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함
뒤로가기버튼 천황무 [E]

천황무 1

2018.02.26 조회 492 추천 3


 천황무 1권
 1장 독보천하(獨步天下)
 
 
 무이산(武夷山)!
 복건성(福建省)과 강서성(江西省)에 걸쳐 장대하게 솟아 있는 산!
 주자(朱子) 강학(講學)의 문공서원(文公書院)이 이곳에 자리하고 있으며 대나무가 많다.
 
 덥다.
 머리 위에 솟아 있는 태양은 대지를 녹일 것 같은 열기를 내뿜고 있다.
 그런데 이글거리는 폭염 속에 더운 입김을 내쉬며 무이산을 오르고 있는 한 사람이 있다.
 대략 이십 세 가량의 청년인데, 훤칠한 키에 알맞은 살집을 지녔다.
 어느 누가 보더라도 감탄할 정도로 미끈하게 뻗은 몸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얼굴은 사람들이 결코 감탄할 정도가 아니다.
 백짓장처럼 창백한 안색.
 하늘을 향해 벌렁 뒤집혀진 코에, 눈매는 가늘고 길어 왠지 보는 사람에게 섬뜩한 인상을 주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청년의 눈빛!
 송곳처럼 빠끔하게 드러난 눈빛만은 얼굴의 생김새와는 달리 너무 맑아 마치 어린아이의 눈을 보는 것 같다.
 그래서 더욱 이 청년에게는 이질감이 느껴진다.
 
 “헉! 헉!”
 청년은 황소처럼 더운 입김을 뿜으며 무이산을 오르고 있었다. 그의 허리에는 긴 쇠밧줄이 묶여져 있고, 일 장 뒤로 하나의 거대한 관이 끌려오고 있다.
 그러고 보니 청년은 지금 관을 끌고 이 험악한 무이산을 오르고 있는 것이다.
 뿐이랴.
 관 위에는 한 명의 노인이 드러누워 태평하게 부채를 살랑이고 있었다.
 그 노인은 누구라도 한번 보면 눈살을 찌푸릴 노인이다.
 등은 낙타처럼 튀어 올라 꼽추라는 것을 말해 주었다. 그리고 그나마 있어야 할 왼쪽 다리는 허벅지에서부터 잘려나간 불구의 몸이다. 게다가, 머리는 몸집의 반을 차지하리만큼 기형적으로 큰 것이다.
 그야말로 세상에서 별로 구경할 수 없는 괴인(怪人)이다.
 끼이익!
 청년은 계속해서 무이산을 오르고 있었다.
 웬만한 사람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을 청년은 하고 있는 것이다.
 말이 관(棺)이지, 전체가 쇠로 만들어져 있다.
 게다가 크기는 보통 관의 서너 배는 족히 되어 보인다.
 무게만도 삼백 근 이상이 될 것 같다.
 거기에 노인의 체중까지 올려져 있으니!
 그만한 무게를 이끌고 험악한 무이산을 오른다는 것은 일반인으로서는 생각도 할 수 없다.
 “헉··· 헉······.”
 청년의 전신은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시야를 어지럽히는 땀을 연신 소맷자락으로 훔쳐내며 무이산을 오르는 그 모습이 위태롭다.
 무질서한 걸음걸이가 얼마 가지 않아 쓰러질 것 같기만 하다.
 청년은 비틀거리며 시선을 노인에게 돌렸다.
 애원의 눈빛이다.
 노인을 응시하는 청년의 흉악한 얼굴에는 짙은 애원이 담겨 있다.
 “사부! 제자는 더 이상 걸을 수 없습니다.”
 청년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같이 비틀거렸다.
 노인은 그럼에도 한가하게 부채질을 하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이놈아! 그런 얄팍한 꾀에 넘어갈 사부는 아니다,”
 청년은 더욱 숨을 헐떡거렸다.
 “그러시다면 잠깐만 쉬었다가 산을 넘는 것이··· 아무래도 이대로 가다가는······.”
 청년의 애원 서린 말이 끝나기도 전에 노인의 고개가 청년을 향했다.
 청년의 애원 섞인 눈빛과는 달리 청년을 바라보는 노인의 눈빛은 매섭다.
 “죽기라도 할 것 같다는 말이냐?”
 “허헉, 아마 그렇게 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듭니다.”
 “크흣!”
 노인은 괴상하게 웃었다.
 “큿! 너는 지금까지 죽을 것 같다는 말을 수백 번은 더 했다. 나부산(羅浮山)을 오를 때도 너는 죽을 것 같다고 했었다. 그러나 너는 나부산을 넘었다. 그때는 지금보다 더 더웠다.”
 청년의 눈빛이 흐릿해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정말 기분이 좋지 않은 것 같습니다.”
 노인은 여전히 괴상한 미소를 짓고 있다.
 “기분이 어떻기에?”
 “아랫도리에 힘이 빠지고······.”
 “그리고 또 뭐냐?”
 “눈앞의 대나무가 이상하게 노랗게 보입니다.”
 노인은 부채를 살랑거리며 자신 있다는 음성으로 말했다.
 “그런 것이라면 걱정하지 마라. 치료 방법이 있다.”
 “어떻게 치료합니까?”
 “이것이면 된다.”
 말이 끝나는 순간이다.
 스으으!
 노인의 손이 언뜻 미미하게 움직이는 것 같았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스윽!
 노인의 손안에 들려 있던 합죽선(合竹扇)이 느리게 청년을 향해 날아갔다.
 그냥 날아가는 것이 아니다.
 노인의 손을 떠난 합죽선은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인 양 흔들거리며 청년의 회음혈(會陰穴)을 향해 날아갔다.
 “허억!”
 청년은 다급한 헛바람을 들이켰다.
 이로 보아 청년이 얼마나 노인을 두려워하는가를 짐작할 수 있었다. 청년은 황급히 몸을 움직였다.
 그것은 자신의 회음혈을 향해 날아드는 합죽선을 피하려 하는 일련의 행동이다.
 생김과는 달리 청년의 동작은 눈부시고 정교했다.
 몸을 가볍게 움직였다고 느낀 순간에 이미 청년은 허공과 지면을 사이에 두고 무려 서른여섯 번의 방위 이동을 펼쳐내고 있었다.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밧줄에 묶여 행동이 부자연스런 가운데 청년이 펼쳐낸 일련의 보법(步法)은 내로라하는 무림의 고수들이라도 흉내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더욱 놀라운 것은 청년이 아니라 노인이다.
 부채는 구렁이처럼 청년의 회음혈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청년의 몸이 움직이는 그 순간에 부채의 움직임은 갑자기 천변만화(千變萬化)를 일으켰다.
 파파팟!
 무수한 선영(扇影)이 허공에 피어 올랐다.
 그것은 회오리치듯 기이한 각도에서 살아 움직이는 듯했다.
 청년의 회음혈을 사방에서 찔러오는 그 공세!
 느린 듯 빠르고, 없는 듯 있으며, 환(幻)과 변(變)이 정신없이 일어나는 그 간단한 손놀림.
 막 지면에 내려서던 청년의 엉덩이가 바짝 경직되었다.
 이윽고 비명이 터져 나왔다.
 “윽!”
 회음혈은 고통에 민감한 곳이다.
 청년의 발끝이 곧추서고 양볼은 고통을 이기느라 풍선처럼 부풀어올랐다.
 그 사이에,
 휙!
 합죽선은 간단하게 노인의 수중으로 자석에 이끌리듯 빨려들었다. 노인은 합죽선을 활짝 펼쳐 바람을 일으키며 괴상한 웃음을 지었다.
 “큿! 그만하면 이 무이산을 넘는데는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으으!”
 청년은 짐승 같은 신음을 흘리며 노인을 바라보았다. 그런 청년의 눈빛에는 원망과 애원이 복잡하게 뒤엉켜 있다.
 노인은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관 위에 벌렁 드러누우며 합죽선을 살랑거렸다.
 “큿! 어떠냐? 이제는 대나무가 파랗게 보이느냐?”
 청년의 얼굴은 일그러졌다.
 “이러다가는 똥줄이 막혀 죽지······.”
 청년은 다시 산을 오르려는 듯 까마득한 무이산의 정상을 바라보았다.
 “큿! 그러니깐 요령 피울 생각은 하지 마라. 지금 네가 끌고 가는 무게는 고작 삼백팔십 근에 불과하다. 그것 좀 끌고 무이산을 오른다고 죽을 너는 아니다.”
 삼백팔십 근!
 그럼에도 노인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하고 있다.
 청년은 다시 발길을 옮겼다.
 끼이익!
 괴괴한 음향과 함께 관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부님만 아니라면 팔십 근은 가벼워지는데··· 그렇다면 제자는 이렇게······.”
 관 위에 누워 있던 불구의 노인은 버럭 고함을 질렀다.
 “놈아! 그럼 이 사부에게 죽으라는 말이냐?”
 청년은 볼멘 음성으로 낮게 투덜거렸다.
 “기왕 죽을 거면 멀쩡한 제자 고생시키느니 그냥 가 버리면 남은 사람이나 편안하고··· 묏자리는 남향으로 잡아······.”
 아무리 낮은 청년의 음성이라고는 하지만 노인이 그것을 못 알아들을 리 없다.
 “뭐야? 이놈!”
 청년은 다시 움찔거렸다.
 그러나 곧이어 그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은 채 무이산을 오르고 있다.
 ‘빌어먹을··· 귀는 밝아 가지고······.’
 청년은 다시 더운 입김을 뿜으며 산을 오르고 있다.
 이글거리는 폭염!
 괴괴한 음향을 발하며 끌려가는 관!
 아직은 모든 것이 의문이다.
 그때였다.
 청년이 무이산의 중턱에 이르렀을 때 두 사람의 전면으로부터 살기 어린 음성이 들려왔다.
 “서백후(徐伯侯)! 이번에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이 무이산을 네놈들의 무덤자리로 만들어주고 말 것이다.”
 끽!
 청년의 발걸음이 그대로 멈춰졌다.
 그리고 태연하게 관 위에서 합죽선을 살랑거리던 노인의 고개가 음성이 들려온 곳으로 돌려졌다.
 
 ***
 
 폭양이 이글거리는 산정.
 일단의 무리들이 형형한 안광으로 두 사람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던 듯했다.
 한 팔과 한쪽 다리가 없는 불구자가 있고, 풍만한 여체가 고스란히 얼비치는 나삼자락 하나만을 간신히 걸치고 있는 농염한 여인의 모습이 보인다.
 오른쪽 눈이 없는 외눈박이 노인이 있는가 하면, 폭양의 날씨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색동옷을 걸친 노인도 있다.
 모습은 달랐지만 이들에게 한 가지 공통된 것이 있다면 두 사람을 응시하는 눈빛이다.
 살기(殺氣)!
 청년과 노인을 응시하는 그들 중 한 사람이 앞으로 한걸음 다가섰다.
 색동옷을 걸친 우스꽝스런 노인이다.
 유난히도 두 팔이 키에 비해 긴, 기형의 노인.
 “서백후, 너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이 무이산을 넘지 못할 것이다. 오늘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아우의 원한을 갚겠다.”
 그렇게 말을 하고는 있지만, 노인의 눈빛 깊숙한 곳에는 일말의 두려움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말이다.
 서백후!
 이들은 분명 노인을 서백후라고 불렀던가?
 
 ― 독보괴협(獨步怪俠) 서백후(徐伯侯)!
 
 이 이름은 이미 오십 년 전 중원무림을 뒤흔들었다.
 
 ― 천지쌍괴(天地雙怪)!
 
 당대 무림의 최강자로 알려진 두 명의 괴인!
 그 중 북괴(北怪)로 불리는 서백후다.
 서백후는 정사지간(正邪之間)의 인물이다.
 일정한 거처가 없고 성격이 괴이해 누구와도 타협을 모른다.
 무학만으로 따진다면 남괴(南怪)인 벽사신괴(碧邪神怪)를 능가하는 천하최강의 인물로 떠오른다.
 그런데 천지쌍괴는 십년 전에 홀연히 중원무림에서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세간에는 이러쿵저러쿵 갖가지 추측만이 풍문으로 떠돌았을 뿐. 풍문은 풍문으로 바람이 한때 지나가듯 잠시 떠돌다 가라앉았다.
 어느 누구도 천지쌍괴의 행방은커녕 자취나 흔적조차 찾지 못했다.
 그리고 오년 전, 돌연 북괴인 서백후만이 중원무림에 나타났다.
 그때는 중원무림이 대혈겁(大血劫)에 휘말려 있을 때다.
 
 ― 무림마녀(武林魔女) 반야음(潘夜蔭)!
 
