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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세제일인 1

2018.03.07 조회 730 추천 3


 절세제일인 1권
 서장
 
 
 지배자(支配者).
 이것을 꿈꿔 온 자, 천지창조 이후 수천만이리라.
 그러나 그리되기 위해서는 자격이 있어야 한다.
 절대(絶代)의 세력(勢力)!
 극강(極强)의 무학(武學)!
 최고(最高)의 지략(智略)!
 그리고 불길 같은 야망(野望)!
 바로 그런 것들이다. 물론 지배자를 꿈꿔 온 사람은 많았지만 그 모든 자격을 지닌 사람은 없었다.
 달마(達磨)는 야망이 없었고 영세무적(永世無敵)의 고혼유찰(孤魂幽刹), 그에게는 지략이 없었다.
 희대의 박학(博學) 천뇌공(天腦公)에게는 무학이 없었으며, 고금제일의 살수 한천귀영(寒天鬼影), 그에게는 세력이 없었다.
 그런데 오백 년 전!
 이 모두를 갖춘 세력이 출현했다.
 그것도 하나가 아닌 자그마치 열 개의 세력이!
 대륙십자련(大陸十字聯).
 환영각(幻影閣).
 마혈금옥(魔血禁獄).
 광령십팔군도(狂靈十八群島).
 황혼철기대(黃昏鐵騎隊).
 혈사리(血沙里).
 무도겁천(武道劫天).
 옥녀궁(玉女宮).
 흑우림(黑雨林).
 천가(天家).
 대륙십패(大陸十覇)!
 세인들은 그 열 개의 세력을 가리켜 그렇게 일컬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다 갖추었으리라 믿었던 그들도 끝내는 좌절을 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 좌절은 지금껏 누구도 생각지 못한데서 비롯되었다.
 절세(絶世)의 운(運)!
 그랬다. 그들에게는 운이 따르지 않았던 것이다.
 하필이면 동시대에 열 개의 극강세력이 한꺼번에 나타날 게 뭐란 말인가?
 일산일호(一山一虎) 세불양립(勢不兩立)이라 했거늘, 한 산에 어찌 두 마리의 호랑이가 양립(兩立)을 할 수 있으랴. 더구나 이는 일산이호 정도가 아니라 일산십호(一山十虎)가 아닌가!
 결국 누구도 지배자의 꿈을 달성시킬 수가 없었다.
 대륙십패는 서로가 서로를 견제하다가 끝내는 지배자의 모든 조건을 땅에 묻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언젠가 틀림없이 다시 나타날 것이다.
 그들이 생각키에 최상의 절세의 운이 따르는 시기에 말이다.
 그리하여 그들 중 누가 되었든 그때는 아직 누구도 이루지 못한 지배자의 신화가 이룩될 것이다.
 一. 남십자성(南十字星)이 성궁(星宮)을 점할 때, 대륙십자련은 천하를 접수하겠노라!
 二. 천하는 환영(幻影)의 신화를 보게 될 것이다. 못 훔치는 것 없고, 못 가는 곳 없으며, 못하는 것 없는 경세환영(驚世幻影)의 신화가 대륙을 훔치겠노라!
 三. 기인이라 자부하는 자들이여, 마혈금옥으로 오라. 그대들의 가슴을 끓게 만드는 지배자의 야망을 성취시켜 주리라!
 四. 바다의 폭풍이 대륙을 강타할 것이다. 바다의 힘! 일만이천의 대선단(大船團)과 함께 나타나리라!
 五. 아는가? 영혼을 잃은 백팔 개의 저주 덩어리들을··· 황혼 속에 나타났다 밤과 함께 사라지는 황혼의 혈풍(血風)을······.
 六. 무도겁천만이 진정한 무(武)의 전설을 창조해 내리라. 누구도 무도겁천 앞에서 무를 논하지 말라! 죽음만이 있을 뿐이다.
 七. 흑우림··· 검은 폭우(暴雨)를 잊지 말라. 검은 비는 곧 죽음이요, 영원한 암흑천하의 근원이다!
 八. 사막의 패자(覇者)가 혈풍으로 몰아가리라. 대륙은 혈사리, 붉은 모래의 꿈이다!
 九. 호호호······! 모든 사내 위에 군림하리라! 사내들은 여인의 종으로 전락하리라! 옥녀궁이 보여주리라!
 十. 싸워라! 언제든지 나타나라! 천가는 그때를 언제까지고 기다리노라. 그 날을 위해 삼천 년을 참아온 우리다.
 무서운 재앙이 닥칠 것 같은 기분 나쁜 예감이 든다.
 피가 보인다. 강처럼 흐르는 피이다.
 주검이 보인다. 산처럼 쌓이는 주검이다.
 이제! 피의, 죽음의, 재앙의 대장정이 열린다.
 이는 세인들이 모르는 새에 은밀히 열리고 있다. 지극히 은밀하게, 더욱 어두운 어떤 곳에서······.
 
 ***
 
 흑(黑)과 백(白)!
 이로써 정(正)과 사(邪)를 구분 짓는다.
 
 ***
 
 백(白)의 실체는 몇 개의 숫자로 정의된다.
 천백이십오(1125). 오(5). 일(1).
 ― 천백이십오가 합쳐 오를 만드니, 오는 일을 낳는다.
 현실!
 이것은 전설이 아닌 현실이다. 바로 당금의 이야기인 것이다.
 그 세 가지 숫자로 백(白)의 실체는 오백 년 동안 이 땅에 찬란하게 꽃피웠다.
 천백이십오!
 정(正)이라 이름하는 백(白)의 추종자 천백이십오 인.
 일컬어 천백이십오 천의정존(千百二十五天意正尊)!
 천의정존 개개인 밑에는 천문학적인 숫자의 무수한 백색추종자(白色追從者)들이 있다.
 즉, 천백이십오 천의정존은 천하각처에 산재한 천백이십오 대소정파의 지존들인 것이다.
 그들은 다시 오(五)라는 숫자 밑으로 모여든다.
 천하대의(天下大義)와 평화라는 대명분 하에······.
 오(五)!
 천의오정천(天意五正天)을 대변하는 숫자이다.
 불천(佛天), 도천(道天), 유천(儒天), 무천(武天), 그리고 상천(商天).
 이들 다섯 개의 천의오정천!
 천백이십오 개의 각 대소정파는 특성에 따라 이들 천의오정천 산하에 예속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오라는 숫자가 탄생한 것이다.
 일(一)!
 이는 곧 천하정파의 모든 것이다.
 다섯 개의 지맹(枝盟)에 천백이십오 개의 분맹(分盟)을 거느린 거대한 정(正)의 상징!
 천의맹(天意盟)!
 백의 모든 실체는 바로 그 천의맹으로써 집약된다.
 그러나 사람들은 모른다.
 천의맹이 어떻게 조직되었고 누가 수뇌인지, 심지어 천의맹의 위치가 어디인지조차 알지 못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천의맹이 존재하는 사실만을 중시했으며 또한 만족해했다. 그리고 그것이 진정한 백의 실체임을 조금도 의심치 않았다. 바로 천의맹에 의해 이 땅의 평화가 지속되고 있기 때문이었다.
 반면 흑(黑)의 실체는 이렇게 정의된다.
 구백팔십이(982). 삼(3). 일(1).
 ― 으으······.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한단 말인가?
 ― 햇빛이 그립다. 이 음습하고 암울한 곳이 이제는 지겹다!
 ― 우리도 이젠 떳떳하게 태양을 이고 살아가자!
 ― 우리가 안 되면 우리의 후손에게나마 저 밝은 태양빛을 마음껏 누리게 하자!
 ― 자, 모두 모여라! 흑(黑)이라 버림받은 자들이여!
 급기야 흑의 추종자들도 모여들기 시작했다.
 하나, 둘··· 열, 스물··· 백, 이백······.
 그리하여 구백팔십이라는 숫자가 최초로 이루어졌다.
 구백팔십이!
 이름하여 구백팔십이마종(九百八十二魔宗)!
 구백팔십이 개의 천하사파(天下邪派)의 지존들이 흑의 실체를 형성하기 시작한 것이다.
 뒤를 이어 그들은 그들보다 더한 숫자의 흑의 추종자들을 이끌고 다시 셋이란 숫자로 뭉쳤다.
 삼대마류(三大魔流)!
 그들은 부르짖었다.
 ― 너희는 단지 한 팔만 내어 도와라! 그리하면 너희들 자자손손이 영원토록 떳떳이 태양 아래 활보할 수 있으리라!
 정녕 아무도 삼의 결정에 이의를 제기하는 자가 없었다.
 그것은 바로 그들이 원했던 것이었으니까.
 일(一)!
 구백팔십이마종을 거느린 삼대마류는 다시 하나로 합일하니, 이름하여 마종맹(魔宗盟)이라 일컬었다.
 마종맹!
 그것이 곧 일의 본체이자 흑의 실체였다.
 그들의 목적은 오직 하나.
 마도천하(魔道天下)!
 그것을 위해서 흑의 추종자들은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천하는 모른다. 천장(千丈) 지하에 숨쉬는 그 가공할 암류(暗流)를······.
 하늘도 그 흑의 실체는 보지 못했다.
 그래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흑의 실체를 이루는 세 개의 숫자를······.
 구백팔십이. 삼. 그리고 일.
 
 ***
 
 흑과 백.
 정과 사.
 그리고 여섯 개의 숫자.
 이 이야기는 그 여섯 개의 숫자와 얽히고설키는 한 소년으로부터 대풍운의 장이 열린다.
 
