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함
뒤로가기버튼 신세계 [E](종료230922)

신세계 1권 (1)

2018.02.22 조회 7,828 추천 50


 #드라이버 황대출
 
 
 
 
 뿌아악!
 티타늄 장갑도 갈기갈기 찢는다는 타이푸노스의 발톱이 대기를 찢는 굉음을 내며 영식을 덮쳤다.
 “흥! 가소로운······.”
 휙!
 여유 있는 표정으로 슬쩍 한 걸음 비켜서며 괴수의 공격을 흘린 영식이 헛발질한 괴수의 상체를 쳐다보며 외쳤다.
 “Hell laser!”
 영식의 외침과 함께 그의 이마 한가운데가 급격히 선홍색으로 물들어 갔다.
 처음엔 메달같이 커다란 붉던 원이 동심원을 그리며 점점 수축되어 더욱 새빨갛게 선홍색으로 농도가 짙어지고 있었다.
 마침내 완두콩만큼 작아진 붉은 원은 금방이라도 핏물이 뚝뚝 흘러내릴 듯 새빨갛게 짙어져 있었다. 그러고는 이내 선홍색 광선을 괴수를 향해 분출시켰다.
 한 줄기 선홍색 광선은 맹렬히 회전하며 거침없이 괴수를 향해 일직선으로 뻗어 나갔다.
 휘리릭. 쐐애액!
 퍽!
 장갑차보다 탄탄한 타이푸노스의 가죽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선홍색 광선은 가볍게 관통하며 커다란 비명을 강요했다.
 케에엑!
 메케한 냄새와 함께 모락모락 연기를 피워 올리며 어깨를 관통한 반대편에는 큰 구멍이 생겨났다.
 그러나 체장이 7미터가 넘고 몸무게가 15톤에 달하는 거대한 괴수인 타이푸노스에겐 치명타가 되지는 못한 듯했다.
 크아아아!
 부웅! 부웅!
 오히려 성질만 돋운 듯 더욱 흉포한 괴성을 지르며 마구잡이로 손을 휘둘렀다.
 마구잡이라고 해도 괴수의 파괴력은 영식에겐 스쳐도 사망이었다.
 역시 혼자 상대하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한 영식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구원을 요청해야 했다.
 “쳇! 덩치만 커다란 무식한 새끼 하곤! 강석아, 이놈 발 좀 묶어 줘!”
 “로저Roger! 옆으로 물러서.”
 영식이 재빨리 물러나자 어디선가 불쑥 나타난 강석이 괴수의 정면으로 쏜살같이 달려들었다.
 자신에게 고통을 안긴 영식을 쫓던 타이푸노스는 새로 등장한 적에 잠시 당황하는 듯했다.
 하지만 괴수가 달리 괴수인가. 마수와는 달리 본능에 충실한 괴수답게 곧 새로 나타난 적을 향해 발톱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크아아아!”
 부웅! 뿌아악!
 “우왁! 이놈! 아주 제대로 건드렸나 본데! 잘못하면 내가 먼저 돌아가시겠네! 옜다! 이거나 받아라! 빙폭氷瀑!”
 강석은 앓는 소리와 함께 괴수를 향해 오른손을 활짝 펼쳐 쭈욱 뻗었다.
 그러자 강석의 오른쪽 손바닥 역시 동심원이 생겨나며 푸른색의 강기가 발출되었다.
 츠츠츠츠!
 강석의 손에서 발출된 푸른 강기는 괴수의 다리에 적중했다.
 퍽!
 스스스슥!
 푸른색 강기는 괴수의 다리를 휘감으며 순식간에 꽁꽁 얼려 갔다.
 크아아아!
 하체가 얼어 가며 움직임이 제한되자 괴수는 분노에 찬 괴성을 질렀지만, 그렇다고 얼어붙은 하체가 풀리는 것은 아니었다.
 물론 얼마 가지 않아 풀리겠지만 그 모습을 그대로 지켜볼 스위퍼들도 아니었고 말이다.
 “굿 잡! 이제 조연들은 그만 물러나 주시는 게 어때?”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던 창렬이 슬그머니 나타나며 얄밉게 입을 열자 제일 먼저 나섰던 영식이 같잖다는 듯이 한마디 했다.
 “지랄, 저 혼자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주제에!”
 아니꼽기는 마찬가지이지만 자신이 발출한 빙폭이 녹는 시간이 신경 쓰인 강석이 중재하고 나섰다.
 “야, 싸움은 나중에 하고 새끼들 흩어지니까 일단 마무리부터 해!”
 “하하하! 오케이! 대지의 주먹!”
 마지막에 등장한 창렬이 득달같이 앞으로 나서며 왼손으로 오른쪽 손목을 잡고 괴수의 머리통을 향해 주먹을 뻗었다.
 창렬의 오른 주먹은 괴수에게 향할수록 점점 커져 마침내 커다란 바위 같아졌다.
 괴기스러운 주먹은 괴수에게도 공포심과 함께 위기감을 주었지만, 지면과 함께 얼어붙은 괴수는 다가오는 주먹을 보고도 피할 수가 없었다.
 빠악!
 크아악!
 커다란 주먹에 매달린 듯한 창렬의 비정상적인 모습이 무척이나 희극적이었다.
 그러나 괴수의 머리를 짓이기는 가공할 위력을 보고 비웃기만은 어려웠다.
 어쨌든 창렬의 가공할 원 펀치에 타이푸노스는 지축을 울리는 굉음과 함께 육중한 몸체를 땅바닥에 뉘어야 했다. 때문에 주변의 수풀은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이 들썩거려야 했고 말이다.
 이윽고 주변을 휩쌌던 충격파가 멎었을 때 머리 없는 괴수는 조금 전과는 확연하게 달리 얌전히 누워 있었다.
 휙, 휙, 휙.
 척.
 “휴우, 느려 터진 주제에 맷집은.”
 강석이 아직도 김이 모락모락 나는 타이푸노스의 사체를 발로 툭 걷어차며 구시렁거렸다.
 “이놈은 얼마나 나올까? 아무래도 50만은 충분하겠지?”
 “장난해? 이 정도 덩치의 괴수라면 못해도 100만 이상은 나와야 수지가 맞지. 안 그러냐, 창렬아?”
 영식이 창렬에게 동의를 구했지만 정상 크기로 돌아온 주먹에 장갑을 끼우던 창렬은 별 관심이 없었다.
 사체를 일순 흘깃 쳐다본 그가 대답했다.
 “본부에 가면 자연히 알겠지, 뭐. 한 타임 지나기 전에 새끼들이나 마저 정리하자. 흩어지면 찾다가 시간 다 지날 테니까 말이야.”
 창렬의 말에 두 사람도 바로 말다툼을 멈추고 근처의 수풀 속에 숨어 있을 새끼들의 수색에 나섰다.
 스위퍼에게 한 타임 한 타임은 바로 부富와 생명과 직결되는 단어였던 것이다.
 “영식아, 새끼가 전부 몇 마리였지?”
 “세 마리.”
 “야, 근데 두 마리밖에 안 보여!”
 “놈들이 숨어 봤자 어디에 숨는다고. 눈 크게 뜨고 잘 찾아봐.”
 타이푸노스는 새끼라고는 해도 큰 놈은 키가 4미터에 육박한다.
 아무리 그라운드 투의 숲이 무성하다고 해도 숨어 봐야 삐죽이 튀어나와,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끄엑!”
 창렬이 묵묵히 두 마리의 새끼들을 처리하는 사이 나머지 두 사람은 사라진 한 마리를 찾아 이곳저곳 살펴보았다.
 그들의 모습은 하늘에 떠 있는 드론을 통해 실시간으로 보고되며 기록되고 있었다.
 
  * * *
 
 스위퍼들의 사냥터에서 약 3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흔치 않은 트럭 한 대가 주차되어 있었다.
 바로 괴수의 사체를 운반하는 협회 소속의 특장 트럭이었다.
 트럭에는 두 사람의 남녀가 탑승하고 있었는데, 협회 소속의 드라이버와 드론 조종사였다.
 조수석에 앉은 여자가 드론 조종사로, 주시하고 있던 모니터에서 눈을 떼며 사내에게 물었다.
 “저건 얼마나 할까?”
 “35만.”
 단정 짓듯 말하는 사내에게 여자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다시 물었다.
 “뭐? 35만밖에 되지 않는다고?”
 “응. 절대 35만 이상은 아냐.”
 “야, 그래도 그라운드 투에서 잡은 성체 괴수인데 겨우 35만 파스칼밖에 안 돼? 최소한 50만 이상은 나와야 하는 것 아냐?”
 여자의 말에 사내는 혀를 차며 대답했다.
 “쯧쯧! 그래서 베테랑들은 타이푸노스를 봐도 안 잡아. 왜 그러겠냐? 맷집만 무식하게 세서 AT 파워는 엄청 잡아먹는데 나오는 건 별게 없거든.”
 여자는 그제야 이해가 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흐응, 그래? 아! 타이푸노스는 나무늘보가 변한 거지? 어린이대공원에 있던 놈들 말이야.”
 “맞아. 나무늘보 발톱 봤어? 장난 아냐. 그런 놈이 괴수로 변했으니 티타늄도 종잇조각이나 마찬가지지. 그리고······.”
 -삐삐삐!
 사내가 말을 이으려는 순간 트럭에서는 날카로운 경보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사내가 계기판을 가리키며 여자에게 황급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야, 야, 위험고도야. 괴조들 몰려와!”
 “아! 아, 미안.”
 사내의 경고에 여자는 재빨리 드론의 고도를 내렸다. 그러자 경보음은 바로 꺼졌다.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쉰 사내는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2시 07분.
 스위퍼들의 원 타임은 10분이므로 사냥을 시작한 지 7분이 지났다는 뜻이다.
 이제 3분 안에 사냥을 마치지 못하면 다시 한 타임을 사용해야 한다.
 하지만 목표였던 타이푸노스를 무사히 처리했으므로 한 타임으로 끝낼 것이다.
 슬슬 사체 근처로 이동할 생각으로 여자에게 말했다.
 “이동하게 안전벨트 매라.”
 사내의 말에 안전벨트를 잡아당기던 여자가 모니터를 가리키며 이상하다는 듯이 말했다.
 “어, 근데 쟤네들 왜 저래?”
 모니터 속에는 숲속을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스위퍼들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사내는 무언가 좋지 않은 예감이 들어 여자에게 물었다.
 “사체가 전부 몇 개야?”
 “하나, 둘, 셋, 어? 세 마리밖에 안 돼! 그럼 나머지 한 마리는?”
 이번 사냥은 타이푸노스 성체 한 마리에 새끼 세 마리로 전부 네 마리였다.
 그렇기에 솔로 플레이어인 스위퍼가 세 명이나 동원되어 팀을 이뤘던 것이고 말이다.
 그런데 3분밖에 남지 않은 시점에 새끼 한 마리를 놓치고 만 것이다.
 물론 두 사람이 잡담을 하느라 시야에서 놓친 이유도 있었다.
 그렇지만 드론은 원래 스위퍼를 중심으로 조작해야 한다.
 스위퍼의 공격력과 위력, 팀플레이 등을 기록, 연구하기 위한 목적이었던 것이다.
 더구나 4미터에 이르는 괴수의 새끼를 놓치는 일은 생각하기도 어려운 일이고 말이다.
 꼴깍!
 사내는 현실적인 불안감이 스멀스멀 엄습해 오자 마른침을 삼키며 운전대를 힘주어 잡았다.
 하지만 아직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한 여자는 한가한 목소리로 물었다.
 “참! 대출아, 타이푸노스 새끼들은 특수 스킬이 있다고 했지? 뭐였지?”
 사내는 여전히 주변에 신경을 집중하며 나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으음, 그래. 바로 투명화Invisibility야.”
 “아! 맞다. 새끼라도 발톱은 굉장할 텐데 보이지도 않으니 새끼가 더 위험하겠네.”
 “어미만큼은 아니라도 이런 트럭 정도는······ 쉿! 저걸 봐.”
 사내 대출은 대시보드에 올려놓은 생수병에 파문이 이는 것을 가리키며 여자를 조용히 시켰다.
 친환경 전기 차인 특장 트럭은 과거의 럭셔리 승용차를 압도할 만큼의 정숙성을 자랑한다.
 당연히 반쯤 남은 생수에 이는 파문은 차의 떨림 때문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아주 미세하게 동심원을 그렸다. 그런데 점점 주기가 짧아지고 있었다.
 20톤이나 되는 특장차에 이 정도의 진동을 줄 거대한 무언가가 다가오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주희야.”
 “으, 응?”
 드론 조종사인 주희도 이젠 심상치 않은 것을 느끼고 바짝 긴장해 메마른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무래도 타이푸노스 새끼가 우리 쪽으로 오는 모양이다.”
 “서, 설마······.”
 스위퍼 협회 소속의 트럭은 대당 50억이 넘는 특수 제작 트럭으로, 방사능 방호 능력은 기본이고 티타늄 차체에 특수 강화유리로 제작되었다.
 이렇듯 웬만한 괴수들의 공격에도 드라이버를 보호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었지만, 타이푸노스의 발톱은 웬만하지 않다는 것이 문제다.
 성체가 아닌 새끼라고 해도 안전을 장담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주희야, 코드S! 어서!”
 “으, 응! 보냈어.”
 이제 드론에서 발출된 긴급 구난 신호가 이 구역 전체에 송신될 것이다.
 그래도 대출은 안심할 수 없었다.
 이미 원 타임을 사용한 스위퍼들이 드라이버를 구하기 위해 다시 능력을 사용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스위퍼는 이번 사냥에 참가한 세 명이었다. 그런데 그들 중에는 장거리 비행 능력을 가진 자가 없었다.
 스위퍼들이 정말 큰마음 먹고 원 타임을 더 쓴다고 해도, 3킬로미터나 되는 거리를 뛰어왔을 때면 이미 이쪽 상황은 종료된 후라는 뜻이었다.
 ‘씨팔! 제발 그냥 지나쳐라, 그냥.’
 대출은 왼손은 핸들에, 오른손은 기어에 올려놓고 대시보드의 생수병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간절히 기도했다.
 “대출아······.”
 “주희야, 드론 오토 모드로 놓고 꽉 잡아.”
 “알았어.”
 대출의 지시에 주희 역시 콘솔을 수납하고 안전벨트를 고쳐 매며 양팔로 손잡이를 꽈악 움켜쥐었다.
 대출은 생수병에서 시선을 돌려 트럭의 전방 30미터 지점에 설치해 놓은 표시목을 향했다.
 표시목은 이곳에 도착해 그라운드 투와 스리를 나누는 경계선에 그가 직접 설치한 것이다.
 우지끈!
 좋지 않은 예감은 항상 들어맞는다고, 표시목은 수숫대처럼 쓰러져 나갔다.
 타이푸노스 새끼가 경계를 넘은 것이 확실했다.
 끼이익!
 부아앙!
 “꽉 잡아!”
 표시목이 부러진 순간 대출은 조금도 지체 없이 기어를 후진에 놓고 액셀러레이터를 힘주어 밟았다.
 맹렬한 속도로 지면을 박차며 길게 타이어 자국을 남기면서 특장차는 후진했다.
 그러자 잠시 후 뿌연 먼지와 함께 타이어 자국이 지워지기 시작했다.
 ‘이크!’
 끼이이익!
 대출은 급브레이크를 밟으면서 핸들을 크게 틀어 전진 기어로 바꿔 가속페달을 밟았다.
 그러자 쓰러질 듯이 크게 휘청거린 특장차는 간신히 균형을 잡고 이내 전방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쿵!
 “꺄악!”
 뒷부분에 강한 충격을 받아 트럭이 크게 기우뚱했지만, 이번에도 다행히 전복되진 않았다.
 -화물칸 도어가 개방되었습니다. 무선송신기가 파괴되었습니다.
 새끼 괴수의 공격에 의해 후면이 찢겨 나가 경보등이 들어오며 이상 상태 경고음이 들렸다.
 화물칸 역시 20밀리미터 두께의 특수 합금이지만 단 한 방에 걸레가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어쩌라고!’
 하지만 대출은 경고음 따위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정면을 주시하며 가속페달을 끝까지 밟는 것이 최선이었으니까 말이다.
 부와아왕!
 RPM이 치솟으며 엔진은 더욱 맹렬히 박동했지만 안타깝게도 낡은 지방 도로가 발목을 잡았다.
 ‘도대체 세금은 어디다 쓰는 거야, 이런 데 쓰지 않고!’
 매일 멀쩡한 보도블록이나 교체하는 정부가 원망스러운 대출이었다.
 
