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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후천자 1

2018.02.06 조회 323 추천 0


 사후천자 1권
 등장인물
 
 
 <만리창천(萬里蒼天)!>
 스스로 하늘을 닮고자 하는 떠돌이 소년.
 제왕지기(帝王之氣)를 타고났으나, 지극히 평범한 외모에 가리어 세인들은 그의 진정한 빛을 쉽게 알아보지 못한다.
 그러나 걷잡을 수 없는 운명의 회오리는 그로 하여금 제왕(帝王)의 길을 걷게 하고······.
 훗날, 그를 따르는 네 명의 여인 사후(四后)로 인해 천하에선 그를 사후천자(四后天子)라 일컫게 된다.
 
 <사사태자(邪邪太子) 숭헌린(崇軒鱗)!>
 중원최강의 무단(武團) 절대사사궁(絶代邪邪宮)의 후계자이자, 이 시대 최고의 천재라 일컬어지는 기남아.
 운명의 회오리 속에서 주인공과 숙명적인 우정(友情)을 맺는다.
 
 <위지도백(魏池度伯)!>
 절대사사궁의 총사(總師)이며 사도제일뇌.
 천하제일의 지략가(智略家).
 절대사사궁과 천하를 움켜쥐기 위해 무서운 두뇌를 구사하는 야심의 효웅(梟雄)으로, 자신의 목적을 위해 주인공을 이용하려 하나······.
 
 <다류삭(多留索)!>
 서역 대파사제국(大巴斯帝國)의 소년 영웅.
 중원을 정복하려는 대파사겁황군(大巴斯劫荒軍)의 수뇌가 되나, 파사공주 벽리향(碧利香)으로 인해 주인공과 숙명의 적수가 된다.
 
 <벽리향(碧利香)!>
 파사제국의 공주.
 어린 시절에 만난 주인공에의 연정(戀情)으로 인해 훗날 천하대세의 커다란 변수를 야기시킨다.
 
 <사사대제(邪邪大帝) 숭헌후염(崇軒吼炎)!>
 절대사사궁의 지존(至尊)이자, 천하최강의 고수(高手).
 
 <마마대법태사(魔魔大法太師) 나흘파!>
 마도최강의 세력인 마마천교(魔魔天敎)의 절대자.
 잃어버린 마도의 영광을 되찾으려는 마웅(魔雄).
 
 <대현천문(大賢天文) 석금량(石禁良)!>
 정도최강의 무맹 대정천무맹(大正天武盟)의 영수이자 정도제일뇌.
 
 <천외대공(天外大公)!>
 중원사천(中原四天)의 하나인 천외제일성(天外第一城)의 성주. 그에 관한 모든 것은 철저한 신비(神秘)에 가려져 있다.
 
 <악마수(惡魔手)!>
 하토(蝦土) 미리왕국(米爾王國)의 저주가 깃든 악마의 손에 제압되어 천하에 피를 몰고 다니는 의문의 괴인.
 
 <사후(四后)!>
 일명 제왕사후(帝王四后)라고도 불리며, 주인공을 그림자처럼 따르는 네 명의 여인.
 일후(一后)의 능력만으로도 천하에 적수를 찾기 어렵다.
 
 <마소야(魔小爺)!>
 마마천교의 후계자이자 마도사상 최고의 기재.
 
 <부세마영(浮世魔影)!>
 죽음을 숙명처럼 안고 살아가는 살수제일인(殺手第一人).
 
 <대정천검(大正天劍) 북리강(北里 )!>
 정도무림의 최고기재.
 구파일방과 천하팔대세가의 진전을 한몸에 이은, 정도 부활(正道復活)을 부르짖는 불세의 청년고수.
 
 <동해비인(東海秘人)!>
 동해에서 왔다는 신비의 고수.
 어쩌면 그는 해동국(海東國)의 인물인지도 모른다.
 그 외에도 수많은 효웅들과 기라성 같은 고수들, 그리고 여인들이 이 한 편의 대서사시(大敍事詩)를 엮어간다.
 
 ***
 
 전설(傳說)은 예언하였다.
 제왕지기(帝王之氣)가 지상에 현신할 때 천하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난세(亂世)의 폭풍과 혈겁에 휘말리게 될 것임을······.
 그러나 전설은 또다시 이렇게 부언하였다.
 그 엄청난 난세(亂世)의 막(幕)은 또한 이제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한 위대한 제왕(帝王)의 탄생을 위해 거쳐야 하는 필연(必然)임을······.
 이제 우리는 지켜보아야 한다. 만리창천(萬里蒼天)이라는 한 소년이 걸어가는 제왕의 길을······!
 
 
 1장 소년 만리창천(萬里蒼天)
 
 
 사후천자(四后天子)!
 이야기는 시작된다.
 
 ***
 
 봄.
 따사로운 양광(陽光) 아래 꽃 내음 실은 훈풍이 불어온다.
 이름 모를 산새들의 재잘거림이 있고, 눈 녹아 흐르는 맑은 개울물 소리가 있어 봄은 좋다.
 서량산(西梁山).
 멀리 천년고도 금릉(金陵=남경)을 굽어보며 병풍처럼 펼쳐진 대산(大山).
 그리 높은 편은 아니나 하늘을 향해 쭉쭉 뻗은 산세는 장쾌하기 이를 데 없다.
 서량산에도 봄이 왔다.
 뽀르르르··· 뿅뿅!
 졸졸졸······.
 
 蒼蒼無上天
 浮雲終日行
 天下遊一浪
 其心如蒼天
 푸르고 푸른 하늘은 끝이 없는데,
 부운(浮雲)은 종일토록 흘러만 간다.
 하늘 아래 한 사람 나그네,
 그 마음은 창천(蒼天)을 닮았어라.
 
 산길 소로(小路).
 맑은 음성으로 시구(詩句)를 읊조리며 한가롭게 산길을 오르는 한 사람이 있었다.
 소년이다.
 일신에는 허름한 백의(白衣)를 걸치고 오른쪽 어깨에는 길다란 죽장(竹杖)을 둘러매고 있다.
 흔들흔들 죽장 끝에 매달린 것은 여기저기 기운 자국이 있는 봇짐 하나, 걷어붙인 팔 소매 아래 구릿빛 팔뚝이 더없이 신선해 보였다.
 나이는 십 육칠 세나 되었을까?
 오랜 유랑생활(流浪生活)이라도 한 듯 가무잡잡한 피부에 지극히 평범한 용모를 지니고 있었다.
 절세미소년(絶世美少年) 따위의 말과는 아예 거리가 멀다.
 이런 정도의 용모라면 하루에도 수십 명은 만날 수 있으리라 여겨질 만큼 평범하다.
 그러나 다르다.
 처음 언뜻 보았을 때는 지극히 평범하다고 느껴졌던 것이 다시 바라보면 알 수 없는 특별한 느낌이 우러난다.
 어디라고 딱 꼬집어 말할 수는 없으나 이 소년에게선 왠지 범인(凡人)과는 다른 기이한 느낌이 풍겨 나오고 있었다.
 신비감이랄까, 타고난 기품(氣品)이라고나 할까?
 그것은 어쩌면 시를 읊조릴 때마다 언뜻언뜻 드러나는, 그리하여 보는 이의 가슴을 아릿하게 저미게 하는 희디흰 치아 때문인지도 몰랐다.
 아니, 또 어찌 보자면 소년이 지닌 특별한 느낌의 근원은 그의 두 눈에 있는 것 같았다.
 눈!
 맑았다.
 그리고 깊었다.
 마치 대해(大海)를 보는 듯 아니, 저 끝없이 맑고 푸른 창천(蒼天)을 옮겨다 놓은 듯 소년의 두 눈은 너무도 맑고 신비로우면서도 아름다웠다.
 누구라도 한 번 보면 죽는 순간까지 그 매혹(魅惑)을 떨쳐버릴 수 없을 정도로······.
 
 春風起萬滿山化
 江上片舟悠悠去
 봄바람 부는 온 산엔 꽃이 만발하고
 강물 위 일엽편주는 유유히 흘러가네.
 
