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맥 1권
무맥 - 탄생(誕生)의 장(章)
동천의 잿빛 하늘을 젖히고 서서히 새하얀 만월이 떠오르고 있었다.
대소림사의 성역 제석평(帝釋坪).
이곳은 바로 조사동(祖師洞) 입구에 위치한 은백색 대리석의 눈부신 광장이었다.
평상시에는 장문인이라 해도 함부로 드나들지 못하는 금역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무슨 일이라도 있는지 무려 이백여에 달하는 고승들이 모여 독경송을 외우고 있었다.
“아제(阿齊)··· 아제··· 바라아제(婆羅阿齊)······!”
혼신의 힘을 기울여 독경을 외우고 있는 고승들은 제석평의 중앙에 원형으로 빙 둘러 앉아 마치 거대한 고리처럼 정좌하고 있었다.
그들의 모습이 한결같이 황색 가사에 흰 수염을 가슴까지 드리운 것으로 보아 당금 대소림을 대표하는 신승(神僧)들이 분명했다.
“아제··· 아제··· 바라아제······!”
달빛에 실려 사방으로 울려 퍼지는 그들의 독경송은 십 리 밖에서도 들을 수 있을 만큼 장엄했고 장내에는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긴장감이 폭발해 버릴 듯 팽배해 있었다.
지금 그들이 정좌하고 앉아 있는 그 원형진 안에는 팔 척 거구에 붉은 법의를 입은 한 노승이 천년석상처럼 미동도 않고 서 있었다.
일신에서 가히 산악과도 같은 기도를 풍기고 있는 이 노승은 바로 당금 대소림사의 장문지존 천오대불(天悟大佛)이었다.
천오대불의 노안에는 지금 식은땀이 송글송글 맺혀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안면을 타고 흐르는 땀방울에도 아랑곳 없이 두 눈을 부릅뜨고 제석평의 중앙에 있는 둥근 연꽃 형상의 석단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런 그의 시선이 닿은 그곳에는 이미 새하얀 달빛이 눈부시게 부서지고 있었다.
그런데 얼핏 보기에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그 석단에서 지금 너무나도 놀라운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지금 그곳에는 전신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남녀가 서로 마주보고 꿇어 앉은 채 미동도 않고 앉아 있는 것이었다.
사내는 천하에 다시 찾아보기 힘든 절세기남아였고 여인 또한 한 떨기 수란화처럼 환상적인 기품과 미태의 가인이었다. 달빛아래 드러난 그들의 나신은 아름답다 못해 어떤 성스러움마저 느끼게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들이 이백에 달하는 고승들 앞에서 정사를 위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들이 미친 사람이 아니고서는 이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더욱 더 이상한 것은 그곳에 모인 어떤 누구도 그들을 놀린다거나 우습게 보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장내의 긴장된 분위기에 시간조차도 조용히 흘러가고 있었고 두 남녀는 여전히 태초의 그 모습으로 넋 나간 듯 서로를 마주보고 있었다.
쿠웅······!
어디선가 한 소리 웅장한 범종음이 울려 퍼졌다.
그 종소리를 듣고 있던 천오대불의 노안에 순간적으로 고뇌의 빛이 물결쳤다.
“사대장로(四大長老), 때가 되었소.”
그는 나직하기는 했지만 어떤 항거할 수 없는 위엄이 깃든 음성을 발했다.
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이백여 고승 가운데 황색가사를 걸친 네 승려가 앞으로 나섰다.
그들은 한결같이 나이를 추측할 수 없는 회염백미의 노승들이었다. 그런 그들은 모두 전대 장문인이자 현 장로원주(長老院主)인 지운성승(知雲聖僧)과 같은 항렬을 가지고 있었다.
우선 가장 좌측에서 묵묵히 시립하고 있는 인물은 지명대사 (知明大師)라는 인물이었으며 그의 옆에 서서 조용히 염주를 굴리고 있는 인물은 지추(知秋)대사라고 불리우는 인물이었다.
또한 지굉(知宏)이라 불리는 대사는 그 옆에서 검미를 잔뜩 찌푸린 채 시립해 있었으며 이들 중 무학의 성취가 가장 높은 지무대사(知武大師)는 가장 오른편에 서 있었다.
“그럼, 시작하도록 하시오!”
천오대불이 그들을 향해 침중하게 말했다.
그의 말을 듣고 있던 이들 사대장로는 이내 나장나녀(裸丈裸女)가 있는 석대 주위로 다가서더니 일제히 운기조식의 자세를 취했다.
스스스······!
약 일다경(一茶經)의 시간이 지나자 운기조식을 하고 있던 그들의 전신에서 찬연한 백광이 발산되었다. 그리고 그 백광은 미처 숨돌릴 틈도 없이 투명한 자광으로 변하고 있었다.
잠시 후 그렇게 모여진 네 줄기 자광은 허공에서 한데 뭉쳐 무섭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 광경은 마치 네 마리의 자룡이 서로 뒤엉켜 춤을 추는 것과 흡사했다.
“아제··· 아제··· 바라아제······!”
침중하게 독경을 외우던 이백여 고승들의 독경소리가 갑자기 크게 고조되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저 고승들의 입에서 맴돌고 있던 그 독경소리는 이제 우뢰와 같은 함성으로 장내를 뒤흔들고 있었다.
그들의 독경소리가 절정에 달하자 사대장로의 전신에서 뻗어나온 자색광망은 마치 모래 속으로 물이 스며들 듯 순식간에 두 남녀의 백회혈 속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자색광망을 두 남녀에게 전달해 준 사대장로의 몸은 이내 폭풍을 만난 듯 심하게 진동했고 그에 따라 두 남녀의 눈부신 나신은 찬란한 황금색으로 뒤덮여갔다.
쿵··· 쿵!
그렇게 뜨거운 차 한 잔을 마실 시간이 지났을 때였다.
계속해서 자신들의 몸에서 뻗어나오던 자광을 두 남녀에게 주입시키던 사대장로가 갑자기 좌정한 자세 그대로 뒤로 쓰러졌다. 그들은 이미 시들 대로 시들어 잿빛으로 퇴색해 버린 청송과도 같은 모습이었다.
사대장로의 수염은 재가 되어 허공에 흩날리고 있었으며 그 얼굴들은 이 순간 피골이 상접하여 마치 시신처럼 창백하게 변해 있었다.
“아미타불······!”
“극락왕생불······!”
산 송장처럼 되어 손가락 하나 꿈쩍할 수 없는 그들의 입에서 미세한 불호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는 사이 단 위의 남녀는 이미 눈부신 자색광망에 뒤덮여 희미한 모습만 보이고 있었다.
구··· 웅!
어디선가 웅장한 범종음이 또 한 차례 울렸다.
그러자 자색광망 속의 여인은 단 위에 누웠고 남자는 그 여인의 위로 서서히 쓰러지기 시작했다.
“아제··· 아제··· 바라아제······!”
계속해서 두 남녀를 주시하던 제석평의 고승 전체가 돌연 두 팔을 높이 쳐들었다.
우우우웅······!
어느 틈엔가 고승들의 전신에는 찬연한 백광이 어렸고 그 백광은 곧 허공으로 솟구쳐 하나의 거대한 환을 이루며 단 위의 남녀 위로 덮어 씌워져 갔다.
그러자 그 환은 눈부신 자색광망과 어우러지며 서서히 그 속으로 스며들어 갔다. 이제 장엄하게 울려 퍼지는 독경 속에서 단 위의 두 남녀는 찬연한 자색광망과 백색 환에 뒤덮이기 시작했다.
천하의 불도인들이 지배하는 성지에서 일어났다고 한다면 도저히 믿을 수 없겠지만 만월 아래의 이 정사는 꽃향기가 진동하는 오 월의 십오야에 벌어지고 있는 엄연한 현실이었다.
두 남녀의 구름결같은 수발은 단 위에 해초처럼 풀어졌고 빙기옥골(氷肌玉骨)의 나신은 탄주되는 금의 현처럼 휘었고 그들을 뒤덮고 있는 거대한 환희는 어느새 그들의 깊은 곳까지 서슴없이 불태우고 있었다.
이 순간 짙은 고뇌의 빛이 담긴 한 쌍의 눈빛이 단 위에서 일어나는 일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 눈빛의 주인은 청송 위에 높이 솟은 명월인 양 깊은 수양과 불심이 엿보이는 백미를 가진 노승이었다.
다름아닌 천오대불(天悟大佛)이었던 것이다.
‘석존(釋尊)이시여······!’
천오대불은 가슴 속 깊은 탄식을 불어냈다.
‘이 천오의 대에서 반야불밀나선대법(般若佛密羅禪大法)이 시행되었음을 용서하소서··· 석존이시여······!’
그의 불심 깊은 노안에는 한없는 심고의 빛이 가득했다.
반야불밀나선대법(般若佛密羅禪大法)!
이는 고금 미증유의 불가밀전대법(佛家密傳大法)이었다.
그 대상은 순양과 순음지기의 남녀 한 쌍이었으며 그들에게 백 일 동안 일천 명의 불승들이 본신진기를 주입하고 그들의 합신이 있기 직전에 일 갑자 이상의 공력을 지닌 일백 인의 불승들이 다시 진기를 주입하는 것이다.
그렇게하여 마침내 합신 후에는 사내가 받아 들였던 모든 진기와 본신의 내기가 여인의 모태에 전해지게 되며 그로 인해 여인은 잉태를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벌어진 한 번의 정사로 인해 일시지간에 엄청난 진기를 받아들인 후에 다시 내보내게 되는 남자는 전신의 경락이 끊기고 심맥마저 고갈되어 결국에는 한 줌의 재로 스러지게 된다는 것이었다.
또한 여인은 결코 인간의 힘으로 이길 수 없는 엄청난 본원지기를 한 몸에 간직하게 되므로 반각 이내에 그 모든 기운을 극음지맥이 닿는 곳에 보내야만 목숨을 이을 수가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모아진 본원지기는 태아에게 전해지게 되고 그에 따라 여인은 사내와 같은 이치로 서서히 죽어가게 되어 아이가 태어날 때면 그녀는 이미 한 줌의 회토로 변해 버리는 것이었다.
반야불밀나선대법은 결국 천여 명에 달하는 불승들의 희생과목숨을 버리는 부모의 희생 속에 한 아기를 탄생시키는 미증유의 대법인 것이다.
그러나 이런 엄청난 희생 속에서 탄생되는 아기는 실로 놀라운 능력을 소유하게 된다. 그 아기는 한 마디로 말해서 신에 가장 가까운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그 아기의 일신에는 순양지기와 순음지기가 모두 내재되며 체내에 상상불허의 가공할 내력이 잠재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참선과 고행으로 닦여진 불승들의 본원지기를 이어 받은 까닭에 천하에서 가장 선한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고금의 수천 년 동안 이 반야불밀나선대법은 단 한 번도 시행된 적이 없었다. 아니 이 대법의 존재를 아는 인물조차 없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만월의 달빛은 흩어지는 한 줌의 은가루처럼 사위로 뿌려지고 있었다.
단 위의 생명을 건 그들의 행위는 어느덧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그들을 감싼 자색광망은 더욱 더 찬연한 광채를 뿜어내었으며 전신이 비 맞은 듯 흠뻑 젖은 고승들의 독경송은 끊임없이 고조되고 있었다.
“아제··· 아제··· 바라아제······!”
‘석존이시여······!’
가슴 속에 한없는 고뇌를 삭히는 듯한 천오대불의 입술 사이로는 불송이 끊임없이 새어나왔다.
그의 귓전에는 아직도 저 단 위의 남녀가 남긴 마지막 말들이 생생히 맴돌고 있었다.
- 일찍이 남아로 태어나 검정(劍精)에 몸을 담았으나 모든 것이 부질없고 덧없음을 알았소. 그러나 이제 한 몸을 바쳐 천하와 소림을 구한다면 내게는 더 없는 영광이 아니겠소.
부디 불법의 보살핌이 천하에 있기를 기원할 뿐이오.
- 목숨이란 언제 달아날지 모르는 덧없는 것이 아닙니까.
이 덧없는 목숨을 바쳐 한 영웅이 탄생한다면 곧 무가 유로 변하는 것이지요. 소녀는 아무런 후회없이 기쁨으로 석존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그들의 얼굴에 떠오르던 절대무애의 미소를 천오대불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었다.
또다시 뜨거운 차 한 잔을 마실 정도의 시간이 지나자 장엄한 불송이 흐르는 가운데 단 위의 찬연한 자광이 서서히 걷혀지며 은은한 백광만이 남아 감돌고 있었다.
여인은 의식을 잃은 채 전라의 모습으로 누워 있었지만 남자의 모습은 이미 어느 곳에도 보이지 않았다.
이제 그곳에는 단지 죽은 듯 누워 있는 여인의 가슴어리에 한줌의 잿더미만이 얹혀져 있을 뿐이었다.
구··· 웅!
터질 듯한 정적 속에서 다시 한 줄기의 웅장한 범종음이 울려퍼졌다.
그러자 그것이 신호인 듯 제석평의 뒤쪽에서 십팔나한이 단 앞으로 걸어나왔다. 그리고 그들은 어깨에 메고 있던 길고 투명한 수정관을 곧 단 아래에 내려 놓았다.
그것을 주시하던 천오대불이 우수를 가볍게 들어 보이자 여인의 몸이 그대로 둥실 허공으로 떠오르며 스스로 관 속으로 들어갔다.
스윽······!
이내 뚜껑은 단단히 닫혀졌다.
“아제··· 아제··· 바라아제······!”
장엄한 불송이 흐르는 가운데 수정관은 조사동(祖師洞) 안으로 사라져 갔다.
그것을 지켜보는 천오대불의 노안에 언뜻 한 줄기 눈물이 소리없이 맺혔다.
‘아미타불··· 석존이시여! 부디 용서를······.’
위대한 역사의 장을 여는 오 월의 십오야는 어느새 저물어가고 있었다.
무맥 - 대도(大盜)의 장(章)
만일 누군가가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인간들을 통틀어 최고의 부호는 누구냐고 묻는다면 정확히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음흉한 사람들의 천국이라 불리는 이 세상에서 누가 얼마나 많이 가졌는지 밝혀질 리가 만무하고 많이 가진 자일수록 가진 것을 밖으로 노출시키지 않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경주하는 판국이니 천하제일의 부호를 정확히 가려낸다는 건 아예 불가능이라 해야 옳았다.
그러나 영원히 알 수 없을 것 같던 이 질문의 해답은 한 사람의 등장으로 인해 풀릴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자신이 바로 천하제일의 갑부라고 자칭했으며 천하의 모든 사람들 또한 이에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 맞아, 천하제일의 부호는 바로 몽향(夢香)이야. 누가 그 사실을 부인할 수 있겠나?
