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도일대기 1권
서장 마화(魔火)의 출현
귀기(鬼氣)가 오싹 감도는 한 절곡(絶谷)!
칼날같이 뾰족한 삼면 험봉(驗峰) 아래 대략 반 경(頃) 정도의 분지가 보인다.
분지를 뒤덮고 있는 것은 수천 그루의 앙상한 고목들.
적어도 수백 성상 이상을 지낸 듯 하나같이 아름드리 거목들이다.
그런데 정작 놀라운 것은 고목의 모습이었다.
수천 그루의 거목들이 나뭇잎 하나 매달리지 않은, 고사(古死)한 것이었다.
흡사 채찍질에 몸부림치는 아녀자의 모습처럼 고목의 가지들은 서로 엉켜 있었다.
고오오오······!
괴괴한 기운이 흐르는 고수림(枯 林) 중앙에는 분위기를 더해 주듯 시커먼 흑석(黑石)으로 지은 석전(石傳)이 음울하게 서 있다.
수십 개의 원형 석주가 하늘을 떠받친 가운데 곱게 다듬어진 장방형의 검은 거석들.
그것들은 수십 명의 장한들이 힘을 합쳐도 들지 못할 정도로 거대했다.
석전은 삼층.
언뜻 천여 평에 달하는 일층은 공기 구멍 하나 보이지 않고 다만 검은 철만이 거대한 반월형을 그리고 있었다.
이층은 일층에 비해 규모는 작았으나 용도를 알 수 없는 네 개의 철문이 굳게 입을 닫고 있었다.
삼층 역시 이층보다 소규모였는데, 하나의 철문이 보였다.
한마디로 납골탑(納骨塔) 같은 괴기스러운 석전.
한 층의 높이가 오 장여 도합 십오 장에 달하는 웅장한 건물이었다.
으스스한 기운이 흐르는 석전 앞에는 수백 구의 악귀나찰(惡鬼羅刹)상이 험상궂은 형상으로 일정한 방위와 간격을 가지고 서 있었다.
쭉 찢어진 입에 불거진 눈, 뾰족한 송곳니, 날카로운 손톱에 잔인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형형각각의 악귀상들.
마치 금방이라도 괴소를 터뜨리며 덤벼들 것 같았다.
천하의 어떤 철담동장의 사내라도 머리칼이 곤두서며 공포에 질릴 만한 곳이다.
하늘은 먹장구름에 덮여 있는 삼경 무렵.
위이잉!
한차례 스산한 바람이 스치고 지나가자 수천 그루의 앙상한 고목들이 전신을 파르르 떨었다.
그때였다.
꽝! 우르릉!
굳게 닫혀 있던 석전의 검은 철문이 요란한 소리와 함께 두 쪽으로 갈라졌다.
그리고는 두 줄기 인영이 화살처럼 뛰쳐나왔다.
휘익! 쉬익!
그들의 신형은 마치 번개와도 같아 눈 깜짝할 사이 악귀나찰상을 지나 앙상한 고수림에 이르렀다.
두 사람은 회포 차림이었는데, 나이는 팔순 가량으로 흰 수염이 가슴까지 이르는 선풍도골의 노인들이었다.
“으으··· 서둘러야 한다.”
“어서 빠져 나가 이 사실을 알려야 해.”
이들의 안면은 경악과 공포에 질려 핏기 한점 보이지 않는 경직된 모습이었다. 극심한 두려움과 초조함이 전신을 감돌고 있는 것이었다.
이윽고 두 사람이 고수림에 이르렀을 때였다.
석전 철문으로부터 한 줄기 잔인한 괴소가 흘러 나왔다.
“으흐흐흐. 마화(魔火)의 비밀을 탐하고도 살기를 바라다니······. 어리석은 미물들이로구나. 흐흐흐흐흐······.”
인정이라고는 티끌만치도 섞이지 않은 음성.
이는 전신의 피를 꽁꽁 얼릴 것처럼 음냉무비해 달리는 두 사람마저도 움찔 놀라는 기색이었다.
“이, 이런······.”
“웨··· 웬놈이냐?”
그러나 귀기스러운 음성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대신 그와는 대조적인 교성이 뒤를 이었다.
“호호호! 엉뚱한 데 신경 쓰지 말고 어서··· 어서 해줘요.”
음성은 애교가 철철 넘치는 삼십대 여인의 것이었다.
음성에는 뭇사내의 심금을 뒤흔들고 간장을 들끓게 만드는 요기가 감돌았다.
그 마력은 수십 년 고행을 거듭한 고승, 도인이라도 욕정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선정적인 교태가 흐르고 있었다.
달리던 두 사람은 여인의 매혹적인 음성에 전신을 부르르 떨 수밖에 없었다.
“이··· 이 교소는······.”
“으으··· 실로 엄청난 마소(魔笑)로다. 여인의 목소리 따위에 이토록 심기가 흔들리다니······.”
두 사람의 노인.
조금 전까지의 두려운 표정은 씻은 듯이 사라지고 흥분과 격정에 뒤범벅된 표정을 지었다.
“흐윽······. 이제 됐어요. 그만··· 그만······.”
철문 안으로부터 거친 숨소리와 함께 여인의 희열에 찬 묘한 신음이 전해왔다.
“흐흐흐! 아직 멀었다. 여봐라! 더욱 거칠게 다루거라.”
예의 음산하기 짝이 없는 음성이었다.
“헉헉! 아··· 알겠습니다.”
“훅! 후욱! 이 계집도 정말 엄청나구나.”
“우리를 한꺼번에 상대하면서도 아직··· 흐윽!”
이어 사내의 거친 숨소리가 고조되었다.
헌데 그것은 한 사내의 것이 아닌 세 사내의 욕정에 찬 호흡이었다.
“아아··· 흐윽··· 나··· 난······.”
여인의 교성은 차마 귀를 가지고 들을 수 없을 정도로 질탕하게 변했다.
“흐흐흐, 아직 멀었다. 네년이 겨우 이 정도에 떨어질 계집이 아님은 이미 알고 있단 말이다.”
세 사람의 남자와 정사를 벌이는 한 여자.
그리고 그 광경을 지켜보며 즐기고 있는 또 한 사내.
목소리만 가지고도 어떠한 일이 벌어지는지 너무도 명백한 상황이다.
“여보, 더욱 더··· 흐으흑!”
“헉헉! 허억!”
쾅!
일순간 격렬한 타격음이 들렸다.
이어 세 사내의 짤막한 비명도 들려왔다.
“이제 네놈들은 비켜라! 내 친히 저 계집을 상대하리라.”
“하악! 하아··· 빨리··· 어서 나를······.”
“흐흐, 정말 백옥같이 아름다운 몸매로다. 나도 이제······.”
음산한 음성도 점점 호흡이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이 계집을··· 이 음탕한 년을··· 마구 짓밟아주마.”
“아아··· 아··· 여보······.”
실로 상상을 불허할 괴이한 상황임에 틀림없다.
밖으로 새어 나오는 거칠고 음탕한 소리로 미루어 희세의 난잡한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으으······.”
“우··· 도저히 못 참겠······.”
고수림 앞에 서 있던 두 노인은 석전 안으로부터 들려오는 음란무비한 괴성에 전신을 떨었다.
그들은 눈앞에 어리는 사욕의 환영을 애써 지우려는 듯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급기야 머리칼을 쥐어뜯으며 몸부림쳤다.
바로 그때였다.
스윽! 스스슥!
경미한 인기척이 들리는가 싶더니 망사 옷을 걸친 십 오륙 세 가량의 소녀 네 명이 고수림 사이에서 모습을 나타냈다.
“누··· 누구냐?”
그때까지 음욕의 그물에 갇혀 자신과 싸우고 있던 좌측의 노인은 정신을 번쩍 차리고 고성으로 외쳤다.
“호호호호호!”
“호호··· 그런 건 따져서 무얼 하겠어요? 나으리들······.”
망사 옷의 네 소녀는 들은 척도 않고 천천히 두 사람 앞으로 다가섰다.
네 소녀가 걸친 망사 옷은 완전 투명한 것으로 속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나이에 비해 한껏 부풀은 유방과 검은 숲이 어둠 속에서도 완연히 빛을 발했다.
그녀들은 요염하기 짝이 없는 미모를 지니고 있었다.
또한 조금도 수치심을 느끼지 못하는 듯 음탕한 미소를 머금고 출렁이는 앞가슴과 풍만한 엉덩이를 묘하게 흔들면서 다가왔다.
“머··· 멈추어라.”
좌측 노인은 전신을 한차례 부르르 떨고는 뒤로 일 보 후퇴했다.
그러나 우측 노인은 욕정에 이글거리는 시선으로 그녀들의 백옥 같은 몸매를 노려보고 있었다.
“호호호호! 왜 이러실까?”
“글쎄 말이야. 우리가 뭘 어쨌다구?”
이윽고 네 소녀들은 돌연 생긋 미소를 던지더니 둘씩 몸을 나눠 좌우로 덮쳐갔다.
“물러서랏!”
좌측 노인은 일갈과 함께 오른 소매를 뿌리쳤다.
콰르르르르······!
그를 덮쳐가던 두 소녀는 경쾌한 신법으로 좌우로 갈라섰다.
“호호호호호!”
“노친네가 근력도 좋으셔.”
좌측 노인은 두 소녀의 신법의 영민함에 깜짝 놀라 우측 노인을 슬쩍 살폈다.
일순 그의 두 눈이 왕방울만 하게 불거졌다.
‘저··· 저런······!’
우측 노인은 이때 왼팔로 두 소녀를 끌어안은 채 오른손으로 한 소녀의 미끈한 허벅지를 더듬고 있었다.
“호호호! 간지러워요.”
소녀는 음탕하게 웃으며 새하얀 두 팔을 들어 우측 노인의 목을 끌어안았다.
“진인(眞人), 미쳤소?”
좌측 노인의 호통에도 아랑곳 않고 우측 노인의 손은 더욱 집요하게 소녀의 깊은 계곡을 파고들었다.
“멈추시오! 진인!”
재차 노갈이 터짐과 때를 같이하여 좌우의 두 소녀가 몸에 걸친 망사 옷을 벗어버렸다.
백옥같이 새 하얀 두 소녀의 살결이 드러나고 탄력 있는 유방과 미끈한 허벅지가 목전에 펼쳐졌다.
좌측 노인은 이를 접하자, 깊은 수양을 쌓은 몸임에도 불구하고 가슴이 탁 막히고 눈앞이 아찔해짐을 느꼈다.
“오호호호! 우리 몸이 어때요?”
“한번 같이 어울리고 싶지 않나요?”
두 소녀는 그의 심중을 더욱 부채질하려는 듯 기묘한 자세를 취하며 뇌살적인 교태를 지어 보였다.
좌측 노인은 재빨리 맑은 공기를 한 모금 들이마셔 흐트러지려는 정신을 바로잡은 뒤 고성으로 외쳤다.
“이 더러운 요물들아! 냉큼 비켜라!”
그는 다소 망설이다가 살수를 펼치기로 작정했다.
한 번 살수를 펼치기로 작정을 하자 그의 행동은 전광석화 같았다.
번개같이 일장일지(一掌一指)를 구사해 두 소녀의 요혈을 노린 다음 우측 노인을 향해 펼쳐갔다.
파파파팍!
그의 출수는 극히 빨라 손을 들었다고 생각하는 찰나 우측 노인을 덮치고 있었다.
헌데 그보다 한 수 빠르게 두 소녀의 몸이 움직였다.
각기 번개같이 일장씩을 갈겨 반격을 가한 두 소녀는 전광석화같이 노인의 좌우를 동시에 노렸다.
펑! 퍽!
두 차례의 음향이 주위를 흔들고 노인의 좌우에는 예리한 두 가닥 지풍이 밀려오고 있었다.
‘아뿔싸! 정말 보통 계집들이 아니구나.’
좌측 노인은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남을 구하기는커녕 자신의 몸도 돌보기 어렵다는 것을 지각했다.
그는 황망히 좌우 장을 일월병휘(日月 輝)식으로 내갈긴 다음, 가볍게 딛고 팔보등공(八步登空)의 경공으로 삼 장 가량 솟구쳤다.
이것은 허공 중에서 시전한 관계로 절정고수가 아니면 감히 꿈도 꿔보지 못할 절묘한 동작이었다.
그러나 두 소녀는 전라의 몸을 묘하게 흔들면서 장세를 막고 허공을 향해 장력과 지력을 쏘아댔다.
펑! 펑!
벽공장 부딪치는 소리가 천지를 뒤흔들며 노인은 반 자 정도 더 상승했다.
“삼은진인(杉隱眞人), 제발 무당(武當)의 명예를 생각하여 제정신을 차리시오!”
그는 크게 외치고는 어기비공(馭氣飛空)으로 허공을 삼 장이나 미끄러지듯 나아가 가볍게 지면을 내려섰다.
‘도저히 안되겠다. 마화의 비밀도 있고 하니, 일단 나라도 이 자리를 피해야겠다.’
생각만큼이나 행동도 빨랐다. 그의 몸은 한 줄기 질풍으로 변해 고수림 속으로 몸을 날렸다.
휘이익!
두 전라의 소녀는 그가 도주하자, 차가운 냉소를 한 번씩 터뜨릴 뿐 추격하지는 않았다.
삼은진인이라는 노인은 그가 사라진 사실도 모르고 두 소녀를 희롱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헉헉! 어서··· 어서······.”
석전 안에서도 그칠 줄 모르는 기성과 거친 숨소리가 흘러 나왔다.
삼은진인은 덥석 두 소녀를 껴안고 고수림 속으로 몸을 날렸다.
“호호호호······.”
“호호호호······.”
두 소녀의 득의에 찬 음탕한 웃음소리가 허공을 메아리치더니 이윽고 주위는 잠잠해졌다.
***
한편 두 소녀의 합공을 벗어난 좌측 노인은 한 마리 새로 변한 듯 날렵하게 고수림을 벗어나고 있었다.