  * * *
 
 “어디쯤이냐?”
 120이 넘는 속도로 산길을 달리느라 사이드미러를 볼 여유가 없는 대출이 주희에게 물었다.
 “몰라! 바짝 붙었어. 10미터도 안 되는 것 같아!”
 이리저리 흔들리는 트럭에서 손잡이를 꽉 잡고 간신히 중심을 잡고 있던 주희였다.
 대출의 물음에 정신을 차리고 힐끗 사이드미러를 쳐다본 주희가 질겁해서 소리를 질렀다.
 희뿌연 먼지 덩어리가 바짝 붙어 따라오고 있었던 것이다.
 “조금만 더 가면 게이트니까 버텨!”
 그라운드 스리 경계를 지키는 게이트엔 군이 주둔 중이다.
 그라운드 스리를 벗어나면 바로 일반인이 생활하는 도시가 있으니까 말이다.
 물론 군대라고 해도 괴수들을 상대하는 것은 무리였다.
 하지만 긴급 호출을 받은 스위퍼나 마법사가 도착할 때까지 지연시킬 수는 있었다.
 ‘최소한 주의를 끌 수는 있을 테니까.’
 더구나 즉시 코드S를 발령해, 지금쯤이면 게이트에 지원조가 대기하고 있을 수도 있었다.
 ‘어떻게든 방재 IC까지만 무사히 갈 수 있다면······ 꿀꺽!’
 대출은 방재 IC에서 7번 국도로 갈아타면 속도를 높일 수 있다는 생각에 마른침을 삼켰다. 7번 국도는 훨씬 길이 양호했던 것이다.
 방재 IC에서 게이트가 있는 동해시까지는 금방이기에, 도로 사정만 좋다면 새끼 괴수 정도는 따돌릴 수 있을 듯했다.
 덜컹!
 투둑! 텅그렁! 드드득!
 강한 진동과 함께 차체에서 요란한 불꽃이 튀었다.
 “꺄악! 대출아, 이거 왜 이래?”
 “제길!”
 뒷바퀴들을 연결한 차체 하부가 통째로 떨어져 나가면서 동체가 아스팔트로 내려앉았던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양쪽이 전부 뜯겨 나가는 바람에 한쪽으로 쏠리면서 전복되는 건 피할 수 있었다.
 콰당!
 그렇다고 해도 뒷바퀴도 없이 동체를 질질 끌면서 달릴 수는 없는 일이다.
 더구나 바짝 따라오던 새끼 괴수의 발톱이 놀고 있을 리도 없었다.
 부웅!
 끄그극!
 놈의 공격에 트럭의 뒷부분은 원래의 형체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찢어지고 뭉개져 있었다.
 크르르르!
 운전석이 차체보다 튼튼하다고는 해도 믿고 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새파랗게 질려 손잡이만 꽉 잡고 있는 주희를 힐끗 바라본 대출은 결심을 굳혔다.
 “주희야!”
 “흐윽. 왜, 왜?”
 “벨트 풀고 의자 밑에 앉아 가만있어, 숨도 쉬지 말고!”
 “왜? 어떻게 하려고? 나 혼자 두지 마.”
 “운에 맡겼다간 둘 다 죽어! 되든 안 되든 시도는 해 봐야지. 날 믿고 내 말대로 해!”
 “하지만······.”
 벌컥!
 대출은 주희의 대답을 뒤로하고 운전석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와 주변을 살폈다.
 이제부터 스스로 미끼가 되어 새끼 괴수의 주의를 끌 생각인 것이다.
 그 길만이 조금이라도 살 가능성이 있으니 말이다.
 물론 120킬로미터의 속도도 쫓아온 놈과 달리기 대결을 벌인다면 10미터도 가지 못해 당할 것이다.
 그러나 대출은 다행히도 이 주변에서 몇 번이고 작전을 수행했기에 지리는 잘 알고 있었다.
 그 역시 곱게 죽어 줄 생각은 없어 최선을 다해 발버둥 칠 생각이었다.
 ‘확실히 저쪽에······.’
 배수로로 내려가는 좁은 통로가 있었다. 일단 그쪽으로 가면 무슨 방법이 있을 것만 같았다.
 “야, 이 새끼야! 이쪽이야!”
 생각과 동시에 대출은 뿌연 먼지 덩어리를 향해 큰 소리를 치며 달리기 시작했다.
 나무늘보가 타이푸노스로 변이되면서 빨라지긴 했지만 그래도 본성은 나무늘보였다.
 일단 가속도를 받으면 달리는 트럭을 따라잡을 정도로 빨랐지만 행동까지 잽싼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대출이 이곳까지 무사히 도망쳤던 것도 곡선 구간에서 제 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도로 밖으로 밀려났기 때문이다.
 캬아아악!
 쿵쾅거리는 진동이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생각에 식은땀이 흘렀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진동의 간격이 좁아지는 것으로 보아 가속을 받기 시작했다는 뜻이었고, 발톱에 등부터 꿰뚫려 꼬챙이에 매달린 산적 신세가 된다면 식은땀이 문제겠는가?
 ‘만기가 2년 남았는데 지금 죽을 순 없다고!’
 우습게도 대출은 지금 이 순간 2년만 더 부으면 만기가 되는 적금을 떠올렸다.
 매달 300만 원씩 불입하는 10년 만기 적금이 2년 남은 것이다.
 ‘그냥 적금도 아니고 복리에 세금 우대라고!’
 한국 스위퍼 협회 소속이라 받는 특혜였다.
 하지만 대출은 부모 형제는 물론이고 4촌 이내 친인척까지 없는 천애 고아였다. 그가 여기서 죽으면, 상속자가 없어서 원금은 고스란히 정부에 귀속될 것이 틀림없었다.
 “제길! 누구 좋으라고!”
 다다다다다!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지난 인생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는데 적금 생각이 먼저 드는 것을 보면 아직 죽을 때는 아닌 모양이다.
 휘익!
 데굴데굴.
 콰콰쾅!
 대출이 가까스로 배수로가 있는 굴다리 안으로 몸을 날리자 바짝 따라오던 타이푸노스는 아슬아슬하게 콘크리트 구조물에 몸을 들이받고 멈췄다.
 굴다리는 도로 아래로 사람이나 동물이 길을 건너게 하려는 교통로다.
 높이가 2.5미터에 불과해, 4미터 남짓의 타이푸노스 새끼가 몸을 들이밀기엔 너무 좁았던 것이다.
 끼아아악!
 양쪽 어깨가 걸려 눈앞에 있는 대출을 공격하지 못하자 새끼 타이푸노스는 제 분에 못 이겨 크게 괴성을 질렀다.
 “하아! 하아!”
 간신히 살았다는 생각에 거친 숨을 몰아쉬던 대출은 그 모습을 보고 안도와 함께 고소하다 싶었다.
 대출은 새끼를 향해 연신 감자를 날리며 소리 질렀다.
 척척척!
 “새끼가 성격은 지랄 같네! 이거나 먹어, 새꺄. 네 어미를 내가 죽였냐? 왜 나한테 이 지랄이야?”
 콰지직! 쾅!
 그러나 앉은 채로 연신 가쁜 숨을 몰아쉬며 터질 것 같은 심장을 달래던 대출은 뭔가 부서지는 소리에 고개를 쳐들어야 했다.
 “아! 씨팔! 이거 농담······이지?”
 새끼 타이푸노스가 그가 있는 굴다리의 천장, 그러니까 도로의 상판을 때려 부수는 모습에 대출은 아연할 수밖에 없었다.
 대출은 더 이상 이대로 있을 수 없다는 생각에 황급히 시선을 돌려 주변을 살폈다.
 야트막한 언덕이 좌우로 보이고, 그 사이 길게 뻗은 협로를 지나면 바로 동해가 나왔다.
 ‘타이푸노스, 아니 나무늘보가 수영을 했던가?’
 마나 축복의 날, 원자력발전소와 핵미사일 기지 등이 일거에 폭발하면서 일부 인간이 스위퍼가 된 것처럼, 일부의 동물은 괴수로 변이했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포유류와 조류에 한정되었다.
 바다에도 포유류가 있지만 다행히도 아직까지 바다에서 괴수가 발견되었다는 보고는 없었던 것이다.
 그 때문에 적어도 바다는 괴수로부터 안전지대로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괴수들이 수영을 하지 못한다는 보고서도 없었다.
 ‘그래도 역시 바다로?’
 하지만 대출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쾌청한 날이라 시계가 좋아 가깝게 보였지 실제로는 최소한 1킬로미터 이상의 거리였던 것이다. 지친 상태로 1킬로미터나 괴수를 따돌리기는 불가능했다.
 ‘제길! 도대체 구원대는 뭘 하는 거야!’
 하지만 스위퍼의 원 타임은 최소 5억 이상의 가치가 있었다. 그뿐 아니라 생명을 담보로 하는 능력이었다.
 50억이 넘는 특장차라면 몰라도, 대출을 구하기 위해 희생하라고 주문할 수는 없는 일이다.
 물론 도의적으로는 마땅히 비난할 수는 있다. 하지만 누구도 강제할 수는 없는 일인 것이다.
 타인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기꺼이 던질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니까 말이다.
 크아아아!
 쿵! 쿵! 쾅!
 풀썩.
 대출이 살 궁리를 하는 동안에도 새끼 괴수는 가만있지 않았다.
 벌써 굴다리의 절반이 무너져 내렸고, 남은 절반도 거의 내려앉기 직전이었다.
 크아아아!
 “제길!”
 놈도 그것을 아는지 성난 포효와 함께 최후의 일격을 가하고 있었다.
 절체절명의 순간을 맞은 대출의 눈에 마침 하수구가 보였다.
 철로 만든 격자무늬 뚜껑이 덮인 곳이었는데, 열릴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로서는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다다다다.
 “어휴! 이게 뭐야?”
 하수구 입구를 막아 놓은 격자무늬의 철 뚜껑은 한 번도 열린 적이 없어 주변의 흙과 한 몸이라도 된 듯 고정되어 있었다.
 절대 쉽게 열릴 것 같지 않았다.
 “제발, 열려라! 끙차!”
 하지만 막다른 골목에 몰린 대출은 포기할 수 없었다.
 격자무늬의 뚜껑에 손가락을 집어넣어 젖 먹던 힘까지 짜 들어 올렸다.
 “아악!”
 손가락이 끊어지는 통증이 밀려왔지만 열지 못한다면 죽는다는 생각에 이를 악물고 고함을 지르며 힘썼다.
 하지만 뚜껑은 꿈쩍도 하지 않고 있었다.
 드드드. 콰르르르!
 남은 굴다리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린 것은 바로 그때였다.
 언제 새끼 괴수의 발톱이 날아올지 모른다는 생각에 대출은 뒷골이 서늘해졌다.
 이젠 이판사판이라는 생각에 혼신의 힘을 다해 뚜껑을 들어 올렸다.
 “우와아악!”
 사람은 간혹 절체절명의 순간에 상상 이상의 능력을 나타내곤 한다. 지금의 대출이 바로 그랬다.
 우지끈!
 덜컹!
 그러나 뚜껑이 열렸다고 안심할 수만은 없었다. 굴다리를 무너뜨린 새끼 괴수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키아아아!
 “으헉!”
 휙!
 기겁을 한 대출은 하수구로 몸을 던졌다.
 아래로 뻗는 사다리를 내려가는 대출의 귀에 새끼 괴수의 분노에 찬 괴성이 들려왔다.
 키아악!
 간발의 차로 대출을 놓친 새끼 괴수는 화가 나는지 구멍에 발톱을 쑤셔 넣고 휘저었다.
 촤촤촤촹!
 첨벙!
 입구는 금세 걸레짝이 되었지만 대출은 이미 바닥까지 내려와 무사할 수 있었다.
 이제 하수구를 따라 빠져나가면 된다는 생각에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정말 십년감수했네. 어!”
 하지만 안도하기에는 아직 일렀다.
 영화에서 나오는 지하 수로를 상상한 그였지만 현실은 전혀 달랐던 것이다. 지하 수로는 사람이 지나가기에는 너무 좁았다.
 “제길, 내 무덤을 내가 팠잖아!”
 위로 다시 나갈 수 없고 전진할 수도 없는 대출은 바로 독에 빠진 생쥐나 다름없었다.
 멀쩡한 도로도 파괴한 새끼 괴수이니 시멘트와 흙으로 만든 수로 입구쯤은 가볍게 부술 것이다. 만일 운이 좋아 잡혀 죽지 않는다고 해도, 수로 입구가 무너지면 그대로 생매장이 될 터였고 말이다.
 “하아, 어째 되는 일이 하나 없냐!”
 더 이상 손쓸 방법을 찾지 못한 대출은 체념하고 푸념을 늘어놓았다. 부모도 없이 혈혈단신으로 악착같이 노력했는데 하늘도 무심하다며 말이다.
 하지만 하늘은 그의 생각만큼 무심하지 않았다.
 “찾았어요! 에잇!”
 슈왁!
 화악!
 청아한 목소리가 날카롭게 울려 퍼지며 새끼 괴수가 입구를 막아 컴컴했던 수로에 한 줄기 빛이 비쳤다, 마치 구원의 빛처럼.
 그리고 대출은 환한 빛무리에 둘러싼 여신을 보았다.
 ‘하, 한승연 마법사······.’
 감격한 대출은 여신을 향해 손을 뻗으며 감사의 인사를 전하려 했다.
 그런데 그보다 먼저 한 무더기의 초록색 액체가 그를 덮쳤다.
 촤아악!
 “앗! 뜨거워!”
 대출은 외마디 비명과 함께 정신을 잃었다.
 
