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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의천사 1

2018.02.13 조회 306 추천 1


 혈의천사 1권
 서막 운명의 장
 
 
 1
 
 
 휘리리링······!
 눈발이 나부꼈다.
 회색 허공을 사선으로 그어대는 눈발이 잔인하게 느껴지는 것은 혹한의 추위 탓인가? 눈발은 간헐적으로 굵어지고 있었다.
 하늘은 어두컴컴하게 느껴지는 잿빛.
 분명 환각은 아니었다.
 그 하늘 밑으로 비틀거리며 걸어오고 있는 하나의 인영.
 여인(女人). 아직 완숙하다 할 수 없는 스물을 갓 넘겨 보이는 여인이었다. 눈발 섞인 삭풍이 사정없이 그 가녀린 몸을 강타했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에 섬연한 목덜미가 휘감기고, 더욱 핏기를 잃어가는 백랍같은 얼굴이었다.
 감히 필설로도 설명할 수 없는 서럽도록 창백한 저 여인의 아름다움.
 그런데···
 여인의 왼쪽 가슴에는 혈고루(血 ?) 모양의 한 자루 비수가 깊숙이 박혀 있었다.
 투둑···!
 핏물이 흘러나오며 흰눈 위로 섬뜩한 혈화(血花)가 번졌다.
 여인은 탈진해 비틀거리면서도 놓칠세라 강보를 품 속 깊숙이 끌어안고 있었다. 강보 속에는 갓 태어난 듯한 아이가 들어 있었다.
 새파랗게 얼어 있는 얼굴이었으나 또렷하고 선명한 이목구비가 이를 데 없이 깜찍하고 귀여운 아이였다.
 그러나 눈은 감긴 채였고 숨소리는 미약하기 짝이 없었다.
 여인은 비틀거리며 멀리 전방을 응시했다. 낮게 깔려 흐르는 잿빛 하늘 속으로 아스라하게 솟아오른 웅장한 봉우리가 보였다.
 “그를··· 만나야 해··· 꼭······.”
 여인은 실낱같은 광채를 흐릿한 동공 속으로 떠올리며 신음하듯 내뱉았다.
 “반드시 알아야 겠어··· 그의 진정한 마음을······.”
 힘겹게 말을 마친 여인은 상체를 꺾으며 검붉은 선혈을 울컥 토해냈다. 그러자 두 다리에 힘이 스르르 빠지며 그녀는 쓰러질 듯 비틀거렸다.
 그러나 여인은 이를 악물며 버텼다.
 “이 아이··· 그와 나 사이에서 태어난 이 아이에게··· 결코 슬픈 과거를 물려줄 수는 없어······.”
 말은 그렇게 했으나 여인의 눈빛은 급격히 흐려지고 있었다.
 여인은 문득 눈보라가 몰아치는 천공을 올려다보며 부르짖었다.
 “안돼··· 아가를 위해서라도··· 난 절대··· 죽을 수 없어······.”
 그러나 운명은 더 이상 그녀의 편이 아니었다.
 양 다리에 힘이 풀리면서 여인은 무너지듯 엎어졌다. 그러자 강보가 옆으로 나동그라졌다. 그러나 아이에게서는 여전히 울음소리 한 마디 울려나오지 않았다.
 “아··· 안돼··· 이리와··· 아가야······.”
 여인은 필사적으로 손을 뻗어 아이를 잡으려 했으나 생각만 그러했을 뿐, 가늘게 떨리는 손은 파르르 경련하다 이내 툭! 꺾였다.
 “아··· 아가야······.”
 그뿐이었다. 눈도 감지 못한 채 여인은 그대로 숨이 끊어지고 말았다.
 다만 멀리 보이는 산봉우리, 그 유명한 소실봉(小室峰) 쪽으로 한스럽게 부릅떠진 시선을 고정시킨 채······.
 - 이곳에 그 누구도 알지 못한 한 운명의 스러짐이 있었다. 그리고 그 죽음이 갖고 있는 무섭고 처절한 의미를 아는 사람 또한 아무도 없었다.
 다만 무심히 희끗희끗 나부끼는 눈발만이 시신 위에서 그 높이를 더해 어느샌가 그녀의 싸늘한 시신을 하얗게 덮고 있었다.
 그때였다. 얼어붙은 아이의 입에서 한 소리 기적과도 같은 울음소리가 터져나온 것은!
 “으아앙!”
 그것은 새로운 생명의 소리였다. 아니, 운명의 울부짖음일지도 몰랐다.
 휘류류류륭!
 갑자기 휘몰아친 삭풍은 삽시간에 눈보라를 일으켜 암울한 회색허공을 자욱이 뒤덮고 있었다.
 
 
 2
 
 
 우학선로(羽鶴仙老) 구우현(具于玄)은 당혹했다.
 그의 인자한 눈매가 이토록 파르르 경련할 정도의 당혹은 맹세코 생애 처음이었다. 지금 그의 맞은편에는 자욱한 어둠 속에서 마치 그 어둠의 일부분인 양 한 사람이 우뚝 서 있었다.
 훤칠한 체격의 흑의복면인이었다. 어둠 속의 두 눈은 마치 억년 호수의 침묵을 보듯 극도로 무심했다.
 그의 왼손에는 염주가 잡혀 있었고, 오른손으론 두툼한 강보를 싸안고 있었다. 어둠 속이라 확인할 길은 없으나 강보라면 대저 아이를 싸안기 위한 것이 아니겠는가?
 불현듯 흑의복면인을 응시하는 구우현의 입에서 한 소리 당혹성이 터졌다.
 “도··· 도대체······.”
 낮고 무거운 흑의복면인의 음성이 구우현의 말을 잘랐다.
 “아무것도 묻지도, 알려고도 하지 마십시오. 저는 다만 이 아이를 이십 년 동안 맡아 주시겠다는 노야의 대답만 듣고자 할 뿐입니다.”
 그는 강보 속이 보이도록 약간 강보를 앞으로 내밀었다. 과연 그 속에는 아이가 들어 있었다.
 “······!”
 구우현은 의혹어린 시선으로 아이를 응시했다.
 신비롭도록 맑고 귀여운 얼굴이 그의 두 동공 가득히 쏘아져 들어왔다.
 비록 어둠 속이라곤 하나, 초롱초롱 빛나는 아이의 눈망울은 이름없이 반짝이는 은하수의 별이 떨어져 붙은 듯 했고, 그 밑의 콧날은 오똑하게 솟아 있었으며, 입술은 비록 추위로 인해 파랗게 물들어 있었으나 그 선이 너무나도 또렷했다.
 구우현은 잠시 망연해 있더니 너털웃음을 지었다.
 “허어···! 노부는 도대체 뭐가 뭔지······.”
 “이십 년만 맡아 주십시오.”
 어찌들으면 억지인 것 같았으나 그의 눈빛은 간절했고, 그 음성에는 거절하기 힘든 묘한 기운이 깃들어 있었다.
 구우현은 흑의복면인의 눈을 깊숙이 응시했다. 언뜻 무심한 듯이 보이나 그 속에선 누구도 측정할 수 없는 깊은 고뇌가 강물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그 눈을 마주 바라보는 동안, 정명하고 깨끗한 구우현의 눈빛이 점점 잔 파랑을 일으켰다.
 얼마 후, 이윽고 구우현은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였다.
 “은공(恩公)의 부탁을 받고자 육십 년만에 무림땅을 내딛은 노부요. 기꺼이 받아들이리다.”
 “······!”
 흑의복면인은 묵묵히 아이를 건네주었다. 건네주면서 그는 붉은 빛이 감도는 손가락 크기의 불상(佛像)을 아이의 목에 걸어 주었다.
 구우현은 엉거주춤 아이를 받아 안으며 물었다.
 “이 아이의 이름은······?”
 “없습니다.”
 흑의복면인은 무심히 대답했다.
 “그럼······?”
 “모든 것을 노야께 맡길 뿐입니다.”
 “음.”
 구우현은 뜻 모를 나직한 침음성을 흘렸다.
 그는 아이에게서 시선을 들어 흑의복면인을 주시하며 엄숙히 입을 열었다.
 “은공은 노부에게 있어 천하의 그 누구보다도 소중한 사람이오. 때문에 은공의 부탁은 노부의 목숨과 바꿔서라도 반드시 이행할 것이오. 그러나··· 한 가지만 말씀드리겠소.”
 흑의복면인의 무심한 시선이 그를 향했다.
 “무슨······?”
 “결코··· 하늘의 뜻을 인력으로 바꾸려 해선 안 되오.”
 “······?”
 흑의복면인의 어깨가 가늘게 흠칫했다. 그것을 보며 구우현은 껄껄 웃었다.
 “허헛···! 늙은이가 그저 괜히 해본 말이니 괘념치 마시오. 그럼 이십 년 뒤에 다시······.”
 스슷!
 웃음도 그러했거니와, 그의 신형은 정말이지 별안간 어둠 한복판에서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 버렸다.
 장승처럼 오래도록 그렇게 우뚝 서 있던 그는 한참만에 느릿하게 고개를 들어 먼 암공(暗空)에 시선을 박았다.
 순간적으로 그의 잔잔한 두 동공 속에서는 미친 듯 소용돌이 치는 듯한 암울한 기운이 감돌았다.
 그것은 고뇌였다. 가슴 깊은 곳까지 파내는 듯한 고뇌(苦惱)······.
 아이야······.
 그저 건강하고 평범하게만 자라다오.
 설사 훗날 때가 오더라도, 아무것도 알려하지 말아다오. 이 애비가 누구였는지··· 어째서 너는 한 잎 고엽(孤葉)처럼 외롭게 세상 밖에 내버려졌는가에 대해서조차도······. 네게만은 이 피의 업보(業報)를 씌우고 싶지 않았단다. 나의 아들아······!
 복면인의 눈가로 엷게 맺히다 사라지는 저 끈끈한 물기운은 무엇인가?
 그것은 아픔의 눈물이었고,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흘러나온 한맺힌 부르짖음과도 같은 것이리라.
 흑의복면인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복면 사이로 보이는 눈매가 가늘게 떨리고 있고, 그 떨림을 억제하기라도 하듯 그의 수중의 염주알은 바쁘게 굴러갔다.
 문득 어둠 속으로 흘러나오는 듯한 한 소리 나직한 음성이 그의 입으로부터 새어나왔다.
 “아미타불······.”
 
 
 3
 
 
 노인 구우현은 지난 한 달간 줄곧 유쾌했다.
 특히 멀리 보이는 무산(巫山)이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그는 더 더욱 유쾌해졌다. 도무지 예측치 못했던 이 감정이 품 속에 안고 있는 아이 때문이라는 사실을 그는 굳이 부인하고 싶지 않았다.
 백이십세수(百二十歲壽)의 대부분을 무와 도의 진리에 몸바쳐왔고, 때문에 위로는 천리(天理)를, 아래로는 만물의 이치를 터득하여 이제는 세상을 관조하며 살아가는 구우현이었다.
 그런 그도 아이만 보면 왠지 자꾸 유쾌해지는 것이다.
 우학선로 구우현.
 그가 누구인가? 백 년 전 이십 세의 나이로 잠시 무림에 나와 기라성같은 천하명숙들을 꺾어 그 이름을 위진시켰으나, 명리를 초탈하였기에 그저 한 번 껄껄 웃고는 미련없이 무림을 등졌던 기인(奇人) 중의 기인이 바로 그였다. 그후 백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에겐 적수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의 구우현, 그는 그저 선옹(仙翁)인 양 은둔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십 년 전, 단 한 번의 실수로 타인으로부터 입은 은혜가 못내 마음에 걸렸지만 아이를 만난 순간부터 그런 감정은 씻겨 나가고 없었다. 그저 유쾌하기만 할 뿐이었다.
 “허헛··· 고놈······!”
 고물거리는 손으로 자신의 수염을 잡아 당기는 품 속의 아이를 보며 구우현은 자신도 모르게 너털웃음을 흘렸다.
 이런 것이 행복이라는 것인가? 고사리같이 앙증맞은 손에 수염이 당겨지는 게 이렇듯 큰 기쁨이 될 줄은 미처 몰랐다. 아니, 미처 몰랐던 일들은 아이를 만난 순간부터 이미 수없이 깨달아지고 있었다.
 구우현은 아이의 도톰한 뺨을 쓰다듬으며 자상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래··· 남은 여생이 어쩌면 너로 인해 외롭지 않겠구나. 허헛······!”
 산길 소로의 눈 위로 잔잔한 웃음의 여운이 흩어지는 순간이었다.
 “······?”
 막 걷히려던 인자한 미소가 그의 노안에서 갑자기 쓱 굳어졌다. 굳어진 시선은 무심코 향하던 방향에 그대로 못박혔다.
 소로 저쪽, 한 인물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칙칙한 회의를 죽음처럼 둘렀고, 한 귀퉁이가 떨어져 나간 죽립을 눌러쓰고 있었다.
 어깨 위엔 한 자루 묵검(墨劍), 그 검을 잡은 손이 마치 횟가루를 바른 것처럼 무섭게 희다. 또 하나, 자연스럽게 눈 위로 오고 있으되 뒤로 난 발자국은 하나도 없었다.
 “······.”
 이쪽을 본 것인지 아닌 것인지, 죽립인은 무심히 걸음을 계속하고 있었다. 거리가 점차 가까워짐에 따라 구우현은 전신근육이 팽팽히 긴장되어 옴을 느꼈다.
 ‘고수다!’
 평생 그를 이렇게 긴장시킨 사람은 단 두 명뿐이었다.
 최초의 인물은 십 년 전 그에게 은혜를 베풀었던 그 사람이었으며, 그리고 지금 눈 앞의 인물이 과거의 그 긴장감을 생생히 재현시키고 있었다.
 죽립인은 다가왔다. 구우현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점점 진저리쳐지도록 무서운 압박감을 느꼈다.
 ‘몰랐구나······! 천하에 이런 자가 존재할 줄은······.’
 이때, 죽립인의 몸이 삼 장 앞에서 우뚝 멈춰섰다. 구우현도 거의 동시에 걸음을 멈췄다.
 죽립인은 잠시 그 상태로 있더니 이윽고 나직한 독백을 입 밖으로 흘려냈다.
 “틀림없군.”
 이것을 어찌 인간의 성대를 통해 나오는 사람의 음성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억양이고 음정이고, 일체의 감정이 배제된 절대무심의 음성. 그 음성 그대로 죽립인은 구우현을 향해 말을 건넸다.
 “사흘 전부터 그대의 뒤를 따르면서 여섯 번이나 확인했다.”
 “······?”
 구우현의 안색이 순간적으로 일변했다.
 ‘사흘··· 사흘이라니······?’
 정말이지 구우현은 누군가 자신의 이목을 가리며 사흘간이나 뒤따를 수 있는 인물이 있으리라곤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단 한 마디로 구우현을 전율시키고난 죽립인은 그 기분 나쁜 음성을 느릿느릿 이어갔다.
 “그대의 몸에선 확실히 천선(天仙)의 냄새가 난다. 묻겠다! 그대는 선궁(仙宮)의 출신인가?”
 “······?”
 구우현은 또 한 차례 전율스런 경악을 느꼈다. 그러나, 곧 미간을 깊이 찌푸리며 반문했다.
 “그대는 대체 누구인가?”
 죽립인의 입에선 기다렸다는 듯이 지체없는 대답이 흘러나왔다.
 “나의 이름은 옥기후(玉奇侯), 독후령(毒侯領)의 제 십이대 영주이지.”
 “독후령!”
 구우현은 경악한 나머지 자신도 모르게 주춤 한 걸음 물러섰다.
 죽립인은 어깨의 묵검 검자루를 만지작거리며 얼음장같은 음성을 울려냈다.
 “선궁의 늙은이··· 그대도 알 것이다. 독후령과 선궁 사이에 매듭지어져야 할 그 일을······.”
 “······?”
 죽립인은 다시 느릿하게 다가오며 무감정한 한 마디를 내뱉았다.
 “나 옥기후··· 지난 이십 년간 선궁의 종적을 찾아 헤매왔다. 이제 그 마지막 결론을 이곳에서 찾을까 한다.”
 “······!”
 “나의 느낌이 전해준다. 이 느낌은 그대가 선궁의 궁주(宮主)일 것이라고 말해주고 있다.”
 굳어져 있던 구우현,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상황임을 직감한 그는 낭패한 기색으로 품 속의 아이를 내려다 보았다.
 ‘이 상태로는 곤란하다······.’
 그 순간, 옥기후의 스산한 음성이 다시 울렸다.
 “그대는 걱정할 것 없다. 나는 결코 싸움의 이점을 좋아하지 않는다.”
 “······!”
 “그 아이는 해치지 않을 것을 약속한다. 그리고 나 역시 그대처럼 한 손을 쓰지 않을 것이다.”
 지루하도록 느리게 다가서던 죽립인의 걸음이 구우현의 일 장 앞에서 우뚝 멈춰 선 순간, 싸늘한 한 마디가 울려왔다.
 “허나··· 나의 애검 사인궁(邪刃穹)이 그대에게 한 가닥 온정을 베풀지도 모른다는 착각은 애당초 하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말이 끝남과 동시였다.
 번쩍!
 묵검의 끝이 가볍게 흔들렸다 싶은 순간 어느새 구우현의 가슴 앞까지 쏘아간 일섬백광(一閃白光)! 실로 무서운 쾌검(快劍)이었다. 단지 검날의 번뜩임이 있었을 뿐이었다. 그 무엇도 움직인 것이라곤 육안에 잡히지 않는 극쾌(極快)의 공세였다.
 그러나 그 순간, 구우현의 신형은 이미 좌로 십이 보 움직이고 여섯 번이나 신형을 번뜩여 검세 밖에 신형을 세우고 있었다. 가히 환상이라 해도 좋을 극쾌절환(極快絶幻)의 신법이었다.
 “좋아. 멋진 세류표(細柳飇)의 신법······!”
 죽립인, 옥기후의 시선이 힐끗 구우현의 얼굴에 꽂혔다.
 “갑자기 묻고 싶군. 노인장 그대의 이름은?”
 구우현은 무겁고 짤막히 대답했다.
 “구우현.”
 
