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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색 조선 1권 (1)

2018.03.05 조회 3,383 추천 16


 #수색대 1중대 2소대
 
 
 
 강원도 철원, 화천 등은 중동부전선 최북단으로 한국군의 최정예인 백골부대, 칠성부대, 승리부대가 주둔하고 있는 곳이다. 그중 15사단인 승리부대가 맡은 구역은 철책선 방어 구역과 종심 방어 구역이 전군에서 가장 짧기로 유명하다.
 ○○대로 불리는 ○통문에 국산 군용 트럭인 닷지(K-311)가 특유의 엔진 음을 내며 진입했다.
 차량의 출현으로 바짝 긴장했던 통문 근무자들은 트럭에서 내리는 낯익은 얼굴을 확인하고 경계를 풀었다. 통문 책임자인 조인한 소위가 작지만 절도 있는 목소리로 한 사내를 맞았다.
 “필승, 어서 오십시오, 박 중위님.”
 “날씨 참 지랄 맞다.”
 박민석 중위는 인사도 받지 않고 양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건들거렸다. DMZ 수색에 나서는 지휘관답지 않게 조금은 경망스러운 모습이었다.
 K-311 트럭에서 내린 수색대 대원들이 엉성하게 대오를 맞추고 통문 앞에 모여 섰다.
 소대장을 닮아서일까? 수색대 병사들은 하나같이 군기가 엉성했다. 그나마 갓 일병을 달고 첫 수색을 나가는 이성재 일병만이 잔뜩 긴장해 있을 뿐이었다.
 ‘어쩌다 수색 대대가 저렇게 됐는지.’
 조인한 소위가 박민석의 뒤통수를 노려봤다. 물론 수색대 전체를 싸잡아 하는 말은 아니다. 미꾸라지 한 마리가 온 웅덩이를 흐린다고, 박민석과 그의 소대가 문제였다.
 주머니에 손을 넣고 발을 동동거리던 박민석은 뒤에 눈이라도 달렸는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말했다.
 “하이바에 구멍이라도 뚫렸냐?”
 “그, 그럴 리가요.”
 조인한은 잽싸게 초소로 달려가 무전기를 들었다. 소초장실을 거쳐 대대 본부까지 확인받아야 비로소 통문이 열리는 것이다.
 소초장에게 보고하고 대대 본부를 연결한 조 소위는 통문개방 승인을 받고 무전기를 박민석 중위에게 건넸다.
 “중대장님이 바꾸라는데요?”
 박민석이 무전기를 건네받기 무섭게 수화기에서 고성이 들려왔다.
 - 박민석이, 너 또 대기 초소에서 자빠져 자다가 걸리면 진짜 국물도 없어!
 “전역이 얼마나 남았다고 그렇게 빡세게 구십니까?”
 - 뭐? 야, 이 새끼야! 네가 무슨 사병이야? 장교면 장교답게 굴어야 될 거 아니야! 너 이 새끼······.
 중대장의 잔소리가 이어졌다. 한번 시작하면 송화기가 침에 젖을 때까지 수다를 떤다고 해서 ‘K3’라는 별명을 가진 이였다. K3는 경기관총으로 중기관총에 비해 분당 발사수는 많지만 화력이 떨어지는 지원화기다. 말은 많은데 쓸 말이 별로 없다는 뜻으로 중대장을 빗대어 하는 말이기도 했다.
 적잖은 시간을 잔소리를 듣느라 허비한 후에야 비로소 통문이 열렸다.
 수색 대대 대원들은 실탄을 지급받고 개인장비 안전 체크를 한 후 삽탄을 했다. K2 소총의 조종간을 안전으로 바꾸는 이성재 일병의 손이 벌벌 떨렸다.
 “다 됐으면 출발하자.”
 소총을 엉덩이에 걸치고 가는 박민석을 보고 조인한 소위가 혀를 찼다.
 “꼴통 새끼들, 빨리 문 닫아!”
 조인한 소위의 신경질적인 반응에 통문 병사들이 부랴부랴 문을 폐쇄했다. 고리를 걸고 자물쇠를 채우는 병사들을 향해 조인한이 작게 말했다.
 “교대 시간 전에 오면 절대 문 열어 주지 마. 알겠어?”
 “당연하지요.”
 부대 복귀 두 시간 전에 귀환한 수색대에게 문을 열어 줬다가 대대장한테까지 불려 가서 조인트를 까였었다. 물론 문제의 당사자는 박민석 중위였다.
 조인한은 당시를 떠올리고 이를 갈았다. 소위 임관하고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 멋모르고 당한 케이스였다.
 부대 내에서 이런저런 이유로 박민석에게 당한 사람이 한 둘이 아니었다. 갓 부임하여 군대 물정을 모르는 하사관이나 햇병아리 초급장교들은 박민석의 좋은 먹잇감이었다.
 
  * * *
 
 수색로를 따라 이동하는 내내 이성재 일병은 계속 고개를 갸웃거렸다. 소리를 내면 안 된다는 걸 알지만 자유분방한 신세대답게 겁 없이 선임자를 불렀다.
 “김상현 일병님.”
 “왜?”
 “DMZ는 언제 나오는 겁니까?”
 “여기가 DMZ잖아.”
 다른 소대 같으면 어디서 신병이 이동 중에 소음을 내냐고 눈을 부라렸을 텐데, 이번 수색조는 아무도 뭐라는 사람이 없다. 역시 박민석의 소대라서 그런가?
 다만 분대장인 백문엽 하사만이 인상을 쓰고 주의를 줄 뿐이었다. 그나마 백문엽이 있어서 소대가 돌아간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이성재 일병은 자신이 생각하던 DMZ와 너무 달라서 조금은 실망했다. 거친 풀과 태고의 밀림을 상상했던 그에게 동네 약수터를 연상시키는 주변 풍경은 시시하게 느껴졌다. 간혹 마주치는 지뢰 경고판이 없다면 영락없는 동네 뒷산이었다.
 얼마나 전진했을까? 느닷없이 박민석 중위가 손을 들어 부대를 정지시켰다. 이성재 일병은 배운 대로 재빨리 무릎앉아 자세로 몸을 낮췄다. 그리고 잠시 후, 몸을 낮춘 사람이 자신밖에 없다는 사실에 얼굴을 붉히고 일어났다.
 ‘젠장.’
 훈련소에서 비지땀을 흘릴 때만 해도 군인의 모습이 그려지는 듯했다. 그러나 박민석 소대로 자대 배치를 받고부터는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었다. 뭐 하나 배운 대로 돌아가는 구석이 없다. 규율이나 규칙은 태반이 무시됐고 위에 걸리지만 않으면 된다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부대원들도 하나같이 이상했다.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다 온 왕고 조성민 병장은 중대에서 저능아로 불렸는데, 그가 시험에 합격하는 것보다 통일이 먼저 된다고들 말한다.
 또 병역 비리로 스물여덟 살에 입대한 재벌 3세 하재영 상병은 자뻑대왕, 사채업자인 아버지를 끼고 부대 내에서 돈놀이를 하는 최동현 상병은 일수쟁이, 사학과 출신이면서 태정태세문단세도 모르는 김상현 일병 등등 구성원들의 이력이 하나같이 예사롭지 않다.
 그러나 무엇보다 심각한 인물은 다름 아닌 소대장 박민석이었다. 들리는 소문에는 부친이 개인 병원을 운영한다고 한다. 소대장 월급으로 150만 원 이상 꼬박꼬박 받고 1년에 두 번, 보너스까지 받으면서도 늘 돈이 없어 허덕인다. 그래서인지 부대원들에게 삥을 뜯기가 일쑤였다. 물론 돈 많은 하재영과 최동현이 주 타깃이긴 했지만.
 게으르고 책임감 없고 약속 안 지키는 등, 사람이 절대 해서는 안 되는 것들을 모아 놓은 결정체가 바로 박민석이었다.
 여기까지가 막내 이성재 일병이 보아 온 1중대 2소대의 모습이었다. 더 겪어 봐야겠지만 한마디로 요상한 부대였다.
 “백 하사, 시간이 될까?”
 “서두르면 간신히 맞출 것 같습니다.”
 “그런가? 계속 전진.”
 고참들이 대화를 나눌 때마다 이성재의 눈이 반짝였다. 언젠가는 그도 고참이 된다. 부대원을 깡그리 바꾸지 않는 한, 저들을 모델로 삼아야 했다.
 다시 이동이 시작됐다. 완만했던 길이 점점 가팔라지고 숨이 턱까지 차오른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나고 다시 경사가 완만해질 즈음, 백문엽 하사가 오른손을 치켜들었다.
 사사삭.
 수색대 대원들이 일사불란하게 몸을 낮췄다. 이성재 일병만이 눈을 껌뻑이고 서 있었다. 선임인 김상현 일병이 눈을 부라리고 낮게 소리쳤다.
 “뭐 해, 새끼야! 빨리 앉아!”
 이성재 일병은 김상현의 우악스러운 손에 이끌려 엉덩방아를 찧었다. 김상현은 그런 그를 향해 한마디 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짬찌(짬밥 찌그러기) 새끼, 신병 새끼가 빠져 가지고.”
 “······.”
 이성재는 정신이 없었다. 김빠진 맥주처럼 흐느적거리던 부대원들이 전광석화 같은 몸놀림을 보이는 것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그들의 일관성 없는 행동이 그를 혼란스럽게 했다.
 ‘일병 단 지가 언젠데 아직도 신병 타령이야.’
 DMZ 수색을 해야 정식 대원으로 인정하는 풍조 때문에 이성재는 아직까지도 신병 소리를 듣고 있다. 이번 작전을 마치면 그 지겨운 신병 딱지도 떼는 것이다.
 숨죽이고 전방을 향해 소총을 겨누던 수색조 앞으로 노루 한 마리가 나타났다. 인간과 야생 노루는 한동안 서로를 노려보며 탐색전을 벌였다.
 수색대 대원들은 모두 석상이라도 된 것처럼 꼼짝하지 않았다. 놀라운 집중력이었다. 박민석 중위만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끼리릭.
 기분 나뿐 금속 마찰음이 고요를 깨고 퍼져 나갔다. 청각이 뛰어난 노루가 이를 놓칠 리 없다.
 바삭.
 몸을 돌려 왔던 길로 되돌아가려던 녀석을 향해 작은 소음이 일었다.
 푸슝.
 털석.
 노루의 두개골을 단번에 관통한 깨끗한 솜씨였다. 노루가 쓰러지자 수색대 대원들이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소대장님, 굿인 거 알죠?”
 “나 제대하면 누가 이 짓 하냐?”
 “하하하.”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대원들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박민석은는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권총에서 소음기를 제거해 주머니에 넣었다.
 모두가 희희낙락하는 가운데 이성재만이 눈을 지릅뜨고 대원들과 죽은 노루를 번갈아 봤다.
 멍한 얼굴로 서 있는 이성재의 옆구리를 누군가 손가락으로 찔렀다. 김상현 일병이었다.
 “뭐 해? 지지 않고.”
 “예?”
 “빨리 짊어지라고. 아, 이 새끼 어리바리해 가지고.”
 김상현에게 등을 떠밀린 이성재는 차마 죽은 노루를 만질 수 없어서 머뭇거렸다. 김상현 일병이 도끼눈을 뜨고 뭐라고 하려는 순간 백문엽 하사가 그를 저지했다.
 “김상현, 네가 들어. 선임이라는 새끼가 후임 하나 관리 못해서 계속 엇나가게 하나.”
 “시정하겠습니다.”
 “하여튼 별장 가서 보자.”
 “흐미.”
 별장이라는 말을 듣자 김상현의 얼굴이 노래졌다. 선임이 분대장한테 깨지자 이성재는 바짝 얼어서 자동적으로 부동자세를 취했다.
 “쫄따구 들어와서 허리 좀 펴나 했더니.”
 “제가 들겠습니다.”
 “됐다 잉.”
 김상현 일병은 건빵 주머니에서 군화 끈을 꺼내 노루의 양 다리를 묵고 짧은 기합성과 함께 들어 올렸다. 양 어깨로 노루의 몸을 지탱하고 묶은 다리 사이로 머리를 내미는 모습이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니다.
 이성재는 계속되는 실수로 의기소침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보다는 부대원들에게 문제가 있어 보였다.
 ‘노루는 왜 잡은 거야? 그리고 소음기는 어디서 났지? 저게 아무나 쓸 수 있는 장비였나?’
 매복지로 향하면서 노루는 왜 가져가는지 의아했다. 거기에다 소음기까지 쓰면서 함부로 실탄을 쏴도 되는지 의문이 들었다.
 ‘원래 군대가 이런 건가? 다른 부대도 다 이러나?’
 수색에 참여하고부터 계속해서 든 의문이었다.
 이동이 재개되고 몇 분 후 작은 갈림길이 나왔다. 길잡이를 하던 백문엽 하사는 주저 없이 왼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김상현 일병이 숨을 헐떡거리면서 막내 이성재에게 귓속말을 했다. 입에서 나는 쇳내에 이성재가 눈살을 찌푸렸다.
 “오른쪽으로 가면 ○○○GP야. 잘 기억해 둬.”
 “네, 알겠습니다.”
 “나중에 우리랑 떨어져서 길 잃으면 거길 찾아가라는 소리다. 큭큭.”
 “예?”
 “뭘 그렇게 놀라. 전투 중에 혼자 낙오하면 헤매지 말고 GP로 가라니까.”
 “예에?”
 이성재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전투는 뭐고 낙오는 뭐란 말인가? 생각만 해도 등골이 오싹했다.
 울상을 짓는 이성재를 보고 김상현 일병이 키득거렸다. 그것을 보고 후미에 있던 최동현 상병이 웃으며 말했다.
 “저 새끼 또 구라치네.”
 “구라라니요. 매복조가 전멸한 사건 모르십니까?”
 “김상현이, 그런 개 뻥을 믿냐.”
 “진짜 있었던 일이라고 들었지 말입니다.”
 “있기는, 후임 놀려 먹으려고 누가 지어 낸 말이겠지.”
 “아닌데.”
 두 사람의 목소리가 앞에까지 들렸는지 부대가 이동을 멈췄다. 빠른 걸음으로 다가온 백문엽 하사가 둘의 철모를 주먹으로 갈겼다.
 “미쳤어! 소풍이라도 나왔어?”
 “시정하겠습니다.”
 “별장에 도착할 때까지 찍소리도 내지 마라.”
 “네, 알겠습니다.”
 매섭게 둘을 노려본 백문엽 하사가 몸을 돌렸다. 제자리로 돌아가기 전에 그의 시선이 이성재 일병을 훑고 지나갔다. 이성재는 뱀이 목을 옥죄는 것 같은 느낌에 몸서리를 쳤다.
 ‘무슨 눈매가 저렇게 소름 끼칠까.’
 꺼벙하고 삐딱하게 보이는 소대장 박민석과는 대조적인 인물이었다. 이성재는 그의 머릿속에 있는 육군 수첩을 펼치고 요주의 인물로 백문엽 하사를 기록했다.
 ‘초특급 요주의 인물이다.’
 다시 행군이 시작됐다. 이성재는 지금까지 일어난 일들을 머릿속으로 정리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러던 중에 이번엔 박민석 중위가 오른손을 들었다. 이성재 일병은 본능적으로 허리를 굽히고 무릎앉아 자세를 취했다.
 ‘뭐야?’
 이번에도 이성재의 예상이 빗나갔다. 모두 서 있는 가운데 자신만 앉았던 것이다. 머쓱하게 몸을 일으키는 그에게 누구하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백 하사, 여기 맞지?”
 “예, 맞습니다.”
 박민석 중위가 허리춤에서 대검을 뽑아 들었다. 날 선 검이 빛을 받아 푸른색 광채를 뿌렸다. 박민석은 기다리라는 말을 남기고 구부정한 자세로 풀이 우거진 숲으로 들어갔다.
 ‘뭐야, 무슨 일이지?’
 이성재 일병은 심상치 않은 상황에 절로 몸이 굳어졌다.
 주변을 돌아보니 제법 수풀이 우거진 둔덕이었다. 둔덕 너머로 인공 구조물로 보이는 건물이 시야에 들어왔다.
 소리치면 서로가 들릴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이쪽에서는 저쪽이 보이지만 반대편에선 둔덕에 가려 이곳이 보이지 않는 묘한 지형이었다.
 이성재는 그곳이 북한군 경계초소라는 건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또다시 궁금증이 머릴 쳐들었다. 간질간질한 입을 겨우 제어하면서 선임인 김상현 일병을 쳐다봤다.
 ‘음?’
 평소 그답지 않게 긴장한 모습이다. 거기에다 백문엽 하사의 손짓이 있자 모두는 천천히 몸을 낮추고 엉클어진 수풀 사이로 숨어들어 은엄폐에 들어갔다. 대원들을 따라 이성재도 엄폐물을 찾아 몸을 숨겼지만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원래 군대가 이런가?’
 모든 것이 생소한 그로선 최선의 질문이자 답이었다.
 담배 한 대 피울 시간이 지나고 박민석 중위가 돌아왔다. 뭘 담아 왔는지 그의 건빵 주머니가 불룩했다. 백문엽 하사가 소리를 죽이고 작게 물었다.
 “성공하셨습니까?”
 “어, 나 제대한 후에도 여긴 얼씬도 하지 마라.”
 “당연하지요.”
 “철수한다.”
 수색조는 올 때보다 더 조심스럽게 현장을 철수했다.
 온 길을 되돌아가는 일행을 보면서 이성재는 박민석이 뭔가 중요한 임무를 수행했다고 생각했다.
 ‘무슨 일일까?’
 목구멍까지 치민 궁금증에 이가 간질간질했다. 하나 고참들이 워낙 조심하는 바람에 감히 물어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들이 떠나고 몇 분 뒤, 일단의 북한군 병사들이 박민석 중위가 들어간 숲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종간나 새끼들, 다음에 만나면 멱을 따 버리갔어!”
 한동안 주변을 살피고 뭔가를 찾던 북한군 병사들은 사나운 눈빛을 사방에 뿌리고는 다시 숲으로 들어갔다.
 
