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부천하 1권
서장
― 도왕(賭王)!
도박(賭博)의 마술사(魔術師)!
사람들은 그를 도박의 왕― 도왕이라고 불렀다.
이 땅에 도박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그보다 위대한 도박의 경지를 이룬 사람은 없었다.
― 대륙제일(大陸第一)의 손[手]!
천하에서 가장 빠른 손을 가진 도박의 왕.
도박세계에서 그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도왕이 어떻게 생겼는지, 젊은이인지 늙은이인지, 혹은 여자인지 남자인지에 대해서는 이상하게도 전혀 알려지지 않고 있었다.
― 얼굴 없는 도박사(賭博師)!
그는 천하를 다니며 한판의 승부를 거는 철저한 도박사다.
천축(天竺)의 신(神)이라는 도신(賭神) 나극찰(喇剋札)!
그리고 서장(西藏)의 도박황제(賭博皇帝)라고 불리는 도제(賭帝) 야율격비(冶律隔庇)!
또한 도박계에 신화적인 인물로 알려져 있는 도수예종(賭手藝宗) 천어백(天御魄)이 도왕과의 대결에서 무참하게 패하고 말았다.
도왕!
도박에 관한 한 그를 능가하는 사람은 없었다.
도박의 세계에서 거의 전설(傳說)적으로 알려진 도박의 거성(巨星)들이 그의 손에 차례로 무릎을 꿇고 말았다.
도왕.
신의 손을 가진 사나이······.
***
도왕에게는 친구가 있었다.
두 사람은 항상 그림자처럼 붙어 다녔으며 그들을 가리켜 환상의 도박조(賭博組)라고 불렀다.
― 전왕(戰王)!
그는 싸움의 왕이다.
도왕이 도박의 왕이라면 전왕은 무공에 관한 한 천하제일의 왕이었다.
도박(賭博)과 무공(武功)!
그것이 한데 어우러져 멋진 짝을 이루어낸 것이다.
도왕은 천하를 다니면서 도박을 벌이고, 전왕은 그림자처럼 도왕을 보호하며 뒤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를 깨끗이 처리한다.
― 전왕이 있는 한 아무도 도왕을 건드리지 못한다!
도왕과 전왕!
그들 두 친구는 온 천하를 자신의 도박무대(賭博舞臺)로 삼아 전설적인 도박을 펼쳐 나갔다.
이 이야기는 사나이들의 도박세계를 무대로 하며 그에 얽힌 미녀(美女)들의 뜨거운 사랑······.
그리고 두 친구가 도박의 세계와 무림(武林)에서 펼쳐 나가는 파란만장한 일대기(一代記)를 그린 우정(友情)의 대서사시(大敍事詩)이다.
1장 친구여, 한탕하세!
― 왕중왕(王中王)!
이것은 도박대회의 명칭이었다.
이 대회에서 최고의 영예를 차지하는 도박사는 명실공히 왕중왕의 칭호를 받는다.
때문에 도박계(賭博界)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오르고 싶어하는 꿈의 자리였다.
도박사 최고의 명예!
천하제일의 도박사를 가리는 왕중왕대회가 마침내 눈앞으로 다가온 것이다.
이에 내로라하는 천하의 도박사들이 왕중왕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중원으로 몰려들었다.
― 왕중왕의 최고 명예는 누가 차지할 것인가.
모른다.
천하의 모든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왕중왕대회는 눈앞에 다가오고 있었다.
***
― 대금각(大金閣)!
항주(杭州) 제일(第一)의 도박장!
이곳은 도박의 종류란 종류는 모두 갖추고 있는 초대형 도박장이었다.
건물의 규모만도 십구층(十九層).
천하에서 몰려드는 많은 도박사들을 한꺼번에 수용할 수 있으며 또한 일층에서 십층까지는 도박장으로, 그리고 십일층에서 십구층까지는 도박사들이 쉬고 머물 수 있도록 숙박 시설이 마련되어 있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대금각은 초호화판 도박장이었다.
아울러 한판에 거는 돈이 제아무리 거금(巨金)이라 할지라도 절대로 마다하지 않는 규칙과 최고의 신용을 자랑하는 곳이 바로 대금각이었다.
대금각은 열기로 가득 차 있었다.
이곳을 가득 메운 사람들은 대개가 부유층이거나 그들을 따라온 사교계의 미녀들이 대부분이었다.
또한 장기투숙을 하면서 도박을 벌이는 도박사들로 부류를 이루는 편이었다.
도박과 미녀는 언제든지 함께 따라다니는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최고의 사교장(社交場)으로도 꼽히는 대금각······.
지금, 대금각은 미녀와 도박사들로 어우러져 향기와 열기를 동시에 뿜어내고 있었다.
이층 난간.
기다란 복도가 이어져 있는 이층 난간에 두 인물이 서서 열기에 달아 있는 아래층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날카롭기 이를 데 없는 그들의 눈은 어느 한 사람의 손을 직시하고 있었다.
마치 무엇인가를 잡아내려는 듯이······.
문득 화려한 의복을 입은 왼쪽의 인물이 입을 열었다.
“저 친구인가?”
“그렇습니다.”
“······.”
“지난 사흘 동안 매일 똑같은 시간에 나타나 저 자리에 앉은 채 벌써 칠백만 냥을 땄습니다.”
“칠백만 냥······.”
화려한 의복을 입은 중년인은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도주(賭主)를 바꿔 보지 그랬나?”
“벌써 세 차례나 바꿨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화려한 의복을 입은 중년인은 칼날처럼 예리한 눈빛으로 초점의 인물을 바라보았다.
미공자(美公子).
나이는 십칠팔 세 가량······.
무척 여유 있고 지적인 면을 보이고 있는 미공자는 일신에 깨끗한 백의(白衣)를 입고 있었다.
특히 입가에 머금은 부드러운 미소가 신비하게까지 느껴졌다.
겉모습을 보아서는 도저히 이런 곳에 와서 도박을 할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그래서일까.
도박장에 있는 수많은 여인들은 힐끔힐끔 백의미공자의 얼굴을 훔쳐보고 있었다.
대체적으로 이런 곳에 드나드는 여인들은 사교계의 여인이 대부분이었으며, 멋있고 점잖으며 돈 많은 사내가 나타나면 이곳에 몰려든 여인들로부터 선망의 눈초리를 받는 것이 도박장의 습성이었다.
화려한 의복의 중년인이 말했다.
“칠백만 냥이라면 대금각이 생긴 이래 최고의 액수다.”
“······!”
“불과 사흘 동안에 한자리에 앉아서 칠백만 냥을 땄다면 도박계의 애송이는 결코 아닐 것이다.”
“······!”
“저자는 누구이며 어디에서 왔는지 알아보았는가?”
“아직······ 밝혀내지 못했습니다.”
화려한 의복의 중년인은 문책하듯 말했다.
“사흘 동안 같은 시각에 나타나 자그마치 칠백만 냥이나 땄는데 그동안 놈의 이름조차 알아내지 못했단 말이냐?”
“죄, 죄송합니다······ 총관(總管)······.”
총관!
바로 이 화려한 의복을 입은 중년인이 대금각의 총책임자이며 도박계에서도 명성이 자자한 사문혈(史門孑)이었다.
외호는 도영(賭影)!
“도박명단(賭博名單)은 찾아보았나?”
― 도박명단!
그것은 도박계에 몸담고 있는 소문난 도박사들의 이름을 찍어 놓은 명단이었다.
도박명단에는 도박사들 개개인의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신상명세가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때문에 한 번이라도 도박계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이라면 도박명단에 얼굴과 이름이 올려지는 것이다.
“찾아보았지만······ 저 같은 인상의 젊은 도박사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풋내기란 얘긴가?”
사문혈은 도박을 벌이고 있는 백의미공자의 몸에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조용히 입술을 떼었다.
“관추(關鎚).”
“말씀하십시오.”
“도박명단에······ 천하의 모든 도박사의 신상명세가 빠짐없이 수록되어 있으나 오직 한 사람만은 이름만 올라 있고 얼굴이 그려져 있지 않다.”
순간 관추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도왕······.”
“그렇다. 바로 도왕이다.”
“하면······ 총관께서는 바로 저 젊은이가······.”
사문혈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모른다. 그러나······ 도박계의 전설적인 인물인 도왕이 저렇게 젊은 미공자라고는 나도 믿지 않는다.”
사문혈은 말을 이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얼마 전에 도왕이 중원으로 들어섰다고 한다. 전왕과 함께······.”
‘도왕과 전왕······!’
“때문에 지금 중원의 도박계는 초비상에 걸려 있다.”
사문혈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단언하건대······ 천하의 도왕이 아니고서는 대금각에서 칠백만 냥이나 딸 수 있는 인물은 아무도 없다.”
“······!”
“놈은 어떤 속임수를 쓰던가?”
“그것이······ 도무지 오리무중(五里霧中)입니다.”
모르겠다는 뜻인가.
“사흘 동안 줄곧 놈의 움직임을 살펴보았으나 무슨 허점이나 속임수를 발견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문혈은 신음처럼 말했다.
“나 역시 이곳에서 세 시진 동안 놈의 손놀림을 지켜보았으나 아무런 의문점도 찾아내지 못했다.”
그렇다면 속임수를 쓰지 않는다는 얘긴가.
“그러나 분명 속임수는 쓴다. 그렇지 않고서야 칠백만 냥이라는 엄청난 돈을 딸 수 없다.”
“······.”
“밝혀내야 한다. 놈이 칠백만 냥이나 따도록 속임수 하나 발견하지 못했다고 한다면 우리 대금각은 웃음거리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싸늘하게 빛나는 눈.
사문혈은 지적이며 점잖은 모습으로 도박을 하고 있는 백의미공자를 다시 한 번 쳐다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대단한 놈이야. 분명히 속임수를 쓰고 있는데 그걸 찾아내지 못하다니······.”
문득 그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리고 손가락 끝으로 난간을 톡톡 두드리던 그는 천천히 몸을 돌리며 한마디를 던졌다.
“관추! 놈을 내 방으로 데리고 와라, 정중히······.”
“예!”
***
방(房).
사방이 투명한 수정벽(水晶壁)으로 되어 있는 이 방은 밖의 도박장이 훤히 내려다보이고 있었다.
사문혈.
그는 의자 깊숙이 몸을 묻은 채 조용히 눈을 감고 있었다.
이때였다.
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문혈은 깊숙이 묻었던 몸을 천천히 일으키며 나직하기 이를 데 없는 음성으로 입술을 떼었다.
“열렸으니 들어오시오.”
문이 열리며 백의미공자가 들어섰다.
가까이서 보는 미공자의 모습은 더욱 준수하고 우아했으며 신비스럽게 느껴졌다.
백의미공자는 담담히 웃었다.
“날 보자고 했소?”
“우선 앉으시오.”
백의미공자가 자리에 앉기를 기다린 뒤 사문혈은 두 손을 깍지끼며 차분한 음성으로 말을 꺼냈다.
“젊은 나이에 대단한 솜씨를 가졌소.”
“······.”
“대금각이 생긴 이래 한 사람이 칠백만 냥을 따기는 이번이 처음이오. 그것도 단 사흘 만에······.”
백의미공자는 미소를 지었다.
“잃는 사람이 있으면 따는 사람도 있는 것이 아니겠소?”
사문혈은 말했다.
“물론 그렇소. 하지만 공자께서 계속 그 자리에 앉아 장난을 친다면 우리 대금각의 이미지는 크게 손상될 것이오.”
“······.”
“앞으로 얼마를 더 따실 생각이오?”
백의미공자는 손가락 하나를 앞으로 내밀어 보이며 느릿하게 말을 꺼냈다.
“삼백만 냥만 더 따면 자리를 뜰 생각이오.”
“일천만 냥을 채우시겠다, 이 말씀이군.”
사문혈은 고개를 두어 번 끄덕거리며 서랍을 열어 한 장의 전표(錢票)를 내밀었다.
“일천만 냥이오.”
백의미공자는 천천히 전표를 내려다보았다.
사문혈은 말했다.
“그것을 가지고 대금각을 떠나 주시오. 더 이상 문제를 일으키지 말고······.”
일순 백의미공자는 앞에 놓인 전표를 사문혈 앞으로 밀며 말했다.
“사양하겠소.”
“······!”
“도박은 재미요. 나는 도박을 통해 승부(勝負)를 즐기는 것이지, 그냥 굴러 들어오는 돈을 원하는 것은 아니오.”
사문혈의 눈이 좁혀졌다.
“속임수를 쓰는데도 말이오?”
속임수라는 말에 백의미공자는 기이한 미소를 머금으며 입술을 떼었다.
“내가 속임수를 쓰는 걸 보았소?”
“보지는 못했소. 그러나 공자를 상대했던 도주는 물론이거니와 이곳 대금각의 도주들은 모두 속임수의 대가(大家)들이오.”
백의미공자는 웃었다.
“속임수의 대가들이라······ 그렇다면 대금각은 손님들에게 속임수를 쓰고 있소?”
“······!”
사문혈은 순간적으로 할말을 잃고 말았다.
― 그쪽에서 속임수를 쓰는데 나라고 해서 속임수를 쓰지 말라는 법은 없지 않느냐?
