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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검사우객 1

2018.01.30 조회 303 추천 1


 고검사우객 1권
 서장 죽음의 비 사우객(死雨客)
 
 
 산 자(者)여······!
 살아 있다는 권리만으로 죽은 자의 영혼을 부를 수 있는 자여······!
 이제 산 자의 권리로 죽은 자의 영혼을 불러 물어 보라.
 ― 그는 누구냐?
 죽은 자의 영혼은 말이 없다.
 산 자의 외침만이 황량한 십팔만리(十八萬里) 중원대륙(中原大陸)을 스산하게 메아리칠 것이다.
 중원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검을 잡은 무인이여······!
 피 젖은 야망(野望)의 검을 들고 외쳐 보라!
 ― 너는 누구냐?
 그는 말이 없었고, 너는 대답이 없다.
 죽은 자의 영혼과 산 자의 야망을 무참하게 난자(亂刺)하는 그는 누군가······?
 ― 사우객(死雨客)!
 죽음의 비를 뿌린다는 가장 완벽한 자객(刺客)이다.
 한 자루 고색창연한 고검(古劍).
 그리고 차갑도록 냉막하고 이지적인 모습의 백의공자(白衣公子).
 가장 냉혹한 이성과 가장 차가운 심장으로 무장한 이 시대 최고의 인간살인병기(人間殺人兵器)다.
 그의 검은 심장을 찌르는 얼음송곳처럼 냉혹하고 비정하다.
 잡을 수도, 죽일 수도 없는 지옥의 살인객(殺人客)이다.
 허나 그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니, 그를 아는 사람은 무수히 많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그의 고검에 영혼을 난자당해 죽었다.
 산 자는 산 자의 권리로 말을 하나 죽은 자는 말을 할 수가 없다.
 사우객!
 그 명호(名號)만이 사신지존(死神至尊)같이 중원대륙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있었다.
 누구도 그를 알지 못한다.
 그의 진정한 야망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다만 그는 죽음의 비를 뿌리며 중원대륙에 공포의 화신(化身)으로 나타났다.
 ― 그를 찾지 말아라.
 아니, 그를 만나지 말아라.
 그는 죽음의 비를 뿌리고 다니며 신(神)을 위협하는 고독한 살인객이다.
 그리고 중원무림의 신도 그의 고독한 검에 난자당해 죽었다.
 무림천하는 공포의 도가니였다.
 잔잔한 연못에 파문이 일 듯 사우객의 공포는 삼산오악(三山五嶽)과 사해팔황(四海八荒)을 충격 속으로 몰아넣었다.
 헌데도 무림천하는 그를 모르고 있었다.
 그는 어디서 찾아온 고독한 검객(劍客)인가······?
 
 ***
 
 그것은 엄청난 충격이었고, 그것은 또한 엄청난 변괴였으며, 그것은 천하를 공포의 도가니로 만드는 시작이었다.
 어느 비 오던 그날은 천지(天地)가 암흑으로 뒤덮여 있었으며, 새파란 섬광이 칼날같이 암천(暗天)을 난자하였고 뇌성벽력(雷聲霹靂)이 악마처럼 울부짖었다.
 번― 쩍!
 그리고 하늘이 무너졌는지 엄청난 폭우(暴雨)가 천지를 떠내려보낼 듯이 퍼부었다.
 쏴쏴쏴― 쏴―!
 ― 아미파(峨嵋波)와 청성파(靑城波)와 공동파(**派)!
 이 삼대문파(三大門派)를 모르는 무인들도 있다던가?
 삼척동자(三尺童子)도 알고 있는 명문대파(名門大派) 중의 명문이다.
 무림의 영원한 태산북두(泰山北斗)인 소림사(少林寺)와 어깨를 견주는 정파무림의 핵심들이다.
 헌데 폭우가 천지를 뒤덮은 그날에······.
 삼대문파의 산문(山門) 앞에는 똑같이 하나의 관(棺)이 놓여 있었다.
 진홍(眞紅)의 노을보다 붉은 핏빛의 목관(木棺)이다.
 언제 누가 그곳에 핏빛의 목관을 갖다 놓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폭우 속에서 번뜩이는 핏빛의 목관은 소름이 돋아나도록 끔찍한 공포를 발산하였다.
 그리고 삼대문파의 제자들이 목관을 발견하였을 때 목관 속에는 한 장의 유지(油紙)가 담겨 있었고, 유지에는 폭우조차 씻어내지 못하는 무시무시한 한 자의 글이 적혀 있었다.
 
 <사(死)!>
 
 죽음이 아닌가?
 도대체 누가 이런 엄청난 짓을 하였단 말인가.
 삼대문파는 돌연 발칵 뒤집어지고 말았다.
 허나 누구도 속시원하게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말하지 못하였다.
 어쩌면 그들은 어떤 미치광이가 미친 짓을 하였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폭우는 바로 죽음의 비였으니······.
 그리고 한 명의 사신지존이 폭우 속에서 나타날지니······.
 어느 비 오던 그날.
 고독한 늑대가 피 젖은 검을 들고 천하에 나타났다.
 그리고 무림의 혈사(血史)는 다시 시작되었다.
 
 
 1장 세우(細雨) 속에 찾아온 불청객
 
 
 만추지절(晩秋之節).
 천자만홍(千紫萬紅)의 단풍은 산야를 형형색색(形形色色)으로 채색하고 마음껏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허나 불어오는 바람은 어쩐지 스산하다.
 하늘은 암갈색으로 우중충하게 죽어 있었고 낮게 드리워진 회백색의 구름덩이가 금방이라도 한바탕 폭우를 퍼부을 듯한 기세다.
 음산한 한기를 동반한 한풍(寒風)이 이미 퇴색한 낙엽을 허공으로 재주껏 날려보낸다.
 정적이 감도는 한적하기 이를 데 없는 산길.
 퇴색한 낙엽이 멋없이 나뒹구는 꾸불꾸불한 구절양장(九折羊腸)이다.
 헌데 구절양장을 따라 낙엽을 밟으며 걷고 있는 인물이 있었다.
 놀랍게도 준수하고 영준한 백의서생(白衣書生)이었다.
 문약한 인상에 글줄이나 읽은 듯한 백의서생의 용모는 가히 군계일학(群鷄一鶴)이다.
 십팔 세 가량 되었을까?
 문약한 일신에서 발산되는 기도는 무섭도록 차갑고 냉혹한 고독(孤獨)이다.
 형형한 정광(精光)이 발산되는 그의 두 눈은 얼음조각같이 투명하고 냉혹하게 느껴졌다.
 백옥(白玉)을 정교히 조각한 듯한 그의 얼굴에는 싸늘한 냉기와 짙은 우수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도대체 문약한 그의 어디에서 이토록 냉막하고 사정없는 고독이 발산되는 것인가.
 누가 보았다면 그는 영락없는 풍류공자(風流公子)이거나 낙방서생이었다.
 허나 그의 허리에는 그것을 부정하는 고색창연한 한 자루 고검(古劍)이 비스듬히 매달려 있었다.
 고검에는 기이하게 붉은빛이 감돌고 있었다.
 백의서생은 한마디 말도 없었다.
 그는 묵묵히 소로를 따라 걷고 있었다.
 회백색의 하늘은 금방이라도 포효하듯이 폭우를 퍼부을 듯하다.
 암울하게 죽어 있는 하늘을 바라보며 백의서생은 문득 소리 없이 냉막하게 웃었다.
 싸늘한 칼날이 스쳐 가듯 전율스러운 냉기가 흐르는 웃음이다.
 백의서생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조금은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그가 가고 있는 목적지는 어디인가?
 백의공자는 여전히 냉막한 웃음을 베어문 채 걸음을 옮긴다.
 쏴아아아······!
 그리고 폭우가 아니라 눈물같이 가는 빗발이 뿌리기 시작했다.
 여인의 흐느낌 같은 세우(細雨)였다.
 