 희대의 대마녀!
 그녀가 중원에 나타나자마자 중원무림은 혼돈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녀를 만나거나 알고 있는 사람은 모조리 그녀의 손에 죽었다.
 잔잔하던 중원무림은 일시에 상풍패속(傷風敗俗)으로 빠져들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손에 죽었는지는 수효를 헤아릴 수 없다.
 특히 중원무림의 이름 있는 기재(奇才)들이 그녀의 손에 죽은 것으로 전해졌다.
 워낙 가공한 무학을 지녔으며 손속이 잔인하기로 소문난 반야음이었다.
 때문인가?
 중원무림이 그녀를 무림의 공적으로 몰았으나 끝내 그녀를 죽이지는 못했다.
 그때 나타난 사람이 서백후다.
 아미산(峨嵋山)의 금정봉(金頂峯)에서 벌어진 서백후와 무림마녀 반야음의 대혈투.
 두 사람의 대결은 무려 칠주야 동안 계속되었다.
 마침내 일대의 마녀였던 반야음도 결국 천하무적을 자랑하는 서백후의 무학 앞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그러나 무슨 이유였을까?
 서백후는 반야음을 죽이지 않은 것이다.
 죽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는 중원무림이 반야음을 인도해 줄 것을 요구했건만, 묵살한 채 반야음과 함께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 독보괴협 서백후를 죽여라.
 
 중원무림은 분노했다.
 반야음에게 향해 있던 복수의 칼날이 이번에는 서백후에게 향한 것이다.
 그로부터 지금까지 서백후는 중원무림의 공적으로 몰려 수많은 생사의 위기를 넘겨야 했다.
 
 색동옷을 걸친 노인은 서백후가 누워 있는 관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서백후! 지금이라도 그 관을 내놓는다면 우리는 물러가겠다.”
 서백후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합죽선을 살랑거렸다.
 “큿! 어휴, 더워! 날씨가 더워서인지 헛소리를 하는 놈들이 많아졌군.”
 아예 신경 쓸 것도 없다는 태도다.
 색동옷을 걸친 노인의 얼굴이 무참하게 일그러졌다.
 ‘감히 이 적미공(赤眉公)을 안중에도 두지 않다니?’
 적미공!
 마도무림(魔道武林)에서 상당한 명성을 지닌 인물이다.
 심성이 잔인하여 독심객(毒心客)이라고도 불린다.
 그런 적미공을 서백후는 어린아이 다루듯 하는 것이다.
 “서백후! 네놈이 아무리 천지쌍괴 중 한 사람이라 해도 이제는 죽을 날만 기다리는 병신이라는 것은 천하가 다 안다.”
 “큿! 그래도 너보다는 오래 살 것이다.”
 “괜한 호기 부리지 마라. 만약 우리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네놈은 물론이요, 네놈의 제자까지 살아남지 못한다.”
 적미공의 눈에는 살기가 등등했다.
 그러나 서백후는 여전히 합죽선을 살랑거릴 뿐이다.
 그리하여 막 적미공 일행이 두 사람에게 거리를 좁혀오는 순간, 서백후가 돌연 청년을 불렀다.
 “풍천아, 이리 오너라.”
 청년은 노인에게 다가갔다.
 허풍천(許風天), 그것이 청년의 이름이다.
 십년 전, 서백후가 중원무림을 떠났을 때부터 서백후의 제자로 길러졌다.
 서백후가 반야음의 사건에 휘말려 도피생활을 시작하면서 그의 제자인 허풍천의 고행도 시작되었다.
 서백후의 시선이 적미공을 향했다.
 “너는 저 자가 누구인지 아느냐?”
 허풍천은 두 눈을 끔벅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어디서 본 늙은이는 분명한데··· 워낙 기억력이 좋지 않아서······.”
 서백후는 합죽선을 접으며 느긋하게 말했다.
 “하기야, 많은 것을 너에게 요구한 내가 잘못이지··· 쯧쯧······.”
 “눈에 익은 저 늙은이가 누굽니까?”
 “적미공이라는 놈이다.”
 “적미공?”
 허풍천은 그래도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버릇이 형편없는 놈이다. 나부산에서 자기 검에 자기가 찔려 죽은 적사공(赤士公)이라는 놈의 쌍둥이 형쯤 되는 놈이다.”
 허풍천의 얼굴에 반색이 떠올랐다.
 “아! 이제 생각이 났습니다. 그 늙은이는 나를 찌르려다가 내가 싹 피하는 바람에 앞으로 고꾸라졌죠. 그래서 자기 검에 자신의 아랫도리를 찔려 바닥을 뒹굴다가 죽은, 그 멍청한 늙은이 아닙니까?”
 허풍천은 몸짓까지 해대며 장황하게 당시의 상황을 늘어놓았다.
 서백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놈의 형이라는 놈이다.”
 허풍천은 돌연 의아하다는 듯 서백후에게 물었다.
 “그런데 왜 저를 불렀습니까?”
 서백후는 또다시 관 위에 벌렁 드러누우며 합죽선을 흔들었다.
 “이번에도 네가 나서야 할 것 같다. 이 늙은이가 나서기에는 날씨가 너무 더워······.”
 허풍천의 흉측한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러나 그는 서백후의 명령을 어길 생각은 하지 못했다.
 “제기랄··· 하필이면 이 더운 날씨에 말썽이냐?”
 허풍천의 얼굴에는 짜증이 더덕더덕 서렸다.
 상대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이 더운 날씨에 움직여야 한다는 짜증이다.
 그는 신경질적으로 서백후에게 물었다.
 “어떻게 할까요?”
 서백후는 잠시 시선을 돌려 적미공을 바라보았다.
 “너무 작아 때릴 구석이 있어야지. 그렇다고 그냥 넘어가기에는 감히 노부에게 범한 무례가 너무 크니······. 할 수 없다. 어금니 두 개만 부러뜨려라. 정신이 번쩍 들게 말이다.”
 허풍천은 헤픈 웃음을 지었다.
 “그러니까 일계백벌(一戒百罰)로 다스리라는 말씀이시군요?”
 서백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놈아! 일계백벌이 아니라 일벌백계(一罰百戒)다. 그렇게 가르쳐 줘도 순서하나 제대로 외우지 못하다니······. 그런 머리로 네가 무공을 익혔다는 것이 영원히 풀리지 않을 네놈의 삼대불가사의(三大不可思議) 중 하나다.”
 “삼대불가사의? 그것이 무엇입니까?”
 서백후는 한심하다는 듯 허풍천을 바라보았다.
 “그거야··· 나같이 잘생긴 사부 밑에 너같이 못생긴 제자가 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요?”
 “마지막은 도수(盜首) 소상아(簫裳娥)라는 멀쩡하게 생긴 계집아이가 너를 죽자살자 따라다니는 것이다.”
 허풍천은 헤프게 웃었다.
 그의 웃음은 괴이했다. 웃을 때마다 입안이 훤하게 드러나 보이는 것이다.
 바보스런 웃음이랄까?
 “후후훗! 그거야, 소상아가 눈이 워낙 뛰어나기에 그런 것이 아닙니까?”
 두 사람이 태연하게 농담을 즐길 때다.
 적미공을 비롯한 그들의 안색이 붉으락푸르락 변했다.
 “이런 놈이!”
 “아예 주둥이를 뭉개 버리겠다.”
 실로 무참하게, 자신들을 앞에 두고 이렇게 농담이나 즐길 수 있는 사람은 천하에 아무도 없을 것이다.
 적미공이 앞으로 다가서는 순간, 허풍천이 손을 들어 적미공의 걸음을 제지했다.
 “아! 잠깐만 기다려라!”
 적미공의 살기등등한 음성이 흘러 나왔다.
 “무슨 헛수작이냐?”
 “푸훗, 이렇게 더운데 천천히 하자.”
 허풍천은 적미공 앞으로 다가갔다.
 허리에는 여전히 쇠밧줄이 매달려 있어 그의 행동에 상당한 제약을 주었다.
 그러나 허풍천은 그런 것은 개의치 않았다.
 허풍천은 적미공의 얼굴을 빤히 응시하며 말했다.
 “늙은이가 적미공이지?”
 늙은이!
 적미공은 지금까지 자신을 이렇게 부른 청년은 만나지 못했다.
 적미공의 얼굴이 꿈틀거렸다.
 “흐흐흐! 네놈의 혓바닥이 얼마나 질긴지 꼭 씹어 보아야겠다.”
 살기 서린 적미공의 말에도 허풍천의 얼굴은 변함이 없다.
 허풍천은 모르고 있는 것이다.
 눈앞의 적미공이 얼마나 무서운 인간인가를.
 그는 적미공의 살기등등한 모습은 개의치 않은 채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을 늘어놓았다.
 “푸후후! 내가 궁금한 것은 당신의 이빨이 얼마나 튼튼한가 하는 것이지. 늙으면 이빨에도 힘이 없어진다는데··· 두 개를 부러뜨리는데 네 개를 부러뜨릴 힘을 사용하기에는 오늘 날씨가 너무 더운 것 같아서······.”
 이 얼마나 속이 뒤집히는 소리인가!
 더 이상 듣고 있을 적미공이 아니었다.
 “이런 애송이 놈!”
 벼락같은 호통이 적미공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순간, 이미 적미공의 왜소한 신형은 상상할 수 없는 빠름으로 허풍천을 향해 짓쳐들고 있었다.
 마도무림의 거효(巨梟)가 살기 서린 모습으로 포효하자, 주위는 무서리쳐지는 살기로 뒤덮였다.
 
 
 2장 유중혈(乳中穴)과 유근혈(乳根穴)의 차이
 
 
 “네놈의 목을 비틀어 버리겠다.”
 적미공의 왜소한 단구가 환상처럼 움직였다.
 파파팟!
 기형적으로 긴 그의 쌍수(雙手)가 벼락같은 기세로 허풍천의 목을 휘감아 오고 있었다.
 이미 마도무림에 익히 알려진 거마(巨魔)다.
 단지 쌍수가 한번 휘저어지는 것 같았는데 허공에는 수백 개의 수영이 휩쓸었다.
 그것은 세기(細氣)를 동반한 채 허풍천의 전신을 휘감았다.
 그는 이 한 수에 자신의 십성 공력을 실었다.
 이 정도의 공세라면 웬만한 고수라도 목숨이 날아가고 말 것이다.
 그때 나삼을 걸치고 있는 농염한 여인의 입가에 야릇한 미소가 서렸다.
 ‘적미공의 천응혈조(天鷹血爪)다.’
 천응혈조!
 이는 적미공의 성명절학이 아닌가?
 숙명의 적수를 만나지 않는 한 잘 사용하지 않는 무학이다.
 ‘놈이 아무리 서백후의 제자라고는 하지만 적미공의 천응혈조 앞에서 목숨을 온전하게 부지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허풍천은 헤픈 웃음을 짓고 있었다.
 “푸흐흐! 그 손에 만약 부채가 들려 있다면 지금의 나를 시원하게 해주었을 텐데··· 매우 아쉽군.”
 허풍천은 웃으면서 그 자리에서 허리를 움직였다.
 그의 움직임은 좀 특이했다.
 두 발은 지면에 그대로 둔 채 허리만 꺾고 틀며 적미공의 가공할 공세를 모조리 피해내는 것이었다.
 ‘이런 일이?’
 단지 피해내는 것만이 아니다.
 적미공이 허공을 쳐내며 몸을 기우뚱거리는 사이에,
 슥!
 이번에는 허풍천의 우수(右手)가 기우뚱거리는 적미공의 오른쪽 얼굴을 향해 움직였다.
 짝!
 경쾌한 타음이 일어났다.
 적미공은 무엇인가 자신의 뺨을 후려친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동시에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는 불똥이 두 눈에서 어른거리는 것을 느꼈다.
 적미공의 고개가 옆으로 홱 돌아갔다.
 “푸후!”
 입안에서 피와 함께 무엇인가가 밖으로 튀어나왔다.
 허풍천은 만족한 웃음을 지으며 허공으로 손을 뻗쳤다.
 “푸후후! 정확히 두 개군.”
 그는 적미공의 입안에서 튀어나온 물체를 받았다.
 두 개의 이빨!
 놀랍게도 허풍천의 손안에 들려진 것은 두 개의 이빨이었다.
 적미공은 두 손으로 자신의 볼을 감싸쥔 채 온몸을 떨었다.
 분노가 극에 달해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생각할 겨를도 없다.
 단지 그의 머리에는 지금의 모든 일이 하나의 악몽처럼 여겨질 뿐이다.
 사람들은 안색이 변했다.
 ‘적미공 같은 마도의 거효가 손 한번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당하다니?’
 ‘서백후에 못지않은 고수다!’
 그들의 얼굴에는 놀람과 살기가 뒤엉켰다.
 적미공의 안색이 더욱 일그러진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원래가 마도인들일수록 명성을 중시하는 편협한 일면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적미공은 많은 사람들 앞에서 수모를 당했다.
 “죽인다! 이 애송이 놈!”
 말과 함께, 적미공의 신형이 허풍천을 향해 질풍처럼 달려들었다.
 살기가 이미 머리끝까지 오른 그다.
 자존심이 무너진 적미공의 공세는 무서웠다.
 초식의 오묘함은 결여된 듯하지만 맹목적인 공세는 산을 뒤엎을 만하다.
 동시에 지금까지의 상황을 관망하고 있는 십여 명의 인물들도 일제히 서백후를 향해 몸을 날렸다.
 