사문혈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한 가지만 묻겠소.”
“······.”
“공자는 혹시······ 도왕이 아니오?”
“도왕?”
백의미공자는 오히려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입가에 한 줄기 미소를 머금었다.
“난 도왕이 누군지 모르오.”
백의미공자는 도저히 짐작할 수 없는 신비로운 미소를 흘리며 느릿하게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더 이상 할말이 없다면 이만 실례하겠소.”
일순 사문혈이 말했다.
“대금각을 떠나시오. 그렇지 않으면······ 공자의 일신상에 좋지 않은 문제가 생길지도 모르오.”
“좋지 않은 일?”
순간이다.
스스슥······.
문이 열림과 동시에 검(劍)과 도(刀)를 휴대한 한 떼의 인물들이 유령처럼 나타나 입구를 봉쇄했다.
한결같이 피[血]를 바짝 말릴 것 같은 냉혹한 인상의 사나이들이었다.
백의미공자는 그들을 힐끔 응시하며 사문혈에게 말했다.
“살인을 저지를 생각이오?”
사문혈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도박장에서 살인이 일어나 사람 하나 죽어 나가는 것은 그다지 대수로운 일이 아니오.”
“그럴지도 모르지······.”
백의미공자는 의미심장하게 말하면서 무사들이 가로막고 있는 입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무척 태연하게······.
찰나 입구를 막고 있던 무사들이 백의미공자를 향해 벼락같이 검과 도를 발출했다.
쉬쉬쉬쉭―!
바로 그때였다.
와장창!
창문이 그대로 박살이 나며 한 인영이 무서운 속도로 날아들었다.
카가각―!
동시에 한 줄기 섬전 같은 광채에 이어 백의미공자를 향해 검과 도를 발출했던 무사들의 목줄기에서 시뻘건 피가 뿜어져 나왔다.
나타난 인물······.
그는 지금 마지막 한 무사의 목줄기에 검을 꽂은 상태로 등을 보이고 있었다.
일신에는 검은 흑의(黑衣).
칠흑 같은 머리를 묶은 검은 유생건(儒生巾)이 무척 인상적인 청년이었다.
모조리 검었다.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츠읏!
그가 목줄기에 박힌 검을 뽑는 순간 피가 화살처럼 뿜어지며 무사는 썩은 나무토막처럼 쓰러졌다.
철컥!
일순 검집에 검을 꽂으며 서서히 돌아서는 흑의청년.
냉혹하다.
모조리 검은빛이어서 그런지 청년의 얼굴은 유난히 희고 싸늘하게 보였다.
“누······ 누구냐?”
사문혈은 뒤로 한걸음 물러나면서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순간 흑의청년의 입에서 흘러 나오는 싸늘한 한마디······.
“전왕.”
“······!”
“내 이름은 빙우(氷雨)······ 도왕을 건드리는 자는 누구도 용서하지 않는다!”
‘저······ 전왕······!’
사문혈의 아랫도리가 사시나무처럼 후들후들 떨리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그는 방금 유유히 자리를 떠난 백의미공자를 떠올리며 다시 한 번 안면 근육을 참혹하게 일그러뜨렸다.
‘도왕······ 바로 그 청년이 도왕이었다!’
― 도왕(賭王)!
신비로운 인간의 첫번째 출현이었다.
***
구름 한점 없이 맑은 하늘이었다.
항주의 대로는 수많은 행인들로 붐비고 있었으며 그 사이로 두 청년이 걸어가고 있었다.
흑(黑)과 백(白).
우선 옷차림부터가 대조적이었으며, 그들에게서는 각기 차가움과 부드러운 분위기가 풍겨지고 있었다.
이때였다.
두두두두······.
일진의 먼지를 일으키며 화려하기 이를 데 없는 한 대의 마차가 대로로 들어서는 모습이 보였다.
― 벽옥향차(碧玉香車)!
마차 전체가 푸른 벽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바퀴 하나까지 금(金)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눈이 부시도록 화려한 마차였다.
백의미공자는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는 벽옥향차를 응시하며 빙그레 웃었다.
“대단하군. 누가 탔는지 모르지만······.”
두두두두······.
벽옥향차는 뽀얀 먼지를 일으키며 한 객관(客館) 앞에서 멈추었다.
<추연객관(秋淵客館)>
항주에서 가장 화려하며 호화로운 객관으로써 객실의 숫자만도 수백 개가 넘는 최고급 투숙소였다.
벽옥향차가 추연객관 앞에서 멈추어 서자 모든 행인들의 시선이 일제히 집중되었다.
이윽고 벽옥향차의 문이 열리며 그곳에서 내리는 한 여인.
“아······!”
“오오······.”
벽옥향차에서 내린 여인을 보는 순간 모든 사람의 입에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보라!
햇살 같은 광휘로써 나타난 여인을······.
일신에는 벽의궁장(碧衣宮裝).
곱게 빗어 단정하게 올린 머리에는 비취옥잠(翡翠玉簪)을 꽂았으며, 샛별 같은 눈[目]······.
조금은 도도해 보이면서 지적인 면을 느끼게 하는 오뚝한 코와 정열적인 붉은 입술······.
그리고 늘씬한 키와 더불어 관능적으로 빠진 몸매는 사내들로 하여금 뜨거운 열기에 사로잡히게 했다.
문득 백의미공자의 입가에 신비로운 미소가 번져 올랐다.
“굉장한 미인에다 대단한 육체파로군. 벗겨 놓고 보면 더욱 볼 만하겠어.”
백의미공자는 흑의청년의 옆구리를 툭 쳤다.
“어떠냐? 내가 저 여자 꼬시는 데 이십 냥 거는 게······.”
흑의청년은 웃었다.
“좋아.”
내기!
벽의궁장미녀를 놓고 두 사람은 희한한 내기를 하는 데 합의를 했다.
과연 누가 이길까.
백의미공자.
지금 막 추연객관 안으로 들어가는 벽의궁장미녀의 뒷모습을 보는 그의 입가에는 신비로운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
“방금 들어간 여자 누구요?”
“······?”
느닷없는 음성에 추연객관 주인은 의아한 듯 고개를 들어 상대를 바라보았다.
“어떤 여자를 말하는 겁니까?”
“벽옥향차를 타고 온 벽의궁장미녀 말이오.”
“아! 설(雪) 낭자 말이로군요.”
이렇게 말한 주인은 조금 미심쩍어하는 눈빛으로 백의미공자를 바라보았다.
일순 백의미공자는 아무 말 없이 은자를 꺼내 놓았다.
가히 뇌물이 약이라······.
백의미공자가 은자를 쥐어 주자 저절로 열리는 주인장의 입.
“대단한 여자지요. 이름은 설리향(雪璃香)이고, 천하가 다 아는 대부호(大富豪) 설천경(雪天卿)의 딸입니다.”
― 천하제일(天下第一) 거부(巨富)의 딸!
“어느 방에 묵고 있소?”
“봉황실(鳳凰室)입니다만 그건 왜······?”
“고맙소.”
백의미공자는 미묘하기 이를 데 없는 미소를 머금으며 느릿하게 몸을 돌려 안으로 걸어갔다.
“공자, 어디 가십니까?”
주인장의 다급한 질문에 백의미공자는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말했다.
“봉황실에.”
“거긴 왜······?”
“놀러······.”
“······!”
‘대부호의 딸에다 팔등신 미인이라······ 그만한 배경에 그만한 미모라면 당연히 주위에 사내들이 들끓겠군. 아무튼 내가 사냥감으로 정한 이상 절대로 내 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 미녀 사냥꾼!
백의미공자.
그는 한 줄기 미소를 머금고 조용히 뒷짐을 진 채 이층 복도를 따라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이때 객관의 점소이가 차와 요리를 들고 그의 옆을 스쳐 갔다.
“이봐!”
일순 차와 요리를 가지고 가던 점소이는 백의미공자가 부르자 걸음을 멈추며 고개를 돌렸다.
백의미공자는 부드럽게 말했다.
“그거 어디로 가지고 가는 중인가?”
“봉황실입니다만······.”
“잘됐군.”
“예?”
점소이가 무슨 말이냐는 듯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백의미공자는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거 이리 주게. 내가 가지고 갈 테니······.”
백의미공자가 자기 대신 차와 요리를 가지고 간다고 하자 점소이는 두 눈을 멀뚱거렸다.
“뉘시온데······.”
“아직 모르는 모양이군. 나 설리향의 약혼자일세.”
‘설 낭자의 약혼자······!’
점소이가 뭘 알랴.
설리향에게 약혼자가 있는지 기둥서방이 있는지······.
더군다나 눈앞에 있는 백의미공자의 모습으로 보아 설리향의 약혼자로서 충분한 품위가 있지 않은가.
점소이가 어리둥절해 하는 사이, 그가 들고 있던 차와 요리는 어느새 백의미공자의 손으로 넘어갔고······.
“그럼 가 보게.”
점소이는 여전히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며 돌아보고 또 돌아보면서 복도에서 사라져 버렸다.
씨익!
백의미공자는 한차례 웃음을 흘린 뒤 느릿하게 걸음을 옮겼다.
봉황실을 향해서······.
똑똑똑······.
봉황실 앞에 선 백의미공자는 조용히 문을 두드렸다.
“누구세요?”
옥구슬이 구르는 듯한 미녀의 음성이 들려오자 백의미공자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점소이입니다.”
“문 열려 있어요. 들어오세요.”
백의미공자는 주저 없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일순 방으로 들어선 백의미공자는 형언할 수 없는 단아한 향기가 코끝으로 스며드는 것을 느꼈다.
미녀의 체향인가.
아니면, 방 전체에 향수를 뿌려 놓은 것일까.
‘요라국(搖喇國)의 특산인 청향유(淸香油)······ 부와 미모에 걸맞는 향수를 쓰는군.’
한데 시선을 들어 정면을 바라보던 백의미공자는 어떤 의외의 상황에 움찔 놀라고 말았다.
방금 목욕을 마치고 나왔는가.
눈이 시릴 정도로 아름다운 미인이 넓은 수건으로 몸을 가린 채 화장대에 앉아 젖은 머리를 말리고 있었다.
그 살인적인 농염함을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으랴.
수건 밖으로 드러난 백옥 같은 어깨의 선.
그 어깨를 폭포수처럼 감싸고 있는 비단결 같은 머리카락······.
그리고 허벅지까지 완연하게 드러난 두 다리의 미끈함은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문득 화장대 거울에 비쳐 보였는가.
백색의 미녀는 고개를 돌려 백의미공자를 쳐다보았다.
다음 순간 그녀는 백의미공자의 준수함에 적이 놀란 탓인지 잠시 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이윽고 그녀의 앵두 같은 입술이 떨어졌다.
“점소이가 아니로군요.”
백의미공자는 조용한 웃음을 머금었다.
“점소이가 이걸 가지고 오다가 그만 실수로 미끄러져서 다리가 삐는 바람에 내가 대신 가지고 온 것이오.”
잘도 둘러댄다.
“대단히 친절한 분이군요.”
거짓말이라는 것을 느꼈는가.
미녀는 입 언저리에 야릇한 미소를 흘린 뒤 아무 말 없이 다시 젖은 머리를 말리기 시작했다.
‘무척 개방적인 아가씨로군. 저런 반나체의 차림을 하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라니······.’
백의미공자는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이건 어디에다 내려놓으면 되겠소?”
“좋을 대로 하세요.”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백의미공자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은 채 침상으로 다가갔다.
설리향은 슬쩍 고개를 돌려보았으나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한데 차와 요리를 침대 위에 내려놓던 백의미공자.
그의 눈이 순간적으로 빛났다.
침대 위.
그곳에는 설리향이 벗어 놓은 듯한 연분홍의 속옷이 소중하게 놓여져 있는 것이 아닌가.
‘후훗······.’
백의미공자는 속옷을 집어들었다.
“색깔이 좋구려. 나도 연분홍을 좋아하는 편인데······.”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돌리던 설리향은 백의미공자의 손에 들려 있는 속옷을 보고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당신······!”
“난 여자 속옷을 보면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소. 이렇게 조그만 게 어떻게 다리 사이로 다 들어가는지······.”
백의미공자는 속옷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는 불가사의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것도 모자랐던지 아예 이리 들춰보고 저리 들춰보는 것이 아닌가.
“이리 내놓지 못해요?”
설리향은 수치심과 창피함을 억누르지 못한 채 정신없이 달려와 속옷을 낚아채 갔다.
일순 백의미공자는 짓궂은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아직도 뭐가 남았단 말인가.
“물고기 잡은 그물처럼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속옷을 도대체 무엇 때문에 입고 다니는지 이해가 가지 않소. 입으나마나일 텐데······.”
― 남이야 통나무로 이빨을 쑤시든 말든······.
“속옷을 입는 목적이란 뭔가 가리기 위해서가 아니겠소? 그런데 속이 다 들여다보일 바에야 무엇 때문에 입느냐, 이 말이오. 차라리 벗고 다니지······.”
“······!”
“도무지 여자들의 속성이란 이해할 수가 없어······.”