몽향(夢香).
몽향노야(夢香老爺)라고도 불리며 혹자에게는 몽향신투(夢香神偸)라고 알려져 있는 이 천하제일의 갑부가 가진 것은 후리후리하게 큰 맨몸뚱이가 전부였다.
하지만 세인들은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든지 그것을 실현할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몽향은 도둑이었다. 그것도 원하는 것이라면 세상의 어떤 것이라도 자신의 재산목록 앞으로 등기시킬 수 있는 환상의 대도였다.
지상에서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그보다 더 위대한 도둑은 없었다고 남녀노소 누구나가 인정해 버린 도중지신 몽향 앞에서 세인들은 체념할 수밖에 없었다.
- 그가 가져간다면 막을 수 없다.
- 그저 오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그렇다. 그는 어느 곳이든 마음만 먹는다면 못 갈 곳이 없는 공간의 제왕이었으며 무수한 신화의 보유자이기도 했다.
그의 사전에는 잠입 불가능이니 탈출 불가능이니 하는 단어들은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를 형용하는 말에는 언제 어느 때나 전무후무라는 말이 전제되고 있었고 사람들은 한 번씩 자고 일어날 때마다 그가 새로이 제조해낸 신화를 아연히 입을 벌린 채 들어야만 했다.
그런 그는 오늘도 내일 아침 사람들의 입을 또 한 번 아연히 벌어지게 만들 더욱 강력한 신화를 준비하고 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그것을 알지 못했다. 그가 벌이고 있는 일이 운명의 두 번째 막을 거침없이 걷어올린다는 것조차도 말이다.
어디선가 풍겨나오는 그윽한 불향만이 고요한 어둠의 적막 속에서 소리없이 흐르고 있었다.
무맥 - 대도(大盜)의 장(章) -2
조사동(祖師洞).
소림 최대의 성지라고 말할 수 있는 이곳에는 지금 짙은 어둠만이 외로이 도를 더해가고 있었다.
번쩍······!
비궁의 적막함을 한꺼번에 도려낼 듯한 한 줄기 유백색 광채가 갑자기 빛을 발하였다.
구구구궁······!
번쩍하는 빛이 채 비궁을 뒤덮기도 전에 조사동 중앙의 석벽이 진동과 함께 무너져 내리며 엄청난 한기가 뿜어져 나왔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처연한 유백색 광채에 둘러싸인 수정관 하나가 무너져 내린 석벽 속에서 환상처럼 미끄러져 나오는 것이었다.
번··· 쩍!
조사동은 순식간에 수정관에서 뿜어져 나오는 유백색 광채와 한기로 뒤덮이고 있었고 수정관이 미미하게 떨리기 시작하더니 이내 급속한 진동으로 변해갔다. 그것은 어찌보면 누군가가 그속에서 관을 무섭게 두드리고 있는 것 같았다.
수정관을 자세히 보고 있노라면 누군가 그 속에서 거칠게 관을 두드리고 있는 것처럼 수정관 전체가 부서질 듯 요동치고 있었다.
꽈앙······!
마침내 거침없이 진동하던 관뚜껑은 퉁기듯 허공으로 솟구치며 떨어져 나갔다. 그와 함께 일진의 거센 회오리 바람과 유백색 광채가 관 속에서 엄청난 기세로 솟구치며 주위에 휘몰아쳤다.
순간의 고요함만이 무엇인가 터질 듯한 주위의 분위기를 가라앉히고 있었다.
“······!”
순간의 고요를 깨고 수정관 속에서 무엇인가 움직이는 듯한 소리가 조심스럽게 들려오기 시작하더니 이내 한 작은 물체가 유백색의 광채에 둘러싸인 채 뽀기작거리며 천천히 관 속으로부터 기어나오는 것이 보였다.
그것은 놀랍게도 생후 육 개월 정도 된 듯한 어린아이였다. 그 아이의 전신은 장엄한 유백색 광채로 빛나고 있었으며 심연처럼 깊고 천진스런 눈동자를 보고 있노라면 마치 도화경(桃花境) 속의 선동을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이의 몸에서 뿜어나오던 유백색의 광채는 외기(外氣)의 영향인지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고 그 속에서 드러나는 아이의 전신은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희고 부드러웠다.
“······.”
아이는 수정관 속과 다른 주위의 광경에 어리둥절했는지 한 쌍의 보석같은 눈동자만을 깜빡깜빡 굴리며 한동안 꼼짝도 하지 않았으나 이내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이 수정관 주위를 신기한 듯 기어다니기 시작했다.
“주··· 주··· 까르르······!”
통통한 허벅지 사이의 작은 고추를 연신 달랑거리며 조사동 안의 한기에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연신 뭐라고 옹알대며 까르르 웃기도 하는 모습은 정말이지 깨물어 주고 싶을 정도로 귀여웠다.
꽈당! 쿠다당······!
조사동 안은 어느새 엉망진창이 되어가고 있었다.
천년소림을 빛내온 역대 장문인들의 위패(位牌)가 모조리 아이의 장난감이 되어 엎어지고 날아가고 난리가 난 것이다.
“까르르······!”
아이는 점점 더 신바람이 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위패를 집어 던지고 엎어트리는 그 힘하며 난리통 속에서도 상처 하나 입지 않는 아이의 모습은 육 개월 난 아이의 모습이 아니었다.
“주··· 주··· 까르르르······!”
우당탕탕······!
이것저것 정신없이 던지고 엎어트리며 신나게 기어다니던 아이가 돌연 동작을 뚝 멈추었다.
“······!”
아이는 기이한 눈빛으로 조사동 중심부의 바닥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 아이의 두 눈에는 천진난만한 호기심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들썩······!
난데없이 바닥의 석판이 위로 열리듯이 들려졌다. 그러자 아이는 재빨리 한 팔로 뻗어 올라오는 석판을 눌러 버렸다.
“큭······!”
석판 밑에서 고통스런 비명이 숨죽인 소리로 터져나왔다. 그 비명 속에는 창졸간에 당한 탓인 듯 경악감이 스며 있었다.
“······?”
아이의 고개가 갸웃해졌다.
석판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고 주위에는 정적만이 감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채 일각도 안 되서 일 장 거리 밖에 있는 또 다른 석판이 들썩이는 것이었다.
“까드드득······!”
아이의 입에서 천진한 웃음이 터지며 또다시 고사리같은 손을 들어올려 올라오는 석판을 눌러 버렸다.
“윽······!”
어김없는 신음성과 함께 또다시 정적은 찾아들었고 아이는 손을 거둬들인 채 여전히 두 눈을 귀엽게 깜빡이고 있었다.
잠시 후, 이번에는 아이의 엉덩이 뒤에 있는 석판이 그야말로 기척도 없이 들어 올려졌다.
스읏······!
들려진 석판틈 사이로 한 쌍의 눈동자가 조심스럽게 드러났다. 그 눈동자는 실내를 조심스럽게 살피는 듯 했으나 더 이상 그럴 수 없게 되버렸다. 아이의 몸이 앉은 채 그대로 뒤로 돌며 석판을 눌러 버렸기 때문이었다.
“어억······!”
이번에는 전보다 더 큰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까르르륵······!”
아기는 아랑곳하지 않고 고사리같은 양 손을 흔들며 즐거운 듯 웃어댔다.
“이런 빌어먹을······!”
창노한 음성과 함께 석판이 둘로 쪼개져 나가며 흑영 하나가 섬광처럼 솟아올랐다. 그 인영은 번개같이 지면에 내려서서 신형을 한 쪽 벽에 붙여세우며 완벽한 경계 태세를 갖추었다.
분노에 찬 호통이 인영의 입에서 터져나왔다.
“대체 어느 놈이 감히 본 노야를 희롱하는 게냐?”
제법 위엄이 서린 호통이었다.
아이는 호기심 어린 눈을 깜빡이며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흑의인영은 두 눈만 빠끔이 내놓고 전신을 흑의와 복면으로 가린 키가 후리후리하게 큰 인물이었다.
“엉······?”
일순 흑의복면인의 빠끔이 드러난 두 눈에 어이없는 빛이 떠올랐다. 사방을 경계하던 그는 마침내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아이와 시선이 딱 마주친 것이다.
“가··· 가··· 주··· 주······!”
아이는 무어라 옹알대며 그를 향해 방실방실 웃어댔다.
그런 아이의 눈빛을 보자 흑의복면인의 눈빛이 기이하게 변해갔다.
“이럴 수가······? 이 소림 땡중 놈들의 금역 속에 웬 어린아이가 혼자 놀고 있단 말인가······?”
그는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좌우로 갸웃거렸으나 이내 자신을 놀린 정체불명의 인물에 대해 생각하고는 재차 경계의 빛을 떠올렸다.
“제길······! 어쨌거나 이런 갓난아이가 나를 놀렸을 리는 없는데······!”
그는 아이 뒤쪽에 있는 수정관을 발견하고는 그 속을 살피기 위해 아이 앞으로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
전신을 긴장시킨 채 아이의 옆을 무심코 지나가던 흑의복면인의 눈이 휘둥그랗게 치떠졌다. 그는 어떤 강력한 힘이 자신의 발을 잡는 느낌을 받은 것이었다. 그것은 맹세코 이제껏 접해본 적이 없는 실로 거대한 힘이었다.
“누구냐?”
그는 호통과 함께 발을 홱 뿌리치며 벼락같이 돌아서려 했으나 그것은 순전히 그의 생각일 뿐이었다.
아이에게 잡힌 그의 발은 완전히 요지부동이었다.
“어··· 억!”
쿠다당!
그의 몸은 그대로 소리도 요란스럽게 바닥에 나뒹굴고 말았다.
흑의복면인의 두 눈은 완전히 당혹과 낭패의 기색으로 얼룩졌다.
‘이··· 이게··· 대체······? 아이고! 이마야!’
그는 속으로 끙끙거리며 조심스럽게 자신의 발쪽을 돌아보았다. 두려움 가득한 그의 시야를 가득 채우며 들어오는 것은 놀랍게도 고사리같은 아이의 손이었다.
“······!”
흑의복면인은 경악과 불신 속에 자신의 발과 아이의 손을 번갈아 보고 또 보았다.
“까르르··· 까르르륵······!”
아이는 그의 발을 잡은 채 재미있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흑의복면인은 기가 꽈악 막혔다.
“이제보니 이 갓난 꼬마녀석이···? 이것 참! 겨우 육십 년밖에 안 살았는데 벌써 노부의 눈에 헛것이 보이나······?”
그의 입에서 절로 어이없는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가 아예 넋을 잃고 있는 사이 아이는 그의 얼굴 쪽으로 뽀기작대며 기어오더니 복면을 잡아 벗겼다.
“······!”
흑의복면인은 막을 생각도 없이 멍하니 아이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검은 복면사이로 드러난 그의 얼굴은 성성한 백발에 붉고 윤택한 홍안이 선인처럼 청수하게 빛나고 있는 노인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얼굴에는 도저히 노인의 그것이라고는 볼 수 없는 기묘한 치기가 어려 있었다. 그것은 장난이 심한 십여 세 소년의 그것이라면 딱 알맞을 것 같았다.
그러나 실제 그의 인상과 분위기를 보다 더 강하게 지배하고 있는 것은 조금은 사이하고 환상적인 기운이었다. 또한 그와 더불어 일문지존의 풍도와 같은 오연한 기질도 미세하게나마 엿보이고 있었다.
각기 성격이 다른 여러 가지 기운들이 어울려 그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참으로 특이하고 신비롭게 조성해 주고 있었다.
“가··· 가··· 주······!”
아이는 그의 수염이 신기한 듯 잡아 당기며 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노인의 입가에 일순 실소가 떠올랐다.
“허허··· 이놈 참 대단한 물건일세, 그랴.”
그것은 결코 싫지 않은 음성이었다.
아이의 손은 이미 수염을 지나 그의 얼굴에서 종횡무진 활동을 개시하고 있었다.
코가 찌푸러지고 입이 찢어져도 그저 가만히 아이를 바라보고 있던 노인은 문득 충동적으로 아이를 번쩍 안아들었다.
“까르륵······!”
아이는 연신 방실방실 웃었다.
“흐흠··· 거 이상한 일일세. 고놈 고추가 실한 것이 노부를 그대로 빼다박았네, 그려.”
갑자기 기분이 좋아진 모양인지 노인은 아이를 더욱 높이 들어 올리며 헤벌쭉 입을 벌리고 웃었다.
“허허··· 험!”
아이의 귀여운 모습을 보며 연신 웃음을 참지 못하던 노인의 웃음소리가 일순 이상하게 변했다.
쉬아아······!
“이··· 이놈이··· 노부가 오늘 세수를 빼먹은 줄 어떻게 알았지?”
노인은 아이가 자신의 얼굴에 대고 실례를 했어도 마냥 즐거운 듯 행복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거 귀신같은 놈인데··· 노부와 닮은 데가 정말 많다.”
노인은 흠뻑 젖은 얼굴로 감탄스럽게 중얼거렸다. 정말이지 지금 노인이 하는 행동은 보통사람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해괴한 행동이었다.
그는 이어 아이를 품으로 내려안고 소맷자락으로 얼굴을 쓰윽 훔치더니 다소 불만스런 눈길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런데··· 아무리 둘러보아도 가져갈 게 없단 말이야. 소림 땡중 놈들이 경비를 한답시고 유난법썩을 떨기에 뭔가 대단한 게 있을 줄 알았더니··· 젠장······!”
그의 시선이 수정관에서 멎었다.
“특별 난 거라곤 한 줌 재밖에 들어있지 않은 저 수정관 뿐이잖아. 빌어먹을··· 이 몽향노야 생애 최초의 헛탕이 벌어지게 생겼군, 그래.”
몽향노야!
환상의 대도인 몽향신투라면 대소림 최고의 비지인 이 달마비부 안에서 고고하게 제 할 일을 다하는 것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런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그지없이 심각한 것으로 보아그는 지금이 일세의 영명에 먹칠을 하게 되는 순간이라고 느끼는 듯했다.
“어억! 이 녀석, 놔라··· 놔!”
아까 발목을 잡아챘던 그 엄청난 힘이 이번에는 수염을 사정없이 잡아챘던 것이다.
노인 몽향신투의 입에서 다급한 비명성이 터져나왔다. 그는 얼마 남지 않은 수염을 뽑히지 않으려고 아이가 잡아채는 대로 신속하게 얼굴을 따라 움직였다.
“후와··· 아프다 아파, 이 녀석아. 노부의 이 멋진 수염을 망칠 셈이냐?”
“가가··· 까르르······!”