 ***
 
 번쩍!
 콰우우우우!
 폭염이 이글거리는 무이산은 난데없이 무서운 격전장으로 변했다.
 서백후와 허풍천을 향해 일제히 몸을 날린 중원무림의 고수들, 그들의 합벽공세는 세인들의 상상을 무시하는 것이다.
 서백후는 자신을 향해 몸을 날린 중원무림의 고수들을 바라보면서 짐짓 다급한 음성으로 외쳤다.
 “우아! 이놈들이 늙은이 잡겠네.”
 허우적거리던 서백후가 돌연 한창 신나는 대결을 벌이고 있는 허풍천을 향해 두 손을 쭉 내뻗었다.
 그러자 실로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막 나삼여인의 공세를 피하며 반격을 가하려던 허풍천의 몸이 무엇엔가 이끌리듯 서백후 앞으로 끌려가는 것이 아닌가?
 “이, 이런?”
 허풍천은 끌려가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쳐보았지만 이미 그의 몸은 서백후 앞에 이르고 난 후였다.
 공포의 접인신공(接引神功)!
 그러나 문제는 거기에서 끝난 것이 아니다.
 허풍천의 몸이 자세를 바로잡기도 전에 이미 서백후를 공격하던 한 자루의 검이 서백후 앞을 가로막은 허풍천의 가슴을 향해 벼락같이 다가들고 있었다.
 말하자면 서백후는 허풍천을 내가진력으로 끌어당겨 그를 방패로 삼은 것이다.
 “헉!”
 허풍천은 다급한 헛바람을 들이킴과 동시에 몸을 요란하게 회전시켰다.
 
 싸악!
 간신히 가슴을 노린 검을 피해냈지만 검은 아슬아슬하게 허풍천의 목밑을 스쳐 가며 그의 귀밑머리를 잘라 버렸다.
 허풍천의 서백후를 향해 버럭 고함을 질렀다.
 “나는 죽어도 상관이 없다는 말이오?”
 서백후는 태연하게 웃었다.
 “큿! 그럼 이 사부는 죽어도 괜찮다는 말이냐?”
 “그래도 그렇지··· 아무런 말도 없이······.”
 “이놈아! 지금은 그런 말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놈들은 성질이 단단히 난 모양이다.”
 허풍천은 힐끔 고개를 돌렸다.
 서백후의 말대로 대여섯 명이 일제히 두 사람을 향해 몸을 날려오고 있었다.
 서백후는 다급하게 말했다.
 “저 애꾸눈 노인은 백발노군(白髮老君)이라는 자다.”
 허풍천은 귀를 기울였다.
 “놈을 제압하는 방법은 소림(少林)의 달마삼검(達磨三劍) 중 일주마천(一柱摩天)이면 된다.”
 “쉽네요.”
 “나삼을 걸친 옥골음희(玉骨陰姬) 염희강(閻姬降)이라는 계집은 진주언가권의 음풍수(陰風手)로 유중혈(乳中穴)을 쳐내라.”
 “검을 잡은 저놈은요?”
 “놈은 귀검자(鬼劍子) 궁무(宮無)라는 자다. 놈을 때려잡는 데는 검보다는 네놈의 발길질이 최고다. 황가퇴법(黃家腿法)으로 엉덩이를 걷어차 버려라.”
 말도 안되는 소리다.
 천하에 아무리 자질이 뛰어난 사람이 있다고 해도 이렇게 잡다한 무학을 한꺼번에 일정한 경지까지 터득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허풍천은 달랐다.
 그는 서백후의 말이 끝나는 순간, 이미 몸을 움직였다.
 번쩍!
 언제 들려졌는지 그의 손에는 나무막대기 하나가 들려 있었다. 그것은 섬랄하게 허공을 가르며 백발노군의 가슴을 찔러갔다.
 검세(劍勢)의 변화가 채 일어나기도 전에, 몸을 한바퀴 빙글 회전시킨 허풍천이 때마침 자신의 등을 공격해 오는 나삼여인의 가슴을 향해 일장을 내뻗었다.
 펑!
 둔탁한 음향과 함께 나삼여인, 염희강의 신형이 허공으로 둥실 떠올랐다가 일 장이나 날아가 나뒹굴었다.
 귀검자 궁무도 마찬가지다.
 염희강을 날려보낸 허풍천이 땅바닥에 벌렁 누워 궁무의 검을 막아냈다. 그리고는 기우뚱거리는 궁무의 엉덩이를 일어서는 탄력으로 걷어찼다.
 “윽!”
 쿠쿵!
 서백후와 허풍천을 공격해 오던 고수들이 일제히 신음을 흘리며 사방으로 퉁겨져 날아갔다.
 말로 하자면 길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눈 한번 깜빡할 사이에 일어난 변화였다.
 “이럴 수가?”
 “말도 안된다. 우리가 어찌 애송이 한 놈에게······.”
 일어서는 그들의 얼굴에 경악과 살기가 파들거렸다.
 허풍천의 무학은 이미 자신들의 상상을 초월한 것이 아닌가?
 ‘서백후보다 더 무섭다.’
 ‘놈이 만약 우리를 죽이려 했다면 우리는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중인들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허풍천은 서백후에게 다가서며 예의 그 헤픈 웃음을 지었다.
 “사부! 보기에 어떠셨습니까?”
 서백후는 얼굴을 찡그리며 고개를 저었다.
 “이놈아! 너무 형편없어 볼 수 없었다.”
 허풍천은 풀죽은 모습으로 고개를 떨구었다.
 “사부가 시키시는 대로 했는데?”
 “일주마천으로 백발노괴를 공격한 것은, 마지막 변화가 무뎌서 가슴을 공격했는데 허리가 겨냥되었고, 염희강이라는 계집을 공격한 진주언가권의 음풍수는 유중혈이 아니라 유근혈(乳根穴)이었다.”
 허풍천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신의 손바닥을 살폈다.
 못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다.
 “이상하다. 그래도 감촉은 똑같았는데?”
 서백후는 또다시 버럭 고함을 질렀다.
 “이놈아! 손안의 감촉이 똑같았던 것은 염희강이라는 계집의 젖이 다른 여자와는 달리 밑으로 처져 있었기 때문이다.”
 유근혈과 유중혈······.
 가슴이 다른 여자와 달리 밑으로 처져······.
 서백후가 버럭버럭 고함까지 질러가며 나눈 두 사람의 대화.
 여자의 몸이라면 차마 얼굴을 붉히지 않고는 들을 수 없는 말들이 아닌가?
 더욱이 지금 자신의 주위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자리를 함께하고 있다.
 “네놈들을 남자 구실 못하게 만들어 버릴 테다.”
 염희강은 여자로서는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설과 함께 허풍천을 향해 몸을 날렸다.
 통상적으로 무림인들이라면 여자의 가슴을 공격하는 것은 금기(禁忌)로 알고 있다.
 그것은 파렴치한이나 하는 행동으로 통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염희강의 가슴을 마음놓고 공격했다.
 그리고 한술 더 떠 지금은 자신들의 행위가 어떠했다는 둥 행위 자체를 즐기는 모습이 아닌가?
 파파팟!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염희강이다.
 그녀의 행동 또한 여자의 법도를 무시한 것이다.
 쌍수는 허풍천의 목을 휘감아 가고 두 다리는 허공에서 요란하게 휘저어지며 허풍천의 양다리 사이를 향해 뻗어졌다.
 여자가 발을 사용하는 것도 무림인이 지켜야 할 예법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미 살기가 동한 염희강이기에 그런 것에 구애받을 이유가 없었다.
 서백후는 짐짓 겁난 얼굴을 했다.
 “풍천아! 이 사부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여자가 사나울 때다.”
 서백후의 손이 움직여 허풍천을 자신 앞으로 끌어당기더니 또다시 그를 방패로 사용했다.
 “아무래도 네가 맡아라.”
 허풍천을 염희강 앞으로 떠민 서백후의 신형이 이번에는 더 이상 기다리지 않고 허공으로 솟아올랐다.
 쉬앙!
 한소리 파공음이 들려왔다.
 동시에 서백후의 신형은 형용불가한 속도로 중원무림의 고수들을 향해 회오리처럼 다가들었다.
 “막아라!”
 “어엇!”
 중인들은 다급하게 외쳤다.
 그들은 서백후가 이렇게 돌연한 행동으로 자신들을 공격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촤르르르르!
 서백후의 손에 들려 있던 합죽선이 활짝 펴지며 움직였다.
 스쳐 가는 바람처럼, 그 바람에 흘러가는 노을빛 구름인 양, 서백후의 손을 떠난 합죽선은 중인들 사이를 누볐다.
 허공에서 두어 번 몸을 틀고 솟구치는 순간에 이미 서백후의 몸과 합죽선은 삼백육십 번의 움직임을 일으켰다.
 그러니 이를 어찌 인간의 능력이라고 할 수 있는가?
 서백후가 처음의 자리로 돌아왔을 때, 이미 중원무림의 고수들은 목상(木像)처럼 굳어져 버린 다음이었다.
 그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눈빛만 요란하게 떨고 있었다.
 자신들이 생각하기에도, 서백후가 어떻게 몸을 움직였으며 어떠한 수법으로 자신들의 혈도를 순간적으로 제압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그럴 수도 있는지조차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으으!”
 “서백후, 너는 오늘의 일을 영원히 후회하게 될 것이다.”
 무림인들의 신음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제자리로 돌아온 서백후, 그가 돌연 허풍천에게 시선을 돌리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허풍천과 염희강!
 두 사람의 모습은 기괴했다.
 두 사람은 똑같이 꼼짝도 않고 굳어 있었다.
 그토록 사납던 염희강은 한 발을 허공에 치켜올린 채 괴상한 자세로 굳어져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한쪽 발이 허공으로 치켜 올라간 상태.
 더욱이 몸에는 매미날개 같은 하나의 나삼자락만을 걸치고 있는 염희강이기에 여자의 가장 은밀한 곳을 보이고 있는 꼴이 된 것이다.
 그녀는 말도 하지 못하고 허풍천을 잡아먹을 듯 바라보고 있었다.
 무엇이 그리 신기한가?
 염희강의 저주 서린 눈빛과는 하등의 상관도 없다는 듯 허풍천은 넋나간 사람처럼 염희강의 가랑이 사이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기가 막히군······.”
 허풍천이 감탄을 금치 못하고 있을 때였다.
 탁!
 서백후의 합죽선이 허풍천의 뒷머리를 사정없이 때렸다.
 “이것이 어찌된 노릇이냐?”
 그러나 허풍천은 아픔도 모르는 듯 염희강의 가랑이 사이에서 여전히 시선을 떼지 않은 채 흘러가는 음성으로 말했다.
 “푸후후! 급한 김에 사부한테 배운 쇄종지법으로 혈도를 제압해 버렸더니 이렇게 기막힌 자세가 되지 뭡니까?”
 허풍천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더니 염희강의 허벅지 쪽을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염희강의 눈빛이 요란하게 흔들렸다.
 생각해 보라.
 이런 부끄러운 자세로 혈도를 제압당한 것도 창피한 일인데, 허풍천은 이제 손으로 자신의 허벅지까지 쓰다듬고 있으니 말이다.
 “푸후후, 어때요 사부? 자세가 매우 독특하지요?”
 그러나 서백후는 허풍천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의 얼굴이 하얗게 변하더니 합죽선으로 허풍천의 머리를 그대로 후려갈겼다.
 팍!
 “윽! 왜 이러시는 겁니까······?”
 비명을 지른 허풍천이 서백후를 바라보았다.
 그제야 비로소 그는 사부의 얼굴이 지금까지와는 달리 긴장되어 있는 것을 알았다.
 “왜··· 그런 무서운 표정을······?”
 서백후는 분기 등등한 모습으로 말했다.
 “이놈아! 쇄종지법은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된다고 당부하지 않았느냐?”
 허풍천은 순간적으로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워낙 급한 김에······.”
 “큰일이다. 쇄종지법에 점혈을 당하면 시술자라도 해혈을 할 수 없다. 그리고 일각이 흐르면 전신의 혈맥이 완전히 봉쇄되고··· 혈류현상이 일어나 전신의 모공(毛孔)으로 피를 흘리며 삼일 동안 전신이 뜯겨져 나가는 고통을 겪다가 죽어 간다.”
 서백후의 이 놀라운 말, 아무리 혈도가 제압당했지만 서백후의 말을 못 들을 리 없는 염희강이다.
 그녀의 얼굴은 서백후의 말이 끝나는 순간, 파랗게 질려 버렸다.
 ‘일각이 흐르면 혈맥이 막히고 혈류현상이 일어나 전신의 모공으로 삼일 동안 피를 흘리다가······.’
 그 다음 말은 하나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 아닌가?
 그런데 자신이 지금 그 무서운 쇄종지법에 제압을 당해 그런 처참한 모습으로 죽어 가야 한다는 것이다.
 서백후의 당황하는 표정을 보건대, 모든 것은 사실이다.
 허풍천은 다급하게 서백후에게 물었다.
 “그럼 어떻게 합니까?”
 서백후는 관 위에 드러누우며 버럭 고함을 질렀다.
 “이놈아! 어떻게 하기는 뭘 어떻게 하냐? 이미 저질러진 일인데······. 어서 이곳을 떠나는 것이 상수다. 빨리 이 무이산을 넘지 못하면 이제 복수심에 불타는 중원무림인들이 떼지어 몰려들어 우리를 죽일 것이다. 염가계집의 동생은 홍화귀모(紅花鬼母) 염방경(閻芳鏡)이다. 저 계집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독랄하고 무섭다. 그 계집이 오기 전에 어서 이곳을 떠나자.”
 허풍천은 파랗게 떨고 있는 염희강을 바라보다가 서백후에게 혈도를 제압당한 고수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푸훗, 그런 것이라면 간단하네요.”
 “뭐가 간단하다는 말이냐?”
 “저놈들을 모조리 죽여버리면 중원무림에서 우리가 한 짓이라는 것을 모를 것이 아닙니까?”
 허풍천은 혈도를 제압당한 고수들에게 다가갔다.
 “네··· 네놈이······.”
 고수들은 다가서는 허풍천을 바라보며 두려움과 분노를 표출했다.
 허풍천이 그의 말대로 손을 쓴다면 자신들은 정말 개죽음을 당하게 될 것이다.
 허풍천의 오른손이 허공을 향했다.
 갈고리처럼 오므라진 손이 투명한 강막을 형성하는 것도 그때, 허풍천은 아무런 감정도 없이 웃었다.
 “푸후후, 이런 것을 두고 멸구살인(滅口殺人)이라고 하던가?”
 멸구살인! 그런 말도 있었던가?
 뒤에서 잠자코 허풍천의 하는 꼴을 보고 있던 서백후의 얼굴이 또다시 일그러졌다.
 “크흐! 영원히 구제불능이다.”
 허풍천은 서백후에게 고개를 돌렸다.
 “무엇이 또 잘못되었습니까?”
 “이놈아! 살인멸구(殺人滅口)면 살인멸구지, 멸구살인이 뭐냐?”
 허풍천은 낮게 투덜거렸다.
 “빌어먹을··· 어쩐지 말이 쉽게 된다 했더니 또 앞뒤가 바뀌었군.”
 말을 하면서도 허풍천의 손은 서슴없이 맨 앞에 있는 적미공의 정수리를 향하고 있었다.
 적미공의 이마에서는 송글송글 샘이라도 솟듯 땀방울이 맺히고 있었다.
 그는 오금이 저려오고 전신이 후들후들 떨림을 느꼈다. 그 와중에서도 이게 무슨 망신인가 하는 수치심과 치욕을 함께 느끼는 것이었다.
 그때였다.
 휙!
 서백후가 허풍천의 허리에 매달인 쇠밧줄을 잡아당겼다.
 그러자 막 적미공에게 손을 쓰려던 허풍천의 몸이 허공으로 날아올라 그대로 서백후 앞에 떨어져 내렸다.
 쿵!
 먼지가 풀썩 일어날 정도로 곤두박질친 허풍천이 고통으로 일그러진 안면을 서백후에게 돌렸다.
 “왜··· 자꾸 제가 하는 일에 방해를 하시는 겁니까?”
 “이놈아! 지금 괜한 일에 힘을 쓸 시간이 없다. 그들을 죽인다고 해서 중원무림인들의 입과 눈을 전부 막을 수 있을 것 같으냐? 이곳을 빨리 빠져 나가는 것이 우리에게는 최선의 방법이다.”
 “그렇군요.”
 “빨리 가기나 해라.”
 허풍천은 무엇인가를 생각하더니 이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끼이익!
 허풍천은 관을 이끌고 혈도가 제압당해 있는 무림고수들 사이를 지나며 한마디 남기는 것을 잊지 않았다.
 “푸후후··· 당신들 오늘은 운이 좋은 줄 알아라. 적미공, 다음에 만나면 이빨을 하나도 남김없이 모조리 뽑아주겠다.”
 허풍천의 걸음은 매우 빨랐다.
 뒤에서 언제 무림의 고수들이 들이닥칠지 모른다는 긴장감이 그의 걸음을 빠르게 만든 것이다.
 한편, 두 사람이 멀어져 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염희강의 눈빛은 이 순간 걷잡을 수 없이 요란하게 흔들렸다.
 절망의 표정이다.
 시시각각으로 달려오는 죽음 앞에 선 사람의 모습이라는 표현이 적당할 것이다.
 ‘내가 이렇게 허무하게 죽는단 말인가?’
 그녀의 뇌리에는 서백후가 한 말이 떠나지 않았다.
 ‘전신의 혈맥이 막히고 삼일 동안 전신의 모공으로 피를 흘리다가······.’
 염희강의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허풍천은 더운 콧김을 내뿜으며 빠른 속도로 무이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이내 염희강의 시야에서 가물가물해졌다.
 허풍천은 쉴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제 싸움은 지긋지긋해졌다. 차라리 사람들을 만나지 않는 것이 더 낫다.’
 오년이란 세월이다.
 무림마녀 반야음이 서백후에게 제압된 이후로 서백후와 더불어 허풍천은 수많은 중원무림의 고수들을 상대로 싸워야 했다.
 손가락으로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싸움, 그 중 팔할이 넘는 싸움을 허풍천이 맡아야 했다.
 서백후는 자신 앞에 언제나 제자인 허풍천을 내세웠다.
 그로 인해 허풍천은 이제 싸움이라면 세상의 어떤 궂은 일보다 진력이 나 있다.
 그러나 허풍천은 모른다.
 자신이 치러낸 수많은 싸움으로 인해 그가 당대 최고의 실전경험을 지닌 무림인(武林人)이 되었다는 사실을.
 그것도 이제 겨우 이십에 불과한 나이에······.
 서백후는 합죽선을 살랑거리며 허풍천을 바라보고 있었다.
 숨을 헐떡이며 무이산을 오르는 허풍천을 보는 서백후의 얼굴에는 옅은 웃음이 서려 있었다.
 ‘큿! 이놈아, 무슨 쇄종지법이 혈류현상을 일으키냐? 다 너를 부리기 위한 이 사부의 계략이지······.’
 그러했다.
 서백후의 말은 사실이 아니다.
 쇄종지법은 단순한 지법에 불과하다.
 위력이 대단한 것은 사실이지만 한 시진이 지나면 자연적으로 해혈이 되는 것이 쇄종지법의 특징이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허풍천과 염희강.
 두 사람은 똑같이 죽음의 공포와 긴장감으로 서백후에게 철저하게 이용을 당하게 된 것이다.
 