 
 
 #별장
 
 
 
 박민석의 수색조는 처음 지나친 갈림길까지 내려와서 GP가 있는 방향으로 경로를 바꿨다.
 “소대장님, EENT(해상 박명종) 10분 지났습니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이동속도를 높인다.”
 “소대장님 말씀 들었지? 야간에 DMZ에서 랜턴 켜고 다니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백 하사의 지적이 아니라도 대원들은 어둑해진 시야에 바짝 긴장한 상태였다. 모두는 뛰다시피 걸음을 옮겼다. 노루를 짊어진 김상현 일병이 숨넘어가는 제스처를 취해 보았지만 아무도 눈길 하나 주질 않았다. 막내인 이성재마저 그를 외면하고 걸음을 빨리했다.
 군인들이 지나다니면서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길을 따라 이동하던 일행은 갑자기 방향을 틀어 가파른 언덕길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길은커녕 잡목과 수풀이 빽빽한 것으로 보아 정상적인 수색 코스는 아닌 것 같았다.
 언덕을 구르듯이 내려온 모두는 작은 옹달샘이 있는 바위 앞에서 멈춰 섰다.
 “분대장, 주변 경계해.”
 “네, 이영석, 하재영.”
 대원들이 수풀 사이에 은닉하는 동안 이영석 병장과 하재영 상병이 계곡 위쪽과 아래로 정찰을 나갔다.
 이성재는 숨 가쁘게 진행되는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면서 본격적으로 수색 임무가 펼쳐진다고 생각했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솜털 하나까지 곤두섰다.
 잠시 후 두 사람이 정찰을 마치고 돌아왔고, 대원들이 바위 뒤에 쳐 놓은 위장막을 걷어 냈다. 그러자 한 사람이 겨우 들어갈 수 있는 동혈이 모습을 드러냈다.
 ‘헉.’
 얼마나 감쪽같았는지 위장막이 걷히기까지 그곳에 동굴이 있다는 사실은 꿈에도 몰랐다. 이성재는 휑하니 뚫린 구멍을 보면서 기막혀 했다. 대원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굴 속으로 하나둘 사라져 갔다.
 내부로 들어온 이성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작은 입구와 달리 내부는 소대 병력이 주둔해도 될 정도로 넓고 높았다. 어떻게 반입했는지 동굴 곳곳에 캠핑용 랜턴이 걸려 있었는데, 랜턴은 사람의 손을 타기 무섭게 내부를 환하게 밝혔다.
 넋을 놓고 서 있는 이성재의 어깨에 누군가 손을 얹었다. 놀랍게도 여태껏 눈길 한번 주지 않던 소대장 박민석이었다.
 “별장에 온 걸 환영한다. 우리 수색대는 매복해야 신병 딱지를 떼는 거야. 임무를 무사히 마치고 진정한 수색대로 거듭나도록.”
 “예, 알겠습니다.”
 박민석 중위는 이성재의 양 볼을 잡아당기고는 중앙에 있는 간이침대에 가서 몸을 눕혔다.
 팔베개를 하고 스트레칭을 하는 그를 사이에 두고 수색조 대원들이 잡담을 하면서 분주하게 움직였다. 휴대용 가스버너를 켜고 사제용 코펠로 밥을 짓고 감자와 당근 등 부식 재료를 다듬었다.
 멍하니 서 있는 이성재를 김상현 일병이 불렀다.
 “야, 이성재, 뭐 해, 인마!”
 “일병 이성재.”
 “헛소리하지 말고 따라와.”
 김상현 일병은 이성재에게 노루를 떠넘기고 동굴 안쪽으로 들어갔다. 어림잡아 길이가 20m는 돼 보이는 지하 동굴이었다. 끝자락에 당도하자 작은 개울이 위에서 바닥을 가로질러 흘렀고 하수구로 연상되는 구멍으로 낙수가 떨어져 지하로 흘러들어 갔다.
 소매를 걷어붙인 김상현 일병이 대검을 꺼내 능숙하게 노루의 배를 갈랐다. 벌어진 가죽 사이로 내장이 흘러나오자 거리낌 없이 손을 넣어 내부를 훑어 냈다. 김상현은 발라낸 내장을 구멍에다 버리고 흉측한 머리를 몸통에서 분리했다.
 “됐다. 최 상병님한테 가지고 가.”
 “네?”
 “최 상병님한테 갖다 주라고. 아, 어리바리 새끼, 콱 그냥.”
 김상현 일병이 선혈이 낭자한 손을 들어 때리는 시늉을 하자 이성재가 기겁하고 노루를 들었다.
 한쪽에 화톳불을 피운 최동현 상병이 노루를 받아 미리 준비한 꼬챙이로 항문에서부터 목까지 찔러 넣고 통나무 중앙에 홈을 파 놓은 지지대에 올렸다.
 “막내.”
 “일병, 이성재.”
 “지금부터 노루 굽는 요령을 알려 주겠다. 여기 꼬챙이에 달린 손잡이를 돌리면서 털을 그슬린다. 털을 그슬린 후에는 대검으로 찌꺼기를 박박 긁어 내고 안과 밖이 골고루 익도록 잘 돌리면서 노릇노릇해지면 나를 부른다. 그럼 내가 와서 바싹해진 껍질을 도려내고 양념장을 바를 거다. 오케이?”
 “네, 알겠습니다.”
 “태우면 노루 대신 널 구울 줄 알아.”
 “절대 안 태웁니다.”
 “좋아. 실시.”
 “실시!”
 신입에게 노루를 맡긴 최동현 상병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 버렸다. 이성재는 고기가 타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손잡이를 돌렸다.
 ‘지금 뭐 하는 거야? 저것들 뭐냐?’
 캠핑이라도 나온 것처럼 왁자지껄 떠들고 있는 대원들을 보면서 이성재의 머릿속은 뒤죽박죽 뒤엉켜 버렸다.
 아무리 자신이 신입이라고 해도 바보는 아니다. 대한민국의 어느 군대가 매복하러 나와서 이 지랄을 한단 말인가? 누구하나 정상으로 보이는 자가 없었다.
 마지막까지 동굴 밖을 살피던 백문엽 하사가 들어왔다. 그가 들어오기 무섭게 다른 대원들이 안에서 입구를 막아 버렸다.
 무전기를 내려놓는 그에게 박민석 중위가 누운 채로 물었다.
 “그래, 대대에 보고는 했어?”
 “네, 매복지에 잘 도착했고 인원 배치 중이라고 했습니다.”
 “잘했다. K3가 뭐라고 안 하디?”
 “왜 소대장이 직접 보고하지 않느냐고 물으시던데요.”
 “그래서 뭐라고 했어?”
 “똥 싸러 갔다고 했습니다.”
 “후후, 그러니까 뭐래?”
 “어떤 버전을 원하십니까?”
 “오리지널.”
 “중대장님 왈, 똥을 몇 번을 싸는 거야? 그 새끼가 지금까지 싼 똥만 해도 방파제를 쌓을 거다.”
 “하하하.”
 대원들이 배를 잡고 넘어갔다.
 “다음 정기 보고 땐 꼭 소대장님이 하라고 하십니다.”
 “됐어. 방파제 쌓으러 갔다고 해.”
 “하하하.”
 모두가 배를 잡고 깔깔거리는 중에도 이성재만은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뭐냐, 저것들? 군인 맞아?’
 믿었던 백문엽마저 이곳에선 군기 빠진 말년 병장처럼 보였다. 그래도 소대장만한 놈이 있을까? 팔베개를 하고 누워서 얄밉게 낄낄거리는 모습이 한 대 쥐어박았으면 싶었다.
 ‘소대장이 문제야. 애들 데리고 매복 나와서 이상한 짓이나 하고.’
 이성재는 자신이 요상한 부대로 왔다는 자괴감에 절로 한숨이 터졌다.
 ‘이상한 나라에 도착한 엘리스도 이런 심정이었을까?’
 텅.
 그때 코펠 뚜껑이 날아와서 이성재의 철모에 부딪혔다.
 “고기 타잖아, 인마.”
 “네? 네, 시정하겠습니다.”
 이성재는 정신없이 손잡이를 돌리면서 목이 메어 왔다. 큰일이라도 하러 가는 사람처럼 가족들의 눈물 어린 배웅을 받던 때가 떠올랐다. 해병대를 나오신 아버지와의 진한 포옹.
 군대 와서 노루나 굽고 있는 자신의 처지를 안다면 얼마나 실망하실까.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때 또 하나의 코펠 뚜껑이 날아왔다.
 “제대로 안 해? 고기 태우면 진짜 널 구워 버릴거야!”
 “아닙니다! 잘 굽겠습니다.”
 마음과 달리 그의 손은 열심히 손잡이를 돌렸다. 처음 털이 탈 때는 고약한 냄새가 났지만 고기가 익기 시작하면서 고소한 냄새를 풍겼다. 굳이 부르지 않아도 최 상병이 올 정도로 냄새가 진동했다.
 “내가 하는 거 잘 봐 둬.”
 최동현은 날카롭게 날을 세운 대검으로 딱딱해진 노루의 껍질을 살점 하나 묻어나지 않을 정도로 정교하게 베어 냈다. 그는 이성재 일병이 한눈을 팔 때마다 눈을 부라리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이성재는 그의 행동을 보면서 끔찍한 생각이 들었다.
 ‘뭐냐, 보고 배우라는 거야? 이런 닝기미.’
 군대에서 고참의 행동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허투루 넘기면 안 된다. 지금같이 살기를 띠고 뭔가를 가르칠 때는 더더욱 그러하다. 잘은 몰라도 앞으로 멧돼지나 노루 요리는 이성재의 몫이 될 확률이 높았다.
 대충 가죽을 벗겨 낸 최동현 상병이 밀봉된 플라스틱 용기를 가져와 뚜껑을 열었다.
 뽕!
 사제 플라스틱 용기는 경쾌한 소리를 내면서 내부를 드러냈다. 그 안에는 황금빛이 나는 점액질이 잔뜩 들어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전문 바비큐 가게의 소스라고 했다. 용기는 물론이고 모두 반입 금지 품목이었다.
 페인트칠을 할 때 쓰는 붓을 용기에 넣고 휘휘 돌린 최동현은 적당히 붓털이 촉촉해지자 빠른 손놀림으로 노루 고기에 바르기 시작했다.
 쓱쓱.
 눈 깜짝할 사이에 소스 칠을 마친 최 상병이 불길 속으로 떨어지는 소스 방울을 보면서 소리쳤다.
 “뭐 해? 타잖아!”
 “네? 네.”
 넋 놓고 구경하던 이성재가 받침대가 삐걱거릴 정도로 빠르게 돌렸다.
 “막내.”
 “일병 이성재.”
 “손으로 만져 봐. 끈적거리지?”
 “예, 그렇습니다.”
 “느낌이 반질반질해지면 그때 다시 소스를 바른다. 알겠어?”
 “예, 알겠습니다.”
 “그렇게 다섯 번만 구워.”
 “예, 알겠습니다.”
 “태우면 진짜 널 구워 버릴 줄 알아.”
 “······.”
 “어쭈, 대답 안 해?”
 “예, 알겠습니다.”
 최동현은 바비큐 소스와 노루 고기가 어우러져 나는 냄새를 한번 크게 들이켜고 손가락을 빨면서 대원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갔다.
 이성재 일병은 잔뜩 심술이 난 얼굴로 손잡이를 빠르게 돌렸다.
 ‘교관 그 개새끼.’
 이성재는 봉오리 신교대에서 만났던 훈련 교관을 떠올리고 속으로 감자를 먹였다. 그는 15사단 수색 대대로 자대 배치를 받은 이성재에게 온갖 미사여구를 써 가며 축하한다고 했었다.
 ‘진정한 사내들이 모인 곳이라고? 니미 뽕이다.’
 최소한 이성재 본인이 생각한 수색 매복은 이런 게 아니었다. 게다가 매복하러 나와서 이 지랄을 떨다가 걸리기라도 하는 날엔······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확 꼰질러 버려?’
 휴가 나가서 아버지께 수색 임무를 자랑하려던 이성재는 슬슬 배알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소대장 박민석을 시작으로 선임인 김상현 일병까지 한 번 이상 씹다 보니 어느새 노루가 완전히 익었다.
 역시 부르지도 않았는데 시계불알처럼 정확하게 최동현이 나타났다.
 “굿!”
 대검으로 넓적다리 살을 떼어 맛을 본 최동현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물론 수고한 이성재가 아닌 본인 스스로에게 던지는 찬사였다.
 두 사람은 꼬챙이 양쪽을 들고 대원들이 모여 있는 중앙으로 가져갔다. 누가 피웠는지 작은 모닥불 사이로 소대원들이 삥 둘러앉아 있었다. 불 위에 세워 놓은 받침대에 노루를 걸친 두 사람은 자리로 가서 앉았다.
 각자의 앞에는 밥이 수북하게 담긴 그릇과 찌개, 사제 김치가 하나씩 놓여 있었다. 김상현 일병이 대검을 바지에 쓱쓱 문지르고 노루 고기를 얇게 썰어서 분배하기 시작했다.
 김상현은 고기를 썰면서 쉴 새 없이 입을 놀렸다.
 “멧돼지였으면 좋았는데 말입니다.”
 “그게 어디 맘대로 되냐.”
 “그래도 조금 더 찾아봤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침 튀어, 새끼야. 입 좀 다물고 해.”
 최동현 상병의 으름장에 김상현의 입이 순식간에 붙어 버렸다. 최동현은 김상현의 바로 위의 선임이었다.
 고기 분배가 끝나고 식사가 시작됐다.
 아무리 군대 밥이 좋아졌다지만 자극적인 음식에 길들여져 있는 신세대 병사들의 기호를 만족시킬 순 없다. 부식이 잔뜩 들어간 고추장찌개와 혀끝을 싸하게 만드는 소스로 양념된 노루 바비큐와는 비교가 불가했다. 식사를 시작한 지 5분도 안 돼서 코펠을 긁는 소리가 요란했다.
 이성재도 정신없이 먹었다. 노루를 구우면서 받았던 스트레스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