말을 하면서 백의미공자의 시선은 시종일관 수건으로 가린 설리향의 중심부(?)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
설리향의 눈꼬리가 파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아직도 볼일이 남았나요?”
“볼일은 이제부터요.”
설리향은 싸늘한 눈으로 백의미공자를 쳐다보다가 차분하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을 꺼냈다.
“옷을 갈아입어야 하니까 그만 나가 주세요.”
백의미공자는 빙그레 웃었다.
“지금 그대로가 훨씬 보기 좋은데 무엇 때문에 거추장스러운 것을 걸쳐 아름다운 몸을 가리려는 것이오?”
이건 또 무슨 소린가.
눈요기 실컷 하게 그냥 그대로 있으라는 얘긴가.
설리향은 차갑게 말했다.
“그러는 당신은 왜 옷을 입고 있죠? 거추장스럽게······.”
“낭자만큼 몸매가 아름답지 못해서······.”
설리향은 너무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어서 아무 말도 못한 채 백의미공자의 얼굴만 빤히 쳐다보았다.
도무지 말발로는 당해 낼 재간이 없었다.
“됐어요. 충분히 즐거웠으니까 이젠 나가 주세요.”
백의미공자는 웃었다.
“나는 낭자를 즐겁게 해주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오. 그리고 내가 지금 이대로 나가지 못할 이유가 있소.”
“그 이유가 뭐죠?”
“친구하고의 내기 때문이오.”
“내기?”
“친구하고 내기를 했소. 이십 냥을 걸고······.”
설리향은 사슴처럼 커다란 눈으로 백의미공자를 응시하며 앵두 같은 입술을 열었다.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죠?”
“상관이 있소. 낭자가 내기의 열쇠를 쥐고 있는 주인공이오.”
“······?”
“낭자를 꼬시느냐, 못 꼬시느냐 하는 내기니까······.”
황당해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
한마디로 말해서 자기를 사냥감으로 놓고 내기를 하고 있다는 얘기가 아닌가.
― 뭐 이런 인간이 다 있어?
설리향은 매서운 눈으로 백의미공자를 응시하다가 돌연 차분한 어조로 말을 꺼냈다.
“내기에서 이기려면 내가 당신한테 넘어가 줘야겠군요?”
“그렇소.”
백의미공자는 빙그레 웃으며 침상에 걸터앉더니 차까지 한 잔 따라 마셨다.
본격적으로 눌러앉아서 얘기를 나눠 보자는 뜻인가.
설리향은 개의치 않고 말했다.
“어쨌든 불쾌하군요.”
“······?”
“내가 겨우 이십 냥짜리 내기의 사냥감 정도밖에 안 된다니 말이에요.”
백의미공자는 아무런 말도 없이 차를 한 모금 마셨고, 미녀 사냥감이 된 설리향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백의미공자의 준수한 얼굴을 바라보며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리고 그대로 침묵이 흘렀다.
2장 미혹(迷惑)의 살인 사건
묘한 침묵.
그 침묵은 좀처럼 깨질 것 같지 않았다.
생전처음 보는 두 남녀(男女).
여인은 배경 좋은 천하절색의 미녀인데다가 느닷없이 그녀의 방에 쳐들어와 능청을 떨고 있는 건달 같은 사내.
어디 그뿐인가.
여인은 알몸에다 수건 한 장만 겨우 걸치고 있었으며 사내는 침대에 걸터앉아 여유롭게 차를 마시고 있었으니······.
그런데 이상했다.
여인은 당연히 건달을 쫓아내야 했건만 점점 더 흥미로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이 침묵을 먼저 깨뜨린 사람은 설리향이었다.
“이름이 뭐죠?”
백의미공자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담담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백잠홍(白潛弘)!”
― 백잠홍(白潛弘)!
이것이 바로 신비로운 백의미공자의 이름이었던가.
설리향은 말했다.
“백잠홍······ 이름이 무척 색깔이 있군요. 분위기가 느껴지는 이름이에요.”
“부모님께서 이름에 신경 좀 쓰신 모양이오.”
설리향은 야릇한 눈빛으로 백잠홍의 얼굴을 응시하다가 감미로운 음성으로 말을 흘렸다.
“내 이름은 알고 있겠죠?”
백잠홍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오. 그걸 알아내기 위해서 여기 주인에게 뇌물까지 바쳤으니까······.”
“애쓰셨군요.”
이렇게 말한 설리향은 젖은 머리를 손끝으로 매만졌다.
“이상한 일이죠?”
“······.”
“여자들은 당신처럼 잘생긴 얼굴에 바람둥이 기질이 있는 남자를 의외로 좋아하니까 말이에요.”
점점 끌린다는 얘긴가.
이어 그녀의 말이 이어졌다.
“당신은 내기에서 이겼어요.”
“······.”
“내가 당신에게 넘어가 주기로 생각을 굳혔으니까 말이에요.”
한데 백잠홍이 빙그레 웃으며 무슨 말인가를 꺼내려는 순간 설리향이 야릇한 음성으로 말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이것만은 알아두세요.”
“······?”
“내가 꼬임에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당신을 꼬신 것이니까 말이에요.”
한 방 맞은 기분이었다.
허나 백잠홍은 특유의 미소를 지으며 수건으로 가려진 설리향의 몸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내가 여자 바람둥이를 만났군.”
― 여자 바람둥이!
백잠홍은 조용히 일어나 설리향의 앞으로 다가섰다.
그리고 속삭이는 말.
“바람둥이끼리 만났으니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지 않겠소?”
이렇게 말한 백잠홍은 천천히 손을 뻗어 설리향의 몸을 가리고 있는 수건을 잡아 갔다.
다음 순간이다.
스륵······.
수건이 풀어지며 밑으로 떨어졌고, 가려졌던 설리향의 나신(裸身)이 그대로 드러났으니······.
눈이 부시다 못해 온몸에 전율이 느껴질 정도의 뇌살적인 그녀의 나체······.
봉긋한 가슴.
그것은 조금도 처지지 않은 채 탄력을 느끼게 했으며, 세류요의 허리······.
그 아래로 놀랍도록 크게 확산되어 나가는 둔부의 선과 환상처럼 자리한 여인의 숲······.
정말이지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내 예상이 맞았군.”
“······.”
“벗겨 놓고 보니까 더욱 훌륭해······.”
백잠홍은 천천히 손을 들어 그녀의 백옥 같은 어깨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다른 어깨를 향해 입술을 가져갔다.
입술이 닿는 순간 설리향은 약간 움찔했으나 그 이상의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일순 백잠홍의 다른 손이 그녀의 새하얀 젖가슴 위로 얹혀졌다.
설리향은 감전이라도 된 듯 몸을 떨며 두 눈을 감고 고개를 뒤로 젖혔다.
더불어 살짝 벌어진 붉은 입술······.
백잠홍.
그는 고개를 뒤로 젖힌 설리향의 목덜미를 향해 입술을 가져갔다.
동시에 어깨를 쓰다듬던 손이 아래로 미끄러지며 새하얀 아랫배를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순간 벌어졌던 설리향의 입술이 이번에는 꼭 다물어졌다.
“음······.”
‘무척 예민한 여자로군.’
백잠홍은 뜨거운 열기가 전해지는 것을 느끼며 급기야 더 아래로 손을 내려갔다.
바로 그 순간이다.
“더 이상은 안 돼요.”
설리향이 밑으로 내려가는 백잠홍의 손목을 살며시 잡는 것이 아닌가.
“이 정도만 하더라도 서로를 느끼는 덴 충분했어요.”
설리향은 백잠홍의 손을 떼어내며 속삭이는 듯한 감미로운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다음에 만날 기회가 있다면 이 부분부터 다시 시작하도록 해요.”
― 아래로부터 시작해서 나머지 일(?)을 마치자!
이 말의 뜻을 누가 모르겠는가.
백잠홍은 말했다.
“다음에 만나면 다음의 인연을 쌓으면 되는 거고······ 지금은 급한 불부터 꺼야 되지 않겠소?”
“나는 불붙지 않았어요.”
설리향은 바닥에 떨어져 있는 수건을 집어들어 다시 알몸을 가리며 말했다.
“나는 지금 피곤해요.”
“······.”
“눈을 붙여야겠는데 나는 누가 옆에 있으면 잠을 자지 못해요.”
이젠 가라는 뜻인가.
백잠홍은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낭자······.”
한데 바로 그때였다.
돌연 차가운 바람이 느껴지는가 싶더니 싸늘하기 이를 데 없는 물체가 목덜미에 와 닿는 것이 아닌가.
‘검(劍)······!’
소리 없이 목덜미에 와 닿은 것은 검날이었다.
흑의녀(黑衣女)!
언제 나타났는지 냉기가 감도는 흑의녀가 백잠홍의 목덜미에 검을 들이대고 있었다.
백잠홍은 천천히 흑의녀를 바라보았다.
‘얼음이다!’
흑의녀를 바라보는 순간 백잠홍은 심장이 얼어붙는 듯한 전율을 느꼈다.
왼쪽 가슴에 수놓아진 한 송이 장미.
폭포수처럼 늘어뜨린 검은 머리카락은 등뒤까지 치렁거렸고, 백잠홍의 목덜미에 닿아 있는 검신의 중앙에는 흑장미가 새겨져 있었다.
차가운 미인······.
― 흑장미(黑薔薇)!
그녀는 바로 설리향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보호하는 여경호원이었다.
백잠홍은 슬쩍 흑장미를 쳐다보았다.
“내 친구 빙우하고 잘 어울리는 여자로군.”
설리향이 말했다.
“흑장미는 남자를 싫어해요.”
“호오······ 그것까지 똑같군. 빙우도 여자라면 질색을 하는 녀석이니까······.”
― 백잠홍과 설리향!
― 빙우와 흑장미!
성격이 비슷한 남녀끼리 만났으니 뭔가 이루어져도 이루어지겠다는 느낌이 든다.
문득 설리향은 매혹적인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그럼 안녕히 가세요.”
그녀는 몸을 가리고 있던 수건을 풀었다.
그리고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알몸 상태로 침상으로 가서 이불을 덮고 누웠다.
일순 백잠홍은 미소를 흘렸다.
“정면에서 볼 때는 몰랐는데 이제 보니 엉덩이가 무척 매력적이군.”
뒤까지 보여주는 꼴이 됐는가.
침상에 누운 설리향은 눈썹을 상큼 치켜 뜨며 흑장미를 향해 나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흑장미, 그분을 정중히 배웅하도록······.”
백잠홍.
몸을 돌려 눕는 설리향의 모습을 바라보면서도 그는 다시 한 번 다짐하듯 말했다.
“기억해 두시오.”
“······!”
“낭자의 입으로 한 말······.”
“······?”
“다음에 만나면 어디에서부터 시작해야 하는지 말이오.”
***
이번이 세 번째······.
영문도 알 수 없는 의문의 살인 사건(殺人事件)은 벌써 세 번째나 계속되었다.
고노(古老) 탁겸(濁兼)으로부터 시작된 미혹의 살인 사건.
그러나 세 번의 살인 사건이 있기까지 그것이 누구의 소행인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밝혀지지 않았다.
― 금농대인(金濃大人) 장취산(張翠霰)!
타고날 때부터 절름발이인 사내.
그렇기 때문에 골동품 모으는 것을 취미로 삼은 그는 자신의 지하밀고(地下密庫)에 수천 가지의 골동품을 소장하고 있었다.
한데 그가 죽었다.
무엇인가 잡으려는 듯이 허공을 움켜쥐고 두 눈을 잔뜩 부릅뜬 채로······.
그리고 골동품이 소장되어 있는 지하밀고.
그곳은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으나 무엇이 없어졌는지에 대해서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 자부노군(紫浮老君) 당필(唐畢)!
무림의 고수이며, 천하 각지에 일곱 개의 골동품 상점을 갖고 있는 위인.
한데 그도 죽었다.
이마에 동전 크기만한 구멍이 뚫린 채······.
그러나 그가 왜 죽었는지, 누구의 손에 당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밝혀진 것이 없었다.
의문스럽게 살해당한 그들 세 사람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골동품!
그들은 한결같이 골동품과 관계가 있었다.
그렇다면 영문을 알 수 없는 의문의 살인 사건은 골동품과 어떤 연관이 있다는 얘긴가.
모른다.
지금까지는 아무것도······.
***
― 표금당(票禽當)!
이곳은 골동품을 취급하는 상점이었다.
때는 야밤 삼경(三更).
일찍부터 잠자리에 든 표금당의 주인 원포(袁浦)는 세상 모른 채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한데 꿈결이었을까.
한창 꿈나라를 헤매고 있던 그는 불현듯 몸 일부분에 차가운 느낌을 받았다.
‘뭐지?’
이상한 느낌에 눈을 뜨던 그는 다음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을 정도로 기겁하고 말았다.
“누······ 누구?”
물체.
마치 유령과도 같은 새하얀 물체가 자신의 이마에 검을 들이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소리 지르지 마라.”
원포는 전신이 싸늘하게 식어 가는 느낌이었다.
소리를 지르라고 해도 이미 혀가 굳어져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할 형편이었다.
문득 수수께끼의 백영은 품속에서 한 장의 그림을 꺼냈다.