 유유자적(悠悠自適).
 하나도 바쁜 일이 없다는 듯 한가롭게 걸어가는 소년의 발걸음은 그대로 창천에 흘러가는 구름인 듯싶었다.
 “휴우! 다 올라왔군.”
 소년은 산등성에 올라 길게 심호흡을 하였다.
 다음 순간 그의 입에서는 맑은 탄성이 터졌다.
 “이야! 이게 바로 대륙의 젖줄이라는 장강(長江)이구나.”
 그렇다.
 시야가 확 트이며 드러난 것은 산 아래로 도도히 흐르는 거대한 강물 줄기, 장강(長江=양자강)이었다.
 대중원(大中原)을 남북으로 구분 지으며 수천 수만 년을 흘러온 장강(長江)!
 얼마나 많은 역대의 영웅재사들이 장강과 더불어 명멸(明滅)해 갔던가?
 장강의 역사는 곧 대중원의 역사이자 풍운(風雲)의 역사였다.
 지금 장강의 푸른 물줄기를 굽어보고 있는 소년의 가슴에도 형언키 어려운 감회가 물결쳤다.
 문득 소년의 입가에 빙긋 미소가 피어났다.
 “장강을 건너면 금릉(金陵)까지는 이십 리. 오늘밤은 금릉에서 묵을 수 있겠다.”
 이어 그는 어깨에 맨 죽장과 봇짐을 한켠에 내던지며 풀밭에 털썩 주저앉았다.
 “좀 쉬었다 갈까?”
 소년은 아예 팔베개를 하고 벌렁 드러누워 버렸다.
 두 눈 가득 하늘이 담긴다.
 창천(蒼天).
 베면 푸른 물이라도 뚝뚝 떨어질 듯한 창천에는 흰 구름이 흐르고 있었다.
 “하늘··· 언제나 좋다. 간혹 먹구름이 덮여 심술을 부리긴 하나 그것은 구름의 장난일 뿐. 본래 하늘은 언제나 변함없이 푸르니까.”
 소년의 깊고 아름다운 눈은 이 순간 또 하나의 하늘이 된 것 같았다.
 “끝이 없고 언제나 푸르른 하늘, 나 만리창천(萬里蒼天)은 저렇게 되고 싶다!”
 만리창천(萬里蒼天).
 소년의 이름이다.
 일곱 살인가 여덟 살 때 혼자서 스스로 지은 이름이었다.
 그는 자신의 출신을 모르는 떠돌이 고아였다.
 처음엔 걸인(乞人)들 틈에서 자랐고 철이 들면서 걸식(乞食)이라는 행위가 싫어 스스로 그들을 떠났다.
 그는 목각(木刻)에 남다른 재주를 지니고 있었다.
 그가 깎은 목각인형(木刻人形)들은 훌륭한 상품의 가치를 지녔다.
 그리하여 그것들은 그의 생계비와 틈틈이 글을 익힐 수 있는 책값이 되어 주었다.
 소년, 만리창천.
 그는 천성적으로 밝은 성품을 타고났다.
 고아라는 신세는 그에게 있어 결코 고독과 비관의 조건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자유(自由)였다.
 무한히 자유로울 수 있고 모든 것을 자신의 뜻대로 행할 수 있음을 그는 좋아했다.
 하늘을 닮고 싶다.
 이것은 그가 철이 들면서부터 품어온 소년다운 꿈이었다.
 하늘의 광활함, 하늘의 무한한 깊음, 하늘의 의연함······.
 이런 것들을 그는 닮고 싶었다.
 만리창천(萬里蒼天)!
 그것은 그의 이름이자 그의 위대한 스승이었다.
 ‘사흘 뒤··· 금릉에서 찬시(撰試)가 있다 했다. 관직(官職)에 등용되고자 함은 아니나··· 한번쯤 그동안 익힌 바를 시험해 봄도 좋으리라!’
 찬시(撰試).
 그것은 황도가 연경(燕京)으로 천도한 뒤 강남(江南)의 인재를 뽑는 관시(官試)였다.
 만리창천은 찬시를 치르기 위해 금릉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문득 그는 품에서 한 자루 벽옥소(碧玉簫)를 꺼내들었다.
 그가 만든 피리였다.
 “하늘엔 구름, 땅에는 꽃바람이라······. 한 곡의 선율(旋律)만 더한다면 아주 제격이 아닌가?”
 이렇게 중얼거리며 벽옥소를 입으로 가져갔다.
 삘리리··· 삘릴리리······.
 피리를 타고 아름다운 음률이 흘러 나오기 시작했다.
 즉흥곡(卽興曲)이었다.
 천공에 흐르는 구름이 선율로 녹아나는 듯, 산등성에 감도는 꽃바람이 가락으로 모여 흐르는 듯, 피리 소리는 흡사 천상(天上)의 선음(仙音)인 양 햇살 속으로 번져 갔다.
 만리창천은 지그시 눈을 감은 채 스스로 음률에 도취되어 무아경 속으로 빠져들며 손가락을 놀리고 있었다.
 삘리리··· 삘리리··· 삘리······.
 이윽고 피리 소리가 그쳤다.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툭!
 돌연 만리창천의 얼굴 위로 뭔가가 떨어져 내리는 것이 아닌가?
 만리창천은 번쩍 눈을 떴다.
 “으음?”
 그의 두 눈에 이채가 스쳐 갔다.
 떨어진 물체.
 그것은 한 마리의 작은 새끼 새였다.
 만리창천의 피리소리에 도취되어 움직이려다 떨어진 것일까?
 일순 만리창천은 빙긋 미소를 떠올렸다.
 “요녀석, 엄마 말을 안 듣고 혼자 날아보고 싶었느냐?”
 뾰르릉··· 뾰릉!
 새끼 새는 그의 품안에서 몸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문득 만리창천은 나무 위를 쳐다보았다.
 높다란 나뭇가지 위에 새 둥지라 여겨지는 까만 점 같은 것이 보였다.
 그러나 나뭇가지엔 둥지뿐만 아니라 무수한 가시덤불들이 엉켜 있었다.
 만리창천의 얼굴에 일순 난색이 떠올랐다.
 그는 높다란 새 둥지와 새끼 새를 번갈아 보았다.
 “저 높은 곳을 어떻게 올라가지?”
 그러나 올라가 새 둥지에 넣어주지 않으면 새끼 새는 죽어버릴 것이다.
 잠시 망설이던 만리창천.
 그는 일순 입맛을 다시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는 수 없군.”
 새끼 새를 가만히 안아 옷 속에 넣고 그는 나무를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나무를 타본 적이 없었던 만리창천에게 있어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새끼 새가 다치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만리창천은 땀을 뻘뻘 흘리며 나무를 기어올랐다.
 땀뿐이 아니었다.
 나무를 휘감은 가시덤불을 헤치느라 얼굴과 팔뚝은 찢겨져 피가 흘렀다.
 무려 한식경을 헤맨 끝에야 만리창천은 간신히 새 둥지에 다다를 수 있었다.
 “후우······.”
 그는 비오듯 흘러내리는 땀을 닦으며 새끼 새를 둥지에 넣어 주었다.
 “이 녀석, 다음부턴 날개가 다 자랄 때까진 함부로 날지 않는 거다. 알았느냐?”
 만리창천은 빙긋 미소 지은 뒤 나무를 내려왔다.
 그런데 어느 순간 지면에 거의 이르렀을 때였다.
 그는 자칫 발 디딜 곳을 잃어 그대로 미끄러지며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쿵!
 “어이쿠!”
 만리창천은 비명을 토하며 엉덩이를 감싸쥐었다.
 그때였다.
 “호호호······.”
 어디선가 갑자기 은방울을 흔드는 듯한 교소가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
 얼떨결에 고개를 돌린 만리창천의 시야에 푸른 청영(靑影) 하나가 들어왔다.
 소녀였다.
 십 사오 세나 되었을까?
 벽의궁장(碧衣宮裝)을 늘씬하게 차려 입고 한 손엔 짤막한 말채찍을 든 소녀였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그녀의 머리는 금발(金髮)이었고 두 눈은 호수처럼 푸른 벽안(碧眼)이 아닌가?
 한눈에도 중원인이 아닌 이국소녀(異國少女)임을 알 수 있었다.
 소녀의 얼굴은 너무도 예쁘고 깜찍하여 마치 인형을 보는 듯했다.
 투명하리만큼 흰 살결에 옴폭옴폭 패이는 보조개, 꽃잎으로 만들어 붙인 듯한 앙증맞은 입술, 그 입술은 다시 교소를 터뜨리고 있었다.
 “호호호··· 그까짓 나무에서 떨어지다니 오빠는 정말 생긴 것만큼이나 바보구나!”
 외모와는 달리 유창한 중원어(中原語)였다.
 만리창천은 일순 말문이 막혔다.
 돌연한 이국소녀의 출현만 해도 놀라운데, 대뜸 오빠라 부르며 반말이고 바보 운운하지 않는가?
 하긴 땀과 상처로 뒤범벅이 된 만리창천의 모습은 어쩌면 바보스럽게 보였을지도 몰랐다.
 만리창천은 그녀를 주시했다.
 ‘귀여운 소녀로군!’
 그렇다.
 벽의소녀의 모습은 설사 그녀의 입에서 어떤 욕설이 튀어나온다 할지라도 밉게 여겨지지 않을 만큼 귀엽기 짝이 없었다.
 만리창천은 엉덩이를 툭툭 털고 일어나며 빙긋 웃었다.
 “낭자는 누구지?”
 “낭자?”
 벽의소녀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묻더니 돌연 입을 삐죽거렸다.
 “피··· 실망했다. 오빠까지도 그런 고리타분한 호칭을 쓸 줄은 몰랐어.”
 “고리타분한··· 호칭?”
 만리창천이 가볍게 눈살을 찌푸리자 벽의소녀는 갑자기 짤랑짤랑한 교성을 내뱉기 시작했다.
 “난 근처를 지나다가 피리 소리가 하도 예뻐서 왔거든. 새끼 새가 떨어지고 오빠가 낑낑대며 둥지에 넣어주는 것도 봤어. 그래서 제법 맘에 들었는데··· 실망이다.”
 만리창천은 피식 실소를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좋아, 그럼 이름이 뭐냐?”
 “호호, 진작 그렇게 물었어야지. 난 향(香)아야, 벽리향(碧利香)······.”
 “이름이 예쁘구나.”
 “그렇지? 남들도 다 이름은 예쁘다고······.”
 거기까지 말하던 벽의소녀 벽리향의 표정이 일순 묘하게 일변했다.
 “어? 그럼 얼굴은 예쁘지 않단 말이야?”
 자못 심각해진 말투였다.
 만리창천은 벽리향의 말투나 태도 하나하나가 사랑스럽게 가슴에 와 닿는 것을 느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빙그레 웃으며 대꾸했다.
 “이름은 예쁘지만 얼굴은 예쁘다.”
 “에?”
 벽리향의 눈이 일순 커졌다.
 그녀는 잠시 만리창천의 말뜻이 혼란스러워진 듯 뭔가를 생각하더니 곧 입술을 쑥 내밀었다.
 “피··· 그런 말이 어디 있어?”
 “있다.”
 “어디?”
 “여기.”
 벽리향은 입술을 다물었다.
 그리고 잠시 만리창천을 바라보더니 깔깔대며 웃었다.
 “호호호, 재미있어. 오빤 정말 재미있는 사람이구나. 호호호호.”
 잠시 후 그녀는 웃음을 그치며 만리창천에게 바싹 다가왔다. 그리고는 풀밭에 사뿐 주저앉으며 자기 옆자리를 가리켰다.
 “오빠도 앉아.”
 “향아는 이 근처에 사니?”
 만리창천은 그녀의 옆에 앉으며 물었다.
 그러나 벽리향은 그 물음에 얼른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만리창천의 눈을 찬찬히 바라보다가 탄성을 발하는 것이었다.
 “어머! 오빠 눈··· 너무 예쁘다.”
 다음 순간 그녀는 빨려든 듯이 한 번도 눈길을 돌리지 않고 만리창천의 눈을 응시했다. 흡사 넋을 잃은 사람처럼.
 ‘어쩌면 남자의 눈이 이리도 아름다울 수가 있지’
 당연한 일이었다.
 만리창천의 두 눈에는 신비한 매력(魅力)이 있었다. 이 눈에 가슴이 떨리지 않을 여인이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그런데 이 순간 벽리향은 내심 또 한 번 놀라고 있었다.
 ‘이상해. 처음엔 모르겠더니··· 볼수록 알지 못할 기품(氣品)과 위엄마저 느껴지네.’
 그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이한 느낌이었다.
 일견 평범해 보이면서도 왠지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기분이 드는 것이었다.
 그때 만리창천이 눈을 한차례 깜박였다.
 순간 벽리향은 나쁜 짓을 하다가 들킨 어린애처럼 화들짝 놀라며 볼을 붉혔다.
 “오빠는 이름이 뭐예요?”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존댓말이었다.
 만리창천은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만리창천(萬里蒼天).”
 “만리··· 창천?”
 벽리향의 푸른 눈에 기이한 빛이 떠올랐다.
 “무슨 이름이 그렇죠? 호호, 그럼 동생은 만리장성(萬里長城)이겠네?”
 만리창천은 가볍게 웃었다.
 “하하! 난 동생이 없다. 떠돌이거든.”
 벽리향의 안색은 가볍게 놀라는 빛이었다.
 “떠돌이? 그럼 고아?”
 “음.”
 만리창천은 고개를 끄덕이며 햇살처럼 웃어 보였다.
 순간 벽리향은 갑자기 눈이 부심을 느끼며 말을 더듬었다.
 “미, 미안해요.”
 “괜찮다. 헌데 넌 아까 내가 물었던 말엔 아직 대답하지 않았지?”
 벽리향은 약간 망설였다.
 “향아는 이 근방에 살고 있느냐?”
 “아니······.”
 벽리향은 고개를 저었다.
 “우린 이곳에 온 지 얼마 안됐어요.”
 “우리?”
 “응. 우린 파사국(巴斯國=페르시아)에서 온 유랑극단(流浪劇團)이에요. 난 인형극(人形劇)을 하는데 지금은 내 차례가 아니라서 놀러 나왔죠.”
 “인형극?”
 만리창천은 호기심이 일었다.
 파사국에서 온 유랑극단이라는 것도 그러했지만, 더구나 그는 목각인형에 일가견이 있지 않은가?
 “아주 재미있어요. 오빠도 구경해 보지 않을래요? 난 마침 돌아가려던 참이었거든.”
 “좋다.”
 만리창천은 흔쾌히 승낙했다.
 어차피 금릉으로 가려던 길이 아닌가?
 일순 벽리향은 옥안 가득 기쁨의 빛을 떠올리며 빠르게 말했다.
 “인형극뿐만 아니라 신기한 재주들이 너무 많아. 한번 볼래요?”
 휘리리리릭!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녀의 신형이 허공에서 십여 차례나 선회(旋回)하며 새 둥지가 있는 가느다란 나뭇가지로 날아갔다.
 나뭇가지는 손가락 굵기밖에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녀는 흡사 춤추는 나비와도 같이 가볍고 아름다운 동작으로 그 위에 사뿐히 내려서는 신기(神技)를 발휘하지 않는가!
 “멋지다!”
 만리창천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발했다.
 만일 그가 무림인(武林人)이었다면 그녀가 펼쳐 보인 신법이 이미 실전(失傳)된 지 오래인 상고기학(上古奇學) 중의 하나임을 간파하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무공을 모르는 만리창천은 그것을 유랑극단의 신기 정도로만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때 나뭇가지 위에 서 있던 벽리향이 외쳤다.
 “오빠! 배가 왔어요!”
 휘리릭!
 벽리향은 다시 나비처럼 내려서더니 만리창천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빨리 가요! 저 나룻배를 놓치면 또 한 시진을 기다려야 돼요.”
 “알았다.”
 만리창천은 고개를 끄덕이며 산 아래로 달려갔다. 벽리향이 쥔 손목에서 기이한 감촉을 느끼면서······.
 
