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함
뒤로가기버튼 오늘은 출근 [E]

오늘은 출근 1권 (1)

2018.03.05 조회 4,378 추천 31


 #Prologue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거센 눈보라에 눈도 뜨기 힘들었지만 남자는 뭔가에 홀린 듯 앞을 향해 걸어갔다.
 20대 후반 또는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였다.
 조금 더 걸어가자 눈만큼 하얀 테이블이 눈에 들어왔다.
 테이블에는 여든이 넘은 백발의 노파가 나이만큼 오래되었지만 깔끔한 갈색 코트를 입고 앉아 있었다.
 노파는 남자가 다가오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에서는 그리움으로 가득한 시선이 느껴졌다.
 하지만 남자는 건조한 눈빛으로 노파를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다.
 노파가 주름진 손으로 테이블을 가리켰다.
 “앉으세요.”
 그 말에 남자는 의자를 꺼내 맞은편에 앉았다.
 물끄러미 남자를 보던 노파가 입을 열었다.
 “이곳으로 불러내서 미안해요.”
 남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는 지금 노파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했다.
 노파가 말을 이었다.
 “전 당신의 아내입니다.”
 “······!”
 남자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는 젊었지만, 앞에 있는 여성은 여든이 훌쩍 넘어 보인다.
 적게 잡아도 쉰 살 이상의 나이 차가 난다.
 절대 결혼한 사이로 생각할 수 없었다.
 결정적으로 남자는 미혼이었다.
 이상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남성에게 노파가 말했다.
 “자세한 이야기는 할 수 없지만, 당신의 현재와 제가 있는 미래가 이어졌습니다.”
 남자가 고개를 저었다.
 “그러니까 그쪽이 미래에서 온 제 아내라고요?”
 노파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식탁에 다이어리 하나를 놓으며 말을 이었다.
 “당신은 항상 열심히 살았고 최선을 다했지만, 행복하지 않았어요. 언제나 일이 우선이었지요.”
 남자는 지금의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노파는 남자를 향해 테이블 위의 다이어리를 밀었다.
 “선물이에요.”
 남자는 여전히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앞에 있는 다이어리를 들어 펼쳤다.
 그런 남자의 모습을 노파는 몹시 그리운 듯 바라보며 작게 입을 열었다.
 “행복하기를 바랄게요. 일도, 사랑도, 가정도.”
 
 좁은 방, 한 청년이 눈을 떴다.
 그의 이름은 이준일. 이제 서른 살이 되는 청년이다.
 눈을 뜬 그는 멍하니 천장을 바라봤다.
 뭔가 꿈을 꾼 것 같은데 잘 기억나지 않는다.
 “할머니가 뭘 준 것 같은데?”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더 이상은 생각나지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난 이준일은 컴퓨터 앞으로 걸어가 전원 버튼을 눌렀다.
 기억나지 않는 꿈을 떠올리기 위해 애쓰고 있을 시간은 없다.
 그에겐 중요한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엠에듀 1차 서류 합격자 발표 날이 오늘이다.
 긴장되는 마음으로 홈페이지에 들어가 1차 합격자 발표 버튼을 클릭했다.
 ‘수험 번호가······ 1018.’
 심장이 터질 듯 울렸고 입에는 침이 바짝 말랐지만 용기를 내서 마우스를 움직였다. 그리고 클릭.
 
 -수험 번호 1018 이준일, 1차 서류 전형 합격.
 
 이준일은 두 팔을 하늘로 번쩍 치켜들었다.
 합격!
 서류 전형만 통과해도 이렇게 기분이 좋아지는 청년이었다.
 
 
 
 
 
 #Chapter 1
 
 
 
 봄이었다.
 벚꽃이 휘날렸고 청춘 남녀들은 뜨거운 연애를 했다.
 세상 모든 것에 걱정이란 존재하지 않는 그런 날씨.
 하지만 또 다른 청춘들은 취업을 걱정하고 있다.
 도심을 거슬러 올라간 주택단지, 곰팡이로 가득한 옥탑방에서 머리를 말리는 남자가 보였다.
 그 역시 분홍빛으로 가득한 사랑보다 내일 먹을 밥을 걱정하는 취업 준비생이다.
 남자의 이름은 이준일, 나이는 30세. 지방의 좋지 않은 대학을 나와 늦은 나이에 취업하려고 했지만 어려웠다.
 그러던 이준일에게 면접을 보러 오라고 연락이 왔으니 그 회사의 이름은 ‘엠에듀’.
 대기업 계열사 중 하나로, 요즘 인터넷 강의 어쩌고 하는 말들이 많은데 그곳도 그런 일을 하는 회사였다.
 그리고 이준일이 예전부터 들어가고 싶은 회사이기도 했다.
 머리를 말리던 수건을 어깨에 걸친 후, 전기면도기를 꺼내기 위해 책상 서랍을 잡았다. 따로 보관해 둘 곳이 없기에 서랍 안에 넣어 뒀지만 불편함은 없다.
 서랍이 열리는 드르륵 소리가 경쾌하게 들렸다.
 아무래도 사회의 첫발, 첫 면접. 들뜨지 않으면 이상한 일이다.
 그런데.
 서랍에는 스킨하고 면도기만 있어야 했는데······.
 두툼한 다이어리 하나가 덩그러니 있는 것이 보였다.
 이준일은 생각 없이 다이어리를 꺼내 들어 외관을 살펴봤다.
 생각을 더듬어 봤지만 넣어 둔 것은 물론 구매한 기억도 없다.
 뭐, 그렇다고 해서 놀라울 일은 아니었다. 서랍에서 면도기를 꺼낼 때 안을 유심히 보는 일은 거의 없으니 이게 지금 보인다고 해서 이상한 일은 아니다.
 ‘언젠가 필름이 끊길 정도로 술을 먹고 사서 넣어 뒀나 보다.’라고 생각했다.
 이준일은 다이어리를 펼쳐 봤다. 그리고 웃었다.
 가장 첫 장에 ‘대기업 총수 이준일의 일기장. 부제 : 대한민국을 바꿔라.’라고 유치하게 적혀 있다.
 글씨는 분명 자신의 것이 맞았기에 의심할 수도 없다.
 ‘도대체 언제 또 술을 마시고 이런 미친 짓을 한 거야?’
 창피해서 이불 킥과 동시에 쥐구멍을 찾아 얼굴을 처박을 만큼 부끄러운 제목의 일기장이었다.
 ‘그래, 대기업 총수 이준일은 그렇다 치고 대한민국은 왜 바꿔?’
 또 어떤 유치한 짓을 했는지 궁금했기에 킥킥거리며 노트를 펼쳤다.
 “그래, 또 뭐라고 써 놨냐?”
 
 면접을 가는데 비가 온다.
 이놈의 기상청은 맨날 틀려.
 그렇다고 해서 그냥 집에 돌아가기는 뭐해서 비에 젖은 쥐처럼 면접을 보러 가는데 마음은 싱숭생숭하다.
 이대로 가도 떨어질 게 뻔한데, 그냥 집에 갈까?
 그렇게 생각을 하면서도 발걸음은 회사로 향하게 되었다.
 나 말고 다른 면접 보는 사람도 다 젖었기를 기대할 뿐이지.
 그런데 회사 앞에서 한 할머니가 나한테 반지 찾는 걸 도와 달래.
 이 면접을 가지 않을 핑계를 찾고 있었나 보다.
 그래서 도와 드렸는데 그 할머니가······.
 
 튜토리얼 퀘스트 : 할머니를 도와라.
 
 ‘아주 소설을 써 놨다.’
 자신의 한심함에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할머니가 뜬금없이 나타나 반지 찾는 걸 도와 달래. 그것도 이상한데 마지막 문장은 더 짜증 났다.
 할머니를 도와줬는데, 그래서 뭐? 그 할머니가 뭐? 이게 듣기만 하던 절단 마공인가?
 아니다. 일기가 삼류 소설인데 뒤 내용은 보지 않아도 뻔하겠지. 비에 젖은 생쥐 꼴로 면접 장소에 들어갔는데 알고 있는 얼굴이 있는 거야. 바로 그 할머니가 엠에듀의 대표이사였고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이 시대의 젊은이답지 않군. 그래서 넌 합격!”
 그리고 튜토리얼 퀘스트? 게임이냐? 아이고, 엄마 말 듣고 게임 좀 그만하자.
 생각을 이어 가던 이준일은 고개를 저었다.
 “그만하자. 생각만 해도 한심하다.”
 이준일은 그 뒷장을 넘겨 봤지만 다행히 적힌 내용이 더는 없었다. 술에 취해 이 정도만 쓰고 포기한 게 분명했다.
 그는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고 계속 몸단장을 이어 갔다.
 비싸지는 않지만 빌려 온 깔끔한 정장.
 면접을 보기 위해 어제 자른 깔끔한 머리 스타일.
 세팅 끝.
 마지막으로 거울을 보며 전체적인 모습을 최종적으로 확인했다.
 그리고 좁고 곰팡이 핀 방을 빠져나왔다.
 밖은 쨍하니 맑았다.
 구름 한 점 보이지 않는 맑은 날씨.
 이런 날씨는 기분이 좋아지기 마련이다.
 콧노래도 한번 불러 보고 아직 열지 않은 가게의 창으로 비친 자신을 보며 흐뭇하게 미소도 지어 봤다.
 ‘합격하기에 좋은 날씨다.’
 그렇게 역에 도착하여 전철을 기다리며 핸드폰을 확인했다.
 오전 8시 30분.
 면접 시간은 10시. 지금 가면 전철 두어 개는 보내고 타도 늦지 않을 시간.
 이준일은 면접 보러 가는 회사에 대한 생각에 빠졌다.
 이번 회사가 교육 관련 회사이기는 하지만 학생들을 가르칠 강사도 아니고 그렇게 학벌적인 것은 보지 않는다고 들었다.
 회사에서 요구하는 것은 오로지 열정, 패기, 창의성.
 좋은 회사지?
 말이 되나? 아니었다.
 회사는 분명 열정, 패기, 창의성을 본다고 선전했지만 지방대를 나온 이준일이 면접이라도 보기 위해 만들어 낸 스펙을 생각하면 토가 나올 정도였다.
 그렇게 스펙만 쌓다 보니 나이는 서른.
 친구들이 회사에 다니며 직장 생활의 고충을 이야기하고 있을 때, 이력서의 자기소개서를 어떻게 하면 감동적으로 쓸 수 있을까 고민하며 살았다.
 하지만 서른이란 나이는 늦은 나이가 아니다.
 어떤 노래에서는 서른이면 나도 장가가서 어쩌고 애도 낳고 저쩌고 집도 있고 어쩌고 했지만, 낚시를 하던 강태공은 나이 일흔이 넘어 입신했고 한명회도 마흔이 넘어 수양대군을 만나 권세를 떨쳤다.
 내 나이는 서른, 젊은 나이다.
 게다가 의료 기술의 발달로 불의의 사고만 없다면 100세까지 살 수 있는 시대다.
 인생 70년 남았다.
 이제 시작이다.
 이준일은 생각을 끝내며 기분 좋게 웃었다. 그렇게 전철에 올라탔고 잠시 후 강남역에서 내렸다.
 강남역.
 거짓말을 조금 보태서 전철에 타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내리는 것 같았다.
 전철에서 내리자 높은 빌딩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이 시원하게 맞이해 줬다.
 말은 제주로 보내고 사람은 서울로 가라고 했다.
 ‘그래, 강남아. 나 이준일이 왔다.’
 이준일은 가볍게 눈을 감았다.
 그간 고생했던 시간들이 스치는 바람과 함께 짤막하게 스쳐 지나간다.
 그렇게 바람을 만끽하고 있는데 그의 얼굴 위로 투툭투툭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얼굴을 만져 봤다.
 물기가 손에 닿는다.
 혹시 모를 불상사를 대비해서 어제 일기예보를 봤을 때만 해도 분명 전국적으로 날씨가 맑아 꽃 나들이를 해도 좋다고 떠들어 댔는데······.
 ‘젠장, 비 오는데 꽃 나들이를 하냐? 망할!’
 하지만 화를 낼 시간은 없다.
 조금이라도 비를 피하기 위해 머리에 손을 대고 달리기 시작했다.
 회사는 역에서 가까우니까 조금만 빨리 달리면 비에 젖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무리였다.
 비는 거세게 쏟아져 내렸다.
 ‘하늘에서 수도꼭지를 틀었냐?’
 쏴아아아아아!
 사람이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지는 재수 없는 인간이 존재한다고 했다.
 지금 이준일이 그랬다.
 그렇게 기다렸던 첫 면접인데, 그래서 옷도 빌려서 잘 준비했는데 비가 쏟아지다니.
 거기에 설상가상으로 금방 차오른 물웅덩이를 지나는 차량의 바퀴.
 촤아아악! 이준일은 그 물을 다 뒤집어썼다.
 “하, 시발.”
 더 짜증 나는 일이 생겼다.
 비가 그쳤다.
 태풍처럼 오던 비는 잠시의 소나기였다.
 이미 옷은 다 젖었는데 비가 그치다니.
 ‘젠장! 젠장! 젠장!’
 하지만 이준일의 생각은 이어지지 않았다.
 누군가가 잡은 이준일의 팔.
 고개를 돌려 보자 흰머리에 뽀글뽀글 파마한 할머니였다.
 “학생, 나 반지를 잃어버려서 그런데 좀 찾아 줘.”
 
