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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검성 1

2018.03.15 조회 431 추천 2


 신검성 1권
 1장 하늘의 형벌(刑罰)
 
 
 세상에는 강한 인간들도 많지만 약한 인간들도 많다.
 강한 인간들은 무쇠처럼 강인한 체력을 지니고 있는 반면, 약한 인간들은 하루살이보다 더 허약한 체질을 지니고 있다.
 석씨 가문(石氏家門)은 후자의 경우에 비추어 가장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세상 사람들은 그들을 저주받은 가문이라고 말하기를 서슴지 않았다.
 저주받은 가문!
 석씨 가문의 후손들은 선천적으로 몸이 허약하여 도무지 서른 살을 넘도록 사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열 살만 되면 전신이 온통 수염과 털로 뒤덮이고, 스무 살이 되면 그 수염과 털이 희끗희끗 세어지며 서른 살이 가까워지면 완전히 호호백발의 노인이 되어 죽어 버리는 것이다.
 몸이 허약하다 보니 생활을 영위해 나가는 것 또한 남달리 어려울 수밖에 없었고, 이러한 가문에 시집을 온다거나 장가를 들려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세상 사람들은 그들을 무슨 짐승처럼 멀리하고 천대하며 멸시했다.
 신(神)에게서 철저히 버림받은 저주의 가문.
 그것이 석씨 가문을 바라보는 세상 사람들의 눈이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더욱 가슴 저미도록 슬픈 것은 석씨 가문의 사람들이 바보스러울 만큼 착하고 어진 심성을 지녔다는 사실이었다.
 조금씩··· 조금씩··· 석씨 가문의 후손들은 그 숫자가 줄어들어 갔다.
 삼백 년 전, 돌연 석씨 가문은 살아남은 마지막 후손들을 데리고 아무도 모르는 곳을 찾아 떠나 버렸다.
 그들이 떠나가는 것을 지켜보던 누군가 물었다.
 - 사람들이 당신들을 냉대하고 멸시하기 때문에 떠나는 것이오?
 석씨 가문의 한 소녀가 대답했다.
 - 아니예요, 아니예요. 우리들은 다만 살아남기 위해 도망을 치고 있을 뿐이에요.
 그 사람은 또 물었다.
 - 도망이라니? 그럼 누군가 당신들을 죽이려고 달려오고 있기라도 한단 말이오?
 소녀는 웃었다.
 몹시도 슬프게 웃어 보이면서 이렇게 대답했다.
 - 그래요. 그들은 우리 석씨 가문뿐만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들을 죽이기 위해 달려오고 있어요. 믿기 어려우시더라도 믿으셔야 해요. 신(神)은 우리 가문에게 거역할 수 없는 저주와 더불어 앞날을 내다보는 신비한 힘도 주셨으니까 말이에요. 그 때가 언제인지는 말씀드릴 수 없어요. 다만 그들은 신(神)이 우리 가문에 내려준 저주보다 몇 곱절 되는 하늘의 형벌(刑罰)을 온 세상 사람들에게 안겨 줄 것이라는 사실만은 자신있게 말씀드릴 수 있어요.
 수수께끼 같은 소녀의 말과 함께 석씨 가문은 중원에서 사라졌다.
 그로부터 오십 년이 흐른 이백오십 년 전.
 어느 날 갑자기 중원무림에 괴이한 사건이 벌어졌다. 똑같은 혈의장포 차림에 똑같이 황금가면을 얼굴에 쓰고 이제까지 세상에 전혀 알려지지 않은 기형병기를 든 서른여섯 명의 괴마인들이 한꺼번에 출현한 것이다.
 그리고 그 때부터 가공할 피의 전설은 시작되었다.
 어디서 왔는지도 알 수 없고, 어떤 내력을 지녔는지도 알 수 없으며, 도무지 인간의 능력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불가사의한 무공을 지닌데다 유사 이래 가장 잔혹한 피보라를 일으켜 천형삼십육벌(天刑三十六罰)로 불려진 개세마인(蓋世魔人)들의 전설!
 그렇다. 그들이 이 세상에 나타난 것 자체가 하나의 저주였으며, 신이 세상에 내린 참혹한 형벌이었다.
 고금으로부터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오는 무림(武林)의 갖가지 기담(奇談)과 괴사(怪事)를 수록한 무림통서(武林通書)에는 그 가공할 혈사(血史)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천하에 그 위세를 떨치던 서부무림의 대문파 검왕궁(劍王宮)의 천오백 고수와 궁주인 현검기자(玄劍奇子) 동천승(童天乘)이 하룻밤 새 몰살당하는 대참사가 벌어졌다.
 그리고 불과 닷새 후에는 설산(雪山)과 나부(羅浮)의 삼천여 고수가 천형삼십육벌에게 깡그리 몰살당했다.
 천하 각 파가 크게 놀라 각기 방비를 굳게 하고 그 진상을 조사하려 했으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강북무림의 남북오악맹(南北五嶽盟), 천외삼성(天外三聖)이 이끄는 구방련(九幇聯)을 비롯한 일곡(一谷), 칠문(七門), 팔방(八幇), 이교(二敎)가 한 달 간격으로 차례차례 멸문당하고 삼 년째 되던 해에는 무려 사십팔 개의 정사대소문파(正邪大小門派)들이 천형삼십육벌의 이름 아래 초토화되고 말았다.
 경천동지(驚天動地)!
 말 그대로 그 기세는 하늘이 놀라고 땅이 흔들릴 정도였다.
 단 서른여섯 명에 의한 그 죽음의 지옥대전(地獄大戰)은 미증유의 위력으로 폭풍처럼 천하를 휩쓸었다.
 더욱이 소름끼치는 점은 천형삼십육벌이 일으킨 이 죽음의 폭풍이 정(正), 사(邪)의 파벌을 가리지도 않은데다 무슨 뚜렷한 목적하에 행해지는 것도 아닌 무차별 살상이라는 점이었다.
 그것은 단지 죽음을 위한 악마들의 유희였다.
 천형삼십육벌(天刑三十六罰).
 무림사를 통틀어 아무리 샅샅이 뒤져도 이보다 더 가공할 이름은 그 어느 시대에도 찾아볼 수 없었다.
 풍전등화 격으로 위기를 맞이한 무림은 전전긍긍 대책을 강구하던 끝에 마침내 하나의 결론에 도달했다.
 그것은 정과 사의 필연적인 결합이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정사(正邪)의 대표 이십오 인은 무산의 어느 은밀한 장소에서 회동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 은밀한 회동에서 하나의 합의가 이루어졌다.
 그것은 천하 각 파가 일시적으로 봉문(封門)을 하여 천형삼십육벌을 꺾을 수 있는 신공절예(神功絶藝)를 만들자는 것이었다.
 천하 각 파의 봉문선언(封門宣言)은 즉시 이루어졌다.
 그로부터 다시 악몽 같은 세월이 지나 이 년이 흐른 뒤였다.
 이십오 인의 정사지존들은 결국 각기 지닌 바 무공 중에 최고의 장점만을 모아 새로운 열 가지 무공을 창안해 내는 데 성공했다.
 이십오 인은 이 열 가지 십 종 무예를 절대십천예(絶對十天藝)라 이름붙였다.
 또한 그 무공들을 수록한 책자를 천화대종경(天華大宗經)이라 명명하고, 그 날부터 그들은 공동으로 이 새로운 무공들을 수련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실로 기이한 것은 이 절대십천예의 위력이었다.
 비록 정사를 대표하는 이십오 인의 최고무예만을 모았다고 해도 그들에게서 나온 바에야 크게 범주를 벗어날 수 없는 게 상식이다.
 그러나 이 절대십천예는 아예 그들의 무공과는 차원이 달랐으며, 그 위력은 차라리 불가사의할 정도였다.
 이십오 인은 그것이 모두 하늘의 도움이라 여기고 사심을 버린 채 그야말로 열심히 수련을 거듭했다.
 그러나 좋은 일에는 반드시 마(魔)가 끼친다 했던가.
 어떻게 알았는지 어느 날 천형삼십육벌이 그들의 수련장소를 급습해 왔다.
 끔찍한 대참사가 벌어졌다. 하루의 수련을 마치고 거의 탈진상태에 빠져들어 잠들어 있던 이십오 인은 이렇다 할 반항 한 번 해 보지 못한 채 속수무책으로 떼죽음을 당해 버렸다.
 그러나 단 한 사람, 천만다행으로 소림사의 장문인 무우대사(無優大師)만은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천하대종경을 가지고 그 장소에서 탈출했다.
 이 소식이 세상에 알려지자 정사무림은 엄청난 충격에 휩싸였으며, 그 충격은 곧 해일 같은 분노로 뒤바뀌었다. 그러한 분노는 급기야 무려 일만여 명에 달하는 정사대연합군(正邪大聯合軍)을 탄생시켰다.
 그리고 마침내 정사대연합군과 천형삼십육벌의 정면충돌은 이루어지고 말았다.
 유사 이래 최악의 대격돌.
 시체가 산을 이루고 피가 바다를 이루는 대혈전이 장장 칠 주야나 계속되었다.
 싸움은 정사대연합군의 승리로 장식되었다. 제아무리 파천의 능력을 지닌 천형삼십육벌일지라도 죽기를 각오하고 벌 떼처럼 달려드는 일만의 고수들을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그 싸움이 얼마나 처절하고 끔찍했는지는 말할 필요조차 없다.
 결국 천형사십육벌은 그렇게 이 땅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그에 따른 정사양도(正邪兩道)의 손실은 엄청날 수밖에 없었다.
 세월, 그것은 모든 시름과 상처를 아물게 하는 묘약인가?
 천하 각 파는 각기 세력회복에 힘쓴 끝에 수십 년이 흐르면서 서서히 안정을 되찾아 갔다.
 정과 사의 양대세력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단합관계에서 대립관계로 되돌아갔다.
 그런 가운데 언제부터인지 무림인들은 슬그머니 딴 곳으로 관심을 돌리기 시작했다.
 천화대종경.
 누구의 입에서부터 나왔는지 그것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지면서 모두가 탐욕과 욕망의 수렁으로 빠져들었다.
 천하 각 파는 각기 은밀히 천화대종경의 행방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그것만 찾을 수 있다면 손실과 피해의 복구는 물론, 능히 천하제일문(天下第一門)으로 탈바꿈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찌 된 영문인지 천화대종경을 지니고 있다는 무우대사의 모습은 천하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더욱 괴이한 일은 천하대종경을 찾아 나섰던 사람조차 속속 행방불명이 되어 한 명도 돌아올 줄 모른다는 점이었다. 그 중에는 각 파의 지존들도 상당수 끼어 있었으며, 나머지도 거의 수뇌급 고수들이었다. 참으로 수수께끼 같은 의문의 연속이었다.>
 종잡을 수 없는 의문의 연속 끝에 세월은 다시 유수같이 지나 이백오십여 성상이 지나갔다.
 천화대종경과 무우대사에 관한 이야기는 이제 하나의 전설처럼 되어 버렸고, 수수께끼의 실종사건들도 완전히 미궁에 빠져들었다.
 그런데 바로 그러한 시기에 천하 각지에서는 이상한 조짐들이 하나 둘씩 일어나기 시작했다.
 석씨 가문의 저주로부터 시작된 이 피의 전설.
 그렇다. 이렇게 시작되었다.
 두 번째 혈사이며, 유사 이래 가장 참혹한 피의 이야기는······.
 
 
 2장 살인광상곡(殺人狂想曲)
 
 
 1
 
 
 대륙의 남단 광동성(廣東省).
 배를 타고 오백 리 가량 가노라면 망망대해 한가운데 열 개의 섬이 모여 있는 한 군도(群島)가 있음을 볼 수 있다.
 모두 여섯 개의 작은 섬들로 이루어진 이 군도를 뱃사람들은 무명군도(無名群島)라 불렀다.
 무명군도는 그야말로 풀 한 포기 찾아볼 수 없는 기암괴석투성이로, 혹자는 죽음의 섬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으로부터 십여 년 전이었다. 이 황폐한 무명군도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그 변화는 처음 바위투성이 섬들의 도처에 푸른 나무들이 무성하게 자라면서 시작되었다.
 근처를 지나던 뱃사람들은 곧 섬 기슭에 온갖 꽃들이 구름처럼 가득 피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다시 몇 년이 흘렀을 때는 섬 도처에 새와 나비, 사슴이며 노루 등이 뛰노는 광경이 목격되었다.
 뱃사람들은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찌 이런 일이 가능하단 말인가?
 말하자면 보잘것 없던 무명군도가 불과 몇 년 새에 하나의 낙원처럼 탈바꿈한 것이다.
 호기심을 참지 못한 몇몇 뱃사람들이 급기야 무명군도를 살피기에 이르렀다.
 무명군도는 밖에서 보던 것보다 더욱 아름다웠다.
 뱃사람들은 난생 처음 대하는 별세계에 도취되어 여기저기를 헤매다가 하나의 장원을 발견했다.
 그 장원은 무명군도에서 가장 큰 섬의 중앙에 지어져 있었다.
 장원의 주인은 삼십오륙 세 가량의 매우 수려한 인물로 한눈에도 신태가 범상치 않았다.
 그 젊은 장주는 삼십 세 가량의 아름다운 미부인과 열 명 남짓한 식솔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 식솔들 가운데는 나이가 젊은 인물이 있는가 하면 노인도 있었고, 여인들도 섞여 있었다.
 뱃사람들은 그들이 젊은 장주를 마치 하늘 대하듯 공경하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또한 낮에는 섬을 개간하여 논밭을 일구었고, 밤에는 한자리에 모여 맛있는 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노래를 불렀다.
 뱃사람들은 그 화기애애한 광경과 섬의 환상 같은 아름다움에 넋을 잃다시피 했다.
 그 모든 광경은 지켜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야말로 그림에서나 보았던 무릉도원을 보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착각마저 불러일으킬 지경이었다.
 그래서 뱃사람들은 돌아갈 생각을 하는 대신 젊은 장주에게 자신들도 섬에 머물러 살게 해 달라고 간청하기에 이르렀다.
 젊은 장주는 기꺼이 그들을 받아들였을 뿐 아니라 크게 환영해 주었다.
 그런 일은 그 후에도 꾸준히 생겨 무명군도에는 조금씩 사람들이 늘어 갔다.
 결국 십여 년이 흐른 지금에 와서는 육십여 가호에 이백여 명이 모여 사는 하나의 섬마을이 형성되었다.
 어언 젊은 장주는 마흔다섯의 중년인이 되었으며, 섬마을 사람들에게 도주(島主)로 받들어졌다.
 그 사이 그의 슬하에는 귀여운 사내아이도 태어나 어느덧 열두 살의 총명한 소년으로 성장했다.
 무명군도의 사람들은 그러한 화복이 도주에게 덕망이 있기 때문이라고 입을 모아 칭송했다.
 사람들은 도주의 이름이 엽장천(葉長天)이라는 것만 알 뿐 그밖에 아는 것이 없었다. 아니,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는 누구에게나 자상하고 온화한 이 섬마을의 도주였으며, 사람들은 늘 그것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무명군도.
 시기도 없고, 질투도 없으며, 싸움도 없는 섬. 오직 평화로움만이 가득한 별천지의 섬.
 그래서인지 섬마을 사람들은 언제부터인가 자신들이 사는 이섬을 선유도(仙遊島)라 부르기 시작했다.
 또한 도주 엽장천이 기거하는 장원을 선유장(仙遊莊)이라 부르며 그를 살아 있는 신선처럼 공경해 마지않았다.
 그런데 폭풍이 밀려오는 것일까?
 어둠이 깔리면서 잔잔했던 바다는 사납게 용트림치며 광란하기 시작했다.
 먹장구름은 순식간에 하늘을 뒤덮었고, 연이어 수만 마리의 늑대가 울부짖는 듯 음산한 바람 소리가 울려 퍼졌다.
 꽈르르릉-!
 천둥 소리가 천지를 뒤흔들었다. 시퍼런 번갯줄기가 번쩍번쩍 암천을 찢어발기며 수평선 너머로 꼬리를 감추고, 파도는 수십 장을 치솟아 거대한 악마의 아가리를 연상케 했다.
 그렇다. 실로 무서운 대자연의 포효가 시작된 것이다.
 선유도, 온갖 기화이초와 수목으로 그림같이 단장된 이 그림 같은 군도에도 폭풍은 예외 없이 밀려들었다.
 콰아아- 번쩍-!
 이 곳은 도주 엽장천의 거처인 선유장.
 고대의 건축양식으로 한껏 우아하게 지어진 이 장원은 세 개의 전각과 하나의 별채로 이루어져 있었다.
 장원의 좌우에는 송림이 빽빽이 우거져 방풍림 구실을 했고, 뒤쪽으로는 깎아지른 듯한 암벽이 병풍처럼 하늘로 치솟아 있어 일견키에도 더할 나위 없는 명당자리였다.
 때는 막 술시(戌時)를 넘어 해시(亥時)로 접어드는 시각이었다.
 어느 한 실내, 일견키에도 서실(書室)임을 알 수 있었다.
 삼면 벽 전체는 서가로 꾸며졌고, 서가마다 수많은 고서가 빽빽이 들어차 있었다.
 한쪽 벽에는 고풍스런 산수화(山水畵)와 족자가 걸려 있어 한층 더 고아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지금 실내의 창가 탁자 앞에는 한 소년이 앉아 무엇인가를 열심히 만들고 있었다.
 대략 십이삼 세 가량 되었을까?
 불빛 아래 드러난 소년의 용모는 백옥을 깎아 다듬은 듯 더할 나위 없이 준수했다.
 수려한 윤곽에 얼음처럼 희고 투명한 살결, 고고하고 맑은 정기가 서린 넓은 이마와 우뚝 솟은 콧날, 맑고 청정한 눈에는 총명과 영기가 가득했으며 꽉 다문 입은 주사빛처럼 붉었다.
 이 소년이 바로 선유장 장주 엽장천의 하나뿐인 엽소군(葉小君)이었다.
 엽소군의 얼굴에는 지금 그 또래에 어울리는 짓궂고 장난스런 미소가 가득 어려 있었다.
 사사삭-!
 빠르게 움직이는 엽소군의 눈은 눈처럼 희고 깨끗해 보였다.
 그의 손 움직임은 시간이 흐르면서 더욱 빨라져 갔다.
 엽소군이 만들고 있는 것은 하나의 탈바가지였다. 그것은 실로 무시무시하게 생긴 마면탈이었다.
 엽소군의 손이 계속 움직임에 따라 그것은 점차 완연한 악마의 얼굴로 변해 갔다.
 대략 향 한 자루가 타 들어갈 시간이 지났을 때 엽소군은 비로소 조각칼을 손에서 내려놓았다. 마면탈이 모두 완성된 것이었다.
 엽소군은 총기 어린 눈을 반짝이며 마면탈을 자세히 살피더니 만족스런 웃음을 지었다.
 “후후··· 됐어.”
 엽소군은 마면탈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제는 유모가 나를 잘도 놀렸겠다? 이제 그 빚을 갚아 줘야지.”
 엽소군은 마면탈을 얼굴에 썼다. 그러자 그의 얼굴은 금세 소름끼치는 형상으로 변했다.
 마면탈! 그것은 금세라도 악마의 숨결을 토해 낼 듯 너무도 섬세하고 정교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겨우 십이 세 소년이 만들었다고 하기에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엽소군은 방 한 구석에 있는 동경 앞으로 다가가 자신의 모습을 비춰 보았다.
 그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무시무시한 형상이 동경 가득 비춰졌다.
 “후후··· 벽아주머니 간담이 아무리 크다 해도 이것을 보면 분명 입에 거품을 물고 까무러칠 거야.”
 엽소군은 만족한 음성으로 중얼거리더니 이내 마음을 굳힌 듯 몸을 돌렸다.
 “흥! 거품을 물고 쓰러져도 마땅하지. 아무리 유모라고 해도 감히 사내대장부인 나 소군을 그렇게 놀리다니······.”
 엽소군은 곧 문을 열더니 밖으로 나왔다.
 밖에는 무서운 폭풍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나뭇가지가 부러지는가 하면 풀뿌리가 송두리째 뽑혀 날아가고 있었다.
 소년 엽소군은 어릴 적부터 많은 폭풍을 경험한 탓에 이처럼 지독한 바람에도 그리 놀라지는 않았다.
 “까딱하다간 바람에 날려 갈 것 같구나.”
 엽소군은 어깨를 잔뜩 움츠리더니 쏜살같이 전면으로 뛰어갔다.
 어느 방문 앞, 엽소군은 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금 다가서고 있었다.
 이 방은 엽소군을 어릴 적부터 줄곧 도맡아 가르치다시피 한 유모 벽서월(碧西月)의 침소였다.
 엽소군은 조심스럽게 문 틈으로 귀를 대었다.
 방 안쪽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흘러 나오지 않았다.
 ‘흠, 됐어. 분위기가 조용할수록 갑자기 들이닥치면 더욱 놀라게 마련이지.’
 엽소군은 득의로운 웃음을 지으며 한 차례 깊게 심호흡을 했다. 이어 그는 방문을 냅다 걷어찼다.
 쾅-!
 방문이 부서질 듯 활짝 열렸다.
 엽소군은 두 손을 높이 쳐들고 괴상한 부르짖음을 토하며 안으로 뛰어들었다.
 “와아악!”
 까무러칠 듯 놀라 나자빠지는 유모 벽서월의 모습이 순간적으로 그의 뇌리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러나 다음 순간 엽소군은 어리둥절해진 채 그 자리에 멈춰 서고 말았다. 실내에는 희미한 황촉 불빛만이 흔들거리고 있을 뿐 텅 비어 있었던 것이다.
 엽소군은 크게 의아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어, 유모가 어디를 갔지?”
 그는 실망한 어조로 중얼거리며 마면탈을 벗어 들었다. 이어 실내를 두리번거리던 그의 시선이 어느 한 곳에서 딱 얼어붙었다.
 그의 몸이 부르르 떨린 것과 눈이 화등잔만하게 뜨여진 건 거의 동시였다.
 피!
 방바닥을 가로지르며 한 줄기 붉은 핏물이 흐르고 있지 않은가?
 그 피는 방 한쪽에 있는 욕실의 문 아래 틈에서 새어 나오고 있었다.
 “피··· 피가······.”
 형용할 수 없는 불안감이 엽소군의 전신을 휩쓸었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욕실 쪽으로 향했다.
 그는 욕실의 문을 열려고 했으나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곧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욕실 문을 왈칵 열었다.
 순간이었다.
 ‘헉!’
 