 ***
 
 삐이걱 삐걱.
 나룻배는 천천히 흔들거리며 장강을 가르기 시작했다.
 배에는 만리창천과 벽리향 외에도 이미 몇 사람의 인물들이 타고 있었다.
 어느 순간 만리창천은 좌측으로부터 섬뜩한 기운이 풍겨오는 것을 느끼고 흠칫 고개를 돌렸다.
 한 사람이 있었다.
 먹물 같은 흑의장포(黑衣長袍)에 검은 죽립(竹笠)을 깊숙이 눌러쓴 사내였다.
 허리에는 한 자루 묵검(墨劍)을 비스듬히 차고 있었다.
 그의 전신에서 뿜어나는 기운은 말 그대로 발톱을 숨긴 야수와도 같은 느낌이었다.
 ‘한 마리 늑대 같다.’
 흑의죽립인은 죽립을 눌러쓴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흐르는 강물을 보고 있는 것일까?
 “오빠.”
 이때 벽리향이 낮은 음성으로 말하며 만리창천의 옆구리를 가만히 찔렀다.
 그녀는 조용히 손가락으로 어느 한곳을 가리켰다.
 그녀가 가리키는 곳에는 한 마의노인(麻衣老人)이 앉아 있었다.
 걸친 마의도 허술했거니와 용모 또한 도무지 특별한 구석이 없어 보였다.
 ‘아무리 봐도 그냥 촌로 같은데······.’
 만리창천은 이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는 벽리향이 가리킨 의도를 알 수 있었다.
 마의노인.
 언뜻 보기엔 백발에 가려져 있었으나, 사실 그의 귀는 보통 사람보다 거의 세 배는 컸다.
 그리고 이따금씩 은은한 신광이 흐르는 눈빛으로 예의 흑의죽립인을 바라보곤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순간 순간이었으므로 그만을 계속 주시하지 않는다면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였다.
 그러다가 한순간 마의노인과 만리창천의 시선이 마주쳤다.
 마의노인의 입가에 기이한 미소가 언뜻 스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이내 강물 쪽으로 고개를 돌려 버렸다.
 삐이걱··· 삐걱!
 나룻배는 장강의 푸른 물줄기를 헤치며 서서히 강심으로 향하고 있었다.
 금릉(金陵).
 강남(江南) 제일의 고도(古都).
 역대 황조(皇朝)의 도읍지로서 그 문물의 번창함과 화려웅대(華麗雄大)함은 여타의 대도시와 비할 바가 아니다.
 금칠홍장(金漆紅裝)의 무수한 고루거각(高樓巨閣)들과 비단화복에 값비싼 패물들을 매달고 왕래하는 부호와 귀부인들.
 금릉은 색향 항주(杭州)나 소주(蘇州)에 못지않는 환락(幻樂)의 도시였다.
 펑! 펑!
 촤아아앗!
 파파팟··· 퍼펑!
 오색찬란한 폭죽(爆竹)이 터진다.
 한낮임에도 불구하고 폭죽은 파란 하늘을 오색 휘황한 불꽃으로 채색하고 있었다.
 청석대로(靑石大路).
 수많은 인파가 몰려들어 있었다.
 “우와!”
 “와아아아······!”
 연신 탄성을 질러대며 한낮의 축제를 즐기는 사람들의 함성과 손뼉 치는 소리에 청석대로는 온통 술렁이고 있었다.
 유랑극단(流浪劇團).
 일년에 몇 번 보기 힘든 유랑극단이 들어섰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서역(西域) 저 멀리 파사국(巴斯國)에서 온 유랑극단이다.
 금릉인들은 물론 강소성(江蘇省) 각처에서 일생에 한 번 구경하기도 힘든 진기한 풍물을 보기 위해 수많은 인파들이 몰려들었다.
 천막.
 서역산(西域産) 최고급 비단으로 짜여진 호화롭기 이를 데 없는 거대한 천막은 한눈에도 이국적인 정취를 물씬 풍기고 있었다.
 원형(圓形)으로 세워진 거대한 천막 위로부터 칠채융단(七彩絨緞)의 끈이 수십 가닥씩 뻗어내려 바람에 펄럭인다.
 쿵자작 쿵작!
 삘리리리 삘리······.
 천막 안에서는 악단(樂團)의 흥겨운 연주가 끊임없이 흘러 나왔다.
 주위엔 진귀한 서역의 물품들을 파는 상인(商人)들과 신기한 눈으로 이것저것 구경하는 인파들로 입추의 여지가 없을 지경이었다.
 그때였다.
 왁자지껄한 군중들 틈새를 비집고 두 사람의 남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야··· 들어갈 수도 없겠다.”
 “호호, 염려 말아요!”
 만리창천과 벽리향이었다.
 벽리향은 만리창천의 손목을 꼭 잡은 채 군중들을 헤치며 길을 텄다.
 그들이 당도한 곳은 천막의 뒤편이었다.
 그들이 나타나자마자, 그곳을 지키고 있던 파사국 복장의 두 장한이 황급히 허리를 접었다.
 “아가씨!”
 “이제 오십니까?”
 두 장한.
 그들은 머리에 천을 휘감은 모양의 기이한 모자(=터번)를 쓰고 허리엔 홍옥주(紅玉株)로 장식된 반월도(半月刀)를 차고 있었다.
 하나같이 건장한 체격에, 역시 푸른 벽안(碧眼)을 지닌 인물들이었다.
 벽리향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별일 없겠지?”
 “단주(團主)께서 몹시 찾으셨습니다.”
 두 장한은 허리를 숙인 채 공손히 대답했다.
 그들 역시 유창한 중원어를 쓰고 있었다.
 순간 벽리향의 입술이 쑥 튀어나왔다.
 “칫! 그 영감쟁인 조금만 자리를 비워도 난리라니깐······. 들어와요, 오빠.”
 그녀는 벽안을 내리깔고 코끝을 살짝 치켜든 채 만리창천의 손목을 이끌었다.
 “음.”
 만리창천은 고개를 끄덕이며 발길을 옮겼다.
 이때 돌연 두 장한이 재빠르게 그들 앞을 막아섰다.
 “아, 아가씨. 외인(外人)은······.”
 벽리향의 교갈이 터졌다.
 “보면 모르느냐? 이 사람은 향의 친구란 말야!”
 “하지만······.”
 두 장한은 난색을 떠올리며 비키려 하지 않았다.
 순간 벽리향의 안색이 싸늘하게 굳어지며 더욱 싸늘한 냉갈이 터져 나왔다.
 “포아랍(布阿拉)!”
 그와 동시에 그녀의 푸른 벽안에서 번쩍 칼날 같은 신광이 일었다.
 그 서슬에 두 장한은 안면 가득 두려운 표정을 떠올리며 황망히 물러섰다.
 이때 만리창천은 벽리향의 또 다른 일면에 내심 가볍게 놀라고 있었다.
 ‘벽리향··· 평범한 신분이 아닌가 보다.’
 벽리향은 언제 그랬냐는 듯 순진무구한 얼굴로 되돌아와 만리창천을 바라보았다.
 “호호··· 오빠, 빨리 들어와요.”
 “으음.”
 만리창천은 싱긋 웃어 보이며 그녀를 따라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그때 한쪽에서 그들의 뒷모습을 뚫어지게 응시하는 한 쌍의 눈이 있었다.
 십 칠팔 세 가량 되어 보이는 파사국 복장의 소년이었다.
 일견하기에도 지극히 굴강한 외모를 가진 소년.
 푸른 벽안에 거의 허리까지 늘어뜨린 금발(金髮)이 이색적이었다.
 특히 한 쌍의 눈빛은 사람의 폐부마저 꿰뚫어버릴 듯 섬뜩하고 강렬했다.
 금발소년은 들릴 듯 말 듯한 낮은 음성으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벽리향··· 반드시 기억하거라. 왕가(王家)의 법(法)은··· 사촌간의 혼사를 허용하고 있다.”
 
 
 2장 회회성소와 악마의 손
 
 
 쿵자작 쿵작!
 삘리리리··· 삘리······.
 원형으로 만들어진 커다란 무대 위에선 한창 신비한 춤사위가 펼쳐지고 있었다.
 한번 듣기 시작하면 저절로 심혼까지 빨려드는 기이한 이국음률(異國音律)에 맞춰 수십 명의 파사여인(巴斯女人)들이 군무(群舞)를 펼치고 있었다.
 오색 찬란한 궁등(宮燈).
 그 광휘에 속살이 훤히 비치는 망사의만을 걸친 여인들의 몸놀림은 극히 선정적이고 유혹적이었다.
 관중들은 아예 넋을 잃고 빠져들었다.
 이윽고 군무(群舞)가 끝나자 관중석에서 우레와 같은 함성과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와아! 멋지다!”
 “계속해라, 계속! 와아아!”
 이어서 관중들의 환호를 받으며 파사국의 미희(美姬)들은 기이한 춤을 펼치기 시작했다.
 수십 명의 무희(舞姬)들!
 그녀들의 농염한 몸에 걸쳐져 있던 옷들이 하나씩 떨어져 나가기 시작했다.
 사르륵··· 사륵!
 무희들의 푸른 눈은 매혹적인 웃음을 머금은 채 관중들의 넋을 빼앗았다.
 일순간 수십 개의 분홍색 망사의가 동시에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그리고 풍만한 가슴을 가린 선정적인 젖가리개가 드러났다.
 툭··· 툭··· 투둑!
 젖가리개가 풀어지면서 농염하게 드러나는 가슴이 관중들의 시야를 압도했다.
 “으흐흐··· 미치겠구나.”
 여기저기서 탄성이 흐르고 신음과 침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이때 조명(照明)은 더욱 선정적으로 변하고 음률조차 흥분을 자아내는 신비한 선율로 바뀌고 있었다.
 천막 안은 온통 후끈하게 달아올랐다.
 그때 무희들의 신비를 가리고 있던 아슬아슬한 고의마저 일제히 떨어져 나갔다.
 열기와 욕망에 달아오른 관중들의 시선이 일제히 어디엔가에 꽂혔다.
 그러나 그 순간 그 시선들은 하나같이 실망으로 뒤덮이고 말았다.
 그곳엔 또 하나의 작은 삼각고의가 앙증맞게 자리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에······.”
 “우우우!”
 실망의 탄성과 야유가 터졌으나 그것은 잠깐 동안이었다.
 무희들은 또다시 선정적으로 몸을 흔들며 삼각고의를 흘려 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 고의가 벗겨지자 좀더 작은 고의가 나타났고 그것이 떨어져 나가자 또 좀더 작은 고의······.
 관중석에선 이제 숨소리조차 하나 들리지 않았다.
 마침내 마지막 손바닥보다도 작은 고의가 떨어져 나가며 막 신비가 관중 앞에 드러나려는 찰나였다.
 휘황찬란하던 조명이 일제히 꺼지며 선홍색 연무(煙霧)가 무대를 뒤덮어 버렸다.
 무희들의 나신은 군중들의 야릇한 기대를 저버리고 연무에 묻혀 버렸다.
 당연히 관중석 여기저기서 아쉬운 탄성이 아우성쳤다.
 “와아! 너무한다, 너무해!”
 “빌어먹을······.”
 “그거 한 번 보여 주는 것이 그렇게 아깝냐?”
 그러는 사이 무대를 가득 메웠던 선홍색 연무는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파파팍!
 다시 휘황한 조명이 일제히 켜졌을 때 이미 무대는 텅 비어 있었다.
 “에이······.”
 “거, 참······.”
 평생 다시 못 볼 진경(眞景)을 놓쳤다는 듯 관중들은 입맛을 다셨다.
 그때였다.
 휘휘휙!
 우스꽝스런 모습으로 분장한 광대 하나가 재주를 넘으며 등장했다.
 “자아, 여러분! 이제부터 저희 유랑극단의 자랑인 인형가극(人形歌劇)을 관람하시겠소이다!”
 “우······!”
 “그거 끝나면 마저 벗는 거냐?”
 관중들이 외쳐댔다.
 그러자 광대는 익살스런 표정을 지어 보이며 외쳤다.
 “자고로 화룡점정(畵龍點睛)이란 말이 있지 않소이까? 눈동자를 마저 찍는다면 그림은 완성되겠지만 용(龍)은 하늘로 날아가 버릴 것입니다. 용이 날아가 버린다면 여러분은 내일 아침 당장 마누라한테 쫓겨나고 말겠지요.”
 중원의 은어(隱語)로 남자의 상징을 용(龍)이라 한다.
 광대의 말은 궤변이었으나 묘한 익살이 담겨 있었다.
 “하하하하······.”
 “그럴 듯하군.”
 관중들은 손뼉을 치며 웃었다.
 바로 그때였다.
 무대 뒤쪽에서 벽리향이 아쉬운 표정으로 일어서며 만리창천에게 속삭이고 있었다.
 “오빠, 내 차례야. 여기서 구경하면서 조금만 기다려요.”
 “향아 솜씨가 기대되는데?”
 “가면 안돼요?”
 불쑥 벽리향이 앙증맞게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알았다.”
 만리창천은 싱긋 웃어 보이며 손가락을 걸어 주었다.
 그러자 벽리향은 만리창천의 볼에 재빠르게 입을 맞추고는 토끼처럼 뛰어갔다.
 만리창천은 그녀의 귀엽고 대담한 행동에 미소를 지으며 무대 쪽을 주시했다.
 무대에서는 붉고 푸른 환상적인 조명 아래 청아하고 아름다운 노랫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옛날 옛날 늑대 마을에 늑대 왕자님이 살았네.
 늑대 왕자님은 용감하고 씩씩하여 모두가 존경했다네.
 
 무대에는 늑대탈을 쓴 인형들의 춤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 가운데 가장 화려하고 멋진 옷을 입은 늑대 한 마리가 왕자관(王子冠)을 쓰고 으쓱대고 있었다.
 
 어느 날, 어느 날, 회의가 열렸다네.
 이웃에 살고 있는 양떼를 잡아다 잔치를 벌이자고······.
 
 무대 뒤에서 벽리향은 인형줄을 조종하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녀는 그 와중에서도 만리창천을 돌아보며 살짝살짝 눈웃음을 보이곤 했다.
 너무도 깜찍스럽고 귀여운 그녀의 모습에 만리창천도 가볍게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네.
 양떼를 지키는 소년, 양치기 소년 때문이었네.
 그래서 늑대 왕자님은 생각했네.
 자기가 양으로 변장해서 양떼들 틈에 숨어 들어가기로.
 
 무대에서는 계속하여 노래에 맞추어 인형들의 춤이 이어졌다.
 그런데 그때였다.
 문득 관중석을 바라보던 만리창천의 눈빛이 이채(異彩)를 발했다.
 눈에 익은 두 사람의 모습을 발견한 것이었다.
 바로 나룻배에 탔던 흑포죽립인(黑袍竹笠人)과 마의노인(麻衣老人)이었다.
 두 사람은 각기 상당한 거리를 두고 관중 속에 끼여 앉아 있었다.
 ‘저들도 구경을 온 건가?’
 그러나 만리창천은 그다지 대수롭게 여기지 않고 고개를 돌려 버렸다.
 
 밤이 되었네, 밤이 되었네.
 양치기 소년은 말했네.
 아아, 졸려. 잠이 오는구나.
 양이 된 늑대 왕자님이 말했네.
 주무세요, 주무세요, 저희들은 염려 말구요.
 아함, 늑대가 나타나면 어쩌지?
 하하하, 늑대가 오면 주인님을 깨우지요.
 참 그러면 되겠구나.
 주무세요, 주무세요, 아무 걱정 말구요.
 양치기 소년은 잠이 들었네.
 그 틈에 늑대 왕자님은 늑대들을 불렀네.
 양떼들은 모조리 붙잡혀 갔네.
 아아, 용감하고 씩씩한 늑대 왕자님!
 멋진 꾀로 잔치를 벌이게 되었네.
 바보 같은 양치기 소년은 잠만 자는데, 잠만 자는데.
 늑대 나라에선 잔치가 열렸네.
 늑대 나라에선 잔치가 열렸네······.
 