 
 1장 부자간의 내기
 
 
 동북의 명산인 괄창산(括蒼山).
 험악한 기암절봉(奇巖絶峯)의 장관이 펼쳐져 있는 곳은 아니나, 완만한 산세가 오히려 더 수려하고 아름다워 시인묵객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때는 황혼녘, 소슬한 가을바람과 함께 노을의 황홀한 빛이 괄창산의 수려한 산세를 더욱 신비롭게 물들이고 있는 시각이었다.
 문득, 제법 높다란 어느 산봉 위로 크고 작은 두 줄기의 인영이 나타났다.
 두 사람.
 부자(父子)간일까?
 장대한 체격의 한 중년인과 십오륙 세 정도 되어 보이는 한 소년이다.
 중년인은 낡디낡은 마의(麻衣)를 일신에 걸치고 체격에 걸맞지 않게 조그마한 봇짐 하나를 어깨에 걸머지고 있다.
 한 손에는 봇짐보다도 더 커다란 술병 하나를 들었으며, 그 술병을 든 팔뚝의 피부는 짙은 구릿빛.
 시커먼 구레나룻이 온 얼굴을 무성히 뒤덮고 있어 용모는 금방 알아볼 수 없다.
 그러나 자세히 뜯어 보면 의외로 준수한 얼굴이었다.
 굵고 진한 검미(劍眉)와 그 끝에서 뻗어 나간 곧은 콧날, 바람에 휘날리는 헝클어진 머리칼 사이로 문득문득 드러나는 넓고 반듯한 이마 등은 가히 대장부의 용모가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었다.
 장대한 신형, 그 전신 곳곳에 은은히 배어 있는 강인한 장부의 체취와 탄력이 또한 범상치 않았다.
 눈빛은 깊었다.
 내면의 감정이 거의 표출되지 않는 눈빛이었다.
 허무(虛無)일까?
 아무런 야심이나 희망을 갖지 않고 되는 대로 살아가는 사람의 낙천(樂天)이랄까?
 그의 깊은 눈빛은 은연중 그러한 기운을 저변에 깔고 있었다.
 허무와 낙천.
 사실은 어울리지 않는 상반된 두 분위기가 그에게선 자연스럽게 어울려 있는 것이다.
 그리고 소년!
 이제 십오륙 세나 되었을까?
 여자가 아닌가 착각하리만큼 아름다운 미소년이었다.
 일신에는 먹물처럼 짙은 흑의를 걸쳤다.
 그 흑의와 실로 인상적인 대조를 이루는 피부는 창백하도록 희디희고, 흰 피부 때문에 더욱 선명해 보이는 붉고 윤기 흐르는 입술, 조각처럼 섬세한 콧날, 그리고 유난히 더 돋보이는 것은 한 쌍의 보석처럼 영롱히 빛나는 눈빛이었다.
 그 아름다운 얼굴은 어딘지 모르게 마의중년인과 닮아 있었다.
 기질 역시 어딘가 비슷했다.
 소년의 아름다움은 세파를 헤쳐온 강인함이 저변에 어려 있어 더욱 빛나고 있었고 무슨 일에도 눈썹 한 올 꿈쩍하지 않을 것 같은 낙천과 여유가 있어 또한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마의중년인과 분명히 다른 점이 한 가지 있기는 했다.
 허무 대신 짓궂은 치기가 가득 배어 있는 것이다.
 천성의 낙천과 여유, 그것이 만들어낸 장난기이리라.
 그들은 계속 걸음을 옮겨 산등성의 정상으로 마저 올라섰다.
 어디라고 분명히 꼬집어 말할 순 없으나 그들의 걸음걸이는 매우 특이했다.
 어찌 보자면 터벅터벅 넋을 놓고 걷고 있는 것도 같았고 또 어찌 보자니 허공을 밟듯 신비롭고 그지없이 안정된 걸음걸이 같기도 했다.
 어쨌거나 그들의 걸음이 멎은 곳은 사방의 시야가 훤히 트인 평평한 암반 위였다. 한층 진한 노을빛이 두 사람의 신형을 화려하게 감싸안았다.
 조금은 싸늘하고 강한 바람이 두 사람의 머리칼과 옷자락을 세차게 휘날렸다.
 마의중년인, 문득 그의 입이 열렸다.
 “저곳이다. 아비가 말한 신비의 사찰(寺刹)······.”
 그의 시선이 가리키는 곳은 발 아래 아득히 내려다보이는 하나의 산곡(山谷)이었다.
 산봉과 절벽을 병풍처럼 사방에 두르고 있는 널따란 분지.
 그 전역을 빽빽이 메운 채 울울창창한 수림이 자라고 있었다.
 그리고 수림 한복판에는 웅대한 규모의 사찰 하나, 천년 이상의 전통이 느껴지는 고색창연한 사찰이다.
 가늘게 뜬 눈으로 사찰 전역을 잠시 훑어본 백의소년은 문득 미소를 피어 올렸다.
 “그렇게 대단한 곳 같지는 않은데요. 오래되어 낡고 허술할 뿐······.”
 마의중년인은 힐끗 그를 돌아보더니 술병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는 벌컥벌컥 들이킨 후 수염에 묻은 술방울을 훔쳐내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겉모습이 그렇다고 무시할 작정이냐?”
 “무시할 일 있으면 해야지요, 뭐.”
 소년의 심드렁한 대꾸.
 마의중년인도 따라서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래, 네 녀석은 마음대로 무시해라. 아비는 무시하지 않고 조심할 테니까.”
 “쳇! 꼭 조심하는 것만이 최고는 아닌 겁니다, 아버님.”
 “무시하는 것은 더욱 최고가 아니다, 이놈아.”
 참으로 기묘한 부자였다.
 예의나 격식 같은 것은 찾아볼 수가 없고 그저 마음 내키는 대로 내뱉는 듯한 말투와 행동이다.
 “헌데, 아버님.”
 “뭐냐?”
 “하필 왜 이 먼길까지 와서 저렇게 귀신 나올 것 같은 절간에서 마지막 내기를 해야 하는 겁니까?”
 마지막 내기?
 부자간에 내기라니······. 게다가 마지막이라는 말이 들어간 걸로 보아 한두 번 한 것도 아닌 모양이다.
 “다 이유가 있다, 이놈아. 아비의 깊은 속을 네 좁은 소견으로 어찌 헤아려 알겠느냐?”
 그렇게 말하는 마의중년인의 어조는 참으로 중후했다.
 소년은 기이한 시선으로 마의중년인을 올려다보았다.
 “아버님, 그 말씀은 제가 해야 하는 것 같은데요? 아버님의 깊으신 속을 소자의 좁은 소견으로 어찌 헤아려 알 수 있겠습니까, 하고······.”
 “그러니 얼마나 자애로운 아비이냐? 네 입이 아플까 봐 네 말을 먼저 다 해주는 아비······.”
 “세상에 없지요. 항상 존경하고 있습니다.”
 “음······. 계속 존경해라.”
 “그럴 예정이옵니다.”
 그러더니 소년은 문득 턱을 슬슬 문지르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한 가지만 약속해 주시면 더욱 존경해 드릴 텐데······.”
 그 말에 마의중년인은 구미가 당긴 듯 되물었다.
 “뭐냐? 약속이라면 철저히 지키는 사람이 바로 이 아비다.”
 “이제까지는 아버님의 그런 모습을 보지 못했습니다만······.”
 “내가··· 그랬더냐?”
 “그렇지 않구요? 이제까지 아흔아홉 번의 내기를 아버님은 모조리 지셨습니다.”
 “졌··· 지.”
 “헌데, 내기에 건 약속 사항을 아버님은 한 번도 지키신 적이 없습니다. 그럴 때마다 아버님에 대해 얼마나 많은 실망을 느꼈는지······.”
 소년은 그지없이 슬픈 표정을 지었다.
 마의중년인의 자세가 조금 불편해졌다.
 “흠··· 흐흠··· 지, 지키면 될 게 아니냐? 이번에는 틀림없이 지켜주마.”
 그러나 소년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더욱 슬픈 표정으로 깊은 탄식을 내쉬었다.
 “아아! 꾸짖어 주십시오. 아버님, 소자는 참으로 불효막심하옵니다.”
 “불효막심하다니? 네가 왜?”
 “아버님의 말씀을 못 믿다니··· 소자가 왜 이렇게 되어 버렸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소년의 표정은 보는 이가 눈물겹도록 슬프고 그럴 듯했다.
 그래서일까?
 마의중년인의 안색이 갑자기 침중해졌다.
 그는 자책하듯 입을 열었다.
 “아비 때문이다.”
 “예?”
 “아비가 그간 얼마나 약속을 지키지 않았으면 네가 그렇게 됐겠느냐?”
 마의중년인은 그 침중한 안색으로 설레설레 고개를 내젓더니 소년의 어깨를 감싸안아 품으로 끌어당겼다.
 “맹세하마. 이번에는 틀림없이 약속을 지킨다. 지키지 않으면 네가 아비고 아비가 너다.”
 “좀··· 노, 놓고 말씀하시지요.”
 소년은 너무 굳세게 끌어안겨져 호흡이 곤란해진 모양이었다.
 마의중년인은 소년의 기색은 본 체도 하지 않고 안은 팔에 더욱 힘을 주었다.
 “이럴 때 한 번 안아 보자, 녀석아.”
 지금 소년을 내려다보는 그의 깊은 눈빛에는 예의 허무 대신 잔잔한 애정이 들어차고 있었다.
 부정(父情).
 묘하게 표현하는 부정이었다.
 소년은 숨이 막히더라도 잠시 참기로 한 모양이다.
 안긴 채 그대로 영롱히 빛나는 눈길을 들었다.
 “한 번만 더··· 믿어 보지요. 이번에는 틀림없이 아버님의 과거를 들을 수 있을 것으로······.”
 과거 이야기를 듣기 위한 내기였단 말인가!
 확실히 괴이한 부자였다.
 과거 이야기 따위가 뭐 그리 대단해서 아흔아홉 번이나 내기를 한단 말인가?
 “녀석······.”
 마의중년인은 문득 이제까지의 장난기를 씻어내고 담담히 말문을 열었다.
 “아비가 이미 마지막 내기라 하지 않았느냐? 얘기해 줄 테니 이번에도 아비를 이기기나 해라.”
 그는 소년을 떼어내고 아래 고찰로 다시 시선을 옮겼다.
 이때 고찰에서는 저녁 일과를 알리는 듯한 은은한 종음(鐘音)이 울려오고 있었다.
 뎅··· 뎅······.
 고찰의 신비롭고 웅장한 자태를 지그시 주시하며 마의중년인의 입이 다시 열렸다.
 “승부물(勝負物)이 어떤 것인지 아직 기억하고 있느냐?”
 “예, 극락전(極樂殿)에 있는 문수보살(文殊菩薩)의 왼쪽 눈알······.”
 문수보살의 왼쪽 눈알.
 사람들이 괴이하니 내기의 승부물 또한 괴이하다.
 “자신 있느냐?”
 “글쎄요.”
 “왜, 아까는 별로 대단한 곳 같지 않다더니?”
 “아까는 그랬지요.”
 “지금은?”
 “다시 보니 절간치고는 꽤 살벌한 곳 같은데요.”
 소년은 가늘게 뜬 눈으로 고찰의 정경을 훑어보았다.
 “거대한 무형의 막 하나가 저곳 전체를 감싸고 있는 것 같아요. 마치 누구든 악의를 품고 접근하면 그대로 박살을 내버릴 듯······.”
 마의중년인의 눈빛이 잠깐 변했다.
 약간의 감탄과 만족이 흘러 나왔다.
 “좋다. 이놈, 이번에도 잘하면 아비를 이기겠구나.”
 통쾌한 어조로 말하더니 마의중년인은 희미한 정광(精光)을 번뜩이며 다시 고찰을 내려다보았다.
 “그렇다. 명색이 법왕사(法旺寺)이다. 세상에 알려지진 않았으나··· 천년소림에 거의 필적하는 가공할 무력을 갖춘 사찰이 바로 저곳이다. 그러니 조심해야 한다. 아비의 과거를 듣기 전에 네 목이 먼저 달아나 버릴 수도 있으니까.”
 그러나 마의중년인의 말을 듣는 소년의 눈빛에는 긴장이나 조심스러운 기색 대신 엷은 흥미가 차 오르고 있었다.
 강한 적일수록 흥미를 느끼는 성격인지······.
 소년 그리고 마의중년인.
 기묘하고 괴이한 이들 부자.
 과연 어떠한 내력과 신분을 지닌 사람들인가?
 겉으로 보기에는 단지 천하가 제 집인 양 떠도는 방랑자의 모습이나 보면 볼수록 신비해 보이는 그들 두 사람이다.
 모를 일이다.
 괴상무쌍한 부자로부터 시작된 이 이야기가 앞으로 어떠한 파란을 일으키며 펼쳐질지······.
 문득 소년은 눈길을 들어 하늘을 보았다.
 “비가 올 것 같은데요.”
 마의중년인은 소년을 따라 천색(天色)을 한차례 살피더니 곧 고개를 끄덕였다.
 “음······. 제법 통쾌하게 뿌릴 것 같다.”
 하늘은 노을을 암갈색으로 물들이며 서서히 먹구름이 일고 있었다. 그리고 산정(山頂)에는 음산한 바람이 자리하고 있었다.
 “서둘러야겠어요.”
 “가자.”
 그렇게 주고받은 두 마디.
 순간 슬쩍 지면을 박차는가 싶더니 소년과 마의중년인의 모습은 환영처럼 그 자리에서 사라져 버렸다.
 실로 기막힌 신법이었다.
 아니 그것은 신법의 차원을 떠나 일종의 환술 같은 것이랄까.
 어쨌든 갈수록 더욱 신비한 느낌을 주는 부자.
 그들이 떠난 자리에 폭우를 예고하는 습기 찬 음풍(陰風)만이 허허롭게 맴돌았다.
 
 ***
 
 법왕사(法旺寺).
 그것은 세상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고찰이었다.
 간혹 아는 사람이 있더라도 그저 역사가 꽤 오래된 평범한 사찰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천년소림(千年少林)!
 불문의 성지이자, 무림의 태두인 소림사만은 결코 법왕사를 평범한 사찰로 보지 않는다.
 아니 소림사는 법왕사를 소림사의 아래로 보지도 못했다.
 그것은 법왕사의 보이지 않는 힘 때문이었다.
 소림사에 칠십이종절예(七十二種絶藝)가 있다면 법왕사에는 천불대라칠십이수(天佛大羅七十二手)가 있으며, 소림사에 달마역근세수공(達磨易筋洗髓功)이 있다면 법왕사에는 무무역합천불공(無無逆合天佛功)이라는 불문의 광세비학이 있었다.
 뿐인가?
 법왕사에 소림의 백팔나한(百八羅漢)과 비등한 항마백팔불(降魔百八佛)이 있다는 사실은 소림사만이 아는 비밀인 것이니······.
 본래 법왕사는 소림의 조사(祖師)인 달마대사의 유일한 지우(知友)였던 무무상인(無無上人)이 창시한 것이었기에 소림사의 장로급 이상 고승들에게만 법왕사의 내력이 전해져 오고 있었던 것이다.
 어쨌거나 그 신비의 사찰 법왕사를 찾아온 신비하고 괴이한 한 쌍의 부자로부터 이야기는 시작되어 버렸다.
 쏴아아― 쏴아아아아―!
 어스름한 어둠 속으로 장대비가 억수같이 퍼붓고 있었다.
 마치 하늘이라도 뻥 뚫려 버린 듯 퍼붓는 폭우였다.
 이곳은 법왕사로 이르는 외진 숲길, 숲길 위로 내리는 밤비는 차라리 을씨년스럽기조차 했다.
 문득 폭우 속으로 한 떼의 무리가 어렴풋이 비쳤다. 한 명의 황의노인과 여덟 명의 체격이 건장한 흑의장한들이었다.
 앞서 걷는 황의노인은 비에 젖어 축 늘어진 백색기(白色旗)가 달린 깃대를 하나 들고 있었으며, 그 뒤를 따르는 흑의장한들은 네 명씩 나뉘어 두 개의 관을 짊어지고 있었다.
 둘 다 크기가 똑같은 검은 색깔의 흑관(黑棺)이었다.
 휘이이이잉······.
 홀연 일진 바람이 일며 빗줄기가 세차게 주위의 나뭇잎을 떨쳐냈다. 떨어진 나뭇잎들이 파르르륵 비명을 내지르며 두 개의 관 위로 나뒹굴었다.
 왠지 귀기스런 분위기를 자아내는 광경이었다.
 문득 황의노인이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뒤를 돌아보며 흑의장한들을 재촉했다.
 “더 어둡기 전에 법왕사에 도착해야 한다. 서둘러라!”
 흑의장한들의 몸에서는 하얀 수증기가 무럭무럭 피어 오르고 있었다.
 필시 먼길을 왔음이 역력한 모습들이었다.
 그러나 황의노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들의 발걸음은 더욱 빨라졌다.
 빗발은 점점 거세어지는데······.
 