 
 2
 
 
 엽소군은 눈앞에 벌어져 있는 광경에 머릿속에서 벼락이 터지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욕조 속에는 마흔 살 가량의 여인이 머리만 내놓고 누워 있었다.
 목욕중에 변을 당한 듯, 그녀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이었다.
 이미 숨을 거둔 듯 눈이 허옇게 까뒤집혀 있고, 혀를 길게 베어 문 모습. 그것은 실로 끔찍한 광경이었다.
 창백하리만큼 흰 나신의 정수리에는 단검 한 자루가 자루만 남긴 채 깊숙이 꽂혀 있었다.
 단검의 손잡이에는 똬리를 튼 붉은 뱀의 형상이 살아 있는 듯 생생하게 조각되어 있어 섬뜩한 괴기를 풍겼다.
 똑- 또똑-!
 이마를 타고 목 아래로 흘러내리는 붉은 피는 욕조에 채워져 있는 물을 온통 붉게 물들여 놓고 말았다.
 툭-!
 그의 손에서 마면탈이 힘없이 떨어졌다.
 “유··· 유모······.”
 새파랗게 질린 그의 입술 새로 신음 같은 음성이 흘러 나왔다.
 욕조의 여인은 바로 엽소군의 유모인 벽서월이었다.
 엽소군은 악몽을 꾸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대체 어떻게 이런 끔찍한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엽소군은 주춤주춤 벽서월에게 다가섰다. 혹시 아직 숨이 붙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 아닌가.
 엽소군은 이를 악물고 용기를 내어 그녀의 완맥을 짚어 보았다. 그러나 벽서월의 손은 이미 얼음장처럼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주, 죽었어······.”
 머릿속이 텅 비어 버리는 듯한 공포감이 재차 무섭게 엽소군을 엄습했다.
 사람이 죽은 것을 보는 것도 처음이거니와 이렇듯 끔찍한 일은 한 번도 상상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엽소군은 몸을 홱 돌려 문 밖으로 뛰쳐나갔다.
 위우우웅- 우지끈-!
 폭풍은 점점 드세져 가고 있었다.
 엽소군은 하마터면 부러져 내리는 나무에 머리를 부딪칠 뻔했다.
 그는 건너편 쪽의 전각으로 미친 듯이 내달렸다. 그 전각은 아버지 엽장천과 어머니 임설정(林雪貞)이 거처하는 곳이었다.
 “아버지!”
 단숨에 당도하기가 무섭게 엽소군은 문을 열고 안으로 뛰어들었다.
 “아버지! 유, 유모가······.”
 엽소군의 말이 돌연 중도에서 끊겼다.
 무엇을 보았는지 그의 안색은 밀랍처럼 창백하게 변했다.
 그의 시선이 고정된 곳은 침상 위였다.
 거기에는 삼십 세 가량의 한 절세미부가 엎드린 자세로 처참하게 죽어 있었다.
 미부는 원래 엷은 단삼을 입고 있었으나 지금은 다 찢겨져 나가 나신에 가까웠다.
 눈이 부시도록 풍염하고 아름다운 그 몸은 실로 참혹하게 유린당해 있었다.
 속의 허연 뼈가 다 드러날 만큼 등 부위가 칼로 깊게 베어진 모습!
 아직도 채 식지 않은 피가 뭉클뭉클 그 몸에서 흘러 나와 침상 위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엽소군은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야말로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어머니!”
 엽소군은 미친 듯이 절규하며 침상으로 달려가 그녀의 몸을 마구 흔들었다.
 아아, 그토록 자상하고 아름다웠던 어머니는 이미 죽어 있었다.
 엄청난 슬픔과 분노가 엽소군의 전신을 휩쓸었다. 몸이 부들부들 경련을 일으키고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져 내렸다.
 어린 소년이 감당하기에 그것은 너무나도 큰 충격이었다.
 엽소군은 문득 아버지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머니, 잠시만··· 잠시만 기다리세요. 아버지를 모셔 오겠어요.”
 엽소군은 마치 살아 있는 어머니에게 말하는 것처럼 울먹이며 말했다.
 그는 이를 꽉 깨물고 미친 듯이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는 자신이 어느 곳으로 뛰고 있는지도 몰랐다. 이미 그에겐 방향 같은 것 따윈 생각할 여유가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순간이다.
 툭-!
 그의 발끝에 돌부리가 차였다. 엽소군의 몸은 중심을 잃고 사정없이 앞으로 곤두박질쳤다.
 꽈당-!
 코가 깨졌는지 비릿한 핏물이 흘러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엽소군은 아픈 것도 모르고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는 다시 달리려다 얼어붙은 듯 그 자리에서 몸이 굳어졌다.
 그의 시선은 전면에 있는 한 그루 거목을 향해 있었다.
 그 거목에는 턱수염을 짧게 기른 육순 가량의 황의노인이 기대어 서 있었다. 한 자루 장검이 그의 가슴을 꿰뚫고 나무에까지 박혀 있었던 것이다.
 시신의 두 눈은 무섭게 부릅뜨여진 상태였다.
 검, 황의노인을 죽인 그 장검 손잡이에도 한 마리 붉은 뱀이 살아 있는 듯 생생하게 조각되어 있었다.
 “노··· 노집사(魯執事)······.”
 엽소군은 망연한 신음성을 흘려 냈다.
 이름이 노평(魯平)이라는 것 외에 엽소군은 노집사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한 가지 안다면 노평이 평소 엽소군 자신을 마치 친손자처럼 끔찍이 귀여워해 주었다는 것뿐이었다.
 “아아······.”
 엽소군은 충격이 거듭되자 이제는 놀람보다도 죽은 사람들에 대한 동정이 왈칵 솟구침을 느꼈다.
 “이것은 꿈이야······.”
 엽소군은 머리를 세차게 도리질했다.
 설령 꿈이라 해도 이건 보통 악몽이 아니었다. 하물며 현실인 바에야 더 말해서 무엇 하겠는가?
 엽소군은 두 눈을 질끈 감고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아버지!”
 폭풍은 이제 빗줄기까지 뿌리기 시작했다.
 어두운 장공을 가르며 쏟아지듯 내리퍼붓는 폭우 속에서 엽소군은 미친 듯이 헤매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이 어린 소년을 공포에서 건져 내 주는 이가 없었다.
 “누구, 아무도 없어요?”
 꽈쾅-!
 뇌성과 번개가 천지를 찢어발기듯 작렬했다.
 엽소군의 시야에 활짝 열려 있는 장원의 대문이 들어왔다.
 그쪽으로 달리며 엽소군은 또 몇 구의 시신을 발견했다.
 그 중에는 그가 심심할 때마다 말벗이 되어 주던 정원지기 막노인도 있었고, 늘 잠자리를 보살펴 주던 취아주머니, 언제나 사람 좋게 껄껄 웃던 뚱보 아저씨도 예외 없이 끼어 있었다.
 ‘아아, 살아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이 집에는 지금 나 혼자만 살아 있을 뿐이야!’
 폭우를 헤치며 대문 밖을 나서는 엽소군의 뇌리에 번쩍 스친 생각이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또 다른 공포가 엽소군의 전신을 무섭게 치달았다.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방금 저녁 식사 때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사람들이 모두 죽어 있는 것이다.
 “헉헉······.”
 얼마나 뛰고 또 뛰었는지 모른다. 숨이 턱끝까지 차오를 무렵 멀리 몇 채의 가옥이 보였다.
 엽소군은 희미하게나마 몇 개의 그림자가 마을에서 어른거리는 것을 보았다.
 ‘사람이다!’
 엽소군은 젖먹던 기운까지 다해 그쪽으로 달렸다.
 한데, 채 열 걸음도 더 나아가기 전이었다.
 “으아악!”
 “아악!”
 처절한 비명이 마을 쪽에서 들려 오는 게 아닌가?
 엽소군은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진 채 우뚝 그 자리에서 얼어붙고 말았다.
 바로 그 때다. 칠흑처럼 어두운 숲 속에서 돌연 하나의 손이 불쑥 나타나 엽소군의 허리를 휘감았다.
 엽소군은 기겁하여 비명을 지르려고 했으나 그 순간 하나의 손이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거의 동시에 한 소리 나직한 음성이 급박하게 그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아버지다, 군아야!”
 “······!”
 엽소군은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는 급히 고개를 뒤로 젖혔다. 그러자 그의 동공 가득 인자스럽고도 근엄한 얼굴이 비쳐 들었다.
 힘차게 뻗쳐 올라간 눈썹에 부리부리한 눈매를 지닌 중년인.
 파르스름한 면도 자국이 유난히 깨끗하면서도 단아한 느낌을 주는 그의 풍도는 한눈에도 비범한 것이었다.
 엽소군의 눈에 금세 눈물이 가득 고였다.
 “아··· 아버지!”
 그렇다. 중년인은 바로 버려진 무인고도를 낙원으로 만들어 놓은 선유도주 엽장천이었다.
 이 순간 엽장천의 깨끗한 백의는 온통 피투성이로 얼룩져 있었다. 활화산처럼 무섭게 이글거리는 그의 두 눈에는 분노와 회한 등의 감정이 가득했다.
 엽소군은 부친의 손에 핏물이 뚝뚝 흐르는 한 자루 장검이 들려 있음을 보았다. 일견키에도 악전고투를 치른 흔적이 역력한 모습이었다.
 엽소군은 경황중에서도 부친의 그런 모습에 내심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파리 한 마리도 죽이기를 꺼려 하는 아버지가 칼을······.’
 엽소군의 내심을 아는지 모르는지 일순 아들을 주시하는 엽장천의 눈에 짙은 연민의 빛이 스쳐갔다. 그러나 그러한 빛은 나타날 때보다도 더욱 빠르게 사라졌다.
 엽장천은 침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자세한 것을 설명할 시간이 없다. 자, 가자.”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는 엽소군의 허리를 안고 허공으로 몸을 솟구쳤다.
 슉-!
 단숨에 오륙 장의 높이를 솟아오른 엽장천은 공중에 뜬 그대로 허리를 틀어 번개같이 앞으로 쏘아갔다. 그 절묘한 신법(身法)은 마치 독수리가 허공을 가르고 날아가는 것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다.
 엽소군은 그만 어안이 벙벙해지고 말았다.
 ‘아, 아버지가 허공을 날다니······.’
 그것은 엽소군으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
 어찌 인간이 이토록 빠르게 날아가듯 몸을 움직일 수 있단 말인가?
 그것도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의 아버지가 말이다.
 뺨을 스치는 날카로운 바람 소리를 들으며 엽소군은 눈을 꽉 내리감았다.
 엽장천의 모습은 장대처럼 쏟아져 내리는 폭우 속으로 빨려들 듯 사라졌다.
 