 
 
 
 #로또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대출은 꼬박 일주일간 병원에 감금당해야 했다.
 괴수의 피에는 독성이 있어 사람에겐 치명적이었다.
 그런데 대출의 경우 피를 뒤집어쓴 것도 부족해 일부는 식도를 타고 흘러들었다.
 그로 인해 스위퍼 협회는 물론 의료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일주일간 정밀한 검사를 거쳤지만 별다른 이상이나 징후를 발견하지 못했다.
 그에 따라 대출이 스위퍼 예비군이라 영향을 받지 않은 것으로 잠정 결론을 내리고 말았다.
 아무튼 그런 곡절을 겪은 후 일주일 만에 자유로운 몸이 되었지만 끝이 아니었다.
 병원에서 퇴원한 대출에게는 KSA(Korea Sweeper Association), 즉 한국 스위퍼 협회의 호출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KSA 본관은 지하철 9호선 여의도 국회의사당 역에서 내려 2번 출구로 나가면 바로 보인다.
 국회 대로를 사이에 두고 국회와 마주 보고 선 13층짜리 건물이 바로 국제 스위퍼 협회인 ISA(International Sweeper Association)의 한국 지부이다.
 절정기에는 지하철역 건너편의 13층 쌍둥이 빌딩도 KSA 소유였지만 몇 년 전에 매각해야 했다.
 하늘 높은 줄 모르던 KSA가 침체기를 맞은 이유는 괴수 사냥을 스위퍼들이 독점으로 하던 시대가 막을 내렸기 때문이다.
 최근엔 가이아 교敎라 불리는 신흥종교 단체와 하프문Half Moon이란 마법사 단체가 세력을 확장하는 중이었다.
 스위퍼는 능력을 사용함에 자신의 생명력을 담보로 한다는 치명적인 핸디캡을 가지고 있었다.
 그 점이 스위퍼 협회의 성장을 멈추게 한 결정적 요인이었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죽고 나면 소용없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마법이라는 새로운 스킬을 다루는 두 단체는 그런 핸디캡이 없었다.
 단지 아직 마법사의 수준이 미미해 위력 있는 마법을 사용하지 못한다는 점 때문에 단숨에 지위를 역전시키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 또한 시간이 해결해 줄 문제였고, 지금도 보완책으로 여러 가지 마법 무구를 개발해 사용하고 있어 역전은 시간문제였다.
 아무튼 그런 위기의 KSA였지만 정부와 협력해 인류와 국가의 큰 위협을 상대하는 곳으로 일반인의 선망을 받고 있다는 점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래서 정문은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군 병력이 파견을 나와 경계하고 있었다.
 물론 그렇다 해도 일반인들 출입도 상당히 많은 곳이라 괜히 위압감을 주는 일은 없었고, 신분 확인만 하면 출입에 어려움은 없다.
 대출이 현관에서 신분증을 내밀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바로 운영이사실로 안내되었다.
 “어서 오게, 황대출 군!”
 “예, 안녕하십니까, 이사님. 어, 주희?”
 운영이사의 방으로 안내된 대출은 뜻밖의 곳에서 주희를 볼 수 있었다.
 주희가 살았다는 것은 들었지만 만날 수는 없었다.
 대출은 반가운 마음에 알은척하려고 했지만 장소가 장소라 눈인사만 나누었다.
 주희 역시 반가운 표정으로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무슨 일이 있나? 하긴, 내가 혼수상태라 혼자 조사를 받았을 테니······.’
 대출이 주희의 어두운 표정으로 까닭을 짐작하고 있는데 운영이사가 자리를 권하며 말했다.
 “자, 시간 없으니 황대출 군도 주희 양 옆으로 앉게.”
 “예······.”
 어정쩡한 모습으로 주희 옆에 엉덩이를 붙이는 대출에게 운영이사는 사무적인 어투로 말했다.
 “자네가 운행했던 K3는 폐차하기로 했네. 물론 자네와 주희 양이 무사한 일은 천만다행이지만 손실이 너무 큰 것도 사실이라네.”
 운영이사는 잠시 말을 멈추고 딱하다는 듯이 두 사람을 둘러보며 다시 말을 이었다.
 “무려 50억의 손실이 났으니 아무도 책임지지 않고 넘어갈 수는 없다는 뜻이네. 그렇다고 자네들에게 물어내라고 할 수도 없는 일이라 협회에서도 난감하다네. 더욱이 자네 선친의 공로도 무시할 수 없는 일이고 말이야.”
 사실 대출은 억울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매뉴얼대로 긴급 구조 신호를 보내고 기다리고 있었으면 이미 저승사자를 만났을 것이 분명했으니까 말이다.
 대출은 살기 위해 최선을 다했던 것뿐이고, 결과적으로 살아남았다.
 상을 받아도 부족한 판에 문책성의 말을 들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운영이사의 말도 전혀 틀리지 않아서 두 사람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50억의 특장 트럭이 폐차가 되었으니까 말이다.
 만일 대출이나 주희가 죽었다면 사정은 지금과 달랐을 것이다.
 드라이버의 안전 문제에 대해 안이한 KSA의 태도가 부각되어 심각한 위기를 맞게 되고, 어쩌면 드라이버의 처우와 안전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는 기회로 바뀌었을 것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두 사람 모두 무사한 점이 문제였다.
 협회는 책임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고 당연히 피해가 아쉬웠다.
 드라이버의 생명을 경시하는 협회의 태도가 야속했지만 어제오늘 일이 아니었다.
 다행히 금전적인 책임을 묻지 않을 듯해 내심 안심하며 물었다.
 “그럼 어떻게······?”
 “일단 이번 사고에 대해서는 일절 외부에 발설하지 말 것이며, 당분간 근신하고 있게.”
 “물론 사고에 대해서는 함구하겠습니다. 그런데 근신이라면 얼마나······?”
 대출은 이 와중에도 붓고 있는 적금이 걱정되어 물었다.
 매달 급여의 절반 이상을 불입하는 적금이다.
 근신 기간에는 작전에 참가할 수 없고 그러면 급여의 대부분인 작전 수당이 나오지 않는다.
 쥐꼬리만 한 기본급으로는 도저히 적금을 지속해 나갈 수가 없었다.
 물론 근신이 1~2주 정도라면 어떻게 대처할 수 있겠지만 장기화되면 답이 없었다.
 답답한 대출의 마음을 알 리 없는 운영이사였다.
 오히려 협회의 배려에 꼬치꼬치 묻는 것이 기분 나빠 안색을 찌푸리며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문제는 협회에서 알아서 할 일 아닌가? 50억의 피해를 끼친 자네를 배려해 주는 협회를 믿지 못하겠다는 겐가? 자넨 그저 협회의 방침에 순응하기만 하면 되네.”
 “죄송합니다, 이사님. 그래도 대략적인 기간이라도 알려 주실 수 없습니까?”
 “어허! 그래도 이 사람이!”
 운영이사가 불쾌한 얼굴로 언성을 높였다.
 대출은 더 이상 좋은 소리는 듣기 어렵겠다는 생각에 꼬리를 내려야 했다.
 “죄송합니다, 이사님.”
 운영이사는 그만 나가 보라는 듯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이 정도도 다 자네 선친을 감안한 선처이니 조용히 근신하기나 하게, 괜히 돌아다니며 엉뚱한 분란 일으키지 말고.”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대출과 주희는 거듭 머리를 조아리며 운영이사실을 나왔다.
 간신히 살아남은 두 사람이 오히려 죄인 취급을 받아야 하는 현실이 억울했지만 도리가 없었다. 협회는 스위퍼를 위한, 스위퍼에 의한 곳이니까 말이다.
 대출이 씁쓸한 마음으로 본부 건물을 나서는데 주희가 생각났다는 듯이 물었다.
 “대출아, 이번에 너 구해 준 사람이 하프문의 한승연 마법사라며?”
 “응, 맞아. 여신님이 구해 줬지!”
 대출이 눈을 빛내며 대답했다.
 정신을 잃기 전에 보았던 천사는 다름 아닌 하프문의 여신으로 불리는 한승연 마법사였다.
 그녀는 뛰어난 마법 실력은 물론, 하프문 10대 마법 무구 중 하나인 벽력도霹靂刀의 주인이었다.
 더구나 빼어난 미모까지 겸비해, 팬클럽 회원 수가 10만 명이 넘는 마법계의 아이돌이었다.
 물론 대출 역시 그중 하나였다.
 꿈이라도 꾸듯 몽롱한 표정의 대출을 본 주희는 어이없어 혀를 차며 말했다.
 “쯧쯧! 잘못하면 밥줄이 끊기는 상황에서 좋기도 하겠다. 쯧쯧쯧.”
 “흐흐! 그건 그거고 이건 또 다르지. 다른 사람도 아닌 여신님이 날 구해 주다니, 뭔가 운명이 느껴지지 않냐? 고맙다고 인사 가야 하는데, 쩝.”
 “정신 차려, 이놈아! 걔가 널 만나 주기나 하겠냐? 또 만나 준다고 해도 너 입조심해야 하는 거 아냐? 괜히 매스컴에 얘기가 들어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근신 기간 동안 적금 넣을 생각이나 해!”
 “아, 적금! 쩝······ 어떻게 되겠지.”
 주희의 질책에 꿈에서 깨 차가운 현실로 돌아온 대출이었다.
 