 퀘스트 : 할머니를 도와라.
 
 “네? 반지요?”
 이 할머니는 지금 사람 모습을 보고도 뭘 찾아 달라는 말을 하고 있을까?
 그리고 반지? 무슨 반지를 말하는 거야?
 “우리 시어머니가 준 반진데, 잠깐 뺀다는 게 놓쳐 버렸어. 눈이 안 봬서 못 찾겠네. 바쁘지 않으면 좀······ 찾아 줘.”
 할머니의 목소리는 정말 슬프게 느껴졌다.
 정말 난처한지 말을 하면서도 시선은 아스팔트를 훑고 있다.
 그러게 반지를 왜 빼셔서······.
 순간 이준일은 아침에 봤던 다이어리가 떠올랐다.
 
 -퀘스트 : 할머니를 도와라.
 
 ‘이거 뭐야?’
 뭔가 상황이 맞아떨어지는 것 같다.
 ‘술 먹으면 노스트라준일스야 뭐야?’
 잠시 생각에 빠졌던 이준일은 곤란한 표정을 짓고 있는 할머니를 향해 활짝 웃었다.
 “네, 제가 도와 드릴게요.”
 다이어리 때문은 아니다.
 술 먹고 쓴 걸 믿고 있는 게 더 웃긴 거지.
 그저 이렇게 옷도 다 젖어 버려서 면접도 못 가게 된 이상 할머니라도 돕고 싶다는 마음이 컸다.
 이준일은 아스팔트에 앉아 반지를 찾기 시작했다.
 사람이 많이 오가는 강남역 앞에서 반지를 찾는다는 것. 젊은 사람의 눈으로도 해내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이왕 찾아 주겠다고 했으니까 찾아봐야지.
 가만히 반지를 찾고 있는 이준일을 보며 할머니가 물었다.
 “그런데 학생이 아니라 회사에 출근하던 거였어?”
 “아뇨, 면접 보러 왔는데요. 이 꼴로 가기는 좀 그렇잖아요. 괜찮아요.”
 “면접? 늦은 거 아냐? 나 때문에 늦는 거면 어서 가 봐요. 괜찮으니까요.”
 “아뇨, 시간은 충분한데 옷이 이래서요.”
 “미안해요. 그런데 그 반지는 정말 소중한 거라서······.”
 “정말 괜찮습니다.”
 이준일은 다시 반지를 찾기 시작했다.
 할머니가 가만히 보다가 입을 열었다.
 “나 때문에 시간도 뺏겼는데, 괜찮다면 우리 남편 옷 빌려줄까요?”
 “남편요?”
 “집이 요 근처니까, 빌려줄게. 잘 입고 가져다 놔요.”
 젖은 옷을 갈아입을 수 있다면 면접에 들어갈 수도 있다.
 이준일이 할머니의 손을 덥석 부여잡았다.
 “부탁드립니다!”
 강물에 휩쓸리는 놈은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산다고 했다.
 할머니의 남편이라면 당연히 할아버지.
 요즘 입는 옷과 유행의 차이가 나겠지. 아니, 그 전에 기장이나 품이 안 맞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꼴보다는 훨씬 나을 게 분명하다.
 그럼 일단 반지를 빨리 찾아야겠지? 이준일은 눈에 불을 켜고 아스팔트를 훑었다.
 그리고 유레카!
 찾았다.
 “여기 찾았어요. 이 반지 맞나요?”
 할머니는 이준일의 손에서 반지를 건네받은 후 활짝 웃었다.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내 정신 좀 봐. 옷 갖다 줘야지. 잠깐만 기다려요.”
 할머니는 반지를 손가락에 끼고 어디론가 걷기 시작했다.
 10분이 지나고 20분이 지났다.
 하지만 할머니는 나타나지 않았다.
 이준일은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면접까지 남은 시간은 15분. 지금까지 오지 않은 할머니가 이 안에 올까?
 ‘아······ 끝났다.’
 지나가는 회사원들이 비에 홀딱 젖은 이준일을 흘끔흘끔 보며 지나쳤다.
 이준일은 몸을 돌렸다.
 ‘속 시원하게 집에 가자. 가서 샤워하고 푹 자면 오늘의 하루는 싹 잊힐 거야. 그래, 그런 거지. 인생은 새옹지마고 내일은 해가 뜨니까······. 면접 보고 싶었는데······. 아냐,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내가 면접을 봤다고 해서 합격했겠어? 다른 곳도 아닌 교육 회사잖아. 교육 회사에서 지방 잡대라고 불리는 곳을 나온 나를 뽑는다고? 그것도 웃긴 이야기지. 요즘 하도 학벌 파괴에 대한 내용이 뉴스에 나오니까 얼씨구나, 이놈 잡대 나왔네? 회사 이미지 올리게 면접은 한번 볼 수 있도록 해 주고 이력서는 쓰레기통에 넣어야지 했겠지. 아니다. 쓰레기통은 너무 가혹하다. 이면지로 썼겠지.’
 이준일이 다시 역으로 향하기 위해 한 발을 뗐을 때, 뒤에서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학생! 오늘 면접 보는 학생! 잠깐만!”
 혹시, 옛날에 텔레비전에서 하던 방송 중에 ‘TV는 사랑을 싣고’라는 프로그램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오래전 연락이 끊겨 찾아뵙지 못한 은사님 또는 첫사랑, 친구 등이 무대 뒤에서 등장할 때 흐르는 그 음악 소리.
 지금 이준일의 귀에는 그 배경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이준일이 고개를 돌아보자 할머니가 양복을 들고 달려오고 있었다.
 ‘아이고, 할머니. 연세도 많고 걸음도 불편해 보이는데 그렇게까지 뛰실 필요는 없습니다.’
 이준일이 할머니의 앞으로 달려갔다.
 “안 늦었지? 우리 집 아들이 자기 옷 골라 달라고 해서 그거 골라 주다가 늦었네.”
 ‘아들도 있었나? 그럼 아들 옷을 가져다주지, 왜 할아버지 옷을······.’
 사람이 앉으면 누울 자리를 찾는다더니, 옷이 젖었다고 징징댈 때는 할아버지 옷이라도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할아버지 옷이 앞에 있으니 ‘아들 옷이었으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것이라도 감지덕지.
 “감사합니다. 잘 입고 세탁해서 돌려 드리겠습니다.”
 “아냐, 아냐. 세탁은 됐고 합격이나 해. 아들 옷 주고 싶었는데 우리 아들이랑 학생······ 아니, 총각이랑은 체형이 워낙 달라서. 말하지 말고 얼른 가 봐. 끝나면 전화허고.”
 이준일은 할머니에게 전화번호를 받고 회사로 달렸다.
 뒤에서 할머니가 손을 흔들며 외친다.
 “면접 잘 봐! 긴장하지 말고!”
 엠에듀 건물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화장실로 향했다.
 옷을 갈아입고 할머니가 준 쇼핑백에 젖은 옷을 고이 넣었다.
 할아버지의 옷은 뜻밖에도 나쁘지 않았다. 기장도 잘 맞는 것 같고, 옷 자체의 원단도 고급스러웠다.
 이준일은 벽에 A4 용지로 붙어 있는 신입 사원 면접 장소 그리고 화살표를 보며 걸음을 옮겼다.
 쉰 명 정도의 인원이 면접을 보기 위해 대기하고 있다.
 이 중에 합격하는 사람은 단 네 명.
 그것도 최종 합격은 아니었다.
 인턴 기간이 2개월이고 그 기간 동안은 월급의 80퍼센트를 받으며 최선을 다해 열심히 일한 자에게 정직원이라는 감투를 씌워 준다.
 대기실에 앉아 있던 이준일은 갑자기 ‘풉!’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다시금 아침에 봤던 일기장이 기억났기 때문이다.
 도대체 어떤 술을 처먹고 일기를 썼기에 몸에 점쟁이가 깃들어서 그런 소설을 쓰고 앉아 있었을까?
 긴장되기보다 여러모로 재밌는 아침이었다.
 ‘이제 그 할머니가 짠 하고 면접관 자리에 앉아 있으면 아침에 했던 상상까지 해서 완벽한데······.’
 하지만 생각은 더 이어지지 않았다.
 “1018번 이준일 씨.”
 “네.”
 이준일이 손을 들었다.
 그리고 대기실을 빠져나와 복도를 걸었다.
 한 여성이 면접에 들어가려는 듯 문 앞에 서 있었고 그 앞에는 대기석이라고 글씨가 적힌 의자가 보였다.
 저기 앉아서 차례를 기다리나 보다.
 이준일은 의자에 앉아 옷매무새를 만졌다.
 아무래도 자기 옷이 아니니까 약간은 불편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준일의 차례가 왔다.
 “이준일 씨, 들어오세요.”
 긴장된 숨을 내쉰 후 자리에서 일어서서 문을 열고 들어가 정중하게 허리를 굽혔다 폈다.
 인사만 해도 수만 번을 연습했으니 완벽한 자세로 보일 것이었다······는 개뿔, 로봇 같았다.
 심장은 터질 것 같았고 코에서는 더운 기운이 푹푹 나왔다.
 옆에서 숨소리를 듣고 있으면 바로 119에 신고해서 구급차를 타고 한국 대학교 병원에 실려 갈 정도의 긴장감?
 이준일이 긴장된 표정으로 앞을 바라봤다.
 앉아 있는 사람은 다섯 명의 심사위원.
 한쪽에는 모니터가, 각자의 자리엔 점수를 매기는 용지가 보였다.
 대표이사라는 명패 뒤에 앉은 풍채 좋은 남자가 입을 열었다.
 40대 중반의 남성, 그룹에서 인정받아 젊은 나이에 엠에듀의 대표이사가 된 성공한 CEO. 깔끔하고 반듯하게 생겼다.
 “이준일 씨, 모니터를 보시겠어요. 모니터에 대기실이 보이죠?”
 “네? 네, 대기실이 보입니다.”
 “우리가 다음 면접자를 기다리면서 대기실을 보고 있었는데, 다른 분들은 다 긴장된 표정인 데에 반해 이준일 씨는 계속 웃고 있더라고요. 뭐 좋은 일 있었습니까?”
 이준일은 슬쩍 웃고 입을 열었다.
 “아침에 재밌는 일이 있었습니다. 우산을 가지고 오지 않았는데 갑자기 소나기가 내렸습니다.”
 이준일은 아침에 있었던 일에 대해 가볍게 설명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대표이사가 눈을 껌뻑거리며 말했다.
 “그거, 우리 엄만데?”
 “네?”
 ‘엄마라니? 대표이사 엄마라니? 반지를 찾던 강남 할머니가 엄마라고? 아침에 상상했던 대로 할머니가 짠 하고 대표이사 자리에 있던 게 아니라 아들이 대표이사였던 거야?’
 그 말에 옆에 있던 다른 심사위원들도 함께 웃기 시작했다.
 말도 안 되게 기가 막힌 인연이었으니까.
 잠시 이어지던 웃음소리가 끝나고 수능 기획부장이라고 적힌 명패의 여자가 입을 열었다.
 “자, 그럼 본격적으로 면접을 시작할게요.”
 30대 중반쯤? 이준일하고는 몇 살 차이 나 보이지 않았다.
 검은 머리가 허리까지 내려올 정도로 길었고 단아하게 보였다.
 결정적으로 예뻤다.
 이 계통에 여직원이 많다는 건 알았지만 저런 미인이 있을 줄은 몰랐다.
 ‘이준일 씨, 우리 회사에 들어온 이유가 뭐죠?’라는 질문을 시작으로 일상적인 그리고 예상하고 있던 질문들이 오갔다.
 회사에 대해 알고 있냐, 강사가 진상을 부리면 어떻게 할 거냐 등등.
 익히 예상하고 있었던 질문이기에 모범 답안을 쏟아 냈다······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역시 Fail······.
 그렇게 연습했는데도 목구멍에서만 맴돌고 더듬거리고 앞뒤가 안 맞고 등등······ 최악이었다.
 그렇게 면접이 끝났다.
 최선을 다했기에 이준일에게 후회는 남아 있지 않았다.
 아니, 후회가 남아 뭐하겠는가? 이미 끝났는데.
 이준일은 옷을 다시 곱게 개서 강남 할머니와 만났다.
 “어떻게, 면접은 잘 봤어?”
 “네, 할머니 덕분에 잘 끝났습니다.”
 옷을 돌려 드리며 인사 청탁을 할까 고민했지만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합격되고 안 되고는 자신의 문제고, 강남 할머니에게는 그저 고마울 뿐이었다.
 허리를 꾸벅 숙여 감사 인사를 하는 이준일에게 강남 할머니가 진심을 담아 말했다.
 “꼭 잘되기를 바랄게. 좋은 일 있었으면 좋겠어.”
 