 대원들은 남은 밥솥을 박박 긁어 밥풀 하나까지 쓸어 먹고 뼈만 앙상하게 남은 노루에게 달려들어 남은 살점을 뜯어 먹었다. 짬밥에서 밀린 이성재 일병은 침만 삼키면서 그 꼴을 지켜봐야 했다.
 저녁 식사가 끝나고 이성재와 김상현이 설거지를 했다. 또 먹을 게 남았는지 설거지를 하는 둘을 보며 대원들의 독촉이 빗발쳤다.
 부랴부랴 설거지를 끝낸 두 사람은 대충 물기를 제거하고 그릇을 가져다 사람 수대로 돌렸다. 이때까지 이성재는 후식으로 뭐가 나올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박민석이 눈짓하자 최동현 상병이 일어나 김상현과 이성재를 불렀다. 이성재는 아무 생각 없이 따라나섰고 잠시 후 최동현이 들춘 위장막을 보고 두 번 놀랐다. 그 교묘함이 첫 번째요, 위장막이 걷어지고 드러난 광경이 두 번째라.
 위장막 너머로 네댓 평 남짓한 공간이 나타났는데 그곳에 술과 라면, 통조림 등 장기 보관이 가능한 음식이 가득했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음식 너머로 군용 박스가 몇 개 보였는데 틀림없는 실탄 상자였다.
 “술하고 참치 캔을 사람 수대로 가져가라.”
 “네, 알겠습니다.”
 최동현 상병은 물건 수량을 확인한 후 자리로 돌아갔고, 배달은 김상현과 이성재의 몫이었다. 몇 번을 왕복해야 끝날 양이었다.
 사람들의 성화에 정신없이 왔다 갔다 하기를 반복한 이성재는 김상현이 없는 틈을 타서 의문의 상자를 열어 봤다.
 “헉!”
 빈 상자인 줄 알았다. 물건을 보관하려고 가져다 놓은 빈 상자인 줄 알았다. 그러나 넓적한 상자는 실탄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성재의 입술이 떨려 왔다.
 ‘이 새끼들, 진짜 뭐 하는 새끼들이야?’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른 상자도 슬쩍 열어 봤다.
 “흐미.”
 이번 상자에는 K3 링크탄이 한가득 담겨 있었다. 동혈 안이 어두워서 파악이 쉽지 않았다. 그래도 어림잡아 그런 상자가 네 개는 넘어 보였다.
 심장이 미친 듯이 펌프질했고 온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군대에선 실탄 한 발만 없어져도 난리가 난다. 관리 또한 엄중해서 밖으로 빼돌리는 게 불가능하다.
 물론 탈영할 목적으로 근무 중에 실탄을 갖고 도망치는 경우는 예외지만, 그래도 이만한 양을 빼돌린다는 건 탈영 할아비가 와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장승처럼 서서 벌벌거리는 이성재를 누군가 군홧발로 걷어찼다.
 “컥.”
 “이게 미쳤나. 누가 뒤지라고 했어?”
 선임인 김상현 일병이었다.
 “그, 그게······.”
 “아주 죽으려고 빽을 쓰는구나. 나와, 새끼야!”
 “아아.”
 김상현이 이성재의 귀를 잡고 밖으로 끌었다. 씩씩 콧김을 뿜으면서 이성재를 끌고 나온 김상현은 눈앞에 펼쳐진 상황에 그를 팽개치고 혼자 달려갔다.
 김상현이 달려간 곳은 동굴 한편의 작은 공터였다. 그곳에 백문엽 하사가 뒷짐을 지고 서 있고 그 밑으로 고참병들이 엎드려뻗쳐 있었다. 수색조는 보통 분대 단위로 나간다. 소대장인 박민석과 경계병을 제외한 여섯 명이 기수별로 나란히 엎드려 있었다. 일명 ‘군기 타임’이 돌아온 것이다.
 이성재도 선임들을 따라 자세를 취하려고 했으나 박민석 중위가 제지했다.
 “막내는 열외다. 내 옆에 와서 앉아.”
 “일병 이성재!”
 이성재는 잽싸게 달려가서 박민석 옆에 무릎앉아 자세로 엉거주춤 앉았다.
 백문엽 하사가 어디서 구했는지 두툼한 몽둥이를 하나 집어 들었다.
 “조성민이.”
 “병장 조성민!”
 “후임들 관리를 어떻게 했기에 신입이 작전 중에 입을 열수 있단 말이냐?”
 “시정하겠습니다!”
 빠악!
 복창과 동시에 백 하사의 몽둥이가 조성민의 엉덩이에 작렬했다. 강력한 힘에 밀려 조성민의 하체가 바닥에 닿았고, 이내 스프링처럼 튕기어 원 위치했다.
 “후임들 관리를 어떻게 했기에 쫄따구들 잡담에 진군이 멈춘단 말이냐!”
 빠악!
 “시정하겠습니다!”
 “일어서!”
 조성민이 재빨리 일어나 백문엽의 뒤로 이동하여 정자세를 취했다. 백문엽 하사는 걸음을 옮겨 다음 후임에게로 갔다.
 “이영석이.”
 “병장 이영석!”
 빠악! 빠악!
 “크억!”
 이영석 병장이 짧게 비명을 지르고 벌떡 일어나 조성민 병장 옆에 가서 차렷 자세를 취했다.
 남은 녀석들은 상병 줄이었다. 백문엽은 몽둥이를 조성민 병장에게 건네고 매섭게 눈짓했다. 그가 퇴장하자 조성민과 이영석 병장이 도끼눈을 뜨고 아래 기수를 불러 모았다.
 “내 밑으로 집합!”
 상병이하 병사들이 조성민과 이영석 병장 앞에 열을 맞춰 섰다.
 “우리 소대 모토가 뭐냐?”
 “할 땐 하자!”
 “아는 새끼들이 그따위로 행동해! 앞으로 취침!”
 “앞으로 취침!”
 “뒤로 취침!”
 “뒤로 취침!”
 “일어서! 앞으로 취침! 뒤로 취침! 좌로 굴러! 우로 굴러!”
 한바탕 얼차려가 시작됐다. 정신없이 바닥을 기는 대원들을 안주 삼아 박민석과 백문엽이 술잔을 기울였다. 둘은 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태연하게 대화를 나눴다.
 그 모습을 몰래 훔쳐보던 이성재의 눈에 약간의 존경심이 깃들었다. 둘의 모습에서 약간이나마 절대자들의 여유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소대장님, 얼마나 가져오셨습니까?”
 “뭘? 아!”
 그제야 생각났는지 박민석이 주섬주섬 건빵주머니를 뒤졌다. 뭔가를 한주먹 꺼내는데 그 향기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삽시간에 동굴 내부가 쌉쌀한 향냄새로 진동했다. 백문엽 하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세상에, 이렇게 많습니까?”
 “아직 놀라면 안 되지.”
 박민석은 악동 같은 얼굴을 하고 반대편 주머니까지 개방했다. 주머니에 가득 든 것을 꺼내 놓자 작은 언덕을 이룰 정도였다.
 “백 하사, 산 더덕은 인삼보다도 좋은 거야. 이런 건 어디 가서 구하지도 못해.”
 “근데 너무 많이 가져온 거 아닙니까? 걔들 거품 물었겠는데요.”
 “알 게 뭐야. 먼저 먹는 놈이 임자지.”
 박민석이 아이처럼 키득거리자 백문엽 하사도 어울리지 않게 미소를 지었다. 작년에 우연히 북한군 병사들이 조성한 더덕 밭을 발견하고 1년간 지켜봤다. 경계가 삼엄해서 계속 미루다가 오늘 큰 맘 먹고 캐 온 것이다.
 박민석은 옆에 있는 이성재에게 더덕을 씻어 오라고 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백지장처럼 하얀 얼굴을 하고 있는 그를 보고 그저 웃기만 했다.
 이성재 일병은 창고용 동혈에서 있었던 일은 까마득히 잊고 얼차려를 받는 고참병들을 보면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수색 중에 떠든 것도 자신이었고 선임들과 잡담하는 통에 진군을 멎게 한 것도 자신이었다.
 차라리 함께 굴렀으면 좋으련만 열외를 시킨 것이 더욱 괴로웠다. 이런 식으로 신입을 고문하는 것이 소대장의 취미라는 걸 안다면 이성재가 어떤 표정을 지을까?
 이성재는 바늘방석에 앉은 것처럼 엉덩이를 들썩이면서 고참들이 비명을 지를 때마다 몸을 비틀었다.
 그런 그를 보고 백문엽이 피식 웃고는 흙이 잔뜩 묻은 더덕을 가지고 일어났다.
 “전체, 기상!”
 “1분 준다. 개나리 군장으로 헤쳐 모여!”
 이영석과 조성민 병장의 서슬 퍼런 외침에 대원들은 사방으로 흩어졌고, 정말 초침이 1분을 넘기기 전에 수색대 본연의 모습을 갖추고 모두 집합했다. 칼같이 열을 맞춘 모습이 통문을 통과할 때 보였던 설렁설렁한 군기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럼에도 조성민과 이영석 병장은 주먹으로 대원들의 가슴을 치면서 소릴 질렀다. 특히 최동현 상병 앞에 이르러서는 거품을 물다시피 했다.
 “이 새끼가 돌았나! 총구가 어디로 가 있는 거야! 야, 최동현이!”
 “상병 최동현!”
 “넌 짬밥이 얼만데 아직도 파지도 몰라? 총구가 왜 허리 위를 향하냐? 여차하면 선임들 그냥 보내 버리게?”
 “아닙니다!”
 최동현이 잽싸게 총구를 아래로 내리고 자세를 바로 했다.
 “수색에서 젤 무서운 게 고참 총부리라고 했는데 우리 소대는 거꾸로 후임 총부리를 조심해야 되나? 군대 참 좋아졌다.”
 “그건 아니지 말입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전부 대가리 박아!”
 대원들이 최동현 상병에게 눈을 흘기고 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식사를 마치고 얼마 되지 않아 콧구멍으로 뿜어지는 냄새가 역했다. 그리고 그것을 다시 코로 빨아들일 때는 속이 다 울렁거렸다.
 목으론 신물이 넘어오고 돌바닥에 닿은 이마에선 체중에 비례한 고통이 해일처럼 밀려온다. 거기에다 말년 병장들이 휘두르는 몽둥이는 가감 없이 죽을 만큼 아팠다.
 땀이 비 오듯 흐르면서 바닥을 적셨다. 버티다 쓰러질 만하면 어김없이 몽둥이가 날아왔다. 쌍팔년 군번에서나 볼 법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김상현 일병의 시야에 소대장 옆에 앉아 있는 막내 이성재가 잡혔다.
 ‘어? 저 새끼 웃었어?’
 언뜻 스치고 지나간 시선에 이성재가 웃고 있는 듯했다. 순간 아드레날린이 분출되면서 호흡이 빨라졌다.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김상현의 뇌리에는 온통 후임이 웃었다는 사실로 가득했다. ‘설마.’ 하는 심정으로 다시 이성재를 살핀 김상현이 이내 한숨을 쉬고 시선을 거뒀다. 하얗게 질려서 벌벌거리는 녀석이 무슨 여유가 있어서 웃을 수 있겠는가.
 한편 이성재는 백지장 같은 안색엔 변함이 없으나 심적으론 상당히 안정된 상태였다. 방금 전에는 바로 위 선임인 김상현의 엉덩이가 동굴 천장에 닿을 것 같다는 상상을 하면서 슬쩍 웃기까지 했다. 그러다 김상현과 눈이 마주쳤고 번개같이 표정을 바꿔 다 죽어 가는 시늉도 냈었다.
 처음 고참들이 얼차려를 받을 때는 책임을 통감하고 죄책감에 몸을 떨었지만 지금 대원들이 받는 기합은 자신과 상관이 없다는 생각에 긴장이 한껏 풀린 상태였다.
 ‘그나저나 사람들이 어떻게 저렇게 달라지지? 그리고 구타에 얼차려까지······.’
 구타와 가혹 행위는 군에서 철저하게 단속하는 편이다. 더욱이 전방에서는 그 정도가 심해서 발각될 시에는 훈방 따위는 기대할 수 없다. 이성재 또한 병영 내에서 어떤 가혹 행위도 당해 본 적이 없다.
 그러나 별장이라고 불리는 이곳에선 모든 게 가능한 모양이었다. 가해자나 피해자 모두가 당연하다는 투로 행동하고 있으니 말이다.
 ‘나 아무래도 좆 된 것 같지?’
 이성재는 머릿속의 육군 수첩을 펼치고 계속해서 엑스를 쳤다. 그나마 좋았다고 기록한 내용들이 모두 지워졌다. 정리가 끝나자 남은 건 죄다 ‘요주의’ 아니면 ‘급조심’뿐.
 절로 한숨이 나온다. 이런 식이면 전역할 때쯤에는 중증 심장병이나 신경과민 환자가 돼 있을 것 같았다.
 “그만들 하고 이리 와라.”
 박민석 중위가 영감님 흉내를 내며 대원들을 불렀다. 대원들이 벌떡 일어나서 화톳불 주변으로 뛰어갔다. 허락 없이 일어났다고 화낼 법도 한데 조성민과 이영석 병장은 당연하다는 듯이 대원들과 함께 쪼르르 달려갔다. 참으로 묘한 녀석들이었다.
 대원들이 자리를 잡기 무섭게 백문엽 하사가 양념을 듬뿍 발라 두 번 구운 더덕을 넉넉하게 돌렸다.
 “잘 먹겠습니다!”
 “술안주니까 아껴서 먹어.”
 “예, 알겠습니다.”
 유치원에서 아이들에게 급식을 배식하듯이 살갑게 돌아다니는 백 하사와 더덕을 받아 들고 바보처럼 실실거리는 대원들, 언제 힘든 얼차려를 받았냐는 듯이 생글거렸다.
 술잔이 돌고 잔이 채워졌다. 대원들은 소주 팩에 찍힌 여가수의 사진을 보면서 침을 흘렸다. 시작도 하기 전에 더덕 향에 취하고 아이돌 가수에 취했다.
 “오늘 하루도 수고했다. 보람찬 하루를 마감하며 건배!”
 “건배!”
 대원들은 거침없이 잔을 비우고 더덕구이를 한입 베어 물었다. 자연산 더덕의 그윽한 향이 입안 가득 퍼지면서 모두는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이성재는 먹는 둥 마는 둥 더덕을 씹으면서 내심 고갤 끄덕였다. 그동안 쌓였던 의문 중 한 가지가 풀린 것이다.