재미있는 듯 노인의 품 속에서 바둥거리며 웃는 아이의 모습은 세상의 어떤 수식어를 써도 모자랄 만큼 귀여웠다.
“그놈··· 웃는 모습이 또 이렇게 귀여울 건 뭐냐? 수염이 뽑혀도 혼을 내줄 수 없잖은가 말이다. 하여튼 기막히게 노부를 많이 닮았다.”
몽향신투는 매우 못마땅한 눈길로 아이를 내려다 보았다. 그러나 그 눈빛 깊은 곳에서는 스스로도 제어할 수 없는 미묘한 정감이 갈수록 진하게 들어차고 있었다.
“허! 참··· 이거 품에서 떼어놓을 수도 없네. 손이 왜 안 떨어지나?”
너털웃음을 짓던 몽향신투는 뭔가 의문이 생긴 듯 아이를 향해 진지하게 물었다.
“묻겠다. 네가 이 소림조사동 안에 있게 된 연유는 무엇이냐?”
“가가··· 주······!”
“너도 모르겠다고? 흠··· 그럼 관두자. 굳이 골치 아프게 캐낼 필요도 없으니까. 노부는 골치 아픈 건 딱 질색이다.”
“까르륵······!”
아이는 티없이 맑은 웃음을 지었다.
“너도 그러냐? 흐으음··· 성격까지 노부를 빼다박았구나.”
“쭈우··· 까······!”
“뭐라고? 잘 안 들린다, 이 녀석아! 크게 말해 봐라.”
몽향신투는 갑자기 아이의 입술 근처로 귀를 가져갔다. 아이에게 무슨 말인가를 듣고 있던 그의 입이 귀 밑까지 찢어졌다.
“그··· 그래? 노부가 좋다고?”
그는 아이를 번쩍 들어 치켜올렸다.
“허허허허허··· 내 그럴 줄 알았다. 그렇다면······.”
눈을 가늘게 뜬 몽향신투는 느닷없이 아이를 바닥에 내려 앉히더니 자기도 그 앞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았다. 그런 그의 모습은 조금 전과는 판이하게 다른 매우 엄숙한 자세였다.
“음··· 내 너에게 지금부터 한 가지 매우 중요한 제안을 하고자 한다.”
아이는 여전히 방실방실 웃고 있었다.
“노부는 지금껏 살아오면서 세상의 그 어떤 것도 다 한 번씩은 가져보았지만 단 한 가지··· 손자만은 가져보지 못했다. 그래서··· 흠흠······!”
몽향신투는 어색한 헛기침 후에 말을 이었다.
“지금 이 순간부터 네 이름을 몽향소야(夢香小爺)라 할 생각인데··· 네 생각이 어떤지를 묻고 싶구나. 몽향노야와 몽향소야··· 어떠냐? 아주 좋지 않느냐?”
“까르륵······!”
아이는 다행히 또 웃어 주었다.
“스··· 승낙하겠다고?”
몽향노야의 입이 또 한 번 쩌억 벌어지더니 그 사이로 조사동을 쩌렁쩌렁 울릴 듯한 앙천대소가 솟구쳐 나왔다.
“으하······!”
그러나 그의 대소는 솟구쳐 나오기가 무섭게 도로 입 속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몽향신투는 심호흡과 함께 이렇게 스스로 타이르고 있었다.
“아니다. 아무리 기분이 좋아도 소림 땡중 놈들이 몰려오게 만들 필요는 없다. 차라리··· 전음술로 웃자.”
혼잣말로 중얼거린 그는 다시 고개를 쳐들고 허리를 제끼며 찢어지게 입을 벌렸다. 먼저 그가 한 말대로 전음술로 웃고 있는 것인지 그 자세는 꽤 오래 계속되었다.
웬만해선 멈춰지지 않을 것 같던 그의 웃음이 일순 멈춰지며 주름진 그의 눈가에 한 방울 물기가 번쩍이는 것이 보였다.
그것이 그가 이 조사동 안에서 보여준 마지막 모습이었으며 그의 후리후리한 신형은 어느 틈엔가 그 자리에서 소리없이 사라지고 있었다. 또한 아이의 모습도 더 이상 이곳에서 찾아볼 수 없음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몽향신투와 귀여운 아이의 모습이 사라지자 조사동의 바닥도 어느새 말끔히 다듬어져 외인이 침범한 흔적이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었다. 이제는 귀여운 아이의 웃음소리와 행복을 실은 몽향신투의 너털웃음만이 환청처럼 아스라이 조사동 안에서 되울려 나올 뿐이었다.
까르르······!
으하하하하하······!
몽향신투는 이토록 어여쁜 손자를 얻게 된 것에 대해 너무나도 감사하고 있었지만 그의 그러한 생각없는 행동으로 인해 대소림사와 향후의 천하무림에 엄청난 파문이 닥쳐올 것이라는 것은 꿈에도 알지 못하고 있었다.
무맥 - 대도(大盜)의 장(章) -3
대소림은 십오 일이 지나서야 아이가 없어진 것을 알게 되었고 그 사실을 알게 된 순간 이래 없던 파문이 대소림을 강타했다.
천년소림 사상 단 한 번도 발동된 적이 없던 최고의 지존령인 녹옥대불령이 발동되었으며 오백에 달하는 소림의 신승들이 강호에 급히 밀파되었다. 그 뿐만 아니라 그 다음 날에는 천오대불이 장문직을 사퇴한다는 한 장의 밀지만을 남기고 어디론가 종적을 감추어 버렸다.
참으로 엄청난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생명을 건 극비 속에서 진행되었으므로 천하의 그 누구도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했다.
영원히 풀리지 않을 것 같은 신비의 수수께끼 속에서 세월은 덧없이도 흘러갔다.
무맥 1장 그의 이름은 소야(小爺)
황하(黃河).
이는 새삼 장황한 설명이 필요없는 중원의 젖줄이다.
늘 그래왔듯이 오늘도 이 대젖줄은 누런 황토빛의 거대한 물줄기를 이루며 중원대륙을 한가슴으로 안아 흐르고 있었다.
쏴아아······!
태고적부터 변함없이 흐르는 이 황하의 장쾌한 물결처럼 이 글의 첫 이야기는 황하변의 한 군도에서부터 시작된다.
풍위군도(風葦群島).
이것은 황하의 한복판에 유유히 떠 있는 십여 개의 갈대섬을 일컫는 이름이다.
섬서성(陝西省)의 북단(北端) 쪽에 위치한 이 풍위군도를 사시사철 뒤덮고 있는 것은 그야말로 한 치 앞도 바라볼 수 없이 무성한 갈대숲 뿐이었다. 그 갈대숲은 한 여름에 이르러서야 진정한 장관을 이루게 된다.
짙푸르게 물이 오른 군도의 갈대숲에 바람이 일게 되면 온통 푸른 파도처럼 흔들려 마치 황금색 황하 위에 새파란 바다 물결이 출렁이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것은 황하를 오가는 수많은 어부들에게 시원한 청량감을 안겨주는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이처럼 아름다운 갈대숲에 둘러싸인 풍위군도를 이루고 있는 섬의 총 수는 열 개였다. 그러나 그 중 아홉 개는 사람도 동물도 살아갈 수 없는 무인도였고 오직 군도의 중앙에 위치한 가장 큰 한 개의 섬만이 인간들의 군락(群落)을 지니고 있었다.
사람들은 이 섬을 풍위도(風葦島)라고 불렀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사면이 온통 갈대숲으로 무성한 이 섬은 황하를 타고 중원대륙을 누비는 상인들의 거처라고 한다.
그러나 이런 말들은 그 누구도 사실을 확인해 볼만한 가치를 느끼지 못한 탓인지 그저 소문으로만 떠돌고 있을 뿐이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이 풍위도라는 섬은 그저 세인들의 적당한 무관심과 보잘 것 없는 신비 속에서 소리없이 존재하는 그런 섬이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운명은 여기서 시작되고 있었다.
풍위도의 겨울바람은 유난히도 매섭다.
그토록 아름다웠던 풍위도의 여름은 황하를 흐르는 강물을 따라 덧없이 흘러갔고 쓸쓸한 가을도 소리없이 지나갔다. 이제 풍위도에도 겨울이라는 옛벗이 다시 찾아온 것이다.
풍위도의 겨울은 정말이지 지독하게 추웠다. 그것은 사방 어디를 둘러보아도 뼈 속까지 얼릴 듯한 겨울의 북풍을 막아줄 나무가 한 그루조차도 없기 때문이었다.
휘우우웅!
북방의 한풍은 쉴새없이 휘몰아치고 있었고 그때마다 하얗게 바싹 말라 버린 갈대숲은 부서질 듯한 비명을 지르며 휘날렸다.
풍위도 사방의 갈대숲에 접해 있는 황하의 얕은 물은 이미 두꺼운 얼음으로 변한 지 오래였다. 더구나 아직 햇살도 비치지 않는 이 새벽의 추위는 더욱 극성스럽게 맹위를 떨치고 있었다.
휘이이잉······!
혹한의 북서풍이 쉴새 없이 하얀 얼음장 위를 매섭게 휩쓸며 질주해 갔고 그때마다 갈대들은 비명을 지르며 나부꼈다.
수수수··· 수수숫······!
갈대들의 비명성이 극에 달한 어느 한순간이었다.
콰드득!
갈대숲 사이의 얼음장이 갑자기 물방울을 위로 확 퉁겨내며 갈라졌다. 그와 동시에 얼음장 밑에서 사람의 머리 하나가 불쑥 솟구쳐 올랐다.
그 인영은 황하의 얼음장을 딛고 가볍게 물 위로 올라섰다. 그의 전신은 이미 물에 흠뻑 젖어 있었으며 아직도 물이 뚝뚝 떨어지는 그의 한 손에는 살아 펄떡이는 거대한 잉어 한 마리가 꽉 붙잡혀 있었다.
휘··· 이······!
밀려드는 혹독한 한풍 앞에 잉어는 곧 비늘 사이가 하얗게 얼어 버렸다.
“날씨가 제법 매서운 걸······!”
인영은 낭랑한 중얼거림을 흘리며 얼음장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 음성과 체격으로 보아 이 인영은 이제 불과 십여 세 남짓한 소년이었다.
이런 혹한 속에서 황하의 차가운 물에 들어갔다가 나오면서도 아무렇지도 않다는 것은 실로 믿기 어려운 사실이었다.
어느 사이엔가 잉어는 빳빳이 얼어붙었고 소년의 전신 의복에도 하얀 고드름이 주렁주렁 매달리고 있었다. 그러나 소년은 조금도 개의치 않는 듯 잉어의 아가미를 갈대 줄기로 정성스레 묶고 있었다.
정성스럽게 갈대 줄기를 묶은 소년은 잉어를 눈 앞으로 들어올렸다.
“됐어···! 이 정도면 약재로는 최상품이지······!”
소년은 밝게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옷에 달린 고드름을 툭툭 털어냈다. 그러자 마침 조금 밝아진 동쪽 하늘의 빛 아래 소년의 얼굴이 드러났다.
희미한 새벽빛 속에 드러난 소년의 얼굴은 한 마디로 잘라 말해서 너무나도 보기 좋았다. 하루 종일 보고 있어도 질리지 않을 만큼 아름다웠다. 그의 얼굴은 어둠과 혼란을 지우며 치솟아오른 아침 햇살의 눈부심 그 자체였다.
짙고 뚜렷하게 뻗쳐올라간 소년의 검미는 보는 이로 하여금 강한 인상을 심어주기에 부족함이 없었고 또랑또랑한 한 쌍의 눈망울은 더없이 치기스럽고 천진하며 해맑은 광채로 빛나고 있었다. 소년의 동공 속에는 보는 이의 심혼까지 송두리째 빨아들일 듯한 신비함이 마치 서기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소년의 아름다움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어린 소년의 그것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콧날은 더없이 준미했고 앙증맞게 꽉 다물린 입술은 마치 주사를 칠한 듯이 붉었다. 또한 그의 피부는 얼음보다 더 투명하고 나이 어린 소년 특유의 섬세함과 부드러움으로 감싸여 있었다.
그 외모로만 본다면 이는 필시 천상의 선동이 속세로 내려온 것이 분명했다.
이 혹한의 풍위도에서 아무도 깨어나지 않은 이른 새벽에 거리낌없이 수중을 드나들며 온몸의 옷이 얼어붙은 추위조차도 아랑곳 않는 미소년은 정말이지 신비스럽기 짝이 없었다.
소년은 어느새 무수한 갈대숲 사이의 얼음 위로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발걸음 소리도 없이 걸어가는 그의 모습은 보통 사람과는 분명히 달랐다.
그의 걸음은 마치 발가락 끝에 닿는 모래알 하나까지에도 신경을 집중시키는 듯한 신중하고도 느릿한 걸음이었다. 그러나 느리다는 것은 단지 눈의 착각일 뿐이었다. 소년의 걸음은 범인의 속도보다 무려 세 배 정도나 빨랐던 것이다.
어느새 소년은 갈대숲을 벗어나 풍위도의 중심부로 접어들고 있었다. 그곳에는 멀리 선박들을 매어 두는 포구가 보이며 그 주위로 방사형을 이루듯 꽤 큰 전각들과 주루, 삼십여 호 가량의 초옥들이 늘어서 있었다.
아직 시간이 이른 탓인지 거리에는 인적조차 없었고 막 주루의 문을 열려는 듯 삐걱거리는 소리만 스산하게 울리고 있었다.
“후후··· 기 아저씨가 오늘은 제법 부지런한 걸······!”
소년은 주루 쪽을 힐끔 바라보며 씽긋 미소를 지었다.
주루의 처마 밑에는 잔뜩 고드름을 매단 현판이 매달려 있었다.
청파루(靑波樓).
이곳의 주인은 기용목(基龍木)이라는 자로서 이제 막 사십 줄에 들어선 인물이었다. 그는 이곳의 주방장까지 겸하고 있었으며 항상 무지막지하게 거대한 감산도로 어떤 재료든 기가 막힌 요리를 만들었다.
특히 그의 거대한 감산도로 겨우 손바닥 반 정도 크기인 은어를 회치면 그것은 그야말로 천하일미로 변해 버린다.
다시 말해서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풍위도 제일의 요리사였다.
소년이 막 주루 앞을 지나치고 있을 때 삐걱거리던 문이 마침내 덜컥 열리며 얼굴 하나가 밖으로 드러났다. 부리부리한 호목을 빛내는 혈색 좋은 중년의 인물이었다.
그는 두 말 할 것도 없이 청파루의 주인 기용목이었다.
뒤이어 어린 점소이 하나가 졸린 눈을 부비며 밖으로 나섰다.
“씨··· 날씨 한 번 더럽게 춥네!”
