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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로가기버튼 대붕신화 [E]

대붕신화 1권 (1)

2018.03.05 조회 2,126 추천 23


 #귀갑지주
 
 
 
 백가장白家莊의 태상장주인 백운경白雲鏡은 서안書案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있는 손자 백검휘白劍輝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야말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자 놈이었지만, 적어도 지금 이 순간 백검휘를 바라보는 백운경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그 이유는 백검휘가 학문에 뜻을 두고 무공 연마를 등한시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가인 백가장의 소장주로서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고, 백운경은 그를 바로잡고자 백검휘를 불러 앉힌 채 사뭇 무거운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는 것이다.
 한참을 말없이 바라보며 무언의 압박을 가하던 백운경이 이윽고 입을 열었다.
 “이 할아비가 왜 너를 부른 것인지 그 연유를 아느냐?”
 “어느 정도 짐작 가는 바가 있습니다.”
 침잠된 분위기에 안절부절못할 법도 하건만 전혀 초조한 기색을 드러내지 않은 채 백검휘가 대답했다.
 그 모습이 괜스레 괘씸하게 느껴진 백운경이 한층 엄중해진 목소리로 물었다.
 “짐작 가는 바라. 그것이 무엇이냐?”
 “제가 무공 연마에 힘쓰지 않는 것 때문이라 생각했습니다.”
 “잘 알고 있구나.”
 “송구하나 할아버님께서 소손을 못마땅해하시는 눈으로 보실 이유는 그것밖에 없으니까요.”
 “대답하는 모양을 보니 네 잘못은 없다 여기는 것 같구나.”
 “사내로 태어나 입신양명立身揚名하는 것이 큰 효 중에 하나라 배웠습니다. 그것을 위해 열심히 공부하는 것이 어찌 잘못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네가 효를 행한다 하니 이 할아비가 묻겠다. 효를 행하는 방법에 있어 양지養志를 모르지는 않겠지?”
 효를 행하는 것이라는 백검휘의 말에 ‘이놈 잘 걸렸다.’ 하는 표정으로 백운경이 양지에 관해 묻자, 백검휘는 반대로 아차 하는 표정을 지으며 답을 했다.
 “소손의 배움이 깊지는 않으나, 항상 부모의 뜻을 받들어 마음을 기쁘게 해 드리는 효행이 양지지효養志之孝라 알고 있습니다.”
 “효를 행하는 방법이 여럿 있지만, 그 근본이 되는 것은 양지이니라. 즉, 부모의 뜻을 받들어 마음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이 으뜸이라는 것이다. 입신양명도 따지고 보면 그것을 위한 한 가지일 뿐이다. 너는 입신양명이 효를 행하는 것이니 그것을 위해 힘을 쏟는다고 말하나 그것은 네 입장에서만 효일 뿐 그것을 받는 부모의 입장에서는 효가 아니다. 그것은 네 부모의 뜻과 어긋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할아비의 뜻과도 어긋나는 것이고 말이다. 너는 그것을 어찌 생각하느냐?”
 백운경은 자신의 말에 억지스러운 점이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으나, 백검휘를 설득하기 위해서는 이보다 더한 억지도 부릴 수 있었다.
 “할아버님의 말씀이 틀리지 않음을 소손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자식이 부모에게 효를 행하듯 부모 역시 자식의 뜻을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자식의 생각이 잘못이라면 그것을 바로잡아야 하겠지만, 제 생각이 과연 잘못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학문을 닦아 입신양명하는 것은 작게는 부모에게 효도를 행하고 가문의 이름을 천하에 알리는 것이며 크게 보면 나라에 충을 행하는 것이라 할 수 있으니, 궁극적으로 보면 양지지효에 못지않은 것이라 감히 소손은 생각하고 있습니다.”
 “네 이놈! 누가 할아버님에게 꼬박꼬박 말대꾸하라고 가르쳤느냐?”
 백검휘의 정연한 대답에 지금껏 석상처럼 가만히 앉아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던 백석군白晳君의 호통이 터져 나왔다.
 그는 백검휘의 아버지로 백운경에게는 아들인 동시에 현 백가장의 장주이기도 했다.
 “틀린 말도 아니니 그만해라.”
 “아버님!”
 “됐다.”
 “휘야!”
 백운경은 백석군을 만류하고는 백검휘를 은근한 목소리로 불렀다.
 “네, 할아버님.”
 더없이 진중해진 백운경의 부름에 백검휘가 살짝 긴장한 목소리로 대답하며 허리를 꼿꼿이 세운다.
 백운경이 그 모습을 눈에 담으며 말했다.
 “너의 말도 일리가 있으니 그것을 가지고 더는 말하지 않도록 하마. 하나 그렇다고 해서 너의 행동을 묵과할 수만은 없구나.”
 ······.
 “네가 가문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무엇이더냐?”
 “소장주의 신분이옵니다.”
 “소장주라 함은 앞으로 한 가문을 이끌어 나가야 할 책임을 가짐을 모르지는 않겠지?”
 “그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 소장주의 신분은 제가 바란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지금 네가 한 말은 그냥 넘길 수 없는 것임을 아느냐?”
 높지는 않으나 위엄이 서린 백운경의 목소리에 백검휘는 순간적으로 움찔하며 급히 대답했다.
 “소, 소손이 감히 실언을 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할아버님.”
 “소장주의 신분은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내팽개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다시 한 번 그따위 말을 한다면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명심해라.”
 “명심하겠습니다, 할아버님.”
 엄중히 경고를 한 백운경은 한결 부드러워진 얼굴로 다시 말을 이었다.
 “후우, 네가 백가의 피를 이어받은 것이 하늘의 뜻이 듯 백가장의 소장주가 된 것 역시 네 운명 중 하나다. 그 운명을 받아들일지 받아들이지 않을지는 네가 결정할 일이다만, 이것 한 가지는 명심해라. 소장주의 신분이라는 것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다. 너를 믿고 따르는 수많은 식솔들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네 결정 하나에 그 수많은 사람들의 운명이 결정된다는 것 또한 알아 두어야 할 것이다. 이것을 잘 생각해 봐라. 그리고 지금 네가 무공을 등한시하는 것이 앞날에 어떤 결과를 초래할 것인지도 아울러 생각해 보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할아버님.”
 “이 할아비가 너의 마음을 모르는 것이 결코 아니다. 하지만 백가장의 태상장주로서 너의 마음을 곧이곧대로 받아 줄 수만은 없음을 네가 이해해 주기를 바란다. 지금은 무리일지 모르지만, 시간이 지나면 너도 이 할아비의 의중을 헤아릴 수 있을 것이다.”
 “소손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할아버님.”
 “그래, 그만 물러가도록 해라.”
 백운경의 축객령에 백검휘는 인사를 하고는 운월당雲月堂을 빠져나갔다.
 “저놈이 뜻을 바꿀까요?”
 백검휘가 나가고 나자 백석군이 백운경에게 물었다.
 “생각이 깊은 아이이니 충분히 알아들었을 게다.”
 “제 선에서 해결해야 하는 일인데, 괜히 아버님까지 나서시게 만들어 죄송합니다.”
 “누가 하면 어떠냐? 저놈이 생각을 고쳐먹고 무공에 정진하는 것이 중요하지.”
 “후우, 누굴 닮아서 저리 고집이 센지 모르겠습니다.”
 “그 고집이 오히려 나중에는 크게 도움이 될 테니 그리 한숨 쉴 것 없다.”
 고집이 센 만큼 한번 마음을 정하면 웬만해서는 흔들리지 않을 것이고, 그것은 분명 무공 수련에 있어 득이 될 터였다.
 
