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대불종합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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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실장 김필도 T 02 444-4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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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 사시미 김필돕니다.”
제1장 김필도
장계상은 앞에 서 있는 청년을 훑어보았다.
검정 정장에 옅은 블루 드레스 셔츠를 받쳐 입고 은회색 실크 넥타이를 맸다. 넥타이 중간쯤에 핀을 꽂았는데, 핀에 박힌 녹색 에메랄드가 광채를 뿌린다.
셔츠 소매 아래로 반쯤 비어져 나온 검정 가죽 줄 시계와, 댄디한 옥스퍼드화까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몸에 두른 게 얼마쯤 될까. 장계상의 머릿속 계산기가 작동한다.
조르지오 아르마니 정장에 넥타이핀은 불가리, 시계는 브레게 레벨 정도 되겠지. 구두야 아무리 비싸도 다른 거에 비하면 껌 값이니 패스. 명품도 명품 나름이야, 라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보통 명품으로 도배하게 되면 천박해 보이기가 쉬운데 녀석은 마치 어느 명품 숍 윈도 속에서 빠져나온 마네킹처럼 참으로 어울린다.
185센티미터가량 되는 훤칠한 키와 군살이 전혀 없는 몸매 그리고 반듯한 이목구비와 귀티 나게 생긴 얼굴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장계상은 생각한다.
“김필도입니다!”
자신을 김필도라고 소개한 청년은 정중하게 명함을 내밀었다.
장계상은 명함을 받아 들었다.
상호는 대불종합개발, 직함은 기획실장이다.
“전형적인 조폭 명함이구나.”
장계상은 명함을 내려놓고 김필도를 보았다.
그리고 인상착의를 머리에 각인시키듯 천천히 시선을 미끄러뜨렸다.
저런 멋진 녀석에게는 50년대나 60년대에 지어졌을 법한 이름인 필도가 아니라 좀 더 현대적이고 시크한, 예를 들면 류현이나 진우, 또는 시우 같은, 이름이 더 어울릴 것 같은데.
그런데 김필도라······.
“원래는 필돈으로 할 생각이었습니다. 필히 돈을 벌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말이죠. 그런데 너무 노골적이라 ‘ㄴ’받침을 빼서 필도가 된 겁니다. 여동생이 지어 준 이름이라 촌스럽지만 그대로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쉽게 기억되는 이름이라고 하더군요.”
마치 장계상의 머릿속에 들어갔다 나온 사람처럼 김필도는 이름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하긴 그런 멋진 얼굴을 한 녀석이 김필돕니다, 하면 머릿속에 팍팍 꽂히겠구나. 앉아라!”
장계상은 자리를 권했다.
김필도는 장계상 건너편으로 앉았다.
“커피, 아니면 술?”
“근무 중이니까 커피로 하겠습니다.”
짝!
장계상은 박수를 쳤다. 그러자 안쪽 문이 열리더니 미니스커트를 걸친 아가씨가 나왔다.
“커피 두 잔만 내와.”
“커피는 어떻게 하죠?”
“난 다방커피, 넌?”
“설탕, 크림 없이 커피만.”
김필도는 짧게 말했다.
“알았어요.”
아가씨는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사무실 안에 진한 커피 향이 흘렀다.
“요즘 너희 대불파에서 새로운 사업을 한다는 말이 들리더구나.”
장계상은 커피 잔을 들며 말했다.
“대불파가 아니고 대불종합개발입니다, 회장님.”
“이름을 바꾼다고 본성이 바뀔 거라고 보느냐?”
“우리 본성이라면······?”
“조폭 말이다.”
“잘못 보셨습니다. 우리 대불종합개발은 불법적인 사업에는 일절 손을 대지 않고 합법적인 사업만 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협박하지도 않고, 강제적인 수단을 동원한 적도 없습니다.”
“바다 이야기 같은 성인 오락은 합법적인 사업이 아닐 텐데?”
