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비천신곡 1권
서장
事件 (Ⅰ)
천하에 괴상한 인물이 어디 하나 둘인가?
기진이보(奇珍異寶)만을 훔치는 신투(神偸).
실전무공(實戰武功)만을 익히는 낭인(浪人).
남 잘되는 것만 보면 싸움을 붙이는 이간질의 달인.
모든 것에 실증을 느껴 천하를 떠도는 거지.
······.
그러나 그런 인물 중에는 천하에 이름을 날린 인물들도 허다하였다.
― 무영야제(無影夜帝) 야운(夜雲).
일갑자 전의 인물로 천하에 그만큼 특이한 인물도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그의 특징 가운데 가장 큰 특징은 자신이 훔쳐갈 물건을 사전에 통보하고 정해진 시간에 정확히 작업(?)을 끝마치는 대도(大盜) 중의 대도라는 점이다.
천하에서 그가 노렸던 물건을 손아귀에 움켜쥐지 못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것이 무공비급이든 절세기보이든 아니면 고금의 신병이든 그가 원하는 것은 모조리 손에 넣었다. 게다가 그 물건을 소유한 상대가 부호이건, 무림의 세력이건 그도 아니면 황궁이건 어느 곳 하나 거칠 것이 없었다.
자신들이 소유하고 있던 보물을 잃어버린 자들이 어찌 그를 가만히 두었겠는가?
수백 명의 무림인들이 저마다 무리를 지어 무림을 종횡하였고, 황궁에서도 수천 명의 황군이 그를 잡고자 무림으로 쏟아져 나왔다.
허나 야운의 절묘한 역용술(易容術)과 경공(輕功)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바, 누구 하나 야운의 옷자락이라도 보았다는 사람이 없었다.
영원히 잡을 수 없는 사막의 신기루처럼 야운은 어둠 속에 은신한 채 모습을 감춰버린 것이다.
몇 달 동안 계속된 수색에도 야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모든 사람들이 포기하고 돌아서려는 순간, 추종술(追 術)의 일인자인 만리추종(萬里追 )이 야운의 흔적을 찾았다는 소문이 무림을 진동시켰다.
야운이 남긴 흔적을 찾아 칠만여 리를 추격하던 만리추종이 거의 그를 잡았다고 생각을 했을 때 마치 그를 비웃듯 야운의 모습은 그의 눈앞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상심한 만리추종은 무림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렸고, 야운은 더욱 활개를 치며 무림을 휘젓고 다녔다.
장장 수십 년 동안 밤의 황제로 지내던 야운이 은퇴(?)를 결심하며 마지막으로 한 건 하기로 한 곳이 당시 마도의 하늘로 이름을 날리고 있던 집마부(集魔府)였다.
대상은 집마부의 권위를 상징하는 집마령기(集魔令旗).
자신의 은퇴를 가장 화려하고 전설적으로 장식하기 위해 집마부에 대해 치밀하게 사전조사를 하였다. 그리고 유난히도 어두운 저녁 집마부를 향해 출발을 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었다.
그 후 야운의 모습을 보았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집마부에서도 야운이 잠입한 적이 없다고 하니 과연 야운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야운의 실종이 세인들의 관심을 끈 것은 그 동안 그가 모았던 엄청난 양의 재물과 무공비급의 향방이었다.
그 동안 야운이 모았던 재물의 양은 한 나라를 세우기 충분한 양이었다. 게다가 그가 모았던 무공비급의 분량 역시 서너 개의 문파를 개파(開派)할 수 있을 정도였다.
수십 년 동안 야운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무림인들은 그가 집마부에 잠입했다가 죽음을 당했다고 생각하였다.
그 일은 곧 세인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신비스럽게만 느껴졌던 야운의 전설이 장차 무림에 풍운을 몰고 올 전조가 될 줄이야, 그 누가 짐작할 수 있었겠는가?
事件 (Ⅱ)
따그닥― 따그닥―!
사위로 땅거미가 지는 관도 위를 필사적으로 달리는 한 대의 마차가 있었다.
한혈보마(汗血寶馬).
천리를 단숨에 달린다는 전설의 신마(神馬).
게다가 땀을 흘릴 때는 피처럼 붉은 땀을 쏟아낸다고 하여 지어진 이름 한혈보마.
천하에서 한 마리도 찾아보기 힘들다는 그 한혈보마가 무려 네 마리나 끄는 마차였다.
이미 상당한 거리를 달린 듯 네 마리 한혈보마의 전신은 피처럼 붉은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피처럼 붉은 땀으로 엉망이 된 네 마리 말들이 토해내는 뜨거운 콧김이 대기 중에 흩어지고 있었다.
“이랴―!”
그럼에도 마부석에 앉아 있는 중년인은 달리는 말에 더욱 채찍질을 하며 길을 재촉하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초조한 듯 쉴새없이 뒤편을 바라보고 있었다.
누군가의 습격을 받은 것인지 마차는 상당히 많은 부분이 파손돼 있었고, 군데군데 부러진 병창기가 박혀 있기도 하였다.
마부석에 있는 중년인의 어깨에도 한 대의 화살이 박혀 있었지만 그것을 뽑을 사이도 없는지 그저 마차를 몰기에 여념이 없었다.
“어이해 이렇게 늦는단 말인가? 이미 적들은 코앞까지 닥쳤는데······.”
이를 악문 중년인의 입에서 흘러 나온 음성에는 불안과 초조함이 진하게 배어 있었다.
그때였다.
두두두―!
돌연 마차의 후면에서 요란한 말발굽 소리가 들리는 것이 아닌가?
불안함을 감추지 못하던 중년인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하였다. 그러나 곧 정신을 차리고 말고삐를 움켜잡았다.
“이랴―!”
말들이 더한층 힘을 내어 지면을 박찰 때 마차 안에서 젊은 여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이총관(李總管)! 밖의 사정은 어떤가요?”
“별일 없습니다. 이제 곧 혈봉세가의 세력권으로 들어서게 되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중년인은 애써 큰소리로 대답하였다. 그러나 뒤편에서 따라오는 말들에게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마차는 엄청난 속도로 달리고 있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뒤편에서 따라오는 말들과의 간격은 점점 좁혀지고 있었다.
마부석에 앉아 있던 중년인의 얼굴에는 초조함만이 어려 있었다.
콰콰콰―!
마차가 요란한 소음과 함께 속도를 내며 둥글게 구부러진 관도를 따라 달리자 그 힘을 이기지 못한 마차가 넘어지려 하였다. 깜짝 놀란 중년인이 마차의 속도를 줄이는 사이 마차의 뒤를 따르던 말들이 마차 옆으로 다가들었다.
“이··· 이총관. 마··· 말을 멈추시오.”
고통에 쌓인 음성을 듣는 순간 중년인은 자신도 모르게 옆을 바라보고는 대경실색하였다.
“아니 당신은 진대장(眞隊長)?”
전신에 십여 군데의 부상을 입은 채 마차와 같은 속도로 말을 달리고 있는 인물.
뜻밖에도 그는 중년인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 척천패도(剔天覇刀) 진무강(眞武岡).
집마부의 여섯 휘하 세력 가운데 하나인 흑마단(黑魔團)의 영주였다.
그의 척천수라도결(剔天修羅刀訣)이라는 패도적인 도법으로 흑마단 내에서도 상당한 위치에 올라 있는 인물이었다. 그런데 그런 그에게 이토록 극심한 부상을 입힌 사람이 대체 누구란 말인가?
“아니 이게 어찌된 일이오?”
“지금은 시간이 없소이다. 누군가 주모님과 소주를 노리고 있으니 어서 혈봉세가로 피신을 해야 하오.”
“그렇지 않아도 갑작스런 기습에 마차를 호위하던 십팔호위사자들이 목숨을 잃었소이다.”
“누군가 주모님을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황급히 집마부를 출발하였소이다. 집마부를 떠날 때만 해도 이백 명이던 수하들이 중간에 이르러 기습을 받아 대부분 목숨을 잃고 겨우 이십여 명만 남았을 뿐이오. 여기부터 우리들이 마차의 호위를 맡을 테니 이총관은 어서 마차를 모시오.”
진무강의 말에 이총관은 마차의 주위를 보호하고 있는 그의 수하들을 바라보았다. 일신에 크고 작은 상처를 입고도 묵묵히 마차를 호위하는 그들의 얼굴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마차만은 지키겠다는 굳은 결심이 어려 있었다.
이미 주위는 짙은 어둠에 싸여 사물을 분간하기도 힘들 지경이었다.
이총관과 진무강이 더욱 긴장을 하며 주위를 살필 때 처절하기 이를 데 없는 말의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히히히― 힝―!
갑자기 무엇에 걸렸는지 앞서가던 말들이 지면으로 쓰러졌고, 마부석에 앉아 있던 이총관도 갑작스런 상황에 어쩔 줄 몰랐다. 그러나 위험을 감지한 네 마리의 한혈보마는 앞발을 들고는 그 자리에 서버렸다.
기기기― 깅―!
기이한 소음을 내며, 마차는 달리던 탄력을 견디지 못하고 비스듬히 쓰러지고 있었다.
“앗!”
진무강은 갑작스런 변화에 깜짝 놀라며 황급히 마차로 신형을 날렸다. 그리고는 마차가 채 쓰러지기 전 마차 안에서 맹렬하게 신형을 회전시키며 빠져 나왔다.
쾅―!
중심을 잃은 마차는 커다란 소리를 내며 쓰러졌고, 진무강은 쓰러진 마차 옆에 조용히 내려서고 있었다.
그런 그의 품에는 이십대 중반으로 보이는 백의미부(白衣美婦)가 안겨 있었고, 미부의 품에는 강보에 싸인 아이가 안겨 있었다.
“사정이 급박하여 감히 존체(尊體)에 손을 댄 속하를 벌해주소서.”
상당히 놀랐는지 미부의 얼굴에는 창백하게 변해 있었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화월용태(花月容態) 같은 여인의 아름다움은 감춰지지 않았다.
바닥을 살펴보던 이총관이 이를 갈며 외쳤다.
“진대장. 적들은 우리가 이곳을 지난다는 것을 이미 사전에 알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오. 저것을 보시오.”
이총관의 손이 가리킨 곳에는 지상 한 자 높이에 수도 없이 많은 하마삭(下馬索)이 매어져 있었다. 이총관의 말에 진무강은 공력을 이끌고는 주위를 살펴보았다. 그리고는 황급히 수하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모두들 경계를 게을리 하지 마라. 적들은 이미 우리를 포위하고 있다.”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들을 포위한 채 구십여 명의 흑의복면인들이 마치 유령처럼 어둠 속에서 드러냈다. 넓게 포위망을 구축하면서도 쉴새없이 신형을 움직이고 있어 마치 어둠 속을 떠다니는 유령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의 모습을 발견한 진무강은 백의미부 앞을 자신의 신형으로 가로막으며 재빨리 이총관에게 말을 건넸다.
“우리들을 기습한 자들도 바로 저들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소이다. 무공이 보통이 넘는 자들이니 조심하시오.”
진무강의 다급한 말에 이총관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신의 병창기를 움켜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는 흑의복면인들을 노려보았다.
점점 거리를 좁혀오던 흑의복면인들은 한순간 폭발을 하듯 일제히 공격을 시작하였다.
휘리리릭―!
스스스스―!
일체의 변식도 없이 일직선으로 날아드는 흑의복면인들의 공격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빨랐고, 자신의 수비를 도외시한 괴이한 공세였다. 그러나 그들의 공격이 너무나 신속하였기에 진무강의 부하들은 미처 대응을 하지 못하고 서너 명이 비명을 터트리며 쓰러졌다.
“크윽!”
“윽!”
사방에서 들리는 수하들의 비명소리에 진무강은 이를 갈았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생명보다 소중하게 지켜야 할 사람이 있기에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뒤에서 그런 광경을 지켜보던 백의미부는 결심을 한 듯 품안의 아이를 바라보았다. 태어난 지 이제 겨우 백일이 갓 지났을 것 같은 아이는 급박한 주위의 분위기를 모르는지 생글거리는 미소를 지은 채 잠들어 있었다.
“웬일인지 천기(天氣)가 불길하게 느껴진다 하였더니 이런 일이 생기는구나.”
조용하게 말하던 백의미부는 품에서 하나의 물건을 꺼내 재빨리 잠들어 있는 아이의 손목에 채워주었다.
볼품없어 보이는 하나의 동환(銅環).
“대체 나 설미령(雪美玲)을 노리는 자가 누구란 말인가? 내가 친정으로 향하는 것을 알아 공격을 한 것은 필시 나와 아이를 인질로 하여 상공을 위협하기 위함이 분명하다.”
아름답기만 했던 백의미부, 설미령의 얼굴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잔뜩 굳어졌다. 그리고 자신의 앞을 가로막고 있던 진무강에게 입을 열었다.
“진대장. 저들이 모습을 드러낸 것을 보니 우리 모자(母子)가 이 자리를 벗어나기 힘들 것 같군요. 그렇다면 이 아이만이라도 살려야 되지 않겠어요?”
“주모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속하가 목숨으로 두 분을······.”
“진대장. 냉정하게 생각을 해봐요.”
설미령의 말에 진무강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의 눈에 파상적인 흑의복면인들의 공세를 견디지 못하고 비참하게 목숨을 잃는 수하들의 모습이 들어왔다. 일 대 일로는 진무강의 수하들이 강했지만, 진무강의 수하들은 지쳤고, 숫자 또한 적어 흑의복면인들에게 제대로 대항을 하지 못했다. 허무하게 목숨을 잃는 수하들의 모습에 진무강은 이를 악물었다.
“어서 말에 이 아이를 묶고 이 자리를 벗어나게 해야 해요.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아이만은 살려야 돼요.”
긴장 어린 설미령의 말에 진무강의 눈에 이슬이 맺혔다.
“주모님.”
“진대장. 어서······.”
비통하게 흘리는 진무강의 눈물을 보며 설미령이 재촉을 하였다. 정신을 차린 진무강은 마차를 몰던 한혈보마 가운데 가장 기운이 있어 보이는 말 한 필에 어린아이를 떨어지지 않게 묶은 다음 주위를 바라보았다.
이십여 명이던 수하들도 이제는 겨우 서너 명밖에 남지 않았고, 그들의 상황도 풍전등화와 같이 위태롭기 그지없었다. 또한 공격하던 흑의복면인들도 진무강의 수하들이 결사적으로 대항하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삼십여 명이 쓰러져 있었다.
“죽어라―!”
“크윽!”
진무강은 허무하게 목숨을 잃어 가는 수하들의 모습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러나 그가 어린 주인을 탈출시키기 위해서는 흑의복면인들이 가장 적은 서쪽의 포위망을 뚫어야 했다. 그러나 남은 내공은 겨우 오성 정도뿐.
이를 악물고 결심을 한 진무강은 품에서 네 자루의 작은 단검을 꺼내들었다. 그리고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자신의 심장 주위에 박아 넣었다.
그 모습을 발견한 설미령은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아니 저것은 네 자루의 단검으로 심장 주위를 제압하여 체내의 잠력을 격발시키는 사인사령술(四刃邪靈術)이 아닌가? 비록 짧은 시간 동안 잠력을 격발시켜 무적의 내공을 얻을 수는 있지만 불과 반 시진 후에는 목숨을 잃고 마는데······.’
그가 무엇 때문에 사인사령술을 펼치는지 모를 리 없는 설미령이었다.
자신과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바치는 진무강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푸욱!
마지막 단검이 심장 주위에 박히자 불과 반각도 안되어 진무강의 신형에서는 엄청난 패기가 마치 활화산처럼 솟구쳤다.
휘리릭―!