 백운경으로부터 한 소리를 듣고 운월당을 나온 백검휘의 심정은 당연히 좋지 않았다. 아직은 어린지라 꾸중을 듣는 것이 유쾌하지 않은 것이다. 물론 나이가 들어도 변하지 않는 사실이긴 하지만 말이다.
 사실 백검휘가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면서까지 학문을 익히는 것에 열중하는 것은 그가 말했던 것처럼 입신양명하고자 해서가 아니었다. 그것은 단지 무공을 익히지 않기 위해 억지로 만든 변명 중 하나일 뿐이었다.
 백검휘가 그렇게 하면서까지 무공 대신 학문을 익히려 하는 이유는 그리 심오하지 않았다. 단지 학문을 익히는 것이 무공을 익히는 것보다 재미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그런 단순한 이유로 열중하기 시작한 학문은 시간이 지날수록 그에게는 점점 더 큰 매력으로 다가오고 있었고, 그 반대로 무공에 대한 흥미는 갈수록 떨어지고 있었다.
 하나둘씩 알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를 깨달아 버린 백검휘는 가만히 앉아 기를 느껴 보라는 둥, 하체를 단련한답시고 하고 나면 다음 날까지도 움직이기 힘들게 만드는 마보세를 취하라는 둥 힘든 여러 요구가 달가울 리 없었다. 그러니 재미는 없고 지루한 데다 힘까지 드는 무공 연마는 자연히 등한시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어린 나이에 무공을 익히는 것은 지루하기 짝이 없을뿐더러 고통스러운 점도 많은 것이 사실이었다.
 세상 모든 일에는 기본이 중요했다. 특히나 무공을 익힘에 있어서 기본은 가장 중요했다. 그런데 그 기본이라는 것이 하체를 단련하고 단전을 닦는 등의 일이었으니 재미를 느낄 수 있을 턱이 없는 것이다.
 그래도 아버지인 백석군의 강요에 못 이겨 몸에 내공을 쌓는 심법만은 꾸준히 하고 있었다. 일종의 타협점인 셈이었다.
 단전에 충분한 내공이 쌓이게 되면 몸에 나 있는 길을 따라 그 내공을 움직일 수 있고, 그렇게 되면 할아버지나 아버지처럼 엄청난 힘을 쓸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것이 눈에 띄게 빨리 일어나는 현상도 아닌지라 이래저래 백검휘의 관심은 무공에서 멀어지고 학문 쪽에 가 있었다.
 어쨌든 백운경에게 쓴소리를 들은 후 백검휘로서는 소장주라는 자신의 신분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어리석지 않은 그인지라, 할아버지가 말하는 의도를 모르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무공 연마에 조금 더 신경을 써 볼까?’ 하는 생각을 아주 살짝 가져 보는 그였다.
 조금 힘들지도 모르지만 그 정도는 참고 해 줄 수 있는 백검휘였다.
 아버지인 백석군의 잔소리에는 꿈쩍도 하지 않던 백검휘였지만, 백운경의 말에는 조금이나마 마음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것은 백석군과 비교할 수 없는 연륜에서 우러나오는 백운경의 위엄이 가져온 결과였다.
 “휘 오빠!”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땅만 바라보며 자신의 처소로 돌아가던 백검휘를 누군가 불렀다.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린 백검휘의 시선에 양 갈래로 머리를 땋은 조그마한 여자아이가 보였다. 그와 동시에 시무룩하던 백검휘의 얼굴이 급격히 환해졌다.
 “이게 누구야? 우리 예쁜 혜아네.”
 여자아이의 이름은 백검혜白劍慧였다. 이제 아홉 살인 그녀는 백검휘의 하나밖에 없는 동생이었다.
 “오빠, 할아버지한테 혼난 거야?”
 백검휘에게로 쪼르르 달려온 백검혜가 물었다. 아무래도 조금 전 시무룩해 있던 표정을 본 모양이었다.
 ‘조그만 것이 눈치 하나는 빠르다니깐.’
 “아니야. 혼나긴.”
 내심 움찔한 백검휘는 오라버니로서의 체면이 있는지라 아닌 척 대답했다.
 “난 오빠 표정이 안 좋아 보여서 혼난 줄 알았지, 헤헤.”
 “험험, 근데 여긴 무슨 일이야? 할아버지 보러 온 거야?”
 배시시 웃는 모습이 마치 다 알고 있지만 모른 척해 준다고 말하는 것 같아 백검휘는 헛기침을 내뱉고는 얼른 물었다.
 “아니, 오빠가 여기 있다고 해서 온 건데.”
 백검혜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백검휘는 뭔가를 바라는 듯한 백검혜의 눈빛에서 그녀가 자신과 함께 놀고 싶어 한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었다.
 백검휘가 빙그레 웃고는 물었다.
 “우리 장터에 구경하러 갈까?”
 “정말?”
 “그럼 정말이지. 이 오빠가 언제 거짓말하는 거 봤어?”
 “좋아! 어서 가자, 오빠!”
 “알았으니까 이것 좀 놓고 가자. 너 때문에 걷지를 못하겠잖아.”
 “헤헤, 미안.”
 백검혜는 찰싹 달라붙어 있던 몸을 살짝 뒤로 빼며 천진난만한 웃음을 만들었다.
 백검휘는 그런 백검혜의 머리에 가볍게 손가락을 튕기고는 조그마한 그녀의 손을 잡고 걸음을 옮겼다.
 두 남매가 내원을 벗어나기 무섭게 그들 앞에 흑의 무사가 나타났다.
 그가 백검휘를 향해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한 후 입을 열었다.
 “소장주님, 어디 나가시는 길입니까?”
 “네, 혜아랑 장터 구경 가려고요.”
 “알겠습니다. 가시지요.”
 흑의 무사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앞쪽을 가리켰다. 그러고는 백검휘와 백검혜가 걸음을 옮기자, 곧장 백검휘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그는 백검휘의 일보위사一步衛士 경무옥慶武鈺으로 백검휘가 내원을 벗어나는 그 순간부터 철저히 백검휘의 그림자가 되었다.
 백검휘를 따른 것은 비단 그만은 아니었다. 경무옥의 움직임에 맞춰 곧장 열 명의 십보위사十步衛士들이 따라붙었다.
 백검휘는 백가장의 소장주로 그의 신변은 곧 백가장의 미래와 직결되는 만큼 외출 때마다 철저한 보호가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일이 이미 익숙한지라 백검휘와 백검혜는 그들을 신경 쓰지 않은 채 장원을 나와 장터로 걸음을 재촉했다.
 “오빠, 나 당과 먹고 싶어!”
 장터거리에 들어서기 무섭게 백검혜가 백검휘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말했다.
 “이번에도 당과야?”
 “응, 혜아는 당과가 제일 맛있는걸.”
 “그래, 알았어. 오빠가 꼭 사 줄게.”
 “헤헤, 역시 오빠가 최고야.”
 백검혜는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당과를 사 준다는 말에 웃음을 지으며 좋아했다.
 물론 집에서도 당과를 먹을 수 있었지만, 장터에서 사 먹는 것이 더욱 맛있게 느껴지는 백검혜인지라 장터에 나올 때마다 이렇듯 오빠를 졸라 당과를 사 먹는 그녀였다.
 백검휘는 세상 누구보다 귀여운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는 당과를 파는 곳으로 움직였다.
 온갖 노점들이 길 양쪽으로 늘어서 있는 장터거리는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혜아야,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한번 떨어지면 찾기 어려우니까 오빠 손 꼭 잡아야 돼.”
 “걱정하지 마, 오빠!”
 백검혜는 힘차게 대답하고는 백검휘의 손을 잡고 있는 자신의 손에 힘을 주었다.
 백검휘는 오빠답게 백검혜를 챙기면서 당과를 파는 노점을 찾아 움직였다.
 그리고 잠시 후 백검혜의 손에는 당과가 쥐여 있었다.
 백검혜에게 당과를 사 준 백검휘는 본격적으로 장터거리를 구경하기 시작했다.
 “오빠, 저쪽으로 가 보자.”
 “그럴까.”
 백검휘는 백검혜가 가리키는 곳으로 이동했다.
 그곳에서 한참을 구경하다가 지겨워지면 다른 곳으로 가고 다시 다른 곳으로 가는 것을 반복했다.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구경하던 백검휘는 장원을 나온 지 이미 상당한 시간이 흘렀음을 느끼고는 다른 쪽으로 가려는 듯 몸을 돌리는 백검혜를 붙잡았다.
 “혜아야, 이제 집으로 돌아가자.”
 “벌써? 조금만 더 보고 가자, 오빠!”
 “안 돼! 어른들이 걱정하시니까 오늘은 그만 돌아가야 돼. 다음에 또 데리고 올 테니까 오늘은 그만 가자.”
 “히잉, 알았어.”
 “우리 혜아, 착하기도 하지.”
 백검휘는 백설기처럼 새하얗고 말랑말랑한 백검혜의 볼을 살짝 잡아당겼다가 놓고는 다시 백검혜의 손을 잡았다.
 그렇게 두 사람이 남매간의 애정을 한껏 드러내며 장터거리를 빠져나오는 가운데 돌연 앞쪽에서 소란이 일었다.
 정체불명의 인물들이 백검휘의 전면에 배치된 십보위사를 공격해 온 것이다.
 차창!
 “습격이다! 소장주님을 보호하라!”
 전면의 십보위사가 정체불명의 적들의 공격을 막는 사이, 백검휘의 바로 뒤쪽에서 그림자처럼 따르던 일보위사가 다급히 외쳤고, 그 외침에 십보위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백검휘 남매를 원형으로 에워쌌다.
 갑작스럽게 일어난 칼부림에 장터거리를 오가던 사람들이 혼비백산하여 비명을 지르며 거리 좌우의 점포 안으로 도망쳐 들었다. 그로 인해 습격을 가한 정체불명의 인물들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귀혈방鬼血幇!”
 그 수는 스물에 달했는데, 그들의 면면을 살피던 일보위사 경무옥이 무거운 음색으로 그들의 정체를 흘려 냈다.
 “오빠!”
 갑작스러운 상황에 두려움을 느낀 백검혜가 몸을 떨며 백검휘에게 바짝 달라붙었다.
 “괜찮아, 걱정할 것 없어.”
 백검휘는 미소 띤 얼굴로 백검혜를 안심시키고는 원형진을 구축한 십보위사를 앞뒤로 포위한 무리를 쏘아보았다.
 귀혈방은 백가장과 견원지간으로 백검휘 역시 잘 알고 있는 곳이었다.
 무창武昌의 백가장과 한양漢陽의 귀혈방은 장강의 수운水運을 놓고 지난 수십 년간 다툼을 벌여 왔는데, 최근에 이르러 백가장이 무한삼진의 장강 수운을 장악하며 귀혈방의 세가 크게 위축된 상태였다.
 그런 가운데 백가장의 소장주인 백검휘를 습격했다는 것은 그를 인질로 삼아 장강 수운의 지배권을 되찾겠다는 심산이 분명했다.
 ‘누가 사파 아니랄까 봐 하는 짓이 아주 졸렬하군.’
 백검휘가 내심 중얼거리는 사이 귀혈방 무리가 십보위사들을 앞뒤로 공격해 들었다.
 백가장 내에서도 상위의 실력자들인 십보위사들은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귀혈방 무리의 공격을 어렵지 않게 막아 내고 있었다.
 그렇듯 상황이 나쁘지 않음에도 백검휘의 옆에 그림자처럼 붙어 있는 일보위사 경무옥의 표정은 썩 좋지 못했다.
 그것은 아직 움직이지 않고 있는 귀혈방의 두 사람 때문이었다. 이십 대 중반의 백의 사내와 삼십 대 중반의 적의 사내였는데, 경무옥도 잘 아는 자들이었다.
 단지 얼굴만으로도 신분을 알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요주의 인물이라는 의미였다.
 실제로도 그랬다. 백의 사내는 귀혈방의 소방주인 교금천喬錦이었고, 적의 사내는 귀혈방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고수인 광혼귀狂魂鬼 맹사도孟謝睹였다. 이 두 사람 모두 경무옥이 쉽게 상대할 수 없는 고수들이었다.
 경무옥은 교금천과 맹사도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지금 상황에서 백검휘의 안위를 확보하기 위한 최선이 무엇일지 생각했다.
 경무옥은 교금천과 맹사도를 상대로 자신이 버틸 수 있는 한계를 최대 십 초로 예상했다. 십보위사의 도움을 받는다고 해도 삼십 초 이상은 버티기 어려울 것이라 생각했다. 즉, 교금천과 맹사도가 움직이면 그와 십보위사는 버티지 못할 테고, 그렇게 되면 백검휘가 저들의 손에 넘어가게 될 것이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선공을 가해 교금천과 맹사도의 발을 묶은 후 그사이 백검휘와 백검혜를 달아나게 하는 것이 최선이라 판단한 경무옥은 여전히 교금천과 맹사도를 주시한 채 백검휘에게 전음을 보냈다.
 소장주님, 제가 움직이는 즉시 아가씨와 함께 곧장 장원으로 달리십시오!
 백검휘가 놀란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지만, 경무옥은 개의치 않고 십보위사들에게 자신의 결정을 알리고 그에 따른 지시를 내렸다.
 그리고 백검휘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무언의 눈빛이 오가는 가운데, 백검휘가 붉은 입술을 열어 말했다.
 “죽지 마세요. 이건 소장주로서 내리는 명령이에요.”
 염려 가득한 백검휘의 눈빛에 희미한 웃음으로 답을 해 준 경무옥은 곧장 바닥을 박차며 교금천과 맹사도를 향해 몸을 날렸다.
 그와 동시에 십보위사 두 명이 방어를 도외시한 채 귀혈방 무사들을 공격해 백검휘와 백검혜가 도주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혜아야, 뛰어!”
 길이 열리기 무섭게 백검휘는 백검혜의 손을 잡고 달리기 시작했다. 비록 어린 나이였지만, 총명하기 그지없는 백검혜는 백검휘가 이끄는 대로 움직였다.
 “어딜!”
 그 모습을 목도한 교금천이 백검휘를 향해 몸을 날리려 했으나, 경무옥이 그것을 두고 보지 않았다.
 경무옥이 움직이는 것과 동시에 맹사도가 마주 움직이며 검을 날렸지만, 경무옥이 맹사도의 검을 회피하는 한편 교금천을 향해 벼락처럼 검을 찔러 넣은 것이다.
 “감히!”
 교금천이 노성과 함께 몸을 돌려세우며 검을 휘둘렀다.
 경무옥은 교금천과 검이 마주치기 직전 검을 회수하는 한편 바닥을 박차 교금천의 머리를 뛰어넘어 바닥에 내려섰다.
 그런 경무옥의 등 뒤로 백검휘와 백검혜가 부지런히 달아나는 것이 보였다.
 경무옥은 그런 일련의 움직임으로 교금천과 맹사도가 자신을 넘지 않고서는 결코 백검휘 남매를 쫓을 수 없도록 만든 것이다.
 경무옥의 의도를 간파한 교금천과 맹사도가 이를 갈며 경무옥을 공격했다.
 두 사람의 검세가 금방이라도 경무옥을 난자할 듯 날아들었다.
 경무옥은 전력을 다해 표풍십이검飄風十二劍을 전개하며 두 사람이 일으킨 검세에 맞서 갔다.
 차자장!
 요란한 소리와 함께 경무옥의 요혈을 파고들던 검광劍光이 모조리 빛을 잃으며 흩어졌다.
 하지만 그것은 요혈을 노리던 검광에 해당할 뿐, 미처 걷어내지 못한 검광이 경무옥의 팔과 어깨를 할퀴고 지나며 피를 뿌렸다.
 경무옥은 새어 나오려는 신음을 삼키는 한편 재차 이어질 공격에 대비했다.
 그와 비등한 실력자 두 명의 합공인 만큼 모든 공격을 방어하는 것은 무리였다.
 치명상을 가져올 수 있는 공격을 우선적으로 막아 내고 당장 목숨을 위태롭게 하지 않는 공격은 몸으로 받아 내겠다는 것이 경무옥의 기본적인 생각이었다.
 “훗, 목숨 따위 아깝지 않다 이건가?”
 본인의 목숨은 안중에 두지 않은 채 백검휘를 지키려는 경무옥의 모습에 교금천이 가소로운 듯한 표정을 짓고는 곧장 경무옥에게로 쇄도했다.
 빠르게 짓쳐 들던 교금천은 경무옥의 공권攻圈에 들기 직전 마치 팽이가 휘돌듯 발끝을 뒤틀며 옆으로 급격히 방향을 전환했다.
 순간적으로 경무옥의 좌측 반 장 밖으로 멀어진 교금천의 발끝이 다시 한 번 바닥을 박차는 순간 그의 신형이 경무옥을 빠르게 스쳐 지났다.
 경무옥이라고 그것을 가만두고 볼 리 없었다.
 하지만 그의 상대는 교금천만이 아니었다. 교금천의 쇄도직후 곧바로 치고 들어온 맹사도가 면밀한 검세를 뿌리며 경무옥이 교금천에게 눈을 돌리지 못하게 만들었다.
 경무옥은 옆을 스쳐 지나가는 교금천을 내버려 둔 채 맹사도의 검을 맞받았다.
 차창!
 검과 검이 격돌하는 순간 경무옥의 신형이 마치 뒤에서 누가 잡아당기기라도 한 듯 쭉 밀려났다.
 경무옥이 교금천과 맹사도에 비해 월등히 앞서는 것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신법이었다.
 경무옥은 맹사도의 검과 부딪친 반발력을 추진력으로 삼아 표풍신법飄風身法을 전개, 급격히 뒤로 물러난 것이다.
 그렇게 이 장이 넘는 거리를 튕기듯 물러난 경무옥은 어느새 신형을 돌려세웠고, 곧바로 바닥을 찍어 누르듯 박찼다.
 파앗!
 재차 탄력을 받은 경무옥의 신형이 늘어지듯 앞으로 쏘아져 나가며 순식간에 교금천을 따라잡았다.
 쉬익!
 경무옥의 검이 지체 없이 교금천의 등을 찔러 들었다. 교금천은 빠르게 신형을 반전하여 경무옥의 공격을 막아 갔다.
 차창!
 격돌이 이뤄짐과 동시에 이번에는 교금천의 신형이 뒤로 쭉 밀려났다. 경무옥이 그러했듯, 교금천 역시 격돌의 반발력을 이용해 거리를 벌린 것이다.
 경무옥이 다급해진 신색으로 재차 교금천을 향해 몸을 날리려 했으나, 그의 머리 위로 검은 그림자 하나가 뚝 떨어져 내리며 그의 전면을 차단했다.
 검은 그림자는 다름 아닌 맹사도였다.
 조금 전 격돌에서 경무옥의 임기응변에 당한 그는 경무옥의 앞을 가로막는 것으로 그 같은 수법이 통할 수 있는 상황 자체를 차단해 버린 것이다.
 “잔꾀는 더 이상 통하지 않아. 네놈의 어린 주인을 지키고자 한다면 나 맹사도를 넘어서야 할 것이다.”
 의기양양한 맹사도의 말에 경무옥이 전혀 대꾸하지 않고 곧장 검을 찔러 갔다.
 지금은 한가하게 맹사도와 대화를 나눌 상황이 아니었다. 한시라도 빨리 맹사도를 넘어 교금천을 쫓아야 했다.
 쉬리릭!
 경무옥의 검에서 뻗어져 나온 경력이 돌개바람처럼 휘돌며 맹사도의 요혈을 파고들었다.
 맹사도가 마주 검을 휘둘러 경무옥의 공격을 막아 갔다.
 차창!
 검과 검이 부딪치며 불똥이 일었다.
 누구도 우위를 확보하지 못하고 서로에게서 이격된 경무옥과 맹사도.
 타닥!
 경무옥이 바닥을 연달아 박찼다.
 첫 번째는 반발력을 해소하려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앞쪽으로 쏘아져 나갈 탄력을 얻으려는 것이었다.
 경무옥은 맹사도를 상대하는 대신 그를 지나쳐 교금천을 쫓으려 했으나, 이미 경무옥의 의도를 뻔히 알고 있는 맹사도가 두 눈 뜨고 당할 리 없었다.
 경무옥이 맹사도를 지나치려는 순간, 맹사도의 검이 경무옥의 목으로 파고들었다.
 그 순간 앞으로 쏘아져 나가는 움직임은 그대로인 채 경무옥의 허리가 부러질 듯 뒤로 젖혀졌다.
 맹사도의 검이 경무옥의 눕혀진 몸 위로 흘러 나가는 것과 동시에 경무옥의 몸이 마치 용수철이 튕겨 오르듯 솟아오르더니 이내 앞으로 내달렸다.
 하지만 맹사도도 만만치 않았다.
 경무옥의 상체가 눕혀지는 순간, 이 같은 전개를 예상한 맹사도는 검초의 여세를 몰아 신형을 빠르게 회전시킨 후 곧장 바닥을 찍어 누르듯 박차며 크게 도약했다.
 마치 비호처럼 몸을 던진 맹사도가 순식간에 경무옥의 측면으로 따라붙었고, 맹사도는 지체 없이 검을 휘둘렀다.
 그대로 가면 팔이 베어져 나갈 상황, 경무옥은 어쩔 수 없이 검을 마주쳐 갔다.
 차창!
 검과 검이 부딪치기 무섭게 경무옥과 맹사도의 신형이 장터거리 양쪽으로 튕기듯 밀려났다.
 그렇게 이격된 가운데, 다음 동작을 먼저 가져간 것은 맹사도였다.
 맹사도는 경무옥이 가고자 하는 방향을 교묘히 차단하는 한편 매서운 검세를 발출했다.
 경무옥은 감히 돌파할 생각을 하지 못하고 검을 빠르게 움직였다.
 경무옥의 검이 검광을 뿌리며 맹사도의 검세 속으로 파고들었다.
 차차창!
 검과 검이 어지럽게 뒤엉킨 것도 잠시, 두 사람의 거리가 다시 벌어졌다.
 그런 두 사람의 표정은 참으로 대조적이었다. 맹사도는 여유가 넘쳐흘렀고, 경무옥은 초조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만 포기하는 게 어때? 이미 잡혀도 몇 번은 더 잡혔을 시간이니 말이야.”
 맹사도가 희죽 웃고는 약을 올리듯 말했다.
 그 말에 경무옥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맹사도의 말이 틀리지 않음을 너무도 잘 아는 것이다.
 이제 막 무공의 기초를 닦고 있는 백검휘가 무공을 전혀 익히지 않은 아홉 살의 여아인 백검혜를 데리고 제아무리 열심히 달려 본들 무공 고수인 교금천의 손바닥 안이었다.
 “그래도 안심하라고. 죽이지는 않을 테니 말이야. 물론 백가장이 본 방의 요구를 들어주었을 경우에 한해서겠지만.”
 “힘없는 아이를 인질로 삼아 이득을 챙기려 하다니, 무인으로서 부끄럽지도 않느냐!”
 “훗, 누가 정파 나부랭이 아니랄까 봐 무른 소리 하기는. 본 방을 위해서라면 그보다 더한 일도 할 수 있다면 답이 되려나?”
 경무옥의 비난에 맹사도가 얼굴색 하나 바꾸지 않은 채 당당히 대답했다.
 “뜻대로는 안 될 것이다!”
 맹사도의 태도에 심사가 뒤틀린 경무옥이 맹사도를 향해 쇄도하며 검을 휘둘러 갔다.
 