 ***
 
 지관(智官) 스님은 당금 법왕사의 두 번째 배분인 지자(智字) 항렬의 제자 중에서도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고제자였다.
 그럼에도 그는 지난 삼십여 년 전부터 맡기 시작한 산문 앞에서 방명록에 서명 받는 일을 아직까지 다른 사람에게 넘기지 않고 스스로 맡고 있었다.
 원래 그 일은 뭇 승들이 꺼리는 일이다.
 사대(四代) 항렬 이하의 제자들이나 맡는 일이다.
 사내(寺內)의 뭇 승들은 지관스님이 덕이 높아 남이 꺼리는 일을 자청해 고행의 도로 삼는 것이라 여겨 항상 그에게 존경의 념(念)을 보내고 있었다. 또한 향객(香客)을 맞는 산문의 일을 가장 잘 처리해 온 사람이 지관스님이기도 했다.
 지관스님은 오늘도 예외 없이 산문 앞의 조그마한 지객당(知客堂) 안에 정좌하고 앉아 염주를 굴리며 산 아래 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회색승포에 대춧빛 홍안(紅顔), 잔잔한 시선 등 일견하여 득도(得道)의 경지에 이른 고승의 풍모였다.
 “아미타불··· 참으로 장엄하게 오시는 밤비로다.”
 지관스님은 그칠 줄 모르는 밤비를 바라보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석가세존께서 열반에 드실 때도 이러했거늘······.”
 그는 지극한 불심이 깃든 음성을 흘려내며 연신 염주알을 굴려댔다.
 헌데 돌연 줄곧 산 아래 쪽을 응시하던 그의 두 눈에 빠른 이채가 스쳤다.
 “오! 또 가엾은 중생의 혼이 오는구나. 아미타불··· 아미타불······!”
 그의 시선을 파고든 것은 한 떼의 행렬이었다.
 백색기가 달린 깃대를 든 한 명의 황의노인을 앞세운 두 개의 흑관을 짊어진 여덟 명의 흑의장한들.
 “아미타불······.”
 지관스님은 장중한 불호를 읊으며 지객당을 걸어나와 빗물에 승포가 젖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황의노인을 향해 다가갔다.
 황의노인 앞에 다가간 그는 정중히 합장지례를 취했다.
 “아미타불··· 어서 오시오, 노시주.”
 “수고하십니다, 지관스님. 불쌍한 중생의 혼을 달래고자 비가 오는 것을 무릅쓰고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말투로 미루어 황의노인은 지관스님을 익히 알고 있는 듯했다.
 비와 땀으로 전신이 흠뻑 젖은 흑의장한들도 지관스님을 잘 알고 있는 듯한 표정들이었다.
 그런데 흑의장한들의 표정에는 황의노인과는 달리 간혹 경멸의 기색이 빠르게 스치곤 했다.
 지관스님은 그러한 흑의장한들의 표정을 못 본 것인지, 아니면 아랑곳하지 않는 것인지 그들을 가볍게 일견한 후 처연한 눈으로 두 개의 흑관을 바라보았다.
 “허, 어찌 두 사람이 동시에?”
 “거지 부자(父子)인 모양인데 하필 저희 황구촌(黃狗村)에 와서 죽어 있지 뭡니까?”
 “부자?”
 지관스님의 얼굴에 놀람의 빛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부자가 동시에 죽었단 말이오?”
 “그렇습니다. 여독과 굶주림에 지쳐 결국 목숨까지 잃은 것 같습니다.”
 “오오! 아미타불!”
 지관스님은 정말 애석하다는 듯이 연신 침중한 불호를 읊었다.
 황의노인이 탄식을 금치 못하며 말을 이었다.
 “조금만 더 일찍 발견했더라면 목숨은 건질 수 있었을 텐데······.”
 “아미타불! 아미타불!”
 “어쨌든 내력도 신분도 모르는 사람들이지만 하도 가엾어서 저희 촌의 관례대로 극락왕생을 비는 염불이라도 해줄까 해서 이렇게 왔습니다.”
 “아미타불! 정말 불심 깊으신 시주들이시오. 아미타불! 아미타불······.”
 입에 밴 듯 연신 불호를 읊어대는 지관스님의 얼굴에는 정녕 탄복했다는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법왕사가 위치한 이곳 괄창산 밑에는 황구라는 조그만 촌락이 있었는데 그 황구촌의 가장 큰 관습 중 하나가 극락왕생을 비는 삼일기원제였다.
 일단 사람이 죽으면 법왕사의 극락전으로 보내 삼일 동안 극락왕생을 비는 염불을 받은 후 장사를 지내는 것이다.
 그래야 혼이나마 극락에 갈 수 있다고 황구촌 촌민들은 신앙처럼 믿고 있었다.
 지나가던 길손이 죽어도 그 관습대로 행하는 것은 마찬가지였고, 황구촌의 촌장인 황의노인 육노장(陸老長) 이하 팔 인의 흑의장한은 죽어 있는 거지부자를 발견하자마자 염(殮)을 하여 곧바로 이곳 법왕사로 운반해 온 것이다.
 황의노인 육노장은 애조 띤 눈으로 두 개의 관을 차례로 바라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저들 부자가 쓰러져 있는 모습은 차마 눈뜨고 보지 못할 정도로 불쌍했습니다. 아마 부처님께서도 저 부자의 혼을 기꺼이 받아주실 것입니다. 지관스님, 어서 극락전주님께 연락을 좀······.”
 육노장의 두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줄곧 안됐다는 빛을 띠고 있던 지관스님의 표정이 모호하게 변한 것은 바로 이때였다.
 그것은 난처하다는 기색이었다.
 “아미타불! 육노시주, 물론 시주를 비롯한 황구촌민들의 불심은 언제나 그러했듯 정말 탄복할 정도요. 그러나 오늘은······.”
 말은 하는 사이 지관스님의 표정은 노골적으로 곤란하다는 기색으로 변해 있었다.
 법왕사에 말못할 일이 있기라도 하다는 듯했다.
 그러나 육노장은 이미 지관스님이 그렇게 나올 것을 예상이라도 한 듯 급히 품속에서 무엇인가를 꺼내 들었다.
 ‘쩔렁’하며 드러난 것은 은자 꾸러미였다.
 대략 오십 냥쯤이나 될까?
 “저··· 이것은 저희 황구촌민들이 성의를 모아······.”
 육노장은 말을 하며 은자 꾸러미를 지관스님의 염주를 잡은 오른손에 올려놓았다.
 “허, 이것 참. 오늘은 삼대제자(三代弟子)들의 법력공양(法力供養)이 있는 날인데 이렇게 향전(香錢:시줏돈)까지 바치니 거절할 수도 없고··· 이를 어쩐다?”
 말과 행동은 여전히 곤란하다는 투였으나, 정작 지관스님의 오른손은 이미 염주와 함께 은자 꾸러미를 꽉 움켜쥐고 있었다.
 육노장은 허리를 굽실거리며 간절한 어조로 사정했다.
 “지관스님, 부디 저 불쌍한 영혼들을 저버리지 말아 주시오.”
 “허, 어쩔 수가 없군. 원래 안 되는 일이나 노시주의 성의를 봐서라도 빈승이 책임을 지겠소. 그러나 이는 매우 특별한 경우라는 사실을 노시주는 알아야 할 것이오.”
 “물론입지요. 고맙습니다, 지관스님!”
 “자, 이제 빈승을 따르시오. 아미타불!”
 지관스님은 불호를 흘리며 서둘러 몸을 돌렸다.
 급히 비를 피하고자 하는 모습이었다.
 흑의장한들의 입에서 지극히 나직한 욕설이 터져 나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나쁜 자식!”
 “중놈이 돈맛이나 알고······.”
 육노장이 다급히 그들의 입을 막았다.
 “조용히들 하게. 이렇게라도 해야 우리 황구촌 사람들이 극락왕생할 수 있네.”
 엄숙히 흑의장한들의 말을 꾸짖듯 자른 육노장은 재빨리 지관스님의 뒤를 쫓아갔다.
 흑의장한들도 즉시 그 뒤를 따랐다.
 그러나 오 장여를 앞서 걷는 지관스님을 바라보는 그들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하나같이 조소와 경멸이었다.
 
 ***
 
 세 개의 불상.
 정중앙에 석가여래(釋迦如來)가 인자한 미소를 띠고 앉아 있었고, 석가여래의 우측으로 험악한 인상의 인왕보살(仁王菩薩)이, 좌측으로는 지혜로운 모습의 문수보살이 앉아 있었다.
 그리고 세 개의 불상 아래 제단에는 두 개의 흑관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또한 두 흑관의 아래로는 청동향로가 놓여 끊임없이 푸르스름한 향연(香煙)을 피워 올리고 있었다.
 뭇 사찰에서는 보기 힘든 법왕사 특유의 극락전.
 이곳은 망자의 혼을 극락왕생하게 해달라 기원하는 곳이었다.
 망자가 누구든 세존의 은혜를 베푼다는 깊은 불심의 발로였다.
 육노장과 여덟 명의 흑의장한들은 이미 관을 안치해 놓고 돌아갔다.
 그들은 삼일기원제가 끝나는 날 관을 찾으러 올 것이다. 그리고 극락왕생 기원제는 내일 날이 밝으면서부터 시작될 것이다.
 쏴아아! 쏴아아아아!
 칠흑같은 어둠과 정적이 자리한 가운데 폭우 소리만이 덧없이 극락전 안을 맴돌고 있었다.
 극락전 안에 불빛이 있다면 단지 청동향로의 향연이 타는 인광(燐光)과도 같은 푸른빛뿐.
 그 위의 두 개의 흑관으로 하여 극락전 안은 절로 섬뜩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이때 돌연 ‘끼이이익’ 한 줄기 날카로운 음향이 귀기스럽게 주위의 정적을 깨뜨렸다. 그것은 뜻밖에도 두 개의 흑관 중 우측의 관에서 나는 소리였다.
 도대체 무슨 일인가? 시체가 든 관에서 소리가 나다니······.
 역한 음향이 어둠의 공간으로 스산히 퍼짐과 동시에 관 뚜껑이 천천히 열렸다.
 관 뚜껑이 반쯤 열리자 파리한 손 하나가 관 밖으로 느닷없이 튀어나왔다. 계속해서 전신을 염한 몸 전체가 관 밖으로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백색수의를 걸친 시체는 관 속에서 뻣뻣이 신형을 일으킨 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사십대쯤 되었을까?
 짙고 무성한 구레나룻이 온 얼굴을 덮은 시체는 배 위에 걸린 관 뚜껑을 소리 없이 밀치며 관 밖으로 나왔다.
 시체의 시선이 옆에 놓인 관으로 향했다.
 옆의 관은 처음과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돌연 시체의 입에서 괴소가 나직이 새어나왔다.
 “후후······.”
 실로 소름끼치는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시체가 스스로 관을 열고 밖으로 나와 괴소까지 흘려내다니?
 “히힛, 녀석. 결국 귀식이양공(龜息移兩功) 만큼은 아직 이 아비를 따르지 못하는구나. 이제야 네 녀석을 한 번 이겨 보는가?”
 시체의 눈빛에는 득의의 빛보다는 왠지 씁쓸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귀식이양공은 성취도가 높을수록 빨리 깨어나지.”
 시체는 중얼거리듯 말하며 옆의 관에서 눈을 떼더니 문득 세 개의 불상 중 문수보살의 왼쪽 눈을 올려다보았다.
 순간 그의 안색이 잠깐 변했다.
 그는 불단 위로 번쩍 날아오르더니 문수보살의 왼쪽 눈 부위를 신속하게 살펴보았다.
 “이, 이런!”
 없었다.
 문수보살의 왼쪽 눈은 퀭하니 검은 구멍만이 뚫려 있을 뿐 눈알은 자취도 없는 것이다.
 시체의 눈길이 서서히 관을 향해 돌아갔다.
 그때 그 속에서 미세하나마 코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드르렁··· 푸우······.”
 마치 들으라고 흘려 보내는 소리 같았다.
 시체의 눈빛이 괴이하게 굳어졌다.
 그것은 아예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니까 네가 이미 문수보살의 눈을 빼내고··· 아비가 깨어날 때까지 한잠 자고 있다는 말이지.”
 분하다는 기색은 없다.
 다만 조금의 허탈함과 만족, 그리고 자식을 향한 애정이 은은히 배어 있는 복잡한 의미의 시선이었다.
 그렇다.
 이 사람은 바로 아까 그 신비하고 괴이한 부자 중의 마의중년인이었다.
 그리고 관 속에서 코를 골고 있는 주인공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여인처럼 섬세한 아름다움과 짓궂은 장난기가 묘한 조화를 이루어 독특한 매력을 발산하는 그 소년이 아니겠는가?
 
 
 2장 좌충우돌하는 부자
 
 
 만혜(萬慧).
 그는 당금 법왕사의 세 번째 항렬의 제자로서 불심이 깊기로 정평이 나 있는 인물이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그의 불심은 법왕사 내에서 따를 사람이 없었다.
 일례로 그는 밤에 잠자다가 측간에 다녀오면서도 반드시 불상 앞을 거쳐올 정도였다.
 지금 그는 측간 앞에 서서 극락전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미타불! 소피를 봤으니 부처님 존안을 뵙긴 뵈어야 할 텐데··· 이 빗속에 대웅전까지 가기는 뭐하고, 그렇다고 극락전으로 가자니 삼일기원제를 지내기 위해 들어온 시체가 둘씩이나 되니······.”
 그토록 불심 깊은 만혜도 극락전에 들어가기는 겁나는지 몹시 망설였다.
 “휴! 세존이시여, 어찌하오리까?”
 그러나 눈을 뜨고도 부처님을 뵙지 않으면 불자(佛者)로서의 자격이 없다고 항시 생각해 온 그였다.
 “아미타불! 아직 이 만혜의 불심이 얕은 소치로다. 세존이시여, 잠시나마 제자의 불심이 흐트러진 점, 밤잠을 자지 않고 부처님 앞에 염불을 올리는 것으로 용서를 비올까 하옵니다. 아미타불······!”
 만혜는 폭우 속으로 성큼 발을 떼어놓았다.
 쏴아아아―!
 장대 같은 빗줄기가 내리고 스산한 바람이 불었다.
 만혜는 약해지려는 마음을 스스로 달래려는 듯 나직이 천수경(千手經)을 읊기 시작했다.
 “수리수리마하수리수수리사바하(修理修理摩訶修理修修理娑婆訶)······.”
 마의중년인. 아니, 지금은 수의를 걸쳤으니 수의중년인의 전신이 흠칫 굳어진 것은 바로 만혜가 천수경을 읊기 시작한 그 순간이었다.
 측간과 극락전 간의 거리는 불과 삼 장여도 채 안 되는 지척인지라 만혜는 이내 극락전 안에 모습을 나타냈다.
 수의중년인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재빨리 신형을 번뜩여 불대 위로 올라갔다.
 만혜는 여전히 천수경을 읊으며 불자(佛字)가 쓰인 유등(油燈)을 들고 조심스런 발길로 불상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겁먹은 표정을 짓지 않고 있는 것은 물론이고, 오히려 평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천수경을 읊고 있는 그의 표정은 차라리 경건하기까지 한 것이었다.
 그는 두 개의 흑관에 시선 한 번 주지 않고 제단 위쪽으로 다가서더니 유등을 들어올려 인왕보살을 비추었다.
 “아미타불! 나무관세음보살······.”
 그는 즉시 합장하며 인왕보살을 향해 허리를 깊숙이 숙이고는 석가여래상 앞에 조심스레 다가섰다.
 “오오! 세존이시여. 만혜의 얕은 불심을 용서하옵소서.”
 그는 잠시 석가여래상을 향해 합장지례를 취해 보인 후 이번에는 문수보살상 앞으로 다가섰다.
 “문수보살님, 부디 이 만혜에게 무한한 불법(佛法)의 지혜를 주옵소서.”
 그는 너무 깊숙이 허리를 숙이는 바람에 미처 문수보살의 왼쪽 눈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이내 허리를 편 그는 다시 한 번 세 불상을 향해 합장을 해 보인 후 그 자리에 앉으려 했다.
 밤새 염불을 올리려는 것이었다.
 막 앉으려 하던 그는 갑자기 흠칫하며 홱 몸을 되돌렸다.
 원래 극락전에 모셔져 있는 불상은 세 개였다.
 그런데 또 하나가 있었다.
 그것도 황금색 불상이 아닌 백색 불상이!
 분명 오늘 저녁까지만 해도 세 개였거늘 언제 네 개가 되었단 말인가?
 만혜는 고개를 갸웃하며 등을 들어 새로 생겨난 불상을 비춰 보았다.
 그 순간 눈을 반개(半開)하고 있던 털보불상이 희미하게 미소를 짓는 것이 아닌가!
 만혜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동시에 그의 입이 주먹 두 개는 들어갈 정도로 크게 벌어졌다. 그러나 아무런 소리도 토해져 나오지는 않았다. 마치 비명이 목에 걸려 뱉어지지 않는 것 같았다.
 이때 ‘끼이이익’ 만혜의 등뒤로부터 소름이 오싹 끼치도록 기분 나쁜 소리가 울렸다.
 순간, 그의 고개가 반사적으로 소리가 들려온 곳을 향해 돌려졌다. 그의 안색이 창백하게 돌변한 것은 그와 거의 동시였다.
 그의 눈앞에서 두 개의 흑관 중 좌측의 관 뚜껑이 서서히 열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만혜는 대경실색을 금치 못해 전신을 부들부들 떨었다.
 “귀··· 귀······.”
 사시나무 떨 듯 떨려나오는 음성.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 음성마저 뒤를 이을 수가 없었다.
 느닷없이 관 뚜껑이 덜컹하며 사납게 치솟아 올라 그의 이마를 정통으로 후려친 것이다.
 그는 그대로 바닥에 무너져 내렸다.
 온통 공포와 경악, 회의에 얼룩진 표정으로······.
 불상 흉내를 내고 앉아 있던 수의중년인의 입에서 통쾌한 듯 나직한 너털웃음이 터져 나왔다.
 “허헛, 잘했다. 하지만 이녀석아, 오 푼의 힘으로 치면 죽지 않으냐?”
 그의 시선 속에 한 명의 소년이 파고들고 있었다.
 예의 그 소년은 아름다운 얼굴로 길게 기지개를 켜고는 관 밖으로 나서며 피식 웃었다.
 “아버진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시는군요. 오 푼의 힘이라 해도 비껴 치면 절대 죽지 않습니다.”
 수의중년인은 호안(虎眼)을 다소 부릅떴다.
 “이녀석아, 그래도 삼 푼으로 쳐야 안전한 거다.”
 “그런 말씀 마세요. 오 푼이 아니라 구 푼으로 쳐도 죽지만 않으면 상관없는 겁니다.”
 “이녀석, 또 우길 셈이냐?”
 “우기긴요? 저는 아직까지 한 번도 우긴 적이 없습니다만, 오히려 아버님이 매일 지니까 우기시는 것 아니옵니까?”
 아주 정중하고 공손한 어조, 그것은 말하자면 야유였다.
 “허, 이놈이 점점······?”
 “그만 두고 이것이나 보시지요.”
 소년은 중년인을 향해 불쑥 오른손을 내밀었다.
 소년의 손에는 짙은 묵광(墨光)이 감도는 커다란 구슬이 하나 들려 있었다.
 “문수보살의 눈입니다.”
 “으음!”
 수의중년인은 말문이 막힌 듯 씁쓸한 침음성을 흘려냈다.
 소년은 말을 이었다.
 “마지막 내기에까지 지신 기념으로 아버님이 보관하시지요.”
 중년인은 불대 위에서 가볍게 아래로 뛰어내리며 손을 저었다.
 “일 없다. 네가 훔친 것이니 너나 가져라.”
 “그럼 다시 꽂아 놓지요. 이런 걸 가지고 다니면 귀찮기만 해서 도대체······.”
 수의중년인은 희미한 기광을 잠깐 번뜩이며 고개를 저었다.
 “모르면 입 다물고 간수하기나 해라. 네가 보기에는 그것이 별게 아닌 것 같지만 사실은 희대의 기보(奇寶)이다.”
 중년인은 소년의 어깨를 툭 치더니 문을 향해 걸음을 옮겨놓기 시작했다.
 소년은 다시 보지도 않고 구슬을 품속에 갈무리하더니 중년인의 뒤를 따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아버님!”
 “부르지도 마라. 이녀석, 한 번쯤 져주면 네몸에 덧이라도 난다더냐? 조그만 놈이 술을 먹어도 이기고, 가르쳐 준 무공에서도 이기고, 천하의 불효막심한 놈!”
 중년인의 말대로라면 소년은 아예 못하는 게 없다는 얘기가 아닌가!
 그런데 소년의 말은 가히 점입가경이었다.
 “다음부턴 안 그럴 테니 우리 이곳 법왕사 중놈들을 좀 혼내주고 갑시다. 아까 산문에 있던 지관인지 뭔지 하는 중이······.”
 “닥치거라.”
 중년인의 입에서 돌연 근엄한 호통성이 나직이 토해졌다.
 “어찌 나무만 보고 숲을 헤아리려 하느냐? 어리석은 놈!”
 잠시 멈춰 섰던 중년인은 다시 문을 향해 걸음을 떼어놓으며 말했다.
 “지관 한 사람으로 법왕사 전체를 평가하려 들지 말거라. 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실력으로도 문수보살의 눈을 훔치는 방법은 귀식이양공밖에 없었다는 사실이다. 법왕사는 기실 소림보다 무서운 곳임을 알아야 한다. 네가 내게서 야금야금 갉아낸 무공이 천하제일이라 생각했다면 큰 오산이다.”
 그러나 소년은 움직이려 하지 않고 또 입을 열었다.
 “아버님!”
 “이놈, 빨리 이곳을 빠져 나가야 한다 하지 않았더냐?”
 “압니다. 그러나, 확실히 짚고 넘어갈 게 있습니다만······.”
 “뭐 말이냐?”
 “약속! 이번에도 딴 소리 하시면 전 여기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을 겁니다.”
 “알았다, 이놈. 어서 따라오기나 해라.”
 소년은 그때서야 비로소 씨익 웃으며 소리 없이 수의중년인 옆에 바싹 다가섰다.
 바로 그때였다.
 돌연 중년인의 안색이 급격히 굳어 들었다. 거의 동시에 문 밖으로부터 한 줄기 장중한 불호성이 울려 퍼졌다.
 “아미타불!”
 
