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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종사 1

2018.03.14 조회 509 추천 4


 대륙종사 1권
 전설(傳說)의 장(章)
 
 
 여기 불멸의 전설이 있다.
 잃어버린 고대의 신전(神殿).
 太陽의 帝國!
 신(神)들의 제국이라 불리는 이곳.
 태양의 신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고대의 신비를 간직한 불가사의한 곳으로서,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들 수 없는 천계(天界)로 신의 무학이 간직되어 있다는 신비의 제국이었다.
 한마디로 환상의 신전인 것이다.
 전설은 말한다.
 태양의 제국을 찾는 자, 고금사상 존재조차 않았던 천추제일인(天秋第一人)이 되며 불사(不死)의 태양신이 된다고.
 과연 태양의 제국은 존재하는 것일까?
 
 ***
 
 또 하나의 전설.
 그것은 마왕(魔王)의 전설이었다.
 공포와 저주, 그리고 재앙의 대명사인 마교(魔敎)!
 바로 그 마교를 일으켰다는 아홉 천마왕(天魔王)들의 전설이었다.
 구천마왕(九天魔王)!
 지상 최강의 대마인(大魔人)이며 초인(超人)들로 불리는 이들, 이들은 인간이 아닌 마신(魔神)이었으며 악마(惡魔)들이었다.
 허나, 문제는 그들이 아닌 그들의 무학이었다.
 구천마왕이 최후에 남긴 마학서(魔學書)!
 마왕단서(魔王丹書)!
 바로 이것이었다.
 구천마왕이 남긴 아홉 권의 마왕단서.
 그것은 바로 재앙의 씨앗이었다.
 ― 마왕단서! 그 아홉 권 중 하나만 얻어도 천하 위에 군림할 수 있다.
 그 전설로 인해 그 얼마나 많은 피가 대륙에 뿌려졌던가?
 한마디로 그것은 끔찍한 저주와 재앙의 마서(魔書)인 것이었다.
 피, 그리고 죽음만을 부르는 마물(魔物).
 무시무시한 혈란 속에 마왕단서는 그 누구의 손에 넘어갔는지도 모른 채 사라졌고 그것은 무상한 세월 속에 세인들의 기억 속에 잊혀진 전설이 되어 있었다.
 
 
 서장 신화(神話)는 시작되고
 
 
 십(十).
 열을 의미하는 숫자.
 그것은 바로 당금 무림천하에 존재하는 열 개의 하늘을 뜻하는 것이다.
 십천세가(十天世家)!
 중원(中原).
 십팔만리 그 광활한 대륙의 대지 위에 찬란한 태양으로 군림하고 있는 불멸의 신화를 낳은 십천세가!
 정도무림의 횃불이요, 혼(魂)으로 대륙의 맥인 소림사(少林寺)를 비롯한 구파일방(九派一*)을 오히려 능가하는 지주적인 대세력을 이루고 있었다.
 한마디로 천하십대세가(天下十代世家)였다.
 천도세가(天道世家)!
 검문세가(檢問世家)!
 용문세가(龍門世家)!
 황보세가(皇甫世家)!
 혈륜세가(血輪世家)!
 사천당가(四川唐家)!
 남궁세가(南宮世家)!
 뢰문세가(雷門世家)!
 봉황세가(鳳凰世家)!
 풍운세가(風雲世家)!
 가히 무적의 가문들.
 정도(正道)는 이들에 의해 좌우된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 까닭에 천하인들은 그들 십천세가의 가주(家主)들에게 전무후무한 불멸의 칭호를 내렸으니······.
 ― 십도천종(十道天宗)!
 천외무황(天外武皇) 북궁황(北宮皇)!
 검왕(劍王) 검군악(劍君岳)!
 용천대제(龍天大帝) 서문신후(西門神候)!
 천붕신후(天鵬神候) 황보성(皇甫星)!
 혈륜신군(血輪神君) 사도문(司徒門)!
 표향절환수(飄香絶幻手) 당문종(唐文宗)!
 철왕(鐵王) 남궁천제(南宮天帝)!
 뢰천권왕(雷天拳王) 단극(丹極)!
 봉황신후(鳳凰神候) 가희려(佳熙麗)!
 풍운비제(風雲飛帝) 갈천우(葛天雨)!
 이들 열 명의 무림왕들.
 무림에서의 그들의 위치는 가히 절대적이었으며 신망과 존경을 한몸에 받고 있었다.
 천하의 그 누구도 그들 앞에 무공을 논할 수 없었고 감히 그들을 멸시하지 못했다.
 그들은 각기 가히 철옹성 같은 대세력을 구축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에 반해, 소림사를 비롯한 구파일방의 세력은 쇠퇴해 거의 봉산(封山)하다시피 해 은연중에 힘을 기르고 있었다.
 옛날의 찬란한 명예를 되찾기 위해······.
 일(一)······.
 대륙 최고의 세력을 뜻하는 숫자였다.
 ― 제왕성(帝王城)!
 정도무림의 핵으로 천하를 관장하는 무림맹(武林盟)이었다.
 그들은 정천(正天)의 최고봉으로써 정의수호를 위해 의혼(議婚)을 불태우고 있는 정(正)의 금자탑이었다.
 환우성자(*宇聖子) 담우승(*禹昇)!
 제왕성의 성주(城主)로 만인의 칭송과 존경을 한몸에 받고 있는 무림신(武林神)이며 성인(聖人)이었다.
 무림의 모든 시비도 그가 나서면 순탄히 무혈(無血)로 끝날 정도였다.
 천하인은 모른다.
 그가 어느 정도의 무공을 지니고 있는지를······.
 그러나 천하인은 느끼고 있었다.
 그의 무공은 지금껏 존재하지 않은 초유의 불세경천(不世驚天)의 경지에 달해 있을 것이라는 것을······.
 천하무림은 이들 제왕성과 십천세가로 인해 태평성대를 구가하고 있었다.
 헌데, 호사다마(好事多魔)라 했던가?
 좋은 일이 있으면 언제고 마(魔) 역시 끼는 법인가?
 중원무림에 엄청 가공할 회오리가 몰아쳤다.
 십천세가 중에서도 최고의 가문으로 손꼽히는 천도세가의 천외무황 북궁황!
 그가 돌연 정도를 배신하고 대마인(大魔人)으로 돌변한 것이었다.
 천하의 마인들을 규합하여 공전절후한 마의 대세력을 구축하니.
 암황천궁(暗皇天宮)!
 정도의 의인(義人)들은 회의와 불신을 금할 수 없었다.
 천하의 우상이던 천외무황 북궁황이 암황천궁을 세우고 천하제패를 위해 가공할 피보라를 일으키기 시작한 것이다.
 십천세가를 비롯한 정도의 대소방파들이 하루아침에 그의 제물이 되어 잿더미로 변해 버리고 말았다.
 정도무림은 그야말로 바람 앞에 등불로 겨우 제왕성의 힘을 빌어 지탱하고 있었으나 실로 위급한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암황천궁의 힘은 그야말로 공포 그 자체였던 것이다.
 정도인들은 천외무황 북궁황의 배신에 분노와 저주를 토하며 마침내 이렇게 부르기 시작했다.
 철혈마제(鐵血魔帝)!
 그리고 죽음을 무릅쓰고 그에게 대항했다.
 그러나 그것은 역부족이었고 천하는 암황천궁의 마수에 떨어지기 일촉즉발의 순간에 놓이게 되었다.
 바로 그때, 혜성처럼 나타난 신비의 기인(奇人)이 있었다.
 환영비매(幻影秘魅)!
 그는 그림자 없는 인간이었다.
 상상을 초월한 무학으로 신출귀몰하게 나타나 홀로 철혈마제 북궁황의 암황천궁에 대항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경이로운 신화(神話)를 이루어가고 있었다.
 암황천궁의 마인들을 풀잎의 이슬처럼 제거해 가며 그 가공할 혈풍을 일단 저지시켜 놓은 것이었다.
 얼굴은커녕 나이와 성별조차 신비에 싸인 환영비매.
 그는 무림 최고의 신비인이었고 우상으로 부각되는 가운데, 정도는 안도의 숨을 몰아쉬며 비밀리에 암황천궁에 대항할 힘을 키우며 연합세력을 구축하는 시간을 벌고 있었다.
 과연 환영비매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리고 그가 암황천궁에 대항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1장 최후의 후계자
 