휘이익!
그는 뒤쫓는 사람이 없음을 알고 일단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으나 경각심은 늦추지 않았다.
“아! 노부가 팔십여 성상을 무공일도(武功一道)에 전념해 천외일성(天外一聖)이라는 명호를 얻었건만 모든 게 허명(虛名)이었도다. 한낱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계집들에게 쫓겨 도주해야 하다니··· 실로 일생일대의 치욕이로다.”
절세의 경공을 펼치는 그였지만 내면에 흐르는 굴욕감은 실로 눈물겨운 것이었다.
천외일성과 삼은진인.
그들은 무림 내에서의 명망이 일세의 기인으로 숭앙되었던 바 그의 심적 고통은 필설로 형언하기 어려웠다.
두 사람은 평소 친분이 두터워 무림에서는 강호이기(江湖二奇)라 불러주었다.
삼은진인은 무당의 장로였다.
그리고 장문인도 그를 보면 쩔쩔맬 정도로 성격이 강직한 자타가 공인하는 무당파의 고수였다.
그러한 삼은진인과의 수십 년 교분을 버린 채 도망치는 천외일성의 비참한 심정을 누가 알아줄 것인가?
한동안 죄책감에 사로잡혀 무작정 질주하던 천외일성은 자신의 막중한 책무를 깨달았다.
“어쨌든 노부는 혈장전(血藏殿)에 마화(魔火)가 간직됐다는 것을 알아냈다. 빨리 이 사실을 무림 전체에 알려 다가올 혈겁을 막아야 한다.”
천외일성은 고수림을 벗어난 즉시 구곡양장(九曲羊 )의 길을 따라 쏜살같이 질주했다.
천외일성 앞에는 하나의 좁은 협로가 전개되고 있었는데, 그 협로 좌우에는 까마득한 절벽이 밑을 보이지 않은 채 어둠을 담고 있었다.
이윽고 산봉에 가려 혈장전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였다.
질주하던 그가 우뚝 신형을 멈추고는 경악의 일성을 내뱉었다. 누군가 유령처럼 앞을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다··· 당신은 누구요?”
외치는 그의 음성은 두려움에 떨리고 있었다.
마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정도의 협로.
바로 그 입구에 검은 바람막이를 걸친 장발의 괴인이 등을 돌리고 앉아 있었다.
“······.”
천외일성의 물음에 장발괴인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침묵만을 지켰다.
“귀하는 뉘시기에 이곳······.”
“으흐흐흐흐······.”
장발괴인은 그의 말허리를 자르며 사악하기 짝이 없는 괴소를 터뜨렸다.
그의 음성에 천외일성은 수십 년 수양도 잊고 전신을 가볍게 떨었다.
“흐흐흐··· 천외일성! 네놈을 기다린 지 오래다.”
내뱉듯 말하며 돌아서는 장발괴인의 얼굴을 본 천외일성은 다시 한 번 놀랐다.
사람의 의복을 걸치고 사지육신을 가지고 서 있는 괴인은 인간이 아닌 흉측한 괴물이었다.
부숭부숭 온몸을 덮고 있는 털, 남루한 천 조각을 기워 놓은 듯한 얼굴, 움푹 꺼진 가운데 시뻘건 흉광을 발하는 눈, 무엇이 갉아먹은 듯 두 구멍만 빠끔히 뚫린 코, 턱밑까지 쭉 찢어진 입, 한쪽밖에 없는 귀.
실로 온 세상의 흉악함을 한데 합친 것처럼 흉물이었다.
“당신이 사··· 사람이오?”
“내가 사람이냐구? 으흐흐흐흐··· 웃기는군.”
장발괴인은 돌연 하늘이 무너져라 울분에 찬 괴소를 터뜨리기 시작했다.
“으흐흐흐··· 정말 웃기는 말이야. 으흐흐흐흐!”
천외일성은 자신의 말이 상대를 격노하게 했음을 알고 내심 아차 했다.
그러나 이미 입밖에 꺼낸 말이다. 주워담을 수도 없는 일이라 묵묵히 그의 다음 행동을 주시할 수밖에 없었다.
장발괴인은 한참 동안 미친 사람처럼 울어댔다.
그러더니 홀연 괴소를 뚝 그치고 흉측무비한 안면을 씰룩이며 외쳤다.
“그 말 한마디로 네놈의 얼굴은 만신창이가 되어 참혹한 죽음을 맛볼 것이다.”
“대체 귀하는 누구시오?”
“지옥에서 구걸하는 네 에미, 애비에게 물어봐라!”
장발괴인은 한차례 욕설을 지껄이더니, 손가락이 여섯 개나 달린 오른손을 곧장 내밀었다.
곧 매서운 장풍이 휘몰아쳤다.
천외일성은 감히 경솔하게 상대할 수 없다는 생각에 팔성의 공력을 끌어 모아 신중하게 맞받아 쳤다.
꽈꽝!
뇌성벽력이 대지를 강타하듯 무서운 폭음과 함께 두 사람의 우열은 금방 드러났다.
장발괴인은 제자리에서 꼼짝도 않고 흉물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데 반해 천외일성은 뒤로 반 보 정도 밀려났다.
“흐흐! 제법이구나. 하지만 이번에는 네 대갈통을 바숴 바가지를 만들겠다.”
일단 승기를 잡은 장발괴인은 거대한 독수리가 먹이를 덮치듯 위에서 아래로 일장을 내리갈겼다.
“도룡수(屠龍手)!”
천외일성도 자신이 수십 년 간 고련해 터득한 비장의 절초 도룡수를 떨쳐냈다.
꽈꽈꽝!
수천 개의 뇌성벽력이 일시에 터지는 경천동지 폭음이 협도를 뒤흔들고 수십 리 밖까지 울려 퍼졌다.
두 사람 사이에는 강한 회오리바람이 짙은 먼지를 일으켰고, 장력의 위력에 반 자 깊이의 구덩이가 패였다.
“으음······.”
천외일성은 무거운 신음을 토하며 무릎을 꿇었다.
명백한 패배요, 죽음의 시발점이었다.
그는 처연한 음성으로 외쳤다.
“노부가 예서 죽는다만 너희 사마(邪魔)들은 반드시 멸망당할 것이다.”
말을 마친 그는 조용히 눈을 감더니 돌연 전신을 세차게 떨었다. 자결을 하려는 것이었다.
“이놈이 자결을? 멈춰라!”
그가 자결하는 것을 간파한 장발괴인이 일지를 날리며 덮쳐갔을 때는 이미 늦고 말았다.
천외일성의 몸은 썩은 나무토막처럼 힘없이 앞으로 꼬꾸라졌다.
“에잇! 이 빌어먹을 놈 같으니!”
장발괴인은 살기가 하늘 끝까지 치솟아 그의 시신을 똑바로 눕힌 다음 옆구리에 힘을 가했다.
우드득!
듣기 꺼림칙한 음향이 들리면서 천외일성의 옆구리는 움푹 꺼졌다.
우드득! 우드득!
장발괴인은 좌우 갈비뼈를 모조리 짓이긴 후, 머리를 향해 힘껏 왼발을 내질렀다.
퍼억! 휙!
수천 근의 힘이 실린 발길질에 천외일성의 두개골은 산산조각으로 변해 절벽 아래로 사라졌다.
그래도 직성이 풀리지 않는지 그는 천외일성의 전신 뼈마디를 짓밟아 가루로 만들었다.
“죽일 놈! 감히 본좌 앞에서 자살을 하다니······.”
퍼억!
그는 다시 발을 들어 천외일성의 시체를 절벽 아래로 걷어찼다.
그때였다.
“이제 그만해요.”
별안간 매혹적인 교성에 이어 두 명의 망사 옷 소녀가 나타났다.
삼은진인과 천외일성을 유혹하던 소녀들이었다.
“흐흐흐··· 마침 신경질이 나던 차에 잘 왔구나.”
그들을 보자 장발괴인의 눈에 짙은 욕정이 어른거리며 바람처럼 소녀들에게 달려들었다
“호호호··· 뭐가 그리 급한가요?”
“삼은진인에 대해서는 궁금하시지도 않은가봐?”
음탕한 소녀의 음성이 주위를 흔들었다.
“흐흐흐, 그런 놈 따위야 알 바가 아니다. 지금 본좌에게 급한 일은······.”
장발괴인은 어느 틈엔가 솥뚜껑처럼 징그러운 손으로 두 소녀의 앞가슴을 주무르고 있었다.
“아이, 아파요. 급하시기는······.”
“흐흐흐··· 너희들은 진정 사내 맛을 아는 계집들이다.”
“호호호! 그러니까 찾아왔죠.”
거친 숨소리와 여인의 교성이 뒤범벅된 가운데 음산한 바람이 한 줄기 불어왔다.
1장 죽음의 무가장(武家莊)
깊은 심야(深夜).
칠흑 같은 어둠과 바람 소리, 천둥번개 사이로 거센 비가 몰아치고 있었다.
번쩍! 콰르르르르!
쏴아아아―! 쏴아아―!
황량한 교외에 쓸쓸하게 서 있는 한 채의 장원.
육중한 대문 위에 무가장(武家莊)이라는 편액이 보였다.
세찬 폭풍우가 붉은 대문을 사정없이 후려쳤건만 꼼짝도 안하고 닫혀 있는 정문.
그 무가장의 정문을 향해 한 인영이 폭풍우를 가르며 전광석화와 같이 질주해 왔다.
타타타탁!
이윽고 정문 앞에는 장검을 맨 십 칠팔 세의 소년이 멈춰 섰다.
준수한 용모에 예리한 눈동자를 지닌 소년.
그는 잠시 정문을 쳐다보았다.
“아··· 이게 대체 얼마만인가.”
무척이나 감회가 어린 듯한 표정이었다.
이윽고 그는 잠시 망설이더니 문에 손을 가져갔다.
삐이걱!
빗장이 잠기지 않았던지 정문이 두 쪽으로 갈라졌다.
“이상하군. 문이 열려 있다니?”
소년은 약간 의아하다는 표정을 짓더니 안으로 신형을 날렸다.
백석(白石)이 곱게 깔린 길을 따라 십여 장쯤 나아가니, 몇 채의 건물이 좌우로 나타났다.
스스스슥!
소년은 좌우의 건물에는 조금도 신경을 쓰지 않고 곧장 질주해 한 대청 앞에 우뚝 섰다.
다음 순간 그의 입에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아앗!”
대청 안은 먹물을 뿌린 듯 캄캄했는데, 그 입구에 시체 한 구가 쓰러져 있기 때문이었다.
시체는 양팔이 잘린 채 두 눈을 크게 뜨고 죽었는데, 아랫배엔 단검 하나가 박혀 있었다.
소년은 망연자실 한동안 서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곧 두 줄기 눈물을 흘렸다.
“아··· 버님! 이게 대체 무슨 일······.”
그는 말문이 막히는지 더 이상 계속하지 못했다.
이때 음산한 괴소가 대청 안으로부터 터져 나왔다.
“흐흐흐! 이제 왔느냐!”
“누구냐?”
소년은 전광석화처럼 몸을 날려 대청 안으로 뛰어들었다.
“흐흐흐! 무가(武家)의 마지막 핏줄. 역시 기다린 보람이 있었구나.”
일순 어둠 속으로부터 음산한 괴성과 함께 예리한 지풍이 날아왔다.
소년은 좌우 장을 들어 지풍을 막았다.
퍽! 퍼퍽!
소리와 함께 소년은 고통성을 발하며 대청 밖으로 밀려났다.
“으음··· 숨어 있지 말고 정정당당하게 겨루자!”
“흐흐흐흐! 미안하다만 네가 싸울 상대는 따로 있단다.”
괴인의 음성이 사라지기도 전이었다.
휙! 휘익!
두 인영이 소년의 등뒤에서 나타났다.
그들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 천을 두르고 있었는데, 반짝이는 두 눈동자만 보였다.
“너희들은 누구냐! 냉큼 정체를 밝혀라!”
소년은 긴장된 목소리로 물었다.
“무자룡(武子龍)! 네 부모와 똑같은 질문을 하는구나.”
대청 안의 괴인이 냉랭하게 말했다.
무자룡이라 불린 소년은 이들이 바로 부친을 살해한 불구대천의 원수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는 원한과 살기에 찬 목소리로 말을 했다.
“좋다. 두려우면 말하지 않아도 좋다. 어차피 네놈들은 모두 나의 손에 죽을 테니까!”
“흐흐흐! 정말 간이 부은 놈이로군. 여봐랏! 어서 저놈의 주둥이를 찢어놔랏!”
그의 명이 떨어지자 한 흑의인이 일장을 갈겨왔다.
휙!
소리가 들리더니 장력은 정확히 현기혈을 노렸다.
무자룡은 이미 살기가 하늘 끝까지 닿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치밀었다.
“그래, 좋다! 어서 오너라!”
대갈일성을 외치면서 오른손에 진기를 잔뜩 모아 그대로 받아쳤다.
펑!
굉음에 이어 제이장이 밀려왔다.
헌데 이번 장력은 전보다 위력이 배가 된 장력이었다.
무자룡은 자신의 공력으로는 상대의 적수가 못됨을 간파했다. 그러나 면전에 부친이 참혹하게 죽어 있는 마당에 죽음이 두려울 리 없었다.
“아앗!”
그는 기합성을 발하며 등뒤의 장검을 번개같이 뽑아 상대의 장력을 쪼개 나갔다.
“흥! 건방진 애송이 녀석!”
흑의인은 냉소를 날리더니 그대로 장검을 받았다.
쐐액! 쾅!
장력이 흐트러지는 순간 그의 손이 신쾌무비하게 움직였다.
흑의인은 두 개의 손바닥을 동원해 장검을 움켜쥐어 힘을 가했다.
뚝!
장검이 부러졌다. 놀라운 공수입백인의 수법이었다.
“아니! 손으로 검을 부러뜨리다니······.”
무자룡은 안색이 백짓장처럼 새하얗게 변했다.