 ***
 
 파르라니 깎은 머리에 선명히 찍한 다섯 개의 계인(戒印)이 조금은 슬퍼 보이기도 하는 한 명의 회의노승(灰衣老僧).
 손에는 하나의 괴장(拐杖)을 든 채 눈처럼 흰 수염을 길게 드리우고 어린아이처럼 붉은 홍안(紅顔)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뒤로는 짙은 어둠과 함께 여전히 폭우가 퍼붓고 있었다.
 늠연한 자세로 극락전의 문을 태산처럼 우뚝 가로막고 선 그의 눈에서는 간간이 번갯불 같은 신광이 폭사되고 있었다.
 필시 범상치 않은 기도를 지닌 듯 장내를 압도하는 웅후한 기도였다.
 그런데 그는 중년인을 발견한 순간 안색을 가볍게 일변시키며 침중한 불호를 읊어냈다.
 “아미타불! 시주는 바로 백리교주(百里敎主), 마침내 본사(本寺)에 잡입해 들고야 말았구려.”
 “대사와 이렇게 마주칠 줄은 미처 몰랐소. 칠년 만이구려.”
 중년인의 표정은 조금 전까지와는 달리 몹시 진중했다.
 아마도 회의노승은 경시할 수 없는 상대인 듯했다.
 회의노승은 나직이 탄식하며 말을 이었다.
 “애석한 것은 노납이 시주를 막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오.”
 중년인은 일순 멈칫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는 돌연 고개를 들고 우렁찬 대소를 터뜨렸다.
 “으하하핫! 당연하오. 하지만 그 역시 애석한 일이 될 것이오. 대사, 이십 년 전의 약조를 잊지 않고 있으리라 믿소만.”
 이번에는 회의노승이 멈칫했다.
 “그러면 시주는 그 약조를?”
 “그렇소.”
 중년인은 지그시 회의노승을 주시했다.
 “나는 지금 대사가 그때의 약조를 지켜주길 바라오. 물론 내 요구는 대사가 우리 부자를 막지 말라는 것이오.”
 “아미타불!”
 회의노승은 안색을 무겁게 굳히고 소리 없는 탄식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
 “알겠소. 노납이 어찌 과거의 약조를 깨리요. 허나 노납이 시주를 막지 않는다 해도 과연 본사의 제자들도 시주를 그대로 보내 줄지 모르겠구려. 시주는 노납에게 저들까지 물러서게 해 달라는 부탁은 할 수 없을 것이오.”
 회의노승은 말과 함께 막아섰던 문에서 옆으로 세 걸음을 물러났다.
 순간 중년인의 두 눈에 미미한 경악이 어렸다.
 문 밖 극락전 앞 너른 뜰에는 어림잡아 일백여 명은 족히 됨직한 건장한 중년승(中年僧)들이 부채꼴 모양으로 도열해 있는 것이 아닌가!
 도대체 언제부터 저렇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던 것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으음, 가히 법왕사답다! 내 비록 이곳을 호락호락 빠져 나갈 수는 없다 짐작했지만 저토록 많은 수가 내 이목을 속여 나타나 있었을 줄이야.’
 중년인은 내심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그들을 침착하게 살폈다.
 ‘진(陣)! 저들은 분명 일종의 기진(奇陣)을 펼치고 있다. 헌데 천하기문진식(天下奇門陣式)을 구할 이상 깨우친 나로서도 저 진세가 생면부지(生面不知)이니··· 내 미리 열두 가지의 대비책을 준비해 오긴 했으나 일이 몹시 어렵게 되었다. 더구나 운도(雲道)가 옆에 있기까지 한 터······.’
 중년인의 시선이 그의 왼편 소년에게 돌려졌다.
 운도(雲道)! 그것이 소년의 이름일까?
 중년인은 아까 회의노승으로부터 백리교주라 불렸다.
 그렇다면 성은 백리(百里)!
 이 순간 소년 백리운도는 기광이 일렁이는 눈으로 백여 명의 중년승인들을 예리하게 살피고 있었다. 마치 그들에게서 무엇인가 읽어내기라도 하려는 듯한 모습이었다.
 중년인은 이 와중에도 백리운도의 그 모습에 고소(苦笑)를 지었다.
 ‘녀석! 네놈이 아무리 용빼는 재주가 있다 해도 이 난국만은 전적으로 아비에게 맡겨야 한다. 이 일은 아비가 전력을 다해도 해결하기 힘든 일이다!’
 그는 재빨리 백리운도에게 전음성을 보냈다.
 (이 일은 네가 골머리를 싸매서 해결될 일이 아니다. 이번만큼은 네놈도 이 아비에게 의지해야 한다. 한시도 내 곁을 떠나지 마라. 알겠느냐?)
 백리운도는 가볍게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그것은 누가 봐도 건성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중년인은 애당초 그 이상의 흔쾌한 대답은 바라지도 않은 터였다.
 그는 문 밖으로 한 걸음 성큼 나섰다.
 순간 그의 자세는 급격히 돌변하였다.
 일방지주(一幇之主) 아니, 만인지상(萬人之上)의 위엄이었다.
 두 발을 어깨넓이로 벌리고 우뚝 버티고 선 그의 전신에서는 감히 범접키 어려운 웅혼한 기상이 피어 오르고 있었다.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본 백리운도는 일순 흠칫 놀란 표정을 지었다. 평소 아버지의 모습과는 너무도 판이한 신위(神威)였던 것이다.
 백리운도는 여태껏 부친에게서 이토록 크나큰 위엄을 느껴 본 적이 없었다.
 항시 괴이한 행동을 몸에 밴 습관처럼 즐겨온 부친이었다. 또한 괴행(怪行)을 통해 자신에게 무엇인가를 반드시 익히게끔 해준 자상한 부친이기도 했다.
 그러나 백리운도는 아직 부친의 과거내력을 조금도 모르고 있다. 모친에 대해서는 얼굴조차 모른다. 한사코 부친이 밝히기를 꺼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번까지 일백 번째의 내기를 하였던 것이다.
 백리운도는 이 순간 그 동안 스스로 억제해 왔던 내심의 의혹이 폭죽 터지듯 터져 오르는 것을 금치 못했다. 도대체 아버지께선 과거에 어떤 내력을 지니고 있었단 말인가?
 백리운도의 의혹은 지체없이 흩어질 수밖에 없었다. 부친의 긴박한 전음성이 다시 들려온 때문이었다.
 (정신 차리고 내 뒤를 바짝 따라라!)
 다음 순간 중년인의 신형이 번쩍 폭우 속을 갈랐다.
 백리운도의 신형이 그의 뒤를 그림자처럼 따른 것은 거의 동시였다. 중년인의 전음성이 다시 백리운도의 귓전을 빠르게 파고들었다.
 (잠형무혼천환변(潛形無魂千幻變)!)
 순간 중년인과 백리운도, 두 사람의 신형이 폭우 속에서 마치 물로 화(化)하기라도 한 듯 눈 깜빡할 사이에 사라져 버렸다.
 잠형무혼천환변(潛形無魂千幻變)!
 빠름과 부드러움을 바탕으로 주위의 자연지물(自然之物)을 이용해 자유자재로 모습을 감출 수 있는 경세비기(驚世秘技)!
 중원의 무학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초극기환술(超極奇幻術)!
 기환술을 눈속임이 아닌 정통무학으로 끌어올린 배교(拜敎)의 신비지술(神秘之術)!
 이는 이미 삼백여 년 전에 실전(失傳)한 것으로 알려지지 않았는가?
 그런데 바로 그 배교의 초극신비기환술이 당금에 이르러 중년인 부자에 의해 동시에 펼쳐질 줄이야. 도대체 잠형무혼천환변을 펼치는 중년인의 진정한 신분내력은 어떠하단 말인가?
 이때 장내에 부채꼴 모양으로 도열해 있던 일백여 중년승인들이 일제히 우렁찬 불호와 함께 신형을 번뜩여 전광석화처럼 천라지망(天羅之網)의 형세를 취했다.
 놀랍게도 천라지망의 형세로 포진한 중년승인들의 정중앙으로 쏟아지던 일단의 빗줄기가 돌연 그 흐름을 멈추었다.
 흐름을 멈춘 그 빗줄기가 두 개의 형체를 이루며 드러났다.
 다름아닌 중년인과 백리운도!
 이제 중년인의 얼굴에 완연한 긴장의 빛이 서렸다.
 ‘저들은 항마백팔불이 틀림없다!’
 항마백팔불!
 바로 소림의 백팔나한과 견주어 조금도 뒤떨어짐이 없다는 법왕사의 비세(秘勢)가 아닌가!
 보다 놀라운 것은 이 신비하고 괴이한 부자, 단 두 사람으로 인해 신비 속에 가려진 그들이 출현했다는 사실이었다.
 중년인은 항마백팔불을 빠르게 일견하기가 무섭게 다시 백리운도를 향해 전음성을 보냈다.
 (운도, 역천분신이환공(逆天分身離幻功)이다!)
 순간 ‘스스스스슷’ 두 사람이 흩어졌다. 아니 흩어졌다 싶은 순간 불어나고 있었다.
 하나가 둘로, 둘이 넷으로, 다시 넷이 여덟으로······.
 종래에는 중년인과 백리운도 각각 한 사람이 열여섯 명씩으로 불어났다.
 그뿐이 아니었다.
 열여섯 명씩의 중년인과 백리운도들은 서로 각기 다른 초식, 즉 서른 두 종류의 초식을 펼치며 일제히 백팔항마불을 향해 덮쳐가는 것이었다.
 어느 누가 이런 경우를 상상이나 하였으랴!
 이는 한 사람이 열여섯 종류의 초식을 펼치는 것과 진배없는 일이었다.
 배교에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전설적인 광세기환술(曠世奇幻術)이 있으니, 이것이 바로 역천분신이환공이었다.
 역천분신이환공은 시전자가 자신과 똑같은 열다섯 개의 환영을 만들어 적과 대항하는 수법이다.
 그러나 환영은 환영이되 일단 만들어진 환영들은 눈속임이 아닌 실체와 같은 능력을 지닌다.
 한 사람이 열 여섯 사람의 능력을 발휘하는 가공경이할 수법인 것이다. 또한 본체와 모든 환영들을 동시에 제압하지 않으면 결코 격퇴시킬 수 없는 것이기도 했다.
 다시 말해 역천분신이환공은 보통 기환술과 달리 패도지학(覇道之學)을 겸비한 것이었다.
 항마백팔불은 중년인 부자가 역천분신이환공을 펼치자 일시 당황한 듯 진세를 흐트러뜨렸다.
 파파파파팟! 우― 우― 웅!
 중년인과 백리운도의 서른두 환영들은 기공이초(奇功異招)들을 펼쳐내며 항마백팔불을 휘젓기 시작했다.
 폭우 속으로 고통스런 신음성과 비명성이 연이어 터졌다.
 항마백팔불의 진세는 이제 거의 와해 직전에 이르고 말았다.
 그런데 이 순간 돌연 우렁찬 불호성에 이은 중후한 일성이 터져 나왔다.
 “아미타불! 항마대라연좌불(降魔大羅蓮座佛)!”
 이에 우왕좌왕하던 항마백팔불이 일제히 허공으로 신형을 떠올렸다. 그러고는 연꽃 모양의 진세를 형성시킴과 동시에 좌선의 자세를 취했다.
 얼핏 거대한 부처를 연상케 하는 장엄한 광경이었다.
 그 연꽃 모양 진세의 정중앙에 백리 부자가 위치하게 되었다.
 중년인의 얼굴에 경악의 표정이 언뜻 스쳤다.
 ‘이, 이것은 천강지벽(天 之壁)의 진이다. 불문 최대 절진이라는 항마대라연좌불! 이 천고의 기진이 법왕사의 항마백팔불에 의해 재현되다니.’
 생각은 길었다.
 그러나 중년인은 한시도 손을 멈출 수가 없었다.
 항마대라연좌불!
 수비 위주의 진법이나 상대의 일말의 허점만 보여도 지체없이 백팔 초의 각기 다른 금나수(擒拿手)가 펼쳐진다.
 한 사람이 어찌 백팔 명의 고수가 일제히 펼쳐내는 금나수법을 모두 피해낼 수 있겠는가!
 대항하는 방법은 오로지 하나!
 끊임없이 공세를 취하는 것뿐이다.
 결국 항마대라연좌불을 파해하기 전에 진기가 고갈되어 결국 사로잡히는 결과를 초래하고 만다.
 그런데 이때 중년인이 모르고 있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
 백리운도, 그가 언제부터인가 모습을 감추고 있는 것이다.
 이미 진기가 고갈되어 쓰러지기라도 했단 말인가?
 중년인은 시간이 흐를수록 위급한 상황으로 빠져 들어갔다.
 그의 구릿빛 얼굴은 이미 창백하게 변해 있었으며 땀으로 흥건했다. 과도한 진기를 사용한 듯 그의 두 눈 또한 찢어질 듯 부릅떠진 채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실로 화급을 다투는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이때 돌연 어디선가 고막을 찢을 듯한 대갈일성이 천둥처럼 터져올랐다.
 “멈추어라!”
 순간 느닷없는 그 일성에 중인들의 시선이 부지중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일제히 던져졌다.
 소리가 들려온 곳은 극락전 문 앞이었다. 거기에는 백리운도가 히죽 웃으며 항마백팔불을 쭉 둘러보고 있었다.
 그를 발견한 순간 항마백팔불의 안색이 일제히 홱 돌변했다.
 백리운도의 여유 있는 미소 아래에는 극락전의 불상 중 석가여래상이 안겨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여차하면 석가여래상을 박살내 버리겠다는 듯 주먹을 쥔 오른손이 여래상 면전을 향해 있는 것이 아닌가!
 백리운도는 히죽 웃으며 주먹을 쥔 오른손을 이리저리 휘휘 저어 보였다.
 “후후. 모두들 물러서시오! 만약 우리 부자를 막으면 여기 계신 부처님께서 지옥 구경을 하게 될 것이오.”
 실로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항마백팔불은 이 순간 누구도 백리운도의 말을 경시하지 못했다.
 불문의 제자의 신분으로서 어찌 부처가 치욕을 당하는 광경을 볼 수 있으랴!
 백리운도가 한 걸음씩 내딛을 때마다 항마백팔불은 주춤주춤 서로 눈치만 보며 길을 터 주기 시작했다.
 방법이야 어찌 되었든 이는 실로 놀라운 임기응변이 아닌가!
 손을 휘휘 저으며 길을 트는 백리운도의 모습을 바라보던 중년인의 입에서 통쾌한 대소가 터져 나왔다.
 “푸하하하핫! 이놈, 그런 방법이 다 있었더냐?”
 중년인은 곧 대소를 멈추고 한쪽에 서서 망연자실하고 있는 회의노승을 돌아보았다.
 “대사, 아무래도 법왕사에서는 우리 부자를 막을 수 없을 것 같소이다. 대사와의 옛 정을 생각해서 서로 얼굴 붉히지 않고 조용히 해결하는 것이 어떻겠소?”
 회의노승은 탄식 어린 불호를 토해내었다.
 “아미타불! 인정하오. 그리고 시주께 저런 혈육이 있다는 것이 놀라울 뿐이오. 허나, 아깝구려. 과연 시주의 아들이 어떤 길을 걷게 될지······.”
 중년인은 담담히 고개를 저었다.
 “대사께선 염려 놓으시오. 내 약속하리다. 내 아들은 결코 나와 같은 길을 걷게 하지 않겠노라고.”
 회의노승은 침통한 표정이었으나 고개를 두 번 끄덕였다.
 “알겠소. 믿으리다. 그보다 아무래도 이 비는 쉽게 그칠 것 같지 않으니 어서 길을 재촉하는 것이 좋을 것 같구려.”
 “고맙소. 그럼 이만······.”
 중년인은 회의노승을 향해 정중히 읍을 해 보였다.
 이어 백리운도가 석가여래상을 바닥에 내려놓고 회의노승에게 포권지례를 취한 순간, 회의노승의 두 눈에 한 줄기 예리한 정광이 번갯불처럼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중년인과 백리운도는 천천히 법왕사를 벗어나고 있었다.
 한동안 백리운도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회의노승은 문득 시선을 돌려 폭우가 쏟아지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저 아이의 골상은 말로만 듣던 바로 그······”
 뒷말은 너무 낮아 들리지 않는다.
 무서운 긴장을 합유한 침중한 불호성이 흘러나올 뿐이다.
 “아미타불!”
 
