다. 심성이 여린 어머니여서 하루가 다르게 몸과 마음이 소진되어 가는 것 같다. 그들의 전셋집은 방 두 칸에 주방과 화장실이 나란히 붙은 15평형의 연립주택이었다. 아직 박스를 풀지 않은 세간이 이쪽저쪽에 가득 쌓여져 있는 사이를 지나 김상철은 현관으로 나왔다. 봉천동의 달동네이기는 하지만 재산 모두를 처분하여 추징금을 내고 전세금이 남은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어머니가 뒤따라 왔다.
 “아버지는 죄가 없어, 모두 과장하고 조서기가 해먹은 거야.”
 “누가 그걸 몰라?”
 신발을 신으면서 김상철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 새끼들이 조금씩 떼어준 돈을 영문도 모르게 받았다고 해도 공범이 된다니까, 어머니는 참.”
 “그래도 억울해. 조서기 그놈은 추징금을 내고도 빌딩 한 채가 남았다는데.”
 아침 7시 30분이어서 여동생 민희는 아직 자고 있는지 방에서는 기척 이 없다. 어머니를 닳아 내성적인 성격인데다가 아버지의 사건이 터지고 학교까지 휴학하게 되자 좀처럼 바깥출입을 하지 않는다. 밖으로 나왔을 때 찬 아침 공기가 피부에 닿았다. 찻길이 멀어서인지 매연이 덜 섞인 시린 공기가 폐에 스며들었으므로 김상철은 어깨를 펴고 숨을 들이마셨다.
 
 
 김상철이 체육관 앞의 나무 벤치로 다가갔을 때 한지은이 머리를 들었다. 짙은 색 바바리코트 차림의 한지은은 두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 어깨를 움츠린 모습이다.
 “오랜만이구나.”
 옆쪽에 앉은 김상철이 한지은을 보았다. 학교 앞에서 그렇게 헤어진 지 보름만이다. 그동안 서로 전화 한 통 주고받지 않았다.
 “운동하고 있다고 해서. 도서관에 갔더니······.”
 조금 핼쑥해진 얼굴로 한지은이 말했다.
 “우리 나가, 밖으로.”
 “아니, 난 한 시간쯤 더 있어야 돼. 시범경기가 있거든.”
 김상철이 머리를 저으며 말을 잇는다.
 “시험공부 때문에 몇 달간 운동은 안 했는데도 몸이 잘 풀려. 스트레스가 싹 풀리는 기분이야.”
 그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에게 끌려 합기도를 배웠는데 지금은 공인 5단이다. 그러나 단수를 높이기로 마음만 먹었다면 7단도 거뜬하게 딸 실력이었다. 대학 2학년 때 중량급 한국 챔피언을 따내었고 군에 들어가서는 해병대에서 무술교관을 지냈다. 그러나 복학 후에는 가끔 체육관이나 도장에 나가 몸을 풀었을 뿐이다. 아버지의 말대로 운동은 정신과 몸의 균형을 맞추기 위한 것이었고 미래를 위해서는 취업 준비가 당면과제였던 것이다. 김상철이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바쁘다는 시늉이어서 건성이다.
 “그래. 무슨 일이야? 여기까지 찾아온 건······.”
 “꼭 말해야 될 것 같아서.”
 김상철을 올려다보던 한지은이 고개를 떨어뜨렸다.
 “나, 중절수술 했어 사흘 전에.”
 “아, 그랬었지.”
 기억이 난다는 듯 김상철이 머리를 끄덕였다. 생리가 한 달 동안 끊겼다고 한 것이 20일쯤 전이었으니 태아는 3개월쯤 되어 있었을 것이다.
 “미안하다, 내가 같이 가주는 건데.”
 “······.”
 “관계를 끊자니 이것저것 정리할 것이 많았구먼. 그래, 몸은 괜찮아?”
 구두 끝을 내려다본 채 입을 열지 않는 한지은의 어깨를 그가 가볍게 쳤다.
 “궁상떨지 말고 돌아가, 이제.”
 “꼭 그런 식으로 말해야 돼?”
 그러자 김상철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럼, 잘못했다고 빌기라도 할까? 아니면 기회를 달라고 매달려?”
 “······.”
 “혼자서도 잘 정리하면서 나한테 바라는 것이 뭐야? 네 마음이 개운해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지?”
 “난 그저······.”
 “넌 영리한 애야. 타산이 빠르고, 그래서 손해를 보지 않는 여자지.”
 “알았어.”
 자리에서 일어선 한지은이 이제는 김상철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는 주머니에서 흰 봉투 하나를 꺼내 김상철의 무릎 위에 내려놓았다.
 “아버지가 오신다는 걸 내가 대신 온 거야. 아버지는 사람을 시켜서 오빠 집안을 알아보셨어. 그래서 이걸······.”