 쿵자작 쿵작!
 무대에선 즐거운 잔치와 춤이 펼쳐졌다.
 반주에 맞춰 승리의 합창(合唱)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만리창천은 무심결에 관중 쪽으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그 두 사람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이상하군. 구경하러 왔다면 아직 순서가 많이 남았을 텐데······.’
 그때 벽리향이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다가왔다.
 “어휴··· 힘들어. 뭘 그렇게 두리번거려요?”
 “음? 벌써 끝났느냐?”
 벽리향의 입술이 튀어나왔다.
 “피이··· 오빠, 한눈만 팔고 있었구나.”
 만리창천은 정색하며 말했다.
 “아니야. 쭉 보고 있었어.”
 “흥!”
 “정말 훌륭했다.”
 “정말?”
 그제야 벽리향의 입술이 들어갔다.
 만리창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 인형들의 조각 솜씨만 좀더 정교했더라면 나무랄 데가 없었을 거야.”
 벽리향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어머! 오빤 인형을 볼 줄 알아요?”
 “약간.”
 만리창천은 미소 지으며 자신이 목각인형을 만들어 왔던 일에 대해 간단히 설명했다.
 그러자 벽리향은 반색하며 졸랐다.
 “오빠, 나 그거 하나만 줘요.”
 “좋다.”
 만리창천은 고개를 끄덕이며 봇짐을 풀었다.
 봇짐 속에는 몇 가지 목각도구(木刻道具)와 책자 그리고 목각인형이 하나 들어 있었다.
 “이런, 꼭 하나밖에 남지 않았군.”
 “고마워요, 오빠!”
 벽리향은 목각인형을 받아들자 몹시 기뻐하며 찬찬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동자상(童子像).
 그것은 극히 정교하게 만들어진 동자상이었다.
 가히 천하명공(天下名工)의 솜씨와도 비견될 만큼 정교하고 완숙한 솜씨였다.
 칼을 댄 부분의 힘차고 부드러움이 실로 절묘하게 배합된 목각인형.
 벽리향의 눈동자는 빨려들 듯 동자상을 응시하며 절로 탄성을 발했다.
 “우리 파사국에서도 이렇게 훌륭한 건 못 봤어! 정말 놀라운 솜씨예요, 오빠.”
 “하하, 그러냐?”
 만리창천은 부드럽게 웃었다.
 “그런데··· 난 뭘 주지?”
 예쁘게 눈살을 좁히며 여기저기 품속을 뒤적거리던 벽리향이 노리개 하나를 꺼냈다.
 붉은 수실이 매달린 청옥접(靑玉蝶)이었다.
 그 뒷면에는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황(皇).>
 “파사국 왕가(王家)에 전해져 오는 물건이에요. 본래는 중원에서 들여온 것이고. 뭔가 신기한 비밀(秘密)이 간직되어 있대요. 근데 난 아무리 봐도 모르겠어요.”
 벽리향이 무심한 어조로 설명했다.
 문득 만리창천은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파사국 왕가의 물건을 네가 어찌?”
 순간 벽리향의 얼굴에 당황의 빛이 스쳤다.
 “그, 그건······.”
 그녀의 양볼이 가볍게 홍조를 띠었다.
 “우연히··· 얻은 거예요.”
 “우연히?”
 벽리향은 대답 대신 시선을 동자상으로 돌렸다.
 “너무 예뻐! 정말 고마워요, 오빠.”
 그때 만리창천의 뇌리에 의혹이 스쳤다.
 ‘파사국의 왕가(王家), 평범한 신분이 아닌 듯한 벽리향, 파사국 유랑극단··· 어떤 연관이 있지 않을까?’
 그러고 보면 인형극의 내용도 좀 이상했다.
 ‘늑대와 양떼의 비유······. 뭔가 깊은 뜻을 암시(暗示)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순간 벽리향은 화사한 웃음을 터뜨리며 만리창천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나가요, 오빠. 보여줄 게 있어!”
 만리창천은 생각을 접어두고 벽리향을 따라 천막 밖으로 나갔다.
 밖의 무대에서는 여전히 광대의 익살스런 음성이 이어지고 있었다.
 “다음은 본 극단 또 하나의 자랑거리인 동시에, 십년면벽(十年面壁)으로 수양 쌓은 생불(生佛)이라도 옷을 벗고 달려든다는······.”
 “어? 타율(駝律) 할아범!”
 일순 천막 밖으로 뛰어나가던 벽리향이 멈춰 서며 탄성을 발했다.
 그들의 전면에는 왜소한 체구의 한 꼽추노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역시 푸른 벽안에 푸른 눈썹과 푸른 수염을 지닌 괴이한 용모의 노인이었다.
 어쩐지 섬뜩하고 으스스한 느낌이 드는 것은, 그의 벽안에서 일렁이는 흡사 유부(幽府)에서 흘러 나오는 듯한 푸른 귀화(鬼火) 때문일까?
 ‘기분 나쁜 노인이군.’
 만리창천은 이렇게 느꼈다.
 “아가씨, 저녁때 단주(團主)께서 들르시라는 분부셨소.”
 생김새 만큼이나 음산한 한마디를 던지고는 꼽추노인은 몸을 돌려 느릿느릿 사라졌다.
 마치 유령이 흐느적거리며 걷는 걸음걸이 같았다.
 “저 노인은 누구지?”
 “신경 쓸 것 없어요. 우린 저쪽으로 가요.”
 벽리향은 빠르게 말한 뒤 교구를 틀었다.
 공연이 펼쳐지는 천막 뒤에는 여러 개의 작은 천막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벽리향은 그 중 하나를 가리켰다.
 “저기예요.”
 천공(天空)에 조금씩 흑회색(黑灰色) 구름이 밀려오고 있었다.
 만리창천은 문득 하늘을 쳐다보았다.
 ‘비라도 오려는가?’
 
