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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야성 1화

2018.01.29 조회 773 추천 3


 불야성 1
 
 
 
 사기꾼
 
 
 
 1998년 3월의 오후, 거리에는 햇살이 환했지만 바람이 세었다. 아직 추위도 가시지 않아서 행인들의 어깨는 움츠러졌고 바람에 날린 휴지 조각이 한참이나 허공을 떠다녔다.
 
 창가에 서서 황량한 거리를 내려다보던 신윤수는 몸을 돌렸다. 60대 초반의 나이였으나 검은 머리에 혈색이 좋아서 40대로 보이는 얼굴이었다. 신윤수가 입술만 조금 비틀고 웃었다.
 
 “대양컴퓨터가 다음 달 말까지 발행한 어음과 당좌가 45억이다. 이번달에는 어떻게든 막더라도 다음 달에는 안 될 게다.”
 
 소파에 앉은 그가 앞자리의 신준을 바라보았다.
 
 “괜찮은 회사다. 불황만 끝나면 당장에 월간 순이익 몇 십억은 올릴 수 있어.”
 
 신준이 머리를 끄덕였다.
 
 “대양 이사장이 며칠 전부터 아버님을 만나려고 하는 모양인데요.”
 
 “어음 기간 연장 때문이겠지.”
 
 소파에 등을 기댄 신윤수가 쓴웃음을 지었다.
 
 “며칠 더 기다리게 했다가 네가 만나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아버님.”
 
 신준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신윤수의 차남으로 적극적이고 철저한 성격의 사내였다. 산만한데다 내성적인 장남 신현과는 대조적인 성격이다. 사장실을 나온 그가 아래층에 있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서자 고광도가 따라 들어섰다.
 
 “전무님, 상일에서 대표가 왔는데요.”
 
 그가 슬쩍 신준의 눈치를 보았다.
 
 “임금 문제인 것 같습니다만···.”
 
 “이건 물에 빠진 놈 건져냈더니 보따리 찾아내라고 하는 꼴이군.”
 
 이맛살을 찌푸린 신준이 날카로운 시선을 들었다.
 
 “몇 놈이 왔어?”
 
 “두 년이 왔습니다.”
 
 시치미를 뗀 얼굴로 고광도가 딴전을 피웠다. 그는 신준의 심복으로 1미터 90센티미터의 키에 체중이 150킬로그램이 넘는 거구였다. 그래서 누구나 전직 씨름선수로 착각하지만 그는 샅바끈을 어떻게 매는지도 모르는 주방용구회사 출신이다. 신준이 벽시계를 올려다보았다. 오후 3시였다.
 
 “난 약속이 있으니까 네가 해결해. 다음 달에 주겠다고 하란 말이다.”
 
 “다음 달 월급날에 말입니까? 석 달치 밀렸다는데 그때 한꺼번에···.”
 
 “미친놈, 우리가 봉이냐?”
 
 신준이 눈을 치켜떴다.
 
 “상일을 인수할 때 밀린 봉급 문제는 계약서상에 넣지 않았어. 우리가 내줄 이유가 없단 말이다.”
 
 
 
 * * *
 
 
 
 불황이어서 골프장은 텅 비어 있었다. 몇 팀이 있긴 했지만 외국인이 끼여 있는 것을 보면 한가로운 내국인은 신준과 장경아 둘 뿐인 것 같았다. 세 홀을 돌고 골프장의 라운지로 돌아왔을 때는 저녁 6시가 다 되어 있었다. 장경아는 인천국제대학 총장의 외동딸로 눈부신 미모에다 미국유학을 마치고 온 재원이다. 오렌지 주스잔을 든 장경아가 흰 이를 보이며 웃었다.
 
 “조용해서 좋네, 그죠?”
 
 “그렇군. 평일에도 이 시간이면 여긴 북적거렸는데.”
 
 신준이 라운지를 둘러보는 시늉을 했다. 손님은 그들과 일본인으로 보이는 두 사내가 있을 뿐이다.
 
 “이젠 없는 놈들이 있는 체 할 수 없는 세상이지. 거품이 걷혔다고 할까?”
 
 “빈익빈 부익부가 두드러지고 있다던데···.”
 
 “능력 나름이야.”
 
 신준이 의자에 등을 기댔다. 그의 아버지 신윤수는 강남에 십여 개의 빌딩을 소유하고 있는 부동산업자인 것이다. 그가 운영하는 한일상사는 IMF시대가 되면서부터 보유하고 있던 자금을 운용하여 유망 중소기업을 흡수하기 시작했는데 이미 다섯 회사의 소유권을 확보해 놓았다. 금융실명제가 대폭 보완된 후로 자금운용이 용이해진 것도 도움이 되었다.
 
 주스잔을 내려놓은 신준이 장경아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손님이 없으니 탈의실도 비었겠구만, 안 그래?”
 
 그녀의 묻는 듯한 시선을 받은 신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탈의실로 가지 않을래?”
 
 그제서야 눈치를 첸 장경아가 그를 흘겼다.
 
 “색다른 곳에서라야 기분이 나요?”
 
 “그건 너도 마찬가지일 텐데. 남자 탈의실에서 해본 적 있어?”
 
 
 
 * * *
 
 
 
 탈의실은 비어 있었다. 그러나 넓었고 서늘한데다 너무 밝았다. 신준이 옷을 벗어 옷장 안에 넣으면서 웃었다.
 