 “이게 뭔데?”
 얇은 봉투를 손에 쥔 김상철이 한지은을 바라보았다.
 “뭐야? 이거?”
 “돈이야. 2천만 원이 들었어.”
 “······.”
 “생활에 보태 쓰라고.”
 머리를 끄덕인 김상철이 봉투를 한지은의 코트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돈을 보니까 목구멍 안에서 손이 나을 것 같지만 안 받겠어.”
 “······.”
 “받을 이유도 없고, 네가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러니 가지고 가.”
 “이건 호의야. 단지, 우리 집안의······.”
 얼굴을 붉힌 한지은이 김상철을 쏘아보았다.
 “오빠가 이러리라 짐작했지만 아버지가 굳이······.”
 “돈은 안 받겠지만 그 호의는 충분히 이해한다고 전해. 그리고 염려하실 것 없다고도 전하고.”
 일어선 김상철이 한지은을 향해 웃었다.
 “아버지가 돈 먹고 교도소에 계신데 자식이 대를 이어 돈을 먹을 수는 없지.”
 
 
 고려그룹은 계열사가 40여 개에 임직원의 숫자만 해도 10만 명이 넘었고 해외 지사와 현지 법인을 합하면 200개가 넘는다. 또한 외국에 세운 현지 공장도 수십 개여서 그룹 전체의 1년 매출액이 200조 원 가깝게 되는 한국의 최대 그룹이었다. 55년 전, 쌀 소매상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강우진 회장은 지금도 정력적으로 그룹을 이끌고 있었는데 물론 경영방식은 옛날과 달랐다. 그룹을 연계성이 있는 품목별 소그룹으로 나누어 소그룹 회장이 있고, 각 소그룹은 종합적인 전략에 따라 계열사를 지휘하는 것이다.
 자동차, 중공업, 전자, 건설, 상사, 유통의 6개 소그룹으로 나누어진 방대한 조직을 통괄하는 것은 물론 강 회장이다. 그는 지금도 한 달에 한 번 그룹장 회의를 주재하면서 그룹을 관리하고 있었다. 또한 한 달에 열흘은 해외의 사업체를 시찰하면서 맹렬한 활동을 한다.
 강 회장이 모스크바에서 돌아온 날 저녁이다. 모처럼 모인 가족들과 식사를 마친 강 회장은 4형제 중 장남인 강용식과 함께 서재로 들어섰다. 강용식은 중공업 그룹의 그룹장으로 조선의 회장도 겸임하고 있었다.
 “러시아는 시베리아 개발에 적극 찬성이야. 한·러 합작 자동차 공장의 계약만 끝낸다면 우리에게 개발권을 주겠다는 거다.”
 소파에 앉은 강 회장이 서두르듯 말하자 강용식이 머리를 끄덕였다.
 “이 실장한테서 들었습니다, 아버님.”
 “우리는 대한민국의 면적 보다 큰 땅을 가질 수가 있단 말이다.”
 “예, 45만 평방킬로미터니까 남북한을 합한 면적보다 두 배도 넘습니다.”
 “내일 청와대에 들어가야겠다.”
 “아버님.”
 자리를 고쳐 앉은 강용식이 헛기침을 했다. 50대 초반으로 이제 경영자로서의 관록이 붙은 강용식이었지만 강 회장 앞에서는 언제나 조심스럽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뺨을 맞는 것이 예사라는 소문도 있었으나 지금은 강 회장에게 제일 신임을 받는 자식이다.
 “먼저 시베리아 지역을 살펴봐야 할 것 같습니다. 러시아 쪽에서 보여준 슬라이드 사진만 가지고는 대뜸 계약하기가······.”
 강용식이 말하자 강 회장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까짓 나무가 조금 적으면 어때? 그땐 땅을 갈아서 옥수수를 심지. 끝도 없는 옥수수 밭을 만든단 말이다.”
 “그러실 바에는 기후와 조건이 더 좋은 땅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하긴 그렇군.”
 “청와대에 들어가시는 건 조금 보류하시고 조사단을 파견해서 임차될 땅에 대한 정밀점검을 시켜야 합니다.”
 강 회장이 입맛을 다셨다.
 “러시아 쪽은 서두르고 있는데 몇 달쯤 보류시켜야겠군.”
 “러시아 쪽에는 로비를 하겠습니다.”
 강 회장이 모스크바에 간 것은 시베리아의 땅을 임차하기 위해서였다. 광활한 시베리아 대륙은 아직도 인간의 손이 닿지 않은 미개척지로 남아 있었는데 풍부한 자연자원을 지닌 땅이었다. 그가 임차 후보지 중에서 고른 지역은 주그주르 산맥 옆쪽의 광활한 무인지대로 원목뿐만 아니라 갖가지 광물질이 풍부하다고 알려져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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