 
 4
 
 
 무산이 멀지 않은 사천성의 어느 깊숙한 야산 계곡.
 장장 이 주야(二晝夜) 동안이나 뇌성벽력이 작렬했다. 집채만한 바윗덩어리가 날아오르고, 아름드리 거목(巨木)들이 수도 없이 부러졌는가 하면 주위 수백 장은 아예 한 치 앞도 볼 수 없을 만큼 검은 흑무로 뒤덮이기까지 했다.
 말이 이 주야지 터질 것 같은 살기로 점철된 격렬한 격투는 하늘과 땅의 접전을 방불케 하는 것이었다.
 인근에 사는 나뭇꾼 하나가 공포에 질린 채 내려와 부르짖었다.
 신(神)과 악마(惡魔)의 싸움을 보았노라고······.
 물론 그 말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틀림없는 진실이었다.
 구우현.
 그는 한 손은 복부를 잔뜩 움켜쥐었고, 또 한 손으로는 여전히 강보를 싸안은 채 고꾸라질 듯 휘청거리면서도 악착같이 걸음을 떼놓고 있었다.
 전신은 피로 목욕한 듯한 모습이며, 그런 몸으로 숨을 쉬고 있는 것은 구우현 그만이 보여줄 수 있는 초능적인 힘이었다. 그는 사력을 다해 걸었다.
 ‘옥··· 기후라 했던가? 놈··· 역시 독후령의 영주다웠다.’
 설마하니 전설의 독형제강(毒形帝 )을 검으로 사출시킬 줄이야! 육성(六成)의 금강부동선공(金剛不動仙功)으로 무기도 없이 막아내기엔 확실히 무리였다.
 ‘허나 옥기후, 그 자는 최소한 십 년은 함부로 움직일 수 없을 것이다. 비록 그 대가로 노부의 목숨을 잃긴 하지만 말이다······.’
 구우현은 더 이상 걷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휘청거렸다. 정신은 흐려지고··· 가물거리는 시선 속으로 아이의 얼굴이 흐릿하게 보였다.
 “아··· 아가야··· 노부··· 더 이상 너를··· 지켜줄 힘이··· 없구나······.”
 급기야 그는 무너지듯 털썩 무릎을 꿇었다. 그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품 속을 더듬어 한 개의 물건을 꺼냈다.
 얼음으로 빚은 듯 투명한 팔찌였다. 끝면에는 십장생도(十長生圖)가 정교하게 그려져 있었다.
 구우현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팔찌를 아가의 손목에 채워주었다. 그 순간 참으로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팔찌는 채우기 무섭게 아가의 손목으로 스며들 듯 사라지지 않는가?
 “시··· 신(神)이··· 노부를 버리지 않는다면··· 훗날 이 아이를 통해··· 선궁(仙宮)의··· 삼대기공(三大奇功)은 재현··· 되리니······.”
 안개처럼 희미한 미소가 입가에 걸쳐지는 순간이었다.
 환청이었을까? 아스라해지는 정신 속으로 어디선가 먼 마차소리가 들려왔다.
 구우현의 근육이 미약하게 실룩였다.
 “신(神)이여··· 저 마차가··· 이곳을 지나가기만··· 기원을······.”
 그토록 간절한 염원이었건만, 말이 채 맺어지기도 전에 그의 몸은 자욱한 검은 연기를 피워 올리며 한줌 핏물로 화해 버렸다.
 또 하나의 죽음을 지켜봐서인가? 아니면 얄궂은 운명에 대한 서러움 탓인가?
 땅바닥에 굴러 떨어진 강보 속의 아이는 또 한 차례 자지러지는 울음을 터뜨렸다.
 “으아앙!”
 
 
 5
 
 
 “독살된 것으로 추정되는 한 줌의 핏물과 아이가 놓여 있습니다.”
 “······.”
 “독은 전설의 독문(毒門) 독우령의 무형지독(無形之毒)과 흡사한 것으로 추측됩니다만 단언하기 어렵습니다.”
 “······.”
 “아이는 태어난 지 불과 반 년 남짓 되보이는 무척 귀엽고 잘 생긴 사내 아입니다.”
 “······.”
 “아이가 추위로 인해 동사(凍死) 직전입니다. 결정을 내려 주십시오. 태상(太上)······!”
 “······.”
 “태상, 아이는······?”
 “······.”
 “알겠습니다. 못 본 것으로 하겠······”
 “데리고 간다.”
 그렇게 마차는 떠났다.
 매서운 삭풍을 뒤로 하고··· 운명을 싣고······.
 그날 이후, 세월은 열아홉 성상(星霜)을 뒤로 한 채 바람처럼 흘러갔다.
 
 
 1장 십종천마(十宗天魔)
 
 
 1
 
 
 마왕성(魔王城).
 이 하늘 아래에서 더 위대할 수 없고, 그래서 아예 지상과 사해팔황(四海八荒)이 인정해 버린 고금최강(古今最强)의 단체.
 군마십팔전(群魔十八殿)을 십지(十地)의 이십사개주(二十四個州)에 깔고 십팔만 리 대륙 천하를 거의 장악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사상초유의 마성(魔城).
 마도에 있어 이 이름의 의미는 흔히 하는 말로 그대로 하늘이자 태양이었다.
 삼대(三代)로 이어지는 현 마왕성의 성주는 천마대존(天魔大尊) 심천궁(沈天弓)이었다.
 백 년 역사의 마왕성을 지상최강의 단체로 끌어올린 장본인이며, 하늘과 땅이 탄생시킨 이 시대 최고의 거인!
 그는 철혈(鐵血)의 성격과 대해같은 심기의 소유자이며 그의 독문애병(獨門愛兵) 천마금인(天魔金印)은 곧 죽음의 상징으로 세인들의 뇌리에 각인되어 있었다.
 또한 심천궁은 인간같지도 않은 인간 여섯을 휘하에 거느리고 있었다. 이름하여 육종천마(六宗天魔)가 바로 그들인데······.
 휘하라고는 하나 성주 심천궁도 이들에겐 최고의 예우와 경의를 잃지 않는다고 전해진다. 인간의 몸을 빌어 났으되, 신의 능력을 지녔다는 육 인의 천마(天魔) 육종천마.
 그들은 마왕성의 핵이며 명실공히 최고의 실력자들이었다. 그들은 다음과 같았다.
 마검(魔劍) 적유명(赤幽明).
 십야사혼(十夜邪魂) 모용잠(慕容潛).
 도백(刀佰) 뇌빙령(雷氷靈).
 독안마륜(毒眼魔輪) 철무독(鐵無獨).
 지살마존(地殺魔尊) 사도해(司徒海).
 혈우신(血雨神).
 마왕성에 있어서 육종천마의 힘은 절대적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마왕성을 이야기 하는데 최근 오 년 사이에 등장한 사 인의 귀재를 빼놓고는 도무지 말이 되지 않는다.
 사 인(四人)의 귀재(鬼才).
 등장하자마자 불과 오 년 사이에 그 미증유한 힘을 폭풍처럼 대륙천하에 과시한 사 인을 일컬음이다.
 강호 일각에선 이들 사 인을 육종천마보다 더 무서운 인물로 평가하고 있었다. 그리고 만약 이들의 가세가 없었다면 결코 마왕성이 오늘날처럼 요지부동의 반석 위에 올려지지는 못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대체 그 사 인의 귀재들이란 어떤 인물들인가?
 신뇌(神腦) 남궁은(南宮隱).
 나이 삼십이 세, 극히 평범해 보이는 문사 모습이나 단순히 그렇게만 본다면 무서운 오해가 벌어진다.
 사실 그는 귀재 중의 귀재였으며, 하늘조차 속인다는 악마적인 두뇌의 소유자였다. 마왕성에 가입한 지 한 달만에 마왕성 최대의 숙적이던 적사궁(赤蛇宮)을 모략 하나로 자멸시킨 그의 업적은 삼척동자도 알고 있는 사실이다.
 세인들은 그의 소름끼치는 지략과 가슴 떨리는 귀계에 전율을 금치 못했다.
 그는 항상 웃는 모습이다. 머리털이 다 빠지도록 어려운 지략을 짜내야 하는 순간에도 그의 얼굴엔 희열과도 같은 미소가 떠오르는 것이다.
 그는 유유자적하게 싯귀를 읊는 것을 즐겼으며, 말없이 먼 하늘 보기를 좋아했다. 또한 그는 금(琴)을 타기를 좋아했다.
 이렇듯 고상한 그는 타인들로부터 많은 관심과 호감을 사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그의 출신내력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월야낭인(月夜浪人) 궁우(弓雨).
 그는 살수(殺手)다. 그러나 멋을 아는 살수였다.
 그는 결코 누구에게도 등을 보이지 않을 뿐 아니라 그 누구도 자신의 등 뒤에 서는 것을 용납치 않았다. 그에게서 한순간이라도 빈틈을 찾아내느니 바닷가의 모래알이나 세고 있는 게 훨씬 나을 것이다.
 살인의 도(道)와 예(藝)를 끊임없이 추구하며 지정한 상대를 삼 일만에 죽이지 못하면 그때가 곧 자신의 생이 끝나는 날이라고 공공연히 말하는 인물이 바로 그였다.
 또한 달빛과 술만 있으면 그는 천하 어디건 낭인처럼 유랑하며 떠돌아 다녔다. 그러나 아무도 그를 간섭하지 않았다. 아니 그의 행동에 대해 간섭할 수 없었다.
 풍문에 의하면 그는 고금제일의 살인마문(殺人魔門) 낙일부(落日府)의 일맥일 것이라고 하나 그 역시 확인된 바 없었다. 그런 그가 어떤 연유로 마왕성에 가입했는지는 더 더욱 모를 일이었다.
 다만, 그가 가입을 요청했을 때 천마대존 심천궁은 두말없이 수락했다는 것이고, 그때부터 마왕성을 적대시하던 천하 기인들이 하나 둘 소리없이 죽어갔으니··· 그것이 궁우의 솜씨임을 모르는 자는 천하에 아무도 없었다.
 홍의미랑(紅衣美娘) 운지(雲芝).
 금년 십팔 세로 마왕성 제일의 미녀(美女)였다.
 그녀를 설명하자면 먼저 마왕성의 살아 있는 두 명의 신(神)을 이야기해야 한다.
 원래 마왕성에는 최고 배분의 여섯 장로가 있었다. 그 중 최근까지 생존했던 두 인물이 태상장로와 오장로(五長老)였다.
 운지는 바로 오장로가 세수 구십에 얻은 천금이었던 것이다. 때문에 오장로의 사랑이 모두 다 운지에게 쏟아진 것은 두말할 나위조차 없었고, 덕분에 오장로의 극고마예(極高魔藝)를 고스란히 이어받은 운지의 현 무공수위는 아예 추측을 불허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삼 년 전, 스스로 천수를 다했음을 느낀 오장로는 백 일에 걸쳐 물경 삼 갑자에 달하는 마문내공(魔門內功)을 그녀에게 주입시켰다.
 그런 판국이니 이 년 전 홍의미랑 운지가 단신의 몸으로 하남제일세력과 남천마부(南天魔府)를 박살내 버린 건 절대 우연이 아니었던 것이다.
 더 자세히 말한다면 박살낸 정도가 아니라 아예 씨를 말리므로써 마녀(魔女)로서의 잔혹비정한 일면을 그대로 만천하에 과시했고, 그와 동시에 당당히 사 인의 귀재 중 한 명으로 꼽히는 명예(?)를 누리게 된 것이다.
 마지막 한 명의 귀재.
 놀랍게도 이 귀재의 능력은 이미 언급한 삼 인을 단연코 압도하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그의 존재와 가치는 언제부턴가 천마대존 심천궁 이래의 명실상부한 최고 실력자로 부각되고 있었다.
 그의 내력을 간단히 보자면 이러했다.
 백우공자(白羽公子) 위지천(尉遲天).
 당년 십구 세의 나이였고, 언제 보아도 티끌 한 올 묻지 않은 백의를 정갈하게 잘 다려 입은 모습이었으며 그 차림새만큼이나 청백하고 기우헌앙한 미장부다.
 타고 난 대로 타협을 모르고 비굴을 용납하지 않는 대쪽같은 성품과 함께 저주받을 악인조차도 너그럽게 포용해 주는 대해(大海)같은 아량의 소유자가 또한 그였다.
 사람들은 말한다······.
 신뇌 남궁은의 악마적인 두뇌와 성주 심천궁의 초능력을 한 몸에 지니고 태어난 불세출의 귀골(貴骨)이 바로 백우공자 위지천이라고······.
 또한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마왕성 최고의 어른격인 태상장로의 의자(義子)가 된 그이며, 이미 신의 영역에 접어든 태상장로의 모든 진전을 흡수하여 이제는 그 태상장로마저 능가하는 불가사의한 능력의 소유자가 또한 위지천, 그일 것이라고······.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 실제 위지천의 두뇌나 무공이 어떠한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왜냐하면 지금껏 그를 상대하거나 그가 무공을 펼치는 것을 본 자가 전무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관토목, 암기제작, 독물제조 및 활용 등에 관한 그의 조예는 아예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특히, 그 중 암기제작에 관한 그의 조예는 문자 그대로 경천지경(驚天之境)이었다. 그가 만들어낸 기상천외한 암기 앞에 쓰러진 대소방파들은 헤아릴 수조차 없을 정도였다.
 세인들은 또 한 번 결정적으로 말한다. 오늘의 마왕성을 있게 한 장본인은 바로 백우공자 위지천이며, 차기성주의 자리는 어김없이 그의 차지가 될 것이라고······.
 그 이름만으로도 능히 천하를 떠들썩하게 하는 육종천마와 무서운 능력을 지닌 귀재 사 인이 당금 천하에서 마왕성을 가장 무서운 단체로 이끌어 가고 있는 것이었다.
 세인들은 이들을 이렇게 부른다.
 마왕성(魔王城)의 십종천마(十宗天魔)라고······.
 이것이 이야기의 시작이며 대풍운(大風雲)의 서곡이다.
 