“이것을 알고 있나?”
원포는 그림을 바라보았다.
흙으로 빚은 여래신불상(如來神佛像)이 그려져 있었으며, 낡았다는 것 이외에는 특징이 없었다.
“삼년 전······ 그대는 상국사(常國寺)의 주지인 담증(覃烝)으로부터 여래신불상을 얻은 것으로 알고 있다.”
수수께끼의 백영은 손을 내밀었다.
“여래신불상을 다오.”
원포는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여래신불상이 골동품이기는 하지만 전혀 값이 나가지 않는 것이오. 한데 왜 굳이 그것을······.”
“알려고 하지 마라.”
수수께끼의 백영은 얼음처럼 차가운 음성으로 말을 흘렸다.
“여래신불상은 어디에 있는가?”
그의 물음에 원포는 무의식적으로 시선을 돌려 책상 위에 있는 작은 목갑(木匣)을 바라보았다.
“고맙다.”
일순 찰나적으로 눈치를 챘는지 수수께끼의 백영은 목갑을 향해 다가갔다.
목갑의 뚜껑을 열자 그 안에 낡은 여래신불상이 들어 있었으며, 그것을 본 백영의 눈이 섬전처럼 빛났다.
다음 순간 수수께끼의 백영은 여래신불상을 손바닥 사이에 끼고 가볍게 힘을 주었다.
꽉······.
여래신불상은 쉽게 깨졌다.
한데 깨진 여래신불상 안에서 뜻밖에도 하나의 녹슨 열쇠가 나오는 것이 아닌가.
‘이것으로써 네 번째 열쇠를 찾았다!’
녹슨 열쇠.
여래신불상 안에서 나온 그 열쇠는 무엇이란 말인가.
문득 수수께끼의 백영은 녹슨 열쇠를 품속에 갈무리한 다음 원포에게 시선을 돌렸다.
원포는 흠칫했다.
수수께끼의 백영은 감정 없는 음성으로 말했다.
“미안하다.”
“······!”
“여래신불상 안에서 나온 열쇠를 보고······ 또 나를 본 이상 입을 다물어 줘야겠다.”
말이 끝나는 순간이다.
슉!
이마 한복판이 화끈하다는 것을 느낀 원포는 옆으로 스르르 쓰러지고 말았다.
뒤이어 동전 크기만하게 뚫린 그의 이마에서 붉은 선혈이 흘러 나왔다.
수수께끼의 백영.
그의 모습은 이미 사라져 버렸고······.
네 번째 살인 사건.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소녀(少女).
아무도 돌보지 않은 채 풀잎처럼 살아온 소녀.
― 빙화(氷花).
그녀에게는 외로움이 전부였고, 그녀에게는 기다림이 삶의 보람이었다.
빙화.
나이는 십삼 세.
슬픔을 알기에는 아직 이른 나이였으되, 빙화는 너무 일찍 슬픔을 알아버렸다.
어린 시절······.
신은 그녀에게서 빛을 앗아가 버렸다.
빙화는 앞을 볼 수 없는 장님이었다.
그러했기에 열세 살의 어린 나이로 너무나 슬프고 외로운 삶을 살아야 하는 소녀.
그러나 빙화는 울지 않았다.
외로움이 밀려오면 하늘을 향해 웃었고, 견딜 수 없을 때면 쓰러질 때까지 들판을 달렸다.
오늘도 빙화는 초옥(草屋)의 언덕 위에 앉아 이슬비를 맞고 있었다.
이슬비.
소리 없이 내리는 이슬비는 초옥과 언덕, 그리고 소녀의 어린 가슴을 촉촉이 적셔 주고 있었다.
빙화.
앞을 보지 못했으되 샛별처럼 영롱하고 사슴처럼 아름다운 눈을 가진 소녀.
지금 빙화의 마음은 한없이 젖어들고 있었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하염없이 내리는 이슬비를 맞으며 비에 젖은 풀잎을 손바닥으로 쓸어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오빠······.’
허공에 실어 보내는 이름.
‘오빠는 왜 오지 않는 거야? 빙화는 이제 지쳤어. 너무 힘들어······.’
눈물.
빙화의 뺨을 타고 슬프디슬픈 두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래도 여기를 떠나지 않을 거야. 난 믿어. 오빠는 나를 데리러 올 거야. 절대로 빙화를 버리지 않을 거야.”
앞을 볼 수 없기에······.
이곳을 떠나면 더더욱 돌봐 줄 사람이 없기에······.
그래서 떠나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언젠가는 반드시 오빠가 돌아와 자신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게 해줄 것이라고 그녀는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러했기에 빙화는 여기를 떠날 수 없었다.
‘꼭 올 거야, 오빠는······.’
그러나 왜 자꾸 눈물이 나오는 것일까.
‘빙화야, 울면 안 돼······ 오빠는 눈물을 싫어하잖니. 웃어야 돼. 아무리 슬퍼도 웃어야 돼······.’
웃었다.
빙화는 이슬비를 맞으며 웃었다.
언젠가는 돌아올 오빠에게 눈물을 보이지 않기 위해서······.
‘난 기다릴 수 있어. 이대로 이슬이 되어 죽는다 해도······ 난 기다릴 수 있어.’
한데 멀리서 빙화의 모습을 바라보며 입술을 악물고 오열하는 청년이 있었으니······.
빙우(氷雨)!
그는 바로 전왕 빙우였다.
‘빙화, 내가 왔다. 이 오빠가 왔다.’
그렇다면 빙우가 빙화의 오빠였단 말인가.
이 하늘 아래 오직 둘뿐인 오누이······.
그들은 바로 친남매였다.
‘빙화, 너는 아직도 여기를 지키고 있었구나. 이 못난 오라비를 기다리며 이곳을 떠나지 않았구나.’
눈물이, 격정의 눈물이 빙우의 차가운 눈에 소리 없이 고여들었다.
그때였다.
영(靈)적으로 느꼈는가.
빙화는 돌연 빙우가 서 있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오빠······ 오빠가 온 거지? 그렇지, 오빠가 온 거지?”
빙화는 몸을 일으켰다.
“대답해. 오빠가 온 거지? 난 알아, 오빠가 온 거야. 오빠가 틀림없어.”
빙우.
참고 참았던 눈물이 마침내 그의 뺨을 타고 뜨겁게 흘러내렸다.
“빙화야······.”
순간 빙화는 뛰어갔다.
“오빠―!”
외로움과 슬픔, 그 오랜 기다림까지도 벗어 던진 채 빙우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오빠―!”
“빙화야―!”
그들은 끌어안았다.
그렇게도 내리는 이슬비 속에서 서로를 꼭 끌어안은 채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그 옛날.
배고픔을 달래 가며 울었던 시절······.
너만은 행복하게 해주리라며 잠든 빙화의 손을 꼭 잡은 채 눈물을 삼키면서 떠났던 빙우.
이제는 돌아왔다.
전왕이라는 신화(神話)의 이름을 안고······.
비[雨]가······.
소리 없이 내리는 비가······.
그들 두 남매의 어깨 위로 축복처럼 뿌려지고 있었다.
***
― 천유별원(天留別院)!
지상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 초호화 별장.
진시황(秦始皇) 시절에 건축되었다는 이 별장은 꿈의 낙원으로 불렸다.
현재의 주인은 손병(孫秉).
대명제국(大明帝國) 구대승상(九代丞相)을 지낸 그가 이 호화별장의 현재 소유자였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명의 백의미공자가 손병을 찾아왔다.
“천유별원을 나에게 파시오.”
찻잔을 내려놓으며 내뱉은 백의미공자의 말에 손병은 두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천유별원은 팔리지 않는 별장이었다.
천유별원을 사려면 천문학적인 액수를 들고 와야 했으며, 그 때문에 아무도 천유별원을 사려고 들지 않았다.
도저히 액수로는 환산할 수 없는 꿈의 별장······.
그런데 이제 약관으로 보이는 젊은 미공자가 천유별원을 사겠다고 찾아왔으니 손병의 입이 벌어질 수밖에······.
“이 별장을 얼마에 구입하셨소?”
“······.”
“손 대인이 사신 금액의 두 배를 드릴 테니 나에게 파시오.”
손병은 또 한 번 소스라쳤다.
구입한 액수 그대로 내놓아도 팔리지 않을 판에 두 배를 내겠다니······.
― 이 녀석 사기꾼 아니야?
― 아니, 미친놈인지도 몰라.
그러나 미친놈으로 보거나 사기꾼으로 몰기에는 너무나 진지하고 적극적이지 않은가.
다른 건 다 집어치우고, 손병은 한마디만 물었다.
“대체 이 별장을 왜 사려는 것이오?”
백의미공자가 하는 말.
“선물하려고.”
‘서······ 선물······?’
손병은 너무도 기가 막히고 질린 나머지 머릿속이 텅 비어 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간신히 또 물었다.
“누구에게 선물하려는 것이오?”
“여자.”
손병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렇다면······ 이곳에는 대체 몇 명이나 와서 살 생각이오?”
“한 명.”
손병은 머리가 띵하다 못해 이제는 아예 무엇엔가 홀리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 이 넓은 호화별장에 겨우 한 사람이 와서 산단 말이오?”
“그렇소. 열세 살 된 내 친구 여동생이 와서 살 것이오.”
― 열세 살 먹은 친구 여동생.
이제 열세 살밖에 안 된 소녀에게 선물로 주기 위해서 천유별원을 사겠다는 얘긴가.
“공자, 혹시 미치지 않았소?”
백의미공자는 빙그레 웃었다.
“솔직히 말해서 난 좀 미친 기질이 있소. 그러나 분명한 것은 친구를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는 것이오.”
― 친구를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한가.
손병.
오랜 시간을 두고 심사숙고하던 그는 마침내 천유별원을 팔기로 결심을 내렸고, 그는 백의미공자에게 마지막 한마디를 물었다.
“친구를 위해서 자신의 전부를 던질 수 있는 공자는 대체 누구요?”
백의미공자.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가면서 말했다.
“백잠홍······ 내 이름은 백잠홍이오.”
3장 기적(奇蹟)을 파는 약장수
낙양(洛陽).
예로부터 시(詩)의 고장으로 불렸으며 그로 인하여 시인묵객(詩人墨客)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또한 북으로는 풍령(豊嶺)을 끼고 있으며, 남으로는 할림호(割林湖)와 이어져 있어 수려함이 더할 수 없이 아름다운 곳이었다.
때문에 사시사철 유람객들이 찾아드는 곳이기도 했다.
궁정로(宮庭路).
낙양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
시인의 노래가 끊이지 않고, 그래서 조금은 북적거려 보이는 낙양의 중심가이다.
해가 서산 중턱에 걸릴 무렵.
백잠홍과 빙우는 궁정로에 도착했다.
백잠홍.
희디흰 백의에 한 자루 섭선(攝扇)을 들고 있는 그의 모습은 세력 있는 가문의 귀공자다운 면모를 풍기고 있었다.
그리고 짙은 흑의를 입은 채 한 자루 검을 차고 있는 빙우의 모습에서는 젊은 영웅의 기도(氣道)가 흐르고 있었다.
걸음을 옮기면서 빙우가 말했다.
“내일이면 왕중왕대회(王中王大會)가 벌어지는 도박의 성에 당도할 수 있겠군.”
― 도박의 성!
그들은 왕중왕대회에 참가하기 위해서 지금 도박의 성으로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문득 빙우가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자신 있냐?”
백잠홍은 가볍게 섭선을 흔들며 입을 열었다.
“빙우, 너도 알다시피 이번에 내가 왕중왕대회에 참가하려는 것은 천하제일의 도박왕이라는 명예를 거머쥐기 위해서가 아니다.”
“······.”
“그곳에 참석하지 않아도 나는 이미 천하제일의 도왕이다.”
백잠홍은 희미하게 웃었다.
“이 세상에서 도박으로 나를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없다.”
확고한 믿음인가.
한데 그렇다면 대체 무슨 이유 때문에 왕중왕대회에 참가하기 위해서 중원으로 들어왔단 말인가.
여기에는 우리가 모르는 어떤 수수께끼가 숨겨져 있는 듯했다.
백잠홍은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가 느릿하게 뒷짐을 지며 빙우에게 말을 건넸다.
“빙화가 천유별원을 마음에 들어 하더냐?”
빙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척이나 좋아하더구나. 너에게 또 한 번 신세를 진 것 같아 미안하다.”
“쓸데없는 소리.”
“······.”
“너와 나는 친구다. 또한 세상은 우리를 환상의 도박조(賭博組)라고 부르지 않느냐.”
― 환상의 도박조!
백잠홍은 말했다.
“나는 지금까지 너와 떨어져 있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
그들은 둘이되 분명히 하나였다.
빙우는 입을 열었다.
“잠홍, 나는 말이다. 너와 친구로 맺어 준 하늘을 향해 늘 감사하고 있다.”
“······.”
“정말이다. 나는 너를 위해서라면 목숨도 버릴 수 있다.”
손[手].
굳게 마주잡은 두 사람의 손을 통해 뜨거운 우정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백잠홍.
그는 웃었다.
웃으면서 말했다.
“빙우,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변한다 해도 너와 나의 우정은 변하지 말자······.”