 ***
 
 아미금산(峨嵋錦山).
 중원의 서단을 가로지르는 사천성(四川省)의 천하대산(天下大山)이다.
 사천성의 지붕이라고 불리는 이곳은 기암절봉(奇巖絶峯)들이 물결치듯이 이어져 장관을 이루는 곳이다.
 쏴아아아아······!
 이곳에도 예외 없이 세우가 내리고 있었다.
 험준절봉을 타고 비안개가 자욱한 운무(雲霧)처럼 피어오르고 있어 신비하기 이를 데 없었다.
 간간이 불어오는 바람에 수목들이 머리를 풀어헤친 광녀(狂女)처럼 춤을 춘다.
 세우를 타고 어둠이 스산한 장막(帳幕)을 드리우기 시작했다.
 헌데 세우를 맞으며 한 명의 백의서생이 아미금산을 오르고 있었다.
 놀랍게도 백의서생은 냉기와 고독으로 뭉쳐진 바로 그였다.
 그는 무심하게 걸음을 옮기고 있었는데 그가 오르는 산길은 아미파의 산문(山門)이 가로막고 있는 곳이다.
 아미파의 위명(威名)은 소림사와 쌍벽을 이루고 있었으나 그가 산문에 이를 때까지 방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미파의 산문은 일주문(一柱門)이다.
 붉은 기둥이 좌우로 하늘을 찌르고 있는 일주문 앞에서 백의서생은 걸음을 멈췄다.
 휘― 익! 휙!
 순간 어둠 속에서 일단의 인영들이 세우를 가르며 날아올랐다.
 회색의 가사(袈裟)를 걸친 아미파의 승인(僧人)들이다.
 그들 중 기골이 장대하고 어깨가 딱 벌어진 승인이 앞으로 나섰다.
 그는 백의서생을 경계의 눈빛으로 한번 훑어본 후 불호를 토했다.
 “무량수불······! 빈승은 아미파의 공명(空明)이라 하오.”
 스스로 법명(法名)을 밝힘은 당신이 누구냐고 묻는 것이다.
 허나 백의서생은 형형한 안광으로 공명을 쏘아볼 뿐이었다.
 공명은 순간적으로 가슴이 서늘한 전율을 느낀다.
 ‘무량수불······! 보기에는 글만 읽은 서생같이 문약한데 무슨 눈빛이 이리도 비수 같은가. 혹시 이자가······?’
 무슨 생각을 하였는지 공명은 전신을 가늘게 떨었다.
 “무량수불······! 시주는 이름을 밝히고 본 파를 찾아온 목적을 말해 주시오.”
 그의 말투는 심신을 수양(修養)하는 승인답게 정중하면서도 당당하였다.
 백의서생은 여전히 냉막한 웃음을 지을 뿐 말이 없었다.
 ‘아니, 이자가 설마 귀머거리에 벙어리란 말인가?’
 공명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는 비록 나이는 삼십을 넘겼으나 아미파의 칠대제자(七大弟子)들 가운데 마지막 항렬의 인물이다.
 또한 그와 함께 날아 나와 주위에 서 있는 승인들은 산문을 지키는 무승(武僧)들이다.
 무승들이 보는 앞에서 무시를 당한 듯한 공명의 안색이 좋을 리가 없었다.
 그는 언성을 높이며 짜증스럽게 말했다.
 “시주는 누군지 어서 정체를······!”
 그의 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번― 쩍!
 너무나 차갑고 신랄한 한 줄기 검광이 경악하는 그의 시야를 무자비하게 내리그어 버렸다.
 “크아악―!”
 처절한 비명을 토하며 공명은 피를 뿌리며 바닥을 뒹굴었다.
 너무나 돌발적이고 누구도 상상치 못한 일이다.
 “무량수불······ 공명 사형(師兄)이 죽었다.”
 일곱 명의 무승들은 혼비백산하며 경악과 공포로 표정이 일그러졌다.
 허나 그들은 이내 백의서생을 향해 성난 사자(獅子)같이 덤벼들었다.
 “이놈이 어디서 함부로 살생(殺生)이냐?”
 “무량수불······! 스스로 자초한 화근이다.”
 순간 백의서생의 입가로 보일 듯 말 듯한 냉소가 선을 긋듯이 스쳐 갔다.
 동시에 그는 가볍게 쌍장을 들어 크게 원을 그린 후 밀어쳤다.
 고오오― 오―!
 놀랍게도 장난 같은 그 동작에 그의 쌍장에서 오색의 장영(掌影)이 폭우처럼 쏟아져 나갔다.
 일곱 명의 무승들은 이 엄청난 광경에 혼백단절하여 몸을 피하려 하였다.
 허나 오색의 장영은 무자비하게 그들을 덮쳐 버렸고, 처절한 비명이 피보라를 뿌리며 터져 나왔다.
 “크아― 악!”
 “으― 악!”
 백의서생은 냉소를 머금은 채 다시 쌍장을 비수같이 종횡으로 내리그었다.
 “크아악!”
 “으― 악!”
 모골이 송연한 비명이 다시 터져 나오고 사위는 비릿한 피 냄새가 역겹게 진동하였다.
 아미파의 무승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칠공으로 피를 뿌리며 죽어갔다.
 그들은 죽어가면서도 백의서생이 도대체 어떻게 살수를 펼쳤는지 보지 못하였다.
 백의서생은 더욱 냉막하고 고독한 눈빛으로 죽어 있는 시체들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에는 한점의 감정조차 담겨 있지 않았다.
 그의 시선이 다시 세우가 쏟아지는 암천을 향했다.
 그리고 죽음보다 심유하고 냉엄한 음성이 칼날같이 흘러 나왔다.
 “죽어야 할 자는 죽어야 한다.”
 거대하고 육중한 대문(大門).
 대문을 들어서면 아미파의 경내(經內)로 들어가게 된다.
 백의서생은 그곳에 서 있었다.
 대문의 좌우에는 네 명의 아미파 제자들이 위맹하게 서 있었다.
 조금 전의 비명 소리를 들었는지 그들의 표정에는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허나 그들은 정중하고 조심스러웠다.
 얼굴이 각지고 네모난 승인이 담담하게 말했다.
 “시주는 어디서, 무슨 일로 본 파를 방문하였소?”
 순간 백의서생의 입가로 지독한 살소가 자욱이 피어올랐고, 피어올랐다고 느낀 순간 우장이 전광석화같이 뻗어 나왔다.
 퍼펑―!
 무시무시한 장강이 시야를 가렸다.
 “크악―!”
 “으― 악!”
 끔찍한 비명이 터지고 그보다 더 끔찍하게 두 명의 제자들이 가슴이 피투성이로 변해 죽어갔다.
 “감히 무자비한 살수를 펼치다니······!”
 “이곳이 어딘 줄 알고 감히 행패를 부리느냐!”
 살아 남은 두 명의 제자들은 계도(戒刀)를 살벌하게 휘두르며 백의서생을 덮쳐갔다.
 같은 동료의 죽음 앞에서 그들은 보이는 게 없을 만큼 분기탱천하였던 것이다.
 슈슈슉―!
 무시무시한 계도는 독사의 혓바닥 같은 도강을 서리서리 뿜어냈다.
 허나 백의서생은 냉오한 살소를 머금은 채 춤을 추듯이 도강(刀剛)을 피했다.
 백의서생의 기기묘묘한 경공신법(輕功身法)에 두 명의 승인들은 혀를 내두르며 감탄했고, 감탄은 이내 무서운 공포로 변해 갔다.
 백의서생은 마치 한 줄기 바람같이 표홀하게 도강을 피하고 있었는데 도무지 움직이는 느낌조차 없었다.
 마치 도강이 스스로 백의서생의 곁에서 피해 가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무량수불! 이자는 너무 강해, 우리의 적수가 아니다.’
 그 같은 생각이 들었을 때 그들은 백의서생의 우장에서 뿜어지는 벼락같은 한 줄기 장력을 보았다.
 아니, 보았다고 느낀 순간 그들은 무참하게 피투성이로 변해 가랑잎같이 날아가며 냅다 비명을 목청껏 내질렀다.
 “크― 아악!”
 “으― 악!”
 “후후후······! 이제 시작일 뿐이다.”
 백의서생의 입가로 얼음장같은 냉소가 번져 갔다.
 이때 요란한 종소리가 난무하며 아미파의 경내가 발칵 뒤집혀지고 있었다.
 뗑뗑뗑― 뗑!
 연이어 터지는 비명 소리에 혼비백산하였던 것이다.
 요란한 발소리가 대문 쪽으로 들리며 외침 소리가 분분히 들려왔다.
 “침입자를 찾아라!”
 “침입자가 살수를 펼치고 있다.”
 백의서생은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냉엄하게 서 있었다.
 그는 홀홀단신으로 거대한 아미파를 상대하려고 결심하고 있는 듯하였다.
 순간 백의서생의 쌍장이 냅다 육중한 대문을 후려쳐 버렸다.
 콰콰쾅― 쾅!
 청천벽력(靑天霹靂) 같은 굉음이 터지며 대문은 박살나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 사이로 백의서생은 비조(飛鳥)같이 날아들었다.
 수십 명의 아미파 제자들이 우르르 몰려나오는 게 보였다.
 그들은 느닷없는 변괴에 경악의 표정을 짓다가 백의서생을 발견하곤 혼비백산하였다.
 “맙소사! 무량수불······!”
 “약관의 서생이 아닌가. 엄청난 고수다.”
 경악하던 아미파의 제자들은 일순 분노의 표정을 지었다.
 그들은 금방이라도 백의서생을 요절낼 듯이 험악하였다.
 허나 그들보다 먼저 한 명의 홍의가사(紅衣袈裟)를 걸친 승인이 근엄한 신색으로 나섰다.
 그는 육 척(六尺)이 넘는 장대한 체구에 부리부리한 호안(虎眼)을 지니고 있었다.
 백의서생을 바라보는 그의 전신에서 엄청난 신위가 발산되었다.
 “무량수불······! 빈승은 현청(賢靑)이라 하오. 시주는 누군데 무슨 원한으로 이 같은 살상을 펼치는 것이오?”
 그의 음성은 잔잔하고 냉엄하였으나 격앙을 띠고 있었다.
 허나 백의서생은 여전히 냉막하게 한마디 말도 없었다.
 철저하게 상대를 안중에도 두지 않고 무시하는 듯한 태도가 아니고 무엇인가.
 홍의가사의 승인 현청의 송충이 같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시주는 왜 말이 없는가.”
 순간 백의서생은 말 대신에 천천히 우장(右掌)을 쳐들었다.
 놀랍게도 그의 우장이 붉게 달아오르며 장심(掌心)에 회색의 반점이 선명하게 나타나는 게 아닌가.
 현청이란 승인과 몇몇의 노승(老僧)들이 혼백이 달아나는 외침을 토했다.
 “오오······ 무량수불! 이럴 수가······!”
 “빙백혈혼장(氷魄血魂掌)이 나타나다니!”
 “악마의 마장(魔掌)이 다시 출현하다니······ 무량수불!”
 그들은 도무지 믿을 수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 빙백혈혼장(氷魄血魂掌)!
 공포의 마장으로 불리는 빙백혈마(氷魄血魔)의 독문장법(獨門掌法)이다.
 빙백혈마는 이미 이백 년 전에 이 악마의 장법으로 천하를 피로 씻은 적이 있었다.
 그의 비위를 건드리는 사람은 누구도 살아 남지 못하였다.
 허나 이백 년 전에 그는 홀연 신비스럽게 무림에서 사라져 버렸다.
 헌데 백의서생의 우장에서 악마의 마장이 분명하게 재현되고 있었다.
 빙백혈혼장을 시전하려면 최소한 일 갑자(一甲子) 이상의 내공(內功)이 있어야 한다.
 아무리 보고 또 보아도 백의서생은 닭 모가지 하나 비틀 힘이 없는 백면서생이 아닌가.
 고오오―!
 백의서생의 우장은 완전히 얼음처럼 투명하게 변했다.
 동시에 그의 우장에서 돌발적으로 수백 갈래의 장영과 함께 엄청난 장풍(掌風)이 폭출되었다.
 장강의 노도마저 역류시킬 엄청난 장풍!
 현청은 대경실색하며 다급히 쌍장을 휘둘러 장풍을 맞받아쳤다.
 퍼퍼펑―!
 천지가 개벽하는 엄청난 폭음이 경내를 뒤흔들었다.
 “으악―!”
 참혹한 비명이 뒤를 잇고 현청은 실 끊어진 연처럼 무려 오 장을 날아가 거꾸로 곤두박질치고 말았다.
 그런 그의 가슴은 피박살이 나서 즉사하고 말았다.
 “무량수불······! 현청 사형(師兄)께서 당하다니······!”
 “현청이 죽다니······?”
 아미파의 제자들은 혼백단절한 채 할말을 잃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현청대사는 아미파의 칠대제자 중 네 번째 항렬에서 가장 무공이 고강한 고수였던 것이다.
 특히 그의 독문장법인 불귀파혼장(不歸破魂掌)은 패도적인 장법으로 강호에 소문이 자자하였다.
 경내에는 잠시 죽음 같은 공포의 침묵이 깔렸다.
 백의서생은 너무나 오만하게 흐릿한 냉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는 현청대사와의 격돌에서 단지 가볍게 어깨만 움찔하였을 뿐이었다.
 아미파의 제자들은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허나 아미파의 제자들은 이미 수백 명이나 경내로 몰려들어 있었다.
 숫자의 우위는 쉽게 만용(蠻勇)을 부리게 만든다.
 “저놈을 죽이자. 저놈이 공명 사형을 죽이고 현청 사백(師伯)까지 죽였다.”
 “놈은 겨우 하나다. 볼 것도 없이 합공으로 원수를 갚자.”
 누군가가 사납게 분노의 외침을 토하자 수백 명의 제자들은 성난 야수로 변하고 말았다.
 카카캉― 캉!
 수십 자루의 방편산(龐鞭珊)과 계도들이 무자비하게 백의서생을 덮쳐들었다.
 단번에 산악(山嶽)이라도 무너뜨릴 듯 엄청난 기세였다.
 허나 백의서생의 입가로는 냉랭한 살기가 칼날같이 번뜩이며 스쳐 갔다.
 “후후후······! 어리석은 땡추놈들!”
 동시에 그는 천천히 쌍장을 가슴에서 십자로 교차했다.
 그의 쌍장은 다시 얼음장같이 투명하게 변하였다.
 찰나 재차 누군가의 외침이 혼을 토하듯이 터져 나왔다.
 “위험하니 물러서라―! 빙백혈혼장이다.”
 허나 수십 명의 제자들은 이미 노한 파도같이 백의서생을 덮쳐들었고 백의서생의 쌍장은 태산을 밀치듯이 허공을 밀어치고 있었다.
 파우우― 웅!
 “아아······ 무량수불!”
 누군가의 입에서 혼백이 달아나는 경악성이 터져 나왔고 태산을 무너뜨릴 듯한 장풍이 수십 명의 승인들을 덮쳐 버렸다.
 콰우우― 웅!
 그것은 너무나 눈 깜짝할 사이의 일이었고, 처절한 단말마의 비명 소리가 사위를 공포의 도가니로 만들었다.
 “크― 악!”
 “으― 아― 악!”
 “으아악!”
 십여 명의 승인들은 복부가 파열된 채 낙엽같이 날아갔고 나머지 승인들도 피를 토하며 뒤로 나뒹굴었다.
 아미파의 경내는 순식간에 피의 아수라장으로 변하고 말았다.
 허나 과연 아미파의 제자들은 명문대파의 제자들답게 용감하고 강하였다.
 “무량수불······! 모두들 물러서지 말고 공격하라.”
 “적은 한 명이다. 아미파의 명예를 걸고 싸우자.”
 산악 같은 함성이 터지고 그들은 성난 사자같이 백의서생을 공격했다.
 이제 타협의 여지는 사라지고 말았다.
 죽지 않으려면 죽여야 한다.
 카카카― 캉! 번― 쩍!
 도검이 난비하며 휘몰아치는 장력이 가히 살인적이다.
 허나 백의서생은 너무나 오만하게 버티고 선 채 연속으로 빙백혈혼장을 시전했다.
 퍼퍼펑― 펑!
 폭죽이 터지듯이 경천동지할 굉음이 연이어 터지고 아미파의 용감한 제자들은 속수무책으로 피를 뿌리며 죽어갔다.
 “크아악―!”
 “으― 악!”
 싸움이란 용기와 패기만으로 이길 수는 없는 것이다.
 문약해 보이기만 한 백의공자는 강하여도 너무 강하였다.
 삽시간에 경내는 아비규환(阿鼻叫喚)의 참살장으로 변하고 말았다.
 헌데 이때다.
 “모두들 멈추어랏!”
 범종(梵鍾)이 울리는 듯한 사자후(獅子吼)가 쩌렁쩌렁하게 경내를 울렸다.
 순간 목숨을 생각지 않고 죽기 살기로 덤벼들던 아미파의 제자들은 밀물같이 뒤로 밀려나며 일제히 포권을 취했다.
 “제자들이 학청(鶴靑) 사부님을 배알합니다.”
 “사부님을 뵙습니다.”
 그들의 사이로 회의가사(灰衣袈裟)를 걸친 오순 가량의 노승이 걸어나왔다.
 붉은 대춧빛의 얼굴에 백염(白髥)이 보기 좋게 가슴을 덮은 노승의 표정은 침중하기 그지없었다.
 그는 피를 뿌리며 사방에 쓰러진 아미파의 제자들을 돌아보며 표정이 돌같이 굳어졌다.
 “무량수불······! 참으로 잔혹한 업보로다. 시주는 무슨 원한(怨恨)이 있기에 이토록 잔인한 살상을 펼치는 것이오?”
 그의 창노한 음성에는 불 같은 분노가 담겨 있어 상대를 위압하였다.
 백의서생은 비웃는 듯한 냉소를 머금으며 한마디 대꾸도 없었다.
 노승의 백미(白眉)가 부르르 떨렸다.
 “시주는 노납의 말이 들리지 않는가!”
 벼락같은 노승의 외침에 백의서생의 눈가로 싸늘한 살기가 스쳐 갔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입에서 뼈를 저미는 냉혹한 음성이 살벌하게 흘러 나왔다.
 “나는 다만 아미파의 장문인 천불선사(天佛禪師)를 만나러 왔다.”
 “무엇이······ 장문 사부님을······!”
 학청대사의 안색이 급변했다.
 “시주는 누군데 무슨 이유로 장문인을 만나려 하시오?”
 “후후후······! 이유는 그대도 알 것이 아닌가.”
 “무엇이······ 무량수불······!”
 학청대사는 경악하며 연신 불호를 토해냈다.
 그런 그의 얼굴은 창백하게 변하고 있었다.
 “하면 시주가 오 일 전에 본 파에 핏빛의 목관(木棺)을 보낸 인물이오?”
 “후후······! 역시 학청대사는 알고 있었군.”
 “무량수불······ 무량수불······!”
 학청대사는 부르르 전신을 떨었고 좌우로 늘어선 아미파의 제자들은 무참하게 안색이 일그러졌다.
 정확히 오 일 전이던가?
 아미파의 산문 앞에 하나의 핏빛 목관이 놓여 있었고, 아미파의 제자들은 그것이 어떤 미치광이의 소행이라고 믿고 있었다.
 헌데 그것은 결코 미치광이의 장난이 아니었다.
 엄청난 혈풍(血風)과 죽음을 예고하는 무서운 도전이었다. 경악하던 아미파의 제자들은 점차 분노의 빛을 띠었다.
 아무리 피에 미친 살인광마(殺人狂魔)라 하여도 아미파를 단신으로 찾아와서 감히 장문인을 죽이겠다니!
 이것은 누가 보아도 아미파를 피로 씻어내겠다는 무서운 도전이고 만행이었다.
 학청대사의 가슴에도 불 같은 분노가 치밀어 올랐지만 그는 잘도 견디고 있었다.
 “시주는 본 파와 무슨 원한이 있소?”
 말을 하지 않는 백의서생의 눈에서 엄청난 살광이 이글거렸다.
 백의서생의 눈빛을 대하는 학청대사는 간담이 서늘하게 오그라드는 기분이다.
 ‘무량수불······! 저주와 원한으로 뭉쳐진 무서운 눈빛이 아닌가. 본 파는 오늘 한바탕의 난리를 면키 어렵겠구나.’
 학청대사는 어눌하게 짓눌린 음성으로 말했다.
 “시주가 본 파와 장문인에게 무슨 원한이 있는지 모르나 이토록 끔찍한 만행을 펼치고도 무사하리라 생각했는가.”
 “후후후······ 그것은 그대가 걱정할 일이 아니다. 어서 장문인 천불선사를 나오게 하라.”
 학청대사는 완강하게 말했다.
 “무량수불······! 시주가 먼저 장문인을 만나겠다는 이유를 말하기 전에는 절대로 아니되오.”
 찰나 백의서생의 눈에서 다시 화염 같은 살광이 폭사되었다.
 “모조리 죽겠다는 말이군. 원대로 해주마.”
 칼날 같은 냉갈이 토해지고 그의 우장이 벼락같이 허공을 휘감아 학청대사를 후려쳤다.
 콰우우― 우!
 광풍노도(狂風怒濤) 같은 핏빛 장력이 무섭게 회오리치며 학청대사를 휘감아 갔다.
 “시주는 너무 방자하고 오만하구려.”
 학청대사는 장중하게 소리치며 백의서생의 장력을 맞받아쳤다.
 콰쾅― 쾅!
 천지가 개벽하는 굉음이 터지고 사위로 거대한 먼지기둥이 솟구쳐 올랐으며, 참혹한 비명과 함께 학청대사는 피를 뿌리며 나뒹굴었다.
 “크아악······! 너는 너무 잔인······ 크윽!”
 신형을 가누려고 혼신을 다하던 학청대사는 회의와 불신의 눈을 부릅뜬 채 죽고 말았다.
 아미파의 제자들은 이 엄청난 사단에 혼비백산하고 말았다.
 도대체 학청대사가 누구이던가.
 그는 파천학무장(破天鶴舞掌)으로 무적을 자랑하던 고수이며 아미파의 칠대제자 중 두 번째 항렬의 고승이었다.
 헌데 그런 그가 독문장법 파천학무장은 펼쳐보지도 못하고 백의서생의 일장에 즉사하고 말았다.
 좌우로 늘어선 아미파의 제자들은 지금 사신지존(死神至尊)을 보고 있었다.
 이제 누구도 함부로 덤비지 못한 채 부들부들 전신을 떨고 있었다.
 백의서생은 칼날 같은 살기를 뿌리며 오만하게 연무장(鍊武場)으로 향했다.
 연무장 입구에서 백의서생은 미간을 찡그리며 멈춰 섰다.
 놀랍게도 연무장에는 이미 천여 명에 달하는 아미파의 제자들이 도검창장(刀劍槍杖)을 비껴 세운 채 험악하게 포진해 있었다.
 그들은 삼대(三隊)로 나뉘어져 품자형(品字型)을 이룬 채 일전불사(一戰不辭)의 표정들이다.
 중앙에 회색 승포를 걸친 이백 명의 승인들은 계율원(戒律院)의 제자들로 아미파에서도 무공이 가장 고강하였다.
 이때 연무장의 맞은편 대불전(大佛殿)에서 일단의 노승들이 모습을 나타내고 있었다.
 하나같이 황의가사(黃衣袈裟)를 걸치고 구름 같은 백염이 가슴을 덮고 있는 선풍도골(仙風道骨)의 고승들이다.
 그들의 중앙에는 한 명의 백미고승(白眉高僧)이 고고한 기품을 전신으로 발산하고 있었다.
 그들이 누구던가?
 아미파의 오대장로(五大長老)와 장문인 천불선사가 아니고 누구이랴!
 이제 아미파의 모든 위용이 드러난 것이다.
 아미파의 제자들은 숨을 죽인 채 긴장하고 있었다.
 그들의 표정에는 아미파와 장문인을 위해선 목숨까지 버린다는 비장감이 서릿발처럼 서려 있었다.
 “무량수불······!”
 낮은 불호가 울리며 백의서생의 앞으로 호안이 번뜩이는 고승이 다가섰다.
 “빈승은 계율원의 덕법(德法)이라 하오. 장문인의 명으로 시주가 본 파를 방문한 이유를 묻고 싶소.”
 덕법대사의 정중한 포권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이유는 이것이다.”
 백의서생의 날카로운 외침이 터지고 우장이 냅다 덕법대사의 가슴을 후려쳐 버렸다.
 “크아악―!”
 미처 피할 겨를도 없이 덕법대사는 가슴이 짓이겨져 피를 토하며 즉사했다.
 이 엄청난 광경에 아미파의 제자들은 혼백단절하고 말았다.
 “후후후······! 묻지도 말고 나를 막지도 말아라! 막는 자는 죽는다.”
 광오하고 냉혹하기 그지없는 살음이 사위를 공포의 도가니로 만들었다.
 백의서생은 한 덩이 얼음조각처럼 냉막하게 대불전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진정 잔혹하고 무엄한 흉수(凶手)로다. 멈추지 못할까!”
 순간 천둥 벼락 같은 사자후가 터지며 홍의가사의 고승이 백의서생을 막아 섰다.
 “감히 이곳이 어디라고 천둥벌거숭이같이 날뛰며 피를 뿌리느냐?”
 장대한 체구에 어깨가 딱 벌어진 고승은 호안을 부라리며 백의서생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았다.
 그의 손에 들린 방천화극(尨天火戟)이 번쩍 허공으로 쳐들렸다.
 찰나 한 줄기 창노하고 위압적인 음성이 그의 행동을 가로막았다.
 “학불(鶴佛)은 화극을 거두고 물러서라!”
 외침을 토한 인물은 오대장로 중 한 명이었다.
 학불대사(鶴佛大師)라 불린 홍의가사의 고승은 칠대제자 중 무공이 가장 고강하고 성격이 불 같은 인물이다.
 그의 방천화극은 믿을 수 없는 거력을 발산하고 화염 같은 강기를 뿌린다고 전해진다.
 허나 그는 거친 숨을 내쉬며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후후후······! 불 같은 성격은 신의(信義)를 중시하나 장수(長壽)에는 지장이 있는 법이지.”
 백의서생은 냉막하게 냉소를 날리며 장문인의 앞으로 나섰다.
 순간 천불선사의 좌우에 시립한 장로들이 벼락같이 외쳤다.
 “시주는 멈춰 서서 용건을 먼저 말하시오.”
 터질 듯한 긴장감이 사위를 폭발 직전으로 몰고 갔다.
 백의서생의 입가로 흐르던 냉소가 칼날같이 얼어붙는다.
 그는 말없이 천천히 우장을 천불선사의 면전으로 쳐들었다.
 붉게 달아오른 장심에는 백색의 반점이 투명하게 드러나 있었다.
 오대장로들의 입에서 폭풍 같은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허억, 저것은 빙백혈혼장······!”
 “무량수불······! 빙백혈마의 독문마장이 나타나다니······?”
 그들의 눈빛은 공포로 물들었고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다.
 천불선사의 우측에 시립한 운백장로(雲帛長老)가 불신의 음성을 토해냈다.
 “무량수불······! 시주가 빙백혈마의 빙백혈혼장을 시전하다니 믿을 수가 없구려.”
 백의서생은 다시 냉랭하게 소리쳤다.
 “나는 장로들과는 볼일이 없으니 물러서시오.”
 허나 운백장로는 부르르 전신을 떨면서도 의연하게 쌍장을 가슴에 교차했다.
 “노납이 시주의 빙백혈혼장을 받아보리다.”
 “후후후······! 스스로 자초한 죽음이다.”
 백의서생은 쳐들었던 우장을 벼락같이 뻗어 쳤다.
 운백장로도 지지 않고 쌍장을 신랄하게 휘감아 후려냈다.
 “아미매화한광장(峨嵋梅花寒光掌)―!”
 사위를 무섭게 뒤흔드는 폭갈이 터지며 두 줄기 장력이 직격했다.
 콰쾅― 쾅!
 태산(泰山)을 무너뜨리는 폭음이 터져 나왔고 운백장로는 피화살을 토하며 뒤로 주르륵 밀려났다.
 “우욱······!”
 아랫배를 움켜잡고 연신 휘청거리는 그의 안색은 시체같이 창백했고 입에서는 검붉은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허나 백의서생의 손속은 독랄하게도 멈추지 않고 있었다.
 파파팍―!
 운백장로가 회의와 불신의 표정으로 간신히 신형을 가누는 순간, 백의서생의 손에서 두 가닥 지강(指剛)이 무섭게 폭사되어 운백장로의 거관혈(巨關穴)을 무자비하게 파괴해 버렸다.
 “크아악―!”
 참혹한 비명을 남긴 채 운백장로는 피를 토하며 앞으로 고꾸라져 버렸다.
 순간 연무장에 포진한 천여 명의 아미파 제자들은 혼비백산하며 백의서생의 잔인한 무공에 치를 떨었다.
 분노를 참지 못한 연백장로(淵伯長老)가 분기탱천하여 소리쳤다.
 “네놈은 정말 잔인하기 그지없구나. 노납이 목숨을 걸고 네놈을 훈계하리라.”
 외침과 동시에 그는 비호(飛虎)같이 몸을 날리며 계도를 사납게 휘둘렀다.
 이미 살기를 품은 계도는 일말의 인정도 담겨 있지 않아 무섭도록 패도적이다.
 파츳츳― 츳!
 연백장로의 계도는 허공을 산산조각으로 베어낸 후 백의서생의 사혈(死穴)을 독사의 혓바닥같이 노리며 파고들었다.
 찰나 백의서생은 슬쩍 뒤로 미끄러져 나가며 허리결의 고검을 가볍게 뽑아 들었다.
 차― 앙!
 검명(劍鳴)이 울리고 눈부신 검신이 찬란한 검기를 무지개같이 뿌려냈다.
 “오오······ 무량수불! 마검탈혼비(魔劍奪魂匕)!”
 “악마의 검(劍) 마검탈혼비가 나타나다니······!”
 순간 장로들의 망연자실한 외침에 천불선사도 혼백단절의 표정을 지었다.
 허나 사납게 계도를 휘두르던 연백장로의 눈에서는 화염 같은 불똥이 튀었다.
 “네놈은 진정 사악한 악마의 자식이구나. 삼십 년 전에 살해된 마두의 검을 지니고 있다니······!”
 어찌나 분노하고 경악하였던지 그는 말조차 잇지 못하였다.
 백의서생은 너무나 오만하고 냉엄하게 냉소를 날렸다.
 “후후후······! 그대는 알 것도 없으니 살고 싶다면 물러서라!”
 “망할 놈의 자식! 노납은 오늘 살계(殺戒)를 범하고 평생을 면벽참선(面壁參禪)으로 죄를 뉘우치리라.”
 연백장로는 무자비한 욕설을 토하며 계도를 사정없이 휘둘렀다.
 파츳츳― 츳!
 심장을 난자할 듯한 도기가 부챗살같이 사위로 짓쳐 나갔고, 백의서생은 냉막하게 마검탈혼비를 내리그었다.
 번― 쩍! 카앙― 캉!
 모골이 송연한 금속성이 울리고 사방으로 검기도강(劍氣刀剛)이 파도처럼 부서져 나갔다.
 연백장로는 등골에 식은땀이 흐르며 혼신을 다해 버티고 있었다.
 허나 일검일도(一劍一刀)의 격돌이 있은 후 백의서생의 마검탈혼비는 이미 연백장로의 등줄기를 내리긋고 있었다.
 슈파팟―!
 진정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쾌검패살(快劍覇殺)의 수법이 아니고 무엇이랴.
 “허억······ 윽······!”
 당혹한 신음과 짧은 비명이 동시에 터지며 연백장로는 주르륵 뒤로 밀려났다.
 그런 그의 황의가사는 이미 시뻘건 선혈로 물들고 있었으며 등에는 일검의 상처가 섬뜩하게 그어져 있었다.
 찰나 천불선사의 웅후한 내력이 담긴 외침이 터져 나왔다.
 “시주는 그만 멈추시오!”
 좌중의 시선이 일제히 천불선사를 향했다.
 일대의 고승인 천불선사의 눈에도 은은히 분노의 빛이 스치고 있었다.
 ― 아미파 삼십이대(三十二代) 장문인 천불선사!
 칠순이 넘어선 그의 불력(佛力)은 이미 초인지경(超人之境)에 달했으며, 심후한 내력과 고절막측한 무공은 강호무적(江湖無敵)으로 자타가 공인하고 있었다.
 그의 심오한 불심(佛心)은 소림사의 장문인과 쌍벽을 이루고 있었다.
 허나 그런 그도 이 순간은 분노의 빛을 삭이지 못하고 있었다.
 “무량수불······! 시주는 노납에게 볼일이 있는 듯하니 노납에게 말해 보시오.”
 분노를 감춘 음성은 위압적인 냉기를 발산하고 있었다.
 천불선사를 바라보는 백의서생의 눈가로 냉혹한 살기가 파동치고 있었다.
 잠시 동안 무거운 침묵이 숨막히게 흘러갔다.
 이윽고 백의서생은 얼음장같이 냉혹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후후후······! 천불선사, 그대는 십년 전 무영산장(武英山莊)의 혈겁(血劫)을 기억하느냐?”
 찰나 천불선사는 대경실색하며 안색이 백지장같이 창백하게 변해 버렸다.
 “무······ 무엇이? 무영산장이라고······ 무량수불······!”
 하늘이 무너져도 흔들리지 않을 것 같던 그의 신형이 사시나무처럼 와르르 떨렸다.
 
