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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2018.02.02 조회 2,132 추천 16


 序章
 
 “사람이 죽으면······.”
 
 ‘혼은 하늘로 오르고, 백은 흩어져 지상에 머문다.’
 
 뒷말을 속으로 삼킨 사내의 눈이 탁자 위의 서책을 향했다. 한눈에 보아도 낡아 있는 것이 족히 수백 년은 되었을 듯한 모습이었다.
 
 “하늘로 올라가는 혼을 잡아 둘 수는 없지만······.”
 
 천천히 책을 읽던 사내는 숨을 내쉬며 책을 덮었다. 그러나 머릿속은 조금 전까지 보던 책의 내용으로 가득했다. 벌써 수십 번. 아니, 수백 번이나 읽어 온 내용이니 떠오르지 않는 것이 이상할 터였다.
 
 ‘그러고 보니, 오래되었군.’
 
 생각을 이어 가던 사내의 눈이 다시 서책으로 향했다. 끝자락에 남은 갈색 얼룩에 시선이 닿은 사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불쾌한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사내는 일그러진 표정을 바로 하고는 다시 책을 펴 조금 전 읽던 내용을 찾아보았다.
 
 ‘무공을 익히지 않은 게 한이 되는군.’
 
 누구나 찾아 헤매던 것이 눈앞에 있다.
 
 그러나 그것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없다는 데에서 찾아오는 실망은 너무도 컸다.
 
 지금이라도 무공을 익힐까 하는 생각을 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나, 필요한 것은 무공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익히며 얻게 되는 깨달음이었다. 그것이 없다면 이 책의 내용을 온전히 해석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저 고수가 되기만 하면 되는 거라면 어렵지 않았다. 그것을 해결할 수 있을 정도의 재산은 충분히 있었고 의지 역시 충분했다. 무공이야 훌륭한 사부를 초빙하면 되는 것이고, 부족한 내력은 영약을 구입해 채우면 된다.
 
 비록 자신의 나이가 적지 않다 해도 몇 년 정도의 노력을 기울이기만 한다면 이 성(省)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고수가 될 수는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해서는 이 책에 기록된 내용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야 고수가 되어 봐야 아무 의미가 없다.
 
 “어렵군, 어려워.”
 
 명가(名家)의 후손으로서 수많은 서책을 가까이 했음에도 이해할 수 없는 내용에 한숨을 내쉰 사내는 다시 책을 덮었다. 그저 기서(奇書)를 가장한 잡서(雜書)라 치부하기에는 그 안에 담긴 현기(玄氣)가 너무도 컸기 때문이었다.
 
 차라리 그것을 알아볼 수 없었다면 이런 고민은 하지 않았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던 사내는 의자에 몸을 묻으며 눈을 감았다. 피곤할 때 나오는 버릇이었다.
 
 이렇게 하고 있으면 피로가 가시는 것은 물론, 붕 떠 있었던 생각이 가라앉으며 정신이 맑아졌다. 게다가 가끔씩은 복잡한 일에 대한 해결책이 나오기도 했다.
 
 “······그렇군.”
 
 이번에도 좋은 해결책이 떠올랐다.
 
 ‘내가 할 수 없다면 다른 사람을 이용하면 되는 게 아닌가.’
 
 더군다나, 자신은 이런 일에 적합한 사람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걸 그대로 알려 줄 순 없지.’
 
 세상에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부모자식조차도 마찬가지다. 그들 역시 혈연이라는 굴레를 제외한다면 남과 다를 것이 뭐가 있단 말인가.
 
 그런 생각을 하며, 사내는 붓을 들어 서신을 작성했다.
 
 
 
 몸이 좋지 않은 것이 오래가지 못할 것 같구나.
 
 
 
 서신을 쓰던 사내의 손이 잠시 멈칫했다. 그러나 이왕 내친걸음이다. 게다가······.
 
 
 
 남경으로 돌아오너라.
 
 
 
 그렇게 서신을 끝낸 사내는, 서신을 접어 봉투에 넣으며 탁자 위의 책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1
 
 팔월(八月), 도강언(都江堰)의 급류는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물론 평소의 도강언도 어디 하나 빠질 것 없는 명소임은 분명했으나, 팔월의 도강언은 평소와는 또 다른, 거칠고 몽환적인 느낌을 자아내는 풍경으로 변하곤 했다.
 
 “언제까지 쏟아지려나.”
 