 ***
 
 벽리향을 따라 들어간 천막 안에는 단아하고 정갈하게 방이 하나 꾸며져 있었다.
 소녀 특유의 야릇한 체향(體香)과 기이한 사향이 한데 어울린 사방에는 기이한 패물과 물품들이 조화 있게 장식(裝飾)되어 있었다.
 그는 방안에 들어서자마자 기이한 감흥을 느꼈다.
 지금까지 중원에서는 보지 못했던 전혀 낯설고 생소한 느낌이었다.
 이때 벽리향이 그윽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향아가 기거하는 방이에요.”
 “참 아늑한 방인데?”
 만리창천은 미소를 떠올리며 여기저기 방안을 둘러보았다.
 그러다 문득 그의 깊은 눈에 호기심이 떠올랐다.
 방안의 한쪽, 검은 휘장(揮帳)이 내려진 곳을 발견한 것이다.
 “저긴 뭐가 있지?”
 “응······.”
 벽리향은 조금 망설이듯 대답했다.
 “여긴··· 우리들의 성소(聖所)예요.”
 “성소?”
 “보고 싶어요, 오빠?”
 벽리향은 눈빛을 반짝이며 물었다.
 “본래는 기도 시간 외엔 못 열게 되어 있지만··· 오빠가 보고 싶다면 보여 줄게요.”
 벽리향은 만리창천이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조심스럽게 휘장을 걷었다.
 만리창천은 휘장 안을 들여다보았다.
 휘장 안에는 좌우에 제법 커다란 청동향로(靑銅香爐)가 놓여 있었다. 그 중앙에는 천장을 향해 두 팔을 벌린 반신상(半身像)이 조각되어 있었다.
 만리창천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뚫어지게 반신상을 응시했다.
 “우리 회회교(回回敎)의 개조(開組)이신 예언자 마호멧이에요. 저 조각은 알라께 계시 받는 장면이고······.”
 반신상(半身像), 그것은 보는 이로 하여금 심령(心靈)이 제압당하는 듯한 기이한 무(巫)적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만리창천은 전신으로 엄습해 드는 형언키 어려운 전류를 느꼈다.
 ‘빨려 들어갈 것 같다!’
 반신상 밑에는 두꺼운 검은 책자와 반월금검(半月金劍)이 융단 위에 나란히 놓여 있었다.
 ‘저것이 말로만 듣던 회회교의 경전(經典=코란)!’
 그때 벽리향의 조용한 음성이 들려왔다.
 “우리는 각자 처소마다 이런 성소를 마련해 두고 있죠. 고국을 떠나 있어도 늘 알라의 축복이 함께 하기를 바라는 뜻에서예요.”
 만리창천이 경전을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자 벽리향이 가볍게 웃으며 그것을 집어들었다.
 “호호, 읽어보고 싶어요?”
 만리창천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난 회회문(回回文)을 배운 적이 없다.”
 “참··· 향아에게 배우면 되잖아?”
 벽리향은 경전을 펼쳐 보이며 회회문자(回回文字)를 하나하나 설명하기 시작했다.
 만리창천은 약 한식경이 흐르자 차츰 회회문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까··· 이 경전은 마호멧이 천계(天啓)를 받은 것들을 모은 것이로구나. 백십사 장(百十四章)에 이르는 교도(敎徒)의 행지규범(行持規範)을 지킴으로써 가르침에 전심전령(全心全靈)을 바쳐 따르는······.”
 “그래요.”
 고개를 끄덕이던 벽리향은 만리창천의 상당히 빠른 깨우침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다류삭(多留索) 오빠만은 못하지만··· 놀라워!’
 일순 그녀는 만리창천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런데 난 어릴 적부터 경전을 배워왔지만··· 이 구절만은 잘 실감이 되지 않아요.”
 벽리향은 경전의 한곳을 가리켰다.
 <부족함을 아는 자, 곧 겸손한 자에게는 알라의 영광이 하늘을 덮으리라.>
 “부족함을 안다는 것은 자족(自足)이겠죠. 그것은 곧 큰 이상과 야망을 포기함을 뜻해요. 이상과 야망이 없는 자에게 어찌 진보(進步)가 있겠으며 알라의 축복이 있겠어요?”
 벽리향은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그것은 정체이며··· 퇴보(退步)라고 생각해요.”
 “아니다.”
 만리창천은 고개를 저었다.
 “자족은 겸손이야. 그것은 이상과 야망을 포기함이 아니라 더욱 큰 이상을 목표함을 뜻한다. 겸손하지 않은 사람은 자칫 자신이 지닌 이상이 가장 크고 훌륭하다고 착각하기 쉽지. 그러나 겸손한 자는 모든 것을 천리(天理)에 맡기는 법이다. 알라가 신이라면··· 자신을 따르는 겸손한 자에게 축복하지 않겠느냐?”
 벽리향의 눈에 이채가 빛났다.
 만리창천은 말을 이었다.
 “인간의 욕념(慾念)은 끝이 없는 법이다. 끝없는 욕심과 교만에 참된 행복이 따를 리 없고 자족과 겸손에만 큰 축복이 내려지는 것이지.”
 “아!”
 벽리향은 고개를 끄덕이며 또 한 번 만리창천을 새롭게 인식하고 있었다.
 접하면 접할수록 다르다.
 처음과 두 번째의 느낌이 달랐고, 세 번째의 느낌은 더욱 달랐다.
 뭐라 말로 형용키 어려운 깊이와 넓음.
 그것이 마치 서서히 밀려오는 물결처럼 그녀의 가슴에 덮여오고 있는 것이었다.
 벽리향은 눈이 부신 듯 만리창천을 바라보았다.
 ‘저 모습······.’
 그렇다.
 저 모습과 같은··· 아니, 저 사람과 똑같은 느낌을 주었던 한 노인의 기억을 그녀는 가지고 있었다.
 외할아버지······.
 노인의 이름은 가파륵(賈巴勒).
 그는 파사국(巴斯國)을 일으킨 노제왕(老帝王)이었다.
 벽리향이 다섯 살 되던 해 가파륵은 임종(臨終)을 맞고 있었다.
 벽리향은 모친을 따라 그 자리에 참석했다.
 그때 가파륵은 희미해져 가는 눈빛으로 벽리향의 손을 잡고 말했었다.
 “향아야··· 명심하거라. 알라께서는 겸손한 자에게 축복하시느니라. 헌데 차무랍(借武拉), 그 아이는 너무 야심이 커서 걱정이다.”
 가차무랍(賈借武拉).
 그는 바로 가파륵의 아들이었다.
 동시에 벽리향의 외숙(外叔)이었다.
 그는 천부적으로 패왕(覇王)의 기질을 타고났다.
 가파륵의 왕업(王業)을 이어 변방국가들을 침공하여 위대한 파사제국(巴斯帝國)을 건설했다.
 그러나 백성들은 그보다는 가파륵을 흠모했다.
 가차무랍은 영웅이었으나 진정한 제왕(帝王)의 그릇으로는 부족하다 했다.
 ‘외할아버지야말로 진정한 제왕이셨어!’
 벽리향도 철이 들면서부터 늘 그런 생각을 해왔다.
 그런데 지금 기이하게도 그녀는 만리창천에게서 그런 느낌을 받는 것이었다.
 제왕의 느낌.
 그것은 어쩌면 그녀의 착각이었을까?
 바로 그 순간이었다.
 우우우우··· 우우우!
 어디선가 돌연 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모골이 송연해질 정도로 귀기(鬼氣)스러운 울음소리였다.
 “음?”
 만리창천의 검미가 찌푸려졌다.
 순간 벽리향은 흠칫 당황하며 그의 손에서 경전을 빼앗아 들었다.
 그리고 다급하게 휘장 안에 넣고는 급히 휘장을 닫아 버리는 것이었다.
 “미, 미안해요, 오빠······.”
 “왜 그래?”
 “사실 기도 시간 외에 성소를 여는 것은 금기(禁忌)로 되어 있어요. 오빠에게 보여주고 싶어서 열었는데······.”
 난데없는 개 울음소리가 그녀를 자각시킨 것일까?
 “우린··· 교법(敎法)을 어기면 알라의 분노를 받게 된다고 믿고 있어요. 설사 아무리 흉악한 죄인이 성소에 숨었다 해도 기도 시간까진 기다려야 해요.”
 “철저하군.”
 만리창천은 감탄했다.
 사실 신앙(信仰)이나 교법 따위는 상식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것이 많다.
 문득 그는 벽리향을 정시하며 물었다.
 “헌데 저 개 울음소린 뭐지?”
 “그건······.”
 그때였다.
 우우우우우······!
 예의 귀기스런 개 울음소리는 한층 더 가까운 곳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벽리향은 일순 크게 당황한 빛으로 빠르게 말했다.
 “참, 난 가봐야 돼요. 단주가 저녁때 들르라고 했거든······.”
 그녀는 교구를 틀어 천막 문 쪽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그러다 문득 그녀는 만리창천을 돌아보며 가볍게 눈을 찡긋했다.
 “조금만 기다리고 있어요, 가면 안돼!”
 벽리향은 연기가 빨려나가듯 밖으로 사라져 버렸다.
 만리창천은 벽리향이 나간 후 빈 천막 안을 둘러보았다.
 기이한 화폭 하나가 벽에 걸려 있었다.
 넓이는 대략 일곱 자(尺) 정도였다.
 그림 전체는 온통 암흑으로 뒤덮여 있는데 괴이한 기화수목(奇花樹木)에 뒤덮인 이상한 계곡(溪谷)이 보였다. 그리고 그 계곡 사이로 시커먼 동혈(洞穴)이 쩌억 입을 벌리고 있는 그림이었다.
 그런데 그 위에는 피를 칠한 듯한 혈수(血手)가 찍혀져 있었다.
 혈수(血手)!
 흡사 악마(惡魔)의 손과도 같은 그 섬뜩함은 화폭을 찢어 버릴 듯 강렬무비(强烈無比)하였다.
 ‘범상치 않다!’
 무언가 표현하지 못할 강렬하고 예리한 요기(妖氣) 같은 기운이 푸른 칼날처럼 덮쳐오는 느낌이었다.
 “이 그림은 대체 뭔가? 아까는 왜 눈에 띄지 않았을까?”
 그림은 성소의 휘장 바로 옆에 있었다.
 아까는 성소에 신경을 쓰느라 발견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림의 밑부분에 핏빛의 회회문(回回文)이 쓰여 있었다.
 <미리(米爾)의 왕업(王業)은 하토(蝦土)에 잠기도다. 천년의 저주(咀呪)가 악마수(惡魔手)로 부활되리라······.>
 ‘악마수!’
 전율스런 글귀였다.
 ‘미리의 왕업, 천년의 저주······.’
 만리창천은 오랫동안 그림을 주시했다.
 그림과 글귀는 그의 뇌리에 각인(刻印)되었다.
 바로 그때다.
 우우우··· 우우우!
 개 울음소리가 사위를 진동하듯 울려 퍼졌다.
 그와 함께 후두둑 후둑! 기어이 비가 쏟아지는지 빗줄기가 천막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은 채 일각도 못되어 폭우(暴雨)로 변했다.
 쏴쏴쏴··· 쏴아아아! 후두두둑!
 뇌성벽력이 작렬했다.
 번쩍! 꽈르르르릉!
 푸른 도끼가 내리쳐지는 듯한 시퍼런 섬광(閃光)이 천막을 통째로 휘감았다.
 우우우우··· 우우··· 우우우!
 빗소리와 함께 진동하는 개 울음소리.
 그것은 실로 섬뜩한 분위기였다.
 만리창천은 일순 천막을 들추고 밖을 내다보았다.
 그때였다.
 휘익!
 빛살 같은 인영(人影) 하나가 폭우를 뚫고 스쳐 가는 것을 만리창천은 볼 수 있었다.
 그것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만리창천 스스로 환각(幻覺)을 본 것이 아닌가 생각할 정도였다.
 만리창천은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천막을 닫았다.
 “어차피 가기는 틀렸군. 향아가 올 때나 기다리기로 하자.”
 찬시(撰試)는 사흘 후에 있다.
 어차피 달리 갈 데도 없는 몸이었다.
 천막의 한쪽에 분홍색 휘장이 드리워진 작고 아늑한 침상(寢狀)이 있었다.
 “향의 침상이군. 미안하지만······.”
 만리창천은 빙긋 미소를 지으며 침상에 팔베개를 하고 벌렁 누워 버렸다.
 그의 코가 씰룩였다.
 향기(香氣).
 벽리향의 소녀 특유의 야릇한 방향(芳香)이 코끝을 간질였던 것이다.
 “과히 싫은 냄새는 아닌걸······.”
 음미하듯 방향을 들이마시며 그는 한참 동안 침상에 누워 있었다.
 그때였다.
 “움직이지 마라.”
 돌연 나직한 음성이 그의 귓전에 날카롭게 파고드는 것이 아닌가!
 동시에 섬뜩한 칼날의 감촉이 뒷덜미에 느껴졌다.
 진득한 피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그러나 만리창천은 당황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누구시오?”
 “후후··· 떨지 않다니, 제법 담이 큰 녀석이군. 하지만 살고 싶으면 내 말을 들어라.”
 만리창천은 침착하게 말을 받았다.
 “위협하지 않아도 도와줄 만하다면 내 스스로 도와줄 것이오. 혹 생명이 위협받는 처지라 해도 협박은 무인(武人)답지 못하오.”
 어디까지나 침착한 태도이자 어투였다.
 칼의 임자는 가볍게 놀란 듯했다.
 “어떻게··· 내가 위기에 처해 있다는 걸 알았느냐?”
 만리창천은 조용히 말했다.
 “당신의 초조한 음성과 피 냄새, 삼척동자라도 알 수 있는 일이 아니오?”
 “음··· 보통 녀석이 아니군.”
 뇌까림과 함께 칼날이 떼어졌다.
 다음 순간 언제 스며들었는지 한 인영이 유령처럼 침상 밑에서 나타났다.
 황의장포(黃衣長袍)를 걸친 호목(虎目)의 중년인이었다.
 그의 왼팔은 어깻죽지부터 싹둑 잘려져 나갔고 가슴은 피범벅이 되어 있었다.
 한눈에도 생명을 장담키 어려운 중상(重傷)이었다.
 그러나 호목에 흐르는 신광(神光)만은 폐부를 꿰뚫을 듯 강렬했다.
 호목중년인은 만리창천을 주시하며 날카로운 음성으로 말했다.
 “자세한 말은 않겠다. 잠시 후 그 계집애가 오거든 침상으로 유인하거라.”
 만리창천의 눈이 빛났다.
 “그녀를 제압하여 인질로 삼아 이곳을 탈출하겠다는 뜻이오?”
 “그렇다. 이 파사유랑극단은 평범한 곳이 아니다. 그 계집애는 필시 중요한 신분일 것, 무인으로서 떳떳치는 못하나 내겐 죽어서는 안될 이유가 있다.”
 그 말이 떨어지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호목중년인이 일순 전신을 부르르 떨더니 부르짖는 게 아닌가?
 “지독한 놈들··· 벌써 이곳까지!”
 그의 음성과 태도엔 극도의 당황함과 초조함이 배어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삐익!
 날카로운 호각 소리가 울려 퍼졌다.
 호목중년인은 황급히 사방을 둘러보았다. 숨을 곳을 찾는 것이다.
 만리창천은 순간 도와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쁜 사람은 아닌 듯하다.’
 동시에 한 가지 기발한 착상이 뇌리를 스쳤다.
 “이리로 숨으시오!”
 만리창천은 급히 호목중년인을 성소(聖所)에 밀어 넣고 휘장을 닫았다.
 휘휘휙!
 천막을 거칠게 젖히며 사인(四人)의 인물들이 날아들었다.
 하나같이 파사국 복장을 하고 있었으나 전에 보았던 파사국 무사들과는 아예 눈빛부터가 달랐다.
 시퍼런 칼날 같은 눈빛과 전신에서 뻗쳐 나오는 가공할 기도(氣度)가 보는 이를 압도했다.
 그들은 파사국(巴斯國)의 고수(高手)들이었다.
 선두에 비쩍 마른 몸매에 살무사처럼 날카로운 인상의 인물이 서 있었다.
 그는 들어서자마자 얼음 조각을 씹어내듯 내뱉었다.
 “찾아라!”
 나머지 삼인은 부챗살처럼 쫙 갈라지며 천막 안 구석구석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들은 침상 밑이고 천막 틈새까지 철저하게 뒤지면서도 기이하게 성소만은 당연하다는 듯 그냥 지나치는 것이었다.
 “아무도 없소.”
 “이미 빠져 나간 모양이오!”
 삼인이 수색을 마치고 내뱉었다.
 “흠··· 그래?”
 살무사 같은 인상의 사내, 그는 일순 성소의 휘장 쪽과 만리창천의 얼굴을 재빠르게 훑었다.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느냐?”
 순간 만리창천은 자신에게 상대의 눈빛이 칼날처럼 쑤셔 박히는 듯 느껴졌다.
 그러나 그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보지 못했소.”
 “정말이냐?”
 만리창천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살무사 같은 인상의 사내는 한참 동안 만리창천을 노려보더니 한 번 더 성소 쪽에 시선을 던졌다.
 그러나 이내 천막 밖으로 몸을 날렸다.
 “가자!”
 휘휘휘휘!
 나머지 삼인도 그의 뒤를 따라 사라져 버렸다.
 쏴쏴쏴쏴 쏴아아.
 번쩍!
 콰르르릉 꽈꽝!
 폭우와 뇌전의 기세는 더욱 광란(狂亂)하듯 거세어지고 있었다.
 이 밤,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3장 천외추종 후자량
 