 
 3장 음모(陰謀)의 덫
 
 
 선유도의 남쪽 끝단.
 원래 이 곳에는 드넓은 백사장이 펼쳐져 있었으나 지금은 밀려드는 해일로 인해 몇몇 암초만이 보이고 있었다.
 어둠 속에 미친 듯이 휘몰아치는 광풍폭우와 광란하는 파도.
 그야말로 세상의 종말을 알리는 듯 무시무시한 밤이었다.
 이 때다.
 휙-!
 어둠을 뚫고 밤하늘의 유성이 떨어져 내리듯 하나의 그림자가 장내에 내려섰다.
 나타난 그림자는 절묘한 몸놀림으로 파도 가운데의 한 암초 위에 내려섰다. 그는 바로 아들 엽소군을 품에 안고 있는 선유도주 엽장천이었다.
 그는 초조한 기색으로 한참 동안 주위를 살폈다.
 “어찌 된 일인가? 그도 당했단 말인가?”
 엽장천의 묵직한 독백성이 파도 소리에 묻혀 사라지는 순간이다. 돌연 어디선가 급박한 외침 소리가 들려 왔다.
 “여깁니다, 도주님!”
 그 외침 소리는 마치 어둠을 밝히는 한 줄기 바람처럼 엽장천의 고막을 두드렸다.
 반사적으로 시야를 돌리는 엽장천의 시야에 먼저 들어온 건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었다.
 바다와 맞닿은 그 절벽 아래에서 희미하게나마 누군가 손을 흔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엽장천은 번개같이 그 곳으로 신형을 날렸다. 품에 엽소군을 안은 상황인데도 조금도 무리가 없는 동작이었다.
 중도에서 날카로운 암초 서넛을 징검다리처럼 절묘하게 밟고 휙휙 파도 위를 날더니, 단숨에 삼십여 장을 지나 목적지에 당도한다.
 “대산(大山), 무사했구나?”
 “제가 어디 시시하게 죽을 위인입니까?”
 호기 어린 음성과 함께 엽장천을 반기는 인물은 구 척 장신에 산처럼 우람한 체구를 지닌 거한이었다.
 구레나룻이 가득한 얼굴이며, 부리부리한 호목(虎目)이 일견키에도 위맹한 성품임을 엿보이게 했다.
 엽소군이 그를 알아보고 부친의 품에서 뛰어내리며 크게 반색을 했다.
 “대산 아저씨!”
 철대산(鐵大山).
 그는 원래 집채만한 바위를 통째로 뽑아 던지는 괴력(怪力)의 소유자로, 이 곳 선유도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철대산은 어린 엽소군과 유달리 친하게 지내 왔던 터였다.
 “많이 놀라셨겠습니다, 도련님?”
 철대산은 엽소군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엽소군의 눈에 다시 눈물이 글썽거렸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어. 유모도, 노집사도··· 다 죽었어.”
 “알고 있습니다, 도련님. 하지만 남아대장부는 이럴 때일수록 용기를 잃지 않는 법입니다.”
 철대산의 이 한 마디는 심중의 격동을 채 억제하지 못했음인지 나직하게 떨리고 있었다.
 엽소군은 이를 악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때 돌연 철대산의 거구가 중심을 잃고 휘청 흔들렸다. 엽소군은 그제야 철대산의 몸이 온통 피투성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대, 대산 아저씨··· 가슴이······.”
 “조금 다쳤을 뿐입니다.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철대산은 애써 환하게 웃어 보였다. 하지만 그것은 어린 엽소군이 보기에도 심한 고통을 감내하는 일그러진 웃음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철대산의 몸은 한마디로 숨을 쉬고 살아 있는 것이 신기할 지경이었다. 무슨 흉기에 베었는지 가슴은 온통 속뼈가 드러날 정도로 헤집어져 있었고, 옆구리와 두 다리에서도 쉴새없이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 때 엽장천이 묵직한 어조로 입을 떼었다.
 “대산, 얼마나 견딜 수 있겠느냐?”
 “서너 시간 정도는 문제없습니다.”
 철대산은 비록 태연하게 대답했으나 그 말은 곧 자신이 서너시간 후에 죽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엽장천은 일시 복잡한 신색이더니 재차 침착하게 물었다.
 “내가 지시한 것은 어찌 되었느냐?”
 “일곱 개의 섬을 모조리 뒤졌지만 배는 한 척도 남김없이 파괴되어 있었습니다.”
 “간악한 놈들, 실로 철저하게 함정을 파 놓았구나!”
 “해서, 급히 뗏목을 하나 만들었습니다만 저 성난 파도를 견딜 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철대산은 자신의 등뒤 쪽을 가리켰다.
 그 뒤쪽 절벽 아래에는 소나무 십여 그루를 칡덩굴로 엮어 만든 뗏목이 매어져 있었다.
 엽장천은 빠르게 뗏목을 대충 살피더니 위엄이 깃들인 음성으로 분부했다.
 “저 정도면 견딜 수 있을 것이다. 대산, 어서 군아를 데리고 이 곳에서 떠나라.”
 철대산의 얼굴에 일순 놀람의 빛이 가득 떠올랐다.
 그는 눈을 크게 뜨고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도주님께선··· 설마 떠나지 않고 이 곳에 그냥 머무르시겠단 말입니까?”
 “나는 아직 할일이 남아 있다.”
 “하지만 저는 중상을 입어 도련님을 끝까지 보호할 수가······.”
 “대산, 여기에서 동쪽으로 십 리 가량 곧장 나아가면 조그만 돌섬 하나가 있다. 우선 군아를 그 곳에까지만이라도 무사히 데려다 주기를 부탁한다.”
 엽장천의 이 한 마디는 철대산을 더욱 당혹으로 몰아넣었다.
 그는 도저히 자신이 저 무서운 파도 속을 뚫고 엽장천이 말한 돌섬까지 갈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뿐인가? 설령 천운으로 그 곳까지 당도한다고 해도 자신은 곧 몸에 입은 상처로 인해 죽을 몸이다.
 그렇다면 그 후에는 도대체 누가 엽소군을 보살핀단 말인가?
 ‘도련님의 목숨보다 중요한 일이 대체 무엇이길래, 도주님께선 이 곳에 남으시려 한단 말인가?’
 철대산은 그렇게 묻고 싶은 심정이 굴뚝 같았으나 꾹 눌러 참았다. 그는 엽장천이 한번 내뱉은 말은 절대 반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떨리는 어조로 이렇게 물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만약 거기에도 이미 놈들의 마수가 뻗어 있다면······.”
 “그렇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엽장천의 대답은 무정하게 느껴질 정도로 확고부동했다.
 철대산의 거구가 부르르 진동했다. 그는 곧 만면에 비장한 각오의 빛을 띤 채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이 대산의 숨이 붙어 있는 한, 무엇도 도련님을 어찌할 수 없을 것입니다.!”
 “고맙다, 대산.”
 엽장천의 두 눈에 언뜻 고통의 빛이 스쳤다. 그의 시선이 문득 아들 엽소군에게 향했다.
 이미 옆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모두 듣고 있던 엽소군은 안색이 창백하게 변해 있었다.
 “아버지······.”
 “군아야, 네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염려 마라. 이 아버지는 절대 쉽게 죽을 그런 사람이 아니다.”
 엽장천은 사랑하는 아들을 향해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소년 엽소군의 몸이 일순 격하게 떨렸다. 그는 눈물이 나오는 것을 참기 위해 입술을 꽉 깨물고 고개를 내리숙였다.
 엽장천의 온화하면서도 위엄 있는 음성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군아야, 이 아비는 네가 누구보다도 침착하고 영리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명심해서 듣거라.”
 엽소군은 대답 대신 고개를 힘있게 끄덕여 보이며 눈물 어린 눈으로 부친을 올려다보았다.
 “첫째, 지금부터 네 성은 엽가가 아닌 사마(司馬)씨라는 것을 명심해 두어라. 따라서 네 이름은 엽소군이 아닌 사마소군(司馬小君)이다.”
 ‘사마소군?’
 엽소군의 맑은 눈망울이 일순 의아함으로 가득 물들었다.
 엽장천은 그러한 아들의 얼굴을 은은한 정광이 서린 눈으로 응시하며 위엄 있게 말을 이어 갔다.
 “의아해 할 것 없다. 이 아비의 본래 성이 사마씨였으니까. 시간이 없어 자세한 이야기를 해 줄 수가 없는 게 안타깝구나.”
 엽장천은 여기서 잠시 말을 끊더니 품속에서 무엇인가를 꺼내 들었다.
 그것은 하나의 동전이었다. 이 동전은 기이하게도 하얀 빛깔을 띠고 있었으며, 다른 동전들처럼 가운데 구멍도 뚫려 있지 않았다.
 엽소군이 무심결에 그것을 받아 살피니, 동전 가운데 하나의 글씨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천(天)>
 엽장천은 아들이 동전을 받아 들자, 문득 복잡한 신색으로 폭풍우가 휘몰아치는 암천장공을 올려다보았다.
 “군아야, 만약 하늘의 도움으로 오늘의 액겁에서 벗어난다면 중원으로 가서 천마사로(天魔四老)라는 분들을 찾도록 해라. 그리고 그분들에게 그 동전을 보여 주면 너를 맡아 줄 것이다. 그 후의 일은 그분들이 시키는 대로 하면 된다. 단 천마사로 외에는 어떤 인물에게도 그 동전을 보여 줘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명심하거라. 만약 이 점을 망각한다면 너는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아버지······!”
 엽소군은 고개를 숙이고 소맷자락으로 눈물을 훔쳤다.
 그 때 돌연, 삐익 하는 날카로운 호각 소리가 섬 쪽에서 들려 왔다.
 연이어 몇몇 그림자들이 유령처럼 빠르게 엽장천들을 향해 날아오기 시작했다.
 엽소군은 몇 차례 눈을 깜박이다가 깜짝 놀랐다. 그들의 믿을 수 없도록 빠른 몸놀림도 그렇거니와 모두 아는 얼굴들이었기 때문이다.
 “아니? 저들은 공야노인과 황약사, 그리고 용씨 사형제가 아니예요?”
 순간, 엽장천의 두 눈에서 바위라도 꿰뚫을 듯한 무서운 신광이 뻗어 나왔다.
 “저들뿐만이 아니란다. 이 섬에 살고 있는 사람들 중 거의 태반이 지금 이 아비에게 칼을 겨누고 있다.”
 이 한 마디는 엽소군을 엄청난 충격과 놀라움 속으로 몰아넣기에 충분했다.
 그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몰려드는 마을 사람들과 부친의 얼굴을 번갈아 응시했다.
 “어, 어찌 그런 일이······?”
 “모든 것이 내 실수다. 놈들은 이미 나를 겨냥해 오래 전부터 완벽한 함정을 파고 있었는데, 나는 그러한 것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엽장천의 얼굴이 섬뜩하도록 무심하게 굳어졌다.
 소년 엽소군은 그처럼 무서운 부친의 표정을 난생 처음 보았다.
 그는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함정이라니요? 아버지가 저들에게 무슨 잘못이라도 저질렀나요?”
 “이 아비는 저들에게 아무런 잘못도 저지른 적이 없다. 그리고 저들 또한 나에게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다. 저들은 단지 누군가의 지시에 의해 움직이는 꼭두각시들일 뿐이다.”
 “누군가라면······?”
 엽소군이 재차 묻는 순간이었다.
 “시간이 없다. 어서 떠나도록 해라, 대산!”
 엽장천이 철대산을 향해 위엄이 담긴 어조로 무겁게 소리쳤다.
 철대산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그는 순식간에 이십여 장 앞까지 다가온 무리들을 힐끔 응시한 후 재빨리 엽소군의 몸을 안아들었다.
 엽소군은 몸부림치며 그의 팔에서 빠져 나오려 했다.
 “안 돼요! 아버지도 같이 가야 해요!”
 그러나 그 사이 철대산은 그의 몸을 껴안고 이미 뗏목 위에 몸을 날려 내려서고 있었다.
 엽장천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아들을 건너다보며 말했다.
 “걱정 말아라. 저들 정도로는 이 아비를 어찌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노리는 한 가지 물건이 있는 장소를 오직 나만이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 한 마디는 매우 의미심장한 것이었으나 엽소군은 깊이 음미해 볼 겨를이 없었다.
 “아버지!”
 그 순간 철대산이 뗏목에 연결된 밧줄을 풀고 몸을 우뚝 세웠다.
 엽장천과 그의 시선이 정면으로 부딪쳤다. 두 사람의 눈길은 마치 활화산의 불길처럼 뜨거웠다.
 “도주님······.”
 “부탁한다, 대산!”
 엽장천이 말했다.
 철대산은 힘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엽장천이 희미하게 웃는 모습을 보았다. 그도 따라 웃어보였으나 눈동자엔 눈물이 맺혀 있었다.
 꽈릉-!
 돌연, 굉렬한 굉음이 진동하며 뗏목이 쭉 밀려 나갔다. 엽장천이 파도를 향해 일 장을 쳐내어 뗏목을 밀어 낸 것이었다.
 엽소군이 부르짖었다.
 “아버지!”
 그러나 엽장천은 마치 천 년 석상인 양 우뚝 선 채 한 마디 말도 없이 멀어져 가는 뗏목을 잠시 응시하더니 느릿하게 돌아섰다.
 슉-!
 그의 신형이 다음 순간 몰려오는 무리들 쪽 허공으로 높이 솟아올랐다. 돌연 사위를 쩌렁쩌렁 울리는 웅후한 대갈성이 그의 입에서 터져 울렸다.
 “와하하하··· 이 놈들아! 나, 사마장천이 여기에 있다!”
 새하얀 섬광이 눈부시게 일어나며 무리들을 휘감아 갔다.
 몰려들던 무리들이 놀라 사위로 분분히 흩어졌다.
 무리 가운데 누군가 음산하게 소리쳤다.
 “포위해라!”
 엽소군은 부친의 모습을 더 이상 바라볼 수 없었다.
 뗏목이 점차 멀어지면서 병장기가 부딪치는 소리만 요란하게 들려 올 뿐 모든 것이 어둠 속에 묻혀 버렸다.
 “아버지!”
 엽소군은 미친 듯이 목메어 소리쳤다.
 그러나 그 외침 소리는 곧 광란하는 파도 소리에 삼켜지고 말았다.
 철대산은 행여 엽소군이 파도 속에 뛰어들세라 왼팔로 꽉 껴안았다.
 사력을 다해 나머지 오른팔로 뗏목을 저어 가는 그의 눈에도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4장 혈풍향(血風香)
 