 수색대의 매복 임무는 분대별, 소대별로 로테이션식으로 돌아간다. 그런데 박민석 중위의 2소대, 그중 1분대는 자기 차례는 물론이고 다른 소대의 순번까지 도맡아서 임무를 수행했다.
 그 때문에 1분대 소속이었던 이성재 일병은 이병 시절, 텅 빈 내무반에서 다른 분대원들의 잔심부름을 하면서 혼자 지내는 경우가 많았다. 수색 임무는 일병부터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대대장이 지나치다며 로테이션을 강조했지만 그때뿐이고 틈만 나면 대타를 뛰어 달라고 타 소대장들이 뇌물을 들고 오기 일쑤였다.
 특히 동상에 걸리기 쉬운 겨울에는 박민석 중위의 인기가 부대 내에서 하늘을 찔렀다.
 ‘매복하러 나가서 고생하는 줄 알았더니 이러고들 놀았단 말이지?’
 이성재는 배신감에 몸을 떨었다. 부모 없는 아이처럼 타 분대의 꼬봉 역할을 해 온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놨던 잔을 다시 들어 단숨에 들이켰다. 물론 막내라는 본분은 잊지 않았다. 부글거리는 내심과 달리 외관은 순한 막내의 표정을 하고 있었다.
 술잔이 서너 번 돌고 얼굴에 빨간 점이 피어오를 즈음, 박민석 중위가 주위를 환기(喚起)시켰다.
 “자, 우리 막내 얘기 좀 들어 볼까?”
 “일병 이성재.”
 대답은 힘차게 했으나 뭔가 어색하다. 멍한 표정을 짓는 그의 옆구리를 김상현 일병이 팔꿈치로 쿡쿡 찔렀다.
 “너 소개하라고, 말하자면 인간 이성재의 사용 설명서를 읊조리라 이거지.”
 “예?”
 “어리바리 새끼. 넌 신입생 ○T도 안 가 봤어?”
 대학 3학년을 마치고 온 이성재 일병이다. 무슨 뜻인지 모를 리가 있겠는가. 문제는 지금 분위기가 전혀 군대 같지 않아서 일순 당황했던 것이다.
 김상현에게 떠밀려 부자연스럽게 일어선 이성재가 양손을 모으고 최대한 예의 바르게 자신을 소개했다.
 “저는 서울에서 태어나서······.”
 “백 하사님, 더덕 남은 거 없습니까?”
 “없어. 아껴 먹으라고 했잖아.”
 “아, 입맛만 버린 것 같아서 떨떠름하지 말입니다.”
 “라면 몇 개 끓이든가.”
 “정말이십니까?”
 “대신 나중에 채워 놔.”
 “당연하지 말입니다.”
 “백 하사님, 전 통조림 하나 더 먹어도 되겠습니까? 먹은 건 채워 놓겠습니다.”
 “그렇게 해.”
 회식 자리에서 노래시켜 놓고 딴짓하는 것까지 닮아 있었다. 그래도 이성재는 자세를 흩트리지 않고 말을 이어 나갔다. 막내니까.
 “아버지가 조그맣게 사업을 하셔서 졸업 후에 아버지 회사에서······.”
 갑자기 동굴 안이 조용해졌다. 옆 사람과 수다를 떨던 대원들의 시선이 일제히 이성재를 향했다. 특히 전역을 얼마 안 남긴 이영석 병장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누가 가로채기라도 할까 봐 재빨리 입을 여는 이영석이었다.
 “무슨 사업 하시는데?”
 “철공소 하십니다. 저도 그 일이 재밌어서 어려서부터 아버지 밑에서 일을 배웠고 기계 공고를 나와 대학도 기계공학을 전공했습니다.”
 이성재의 말이 끝나자마자 동굴 안이 다시 소란스러워졌다. 이영석도 흥미를 잃고 조성민 병장과 수다를 떨었다.
 잠시지만 모두의 관심을 받아 행복했던 이성재는 전보다 더한 쓸쓸함을 간직한 채 자기소개를 마쳤다.
 “······이상입니다.”
 양 볼이 발그레 물든 이성재가 엉거주춤 자리에 앉자 대원들이 기계처럼 손뼉을 쳤다. 군대에 오기 전에 보았던 광경과 너무 닮아 있었다. 싫다는 걸 강제로 노래를 시켜 놓고 지들은 딴짓을 하다가 노래가 끝나면 영혼 없는 박수를 보내던······.
 ‘요즘 군대는 이런가?’
 민간인 사회와 너무 닮아 있는 분위기에 이성재는 또다시 혼란을 느껴야 했다. 그리고 그때 소대장 박민석이 염장을 지르는 말을 했다.
 “부친의 가업을 잇는다. 요즘 젊은이답지 않게 훌륭한 사상을 갖고 있구나. 열심히 하도록 해.”
 “예, 감사합니다.”
 부친의 사업을 잇는 게 왜 훌륭하단 말인가? 아버지가 재벌 총수라도 저렇게 말을 할까? 은근히 철공소를 무시하는 것 같아서 이성재는 자존심이 상했다.
 다시 한 번 술잔이 돌고 장기자랑 시간이 돌아왔다. 최동현 상병이 전투복 상의를 반쯤 까고 막춤을 추면서 노래 한 곡조를 뽑았다.
 “인······천의 성냥 꽁장······ 성냥꽁장 아가씨는 빽바지 빽바지!”
 “꿀따리 꿀따리!”
 80년대 군번이나 출 법한 막춤을 추면서 일명 ‘영자송’을 부르는 최동현 상병과 추임새를 넣는 고참들의 모습은, 한마디로 추했다.
 그러나 이성재 일병은 막내답게, 머릿속 수첩에 적힌 내용대로 충실하게 안면 근육을 수축 이완시키면서 열심히 손뼉을 쳤다.
 다음 차례도 또 그다음 차례도 추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왜 신세대라는 놈들이 저렇게 쉰내 나게 노는지, 이성재의 의문이 한 가지 더 늘었다. 그리고 곧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박민석 중위의 차례가 돌아왔다. 그는 껄렁하게 일어서더니 짝다리를 짚고 한쪽 다리를 심하게 떨면서 노래를 시작했다.
 “소령, 중령, 대령은 양주 쳐 먹고.”
 “핫!”
 “소위, 중위, 대위는 맥주 쳐 먹고.”
 “핫!”
 거짓 미소를 얼굴 가득 짓고 이성재는 열심히 손뼉을 쳤다. 그러나 속으로는 목구멍까지 욕이 치밀었다.
 ‘장교라는 새끼가 저래도 되는 건가?’
 고통스러운 장기자랑 시간이 끝나고 대원들은 삼삼오오 흩어져서 취침 준비를 했다. 옆으로 누워서 과자를 오물거리며 잡담을 나누는 모습이 MT에 온 학생들 같았다.
 이성재는 DMZ 첫 임무를 괴상망측하게 마감했다는 생각에 자리에 눕자마자 남모르게 탄식했다.
 ‘앞으로가 걱정이구나. 이러다 위에 걸리기라도 하는 날엔······.’
 슬쩍 대원들을 돌아봤다. 물론 자신은 입을 다물겠지만 이들 중에 누구라도 입을 놀린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이게 다 소대장 때문이야.’
 소대장을 바라보는 눈에 자신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남들 모르게 소대장을 노려보던 이성재는 옆구리를 찌르는 손길에 움찔했다. 김상현 일병이었다.
 “자냐?”
 “일병 이성재.”
 “됐어, 인마. 오늘 근무 시마이야. 쉬어. 아버지 철공소는 잘되냐?”
 “겨우 밥 먹고 삽니다.”
 “우리 집도 자영업 하잖아, 좋지가 않아. 고새 망하지나 않았는지 모르겠다.”
 “요즘 경기가 어렵다고 들었습니다.”
 “그러게 말이다.”
 둘의 대화를 듣고 어깨 넘어 누워 있던 최동현 상병이 빙글 몸을 돌려 두 사람 곁으로 굴러왔다.
 “야, 김상현이.”
 “왜요.”
 “이 새끼가 빠져 가지고 선임이 부르는데 왜요?”
 “아, 좀. 잘 때는 건들지 마시죠.”
 “집에 돈 필요하면 얘기해. 저리로 빌려줄 테니까.”
 “일 없습니다.”
 “진짜로 싸게 빌려준다니까.”
 “아, 됐다고요.”
 “싫으면 말고.”
 최동현이 다시 몸을 굴려 제자리로 돌아갔고, 김상현은 눈을 흘기며 투덜거렸다.
 “누구 신장을 떼 가려고.”
 “예?”
 “몰랐냐? 이성재 너도 저 인간 조심해. 집이 강남에서 사채놀이 하는 모양인데 장난이 아닌가 봐. 제때 안 갚으면 장기도 떼 가는 모양이더라.”
 “에이, 설마요.”
 “정말이야. 저 인간이 직접 한 얘기야.”
 “······.”
 이성재는 순간 목이 턱 막혀 왔다. 가뜩이나 구성원들이 맘에 안 드는데 김상현의 말을 들으니 한층 더 정나미가 떨어졌다.
 이성재와 김상현은 가끔씩 이쪽으로 시선을 던지는 최동현을 느끼고 자라목처럼 바짝 움츠러들었다. 그렇게 시간이 조금만 더 흘렀다면 목에 깁스를 해야 했을 것이다.
 그때 백문엽 하사가 둘을 구제했다.
 “최동현, 불침번 교대해 줘라.”
 “네.”
 최동현 상병이 개인 소지품을 챙겨서 입구로 걸어갔다. 그와 교대한 김인하 상병이 두 사람 곁에 와서 누웠다. 이성재가 상체를 일으키고 반갑게 그를 맞았다.
 “수고하셨습니다, 김인하 상병님.”
 “그래, 고맙다.”
 다음 달에 병장을 다는 김인하는 이성재가 제일 좋아하는 선임이다. 늘 후임에게 다정하게 굴며 혼낼 일이 있어도 자상하게 타이르는 스타일이었다. 군인답지 않게 이성적이고 거기에다 과묵하기까지 해서 믿고 따를 만한 선임이라고 늘 생각해 왔다. 그런데 소대 내에서는 그다지 인기가 없었다.
 ‘저렇게 멋진 남자를 왜들 몰라보는 걸까? 하긴, 찌질이들 눈엔 모나 보이겠지.’
 이성재는 소대 내 찌질이의 원조 격인 박민석을 다시 한 번 흘겨봤다. 누워서 오징어땅콩 과자를 공중에 던지고 입으로 받아 먹는 모습이 한심스러웠다.
 “김 일병님, 작전 나올 때마다 여기서 지낸 겁니까?”
 “그랬다간 벌써 걸렸게. 비 오는 날이나 김일성 생일같이 북한군 경계가 느슨해질 때 오는 것 같더라. 자세한 건 나도 몰라. 소대장 마음이니까.”
 그래도 최소한의 기준은 있는 모양이었다.
 “아 참, 동굴에 있는 실탄은 뭡니까?”
 “나도 몰라. 우리가 오기 전부터 있었어.”
 “예?”
 “백 하사님이 그러는데 적어도 20년 가까이 모은 거라더라.”
 “누가요?”
 “누군 누구야. 우리 앞에 선배들이 그랬겠지.”
 “헉, 20년······. 녹슬어서 나가기나 합니까?”
 “녹슬긴. 임무 나올 때마다 교체해서 저것들 다 새거나 다름없어.”
 “규격이 맞습니까?”
 “바보냐? K2나 M16 둘 다 같은 탄이잖아.”
 “아.”
 한국군은 표준 탄으로 5.56mm 나토탄을 쓴다. K2 이전에 주력 소총이었던 M16도 같은 규격이다.
 그래서인지 아직도 전방에는 M16용 20발들이 탄창이 상당수 돌아다니고 있다. 재활용도 좋지만 K2는 물론이고 소화기 기관총인 K1에까지 20발들이 탄창을 쓰는 건 조금 심한 처사라 하겠다.
 “대대에 신고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신고를 왜 해?”
 “출처가 불분명하니까 당연히······.”
 “어리바리 새끼, 누가 신입 아니랄까 봐. 우리가 한 것도 아닌데 덤터기 쓸 일 있어?”
 “그래도 사실대로 말하면······.”
 “사실대로 뭐라고 할 건데. 아버지뻘 선배들이 남겨 준 실탄을 쌓아 놓고 매복 나와서 술 처먹고 놀다가 정신이 번쩍 들어서 갖고 왔다고 할까?”
 “······.”
 “우리 같은 쫄병은 위에서 까라면 까다가 제대하면 그만이야. 괜히 나대다가 일 만들지 말고. 알았어?”
 “예.”
 “내 생각인데 우리 아버지 세대가 군 생활할 때는 남북관계가 좀 살벌했냐? 수색 나가기가 죽기보다 싫었을 거야. 실제로 교전도 있었다고 하니까. 아마 불안해서 실탄을 모아 두지 않았나 싶다.”
 “불안해서요?”
 “너, 지금 탄창 몇 개 있어?”
 “세 개 가져왔습니다.”
 부대마다 차이는 있지만 개인당 세 개에서 다섯 개 정도의 탄창을 소지하고 근무에 나간다. 한참 남북 관계가 경색될 때는 여덟 개까지 소지한 적도 있다고 한다.
 “탄창 하나당 25발씩 장전했으니까 모두 75발이야. 만약 매복 중에 교전이라도 벌어지면 그걸로 제대로 싸울 수 있을 것 같아? 놈들은 작정하고 내려왔으니 빵빵하게 챙겨 왔을 텐데, 교전 중에 실탄 떨어져 봐. 다 뒈지는 거야.”
 “흠.”
 K2 소총은 연사일 때 분당 700~900발, 점사도 분당 45~65발의 뛰어난 속도를 보이는 자동소총이다. 탄창 세 개쯤은 작정하고 쏘면 눈 깜짝할 사이에 소진될 분량이었다. 기관단총인 K1은 말할 것도 없고.
 “작전 나가기 전에 여기에 들러서 실탄을 바리바리 챙겨서 가지 않았나 싶다. 나 같아도 그랬을 테니까.”
 김상현은 이제 한 식구라고 여겼는지 스스럼없이 말을 이어갔다. 또한 별장 신입에 대한 보안교육도 선임인 그의 몫이기도 했다.
 이성재가 귀를 쫑긋거리면서 들었다. 알게 모르게 자신을 따돌렸던 것보다는 지금처럼 동료로 인정해 주는 분위기가 좋았다. 물론 비밀 엄수라는 단서가 붙었지만 말이다.
 “그럴 리 없겠지만 여기서 보고 들은 건 절대 비밀이다. 밖으로 새어 나가면 다 같이 죽는 거야.”
 “알고 있습니다.”
 “똑똑한 놈이니까 알아서 행동하겠지. 그만 자자.”
 똑똑한 놈? 이성재의 눈이 커졌다. 김상현이 자신을 지칭하는 말은 대개가 ‘어리바리’, ‘군빠신(군기 빠진 신병 대가리)’, ‘짬찌(짬밥 찌그러기)’ 등등이었다. 그런데 별장으로 불리는 이곳에서는 칭찬 비스무리한 말도 내뱉고 있었다. 진심인지 모르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굴종의 대가는 달다고 했었지. 이렇게 나도 코가 꿰이는 건가?’
 