 
 2
 
 
 <마왕성을 거역함은 곧 파멸을 의미하는 것, 오늘 밤 축시(丑時)를 기해 혈교(血敎)를 지상에서 제명할 것이다.
 독안마륜(獨眼魔輪) 철무독.>
 손.
 마악 핏물에서 빠져나온 듯한 시뻘건 손이 서찰을 와락 움켜쥐었다. 이내 그 손에서는 지렁이같은 힘줄이 툭툭 불거졌다.
 이 손의 주인은 화려한 태사의 깊숙이 몸을 묻고 있었다.
 집채만한 거구에 입고 있는 옷을 비롯해 머리와 얼굴색은 물론, 수염과 심지어 두 눈의 동공까지도 붉은 빛이었다.
 얼핏 보아 그대로 검붉은 불덩이를 연상시키는 이 인물······.
 “심천궁이 직접 나선다 해도 외눈 하나 까딱 않을 노부에게 감히 십종천마의 서열 사위인 철무독 따위가······.”
 나즈막했지만 스산하기 그지없는 음성이었다.
 어느틈엔가 그의 붉은 손아귀에 쥐어진 서찰은 푸스스! 소리와 함께 그대로 가루로 변하고 있었다.
 그는 손에 움켜진 서찰, 아니 한 줌의 가루를 홱! 뿌렸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놀랍게도 서찰 가루는 순식간에 자욱한 혈무로 화해 주위를 뒤덮어 버린 것이다.
 괴소는 그 혈무 속에서 울려나왔다.
 “흐흐흐······! 나 전세희(典世希)를 건드려 보겠다는 수작인데··· 좋아, 아주 좋아······.”
 그는 차가운 미소를 입가에 머금으며 말을 이었다.
 “어차피 한 번은 부딪쳐야 할 싸움··· 노부 또한 원하고 있던 차에 이제 너희가 먼저 노부의 영토를 침범했으니 명분은 떳떳해진 셈이다.”
 혈무가 서서히 걷히고 태사의에서 시뻘겋게 웃고 있는 인물의 모습이 보였다. 언뜻 내비친 이빨까지 핏빛이었다.
 그는 흉흉한 눈빛을 폭사하며 불그죽죽한 입술을 일그러뜨렸다.
 “오너라, 마왕성······! 나 전세희가 어떤 인물인지 똑똑히 인식시켜 주마.”
 말을 내뱉는 순간, 그의 두 혈안은 이글이글 타오르고 전신으론 불길처럼 가공한 기운이 피어올랐다.
 이 인물은 바로 혈존(血尊) 전세희(典世希)였다.
 세상은 그에 대해 별로 아는 게 없다.
 단지 사천제일마세(四川第一魔勢)인 혈교(血敎)의 교주라는 사실 정도가 알려져 있을 뿐이었다.
 원래 그가 이끌고 있는 혈교는 과거 오백 년 전 이대 폭풍을 일으켰던 혈사교(血邪敎)의 일맥이라고 이야기 되어지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권위 이외엔 천하의 그 어떤 권위도 인정하지 않는 자존심 강한 일대마존이었고, 심지어는 마왕성마저 인정하지 않으려 함으로써 엄청난 화(禍)의 불씨를 안고 있었다.
 그러나, 사실 그가 천하를 움켜쥐려는 엄청난 야망을 불태우며 기회를 노리고 있는 사천의 효웅임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더욱 무서운 인물이 바로 전세희였다.
 “조양(趙陽).”
 “하교하십시오, 교주.”
 태사의 아래에는 비슷해 보이는 체격의 일곱 인물들이 엄숙히 무릎을 꺾고 있었다.
 모두 일률적으로 적포를 걸쳤으며, 깊숙이 머리를 숙인 모습이었다. 허리를 꺾었다고는 하나 그들의 몸에서 풍겨나오는 기개와 기질은 잘 단련된 강철 덩어리를 보는 듯했다.
 조양이라 불리운 자는 그 중 맨 오른쪽에 위치해 있었다.
 전세희는 허공중에 혈안을 고정시킨 채 물었다.
 “지금 시각은?”
 “자시(子時) 칠각(七刻)입니다. 축시까지는 삼각이 남았습니다.”
 “마왕성의 동태는?”
 “삼백여 마왕성 정예들이 이미 반 시진 전에 본교 제일방어선 앞에 포진해 있습니다.”
 전세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왕성다운 행동이군.”
 이때, 가운데 적포인이 짓눌려진 듯한 억양으로 입을 열었다.
 “속하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교주.”
 전세희의 시선이 무심하게 그를 향했다.
 “무슨 말인가?”
 적포인은 약간 머뭇거리더니 공손히 말했다.
 “매우 좋지 않은 보고 하나가 접수됐습니다.”
 “말해 보라.”
 “이번 마왕성 출정에는 철무독과 함께 백우공자 위지천이 직접 참가하고 있다는 정보입니다.”
 위지천이라는 이름이 적포인의 입에서 흘러나온 순간, 전세희의 얼굴에 흠칫한 기색이 번졌다.
 “위지천이······?”
 그는 적지 아니 놀란 것 같았으나 어느 정도는 짐작했었던 듯 이내 냉정을 회복했다.
 그의 얼굴이 굳어들고 있었다.
 ‘위지천··· 철옹성을 자랑하던 천하의 유수대파들이 너 하나로 인해 무너졌다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그러나······.’
 전세희는 눈을 가늘게 뜨며 실낱같은 안광을 뻗어냈다. 그것은 흡사 독사의 혓바닥처럼 새파랗게 번뜩이는 눈빛이다.
 ‘네가 암기제작의 달인이라면 나 전세희는 혈사교(血邪敎)의 맥을 이은 철과 불의 위대한 시술사(施術士)다!’
 ‘흐흐··· 위지천, 너에 대한 준비는 이미 이 년 전에 끝냈다. 알겠나? 무엇이든 뚫어 버리는 창과, 무엇이든 막아내는 방패의 재미있는 대결이 너를 위해 준비되어 있단 말이다!’
 그는 가슴 깊숙이서 급격히 확산되어 오는 짜릿한 전율을 느꼈다.
 ‘이젠 멋진 한 판 승부만이 남았을 뿐이다. 위지천······!’
 전세희는 더욱 태사의 깊숙이 몸을 파묻으며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조양.”
 “하교를 기다립니다.”
 “즉시 철갑(鐵甲)의 문을 열도록 하라.”
 조양은 움찔해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철갑의··· 문입니까?”
 전세희는 음침하게 웃으며 독백하듯 말했다.
 “흐흐··· 그래, 인간도 아닌 가공할 괴물··· 삼백육십칠 인(三百六十七人)의 철갑귀시대(鐵甲鬼屍隊)가 있는 그 철갑의 문이다. 흐흐······!”
 “알겠습니다······.”
 조양의 대답엔 어딘지 모를 두려움이 먹구름처럼 끼어 있었다.
 밖에서는 비가 오는 것인지 쏴아하는 소리가 너무도 선명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이제 축시까지 겨우 이각이 남았을 뿐이다.
 
 
 3
 
 
 쏴아아아······!
 엄청난 폭우(暴雨)다.
 암흑같은 어둠 속에서 굵은 빗줄기는 억수처럼 쏟아져 천지를 온통 축축한 대기 속으로 몰아 넣었다.
 무성한 잡초들은 거친 폭우에 휩쓸려 사방으로 흩어지고 있었으며··· 굵은 나무들조차 미친 듯이 광란의 춤을 추고 있었다.
 이런 기세대로라면 미처 날이 밝기도 전에 세상은 빗물 속에 침몰해 버리고 말 것이다.
 쏴쏴아···!
 한 마디로 기분 나쁜 날씨이며 풍경이었다.
 그런데, 야트막한 둔덕 위. 칠흑의 어둠과 뿌우연 우막 속에 하나의 거대한 의자가 놓여 있었다.
 이런 살벌한 폭우 속에 의자라니······?
 자세히 보니 그 의자 위에는 한 인간이 목석인 양 정좌하고 있었다.
 그 인물은 오십대 초반쯤 되어 보이는 모습이었으며, 나부끼는 머리칼 사이로 드러난 얼굴은 탄탄한 황갈색 바위를 연상시켰다. 두 눈은 지그시 감았으나 왼쪽 눈두덩이가 움푹 꺼진 것으로 보아 애꾸인 듯했다.
 무표정 속으로 어우러지는 굵직한 윤곽선이 갈무리 된 강인한 기질을 느끼게 하는 이 인물······.
 미친 듯이 퍼붓는 폭우를 고스란히 맞으면서도 그는 미동도 않고 있었다.
 그의 뒤에는 억센 갈대숲이 빗줄기에 휩쓸려 춤을 추었다.
 그런데, 그 속에 우뚝우뚝 도열해 있는 검은 그림자들은 뭐란 말인가? 그 수효는 줄잡아 수백여에 이르며 그들 역시 석상처럼 미동도 않고 있었다.
 뿐만이 아니다. 갈대숲 곳곳에는 수십 대의 시커먼 마차들이 빗물에 번들거리며 괴물처럼 웅크리고 있었다.
 썰렁한 냉기와 함께 섬뜩한 공포가 살갗을 파고 드는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쏴아······!
 폭우는 더욱 기승을 부리며 퍼붓고 있었으며··· 그 속에서 질식할 듯한 침묵의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이때였다.
 문득 철거덕··· 철거덕하는 괴이한 금속성이 폭우 속의 적막을 깨고 들려왔다.
 마치 이것이 신호인 듯, 맞은편 둔덕 아래서부터 시커먼 그림자들이 이내 시야를 검게 채우며 그 형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 숫자만도 어림잡아 삼백여 명이 넘었으며··· 그들이 움직일 때마다 고막을 긁어대는 듯한 쇳소리가 어둠을 갈랐다.
 빗소리와 금속성.
 그 속을 유령처럼 흐느적거리며 다가오는 흑영들은 눅눅한 습기를 타고 흐르는 긴장과 더불어 가슴 떨리는 공포를 불러 일으키고 있었다.
 철거덕··· 철거덕···!
 비록 느리기는 했으나 한 치의 주춤거림도 없이 계속 다가오고 있는 검은 그림자들······!
 그러나 의자의 흑포인은 처음 자세 그대로 미동도 않고 있었다. 그는 눈조차 뜨지 않는다. 저 소름끼치는 괴음향을 못 들을 리 없는 데도 말이다.
 흑포는 비에 흠뻑 젖어 탄탄한 어깨의 근육질을 내비치고 있었다.
 이때였다.
 의자 뒤에 시립해 있던 한 명의 흑의인이 약간 멈칫거리더니 더 견디지 못하겠다는 듯 흑포인 앞으로 나와 무릎을 꺾고 말했다.
 “사종(四宗)께 아룁니다.”
 “······.”
 “혈교의 수하들이 나타났습니다.”
 “······.”
 “머리에서 발끝까지 철갑으로 철저히 무장한 자들입니다. 철갑은 어둠 속에서조차 철광을 뿌리는 것으로 보아 흑암자오철(黑岩磁烏鐵)인 듯 합니다. 또한 놈들의 움직임으로 보아 고도의 수련을 거친 자들이 분명합니다.”
 “······.”
 “사종, 하명을 기다립니다.”
 흑의인이 말을 마치자, 영원히 열릴 것 같지 않던 흑포인의 입술이 떼어지며 무거운 독백이 흘러나왔다.
 “흑암자오철의 철갑에 강시( 屍)라··· 위지소제의 예측이 너무도 정확히 들어 맞았군.”
 “······!”
 의자 앞의 인물은 그 말을 듣자 두 말없이 일어나 원래의 자리로 향했다. 돌아가면서 그는 괜히 쓸데없는 걱정을 했다고 생각했다.
 그가 둔덕 위에서 말없이 내려다보고 있는 사이 철갑괴인들은 이미 오십 장 앞까지 접근해 오고 있었다.
 폭우 속에서 뱀의 가죽처럼 번들거리는 푸르죽죽한 철광을 띠고 있었으며 손에는 굵은 쇠사슬을 감아쥐고 있었다.
 설사 끓는 용암 속에 던져진다 해도 끄떡하지 않을 것 같은 무시무시한 모습이었다. 한 마디로 괴물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괴물. 그렇다. 혈존 전세희가 언급한 삼백육십칠 인의 철갑귀시대(鐵甲鬼屍隊)였다.
 철거덕··· 철거덕···!
 그들과 의자가 있는 둔덕간의 거리가 삼십여 장으로 좁혀졌을 때였다.
 둥··· 둥···!
 어디선가 둔중한 북소리가 야음의 정적을 뚫고 울려퍼졌다.
 순간이다. 굳게 감겨 있던 흑포인의 독안이 번쩍 떠진 것은······.
 “······!”
 시퍼런 광채가 빗속을 뚫고 그의 두 동공 속에서 서리서리 뻗쳐나왔다. 참으로 가슴이 떨리도록 무서운 눈빛으로 웬만한 사람이라면 그 눈빛 하나만으로도 숨이 꽉 멎을 지경이었다.
 흑포인은 그 시선 그대로 전면을 직시하며 우수를 가볍게 치켜들었다.
 “자모연환궁(子母連還弓) 앞으로······.”
 그 한 마디가 그의 입에서 뱉어지자마자 쿠구궁, 하는 소리와 함께 젖은 갈대 숲에서 다섯 개의 거대한 물체가 솟아올랐다.
 화포(火砲)! 그것은 하나의 포신에 무려 열다섯 개의 구멍이 나 있는 화포였다.
 끼끼끼···!
 귀에 거슬리는 금속성을 일으키며 다섯 개의 포신이 전방으로 향했다. 살아 움직이는 철갑귀시대와 괴물같은 화포의 대치다.
 쏴아아···!
 폭우는 여전히 사납게 퍼붓고 있었다.
 철갑귀시대가 이십여 장 앞까지 접근해 온 순간, 치켜든 흑포인의 손이 천천히 앞을 향했다.
 그리고 그는 차가운 한 마디를 내뱉았다.
 “쏴라.”
 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쿠구궁하는 소리가 귀를 찔렀다.
 다섯 개의 자모연황궁에서 도합 칠십오 개의 구멍이 일제히 시꺼먼 빛줄기를 발사했다.
 그것은 다름아닌 강전(强箭)이었다. 그것도 거의 어른 팔뚝 굵기의 묵빛 강전이었다. 최초로 발사된 강전은 맨 앞의 철갑귀시대의 가슴을 그대로 관통했다.
 자모연환궁에서 쏘아진 강전이 격중된 순간 철갑귀시대는 불벼락을 맞은 멧돼지처럼 펄쩍 뛰어올라 수 장 밖으로 퉁겨 날아가 버렸다.
 “끄아··· 악!”
 실로 가공절륜할 위력이었다. 쇠중의 쇠라는 흑암자오철의 철갑이 두부처럼 간단히 꿰뚫리고 있는 것이었다.
 더욱 더 무서운 것은 그 가공한 위력은 한 번의 발사로 끝나는 게 아니라는 것이었다. 다섯 개의 자모연환궁은 최초의 발사가 격중되기 무섭게 다시 작동되어 연속적으로 발사되고 있었다.
 쿠쿠쿠쿠쿵!
 “끄아··· 악!”
 자모연환궁에서 불꽃이 뿜어지기가 무섭게 철갑귀시대의 강시들은 비명을 지르며 피떡이 되어 날아갔다.
 과연 이 광경을 어떻게 표현해야 한단 말인가?
 팔에 맞으면 어깻죽지까지 통째로 날아가고, 다리는 슬쩍 스치기만 해도 반 이상 그대로 찢겨 버리니······.
 자모연황궁!
 전에도 없었거니와 후에도 없을 이 공포의 살인기계(殺人機械)는 대체 어느 누구의 손에서 만들어질 수 있단 말인가?
 쿠구궁···! 크아악···!
 둔중한 폭음과 폐부를 쥐어짜는 듯한 비명은 잇따라 폭우 속을 뒤흔들었다.
 비록 어둠 속이라 하나 낭자한 선혈과 난무하는 인육(人肉) 조각들까지 감추지는 못한다. 실로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폭우가 퍼붓는 둔덕 위에는 백여 구에 가까운 철갑귀시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이건 도무지 말도 안 되는 싸움, 아니 싸움이라고 할 수도 없는 일방적인 무차별 살상이었다. 혈교의 자랑이던 철갑귀시대의 종말은 이제 시간문제였다.
 흑포인.
 흡사 바윗덩어리같은 이 위인의 얼굴에 처음으로 희미한 미소 한 가닥이 피어 올랐다.
 그것은 목전 상황에 대한 흡족함이 아니라 어느 한 사람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자신도 모르게 머금는 미소였다.
 ‘인간의 두뇌와 손을 빌어 저토록 무서운 병기가 만들어질 수 있다니······.’
 그는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이미 한두 번 놀란 것도 아니네만 우형은 이번에도 여지없이 놀라고 말았다네, 위지소제······.’
 흑포인은 잠시 상황을 더 지켜보더니 이윽고 천천히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앉아 있을 때는 만년풍우(萬年風雨)를 견뎌낸 거암이더니 정작 몸을 바로 세우자 그의 몸은 흡사 작은 산악을 연상시켰다.
 그는 선 자세 그대로 멀리 폭우 속에 시선을 던졌다.
 깊숙한 계곡 아래 괴물처럼 도사린 거대한 성채가 눈에 들어왔다.
 문제의 혈교(血敎), 그 총단이 바로 그곳이었다.
 검은 우막에 덮어 씌워진 성을 응시하는 흑포인의 입가로 문득 비릿한 조소가 번져올랐다.
 “전세희······! 너는 헛된 꿈은 꿀지언정, 최소한 마왕성의 비위만은 건드리지 말았어야 했다······.”
 스산한 독백이 빗물 속에 흘려내어지는 순간, 그의 구척 거구는 믿을 수 없는 속도로 허공을 갈랐다.
 슈우욱!
 그것이 신호인 듯, 그의 뒤 갈대숲 속에 도열해 있던 수백여 명의 흑의인과 수십 대의 마차들이 일제히 폭우를 뚫고 돌진했다.
 우두두···!
 갈대숲에 가려져 있을 때는 보이지 않았지만 차체 전체가 온통 손가락 굵기의 창칼로 뒤덮여 있는 그것은 문자 그대로 괴전차(傀戰車)가 아닌가?
 일단 움직이기 시작하자, 바위든 거목이든 스치는 건 모조리 찢겨지고 박살나며 하늘로 자욱이 치솟았다. 실로 무시무시한 괴력이었다.
 마차의 위력에 하늘이 놀라고 땅이 흔들릴 정도였다.
 우두두두···!
 그래서였을까?
 미친 듯 쏟아지던 폭우는 곧 멎을 기세였다.
 