점소이는 뭐 갈긴 사람처럼 몸을 부르르 떨며 중얼거렸다.
소년은 등 뒤로 그 말을 들으며 씨익 웃었으나 그대로 지나쳐 갔다.
기용목은 그런 소년의 등을 지그시 응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공자께선 벌써 아침 수련을 마치고 목욕까지 하신 모양이군······.”
그는 고드름이 주렁주렁 매달린 소년의 모습에 전혀 놀라지도 않는 눈치였다.
점소이는 갑자기 경외스런 얼굴이 되며 말했다.
“공자님은 혹시 신선이 아닐까요?”
“녀석······!”
기용목은 그 말에 피식 웃으며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곧이어 청소를 하는 듯 부산한 소리가 주루 밖으로 흘러나왔다.
소년은 포구 쪽을 향해 계속해서 걸어가며 싱그레 미소를 피워 물었다.
“많이 좋아졌어······ 이젠 모두들 눈에 활기가 돌아······.”
매서운 북서풍까지라도 녹일 듯 따뜻한 미소와 함께 소년이 흘려낸 독백은 상당히 의미심장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소년의 그러한 말투로 보아 그의 신분이 이 풍위도에서 결코 범상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었다.
소년은 포구 옆에 위치한 한 채의 모옥의 마당으로 들어섰다.이때 막 모옥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던 한 소년이 그를 발견하고 흠칫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 소년의 나이는 십육 세 가량 되어 보였으며 건장한 체격에 뱃사람들이 입는 청의를 입고 있었다.
“소야(小爺)께서 어쩐 일로······?”
청의소년은 얼른 소년의 앞으로 달려오며 의아한 듯 물었다.
소년은 밝고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학노인의 기침이 심하다는 말을 들었다. 조빈! 자, 받아라. 이놈 한 마리면 거뜬히 나을 거야.”
소년은 이미 막대기처럼 꽁꽁 얼어붙은 잉어를 앞으로 내밀었다.
“······!”
조빈이라 불리운 청의소년은 잉어를 받아들며 놀람과 감격이 뒤섞인 눈빛으로 소야와 잉어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이걸 소야께서 손수······?”
소야는 따스한 미소만 지어 보였다.
“공자님께서 오셨다고······?”
소야의 얼굴에서 미소의 흔적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안에서 문득 카랑한 음성이 들려왔다.
소야는 안쪽을 향해 맑게 소리쳤다.
“일어나실 필요없어요. 학노인!”
“어이구···! 잠시만 들어오시지요. 공자님.”
반가운 어조와 함께 문이 열리며 한 명의 노인이 얼굴을 드러냈다.
그의 나이는 오십대 후반 정도 되어 보였으며 탐스럽고 보기좋은 백염이 가슴 아래까지 길게 자라 있고 매우 청수한 인상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의 얼굴은 창백한 안색의 병색이 완연한 얼굴이었다.
“콜록··· 콜록······!”
찬바람이 얼굴에 닿은 때문인지 노인장은 당장 숨가쁜 기침을 토해냈다.
“원···! 날씨가 좀 풀려야 기침이 멎을 텐데······.”
한참만에야 기침을 멈춘 노인은 힘없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풍위도에서는 이 노인을 모두 학노선생(鶴老先生)이라 부르며 풍위도주(風葦島主) 다음으로 존경하며 따랐다.
그의 원래 이름은 사무현(司武玄)이었다.
사무현은 풍위군도 소년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일을 소일로 하고 있었으며 풍위군도에 관계되는 모든 대소 문서들을 관장하고 있었다.
그는 결코 평범한 노인이 아니었다. 황하의 이런 외진 섬에서 지내는 자라곤 도무지 믿을 수 없을 만큼 그의 학식은 깊고도 풍부했다. 그의 지혜로 말하자면 대해를 뒤덮고 태산을 감싸고도 남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는 그 정도의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이곳 풍위도의 소년들을 가르치는 일에 만족하는 듯 결코 바깥으로 눈을 돌리는 일이 없었다.
그는 그저 자신의 시중을 들어주는 소년 조빈과 조용히 살아갈 뿐이었다.
풍위군도에서 그런 그에게 학노선생이란 경칭을 쓰지 않고 학노인이라 칭할 수 있는 인물은 단 두 명이 있었다. 그들은 지금 학노인 앞에 서 있는 소야라는 소년과 이곳에서는 노야(老爺)로 불리우는 풍위도주(風葦島主)였다.
사실 이곳은 평범한 하나의 작은 섬에 불과하지만 기이하게도 풍위도주를 중심으로 모든 일이 결정되고 실행되어 왔다. 또한 그 모든 일이 더없이 일사불란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소야는 학노인 사무현을 맑은 눈빛으로 응시하며 미소를 지었다.
“기운 내! 학노인. 이걸 고아 마시면 기침 쯤은 금방 나을 거야, 그럼 난 가볼께.”
소야는 말이 끝남과 동시에 소리없이 밖으로 나갔다.
멀리서 메마른 갈대잎이 북풍에 흔들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후이이잉······!
스스스··· 슷······!
“음!”
학노인 사무현은 깊숙한 눈길로 멀어져 가는 소야의 뒷모습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런 그의 눈빛 깊숙한 곳에서는 뭔지 추측할 수 없는 기이한 광채가 일렁이고 있었다.
사무현은 조빈을 향해 천천히 눈길을 돌리며 기이한 어조로 물었다.
“조빈아, 너는 공자님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조빈은 난해한 표정을 지었다.
“소야는 안개같으신 분입니다. 알 듯 하면서도 전혀 알 수가 없거든요.”
학노인 사무현은 그 말에 소리없이 미소를 지었다.
“공자님을 잘 모셔야 한다. 공자님은 바로 네 부모의 원수는 물론 이곳 풍위도 전체의 한을 씻어 줄 유일한 분이니라.”
학노인 사무현의 어조에는 엄숙한 어떤 확신이 배어 있었다.
조빈은 고개를 담담하게 끄덕였다.
“잘 알고 있습니다. 벌써 소야께선 저를 부르셨습니다.”
“응······?”
사무현은 흠칫하며 조빈을 쳐다봤다.
조빈은 언뜻 긴장의 빛을 떠올렸다.
“어쩌면··· 이 조빈도 풍위도를 떠나게 될지 모르겠어요··· 더 이상은 묻지 마십시오.”
“음, 그래 알았다.”
학노인 사무현은 뭔가 짐작이 가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안으로 사라졌다.
소야라는 소년이 떠난 지 한 식경이 지났을 쯤 모옥 안에서는 잉어가 고아지는 구수한 냄새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바로 그 시각이었다.
무맥 1장 -2
키를 넘는 갈대숲이 울창하게 뒤덮인 풍위도의 남단.
한 채의 작고 정갈한 초옥이 갈대숲 속에 자리하고 있었다. 초옥은 사방이 갈대숲으로 가려져 멀리서는 결코 보이지 않았으며 주위로는 나머지 아홉 개의 풍위도와 황하의 물결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었다.
초옥의 둘레는 문과 목책(木柵) 대신 굵고 긴 갈대들로 엮은 울타리와 발이 쳐져 있었다.
파스스슷······!
갈대들이 한풍에 씻기는 소리가 연신 초옥의 주위에 스산한 메아리를 자아내고 있었다.
초옥의 한 방 안에는 두 명의 인물이 대좌하고 있었다.
그 중 한 명은 적염적발의 백포노인이었다. 노인의 얼굴에는 별다른 특징이 없었지만 가끔씩 노인의 두 눈에서 탐욕스럽고 위악적인 눈빛이 소리없이 번들거리며 솟구쳐 나오고 있었다.
그 앞의 인물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흑의복면으로 가린 인물이었다. 극히 무심하고 전율적으로 차갑게 빛나는 기도를 지닌 이 위인의 전신에서는 음침하면서도 몹시 기분나쁜 냄새가 체취처럼 스며져 나오고 있었다.
“······!”
얼마간의 침묵 속에서 두 사람의 시선이 뒤엉키더니 복면인의 입이 먼저 열렸다.
“좋소. 수락하겠소. 헌데··· 죽여줄 자는 몇 명이오?”
복면인의 음성은 도저히 인간의 음성이라고 믿어질 수 없었다. 일점의 감정도 억양도 없는 그의 음성은 차라리 사흘을 굶주린 살쾡이의 울부짖음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한 명!”
노인의 대답은 간단했다.
노인은 습관적으로 자신의 붉은 수염을 툭툭 건드리고 있었다.
“한··· 명?”
복면인은 언뜻 곤혹스런 기색을 눈빛 속에 떠올렸다.
“단 한 명 때문에 본 사월회(死月會)의 전원을 필요로 한단 말이오?”
복면인의 삭막무비한 음성은 손상된 자존심으로 인해 한껏 흥분되어 있었다.
“사월회 전체를 필요로 하는데 드는 대가는 이미 충분히 지불했으니 더 이상 군말은 필요없소. 당신들은 한 사람을 그냥 죽여주기만 하면 되는 것이요.”
태연히 내뱉는 노인의 태도는 차가웠다.
복면인은 경멸의 눈빛을 떠올리며 비웃듯 말했다.
“당신같은 사람 때문에 본 사월회는 날로 번창하고 있지. 그러나 단지 한 명을 죽이기 위해 그런 막대한 황금을 받는 것은 별로 원치 않는 일이오.”
노인은 그 말에 피식 냉소를 지었다.
“사월회주가 이렇게 말이 많을 줄은 몰랐군.”
노인은 더 이상의 대화를 필요로 하지 않는 듯 시선을 다른 곳으로 쑥 돌려 버렸다.
사월회(死月會)!
일명 죽음의 달이라고 불리우는 단체가 바로 사월회였다. 그들이 누군가를 죽이고자 한다면 단 일 인의 자객만으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완벽한 살인을 치루어낼 수 있었다.
그들이 목표로 하는 자는 하늘이 보이고 땅이 닿는 어느 곳에 있던지 죽음이라는 기정의 사실을 떨쳐낼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최강의 고수이든 삼류의 하류잡배이든 죽이려고 마음먹은 자는 누구든 가리지 않고 해치웠다.
그들이 바로 사월회의 자객들이었다.
그러나 그 대가만은 죽이려는 자의 신분고하에 관계없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났다.
사월회의 총 인원은 회주를 포함하여 단 네 명 뿐이었으며 그 네 명의 자객의 정체는 모두 극비에 가려져 있었다. 또한 그들은 단 일 인 이상이 같은 목표를 노린 적이 없었다. 그러나 사월회가 청부받은 살인에 있어 실패란 것은 전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딱 잘라 말해서 지금까지 그들은 소수정예의 가장 완벽한 살인자들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그들에게 단 한 명을 죽여달라며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는 이 풍위도의 노인과 그가 죽여달라는 그 일 인은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정말 두고 볼 일이다.
“······!”
복면을 한 사월회주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냉혹하게 번뜩이는 눈으로 노인을 쏘아보며 음산하게 내뱉았다.
“좋소. 일이 끝난 후에 인사없이 갔다고 섭섭해 하진 마시오.”
“좋을 대로······.”
노인은 서슴없이 대꾸하고는 이내 품 속에서 주판 하나를 꺼내더니 무엇인가 혼자서 열심히 계산을 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미 사월회주의 존재를 완전히 잊었는지 무시하는 듯했다.
“······!”
사월회주는 전신에서 으스스한 살기를 발하며 초옥을 나서 갈대숲 속으로 향했다. 아니 그가 그 쪽으로 향했다 싶은 순간 그는 이미 허상이 꺼지듯 소리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가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던 노인은 문득 시선을 들어 사월회주가 사라진 곳에 일별을 던졌다.
노인의 두 눈에는 왠지 기이한 조롱의 빛이 짙게 담겨 있었다.
“모두 그렇게들 말은 했었지··· 그러나 그런 놈들 치고 이곳 풍위도를 살아서 빠져나간 놈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물론 네놈들 사월회라고 해서 예외일 수는 없는 것이지······.”
노인의 입에서 비릿한 조소가 물씬한 독백이 흘러나왔다. 그것은 참으로 속셈을 전혀 추측할 수 없는 괴이한 중얼거림이었다.
이쨌거나 노인은 여전히 습관적으로 수염을 툭툭 건드리고 있었고 어느덧 붉은 해가 갈대밭과 하늘을 온통 선홍색으로 물들이며 서서히 떠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일은 그 떠오르는 태양과 함께 시작되었다.
무맥 1장 -3
학노인 사무현의 모옥을 떠난 소야는 막 초옥을 둘러싼 울창한 갈대숲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멀리 초옥의 지붕이 보일 듯 말 듯 시야에 비쳐들고 있었다.
그의 옷에 주렁주렁 열렸던 고드름은 끝에서부터 천천히 녹고 있었다.
스스스······!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모를 한 줄기 한풍이 갈대숲 사이로 불어닥쳤다.
“응?”
소야는 갑자기 그 자리에 멈춰섰다. 그의 초롱초롱한 눈망울 속에는 한 가닥 기이로운 이채가 빠르게 스쳐가고 있었다.
“바람의 냄새가 수상해······.”
혼자서만 알아들을 수 있는 나직한 독백을 내뱉은 소야는 옆의 갈대 줄기 하나를 툭 꺾어 들고는 이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변함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소야가 채 열 보도 가지 못한 때였다.
갑자기 한 줄기의 흐릿한 인영이 소야의 등 뒤에서 소리없이 솟아나오는 것이었다.
스읏······!
그 인영은 바짝 마른 체격에 무심한 눈빛과 기도를 흘리는 흑의복면인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의 눈빛은 소리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이런 꼬마녀석을 위해 본 사월회 전체가······?’
그의 눈빛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찰나였다. 복면인은 이내 무심하고 냉혹무쌍한 살기로 뒤덮였다.
‘어른이건 아이건 목숨이 다를 것은 없겠지··· 어차피 한 번은 죽을 목숨이니까······!’
슷······!
동시에 복면인은 나타날 때와 똑같이 소리없이 흐릿해지며 사라져 버렸다.
그렇다. 사월회의 죽음의 달 네 개가 동시에 노리고 떠오른 살인 목표물은 바로 소야라 불리는 이 어린 소년이었던 것이다.
“······!”
소야는 여전히 침착한 걸음으로 갈대숲 속을 지나가고 있었다.
그의 입가에는 한 줄기 의미 모를 미소가 가늘게 맺혀 있었다.
“당신들은 나를 죽여야 하는 이유를 모르지만 나 소야는 그대들과 싸워야 하는 이유를 알고 있어··· 그리고 이건 누구에게나 결코 장난이 아니지······.”
나직한 독백이었지만 마치 누군가 들으라는 듯 그의 독백은 또렷하고 분명하게 흘러나왔다.