  * * *
 
 “일단 샤워부터 해야지.”
 주희와 헤어져 집으로 돌아온 대출은 샤워실로 직행했다.
 의사로부터 이상이 없다는 말을 듣긴 했지만 독성 물질로 알려진 괴수의 피다. 역시 찝찝함을 떨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촤악.
 쏟아지는 물줄기를 맞으며 대출은 소독 성분이 함유된 세정제로 살갗이 벗겨져라 빡빡 문질러 닦았다.
 “겉은 이렇게 한다지만 속은······ 쩝, 의사들이 괜찮다니까 믿어 보는 수밖에.”
 살갗이 빨갛게 되어 일어나도록 문지른 후에야 샤워를 마친 대출은 거울 앞에 섰다.
 “어디 보자, 팔은 이상 없고······ 응? 이건?”
 조금 전 때를 밀 때만 해도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그런데 배꼽을 중심으로 검붉게 점과 같은 것들이 있었다.
 “씨팔! 그러면 그렇지. 이상이 없기는 개뿔이! 그래도 가렵지는 않은데······.”
 대출은 피부병을 의심하고 먼저 의사들에게 원망을 늘어놓으며 손으로 만져 보았다.
 스슥.
 맨질맨질.
 그런데 살갗은 돌기하지도 않았고 가려움도 없었다. 평소 맨살을 만지는 감촉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원래 이런 병이 더 무서운 법인데······.”
 병원에서 퇴원 전날까지 온갖 장치들을 주렁주렁 매단 채 검사를 받았다. 그것도 각 분야의 최고 의사들이 살폈다.
 때문에 간단한 피부병 정도를 놓쳤을 리 없다는 생각에 대출의 불안감은 더욱 증폭되어 갔다.
 “그런데 이렇게 눈에 확 띄는 것을 놓쳤다는 것은······ 가만, 점이 생긴 건가?”
 점이 어떻게 생겨나는지 알지 못하는 대출이다.
 하지만 아무리 점이라도 일순에 생겨나지는 않을 듯했다.
 “더구나 이렇게 큰 점이 한순간에 생겨났다는 소리는 들어 본 적도 없고 말이야.”
 다시 병원에 가 보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한 대출은 서둘렀다.
 거울 앞에서 물기를 닦아 내면서도 대출의 신경은 온통 피부 트러블에 집중되었다.
 반점은 거울에 비춰 보니까 한눈에 확 들어왔다.
 크고 작은 선과 점으로 연결된 반점은 마치 기하학적인 도형처럼 보여 보기에 나쁘지 않았다.
 “흐음······ 그래도 보기보다 흉하지는 않은데! 정 없어지지 않으면 문신이라고 우겨도 되겠어. 응? 문신?”
 후다닥.
 문신까지 생각이 이어지자 대출은 미친놈처럼 알몸으로 허겁지겁 거실로 달려갔다.
 자신의 집에서 벌거벗고 다닌다고 누가 뭐라 할 사람은 없지만 말이다.
 드륵!
 “여기 어디 있을 텐데······ 아! 있다!”
 거실 장식장 서랍을 열어 수성 사인펜을 찾아낸 대출은 다시 거울 앞에 섰다.
 하지만 조금 전 피부병을 걱정할 때와는 전혀 다른 표정이었다.
 사형선고라도 받은 표정에서, 지금은 마치 로또 1등에 당첨된 사람과도 같이 헤실헤실 실없는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대출은 웃음을 멈추지 못하고 배꼽 주변의 점과 선을 수성 펜으로 연결해 보았다.
 그러자 무질서해 보였던 점과 선은 확실히 일관적인 모양을 이루고 있었다.
 도형을 확인한 대출은 양손을 번쩍 들고 미친 듯이 웃어 젖히며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우하하하하! 문양文樣이다! 이제 나도 스위퍼라고!”
 KSA로부터 스위퍼 관련 교육을 받은 특별 관리 대상이면 대출의 배에 나타난 문양을 모두 알고 있었다.
 이 문양이 바로 스위퍼로서의 각성을 의미하고 고유 스킬을 습득한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대출의 생각대로 각성 문양이라면 의사와 간호사가 발견하지 못한 것도 당연했다.
 스위퍼의 각성은 아직 현대 기술이나 의학으로 규명할 수 없는 것이었고, 당사자만이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각성 후에도 고유 스킬을 사용하기 전까지는 드러나지 않는 점이 특징이었다.
 “어!”
 하지만 기쁨에 날뛰던 것도 잠시였다. 각성에 관련된 사실과 부합되지 않는 점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난 어떤 스킬을 각성한 거야? 분명히 교육에는 각성과 동시에 스킬도 자연스럽게 알 수 있다고 했는데.”
 그러는 동안에 배꼽 주위의 점과 선 들은 점점 희미해져 갔다.
 “어어! 가지 마!”
 당황한 대출은 문양을 움켜쥐고 소리쳤지만 매정한 문양은 이내 흔적도 없이 전부 사라져 버렸다.
 태고의 몸으로 거울 앞에 선 대출은 일장춘몽一場春夢이라도 꾸고 난 사람처럼 허탈해져 제 볼을 꼬집어 봤다.
 꼬집!
 “악! 하아! 꿈은 아닌 모양인데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스위퍼 각성을 한 거야, 만 거야?”
 아무리 생각해도 알 길 없는 대출은 꼬집던 볼을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근데 각성하고도 스킬을 알지 못하는 경우가 있었나? 있다면 몰라도, 없다면 나만 미친놈 취급받는 거 아냐? 하아!”
 더구나 어제 운영이사에게 대든 일도 있어 이상한 놈으로 몰리기가 쉬웠다.
 마침 정기 검사가 며칠 후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떠올린 대출은 협회에 보고하지 않기로 했다.
 “쩝, 일단 협회에는 알리지 말고 검사부터 받자, 만일 내가 각성했다면 AT 파워가 1만 이상으로 나올 테니까.”
 자리에 누웠지만 대출은 쉽게 잠을 이루지 못했다.
 
  * * *
 
 2주 후, KSA 본관 앞.
 2주 만에 다시 보는 대출을 신기한 듯이 바라보며 주희가 말을 건넸다.
 “정말 네가 웬일이야?”
 “뭐가?”
 “너 스캐닝 싫어했잖아. 매번 마지막 날 억지로 가던 놈이 시즌 첫날부터 가자고 하니까 그렇지.”
 대출은 의미심장한 웃음을 흘리며 대답했다.
 “흐흐! 그럴 일이 있지.”
 “어라, 정말 뭔가 있나 본데! 뭔데? 말해 봐!”
 “흐흐흐! 나중에. 어서 들어가기나 하자.”
 사실대로 말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대출은 말을 아끼고 주희의 손목을 잡아끌며 현관으로 향했다.
 깜짝 놀라는 주희의 모습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물론 배에 나타났던 문양은 두 번 다시 나타나지 않았지만, 대출은 어느 정도는 기대하고 있었다. 그래서 주희의 말대로 3/4분기 스캐닝 시즌이 시작되자 득달같이 달려왔던 것이다.
 팔을 잡아끌며 서두르는 대출이 이상하긴 했지만 주희는 오히려 안심이 되었다.
 최근 큰 사고로 일주일이나 입원했고 협회에서 제재를 당하는 등 좋지 않은 시기를 보내는 대출이었다. 그로 인해 의기소침해 있지 않을까 걱정했던 주희다.
 그런데 오히려 의욕이 넘쳐 보여 한결 마음이 놓였다.
 주희는 고개를 끄덕하며 대출이 잡아끄는 대로 현관으로 향했다.
 “그래. 이왕 받은 거라면 서두르자. 오전에 가야 덜 복잡하니까.”
 “그래.”
 현관 출입문 검색대에는 테스트를 보러 온 방문객들이 벌써 기다란 줄을 만들고 있었다.
 현재 스위퍼 등록과 관리에 관한 법에 의거해, 만 15세가 된 모든 남녀에게 마치 군대 영장처럼 AT 파워 스캔 안내장이 날아갔다.
 1년에 네 번 한 달 동안 실시되는 기간 안에 자유롭게 검사받을 수 있다.
 물론 형사상 처벌까지는 없지만 과태료 액수가 만만치 않아서, 대부분은 안내장에 따라 검사를 받는다.
 하지만 과태료 이전에 인생 로또와 다름없어 받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기간 내내 혼잡할 수밖에 없었다.
 스위퍼 예비군인 대출과 주희는 방문객용 줄에 설 필요가 없었다.
 일단은 협회 직원이기도 하고, 예비군에게는 우선권이 주어져 직원용 입구로 들어갈 수 있었다.
 마나 축복의 날 치사량의 몇 곱절이 넘는 방사능에 노출된 사람 중에 각성을 이뤄 살아남은 사람들을 1세대 스위퍼라고 불렀다.
 1세대 스위퍼들은 함께 나타난 괴수, 마수와 필연적으로 싸워야 했다.
 지구상에서 스위퍼의 출현도 처음이었지만 괴수나 마수의 등장 역시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현대 무기로는 타격할 수 없는 괴수와 마수를 상대할 수 있는 자는 스위퍼밖에 없었던 것이다.
 당시 전 세계적으로 수만 명에 달했던 1세대 스위퍼들은 아무런 자료나 대책 없이 맨몸으로 마수와 괴수를 상대했다.
 현재는 인마대전人魔大戰으로 불리는 당시 괴수와의 전쟁에서 1세대 스위퍼들은 과도한 생명 에너지의 소모로 대부분이 사망에 이르러, 현재 남아 있는 1세대 스위퍼는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였다.
 대출의 부친 역시 인마대전 당시 생명력의 고갈로 숨진 1세대 스위퍼였고 말이다.
 아무튼 그로 인해 스위퍼의 수는 격감했고 현재 쇠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
 이에 한 명이라도 많은 스위퍼를 찾기 위해 KSA는 정부의 협조를 얻어 전 국민을 대상으로 의무적으로 검사를 하게 되었다.
 물론 대부분이 유전으로 이어지지만 개중에는 돌연변이로 나타나는 경우도 있었다.
 비록 10만분의 1의 확률보다도 적었지만, 많은 비용과 시간을 들일 가치가 있었다. 아직은 스위퍼의 보유 수가 국력과 비례하니까 말이다.
 Absolute-transitional Power.
 마나 축복의 날 이후 등장한 스위퍼들이 쓰는 초능력의 실체를 절대 변환 파워라고 하고, 보통은 줄여 AT 파워라고 부른다.
 AT 파워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생명 에너지를 마나와 융합시켜 기존의 과학 법칙으론 설명할 수 없는 절대적인Absolute 에너지를 일컫는다.
 이때 생명 에너지에 얼마나 많은 마나를 결합시켜 절대 에너지로 변환Transition시키느냐에 따라 위력이 천차만별이었다.
 사람들은 그 절댓값을 계측하기 위해 노력했고, 그 결실을 맺어 미국의 스위퍼 협회에서 현재의 스캐닝 방법을 만들어 냈다.
 현재는 전 세계가 같은 방법으로 스위퍼를 발굴하고 있었다.
 대출과 주희가 길게 늘어선 줄을 지나 직원용 입구로 향하자 줄을 서 있던 교복 차림의 남학생들이 부러운 시선으로 쳐다보며 환호했다.
 “우와! 저 누나 죽인다!”
 “어디? 와! 레알! 스위퍼 되면 전부 예뻐진다더니 진짠가 보네.”
 스위퍼나 마법사에 견주어도 결코 처지지 않는 주희가 오해를 불러일으킨 것이다.
 주희가 뻔뻔하게 학생들을 향해 손을 흔들며 대출에게 속삭였다.
 “호호호! 너도 봤지? 나랑 같이 일하는 걸 삼대의 영광으로 알아야 해.”
 “뭐? 쯧쯧! 미녀가 다 얼어 죽었다. 주변에 여자 스위퍼들이 득실대는데 나대기는 어딜 나대!”
 하지만 주희는 대출의 면박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의미심장한 시선으로 대답했다.
 “호호! 각성하기 전에 벌써 이 정도 미몬데 만일 각성한다면 아마 넌 말도 붙이지 못할걸.”
 사실 주희의 말이 맞았다.
 남자도 스위퍼로 각성을 하면 골격이 바뀌고 피부도 좋아지면서 외모가 일취월장한다.
 그렇다고 무협 소설 속의 환골탈태 정도는 아니지만, 확실히 각성 전과는 비교되었다.
 대출도 외모 역시 특별히 변하지 않아 더욱 불안했지만 그래도 ‘남자니까!’ 하며 자위하고 있던 중이었다.
 그러나 여자의 경우는 정말 환골탈태이라고 부를 만한 수준으로 변했다. 만일 주희가 각성하면 여신급으로 변할 것이 확실했다.
 “으음······.”
 딱히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한 대출은 서둘러 직원용 입구를 통해 건물로 들어갔다.
 시끌벅적, 와글와글, 웅성웅성.
 접수처가 있는 1층은 마치 도떼기시장처럼 북적댔다.
 대출이 주희에게 줄을 가리키며 물었다.
 “원래 첫날부터 이러냐?”
 “응. 그렇긴 해도 오전부터 이 정도로 붐비지는 않는데······.”
 대답을 하던 주희는 대부분이 앳된 얼굴의 여고생인 걸 확인하고 고개를 갸웃하며 가까운 곳의 여고생에게 물었다.
 “너희 어디서 왔어?”
 “청진에서요.”
 “청진? 대출아, 청진이 어디야?”
 “에라, 이! 얼굴만 되면 뭐 하냐? 우리나라 지명도 모르면서. 함경북도 청진도 몰라?”
 대출의 면박에 그제야 떠올린 주희는 다시 여고생에게 물었다.
 “아! 그 청진? 그런데 그 먼 데서 이 시간에 어떻게 왔어?”
 “호호호! 우리 어제 서울로 수학여행 왔어요. 호텔에서 묵고 아침에 바로 온 거예요.”
 두 사람은 5년 전 염원의 남북통일의 감격스러웠던 순간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북한을 흡수통일한 통일 정부에서 가장 중점을 둔 부분이 개발과 의식 통합 작업이었다.
 그 정책의 일환으로 북한 지역 학생들을 남한으로 수학여행을 보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고, 어린 학생들의 의식 개혁이 우선되어야 했으니까 말이다.
 각종 경비까지 정부가 보조해 호텔에서 묵는 호사까지 누리며 남한 지역을 볼 수 있도록 했다.
 “아! 그럼 수학여행 온 김에 겸사겸사 스캐닝도 받는 거구나.”
 주희와 대출이 이해되었다는 듯 마주 보며 고개를 끄덕이는데 커다란 팡파르가 울려 퍼지며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빠바밤빰빠! 빰빰빰!
 -817번 응시생께서 9,078점으로 1종 특별 관리 대상에 선정되셨습니다.
 