 * * *
 
 백검휘는 백검혜의 손을 잡은 채 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여아인 데다 아직 어린 백검혜로 인해 달리는 속도는 그리 빠르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 속도도 백검혜에게는 벅찼다. 헉헉거리는 그녀의 숨이 그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혜아야, 조금만 참아.”
 백검휘는 힘들어하는 동생이 안타까웠지만, 지금은 백검혜의 사정을 살펴 줄 여유가 없었다.
 백검휘는 달리는 속도를 감당하지 못하고 뒤로 처지려는 백검혜를 억지로 잡아끌며 멈추지 않고 달렸다.
 하지만 백가장은 아직도 멀었다. 족히 삼 리는 더 달려야 했다.
 백검휘는 자신과 동생이 백가장에 도착할 때까지 경무옥과 십보위사들이 귀혈방 무리를 막아 주길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그의 바람은 돌연 머리 위에서 뚝 떨어져 내리며 앞을 가로막는 백색 인영에 의해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백색 인영은 다름 아닌 교금천이었다.
 “쯔쯧, 귀여운 여동생이 그렇게 힘들어하는데 쉬지도 않고 계속 뛰다니, 참으로 못된 오라비가 아닌가?”
 자신을 조롱하는 교금천의 말에 이맛살을 찌푸린 백검휘가 쏘아붙이듯 말했다.
 “네놈들만 아니었으면 이렇게 뛸 일도 없었어!”
 “훗, 원망을 하려거든 네놈 아비에게 해라. 일이 이 지경까지 흐른 데는 장강 수운을 독차지한 네놈 아비 책임이 크니 말이야.”
 “흥! 정정당당히 힘으로 얻은 권리를 두고 무엇을 원망하라는 것이냐? 원망하려면 무인으로서의 자긍심도 잃은 채 힘없는 아이를 핍박하려는 치졸한 네놈들을 원망해야지.”
 “어린놈이 겁도 없이 입을 함부로 놀리는구나. 죽고 싶은 것이냐?”
 교금천이 살기를 뿌리며 으르렁거렸다.
 그 살기에 놀란 백검혜가 몸을 부르르 떨며 백검휘의 팔에 매달렸다.
 백검휘도 교금천의 살기에 다리가 후들거리긴 마찬가지였지만, 이를 악물고는 말했다.
 “어디 죽일 수 있으면 죽여 봐라.”
 “하아!”
 죽음 따위 두렵지 않다는 듯 꼿꼿이 말하는 백검휘의 모습에 교금천의 얼굴에 어이없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비록 미약하다고는 하나 자신의 살기를 감당해 내고, 죽음 앞에서도 의연한 모습은 적아를 떠나 충분히 감탄할 만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욱 대단한 것은 자신이 백검휘를 죽이지 않을 것임을 백검휘가 간파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백검휘는 ‘죽일 수 있으면’이라고 말했다. 교금천이 자신을 죽이지 않을 것임을 이미 알고 있기에 뱉을 수 있는 말이었다.
 “훗, 내가 네놈을 죽이지 않을 것임을 잘 아는 듯하구나.”
 “날 죽여서 귀혈방이 얻을 수 있는 건 없으니까. 되레 본 장의 분노를 사 멸문을 당하지 않으면 다행이지.”
 “하하, 생각보다 영특한 놈이로구나. 하면 내가 널 노리는 이유도 짐작하느냐?”
 “날 인질로 삼아 본 장이 가지고 있는 장강 수운의 지배권을 빼앗으려는 속셈이겠지. 흥! 하지만 네놈들 뜻대로 되지는 않을 것이다.”
 “백가장이 장강 수운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냐?”
 “본 장이 장강 수운의 지배권을 가지고 이유는 네놈들로부터 그것을 지켜 낼 수 있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내 목숨을 위협해 그 이권을 빼앗는다고 해도 결국 네놈들은 그것을 지켜 내지 못할 것이다.”
 “하하하, 맞다. 분하지만 네놈 말은 전혀 틀림이 없다. 하지만 네가 모르는 것이 하나 있느니라.”
 “그것이 무엇이지?”
 “네놈의 인질로서의 가치가 결코 일회성이 아니라는 것이지.”
 “본 장은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다. 네놈들이 이렇듯 날 인질로 삼는 일은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뭔가 착각을 하고 있는 모양이로구나. 본 방이 오늘 같은 일을 또다시 벌이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전혀 그럴 필요가 없거든.”
 교금천의 자신만만한 말에 백검휘가 미간을 찌푸렸다.
 교금천의 말을 따져 보면 단순히 백검휘를 납치해 인질로 삼아 장강 수운의 운영권을 빼앗는 데 그치지 않고 무언가가 더 있는 것 같았다.
 추측하건대 장강 수운의 운영권을 탈취하고 난 이후에도 계속해서 그것을 지켜 낼 수 있는 방도가 준비되어 있는 모양인데, 그것이 무엇인지 백검휘로서는 전혀 짐작이 가질 않았다.
 “훗, 표정을 보니 꽤나 궁금한 모양이로구나. 말이 나온 김에 알려 주도록 하지. 칠혼독七混毒이라고 들어 본 적이 있느냐?”
 “그렇군. 칠혼독으로 날 중독시킨 후 해독약을 빌미로 본 장이 장강 수운의 운영권을 되찾지 못하도록 하려는 속셈이로군.”
 “칠혼독이란 단어 하나로 그렇듯 유추를 해내다니 대단하구나. 한 가지 덧붙이자면 칠혼독은 일곱 가지 독을 적절한 비율로 배합해 만들어 내는 것인데, 그 배합의 가짓수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지. 중요한 건 그 배합 비율을 알지 못하면 해독약을 만들지 못한다는 점이야. 즉, 칠혼독을 제조한 사람이 아니고서는 절대로 해독약을 만들지 못한다는 말이지.”
 “당연히 완전한 해독약을 주지는 않겠지. 그렇게 되면 굳이 독을 쓸 이유도 없을 테니 말이야.”
 “이거야 원. 하나를 말해 주면 둘을 헤아리는구나. 맞다. 본 방은 그저 칠혼독을 억제할 수 있는 임시방편의 해독약을 제공할 것이다. 그래야 백가장이 감히 장강 수운의 운영권을 넘볼 수 없을 테니 말이다.”
 “흥! 내 스스로 목숨을 끊는 한이 있더라도 네놈들의 뜻대로 흘러가게 두지는 않을 것이다.”
 “똑똑한 줄 알았더니 그것도 아닌 모양이로구나.”
 “무슨 말이지?”
 “칠혼독을 쓸 사람이 너 하나만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교금천이 슬쩍 입꼬리를 말아 올리고는 잔뜩 겁에 질려 백검휘의 팔에 매달려 있는 백검혜를 슬쩍 쳐다보며 말했다.
 “이 악독한!”
 백검혜를 향하는 교금천의 시선에 백검휘의 몸이 벼락을 맞은 듯 부르르 떨었다.
 교금천이 한 말을 백검휘는 단박에 알아들었다. 그는 자신뿐 아니라 백검혜에게까지 칠혼독을 쓰려는 것이다.
 그 악독함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할 수만 있다면 눈앞에서 비열한 웃음을 흘리고 있는 교금천을 당장이라도 죽이고 싶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백검휘에게는 그럴 만한 힘이 없었다. 억울하고 분해도 힘이 없는 이상 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후후, 이 정도면 네놈 장단에 놀아 줄 만큼 놀아 준 것 같으니, 이제 그만 가 볼까.”
 교금천의 이어진 말에 백검휘의 표정이 잔뜩 구겨졌다.
 백검휘는 부러 교금천과의 대화를 길게 이어 나갔다. 경무옥이 자신과 동생을 구할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높이기 위해서 말이다.
 교금천은 그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들을 늘어놓았다.
 그것은 어떻게 하든 경무옥이 백검휘를 구하지 못할 것이라는 자신감의 발로였다. 그리고 시간을 끌면 경무옥이 구해 줄지도 모른다고 믿고 있는 백검휘의 희망에 대한 명백한 조롱이었다.
 백검휘의 일그러진 표정이 재밌다는 듯 희죽 웃은 교금천이 이내 백검휘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의 손이 막 백검휘의 어깨를 잡으려는 순간, 청수한 목소리가 장내에 울렸다.
 “찾았구나!”
 그 울림을 따라 교금천과 백검휘 남매의 고개가 돌려졌다.
 그들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흑백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낡은 도복의 도장이 빙그레 웃고 서 있었다.
 
 * * *
 
 우우웅!
 객잔에 앉아 차를 음미하던 무량無量은 양팔 전완前腕부에 차고 있는 완갑腕甲에서 울려 나오는 묵직한 진동에 눈을 부릅떴다.
 그가 양팔에 차고 있는, 천 년을 넘게 산 거북의 등껍질로 만든 귀갑龜甲은 스스로 주인을 찾는 기물奇物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의 팔을 떨어 울리는 이 묵직한 진동이 바로 귀갑, 정확히는 그 안에 봉령封靈된 대붕大鵬의 목소리였다. 자신의 주인이 될 자가 나타났다는 그런 외침인 것이다.
 무량은 오백 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주인을 택하지 않았던 귀갑이 진동하고 있단 사실에 격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여기서 놀라고 기뻐할 여유가 없었다. 귀갑의 울음을 따라 그 주인 될 자를 찾아야 했다.
 무량은 마시던 차를 내려놓고 급히 몸을 일으켜 객잔을 빠져나갔다.
 무량이 나온 객잔은 무창에서 가장 번화한 시가市街에 붙어 있었고, 번화한 만큼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도 많았다.
 이런 곳에서 어떻게 귀갑이 선택한 자를 찾을 수 있을까 싶었지만, 그것은 생각만큼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귀갑의 울림은 귀갑이 선택한 자와의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그 정도가 심해진다. 반대로 거리가 멀어지면 그 진동은 약해진다. 그 점을 이용하면 귀갑이 선택한 자가 있는 곳을 대충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다음엔 귀갑에 봉령된 대붕의 혼체魂體가 스스로 주인을 찾아낼 것이다. 무량은 그렇게 들었고, 알고 있었다.
 무량은 일단 우측 방향으로 움직여 보았다. 십여 장쯤 움직였을 때 귀갑의 울림이 미약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귀갑이 선택한 이와 거리가 멀어졌다는 의미였다.
 무량은 지체 없이 몸을 돌려 반대 방향으로 움직였다. 처음 나온 객잔을 지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귀갑의 울림이 강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일단 방향을 특정한 무량은 걸음의 속도를 높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무량은 거리 한복판에서 칼부림을 벌이고 있는 두 무리를 볼 수 있었다.
 그들은 경무옥과 맹사도 그리고 백가장의 십보위사들과 귀혈방의 무사들이었다.
 다른 때라면 그들의 다툼을 두고 보지 않았을 무량이었으나 지금은 귀갑을 울리게 만든 이를 찾는 것이 우선이었기에, 못 본 척 그들을 지나쳤다.
 우우웅!
 그들을 지나 이십여 장을 더 움직였을 때, 귀갑이 지금까지와는 비교할 수 없는 울림을 흘렸다.
 무량은 마치 누군가가 자신의 팔을 잡아끌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귀갑이 그를 이끌고 있는 것이다.
 무량은 귀갑의 의지를 거스르지 않고 귀갑이 이끄는 대로 움직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무량은 백의 사내와 두 명의 남녀 아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
 ‘저 아이로구나.’
 그들을 시선에 담는 순간, 무량은 귀갑이 선택한 자가 누구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귀갑에 봉령된 대붕의 의지가 심어와도 같이 그의 머릿속을 울렸기 때문이다.
 “찾았구나!”
 무량이 격동을 주체하지 못하고 외쳤다.
 그에 세 사람의 고개가 돌려지고 그들의 시선이 일제히 무량을 향했다.
 무량의 출현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백의 사내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반면 두 명의 남녀 아이의 표정에는 뭔지 모를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
 무량은 그를 통해 대충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 내막은 알 수 없으나, 두 남녀 아이를 백의 사내가 핍박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장성한 사내, 그것도 무인이 열 살 안팎의 아이들을 핍박하는 상황은 보통 때라도 넘길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두 아이 중에 귀갑이 선택한 이까지 있었다. 무량으로서는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일이었다.
 “노도가 그 아이들에게 볼일이 있는데 괜찮겠는가?”
 무량이 백의 사내, 교금천을 향해 점잖게 물었다. 일단은 그저 예상일 뿐인지라 정중한 태도를 견지한 것이다.
 “뉘신지 모르겠으나 조용히 물러가시는 게 좋을 것이오. 이 아이들에게 볼일은 본인이 우선이니 말이오.”
 “보아하니 그 볼일이라는 것이 가히 좋은 목적은 아닌 것 같은데, 맞는가?”
 “노장께서 전혀 신경 쓰실 일이 아니니, 괜한 참견은 삼가시는 게 좋을 것이오.”
 “이자는 저와 동생을 납치하려고 합니다. 부디 도와주십시오.”
 참견치 말라는 교금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백검휘가 무량을 향해 외치듯 말했다.
 “이것을 어쩐다. 노도는 마음이 약해 구원救援의 청을 차마 거절치 못할 것 같구려.”
 “좋은 말로 할 때 물러나시오. 그렇지 않으면 후회하게 될 것이오.”
 교금천이 위협하듯 기세를 피워 올리며 경고했다.
 “그대가 노도를 후회케 만들 일은 없을 것이네.”
 무량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꾸하고는 슬며시 손을 들어 올렸다.
 “어!”
 놀란 음성과 함께 백검휘와 백검혜의 신형이 두둥실 떠오르더니 이내 무량 쪽으로 이끌려 왔다.
 “허공섭물虛空攝物!”
 그 모습에 교금천이 경악한 듯 외쳤다.
 허공을 격해 물건을 당기거나 보내는 허공섭물의 신기는 최소한 절정의 경지에 이르지 않고서는 결코 보여 줄 수 없는 것이다. 더구나 노도사는 그것이 아이라고는 하나 두 명을 한 번에 끌어당겼다. 절정 그 이상의 경지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일류의 경지에 불과한 교금천의 실력으로는 결코 노도사를 감당할 수 없었다.
 교금천으로서는 노도사가 원하는 대로 백검휘와 백검혜를 그에게 넘겨줄 수밖에 없었다.
 ‘젠장맞을.’
 교금천은 분한 마음에 내심으로 욕지거리를 내뱉고는 무량을 향해 물었다.
 “무림은 힘이 곧 법이니 오늘은 도장의 뜻에 따르도록 하지요. 대신 도장의 존함을 알려 주실 수 있겠소?”
 “훗날 오늘의 일에 대해 책임을 묻겠다는 말로 들리는구려.”
 “두려우시면 알려 주지 않으셔도 되오.”
 교금천의 뻔한 도발에 헛웃음을 지은 무량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자신의 도명을 밝혔다.
 “무량. 하잘것없는 노도의 도명이라오.”
 “그 이름 기억하지요. 그럼.”
 교금천은 잠시간 무량을 노려보고는 이내 몸을 돌려 장내를 떠났다.
 그로써 위기를 벗어나게 된 백검휘는 무량을 향해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저와 동생을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은혜 절대로 잊지 않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백검혜도 백검휘를 따라 얼른 고개를 숙이며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보아하니 귀한 집의 자제들인 듯한데, 어느 가문의 인물들이신가?”
 두 남매의 감사 인사를 그저 인자하게 웃는 것으로 받은 무량이 이윽고 물었다.
 백검휘 남매는 화려하지는 않았으나 품격이 느껴지는 차림새를 하고 있어 그들이 제법 사는 집안의 아이들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아! 저는 백가장의 백검휘라고 합니다. 여기 이 아이는 제 동생인 백검혜고요.”
 “그렇구려. 노도가 백가장의 소공자와 긴히 나눌 말이 있는데, 가능하겠소?”
 “저와 말입니까? 혹 저를 알고 계십니까?”
 “그랬다면 조금 전 노도의 질문은 필요치 않았을 테지요.”
 “그렇군요. 한데 생면부지인 저와 무슨 할 말이······?”
 “우선 이것부터 보도록 하지요.”
 무량이 말과 함께 도복의 양 소매를 위로 걷어 올렸다.
 노도사가 도대체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의아해하는 백검휘의 눈에 흑과 백의 서광瑞光을 뿌리며 몸을 부르르 떨고 있는 귀갑이 들어왔다.
 확실히 기이하고 신비로운 광경이었지만, 백검휘는 무량이 자신에게 그것을 보여 주는 연유를 전혀 짐작하지 못하고 무량을 쳐다보았다.
 “노도가 팔에 차고 있는 이 물건은 귀갑이라는 것으로 스스로 주인을 택하는 기물이지요.”
 “설마 노도사님께서는 그 귀갑이 저를 주인으로 택했다고 말씀하시려는 것은 아니겠지요?”
 “소공자께서는 귀갑이 소공자께 가고자 안달하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게요?”
 “제가 뭐라고 그 기물이 저를 주인으로 택한다는 것입니까?”
 “그것은 노도로서도 알 수 없는 일이오. 확실한 건 오백 년이 넘도록 주인을 택하지 않던 귀갑이 소공자를 주인으로 정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노도사님께서는 어찌하시겠다는 것입니까?”
 “귀갑이 소공자를 주인으로 정했으니, 이 귀갑을 소공자께 넘겨야지요.”
 “그 귀갑은 정확히 어떤 물건입니까?”
 “이 귀갑은······. 누군가 이쪽으로 오는구려.”
 무량이 백검휘의 물음에 답을 하려다 뒤를 돌아보았다. 백검휘가 그 시선을 따라가니 경무옥과 십보위사들이 날듯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교금천은 장내를 벗어난 후 곧장 맹사도 등에게 퇴각을 알리는 적笛을 울렸고, 그 신호에 맹사도 들이 물러가자 경무옥과 십보위사들은 즉시 이곳으로 달려온 것이다.
 “저를 지키는 호위들입니다.”
 “그렇구려.”
 “소장주님, 어디 다친 곳은 없습니까?”
 가장 앞서 달려온 경무옥은 교금천에게 잡혀갔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백검휘 남매가 처음 보는 노도사와 함께 서 있는 것을 보고는 일단 안도하며 백검휘를 향해 물었다.
 “이분 노도사님께서 도와주셔서 아무 일 없으니 걱정하지 말아요.”
 백검휘가 안심하라는 듯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하마터면 천추의 한이 될 뻔했는데 참으로 다행한 일입니다.”
 백검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안도한 경무옥은 무량을 향해 몸을 돌린 후 정중히 감사의 인사를 올렸다.
 “백가장의 위사 경무옥이 소장주님과 아가씨를 구해 주신 도장의 은혜에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노도는 여기 소공자에게 볼일이 있어 나선 것뿐이니, 경 위사께서는 그리 고마워하실 필요 없소이다.”
 “본 장의 소장주님께 볼일이 있다고 하셨습니까?”
 “그리 경계하실 필요는 없소이다. 소공자에게 해를 끼칠 생각은 전혀 없으니 말이오.”
 “죄송합니다. 소장주님을 지키는 것이 본분이라 그런 것이니 도장께서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양해를 해 주십시오.”
 “경 위사께서 노도를 경계하는 것은 호위로서 마땅히 지녀야 할 마음이니 그러실 필요 없소이다.”
 “외람되나 도장께서 본 장의 소장주님께 볼일이 무엇인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경 위사님, 자세한 이야기는 장에서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저와 동생을 구해 주신 분인데 작게나마 대접을 해 드려야 할 것도 같고요.”
 “소장주님의 말씀이 지당합니다.”
 “노도사님, 무례가 아니라면 본 장으로 모시고 싶은데, 괜찮겠습니까?”
 “소공자의 뜻대로 하지요.”
 “그럼 가시지요.”
 무량이 고개를 끄덕였고, 그를 비롯한 장내의 인물들은 백가장으로 향했다.
 