 
 2장 십 일(十日)의 공포천하(恐怖天下)
 
 
 천불선사의 얼굴은 무참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무량수불······! 진정 시주가 무영산장의······!”
 백의서생이 마검탈혼비를 겨누며 싸늘하게 말을 잘랐다.
 “천불선사, 더 이상의 말이 무슨 소용인가. 이미 그대가 들어갈 관을 보낸 지 오래다.”
 백의서생의 음성은 칼날을 베어문 듯이 처절하고 한스러웠다.
 “무량수불······! 모두가 업보로다.”
 천불선사는 침통한 표정으로 세우가 쏟아지는 암천을 바라본다.
 “천불선사, 무엇이 두려운가.”
 백의서생은 이제 조롱하듯이 빈정거렸다.
 암천을 바라보던 천불선사는 결심이라도 굳힌 듯이 처연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무량수불······! 시주의 선친(先親)은 결코 나쁜 사람이 아니었소. 다만 천하독패(天下獨覇)의 야망이······.”
 “닥치시오. 이제와서 무슨 구구한 변명을 하려는 것이오.”
 천불선사의 표정은 더욱 참담하게 일그러졌고 백의서생의 눈빛에는 무시무시한 살광이 튀었다.
 “억울하게 죽은 부친의 무덤 앞에 너희들의 목을 바치기 위해 지금까지 복수의 칼을 갈아 왔다.”
 “무량수불······!”
 “순순히 앞으로 나서서 목을 바쳐라.”
 “시주는 모르고 있소. 부친이 죽은 원인을 시주는 정확히 알아야 하오.”
 “닥쳐랏! 변명으로 더러워진 혓바닥부터 잘라 버리겠다.”
 엄청난 폭갈과 동시에 백의서생의 마검탈혼비가 사정없이 천불선사의 목을 베어 갔다.
 “무량수불······! 이 업보를 어찌할지······.”
 독랄하게 새파란 검기가 사위를 휘감는 순간, 천불선사는 참담한 불호를 토하며 무허신법(無虛身法)을 펼쳐 새파란 검기를 피해냈다.
 백의서생의 눈가로 언뜻 놀라움의 빛이 스쳐 갔다.
 ‘과연 일파의 장문인다운 신법이다.’
 백의서생은 감히 경시치 못하고 재차 마검탈혼비를 난비시켰다.
 “혈폭사혼류(血爆死魂流)―!”
 엄청난 외침이 터지는 순간, 수백 줄기의 핏빛 검기가 온통 천불선사의 전신을 휘감아 버렸다.
 파우우― 우우!
 “무량수불······!”
 불호를 토하는 천불선사의 눈가로 대경의 빛이 섬전같이 스쳐 갔다.
 마검탈혼비의 혈강은 모조리 천불선사의 사혈을 노리며 짓쳐들었다.
 순간 아미파의 제자들과 장로들은 혼비백산을 금치 못하였다.
 “아아······ 무량수불······! 장문인, 위험하오!”
 헌데 천불선사는 살벌하게 짓쳐드는 혈강을 피할 생각도 하지 않고 망연히 서 있는 게 아닌가.
 스파팟―!
 핏빛의 검기는 사정없이 천불선사의 복부를 그어 버렸다.
 “으윽······!”
 천불선사는 참담한 비명을 토하며 복부를 움켜잡고 휘청 뒤로 물러섰다.
 복부를 감싼 그의 손에서 피가 물처럼 줄줄 흘렀다.
 순간 백의서생은 마검탈혼비를 거두어들이며 의혹의 빛을 띠고 다그쳤다.
 “천불선사, 왜 피하지 않았느냐?”
 천불선사는 고통으로 일그러진 신음을 토했다.
 “으윽······! 시주, 다시 한 번 무영산장의 혈겁을 냉정하게 생각하기 바라네. 노납은 그때의 일을 심히 자책하고 있었······ 으윽······!”
 말을 잇지 못한 채 천불선사는 복부를 움켜잡은 채 앞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찰나 아미파의 제자들이 분노하여 함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저놈이 장문인을 살해했다. 저놈을 죽여라―!”
 “와아! 저놈의 악마를 죽여서 장문인의 원수를 갚자.”
 천여 명의 제자들이 일시에 내지르는 함성은 지축을 흔드는 무서운 공포였다.
 “무량수불······! 부처님도 오늘의 살겁은 용서하리라. 아미파의 제자들이여! 저놈을 죽이자.”
 “죽여라―!”
 장로들의 분노도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파팟―!
 헌데 그 순간 백의서생은 비쾌무비하게 신형을 솟구치며 낭랑하게 소리치는 게 아닌가.
 “후후후······ 어리석은 자들아! 천불선사는 마땅히 죄를 알고 죽었다. 그런데 무슨 놈의 복수를 한다는 것이냐?”
 놀랍게도 백의서생은 삼십 장을 까마득히 솟구쳐 올라 있었다.
 그는 비룡번신(飛龍飜身)의 수법으로 빙그르 신형을 회전하여 허공에 우뚝 멈춰 서 버렸다.
 “천불선사가 뉘우치고 죽었으니 아미파에 더 이상의 혈채를 요구하진 않겠다. 천불선사를 양지바른 곳에 장사지내기 바란다.”
 말이 끝나자마자 백의서생은 해학승운(海鶴昇雲)과 해연약파(海燕掠波)의 절학을 연이어 시전하며 전광석화같이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참으로 귀신이 곡할 신기절학(神技絶學)이 아닐 수 없었다.
 장로들과 아미의 제자들은 망연자실하고 말았다.
 “무량수불······! 엄청난 고수다.”
 “무림의 앞날에 무서운 저주가 내리고 있음이오.”
 “무량수불······! 저자의 살겁(殺劫)을 누가 막겠소.”
 그들은 장문인이 죽었다는 사실조차 망각하고 있었다.
 일대의 고승인 천불선사는 허무하게 눈을 감지도 못하고 죽어 있었다.
 감지 못한 그의 눈에는 무서운 피의 공포가 그림자를 내리고 있었다.
 