 
 
 #오행진
 
 
 
 배불리 먹고 한바탕 신나게 논 대원들은 단잠에 빠져들었다. 오직 불침번을 서는 최동현 상병과 첫 임무에 긴장한 이성재만이 깨어 꼼지락거렸다.
 이성재는 혹여 최동현이 졸지는 않을까 수시로 고개를 돌려 확인했다. 물론 최동현이 눈치채지 못하게 조심함은 말할 것도 없다.
 ‘자식, 그래도 근무 설 때는 에프엠이네.’
 입구를 막은 바위에 귀를 대고 집중하는 모습이 제법 고참다워 보였다. 이성재는 웃음을 삼키고 팔베개를 하고 천장을 올려다봤다.
 얼마나 많은 선배들이 이곳을 거쳐 간 걸까? 그리고 그들은 왜 탄약을 빼돌려서 쌓아 놓은 걸까? 그건 또 어떻게 빼냈을까? 소대장은 이곳을 어떻게 알게 됐을까? 후계자에게 물려주듯 박 중위가 선택된 걸까?
 머릿속이 오만가지 생각으로 부스럭거렸다. 무엇보다 궁금한 것은 어떻게 그 오랜 세월 동안 들통 나지 않았냐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론 자신이 비밀 클럽의 회원이 된 것 같아 우쭐해지기도 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선잠이 들었던 이성재는 얼굴에 떨어진 물방울에 기겁하고 일어났다. 따듯한 공기가 차가운 천장에 부딪히며 물기가 생긴 모양이다. 낮은 곳을 찾아 모여든 물기가 방울을 이루고 무게를 이기지 못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이성재는 손으로 얼굴을 비비고 무의식적으로 동굴 입구를 응시했다. 언제 교대했는지 김상현 일병이 동굴 바위에 귀를 대고 경계를 서고 있었다.
 ‘후우.’
 자신도 모르게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무리 이곳이 은밀하다 해도 작전지역 안이다. 언제 어떤 불상사가 일어날지 모르는 일이었다.
 엉터리 같은 구석이 있어도 맡은 임무를 게을리하지 않는 선임들을 보면서 눈곱만큼이나마 존경심이 들었다.
 ‘자식, 고생해라.’
 두 달 고참이면서 두 살 어린 김상현 일병에게 이성재는 가볍게 응원 어린 시선을 날려 주고 자리에 누웠다.
 ‘그나저나 녀석들이 믿어 줄까?’
 뻥치지 말라고 눈을 부라릴 친구들을 생각하니 피식 웃음이 터져 나왔다.
 
  * * *
 
 그 시각.
 수색대 대원들이 자리한 바닥 아래서 작은 기운이 일고 있었다. 일행이 누운 바닥 밑으로 또 다른 빈 공간이 존재했는데, 높이가 2m에 다다르고 지름이 10m에 이르는 원형 공동(空洞)이었다. 그리고 그 지면에는 지금은 쓰지 않는 옛 한자와 부호들이 어지럽게 그려져 있었다.
 중앙에는 음각된 한자가 가로 세로 1m 공간에 빼곡하게 새겨져 있었고, 그 주위를 특이한 부호들이 원을 그리며 퍼져 나갔다. 부호들은 어쩔 땐 선이 됐다가 어느 곳에선 면이 되기도 하고 글자와 만나 그림이 되기도 했다.
 부호의 끝에는 어김없이 한자가 한 글자씩 새겨져 있었고 그 수가 모두 다섯 개에 이르렀다. 간격 또한 일정했다.
 다섯 개의 글자는 현대에도 사용하는 한자로 목(木), 화(火), 토(土), 금(金), 수(水)였다. 다섯 방위에 그려진 글자를 모두 연결하면 반듯한 원이 만들어졌다.
 한 가지 특이한 것은 다섯 방위에 있는 글자와 그에 연결된 부호 중 네 개의 영역이 찬연한 금색으로 빛나고 있다는 것이다. 오직 수(水)의 방위와 그 구역만이 칙칙한 검은색을 띠었다.
 금색을 띠고 있는 네 개의 영역은 같은 색으로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그 채도와 명도가 사뭇 달랐다. 오랜 시간을 두고 조심씩 변했다는 뜻이었다.
 다섯 번째 방위인 수(水) 또한 상당 부분이 금색에 잠식당한 상태였고 한 뼘도 안 되는 적은 영역만이 검은색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색의 농도가 짙지 않아서 자세히 보지 않으면 못 알아챌 정도로 희미했다.
 변화는 금색과 검은색의 경계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금색 영역에서 일어난 미세한 미풍(微風)이 끊임없이 경계를 넘어 검은색을 도발했고 미풍의 끊임없는 공세에 검은색은 점차 금색으로 변해 갔다.
 현재 시각 23시 30분.
 단잠에 빠져 있던 대원들은 안면을 때리는 차가운 느낌에 놀라 잠이 깼다.
 “뭐야?”
 바닥에서 시작된 작은 진동이 벽을 타고 뻗어 나가면서 천장에 달려 있던 물방울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동굴 내부에는 한바탕 소나기가 지나간 것처럼 한기가 감돌았다.
 잠시 후 모두의 시선이 천장에서 바닥으로 향했다. 바닥을 짚은 손에서 떨림이 감지됐고, 그 세기는 시간이 갈수록 더욱 강해졌다.
 “지진이다!”
 “모두 조용히 해!”
 최동현 상병의 말대로 지진이라면 동굴은 위험하기 짝이 없다. 박민석 중위는 입을 여는 사람이 없음에도 버럭 소릴 질렀다. 지진이라는 말에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진 대원들의 마음을 다잡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젠 몸이 흔들릴 정도로 진동이 거세졌고 천장에서 돌가루가 섞인 흙먼지가 쏟아지면서 걷잡을 수 없게 되었다.
 “신속하게 장비를 챙겨 나간다. 실시!”
 벗어났던 전투 조끼를 걸치고 군화는 시간이 없어서 끈을 묶어 그대로 목에 걸었다.
 “움직여!”
 눈 깜짝할 사이에 준비를 마친 대원들이 입구로 향할 즈음, 뼈마디가 어긋나는 것처럼 기분 나쁜 소음과 함께 바닥이 크게 흔들렸다. 갑작스레 일어난 일이라 모두는 균형을 잃고 옆으로 쓰러졌다.
 쩌억!
 대원들이 넘어지기 무섭게 동굴 바닥은 기다렸다는 듯이 균열이 일었고 눈으로 좇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동굴 전체로 퍼져 나갔다. 다섯 방향으로 뻗은 균열이 동굴 벽에 닿으면서 바닥이 원형으로 일제히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쿠르릉!
 “으악!”
 몸을 일으킬 여유도 없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선임 후임 할 것 없이 비명을 지르고 아래로 떨어졌다.
 높이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칠흑같이 어두운 시야는 모두를 공포로 몰아넣기에 충분했다. 대원들은 서로를 부르며 주위를 더듬거렸다. 하나같이 겁에 질린 목소리였다.
 “소대장님!”
 “백 하사님!”
 “김 일병!”
 그때 천장에서 랜턴 하나가 또르르 굴러떨어졌다. 누군가 재빨리 랜턴을 주워 주위를 비췄다. 백문엽 하사였다.
 “다친 사람 없어?”
 대원들은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고 백 하사 주위로 모여들었다.
 “소대장님은?”
 “나 여기에 있다.”
 백 하사가 소리가 들린 쪽으로 랜턴을 돌리자 박민석이 손을 휘휘 저으면서 일행이 있는 곳으로 걸어왔다. 왜 저런 행동을 하는지 궁금했던 모두는 이내 내부를 뽀얗게 덮은 흙먼지를 발견하고 요란스럽게 재채기를 했다.
 “모두 무사한가?”
 “네, 높이가 낮아서 천만다행이었습니다.”
 “운이 좋았어. 빨리 나가는 게 좋겠다.”
 바닥에서 천장까지에 거리는 2m 남짓, 수색대 대원이라면 도움 없이 오를 수 있는 높이였다.
 박민석이 개인장비를 위로 던지고 도움닫기를 하려는 순간 이성재 일병이 다급하게 그를 불렀다.
 “소대장님, 여기 좀 보십시오!”
 이성재가 손가락으로 바닥을 가리키며 어지럽게 부산을 떨었다. 박민석은 백문엽에게 랜턴을 받아 바닥 가까이 가져갔다.
 “헉!”
 칙칙한 돌바닥 사이로 누런색이 미로처럼 사방으로 뻗어 있었는데 틀림없는 금이었다. 사방에서 마른침 삼키는 소리가 요란했다.
 “백 하사, 이거 금 맞지?”
 “······.”
 흙먼지가 들어가는 것도 모르고 백문엽은 속이 보일 정도로 입을 벌리고 있었다. 백 하사뿐만이 아니었다. 대원들은 넋 나간 사람처럼 멍한 표정으로 혼자만의 상상에 빠져 있었다.
 이영석 병장은 사장이 되어 늘씬한 비서가 타 주는 모닝커피를 마시고 있었고, 김상현 일병은 재단 후원금을 내고 여자고등학교의 선생이 돼서 아이들과 희희덕거리는 꿈을 꾸었다. 이성재 일병은 목 좋은 자리에 땅을 사서 아버지의 철공소를 옮기는 상상을 했다.
 “정신들 차려!”
 박민석 중위의 일갈에 대원들이 머리를 흔들고 현실로 돌아왔다. 그러나 여전히 망상에서 깨어나지 못했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그들의 눈은 탐욕으로 이글거렸다.
 “이 새끼들이 미쳤나. 백 하사, 너까지 왜 그래!”
 “험험, 소대장님 말씀 들었지? 일단 여기서 나가자.”
 대원들은 애인을 남기고 떠나는 사람처럼 아쉬워하며 장비를 위로 던졌다. 언제다시 지진이 올지 몰라 우선은 이곳을 벗어나야 했다.
 그때였다.
 조명 기구에 전원이 들어올 때 나는 소리가 들리며 반대편 구석에서 사람 몸통만한 빛줄기가 솟구쳤다. 시각뿐 아니라 사람의 오감을 자극하는 찬연한 녹색의 빛기둥이었다.
 “아아.”
 “나만 그러나? 빛에서 향기가 나는 것 같아. 숲 향기가.”
 “바람, 바람이 느껴지지 않나요?”
 “맞아, 바람 소리도 들리는 것 같아.”
 눈앞의 광경은 충분히 신비롭고 몽환적이었다. 밖으로 나가야 한다는 생각도 잊고 대원들은 묘한 자세로 빛줄기를 감상했다.
 텅.
 또 하나의 빛줄기가 12시 방향에서 솟구쳤다. 이번에는 붉은색의 빛기둥이었다. 서늘했던 내부가 빛줄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훈풍에 후끈 달아올랐다. 빨래 마르는 냄새가 대원들의 코를 자극했다.
 텅.
 처음 녹색의 빛줄기가 약간의 여유를 가진 것에 비해 두 번째 빛기둥부터는 눈에 띄게 간격이 줄어들었다. 네 번째 빛줄기가 만들어질 때는 채 10초도 걸리지 않았다.
 “오오.”
 놀라운 빛의 향연이었다. 녹, 적, 황, 백 네 가지 색의 빛기둥은 대원들이 있는 내부를 대낮같이 밝히고 묘한 향기와 소리를 퍼트렸다. 특히 소리는 서로 공명하면서 새로운 영역으로 변화되고 있었다. 천상의 소리가 있다면 이렇지 않을까?
 한데 이런 환상적인 장면 앞에서 대원들의 인상은 어두웠다. 이유는 모르지만 뭔가 이상한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김상현 일병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입을 열었다.
 “뭔가 빠진 것 같아.”
 “김 일병, 너도 그렇게 느꼈냐?”
 “네, 처음에는 몰랐는데 볼일 보고 밑을 안 닦고 나온 것처럼 찜찜하네요.”
 일행 중에 미술이나 그래픽을 전공한 사람은 없었다. 그럼에도 모두는 본능적으로 조화롭지 못하고 뭔가 불완전하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바닥을 두리번거리던 김상현이 눈을 번뜩이고 처음 빛줄기가 솟았던 곳으로 걸어갔다.
 “여기 좀 보십시오. 글자가 있습니다.”
 “저기도 있습니다.”
 빛줄기를 뿜어내는 바닥에는 어김없이 한자가 한 글자씩 새겨져 있었다. 김상현이 불이 들어온 순서대로 읽어 나갔다.
 “목(木), 화(火), 토(土), 금(金).”
 “저리 비켜 봐.”
 박민석 중위가 김상현을 밀치고 ‘금(金)’ 자가 새겨진 위치에서 7시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허리를 굽혀 바닥을 살핀 그가 신음을 토했다.
 “여기 마지막 글자가 있었군. 수(水).”
 대원들이 쪼르르 달려와 수(水)자를 중심으로 둥글게 섰다.
 “어, 정말이네.”
 “수(水)자에 불이 들어오면 완벽한 오행성이 되는 건가? 에이.”
 박민석이 속상하다는 듯이 탄식했다. 백문엽 하사가 불안한 표정으로 그에게 물었다.
 “소대장님, 그럼 저 금맥이······?”
 “아니야. 누가 이런 짓을 했는지 모르지만 이건 금맥이 아니라 인위적으로 만든 거야.”
 박민석이 바닥에 팬 금선을 손으로 만지작거리면서 말했다. 소대장의 말에 화들짝 놀란 대원들이 다이빙을 하듯이 엎드려서 바닥을 손으로 쓸었다.
 “진짜네. 이런 젠장.”
 자세히 보니 선도 금을 박아 넣은 것이 아니라 살짝 금칠을 한 정도였다. 다 긁어 모아 봐야 하룻밤 술값이나 나올지 의문이었다.
 대원들은 땅이 꺼라져 한숨을 쉬고 바닥을 응시했다.
 “다들 이리 와 봐.”
 소대장의 부름에 주저앉아 있던 대원들이 벌떡 일어나 달려갔다. 혹여 돈이 될 만한 것이 있나 해서였다.
 백문엽이 제일 먼저 다가와 쪼그려 앉았다.
 “여기들 봐라. 금선이 점점 늘어나고 있어.”
 금색 영역에서 일어난 미세한 기운이 흑색과 경계를 이루는 지점에서 작은 회오리를 일으키고 있었다. 그 기운에 휩싸인 흑색 영역은 점차 금빛으로 변해 갔다.
 “아!”
 그제야 대원들은 바닥에 생긴 금선의 생성 비밀을 알 수 있었다. 21세기 과학기술로 이런 조화를 만들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금색 미풍의 회오리는 눈곱만큼 남았던 흑색을 밀어내고 마지막 수(水)와의 조우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대원들은 그 광경을 신기하게 지켜보며 다음 진행을 기다렸다. 이때 시계는 23시 59분 50초를 가리키고 있었다.
 띠띠.
 누군가의 전자시계에서 24시 정각을 알리는 신호 음이 일었다. 금선은 완벽하게 ‘수(水)’ 자와 연결됐다. 그리고······.
 텅!
 “으아악!”
 머리를 맞대고 상황을 지켜보던 대원들은 ‘수(水)’ 자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렬한 빛줄기에 비명을 지르고 넘어갔다.
 망막에 자극을 받았는지 모두는 눈을 비비며 고통스럽게 바닥을 굴렀다.
 오행의 원 안에서 신음하는 그들을 품에 안은 채 다섯 개의 빛기둥은 마지막 수(水)의 점화(點火)를 기점으로 안쪽으로 그 폭이 확장되기 시작했다. 그러곤 정중앙에 이르러 하나로 합해지면서 각각의 색은 백색으로 통합되었다.
 