  * * *
 
 그날 밤.
 이준일은 집에 들어오자마자 책상 서랍을 뒤져 다시 다이어리를 꺼내 펼쳤다.
 ‘점쟁이 빤스라도 사다 입은 거야? 어떻게 이리 잘 들어맞을 수 있어?’라고 생각하는데, 또 뭔가 다른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이, 이게 뭐야?’
 무서웠다.
 무서울 수밖에 없다.
 ‘대체 뭐야? 왜 쓰여 있는 거야? 아침에 봤을 땐 할머니에 대한 내용이 전부였잖아?’
 그런데······.
 
 그런데 회사 앞에서 한 할머니가 나한테 반지 찾는 걸 도와 달래.
 난 이 면접을 가지 않을 핑계를 찾고 있었나 보다.
 그래서 할머니를 도와줬는데 그 할머니가······.
 
 퀘스트 : 할머니를 도와라.
 Tutorial Mission Complete
 
 분명 퀘스트만 적혀 있었다.
 그런데 그 아래에 ‘Tutorial Mission Complete’라는 이상한 글씨가 있다니.
 ‘이거 뭐야? 내가 미친 거야? 아니면 아침에 이걸 본 걸 기억 못 했었나? 뭐야? 뭐야?’
 이준일은 서둘러 뒷장을 넘겨 봤다.
 ‘하······ 또 적혀 있어.’
 손이 떨려 왔고.
 무서웠다.
 털썩.
 노트가 땅에 떨어졌다.
 아침에는 분명 뒷장에 어떤 내용도 없었다. 이건 확실했다.
 그런데 다른 내용이 적혀 있었다.
 ‘아, 젠장. 귀신? 그래, 귀신이 장난치나?’
 3시간쯤 지났을까, 이준일은 다시 덜덜덜 떨리는 손으로 노트를 들었다.
 뭔지는 몰라도 궁금하기는 했다.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에게 도움이 될 것도 분명했다.
 왜 그런지 몰라도 그런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그러니까 보고 있는 거겠지.
 
 이기봉, 신구성, 김삼진, 김진용, 박호수, 유이진, 곽용호, 오시라, 이호선, 최전일, 오준민, 김시온, 고선, 박성현, 김혜진, 최상호.
 
 퀘스트 : 이름을 외워라.
 
 ‘이게 뭐야? 혹시?’
 이준일은 바로 컴퓨터 앞에 앉았다.
 그리고 엠에듀의 홈페이지로 들어가 이것저것을 확인했다.
 일기장에 적혀 있는 이름은 과학 탐구 영역의 강사진이다.
 ‘설마, 내가 이걸 맡게 되는 건가?’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하지만 바로 고개를 저었다.
 ‘헛바람은 들지 말자. 김칫국 먼저 마셨다가 떨어졌을 경우 얼마나 오랫동안 가슴에 구멍이 뚫린 채로 살아야 하는지 몇 번이나 경험했잖아.’
 이준일은 최대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방바닥에 누웠다.
 분명 다이어리가 자신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것은 알 것 같았다. 논리적으로 이야기할 수 없는 강한 확신이 그 이유였다.
 깊게 생각하고 있어 봤자 해결될 일도 없었다.
 모든 것은 시간이 지나 봐야 알 수 있는 일이다.
 이준일은 눈을 감고 피곤한 하루를 그렇게 마감했다.
 그리고 며칠 후, 합격 발표일.
 컴퓨터를 켰다.
 ‘제발, 제발, 제발! 기대될 수밖에 없잖아!’
 
 -수험 번호 1018 이준일, 합격.
 
 합격이란 단어는 사람을 흥분시키는 묘약이었다.
 “끼야호오!”
 가슴이 두근거렸다.
 ‘시골에 계신 부모님께 전화해서 이제 고생 끝, 행복 시작이라고 말씀드려야 하나? 어쨌든 나도 이제 강남의 높은 빌딩 안으로 당당히 들어갈 수 있는 사회인! 회사원! 직장인!’
 이준일은 컴퓨터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두근두근, 묘한 흥분감이 가시지를 않았다.
 누군가는 직장 생활을 당연히 여기고 그 당연함을 지루해하며 투덜대고는 했다.
 하지만 이준일은 아니었다.
 나이 서른의 신입 사원.
 장학금을 받기 위해 좋은 대학에 들어가지 못했다.
 물론 장학금이 아니라면 조금 더 좋은 대학을 갈 수도 있었다.
 뭐, 집안 사정이라는 게 있으니까.
 하지만 현실의 벽은 높았다.
 이준일이 가지고 있는 대학의 간판으로는 흰색 와이셔츠를 살짝 걷어 열정을 표현하는 직업은 가지기 어려웠다.
 그런데 이제 그 꿈을 이룰 시간이 되었다.
 핸드폰의 벨이 울렸다.
 “여보세요?”
 -네, 엠에듀 인사과 최경진이라고 합니다.
 상냥한 여직원의 목소리.
 -이준일 씨? 합격을 축하드립니다. 다음 주 월요일에 출근해서 3층 인사과로 와 주세요.
 “아, 네! 감사합니다! 알겠습니다! 네! 네!”
 전화까지 오자, 합격했다는 것이 현실로 다가왔다.
 기쁨과 흥분이 배가된다.
 흥분을 감추고 싶었지만 어려웠다.
 다시 전화를 들었다. 그리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아, 엄마? 하하, 아들 합격했어요!”
 -정말? 우리 아들 합격했어?
 엄마는 크게 기뻐했다. 전화를 끊자마자 이준일은 멈추지 않고 전화번호를 눌렀다.
 “아, 아버지? 하하, 아들 합격했어요!”
 -엄마 옆에 있어서 들었어.
 아버지가 엄마 옆에 계시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합격했다는 말은 어머니에게 전해 들으시는 것보다 아들에게 직접 듣게 하고 싶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누구보다 아들의 성공을 기다리는 분들이니까.
 오늘은 흥분해도 된다.
 그동안 고생했으니까.
 취업 준비생이라는 이름으로 지내며 마음고생이 심했으니까.
 이준일은 싱글벙글 웃으며 또다시 전화를 들었다.
 “어이, 소주. 이 오빠가 출근하게 생겼다.”
 -진짜? 진짜? 진짜?
 드넓은 서울 하늘 아래 유일하게 한 명 있는 친구로 이름은 주소요, 별명은 소주요. 별명만큼 소주를 잘 마시는 친구였다.
 어린 시절부터 함께 지냈고 비록 성별도 다르고 예쁘다는 얘기를 많이 듣지만, 이성적인 감정은 0.01퍼센트도 없는 베스트 프렌드.
 잠시 후, 이준일과 주소요는 동네의 실내 포장마차에서 만났다.
 가게 사장님은 이 두 사람이 배고픈 청년들이라는 걸 알기에 언제나 푸짐한 김치찌개를 대접해 줬는데, 그게 좋아 이곳만을 드나들었다.
 주소요가 큰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그런데 진짜 합격했어, 엠에듀에?”
 “고롬.”
 “아씨, 이제 우리는 적이네.”
 주소요는 업계 1위인 대일 스터디에 다니고 있다.
 이준일이 몇 번이나 이력서를 넣었지만 번번이 떨어졌던 기업이기도 하다.
 주소요는 그곳의 수능 기획부 수학 팀장으로 일하고 있다.
 그녀를 보며 이준일이 피식 웃었다.
 “적은 무슨, 이제 동종 업계지.”
 주소요는 잠시 흐뭇한 눈으로 이준일을 보다가 소주 병뚜껑을 뜯었다.
 “어쨌든 축하한다. 너 예전부터 엠에듀에 가고 싶어 했잖아. 좋아! 회사에서 일하다가 어려운 거 있으면 이 누님한테 물어봐. 뭐든지 가르쳐 주지. 내가 너라면 우리 회사 기밀도 빼다 준다.”
 “워, 워. 그런 짓은 하지 마라.”
 푸근한 인상의 사장 아주머니가 김치찌개를 들고 테이블로 걸어왔다.
 이준일이 사장님을 보며 말했다.
 “사장님, 오늘 계란말이도 푸짐하게 주세요.”
 “계란말이도?”
 매번 찌개만 시켜 먹는 두 남녀가 계란말이라니.
 사장은 놀란 표정으로 이준일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둘이 결혼이라도 해?”
 “네? 아뇨, 우리는 염색체만 다르지, 동성이에요. 그게 아니라 제가 이제 직장인입니다! 하하하하하.”
 “정말? 준일 총각, 합격했어? 내가 사이다는 서비스로 준다!”
 아주머니가 신이 나서 이야기하며 바로 사이다를 가지고 왔다.
 확실히 장사할 줄 아는 아주머니다.
 사이다까지 서비스로 오며 합격의 기쁨은 점점 커져만 갔다.
 술이 따라지고 두 사람의 술잔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주소요가 기분 좋게 웃으며 말했다.
 “축하해.”
 그의 옆에서 이준일이 얼마나 열심히 준비했는지 봐 왔기 때문에 그녀의 말은 진심이었다.
 “땡큐!”
 그렇게 술이 한 잔, 두 잔 따라졌다.
 주소요가 술을 채우며 말했다.
 “그런데 이 업계 사원의 평균 나이가 어린 거 알지?”
 “응, 내가 많은 편이라고는 들었어.”
 “그리고 여성의 비율이 50퍼센트나 되는 거 알아? 다른 업종에 비하면 여자가 상당히 많은 거야. 거기에 네가 지원한 기획부 같은 경우는 대부분이 여자고.”
 그녀가 걱정하는 게 뭔지 이준일은 잘 알고 있었다.
 이준일의 외모를 잠깐 살펴보면 요즘 꽃미남 계보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강한 인상이다.
 일명, 아주머니들이 좋아하는 얼굴.
 짙은 눈썹에 하루만 자르지 않아도 덥수룩이 올라오는 수염.
 바로 얼굴만은 마초요, 상남자였다.
 이 업계 기획부 팀장의 나이가 평균 서른다섯. 능력 있는 사람은 더 어린 나이에도 팀장을 차고 나온다. 직장이라고 해도 나이 많고 거칠게 생긴 신입 사원을 편하게 대할 팀장은 많지 않았다.
 주소요가 술을 입으로 넘기며 짙은 눈으로 이준일을 바라봤다.
 “알아서 기어. 첫 이미지를 바꾸기는 힘들지만 알아서 박박 기면 바뀔 거야.”
 “야, 아직 만나지도 않았는데 내 첫 이미지를 네가 왜 결정해?”
 “거울을 봐.”
 “응.”
 주소요는 잔인했다.
 
  * * *
 
 그 시각, 엠에듀 빌딩.
 늦은 밤이었지만 불이 꺼지지 않은 창문이 많이 보였다.
 그중 수능 기획부 과학 팀장 진세현이 몹시 짜증 나는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 나란히 있는 두 명의 파트장들.
 진세현이 입을 열었다.
 “우리 팀으로 고문관 하나 보낸대.”
 “네? 고문관요?”
 “서른 살 남자. 경력 없는 신입. 사진을 봤더니 얼굴은 임꺽정. 대학은 있는지도 몰랐던 곳.”
 “······!”
 “인턴 기간 끝나면 안 받을 거야. 그건 내가 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이미 인사 발령이 나서 인턴 기간을 막을 수는 없어. 일단 1파트로 넣을 거니까 박주은 파트장이 적당히 시간 보낼 수 있도록 만들어.”
 지시를 받은 박주은 파트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왜 우리 팀으로 보낸대요?”
 “천문학과 나왔대. 그거랑 과학이랑 크게 상관없는데, 왜 여기로 보내? 어쨌든 인턴 기간만 잘 버텨. 우리 팀 사람 없는 건 알지만 고문관이랑 같이 일할 수는 없잖아.”
 박주은 파트장은 장난스러운 미소로 말했다.
 “천문학과면 별자리 운세 잘 보겠네요. 그거나 물어봐야지.”
 