 
 3장 아버지와 아들
 
 
 <아비의 과거를 아비의 입으로 네게 이야기한다는 것이 어쩐지 쑥스러운 일이더구나. 그래서 틈틈이 글로 기록해 놓았다. 읽어보거라. 읽고 아비의 과거를 참고삼아 네가 할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거라.>
 낡디낡은 한 권의 책이었다.
 겉장은 제목도 표서(表書)도 없는 싯누런 것이었다.
 거기에는 어둡고 한스런 과거를 스스로 기록해 나간 한 고독한 사나이의 허무와 한이 앙금처럼 배어 있었다.
 그 겉장을 넘기는 백리운도의 손길은 그답지 않게 조심스러웠다. 그토록 듣고 싶어하던 부친의 과거가 아닌가?
 한 번도 뵌 적이 없는 어머니의 이야기도 들어 있을 것이다.
 <아비의 이름은 백리숭헌(百里嵩軒), 배교(拜敎)의 제 육십이대 교주였다.>
 그렇게 시작된 책자의 내용은 실로 놀라운 사실을 밝혀 놓고 있었다.
 우선 과거의 신분이 제 육십이대 배교교주였다는 것만도 놀라운 사실이 아닌가!
 십칠 년 전, 이야기는 바로 그 시점에서 시작되었다.
 <발신(發信) : 제이(第二), 귀마류(鬼魔流).
 수신(受信) : 제사십칠마종(第四十七魔宗) 배교교주.
 내용(內容) : 옥녀궁 잠입, 첩보에 관한 건.
 주(註) : 별도 지시된 내용과 차후 지시될 밀명을 참고하
 여 시행할 것.>
 잠입, 은신, 역용변장(易容變裝) 및 기문잡학에 있어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배교.
 그 배교의 젊은 지존 백리숭헌에게 내려진 마종맹의 밀명이었다. 그것은 바로 배교가 구백팔십이마종 중 서열 제 사십칠 위의 사십칠마종이었기 때문이었다.
 백리숭헌!
 스물두 살의 젊은 나이로 배교를 맡은 그는 배교가 무림에서 방문좌도(傍門左道)로 취급받고 있다는 사실에 심히 불만을 품고 있던 청년이었다.
 그런 그에게 배교가 구백팔십이마종 중 하나라는 것은 커다란 위안이었고 가슴을 태워 버릴 듯한 불만을 다소나마 식혀주는 것이었다.
 그는 마종맹의 최후 목표인 마도천하를 위한 일이라면 죽음이라도 서슴지 않을 인물이었다.
 그에게 있어 배교에 대한 무림의 편견은 깊은 원한과 증오, 그 자체였던 것이다.
 그가 배교를 이끈 단 일년 만에 마종맹 내에서도 서열 팔백사십오 위에 불과하던 배교의 서열은 무려 사백일 위로 급상승했다. 다시 일년 후에는 이백삼 위, 그리고 배교를 맡은 지 삼년에 이르자 그는 배교를 마종맹 서열 제 사십칠 위까지 당당히 올려놓았던 것이다.
 그 동안 마종맹 산하 삼대마류 중 제 이마류인 귀마류가 내린 백서른 세 번의 밀명을 백리숭헌은 철저하리만큼 완벽하게 수행하였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바로 마종맹을 향한 백리숭헌의 충성심과 일 처리의 치밀성, 가공할 무공 등에 기인한 결과였다.
 그러한 그에게 내려진 이번의 밀명은 지금껏 내려졌던 어떤 밀명보다도 막중했고, 그 스스로도 쉽지 않은 것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옥녀궁이라면 대륙십패의 하나로서 천하에 그 이름만이 알려진 신비방파가 아닌가?
 더구나 백리숭헌은 옥녀궁에 대한 별도 지시사항을 계속 받아왔지만 귀마류 역시 옥녀궁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듯 위치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고 단지 옥녀궁에 잠입하는 방법만을 지시 받은 터였다.
 <옥녀궁은 문파보존(門派保存)을 위해 일년에 두 번씩 봄, 가을로 옥녀집남대(玉女集男隊)라는 백 명의 여인을 강호로 내보내 백 명의 남자를 모집해 돌아간다. 하남성(河南省) 함곡관(函谷關)에서 그들 속에 자연스럽게 합류하라. 귀마류의 안배가 있을 것이다. 잠입 후에는 되도록 수뇌부(首腦部)에 접근하라. 이 후의 모든 제반사(諸般事)는 스스로 해결해야 하며, 탈출 또한 그대의 역량에 맡길 수밖에 없다.>
 이상이 귀마류로부터 전해진 모든 정보였다.
 실로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위험천만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었다.
 백리숭헌이 옥녀집남대에 위장 납치되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물론 스스로의 역량과 사술에 가까운 배교 무공이 주된 힘이 되었지만, 가장 결정적인 것은 귀마류의 안배가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마종맹이 옥녀궁의 실체에 대해 파악한 바는 거의 전무한 상태였으나, 옥녀집남대에 대해서만은 치밀한 안배가 있었던 것이다.
 백 명의 절세미녀로 구성된 옥녀집남대는 백 명의 청년을 열 대의 마차에 나누어 태운 뒤 방향도 없이 사흘을 달렸다.
 백리숭헌은 이혈공(移穴功)과 이산공(移散功)으로 점혈(點穴)을 모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사흘째 되는 날 마차의 방향을 놓치고 말았다.
 열 대의 마차는 갈림길이 나올 때마다 한 대씩 갈라졌으며 대열에서 벗어난 마차는 수십 번이나 마차를 바꿔 갈아가며 어디론가 끝없이 달렸던 것이다.
 마침내 마차가 멈추자, 한 명의 여인이 각각 한 명씩의 사내를 안아 들고 다시 열 방향으로 흩어졌다.
 그때 백리숭헌은 가물거리는 의식 속에서 마차가 멈춘 곳이 장수점(長壽店)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리고는 사흘 밤낮을 과도하게 곤두세웠던 의식의 줄을 놓치고 말았다.
 책자를 읽는 백리운도의 눈빛이 은은한 긴장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어머니!
 어머니의 이야기가 드디어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옥녀궁 안에서 바로 네 어머니를 만났다.
 네 어머니는 참으로 아름답고 순진무구한 여인이었다.
 세상의 때라든가 그늘 따위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그야말로 한 떨기 고결한 난초 같은 자태였다.
 야망에 몸을 싣고 세상의 권모술수 속을 파헤쳐 나가던 아비에게 있어 네 어머니의 모습은 그대로 거대한 충격이었다.
 이름은 엄몽유(嚴夢柔).
 바로 옥녀궁의 소궁주였다.
 허헛, 알겠느냐?
 백 명의 씨받이 청년 중 아비가 가장 뛰어나 보였던 모양인지 소궁주의 배필로 선택된 것이다.
 그것은 불행한 일이라 해야 할지 아니면 반대로 행운이었다 해야 할지 아비는 지금도 명확히 말할 수가 없다.
 그때 품고 있었던 야망의 관점에서 본다면 네 어머니와의 만남은 분명히 불행이었다.
 그러나 어찌 인생에 있어 과연 그러한 비정한 야망이 전부이겠느냐? 네 어머니와의 만남은 아비의 마음에 야망 대신 사랑을 채워 주었다.
 사랑······.
 네 녀석에게 하기에는 조금 불편한 얘기로구나.>
 백리숭헌은 어쨌거나 씨내리로서의 역할로 소궁주 엄몽유와 함께 지내게 되었다.
 꿈결 같은 세월이 흘렀다.
 어느덧 한 달.
 그러나 백리숭헌은 한 달을 보내는 동안 자신의 처소에서 한 발짝도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그저 높게 처진 담장 너머로 보이는 수천 채의 고루거각(高樓巨閣)으로 옥녀궁의 규모를 미루어 짐작할 수밖에 없었다.
 엄몽유에게 옥녀궁에 대해 조심스럽게 물어봐도 그녀 역시 뜻밖에 아는 바가 전혀 없었다.
 단지 이곳의 궁주가 자신의 어머니이고, 어머니의 이름이 엄혜빈(嚴慧檳)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 뿐이었다.
 사실 그것은 옥녀궁의 특이한 규율 때문이었다.
 아이를 낳은 여인이어야만 비로소 옥녀궁에 대해 알 수 있는 자격이 갖추어지는 것이다.
 한마디로 옥녀궁의 비밀이 외부로 새나가는 것을 철저히 막겠다는 의도였다.
 그런데 백리숭헌이 알아낸 중요한 것이 하나 있었다.
 자신과 함께 옥녀궁에 같이 들어왔던 다른 사람들은 이미 그들의 씨를 이름도 모르는 여인들의 몸 속에 남겨 놓은 후 어디론가 사라졌다는 사실이었다.
 백리숭헌은 소궁주의 배필이었기 때문이데 다른 사람과는 달리 특혜가 베풀어져 아직 아무런 변고도 당하지 않고 있었다.
 두 달이 흐르자 백리숭헌은 자신의 목적을 잊었다.
 목적을 잊게 한 것은 바로 사랑이었다.
 평생을 도산검림(刀山劍林) 속에서 묻혀 살던 백리숭헌에게 있어 한시도 자신의 곁을 떠나지 않고 자신만을 위해 시중을 드는 엄몽유의 그림자.
 그것은 그를 완전히 함몰시켜 버리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그야말로 꺼질래야 꺼질 수 없는 사랑의 불꽃이 활화산처럼 뜨겁게 타올라 있었던 것이다.
 그런 식으로 네 달이 지났다.
 엄몽유의 몸은 눈에 띠게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마침내 태기(胎氣)가 몸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때부터 엄몽유는 왠지 서글픈 눈으로 백리숭헌을 대하곤 했다.
 세월은 유수(流水)라 하였다.
 동산만 하게 부푼 엄몽유의 뱃속 생명은 오늘내일 하며 태양빛을 기다리게 되었다.
 그때는 이미 백리숭헌이 자신의 처지조차 망각의 세월 속에 까마득히 묻고 난 후였다.
 엄몽유를 너무도 사랑했고, 이제는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될 날만을 기다리며 흐뭇해하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청천벽력과도 같은 말이 전해진 것은 엄몽유가 해산하기 전날 밤이었다. 그것은 엄몽유가 옥녀궁의 규율을 거역하면서까지 들려준 말이었다.
 옥녀궁은 남자를 결코 용납치 않았다.
 씨내리 남자로부터 씨를 받아 태어난 아이가 사내아이라면 산모의 신분 여하를 막론하고 아이는 즉시 제거하며 여아(女兒)일 경우에만 키워지게 되는 것이다.
 백리숭헌 또한 엄몽유가 출산하는 동시에 제거된다.
 그것은 옥녀궁의 상징적 존재인 태상궁주(太上宮主)가 나선다 해도 어쩔 수 없는 천년의 규율이었다.
 <그리고 네가 태어났다.
 사내아이!
 바로 출산 즉시 제거되어야 하는 사내아이였던 것이다.
 어쩌겠느냐? 아비로서 할 일은 산실(産室)에서 너를 탈취하여 그대로 도주하는 길뿐이었다. 그 도주의 행로가 얼마나 어려운 것이었는가는 여기 적지 않겠다.
 다만 네 어머니의 필사적인 도움이 없었다면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는 것만 밝혀두마.
 아비가 네 어머니를 사랑하는 이상으로 네 어머니도 아비를 사랑했다. 너보다도 아비의 죽음을 네 어머니는 볼 수 없었던 것이다.>
 백리운도의 눈은 한동안 그 부분에서 떠날 줄 몰랐다.
 진한 아픔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아버지, 어머니! 그렇게 헤어져야 했습니까?’
 책자는 마지막 한 장이 남아 있었다.
 백리운도는 떨리는 손길로 서서히 그 마지막 한 장을 넘겼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흡사 땅에서 솟아나듯 하나의 인영이 백리운도의 등뒤로 나타났다.
 장대한 신형, 일신의 마의, 온 얼굴을 덮은 무성한 구레나룻이 대해처럼 깊고 유현한 시선······.
 바로 백리숭헌이었다.
 그는 의미 모를 무거움이 들어찬 눈길로 잠시 백리운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다음 순간 그 눈빛에 실체를 알 수 없는 희미한 갈등과 아픔, 그리고 비장함이 들어찼다.
 무엇을 향한 갈등인가?
 무엇으로 인한 아픔이며, 무엇을 암시하는 비장함인가?
 그는 이어 백리운도의 등을 향해 서서히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백리운도는 책자에 몰입되어 그러한 부친의 존재와 기척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무림에서 아비는 이미 죽은 것으로 되어 있다.
 그렇다.
 이전의 아비는 이미 오래 전에 죽은 것이다.
 마종의 일원으로 숱한 신비와 괴사(怪事)를 일으키던 배교교주 백리숭헌은 십육 년 전에 세상에서 사라진 것이다.
 이제는 평범한 삶의 가치를 아는 너의 평범한 아비일 뿐이다.
 그래서 네게도 아비와 함께 평범하게 살아가기를 바라고 싶다.
 그것은 아비의 바람일 뿐만 아니라 네 어머니의 바람이기도 할 것이다.
 강요하지는 않겠다.
 만약에 네가 아비 능력의 십 배를 뛰어넘는 능력을 지녔다면 말이다.
 십 배라면 과장된 표현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이야기를 읽는 지금 이 순간 너는 아비로부터 그 정도의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끝내 아비에게 이 이야기를 받아낸 것이다.
 알겠느냐?
 뛰어난 능력을 지닌 인간은 뛰어난 삶을 살아갈 권리가 있고 의무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강요할 수가 없다.
 다만 묻고 싶다.
 이녀석아, 너는 진정 무림의 그 험경을 헤쳐나갈 각오와 자신이 있느냐?>
 백리운도의 시선이 책의 마지막 끝부분에서 뚝 멈추었다.
 무겁게 가라앉았던 그의 두 눈은 이 순간 미세한 떨림을 보이고 있었다.
 인생의 향방을 결정하라는 아버지의 글 때문인가?
 그러나 그것도 잠깐뿐 백리운도의 두 눈이 다시 깊게 침잠 되어짐과 동시에 그의 고개가 한차례 끄덕여졌다.
 무림천하로 뛰어들 결심을 굳힌 것이다.
 아버지로 인한 것인지, 어머니로 인한 것인지, 아니면 그 나름대로의 목적이 있어서인지 알 수는 없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백리운도는 자신의 전신 모공(毛孔)으로 감당할 수 없는 거센 한기가 느닷없이 파고드는 것을 느끼며 흠칫 몸을 움츠렸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정신이 아득해 왔다.
 그는 급격히 꺼져 드는 정신을 놓치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며 힘겹게 뒤를 돌아보았다. 부친의 모습이 흐릿하게 어른거렸다.
 ‘아! 아버지··· 왜?’
 의혹은 일순간이었다. 백리운도는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
 아들의 뇌호혈(腦湖穴)을 내려친 백리숭헌의 표정은 무겁게 경직되어 있었다.
 쓰러진 백리운도의 신형을 그의 아픔 어린 시선이 감싸안았다.
 다음 순간 거의 들리지 않는 낮은 탄식성이 새어나왔다.
 “운도야, 알 수 없구나. 네게 제령심인(制靈心印)을 펼쳐야 하는 아비의 고충을 네가 과연 이해할 수 있을지······.”
 제령심인(制靈心印)!
 그것은 인간의 오성(悟性)을 내적으로 깊숙이 갈무리시켜 겉으로 전혀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배교의 비전대법(秘傳大法)이다.
 아무리 뛰어난 천하의 기재라 해도 일단 제령심인을 받게 되면 누가 보아도 백치(白痴)로 여길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제령심인은 단지 외모에만 영향을 줄 뿐 내면의 총기(聰氣)나 심성에는 하등의 영향도 주지 않는 오묘한 대법이었다.
 도대체 백리숭헌이 그의 아들에게 제령심인을 펼친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백리운도의 눈이 몇 번 꿈틀하더니 번쩍 뜨여졌다.
 그런데 뜨여진 그 눈은 예전의 그것이 아니었다.
 초점마저 헝클어지고, 마치 이지(理智)를 상실한 자의 눈처럼 회색빛으로 흐릿하게 풀어져 있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그의 입술이란 것은 바보처럼 헤벌쭉 벌어진데다 실없는 웃음마저 걸려 있었으며 혈색은 창백하다 못해 차라리 푸르뎅뎅할 정도였다.
 백리운도는 그러한 사실도 모르고 긴 잠에서 깨어나기라도 한 듯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앉았다.
 부친 백리숭헌의 모습은 방안 어디에도 없었다.
 단지 서탁(書卓) 위에 놓인 낯선 한 통의 서찰만이 눈을 자극하듯 파고들어 올 뿐이었다.
 순간 백리운도는 아까 자신을 내리친 후 무겁게 굳어 있던 부친의 눈을 상기하며 다급히 서찰을 집어들었다.
 <운도, 보거라.
 이 아비는 네가 무림으로 뛰어들겠다는 결심을 너의 운명으로 여기며 따로 할 일이 있어 떠난다.
 이제는 네 혼자의 힘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네가 정히 혼자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위급한 상황에 처했을 때는 법왕사에서 빼내온 문수보살의 눈을 깨거라.
 네가 어디에 있든 이 아비는 너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네 몸에 제령심인을 펼쳐 놓았으니 신체의 변화에 너무 놀라지 말거라.
 제령심인은 네가 제령심인을 능가하는 무공을 성취하면 저절로 풀리게 되는 것이니라.
 자, 이제 네 앞에는 천하라는 광대무변(廣大無變)의 신천지가 펼쳐져 있다.
 마음껏 날거라.
 결코 이 아비를 실망시키지 않을 것이라 믿는다.
 부(父) 친서(親書).>
 “아버지······.”
 백리운도의 입에서 지극히 작은 음성이 끊길 듯 새어나왔다.
 그의 두 눈은 격한 파랑을 일으키고 있었다.
 실로 예기치 못한 이별!
 한동안 서찰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백리운도는 일순 장탄식을 금치 못하더니 돌연 키들키들 웃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항상 나를 궁지로 몰아 넣으려 하신단 말이야. 하지만 아버지, 전 언제나 이겨왔습니다. 아버지는 또 헛일을 하신 겁니다.”
 음성은 밝았으며 웃음기가 감돌았다.
 그러나 그의 두 눈으론 뿌연 물안개가 번져 오르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동경(銅鏡) 앞으로 다가가 섰다.
 동경 속으로 그의 어처구니없이 변한 모습이 비춰졌다.
 너무 어이가 없으면 웃음이 나오는 모양이다.
 “후후후! 졸지에 바보가 되어 버렸군. 야! 네가 정말 백리운도냐?”
 진정 어이가 없었다.
 웃어 보았다가 화를 내보기도 하고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꾹 다물어도 보았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그의 모습은 오히려 더 바보스럽고 추악해지기만 했다.
 “아버진 끝까지 나를 못살게 구시는군. 혼자 살라고? 쳇, 얼굴을 이렇게 장가도 못 가게 만들어 놓고··· 하지만 좋습니다. 아버지가 혼자 살라면 혼자 살지요. 대신, 다시 만나는 날에는 각오하고 계셔야 할 겁니다.”
 애써 참으려 했으나 두 눈에 맺혔던 눈물이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두 볼을 타고 주르르 흘러내렸다.
 그것은 그의 기억으로 최초로 흘린 눈물이었다.
 푸른 산 북녘 성곽을 둘렀는데,
 강물은 굽이굽이 성을 돌아가는구나.
 예서 그대 한 번 보내고 나면,
 외로이 떠나리, 먼 만리 길.
 길손은 뜬구름에 뜬구름에 닮아,
 지는 해는 서글픈 그대의 심정이리.
 손을 내저으며 이제 떠나리니,
 울어 예는 말소리 더욱 섧구나.
 