 
 1
 
 
 세상에 불가능한 일은 많다.
 하늘과 땅을 바꿔 놓는 일이 그렇고, 바다를 흙으로 메워 놓는 일이 그러하며, 사내로 하여금 아이를 낳게 하는 일이 그러하다.
 어둠과 폭풍의 바다, 그것을 뚫고 이십 리 뱃길을 간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제아무리 철대산이 천부의 괴력을 지녔다고는 하나, 목숨이 경각에 달린 엄중한 중상의 몸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더더욱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철대산을 끝내 해내고야 말았다. 집채만한 파도더미에 몇 번이나 휩쓸릴 뻔한 위기를 극복하고 돌섬이라는 무인도에 당도한 것이다.
 그렇다. 생사를 도외시한 인간의 집념으로 해내지 못할 일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번쩍- 꽈르르-!
 이 조그만 돌섬에도 폭풍은 예외 없이 맹위를 떨치고 있었다.
 철대산은 거의 탈진상태로 뗏목에서 내려서며 주위를 살폈다.
 그의 얼굴에 문득 안도의 기색이 스쳤다. 사방 어디를 보아도 시커먼 바위들만 가득할 뿐 사람의 흔적이라고는 없었기 때문이다.
 “놈들의 마수가 여기까지는 미치지 않은 모양이군.”
 긴장이 풀린 탓인가? 철대산은 하늘이 빙글 도는 것을 느끼며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 때 의식을 잃고 있던 엽소군이 그의 품에서 가벼운 신음성과 함께 눈을 떴다.
 “대산 아저씨······.”
 “도련님, 정신을 차리셨군요?”
 “여기가 어디······?”
 말을 하다 말고 엽소군은 문득 입을 다물었다. 악몽 같은 기억들이 생생하게 떠올라 그는 비로소 여기가 어딘지 짐작한 것이다.
 그는 몸을 일으키다 말고 철대산의 안색이 지나치게 창백한 것을 발견했다.
 “대산 아저씨, 괜찮아요?”
 “허허··· 아직 괜찮··· 우욱!”
 철대산은 대답하다 말고 갑자기 울컥 한 모금의 선혈을 토해 냈다. 그것은 시커멓게 죽은 피였다.
 “대산 아저씨!”
 엽소군이 놀라 소리쳤다. 그러나 그는 다음 순간 어리둥절해지고 말았다. 철대산의 얼굴에 불그스레한 화색이 감도는 것을 본 것이다.
 철대산의 손끝이 그 순간 미미하게 떨렸다.
 그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갑자기 정신이 맑아지며 얼굴에 화색이 도는 것은 이른바 죽음 직전의 회광반조(回光返照) 현상이라는 것을. 그것은 마치 촛불이 꺼지기 직전, 더욱 밝은 빛을 뿜어 내는 이치와도 같은 것이다.
 하지만 철대산은 그러한 내색을 전혀 드러내지 않은 채 빙그레 웃어 보였다.
 “이제 괜찮아졌습니다, 도련님.”
 그러나 상황을 모르는 엽소군은 그 말을 그대로 믿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정말 다행이에요. 대산 아저씨마저 돌아가시면 어떡하나 하고 걱정했어요.”
 “헛헛··· 천하의 이 철대산이 겨우 이 정도로 쓰러진대서야 말이 안 되지요.”
 말은 비록 그렇게 했지만 그의 내심에는 형용할 수 없는 비감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어차피 나는 죽을 몸이다. 하지만 이런 풀 한 포기 없는 섬에 어찌 도련님을 혼자 두고 편안히 숨을 거둘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 설령 폭풍이 멎는다 해도 망망대해의 가운데 있는 이 섬을 벗어나기란 불가능하며, 그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철대산은 무슨 수를 쓰든지 엽소군이 살아남을 수 있는 대책을 만들어 두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없다.’
 철대산은 풀먹인 솜처럼 축 늘어진 몸을 간신히 일으켰다.
 몸 속의 피도 거의 다 메마른 듯 가슴의 상처 부위에는 더 이상 피도 흘러 나오지 않았다.
 그는 휘청거리며 엽소군의 손을 잡았다.
 “도련님, 여기는 위험합니다. 가능한 높은 곳으로 가 있어야 파도에 휩쓸리지 않습니다.”
 엽소군은 고개를 끄덕이다 말고 흠칫 놀랐다. 마치 얼음장을 만진 듯 철대산의 손이 차가웠던 것이다.
 “대, 대산 아저씨! 손이 왜 이렇게······.”
 엽소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철대산이 돌연 안색을 돌처럼 딱딱하게 굳히며 재빨리 그의 몸을 보호하듯 껴안았다.
 엽소군이 어리둥절하여 입을 열려는 순간이다.
 철대산의 입에서 잔뜩 긴장이 담긴 외침성이 흘러 나왔다.
 “누구냐?”
 “······!”
 엽소군은 그제야 심상치 않음을 깨닫고 힐끔 뒤를 돌아다보았다. 그의 눈이 곧 크게 뜨여졌다.
 오륙 장 앞, 어느 새 나타났는지 한 사람이 유령처럼 우뚝 서 있었다.
 철대산은 그가 가까이 접근하는 것을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어둠의 한 귀퉁이에서 솟아난 양 묵묵히 서 있는 그림자.
 그는 일신에 먹물처럼 검은 흑의장포를 걸쳤고, 얼굴 또한 깊이 눌러 쓴 검은 죽립에 가려져 있어 용모조차 알 수 없었다.
 왼손에는 검은 광채가 번들거리는 묵장(墨杖)을 들었는데, 그 괴이한 형태로 보아 한눈에도 예사로운 병기가 아닐 성싶었다.
 그러나 정작 철대산이 놀란 건 그 괴이한 겉모습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상대방에게서 알 수 없는 위압감과 사괴한 기운을 느꼈다. 그것은 철대산이 일찍이 느껴 보지 못한 강렬한 기운이었다.
 ‘고수다!’
 철대산은 가슴에 찬바람이 이는 느낌이었다.
 설마하니 이 곳에까지 놈들의 마수가 뻗쳤단 말인가?
 철대산은 절망감을 느꼈다. 더욱이 몸조차도 가누기 어려운 자신을 생각하자 눈앞이 깜깜할 지경이었다.
 “누구냐고 물었소?”
 “······.”
 “귀하는 귀머거리요?”
 “······.”
 어찌 된 영문인지 흑의죽립인은 돌부처처럼 미동도 않고 선 채 전혀 대답이 없었다.
 철대산의 안색이 일시 복잡하게 변화를 일으켰다.
 ‘이 인물에게서는 살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그것은 거의 본능적인 직감이었다. 문득 철대산은 상대가 선유도의 피바람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내게 용건이 없다면 이만 실례하겠소.”
 철대산은 그러한 추측을 시험하기라도 하듯 휘청거리는 걸음걸이로 몸을 돌려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 순간 그는 갑자기 시야가 흐릿해지며 견딜 수 없도록 잠이 쏟아지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죽음을 예고하는 잠이었다.
 철대산은 여기서 쓰러지면 영원히 깨어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며 의식을 회복하려 했다.
 “대산 아저씨!”
 “······!”
 철대산은 몸을 부르르 떨더니 무슨 말인가 하려다 말고 고개를 돌려 흑의죽립인을 바라보았다.
 흑의죽립인은 여전히 처음의 자세 그대로 그 자리에 미동도 않고 서 있었다. 그는 마치 애초부터 철대산이 몇 걸음 못 가 쓰러지리라는 것을 예측이나 한 것처럼 보였다.
 철대산의 얼굴근육이 파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나··· 철모는··· 귀하가 누군지··· 모르오. 그렇지만 한 가지 부탁하오.”
 “······.”
 “만약 귀하에게 우리 도련님을··· 죽일 마음이 있다면 고통 없이 단칼에 죽여 주시고··· 그렇지 않다면 우리 도련님을 중원까지 데려다··· 주시오. 만약 후자를 택하여 주신다면··· 죽어서도 그 은혜를······.”
 여기까지 간신히 말한 철대산은 갑자기 목에서 끄르륵 하는 소리를 내더니 앞으로 푹 고꾸라졌다.
 “아저씨!”
 엽소군의 안색이 창백해진 채 그의 몸을 흔들었다.
 그러나 철대산은 다시는 움직일 줄을 몰랐다. 절명(絶命)이었다.
 엽소군은 잠시 넋 나간 얼굴이더니 곧 대성통곡을 했다.
 울지 않으려 했으나 이제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그것은 아버지 엽장천과 헤어질 때부터 억눌러 왔던 울음이었다.
 엽소군은 정말 서럽게 슬피 울었다. 그것은 철대산의 죽음을 슬퍼하는 울음이기도 했지만, 자신의 충격과 고통을 달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엽소군은 곧 울음을 그쳐야 했다. 흑의죽립인이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를 들은 것이다.
 ‘이제 나도 곧 죽을지 모르겠구나!’
 엽소군은 전신의 피가 싸늘하게 식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그는 도망치지는 않았다.
 그는 흑의죽립인이 예사로운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짐작하고 있었다. 자신은 달아날래야 달아날 수도 없고, 더욱이 여기에는 달아날 장소조차 없는 것이다.
 이윽고 발자국 소리가 엽소군의 등뒤에서 멈추어졌다.
 엽소군은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지는 것을 느끼며 두 눈을 내리감았다.
 ‘모든 게 끝났구나······.’
 바로 그 순간이었다. 흑의죽립인이 그의 어깨를 가볍게 어루만지며 부드럽게 묻는 게 아닌가?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것은 바람 소리처럼 스산하면서도 위엄이 깃들인 음성이었다.
 엽소군은 전신을 흠칫 떨었다. 그는 반사적으로 눈을 뜨고 흑의죽립인을 올려다보았다.
 “아저씨는··· 나를 죽이지 않을 건가요?”
 “나는 너를 죽일 아무런 이유도 없는 사람이다.”
 “소군··· 제 이름은 소군이에요.”
 엽소군은 망연히 그를 올려다보며 대답했다.
 흑의죽립인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독백처럼 말했다.
 “성(姓)은 사마씨겠군.”
 이 나직한 한 마디는 엽소군을 재차 기이한 충격 속으로 몰아넣었다.
 그는 부친 엽장천이 자신과 헤어질 때 남겼던 말을 퍼뜩 뇌리에 떠올렸다.
 엽장천도 그에게 본래의 성(姓)이 사마씨라고 했지 않은가?
 ‘도대체 아버지는 왜 성을 바꾸고 살아오셨을까? 그리고 이 사람은 아버지를 어떻게 알고 있을까?’
 갑자기 구름 같은 의혹이 밀려와 그를 휘감았다.
 그렇다. 상황으로 보아 그의 성(姓)이 사마(司馬)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으며, 여기에는 깊은 내막이 있을 것 같았다.
 ‘그렇구나. 내 이름은 이제부터 사마소군이다. 나는 그 사실을 인정해야만 한다.’
 엽소군··· 아니, 사마소군은 갑자기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내색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아저씨는 제 아버지를 잘 알고 있는 것 같군요.”
 “방금 죽은 이 인물은 중원팔의(中原八義) 가운데 한 명인 대력패왕(大力覇王) 철대산이다. 본래 중원팔의가 모시는 인물은 백의성검(白衣聖劍) 사마장천임을 세상이 다 아는데··· 어찌 내가 모르겠느냐?”
 ‘중원팔의는 뭐고, 백의성검은 또 뭐란 말인가?’
 사마소군은 갈수록 어리둥절한 느낌이었다.
 그는 그제야 부친이 강호에서 명성을 날리던 무림고수였음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마음의 평정을 찾은 사마소군은 곧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나는 이제야 아저씨가 내게 아무런 악의도 없으며, 우리 섬마을을 휩쓴 액겁과도 관련이 없음을 알겠어요.”
 “······.”
 “아저씨는··· 누구세요?”
 “······.”
 흑의죽립인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사마소군을 응시한 채 잠시 침묵하더니 이윽고 느릿하게 입을 떼었다.
 “말해 줘도 너는 모를 것이다. 하지만 정 알고 싶다면 말해 주겠다. 내 이름은 석우생(石羽生)이라고 한다.”
 “석우생··· 좋은 이름이군요. 그런데 아저씨는 무슨 일로 이런 외딴 섬에 오게 됐지요?”
 이 질문은 어찌 생각하면 매우 당돌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 질문이 사마소군의 입을 통해 나오자, 전혀 거부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은 사마소군의 해맑은 두 눈과 넓은 이마에서 순진무구한 대범함이 발산되기 때문이었다.
 흑의죽립인 석우생은 그러한 사마소군을 잠시 내려다보더니 느릿하게 대답했다.
 “나는 본래 한 달 전부터 이 곳에 살고 있었다. 그것은 한 가지 조사할 일이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알려고 하지 마라.”
 “······!”
 사마소군은 그 말을 듣고 가볍게 얼굴을 붉혔다.
 “미안해요. 제가 너무 많은 질문을 한 것 같군요.”
 “그 말은 틀렸다. 너는 많이 묻지 않았다. 내가 지금 대답을 하지 않는 것은 지금 우리 주위에 엿듣는 쥐새끼들이 있기 때문이다.”
 ‘쥐새끼들이라고?’
 사마소군의 뇌리에 순간, 번뜩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그는 바싹 긴장한 얼굴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주위에는 쥐새끼는 고사하고 개미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2
 
 
 폭풍도 어느 샌가 잠잠해져 언제 그랬냐는 듯 사방에는 무거운 정적만이 깔려 있었고, 가끔씩 빗방울이 마지막 몸부림처럼 떨어져 내릴 뿐이다.
 검푸른 파도는 아직도 높게 일렁이고 있었으나 동녘 하늘에서는 서서히 여명이 밝아 오고 있었다.
 여기저기 검은 바위와 암초들만이 음산한 괴기를 풍기며 간밤의 끔찍한 악몽을 되새겨 주는 듯했다.
 사마소군은 갑자기 알 수 없는 슬픔이 조수처럼 밀려드는 것을 느꼈다.
 그는 방금 전 석우생이 한 말은 어느 새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 때였다. 석우생이 손을 뻗어 사마소군의 어깨를 감싸안더니, 오른쪽 방향을 향해 차가운 음성을 흘려 냈다.
 “어느 방면의 쥐새끼들인지는 모르겠으나, 오래 살고 싶으면 어서 빨리 이 곳에서 사라지는 게 좋을 것이다.”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휙- 휘익-!
 주위의 크고 작은 바위들 틈에서 연기가 솟아오르듯 일곱 그림자가 나타나더니,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석우생과 사마소군을 포위했다.
 그러나 석우생은 조금도 흔들림 없이 그들을 차례로 쓸어 보았다.
 그들 칠 인(人)은 모두 일신에 핏빛처럼 붉은 홍의를 입고 있었다.
 두 눈만을 제외하고는 얼굴까지도 붉은 복면으로 가리고 있어 실로 음산하기 짝이 없는 모습들이었다.
 사마소군은 비로소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깨닫고 자신도 모르게 석우생의 팔을 힘껏 붙들었다.
 ‘저 사람들의 눈빛은 너무도 독살스럽구나! 아마 유모에게 들었던 늑대들의 피에 주린 눈빛이 저와 같을 것이다.’
 그런 그의 내심을 헤아린 듯 석우생이 담담하게 말했다.
 “아이야, 조금도 무서워할 것 없다. 그래 봐야 저들은 여전히 쥐새끼들일 뿐이니까.”
 그 때 일곱 복면인들 가운데 한 인물이 앞으로 나서며 살기 어린 음성을 발했다.
 “행색을 보아하니 네가 예사롭지 않다는 걸 알겠다. 그러나 네가 진정 목숨을 부지하고 싶다면 이 어른의 말을 잘 들어라.”
 “귀를 씻고 경청하겠으니, 어서 말해 보게나.”
 “그 아이를 이리 내놓고 어서 이 곳을 떠나거라.”
 “그 두 가지를 다 들어 줄 수는 없지만 한 가지는 들어 줄 수 있네.”
 석우생은 거의 알아들을 수 없을 만큼 나직하게 웃더니,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이 아이는 내 물건도 아니니 내가 내놓을 처지가 못 되고, 내가 이 곳을 떠나도록 하겠다.”
 “흐흐··· 그것도 괜찮겠지.”
 우두머리인 듯한 홍의복면인은 음산하게 괴소를 지으며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석우생은 손을 들어올리더니 죽립을 더욱 깊이 눌러 썼다.
 “하지만 나는 떠나기 전에 한 가지 처리할 일이 있는데, 그대는 아량을 베풀어 편리를 봐줘야 될 걸세.”
 “빌어먹을, 그게 무엇이냐?”
 홍의복면인은 귀찮다는 듯이 냉막성으로 물었다.
 석우생은 대답 대신 문득 사마소군을 내려다보았다.
 “아이야, 너는 알겠느냐?”
 느닷없는 이 질문에 사마소군은 움찔했으나, 그 순간 번개같이 뇌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다.
 “제 짐작이 맞을지 모르지만··· 아마 쥐새끼들을 잡는 일이겠지요.”
 “호오! 바로 맞추었다.”
 석우생은 사마소군의 침착한 대답에 나직한 탄성을 발하더니 재차 물었다.
 “아이야, 너는 그 쥐새끼들이 어디에 있는지도 알겠구나?”
 “그 쥐새끼들은 정확히 일곱 마리로, 아저씨 앞에 있답니다.”
 사마소군은 빙긋이 웃었다. 그의 대답은 너무나 태연하고 여유만만해서 석우생은 정말로 놀라고 말았다.
 ‘이 아이는 매우 영리하구나. 더욱이 굳은 심성을 지녔으며, 용기와 담력 또한 보통이 아니다.’
 순간적으로 그의 뇌리를 스친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생각 이전에 그의 입에서는 호탕한 웃음소리가 흘러 나오고 있었다.
 “핫핫핫··· 네 말은 조금도 틀림이 없다. 그러면 이 아저씨는 지금부터 쥐새끼들을 없애 보겠다.”
 석우생의 이 웃음소리는 듣는 사람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 주는 기이한 마력이 있었다.
 사마소군은 그에 대한 인상이 갑자기 달라지는 것을 느꼈다.
 원래 석우생에게서는 잿빛 하늘처럼 음울하고 우울한 기운이 느껴졌으나 웃음을 터뜨리는 순간만은 청명한 가을의 햇살 어린 하늘처럼 환해지는 것이다.
 사마소군도 따라서 웃었다. 그러나 이 웃음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홍의복면인이 솟구치는 분노를 주체하지 못한 듯 몸을 부르르 떨더니 수중의 검을 번쩍 뽑아 든 것이다.
 “어리석은 놈! 네 목이 얼마나 질기고 단단한지 시험해 봐야겠다!”
 연달아 나머지 여섯 홍의복면인들도 일제히 검을 뽑아 들었다.
 숨막힐 듯한 살기의 소용돌이가 장내를 휩쓸었다.
 “죽여라!”
 냉혹한 일갈이 울려 퍼졌다. 우측의 한 홍의복면인이 석우생의 가슴을 노리고 득달같이 덮쳐 들었다.
 그 기세는 벼락과도 같아 눈 깜짝하기도 전에 삼 검(三劍)을 발출했다.
 파파팟-!
 그 검광은 지독하리만큼 빨라, 일순간에 석우생의 전후좌우를 차단하며 조여 들었다.
 “삼십육식(三十六式) 단혼검법(斷魂劍法)? 이제 보니 너희들은 음산(陰山) 유령곡의 유령칠괴(幽靈七怪)였구나?”
 석우생의 어깨가 가볍게 진동했다.
 공격해 오던 홍의복면인은 석우생이 피할 생각조차 않고 놀란 듯 물어 오자, 잔혹한 냉소를 터뜨렸다.
 “흐흐··· 너는 너무 늦게 알았······.”
 그의 말과 동작이 돌연 뚝 끊겼다. 어찌 된 판인지 석우생은 어느 새 유령처럼 옆으로 비켜나 있고, 자신의 검은 애꿎은 허공만 베고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뒤······!’
 그가 대경실색하여 풍차급전(風車急轉)의 신법으로 빙글 돌아서는 순간이다. 그의 시야에 괴이하게 구부러진 손가락 세 개가 자신의 정수리를 향하여 쏘아져 오는 것이 보였다.
 “헉!”
 피해야 한다고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그는 미간이 뜨거운 인두로 지진 듯 화끈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퍼억-!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그는 즉사했다.
 두개골이 산산이 박살난 채 검을 떨어뜨리고 쓰러지는 시신의 모습이 나머지 여섯 사람의 눈에 비쳤다.
 그것은 너무나 창졸간에 벌어진 광경이었다.
 여섯 홍의복면인들은 일시에 넋을 잃었다. 그리고 그 짧은 순간, 석우생이 땅에 떨어지는 동료의 검자루를 절묘하게 발끝으로 차올리는 것을 본 인물은 아무도 없었다.
 슈우욱-!
 유성처럼 퉁겨 날아간 그 검은 쏜살같이 또 한 명의 목을 관통했다.
 “으아악-!”
 엄청난 경악과 불신에 담긴 비명성이 울려 퍼졌다.
 목덜미에 검이 꿰어진 그 몸뚱어리는 허공으로 붕 떠오르며 나가떨어졌다.
 “······!”
 나머지 오 인(人)은 그대로 몸이 얼어붙고 말았다.
 그들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뜨여졌다.
 그들은 창졸간에 벌어진 이 상황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심지어 그들은 석우생이 무슨 수법을 펼쳐 자신의 동료들을 죽였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석우생은 그들이 생각을 굴릴 여유조차 주지 않았다. 그의 손가락이 어느 새 다시 괴이하게 오므라져 섬광처럼 앞으로 쏘아져 나간 것이다.
 그 찰나의 순간, 비로소 그 수법을 알아본 듯 누군가의 입에서 경악성이 터졌다.
 “이, 이제 보니 저것은 혈견휴천마혈선지(血見休天魔血線指)가 분명하다!”
 그 외침을 듣자, 모두가 눈빛이 사색이 된 채 급급히 몸을 날려 피하려 했다. 그러나 이미 때는 너무나 늦고 말았다.
 연달아 살과 뼈가 터지는 섬뜩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퍼퍼퍽-!
 “으아악!”
 “컥-!”
 삽시간에 네 명이 썩은 짚단처럼 쓰러지듯 차례로 고꾸라져 갔다. 그들은 모두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나뒹굴었는데, 신기하리만큼 그 동작이 똑같았다.
 그들의 미간에서 뿜어져 나오는 네 줄기 피둥지가 둥근 호선을 그리며 땅바닥으로 이어졌다.
 이제 단 한 명만이 남았다. 그러나 그는 말 그대로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석우생은 원래 서 있던 자리에 솜털처럼 가볍게 내려섰다. 그러한 그의 동작은 그야말로 호흡 한 점 흐트러짐이 없었다.
 지켜보던 사마소군은 그가 마치 처음부터 움직이지 않았던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킬 정도였다.
 ‘세상에······.’
 사마소군은 이처럼 놀라운 광경은 난생 처음 보는지라 무서움 보다도 신기함이 앞섰다. 석우생의 눈부신 동작과 기괴한 솜씨, 사마소군은 한바탕 환상을 본 듯했던 것이다.
 이 때 홍의복면인의 공포에 찌든 음성이 울려 퍼졌다.
 “혀··· 혈풍향(血風香)! 귀하는 과연 혈풍향이었구나!”
 “너무 늦게 알았다, 너는.”
 석우생의 무심한 대답이었다. 그 음성은 매우 나직해서 차라리 부드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러나 홍의복면인의 귀에는 그것이 마치 악마의 속삭임처럼 크게 들렸다. 그는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석우생의 입에서 들릴 듯 말 듯한 희미한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유령곡의 인물들은 후퇴를 모른다고 들었는데, 이제 보니 그런 것만도 아니군.”
 “우, 우리 유령곡과 귀하는 아무런 원한도 없는데 어찌 이리 잔혹할 수가······.”
 “나는 진작부터 유령곡과는 원한관계가 생기리라고 예측하고 있었다.”
 석우생은 느릿하게 걸음을 옮겨 그에게 다가서기 시작했다.
 홍의복면인은 전신을 부르르 떨더니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더 이상 후퇴해 봐야 소용 없음을 깨달은 것이다.
 순간, 그는 갑자기 짐승 같은 괴소를 터뜨렸다.
 “크하하핫··· 좋다! 하지만 네놈은 언젠가 반드시 이번 일에 끼여든 걸 뼈저리게 후회할 날이 있을 것이다!”
 이 저주에 찬 울부짖음이 끝나자, 그는 돌연 자신의 천령개를 손끝으로 찍어 갔다.
 퍽-!
 붉은 피가 튀었다.
 그는 비명도 없이 앞으로 고꾸라져 죽었다.
 석우생은 그가 자결하리라는 것을 이미 예측했던 듯 물끄러미 시신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나 사마소군은 다소 질리는 느낌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기묘한 표정으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석우생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 때 석우생이 그를 향해 조용히 몸을 돌려 다가왔다. 그는 사마소군의 어깨를 부드럽게 다독거렸다.
 “녀석, 뭘 그리 넋 나간 사람처럼 쳐다보느냐?”
 “혈풍향··· 그것이 아저씨의 별호인가요?”
 “그렇다. 너는 들어 본 적이 있느냐?”
 “없어요. 하지만······.”
 사마소군은 뜻 모를 한숨을 가볍게 내쉬며 말을 이었다.
 “단지 저들이 죽기 전 매우 놀라는 것으로 보아 무림계에서 상당히 무서운 인물이라는 걸 알겠어요.”
 “녀석······.”
 석우생은 때마침 밝아 오는 동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폭풍우는 완전히 가라앉았고 바다는 쥐죽은 듯 고요했다.
 석우생은 문득 몸을 돌려 해변가로 걷기 시작했다.
 “자, 이제 그만 떠나자.”
 “어디로 말인가요?”
 “물론, 중원이다.”
 “아······!”
 사마소군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그는 약간 상기된 얼굴을 한 채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왜··· 나를 도와 주는 것이지요?”
 “대력패왕 철대산은 너를 죽이거나, 아니면 중원(中原)으로 데려다 주기를 원했다. 나는 너를 죽일 이유가 없으니 중원에 데려갈 수밖에 없지 않느냐?”
 이 대답은 약간 괴상한 구석이 있었다. 또한 언뜻 들으면 무심하고 삭막하여 정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는 것 같았다. 그러나 사마소군은 이상하게도 마음이 훈훈해지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배도 없는데, 무슨 수로······?”
 “녀석, 내가 이 섬에 날아온 줄 아느냐?”
 “그럼 배가 있단 말인가요?”
 “물론이다.”
 석우생의 뒷모습이 바위 저편으로 사라졌다.
 사마소군의 두 눈에 맑은 광채가 반짝 빛났다.
 그는 곧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죽은 철대산을 돌아다보았다.
 그의 눈꼬리에 이슬이 맺혔다.
 “안녕, 아저씨는 내 마음 다 알 거야.”
 그 말을 끝으로 사마소군은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그의 모습은 곧 석우생이 향한 방향으로 사라졌다.
 장내는 쥐죽은 듯 고요한 태고의 적막 속에 가라앉았다.
 해변가의 파도 소리만이 간간이 불어 오는 해풍(海風)에 뒤섞여 죽은 시신들 위를 스쳐갔다.
 