 “우와!”
 짝짝짝!
 안내 방송에 1층을 가득 메운 여고생들이 특유의 하이 톤 목소리로 환호를 보내며 친구의 합격을 축하하며 웅성거렸다.
 “근데 817번이 누구야?”
 “아마 8반의 세경일걸!”
 “우와! 부럽다. 그럼 걘 이제 서울로 전학 가겠네?”
 AT 파워 수치가 5,000점 이상이면 스위퍼 예비군으로 본다. 대출과 주희와 같은 경우였다.
 그중에서도 특히 9,000점이 넘는 사람은 1종 특별 관리 대상으로 지정해 국가와 협회에서 관리한다.
 통계적으로 볼 때 1종 관리 대상의 약 90퍼센트가 1년 안에 각성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전원 KSA 산하의 기숙학교에 입학해 관리받는다.
 아직은 스위퍼들이 국가의 전략 병기로서 취급받아 별도로 격리 보호하고 있는 것이다.
 일단 1종 관리 대상이 되면 생활비 일체는 물론이고 질 높은 교육과, 본인이나 가족에게도 금전적인 혜택이 베풀어진다.
 안내 방송을 들은 대출은 묘한 표정이 되었다.
 ‘쩝, 나도 애매하게 9,000대가 나오면 어쩌지?’
 대출은 각성인가 아닌가만 생각했지 그 밖의 경우에 대해서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그것도 나쁘지는 않지만······.’
 1년 내에 90퍼센트의 확률로 각성하지만 여전히 10퍼센트는 각성하지 못하고 지나간다.
 10퍼센트에 속했어도 어린 학생이라면 아직 기회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대출의 나이를 생각한다면 1년 안에 각성하지 못하면 불발로 그치기 쉬웠다.
 ‘역시 한 방에 넘어가야 하는데······.’
 대출이 상념에 빠져 있을 때 주변이 다시 소란해져 시선을 돌렸다.
 마침 지하 1층에서 스위퍼 전용 승강기를 타고 올라오는 소녀가 보였다.
 “와아! 역시 세경이다! 축하해, 세경아!”
 짝짝짝!
 소녀는 친구들의 박수와 환호에 얼굴을 붉히며 손으로 수줍게 V를 그려 보였다.
 곧 소녀의 옆으로 경호원들이 나타나 지켰다.
 “오오!”
 “꺄악! 세경아, 사랑해!”
 이제 세경이라는 소녀는 바로 기숙학교로 전학되며 더 이상 친구들과 함께 수학여행을 즐기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세경의 표정에서 아쉬운 기색은 찾아볼 수 없었다.
 앞으로 세경에게는 장밋빛 미래가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꿈에 그리던 스위퍼에 한 발짝 앞까지 다가섰고 말이다.
 대출 역시 잠시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보다 주희와 함께 한산한 특별 관리 대상 전용 접수처로 향했다.
 AT 파워가 9,000 이상인 1종은 격리되지만 5,000 이상 9,000 미만은 2종으로 구분한다.
 2종의 경우 스위퍼 등록과 관리에 관한 법에 의해 29세까지 1년에 네 번의 검사를 반드시 받도록 정해져 있었다.
 2종의 각성 경우는 5퍼센트 미만이어서 격리 보호까지는 실시하지 않았다.
 그러나 매 분기 실시하는 검사를 거부할 경우 즉시 체포된다. 소재 불명일 경우 전국에 특별 수배령까지 발령해 잡아들인다.
 비록 마법사들의 등장으로 스위퍼의 위상이 실추되었어도 여전히 국가의 중요한 자산인 것이다.
 대출과 주희가 접수처에 이르자 낯이 익은 접수원이 인사를 건넸다.
 “어! 대출 선배, 무슨 바람이 불어 첫날부터 오셨습니까?”
 “어? 선일이 아냐! 너 여기로 옮겼어?”
 “예, 드론 조종사는 아무래도 적성이 안 맞는 것 같아서요. 다행히 이곳에 자리가 있어서······.”
 대출이 신분증을 내밀며 물었다.
 “그래? 잘됐네. 적성에 맞지 않으면 힘들지. 근데 우리 많이 기다려야 하냐?”
 “아뇨. 바로 검사받을 수 있습니다. 주희 누나도 같이 받을 거죠?”
 “응. 부탁해. 대기자 많아?”
 “스위퍼가 첫날부터 나오겠습니까. 첫날이 아니라 첫 주는 별로 없어요. 선배도 그랬잖습니까?”
 지금까지 대출이도 그랬듯이 다들 미루고 미루다 시즌 종료가 임박해서야 몰려들었다.
 “하하! 뭐 그랬지. 아무튼 서둘러 줘.”
 “예, 접수했으니 바로 내려가시면 됩니다.”
 “고마워. 수고해라!”
 신분증을 돌려받은 대출과 주희는 방금 세경이가 내린 스위퍼 전용 승강기로 향했다.
 
 -잠시 안내 말씀 드리겠습니다. 협회 직원이 먼저 스캐닝을 받기 위해 일반인 방문객 952번부터 잠시 대기가 있겠습니다. 협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새치기를 당하면 불평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이곳만큼은 예외였다.
 불평은커녕 대출과 주희를 선망의 시선으로 바라보며 환호하며 플래시 세례를 터뜨렸다.
 KSA 협회, 아니 정확히는 ISA에서 할리우드와 손을 잡고 스위퍼를 주인공으로 하는 히어로 영화를 제작해 큰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이다.
 만화에나 존재하는 가상의 히어로가 아닌 현실 속에 실재하는 스위퍼는 분명히 매력적인 소재였다.
 실례로 얼마 전 여름방학을 노리고 ‘7인의 영웅들’이란 한일 합작의 영화가 개봉되었었다.
 소위 전대물이라 불리는 공상과학영화로, 양국에서 2,000만이 넘는 관객을 끌어모으며 공전의 히트를 쳤다.
 일본과 한국은 원전 비중이 높은 나라여서 마나 축복의 날 피해도 극심했다.
 그로 인해 인구의 40퍼센트가 줄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2,000만이라는 관객이 얼마나 대단한 숫자인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법에 의해 강제된 스캐닝이긴 하지만 학생들에게는 신나는 이벤트였던 것이다.
 물론 특별 관리 대상으로 지정되면 더할 나위가 없겠지만 극히 희박한 확률이라는 것을 학생들도 이미 알고 있었다.
 때문에 학생들은 마치 아이돌 스타와 같이 동경하는 스위퍼를 직접 볼 수 있다는 기대로도 충분했다.
 그러던 중 스위퍼 전용 승강기를 향해 걸어가는 두 사람을 발견하곤 환성을 지른 것이다.
 “와! 저 사람들이 스위퍼래.”
 “스위퍼들은 AT 파워가 얼마나 나올까?”
 “막 10만 넘고 그러는 거 아냐?”
 “그라운드 제로 들어가는 S급 스위퍼들은 100만도 넘는대.”
 “우리나라에도 셋밖에 없다는 S급들?”
 대출과 주희는 선망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사람들을 향해 굳이 변명하기도 뭐해서 바로 승강기에 올라 서둘러 닫힘 버튼을 눌렀다.
 문이 닫히며 승강기가 움직이자 대출이 입을 열었다.
 “주희야.”
 “응?”
 “돌연변이로 스위퍼가 될 확률이 어느 정도나 된다고 하냐?”
 “글쎄. 10만 명에 한 명 정도나 되나? 나도 정확히는 몰라. 왜?”
 “아니, 그냥.”
 2세대 스위퍼는 대부분이 1세대 스위퍼들이 각성 후에 낳은 자식이었다.
 나머지는 10만분의 1 확률로 발생한 돌연변이였다.
 때문에 9,000을 넘긴 세경이는 돌연변이 2세대로 정말 운이 좋았다. 일단 스위퍼로서 각성만 하면 일확천금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말이다.
 대출 역시 그런 인생 역전을 기대하며 지하 1층으로 내려가는 승강기를 타고 있었고 말이다.
 