 
 잠시 후 호목중년인은 조심스럽게 성소(聖所)의 휘장을 걷고 나왔다.
 “고맙네. 나 금풍도(禁風刀) 방추상(方秋相)이 어린 친구의 도움을 받을 줄이야.”
 어느새 말투마저 변해 있었다.
 도움을 받기도 했지만 그는 만리창천의 순간적인 기지(機智)에 감탄했던 것이다.
 호목중년인, 금풍도 방추상의 예리한 시선이 다시 한 번 만리창천을 훑었다.
 ‘기이하군. 그지없이 평범한 외모에 은은한 기품(氣品)이 느껴지다니······.’
 그는 문득 신광을 빛내며 물었다.
 “자네 이름이 무엇인가?”
 “만리창천. 헌데 방대협(方大俠)께선 어쩌다 그런 중상을 입고 쫓기게 되셨소?”
 “음.”
 금풍도 방추상은 나직한 신음을 흘려냈다.
 “이곳 파사유랑극단은 범상한 곳이 아니네. 나는 진작부터 이들이 파사제국(巴斯帝國)에서 파견한 밀정단(密情團)이 아닌가 의심해 왔지.”
 “파사제국의 밀정단?”
 만리창천의 검미가 일순 좁혀졌다.
 “자네는 무림인(武林人)이 아니고 이번 일에 연관이 없으므로 자세한 이야기는 해줄 수 없네. 다만 나는 중원의 무인(武人)으로서 이들의 내막을 밝혀보고 싶었네. 헌데······.”
 “발각되었단 말씀이군요?”
 “음······.”
 금풍도 방추상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놈들은 치밀하고 강했네. 도(刀)에 관한 한 강남무림에서 적수를 만나보지 못했던 나 방추상이 놈들에게 왼팔을 잘렸을 정도이니······!”
 팔이 잘려나간 어깨는 보기에도 끔찍했다.
 “내가 보기에 나 외에도 몇몇 고수들이 이곳에 잠입(潛入)한 것 같네. 허나 그들 또한 무사하기는 어려울 것이네.”
 그때 만리창천의 뇌리에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이곳에 잠입한 몇몇 고수?’
 순간 그의 눈앞에 흑포죽립인(黑袍竹笠人)과 마의노인(麻衣老人) 두 사람의 모습이 언뜻 스쳐 갔다.
 그때였다.
 우우우우우··· 우우!
 삐익! 삑!
 예의 귀기스런 개 울음소리와 날카로운 호각성이 야공(夜空)을 찢었다.
 금풍도 방추상의 안색이 흠칫 굳어졌다.
 만리창천은 일순 그의 얼굴을 주시했다.
 “어쨌든 이곳을 빠져 나가는 것이 급선무가 아니오?”
 “물론이네!”
 금풍도 방추상은 도(刀)를 움켜쥐고 몸을 일으켰다.
 그의 호목에서 시퍼런 섬광이 빛났다.
 “어떻게 하실 생각이오?”
 “내 잠시 목숨이 급하여 무인(武人)의 부끄러움을 잊었었네. 무인은 죽을지라도 수치스럽게 죽어서는 안되는 법.”
 무인의 부끄러움!
 그것은 벽리향을 유인하여 인질로 삼겠다는 것을 뜻함이리라.
 “내 힘으로 뚫어볼 것이네. 비록 죽음을 당할지라도!”
 금풍도 방추상의 눈빛엔 굴강한 의지가 떠올랐다.
 만리창천은 가볍게 검미를 좁혔다.
 “어렵지 않겠소?”
 금풍도 방추상의 입술꼬리가 조용히 실룩였다.
 “후후··· 나, 금풍도 방추상이 무공(武功)으로만 따진다면 천하에서 서열 일백 위(一百位) 안에 들 수 있으리라 장담하기 어렵네. 허나!”
 일순 그의 눈빛이 뇌전(雷電)처럼 강렬무비한 빛을 뿌렸다.
 “나의 경공술은 지상최고(地上最高)라 칭송되는 천외추종(天外追 ) 후자량(厚子亮)과 비견해도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자부하네.”
 말투에 자긍심(自肯心)이 칼날처럼 서려 있었다.
 “또한 내 비록 왼팔을 잃었으나 오른팔은 건재하네. 반드시 뚫을 것이네!”
 한자 한자 끊어내듯 내뱉으며 금풍도 방추상은 걸음을 떼 놓았다.
 뚜벅 뚜벅!
 그 순간 만리창천의 조용한 음성이 그의 발길을 멈춰 세웠다.
 “방대협께선 두 가지를 잘못 생각하고 있소.”
 금풍도 방추상은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무슨··· 뜻인가?”
 “첫째, 방대협께선 현재 엄중한 부상을 입은 몸이오. 둘째, 조금 전 절대 죽어서는 안될 이유가 있다 하지 않았소?”
 금풍도 방추상의 눈빛이 일순 흔들렸다.
 만리창천은 말을 이었다.
 “죽음을 각오하는 용기는 무인다우나 자신의 입장을 도외시한 용기는 필부의 만용(蠻勇)에 지나지 않소.”
 금풍도 방추상은 신형을 천천히 돌렸다.
 그는 강렬한 시선으로 다시 만리창천을 주시했다.
 “만리창천이라고 했는가? 자네의 말은 옳네. 나 또한 그걸 모르는 바 아니지. 허나 대안책(代案策)이 없지 않은가?”
 말투는 부드러웠으나 따지고 보면 이런 뜻이 아닌가?
 이런 상황에서 자네라고 무슨 뾰족한 수가 있겠는가?
 만리창천은 빙긋 미소 지었다.
 “대안책이 없지는 않소.”
 “음?”
 “성동격서(聲東擊西).”
 “성동격서?”
 “조금 전 그 자들이 물러갔지만 필시 방대협께서 숨었던 성소를 의심했을 것이오. 열어보지 못한 것은 그들의 교법(敎法) 때문이었소.”
 “그래서?”
 “그들은 필경 밖에서 노리고 있을 터, 우리는 이 점을 역이용하면 되는 것이오.”
 “무슨 말인가?”
 “내가 먼저 밖으로 나가 의혹스런 동작으로 빠져 나가면 그들은 반드시 의심을 품고 내 뒤를 미행할 것이오. 그 사이에 방대협께선 반대쪽으로 빠져 나가시오.”
 “오!”
 비로소 금풍도 방추상의 입에서 탄성이 터졌다.
 성동격서(聲東擊西)!
 동쪽에서 소리를 지르고 서쪽을 친다.
 듣고 보면 간단한 지략(智略)이나 사실 이런 위급한 상황에서 이런 착상을 떠올리기란 쉬운 일이 아닌 것이다.
 금풍도 방추상은 만리창천을 새삼 다시 바라보았다.
 놀라움 속에 그의 인물됨이 재인식(再認識)되는 것이다.
 ‘다르다! 처음에는 그저 평범한 소년이라고만 여겼는데··· 사실은 닦여지지 않은 보옥(寶玉)이 아닌가?’
 처음에는 평범했다.
 그러나 다시 보면 뭔가 다르다.
 그리고 또다시 접해 보면 완전히 처음의 느낌과는 다른 기품(氣品)과 깊이가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것이 만리창천이었다.
 “자네가 위험을 감수해 주겠는가?”
 만리창천은 조용히 웃었다.
 “나는 벽리향의 친구이니 별로 위험하진 않을 것이오.”
 금풍도 방추상은 한동안 만리창천을 주시했다.
 그리고 일순 그의 한 손을 움켜잡았다.
 “고맙네! 오늘의 도움··· 결코 잊지 않을 것이네.”
 만리창천은 그의 손등 위에 자신의 손을 얹으며 미소 지었다.
 “시간이 많지 않소.”
 쏴아아― 쏴쏴쏴― 쏴아!
 장대 같은 빗줄기는 여전히 억수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문득 천막이 불쑥 젖혀지며 하나의 얼굴이 내밀어졌다.
 만리창천이었다.
 그는 뭔가를 조심스럽게 살피는 듯 사방을 둘러보더니 슬그머니 밖으로 빠져 나왔다.
 이어 그는 이곳저곳을 기웃기웃하며 수상한 동작을 연출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먹물 같은 암흑 속에서 그의 일련의 행동들을 주시하는 눈빛들이 있었다.
 “흐흐··· 처음부터 저놈이 의심스러웠다. 필시 그놈이나 그놈의 패들에게 연락을 취하려는 것이리라. 조심스럽게 미행하라.”
 대답도 없이 소리도 없이 몇 개의 그림자가 이동했다.
 쏴아아아아!
 빗줄기는 점점 더 거세어지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더 시간을 끌어야 한다!’
 비에 흠뻑 젖은 만리창천.
 그는 여전히 좌우를 두리번거리며 천천히 야산(野山) 쪽으로 다가가기 시작했다.
 얼마쯤 걸었을 때 돌연 소리가 들렸다.
 “멈추어라!”
 음산한 한마디와 함께 만리창천의 좌우에 몇 개의 그림자가 환영처럼 솟구쳤다.
 스슷!
 만리창천의 발걸음이 뚝 멎었다.
 나타난 인물들은 조금 전에 천막으로 날아들었던 사인.
 바로 파사국의 고수들이었다.
 ‘됐어!’
 만리창천이 득의의 고소를 내심 흘리는 순간 선두의 살무사의 인상을 지닌 사내가 음산한 어조로 물었다.
 “어딜 가느냐?”
 만리창천은 짐짓 우물쭈물했다.
 “저, 그게······.”
 “대답하라.”
 “시, 실은··· 뒤가 마려워서······.”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만리창천은 바지춤을 풀며 급히 나무 밑으로 엉거주춤 달려갔다.
 살무사 인상의 사내는 번쩍 사목(蛇目)을 빛냈다.
 그 순간 나무 밑에서 힘주는 소리와 함께 만리창천의 음성이 들렸다.
 “끄응··· 여, 여기가 처음이라 뒷간이 어딘지도 모르고··· 비가 쏟아지니 아무 데서나 볼 수도 없고··· 마땅한 곳을 찾느라······.”
 파사국 고수들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순간 사목의 사내가 싸늘한 음성을 발했다.
 “가자! 그 사이에 달아났을지도 모르겠구나!”
 츄아아아앙!
 그들 사인의 신형은 네 개의 빛줄기가 되어 폭우 속을 꿰뚫었다.
 일순 만리창천은 부스스 일어서며 중얼거렸다.
 “휴, 억지로 힘을 썼더니 아랫배가 다 아프구나.”
 그의 입가엔 득의의 고소가 떠올라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후후후, 제법 영리한 놈이군.”
 어디선가 돌연 얼음 가루를 비비는 듯한 냉막한 괴음성이 들려왔다.
 만리창천은 흠칫 놀라 나무 위를 바라보았다.
 우거진 나뭇가지 속, 어둠에 묻혀 한 명의 흑영(黑影)이 은신하고 있었다.
 그 흑영의 모습을 확인한 순간 만리창천의 눈에는 가벼운 놀람이 스쳤다.
 “당신이었소?”
 흑영(黑影).
 그는 바로 나룻배에서 보았던 흑포죽립인(黑袍竹笠人)이 아닌가!
 그의 전신에 깔려 있는 짙디짙은 죽음의 냄새.
 ‘역시··· 한 마리 늑대 같군.’
 흑포죽립인.
 이토록 거센 폭우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의복에는 물방울 하나 묻어 있지 않았다.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때 흑포죽립인은 다시 냉막무비한 음성을 뱉어냈다.
 “너는 그 계집아이와 어떤 관계냐?”
 만리창천은 간단히 대답했다.
 “친구요. 오늘 처음 만난······.”
 “그래?”
 흑포죽립인의 눈에 일순 기광(寄光)이 스쳤다.
 그러나 그것은 순식간에 사라졌고 대신 짤막한 음성을 뱉었다.
 “가거라.”
 만리창천은 조금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흑포죽립인의 냉막한 음성이 낮게 파고들었다.
 “이곳은 용담호혈(龍潭虎穴), 너 같은 아이가 머무를 곳이 못 된다. 살고 싶거든 즉시 달아나거라.”
 그런데 기이하게도 만리창천은 이 순간 흑포죽립인의 냉막한 음성 속에서 어떤 정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놈들은 금풍도 방추상이 달아난 것을 알면 너부터 찾아 죽일 것이다.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다.”
 만리창천은 가볍게 놀랐다.
 ‘저 사람이 어떻게 그것을 알고 있을까?’
 이때 흑포죽립인은 그의 마음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듯이 나직한 기소를 흘려냈다.
 “후후후! 어떻게 아느냐고 묻고 싶으냐?”
 “그렇소.”
 만리창천은 어이가 없었다.
 “도대체··· 이곳은?”
 “그것도 알려 하지 마라. 알려 했던 자들은 모두 죽었다. 어서 가거라.”
 “내, 참······.”
 만리창천은 실소를 흘렸다.
 “비밀도 많군. 대체 당신은 누구요?”
 순간 흑포죽립인의 눈에 한광(寒光)이 번쩍 솟았다.
 “귀찮은 놈이로군. 나 부세마영(浮世魔影)은 오늘처럼 많은 말을 해본 적이 없다.”
 찰나였다.
 쉬위이이잉! 펑!
 한 줄기 막강한 무형경력(無形勁力)이 만리창천의 가슴을 후려쳤다.
 만리창천은 십 장(丈) 밖으로 쿠당 나가떨어졌다.
 “어억!”
 그러나 기이하게도 아무런 통증도 느껴지지 않았다.
 만리창천이 몸을 막 일으키려는 순간, 툭 하고 시커먼 물체 하나가 그의 앞에 떨어져 내렸다.
 “네가 지난날 내가 알던 한 사람과 닮지 않았다면 목숨을 부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소군보전(昭君寶錢)의 인연이 닿기를 빌겠다.”
 그 음성이 채 끝나기도 전, 흑포죽립인의 모습은 어둠에 흡수되듯 사라져 버렸다.
 “부세마영(浮世魔影)? 괴상한 별호로군. 그리고 내가 누구를 닮았다고?”
 만리창천은 중얼거리며 풀밭에 떨어진 시커먼 물체를 집어들었다.
 그것은 하나의 검은 철전(鐵錢)이었다.
 아무런 표시도 문양도 없었고 단지 전자체로 다섯 글자가 새겨져 있을 따름이었다.
 <昭君拂玉按 (소군은 백옥의 안장을 떨치고).>
 “이건··· 이백(李白)이 지난날 왕소군(王紹君)의 가련한 신세를 노래한 시의 첫 구절이 아닌가!”
 만리창천은 그 시를 알고 있었다.
 그 내용은 이러하다.
 昭君拂玉按(소군은 백옥의 안장을 떨치고)
 上馬啼紅顔(말 위에 올라 홍안을 눈물로 적신다.)
 今日漢宮人(오늘은 한나라 궁인이건만)
 明朝胡地妾(내일 날이 밝으면 호나라의 첩이 된다네.)
 “왕소군은 한조(漢朝) 원제(元帝)의 후궁, 이름은 왕장(王墻)이요, 자(字)를 소군(昭君)이라 했다. 흉노(凶奴)와의 화친을 위해 흉뇨의 수장 단우(單于)에게 보내졌다는 미인(美人)······.”
 만리창천은 눈살을 좁혔다.
 “이 철전의 이름이 소군보전(昭君寶錢)이라······. 무슨 관계가 있기라도 한단 말인가?”
 그는 잠시 흑포죽립인, 부세마영의 마지막 말을 떠올렸다.
 ― 소군보전의 인연이 닿기를 빌겠다.
 ‘인연(因緣)··· 무슨 인연을 말함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는 말이었다.
 “어쨌든 간직해 두기로 하자.”
 만리창천은 소군보전을 품속에 간직했다.
 이어 산 아래쪽을 바라보았다.
 쏴쏴쏴쏴··· 쏴아아!
 폭우가 퍼붓는 가운데 파사유랑극단의 천막들이 세워져 있는 곳은 뿌연 우연(雨煙)이 피어 오르고 있었다.
 개 울음소리도, 호각소리도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금풍도 방추상··· 무사히 빠져 나갔을까?”
 만리창천은 중얼거리다가 문득 한 가지 생각을 떠올렸다.
 ‘파사유랑극단은 파사제국에서 온 밀정단(密情團)··· 사실일까?’
 그는 그곳에서 느껴졌던 어딘지 음산하고 섬뜩한 분위기를 생각했다.
 동시에 벽리향의 티없이 맑고 발랄한 모습을 함께 떠올랐다.
 ‘파사유랑극단이 밀정단이라면 벽리향은 어떤 신분인가?’
 여러 가지 의혹들이 한꺼번에 몰아쳤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만리창천은 발걸음을 돌렸다.
 “이왕 나섰으니 떠나는 게 좋겠다. 향아에겐 미안하지만 무림(武林)의 일에 끼여들고 싶진 않으니까.”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얘야, 넌 잘못 생각하고 있구나. 만일 파사제국이 중원을 침공한다면··· 그것이 어찌 무림만의 일이겠느냐?”
 어디선가 창노하면서도 미약한 한 줄기 음성이 들려왔다.
 만리창천은 소리 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사람의 그림자는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우수수수··· 수수숫.
 비바람에 나무와 풀잎들만이 머리를 풀어헤치고 아우성치고 있을 뿐이었다.
 “누구시오?”
 만리창천은 큰소리로 외쳤다.
 그러자 다시 음성이 이어졌다.
 “노부는··· 극심한 중상을 입었다. 노부를··· 도와줄 수 없겠느냐?”
 만리창천은 직감했다.
 이 음성의 주인 또한 필시 파사국 고수들에 의해 당한 인물일 것이라고······.
 그는 망설이지 않았다.
 “도와 드리겠소이다. 어디 계시오?”
 “네 뒤쪽을 보아라. 계곡이 보일 것······.”
 만리창천은 뒤쪽을 바라보았다.
 폭우에 시야가 흐려 전방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는 한참이나 시력을 집중한 끝에야 삼십 장 가량 떨어진 곳에 가물가물 형태를 드러내고 있는 계곡(溪谷)을 판별해 낼 수 있었다,
 “보이느냐?”
 “가겠소.”
 대답보다 앞서 만리창천은 달리기 시작했다.
 쏴쏴쏴 쏴아아아 쏴쏴!
 무섭게 내리퍼붓는 폭우를 가르며······.
 