친구여······.
이 世上의 모든 것이 변한다 해도,
너와 나의 友情은 변하지 말자!
가슴.
그들의 가슴으로 번지는 뜨거운 우정.
지금 이 순간 그들에게 죽음이 찾아온다 할지라도 그들의 우정은 깨지지 않으리라.
씨익······.
그들은 서로를 향해 웃음을 지어 보인 뒤 보란 듯이 어깨동무를 하며 궁정로 한복판을 당당하게 걸어갔다.
한데 걸음을 옮기던 백잠홍의 눈에 이상한 광경이 들어왔다.
<기적(奇蹟)의 약(藥)― 특별염가판매>
‘기적의 약?’
문구부터가 재미있어 백잠홍은 거듭 깃발에 쓰여진 글을 다시 한 번 쳐다보았다.
<一 투명인간(透明人間)이 되는 약.
一 추녀(醜女)를 미녀로 만들어 주는 약.
一 죽은 사람도 살리는 약.
一 한 알만 먹으면 평생 배고프지 않는 약.
······.>
낡아빠진 깃발에 쓰여져 있는 글을 끝까지 읽은 백잠홍은 그만 어처구니가 없었다.
‘세상에······ 저런 약이 정말로 있단 말인가?’
백잠홍은 책상다리를 하고 깃발 옆에 앉아 있는 인물을 바라보았다.
잡다하게 펼쳐놓은 약병들.
그런데 무슨 차림새가 저런가.
겉에 입은 옷은 때가 꼬질꼬질한 도사복(道士服)이었는데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목탁이었다.
뿐인가.
머리는 중[僧]의 빡빡머리가 분명한데 무릎 위에는 도사가 쓰는 도관(道冠)이 놓여져 있었다.
도사옷에 목탁!
중의 머리에 도관!
이건 도무지 중도 아니고 도사도 아닌 해괴망측한 모습이었다.
아니, 중과 도사를 섞어 놓은 형상이었다.
거기에다 약을 팔고 있으니 도사인지 중인지, 아니면 약장수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생긴 것은 또 어떠한가.
앞은 쑥 들어가고 뒤는 툭 튀어나온 뒤짱구였고, 코는 하늘을 향해 힘차게 뚫려 있었으며, 키는 앉아 있는 것인지 서 있는 것인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지독하게 작았다.
괴물(怪物)!
이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는 위인이었다.
지금 얼굴에 짙은 화장을 한 두 계집애가 그 앞에 쪼그리고 앉아 열심히 상담(?)을 하고 있었다.
“그런 약 있잖아요, 왜······.”
“무슨 약?”
“아이······ 다 알면서 왜 이러셔. 우리 같은 계집년이 쓰는 거라면 뻔한 약 아니겠어요?”
“뻔한 약이라니?”
“침대에서 죽여주는 약 말이에요.”
일순 약 파는 노인은 두 눈을 가늘게 뜨며 두 계집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무식한 년들······.”
“······?”
“깃발에 쓰여 있는 글도 못 읽냐? 이 어르신네는 죽이는 약을 파는 게 아니라 살리는 약을 판단 말이다.”
“왜 이렇게 눈치가 없으실까? 누가 그런 약 말하는 거예요?”
약 파는 노인은 그 계집을 쏘아보았다.
“이년아, 너는 앉아 있으려면 똑바로 앉아 있을 것이지, 왜 가랑이는 쩍 벌리고 앉아서 이 어르신네의 눈을 어지럽게 만드느냐?”
정말이다.
그 계집은 다리를 벌리고 앉아 있었고 가랑이 사이의 부위가 훤히 들여다보였다.
헌데 계집애가 하는 말.
“뭐 어때요? 바람 통하고 좋잖아요. 그리고 영감님도 눈요기해서 좋을 텐데 뭘 그래요?”
그러면서 가랑이를 슬쩍 더 벌리는 것이 아닌가.
‘이······ 이런 걸레 같은 년!’
약 파는 노인의 주름진 눈꼬리가 파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도대체 너희들 뭐 하는 년들이냐?”
“어머! 아직도 눈치채지 못하셨나 봐? 우린 저 건너편에 있는 춘홍루(春紅樓)의 여자들이에요.”
“춘홍루? 그곳이 뭐 하는 곳이냐?”
까만 점이 있는 계집이 추파를 던지며 말했다.
“술 팔고 몸 파는 곳이에요. 있다가 밤에 놀러오세요. 특별히 잘해 드릴 테니까요.”
‘윽!’
약 파는 노인의 얼굴이 한순간에 일그러져 버렸다.
“그럼 네년들이 말하는 약은······?”
“이제 감이 잡히셨나 봐.”
다음 순간 약 파는 노인이 왼쪽 볼을 씰룩거리며 무슨 말인가를 하려고 하는데 그보다 먼저 계집애가 입을 열었다.
“그리고 이런 약은 있는지 모르겠어요?”
또 무슨······.
“수축되는 약 말이에요.”
“······?”
“이 생활 오래하다 보니까······ 하여튼 그것 때문에 사내자식들이 바다가 어쩌느니, 뭐가 넓어서 헤엄을 치고 다니느니 하며 개소리들이 많아요.”
“······!”
“그것 때문에 싸움도 종종 일어나구요.”
계집은 바짝 다가앉으며 말했다.
“어때요? 그런 약 있어요?”
약 파는 노인.
그의 반들반들한 대머리는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으며 두 귀에는 연기가 뽀글뽀글 피어 나오고 있었다.
“이······ 이 우라질 년들 같으니라고!”
그는 눈알을 부릅떴다.
“이년들이 감히 나를 뭘로 보고······ 썩 사라지지 못해!”
“어머! 이 영감탱이가 왜 이래?”
“이 영감이 죽으려고 환장을 했나? 이년 저년 하는 것도 그냥 넘어가 주니까 아예 기고만장해서 날뛰어!”
“야, 이 늙은이야! 너 다 살고 싶어?”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는가.
‘으······.’
약 파는 노인은 두 주먹을 불끈 쥔 채 전신으로 불 같은 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한데 바로 그때였다.
“이 영감탱이, 드디어 잡았다.”
우당탕탕!
어디서 나타났는지 갑자기 백발의 노파(老婆)와 검은 면사로 얼굴을 가린 소녀가 달려들며 약 파는 노인의 멱살을 움켜잡는 것이 아닌가.
“이 날강도 같은 놈아! 내 손녀딸의 신세를 망쳐 놓고 도망가면 우리가 못 잡을 줄 알았더냐?”
순간이다.
“뭐야, 뭐······.”
“무슨 일 났어?”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우르르 그쪽으로 몰려들었다.
“저기 있는 약 파는 노인네가 저 손녀딸을 건드려 놓고 도망을 친 모양이지?”
“그랬나 봐.”
“쯧쯧쯧, 나이 값을 해야지, 나이 값을······.”
그런데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주위에 몰려든 사람들이 수군거리자 멱살을 잡힌 약 파는 노인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이 우라질 새끼들아! 모르면 아가리 닥치고 있어라!”
찰나 나타난 소녀가 얼굴을 가리고 있던 검은 면사를 홱 들추며 악을 썼다.
“이 늙은이가 뭘 잘했다고 큰소리야? 당신의 엉터리 약이 내 얼굴을 이 모양으로 만들어 놨잖아!”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소녀에게로 쏠렸다.
순간이다.
‘맙소사······!’
‘무슨 얼굴이 저 모양으로 생겨먹었냐?’
면사가 들춰지며 드러난 소녀의 얼굴······.
왼쪽 눈두덩이 혹이 난 것처럼 부풀어올라 있었으며 시뻘겋게 피멍까지 들어 있었다.
또한 입술과 코도 어떤 부작용 때문인지 잔뜩 곪아터져 있었는데······.
그뿐이면 말도 안 한다.
얼굴 전체가 누구한테 신나게 얻어맞은 듯 온통 푸르뎅뎅하게 반점이 돋아 있었다.
정말이다.
못생긴 여자를 뽑는 대회가 있다면 그녀는 죽는 날까지 두고두고 혼자 영예(?)를 차지할 것이다.
그런데 몸매 하나만큼은 기가 막힐 정도로 늘씬하게 빠졌다.
붉은 홍의(紅衣).
몸에 달라붙는 홍의를 통해 드러난 소녀의 몸매는 정신이 아찔할 정도였다.
백발의 노파.
그녀는 이마에 녹색의 띠를 동여매고 있었으며 띠의 중앙에는 한 마리의 매가 그려져 있었다.
전체적으로 날카로운 인상을 주는 노파였다.
“건방진 늙은이······ 감히 나 낭산귀모(狼山鬼母) 궁파(芎芭)에게 사기를 치다니······!”
― 낭산귀모 궁파!
이름 하나로도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이때 약 파는 노인이 다급하게 말했다.
“이거 놓고 얘기합시다. 남들 보는데 창피하게시리······.”
멱살을 움켜쥔 낭산귀모는 싸늘하게 말했다.
“창피해? 창피한 걸 아는 놈이 그 따위 엉터리 약을 팔아 처먹었던 말이냐!”
홍의소녀가 끼여들었다.
“저런 늙은이는 가만두면 안 돼요!”
“넌 가만히 있어! 이 우라질 년아! 뭐가 잘났다고 끼여들어!”
움찔······.
일순 낭산귀모의 호통에 목을 자라처럼 움츠린 홍의소녀는 못마땅한 듯이 입술을 삐죽거렸다.
‘씨······ 사람 많은 데서 욕하고 그래······.’
“저 육시랄 년! 주둥아리 씰룩거리는 것 좀 봐? 아가리를 쫙 찢어 놓을까 보다.”
‘읍!’
홍의소녀는 황급히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나 속으로는 불만을 터뜨리고 있었다.
‘저 무식의 극치······ 아무리 내 할머니라고는 하지만 정말이지 창피해서 같이 못 다니겠어.’
이때 낭산귀모는 약 파는 노인을 향해 이를 갈며 말했다.
“네놈을 잡으려고 일년을 쫓아다녔다. 천하 방방곡곡을 이 잡듯 뒤져 가면서 말이다.”
낭산귀모의 음성은 점점 싸늘해졌다.
“추녀를 미녀로 만들어 주는 약이라구? 네놈한테 속아서 손녀에게 그 약을 먹였다가 저 꼴이 됐다!”
약 파는 노인은 당당한 어조로 말했다.
“아무리 좋은 약도 부작용이라는 게 있는 법이오.”
“부작용 좋아하지 마라. 네놈이 청양성(靑陽城)에서 기적의 약인지 뭔지 하는 것을 팔고 간 뒤에 청양성 일대는 완전히 초상집 분위기로 변하고 말았다.”
이제 대충 알 만했다.
낭산귀모 궁파의 손녀 옥류염(玉琉艶).
그녀는 무림소녀(武林少女) 중에서 첫손가락에 꼽히는 무공을 지니고 있었으나 얼굴은 지독히 못생긴 편이었다.
때문에 무림의 기남아들은 아예 그녀에게 말조차 걸어오지 않았다.
그런데 청양성을 지나던 도중 우연히 기적의 약을 파는 것을 보게 되었고, 앞뒤 가리지 않은 채 약을 사버렸다.
그것이 화근이었다.
오로지 못생긴 운명에서 벗어나야겠다는 일념!
그러나 기적의 약을 복용한 뒤의 결과는 너무도 엄청나고 절망적인 것이었으니······.
이제는 아예 내놓고 다닐 수도 없게 된 얼굴.
― 이놈의 사기꾼! 중원 십팔만리(十八萬里)를 모조리 파헤치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잡고야 말겠다.
그래서 엉터리 약장수를 끈질기게 추적하여 마침내 잡았다는 이야기인데······.
어쨌거나 주위에 몰려 있는 사람들은 킥킥거리며 웃었다.
‘기적의 약은 기적의 약이군. 양귀비처럼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니라 마귀처럼 만들어 놓은 것이 탈이긴 하지만······.’
기적의 약!
그 엉터리 약으로 피해를 입은 사람이 얼마나 될까······!
이때 궁지에 몰려 있던 약 파는 노인은 모여든 사람들 중에서 백잠홍을 발견하고는 두 눈에 반짝 예광을 뿌렸다.
빠져 나갈 길을 찾아낸 것인가.
그는 내심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낭산귀모에게 말했다.
“나를 자꾸만 사기꾼으로 몰아세우는데······ 그렇다면 좋소. 기적의 약이 가짜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 보이면 될 것 아니오?”
일순 홍의소녀가 코방귀를 날렸다.
“웃기고 있네. 뭘로 증명을······.”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낭산귀모가 눈알을 부라리며 고함을 질렀다.
“이년이 또 끼여드네? 아가리 닥치고 있으라니까!”
홍의소녀는 행여나 입이라도 찢길세라 급히 입을 다물었다.
문득 낭산귀모는 살벌한 눈빛으로 약 파는 노인을 노려보았다.
“증명을 해보이겠다고? 네놈이 또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 모양인데······ 도대체 무슨 재주로 증명을 하겠단 말이냐?”
약 파는 노인이 말했다.
“어쨌든 증명해 보이면 될 것 아니겠소?”