 
 “헉헉······.”
 고통이 진하게 배인 호흡소리가 백 장 밖에서 들려오는 듯싶은 순간,
 고오오오―!
 대기의 기운이 폭풍처럼 무섭게 경련을 일으켰다.
 이어, 기암괴석과 밀림 같은 수림으로 뒤덮인 숲 속 한곳에서 휘류륭! 돌개바람이 벼락처럼 휘몰아쳐 들었다.
 그리고 삽시간 돌개바람이 사라지는가 싶은 찰나, 회색 빛 장포를 입고 있는 한 사람이 그 가공할 돌개바람 속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실로 불가사의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인간의 능력으로 그 엄청난 돌개바람을 일으키며 공간을 초월해 단숨에 백 장 거리를 주파할 수 있다니.
 도저히 범인의 사고(思考)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불가능한 일었다.
 회색 빛의 인간!
 나이를 측량할 수 없을 정도의 회색 장발(長髮)이 폭풍처럼 휘날리고 있었으며 섬뜩하게도 혼백을 빨아들일 듯한 무심한 눈빛을 전광처럼 뿜어내고 있었다.
 실로 오싹한 모습이었다.
 헌데, 인간이 이런 상처를 입고도 살아 있을 수가 있단 말인가?
 소름이 끼칠 정도로 끔찍했다.
 복부를 움켜잡고 있는 그의 손가락 사이로 갈기갈기 찢겨진 내장부스러기와 핏물이 철철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또한 가슴에는 시커멓게 그을린 장인(掌印)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으며 수백 수천의 도상(刀傷)이 무수히 그어져 있었다.
 실로 믿어지지 않았다. 이런 참혹한 상처를 당하고도 숨을 쉬고 있다는 자체가······.
 더욱이 이런 모습으로 그토록 상상을 불허하는 경이의 무공을 펼칠 수 있다니.
 “우욱······!”
 괴인은 지극히 고통스러운 듯 가슴을 움켜쥐며 왈칵 핏물을 토해내었다.
 쭈욱 뿜어지는 시커먼 핏물.
 그것은 놀랍게도 독혈(毒血)이었다.
 어느덧 시뻘건 노을이 짙게 깔려들고 있었다.
 괴인은 그 석양을 직시한 채 바위에 기대 초점 잃은 두 눈에 광망을 흘려내었다.
 “크흐흐······.”
 안면이 무섭게 씰룩거렸다.
 “어이가 없군. 백오십 년 전만 해도 천하에 적수가 없었거늘··· 그까짓 구십구 명의 마졸이 펼친 천라지망을 뚫는데 이 꼴이 되다니······.”
 ― 천하에 적수가 없었다!
 실로 광오한 말이다.
 더욱이 백오십 년 전이라니······.
 그렇다면 전대(前代) 절세기인(絶世奇人)이란 말인가?
 “으······.”
 괴인은 고통스런 신음을 흘리며 휘청거렸다.
 ‘빌어먹을. 천하 최고의 후계자를 찾아 나섰다가··· 우연히 놈들의 정체를 알게 되었는데··· 어이없게 발각돼 이 꼴이 되다니······.’
 이런 상황 속에서도 괴인은 기가 막힌 듯 입가에 고소를 떠올리고 있었다.
 이내 괴인의 눈빛엔 다급한 빛이 스쳤다.
 ‘시간이 없다. 이미 노부의 생명은 한 시진 이상은 견디지 못한다. 더욱이 놈들의 추격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한 시진···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어도 후계자를 찾아야 한다. 천 년의 영광을 되찾아줄 최후의 후계자를······.’
 ― 천년영광을 되찾아줄 최후의 후계자!
 ‘만약··· 찾지 못한다면 노부는 천년 한(千年恨)을 안고 죽어야 한다!’
 일순, 핏기 한 점 없이 창백했던 괴인의 안색이 돌연 흙빛을 띠어가고 있었다.
 ‘으··· 독천마(獨天魔)의 흑골부시독(黑骨腐屍毒)이 이제 서서히 오장육부를 녹여가고 있군.’
 죽음 앞에 초연한 것인가?
 이런 상황 속에서도 눈빛 하나 변하지 않고 이렇듯 담담할 수가······.
 그의 눈빛이 점차 흐려질수록 두 눈에선 광망이 불꽃처럼 이글거리고 있었다.
 “크흐흐··· 방심만 하지 않았어도··· 독공에 내공이 감소되지만 않았다면··· 흑천마(黑天魔)의 쇄심마령수(碎心魔靈手)와 도천마(刀天魔)의 파천마도(破天魔刀)에도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신경질적으로 쏟아져 나오는 내장부스러기를 꾸역꾸역 뱃속에 집어넣었다.
 섬뜩했다.
 “하여튼 천마삼령(天魔三靈) 놈들에게 당했지만··· 노부 역시 손해는 보지 않았다. 놈들은 이미 노부보다 먼저 구천에 떠도는 혼이 되었으니까······.”
 강한 자부심이 어려 있었다.
 그러나 이내, 괴인의 안색은 무겁게 굳어져갔다.
 ‘어찌됐건 놈들이 다시 출현했다는 것이 크나큰 문제이다.’
 어떤 섬뜩한 긴장감마저 어린 음성이었다.
 ‘더욱이 믿을 수 없게도 놈들은 과거와는 상상도 되지 않을 정도로 거대한 세력을 구축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노부를 이 지경으로 만든 천마삼령··· 그들은 겨우 놈들의 이류고수에 지나지 않았으니······.’
 “우욱······.”
 괴인은 다시금 검붉은 독혈을 토해내며 쓰러질 듯 휘청거렸다.
 ‘더욱 가공스러운 것은··· 놈들이 세상의 이목을 속이고 어느새 천하에 잠식해 들었다는 것이다······.’
 ― 천하의 이목을 속이고 천하에 잠식해 있다.
 이 무슨 엄청난 말인가?
 대체 어떤 세력이 이처럼 가공할 포석을 깔고 있단 말인가?
 휘이잉······.
 한줄기 야풍이 밀려들었다 싶은 순간이다.
 ‘······!’
 괴인의 눈빛이 급격히 흔들려졌다.
 ‘이럴 수가··· 이환허체대법(以幻虛體大法)을 펼쳤거늘 어느새 뒤쫓아오다니······.’
 이환허체대법!
 진기로써 실체와 똑같은 허체를 만들어 뜻대로 움직이게 만드는 불가사의한 환술(幻術)이었다.
 펼친 사람이 거두지 않는 한 그 허상은 한 시진 동안 사라지지 않고 활동한다.
 괴인은 도주하면서 이환허체대법을 펼쳐 허상을 반대방향으로 가게 해 추적을 따돌렸던 것이었다.
 뜻밖의 눈빛을 짓던 괴인.
 돌연 괴인의 눈빛이 홱 변했다.
 ‘이런··· 엄청난 놈이 오고 있다. 천마삼령과는 상대도 안 되는··· 어쩐지 놈들이 의외로 빨리 눈치챘다 했더니······.’
 바람 속에 전해져 오는 느낌.
 그것은 괴인의 전신에 섬뜩한 한기를 느끼게 하고 있었다.
 ‘놈은 평상시의 노부와 버금가는 놈이다!’
 일순, 괴인은 침음을 흘렸다.
 “음, 이미 나는 기력이 다해 기공이 거의 고갈되어 있다. 이런 상태에 놈들에게 발각되면 개죽음뿐이다. 허나······.”
 문득 입가에 괴이한 웃음을 흘렸다.
 이어, 그는 자신의 갈라진 복부를 보았다.
 녹고 있었다.
 오장육부가 끔찍스럽게도 독혈에 의해 흐물흐물 녹아가고 있는 것이었다.
 “흐흐흐··· 놈들은 더 이상 노부를 찾지 못할 것이다. 찾는 것은 핏물의 흔적뿐일 테니까.”
 한순간 괴인의 입에서 주문 같은 외침이 터졌다.
 “음양(陰陽)의 기운이 한곳에 모일지니 죽음의 혼으로 부활하리라!”
 고오오오······.
 돌연 경이롭게도 대기의 기운이 폭풍처럼 뒤흔들려지며 괴인의 일신으로 빨려들 듯 흡수되기 시작했다.
 헌데 그것도 잠시, 정녕 기상천외한 변화가 끔찍스럽게 일기 시작했다.
 흐물흐물.
 괴인의 몸 전체가 촛농처럼 녹아들며 한줌의 핏물로 화해 버리는 것이 아닌가?
 눈 깜짝할 사이에 괴인은 아예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저 검붉은 독혈만이 그 자리에 흥건할 뿐이었다.
 헌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슈아아아앙―!
 바람을 가르는 엄청난 파공음이 들리는가 싶더니, 거대한 나무들이 일직선으로 산산조각이 나며 섬광처럼 하나의 인영이 괴인이 사라진 그곳에 나타났다.
 실로 무시무시하고 가공할 출현이 아닐 수 없었다.
 그가 지나온 숲은 아예 초토화가 되어 있는 것이다.
 혈포인(血袍人)!
 온통 핏빛 복면에 혈의장포를 걸치고 있는 인물로 전신에 섬뜩한 마기(魔氣)가 폭풍처럼 일렁이는 삭막한 기도를 지니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차라리 피의 뇌전이었다.
 파랏!
 “······.”
 마치 번갯불처럼 주위를 훑던 그의 시선은 순간적으로 흥건한 독혈을 포착하고 고정되었다.
 순간 혈포인의 시뻘건 혈안(血眼) 속에 냉혹한 이채가 스쳤다.
 “후후··· 끝내 놈은 흑골부시독에 녹아버렸군.”
 섬뜩한 괴인의 괴소가 입가로 혹독하게 흘러 나왔다.
 헌데 문득, 그의 눈빛이 차갑게 식어 내렸다.
 ‘······!’
 무엇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낀 것인가?
 그는 즉시 무릎을 굽혀 바닥에 흥건한 독혈을 손가락으로 찍어 혀끝에 대었다.
 ‘이건······!’
 혈포인의 두 눈에 경악과 함께 싸늘한 냉광이 벼락처럼 폭사되어 나왔다.
 “이것은 전진밀문(全眞密門)의 분혈환체기공(分血幻體奇功)··· 그렇다면 놈은 전진의 후예······.”
 전진밀문!
 그것은 바로 천이백 년 전에 사라진 기상천외한 환술(幻術)의 대명사로 불렸던 기문(奇門)이 아니던가?
 헌데 괴인이 전진밀문의 후예였다니······.
 정녕 경이로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믿을 수 없군. 사라진 전진밀문의 후예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
 혈포인의 두 눈에서 뿜어지는 혈광은 섬뜩하기 그지없었다.
 그의 시선은 흥건한 핏물에 고정된 채 움직일 줄 몰랐다.
 ‘하여튼 지독한 놈이다. 자신의 피까지 이용하다니······.’
 허나 혈포인의 입가에는 서서히 혹독한 냉소가 번져 올랐다.
 “하지만 천하 사술(邪術)에 잔뼈가 굵은 나 사령마인(邪靈魔人)의 이목을 그따위 분혈환체기공 같은 기환술로 속이지는 못한다.”
 사령마인!
 왠지 오싹한 사기(邪氣)를 느끼게 하는 이름이었다.
 이때 주위 숲 속으로 어느새 수많은 흑의복면인이 살벌한 기운을 드리운 채 포위망을 좁혀오듯 나타나고 있었다.
 사령마인의 수하들인 듯싶었다.
 “후후후······.”
 사령마인은 느릿하게 시선을 들어 그들을 응시한 채 조소를 흘려내었다.
 “놈은 결코 백 장 이상은 빠져 나가지 못한다. 어쩌면 이미 죽음의 사신을 만났는지도 모르는 일······.”
 잔인한 살광(殺光)이 광기처럼 두 눈에 희번덕거렸다.
 ‘어쨌든 아직 본교(本敎)의 정체가 드러나선 안 된다. 반드시 놈의 시신이라도 찾아 입을 봉해야 한다!’
 이어 막 수하들에게 입을 열려는 순간,
 삐익―!
 어디인지 모를 먼 곳으로부터 긴 신호음이 울려들었다.
 사령마인은 흠칫했다.
 ‘이것은 추격을 포기하고 들어오라는 신호가 아닌가? 대체 무슨 일이기에······.’
 그의 눈빛이 꿈틀거렸다.
 ‘놈, 재수가 좋군. 허나 어차피 놈의 생명은 길어야 한 시진도 남지 않았다.’
 “돌아간다!”
 차갑게 수하들에게 말을 내뱉은 그는 이내 땅을 박찼다.
 슈욱―!
 허공으로 아득히 치솟아 오른 사령마인의 신형은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그에 따라 흑의복면인들도 역시 기척도 없이 귀영(鬼影)처럼 신형을 날려 썰물처럼 사라져버렸다.
 삽시간에 숲 속은 다시금 깊은 정적과 함께 석양의 빛만이 깔려들고 있었다.
 
 ***
 
 아버님······.
 당신이 원망스럽습니다.
 어이해 세상을 저버리셨단 말씀이십니까?
 하늘의 태양처럼 천하의 우상이셨으며 만인이 존경하던 대영웅이었던 당신이!
 소자는 그런 당신을 존경하였습니다.
 헌데 왜······?
 당신은 그 모든 사람을 외면하셨습니다.
 더러운 야망 속에 인면수심(人面獸心)의 이단자로 변한 당신······.
 그토록 가문의 영광을 자랑으로 여기시던 당신이 어이해 천하를 배신하셨단 말씀이십니까?
 소자는 통곡하옵니다.
 당신은 아십니까?
 천하인의 지탄을 받는 배신자의 자식으로 살아야 하는 아픔을······.
 소자는 미치고 싶습니다.
 아니, 미쳤습니다.
 그리고 천하 죄인의 자식으로서 하늘을 우러러보지 못한 채 그렇게 미쳐 살아갈 것입니다.
 