 ***
 
 자욱한 밤안개처럼 계곡엔 뿌연 우연(雨煙)이 피어 오르고 있었다.
 기암괴석(奇岩怪石)들이 난립한 계곡의 모습은 흡사 지옥문(地獄門)의 입구를 보는 듯 음산했다.
 그 깊숙한 곳에 하나의 동혈(洞穴)이 은밀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신음은 그 안쪽으로부터 들려오고 있었다.
 “으으으······.”
 만리창천은 상체를 반으로 꺾어 비좁은 동혈 속으로 들어갔다. 칙칙하고 음습한 동혈은 흡사 뱀굴처럼 구불구불 뚫려 있었다.
 거의 기다시피 하여 속으로 들어가면서 만리창천은 적이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렇게 먼 곳에서 음성을 보낼 수가 있다니!’
 얼마나 들어갔을까?
 “웃!”
 만리창천은 흠칫 고개를 젖히며 헛바람을 삼켰다.
 빛(光)!
 지독한 어둠 속에서 시퍼런 인화(燐火)가 번뜩이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그것이 바로 인간의 눈이라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신음이 거기에서 흘러 나왔기 때문이다.
 “으으··· 와 주었구나.”
 만리창천은 대답 대신 화섭자를 꺼내 불을 붙였다.
 팟!
 어둠이 갈라지는 순간 만리창천은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내뱉고 말았다.
 “헉!”
 괴인(怪人)!
 세상에 이토록 참혹하고 끔찍한 몰골의 괴인이 있을 수 있겠는가 싶을 정도였다.
 얼굴도 몸뚱이도 사지(四肢)까지도 시커멓다.
 그러나 그것은 본래의 피부 색깔이 검기 때문이 아니었다.
 숯덩이!
 바로 그것이었다.
 괴인의 전신은 마치 불덩이 속에서 막 끄집어낸 숯처럼 새까맣게 타버린 상태였던 것이다.
 괴인의 팔과 다리는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그대로 부스스 재가 되어 흘러내릴 듯했다.
 “이럴 수가?”
 만리창천은 급히 품속에서 유면(油綿)을 꺼내 불을 붙여 동굴 벽에 걸어놓고 괴인 쪽으로 다가갔다.
 괴인의 시퍼런 눈빛은 계속 만리창천에게 꽂혀 있었다.
 그의 몸에서 생명이 남아 있는 유일한 증표였다.
 그리고 또 하나가 있다면 음성이었다.
 “으··· 놀랐느냐? 얘야······.”
 말을 할 때마다 입언저리에서 푸석푸석 잿가루가 떨어져 내렸다.
 사람이 이런 상태가 되고서도 살아 있을 수 있는가?
 “솔직히 그렇습니다.”
 만리창천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괴인의 입언저리가 묘하게 씰룩였다.
 이번에는 좀더 많은 잿가루가 흘러내렸다.
 “그러고 보니··· 우린 초면이 아니구나. 낮에 나룻배에서······.”
 만리창천은 일순 검미를 좁히며 괴인을 자세히 바라보았다.
 ‘아!’
 그렇다.
 새까맣게 타버린 괴인의 용모는 도저히 분간할 수 없었으나 딱 한곳 눈에 띄는 곳이 있었다.
 보통 사람보다 최소한 세 배는 커다란 괴인의 귀!
 바로 그것이었다.
 괴인은 나룻배에서 만났던 신비의 마의노인(麻衣老人)이었던 것이다.
 “어쩌다가 이런 참혹한 꼴을 당하셨습니까?”
 “으음······.”
 괴인은 괴로움을 억지로 견디고 있는 듯 신음부터 흘려냈다.
 “시간이 많지 않으니··· 노부의 이름부터 말하는 게 쉽겠군. 노부는··· 천외추종(天外追 )··· 후자량(厚子亮)······.”
 천외추종(天外追 ) 후자량(厚子亮)!
 천하에 누가 그를 모르랴?
 지상최강(地上最强)··· 아니, 사상최강(史上最强)이라 극찬되는 경신술의 천하제일고수가 아닌가?
 고금을 통틀어 경공신법(輕空身法)에 관한 한 그를 능가할 자가 없었다.
 광령무벽(光靈無壁)!
 그의 경신술은 가히 빛의 속도를 따라잡는다 했다.
 귀영(鬼影)이라도 그의 추적을 뿌리칠 수 없다.
 그는 경신공의 제일인자이자 추적술의 당대제일인(當代第一人)이었다.
 ‘금풍도 방추상이 비교했던 천외추종 후자량이 바로 이 사람이었군!’
 괴인 천외추종 후자량.
 그가 신음과 함께 들려주는 이야기는 대충 이러했다.
 천외추종 후자량 역시 파사유랑극단의 정체를 의심한 사람들 중의 하나였다.
 그는 추적술의 제일인자답게 단주(團主)의 처소에 잠입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그들이 바로 파사제국(巴斯帝國)의 대중원 침공을 위한 밀정단(密情團)이란 확증을 잡기에 이르렀다.
 그것은 파사제국의 한 수뇌인물로부터 중원의 한 실력자(實力者)에게 전해지는 한 통의 밀지(密旨)였다.
 <모든 준비는 완벽에 이르고 있소. 아니, 완벽 그 이상이라 말해도 좋을 정도이오. 남은 것은 오직 기일(期日)뿐! 백공(伯公)께서 길일(吉日)을 준비하신다면 파사의 전마(戰馬)는 즉시라도 옥문관(玉門關)을 넘겠소.>
 천외추종 후자량은 경악했다.
 그는 그 파사밀지를 품에 급히 집어넣고 단주의 처소를 빠져 나오려고 했다.
 그 순간 파사국 고수들이 덮쳐들었다.
 “난투가 벌어졌다. 허나 그들만이었다면 노부는 패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럼?”
 “문제는··· 파사유랑극단의 단주(團主)······.”
 “단주?”
 “놈은 가공했다. 놈의 무학(武學)은··· 이미 칠백 년 전에 실전(失傳)되었다는 마라대혈화인(麻羅大血火印)······. 노부는 적수가··· 아니었다.”
 무공이란 것을 알지 못하는 만리창천이었으나, 천외추종 후자량을 이런 참혹한 숯덩이로 만들어 버린 것이 바로 그것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마라대혈화인(麻羅大血火印)!’
 천외추종 후자량은 말을 이었다.
 “만일··· 노부가 경신술에 뛰어나지 못했다면··· 그 자리에서 한줌 재가 되어 버렸을 것이다.”
 “무서운··· 무공이군요.”
 “으으으······.”
 천외추종 후자량의 신음이 갑자기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그의 눈빛도 점점 흐려지고 있었다.
 생명의 불꽃이 스러져 가는 것이다.
 만리창천은 안타까웠다.
 그러나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그는 메마른 입술을 떼었다.
 “제가 노인장을 도와 드릴 일이 있다면 돕고 싶습니다.”
 “으······.”
 천외추종 후자량은 힘겹게 눈을 뜨며 만리창천을 주시했다.
 그러던 그의 두 눈에 기광이 떠올랐다.
 ‘기이한 일이로다. 어찌 이 아이의 몸에서 보기(寶氣)가 느껴진단 말인가?’
 천외추종 후자량이 처음 나룻배에서 무심코 만리창천 쪽으로 시선을 돌렸던 것은 오직 곁에 앉은 벽리향 때문이었다.
 그러나 만리창천과 눈빛이 마주쳤을 때 그는 인식을 달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나는 이 아이에게 천부의 기품(氣品)을 보았다. 헌데··· 지금은 또 다르다!’
 다르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이라고 한마디로 표현하기는 어려웠다.
 신비감이랄까? 상대방을 은연중에 압도해 가는 일종의 위엄이랄까?
 ‘놀랍도다. 만일 몇 년쯤 후에 이 아이를 만났다면··· 노부라도 그 앞에 바로 서지 못했으리라.’
 죽음에 이르러 마음이 약해진 때문이 아니었다.
 천외추종 후자량은 이 순간 진심으로 그렇게 느꼈다.
 일순 그의 입술이 떼어졌다.
 “노부를··· 도와주겠는가?”
 “물론입니다.”
 만리창천은 확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파사밀지는··· 불타 버렸네. 오늘··· 보고 들은 이야기를··· 천외제일성(天外第一城)에··· 전해주게.”
 “천외제일성?”
 만리창천은 가볍게 놀랐다.
 ― 천외제일성(天外第一城)!
 무림의 일을 모르는 그도 이름은 익히 들어 알고 있다.
 세인들이 당금 천하무림은 네 개의 하늘(四天)에 의해 좌우된다 했다.
 대정천무맹(大正天武盟)!
 절대사사궁(絶代邪邪宮)!
 천외제일성(天外第一城)!
 마마천교(魔魔天敎)!
 ― 대정천무맹(大正天武盟).
 무림의 영원한 평화를 주장하며 결속된 백만정도인(百萬正道人)의 대연합무맹(大聯合武盟)!
 천년 전통의 구파일방(九派一 )을 비롯, 천하팔대세가(天下八大世家)와 천하 각처에 산재한 일백사십여(一百四十餘) 정도문파가 소속되어 있다.
 대정천무맹의 힘은 정도무림 사상 최강(最强)이라 일컬어진다.
 ― 절대사사궁(絶代邪邪宮).
 네 개의 하늘 중 실질적인 힘으로는 최강(最强)!
 정도의 대정천무맹을 앞지르는 거대한 사도(邪道)의 하늘이다.
 사도무림의 전 거마효웅(巨魔梟雄)들이 소속되어 있다.
 남칠북육십삼성(南七北六十三省)에 일천분타(一千分陀)를 두고 외단고수(外壇高手) 십만(十萬)과 총단(總壇)에 일만정예(一萬精銳)를 거느린 엄청난 거력(巨力)!
 휘하 무사들의 숫자는 무려 팔십만(八十萬)을 헤아릴 것이라 했다.
 ― 천외제일성(天外第一城).
 백년 전 천외(天外)로부터 왔다는 한 신비인에 의해 세워졌다. 그 신비인을 가리켜 세인들은 천외대공(天外大公)이라 불렀다.
 그러나 그곳에 대해 알려진 것은 전무(全無)였다.
 그 규모나 세력은 물론 어느 곳에 위치해 있는지조차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외제일성은 사천(四天) 중의 하나로 당당히 군림하고 있었으니··· 그 이유마저도 세인들은 알지 못했다.
 ― 마마천교(魔魔天敎).
 마도(魔道)의 하늘!
 이 한마디로 모든 것이 설명된다.
 굳이 덧붙이자면, 그들의 마수(魔手)를 참다못해 대정천무맹과 절대사사궁의 연합군단이 그들을 쳐부순 삼십여 년 전까지 천하의 패자(覇者)였다는 사실이다.
 지금은 명분뿐인 하늘.
 그러나 그들은 되살아나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삼십 년 전의 혈한(血恨)을 칼날로 갈면서!
 ‘이 사람은 천외제일성의 인물이었던가?’
 만리창천은 가볍게 검미를 좁혔다.
 천외추종 후자량은 말을 이었다.
 “천외제일성은··· 절강성(浙江省) 남안탕산(南安蕩山)에 있네. 산구(山口)에 이르거든··· 음파곡(陰婆谷)을 찾게.”
 “알겠습니다.”
 “천하의 안위가 달린··· 중대한 일일세······. 파사제국··· 그들이 오기 전에··· 중원(中原)은 대책이 있어야······.”
 “······.”
 만리창천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파사제국이 침공해 온다면 그것이 어찌 무림만의 일이겠는가?’
 이때 천외추종은 만리창천의 눈을 주시하며 말했다.
 “대가로··· 두 가지를 주겠네.”
 “대가를 받을 생각은 없습니다.”
 “아니네······.”
 천외추종은 고개를 저었다.
 “이건··· 자네의 수고에 대한 대가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자네가 전해야 할 중대한 정보를··· 보호하려는 노부의 의무이니까.”
 간단한 말이었다.
 중대한 정보를 가진 만리창천이 중도에서 변고라도 당한다면 큰일이라는 뜻이 아닌가?
 만리창천은 조용히 미소 지었다.
 “제게 무공(武功)을 전수해 주시겠단 말씀이십니까?”
 “잘 알아듣는군······.”
 천외추종의 눈빛에 미미한 감탄이 떠올랐다.
 “한 가지는··· 무공이고··· 한 가지는 저것이다······.”
 그는 시선으로 바닥 한쪽을 가리켰다.
 만리창천이 돌아보니 바닥엔 하나의 옥갑(玉匣)이 떨어져 있었다.
 “그 속엔··· 천외신단(天外神丹)이라 하는 영단(靈丹)이··· 들어 있네. 시체의 뼈에라도 살을 붙일 수 있는 절세영약(絶世靈藥)이지······.”
 만리창천은 그 말에 의혹을 떠올렸다.
 “그걸 왜 노인장께서 복용치 않으십니까?”
 “흐······.”
 천외추종의 입에서 묘한 기성이 새어 나왔다.
 소성(笑聲)인가?
 “노부는··· 이미 뼈마저 녹아 내리고 있다네······.”
 만리창천의 눈빛이 침울하게 변했다.
 그때 천외추종의 눈빛은 일순 진중하게 빛났다.
 “지금부터··· 구결(口訣)을 불러주겠네··· 잘 듣게······.”
 구결(口訣)!
 무공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때 만리창천이 입을 열었다.
 “잠깐! 그 파사밀지(巴斯密旨)에 언급된 백공(伯公)이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지 짐작이 안 가십니까?”
 “그건··· 노부도 모르겠네. 백(伯)이라는 말밖에······. 여러 가지 의미가 있을 수 있으니까······.”
 그렇다.
 백(伯)이라는 말에는 천외추종의 말대로 수십 가지의 의미가 있었다.
 대표적인 것만 해도 대인(大人)이라는 의미이기도 하고 백부(伯父)라는 뜻도 된다. 존경의 호칭이 될 수도 있으며 성(性)이나 이름일 수도 있다.
 그때였다.
 “으으으······.”
 숨이 가빠오는 듯 천외추종은 헐떡이기 시작했다.
 “시간이, 시간이 없다······. 어서 구결을······.”
 “듣겠습니다!”
 만리창천은 짧게 말하고는 눈을 꽉 감았다.
 경청(傾聽)의 자세였다.
 천외추종이 숨을 헐떡이며 들려준 것은 다음과 같았다.
 <노부가 전하고자 하는 것은 무공(武功)이라기보다는 하나의 괴학(怪學)이라 함이 옳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잘 활용하기만 한다면 능히 천하제일고수(天下第一高手)로 군림할 수도 있음을 장담한다.
 광령비영투(光靈飛影透)!
 한마디로 광고절금(曠古絶今)의 경신공부(輕身功夫)이다.
 허나 경신공부라 해서 소홀히 여기지 말라.
 노부는 그것의 불과 사성(四成)의 성취를 얻었으나, 그것만으로도 경신술의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것은 철저한 단순(單純)을 의미한다.
 일체의 교(巧)와 변(變)과 환(幻)을 완전히 삭제해 버린, 지독하리만큼 철저한 단순함에서 최고의 빠름은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의 신체에 취해질 수 있는 자세와 동작들을 일만칠천종(一萬七千鍾)으로 분류하고 삼만사천회(三萬四千回)의 실험을 걸쳐 채택된 완벽한 단순신법(單純身法)!
 공력(功力)의 깊이에 의해 속도는 가감(加減)되나 십성(十成)에 이른다면 말 그대로 빛의 속도를 앞설 수 있다.
 광령(光靈)!
 바로 그것이다.
 광령비영투에는 또 하나 놀라운 비밀이 감춰져 있다.
 육성(六成)의 경지에 이르면 익힌 사람은 가공할 신안(神眼)을 지니게 된다는 사실이다.
 광령투영안(光靈透影眼)!
 한마디로 신의 눈이다.
 천하에 존재하는 그 어떤 움직임도 광령투영안을 벗어날 수 없다.
 빠름의 또 하나의 의미를 아는가?
 그것은 곧 상대성(相對性)이다.
 달리고 있는 사람의 눈에는 걷는 사람의 행동이 지극히 느리게 보이는 법이며 말을 타고 질주하는 사람의 눈엔 달리는 사람의 행동이 느리게 보이는 법이지 않겠는가?
 이런 경우를 상상해 보라.
 빛의 속도로 달리는 사람이 있어 그 눈으로 천하의 모든 움직이는 것을 본다면······.
 그렇다.
 바로 그것이다.
 광령투영안을 지니게 되면 자신이 비록 몸을 움직이지 않고 있더라도 빛보다 빠르게 달리는 상태의 눈으로 사물을 볼 수 있게 되는 거지.
 천하의 어떤 무공초식도, 그 어떤 쾌(快)와 변화(變化)도 지극히 느린 형태로 느긋이 봐 버릴 수 있는 게야.
 허헛, 피하지 못할 초식이 어디 있겠는가?
 한 번 보고 흉내내지 못할 무공이 무엇이겠는가?
 자네가 광령투영안을 지니게 될 때··· 자네 앞에서 펼쳐지는 모든 무공은 바로 자네 것이다.
 통쾌하지 않은가?
 허나 그 경지에 도달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노부는 평생을 노력했으나 사성(四成)밖에 얻지 못했다.
 벌모세수(伐毛洗髓)나 탈태환골(脫胎煥骨)의 기연이 없고서는 오성(五成)을 넘을 수가 없음이니······.
 그러나 실망할 필요는 없다.
 노부의 깨달음을 전수 받는 것만으로도 최소한 경신술에 관한 한 자네를 능가할 인물은 없을 테니까······.
 또한 자네의 골상(骨相)을 보건대 자네에겐 반드시 복연(福緣)이 따를 것이다.
 그것이··· 자네에게 광령비영투의 구결을 전수하는 또 하나의 이유이지······.
 노부의 사후(死後)에라도 이 무학이 찬란한 꽃을 피우도록··· 그렇게 핀다면··· 노부는 지하에서나마 웃을 수 있지 않겠는가······.
 허헛, 무운(武運)을 빌겠다······.>
 