  * * *
 
 근거리에 위치한 000GP가 소란스러웠다.
 경계를 서던 초병은 정체불명의 빛기둥을 목격하고 급히 GP장을 찾았다. GP장 한병윤 중위는 전방 철책 7시 방향에서 솟구친 빛기둥을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저게 뭐야?”
 “소대장님,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북한군 GP에 비상이 걸린 것 같습니다.”
 아군 GP와 마주 보고 있는 북한군 초소에 야간등이 들어오고 북한군 병사들이 분주하게 오가는 모습이 보였다.
 “이게 뭔 일인지. 전체, 비상! 무기고 개방한다! 전원, 전투 위치로.”
 한병윤 중위는 분대장들에게 전투준비를 시키고 황급히 무전실로 달려갔다.
 비무장 지대를 대낮같이 밝힌 빛기둥은 2km 남짓 떨어진 GOP에서도 관측됐다. 계통을 따라 올라간 보고는 사단 본부까지 발칵 뒤집어 놓았다. 곧 사단 전체에 비상이 걸렸고 장병들에겐 실탄이 지급됐다. 예하 포병연대와 전차 중대, 직할 대대도 출동 준비를 마쳤다. 15사단과 인접한 3사단과 7사단도 비상대기 상태에 돌입했다.
 전일 23시 30분에 발생한 정체불명의 빛줄기는 익일 00시 00분을 넘기면서 극을 이뤘다. 자정을 기점으로 다섯 개의 빛기둥이 하나로 합쳐지면서 더욱 강력한 세기로 진화했고, 이내 다섯 개가 완벽히 뭉치면서 거대한 빛의 파장을 일으켰다.
 스팟!
 빛의 해일이 빛기둥을 중심으로 원형을 그리면서 퍼져 나갔다. 장관이었다. 인근에서 이를 관측하던 남북한 병사들은 최면에라도 걸린 것처럼 넋을 잃었다.
 그러나 보는 것과 달리 빛의 해일이 닿는 곳은 살과 피로 이뤄진 생명체들의 비명으로 아비규환이었다.
 사람이고 짐승이고 예외는 없었다. 빛기둥 최근거리에 있었던 000GP는 병사들이 지르는 비명과 외침으로 지옥을 방불케 했다. 처음 빛에 닿은 병사의 피부가 흐물흐물해지면서 눈알이 튀어나왔고 짤막한 외마디 비명과 함께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병사들이 기겁하고 도망쳐 보았지만 눈으로 좇기 어려울 정도로 빠르게 다가오는 빛의 파도를 벗어날 수 없었다.
 “크아악!”
 한병윤 중위가 양손을 뻗어 막아 보았지만 뼈마디가 녹아내리는 광경을 목격하고 더한 공포 속에 생을 마감해야 했다.
 가공할 살인 광선은 한병윤 중위를 끝으로 000GP에 근무하던 모든 장병들의 목숨을 앗아 가고 나서야 진행을 멈췄다. 그러곤 세포가 자가 분열을 하듯 팽창하더니 한계점에 이르러 무시무시한 폭발을 일으켰다.
 스팟!
 화약 무기가 터질 때 나는 폭발음도 없었다. 정체 미상의 빛기둥은 갑작스러운 출현만큼이나 허무하게 사라져 버렸다.
 그러나 단순히 시각적인 소멸로 그치지 않았다. 반경 1km, 직경 2km가 조금 안 되는 거대한 영역이 가위로 오려 낸 것처럼 뽑혀 사라졌고, 그 자리는 황무지로 변해 버렸다. 범위 안에 있던 동식물은 물론이고 인간마저 모조리 사라져 버린 것이다.
 이를 지켜보던 남북한 병사들은 멍한 얼굴로 한동안 입을 열 수 없었다. 아무리 기를 써도 지금의 상황을 표현할 단어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당소 올빼미
 
 
 