 ***
 
 항주(抗州).
 중원오도(中原五道)의 하나이면서 천하제일의 색향(色鄕)이었다.
 최고급의 기생에서부터 최하급의 창녀들까지 운집해 있어 풍류남아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곳이다.
 때는 춘삼월 호시절, 태양이 중천에 떠 있는 오전 무렵이었다. 성내 거리에는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오가고 있는 가운데 돌연, 음탕한 시구가 울려 퍼졌다.
 장강(長江)의 물결이 술[酒]이 되어 흐르니,
 낙화(洛花)하는 꽃잎들이 춤을 추는구나.
 어찌할꼬
 어찌할꼬
 술과 꽃이 어울려드니 별들이 모여들고
 황홀한 달빛 속에 춘몽에 빠져들어 교교한 가락 속에 젖어드니,
 세상천지가 춘풍에 휩싸이도다.
 “푸하하하··· 세상에 술과 계집이 없다면 삭막해서 어찌 살아갈 수 있었단 말인가?”
 시구가 울려 퍼지며 술에 찌든 대소와 함께 서쪽으로부터 한 백의소년(白衣少年)이 휘적휘적 모습을 나타내었다.
 대략 십 육칠 세쯤 되었을까?
 훤칠한 키에 호리호리하게 균형 잡힌 체격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몰골은 낙방서생처럼 덥수룩하였고 백의는 오랫동안 빤 적이 없는 듯 누렇게 바래 있었다.
 머리는 제멋대로 풀어져 봉두난발이었으며 더더욱 가관인 것은 허연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이미 술에 절어 게슴츠레한 눈빛을 띠고 있다는 것이다.
 영락없이 광인(狂人)처럼 보였다.
 허나, 자세히 보면 절로 탄성과 찬사가 터져 나올 정도로 준수하고 헌앙한 풍모 속에 호기 찬 기상(氣像)이 서려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한마디로 군계일학(群鷄一鶴)의 출중한 용모로 어떤 여인일지라도 한번 보면 사타구니에 짜릿한 전율을 느끼게 할 정도였다.
 “꺼억! 좋다. 이렇게 좋은 세상이 어디 있을꼬. 술과 꽃이 있는 이 세상이··· 하하하··· 이번엔 어디 가서 놀아볼까나.”
 백의소년은 트림과 함께 갈지자로 대로를 걸으며 미친 사람처럼 웃어대었다.
 행인들은 분분히 길을 터주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그 누구도 감히 나서는 자는 없었다.
 분명 경멸의 빛을 띠고 있었으나 눈빛 깊숙이에는 어떤 두려움이 가득 어려 있었다.
 대체 백의소년이 누구이기에 그런단 말인가?
 광색공자(狂色公子) 북궁비(北宮妃)!
 꽃과 술을 찾는 미친 사내.
 그는 항주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인물이었다. 계집질에 미친 한량이며 하루종일 술에 빠져 있는 주정뱅이였다.
 허나, 천하의 그 누구도 그를 무시하거나 멸시하지 못했다.
 그에게는 상상을 불허할 정도로 엄청나고 가공할 배경이 있기 때문이었다.
 바로 당금무림을 장악하고 있다시피 하고 있는 정도(正道)의 십천세가(十天世家) 중 최고의 가문으로 꼽혔던 천도세가(天道世家)로 천하를 배신하고 마도(魔道)의 대부(大父)로 무림을 위협하고 있는 가공할 마세(魔勢).
 ―암황천궁(暗皇天宮)!
 바로 그곳의 대궁주이며 천하마인들의 생사여탈권을 갖고 있는 대거인.
 철혈마제(鐵血魔帝) 북궁황(北宮皇)!
 한때 정도에서 천외무황(天外武皇)으로 불리던 대효웅(大梟雄)의 자식이 바로 북궁비인 것이다.
 비록 천하 정도를 배신한 인물로 낙인찍혀 비웃음과 멸시를 받고 있는 철혈마제 북궁황이었으나 감히 그의 면전에서 조소를 던지는 인물은 없었다.
 그만큼 암황천궁의 세력은 공포스러울 정도로 가공한 것이었고 철혈마제 북궁황의 무학 또한 신의 경지를 뛰어넘은 불가사의한 것이었기에······.
 그러하였으니, 어찌 그 누가 감히 광색공자 북궁비를 조롱할 수 있겠는가?
 ‘후후후······.’
 북궁비의 입가에 씁쓸하고 어두운 미소가 아련한 아픔처럼 배어져 나왔다.
 따가운 멸시에 찬 눈길을 느낀 것이다.
 ‘한때 저들은 천도세가를 존경하고 흠모했던 자들이다. 허나, 지금은 두려움과 멸시만이 있을 뿐이다. 누가··· 대체 누가 이렇게 만들었단 말인가?’
 서글픔이 고통처럼 그의 가슴속에 스며들었다.
 허나, 이미 그런 시선에 익숙해져 있는 듯 그는 암울하게 툴툴거렸다.
 “후후. 그래··· 비웃어라. 마음껏. 오히려 그것이 내 마음을 편하게 만드는 것이니까.”
 그는 미친 듯 낄낄거리며 비틀비틀 걸음을 떼어놓았다.
 이내 사통팔달의 저잣거리를 지나 한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그곳은 항주에서 유명한 윤락가로 수많은 기루(妓樓)들이 줄지어 있었는데 한결같이 화려하고 구중궁궐처럼 웅장한 건물들이었다.
 웬만한 고관대작이나 부호의 자제들이 아니면 입구에서부터 압도당할 정도로 웅장하였고 환락과 쾌락의 무풍지대(無風地帶)라 불리는 곳이 이곳이었다.
 허나, 지금의 거리는 너무도 조용했다.
 대낮의 윤락가는 차라리 정적감마저 느끼게 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이곳이 낮에는 스러지고 밤에는 정열적으로 피어오르는 야화(夜花)의 세계이기 때문이었다.
 “······.”
 북궁비는 비틀거리며 텅 빈 거리를 걷고 있었다.
 그의 입가에 교소가 스쳤다.
 ‘후후. 밤이 되면 화려한 폭죽과 함께 불야성을 이루는 이곳··· 그런 이곳의 고요함이라··· 생기를 잃은 듯한 느낌이 드는군! 후후후. 만물의 이치가 그런 법이지. 모든 것이 제 빛을 잃으면 죽음처럼 추악한 것이니까. 후후후······.’
 그의 눈빛 깊숙이에 공허한 서글픔이 아려들고 있었다.
 허나, 그것은 곧 착각처럼 사라지며 취기가 가득한 두 눈에 광기가 어렸다.
 ‘오늘은 모처럼 부용을 찾아볼까? 부용······. 알 수 없는 여인. 하지만 대단한 여인이지. 이 거대한 항주의 윤락가에 대모(大母)로 통하는 여인이니··· 일년 전 처음 그녀를 보는 순간 나는 충격을 느꼈다. 마치 안개의 여인처럼 항상 우수에 젖은 듯한 눈빛··· 그 눈빛에서 나와 같은 동병상련(同病相憐)의 아픔을 느꼈기에······.’
 그는 제일 화려하고 웅장한 한 기루의 문을 열고 거리낌없이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모두 밤을 샜는지 아무도 그를 막는 자가 없었다.
 마치 쥐죽은듯 조용한 것이 텅 비어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알 수는 없지만 뭔가 그녀는 가슴에 비밀을 안고 있는 느낌이었지.’
 북궁비는 아홉 개의 중문을 거쳐 화려한 구름다리 위를 걷고 있었다.
 실로 위압감이 느껴질 정도로 웅장하고 화려함이 극치를 이룬 이곳.
 화월정축원(花月精築院)!
 항주에서 제일 유명한 청루로써 공자대인(公子大人) 사대부(士大父)의 인물이 아니면 이곳 화월정축원에 들어간다는 것은 그야말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더욱이 항주에 군집된 수많은 화루의 대표적인 곳이었다.
 야화천모(夜花天母) 화부용(花芙蓉)!
 화월정축원의 원주였으며, 밤의 세계를 단숨에 휘어잡은 입지적인 여인.
 그녀의 말 한마디에 항주의 수천을 헤아리는 기녀(妓女)들은 죽고 살 정도였다.
 “······.”
 잠시 구름다리 중간쯤에서 멈춰선 북궁비는 회상이 어린 눈빛으로 연못의 수면을 가득 뒤덮은 화려한 연꽃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부용··· 처음 그녀를 만난 곳이 이곳이었지. 그때 난 그녀를 보는 순간 나의 사고가 하얗게 마비되는 것을 느꼈다. 마치 꽃의 여신 같던 그녀··· 그리고 그녀 역시 나를 응시한 채 전류에 감전된 듯 나를 그 수정 같은 눈빛으로 바라보았고 우리는 그렇게 한동안 그 자리에서 움직일 줄 몰랐다.’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웠던 추억이다.
 ‘그 후 나에게 그녀는 진실한 사랑을 아낌없이 주었다. 나에게 있어 연인이었고 누님이었으며 어머니 같은 여인이었다.’
 북궁비의 입가에 소리 없는 미소가 일었다.
 허나, 그의 눈빛 속엔 점차 고뇌 어린 어둠이 드리워지고 있었다.
 ‘사랑했다. 나의 생명처럼. 그러나 그런 그녀를 언제부터인가 의식적으로 피할 수밖에 없었다. 정도천하의 이단자요, 배신자의 자식인 나··· 나로 인해 그녀의 가슴속에 또 하나의 아픔을 주고 싶지 않았기에······.’
 문득 그는 구름다리의 난간을 두 손으로 꽉 움켜잡았다.
 ‘이제 결정했다.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아픔 속에서··· 그리고 몇 번의 갈등 속에서 나는 이곳에 왔다. 마지막 만남을 위해······. 나는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두려웠다, 내 마음이 흔들릴까봐······.’
 그의 눈빛은 흔들리고 있었다.
 마치 그것은 그의 가슴속에서 번져 오르는 통곡 같은 느낌이었다.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구름다리를 지나 하나의 월동문(月東門) 앞에 다다랐다.
 막 월동문으로 들어서는 순간,
 “어서 오십시오. 공자님. 천모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영롱한 옥음을 발하며 공손히 허리를 굽히는 묘령의 두 소녀가 있었다.
 시비 차림의 흑의소녀와 백의소녀였다.
 한결같이 아찔한 매력과 미모를 지닌 소녀들로 흑의소녀는 얼음 가루가 풀풀 날릴 정도로 차가운 인상으로 빙매(氷梅)를 연상케 하였고, 백의소녀는 화사할 정도로 활짝 웃음진 얼굴로 오목한 보조개가 깜찍하게 느껴지는 백모란(白牡蘭)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 흑매(黑梅)와 백란(白蘭)이로구나.”
 야화천모 화부용을 항상 그림자처럼 따르는 시녀들로 북궁비는 한눈에 알아보았다.
 허나, 그는 내심 움찔했다.
 ‘부용··· 그녀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고··· 내가 올 줄 알고 있었단 말인가? 하긴 그녀의 지혜와 해안은 천하의 무불통(無不通)이라 할 수 있는 나조차 탄복케 하는 것이니까.’
 왠지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을 어쩌지 못했다.
 ‘어쩌면 그녀는 내 마음까지 알고 있을지 모른다.’
 “공자님, 어서 드시지요.”
 백의소녀 백란이 보조개를 띤 채 공손히 입술을 열었다.
 북궁비는 고개를 끄떡이곤 걸음을 떼어놓았다.
 이어, 그는 백색의 궁처럼 화려한 하얀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전각(殿閣) 안으로 들어섰다.
 백야각(白夜閣).
 야화천모 화부용의 처소였다.
 이층으로 올라 다시 긴 회랑을 거친 북궁비는 한 방문 앞에 걸음을 멈추어 세웠다.
 “······.”
 이어 잠시 서 있던 그는 천천히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은은한 향기가 감도는 규방이었다.
 방안의 탁자 위에 은은한 등이 놓여 있고 그곳에 한 연록색의 궁장을 입은 여인이 차를 마시고 있었다.
 정녕 이것이 조물주가 탄생시킨 인간의 모습이란 말인가?
 아름다운 무지개조차 그 빛을 잃게 만드는 저 화사한 아름다움······.
 아예 눈이 부셔 혼(魂)이 달아날 정도였다.
 십전천미(十全天美)라고나 할까?
 봉황의 눈망울처럼 아름다운 봉목(鳳目) 가득 애잔함과 연모, 그리고 어떤 아픔과 수심을 담고 있는 이십 세 정도의 절세미녀(絶世美女)······.
 마치 백설 위에 핀 한 떨기 설중매(雪中梅)처럼 아찔한 미와 고고함이 운명처럼 배어 있는 여인이었다.
 꽃의 여신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허나, 그녀의 눈망울 속엔 슬픔과 진한 우수가 안개처럼 어려져 있었다.
 그녀가 바로 이곳 화월정축원의 주인이며 야화(夜化)들의 대모로 불리는 야화천모 화부용이었다.
 “아······.”
 화부용은 가벼운 탄성을 발하며 몸을 돌렸다.
 그 순간 그녀의 호수 같은 눈망울은 북궁비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옥용에 반가운 빛을 띠며 살며시 교구를 일으켰다.
 두 눈은 호수를 닮은 두 개의 흑진주를 박은 듯했고 오똑한 코와 섬려한 입술은 세상 미의 극치를 보는 듯했다.
 천하의 그 어느 미녀도 이 여인 앞에 서면 빛을 잃으리라.
 “비랑······.”
 화부용은 반가움에 그윽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그 사뿐히 걷는 걸음에서도 보는 눈이 있는 자는 섬세하고 유려한 미의 선이 있음을 알게 되리라.
 또한 입가에 짓는 그윽한 미소야말로 사나이 철석간장을 단숨에 녹여버릴 수 있을 정도였다.
 ‘······!’
 북궁비는 그녀의 모습에 가슴이 찌르르 감전되는 느낌이었다.
 늘 그러했다.
 “비랑께서 오시기를 항상 이렇게 기다리고 있었어요.”
 화부용은 공손히 북궁비에게 허리를 숙였다.
 ‘항상 기다렸다고······.’
 이 순간 북궁비의 가슴이 뭉클 미어지는 느낌이었다.
 ‘그렇다면 내가 찾지 않은 삼 개월 동안 줄곧 나를 기다렸다는 말이 아닌가? 부용··· 그대는 정녕······.’
 그는 치솟는 뜨거운 사랑을 느끼며 화부용을 으스러지게 포옹하고 싶은 강렬한 충동을 느꼈다.
 너무도 사랑스런 여인······.
 허나, 그는 마음을 모질게 먹으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부용, 앉으시오.”
 “······!”
 북궁비의 굳어진 표정에 화부용은 움찔했으나 여전히 그윽한 미소를 지으며 의자에 앉았다.
 북궁비도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화부용은 향차의 주전자를 기울여 찻잔에 따른 뒤 두 섬섬옥수로 북궁비에게 건넸다.
 “비랑께 그 동안 소녀가 부족한 점이 많았던 것 같아요.”
 북궁비는 향차를 받으며 흠칫했다.
 “그게 무슨 말이오, 부용?”
 화부용은 서늘한 아미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비랑께서 지난 삼 개월 동안 소녀를 찾지 않았겠습니까?”
 북궁비의 안색이 굳어졌다.
 “부용.”
 그의 음성은 침중했다.
 “······!”
 화부용의 안색은 가볍게 변화를 일으켰다.
 북궁비는 침중하게 말을 이었다.
 “원래 오늘 오지 않으려 했소. 허나, 꼭 한마디해야 할 것이 있어 왔을 뿐이오.”
 “······.”
 화부용의 고운 눈썹 끝이 파르르 떨렸다.
 “부용, 사실은······.”
 “그만.”
 화부용은 그의 말을 중도에 끊었다.
 그녀의 커다랗고 아름다운 두 눈에는 어느덧 뽀얀 안개가 어려 있었다.
 그녀는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소녀는 비랑의 뒷말을 듣고 싶지 않아요. 저는 비랑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기 때문에 비랑의 마음을 알고 있어요.”
 “······.”
 “또한 그것이 소녀를 위하시기 때문이라는 것도··· 하지만 그것은 비랑의 아버님의 일이지 결코 비랑의······.”
 북궁비가 그녀의 말을 조용히 끊었다.
 “부용, 내 몸 속엔 아버님과 같은 피가 흐르고 있소. 천하가 경멸하는 이단자의 피가······.”
 그의 입가에서 퇴폐적인 웃음이 흘러 나왔다.
 “후후··· 비록 부용은 그리 생각하지 않을지 모르나··· 세상은 결코 그렇지 않소.”
 처절한 고뇌의 먹구름이 가득 그의 만면에 떠오르고 있었다.
 “부용··· 그러하기에 난 그 아픔을 그대와 함께 할 수 없는 것이오.”
 “아······.”
 화부용은 탄식을 토했다.
 그러다 문득 그녀는 간절한 눈빛으로 북궁비를 응시하며 물었다.
 “소녀가 이렇게··· 간청을 해도 마음을 돌릴 수 없나요?”
 “······!”
 북궁비의 눈썹 끝이 파르르 떨렸다.
 그의 얼굴에는 짧은 순간 많은 갈등이 교차되었다.
 화부용은 그런 그를 계속 간절한 눈으로 응시했다.
 이윽고 북궁비의 얼굴에는 비장한 빛이 떠올랐다.
 이어, 그는 의자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담담한 말투로 입을 떼었다.
 “부용, 그대의 행복을 위해서는 나 같은 인간은 잊는 것이 좋소. 고통은 순간이나 행복은 긴 것이니까.”
 이어 그는 뒤로 한걸음 물러나며 말을 이었다.
 “그간 즐거웠소. 부용, 마음속으로나마 그대 앞날의 행복을 기원하리다.”
 화부용은 교구를 가늘게 떨었다.
 무슨 말인가를 할 듯 말 듯, 허나 그 순간 북궁비는 몸을 돌리고 있었다.
 “비랑······!”
 화부용은 떨리는 음성으로 그를 부르며 일어났다.
 그 순간 그녀는 심적인 타격이 너무 큰 듯 안색이 창백해지더니 몸을 비틀거렸다.
 그녀는 탁자의 모서리를 잡고 몸을 의지했다.
 그 순간 갑자기 무슨 생각을 했는지 입술을 꼭 깨물었다.
 ‘나의 운명은··· 어차피 저당 잡혀 있는 것··· 내 몸은 오직 도구일 뿐이다. 그래, 사랑이라는 감정은 나에게는 사치일는지도 몰라······.’
 무슨 말인가?
 화부용의 눈에는 이슬이 맺혔다.
 그녀는 문 쪽으로 걸어가는 쓸쓸하면서도 어두운 북궁비의 뒷모습을 보며 다시 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더구나 그 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나의 이 한목숨 언제 사라질지도 모르는 일··· 그럴 바에야 차라리······.’
 그녀의 눈에는 순간적으로 어떤 결심의 빛이 떠올랐다.
 “비랑!”
 그녀는 막 문을 열고 나가려는 북궁비를 불렀다.
 북궁비는 걸음을 멈추고 돌아섰다.
 “······!”
 그는 화부용의 두 눈이 유난히 빛난다고 느꼈다.
 “왜 불렀소, 부용?”
 “······.”
 화부용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북궁비는 의아함을 느끼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러는 사이 어느새 그녀의 표정은 담담히 가라앉아 있었다. 그녀는 사뿐히 걸음을 옮겨 북궁비의 코밑까지 다가왔다.
 “······!”
 북궁비가 움찔하는 사이 그녀의 몸에서 풍기는 그윽한 향기와 훈기를 느낄 수가 있었다.
 그녀는 입술을 살짝 벌리며 달콤한 미소를 지었다.
 동시에 귀밑머리를 뒤로 살짝 넘기며 물었다.
 “비랑, 당신은 제가 아름답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실로 고혹적이고도 뇌살적인 모습이요, 음성이었다.
 “아, 아름답소. 무척······.”
 북궁비가 아찔한 느낌을 받으며 최면에 걸린 듯 말하자 화부용은 방긋 웃었다.
 “그렇다면 저를 갖고 싶지 않나요?”
 쿵!
 북궁비는 가슴이 멈추는 충격과 함께 현기증을 느꼈다.
 동시에 갑자기 자신도 주체할 수 없는 불같은 열기가 전신 가득 후끈 달아오르는 것을 억제치 못했다.
 순간적으로 정신이 몽롱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앞으로 한걸음 다가갔다.
 