 
 4장 폭우 속의 격전
 
 
 쏴아아아 쏴쏴쏴!
 번쩍! 콰르르릉 콰콰쾅!
 폭우와 뇌전은 여전히 대지를 난자하고 있었다.
 한줌의 잿더미가 되어 버린 천외추종 후자량의 주검을 묻어주고 만리창천은 계곡을 빠져 나왔다.
 그의 머릿속엔 괴학(怪學), 광령비영투(光靈飛影透)의 구결이 맴돌고 있었다.
 그리고 처참하게 죽어 갔던 천외추종의 모습도.
 ‘열 번을 고쳐 생각한다 하더라도 파사제국의 침공은 좌시(座視)할 수 없다!’
 만리창천의 눈빛은 빛나고 있었다.
 ‘일은 중대하고 급하다!’
 사흘 후의 찬시(撰試) 따위는 이제 문제가 될 수 없었다.
 그는 서둘러 남안탕산으로 가야 하는 것이다.
 천외제일성(天外第一城)으로!
 “가자!”
 만리창천의 입에서 짤막한 일갈이 터진 순간이었다.
 스읏!
 그의 신형이 그림자처럼 가볍게 허공으로 떠올랐다.
 아니, 떠올랐다 싶은 순간 그는 이미 놀라운 속도로 폭우를 가르며 날아가고 있었다.
 촤아아아!
 광령비영투(光靈飛影透)!
 비록 공력이 전무(全無)하여 십분지 일의 속도도 내지 못하는 상태였으나, 그것만으로도 강호일류고수의 경신술과 비길만한 정도였다.
 촤아아아······!
 만리창천은 폭우 속을 뚫고 산곡(山谷)을 넘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어디선가 싸늘한 호통이 터졌다.
 “멈춰라!”
 어디선가 싸늘한 호통이 터지는가 싶더니 한 줄기 위맹한 장력이 만리창천을 덮쳐들었다.
 슈아아! 펑!
 “헛!”
 만리창천은 그대로 가슴에 일장을 얻어맞고 삼 장 밖으로 나뒹굴었다.
 그때 허공으로부터 한 줄기 인영이 화살이 내리꽂히듯 지면으로 내려섰다.
 “흐흐흐, 역시 네놈이었군.”
 그 인물은 얼음 조각을 씹어 내뱉듯이 중얼거리며 만리창천을 향해 다가왔다.
 그는 바로 파사국 고수들 중 선두에 섰던 살무사 사목인(蛇目人)이었다.
 “쥐새끼 같은 놈! 성소를 피로 더럽히고 죄인을 빼돌렸지. 찢겨 죽을 각오는 되었느냐?”
 만리창천은 가슴을 움켜쥔 채 비틀비틀 일어나며 사목인을 바라보았다.
 가슴이 빠개질 듯 아팠고 기혈이 뒤틀린 듯 구역질이 났다.
 “으윽······.”
 핏덩이를 한 모금 토했다.
 피를 토하고 나자 머릿속은 오히려 좀 맑아진 느낌이었다.
 만리창천은 손등으로 피 묻은 입가를 쓱 닦았다.
 “그가 빠져 나가긴 한 모양이군.”
 사목인은 천천히 다가들며 비릿한 조소를 흘려냈다.
 “흐흣, 놈은 이 산을 빠져 나가지는 못할 것이다. 네놈은 너 죽을 일이나 염려해라.”
 그러면서 우수(右手)를 느릿하게 치켜올렸다.
 순간 만리창천의 안색이 굳어졌다.
 죽음!
 그 말이 지금처럼 확실하게 피부로 느껴진 적은 없었다.
 ‘길은 없는가?’
 사목인의 입가엔 악마처럼 잔혹한 미소가 묻어 있었고 두 눈에선 살광(殺光)이 빛을 발했다.
 “흐흐흐! 가거라.”
 무섭게 쏟아지는 폭우를 뚫고 한마디 날카로운 외침이 들려온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멈춰! 사륜사후(斯倫蛇侯)!”
 “음?”
 사목인의 눈꼬리가 일순 치켜졌다.
 그러나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리기도 전이다.
 쉬애애액!
 흡사 뇌전과도 같은 한 줄기 푸른빛이 사목인의 전면에 내리꽂혔다.
 그것은 푸른 벽의궁장을 걸친 미소녀였다.
 벽리향(碧利香)!
 다름아닌 벽리향이었다.
 그녀는 내려서기가 무섭게 만리창천을 향해 외쳤다.
 “오빠! 다친 데는?”
 “괜찮다.”
 만리창천이 고개를 끄덕이자 벽리향은 사목인에게 신형을 돌렸다.
 그녀의 두 눈에서 번쩍 섬광이 빛났다.
 “무슨 일이죠, 사륜사후?”
 사목인, 사륜사후(斯倫蛇侯)는 음침하게 웃었다.
 “흐흐, 향 아가씨께서 상관할 일이 아니오. 비켜 주시오.”
 “흥!”
 벽리향의 코웃음이 날았다.
 “보면 모르는가? 이 사람은 향의 친구야!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나 이 사람에게 손끝 하나라도 댄다면 용서하지 않겠어.”
 사륜사후의 입가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향 아가씨, 저놈은······.”
 “닥쳐요!”
 벽리향의 일갈이 사륜사후의 말을 매정하게 잘라 버렸다.
 이 순간의 벽리향의 태도에는 소녀답지 않은 위엄이 있었다. 그에 반해 사륜사후는 그녀를 몹시 조심하는 듯한 자세였다.
 일순 벽리향은 아미를 바짝 좁히며 싸늘하게 내뱉었다.
 “물러가세요. 모든 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그녀는 만리창천의 손을 잡자마자 그대로 신형을 뽑아 올렸다.
 “자, 가요, 오빠.”
 휘익!
 두 사람은 폭우가 쏟아지는 야천(夜天)을 가르며 날아가기 시작했다.
 “으······.”
 사륜사후의 입에서 짐승 같은 신음이 흘러 나왔다.
 이빨을 갈았으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단주(團主)마저도 조심스럽게 대해야 하는 신분이 아닌가?
 바로 그때였다.
 스슥!
 한 인영이 유령처럼 흐느적거리며 사륜사후 쪽으로 서서히 다가왔다.
 청미청염(靑眉靑髥)의 꼽추노인.
 만리창천이 기분 나쁜 노인이라 느꼈던 타율(駝律), 바로 그가 아닌가?
 사륜사후는 그를 발견하자 급히 허리를 꺾었다.
 “죄송합니다, 파사(把師).”
 그러나 타율은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만리창천과 벽리향이 사라진 허공을 노려보며 음산하게 내뱉었다.
 “후후후후, 사륜사후! 지옥견(地獄犬)을 풀어라.”
 “지옥견을 말입니까?”
 “놈들은 향 아가씨의 냄새를 알고 있다. 아가씨를 다치지 않고 그 녀석을 없애버릴 수 있는 방법은 그것뿐이다.”
 “존명!”
 버언쩍!
 콰르르르··· 르르··· 릉!
 엄청난 뇌성벽력(雷聲霹靂).
 폭우는 더욱 사납게 기승을 부리고 폭우 속의 운명(運命)은 광풍처럼 치닫고 있었다.
 
 ***
 
 쏴아아아 쏴쏴쏴.
 휘이이잉!
 폭우는 거센 바람에 실려 휘몰아치고 있었다.
 폭풍우가 휘감기는 어느 절봉(絶峯).
 “으······.”
 한 사람이 비틀거리고 있었다.
 전신이 피범벅이 된 채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비틀거리는 그 모습은 말 그대로 혈인(血人)이었다.
 그런데 그 주위에는 부러진 병장기들, 그리고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수십 구의 참혹한 시신(屍身)들이 있었다.
 일견키에도 처절한 악전고투(惡戰苦鬪)가 치러진 듯했다.
 “가, 감히 본 태자(太子)를 죽이려는 놈들이 있었다니······.”
 씹어내듯 중얼거리는 그의 한 손엔,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한 자루 금검(金劍)이 들려 있었다.
 일순 번쩍 한 줄기 뇌광(雷光)이 암천을 찢으며 그의 얼굴을 백사(白蛇)처럼 핥고 지나갔다.
 콰르르릉··· 꽈꽈꽝!
 순간적으로 그의 용모가 드러났다.
 절세미청년(絶世美靑年)이었다.
 일견 여인처럼 수려하면서도 장부의 굴강한 기상이 산악처럼 어려 있는 용모였다.
 관자놀이까지 쭉 뻗어 올라간 힘찬 검미(劍眉)와 우뚝한 콧날, 꽉 다물린 주사빛 입술은 그야말로 미장부(美丈夫)의 완벽한 전형을 보는 듯했다.
 “우욱······.”
 일순 그의 입술을 비집고 한 덩이 검붉은 선혈이 흘러 나왔다.
 “지독한 놈들··· 허나 나 숭헌린(崇軒鱗)이 죽지 않은 이상··· 본궁의 명예를 걸고서라도 네놈들의 배후를 밝혀내고 말 것이다!”
 비틀 그는 한 손으로 피범벅이 된 가슴을 움켜쥐고 힘겹게 걸음을 떼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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