  * * *
 
 첫 출근 날이었다.
 이준일은 긴장된 표정으로 인사부에 앉아 있었다.
 그의 옆에는 이번에 함께 인턴을 보낼 동기라는 세 명도 함께였다.
 이준일까지 여자 둘에 남자 둘.
 그렇게 뻘쭘하게 앉아 있는데 옆에 있던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김대염입니다. 연세 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했습니다.”
 연세대?
 그러자 옆에 있던 여자 하나가 일어섰다.
 “제 이름은 장진세입니다. 고려 대학교 경제학과를 나왔어요.”
 이번엔 고려대?
 마지막으로 앉아 있던 여자가 생긋 웃으며 말했다.
 “김아현이라고 해요. 서울 대학교 산업공학과를 졸업했어요.”
 서울대, 연대, 고대.
 SKY!
 하늘이다!
 세 사람의 시선이 이준일에게 향했다.
 어서, 너도 소개를 하란 말.
 ‘아니, 자기소개 할 때 원래 학교 이름 말하는 거야?’
 이준일은 어색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준일이라고 합니다. 세존 대학교 천문학과 나왔습니다.”
 연세대를 나왔다는 김대염이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세종대요? 거기 물리천문학과 박주동 교수님이 제 아버지 친구인데요.”
 ‘아씨, 세종대 아니고 세존대라고!’
 일단 잘못 알고 있는 것은 확실히 교정해 둘 필요가 있기에 다시 입을 열었다.
 “세종대 아니고 세존대인데요······.”
 김아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혹시 그 라디오 광고에서 나오는 ‘세상에 존재를 떨쳐라! 취업 잘되는 대학, 세존대.’ 맞나요?”
 “그럴걸요.”
 그 이후로 다른 세 명은 이준일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학교 간판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모습이 뻔히 보였다.
 여기 앉아 있는 네 사람은 인턴에서 모두가 합격할 수도 있었지만 모두가 떨어질 수도 있다.
 아니, 옆에 앉은 세 사람만 합격하고 이준일 혼자만 떨어질 수도 있었다.
 아마 그게 가능성이 제일 클 거다.
 이미 세 사람은 이준일이 떨어질 거라는 걸 확신하는 것으로 보였으니까.
 ‘그래, 인턴 합격했다고 긴장을 풀지 말고 정사원이 될 때까지 이를 악물고 일하자.’
 그렇게 앉아 있는 사이, 이준일을 제외한 세 사람의 사이에서 많은 이야기가 오갔다.
 “연대 경영이면 더 좋은 곳에 갈 수 있지 않아요?”
 “네, 그런데 엠에듀에서 열심히 하면 그룹 본사로 올라갈 수도 있다는 말을 들어서요. 계열사 말고 본사에서 일하면 재밌을 것 같지 않아요?”
 “하긴, 저도 그런 말 듣고 왔어요. 이쪽 계통이 가능성이 보여서 주시하고 있다고 하던데요.”
 이준일의 생각과 이들이 하는 생각은 달랐다.
 이준일은 어떻게든 정직원이 되는 게 목표인데 이들은 벌써 인턴을 넘어 그룹을 넘보고 있다니.
 잠시 후, 인사과 직원이 몸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이준일 씨는 수능 기획부의 과학 팀이고요. 그리고······.”
 한 명씩 배정받을 곳을 알려 줬다.
 하지만 그 역시 스쳐 지나갈 뿐, 이준일에게는 ‘과학 팀?’이라는 생각만 들 뿐이었다.
 일기장에 적혀 있던 과학 영역의 강사들 이름. 그게 지금의 상황을 또 예견한 건가?
 수능 기획부 과학 팀은 수능 시장에서 과학 영역을 기획하는 팀이다.
 하는 일은 강사들이 더 많은 매출을 올릴 수 있도록 연구하고 기획하는 일.
 아직 자세히는 몰랐지만 대충 그 정도로 알고 있다.
 인사과 직원은 그 후로도 몇 가지 이야기해 줬다.
 앞으로 일어날 일과 해야 할 일 등 간략한 회사에 대한 설명들.
 그때 한 중년의 남성이 안으로 들어와 인턴들의 앞에 섰다.
 “이번에 새로 들어온 신입 사원들인가?”
 잘 빗어 넘긴 머리가 인상적인 서글서글한 얼굴의 40대 남성이었다.
 이름은 박지후. 강사 출신의 사외 이사였다.
 인사과 직원이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하자 이준일과 다른 인턴들도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박지후 사외 이사는 손을 흔들며 빙긋이 미소를 지었다.
 “아, 편안히 있어요. 우리 회사의 미래를 책임질 사원들이 왔다고 해서 들른 거니까.”
 이사라는 직함을 가진 분이 편안히 있으라 한다고 허리를 등받이에 붙인 채 편히 앉아 있을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모두 최대한 바른 자세로 앉아 있었다.
 박지후 사외 이사가 인턴들의 앞에 앉았다.
 “많은 IT 기업이 그렇겠지만 우리 회사도 정말 자유로운 분위기예요. 특히 인사 교류의 한계가 없어요. 여기 남자 사원 두 분은 군대 다녀왔나요?”
 인사 교류를 이야기하다가 왜 뜬금없이 군대 이야기를 하는지는 모르지만 이사가 한 질문이었기에 이준일과 김대염은 큰 소리로 대답했다.
 “네!”
 “군대에 보면 병장이 이등병보다 모든 능력 면에서 우월하다는 개념을 깔고 시작하지 않나요? 경험적 측면을 보면 맞는 말일 수 있지만, 우리처럼 하루하루가 다른 기업에서는 경험적 측면도 중요하지만 개인의 능력을 더 우선으로 하기도 해요. 그러니까 열심히 하면 지금은 인턴이지만 몇 년 후에는 과장, 부장을 달고 있을 수도 있으니 최선을 다해 보도록 하세요.”
 박지후 사외 이사의 말이 조금은 힘이 되었다.
 또래의 사람들은 한자리씩 차지하고 있는 것 같은데 이준일은 이제 신입 사원. 앞으로 발 빠르게 움직이지 않으면 더 뒤처지고 만다. 하지만 열심히 하면 위를 바라볼 수도 있다는 뜻.
 이준일은 작게 숨을 내쉬었다.
 박지후 사외 이사는 인턴들에게 다시 한 번 기분 좋은 미소를 남긴 채 나중에 보자는 말과 함께 인사과를 빠져나갔다.
 그리고 잠시 후, 슬리퍼를 질질 끌고 한 여성이 나타났다.
 몹시 피곤한 얼굴로 나타난 그녀의 이름은 진세현 수능 기획부 과학 팀장.
 나이는 서른한 살, 이준일보다 한 살 많을 뿐이었지만 벌써 7년 차 고참으로 직급은 과장.
 주소요에게 이미 이 계통이 전반적으로 나이가 어리다고 들었다. 그리고 주소요 역시 팀장을 하고 있으니 진세현 팀장과 이준일의 나이가 비슷하다고 해서 별다른 느낌은 없었다.
 그녀는 몹시 피곤해 보이는 눈동자를 하고 있었는데 옷은 뭐, 깔끔하게 무릎까지 오는 검은색 치마에 흰 블라우스를 입고 있었다.
 진세현 팀장은 머리는 하나로 질끈 동여 묶은 모습으로 이준일을 바라봤다.
 “이준일 씨?”
 “네? 이준일입니다.”
 “따라오세요.”
 차가운 그리고 몹시 귀찮다는 말투.
 그녀는 그 말을 끝으로 슬리퍼를 질질 끌며 인사과를 나가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5층으로 가는 동안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도착한 곳은 사무실이었다. 이곳이 수능의 전체를 총괄하는 팀이 모두 모여 있는 곳.
 수능 기획부 운영 팀, 사업 팀, 마케팅 팀 등등.
 진세현 팀장은 과학 팀이 있는 칸막이로 들어가 한 여직원을 불렀다.
 “박주은 파트장, 신입 사원 왔어요.”
 박주은 파트장, 화학, 생물 파트를 맡은 사람으로 스물일곱, 직급은 대리. 역시 몹시 피곤해 보이는 얼굴.
 박주은 파트장이 자리에서 일어서 자신의 옆 책상을 가리켰다.
 “반갑습니다. 박주은이라고 하고요. 이쪽이 이준일 씨 자리입니다. 용품은 오시기 전에 다 준비했으니까 더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해 주세요.”
 필요한 게 있어도 말하면 민폐를 끼칠 것 같은 다크서클.
 박주은 파트장이 계속 말했다.
 “일단 사이트 들어가서 한번 모니터링하고요, 강사진 이름과 얼굴부터 외우세요.”
 “이름요?”
 “네.”
 다른 신입 사원에게 이름을 외우라고는 시키지 않았다.
 자연스레 익히는 것이고 자기 파트만 알고 있으면 되니까.
 하지만 이준일에게 다른 일을 굳이 가르쳐 주고 싶지 않기에 시킨 일인데······.
 “이름은 외워 왔습니다. 이기봉, 신구성, 김삼진, 김진용, 박호수, 유이진, 곽용호, 오시라, 이호선, 최전일, 오준민, 김시온, 고선, 박성현, 김혜진, 최상호. 맞지요?”
 “네?”
 눈을 껌뻑이는 박주은 파트장을 보며 이준일이 기분 좋게 미소를 지었다.
 출근하기 전까지 도대체 이 이름이 뭔가 궁금해서 다이어리만 들여다보고 있었으니 자연스럽게 외울 수밖에 없었다.
 박주은 파트장이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의외네요.”
 ‘의외? 뭐가 의외라는 거지?’
 박주은 파트장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행동에서 말을 걸지 말라는 침묵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준일이 할 일은 없었다.
 어떤 업무도 주지 않으니 그저 시간만 흘러간다.
 시킨 대로 사이트를 들어갔다가 나왔다가 하고, 이것도 눌러 보고 저것도 눌러 봤다.
 매출 현황도 눌러 봤지만 열리지 않았다.
 인턴은 볼 수 없는 현황이었다.
 슬쩍 칸막이 너머 다른 팀을 바라봤다.
 함께 온 동기들은 열심히 복사하는 방법을 배우고 있었다.
 동기들의 표정은 일류 대학을 나와 왜 복사기와 싸우고 있냐는 얼굴이었지만······.
 부러웠다.
 저것이라도 할 수 있는 게 어딘가?
 이준일의 시선은 다시 자신의 팀으로 향했다.
 일단 이준일이 있는 화학 생물 파트는 과학 1파트라고 했다. 인원은 이준일까지 총 세 명.
 박주은 파트장과 김세민 주임, 그리고 이준일.
 그리고 물리, 지구과학으로 이루어진 2파트가 있었다.
 이렇게 두 파트가 모여 진세현 팀장의 아래에서 과학 팀이 된다.
 이준일은 다른 사람들이 하는 업무를 가만히 지켜봤다.
 할 일이 없다면 지금 이 분위기를 익힌다.
 낯선 공간에서 적응은 가장 우선되어야 하니까.
 
  * * *
 
 점심시간이 되었다.
 신입 사원 주제에 먼저 일어나서 ‘식사는?’이라고 말을 할 수는 없다.
 진세현 팀장이 이준일의 마음을 알았는지 팀원들을 훑어보며 입을 열었다.
 “2파트하고 전 할 일이 조금 남아 있어서 나중에 식사할게요. 화생방 파트는 이준일 씨 데리고 식사하고 오세요.”
 화생방 파트?
 ‘화생방은 뭐야?’라고 생각할 때, 이준일이 속해 있는 1파트의 박주은 파트장과 김세민 주임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1파트를 화생방이라고 하나 보다.
 구내식당에 앉았을 때, 박주은 파트장이 입을 열었다.
 “처음 본 첫날에 이런 말을 하면 그렇지만 우리가 화생방 파트라고 불리는 이유를 알고 있나요?”
 “네? 화학과 생물을 줄여서 화생방이라고 하는 거 아닌가요?”
 “반은 맞아요. 화학, 생물인데 방은 어디서 나왔을까요?”
 입사 첫날인데 알 수 있을 리가 없다.
 박주은 파트장이 말을 이었다.
 “군대 갔다 왔으니까 화생방 알죠?”
 아마 화생방에 대해서는 훨씬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네, 알고 있습니다.”
 “화생방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과학의 경우 이과생만 들어요. 그래서 과학의 1타라 불리는, 음, 1타가 가장 매출이 높은 강사를 말해요. 우리 회사 과학 1타의 경우가 연 20억 정도의 매출을 내죠.”
 한 강사가 벌어들이는 매출이 20억. 듣기만 해도 엄청나다.
 과학의 강사가 총 열여섯 명이니 단순 수치 계산으로 100억 이상은 매출을 낸다는 뜻이었다.
 박주은 파트장이 계속 말했다.
 “과학 전체 말고 우리 파트 1타 유이진 선생님의 연 매출은 10억이에요.”
 10억, 20억 등 생각하기 힘든 액수가 왔다 갔다 하자 정신이 없었다.
 하지만 그 뒤에 들은 말은 입을 찢어지게 만들었다.
 “우리 회사 수학 1타 선생님 매출이 얼마인지 아세요? 과학 전 선생님의 매출을 합쳐도 그 수학 선생님 한 분의 매출을 잡지 못하죠.”
 ‘내가 연봉을 얼마에 계약했더라······.’
 “즉, 일은 고되고 힘든데 벌어들이는 돈이 없고 거기에 인정도 받기 힘드니 화생방. 이해했어요?”
 이런 이야기를 왜 하고 있을까?
 그녀의 목소리와 눈빛에서 적대적인 감정이 느껴진다.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박주은 파트장이 말을 이었다.
 “이준일 씨는 또래보다 늦게 입사하셨잖아요. 그만큼 빨리 승진을 원할 수도 있고요. 하지만 화생방 파트에 있으면서 회사 내에서 돋보이기는 어렵습니다.”
 밥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든다고 했는데, 박주은 파트장은 약점을 후벼 파고드는 중이다.
 박주은의 입을 통해 잔인한 내용이 계속해서 뿌려졌다.
 “앞으로 보시면 알겠지만 우리가 현장에서 일을 가르치며 하기에는 시간이 없어요. 옆에서 하는 걸 지켜보면서 따라 하실 수밖에요.”
 “······.”
 “이준일 씨는 저보다 나이가 많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보통 나이 많은 남자분들은 자격지심이 조금 있더라고요. 그리고 지방대를 나왔다고 했는데······.”
 “······.”
 “만약 자격지심 또는 떼쓸 생각이면 빨리 나가 주시는 것도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일입니다.”
 그녀의 말에 마음 아픈 건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이곳엔 이준일의 꿈이 있었다.
 엠에듀는 이준일이 예전부터 들어오고 싶어 했던 회사였다.
 그래서 이준일은 웃었다.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 친구 주소요의 말이 떠올랐다.
 