 
 2장 어둠 속의 대기연(大奇緣)
 
 
 “으······.”
 북궁비의 눈빛이 돌연 초점을 잃으며 붉게 충혈되었다.
 화부용의 눈빛은 처연했으나, 북궁비를 그윽이 응시한 채 입가에 달콤한 미소를 띠며 교태의 음성을 흘렸다.
 “이리 오세요, 비랑.”
 그녀는 육감적인 허리를 비틀며 차츰 침상으로 향했다.
 “······.”
 어찌 된 일인가?
 북궁비는 마치 무엇에 홀린 듯 넋 잃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본 채 끌리듯이 다가가고 있었다.
 화부용은 속으로 오열했다.
 ‘비랑··· 죄송해요. 당신께 미광최혼대법(迷光催魂大法)을 펼친 소녀를 용서하세요. 하지만 이러지 않고서는 소녀는··· 흑······.’
 미광최혼대법!
 그것은 일종의 최면술로 시술자의 뜻대로 조종되는 사술의 일종이었다.
 헌데, 화부용이 그런 사술을 익히고 있다니.
 정녕 그녀는 북궁비의 사랑이 이토록 절실했단 말인가?
 ‘비랑······. 소녀는 당신의 흔적을 영원히 간직하고 싶어요. 그러기 위해 이럴 수밖에 없는 소녀를 용서하세요.’
 그리고 눈부시도록 요염하게 활짝 피어나는 여인의 뇌살적인 미소. 그와 함께 그녀는 서서히 섬섬옥수를 들어올려 자신의 상의 옷고름을 풀기 시작했다.
 사르르!
 감미로운 옷자락 소리와 함께 상의가 벗겨졌다.
 마치 꽃뱀의 허물이 흘러내리듯.
 “아······!”
 북궁비의 몽롱한 눈빛 속에 열꽃이 피어오르며 전신은 뜨겁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화부용은 옥수를 멈추지 않고 계속 옷자락을 끌어내렸다.
 다시 치마가 흘러내리고 마지막 속옷까지 그녀의 교구에서 떨어져 나갔다.
 “으······.”
 북궁비는 눈빛을 벌겋게 충혈시킨 채 괴이한 신음을 흘려내었다.
 여인의 나신.
 실로 환상적이면서 충격적인 미의 여체가 아닐 수 없었다.
 은은한 궁등 불빛 아래 밤의 대모 화부용은 실오라기 한 올 걸치지 않은 나신으로 침상 가에 서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완전히 도화빛이 되어 있었다.
 두 개의 천도(天桃) 같은 젖가슴은 미묘한 흥분으로 가늘게 출렁거렸으며 그때마다 수밀도 위의 연분홍빛 돌기는 파르르 떨림을 일으켰다.
 그리고 뜨거운 숨결이 토해질 때마다 가볍게 율동을 발하며 솟았다 평평해지는 매끄러운 여인의 아랫배.
 두 다리는 풍만하고도 미려한 둔부로부터 빠져 내려 여신처럼 바닥을 밟고 있다.
 또한 은밀한 허벅지가 깊숙이 교차되는 지점의 비림(秘林)은 그늘진 채 숨막히는 열기를 가볍게 흔들리고 있었다.
 이렇듯 눈부신 나신은 사나이의 가슴에 열병 같은 무서운 불길을 지르고 말았다.
 “부, 부용!”
 북궁비는 몽롱한 의식 속에 치솟는 불꽃같은 욕망을 주체할 수 없는 듯 마침내 그녀의 알몸을 와락 끌어안았다.
 “아아··· 비랑······!”
 “부용······.”
 두 사람은 한데 엉켜들며 자연스럽게 침상 위로 뒹굴었다.
 사랑, 그리고 여인의 불같은 열정.
 그것은 이성을 마비시키는 욕념의 불꽃이 되어 타오르기 시작했다.
 남과 여.
 그들은 이 순간 내일을 생각지 않았다.
 단지 서로의 뜨거운 정염에 몸을 사르고 싶을 뿐이었다.
 화부용은 뜨겁게 북궁비를 끌어안고 침상을 뒹굴었다.
 ‘아아··· 비랑··· 드리겠어요. 소녀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그리고 당신의 흔적을 영원히 간직할 거예요.’
 불꽃같은 열기가 확확 그녀의 입에서 번져 나왔고, 그녀의 손은 거칠게 사내의 옷을 벗겨나갔다.
 이윽고 북궁비의 허물이 모두 벗겨나가자,
 “아······.”
 화부용은 그만 탄성을 토해내고 말았다.
 ‘남자의 몸이 이토록 아름다운 것이었던가?’
 그녀는 대리석을 깎아 만든 듯한 탄탄한 사내의 육체에 순간적으로 눈이 부셨다.
 허나 이내, 슬며시 밑으로 시선을 옮기던 그녀의 안색은 그만 홍시처럼 달아올랐다.
 금방이라도 터져 버릴 듯 불끈거리는 사내의 그것이 두 눈 가득히 비쳐든 것이었다.
 그녀는 가슴이 쾅쾅 뛰는 것을 느꼈다.
 왠지 하반신이 짜릿해지는 느낌이었다.
 북궁비는 뜨거운 헛바람을 토하며 여인의 탄력 있는 젖가슴을 꽉 움켜잡았다.
 “악! 아, 아파······.”
 화부용은 그만 비명을 토했다. 눈물이 찔끔 날 정도의 아픔이 그녀의 가슴을 압박해 들었다.
 헌데, 아픔과 함께 스며드는 야릇한 느낌, 그것은 짜릿해지는 쾌감이었다.
 파르르.
 여체는 은어처럼 파드득거렸다.
 화부용은 화려한 불꽃이 전류처럼 전신에 번져드는 것을 어쩌지 못했다.
 그녀는 사내의 다른 한 손이 거칠게 매끄러운 허벅지 깊숙이 스며드는 것을 느끼며 거친 숨결과 함께 다리를 꽉 오므렸다.
 본능이었다.
 단 한 번도 낯선 침입자를 허용한 적이 없었기에······.
 ‘안돼, 결코 이분의 손길을 거부해선 안돼. 이분은 나의 전부야.’
 그녀는 자신을 질책하며 활짝 허벅지를 벌렸다.
 주춤하던 사내의 손길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대로 여인의 비지(飛地)로 스며들었다.
 “후훅!”
 여인은 눈을 크게 뜨며 뜨거운 입김을 토해냈다.
 숲 속 깊숙이 축축한 물기를 담고 있는 옹달샘.
 사내의 손길은 심한 갈증을 느끼는 듯 깊숙이 침투해 들고 있었다.
 “어헉!”
 여인은 하체 깊은 곳에서 밀려드는 이물질을 온몸으로 느끼며 전신이 짜릿하게 마비되는 것을 어쩌지 못했다.
 “아아, 비··· 비랑··· 으음······.”
 주체할 수 없는 열정에 그녀는 교음을 흘리며 북궁비의 남성을 꽉 움켜쥐었다.
 ‘앗! 빠, 빠질 것 같다.’
 북궁비는 그 묘한 상황에 그만 전신이 싸늘히 식어 내리는 것을 느끼며 아연하고 말았다.
 ‘헛! 이런 내가 이런 실수를··· 순간적으로 이성을 잃다니.’
 그는 왜 자신이 이성을 잃었는지 알지 못했다. 단지 자신의 실수로 느끼며 민망함과 부끄러움을 금치 못했다.
 ‘고작 내가 이 정도란 말인가? 못난 자식.’
 진한 자책감을 느끼며 그는 돌연 벌떡 일어서 황망히 자신의 옷을 주워 입었다.
 일순, 이 뜻밖의 사태에 열정에 헐떡이던 화부용은 흠칫하며 놀람과 함께 전신이 차갑게 식는 것을 어쩌지 못했다.
 ‘이분이 어떻게······.’
 그녀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일단 펼치면 시술자가 풀기 전에는 절대 풀 수 없는 절세의 최면대법이 아니던가?
 헌데, 북궁비가 스스로 그 최면대법에서 헤어나다니.
 그녀는 경이감을 느꼈다.
 ‘아, 이분의 정신력이 이토록 강하다니. 백년 면벽한 고승조차 이 대법에는 속수무책이거늘.’
 그녀는 놀라움 속에 한편 불안감을 어쩌지 못했다.
 ‘이분이 내가 그런 사법을 펼친 것을 안다면 나를 요녀라고 욕하시지 않을까? 안돼! 설혹 오늘이 이분과 마지막일지라도 이분의 기억 속에 나에 대한 오점을 남겨놓아선 안돼.’
 그녀는 사실대로 말해 용서받을 결심을 했다.
 허나, 이때 북궁비는 안색을 굳히며 침중히 입을 떼었다.
 “미안하오, 부용. 내가 못나 그대에게 못난 짓을 할 뻔했으니.”
 ‘아, 이분은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다.’
 화부용은 안도 속에 맥이 탁 풀리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이후 북궁비가 그녀를 절대 찾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느낀 것이다.
 “부용, 난 결코 그대와의 만남을 잊지 못할 것이오. 나와의 만남은 그대에게 있어 불행일 뿐. 부디 좋은 사람 만나 행복하시오.”
 이어, 그는 침상에서 내려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밖으로 사라져버렸다.
 “······!”
 침상 위에 멍하니 누운 화부용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다.
 그녀는 잠시 후 몸을 일으켰다.
 ‘비랑··· 결국 이렇게 끝나는가요?’
 그녀는 조용히 옷을 걸쳤다.
 그리고 무너지듯 침상에 엎어져 흐느끼기 시작했다.
 “으흐흑··· 흑흑······.”
 그녀의 오열에는 진하디진한 슬픔과 절망이 묻어 있었다.
 헌데, 이때였다.
 스슷!
 섬세한 두 줄기 인영이 바람결처럼 방안으로 스며들며 모습을 나타내었다.
 그녀들은 바로 흑매와 백란이었다.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녀들의 일신에 초일류급의 무공이 숨겨져 있었다니.
 백란이 조용히 다가서며 애처로운 음성으로 입술을 열었다.
 “아가씨, 슬픔을 딛고 일어서야 해요. 아가씨는 천하에서 그 누구보다 강해야 하십니다.”
 그러자 흑매가 예의 차가운 눈빛을 띤 채 말했다.
 “어차피 그자와 아가씨는 절대 이루어질 수 없는 사이였어요. 아가씨께서는 결코 피맺힌 한을 잊으시면 안됩니다.”
 흑매는 서리 같은 싸늘한 눈빛을 토해내었다.
 “저주의 사슬과 한을 풀 때까지 아가씨는 혼자 몸이 아닙니다. 수많은 목숨이 아가씨 한몸에 달려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 말에 화부용은 오열을 뚝 그쳤다.
 이어, 그녀는 눈물 젖은 얼굴을 돌려 흑매와 백란을 바라보았다.
 “흑매, 백란아······.”
 그녀의 음성은 의외로 가라앉아 있었다.
 “예, 아가씨.”
 두 소녀는 허리를 굽혔다.
 화부용은 소매로 눈물을 씻으며 말했다.
 “내일 이곳을 떠나 본부로 돌아가자.”
 그 말에 흑매와 백란의 안색이 비장하게 굳어져들었다.
 “잘 생각하셨어요.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하니까요.”
 화부용은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눈길은 흐트러진 침상 위에 떨어졌다.
 ‘비랑, 당신과 나는 더 이상 연분이 없는가 보군요. 앞날이 진흙탕 속에 던져진 이 몸. 당신에게 모든 걸 바치고 싶었는데··· 비랑······.’
 