 도강언을 바라보던 청년 이현은 손바닥을 위로 한 채 손을 들어 올렸다. 떨어져 내리던 빗방울이 펼쳐진 손바닥을 톡톡 두들겼다. 묘하게 간질거리는 느낌에 손을 털어 낸 이현은 가볍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제 그칠 때도 된 것 같은데.”
 
 말끝을 흐리며 하늘을 올려다보지만, 비가 그칠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어느새 바로 앞까지 다가온 물살을 느낀 이현은 뒤로 조금 물러나며 거칠어진 민강(岷江)을 바라보았다.
 
 “이러다 넘치겠군.”
 
 물은 점점 불어나고 있었다. 외강(外江)은 물론, 저편에 있는 내강(內江)까지도 오래 지나지 않아 넘칠 기색이 언뜻 보였다. 물살의 흐름이 조금씩 빨라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퇴(離堆)와 비사언(飛沙堰)으로 물길을 돌리는 것도 슬슬 한계가 다가온 듯한 느낌이었다.
 
 도강언을 만든 이왕(二王) 부자의 노력도 자연 앞에선 한계가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무렵, 이현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사형! 사형!”
 
 익숙한 목소리였다. 시내(市內)가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생각대로의 인물이 다가오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도대체 이런 날씨에 왜 물가에 나와 있는 거예요! 아무리 사형이라고 해도 급류에 휘말리면······.”
 
 “그 말, 두 번만 더 들으면 백 번째야.”
 
 “그러니까 백 번 채우기 전에 그만하라고요!”
 
 “하아.”
 
 ‘역시나.’라고 중얼거린 이현은 째려보는 눈매를 힐끗 확인하고는 슬쩍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꽤 자연스러운 동작이었으나, 그것이 자신을 피하고 있다는 의미임을 모를 리 없었던 소녀는 입술을 살짝 깨물며 이현의 발등을 밟으려 했다. 그러나 얄밉게도 이현은 반걸음 뒤로 물러나 소녀의 발을 피해 냈다.
 
 “발등도 백 번이나 밟힐 순 없지.”
 
 “사형!”
 
 가볍게 떨리는 주먹을 본 이현은 ‘이크’하며 조금 더 뒤로 물러났다.
 
 그러는 사이에도 물살은 계속 불어났고, 그것을 모를 리 없던 소녀는 한숨을 내쉬곤 주먹을 내린 채 입을 열었다.
 
 “여기서 궁상떨지 말고 따라와요.”
 
 “무슨 일인데?”
 
 “사부님이 찾으세요.”
 
 
 
 “뭐야, 결국 모른다는 소리잖아.”
 
 “그래서 불만이에요?”
 
 당연하지 않느냐고 말하려던 찰나, 어느새 다시 쥐어진 소녀의 손을 본 이현은 태연히 눈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아니, 꼭 불만이라기보다는 말이지······.”
 
 “아니면요?”
 
 “글쎄.”
 
 슬쩍 고개를 돌린 이현의 눈에 이왕묘(二王廟)가 보였다. 이제 본격적으로 산행이 시작되리라는 걸 알고 있던 이현은 대답을 회피하며 속도를 높였다.
 
 말끝을 흐리는 이현의 모습에 미간을 좁힌 것도 잠시.
 
 갑자기 걸음이 빨라지는 이현의 속도에 당황한 소녀는 보폭을 넓혀 이현을 따라 걸었다. 그럼에도 거리는 좁혀지지 않아 소녀는 투덜대며 이현의 등에 대고 입을 열었다.
 
 “뭐예요.”
 
 “뭐가?”
 
 “경공도 안 쓰면서 뭐 그리 빨라요?”
 
 “익숙하니까.”
 
 벌써 수백 번이나 오르내린 길이다.
 
 비록 돌을 반듯이 잘라 쌓은 계단과는 달리 굴곡이 심하다고는 해도 눈을 감고서도 지나갈 수 있을 만큼 익숙한 곳이었으니. 평지를 걷는 것과 비슷한 속도가 나오는 것은 너무도 당연했다.
 
 “······자랑할 일은 아니군.”
 
 그 말은 수련을 빼먹고 밖으로 나돌아 다닌 것이 수백 일이라는 이야기와 다를 바 없었다.
 
 새삼 그것을 떠올린 이현은 쓴웃음을 머금은 채 속도를 높였다. 뒤에서 뭐라 떠드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 소리도 이내 빗소리에 묻혀 사그라졌다.
 
 “아, 진짜! 사람 말 좀 들어요!”
 
 경공까지 써 가며 따라붙은 소녀의 목소리에 인상을 쓴 이현은 귀를 막으며 고개를 돌렸다.
 