스스스······!
주위에는 깊은 정적과 함께 뼈를 에일 듯한 한풍만이 갈대숲을 흔들며 불어오고 있었다.
소야는 나직한 그러나 여전히 누군가에게 말하듯 독백을 이었다.
“당신들은 십오 년 전 한 목숨을 처치한 일이 있었지? 그 인물은 이십 년 전에 멸망한 천년녹림(千年綠林)의 최후 생존자 오인 중의 한 명이었다고 할아버지에게서 들었어.”
휘우웅······!
겨울의 북풍은 더욱 강한 냉기를 품고 갈대숲에 휘몰아쳤다.
소야는 두 눈에 맑은 광채를 빛내며 또렷하게 내뱉았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할아버지는 결코 목숨을 가지고 장난하는 걸 좋아하지 않아!”
말을 마침과 동시에 소야는 신형을 일직선으로 쭉 날렸다.
번··· 쩍······!
소야가 신형을 날리는 순간 한 가닥 무형의 검기가 섬광처럼 소야가 서 있던 땅 밑에서 솟구쳐 올랐다.
“하하핫······!”
소야는 그 순간 이미 낭랑한 웃음을 흩뿌리며 갈대숲 사이로 사라지고 없었다.
소야가 없어진 그 자리에 아까의 그 흑의복면인이 또다시 기척도 없이 출현했다.
“저 꼬마가 바로 멸망한 녹림의 후예라고···? 그렇다면 죽여야 할 이유는 더욱 분명해진 셈이군.”
소야가 사라진 곳을 응시하는 흑의복면인의 입에서 비릿한 중얼거림이 새어나오는가 싶더니 이내 그의 전신에서는 살객 본연의 냉혹함과 비정한 살기가 물씬 피어오르고 있다.
“네번째 죽음의 달 혈사월(血死月)의 손은 죽이기 위해서만 존재한다!”
네번째 죽음의 달이라고 자칭한 혈사월이라는 자는 냉혹한 한마디를 씹어뱉고는 가공할 살념을 타올렸다.
그의 두 동공이 살기로 인해 번들거리고 있을 때였다.
“······!”
혈사월의 살기어린 눈빛이 갑자기 굳어졌다.
입가에 시리도록 무심한 미소를 베어문 하나의 어린 얼굴이 언제 나타났는지 정면에서 기척도 없이 자신을 향해 쇄도해 오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그 어린 얼굴은 두 말 할 것도 없이 소야의 얼굴이었다.
“이 꼬마 녀석이······?”
혈사월은 믿을 수 없는 심정이었다. 그는 원래 이 꼬마를 향해 사월회 전체가 투입된 만큼 누군가 보이지 않는 막강한 호위가꼬마의 주위에 맴돌고 있으리라 여겼다.
그렇게 생각한 그는 먼저 그 호위부터 처치한 후 소야를 죽이리라 계산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순간 호위는커녕 살인 목표물이 직접 자신을 향해 쏘아오고 있는 것이다.
혈사월은 복면 속에서 피식 냉소를 흘렸다.
“그렇다면 일이 간단하게 끝나겠군.”
번··· 쩍!
그의 검에는 아무런 변식도 없음은 물론이었고 어떠한 변화조차도 없었다. 그것은 단지 덮쳐오는 소야를 죽일 수 있는 가장 짧은 거리를 날아 쾌속하게 목줄기를 향해 한 줄기 섬광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것은 필설로 형용할 수 없는 마치 날아가는 유성을 천만분지 일의 속도로 나눈 것과 같은 가공할 쾌검이었다.
“ㅋ······!”
그의 검이 작렬했다 싶은 순간 예의 신음성이 터져나왔고 산뜻한 감촉이 혈사월의 검을 쥔 손 끝으로 전해졌다.
찰칵!
그의 검은 어느새 자신의 검집 속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미안하군. 꼬마······!”
말은 그렇게 했으나 결코 미안하지 않은 어조의 독백을 흘리며 혈사월은 만족한 눈빛으로 허공을 향했다. 그는 마치 곧 핏물을 흩날리며 떨어져 내릴 소야의 모습을 보려고 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착각에 불과했다.
“헉!”
그의 입술을 비집고 터져나온 것이 만족스러운 미소가 아니라 창황한 경호성이었다. 살기로 뒤덮여 있던 그의 두 눈은 불신으로 인해 부릅떠져 있었다.
분명 허공에 흩날리며 떨어지는 것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노렸던 목표가 아닌 산산이 바스러진 갈대 줄기였다.
그는 황급히 시선을 옆으로 돌렸고 그의 시선이 닿는 곳에서 차디차게 미소짓고 있는 소야의 얼굴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 사술(邪術)?”
살객 혈사월은 안면을 부르르 떨며 중얼거렸다.
번쩍!
한 줄기 소리없는 죽음의 섬광이 불가사의한 환상처럼 혈사월의 가슴에 꽂혔다. 그것 역시 메마른 갈대 줄기였다.
파르르!
갈대줄기의 끝이 혹한의 북풍에 무심히 흔들리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하얗게 메말라 있던 갈대는 곧 심장 부근에서부터 새빨갛게 물들어 갔다.
혈사월의 전신은 마치 폭풍을 만난 것 같이 경련하고 있었으며 그의 가슴으로부터 계속해서 뜨겁고 선연한 핏빛의 물줄기가 솟아나고 있었다.
“네··· 네놈이 이런 사악한 수법을······!”
혈사월은 분노와 불신에 찬 음성으로 쥐어짜듯 외쳤다.
소야는 사뿐하게 그의 앞에 내려서며 싱긋 웃었다.
“귀하가 본 허상은 배교비승(拜敎秘承)의 천기구중환법(天機九重幻法)이었고 갈대를 날린 것은 소림의 금강참령추(金剛斬靈抽)였다. 그런데 그것을 사술이라고 몰아세우다니··· 알고보니 귀하는 살수답지 않게 너무 무식하군.”
소야는 자세한 설명까지 해주며 혈사월을 반박했다.
혈사월은 이번엔 아예 자신의 두 귀까지 의심하고 말았다.
“너··· 너같은 꼬마 놈이··· 어··· 어떻게······?”
그는 어떻게 그렇게 광범위한 무학을 일신에 지닐 수 있겠느냐고 묻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말도 다 마치지 못한 채 입술을 차디찬 대지에 처박아 버렸다.
쿠··· 웅!
혈사월은 지금까지 숱한 생명들을 자신의 손으로 떠나보냈던 저승으로 이번에는 자신이 직접 떠나게 되는 것이었다.
소야는 쓰러진 시신을 일견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비록 훔쳐 배우긴 했으나 제법 쓸만한 것들이야······!”
스슷······!
말이 끝남과 동시에 소야는 다시 갈대숲 사이로 신형을 감춰버렸다.
순간적으로 일어났던 일이지만 실로 믿기 어려운 사실이었다. 단 한 번의 실패도 모르던 사월회의 자객 중 한 명이 마침내 명을 달리하게 된 것이다. 그것도 불과 십이 세의 나이어린 소년의 손에 의해서 말이다.
만약 이것이 만인에게 알려진다면 아무도 믿지 못할 천하경동의 비사였다.
스··· 스······!
무심코 앞을 바라보던 소야는 혈사월의 시신이 쓰러진 바로 옆의 갈대가 미세하게 흔들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 자리에서는 또 한 명의 검은 그림자가 흐릿한 묵운처럼 떠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연기처럼 끊임없이 흔들리며 그 형체를 확인할 수 없는 인영이었다.
소야가 넋을 잃고 그것을 바라보고 있을 때 인영의 입에서 마치 음습한 동굴에서 흘러나오듯 스산냉혹한 일성이 흘러나왔다.
“보통 놈이 아니군··· 이건 사월회의 첫 희생으로 기록될 것이다. 넷째······!”
그 음성은 어디에도 비할 데 없이 음산했고 한 마디 한 마디 속에 물씬 배어 나오는 살기는 혈사월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이 가공할 정도였다.
그 인영은 그 한 마디를 남기고는 흔적도 없이 허공 속으로 녹아들 듯 사라졌다.
휘우우웅······!
바스스······!
메마른 갈대들이 바람에 씻기어 못내 비명을 지르는 그 자리에서 갈대에 찔려 쓰러진 혈사월의 시신이 급속도로 얼어붙고 있었다.
풍위도의 겨울 어느 날 새벽.
지상 최고로 불리우는 네 명의 절정살수와 십이 세 어린 소년과의 기이한 혈투는 이렇게 막이 오르게 된 것이다.
무맥 2장 어떤 비밀(秘密)
초옥의 방 안.
예의 적염노인이 홀로 육포를 안주삼아 유유히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평소와는 조금 다른 모습으로 가끔씩 갈대숲 쪽으로 시선을 던지던 노인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불안한 눈빛이 되어가고 있었다.
“사월회는 너무 무리였나···? 그럴 리가 없지. 어떻게 키운 녀석인데······.”
노인은 고개를 흔들어 내심의 불안을 떨쳐 버리는 듯 술 한 잔을 쭈욱 들이켰다.
“크······!”
술 한 잔을 들이키고는 이내 황홀한 표정을 짓던 노인은 육포 하나를 쭉 찢어 입으로 가져가며 힐끗 천공을 응시했다.
어느새 붉은 햇살이 온누리를 비추며 드높은 천공에 떠올라 있었다.
조용히 햇살을 응시하던 노인은 또다시 눈빛이 불안하게 흔들리며 갈대숲을 쳐다봤다.
“빌어먹을··· 속이 타는군!”
노인은 초조감을 견딜 수 없는 듯 연달아 안주도 없이 술을 입속으로 들어 부었다.
그가 서너 잔 정도 술을 들이켰을 때였다.
“아··· 악!”
갑자기 나이어린 소년의 처절한 비명이 갈대숲 속에서 터져울려왔다.
휘익!
그 비명성과 동시에 온통 시뻘건 핏물에 젖은 옷자락 하나가 허공에서 산산이 분해되며 흩날리는 게 보였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노인의 적염이 폭풍처럼 부르르 떨리고 두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헉! 저··· 저건 그 녀석의 옷자락!”
노인은 경악실성이 터뜨리며 신형을 날려 비명성이 난 곳으로 쏘아져 갔다. 이미 그의 전신은 극한의 당혹함과 살기로 뒤범벅되어 있었다.
“안돼! 소야를 죽이면 안돼!”
그는 필사적으로 외치며 갈대숲으로 뛰어들었다.
그런데 노인이 갈대숲으로 사라졌을 때였다. 어디선가 작은 그림자 하나가 기척도 없이 초옥 안으로 스며드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놀랍게도 소야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더욱 놀라운 것은 그가 겉옷을 벗은 속옷차림이라는 것 외에는 멀쩡한 모습이었다는 것이다.
소야는 언제나 그래왔듯이 치기스러운 미소와 짓궂은 눈빛을 반짝이며 노인이 앉아 있던 대청에 털썩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할아버지는 너무해. 이런 좋은 것을 혼자만 몰래 마시고 있었다니······!”
소야는 태연히 술을 한 잔 따라 입으로 가져갔다.
“크··· 좋다!”
술 한 잔을 마신 소야는 얼굴을 묘하게 찡그렸다.
주인이 없는 곳에서 유유히 육포 안주까지 챙겨 먹고 있는 그의 모습은 정말이지 너무나도 능청스러웠다.
이윽고 노인은 피에 물든 소야의 겉옷 조각을 집어들고 갈대숲으로 나와 초옥으로 다가왔다.
“아아······!”
그는 신음성을 흘리며 망연한 눈길로 아직도 갈대숲의 이곳 저곳을 살피고 있었다.
소야는 그것을 재미있다는 듯이 지켜보며 또 한 잔의 술을 홀짝 마시고 있었다.
“크······으!”
노인은 순간 그 소리를 들었는지 고개를 홱 돌려 대청을 쳐다보았다. 그의 두 노안으로 소야가 술잔을 내려놓는 모습이 너무나도 생생히 들어왔다.
노인의 두 눈 가득히 분노의 광망이 서리며 안면이 홱 뒤틀려 버렸다.
“이··· 놈!”
십여 장이 넘는 거리를 언제 번개같이 날아왔는지 노인은 어느새 겉옷을 내팽개 쳐버리고 와락 소야의 멱살을 잡아채 허공으로 번쩍 치켜들었다.
이에 소야는 두 발을 바둥거리며 다급한 외침을 터뜨렸다.
“겨우 두 잔밖에 안 마셨단 말야!”
“요놈아! 이 술은 황제조차도 구경 못한 백 년 묵은 청옥밀(靑玉密)이란 말이다!”
노인은 노성을 터뜨렸다.
정말이지 기가 꽉 막힐 노릇이다. 그는 소야가 피묻은 겉옷으로 장난을 쳐서 자신을 속인 것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아까운 술을 축냈기 때문에 이토록 노하는 것이었다.
소야는 허공에 매달린 채 얼굴을 불만스럽게 찡그렸다.
“에이···! 할아버지도 어디서 슬쩍 한 거면서······.”
“뭐가 어째?”
노인은 짐짓 두 눈을 무섭게 부릅떴으나 그의 입가에서 절로 떠오르는 인자한 미소는 숨길 수가 없었다.
“에라! 요 녀석아!”
“씨··· 이! 머리 상한단 말야.”
소야는 입술을 한 자나 내밀었다.
그제야 그는 겨우 허공에서 해방되어 내려올 수 있었다.
노인은 소야를 내려놓고는 청옥밀이 든 술병을 흔들어 보며 불만스럽게 중얼거였다.
“징그러운 놈! 이제는 내 술까지 넘보다니······.”
이들은 정말 보통 사람의 생각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괴이한 조손간이었다.
소야는 노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데 오늘 아침 할아버지가 변장한 모습은 별로 보기가 좋지 않았어.”
“하도 변장을 해서 이젠 변장할 모습도 거의 바닥이 났기 때문에 할 수 없다.”
노인은 투덜대듯 말하며 고개를 쓱 흔들었다.
그런 그의 모습은 정말이지 나이를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치기스럽고 청수한 모습이었다.
이 노인은 바로 천하제일의 갑부라 할 수 있으며 지금은 이곳 풍위도에서 모든 이의 경외를 한몸에 받고 있는 풍위도주 몽향신투(夢香神偸)였다.
그리고 그의 앞에 앉아 있는 소야라는 아이는 두 말 할 것도 없이 십수 년 전 달마비동에서 탄생한 그 어린아이였던 것이다. 그 아이는 지금 이곳 풍위도에서 향소야(香小爺)로 불리우고 있었다.
향소야는 몽향신투 몰래 술병을 집어들고 훌쩍 마당으로 내려섰다.