진무강의 신형에서 쏟아져 나온 경기에 금방이라도 그의 옷을 찢어질 듯 펄럭였다. 평소 자신의 내공보다 두 배 이상 강해진 것을 확인한 진무강은 지체없이 신형을 날리며 수중의 도를 휘둘렀다.
“차앗! 척천수라멸(剔天修羅滅)―!”
츠츠츠츠―!
가공할 도기가 주위를 휩쓸며 흑의복면인들을 난자해 갔다.
“크윽!”
“켁!”
도세의 범위 내에 있던 이십 사오 명의 흑의복면인들의 전신이 갈가리 찢겨진 채 사방으로 날아갔고, 그 순간 서쪽의 포위망이 급격히 무너졌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설미령은 자신의 아이가 묶여 있는 한혈보마의 엉덩이를 세차게 때렸다.
철썩―!
히히히― 힝―!
놀란 한혈보마는 커다란 울음을 토하고는 쏜살같이 달리기 시작했다. 갑작스런 행동에 흑의복면인들은 당황하였지만 그들이 정신을 차렸을 때 이미 한혈보마의 모습은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난 후였다.
점점 멀어지는 아이의 모습을 보며, 설미령은 눈물을 참으며 이를 악물었다.
‘마도지존(魔道至尊)의 아들로 태어나자마자 이런 고난을 당하다니······. 네가 곤룡(困龍)의 운세를 타고나 어린 시절 심한 고난을 당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미리 방비하지 못했다니 정말 네게 미안하기 이를 데 없구나. 그러나 그 고난만 이긴다면 너는 창공을 지배하는 비룡(飛龍)이 될 것이다. 그때 네 옆에 있어주지 못한 나를 용서해주렴.’
그러는 사이 불과 일각도 지나지 않아 진무강의 수하들은 모두 목숨을 잃었고, 이총관 역시 서너 자루의 검에 관통이 된 채 비통해하는 모습으로 잠이 든 듯 쓰러져 있었다.
가쁜 숨을 몰아쉬는 진무강의 신형에도 크고 작은 십여 개의 검상이 새로 나 있었지만 꺾이지 않는 투혼의 화신인 양 수중의 도를 움켜쥐고 서 있었다.
설미령 역시 백의가 혈의로 바뀔 정도로 선혈을 뒤집어쓴 채 흑의복면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잠깐 동안 대치상태를 유지하고 있을 때, 그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백의복면인 한 명이 있었다.
그는 잠시 주위를 한 번 둘러보고는 황급히 흑의복면인 가운데 한 명에게 입을 열었다.
“아이는 어디에 있느냐?”
“저어 그··· 그것이······.”
흑의복면인이 우물쭈물하며 미처 대답을 잘못하자 백의복면인은 신경질적으로 손을 뻗었다.
퍽!
순간 흑의복면인의 머리통이 박살이 나며 십여 장 밖으로 날아갔다. 백의복면인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기 힘든 듯 전신을 떨고 있었다.
한편 백의복면인이 손을 쓰는 모습을 지켜보던 진무강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다··· 당신은 팔뇌원(八雷院)의 원주인 만겁마수(萬劫魔手)?”
진무강의 말에 설미령이나 백의복면인은 모두 놀랐다.
“아니 원주가 어찌 그럴 수가······?”
“흐흐흐. 어차피 죽을 목숨이니 누구의 손에 목숨을 잃는지 아는 것도 괜찮겠지. 팔뇌인(八雷印)!”
백의복면인은 그 말과 함께 불가사의한 속도로 진무강에게 다가왔고, 진무강이 피하려고 하는 순간 그의 손이 가슴을 꿰뚫었다.
푸욱―!
기이한 소리와 함께 심장이 꿰뚫리는 느낌에 진무강의 눈이 커졌다. 진무강은 마치 전신이 끓는 물 속에 빠진 듯 극심한 뜨거움을 느꼈다.
한마디 말도 남기지 못하고 커다란 나무둥치가 쓰러지듯 넘어가는 진무강의 모습에 설미령은 놀란 음성으로 외쳤다.
“아니 진대장?”
쿵!
진무강까지 쓰러지자 살아남은 사람은 설미령뿐이었다.
설미령은 천천히 다가오는 백의복면인을 발견하고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흐흐흐. 네 아들놈을 어디에 숨겼는지 어서 말해라. 그러면 네 목숨만은 살려주마.”
“닥쳐라. 그분께서 너를 어찌 대하셨는데 그 은혜를 원수로 갚다니······. 짐승만도 못한 놈.”
분노에 떠는 설미령을 보며 백의복면인은 이를 갈았다.
“닥쳐라. 무엇이 은혜란 말이냐? 그놈은 나보다 늦게 본문에 들어와 내가 차지해야 할 모든 것을 빼앗은 놈이다. 그런데 그런 것을 은혜라고 할 수 있단 말이냐?”
“흥! 자신의 능력이 모자란다는 말은 하지 않고 남의 탓만 하다니······. 받아랏!”
설미령이 돌연 검을 휘두르며 달려들자 백의복면인은 황급히 신형을 회전하며 후방으로 물러났다. 그러나 설미령의 공세가 이어지자 그로서도 반격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에잇, 괘씸한······. 팔뇌진천(八雷震天)!”
콰르르르!
요란한 소리와 함께 백의복면인의 공세가 터져 나왔다.
설미령은 검으로 자신을 보호한 채 공세를 이어나갔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의 검은 점점 무뎌졌다. 그러던 중 한 줄기 공세가 그녀의 가슴으로 날아들었다.
깜짝 놀란 그녀가 황급히 신형을 비틀었고 간발의 차이로 겨우 피할 수 있었다.
찌이익!
그러나 공세가 스치고 지나간 그녀의 가슴 부분은 길게 옷이 찢어져 그녀의 소담스런 가슴이 살짝 엿보였다. 당황한 그녀의 손발은 더욱 어지러워졌고, 그런 그녀를 백의복면인은 손쉽게 상대하였다.
“어서 네 자식놈이 달아난 곳을 말해라. 그렇지 않으면······.”
그러나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 설미령의 검이 발작적으로 밀려들었다. 여유 있게 신형을 피한 백의복면인은 다시 입을 열었다.
“흐흐흐. 좋다. 네 자식놈은 포기를 한다. 그러나 네년을 사로잡는다면 그도 내 말을 듣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가쁜 숨을 몰아쉬던 설미령은 상대가 자신의 아이를 쫓는 것을 포기하고 자신을 사로잡으려 하자 자신도 모르게 긴장을 하였다.
‘어떤 일이 있어도 그분께 짐이 될 수는 없어.’
내심 결심을 한 그녀는 상대가 방심한 틈을 타 맹렬하게 공격을 하였다.
“혈봉난비(血鳳亂飛)!”
십여 줄기의 검세가 불규칙한 곡선을 그리며 날아들자 백의복면인은 감히 경시하지 못하고 방어를 하였다.
챙챙챙!
날카로운 금속음과 함께 밤하늘을 아름답게 수놓는 불똥의 모습이 보였다.
설미령은 자신의 마지막 공격에도 상대를 제압할 수 없자 결심을 하였다.
천천히 검을 들어 중단의 자세를 취했다.
갑작스런 설미령의 모습에 백의복면인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차앗!”
푹!
날카로운 여인의 기합소리와 함께 검은 사정없이 여인의 가슴속으로 파고들었다. 너무도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백의복면인으로서는 그저 멍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창백한 안색으로 천천히 뒤로 넘어가는 설미령의 입가에는 조롱과 안도의 기색이 마치 그림처럼 걸려 있었다. 그제야 설미령의 계획을 눈치챈 백의복면인은 짐승처럼 신음을 토해냈다.
“인질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 자결을 하다니······. 지독한 계집.”
그러나 그의 음성에는 허망함만이 짙게 배어 있었다.
곧 정신을 차린 백의복면인은 주위에 있던 흑의복면인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이곳을 신속하게 벗어나도록 해라. 아마 혈봉세가의 놈들이 곧 밀어닥칠 것이다. 흔적을 지우는 것을 잊지 말도록 해라.”
그 말과 함께 백의복면인은 그 자리를 떠났고, 뒤에 남아 있던 흑의복면인은 신속하게 자신들의 흔적을 없애고는 그 자리를 떠났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벌어진 일단의 살인사건.
과연 말에 묶여 도주한 아이는 어찌 되었으며, 이 일로 천하에 어떤 일들이 발생할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1장 나의 소원(所願)은······
가뭄이 들었다.
천하 각지에서 시작된 가뭄이 몇 년 간 계속되었다.
가뭄으로 인한 기아(飢餓)와 관리(管理)들의 수탈(收奪).
소작민들은 정든 고향을 떠나 천하를 떠도는 유랑민(流浪民)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고향을 떠난 그들을 따스하게 맞이해 준 곳은 단 한곳도 없었다.
많은 유랑민들이 기아와 병마에 시달리며 여행 도중 쓰러져갔지만, 그래도 살아남은 사람들은 자신들을 기다리는 신천지(新天地)를 향하여 힘든 발걸음을 옮겼다.
워낙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일까?
유랑민 중 마음에 맞는 사람들끼리 대열을 이탈하여 정착을 한 곳은 대부분 번화한 성의 외곽이나 깊은 산 속이었다.
그렇게 해서 생겨난 것이 빈민촌(貧民村)이었고, 화전촌(火田村)이었다.
천하에는 이런 빈민촌과 화전촌이 숫자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생겨났다.
그런 마을이 얼마나 많으냐고 묻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 아닐까?
***
천빈촌(賤貧村).
강소성(江蘇省) 외곽에 위치한 여러 빈민촌 가운데 가장 찢어지게 가난한 빈민촌이다.
그들이 위치한 곳은 강소성에서 장사를 하는 주루와 객잔들이 음식물을 버리는 곳이었다.
물론 그 음식물의 대부분이 상해서 먹을 수 없는 것이지만 그래도 천빈촌 사람들은 그곳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겨울을 제외한 나머지 계절은 음식물이 상하여 먹을 수 없었다. 그러나 겨울이 빨리 찾아오고 유난히 겨울이 긴 이 강소성에서 음식물을 쉽고 편하게 얻을 수 있는 곳은 이곳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다른 빈민촌은 겨울에 많은 사람들이 아사(餓死)를 하지만 천빈촌 사람들은 오히려 겨울에 배부르게 먹을 수 있었다.
그런 이유로 천빈촌 사람들은 이런 혜택을 자신들이 독점을 하기 위해 인근의 다른 빈민촌과 많은 싸움을 하여야 했다.
천빈촌에 사는 사람들은 어려서부터 본의 아니게 많은 것을 포기하고 산다.
물론 그중에는 자신들의 목숨도 포함되어 있다.
그런 사람들이 싸움을 할 때면 죽이지 않으면 죽는 것이다.
절대 어중간한 싸움은 없다.
그렇기에 인근의 다른 빈민촌 사람들도 어지간하면 천빈촌 사람들과는 다투려 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이 원하는 것이 무리한 것이 아니면 기꺼이 양보를 한다.
그러한 것은 아이들 역시 마찬가지.
천빈촌에 사는 아이들이 독종(毒種)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천빈촌의 중앙에 난 길을 기준으로 동천빈촌과 서천빈촌으로 나눠진다. 물론 그 구분이라는 것은 애매하기 이를 데 없는 일이었다.
다만 동천빈촌에는 어린아이들이 많고 서천빈촌에는 청년들이 많다는 것이 유일한 구분 수단이랄까?
그러나 어린아이라고 우습게 여기다가는 큰코다친다.
이제 겨우 십 세 남짓한 아이들.
그러나 그들에게는 그 나이 또래의 다른 아이들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독기(毒氣)와 나름대로의 우정(友情)이 있다.
그 아이들을 이끌고 있는 것은 용사린(龍獅麟)이란 소년과 그보다 두 살이 더 많은 궁천(穹天)이란 소년.
둘의 사이는 그렇게 좋은 편이 아니었다.
용사린은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해박한 지식으로 아이들을 이끌었고, 궁천은 자신의 나이가 많은 것을 들어 용사린의 말에 곧잘 제동을 걸곤 하였다.
이 날도 둘은 말다툼을 하고 있었다.
***
“넌 네가 말한 것이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해?”
“그럼 네 말이 맞단 말이냐?”
“생각을 해봐. 우리들은 아직 어린애란 말이야. 그런데 칼 같은 것을 사용한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소리야.”
다섯 자도 안돼 보이는 허름한 복장의 소년이 눈앞의 소년을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소년의 이름은 용사린(龍獅麟).
정확히 자신이 어디에서 태어났는지 모르는 소년이다.
다만 용사린이 발견이 되었을 때 소년의 팔에 허름한 동환(銅環)이 하나 채워져 있었고, 그 동환에 용사린이란 이름이 새겨져 있었을 뿐이었다.
그것이 소년의 이름인지, 아니면 소년을 버린 사람의 이름인지 아무도 몰랐다.
해서 천빈촌 사람들은 편의상 소년을 용사린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그때부터 용사린은 천빈촌에서 생활을 시작하였고, 눈치가 빠른 탓에 고아이면서도 꽤 많은 사람들에게 귀여움을 받고 있었다.
지금 용사린과 대치를 하고 있는 소년은 궁천으로 이곳 천빈촌에서 꽤 큰집을 소유하고 있는 아버지를 부모로 둔 소년이었다.
궁천으로서는 용사린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신보다 작은놈이 무슨 일이건 사사건건 나서서 잘난 척하며 말하는 것도 싫지만 자신이 하는 말에 꼬투리를 잡는 것이 그야말로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웠다.
이 날도 자신이 하는 말에 당장 반대를 하는 것이었다.
“그럼 좌가촌(左家村) 놈들이 이곳까지 쳐들어와도 참고 가만히 있어야 된단 말이냐?”
좌가촌(左家村).
천빈촌 바로 옆에 있는 빈민촌으로 다른 빈민촌보다 좌씨 성을 가진 이들이 많아 좌가촌으로 불린다. 그리고 먹을 것이 부족하여 항상 천빈촌을 노리고 있었다.
그쪽 아이들은 이미 나이들도 십 사오 세 정도 되어 몸집만 보면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워낙 천빈촌의 아이들이 독종들이기에 매번 패배를 하면서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누가 그냥 있는다고 했어? 다만 칼을 사용해서는 안된다는 거지.”
“그럼 어떻게 그놈들을 막겠다는 거냐?”
“어떻게 하긴. 여태 했던 것처럼 우리 모두 힘을 합쳐 그놈들을 막아내야지.”
“그건 말도 안되는······.”
두 소년이 팽팽하게 자신의 의견을 굽히지 않고 대치를 함에도 불구하고 다른 소년들은 그저 구경만 하고 있었다.
두 소년을 바라보는 그들의 눈에는 동조도, 반대도 아닌 회색(灰色)의 기운만이 어려 있었다.
그때였다.
그들에게 황급하게 뛰어오는 어린 소년이 있었다.
가쁜 숨을 내쉬며 단숨에 그들이 있는 곳까지 달려온 소년은 숨을 몰아쉴 뿐 좀처럼 말을 하지 못하였다.
“헉··· 헉··· 헉······.”
소년이 말을 하지 못하자 성미가 급한 궁천은 소년의 어깨를 흔들며 질문을 하였다.
“무슨 일이야?”
“헉··· 헉······! 옆··· 마을··· 놈들이······.”
소년의 말을 듣자 바닥에 아무렇게나 앉아 있던 소년들의 얼굴에 비로소 표정이라는 것이 생겼다.
생기를 잃었던 눈에 파르스름하게 보이는 것은 살기(殺氣)에 가까운 공격성(攻擊性)이었다.