 ***
 
 여인은 가지런한 백옥빛 상아(象牙)로 붉은 꽃잎의 아랫자락을 질끈 악물었다. 그리고는 모종의 결심을 굳힌 듯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허름한 황의(黃衣)에 섬연한 몸매의 굴곡이 완연하게 내비쳤다가는 잦아들었다.
 여인은 이어 살며시 방문을 열었다. 누구에게도 눈치채이지 않으려는 은밀함이 엿보이는 행동이었다.
 문이 열리자 삼월 스무날의 칠흑같은 어둠이 잠시 여인을 주춤하게 만들었다. 여인은 흐릿한 불빛이 흔들거리는 옆방 문을 조심스레 돌아보았다.
 한 줄기 술에 찌든 노인의 한 서린 장탄식이 그 방문 사이로 무겁게 토해지고 있었다.
 “휴우! 천하의 몹쓸 영감탱이 같으니라고. 세상에 어찌 이럴 수가······. 꺼― 억!”
 그것은 여인의 아버지가 건넛마을의 상노인(常老人)을 두고 한 말이었다.
 상노인은 본래 소문난 구두쇠인데다가 악독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이다.
 그가 일년 전 어느 날, 극심한 가뭄으로 인해 거의 굶어죽을 처지에 몰린 여인의 아버지 추노인(秋老人)에게 구원의 손길을 뻗쳤다.
 은자 오십 냥.
 상노인에게 있어 그 돈은 고기 먹고 이 쑤시는 이쑤시개 값도 안 되는 푼돈이었지만, 추노인은 달랐다. 그에게 있어서는 생명과도 같은 돈이었다.
 그러나 평소 상노인의 행동으로 보아 온 추노인은 필시 그 돈이 예삿돈이 아닐 것이라 생각하여 선뜻 손을 내밀 수 없었다.
 그러나 그 당시 상노인의 태도는 너무도 의외였다.
 그는 친근한 웃음마저 띠며 부드러운 음성으로 여유가 생기면 갚으라고 하는 것이었다.
 추노인은 더 이상 망설일 수가 없었다.
 굶주림에 지친 가족들 생각에 일단은 돈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몇 달 간 생계를 이을 수 있게 된 추노인은 은자 오십 냥의 빚을 갚기 위해 열심히 일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하는 일마다 되는 일이 없었다. 또 몇 번의 생계 위험을 맞았으나 그때마다 상노인은 이유도 없이 구원의 손길을 뻗쳤다. 여유 있으면 갚으라는 단 한마디 말과 함께.
 상노인은 행여 추노인이 거절할까 두렵기라도 하다는 듯 은자를 건네주고는 서둘러 몸을 돌리곤 했던 것이다.
 빚은 불과 일년 만에 무려 은자 이천 냥까지 불어났다.
 추노인이 두 번 죽었다 깨어나도 갚을 수 없는 엄청난 거금으로 불어나 버린 것이다.
 추노인이 상노인으로부터 청천벽력과도 같은 말을 들은 것은 바로 그때였다.
 ― 이제 이천 냥이네. 내 요즘 곤란한 형편이니 이자는 그만두고라도 이달 말까지 해결해 주게. 만약 갚지 못할 경우에는 내 자네 큰딸을 소실(小室)로라도 데려갈 것이네.
 추노인은 아예 실신할 지경이었다.
 당장 하루하루 입에 풀칠하기도 힘든 형편이었다.
 그런데 불과 닷새의 말미를 주고 은자 이천 냥을 갚으라니!
 추노인은 그제야 상노인이 이미 오래 전부터 자신의 큰딸 추월아(秋月雅)에게 흑심을 품고 수작을 부렸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까지 상노인에게 약점을 잡힌 사람치고 온전히 배겨난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닷새의 말미는 오늘로써 끝이 난다.
 내일 아침이 되면 어김없이 상노인의 종복(從僕) 떼거리가 추월아를 강제로 끌고갈 것이다.
 여인 추월아는 끊임없이 장탄식이 터져 나오는 늙은 부친의 방을 잠시 바라보다 이내 마당으로 내려섰다. 그리고는 도둑고양이처럼 소리 없이 대문으로 다가가 조심스레 문틈으로 몸을 빼냈다. 밖으로 나선 그녀는 방향도 없이 무작정 뛰기 시작했다.
 ‘그런 늙은이한텐 결코 내 순결을 바칠 수 없어! 차라리 오늘밤 누구건 젊은 사람에게 내 순결을 주겠어! 누구에게건······.’
 그녀는 내심 모질게 부르짖었지만 참을 수 없이 복받치는 서러움에 왈칵 눈물을 쏟고 말았다.
 여인에게 있어 순결만큼 소중한 것이 사랑이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 순결을 잃는다는 것은 죽음과도 같은 고통인 것이다. 하물며 칠십에 이른 늙은 수전노(守錢奴)에게 당하는 것이라면 두말 할 필요가 없었다.
 무작정 앞으로 내달리던 추월아의 뇌리에 한 사내의 모습이 떠오른 것은 잠시 후의 일이었다.
 그녀는 즉시 방향을 바꿔 백강(白江) 쪽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
 