 * * *
 
 다른 이들보다 앞서 백가장으로 움직인 십보위사의 연락을 받은 백운경과 백석군은 은인인 무량을 맞이하기 위해 외원으로 나갔다.
 그리고 백가장에 도착한 무량과 의례적인 인사를 주고받은 후 백운경의 처소인 운월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손주 놈들을 구해 주신 은혜 다시 한 번 감사를 드립니다.”
 “그저 인연이 이끄는 대로 움직였을 뿐입니다.”
 “인연이라 하시면?”
 “여기 소공자께는 잠깐 말을 했습니다만, 제가 잠시 맡아 두고 있는 기물이 노도를 소공자께 인도한 것입니다.”
 “기물요?”
 “이놈이지요.”
 무량이 낡은 도복의 소매를 걷어 올린 후 여전히 흑과 백의 서광을 뿌리면서 웅웅거리며 몸을 떨고 있는 귀갑을 보여 주었다.
 백운경과 백석군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귀갑이 발산하는 흑과 백의 서광을 통해 결코 보통의 물건이 아니라는 것을 느낀 것이다.
 “노도사님께서는 저 귀갑이 저를 주인으로 택했다고 하셨습니다.”
 “손자 놈을 주인으로 택했다니, 그 귀갑이 영성靈性이라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이 귀갑 안에는 대붕이라는 영수가 봉령되어 있지요. 소공자를 주인으로 택한 것은 바로 그 대붕의 혼체입니다.”
 “대붕이라면 하루에 구만 리里를 날아간다는 상상 속의 새가 아닙니까?”
 “까마득한 옛날, 신령神靈이 융성하였던 세상에는 분명히 존재했던 영수지요. 뭐, 노도 역시 사부님으로부터 들은 이야기일 뿐이지만 말입니다.”
 “노도사님께서는 대붕이 봉령되었다고 하셨는데, 누가 영수인 대붕을 봉령한 것입니까?”
 “본 문의 사조이신 제령환존制靈幻尊께서 하신 일이지요.”
 “제령환존요?”
 백운경이 들어 본 적이 없는 이름인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인세에는 잊힌 이름이라 들어 보신 적이 없을 겁니다.”
 무량이 답했다.
 “그렇군요. 하면 도장께서 원하시는 바가 정확히 무엇입니까?”
 “소공자께 귀갑을 전하고자 할 뿐입니다.”
 “짐작하건대 귀갑은 도장께서 계시는 사문의 기보奇寶일 듯한데, 그처럼 귀한 것을 그냥 주지는 않을 테지요?”
 “귀갑이 본 문의 기보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귀갑이 소공자를 주인으로 정한 이상, 귀갑을 전하는 대가로 소공자께 무언가를 강제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다만 차후 소공자의 명이 다했을 때, 본 문의 계승자에게 귀갑을 넘겨준다는 약조만 해 주시면 됩니다. 대대로 귀갑을 수호하며 그 주인을 찾는 것이 본 문의 사명이니 말입니다.”
 “한데 귀갑의 주인이 되면 얻게 되는 것은 무엇인가요?”
 백검휘가 물었다.
 “대붕의 힘을 얻게 됩니다.”
 “대붕의 힘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요?”
 “첫째로는 대붕 본신의 힘인 혼원무극기混元無極氣를 얻게 될 것이고, 둘째로는 대붕의 혼체에 새겨진 기억을 얻게 됩니다. 이해하기 쉽게 간단히 말하면 내공과 무공 지식을 얻게 되는 것이지요.”
 “당연히 보통의 것은 아니겠지요?”
 “귀갑을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면 설사 고금십천古今十天이 살아 돌아온다 해도 소공자를 어찌하지 못할 겁니다.”
 무량의 말에 백검휘의 눈이 놀람으로 커졌다. 그것은 백운경과 백석군도 마찬가지였다.
 고금십천이 누구인가.
 무림사를 통틀어 가장 강하다고 평가받는 열 명의 절대 무신들이었다. 그런 그들도 어찌하지 못한다니, 대체 얼마나 강력하다는 말인가.
 백검휘는 그 같은 절세무비의 힘을 얻게 되었다는 사실에 어안이 벙벙했다. 한편으로는 자신이 과연 그런 힘을 얻을 자격이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흔히 하는 말로 강한 힘에는 그만큼의 책임이 따른다지 않는가.
 “그렇게 엄청난 힘을 갖게 된 제가 그릇된 길을 갈지도 모르는데 노도사님께서는 걱정이 되지 않으십니까?”
 “귀갑이 주인을 정한 이상 노도는 그저 지켜볼 뿐입니다.”
 무량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백검휘는 그 웃음 속에 담긴 흔들림 없는 믿음을 읽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백검휘에 대한 믿음이 아니었다. 귀갑에 봉령된 대붕에 대한 신뢰였다. 대붕이 정한 주인은 절대로 악인의 길을 걷지 않을 것이라는 그런 믿음 말이다.
 백검휘는 괜스레 어깨가 무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말했다.
 “하면 이제 어찌하면 되는 것입니까? 특별한 의식이라도 치러야 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저 이 귀갑을 착용하면 됩니다.”
 무량이 말과 함께 귀갑의 매듭을 풀어 팔에서 떼어 냈다.
 “잠시만!”
 무량이 귀갑을 백검휘에게 넘겨주려는 찰나, 백석군이 무량을 저지하고 나섰다.
 “외람되나 귀갑이 아들놈에게 해가 되는 일은 없겠지요?”
 왜 그러냐는 듯 쳐다보는 무량을 향해 백석군이 물었다.
 “환존께서 봉령하신 다른 영수들은 몰라도 이 귀갑의 대붕은 결코 그 주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습니다. 보잘것없는 제 이름과 사문의 명예를 걸고 약속드리지요.”
 무량이 빙그레 웃고는 대답했다.
 “아비로서 염려가 되어 물은 것일 뿐 결코 도장을 의심한 것이 아니니 부디 이해를 해 주십시오.”
 “그리 말씀하지 않으셔도 충분히 알고 있으니 마음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무량이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 말하고는 손에 쥐고 있던 귀갑을 백검휘에게 내밀었다.
 백검휘는 떨리는 손으로 귀갑을 받아 들었다.
 무량에서 백검휘에게로 옮겨진 귀갑은 더욱 강렬한 서광을 발산하며 크게 몸을 떨었다. 마치 주인을 만난 기쁨을 표출하는 것 같았다.
 백검휘는 귀갑이 자신을 향해 만나서 반갑다고 말하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도 만나서 반가워.’
 백검휘는 내심으로 그렇게 말하고는 귀갑을 양팔에 찼다.
 스르륵.
 이제 열세 살에 불과한 백검휘가 차기에는 커 보이던 귀갑은 백검휘가 팔에 차자 스스로 그 크기를 줄이며 백검휘의 팔에 꼭 맞게 변했다.
 그 신비한 현상에 무량을 제외한 세 명은 크게 놀라 반사적으로 무량을 바라보았다.
 무량이 빙그레 웃고는 말했다.
 “스스로 주인을 택하는 기물인데 저 정도는 놀랄 것도 아니지요.”
 하긴 그랬다. 무량을 제외한 세 명은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소공자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대붕의 힘을 받아들이도록 하세요.”
 무량의 말에 백검휘는 곧장 가부좌를 틀고 앉은 후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혔다.
 우우웅!
 귀갑이 크게 진동하더니 왼팔의 귀갑에서는 칠흑의 기운이 솟구쳤고, 오른팔의 귀갑에서는 순백의 기운이 치솟았다.
 귀갑에서 뿜어져 나온 흑과 백의 기운은 백검휘의 팔을 타고 휘돌며 오르더니 이내 하나로 합해지며 백검휘를 중심으로 회오리치듯 휘돌기 시작했다.
 그렇게 백검휘를 집어삼키며 휘돌던 흑과 백의 기운은 어느 순간 백검휘의 전신 모공을 통해 흡수되기 시작했다.
 전신 모공을 통해 흡수된 흑과 백의 기운은 휘몰아치듯 기해氣海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기해에 자리를 잡고 있던 백가장 비전의 진천공振天功의 기운은 흑과 백의 기운에 휩쓸리며 순식간에 흩어져 버렸다.
 진천공의 기운을 집어삼킨 흑과 백의 기운은 기해에 똬리를 틀듯 자리를 잡았다.
 처음엔 콩알만 하게 뭉쳐진 흑과 백의 기운이 무서운 속도로 회전하며 그 크기를 불려 나갔다.
 실타래에 실이 감기듯 몸집을 불려 나간 흑과 백의 기운은 곧 백검휘의 단전을 가득 채웠다.
 
 기해를 의지로서 넓혀라. 그리하면 대붕도 능히 담을 수 있으리라.
 
 그 순간 웅혼한 목소리와 함께 그에 관한 깨달음들이 백검휘의 뇌리로 파고들었다.
 망아한 백검휘의 의식은 그 깨달음을 순식간에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고, 백검휘의 단전은 마치 새가 알을 깨고 넓디넓은 세상으로 나오듯 한계를 깨고 무섭게 확장되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가득 찬 단전으로 인해 정체되어 있던 흑과 백의 기운이 확장된 단전으로 물밀듯 밀려들었다.
 꼬박 두 시진에 걸쳐 흑과 백의 기운, 혼원무극기를 받아들이고 나서야 백검휘는 눈을 떴다.
 “괜찮은 것이냐?”
 “어디 이상한 곳은 없느냐?”
 경이로운 시선으로 백검휘를 지켜보던 백운경과 백석군이 백검휘가 눈을 뜨기 무섭게 물었다.
 분명 무량이 아무런 해도 없을 것이라 말했지만, 걱정스러운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네, 괜찮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두 사람을 안심시킨 백검휘는 무량을 바라봤다.
 “어떠신가?”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입니다.”
 백검휘는 단전에 가득 찬 혼원무극기가 전해 주는 충만감에 경탄하며 대답했다.
 “지금 소공자의 단전에 들어찬 대붕의 힘은 그저 존재할 뿐, 아직은 소공자의 것이 아닙니다. 그 힘을 온전히 소공자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부단한 수련이 뒤따라야 함을 항시 명심하세요.”
 “가슴에 새기겠습니다.”
 무량의 말대로였다.
 백검휘의 단전에 대붕의 힘이 자리하고 있긴 했지만, 백검휘는 아직 그 힘을 뜻대로 사용할 수 없었다. 대붕이 백검휘를 주인으로 택하긴 했지만, 그것이 자신의 힘을 온전히 허락하겠다는 의미는 아닌 것이다.
 대붕의 힘을 무리 없이 사용하기에는 백검휘의 육체와 정신 모두 아직은 수준 미달인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 백검휘는 보통의 무인들이 그렇듯 수련을 통해 육체와 정신을 단련하여 대붕의 힘을 사용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춰야 했다.
 무량의 말은 그런 의미였고, 그것은 백검휘 본인도 느끼고 있는 부분이었다.
 어쨌든 백검휘가 절대의 힘을 가질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귀갑공능
 
 
 