 ***
 
 아직은 석양의 잔꼬리가 남아 있는 시각.
 어렴풋한 땅거미의 흔적이 흐릿한 노을 속에 스며들고 있었다.
 어느덧 항주 홍등가에는 하나 둘 홍등이 걸려들고 있었고, 아직은 발길이 뜸한 유곽의 골목길을 북궁비는 무겁게 걷고 있었다.
 휘이잉!
 쓸쓸한 바람이 그의 머릿결을 휘날리는 가운데, 북궁비의 눈빛 속엔 공허한 빛이 어둡게 잠겨들었다.
 “후후······.”
 허탈한 실소가 입가를 적셨다.
 “누가 그랬던가, 인간의 만남과 헤어짐, 헤어짐과 만남은 번뇌와 갈등이라고······.”
 처음으로 진실한 사랑을 느꼈던 화부용과의 이별.
 그것은 그의 가슴에 더할 수 없는 아픔과 괴로움을 흔적으로 남겨주고 있었다.
 서녘에 숨어드는 석양.
 그것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가슴을 찡하게 울릴 듯 허허롭기만 했다.
 ‘아버님, 당신의 잘난 아들이기에··· 사랑하는 여인까지 버려야 하는 쓰라린 아픔을 당신은 아십니까?’
 그의 입가에는 처절한 웃음이 배어 나왔다.
 “후후. 부귀영화가 무엇인가? 저 화려했던 진시황의 아방궁도 지금은 폐허의 잡초만 무성한 것을······.”
 울려드는 서글픈 음성. 허나, 그것은 이내 오열과도 같은 미친 듯한 광소로 변해들고 있었다.
 하늘아······.
 너는 어이해 통곡하지 않느냐?
 태양이 떨어져 빛을 잃고 암흑으로 변하였지만,
 무심하구나.
 너는 여전히 괴로움도 고통도 없이 변함이 없으니.
 하늘아······.
 제발 울어다오.
 그리하여 이 세상의 모든 더러움을 씻어가다오.
 푸하하하!
 그는 미친 듯이 앙천광소를 토하며 어디서 구했는지 술병을 입 안에 밀어 넣은 채 벌컥벌컥 마셔댔다.
 ‘취하고 싶다. 모든 것을 잊고 싶기에······.’
 그는 아예 미친 듯이 폭주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비틀비틀 골목길을 빠져 나가고 있었다.
 헌데 골목길 중간쯤 갔을까?
 쑤욱!
 믿을 수 없게도 돌연 좌측 벽 속에서 핏물로 흠뻑 젖은 손이 뻗어 나오며 북궁비의 어깨를 덥석 잡는 것이 아닌가?
 “헉······!”
 북궁비는 기겁했다.
 취기가 싹 가시며 온몸에 소름이 오싹 끼쳐들었다.
 담에서 피에 젖은 손이 튀어나오다니.
 도저히 인간의 상식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기문괴사(奇聞怪事)였다.
 ‘이, 이런 일이······.’
 그는 망연자실한 채 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는 다시금 아연경악하며 두 눈을 부릅뜬 채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스스슷!
 벽으로부터 온통 피칠을 한 한 사람이 그림자처럼 빠져 나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복부는 완전히 녹아 오장육부의 형태를 찾아볼 수 없이 망가진 채 독혈을 뚝뚝 떨어뜨리고 있었고, 온몸이 칼로 난도질당한 끔찍한 괴인.
 북궁비는 경이감을 금치 못했다.
 ‘불가사의한 기환술이다.’
 천하의 마웅(魔雄) 철혈마제 북궁황의 자식으로서 그는 그 누구보다 무림의 일을 잘 알고 있는지라 한눈에 알아본 것이다. 아울러 그는 불가사의함을 금치 못했다.
 ‘세상에··· 저런 상태로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이 의심스러울 정도다!’
 더군다나 그 몸으로 초극의 기환술을 펼치고 있었으니.
 북궁비로서는 놀람이 당연했다.
 그는 멍하니 넋을 잃은 채 움직일 줄 몰랐다.
 괴인, 그는 전진밀문의 후예였다.
 이때 괴인은 오히려 움찔하며 의외의 빛을 띠었다.
 ‘이놈 봐라? 대단한 담력인걸?’
 자신의 끔찍한 모습, 웬만한 사람이라면 귀신으로 착각하고 그 자리에서 심장마비를 일으킬 정도가 아닌가?
 헌데, 북궁비는 전혀 두려운 빛 없이 태연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괴인은 약간 기괴한 표정을 지었다.
 허나, 일순 그는 벼락같은 눈빛으로 무시무시하게 북궁비를 쏘아보았다.
 “이놈! 네놈은 죽음이 두렵지 않느냐?”
 “후후······.”
 북궁비는 눈빛 하나 흔들리지 않은 채 오히려 입가에 고소를 지었다.
 “죽음? 이 몸은 죽지 못해 살고 있는 몸··· 노인께선 이미 산 자의 몸이 아닌 터 심심하시다면 황천길에 벗을 해 드리리다.”
 담담한 가운데 공허하기 그지없는 음성이었다.
 “뭐? 황천길에 벗을 해주겠다고······.”
 괴인은 어이가 없다못해 멍청한 빛을 띠었다.
 ‘이런 놈이 있다니. 괴물 같은 놈이군.’
 왠지 북궁비의 대담성과 어두워 보이는 모습에 호감이 가는 것을 느꼈다.
 “······!”
 북궁비의 전신을 훑어보던 괴인은 돌연 두 눈 깊숙이 이채와 함께 놀라움이 스쳤다.
 ‘오오··· 대단한 기골이다. 특히 이놈은 천외천(天外天)의 신품(神品)이라는 천왕지체(天王之體)를 타고났다.’
 천왕지체!
 인간이 아닌 천인만이 타고난다는 전설의 신체!
 문(文)을 익히면 문의 제왕이 되고 무(武)를 익히면 무의 제왕이 된다는 불가사의한 능력의 천왕지체.
 헌데, 북궁비가 그런 천왕지체였다니.
 괴인은 가슴이 벅차 오르는 흥분을 금치 못했다.
 ‘오오. 하늘이시여! 당신은 결코 나를 저버리시지 않으셨습니다. 이런 기재를 저에게 보내주시다니.’
 그는 격동했다.
 ‘이제 이 아이는 전진밀문의 최후 후계자가 되리라. 그리하여 뛰어난 기재가 없어 천년 동안 그 누구도 완성하지 못한 전진의 천학(天學)은 이 아이에게서 찬란한 진가를 발휘하리라.’
 전진밀문의 기상천외한 천학!
 그것을 천년 동안 그 누구도 완벽하게 연성하지 못했다니, 정녕 경이로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대관절 전진밀문의 무학은 어느 정도란 말인가?
 하여튼 이때였다.
 “우욱!”
 괴인은 격동에 기혈이 치밀어 오르는 듯 시커먼 독혈 덩어리를 분수처럼 쭈욱 뿜어내며 허물어질 듯 휘청거렸다.
 북궁비는 흠칫하며 즉시 그를 부축했다.
 “노인장······.”
 헌데, 괴인은 돌연 그를 와락 밀쳐내었다.
 “내 몸에 손대지 마라. 노부의 몸은 이미 독으로 뭉쳐져 있다.”
 “······!”
 북궁비는 흠칫 괴인을 새삼 다시 응시했다.
 ‘결코 나쁜 사람은 아니다. 죽음 앞에서 내가 중독될 것을 걱정하다니.’
 일순, 괴인은 그의 내심을 읽은 듯 킬킬거렸다.
 “크크. 아이야, 노부는 결코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좋은 사람은 아니다. 단지 네가 필요하기 때문에 그런 것뿐이다.”
 “······!”
 “한때 노부의 손에 죽은 자가 어림잡아 수천은 넘을 것이다.”
 북궁비는 아연했다.
 ‘수천··· 그럼 대마왕이란 말인가?’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말이 수천이지 어디 그것이 적은 숫자란 말인가?
 허나, 그는 왠지 괴인의 솔직한 말에 호감이 가는 것을 느꼈다.
 “후후. 하지만 그 죽은 자들은 결코 좋은 자들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노인장의 강직하면서 거짓 없는 성품이 그것을 증명하니까.”
 ‘이놈······.’
 괴인은 가슴이 찡해드는 것을 금치 못했다.
 ‘정(情)이 가는 놈이다. 좀 더 일찍 만났으면 좋았을 것을······.’
 부르르!
 일순, 그의 전신이 벼락을 맞은 사람처럼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우욱! 사신(死神)이 눈앞에 다가왔군. 이제 내겐 일각 이상을 버틸 힘이 없다.’
 안타까운 빛이 어려드는 창백한 안색.
 헌데 한순간 불그레한 혈색이 가득 떠오르기 시작했다.
 ‘회광반조(廻光返照).’
 북궁비는 느꼈다.
 이 괴노인의 생명은 이미 지옥의 문턱에 이르러 제아무리 전설의 화타가 환생한다 해도 살아나지 못함을······.
 이때 괴인이 안면근육을 무섭게 경련시키며 입을 떼었다.
 “아이야, 네가 누군지에 대해선 묻지 않겠다. 단지 노부의 부탁 한 가지만 들어다오······.”
 그의 초점 잃은 퀭한 눈빛에는 간절함이 어려 있었다.
 북궁비는 왠지 가슴이 뭉클해지는 느낌 속에 그를 응시했다.
 ‘이 노인··· 가슴속에 응어리진 한이 있기에 기적처럼 죽음을 거부한 채 지금까지 버티고 있는 것이다!’
 이내 그는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하십시오. 소생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들어드리겠습니다.”
 괴인의 눈빛 속엔 감격이 젖어들었다.
 “고맙다······. 그 부탁이란··· 전진밀문의 비기(秘技)를 네가 이어달란 것이다.”
 “······!”
 북궁비는 경악하고 말았다.
 ‘전진밀문! 그것은 바로 천이백 년 전에 사라진 신비문파가 아닌가?’
 그는 놀라다못해 입을 딱 벌렸다.
 괴인의 전신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세차게 떨려들었다.
 “으··· 결코 전진의 후계자가 되란 말은 하지 않겠다. 단지··· 전진의 비기가 유실되지만 않게 해다오.”
 그러면서 그는 품속에서 검은 광택이 흐르는 하나의 자그마한 상자와 왠지 섬뜩한 느낌이 드는 빛깔의 책자를 꺼내 북궁비에게 전했다.
 북궁비는 엉겁결에 흑갑과 책자를 받아들었다.
 “으으······.”
 괴인은 무서운 고통이 전신에 엄습해 드는 듯 비음을 토해내며 말을 이었다.
 “그 붉은 책자는 노부가 백년 전 우연히 얻은 것으로··· 네게 도움이 될 것이다······.”
 북궁비는 놀라운 빛을 떠올렸다.
 아울러 그는 의혹을 금할 수 없었다.
 ‘백년 전이라면 이 노인의 나이가 몇 살이란 말인가? 대체 이 노인의 정체가 무엇이기에······?’
 이때 괴인의 앙천광소가 미친 듯 울려 퍼졌다.
 “푸흐핫핫! 전진의 천년 한(恨). 그것은 이제 천고의 기재에 의해 풀어지리라! 그러기에 나 기환천자(奇幻天子) 한송(韓松)은 웃으면서 죽을 수 있노라······.”
 그와 동시에 끔찍하게도 괴인의 전신은 마구 녹아들기 시작했다.
 실로 무시무시한 독이 아닐 수 없었다.
 ‘기환천자 한송··· 이분이 천하에 신화로 불리는 그분이었다니.’
 어찌나 놀랐는지 그는 멍하니 넋을 잃은 채 망부석처럼 움직일 줄 몰랐다.
 기환천자 한송!
 천하의 그 누가 이 엄청난 이름을 모른다 하겠는가?
 백오십 년 전.
 당시 무림의 최강고수라는 정사마(正邪魔)의 백인고수(百人高手)를 홀로 경천동지할 기학으로 꺾어 엄청난 파란을 일으킨 후 자취를 감추었던 대기인.
 아울러 당시 전성기를 맞고 있던 마도의 혈랑보(血狼堡)와 무영탑(無影塔), 패천마궁(覇天魔宮), 그리고 정도의 신검보(神劍堡)와 오행신궁(五行神宮) 등 천하 대소방파 십여 세력을, 마음에 안 든다는 한 가지 이유로 산산이 붕괴시킨 신화적인 인물이었다.
 또한 정사를 구분하지 않는 괴팍한 성격의 소유자였으나 조금의 불의도 용서치 않는 강직한 성격의 괴인이기도 했다.
 세인들은 말한다.
 세상에 적수가 없어 고독을 느낀 나머지 은거했다고······.
 헌데, 경이롭게 그런 그가 이토록 처참한 모습으로 나타나다니.
 대체 천하의 그 누가 기환천자 한송을 감히 이 지경으로 만들 수 있단 말인가?
 ‘대관절 누가 전대의 대기인을 이렇게 만들 수 있었단 말인가?’
 아연해지는 느낌이었다.
 아울러 그는 온몸이 독물로 녹아 사라져 가는 대기인의 주검 앞에 숙연함을 느끼며 무겁게 바라보았다.
 일순, 그는 느꼈다.
 기환천자 한송이 자신을 바라보며 웃고 있다는 것을.
 그것은 아마도 전진밀문의 천년 한을 북궁비가 풀어주리라는 확신 때문이리라.
 ‘노선배님, 당신의 부탁은 반드시 들어드리겠습니다.’
 북궁비는 자신도 모르게 다짐을 하고 있었다.
 그때 그의 뇌리에 기환천자 한송의 음성이 울려드는 것을 느꼈다.
 “아이야, 마교를 조심하거라.”
 그 말을 끝으로 기환천자 한송은 흑수로 녹아들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전대의 대거성이 떨어지고 만 것이다.
 헌데, 이 순간 북궁비는 마치 뇌전에 맞은 듯 전신을 부르르 떨며 안색을 딱딱히 굳힌 채 움직일 줄 몰랐다.
 ‘마, 마교라니······. 그렇다면 천년 만에 그 저주의 마교가 다시 부활했단 말인가? 그리고 한송 노선배님의 죽음은 그들의 짓······.’
 그의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어 내리는 것을 어쩌지 못했다.
 마교(魔敎)!
 그 누가 이 가공하고도 전율스런 이름을 모른단 말인가?
 이름만 들어도 치가 떨리는 마의 대명사.
 하늘 아래 마(魔)란 존재를 처음으로 뿌리내린 그 무시무시한 이름.
 이미 그들이 이 땅에서 사라진 지 천년이 흘렀건만 망각의 동물이라는 인간의 기억을 무색케 하고 생생히 기억되고 있는 전율스런 악몽!
 천오백 년 전.
 처음 이 땅에 가공할 피의 폭풍을 몰고 나타났고, 천년 전 천하무림에 암흑의 혈풍지대를 만들어 저주의 재앙으로 처참하게 짓밟았던 그들.
 헌데, 그런 그들이 당금에 이르러 다시 나타났다니.
 부르르!
 북궁비는 경련을 일으켰다.
 ‘정녕, 그렇다면 무서운 일이다. 마교가 다시 제삼차 창궐(猖獗)을 노리고 있다면······.’
 마교의 제삼차 창궐!
 그것은 정녕 전율스러운 사건이 아닐 수 없다.
 허나, 그보다 더 소름 끼치도록 섬뜩한 것은 그런 사실을 천하인 그 누구도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과연 그들의 출현이 사실일까?’
 북궁비는 반신반의했다.
 암황천궁에 의해 천하가 혼란의 회오리에 있을 뿐 중원에 또 다른 동요는 전혀 없지 않은가?
 북궁비의 눈빛은 무거워졌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마교! 그들이 암중에 무엇인가를 획책하고 있다는 것······.’
 그는 이제 흔적도 없이 한줌의 핏물로 녹아버린 기환천자 한송의 참혹한 죽음을 응시한 채 나직이 중얼거렸다.
 “어쩌면 노선배님의 주검은 앞으로 다가올 피의 폭풍을 예고하는 것인지도 모르겠군요.”
 피의 폭풍!
 밤안개처럼 스며드는 불길한 예감.
 허나, 문득 그는 어느새 땅거미가 짙게 깔린 밤하늘을 응시하며 공허한 실소를 입가에 흘려내었다.
 “후후! 어차피 지금의 중원은 암흑세계가 아닌가? 더욱이 나 같은 백면서생과는 상관없는 일······.”
 그는 느릿하게 걸음을 떼어놓기 시작했다.
 ‘노선배, 당신과의 약속은 지킬 것이오. 허나, 당신의 복수는 해드릴 수 없소. 추악한 무림의 일에 개입하고 싶지 않기에······. 어차피 당신과의 약속에 복수란 단어는 없었으니까.’
 ― 전진밀문의 천학을 유실시키지 않겠다. 그러나 설혹 마교가 출현한다 해도 그것은 무림의 일, 상관치 않겠다!
 휘이잉!
 한줄기 밤바람이 그의 옷자락을 스치며 지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눈에는 홍등가의 불야성이 비춰들고 있었다.
 문득 찬란한 홍등 불빛을 보는 그의 눈가에 암울한 고뇌의 빛이 스쳐들고 있었다.
 ‘지금 내가 하고자 하는 일··· 과연 잘하는 것일까?’
 그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아버님께 반발한 불효자식··· 모든 것은 하늘만이 결정하리라.’
 무슨 일이기에 그의 마음을 이토록 번민하게 만드는 것일까?
 하여튼 그는 어느새 골목길을 빠져 나가기 시작했다.
 헌데, 바로 그때였다.
 스슷!
 핏빛의 환상인가?
 하나의 시뻘건 혈영이 소리 없이 어둠뿐인 골목길에 유령처럼 모습을 드러냈다.
 섬뜩했다.
 정녕 이것이 인간의 모습이란 말인가?
 혈의괴객(血衣怪客)!
 전신을 온통 핏물 같은 혈의로 감쌌으며 긴 혈발(血髮)은 땅바닥까지 길게 흘러내렸다.
 그리고 두 눈은 섬뜩하게도 검은 동공조차 없는 허연 백안(白眼)으로 귀기스런 빛을 흘려내고 있었다.
 헌데, 이 무슨 기절초풍할 괴사란 말인가?
 쩌억!
 혈의괴객의 이마 중앙이 벌어지며 가공할 혈광을 쏟아내는 것이 아닌가?
 다시금 나타난 또 하나의 눈.
 그것은 실로 끔찍한 혈안(血眼)이었다.
 세상에 세 개의 눈을 가진 인물이 있다니.
 “흐흐흐.”
 혈의괴객은 섬뜩한 괴소를 흘리며 기환천자가 죽어 흥건한 핏물로 변한 흔적을 힐끗 응시하곤 이내 사라지는 북궁비의 뒷모습을 쏘아보았다.
 “어린놈. 네놈은 아직 알아서는 안될 것을 알았다. 싱싱하겠군, 어린놈의 심장이니······.”
 실로 섬뜩한 말이다.
 “흐흐흐. 피의 신인 나 삼목혈신(三目血神)이 하늘을 지배할 마의 이름으로 네놈의 목숨을 접수하겠다.”
 이어 막 신형을 날리려는 순간이다.
 “삼목혈신! 네가 감히 하늘이 내린 잠룡을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묵직하게 들려오는 창노한 음성.
 “헛!”
 삼목혈신은 등뒤 지척에서 들려오는 음성에 아연실색하며 벼락같은 기세로 신형을 회전시키며 공격을 펼쳐내려 했다.
 그 찰나,
 쏴아아!
 수백 수천의 엄밀한 수영(手影)이 이미 빛살처럼 그의 면전에 다다르고 있었다.
 삼목혈신은 숨이 꽉 막히는 느낌 속에 삼목을 부릅떴다.
 “으헉! 이것은 여의섬천수(如意閃天手)··· 으악!”
 꽈꽝!
 벼락같은 타격음이 일며 삼목혈신의 신형은 시뻘건 핏물과 함께 추풍낙엽처럼 날아 한쪽 담에 무섭게 부딪쳐들었다.
 쿵!
 “우웩!”
 충격에 사정없이 바닥에 나뒹군 삼목혈신은 검붉은 선혈을 다시금 폭포수처럼 토해내었다.
 이어, 그는 초점 잃은 눈으로 어둠 속에 서서히 드러나는 상대를 보며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가리켰다.
 “네··· 네놈은······. 아직 살아 있었다니··· 마··· 마의 저주에서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헉헉!”
 삼목혈신은 끝내 썩은 고목처럼 고개를 꺾고 말았다.
 실로 생각지도 못한 눈 깜짝할 순간의 일이었다.
 이때 짙은 어둠 속에서 서서히 드러나는 인물.
 놀랍게도 허리가 구부정한 꼽추노인이었다.
 허름한 차림에 지극히 평범한 느낌의 괴노인.
 잿빛의 머리를 어깨까지 치렁치렁 내려뜨리고 있는데 도저히 나이를 측량할 수 없었다.
 그저 어느 집의 잡일을 도맡아하는 하인처럼 보이는 그런 노인이었다.
 헌데, 그런 노인의 일신에 이토록 신기에 가까운 절학이 숨겨져 있었다니. 실로 경이로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
 삼목혈신의 시신을 내려다보는 꼽추노인의 노안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마교··· 드디어 예측대로 나타나고야 말았다!’
 마교의 출현을 예측했는가?
 ‘하지만 무서운 일이다. 삼목혈신 같은 전대의 대마왕조차 놈들의 하수인으로 있다는 것은······. 제삼차 창궐··· 그것은 어쩌면 노부의 생각보다 더 가공스런 것인지도 모른다.’
 꼽추노인은 침음을 흘려내었다.
 ‘더욱이 보이지 않는 검은 손이 천하의 숨통을 조여오고 있는 이때에······.’
 보이지 않는 검은 손.
 그것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문득 꼽추노인의 흐릿한 노안 속에 한줄기 예광이 착각처럼 스쳤다.
 ‘검은 손··· 혹시 그들이······!’
 퍼뜩 불길한 예감이 스쳤는가?
 그의 노안이 경직되어 들었다.
 ‘만약 그렇다면 실로 엄청난 일이다. 무림의 생사까지 위협할······.’
 소름이 전신에 번져 오르는 듯 그는 노구를 한차례 부르르 경련시켰다. 그러다 일순, 꼽추노인은 북궁비가 사라진 곳을 응시한 채 나직이 중얼거렸다.
 ‘무림의 운명··· 어쩌면 저 아이의 어깨에 달려 있는지도 모른다.’
 어둠 속으로 꼽추노인은 차츰 사라지고 있었다.
 