 똑. 똑.
 10인의 수색대 대원들이 널브러져 있는 동굴 안은 천장에서 떨어지는 낙수 소리만 간간이 들릴 뿐 고요 속에 잠겨 있었다. 평화롭기까지 한 정적은 인간들의 괴성으로 깨져 버렸다.
 “아, 안 보여! 소대장님! 백 하사님!”
 잠에서 깬 대원들은 온통 시커먼 세상에 팔다리를 버둥거리면서 울부짖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사람들도 사정은 매한가지였다. 단순히 동굴 안이 어두워서 벌어진 일은 아니었다. 마치 무저갱이 눈앞에 펼쳐진 것처럼 완벽한 어둠이었던 것이다.
 놀랍게도 대원들의 눈은 하나같이 백안(白眼)이었다. 티끌하나 없는 백색의 기운이 안구의 바깥쪽 각막을 완전히 뒤덮고 있었다. 그렇다고 수정체가 회백색으로 흐려져서 시력이 떨어지는 백내장과는 사뭇 달랐다.
 하늘이 무너져도 빈둥거릴 것 같던 박민석 중위도 이때만큼은 두려움에 휩싸여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대원들은 서로를 찾아 더듬더듬 동굴 안을 헤맸고 전우의 체온을 느끼고 비로소 안도할 수 있었다.
 1시간 후, 적잖게 심력을 소모한 모두는 서로의 등을 의지하고 몸을 늘어뜨렸다. 격앙된 감정이 가라앉기보다는 지쳐서 손가락 하나 까닥할 수 없다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그럼에도 심장이 터질 것 같은 답답함과 억울함이 여전히 그들을 지배했다.
 그 와중에 누군가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들렸다. 이런 상황에도 밥 달라고 조르는 눈치 없는 밥통이 기막힐 따름이다. 대원들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멀쩡한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에 모두는 경악했다. 모두가 장님인데 누가 자신들을 이끌고 빠져나간단 말인가? 허탈함과 분노가 끓어올랐다.
 그중에서도 이성재의 분노는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허공을 더듬거리면서 자리에서 일어난 이성재 일병이 울음 섞인 음성으로 부르짖었다.
 “이게 뭐야! 이게 뭐냐고, 이 꼴통 새끼들아! 규정대로 행동했으면 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잖아. 매복이나 제대로 할 것이지 왜 이딴 곳에 와서 죄다 장님이 되냔 말이야! 어떡할 거야? 이제 어떡할 거냐고!”
 제대 후에 아버지를 도와 철공소를 꾸려 가려던 꿈이 사라졌다. 아들 대학 보내겠다고 밤늦게까지 쇠와 씨름하셨던 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라 목이 메어 왔다.
 평생 허리 한번 제대로 못 펴고 고생만 하셨던 아버지, 이젠 소경이 된 아들의 뒤치다꺼리까지 해야 할 상황이니 미칠 일이었다.
 의외로 고참들이 침묵했다. 뻔뻔하게 발뺌이라도 했다면 그나마 울분이라도 토할 수 있을 것을, 선임들은 물론이고 박민석 중위까지 굳게 입을 다물었다.
 이성재는 맥이 빠져 몸을 가누지 못했다. 울음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입술을 깨물었다.
 “당신들이야 원해서 왔을지 모르지만, 난 졸병이라서 선택권도 없이 끌려왔어. 이렇게 장님이 될 순 없단 말이야. 왜 그런 거야? 왜 실탄 따위를 숨기고 군에서 금지하는 사제 물건을 쌓아 놓은 거야? 왜 근무는 안 서고 이런 곳에······!”
 한참 넋두리를 늘어놓던 이성재가 벼락 맞은 사람처럼 부르르 몸을 떨었다. 흐릿하게 사물이 보였던 것이다. 그 후로 거짓말처럼 시력이 돌아왔다.
 “으하하하!”
 이성재는 환희에 젖어 어쩔 줄 몰라 했다.
 만세라도 외칠 것처럼 양팔을 들던 그가 뭔가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저, 저기······!”
 벌써 시력이 돌아왔는지 선임인 김상현 일병을 필두로 소대장 박민석 중위까지 실눈을 뜨고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젠장, 이런 것도 짬밥순인가?’
 상황을 보니 이성재가 가장 늦게 시력을 되찾은 것 같았다.
 시력을 찾고 기쁨에 환호라도 치려던 고참들은 막내의 원맨쇼에 잠시 침묵했었다. 그리고 이젠 그 침묵을 깰 시간이었다. 선임인 김상현 일병과 최동현 상병이 엉덩이를 털고 이성재에게 다가갔다.
 특히 바로 위 선임인 김상현의 분노는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믿었던 도끼에 발등이라도 찍힌 것처럼 어깨를 들썩이며 씩씩거렸다.
 “순둥인 줄 알았는데 이거 완전히 흉악한 놈일세. 그깟 눈 좀 멀었다고 고참을 까? 뭐? 꼴통 새끼들?”
 눈이 먼 게 작은 일이겠냐마는 시력을 찾았으니 이런 헛소리도 들어 줄 만했다.
 “김 일병님, 그게······.”
 “주딩이 닥쳐라 잉!”
 “크헉.”
 이성재의 아랫배에 묵직한 통증이 전해졌다. 숨이 막히고 허리가 끊어질 것 같은 고통에 그대로 고꾸라졌다.
 “어디서 엄살은!”
 최동현 상병이 자신의 방탄모를 벗어 이성재의 헬멧을 가격했다. 거기에다 서너 명이 더 가세하여 우악스럽게 몰매를 놓았다.
 “잘못했습니다! 어이쿠.”
 고슴도치처럼 몸을 말고 주먹과 발을 피해 이리저리 몸을 굴리던 이성재가 어디를 맞았는지 숨넘어가는 소리를 냈다. 그와 동시에 박민석 중위가 그들을 제지했다.
 “그쯤하면 됐다. 그리고 막내, 이리 와.”
 죽겠다고 비명을 지르던 이성재가 벌떡 일어나서 달려갔다. 박민석 앞에 멀쩡하니 부동자세를 취하는 모습을 보고 선임들이 혀를 내둘렀다.
 “뭐, 저런 새끼가 다 있냐.”
 “2소대에 왕 뺀질이 하나 나셨구먼.”
 당사자인 이성재도 자신의 뻔뻔함과 이중적인 태도에 놀라고 있었다.
 ‘내가 이런 놈이었나?’
 불안하게 눈알을 굴리는 그에게 박민석이 얼굴을 밀착시키고 높낮이 없는 음성으로 말했다.
 “나도 막내한테 이런 말 하는 건 처음이다. 그래도 한마디 하자면, 너 진짜 재수 없는 놈이야. 찍혔으니까 제대하는 날까지 찍소리도 내지 말고 조용히 지낸다. 알겠나?”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아무 일도 없었던 거야. 우린 매복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복귀하는 거야. 알겠지?”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네가 본 물건들은 사제 물건이 아니라 그냥 나뭇가지고 돌덩이였다. 접수했지?”
 “예, 알겠습니다.”
 “질문.”
 “없습니다. 그리고 시정하겠습니다.”
 이성재의 대꾸에 박민석 중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사람마다 타고난 심성이 있는데 그게 시정해서 될 일인지 모르겠다.”
 이성재는 뜨끔했다. 공식적으로 의리 없고 교활한 놈으로 찍힌 것이다. 앞으로 군 생활이 어떻게 전개될지 안 봐도 훤히 그려졌다.
 박민석이 그의 어깨들 툭툭 치면서 지나쳤다. 절대 격려나 위로의 토닥거림은 아니었다.
 “내 시계가 먹통이야. 몇 시나 됐나?”
 “저도 먹통입니다.”
 정확히 먹통은 아니었다. 디지털시계의 다이오드(LED)가 0~9의 숫자를 정신없이 반복하고 있었다. 한참 들여다보고 있으면 현기증이 날 정도였다. 유일하게 아날로그시계를 차고 있던 하재영 상병이 시간을 보고 소리쳤다.
 “이런, 큰일 났습니다. 복귀 시간이 한참이나 지났습니다.”
 “뭐야?”
 박민석이 그의 팔목을 낚아채어 시간을 확인했다. 시침이 10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어제 자정쯤에 일이 벌어졌으니 시간이 거꾸로 갈 리 없고, 오전 10시라는 얘기였다.
 BMNT(해상 박명초)를 한참이나 넘긴 시간이었다.
 BMNT는 지역과 계절별로 차이는 있지만 일출 전 30분에서 50분 사이로 희미하게 새벽 여 명이 밝아 올 즈음이다. 그리고 매복조가 귀대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대대에 난리가 났겠구먼. 무전기 어디 있어?”
 “동굴 입구에 있습니다.”
 무전병인 이재희 상병이 손가락으로 위쪽을 가리키고 대답했다. 박민석이 마땅찮은 표정으로 쯧쯧거렸다.
 매복 임무는 크게 1단계와 2단계로 분류하는데, 1단계 작전지역은 GOP 넘어 GP 철책 안쪽까지를 말하고, GP 철책 너머를 2단계로 구분한다. 이번 매복은 1단계로 000GP 철책 안쪽에 있는 매복호에서 경계를 서는 임무였다.
 GP와 연계하는 작전이므로 이상이 없을 시 1시간 간격으로 GP장에게 보고해야 한다. 그 때문에 박민석의 수색조는 무전기 안테나를 동굴 밖으로 빼고 불침번이 시간대별로 GP에 무전했던 것이다.
 간혹 GP에서 열감지 카메라로 매복호를 체크하기도 하는데, 한 번은 GP장이었던 한병윤 중위가 매복호에 아무런 열도 감지되지 않는다고 박민석에게 무전을 때린 적이 있다. 모두 별장에 있었으니 감지될 리가 없었다.
 무슨 일이냐고 귀찮게 따지는 한병윤 중위에게 나중에 설명하겠다고 구슬리고 며칠 뒤, 임무 교대를 하고 페바로 내려 온 한병윤을 찾아가서 조인트를 날렸다. 한병윤은 R○TC 한 기수 후배였다.
 그날 한병윤은 변명도 못 하고 맞아야 했다. 매복호 전방에 수상한 움직임이 있어서 정찰을 나갔는데 눈치 없이 계속 무전을 때려서 위장이 들통 날 뻔했다고 눈을 부라리는데 거기에다대고 뭐라고 하겠는가?
 물론 구라였지만 박민석의 천연덕스러운 연기에 한병윤은 물론이고 주변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속아 넘어갔다.
 그 후로는 박민석 소대가 매복을 나갈 땐 어떤 GP장도 간섭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평화로웠다. 어제 그 사건만 아니면 말이다.
 “나한테 생각이 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라. 물론 입은 맞춰야겠지. 가면서 설명한다. 일단 밖으로 나가자.”
 “네.”
 대책이 있다는 말에 대원들의 안색이 밝아졌다. 박민석이 그렇다면 그런 거다. 한 번도 이런 일로 소대원들을 실망시킨 적이 없다. 그런 점이 박민석의 매력이었고 소대원들이 그를 신뢰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가벼운 마음으로 동굴 벽을 오르는 대원들. 한데 그들이 간과한 것이 하나 있다. 옆 사람도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캄캄했던 이곳을 대낮처럼 활보하고 있다는 것이다.
 랜턴도 망가진 지 오래였다. 모두는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이 칠흑 같은 어둠 속을 제집처럼 돌아다니고 있었다.
 동굴 밖으로 나온 박민석은 제일 먼저 GP와 교신을 시도했다.
 “GP 호출해.”
 “네.”
 이재희 상병이 주파수를 맞추면서 고갤 갸웃거렸다. 너무도 깨끗했던 것이다. 주변에 전자파가 하나도 없는 것처럼 잡음이 전무했다.
 “당소 올빼미, 당소 올빼미.”
 “왜 안 돼?”
 “이상합니다. 연결이 안 됩니다.”
 “대대 본부에 해 봐.”
 이재희 상병은 불안한 표정으로 대대 본부를 호출했다. 그러나 연결이 안 되기는 대대 본부도 마찬가지였다.
 이마에 땀이 맺힐 때까지 무전기와 씨름을 하던 이재희가 박민석을 보고 머리를 흔들었다.
 “고장 난 모양이지. 어차피 부수려고 했는데 잘됐다. 우선 000GP에 들려서 밑밥 좀 뿌리고 복귀하는 걸로 하자. 지휘조, 지원조 잘 맞춰서 이동해. 출발!”
 GP에 보는 눈이 있으니 규정대로 구색을 맞출 필요가 있었다. 대원들은 조별 15m, 개인 간 5m의 간격을 두고 이동했다.
 이성재 일병은 K3 사수인 하재영과 유탄수 최동현의 총부리가 자신을 향하는 것 같아서 뒤통수가 서늘했다. 거기에다 위 선임인 김상현 일병마저 눈빛 한번 안 주니 서글프기 짝이 없었다.
 이성재는 얼마 가지 않아 이상한 광경을 목격했다. 산비탈이 시작되는 우측 등성이에 검붉은 점액질이 군데군데 붙어 있었던 것이다. 간혹 동물의 털로 여겨지는 곱슬곱슬한 섬유질이 달라 붙어 있었는데 난생 처음 보는 징그러운 장면이었다. 고참들에게 보고하려다가 냉랭한 그들의 표정을 보고 그만뒀다.
 GP에 도착한 수색대는 백문엽 하사의 수신호에 맞춰 자세를 낮추고 사방으로 흩어졌다. 이유는 물을 필요도 없었다. 쥐 죽은 듯 괴괴하고 음산한 정적에 잠긴 GP는 어떤 생명 반응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굳게 잠겨 있어야 할 통문이 열려 있었고, 자물쇠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바람에 흔들거리는 통문 위로 ‘조국은 너를 믿는다.’라는 표어가 눈에 뜨였다. 볼 때마다 가슴 한쪽이 아려오는 문장이었다.
 박민석 중위가 손짓하자 백문엽 하사와 조성민 병장이 좌우로 나뉘어 돌입했다. 엄폐물을 찾아 위치를 확보한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진입로 확보를 알려 왔다.
 “진입한다.”
 수색대 대원들이 통문을 완전히 열어 놓고 돌입했다. 유사시에 용이한 퇴로를 확보하기 위한 행동이었다.
 대원들은 소대장의 지휘에 따라 2인 1조로 흩어져서 GP 내부를 수색했다. 대공 초소로 올라가던 이성재는 계단에 덕지덕지 붙은 점액질을 보고 망설이다가 뒤따라오는 최동현 상병의 기척을 느끼고 걸음을 옮겼다. 이때까지도 대원들은 점액질의 정체를 몰랐다.
 대공 초소에 오른 이성재는 바닥에 떨어져 있는 전투복 두 벌을 발견했다. 방탄조끼까지 착용된 채로 뒹구는 것이 심상치 않았다.
 전투복 안쪽은 예의 그 점액질이 잔뜩 묻어 있었다. 전투복 상의를 들춰 본 이성재가 느닷없이 비명을 지르고 엉덩방아를 찧었다. 막 초소로 들어선 최동현이 K2 소총을 좌우로 겨누고 빠르게 초소 안을 살폈다.
 “뭐야?”
 최 상병의 물음에 이성재가 몸을 떨면서 바닥에 떨어진 전투복을 가리켰다. 끈적거리는 바닥을 지나 총구로 전투복을 들춘 최동현이 눈을 부릅떴다. 이름표에 적힌 이름이 눈에 익었기 때문이다.
 “표인성?”
 봉오리 신교대 동기로 연대 직할 수색 중대로 배치받은 친구였다. 최동현이 장갑을 낀 손으로 전투복을 들어 올렸다.
 전투복 안쪽에서 시커먼 털 뭉치와 하얀 구슬 두 개가 떨어져 바닥을 굴렀다. 자세히 보니 털 뭉치는 점액질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이었고 구슬은 흑백 구분이 선명한 눈알이었다.
 “악!”
 최동현이 외마디 비명을 지르고 뒷걸음질했다. 한동안 최동현과 이성재는 숨만 헐떡거릴 뿐 입을 열지 못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북한군의 기습?
 하지만 북한군에게 사람을 분해해 버릴 정도로 가공한 무기가 있다는 소리는 들어 본 적이 없다.
 밖에서 둘을 찾는 소리가 들렸다. 집합 시간이 된 모양이다.
 “이성재, 무기 챙겨라. 하나도 빠짐없이 챙겨.”
 “예, 최 상병님.”
 최동현은 바닥에 떨어진 눈알을 주워 상의 주머니에 넣어 주고 전투복 두 벌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한편 벙커 안 상황실에서 박민석 중위가 주인을 잃은 전투복을 매만지며 망연자실, 흐트러진 눈길을 가누지 못했다. 그가 들고 있는 전투복은 GP장이었던 한병윤 중위의 것이었다. 박민석은 바닥에 떨어진 눈알을 주워 고인의 전투복 주머니에 넣고 일어섰다.
 “소대장님! 내무실, 취사장, 보일러실 모두 텅 비었습니다.”
 이영석 병장의 보고에 박민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비상이 걸렸으니 모두 전투 위치로 갔겠지. 한병윤 중위는 상부에 보고하려다가 당한 것 같고.”
 이미 벙커 입구에서 여러 벌의 전투복을 발견한 바 있다. 박민석은 이영석 병장에게 전투복을 건네고 통신병 이재희 상병을 불렀다.
 “어때?”
 “유무선을 망라하고 외부와 통신할 수 있는 장비는 모두 고장입니다. 비상 발전기로 전원을 연결했지만 아무런 신호도 잡히질 않습니다.”
 “콜렉트 콜은?”
 “마찬가집니다.”
 “젠장,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소대장님, 느낌이 안 좋습니다. 빨리 복귀하죠.”
 “모두 집합시켜. 그리고 이재희는 상황실 통신기가 우리 무전기와 통신이 가능한지 확인하고.”
 “알겠습니다.”
 이영석 병장이 급하게 벙커를 빠져나갔다. 귀신 나오게 생긴 벙커에 잠시도 있기 싫었던 모양이다.
 이재희 상병이 자신이 소지하고 있던 무전기와 GP의 통신기가 연결 가능한지 체크했다. 그리고 몇 분 뒤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보고했다.
 “소대장님, GP 통신기랑 우리 장비랑 통신 가능합니다.”
 “뭐야!”
 장비 고장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대대 본부와 불통인 지금 상황이 납득이 가질 않는다.
 “대대에 가서 직접 알아봐야겠다. 나가자.”
 “네.”
 이재희 상병이 잽싸게 통신기를 짊어지고 입구로 달려갔다. 박민석도 상황실 일지를 챙겨 밖으로 나갔다.
 벙커 앞 공터에 수색대 대원들이 수거한 전투복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대원들의 표정을 보니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듯했다.
 “백 하사, 모두 몇 명인가?”
 “간부 네 명에 사병이 서른네 명입니다.”
 일지에 적힌 인원과 맞아떨어졌다. 박민석 중위가 씁쓰레, 자조 섞인 표정을 짓고 머리를 끄덕였다.
 “전원, 전사했군. 모두 주목.”
 사상 초유의 사태를 접한 대원들은 진지하기 그지없었다. 두려움보다는 미지의 적에 대한 적개심으로 똘똘 뭉쳐 있었다.
 “부식차도 안 오는 걸 보니 사달이 난 게 분명하다. 통신이 두절된 상태라 누군가 대대에 가서 상황을 파악해야 한다. 지금부터 부대를 둘로 나눈다. 나를 포함한 지휘조는 대대에 복귀해서 이곳 상황을 알리고 후속 부대와 함께 돌아오겠다. 지원조는 백문엽 하사와 함께 이곳에 남아 무기를 수습하고 후속 부대가 올 때까지 경계 임무를 수행한다. 질문 있나?”
 대원들은 굳센 눈빛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이 비극을 일으킨 적이 근처에 있다면 다음은 그들의 차례일 수 있다. 적보다 먼저 그들을 찾아내야 자신이 살고 죽은 전우의 복수도 할 수 있었다.
 “우리가 올 때까지 절대 GP 밖으로 나가지 마라. 최대한 빨리 돌아오겠다. 그리고 백 하사는 상황실에 인원 배치하고 잠시도 비우지 말도록.”
 “걱정 마십시오.”
 박민석은 대원들 하나하나와 눈빛을 교환했다. 때로는 말보다 눈으로 더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다.
 박민석은 조성민 병장과 김인하 상병, 이재희 상병을 대동하고 GP 통문을 나섰다. 더 이상의 작별 인사는 없었다. 박민석이 반드시 돌아오겠다고 했고, 그가 그렇다면 그런 거다. GP에 남은 지원조는 그가 후속 부대를 데리고 올 것을 의심치 않았다.
 지휘조가 GP를 나가고 어디서 찾았는지 대원들이 자물쇠로 통문을 잠갔다. 지휘조의 모습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GP에 남은 대원들은 통문 앞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조선으로 회귀하다 (1)
 
 
 