 휘리리리리링― 스스스스스―!
 아직은 차가운 밤바람이 지난해 무성히 자라 겨울을 넘긴 마른 갈대 사이로 스산하게 불어댔다.
 “이놈아, 조금만 먹어!”
 갈대 사이의 샛강으로부터 한 줄기 바보스런 음성이 들려왔다.
 갈대 속에 조그만 나룻배 하나가 물결을 따라 잔잔히 일렁이고 있었다. 그 나룻배 위에는 흑의를 걸친 한 명의 추면소년(醜面少年)이 팔자 좋게 네 활개를 쭉 펴고 편한 자세로 누워 있었다.
 그리고 소년의 가슴 위에서는 어른의 주먹만한 검은 쥐 한 마리가 소년이 놓아준 듯한 말린 물고기를 게걸스럽게 먹어대고 있었다. 아마도 조금 전의 바보스런 음성은 소년이 그 쥐에게 한 말인 듯했다.
 그러나 소년의 시선은 쥐를 향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먹물이 번지듯 어두워져가고 있는 장천(長天)의 잔월(殘月)을 향해 못박혀 있었다.
 소년의 입가에 실없는 웃음이 스쳤다.
 “사공 노릇 하기를 잘했지. 후훗! 천하의 갖가지 소식이 이 두 귀로 집중된단 말씀이야.”
 문득 소년은 하나의 영상을 잡기라도 하려는 듯 망연한 눈빛을 흐렸다.
 “그런데 아버진 지금 어디에 계신지··· 도대체 무슨 할 일이 있다고······.”
 소년이 떠올린 영상은 밤송이 같은 수염이 얼굴을 온통 덮다시피 한 털복숭이 중년인이었다.
 그리고 그 털복숭이 중년인은 소년의 부친이었다.
 소년은 바로 백리운도였던 것이다.
 황구(黃狗)라는 외진 산촌에서만 자라 온 백리운도는 황구촌을 벗어난 순간 자신이 천하에 대해 너무도 모름을 절실히 깨달았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바로 이곳 백강의 사공 노릇이었다.
 그의 생각대로 배를 타는 사람들은 천하의 정세에 관해 수많은 얘기를 했기에 실로 많은 것을 들을 수 있었다.
 더구나 백리운도가 가뜩이나 바보로 보였기 때문인지 사람들은 비밀스런 얘기까지도 서슴지 않았다.
 “이놈아, 이제 그만 좀 먹어라! 그렇게 먹어대다가는 배가 터져 죽고 말겠다!”
 백리운도는 자신의 가슴 위에서 계속 물고기를 뜯고 있는 쥐에게 사납게 소리치며 몸을 벌떡 일으켰다.
 순간 쥐는 깜짝 놀라며 배의 한쪽 구석에 마련된 사각형 나무상자 속으로 잽싸게 달려들었다.
 “낚시나 해야겠군.”
 백리운도는 쥐를 향해 바보스런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후미(後尾)를 향해 몸을 일으키려 했다.
 바로 그때였다.
 마른 갈대가 양쪽으로 쫙 갈라지며 가냘픈 인영 하나가 다짜고짜 숨가쁘게 배 위로 뛰어올랐다.
 “어······?”
 백리운도의 눈빛이 의외라는 듯 멍청하게 풀렸다.
 배 위로 올라선 채 숨을 가쁘게 헐떡이고 있는 인영은 뜻밖에도 여인이었다.
 자욱이 번지는 어둠 속에 어스름이 쏟아지는 달빛, 그 아래 출렁이는 강물과 묘한 조화를 이루는 한 명의 아름다운 황의소녀, 다름 아닌 추월아였다.
 그렇다면 그녀가 아까 뇌리에 떠올린 사내는 백리운도였단 말인가?
 본래 그녀는 처음 만나는 젊은 사내에게 무조건 순결을 주려 했었다. 그러나 아무리 결심이 그러하다 한들 자신의 몸을 함부로 내던질 수는 없는 일이다.
 중요한 것은, 이 일이 반드시 비밀스럽게 행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누구에게도 알려져서는 결코 안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가장 적합한 인물로 바보 사공을 떠올린 것이었다.
 그녀는 멀거니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백리운도의 시선은 아랑곳 않고 그의 앞에 살며시 앉았다.
 백리운도가 난처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낭자, 날이 어두워서 이제는 배를 못 띄웁니다.”
 그는 정말 뱃사공이 다 되어 있었다.
 굽신거리는 허리 하며, 바보 같은 음성에는 장중함까지 깃들어 있었다.
 추월아는 처연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나는 강을 건너려는 것이 아니에요. 그보다 당신은 올해 몇 살이죠?”
 “예?”
 “나이 말이에요. 당신은 당신 나이도 모르고 있나요?”
 “글쎄요, 한 열여섯쯤 될 겁니다.”
 “열여섯이면 열여섯이지 쯤이라니요?”
 백리운도는 멀쑥하니 머리를 긁적였다.
 “저도 확실한 것은······.”
 “이제 보니 당신은 소문보다 바보로군요.”
 “아마 그럴지도 모릅니다.”
 추월아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고 말았다.
 “어쨌든 상관없어요. 열여섯이든 열일곱이든, 당신은 아직 그런 건 모르겠군요?”
 “그런 거라니요?”
 백리운도의 두 눈이 한층 멍청하게 커졌다.
 추월아는 일순 얼굴을 가볍게 붉히더니 나직이 한숨을 불어내며 다시 말을 이었다.
 “내가 오늘밤을 당신과 함께 이 배에서 보낸다면 당신은 어떻게 할 생각인가요?”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그런데 백리운도는 일이 함지박만 해져 즉시 대답했다.
 “좋은 밤이 되겠지요.”
 순간 추월아는 거침없는 그의 대답에 흠칫했다.
 그러나 그녀는 백리운도가 단지 생각 없이 대답한 것이라 여기며 앉은 자세에서 그의 몸을 와락 감싸안았다.
 “이렇게 말인가요?”
 그녀의 꽃잎 같은 입술이 달콤한 단향과 함께 백리운도의 입술로 향했다.
 ‘어?’
 백리운도로서는 부지불식간에 당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오히려 그녀의 나긋한 교구를 억세게 끌어안았다.
 추월아로서는 예측조차 못한 반응!
 이때 돌연 백리운도가 입술을 떼며 오른손으로부터 그녀의 턱을 받쳐들었다.
 “낭자, 낭자의 의도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내게 있어 낭자는 어디까지나 실험용이 될 것이오.”
 추월아의 전신이 세차게 떨렸다.
 느닷없을 뿐만 아니라 좀전처럼 바보스럽지도 않은 백리운도의 말이었던 것이다.
 “나는 아직 나의 모든 일을 진짜를 위한 실험 정도로 생각하고 있소. 낭자 또한 이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오. 그래도 좋다면 내 오늘밤을 낭자와 함께 즐거이 보내리다.”
 추월아는 너무도 놀라 정신을 잃을 지경이었다.
 “다, 당신! 바보가 아니었군요.”
 “후훗, 사실 그건 잘 모르겠소. 내가 바보인지 아니면 세상이 바보인지······.”
 추월아는 망연자실하여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천하에 둘도 없을 바보라 생각하여 백리운도를 택한 그녀가 아니었던가?
 그러나 그녀는 더 이상의 생각을 떨쳐 버렸다. 이제 와서 다른 상대를 찾는다는 것은 그만큼 고통과 번민이 따를 뿐이다.
 상대는 이미 결정된 것이다.
 보다 중요한 것은 그런 문제가 아니었다.
 추월아는 잘끈 입술을 깨물었다.
 아무리 스스로 순결을 바치려 하지만 실험용이라니.
 그녀의 여린 가슴은 이 순간 진한 상처를 받고 말았다.
 “당신은 항상 모든 여인을 그런 식으로 생각하나요?”
 “아직까지는 그렇소. 내게 있어 여인은 두 부류요. 하나는 지금 같은 입장에서 보는 실험용이고, 다른 하나는 내 스스로 설 수 있을 때의 사랑용이라고나 해둘까?”
 “그렇다면 나는 사랑용의 여자가 될 수 없다고 간주되는 건가요?”
 “후훗. 그렇소. 지금의 내겐 사랑이라는 말 자체가 사치스러울 뿐이오.”
 얼굴에 천성인 양 떠올라 있는 바보스런 표정과는 달리 차분하고 냉정하게 가라앉은 음성이었다.
 문득 추월아의 눈에 백리운도의 모습이 경이롭도록 크게 확대되어 왔다. 차라리 신비롭도록 기이한 느낌을 몰고 확대되어 왔다는 표현이 옳았다.
 추월아는 잠시 넋을 잃은 듯 그를 바라보다 이내 본래의 신색을 되찾았다.
 “좋아요. 나는 내 발로 당신을 찾아왔으니 기꺼이 당신의 실험용이 되어 드리겠어요. 물론 당신이 내 몸을 가져주는 조건으로요.”
 “공정한 거래구려.”
 백리운도는 아무렇지도 않게 이렇게 말했다.
 헌데도 추월아는 왠지 지금 이 순간 그 말처럼 합당한 말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내 두 사람은 서로 돌아앉은 채 옷을 벗기 시작했다.
 바람이 갈대잎에 스치는 소리와도 같은 음향이 나룻배 위로 나풀 날아올랐다.
 강물은 뱃전에 부드럽게 찰랑거리고 그 물결따라 몸을 내맡긴 나룻배 위에 두 사람의 옷이 겹쳐져 하나의 침상이 만들어졌다.
 여인은 눈부시도록 희디흰 백옥빛 나신을 하늘로 향했다. 흐릿한 달빛과 별빛이 여인의 나신 위로 이슬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사내가 문득 입을 열었다.
 “이런 것에 대해 알고 있소?”
 “아, 아니··· 몰라요.”
 “야단났군. 나도 전혀 모르는데··· 하지만 어떻게든 해 보는 수 밖에······.”
 두 사람의 얼굴 위로 당혹함이 스쳐갔다.
 “가만, 이제 생각하니 언젠가 우연히 이런 일에 대해 쓴 서적을 본 적이 있었어. 그 책에 써 있기를 처음에는 이렇게······.”
 이렇게······.
 또 이렇게······.
 밤이 뜨겁게 깊어갔다.
 오늘의 이 밤은 왜 이렇게 짧은 것인가?
 잠 안 오는 밤이면 수백 번을 뒤채도 새벽의 여명(黎明)은 터 오지 않았건만 갈대숲마저 환희성(歡喜聲)을 토해내던 이 밤은 정녕 짧았다.
 
 ***
 
 어느새 여명이 텄다.
 새벽 여명을 등지고 추월아는 쓸쓸히 나루터를 떠났다.
 바로 그 직후, 나룻배 위에서 한 줄기 노인의 음성이 크게 울렸다.
 “이봐! 사공! 사공!”
 한 명의 회의노인이 막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기 시작한 백리운도를 다급히 깨우고 있었다.
 백리운도는 부스스 눈을 뜨고 회의노인을 멀거니 응시했다.
 회의노인의 핀잔 어린 음성이 백리운도의 바보스런 얼굴로 꾸짖듯 쏟아졌다.
 “에이, 이놈아! 아직도 잠 타령이냐? 해가 네 엉덩이까지 치솟아 있는데······.”
 백리운도는 잠을 쫓으려는 듯 머리를 몇 차례 세차고 흔들고는 후다닥 몸을 일으키기가 무섭게 허리를 연신 굽신거렸다.
 “헤헤헤! 그렇게 되었습니다요. 헌데 강을 건너시려고요?”
 “빨리 배를 저어라. 오늘은 주인 어른의 혼삿날인데 강 건너서 구해올 물건이 많다.”
 “예? 주인 어른이시라면?”
 “상노야(常老爺) 어른이시다.”
 “상노야! 아니, 상노야 어른이시라고요? 상노야께서 그 나이에? 규수(閨秀)는 누굽니까?”
 “이놈아, 바보 놈이 그런 건 알아서 뭘하겠다는 거냐? 저 앞마을 추노인의 천금(千金) 월아낭자가 우리 주인어른의 새색시다.”
 순간 노를 잡아가던 백리운도의 손이 멈칫했다.
 ‘추월아······?’
 도대체 이 감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좋단 말인가? 분명 무엇인가 기구한 사연을 지닌 여인이라는 생각은 들었지만······.
 백리운도가 손을 멈칫한 것은 육안으로 가늠할 수조차 없는 짧은 순간의 일이었다.
 몸에 펼쳐진 제령심인으로 하여 바보스런 표정 외에는 거의 다른 표정을 떠올리지 못하는 백리운도는 이 순간 내심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이윽고 배가 앞으로 스르르 미끄러져가기 시작했다.
 “잠깐!”
 한 올의 감정조차 배제된 듯 차갑고 억양 없는 음성이 백리운도의 귓전을 파고든 것은 바로 그때였다.
 백리운도는 힐끗 시선을 돌려 그 음성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순간 초점 없는 백리운도의 두 눈이 흠칫 굳어드는가 싶더니 원래대로 빠르게 돌아갔다.
 배를 제지하며 나타난 인물은 온통 흑색일색(黑色一色)이었다.
 일신에는 먹처럼 짙은 흑의장삼(黑衣長衫)을 걸쳤으며, 등에도 역시 시커먼 피풍의(避風衣)를 걸쳤다. 얼굴마저 검은 오죽립으로 깊숙이 가리어져 있었으며 배 위로 가볍게 뛰어올라 딛고 선 것은 새까만 흑리화(黑裏靴)였다.
 그의 몸에서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모름지기 사람이라면 그 특유의 색깔이라든가 기운이 느껴져야 한다. 그런데 이 흑의죽립인(黑衣竹笠人)에게서는 그 어떤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단지 있다면 죽음의 냄새!
 바로 그것만이 느껴질 뿐이었다.
 흑의죽립인은 배에 오르자 한쪽 구석에 자리를 잡고 무심히 백강의 투명한 물 속을 내려다보기 시작했다.
 비록 그렇게 한마디의 말도 없이 묵묵히 서 있었으나 엄청난 기세가 뻗어 나왔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수선을 떨다시피 백리운도를 재촉하던 회의노인은 갑자기 말을 잊은 듯 한켠에 앉아 눈을 뒤룩뒤룩 굴리고만 있었다.
 백리운도는 이미 노를 부지런히 젓고 있었다.
 잠시 후 배는 이내 강 건너 나루터에 멈춰 섰다.
 회의노인은 누가 잡을세라 도망치듯 뭍으로 뛰어내렸다.
 그러나 흑의죽립인은 여전히 처음 자세 그대로 굳은 듯 물 속을 내려다보고만 있을 뿐 움직일 줄을 몰랐다.
 백리운도는 한 줄기 기광이 번뜩이는 눈으로 흑의죽립인의 뒷모습을 일견하다 이내 헤픈 웃음을 지었다.
 “헤헤, 손님! 다 왔습니다요. 어서 내리셔야······.”
 “내리고 안 내리고는 내 일인 것! 다시 노를 저어라.”
 “아, 알겠습니다요.”
 백리운도는 즉시 대꾸하며 다시 뱃머리를 돌렸다.
 그런데 이 순간 그는 전신으로 압박해 드는 긴장감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무릇 말에는 억양이 있는 법이다. 특히 한어(漢語)는 여느 말과 달리 그 독특한 억양의 높낮이가 뚜렷하다.
 그런데 흑의죽립인의 말에는 한치의 억양도 없었던 것이다.
 백리운도는 이런 류의 인물이 어떤 인물인가를 잘 알고 있었다. 패도극강(覇道極强)의 무공을 지닌 인물들이 대개 이러했다.
 삐걱! 삐이걱!
 여전히 강물은 유유롭게 흐르고 있었다.
 배는 백리운도가 젓는 노의 움직임에 따라 강 한복판 어림에 이르렀다.
 이때 흑의중년인의 신형이 돌연 백리운도를 향해 빙글 돌렸다.
 “그만 젓고 앉아라.”
 흑의죽립인은 백리운도가 뭐라 대꾸할 새도 없이 명령조로 말을 이어갔다.
 “가자. 너의 내면 깊숙한 곳에 자리한 큰그릇을 가득 채워주겠다.”
 헤벌쭉 벌어져 있던 백리운도의 입술이 억지로 다물려졌다.
 이 순간 그의 뇌리 속에는 수백, 수천 가지의 생각이 빠르게 스치고 있었다.
 그러나 이내 백리운도의 입꼬리에 예의 그 백치 같은 미소가 살아나며 흑의죽립인을 바라보았다.
 “내가 엊저녁 무얼 했는지 알아맞힌다면 당신을 따라가겠소!”
 “크하하핫―!”
 돌연 흑의죽립인의 입에서 앙천광소가 터져 나왔다.
 순간 백리운도의 전신이 부르르 세찬 진저리를 일으켰다.
 광소가 귓전을 파고든 순간 그는 전신 기혈이 온통 뒤집히는 듯한 충격을 받았던 것이다.
 한동안 계속되던 광소성이 돌연 칼로 자른 듯 뚝 그쳤다.
 “영악한 놈, 걱정할 것 없다. 오늘 잔치는 없을 것이다.”
 “분명하오?”
 “아까 그 계집애에게 황금 만 냥을 주어 보냈다. 되었느냐?”
 “믿겠소.”
 말.
 참으로 묘한 것이 말이다.
 사실 백리운도는 그 일을 자신이 처리해야 한다는 것을 자신이 엊저녁 무엇을 했는지 알아맞히라는 식으로 돌려 말한 것이다.
 “자, 너까지 합쳐 열 명째다. 어서 가자.”
 “좋소, 갑시다. 내가 안간다 하면 당신은 분명히 나를 죽일 것이니··· 제길, 뜻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군. 어느 쪽이오?”
 “물 흐르는 방향으로!”
 “훗, 편해서 좋군.”
 백리운도는 노를 놓고 편한 자세로 앉았다.
 배는 제 스스로 하류를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이때 백리운도는 내심 차분히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다.
 갑작스레 자신 앞에 나타난 흑의죽립인!
 백리운도는 그를 처음 본다.
 그러나 흑의죽립인은 언제부터인지 모르나 암중(暗中)으로 자신을 주시해 왔음이 분명하다. 그것은 그가 백리운도에게 모종의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흑의죽립인의 정체는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또한 그가 가고자 하는 곳은 어디란 말인가?
 지금으로서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
 단 하나 분명한 것은, 흑의죽립인이 가고자 하는 곳에 백리운도를 비롯한 열 명의 아이가 모일 것이라는 사실이다.
 