 
 3장 최후의 승부사
 
 
 항주의 찬란한 홍등가 뒷면에는 또 하나의 어두운 거리가 있었다.
 창녀촌.
 여느 기루와는 격이 다른 싸구려 창굴이었다.
 나이가 들어 밀려난 폐기(廢妓)들이 안주해 있는 곳이다.
 하지만 재수만 좋으면 그런 대로 괜찮은 계집을 골라 하룻밤 쉬어갈 수 있는 곳이기에 꽤 많은 서민(庶民)들이 찾았다.
 창녀촌의 거리.
 수많은 창녀들이 길거리에 나와 한껏 요염한 모습으로 줄지어 있었고, 몇 명 창녀는 재수 좋게 손님을 맞이해 갖은 아양 속에 손님의 손을 잡아끌어 방으로 안내했다. 또 어느 창녀는 실컷 주물럭거리다 그냥 가는 손님의 뒤에다 대고 쌍스런 욕지거리를 하고 있었다.
 한 낡은 객루.
 “아흐흑··· 아아··· 몰라······.”
 숨막히는 여인의 자지러지는 교성이 흘러 나오고 있는 침실에 열락의 열풍이 몰아쳐 나오고 있었다.
 희미한 분홍빛 등불이 비쳐지고 있는 침상.
 두 개의 허여멀건한 나신이 어지럽게 엉켜 흠뻑 땀으로 뒤범벅이 되어 있었다.
 여인.
 완숙한 미가 흐르는 농염한 몸매의 요염한 중년미부였다.
 색정이 가득 피어오른 중년미부의 얼굴은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지만 안타까움의 빛이 가득 차 있었다.
 “아아··· 조금만 더······.”
 그녀는 필사적으로 사내의 건장한 몸을 죄었다.
 무언가 자신의 욕망이 완전치 못하다는 광란의 몸부림이었다. 그에 반해 수염이 마치 밤송이처럼 꺼칠한 불혹의 사내는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는데 그것은 결코 쾌락의 표정이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중년미부는 지금 무려 열 차례나 그것을 요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내는 도저히 중년미부의 광적인 정력을 충족시킬 수 없었다.
 그래서인지 중년미부는 더더욱 몸이 달아 자신의 매끄럽고 허연 허벅지로 그의 허리를 휘감으며 몸부림쳤다.
 “헉! 허헉··· 어서··· 더··· 아흐흑······.”
 중년미부는 미친 듯 재촉을 했다.
 박 속처럼 허여멀건한 둔부가 성난 노도처럼 출렁거렸다.
 허나, 사내는 도저히 견딜 수 없는 듯 허탈한 긴 탄성과 함께 힘없이 늘어지고 말았다.
 아울러 그의 거대한 남성은 수축되었다.
 이에 중년미부는 울상을 짓는 듯싶더니 짜증스런 음성으로 표독스럽게 쏘아붙였다.
 “흥. 병신 같으니··· 당신 정말 사내예요?”
 그러면서도 도저히 치미는 정념을 막을 수 없는 듯 자신의 손을 움직여 풍만한 젖무덤과 물기로 흥건히 젖어 있는 울울창창한 수림으로 뒤덮인 비지를 마구 주물럭거렸다.
 “아음··· 미··· 쳐······.”
 사내는 그 같은 광경에 죄인인 양 고개를 푹 떨구었다.
 “미안하구려. 요연(妖姸)··· 언제나 만족시켜 주지 못해서······.”
 “몰라. 이 병신아! 으흐흑··· 아아······.”
 사내는 중년미부 요연이 울음 같은 교성을 멈추지 않자 언뜻 고뇌의 빛을 띠었다.
 “휴··· 나 천풍고영도(天風孤影刀) 독고혼(獨孤魂)이 이토록 허약해질 줄이야······.”
 천풍고영도 독고혼!
 십 수년 전 대륙천하를 도(刀) 하나로 종횡하던 철혈의 사내. 그는 불의를 악보다 미워하는 가공무쌍한 도법자(刀法者)며 승부사였다.
 허나, 그는 무림에서 종적을 감추어야만 했으니······.
 바로 정도인으로 숭앙 받던 천도세가의 천외무황 북궁황이 변심해 마인으로 돌변 암황천궁을 세우고 철혈마제로 불리자 격분하여 북궁황을 암살할 우를 범한 것이다.
 결국 암황천궁의 가공할 힘 앞에 쫓겨다녀야만 했다.
 암황천궁의 무시무시한 거미줄 같은 죽음의 추격에 천풍고영도 독고혼은 공포의 도피 행각을 벌였다.
 그런 급박한 상황 속에 그를 가장 안전하게 피신시켜준 인물이 바로 요연이었다.
 호탕하고 사내다운 독고혼의 모습에 매료되어 요연은 불문곡직하고 자신의 처소에 숨긴 것이다.
 암황천궁의 인물들은 자신들이 추격하고 있는 천풍고영도 독고혼이 지척의 싸구려 창녀굴에 숨었으리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결국 독고혼은 요연에게 헌신적인 사랑을 느껴야 했다.
 하지만 근래에 와서 그들 사이가 변해가고 있었으니······.
 요연!
 그녀는 엄청난 색광이었으며 우물(尤物)로 십 수년 동안 단 하루도 빠짐없이 십여 차례씩 정사를 요구해 와 천하의 천풍고영도도 지칠 수밖에 없었고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가공할 승부사요, 철혈의 인간 독고혼은 어느덧 폐인으로 변하고 만 것이다.
 그는 근래에 이르러 요연이 가끔 남자를 끌어들여 욕정을 채운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무능력과 그녀에게 생명의 빚이 있다는 마음 때문에 말없이 참고 있었다.
 “다 나의 못남이다. 내가 그녀를 만족시켰다면 어찌 그녀가 다른 사내에게 몸을 맡기겠는가?”
 그는 자포자기와 함께 스스로를 자책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아흐··· 아아······.”
 아직도 몸을 비비꼬며 교성을 토해내고 있는 요연을 힐끗 쳐다보곤 독고혼은 쓸쓸히 겉옷을 걸쳤다.
 한잔의 술로 자신을 달래기 위함이었다.
 그때였다.
 “으하하하··· 하늘아, 술과 함께 이 미친 세상처럼 멋지게 미쳐보자꾸나.”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서 느닷없이 파안대소가 들려왔다.
 ‘광색공자······!’
 독고혼은 직감적으로 상대가 누구임을 알았다.
 그가 멈칫하는 사이 돌연 요연이 언제 그랬냐는 듯 재빨리 침상에서 일어나 의복을 걸치기 시작했다.
 “······!”
 요연은 가히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민첩하게 옷매무새를 다듬고는 얼굴에 분을 바르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리곤 이내 독고혼을 경멸의 눈으로 응시한 후 바람처럼 휑하니 밖으로 나가버렸다.
 “후후후······.”
 독고혼은 쓰디쓴 고소를 날렸다.
 지금 요연이 그토록 황망히 나가는 이유를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천하의 탕아이며 돈을 잘 쓰는 광색공자를 싫어할 여인은 아무도 없겠지. 후후······.”
 처량한 독백을 흘리며 그는 침상 밑에서 반쯤 마시다 남은 술병을 꺼내어 미친 듯 들이키기 시작했다.
 술병을 쥐고 있는 그의 손은 왠지 부들부들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으으······.’
 “하하하!”
 “아이, 몰라요. 이러시면··· 흐응······.”
 남녀의 음탕한 웃음소리가 바로 옆방에서 심장을 파고들 듯 날카롭게 들려오고 있었다.
 독고혼은 귀를 틀어막고 이를 악물었다.
 지금 그 웃음소리가 무엇을 의미하며 주인공들이 누구인지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이었다.
 언제부터인가 그는 그 숨넘어가는 야릇한 남녀의 웃음소리에 체념을 넘어 득도한 고승처럼 흔연히 받아넘기는 아량을 지니게 됐다.
 하지만 오늘만은 달랐다.
 상대가 달랐기 때문이었다.
 바로 정도의 배신자요, 자신을 이런 폐인으로 만든 원수 철혈마제 북궁황의 자식이기 때문이다.
 “커··· 으······.”
 그는 쓰디쓴 술을 미친 듯이 입 속에 퍼부었다.
 벌컥, 벌컥!
 ‘잊자. 이제 모든 것을 완전히 잊자. 독고혼, 너는 이미 십 수년 전에 죽은목숨이 아니더냐? 크흐흐······.’
 어느덧 그의 술병은 모두 비워졌고 두 눈은 시뻘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이봐요! 북궁공자님께서 당신을 찾아요.”
 “······!”
 요연의 간드러진 음성에 독고혼의 안면은 참담히 일그러졌고 전신에선 가는 경련이 일었다.
 허나, 그의 얼굴엔 곧 체념과 공허한 빛이 흘렀다.
 이어 그는 무심한 표정으로 옆방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요연이 풍만하고 요염한 육신을 북궁비의 품에 기댄 채 연신 교태로운 몸짓을 하고 있었다.
 “······.”
 순간적으로 독고혼의 눈에 불꽃이 피었으나 이내 담담해졌다.
 북궁비는 여전히 요연을 안은 채 의미심장한 시선으로 그를 응시하며 입을 떼었다.
 “독고혼! 그간 별고 없으셨소?”
 ‘헉!’
 독고혼의 안색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나의 정체를 알고 있었단 말인가?’
 온몸에 피가 싸늘하게 식어 내리며 긴장감이 전류처럼 번져 올랐다.
 그러나 그는 이내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당당히 반문했다.
 “공자,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소인은 독고혼이 누군지 전혀 모르겠습니다.”
 북궁비는 묘한 웃음을 흘렸다.
 “후후. 당신이 정녕 천풍고영도가 아니란 말이오? 후후후··· 그럴 리 없을 텐데······.”
 ‘으음······.’
 독고혼의 등에선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허나, 그는 여전히 태연한 음성을 내뱉었다.
 “북궁공자, 소인은 천풍고영도란 말은 금시초문이었습니다. 공자께서 그걸 묻기 위해 소인을 부르셨다면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이어, 그는 조용히 돌아서며 방문을 막 나서려 했다.
 그 순간 북궁비의 조소 어린 음성이 들려왔다.
 “후후··· 천풍고영도 독고혼! 어찌 그리 허둥거리시오? 다른 사람은 모두 속일 수 있을지언정 본인의 눈만은 결코 속일 수 없소.”
 “······.”
 독고혼은 움찔했으나 계속 밖을 향해 걸음을 떼어놓았다.
 그런 그의 뒤로 북궁비의 음성이 계속 이어졌다.
 “후후후. 무림제일의 승부사요, 열혈의 영웅인 천풍고영도가 목숨이 아까워 이토록 치졸한 졸장부로 변하다니. 역시 내가 사람을 잘못 보았어. 자, 요연아. 술을 따라라. 괜히 졸장부 하나 때문에 술맛을 잃을 뻔했구나.”
 ‘졸장부······?’
 견딜 수 없는 모욕감을 느꼈는가?
 독고혼은 우뚝 선 채 주먹을 으스러지게 움켜쥐며 부르르 치를 떨었다.
 그런 그의 등뒤로 북궁비의 조롱 어린 음성은 계속되었다.
 “푸하하하! 요연아, 너도 생각해 보려무나. 만약 네 기둥서방이 과거 천하를 위진시킨 영웅 천풍고영도였다면 자신의 여자가 외간남자의 품에 안겨 있는 것을 보고 있지는 않을 게야. 그렇지 않느냐?”
 그러면서 북궁비는 손을 뻗어 요연의 풍만한 가슴을 와락 움켜쥐며 주물럭거렸다.
 “아이··· 아파요··· 아흥······.”
 요연은 두 눈에 색기를 가득 담고 교태를 요염하게 떨었다.
 북궁비는 나머지 한 손으로 술잔을 들어올렸다.