 박민석은 최소한의 경계만을 취하고 빠르게 이동했다. GP에 남겨 둔 대원들이 눈에 밟혀서 자신의 안전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별장을 지나 한참을 전진했을 때였다. 수색로가 끊기고 갑자기 울창한 삼림이 대원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뭐야?”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히 있어야 할 수색로가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다. 길을 잘못 들었다 여기고 주변을 수색했지만 이어진 수색로를 따라 이동하다 보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기 일쑤였다. 몇 시간을 이렇게 헤맸는지 모른다.
 박민석이 급히 지도를 꺼내 이동 경로를 되짚었다.
 “000GP에서 수색로를 따라 이렇게 이동했다. 맞지?”
 “네, 틀림없습니다.”
 “별장이 이쯤이고 지금 우리 위치는 이곳이다.”
 한두 번 다닌 길도 아니고 재고의 여지도 없다. 15사단의 작계지역인 대성산과 적근산 인근은 눈 감고도 다닐 정도로 수색대에게 익숙한 장소였다.
 그런데 길을 잃었다. 그것도 장님도 찾아갈 수 있는 수색로에서 말이다.
 몇 번이나 주변을 정찰했지만 결과는 매한가지였다. 별장에서 1km 거리까지만 그들이 알던 곳이었고 1km를 벗어나면 생경한 지형이 펼쳐졌다.
 곧 해가 진다. GP로 돌아가든지 삼림을 뚫고 길을 찾든지 선택을 해야 했다. DMZ 안에서 야간에 함부로 이동했다간 적아를 막론하고 골로 갈 수 있었다.
 “그나저나 무슨 초겨울 날씨가 이렇게 덥냐?”
 “소대장님, 이상하지 않습니까?”
 “뭐가?”
 “오다가 매미 울음소리를 들은 것 같습니다.”
 “조성민이, 겨울에 무슨 매미가 있어?”
 어제가 크리스마스를 한 달 앞둔 11월 25일이었다. 매미가 있을 턱이 없다.
 “그러니까요. 근데 분명히 매미 소리였는데.”
 “시답잖은 소리 말고······.”
 무의식적으로 주변을 돌아보던 박민석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게 뭔 일이래?”
 “왜 그러십니까?”
 “저기 봐라. 수색로가 끊기는 곳을 경계로 양쪽의 풍경이 다르잖아?”
 “어?”
 수색로 안쪽은 단풍이 지고 겨우살이를 준비하는 앙상한 나무들로 즐비한 반면 바깥쪽은 오뉴월에나 볼 법한 푸르디푸른 잎사귀로 가득했다. 또한 초목들 사이로 이름을 알 수 없는 들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화사함의 극치를 이루고 있었다.
 대원들의 안색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때마침 숲에서 불어온 바람이 목덜미를 스치자 소름이 돋았다.
 “대대 본부에 아니, GOP까지라도 가 보자. 그래야 뭔가 감이 잡히겠어. 조성민, 길을 내라.”
 “알겠습니다.”
 조성민 병장이 소총을 등 뒤로 메고 야전삽을 들었다. 진로를 방해하는 잡목을 제거하면서 GOP가 있는 남서 방향으로 길을 잡았다. 박민석은 지도를 보며 그때그때 방향을 수정해서 알려 줬다.
 잡목이 빽빽한 수풀 사이를 힘겹게 전진할 때였다. 모두는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석상이라도 된 것처럼 몸을 굳혔다.
 선음(蟬吟).
 틀림없는 매미의 울음소리였다. 망연자실, 고개를 돌리는 대원들의 시야로 암컷을 찾기 위해 몸부림치는 수컷 매미가 들어왔다.
 저걸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땅속에서 꿈틀거리고 있어야 할 녀석이 생뚱맞게 초겨울에 나와 울고 있었다.
 대원들은 바보처럼 눈만 껌뻑거렸다.
 “소대장님, 내 말이 맞지요? 저거 매미 맞아요. 바퀴벌레나 귀뚜라미라고 우기면 안 됩니다.”
 “······.”
 매미의 습격이 있고 나서 이번엔 벌떼가 떼를 지어 날아왔다. 그 뒤로 나비 수십 쌍이 한가롭게 꽃 사이를 옮겨 다니는 장면도 목격했다.
 박민석은 이제 반박할 기운도 없었다. 앞으로 손을 뻗는 모습이 무척이나 짜증스럽게 보였다.
 다시 행군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부대가 멈춰 섰다.
 “안 되겠다.”
 겨울 양말을 신은 발바닥은 아까부터 끈적거렸고, 내복은 땀에 젖어 등짝에 달라붙어 있었다. 상체를 움직일 때마다 내복과 살갗 사이에 틈이 벌어졌고 어김없이 살가죽 사이로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그때마다 대원들은 몸서리를 치며 인상을 찌푸렸다.
 내복에 전투복, 방한복, 깔깔이(방한 내피)까지 네 겹, 다섯 겹으로 껴입은 대원들은 땀에 익사할 지경이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모두는 겨울 의복들을 벗어 군장에 쑤셔 넣었다. 박민석 중위는 전투복 하나만 남기고 내복까지 벗었다. 눈치를 보던 대원들도 훌훌 내복을 벗어 버렸다.
 “아, 살 것 같다.”
 벌어진 전투복 상의 사이로 바람이 들어왔다. 무거운 방탄모까지 벗어 놓자 급격하게 땀이 식으면서 가빴던 호흡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마지막으로 두 겹으로 신었던 양말 중 겉 양말(겨울 양말)을 제거하자 천국이 따로 없었다.
 잠깐의 유희를 만끽한 대원들은 가벼운 복장으로 다시 일어섰다.
 GP와 GOP의 거리는 3km 남짓, 예상치 못한 숲을 만나 시간을 지체하긴 했어도 수색대 대원들에게 큰 장애물은 되지 못했다.
 어느덧 숲을 벗어나 통문 근처에 다다랐다. 그러나 기뻐해야 할 대원들의 안색이 어두웠다. 능선을 따라 있어야 할 철책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박민석은 불안한 기색을 감추고 통문으로 걸어갔다. 아니, 통문이 있었던 자리로 향했다.
 “으음.”
 통문이 있던 곳으로 추정되는 장소에 도착했지만 철문은커녕 사람 다니는 길도 나 있지 않았다.
 이재희 상병이 시계를 들여다보고 고갤 저었다. 여러 이유로 시간을 지체했지만 이 정도 시간을 이동했다면 전후좌우 어느 곳에서든 철책이 목격돼야 정상이었다. 그러나 주위에는 어떤 인공의 조형물도 눈에 뜨이지 않았다.
 “빌어먹을.”
 박민석이 평평한 바위에 나침반과 지도를 펼쳤다. 여기까지 오면서 수도 없이 보고 또 본 지도였다. 더는 새로울 것도 없었다. 그럼에도 손가락으로 선을 그어 가며 위치를 확인하는 그를 보며 대원들은 실낱같은 기대감을 품었다.
 그때였다. 남쪽 산등성이에서 여인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박민석과 대원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고 소리가 들린 곳으로 전력으로 달렸다.
 ‘사람이다. 사람이 있어.’
 지금 상황을 설명해 줄 수 있다면 그것이 아이이든 여인이든 상관없다. 산짐승이라도 만나면 꾸벅 절을 하고 묻고 싶을 지경이었다.
 박민석과 대원들은 간간이 들려오는 여인의 비명 소리를 길잡이 삼아 거리를 좁혀 갔다.
 산등성이에 다다르자 사람으로 보이는 몇몇 인영이 흐릿하게 눈에 들어왔다. 박민석은 수신호로 수하들을 엄폐시키고 서둘러 옷소매로 눈을 문질렀다. 땀으로 시야가 뿌옇게 보였던 것이다.
 시야가 트이자 웃기지도 않는 장면이 펼쳐졌다. 분명 이곳은 민통선 위쪽이라 민간인이 출입할 수 없다. 그럼에도 세 남자와 두 여자는 묘한 차림으로 남녀상열지사를 연출하고 있었다.
 김인하 상병이 눈을 찡그리고 작게 소리쳤다.
 “소대장님, 저것들 잡아서 족치죠.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민간인들이······.”
 그의 말에 조성민 병장이 끼어들었다.
 “기다려 봐, 인마. 한창 본론으로 들어가려는데 초 치지 말고.”
 조성민은 간절한 눈으로 소대장을 바라봤다. 그의 눈은 ‘일 끝나고 잡으면 안 될까요?’를 외치는 듯했다.
 박민석 중위가 피식 웃고 고개를 끄떡였다. 조성민과 이재희은 손으로 입을 막고 키득거렸고, 김인하 상병은 뭐가 불만인지 입이 댓 발이나 나왔다.
 사람을 만났다는 반가움에 모두는 작은 해방감에 빠져들었다. 그래서 이런 우스운 분위기도 만들어질 수 있었다.
 야릇한 기대감 속에 숨을 죽이던 대원들은 시간이 갈수록 의문으로 물들었다. 일단, 사람들의 복장이 이상했다. 남자들은 가랑이가 무릎까지 내려오는 잠방이 비슷한 홑바지에 무명 마고자를 입고 있었고 여자들은 저고리에 속바지와 치마를 걸치고 있었다.
 ‘영화 촬영하나?’
 제일 먼저 떠오른 생각이다. 그러나 주변을 샅샅이 훑어도 카메라 비슷한 것은 보이지 않았다.
 “아악!”
 무성영화처럼 음향 없이 움직이던 사람들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대원들은 마른침을 삼키고 대화를 듣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웠다.
 턱수염이 어지럽게 난 사내가 앳돼 보이는 소녀에게 눈을 부라리며 협박조로 을러 댔다.
 “무사히 돌아가고 싶으면 얌전히 있거라.”
 “아무한테도 고하지 않을 테니 제발 살려 주시어요.”
 “허어, 이년 보소. 누가 죽인다고 했느냐? 얌전히 있으면 고이 돌려보낸다고 하지 않았느냐. 한 번만 더 입을 놀렸다간 목을 잘라서 늑대 밥으로 던져 줄 것이다.”
 “······.”
 저항하던 소녀가 입을 닫고 닭똥 같은 눈물을 흘렸다. 소녀가 팔에서 힘을 빼자 사내는 신이 나서 그녀의 저고리를 풀기 시작했다.
 상의가 벗겨지고 가녀린 어깨가 드러났다. 가볍게 떨리는 어깨가 사내의 욕정을 자극했다. 숨소리가 거칠어지고 치마끈을 푸는 손이 흥분으로 떨려 왔다.
 옆에서 지켜보던 사내들도 남은 여인을 강제로 눕히고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손때가 잔뜩 묻은 저고리를 입고 있던 30대의 여인은 소녀와 달리 처음부터 반항하지 않았다.
 여인들의 옷이 빠르게 벗겨지고 순식간에 반나체로 변해 버렸다. 턱수염 사내는 마지막 츤의를 벗기려다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그대로 두고 소녀의 몸에 자신의 몸을 포개고 혀로 가슴을 애무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에도 사내는 소녀의 속곳 속으로 손을 집어넣고 꼼지락거리는 것을 잊지 않았다. 소녀는 이런 경험이 처음인지 자지러지게 놀라 몸을 움츠렸고 그럴수록 사내의 혀가 더욱 집요하게 몸 구석구석을 파고들었다.
 턱수염 사내는 소녀의 호흡이 바뀌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제법 여성 편력이 있었는지 힘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여인의 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이런 애송이 처자 따위는 촌음도 안 걸린다고 자신했다. 그러나······.
 “아악!”
 턱수염 사내가 자신의 왼쪽 귀를 잡고 옆으로 굴렀다. 귀를 움켜진 손가락 사이로 붉은 선혈이 삐져나왔다. 소녀가 얼떨결에 귀를 문 것이다.
 “이런 육시랄!”
 거칠게 몸을 일으킨 사내의 귓불이 너덜너덜해졌다. 자칫 조금만 더 힘을 줬다면 그대로 떨어져 나갔으리라.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턱수염 사내가 바닥에 누여 놨던 당파를 들고 소녀를 겨냥했다. 그러자 그와 일행으로 보이는 두 사내도 바지춤을 여미고 아쉬운 듯 자리에서 일어나 무기를 들었다.
 그때 그중 염소같이 모지랑 수염을 달고 있는 사내가 턱수염 사내에게 다가와 말했다. 탁 봐도 비굴하기 그지없는 것이, 턱수염 사내의 아랫줄인 것 같았다.
 “이봐, 한삭이.”
 “이 자식이!”
 “아이고 요 주둥아리. 까마귀 고기를 처먹었는지 깜박깜박 한단 말이시. 한삭 형님.”
 염소수염 사내가 한삭에게 바라는 것이 아첨을 떨었다.
  “그래도 계집들이 반반한 게 이대로 보내기엔 좀 아깝다는······.”
 “이런 염병할 놈이, 지금 내 꼴을 보고도 계집 생각이 나더냐?”
 “그, 그런 게 아니라······.”
 한삭의 눈에서 살기가 번뜩였다. 그와 눈이 마주친 염소수염 사내가 몸을 부르르 떨고 뒷걸음질했다.
 “빌어먹을 년, 네년이 자초한 일이니 날 원망하지 말거라.”
 “사, 살려 주셔요.”
 한삭의 말에 여인들의 안색이 파리해졌다. 그의 말을 흡사 자신들을 죽이겠다고 곡해한 모양이다. 한삭은 그저 분풀이 삼아 당파로 몇 대 때리고 보내 줄 심사였다. 장독이 올라 죽거나 병신이 되는 것은 그가 알 바 아니었다.
 소녀가 울먹이면서 함께 온 여인을 불렀다.
 “강릉댁 아주머니.”
 “아이구, 오살할 놈들. 범인 줄 알았더니 개갈가지래요. 보릿고개 넘기고 보리 좀 아껴 보겠다고 산에 딱쥐기 하러 왔는데 이게 뭔 지랄이래? 사나가 그리 할 짓이 없어서 힘없는 아녀자들 겁박이나 하고, 또 개살이 나서 발광이래. 세상이 우터 되어 가는지?”
 “닥쳐라, 이 촌년아.”
 “아이구, 나보고 촌년이래요. 강릉 가 보기나 했더래요? 이 촌구석에 시집와서 촌놈들한테 별소리를 다 들어요. 아이래?”
 영동 지방 출신인 강릉댁은 이곳 사람들과 다른 억양의 사투리를 구사했다. 강원도는 영동과 영서로 나뉘는데 고유한 방언을 유지한 영동과 달리 철원, 화천 등 영서 지방은 경기도 방언에 가까웠다.
 저고리를 주워 상체를 가린 소녀가 강릉댁 뒤에 숨어 오들오들 떨었다.
 “계집이 가랑이를 벌려 주면 욕심이나 풀고 가면 되지, 만구에 오살을 떨고 그래요.”
 “하아, 육시랄 년.”
 강릉댁과 실랑이를 벌이던 사내들, 특히 한삭은 어느 정도 분이 풀렸는지 강릉댁 뒤에 숨어 있는 소녀를 보고 다시 음심이 일었다.
 한삭은 강릉댁을 걷어차고 소녀의 머리끄덩이를 잡아챘다.
 “넌 이리 와.”
 “살려 주셔요.”
 한삭은 거칠게 소녀를 내동댕이치고 그대로 바지춤을 풀었다. 여인의 호흡이고 나발이고 이젠 다 필요 없다. 우악스럽게 속곳을 벗겨 내자 소녀의 속살이 드러났다. 사타구니 위로 막 나기 시작한 거웃이 앙증맞게 보였다.
 소녀는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입술을 가볍게 물었다. 어차피 욕심을 채우고 죽일 것이라 여긴 그녀는 때를 봐서 혀를 물고 죽어야겠다고 결심했다.
 죽는 것은 두렵지 않다. 다만 집에 계신 병든 아비와 그녀만을 보고 사는 어미가 눈에 밟혀 목이 메었다.
 한삭은 완강하게 저항하던 소녀의 하체에 힘을 풀리는 것을 보고 득의만만한 표정을 짓고 소녀의 다리를 벌려 자신의 양물을 삽입하려고 했다.
 “동작 그만!”
 ‘동작 그만?’
 사람들은 처음 듣는 생경한 말에 일제히 고갤 돌렸다. 그리고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대낮에 괴상한 바가지를 뒤집어쓰고 현신한 도깨비 무리를 말이다.
 알록달록한 옷에 시커먼 쇠몽둥이를 든 모습이 흉악스러웠다. 그러나 무엇보다 사람들을 두렵게 한 것은 안면이었다.
 얼굴은 온통 시커멓고 두 눈은 흰자위 하나 없이 타는 듯이 새빨갛다. 붉은 안광이 뿜어져 나온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강렬한 색채였다.
 19금 장면을 느긋하게 감상하던 수색대 대원들은 상황이 이상하게 흐르는 것을 보고 분노했다. 정사와 강간은 엄연히 다른 영역이기 때문이다. 뛰어들 기회만 엿보던 차에 드디어 소대장이 움직였다.
 여인들의 비명이 주위를 갈랐다. 소녀와 강릉댁은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기절초풍했다. 한삭과 그의 수하로 보이는 자들만이 겨우 무기를 들고 저항할 뿐이었다.
 조성민 병장이 코웃음을 치고 사내들을 향해 빈정거렸다.
 “지금 뭐 하냐? 사극 찍어? 빨리 안 내려놔! 이것들이 여기가 어딘 줄 알고 까불고 있어.”
 “누, 누구냐?”
 제법 강짜를 부려 보는 한삭이었다. 군사 지역에서 군인을 보고 누구냐? 대원들은 어이가 없었는지 혀를 차고 서로를 돌아봤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한삭을 비롯한 사내들이 세 방향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한삭 등은 젖 먹던 힘까지 써서 내달렸다. 그러나······.
 타타타탕!
 요란한 소음과 함께 1장(丈) 앞에서 피어 오른 흙먼지에 세 사람은 발을 멈춰야 했다. 한삭의 눈이 심하게 떨렸다.
 ‘화, 화승총! 틀림없는 화승총이다! 맙소사, 한 번에 여러 발이 나가는 화승총이 있다니.’
 “한 발짝이라도 움직이면 안전을 보장하지 못합니다.”
 박민석 중위의 정중한 말이 있고 나서 대원들이 세 사내에게 걸어가 총구를 디밀었다. 쇠막대가 무엇인지 깨달은 사내들은 총구가 자신에게 향하자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그다음부터는 일사천리였다. 사내들은 순한 양이 되어 수색대 대원들이 시키는 대로 얌전히 따랐다. 여인들은 총성이 들린 후로 더욱 자세를 낮추고 고개를 들지 않았다.
 대원들이 사내들을 잡아 한자리에 모으는 동안 박민석이 여인들에게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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