 
 2장 그가 나타났다
 
 
 1
 
 
 일남일녀(一男一女).
 사내는 깡마른 체구에 뻣뻣하고 낡은 마의(麻衣)를 걸쳤다. 거기다 죽립을 깊숙이 눌러쓴 모습하며, 오른쪽 옆구리에는 주방에서 두부나 베고 있어야 할 듯 싶은 목검을 차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전신에선 얼음장을 보듯 냉막한 기운이 풀풀 나부꼈다.
 여인은 삼십이삼 세 가량의 중년미부(中年美婦)였다. 치렁치렁한 흑발이 묶지도 않은 채 흘러내려 얼굴의 반 이상을 가리고 있는가 하면 언뜻 내비치는 안색은 무섭도록 창백했다.
 그러나 그 얼굴······!
 아름답다. 정말 미치도록 아름답다.
 흑진주를 연상시키는 검은 눈동자와 조물주가 정성을 다해 깎아놓은 듯한 콧날은 손을 대었다가는 그 날카로움에 베일 듯이 오똑했다. 또한 그 밑의 입술은 새빨간 꽃잎 두 장이 살포시 겹쳐져 있는 듯했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에선 왠지 사람의 애간장을 축축히 적셔낼 듯 암울한 분위기가 풍겨나오고 있었다.
 “······?”
 그들은 몸을 돌려 천천히 주위를 둘러 보았다.
 이슥한 어둠 속에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시체들이 제멋대로 나뒹굴고 있었다.
 처참지경!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만큼 참혹하거니와, 몇 년 전에 먹은 음식물이 솟구칠 듯한 끔찍한 광경이었다.
 휘이잉······!
 한 차례 야풍이 불어오자 주위는 코가 떨어져 나갈 듯한 피비린내에 휩싸였다. 어느 구석에선가 까마귀떼와 들짐승의 탐욕에 찬 아귀다툼 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도대체 무얼 하자는 것일까?
 사내와 여인은 질퍽한 핏물 위로 희디 흰 비단천을 길게 깔았다. 끝도 없이 펼쳐 깐 후, 그들은 양쪽 귀퉁이에 시립하여 공손히 허리를 굽혔다.
 최고의 충(忠)과 경외심을 엿볼 수 있는 모습이긴 했으나 아무도 없는, 아니 수백 구의 시산혈해 속에 흰 비단천은 무엇이고 이렇듯 공경스런 자세는 또 뭐란 말인가?
 어쨌거나 그런 상태로 두 사람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어느샌가 비는 이미 그쳐 있었다.
 채 걷히지 않은 먹장구름 새로 빠꼼히 드러난 달빛 아래 흰 비단과 흥건한 핏물의 조화가 극렬하도록 선명한 대조를 이루었다.
 이때였다. 잔뜩 구부린 두 사람의 시선 속으로 하나의 새하얀 가죽신이 쏘아들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그것밖에 볼 수 없었다. 숨조차 못쉬며 더욱 깊이 허리를 숙여야 했으므로······.
 가죽신의 주인은 사내였다. 그것도 훤칠한 체구에 희디 흰 백삼을 잔잔히 나부끼는 약관의 미청년이었다. 사정없이 휘몰아쳐온 야풍에 몇 가닥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귀 뒤로 나부꼈다.
 사내의 얼굴이 이토록 아름다워도 되는 것인가?
 그 어떤 형용도 불필요하게 느껴지는 순백 그 자체인 깨끗한 피부였다. 그리고 시원스럽게 쭉 뻗어 올라간 검미 아래 두 눈은 구름 한 점 없이 푸르디 푸른 창천을 그대로 닮아 버린 듯했다.
 또한 빚은 듯 우뚝 솟아오른 콧날이며 꾹 다물려진 주사빛 입술과 수려한 윤곽의 절묘한 조화는 또 어떤가?
 가히 조화옹이 온갖 정성을 기울여 만들어낸 하나의 작품을 보는 듯했다.
 더불어 또 하나, 눈부시도록 빼어난 용모에 걸맞게도 이 몸에서 풍겨나는 고아한 기품에는 스치는 바람조차도 숨 죽일 정도였다.
 그렇다. 이 사내는 어쩌면 사내가 갖추어야 할 모든 것을 다 갖추고 있는 이 땅의 유일한 사내인지도 몰랐다.
 “······.”
 백의청년은 시리도록 맑은 눈빛으로 주위를 휘둘러 보았다. 코를 찌르는 혈향(血香)과 더불어 한폭의 지옥도(地獄圖)가 눈에 들어왔다.
 그의 미간이 가볍게 찌푸러지며, 입에선 바람결처럼 담담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자업자득(自業自得)··· 날 원망치 마라, 전세희······.”
 그 한 마디를 뒤로 하고 어느새 그는 흰 백포 위로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걸음을 옮기는가 싶자, 백의청년은 이내 어둠 속의 흰 점이 되어 멀어졌다.
 죽립의 사내와 중년미부는 백의청년의 모습이 혈지를 다 벗어날 때까지 숙인 고개를 들지 않았다.
 어느 순간 고개를 들었다 싶었을 때 그들은 어느새 아득히 사라지는 백의청년의 뒤를 그림자처럼 따라붙고 있었다.
 그렇다.
 그가 나타났다.
 
 
 2
 
 
 “교주! 어서 몸을 피하시오. 사태는 이미 절망적입니다!”
 조양은 이마를 바닥에 박고 울부짖듯 부르짖었다.
 혈존 전세희.
 태사의 깊숙이 파묻혀 있는 그의 두 눈썹 끝이 파르르 떨렸다.
 그러나 그 뿐이었다. 발치께로 내던지고 있던 시선 한 올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붉은 혈암을 깎아 빚은 듯한 얼굴도 마찬가지였다.
 그에게서 아무 반응이 없자 조양은 고개를 번쩍 치들며 말했다.
 “정말입니다! 마왕성의 힘은 우리가 예상했던 것보다 최소한 세 배는 더 강합니다.”
 “······!”
 “더욱이 보도 듣도 못한 자모연환궁과 수십 대 괴전차들은 한 마디로 악마를 보는 듯한 기분입니다. 본교 제자들은··· 무기 한 번 뽑아내지 못하고 추풍낙엽처럼 날아가고 있습니다.”
 음성은 충격과 울분에 짓눌려 나왔다.
 문득, 전세희의 입이 느릿하게 열렸다.
 “철갑귀시대는······?”
 “전멸입니다.”
 “음······.”
 무거운 침음을 흘리며 전세희는 참담한 눈길을 들어 허공에 박았다.
 ‘그랬나? 백우공자 위지천··· 네놈의 힘이 그토록 대단했단 말이냐.’
 씁쓸한 고소가 입가로 베어났다.
 자존심을 논하자면 천하에서 둘째 가는 것도 서러워 할 그다. 또 그에겐 그럴 만한 힘도 있었다. 그는 그 힘으로 마왕성이 아니라 천하라도 통째로 움켜쥘 수 있다고 확신했었다. 또한 모든 준비는 치밀하고 완벽했다.
 그런데······.
 무너지다니······. 그것도 마왕성 전체가 아닌 단 두 명 때문에 이렇게 어처구니 없이 무너지고 말다니······!
 조금 전 외마디 비명을 끝으로 밖에선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끝장난 것이다. 패배는 결정적이다. 설사 하늘이 뒤집힌다 해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전세희는 포기하지 않았다.
 ‘아직 무너지지 않는다··· 나 전세희가 이렇게 버티고 있는 한······.’
 와스스······!
 움켜쥔 태사의 팔걸이 부분이 가루가 되어 부서져 나갔다.
 전세희의 핏빛 동공에선 화염같은 광망이 뿜어져 나왔다.
 조양은 맹세컨데 평생을 전세희에게 충절을 바쳐 왔으며 남은 여생도 그러하리라 마음먹고 있었다. 때문에 조양은 그의 그런 모습이 무엇을 뜻하는지 직감했다.
 그는 비감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교주··· 훗날을 기약···”
 전세희의 동공이 그의 동공에 꽂히듯 와 닿았다.
 “조양!”
 “예, 교주!”
 “연아(燕兒)를 부탁한다.”
 “······!”
 조양은 폭풍에 휘말리듯 부르르 몸을 떨었다.
 연아··· 전하연(典河燕)!
 십칠 년을 어미없이 키워온 전세희의 단 한 점 피붙이다.
 전세희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교주···!”
 “어서 떠나라. 그리고··· 네가 본좌를 교주라고 생각한다면 죽는 순간까지 그 아이를 보호해 다오.”
 “교주···”
 조양은 비통하게 부르짖으며 바닥에다 머리를 처박았다.
 그 순간 밖에서 한 소리 묵직한 음성이 두 사람의 고막으로 천둥처럼 울려들었다.
 “나오너라. 전세희, 나 철무독이 왔다.”
 “······.”
 전세희는 마치 기다리고나 있었던 것처럼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없었다. 불 뿜듯 강렬한 시선을 너무도 담담히 문가로 향해 내던지며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그 모습은 친숙한 지인(知人)이라도 맞으려는 듯한 모습이었다.
 철무독의 음성과 동시에 고개를 번쩍 치켜든 조양의 눈엔 견딜 수 없는 고통의 빛이 어렸다.
 그는 아랫 입술을 질근 깨물었다.
 “존체 보중하십시오. 교주···!”
 뜨거운 한 마디 말과 함께 그의 신형은 뒤쪽으로 번뜩 사라졌다.
 앳되고 해맑은 소녀의 영상 하나가 전세희의 뇌리에 와 박히듯 자리 잡은 것도 그때였다. 전세희는 심중의 고뇌를 털어 내기라도 하듯 왈칵 문을 열었다.
 문 밖에는 구척 거구의 흑포인이 우뚝 서 있었다.
 하나뿐인 외눈에선 소름끼치는 자광이 줄기줄기 뻗어나오는 매우 강인한 기질의 이 인물.
 처음 보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전세희는 한눈에 이 흑포노인의 정체를 알아버렸다.
 그는 다름아닌 십종천마의 서열 사위인 독안마륜 철무독이라는 것을······.
 철무독의 등 뒤로 끝도 없이 도열해 있는 괴전차와 마왕성의 고수들이 보였다.
 비는 그쳤다 하나 천지는 여전히 먹물빛이며, 비 개인 뒤의 썰렁한 냉기를 품은 어둠 속에서는 수백 쌍의 안광들이 번들거리는 기름 불빛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달은 솟았으되 어느 한켠도 제대로 비추질 못하는 있으나마나한 것이었고, 야적 속에 버티어선 이들의 기세는 가히 산악이라도 통째로 날려버릴 듯했다.
 그러나 전세희는 안색 하나 바꾸지 않고 주위를 쓸어본 뒤 마지막으로 흑포인의 얼굴에 시선을 꽂았다.
 “······!”
 시선과 시선이 부딪히며 시퍼런 불꽃이 튀었다. 말이 필요 없다는 걸 느꼈기 때문인가?
 전세희는 천천히 왼쪽 소매를 걷어올렸다.
 핏기둥같은 팔뚝에는 종잇장처럼 얇은 연검 하나가 둘둘 감겨 있었다. 전세희는 연검을 끌르며 독백하듯 입술을 열었다.
 “사람들은 십종천마를 무섭다고 말하더군. 그러나··· 혈존 전세희가 왜 십종천마를 두려워하지 않는가를 모르고 있더군!”
 취릿! 하는 소리와 함께 연검은 다 풀어졌다 싶자 그의 가슴 앞에 곧게 세워졌다.
 기다렸다는 듯 와르르 쏟아져 나오는 핏빛 혈광(血光)!
 전세희의 불그죽죽한 입술이 먼저번보다 더욱 느리게 움직였다.
 “오너라, 철무독!”
 철무독의 외눈이 잔인하게 번뜩였다.
 “어리석은 놈··· 십종천마가 왜 무서운지 가르쳐 주마.”
 그는 흑포자락을 걷어붙였다. 굵은 허리에 은빛 반월형 륜(輪)이 비껴 차 있었다. 철무독을 오늘날의 십종천마 서열에 있게 한 애병(愛兵) 은월마륜(銀月魔輪)이었다.
 지난 삼십여 년 동안 전세희를 그림자처럼 보필해 온 혈교의 실질적인 이인자(二人者)이며, 그 동안 전세희에게 바쳐온 충성은 거의 맹목적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닌 인물이 바로 조양이었다.
 이제 그는 자신의 신(神)이나 진배없는 전세희의 마지막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달리고 있었다.
 - 네가 본좌를 교주라고 생각하는 순간까지 그 아이를 보호해 다오······.
 저 멀리 계곡 안쪽으로 은밀하게 자리한 한 채의 모옥이 그의 시선 속에 쏘아 들어왔다. 바로 그가 목숨을 걸고 탈출시켜야 할 전하연이 있는 곳이다.
 지그시 어금니를 악문 조양.
 슈우욱!
 그의 신형은 빛살처럼 암공을 가르고 쏘아 나갔다.
 그때다. 느닷없이 한 가닥의 스산한 괴소가 그의 귓속을 불쑥 파고 들었다.
 “흐흐···! 저승길이 그토록 바쁜가?”
 “······?”
 조양은 일순 흠칫 안색이 급변했다. 그는 반사적으로 신형을 뒤집어 옆으로 쏘아 나갔다. 우선 위험의 사정거리 밖으로 벗어나고 보자는 계산이었는데··· 어찌된 일인가?
 한 점 파공음도 없이 극렬한 살기가 벼락처럼 그의 정수리를 파고 들었다. 실로 가공할 살기(殺氣)였다. 조양은 그것이 무지막지한 도끼날이란 것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웬놈이냐?”
 날카롭게 부르짖는 순간, 그의 옆구리에서 예리한 검날이 날벼락치듯 폭사했다.
 차앙! 하는 금속성과 함께 하늘이라도 갈라버릴 듯한 엄청난 뇌강이 일어났다. 그와 동시에 시퍼런 불꽃이 조양의 머리어림에서 무섭게 작렬했다.
 조양의 얼굴이 완전히 흙빛으로 물들었다.
 분명히 막았다. 그런데 이건 뭐란 말인가?
 하지만 지금 이순간 그의 손에 들린 것은 검을 치켜들 때의 비중에 절반도 못미치는 부러진 검자루 뿐이었으며··· 시퍼런 도끼날은 맞물림 톱니바퀴가 당연히 제이빨을 찾아 찍히듯 여지없이 그의 정수리를 파고 들어오는 것이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사방으로 피가 튀어 올랐다.
 “크···악!”
 예의 스산한 괴소가 다시금 그의 귀청에 울렸다.
 “알고나 죽어라. 사종(四宗) 나으리의 그림자, 살인마부(殺人魔斧)가 바로 이 어른이시다.”
 나동그라지는 조양의 동공 속으로 막 허공을 선회해 내려서는 왜소한 꼽추노인의 잔인음독한 미소가 쑤시듯 들어와 박혔다.
 소름끼치게 재수없는 미소다.
 쿵!
 조양은 멀리 계곡의 모옥을 부릅 뜬 눈에 담은 채 고목처럼 쓰러졌다.
 꼽추노인은 거무튀튀한 피부 군데군데 손바닥만한 반점이 깔려 있는 얼굴을 가졌으며, 조잡한 고리눈에 벌쭉한 메기입 등 도무지 인간의 냄새를 느낄 수 없는 이질감마저 느껴지는 인상이었다. 그런가 하면 좁은 눈매에는 파르스름한 살광까지 어려 있었다.
 그는 도끼날에 묻은 피를 시체 옷자락에 쓱쓱 문질러 닦더니 멀리 모옥 쪽으로 힐끗 시선을 던졌다.
 “흐흐··· 전세희의 딸년이 저곳에 있단 말이지? 좋아. 어쩌면 또 하나의 공을 세울지도 모르겠군.”
 푸르뎅뎅한 입술 언저리가 비정하게 일그러지는가 싶더니 작달막한 삼척 단구는 어기적거리듯 모옥 쪽으로 향했다.
 느낌과 달리 번갯불처럼 신쾌한 신법이었다.
 “빌어먹을···”
 전세희는 극도의 절망과 불신어린 눈빛으로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봤다.
 피(血)!
 앞섶을 축축히 적시는 검붉은 핏물이 부릅떠진 두 동공을 물들였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싸움 개시 삼십 초만에 혈검은 두 동강이 났고, 이렇듯 자신의 심장에 은월마륜이 짓쑤셔 박힌 것은 그로부터 십칠 초가 지나서였다.
 고개를 저은 것은 도무지 이 상황을 믿을 수 없다는 불신의 의미이며 이내 입가 근육을 경직시키며 흐리게 떠오르는 고소는 하늘이 무너지는 절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우습구나······!’
 천하를 한 손아귀에 거머쥐려던 나 전세희가 한낱 철무독 따위 앞에 무너지다니······.
 십종천마, 이토록 강한 자들이었단 말인가······?
 그의 신형이 가볍게 휘청이며 가슴에 쑤셔박힌 은월마륜을 쑥 빼내었다.
 이때 전신이 피범벅이 된 전세희에게 한 마디 차가운 음성이 들려왔다.
 “본성의 권위를 능멸한 대가다. 전세희.”
 “······!”
 전세희는 무슨 말인가 하려고 입술을 씰룩였다. 그러나 그 입술은 이내 축축한 땅 속으로 처박혔다.
 쿵······!
 그것은 죽음이었다.
 숨가쁘게 치달려 왔던 것에 비해 너무나 허무하고 간단히 마감되는 생이었다.
 철무독은 핏물이 흐르는 은월마륜을 쥔 채 멀리 허공 한 곳에 시선을 던졌다. 어둠의 응어리를 풀어내며 동천(東天)은 서서히 여명(黎明)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로써 사천의 화근덩어리는 완전히 제거된 셈이군!’
 그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며 짤막히 일갈했다.
 “전원 철수하라.”
 “존명.”
 우렁찬 대답과 함께 괴전차들과 수많은 마왕성 고수들이 썰물처럼 장내를 빠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철무독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눈은 누군가를 찾는 듯 느릿하게 주위를 훑었다.
 바로 그때였다.
 스스···!
 어디선가 경미한 기척과 함께 삭막한 음성이 울려왔다.
 “다녀왔습니다. 사종.”
 최초의 음성은 이십여 장 밖에서 울렸다.
 그러나 철무독은 곧장 자신의 턱 밑으로 시선을 옮겼다.
 놀랍게도 음성의 주인은 이미 바로 그의 두 걸음 앞에 나타나 공손히 시립해 있지 않은가!
 허리를 굽혀 더욱 왜소하게 느껴지는 꼽추노인, 살인마부였다. 철무독이 담담히 물었다.
 “어찌 되었느냐?”
 “깨끗이 처리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생겼습니다.”
 “음?”
 “바로 이겁니다.”
 살인마부는 자신의 왼쪽 옆구리를 가리켰다. 뜻밖에도 그의 허리엔 한 명의 청의(靑衣)소녀가 축 늘어진 채 끼어 있었다.
 철무독의 눈살이 가볍게 찌푸러졌다.
 “누구냐?”
 “전가놈의 딸년입니다.”
 “······!”
 “무공을 전혀 모르는 계집인데 하도 앙탈을 부리기에 수혈을 짚었습니다.”
 “데리고 온 이유는?”
 살인마부의 좁은 눈가로 한 가닥 야릇한 미소가 스쳤다. 그는 청의소녀의 머리칼을 잡아채 고개를 쳐들어 보이며 말했다.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죽은 듯 눈을 감고 있는 하얀 옥용이 어둠 속에 드러났다.
 소녀의 얼굴을 보자 철무독의 동공 깊숙이 기이한 광채가 번뜩 떠올랐다. 그것은 떠오를 때보다 더욱 빠르게 사라졌지만 그것을 놓칠 살인마부가 아니었다.
 그는 의미심장하게 물었다.
 “어떻습니까?”
 “······.”
 철무독은 대답없이 지그시 소녀의 얼굴을 응시했다.
 아름다웠다. 갸름한 얼굴의 선은 너무도 섬세하고 부드러우며 만지면 분가루라도 묻어날 듯 희디 흰 피부를 지니고 있었다. 게다가 휘장처럼 길고 고운 눈썹과 옥을 정성들여 세공해 놓은 듯한 콧날은 또 어떤가?
 비록 핏기를 잃었으되 왠지 모를 가련함을 불러 일으켜 더욱 청순한 미태를 돋보이게 하는 도톰한 입술······.
 그야말로 풀잎에 맺힌 새벽이슬처럼 신선하고 해맑은 미모의 소녀였다. 철무독의 외눈에 일말의 득의한 미소가 어렸다.
 ‘됐다······!’
 무엇이 됐단 말인가?
 사실 이 바위같은 인간 철무독에게는 한 가지 광적인 취미가 있었다. 그것은 여인을 곁에 두고 감상하는 일이었다.
 그는 결코 색을 즐기는 건 아니었다. 그저 꽃을 바라보듯 심미안적인 눈으로 바라만 보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이런 괴팍한 취미의 내막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때문에 더욱 괴벽으로 여겨지는 것이었는데······.
 철무독의 표정을 살피던 살인마부는 철무독이 이 기막힌 미소녀를 결코 포기하지 않으리라는 확신에 차 있었다.
 여인이란 게 워낙 요물(妖物)이어서 처덕처덕 발라대고 온갖 가지로 치장을 해놓으면 아무리 험악한 추물이라도 사내의 식욕을 돋굴 만큼 요사스런 미태를 발휘하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하늘에 맹세코 이토록 청초하고 깨끗한 미모는 중원의 전체를 이잡듯 뒤져도 겨우 서넛을 건져낼까 말까한 것이었다.
 미소녀를 바라보던 철무독의 시선이 살인마부를 향했다.
 “막청(幕靑).”
 “말씀하십시오. 사종.”
 “어설픈 짓을 했구나. 너는.”
 “예······?”
 살인마부 막청의 얼굴에선 미소의 한점 흔적까지 씻기듯 사라졌다.
 “죽여라. 지금 즉시.”
 막청은 왜소한 삼척단구를 미미하게 떨었다.
 뜻밖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복종은 그의 첫번째 습관이었으므로 그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슈우욱!
 칼끝처럼 세워진 그의 우수가 사정없이 소녀의 머리로 내리꽂혔다.
 바로 그때였다.
 “멈춰라 막청.”
 한 소리 담담한 음성이 울려 나는가 싶더니 어느새 막청의 우수를 막아서는 물체가 하나 있었다. 그것은 거무튀튀한 검의 손잡이였다.
 “······!”
 막청은 멈칫해 고개를 치켜 들었다.
 언제 나타났단 말인가?
 낡고 빛깔 바랜 마의에 죽립을 눌러쓴 한 인영이 그의 눈 앞에 서 있었다.
 “그, 그대는······!”
 막청은 상대를 올려다보며 무슨 말을 하려다 돌연 안색이 급변했다. 죽립인의 뒤에 서 있는 또 다른 사람을 보았던 것이다.
 그를 보자마자 막청의 신형은 그 자리에 허물어지듯 깊숙이 부복했다.
 “속하 막청, 대공자의 존체를 뵈옵니다.”
 대공자! 고아한 기품을 구름처럼 피워올리는 백의청년을 일컬음이었다. 그를 발견한 철무독은 크게 반색했다.
 “역시 와 주었군. 위지소제.”
 백의청년은 햇살같은 미소를 은은히 머금으며 말했다.
 “노형님의 위용을 보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헛헛···! 낯 뜨거운 말이군. 사실 말이지만··· 자네 백우공자(百羽公子) 위지천(尉遲天)의 자모연환궁이 없었다면 솔직히 이 우형은 크게 고전했을 것이네.”
 “······.”
 백의청년은 소리없는 미소를 떠올릴 뿐이었다.
 이 청년이 누구인가?
 천하가 인정하는 이 시대의 제 이인자이며 중천의 태양인 양 그 빛나는 명성으로 대륙천하를 완전히 압도하는 문제의 풍운아(風雲兒), 백우공자 위지천이었다.
 위지천의 시선은 어느틈엔가 막청이 부복하면서 땅에 내려놓은 전하연의 얼굴을 향해 있었다.
 철무독은 그제야 그가 그녀를 죽이지 못하게 막았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그는 특유의 무심한 어투로 말했다.
 “관심이 있나?”
 “저 소녀는 제가 맡겠습니다.”
 지체없이 튀어나온 이 말에 철무독은 적잖이 놀란 얼굴이 되었다.
 “이거··· 굉장한 일인데? 자네가 여자에 관심을 보이다니······!”
 철무독은 여전히 소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는 위지천을 향해 재차 넌지시 물었다.
 “그런데, 자네는 저 계집의 신분을 알고 있나?”
 “승낙입니까? 거절입니까?”
 연거푸 튀어나오는 그의 두 마디 말은 철무독의 그 어떤 참견이나 추측도 냉정히 거부하는 것이었다.
 “이건 완전히 협박이군. 좋아, 마음대로 하게.”
 철무독은 고개를 홰홰 저으며 재차 중얼거렸다.
 “성주의 부탁은 거절할 자신이 있지만 자네란 사람은 도무지······.”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철무독은 원래 말이 없는 인물이다. 쓸데없이 많은 말을 하는 것은 정력 낭비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그였다. 그런데 어찌된 판인지 위지천만 보면 작정하지도 않았던 말들이 술술 쏟아져 나오는 것이었다.
 하지만 철무독은 그 이유를 골머리를 싸매고 생각해 보아도 알 수가 없었다.
 다시 철무독은 입가에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저 계집아이를 데려가면 운지(雲芝)가 가만 있을까?”
 그러나 위지천의 입에선 대답이 아닌 엉뚱한 말이 흘러나왔다.
 “데려가라, 사노(死奴).”
 위지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한쪽에 시립해 있던 자의미부가 관절 하나 굽히지 않고 미끄러지듯 전하연을 향해 다가갔다.
 위지천은 철무독을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
 “가시지요 노형님.”
 그것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다 할 수 있는 혈교에서의 이야기가 일단 끝났음을 의미하는 말이었다.
 물론, 진정한 이야기는 이제부터가 시작이지만.
 