몽향신투의 눈이 이내 흠칫 휘둥그래졌다.
“너··· 무엇······.?”
와장창!
미처 어찌할 사이도 없이 향소야는 그 귀한 청옥밀을 자신의 손바닥에 몽땅 부어 버리고 있었다.
“손에서 피냄새가 나는 건 싫어. 술로 씻어야 냄새가 깨끗이 가신단 말야.”
“그렇다고 그 귀한 청옥밀을······?”
몽향신투는 아연실색하여 입도 다물지 못했다.
향소야는 미간을 가볍게 찌푸렸다.
“이번에는 제법 질긴 놈들이었단 말야. 특히 자칭 무슨 회주(會主)라 중얼거리며 죽은 자와는 거의 반 시진이나 숨바꼭질해야 했어.”
잠시 동안 투덜거리던 향소야는 술이 묻은 손을 옷에 쓱쓱 문지르더니 품 속에서 하나의 사각형 묵패(墨 )를 꺼냈다.
그 묵패에는 핏빛의 달 네 개가 선명히 각인되어 있었고 그 달의 중앙으로 네 개의 검이 동시에 꿰뚫고 있는 섬뜩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그렇다. 그것은 바로 사월회의 신표이며 회주의 신물이었던 것이다.
휘··· 익!
묵패는 곧바로 허공을 날아 몽향신투의 앞으로 날아들었다.
“······!”
몽향신투는 묵패를 움켜쥐었다.
묵패를 움켜쥔 몽향신투의 두 눈이 형용할 수 없는 깊이로 젖어들며 안색이 얼음장처럼 차갑고 딱딱하게 변색되었다. 지금 그의 안색은 도저히 산사람의 것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차가운 느낌을 주고 있었다.
그는 수중의 묵패를 그대로 꿰뚫어 버릴 듯 노려 보았다.
부스스······!
몽향신투는 묵패를 쥔 손에 힘을 주었고 이내 묵패는 그대로 가루로 부서지며 밑으로 흘러내렸다.
“이로써 셋째의 한이 조금은 풀렸으리라······!”
그는 여전히 안색을 굳힌 채 나직한 독백을 흘리며 허공으로 지그시 시선을 돌렸다.
지금 그의 눈빛은 전혀 그답지 않은 허허로운 눈빛이었다.
“셋째가 죽은 지도 벌써 십오 년이 흘렀군······.”
몽향신투의 입술 사이로 회한이 깃든 어두운 한 줄기 탄식이 미세하게 흘러나왔다. 그의 그러한 탄식 속에는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진득한 회한의 사연이 담겨져 있는 것 같았다.
무맥 2장 -2
녹림(綠林).
일찍이 이 땅에는 녹림이라는 곳이 있었다.
녹림은 이천 년 무림사에 천 년의 뿌리를 내려온 한 줄기 도도한 뿌리였다. 또한 그 세력으로 말하자면 개방( )보다도 방대했고 그 역사는 소림, 무당, 개방의 삼파를 제외한 어느 무파보다도 깊었다.
혹자는 녹림을 하류잡배의 쓰레기가 득실거리는 곳이라고 매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은 한 녹림 안에 두 개의 거대한 기둥이 공존하고 있었음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협림(俠林)과 사림(邪林).
그것이 바로 녹림의 두 개 기둥이었다.
사림(邪林)!
이곳은 이름만 사림일 뿐이지 실제로는 결코 사악한 무리들의 집단이 아니었다. 이들은 단지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발버둥치는 가여운 무리들이라고 해야 옳았다.
이 사림의 모든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었다. 그것은 그들이 세상에서 발붙이지 못한 낙오자들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살기 위해 어떠한 일이라도 가리지 않았다.
무식하고 못난 뱃놈에서부터 매음굴의 뚜쟁이, 심지어는 소매치기와 좀도둑까지 하는 사람도 있었으니 어찌보면 진정 하등의 인간류임에 틀림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일에 충직하며 절대 배신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었다. 또한 그들은 자신들을 이끌어 주는 힘의 원천에 대해서는 목숨까지도 바치는 경외를 아끼지 않는 그런 의리의 무리들이었다.
그런 사림을 이끄는 힘의 원천이며 그들의 의지처가 되는 것은 바로 협림(俠林)이라는 단체였다.
협림(俠林).
그들은 모든 사람을 통제하며 이끌었다.
그들 자신의 무학은 어떠한 방파에도 뒤지지 않았으며 어떠한 정파의 문파보다도 광명정대(光明正大)한 대도를 걸었다.
그들은 사림에서 걷어들인 막대한 자금을 불행한 인간들을 위해 아끼지 않고 썼으며 녹림도의 구성원을 철저하게 보호해 주었다.
그들의 조직을 살펴 보자면 총맹주(總盟主)가 일 인이며 사림과 협림의 맹주가 각각 일 인이었다. 그리고 총맹주의 좌우에서 그를 보좌하는 다섯 명의 녹천대장로(綠天大長老)가 있었다.
오 인의 녹천대장로는 실질적으로 녹림의 모든 일을 주관하는 자들이었으며 모두 총맹주의 직위를 거친 전대 맹주로 구성되어 있었다.
총맹주와 녹천대장로는 녹림의 하늘이었다.
수석(首席) 녹천대장로(綠天大長老) 기천악(奇天岳).
놀랍게도 이 이름은 바로 까마득한 과거에 몽향신투를 가리켰던 이름이었다.
그는 찬란했던 녹림시대의 하늘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운명이란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이었다.
어느 날 그 모든 것이 비참하게 붕괴되고 말았다.
녹림의 기둥이던 협림의 이천정예가 하루저녁 하루아침에 모조리 피어린 고혼이 됨을 시작으로 세칭 녹림대혈하(綠林大血河)라고 불리우는 가공할 대참사지변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그 원인과 흉수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밝혀진 것이 없었다.
그 와중에서도 다섯 명의 녹천대장로는 극적으로 목숨을 건졌으나 보이지 않는 어떤 가공할 손에 의해 그들은 이틀 후 태산 골짜기에서 기어이 추살당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녹천대장로 오 인이 모두 저승고혼이 되었다고 세상에 알려진 지 오래였다.
그러나 세인들이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르게 그 중 수석 녹천대장로였던 기천악만은 몽향신투라는 이름으로 아직도 건재하게 살아 있었다. 그것도 풍위도에서 그의 후예를 통해 잠룡처럼 힘을 기르면서 말이다.
오늘 사월회의 네 명 절정 자객들과 향소야가 벌인 일전은 몽향신투가 오랜 세월 동안 철저히 추적하여 밝혀낸 흉수들 중 하나인 사월회에 대한 복수였으며 아울러 향소야의 실전연습이기도 했다.
몽향신투는 턱 밑의 백염을 쓸어내리며 문득 허허로운 웃음을 흘려냈다.
“후후···! 그 동안 도둑질 해서 모은 황금으로 이 풍위군도 전체를 황부에서 사들여 멸망한 녹림의 후예들을 비밀리에 모아들였다.”
몽향신투의 말이 사실이라면 풍위도의 주민들은 모두 멸망한 녹림의 후예이거나 지난 날 그 끔찍한 참사 속에서 천신만고 끝에 목숨을 부지하고 숨어 살던 인물들임이 분명했다.
두 눈을 지그시 내려감은 그의 입에서는 계속해서 독백이 이어지고 있었다.
“지난 날··· 네 명의 의제들이 내 눈 앞에서 피를 토하며 죽어가던 모습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으로 독백을 하고 있는 그의 전신에서 무어라 형용할 수 없이 숨막히는 기도가 구름처럼 뭉클 피어오르고 있었다.
몽향신투의 전신에서 엄청난 살기가 발동되고 있을 무렵 문득 한 명의 인물이 갈대숲을 건너 초옥 쪽으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허리에는 한 자루 거대한 감산도를 둘러찼고 양 손에는 무언가 묵직해 보이는 대바구니를 들고 있는 중년의 인물은 다름아닌 청파루의 주인인 기용목이었다.
그는 과거 협림에 속해 있던 녹림의 소년무사였으며 이곳 풍위도에서는 언제나 몽향신투와 향소야의 식사를 자신이 직접 정성스럽게 만들어 들고 오는 자였다. 몽향신투는 힐끗 다가오는 기용목을 보며 전신에서 뿜어내던 모든 기운을 지워 버렸다.
“사월회의 놈들은 셋째를 죽여달라는 청부를 맡았었지······!”
나직이 중얼거리는 몽향신투는 문득 한 가닥 차가운 미소를 스쳐보냈다.
“오늘 소야의 무공 수련 상대가 놈들의 마지막 청부였어.”
뼈 속까지 스며드는 차가운 독백이었다.
오늘의 일이 과연 복수를 위한 무공수련이었는지 무공수련을 위한 복수였는지는 몰라도 분명한 것은 사월회라는 지상 최강의 자객집단이 오늘로써 영원히 사라졌다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향소야는 문 밖으로 나가 얼른 기용목에게서 대바구니를 받아들고 있었다. 바구니 속에는 음식이 가득 들어 있었다.
“야··· 오늘 아침은 진수성찬인 걸!”
향소야는 탄성을 터뜨렸다.
“힘을 쓰고 난 뒤에는 먹는 게 제일이지요. 공자님······!”
기용목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향소야도 그를 보며 싱긋 웃었다.
“그럼 오늘 저녁에도 잘 부탁해. 일이 생겨 밖으로 좀 나가야 하거든······.”
“알겠습니다.”
기용목은 미소어린 대답을 하고는 몽향신투 쪽으로 눈길을 돌리며 물었다.
“어떻게 처리할까요? 갈대숲 속에 이상한 물건들이 있던데······.”
몽향신투는 담담이 수염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정성껏 묻어주게. 그들의 죄는 이미 목숨으로 씻어졌으니······.”
“알겠습니다.”
기용목은 깊숙이 허리를 굽혔다. 그 모습은 몽향신투를 향한 깊은 경외심을 한눈에 느낄 수 있는 모습이었다.
향소야는 대청에 음식을 펼쳐 놓았다.
“기아저씨도 같이 먹어요.”
“하하···! 아닙니다. 공자님! 소인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기용목은 이어 빠른 걸음으로 되돌아 갔고 그가 갈대숲으로 완전히 사라짐과 동시에 몽향신투는 군침을 삼키며 음식들을 둘러 보았다.
“자···! 그럼 내장을 윤기있게 만들어 볼까······!”
그는 언제 그랬냐 싶게 원래의 밝고 소년처럼 치기스런 눈빛을 발하며 요리를 입으로 가져갔다.
“쩝쩝···! 어··· 맛 좋고······!”
향소야는 이미 그보다 빨리 음식들을 부지런히 입 속으로 가져가고 있었다.
무맥 2장 -3
어느새 깊고 깊은 심연처럼 붉은 노을이 드넓은 풍위군도의 갈대숲 속에 아스라이 젖어들고 있었다.
향소야는 그 노을 젖은 갈대숲 속에서 마치 안방에 누운 것처럼 편안한 자세로 드러누워 있었다. 그의 입에는 갈대잎 하나가 길게 물려 하늘거리고 초롱초롱한 눈망울엔 노을이 가득 물들어 있었다.
“석양이 질 때의 하늘은 언제나 편안한 느낌을 준단 말야··· 꼭 어머니의 품 속처럼 따뜻해······.”
누구나 그렇겠지만 향소야는 유독히 석양을 좋아했다. 때문에 맑은날 석양이 질 때면 그는 언제나 이렇게 갈대숲 속에 드러누워 땅거미가 어둑해질 때까지 하늘을 바라보곤 했다.
“······!”
눈도 한 번 깜박이지 않고 하늘 가득히 퍼져 나가는 노을 빛을 쳐다보고 있던 향소야의 입에서 나지막한 독백이 흘러나왔다.
“할아버지는 나를 처음 소림의 달마비동(達摩秘洞)에서 만났다고 했지······.”
향소야는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떠올렸다. 그것은 형언할 수 없이 우울한 미소였다.
“알 수가 없어··· 삼 년 전 처음 세상에 나갔을 때 나는 그곳에 가 봤었다. 과연 그곳에는 한 줌 재가 담긴 수정관이 놓여 있었지··· 하지만 그 수정관의 의미를 도저히 알 수가 없어.”
향소야는 짙은 곤혹과 고통의 표정을 한꺼번에 떠올렸다.
“더욱이 달마비동의 그 어느 곳에서도 난 내 출생에 관한 다른 단서를 아무것도 찾을 수가 없었다.”
향소야는 고통스럽게 독백을 흘려냈다.
사실 그는 이미 남몰래 소림의 달마비동에 들러 자신의 출생에 대한 비밀을 찾아 보았던 것이다.
툭······!
입 속의 갈대잎이 끊어졌고 향소야는 갈대잎을 내뱉고는 또 하나를 꺾어 입에 물었다.
그의 우울한 상념은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다.
“왜, 도대체 어떻게 갓난아기가 그곳에 있었을까? 그것은 결코 우연일 수가 없어. 더욱이 그곳이 천하제일의 금역인 달마비동이라면······.”
지그시 허공을 응시하는 향소야의 두 눈에서 석양은 더욱 짙고 강렬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그런데 더욱 기이하고 알 수가 없는 것은··· 수정관! 그 수정관이 왠지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고 자꾸만 영상 속에 떠오른다는 점이다. 날이 갈수록 더욱 뚜렷하게······.”
그의 기억 속에서 잊혀지지 않는 수정관은 차라리 그의 운명이라 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휘이··· 잉!
차가운 북풍이 그의 얼굴 위를 스치며 갈대숲 속을 뒤흔들었다.
향소야는 언뜻 한 가닥 결심의 빛을 떠올렸다.
“이번에 일이 끝나면 다시 소림사에 들러 비서들이 저장된 곳에 가봐야겠어. 뭔가 나의 탄생에 대한 단서가 분명하게 잡힐지 몰라······!”
잠시 동안 이를 앙다물고 있던 향소야는 또다시 극히 우울한 미소를 입가에 피워 물었다.
“부모··· 단지 생각만 하고 이름만 불러봐도 가슴이 따뜻해지는 나의 아버님··· 어머님··· 그 분들은 알고 계실까? 당신들의 자식인 이 향소야가 얼마나 외롭고 쓸쓸하게 자라야만 했는지······!”
그렇게 넋두리를 하는 그의 눈가에서 한 방울의 이슬이 비쳐들었다. 그것은 인간이라면 결코 거부할 수 없는 인지상정의 비애라고도 할 수 있었다.
천년녹림의 중흥을 한몸에 걸머지고 언제나 밝은 미소를 잃지 않던 향소야이지만 역시 그도 인간인지라 자신의 근원을 찾으려는 안타까운 몸부림을 떨쳐낼 수 없었다.