 
 5장 이별(離別)
 
 
 1
 
 
 복우산(伏牛山).
 하남지방과 호북지방을 가로지르는 울창한 대산맥.
 멀리서 보면 굽이쳐 흐르는 산세가 마치 거대한 한 마리 소가 웅크리고 있는 듯하다 하여 달리 와우산(臥牛山)이라고도 불린다.
 그 복우산맥을 따라 꽤 깊숙이 들어가면 외방악(外方嶽)이라는 준령이 있는데, 그 험준함이 주위의 어느 산과도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하지만 이 외방악은 하남과 호북을 최단거리로 연결하는 가장 빠른 지름길이었다.
 자연 갈 길이 바쁜 과객들은 이 곳을 지나게 마련이었고, 그에 따라 이 곳에는 조그만 촌락이 형성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이 조그만 촌락을 주양관(朱陽關)이라 불렀다. 산세에 들러싸인 지형적 영향으로 늘 하늘이 자욱한 풍사(風沙)로 뒤덮여 태양이 언제나 붉게 보이기 때문이었다.
 때는 매서운 삭풍이 휘몰아치기 시작한 십일월 하순.
 잿빛으로 잔뜩 흐린 하늘에 초저녁 무렵부터 눈발이 희끗희끗 흩날리기 시작했다.
 어느 한순간 그 눈발을 맞으며 주양관 입구에 두 과객이 나타났다.
 그들은 검은 죽립을 눌러 쓰고 검은 옷차림에 신발까지도 온통 검은색으로 두른 흑의죽립인과 십이 세 가량으로 보이는 소년이었다.
 “아함······.”
 여인은 길게 기지개를 켜며 목젖이 다 보이도록 하품을 했다.
 의미 없는 눈물이 그녀의 눈가에 찔끔 묻어 나며 속눈썹을 적셨다.
 초점이 풀려 게슴츠레한 그 눈에는 권태와 졸음이 가득했다.
 일견 사십 줄에 접어든 나이를 말해 주듯 그녀는 눈가의 잔주름을 짙은 화장으로 감추고 있었다.
 몸에는 화려한 홍의를 입었는데, 용모로 말하자면 아름답지도 못나지도 않아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얼굴이었다.
 굳이 한 가지 특징을 찾는다면 젖가슴과 둔부가 유난히 크고 펑퍼짐하다는 점이리라.
 주양관의 촌민들은 이 여인을 장과부라고 불렀다.
 그녀는 주양관 끝 언저리에 위치한 낡고 허름한 주막의 주인이었다. 남편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그녀는 점원 하나 없이 장사를 꾸려 나갔다.
 평소 그녀는 입버릇처럼 자신이 젊었을 때는 낙양거리를 웃음하나로 휘어잡았던 명기(名妓) 중의 명기였다고 자랑삼아 떠들어대곤 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아무도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오히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녀가 틀림없이 어느 싸구려 홍등가 출신일 것이라고 믿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원래 장과부의 주막은 매우 작고 초라하여 일 년 내내 고작해야 열 명 남짓한 손님이 들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가끔 이웃 큰 성내(城內)의 마을로 나가 비싼 옷가지며 화장품 따위를 한 보따리씩 사 왔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녀가 틀림없이 모든 손님에게 몸을 팔았으리라는 추측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이 곳 주양관의 사람들은 그 누구도 장과부와 가까이 지내려 하지를 않았다.
 장과부, 그녀는 지금 삐걱거리는 낡은 의자에 앉아 창 밖을 망연히 응시하고 있었다.
 쌔애앵-!
 스산한 바람이 싸락눈을 흩뿌리며 창문을 두드렸다.
 장과부는 문득 추위를 느낀 듯 어깨를 추스르며 처량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아아, 벌써 눈이 내리다니··· 그렇다면 올해 장사도 끝났다는 말인데······.”
 제아무리 이 곳으로 통하는 길이 하남과 호북을 잇는 첩경이라 해도 눈이 내리면 그 누구든 고개를 넘을 엄두조차 못 내는 것이다.
 장과부는 갑자기 자신이 이 세상에서 가장 외롭고 불행한 여인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땅이 꺼져라 탄식했다.
 “휴우, 이런 날에는 누가 와도 돈 한 푼 안 받고 선심을 쓸 텐데.”
 그녀의 육체는 아직 뜨거웠다. 이렇게 비나 눈이 내리는 날은 어쩐지 더욱 그랬다.
 “쯧, 보아하니 누구 하나 걸려들기는 틀린 것 같구나. 일찌감치 문이나 닫는 게 낫겠다.”
 장과부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입구 쪽으로 고개를 돌린 순간이었다.
 ‘손님?’
 그녀의 두 눈이 크게 뜨여지며 가득 이채로 물들었다. 두 과객이 막 주막의 입구에 나타난 것이다.
 한 명은 온통 검은빛으로 전신을 두른 흑의인이었고, 또 한 명은 십이삼 세 가량의 소년이었다. 소년은 몸에 백의를 입고 있었으나 지금은 때에 찌들어 회의인지 흑의인지 아리송할 정도였다.
 오랜 여행에 지친 듯 소년의 얼굴에는 피로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그런데도 불구하고 소년의 용모는 더할 나위 없이 뛰어나고 영준해 보였다.
 그렇다. 이들은 바로 혈풍향 석우생과 사마소군이었다.
 ‘세상에, 어디서 저렇게 잘생긴 녀석이 나타났을까?’
 장과부의 시선은 사마소군의 얼굴에 못박힌 채 좀처럼 떨어질 줄을 몰랐다.
 이 때 그녀의 귓속으로 바람 소리처럼 스산하면서도 위엄 있는 음성이 파고들었다.
 “장사 안 하나?”
 장과부는 그제야 퍼뜩 상념에서 깨어났다.
 “내 정신 좀 봐. 손님을 밖에 세워 놓고 앉아만 있다니······.”
 말과 함께 그녀는 벌떡 일어나더니 쪼르르 달려나오며 호들갑스런 교소를 날렸다.
 “호호호··· 장사를 안 하다니요? 자, 그렇게 서 계시지 말고 추운데 어서 저 난롯가로 가 앉으세요.”
 반가워하는 폼이 마치 죽은 남편이라도 살아 돌아온 듯하다.
 이윽고 석우생과 사마소군이 자리를 잡고 앉자, 그녀는 재차 교태로운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뭘 드릴까요? 웬만한 건 다 준비가 되겠지만 보다시피 여기는 궁벽한 산촌이라······.”
 “아무 술이나 한 병 하고 요기할 만한 것을 갖다 주게.”
 “호호··· 알겠어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장과부는 풍만한 둔부를 한껏 교태롭게 살랑거리며 주방 쪽으로 향했다.
 그녀의 마음은 한껏 부풀어오르고 있었다.
 음산한 옷차림새와 냉막한 어투가 다소 꺼림칙하긴 했으나 그게 무슨 상관인가?
 그녀는 야릇한 상상으로 몸을 파르르 떨었다.
 이윽고 그녀는 주방 안으로 사라졌다.
 석우생은 고개를 약간 내리숙인 채 말이 없었다.
 사마소군도 묵묵히 창 밖을 응시하며 상념에 젖어 있었다. 그러다 문득 사마소군은 품속에서 두 가지 물건을 꺼내 들었다.
 그것은 조각칼로 보이는 조그만 소도와 하나의 목각상이었다.
 목각상은 조그만 아기 사슴의 형상이었다.
 이미 거의 만들어진 이 사슴 목각상은 마치 살아 있는 듯 정교하고 섬세했다.
 그런데 이 사슴 목각상은 어쩐지 가련하고 슬퍼 보였다.
 본래 사슴이란 가련하고 슬픈 동물이지만 한낱 목각상에서까지 이런 기운이 나타난다는 것은 기이한 일이었다. 그것은 어쩌면 목각상을 다듬는 사마소군의 마음 속에서 그러한 감정들이 응어리져 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스슥- 슥-!
 사마소군은 이윽고 조심스럽게 목각상을 다듬기 시작했다.
 무거운 정적 속으로 화롯불 타는 소리와 목각 다듬는 소리가 묘한 조화를 이루며 울려 퍼졌다.
 석우생은 그것을 보는지 안 보는지 여전히 돌부처처럼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이 때다. 장과부가 주방에서 모습을 나타내더니 술과 만두를 담은 쟁반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아까와는 달리 그녀의 상의 앞섶은 절반쯤 풀어 헤쳐져 있었다.
 허리를 숙이는 순간, 그녀의 풍만한 유방이 살짝 내비쳤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음식을 다 내려놓았는데도 불구하고 그 자세를 계속 유지한 채 요염함 웃음을 지었다.
 “다른 건 몰라도 술은 얼마든지 있으니 마음대로 드세요. 여기 꼬마 손님은 만두를······.”
 말하다 말고 그녀는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사마소군의 손에 들려진 사슴 목각상을 본 것이다.
 그녀는 눈을 둥그렇게 뜬 채 손뼉을 치며 탄성을 터뜨렸다.
 “어머나! 어쩌면 이렇게 훌륭한 솜씨를 지녔지요?”
 그러나 사마소군은 그녀의 말을 못 들은 듯 계속 하던 일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그러자 장과부는 사마소군의 옆에 바짝 다가앉더니 다시 한바탕 칭찬을 늘어놓은 후 은근한 어조로 물어 왔다.
 “어때요, 꼬마 손님? 만두값을 받지 않을 테니, 그 사슴 목각상을 내게 줄 수 없어요?”
 사마소군을 대답 대신 고개를 묵묵히 내저었다.
 장과부의 얼굴에 금세 실망의 빛이 떠올랐다.
 “안 돼요? 그럼 오늘밤······.”
 여기까지 말한 장과부는 문득 얼굴을 가볍게 붉히더니 급히 말머리를 돌렸다.
 “나도 참 주책없지. 음, 그럼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만두 한 접시를 더 주고 은자 세 닢을 얹어 주면.”
 사마소군은 그제야 고개를 들어 장과부를 응시했다.
 “나도 주고 싶지만 안 돼요.”
 “왜 안 된다는 거지요, 꼬마 도련님?”
 “이 사슴을 줄 사람은 이미 정해져 있거든요.”
 “저런, 그게 누구지요?”
 장과부가 서운한 듯 묻자, 사마소군은 대답 대신 시선을 들어 석우생을 가리켰다.
 장과부는 덩달아 석우생을 바라보더니 만면 가득 실망한 기색을 지었다.
 “그러니까··· 저분께 그것을 주려는 건가요?”
 사마소군은 대답 대신 고개를 가만히 끄덕였다.
 장과부는 때마침 말을 걸 좋은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다.
 “호호··· 그럼 저분께 부탁해 볼까?”
 장과부는 슬그머니 석우생의 옆자리에 앉더니, 의식적으로 몸을 그의 어깨에 기대며 콧소리 섞인 음성을 발했다.
 “이것 보세요, 손님. 저로 말할 것 같으면 한때 낙양에서도······.”
 “상대를 잘못 골랐다, 장음교(張陰敎).”
 느닷없이 석우생의 입에서 흘러 나온 한 마디가 그녀의 말을 중단시켰다.
 장과부의 눈이 순간, 경악을 담고 크게 뜨여졌다.
 그녀는 퉁기듯 그의 몸에서 떨어져 나와 자세를 바로잡더니 무섭게 석우생을 노려보았다. 이 일련의 동작은 너무도 민첩하고 빨라 마치 그녀가 창졸간에 딴 사람으로 변한 듯한 느낌을 주었다.
 “누구냐? 내 본명을 알고 있는 너는?”
 소름끼치는 살기가 담긴 음성이며 비수처럼 예리한 눈빛이다. 여차하면 당장이라도 살수를 펼쳐 낼 자세였다.
 상황을 지켜보던 사마소군은 그만 어리둥절해진 채 두 사람을 번갈아 응시했다.
 그는 방금 전만 해도 봄바람처럼 부드럽던 장과부가 갑자기 저렇게 무서운 여인으로 변한 까닭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석우생은 여전히 원래의 고요한 자세를 잃지 않은 채 느릿하게 술잔을 들어올리고 있었다.
 장과부의 눈꼬리가 순간, 매섭게 치켜 올라갔다.
 “흥! 보아하니 따끔한 맛을 봐야······.”
 말하다 말고 그녀는 돌연 무엇을 보았는지 안색이 핼쑥하게 변했다.
 그녀의 시선은 막 술병을 기울이는 석우생의 손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석우생의 손은 사내의 손치고는 지나치리만큼 희고 섬세한 편이었다. 그 손의 약지(藥指)에는 푸른 광택이 영롱한 벽록색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장과부를 얼어붙게 만든 것은 바로 그 반지 때문인 듯했다.
 그녀는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몸을 부르르 떨더니 황급히 허리를 굽히고 코가 땅에 닿을 듯 절했다.
 “처, 천녀 장음교··· 감히 석대야에게 불경죄를 지었습니다!”
 “됐다.”
 석우생은 그녀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술잔을 들어올리더니 냉막하게 말을 이었다.
 “네 방으로 들어가 있거라. 다시 부를 때까지······.”
 “아, 알겠습니다.”
 장과부는 감히 고개조차 들지 못하고 엉거주춤한 자세로 뒷걸음질치더니 황급히 안으로 사라졌다.
 장내가 갑자기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사마소군은 기이한 눈빛으로 석우생을 응시했으나 그는 묵묵히 술잔만을 기울일 뿐이다.
 석우생이 술을 마시는 모습은 약간 특이했다.
 보통 사람은 술을 마시려면 대개가 고개를 약간 뒤로 젖히게 마련이다. 그러나 석우생은 고개를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단지 눌러 쓴 죽립 밑으로 술잔을 넣었다 뺄 뿐이었다. 그것은 식사를 할 때도 마찬가지여서 사마소군은 아직까지도 그의 얼굴을 볼 기회가 없었다.
 ‘나는 이 아저씨와 근 석 달 간이나 같이 있었는데도 아는 게 하나도 없으니, 이처럼 우스운 일이 또 있을까?’
 사마소군은 참지 못하고 물었다.
 “도대체 아저씨는 어떤 분이시지요?”
 석우생은 기계적으로 술을 따르며 대꾸했다.
 “녀석, 너는 석 달 동안 똑같은 질문을 몇 번이나 한 줄 아느냐?”
 “아마 스무 번쯤······?”
 “그렇다면 이번에도 내 대답이 어떠리라는 것을 짐작하겠구나.”
 석우생의 담담한 대꾸에 사마소군은 실망의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이름은 석우생, 별호는 혈풍향. 그것 말인가요?”
 “또 있지 않느냐?”
 “어떤 한 가지 일을 조사하기 위해 중원천하를 뒤지고 다닌다는 것 말인가요?”
 “그렇다.”
 “휴······.”
 사마소군은 나직한 탄식성을 흘려 내며 그를 빤히 직시했다.
 