어느 틈인가 소년들은 공들여 깎은 몽둥이를 들고 조금 전 소년이 달려온 곳으로 달려갔다.
그들이 도착한 곳에는 이미 좌가촌의 아이들이 역시 몽둥이를 든 채 기다리고 있었다.
언뜻 보아도 좌가촌 아이들이 숫자도 많고 체격도 훨씬 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빈촌 아이들이 나타나자 찔끔하며 왠지 주눅이 든 표정이었다.
천천히 앞으로 나선 용사린과 궁천.
“무슨 일로 이곳에 온 것이지?”
“오늘은 반드시 네놈들의 버릇을 고쳐주겠다.”
한걸음 앞으로 나서 입을 여는 소년은 용사린이나 궁천보다 훨씬 체격이 컸다.
“좌표(左彪). 네가 말은 항상 그렇게 하지만 매번 우리에게 지고 도망가는 것은 너희가 아니냐?”
용사린의 말에 좌표라고 불린 소년은 수치심으로 얼굴이 붉어졌다. 애써 달아오르는 얼굴을 식힌 소년은 이를 갈며 입을 열었다.
“좋다. 오늘도 네놈들이 이길지 두고 보자.”
좌표는 뒤에서 자신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는 아이들을 보고는 몽둥이를 잡은 손을 번쩍 들었다.
그리고는 큰소리로 외쳤다.
“공격―!”
좌표의 말에 좌가촌의 아이들은 커다란 함성을 지르며 돌진을 해왔다.
“와―!”
“천빈촌 놈들을 박살을 내자!”
그러나 그들이 공격하는 것을 보고도 천빈촌 아이들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다만 그들이 좀더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그들이 오 장 앞으로 다가오자 용사린은 손을 번쩍 들었다.
그러자 흙 속에 감춰두었던 밧줄이 팽팽하게 당겨진 채 모습을 드러냈고 좌가촌의 아이들은 밧줄에 걸려 넘어졌다.
그러나 워낙 맹렬한 속도로 달려와서인지 앞장섰던 아이들이 넘어지자, 뒤에 있던 아이들도 미처 피하지 못하고 연쇄적으로 넘어져 버린 것이다.
순간 용사린의 눈빛이 빛났다.
“공격―!”
그제야 천빈촌 아이들은 좌가촌 아이들을 공격하였다. 소년들은 단 한마디 말도 없이 몽둥이를 휘두르며 좌가촌 소년들을 공격하였다.
넘어지자마자 천빈촌 소년들이 공격을 하자 좌가촌 소년들은 당황하여 도망치기 바빴다.
천빈촌 소년들은 도망치는 소년들은 본 척도 하지 않고, 쓰러진 소년들을 더욱 매섭게 공격을 하였다.
이미 바닥에 쓰러진 좌가촌 소년이 열 명이 넘었다.
물론 천빈촌 소년들도 무사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들도 좌가촌 소년들이 반항을 하며 휘두른 몽둥이에 머리나 팔, 다리를 맞아 부러지고 깨지고 하였지만, 어느 누구도 신음을 터트리는 소년은 없었다.
궁천은 자신의 팔에 통증이 이는 것을 느꼈지만 애써 참으며 큰소리로 입을 열었다.
“얘들아! 저놈들을 어서 묶자.”
궁천의 말에 소년들은 자신의 상처에서 이는 고통을 참으며 바닥에 쓰러져 있는 좌가촌 아이들을 끈으로 묶기 시작했다.
궁천과 소년들은 좌가촌 소년들을 포로로 잡고는 의기양양하게 천빈촌으로 향하였다.
뒤따라오던 용사린은 그 모습을 차분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갖가지 부상을 입은 소년들은 손과 다리 그리고 머리 등을 지저분해 보이는 천으로 칭칭 감은 채 만났다.
어느 누구 하나 다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소년들의 얼굴은 자신들보다 체격도 더 크고 숫자도 많은 좌가촌 소년들을 물리쳤다는 승리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자신들만의 성에 모인 소년들은 자신들의 무용담을 저마다 떠들며 자랑을 하였다.
“사린. 이래도 너는 우리가 칼을 가지면 안된다고 할 테냐?”
궁천 역시 이번 결투에서 심한 부상을 입었다.
팔이 부러졌는지 한쪽 팔에 부목을 댄 채 천으로 칭칭 감고 있었다.
그런 궁천의 모습을 보며 용사린은 입을 열었다.
“궁천, 너는 우리가 숫자로 열세이니까 칼을 갖자고 하지만 만약 우리가 칼을 먼저 사용하게 된다면 좌가촌 놈들도 칼을 사용할 거야. 그리고 저놈들은 우리보다 숫자가 많아. 그렇게 되면 너는 그놈들을 어떻게 막을 거야?”
용사린의 말에 궁천은 할말이 없었다.
그리고 용사린이 지금 말한 것을 모르는 바도 아니었다. 어떻게든 용사린이 자신의 말을 따르는 것을 보고 싶었기에 괜한 억지를 부리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러니까 힘은 들겠지만 지금처럼 그냥 몽둥이를 사용하는 것이 훨씬 좋아.”
용사린의 말에 소년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몽둥이로 맞으면 가장 심하게 다친다고 하더라도 뼈가 부러지는 것으로 끝나지만 만약 칼을 사용한다면 그대로 절단이 아닌가?
말 그대로 스쳐도 사망할지 모르는 일이었다.
아무리 독한 소년들이지만 그들에게도 죽음에 대한 막연한 공포는 있었다.
“그런 이야기는 그만하고 오늘 저녁에 모여서 놀자.”
용사린의 말에 소년들은 대부분 찬성을 하였다.
소년들이 헤어지고 혼자 그 자리에 남아 있던 궁천은 용사린이 사라진 곳을 바라보며 나직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어디서 태어났는지도 모르는 놈한테 계속 당할 수는 없어. 언젠가는 갚아줄 날이 있을 거야.”
***
천빈촌의 뒤편에 위치한 나직한 석산(石山).
워낙 칼날 같은 바위들이 모인 석산은 사람들의 발길이 뜸한 곳이었다. 그런 이유로 소년들은 석산의 한쪽을 자신들의 본거지로 삼고 있었다.
산기슭의 바위들이 마치 성벽처럼 둘러쳐져 있는 곳.
그러나 잔월의 빛을 받아 그림자가 늘어진 것이 마치 지옥처럼 보이는 곳이었다.
가장 먼저 도착한 소년은 용사린이었다.
그는 일전에 모아둔 나뭇가지들을 공터의 중앙에 모아놓고 불을 지폈다.
따― 따― 딱―!
워낙 마른 나뭇가지여서일까?
나뭇가지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불씨를 날리며 타올랐다.
멍하니 타오르는 불꽃을 보며 용사린은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일까?
그의 눈은 멍하니 어둠 속에서 자신의 몸을 사르며 타 들어가는 나뭇가지를 보고 있었다.
순간 그의 뒤에서 발자국 소리가 났다.
저벅― 저벅―!
용사린은 고개를 돌려 모닥불로 다가오는 인영을 바라보았다. 뚱뚱한 체격을 한 적산이란 소년이었다.
적산은 용사린이 모닥불 옆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그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언제 왔어?”
“조금 전에······.”
“다른 애들은······?”
“아직······.”
전혀 소년답지 않은 질문과 대답이었다.
시간은 하염없이 흘러 사위는 더욱 짙은 어둠에 쌓였다.
하나 둘씩 모습을 드러낸 소년들은 멍하니 모닥불을 보고 있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입을 여는 소년이 없었다.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 용사린이 입을 열었다.
“오늘 다른 아이들은 오지 못하는 모양이야.”
“그래. 그런데 이렇게 모이긴 모였는데 뭘 할 거야?”
작은 음성으로 가성이 입을 열었다.
“글쎄 무엇을 하면 좋을까?”
용사린의 물음에 대답을 한 사람은 소취였다.
“내가 일하는 주루에서 들은 이야기인데··· 옛날에 야운이라는 사람이 있었대.”
“야운? 뭐하던 사람인데······?”
“내가 알기로는 신투(神偸)였대.”
“신투? 도둑이란 말이야?”
소취의 말에 소년들의 눈빛이 반짝였다.
“그래. 도둑 중에서도 최고인데 사람들의 이야기로는 그 사람이 살아 있을 때 훔친 보물이 엄청나게 많다는 거야.”
“보물?”
“그래. 그런데 그 장소를 그 사람만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사람이 죽은 후 아무도 야운이란 사람의 보물을 찾지 못하고 있대. 만약 그 보물만 찾을 수 있다면 엄청난 부자가 될 수 있을 텐데······.”
소취의 말은 묘한 여운을 띠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소년들의 눈에는 막연하지만 기대의 빛이 떠올라 있었다.
한동안 그런 시간이 지나고 소취가 먼저 입을 열었다.
“우리에게 그런 재물을 얻을 기회가 있을지 모르지만 진짜 그 보물을 찾았으면 좋겠어.”
소취의 말에 적산이 약간은 심통이 어린 얼굴로 말했다.
“나는 있을지도 모르는 황금보다는 당장 끼니를 때울 만두가 더 필요해.”
퉁명스럽게 말을 내뱉던 적산.
쪼― 르― 륵―!
그 소리가 적산의 배에서 나는 소리라는 것을 다른 소년들도 알 수 있었지만 누구도 웃을 수 없었다.
그들 자신도 굶주림을 참으며 이 자리에 앉아 있기 때문이었다.
“만약 내가 그 보물을 찾는다면 이 세상에서 가장 화려한 집을 짓고, 매일 세 끼를 다른 음식으로 먹을 거야. 또 옷은 화려한 금의(錦衣)만 입고, 내가 아는 모든 사람들을 불러 매일 연회를 베풀 거야.”
적산의 말이 끝나자 소년들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옆에서 그 말을 듣고 있던 가성이 입을 열었다.
“만약 나에게 그런 행운이 찾아온다면 천하에 헐벗고, 불쌍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사람이 되고 싶어. 약하고, 착한 사람들을 괴롭히는 사람들을 혼을 내주어 그래도 세상은 아직 살아볼 만한 곳이라는 생각을 하게 해주고 싶어.”
가성의 말에 옆에서 그 말을 듣고 있던 소년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가성같이 여린 성격의 소유자라면 아마 다른 일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천아. 너는 보물을 찾는다면 무엇이 되고 싶니?”
한 소년의 물음에 궁천은 오래 전부터 생각을 하였는지 망설이지 않고 입을 열었다.
“만약 나에게도 그런 기회가 온다면 천하를 호령하는 대장군이 되고 싶어.”
궁천은 잠시 마른입술에 침을 묻히고는 말을 이었다.
“천하를 다스리는 것이 황제라고는 하지만 나는 미처 황제의 손이 미치지 못하는 곳을 감싸주고 싶어. 야운의 보물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지만 만약 그 보물의 양이 충분하다면 천하에 있는 빈민촌을 모조리 없애고 싶어.”
“그럼 이번에는 소취가 말을 해봐.”
왜소한 체격의 소취가 입을 열었다.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건강하지 못하고, 잘하는 것도 없어. 만약 내가 그 보물을 찾게 된다면 나처럼 배우지 못한 어린애들을 찾아 그 아이들이 원하는 만큼 가르쳐주고 싶어.”
누구보다 기억력이 뛰어난 소취의 소원이 성내의 다른 아이들처럼 서원(書院)에 다니고 싶어하는 것임을 소년들은 모두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높은 관직(官職)에 올라 천하에 불쌍하게 사는 사람, 가난하게 사는 사람들에게 많은 것을 베풀 수 있는 사람이 될 거야.”
소취의 말에 다른 소년들은 용사린을 바라보았다.
그는 자신들을 은연중에 이끌던 대장이니 그 꿈도 클 것이라고 나름대로 생각을 하였다.
소년들이 자신을 바라보자 용사린의 얼굴은 불빛을 받아 붉게 보였다.
가성이 용사린을 바라보았다.
“사린이는 항상 우리보다 생각이 깊으니까 그 보물을 찾게 된다면 더 잘 쓸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을 거야.”
가만히 얼굴을 붉히던 용사린이 입을 열었다.
“글쎄, 나는 여태껏 그런 것은 별로 생각을 하지 않았었어. 그렇지만 굳이 말을 하자면, 남들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이라면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이든 상관이 없다고 생각을 해. 내가 어떤 재주를 가지고 있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는 모르지만 만약 나에게도 재주가 있다면 남들을 위해 사용하고 싶어.”
“그럼 무엇이 되고 싶은 것인데······?”
“글쎄, 꼭 예를 든다면 의원 같은 거 말이야. 무슨 병이든 치료를 하고 어려운 사람들은 그냥 도와줄 수 있는 그런 의원이 되고 싶어.”
“너무 시시한 것 아니야?”
궁천이었다.
그의 얼굴에는 용사린의 포부가 너무 작은 것에 대한 비웃음도 섞여 있었다.
궁천의 얼굴을 바라보던 용사린은 고개를 흔들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올 봄에 성에서 나온 음식을 잘못 먹고 괴로워하다 돌아가신 주씨 아저씨의 일을 잊었어? 조금의 의술만 있었으면 아저씨가 죽지 않아도 될 것을 변변한 약을 구하지 못해 목숨을 잃으셨잖아. 사람의 목숨을 살리는 것은 절대 시시한 일이 아니야.”
용사린의 말에 대부분의 소년들이 동조하는 빛을 보이자 궁천의 눈에는 살의에 가까운 시기심이 엿보였다.
궁천으로서는 용사린의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도 사내라면 천하를 호령하는 야망을 가지는 것이 더 훌륭한 것 아니야?”
“그래, 궁천. 네 말도 틀린 것은 아니야. 나도 너처럼 건강했다면 문사보다는 장군이 되고 싶어. 번쩍거리는 투구와 갑옷을 입고 큰칼을 휘두르며 밀려온 적들을 물리치는 그런 장군 말이야.”
그런 말을 한 소년은 소취였다.
소취의 말을 들은 궁천은 득의만만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단순히 사내로서의 야망만이 아니라 적어도 그런 자리에 있어야 조금이라도 더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것 아니야? 의원도 좋지. 그렇지만 의원이 구할 수 있는 사람의 숫자는 한정이 돼 있잖아. 그렇기 때문에 나는 대장군이 되고 싶은 거야.”
궁천의 말에 소년들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들의 소원이 이루어질 것인가에 대해서는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적어도 그런 소원을 가슴 한구석에 가지고 있는 한 자신들의 미래가 꼭 불행하지만을 않을 것 같았다.
타오르는 모닥불을 바라보던 소년들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 눈을 들어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무수히 많은 별들.
지금은 비록 힘들고 고달픈 생활을 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저 밤하늘에서 찬란하게 빛을 발하는 별이 될 것이다.
그런 소년들의 생각을 알기라도 하듯 밤하늘의 별들은 더욱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
용사린과 소년들이 자신들의 희망을 이야기한 날도 벌써 여러 날이 흘렀다.
좌가촌 소년들도 전의(戰意)를 상실하였는지 더 이상의 침범도 없었다. 그렇기에 천빈촌의 소년들은 더욱 심심하였다.
은연중에 그들의 대장 역할을 하던 용사린의 말에 따라 그 날도 그들은 열심히 훈련을 하고 있었다.
정오(正午).
하루 중 가장 더운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천빈촌의 소년들은 열심히 훈련을 하고 있었다.
십여 명의 소년들은 용사린의 구호에 맞추어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워낙 더운 날씨인지라 소년들의 몸은 이미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많은 땀을 흘리고 있던 궁천은 이마에 흐른 땀을 닦으며 입을 열었다.