 
 3
 
 
 태고(太古)의 숨결을 간직한 채 만년설(萬年雪)을 머리에 인 십만대산(十萬大山). 그 중에서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웅장한 열 개의 주봉(柱峯)들은 그대로 십만대산의 뿌리이자 기둥이다.
 그런데 믿을 수 있겠는가?
 이 주봉들을 뺑 둘러 회백색 대리석 성곽이 끝도 없이 이어져 있다면······.
 대체 인간의 능력으로 그것이 가능이나 한 것인가?
 어쨌거나 성곽은 십만대산의 허리를 휘어감고 엄밀히 존재해 있으며 이 불가사의한 기경을 보면 누구나 하나의 이름을 떠올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마왕성(魔王城)!
 그 넓이를 합치자면 대충 쳐도 족히 오만 평은 넘을 것이다.
 그 철옹성은 설사 한 마리의 날짐승이라 해도 침입을 용납치 않을 정도였다.
 열 개의 주봉마다에는 흰구름을 뚫고 거대한 전각들이 솟아 있었다. 그 웅위한 장관경을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으랴.
 지상의 십역(十域)을 관장하는 마왕십마전(魔王十魔殿)!
 그 하나의 힘만으로도 능히 천하 위에 군림할 수 있다하며······. 그곳의 주인은 바로 마왕성 최고의 실력자들인 십종천마였다.
 마왕성은 이런 최강의 단체들을 무려 열 개나 거느리고 있는 셈이니 당대에까지 고금 최강의 세력으로 당당히 군림하는 게 결코 우연이 아님을 실증해 주는 것이다.
 그 마왕성의 주인을 세인들은 천마대존(天魔大尊) 심천궁(沈天弓)이라 불렀다.
 그는 바위였다.
 감정이란 감정은 철저히 배제한 차디찬 바윗덩이였다.
 그의 곁에는 항상 검이 있었다. 검은 그대로 그의 생명이고, 그의 전부였다. 그래서인지 그는 검도사상 전무후무한 최고의 검신(劍神)으로 불리웠다.
 “······.”
 희미한 유등이 실내 가득히 잔빛을 뿌리고 있다.
 단지 불빛의 미세한 흔들림이 있을 뿐, 실내는 침몰하듯 정적에 휩싸여 있었다.
 그리 밝지 않은 유등의 불빛 아래엔 한 사람이 매우 느린 동작으로 검을 닦고 있었다.
 검은 손가락 두 개 넓이에 길이 열 자 두치, 끝이 세 갈래로 갈라져 있는 기형검(奇形劍)이며, 갈라진 각기의 검신에는 실낱처럼 가느다란 혈선이 그어져 있었다.
 그것은 어쩐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심장이 찔리우는 듯한 섬뜩한 느낌을 불러 일으켰다.
 기름먹인 하얀 명주로 이 검을 정성스레 닦고 있는 인물. 그는 적당한 체구이면서도 약간 마른 듯한 느낌을 주는 몸집의 사내였다.
 무릎 밑까지 늘어뜨려진 의복은 정갈한 갈색장포였으며 희끗한 반백의 머리이되 턱 밑 수염은 깨끗이 면도해 버린 모습이었다.
 흐릿한 불빛 탓인지 그의 안색은 몹시 창백해 보였다.
 그러나, 엷은 음영이 드리워진 이 얼굴은 마치 천년을 침묵으로 일관해 온 거암(巨岩)인 양 무심하면서도 완강해 보였다.
 마검(魔劍) 적유명(赤幽明)!
 검학으로만 따지자면 절대 천마대존 심천궁의 아래가 아닐 것이라고 하며, 검신(劍神)이라는 빛나는 칭호를 얻은 이래 단 한 번도 위세를 흐트러뜨린 적이 없는 이 시대 최강의 검도고수(劍道高手)였다.
 십종천마 서열 일위(一位)의 기인이 바로 이 사람이다.
 그가 닦고 있는 기형검으로 말할 것 같으면, 고금십사기병(古今十四奇兵) 중 당당히 서열 오위를 차지하고 있는 공포의 마검 천인궁(天刃穹)이었다.
 일설에 의하면, 그는 전설이 전하는 최강의 검법 구구사인훼(九九死引卉)를 익힌 사상 초유의 검인이라 하나, 확인된 바 없다. 그것은 지금껏 그가 구구사인훼를 펼치는 것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스윽··· 슥······!
 검수가 검을 닦는다는 것. 여기에는 많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그러나 적유명은 굳이 다른 의미를 부여해 이 단순한 동작을 미화시켜본 적이 없었다. 그저 이것은 하루도 빠짐없이 행하는 일과 중 하나이며, 그 하루 중 그가 가장 정성과 심혈을 기울이는 때가 또한 지금인 것이다.
 마른 헝겊이 스쳐지날 때마다 세 갈래 파릇한 예기를 뿜어냈다. 흐릿한 불빛과 침묵과··· 반복적인 단조로운 동작······. 어찌 보자면 그는 이 한 자루 검을 닦기 위해 태어나 혼신의 힘을 기울여 그 의미를 다하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열심을 기울여 검을 닦던 그의 손놀림이 갑자기 뚝 멈췄다. 그것은 막 치켜든 파르스름한 검광 위에 한 인영의 모습이 비쳐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의 동작은 이내 유유롭게 계속되었다.
 “여전하십니다, 노형님.”
 한 소리 담담한 음성과 함께 한 명의 백의미공자가 문가에 기댄 채 그 모습을 드러냈다.
 헌앙한 기우와 맑은 기품을 극히 자연스럽게 풍겨내는 보기 드문 귀족풍의 인물. 바로 백우공자 위지천이었다.
 그러나 적유명은 그를 돌아보지도 않을 뿐 아니라 묵묵히 자신의 일을 계속했다. 허나 위지천은 그의 이런 태도에는 매우 익숙해 있는 듯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는 의자 하나를 당겨 불빛을 마주하고 적유명과 마주 앉았다.
 슥··· 스슥······!
 위지천은 마검 천인궁과 적유명의 얼굴을 번갈아가며 응시하더니 엷은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하루를 거른다고 그 검에 녹이 슬지는 않을 겁니다.”
 적유명은 대답은커녕 마주앉은 그에게 시선 한 번 옮기지 않았다.
 하지만 위지천은 개의치 않았다. 그것은 그가 적유명의 성격을 너무나도 잘 알기 때문인데, 그가 아는 한 적유명은 이때 만큼은 하늘이 무너진다 해도 꿈쩍도 안할 위인인 것이다.
 위지천은 동공이 찔리도록 새파란 광채를 뿜는 검날을 들여다보며 잔잔한 웃음을 떠올렸다.
 “후후··· 그렇게 닦아대다간 천인궁이 다 닳아······.”
 말은 채 맺어지지 못했다.
 핏물처럼 검신 위에 배어나 있던 세 가닥 혈선이 어느 순간 흔적도 없이 검날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 광경을 직시하던 위지천의 두 동공엔 적지 않은 놀람의 빛이 떠올랐다.
 ‘들은 적이 있다. 검과 마음이 일치되면 무공(無空)의 상태로 돌아간다고··· 그렇다면 노형님은 이미······?’
 위지천이 놀라고 있는 사이, 적유명은 그제서야 하던 일을 마치고 그를 향해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혈교에 갔었다고 들었네.”
 단단하고 빈틈없어 뵈는 외모와 달리 음성은 약간 쉰 듯한 탁음이었다.
 위지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전에 돌아와서 의부를 뵙고 곧장 오는 길입니다.”
 “음······.”
 위지천을 향해 적유명의 노안에 문득 따뜻한 빛이 어렸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었던가 싶게 이내 극도의 무심으로 바뀌었다.
 적유명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에도 자네의 자모연환궁이 놀라운 위력을 발휘했다더군.”
 위지천은 싱긋 미소하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제가 하는 일이 잘못되는 거 보셨습니까?”
 “자만은 좋지 않아.”
 “음······.”
 적유명은 유등 저편에 있는 위지천의 얼굴을 깊숙이 응시했다.
 불빛 탓인지 몰라도 위지천의 흰 얼굴은 현란하도록 아름다웠다. 그에게는 상대의 마음을 걷잡을 수 없이 빨아들이는 심마적(心魔的)인 그 무엇이 있다.
 그러나 적유명은 지금 그런 것을 생각하고 있는 게 아니다. 오래도록 위지천의 얼굴만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그는 문득 명주천을 집어들며 독백처럼 이렇게 중얼거렸다.
 “자신감은 이지(理智)를 흐리기 쉬워. 행동은 늘 생각보다 늦어야 되는 법이거든······.”
 위지천의 수묵빛 동공에 엷은 이채가 떠올랐다. 허나 그는 곧 낭랑한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 노형님의 금언(金言)은 심장 속에다 새겨두겠습니다.”
 이윽고 웃음을 그친 그는 품 속에서 작게 접힌 비단보자기를 꺼내 내밀었다.
 “펴보십시오. 이번에 사천을 다녀오면서 노형님께 드리려고 준비한 선물입니다.”
 적유명은 약간 뜻밖이라는 듯 그것을 받으며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고맙네,”
 그가 막 유등이 놓인 탁자 위의 비단보자기를 끌르려 했을 때, 불현듯 밖에서 매우 공손한 음성이 들려왔다.
 “제일전주(第一殿主)께 아룁니다.”
 적유명은 멈칫하며 손을 멈췄다.
 “무슨 일이냐?”
 “한 분의 손님이 제일전주님을 뵙기를 간곡히 청하옵니다.”
 “······!”
 적유명의 눈살이 가볍게 찌푸러졌다.
 착각이었을지도 모르나 위지천은 그 순간 적유명의 눈가로 스치는 옅은 당혹의 기색을 읽었다.
 ‘손님이라······?’
 당혹을 느낀 것은 위지천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알기로 적유명은 근 십 년 가까이 외부와 단절된 생활을 해왔기 때문이었다.
 마음을 터놓고 지내는 그 흔한 말벗 하나 없었을 뿐 아니라 외부에서 손님이 찾아오는 일이란 더 더욱 없었음을 위지천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위지천은 이내 몸을 일으켰다.
 “그럼 나중에 다시 찾아 뵙겠습니다, 노형님.”
 “음.”
 위지천은 포권을 취해 보인 뒤 밖으로 나갔다.
 탁!
 “······.”
 닫힌 문으로 적유명의 시선이 가 닿았다.
 이 순간 그의 눈에는 헤아릴 길 없는 깊은 고뇌가 깃들여져 있었다.
 