 
 2
 
 
 “옛 성현들의 말씀 중에 한 사람을 가장 확실히 알고 싶을 때는 그 사람과 여행을 같이 해 보면 된다는 것이 있지요. 그러나 그 말도 틀린 말이라는 것을 나는 이제야 알겠어요.”
 “그 말은 틀리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정도만 해도 너는 이미 나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석우생의 조용한 이 대답은 사마소군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그 말은 이해할 수가 없군요.”
 “만약 내가 다른 사람으로 변장을 한다 해도 너는 오래지 않아 알아 낼 것이다. 그것은 네가 석 달 동안이나 나와 같이 행동하면서 내 체취를 익혔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은 그럴 수가 없지.”
 “아······.”
 사마소군은 나직한 탄성을 발했다. 그러나 여전히 불만스러운 표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하지만 아저씨를 보면 볼수록 나는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더 많아지는 것 같으니 어쩌지요? 아저씨는 너무나 신비로운 사람이에요.”
 “뭐가 그리 신비하다는 것이냐?”
 “저는 처음에 아저씨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사람일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했어요. 물론 무뚝뚝한 성품 때문이지요. 그러나 다니다 보니 정반대였어요.”
 사마소군은 잠시 사이를 두고 차분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예상 외로 아저씨는 많은 사람을 알고 있었어요. 그리고 만나는 사람들마다 방금 전의 아줌마처럼 깍듯이 아저씨께 공경을 표시했어요. 그래서 저는 오늘에서야 비로소 한 가지 결론을 내렸어요.”
 “무슨 결론이지?”
 석우생은 술잔을 느릿하게 내려놓으며 물었다.
 사마소군은 잠시 망설이는 눈치였으나 이윽고 결심한 듯 또렷한 어조로 말했다.
 “만약 제 추측이 틀리지 않는다면 아저씨는 어떤 거대한 조직을 이끌어 나가는 분이에요. 그리고 그 조직은 중원의 어디를 가도 거미줄처럼 퍼져 있는 방대한 조직임이 분명해요. 제 추측이 틀렸나요?”
 “······!”
 막 술잔을 입으로 가져가려던 석우생의 손이 순간, 흠칫 정지되는 듯했다. 눌러 쓴 검은 죽립 아래로 희미하게 보이는 그의 아래턱이 화강암처럼 단단하게 보였다.
 그러나 그는 이내 기계적으로 술을 들이키며 억양 없는 음성을 흘려 냈다.
 “만두가 식고 있다. 어서 먹어라.”
 이 한 마디는 결국 사마소군으로 하여금 아무리 따져 물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었다.
 사마소군은 그만 씁쓸하게 웃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만두를 먹지 않고 잠시 손을 멈추었던 사슴 목각상을 다시 다듬기 시작했다.
 석우생의 나직하나 위엄 있는 음성이 재차 그의 귀를 두드렸다.
 “어서 먹으래도.”
 “시간이 없어요. 이제 마지막 손질만이 남았으니, 다 끝내고 먹겠어요.”
 “시간이 없다니··· 무슨 말이냐?”
 “며칠 전부터 느낀 생각이지만······.”
 사마소군은 계속 정성스럽게 사슴 목각을 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이제 아저씨와 같이 있을 날도 얼마 남지 않았을 게 분명해요. 그리고 이 산촌으로 들어오는 순간, 어쩌면 이 곳이 바로 아저씨와 제가 헤어지게 되는 장소일 거라는 예감이 들었어요.”
 “······!”
 술잔을 들어올리던 석우생의 손이 다시 흠칫 경직되었다.
 ‘이 녀석은 나이에 비해 너무나 영리하구나.’
 그는 한참 동안이나 사마소군을 뚫어지게 응시하더니 이윽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정확히 보았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뿐이다.”
 사마소군은 고개를 들고 빙긋 웃었다.
 “역시 내 예감이 적중했군요.”
 언제나처럼 사마소군의 웃음은 맑고 보기가 좋았다. 그러나 석우생은 그 웃음 뒤로 언뜻 스쳐가는 어두운 그림자를 놓치지 않았다.
 석우생은 습관처럼 손에 든 술잔을 매만지며 말했다.
 “원래 나는 너를 중원땅에 올려놓은 후 곧장 떠날 생각이었다. 하지만 왠지 네녀석을 매정하게 뿌리칠 수가 없었다.”
 “걱정 마세요. 설마하니 사내대장부가 제 몸 하나 지키지 못하겠어요?”
 사마소군은 짐짓 호기롭게 가슴을 펴 보였다.
 석우생은 그 모습을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그건 평범한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말이다. 내가 알기로 너는 어떤 자들에 의해 암암리에 항상 쫓기고 있다.”
 “······!”
 사마소군은 안색이 굳어지더니 우울한 빛을 띠었다. 선유도의 그 악몽 같았던 하룻밤이 주마등처럼 뇌리에 떠올랐던 것이다.
 석우생의 말대로 추적자들이 있었다면 바로 그 잔악한 무리들과 한패일 것이 분명했다.
 “내가 이 곳으로 널 데려온 것은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석우생은 천천히 술을 한 모금 마시더니 말을 이었다.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은 외방악의 산중에는 내가 잘 아는 한 사람이 살고 있다. 그는 비단 일신에 지닌 무공도 출중하거니와, 두뇌로 말하자면 천하에 그 짝을 찾아볼 수 없을 지경이다.”
 사마소군의 맑은 두 눈이 반짝 빛났다.
 “그러니까 저를 이 곳으로 데려온 것은 바로 저를 그분께 맡기려고······?”
 “그렇다. 하지만 그는 원래 성격이 괴팍한 사람이라 잘 될지 모르겠구나.”
 여기까지 말한 석우생은 문득 창 밖을 바라보았다.
 어느 새 밖에는 어둠이 깔려 먹물이라도 뿌려 놓은 듯 깜깜했다.
 사마소군은 그러한 그의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한 가지 물어도 돼요?”
 “무엇이냐?”
 “아저씨와 그분의 무예를 비교한다면 누가 더 높지요?”
 이것은 매우 천진스러운 질문이 아닐 수 없었다.
 석우생은 약간 뜻밖이었는지 얼른 대답을 하지 못했다.
 “글쎄다. 그와 한 번도 싸워 보지 못해 뭐라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절대 나의 아래는 아닐 것이다.”
 이 말이 떨어진 순간, 사마소군은 알 수 없는 흥분으로 가슴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하늘이 도운다면 나는 어쩌면 아저씨처럼 뛰어난 무공을 배우게 될지도 모르겠구나!’
 아버지 사마장천의 생사도 분명치 않고 자신은 추적자들에게 항상 생명의 위협을 당할지 모르는 처지에 있는 판이니, 무공은 반드시 배워 두어야 할 것 같았다.
 아니, 끔찍하게 죽은 어머니와 유모의 혼백을 위로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무공을 배워 복수를 해야만 하는 것이다.
 하지만 곧 석우생과 이별을 해야 한다는 사실에 생각이 미치자, 역시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아저씨······.”
 사마소군은 손에 들고 있던 사슴 목각을 그에게 내밀었다.
 어느 새 그것은 정교한 형상을 드러낸 채 모두 완성되어 있었다.
 “이걸 받으세요.”
 “왜 그것을 나에게 주려고 하지?”
 “아저씨는 제 목숨을 구해 준 생명의 은인일 뿐만 아니라 훌륭하신 분에게 데려다 주려 하고 있어요. 이건 비록 보잘것 없는 물건이지만 은혜를 감사드리는 의미에서 드리는 거예요.”
 “······.”
 석우생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입을 굳게 다문 채 사슴 목각상을 받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사마소군은 자신의 선물이 하잘것 없는 것이라 그러는 줄 알고 얼굴을 가볍게 붉혔다.
 “어서 받으세요. 지금은 가진 게 없어 이런 것밖에 드리지 못하지만 이 다음에는 훨씬 좋은 것을 드리겠어요.”
 사마소군의 이 말은 구구절절 진심이 깃들여 있을 뿐 아니라 추호의 가식도 없어 듣는 이를 감동케 하기에 충분했다.
 석우생은 비로소 술잔을 내려놓더니 목각상을 받아 들었다.
 “고맙다.”
 사마소군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활짝 웃었다.
 석우생은 사슴 목각상을 찬찬히 살펴보며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곧 조용한 음성을 흘려 냈다.
 “대신 나도 한 가지 부탁할 게 있다.”
 사마소군은 어깨를 활짝 펴며 힘있게 대꾸했다.
 “말씀하세요. 제가 할 수만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겠어요.”
 “물론 네가 할 수 있는 일이다.”
 “말씀해 보시라니까요.”
 “나는···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리 나이가 많지 않다. 또한 아직 혼인도 하지 않은 몸이다. 그러니 너는 이제부터 나를 아저씨라 부르지 말고 형이라고 부르도록 해라.”
 석우생의 이 한 마디는 너무도 뜻밖의 것이어서 사마소군은 그만 자신의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눈을 휘둥그래 뜬 채 말문조차 열지 못했다.
 석우생의 입에서 믿어지지 않을 만큼 부드러운 음성이 흘러 나온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왜? 내가 싫으냐?”
 “저, 정말 그렇게 불러도 되겠어요?”
 “그렇다. 나는 분명히 그렇게 말했다.”
 “······!”
 사마소군은 격동을 감추지 못하고 두 눈에 눈물을 글썽였다.
 그 눈물은 감격과 기쁨의 눈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곧 얼른 눈물을 훔치고는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석우생에게 공손히 절을 했다.
 “석형님께 아우 소군이 인사드립니다.”
 석우생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사마소군의 어깨를 잡고 일으켜 세웠다.
 “일어나거라, 소군. 마음 같아서는 이 형이 너에게 자세한 신세내력과 함께 얼굴을 보여 주고 싶다만은······.”
 여기까지 말한 석우생은 가벼운 탄식성을 발하더니 사마소군의 뺨을 어루만졌다.
 “때가 되면 모든 것을 알게 될 테니, 그 때까지는 괴상한 형을 두었다고만 생각하거라.”
 “그런 건 괜찮아요.”
 사마소군은 멋쩍게 웃어 보였다. 그러나 그의 눈가에는 여전히 눈물이 맺혀 있었다.
 석우생이 손을 움직여 그 눈물을 닦아 주었다.
 “울지 마라. 이 형은 여자처럼 눈물이나 흘리는 동생은 좋아하지 않는다.”
 사마소군은 활짝 웃어 보였다.
 석우생은 그를 자리에 앉게 하더니 자신도 뒤따라 앉으며 품속에서 뭔가를 꺼내 들었다.
 그것은 조그만 비단 보자기로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받거라, 소군.”
 “이건······?”
 “나중에 방에 들어가서 끌러 보거라.”
 “알겠어요.”
 사마소군은 의아함을 금치 못했으나 더 이상 묻지 않고 비단 보자기를 받아 들었다. 그러다 문득 그는 무엇을 생각했는지 안색을 딱딱하게 굳히며 석우생을 올려다보았다.
 “설마하니 형님께서는 지금······.”
 “그렇다. 나는 지금 떠나려 한다. 예고도 없이 불쑥 찾아가는 것보다는 이 형이 미리 그를 방문해 의사를 타진하는 게 좋을 것 같다.”
 “······!”
 “늦어도 닷새 후에 돌아오도록 하마. 그 동안 너는 여기에 머물러 있도록 해라.”
 “잘 알겠어요, 형님.”
 사마소군은 섭섭한 감이 없지는 않았으나 닷새 후에 다시 볼 수 있다는 말에 위안을 삼았다.
 그러자 석우생은 고개를 돌리더니 안쪽을 향해 나직한 일성을 흘려 냈다.
 “장음교.”
 순간이다. 방문을 왈칵 밀어젖히며 장과부가 후다닥 뛰어나왔다.
 그녀는 재빨리 허리를 숙이며 극히 공경스런 어투로 입을 떼었다.
 “부르셨습니까?”
 “내가 돌아올 때까지 아우를 잘 보살펴 주기를 바란다.”
 본래의 그 무심하면서도 냉막한 음성이었다.
 장과부의 허리가 더욱 깊숙이 숙여졌다.
 그녀는 이미 안에서 모든 말을 다 엿듣고 있었던지라 지체 없이 사마소군을 향해 공손히 말했다.
 “염려 마십시오. 제가 잘 보살펴 드리겠습니다.”
 “장음교, 내 아우에게 되도록 쓸데없는 말은 삼가는 게 좋다.”
 “명심하겠습니다.”
 장음교의 대답을 들으며 석우생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사마소군은 배웅을 하기 위해 따라 일어서려고 했으나, 석우생이 어깨를 가만히 누르는 바람에 다시 앉고 말았다.
 “이 형은 번거로운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다녀오마.”
 석우생은 곧 등을 돌리더니 문 밖으로 사라졌다.
 장과부는 여전히 허리를 숙인 자세로 선 채 그를 배웅했다.
 사마소군은 황급히 창가로 다가가 멀어져 가는 석우생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는 오늘따라 석우생의 뒷모습이 유난히 쓸쓸하고 고독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래, 형님 말대로야. 지난 석 달 동안 형님의 체취를 피부로 느낄 만큼 정이 들었나 보구나.’
 자욱한 눈보라와 어둠이 석우생의 모습을 금세 삼켜 버렸다.
 그러나 사마소군은 언제까지나 창가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6장 무도입문(武道入門)
 