 ***
 
 십 일의 공포천하(恐怖天下)―!
 이는 무엇을 이르는 말인가?
 삼척동자도 능히 알고 있는 당금 천하를 이르는 말이다.
 ― 사천성(四川省)의 삼대문파(三大門派)가 참화를 당하였다.
 ― 아미파를 위시한 청성파와 공동파가 장문인 이하 백여 명의 제자들이 무참히 죽임을 당하였다.
 천하무림은 단번에 발칵 뒤집어지고 말았다.
 단 십 일 만에 벌어진 믿을 수 없는 참화(慘禍)였다.
 ― 흉수(凶手)는 백의서생이다!
 ― 문약하고 냉막한 백의서생은 이백 년 전에 실종되었던 빙백혈마의 빙백혈혼장을 펼쳤고,
 ― 삼십 년 전에 구파일방(九派一幇)의 공적으로 죽임을 당한 혈천마마제(血天魔魔帝)의 마검탈혼비를 지니고 있었다.
 무림천하는 혼돈의 와중 속으로 침몰하고 말았으니······.
 삼산오악이며 사해팔황이 경천동지하고 말았다.
 도대체 백의서생은 누구인가?
 누군데 빙백혈마의 독문장법을 사용하고 혈천마마제의 마검을 지니고 있단 말인가?
 그는 왜 천하를 향해 피 젖은 검을 뽑았는가?
 의문과 의문이 꼬리를 물고 무림천하는 공포 속으로 빠져들었다.
 십 일(十日)······!
 단 십 일 만의 공포천하였다.
 