 “하긴 천풍고영도 독고혼이 어떤 인물인데··· 그는 위대한 승부사로 절대 벌레처럼 목숨을 구걸하며 살 인물이 아니지. 암. 아니구말구.”
 “······.”
 독고혼의 꽉 움켜쥔 두 손의 경련이 더욱 거세어져갔다.
 “천풍고영도! 아마 그는 지금도 어디선가 중원의 정의를 위해 암황천궁을 무너뜨리려고 도를 갈고 있을 거야. 암, 그는 진정한 영웅이니까.”
 “음······.”
 일순 독고혼은 북궁비의 비수 같은 질타에 나직한 신음과 함께 몸을 휙 돌렸다.
 그의 두 눈은 좀 전에 볼 수 없었던 태양 같은 정광이 검날처럼 이글거리고 있었다.
 아울러 그의 전신에는 산악 같은 어마어마한 기도가 구름처럼 번져 올랐다.
 “북궁공자, 대체 무슨 마음으로 나를 격동시키는 것이오?”
 북궁비는 짐짓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허, 그대가 무슨 연유로 그렇게 화를 내는가? 그대가 천풍고영도 독고혼이라도 되는가?”
 “그렇소. 내가 바로 독고혼이오.”
 독고혼은 무겁게 대답했다.
 허나, 북궁비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그대는 이젠 아예 미친 것 같군. 어찌 당신처럼 치졸한 인간이 승부사인 천풍고영도가 될 수 있단 말인가?”
 “크하하핫!”
 독고혼은 하늘을 향해 통분과 회한에 가득 찬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그것은 울분을 토하는 맹수지왕인 사자의 포효 같았다.
 그러자 북궁비가 파안대소를 터뜨렸다.
 “크하하하! 그렇지. 천풍고영도는 절대 이렇듯 치졸한 자가 아니지. 그는 지옥사자조차 무서워하지 않는 철혈의 승부사이니까.”
 그러다간 이내 그는 웃음을 뚝 멈추며 두 눈에 기광을 번뜩이며 독고혼을 냉랭하게 쏘아보았다.
 “그대가 이제야 정신이 돌아온 모양이군. 그렇다면 이젠 멀리 사라지게. 본 공자는 오랜만에 여인을 품어봐야겠으니.”
 이어, 그는 더 이상 독고혼에게 시선을 던지지 않은 채 요연을 번쩍 안아들고 침상에 던진 후, 그녀의 몸에 자신을 싫었다.
 “아이, 싫어요··· 거친 건··· 천천히··· 아흥······.”
 요연은 코먹은 음성을 흘리며 기다렸다는 듯 북궁비의 목을 끌어안고 자신의 몸을 마구 꿈틀거렸다.
 “후후··· 요연, 너의 가슴이 이토록 풍만했다니. 진정 본 공자는 탄복했다.”
 “아흐흥··· 몰라······.”
 두 남녀는 찰나간 자신들의 겉옷을 벗어 던지며 뜨겁게 뒤엉켰다.
 허나, 이때 독고혼은 전신에 전류가 흐르는 느낌이었다.
 ‘멀리 사라지라고······?’
 무엇인가 암시하는 북궁비의 말이 그의 뇌리를 강하게 강타한 것이었다.
 찰나, 그는 번갯불처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그렇다. 그건 바로 나보고 피하라는 암시다!’
 그렇게 느끼는 찰나였다.
 “······!”
 스스슷!
 그의 귓전에 자신이 있는 곳을 향해 쏘아져오는 경미한 인기척이 들렸다.
 ‘기척으로 보아 가공할 절정고수들이다. 분명 나를 잡기 위해 오는 암황천궁의 고수들임이 분명하다.’
 비록 십 수년이나 이런 곳에서 묻혀 폐인이 되었지만 승부사적인 초감각만은 잃지 않고 있었다.
 위기의식을 느낀 그는 더 이상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일순, 촌각의 순간 그의 신형은 섬광처럼 창문을 빠져 몇 채의 지붕을 넘는 듯싶더니 순식간에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 순간, 밤하늘을 울리는 호각소리와 함께 외침이 울려 퍼졌다.
 삐이익!
 “천풍고영도가 도망간다!”
 “절대 놓치지 마라!”
 이어, 한 무리의 인영들이 쾌속무비하게 독고혼의 뒤를 추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또 한 무리의 인영들이 요연이 있는 방 앞으로 밀어닥쳤다.
 허나, 그들은 곧 움찔하며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방안.
 그곳에선 숨막히는 여인의 교성과 사내의 거친 호흡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흐흑··· 헉헉··· 좋아··· 공자님··· 조금만 더······.”
 “요연, 너는 정말 요물이로구나. 헉헉!”
 일단의 고수들은 섬뜩한 느낌이 드는 흑의경장을 한 무사들로 한결같이 대단한 기도가 엿보이는 인물들이었다.
 그들의 가슴에는 송연한 핏빛의 혈월(血月)이 문장처럼 수놓아져 있었다.
 바로 암황천궁의 표식이었다.
 그들은 방안에서 들려오는 거친 숨소리에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며 실소를 흘려내었다.
 ‘쯔쯔··· 호부(虎父) 밑에 견자(犬子) 없다는 말도 옛말이군. 저러니 궁주님의 눈밖에 나지.’
 그들은 이미 방안에 있는 사내가 그들의 소궁주인 북궁비인 것을 눈치챈 것이다.
 그때 그들 중 수뇌인 듯한 흑의중년인이 냉막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뭣들 하느냐? 어서 항주 전체를 수색해 독고혼, 그놈을 잡아라!”
 “예.”
 수하들이 사라지자 흑의중년인은 방문 앞으로 다가서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험. 소궁주, 속하 냉혈검마(冷血劍魔)입니다.”
 허나, 안에서는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오히려 역겨울 정도의 비음소리만 더욱 커질 뿐이었다.
 냉혈검마는 떫은감을 씹은 표정을 짓고 말았다.
 ‘내가 어리석었지. 궁주님조차 두 손 들은 소궁주이신데 내가 어떻게 데려간다고······.’
 그는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그리곤 이내 그의 신형은 빨려들 듯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바로 그 찰나, 방안에 있던 북궁비의 두 눈에 번쩍 기광이 스쳤다.
 ‘갔군. 부디 무사히 추격을 벗어나야 할 텐데.’
 그리곤 그는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어멋! 공자님, 왜 일어나세요? 어서··· 흐응······.”
 한창 열정에 달아올랐던 요연은 깜짝 놀라 문어처럼 그의 몸에 달라붙으며 재촉했다.
 순간 요연의 두 뺨에 불똥이 튀었다.
 짝! 짝!
 “아악! 공, 공자님. 왜?”
 그녀는 두 볼을 감싼 채 화들짝 두 눈을 떴다.
 북궁비의 눈에 돌연 차가운 한기가 스며들며 냉엄한 음성을 토했다.
 “후후. 요연, 너는 너무도 엄청난 두 가지 죄를 저질렀다.”
 “예에? 그, 그게 무슨······?”
 요연은 전신을 가늘게 떨었다.
 북궁비의 음성은 추상같았다.
 “첫째, 한 영웅을 치마폭에 끌어들여 졸장부로 만든 죄, 둘째, 암황천궁에 가증스럽게도 그 영웅을 팔아 넘긴 죄이다.”
 “헉! 공자님이 그것을 어떻게······?”
 요연의 안색은 한순간에 해쓱해지며 공포에 부들부들 전신을 떨었다.
 북궁비.
 천하의 파락호며 주정뱅이였던 그.
 그런 그의 전신에 지금 조금 전까지만 해도 느낄 수 없었던 구름 같은 위엄이 무섭게 피어오르며 두 눈엔 금석조차 녹일 것 같은 신광이 번득이며 폭사되어 나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것은 실로 믿을 수 없는 변화였다.
 천하의 그 누가 그의 이런 모습을 미친 주정뱅이이며 파락호라고 할 것인가?
 요연은 그런 그의 모습에 말할 수 없는 두려움을 느낀 것이다.
 북궁비는 입가에 싸늘한 냉소를 머금었다. 그런 그의 눈빛 속엔 어떤 분노가 조용히 피어오르고 있었다.
 “흥. 너는 본 공자가 누구의 자식이라는 것을 잊었느냐? 어쨌든 네년은 더 이상 살 가치가 없다. 세상엔 네년 같은 가증스런 요녀가 적으면 적을수록 평온해진다.”
 “공, 공자님··· 제··· 제발······.”
 요연은 허겁지겁 무릎을 꿇으며 북궁비의 두 다리를 움켜잡으며 처절히 애원했다.
 번쩍!
 그러나 한 줄기 섬전과 함께 그녀의 목은 허공을 날고 있었다.
 비명도 몸부림도 없었다.
 그저 무디게 나뒹굴었을 뿐이었다.
 북궁비는 요연의 목 없는 시신을 내려다보며 복잡한 빛을 띠었다.
 “이로써 난 아버님께 직접적인 반기를 들고 말았다.”
 암울한 탄식이 그의 입에서 무겁게 흘러 나왔다.
 아버지를 습격했던 승부사.
 그 승부사를 살려 보냈으니 북궁비의 마음은 착잡하기만 했다.
 ‘과연 내가 잘한 일일까?’
 이어,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나서기 시작했다.
 그리고 막 방문을 나서는 순간, 그는 흠칫했다.
 조용히 서 있는 그림자를 발견한 것이었다.
 꼽추노인, 바로 그였다.
 북궁비는 언뜻 의외의 빛을 띠었다.
 “노야가 어쩐 일로 여기에······.”
 아는 사이였던가?
 그렇다.
 암황천궁으로 변신하기 이전 천도세가에 언제부터인가 잡일을 도맡아하는 하인으로 일해오는 노인이었다.
 허나, 북궁비와는 각별한 사이였다.
 일찍이 어머니를 잃은 북궁비를 마치 친손주처럼 업어 키운 사람이 바로 이 꼽추노인인 것이다.
 그러하기에 모든 사람들은 그를 환옹(幻翁)이라 불렀으나 북궁비는 노야라 부르며 친할아버지처럼 잘 따랐다.
 부친인 철혈마제 북궁황이 마왕으로 변한 지금, 북궁비가 그 누구보다 정을 느끼고 있는 인물이 환옹이었다.
 환옹은 노안에 자애로운 미소를 담았다.
 “둘째공자, 노복은 우연히 공자가 이곳에 드는 것을 보고 이렇듯 뒤쫓아왔소.”
 “······.”
 “자, 공자. 아버님께서 화내시기 전에 이만 노신과 함께 돌아가도록 하시지요.”
 비록 공손한 어조였으나 마치 사랑스런 손자에게 말하는 듯 부드러웠다.
 “음······.”
 북궁비는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허나, 이내 밤하늘을 잠시 응시한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걸음을 떼어놓았다.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가는 그들 사이로 어렴풋이 대화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공자, 아버님이 그리도 원망스럽습니까?”
 “······.”
 “이해합니다. 공자께서 얼마나 아버님을 사랑했는지. 그렇기에 아버님에 대한 배신감이 그만큼 크다는 것을.”
 “노야, 난······.”
 “압니다. 무척 고뇌하고 계시다는 것을. 하지만······.”
 “······.”
 “한번쯤은 아버님을 이해하도록 노력하시지요.”
 “······?”
 “나무만 보면 숲의 거대함을 모르고 물위에 떠 있는 빙산만 대하면 그 밑의 웅장함을 깨닫지 못하니까요.”
 “무슨 말입니까, 노야?”
 “허허. 이 보잘것없는 노복이 뭘 알겠습니까? 허나, 공자께서는 후일 아실 날이 있으실 것입니다.”
 어둠.
 두 사람의 모습은 사라졌고, 더 이상 대화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
 