 
 3장 몰려드는 고수(高手)들
 
 
 “사부?”
 “갑자기 왜 그런 다정한 음성으로 부르느냐? 징그럽게시리······.”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뭐냐?”
 “저 관 속에 들어 있는 무림마녀 반야음이라는 여자는 도대체 어떤 여자입니까?”
 “그것이 알고 싶으냐?”
 “푸흣!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죽였으면 정도무림인들은 물론 마도무림의 악명 높은 인간들까지 죽이려고 그 안달을 하는지 몹시 궁금합니다.”
 “알려고 하지 마라.”
 “왜요?”
 “그녀를 알려 하는 것은 죽음을 재촉하는 일일 뿐이다. 지금까지 그녀를 만나고 살아남은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사부를 제외하고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녀로 인해 죽었다. 특히 너 같은 청년은 그녀에게 눈길을 던지는 순간 죽었다.”
 “그런데 왜 사부는 반야음을 죽이지 않았습니까?”
 “믿어지지 않겠지만··· 이 사부 또한 그녀를 꺾는데는 성공했지만 그녀를 죽일 수는 없었다.”
 “반야음이 그렇게 대단한가요?”
 “지금이라도 그녀가 이 관을 뛰쳐나온다면 이제 이 사부도 그녀를 당할 수 없다. 그래서 사부는 그녀가 영원히 이 세상에 나오지 못하도록 특수한 관을 만들어 그녀를 가두어 버린 것이다.”
 “궁금한 것이 또 한 가지 있습니다.”
 “또 뭐냐?”
 “기련산(祁連山) 무개애(無蓋崖)의 천기동부(天機洞府)까지 가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곳에 가면 알게 된다.”
 