 -넌 처음에 가면 분명 인정 못 받아. 하지만 꾹 참고 너를 보여 줘. 넌 뚝배기 같은 놈이라 시간이 걸려도 진가를 알아봐 줄 거야.
 
 이준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방해되지 않도록 열심히 하겠습니다.”
 기죽지 않아 보이는 이준일의 행동에 박주은 파트장은 다시 한 번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사실 지금의 행동은 모두 진세현 팀장과 입을 맞춘 일이었다.
 기를 죽이라고, 그리고 쫓아내라고.
 잔인하지만 회사는 결과를 내야 하는 조직이다.
 이준일이라는 사람의 스펙은 도저히 이 안에서 결과를 도출해 낼 수 없는 기록을 가지고 있었다.
 이 사람을 뽑은 인사 팀이 미쳤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박주은 파트장은 가만히 이준일을 바라봤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 심한 말을 했나?’
 그녀는 조금 미안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강사들의 이름을 외우고 있는 걸 보고 의외라고 생각했어요. 한번 열심히 해서 화생방 파트를 살려 보세요. 이 바닥은 단 한 사람에 의해서 성과를 낼 수도 있는 곳이니까요.”
 그 뒤로 몇몇 이야기를 더 들었다.
 하나같이 매출 어쩌고저쩌고하는 기본적인 이야기들.
 이준일은 하나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 귀를 기울였다.
 사회라는 곳에서 생존하기 위한 방법은 최선이었다.
 식사를 하고 난 후 박주은 파트장과 김세민 주임은 사무실로 올라갔고, 이준일은 화장실로 향해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했다. 칸칸을 열기까지 했으니 아무도 없는 게 확실했다.
 그제야 그는 전화를 들었다.
 그 전화는 주소요에게 향하고 있었다.
 -오, 신입 사원. 전화할 시간도 있는 거 보니까 회사 생활을 할 만한가 보다?
 “할 만하긴, 다 나를 싫어하는 것 같아.”
 -당연하지. 누가 네 얼굴 보고 좋아할 수 있겠냐?
 이준일은 화장실의 거울을 통해 얼굴을 바라봤다.
 거울 속에는 상남자가 서 있었다.
 “잘생겼네.”
 -이상한 말 하지 말고 빨리 용건이나 말해. 네가 전화한 이유가 있을 거 아냐?
 “내가 화학 생물 파트로 빠졌거든.”
 말이 끝남과 동시에 주소요의 입에서 그 파트에 대한 간략한 해설이 쏟아져 나왔다.
 아무래도 수학이나 영어는 이슈가 많지만 과학은 이슈도 없으니 신입 사원이 두드러지기 어렵다는 등등의 비극적인 결말.
 -어차피 인턴이 할 일은 복사와 전화받기야. 그런데 화학, 생물이면 더 없어.
 박주은 파트장에게 들은 말을 친구에게도 또 듣다니.
 ‘그런데 친구야, 난 복사도 안 하고 전화도 안 받아.’
 이준일이 입을 열었다.
 “희망적인 건 없어?”
 -응, 없어. 그냥 때려치워. 너 왕따야.
 “네가 나 뚝배기라며?”
 -기분 좋아지라고 한 말.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어?”
 -공부해. 네가 그 강사들이 누군지 모르잖아. 일단 봐. 그리고 연구해. 아, 내가 적을 가르치고 있다는 걸 우리 대표님이 안다면 때려죽이려고 하실 텐데.
 그녀와 전화를 끊었다.
 이준일은 한숨을 내쉬며 주먹을 꽉 쥐었다.
 ‘그래, 할 일이 없으면 만든다.’
 기획부의 역할은 강사를 메이킹하고 분석하는 것.
 우선 되어야 할 건 많은 강의를 접해 보는 일이다.
 이준일은 사무실로 들어가 헤드셋을 스피커에 꽂았다.
 그런 이준일을 박주은 파트장과 진세현 팀장이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보거나 말거나 이준일은 화학 파트를 클릭하고 한 강사의 내용을 1.5배속으로 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던 진세현 팀장이 박주은 파트장에게 메신저를 날렸다.
 
 -진세현 : 박주은 파트장이 시킨 일이야?
 -박주은 : 아뇨. 전 아무것도 가르쳐 주지 않겠다고 선 그었는데요.
 -진세현 : 그런데 왜 저래?
 
 신입 사원은 아무 일도 주지 않으면 멍하니 사이트만 보다가 퇴근하는 게 일반적이다.
 이준일처럼 강의를 하나씩 보는 건 누가 지시하기 전까지는 하기 어려웠다.
 당연하지만 사무실에서 헤드셋을 끼고 뭔가를 보는 행위가 신입 사원이 당당히 하기는 어려운 일이니까.
 두 사람이 이상한 눈으로 보고 있었지만 이준일은 묵묵히 강의를 봤다.
 ‘젠장, 화학을 보고 있다니! 나이 서른에 화학을 공부하고 있다니! 이온이 결합하는 걸 보고 있다니!’
 신입 사원이 왔다고 해서 거창한 회식 같은 건 없었다.
 
  * * *
 
 퇴근 후, 이준일은 하품을 하며 책상에 앉았다.
 책상 서랍에서 다이어리를 꺼내 들었다.
 며칠 지나자 처음 가지고 있던 두려움은 없었다.
 이게 어디서 왔을까 하는 궁금증도 시간이 지나며 희석되고 있었다. 그저 신기할 뿐이었다.
 “응? 또 적혀 있네?”
 
 이기봉, 신구성, 김삼진, 김진용, 박호수, 유이진, 곽용호, 오시라, 이호선, 최전일, 오준민, 김시온, 고선, 박성현, 김혜진, 최상호.
 
 퀘스트 : 이름을 외워라.
 Mission Complete 1 : 1/5.
 
 박주은 파트장에게 강사의 이름을 그냥 말했을 뿐인데, Mission Complete를 했다.
 깼다!
 ‘내가 암기 과목은 잘하지. 1/5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 깨면 좋잖아? 지난번은 튜토리얼이었으니까 이제 본 게임이라는 건가?’
 이준일은 무심코 다음 장을 넘겼다.
 며칠 동안 계속 봤지만 그동안은 새로운 게 없었는데, 이번엔 있었다.
 
 할 일이 너무 없어서 시간대별로 박호수 강사의 강의를 전부 적고 있었다.
 그건 그렇고 매출이 안 나온다며 메인에 노출시켜 달라고 억지를 부리던 유이진 강사가 결국 이렇게 될 줄이야.
 박주은 파트장은 대표이사 회의까지 끌려가 욕을 먹고 왔다. 울고 있는 박주은 파트장을 보니 너무 안타깝다. 그만두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아······ 박호수 강사를 잡았어야지.
 
 퀘스트 : 박호수 강사를 잡아라.
 
 이준일은 일단 생각을 정리하기로 했다.
 이 다이어리가 미래를 예측해 주는 건 일단 확실하다.
 문제는 자세한 상황을 이야기하지 않고 이처럼 뭉뚱그려서 보여 주고 있다는 거다.
 ‘할 일이 없어서 박호수 강사의 강의를 전부 적었다고?’
 그건, 그럴 만했다.
 ‘할 일이 없긴 하지. 그런데 왜 하필이면 박호수 강사야?’
 박호수 강사의 강의는 잠깐 훑어봤지만 정말 지겨운 사람이었다.
 그리고 유이진 강사?
 이준일은 컴퓨터를 켜고 엠에듀 사이트에 들어가 유이진 강사를 클릭했다.
 꽤나 예쁘게 생긴 얼굴이었다.
 매출도 1파트에서는 최고다.
 화면을 바라보던 이준일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 사람이 억지를 부린다고?’
 이준일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몇 가지 상황이 예측된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아직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서 지나친 억측은 좋지 않은 일이다.
 이준일은 마우스를 움직여 박호수 강사를 클릭했다.
 온라인 강의의 초기에는 꽤 인기 있는 강사였다.
 좋은 학벌에 실력 있는 강의.
 하지만 시간이 가면서 그는 추락했다.
 화학의 인기가 식었고 젊고 예쁜 강사들이 튀어나오자 나이가 든 강사는 뒤안길로 들어설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설명이 지겹기도 했다.
 듣고 있으면 잠이 새록새록 올 정도.
 아마 강의가 아니라 갓난아기 재우는 자장가 프로그램으로 만들면 대박이 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런데 이 사람을 잡았어야 한다니?’
 
  * * *
 
 며칠 후.
 진세현 팀장과 1파트 세 명은 회의실에 앉아 있었다.
 진세현 팀장이 입을 열었다.
 “유이진 선생님한테 전화가 왔었다고요?”
 박주은 파트장이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
 “네, 유이진 선생님이 메인 배너에 노출시켜 달라네요.”
 그 말에 무거운 분위기가 이어졌다.
 유이진 강사는 메인 배너에 노출되기에 매출이 약했다.
 정말 입 벌어지는 수익을 올리는 강사들도 대기하고 있는 상황에 유이진 강사를 올리는 것은 설득력이 없었다.
 과학 1파트 1타 강사지, 과학의 1타도 아니다. 다른 과목의 강사들과 비교하면 중하위권은 되려나?
 당연히 그녀를 메인에 올린다면 지금까지 가만히 있던 2~3타 강사들이 자기도 올려 달라고 난리가 나겠지.
 그렇다고 해서 계속 거절하기도 애매한 상황이다.
 모두가 고민하고 있던 그때 이준일은 입을 꽉 닫고 있었다.
 ‘이번에도 다이어리는 이 상황을 맞혔잖아?’
 다이어리가 미래를 예측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맞힐 때마다 신기했다.
 ‘그럼 이제 유이진이 메인에 노출되고 박주은 파트장이 대표이사 회의까지 끌려가서 욕을 먹는다는 거지?’
 박주은 파트장이 왜 끌려가는지의 중간 과정이 없기에 그 상황까지는 알 수 없다.
 ‘그 상황을 막으면 도움이 되나? 막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생각을 하던 이준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도움이 된다고 해도 지금은 모른 척 가만히 있어야 한다.
 지금은 나설 상황도 아니다.
 이준일은 상황이 흘러가는 걸 조금 더 지켜보기로 했다.
 회의가 끝나고 이준일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역시 할 일을 주지 않는다.
 일단 다이어리에서 나왔던 내용을 직접 실현해 보기로 했다.
 ‘심심해서 박호수 강사가 하는 말을 전부 적었다고?’
 박호수 강사의 강의를 클릭.
 영상이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이준일은 워드 프로그램을 실행한 후 박호수 강사의 강의를 고스란히 받아 적었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일단 박호수 강사의 강의는 졸린 데다, 화학 공식은 복잡했다.
 그래도 적었다.
 몇 번의 경험으로 미루어 봤을 때, 다이어리의 내용은 이준일에게 해를 끼치지 않았다.
 그럼 이것도 어떤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헤드셋을 귀에 걸고 뭔가를 열심히 쓰고 있는 이준일의 모습을 박주은 파트장이 이상한 표정으로 잠시 바라봤다. 하지만 유이진 강사 때문에 골치가 아팠던 그녀는 이내 이준일에 대한 관심을 접었다.
 한참을 일하고 있는데 누군가 이준일의 등을 툭툭 건드렸다.
 고개를 돌려 보자 김세민 주임이었다.
 “점심시간이에요.”
 “벌써요?”
 강의를 받아 적느라 온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더니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김세민 주임의 눈이 가만히 이준일의 모니터를 바라봤다.
 “아까부터 궁금했는데, 이게 뭐죠?”
 “아, 그냥 강의를 듣기가 무료해서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적어 보고 있었습니다.”
 “그런 건 도움 안 돼요. 힘만 들고요. 먼저 식사하러 가세요. 우리는 일이 있어서 나중에 밥을 먹어야 할 것 같아요.”
 다른 파트원들은 열심히 일하고 있는데 혼자만 식사하러 가는 건 눈치가 보였다. 하지만 모두들 이준일에게 관심이 없어 보이니 어쩔 수 있을까?
 조심스럽게 일어난 이준일이 밖으로 나섰다.
 그때 박주은 파트장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 몰라. 배고파. 저도 밥 먹고 올게요.”
 그때 그녀의 핸드폰이 울렸다.
 유이진 강사였다.
 박주은 파트장이 미간을 찌푸렸다.
 “점심시간인 거 뻔히 알면서 꼭 이 시간에 전화하고 있어! 짜증 나게.”
 하지만 말했던 것과 다르게 통화 버튼을 누른 박주은 파트장의 목소리는 상냥하게 변했다.
 “네, 선생님. 어제 말씀하셨던 거요? 네? 네. 요즘 영어가 이슈라서 메인 자리는 조금 어려운데요. 그래도······.”
 박주은 파트장이 이준일에게 먼저 가라고 손을 내저었다.
 이준일은 잠시 박주은 파트장을 보다가 식사를 하러 밖으로 나갔다.
 