이어 약 파는 노인은 모여 있는 사람들 중에서 누군가를 가리키며 점잖은 음성으로 말했다.
“제자야, 이리 나오너라.”
제자?
언제 이 자리에 약 파는 노인의 제자가 있었단 말인가.
그런데 손짓으로 나오라고 한 사람은 다름아닌 백잠홍이 아닌가.
졸지에 약 파는 노인의 제자가 되어 버린 백잠홍.
그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 있는 순간 그의 귀에 모깃소리보다 작은 음성이 들려왔다.
(이놈아, 이 어르신네를 한 번만 도와다오. 은혜는 평생 잊지 않겠다.)
약 파는 노인이 보낸 전음술(傳音術)이었다.
전음술.
내공(內攻)의 기가 극치에 이르지 못하면 전개할 수 없는 절세의 기공이다.
그것으로 보아 약 파는 노인은 무림의 기인인 것 같았다.
‘어디 한번 두고 볼까?’
백잠홍은 천천히 앞으로 걸어나갔다.
그가 나오는 순간 약 파는 노인은 백잠홍의 어깨에 손을 척 올려놓으며 자랑스럽다는 듯이 중인(衆人)들을 쓸어보았다.
“이놈이 내 제자요.”
백잠홍의 얼굴을 본 사람들은 그의 절륜한 용모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오오······!”
‘눈부시다. 무슨 남자가······!’
‘정말 잘생겼다. 나도 한번 저렇게 잘생겨 봤으면······.’
‘어쩌면······ 안기고 싶어······.’
‘저런 미공자하고 하룻밤만 자 봤으면 소원이 없겠어······.’
남자는 남자대로, 여자는 여자들대로 백잠홍의 절세준미한 모습에 침을 흘리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특히 옥류염은 백잠홍의 고고한 인품에 넋이 빠졌는지 두 눈 가득 연모의 정을 뿌리고 있었다.
‘아아! 너무너무 멋져······.’
이때 약 파는 노인이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여러분도 보다시피 내 제자의 얼굴은 천하제일의 미남이오.”
“······.”
“그러나 원래는 구역질이 날 정도로 지독히 못생긴 추남이었소.”
‘······!’
약 파는 노인은 말에 힘을 주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째서 천하제일의 미남으로 변했느냐? 그게 바로 기적의 약을 먹은 때문이오.”
맙소사!
백잠홍을 자신의 제자로 만들어 놓고 증명용으로 내세우고 있지 않은가.
“푸훗······.”
좀처럼 웃지 않는 빙우조차 이 대목에 이르러서는 참지 못하고 실소를 흘리고 말았다.
약 파는 노인은 낭산귀모를 쳐다보았다.
“이래도 내 약이 엉터리란 말이오? 산 증인이 있는데······?”
낭산귀모는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눈초리로 백잠홍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때 옥류염이 백잠홍에게 물었다.
“공자님께서 정말 저 늙은이의 제자인가요?”
“······.”
“그리고 원래는 더럽게 못생겼는데 기적의 약을 먹고 이렇게 절세미공자(絶世美公子)로 변했다는 게 사실인가요?”
백잠홍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빙그레 웃고만 있었다.
일순 약 파는 노인이 다급하게 전음술을 보냈다.
(이놈아, 뭘 하고 있느냐? 꿀 먹은 벙어리처럼 서 있지 말고 빨리 그렇다고 대답해라!)
이윽고 백잠홍은 여전히 미소를 지은 채 옥류염에게 말했다.
“낭자는 어떻게 생각하시오?”
백잠홍이 의미심장하게 되물어 오자 낭산귀모와 옥류염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반면 약 파는 노인은 똥줄이 바짝 탔다.
‘아이고, 이놈아! 나 좀 살려다오. 누구 죽이려고 작정을 했냐?’
불현듯 낭산귀모는 날카로운 눈으로 백잠홍을 째려보았다.
“분명히 밝혀라. 저 늙은 놈의 말이 모두 사실이냐?”
낭산귀모는 재차 말했다.
“만약 거짓말을 씨부렁거린다든가, 노신(老身)을 기만했다가는 뼈도 못 추릴 줄 알아라!”
으름장을 놓는가.
백잠홍은 빙그레 웃음을 띠었다.
그리고 낭산귀모의 물음을 잠시 보류하고는 시선을 약 파는 노인에게 돌렸다.
노인은 움찔거렸다.
백잠홍의 눈빛.
그것이 노인을 향해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 내가 뼈도 못 추릴 각오를 해가면서까지 당신을 도와준다면 당신은 내게 어떤 대가를 지불하겠소?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
더군다나 뼈도 못 추릴 각오를 해가면서까지 도와준다면 당연히 대가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약 파는 노인은 다급히 전음술을 보냈다.
(이놈아, 제발 도와만 다오. 도와만 준다면 네놈이 시키는 일이라면 뭐든지 하겠다.)
“······.”
(아니, 네놈을 아예 노부의 십구대(十九代) 조상으로 섬기겠다.)
백잠홍.
그는 미소를 지으며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그는 낭산귀모를 향해 말했다.
“사부님의 말은 모두 사실입니다.”
옥류염과 낭산귀모는 긴가민가 하는 눈빛으로 백잠홍을 바라보았고, 약 파는 노인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살았다!’
이때 옥류염이 입을 열었다.
“좋아요. 저분 공자님의 말을 전적으로 믿겠어요.”
옥류염은 입술을 잘근 깨물며 약 파는 노인을 향해 암팡진 음성으로 말했다.
“기적의 약이 진짜이건 가짜이건 그건 문제가 되지 않아요.”
“······?”
“가장 중요한 문제는 내 얼굴이 이 모양 이 꼴로 변했다는 거예요.”
옥류염의 눈꼬리가 가늘어졌다.
“비록 내 얼굴이 못생기긴 했지만 그래도 개성 하나만큼은 강했던 얼굴이에요.”
― 못생기긴 했어도 개성은 강했던 얼굴이다!
믿어 버리자.
못생긴 것도 개성 축에 든다면 드는 것이니까.
“어떻게 할 거예요? 이 상태로는 시집은커녕 평생 밖에 나다닐 수도 없으니 말이에요?”
일순 낭산귀모가 고함을 질렀다.
“이 사기꾼 늙은이야, 내 손녀딸 책임져! 네놈이 데리고 가서 살아!”
찰나 옥류염은 살얼음 같은 눈으로 낭산귀모를 노려보았다.
“할머니! 지금 무슨 말을 하시는 거예요! 나더러 저 늙은이하고 살라는 얘기예요?”
‘윽!’
낭산귀모는 움찔했다.
홧김에 한 말이지만 그건 정말 자신이 생각해도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문득 옥류염의 입꼬리가 야릇하게 말려졌다.
“나도 이 문제를 갖고 더 이상 시끄럽게 굴 생각은 없어요. 그렇지만 당신도 도의적인 책임은 져야 할 거예요.”
살기 등등하던 그녀가 갑자기 왜 부드럽게 나오는가.
약 파는 노인은 말했다.
“날더러 어떤 책임을 지란 말이냐?”
옥류염은 입꼬리에 미묘한 웃음을 떠올리며 백잠홍을 가리켰다.
“당신 제자 있잖아요.”
“······?”
“스승과 제자는 부모지간 이상이에요. 그러니까 스승의 과오를 제자가 짊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죠.”
약 파는 노인은 눈을 멀뚱거렸다.
“네 말은······ 그러니까 나 대신 내 제자가 너를 책임지란 뜻이냐?”
“그래요.”
맙소사!
아예 봉을 잡으려는가.
백잠홍을 보는 순간 홀랑 반해 버린 그녀는 이 일을 핑계 삼아 물고 늘어지려는 속셈이었다.
생각해 보라.
세상에서 가장 잘생기고 멋진 남자와 함께 살 생각을 하니 얼마나 가슴 벅찼겠는가.
비록 자신은 천하에서 가장 추물이지만······.
정말이다.
얼굴이 메주덩어리로 변하긴 했지만 이런 행운을 잡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는 사실에 옥류염은 한없이 기뻤다.
그러나 백잠홍의 심정은 말이 아니었다.
까딱 잘못하다가는 메주덩어리를 떠맡게 생기지 않았는가.
이때 약 파는 노인은 쾌재를 부르고 있었다.
‘잘됐다!’
백잠홍이야 어떻게 되든 말든 확실히 빠져 나갈 구멍을 찾은 그가 이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으흠······ 비록 부작용으로 이런 문제가 생기기는 했지만 도의적인 책임을 회피하면 안 되겠지.”
약 파는 노인은 백잠홍을 쳐다보았다.
“제자야, 들었느냐?”
“······!”
“자고로 스승과 제자는 혈연(血緣) 이상인 법······ 스승이 과오를 범했다면 마땅히 제자도 그 책임을 통감해야 하는 것이다.”
노인은 근엄하게 말을 이었다.
“물론 제자인 네가 과오를 범했다면 이 스승 또한 책임을 질 것이다.”
백잠홍은 기가 막힌 나머지 말도 꺼내지 못했다.
약 파는 노인.
그는 더욱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느릿하게 낭산귀모를 돌아보았다.
“귀모.”
“······!”
“결과야 어찌되었든 노부는 이 일에 책임을 통감하오. 해서······ 사랑하는 내 제자로 하여금 귀손녀를 책임지게 할 것이오.”
찰나 백잠홍은 황급히 말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약 파는 노인은 그에게 말할 기회를 주지 않은 채 괴로운 표정으로 허공을 쳐다보았다.
“미안하다. 정말이지 미안하다, 제자여······.”
“······!”
“노부가 더 이상 무슨 낯으로 너를 대할 수 있겠느냐? 이 사부는 네 곁을 떠나겠다.”
이어 약 파는 노인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심적 타격을 받은 듯 비틀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
“······!”
누구도 그를 잡지 못했다.
아니, 그의 심정을 이해했다.
천하에서 가장 추악한 여자에게 제자를 내맡기는 사부의 심정이 얼마나 아프겠는가.
그러나 약 파는 노인이 슬금슬금 도망을 치자 백잠홍은 다급해졌다.
“사부님!”
그가 부르는 순간 비틀거리며 걸어가던 노인이 갑자기 바람처럼 내빼기 시작했다.
슈― 아― 앙―!
정말이다.
어찌나 빨리 날아가는지 그가 지나간 자리에는 먼지가 뿌옇게 일어나고 있었다.
이때 백잠홍의 귀에 노인의 전음이 들려왔다.
(이놈아, 어쨌든 네놈 덕분에 무사히 빠져 나가게 되어 정말 고맙다.)
“······!”
(낭산귀모는 무림에서도 무식하기로 소문난 할망구다. 그리고 그녀의 손녀인 옥류염 또한 만만치 않은 계집이다.)
“······!”
(이제는 문제가 네놈한테 넘어갔으니 네놈이 알아서 해결하도록 해라. 그럼 무운을 빈다.)
노인의 모습은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문득 낭산귀모가 냉랭하게 말했다.
“흥! 그래도 양심은 있는 영감탱이로군. 제자를 맡겨 놓고 갔으니······.”
백잠홍은 손을 저었다.
“아닙니다. 그 노인은 소생의 사부가 아닙니다.”
찰나 낭산귀모가 눈알을 부라렸다.
“이 새끼가 사부를 닮아서 거짓말을 밥먹듯 하는구나! 조금 전에 네놈 입으로 분명히 말하지 않았느냐? 네놈이 그의 제자라고!”
“그건······.”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골치 아프게 생겼구나. 약 파는 노인에게 꼼짝없이 당했어.’
이 순간 옥류염은 너무도 기쁜 나머지 온몸을 비비 꼬고 있었으며, 낭산귀모는 못마땅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에이, 한심한 년······ 그 꼴에 눈은 달렸다고 잘생긴 사내는 알아보는구나. 내 손녀이긴 하지만 정말이지 밥맛 떨어져.’
이때 백잠홍은 재빨리 판단을 내렸다.
‘어물쩡거리고 있다가는 정말 곤란해질지 모른다. 이럴 때는······ 튀는 게 최고다!’
“빙우야! 튀자―!”
순간 백잠홍은 앞뒤 가리지 않은 채 냅다 도망을 치기 시작했다.
“어머나!”
“엇? 저 새끼가······!”
“할머니, 빨리 따라가서 잡아요!”
“서라!”
슈― 아― 아― 앙!
쫓고, 쫓기고······.
어느 날 벌어진 무림의 추격전(追擊戰)은 이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4장 하늘이 허락한 절대고수
대천산(戴天山).
사천성(四川省) 면주(綿州) 창명현(彰明縣) 북쪽에 있는 산으로 강산(康山), 또는 대광산(大匡山)이라고도 부른다.
산세가 수려하기로는 오악(五岳)에 견줄 만하며, 병풍처럼 둘러싸여진 절벽 위에서 떨어지는 폭포는 가히 천하일경(天下一景)이었다.
석양이 붉게 타오를 무렵.
두 개의 그림자가 산기슭에 나타났다.
백잠홍과 빙우였다.
“빌어먹을······ 하마터면 호박덩어리한테 걸려서 신세 망칠 뻔했다.”
백잠홍.