그러나 불끈 호승심이 치솟은 무자룡은 반동강이 난 장검을 세차게 휘둘렀다.
“하지만 아직 멀었다.”
그러자 흑의인은 오른손을 뒤로 쳐들더니 가볍게 한 번 흔들었다.
그 동작은 지극히 유연해 마치 작별 인사를 하며 손을 흔드는 것처럼 보였다.
무자룡은 크게 의아했으나 더 생각지 않았다.
그런데 놀라운 현상이 발생했다.
한 줄기 봄바람과도 같은 기운이 몰려오더니 전신을 휘감는 것이었다.
무자룡은 내심 ‘아차!’ 했으나 이미 늦고 말았다.
전신의 맥이 탁 풀리고 눈앞이 아찔했다.
“흐흐흐! 음화기공(陰火奇功)에 격중되면 한 시진 이내에 죽는다.”
무자룡은 힘은 없지만 분노가 실린 목소리로 외쳤다.
“으음··· 이 비겁한······.”
“흐흐흐! 절세의 무공 앞에 죽으면서 비겁하다는 소리를 하다니··· 참으로 어리석은 놈이 아닌가.”
괴인의 음성을 들으며 무자룡은 힘없이 쓰러졌다.
“나를 원망할 필요 없다. 모든 게 젊고 아름다운 에미를 둔 탓이니······.”
혼미해지는 와중에서도 상대의 말은 충격적이었다.
‘무, 무엇이? 이 모든 일이 어머님 탓이라고? 그렇다면······.’
그러나 무자룡의 생각은 그리 길게 이어질 수 없었다.
“완전히 목숨을 끊어 놓아라!”
괴인의 냉혹한 일성이 떨어졌다.
그러자 흑의인은 천천히 손을 들었다.
무자룡은 이를 갈았다.
‘으으······. 부모의 원수를 눈앞에 두고도 오히려 죽음을 기다려야 하다니······.’
실로 위기의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바로 그때였다.
“우··· 우······!”
사람의 혼을 부르는 듯한 길다란 장소가 멀리서 들려왔다.
장소는 처음 사오 리 밖에서 들리는 듯 긴 여운을 끌며 아련히 어둠을 흔들었다.
그러나 순식간에 그 소리는 장원 앞까지 이르더니, 곧이어 번쩍 하고 백영이 번뜩였다.
“누구냐?”
괴인의 일갈이 터졌을 때는 백영의 모습이 사라진 후였다.
신쾌하게 빠른 속도로 상대가 또 움직인 것이었다.
“흥! 네놈들 따위가 내 정체를 물을 자격이 있느냐?”
차가운 냉소가 들리더니 무언가 대청 앞에 내려섰다.
휘익!
그러자 상대를 본 두 흑의인은 이구동성 비명을 지르며 후퇴했다.
“으아악!”
“우왓! 괴··· 괴물이다!”
면전에 내려선 백영은 칠순이 훨씬 넘은 백포(白浦) 노인이었다.
허리를 뒤덮는 백발과 긴 수염을 배까지 늘어뜨린 노인.
그러나 정작 놀라운 것은 노인의 안면이었다.
바늘 하나 꽂을 여유도 없이 도상, 검상(刀傷,劍傷)이 뒤덮고 있어, 누구라도 등골이 오싹할 몰골이었다.
백포의 괴인은 쓰러져 있는 무자룡을 번개같이 쓸어보고는 대청 안을 향해 외쳤다.
“거기 숨어 있는 잡종은 누구냐?”
이 말에 괴인의 자존심이 크게 상한 듯 돌연 살기가 실린 앙청광소가 터져 나왔다.
“크하하하핫!”
대청 안에서 들려온 광소에 눈살을 찌푸리던 백포노인이 광소에 맞대응해 소리쳤다.
“시끄럽다, 이놈아!”
일갈이 터지는가 싶더니 백포괴인의 오른 소매가 펄럭였다.
꽈쾅!
경천동지 폭음이 천지를 뒤흔들었다.
백포괴인의 소맷바람은 대청을 송두리째 날려보냈다.
기왓장이고, 기둥이고, 흙이고 할 것 없이 와르르 무너져 사오 장이나 밀려났다.
“흐흐흐흐! 노부의 권풍수(捲風袖) 맛이 어떠냐?”
순간 무너져 버린 대청의 기왓장 더미 안에서 굉음과 함께 흑의의 괴인이 튀어나왔다.
그 역시 두 눈만 반짝이고 있었다.
백포노인은 그러한 모습을 보며 비웃듯이 말했다.
“흐흐흐! 어디 다친 데는 없느냐?”
비꼬는 듯한 물음에도 대청 안의 인물은 백포노인의 가공할 무공에 차마 경시를 할 수가 없었다.
그는 짐짓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보다 귀하의 드높으신 명호를 듣고 싶소이다.”
“절정마신(截情痲神)!”
백포괴인은 내뱉듯 외치며 일지를 구사했다.
파파팍!
“에엣! 저, 절정마신··· 크윽!”
흑의괴인은 경악성과 함께 손바닥을 움켜쥐고 세 걸음이나 후퇴했다.
“흐흐흐! 혈심지(血心指) 맛이 꽤 괜찮았지?”
백포괴인 즉, 절정마신은 괴소를 날리며 차갑게 노려봤다.
흑의괴인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귀하가 아직 살아 있었다니 실로 놀라운 일이오.”
절정마신은 흑의괴인의 말에 냉소하며 말했다.
“아직 죽으려면 오십 년은 있어야 할 것이다. 어쨌든 오늘은 피를 보고 싶지 않으니 냉큼 꺼져라!”
“그, 그건······.”
“오라? 굳이 피를 보고 싶단 말이지?”
“아··· 알겠소이다.”
흑의괴인은 천자의 사면을 받은 사람처럼 정중히 목례를 하고는 몸을 날렸다.
두 흑의인들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의 뒤를 따랐다.
“흐흐흐······. 쓰레기 같은 놈들······.”
절정마신은 그 모습을 보며 득의의 웃음을 날리더니, 가볍게 신형을 박찼다.
그러나 곧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허공에서 신형을 선회해 다시 지면에 내려섰다.
휘익― 척!
그는 땅에 쓰러져 있는 무자룡을 살피더니 잠시 무엇인가 생각에 잠겼다.
‘이놈. 이제 보니 근골이 괜찮은데······?’
이윽고 절정마신은 무자룡을 옆구리에 끼었다.
“우··· 우······.”
허공을 향해 재차 장소를 발한 그는 화살같이 질주해 갔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무자룡은 차가운 한기를 의식하며 깨어났다.
“이제 일어났느냐?”
귓전을 두드리는 음성에 벌떡 몸을 일으킨 그는 눈앞의 괴인을 보고 반 보 후퇴했다.
“다, 당신은 누구······.”
“흐흐흐! 죽음 직전에서 네놈을 구해줬다.”
“그게··· 사실이오?”
“노부가 너 같은 어린애한테 거짓말을 해서 무슨 소용이 있느냐?”
“그게 사실이면······.”
무자룡은 말을 하다말고 원독에 가득 찬 시선으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부친의 참혹한 죽음과 흑의괴인이 마지막으로 던진 가증스러운 말이 떠올라 주먹을 불끈 쥐었다.
“노부는 네 체내에 침투해 있는 한독(寒毒)을 제거하기 위해 무려 반 시진 이상을 허비했다.”
“그 자는 어찌 되었습니까?”
“흑의를 걸친 작자 말이냐?”
“그렇습니다.”
“가벼운 훈계를 내리고 보내줬다.”
“저희 모친은 못 보셨습니까?”
무자룡의 말에 백포괴인은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다.
“너희 조손 삼대를 모두 살려야 한단 말이냐?”
“그건 아니지만··· 다만 자식된 도리로 모친의 안위가 궁금해서······.”
“노부, 다른 사람은 만난 적도 없고 본 적도 없다.”
무자룡은 내심 무거운 한숨을 토해냈다.
흑의괴인의 마지막 말 즉, 젊고 아름다운 모친을 둔 죄로 죽는다는 말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그건 그렇고. 너는 앞으로 어쩔 셈이냐?”
백포괴인의 차디찬 음성이 귓전을 두드렸다.
“불구대천의 원수가 있는데 어찌 팔짱을 끼고 있겠습니까. 설사 죽음을 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흑의인을 찾아 나설 것입니다.”
무자룡은 고성으로 외치고는 뚜벅뚜벅 걸어나갔다.
“흥! 그 무공 가지고는 맞아죽기 십상이다.”
“······.”
“그런데 어딜 가는 게냐?”
“선배님께서 구해 주신 은혜, 살아 있는 한 기어코 보답하겠습니다.”
무자룡은 걸음을 멈추고 정중히 예를 표했다.
“흐흐흐! 은혜를 갚겠다구? 그렇게 쉽게 될까?”
“가능한 한 노력하겠습니다. 그럼··· 이만 소생은 물러가겠습니다.”
“멈춰라!”
백포괴인의 일성이 허공을 갈랐다.
“무슨 가르침이라도 계시는지?”
“노부가 아는 바, 네 원수의 무공은 천하에 짝을 찾기 힘든 절정고수였다. 네가 진정으로 부친의 원수를 갚겠다면 단 한 가지 방법만이 존재한다.”
“그게 무엇입니까?”
“흐흐흐! 나 절정마신을 사부로 모시는 길이다.”
“선배님은 그를 능가할 무학이 있습니까?”
“으흐흐흐! 네 안목이 좁아 노부의 명성을 듣지 못했나 보다만······.”
백포괴인 즉 절정마신은 잠시 말을 멈추더니, 가볍게 일장을 휘둘렀다.
스스슥!
이 일장은 극히 부드러워 마치 봄바람이 풀잎을 스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장력이 동굴 벽에 부딪치자, 실로 놀라운 현상이 발생되었다.
꽈쾅!
고막이 찢어질 듯한 웅맹한 폭음과 동시에 동굴 천장과 벽이 동시에 무너져 내렸다.
무자룡이 깜짝 놀라 몸을 날려 피하려는 찰나였다.
백영이 번쩍 눈앞을 스치는가 싶더니 그의 몸은 누군가의 팔에 끼여 동굴 밖에 내려졌다.
우르릉!
동굴이 사정없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무자룡의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가볍게 휘두른 일장치고는 놀라운 위력이구나.’
절정마신은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후후! 믿지 않아도 그만이다만··· 어쩌면 오늘 중으로 노부가 천하제일의 영예를 얻을지 모른다.”
그는 말을 마치고 허공을 향해 길다란 장소를 발했다.
무자룡은 그의 말이 과장이 섞여 있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는 마음속의 결심을 가지고 무릎을 끓었다.
“제자, 무자룡 사부님을 배알합니다.”
“으하하핫! 그래 착한 내 제자야.”
‘어쩌면 두 번 다시 이분 같은 고인을 만나지 못할지 모른다. 내 여기에서 굴러드는 복을 찬다면 평생 아버님의 원한을 좌시해야 하는 불효자가 될 것이다.’
순간이었다.
절정마신의 눈가에 이상야릇한 광채가 스치고 지나갔다.
언뜻 보면 장난기 같다고 할까? 어쨌든 기묘한 미소가 입가에 번졌다.
무자룡은 다소 꺼림칙했으나 이미 내딛은 걸음이라 깊게 생각지 않았다.
“이제부터 너는 노부의 제자로 생사고락을 같이 한다. 만일 노부의 명을 어길 시에는 이 모양이 될 것이다.”
절정마신은 번개같이 일장을 동굴 입구를 향해 갈겼다.
장력은 눈 깜짝할 사이 동굴을 무너뜨렸다.
꽈르릉!
거대한 굉음을 발하며 수천 수만 근의 바위가 허물어져 순식간에 자욱한 먼지가 사오 장을 뒤덮었다.
먼지가 가라앉았을 때, 동굴의 모습은 지상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이 장법은 쇄악장(碎岳掌)으로 무엇이든 맞기만 하면 가루로 변한다. 일장에 최하 일만 근의 힘이 깃들어 있지.”
“정말 무서운 장법입니다.”
“흐흐흐! 쇄악장은 노부가 맨 처음 터득한 장법으로 가장 약한 위력을 가지고 있지.”
“예엣! 그게 약하다구요?”
“쇄악장보다 열 배나 위력이 강한 신공도 있다.”
절정마신의 얘기는 무자룡의 입을 딱 벌어지게 만들었다.
“노부는 삼 년 이내에 너를 천하에 적이 없는 무적의 고수로 키우겠다.”
“제자가 아둔해 그 같은 성취를 이룰지 의문입니다.”
“어쨌든 빨리 가자.”
“어디를 말입니까?”
“흐흐흐! 조금 전에 말했지 않느냐? 천하제일의 자리를 노리러 간다고······.”
“하오나······.”
“무슨 문제가 있느냐?”
절정마신은 눈살을 찌푸렸다.
“부친께서 참혹한 시신으로 변해 원한의 눈을 감지 못하고 계신지라······.”
“으음, 그렇다면 그 일부터 처리해야겠군.”
“감사하옵니다.”
무자룡은 절정마신의 옆구리에 끼여 무가장으로 향했다.
***
절정마신의 경공 신법은 극히 뛰어나 순식간에 수십 리를 달려 무가장 담 앞에 당도했다.
그는 한 마리 박쥐처럼 가볍게 담을 넘어 예의 그 대청 앞에 멈춰 섰다.
“허어!”
먼저 타성을 발한 절정마신은 무자룡을 땅에 내려놓으며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정말 괴이한 일이로군!”
“아··· 버님!”
무자룡은 한 소리 부르짖고는 대청 안으로 뛰어들었다.
응당 있어야 할 시신이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었다.
무자룡은 대청 안과 좌우 협실을 샅샅이 뒤졌으나, 부친의 시신은 발견되지 않았다.
“잠깐 기다려라, 노부가 근처를 수색해 보겠다.”
절정마신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한 줄기 연기로 변해 모습을 감췄다.