  * * *
 
 띵!
 비록 지상 1층과 지하 1층은 딱 한 층 차이지만 50미터는 내려가야 했다.
 가로 세로 높이가 각각 40미터, 40미터, 20미터에 무게는 무려 220톤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기계가 지하 1층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무지막지한 기계였기에 도입 당시에 지하 1, 2, 3, 4층을 모두 터서 거대한 공동空洞을 만드는 작업에만 3개월이나 걸렸다.
 이런 거대한 규모에, 비록 분기마다 한 번 오긴 하지만 대출은 올 때마다 압도되곤 했다.
 미국에서 만들어진 스캐너는 대당 가격이 무려 1조 원이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승강기의 문이 열리자 두 사람은 지하 특유의 서늘함을 느껴야 했다.
 지하 1층의 스캐너 주변은 이중의 방벽이 둘러쳐져 있고 유일한 통로 앞엔 완전무장한 군인들과 당직 스위퍼들이 지키고 있었다.
 안면이 있는 스위퍼와 눈인사를 주고받는 가운데 담당 직원이 두 사람을 맞이했다.
 “황대출 씨, 김주희 씨. 반갑습니다.”
 “예, 수고하십니다.”
 “먼저 황대출 씨부터 신분 확인 부탁드립니다.”
 “알겠습니다. 주희야, 나 먼저 한다.”
 “응. 잘되길 바랄게.”
 “너도.”
 대출은 주희에게 싱긋 웃어 보이고 직원의 안내대로 신분 확인 절차에 임했다.
 -지문指紋 검사, Pass.
 -홍채虹彩 검사, Pass.
 -성문聲紋 검사, Pass.
 대출이 신분 확인을 마치자 흰 가운을 입은 40대의 조사원이 말을 걸었다.
 “어서 오게. 일전에 꽤 고생했다고?”
 스캐너 담당 조사원인 오강환은 과거 2세대 스위퍼로서 활약하다가 현역에서 물러나 새 인생을 살고 있었다.
 오강환은 바로 스위퍼로서의 각성은 스물다섯 살이 한계라던 통례를 깨고 스물아홉 살에 각성한 사람으로, 대출과도 친분이 있었다.
 “오 선배, 말도 마십시오. 나무늘보가 그렇게 빠른 놈인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나무늘보? 아, 타이푸노스! 겉모습만 보고 된통 당하는 스위퍼도 많았지. 어? 아직도 주희랑 같이 일하나 보군?”
 사내가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주희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쩝, 마지막 작전까지는 그랬죠.”
 “아, 근신 처분 받았지! 하하! 잠시 쉰다고 생각해.”
 “예. 근데 언제 풀릴지 몰라 걱정입니다.”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야. 그럼 테스트를 실시할 테니 긴장 풀고 지시대로만 하게.”
 “예. 스무 번도 더 받았는데 긴장은 무슨 긴장입니까. 어서 시작해 주십시오.”
 “하하! 미안하네. 하루 종일 애들 상대하다 보니 입에 붙어서 말이야.”
 손가락에 물려 놓은 맥박계로부터 심박이 정상으로 돌아왔다는 것이 모니터에 출력되었다.
 일반인들은 이런 절차도 없이 대강 스캐닝을 하지만 스위퍼나 특별 관리 대상들은 오차를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 이런 세세한 과정을 모두 거쳐 테스트를 시작했다.
 “자, 그럼 시작하지. 이번엔 꼭 승급하길 바라네.”
 “포기한 지 오래입니다. 괜히 선배님 때문에 스물일곱 살 먹고도 검사 받으러 와야 하잖아요.”
 “하하하, 혹시 아나, 이번에 갑자기 넘을지?”
 “에이! 포기했다니까요.”
 대출은 내심과는 달리 말하며 스캔실로 들어갔다.
 말과는 달리 이번엔 확실히 전과는 다를 것이란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비록 여러 가지 다른 부분이 있기는 해도 문양이 나타난 것만은 사실이니까 말이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스킬을 모른다 뿐이지 이미 각성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AT 파워가 1만만 넘으면······.’
 지금까지 각성에 성공한 스위퍼는 예외 없이 AT 파워가 1만은 넘었다.
 그러므로 대출도 1만을 넘기는 수치가 나올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스캔실의 좌우로는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와 긴장을 풀어 주고 있었다.
 지나치게 들떠서 흥분하거나 혹은 반대로 겁을 집어먹고 위축되어도 검사엔 좋지 않았다.
 그런 사람들도 음악을 들으면서 걷다 보면 평정심을 얻을 수 있었다.
 검사를 수십 번 받은 대출도 이번만은 음악의 효과를 보며 중앙을 향해 걸어갔다.
 대출은 스캐너 정중앙에 위치한 커다란 의자에 앉았다. 그러자 바로 눈앞에 그에 관한 정보가 표시되었다.
 
 -제2종 특별 관리 대상 등록 번호 2,284번 황대출.
 
 그리고 바로 지난 열 번의 검사에서 나온 AT 파워 지수가 모니터에 표시되었다.
 
 -7,112
 -7,119
 -7,202
 (중략)
 -6,803
 -6,714
 
 처음에는 조금씩이라도 올라갔지만 재작년 겨울, 4/4분기 검사에서부터 AT 파워가 하향 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런 경우는 비단 대출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었다.
 보통 스물다섯 살이 넘어가면 AT 파워가 조금씩 약해져 갔다.
 그런데 오강환이 기적적으로 스물아홉 살에 각성에 성공하며 종래의 통설을 깨 버려서 이제는 스물아홉 살까지 검사를 하게 만든 것이다.
 -지금부터 스캐닝을 시작합니다. 혹시 자기 물질을 휴대하고 계시면 즉시 검사를 중단하고 반납하시기 바랍니다.
 입구를 통과할 때 샅샅이 검사했지만 만일의 사태를 위해 다시 한 번 안내했다.
 1조 원이 넘는 장치가 고장이라도 나는 날엔 ‘미안해요.’ 정도로 끝이 날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대출도 다시 한 번 확인한 후 검사에 임했다.
 -그럼 검사를 시작합니다.
 삐, 삐, 삐이이.
 마나란 것이 처음으로 발견된 것은 마나 축복의 날 이후 일주일째 되는 날이었다.
 이란의 한 과학자가 대기 중에 지금껏 보지 못한 새로운 물질을 발견하고 그것에 Mana란 이름을 붙였다.
 그러니까 처음 마나란 이름이 붙여질 때는 판타지 문학에서 단골로 등장하는 마나와는 하등 관계가 없었던 것이다.
 그냥 발견한 과학자의 이름이 우연히 아르다반 마나하스Ardavan Manahas고 과학계에선 새로 발견된 것에 자신의 이름을 붙이는 것은 아주 흔한 일이었다.
 인마대전이 끝난 후 이 마나라는 새로운 물질에 대해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되었고, 스위퍼들이 괴수들을 상대할 때 쓰는 신비로운 초능력의 원천에 마나가 관여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구우웅, 쿵!
 천장에서부터 투명한 유리관이 내려와 황대출이 앉아 있는 의자를 덮었다.
 이것은 황대출의 몸에서 내는 특별한 파장을 약 1억 배가량 증폭하기 위한 특수한 장치였다.
 마나가 인간의 몸에서 융합 과정을 거칠 때 특별한 파장이 나타날 것이란 이론은 꽤 오래전에 정립이 되었다.
 하지만 이론적으로 존재할 미세한 파장을 관측하는 것은 마치 수십억 광년 떨어진 별을 탐색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그것을 가능하게 만든 것이 미국의 나사였고, 지금 미국의 나사 본부가 있는 휴스턴엔 최초의 스캐너 장치가 남아 있다.
 방금 전 황대출과 얘기를 나눈 연구원은 실제 그곳까지 가서 견학을 했는데, 그의 말에 따르면 여기 KSA의 스캐너 장치는 그놈에 비하면 그냥 장난감 수준이라고 했다.
 -오늘 저녁 뭐 먹을래?
 한참 스캐너 장치와 마나에 대해 이것저것 아는 내용을 곱씹고 있는데 모니터에 주희의 얼굴이 보이며 뜬금없는 질문을 했다.
 “서울까지 왔으니 고기 좀 썰자.”
 -그럴까? 늘 가던 데로?
 종종 둘 다 협회에 볼일이 있어 함께 서울로 오면 저녁을 먹곤 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살뜰하기가 자린고비 수준인 주희는 아주 저렴한 식당을 찾았다.
 “아냐. 호텔로 예약해.”
 처음에는 긴가민가했지만 스캐너 기계 앞에 서자 점점 확신으로 바뀌고 있었다.
 사람이 갈망이 크면 모든 게 그렇게 보이는 법이다. 지금 황대출에겐 평소보다 계측 시간이 조금 더 걸리는 것도 같고, 그것조차 자신의 AT 파워가 엄청난 수치로 나와서란 생각마저 들었다.
 -야! 야!
 “아, 응?”
 -너 오늘 왜 그래? 스캐닝을 먼저 받으러 가자고 하질 않나, 비싼 호텔에서 밥을 먹자고 하질 않나. 지금은 또 정신이 나가 있고.
 지금 황대출은 투명한 유리관 안에 갇혀 있고 밖에서는 연방 기괴한 소리를 내며 장치들이 돌아가고 있었다.
 황대출이야 귀찮을 정도로 검사를 받았으니 안에서 딴생각을 할 정도의 여유가 있지만 생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검사를 받는 대부분은 사정이 다르다.
 특히 어린 여학생들 중에는 눈물을 터뜨리거나 비명을 지르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그래서 검사 중 밖에서 다음 차례의 친구 얼굴을 보며 얘기를 나눌 수 있도록 부랴부랴 시스템을 개선했다.
 “그럴 일이 있으니까 오빠만 믿고 예약해. 나가서 얘기해 줄게.”
 주희는 도통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이었지만 영상통화 시간 종료가 임박한 터라 더는 캐묻질 못하고 알았다며 끊었다.
 -검사 종료까지 앞으로 1분 남았습니다.
 스캐닝도 이제 막바지였다.
 지금 황대출을 에워싸고 있는 관은 불투명하게 변해서, 밖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안에서는 보이질 않았다.
 아마 지금 단계는 외부에 노출되어서는 안 되는 극비 공정이라 일부러 시야를 막은 게 아닌가 하고 황대출은 짐작했다.
 흔히들 AT 파워를 단순히 스위퍼들이 가지는 전투력의 양으로 오해하고 관용적으로 그런 의미로 사용되고 있지만, 정확히 말하면 변환 효율이다.
 생명 에너지×변환 효율=스위퍼의 전투력.
 사람들이 변환 효율인 AT 파워를 스위퍼의 전투력으로 이해하는 것은 생명 에너지는 상수常數 취급을 해 버리기 때문이다.
 아직까진 사람의 생명 에너지를 알아낼 방법도 없고 사람마다 생명 에너지가 다른지, 다르면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는 더더욱 미지의 세계다.
 그러니 생명 에너지를 같다고 보면 변환 효율인 AT 파워의 차이에 따라 전투력에서 차이가 나는 셈이다.
 하지만 실제 현장에서 사냥을 해 보면 AT 파워가 낮은 사람이 더 강한 공격을 괴수에게 가하는 예가 드물지 않다.
 정말 생명 에너지의 차이 때문인지 아니면 미국이 해외에 수출하는 스캐너 장비를 다운그레이드해서 빚어지는 오차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미국이 자국의 위성들을 이용해 민간에 제공하는 GPS, 즉 G​lobal positioning system만 해도 적성국의 군사작전에 이용되는 경우를 대비해 고의로 오차를 일으킨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니까.
 스위퍼들이 각국의 전략 병기로서 주요한 군사적 가치를 가지고 있으니 그걸 계측하는 스캐너 장비 역시 마찬가지 아니겠냐는 것은 합리적인 의심일 것이다.
 위이잉.
 관이 다시 투명해지면서 천장을 향해 조금씩 올라갔다.
 -검사가 끝났습니다.
 거의 포기 상태였을 때도 지금 이 순간만은 대출도 긴장했다.
 하물며 크게 기대를 품고 있는 지금은 요동치는 펌프질에 심장이 터져 나갈 것만 같았다.
 ‘제발 일단 1만이라도 넘자.’
 일단 1만이라도 넘겨서 KSA 정회원이 되고 싶었다.
 -3, 2, 1.
 드디어 마지막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다.
 손잡이 의자를 꽉 움켜쥔 대출의 손아귀에 자신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5,000
 -수고하셨습니다. 안녕히 돌아가십시오.
 건조한 안내가 다음 차례를 위해 자리를 비워 줄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대출에게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멍하니 초점 없는 시선으로 모니터에 표시된 숫자만 쳐다보고 있었다.
 -황대출 씨, 수고하셨습니다. 안녕히 돌아가십시오.
 다시 한 번 멘트가 나온 후에야 겨우 정신을 차린 대출은 입구를 향해 힘없이 걸었다.
 ‘5,000? 겨우 5,000이라고?’
 돌아오는 길에 몇 번이고 벽을 짚지 않았다면 다리가 풀려서 주저앉았을지도 모른다.
 대출이 충격을 받은 이유는 비단 스위퍼가 되지 못했다는 것만이 아니었다.
 바로 5,000이란 수치가 가져온 충격이었다.
 AT 파워 5,000은 특별 관리 대상으로 남기 위한 마지노선이었다.
 스위퍼가 되는 데 전혀 관심이 없는, 혹은 포기한 사람이면 5,000 이하로 수치가 떨어지는 것을 오히려 반길지도 모른다.
 더는 귀찮은 검사를 받으러 여기까지 올 필요가 없어졌으니 말이다.
 하지만 황대출은 사정이 다르다.
 그의 직업은 드라이버고 드라이버는 1세대 스위퍼들의 자식 중에 2종 특별 관리 대상자들의 몫이다.
 나라를 위해 헌신한 애국지사나 전몰자에 대한 예우가 미흡하기론 이 시절에도 변함이 없었다.
 애국심이든 가족을 잃은 복수심이든, 1세대 스위퍼들은 AT 파워가 목숨을 촉매로 한다는 사실도 모르고 괴수들과 싸우다 죽어 갔다.
 정부는 그들을 국립 현충원에 안장하고 전공에 따라 각각 태극, 을지, 충무 무공훈장을 추서했지만 유족이 받을 수 있는 연금이 박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온 나라, 아니 전 세계가 아수라장인 마당에 예전처럼 성금도 잘 모이질 않았고, 결국 1세대 스위퍼들의 자식들은 오히려 더 어려운 삶을 살아야 했다.
 ISA가 발족되고 국내에도 지부인 KSA가 생긴 후에야 1세대 스위퍼들의 유족들에 대한 처우 개선을 협회 차원에서 정부에 요구할 수 있었고, 대출이 하는 드라이버 직업도 그중 하나였다.
 스위퍼로서 아직 각성하지는 못했지만 5,000 이상의 AT 파워 수치를 보이는 이들을 특별 관리 대상으로 지정하고 그중 부모를 스위퍼로 둔 자들에 한해 드라이버로 취업할 수 있게 한 것이다.
 대출이 드라이버 연봉을 가지고 불만을 터뜨리지만 그건 같이 일하는 스위퍼들과 비교한 상대적 박탈감일 뿐이다.
 주로 그라운드 투 지역에서 활동하는 대출의 경우 기본급과 각종 수당 등을 합하면 연봉으로 1억 가까이 받는다. 거기에 4대 보험까지 적용되는 정규직이라, 마나 축복의 날 이후 각박해진 시대에 이 정도면 신의 직장까지는 아니어도 충분히 괜찮은 직장인 건 확실하다.
 ‘젠장! 젠장!’
 대출이 복도 중간쯤에 이르러 또 욕지거리를 뱉었다.
 5,000 미만으로 떨어지면 특별 관리 대상 지정에서 해제된다.
 앞서도 말했지만 스물다섯 살 이후로 AT 파워 수치가 반등한 경우는 전 세계에서 한 번도 없다.
 그 말은 다음 4/4분기 스캐닝 시즌의 검사에서 황대출의 AT 파워가 5,000보다 떨어질 것이 확실하다는 얘기다.
 그것은 곧 드라이버 자격증이 날아간다는 의미이고.
 ‘뭐야, 쫓겨나는 거야?’
 스무 살 때부터 해 온 일이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해 오던 일을 이제 와서 그만두면 앞으로 뭘 해서 먹고살지 벌써부터 걱정이다.
 아니, 먹고사는 불안감이 문제가 아니었다.
 스위퍼가 되어 보란 듯이 당당하게 운영이사를 다시 만나려던 계획도 틀어졌다.
 사과를 받기는커녕 7년간 몸담았던 직장에서 쫓겨날 수도 있었다.
 휘청!
 대출은 밀려오는 수치심과 좌절감, 허탈감으로 인해 몸을 가누지 못하고 쓰러질 듯 비틀거렸다.
 덥석.
 “대출이 정신 차려! ······유감이군.”
 쓰러지려는 대출을 부축한 연구원의 위로도 그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멍한 표정의 대출을 본 연구원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의 손을 잡고 게이트 밖으로 안내했다.
 “자, 이리로!”
 게이트 밖에서 순서를 기다리던 주희는 굳은 표정으로 연구원의 손에 끌려 나오는 대출을 보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스캐닝을 받은 후의 표정이 그렇다면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김주희 씨, 입장하시기 바랍니다.
 주희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대출의 어깨를 한번 툭 두드려 준 후 검사를 받기 위해 게이트 안으로 들어갔다.
 “갔다 올게!”
 툭!
 “으, 응······.”
 건성으로 대답한 대출은 다시 생각에 잠겼다.
 한번 떨어지기 시작한 AT 파워가 다시 올라간 건 아직 보고된 사례가 없었다.
 스물아홉 살에 스위퍼가 된 연구원 역시 첫 번째 스캐닝에서 바로 1만을 넘긴 케이스였다.
 그렇다면 다음 4/4분기 검사에서 대출의 AT 파워가 5,000 아래로 떨어지는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다.
 ‘그냥 지금 그만둘까?’
 자격을 박탈당하고 쫓기듯이 드라이버를 그만두는 것은 자존심 상하는 일이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그만두고 싶다.
 적금을 해약하면 이자는 몽땅 날아가겠지만 원금만 회수해도 트럭 하나는 살 수 있을 것이다.
 그걸로 과일이나 농산물을 실어 마을마다 돌며 팔아도 먹고는 살 거고, 다행히 속초에 집은 있으니 그럭저럭 생활은 될 것이다.
 ‘아냐. 자존심이 밥 먹여 줘? 한 번이라도 더 적금 내고 나머지는 뭐 집을 팔든 어떻게든 해서 만기를 채워야지.’
 결국 골똘히 앉아서 그렇게 하기로 생각을 고쳐먹었다.
 중간에 모니터로 주희가 뭐라고 말을 걸었지만 대출은 듣지도 못했다.
 심각한 얼굴로 장고에 장고를 거듭하는 대출을 보며 주희도 걱정스러운 얼굴을 한 채 모니터가 꺼졌다.
 “좋아! 복직되면 그라운드 원에 지원해야겠군.”
 생각을 정리하자 한층 머리가 맑아지면서 대출은 자신도 모르게 입 밖으로 말을 내뱉고 말았다.
 경비를 서던 군인이 의아한 눈초리로 잠시 대출을 바라봤다.
 High risk, High return.
 위험이 크면 대가도 큰 법.
 남은 몇 달 바짝 당기려면 그라운드 투에 비해 수당이 3배는 더 붙는 그라운드 원 작전에 참가해야 한다고 마음먹었다.
 삐잉, 삐잉, 삐잉.
 그때 다시 게이트가 열리면서 주희가 돌아왔다.
 “어휴, 2 올랐어, 2.”
 이제 막 스물다섯 살이 된 주희는 지금 수치가 맥시멈일 것이다.
 7,524.
 1만을 목전에 두고 아깝게 멈췄지만 주희는 별로 아쉬워하지 않았다.
 “응, 그래. 아깝네······.”
 “아깝기는, 쓸데없는 기대는 정신 건강에 좋지 않아.”
 주희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하곤 대출의 안색을 살폈다.
 여태까지는 대출 역시 큰 기대를 가지지 않았는데 오늘은 뭔가 이상했던 것이다.
 ‘하긴, 죽을 뻔한 데다 근신까지 받았으니······.’
 여전히 풀 죽어 있는 대출의 모습에 주희는 위로해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탁!
 주희는 축 처진 대출의 어깨를 탁 치며 호기롭게 말했다.
 “그건 그렇고 사내새끼가 그런 일로 언제까지 기죽어 있을래! 더 이상 할 일도 없는 것 같은데 우리 나가자. 내가 근사한 데서 한잔 쏠게.”
 