 움찔하던 소녀는 찌푸려져 있는 이현의 얼굴을 발견했다. 그 모습에 울컥했는지, 다시 들려온 소녀의 목소리엔 이를 가는 듯한 소리가 섞여 있었다.
 
 “자꾸 무시할래요?”
 
 우립(雨笠) 아래로 보이는 눈초리가 상당히 매서웠다. 그 눈초리에 다시 수세로 몰린 이현은 딴청을 부리려다, 또다시 들리는 이 가는 소리에 항복을 선언하곤 입을 열었다.
 
 “빗소리 때문에 안 들렸어.”
 
 “말이 되는 소리를 하세요. 십 년이나 내공을 수련한 사람이 빗소리 때문에 말을 못 들어요?”
 
 “편견을 버려. 내공을 익힌 사람이라고 해서······, 어?”
 
 능청스럽게 말을 잇던 이현의 눈이 살짝 커졌다.
 
 걸음마저 멈춰 버린 채 오른쪽을 쳐다보는 그를 발견한 소녀는 그를 따라 오른쪽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이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도대체 뭐가······. 앗! 사형!”
 
 잠깐 한눈을 판 사이 벌써 저만큼이나 떨어진 이현을 본 소녀는 꽉 쥔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미리 준비하지 않고서야 그 짧은 시간에 저렇게 멀리 도망칠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잡히기만 해 봐요!”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뻔했다. 게다가 목소리 끝이 날카로워진 것으로 보아 장난이었다며 넘어가기도 쉽지 않을 듯했다.
 
 물론 자업자득이지만 왠지 억울하다는 생각에 한숨을 내쉰 이현은 속도를 조금 더 높이며 산길을 뛰었다. 어쨌든 지금은 화가 좀 가라앉을 때까지 피해 있는 것이 상책이라는 판단에서였다.
 
 “진짜! 잡히면 죽을 줄 알아요!”
 
 ‘휘유.’하고 한숨을 내쉬며, 이현은 한층 더 속도를 높였다.
 
 
 
 이를 악물고 따라오는 소녀를 간신히 뿌리친 이현은 일부러 산을 빙 돌아 올랐다. 사부가 있을 건복궁(建福宮)으로 가려면 장인봉(丈人峰)으로 가야 했지만, 사매의 잔소리에서 해방되려면 한동안 다른 곳에 숨어 있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산을 오르던 이현의 눈에 빗속에서도 검을 휘두르는 검수(劍手)들의 모습이 보였다.
 
 이 날씨에도 검을 수련하고 있다는 것에 의아해진 이현은 그곳으로 가려다 그들의 얼굴을 보곤 쓴웃음을 지으며 몸을 돌렸다.
 
 “아무리 화가 나도 그렇지······.”
 
 생각해 보면 납득하지 못할 일도 아니다. 비무라고는 해도, 본산제자인 저들이 속가제자인 자신에게 검 한 번 제대로 휘두르지 못하고 졌으니 저들의 사부 된 입장에선 답답하고 울화가 터지는 일이 아닐 수 없을 터였다.
 
 그러니 이 정도 날씨가 무슨 대수랴.
 
 그런 생각에 쓴웃음을 문 이현은 몸을 돌리며 중얼거렸다.
 
 “그건 그렇고, 어디로 간다······.”
 
 사부가 찾는다고는 해도 급한 일은 아닌 것 같았다. 정말 급한 일이라면 사매를 보내는 대신 직접 왔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우중(雨中)의 도강언을 보는 취미마저 방해받은 마당이니, 한두 시진 정도는 여유를 가져도 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있었다.
 
 “백운군동(白云群洞)이나 가 볼까.”
 
 이내 행선지를 정한 이현의 신형이 남쪽으로 향했다.
 
 반 시진이나 지났을까 싶을 무렵, 빠르게 움직이던 이현의 신형이 멈춰 섰다.
 
 목적지까지는 한참 남아 있었지만 더 움직일 생각은 하지 못했다. 이곳에 있을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던 사람의 모습이 눈앞에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흥.”
 
 “사, 사매?”
 
 “사형, 너무 뻔한 거 알아요?”
 
 “아, 아하하······.”
 
 어색하게 웃는 이현의 이마 위로 한 줄기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저, 저기 말이야. 그러니까······.”
 
 “왜요.”
 
 “······아냐. 미안. 잘못했어.”
 
 소녀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것을 본 이현은 조금 더 긴장하며 한발 뒤로 물러났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미루어 볼 때, 저런 표정은 잔소리가 터져 나오기 직전에 짓는 거란 걸 매우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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