 ***
 
 여기는 파양호(播陽湖).
 중원오대호(中原五大湖) 중 호남(湖南)의 동정호(洞庭湖)와 더불어 쌍벽을 이루는 아름다운 호수다.
 호반(湖畔)은 흡사 푸른 비단을 펼친 듯 명경지수(明鏡止水)이고, 주위의 경관은 요산요수(樂山樂水)를 이루고 있어 전설의 무릉도화경을 연상케 하였다.
 바로 그곳에 파양호의 풍경과 절묘하게 어울리는 객점(客店)이 있었다.
 ― 호반객잔(湖畔客棧)!
 한 폭의 그림같이 아름답고 호화스러운 객점이다.
 객점 안은 풍류객(風流客)과 많은 사람들로 몹시 붐비고 있었다.
 객점의 이층 창가.
 파양호의 명경 같은 호반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이다.
 호반 위로 형형색색의 유람선(遊覽船)이 풍류객을 태운 채 미끄러지고 있었다.
 헌데 창가의 탁자에는 한 명의 백의서생이 홀로 자음자작하고 있는 게 아닌가.
 고독한 냉기가 전신에 아지랑이같이 어려 있고 눈빛은 무심히 우수에 젖어 있었다.
 백지장같이 창백한 안색에 냉막하기 그지없는 표정이다.
 그는 술잔을 든 채 파양호의 호반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누구도 함부로 말을 걸기 어려운 차가움과 고독이 백의서생의 문약함을 가려 주고 있었다.
 백의서생은 천천히 입으로 술잔을 가져갔다.
 순간 왁자한 소리가 들리며 다섯 명의 청의대한(靑衣大漢)들이 이층으로 올라서는 게 아닌가.
 하나같이 구레나룻이 위맹하게 귀밑까지 뻗었으며 가슴에는 금색의 수실로 비상하는 독수리가 새겨져 있었는데, 등에는 비스듬히 귀두도(鬼頭刀)를 메고 있었다.
 그들은 이층을 한바퀴 둘러본 뒤 태연하게 빈자리에 앉았다.
 백의서생은 단지 그들을 힐끔 바라보았을 뿐 시선을 창가로 던지고 있었다.
 다섯 명의 장한들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양고기와 몇 동이의 술이 올라오자 몹시 배가 고팠는지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마파람에 게눈 감춘다는 말은 바로 그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탁자 위의 음식과 술은 눈 깜짝할 사이에 깨끗이 비워져 버렸다.
 문득 턱밑에 콩알만한 검은 점이 있는 대한이 입가를 쓱쓱 문지르며 입을 열었다.
 “자네들도 삼대문파의 혈겁에 대해서 들었겠지?”
 매부리코가 유난히 돋보이는 대한이 침통하게 말을 받았다.
 “그 일로 무림천하가 벌집을 쑤신 듯 발칵 뒤집히고 말았네.”
 “장문인과 백여 명의 제자들이 꼼짝없이 죽임을 당했다고 하더군.”
 갑자기 그들의 분위기가 숙연하게 변했다.
 그들은 스스로의 말에 긴장하고 있는 것 같았다.
 “놀라운 건 흉수가 약관도 되지 않은 백의 차림의 서생이라는군.”
 기골이 장대하고 어깨가 벌어진 대한이 신경질적으로 술잔을 기울였다.
 “삼대문파의 이야기만으론 믿을 수가 없는 일이지. 내 눈으로 직접 보기 전에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
 “맞는 말이네. 약관도 안 된 문약한 서생이 그런 엄청난 일을 저질렀다니 어떻게 믿을 수가 있겠는가.”
 “그런데 그 서생이 빙백혈마의 독문장법인 빙백혈혼장을 사용한다고 하던데 그게 사실인가.”
 순간 턱밑에 검은 점이 박인 장한이 손을 저으며 말을 막았다.
 “그만들 하지. 우리는 어차피 보주(堡主)의 명으로 서생을 찾아야 하지 않는가.”
 “점백(點魄)의 말이 맞네. 보주께서는 서생에게 상당한 관심이 있는 게 분명하네. 보주의 말에 의하면 서생은 필시 빙백혈마와 무관치 않을 거라고 하였네.”
 기골이 장대한 대한이 턱밑을 쓰윽 문지르며 쉰 듯한 음성으로 말했다.
 “만약 서생이 정말로 빙백혈마의 무공을 익혔다면 보통 일이 아니지.”
 순간 그들의 말소리가 멈추며 백의를 걸친 한 명의 미소년(美少年)이 이층으로 올라섰다.
 눈부시도록 흰 백의가 미소년의 영준한 용모와 절묘하게 어울리는데 어딘지 모르게 섬유하고 연약해 보인다.
 백의소년이 나타나자 장내의 시선은 일제히 그에게 향했다.
 백의소년은 모두들 자신을 바라보자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여인의 아미(峨眉)같이 섬세한 눈썹이며 성광(星光)같이 그윽한 눈빛과 단아한 이목구비는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감탄하게 만들었다.
 ‘무슨 사내가 계집보다 잘생겼지.’
 ‘계집들이 보면 몸살을 떨겠구나.’
 중인들은 내심으로 백의소년의 영준한 용모를 질투하고 있었다.
 허나 백의소년의 관옥 같은 얼굴에는 어딘지 모르게 차가운 우수가 깔려 있었으며, 용모에 어울리지 않는 한 자루 고검이 허리에 고색창연하게 매달려 있었다.
 백의소년은 태연하게 시선을 피해 빈 탁자에 앉았다.
 다섯 명의 청의대한들은 백의소년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의 위맹한 눈빛은 긴장감으로 굳어져 있었다.
 허나 백의소년은 그들의 눈빛조차 외면하고 있었다.
 자신의 용모로 인해 이미 숱한 눈길을 받아 본 듯 백의소년의 행동은 지극히 자연스럽기만 하다.
 백의소년을 살피던 청의대한들이 의미심장한 눈빛을 주고받는다.
 순간 무언의 약속이 이루어진 듯 기골이 장대한 장한이 자리를 차고 일어나 백의소년에게 다가섰다.
 그는 짐짓 정중하게 포권을 취하며 형형하게 백의소년을 바라보았다.
 “본인은 비응보(飛應堡)의 제자로 금사조(擒蛇爪)라고 하오. 형장의 고명은 어떻게 되는지 알고 싶소.”
 백의소년은 힐끔 금사조를 바라보았다.
 놀랍게도 그의 표정은 뉘 집 개가 짖느냐는 표정이다.
 금사조의 호안에 냉혹한 안광이 스쳐 갔다.
 “형장은 본인의 말이 들리지 않는가.”
 사뭇 도전적이고 불쾌한 기색이 역력한 말투였다.
 허나 백의소년은 일언반구도 하지 않고 노을이 지고 있는 호반으로 시선을 외면했다.
 금사조의 안색이 무참하게 일그러진다.
 ‘망할 놈의 새끼가 사람을 완전히 무시하는군.’
 금사조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고 금방 말투가 거칠어졌다.
 “빌어먹을······! 형장은 귀가 먹고 말까지 못하는 병신인가.”
 백의소년은 힐끔 시선을 돌리더니 차갑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어디서 들어온 개[犬]가 이리도 시끄럽게 짖는가.”
 “우왁······! 개라고······ 우라질 놈의 새끼! 넌 죽었어.”
 금사조는 불같이 분노하며 냅다 우장으로 백의소년의 얼굴을 후려쳐 버렸다.
 퍼퍽!
 끔찍한 격타음이 울리는 순간 누군가의 입에서 처절한 고통의 비명 소리가 흘러 나왔다.
 “으윽······!”
 헌데 진정 믿을 수 없는 사단이 눈앞에 펼쳐지고 말았다.
 사납게 백의소년의 면상을 후려쳤던 금사조의 우장이 백의소년의 백옥 같은 손아귀에 잡혀 있는 게 아닌가.
 금사조는 땀을 뻘뻘 흘리며 고통스러운 듯 몸을 비틀었다.
 “빌어먹을······!”
 “저놈이 금사조를······!”
 네 명의 청의대한이 대경하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들의 전신에서는 엄청난 살기가 서릿발같이 발산되었다.
 허나 누구도 쉽게 백의소년에게 덤벼들지는 못하였다.
 금사조는 백의소년의 손아귀에 잡힌 우장을 빼려고 고통스럽게 몸부림쳤다.
 “으윽······! 이게 무슨 빌어먹을 일······ 으윽······!”
 금사조는 순식간에 사색으로 변해 네 명의 청의대한들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는 도와달라는 애원의 빛이 가득 차 있었다.
 네 명의 청의대한들은 백의소년의 눈치를 슬금슬금 살피며 그에게 다가왔다.
 순간 백의소년의 입가로 얼음장같은 냉기가 피어올랐고 칼날을 토해내는 듯한 음성이 흘러 나왔다.
 “흥, 하룻강아지 같은 놈들! 본 공자가 네놈들의 버릇을 고쳐 주겠다.”
 말을 하면서 백의소년은 손아귀에 서서히 공력을 가했다.
 우두두― 둑!
 뼈마디가 으스러지는 소름 끼치는 괴음이 들렸고, 금사조의 고통스러운 비명 소리가 처절하게 울려 퍼졌다.
 “으아아― 악!”
 네 명의 청의대한들은 험악하게 귀두도를 뽑아 들며 소리쳤다.
 “손목을 놓아라! 어서 손목을 놓지 못할까!”
 허나 백의소년은 너무나 태연하고 냉랭하게 금사조의 손목을 밀어젖혔다.
 우두둑― 콰당탕!
 뼈마디가 박살나는 소리를 남긴 채 금사조는 볼썽사납게 뒤로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으윽······!”
 고통스러운 신음을 삼키며 우장을 감싸는 금사조의 얼굴이 흉측하게 일그러졌다.
 “금사조, 견딜 만한가.”
 턱밑에 점이 박인 대한이 빠르게 그를 부축하며 물었다.
 금사조는 일그러진 표정으로 속삭이듯이 말했다.
 “으윽······! 저놈은 보통 놈이 아니네. 어쩌면 삼대문파에서 혈겁을 자행한 그자인지도 모르네.”
 “무엇이······!”
 점박이 대한이 경악의 표정을 지으며 황급히 백의소년을 바라보았다.
 순간 매부리코가 돋보이는 대한이 귀두도를 흔들며 앞으로 나섰다.
 “형장이 누군지는 모르나 비응보를 안중에도 두지 않는다는 뜻인가?”
 “비응보······!”
 “그렇소. 우리는 비응보의 제자들이오.”
 백의소년이 미간을 찡그리자 매부리코의 대한은 자못 험악하게 말했다.
 허나 백의소년은 이내 가소롭다는 듯이 냉소를 토했다.
 “후후후······! 웃기는 짬뽕들이군. 비응보가 무슨 염라국(閻羅國)이라도 된다는 말이냐?”
 “웃······ 웃기는 짬뽕이라고······ 이놈―!”
 네 명의 대한들은 동시에 짐승이 울부짖는 듯한 외침을 토하며 분기탱천하였다.
 그들의 전신에는 분노의 살기가 파도치고 있었다.
 언제 한 번이라도 그들이 이런 모욕을 받은 적이 있었던가?
 매부리코의 대한은 성격이 급하다.
 성격이 급한 위인은 모욕과 수치에 약한 법이다.
 “이놈! 비응보의 명예를 걸고 네놈의 혓바닥을 자르고 말겠다.”
 파팟―!
 그는 쌍수를 갈고리처럼 구부려 번개같이 백의소년의 천령개를 찍어 갔다.
 분노만큼이나 무섭도록 신랄한 공세였다.
 “흥, 이것도 무공이라고 누구의 혓바닥을 자른다는 말이냐!”
 그의 갈고리 손이 백의소년의 천령개에 닿으려는 순간 백의소년은 냉랭하게 소리치며 빙그르 회전하더니 비호처럼 일권(一拳)을 매부리코의 옆구리에 쑤셔 박았다.
 퍽―!
 속살이 터지는 끔찍한 기음이 울리고, 분기탱천하여 기세 좋게 덮쳐들던 대한의 입에서 피를 토하는 비명 소리가 흘러 나왔다.
 “으악······!”
 그의 안색은 순식간에 창백하게 변한 채 옆구리를 움켜잡고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허나 그는 채 두 걸음도 걷기 전에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으윽! 내가 당하다니······ 이런 믿을 수 없는 일이······!”
 그의 입에선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후후후······! 혓바닥을 뽑지 않은 걸 다행으로 알아라.”
 백의소년은 너무나 태연하고 차갑게 말했다.
 찰나 다시 한 명의 대한이 귀두도를 사납게 쳐들며 벼락같이 소리쳤다.
 “네놈이 삼대문파의 장문인을 살해하고 제자들을 죽인 바로 그 흉수구나.”
 그는 분노의 살기를 발산하며 귀두도를 백의소년에게 겨누었다.
 “네 이놈! 어서 목을 빼고 이실직고하여라!”
 백의소년의 안색이 얼음장같이 냉혹하게 변했다.
 “후후후······! 간교한 세 치 혓바닥으로 죽음을 자초하는구나.”
 “크흐흐······! 누가 죽는지 두고 보자. 이놈을 죽이자!”
 대한의 외침에 나머지 대한들도 험악하게 귀두도를 휘둘렀다.
 슈파팟― 팟!
 각기 다른 삼 방에서 귀두도는 무시무시한 살기를 뿌리며 백의소년의 전신을 난자해 들었다.
 헌데도 백의소년의 입가에는 냉막한 냉소만이 짙게 배어 있었다.
 그는 세 자루 귀두도가 지척지간에 짓쳐들자 허리를 번개같이 뒤로 젖히더니 용수철같이 반탄되며 고검을 뽑아 들었다.
 차― 앙!
 모골이 송연한 검명이 전율스럽게 사위를 휘감았고 대한들의 귀두도는 아슬아슬하게 백의소년의 가슴 위로 스쳐가 버렸다.
 “후후후······! 겨우 그 정도로 시비를 걸어 멀쩡한 본 공자를 죽이겠다는 것이냐?”
 세 명의 대한들은 생사필도(生死必刀)의 초식이 무산되자 등골에 식은땀이 흐르는 공포를 느꼈다.
 ‘으으······ 처음 상대하는 무서운 고수다.’
 ‘상대를 잘못 골랐다. 이게 아닌데······.’
 그들은 귀두도를 겨눈 채 주춤주춤 뒷걸음질쳤다.
 백의소년은 이제 그들의 공포였고 사신지존이었다.
 “으으······! 우리를 어쩔 셈이냐?”
 청의대한들은 부르르 치를 떨었다.
 백의소년의 눈가에 칼날 같은 살기가 스쳐 갔다.
 “본 공자를 건드리는 자는 누구든지 죽는다.”
 살기가 물씬 풍기는 단호한 일갈이었다.
 세 명의 대한들은 삽시간에 사색으로 변했다.
 “으으······! 정말 우리를 죽인다면 후회하게 될 것이다.”
 “후후후······! 후회란 게 무엇인지 알려면 어쩔 수 없이 죽여야겠구나.”
 백의소년은 냉엄하게 고검을 허공에 쳐들었다.
 “멈추어랏―!”
 찰나 귀청을 찢는 엄청난 대갈이 객점을 쩌러렁 울리는 게 아닌가.
 동시에 두 명의 홍의인(紅衣人)이 신쾌하게 모습을 나타냈다.
 하나같이 호안에 태양혈(太陽穴)이 불끈불끈 치솟아 한눈에 일류고수임을 알 수 있었다.
 홍의인들의 호안에서는 형형한 안광이 무섭게 뿜어져 나왔다.
 우측의 홍의인은 기골이 장대한 초로의 노인이고 좌측의 노인은 깡마르고 왜소한 육순 가량의 노인이다.
 그들이 나타나자마자 사색이 되었던 대한들은 반색을 하며 포권을 취했다.
 “속하들이 청룡호법(靑龍護法)과 백호호법(白虎護法)을 배알합니다.”
 그들의 우렁찬 음성에는 이제 힘이 실려 있었다.
 두 명의 홍의인은 그들이 충분히 안심하고도 남을 인물이었으니······.
 그들은 바로 비응보의 사대호법(四大護法) 중 가장 위맹한 절정고수들이다.
 ― 남북철장(南北鐵掌) 고탁(高卓)과 풍마괴수(風魔怪手) 웅담(雄覃)!
 그것이 그들의 명호이다.
 그들의 명호는 이미 대강남북을 위진하며 소림사의 장로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었다.
 비응보에서 그들이 차지하는 위치는 막강하기만 하였다.
 청의대한들은 그들에게 귓속말로 무언가 소곤거리고 있었으며, 그들의 표정은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졌다.
 ‘음······! 비응보가 자랑하는 고수들까지 나타났군.’
 백의소년은 감히 경시치 못하고 천천히 고검을 허리에 꽂았다.
 순간 남북철장 고탁이 포권을 취하며 백의소년에게 말을 걸었다.
 “노부는 비응보의 청룡호법인 남북철장이오. 공자의 명호를 말해 줄 수 있겠소.”
 그의 말투는 정중하였으나 위압감이 은은하게 배어 있었다.
 헌데 백의소년은 냉랭하게 코방귀를 날리는 게 아닌가.
 “흥, 이제 늙고 살찐 개가 나타나서 왕왕거리는군.”
 풍마괴수의 안색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뭐야! 귀때기에 피도 안 마른 애송이놈이 누구에게 늙은 개라는 것이냐?”
 그는 당장이라도 백의소년을 요절낼 듯한 기세다.
 허나 남북철장은 그를 가로막으며 다시 물었다.
 “공자가 삼대문파에서 살겁을 자행한 흉수인가?”
 “후후······! 그렇다면 어쩔 테고 아니라면 어쩔 텐가.”
 긍정도 부정도 아닌 그 말은 완전히 빈정거림이었다.
 남북철장의 눈빛이 냉기로 굳어진다.
 ‘역시 흉수였군.’
 그는 단번에 백의소년이 흉수라고 믿었다.
 그의 안색이 살벌하게 일그러졌다.
 “공자가 진정 흉수라면 죄의 대가를 받아야 하오.”
 백의소년은 얼음장보다 냉혹한 냉갈을 토했다.
 “후후······! 누가 대가를 받는단 말이냐? 추악하게 늙은 개가 잘도 짖어대는구나.”
 “무엇이······! 그렇게 오만방자하다면 노부의 일장을 먼저 받아라!”
 남북철장의 인내심에도 한계가 있었다.
 그는 쌍장을 번쩍 쳐들어 맹렬하게 철사장(鐵沙掌)을 퍼부었다.
 백의소년은 느닷없는 공세에 흠칫하더니 벼락같이 우장을 들어 맞받아쳤다.
 콰쾅― 펑!
 객점이 송두리째 날아갈 굉음이 터지고 탁자가 박살나서 사방에 흩어졌다.
 동시에 남북철장과 백의소년은 똑같이 두 걸음씩 물러났다.
 백의소년의 얼굴에 경악의 빛이 번개처럼 스쳐 갔다.
 ‘음······! 놀랍군. 남북철장의 철사장이 소문보다 강하지 않은가.’
 허나 남북철장은 백의소년보다 두 배는 놀라는 표정이다.
 ‘이럴 수가······? 약관도 안 된 애송이가 이토록 내공이 고강하다니······ 잘못하다간 낭패를 당하겠다.’
 내심의 생각과는 달리 남북철장은 다시 쌍장을 쳐들며 소리쳤다.
 “노부의 독문절장인 혈류철사장(血流鐵沙掌)도 받아 보아라!”
 백의소년도 냉랭하게 소리쳤다.
 “흥, 혈류철사장이 아니라 그보다 더한 것도 걱정 없다. 덤벼라!”
 “겁을 상실한 애송이구나.”
 남북철장은 분기탱천하여 무섭게 쌍장을 밀어쳤다.
 혼신의 공력을 다한 혈류철사장이 시전된 것이다.
 콰우우― 우!
 광풍노도 같은 기세로 수십 줄기의 장강이 백의소년의 전신으로 휘감아 들었다.
 백의소년의 안색이 급변했다.
 ‘강하다. 잘못하면 당한다.’
 백의소년은 황급히 우장을 들어 수십 줄기의 장강을 맞받아쳤다.
 콰르르릉······ 콰쾅!
 천번지복할 폭음이 터지고 객점의 지붕이 통째로 날아가 버렸다.
 “으윽······!”
 자욱한 황진이 시야를 가리는 순간, 오장육부를 쥐어짜는 고통의 신음이 터지며 백의소년이 주르르 뒤로 밀려나 털썩 주저앉는 게 아닌가.
 그의 입에서 검붉은 선혈이 줄줄 흘러 나왔다.
 순간 세 걸음을 밀려나 간신히 신형을 가눈 남북철장이 섬칫한 냉소를 날렸다.
 “크흐흐······! 이제 하늘 높은 줄을 알겠느냐?”
 백의소년은 입 속의 피를 탁 뱉어내며 냉혹하게 소리쳤다.
 “닥쳐랏! 본 공자는 다만 늙은 개를 얕잡아보았을 뿐이다.”
 백의소년은 다시 울컥 선혈을 토해냈다.
 그런 그의 안색은 시체같이 창백하게 변해 있었고 전신이 와르르 떨리고 있었다.
 치명적인 내상을 입은 게 분명하였다.
 “크흐흐······! 어린놈이 그래도 주둥아리는 살아 있구나.”
 남북철장은 청의대한들을 돌아보며 냉엄하게 외쳤다.
 “속히 저자를 비응보로 압송하라.”
 “존명······!”
 청의대한들은 의기양양하게 포권을 취한 후 백의소년에게 성큼성큼 다가섰다.
 “잠깐만 멈추어 주실까?”
 헌데 그 순간 무심하고 냉막한 음성이 잔잔하게 그들의 행동을 제지하였다.
 ‘또 웬 놈이······?’
 남북철장과 풍마괴수는 동시에 고개를 돌리다가 흠칫하였다.
 ‘또 백의를 걸친 백의서생인가?’
 창가에 앉아 태연하게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백의서생을 발견한 것이다.
 백의서생은 마지막 한 잔의 술을 비운 후 너무나 태연하게 돌아서고 있었다.
 문약하기 이를 데 없는 모습의 백의서생은 바닥에 주저앉은 백의소년을 힐끔 바라보았다.
 백의소년은 고통을 참느라 이를 악물고 있었다.
 순간 남북철장이 백의서생에게 다가서며 포권을 취했다.
 “공자는 누구시오?”
 백의서생은 대답 대신에 피식 웃었다.
 순간 남북철장은 백의서생의 차가운 눈빛과 마주치며 자신도 모르게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으······ 이것은 살기(殺氣)다. 약관도 안 된 놈의 눈빛에 이런 엄청난 살기가 있다니······?’
 그는 본능적으로 긴장하며 다시 말했다.
 “공자는 공연히 비응보의 일에 나서지 마시오.”
 찰나 백의서생의 눈에서 섬전 같은 살광이 튀었다.
 “후후후······! 늙은 개라더니 혓바닥이 피를 부르는구나.”
 엄청나게 모욕적인 말이 아닌가.
 남북철장보다 청의대한들이 먼저 분노하며 소리쳤다.
 “망할 놈의 자식! 말버릇이 고약하구나.”
 “어디서 굴러먹던 개뼈다귀가 나타나서 지랄이야.”
 백의서생은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지옥(地獄)에서 왔다.”
 “무엇이? 미친놈! 지옥에는 너 같은 인간밖에 없느냐?”
 한 명의 청의대한이 무자비하게 귀두도를 휘두르며 백의서생을 덮쳐갔다.
 파파파― 팟!
 허나 백의서생은 가볍게 일지(一指)를 퉁겼고 한 줄기 붉은 광채가 벼락같이 청의대한의 이마를 관통하고 말았다.
 “크아악―!”
 기세 당당하게 덮쳐들던 청의대한은 뻥 뚫려져 피가 철철 흐르는 이마를 감싼 채 뒤로 벌렁 넘어지고 말았다.
 너무나 촌각지간의 일이었다.
 허나 남북철장의 입에서는 외마디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아앗······! 그것은 혈혼지강(血魂指剛)······!”
 남북철장과 풍마괴수는 가늘게 전신을 떨었다.
 그런 그들의 눈빛에는 한 줄기 두려움의 빛이 스쳐 갔다.
 “후후후······! 그래도 늙은 개가 안목이 대단하군.”
 백의서생은 조롱하듯이 냉랭하게 그들을 쏘아보았다.
 ‘으으······ 이럴 수가? 혈혼지강은 혈천마마제의 독문지공(獨門指功)이 아닌가. 그렇다면 이놈이 삼대문파를······?’
 그들은 일시에 간담이 철렁하는 기분이었다.
 허나 그들도 일파의 호법이고 산전수전(山戰水戰)을 다 거친 늙은 여우들이다.
 이내 그들은 내심을 숨기고 태연하게 물었다.
 “공자는 혈천마마제와 어떤 관계이오?”
 찰나 백의서생의 입에서 벼락치는 듯한 엄청난 폭갈이 터져 나왔다.
 “닥쳐랏! 그 더러운 입으로 감히 그분의 명호를 담다니 죽고 싶으냐!”
 남북철장의 안색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비록 혈천마마제의 혈혼지강에 당황하였으나 무공에 관한 그의 자존심은 오만할 정도였다.
 게다가 상대는 약관도 되지 않은 새파란 서생이다.
 “크흐흐······! 애송이놈! 역시 네놈은 혈천마마제와 연관이 있구나.”
 그의 말에 풍마괴수가 쇠북 치듯이 소리쳤다.
 “크크······! 혈천마마제는 무림의 공적으로 죽임을 당했다. 네놈은 그자와 무슨 관계인지 속히 말해라.”
 순간 백의서생의 눈에 지금까지 보지 못한 냉혹한 살기가 어렸다.
 “후후후······! 그분의 명호를 더럽히다니, 네놈들은 이제 죽는다.”
 “크크크······! 망할 놈의 새끼! 죽는 건 네놈이다.”
 풍마괴수는 험악한 욕설을 토하며 이미 자신의 절기인 혈풍수(血風手)를 시전하고 있었다.
 시뻘겋게 변한 그의 쌍장이 무시무시하게 백의서생의 가슴을 찔러 들었다.
 “후후후······! 큰소리치기에는 보잘것없는 손장난이다.”
 찰나 백의서생은 냉랭하게 코웃음을 날리며 우수를 신랄하게 구부려 가슴을 짓쳐드는 풍마괴수의 혈도를 찍어 버렸다.
 슈파팟―!
 그것은 누구도 상상치 못한 불가사의였다.
 “허억, 이게······ 아닌데.”
 풍마괴수는 혼비백산하며 급급히 신형을 솟구쳐 올렸다.
 “크아악―!”
 허나 풍마괴수는 가슴에서 시뻘건 피를 분수같이 뿜어내며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맙소사! 풍마괴수······!”
 “믿을 수가 없다. 백호호법이 단 일장에 당하다니······!”
 남북철장과 청의대한들은 망연자실하고 말았다.
 그들은 도무지 자신들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들뿐만 아니라 고통을 참고 있던 백의소년도 대경의 표정을 지었다.
 풍마괴수를 바라보는 남북철장의 얼굴에 분노와 원한의 빛이 겹겹이 서렸다.
 그는 천천히 우장을 들어올리며 살벌하게 소리쳤다.
 “풍마괴수의 원수를 갚겠다. 네놈을 찢어 죽이고 말겠다.”
 저주의 외침을 토하며 남북철장은 혼신을 다해 우장을 후려쳤다.
 “철사파혼장(鐵沙破魂掌)―!”
 객점 안은 아수라장으로 변해 버렸다.
 창문이 박살나서 날아가고 탁자며 의자들이 산산조각나서 흩어졌다.
 허나 그 와중에도 백의서생은 한 줄기 냉오한 냉소를 머금고 있었다.
 “후후······! 제법 쓸 만한 손장난이군.”
 백의서생은 태산을 쪼갤 듯이 쌍장을 종횡으로 후려쳤다.
 찰나 무자비한 장력을 퍼붓던 남북철장은 형용할 수 없는 두려움을 느꼈다.
 ‘허억······! 이건 너무 강하다.’
 이제와서 피할 수는 없었다.
 그는 혼신을 다해 다시 쌍장을 휘둘렀다.
 콰콰쾅― 쾅!
 경천동지할 폭음이 터지고 장력과 장력이 사방으로 부챗살같이 파산되었다.
 “크― 아― 악!”
 동시에 참혹한 비명을 남긴 채 남북철장은 가슴이 박살나서 창 밖으로 날아가 버렸다.
 그가 바닥에 나뒹구는 끔찍한 소음이 들렸다.
 살아 남은 몇 명의 청의대한들은 무서운 공포로 인해 전신이 와르르 떨렸다.
 ‘사신지존을 만났다.’
 그들은 죽음의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헌데 그런 그들을 바라보며 백의서생은 냅다 소리치는 게 아닌가.
 “살고 싶다면 꺼져라!”
 순간 청의대한들은 꼬랑지가 빠지게 창 밖으로 몸을 날렸다.
 누구에게나 목숨은 소중한 것이다.
 백의서생은 아직도 고통을 참고 있는 백의소년을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그리고 차갑게 신형을 돌려 아래층으로 향했다.
 객점의 주인은 꿈에서도 생각지 못한 엄청난 참변에 사색이 되어 와들와들 떨고 있었다.
 백의서생은 품속에서 한 덩이 은자를 꺼내 주인의 손에 쥐어 주었다.
 “이것으로 수리를 하도록 하시오.”
 사색이 되어 있던 주인의 안색이 활짝 펴지며 허리가 꺾어져라 고개를 숙였다.
 “고맙습니다, 공자님! 부디 만수무강하십시오.”
 “후후······! 고마운 말이오.”
 백의서생은 다시 신형을 돌렸다.
 “형장, 잠깐만 기다리시오.”
 찰나 백의소년이 황망히 달려오며 소리쳤다.
 “형장은 소생의 구명지은이니 은혜에 감사를 드리오.”
 “마음에 두지 마시오. 나는 단지 공자가 누명을 쓰는 게 싫었을 뿐이오.”
 백의서생의 말에 백의소년은 흠칫하더니 반문했다.
 “누명(陋名)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오?”
 “후후후······! 공자가 더 잘 알고 있을 게 아니오.”
 “도대체 형장은 누구시오?”
 백의서생은 천천히 돌아서며 냉막하게 말했다.
 “사한천(史寒天)······?”
 “사······ 한천······?”
 백의소년은 그 이름을 새기듯이 중얼거렸다.
 ― 신비의 백의서생 사한천(史寒天)!
 차가운 하늘이란 말이 아닌가?
 그 이름은 충격처럼 백의소년의 뇌리에 새겨져 버렸다.
 ‘사한천······! 정말 차갑고 고독한 이름이다. 저 사람이 삼대문파의 혈겁을 자행한 인물······! 그래, 틀림없다.’
 백의소년은 등을 돌린 사한천에게 외치듯이 말했다.
 “사 형(史兄), 소생은 세옥(世玉)이라 하오.”
 ― 백의소년 세옥(世玉)!
 허나 사한천은 냉담하기만 하다.
 아니, 사한천은 이미 빠르게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순간 세옥의 미간이 곱게 찌푸려졌다.
 ‘오만하고 냉정한 사람이군.’
 아마도 그의 자존심이 상하였으리라.
 그는 멀어지는 사한천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다시 중얼거렸다.
 “사한천! 정말 차가운 하늘인지 두고 보자.”
 그는 주삿빛 입술을 꼭 깨물었다.
 