“이미 많은 훈련을 하였으니 잠시만 쉬었다가 하는 것이 어때?”
궁천의 말에 뙤약볕 아래에서 땀을 흘리던 용사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만 쉬도록 하자.”
용사린의 말에 소년들은 일제히 우르르 나무 그늘로 달려갔다. 시원한 나무 그늘 아래에서 더운 땀을 식히던 궁천은 혼자말을 하였다.
“빌어먹을! 좌가촌 놈들만 아니면 이런 날에 땀을 흘릴 이유도 없을 텐데······.”
궁천의 말에 용사린은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궁천의 말대로 좌가촌만 아니라면 굳이 이렇게 더운 날씨에 땀을 흘릴 필요가 있겠는가?
다른 소년들도 흐른 땀을 닦으며 나름대로 툴툴거렸다.
“린아! 이런 날에 꼭 이렇게 훈련을 해야 하는 거냐?”
“그래. 나는 너무너무 배가 고프다.”
“먹은 것도 없는데 그만 하자.”
소년들의 말을 들으며 용사린은 미소를 지었다.
그가 어찌 소년들의 마음을 모르겠는가? 자신만 하더라도 이미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되었거늘······.
“그래, 쉬었다가 조금만 더하고 오늘은 그만 하자.”
용사린의 말에 소년들은 입을 열어 찬성을 하지는 않았지만 만족해하는 기색은 완연하였다.
한낮의 태양은 왜 그리고 오래가는가?
좀처럼 태양은 수그러들지 몰랐다.
그늘에서 쉬던 소년들은 일부는 잠이 들고, 일부는 저희끼리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빌어먹을······. 이렇게 더운 날은 근래 들어 처음이군.”
“그래. 오늘은 너무 덥다.”
나무 그늘에 누워 저희들끼리 대화를 나누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던 용사린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자신이 정성 들여 깎은 몽둥이를 들고 거대한 석상처럼 늘어서 있는 석산의 전면으로 다가갔다.
소년들이 훈련을 하며 하도 돌들을 두들겨 커다란 바위는 상처투성이였다.
거암(巨岩)과 소년(少年).
용사린은 마치 거암이 자신의 적이라도 되는 양 노려보았고, 그늘에서 쉬던 소년들도 하나 둘 일어나 그 모습을 쳐다보고 있었다.
용사린의 신형이 허공으로 치솟는다고 느끼는 순간, 용사린이 들고 있던 몽둥이는 바람을 가르며 거암을 때리고 있었다.
따따딱―!
육안으로 식별하기도 힘들 만큼 빠르게 거암을 십여 차례 가격한 용사린의 몽둥이.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소년들의 입에서는 탄성이 저절로 흘러 나왔다.
“역시 사린이의 몽둥이가 제일 빨라.”
“힘만 따지면 궁천이지만, 속도만 따지면 사린이를 따라갈 사람이 없어.”
그러나 용사린은 그런 소년들의 말은 들리지 않는지 계속하여 거암을 공격하고 있었다.
용사린의 몽둥이가 사선(斜線)을 그리며 거암의 머리 부분을 가격했을 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쩍―!
소년들의 전부를 합친 것보다 더 커다란 거암이 힘없이 쪼개진 것이다. 그와 함께 거암에 막혀 있던 산 위의 돌들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하였다.
와당탕―!
요란한 소음과 함께 짙은 흙먼지가 일어났다.
너무나도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에 소년들은 그저 멍하게 바라만 보고 있었다.
소년 가운데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사람은 궁천이었다.
“뭘 보고 있어? 사린이를 구해야 할 것 아니야?”
2장 보석(寶石)과 불행(不幸)
궁천의 말에 십여 명의 소년들은 용사린이 서 있던 곳으로 황급히 달려갔다.
소년들이 도착을 하였을 때 용사린이 서 있던 곳은 무너진 바위들로 뒤덮여 있었다. 소년들은 일단 작은 돌부터 치우기 시작했다.
그들이 입은 옷이 땀으로 범벅이 될 때쯤 커다란 바위틈에 끼어 있는 용사린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머리에 돌을 맞았는지 용사린의 오른쪽 이마 부분이 길게 찢어져 있었다.
조심스럽게 용사린을 꺼낸 소년들은 그를 나무 그늘 밑으로 데리고 왔다. 그리고 다른 부분을 살펴보았으나 다행히도 다른 곳은 다치지 않은 것 같았다.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 용사린의 눈이 떠졌다. 그가 깨어나기만 기다리던 소년들의 입에서 일제히 함성이 터져 나왔다.
“와―!”
“사린이가 눈을 떴다.”
“사린아! 머리는 괜찮아?”
“어디 다른 곳은 아픈 곳이 없는 거야?”
소년들은 일제히 물어보았고,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용사린은 머리를 잡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무에 기대어 인상을 쓰던 용사린은 자신을 걱정스러운 눈길로 바라보는 소년들을 발견하였다.
“나는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마.”
용사린의 말에 가성이 입을 열었다.
“다른 곳도 괜찮아?”
“응, 그래.”
“너 정말 대단하다. 그렇게 큰 바위를 쪼개다니 말이야.”
소취의 말에 용사린은 웃음이 나왔다.
“내가 그럴 힘이 어디 있어? 우리가 그 동안 훈련을 쌓느라고 바위를 쳐서 금이 갔던 것이 오늘 쪼개진 거지.”
“그래. 그 동안 우리가 얼마나 그 바위를 쳤는데······.”
용사린의 말에 대부분의 소년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천빈촌 소년들은 좌가촌의 소년들보다 숫자가 적기에 많은 양의 훈련을 하고 있었다.
오히려 관병(官兵)보다 훨씬 힘든 훈련을 하고 있었고, 그렇기에 좌가촌 소년들과의 대결에서 항상 이길 수 있었던 것이다.
용사린은 힘들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딜 가려고······?”
“아까 바위가 쪼개질 때 이상한 것을 보았거든.”
용사린은 가성의 도움을 받으며 바위가 무너져 있는 곳으로 갔다.
바위가 무너진 산의 기슭은 황토색의 속살을 드러내고 있었고 아직 무너지지 않은 바위들이 위태스럽게 보였다.
여기저기를 살펴보던 용사린은 무엇을 발견하였는지 한쪽을 향하여 걸음을 옮겼다.
다른 소년들도 용사린을 따라 바위가 무너진 곳으로 왔다.
용사린은 무너진 바위를 치우기 시작하였다.
얼마나 치웠을까?
부서진 바위 밑에서 강철로 만든 철함(鐵函)이 발견되었다.
용사린은 바위가 무너지는 그 위급한 순간에 어떻게 그것을 발견하였단 말인가?
소년들은 철함을 다시 나무 그늘 밑으로 가져왔고 그 주위에 빙 둘러앉았다. 소년들의 얼굴에는 철함 속에 든 내용물에 대한 호기심이 가득하였다.
내용물은 대체 무엇일까?
그리고 왜 바위 안에 감추어져 있는 것일까?
사방 한 자 크기의 철함은 아무런 장식도 없어 투박하게 보였다. 게다가 더 특이한 점은 상자를 열 수 있는 부분이 없다는 것이다.
마치 강철덩어리처럼 느껴지는 이 철함은 대체 무슨 목적으로 만든 것일까?
“이걸 어떻게 열지?”
“열쇠도 없고, 어떻게 열어야 하지?”
소년들이 아무리 궁리하여도 그들이 알고 있는 지식으로는 철함을 열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그냥 부수어 버리자.”
옆에서 지켜보던 적산이 입을 열었다.
“달리 방법도 없으니 부수는 것이 제일 좋을 것 같아.”
궁천도 거들었고 결국 철함을 부수기로 하였다.
소년들은 철함을 중앙에 두고 둘러서서 일제히 자신들의 몽둥이로 내려치기 시작하였다.
탕― 탕― 탕―!
철함에서는 요란한 소리가 났지만 그 모습에는 변함이 없었다. 거의 반 시진 이상 소년들은 철함을 부수기 위해 노력을 했지만 소득이 없었다.
소년들의 힘이 거의 빠져갈 때 소취가 내려친 몽둥이가 다른 소년의 몽둥이와 부딪혀 철함의 옆면을 치게 되었고, 그 순간 철함은 활짝 열렸다.
분명 환한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주위가 온통 환해졌다.
“우― 와―!”
소년들은 난생처음 보는 광경에 소리를 지르는 것도 잊어버렸다.
철함 안에서 쏟아진 빛은 엄청난 보광(寶光)이었다.
오색이 영롱한 오색자금배(五色紫金杯).
천축에서도 구경하기 힘든 향설목(香舌木)으로 깎아서 만든 선녀상(仙女像).
일곱 가지 색으로 빛나는 칠채보주(七綵寶珠).
평생 구경하기도 힘든 취옥으로 만든 취옥불(翠玉佛).
온갖 보석으로 치장한 백옥(白玉)으로 만든 피리.
만독(萬毒)을 해독시킨다는 웅황(熊皇)의 단주(丹珠).
갖가지 보석으로 치장된 통천관(通天冠).
스물여덟 개의 면에 부처의 모습을 조각한 금강석(金剛石).
홍옥에 나비 무늬를 깎아서 만든 홍접잠(紅蝶簪).
재질을 알 수는 없지만 영롱한 빛을 내는 유리탑(琉璃塔) 등등······.
어느 것 하나만 하더라도 값을 따질 수 없는 무가지보(無價之寶)가 하나 둘이 아니라 철함 가득 들어 있었던 것이다.
천하를 다스리는 황제도 가지지 못할 엄청난 보석들이 소년들의 눈앞에 있는 것이다.
소년들은 기진이보가 뿜어내는 보광에 넋을 잃고 쳐다보고 있었다.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 정신을 차린 소년들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제야 소년들의 얼굴에 표정이라는 것이 생겨났다.
그것은 기쁨이었고 환희였다.
소년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저절로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였다.
“하하하! 이거 말로만 듣던 보석이 맞지?”
“이런 것을 보고 보석이라고 부르는 거야?”
“그럼 우리는 대체 얼마나 부자가 된 거지?”
소년들이 기뻐하는 것과는 달리 용사린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그 모습을 이상하게 여긴 소년들이 용사린에게 물었다.
“사린. 너는 보석을 발견하고도 기쁘지 않아?”
“아니야, 나도 기뻐. 하지만······.”
왠지 여운을 느끼게 하는 용사린의 말에 기뻐하던 소년들은 하나 둘씩 웃음을 지우고 용사린을 바라보았다.
소년들이 자신의 얼굴을 보자 용사린은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너희들은 이 보석을 어떻게 할 거지?”
“어떻게 하긴 공평하게 나누어서 집에 계신 부모님께 가져다 드려야지.”
궁천의 말에 대부분의 소년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소년들의 얼굴에는 이제 가난은 끝났다는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그러나 용사린은 무엇 때문인지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럼 부모님께 보석이 어디서 났다고 말할 생각이지?”
“어떻게 말을 하긴 산에서 주었다고······.”
“부모님들이 우리 말을 믿어주실까?”
용사린의 말에 소년들은 용사린이 걱정하는 것이 무엇인지 몰라 고개를 갸웃거렸다.
“부모님들께서는 너희들 말을 믿어주시겠지. 그렇지만 다른 사람들이 그 말을······?”
“걱정하지 마. 우리도 그만한 것은 알고 있으니까.”
궁천은 용사린의 말을 끊었다.
“어서 이 보석을 공평하게 나누자.”
적산의 말에 소년들의 눈에서 일제히 빛이 났다. 그러나 일단 보석을 발견한 사람이 용사린이기에 잠자코 있을 뿐이었다.
용사린은 그런 소년들을 만류할 수 없었다.
마침내 용사린이 고개를 끄덕이자 궁천은 철함 안의 모든 보석을 꺼내어 대략적으로 십여 등분하였다.
자신의 몫으로 나눈 보물을 살피던 용사린은 거무튀튀한 색을 띠고 있던 철불(鐵佛) 하나를 집었다.
기쁜 듯 미소를 지으며 한 손에는 술병을 들며 마치 임신한 것처럼 불룩한 배를 만지고 있는 것이 중원의 불상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용사린이 불상을 살피고 있을 때 소년들은 자신에게 배분이 된 보석을 안고 다들 집으로 달려갔다.
그런 소년들의 뒷모습을 보는 용사린은 왠지 불길한 마음을 떨칠 수가 없었다.
“보물을 발견한 것은 행운이지만, 그런데 왜 이렇게 불안한 생각이 들지? 이런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나지막이 중얼거리는 용사린의 음성은 힘이 없었다.
***
보석이 발견되고 며칠이 지났다.
보석을 발견한 소년들은 그 동안 한 번도 그들의 성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용사린은 계속 불안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그 날도 석양이 붉게 물들 때까지 혼자 있던 용사린은 열심히 몽둥이를 휘두르고 있었다.
휙― 휙―!
날카로운 파공성(破空聲)을 내며 몽둥이는 허공에서 영활한 뱀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마치 삼매(三昧)의 경지에 든 고승처럼 용사린의 표정은 엄숙하기 이를 데 없었다.
용사린은 요즘 봉술(棒術)이라고까지 말할 수는 없지만 자신이 익히고 있는 몽둥이 휘두르기의 매력에 빠져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었다.
무공을 익힌 사람들이 보기에는 어설프기 이를 데 없는 봉술이지만 용사린은 온 정신을 집중하여 익히고 있었다.
이미 그의 신형은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고, 몽둥이가 휘둘러질 때마다 땀방울도 허공에 뿌려지고 있었다.
한참 동안 몽둥이를 휘두르던 용사린은 마침내 지쳐서 땅바닥에 그대로 누워서는 심하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때였다.
헐레벌떡 숨을 몰아쉬며 용사린에게 달려오는 소년의 모습이 땅바닥에 누워 있던 용사린의 눈에 들어왔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 용사린은 소년의 모습을 보자, 잊어버렸던 불안함이 다시 생각났다.
용사린의 곁으로 달려온 소년은 가성이었다.
그의 얼굴은 땀과 눈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입을 연 가성의 첫마디는 청천벽력(靑天霹靂) 같은 말이었다.
“린아! 큰일났어.”
“큰일?”
“적산이 아버지가 실종되셨어.”
“아저씨가?”
“그래.”
“차근차근 말을 해봐.”
“적산이 아버지가 그때 나누었던 보석을 가지고 몰래 성안의 비룡전장(飛龍錢莊)으로 환전(換錢)을 하러 가셨대. 그런데 비룡전장의 장주 놈이 그 보석을 보고는 어디서 난 것이냐고 꼬치꼬치 캐묻더래. 그래 아저씨가 가문에서 내려오는 보물이라고 그랬더니 장주 놈이 아저씨를 자신의 물건을 훔친 도둑으로 몰아 관부(官府)에 신고를 했대.”
가성의 말에 용사린은 지난 며칠 동안 자신의 가슴속에서 떠나지 않던 불안감의 정체가 무엇인지 그제야 깨달았다.
“그럼 적산이 아버지는?”
“관부에 끌려가시기도 전 갑자기 나타난 무림인들에게 납치되셨어. 그래서 동네 어른들이 마을 주위를 온통 뒤지고 다니시는데 흔적도 발견하지 못하셨어.”
용사린의 얼굴이 어두워졌고, 가성은 말을 이었다.
“게다가 아저씨가 실종되었다는 말이 전해지자마자 이번에는 궁천의 아버지가 실종이 되셨어.”
그 말에 용사린의 가슴은 철렁 내려앉았다.
“그럼 다른 아저씨들은?”
“글쎄 아직까지는 두 분뿐인 걸로 알고 있는데······.”
“그럼 어서 마을로 가보자.”