 
 
 
 #주희
 
 
 
 반짝.
 타는 듯한 갈증으로 눈을 뜬 대출은 곧 총체적인 난국을 맞이했다.
 속은 울렁거리고 쓰렸으며 머리는 깨질 것 같은 통증이 엄습했던 것이다.
 “으윽! 머리야······.”
 대출은 지끈거리는 머리의 통증을 조금이라도 완화시키기 위해 관자놀이를 지그시 누르며 중얼거렸다.
 어렴풋이 두통의 원인이 떠오르고 있었다.
 “대체 얼마나 마신 거야······.”
 새벽까지 이어진 주희의 위로주가 불러온 당연한 결과였다.
 2차까지는 어렴풋이 기억이 났지만 그 후로는 필름이 끊겨 전혀 기억이 나질 않았다. 엉망진창으로 취한 결과 귀소본능에 의해 집에 돌아온 듯했다.
 하지만 속 쓰림과 두통으로 인해 총체적인 난국을 맞은 지금 기억을 떠올릴 여력이 없었다.
 “으, 으······ 속 쓰려. 무울······.”
 대출은 타는 듯한 갈증을 달래 줄 한 잔의 냉수가 급했다.
 그렇다고 혼자 사는 대출에게 물을 떠다 바칠 사람은 없었다. 아무리 고통스럽고 힘들어도 자신이 해결해야 했다.
 “끄응······.”
 부스럭.
 일단 몸에 가득 찬 알코올 기운을 배출하고 중화시키는 것이 우선이라는 생각에 대출이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응?’
 반쯤 몸을 일으키던 그는 왠지 모를 위화감을 느끼며 고개를 갸웃했다.
 한 줄기 빛도 들지 않아 캄캄한 침실이었다. 하지만 마이 홈의 익숙함이나 편안함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드러난 맨살에 닿는 시트의 감촉도 전혀 달랐다.
 “하긴, 그렇게 취해서 속초까지 가기는 무리였겠지······.”
 아마 주희가 근처의 호텔이나 모텔에 집어넣었다고 생각하며 더듬더듬 스위치를 찾았다.
 침대 곁에 있는 미등의 스위치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의 손이 터치 스위치를 건드려 미등이 밝혀졌다.
 탁.
 화악.
 비록 희미한 미등이라도 칠흑 같은 방 안을 밝히기에는 충분했다.
 부스럭.
 대출은 낯선 방에 대한 호기심보다는 속 쓰림의 해결이 우선인지라 몸을 일으켰다.
 이불 속에서 나오자 에어컨이 충분히 제 기능을 발휘하고 있는지 전신에 서늘한 한기를 느꼈다.
 알고 보니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완전한 나신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갈증 해결이 먼저여서 냉장고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출렁!
 그가 몸을 일으키자 쿠션에 의해 침대가 출렁거렸다.
 그 때문에 달콤한 수면을 방해받은 사람이 있었다.
 부스럭.
 “으응······.”
 멈칫!
 냉장고를 향하던 대출은 방 안에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돌처럼 굳어 우뚝 멈췄다.
 뒤척이며 옹알거리는 음성은, 톤으로 보아 여성이 틀림없었다.
 ‘누, 누구? 서, 설마!’
 머리가 쭈뼛 서며 등골이 서늘해진 대출은 조심스럽게 침대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얇은 시트에 감싸인 긴 머리 생물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반쯤 드러난 매끄러운 어깨에서 허리, 골반으로 이어진 부드러운 곡선.
 확실히 여자였다.
 물론 그 전에, 흐트러진 긴 머리카락이 여자라고 강력하게 웅변하고 있었고 말이다.
 ‘으음!’
 대출은 비록 뒷모습이었지만 상당히 익숙한 신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이미 그의 뇌리 속에는 상대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어제 같이 술을 마신 사람은 주희밖에 없었으니까 말이다.
 그는 단지 진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부스럭.
 “으음.”
 뒤통수에 따가운 시선을 느껴서인지 여자가 다시 뒤척이며 그를 향해 돌아누웠다.
 안 좋은 예감은 적중한다는 통설은 이번에도 들어맞았다. 설마 했지만 역시 주희였다.
 척!
 “헉!”
 하지만 좋지 않은 상황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주희가 희고 매끄러운 다리로 시트를 감싸고 돌아눕는 바람에 전신이 드러났다.
 이미 반쯤 드러났던 어깨는 물론이고 매끄러운 등과 허리에서 급격한 곡선을 그리는 엉덩이까지, 허벅지에 낀 시트로 간신히 중요 부분을 가렸지만 어디에서도 옷의 흔적을 발견할 수 없었다.
 주희 역시 완전한 나신이었다.
 더구나 희고 매끄러운 살결에 남아 있는 붉은 자국들은 지난밤에 벌어진 상황을 대변하고 있었다.
 “후우! 이게 무슨······.”
 털썩.
 대출은 머릿속이 텅 비어 바닥에 주저앉아 중얼거렸다.
 주희는 대출에게 생사를 같이한 직장 동료이자 가장 가까운 친구지 연인은 아니었다. 그런데 정황으로 보아 일선을 넘은 것이 분명했다.
 사실 대출은 주희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성적인 관심은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의 관계가 유지되었다고 믿고 있었다.
 더구나 객관적인 스펙으로 보아 주희는 혈혈단신의 대출에게는 넘치는 상대였다. 괜한 일로 소중한 친구를 잃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휴우! 이제 어쩐다. 망할 놈의 술.’
 어제 있었던 검사 결과도 방금 전까지 그를 괴롭히던 속 쓰림과 두통도 더 이상 문제가 아니었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그보다 더한 충격이었으니까 말이다.
 ‘일단 난처한 상황은 피하자!’
 대출은 일어서서 다시 한 번 침대를 쳐다보았다.
 아무리 고민해 봐도 당면한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도망칠 수도 없었고 피할 문제도 아니었다.
 이미 벌어진 이상, 서로 마주 보고 대화를 통해 책임을 져야 했다.
 그래도 눈이 마주쳤을 때 서로 벌거벗고 있는 어색한 상황은 피하는 것이 좋을 듯했다.
 중간에 깨지 않도록 조심스러운 손길로 시트를 잡아 드러난 곳을 덮어 주려 했다.
 ‘어! 이건 피······.’
 시트를 잡아당기자 드러난 매트리스에는 피가 점점이 묻어 있었다.
 순간 확 떠오르는 생각에 대출은 패닉에 빠졌다.
 ‘서, 설마? 제길! 나이 스물다섯 살에 아직도 처녀였단 말이야?’
 상황은 더욱 나빠졌다.
 혹시나 아무 일도 없었을 수도 있다는 일말의 기대는 완전히 사라진 것이다.
 ‘하아! 얘는 왜 나 같은 놈에게······.’
 주희의 첫 상대가 되었다는 자부심보다 첫 상대로 그를 선택한 주희에 대한 원망이 앞섰다.
 그러나 더 이상 자책해 봐야 소용없었다. 이렇게 된 이상 주희의 처분에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일단 몸이나 가려 주고 나서······.’
 알몸과도 다름없는 주희 때문에 시선도 마땅치 않아 진땀이 흘렀지만 무사히 가려 줄 수 있었다.
 ‘휴우! 이제 됐다. 다음은 내 차롄가. 팬티가 어디에 있나······.’
 침대 주변에 널려 있어 속옷을 찾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먼저 샤워라도 해서 정신을 맑게 하고 싶었지만 참아야 했다. 생각이 정리되기 전에 주희를 깨우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대출은 찝찝한 상태로 주섬주섬 옷가지를 찾아 입고 주희의 속옷을 침대에 올려놓았다.
 그러자 잠시 잊었던 갈증이 다시 찾아와 냉장고를 향했다.
 생수를 한 병 꺼내 들고 한편에 놓인 소파에 앉아 들이켰다.
 벌컥벌컥!
 한 병의 생수로 갈증은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었지만 어색한 상황을 만든 답답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후우······.’
 깊은 한숨을 내쉬며 흐트러진 모습으로 잠든 주희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어쨌든 알몸으로 잠든 평화로운 모습은 보기 좋았다.
 더구나 객관적으로 보아 미인인 주희가 알몸으로 잠들어 있다. 그가 지금까지와는 다른 시선으로 보게 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이 기회에 사귀자고 해 볼까?’
 절레절레!
 하지만 대출은 바로 고개를 저었다.
 모든 일에는 선후가 있는 법이고 연애는 서로의 감정이 우선이었다.
 주희에 대해 이성적인 호감이 아닌 책임감으로 사귀자고 하는 것은 자기만족이고 변명에 불과할 뿐이다.
 더구나 그에게는 남몰래 좋아하는 여자가 있었다.
 상대는 아이돌과도 같은 여신이라 처음에는 팬과 같은 막연한 동경이었다.
 대출의 경우 KSA 소속 드라이버라는 직업상 협회나 현장에서 많은 스위퍼들을 보아 왔다. 마법사들 역시 일반인에 비하면 자주 보았고 말이다.
 그런데 여성 스위퍼나 마법사의 공통점 중에 하나가 굉장한 미인이라는 것이다.
 그것도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정도가 아닌, 미스코리아 뺨치는 초절정 미인이다.
 그녀들 가운데서도 3대 여신의 한 사람인 한승연 마법사를 그가 좋아하는 것은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아마 별다른 계기가 없었다면 그 역시 팬으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한데 최근에 두 사람은 우연히 직접 만나게 되었다. 스쳐 지나간 것이 아닌 1대1로 말이다.
 상대는 바로 그의 목숨을 구해 준 3대 여신의 한 사람인 한승연 마법사였던 것이다.
 절체절명의 순간에서 그에게 구원의 손길을 뻗어 준 그녀와의 만남은 영원히 잊지 못할 기억으로 남았다.
 이후 그는 운명을 느꼈고, 그녀에 대한 동경은 짝사랑으로 변해 갔다. 비록 그녀는 기억하지 못하고 이루어지기 힘든 사랑이지만 말이다.
 ‘짝사랑이지만 그녀에게도 죄를 짓는 것이고 말이야. 쩝, 답이 없네, 답이!’
 친구로서 몇십 년을 지낸 남녀 사이라도 일단 잠자리를 같이하면 둘 중 하나였다.
 연인으로 발전하거나, 인연을 끊게 된다.
 그런데 두 가지 결과 모두 대출에게는 전혀 반갑지 않았다.
 아무리 술에 취했다고는 해도 둘 사이의 관계를 망쳐 버린 자신을 원망할 뿐이었다.
 ‘하아······ 계집애, 말리지 않고······.’
 말렸다면 멈췄을지도 의문이지만, 주희 역시 취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기억나지 않는 부분에 서로가 합의했거나 당시의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렀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소파에 앉아 고민과 번민을 거듭하는 중에도 생리 현상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점점 대출의 눈꺼풀이 무거워지며 수마가 찾아온 것이다.
 