 대붕의 힘을 얻은 후 백검휘는 백팔십도 달라졌다. 무공을 등한시하던 과거와는 달리 무공 수련에 매진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듯 백검휘가 달라진 것은 비단 대붕의 힘을 얻었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백검휘는 귀혈방에 납치될 뻔한 위험을 통해 힘의 필요성을 확실히 깨달았다. 그리고 그동안 무가의 핏줄로서 자신이 얼마나 안일한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도 뼈저리게 느꼈다.
 그리하여 백검휘는 달라지기로 결심했다. 자신을 그리고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힘을 키우기로 말이다.
 그 같은 결심에 대붕의 힘은 기폭제가 되었고, 백검휘는 완전히 사람이 달라진 듯 무공 수련에 몰두하고 있었다.
 백검휘는 백가장의 장주 비전인 백가유성검白家流星劍도 병행하고는 있었지만, 그보다는 대붕의 혼체가 전해 준 무공을 익히는 것에 주력하고 있었다.
 대붕의 혼체는 귀갑의 주인이었던 자들의 무공과 깨달음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귀갑의 주인이 된 자는 모두 세 명이었다.
 첫 번째로 주인이 된 자는 대붕을 봉령시킨 장본인인 제령환존 초운량肖亮이었다.
 환문술법幻門術法을 근간으로 삼고 있던 초운량은 대붕이 품고 있던 혼원무극기를 운용할 수 있는 혼원무극신공混元無極神功과 공攻으로서 혼원벽력파混元霹靂破, 방防으로서 혼원공진벽混元空眞壁을 창안했다.
 초운량은 성조聖鳥였던 대붕과 달리 마성魔性을 지닌 채 인세를 어지럽히던 다섯 영수靈獸도 차례로 봉령했는데, 재밌는 점은 훗날 이 다섯 영수가 봉령된 기물을 얻은 이들이 무림사를 통틀어 가장 강하다고 평가받는 고금십천의 한자리씩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참고로 다섯 영수가 봉령된 기물은 대붕이 봉령된 귀갑과 달리 마성을 간직하고 있었기에, 그 주인 된 자가 그 마성에 굴복하게 되면 혈제血帝와 같은 희대의 마인이 탄생하게 될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듯 위험한 기물인 탓에 초운량은 다섯 영수를 봉령한 기물을 세상 깊숙이 봉인해 두었는데, 우연과 필연이 겹쳐 그것이 세상으로 퍼졌고 고금십천의 다섯이 탄생하게 된 것이었다.
 어떻게 보면 무림에서 가장 강력한 다섯 명의 무신을 탄생하게 만든 장본인인 초운량에 이어 두 번째로 귀갑의 주인이 된 인물은 경천무제驚天武帝 위공무韋共茂였다.
 당시 무림을 지배했던 성마교聖魔敎에 의해 멸망한 제천곡制天谷의 마지막 후예였던 위공무는 초운량이 창안한 혼원삼공混元三功에 자신만의 검법인 제천파황검制天破荒劍을 더해 천하에 우뚝 선 인물이었다.
 위공무는 천마天魔, 혈마血魔와 함께 삼대마종三大魔宗으로 거론되는 성마교의 교주 패마覇魔를 쓰러트림으로써 당당히 고금십천의 한자리를 차지했다.
 경천무제 위공무에 이어 세 번째로 귀갑의 주인이 된 인물은 단천도天刀 패공覇恭이었다.
 그의 이름은 고금십천에 기재되지 않았으나, 가진 실력이 모자라서 그런 것은 결코 아니었다.
 단지 무림사 이래 가장 평화로운 시대를 살았기에 특별히 실력을 발휘할 기회가 없었던 것뿐이었다.
 단적으로 그의 단천패왕도天覇王刀는 위공무의 제천파황검에 비해 결코 떨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귀갑의 주인이 된 자와 심령을 교감하는 대붕의 혼체는 그 세 명의 무공과 심득을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하고 있었고, 그것을 고스란히 백검휘에게 전수해 줬다. 그야말로 천하제일의 무학을 백검휘는 너무도 간단히 얻게 된 것이다.
 백검휘는 그 같은 행운을 거부할 마음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무공을 모두 익힐 수는 없었다.
 혼원삼공은 차치하고서라도 제천파황검과 단천패왕도 중 한 가지를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됐다.
 물론 검법과 도법을 동시에 익힐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아무래도 한 가지를 익힐 때보다 성취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여러 우물을 파는 것보다 한 우물을 파는 게 훨씬 빨리 제대로 된 우물을 팔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결론적으로 백검휘는 단천패왕도를 포기하고 혼원삼공과 제천파황검을 익히기로 결정했다.
 단천패왕도가 제천파황검에 뒤떨어져서라기보다는 백가장이 검을 무기로 사용하다 보니 아무래도 검법이 익숙한 까닭이었다.
 
 백가장의 연무장.
 진청의 무복을 차려입은 백검휘가 목검을 늘어트린 채 홀로 서 있었다.
 눈을 감은 채 서 있던 백검휘가 어느 순간 눈을 뜨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전방으로 빠르게 쇄도하며 목검을 찔러 넣은 백검휘가 얕은 신음을 흘리며 튕기듯 옆으로 밀려났다. 눈길을 끄는 것은 실제로 타격을 받기라도 한 듯 휘청거리며 밀려나는 백검휘의 신형이었다.
 백검휘의 모습을 보자면 가상의 적을 상정하고, 실제로 그와 대결을 펼치듯 무공을 수련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같은 수련 방식은 어디까지나 상상일 뿐이었다. 가상의 적이 펼친 공격을 회피하는 움직임은 보일 수 있을지언정 지금처럼 실제로 공방을 나눈 듯 충격을 받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백검휘의 움직임은 무엇이란 말인가.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백검휘의 수련은 일반적인 가상 대결과는 달랐다.
 백검휘가 지금 하고 있는 것은 환공무연幻空武鍊이라 불리는 제령환문 고유의 수련법이었다.
 환공무연은 환문술법을 통해 환상의 공간을 구축한 후 역시나 술법의 힘을 빌려 구현된 상대와의 대결을 통해 무공을 연마하는 수련법이었다.
 이 환공무연이 대단한 점은 환상의 공간에 구현된 상대와의 공방이 실제와 전혀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검과 검이 부딪칠 때의 타격감, 그로부터 발생하는 반발력은 물론 상대의 공격에 적중당했을 때 현실의 그것처럼 충격과 고통이 전해지는 것이다.
 비록 그 정도가 약화되긴 하지만 실제로 대결을 펼치는 것이나 다를 바 없는 것이다.
 무인에게 있어 실전만큼 중요한 것이 없다. 그런 점에서 환공무연은 그 어떤 수련법보다 탁월하다 할 수 있었다.
 다만 환공무연에는 한 가지 한계가 존재했다.
 그것은 바로 환상의 공간에 구현하는 상대가 제한적이라는 점이었다. 구체적으로 환공무연을 펼치는 본인이 직접 보았거나 상대했던 인물이 아니면 구현시킬 수 없는 것이다.
 그런 한계로 인해 백검휘와 같은 무공의 초보자는 환공무연을 제대로 이용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일반적인 경우다.
 백검휘에게는 대붕이 있었다.
 대붕의 혼체는 주인이었던 자들뿐 아니라 그들이 상대했던 적들에 대한 정보까지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그것은 곧 백검휘의 경험이나 마찬가지였고, 백검휘는 그것을 기반으로 가상의 적을 얼마든지 구현시킬 수 있었다.
 그렇게 대붕의 기억을 빌려 만들어 낸 상대는 귀도鬼刀라는 낭인이었다.
 당연히 본실력으로 하면 일초지적도 되지 않으니, 백검휘의 실력에 맞게 하향 조정된 귀도였다. 그래 봤자 무참히 당할 뿐이었지만 말이다.
 백검휘는 단 십 초만에 귀도의 도에 가슴이 갈렸고, 다섯 초가 더 흘렀을 때는 팔이 잘려 나갔다.
 마치 불에 덴 듯한 고통과 함께 환공幻空의 술법이 깨어져 나가며 백검휘는 현실로 돌아왔다.
 백검휘는 고개를 돌려 귀도의 도에 잘렸던 팔을 바라봤다.
 당연히 팔은 멀쩡했다.
 하지만 여전히 남아 있는 아릿한 느낌은 조금 전 귀도의 도에 팔이 잘려 나간 순간이 그저 환상만은 아님을 알려 주고 있었다.
 호흡을 고르며 잠시 서 있자 팔에 남아 있던 아릿한 느낌은 완전히 사라졌다. 가볍게 팔을 이리저리 움직여 본 백검휘는 다시 목검을 잡았다.
 그리고 제천파황검의 기본 검인 제천사십팔식制天四十八式을 펼쳐 내기 시작했다.
 실전도 어디까지나 기본적인 틀이 잡히고 난 후에야 효과가 있는 법이었다. 무작정 환공무연으로 수련을 한다고 해서 실력이 늘어나는 것은 아닌 것이다.
 우선은 제천사십팔식을 완전히 체화體化시키는 것이 중요했다. 어떤 순간에서도 몸이 저절로 제천사십팔식을 펼쳐 낼 수 있도록 말이다.
 귀혈방에 납치될 뻔한 위험을 겪으며 무공을 익혀야 할 이유를 절실히 느낀 백검휘는 그렇게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진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대붕의 힘을 빌린 환공무연이라는 최고의 수련법에 각고의 노력을 기울이는 지금의 모습이라면 백검휘의 성장은 전무후무한 것이 될 것이 틀림없었다.
 