“그런데 지금 마을에는 무시무시하게 생긴 무림인들 뿐이라 동네 어른들도 겁이 나서 집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있어.”
말을 하는 가성은 잔뜩 겁을 먹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천빈촌 사람들이 알고 있는 무림인은 사람의 목숨을 파리목숨보다 더 우습게 여기는 무시무시한 살인귀(殺人鬼)들이었다. 그런 무림인들이 마을에 가득 있다면 어느 누구도 집 밖으로 나오지 못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가슴속이 답답해지는 것을 느낀 용사린은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성아. 너는 어서 집으로 가도록 해.”
용사린은 걱정스런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가성을 뒤로 한 채 동네를 향해 달려갔다.
동네의 어귀.
급하게 달음박질치던 용사린은 마을의 입구에서 서성대는 서너 명의 무림인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들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마을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고 있었고, 무엇을 찾는지 날카로운 시선으로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게다가 그들의 강압에 못이긴 마을 사람들이 여기저기로 끌려 다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기는 용사린에게 돌연 날카로운 음성이 들려왔다.
“야! 꼬마.”
흠칫 놀란 용사린이 고개를 돌리고 보니, 가슴에 검을 안은 이십대 후반의 청년이었다.
독사 같은 눈초리와 날카로운 콧날, 그리고 얇은 입술이 조화를 이루어 꽤나 잔인한 성격을 가진 인물인 것 같았다. 게다가 그의 음성은 갈라져 있어 듣기에도 상당히 거북했다.
“부··· 부르셨습니까?”
용사린이 긴장을 하며 대답하자 청년은 입가에 침을 바르며 입을 열었다.
“너는 이곳에 사는 놈이냐?”
“그렇습니다.”
“혹시 이 마을에 근래 들어 갑자기 부자가 된 사람은 없느냐?”
용사린은 그가 무슨 의도에서 그런 질문을 한 것인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떨리는 가슴을 억지로 진정시키며 조심스럽게 대답을 하였다.
“제가 알기로 그런 분은 계시지 않습니다.”
“그래?”
청년은 용사린의 눈에서 무엇인가를 발견하려는 듯 용사린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터질 듯한 심장을 억지로 눌러 참으며 용사린은 태연한 척을 하였다.
“만약 네가 그런 사람을 발견하게 된다면 나에게 연락을 하거라. 그러면 너에게 커다란 상금을 내리겠다. 나는 성안의 다빈객잔(多貧客棧)에 머무르고 있으니 그곳으로 연락을 해라. 알겠느냐?”
“명심하겠습니다.”
용사린은 대답과 함께 조심스럽게 청년의 곁을 떠났다.
그런 용사린의 귀에 청년의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비룡전장에 나타났다는 선녀상은 과거 야운이 훔쳤던 칠채선녀상(七采仙女像)이 분명하다. 야운의 보물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라면 장보도(藏寶圖) 역시 누군가의 수중에 있다는 것. 그러나 나 날수잔검(捺手殘劍)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는 없을 것이다.”
재빠르게 걸음을 옮기던 용사린의 신형이 움찔거렸다. 그러나 청년, 날수잔검의 등뒤에 위치하고 있었기에 다행히 들키지 않을 수 있었다.
도망치듯 걸음을 옮겨놓는 용사린의 얼굴에는 경악에 가까운 놀라움이 어려 있었다.
‘우리가 발견한 보물이 소취가 말했던 그 야운의 보물이란 말인가? 그럼 두 아저씨가 사라진 이유도 그 보물이 야운의 것이기 때문에? 그런데 장보도라니? 그것은 또 무슨 말이지?’
용사린의 뇌리에는 수많은 의문점이 떠올랐지만 어느 것 하나 시원하게 알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성의 외곽에 위치한 와우산(臥牛山).
산의 전체적인 모양이 마치 소가 풀을 뜯고 누운 모양과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나 구릉이 완만하여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었다.
성안과 이어진 와우산의 남단은 짙은 녹음을 자랑하고 있어 평소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었다. 헌데 오늘은 단 한 사람의 모습도 찾아볼 수 없는 것이 아닌가?
녹음으로 우거진 산기슭에서 조금 안으로 들어간 곳에 작은 공터가 있었다.
사방 오 장쯤 되는 공터에 지금 오륙 명의 장한들이 서 있었고, 그들 가운데 두 명의 사내가 피투성이가 되어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청의를 걸치고 있던 중년인은 바닥에 쓰러져 있던 인물 중 바짝 마른 중년사내의 얼굴을 짓밟고 있었다.
“너희 같은 무지렁이들이 감히 본좌들을 능멸하려 하다니······. 네놈들은 죽음이 두렵지도 않느냐?”
“나리, 제발 소인들의 목숨을 살려주십시오. 으윽!”
청의중년인이 발에 힘을 주자 중년사내는 신음을 터트렸다.
“그렇다면 네놈들이 가지고 있던 그 보물이 어디에서 난 것인지 사실대로 말해라.”
“으윽. 그··· 그것은 소인들의 가문에서 대대로······. 윽!”
중년사내의 얼굴에서 흘러 나온 선혈이 바닥을 적시고 있었다. 그러나 중년사내를 짓밟고 있던 청의중년인의 얼굴에는 잔인한 미소가 어려 있었다.
“흐흐흐. 네놈이 죽고 싶어 환장을 했구나. 나는 믿을 수 있지만 여기 계신 다른 형장들께서는 네놈의 말을 도저히 믿을 수 없다고 하시는구나.”
“흐흐흐, 강형. 이놈은 영 말을 하지 않을 듯하니 아예 이놈을 죽여버리고 저놈에게 물어봅시다.”
청의중년인 옆에 있던 흑의장년인이 음침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을 했다. 그의 말에 동조라도 하듯 옆에서 그 장면을 지켜보던 다른 장한들의 고개도 끄덕여졌다.
그러자 발 밑에서 버둥거리던 중년사내가 사색이 된 채 황급히 입을 열었다.
“나리, 제발 소인을 살려주십시오.”
퍽―!
“켁!”
중년사내는 청의중년인의 발길질 한 번에 마치 애벌레처럼 꿈틀거리더니 곧 그 움직임을 멈추었다.
너무도 덧없는 죽음에 같이 잡혀왔던 다른 중년사내의 눈에 공포의 기색이 어렸다.
방금 죽음을 당한 중년사내와는 어려서부터 같이 커왔던 죽마고우(竹馬故友)로 그 동안 기쁨과 슬픔을 함께 해왔는데 이렇게 허망하게 목숨을 잃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그러나 사신(死神)의 그림자가 그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중년사내, 적용산(積龍山)은 괴소를 지으며 다가오는 무림인들의 모습에 몸서리를 쳤다. 그러나 그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길은 전무하였다.
“방금 네 친구란 녀석이 비참하게 죽는 모습을 보았을 것이다. 좋은 말로 할 때 그 보물이 어디에서 난 것인지 솔직하게 말해라. 그렇지 않다면 네 녀석은 더욱 비참한 죽음을 당하게 될 것이다.”
너무도 음산한 흑의장년인의 말에 적용산은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꼈다. 설사 자신이 사실을 말한다 하더라도 이들이 자신을 풀어줄 리 만무하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나리. 소인은 나리들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옥배(玉杯)는 진정 소인의 가문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귀중한 보물이옵니다.”
적용산이 사시나무 떨 듯 떨면서도 계속 문제의 옥배가 자신의 물건이라고 말하자, 흑의장년인의 얼굴에 노기가 치솟았다.
“건방진 놈. 감히 네놈이 본좌를 어찌 보고······?”
휙―!
“으악! 내 팔! 내 팔!”
분노를 참지 못한 흑의장년인이 가볍게 손을 내뻗자 적용산의 두 팔이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허공으로 치솟았다. 적용산은 자신의 신형에서 떨어져나간 팔을 보고 비명을 터트렸고, 그가 걸친 의복은 삽시간에 선혈로 물들었다.
“다시 한 번 묻겠다. 그 물건은 어디에서 난 것이냐?”
“으··· 으··· 으······. 그 물건은 소인의 집안에서 내려오는 보물로 틀림없이 소인의······. 크악!”
적용산은 미처 말을 끝내지도 못하고 비명을 질렀다.
흑의장년인이 재차 손을 내젓자 적용산의 두 다리가 그대로 잘려나갔다.
이미 두 팔이 잘려나간 적용산은 미친 듯이 전신을 비틀며 땅바닥을 뒹굴었다. 그의 두 팔과 다리에서 흘러 나온 선혈이 이미 지면을 촉촉하게 적셨다.
과연 인간의 몸 안에는 얼마만한 선혈이 있는 것일까?
바닥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적용산의 신형에서는 그래도 약간씩의 선혈이 지면으로 흐르고 있었다. 자신의 죽음을 직감한 적용산은 자신의 팔과 다리를 자른 흑의장년인을 보았다.
원독이 서린 적용산의 눈초리에 흑의장년인은 어이가 없었다. 이것은 마치 하룻강아지가 호랑이 무서운 줄 모르는 꼴이 아닌가?
“내··· 먼저··· 지옥에··· 가서··· 기다리마.”
퍽―!
적용산은 그 말을 남기고 스스로 지면에 머리를 박고는 자결을 하였다. 설마 그가 자결을 할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한 흑의장년인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노호성을 터트렸다.
“이··· 이 죽일 놈이······?”
퍽― 퍽― 퍽―!
흑의장년인의 발길질에 적용산의 신형은 혈괴(血塊) 덩어리로 변했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흑의장년인은 먼저 죽음을 당했던 중년사내의 시신에게도 발길질을 했다.
“이형(李兄). 화풀이는 그만하고 다른 녀석을 찾아봅시다. 이 마을에 야운의 보물을 가진 녀석들이 틀림없이 더 있을 것이오. 그런 놈들을 조사하다 보면 틀림없이 야운이 남긴 장보도를 가지고 있는 놈들이 나올 것이오. 날파리들이 꼬이기 시작했으니 재빨리 손을 쓰지 않으면 우린 헛수고를 할지도 모르오.”
청의중년인의 말에 흑의장년인이나 주위에 있던 장한들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 자리를 떠났다.
장내에는 잘려나간 팔다리와 억울하고 비참한 죽음을 당한 두 중년사내의 시신만이 버려져 있었다.
***
마을의 뒤편에 위치한 작은 석산.
소년들만의 성에는 십여 명의 소년들이 사색이 된 채 모여 있었다.
부들부들 떠는 소년들이 있는가 하면 잔뜩 걱정이 어린 얼굴을 하고 있는 소년들도 있었다. 그런 소년들을 바라보는 용사린의 얼굴도 심각하게 굳어져 있었다.
잠시의 시간이 지나자 용사린을 바라보는 소년들의 시선이 점점 늘어만 갔다.
용사린이 왜 그들의 심정을 모르겠는가?
“아직 아저씨들은 돌아오지 않으셨니?”
용사린의 물음에 적산과 궁천은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이제 우린 어쩌면 좋지?”
소년들은 그 말과 함께 자신들이 보석을 가지고 집으로 가려 할 때 반대를 하던 용사린의 모습을 떠올렸다. 중구난방(衆口難防)으로 터져 나오는 소년들의 질문을 들으며 용사린은 고개를 흔들었다.
“우리가 발견한 것이 단순히 황금 몇 덩이였다면 모르지만 나누어 가진 모든 것들이 세상에 둘도 없는 보물들이야. 게다가 야운의 보물이 틀림없는 것 같아.”
소년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보물들이 야운의 것이라는 용사린의 말에 깜짝 놀랐다.
“정말 우리가 가지고 있던 보물이 야운의 것이 맞단 말이야?”
“그런 것 같아. 그런데 문제는 무림인들이 보물이 숨겨져 있는 장보도라는 것을 찾는 것 같아.”
“장보도?”
소년들은 얼른 이해를 할 수 없었다.
“장보도를 찾다니?”
“만약 장보도를 찾는다면 야운이 감추어둔 모든 보물을 차지할 수 있는 것 같아.”
“그렇지만 우리는 그런 종이를 본 적도 없잖아?”
용사린의 말을 듣고 있던 소년 가운데 한 명이 말했다.
“그래 분명히 우리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누가 우리의 말을 믿어주겠니? 게다가 상대는 사람 죽이는 것을 재미로 삼는 무림인들이잖아.”
용사린의 말에 소년들은 고개를 떨구었다.
몇몇 소년의 눈에서는 벌써 굵은 눈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일이기에 용사린의 마음도 무거웠다.
“그저 무림인들이 마을에서 물러가기만 기다려야지.”
용사린의 힘없는 말에 소년들은 그저 묵묵히 고개만 숙이고 있을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시간이 술시(戌時)를 지나자 소년들은 하나 둘씩 자신들의 집으로 돌아갔고, 용사린은 자신의 몫으로 남겨두었던 보석을 다시 한 번 확인하러 갔다.
무너진 돌 틈 사이에 묻어두었던 철함은 이상이 없었다.
따로 조그만 주머니에 보석을 주워담는 용사린의 얼굴은 어둡기 그지없었다.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던 용사린은 품안에 손을 집어넣어 하나의 물건을 꺼내들었다.
볼품없는 불상 하나.
철함 안에 들어 있는 수많은 보석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 철불이 무슨 이유로 보석들과 함께 철함 안에 들어 있었던 것일까?
군데군데 녹까지 쓴 철불의 모습은 어디로 보아도 비싸거나 귀한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한참 동안 철불을 살펴보던 용사린은 철불의 자세 가운데 한 가지 기이한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배를 쓰다듬고 있는 철불의 오른손 엄지가 조금은 부자연스럽게 하늘을 향하고 있었다. 물론 만든 사람이 실수로 잘못 만들었다면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 문제지만 왠지 시간이 지날수록 용사린은 우수의 엄지가 눈에 거슬렸다.
“대체 이 철불에 어떤 비밀이 있기에 그 보물들과 함께 있었던 거지? 야운이란 사람이 이 물건을 보석들과 함께 철함에 집어넣었을 땐 분명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을 텐데······.”
용사린은 그 말과 함께 손을 뻗어 철불의 엄지를 만졌다.
자신도 모르게 좀더 완전한 모습의 철불을 만들려고 했는지 용사린의 손가락이 철불의 엄지를 누르는 순간 손가락이 기이한 각도로 꺾여졌다.
철컥―!
철불은 작은 쇳소리를 울리며 배 부분이 갈라졌고, 그 안에 무엇인가 흰색을 띠고 있는 물체가 들어 있는 것이 보였다.
용사린은 왠지 흥분이 되는 것을 느끼며 그것을 꺼냈다.
조심스럽게 펼쳐보니 그것은 한 장의 서찰이었다.
<빌어먹을, 천하에 나 야운이 이렇게 비참하게 목숨을 잃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무려 백 마흔아홉 번의 투행(偸行)에서 단 한 번의 실수도 없었는데 마지막 은퇴작업(?)에서 실수를 할 줄이야······.
세인들이 밤의 황제라고 일컫는 나 야운이 실수를 한 것은 전적으로 집마부 놈들 때문이다.
분명 내가 살펴본 결과 집마부의 외부와 내부, 그리고 각 전각들의 배치, 기관의 설치여부 등 모든 것이 완벽하였는데 어떤 놈이 내부 기관장치의 배열을 바꾸었던 것이다.
단 한 번의 실수로 본좌는 집마부의 사냥개라고 하는 혈전단(血戰團) 놈들에게 쫓기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극심한 상처를 입고 겨우 이곳에 올 수 있었다.
내상은 점점 심해지는데 혈전단 놈들은 잠시도 쉴 틈을 주지 않고 내 뒤를 쫓고 있다.
멀리서 혈전단 놈들이 신형을 날리는 소리가 들린다.