 
 1
 
 
 방은 초라했지만 아늑하게 꾸며져 있었다. 거기다 장과부가 땀을 뻘뻘 흘리며 열심히 청소한 탓에 먼지 한 점 없이 깨끗했다. 오랜 여로에 지쳐 있던 사마소군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보금자리인 셈이었다.
 그러나 막상 잠자리에 들자, 생각과는 달리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이런 저런 생각에 사마소군은 몸을 뒤척이며 창문 밖으로 흩날리는 눈발을 응시했다.
 망연히 넋을 놓고 휘날리는 눈발을 바라다보니 문득 선유도에서의 처참했던 순간들이 다시 떠오르며 그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그 날 벌어진 일들은 하나같이 그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뿐이었다.
 짐작이 가는 점들이 있다 하더라도 안개 속을 헤매는 듯 애매모호할 뿐이었다.
 ‘아버님은 과연 무사하셨을까? 혹 돌아가신 건 아닐까? 그리고 아버님이 찾아가 보라고 당부한 천마사로라는 분들은 어떤 분들이실까?’
 생각하면 그 모든 의혹들을 어디서 풀어야 될지 막막할 뿐이었다.
 밤이 깊어 가면서 간간이 흩날리던 눈발은 폭설로 변하고, 바람도 세차게 변해 요란스럽게 창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사마소군의 생각은 불현듯 석우생에게로 옮겨졌다.
 그는 석우생의 신비로운 무공 실력을 잘 알고 있었지만 역시 걱정이 되었다.
 “쉬었다가 내일 가라고 할걸······.”
 생각해 보면 이제 천애고아나 다름없는 자신이었다. 그런 자신에게 석우생과 같은 의형(義兄)이 생긴 것은 그야말로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비록 석우생에 관해 아는 것이 별로 없는 그였으나, 온통 모든 관심이 그에게 쏠리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이 때 문득 사마소군은 석우생이 남기고 간 비단 보자기에 생각이 미쳤다.
 ‘내가 왜 그것을 잊고 있었을까?’
 사마소군은 맑은 두 눈에 이채를 떠올리며 침상의 머리맡 끝을 올려다보았다. 석우생이 준 조그만 보따리가 거기에 있었다.
 사마소군은 강한 호기심을 느끼며 그것을 집어 들었다.
 마침 잠도 안 오는 판이라 그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
 이에 비단 보자기를 조심스럽게 풀자, 속에서 몇 가지 물건이 나타났다.
 그것은 한 통의 서찰과 가지런히 차곡차곡 쌓인 몇 장의 양피지, 그리고 손가락 굵기의 검은 원통이었다.
 사마소군의 눈을 맨 처음 자극한 것은 바로 검은 광채가 번들거리는 검은 원통이었다.
 사마소군은 검은 원통을 집어 들다가 흠칫 놀랐다. 마치 얼음 덩어리를 만진 듯 섬뜩한 한기가 손끝에 전해졌던 것이다.
 ‘대체 이게 뭐지?’
 사마소군이 그 괴상한 물건을 이리저리 살피니, 아래쪽 겉부위에 두 개의 붉은 단추 같은 것이 박혀 있었다.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붉은 단추에 손가락을 갖다 대었다. 하지만 그는 단추를 누르지는 못했다. 왠지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등줄기를 엄습했던 것이다.
 “서찰부터 읽어 보는 게 좋겠구나.”
 사마소군은 검은 원통을 내려놓고 서찰을 펼쳐 들었다. 그러자 한 마리 흑룡(黑龍)이 춤추듯 수려한 필체로 쓰여진 글귀가 나타났다.
 <소군, 강호는 네 짐작보다 훨씬 험난한 곳이다. 언제 어디를 가도 자신의 몸 하나 정도는 지킬 수 있어야 된다.
 그러한 뜻에서 나는 한 가지 검법을 네가 혼자서라도 익힐 수 있도록 쉽게 풀어 적어 놓았다.
 너는 총명하니, 열심히 익힌다면 크게 깨닫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네 몸 하나만은 지킬 수 있으리라 본다.
 그리고 옆의 물건은 벽력신화통(霹靂神火筒)이라는 것으로, 무림에서는 천하삼대마병(天下三大魔兵) 중 하나로 평가될 만큼 무서운 암기통이니 조심스럽게 다루어라.
 유사시에 벽력신화통의 붉은 단추를 누르게 되면 방원 오륙 장 이내의 것은 모조리 잿더미로 변하게 된다.
 거듭 세 번까지 사용이 가능하다. 만약의 경우를 위해서 네게 남겨 두는 것이니, 최악의 사태가 아니면 절대 사용해선 안 될 것이다.>
 서찰의 내용은 그렇게 끝났다.
 사마소군은 눈을 휘둥그래 뜬 채 새삼 검은 원통을 내려다보았다.
 “세상에, 이 조그만 물건에 그토록 가공할 위력이 담겨져 있었단 말인가?”
 사마소군은 아무리 생각해도 믿어지지 않았으나 석우생의 말이니만큼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그는 조금 전 자신이 단추를 누르려고 했던 것을 상기하자, 등골에 소름끼치는 것을 느꼈다.
 “휴우, 하마터면 큰일날 뻔했구나.”
 사마소군은 서찰을 내려놓고 마지막으로 차곡차곡 쌓인 양피지 가운데 맨 윗장을 집어 들었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었다.
 <검(劍)이라는 것은 함부로 사용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며, 필승의 자신이 있을 때에만 뽑아야 한다. 이 도리를 무시하는 자는 결코 진정한 검객이라 말할 수 없다.>
 매우 간단한 글귀였으나 언뜻 쉬운 듯하면서도 잘 이해가 가지 않는 말이었다.
 사마소군은 거듭 읽고 생각한 후에 다음 장을 펼쳐 들었다.
 <나는 네게 두 가지 검법을 가르쳐 주고자 한다.
 첫째는 쾌(快)를 주맥으로 하는 검법이다.
 이 검법은 원래 단 일 초뿐인 것으로 단천검법(斷天劍法)이라 부른다.
 단천검법은 일 대 일의 승부에 적합하며 비록 단 일 초뿐이라고는 하나, 그 속에는 기기묘묘한 수백 가지 변화가 숨어 있다.
 두 번째 검법은 많은 적을 맞이했을 때 사용하는 세력 위주의 검법으로, 이름은 탈정삼검(奪精三劍)이라 한다.
 이 두 가지 검법만 완벽히 배운다면 강호의 어떤 고수라도 너를 함부로 어찌하지는 못할 것이다.>
 “단천검법, 탈정삼검······.”
 사마소군은 내심 흥분을 금치 못하며 독백처럼 중얼거렸다.
 그 무시무시한 이름만 보더라도 필시 보통 검법은 아닐 것이라고 사마소군은 추측했다. 비록 막연한 상상이지만 능히 그 엄청난 위력을 짐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제 사마소군은 다른 일은 까맣게 잊고 세 번째 양피지를 집어 들었다.
 거기에는 자세한 검법의 요결과 함께 익히는 방법, 자세 등이 그림과 더불어 상세히 적혀 있었다.
 맨 위에는 단천검법이라고 큰 글씨로 쓰여져 있고, 그 바로 밑에는 이러한 글이 보였다.
 <쾌검의 첫번째 조검은 부동(不動)의 자세에 있다.
 부동이라 함은 정(精), 기(氣), 신(神), 삼위일체의 상태를 일컬음이다.
 무릇 먹이를 노리는 맹수가 처음부터 득달같이 덤벼드는 법은 없다. 사납고 광폭한 맹수일수록 일단 먹이를 눈앞에 두면 더욱 침착하고 긴장하는 법이다.
 봄바람처럼 느리고 부드럽게, 그리고 조심스럽고 조용하게 상대방에게 다가가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덮쳐 일격에 숨통을 끊어 놓는 것이다.
 그 기세는 마치 무엇인가 폭발하듯 사납고 빠르기 이를 데 없으며, 일격필살의 확고한 신념이 깃들여 있는 공격인 것이다.
 단천일검은 바로 그러한 일격필살의 방법과 신념에 바탕을 둔 것이다.
 최초에는 죽음 같은 부동의 자세에서 날벼락 같은 발검을 할 수 있어야만 한다. 그것은 바꾸어 말해 상대에게 전혀 방비할 틈을 주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그 밑으로는 다시 수련방법과 자세가 그려져 있었다.
 사마소군은 그림대로 약간 자세를 잡아 흉내를 내 보다가 다음 장을 펼쳤다.
 이 장에도 역시 검결에 대한 설명이 적혀 있었다.
 <무릇 검을 쓰는 방법은 크게 네 가지로 구분된다.
 가로 베고, 내리긋고, 휘젓고, 찌르는 것이다.
 천하에는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검법이 있으나, 알고 보면 이 네 가지를 응용하고 변화시킨 것이다.
 다음의 탈정삼검도 역시 그 네 가지에 기초를 두었다. 그러나 그 오묘무쌍한 변화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탈정삼검은 대개 아홉 가지의 변화를 포함한다. 그 아홉 가지의 변화는 강물처럼 꼬리를 물고 이어져 다시 스물일곱 가지의 변화를 창출한다.
 제일초 표화결(飄化訣) 만화천광(滿花天光)은 마치 봄나비가 꽃을 찾아 날듯, 봄바람이 실버들을 희롱하듯, 수천 개의 꽃잎이 바람을 타고 너울대며 하늘로 오르듯, 부드럽고 그윽한 조화를 이루는 가운데 전개된다.
 전삼식(前三式)은 공초(功招), 중삼식(中三式)은 수초(守招), 후삼식(後三式)은 살초(殺招)의 성격을 띠고 있으며 이를 익히자면 아래 그림과 같이 오른쪽 발을 중궁의 위치에 밟고, 왼손은······.>
 구결을 비롯한 자세와 생검의 방법이 그 아래로 그림과 함께 상세히 이어지고 있었다.
 사마소군은 본래 무공의 무자도 모르는 처지였지만, 워낙 설명이 상세하게 적혀 있는 까닭에 조금씩 깨달아지는 것이 있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시간이 흘러 다시 한 시간쯤 지났을 무렵, 사마소군은 검결을 대충 다 외울 수가 있었다.
 “휴우, 무공이란 것은 생각보다 훨씬 어려운 것이구나.”
 사마소군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나, 나는 어떤 고통이 따르더라도 반드시 터득해야만 한다. 그것이 내 모든 의혹을 풀 수 있는 길이고, 선유도의 평화를 다시 찾을 수 있는 길일 테니까.”
 사마소군은 한 차례 긴 호흡을 하며 각오를 단단히 다졌다.
 “내일부터는 실제로 연습을 해 보아야겠다.”
 사마소군은 내심 결정을 내리고는 잠자리에 들었다.
 기이한 흥분감이 나른한 그의 전신을 휩쓸었다. 이제 내일부터는 새로운 세계가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는 드디어 자신도 무림인이 되는 첫발을 내딛었다고 생각했다.
 그 이상야릇한 흥분감과 기쁨 탓인가?
 얼마 후 그가 잠에 깊숙이 빠져들었을 때도 그 입가에 맺혀 있는 미소는 가실 줄을 몰랐다.
 남소현(南小顯).
 이 촌락은 지형적으로는 주양관과 더불어 복우산 줄기에 같이 붙어 있었으며, 풍광이 수려하기로 이름난 곳이었다.
 그러나 주양관과는 반대편 방향인데 거리가 무려 이백 리 가량이나 떨어져 있어 모든 생활환경은 판이하게 달랐다.
 때는 밤이 깊어 사경을 헤아릴 무렵, 석우생은 어둠을 등에 지고 석상처럼 우뚝 선 채 언덕 아래로 멀리 내려다보이는 한 거대한 장원(莊院)을 굽어보고 있었다.
 “······.”
 쏟아져 내리는 폭설로 인해 장원의 모습은 희미한 윤곽만이 내비치고 있었다.
 그러나 석우생의 초인적인 시야는 삼십여 장 전방에 있는 장원 내의 구석구석을 샅샅이 알아보고 있었다.
 “너무 늦었어. 저 시체들은 벌써 열흘째 저렇게 방치되어 있었던 것 같구나······.”
 시체(屍體).
 그렇다. 장원 곳곳에는 수백 구의 시체들이 처참한 모습으로 나뒹굴고 있었다.
 비록 쌓인 눈으로 인해 그 처참한 광경이 약간 가려지기는 했으나 그야말로 아수라지옥 같은 장면이 아닐 수 없었다.
 그 때였다.
 휘이잉-!
 한 줄기 스산한 바람이 스쳐가는 듯하더니, 석우생의 등뒤로 몇 줄기 인영들이 소리 없이 나타났다. 뒤따라 수십 줄기의 인영들이 그 뒤로 내려서며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그 가운데 먼저 도착했던 인물 가운데 한 명이 앞으로 나서며 두 손을 모으고 정중한 예를 취했다.
 “다녀왔습니다.”
 석우생은 느릿하게 몸을 돌렸다.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날렵한 체구의 인물이 그의 시야에 비쳤다.
 “역시 중원팔의 중 또 한 명이던가?”
 “중원팔의 중 둘째인 화룡신장(火龍神掌) 조영(曹英)이 틀림없었습니다.”
 복면인의 허리가 더욱 깊숙이 숙여졌다.
 언뜻 사십대 초반의 것으로 보여지는 그의 음성이 차분하게 이어졌다.
 “조영을 비롯한 일가족 이백구십삼 명이 모두 몰살당했습니다.”
 “······.”
 석우생은 고개를 미미하게 끄덕이며 잠시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는 한참 후에야 다시 입을 열었다.
 “사마장천이 중원팔의를 모두 이끌고 선유도로 은거하지 않고 그 중 절반을 중원 각처에 풀어 놓은 이유를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그건······.”
 복면인은 움찔하는 기색이더니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그는 선유도로 은거하기 전 뭔가 심상치 않은 기미를 느낀 게 분명한 것 같습니다. 필시 중원팔의에게 무언가 준비를 시켜 놓았을 것입니다.”
 “잘 봤어. 그러나 그게 뭘까?”
 석우생의 물음이 재차 이어지자, 복면인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나 석우생은 그가 모르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 위엄 있는 어조로 말문을 돌렸다.
 “중원팔의 중 첫째인 비룡유협(飛龍遊俠) 황보웅(皇甫雄)의 거처는 파악했는가?”
 복면인은 약간 주춤거리는 어조로 즉시 대답했다.
 “괴이하게도 그의 거처를 아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결국··· 그가 의문의 열쇠를 쥐고 있는 셈인가?”
 석우생은 나직이 뇌까리더니 비수로 자르듯 단호한 어조로 명령했다.
 “되도록이면 그를 찾는 일에 전력을 기울이도록 하라.”
 “명을 받들겠습니다.”
 대답이 끝나는 것과 거의 동시였다. 장내에 부복해 있던 인물들이 일제히 연기처럼 그 자리에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석우생은 홀로 남게 되자 멀리 장원을 잠시 깊숙이 바라보는 듯하더니, 천천히 몸을 돌려 어둠 속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2
 
 
 주양관은 좁다. 바닥이 좁은 만큼 일어나는 소문은 금세 퍼지게 마련이었다. 또한 대개의 소문이 다 그렇듯이 누가 방귀를 뀌었다면 몇몇 사람을 건너는 사이 똥을 쌌다는 말로 과장되게 마련이다.
 사마소군이 장과부의 주막에 머무르기 시작한 지 사흘째 되는 날, 주양관에는 하나의 웃지 못할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뭐라고? 그게 사실이야?”
 “글쎄,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왔다니까 그러네.”
 “저런 망할 년 같으니! 아무리 사내가 그립다기로서니 그래, 자식뻘밖에 안 되는 새파란 애송이를 죽은 서방 모시듯 해?”
 “죽은 서방 정도가 아니라네. 이건 아예 황제 모시듯 발까지 씻겨 주는 것은 물론이고, 욕실에서는 사타구니까지 씻겨 준다네.”
 “저, 저런······.”
 이 떠들썩한 소문을 주양관 사람들이 다 아는 데에는 불과 반 나절도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입으로는 하나같이 온갖 욕을 다 퍼부으면서도 그들의 눈빛은 대개 음탕한 빛을 띠고 있었다. 사실 말이 났으니 말이지, 이러한 소문을 신명나게 떠들어대는 위인들치고 기회만 주어진다면 당장 장과부에게 뛰어가지 않을 사내는 없는 법이므로.
 본래 사내들이란 제 마누라가 아무리 양귀비 같아도 옆집 곰보에게 눈을 돌리는 속성이 있다던가.
 어쨌든 이런저런 소문 끝에 또다시 이틀이 지나가고 있었다.
 “타앗- 탓-!”
 기합 소리는 새벽 공기를 가르며 더없이 힘차고 낭랑하게 울려 퍼졌다.
 사마소군은 자신이 직접 나무를 깎아 만든 목검(木劍)을 열심히 휘두르고 있었다.
 그가 이 객점 뒤뜰에서 목검을 휘두르기 시작한 것도 이미 이틀이 지났다.
 매서운 날씨인데도 어찌나 열심히 수련하는지 그의 전신은 온통 땀으로 흠뻑 젖어 있다. 공기를 가르며 울려 퍼지는 목검 소리도 제법 예리해진 지 오래였다.
 사마소군이 수련하고 있는 초식은 탈정삼검의 제일식인 표화결 만화천광이었다.
 사마소군이 전개해 보이는 만화천광의 흐름은 그런대로 능숙한 것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장과부는 멀찌감치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내심 탄식을 금치 못했다.
 그녀 또한 무림인인지라 사마소군이 펼치는 만화천광의 흐름이 어딘가 산만하고 부자연스럽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그 이유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혈풍향 석우생, 닷새 안으로 돌아온다고 한 그가 어찌 된 영문인지 돌아오지 않고 있는 것이다.
 장과부는 어제 저녁 사마소군이 저녁식사도 거른 채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당연히 먼동이 트기도 전에 밖으로 뛰쳐나와 저렇게 목검을 맹렬히 휘두르고 있는 사마소군의 모습을 장과부는 측은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 한순간이다.
 “헉헉······.”
 사마소군이 지친 듯 거친 숨을 몰아쉬며 동작을 멈추었다.
 하얀 입김이 그의 얼굴을 덮는 듯하더니 허공으로 흩어져 날아갔다.
 이 때 장과부가 가볍게 웃으며 그에게 다가갔다.
 “좀 쉬었다가 하세요, 소공자님.”
 그녀는 준비하고 있던 마른 수건을 내밀었다.
 그러나 사마소군은 그것을 받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밝아 오는 하늘을 향해 있었다.
 언제나처럼 하늘은 우중충한 잿빛 구름으로 가득 뒤덮여 있어 당장이라도 눈이 펑펑 쏟아질 것만 같았다.
 문득 사마소군은 그 어두운 하늘을 보며 조용히 입을 떼었다.
 “장아주머니.”
 “예, 소공자님.”
 “가능한 지금부터 제가 묻는 말에 숨김없이 대답해 주시기 바랍니다.”
 “무슨······?”
 장과부는 흠칫 의아로운 표정이 되었다.
 사마소군은 그녀의 얼굴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이미 알고 계실지 모르겠습니다만 나는··· 중원에 발을 들여놓은 지 겨우 석 달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나는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습니다.”
 사마소군은 가벼운 탄식을 흘러 내며 말을 이었다.
 “석형님을 형님이라 부르게 된 것도 엿새 전 바로 이 자리에서였습니다.”
 “······?”
 장과부는 그가 무슨 질문을 할까 자못 불안한 기색이었다.
 사마소군의 시선이 어떤 염원을 담고 그녀의 얼굴에 고정되었다.
 “장아주머니, 대체 석형님은 어떤 사람입니까?”
 “어, 어떤 사람이라 하심은······.”
 “나는 석형님이 강호무림계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치나, 간단한 과거내력 등을 알고 싶은 것입니다.”
 “하, 하지만······.”
 장과부는 만면에 두려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녀는 그러한 내심을 나타내기라도 하듯 주위를 한 차례 살폈다.
 사마소군은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나중에 석형님이 오셔도 못 들은 것으로 할 테니까요.”
 “소공자님은 정말 저를 난처하게 만드시는군요.”
 장과부는 씁쓸하게 웃었다. 하지만 이 순간 그녀의 손에는 식은땀이 맺히고 있었다.
 잠시 장내에 기이한 침묵이 흘렀다.
 장과부는 한참 동안 망설이는 기색이더니 이윽고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드리지요······.”
 “······.”
 사마소군은 그 말에 크게 반색을 지었다.
 장과부는 다시 한 번 주위를 살피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당금무림에는 불과 오 년 새에 도합 예순일곱 번의 청부살인(請負殺人)을 완벽하게 해낸 신화적인 직업살수가 한 명 있답니다. 때문에 강호에서는 그를 일컬어 천하제일의 살수라고 부르지요. 자, 이제 소공자님께서는 그분이 누군지 짐작하시겠어요?”
 “직업··· 살수?”
 사마소군은 너무도 뜻밖이라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장과부는 목소리를 낮추고 두려움이 섞인 어조로 말을 이었다.
 “쉽게 말하면 남에게 어떤 대가를 받고 대신 누군가를 죽여 주는 일을 하신다고 할 수 있지요.”
 “그럴 수가······?”
 사마소군의 안색이 일시에 복잡한 변화를 일으켰다. 그는 설마하니 석우생이 그런 무서운 부류의 사람인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그럼 석형님은 아무나 재물만 주면 원하는 자를 죽여 주는 그런 사람이란 말입니까?”
 “그렇지는 않아요.”
 장과부의 표정이 순간, 엄숙하게 변했다. 그것은 달리 보면 존경과 두려움이 뒤섞인 표정이기도 했다.
 “그분께서는 청탁을 받으시면 일단 수락하기 전에 죽여야 할 사람에 대해 철저히 분석을 하시지요. 그리하여 만약 그 사람이 죽여서는 안 될 사람이라고 판단이 내려지면 설혹 청탁금이 억만금일지라도 거절하시곤 했어요. 소공자님은 보통의 살수와 그분을 비교하셔서는 안 될 거예요.”
 장과부의 이 한 마디는 사마소군을 약간 안심시켜 주었다.
 그는 두 눈에 반짝 이채를 발하며 급히 물었다.
 “그렇다면 석형님께 죽은 사람들은 대체로 어떤 사람들입니까?”
 “거의 대부분은 이 세상을 살아갈 가치가 없는 인간들이에요. 물론 그 중에는 정파무림의 거물급 고수도 몇 명 있긴 하지만······.”
 “정파무림의 거물이라면 좋은 사람일 텐데, 왜 죽인단 말이오?”
 그 말에 장과부는 가볍게 웃어 보였다. 그녀는 사마소군을 뜻깊은 시선으로 깊숙이 응시하며 말했다.
 “소공자님, 그건 나중에 소공자님이 강호활동을 하시게 되면 자연히 알게 되실 거예요. 바로 세상에는 양의 탈을 쓴 이리 떼도 적지 않다는 뜻이지요.”
 “말하자면 위선자들 말이오?”
 “후훗··· 바로 맞추셨어요.”
 장과부는 자신도 모르게 본래의 요염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위선자라는 말을 듣는 순간 내심으로 엉뚱한 일을 떠올렸던 것이다.
 그러나 사마소군은 자신도 모르게 선유도의 악몽 같았던 밤을 떠올리고 있었다.
 위선자.
 평소 그토록 착하고 선량해 보였던 섬사람들이 광풍폭우가 몰아치던 그 날 밤에는 마치 피에 굶주린 악귀들처럼 자신과 아버지를 죽이려고 득달같이 달려들지 않았던가?
 물론 섬사람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사마소군은 결코 그 때의 충격을 잊을 수가 없었다.
 사마소군은 한숨을 내쉬며 목검을 힘주어 불끈 잡았다.
 ‘어쨌든 다행한 일이로구나. 형님이 아무나 죽이는 무지막지한 살인마가 아니라니······.’
 그러한 그의 내심을 짐작하기라도 한 듯 장과부는 재빨리 말을 이었다.
 “지금까지 그분의 표적이 되고서 살아남은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그분은 또한 의표를 찌르는 깨끗한 살인수법과 완벽한 뒷처리로도 유명하답니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환상(幻想)의 살수라고 부르는가 하면, 가장 치밀하고 냉혹한 불패(不敗)의 승부사(勝負師)라고도 말하지요.”
 여기까지 말한 장과부는 사마소군의 표정을 살피며 숨을 돌리더니 약간 들뜬 어조로 다시 말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그분의 출신내력이나 생김새 등이 일체 비밀에 가려져 있어 중원제일의 신비객(神秘客)이라고도 부른답니다.”
 사마소군은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그는 장과부가 지나치게 석우생을 과장한다고 생각했다.
 “뭐가 그리 많습니까?”
 “사실이 그러하니까요.”
 장과부는 자못 엄숙한 얼굴로 자랑스러운 듯 말했다.
 그녀는 끝까지 자신이 석우생과 어떤 관계인지는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마소군은 희미하게나마 그녀가 석우생이 속한 조직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으리라는 추측을 할 수 있었다.
 쌔앵-!
 싸늘한 새벽 바람이 두 사람의 옷깃을 스치며 장내를 스쳐 지났다.
 사마소군은 고개를 숙인 채 뭔가 생각하더니 한참 만에야 장과부를 쳐다보았다.
 “장아주머니, 나는 한 가지 결심을 했습니다.”
 “무슨······?”
 장과부는 순간, 그의 얼굴에서 뭔가 심상치 않은 기색을 발견하고 흠칫 놀랐다.
 사마소군은 두 눈에 맑고 깊숙한 광채를 빛내며 단호하게 말했다.
 “이렇게 무작정 석형님을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저 외방악으로 들어가 석형님을 찾아 보겠습니다.”
 장과부는 깜짝 놀라며 소리쳤다.
 “그건 허락할 수 없어요! 그분은 곧 돌아오실 거예요.”
 “이미 돌아온다고 약속한 날짜가 지났으니, 찾아 나서는 게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만약 소공자님께서 떠나신 후에 그분께서 돌아오시기라도 한다면 저는······.”
 장과부는 울상을 지었다.
 그녀는 외방악이 얼마나 험한 고개이며, 특히 눈이 내릴 때는 절대 들어갈 엄두조차 내어선 안 된다는 사실을 말하려 했다.
 그러나 사마소군은 그런 그녀를 안심시키려는 듯 싱긋 미소지으며 어른스럽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그런 일은 없을 테니까요. 설령 그런 일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장아주머니는 내가 잠깐 산책을 나갔다고 말하시면 책임을 면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사마소군은 말을 마치자마자 목검을 옆구리에 쑤셔 넣고 몸을 돌려 객잔을 떠나기 시작했다.
 장과부는 멀어져 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안절부절 못할 뿐이었다.
 “그, 그럼 아침식사라도 하신 후에······.”
 다급한 김에 얼떨결에 흘려 낸 한 마디였다.
 그러나 그 순간 사마소군은 이미 담벼락을 넘어 모습을 감춘 후였다.
 “이, 이 일을 어쩌지?”
 장과부는 발을 동동 구르며 안타까운 중얼거림을 발했다.
 그 때다. 어디선가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희미하게 그녀의 귓가에 들려 왔다.
 “큭큭··· 아주 가관이군 그래. 대가리에 쇠똥도 벗겨지지 않은 놈을 붙잡지 못해 사족을 못 쓰는 꼴이라니······.”
 “흐흐··· 하기야 저 어린 놈도 죽을 맛이겠지. 쭈글쭈글한 뱃가죽 위에서 노는 것도 하루 이틀이 아니겠어?”
 비록 그 대화 소리가 나직하기는 했지만 장과부가 못 들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리고 그 소리는 가뜩이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속만 태우고 있던 장과부의 가슴에 불을 지른 격이 되고 말았다.
 “이 망할 자식들! 이른 새벽부터 어디 할일이 없어 남의 마당을 기웃거리느냐!”
 그녀는 성난 암표범처럼 소리가 들려 온 쪽으로 신형을 날렸다. 뒤이어 놀람과 의혹이 뒤섞인 두 마디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이쿠! 나 죽네!”
 “아니, 이 죽일 년이 이젠 안 하던 짓까지··· 으악!”
 그로부터 얼마 후 꽁지가 빠져라 장과부의 객잔 한 구석에서 달려나오는 두 사내의 이빨 중 성한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7장 기연(奇緣)이냐 악연(惡緣)이냐
 