무자룡은 멀거니 하늘만 쳐다보았다.
대략 차 반잔 마실 시간이 흘렀다.
“이 녀석아! 아무리 찾아도 네 아비의 시신은 보이지 않는구나.”
절정마신의 음성은 무자룡 내면에 잠재해 있던 뜨거운 비애를 일시에 격발시켰다.
“우우··· 이럴 수가······. 아버님! 시신조차 거두지 못하는 이 불효를 꾸짖어 주십시오.”
고개를 푹 떨구고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걱정 마라. 이 다음에 그놈들이 노부의 눈에 띈다면 전신 삼백육십 관절을 모조리 부러뜨리겠다.”
절정마신도 울화가 치미는지 대청을 향해 우장을 수평으로 내갈겼다.
파파파파··· 콰쾅!
그러자 전면에 서 있는 대청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이때였다.
“게 누구냐?”
목이 쉰 듯한 컬컬한 소리가 담 밖에서 들리더니, 잠시 후 두 노인이 허공을 가르며 내려섰다.
두 노인은 청, 홍 장포를 걸치고 있었다.
나이는 쉰 살 가량이고, 음흉한 용모를 지니고 있었다.
절정마신이 짐짓 음흉한 괴소를 흘려냈다.
“흐흐흐! 어디서 굴러먹든 작자들인데 노부 앞에서 아가리를 놀리느냐?”
두 사람은 절정마신의 흉측한 얼굴을 보자, 아연실색해 한걸음씩 후퇴했다.
‘으으··· 인간이 어떻게 저런 몰골을······.’
‘저 자도 진정 인간이란 말인가?’
절정마신은 살광을 번득이며 좌우 장을 두어 번 비벼댔다.
“그렇지 않아도 손이 근질근질하던 참인데 마침 잘 와줬다. 일단 냉큼 명호부터 밝혀라!”
그러자 우측에 선 염소수염의 노인이 앞으로 일 보 나서며 고성으로 외쳤다.
“우린 천지쌍흉(天地 凶)이라 한다! 네놈들이야말로 무슨 이유로 여기서 얼쩡거리는 게냐?”
그는 내심 두려움이 있었지만 짐짓 거드름을 피웠다.
천지쌍흉!
이들 두 사람은 중원 각처를 횡행해 살인, 약탈, 방화, 강간 등을 본업으로 삼는 작자들이었다.
그러나 지닌바 무공이 높아 강호에서 감히 정면 도전하는 사람이 없어 흉명이 하늘을 찌를 듯했다.
“으하하하! 천지쌍흉이라고?”
절정마신은 기가 막히다는 듯 한차례 길다란 장소를 터트렸다.
장소 소리는 어찌나 우렁찼던지 어둠을 꿰뚫고 수 리를 진동시켰다. 근처에 서 있는 몇 그루의 꽃나무들까지 부들부들 떨 정도였다.
이윽고 절정마신은 웃음을 그치고 냉랭한 어조로 말했다.
“쥐새끼 같은 놈들이 호랑이 수염을 건드리다니! 정말 살고 싶지 않은 모양이구나!”
그는 한마디 내뱉고는, 다시 음산한 괴소를 터뜨렸다.
무자룡은 그가 비록 자신의 사부이지만, 괴소에 머리칼이 곤두서며 소름이 끼쳤다.
“흥! 네놈은 천지쌍흉이라는 대명을 듣지 못했느냐?”
이번에는 좌측 노인이 쭉 찢어진 메기입을 놀리며 말했다.
“천지쌍흉? 무림도상에 그런 놈들도 있었나?”
“뭐라구? 이런 죽일 놈!”
염소노인은 두 눈을 찢어져라 부릅떴다.
“흐흐흐! 감히 본좌 절정마신 앞에서 잔재주를 부리다니······.”
“에엣! 저··· 절정마신!”
염소노인이 질겁을 하며 황급히 두 걸음 후퇴했다.
그러나 절정마신은 어느새 그의 옆에 접근해 있었다.
“우선 갈비뼈부터 가루로 만들어 주지!”
“아아악!”
염소노인은 절정마신의 재빠른 공격에 미처 대항도 하지 못했다. 그는 곧 처절한 비명을 지르면서 옆구리를 움켜쥐고 나뒹굴었다.
“크흐흐! 소리가 괜찮군!”
절정마신은 유령처럼 미끄러져 염소노인의 관절에 발을 올려놓았다.
“아이구! 서, 선배님··· 살려··· 주십시오. 소인··· 눈이 있어도······.”
“아가리 닥쳐!”
호통성에 이어 우둑! 듣기 꺼림칙한 음향이 주위를 진동시켰다.
“악!”
염소노인은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며 혼절해 버렸다. 극심한 통증에 정신을 잃은 것이었다.
“으하하핫!”
절정마신은 광기가 하늘 끝까지 솟구쳤는지 드높은 광소를 터뜨렸다.
무자룡은 사부의 돌변한 광태(狂態)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자신도 모르게 뒤로 한걸음 물러서고 말았다. 이것은 비단 그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메기입의 노인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절정마신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전신의 맥이 쭉 빠지고 두 다리의 기운이 어디론가 사라져 옴짝달싹도 할 수 없었다.
‘에쿠! 여기서 이런 대마두를 만나다니······. 일진이 사나운 정도가 아니라 까딱하면 제삿날이 되겠군.’
그가 죽어라 공포를 느끼는 것도 당연지사였다.
절정마신.
그는 사마외도(邪魔外道)의 원조로 불리는 마종사(魔宗師)의 네 제자 중 한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그저 삼십육계(三十六計)가 최고다!’
내심 부르짖은 그는 절정마신의 광소를 틈타 후다닥 등을 돌려 도주했다.
그가 꽁지가 빠지도록 도주하는 순간이었다.
“거기 섯!”
저승사자와도 같은 절정마신의 호통에 왼쪽 다리가 뜨끔하더니 금방 마비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이를 악물고 담을 뛰어넘었다.
“어리석은 놈!”
절정마신의 냉소가 들리더니 그는 등뒤에서 강하게 끌어당기는 흡인력을 느꼈다.
“아이쿠!”
그의 몸은 땅바닥에 사정없이 내동댕이쳐졌다.
“흐흐흐! 네놈이 미꾸라지처럼 도망가려고 했다만 자인흡기(磁引吸氣) 앞에서는 어림도 없는 일이다.”
“저, 절정 선배님! 제발 한 목숨 살려 주십시오. 그리하면 소인이 알고 있는 무림의 일대 기보(寄寶)······.”
메기노인은 쓰러진 몸을 황급히 일으켜 무릎을 꿇고는 두 손을 마구 비벼댔다.
“이놈이 감히 노부를 매수해?”
절정마신의 두 눈에서 번갯불 같은 살광이 번뜩였다.
“그게 아니오라······.”
“으흐흐흐! 노부가 어떤 신분인데 그따위 쇳조각이나 썩어빠진 비급 나부랭이에 마음이 흔들릴 줄 아느냐!”
그는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하더니 가볍게 일지를 갈겼다.
“아아악!”
메기노인의 왼쪽 눈이 정확히 파열되고 분수 같은 선혈이 흘러내렸다.
“그에 대한 징계다. 차후로는 조심하도록 해라.”
“아, 알겠습니다.”
메기노인은 두 손으로 검붉은 액체가 흘러내리는 왼쪽 눈을 감싸쥐며 고통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흐흐흐! 그럼 그래야지.”
절정마신의 입가에 잔인한 미소가 슬쩍 번졌다.
순간 메기노인의 오른쪽 눈에 또다시 일지가 격중되었다.
“으아아악! 내 눈! 내 눈!”
이 한 번의 출수는 극히 빨라 무자룡으로서는 언제 갈기고 언제 손을 내렸는지 전혀 보지 못했다.
메기노인은 순식간에 두 눈을 잃자 얼굴 전체가 검붉은 선혈로 물들었다.
“흐흐흐! 노부를 보고 무릎을 꿇지 않은 죄에 대한 징계일 뿐이다.”
“사부님!”
보다못한 무자룡이 나섰다.
그의 표정이나 어투로 미루어 숨이 끊어질 때까지 참혹한 고통을 줄 것 같았다.
“왜 무서우냐?”
“그런 것이 아니오라··· 너무 잔인하신······.”
“이 사부가 잔인하다고?”
절정마신의 음성이 일순 차갑게 변했다.
“제자는 다만······.”
무자룡은 은연중 두려움을 느껴 고개를 떨구었다.
“알았다. 네 부탁이니 일장에 때려 죽여주지!”
그는 말을 마치고는 오른 소매를 가볍게 펄럭였다.
퍼엉!
그러자 땅에 무릎을 꿇고 있던 메기노인의 몸이 일 장이나 떠올랐다.
“서, 선배님······.”
메기노인의 당황해 하는 음성을 귓전에 흘린 채 절정마신의 일장이 작렬했다.
퍽!
하는 둔탁한 음향에 이어 메기노인은 처절한 비명을 토하며 실 끊어진 연이 되어 담을 넘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네놈도 가거라!”
절정마신은 혼절해 있는 염소노인을 자인흡기로 허공에 띄운 다음 앞가슴에 일장을 갈겼다.
퍽!
그의 몸은 허공을 가르며 십여 장 밖으로 사라졌다.
그 충격에 짓이겨진 다리 한짝이 몸과 분리되어 담 아래 툭! 하고 떨어졌다.
무자룡은 속으로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아! 사부님이 저토록 냉혹무비하다니······. 앞으로 세인들은 나를 보고 소마두라 부르겠구나.’
그가 암울해 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의 선친 무전화(武詮和)는 평소 악을 미워하고 인(仁)을 가까이 하는 사람이었다. 때문에 무자룡에게 절기보다 인의(仁義)가 앞선다는 말을 수차 했었다.
기실 무자룡은 무가의 절전무학(絶傳武學)을 십이성 익힌 후, 강호견문을 넓히기 위해 집을 나섰다.
석 달 동안 강호를 주유하던 그는 부친의 급서를 받고 밤을 새어 달려왔던 바, 무가장의 참변을 접하게 되었다.
부친이 보낸 서찰에는 급히 상의할 일이 있다는 내용 외에 다른 말은 없었다.
때문에 그것은 조그만 단서도 되지 못했다.
어쨌든 무자룡이 암울한 심정이 되어 서 있었다.
절정마신이 위로의 말을 던졌다.
“상대가 시신까지 은닉한 걸로 미루어 불원간 다시 네 앞에 나타날 것이다. 그때 이 사부가 책임지고 그 자들을 사로잡아 자초지종을 규명할 테니 너무 심려 말아라.”
언제 살인을 했냐는 듯 인자한 음성이었다.
“제자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흉수는 시신에 목적이 있는 게 아니라 저에게 용무가 있는 듯하니, 쉽게 훼손하지 않으리라 생각이 듭니다.”
“흐흐흐! 그럼 그 일을 잠시 접어두고 사조님을 뵈러 가자.”
“사조님께서는 지금 어디에 계시온지요?”
“여기서 남으로 백 리 정도만 가면 뵈올 수 있다.”
“그럼 동백산(桐栢山) 부근이겠네요?”
“풍엽곡에 계시다.”
절정마신은 말을 마치고, 무자룡을 옆구리에 끼었다.
무자룡은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지만 자신의 경공이 사부와는 천양지차라 입을 다물었다.
“우우······!”
절정마신은 길다란 장소를 발하는가 싶더니 한 마리 거조로 변해 어둠을 갈랐다.
무자룡은 두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시신의 행방과 모친의 실종 그리고 흉수의 정체 등을 연결시켜 사건을 분석했다.
‘흉수의 말로 미루어 어머님은 살아 계심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누군가에 의해 어디론가 끌려가시고, 흉수만 남아 나를 기다렸다는 결론이 아닌가? 그 자는 어떻게 내가 올 줄 알고 기다리고 있었을까? 아버님은 절대 그같은 말을 하지 않으셨을 텐데······.’
갖가지 생각이 떠올랐으나 어느 것 하나 뚜렷한 해답이 나오지 않았다.
무자룡은 처연한 탄식을 토하고 심기일전 맑은 공기를 들이마셨다.
순간 사부 절정마신의 몸에서 기이한 향기가 느껴졌다.
그는 잘못 맡았나 싶어 다시 냄새를 맡았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후각을 자극하는 은은한 기향(寄香)이 전달되었다.
‘아니? 여자도 아닌데 무슨 향내가 난담.’
내심 중얼거리던 그는 나직한 탄성을 발했다. 절정마신의 손목이 아녀자처럼 가늘고 손 또한 가늘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몸매는 호리호리하고 옷을 뚫고 전해 오는 감촉 또한 매끄러운 것이었다.
‘사부님이··· 여자?’
이 같은 충격적인 예상은 그로 하여금 의혹의 구름을 불러일으켰다.
만일 절정마신이 추측대로 여자의 몸이라면 얼굴에 쓴 것은 한 장의 인피면구에 불과할 테고, 그 뒤에 숨겨 있는 진면목은 쭈글쭈글한 노파의 얼굴임이 자명한 일이었다.
무자룡은 사부의 비밀을 풀어볼까 생각했으나, 곧 그의 냉혹한 성격이 떠올라 단념하고 말았다.
2장 혈투
절정마신의 경신재간은 신화경에 이르러 밥 한끼 지을 시간이 흐르자 곧 동백산 앞에 당도했다.
“사조님께서는 묻는 말 이외에 말하는 걸 싫어하시니 경솔하게 나서지 마라.”
“각별히 명심하겠습니다.”
무자룡은 이렇게 대답했지만 실상은 절정마신의 음성을 주의 깊게 듣고 있었다. 물론 절정마신이 과연 여자인지를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절정마신은 그의 심중을 모른 채, 다시 신형을 날려 한 계곡으로 질주했다.
좌우로 길게 뻗은 능선 가운데 펼쳐진 협곡을 따라 십여 리 전진했다.