만약 네가 나의 모든 것을 얻으려 한다면 청운산(靑雲山) 귀두암(龜頭岩)을 찾아라.
야운(夜雲) 필(筆).>
상황이 몹시 급박했었는지 끝 부분은 겨우 글자를 알아볼 정도로 엉망으로 휘갈겨 쓰여져 있었다. 그러나 용사린에게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무림인들이 찾는 야운의 장보도란 바로 이 철불 속에 감추어져 있던 이 서찰이 아닌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재빨리 주위를 훑어보았지만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서찰의 뒷면에는 청운산이란 곳을 나타내는 지도가 그려져 있었다. 다시 한 번 수중의 내용을 읽은 용사린은 주저 없이 모닥불 속으로 던졌다.
화르르르!
서찰은 파란 불꽃을 내며 순식간에 타버렸고, 용사린은 성이 차지 않는지 그 재마저 완전히 부수어 버렸다.
서찰이 완전히 재로 변해 불어오는 바람에 날아가는 모습을 보고서야 용사린은 안도할 수 있었다.
야운의 몇 가지 보물만으로도 이렇듯 마을이 술렁거리는데 만약 보물을 감추어둔 곳에 대한 서찰이 발견이 된다면 천빈촌에 혈풍이 불 것은 자명한 일이 아닌가?
다시 보석이 들어 있는 주머니를 나무 밑에 숨겨 놓고 나자 이미 해는 서산너머로 지며 온 하늘을 붉게 물들였다.
매일 보는 석양(夕陽)이건만 왜 오늘따라 이리도 불길하게 보이는 것일까?
용사린은 천빈촌에 닥친 불행이 이 정도에서 끝나기를 진심으로 기원하였다.
***
밤하늘의 별도 채 사라지지 않은 시각, 용사린은 인간의 살이 타 들어가며 내는 지독한 냄새를 느끼며 잠에서 깨어났다.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용사린은 불안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무의식적으로 마을 쪽을 바라보았다.
헌데 이것이 어떻게 된 일인가?
천빈촌을 이루고 있는 수백 가구가 화마(火魔)에 휩싸인 채 불바다를 이루고 있는 것이 아닌가?
천공까지 붉게 타오르는 천빈촌의 모습.
용사린의 눈에 불바다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쓰러지는 천빈촌 사람들과 그런 천빈촌 사람들을 마구 학살하고 있는 무림인들의 모습이 보였다.
마치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닌 듯 용사린은 얼어버린 사람처럼 그저 멍하게 바라보고만 있었다.
지옥도(地獄圖)와 같은 마을의 모습에 용사린은 자신도 모르게 전신을 덜덜 떨었다. 그리고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마을로 뛰어갔다.
“안돼―!”
용사린이 마을에 도착을 했을 때, 마을에서 움직이는 사람은 찾을 수 없었다.
움직이는 것은 마을을 온통 잿더미로 만들고 있는 불꽃뿐이었다. 그리고 그 화마들 사이로 전신이 까맣게 타버린 시신들의 모습이 보였다.
용사린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다가 정신을 차렸다. 자신의 친구들의 생사를 확인하는 것이 무엇보다 급했다. 그는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가성의 집으로 있는 힘을 다해 달려갔다.
용사린의 귀에 희미한 신음소리가 났다.
“으음. 살려··· 주세요.”
용사린이 귀를 기울이며 불꽃에 휩싸인 가성의 집을 살폈다. 그러나 희미하게 들리던 신음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보이는 것은 온통 불꽃뿐 사람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용사린이 긴장을 하며 다시 귀를 기울이자 이번에는 조금 더 똑똑한 음성이 들렸다.
“누··· 누가 나 좀 살려주세요.”
그 음성을 듣는 순간, 용사린은 상대가 누구인지 확인할 사이도 없이 불 속에 뛰어들었다.
가성의 집은 두 칸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음성이 들린 곳은 좌측 방이었다.
용사린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문고리를 잡자 섬뜩한 소리를 내며 용사린의 손이 타 들어갔다.
칙― 칙― 칙―!
와장창―!
반쯤 타고 있던 문은 힘없이 부서져 버렸고, 용사린은 방 가운데에서 피를 흘리고 있는 가성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자욱한 연기를 헤치며 방안으로 뛰어든 용사린은 황급히 가성의 상태를 살펴보았다. 이미 정신을 잃고 있던 가성은 가슴에 검상(劍傷)을 입고 있었다.
용사린은 황급히 가성을 부축하고는 집을 빠져 나왔다.
그러는 동안 용사린의 옷과 머리가 화기(火氣)를 이기지 못하고 타버렸지만 용사린은 그런 것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 용사린은 가성을 불길이 닿지 않는 안전한 곳으로 옮기고서야 바닥에 쓰러졌다.
“헉헉헉!”
가쁜 숨을 몰아쉬는 용사린의 신형에서는 희미하게 연기가 피어 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가성은 정신을 잃고 있는 것이, 상태가 보통 심각한 것이 아닌 것 같았다.
다시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난 용사린은 가성을 업고 자신들의 성이 있는 마을의 후면으로 향하였다.
***
금방이라도 꺼질 듯이 깜박이는 모닥불을 바라보는 세 소년들이 있었다.
전신을 천으로 휘감은 채 정신을 잃고 있는 가성과 걱정스런 눈길로 그를 바라보는 용사린, 그리고 천빈촌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혈겁을 맞이한 자진룡(紫鎭龍)이었다.
걱정스런 눈길로 가성을 바라보는 용사린에게 자진룡이 물었다.
“형. 이 형의 상처가 심한 것 같은데 그냥 놔두어도 될까?”
“나도 모르겠어. 하지만 아직 마을에는 무림인들이 떠나지 않고 있으니 마을로 내려갈 수도 없잖아.”
용사린의 대답에 자진룡은 작은 눈을 굴리며 다시 용사린에게 물었다.
“그런데 무림인들이 말하는 그 야운의 장보도라는 것이 대체 뭐기에 함부로 사람을 죽이는 것이지?”
그러나 용사린의 모든 신경은 가성에게 쏠려 있었다.
그때였다.
“무··· 물······.”
미약한 가성의 신음에 용사린은 황급히 자신이 미리 준비했던 물로 가성의 입을 축여준 다음 조금씩 그에게 먹여주었다.
몇 모금의 물을 마시자 정신이 드는지 힘없이 가성의 눈이 뜨여졌다. 그러나 상대가 제대로 보이지 않는지 몇 번이나 눈을 깜빡거렸다.
“성아! 나야 사린. 나를 알아보겠니?”
용사린의 음성에 가성은 정신이 드는지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급히 가성을 부축해준 용사린은 그가 편하게 기댈 수 있도록 해주었다.
천천히 화마가 휩쓸고 간 마을을 바라보던 가성은 눈물을 흘렸다.
가옥이건 사람이건 온통 새까맣게 타버린 마을의 모습을 모며 가성이 중얼거렸다.
“어··· 머··· 니······.”
그 말과 함께 가성의 눈에서는 한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용사린은 그 모습에 마음이 아팠지만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에게 물었다.
“누가 너에게 손을 썼지?”
“몰라. 누군가 어머니에게 야운의 장보도를 아느냐고 물었고, 모른다는 어머니의 대답에 마구 살수를 썼어. 어머니와 난 반항 한번 해보지 못하고 그자에게 당했어.”
가성은 흡사 혼이 빠져 나간 실혼인처럼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저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다른 아이들은?”
“몰라. 죽었는지 아니면 살았는지······. 내가 궁천과 적산, 그리고 소취 등의 집으로 가보았을 땐 이미 그 아이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어. 무사히 피했기만을 바라야지.”
자신이 없는 용사린의 말에도 가성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 흘러 나온 말.
“아직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남았다면 살아 있을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죽었겠지.”
천빈촌을 휩쓸고 지나간 혈겁은 가장 마음이 여렸던 가성의 성격을 바꾸어 놓았다. 용사린은 무림인들이 저지른 만행에 치를 떨었다.
아직까지 천빈촌에서는 검은 연기가 피어 오르고 있었다.
천빈촌에서 일어난 혈겁은 다섯 소년이 말했던 희망을 원한으로 바꾸어 놓았다.
그들의 가슴속에 새겨둔 한(恨)이 천하를 뒤덮게 될 풍운의 씨앗이 될 줄 어찌 알았으며, 항차 천하를 혈풍성우 속으로 몰아넣게 될 줄 뉘라서 짐작이나 할 수 있겠는가?
3장 고난(苦難)의 세월(歲月)
다음날 용사린이 잠에서 깨었을 때 가성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대체 그는 그렇게 극심한 상처를 입고 어디로 갔단 말인가?
걱정이 된 용사린은 주위를 온통 뒤지며 가성을 찾았지만 그 어디에서도 가성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주저앉은 용사린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가성. 너마저도 떠난 거야?”
꺼진 모닥불 곁에는 깊은 잠에 빠져 있는 자진룡의 모습이 보였다. 한동안 그의 모습을 지켜보던 용사린은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그래. 나도 이곳을 떠날 거야. 그리고 언젠가 내가 힘이라는 것을 가지게 된다면 약한 자들을 괴롭히는 자들을 가만히 두지 않을 거야.”
용사린이 토해낸 음성에는 언제부터인가 싸늘함과 단호함이 어려 있었다.
천빈촌을 찾은 혈겁은 언제나 미소를 잃지 않고 살아가던 용사린의 마음마저 차갑게 얼려버렸다.
용사린은 고목 밑에서 전날 저녁 감추어 놓았던 보물주머니를 파냈다. 작은 주머니에 잔뜩 묻은 흙을 털어 내고는 품에 집어넣었다.
그러나 잠들어 있는 줄 알았던 자진룡이 샛눈을 뜨고 용사린의 그런 행동을 유심히 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꿈에도 그런 사실을 모른 용사린은 잠들어 있는 자진룡 곁으로 다가와 그를 깨웠다.
“용아, 용아.”
“으응. 왜 형?”
“어서 이 마을을 떠나자.”
그제야 잠에서 깨어난 척을 한 자진룡은 용사린의 말에 반문을 하였다.
“어디로 갈 건데······.”
“이렇게 넓은 천하에 우리가 갈 곳이 없겠니?”
“그럼 지금 떠날 거야?”
“난 한시라도 빨리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어.”
“난 밥이라도 먹고 갔으면 좋겠는데······.”
자진룡은 용사린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밥은 이곳을 떠나고 먹도록 하자.”
단호한 용사린의 대답에 자진룡은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하고 용사린의 뒤를 따랐다.
***
관도(官道).
감숙성(甘肅省) 외각 십 리까지 이어진 관도는 끝이 나 있었고 울퉁불퉁한 흙 길을 걷는 두 소년이 있었다.
용사린과 자진룡.
두 소년은 이미 폐허로 변해버린 마을을 한번 둘러보고 천빈촌을 떠나는 중이었다.
천빈촌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자진룡은 홀가분하게 떠날 수 있었지만, 용사린은 마치 천빈촌 사람들에게 죄라도 지은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유령의 마을로 변해버린 천빈촌.
사방에 검게 타버린 시신들이 널려 있었고, 많은 가옥들이 화재로 무너져 버려 성한 건물들을 찾아볼 수 없었다.
지금은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르는 친구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용사린은 천빈촌을 떠났다.
천빈촌을 떠나오던 날 용사린은 끝없이 걸었고, 그가 걸음을 멈추었을 때는 이미 서산에 해가 지고 있었다.
마음이 피곤하면 몸도 피곤한 것일까?
묵묵히 자신의 뒤를 따르는 자진룡의 얼굴을 한 번 힐끗 보고는 관도 옆의 초지(草地)를 찾았다.
자진룡도 용사린의 기분이 전염이 되었는지 하루종일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초지에 피곤한 몸을 누이며 눈을 감자 그대로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용사린이 깊은 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이미 정오가 지나고 있었다.
멍한 기분을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난 용사린은 자진룡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을 발견하였다.
용사린은 자신도 모르게 품안으로 손을 넣어 확인을 해보았지만 품안은 이미 텅 비어 있었다.
자신이 잠든 사이 자진룡이 자신의 보석을 가지고 달아난 것이었다. 그런 사실을 깨달은 용사린은 왠지 분노보다는 실소가 터지는 것을 느꼈다.
결국 보석을 발견하기는 하였으나, 어느 누구도 그 보석으로 인한 혜택을 본 사람이 없었던 것이었다.
오히려 그 보석으로 인해 살신지화(殺身之禍)를 입은 사람이 어디 하나 둘인가?
사람들 말처럼 모든 물건에는 애초에 주인이 정해져 있어 사람이 제아무리 노력을 한다고 해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오히려 잘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디 자진룡에게 자신에게 닥쳤던 불행은 닥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일단 그렇게 생각을 하자 속이 편해졌다.
정작 문제는 자신의 수중에 단 한푼도 없다는 것이었다.
용사린은 쓴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고 그 순간 그의 뱃속에서 과거에 많이 들었던 소리가 들려왔다.
꼬― 르― 륵―!
그러고 보니 어제 천빈촌을 떠나올 때 조금 먹은 이후로 아무것도 먹은 것이 없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그래도 겨울에 비하면 여름은 견디기가 편했다. 애써 그런 생각으로 자위를 하며 천천히 길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애초에 목표로 정한 곳이 없으니 빨리 갈 필요가 없지 않는가? 그렇기에 용사린의 발걸음은 느릿하기 이를 데 없었다.
용사린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
용사린이 한 가지 잘못 생각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천하를 뒤덮은 가뭄을 생각하지 못한 것이었다.
가진 돈은 없어도 나무열매나 간단한 사냥 등으로 연명을 하려 하였지만 적어도 사람의 발길이 닿는 곳에는 단 한 개의 열매도 그리고 동물들도 없었다.
지금 천하는 엄청난 기근(饑饉)으로 아사(餓死)하는 사람들의 수를 헤아릴 수도 없었다. 그렇기에 가난한 집에서는 자식들을 부잣집 노예(奴隸)로 파는 부모들도 속속 생겨났다.
그것은 부모가 몰인정해서가 아니라 자식들만이라도 부잣집에서 배불리 먹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또 어느 지방에서는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믿어지지 않는 일까지 발생했다는 것이었다.
여행을 시작한 용사린의 눈에 보이는 것은 시신이요, 귀에 들리는 것은 굶어 죽었다는 말뿐이었다.
그러나 성의 관리들이 굶어 죽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하였고, 천하의 상권(商權)을 잡고 있는 거상(巨商)들이 자신의 재산을 털어 사람들의 목숨을 구해주었다는 말 또한 들어보지 못하였다.
오히려 거상들은 이때 더 많은 재산을 긁어모으기에 여념이 없다는 소식뿐이었다.
용사린의 가슴속에도 현실에 대한 분노가 서서히 자리를 잡는 것 같았다.
용사린이 천빈촌을 떠나온 지도 벌써 육 일.
그러나 그가 그 동안 먹은 것은 몇 모금의 물뿐이었다.
폭양이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관도는 달아오른 철판을 연상케 하였다.
용사린은 마치 실혼인처럼 그저 앞만 보고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런 관도의 좌우에는 각 마을에서 굶어죽은 아사자들과 양식을 약탈해 가는 도적들에게 죽임을 당한 사람들이 마치 산처럼 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시신들을 파먹기 위해 몰려드는 까마귀들이 극성을 부리고 있었다.
한창 까마귀들이 몰려 있는 곳에는 두 동강이 난 어린 소동의 시신이 있었다. 무엇이 원통한지 눈을 부릅뜨고 있는 소동은 용사린의 보물을 훔쳐 달아났던 자진룡이 아닌가?