“······!”
향소야가 모든 것을 잠시 잊으려는 듯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석양에 물든 메마른 갈대들이 그의 시야를 채우며 들어왔다.
스스슷··· 스스스슷······!
스쳐가는 찬바람에 갈대들이 서로 뒤엉키는 소리가 향소야의 귓전까지 고스란히 들려왔다.
“이 놈아! 부르면 대꾸가 있어야지.”
언제 나타났는지 몽향신투가 향소야의 머리 위에 나타나 괘씸한 표정으로 호통부터 내질렀다.
“못들었단 말야.”
향소야는 입에 물고 있던 갈대잎을 내뱉고는 툭툭 털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이미 비애나 우울 따위의 빛은 씻은 듯이 사라져 있는 천연덕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향소야의 대꾸에 몽향신투는 기가 막힌 듯 말했다.
“새파랗게 어린 녀석이 벌써 귀라도 먹었단 말이냐?”
향소야는 불만스럽게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치··· 이! 내가 새파랗게 어리면 할아버지는 노랗게 늙었게······?”
“뭣? 요 맹랑한 녀석이······!”
마침내 향소야의 이마로 몽향신투의 알밤이 번개같이 날아갔다.
휙······!
그러나 향소야는 가볍게 그 손길을 피하며 어느새 초옥 쪽으로 달음질 치고 있었다.
“헤헷···! 노란 할아버지의 주먹쯤은 간단히 피할 수 있단 말야······!”
향소야의 치기어린 짓궂은 웃음소리가 갈대숲에 밝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애꿎은 허공만 쥐어박은 몽향신투는 쩝쩝 입맛을 다셨으나 그의 얼굴에는 이내 자애스런 미소가 가득 떠오르고 있었다.
“허허··· 그 녀석······!”
그는 대견한 눈빛으로 멀어져 가는 향소야의 뒷모습을 응시하며 수염을 쓰윽 쓰다듬었다. 그런 그의 얼굴로 한 줄기 회상의 빛이 스쳐 올랐다.
“다섯 살 때부터 문과 무를 익히기 시작했지만 녀석의 뛰어난 오성과 능력은 언제나 나를 놀라게 했지··· 중원의 모든 무학과 학문을 깨우쳤지만··· 저 녀석은 결코 만족하지 못했어······!”
몽향신투의 말은 진정 사실이었다.
그는 향소야에게 문무를 가르치기 시작하면서부터 거의 잠잘 시간조차 갖지 못했다. 그것은 자신의 무학과 신기에 가까운 투술이 불과 사흘만에 향소야에 의해 바닥이 났기 때문이었다.
향소야는 그 아무리 난해한 것도 단 한 번 쓰윽 훑어보는 것으로 모조리 암기했고 또한 깨우쳤다. 아니 그보다 한 수 더해서 오히려 어떤 것은 그 허점까지 일일이 지적하기도 하며 한 권의 책으로 반나절 이상을 허비한 적이 없었다.
그에 따라 몽향신투는 비명을 지를 정도로 바쁘게 서책과 무공비급들을 날라야 했던 것이다. 그는 현존하는 문파는 물론 실전된 문파의 절급까지 찾기 위해 발이 닿도록 헤매어 다녔으며 심지어는 황궁서고(皇宮書庫)까지도 이잡듯이 뒤졌었다.
그렇게 천하에 존재하는 모든 학문서와 비급들이 불과 반나절도 넘김없이 향소야의 손을 스쳐갔고 그와 동시에 그것들은 모두 귀신같이 훔쳐왔다가 감쪽같이 제자리로 되돌려졌다.
이러한 사실은 설사 그 주인에게 말한다 해도 믿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어쨌거나 향소야는 구파일방의 절기는 말할 것도 없고 멸문된 마교(魔敎), 천축의 홍교(紅敎), 청교(靑敎), 사문대파(邪門大派)로 몰려 멸문된 배교(拜敎)를 비롯하여 서장의 포달랍궁(布達拉宮), 동영(東瀛)의 인자술(忍者術) 등 수백의 무류를 모두 다 익혔다.
지금은 몽향신투 스스로도 어떤 것을 훔쳐왔었는지 다 기억할 수도 없을 정도였다.
또한 유가(儒家), 법가(法家), 불가(佛家), 선가(仙家) 등의 삼교구류(三敎九流)의 경전들과 각 대의 거학자들의 문집 수천 권까지 모조리 섭렵하였다.
그야말로 소림의 장경각을 비롯하여 각파의 비전밀고, 황궁서고 등은 몽향신투의 손때 발때로 반들반들해졌다. 그러나 몽향신투는 어떠한 무학과 학문의 경전 앞에서도 향소야의 만족해 하는 얼굴을 보지 못했다.
결국 육 년만에 몽향신투도 향소야를 만족시키는 일에 어쩔 수 없이 포기하고 말았다. 그것은 더 이상 가져다 줄래야 줄 책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바로 향소야가 열한 살 때의 일이었다.
그후 향소야는 풍위도를 벗어나 중원대륙을 마음껏 활보하기 시작했다. 어느새 목에 걸린 상금이 몽향신투보다 두 배나 많은 엄청난 위명을 떨치기 시작했으며 그 정체조차 발각되지 않는 완벽한 수법으로 소위 부자라고 거들먹거리는 자들에게는 공포의 대명사로 불리워지고 있었다.
“녀석은 실로 완벽하게 녹림을 재건하고 있다··· 하지만······.”
향소야를 생각하며 흡족해하던 몽향신투의 눈빛에 돌연 깊은 우려의 빛이 떠올랐다.
“자신이 태어난 내력을 알아낸 후엔 어떻게 변할지······?”
몽향신투는 향소야가 커 갈수록 그러한 불안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이미 과거 극비 속에서 행해졌던 소림사의 반야불밀나선대법과 향소야 탄생의 비사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향소야가 소중한 만큼 향소야의 내력을 밝혀내는 일 또한 중대사가 아닐 수 없었다. 마침내 그는 모든 사실을 알아냈으나 향소야에게 차마 발설할 수가 없었다.
“만약 녀석이 계속 소림에 있었다면··· 달마조사에 비교할 수 있는 엄청난 신인이 되었을 것을······!”
마지막 한 줄기 죄스런 독백과 함께 몽향신투는 느릿느릿 초옥 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의 머리 위에서 석양은 최후의 불꽃을 화려하게 피워올렸고 차가운 서북풍은 풍위군도 전체를 휘감고 쉴새없이 불어닥치고 있었다.
무맥 2장 -4
초옥의 대청.
향소야는 막 눈이 부시도록 화려하고 깨끗한 백의를 갈아입고 있었다.
백의는 향소야의 뛰어난 용모와 어우러지며 그 모습을 한층 눈부시게 만들고 있었다. 옛말에 옷이 날개라고 백의를 걸친 향소야의 모습은 마치 고귀한 신분의 귀공자를 보는 듯했다.
그런데 한 가지 기이한 점은 향소야의 몸에 비해 옷이 너무 크다는 점이었다. 소매는 아예 손등을 뒤덮은 채 무릎까지 내려왔고 옷자락은 대청 바닥에 길다랗게 끌리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어린 꼬마가 아버지의 커다란 장삼을 푹 뒤집어 쓰고 있는 것과도 같은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었다.
“황제의 예복을 만드는 금릉의 어의점(御衣店)에서 특별히 맞춘 것이라 역시 다르군······!”
혼자 이리저리 자신의 옷맵시를 살펴보던 향소야는 매우 흡족한 표정이었다.
몽향신투는 어이가 없어 실소를 흘렸다.
“허허허··· 하긴 네녀석이 아니면 누가 그런 멋진 의복을 걸치겠느냐?”
향소야는 싱긋 짓궂은 미소를 던졌다.
“후후···! 이래도 할아버지는 웃을 수 있을까요······?”
향소야는 의미모를 한 마디를 내뱉고는 몸을 움직여 보이기 시작했다.
꿈틀꿈틀······!
그러자 그의 모습이 서서히 환상처럼 변해가기 시작했다. 먼저 전신의 근육이 소리없이 움직이며 쭉쭉 늘어나듯 커졌고 동시에 얼굴의 근육 또한 환상처럼 일렁이는가 싶었다.
향소야의 몸에서 일어나는 변화가 다 끝났을 무렵에는 이미 어린 향소야는 없고 헌칠하고 늠름한 한 명의 절세미장부가 헌앙한 모습으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실로 눈깜짝할 사이의 완전한 변모가 아닐 수 없었다.
이미 어리고 총기 반짝이던 향소야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또한 백의는 더없이 근사하게 청년의 몸에 딱 들어 맞았다.
몽향신투는 입이 딱 벌어졌다.
“엉? 배교의 환체변용대법(幻體變用大法)······?”
배교의 환체변용대법!
이것은 일반 역용술과 근본적으로 달랐다.
그 이유는 어떠한 외부의 도구도 일체 사용함이 없이 그 자신의 내공만을 이용하여 근육을 바꾸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그 효과는 상상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시전자는 마음먹기에 따라 어떠한 모습으로도 변할 수가 있었다. 얼굴의 모습은 물론이고 신체의 크기와 심지어는 깊숙한 도흔 따위의 상처까지 자유자재로 형성해 낼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효과가 엄청난 만큼 시전 또한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 대법을 시전하려면 최소한 사 갑자 이상의 엄청난 내공을 지니고 있어야 했고 또 그 변장한 모습을 유지하는데는 끊임없이 막대한 진력이 소모되었다.
그러므로 이 대법을 안다 해도 감히 함부로 펼칠 수 없는 꿈의 변환대법이 바로 이 환체변용대법인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런 어려운 대법을 어린 향소야가 펼쳐내고 있는 것이었다.
“이렇게 하면 현상금을 노리는 자들에게 귀찮은 일을 당하지 않고 쉽게 일을 할 수가 있단 말야.”
향소야는 이렇게 말하며 여유 있게 휘파람까지 불었다.
“그럼 너는 지금껏 이런 모습으로······!”
몽향신투는 너무나 기가 막힌 듯 말을 잇지 못했다.
“후후후······!”
향소야는 말없이 싱긋 미소만 지었다.
사실 이것은 그 동안 몽향신투에게도 알리지 않았던 향소야의 비밀이었다.
청년의 모습으로 작업을 끝내고 향소야의 진면목으로 돌아온다면 아무도 이 십삼 세의 소년을 의심치 않을 것이다. 더욱이 경계하는 자들에게 청년으로 변한 모습을 슬쩍 보여 주기라도 한다면 십삼 세의 소년 향소야는 그들의 사정권 안에서 안전하게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해서 향소야는 지금까지 손가락 하나 까딱없이 추적자들을 유유히 따돌릴 수 있었다.
“······!”
몽향신투는 이런 기상천외한 발상에 아예 딱 벌어진 입을 닫을 줄을 몰랐다.
“너란 녀석은······!”
한참만에야 그는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향소야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모두가 늙은 할아버지와 이백 명이 넘는 풍위도의 식구들을 먹여 살리려고 하는 짓이지요. 암······!”
향소야는 말 끝에 능청스럽게 한숨까지 내쉬었다.
“어이구···! 징그러운 녀석······!”
몽향신투는 머리를 탁 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나 향소야의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사실 향소야가 천하를 활보하기 시작한 이후 풍위도 전체는 몰라보게 활기를 띠고 있었다.
모든 대소사가 몽향신투가 아닌 향소야에 의해 계획되고 결정되었으며 그로 인해 풍위도는 막대한 수입을 올리고 있는 터였다.
“······!”
향소야는 다시 옷을 갈아 입고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 왔다.
“다녀올게. 할아버지!”
향소야는 오늘밤 또다시 강호로 나가려는 것이었다.
몽향신투는 고개를 끄덕였다.
“되도록 빨리 돌아 오너라.”
향소야는 싱긋 미소를 지었다.
“이번에는 아주 거대한 것을 가지고 개선할 예정이야.”
“녀석, 꼬리가 길면 좋지 않다는 걸 항상 명심해라.”
몽향신투는 약간 염려스런 표정이 되었다.
“하하···! 염려 말아요. 할아버지······!”
향소야는 낭랑한 웃음과 함께 밖으로 달려 나갔다.
어느덧 새하얀 달빛이 천공 높이 떠올라 달려가는 향소야의 뒷모습을 비춰주고 있었다.
“······!”
몽향신투는 오래도록 그 자리에 선 채로 향소야가 사라진 갈대숲만 지켜 보았다.
풍위도의 포구.
그곳에는 지금 한 척의 범선이 금방이라도 출항하려는 듯 돛을 한껏 부풀리고 있었다.
그 범선 앞에는 이백여 명의 인물들이 달빛 아래 이열로 도열해 있었다. 그들은 일견해서도 한결같이 범상치 않은 기도를 지닌 자들이었으며 그 차림새는 갖가지로 선원, 농부, 상인, 주루의 점원 등 가지각색의 신분을 나타내고 있었다.
이들은 바로 풍위도에 거주하는 녹림의 후예들이었다. 그들은 황하 주변에서 활동하다가 밤이 되면 모두 가족이 있는 풍위도에 집결하는 것이었다.
지금 그들은 누군가를 환송하려는 듯한 모습이었다.
“오신다!”
어수선하던 장내가 누군가의 낮은 외침과 함께 조용해졌다.
잠시 동안 장내에 정적이 감돌았고 그 사이로 향소야의 모습이 중인들 앞에 나타났다. 그의 뒤로 조빈을 비롯한 세 명의 청년이 따르고 있었다.
그의 모습을 바라보던 중인들은 그대로 그 자리에 부복하며 외쳤다.
“소주(少主)의 무운을 비옵니다!”
그것은 깊은 충성심과 경외가 절절이 깃든 외침이었다.
향소야는 순간 입가에 멋적고 씁쓸한 미소를 떠올렸다.
“내참··· 대체 이러지 말라는 명령은 왜 안듣는지 이해할 수가 없군요.”
향소야는 멋적어 하며 그들은 거두려 했으나 중인들은 아무도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쩝······!”
향소야는 할 수 없는 듯 고개를 흔들며 범선으로 올라섰고 그때서야 중인들은 공손히 몸을 일으켰다.
뒤이어 세 명의 청년이 범선을 향해 그들 사이로 걸어 들어왔다.
“이 녀석들 드디어 명을 받았구나. 출도를 축하한다!”
“잘해내라!”
“많이 컸다. 조빈······!”
중인들은 세 명의 어깨를 차례로 두드리며 환호했다.