 
 3장 남장여인(男裝女人)
 
 
 파양호의 북쪽에 위치한 금엽산(錦葉山).
 형형색색의 단풍이 천자만홍을 이루었던 금엽산에는 낙엽이 날리고 있었다.
 아름다운 꿈은 오래가지 않는 법이다.
 퇴색된 낙엽은 단풍(丹楓)의 아름다움을 잃어버리고 바람 따라 날리고 있었다.
 그래도 하늘은 청명하고, 햇살은 은가루같이 대지 위에 쏟아지고 있었다.
 낙엽이 뒹구는 산곡(山谷)을 따라 걷고 있는 백의서생이 있었다.
 스스로 차가운 하늘이라고 밝힌 사한천이다.
 산곡은 적막하리만큼 조용하였다.
 사한천은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걷고 있었다.
 주위의 경관을 구경하는 것도 아니었다.
 헌데 그때였다.
 “으― 아― 악!”
 우측의 수림(樹林)에서 소름 끼치게 처절무비한 비명이 들려오는 게 아닌가.
 사한천의 검미가 크게 꿈틀거렸다.
 동시에 그의 신형은 이미 우측의 수림으로 날아들고 있었다.
 낙엽이 발목까지 쌓인 원시림(原始林)이다.
 간간이 그의 귓전으로 신음 소리와 외침 소리가 들려왔다.
 사한천의 눈에 번갯불 같은 신광이 폭사되었다.
 시야가 트인 그곳은 놀랍게도 분지(盆地)였다.
 분지 위에는 십여 구의 시체들이 핏속에 나뒹굴고 있었다.
 끔찍하게도 하나같이 팔과 다리가 잘라졌고 머리에는 커다란 구멍이 뻥 뚫려져 있었다.
 ‘저들은 비응보의 제자들이 아닌가.’
 사한천은 가볍게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그의 뇌리에 번개같이 한 인물이 스치고 지나갔다.
 ― 비응보 보주 만조신응(萬鳥神應) 강윤발(康閏鉢)!
 그렇다!
 놀랍게도 만조신응 강윤발의 모습이 선명하게 스쳐 갔던 것이다.
 당금 천하에서 비응보는 가장 안정된 세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비응보주 만조신응은 당금 무림에서 열 손가락에 꼽히는 무적의 고수였다.
 또한 서장(西藏)의 라마승(喇麻僧)들을 물리치고 변방무림에 위명을 떨친 비응칠수검(飛應七帥劍)을 위시하여, 무적의 연수합공(連手合功)으로 강호를 위진한 파혼십이절사진(破魂十二絶死陣)은 비응보의 영명을 만천하에 떨치고 있었다.
 비응보는 은연중에 당금 천하의 막강세력으로 부상해 있었다.
 이제 그것을 부인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구파일방도 그들과 유대관계를 맺고 있다고 전해진다.
 사한천이 가볍게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재차 돌발적인 비명 소리가 처절하게 들려왔다.
 “으아악!”
 사한천은 빠르게 비명 소리가 들린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분지의 구석진 곳에 일단의 인영들이 보였다.
 육순 가량의 은삼노인(銀衫老人)이 손목이 잘라진 채 피를 흘리며 고목에 기대 있는 것도 보였다.
 은삼노인의 얼굴에는 공포와 고통의 빛이 참혹하게 일그러져 있었는데, 끔찍하게도 머리에서도 피가 철철 흐르고 있었다.
 헌데 그런 은삼노인의 면전에는 세 명의 홍의여인(紅衣女人)들이 도도하게 팔짱을 끼고 있었다.
 타는 듯이 붉은 홍의는 속이 훤하게 비치는 얇은 나삼이었다.
 그녀들은 피를 흘리고 고통스러워하는 은삼노인을 바라보며 야릇한 미소를 흘리고 있었다.
 그녀들의 앞에는 삼십 세 가량의 홍의미부(紅衣美婦)가 매화가 그려진 섭선(攝扇)을 들고 있었다.
 얇은 홍의나삼은 대리석같이 미끈하고 탄력 있는 그녀의 속살을 숨막히게 드러내고 있었다.
 그녀는 돌연 요악한 교소를 까르르 터뜨리며 흐드러지게 웃었다.
 “호호호······! 바보 같은 늙은이! 청조신필(靑鳥神筆), 이래도 본 궁에 굴복하지 않겠느냐?”
 표독하고 앙칼진 외침이었다.
 순간 피를 뒤집어쓴 듯한 은삼노인이 벼락같이 소리쳤다.
 “닥쳐랏! 요부(妖婦) 구미랑(九尾狼), 네년의 더러운 속임수에 누가 순순히 따를 줄 알았더냐?”
 그의 외침은 분노로 인해 몹시 격앙되어 있었다.
 청조신필은 한 자루 조관필(鳥貫筆)로 대강남북에 위명을 떨치는 인물이었다.
 기이한 새의 형상을 닮은 조관필은 한때 생사필(生死筆)로 불리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는 비응보의 주작호법(朱雀護法)으로 수석호법을 맡고 있었다.
 헌데 그의 입에서 피를 토하듯이 흘러 나온 요사한 명호 하나.
 ― 구미랑(九尾狼)!
 귀신이 아닌 사람에게 꼬리가 아홉 개 달렸다면 믿을 수가 있겠는가.
 꼬리가 아홉 개 달린 늑대 같은 여인.
 그것이 바로 구미랑이란 여인이다.
 그녀는 여인이란 사실밖에 알려진 게 없었으며 천(千)의 얼굴을 지녔다고 한다.
 누구도 그녀의 진면목(眞面目)은 물론 그녀의 신분내력을 알지 못한다.
 모든 것이 철저하게 신비에 가려진 유일한 여인이다.
 그리고 그녀는 음탕하고 사악하여 사내들의 정기(精氣)를 채양보음(採陽補陰)으로 흡취하여 아름다운 젊음을 유지하고 있었으니······.
 실제 그녀의 나이는 육순에 가까운 노파(老婆)였다.
 사내들의 정기를 흡취하였기에 그녀의 내공은 무림에서도 손꼽히고 있었다.
 청조신필의 분노한 외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는 둔부를 살랑이며 그에게 다가갔다.
 “호호호······! 청조신필, 너는 관을 보고도 눈물을 흘리지 않는 어리석은 늙은이로구나.”
 “흥, 요부! 감언이설(甘言利說)에 넘어갈 노부가 아니다.”
 “호호호······! 늙은이답지 않게 제법 기백이 당당하구나. 허나 이것은 스스로 자초한 운명이니 나를 원망하지 말아라.”
 사악하게 소리치며 구미랑은 무섭도록 신랄하게 섭선을 활짝 펼쳤다.
 촤라락―!
 섭선에서 열두 줄기 은빛 섬광이 전광석화같이 폭사되었다.
 “크아악―!”
 의연하게 버티던 청조신필은 처참하게 비명을 지르며 피를 뿌렸다.
 그의 두 다리는 무같이 잘려져 버렸고 머리는 참혹하게도 박살나 버렸다.
 실로 무서운 악마의 섭선이 아닌가.
 “호호호······! 어리석은 영감탱이! 항복하였으면 부귀영화(富貴榮華)를 누렸을 것이다.”
 구미랑은 다시 극사한 웃음을 토했다.
 이것을 유심히 바라보던 사한천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냉혹한 여인이다. 구미랑이라고······ 이름에 어울리는 악독한 살수였다.’
 그는 천천히 신형을 돌리려 하였다.
 헌데 그 순간 표독한 구미랑의 외침이 사한천의 걸음을 잡아챘다.
 “흥, 쥐새끼처럼 숨어 있는 놈은 누구냐?”
 동시에 그녀는 봉황전시(鳳凰展翅)의 신법으로 표표히 사한천의 면전에 내려섰다.
 사한천은 그녀를 외면한 채 다시 걸음을 옮겼다.
 순간 그녀의 칼날 같은 아미(蛾眉)가 파르르 떨렸다.
 “멈추지 못할까!”
 간담이 오싹할 냉갈이 앙칼지게 터져 나왔다.
 사한천은 그제서야 걸음을 멈추고 지극히 느릿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무심하고 고독하며 냉막한 표정이다.
 허나 사한천을 바라보는 구미랑의 눈에선 엄청난 섬광이 새파랗게 폭사되었다.
 그것은 말할 수 없는 충격의 눈빛이었다.
 사한천의 눈빛은 얼음장같이 투명하고 무심할 뿐이었다.
 구미랑은 슬그머니 사한천의 눈빛을 외면하며 까르르 웃었다.
 “호호호······! 제법 눈부시게 잘생긴 쥐새끼가 숨어 있었구나.”
 사한천의 미간이 미미하게 떨렸으나 그는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호호······! 공자는 설마 벙어린가요?”
 금방 그녀의 말투가 변했다.
 그런 그녀의 눈빛에는 이내 탐욕(貪慾)과 욕망의 빛이 번들거렸다.
 사한천은 일시 역겨움을 느꼈으나 꾹 눌러 참았다.
 그는 구미랑을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듯이 다시 걸음을 옮긴다.
 “너는 본 주의 말이 들리지 않느냐?”
 구미랑은 다시 수십 개의 칼날을 토해내듯이 표독하게 소리쳤다.
 “네 이놈! 건방진 애송이놈아! 멈추지 못할까!”
 헌데도 사한천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구미랑의 아미가 확 치켜 올라가며 무시무시한 살기가 피어났다.
 “망할 놈의 자식! 정말 죽고 싶어 환장을 하였구나.”
 촤라락―!
 그녀는 사납게 수중의 섭선을 휘둘렀다.
 소름 끼치는 파공성을 끌고 수십 줄기의 새파란 섬광이 사한천의 요혈을 노리고 짓쳐들었다.
 ‘아까운 놈! 말을 듣지 않으니 할 수 없지.’
 새파란 섬광은 사한천이 피할 수 있는 모든 방위를 차단해 버렸다.
 그야말로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스으으······!
 헌데 미세한 기척이 일고 실로 믿을 수 없는 사단이 눈앞에 벌어지고 말았다.
 새파란 섬광에 전신이 난자당할 사한천이 유령처럼 눈앞에서 사라져 버린 것이다.
 파파파― 팟!
 목표를 잃은 새파란 섬광은 애매한 땅바닥에 구멍을 뻥뻥 뚫어 버렸다.
 “아니······ 네놈이······! 네놈이 고수······?”
 구미랑이 혼백단절할 듯한 경악성을 간신히 삼킬 때, 사위를 뒤흔드는 낭랑한 외침이 들려왔다.
 “하하하······! 악독하기 그지없는 살수가 아닌가.”
 구미랑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소리가 들린 곳으로 번개같이 고개를 돌렸다.
 까마득히 하늘을 찌른 한 그루 고송(古松) 위다.
 놀랍게도 사한천은 고송의 중턱에 의연하게 서 있었다.
 어느새 그의 안색은 싸늘하게 굳어져 있었다.
 “후후······! 나를 귀찮게 하는 자는 누구든지 죽는다.”
 그의 말에 구미랑은 까르르 교소를 터뜨렸다.
 “호호호······! 네놈이 무허신법을 펼치는 것을 보니 제법 한가락 재주를 지녔구나. 허나 함부로 까불면 죽는 건 너다.”
 말을 하는 그녀의 얼굴에 욕망의 미소가 탐욕스럽게 피어올랐다.
 그 웃음은 사내들이 채양보음공에 걸려드는 첫번째 유혹의 함정이다.
 ‘지독하구나.’
 사한천은 일시 정신이 아찔한 것을 느꼈다.
 동시에 자신도 모르게 단전으로 참을 수 없는 욕망의 열기가 용솟음쳤다.
 허나 그는 냉정하게 이성을 찾으며 냉혹하게 소리쳤다.
 “흥, 당신의 채양보음공은 비록 경지에 올랐으나 나를 유혹하지는 못할 것이다.”
 구미랑의 얼굴을 덮었던 음탕한 웃음이 싸늘하게 식어 버렸다.
 ‘이놈은 생각보다 대단한 놈이다. 무시할 상대가 아니다. 이제 겨우 약관인데 이놈의 정력(精力)은 상상보다 강하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사한천에게 한 가닥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순간 사한천은 독수리가 먹이를 잡아채듯 절묘하게 바닥으로 내려섰다.
 ‘유운요일(流雲搖日)에 풍선수취(風旋水取)의 신법이다.’
 그녀는 다시 한 번 경악성을 간신히 삼켰다.
 사한천의 냉랭한 음성이 날아왔다.
 “나는 더 이상 당신과 말장난을 할 시간이 없으니 귀찮게 하지 마시오.”
 사뭇 위압적인 말투가 아니고 무엇인가.
 허나 이미 마음이 흔들린 구미랑이 순순히 그를 보내주겠는가.
 “호호호······! 애송아, 네놈의 순양지기(順陽之氣)를 취하기 전에는 절대로 보낼 수가 없다.”
 그녀의 말이 끝나는 순간, 섭선이 날카롭게 파공성을 뿌리며 펼쳐졌다.
 촤르륵―!
 차차― 창!
 어느새 세 명의 홍의소녀가 장검을 뽑아 들고 사한천의 앞을 막아 섰다.
 미색이 가장 출중한 홍의소녀가 차갑게 말했다.
 “사부님, 건방지고 버릇없는 저놈을 속하들에게 맡겨 주십시오.”
 구미랑의 입가로 사이한 냉소가 스쳐 갔다.
 그녀는 사한천의 실력을 알고 싶었다.
 어쩌면 자신의 수하들이 피를 흘리고 죽을지도 모르지만 우선은 상대의 실력을 철저하게 알아둘 필요가 있었다.
 “호호······! 저놈은 제법 경공조예가 뛰어나니 조심해야 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사부님.”
 세 명의 홍의소녀는 거침없이 품자형으로 늘어섰다.
 사한천은 태연하게 그녀들이 공격하기를 기다렸다.
 “차핫! 건방진 놈! 감히 사부님에게 찧고 까불어.”
 “넌 끝났어.”
 순간 사나운 외침이 앙칼지게 터지고 얼음장같이 냉혹한 검기가 사한천의 전신으로 부챗살같이 뻗쳐왔다.
 파츠츠― 츳―!
 허공으로 싸늘한 검기와 검화(劍花)가 난비하였다.
 “하하하······! 겨우 이 정도에 주둥아리가 그렇게 거칠었더냐?”
 사한천은 싸늘한 대갈을 토하며 허리결의 마검탈혼비를 뽑아 들었다.
 아니, 뽑아 들었다고 느낀 순간 이미 크게 허공으로 원을 그리고 있었다.
 “가랏―!”
 일갈의 벼락같은 외침이 터지고 참담한 비명과 경악성이 홍의소녀들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으악······!”
 “으윽······!”
 홍의소녀들은 황급히 뒤로 삼 장을 물러났다.
 안색이 창백하게 변한 그녀들의 앞가슴은 놀랍게도 하나같이 일자로 베어져 나풀거리고 있었다.
 허나 절묘한 검초의 변식으로 상처는 조금도 입지 않았다.
 베어져 나풀거리는 앞가슴 사이로 봉긋한 젖가슴이 살짝 엿보였다.
 홍의소녀들은 등골이 서늘하고 간담이 오싹한 기분이었다.
 ‘으으······ 하마터면 귀신도 모르게 죽을 뻔하였어.’
 부들부들 떨고 있는 그녀들의 얼굴엔 땀이 축축하게 번지고 있었다.
 “후후······! 이제 알겠느냐?”
 사한천은 빠르게 시선을 돌렸다.
 홍의소녀들의 젖가슴이 이상하게 가슴을 설레게 만들었던 것이다.
 순간 홍의소녀들은 황급히 앞가슴을 가리며 구미랑에게 달려갔다.
 “사······ 사부님, 용서하십시오. 저놈은 속하들의 상대가 아닙니다.”
 구미랑은 싸늘하게 얼어버린 표정으로 말을 받았다.
 “그래, 저놈은 너무 강해서 너희들의 상대가 아니다. 만약 저놈이 악독한 마음을 먹었다면 너희들은 이미 죽었다.”
 “사부님······!”
 세 명의 홍의소녀는 사색이 되어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사부님, 당금 천하에서 저런 약관의 고수가 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그녀의 곁에 있는 눈빛이 무척 요염한 홍의소녀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사부님, 혹시 저놈이 삼대문파에서 혈겁을 일으킨 놈이 아닐까요?”
 구미랑의 표정이 기묘하게 변했다.
 “글쎄다. 모르긴 해도 본 주의 생각은 아닌 듯하구나. 삼대문파에서 혈겁을 일으킨 놈은 악독하고 손속이 잔인하다고 하였다. 그런 놈이라면 너희들을 살려 주었겠느냐?”
 “그런 것도 같습니다, 사부님!”
 세 명의 홍의소녀는 이마에서 흐르는 땀을 훔치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사한천의 모습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구미랑의 음탕한 얼굴에 냉기가 바람같이 스쳐 갔다.
 그녀의 자존심이 상하고 있다는 증거다.
 허나 그녀의 얼굴에는 더욱 요악한 교소가 사르르 번져 갔다.
 “호호호······! 놈이 제법 깐깐하고 뛰어나지만 얼마 가지는 못했을 것이다.”
 홍의소녀들은 해연히 놀라는 표정들이다.
 “사부님, 그게 무슨······?”
 말을 하던 그녀들 중 한 명의 홍의소녀가 사이한 냉소를 머금었다.
 “호호호······! 속하는 알았어요.”
 “알았다니······?”
 “호호······! 사부님은 이미 그자에게······!”
 구미랑이 그녀의 말을 빠르게 잘라 버렸다.
 “그렇다. 역시 매홍(梅紅)은 여우같이 눈치가 빠르구나.”
 두 명의 홍의소녀들도 그제서야 감이 잡히는 듯 입을 크게 벌렸다.
 “도대체 언제 사부님이 그자에게 음사향(淫蛇香)을 뿌렸습니까?”
 “호호······! 그자가 너희들에게 검을 뽑아 드는 순간 귀신도 모르게 살짝 뿌렸다. 호호호······! 천하에서 음사향을 당할 사내가 있다더냐?”
 구미랑은 전신을 흔들며 요악하게 웃었다.
 그런 그녀의 전신에서는 이미 음욕(陰慾)의 기운이 아지랑이같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과연 그녀는 소문대로 요사하기 이를 데 없는 탕녀(蕩女)가 분명했다.
 자신의 마음에 드는 사내는 누구든 놓치지 않는다는 요부(妖婦)답게 그녀는 사한천에게 음사향을 뿌린 것이다.
 음사향은 철석간장을 가진 사내는 물론 부처님까지도 완벽하게 욕망의 늪으로 빠뜨린다는 무서운 독향(毒香)이다.
 “호호호······! 이제 우리는 욕망에 미친 한 마리 짐승을 추적하기만 하면 된다.”
 구미랑은 입이 찢어져라 요란하게 웃었다.
 