굶주린 까마귀들에게 뜯어 먹히고 있는 어린 소동의 시신.
용사린은 미처 자진룡의 시신을 발견하지 못했는지 그저 앞만 본 채 먼지가 풀풀 날리는 관도를 걷고 있었다.
그의 발걸음이 더욱 늦어진다고 느껴지는 순간, 그의 신형은 길 위에 힘없이 쓰러졌다.
털― 썩―!
순간 자욱한 흙먼지가 일었다. 그리고 바닥에 쓰러진 용사린의 신형 위로 흙먼지가 사정없이 내려앉았다.
바닥에 심하게 얼굴을 부딪쳤지만 용사린은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지 그저 애벌레처럼 꿈틀거릴 뿐이었다.
바닥에 쓰러지고도 끝없이 움직이는 모습은 마치 몇 장 앞에 그가 원하는 모든 것이 있는 듯해 보였다.
그러나 한낮의 폭양은 용사린의 그런 모습마저 용납을 하지 못하였다.
결국 얼마 되지 않아 용사린의 움직임은 완전히 멎었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갔다.
기승을 부리던 태양도 서서히 서산너머로 사라질 때 포장이 되어 있지 않은 길을 따라 서너 필의 말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세 명의 중년인과 네 명의 청년들이었다.
그들은 날렵해 보이는 청의무복(靑衣武服)을 걸치고 있었다.
각기 검과 도를 차고 있었고 그들이 입고 있는 옷의 가슴 부분에는 십주(十州)라는 금색 글씨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말을 몰고 용사린 곁을 지나던 그들 중 한 사람이 갑자기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말에서 내려 바닥에 쓰러져 있는 용사린에게 다가갔다.
중년인 한 사람이 돌연 말에서 내리자 나머지 일행들도 일제히 멈추고는 중년인에게로 말을 몰아갔다. 그리고 그들 중 한 사람이 입을 열었다.
“아니 형님 왜 갑자기 말을 멈춘 거요?”
“또 의협심이 발동하신 모양이지 뭐.”
그러나 일행들의 입방아는 아랑곳하지 않고 중년인은 용사린의 전신을 살펴보았다. 다행히도 용사린이 다만 기아와 너무도 강한 햇살 때문에 기절을 한 것임을 알고는 용사린을 품에 안아 들었다.
그 모습에 청년 한 사람이 입을 열었다.
“형님. 형님이 무슨 부처님의 화신이오? 길에 쓰러진 사람은 모두 구하게······.”
용사린을 안은 채 말 위에 오른 중년인은 청년을 꾸짖었다.
“자네 그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닐세. 부처님께서도 말씀하지 않으셨나? 한 사람을 구하는 것이 칠층석탑(七層石塔)을 쌓는 것보다 더 훌륭한 일이라고 말일세. 그리고 무예를 익힌 이유가 무엇인가? 나보다 약하고 힘없는 사람을 구하고 도와주기 위해서가 아닌가?”
근엄하게 꾸짖는 중년인의 말에 청년은 얼굴만 붉힐 뿐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였다.
“하하하! 네 녀석의 그 말버릇, 언젠가는 혼이 날 줄 알았다.”
“하하하! 저 녀석 오늘 형님에게 단단히 혼이 나는구나.”
일행들의 말을 들은 청년은 머리를 긁으며 입을 열었다.
“형님, 죄송합니다. 소제는 그런 뜻에서 말씀드린 것은 아니었는데······.”
“자네 마음은 잘 알고 있네. 그렇지만 그래도 말은 조심해야 하는 걸세.”
“예예, 잘 알겠습니다. 이번 한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청년의 엄살에 중년인의 얼굴도 펴졌다.
“좋네. 자네가 우리가 묵을 객잔에서 한잔을 산다면 내 자네를 용서하겠네.”
중년인의 말에 일행들은 웃음을 터트렸고 청년은 울상이 되었다.
“하하하! 말 한마디 잘못하여 큰돈 날아가게 생겼구나.”
“운형, 오늘 잘 마시겠소. 하하하!”
일행은 웃음을 지으며 자신들이 묵을 객잔을 찾아 다시 말을 몰고 그 자리를 떠났다.
전신이 나른한 것을 느끼며 용사린은 눈을 떴다.
머리는 무겁고 멍하였으며 손조차 움직일 힘이 없었다.
게다가 눈에 보이는 것은 분명 어느 방 같았는데 자신이 왜 이곳에 있는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용사린은 궁금함을 이기지 못해 억지로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였지만 도저히 그럴 만한 힘이 없었다.
그가 고개를 돌리며 주위를 살필 때 내실의 문을 열고 들어오는 중년인의 모습이 보였다.
나이는 약 사십대 후반쯤으로 보였고 별다른 특징이 없는 중년인이었다. 다만 인상적인 것은 부처님의 미소를 연상케 하는 미소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을 보호해 줄 것 같고, 무슨 짓을 하던 용서를 해줄 것 같은 그런 미소를 보자 용사린은 왠지 안심이 되는 것 같았다.
남은 힘을 다해 입을 열었다.
“아저씨께서 저를 구해주셨나요?”
“오, 깨어났구나. 그래, 내가 너를 구했단다. 헌데 어쩐 일로 길에 쓰러져 있었던 것이냐? 너 같은 어린아이가······?”
용사린은 눈앞의 중년인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자신에게는 생명의 은인이기에 그에게 무엇인가를 감춘다는 것이 죄를 짓는 것 같았다. 그래서 천천히 입을 열어 자신의 신세내력(身世來歷)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용사린을 구해준 중년인은 천하 삼대표국(三代 局) 중 하나인 십주표국(十州 局)의 이백이십 명의 표두( 頭) 중 한 명인 연환검(連環劍) 조충양(曺忠陽)이었다.
연환검 조충양은 용사린의 말을 들으며 그에게 닥친 불행을 진심으로 위로해 주었다.
용사린은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연환검 조충양이란 사람이 참으로 이상한 성격의 소유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의 불행을 가슴아파 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아왔지만 조충양처럼 자신의 일같이 생각을 하는 사람은 본 적이 없었다.
마치 천하에 있는 모든 걱정을 다하는 듯한 조충양의 얼굴을 바라보던 용사린은 그런 그의 성격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결코 싫지는 않았다.
바로 그의 그런 생각 때문에 자신의 목숨을 구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천빈촌의 보석 이야기를 들었을 때 조충양은 진정 놀랐다.
용사린의 이야기를 듣고 조충양이 나름대로 생각을 해보니, 틀림없이 그것은 야운이 숨겨 놓은 기진이보 가운데 일부임이 분명하였다. 그러나 탐욕에 눈이 어두운 무림인들 때문에 어린 소년들의 가슴에 원한이 새겨졌다는 것을 알고는 그의 안색은 어둡게 변하였다.
“그래, 이제 너는 어디로 갈 생각이냐?”
그의 물음에 용사린의 얼굴도 따라 어두워졌다.
“천애고아인 제가 갈 곳이 어디 있겠습니까?”
용사린의 안색을 살피던 조충양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만약 네가 갈 곳이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면 일단 내가 있는 십주표국은 어떠냐?”
용사린도 천하를 떠돌았던 과거가 있었다.
그때 자신의 귀가 닳도록 들은 것이 십주표국에 관한 이야기였다.
삼대표국 중에서는 가장 늦게 시작을 하였으나, 국주의 능력이 뛰어나 짧은 시기에 천하 삼대표국 중 하나가 되었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조충양은 무조건 가자고 하면 자신의 자존심에 상처가 날까봐 갈 곳이 정해질 때까지 같이 있자고 하니 눈물이 나도록 고마웠다.
자신의 심정대로만 한다면 마땅히 그의 말을 거절하는 것이 옳지만, 지금 자신의 체력은 너무 허약하기 이를 데 없었다. 수치심으로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느꼈지만 애써 참으며 용사린은 입을 열었다.
“아저씨에게 폐가 되지 않는다면 신세를 지겠습니다.”
당연히 거절하리라고 생각하던 조충양은 기뻐서 어쩔 줄 몰랐다.
“자세한 이야기는 표국에 도착해서 하겠지만 일단은 나를 숙부라고 불러라.”
조충양의 말에 용사린은 다만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꼬― 르― 륵―!
용사린의 뱃속은 먹을 것을 달라고 아우성이었다.
용사린의 얼굴은 붉어졌고, 그 소리를 들은 조충양은 큰소리로 웃었다.
“배에서 그런 소리가 나는 것을 보니 벌써 여러 날 굶은 모양이구나.”
용사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서 나가서 식사를 하도록 하자. 내 비싼 것은 사줄 수는 없지만 배를 채워줄 수는 있단다.”
‘아저씨. 언젠가는 제가 아저씨를 도울 수 있는 날이 올 것입니다. 그때 아저씨의 은혜에 결초보은 하겠습니다.’
해서 용사린은 칠 일 만에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용사린은 조충양 일행에 합류하여 십주표국으로 향하는 동안 여러 가지를 알 수 있었다.
이들은 이번에 강소성으로 표물을 운반하고 표국으로 되돌아가는 중이었고, 다른 두 중년인은 부표두였고 네 명의 청년들은 표사들이었다.
비록 피곤은 가시지 않았지만 며칠 동안 계속 식사를 한 탓에 용사린의 얼굴에는 화색이 돌고 있었다.
조충양이 탄 말에 같이 탄 용사린은 조충양의 허리를 붙잡고 있었고, 그들이 나누는 대화를 듣고 있었다.
그들이 나누는 대화의 대부분이 무림인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런데 그들의 말대로라면 무림인들이야말로 살아 있는 신선들이었다.
손을 뻗으면 수십 장 밖의 바위가 박살이 나고, 검을 휘두르면 떨어지던 폭포가 갈라지며, 한번 공중에 치솟으면 수십 장을 날아간다는 그런 내용이었다.
며칠 동안 그들이 말한 무림인들의 이야기에 완전히 빠진 용사린은 언젠가 자신도 기회가 닿는다면 그런 무림인이 되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그 날 들린 객잔에서도 용사린은 자신이 들은 무림인들의 이야기를 생각하며 잠이 들었다.
다음날 조충양 일행은 십주표국에 도착할 수 있었다.
십주표국(十州 局).
십삼 개 성에 팔백여 개의 지부를 둔 거대한 하나의 왕국이었다.
하루에도 수백 명이 천하 각지로 출발을 하고, 수백 명이 표행을 마치고 표국으로 복귀를 하였다.
중원 전역에 있는 지국(支局)에서 출발한 표사와 표물들이 쉴새없이 드나들고 있었고, 본국(本局)에서도 쉴새없이 표물이 천하로 출발을 하고 있었다.
국주(局主) 십주신검(十州神劍) 현세충(玄世 ).
젊은 시절 한 자루 십주신검을 차고 무림에 등장하여 그 적수를 찾아보기 힘들었던 일대기협(一代奇俠)이었다. 그가 결혼을 하고 무림을 떠나 만든 것이 이 십주표국이었다.
그의 비상한 상재(商才)로 인해 십주표국은 일신우일신(一新又一新) 나날이 세력을 넓히고 있었다.
십주표국의 거대한 모습을 본 용사린은 왠지 감동이 밀려드는 것을 느꼈다. 천하의 한구석에서는 사람들이 굶어죽지만 이곳에서는 그런 어두운 그림자는 찾아볼 수도 없었다.
쉴새없이 움직이는 표사들과 쟁자수(爭子手)들의 움직임을 바라보며 용사린은 역시 천하는 넓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리고 자신도 그들의 틈에서 생활을 하고 싶었다.
조충양과 그 일행은 본국의 접수대로 가서 자신들의 복귀를 신고하고 돌아왔다.
“와서 직접 보니 어떠냐?”
“천하에 이렇게 거대한 표국이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어요.”
“지금보다는 내년이, 내년보다는 이년 후 이곳은 더욱 커질 것이다.”
“저한테도 기회가 온다면 표사( 士)가 되고 싶어요.”
용사린의 음성은 은은한 열기를 띠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던 조충양은 용사린의 어깨를 두드리며 입을 열었다.
“그래, 언젠가는 너도 뛰어난 표사가 되고, 표두가 되고, 총표두가 될 수 있을 게다.”
용사린은 그 날부터 십주표국에서 생활을 하게 되었다.
조충양은 용사린을 자신의 조카뻘이 되는 소년으로 주위 사람들에게 소개를 하였다.
비록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았지만 워낙 눈치가 빠른 용사린은 곧 주위 사람들에게 귀여움을 받았다.
대부분의 표사와 표두들은 혼인을 하여 가족들을 표국 밖에 두고 자신들만 이곳에서 생활을 하기에 항시 가족들의 소식을 알고 싶어했다.
그러나 일단 십주표국으로 들어가게 되면 보고와 표행, 그리고 무공수련 등으로 좀처럼 집에 가기 힘들었다. 그런 점은 높은 자리, 즉 표두가 되면 더욱 심해 어떤 이들은 일년 가까이 가족을 만나보지 못한 사람도 있었다.
용사린은 자신을 귀여워해 준 표두와 표사들의 은혜에 보답을 하고자 표두와 표사들의 편지를 모았다가 그들의 집으로 보내고, 또 답장을 받아오는 일을 시작하였다.
처음엔 단순히 은혜에 보답하는 차원에서 시작을 한 것인데 워낙 사람들의 호응이 좋아 거의 매일 편지를 보내고, 받아오는 일에 매달려야 할 정도였다.
그런 용사린이니 어찌 표두와 표사들이 고맙게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고아임에도 불구하고 한 점 그늘도 없이 생활하는 용사린의 모습에 그들은 대견해 했고, 그들 가운데에서는 먼 곳으로 표물 호송을 하게 되는 경우 꼭 그 지방의 토산품을 사다주는 이들까지 생겨났다.
십주표국 내에서 용사린의 손을 빌어 편지를 전하거나 받아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지경이었다.
모든 사람들에게 귀여움과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는 용사린이었지만, 그가 표두와 표사들의 귀여움을 받으면 받을수록 이를 가는 사람이 있었다.
현세충에게는 두 명의 자식이 있었다.
큰아들인 현철원(玄鐵元)은 독선이 강하고, 자존심이 강한 청년이었다. 아버지의 성명절기인 청해파랑검법(靑海波浪劍法)을 이미 십성 익힌 그는 후기지수(後起之秀) 중에서도 상당한 명성을 날리고 있었다.
막내는 딸로 현휘란(玄煇鸞)이란 이름을 가진 여인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모습을 확인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모르지만 철저히 중인들의 시선에서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그런 이유로 그녀가 있는 난향루(蘭香樓)는 금지(禁地)가 되었고, 십주표국 사람뿐만 아니라 어느 누구도 함부로 접근할 수 없는 곳이었다. 그곳을 출입할 수 있는 사람은 그녀의 부친과 오빠 그리고 두 명의 시녀뿐이었다.
문제는 바로 큰아들인 현철원에게 발생했다.
자신만 보면 슬슬 피하는 표두와 표사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하고 있는 용사린의 모습.
처음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지만 그 모습이 눈에 거슬리기 시작한 것은 그와 용사린 사이에서 한 가지 일이 생기면서부터였다.
십주표국에서 용사린이 맡은 일은 그가 어린 나이임을 고려하여 말을 돌보는 마동(馬童)이었다.
표물을 운반하기 위해서는 쟁자수(爭子手)들도 있어야 하지만 무엇보다 튼튼한 말이 있어야 했다.
그런 이유로 십주표국에는 천여 마리에 가까운 말들이 항상 대기를 하고 있었고, 수백 명들의 마부들이 말들을 보살피고 있었다.
용사린이 먼저 한 일은 표행에 맞는 말들을 찾는 일이었다.