 덥다.
 폭염은 구름 속에 가려졌지만 후덥지근한 날씨는 숨을 막히게 만들 지경이다.
 허풍천은 다른 날보다 더 많은 땀을 흘려야 했다.
 그러나 그는 쉬지 않고 형산(荊山)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허풍천은 소맷자락으로 이마의 땀을 훔쳐내며 우중충한 하늘을 바라보았다.
 “빌어먹을··· 소나기가 쏟아질 모양이군.”
 허풍천의 미간은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그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것이 있다면 바로 기상의 변화다.
 비가 내리면 땅이 질퍽거리고 그로 인해 삼백 근이 넘는 관을 끌기란 여간 힘겨운 것이 아니다.
 서백후는 달랐다.
 그는 관 위에서 합죽선을 살랑이며 히죽 웃었다.
 “그래. 한바탕 시원하게 쏟아져라.”
 허풍천의 고개가 서백후를 향했다.
 “사부?”
 “며칠 동안 목욕을 하지 못했더니 온몸이 근질거린다. 내가 남창(男昌)으로 가지 않고 형산으로 향한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다.”
 서백후의 말에 허풍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당했다. 어쩐지 가까운 길을 두고 험하고 먼길을 택한다고 했더니··· 사부는 이곳에 소나기가 내릴 것을 알고 있었다.’
 서백후라면 능히 그런 인간이다.
 자신의 편안함을 위해서는 제자인 허풍천의 고생 따위는 아예 안중에도 두지 않는 사람이다.
 허풍천의 가느다란 두 눈이 독기를 머금었다. 그러나 잠시 서백후를 독기 서린 눈빛으로 보았을 뿐, 허풍천은 다시 풀죽은 모습으로 고개를 돌리며 자신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음성으로 투덜거렸다.
 ‘제기랄, 하늘은 벼락은 두었다가 어디에 쓰는지 모르겠어······.’
 이번에는 서백후의 고개가 허풍천을 향했다.
 부릅떠진 두 눈에 심상치 않은 기운이 서려 있다.
 “뭐야? 이놈! 너는 지금 이 사부에게 벼락이라도 떨어지라는 말이냐?”
 “그··· 그것이 아니라······.”
 “아니면 무엇이냐?”
 “벼락이 관에 떨어지면··· 관 속에 있는 무림마녀 반야음이 까맣게 타죽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우리는 이런 고생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정신없이 변명을 해댔지만 어색하기 이를 데 없다.
 “이놈이! 이제는 이 사부까지 놀려?”
 불같은 노성이 떨어졌다.
 휙!
 서백후의 손안에 들려 있던 합죽선이 일직선으로 허공을 가르며 허풍천의 등을 찔러오는 것이 아닌가?
 회오리치는 강렬한 선영(扇影)의 예기(銳氣)들.
 합죽선이 허풍천을 향하기도 전에 그는 무서운 예기가 노도처럼 전신을 엄습해 오는 것을 느꼈다.
 ‘잘못했다가는 뼈도 추릴 수 없다!’
 허풍천은 다급한 마음에 몸을 허공으로 솟구쳤다.
 일단 손을 쓰면 인정이 없는 서백후다.
 제자인 자신에게는 더더욱 무서운 서백후!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오로지 서백후의 공세를 피하는 길뿐이다.
 그러나 다음 순간, 허풍천은 자신의 그런 행동이 얼마나 어리석었는가를 새삼 느끼게 되었다.
 쉭!
 아슬아슬하게 서백후의 합죽선을 피해냈지만,
 “크큿! 네가 그렇게 나올 줄 알았다, 이 녀석!”
 서백후의 괴상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이번에는 허풍천의 허리를 묶고 있는 쇠사슬을 통해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는 가공할 힘이 전해졌다.
 “이··· 이런······.”
 허풍천은 바동거렸다.
 허리로 전해지는 힘은 족히 잡아도 수백 근이다.
 거기에 서백후의 강렬한 접인신공이 가세를 하니 가히 죽을 지경이 아닌가!
 허풍천의 몸이 허공으로 떠오를 때보다 배나 빠르게 지면으로 곤두박질쳤다.
 쿵!
 지면이 흔들릴 정도로 곤두박질친 허풍천, 그는 뼈가 으스러지는 듯한 고통에 신음도 흘리지 못했다.
 웬만한 사람이라면 이 정도로 사납게 곤두박질쳤다면 그 자리에서 죽음을 면하지 못했을 것이다.
 “으··· 으······.”
 허풍천은 벌레처럼 꿈틀거리며 일어섰다.
 땀과 먼지로 범벅이 된 그의 얼굴은 그래서 더욱 흉측하다.
 “으음··· 이렇게 살 바에는 차라리 죽는 것이 행복하겠다.”
 체념의 눈빛이랄까?
 서백후의 모습을 힐끔거리는 허풍천의 눈빛에서는 체념이 느껴진다.
 그때였다.
 두 사람의 귓전으로 음산한 음성이 들려왔다.
 “크흐흐흐! 걱정하지 마라! 이번에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너를 죽여 너의 소원을 들어주겠다.”
 음성에 이어,
 스으으으!
 수효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수림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내며 서백후와 허풍천을 완벽하게 에워쌌다.
 그리고는 갑자기,
 꽈르르― 꽝!
 벼락이 작렬하며 근처에 있던 거대한 노송이 허리에서부터 부러져 나갔다.
 쏴아아아!
 천둥번개와 함께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우연이었을까?
 폭우가 쏟아진 것은 서백후와 허풍천을 포위한 수백 명의 인물들이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부터였다.
 각양각색의 인물들.
 어찌 보면 세상의 모든 부류의 인간들이 이 자리에 다 모인 것 같았다.
 허풍천의 눈빛이 잔뜩 찌푸려졌다.
 ‘이렇게 많은 놈들이 한꺼번에 모이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지금까지 수많은 대전을 벌여 온 허풍천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나타난 적은 없었다.
 허풍천의 시선이 그들 맨 앞에 서 있는 혈포노인(血袍老人)을 향했다.
 깡마른 체격에 키가 훌쩍 큰 노인.
 자색 광채를 쏟아내는 눈빛이 섬뜩하게 느껴진다.
 ‘지금까지 대한 적이 없는 고수다.’
 허풍천은 혈포노인을 발견하는 순간, 그가 지금까지 상대했던 어느 인물보다 더 무서운 고수라는 직감을 받았다.
 독보괴협 서백후.
 언제나 독선적이고 여유만만하던 그였다. 그러나 자신 앞에 나타난 인물들을 발견하는 순간, 서백후의 눈빛에 잔잔히 긴장감이 서렸다.
 ‘갈수록 어려워지는군.’
 서백후의 눈빛이 허풍천 앞에 나타난 혈포노인을 향했다.
 ‘백팔마련(百八魔聯)의 삼태상(三太上) 중 한 사람인 지마(智魔) 단우패(段于覇).’
 혈포노인!
 그는 마도무림의 성전(聖殿)으로 불리는 백팔마련의 삼태상 중의 한 사람인 지마 단우패였다.
 지옥수라삼도(地獄修羅三刀)는 패도적인 위력을 지닌 마도제일도(魔刀第一刀)로 정평이 나 있다.
 서백후의 시선이 이번에는 자신의 오른쪽에 우뚝 서 있는 한 명의 청의노파를 향했다.
 ‘빌어먹을··· 사천당문(四川唐門)의 가주(家主)인 당노대부인(唐老大夫人)까지 냄새를 맡았군,’
 당노대부인!
 이른바 중원십대고수 중 한 사람으로 불리는 무림의 여기인이다. 사천당가의 가주임과 동시에 암기술에 관한 한 독보적인 존재다.
 또 한 사람, 그는 가슴에 한 자루의 고색창연한 검을 안은 채 담담한 시선으로 서백후를 응시하고 있었다.
 ‘무당삼절(武當三絶) 가운데 하나인 운중자(雲中子)로군.’
 운중자!
 무당삼절 중 검절로 통하는 인물.
 가장 비천한 신분으로 무당에 입문하여 무당삼자(武當三子)로 불리기까지 운중자는 오로지 양의검도만을 광적(狂的)으로 집착해 온 검의 광인이다.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닌가?
 지금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
 정도무림인들은 물론이요, 마도무림의 성전이라 불리는 백팔마련의 거효와, 거기에 무림명가로 명성을 날리고 있는 사천당가의 가주까지 이 자리에 함께 나타났다.
 중원무림사를 통틀어 한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 이렇게 많은 중원무림의 정사고수들이 함께 작당한 적은 없었을 것이다.
 
 “크큿!”
 서백후는 웃었다.
 언제나처럼 실없는 웃음을 흘리는 서백후.
 그러나 오늘의 웃음은 달랐다.
 최소한 허풍천에게는 평소와 다르게 느껴졌다.
 ‘사부님은 지금 긴장하고 있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어떠한 일에도 여유 있게 대처하는 서백후가 아니던가?
 허풍천은 조용히 서백후에게 다가갔다.
 “사부! 명령만 내리십시오. 놈들을 싹 쓸어버리겠습니다.”
 광오하기 이를 데 없는 말.
 지금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가 일문의 지존들이거나, 그들과 어깨를 같이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래서였을까?
 스윽!
 성격이 급하기로 이름난 단우패가 허풍천 앞으로 소리도 없이 다가섰다.
 “방자한 놈! 네놈의 그 방자한 주둥아리부터 요절을 내고 서백후의 목을 비틀어 주겠다.”
 말보다 빠른 것은 그의 행동이다.
 슥!
 한 자루의 기형도(奇形刀)가 그의 손에 들려졌다.
 편월(片月)처럼 완만하게 구부러진 기형도!
 곧이어,
 번쩍!
 단우패의 기형도는 일직선으로 허공을 검단한 채 허풍천의 정수리를 정면으로 갈라왔다.
 빨랐다.
 최소한 이 정도의 빠름이나, 이 정도의 정확함이라면 허풍천은 목이 날아가던가 아니면 치명적인 중상을 입을 것이다.
 서백후가 다급하게 외쳤다.
 “놈아! 그것은 지옥수라삼절도 중 지옥일섬(地獄一閃)이다.”
 극단의 빠름을 위주로 한 지옥일섬!
 단우패는 평소 입버릇처럼 말했다.
 
 ― 지옥수라삼절도의 지옥일섬보다 빠른 도법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빠르다는 것.
 그것은 상대에게 반격할 시간이라든가 피할 틈을 주지 않는다.
 ‘과연 단우패다.’
 당노대부인!
 육십 년 동안이나 무림에서 잔뼈가 굵어 온 그녀는 단우패의 일도에 허풍천의 목이 날아갈 것이라고 믿었다.
 그녀는 서백후에게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서백후! 제자의 죽음을 보고만 있겠느냐?”
 당노대부인의 넓은 소맷자락 속에서 깡마른 두 개의 쌍수가 불쑥 내밀어졌다.
 그러나 서백후는 그 순간에도 웃음을 짓고 있었다.
 “크큿! 내 제자는 다른 놈과는 좀 다른 별종이지······. 단우패의 지옥수라삼절도가 빠른 것은 사실이지만, 내 제자의 굼벵이 같은 몸뚱이를 베지는 못할 것이다.”
 이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인가?
 당노대부인은 코웃음을 치며 느리게 시선을 허풍천에게 돌렸다.
 파리한 도광 속에서 허풍천의 몸이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지루하게 느껴지리만큼 완만한 동작, 그것은 단우패가 펼쳐낸 지옥수라삼절도의 빠름과 비교한다면 너무 보잘것없는 것이다.
 그러나 다음 순간,
 ‘저럴 수가?’
 당노대부인의 안색은 여지없이 굳어지고 말았다.
 허풍천은 장난하듯 허리를 교묘하게 흔들었다.
 그의 두 발은 여전히 지면에서 꼼짝도 하지 않은 채였다.
 그런데 그 간단한 몸놀림에 단우패의 도는 모두가 애꿎은 허공만을 난자하고 있었다.
 ‘믿어지지 않는다. 저 어린놈이 정(靜)으로 동(動)을 제압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는 말인가?’
 말로는 쉽다.
 그러나 그 경지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무서운 수련과 뛰어난 자질이 필요했겠는가?
 솔직하게 말해, 나이가 이미 팔십에 이른 당노대부인으로서도 허풍천과 같은 완벽한 경지에 이르렀다고 장담할 수 없다.
 “이런 미꾸라지 같은 놈이!”
 단우패의 불같은 음성이 폭우 속에서 들려왔다.
 백팔마련의 삼태상 중 한 사람인 자신이다.
 천하에 단 한 사람을 제외한다면 나름대로 천하제일이라고 은근히 자부하던 그가 허풍천에게 우롱을 당한 꼴이 된 것이다.
 쿠오오오!
 단우패의 도가 상상할 수 없는 속도로 허공을 갈랐다.
 허풍천의 십팔 방위를 모조리 차단한 채 휩쓸어 오는 도세!
 허풍천의 의복이 그 여력을 감당하지 못하고 찢어져 나갈 듯 펄럭였다.
 ‘더럽게 사납군.’
 허풍천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비로소 오늘의 사태가 지금까지와는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허공으로 몸을 일 장 가량 떠올린 허풍천!
 그의 쌍장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허풍천의 쌍수는 원숭이가 나무에 오르듯 요란하고 무질서하게 움직였다.
 그것은 소림의 십팔나한장(十八羅漢掌) 같기도 했고, 천년 전의 일대거마인 사황(邪皇) 적리홍(狄里紅)의 음풍십삼장(陰風十三掌) 같기도 하다.
 단우패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설마··· 놈이······.’
 십팔나한장이나 음풍십삼장 같은 장법을 익혔겠느냐 하는 생각이다.
 대기를 말아 올리는 진공음과 함께, 단우패의 도세와 요란하게 뒤엉킨 허풍천의 장력!
 꽈르르르릉!
 굉음이 요란하게 울리며 주위의 거목괴수들이 뿌리째 뽑혀 사방으로 비산되었다.
 “윽!”
 “으음!”
 굉음에 이어 두 사람의 묵직한 신음이 들려왔다.
 단우패와 허풍천은 똑같이 일 장씩 퉁겨져 나가 비틀거렸다.
 당노대부인은 더 이상 놀라지 않았다.
 ‘놈! 과연 서백후의 제자답다.’
 서백후의 제자.
 아무리 나이가 어리다고는 하지만 상대가 서백후의 제자라는 사실만으로도 지금의 상황은 납득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느리게 서백후에게 다가서는 당노대부인.
 그녀가 서백후에게 향하자, 백여 명에 달하는 사천당가의 제자들이 일제히 서백후와의 거리를 좁혀들었다.
 “서백후! 당신의 목숨은 사천당가에서 접수하겠다.”
 가볍게 살랑거리는 당노대부인의 손.
 신호가 떨어지자 백여 명에 달하는 사천당가의 제자들이 일제히 품안에서 피리 모양의 죽통을 꺼내 들었다.
 서백후의 안색이 급변을 일으킨 것도 그 순간이었다.
 “그것은··· 이화폭뢰정(離火暴雷精)!”
 당노대부인은 실낱같은 웃음을 머금었다.
 “이화폭뢰정은 한번 시전되면 주위 백여 장을 전멸시킬 수 있는 독암기다. 천하에 오로지 서백후 당신에게만 시험할 수 있는 것이지.”
 “으음······.”
 서백후는 나직이 신음을 흘렸다.
 이화폭뢰정!
 ‘솔직하게 말해 그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고 장담하지 못한다. 만약 당노대부인만 가세하지 않는다면 그래도 희망은 있다.’
 서백후는 손안의 합죽선을 으스러져라 잡았다.
 허풍천의 모습을 힐끔 바라보았다.
 단우패를 비롯하여 구대문파의 제자들을 상대로 혼신의 힘을 다하는 허풍천.
 믿어지지 않는 사실이지만 허풍천은 그들을 상대하면서도 결코 약세를 드러내지 않은 채 의연하다.
 ‘놈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괴물이 되어 버렸다.’
 서백후는 다소 안도하며 당노대부인을 응시했다.
 “할망구! 이화폭뢰정을 선물하는 것보다는 늙었지만 할망구의 몸이 더 마음에 드는데 다시 생각을 해보는 것이······. 크큿, 하기야 그러기에는 지금 이곳은 사람이 너무 많아. 늙을수록 부끄러움은 더하는 법이니까.”
 좀체 자신의 감정을 남에게 드러내지 않는 당노대부인이다.
 그러나 서백후의 말에는 눈빛이 요란하게 떨렸다.
 아무리 늙었다고는 하지만 여자의 기능과 여자의 심성을 잃어버린 것은 정녕 아니다.
 “이화폭뢰정은 헛소리만 늘어놓는 늙은이에게는 좋은 선물이 될 것이다.”
 팟!
 그녀의 손이 허공에 길다란 원을 그렸다.
 파파팟!
 빛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광풍폭우 속에서 희번덕거리는 빛무리가 천라지망처럼 서백후의 전신을 향해 폭사해 왔다.
 