 
 4
 
 
 황혼녘의 화원은 그대로 한 폭의 그림이었다.
 만년설이 뒤덮인 멀리 보이는 산정은 불길이 번져 내려오는 듯 하며, 산자락 아래로는 꺼뭇한 땅거미가 먹물처럼 짙게 내뿜으며 노을빛에 물들어 갔다.
 거기에다 해질 무렵의 지독한 적요가 더해져 왠지 모를 향수로 사람의 가슴을 후벼온다.
 화원 사이로는 좁은 소로가 나 있었다.
 소로에는 깨끗한 대리석이 곱게 깔려 있었다. 곱게 깔린 그 길 위로 지금 백의를 단아하게 차려입은 준수한 청년 하나가 걸어 가고 있다.
 눈부시도록 흰 백삼이 노을빛에 물들어 신비로움을 더해 주건만 그의 검미는 약간 찌푸러져 있었다. 그는 다름아닌 위지천이었다.
 ‘노형님께 손님이라······.’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릴 수도 있는 일이다. 십 년만이건 오십 년만이건 없던 방문객이 느닷없이 생겨날 수도 있는 법이니까.
 하지만 문제는 아무리 대수롭잖게 넘겨 버리려 해도 넘겨지지 않는 데 있었다. 그것은 바로 적유명의 눈빛 때문이었다.
 위지천은 방문객이 있다는 말에 순간적으로 스치던 적유명의 그 눈빛이 왠지 마음에 걸렸다.
 ‘대체 그 방문객이 누구이길래······?’
 의문에 잠긴 채 걷던 위지천의 걸음이 문득 우뚝 정지했다.
 무심한 시선 한 귀퉁이로 잡혀오는 하나의 인물을 보았기 때문인이었다.
 화원이 거의 끝나는 곳에 한 명의 여인이 저녁바람에 날아갈 듯 서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여인이라기보다 소녀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백옥같은 피부에 일신에는 불 붙듯 짙붉은 홍의를 걸쳐 너무나 선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서글서글한 봉목과 오똑 솟은 콧날과 앙증맞도록 붉디붉은 입술, 섬연한 얼굴의 윤곽선은 새하얀 옥부와 어울려 극히 화려한 미모를 뽐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 소녀에게선 잘못 건드리면 용수철처럼 튀어오를 것 같은 도발적인 분위기가 풍겨나오고 있었다.
 그녀는 위지천을 향해 말없이 다가서다가 위지천의 일 장여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녀는 이내 버들같은 허리에 교수를 척 얹은 채 차가운 시선으로 위지천을 노려보고 있었다.
 위지천은 빙그레 웃음을 띄며 말했다.
 “운매였구나. 그렇잖아도 지금 네 처소로 가고 있던 중이다.”
 위지천의 미소가 채 걷히기도 전, 그녀의 입에선 냉랭한 일갈이 튀어 나왔다.
 “입에 침이나 바르고 말해요.”
 “허어··· 운매는 내 말을 믿지 못하는 모양이구나.”
 홍의소녀는 눈을 똑바로 뜨며 위지천 앞으로 한 걸음 더 다가섰다. 그리고는 꽃잎같은 입술을 나불거리기 시작했다.
 “아무튼 좋아요. 그보다 먼저 한 가지 따질 일이 있어요.”
 위지천은 내심 짚이는 바가 있었으나 짐짓,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따질 일······?”
 홍의소녀는 위지천의 턱 밑에 우뚝 멈춰서서 그를 똑바로 올려다보며 차갑게 쏘아댔다.
 “이번에 혈교에서 계집아이 하나를 데려왔다고 들었어요. 맞나요?”
 “계··· 집?”
 능청스레 반문한 위지천은 비로소 깨달았다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 전하연 말이군.”
 “흥, 전하연인지 나발인지··· 대체 그 계집을 뭣 때문에 데려온 거죠?”
 “그건······.”
 “더구나 그 계집을 당신의 처소에까지 들였다면서요?”
 “운매, 사실······.”
 “나는 참을 수 없어요. 그건 나를 모독하는 처사예요!”
 도무지 말할 틈을 주지 않았다. 하지만 위지천은 그녀가 언제나 이런 식이라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에 그저 씁쓸한 고소를 떠올릴 뿐이었다.
 홍의미랑(紅衣美娘) 운지(雲芝).
 믿어지지 않겠지만 그녀는 마왕십마전 중 홍의마전(紅衣魔殿)을 이끌고 있는 십종천마 중 일인이었다.
 지독히 독선적인 성격에다 일단 비위에 거슬리면 무엇이든 박살내 버리고 마는 냉혹한 기질의 미녀였기 때문에 천하에서는 마녀(魔女)로 마왕성 내에서는 누구나 한 수 양보하고 보는 공포의 대명사로 인식되어 있었다.
 지금만 해도 그렇다.
 두 사람은 이미 정혼한 몸이었다. 과거 운지의 부친인 마왕성의 제 오장로와 위지천의 의부 태상장로가 두 사람 사이를 약혼해 버렸던 것이다. 때문에 두 사람이 곧 맺어지게 되리라는 사실을 의심할 사람은 마왕성 내에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인지 운지는 벌써부터 아예 위지천의 부인처럼 행동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위지천에겐 이보다 더 골치아픈 일이 없었다. 하지만 그도 어엿한 대장부이기에 질투하는 여인 앞에서 화를 낼 수도 없었다.
 위지천은 고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운매, 내겐 몸종이 필요했다. 때문에 그녀를 데려다 내 처소에 들여놓은 것이다.”
 “몸종이라니요?”
 “그래 몸종··· 한데 운매는 어찌 한낱 몸종에 자신을 비교하고 화를 낸단 말인가?”
 “······?”
 “그러니 다시는 내 앞에서 그녀의 문제를 꺼내지 마라.”
 그 음성은 담담한 가운데 부드러운 정감이 어렸고, 그저 내뱉는 어조엔 형용키 어려운 신뢰와 위엄이 배어 있었다.
 그런 위지천을 똑바로 쏘아보던 운지의 눈빛이 가늘게 흔들렸다. 그녀는 잠시 뭔가 생각에 잠겼다. 잠시 후, 그녀의 싸늘한 안색이 차츰 풀려갔다.
 ‘그래··· 내가 경솔했어. 한낱 몸종 계집 따위로 인해 내 품위를 손상시키다니······.’
 그녀는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다.
 그녀는 기분 좋은 것을 숨기는 성격 또한 결코 못되었다. 그래서 그녀는 좋아진 김에 위지천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이 년 내에 당신과 정식으로 결혼하겠어요!”
 “······!”
 “그리고··· 만약 전하연 그 계집과 이상한 소문이 조금만 들려도 그 계집을 갈기갈기 찢어 죽이고 말겠어요. 내 말 명심해 두는 게 좋을 거예요.”
 그녀의 겉모습은 너무나도 아름다웠으나 그녀의 행동에서는 도무지 달콤하고 부드러운 구석이라곤 눈 씻고도 찾아볼 수 없었다.
 말을 마치자, 그녀는 신형을 솟구쳐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녀의 그런 행동에 얼떨떨해진 위지천은 황혼이 저무는 허공을 올려다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내 앞날도 심히 걱정되는구나······!”
 
 
 3장 침입자(侵入者)
 
 
 1
 
 
 쿠쿠쿠쿠······!
 하늘의 벽이라 부를 만큼 아득한 절벽 협곡을 타고 장엄히 굽이치는 폭포.
 굳이 용연폭(龍淵瀑)이란 이름을 들먹이지 않아도 이 거대한 물줄기는 승천하는 한 마리 백룡(白龍)을 연상시켰다.
 노을은 서쪽 하늘에 잔잔하게 물들여져 있었다. 황혼의 잔영 속으로 자욱이 솟아 오르는 물안개는 대자연 속에 감춰진 환희의 절정을 엿보는 듯하다
 “······.”
 홍의소녀 운지는 폭포 연변의 바위 위에 쪼그리고 앉은 채 두 무릎 사이에 고개를 파묻고 있었다. 희뿌연 포말이 튀어 늘어진 옷자락을 적셨지만 그녀는 그대로 꼼짝도 하지 않았다.
 흘러내린 머리칼이 어깨를 뒤덮었고 노을빛은 매끄러운 흑발 위에 그대로 부서져 내렸다.
 쿠쿠쿠쿠······!
 폭포의 굉음만이 해거름녘의 정적을 삼키고 있었다.
 꽤 오랫동안 그렇게 쪼그리고 앉아 있던 그녀는 문득 발작적으로 고개를 발딱 쳐들었다.
 “빌어먹을······!”
 뭔가 잘 안 되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천하에 한 번 마음먹어 안 되는 일이 없는 그녀였으며··· 또한 그것을 매우 당연한 것으로 여겨온 사람이 바로 운지, 그녀였다.
 그런데 그런 그녀에게도 딱 하나 마음대로 안 되는 일이 있었다. 바로 위지천에 관한 일이었다. 어찌된 판인지 이 위인은 도무지 그녀의 뜻대로 되어주질 않는 거였다.
 그렇다고 간이고 쓸개고 다 팽개치고 순종하자니 자존심이 상해 견딜 수가 없었다. 왠지 끝없이 그에게 반항하고 싶을 뿐이었다.
 그러면서도 끝내 독선적으로 행동할 수 없는 이 알 수 없는 모순된 심사는 대체 뭐란 말인가?
 “휴우······.”
 운지는 길게 탄식하며 설레설레 고개를 흔들었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호쾌한 음성이 울려왔다.
 “여어··· 이거 운매가 아닌가?”
 계곡의 물줄기를 따라 한 사람이 유유자적하게 올라오고 있었다. 그 사람의 얼굴을 본 순간 운지의 선명한 눈매가 살짝 찌푸려졌다.
 물빛 청의에 역시 같은 색 문사건을 쓴 삼십 쯤 되보이는 사내였다.
 굵직하고 시원한 인상에다 붓으로 진하게 그어 놓은 듯한 눈썹하며 오똑하게 솟은 콧대에 한 일자로 다물어진 입술은 보는 이로 하여금 누구라도 호감을 느낄 만한 인물이었다.
 특히 안면 가득 넘쳐나는 쾌활한 미소는 호남아의 기질을 물씬 풍겼다.
 그런 그였음에도 불구하고 운지는 시선을 반쯤 돌리다 말고 냉랭하게 쏘아댔다.
 “웬일이신가요? 남궁선생께서 이런 곳엘 나오시다니······.”
 “하하··· 낙조(落照)가 하도 아름답기에 그저 발길 닿는 대로 걸었더니······.”
 청의문사는 서글서글한 눈으로 그녀를 힐끗 보며 기이한 웃음을 머금었다.
 “한데 이건 매우 대단한 발견인 걸? 운매에게도 이런 감상적인 데가 있었다니······.”
 이 인물은 바로 신뇌 남궁은이라는 위인이었다.
 그는 마왕성 최고의 두뇌이며 최근 무섭게 부각되어 위지천과 더불어 십종천마 대열에 당당히 낀 인물이었다.
 드러난 성격은 이렇듯 초탈하고 쾌활했지만 일단 두뇌가 발동하면 천하의 그 누구도 그가 하고자 하는 것을 막지 못한다.
 “저녁 하늘에 기러기 날고 부서지는 포말(泡沫)은 안개꽃과도 같으니··· 낙조의 향수(鄕愁) 가슴에 스미도다······.”
 먼 허공을 우러르며 노을에 취한 듯 읊조리던 남궁은은 문득 낭랑한 웃음을 머금고 운지를 돌아보며 말했다.
 “하하···! 역시 대자연은 위대한 거야. 그렇지 않나 운매?”
 운지는 여전히 쪼그린 채 굉렬한 기세로 떨어지는 폭포에 새침한 시선을 박고 있었다.
 그러다 돌연 발딱 교구를 세우며 싸늘하게 한 마디를 내뱉었다.
 “먼저 실례하겠어요.”
 그녀가 몸을 돌리려는 순간, 남궁은이 은근한 어조로 말했다.
 “대공자와의 일이 잘 안 풀리는 모양이지?”
 “······!”
 운지의 걸음이 딱 멎었다. 그녀의 그림같은 아미가 상큼하게 치켜 올라가 있었다.
 남궁은은 못본 척 하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대공자는 존경받을 가치가 있는 인물이지. 천하가 인정하는 영웅이기도 하고. 만약 그가 원했다면 이미 천하의 미녀란 미녀는 모두 그의 수중에 있을 것이다.”
 나직했으나 분명 그녀가 들으라고 한 말이었다.
 그러잖아도 심사가 뒤틀려 있던 운지는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서 버렸다.
 “본론만 말해요.”
 “전하연이라던가? 몹시 청초하고 해맑은 소녀더군. 대공자는 평소 마음 속에 그런 여인상을 그려왔는지도 모른다.”
 “그래서요?”
 남궁은은 엷은 미소를 띄고 말했다.
 “운매, 그를 독차지 할 생각은 버려라. 그가 몹시 피곤해질 것은 물론이고 운매 역시······.”
 남궁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그를 직시하는 운지의 두 눈에서 얼음가루 같은 한광(寒光)이 와르르 쏟아졌다. 그 눈빛은 점점 투명해지더니 전율스럽도록 사이하게 변했다.
 “내 일에 간섭하지 말아요. 더불어··· 한 번은 참지만 두번째는 누구도 용납치 않는 내 성격을 명심해 두기 바래요.”
 파앗!
 말을 내뱉기 무섭게 그녀의 신형은 폭포를 거스를 듯 솟구쳐 이슥한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갔다.
 남궁은은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호쾌한 대소를 터뜨렸다.
 “다 운매를 위해 한 말이다. 하하······!”
 그러나 웃음의 끝은 공허로이 허공을 울리고 말 뿐, 남궁은은 이내 씁쓸한 웃음을 띈 얼굴 그대로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노을은 이미 꺼뭇하게 사위어 어둠 속에 묻혀들고 있었다. 어둠이 잦아들자 폭포소리가 천둥처럼 적요를 뒤흔들었다.
 쿠쿠쿠쿠······!
 운지의 모습이 하나의 점으로 변해가자 남궁은의 입가에 떠돌던 웃음기가 소리없이 사라졌다.
 그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운지······.”
 이 순간 그의 두 눈 깊숙이서 일렁이듯 피어 오르는 저 서늘한 기광(奇光)은 무엇인가?
 알 수 없다. 어찌 그 속을 읽을 수 있겠는가?
 지략과 귀계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악마적인 두뇌의 소유자이며··· 추측불가의 능력을 지니고 있었으나 출신내력이 일체 비밀에 싸인 신비 속의 인물이 바로 신뇌 남궁은인 것을······.
 