 풍엽산(風葉山)!
 항주에서 칠십 리쯤 떨어져 있는 곳으로 그 눈부신 절경은 가히 중원오악(中原五嶽)과 견주어도 손색없는 곳이다.
 더더욱 천연의 요새를 이루고 있어 장중한 지형을 지니고 있다.
 그러한 이곳은 한때 무림의 성역이라고까지 불렸다.
 그것은 천년 동안 무림에 지주적인 역할을 해오던 십천세가 중에서도 최고의 가문으로 꼽히는 천도세가가 바로 이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허나, 천하인이 흠모하고 신성시하던 천도세가의 자리에 거대한 궁이 철옹성처럼 세워지는 순간 이곳은 그 누구도 오를 수 없는 절대마역으로 변했다.
 암황천궁(暗黃天宮)!
 그렇다.
 천도세가의 실체와 천하마인들이 모여 세워진 가공할 마궁.
 풍엽산은 완전 사역(死域)이나 진배없었다.
 십 수년 전 느닷없이 천도세가가 정(正)에서 마(魔)인 암황천궁으로 창궐하면서 마천(魔天)의 대부가 되었고 그 세력은 가히 일순간에 천하를 피로 씻을 만큼 엄청난 것이었다.
 천도세가가 빠진 구천세가를 위시한 구파일방, 그리고 정도의 명문대파조차 그 위세에 눌려지내는 처지였다.
 철혈마제 북궁황!
 한때 천외무황이란 찬란한 명호를 지녔던 불세의 신화를 남긴 무신(武神)이었다.
 허나, 지금은 암황천궁의 대궁주이며 마(魔)의 절대자였다.
 그의 말 한마디가 곧 죽음이며 삶인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그는 잔인한 손속과 냉혹한 심계로 서서히 천하를 정복해가고 있었다.
 더욱이 그가 거느리고 있는 인물들은 한결같이 그에 못지않은 최강자와 가공할 마인들이었다.
 구대철왕(九大鐵王)!
 혈천십마왕(血天十魔王)!
 암황십천대(暗皇十天隊)!
 십팔수라령(十八修羅靈)!
 그들의 무공은 가히 불가사의할 정도로 무시무시한 무학을 지닌 불사신들이었다.
 구대철왕!
 이들은 한때 천도세가의 가신들로 한결같이 불세출한 전대의 장로들이다.
 그들의 능력은 아무도 모를 정도였다.
 혈천십마왕!
 이들은 전대의 노마왕들로 백년 전에 은거했던 인물들이 암황천궁에 가입했던 것이다.
 암황십천대!
 그들은 암황천궁의 주축이 되는 열 개의 세력으로 한때 무림에 무시무시한 혈명을 날렸던 가공할 마인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들은 차라리 공포, 그 자체였다.
 암황십천대는 혈천십마왕이 각기 지휘하고 있었다.
 십팔수라령!
 그들은 한마디로 유령 같은 인물들이다.
 모든 것이 완전히 신비에 가려진 고수들이었다.
 이들에 대해선 철혈마제 북궁황의 좌우 팔인 구대철왕과 혈천십마왕조차 모르고 있었다.
 다만 그들이 알고 있는 것은, 십팔 인의 수라령은 철혈마제 외에는 절대 알지 못하며 그의 신변에 유령처럼 붙어 다니며 그를 보호한다는 것과 세상에서 그들이 해내지 못하는 일은 단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불가능을 모르는 가공할 철의 고수들.
 한마디로 안개 같은 인간들이었다.
 ― 십팔수라령이 존재하는 한 암황천궁은 불멸하리라.
 이처럼 세인들에게 공포의 존재로 부각한 인물들인 것이다.
 하여튼 광활한 풍엽산의 천연요새 속에 하늘을 찌를 듯 세워진 거대하면서도 웅장한 암황천궁!
 철담동벽의 철옹성으로서 곳곳에 진식과 기관이 설치되어 귀신조차 스며들 수 없을 정도였다.
 밤.
 삼라만상이 깊이 잠든 심야.
 먹물 같은 어둠이 수림처럼 세워져 있는 암황천궁의 수많은 전각과 누각들을 감싸고 있었다.
 숨막힐 듯한 정적과 고요, 그 속에 암황천궁은 거대한 웅체를 웅크린 채 그 어떠한 기척도 없었다.
 헌데, 이때였다.
 스슷!
 어둠을 유영하는 바람처럼 암황천궁의 전각들 사이를 소리 없이 섬광처럼 쏘아져 가는 흑영 하나가 있었다.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용담호혈이며 죽음의 사각지대인 암황천궁에 스며들 수 있는 인물이 존재했다니.
 더욱이 경이로운 것은 죽음의 기관과 진식이 펼쳐진 암황천궁을 손바닥 보듯 알고 있는 듯 마치 제 집처럼 거침없이 쏘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어느 한순간, 흑영은 암황천궁 깊숙한 곳에 위치한 어느 한 거대한 전각 앞에 우뚝 내려섰다.
 “······.”
 흑영, 그는 전신을 온통 흑의로 감쌌으며 얼굴에는 복면을 하고 있었다.
 그는 사방을 예리하게 살피곤 이내 전각 안으로 연기처럼 스며들었다.
 슈우욱!
 흑영은 빨려들듯 전각 속으로 사라졌다.
 거대한 전각은 마치 텅 빈 것처럼 인기척 하나 없이 숨막힐 것 같은 적막에 휘감겨 있었다.
 허나, 흑의인은 전혀 머뭇거리지 않고 곧장 어느 한 방의 창문 옆에 찰싹 달라붙으며 곧 방안의 동정을 살폈다.
 그리곤 이내 창문을 조심스럽게 열고는 방안으로 소리 없이 들어섰다.
 한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팟!
 암흑에 휩싸여 있던 방안이 돌연 환하게 밝혀지며 냉엄하면서 창노한 일갈이 천둥처럼 방안을 울리는 것이 아닌가?
 “환영비매(幻影秘魅)! 기다리고 있었다.”
 “헉!”
 흑의인은 졸지에 자신이 발각되자 아연하며 즉시 신형을 돌렸다.
 그의 전면에는 어느새 핏빛의 붉은 혈포를 걸친 혈미(血眉)의 건장한 노인이 차가운 미소를 머금고 있지 않은가?
 두 눈빛이 마치 핏빛 벼락처럼 느껴지는 섬뜩한 혈포노인이었다.
 복면인은 그를 대하는 순간 다시 한 번 경악했다.
 “엇! 다, 당신은 혈천십마왕 중 혈염마신(血炎魔神)······.”
 긴장된 음성이었다.
 혈포노인, 혈염마신은 냉혹한 괴소를 흘려내었다.
 “흐흐흐. 그렇다. 노부는 오늘밤 네놈이 찾아오리라 예측했다.”
 흑의인, 환영비매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그, 그렇다면 네놈들은 나를 유인하기 위해 헛소문을······.”
 “흐흐. 그렇다. 본궁이 네놈 하나 때문에 고통당한 생각을 하면··· 허나, 이젠 네놈도 오늘로 끝이다.”
 환영비매의 복면한 안면이 꿈틀거렸다.
 “정녕 철혈마제가 주화입마를 당하지 않았단 말인가?”
 혈염마신은 송연한 안광을 이글거리며 냉소를 흘려내었다.
 “흐흐. 이미 신의 경지에 이른 궁주님께서 어찌 그깟 주화입마에 걸리시겠느냐?”
 “함정이었다니······.”
 환영비매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의 전신에는 지금 식은땀이 촉촉이 배이고 있었다.
 최대의 위기의식을 느낀 것이다.
 허나, 환영비매가 누구인가?
 지상최대의 신비인으로 불리고 있는 신화의 인간이며 정도의 우상으로 불리고 있는 인물이 아닌가?
 천하를 위협하는 암황천궁을 혈혈단신으로 집요하게 상대하고 있는 기인.
 마의 절대신이라 불리는 암황천궁조차 환영비매 한 사람의 저항으로 인해 무림정복이 일단 저지됐을 정도였다.
 달 그림자처럼 완전 신비에 가려진 환영비매.
 그의 무학은 가히 신화적이었다.
 그의 손에 그 얼마나 많은 암황천궁의 마인들이 풀잎의 이슬처럼 죽어갔던가?
 그로 인해 암황천궁은 주춤했고 정도는 안도의 숨을 돌리며 비밀리에 힘을 키워 연합세력을 구축하는 시간을 벌고 있었다.
 철혈마제 북궁황!
 그가 마침내 대로(大怒)했다.
 ― 환영비매를 잡아라. 잡는 순간부터 다시 천하를 피로 씻으리라.
 아울러 암황천궁의 최대 신비인간들인 십팔수라령을 풀어 환영비매를 추격케 했을 정도였다.
 한마디로 환영비매 한 사람이 암황천궁의 거대한 마의 힘을 저지하고 있다 할 수 있었다.
 환영비매.
 그는 바로 그런 엄청난 인물이었다.
 무림의 대영웅(大英雄)인 것이다.
 이때 혈염마신은 내심 경악하고 있었다.
 ‘이럴 수가! 천하의 환영비매가 아직 약관도 지나지 않은 어린 소년이었다니.’
 환영비매의 앳된 음성을 들은 그는 믿어지지 않는 표정이었다. 그만큼 환영비매의 위명은 전대의 마왕들에게까지 신화적인 인물로 인식되고 있었다.
 그가 약간 정신을 흐트러뜨리는 찰나,
 “혈염마신! 다음에 다시 오겠다.”
 돌연 환영비매가 빛살처럼 창 밖으로 신형을 날렸다.
 “앗! 저놈이······.”
 혈염마신이 흠칫 정신을 차리며 벼락처럼 자신의 독문절학인 혈천마강을 내뻗었다.
 슈슈― 슉!
 송연한 핏빛의 강기가 그의 장심을 떠나 뇌전처럼 허공에 작렬했다.
 퍽!
 “윽······!”
 섬광처럼 신형을 날리던 환영비매의 입에서 고통스런 신음이 울려나왔다.
 허나, 그의 신형은 여전히 빛살처럼 쏘아져나갔다.
 문득 삽시간에 사라지는 환영비매를 응시하며 혈염마신은 냉혹한 회심의 미소를 입가에 떠올렸다.
 “흐흐. 환영비매, 네놈은 노부가 실수해 놓친 것으로 알겠지만··· 흐흐··· 네놈은 잠시 후면 암황천궁이 과연 어떤 곳인지 뼈저리게 느낄 것이다.”
 아울러 그의 신형은 허공으로 솟구쳤다.
 “으하하하! 네놈이 제아무리 도망쳐도 부처 손바닥 안의 손오공에 불과할 뿐이다.”
 그와 함께 그의 모습은 어둠 속으로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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