 
 4장 죽음의 선택
 
 
 쏴아아아!
 광란하듯 쏟아지는 폭우.
 한치 앞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장대 같은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그리고 폭우와 더불어, 죽음의 백색광선이라고 불리는 이화폭뢰정의 독암기들이 서백후의 몸을 뒤덮어 버렸다.
 ‘천하의 서백후라도 이 상황에서는 죽을 수밖에 없다.’
 당노대부인은 여유 있는 미소를 지었다.
 사천당문이 세워진 이래, 이화폭뢰정을 사용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어디까지나 신비로만 전해진 이화폭뢰정.
 ‘서백후가 죽는다면 천하에 사천당문을 경시할 수 인물은 없다.’
 인간에게 있어서 명예욕이란 끝이 없다.
 당노대부인이라 해서 다를 것이 없다.
 그녀는 지금 자신과 사천당문이 서백후를 죽여 사천당문의 위세를 천하만방에 과시하려 했다. 그러나 그녀의 입가에 서린 미소가 채 사라지기도 전이다.
 우우우우웅!
 돌연 서백후의 전신에서 맑은 음향이 터져 나왔다.
 소스라치게 놀란 당노대부인의 시선이 서백후를 향했다.
 서백후의 전신에서 자사의 서기(瑞氣)를 연상케 하는 찬란한 빛무리가 투명한 강막을 형성하는 것이 아닌가!
 순간 당노대부인의 안색이 홱 돌변했다.
 ‘오오! 저것은 금황반선강기(金皇般旋 氣)가 아닌가?’
 파파팟!
 서백후를 향해 맹렬하게 쏟아지던 독암기들이 무형의 힘에 의해 퉁겨졌다.
 그것은 날아들 때보다 수 배는 빠르게 이번에는 사천당문의 제자들을 향해 쏘아갔다.
 “피해라!”
 당노대부인의 외침이 다급히 울려 퍼졌다.
 꽈르르릉!
 또 한차례의 천둥번개가 대지를 뒤흔드는 순간,
 “으악!”
 처절한 비명이 여기저기서 터지며 수십 명의 인물들이 고슴도치 형상이 되어 사방으로 쓰러졌다.
 서백후도 무사하지는 못했다.
 “으음······.”
 금황반선강기를 전력으로 펼쳐냈지만 어깨와 등에 다섯 개의 독암기를 격중당하고 심하게 몸을 비틀거렸다.
 독암기에 격중을 당한 살갗은 빠르게 검은빛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큰일이다. 독이 심장으로 번지기 전에 해독을 해야 하는데······.’
 그러나 그의 앞에는 위기가 기다리고 있었다.
 천하의 서백후도 이런 경우에는 어쩔 도리가 없다.
 믿어지지 않는 표정으로 오래도록 몸을 떨고 있던 당노대부인, 그녀가 벼락같이 서백후를 향해 몸을 날렸다.
 “죽인다, 서백후!”
 당노대부인의 몸이 땅을 박차고 날아오르는 순간, 쌍수가 서백후를 향해 뻗어졌다.
 “벽력지광(霹靂之光)”
 번쩍!
 서백후의 머리 위로 섬광과도 같은 무언가가 번쩍이며 내리찍히는 것이다.
 그런데 일직선을 그으며 그의 머리 위에 내리치는 순간, 마치 살아 있기라도 하는 듯 그 빛은 갑자기 파동을 일으켰다.
 그리고 순식간에 서백후의 몸은 빛에 휩싸여 버렸다.
 쿠앙!
 지면이 들썩일 정도의 굉음과 함께 흙더미와 바위가 폭우를 거슬러 하늘로 폭발이라도 하듯 튀어 올랐다.
 마치 바다의 폭풍과도 같이 거대한 흙의 해일이 사방을 뒤덮은 것이다.
 “으아악!”
 “아아악!”
 내공이 강하지 못한 몇몇은 흙바람에 휘말려 함께 공중으로 퉁겨 올랐다.
 거목들도 뿌리째 뽑혀 날아가는 것이다.
 지면에 닿았는가 하는 순간 빛은 감쪽같이 사라졌다.
 세차게 공중으로 치솟는 흙더미와 무시무시한 흙바람과 먼지에 사방은 온통 컴컴할 뿐.
 그 위세에 대적 중이던 허풍천과 사천당문의 무인들도 잠시 싸움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흙바람이 잦아들고 사방이 조용해질 무렵까지 주변 사람들은 무슨 일이 있었는가 알지 못한 채 얼이 빠져 있을 뿐이었다. 마치 거대한 도끼에 연속으로 내리 찍힌 듯 지면에는 여러 개의
 상흔이 남아 있었다.
 서백후가 있던 자리는 움푹 깎였고 그의 자취는 묘연했다.
 ‘설마 사부가······.’
 허풍천은 아연한 표정이 되었다.
 그때,
 쿵! 쿠궁!
 하늘로 퉁겨졌던 흙더미가 떨어졌다.
 그 충격으로 땅은 굉음과 함께 또 한번 들썩였고 이어 자갈들이 우수수수 떨어지는 것이다.
 그때 뿌연 흙먼지 속에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앗! 저기다!”
 흙먼지가 채 걷히지 않은 까마득한 공중에서 서백후와 당노대부인은 얽혀 대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들은 까마득한 허공에서 마치 두 마리 비룡이 다투는 듯 주거니 받거니 서로 얽히다 멀어지며 무공을 펼치고 있었다.
 가히 화려하면서 현란한 대전이 아닐 수 없었다.
 지상의 무인들도 자신들이 무엇을 하던 중이었는지 잊은 듯 멍하니 두 고수의 접전을 넋을 잃고 구경만 하는 꼴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당노대부인이 필살의 공격을 펼치는 데 반해 서백후는 당노대부인의 수를 피하거나 막아낼 뿐이라는 것이다.
 왜인지 서백후는 상대에게 치명적인 공격을 하지 않았다.
 ‘사부가 많이 다치신 모양이군.’
 허풍천은 사부 서백후가 그의 기량을 다 발휘하지 않는 것을 그의 부상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는 문득 생각이 난 듯 단우패를 향했다.
 “우리도 다시 겨루어볼까?”
 
 ‘이런 괴물은 처음이다.’
 단우패는 믿으려 하지 않았다.
 도대체가 생각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천하제일을 자랑하는 자신의 지옥수라삼절도를 이름도 들어본 적이 없는 허풍천이 아주 여유 있게 받아내는 것이 아닌가?
 허리에 쇠사슬까지 두르고 있는 허풍천이다.
 믿을 수 없는 일은 또 하나 있었다.
 허풍천, 그는 천하의 무학을 모조리 알고 있는 듯했다.
 ‘놈이 모르는 무학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정도무림의 실정된 기학(奇學)은 물론이요, 마도무림인들조차 익히기 꺼려하는 극악한 마공(魔功)에서부터 사공(邪功)까지 허풍천은 너무 매끄럽게 펼쳐냈다.
 허풍천은 히죽 웃었다.
 흉측한 얼굴에 떠오른 미소는 차라리 섬뜩하다.
 “푸후훗! 재미있는데······. 이런 놀음이라면 평생을 해도 질리지 않을 것 같다.”
 웃으면서 그는 쌍장을 현란하게 움직였다.
 고오오오!
 부챗살처럼 쏟아져 나오는 강기!
 빠르기도 빨랐거니와 노도 같은 기세는 산악을 뒤엎을 만한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허억!’
 단우패의 얼굴에 격렬한 진동이 일어났다.
 어디를 어떻게 피하고 막아야 하는지 방법을 떠올릴 수 없었다.
 “푸후후! 허둥대기는······. 왼쪽을 버리면 된다. 사실 이 장법은 허초가 많거든.”
 “빌어먹을······.”
 단우패는 욕설을 내뱉으며 막 자신도 모르게 왼쪽으로 피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이다.
 펑!
 단우패는 그만 가슴에 일장을 격중당하고 말았다.
 가슴이 으스러지는 고통이 전신을 휩쓸었다.
 처음으로 당하는 고통이다. 울컥 피를 한 모금 토해낸 단우패는 심하게 몸을 비틀거렸다.
 허풍천은 바보 같은 웃음을 흘렸다.
 “푸후훗! 당신도 이 허풍천보다 영리한 구석은 없어······. 그 수법은 내 사부가 평소에 써먹던 것인데 내가 시험했을 뿐이다.”
 거짓말!
 허풍천의 말은 사실이 아니었다.
 그때, 지금까지 눈살을 잔뜩 찌푸리고 있던 무당의 운중자가 허풍천을 향해 몸을 날리며 외쳤다.
 “무량수불(無量壽佛)! 이 운중자가 한 수 거들겠소.”
 검으로 평생을 살아온 운중자, 그의 검학은 단우패의 도법과는 또 달랐다.
 단우패의 도법이 패도적이라면, 운중자의 검학은 정교하면서도 다변을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운중자가 상대하기 훨씬 까다로운 편이다.
 양의 검도!
 무당의 오늘이 있게 한 검학이 아닌가?
 팟!
 빛이 떠오르고, 떠올랐다고 느낀 순간에 이미 허공에는 수많은 검영(劍影)이 형성되었다.
 “분광무영(分光無影)이라는 것이군.”
 폭산하듯 일렁이는 검광은 일순간 허풍천을 자욱한 검막 속에 가두어 버렸다.
 단우패의 눈빛이 기이하게 변했다.
 ‘무당도 경시할 수 없군.’
 그러나 단우패의 안색은 또다시 변했다.
 허풍천이 허공과 지면을 사이에 두고 몸을 움직이며 맞공세를 펼치는데, 방위를 옮기는 신법이나 내공화후가 오히려 운중자를 능가했다.
 