 
 2
 
 
 “경고했었다. 다시는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말라고.”
 마검 적유명의 냉갈이 어둠을 뚫고 터져나왔다.
 그는 등을 돌리고 앉아 있었다. 창 밖으로 비스듬히 비껴든 초순의 달빛은 실내의 정경을 어스름히 비춰 주었다.
 적유명의 등 뒤에는 칙칙한 갈색장포인이 두 손을 바닥에 대고 깊숙이 부복해 있었다. 죽립을 깊숙이 눌러써 얼굴을 볼 수는 없으나 약간 드러난 턱이 회색빛 화강암을 연상시키는 인물이다.
 인상적인 것은 그 단단해 보이는 턱언저리로 길게 나 있는 검상(劍傷)이었다.
 “한데 사마수(司馬秀), 너는 그 세번째 경고마저 어기고 있다.”
 적유명의 엄숙한 음성이 다시 흘러나왔다.
 죽립인은 더욱 깊이 머리를 숙였다. 이어 그의 입에선 쇠를 깎아대는 듯한 듣기 거북스런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소인의 불찰은 스스로 깨닫고 있습니다.”
 “하면?”
 “대인(大人)!”
 “돌아가라.”
 적유명은 극도로 감정을 절제하고 있었다.
 유연한 뒷덜미에 전에 없이 힘이 들어 있는 게 그것을 말해 준다.
 “대인, 이번이 마지막입니다. 최후로 한 말씀만 더 드립니다.”
 “지난 번과 같은 말이라면 하지 않는 게 좋아. 어쩌면 나의 이 검이 너의 목을 벨지도 모르니까.”
 그의 무릎 위에는 애검 천인궁이 어둠에 감싸인 듯 엷은 묵기를 품고 놓여 있었다.
 죽립인은 재차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대인께선 소인의 목숨을 두 번이나 구해주신 생명의 은인이십니다.”
 “과거는 잊어라. 노부 또한 필요에 의해 너를 구했을 뿐이다.”
 “······.”
 죽립인은 무엇으로도 그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음을 느낀 듯했다.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품 속에서 뭔가를 꺼내 두 손에 공손히 받쳐들었다.
 그것은 깃발이었다.
 자색 바탕의 삼각기로 중앙에는 한 자루의 묵검이 그려져 있었다. 또한 가장자리에는 솜털처럼 섬세하게 수실이 달려 있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이 삼각기에선 기이하게도 엷은 자광(紫光)이 자욱이 발출되어 실내를 물들이고 있는 것이었다.
 그 깃발을 본 순간 적유명의 어깨가 가늘게 진동을 일으켰다. 진동은 자광이 짙어짐에 따라 눈에 띄도록 격렬해졌다.
 “이··· 이것은······!”
 적유명은 신음같은 음성을 흘리며 가부좌의 자세 그대로 느리게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다시 한 번 깃발을 빨려들 듯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깃발을 직시하던 그의 두 동공에선 어느새 한 차례 세찬 파랑이 일어났다. 그것으로 그 삼각기가 적유명에게 얼마나 큰 충격을 가져다 주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격정어린 음성을 발했다.
 “이것은 틀림없는 본문의 영기(令旗)다. 구십 년 전 본문의 붕괴와 함께 사라졌던······.”
 그는 죽립인 사마수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물었다.
 “묻겠다. 이 영기는 어떻게 네 손에 들어왔느냐?”
 사마수는 깊숙이 숙였던 고개를 반쯤 들고는 대답이 아닌 엉뚱한 말을 흘렸다.
 “대인께선 알고 계실 것입니다. 이 영기가 대인의 행동을 구속할 수 있음을······.”
 “음······.”
 적유명은 묵직한 신음을 흘렸다.
 예기치 못했던 상황에 대한 엷은 당혹감이 미간 사이로 먹구름 밀리듯 스쳤다.
 “마지막 기회입니다. 그를 제거하십시오.”
 적유명은 자못 분노어린 음성을 발했다.
 “그것은 거론할 가치조차 없다고 분명히 말했었다!”
 “영기의 명을 거역하시렵니까?”
 영기의 명··· 그것이 도대체 무엇이기에 천하의 적유명을 구속할 수 있단 말인가?
 적유명의 짙은 눈썹이 무섭게 꿈틀했다.
 “네가 감히······.”
 “솔직히 소인의 마음도 편치 않습니다. 허나··· 명심하십시오. 놈이 더 크기 전에 제거하지 않으면 장차 대인께서 설 자리가 없게 됩니다.”
 “······.”
 적유명은 무섭게 타오르는 시선으로 사마수를 응시했다.
 사마수는 여전히 고개를 땅에 처박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물줄기처럼 쏘아져 와 박히는 적유명의 시선을 전신으로 느꼈다.
 그의 몸이 진저리치듯 미세한 경련을 일으켰다.
 한참을 멍하니 있던 적유명이 매우 침중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한 가지만 더 묻자. 그가 제거되면 네게 어떤 이득이 생기느냐?”
 “······!”
 “노부가 아는 너는 이번 일을 모사(謀事)할 만한 위인이 못된다. 말해라. 누구의 사주를 받고 있느냐?”
 나직하나 불벼락같은 호통과 분노가 서린 음성이었다.
 사마수는 잠시 그대로 침묵하다가 이내 매우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소인은 최대한의 인내심을 발휘해 보름을 기다리겠습니다. 회답을 주십시오.”
 그는 어둠 속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대인께선 누구보다 훌륭하신 무인이십니다. 결코 귀문의 영기를 욕되게 하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사마수는 적유명을 향해 깊숙이 포권했다.
 “그럼······.”
 허리를 펴는가 싶은 순간, 그의 모습은 연기처럼 어둠 속으로 꺼져들고 없었다. 참으로 귀신도 질겁하고 말 경세적 신법이었다.
 사마수가 사라지자 적유명은 그대로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 얼굴에는 수없이 뒤엉켜 변하는 극심한 번민과 고통의 빛이 스쳐갔다. 내심이 갈등을 나타내기라도 하듯 경련이 안면근육을 타고 번져갔다.
 적유명은 무엇인가를 신중히 생각하고는 굳은 입술 사이로 한 소리 무거운 독백을 흘렸다.
 “좋지 않아······.”
 
 
 3
 
 
 천기마전(天機魔殿).
 마왕십마전 중 하나로 그 휘하고수는 일만을 헤아린다. 그러나 여기에서의 일만이란 수치 개념은 일반과 크게 다르다는 것이 강조되어져야 한다.
 기문, 역학, 토목건축, 기관암기, 심지어 모사와 술수에 이르기까지 천하의 기라성같은 귀재들이 집결되어 있는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다시 말해 일만의 구성원들 중 기인이 아닌 자가 없다는 뜻이기도 한 것이다.
 때문에 천기마전은 마왕성 내에서도 가장 무서운 철옹성으로 불리운다.
 이 신화적인 두뇌의 소유자들이 머리를 짜내어 설치한 수많은 기문기진들이 천기마전을 첩첩이 둘러싸고 있는 것이다. 이쯤되고 보니 외부의 침입이 절대 불가능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마왕성 고수들도 사전 허락이 없이는 출입을 할 수 없었다.
 마왕성 내에서 가장 위험하면서도 요새적인 중추 노릇을 하고 있는 천기마전. 그곳의 주인은 바로 백우공자 위지천이었다.
 “음······.”
 을씨년스런 초생달이 비스듬히 걸린 야밤이었다.
 한 그루 거목에 기대어 팔짱을 낀 채 나직한 침음성을 흘려내는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다름아닌 위지천이었다.
 웬일인지 그의 검미는 잔뜩 찌푸러진 채 전면에 시선을 박고 있었다.
 초생달의 불빛만으로는 밤의 어둠을 이길 수 없었는지 주위는 으스름한 어둠 속이었다. 칠흑의 어둠을 품어안은 계곡이 적요 속에 잠겨 있었다.
 이곳은 바로 천기마전의 입구가 되는 곳이었다. 원래 이곳에는 천기마전 기인들 중에서도 십방기문진(十方奇門陳)의 대가들이 무려 오 년 동안 연구하여 창안해낸 절대금진(絶代禁陳)이 설치되어 있었다.
 - 생로(生路)를 모르면 신선이라도 통과하지 못한다.
 당시 마왕성 수뇌들이 은근한 공포를 느끼며 내뱉은 말이었다.
 그런데 지금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나 있었다.
 ‘옥천라금진(玉天羅禁陳)··· 서방이 흐트러져 있다!’
 신선의 할아비라도 나타났단 말인가?
 위지천은 혈교의 일이 끝난 직후라 몇 사람과 더불어 기분좋게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느낌만으로도 이 절대금진에 이상이 생겼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무리 미세한 변화라도 결코 그의 눈을 속이지 못한다.
 사실 지난 오 년 동안 그의 예리한 감각을 자극할 만한 이런 일은 한 번도 일어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오늘은 뭔가 틀려도 한참 틀렸다.
 단순히 과민해진 느낌 탓일까? 그는 문득 좋지 않은 예감이 가슴을 서늘히 식히고 지나감을 느꼈다.
 울울창창한 송림(松林).
 태양이 이글거리는 한낮이라도 빛 한 점 스밀 것 같지 않은 빽빽한 이 수림은 끝간데 없이 펼쳐져 있었다.
 시각은 삼경을 지나고 있었다. 더구나 구름에 가려진 한 조각 편월(片月)뿐이니 이 송림 속이 암흑처럼 어두운 것은 당연했다.
 그런데 무얼 하자는 것일까?
 위지천은 한곳에 무릎을 굽히고 뭔가를 세밀히 살피고 있었다.
 그렇다.
 그는 지금 절대기진의 이상을 살피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이 울창한 송림이야말로 일만여 평에 달하는 천기마전을 에워싸고 있는 살아있는 기관이었다.
 고금최대의 절고기진(絶古奇陳)!
 이것은 위지천이 일 년의 노력끝에 직접 완성한 것으로 그 무서움이 어느 정도인가는 아직 모른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지금껏 그 누구도 파진법(破陳法)을 알아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위지천의 희디 흰 손은 어둠 속에서 난석 사이를 조심스레 더듬어갔다.
 약 일각이나 지났을까? 문득 손의 움직임이 뚝 멎었다.
 “······!”
 그는 안력을 집중시켜 어둠 속을 꿰뚫어 보았다.
 무엇인가 보이는 것이 있었다. 바위에 덮인 푸른 이끼가 미세하게 긁힌 자국이 그의 침착한 동공 속에 사로 잡혀왔다.
 도대체 이런 감각이 가능이나 한 것인가? 수십 개의 횃불을 밝혀들고 수백 쌍의 부릅뜬 눈들이 샅샅이 훑어낸다 해도 분간해 낼까말까한 흔적을 말이다.
 그러나 위지천에겐 이런 의문 따위는 거추장스럽고 불필요한 불신에 불과했다.
 ‘누군가··· 기관을 잘못 건드린 흔적이다!’
 위지천은 빠르게 고개를 들었다.
 그의 두 동공으로 전면의 나뭇가지에 걸려 있는 손바닥 크기의 청의 조각이 쏘아져 들어왔다. 날카로운 나뭇가지에 찢겨진 이 청의 조각에는 보일 듯 말 듯한 핏방울이 번져 있었다.
 위지천은 벌떡 퉁겨 천조각을 빼냈다.
 “······!”
 위지천의 안색이 슥 굳어졌다. 그는 천기마전의 수하들은 결코 청의를 입지 않는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천기마전에서는 직위고하를 막론하고 백의만 착용하도록 되어 있었다.
 위지천은 일단 천조각을 품 속에 갈무리했다. 그의 얼굴은 이내 특유의 담담함을 되찾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의 전신의 신경다발들은 아우성치며 외쳐대고 있었다.
 ‘침입자가 있었다!’
 