장거리 표행에 맞는 말이 있는가 하면 단거리 표행에 맞는 말들도 있었다. 또한 급한 표물 운송에 맞는 말들도 필요했다.
용사린이 그 일을 맡은 후로는 정확하게 말들을 구분하여 항상 표행에 맞는 말들을 대령하였기에 그에게 쏠리는 표사들의 관심과 사랑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수십 년 동안 그 일을 해온 마구간의 책임자인 정노인도 감탄을 금할 길 없을 정도로 정확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서너 달이 지난 지금 용사린의 손을 거치지 않은 말들은 거의 없을 지경이었다.
그 날도 용사린은 아침식사를 간단하게 마치고 말들을 돌보기 위해 마구간으로 달려갔다.
히히히― 힝―!
요란한 말울음 소리가 들리며 웬일인지 마구간은 소란스럽기 그지없었다. 게다가 마부들은 밖에서만 서성거릴 뿐 마구간 안으로 들어갈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용사린이 다가가서 마구간 안을 보니 현철원이 마치 미친 듯 말을 향해 채찍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 모습에 용사린은 누가 말릴 사이도 없이 마구간으로 뛰어들었다. 한참 동안 채찍을 휘두르던 현철원이 갑자기 뛰어든 인물 때문에 흠칫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그 인물은 자신의 곁을 지나 곧장 말에게로 달려갔다.
말은 극도로 흥분하여 날뛰고 있었고, 용사린의 작은 신형은 금방이라도 말발굽 아래 짓밟힐 것 같았다. 그러나 용사린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말에게 다가서며 입을 열었다.
“용풍(龍風)! 나야, 많이 아팠지?”
그러나 흥분한 말은 좀처럼 진정할 줄 몰랐다.
용사린은 더욱 차분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내가 상처를 봐줄 테니 이제 그만 진정하도록 해. 소국주님께서 네가 상처 입은 것을 모르고 타려고 했기 때문에 네가 이렇게 화를 내는 것을 잘 알아.”
푸르르!
말은 고개를 흔들며 연신 껑충거리고 있었다.
말이 앞발을 들 때마다 복부에 마치 붉은 혈사(血蛇)가 지나가는 듯한 십여 개의 상처가 보였다.
말을 진정시키기 위해 작은 팔을 벌리며 다가서는 용사린.
뒤에서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마부들은 그의 안위가 걱정되었지만 현철원이 있었기에 감히 드러내고 말을 하지 못했다.
한편 옆에서 용사린의 말을 듣고 있던 현철원의 눈에서 불똥이 튀고 있었다.
말을 거칠게 몬다는 사실은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용사린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마치 자신에게 들으라고 하는 소리 같지 않은가?
“용풍. 가만히 있어 내가 치료를 해줄게.”
그 말과 함께 용풍의 옆구리에 용사린의 손이 닿자 마치 거짓말처럼 용풍의 움직임이 멈추어졌다.
“그래. 그렇게 가만히 있어. 내가 얼른 치료를 해서 네가 다시 힘차게 달릴 수 있도록 해줄게.”
마치 용사린의 말을 알아들은 것처럼 용풍은 용사린의 작은 가슴에 머리를 비볐다.
그런 모습에 현철원은 끓어오르는 노화를 참지 못했다.
“이 죽일 놈. 대체 말을 어떻게 돌보기에 저런 상처를 아직도 치료하지 않았단 말이냐?”
현철원의 억지에 그 모습을 지켜보던 마부들은 어이가 없었다. 분명 어제 저녁 늦게 현철원이 술에 만취가 된 상태로 말을 끌고 온 것을 모두가 잘 알고 있었다.
옆에서 그 말을 듣고 있던 정노인은 황급히 머리를 조아리며 입을 열었다.
“저어, 소국주님. 저희가 말에 상처가 났다는 사실을 미처 알지 못했기에 일어난 일이옵니다. 앞으로는 절대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사오니 한번만 용서를 해주시기 바라옵니다.”
뜻밖에도 용사린 대신 정노인이 용서를 빌자 현철원은 할말이 없었다. 그 모습에 용사린 역시 용서를 빌었다.
“소국주님. 앞으로는 절대 말에 상처가 생기지 않도록 조심하겠습니다.”
용사린의 그 말에 현철원의 눈에서는 다시 한 번 살기에 가까운 청광이 번뜩였다.
그러나 애써 눌러 참고는 마구간을 떠났다.
잠시 후 용풍의 몸에 생긴 상처를 치료하고 있는 용사린에게 정노인이 다가와 충고를 하였다.
“린아야. 소국주님께서 화가 단단히 난 것 같으니 앞으로 행동을 조심하도록 하거라.”
“예. 알겠습니다.”
모자라는 약을 가져오기 위해 내실로 향하는 용사린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정노인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흔들었다.
“휴우! 소국주의 성격이 웬만하다면 내가 왜 너에게 그런 말을 했겠느냐? 필시 오늘 일이 소국주의 가슴에 단단히 새겨져 있을 테니 네가 그 괴로움을 어찌 견딜는지······.”
그 일이 있고 난 후 항시 용사린의 뒤를 쫓는 눈초리가 있었다.
표두와 표사들에게 항상 사랑을 받는 용사린.
그런 반면 자신의 독선적인 성격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현철원은 왜 자신을 싫어하는 표두와 표사들이 용사린은 귀여워하는 것인지 궁금하기 이를 데 없었다.
마치 자신이 용사린으로 인해 표두와 표사들에게 따돌림을 받는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또한 자신에게 생글생글 미소를 짓는 용사린의 얼굴을 대하면 대할수록 가슴속에 용사린에 대한 질시의 감정을 차곡차곡 쌓아갔다.
조금이라도 잘못을 발견하기만 하면 용사린을 흠씬 두들겨 팰 수 있을 것 같은데 좀처럼 그런 틈을 보이지 않는 용사린이었다. 때로 무리한 명령을 내린다 하더라도 묵묵히 완수하려 노력을 하였다. 그리고 상당 부분 완수를 해왔다.
아무리 용사린이 밉다고 잘못한 것도 없는 용사린을 괴롭힌다면 제아무리 현철원이 십주표국의 소국주라고 하더라도 표두와 표사들의 눈총을 받을 것은 분명하지 않은가?
그 날도 편지를 전하러 가는 용사린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현철원은 그를 괴롭힐 좋은 방법을 생각해냈다.
“흐흐흐! 어디 이번에도 네놈이 빠져 나갈 수 있을지 내 두고 보겠다.”
심부름에서 돌아오는 용사린을 부른 것은 십주표국의 주방에서 왕인 부소(敷蔬)였다.
상주 인원이 팔천 명에 이르는 십주표국에 주방이 어찌 없겠는가? 주방에서 일하는 식솔들만 하더라도 거의 이백여 명이 넘는다.
부소는 그런 주방에서 왕인 것이다.
그의 손에는 방금 만든 듯한 음식이 들려 있었고, 용사린을 바라보는 눈은 짜증스러웠다.
용사린이 의아해하는 얼굴로 다가오자 부소는 자신이 들고 있던 음식 그릇을 용사린에게 디밀었다.
영문을 모르고 음식 그릇을 받아든 용사린에게 부소가 한마디를 하고는 그대로 주방으로 들어갔다.
“아가씨께서 시키신 것이니 식기 전에 어서 가지고 가라.”
용사린은 부소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십주표국에서 아가씨라고 불릴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뿐이었다.
현휘란, 그녀였다.
그런데 그녀의 음식 심부름을 그녀의 시녀들이 하지 않고 왜 자신에게 맡긴 것인가?
그러나 음식이 식기 전에 가져다주라는 주방장 부소의 말에 일단 그녀가 있는 난향루로 걸음을 옮겼다.
자신이 이 십주표국에 온 지 삼 개월이 지났으나, 한번도 와 본 적도 없었고 그녀의 모습을 본 적도 없었다.
난향루에 가까워질수록 왠지 불안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왜 그런 마음이 들었을까?
이유는 용사린이 난향루의 오 장 앞으로 다가갔을 때 알 수 있었다.
그를 기다리는 것은 현휘란의 시녀들이 아니라 현철원이었다. 게다가 그의 입가에 걸린 괴이한 미소를 보는 순간, 용사린은 무엇이 잘못됐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너같이 미천한 놈이 이 난향루에는 무슨 일이지?”
“주방장님께서 이 음식을 아가씨께 빨리 가져가라는 말씀을 하셔서 이렇게······.”
용사린의 말에 가까이 다가온 현철원은 그가 들고 있는 음식을 덮은 천을 휙 벗겼다.
그러나 그곳에는 허연 김을 올리고 있는 뜨거운 물이 담겨 있을 뿐이었다. 물을 보는 순간, 용사린은 이 모든 것이 현철원의 농간(弄奸)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감히 네놈이 날 놀리다니······.”
큰소리를 치며 현철원은 손을 힘차게 뻗었다.
비록 내공이 담기지는 않았지만 눈부신 속도로 내뻗은 그의 손은 용사린의 턱을 갈기고 있었다.
퍽―!
“으윽.”
와장창―!
용사린이 들고 있던 그릇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리고 바닥에 쓰러진 용사린의 가슴을 발로 밟으며 입을 열었다.
“네놈은 무슨 목적으로 이 난향루에 접근을 한 것이냐? 어서 대답을 해라.”
현철원의 음성은 분노한 것 같았으나 그의 얼굴은 웃고 있었다. 용사린은 그의 얼굴에서 천빈촌에서 보았던 무림인들의 잔인한 웃음을 보았다.
이미 상대는 자신을 괴롭히기 위해 작정을 한 사람이다. 게다가 이곳 십주표국에서는 그를 제지할 사람은 그의 부친밖에는 없었다.
그러나 현세충은 국주라는 신분 때문에 일년이면 거의 팔 개월 이상을 천하를 떠돌며 외유를 해야 되었다. 그러니 누가 현철원을 제지할 수 있단 말인가?
십주표국의 표사들과 표두들이 자신들끼리 말할 때 그의 별호를 십주검호(十州劍豪)에서 열혈광호(熱血狂虎)라고 바꾸어 부르는 것을 간혹 들은 적이 있었다.
그래도 설마 하였으나 현철원의 표정을 보고는 자신에게는 아무런 희망도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용사린이 아무런 말도 없이 자신의 얼굴만 바라보자 현철원은 분노가 치미는 것을 느꼈다.
용사린의 가슴을 밟고 있던 발에 지그시 힘을 주었다.
뚜뚝―!
기이한 소음이 들리며 용사린은 점점 숨쉬기가 힘들어졌다.
“어서 말을 해라. 누구의 사주를 받고 이곳에 온 것이고, 또 무슨 목적으로 이곳에 온 것인지를 말이다.”
용사린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속으로 여러 생각을 해보았지만 이 자리를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왜 자신에게는 항상 이런 일만 생기는 것일까?
“당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오?”
“뭐? 당신? 이 개 잡종 놈이 누구에게 감히······?”
퍽―!
“으악―!”
용사린의 신형은 거의 오 장 이상을 날아갔다.
그의 입에서는 장기(臟器)가 상하였는지 선혈이 흘러 나왔고, 용사린의 두 손은 왼쪽 옆구리를 감싸고 있었다.
용사린의 온몸은 마치 중풍에 걸린 사람처럼 심하게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그러나 현철원은 그런 용사린의 반대편 옆구리를 강하게 찼다.
퍽―!
다시 용사린의 신형은 사오 장 정도를 날아갔다. 그러나 이번에는 신음조차 없었다.
다만 울컥 하고 한 종지가 넘는 선혈을 토해냈을 뿐이었다.
용사린은 온몸이 부서지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손끝 하나를 움직이는 데도 통증이 일어 움직일 수 없었다.
다시 용사린이 쓰러진 곳까지 온 현철원은 용사린의 얼굴에 발을 올렸다. 그리고는 지그시 힘을 주었다.
뚝―!
용사린의 가냘픈 코뼈는 부러졌으나, 현철원의 발은 멈출 줄 몰랐다. 그의 발이 이리저리 비벼지자 용사린의 입술이 터졌고, 눈 주위가 찢어졌으며 이빨이 부러져 나갔다.
그러나 현철원은 단 한 번도 용사린이 죽을 정도의 힘을 준 적은 없었다.
“다시 한 번 말을 해봐라. 내가 누구냐?”
입안에 있던 부러진 이빨을 내뱉으며 용사린은 힘겹게 입을 열었다.
“현철원.”
그래도 용사린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현철원의 눈에는 새파란 불똥이 튀었다. 그것은 곧 살기로 변하였고, 그의 입에서는 스산한 웃음이 흘러 나왔다.
“흐흐흐! 제법 용기가 있는 놈이구나. 그러나 나는 그런 놈을 살려둘 정도로 아량이 있는 사람이 아니니 너의 불행을 욕을 해라.”
용사린의 얼굴에 올라와 있던 발이 서서히 허공으로 들려졌다. 용사린은 부러진 코로는 숨을 쉴 수가 없어 입으로 가쁜 숨을 쉬며 연신 선혈을 토하고 있었다.
그의 안색은 점점 창백해졌으나, 자신의 머리 위에 들려진 현철원의 발을 노려보는 것을 잊지 않았다.
목숨이 경각에 달한 것을 알면서도 자신의 발을 노려보는 용사린이 현철원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지금쯤 용사린은 자신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목숨을 구걸하여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자신을 무슨 영웅쯤으로 생각을 하는지 의연한 태도를 보이는 용사린의 모습에 현철원의 살심은 더욱 굳어졌다.
그가 막 발을 내려 용사린의 얼굴을 밟아 박살을 내려는 순간, 현철원을 제지하는 가느다란 음성이 있었다.
“멈추세요, 가가.”
음성이 들리자 미처 발을 회수하지 못한 현철원의 발은 용사린의 얼굴 옆면을 스치고 지나갔고, 용사린의 가냘픈 피부는 공력이 담긴 현철원의 발길을 견디지 못하고 그대로 찢겨져 나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사린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현철원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발견한 현철원은 갑자기 자신의 등에 누가 찬물이라도 끼얹은 듯 소름이 오싹 끼치는 것을 느꼈다.
천천히 현철원에게서 눈길을 돌린 용사린은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음성이 들린 곳을 바라보았다.
난향루의 이층(二層).
그곳에 한 여인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면사(面絲)를 하고 있어 그녀의 나이를 알 수는 없었지만 겉으로 보이는 체형으로 보아 그리 나이가 많아 보이지는 않았다.
그녀의 면사 중 왼쪽 눈 부위만이 유일하게 뚫려 있었다.
그곳으로 보이는 여인의 눈망울은 너무도 선하게 보였다. 그리고 그 선한 눈망울이 자신을 바라보며 걱정에 가득한 기색을 보이자 용사린은 감격스러움을 금치 못했다.
“죽일 놈. 천한 네 목숨을 구해준 은인에게 감사하다는 말 정도는 할 줄 알아야 하는 것 아니냐?”
용사린은 전신에 이는 통증에 이를 악물고 참으며 여인이 있는 곳 바로 밑까지 기어갔다.
그가 지나온 길은 그야말로 혈로(血路)였다.
용사린의 너무나도 처참한 모습에 여인은 겁에 질린 듯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고 신형만 떨고 있었다.
용사린은 그런 그녀를 향해 입을 열었다.
“아가씨. 이 천한 목숨을 구해 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현철원은 용사린이 자신의 동생을 보고 너무도 쉽게 아가씨라는 호칭을 하자 다시 살심이 솟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입을 열어 말하지 않은 것은 앞으로도 그에게는 용사린을 괴롭힐 수 있는 새털같이 많은 날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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