무자룡이 살펴보니, 수백 년은 지난 듯 울창한 거목들이 빽빽이 들어찬 수림이 끝없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앞으로 한걸음 내딛기 어려울 정도로 울창했다.
절정마신은 몇 구비인가 골짜기를 돌았다.
그러더니 홀연 돌출된 삼 장 높이의 바위 앞에서 신형을 세웠다.
“이제 다 왔다.”
그는 나직이 한마디 던지고는 훌쩍 바위 위로 올라섰다.
그리고는 짧게 한 번 휘파람을 불었다.
휘파람 소리가 채 사라지기도 전에 그는 다시 바위를 박차고 수림 위로 몸을 날렸다.
그는 나뭇잎과 가지를 밟으며 단숨에 이삼 리를 달렸다.
무자룡은 그의 신법에 내심 혀를 내둘렀다.
‘무공이 초절한 사람은 풀 위에 서서 반나절도 견딘다더니 과연이구나!’
이런 생각을 할 때, 절정마신의 몸이 아래로 하강했다.
휘이익!
그곳에는 대략 천 평은 됨직한 평지에 사면이 숲으로 둘러싸인 가운데 한 채의 석옥(石屋)이 자리잡고 있었다.
절정마신은 무자룡을 내려놓고 석옥을 향해 외쳤다.
“제자, 절정이 지금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석옥 안에서는 아무 기척도 없었다.
절정마신은 조금도 놀라는 기색 없이 석옥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무자룡이 그를 따라 석옥에 당도하니 문틈으로 희미한 불빛이 보였다.
끼이익!
절정마신은 가볍게 마른기침을 토하고는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섰다.
무자룡은 잠시 망설이다가 절정마신을 따랐다.
실내에는 네 개의 궁등(宮燈)이 사면 벽에 걸려 휘황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에 침상이 하나 있었는데, 그 위에 백발이 성성한 노인 하나가 죽은 듯 누워 있었다.
침상 좌우에는 장대한 키에 구순 가량의 두 노인이 시립해 있었다. 각기 흑백의 대조적인 옷을 걸친 그들 역시 백발이 성성했다.
또한 침상 앞.
그곳에는 두 노인과 한 노파가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노파 뒤에는 서른 살 가량의 요염하게 생긴 궁장미부가 서서 힐끔힐끔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두 노인과 노파 역시 백발을 허리까지 늘어뜨리고 있었다.
두 사람이 들어서자 절정마신과 무자룡을 번개같이 번갈아 쓸어보고는 시선을 거두었다.
절정마신은 침상 앞에 무릎을 꿇고 비분에 찬 어조로 입을 열었다.
“부족한 이 몸이 사부님의 전갈을 받고 불철주야 달려 이제 겨우 도착했습니다. 모쪼록 혜지(慧智)를 되찾으시어 병마(病魔)를 극복하시기를 진심으로 바라옵니다.”
“그래··· 이제야 모두··· 왔구나.”
침상 위의 노인 흐릿한 시선을 발하며 모기소리만큼 미약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의 모습을 살피던 무자룡은 하마터면 눈물을 흘릴 뻔했다.
사실 노인의 얼굴은 뼈 위에 종이를 바른 듯했고, 눈은 움푹 패였으며, 광대뼈는 톡 불거져 입김만 세게 불어도 숨이 끊어질 듯한 처연한 몰골이었다.
“사부님!”
절정마신은 비애에 가득 찬 음성으로 한 소리 울부짖고는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꼈다.
“어··· 어서··· 일어··· 나거라. 내가··· 긴히··· 할 얘기가······.”
“사부님, 말씀은 나중에 하시고 우선 몸부터 조리를······.”
울부짖는 절정마신을 향해 세 줄기 싸늘한 한광이 쏘아졌다가 곧 사라졌다.
“네 마음은··· 안다만······.”
노인은 말을 하다말고 스르르 눈을 감았다.
“사부님!”
네 사람과 절정마신이 이구동성으로 외쳐 불렸다.
그러자 침상 위의 노인은 억지로 눈을 뜨더니 한자한자 떠듬떠듬 입을 열었다.
“노부는··· 마종사(魔宗師)라는··· 명호로··· 이제··· 너희··· 네 사람··· 전인(傳人)은··· 전인은······.”
“후사를 정하십시오.”
우측 백포노인이 황급히 말했다.
“저··· 소년은······.”
침상의 노인 즉, 마종사의 시선이 무자룡에게 향했다.
“네, 절정의 제자이옵니다.”
절정마신이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그러나 마종사의 입은 열리지 않았다.
무표정한 시선으로 무자룡을 노려볼 뿐이었다.
대략 다섯을 셀 시간이 흘렀다.
“이미 입멸(入滅)하셨소.”
좌측 흑포노인이 비통한 어조로 말하고는 마종사의 눈을 내리쓸었다.
“이런 변이······.”
두 노인과 노파는 한마디씩 부르짖고는 털썩 땅에 주저앉아 대성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들어서 아시겠지만··· 주인님께서는 임종 직전 절정의 제자에게 후사를 맡기셨소.”
“닥치시오!”
백의노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금방까지 땅을 치고 울부짖던 두 노인과 노파가 벌떡 일어났다.
소리를 지른 자는 그 중 금포에 용이 수놓아진 화려한 옷차림의 노인이었는데, 왼쪽 귀 하나가 없었다.
“낙령혈마! 당신은 사부님의 유시를 거역할 셈인가?”
백의노인이 노성으로 외쳤다. 내심 분노가 크게 치민 듯 수염이 부들부들 떨렸다.
“흐흐흐! 정녕 사부님의 뜻이라면 끓는 물, 기름 솥이라도 뛰어들 자신이 있소만······.”
“흥! 네 눈으로 직접 보고도 딴소리냐! 만일 불손한 언동을 계속 뱉는다면 기사멸조의 대죄로 다스리겠다.”
흑의노인도 언성을 높였다.
“으하하핫! 그럼 저 어린 녀석을 상전으로 받들어 모시란 말이오? 하늘이 두 쪽 나도 노부는 승복할 수 없소.”
금포노인이 내력이 깃든 장소를 터뜨리자, 석옥 전체가 웅웅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무자룡은 고막이 찢어지는 듯한 통증을 참지 못하고 두 귀를 꽉 틀어막았다.
“크흐흐흐! 그건 이 괴리(魁離)도 동감이오.”
이번에는 반대편에 서 있던 앙상한 체구에 납덩이 얼굴을 가진 팔순 괴인이 외쳤다.
“노신도 구유마녀라는 명호를 어린 애새끼 발아래 짓밟힐 수는 없다고 생각하오.”
백발노파가 살기가 뚝뚝 떨어지는 음성으로 말했다.
“호호호! 진정 혼을 내시려면 이 독귀비(毒貴妃)에게 맡겨주세요.”
노파의 뒤에 서 있던 궁장미부가 요사스러운 미소를 발하며 고성으로 말했다.
한켠에 서 있던 무자룡은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라 망연히 쳐다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마종사가 임종 직전 네 제자를 불러놓고 적통(滴通)을 선출하려 했다는 추측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마종사의 눈길 한 번이 이토록 큰 파문을 일으킬 줄은 상상도 못했다.
‘이, 이건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일인지······.’
세 사람이 반대를 하자, 백, 흑 두 노인의 안색은 매섭게 변했다.
“도저히 안되겠구나! 주인님을 대신해 너희 셋을 치죄하겠다!”
“흐흐흐! 사부님이 이 사실을 안다면 지하에서 땅을 치고 통곡하시겠군.”
그때였다.
“이 어린놈만 없어지면 그만이겠지!”
낙령이라 불린 금포노인은 번개같이 일장을 갈기면서 무자룡의 가슴을 향해 일지를 무찔렀다.
파파파파팍!
실로 신쾌한 암습 일격이었다.
이를 본 백의노인이 ‘어험!’ 노성을 발하며 좌우 장을 번개같이 후려갈겼다.
“흐흐흐! 다른 사람은 건곤이괴(乾坤二愧)를 두려워할지 몰라도 나 낙령혈마(落靈血魔)의 눈에는 늙은 뼈다귀로밖에 안 보인다.”
금포괴인은 가가대소를 터뜨리며, 일장을 내미는 척하다가 쑥쑥 두 차례 지풍을 날렸다.
“이 지법은 사부님께서 너희 두 뼈다귀를 부수라고 가르쳐 주신 지공이다.”
백의노인은 안색을 대변시키며 연속 소매를 저어 막았다.
낙령혈마는 드높은 어조로 외쳤다.
“크흐흐! 괴리신군(魁離神君)도 한 수 배우고 싶소.”
“에잇! 천하에 불충불의한 놈들.”
“히히히! 사부님께서도 조사님을 상해하고 마종사가 되셨는데 하물며··· 꼬마 놈아, 죽어랏!”
백발노파 즉, 유명마녀는 질그릇 깨지는 음성으로 떠들어대더니 번개같이 무자룡의 옆구리에 일장을 갈겼다.
“피해라!”
절정마신은 그를 석옥 밖으로 내던지면서 좌측 소매를 홱 뿌리쳤다.
꽈꽝!
두 줄기 서로 다른 기운이 허공에서 충돌하자, 실내의 기류가 거센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천장과 바닥에 있던 먼지들이 일시에 일어나 시야가 흐려졌다.
“절정, 그간 재간이 늘었군.”
유명마녀는 조롱인지 칭찬인지 한마디 던지고는 다섯 손가락을 쫙 펴서 허공을 그었다.
“오독조(五毒爪)도 좋다만 손톱의 때나 씻어라.”
절정마신은 오독조의 독랄함을 누구보다 잘 아는 터라, 경솔히 받지 않고 가볍게 옆으로 피했다.
한편 괴리신군은 건곤이괴에게 다가서며 비릿한 웃음을 날렸다.
“흐흐흐흣! 노부도 사부님 영전 앞에서 근래 터득한 신공을 보여 드릴까?”
“오냐, 사은(師恩)을 원수로 갚는 네놈들을 황천으로 보내주마!”
백의노인은 살기등등한 어조로 외치며 쌍장을 가슴 부위까지 들어올렸다.
“흐흐흐! 종놈의 새끼가 건방지게 나서다니 살고 싶지 않은 모양이군!”
낙령혈마는 괴소를 터뜨리며 가볍게 일장을 내밀었다.
그러자 검은빛을 띤 기류가 곧장 무찔러갔다.
“죽어랏!”
백의노인은 쌍장을 번개같이 내밀고 재차 삼장을 갈겼다.
펑!
요란한 굉음이 들리면서 백의노인은 일 보 후퇴했다.
피차간의 무공 차이가 드러난 것이었다.
건곤이괴 두 사람은 마종사의 시동으로 근 백여 년 간을 그림자처럼 쫓아다녔다.
그러나 자질 면에서는 마종사의 네 제자에 비해 훨씬 뒤떨어졌다.
마종사가 제아무리 절기신공을 전해줘도 네 제자를 능가하지 못했다.
때문에 건곤이괴는 마종사의 진전을 이어받았으면서도 수세에 급급했다.
“흐흐! 살고 싶으면 이제부터 노부를 주인님이라 불러라!”
“헛소리 마라!”
네 사람을 건곤이괴는 옛날부터 미워하고 있었다.
사부의 좌우에 서서 하인 취급받던 일이 수없이 많았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 요절을 내고 싶었지만, 사부인 마종사가 두려워 인정하며 지내왔다.
그러나 호랑이 같은 마종사가 죽자, 그들의 노기는 일시에 폭발했다.
더구나 차마 귀를 가지고 들을 수 없는 모욕을 주자 그들의 손발은 점점 어지러워졌다.
“으으··· 이런 배신자 놈들에게 밀리다니······.”
한편 무자룡은 석옥 밖에 서서 사태의 추이를 관망하고 있었다.
그는 사부 절정마신을 돕고 싶었으나 반딧불 같은 자신의 재주로는 어림없는 생각이었다.
그가 전전긍긍하고 있을 때였다.
“귀여운 마종사님, 이 누님과 겨뤄볼까요?”
한 줄기 교성과 함께 휙! 하고 독귀비가 덮쳐왔다.
무자룡은 대경실색해 저력이 깃든 일장을 상대의 앞가슴을 향해 갈겼다.
그러자 독귀비는 그대로 앞가슴으로 막았다. 이미 장력의 위력을 간파한 것이었다.
퍽!
소리와 함께 탄력 있는 진동이 손바닥에 전달된다고 느낀 순간, 그의 몸은 이 장이나 밀려났다.
“호호호! 조그만 공자님께서 응큼도 하시네. 그렇게 이 누님의 가슴을 만지고 싶어요?”
독귀비는 요사스럽게 웃으며 그에게 다가섰다.
무자룡은 독귀비의 경박스러운 말에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귓불까지 시뻘겋게 붉어졌다.
그때였다.
“안돼! 내 제자에게 함부로 손대지 마라!”
절정마신이었다.
구유마녀와 겨루던 절정마신은 독귀비가 석옥을 나서자 크게 초조해졌다.
“히히히! 이 늙은이야! 노신의 제자가 재미를 보여줄 테니 주책없이 나서지 마라.”
“더러운 년!”
절정마신은 한 소리 빽 지르고 왼 소매는 권풍수(捲風手)를, 우장에는 천강수(天 手)라는 장법을 일으켜 공격했다.
두 가지 무공은 산을 가루로 만들고 바닷물을 안개로 만드는 강맹한 위력이 있었다.
결국 유명마녀는 허리를 비틀어 금강수를 피하고 천충수만 받았다.
펑! 꽈르릉!
절정마신은 석옥 밖으로 밀려났다.
콰르르르······!
금강수의 위력은 대단했다. 단단하던 석옥이 와르르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석옥이 무너진다!”
“일단 피하고 보자!”
실내에 있던 다섯 사람은 석옥이 무너지자 각기 호신강기(護身 氣)를 일으켜 전신을 보호한 다음 천장을 향해 일장씩을 갈겼다.
꽈꽝! 꽝!
꽈르릉! 꽈꽝!