 두 사람은 순식간에 이십여 초를 교환했다.
 그 빠름이란 도저히 육안으로 형용할 수 없다.
 그래서였을까?
 이번에는 공동파의 장문인인 금마도인(禁魔刀人)이 묵직한 도를 허공으로 치켜올렸다.
 “허허헛! 괴물을 잡는 데는 단종도법(丹宗刀法)을 빼놓을 수 없지.”
 중(重)과 정(靜)에 묘리를 둔 단종도법.
 파파팟!
 장난하듯 휘두르는 금마도인의 손짓에 따라 면도날처럼 살벌한 세기(細氣)의 도광(刀光)이 막 운중자의 검세를 피해낸 허풍천의 허리를 그대로 양단해갔다.
 그것만이 아니다.
 “괴물··· 이번에는 용서하지 않겠다.”
 허풍천으로 인해 뜻하지 않은 모욕을 당한 단우패, 그가 아예 끝장을 내버리겠다는 심정으로 격전장을 향했다.
 한 사람의 능력만으로도 능히 역사를 움직일 수 있는 인물들.
 그들이 한꺼번에 공세를 취하게 된다.
 “으윽!”
 허풍천은 숨막힐 듯한 공세에 연신 뒷걸음질쳤다.
 아무리 천하를 놀라게 하는 무학을 지닌 허풍천이지만, 세 사람의 합공세를 이겨내기에는 무리였던 모양이다.
 더욱이, 허리에는 묵직한 쇠사슬이 묶여 있지 않은가?
 팟!
 운중자의 검이 허풍천의 옆구리를 스쳐 가며 피보라를 일으켰다.
 뿐이랴, 금마도인의 도는 그의 어깨에 긴 도흔을 남겼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가 몸을 비틀거리며 물러선 곳이 다름아닌 살기등등한 단우패 앞이 아닌가?
 “크흐흐! 괴물! 이 단우패가 너를 지옥으로 보내주겠다.”
 번쩍!
 지옥수라삼절도의 마지막 초식인 지옥마흔(地獄魔痕)!
 패도적인 면으로만 논한다면 천하제일인 지옥마흔이 펼쳐졌다.
 “허헉!”
 죽음의 기운이라는 것은 누구나 느낀다.
 부지중에 허풍천은 자신의 등뒤에서 펼쳐진 단우패의 도세를 느꼈다.
 그러나 느낌만으로 단우패의 전력을 다한 지옥마흔을 피해낼 수는 없는 것이다.
 절대절명(絶對絶命)의 순간!
 “물러서라.”
 허공을 쩌렁하게 울리는 노성과 함께, 서백후의 신형이 허공을 갈라왔다.
 까앙!
 귀청을 울리는 금속성이 터지며, 단우패의 몸이 엄청난 여력을 감당하지 못하고 세 걸음이나 물러섰다.
 눈앞에는 서백후가 외다리로 서 있는데, 그의 몸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로웠다.
 “사부!”
 허풍천은 황급히 다가가 비틀거리는 서백후를 부축했다.
 이화폭뢰정의 독암기를 다섯 개나 맞은 서백후.
 그가 온전하지 않은 몸으로 또다시 단우패의 지옥마흔을 받아냈으니, 인간이 쇠로 만들어진 몸이 아님에야 온전할 수 없다.
 “큿! 천하의 서백후가 이렇게 되는군.”
 서백후는 자조적인 어투로 자신의 주위를 휩쓸어 보았다.
 수백 명에 달하는 중원무림의 고수들이 거기에 있었다.
 그러나 서백후와 허풍천의 손에 백여 명이 넘는 사람이 죽거나 부상을 당했다.
 당노대부인이 서백후 앞으로 미끄러져 왔다.
 “서백후! 나는 오늘에야 아무리 강한 인간도 죽는다는 것을 알았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당노대부인의 눈빛은 관을 향했다.
 “저 관 속에 들어 있는 마녀 반야음을 내놓는다면 물러설 수도 있다.”
 서백후는 툴툴 웃었다.
 “큿! 내 목숨을 달라고 하면 그렇게 해줄 수는 있다.”
 서백후의 음성은 단호했다.
 이유가 무엇인가?
 그가 왜 자신의 목숨보다 무림마녀 반야음의 죽음을 더 중시하는지 많은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었다.
 “말로는 안될 위인이군.”
 성큼 서백후 앞으로 나선 사람은 운중자였다.
 운중자가 몸을 움직임을 기호로 해서, 단우패와 살아남은 중원무림의 정사고수들로 서서히 서백후를 향해 다가섰다.
 여차하면 합공을 펼칠 기세다.
 허풍천은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사부!”
 서백후는 허풍천에게 시선도 돌리지 않은 채 말했다.
 “녀석아! 무슨 말을 하고 싶으냐?”
 “저 관을 줘버리면······.”
 “죽음이 두려우냐?”
 “솔직하게 말해서··· 사부는 살만큼 살았지만··· 제자는 아직 앞길이 구만리 같은데······.”
 서백후는 더 이상 허풍천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이어 그는 자신의 품안에서 하나의 물건을 꺼내 들었다.
 크기가 주먹만한 구슬이다.
 “큿! 살아남은 놈들이 아직 오십 명이 되는군. 우리는 이제 싫든 좋든 함께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이다. 그곳에 가서 이 싸움의 결판을 내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겠군. 가만 있자··· 증인으로는 염라대왕을 세우면 더 좋겠군.”
 사람들의 눈에 짙은 의혹이 서렸다.
 서백후의 말을 쉽게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저 늙은이가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죽을 때가 다가오니 정신까지 이상해진 것인가?’
 중원무림의 고수들은 잠시 주춤거렸다.
 상대가 다름아닌 천하제일고수인 서백후다.
 그때 서백후의 손에 올려진 검은 물체를 바라보는 허풍천의 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이 아닌가?
 “사··· 사부! 그것은 광천뇌정(狂天雷霆)!”
 서백후는 허풍천의 떨리는 음성에 고개만 가볍게 끄덕였다.
 “크큿··· 네놈이 처음으로 말을 똑바로 하는구나.”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당노대부인의 안색이 급변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주춤 한걸음 물러섰다.
 물러서는 그녀의 얼굴은 차라리 횟가루라 할만큼 하얗게 질려 있었다.
 단우패는 심상치 않은 것을 느끼고 당노대부인에게 물었다.
 “광천뇌정이라는 것이 무엇이기에?”
 당노대부인은 무엇엔가 홀린 사람처럼 뇌까렸다.
 “광천뇌정은······.”
 
 ― 광천뇌정!
 
 그것은 일종의 폭약이다.
 그러나 그 위력은 벽력탄이나 여타의 폭약과는 비교도 할 수 없다.
 하나의 위력만으로도 터지기만 하면 주위의 백여 장은 폐허로 만들어 버릴 수 있다고 한다.
 
 단우패는 물론이요, 중원무림의 고수들은 자신도 모르게 한걸음씩 물러섰다.
 그들은 비로소 서백후가 왜 자신들에게 그런 말을 했는가를 알 수 있었다.
 
 ― 죽을 바에는 같이 죽는다.
 
 이것이 서백후의 생각이었다.
 아무리 중원무림의 내로라하는 고수들이라고는 하지만 광천뇌정이 터진다면 그 아래 살아남을 수 없다.
 놀란 사람은 그들뿐 아니라 허풍천도 마찬가지다.
 “사부··· 이건 너무 억울합니다. 지금까지 고생은 다 시키고··· 마지막에는 같이 죽자니요······.”
 허풍천은 울음이라도 터뜨릴 기세다.
 그럼에도 서백후의 얼굴은 변하지 않았다.
 “크크큿! 이놈아! 너보다 어린 나이에 죽은 놈도 부지기수다. 그리고 이놈아! 지옥에 가면 누가 이 사부의 시중을 들어주겠느냐? 이 사부에게는 너밖에 없다는 것을 알지 않느냐?”
 “크으으······.”
 허풍천은 짐승 같은 신음을 흘렸다.
 “내 운명에 가장 잘못된 것이 있다면 어쩌다가 당신을 사부로 모신 것이었소.”
 허풍천은 눈물을 철철 흘리며 아예 가슴을 쥐어뜯는 것이다.
 그 모습은 허풍천의 외모나 체구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그와 대적하던 자들조차 가엾게 볼 정도였다.
 허풍천의 처절한 탄식과 사부에 대한 원망이 하염없이 이어졌다.
 그때였다.
 휙!
 서백후의 손에 들린 광천뇌정이 허공에 던져졌다.
 그러자 거의 같은 순간에 누가 특별히 지시한 것도 아니건만 이곳에 모인 중인들은 벼락같이 사방으로 몸을 날렸다.
 그들이 몸을 날리는 속도는 자신들이 생각하기에도 놀라울 정도였다.
 그런데 몸을 움직이지 않은 단 두 사람이 있었다.
 허풍천과 서백후!
 죽음을 받아들였기 때문인가?
 아니면 명백한 죽음 앞에서 초라한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함인가?
 서백후와 허풍천은 머리칼 하나 움직이지 않은 것이다.
 
 콰콰콰콰쾅!
 천지가 무너질 것 같은 굉렬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
 자욱한 화약냄새와 함께, 폭음이 터진 주위 수십 장은 아예 검은 연기에 가려 한치 앞을 분간할 수 없었다.
 그리고 한번으로 끝날 줄 알았던 폭발음은 끊이지 않고 계속해서 터져 나왔다.
 콰르르릉!
 형산의 주위 대소산야가 요란하게 흔들렸다.
 천지가 무너지고 세상이 종말을 맞는 듯 땅은 엄청난 진동에 흔들렸다.
 이어 주변에는 태초의 암흑과도 같은 무거운 어둠이 내려앉았다.
 급기야 하늘조차 무너졌는지 폭우는 더욱 거세게 퍼부었다.
 얼마나 무서운 폭발이었는가는, 광천뇌정이 폭발하면서 피어오른 연기를 백 리 밖에서도 볼 수 있었다는 후문만으로도 알 수 있다.
 쏴아아아!
 폭우는 여전히 사납게 쏟아지고 있는데······.
 
 
 5장 죽음이 남긴 것
 
 
 스으으!
 폭음이 휩쓸고 간 폐허의 자리에 일단의 무리들이 소리도 없이 나타났다.
 얼마 전, 목숨을 걸고 이곳을 탈출했던 이들이다.
 단우패를 비롯하여, 당노대부인과 운중자 등 살아남은 사람은 중원무림의 고수들이다.
 검게 그을린 얼굴과 의복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광천뇌정의 폭발 앞에서도 살아남은 것으로 위안을 삼은 듯 무표정했다.
 그들의 시선은 주위를 살피고 있었다.
 광천뇌정의 가공할 폭발.
 폭발음으로 보건대, 이런 상황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라고 단정했다.
 검은 연기로 얼굴이 까맣게 그을린 단우패의 눈빛이 주위를 살피는 순간 참담하게 일그러졌다.
 “당했다.”
 단우패의 말에 주위에 있는 고수들도 한차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광천뇌정이 폭발한 주변.
 마땅히 땅거죽이 뒤집히고, 시신들이 널려 있어야 하건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검은 연기에 그을려 있을 뿐 특별하게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꽝!
 단우패는 근처에 있는 고목을 후려갈겼다.
 엄청난 내력을 감당하지 못하고 고목은 중간에서 부러져 나갔다.
 “간교한 늙은이······. 광천뇌정은 폭약이 아니라 단순한 연막에 불과했다. 우리는 속은 것이다.”
 당노대부인은 이빨을 갈았다.
 “감히 나를 속이다니······.”
 당노대부인이 누구인가?
 화약와 암기로 일문을 이룬 사천당가의 가주다.
 그런 당노대부인이 서백후에게 보기 좋게 당했으니······.
 당노대부인은 번쩍 허공으로 몸을 날렸다.
 “서백후! 너를 살려두면··· 이름을 갈겠다!”
 당노대부인이 몸을 날리자, 불같은 노성을 참지 못하고 있던 단우패도 뒤를 따랐다.
 “으드득··· 멀리는 가지 못했을 것이다.”
 단우패가 사라지자 운중자를 비롯한 구대문파의 고수들은 복잡미묘한 시선으로 두 사람이 사라진 방향을 응시하다가 서서히 몸을 움직였다.
 “가자!”
 
 끼이익!
 허풍천은 형산을 오르고 있었다.
 그는 한걸음 옮길 때마다 수없이 투덜거렸다.
 “빌어먹을··· 얼마든지 좋은 방법이 있었을 텐데······. 꼭 사람을 이렇게 만들어야 직성이 풀리나?”
 허풍천은 투덜거릴 만도 했다.
 그의 모습.
 이것이 어찌 사람이 하고 다닐 수 있는 몰골인가?
 누더기 같은 의복은 여기저기 타 들어가 걸레쪽보다 더 해져 있었다. 얼굴이며 살갗은 검게 그을려 본래의 모습을 분간할 수 없다.
 처음에는 죽지 않고 살았다는 것에 위안을 삼았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서백후에 대한 불만은 더해갔다.
 “광천뇌정이 어떤 것이라는 것을 사전에 알려주었던들··· 최소한 이렇게 멍청하게 당하지는 않았을 텐데··· 이번에도 깜빡 속았다.”
 허풍천은 그때 자신이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서백후는 입버릇처럼 말하지 않았던가?
 
 ― 이놈아! 광천뇌정 하나면 태산(泰山)의 절반은 날려 버릴 수 있다.
 
 그 말을 굳게 믿어온 허풍천이다.
 그래서 그는 서백후에게 매달려 사정했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광천뇌정만은 사용하지 말라고.
 허풍천은 힐끗 시선을 서백후에게 돌렸다.
 언제나처럼 서백후는 관 위에 벌렁 드러누워 있다.
 그러나 그의 모습은 예전의 모습이 아니다.
 독암기의 독기가 전신으로 번져 온몸의 피부는 독기로 인해 거무스름하게 죽어 가고 있는 것이다.
 웬만한 사람이라면 오래 전에 죽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초인적인 내력으로 심장으로 번지는 독기를 억제하고 있다.
 ‘이런··· 이 서백후가 이렇게 되다니······.’
 서백후는 자신의 무력함을 느꼈다.
 지금까지 오년이라는 세월 동안, 혈혈단신으로 중원무림과 싸움을 벌여오면서 의연함을 잃지 않았던 그.
 그러나 이 순간만은 서백후도 불가능이라는 것을 느껴야 했다. 서백후는 자신을 바라보는 허풍천에게 말했다.
 “놈아! 저기 동굴로 일단 피하자.”
 매우 힘겨운 음성이다.
 허풍천은 의외라는 듯 서백후가 가리킨 곳을 응시했다.
 수림 속에 하나의 동굴이 보였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발견할 수 없는 동굴이다.
 ‘웬일이지? 이 늙은이가······.’
 지금까지 서백후가 쉬어가자는 말을 한 적은 없다.
 의문을 지닐 필요도 없이 허풍천의 걸음은 어느덧 서백후가 말한 동굴로 들어서고 있었다.
 