그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빙우는 피식 웃었다.
“앞으로 골치 좀 썩게 생겼다. 눈치를 보니까 그 여자 평생 죽자 사자하고 네놈을 쫓아다닐 모양이던데······.”
백잠홍은 정색을 했다.
“그만둬라. 생각만 해도 소름 끼친다.”
정말이다.
낭산귀모와 옥류염이 죽는 날까지 쫓아다닌다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특히 추녀 옥류염이 골치였다.
― 이왕 시집을 못 갈 바에야 백잠홍도 장가들지 못하도록 훼방을 놓겠다.
이럴지도 모른다.
원래가 못생긴 노처녀의 심보란 그러한 것이니까.
백잠홍은 쓴입맛을 다셨다.
“골치 아파 죽겠다. 여기서 좀 쉬었다 가자.”
백잠홍은 문득 걸음을 멈추며 근처에 있는 바위에 털썩 걸터앉았다.
빙우는 소리 없이 웃을 뿐이었다.
한데 그때였다.
뚝뚝······.
바위에 걸터앉은 백잠홍의 머리 위로 꽤나 넓은 그늘을 만든 채 퍼져 있는 거대한 나무 위에서 무엇인가 끈적한 액체가 떨어져 내리는 것이 아닌가?
백잠홍은 일순 흠칫했다.
‘피······!’
예민한 본능이 발동했는가.
백잠홍과 빙우는 순간적으로 급히 위를 쳐다보았다.
그들의 안색이 동시에 딱딱하게 경직되었다.
한 사람.
언제부터 그곳에 있었는지 한 인물이 나뭇가지 위에 힘없이 등을 기대고 있는 것이 아닌가.
머리카락이 유난히도 기다란 장발의 중년인이었다.
헌데 중상을 당했는가.
혈인(血人).
전신은 참혹하기 이를 데 없는 피투성이의 모습이었다.
더군다나 가슴을 움켜쥔 열 손가락 사이로 선지 같은 피가 꾸역꾸역 흘러 나오고 있었다.
그런 모습과는 달리 중년인의 인상은 서릿발처럼 극히 냉혹하고 어딘가 모르게 사이롭게까지 느껴지고 있었다.
백잠홍은 가볍게 미간을 찌푸렸다.
‘지독한 상처다.’
이때였다.
휙―!
나무 위의 중년인이 돌연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대로 지면에 박힌다면 머리의 어느 한 부분이 박살날 지경이었다.
그것을 본 순간 빙우의 신형이 날았다.
날았다고 느낀 순간 빙우는 떨어지는 중년인의 몸을 가볍게 받아들곤 사뿐히 지면으로 착지했다.
기막힌 신법이었다.
빙우가 아니면 보일 수 없는 화려한 동작이었다.
판단의 의지조차 흐려졌는가.
빙우의 팔에 안긴 중년인의 동공은 흐릿한 막으로 뒤덮여 있었다.
중년인은 잠시 백잠홍과 빙우를 번갈아 쳐다본 뒤 희미한 음성으로 물었다.
“누군가······ 젊은이들은······.”
백잠홍이 우아하게 대답했다.
“지나가던 사람들입니다. 한데 어쩌다 이렇게 당하셨습니까?”
“욱······!”
중년인은 입에서 한 사발 가량의 시꺼먼 핏덩이를 토해냈다.
토해진 핏덩이 속에는 으스러진 내장 부스러기들이 섞여 있었다.
보기에도 끔찍한 지독한 내상이었다.
백잠홍의 경직된 시선이 중년인의 상태를 빠르게 훑어갔다.
그의 눈에 은은한 놀람의 빛이 떠올랐다.
‘전신의 심맥이 모조리 끊어졌다. 그리고 십이경락 중 열한 군데의 경락이 크게 상했다.’
앞으로 반각 이상 버티기가 어려운 상태였다.
백잠홍이 내심 이런 판단을 세우고 있을 때였다.
음성.
어디선가부터 한 줄기 비정하도록 잔인한 음성이 몰아쳐 들어왔다.
“혈비양(血飛陽)······ 너는 이제 더 이상 갈 곳이 없다.”
심장을 얼릴 듯한 음성과 함께 섬뜩한 냉풍과 한기가 장중에 휘몰아쳤다.
휘휘휙!
휙휙!
지독한 냉풍과 함께 유령처럼 나타난 인물들.
오 인(五人)이었다.
머리에는 검은 철립(鐵笠).
빛 바랜 칙칙한 회색 장포.
전신에 감도는 악마의 숨결과도 같은 비정한 냉기(冷氣).
일견해 보기에도 인간 한계를 극복한 고도로 훈련된 살인고수(殺人高手)들 같았다.
그들이 나타나는 순간 빙우의 품에 안겨져 있던 피투성이의 중년인이 창백한 눈꼬리를 가늘게 경련했다.
“기어이······.”
그의 입을 가르고 절망적인 뇌까림이 흘러 나왔다.
찰나 더 이상의 말도 없었다.
오 인의 철립인들은 단 한 번 시선을 교환했을 뿐 침묵과 함께 일제히 중년인을 향해 무섭게 폭사해 들었다.
추― 파―!
그가가가각!
섬뜩했다.
빠르기도 했지만 그들이 검을 뽑음과 동시에 벼락처럼 몰아치는 광폭한 살인검기(殺人劍氣)는 우주를 통째로 짓이겨 버릴 듯 잔혹악랄한 것이었다.
빙우의 입가에 싸늘한 냉소가 피어오른 것은 바로 그때였다.
느끼는 순간 그의 검이 환상처럼 작렬했다.
번쩍!
폭발하는 검기······.
그것이 시작이었다.
“크악―!”
한 놈의 머리통이 베어져 그대로 허공으로 떠올랐고 뒤이어 선연한 피보라가 화려하게 솟구쳤다.
파······.
빙우의 검은 방향을 급선회하며 이번에는 좌측에서 덮쳐드는 철립인의 허리를 쓸어 갔다.
“우악!”
또 한 놈의 몸뚱어리가 머리에서 발끝까지 나무토막처럼 베어져 나갔다.
‘헉······!’
‘저, 저럴 수가······!’
나머지 삼 인의 철립인들은 빙우의 상상을 초월하는 검세를 보자 아연경악하고 말았다.
그들이 어찌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빙우!
검을 뽑지 않으면 모르되 일단 검을 뽑으면 반드시 상대의 숨통을 끊어 놓는다는 위대한 검의 달인.
슈파!
빙우의 검날이 재차 극치의 예술적인 감각을 보이며 허공을 갈랐다.
무딘 검빛이 햇살 아래 영롱하게 흐른다.
그때마다 어김없이 참혹한 비명성이 짓터져 울렸다.
“으악―!”
상대들이 누군지는 모른다.
그리고 어느 정도의 고수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단 한 가지!
그들은 절대 빙우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세 번째 철립인을 베어 버린 빙우의 검이 이번에는 전방의 철립인을 노리고 섬광처럼 뻗어 나갔다.
순간 살아 남은 이 인의 철립인들은 빠르게 시선을 교환했다.
결론은 확실했다.
― 튀자!
서로의 뜻을 확인한 두 명의 철립인들은 검을 휘둘러 빙우가 쏘아낸 검기를 차단함과 동시에 신형을 좌우로 부챗살처럼 치솟아 올렸다.
자신들의 능력으로는 빙우를 상대하기가 역부족임을 알고 도주하려는 것이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십 장 밖의 허공을 가르고 있는 철립인들의 뒷덜미로 한 소리 조용한 음성이 밀어닥친 것은 바로 그때였다.
“빙우, 놈들을 쫓아라.”
백잠홍의 담담한 음성이 다시 이어졌다.
“놈들은 우리의 얼굴을 보았다. 때문에 차후 시끄러운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그의 음성이 채 여운을 끝맺기도 전이다.
파아―!
빙우의 신형이 허공으로 떠올랐고 그것을 느꼈을 때 그의 검은 더할 수 없이 화려한 검화(劍花)를 폭사했다.
정말이다.
단지 그 한 번의 동작뿐이었다.
“으아악!”
근 이십여 장 밖까지 달아나던 두 명의 철립인 중 한 명의 등짝이 좌우로 뽀개지며 참혹한 비명성과 함께 땅바닥으로 나뒹굴었다.
불가사의한 쾌검술.
인간으로서 그와 같은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조차 믿기 어려운 고도의 살인검예였다.
그러나 나머지 한 명은 그 짧은 순간을 이용해 이미 백여 장 밖을 치닫고 있었다.
빙우의 신형이 유성처럼 그자를 쫓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그들의 모습도 백잠홍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백잠홍은 비로소 시선을 피투성이 중년인에게 던져 갔다.
밀랍처럼 창백한 중년인의 얼굴 위로 경이의 빛이 떠올라 있었다.
그는 백잠홍을 응시하며 희미하게 입을 떼었다.
“자네들은 누군가?”
“······.”
“빙우라는 젊은이······ 일찍이 저 같은 나이에 그토록 무서운 무공을 지닌 젊은이는······ 보지 못했다······.”
백잠홍은 그 질문에는 답하지 않고 조용히 물었다.
“방금 그자들은 누굽니까?”
착각이었을까?
그 순간 중년인의 탁 풀린 동공 속으로 한 가닥 전율의 공포가 스쳐 갔다.
그는 신음처럼 뇌까렸다.
“공작성(孔雀城)의 인물들이다······.”
“공작성······.”
백잠홍의 눈빛이 기이하게 굳어졌다.
한데 들었는가?
― 공작성!
단언하건대, 하늘 아래 이 이름보다 우선하는 단체가 없었으며, 우주사해팔황(宇宙四海八荒)을 통틀어 이보다 더 신비하고 불가사의한 비밀을 감추고 있는 위대한 집단은 존재하지 않는다.
당대 천하에 홀로 우뚝 선 단 하나의 하늘.
전통의 구파일방(九派一幇)보다도, 중원 무예가 자랑하는 일천무림세가(一千武林勢家)보다도, 또한 완벽한 신비에 가려진 그 어떠한 비밀세력들보다도 훨씬 더 혁혁한 위명을 뿌리고 있는 지상최강의 미증유 단체!
그곳이 바로 공작성이었다.
실로 기이한 일이 아닌가?
오직 전설과 신화만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지상최강의 세력 공작성의 인물들이 무엇 때문에 중년인을 노리고 있다는 말인가.
백잠홍이 그 부분에 강한 호기심을 느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이 선배님을 쫓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중년인은 가슴에 심한 기복을 일으켰다.
그는 힘겨운 음성으로 뜨문뜨문 대답했다.
“내 이름은 잠마(潛魔) 혈비양······ 놈들이 나를 쫓는 이유는······ 우욱······!”
그는 말을 하는 도중에 다시 시커먼 핏덩이를 토해냈다.
그때였다.
잠마 혈비양.
그의 신형이 부르르 경련했다.
혈비양은 일순 한 줄기 청량한 기운이 자신의 체내로 주입되는 것을 느낀 것이다.
백잠홍이었다.
그는 오른쪽 손바닥을 혈비양의 명문혈에 갖다 붙인 채 자신의 무궁한 내력을 혈비양의 체내 속으로 주입시키고 있는 것이었다.
창백하던 혈비양의 얼굴에 조금씩 화색이 감돌기 시작했다.
잠시 후 어느 정도 기력을 회복한 듯 혈비양의 얼굴에는 조용한 미소 하나가 떠올랐다.
죽음을 앞둔 사람의 얼굴에 떠오르는 마지막 혈색이었다.
혈비양의 감겨졌던 눈이 천천히 떠지며 백잠홍의 얼굴에 못박였다.
“젊은이도······ 무공을 아는가?”
백잠홍은 그저 담담히 웃기만 할 뿐이었다.
‘이 젊은이······ 기이할 정도로 신비하구나······.’
혈비양은 이 순간 백잠홍에게서 더할 수 없는 신비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그런 느낌과 함께 잠시 멈추었던 음성을 희미하게 이어 갔다.
“그들이 나를 쫓는 이유는······ 하나의 구슬[玉珠] 때문이다.”
‘구슬······?’
문득 혈비양이 안색을 굳히며 물었다.
“젊은이······ 이름이 무엇인가?”
“백잠홍입니다.”
혈비양의 얼굴에 떠올랐던 회광반조의 빛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희미하게 꺼져 가고 있었다.
이미 죽었어도 오래 전에 죽었어야 할 몸.
혈비양은 백잠홍의 무궁무진한 진기의 힘을 빌어 지금까지 생명을 이어 온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의 운명도 다한 듯 암울한 죽음의 장막이 서서히 그의 전신을 뒤덮기 시작하고 있었다.
혈비양은 아스라하게 꺼져 가는 눈빛으로 재차 힘겹게 말을 이었다.
“젊은이······.”
“······.”
“나를 대신해서······ 한 가지 일을 마무리해 주겠는가?”
백잠홍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말씀해 보십시오.”
혈비양은 품속으로 손을 가져갔다.
그가 꺼낸 것은 하나의 조그만 황금상자였다.
황금상자가 꺼내진 순간 주위는 휘황한 금광(金光)으로 물결쳤다.