향소야는 가끔씩 뛰어난 인재들을 발탁해서 모종의 임무를 맡기고 강호에 출도시켜 왔었다. 때문에 풍위도의 사람들은 누구나 무상의 영광을 나타내는 거기에 발탁되기를 간절히 기원하고 있었다.
현재까지 이미 그렇게 풍위도를 떠난 인재들이 백여 명에 이르렀으며 그들은 지금도 강호에서 철저히 신분을 숨긴 채 암약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과연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는 향소야 만이 아는 사실이었다.
오늘 조빈을 비롯한 세 명의 청년은 이 자리에 영광스럽게 발탁되어 강호로 떠나는 것이었다.
세 명의 청년이 허리가 아프도록 작별인사를 나눈 후 범선에 오르는 순간 범선은 이백여 중인의 환호 속에 조용히 포구에서부터 미끄러져 나가기 시작했다.
쏴아아······!
선미 쪽으로부터 하얀 포말이 일었고 달빛은 소리없이 허공을 밝히고 있었다.
무맥 3장 지상최고의 명령(命令)
선실 안은 흔들리는 물결을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향소야는 그런 선실의 태사의에 깊숙이 앉아 선창을 응시하고 있었다.
굵은 황촉불빛은 배의 움직임에 따라 향소야의 얼굴 위에서 어지럽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러나 향소야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자신의 얼굴에서 일렁거리는 불빛에도 아랑곳없이 신중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믿지 못할지 모르지만 이 순간 그의 모습에서는 도저히 소년이라고 보기 어려운 태산같은 위엄이 서려 있었다.
그것은 무림의 노거두들도 감히 흉내낼 수 없는 제왕의 기도였으며 향소야의 숨겨진 또 하나의 모습이기도 했다.
어느새 선창 밖 황하의 물결 위로는 하얗게 달빛이 내려앉고 있었다.
향소야의 등 뒤에서는 조빈 등 예의 세 청년이 공손히 시립하고 있었다. 지금 그들은 매우 긴장된 눈빛으로 미동조차 보이지 않았다.
“······!”
실내에는 한동안 긴장된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향소야는 눈길을 선창에 고정시킨 채 담담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조빈······!”
갑자기 자신의 이름이 불리워지자 조빈은 흠칫 고개를 들며 대답했다.
“예··· 소야!”
향소야는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너는 지금 이곳을 떠나야 한다. 그리고 즉시 만리장성을 넘어 대초원으로 가라.”
향소야의 느닷없는 한 마디에 조빈은 망연한 어조로 다시 한 번 되뇌었다.
“대초원······!”
향소야는 지극히 맑은 시선으로 조빈을 한차례 응시하고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곳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튼튼한 뿌리를 박아라. 네 끈질긴 생명력과 집념이라면 이 년이라는 시일 안에 막강한 실력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어조는 너무나도 담담했으나 그 속에는 어떤 불가항력적인 위엄과 신의가 담긴 한 마디였다. 조빈은 그제야 오늘이 자신의 생애에서 가장 중대한 날임을 깨달으며 몸을 부르르 진동했다.
대초원(大草原)!
그곳은 만리장성 서북 쪽의 광활한 사막과 초원으로 이루어진 야생의 대지였다. 또한 그곳은 결코 약자는 살아남을 수 없는 철저한 약육강식의 철칙이 지켜지는 곳이기도 했다.
그 광대한 초원과 사막 땅은 이미 다섯 개의 막강한 대부족이 분할하여 통치하고 있었다. 그들은 감히 서로를 함부로 어쩌지 못할 정도의 팽팽한 호각지세의 균형을 이루며 대초원을 오 등분한 다섯 개의 세력이었다.
혈사오패천(血獅五覇天).
중원무림에서 그런 이름으로 불리워지는 그들은 중원과 서로 불가침의 관계를 이루고 있었다.
사실 대초원은 혈사오패천이 있는 한 단 한 올의 틈도 없는 그런 곳이었다. 그런데 향소야는 빈손의 조빈에게 그곳에서 세력을 만들라는 황당무계한 주문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향소야는 분명히 그렇게 말했고 그 말을 들은 조빈은이 순간 망설일 것도 없다는 듯 천천히 힘주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소야의 명(命)이라면······!”
그렇다. 향소야의 명이라면 설령 지옥 속에서 염라대왕과 만나라 해도 거역치 않을 충성심과 집념을 가지고 있는 조빈이었던 것이다.
“이건 오래 전부터 계획되어온 일이다. 너를 믿겠다.”
향소야는 처음으로 그를 향해 시선을 돌리며 신비하고 유현한 미소를 피워물었다.
“혈사오패천은 나 소야의 뜻을 막을 수 없어. 조빈은 나 소야의 대리자로 그곳에 힘찬 뿌리를 박는 거야······!”
그의 말을 듣는 순간 조빈은 자신도 모르게 가슴 깊숙이 힘과 야심이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나는 소야의 대리자가 된 것이다······!’
사실 조빈의 가슴 속에서 향소야라는 이름은 위대한 신과 같은 존재로 깊이 뿌리박혀 있었다. 그래서인지 향소야의 말을 듣고 있던 조빈은 가슴이 터질 듯한 희열과 감격을 느끼고 있었다.
향소야는 다른 두 명의 청년에게 눈길을 돌렸다.
“소소단(蘇小端), 소소검(蘇小劍)······!”
향소야의 입이 채 다물어지기도 전에 이들 이 인은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예···! 소야!”
대답하는 두 청년은 마치 판에 박은 듯 닮은 얼굴이었다.
세모꼴의 얼굴에 창백한 살결은 서로 너무나도 비슷했으며 날카롭게 솟은 콧날과 쏘는 듯한 그들의 눈빛은 그들의 성질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사실 이들은 형제였다. 형인 소소단이 십구 세이며 동생 소소검이 올해로 십팔 세가 되었다.
그들의 좌측 허리에는 각기 검신이 가늘고 긴 한 자루씩의 장검이 꽂혀 있었다. 이들은 풍위도에서 같은 또래의 후기지수 중 가장 출중한 무예를 지니고 있었다.
원래 이들은 풍위도의 수비를 위해 몽향신투와 향소야가 특별히 수련시킨 청년검수들이었다.
그리고 이들이 사용하는 검식은 그 청년고수들 중에서도 눈에 띄게 날카로우며 예리하다고 정평이 나 있었으며 특히 형제가 한 몸처럼 펼쳐내는 합격검진은 무림의 일류고수조차 비교될 수 없는 막강한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향소야는 조빈에게처럼 두 형제를 향해 담담히 입을 열었다.
“그대들은 동영으로 가라.”
“동영······!”
그의 말을 듣고 있던 형제 소소단과 소소검의 두 눈에 가벼운 이채가 번뜩였다.
동영(東瀛).
이곳은 바로 중원에 일도류(一刀流)와 인자술(忍者術)로써 널리 알려진 왜인들의 고장이었다.
또한 그곳은 끝없이 멀고 먼 바다 저 멀리에 있었다.
그러나 향소야는 단호한 어조로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동영에는 용천(龍天)과 삼해협(三海俠)이라는 인자집단이 패권을 잡고 있다고 들었다. 삼 년 안에 그 중 하나의 지배자가 되라!”
그것은 참으로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황당한 명령이 아닐 수 없었다.
원래 동영의 인자집단이란 극히 패쇄적인 단체임은 물론이고 그들의 무술은 중원과는 전혀 성질이 다른 독특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소단과 소소검 형제는 한 마디의 반문도 없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목숨을 걸고서라도 명령을 이루겠습니다. 소야!”
향소야의 안색이 차가운 위엄으로 빛났다.
“실패하면 동영에 뼈를 묻도록 하라.”
“······!”
형제는 말없이 비장한 눈빛이 되었다.
향소야는 천천히 삼 인의 청년을 돌아보았다.
“뜻이 이루어지는 날 우리는 다시 모일 수 있을 거야.”
굳은 결의가 담긴 말을 하는 향소야의 입가에 따뜻하고 강한 신념을 느끼게 해주는 미소 한 줄기가 떠올랐다.
“······!”
잠시 동안 그들을 바라보던 향소야는 이윽고 자리에서 일어나 삼 인의 손을 모아쥐었다.
“그대들의 무운을 빌겠어.”
“소야······!”
삼 인은 향소야의 손을 힘차게 맞잡았고 그 순간 그들의 굳센 의지의 미소가 서로를 향해 교환됐다.
향소야는 자랑스러운 눈으로 삼 인을 번갈아 보더니 이내 밖으로 나갔고 그가 나간 지 얼마 안 되어서 정갈하게 꾸며진 주안상이 삼 인 앞으로 들여졌다. 그 위에는 기용목이 거대한 감산도로 특별히 요리한 연어회도 푸짐하게 놓여 있었다.
잠시 후 서로의 장도를 축하하며 무운을 비는 삼 인의 목소리가 선실 안에서 우렁차게 울려 나왔다.
갑판 위에는 매서운 황하의 야풍이 칼날처럼 스쳐불고 있었다.
향소야는 한 명의 장대한 중년인과 뱃전에 나란히 서서 어둠에 물든 황하를 굽어보고 있었다.
“······!”
중년인은 빳빳한 검은 수염이 온통 얼굴 전체를 뒤덮은 채 눈빛만 감히 쳐다볼 수 없을 정도로 무겁게 번쩍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강철로 된 거암을 대하듯 패도적인 기도가 물씬 흘러나오는 인물이었다.
천수룡(天水龍) 갈궁악(渴宮嶽)!
이것이 이 중년인의 이름이었다.
그는 이 범선의 선장이며 풍위도에 소속된 모든 대소 범선들을 지휘하는 직위에 있는 인물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중년의 나이로 보이지만 이미 그의 나이는 백 세에 이르러 있었고 세상에는 이미 죽은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한때 대녹림 휘하 장강수로맹(長江水路盟) 전체를 호령했던 그였기에 지금도 장강을 오가는 선원들 사이에서 전설적인 위명을 떨치고 있었다.
아마도 강이 있고 배가 있는 한 천수룡 갈궁악이라는 이름은 가장 용맹스럽고 가장 탁월했던 뱃사람으로서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후우우웅······!
매서운 북풍은 쉴새없이 갑판 위로 불어닥쳤다.
강물을 굽어보던 향소야는 고개를 돌려 천수룡 갈궁악을 향했다.
“부탁해. 갈아저씨······!”
천수룡 갈궁악은 빙긋 미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염려마십시오. 소주.”
“그럼······.”
향소야는 갈궁악과 뜻모를 이야기를 나누고는 느닷없이 범선 아래로 몸을 날렸다.
어찌보면 그대로 강물 속으로 뛰어들려는 것 같이 보였으나 이미 범선 아래 쪽에는 범선과 밧줄로 연결된 한 척의 소선이 떠 있었다.
가냘픈 소선은 불어오는 강풍에 금방이라도 뒤집힐 듯 심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스읏!
향소야는 깃털처럼 소선 위로 내려섰다.
“다녀오십시오, 소주.”
천수룡 갈궁악은 갑판 위에서 가볍게 공수의 예를 취했고 향소야는 말없이 미소하며 손을 흔들었다.
갈궁악과 마지막 인사를 나눈 향소야는 밧줄을 풀고 빠른 속도로 범선으로부터 멀어져 갔다.
쏴아아······!
매섭고 강한 북풍에도 불구하고 소선은 똑바로 한 방향으로만 곧장 미끄러져 가고 있었다.
“······!”
향소야는 언제나 이렇게 도중에서 홀로 범선을 타고 떠나 어디론가 사라지고는 했었으므로 천수룡 갈궁악도 그가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했고 또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갈궁악은 어둠 속으로 점차 사라져 가는 향소야의 뒷모습을 지그시 응시하고 있었다.
“소주가 십삼 세 소년이라고는 풍위도의 그 누구도 믿지 못하는 심정이다. 차라리 백삼십 세라 하면 믿을 정도로 소주는 완벽하게 우리 모두를 지휘해 나가고 있다······.”
천수룡 갈궁악은 미동도 없이 서서 향소야의 뒷모습만 응시하고 있었다.
“어쨌든······!”
그는 지그시 두 손을 말아쥐었다.
“소주가 있는 한··· 녹림의 재건은 시간문제다.”
그는 멀어져가는 소선의 꼬리를 바라보며 더없이 뿌듯한 눈빛을 빛냈다.
쏴아아······!
범선의 꼬리를 따라 달려오는 물결의 포말 속에 달빛이 은가루처럼 부서지고 있었다.
무맥 3장 -2
황도(皇都) 금릉(琴陵).
여기에 두 개의 유명한 길이 있었다.
그 첫번째가 바로 황궁으로 통하는 천문로(天門路)였다.
천문로.
천하의 모든 길은 이곳으로 통한다는 말이 생길 정도로 절대권력이 구석구석 배어 있는 절대지배자의 길이 바로 이 천문로였다.
이 천문로만큼이나 유명한 길이 바로 운문로(雲門路)였다.
운문로.
이름만 들어도 그윽한 운취를 풍길 듯한 이 거리가 바로 금릉의 이대 대로 중 하나였다. 그러나 무언가 알고 있는 아낙네들이나 많은 여인들은 운문로라는 이름만 들어도 살짝 얼굴을 붉히며 돌아서기 마련이다.
그렇다. 운문로는 바로 금릉제일의 홍등가(紅燈街)인 것이다.
술과 여자를 함께 취급하는 홍루와 술과 음식만을 취급하는 주루, 그리고 여자만을 취급하는 청루 등의 모든 위락시설이 이곳에 밀집되어 있었다.
특히 이곳 운문로의 청루는 비록 돈주고 사는 여인일망정 절세미인이 많기로 유명한 곳이었다.
때는 유시(酉時) 무렵이었다.
운문로의 거리는 어느새 청홍의 불빛이 질펀하게 흐르고 있었다.
이곳은 운문로에서도 주로 청루만이 밀집된 거리.
어느새 골목의 곳곳에서는 하룻밤 설익은 사랑을 호소하는 야화들이 방문객의 옷소매를 끌고 있었다.
“호호호··· 나으리! 천첩이 오늘밤 새로운 기술 하나 가르쳐 드리지요.”
“흐흐··· 좋아. 그 기술이 맘에 들면 앞으로 일 년간 네 단골 서방이 되어주지.”
“오호호호······!”
질탕하게 오가는 음담패설과 함께 역겹도록 자욱한 지분 내음이 야공 속에서 한데 뒤엉켜 어우러지고 있었다.
지금 어디서 나타났는지 이런 거리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한 어린 소년이 휘적휘적대며 홍등가 한가운데를 여유롭게 걷고 있었다.
이런 곳을 다니는 것이 한두 번이 아닌 듯 지극히 자연스럽게 거리를 활보하는 이 어린 소년은 뜻밖에도 향소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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