 “이봐, 카운터에다 약을 써놓았으니 한 시간 동안은 휴게실 문을 닫을 거야. 벗어.”
 
 “그럼 남탕 구경이나 할까?”
 
 장경아가 따라 웃었다. 그리고는 셔츠와 바지를 순식간에 벗었는데 금방 미끈한 나신이 드러났다. 그녀의 몸에 시선을 준 신준의 얼굴이 상기되었다.
 
 “네 몸은 남자를 위해 만들어진 것 같단 말이야.”
 
 “그런 얘기 전에도 들은 것 같네.”
 
 신준이 그녀의 상반신을 끌어안자 곧 두 알몸이 밀착되었다.
 
 “여기서?”
 
 “아무려면 어때?”
 
 마룻바닥 위에 뉘어진 장경아가 몸을 비틀며 일어났다.
 
 “바닥이 차. 준 씨가 밑으로.”
 
 넓은 탈의실에는 불빛이 환했고 옆쪽 목욕탕에서 물 흐르는 소리만 희미하게 들렸다.
 
 “덥혀줘.”
 
 신준 위에 올라앉은 그녀가 몸을 비틀자 풍만한 젖가슴이 젤리 덩어리처럼 탄력있게 흔들렸다. 그러나 그의 손길이 닿기도 전에 그녀의 몸은 달아올라 있었다. 그리고 그녀 스스로 서두르듯 그의 남성을 몸에 넣었다.
 턱을 치켜든 그녀가 위쪽의 불빛을 눈부신 듯 바라보며 탄성을 뱉었다.
 
 “좋아.”
 
 그녀의 여성은 뜨겁게 젖어 있었다. 그리고 살아있는 듯 움직였다.
 
 
 
 * * *
 
 
 
 “잠깐만요.”
 
 뒤에서 부르는 소리에 신준은 몸을 돌렸다. 장경아도 놀란 듯 그에게로 바짝 몸을 붙였는데 주위는 어두웠고 인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앞으로 다가온 것은 두 여자였다. 골프장의 주차장에는 짙은 정적이 덮여 있었다.
 
 “날 부른 거요?”
 
 “네, 혹시 한일상사의 신전무님 아니세요?”
 
 오른쪽의 여자가 물었는데 다부진 표정이었다. 신준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런데 무슨 일입니까?”
 
 “저희들은 상일전자에서 왔어요.”
 
 오후에 고광도에게 맡기고 나왔던 상일의 대표라던 여자들이다. 신준이 입맛을 다셨다.
 
 “내가 고부장한테 말해두었는데···.”
 
 “다음 달에 한 달분 봉급을 준다는 말씀인가요?”
 
 오른쪽 여자가 한 걸음 다가섰다.
 
 “저희들한테는 밀린 봉급을 모두 지불한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계약서대로 집행할 뿐이오.”
 
 신준이 장경아를 돌아보았다.
 
 “차에 들어가 있어.”
 
 그가 건네준 열쇠를 받은 장경아가 흘낏 여자들에게 시선을 주었다.
 
 “추워요. 빨리 오세요.”
 
 장경아가 차에 들어가자 신준이 여자들을 향해 섰다.
 
 “우리도 부실기업을 인수해서 손해가 커요. 당신들 요구대로 들어줄 수는 없단 말입니다.”
 
 “그런 식으로 부실기업을 인수해 오셨나요?”
 
 이번에는 왼쪽의 여자가 물었으므로 신준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아직 뭘 모르시는 모양인데, 우린 상일을 휴업시켜도 법적으로 하자가 없는 입장이오.”
 
 “우린 당신이 상일어음 10억을 연장해 줄 것처럼 하다가 부도를 냈다는 걸 알고 있어요.”
 
 “그렇다면 우리가 상일을 그대로 딴 곳에 팔아도 하자가 없다는 것도 아시겠구만. 물론 봉급 줄 필요도 없이 말이오.”
 
 “당신의 양심을 믿었어요.”
 
 왼쪽 여자가 신준을 쏘아보았다.
 
 “회사 전직원 앞에서 약속하신 일입니다.”
 
 “난 기억이 나지 않는데.”
 
 신준도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보셨다시피 난 아는 여자들이 많습니다.”
 
 “나쁜 자식.”
 
 오른쪽 여자가 뱉듯이 말했다.
 
 “넌 기생충 같은 인간이다.”
 
 신준이 그녀를 향해 머리를 끄덕였다.
 
 “당신의 지금 그 말 한 마디로 다음 달에 나갈 한 달분의 봉급마저 보류되었어. 그것이 분하면 법적 수단을 찾아보도록.”
 
 그의 시선이 왼쪽 여자에게로 옮겨졌다.
 
 “당신 이름이 뭡니까? 기억할 테니 말씀해 주시오.”
 
 “양선영입니다.”
 
 메마른 목소리로 말한 여자가 시선을 비꼈다.
 
 “상일전자 노조의 부위원장이에요.”
 
 머리를 끄덕인 신준이 몸을 돌렸다. 기억나지 않는다고 한 것은 거짓말이다. 오른쪽 여자는 노조위원장 홍혜선이다. 그는 그들에게 밀린 월급은 책임지고 해결할 테니 합의문에는 기록하지 말자고 부탁했던 것이다. 적자회사를 인수하는데 사장이 반대하고 있다는 것이 이유였는데 그들은 사장의 차남인 자신의 말을 믿은 것이다. 차에 돌아가 운전석에 앉자 화장을 고치고 있던 장경아가 그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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