  * * *
 
 식사를 마치고 다시 사무실에 앉은 이준일.
 유이진 강사 때문에 과학 팀의 분위기는 좋지 않았다.
 모두의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이준일은 헤드셋을 머리에 썼다.
 지금 이준일이 해야 하는 일이라면 ‘클릭’뿐.
 다시 박호수 강사의 이름을 찍고 강의를 들었다.
 자기도 모르게 하품이 나온다.
 ‘뭐야, 이게?’
 정말 딱 고등학교 화학 선생님의 수업이 느껴졌다.
 낮은 중저음의 목욕탕 아저씨 목소리.
 농담은 하나도 없고 오로지 설명, 설명, 설명, 설명, 설명, 설명. 꿀잠을 잘 수 있는 최적의 요건이었다.
 오죽했으면 하품하다가 눈물까지 찔끔 나왔을까.
 ‘이 아저씨를 잡으라고?’
 이준일은 유이진과 박호수의 강의를 비교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같은 화학 강사.
 유이진은 학생들을 ‘꼬꼬마!’라고 부르기까지 한다. 하지만 박호수는 인사말이 ‘안녕하세요.’가 전부.
 유이진은 그날 배울 내용 소개가 10분. 박호수는 없음.
 박호수는 그 뒤로 쭉 강의.
 강의, 강의, 강의.
 솔직히 말해서 ‘누구의 강의를 들으면 성적이 오를까?’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박호수의 것을 들으라고 답하고 싶었다.
 깊이도 있었고 설명도 쉽게 쉽게 나갔다.
 하지만 ‘누구의 강의를 들을 거야?’라는 질문 앞에서는 당연히 유이진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유이진 강의는 졸리지 않지만 박호수 강의는 너무 졸리니까.
 
  * * *
 
 진세현 팀장과 이야기를 나누고 온 박주은 파티장이 자리에 앉으며 이준일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뭐 해요?”
 “네? 아, 박호수 선생님 강의 듣고 있었는데요.”
 “그 사람은 안 돼요. 매출도 2천이 안 넘어요. 계약 기간도 1년이 안 남았으니까, 다른 곳에 신경 쓰지 말고······.”
 “좋은데요?”
 박주은 파트장이 ‘네가 뭘 알겠냐.’라는 시선으로 이준일을 바라봤다.
 “강의에도 트렌드라는 게 있어요. 그분은 트렌드를 따라가기에는 너무 늦었어요. 나이가 많을수록 변화할 수 있는 범위가 적다는 건 알고 있죠?”
 “잘할 것 같은데요?”
 박주은 파트장의 표정이 좋지 않다.
 그녀가 싸늘히 고개를 젓는다.
 그때 그녀의 핸드폰이 울렸다.
 “아, 박호수 선생님? 안녕하세요? 네? 계약요? 위약금? 음······ 제가 알아보고 연락드릴게요.”
 박주은이 전화를 끊으며 이준일을 바라봤다.
 “이준일 씨가 괜찮다고 칭찬한 박호수 강사가 계약 해지 위약금을 물어보네요.”
 “그럼 해지하는 건가요?”
 “사실 우리도 바라고 있던 거라서요, 다른 뉴 페이스를 찾는 게 매출에 더 도움이 되니까.”
 해지한다고?
 강의를 들어 보면 지루해서 그렇지, 내용은 좋았는데?
 그리고 다이어리 때문일까? 왜 그런지는 몰라도 박호수 강사를 놓치고 싶지 않다.
 
 
 
 
 
 #Chapter 2
 
 
 
 “파트장님.”
 “네, 말씀하세요.”
 “제가 박호수 선생님 한번 만나 봬도 될까요?”
 박주은 파트장의 눈이 이준일을 이상한 듯 바라본다.
 “이준일 씨가 왜요? 지금 선생님 측에서 해지 문의를 해 왔고 우리도 그럴 생각인데요.”
 “······.”
 가만히 있자 박주은 파트장의 입꼬리가 살짝 비웃듯 올라갔다.
 “마음대로 하세요. 어차피 그게 그거니까.”
 
  * * *
 
 이준일은 퇴근 후, 박호수 강사가 있는 학원으로 가고 있었다.
 그곳은 엠에듀의 오프라인 학원 중 하나로 대치동에 있었다.
 인터넷 강의를 하는 강사들이 실제로 학생들을 가르치는 곳 중 하나.
 학원 강사들에게는 현장감 있는 강의를 이어 가며 감을 떨어뜨리지 않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고, 학생들에게는 유명 강사의 강의를 직접 들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는 곳이었다.
 버스에서 학원으로 걸어가고 있을 때, 전화기가 울렸다.
 통화 버튼을 누르자 주소요였다.
 “여보세요?”
 -퇴근했어? 치맥 할까?
 “계약 기간이 남아 있는데도 다른 곳으로 이동할 수 있어?”
 치맥 하자는 말에 뜬금없이 일을 물어보니 주소요는 고개가 갸우뚱했다.
 -그 정도는 사수가 충분히 대답해 줄 수 있는 질문인데?
 이준일은 한숨을 내쉬었다.
 ‘응. 그건 나도 알아, 친구야. 그런데 물어보기가 어려워.’
 이준일이 가만히 있자 수화기 속 너머로 주소요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이어졌다.
 -너 진짜 왕따당하고 있는 거야?
 “몰라. 물어볼 사람 없어. 대답이나 해 줘.”
 잠시 수화기 너머에서 어떤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다가 짧은 한숨 소리가 들리더니 주소요의 진지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계약금을 받은 강사라면 받은 돈 토하고 알파로 위약금. 그게 아니면 위약금만 물어 주면 끝나지. 돈이 안 된다고 판단하면 빨리 다른 곳으로 이동하고 싶어 하는 강사도 많아. 다른 회사에서 받은 계약금으로 퉁 치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고.
 이준일은 잠시 생각에 빠졌다.
 “그럼 위약금을 안 내는 경우도 있나?”
 -정말 매출이 안 나와서 서로 골치 아픈 경우? 그런데 무슨 일이야?
 이준일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
 “나 사고 쳤어.”
 -사고?
 신입 사원, 그것도 잔뜩 미운털을 받는 그가 박호수를 잡아야 한다는 말을 했을 때 방금까지 진지한 목소리로 걱정해 줬던 주소요는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하긴, 주소요가 계속 걱정스럽게 대했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한참을 웃던 주소요가 물었다.
 -그래서? 박호수 선생님 찾아가는 거야?
 “응, 나보고 설득하란다. 그리고 계속 있겠다고 하면 내가 기획해 보란다.”
 -그 정도야?
 인턴에게 기획을 맡기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아니, 아예 없었다.
 만약 있다고 하면 하기 귀찮은 하찮은 기획 또는 버리는 일이었다.
 이준일의 말대로라면 박호수라는 카드를 버리겠다는 뜻이 된다.
 그리고 이준일 역시, 그런 버리는 일로 2개월만 데리고 있다가 끝내겠다는 뜻이기도 했다.
 주소요는 그걸 알고 있지만 말을 하지는 않았다.
 대신 다른 말로 용기를 줬다.
 -이건 기회야. 네가 해서 박호수 선생님이 떠 봐. 다 네 성과로 기록되는 거 알지?
 “땡큐.”
 전화를 끊은 이준일이 다시 터벅터벅 학원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때 다시 전화가 울렸다.
 또 주소요였다.
 “왜?”
 -친구야, 술 사라.
 “나 지금 일하러 간다니까.”
 뭔 놈의 여자애가 이렇게 술을 좋아하는지 모르겠다.
 -내 말 들으면 술 사야 할 거다.
 “뭔데?”
 -박호수 선생님을 스카우트하고 있는 곳이 우리 대일 스터디야.
 “······!”
 -내가 수학 팀장이라 과학은 관심이 없어서 몰랐는데, 네 말 듣고 과학 팀장이랑 박호수 선생님 요즘 매출 안 나온다고 이야기했거든, 그러니까 우리 쪽으로 불러오려고 노력한다더라. 이유는 몰라. 내가 더 물어볼 입장은 아니니까.
 엠에듀에서는 한물갔다고 생각하는 박호수 강사를 왜 대일 스터디에서 데리고 가려고 할까?
 그것도 업계 1위의 회사에서?
 이준일의 눈동자는 빠르게 움직였다.
 주소요가 말했다.
 -나 지금 간첩질하는 거 맞지? 술 사야겠지?
 “내가 돈 탈탈 털어서 소맥 말아 줄게. 이 정도면 간첩 공작금으로 되나?”
 -그럼 소맥 받고 안주로 부대찌개를 업글할 수 있는 이야기 하나 더 있는데. 콜이야, 다이야?
 “콜.”
 무조건 콜이었다.
 -박호수 선생님을 데리고 오자고 한 사람이 누군지 알아? 이스터디 창업주 김오윤이야. 알지, 이번에 우리 본부장으로 온 거?
 김오윤, 나이는 서른세 살. 대학에 다니면서부터 다섯 명의 선후배와 함께 벤처 동아리로 ‘이스터디’라는 온라인 회사를 만들었다.
 그 회사를 대기업에 판 다섯 명의 선후배들.
 그들은 이 업계를 떠나지 못하고 각각 다른 회사로 스카우트되었는데 물론 엠에듀에도 있었고 다른 곳에도 있었다.
 그중 기획력에 한해서만큼은 업계 톱인 김오윤은 대일 스터디의 본부장이 되었다.
 그런 김오윤이 박호수를 노린다고?
 이준일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아직 이 업계를 잘 몰라서 어렴풋이 느끼고만 있던 생각이 확신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박호수의 스타일에는 핵심을 찔러 가는 날카로움이 있다.
 문제는 졸리다는 것.
 문제를 걷어 내면 최고가 될 수 있다.
 어떻게 그것을 해결할지 고민하며 이준일은 힘차게 걸음을 걸어 학원으로 향했다.
 그리고 박호수와 마주 앉았다.
 “안녕하십니까? 엠에듀 과학 팀 이준일입니다.”
 명함은 아직 나오지도 않았으니 줄 수 없었다.
 이준일을 보던 박호수가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죠? 아까 낮에 박주은 파트장하고 이야기했을 때는 이미 결론이 난 걸로 아는데요.”
 이준일은 미간을 찌푸렸다.
 ‘젠장. 여기로 보내기 전에 이미 결론을 냈다고? 그럼 보낸 이유가 뭐야? 그냥 고생 한번 해 보라고?’
 별별 생각이 다 났지만 여기까지 왔는데 포기하고 갈 순 없었다.
 “저는 선생님과 계속 함께하고 싶습니다.”
 이준일의 진지한 눈빛을 본 박호수 강사가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엠에듀하고는 그만하려고 해요. 아무래도 나한테 관심이 없으니까요. 그쪽에서도 마찬가지 아니었나요?”
 강사의 매출은 노출도에 따라 크게 좌지우지되기 마련이다.
 사이트 메인 화면에 얼굴이 실려 있느냐, 어느 위치에 있느냐에 따라 금액의 크기가 달라진다.
 아무래도 학생들이 메인에 노출되어 있는 강사에게 더 신뢰도를 느끼니까.
 물론 메인에 노출되는 게 전부가 아니었다.
 학생들이 ‘맛보기’라 불리는 무료 강의를 듣고 결제를 하느냐 마냐를 선택할 때, 결제 버튼으로 손을 이동시킬 수 있는 강사! 회사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조금이라도 더 돈을 끌어올 수 있는 강사를 노출시킬 수밖에 없었다.
 박호수 강사의 경우는 맛보기 강의만 들어도 졸렸다.
 이건 인정해야 했다.
 하지만 이 사람을 대일 스터디 본부장 김오윤이 찍었다는 것!
 그것은 박호수에게 뭔가를 발견했다는 뜻이다.
 그게 뭔지 아직 이준일은 몰랐다.
 하지만 놓쳐서는 안 된다는 것은 알았다.
 이준일은 가지고 온 가방의 지퍼를 열었다. 그리고 한 뭉텅이의 종이를 꺼냈다.
 “오해하시는 거예요. 제가 선생님 강의를 띄워 보려고 이렇게 준비하고 있습니다.”
 “······!”
 책상에 펼쳐진 종이. 거기에는 빼곡하게 박호수의 강의 내용이 적혀 있었다.
 박호수가 더듬더듬 물었다.
 “이걸 일일이 타이핑했나요?”
 일단 어떻게든 설득하고 싶어서 꺼내 들었는데 그게 박호수 강사에게는 새롭게 다가왔나 보다.
 “네, 선생님 강의를 제가 연구하고 있었거든요.”
 박호수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연구하고 있다? 사실 엠에듀에서는 내게 전혀 관심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렇게 일일이 타이핑할 정도로 뭔가를 준비하고 있었다니.’
 박호수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런데 아까 파트장에게 전화받았을 때는 해지하자고 말하던데······.”
 파트장에게까지 전화를 받았다는데 뭐라고 말해야 할까?
 고민은 짧았고 허세는 강했다.
 “파트장이 잘 몰라서 그래요.”
 미쳤다. 하늘과 같은 직속상관을 무시하고 나섰다.
 이준일은 ‘대일 스터디가 채 가려고 하던 강사를 잡는 일이니까 나중에 잘되면 좋잖아?’라고 스스로를 납득시켜 버렸다.
 박호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이준일 씨라고 했죠? 제가 뭐라고 불러야 하나요?”
 직책을 물어보는 것이다.
 이럴 때 ‘네! 신입 인턴 이준일입니다!’라고 말하면 말짱 도루묵.
 또 허세로 가득한 말이 터져 나왔다.
 “하하하, 나중에 천천히 아시면 됩니다. 살짝 말씀드리자면 대표님 아버지의 옷을 제가 입었던 사이?”
 이준일은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자세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을 뿐이지.
 박호수 강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헷갈립니다. 실무진에서 반대하고 있는데, 제가 가서 뭘 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사실 다른 곳에서 좋은 조건으로 제의받았거든요.”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다?
 극비로 이뤄지는 사항인 줄 알고 있는데, 알고 있다니?
 박호수의 눈이 가만히 이준일을 바라봤다.
 ‘대표이사 아버지 옷을 입었던 사이라면······. 아냐, 대표이사가 이만한 아들이 있을 나이는 아니잖아? 그럼 형제? 늦둥이? 도대체 이놈은 뭐야? 아니면 그냥 알고 있다고 떠보는 건가?’
 그가 생각을 이어 가고 있을 때, 이준일이 말했다.
 “제가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하지는 못하지만 매출로 결과를 내 드릴게요.”
 박호수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그럼 어떤 방식으로 할 건지 말씀해 주실 수 있나요?”
 “네! 다음 주 월요일에 다시 찾아뵙도록 할게요.”
 자신 있게 말하긴 했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방법은 없었다.
 일단 때려 놓고 본 것.
 ‘그래, 사람은 살면서 가끔 이렇게 무모한 짓도 해 봐야 하는 거야.’
 