  * * *
 
 “야, 그만 일어나!”
 짝!
 등짝에 화끈한 충격을 느끼고 대출은 부스스 눈을 떴다.
 밝은 조명 아래 고리눈을 뜬 주희의 얼굴이 보였다.
 “어?”
 비록 성난 표정을 하곤 있지만 말짱히 옷을 입고 눈은 웃고 있었다.
 웃고 있는 그녀의 눈을 보니 새벽에 있었던 일이 꿈만 같았다.
 그녀의 얼굴에서 침대로 시선을 돌리자 이미 깨끗이 정리되어 있었다.
 대출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 그녀의 얼굴과 정리된 침대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혹시 정말 어젯밤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아냐! 그럴 리가 없어!’
 정말 보이는 대로 꿈이라면 좋겠지만 절대 그럴 리는 없었다. 그 증거로 그는 소파에서 눈을 떴으니까 말이다.
 대출이 상황 파악에 곤란을 겪고 있자 주희가 재촉했다.
 “뭐 해? 출근해야 할 것 아냐. 어서 준비해!”
 “출근?”
 “이게 잠이 덜 깼나? 너 근신이지 회사 잘린 건 아니잖아. 나중에 어떻게 되든 일단 회사에는 나가야 할 거 아냐.”
 “아!”
 “어서 일어나. 나도 속 쓰려 죽겠는데 근처에서 해장이나 하고 가자.”
 “어, 어. 알았어.”
 마치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한 주희의 행동에 대출은 혼란스러웠다.
 아무리 주희가 어른스럽고 털털한 편이지만 지난밤에 있었던 일은 절대 대수롭게 넘길 게 아니었다.
 ‘얘도 지금까지의 관계를 망치기 싫어서······? 맞아! 그럴 거야. 그렇다면······.’
 대출이 주희에서 손을 끌려 식당에 들어가는 동안 곰곰이 생각한 결론이었다.
 그 역시 원하는 바였기에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마저 없던 일로 넘어갈 수는······.’
 피해서만은 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 대출은 말을 꺼내려 했다.
 “저, 주희야.”
 “시간 없으니까 빨리 먹고 가자. 이왕 쏘는 것 해장국도 내가 쏠게. 난 선짓국. 너도 선짓국이면 되지?”
 “어? 응.”
 일부러 말을 돌리는 주희였다.
 ‘그래, 일단 밥부터 먹고.’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했고, 사실 속도 쓰리고 배도 고팠다. 더구나 당장 어떻게 말을 꺼내야 좋을지도 몰라 밥을 먹는 동안 더 생각해 보기로 했다.
 곧 음식이 나왔고 생각보다 맛이 있어 두 사람은 먹는 것에 집중할 수 있었다.
 꿀꺽꿀꺽!
 “으으! 이제 살겠네.”
 “나도!”
 허겁지겁 한 그릇을 뚝딱 비우고 물을 마시고 나자 식탁엔 어색한 침묵만이 남아 있었다.
 그 침묵이 싫었던 주희가 먼저 일어서며 말했다.
 “자! 늦겠다. 어서 가자!”
 “주희야, 잠깐 앉아 봐!”
 덥석!
 대출은 얼떨결에 일어서는 그녀의 손을 잡아 앉혔지만 다음에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뭐라고 하지? 그냥 무조건 잘못했다고 빌어? 하라는 대로 다 하겠다고?’
 대출은 그 어떤 말도 무책임하고 뻔뻔스럽게 느껴져 쉽게 입을 떼지 못했다.
 하지만 그런 대출의 고민을 주희가 덜어 주었다.
 털썩.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자리에 앉은 주희가 먼저 입을 열었던 것이다.
 “알아.”
 “······.”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대출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음에 나올 말을 기다렸다.
 “네가 나를 연인으로서 좋아하는 게 아니란 정도는 나도 알아.”
 약간 잠긴 듯한 주희의 목소리에 대출은 쥐구멍이라도 파고 들어가고 싶었다. 그저 처분에 맡기겠다는 생각으로 고개를 푹 숙였다.
 “······.”
 고개 숙인 대출을 잠시 쳐다보던 주희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프러포즈도 반쯤은 술에 취해서란 것도 알고.”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대출의 뇌리가 하얗게 변해 갔다.
 ‘헉! 내가 프러포즈를? 취한 게 아니라 완전히 미쳤군, 미쳤어!’
 아무리 전날 밤의 기억을 떠올리려 해도 조금도 생각나지 않았다.
 “하지만 내게 프러포즈할 때 넌 무척 진지했어. 내 눈을 똑바로 보고 말했거든.”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대출은 주희가 뭐라 해도 할 말이 없었다.
 ‘너도 꼭지가 돌았겠지. 그러니까 진지하게 보였을 테고.’
 취한 사람은 절대 취했다고 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그리고 남들에게는 엉망으로 취해 횡설수설하는 것으로 들려도 당사자인 두 사람은 대화가 된다.
 비록 깨고 나면 기억하지 못하지만 말이다.
 대출은 어젯밤도 그런 상황이었다고 짐작했다.
 아무런 일도 없었다면 서로 기억하지 못하고 지나가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 대형 사고를 치고 만 것이다.
 대출이 다시 술을 마시면 개새끼라고 생각하며 후회하는 와중에 주희의 말이 이어졌다.
 “아무튼 난 인생에서 처음으로 받은 프러포즈이고 더구나 첫 경험이었어. 그러니까 만일 술김에 그랬다고 하면 가만히 안 둘 거야.”
 딸꾹!
 ‘혼빙간, 혼빙간······.’
 대출의 머릿속에 혼인빙자간음죄婚姻憑藉姦淫罪란 단어가 떠올랐다.
 맥락을 보면 숫처녀를 결혼하자고 꾀어 술에 취하게 해 욕심을 채운 놈이 되었다.
 비록 위헌판결을 받아 효력은 상실했지만 인간쓰레기가 되기에는 충분했다.
 폐쇄적인 사회인 협회에서도 쫓겨날 것은 분명했고, 두 번 다시 얼굴을 들고 다니지 못할 것이다.
 눈앞이 깜깜해진 대출이 당황해 입을 열었다.
 “주희야, 설마 내가······!”
 하지만 주희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고개를 저어 말문을 막은 그녀는 대출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하지만! 당장 결혼하자고 할 생각은 없어. 나를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는 남자와 결혼할 생각은 없으니까 말이야.”
 ‘휴······.’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대출의 표정을 본 주희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다고 대놓고 안심하면 내 기분이 좋을까?”
 “어? 누, 누가 안심했다고.”
 “까불지 마! 내가 너랑 몇 년을 지내 왔는데 네 생각 하나 모를까!”
 사실 출근하면 화장실 가는 시간만 빼고는 계속 붙어 있어야 했다.
 대출 역시 주희의 표정으로 속내를 대충 짐작할 수 있는데 여자인 주희야 말할 필요도 없었다.
 마땅히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해 우물거리는 대출에게 주희가 최후의 일격을 가했다.
 “하지만! 우리 관계가 확실해질 때까지 절대 다른 여자에게 추근대서는 안 돼! 그러면 너 죽고 나 죽는 거야.”
 “으, 응.”
 딸꾹.
 사나이 황대출의 화려한 싱글 라이프는 스물일곱 살을 마지막으로 완전히 끝났다.
 2년 뒤 적금을 타면 1년간 휴직하며 세계 곳곳의 모든 여자를 만나 보려고 했던 그의 원대한 꿈도 함께 막을 내렸다.
 “할 말 있으면 퇴근 후에 다시 하고, 일단 출근하자.”
 “으, 응······.”
 결국 주희의 페이스에 말려든 대출은 힘없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축 처진 대출을 보며 주희는 혀를 찼다.
 ‘흥! 이젠 넌 내 거야. 나한테 선택받은 걸 오히려 고마워해야 한다고!’
 계산하는 주희의 목소리는 한결 경쾌해졌고 말이다.
 “아줌마, 잘 먹었어요!”

댓글(3)

콩알이네1    
재미없음 잡설만길고
2020.04.18 10:54
불방망이    
판타지에 잘 등장하지않는 여자 캐릭터는 괜찮네요! 괜히 빼고 내숭까면 고구마같은데...
2020.04.25 02:45
풀님    
요새 워낙 비슷한 내용이 많고 뒷내용이 짐작되어 중도포기한 경우가 있는데 완결작이라 그런지 잘 읽히네요. 허술한점은 많은데 그래도 뒤가 궁금한 장편 드라마보는 기분으로 잘 보고 갑니다
2023.05.01 19:48
0 / 3000

이용약관 유료이용약관 개인정보처리방침 청소년보호정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