혈비양은 황금상자를 마치 목숨처럼 소중하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 안에······ 구슬이 들어 있다······.”
“······.”
“이 구슬을······ 천홍각(天紅閣) 십삼월(十三月)에게······.”
― 십삼월(十三月)!
자세히는 모르지만 어떤 암호명 같았다.
‘대체 황금상자 안에 든 구슬이 무엇이기에······.’
백잠홍은 강한 궁금증이 일자 혈비양에게 물으려 했다.
그러나 그에 앞서 혈비양의 탁한 음성이 힘겹게 흘러 나오고 있었다.
“부탁한다······ 만약 십삼월에게 넘겨주지 못하면······ 그것을······ 이 세상에서······ 없애 버려······ 라······.”
끝이었다.
툭!
혈비양의 고개가 힘없이 좌측으로 꺾이더니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잠마 혈비양!
그의 최후였다.
백잠홍은 비로소 천천히 그의 몸에서부터 손을 떼어냈다.
그의 미간은 가볍게 찌푸려져 있었다.
‘무엇인지도 모르는 구슬······ 천홍각······ 십삼월······ 모조리 수수께끼투성이로군.’
대체 그것들은 무엇을 말함이며, 어느 날 느닷없이 밀려온 이 운명은 백잠홍에게 어떤 실체로 다가올 것인가.
이때였다.
히히히히힝······!
결코 잘못 들은 소리가 아니었다.
말 울음소리.
마치 환청인 듯 하나의 말 울음소리가 밀려와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던 백잠홍의 귓전을 기이한 충격으로 강타하는 것이 아닌가.
백잠홍의 고개가 본능적으로 꺾여진 것은 바로 그때였다.
순간 그는 보았다.
칠십 장 밖.
까마득히 치솟아 오른 가파른 절벽 위.
착각이었을까?
백마(白馬).
언제부터 그곳에 있었는지 한 필의 희디흰 백마가 절벽 끝에 아련하게 서 있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설백처럼 새하얀 백마의 잔등 위에 올라탄 채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한 사람.
일신에는 시리도록 찬란한 은의(銀衣).
이마에는 짙고 푸른 영웅건을 띠처럼 두르고 있었는데 그곳에는 하나의 화려한 공작 깃털이 꽂혀 있었다.
거기에다가 마치 억년의 호수처럼 절대고요의 눈빛과 너무도 깨끗하며 고고한 그 모습은 숙명처럼 그의 전신을 감돌고 있었다.
허나 그에게는 실로 불가사의한 또 다른 기운이 숨결인 듯 감돌고 있었다.
부드러움······.
조용함······.
그것들이었다.
그러나 한번 분노하면 신조차 전율할 전능의 초자연적 미증유의 거력이 고요하고 신비로운 그의 두 눈 속에 깊이 감추어져 있음을 아는가.
일신에 불가사의한 신의 기운을 품고 있는 백마를 탄 공작 깃털의 사나이!
파다다다닥······.
눈부신 그의 은의 자락은 절벽 위를 휩쓸고 있는 세찬 삭풍에 찢어질 듯 펄럭이고 있었다.
누구인가?
그는······.
만남.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
이 만남은 두 사람에게 충격과도 같은 전율을 안겨다 주었으며, 전생(前生)으로부터 영원토록 이어져 내려온 숙명의 불가사의처럼 한순간에 두 사람의 가슴을 꿰뚫고 치솟아 영혼까지 관통하고 있었다.
운명의 불길······.
아마도 그것은 신의 권한으로 맺어진 거대한 운명의 화염이었으리라.
***
“······.”
“······.”
침묵이다.
두 사람.
그들의 시선은 물빛처럼 고요하게 가라앉은 채 아득한 허공을 사이에 두고 그렇게 부딪치고 있었다.
말은 없었으나 백잠홍은 온통 신비의 고요 속에 휘감긴 듯한 공작 깃털의 중년인을 대하는 순간 가슴 저 깊은 곳에서부터 알 수 없는 미지의 격동 같은 것이 이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항거할 수 없는 거대한 운명의 충격과도 같은 것이었다.
‘마치 불가사의한 인간과 마주하는 듯한 기분이다. 일찍이 저같이 신비로운 분위기를 지닌 사람은 본 적이 없다!’
신비의 숨결을 장막처럼 두르고 있는 불가사의한 인간.
공작 깃털의 사나이.
그의 표정과 눈빛은 처음과 여전히 변함이 없었으며, 도무지 단 한 올의 감정조차 드러나지 않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문득 영원히 입을 열지 않을 것만 같던 공작 깃털의 사나이가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이름이 무엇인가?”
목소리.
아득한 절벽 위, 멀리 떨어져 있거늘 마치 바로 옆에서 이야기하는 듯 신비롭고 은은한 음파로 밀려들어왔다.
백잠홍은 담담히 대답했다.
“백잠홍이오.”
그의 목소리는 작았다.
그러나 공작 깃털의 사나이는 백잠홍의 말을 바로 옆에서 듣는 듯 선명하고 해맑게 들을 수 있었다.
공작 깃털 사나이의 고요한 물빛 시선이 백잠홍이 들고 있는 황금상자로 향했다.
“지금 자네 손에 있는 황금상자는 자네와는 무관한 것이다.”
“······.”
“황금상자를 그 자리에 내려놓고 자네는 갈 길을 가라.”
백잠홍은 은은한 시선으로 절벽 위에 환상처럼 자리하고 있는 공작 깃털의 사나이를 바라보았다.
“이 황금상자와 내가 무관한 것은 사실이오. 그러나······.”
“······.”
“이것을 여기에 두고 갈 수는 없소.”
“이유는 무엇인가?”
백잠홍이 오히려 반문했다.
“놓고 가라는 이유는 무엇이오?”
잘못 본 것이었을까?
공작 깃털 사나이의 표정이 잠시 굳어졌다.
그러나 이내 한 줄기 조용한 미소가 그의 입가로 번져 올랐다.
“자네는 황금상자 안에 든 구슬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
백잠홍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아무것도 모르오.”
문득 공작 깃털 사나이의 시선이 하늘로 향했다.
그리고는 마치 독백하듯 뇌까렸다.
“그 구슬의 이름은 마왕(魔王)의 구슬[玉珠]······.”
“······!”
“그러나 유령(幽靈)의 거울[鏡]과 천사(天使)의 새[鳥]가 없으면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한다.”
― 마왕(魔王)의 구슬[玉珠]!
― 유령(幽靈)의 거울[鏡]!
― 천사(天使)의 새[鳥]!
도대체 이것들은 무엇인가?
공작 깃털 사나이의 시선이 다시 백잠홍의 해맑은 얼굴로 향했다.
“잠마 혈비양이 마왕의 구슬에 대해서 아무런 말도 남기지 않은 모양이군.”
백잠홍은 말이 없었다.
그는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떼었다.
“나도 한 가지만 묻겠소.”
“······.”
“당신이 누구인지 알고 싶소.”
상대의 질문에 대한 답은 회피하고 오히려 물었다.
뜻밖으로 공작 깃털 사나이는 순순히 자신의 신분을 밝혔다.
“내 이름은 천도비(千屠菲)······ 사람들은 나를 환우공작(還宇孔雀)이라고 부른다.”
들었는가?
― 환우공작(還宇孔雀) 천도비(千屠菲)!
무예계에 절대고수들은 수도 없이 많다.
그러나 그 가운데 하늘 아래서 감히 이런 칭호로 불릴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 하늘이 허락한 지상최강(地上最强)의 절대고수!
천하무예계 청년 고수들의 살아 있는 우상이며, 절대영웅들의 신앙과도 같은 불멸의 대고수······.
또한 그는 신비와 영원한 안개의 장막에 가려진 공작성의 제이인자(第二人者)로 알려져 있다.
허나 무림의 전설은 말한다.
환우공작 천도비의 일신 무학은 신비의 공작성주(孔雀城主)를 능가하고 있다고!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공작 깃털 사나이가 무예계의 살아 있는 무신(武神)인 환우공작 천도비라는 사실은 백잠홍조차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충격이었다.
천도비.
그의 음성이 다시 고요하게 흘렀다.
“이제 황금상자를 다오.”
백잠홍은 담담하게 웃어 보였다.
그는 들고 있던 황금상자를 천천히 품속에 넣으며 입가에 흰 선 하나를 그려 올렸다.
“미안하오. 잠마 혈비양과의 약속을 나는 지켜야 하오.”
그가 황금상자를 품속에 넣기도 전이었다.
환상이었을까?
단지 흰빛이 번쩍이는 것만 느꼈을 뿐이거늘 천도비의 신형이 마치 투명한 불꽃에 휩싸인 공작처럼 백잠홍의 삼 장 앞에 나타났다.
파다다닥······.
그의 옷자락이 싱그러운 햇살 아래 미미하게 파닥이고 있었다.
정녕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환상의 절기!
하늘이 허락한 절대고수!
과연 무림계에 떠도는 이 전설과도 같은 말이 실감나는 순간이었다.
천도비는 옷자락을 펄럭이며 고요한 시선으로 백잠홍을 응시한 채 조용히 손을 내밀었다.
“다오.”
백잠홍은 눈빛을 침잠시켰다.
“미안하오.”
천도비의 얼굴이 무심하게 굳어졌다.
“다오.”
백잠홍은 무언의 침묵을 지켰다.
순간 천도비의 눈빛이 더욱 차갑게 굳어졌다.
그것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슈!
천도비의 빛처럼 투명한 우수가 영롱한 햇살 아래 불가사의한 속도로 밀려왔다.
백잠홍의 예상을 초월한 지독한 빠름이었다.
그의 입가에 한 가닥 신비한 미소가 안개처럼 떠오른 것은 바로 그때였다.
미소와 함께······.
스스스스······.
믿을 수 없게도 백잠홍의 신형이 수십 개로 변신하며 투명한 햇살 속으로 스미듯 흩어지는 것이 아닌가.
단지 그것은 느낌일 뿐이었다.
기실 그의 몸은 최초 하나에서부터 좌우 두 개로 분리되었으며, 거의 동시에 분리된 좌우의 형체에서부터 또 다른 형체가 마치 물결의 파문처럼 환상과 같이 퍼져 나간 것이었다.
환영비술(幻影秘術)!
금단이학(禁斷異學)이라 불리며, 이미 실전된 지 육백 년(六百年)이 지난 전능의 비학이다.
환영비술이 전개된 순간 눈 깜짝할 사이에 수십 개로 불어난 백잠홍의 형체는 어느 것이 진짜이고 허상인지 알아낼 수가 없을 정도였다.
소리 없는 가운데 광휘로운 햇살에 가려진 채 밀려오던 천도비의 손그림자가 돌연 방향을 급선회하며 백잠홍의 한 그림자를 가격했다.
백잠홍의 안색이 무겁게 경직되었다.
‘윽!’
그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짧은 순간에 환영비술을 전개해 자신의 형체를 수십 개로 변신했음에도 불구하고 천도비는 정확하게 실체를 공격해 온 것이다.
손그림자가 미처 백잠홍의 몸에 닿기도 전에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암경이 해일처럼 몰아쳐 들었다.
‘과연 하늘이 허락한 절대고수다!’
백잠홍은 내심 탄성을 흘리며 제자리에서 빙글 회전했다.
거의 동시에 천도비의 암경이 그를 휘감아 왔다.
충돌!
최초의 부딪침이 일었다.
단지 그것뿐이었고, 그림자처럼 붙었던 두 사람의 신형은 안개가 흩어지듯 떨어져 나갔다.
환우공작 천도비.
백잠홍.
그들 두 사람이 도대체 무슨 무공을 사용했는지조차 알 수가 없을 정도로 화려하고 신비로우며, 불가사의한 빠름이었다.
그들은 말이 없었다.
천도비는 어느새 백마 위에 우뚝 올라타 있었는데 표표히 옷자락을 휘날리고 있는 그의 표정은 여전히 신비롭고 무심했다.
기이하게도 침묵과 정적 속에 휘감긴 그의 전신에서 알 수 없는 고독의 물기가 느껴지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자신조차도 스스로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모르고 있다는 이 시대의 가장 위대한 절대고수······.
그런 그를 말없이 응시하고 있는 백잠홍의 동공에는 한순간 미미한 경이의 충격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정말이다.
백잠홍은 무림출도 이후 천도비와 같이 불가사의하고 신비한 능력을 지닌 절대고수는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다.
그러나 그의 놀라움은 오래가지 못했다.
언뜻 그의 시선 속으로 백마의 잔등 위에서 바람결같이 떠오르는 천도비의 신형을 본 것이다.
그가 그것을 느꼈을 때, 천도비의 신형은 광활한 구름 더미처럼 백잠홍의 머리 위를 휘황하게 덮어 내려오고 있었다.
백잠홍의 신형이 바람을 타고 흘렀다.
두 사람의 그림자가 햇살 속으로 흡수되며 허공 칠 장 위에서 다시 한 번 부딪쳤다.
부딪치고 스치는 순간 백잠홍의 흰 백의 앞자락은 섬뜩하게 베어져 나갔고, 그와 동시에 품속에 갈무리했던 황금상자가 어떤 거대한 흡입력에 빨린 듯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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