 * * *
 
 수련을 끝내고 처소로 돌아온 백검휘는 자신을 기다리는 일보위사 경무옥을 발견했다.
 “오셨어요?”
 백검휘가 반가운 기색으로 인사를 하자 경무옥이 절도 있게 예를 취했다.
 “소장주님을 뵙습니다.”
 “경 위사님이 돌아오신 것을 보니 귀혈방과의 싸움이 끝이 난 모양이로군요.”
 백가장은 귀혈방이 백검휘 남매의 납치를 시도한 날로부터 닷새 후 귀혈방과의 전쟁을 시작했다. 지금까지는 귀혈방의 도발을 참아 넘겼지만, 백검휘와 백검혜를 납치해 독을 쓰려 했다는 사실에 더 이상 인내심을 발휘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사실 그동안 백가장이 귀혈방의 도발을 묵과한 것은 그들을 상대할 힘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귀혈방과의 싸움에서 희생될 백가장의 무인들을 생각한 인내였을 뿐이다.
 하지만 이번 일로 백가장의 수뇌부는 그 어떤 희생을 치르고서라도 귀혈방을 무너트릴 것을 결의했다.
 백가장은 모든 전력을 움직여 귀혈방을 공격했고, 그것은 백검휘의 호위인 경무옥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귀혈방과의 싸움에 차출되었던 경무옥이 귀장歸莊했다는 것은 귀혈방과의 싸움이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되었다는 의미였다.
 “귀혈방의 항복으로 싸움은 일단 종결이 된 상황입니다. 지금은 이번 싸움에 대한 배상 협상이 진행되는 중이고 말입니다.”
 “음, 이번 기회에 귀혈방을 완전히 끝장내는 것이 좋지 않나요?”
 “물론 그렇습니다. 우리 장 역시 그러할 마음을 먹고 있었습니다.”
 “한데 어찌하여?”
 “마지막 순간에 태진문太振門이 중재를 하고 나섰습니다.”
 태진문은 한구漢口에 본거지를 두고 있는 문파로 백가장이나 귀혈방보다 우위에 있는 곳이었다.
 태진문이 중재를 하고 나선 이상 백가장으로서는 한 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그렇군요.”
 백검휘는 미간을 찌푸렸다.
 태진문이 중재에 나선 이유는 뻔했다. 백가장의 힘이 커지는 것을 우려하는 것이다.
 분한 일이었지만, 힘이 없는 이상 태진문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백검휘는 다시 한 번 힘의 필요성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 장의 피해는 어느 정도인가요?”
 “다행히 사망자는 많지 않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입니다.”
 “다행이로군요. 고단하실 텐데 경 위사님도 돌아가 쉬도록 하세요.”
 “그럼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경무옥이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처소를 나갔다.
 그리고 다음 날 백운경을 비롯한 백가장의 무인들이 백가장으로 돌아왔다.
 그 소식을 들은 백검휘는 곧장 백운경의 처소인 운월당으로 향했다.
 “할아버님, 소손입니다.”
 “들어오너라.”
 백운경의 허락에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니 백운경이 차를 마시고 있었다.
 “소손 할아버님을 뵙습니다.”
 “오냐, 그리 앉아라.”
 “이렇듯 무탈하셔서 참으로 다행입니다.”
 “걱정 많이 했느냐?”
 “귀혈방의 누구도 할아버님을 어쩌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모르지는 않으나, 세상일이라는 것이 장담을 할 수 없는 것인지라 아무래도 걱정이 되었습니다.”
 “말하는 것만 보면 어른이 따로 없구나. 그러니 애늙은이라는 소리를 듣지.”
 “그래도 응석을 부리는 것보다는 낫잖아요.”
 백검휘가 불만인 듯 볼멘소리를 했다.
 “하하, 물론 그렇긴 하다만 가끔은 네가 응석을 부리는 모습을 보고 싶기도 하구나.”
 “할아버님께서 원하시면 노력은 해 보겠습니다.”
 “노력할 것도 많구나. 됐으니 하던 대로 해라.”
 “어제 경 위사에게 듣자 하니 귀혈방과 배상에 관한 협상을 하신다던데, 그 일은 잘되신 것입니까?”
 “물질적, 정신적 피해에 대한 보상으로 은자 십만 냥을 받기로 했느니라.”
 “당연히 일시불은 아니겠지요?”
 “아니다. 앞으로 십 년 동안 분할하여 받기로 했다.”
 “저들이 약속을 어길 수도 있지 않습니까?”
 “태진문이 공증을 하였으니 귀혈방도 약속을 어기지는 않을 것이다. 게다가 은자 십만 냥을 모두 배상할 때까지 귀혈방 소방주의 자식 중 한 명을 볼모로 잡아 두기로 하였느니라.”
 “소방주의 자식이라면 배상도 배상이지만 앞으로 귀혈방이 경거망동하지 못하도록 만들 수 있겠군요.”
 “꼭 그렇지는 않을 게다.”
 “그래도 자식인데······. 아!”
 백검휘가 이해가 되지 않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다 돌연 눈을 빛냈다.
 “이유를 알겠느냐?”
 백검휘가 뭔가를 눈치챈 듯하자 백운경이 빙긋이 웃고는 물었다.
 “듣기로 귀혈방의 소방주는 세 명의 자식을 두었는데, 그중 한 명을 기녀에게서 얻었다고 들었습니다. 이번에 볼모가 된 것은 바로 그가 아닙니까?”
 “맞다. 귀혈방이라면 기녀에게서 얻은 자식은 언제든 버릴 수 있을 게다.”
 “한데 어찌하여 귀혈방을 금제할 수 없는 자를 볼모로 데려온 것입니까?”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느냐?”
 “네, 그렇긴 하지요. 하지만 소손이 생각하기로 다른 이유가 계신 것 같은데요.”
 “그래? 생각하는 바가 있으면 한번 말해 봐라.”
 “할아버님께서는 귀혈방이 또다시 도발을 해 온다고 해도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시는 것이 아닙니까? 아니, 오히려 그러길 바라고 계시는 것이지요? 그때는 제아무리 태진문이라 해도 우리 장의 행사를 방해할 수 없을 테니 말입니다.”
 이번에야 태진문의 위신을 생각해 물러났지만, 귀혈방이 또다시 도발을 해 온다면 그때는 태진문도 더 이상 귀혈방을 비호하지는 못할 것이다. 귀혈방의 뒤를 봐주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구설에 오르고 싶지 않다면 말이다.
 “하하, 네 말이 맞다. 귀혈방이 또다시 도발을 한다면 그때야말로 귀혈방의 마지막이 될 것이다.”
 “귀혈방도 승산이 있지 않고서는 쉽사리 움직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만큼 귀혈방이 행동을 취한다면 결코 쉽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허허, 지금 이 할아비를 가르치고자 하는 것이냐?”
 “송구합니다. 소손이 감히 주제넘었습니다.”
 “하하, 아니다. 소장주로서 네 식견이 그리 깊은 것을 보니 이 할아비는 참으로 든든하구나.”
 “모두 할아버님의 가르침 덕분입니다.”
 “입에 발린 소리는.”
 자신의 덕이라며 겸양하는 백검휘의 말에 백운경이 싫지는 않은 듯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휘야!”
 기꺼운 듯 백검휘를 바라보던 백운경이 돌연 진중한 목소리로 백검휘를 불렀다.
 “말씀하세요.”
 백검휘도 덩달아 자세를 꼿꼿이 세우고는 백운경의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너는 우리 장이 이렇듯 번거로움을 감수하는 이유가 무엇인 줄 아느냐?”
 “태진문 때문이 아닙니까?”
 “틀린 답은 아니다만, 더 근본적으로는 우리 장이 태진문보다 힘이 없기 때문이니라. 이렇듯 힘이 없으면 정당한 권리조차 방해받는 법이니, 너는 부단히 힘을 키워야 할 것이다.”
 “소손, 명심하겠습니다.”
 근자의 일들로 그것을 몸소 깨달은 백검휘는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야지.”
 백검휘의 대답에 백운경이 기꺼운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무공을 등한시하여 애를 태우던 손자였는데, 작심을 하고 무공을 익히니 기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 뒤로 잠시 더 대화를 나눈 백검휘는 운월당을 나와 아버지가 있는 백운각白雲閣에 들러 문안을 올린 후 자신의 처소인 휘영당輝榮堂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백가장의 소장주로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백검휘는 백가장이 천하에 군림하는 것을 원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누구도 백가장을 무시하지 못하도록 만들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힘을 키워야 했다.
 백검휘 자신의 힘을 키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백가장 전체의 무력을 키우는 것도 그 못지않게 중요한 일이었다.
 백가장의 힘을 키우기 위해서는 무인의 수를 늘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개개인의 실력을 높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삼류 무사 백 명보다는 일류 무사 열 명이, 일류 무사 열 명보다는 절정 무사 한 명이 더 나은 것이다.
 한마디로 고수의 양성이 필요했다.
 하지만 고수의 양성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고수가 되기 위해서는 무재를 타고나야 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무공에 재능이 있는 자들을 얻기가 하늘의 별을 따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라는 점이다.
 무공에 뜻을 두고 있는 자들은 대부분 명문대파에 들기를 원한다. 백가장에 드느니 가까이는 태진문에, 멀게는 무당파같이 보다 이름 있는 곳에 입문을 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니 백가장으로서는 재능 있는 인재를 얻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무림에서 힘의 균형이 좀처럼 깨지지 않는 이유는 바로 그것 때문이었다.
 기본적으로 고강한 무공과 전통을 가진 데다 재능 있는 인재를 계속해서 수급하는 명문대파를 백가장 같은 중소 문파들은 결코 따라갈 수가 없는 것이다.
 무인이 되고자 하는 이들에게 그다지 매력이 없는 백가장이 인재를 얻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직접 찾아 나서면 된다.
 무재를 지닌 자들이 모두 무인이 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미처 자신의 재능을 깨닫지 못하고 썩히고 있는 이들이 중원 전체로 보면 부지기수였다.
 백검휘는 그런 이들을 발굴해 백가장에 영입해 키우는 방법을 떠올렸다.
 물론 그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결코 흔하지 않아 인재라 부르는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충분히 시도해 볼 만한 일이었다.
 백검휘는 곧장 경무옥을 휘영당으로 호출했다.
 “부르셨습니까?”
 “네, 부탁할 일이 좀 있어서요.”
 “말씀하십시오.”
 “휘하의 위사분들을 움직여 무한삼진에 적을 두고 있는 열다섯 살 이하의 아이들 중 근골이 괜찮은 이들을 알아봐 주세요. 신분은 따지지 말고요.”
 “혹 그들을 거두려 하시는 것입니까?”
 “네, 쓸 만한 아이들이 있다면요.”
 “장주님께서도 알고 계시는 사항입니까?”
 “아직 말씀드리지 않았어요. 우선 쓸 만한 아이들이 있는지 확인을 한 연후에 영입할 만한 아이들이 있으면 그때 말씀을 드릴 생각이니, 제가 말한 대로 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백검휘의 그림자답게 경무옥은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휘영당을 물러났다.
 경무옥이 나간 후 백검휘는 곧장 몸을 일으켜 진천단振天團의 무인들이 무공을 수련하는 연무장으로 움직였다.
 진천단은 백가장의 정예 무력 집단으로 유소년 위주로 이뤄진 예비 전력까지 합치면 이백 명이 조금 못 되었는데, 백검휘가 그들의 수련장을 찾는 이유는 진천단원 중 재능이 특출 난 자들을 추려 내 그들에게 대붕이 전해 준 무공을 전수하기 위함이었다.
 백검휘가 진천단 모두가 아닌 일부 재능 있는 자들에게만 무공을 전수하려는 까닭은 간단했다. 대붕이 전해 준 무공은 하나같이 상승의 절예들로, 재능이 특출하지 않고서는 그것을 제대로 익힐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상승의 절예라 해도 제대로 익히지 못하면 완성된 삼류 무공보다 못한 법이다.
 그러한 이치를 잘 알기에 백검휘는 상승의 절예를 익힐 만큼 재능이 있는 자들만을 골라 무공을 전하려는 것이다.
 진천단 전용의 연무장에 도착하니, 오십 명 정도가 수련을 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얼굴을 보니 모두 앳된 것이 스무 살 아래로 보였는데, 백검휘는 그들이 진천단의 정규 단원이 아닌 예비 단원들임을 어렵지 않게 깨달을 수 있었다.
 정규 단원은 귀혈방과의 싸움에서 돌아온 직후라 크고 작은 부상을 치유하고 휴식을 취하고 있는 중임을 미루어 짐작한 백검휘는 훈련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조용히 연무장 한쪽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그곳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서 예비 단원들이 수련을 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기 시작했다.
 
 백운각의 집무실에서 서류와 씨름을 벌이던 백석군은 한 시진 전에 문안 인사를 하고 돌아갔던 백검휘가 또다시 자신을 찾아오자 의아한 눈빛으로 물었다.
 “네가 여긴 또 어쩐 일이냐?”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그래? 그리 앉아라.”
 중요한 일이 아니면 이렇게 찾아오지 않을 백검휘임을 알기에 백석군은 백검휘에게 자리를 권하고는 보고 있던 서류를 옆으로 치워 놓았다.
 “차 한잔할 테냐?”
 “괜찮아요.”
 “그래, 그럼 말해 봐라.”
 “외람되나 진천단에 소속된 세 사람을 제게 주셨으면 해서요.”
 백검휘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물론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테지?”
 “소자가 귀갑의 주인이 되면서 얻은 무공을 그들에게 전수하고 싶어서요.”
 “그런 것이라면 진천단 모두에게 무공을 전수하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느냐?”
 “아무리 좋은 무공이라 해도 그것을 제대로 익히지 못한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잖아요.”
 “네가 달라는 세 사람만이 귀갑의 무공을 익힐 재목이라는 것이냐?”
 “네.”
 “한데 그들보다 못한 수준의 네가 어찌 그것을 판단할 수 있는 것이냐?”
 “소자의 판단이 아닙니다. 귀갑의 대붕이 직접 선택한 이들입니다.”
 “대붕이 직접 선택했단 말이지. 그들이 누구냐?”
 “백요홍白曜鴻, 경추생慶推, 목일경睦日鏡 이렇게 세 명입니다.”
 백석군으로서는 당조카인 백요홍만을 알고 있을 뿐 경추생과 목일경은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모두 정규 단원은 아닌 듯싶구나.”
 “네, 모두 예비 단원이에요. 진천단의 정규 단원은 아직 확인을 해 보지 못했어요.”
 “진천단의 정규 단원 중에서도 사람을 골라 무공을 전할 모양이로구나.”
 “아버지께서 허락해 주신다면요.”
 “우리 장의 힘이 커지는 일인데 마다할 수 없지. 네 뜻대로 해라.”
 “감사합니다.”
 “감사하기는. 그렇지 않아도 네게 부탁을 하려던 일이었다.”
 귀갑의 무공이 하나같이 상승의 절예라는 것을 들어 알고 있던 백석군은 그 무공을 통해 백가장의 힘을 키울 마음을 먹고 있었다.
 단지 귀혈방과의 싸움으로 인해 그것을 미처 백검휘에게 말하지 못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백검휘가 알아서 일을 진행하니 백석군으로서는 그보다 반가울 수가 없었다.
 내심 아버지의 권위를 무시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 마음을 쓰던 백검휘는 그것으로 한시름을 덜 수 있었고, 편안한 마음으로 백운각을 나와 자신의 처소로 돌아왔다.
 그리고 곧바로 자신이 지목한 세 사람을 휘영당으로 호출했다.
 
 백검휘는 자신의 호출에 따라 휘영당으로 온 세 사람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먼저 맨 오른쪽, 세 사람 중 가장 건장한 체격에 각진 얼굴이 강인한 인상을 풍기는 소년은 백요홍으로 올해 열네 살이었다. 그는 백검휘의 육촌 형으로 세 사람 중 유일하게 백검휘와 안면이 있었다.
 그 옆에 서 있는 호리호리한 체격에 찢어진 눈으로 인해 날카로운 인상을 주는 소년의 이름은 경추생, 나이는 백요홍과 같은 열네 살이었다.
 마지막으로 맨 왼쪽, 약간은 통통한 체격에 둥글둥글한 얼굴이 제법 귀여운 소년이 목일경이었다. 그의 나이는 열세 살로 세 사람 중 가장 어렸다.
 “내가 세 사람을 부른 이유가 궁금할 테죠?”
 세 사람을 차례로 훑어본 백검휘가 빙긋이 웃고는 물었다.
 “그렇습니다.”
 백요홍이 대표로 그렇다고 대답했다. 사적으로는 육촌 형이나, 지금은 소장주로서 마주하는 것이니 존대를 하는 것이다.
 “세 사람은 지금 이 순간부터 진천단 소속이 아닙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저희가 탈단脫團이라도 되었다는 말씀입니까?”
 백요홍이 당혹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맞아요.”
 “이유가 무엇입니까?”
 백검휘가 긍정하자 백요홍이 굳은 얼굴로 물었다. 경추생과 목일경 역시 얼굴이 굳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럴 만도 했다.
 진천단의 단원이 된다는 것은 백가장 무인들이 가장 바라는 일이었다. 그것은 세 사람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어렵게 들어간 진천단에서 이유도 모른 체 탈단되었다고 하니 그들로서는 당혹스럽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내가 그것을 원했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은 소장주님께서 저희를 탈단시켰다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왜요? 이유가 무엇입니까? 저는 물론이거니와 여기 둘도 진천단에서 제외될 만한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소장주님 임의로 탈단을 시킨단 말씀입니까?”
 백요홍이 격앙된 목소리로 따지듯 물었다.
 “세 사람의 재능이 진천단에 머물기에는 아깝기 때문입니다.”
 “그게 무슨······?”
 “말 그대로입니다. 세 사람의 재능은 꽤 뛰어난 편입니다. 진천단의 단원들이 익히는 진천공振天功과 진천십이검振天十二劍으로는 그 재능을 만개시킬 수 없을 만큼 말이죠. 그래서 세 사람을 빼 온 것입니다. 앞으로 만들어질 휘영단輝影團의 일원으로 삼기 위해서 말입니다.”
 “소장주님의 말씀을 따져 보면, 저희가 휘영단의 일원이 되면 진천공과 진천십이검보다 뛰어난 무공을 배울 수 있다는 것처럼 들리는데, 제 생각이 맞습니까?”
 지금껏 백요홍에게 대화를 일임하고 있던 두 사람 중 경추생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그렇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굳이 세 사람을 진천단에서 빼 올 이유가 없으니까요.”
 “백가장에 진천공과 진천십이검보다 뛰어난 무공이라면 장주 비전秘傳의 무공밖에 없는데, 설마 그것을 전수하겠다는 것은 아니겠지요?”
 백요홍이 설마 하는 얼굴로 물었다.
 “당연히 아닙니다. 여러분이 배울 무공은 제천공이라는 내공심법과 제천사십팔식이라는 검법입니다.”
 “제천공과 제천사십팔식요? 우리 장에 그러한 무공이 있다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우리 장의 무공이 아니니까요. 하지만 이제부터 그렇게 될 것입니다. 분명한 건 제천공과 제천사십팔식이 장주 비전의 무공에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백검휘의 말에 세 사람은 반신반의하는 표정이었다. 장주 비전과 견줄 만한 무공이 있다는 것도, 그것을 자신들에게 전수한다는 것도 쉽게 믿기지가 않는 것이다.
 “표정을 보니 그다지 믿음이 가지 않는 모양이로군요.”
 그 내심을 짐작한 백검휘가 말과 함께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백요홍에게로 다가갔다.
 “요홍 형에게 먼저 전수하도록 하죠.”
 “무슨?”
 “날 믿고 마음을 편히 가져요.”
 백검휘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자신을 올려다보는 백요홍의 정수리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왠지 항거할 수 없는 백검휘의 말에 백요홍이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혔다.
 그와 동시에 백요홍의 머리를 덮은 백검휘의 손에서 흑과 백의 서광이 뻗쳐 나왔다.
 백검휘는 지금 대붕의 힘을 빌려 환문술법 중 하나인 의각전도意刻傳道를 펼치고 있었다.
 의각전도는 자신의 지식을 상대방에게 전도시키는 술법으로, 의각전도를 통해 전해진 지식은 상대방의 의식에 각인이 되어 절대로 망실忘失되지 않았다.
 백검휘는 의각전도를 통해 제천공과 제천사십팔식을 백요홍 의식에 각인시키고 있는 것이다.
 한편 백요홍은 머릿속으로 밀려드는 제천공의 구결에 처음에는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하지만 백검휘가 자신에게 해가 되는 일을 할 리 없다는 생각이 들자 마음이 편안해졌다.
 굳이 의식하지 않음에도 마치 정으로 새기듯 각인되는 제천공의 구결.
 의각전도의 술법이 펼쳐지고 반 각의 시간이 흐르자 제천공의 모든 구결과 그것을 자세히 해석한 주해註解가 백요홍의 의식에 완벽히 각인되었다.
 그와 동시에 백요홍의 눈앞으로 환상의 공간이 펼쳐졌다.
 백요홍이 미처 놀라기도 전에 환상의 공간에 검을 든 인영 하나가 나타났다.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인영은 곧 검을 움직이며 하나의 검술을 펼쳐 나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제천사십팔식이었다.
 백요홍은 어떻게 해서 이와 같은 기사奇事가 벌어지는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눈앞의 인영이 자신에게 무공을 전하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백요홍은 인영이 펼치는 검술을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리고 인영의 움직임 하나하나는 백요홍의 의식에 각인되었다.
 도합 마흔여덟 개의 검형을 펼치고 난 인영은 자신의 역할이 끝나자 연기처럼 흩어졌고, 백요홍을 둘러싸고 있던 환상의 공간 역시 사라졌다.
 그것을 끝으로 의각전도의 술법에서 빠져나온 백요홍의 눈에 머리에 올렸던 손을 거두는 백검휘가 들어왔다.
 “무, 무엇을 한 것입니까?”
 백요홍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의각전도. 타인에게 자신의 지식을 전하는 술법이에요. 난 방금 그 의각전도를 통해 요홍 형에게 제천공과 제천사십팔식이라는 무공을 전한 것이고요.”
 “그런 것이 가능하다는 것입니까?”
 “지금 요홍 형의 머릿속에 새겨진 무공이 가장 확실한 답이 될 것 같은데요.”
 백요홍은 ‘제천공’ 세 글자를 떠올리기 무섭게 떠오르는 제천공의 구결과 그에 대한 세세한 주해의 향연에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직접 겪고도 믿을 수가 없군요. 한데 이 의각전도라는 술법은 어디서 배우신 것입니까?”
 백요홍이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일전에 귀혈방에 납치당할 뻔한 날 구해 주신 도장분에게 배운 것입니다.”
 귀갑에 관해서는 철저히 함구하는 것이 좋았기에 백검휘는 무량을 팔았다. 귀갑의 주인이 되고, 대붕의 힘을 얻게 된 것이 그의 덕분이니 꼭 거짓말도 아니었고 말이다.
 “제천공과 제천사십팔식 역시 그분에게 배우신 것입니까?”
 “그렇다고 할 수 있죠.”
 “그렇군요. 비천한 재능을 어여삐 여겨 이렇듯 뛰어난 무공을 전수해 주신 은혜,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백요홍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내 몸을 일으켜 무공을 전수해 준 백검휘에게 허리 숙여 감사를 표했다.
 그것을 옆에서 지켜보던 경추생과 목일경은 어안이 벙벙할 수밖에 없었다.
 백요홍의 머리에 얹힌 백검휘의 손에서 기이한 서광이 뿜어져 나온 것으로 보아 의각전도라는 술법을 펼친 것 같긴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저렇듯 간단히 무공을 전할 수 있다는 것이 두 사람으로서는 쉬이 납득이 되질 않았다.
 하지만 백요홍의 태도로 보아 결코 거짓은 아닌 듯 보였기에 믿지 않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이번에는 추생 형입니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제가 전하는 것을 거부하지 마세요.”
 백검휘는 두 사람의 표정에 피식 웃고는 경추생에게 다가서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경추생이 살짝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긴장하지 말고요.”
 백검휘가 경추생에게 긴장을 풀라는 말을 하며 그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의각전도를 시전했다.
 이각의 시간이 흐르고 경추생의 머리에서 백검휘가 손을 떼자 경추생 역시 백요홍과 같은 반응을 보이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경추생까지 그러하자 마지막 순서인 목일경은 한시라도 빨리 의각전도를 체험하고 싶었고, 그 마음을 알았는지 백검휘는 곧바로 목일경에게 의각전도로 무공을 전했다.
 의각전도에 의한 무공 전수가 끝나자 목일경 역시 앞선 두 사람과 마찬가지로 눈을 부릅뜨며 놀라워했고, 스스럼없이 상승의 무공을 전수한 백검휘에게 진정으로 감사를 표했다.
 “세 사람 모두 느끼겠지만, 내가 전한 무공은 결코 평범한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그것을 세 사람에게 전한 이유가 무엇인지 알겠습니까?”
 “우리 장의 힘을 키우고자 함이 아닙니까?”
 백검휘의 물음에 백요홍이 반문으로 답했다.
 “맞습니다. 이번에 우리 장과 귀혈방 간의 일을 들어 알고 있을 겁니다. 우리 장은 확실한 명분에 따라 귀혈방을 공격했고 귀혈방을 무너트리기 직전까지 갔었습니다. 하지만 태진문이 개입함으로서 귀혈방을 살려 둔 채 물러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같이 억울한 일을 당한 것은 우리 장이 태진문보다 힘이 약했기 때문입니다. 하여 나는 앞으로 우리 장이 그 어떤 세력에 의해서도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힘을 갖추길 원합니다. 그 시작이 바로 내 앞에 있는 세 사람입니다. 이런 내 마음을 따라 세 사람은 부단히 수련을 하여 장차 우리 장의 주춧돌로서 자리매김해야 할 것입니다.”
 백검휘의 웅심雄心 가득한 말에 담긴, 자신들에 대한 믿음에 세 사람은 온몸으로 전해지는 짜릿한 감동을 느끼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윽고 백요홍이 결의에 찬 표정으로 말했다.
 “소장주님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경추생과 목일경 역시 백요홍의 뒷말을 복창하며 자신들의 결의를 알렸다.
 “모두 지금의 그 마음을 잊지 말도록 하세요. 그리고 노파심에서 말하는데, 내가 전수한 무공은 그 누구에게도 알려서는 안 됩니다.”
 “알겠습니다.”
 “믿도록 하죠. 내게 따로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까?”
 ······.
 “없는 모양이로군요. 그럼 이만 돌아들 가 보세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쉬십시오.”
 백검휘의 축객령에 세 사람은 인사를 하고는 휘영당을 물러났다.
 홀로 남은 백검휘는 찻잔에 남은 차를 마저 들이켜고는 방 중앙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그리고 혼원무극신공을 운공하기 시작했다.
 