 ***
 
 “공연히 이상한 일에 휘말릴 뻔하였어.”
 사한천은 희미한 냉소를 머금으며 느릿느릿 걷고 있었다.
 아름다운 주위의 경관이 물결치듯이 스쳐 가고 있었다.
 “아직도 강호의 경험이 부족······ 윽······!”
 나직이 중얼거리던 사한천은 돌연 낮은 신음을 토하며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
 그는 순간적으로 자신의 몸에 이상이 생긴 것을 감지하였다.
 느닷없이 전신의 열기가 단전(丹田)으로 몰려들었고 단전에서 항거할 수 없는 거대한 열기의 불기둥이 솟구치고 있었던 것이다.
 ‘빌어먹을······ 이건 욕망(慾望)!’
 사한천은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놀랍게도 그것은 너무나 엄청난 욕망의 불길이었다.
 욕망의 불길은 너무나 느닷없이 그의 전신을 태울 듯이 치솟아 올랐던 것이다.
 사한천의 얼굴에 의혹의 빛이 구름처럼 스치고 있었다.
 “왜 이렇게 되었지? 갑자기 내가 미쳤나. 느닷없이 이게 무슨 황망한 사건이란 말인가.”
 그는 당혹감을 금치 못하였다.
 이미 그의 마음속에도 참을 수 없는 욕망의 불씨가 당겨지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달구어진 쇳덩이같이 붉게 변했다.
 “으윽······! 정말 미치겠네. 아니, 돌겠다. 갑자기 왜 이러지.”
 그는 치솟는 욕망의 열기를 무참하게 짓눌러 보았다.
 허나 그것이 짓누른다고 눌러지는 것인가.
 짓누를수록 더욱 팽팽한 욕망의 열기가 노도같이 전신을 휘감아 돌았다.
 “으윽! 이게 무슨 황당한······!”
 순간 사한천의 이글거리는 눈에서 한 줄기 이채가 번뜩이고 지나갔다.
 “그렇구나. 구미랑이라는 요사한 계집이 미혼산을 뿌렸구나. 이토록 극렬한 미혼산은 음사향이다.”
 놀랍게도 사한천은 그 와중에도 정확히 구미랑이 뿌린 미혼산을 밝혀내고 있었다.
 허나 음사향을 밝혀낸 순간 그의 얼굴은 더욱 참담하게 일그러지고 말았다.
 “음사향······ 빌어먹을, 하필이면 음사향이라니······!”
 그는 욕망을 움켜잡고 피식 웃고 말았다.
 ― 독(毒)이 아닌 독을 조심하라!
 검을 잡은 무인이라면 누구나 가슴에 새겨두어야 하는 말이다.
 독이 아닌 독은 바로 음사향을 말함이다.
 “으으······! 한순간의 방심이었는데······ 음사향은 해약(解藥)이 없고 오직 남녀의 운우지락(雲雨之落)으로 풀어야 한다고 했다.”
 사한천의 얼굴에 지렁이 같은 핏줄이 툭툭 불거져 나왔다.
 천하에서 가장 참기 어려운 것이 본능으로부터 시작되는 욕망이다.
 사한천은 지금 본능의 욕망 중에서 가장 무서운 육체(肉體)의 욕망 속에 빠진 것이다.
 “으윽······! 죽이는구나. 이대로 일각이 지나면 전신의 혈관(血管)이 파열되어 죽고 말 것이다.”
 사한천은 자신의 경솔함을 후회했고 자신의 방심을 자책했다.
 상대는 천하가 알아주는 마녀(魔女) 구미랑이 아니었던가.
 그는 그녀를 너무 안이하게 생각하였던 것이다.
 사한천은 비통한 심정으로 중얼거렸다.
 “허나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 부모님의 피맺힌 원한이 아직도 구천을 헤매고 있는데 절대로 죽을 수는 없다.”
 그는 비틀거리며 빠르게 걸음을 옮겨 나갔다.
 “사부님의 하해와 같은 은혜조차 갚지 못하였는데······ 으윽! 이대로 죽는다는 건 너무 억울하지 않은가.”
 악다문 입가로 한 줄기 선혈이 흐르고 전신에는 땀이 비 오듯이 흘러내렸다.
 순간 흐려지는 그의 시야에 한 채의 고찰(古刹)이 들어왔다.
 낡고 황폐한 고찰은 한눈에도 이미 버려진 폐사임을 느끼게 하였다.
 사한천의 충혈된 눈에 광기가 번득였다.
 ‘혹시 마행심법(魔行心法)을 사용하면 독기를 몰아낼 수 있을지 모른다. 우선 저곳에서 운기행공을 해야겠다.’
 더 이상 생각하고 망설일 시간이 없었다.
 그는 이를 악물고 고찰 안으로 들어갔다.
 고찰 안은 무성한 잡초만이 키를 넘게 자라 있었다.
 “으윽······! 방해할 사람이 없으니 오히려 다행이다.”
 사한천은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운기행공을 시작할 마땅한 장소가 필요하였다.
 그는 제일 먼저 눈에 띄는 방으로 뛰어들었다.
 문짝은 떨어져 나갔고 창문은 박살났으며 먼지가 수북이 쌓여 있는 방이다.
 허나 사한천은 그런 것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그는 바닥의 먼지를 손으로 떨어낸 후 가부좌를 틀었다.
 땀이 비 오듯이 흐르고 불거진 핏줄은 금방이라도 터질 듯하였다.
 사한천은 빠르게 진기를 이어 마행심법을 운기했다.
 허나 그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진기는 이어지지 않았고 혈맥은 제멋대로 뒤틀리고 있었다.
 ‘으윽······! 가슴이 터질 것 같군.’
 그의 안색은 참담하게 일그러졌다.
 무리하게 진기를 운행하자 가슴의 혈관들이 모조리 바늘로 찌르는 듯이 고통스러웠던 것이다.
 “으윽······!”
 마침내 그의 입에서 절망처럼 고통의 신음이 짓이겨져 나왔다.
 금방이라도 심장은 터질 듯이 벌떡거리고 단전의 열기둥은 폭발할 것만 같았다.
 “으윽······! 정말 이렇게 죽어야 한단 말인가.”
 사한천은 한스럽게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에도 이미 참을 수 없는 욕망의 열류가 흐르고 있었다.
 헌데 순간이다.
 허공으로 시선을 던지던 그의 눈빛이 흠칫하는 게 아닌가.
 뜨겁게 달구어지는 눈빛 속으로 칼날같이 한 명의 백의인이 파고들었던 것이다.
 사한천은 백의인이 객점에서 만났던 백의소년임을 단번에 알 수가 있었다.
 ‘크크······! 이상한 운명이군. 세옥······ 그래, 세옥이라고 하였지.’
 사한천은 메마른 웃음을 소리 없이 툴툴 흘렸다.
 웃으며 그는 백의소년에게 물었다.
 “그대가 이곳에는 어쩐 일인가?”
 욕망의 고통을 참느라 그의 음성은 탁탁 갈라지고 있었다.
 백의소년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사한천의 전신에 비 오듯이 흐르는 땀과, 시뻘건 얼굴에 툭툭 불거진 핏줄이며, 입가로 흐르는 핏물까지······.
 백의소년의 눈이 커질 대로 커진다.
 “세상에! 사 형은 어디가 아픈 것이오?”
 “쿡쿡······! 보다시피 이렇게 되었소.”
 세옥은 단번에 무언가 심상치 않은 것을 알았다.
 그의 눈빛은 칼날같이 사한천의 모습을 살폈다.
 이어 그 눈빛은 경악으로 물들며 허공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 탄식 같은 음성이 흘러 나왔다.
 “사 형은 지독한 음독(陰毒)인 음사향에 중독되었소.”
 “아니, 그것을 어떻게······?”
 사한천은 해연히 놀라며 세옥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세옥은 좀더 가까이 다가서며 처연한 표정을 지었다.
 “음사향이 분명하오. 좀더 정확히 알아야 하오.”
 “그렇소. 구미랑이란 요부에게 당한 듯하오.”
 “당한 게 아니라 당한 듯하다는 말이오?”
 “쿡쿡······! 나도 모르게 그렇게 되었소.”
 “최초의 발작은 언제였소?”
 “반각은 지난 듯하오.”
 “반각이라······ 그럼 너무 시간이 없군.”
 세옥은 당혹감을 금치 못하는 표정이다.
 헌데 그런 그의 얼굴에 왠지 홍조가 번지고 있는 게 아닌가.
 “일각이 지나면 아무리 공력이 강해도 전신의 혈관이 파열되고 말 것이니 이제 반각이 남았을 뿐이오.”
 “쿡쿡······! 무슨 방법이라도 있다는 말이오?”
 사한천은 어이가 없다는 듯 툴툴 메마른 웃음을 토해냈다.
 허나 세옥의 눈빛은 결코 장난이 아니었다.
 “사 형은 음사향에 해약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소?”
 “쿡쿡······! 그렇소.”
 사한천이 냉소를 머금자 세옥의 눈빛이 경직되었다.
 그리고 나직한 음성이 흘러 나왔다.
 “허나 결코 해약이 없는 것은 아니오.”
 “무엇이······! 해약이 있다는 말이오?”
 사한천은 크게 경악의 표정을 지었다.
 그는 무엇이든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세옥은 너무나 자신 있게 말한다.
 “분명히 있소.”
 “그게 무엇이오?”
 “여자의 육체······!”
 너무나 간단하게 세옥의 입에서 그 말이 흘러 나왔고 사한천의 입에서도 욕설이 동시에 튀었다.
 “빌어먹을······ 여자의 육체!”
 사한천은 상대도 하기 싫다는 듯 시선을 돌려버린다.
 “쿡쿡! 망할 놈의 자식! 느닷없이 여자의 육체라니······!”
 사한천은 미친 듯이 킬킬거린다.
 허나 놀랍게도 세옥의 눈빛은 냉정하고 표정은 비장하였다.
 “사 형은 더 이상 살고 싶지가 않다는 말이오?”
 사한천의 시선이 비수같이 그를 쏘아본다.
 냉정한 정광이 일렁이는 세옥의 눈빛은 분명히 장난이 아니었다.
 사한천의 입에서 거친 숨결이 터지듯 냉음이 흘러 나왔다.
 “나는 많은 사람과 원한이 있는 몸이라 이대로 죽기는 너무 억울한 일이오.”
 “죽기 싫다면 살아야 하지 않소?”
 “여자의 육체로 말이오?”
 “방법이 그것뿐이라면······.”
 순간 사한천의 입에서 폭풍 같은 외침이 터져 나왔다.
 “망할 놈의 자식! 누굴 놀리나! 다 허물어진 절간에서 느닷없이 여자의 육체라니······!”
 그는 거친 숨을 북북 내쉬었다.
 “그래, 나도 여자의 육체뿐이란 건 인정하오. 그리고 그런 육체가 있다면 미친 짐승이라도 되고 싶소. 우라질······! 그런데 어디서 갑자기 여자의 육체를 찾는단 말이오.”
 “먼데서 찾지 말고 가까운 데서 찾아보시오.”
 “쿡쿡······! 끝까지 빌어먹을 놈이군. 너는 죽어가는 사람을 놀리는 게 취미인가 본데 그런 악취미는 버리는 게 좋아.”
 “가까운 곳에 있는 여자의 체향을 느끼지 못하오?”
 “빌어먹을! 느닷없이 네가 재주라도 부려서 여자로 변신하기라도 하겠다는 것이냐?”
 사한천의 냉갈에 세옥은 처연한 미소를 짓는다.
 “재주를 부릴 필요도 없소.”
 “무엇이······?”
 “내가 사 형을 살리겠소.”
 “나를 살린다고······?”
 사한천은 정신이 혼란스러웠다.
 허나 세옥은 이미 단단하게 결심이라도 굳힌 듯 담담하게 말했다.
 “사 형, 나를 보시오.”
 말을 하면서 그는 빙그르 회전하였다.
 찰나 하늘이 무너져도 놀라지 않을 것 같던 사한천의 입에서 경악성이 터지고 눈이 커질 대로 커졌다.
 “맙소사!”
 그도 그럴 것이, 그의 눈앞에 환상같이 펼쳐진 광경을 보라!
 백의소년이었던 세옥은 어디로 사라지고 한 명의 백의여인이 처연하게 미소를 짓고 있는 게 아닌가.
 삼단 같은 머리결은 허리까지 흘러내려 폭포수같이 출렁이고, 단아한 이목구비는 그린 듯이 아름다운데 늘씬한 자태와 고혹적인 모습은 월궁의 항아가 하강한 듯하였다.
 이것은 환상도 아니고 꿈도 아니었다.
 ‘세상에, 세옥이 그럼 남장여인(男裝女人)······!’
 사한천은 순간적으로 뒤통수를 쇠망치로 강타당한 기분이었다.
 순간 가장 아름다운 여인으로 돌아간 세옥은 처연하게 웃는다.
 “사 형은······ 아니, 사 공자는 실망했나요?”
 음성도 변하고 그 음성은 계곡을 타고 흐르는 벽수같이 짤랑짤랑하였다.
 사한천은 그녀를 외면한 채 말했다.
 “실망이 아니라 기가 막힐 뿐이오.”
 “그래도 실망이 아니라면 다행이군요.”
 “왜 이런 감당할 수 없는 충격을 주는 것이오?”
 “지금은 그런 말을 할 때가 아닌 것 같군요.”
 “빌어먹을······!”
 “빌어먹을 때 빌어먹더라도 지금은 여자의 육체가 필요할 뿐이에요.”
 말을 하면서 그녀는 옷자락을 풀기 시작했다.
 사한천은 말릴 시간도, 말릴 수도 없었다.
 이미 그녀의 옷자락은 신비의 나신을 위해 몸부림치듯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녀는 아름답다!
 달도 꽃도 부끄러워 고개를 숙인다는 폐월수화(閉月隨花)랄까?
 얼음같이 투명한 백옥지신(白玉之身)의 빙기옥골(氷琪玉骨)이랄까?
 아니다, 무수히 아름다운 형용사가 다 무슨 소용이랴!
 그녀는 다만 아름답다.
 누구나 한 번만 보면 보는 그대로 미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다.
 지루한 장마 끝에 검은 구름을 뚫고 느닷없이 나타나는 햇살 같은 여인이다.
 전신에 흐르는 고귀한 기품은 보는 이로 하여금 숨이 막히게 만들었다.
 수려한 이목구비는 선이 뚜렷하고 강렬한 인상을 풍기며 학(鶴)의 목을 닮은 우아하고 긴 목덜미는 만지면 분가루라도 묻어날 듯이 희디희었다.
 목덜미를 타고 여리게 곡선을 그린 동그란 어깨와 선연히 드러나는 젖가슴의 신비는 야천에 걸린 반월(半月)과도 같았다.
 탄력이 눈으로 묻어나는 풍만한 젖가슴은 한없이 포근하고 따스한 여인의 체취가 서려 있는 듯하였다.
 또한 기름진 아랫배는 양지유(羊脂油)를 바른 듯이 눈이 부시고 잘록한 버들허리는 실바람에도 하늘거릴 듯하다.
 급격히 부풀어오른 둔부는 관능적이고 선정적인 유혹을 담고 있었으니······.
 늘씬한 몸매와 쭉 뻗은 각선미는 느낌 그대로 욕망의 바다로 가는 문이 아닌가.
 비릿한 체향이 숨겨진 허벅지의 아리아리한 속살은 눈이 시리게 여린데 비지(秘地)의 신비는 검은 음영(陰影)만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진정 숨이 막히도록 요염(妖艶)하고 염태로운 모습이 아닌가.
 그 어떤 여인이든 여인의 알몸은 신비스럽고 아름답기 마련이다.
 허나 누구든 이 여인을 단 한 번만 보는 날이면 보는 그대로 어떤 여자의 알몸도 더 이상은 신비스럽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녀는 신(神)이 그녀에게 내린 기적의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나신(裸身)을 보는 순간 냉막하고 고독한 사한천도 욕망의 바다로 뛰어들고 말았다.
 그녀의 신비가 만들어내는 욕망의 항해는 끝이 없었다.
 사한천은 그녀의 나신에 열류같이 흐르는 모든 욕망을 맡겨 버렸다.
 