 동굴!
 천연으로 이루어진 동굴은 밖에서 보기와는 달리 넓었다.
 안은 칠흑같이 어두웠지만 두 사람에게는 전혀 문제가 될 것이 없었다.
 서백후는 힘겨운 음성으로 허풍천을 불렀다.
 “이리··· 가까이 오너라.”
 허풍천은 막 자리에 드러누우려다 서백후에게 다가갔다.
 “또 무슨 일을 시키시려고······.”
 볼멘소리로 불평을 늘어놓으려던 허풍천의 음성이 중간에서 뚝 끊어졌다.
 그는 본 것이다.
 서백후의 참혹하게 변해 버린 모습을.
 흰 눈동자만을 제외하고는 서백후의 전신은 검게 물들어 있어 끔찍한 흉상을 보는 것 같았다.
 “사부!”
 허풍천은 황급히 서백후의 손을 잡았다.
 그 순간 허풍천은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손안으로 전해진 서백후의 싸늘한 몸.
 이미 얼음장처럼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아무리 미련한 허풍천이라고는 하지만 곧 서백후의 죽음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게 되었다.
 서백후는 쓰디쓴 웃음을 지었다.
 “크큿! 놈아··· 나를 위해 눈물을 흘릴 생각은 말아라.”
 “사부······.”
 “나는 네가 내 죽음 앞에 눈물을 흘릴 정도로 너에게 따뜻하게 대해 주지 않았다.”
 “그러나··· 사부······.”
 허풍천이 무어라 말을 하려 하자 서백후가 손을 들어 막았다.
 “아무 말도 하지 마라. 앞으로 내가 살아 너의 앞에 있을 수 있는 시간은 길어야 두 시진이다. 그 안에 당부할 몇 가지가 있다.”
 허풍천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이라도 제자가 해독약을 구해 보겠습니다. 잠시만 이곳에서 기다리십시오. 사천당문에 가면 해독약을······.”
 서백후는 고개를 세차게 가로 저었다.
 “부질없는 짓이다.”
 “그래도······.”
 “이놈아! 이곳에서 사천당문까지의 거리가 얼마냐? 아무리 빠르게 다녀온다고 해도 하루는 걸릴 것이다.”
 “그··· 그렇군요.”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명심해서 들어라.”
 “예.”
 
 ― 어떠한 일이 있어도 너는 저 관을 열어서는 안된다. 목숨을 걸고라도 저 관을 기련산의 천기동부까지 운반해라. 그다음의 일은 그곳에 가면 알게 될 것이다.
 
 관을 열지 마라!
 서백후가 말한 첫번째 당부였다.
 허풍천은 강렬한 의문을 느꼈다.
 “사부! 무림마녀가 관을 뛰쳐나오면 그때는 어찌 됩니까?”
 서백후의 차디찬 전신에서 미미한 파동이 일어났다.
 “그래서는 안된다. 만약 관 속에 있는 무림마녀가 관을 뛰쳐나오면 그때는 중원무림은 종말을 맞이하게 된다.”
 “반야음이 그렇게 무섭습니까?”
 “그렇다. 다시 한 번 말하건대, 절대로 관을 열어서는 안된다.”
 허풍천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의문이 완전하게 가신 것은 아니다.
 ‘대체 반야음이라는 마녀가 얼마나 무서운 마녀이기에 사부가 그녀의 이름만 들먹이면 중풍에 걸린 사람 모양 몸을 떨지?’
 허풍천은 괜스레 온몸에 전율이 서리는 것을 느꼈다.
 무림마녀!
 이제 허풍천은 그 무서운 무림마녀와 함께 있어야 한다.
 
 ― 둘째는 될 수 있는 한 천기수사(天機秀士) 지다성(智多星)이라는 인물을 만나지 말라는 것이다.
 
 “천기수사 지다성?”
 “그렇다.”
 “그놈은 또 어떤 놈입니까?
 “한마디로 머리만 불필요하게 큰 놈이다.”
 “에이··· 그런 놈이라면 겁낼 이유가 없잖아요?”
 “아니다. 놈을 만나지 말라는 것은 그의 무학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그의 머리가 두렵기 때문이다. 이 사부가 만든 관은 특수하게 만들어져 천하에 그 누구도 파괴하거나 열 수 없다. 그러나 천기수사 지다성이라면 저 관을 파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럼 만약 그를 만났을 때는 어찌합니까?”
 서백후는 단호하게 말했다.
 “네가 익힌 가장 패도적인 무학으로 놈을 죽여라.”
 허풍은 씩 웃었다.
 “그러니까 머리를 굴릴 시간을 주지 말라는 말씀이시군요?”
 “그런 셈이다.”
 “그런 것이라면 걱정하지 마십시오. 놈의 머리가 돌아갈 시간을 주지 않고 죽여버리겠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만약 관이 파괴되고 무림마녀가 관에서 뛰쳐나와 중원무림인과 대결을 벌일 경우 어떠한 일이 있어도 그녀를 도와야 한다.”
 “예옛?”
 허풍천은 화들짝 놀랐다.
 그는 혹시 서백후가 잘못 말한 것이 아닌가 하고 서백후를 한동안 응시했다.
 그러나 서백후의 얼굴은 담담했다.
 평상시와 다름이 없었다.
 “사부?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무림마녀 반야음을 보호하라고 했다.”
 허풍천은 서백후의 얼굴을 이리저리 살폈다.
 “사부··· 방금 그 말 제정신으로 한 말은 아니겠죠?”
 “왜? 이 사부가 정신없이 해댄 말 같으냐?”
 “그렇지 않고서는 어찌 반야음 같은 마녀를 보호하라는 말씀을··· 그것도 유언으로··· 남기실 수가······?”
 “사부는 온전하다.”
 허풍천은 이해할 수 없었다.
 무림마녀 반야음을 보호하라니······.
 “제자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왜··· 사부님이 그런 유언을 남기시려는지······.”
 “이놈아! 많은 것을 생각하려 하지 마라. 네 머리로 많은 것을 생각한다는 것은 무리다.”
 허풍천은 머리를 긁적거렸다.
 “알겠습니다.”
 대답은 했지만 영 시원치가 않았다.
 무림마녀의 이름도 떠올리기 싫은 지경인데, 만에 하나 일이 잘못되면 그녀를 보호해야 한다니!
 ‘제가랄··· 아무래도 망령이 든 게야.’
 허풍천은 서백후의 얼굴을 응시했다.
 서백후의 숨소리는 차차 거칠어지고 있었다.
 허풍천은 그런 서백후의 옷을 잡아당겼다.
 “사부··· 기왕에 죽을 거면 이 제자의 마지막 부탁이라도 들어주시고······.”
 “죽으라는 말이냐?”
 “그것이······.”
 서백후는 허풍천의 모습을 한동안 쏘아보더니 힘없이 말했다.
 “부탁이라는 것이 무엇이냐?”
 허풍천의 시선은 서백후가 누워 있는 관을 바라보았다.
 “다름이 아니라··· 관을 끌고 기련산까지 가기에는 관의 무게가 너무 무거운 것 같아서··· 이 기회에······.”
 뒷말은 듣지 않아도 뻔하다.
 “그러니까··· 관의 무게를 줄여달라는 말이냐?”
 허풍천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렇습니다.”
 말을 하면서 허풍천의 눈은 서백후를 힐끔거렸다.
 서백후의 표정을 살피는 것이다.
 그런데 웬일인가?
 마땅히 한번쯤은 거절할 줄 알았던 서백후가 상상외로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아닌가?
 “알았다.”
 “저··· 정말이십니까?”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다가는··· 내가 죽으면 내 시신을 까마귀밥으로 만들 것 같으니 들어주겠다.”
 허풍천은 쾌재했다.
 “역시 사부님은 현명하십니다.”
 서백후는 기뻐하는 허풍천을 올려다보며 벌떡 몸을 일으켰다.
 “뭐야? 이놈! 그렇다면 이 사부를 정말 까마귀밥으로 만들 셈이었느냐?”
 허풍천은 움찔했다.
 말을 하다 보니 자신이 너무 노골적으로 속마음을 드러낸 셈이다.
 허풍천은 다급히 서백후를 자리에 눕혔다.
 “사부··· 노하시면 독기가 더 빨리 번져서······.”
 서백후는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죽을 때가 되니··· 하나 있는 제자에게까지 천대를 받는구나.”
 독보괴협 서백후.
 풍진이인으로 천하를 주유하던 그.
 그도 죽음 앞에서는 나약해질 수밖에 없었을까?
 
 ***
 
 허풍천은 동굴 앞에서 서성거렸다.
 그런 허풍천의 얼굴에는 초조한 기색이 역력했다.
 ‘왜 이렇게 소식이 없지? 벌써 한 시진이 지났는데······.’
 서백후가 관을 끌고 동굴의 어디론가 사라진 지 한 시진.
 서백후는 나타나지 않았다.
 ‘혹시··· 관의 무게를 줄이다가 잘못되어 무림마녀 반야음이 뛰쳐나와 그녀에게 죽은 것이 아닐까? 그럴 리는 없고······. 그렇다면 독기가 빨리 번져 아예 죽어버린 것이 아닐까?’
 허풍천은 별 생각을 다했다.
 그때 동굴 안으로부터 힘겨운 서백후의 음성이 들려왔다.
 “놈아······ 이제 들어오너라.”
 허풍천은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다.
 다만 서백후의 음성으로 그가 아직 살아 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그럼 그렇지······. 그렇게 쉽게 죽을 리가 없지.’
 허풍천은 잰걸음으로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관!
 관은 얼마 전까지와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보통 관의 세 배 정도 되어 보이던 관의 크기가 절반 정도로 줄어 있었다.
 허풍천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히야··· 그 전의 절반도 안되겠다. 거기에다··· 늙은이가 죽으면 잘해야 백오십 근 정도겠다.’
 허풍천은 그 자리에 넙죽 엎드렸다.
 “사부님! 이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서백후는 희미하게 웃었다.
 “이놈아! 그런 마음에도 없는 말은 집어치워라.”
 “마음에도 없다니요?”
 “그러면··· 내가 죽은 다음에 지옥에라도 찾아와서 은혜를 갚겠다는 말이냐?”
 허풍천은 그만 입을 꾹 다물어 버렸다.
 그는 또 실수를 한 것이다.
 자신의 사부는 이제 기껏해야 반 시진을 살 수 있다.
 “앉아라.”
 서백후는 자신의 옆자리를 가리켰다.
 허풍천이 자리에 앉기를 기다렸다가 서백후는 나직한 음성의 말문을 열었다.
 
 “풍천아!”
 서백후의 음성이 갑자기 은은하게 떨렸다.
 허풍천은 그런 서백후의 음성을 듣는 순간 괜스레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이 사부는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다. 단 한 가지 마음이 놓이지 않는 것은 너를 홀로 남기고 죽는 것이다. 그것이 마음에 걸린다만 크게 걱정은 하지 않는다. 너는··· 바로 이 서백후의 제자이기 때문이다.”
 천하제일이라는 광오한 자부심.
 “앞으로 너에게 얼마나 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가를 이 사부는 안다. 그러나 너는 능히 그들을 물리칠 것이다. 너는 바보스럽기는 하지만 무학에 관한 한 천하에서 제일 가는 자질을 지녔다고 자부한다.”
 허풍천은 침울한 시선으로 사부를 응시했다.
 평소에는 단 한 번의 칭찬도 없었던 사부다.
 그러나 처음으로 듣는 칭찬이 기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이란 말인가?
 “무학으로만 놓고 따진다면 천하에서 너를 당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물론 실전에 있어서도 너는 가장 많은 실전을 치른 사람이다.”
 허풍천은 모른다.
 서백후가 왜 모든 싸움에 자신을 앞세웠는가를, 원래가 뛰어난 머리를 지닌 허풍천은 아니다.
 무학의 자질과는 달리, 그는 남보다 교활할 줄 몰랐다.
 그리하여 서백후는 그에게 수많은 실전경험을 지니게 한 것이다.
 서백후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의 숨소리는 허풍천이 듣기에도 답답할 정도로 거칠어졌다.
 “사··· 부······.”
 허풍천은 서백후의 손을 잡았다.
 썰렁하게 식어 있는 손.
 죽음의 기운은 이미 성큼 다가와 있었다.
 서백후는 돌연 툴툴 메마르게 웃었다.
 “크크크··· 너무 긴 세월이었어······. 이제는 편안하게 쉴 수 있을 것이다.”
 허풍천은 서백후의 손이 가늘게 떨리는 것을 감지했다.
 ‘죽어 가고 있다.’
 허풍천은 갑자기 가슴이 콱 막히는 것 같았다.
 아무리 미워하고 원망했던 서백후이지만, 서백후는 자신의 정신적인 지주이자 허풍천의 모든 것이다.

이용약관 유료이용약관 개인정보처리방침 청소년보호정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