 
 
 #오년지약
 
 
 
 백요홍 등에게 무공을 전한 백검휘는 그 뒤로 며칠 동안 틈틈이 진천단의 무인들을 살폈으나, 휘영단에 영입할 만한 인물을 찾을 수 없었다.
 재능만 따지면 적당한 인물들이 몇 명 있긴 했지만, 모두 삼십 대 중반 이상의 나이였다. 진천공과 진천십이검의 수련을 이십 년 이상 해 온 그들에게 새로운 무공을 전수하는 것보다는 그동안 익혀 온 진천공과 진천십이검의 대성을 바라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 백검휘는 판단했다.
 그리하여 진천단에서는 더 이상의 인재를 찾지 못한 백검휘는 딱히 실망하지 않은 채 무공 수련에 매진하고 있었다.
 백검휘가 현재 가장 주력하여 익히고 있는 무공은 제천사십팔식이었다.
 혼원벽력파나 혼원공진벽은 일정 수준에 오르지 않으면 구사할 수 없는 상승의 무공이었기에, 지금으로서는 그림의 떡이나 마찬가지였다.
 제천파황검 역시 제천사십팔식을 숙달하지 않고서는 익힐 수 없는 상승의 절예였기에, 사실상 백검휘에게는 제천사십팔식을 수련하는 것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 제천사십팔식은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총 마흔여덟 개의 검형으로 이루어진 검법이었다.
 일반적으로 검이 움직일 수 있는 궤적을 망라하고 있는 제천사십팔식은 그 자체로 충분히 뛰어난 검법이었다.
 제천사십팔식의 궁극적인 목표는 마흔여덟 개의 검형, 즉 외적인 형식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각각 따로 존재하는 마흔여덟 개의 검형을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게 되는 순간이 제천사십팔식의 완성인 동시에 비로소 제천파황검을 익힐 수 있는 시작점이 되는 것이다.
 그러한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단 하나, 무수한 반복이었다.
 일만격一萬擊이라는 말이 있다.
 하나의 초식을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일만 번의 반복을 거쳐야 한다는 말이다.
 무작정 일만 번을 휘두른다고 해서 되는 것은 아닌, 마음을 다한, 혼신의 힘을 다한 일만격이었다.
 물론 일만 번을 반복한다고 해서 반드시 초식을 완성하는 것은 아니다. 그만큼 무수한 반복을 거쳐야 한다는 의미일 뿐이었다.
 분명한 것은 무수한 반복이 없고서는 초식의 완성을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이었고, 그것은 제천사십팔식이라고 해서 다를 바 없었다.
 하여 백검휘는 오늘도 제천사십팔식의 검형을 부단히 펼쳐 내고 있었다.
 수련을 시작한 지 한 시진가량이 지났을 때, 백검휘는 묘하게 뒤통수가 따끔거리는 느낌에 목검을 멈추고 시선이 느껴지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 자신과 비슷한 나이의 사내아이 하나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갸름한 선에 백옥 같은 피부 그리고 수려한 이목구비까지. 언뜻 보면 예쁘장한 소녀를 보는 것만 같은 소년이었는데, 백검휘는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누구지?’
 백검휘는 고개를 갸웃했다. 연무장이 있는 내원은 아무나 들어올 수 없는 곳인데, 생면부지의 인물이 서 있으니 의아했던 것이다.
 그도 잠시 백검휘가 표정을 굳히고는 초면의 아이를 향해 물었다.
 “너는 누군데 이곳에 있는 것이지?”
 “나도 여기 있고 싶어서 있는 건 아니니까, 그렇게 인상 쓰지 말라고.”
 초면의 아이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렇군. 귀혈방에서 볼모로 잡혀 온 게 바로 너로군.”
 아이의 말에 백검휘는 어렵지 않게 그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네가 이곳의 소장주냐?”
 단박에 자신의 정체를 알아차린 백검휘의 날카로운 직관에 소년이 살짝 놀란 얼굴을 하고는 물었다.
 “여기는 어떻게 들어온 거지?”
 “나부터 물었는데.”
 “맞다, 내가 백가장의 소장주다. 이제 네 차례야. 여긴 어떻게 들어온 거지?”
 “어떻게 들어오긴 내 발로 걸어왔지.”
 “내 말은 본 장의 무인들이 지키고 있을 텐데, 어떻게 이곳까지 온 것이냐고 묻는 것이다.”
 “내가 어려서 그런지 경계가 허술하더라고. 그래서 몰래 빠져나올 수 있었지. 내가 다른 건 몰라도 그런 건 잘하거든.”
 소년이 별거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경계가 허술하다는 소년의 말에 백검휘는 아버지에게 일러 장원 내의 경계와 순찰을 담당하고 있는 경정단警靖團에 단단히 주의를 줘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소년에게 말했다.
 “그만 돌아가라. 그리고 얌전히 지내. 볼모답게.”
 “싫다면?”
 “뭐?”
 “나도 지금 엄청 억울한 상황이라고. 입장을 바꿔 놓고 생각을 해 봐. 아무 잘못도 없는데 잡혀 와서 줄에 묶인 개새끼처럼 굴라고 하면 너라면 좋겠어?”
 “잘못이 없다고? 네 아비가 귀혈방의 소방주라는 것이 바로 잘못이야.”
 자신과 동생을 납치해 독을 먹이려 했던 교금천의 얼굴을 떠올린 백검휘가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네 입장에서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어. 그런데 지금까지 자식 취급도 받지 못하고 천덕꾸러기처럼 살아온 내 입장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거든.”
 초면의 소년이 울분을 토해 내듯 말했다.
 백검휘는 그런 소년을 바라봤다.
 그의 말대로라면 확실히 억울할 법도 했다. 이제까지 제대로 자식 취급도 받지 못하다가 교금천의 핏줄이라는 이유 하나로 이렇듯 끌려와 옴짝달싹 못하고 죽은 듯 지내게 되었으니 말이다.
 오죽하면 백검휘를 붙잡고 이러겠는가.
 그렇다고 볼모로 끌려온 아이를 자유롭게 놔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도 네가 볼모인 이상 어쩔 수 없는 일이야. 좋은 말로 할 때 그만 돌아가.”
 소년의 처지에 동정이 갔는지, 백검휘가 한결 누그러진 어조로 말했다.
 “그럼 내가 볼모가 아니게 되면 자유를 찾을 수 있는 거냐?”
 “네가 어떻게 볼모가 아니게 된다는 거지?”
 “백가장의 무인이 될게.”
 “뭐라고?”
 “내가 백가장의 무인이 되겠다고. 그러면 되는 거잖아.”
 “말이 되는 소리를 해. 귀혈방 소방주의 자식인 네가 본 장의 무인이 되겠다는 게 가당키나 할 것 같아?”
 “안 될 건 또 뭔데? 어차피 자식 취급도 안 해 주는 아버지, 없는 셈 치면 되잖아.”
 “천륜은 끊고 싶다고 해서 끊어지는 게 아니야. 지금은 억울한 마음에 그렇게 말하지만, 나중에 네 아비가 위험에 처하면 결코 모른 척할 수 없을 거야. 그러니 네 아비와 적대 관계인 본 장의 무인이 된다는 것은 말도 안 돼는 일이야.”
 “그래, 솔직히 그럴지도 몰라. 하지만 맹서盟誓할게, 결코 백가장에 해를 끼치는 일은 하지 않겠다고. 그러니 날 백가장의 무인으로 받아들여 줘.”
 “말로는 무엇인들 못할까?”
 “말만이 아니야.”
 “그럼 묻지. 내가 너를 본 장의 무인으로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한 가지 금제禁制를 가한다고 해도 너는 그것을 감수하고서라도 본 장의 무인이 되고 싶은 것이냐?”
 “금제라면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이지?”
 “네가 본 장에 반하는 마음을 갖지 않는다면 전혀 해가 되지 않을 금제다.”
 “그것을 어떻게 믿지?”
 “내가 네 말을 믿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 아닌가? 정히 믿지 못하겠다면 거절하면 그만이다. 전혀 강요할 생각은 없으니 말이다.”
 백검휘가 자신은 전혀 아쉬울 것 없다는 듯 말했다.
 “젠장. 주도권은 네가 쥐고 있다는 것인가? 좋아, 단 조건이 하나 있다.”
 “조건? 네가 지금 조건을 운운할 상황은 아닌 것 같은데.”
 “너무 팍팍하게 구는 거 아냐?”
 “좋아, 일단 들어 보지.”
 “오 년 후 너와 대결하여 내가 승리한다면 아무런 조건 없이 나를 놓아줘라.”
 “결국 원하는 것은 그것이로군.”
 백검휘가 피식 웃었다.
 귀혈방이 배상금을 분할 지급하는 기간은 십 년이다. 그 말은 소년이 볼모로 잡혀 있어야 할 기간 또한 십 년이라는 뜻이었다. 소년은 십 년의 기간을 반으로 줄이고자 백가장의 무인이 되고자 한 것이다.
 “어때? 그렇게 해 줄 수 있어?”
 “대신 내가 널 이긴다면 넌 평생 날 따라야 한다. 그래도 좋다면 받아들이지.”
 “좋다. 그렇게 하지.”
 “계약 성립이로군. 일단은 네 처소로 돌아가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라. 아버님과 할아버님에게 허락을 받은 후 내가 찾아갈 테니.”
 “허락을 받지 못하는 것은 아니겠지?”
 “어떻게든 받아 낼 테니 걱정 마라.”
 백검휘는 애늙은이라는 말을 들을 만큼 조숙한 자신에 못지않은 소년이 마음에 들었다. 무엇보다 심령으로 연결된 대붕이 감탄할 정도로 소년의 재능이 뛰어났다.
 그래서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어떻게든 설득해 소년을 백가장의 사람으로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럼 믿고 기다리지.”
 소년이 몸을 돌려 연무장을 빠져나갔다.
 백검휘도 목검을 거치대에 다시 놓은 후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연무장을 나섰다.
 