  * * *
 
 이준일은 버스를 타고 집 앞에서 내렸다.
 하지만 향한 곳은 집이 아니라 단골 실내 포장마차였다.
 “준일 총각, 입사하더니 얼굴이 좋아졌네.”
 “얼굴은 원래 좋았죠.”
 사장 아주머니의 인사를 들으며 이준일은 자리에 앉았다.
 잠시 후, 주소요가 들어왔다.
 퇴근하고 대충 트레이닝복만 입은 채 터덜터덜 들어온 그녀.
 “화장은 좀 하고 다니지 그러냐?”
 “너 만나는데 내가 화장을 왜 해? 그리고 부대찌개 콜했다. 말 바꾸지 마라.”
 “부대찌개 받고 계란말이까지 추가하자.”
 주소요가 이준일을 이상하게 바라봤다.
 “뭘 또 빼먹으려고 계란말이를 추가하고 있어?”
 참, 눈치 빠른 친구였다.
 이준일은 어색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내가 또 사고를 쳤거든.”
 “······.”
 방금 박호수 강사를 만나러 가면서 사고를 쳤다고 말했던 이준일이 그사이에 또 사고 쳤다는 말에 주소요는 말을 듣지도 않고 한심하다는 듯 고개부터 저었다.
 하지만 이준일은 표정의 변화 없이 박호수 강사와 있던 일련의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주소요는 ‘에휴.’ 하고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어서 방법을 말해라, 친구여. 이 업계에서는 네가 닳고 닳은 팀장이니 난관을 헤쳐 나갈 방법이 있을 거 아냐?”
 “없어.”
 “계란말이 취소한다.”
 “있어.”
 잠시 생각에 빠졌던 주소요가 입을 열었다.
 “너 왕따지?”
 “인간은 원래 혼자 살아가는 동물이야.”
 “그럼 미친 척 한번 저질러.”
 “응? 뭘 저질러? 이미 저지르고 있는데.”
 주소요가 심각한 얼굴로 잔에 소주를 채우더니 말을 이었다.
 “지금 보면 너 인턴 통과 못 하거든.”
 이준일이 어색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어떻게든 살아 보겠다고 발버둥 치는 친구에게 비희망적인 이야기를 대놓고 하다니, 넌 정말 최고로 멋진 친구야.”
 주소요는 이준일의 말을 신경 쓰지 않고 계속 입을 열었다.
 “일거리 안 주고, 가르쳐 주는 것 없고, 복사나 종이 파쇄하는 것만 시키지?”
 이준일은 눈을 깜빡였다.
 ‘헐······ 우리 회사 CCTV 보안이 뚫렸나? 어떻게 보지도 않고 이렇게 세세하게 말을 할 수 있지? 아, 아니다. 복사나 파쇄도 안 하고 가만히 앉아만 있구나. 다행이다. CCTV 안 뚫렸네.’
 주소요가 계속 말을 이었다.
 “거기 팀장은 너를 보면서 어차피 내보낼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어. 가르칠 필요가 없으니까 잡무만 시키는 거고.”
 눈치가 없는 이상 조금은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말을 들으니 가슴이 아팠다.
 주소요가 말했다.
 “네가 회사에 남아 있으려면 방법은 하나야. 팀장의 눈이 아니라 그 윗선의 눈에 드는 것.”
 ‘그게 쉬우면 내가 이러고 있겠냐? 그리고 박호수 강사 어떻게 할 건지 물어봤더니 왜 아픈 이야기만 하고 있어?’
 “박호수 강사를 네가 메이킹해 봐.”
 “내가?”
 “이미 일은 벌어졌잖아. 완전 또라이 한번 되는 거야. 미안. 이미 또라이구나.”
 “또라이라니······.”
 이준일은 ‘이모, 계란말이 취소요!’라고 말하고 싶은 심정을 꾹 눌러 참았다.
 주소요가 말을 이었다.
 “아까 집에 와서 너 기다리면서 박호수 강사 맛보기 강의 들어 봤거든. 완전 졸리더라. 90년대 화학 선생님 이미지였어. 그걸 싹 바꿔서 다시 촬영 들어가고 올리는 거지.”
 “그걸 내가 어떻게 해?”
 “또라이니까?”
 “또라이, 또라이 하지 마. 듣는 또라이 기분 나쁘니까.”
 장난처럼 이어진 대화였지만 이준일은 뭔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 * *
 
 다음 날.
 이준일은 회사에 출근해서 박주은 파트장에게 다가갔다.
 “어제······ 박호수 선생님 만나고 왔습니다.”
 “아, 그래요? 뭐라고 그러세요?”
 “조금 생각해 보겠다고 합니다.”
 이준일은 봤다, 박주은 파트장의 이마에 심줄이 솟아나는 걸.
 매출이 안 나와 골치 아픈 강사가 알아서 나간다고 하는 걸 왜 잡았냐고 하는 얼굴이었다.
 어쩔 수 없는 반응이라는 걸 안다.
 내가 박주은 파트장의 위치였다고 해도 같은 반응을 했을 거다.
 이준일은 꾸벅 인사하고 자리에 가서 앉았다.
 헤드셋을 끼고 박호수 강사의 강의를 들으려고 하는데 박주은 파트장이 입을 열었다.
 “이봐요, 이준일 씨.”
 차가운 목소리였다.
 “팀에서는 박호수 선생님을 제외시키도록 결정이 났어요. 그러니까······.”
 이준일은 한숨을 내쉬었다.
 주소요가 난처해질 수도 있으니 대일 스터디에서 데리고 가려 한다는 말은 할 수가 없고, 일기장에서 봤다는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답답하기만 했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친 이발사의 마음이 이런 거구나 하고 느끼고 있었다.
 한참 잔소리를 듣고 난 후에 이준일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다음 주 금요일까지만 시간을 주십시오.”
 “마음대로 하세요. 말을 듣지도 않는데 알아서 잘하겠죠. 괜히 박호수 선생님하고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나면 책임져야 할 거예요.”
 박주은 파트장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하고 모니터로 시선을 옮겼다.
 그녀의 분위기를 보고 있자니 주소요가 했던 가슴 아픈 말이 떠올랐다.
 
 -어차피 내보낼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어.
 
 이준일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직원이 되려면 팀이 아니라 그 위의 눈에 들어야 한다.
 이준일은 일단 박호수 강사의 전 강의를 직접 써 보기로 했다.
 하지만 쉽지 않은 일이었다.
 퇴근할 때까지 타이핑을 했고 집에 와서도 했다.
 박호수 강사의 강의를 모두 받아 적은 후에는 비록 과학이 아니라 수학이었지만 엠에듀 매출 최고 강사의 강의 역시 토씨 하나 빼놓지 않고 농담까지 적었다.
 그렇게 모든 타이핑이 끝난 것은 토요일 늦은 오후였다.
 어렴풋이 느껴졌던 장점과 단점이 확실히 눈에 들어왔다.
 박호수 강사의 장점은 화학 전공자다운 전문성과 강의의 깊이.
 단점은 재미가 없다는 것.
 매출 1타 강사와 비교해 보자 확연히 그게 더 드러났다.
 그리고 목소리마저 목욕탕집 아저씨의 중저음 목소리이니 집중하기도 힘들었다.
 하지만 강의의 깊이에 재미까지 붙는다면 분명 해볼 만한 싸움일 텐데······.
 
  * * *
 
 그리고 월요일이 되었다.
 이준일은 퇴근 후, 박호수 강사를 찾아갔다.
 이준일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문제만 찾았지, 해결 방안을 찾지 못했으니까.
 박호수 강사의 수업이 끝나지 않은 시간이라 잠시 커피숍에 앉아 시간을 보냈다.
 대치동의 학원가에 있는 커피숍에는 학생들도 많았고 아이들의 수업이 마치기를 기다리며 모여서 수다를 떠는 엄마들도 많았다.
 언젠가 들어 본 적이 있었다.
 ‘돼지 엄마’. 뚱뚱해서가 아니라 치맛바람을 일으켜 학원을 결정하고 다른 엄마들의 중심이 되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었다.
 이준일의 뒤에 앉아 있는 엄마들 중에도 그 ‘돼지 엄마’가 존재했다.
 학원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어서인지 솔깃 귀가 쫑긋해졌다.
 “우리 애가 사회는 이필 아카데미, 박동세 선생님 거 듣잖아. 재미는 없는데, 그 선생님 걸 이해하면 사탐은 만점이래.”
 “진짜?”
 재미는 없는데 이해하면 만점?
 ‘어쩐지 비슷한데?’
 순간 이준일의 눈이 반짝였다.
 그는 서둘러 가방에서 노트를 꺼냈다.
 이것저것 적어 보고 끄적이는 그의 눈이 빛났다.
 