 
 4장 유혹(誘惑)의 향기 속으로
 
 
 폭풍 같은 열락(悅樂)의 순간은 지나갔다.
 스스로 원한 일이었으나 세옥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녀의 헌신적인 희생으로 음사향을 치유한 사한천은 할말이 없었다.
 그는 소리 없이 눈물을 삼키는 세옥을 어색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시작이 어떠하였고 과정이 어떠하였든 결과는 그를 참으로 난감하게 만들었다.
 ‘어쩌지? 먼저 말을 걸어야 하나. 무엇이라고 말을 하지.’
 사한천은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어 안절부절못하고 있다.
 언제나 냉막하고 무심하며 고독하였던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 순간이었다.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말고 떠나버려······? 그건 도리가 아니지. 그래도 그녀는 순결지신을 바쳐 나를 살렸는데······.’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사한천은 힐끔힐끔 그녀를 돌아보며 미간을 찡그렸다.
 어쩌면 그녀도 그가 먼저 말을 해주길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무슨 말을 해야 하는가?
 미안하니 평생을 책임진다고 해야 하는가?
 아직도 원수는 많고 많은데 내가 어떻게 그녀를 책임진다는 말인가.
 나는 지금 나 자신도 책임지지 못하는 처지가 아닌가.
 빌어먹을, 살긴 살았지만 이건 지독한 고문이다.
 사한천은 다시 쓴입맛을 다셨다.
 순간 구원의 손길같이 흐느끼던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사 공자는 소녀가 이상한가요?”
 눈물 젖은 음성은 공연히 듣는 이의 심정까지 울적하게 만든다.
 “아······ 아니오. 조금도 이상하지 않소.”
 “그럼 다행이군요.”
 그녀는 처연하게 웃는다.
 그 웃음은 눈물보다 서럽고 아픈 웃음이다.
 사한천은 여인의 웃음이 그토록 슬프리라곤 한 번도 상상한 적이 없었다.
 그녀의 웃음은 소리 없는 오열같이 사한천의 가슴에 스며들었다.
 “낭자가 이제 여인이란 걸 알았고······ 이름이 세옥이라고 하였으니 나는 앞으로 낭자를 옥매(玉妹)라고 부르겠소.”
 “그게 진심인가요?”
 “그렇소.”
 “정말 고마워요. 그 말을 들으니 마음이 놓여요.”
 무엇이 마음이 놓인다는 것인가?
 사한천은 문득 손을 뻗어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악연(惡緣)은 아닐 것이오. 그리고 분명히 말하지만 우연(偶然)도 아니오.”
 “······!”
 “이것은 인연이오.”
 “사 공자······!”
 세옥은 충격을 받았는지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사한천은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인연이라고 하였는데······ 그리고 내가 옥매라고 부르는데 옥매는 왜 나를 사 공자라 하오?”
 “그럼 무엇이라고······?”
 사한천은 단호하게 말했다.
 “한천이오. 옥매만이 나를 한천이라고 부를 수가 있을 것이오.”
 “아······ 한천!”
 그녀는 격동하며 파르르 아미를 떨었다.
 “내가 원래 말재주가 좋지 않아서······.”
 사한천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을 흐리자 그녀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아니에요. 한천이 지금까지 소녀에게 한 말은 평생 처음 들어보는 정말 멋진 말이었어요.”
 “그렇다면 다행이오.”
 사한천은 다시 어색하게 웃었다.
 허나 그 웃음조차 그녀는 평생 처음 보는 정말 멋지고 황홀한 웃음이었다.
 이제 그들의 어색함은 사라져 버렸다.
 사한천은 분명히 인연이라고 하였고 그녀는 그것을 사랑이라고 믿었다.
 ‘인연이라면 이분을 위해 나는 평생을 사랑하고 살아야 한다.’
 그녀는 스스로 다짐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무엇이 생각난 듯 물었다.
 “한천,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어요.”
 “무엇이오?”
 그녀는 망설이다가 이내 빠르게 말했다.
 “한천이 정말로 아미파의 장문인을······.”
 사한천은 냉엄하고 단호하게 그녀의 말을 잘라 버렸다.
 “사실이오. 당연히 죽어야 하는 인과응보(因果應報)였소.”
 “인과응보······!”
 그녀는 부르르 전신을 떨었다.
 ‘이해가 가지 않아. 이토록 섬유하고 문약하게 보이는 이분이 아미파는 물론 삼대문파의 혈겁을······?’
 그녀는 생각조차 하기가 싫었다.
 그녀의 시선이 사한천을 똑바로 직시하였다.
 “한천, 한천은 문파가 어디인가요?”
 사한천은 말이 없었다.
 그는 한동안 무엇인가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냉엄하게 말했다.
 “때가 되면 알 것이니 지금은 알려고 하지 마시오.”
 그녀의 눈빛에 실망의 빛이 스쳐 갔다.
 사한천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옥매도 그만 일어나시오.”
 “어디로 가려고······?”
 말을 하던 그녀는 얼른 입을 다물어 버렸다.
 ‘바보 같은 계집애! 어쩌자고 자꾸 비천한 행동을 하지. 인연이라 하지만 아직은 저분이 나를 사랑하는 건 아니야. 아니, 사랑을 한다고 해도 어디로 가는지 내가 물을 자격은 없어.’
 그녀는 처연하게 웃으며 얼른 신형을 추슬렀다.
 잠시 후 그녀는 다시 남장여인으로 변했다.
 사한천의 입가로 희미한 미소가 스쳐 갔다.
 “후후······! 누가 보아도 완벽하게 아름다운 남자가 아니오?”
 “소녀를 놀리세요?”
 “아······ 아니오. 옥매를 알아볼 사람은 아마도 나뿐일 것이오.”
 그녀는 사르르 얼굴을 붉혔다.
 순간 무슨 생각을 하였는지 그녀는 지그시 어금니를 악물며 말했다.
 “이제 언제 만날 수 있을까요?”
 “······!”
 “인연이 닿으면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인연은 이미 만들어졌소. 옥매가 어디에 있고 내가 어디에 있든 우리의 인연은 시작되었다는 뜻이오.”
 “고마운 말이군요. 하지만 소녀는 한천의 짐이 되고 싶지는 않아요.”
 “무슨 뜻이오?”
 “한천은 갚아야 할 원한이 많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렇소.”
 “그런데 소녀가 한천을 따라갈 수는 없잖아요.”
 사한천은 한동안 그녀를 바라보더니 시선을 허공으로 던졌다.
 “미안하오.”
 간단한 한마디였다.
 허나 사한천의 의중이 무엇인지 대변하는 한마디였다.
 그녀는 잠시 교구를 바르르 떨더니 빙글 돌아섰다.
 “인연을 절대로 잊지 않겠어요.”
 그 한마디를 남긴 채 그녀는 바람같이 달려갔다.
 “옥······ 옥매!”
 사한천은 당혹한 외침을 토했다.
 허나 그녀는 이미 시야에서 까만 점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미안하오. 허나 나도 인연을 잊지 않을 것이오.”
 사한천은 희미한 냉소를 머금었다.
 “지금은 함께 다닐 수가 없다는 것을 먼저 알아주니 고맙소.”
 그는 천천히 신형을 돌렸다.
 헌데 괴이하게도 텅 빈 듯한 이 가슴은 무엇인가?
 금방이라도 어디선가 그녀의 청아한 음성이 들려올 것 같은 느낌은 또 무엇인가?
 “빌어먹을······!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벌써 여인지정(女人之情)에 빠지고 말다니······ 한천아! 너는 사부님의 말씀을 벌써 잊었느냐?”
 그는 시선을 허공에 던졌다.
 ‘지금 나에게 여인지정은 사치가 아니고 무엇이랴! 아직도 냉혹함과 고독함이 무엇인지 모른단 말이냐!’
 그는 스스로 자책하고 있었다.
 허나 세옥의 모습과 음성은 심한 자책 속에서도 생생히 살아 있었다.
 “후후······! 인연이라지만 정말 바보 같은 일을 저지르고 말았어.”
 그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헌데 그때였다.
 휘― 익!
 허공을 가르는 날카로운 파공성이 울리고 한 줄기 홍영이 전광석화같이 사한천의 면전으로 내려서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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