 
 4
 
 
 위지천은 전각의 창가 쪽을 힐끗 쳐다봤다.
 불은 꺼져 있었다. 그는 무심하게 흰 대리석 층계를 밟고 오르기 시작했다.
 그곳은 백의별전(白衣別殿)이라 불리는 곳으로 지금 위지천의 처소였다. 천기마전을 마주한 이 별전은 그리 크진 않으나 온통 회백색 대리석으로 축조되어 화려하고 운치가 있었다.
 창백한 달빛은 조금 비껴들어 난간 위에 부서지고 있었다.
 층계를 다 올라선 위지천은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가 문 안으로 들어서자 갑자기 번쩍하는 한 가닥 예리한 검광이 시야를 갈라왔다. 그다지 빠르다거나 세련된 검법은 아니었으나 이 검엔 지독한 살기가 서려져 있었다.
 위지천은 가볍게 검미를 찌푸렸다. 그는 우수로 금나수법을 가볍게 내뻗었다.
 그의 우수와 검이 쩡그랑 소리를 내며 부딪히자 단검이라 짐작되는 물체가 맥없이 바닥에 떨어졌다. 이어 그는 어느틈엔가 그의 손아귀에 잡혀 있는 가냘픈 손목을 그대로 내동댕이 쳤다.
 “악!”
 어둠 속으로 누군가 나동그라지고 뾰족한 비명소리가 울렸다.
 위지천은 뚜벅뚜벅 한쪽으로 걸어가 먼저 유등에 불을 켰다. 그리고는 옆에 있는 의자에 털썩 앉으며 무심하게 내뱉었다.
 “첫날부터 나를 피곤하게 만들지 마라.”
 불빛과 함께 드러난 실내 한 구석에는 자그마한 몸집의 소녀가 나동그라져 있었다. 흐릿한 불빛에 비친 그녀는 여리디 여린 빛깔의 취의를 입은 소녀였다.
 그녀는 쓰러지자마자 발딱 고개를 쳐들었다. 그녀의 흐트러진 흑발 사이로 하얗게 돋아나는 옥용은 새파란 독기가 서리서리 뻗쳐 있었다.
 “악마······!”
 그녀는 다름아닌 전하연이었다.
 “오늘은 실패했지만 아버님의 원수는 반드시 갚고 말 테다!”
 위지천을 노려보는 그녀의 두 눈이 살기로 활활 타올랐다.
 위지천은 유등의 심지를 돋구며 반문했다.
 “자신이 있나?”
 “부모의 원수는 불공대천지수··· 너를 죽이기 전에는 결코··· 흐흑······!”
 이를 악물며 바르르 떨던 전하연은 분에 못이겨 바닥에 엎어져 흐느끼기 시작했다. 참으로 서러운 흐느낌이었다.
 하지만 위지천은 무표정한 눈길로 유등을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불꽃은 단번에 오르는 게 아니다. 꺼질 듯 말 듯 위태로운 숨결을 가누다, 마침내 든든한 화심(火心)을 이루며 마지막 산화를 다하는 순간까지 화려하게 타오르는 것이다.
 미침내 위지천의 입술이 움직였다.
 “너는 아직 네 부친을 모르는구나.”
 전하연의 오열이 멎었다.
 “······!”
 “자기 한 몸의 야망을 위해선 피도 눈물도 가리지 않는 잔인한 인간이 바로 네 부친 전세희였다.”
 아무리 심성이 착한 사람이라고 해도 자신의 부친을 욕한다면 과연 그 누가 태연할 수 있겠는가? 고개를 치켜든 전하연, 그녀의 눈에 독기가 자욱이 피어올랐다.
 그녀는 위지천을 향해 눈을 흘기며 싸늘하게 말했다.
 “그렇게 말하는 당신은?”
 실낱같은 조소가 창백한 입술꼬리를 타고 번졌다.
 “왜 대답을 못하느냐? 한 조각 양심이 남아 있어서냐······?”
 위지천은 비로소 시선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잡혀온 지 만 하루가 지난 지금까지 물 한 모금조차 마시기를 거부했다. 때문에 그녀의 몰골은 너무도 초췌해져 있었다. 만일 전신을 태우고 있는 복수심이 아니었다면 그녀는 이렇게 버티지 못할 것이다.
 그녀의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던 위지천은 피곤한 듯 의자 깊숙이 몸을 묻으며 중얼거렸다.
 “우습구나, 피에 굶주린 마인의 혈통에서 너같은 착한 아이가 나오다니··· 하긴 왕왕 예외란 있는 법이지만.”
 파르르······!
 전하연의 교구가 폭발이라도 할 것처럼 무섭게 떨렸다.
 그녀는 입술이 터지도록 짓깨물며 악에 받쳐 부르짖었다.
 “야수! 내 아버님을 죽인 것으로도 모자라 이런 모욕을 주려고 나를 끌고 왔느냐? 나를 죽이지 않고 왜······?”
 그녀가 아무리 소리쳐도 위지천은 그저 묵묵히 그녀를 응시할 뿐이었다. 눈물범벅인 파리한 그녀의 얼굴이 유등 불빛 앞에 아프게 흔들렸다. 서럽도록 애처로운 얼굴이었다.
 “아름답구나 하연······.”
 “······!”
 그 말을 들은 전하연의 안색이 순간적으로 파랗게 질렸다. 또한 그녀의 얼굴에는 참을 수 없는 수치와 모멸감이 한 겹 막처럼 뒤덮였다.
 대개의 여인들이란 아름답다는 말 한 마디면 울던 얼굴도 희희낙락해진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예외란 존재하기 마련이다. 특히 지금은 더 더욱 그러했다.
 뼈에 사무치는 철천지 원수의 입에서 아름답다는 말을 들은 전하연은 전혀 기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녀에게 있어서는 더할 수 없는 모욕일 뿐이었다.
 위지천은 핏기를 잃고 질려 있는 그녀를 말없이 응시하다가 이내 몸을 일으켰다. 그는 뚜벅뚜벅 걸음을 옮겨 왼쪽 석벽 앞으로 가더니 벽장문을 벌컥 열었다. 그 속에는 수많은 책자들이 빽빽이 들어차 있었다.
 위지천은 전하연을 쳐다보지도 않고 무심히 말했다.
 “이것들은 모두 천하 최극상의 무공 비급들이다.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익혀라.”
 “······!”
 전하연은 흠칫한 눈으로 그의 뒷등을 쳐다봤다.
 위지천은 벽장문을 탁 닫고는 무심하게 반대편 휘장 쪽으로 다가갔다. 길게 내려쳐진 진자주빛 휘장은 화려하면서도 단아한 분위기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이곳이 바로 그의 처소로 향하는 곳이었다. 휘장 앞에 다가선 그는 휘장을 젖히려다 말고 나직하게 내뱉었다.
 “복수를 생각했다면 우선 강해져야 한다. 그러자면 무공뿐 아니라 먹는 것도 열심이어야 할 것이다.”
 “······!”
 전하연의 눈빛이 미미하게 흔들렸다.
 이런 사내를 상대로 어디서부터 시작해 어떻게 복수를 해야 한단 말인가? 그녀는 암담해지는 마음을 거두려고 더욱 이를 악물었다.
 어쩔 수 없이 또다시 핑그르 돌아드는 물안개 속으로 휘장에 가려지는 위지천의 뒷모습이 들어왔다. 너무나 완강한 어깨이며 등이다. 그녀가 복수하기에는 너무나도 강한······.
 위지천이 침실로 들어서자 두 사람이 좌우에서 공손히 허리를 굽혔다.
 그들은 한 자루의 묵검을 가슴에 안은 마의죽립인과 치렁치렁한 흑발에, 섬뜩한 미모를 지닌 자의중년미부였다. 사내는 실내에서도 죽립을 벗지 않고 있어 스산하고 을씨년스런 분위기가 풍겼다.
 위지천은 웃옷자락을 풀며 담담히 말했다.
 “잔비, 사노···! 밤이 늦었다. 그만 물러가 쉬도록 하라.”
 잔비와 사노. 이것은 그들의 이름이었다.
 마왕성내에서도 이 이름 외엔 이들에 대해 알려진 게 하나도 없었다. 단지 그들의 무공수위가 상상불허일 것이라는 막연한 추측과 위지천의 충직한 심복이라는 사실 정도만 알고 있을 뿐이다.
 “······.”
 잔비와 사노는 말없이 포권하고는 한 걸음 물러섰다.
 그들이 막 돌아서는 순간이었다. 무심하던 위지천의 두 눈에 섬전같은 기광이 스쳤다. 그와 동시에 잔비와 사노의 신형이 번개처럼 되돌아 섰다.
 시선과 시선이 부딪히고 곧 잔비와 사노의 신형은 반쯤 열린 창 사이로 빛살처럼 쏘아나갔다. 입이 딱 벌어질 정도로 경이로운 경공신법이었다.
 위지천의 무심한 얼굴 속으로 엷은 그늘이 깔려들었다.
 ‘나의 거처까지 접근한 자가 있다니··· 이런 일은 처음이다!’
 그의 손은 풀던 앞섶을 다시 채워갔다.
 사실 그는 지붕 위에서 이는 미세한 호흡을 감지했던 것이다.
 그 호흡은 너무도 순간적인 것이었다. 아마도 상대가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급히 호흡을 멈춘 것 같았다.
 그런 짧은 기(氣)를 놓치지 않은 이들의 감각은 실로 놀라운 것이 아닐 수 없었다.
 위지천이 마지막 단추를 채우고 있는 사이, 그의 앞에는 연기가 솟아나듯 잔비와 사노의 신형이 홀연히 나타났다. 그들은 다짜고짜 자신들의 새끼손가락을 끓어 버리며 털썩 무릎을 꿇었다.
 “죄송합니다.”
 위지천의 단아한 검미가 가볍게 찌푸러졌다.
 ‘그 정도란 말인가? 이들의 이목을 속여 피할 정도의 고수······?’
 지금껏 어떤 일에서건 단 한 번도 실패해 본 적이 없는 잔비와 사노였다. 비단 죽이는 일에서 뿐 아니라 무엇을 추적해 찾아내는 데도 그들의 감각과 능력은 귀신이 혀를 찰 정도였다.
 “됐다. 돌아가라.”
 잔비와 사노는 무거운 시선으로 위지천을 바라본 후 소리없이 사라졌다.
 위지천은 침상 위에 걸터앉아 지그시 발치께로 시선을 던졌다. 그리고 그는 무엇인가 깊은 생각에 잠겼다.
 놈은 그 지옥같은 진법과 기관을 뚫고 드디어 내게로 접근했다. 왜···? 놈은 대체 누구이며 내게서 무엇을 노리는가?
 생각을 마치고 고개를 든 위지천은 품 속에 갈무리했던 푸른 천조각을 꺼내놓고 마왕성 내에서 청의를 즐겨 입는 인물을 떠올려 보았다.
 사실 마왕성의 십만여 성도들 중 청의의 인물들은 수도 없이 많다. 그러나 그 중 그가 직접 설계한 절대기진을 뚫을 만한 능력의 소유자는 몇 되지 않았다.
 기껏해야 성주와 십종천마 정도일 테니까······.
 그 중 청의를 즐겨입는 인물은 그는 문득 한 인물이 떠오르자 가볍게 안색이 일변했다.
 ‘설마 그가······’
 허나 그는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가 비록 청의를 즐겨 입는다고 하나 이유가 없다. 그는 아니다!’
 그는 다시 주위의 인물들을 하나씩 추측해갔으나 그럴수록 그의 머리만 복잡해질 뿐이었다.
 그는 벌떡 일어나 혼란을 떨쳐버리려는 듯 머리를 흔들며 길게 기지개를 켰다.
 “일단 접어두자.”
 그는 한숨을 쉬며 침상의 한쪽 모서리를 눌렀다.
 그러자 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커다란 침상이 소리없이 미끄러지며 그 밑에 조그만 비밀통로가 나타난 것이었다. 위지천은 가볍게 불을 끈 후 그 속으로 빨려들 듯 들어갔다.
 그곳은 대략 사오 장 넓이의 지하 석실이었다.
 천연적인 지형을 이용해 만든 듯 사방이 울퉁불퉁한 바위로 이루어졌다. 가운데는 덩그러니 놓여진 밋밋한 돌탁자와 의자 하나가 단정하게 놓여 있었다. 그다지 특별한 것이 없는 단순한 석실이었다.
 하지만 눈여겨 보면 매우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사방 석벽에 빽빽이 만들어져 있는 수백 개의 서랍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곳은 바로 위지천의 비밀연구실 역할을 하는 곳이다. 지난 오년여 동안 천하를 경악시킨 기상천외의 암기와 기병들이 모두 이곳에서 설계, 제작되었던 것이다.
 의자에 앉은 위지천은 잠시 뭔가 생각하더니 세 곳을 향해 지풍을 날렸다.
 파··· 파팟!
 지풍은 좌측 하단의 여섯번째와 아홉번째, 그리고 전면 상단의 열두번째 서랍에 정확히 맞았다. 그러자 순식간에 세 개의 서랍이 스르륵 미끄러져 열리는 것이었다.
 서랍이 다 열리자 위지천은 말없이 열려진 서랍을 향해 손을 뻗었고, 이내 그 속에 든 세 장의 유지가 그의 손으로 빨려 들어갔다. 물론 서랍은 다시 닫혀 있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의 연속이었다.
 위지천은 아무렇지도 않게 세 장의 유지를 탁자 위에 쫙 펼쳤다. 거기엔 기이한 형태의 도면들이 무수히 엇갈린 채 그려져 있었다.
 “······.”
 위지천은 진중한 눈빛을 발하며 도면을 검토해갔다.
 뜨거운 차 한 잔을 비울 정도의 시간이 지나자 그의 얼굴에서는 햇살같은 미소가 잔잔히 피어 올랐다.
 “좋아, 다섯번째 검토했으나 역시 허점이 발견되지 않는다.”
 스스로도 만족스러운지 그는 매우 뿌듯해 했다.
 “이것이 완성되는 날··· 세상은 비로소 눈을 부릅뜨고 한 인간의 불가사의한 능력을 보게 될 것이다.”
 그의 입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뱉어진 한 마디였으나 그의 능력을 아는 누군가가 들었다면 그것은 그 사람을 능히 기절시킬 만한 엄청난 한 마디였다. 그만큼 그의 능력은 대단했다. 세인들이 지금껏 상상도 못했던 암기와 기병들이 모두 그의 손을 통해 만들어져 왔으므로······.
 그는 다시 만면에 미소를 띄우며 말을 이었다.
 “문제는··· 천하에서 구하기가 극히 어려운 다섯 가지 희귀재료다. 범인의 능력으로는 구하지 못한다. 허나 성주가 나선다면··· 후후······!
 뭐가 뭔지 확실히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백우공자 위지천이 또 다른 작업에 들어갔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다섯 번씩이나 검토를 거쳐야 하는 엄청난 작업에······.
 지금은 혈교가 무너지고, 마왕성의 위명이 또다시 재확인되고 있는 어수선한 난세(亂世)였다.
 
 
 4장 도법(刀法)의 일인자
 
 
 1
 
 
 먼동이 트려면 족히 두 시진은 더 지나야 할 것이다. 그러나 여명과의 완충지대쯤에 속하는 이 어둠은 이미 희뿌연 회색빛이었다. 벌써 성급한 새벽안개가 산허리까지 차오르고 있다.
 위지천은 어차피 이 밤에 눈을 붙이기는 어려울 것 같다고 생각했는지 잠을 포기하고 새벽 산책에 나섰다.
 울창한 숲길에서 풍겨나오는 신선한 초목내음이 심신의 감각을 선명하게 일깨워 주었다.
 위지천은 깊게 심호흡을 하다가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어디선가 밤의 정적을 깨우며 기이한 음향이 들려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이내 소리의 정체를 깨달은 듯 이내 입가에 빙긋이 미소를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뇌사형(雷師兄)을 만나본 지도 오래됐군.”
 그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아마 천하에 뇌사형만큼 집념이 강한 자도 드물 것이다.”
 서늘한 밤바람에 그의 옷자락이 보기 좋게 나부꼈다.
 슉!
 위지천은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귀에서 기음향이 더욱 생생하게 들려왔다.
 소리의 진원지를 향해 다가서던 위지천의 눈가에 엷은 놀람의 빛이 번져 올랐다.
 “도음이 차츰 공기 속으로 스며들고 있다. 뇌사형의 도법은 이미 무상지도(無上之刀)의 화후에 들었군.”
 만약 위지천이 범인이었다면 이 소리만으로는 도법의 화후를 판명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니 아예 그 소리가 무슨 소리인지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무릇 글을 아는 자만이 학문을 논할 수 있듯, 그가 도(刀)에 대해 잘 알고 있기에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단지 소리만 듣고도 도법의 경지를 측정해내는 위지천의 능력은 또 어떻다고 말해야 하는가?
 “뇌사형··· 천품(天品)의 무골(武骨)이자 도에 관한한 지상 최강의 달인이다. 아마 일이 년 후엔 고금을 통해 그를 대적할 자가 없게 될 것이다.”
 위지천은 낮은 독백과 함께 계속 걸음을 옮겼다.
 우거진 잡초 사이로 거대한 암석이 누워 있었다. 위지천은 불현듯 그 암석의 삼 장여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두 눈에 가벼운 기광을 떠올렸다.
 “······!”
 천지는 경쟁이라도 하듯 희뿌옇고··· 간간이 부는 야풍이 스산하게 수목을 휩쓸어가는 이 새벽의 풍경 속에서 암석은 왠지 음산한 느낌을 강렬하게 풍기고 있었다. 마치 거대한 무엇이 웅크리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 거암을 자세히 살펴본 위지천의 입가로 한 가닥 보일 듯 말 듯한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땅의 마왕이시군!’
 그는 이끼 뒤덮인 암석을 향해 느릿느릿 다가갔다. 그리고는 무슨 생각에선지 주위를 둘러보더니 돌연 바지고름을 끌르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세 살 먹은 어린애라도 이것이 분명 작은 일을 보려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위지천의 바지고름이 다 풀어졌을 쯤, 느닷없이 땅 속에서 한 마디 음성이 튀어나왔다.
 “이런 똥물에 튀길! 당장 그만 두지 못해!”
 실로 소름이 쫙 끼치도록 음산한 소리였다. 게다가 천 길 땅 밑에서 울리듯 웅웅거려 도무지 방향을 종잡을 수도 없었다.
 위지천은 짐짓 당황한 표정이 되어 얼른 바지춤을 추스리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대체 누구······?”
 “이런 빌어먹을··· 지계(地界)의 주인을 몰라보다니, 내 목소리도 잊었나?”
 위지천은 그제서야 얼굴에 넉살스런 웃음을 떠올렸다.
 “아···! 땅귀신들의 우두머리셨군요. 하마터면 소제는 간 떨어질 뻔 했습니다.”
 말끝의 여운을 타고 한 가닥 묘한 미소가 그의 입술 언저리로 쓸쩍 스치자 그는 무심결인 듯 잡초를 지그시 밟았다.
 그러자 한 소리 괴음성이 답답하게 터져 나왔다.
 “으윽··· 끝까지 이럴 텐가?”
 위지천은 웃음을 참으려는 듯 손으로 입을 가리고 말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비켜! 자네가 지금 밟고 있는 곳은 내 콧잔등이라고!”
 “이런······.”
 위지천이 아연해 하며 급히 발을 옮기자, 또다시 신음성이 들려왔다.
 “거기는 노부의 배······”
 “어이쿠!”
 “우욱···! 거기는 중간다리!”
 위지천은 웃음을 참을 수 없었으나 짐짓 당황한 기색으로 투덜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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