 
 1
 
 
 이른 새벽의 공기는 맑고 서늘했다.
 사마소군은 장과부의 객잔 뒤쪽으로 이삼 리 가량 떨어져 있는 한 언덕 위에 당도했다.
 그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폐부 깊숙이 상쾌한 공기를 들이마셨다.
 숨을 돌리고 전방을 살펴보니 언덕 뒤로는 구불구불한 소로가 사오 리 가량 길게 뻗어 있었다.
 소로의 끝은 짙은 안개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그 뒤로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는 첩첩산중의 수많은 봉우리들.
 사마소군은 그 험준한 봉우리들의 기세를 보자, 그만 기가 질리는 느낌이었다.
 “저 깊은 산중 어디에서 석형님을 찾는단 말인가?”
 설상가상으로 소로 위에는 밤새 쌓인 눈이 한 자 가량이나 되었다. 깊은 산중에 들어가면 필경 단 한 걸음을 옮기기도 힘들 것이다.
 그러나 사마소군은 설사 이보다 더한 경우라도 절대 포기할 수 없었다.
 “재수가 좋다면 중도에서 석형님을 만날 수도 있을 거야.”
 사마소군은 스스로를 위로하며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가 언덕을 거의 다 내려갔을 무렵이다.
 “비켜라, 이 놈아!”
 느닷없이 뒤쪽에서 대갈 호통성이 들려 오는 게 아닌가?
 사마소군은 흠칫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순간, 그의 눈이 휘둥그래 뜨여졌다.
 언덕 위 꼭대기에서 한 사람이 무서운 눈초리로 사마소군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말이 사람이지, 그의 용모는 거의 괴물에 가까웠다.
 대략 육십 세 가량 되었을까?
 오 척 정도의 짧은 키에 노인의 모습은 믿을 수 없으리만큼 뚱뚱해서 언뜻 보기에도 보통 사람 다섯은 합쳐 놓은 듯했다.
 ‘맙소사! 아예 터지기 직전의 풍선 같구나!’
 비곗살에 파묻혀 목은 전연 보이지도 않고 눈, 코, 귀, 입 등도 축축 늘어져 제 형상대로 붙어 있는 게 하나도 없었다.
 몸에는 한여름에나 입는 짧은 단삼을 입었는데, 팔이며 무릎 아래의 맨살이 그대로 노출되어 있었다. 그 팔다리조차 멀리서 보자니 마치 무슨 굵은 통나무처럼 보였다.
 ‘이제 보니 저것은 배부른 두꺼비와 똑같은 형상이다.’
 사마소군은 내심 혀를 내둘렀다.
 이 때다. 돌연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단삼노인이 그 뚱뚱한 거구를 일 장 가량 붕 떠올리더니, 그대로 데굴데굴 굴러 내려오는 게 아닌가?
 언덕은 눈이 가득 쌓인 상태였다. 단삼노인의 몸은 굴러 내려 오면서 점차 부풀어 거대한 눈덩이로 변해 갔다.
 우르르릉-!
 굉렬한 소리가 주위의 정적을 뒤흔들었다.
 사마소군이 그 어이없는 광경에 기가 막혀 몇 차례 눈을 껌벅거리는 순간, 그 거대한 눈덩이는 바로 그의 코앞까지 굴러왔다.
 사마소군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놀란 비명과 함께 황급히 옆으로 피했다.
 집채만하게 변한 그 눈덩이는 간발의 차이로 아슬아슬하게 그의 곁은 스쳐 아래쪽의 한 거목에 요란하게 부딪쳤다.
 쿠궁-!
 그 모습에 사마소군은 나직한 신음을 발했다.
 “큰일이다. 필시 크게 다쳤을 것이다!”
 사마소군은 황급히 그 곳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그는 곧 자신의 그러한 생각이 한낱 기우였음을 깨달았다. 단삼노인이 부서진 눈덩이 속에서 엉금엉금 기어나오는 모습이 보였던 것이다.
 단삼노인은 완전히 눈덩이 속에서 빠져 나오자, 옷을 툭툭 털더니 힐끔 언덕 위를 돌아다보았다.
 그는 누런 이를 드러내며 빙그레 웃었다.
 “클클··· 걸어 내려오려면 최소한 한 식경은 걸렸을 터인데, 굴러 내려오니 눈 깜짝할 새에 해결되는군. 아무리 생각해도 내 머리는 지나치게 잘 돌아간단 말이야.”
 단삼노인은 만족한 표정으로 습관처럼 자신의 머리를 툭툭 두드렸다.
 그는 우두커니 서 있는 사마소군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몸을 돌려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가 걷는 모습은 너무나 힘들어 보여 사마소군은 동정을 금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은 잠시에 불과했고, 사마소군은 곧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단삼노인은 분명 거북이처럼 느리게 걷는데도 불구하고 한 걸음을 옮길 때마다 이 장 가량 앞으로 쭉쭉 나아가는 게 아닌가?
 게다가 단삼노인이 지나간 눈 위에는 발자국은커녕 미세한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저럴 수가?’
 사마소군은 재차 눈을 화등잔만하게 떴다.
 그는 흡사 귀신을 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불과 뜨거운 차 한두 모금 마실 사이, 단삼노인의 모습은 자욱한 안개 너머로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사마소군은 망연히 그 자리에 서 있다가 한참 후에야 고개를 내흔들며 걸음을 떼어 놓기 시작했다.
 “이제 보니··· 방금 그 노인은 무림의 고수인 모양이구나.”
 눈 위를 걷는 것은 매우 힘들었으나 사마소군은 아름다운 설경(雪景)에 취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그는 어느 새 단삼노인의 일 같은 건 까맣게 잊어 버리고 있었다.
 마침내 사마소군은 소로의 끝에 당도했다.
 그는 주위에 깔린 자욱한 안개를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이렇게 짙은 안개는 처음이구나. 잠시 기다렸다가 해가 뜬 후 나아가는 게 좋겠다.”
 무리하게 앞으로 전진하다가 벼랑에라도 떨어지면 정말 개죽음이 아닐 수 없었다.
 다행히 동녘 하늘에는 이미 뿌옇게 여명이 밝아 오고 있었다.
 그 때다.
 “와아악! 비켜라!”
 갑자기 그의 고막 속으로 괴상한 울부짖음이 파고들었다. 동시에 사마소군은 시커먼 물체가 자신의 눈앞으로 쏘아져 오는 것을 발견했다.
 ‘앗!’
 미처 피하고 어쩌고 할 틈도 없었다. 비단 쏘아져 오는 물체의 속도도 빨랐거니와 너무나 느닷없는 일이어서 사마소군은 그대로 충돌하고 말았다.
 쿵-!
 “으윽······!”
 얼마나 세게 부딪쳤는지 사마소군은 공처럼 퉁겨져 나가 삼사 장 밖에 곤두박질쳤다.
 그는 엉덩이가 부서지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 급히 상체를 일으켰다.
 다행히 눈이 수북이 쌓인 상태라 그는 큰 상처는 입지 않았다. 그러나 괴그림자와 정통으로 부딪쳤던 가슴 부위는 여간 아픈 게 아니었다.
 “도, 도대체 누구요?”
 사마소군은 오만상을 찌푸리며 사방을 살폈다.
 그의 시야에 곧 한 비대한 그림자가 번개같이 저만큼 멀어져가는 모습이 들어왔다.
 자세히 보니 그는 바로 얼마 전에 만났던 단삼노인이 아닌가?
 사마소군은 어이없는 한편, 의아함을 금할 수 없었다.
 “저 두꺼비 같은 노인은 대체 무엇 때문에 저리 바쁘게 왔다갔다 한단 말인가?”
 그가 한탄을 하는 사이, 단삼노인의 모습은 다시 종적을 감추었다.
 사마소군은 몸을 일으키자 가슴에 참기 힘든 통증이 이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는 이만한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 거구와 부딪쳤으니······.”
 사마소군은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가 채 다섯 걸음도 떼어 놓기 전이었다. 등뒤에서 예리한 파공성이 들려 왔다.
 사마소군이 흠칫 뒤돌아보니 어느 새 나타났는지 단삼노인이 등뒤에 유령처럼 서 있는 게 아닌가?
 사마소군은 혼비백산했다. 저 엄청난 몸집이 이토록 빠른 것도 놀랍거니와 막상 앞을 막아서자, 거대한 산이 내려앉은 듯 숨이 막혔다.
 “노, 노인장은······?”
 “······.”
 단삼노인은 고개를 약간 삐딱하게 옆으로 눕힌 채 사마소군을 뚫어지게 노려보았다.
 축 늘어진 눈까풀 새로 쏟아져 나오는 그의 눈빛은 폐부를 찌를 듯 날카로웠다.
 사마소군은 말 한 마디 없이 자신을 잡아먹을 듯 응시하는 그를 보자, 당혹과 의아함을 금치 못했다.
 “왜 그렇게··· 저를 뚫어지게 보십니까?”
 그러자 단삼노인은 불쑥 수긍하듯 되물었다.
 “꼬마야, 네 이름이 무엇이냐?”
 사마소군은 내심 뜨끔함을 느꼈다.
 생면부지의 노인이 무엇 때문에 자신의 이름을 묻는단 말인가?
 ‘혹시 날 죽이기 위해 남해에서부터 쫓아온 사람이 아닐까?’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사마소군은 내심 바짝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내색을 드러내지 않은 채 침착하게 대답했다.
 “제 이름은 사마소군입니다.”
 순간, 단삼노인의 안색이 홱 변했다.
 “너··· 지금 이름이 무엇이라고 했느냐?”
 “사마소군이라고 했습니다.”
 “그, 그러니까 네 이름이 분명 사마소군이란 말이냐?”
 단삼노인이 거듭 확인하듯 묻자, 사마소군은 더욱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 그러십니까? 저를 아십니까?”
 “······!”
 단삼노인은 대답 대신 안색을 수십 차례 바꾸더니 사마소군의 전신을 거듭 훑어보았다.
 그의 얼굴에 곧 절망적인 빛이 떠올랐다. 이어 그는 느닷없이 그 자리에 주저앉더니 땅을 치며 대성통곡을 했다.
 “아이고, 아이고!”
 사마소군은 그만 어리둥절해진 채 그 모습을 망연히 내려다보았다.
 ‘이 노인이 갑자기 왜 이러지?’
 단삼노인은 울음을 그치지 않았으며, 갈수록 더욱 가관이었다.
 “아이고, 아이고! 그 늙지도 않은 놈이 정말 해도 너무했다. 이 천 리 길을 사흘 만에 달려와야 한다기에 허약한 몸을 이끌고 죽자 살자 달려왔더니··· 아이고, 이제 보니 겨우 저런 어린 거지 새끼가 사마소군이라니······.”
 사마소군은 그 곡성을 듣자 더욱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그 때 문득 그의 뇌리를 스치는 한 가지 생각이 있었다.
 ‘가만 있자, 자고로 미친 사람은 아무나 붙잡고 시비를 한다던데··· 혹시 이 노인도 미친 사람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굴리며 단삼노인을 새삼 살피자, 과연 영락없이 미친 늙은이 같았다.
 사마소군은 한시라도 빨리 이 늙은이 곁에서 떠나는 것이 상수라고 생각했다.
 “저··· 더 이상 제게 볼일이 없다면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말과 함께 슬그머니 자리를 뜨려는 순간이었다.
 단삼노인이 거짓말처럼 대성통곡을 뚝 그치더니 그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그냥 가겠다고?”
 사마소군은 내심 뜨끔했으나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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