무너져 내리던 돌덩이들은 경천동지 장력에 의해 십여 장 이상 하늘로 솟구쳤다.
그 사이 다섯 사람은 다섯 줄기의 선을 그으며 석옥을 빠져 나왔다.
“기왕 나왔으니 널찍한 곳을 골라 싸우자!”
“오냐! 노부도 그럴 참이다.”
괴리신군과 흑의노인이 오 장 밖에 있는 채원(菜園) 앞에 자리를 잡았다.
“흐흐흐! 우리는 이곳에서 묵은 빚을 청산하자.”
낙령혈마는 백의노인의 말을 듣지도 않고 다시 공격을 가했다.
한편 무자룡은 다가오는 독귀비를 피해 서너 걸음 물러섰으나, 번쩍! 무엇인가 눈앞에 어른거린다 싶더니 맥문이 저려왔다.
“호호호! 이 누님이 싫은가요?”
독귀비는 그를 끌어당김과 동시에 수림 쪽으로 신형을 날렸다.
“으으··· 이 손을 놓으시오.”
무자룡은 그녀의 품에서 빠져 나오려 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맥문이 제압된 관계로 전신의 기력이 연기처럼 사라진 탓이었다.
그러나 가슴에 전달되는 짜릿한 감촉은 평생 두고 잊을 수 없는 황홀한 기분이었다.
“호호호! 우리 사부님은 눈에만 띄지 말라고 하셨거든.”
독귀비는 수림 속에 들어섬과 동시에 신형을 세웠다.
“나를··· 놔주시오.”
무자룡은 수치심에 뒤범벅된 어조로 말했다.
“호호호! 이제 보니 여자를 한 번도 품어본 적이 없는 숙맥이로군.”
독귀비는 교성으로 말하더니, 세 군데 혈도를 짚었다.
“이게 대체··· 어쩌려는 거요?”
“호호호! 지금부터 아주 재미있고 달콤한 것을 이 누님이 가르쳐 줄게요.”
그녀는 다짜고짜 무자룡을 땅에 눕히더니 그 위에 올랐다.
“왜··· 이러시오?”
무자룡은 그녀의 해괴망측한 행동에 얼굴이 홍당무로 변했다.
“으응··· 가만히 있어요.”
독귀비는 서슴없이 무자룡의 하체를 더듬었다.
“아악!”
무자룡은 깜짝 놀라 비명을 질렀다.
“호호호! 귀여워라!”
독귀비는 무자룡의 내의 속까지 섬섬옥수로 강제 침범시키더니, 돌연 앵두 같은 입술을 덮쳐왔다.
“우욱!”
무자룡의 비명은 그녀의 입술에 덮여 괴성으로 변했다.
달콤하면서도 향긋한 혓바닥이 입 안으로 잠입해 왔다.
무자룡은 전신의 맥이 탁 풀려지는 것을 의식했다.
온 세상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짜릿한 쾌감이 전신 마디마디로 번지기 시작했다.
입 안을 점령한 독귀비의 손길은 점점 대담해졌다.
무자룡은 쾌감과 함께 수치심이 전신을 뒤덮었으나,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게다가 사타구니에 뜨거운 기운이 타고 흐르기 시작했다. 혈루가 사정없이 흐르며 남근이 벌떡 용솟음을 친 것이다.
“호호호! 동생. 생각보다 물건이 건실하네··· 흐응!”
독귀비의 음성은 질펀하게 젖어들었다.
그녀가 막 무자룡의 옷을 풀어헤칠 때였다.
“요망한 계집.”
귀에 익은 일갈과 더불어 독귀비의 몸이 이 장 밖에 나뒹굴었다.
“아악!”
뒤이어 펑펑! 하고 두 차례 벽공장 부딪치는 소리가 수림을 뒤흔들었다.
“절정! 싸우다 말고 어딜 가려는 게냐!”
무자룡이 살피니 절정마신과 구유마녀가 서로 대치하고 있었다.
이때, 옷자락 펄럭이는 소리가 들리더니 네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크흐흐흐! 벌써 신방을 차리고 있었나?”
괴리신군이 무자룡의 헤쳐진 옷을 보고 한마디 던졌다.
“기왕 이렇게 됐으니 둘을 맺어주는 게 어떤가?”
낙령혈마가 괴소를 터뜨리며 거들었다.
“닥쳐랏!”
절정마신은 낙령혈마를 향해 노갈을 토하면서 구유마녀를 향해 천강수를 뿌렸다.
그리고는 훌쩍 신형을 날려 무자룡의 옷자락을 당겨 일으켜 세웠다.
“어서 일어서라.”
무자룡은 사부가 당기는 순간 혈도가 풀리고 전신이 자유로워졌다. 그 사이 구유마녀도 독귀비의 상처를 살폈다.
그리고는 품안에서 한 알의 환약을 꺼내어 주었다.
덕분에 자연스럽게 싸움은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그러자 괴리신군이 음침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흐흐흐! 이럴 게 아니라 우리 네 사람 중 가장 무공이 고강한 사람을 마종사로 추대하는 게 어떻소?”
“닥쳐라! 노부들이 시퍼렇게 눈을 뜨고 있는 이상 꿈도 꾸지 말아라.”
건곤이괴 두 사람이 노성으로 외치며 낙령혈마를 노려왔다.
“아무래도 너희 두 놈이 죽어줘야 일이 되겠군!”
“나도 한 손 거들겠소.”
괴리신군도 살광을 번뜩이며 앞으로 나섰다.
다시 일촉측발의 긴장이 감돌았다.
“흐흐흐흐······.”
돌연 낙령혈마의 괴소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아니, 투혼기공(透魂氣功)!”
건곤이괴의 입에서 경악의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렇다. 투혼기공이다.”
낙령혈마의 냉랭한 음성과 더불어 그의 장심은 백옥같이 새하얗게 변했다.
“으음, 그 무공은 너무도 악랄해 익히지 말라는 사부님의 엄명이 계셨건만······.”
“흐흐흐! 잔말 말고 받아랏!”
한차례 호통에 이어 낙령혈마의 오른손이 근처 오 장을 뒤덮었다.
건곤이괴는 대갈일성 외치며 양소매를 동시에 떨치고는 쪼개지듯 좌우로 갈라섰다.
딱! 딱! 마치 조약돌을 마주치는 듯한 음향이 들리더니, 건곤이괴가 이구동성 신음을 발하며 가슴을 부여안았다.
“흐흐흐! 맛이 어떠냐?”
“제법이군!”
절정마신의 싸늘한 일성이 뒤를 잇더니, 휙! 하고 예리한 파공음이 주위를 뒤흔들었다.
“적적기공(赤赤氣功)?”
괴리신군의 경악성을 뒤로하고 두 줄기 서로 다른 기운이 충돌했다.
꽈르릉! 폭음이 귓전을 뒤흔들며 차가운 냉기와 뜨거운 열기가 중인들의 피부에 전달되었다.
투혼기공과 적적기공은 악독한 내가기공(內家氣功)으로 서로 상반된 성질을 가지고 있었다.
이미 마종사 자신도 익히기를 꺼려한 절독 장공(掌功)으로 네 제자에게는 절대 수련을 금했었다.
“크흐흐! 전부 숨은 재주 한 가지씩은 가지고 있었군!”
“불복이면 너도 한 번 받아봐랏!”
절정마신은 가볍게 일장을 휘둘러 괴리신군의 앞가슴을 향해 붉은 기류를 갈겼다.
괴리신군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앙천광소를 터뜨리며 전광석화처럼 일지를 구사했다.
그의 한 가닥 꼿꼿이 세운 식지에서 아무런 파공음이 없는 지력이 사출되었다.
이 일지는 무언가 미미한 기운이 뻗쳐 나간다고 겨우 느낄 정도로 무형, 무성의 지력이었다.
퍽!
굉음이 들리더니 절정마신이 장심을 움켜쥐고 반 장이나 밀려났다.
“크흐흐흐! 어떠냐? 파정지공(破晶指功)의 위력이?”
괴리신군은 오만하게 웃으며 주위를 쓸어보았다.
“이제 보니 파정지공의 비급을 네놈이 훔쳐갔구나!”
건곤이괴 중 흑의노인이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크흐흐! 다들 한 가닥씩 하는데 나라고 가만있을 수 있나? 아마 구유마녀도 숨겨 놓은 한 수가 있을걸?”
“히히히! 냄새 하나는 잘 맡는군. 노신이 사명마장(死鳴魔章)을 익힌 걸 어떻게 알았지?”
유명마녀는 어깨를 한번 으쓱하더니 횡으로 일장을 갈겼다.
쉬쉬쉭!
장력은 기이한 괴성을 발하며 건곤이괴 중 백의노인을 향해 날아갔다.
“허억!”
꽈꽝꽝! 우지끈! 우지끈!
사명마장은 백의노인을 스치고 수림에 격중되었다.
거대한 굉음을 발하며 아름드리 거목 수십 그루를 송두리째 뽑아버렸다.
이를 본 마두들의 입이 딱 벌어졌다.
특히 무자룡은 사명마장의 위력에 혼절한 지경이었다.
“이히히히! 각자 사부님을 속인 대죄인이니 서로 잘잘못을 따질 것 없이 무공으로 결정짓자.”
“노부가 원하던 바다!”
“낙령혈마도 나서는데 노부라고 꽁지를 감추겠나.”
모두가 동조를 하자, 절정마신은 재빨리 생각을 굴렸다.
‘내가 여기서 빠진다면 보나마나 나부터 처치할 것이 자명한 일. 우선 응낙하고 보자.’
결정을 한 그는 껄껄 웃으며 입을 열었다.
“노부도 이의는 없소. 대신 이 일과 상관없는 사람은 멀찍이 물러서도록 합시다.”
그러자 구유마녀가 독귀비를 향해 말했다.
“히히히! 좋다. 얘야, 너는 한쪽에서 구경만 해라,”
독귀비는 절정마신의 일장에 격중된 내상을 치료하고 있었다. 그녀는 사부 구유마녀의 음성이 들리자 예의 요사스러운 미소를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크흐흐! 헌데 워낙 손버릇이 나쁜 애라 절정의 제자를 그냥 둘지 의문이오.”
“젊은 애들이 서로 좋아 재미 보는데 뭘 그리 간섭이오?”
낙령혈마가 핀잔 반, 조롱 반 한마디 끼여들었다.
“흥! 또다시 더러운 화냥기를 풍긴다면 살려두지 않겠다.”
절정마신은 한마디 대갈성을 지르고는 무자룡에게 말했다.
“너도 한쪽에서 구경이나 해라.”
“알겠사옵니다.”
무자룡은 허리를 굽혀 일례를 포하고는 건곤이괴 중 백의노인 옆으로 다가섰다.
3장 뇌마혈경(牢魔血經)
시간은 흘러 동녘은 여명이 찾아오고 있었다.
무자룡은 내심 탄식을 발했다.
‘하룻밤 사이에 측량할 수 없는 겁난을 겪었다. 과연 오늘은 어떤 일이 생기려나······.’
그러나 목전의 상황으로는 결코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없는 처지였다.
마종사의 전인이자, 절세의 마두인 네 사람은 각기 천하제일의 마두라는 명예를 노리고 대치하고 있었다.
네 마두는 원을 그리듯 동그랗게 서서 피차를 노려보고 있었다.
실로 숨막히는 순간이었다.
건곤이괴 두 사람은 각기 원공요상에 몰두하느라 장내에는 조금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독귀비는 구유마녀 뒤쪽 오 장쯤 되는 위치에서 무엇인가 눈동자를 굴리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자, 노부가 먼저 서툰 재간을 부려볼까?”
낙령혈마가 좌우 쌍장을 떨쳐냈다. 동시에 네 마두의 신형이 번뜩였다.
휘익! 휙! 휙!
예리한 파공성에 이어 절기신공이 허공에서 격돌했다.
펑! 펑! 꽈꽝!
네 마두의 경천동지할 장력 지력은 가히 경세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지축을 뒤흔드는 굉음에 이어 네 사람이 대치한 가운데 부분은 순식간에 한 자 깊이의 커다란 구덩이가 생겼다.
또한 한치 앞을 살피기 어려울 정도로 희뿌연 흙먼지가 네 마두를 완전히 감쌌다.
“투혼기공이오!”
“사명마장도 있다!”
외침과 기합성이 주위를 뒤흔들며 수만 근의 화약을 일시에 터뜨리는 듯한 강맹한 폭발음이 천지를 뒤흔들었다.
장내에서 훨씬 벗어난 무자룡의 신변까지도 그 여세가 밀려와 옷자락이 세차게 펄럭였다.
“하앗!”
절정마신의 맑은 기합성에 이어 천강수(天 手)가 허공을 베었다. 그는 옆에 있는 낙령혈마에게 일장을 갈긴 즉시 신뢰하격( 雷下擊)식으로 권풍수를 뿌렸다.
“흐흐흐! 노부에게 유감이 많은가 보군!”
낙령혈마는 일세의 마두답게 맹공에서도 당황해 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허공을 향해 거수일장 때려갈기며 왼 소매를 가볍게 밀었다가 회수하고 재차 우장으로 투혼기공을 뿌렸다.
투혼기공은 극히 음한(陰寒)한 내가장공으로 익히기 어려운 만큼 그 위력도 매서웠다.
어떤 절정고수도 일장이라도 스치기만 해도 한독이 심장을 파고들어 반각 이내에 숨을 거둔다.
“적적기공도 있다!”
절정마신은 일갈을 피하면서 전력이 깃든 적적기공의 일장을 홱 뿌렸다.
펑!
충돌의 여세를 이용한 그는 전면에 있는 괴리신군을 향해 천강수를 한 대 갈기고 혈심지를 세 번 무찔렀다.
“크흐흐! 기다렸던 참이다!”
괴리신군은 이에 전력을 장심에 결집하고 있던 터라, 독보무학(獨步武學)인 파정지를 갈겼다.
절정마신은 파공지의 위력을 이미 목견한 연후라, 즉시 지력을 빗나가게 만들었다.