 “흐음, 어린놈의 심계가 보통이 아니로구나.”
 백검휘의 말을 들은 백운경이 놀랍다는 듯 말했다.
 “저나 아버님이 아닌 휘를 찾아간 것도 휘가 가장 가능성이 높을 것이라 생각한 것일 테지요.”
 백석군이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부연했다.
 “그래서 이미 약조를 했다고?”
 백운경이 백검휘를 향해 물었다.
 “그렇습니다.”
 “그를 네 사람으로 만들 확신은 있는 것이냐?”
 “소손의 안목이 뛰어난 것은 아니라 하나 적어도 그가 귀혈방에 애착을 가지고 있지는 않은 것 같았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아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고 말입니다. 오히려 지금껏 천덕꾸러기처럼 대하다가 볼모가 필요하자 냉큼 자신을 내준 아비에 대해 적의를 품고 있는 듯했습니다. 우리 장을 동경한다거나 하는 마음은 없을지라도 적어도 우리 장에 위해를 끼치기 위한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닌 듯싶었습니다. 금제를 가한다는 소손의 조건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을 봐도 그렇고 말입니다.”
 “하긴. 알아보니 아비는 낳아 놓기만 한 채 관심을 두지 않고, 이복형들은 기녀의 소생이라 하여 갖은 핍박을 가했다고 하더구나. 정이 떨어질 만도 하겠지. 한데 금제는 어떤 것을 말함이더냐?”
 “환문술법 중에 심령공제心靈恐制라는 것이 있습니다.”
 “심령공제?”
 “술법을 통해 저에 대한 공포심을 의식 깊숙한 곳에 각인시킴으로써 제게 반하는 행위를 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가능하더냐?”
 “네, 의지력이 강하거나 일정 수준 이상의 고수에게는 그다지 효용이 없긴 하지만요.”
 “흠, 만약을 대비한다는 점에서 보자면 좋은 방법이 될 수 있을 것 같구나. 하지만 그 아이를 진정 네 사람으로 만들고자 한다면 그것은 썩 좋은 방법이 아닐 듯싶구나.”
 “소손도 잘 알고 있습니다. 사실 말을 꺼내긴 했지만, 실제로 심령공제를 가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저 그가 진심인지 떠보고자 함이었습니다.”
 “그래, 그런 편법을 통해 그 아이를 네 옆에 둔다면 당장은 네 사람인 듯 보이겠지만, 그것은 결국 허울뿐인 주종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저 너라는 사람 자체를 보고 그 아이가 너를 믿고 따르도록 만들어라. 그때야말로 진정한 네 사람이 되는 것이니 말이다.”
 “명심하겠습니다.”
 “한데 그 아이를 우리 장의 무인으로 거두고자 한다면 무공을 전수해야 하는 것 아니냐?”
 백석군이 중요한 문제를 거론했다.
 “제천공과 제천사십팔식을 알려 줄까 합니다.”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냐?”
 백석군이 염려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그는 혹시라도 제천공과 제천사십팔식이 귀혈방으로 넘어가지는 않을까 걱정하는 것이었다.
 “저는 그 아이가 마음에 듭니다. 하여 확실히 제 사람으로 만들고자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제가 그에게 믿음을 보여 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믿음이 바로 제천공과 제천사십팔식이고 말입니다.”
 “네 마음을 모르는 바 아니다만, 그 아이가 네 믿음을 저버리면 어찌할 것이냐?”
 “그때는 제가 그에게 전한 것을 남김없이 거두어들일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네가 그 아이보다 우위에 있어야만 한다는 것은 당연히 알겠지?”
 “물론입니다. 소자 제어할 수 없는 검을 곁에 둘 만큼 어리석지 않습니다.”
 “좋다. 그에 관한 일은 네가 알아서 해라.”
 가만히 듣고 있던 백운경이 결론을 내렸다.
 “감사합니다. 더 하실 말씀 없으시면 저는 이만 물러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리해라.”
 용무를 마친 백검휘는 백운경과 백석군에게 인사를 올리고는 물러갔다.
 “괜찮을까요?”
 백검휘가 나가고 나자 백석군이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일단 지켜보자꾸나. 성공하든 실패하든 이번 일로 느끼는 바가 클 것이니. 앞으로 우리 장을 이끌어 나갈 후계자로서 유익한 경험이 될 게야.”
 “알겠습니다.”
 “듣자 하니 휘가 휘하의 위사들을 움직였다고 하던데, 그에 대해 아는 바가 있느냐?”
 “무한삼진에 적을 두고 있는 아이들 중 근골이 뛰어난 이들을 찾고 있는 모양입니다.”
 “그래?”
 “인재를 찾아내 우리 장의 세력을 키우고자 하는 모양입니다. 누굴 닮아 그리 조숙한 것인지.”
 “적어도 네놈을 닮은 것 같지는 않구나.”
 “크흠, 그리 꼭 집어 말씀 안 하셔도 충분히 잘 알고 있습니다.”
 “하하하! 그나저나 귀혈방 놈들에게 고마워해야 할 것 같구나.”
 백석군의 불만 섞인 반응에 웃음을 터트린 백운경이 뜻 모를 소리를 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백석군이 의아한 듯 물었다.
 “휘아 말이다. 귀혈방 놈들이 그런 짓을 벌인 후에 소장주로서의 책임을 확실히 깨닫지 않았느냐? 무공 수련에 매진하는 것도 그렇고, 휘영단을 조직하고 인재를 찾아 나서는 것도 그렇고 말이다.”
 “아! 저는 또 뭐라고. 하긴 그날 이후로 완전히 바뀌었지요. 마치 딴사람이 된 것처럼.”
 “그래서 세상일은 아무도 모른다고 하는 모양이다. 누가 알았겠느냐? 귀혈방 때문에 휘아가 저리 바뀔지 말이다.”
 “결과적으로 보면 그렇긴 하지만 저는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철렁합니다. 하늘이 도와 무량 문주께서 늦지 않게 나타나셨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휘아와 혜아가 어찌 되었을지 상상조차 하기 싫습니다.”
 “이 아비라고 다를 게 있겠느냐? 이번에 귀혈방을 확실히 끝장을 냈어야 했는데, 그놈의 태진문 때문에.”
 백운경이 태진문을 떠올리며 분한 듯 이를 갈았다.
 “휘아가 귀갑의 힘을 온전히 습득한다면 태진문 따위는 우리 장의 상대가 되지 못할 것입니다.”
 “하하, 어서 빨리 그런 날이 왔으면 좋겠구나.”
 백운경이 생각만으로 기쁜 듯 대소를 터트렸다.
 두 사람에게 백검휘는 희망 그 자체였다.
 
 * * *
 
 양교梁皎는 교금천이 백가장의 볼모로 자신을 내어 준 그 순간 교씨라는 성을 버리고 아비지 교금천은 물론 귀혈방과도 절연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렇지 않아도 지금껏 귀혈방에서 받아 온 천대와 멸시가 쌓이고 쌓여 폭발 직전이었는데, 이번 볼모행이 기폭제가 되어 교금천과 귀혈방에 완전히 정나미가 떨어진 것이다.
 하지만 그가 귀혈방과의 절연을 결심했다고 해도 백가장의 볼모라는 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다. 앞으로 십 년간 백가장이 정한 공간에서 꼼짝없이 갇혀 지내야 하는 것이다.
 양교는 십 년의 세월을 그렇게 허송세월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어떻게 하면 볼모 신세를 벗어날 수 있을까 고민했고, 그 고민의 결과가 백가장의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절연을 결심했다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귀혈방 소방주의 핏줄인 그가 귀혈방과 적대 관계인 백가장의 사람이 되겠다는 것을 누가 믿어 줄까?
 양교는 자신의 말을 가장 믿어 줄 사람을 선택해야 했고, 그는 다름 아닌 백가장의 소장주인 백검휘였다.
 그가 백검휘를 선택한 이유는 간단했다.
 일단 나이가 어리니 자신의 말을 덜 의심할 테고, 백가장의 소장주인 만큼 어느 정도의 발언권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래서 기회를 틈타 자신에게 지정된 장소를 벗어나 연무장에서 수련을 하고 있는 백검휘를 만났고, 그에게 자신의 생각을 전했다.
 직접 만나 본 백검휘는 생각했던 것만큼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지만, 어쨌든 양교가 의도한 대로 백검휘는 그를 백가장의 무인으로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 긍정적인 답변을 내놓았다. 게다가 백가장의 장주와 태상장주에게 허락을 받아 내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연무장에서 대화가 있고 난 지 채 반나절이 지나기도 전에 양교를 찾아왔다.
 “생각보다 빨리 왔네.”
 “질질 끌 이유가 없으니까.”
 “그래서 어떻게 됐어?”
 “허락하셨어.”
 “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대단하구나.”
 양교가 감탄과 부러움이 섞인 표정으로 말했다.
 백검휘의 나이는 이제 고작 열세 살이다. 백가장의 소장주라고는 하나 볼모인 양교를 백가장의 무인으로 들이는 것을 허락하게 만들었다는 것은 그만큼 백가장의 장주나 태상장주가 백검휘에게 신뢰를 보내고 있다는 뜻이다.
 양교는 고작 열세 살의 나이로 그러한 신뢰를 받는 백검휘가 놀라웠고, 한편으로는 아비에게 자식 취급도 받지 못하고 볼모로 끌려온 자신과 극명히 비교되는 그의 모습이 부럽기도 했다.
 “일단 호칭부터 정리하자. 그러고 보니 아직 통성명도 하지 않았네. 나는 백가장의 소장주인 백검휘다. 앞으로 소장주님으로 부르면 된다.”
 “내가 너, 아니 소장주님의 아래라는 것을 분명히 하자는 것이지? 좋아, 백가장에 들기로 했으니 당연히 그렇게 해야지. 나, 아니 제 이름은 양교입니다. 교씨라는 성은 이곳으로 오며 이미 버렸습니다.”
 “천륜을 끊겠다는 거야?”
 “없느니만 못한 천륜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건 좀 그렇지만, 그 말이 진정이라면 나로서는 나쁘지 않은 일이네. 그만큼 네가 본 장에 온 마음을 다할 가능성이 크다는 거니까.”
 “약조한 대로 오 년 후 소장주님께서 저를 꺾는다면 그렇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약조가 그것만은 아니지.”
 “다른 약조라면 금제를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맞아. 왜? 겁나?”
 “아닙니다. 제가 백가장에 위해를 가할 마음을 먹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아닌 금제라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전혀 겁날 게 없지요. 백가장의 소장주님께서 거짓을 말씀한 것이 아니라면 말입니다.”
 “큭큭, 지금 날 떠보는 거야?”
 “그럴 리가요. 말이 그렇다는 겁니다.”
 “이해할 수가 없네.”
 “뭐가 말입니까?”
 “난 너와 몇 마디 나눠 보는 것만으로 네가 범상치 않은 아이라는 걸 알겠는데, 귀혈방은 어째서 너 같은 아이를 내준 것일까 싶어서 말이야.”
 “애초에 보고 싶은 마음이 없었으니까요.”
 양교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런가? 어쨌든 나로서는 고마운 일이지. 덕분에 이렇게 앉아서 인재를 얻게 되었으니 말이야.”
 “설마 그런 감언甘言으로 제 마음을 얻고자 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느낀 그대로를 말한 것뿐이야. 그리고 달콤한 감언 따위에 마음을 주는 헤픈 사람은 나도 사양이거든.”
 “빈말이 아니라니 기분은 좋군요.”
 “훗, 좋아하기는. 그럼 시작해 볼까?”
 “무얼?”
 “뭐긴 뭐야? 금제를 하려는 거지.”
 “그 금제라는 것은 어떤 식으로 하는 겁니까? 설마 소장주님께서 직접 하시는 겁니까?”
 “뭐야? 그 미심쩍은 눈빛은? 왜? 내가 하면 잘못되기라도 할까 봐 그래?”
 “아니, 입장을 바꿔 놓고 생각을 해 보세요. 소장주님이 저라면 이제 열세 살짜리 애한테 자신을 맡길 수 있겠습니까? 그 금제라는 것이 뭔지도 모른 채 말입니다.”
 양교가 격렬히 항변했다.
 “솔직히 그럴 수 있다고는 못하겠네. 하지만 날 믿어. 정 그게 어려우면 그냥 포기해. 그러면 편해질 거야.”
 “하아. 지금 그걸 말이라고, 어!”
 백검휘의 장난스러운 말에 양교가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으며 뭐라 말하려는 찰나, 백검휘의 손이 양교의 머리 위에 올려졌다.
 “마음을 가라앉혀.”
 그에 기겁해 머리 위에 놓인 백검휘의 손을 치우려던 양교의 귓가로 백검휘의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장난기 하나 없는 진중한 목소리에는 항거할 수 없는 힘이 담겨 있었다.
 양교는 자신도 모르게 백검휘의 손을 치우려 올리던 손을 내리고는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와 동시에 양교의 머리를 덮은 백검휘의 손에서 흑과 백의 서광이 뻗쳐 나왔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의각전도를 펼쳤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백검휘는 백운경에게 말한 대로 심령공제를 통한 금제가 아닌 의각전도를 통해 제천공과 제천사십팔식을 양교의 의식에 각인시키고 있는 것이다.
 한편 양교는 머릿속으로 밀려드는 제천공의 구결에 어리둥절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백검휘는 분명 금제를 가한다고 했다. 그런데 지금 머릿속으로 흘러드는 것은 내공심법의 운공비결이었다.
 이것을 어찌 해석해야 한단 말인가.
 의아함을 지우지 못한 가운데 제천공의 모든 구결은 양교의 의식에 깊이 각인되었고, 뒤이어 양교의 눈앞으로 환상의 공간이 펼쳐졌다.
 양교가 미처 놀라기도 전에 환상의 공간에 검을 든 인영 하나가 나타났다.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인영은 곧 검을 움직이며 하나의 검술을 펼쳐 나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제천사십팔식이었다.
 검을 든 인영은 마흔여덟 개의 검형을 차례로 펼쳐 내고는 이내 연기처럼 흩어졌다. 그와 동시에 양교를 둘러싸고 있던 환상의 공간 역시 사라졌다.
 의각전도의 술법에서 빠져나온 양교가 눈을 부릅뜨고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 이것이 무엇입니까?”
 백요홍 등과 전혀 다를 바 없는 양교의 반응에 백검휘가 피식 웃고는 대답했다.
 “의각전도. 타인에게 자신의 지식을 전하는 술법이야. 난 방금 그 의각전도를 통해 네게 제천공과 제천사십팔식이라는 무공을 전한 것이고.”
 “이것, 의각전도라는 술법은 백가장의 것입니까?”
 “아니, 제령환문이란 곳의 술법이야.”
 “제령환문? 소장주님은 그곳의 제자인 것입니까?”
 처음 들어 보는 이름인지 고개를 갸웃거린 양교가 물었다.
 “제자는 아닌데, 술법은 사용할 수 있어.”
 “잘은 모르지만 술법이란 것 역시 각고의 수련을 거쳐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소장주님께서 펼친 의각전도란 술법의 공능을 따져 보면 아무나 펼칠 수 있는 것이 아닌 듯싶은데······.”
 “그러니까 고작 열세 살밖에 안 된 내가 어떻게 그런 고난도의 술법을 펼칠 수 있느냐 이거지?”
 “그렇습니다. 저는 솔직히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궁금해?”
 “네.”
 “미안하지만 그건 내 밑천이라 밝힐 수 없어.”
 “네?”
 “비밀이라고.”
 “알겠습니다. 더 이상 묻지 않겠습니다.”
 “잘 생각했어. 어차피 물어도 대답해 주지 않을 거니까.”
 “한데 분명 금제를 가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것은 금제가 아닌 것 같은데?”
 “왜? 금제를 받고 싶어?”
 “그게 아니라 소장주님의 의도가 정확히 무엇인지 알고 싶은 것입니다.”
 “그저 너에 대한 내 신뢰를 보여 준 것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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