 
 4장 십 중 삼(十中三)
 
 
 이곳은 지하인가 아니면 지상에 위치한 어느 장원(莊院)의 밀실인가?
 도대체 대륙의 어느 구석에 위치한 것인지 추측조차 할 수가 없다.
 긴 회랑(回廊)을 따라 정확히 열 개의 석실과 석실이 끝나는 곳에 사방 십여 장 정도의 장방형 공터가 하나 있다.
 불빛이라고는 천장과 벽에 일 장여 간격으로 박혀 있는 수십 개의 야명주(夜明珠)에서 뿜어지는 스산한 청광(靑光)뿐이다. 그리고 통풍이 제대로 되지 않아 칙칙한 습기와 구토를 일으킬 것 같은 악취가 진동했다.
 음산하다 못해 귀기(鬼氣)마저 감도는 거대한 밀실!
 지옥의 유부(幽府)가 눈앞에 보일 듯한 정경이었다.
 장방형의 넓은 공터는 그래도 밀실 내에서 가장 밝고 깨끗한 곳이었다.
 지금 이곳에는 열 명의 아이가 서로를 조심스럽게 살피며 앉거나 서거나 드러누워 있었다. 하나같이 십 육칠 세쯤 되어 보이는 여덟 명의 소년과 두 명의 소녀였다.
 그들이 걸친 옷들은 색깔은 달랐지만 한결같이 초라했다.
 그러나 소년들의 체격은 나이답지 않게 건장했으며, 소녀들은 나이에 비해 이미 성숙한 자태를 발산하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뭔지 모를 공포와 긴장감에 휩싸여 있다.
 단지 한쪽 구석에 아무렇게나 벌렁 드러누워 드르렁드르렁 코를 골고 있는 흑의소년만이 예외였다.
 그는 몇 번인가 심한 잠꼬대마저 해대며 입언저리에 바보 같은 웃음을 쉼 없이 흘린 채 곤하게 자고 있었다.
 무엇인가 터져 버릴 듯한 이 분위기 속에서 저토록 태평스럽게 잠을 자고 있는 것이다.
 다른 아홉 명의 아이들이 듣기에 오늘 마지막으로 들어온 흑의소년의 이름은 백리운도였다.
 그는 밀실에 들어서자마자 아이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히죽히죽 웃어대고 횡설수설하다가 저렇게 잠에 빠져들었던 것이다.
 “음냐, 음냐. 에이구! 아버지가 또 지셨어요. 이젠 안 물러줘요.”
 아버지와 바둑을 두는 꿈을 꾸고 있는 것일까?
 ‘기이한 놈이다!’
 아이들은 그런 백리운도의 잠자는 모습을 간혹 힐끔힐끔 훔쳐보곤 했다.
 그런데 그 아홉 아이들 중 백리운도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계속 석실 바닥에 무엇인가를 찍어대는 소년이 한 명 있었다.
 팍! 파팍!
 불꽃이 사방으로 튀었다.
 회의(灰衣)를 걸친 그 소년은 얼굴의 선(線)과 눈썹이 유난히 뚜렷하고 짙었다.
 그의 손에 잡혀 있는 것은 하나의 식도(食刀)였다. 얼마나 석실 바닥을 찍어댔는지 그 끝은 뭉툭하게 무디어져 있었다. 마치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응어리진 한을 간직하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감군악(甘君嶽)!
 그의 이름은 감군악이었다.
 그의 맞은편 구석에는 또 한 명의 눈길을 끄는 소년이 있었다.
 구릿빛 얼굴 가득 자잘한 상흔(傷痕)이 거미줄처럼 엉켜 있는 이 흑의소년의 이름은 장엽(張葉)이었다.
 그는 시끄러웠다.
 무겁게 가라앉은 석실의 분위기가 그로 인해 다소나마 완화될 정도로 그는 시끄러웠다.
 그는 망나니의 아들이라고 했다.
 자신의 아버지가 몸이 불편할 때마다 자신이 대신 사형장에 나서 망나니 노릇을 했다며 죄수의 목을 치는 흉내를 손짓 발짓 섞어가며 자랑스럽게 떠들곤 했다.
 “살인(殺人)! 살인이 나 장엽의 특기이지. 물론 합법적인 살인 말이야.”
 장엽은 살인을 합법적으로 즐기려는 소년이었다.
 또 한 사람, 열 명 중 유난히 겁먹은 표정을 지으며 안절부절못하는 소년이 있었다.
 얼굴이 희고 눈매가 특히 갸름해 차라리 여인처럼 느껴지는 갈의소년(褐衣少年) 고서풍(高敍風)!
 그는 자신의 이름을 밝히는 것조차 몹시 꺼렸을 정도였다.
 그 외에도 날카로운 인상의 지혜로워 보이는 백의소년(白衣少年) 소운평(蘇雲平), 사냥꾼의 아들이라는 청의소년(靑衣少年) 관홍(官弘), 주루의 점소이였다는 회의소년(灰衣少年) 상운(尙雲), 부잣집 머슴이었다는 황의소년(黃衣少年) 강욱(江旭)이다.
 그리고 홍의소녀(紅衣少女)는 요지(妖芝), 자의소녀(紫衣少女)는 백빈영(白彬 )이었다.
 둘 다 진정 아름다웠다.
 그러나 두 소녀의 아름다움은 현격하게 상이(相異)했다.
 요지의 아름다움은 보는 이를 그대로 자극하고 말 듯한 강렬한 요요(妖妖)로움이었다.
 한편 백빈영의 아름다움은 은은했다.
 교태로운 듯하면서도 현숙했고 요요로운 듯하면서도 성결했다.
 이들 열 명 소년소녀들은 모두가 정체를 알 수 없는 흑의죽립인에 의해 이곳까지 오게 된 것이다.
 백리운도가 마지막으로 오게 됨으로써 이곳에 만들어진 열 개의 석실과 아이들의 숫자는 꼭 맞게 되었다.
 그리고 오늘은 무슨 일인가 분명 일어날 것이다.
 그것은 오감(五感)이기 이전에 육감(六感)인 예감(豫感)이었다. 그 예감이 열 명의 아이들을 자신의 방으로부터 하나 둘 모이게 한 것이었다.
 백리운도가 이곳에 들어온 지 두 시진 남짓 지났을 때였다.
 우― 우― 웅!
 돌연 석실 전체가 그대로 무너져 내릴 듯한 진동이 일기 시작했다. 아이들의 얼굴이 일제히 긴장으로 흠칫 굳어들었다. 단지 아직도 코를 골고 자고 있는 백리운도만이 예외였다.
 예의 차갑고 억양 없는 흑의죽립인의 음성이 방향도 없이 들려 온 것은 다음 순간이었다.
 “오랫동안 기다렸다. 본좌는 너희들에게 천하의 온갖 부(富)와 명예(名譽)를 준다고 약속했던 사람이다.”
 잠시 음성이 멎었다.
 자취조차 드러내 놓지 않고 들려오는 그 음성은 아이들에게 극도의 공포를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곧 음성이 이어졌다.
 “하지만 너희들 모두에게 자격을 줄 순 없다. 그 자격은 너희들 스스로 쟁취해야 한다.”
 또 다시 음성이 끊어졌다.
 아이들의 눈에는 이제 긴장과 더불어 불안의 기색까지 배어들고 있었다.
 이때 돌연 한쪽 구석에서 짜증스런 고함 소리가 울려 퍼졌다.
 “거 조용히 좀 하시오! 오랜만에 잠 좀 자려 했더니만······.”
 백리운도였다. 눈을 비비며 몸을 일으키는 그의 바보 같은 얼굴에는 진정 짜증이 섞여 있었다.
 그러나 그의 이 천연덕스런 괴행(怪行)은 다른 아이들의 관심을 끌 수 없었다.
 다른 아이들은 흑의죽립인의 음성에 전신의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뭐 먹을 것이라도 준다는 얘기이냐?”
 백리운도가 식도를 굳게 움켜쥐고 있는 감군악의 옷소매를 잡았다.
 순간 감군악의 왼손 주먹이 ‘퍽!’ 백리운도의 얼굴에 정통으로 작렬했다.
 “바보 같은 놈!”
 백리운도는 코를 잡고 나뒹굴었다.
 “으윽!”
 코를 움켜쥔 손가락 사이로 검붉은 핏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때 다시 흑의죽립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물론 너희들 개개인의 자질과 골격은 백년에 하나 날까말까 할 정도로 뛰어나다. 허나 본좌가 너희들에게 주려는 것은 결코 그것만 가지고 되는 것은 아니다. 자질과 골격 외의 것, 그것이 바로 본좌가 너희들에게 바라는 것이다.”
 그때였다.
 백리운도가 이번에는 자의소녀 백빈영의 옷소매를 잡았다.
 “낭자, 저 사람은 도대체 무슨 말을······.”
 “쉿! 잘 들어요.”
 백빈영은 투명하리만큼 가늘고 흰 손가락으로 입을 막는 시늉을 하며 백리운도를 안심시키기라도 하려는 듯 가볍게 웃어 보였다.
 “야! 예쁘구나!”
 백리운도의 얼굴이 헤벌쭉해지며 한층 더 바보스럽게 변했다.
 흑의죽립인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십중삼(十中三)! 본좌는 너희들 열 명 중 세 명만을 원한다. 수단과 방법은 따지지 않겠다. 너희들 중 세 명이 최후로 남을 때 첫번째 석실 앞의 줄을 당겨라.”
 석실 안은 이제 터질 듯한 긴장감에 소리 하나 없었다.
 “소요되는 시간이 얼마이든, 너희들이 어떤 방법을 쓰든 일체 관여치 않겠다. 단 이제부터 모든 식량 공급은 중단한다. 부디 최대한의 재치와 기지를 발휘해 세 명 중 하나가 되길 모두에게 바란다.”
 그 말을 끝으로 더 이상 아무런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러나 말이 끝남에도 열 명의 소년소녀들은 누구도 움직일 줄을 몰랐다.
 말이 뜻하는 바는 바로 열 명 중 일곱 명이 죽어야 한다는 것이 아닌가? 그러기 위해서는 결론은 하나뿐이었다.
 ― 살고 싶으면 죽여라!
 흑의죽립인은 그것을 강요한 것이었다.
 실로 치가 떨리는 잔인한 요구!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이제와서 나는 못하겠노라 발버둥쳐 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가뜩이나 침중했던 분위기는 더욱 스산하고 무겁게 가라앉았다.
 “으히힛! 웃기는 작자로군. 어떻게 열 명 모두가 세 명 중 하나가 되란 말이야? 안 그러냐?”
 백리운도는 벌겋게 부어오른 콧등을 만지작거리며 극도의 공포심에 몸을 떨고 있는 고서풍의 옷을 잡았다.
 순간 고서풍의 유난히 흰 얼굴이 다급히 백리운도의 바보 같은 웃음을 피했다.
 “나, 난 하나도 못 알아들었어.”
 “제길! 너는 지독한 겁쟁이로구나.”
 “시끄럿, 이 병신 같은 자식아!”
 백리운도의 말문을 차갑게 막아 버린 사람은 날카로운 인상의 소운평이었다.
 그의 얼굴은 오밀조밀하게 이목구비가 갖추어져 있었다.
 무릇 이런 사람은 치밀한 사람이다.
 자신에게 해가 되는 일은 결코 하지 않으려 하며 쉬운 일도 생각을 거듭한 끝에 완전한 승산(勝算)이 서야만 실행한다.
 “이제부터 너희들 내 말 잘들어!”
 소운평은 다른 아이들을 쭉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우리는 한마디로 말해서 그 자의 계략에 걸려든 거다. 이제 우리에겐 하고 안 하고의 선택이란 없다.”
 “그렇다면 너는 어떻게 하자는 말이냐?”
 사냥꾼의 아들 관홍이 구릿빛 얼굴 위로 흐르는 식은땀을 옷소매로 문지르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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