그러자 파정지는 방향을 바꿔 엉뚱하게도 구유마녀의 옆구리를 노렸다.
“썩어빠진 노물(老物)이 어디다 공격이냐!”
구유마녀는 허리를 약간 비틀어 지력을 피했다.
그리고는 비밀리에 연마한 절독장법 사면마장을 갈겼다.
쉬― 익!
기이한 파공음을 수반한 사면마장이 괴리신군을 노렸다.
괴리신군은 더 이상 전권에 머물다가는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잽싸게 지면을 박차고 삼 장 밖으로 후퇴했다.
“흐흐흐! 대명이 쟁쟁한 괴리신군께서 꽁지를 보이다니······.”
절정마신이 끼여들며 여세를 이용해 삼장이지를 갈겼다.
휙! 휙! 휙!
예리한 파공음이 새벽 공기를 뒤흔들었다.
“너야말로 그만하고 노신의 일장을 받아랏!”
절정마신이 등을 보이자, 이번에는 구유마녀의 오독조(五毒爪)가 급습해 왔다.
다섯 줄기의 조풍(爪風)은 절독을 함유한 채 전후좌우 요소를 노렸다.
“투혼기공도 가오!”
낙령혈마가 그의 피신 지점을 예측하고 좌우로 두 차례 장력을 발했다.
이렇게 되니 절정마신은 합공을 받은 꼴이 되고 말았다. 결국 그는 부득불 앞으로 몸을 날리는 수밖에 없었다.
“우리 합착합시다.”
낙령혈마가 슬쩍 구유마녀에게 한마디 던졌다.
“그것도 괜찮지!”
구유마녀는 연속 삼장을 때려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절정마신이 날카로운 장력을 날려왔다.
“쉽게 안될 것이오!”
펑! 펑!
두 차례의 폭음과 함께 절정마신은 우측으로 이 장 몸을 날려 장내를 벗어났다.
“히히히! 되고 안되고는 노신이 결정한다! 절정마신!”
구유마녀가 벼락같은 몸놀림으로 절정마신을 쫓았다.
바로 그때였다.
“흐흐흐··· 이것으로 합착은 끝났소!”
낙령혈마는 절정마신에게 신경이 쏠린 구유마녀 왼쪽 어깨를 향해 일권(一券)을 갈겼다.
“아앗! 이놈이 감히······.”
구유마녀는 대로(大怒)한 나머지 괴성을 발하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좌우 소매를 떨쳐냈다.
“킬킬킬! 그래도 온갖 손장난은 다 익혔군!”
낙령혈마는 일장을 갈기고 허공에 둥그런 원을 그렸다.
꽈꽝!
경천동지할 폭발음이 들리며 두 사람은 각기 반 보씩 밀려났다.
한편 한구석에서 내상을 치료하고 있던 건곤이괴.
그들은 싸움이 점점 치열해지자, 서로 눈짓을 교환하더니 무어라 전음술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흑의노인이 번개처럼 무자룡을 덮쳐 좌우 견정혈을 짚었다.
“아니!”
무자룡이 깜짝 놀라 외치는 순간, 흑의노인은 그를 옆에 끼고 신형을 솟구쳤다.
쉬이익!
이 동작은 하늘의 매가 병아리를 급습하듯 날쌘 동작이라 소리치고 어쩌고 할 여유가 없었다.
독귀비는 장내에 정신이 팔려 있던 관계로 흑의노인이 십여 장 질주해 수림 부근에 이르렀을 때야 발견했다.
“사부님! 꼬마 놈이 도망가요.”
그녀의 다급한 외침에 네 사람의 시선은 일제히 방향을 바꿨다.
“앗! 저기······.”
“잡아랏!”
네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몸을 날렸다.
“게 섯거라!”
“멈춰라, 노괴야!”
고래고래 소리치며 초상승의 경신재간을 구사할 때였다.
“어딜 가려느냐? 아직 노부가 있다.”
가부좌를 틀고 있던 백의노인이 연속 삼장을 갈겼다. 건곤이괴 중 나머지 하나였다.
“망할 놈의 늙은이!”
대로(大怒)한 괴리신군의 파정지공이 양미간을 향해 노렸다.
“죽어랏!”
“비켜!”
나머지 세 사람도 각기 절기를 발휘해 일장씩을 갈겼다.
펑! 펑! 펑!
“으윽!”
선후를 구분하기 어려운 굉음과 신음이 주위를 흔들었다.
네 마두의 합공에 건곤이괴 중 백의노인은 삼 장이나 날아가 쿵!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이미 그의 칠공(七孔)에서는 검붉은 선혈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네 마두는 그의 생사도 확인하지 않고 흑의노인을 추적했다.
한편 흑의노인은 화살같이 몸을 날려 수림 속으로 접어들었다. 그는 이곳에서 수십 년을 살아온 터라, 풀 한 포기, 나무 한 뿌리의 정확한 위치를 알고 있었다.
거목 사이사이를 이리 돌고 저리 돌아 순식간에 네 마두의 추격을 뿌리쳤다.
무자룡은 내심 크게 놀라고 있었다.
‘불쑥 나를 납치하려는 의도가 무엇일까? 이 사람은 비록 마도인이지만 의(義)를 아는 자 같던데······.’
대략 칠팔 리쯤 달렸을까?
흑의노인은 신형을 멈추고 무자룡을 내려놓았다.
무자룡은 주위를 살펴보았다.
넓이가 사오 평 정도 되는 공지로 사면에 빽빽한 수림이 울타리 쳐져 있는 곳이었다.
그때였다.
흑의노인이 별안간 무릎을 꿇었다.
“늙은 몸 모용미생(慕容微生), 주인님을 뵙사옵니다.”
그의 음성은 극히 공손했고 고개를 조아리는 동작도 지극히 정중했다.
“무슨 일··· 이십니까?”
“이 몸은 주인님의 종복인 바, 말씀을 낮추어 주십시오.”
“제가··· 어찌 감히······.”
“이것은 사조님이시자, 전 주인께서 하명하신 엄명입니다.”
“아닙니다. 저는 사부님을 만난 지 반나절도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전인으로 정하셨다는 것은 무언가······.”
“주인님께서 이를 거역하신다면 기사멸조의 대죄를 범하는 것이옵니다.”
흑의노인의 얼굴은 점점 엄숙해졌다.
“저의 사부님도 계신데 제자가 어찌 마종사라는 중책을 맡겠습니까.”
“그 점은 염려 마십시오. 우리 뇌마문(牢魔門)은 마종사 이외 어떤 사람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설사 사부가 있더라도 마종사의 명을 따라야 합니다.”
“하지만 아무 능력도 없는 제가 무슨 재간으로 마종사의 자리를 지키겠습니까?”
“천마문의 절예는 천하 마공(魔功)의 집대성으로, 고금을 통해 이에 필적할 무학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제압할 무공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인가요?”
“역대 마종사들이 익히신 뇌마혈경(牢魔血經)에 수록되어 있는 무공입니다.”
이에 무자룡은 귀가 번쩍 뜨였다. 부친의 원수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뇌마혈경?”
“지금부터 약 삼백년 전, 소림고승 공겁(空劫)이라는 자가 무림의 최대 절기인 달마역근경(達魔易筋經)을 대성한 후, 천하 각처를 돌아다니며 다소 편협하고 잔인한 무공을 익힌 사람을 모조리 마두로 몰아 대참살극을 일으켰습니다.”
모용미생은 잠시 말을 멈추고 생각을 더듬더니 재차 말을 이었다.
“원래 무학이란 그 범위가 광범위해 수련 방법이나, 위력 등이 천편일률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공겁이란 화상은 모든 무학의 주류(主流)는 소림에서 파생되었다 주장하며 소림무학을 벗어난 무공은 무조건 마공으로 몰았습니다. 이에 반발한 무림고수들은 사마외도로 몰려 죽음을 당했고 이에 불만인 고수들은······.”
공겁대사가 일으킨 정사논쟁은 중원무림 전체에 파문을 일으켰다. 당시까지는 무공에 의한 정사의 구분이 명확치 않았기 때문이다.
수많은 무림인이 반론을 제기했으나 돌아온 것은 죽음뿐이었다.
이에 마도로 지정 받은 무림인들은 천황산(天皇山) 금선봉(金仙峰)에서 회합을 열고 공겁대사를 제거하기로 중론을 모았다.
이때, 모인 고수는 서른여덟 명으로 공겁과의 일전으로 죽음을 당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각자 손가락 하나씩을 잘라 절기를 기록했다.
이 책이 바로 뇌마혈경으로 내용 중 대부분이 절독, 악랄, 잔인한 무공이었다.
서른여덟 고수는 숭산(崇山) 오유봉(五乳峰)에서 공겁을 비롯한 소림정예와 싸웠다.
그러나 중과부적, 단 한 명도 살아남지 못했다.
그 후 뇌마혈경은 천황산 금선봉에 이백여 년 동안 비장 되어 있었다.
바로 이것을 우연히 발견한 사람은 한 유생( 生)으로 바로 초대 마종사였다.
마종사는 뇌마혈경을 터득한 후, 소림파를 찾았다.
그러나 공겁은 백년 전에 죽었고, 소림무학은 지극히 미약한 상태였다.
마종사는 소림의 당대 장문인 정반대사를 목베는 것으로 원한을 종결시켰다.
그 이후 마종사는 사마외도의 원조로 정사양도 모두 외경(外敬)하는 존재가 되었다. 급기야 하나의 전설처럼 강호에 전해진 것이다.
역대 마종사는 이따금 강호에 출도해 신기(神奇)를 발휘하고 연기처럼 사라졌다.
따라서 마종사의 존재는 강호의 일대은비(一大隱秘)였다.
마종사는 항상 네 사람의 제자와 두 명의 시자를 거느렸다.
네 제자는 각기 다른 무공을 익히게 한 후, 그 성취도를 보아 의발전인을 삼았다.
뇌마혈경 속에는 각 마공의 허실과 제압법이 수록된 관계로, 일단 의발전인이 되면 한 달 이내에 제자들을 제압할 수 있었다.
뇌마문의 내력을 들은 무자룡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곧 의문점이 떠올라 입을 열었다.
“노선배께서 뇌마혈경을 연마한다면 마종사가 될 것이 아닙니까?”
그가 아무 물욕이 없는 사람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상대는 어디까지나 절세의 마두라는 현실에 의아심을 품었다.
“에, 그것은 뇌마혈경의 가장 큰 비밀입니다. 저희 시자들은 애초부터 특수한 무공을 익힙니다. 이것은 뇌마혈경의 무공과 상극되는 무공이라, 뇌마혈경의 무공을 익힌 즉시 주화입마가 되기 때문에 닭 앞에 놓인 진주와 같습니다.”
“그랬었군!”
무자룡은 그제야 모든 내막을 알았다.
“이제 주인님께서는 뇌마혈경을 속히 익히시어 기사멸조의 대죄를 범한 네 사람을 문죄하셔야 합니다.”
“아니? 그 속에 사부님도 포함된단 말이오?”
“절정 역시 대죄를 지었습니다. 이제 주인님께서 마종사가 되신 이상, 그는 사부가 아닌 한낱 수하에 불과합니다.
“아니오! 난 절대 그럴 수 없소.”
무자룡은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정히 그러시다면 한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절정의 무공을 폐해 두 번 다시 무공을 펼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제자가 어찌 감히 사부의 무공을 폐한단 말이오!”
“그것도 못하신다면 도리가 없군요. 하지만 이후로는 사부라고 불러서는 안됩니다. 이것은 역대 뇌마문의 관습일 뿐 아니라 마종사의 권위와 관계되는 일이니까요.”
“다소 힘든 일이지만 해보겠소.”
“휴우! 이 늙은이가 말씀 드린 것은 어디까지나 충정에서 우러나온 얘기입니다.”
모용미생은 다시 천연한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비급을 찾으러 가셔야 합니다.”
“비급이 어디 있소?”
“마종사께서 저희 두 사람에게 명해 은밀한 곳에 감추도록 명하셨습니다.”
무자룡은 그의 뒤를 따랐다.
모용미생은 수림 사이를 헤치고 길을 안내했다.
얼마나 전진했을까?
그는 신형을 멈추고 주위를 살피더니 커다란 측백나무 밑을 파기 시작했다.
그곳은 사면이 울창한 잡목으로 둘러싸였는데 우뚝 측백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모용미생은 비록 양손을 이용해 땅을 팠으나, 순식간에 석 자 깊이의 구덩이가 생겼다.
무자룡은 숨을 죽이고 모용미생의 하는 양을 살폈다.
이때, 그의 가슴은 크게 격동하고 있었다.
‘내가 무림의 최절예인 뇌마혈경을 얻게 되다니······. 마종사의 눈길 한 번으로 이 같은 기연을 만나다니 모두 하늘의 보살핌이다.’
문득 참혹하게 죽임을 당한 부친의 모습이 떠올랐다. 자신도 모르게 두 주먹에 불끈 힘이 갔다.
“뇌마혈경을 익힌 즉시 흉수를 찾아 천하에서 가장 참혹한 죽음을 내리겠다.”
그가 내심 결의를 다지고 있을 때, 모용미생은 구덩이에서 하나의 철함을 꺼냈다.
“이것이 뇌마혈경입니다.”
뚜껑을 열고 꺼내든 것은 누렇게 색이 바랜 책자였다.
뇌마혈경(牢魔血經)!
네 글자가 붉은 글씨로 쓰여 있었다.
무자룡의 심장은 쿵쿵 소리를 내며 뛰었다.
실로 천고(千古)에 짝이 없는 절세비급을 접하자, 전신의 혈관이란 혈관은 모두 파열할 것 같았다.
그가 떨리는 자신을 의식하며 비급에 손을 가져간 순간이었다.
“비급은 노부 것이다!”
한마디 냉랭한 음성과 더불어 휙!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들렸다.
“낙령혈마!”