  * * *
 
 시간에 맞춰 올라가자 박호수가 먼저 미팅실에 앉아 있었다.
 “하하, 먼저 와 계셨네요.”
 기분 좋은 인사에 박호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럼 말씀해 주십시오.”
 자리에 앉아 다시 두꺼운 종이를 꺼내 들었다.
 모두 박호수가 지금까지 했던 강의 내용이었다.
 “이건 제가 받아 적은 건데요. 모두 폐기하겠습니다.”
 “네? 폐기하다뇨?”
 “강의를 완전히 바꿔서 새로 촬영하면 어떨까요?”
 새롭게 촬영한다?
 “그러니까 선생님은 대마왕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일명, ‘끝판왕’. 옷도 이렇게 입고요.”
 카페에서 끄적였던 그림을 보여 줬다.
 드라큘라 백작 옷 같은 것을 입고 있는 남자.
 분명 그림은 잘 그리지 못했지만 알아볼 수는 있었다.
 “이······런 걸 입고 강의를 하라고요?”
 “네, 중하위권 학생들을 대상으로요. 첫 번째 강의를 듣고 문제를 풀면 두 번째 강의를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생기는 거예요. 그렇게 끝까지 풀면 나도 화학 만점! 선생님 목소리도 중후하니까 딱 마왕에 어울리지 않나요?”
 이준일은 슬쩍 박호수 강사의 표정을 살폈다.
 ‘너무 나갔나? 50대 아저씨에게 마왕 복장을 하고 강의를 하라고 했으니······.’
 아니나 다를까, 박호수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박호수는 가만히 이준일을 바라봤다.
 그는 20년 정도 강단에 있었다.
 많은 학생들을 지켜봤다.
 그래서 학생이 질문 하나 하는 것만 봐도 수준을 파악하는 것은 물론 어느 대학에 갈 수 있을지 예상할 수 있었다.
 많은 사람들을 겪으며 사람을 볼 수 있는 눈이 생긴 것이다.
 하지만 지금 앞에 있는 이준일이라는 사람은 도무지 파악이 안 됐다.
 ‘도대체 뭘 하는 사람이지? 뭘 믿고 이러는 거지?’
 박호수의 눈이 이준일이 가지고 온 종이 뭉텅이로 향했다.
 자신의 강의를 일일이 타이핑했다는 지극정성.
 ‘내가 대일 스터디에 가면 어떻게 될까?’
 아무래도 1타가 될 자신은 없었다.
 ‘거기서나 여기서나 똑같지 않을까? 그러면 차라리 나를 이렇게까지 인정해 주는 사람이랑 같이 있는 게 좋지 않을까?’
 박호수의 눈은 이번엔 이준일이 그려 온 마왕 복장을 바라봤다.
 ‘마왕이라······.’
 온라인 강의 1세대 중에서 도끼를 들고 나온 강사가 있었다.
 특이한 행동과 쉬운 강의로 대히트를 쳤던 것이 기억났다.
 물론 그 시절과 지금은 다르다.
 하지만 이준일이 그려 온 마왕 복장 역시 다른 강사들과 달랐다.
 ‘마지막으로 모험을 걸어 봐?’
 생각을 마친 박호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 목소리는 발성 연습을 하다가 이렇게 되었어요. 아, 대학 시절에 연극을 했거든요. 그때 했던 배역이 마왕이었는데 나이 오십에 다시 마왕을 만나게 되다니 느낌이 나쁘지 않네요.”
 “연극을 하셨다고요?”
 “네, 똑같이 마왕 배역이었고요.”
 “그럼······ 연기도 잘하시겠네요?”
 “네? 연기요?”
 박호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의 눈에는 ‘마왕 배역을 맡았다고 했을 뿐인데 이번엔 연기를 물어봐? 도대체 뭐 하는 놈이야?’라는 말이 적혀 있는 것 같았다.
 이준일이 말을 이었다.
 “그럼 제가 대마왕으로 한번 준비해 볼게요. ‘대마왕 박호수’ 어때요?”
 박호수는 황당한 표정으로 바라봤고 이준일은 슬며시 미소 지었다.
 이준일은 수첩을 꺼내 일정을 확인한 후 말했다.
 “녹화는 내일모레. 스케줄 어떠세요?”
 “내일모레? 너무 급박하지 않아요?”
 이준일이 고개를 저었다.
 “저도 촬영한 후 위에 보고해야 하고, 만약에 잘 안 될 경우에 선생님은 스카우트되셨다는 곳으로 아무렇지 않게 가셔야 할 거잖아요. 그러려면 빠르게 움직여야 해요.”
 박호수 강사가 의아한 눈으로 이준일을 바라봤다.
 “지금 나를 생각해 주는 겁니까?”
 “다 잘되면 좋으니까요.”
 박호수 강사는 이준일을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회사와 강사의 관계는 엄연히 계약일 뿐이다.
 지금까지 박호수 강사가 만난 회사원들은 자기의 안위만 생각했지, 강사의 걱정까지 하는 사람은 만나 보지 못했다.
 하지만 이준일은 달랐다.
 박호수 강사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박호수 강사는 생각 이상으로 쉽게 설득했다.
 이제 그다음 일을 진행할 차례였다.
 이준일은 집에서 다시 밤을 새우기 시작했다.
 박호수 강사가 지금까지 했던 강의 내용, 일종의 대본이라고 볼 수 있는 것 중에서 꼭 필요한 내용에만 붉은 표시로 밑줄을 그었다.
 회사에서도 그 일은 계속되었다.
 가만히 이준일이 하는 걸 보고 있던 박주은 파트장이 진세현 팀장에게 다가갔다.
 “이준일 씨가 진짜 뭔가를 하려고 하는 것 같은데요?”
 “놔둬. 인턴이 사고 치고 내가 한번 욕먹으면 되는 거야. 가만히 있다가 자르면 우리도 마음이 편치 않은데 차라리 잘된 거 아냐?”
 “박호수 선생님은 어떻게 하죠?”
 “계약 해지까지 2주 남았지? 그 안에 인턴이 뭘 보여 줄 수 있을 것 같아?”
 “아뇨.”
 그들이 대화하고 있을 때, 이준일이 갑자기 전화를 들어 올렸다.
 “촬영 팀이죠? 과학 1파트 이준일인데요. 내일 촬영 스케줄을 잡을 수 있을까요?”
 그 모습을 보던 진세현 팀장이 화를 냈다.
 “이준일 씨, 지금 뭐 하는 거예요?”
 동시에 수화기 안에서도 쌍욕이 흘러나왔다.
 -아니, 갑자기 스케줄을 어떻게 잡아요! 지금 장난합니까? 과학 1파트 이준일 씨, 그게 누구지? 뭐? 인턴이라고? 인턴? 이런 미친 ××××××××××××××.
 이준일은 양쪽에서 쌍욕을 먹었다.
 딸칵.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이준일은 멍하니 진세현을 바라봤다.
 무서운 눈으로 이준일을 노려보고 있는 그녀가 입을 열었다.
 “이준일 씨, 보고할 줄 몰라요?”
 다른 팀과 연계성이 있는 일을 하기에 인턴에게는 아무 힘도 없었다.
 진세현이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준일 씨, 제발, 아무 일도 하지 마세요. 그냥 가만히 있다가 퇴근하세요.”
 팀의 분위기는 싸늘해졌다.
 파티션 너머의 다른 팀들이 흘끗흘끗 한심한 눈으로 이준일을 바라봤다.
 다행히도 욕먹었다고 위축되지는 않았다.
 지금 문제는 이 난관을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하는 것이다.
 박호수 강사와 약속한 것은 내일.
 시간이 없었다.
 이준일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서 고개를 숙이고 시무룩하게 사무실을 벗어났다.
 그의 뒷모습을 보던 진세현이 머리를 쓸어 넘겼다.
 “인사과에서는 저딴 걸 우리 팀에 보냈다고? 또라이 아냐!”
 그녀의 목소리가 사무실을 울렸다.
 그 목소리는 밖으로 걸어가던 이준일의 귀에도 흘러왔다.
 ‘또라이?’
 이준일의 고등학교 때의 별명이 진짜 또라이.
 대학 때의 별명이 레알 또라이.
 ‘회사에 와서도 또라이로 불리는구나. 그래, 나 또라이다.’
 ‘또라이’라는 별명은 이상한 행동을 해서가 아니라 하나를 물면 미친 듯이 파고드는 이상한 집념 때문에 생긴 것이었다.
 그리고 이준일에겐 지금 촬영 팀과의 내일 스케줄이 걸려 있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촬영 팀이 있는 6층을 꾹 눌렀다.
 전화로 업무 연계를 이끌어 낼 수 없다면 직접 찾아간다.
 지금 이준일에게는 그 방법밖에 없었다.
 잠시 후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이준일은 촬영 팀을 찾아 이동했다.
 한 층을 전부 스튜디오로 사용하고 있는 촬영 팀.
 이준일의 앞으로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이 보였다.
 멀리 칠판을 만들어 강의실처럼 만들어진 세트장에서 한 강사가 서서 열심히 촬영하기도 했다.
 두리번거리던 이준일은 수능 촬영 팀장을 찾아갔다.
 “안녕하세요? 이준일입니다.”
 턱에 털이 삐죽삐죽 튀어나와 산적처럼 생긴 촬영 팀장의 눈이 무섭게 이준일을 노려봤다.
 “누구요?”
 “방금 전화드렸던 이준일요.”
 “어이가 없구먼.”
 촬영 팀장이 고개를 저으며 다시 이준일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고개를 저었다.
 “연식이 좀 있어 보이는데?”
 인턴이라고 했는데 나이가 있어 보이는 얼굴에 물어본 말이다.
 이준일은 잠시 자신의 소개를 하고 촬영 팀장에게 고개를 숙였다.
 “일단 멋대로 연락드린 점, 죄송합니다. 박호수 선생님 촬영을 해야 하는데 스케줄 잡기가 여의치 않아서요.”
 벅호수라는 말에 촬영 팀장의 입이 멈칫거렸다.
 “누구? 박호수 선생님? 그 선생님 그만두기로 한 거 아녜요?”
 엠에듀에는 많은 직원들이 있었지만 소문은 빨랐다.
 “네, 우리 팀에서도 그렇게 결정이 난 것 같은데······.”
 촬영 팀장의 입가에 또다시 어이없다는 미소가 걸렸다.
 “그러니까 팀장이 접으라고 한 사람을 인턴이 보기에는 잡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건가요?”
 “네?”
 “말이 그렇잖아요. 팀장이랑 파트장은 얼간이고, 이제 막 들어온 인턴이 볼 때는 박호수 강사를 잡아야 한다 이거잖아요?”
 “······.”
 이준일은 별의별 생각을 다 하기 시작했다.
 ‘아, 이거 틀렸나? 촬영 팀장의 이죽거리는 표정을 보고 있으면 안 해 줄 것 같은데. 어쩌지? 내가 핸드폰이라도 들고 가서 강의를 찍어야 하나? 핸드폰으로 영화도 찍고 했다며? 안 될 것은 없잖아?’
 굳은 표정의 이준일을 보며 촬영 팀장이 픽 웃었다.
 “그런데 나도 그렇게 생각해. 박호수 선생은 뭔가 아쉬워. 뭐 하나만 있으면 뜰 것 같은데 그게 안 되고 있으니까.”
 “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그쵸? 저도 그렇게 생각하거든요.”
 촬영 팀장이 손가락 하나로 옆머리를 긁적였다.
 “그런데 기획 팀이 우선이기 때문에 내가 뭘 생각하든 상관은 없는 거지. 매출을 만들어야 하는 건 그쪽이고, 우리는 촬영만 하면 되니까요.”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박호수 강사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을 만났다는 건 좋은 징조였다.
 잠시 이준일을 보던 촬영 팀장이 말을 이었다.
 “그럼 팀장을 무시하고 여기까지 나타난 인턴이 생각한 걸 말해 봐요. 똑같은 강의를 다시 찍는다는 헛소리를 지껄이면 창문 밖으로 집어 던질 테니까, 말 잘해라.”
 어설프게 존댓말을 섞어 쓰던 촬영 팀장은 이내 반말을 하기 시작했고, 이준일은 그의 말이 마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이상하게 듣지 말아 주세요. 대마왕을 하려고 합니다.”
 이렇게 말한다고 이상하게 안 들을 사람이 어디 있을까?
 촬영 팀장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뭐? 대마왕?”
 “네, 제가 박호수 강사님을 화학의 끝판왕으로 만들 거예요. 대마왕.”
 이준일의 설명이 이어졌다.
 “대마왕이라······. 대마왕.”
 촬영 팀장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이내 끄덕이며 말했다.
 “좋아.”
 촬영 팀장의 나이는 마흔, 이름은 최지호. 영화판을 전전하다가 여기까지 흘러들어 온 사람이었다.
  * * *
 
 다음 날, 퇴근 시간이었다.
 다른 팀원들은 중간고사 일정으로 정신이 없는 사이, 이준일은 얄밉게 먼저 퇴근했다.
 계속 있어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고, 있다고 해도 할 일도 없었으며, 무엇보다 지금 이준일에게는 중요한 일이 있으니까.
 이준일이 간 곳은 대치동 학원가였다.
 그 앞에는 먼저 도착한 촬영 팀장과 함께 촬영 장비가 내려지고 있었다.
 이준일은 주먹을 꽉 쥐었다.
 ‘이게 뜨면 정규직, 망하면 다시 취업 준비생.’
 해내야만 했다.
 이준일은 천천히 학원 건물로 올라갔다.
 비어 있는 강의실을 촬영 장소로 택했고, 박호수 강사가 붉은색과 검은색이 어우러진 마왕 옷을 입고 부끄러운 듯 등장했다.
 촬영 팀장이 박호수 강사를 보며 말했다.
 “선생님, 아주 보기 좋은데요.”
 긴장을 풀어 주기 위한 말이었다.
 “하하, 그런가?”
 박호수 강사가 어색하게 웃을 때, 이준일이 그 앞으로 다가가 말했다.
 “선생님이 강의하실 대본요.”
 “대본?”
 “네, 제가 선생님 강의 내용을 짜깁기했어요. 재밌는 말도 넣었고요. 잠깐 읽어 보시고 앞에 스크린에 쏠 테니까 중간중간 보면서 하세요.”
 박호수는 대본을 들고 가만히 바라봤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이준일 씨를 믿기로 했으니까 가 봅시다.”
 “감사합니다.”
 이준일은 뒤로 빠졌다.
 촬영 팀장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금 박호수 선생님이 너 믿는다고 했냐?”
 “네, 그렇게 말씀하셨네요.”
 “너 솔직히 말해. 인턴인 거 숨기고 사기 쳤지?”
 걸렸다.
 “숨기지는 않았고요. 그냥 말을 안 했어요.”
 “그게 그거지.”
 촬영이 시작되었다.
 “나는 대······ 대마왕이다! 하하하하하하!”
 굵은 중저음의 목욕탕 목소리를 가진 50대 남자가 검은 옷과 붉은 망토를 걸치고 머리에 뿔까지 쓴 채 강의를 시작했다.
  * * *
 
 그렇게 촬영이 끝나고 촬영 팀장이 이준일에게 USB 하나를 건넸다.
 “편집은 일단 패스. 거기까지 하기엔 우리 인력이 모자라. 여기까지 몰래 도와준 것도 힘들었어. 나중에 잘되면 술이나 한잔 사라.”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했다.
 만약 도와주지 않는다고 하면 카메라라도 빌려 올 생각으로 갔던 이준일이었는데 이렇게 촬영까지 가능하게 되었다.
 촬영 팀장이 물었다.
 “그런데 이제 어떻게 할 거야?”
 “하하. 진세현 팀장님께 진짜 미움받아 보려고요.”

이용약관 유료이용약관 개인정보처리방침 청소년보호정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