모용미생은 반사적으로 일장을 갈기며 다른 한 손으로는 뇌마혈경에 손을 가져갔다.
낙령혈마는 금포자락을 홱 뿌리치며 장력을 해소시켰다.
그리고는 허리를 약간 비트는가 싶더니 먹이를 노리는 매처럼 모용미생의 견정혈을 짚어갔다.
모용미생은 크게 당황했다.
낙령혈마의 성격이 악랄하고 손속이 매운 것을 전부터 익히 알고 있는 터라, 일단 비급이 출현한 이상 별의별 수단과 독수를 다 펼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내 한 목숨을 바쳐 주인님을 구할 수 있다면 눈을 편히 감지 못하신 마종사께서도 칭찬할 것이다.’
내심 재빨리 생각을 굳힌 그는 가볍게 뇌마혈경을 무자룡에게 던지며 전신의 진기를 오른손에 모아 곧장 받아쳤다.
“주인님, 어서 피하십시오. 이 늙은이의 간절한······.”
펑!
요란한 폭음에 가려 뒷말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무자룡은 무의식중에 모용미생이 던진 뇌마혈경을 받아 들었다. 그가 잠시 엉거주춤하고 있을 때 다급한 외침성이 고막을 뒤흔들었다.
“빨리 피하십시오. 다른 자들이 오면 저도 더 이상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모용미생은 말을 하다 말고 연속 삼장을 후려 때리고 사지를 내뿜었다.
일단 비급을 건넨 그로서는 생사를 도외시하게 되었고, 그에 따라 투지도 가중되었다.
낙령혈마는 당장 무자룡을 때려죽이고 뇌마혈경을 강탈하고 싶었지만, 모용미생의 미친 듯한 공세에 몸을 빼낼 수가 없었다.
“오냐! 사부가 네놈들한테 음흉한 밀계(密計)를 내린 것을 증거가 없어 밝히지 못했는데, 이제 제대로 실토했으니 인정사정없이 때려 죽여주마!”
그는 폭갈을 토하면서 자신의 독문절기 투혼기공을 전력으로 출발했다.
치이익!
새하얀 백광이 모용미생을 향해 일직선을 그리며 무찔러갔다.
이를 본 무자룡은 그의 위기를 직감했다.
‘내가 이곳을 피하는 게 모용노인을 살리는 길이다.’
결정을 내린 그는 뇌마혈경을 품속에 넣음과 동시에 몸을 날렸다.
“혼자서 떠나는 나를 용서하시오!”
이 말은 지극히 평범한 말이었으나 낙령혈마에 있어서는 청천벽력과도 같이 들렸다.
“게 섯거라!”
쩌렁쩌렁한 호통을 날리며 투혼기공의 장세를 거둬들였다.
그러나 이를 수수방관할 모용미생이 아니었다.
“아직 노부가 있다!”
대갈을 터뜨리며 연속 세 번 갈기고 두 번 찔러 공격했다.
“찢어죽일 늙은이!”
낙령혈마는 우선 자신의 목숨이 위급했으므로 손을 들어 장력과 지력을 흩뜨렸다.
***
무자룡은 단숨에 수십 그루의 나무를 지나 좌우로 방향을 바꿔 질주했다.
상대의 추격을 따돌리자는 심산이었다.
그가 요리조리 한 마장쯤 달렸을까?
홱!
돌연 옷자락 펄럭이는 소리가 들리더니 한 인영이 우뚝 내려섰다.
“괴리신군!”
그를 본 무자룡은 대경실색 소스라치게 놀랐다.
“크흐흐··· 그 늙은 개뼈다귀는 어디 있느냐?”
괴리신군은 살기가 짙게 깔린 안광을 번뜩이며 천천히 다가섰다.
“히히히! 여기 있었군!”
순간 까마귀 울음소리 같은 노파의 음성이 좌측에서 들리더니 구유마녀가 나타났다.
그녀의 뒤에는 독귀비가 따르고 있었다.
무자룡은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만약 낙령혈마가 나타난다면 모든 것은 끝장이다.’
그가 사색이 되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을 때였다.
“두려워 마라, 이 사부가 왔다.”
귀에 익은 목소리에 이어 휙! 하고 절정마신이 내려섰다.
“크흐흐! 머리칼 한 올 건드리지 않았으니 걱정 말게.”
절정마신은 그의 말에 가볍게 코웃음을 날려 일거에 무시하고는, 정감이 깃든 어조로 물었다.
“너를 납치한 그 늙은이는 어디 있느냐?”
순간 무자룡의 뇌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여기 계속 있으면 낙령혈마의 출현은 당연한 일일 것이고, 그리되면 뇌마혈경의 쟁탈전이 벌어질 것이 분명하다. 그럴 바에는 사부님을 잠시 속이는 죄를 짓더라도 이곳을 탈출해야 한다.’
기민하게 생각을 굴린 그는 다급한 어조로 가장해 외쳤다.
“지금 낙령혈마가 뇌마혈경을 뺏으려는······.”
“무엇이! 그곳이 어디냐?”
세 마두의 입에서 이구동성 똑같은 질문이 터져 나왔다.
“이리로 곧장 가면······.”
그의 손가락이 한 방향을 가리켰을 때, 세 사람의 신형은 세 줄기 섬광으로 변했다.
독귀비도 쿵! 하고 땅을 박차더니, 뒤도 한번 돌아보지 않고 모습을 감췄다.
무자룡은 네 사람의 신형이 사라지기가 무섭게 걸음아 날 살려라 자신의 진기를 모조리 양다리에 집중 몸을 날렸다.
순식간에 수림을 벗어난 그는 대충 방향을 살피다가 골짜기 남쪽 산봉으로 질주했다.
누구라도 산 속으로 들어가 숨으리라는 생각을 못할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과연 그가 예상한 대로 호엽곡은 위로 올라갈수록 험준한 봉우리와 울창한 수림만이 전개되어 있었다. 한치 앞을 내딛기조차 어려울 지경이었다.
옷이 찢기고 살이 긁혀 피가 철철 흘렀지만 그는 이를 악물고 전진했다.
얼마나 전진했을까?
전면에 우뚝 험애(險崖)가 가로막았다.
도저히 오르지 못할 만큼 높고 준험(峻險)했다.
그가 험애를 따라 백여 척쯤 걸었을까?
“썩 나와라!”
홀연 바람결을 타고 낙령혈마의 음성이 메아리쳐왔다.
무자룡은 겁이 덜컥 났다.
“보나마나 이곳까지 뒤질 모양이구나!”
초조해진 그는 은신할 곳을 찾다가 사람 하나가 허리를 굽히고 겨우 기어 들어갈 동구(洞口)를 발견했다.
무심결에 안으로 기어들던 그는 동굴 내부에 입구를 가릴 만한 커다란 돌덩이를 찾아냈다.
‘옳지! 저것으로 가리면 되겠구나.’
그는 돌덩이를 옮겨 입구를 막았다.
그리고는 거칠어진 숨결을 달랬다.
얼마 동안 밖의 동정을 살피던 그는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동굴 내부를 살폈다.
동굴은 입구는 작은 반면 내부는 점점 넓어지고 있었고, 어디로 통하는지 길다란 암도가 펼쳐져 있었다.
무자룡은 잠시 망설이다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앞으로 나아갔다.
암도를 따라 사오 장쯤 전진하자 하나의 넓은 광장이 나타났다.
광장은 오십여 평 정도 입구를 제외하고는 바람구멍 하나 보이지 않았다.
바닥에는 몇 개의 토기가 널브러져 있었다. 이로 미루어 과거에 누군가 살던 곳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무자룡은 잠시 내부를 주의 깊게 살피다가 마음을 정했다.
“이곳이라면 무공을 연마하기 적합한 장소이다. 섣불리 동백산을 벗어나려 했다가 네 마두에게 발각되면 만사가 끝장이다.”
마음을 정한 그는 한동안 휴식을 취한 후 동굴 입구로 나아가 청력을 집중시켰다.
대략 일각 동안 귀를 기울였으나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아 무거운 가슴을 내려놓았다.
무자룡은 품속을 뒤져 천고의 비급 뇌마혈경을 꺼냈다.
돌 틈으로 희미하게 비치는 빛을 받아 자세히 살피니, 일필휘지로 뇌마혈경이라는 네 글자가 검붉은 빛을 발했다.
그는 쿵쿵 울리는 심장의 박동을 의식하며 첫 장을 펼쳤다.
‘아······!’
그는 자신도 모르게 마음속으로 탄성을 발했다.
책자에는 그야말로 셀 수도 없는 수많은 비공들이 빽빽하게 나열되어 있었다.
血光飛葉手(혈광비엽수)!
碎岳神掌(쇄악신장)!
陰風震功(음풍진공)!
雷天分陽掌(뇌천분양장)!
飛輪八式(비륜팔식)!
魔影金傘手(마영금산수)!
招魂索靈攻(초혼색령공)!
破晶指功(파정지공)!
太陰日氣功(태음일기공)!
千幻錦絲劍(천환금사공)!
易本七攝(역본칠섭)!
回反 功(차회반선공)!
九九陰玄掌(구구음현장)······!
이외에도 수십 가지의 천하 마공이 수록되어 있어 그 명칭도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였다.
“이런 행운이 나에게 찾아들다니······.”
무자룡은 하늘을 날 듯 기뻤다.
자신의 무공이 약해 부모의 원수를 목전에 두고도 살려보낸 과거가 있는지라 누구보다도 감회가 깊었다.
“일단은 동굴 속에 기거할 준비를 해야겠다.”
그는 근처 인가를 찾아 양식과 일용품을 구할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는 이곳에서 뇌마혈경에 상세하게 기술된 천하의 모든 마공을 익히기로 했다.
4장 강호출도(江湖出道)
그로부터 이년이 지난 어느 날.
필양현(必陽懸) 서쪽 관도 위에 남루한 옷차림의 소년이 나타났다.
소년의 나이는 십구 세 가량.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뽀얀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그러나 만면에 흐르는 짙은 살기와 번갯불 같은 안광은 냉혹한 인물임을 느끼게 했다.
그는 시종일관 경직된 살광(殺光)을 내쏘며 전면을 향해 걸음을 내딛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관도가 좌측으로 구부러지며 청송녹수(靑松綠樹)가 우거진 널따란 수림이 시야에 드러났다.
수림 앞에 이른 소년은 주위를 한두 차례 쓸어보더니, 훌쩍 지면을 박찼다.
그의 몸은 단숨에 사오 장을 솟구쳐 가볍게 신형을 선회하고는 곧장 화살처럼 직진했다.
이 신법은 어기비공(馭氣飛功)의 경공 재간으로 누구나 쉽사리 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러나 소년의 내력(內力)이 출신입하의 경지에 도달한 양 땅을 박차고 소매를 뒤로 젖히는 순간, 십여 장 이상을 날아갔다.
남루한 옷차림의 소년!
그는 다름아닌 무자룡이다.
이년의 각고(刻古) 끝에 뇌마혈경의 정수를 터득하고 강호에 출도한 것이었다.
무자룡은 이년 동안 심신 모두 커다란 변화를 일으켰다.
칠 척의 훤칠한 키에 떡 벌어진 가슴.
관옥같이 해맑은 얼굴에 천지간의 모든 물건을 꿰뚫을 듯한 예리한 안광 곧게 선 콧날.
굳게 다문 입술 등은 뭇소녀의 가슴을 여지없이 설레게 만들 용모였다.
무자룡은 빽빽한 수림을 가로질러 자신이 태어나 성장한 곳이자, 원한의 발상지인 무가장을 향했다.
휘익! 휙!
대략 삼사 리를 날았을까?
무성한 잡초 더미에 덮인 폐허로 변한 장원의 모습이 나타났다.
‘아··· 버님······.’
무자룡은 내심 뜨거운 오열을 터뜨렸다.
지난 십수년 동안의 추억이 일시에 떠오르고 자상한 부친의 영상이 눈앞에 어른거려 눈물이 핑 돌았다.
그는 대충 장문(莊門)이라 생각되는 곳에 이르러 우뚝 신형을 멈춰 세웠다.
이미 장문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담도 곳곳이 허물어져 무성한 잡초만이 길을 막고 있었다.
무자룡은 잠시 감회 어린 눈으로 주위를 살피다가 잡초 사이를 헤집고 안으로 들어섰다.
십여 걸음 들어서니 건물 전체가 폭삭 내려앉아 있었다.
‘후우··· 가문을 이런 꼴로 방치하다니······. 과연 이 죄를 언제나 씻을 수 있단 말인가?’
무자룡은 무거운 한숨을 토해내고는 다시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윽고 그는 부친이 참혹한 시체로 화했던 대청 앞에 당도했다.
그러나 대청 역시 누군가에 의해 불타버린 후였다.
다만 몇 개의 주춧돌만이 불에 그을린 채 과거의 기억을 더듬게 만들었다.
“죽일··· 놈들!”
무자룡은 전신에 뜨거운 피가 용솟음쳤다. 당장 누구라도 격살하고 싶은 무서운 살기에 사로잡혔다.
그는 원독(怨毒)에 사무쳐 전신을 부들부들 떨었다. 이년 전의 일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대청 안에서 음침하기 짝이 없는 괴소로 말하던 정체불명의 인물.
― 모든 게 젊고 아름다운 에미를 둔 탓이니······.
흉수의 마지막 말이 귓전을 두드리자 더욱 뜨거운 피가 전신을 감돌았다.
그 말은 지난 이년 동안 그로 하여금 냉혹잔인한 성격으로 변모시키기에 충분했다.
― 정욕에 눈이 멀어 남편을 주살하고 간부의 품속으로 뛰어
든 희세의 음녀!
바로 이것이 무자룡이 내린 최후의 결론이었다.
그 외에는 어떠한 대안도 생각나지 않았다.
모친의 부정!
어떤 인간에게 있어서나 참기 힘든 악마의 시련이다.
가장 믿고 사랑하는 모친이 외간남자의 품에 안겨 희희낙락하는 꼴을 감수할 인간은 온 천하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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