“바다 이야기는 영상물등급위원회의 사전 심의를 받은 합법적인 프로그램이었습니다. 처음엔 합법이었다는 거죠. 그러다가 사행성과 중독성이 지적돼 불법으로 판결났고, 우린 바로 문을 닫았습니다.”
“그래서 할 게 없으니까 내 영역을 넘보는 게냐?”
“우리가 오픈하고 있는 클럽은 회장님이 운영하는 나이트클럽과는 질적으로 다릅니다.”
“질적으로 다른데 내 가게 매출이 30퍼센트나 준단 말이냐?”
“그건 내가 아니라 회장님 부하 직원에게 해야 할 말이라고 생각되는군요.”
“내가 나이트클럽 사업에 발을 들인 게 언제인지 아느냐?”
“내가 태어나기도 전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정확하게 지금부터 50년 전이다.”
장계상은 스스로 자수성가의 표본이라고 자부한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건 살아온 과거 때문이다. 그는 어린 시절 부모님을 잃고 고아가 됐다. 그 후로 고아원을 전전하며 살았다. 그러다가 처음으로 나이트클럽에서 돈을 배웠다.
백악관 나이트.
50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그 나이트클럽의 이름은 잊히지 않는다. 고아원 원장선생님 지갑에서 훔친 돈을 가지고 박×스를 사들고 나이트클럽으로 들어갔다.
한 달 전부터 기도와 웨이터 형님들에게 작업을 해두었던 터라 큰 어려움은 없었다.
굳이 테이블을 돌며 사달라고 애원할 필요가 없었다. 그저 화장실 앞에 서서 박×스를 내밀면 그걸로 끝이었다. 사장님 사모님들은 얼마냐고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지폐를 한 장씩 내밀었다.
그때 깨달았다. 바로 이런 장사를 해야겠다고.
그리고 35년 후 백악관 나이트클럽의 주인이 됐다.
승승장구란 장계상을 위해 생겨난 말이었다.
아니 살다 보면 운대가 맞아떨어지는 시기가 있다는 말이 맞았다. 무슨 일이 됐건 손대는 족족 상한가를 쳤다.
그때 붙은 별명이 마이더스의 손이다.
백악관 나이트클럽을 바탕으로 다른 나이트클럽을 인수하기 시작했다.
나이트클럽의 인수는 필연적으로 주먹들이 엮일 수밖에 없다. 그 당시 가장 강했던 연안파와 손을 잡기에 이른다.
연안파는 최태성과 정중수 두 사람이 두목이었다. 하지만 세 사람이 사업을 할 수는 없었다. 결국 두 사람 중 최태성을 택했다. 지분은 7 대 3으로 나눴다.
자금과 힘의 결합은 완벽했다.
거의 반년에 하나씩 나이트클럽이 수중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다시 십 년이 흘렀을 때 장계상의 별명은 ‘마이더스 손’에서 ‘밤의 대부’로 바뀌었다.
30개의 나이트클럽을 소유하고 대부분의 주먹을 거느렸다.
문제가 생긴 건 1년 전이다.
나이트클럽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개념의 업소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처음엔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어떤 미친 작자가 돈지랄한다고 치부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나이트클럽의 성공 여부는 부킹을 담당하는 웨이터들에게 달려 있기 때문이다. 웨이터만 확실하게 관리하면 문제 될 게 전혀 없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매출이 하향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깜짝 놀라 원인을 조사했다. 놀랍게도 나이트클럽 매출의 30퍼센트를 잡아먹은 것은 같은 업종의 클럽이었다.
도끼눈을 뜨고 클럽을 오픈한 자들을 파헤쳤다. 그러다가 클럽의 배후에 십여 년 동안 연안파의 최대 맞수였던 대불파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대불파의 두목 정중수는 과거 연안파 두목 중 한 명이었다. 하지만 정중수는 클럽 같은 고차원적인 놀이 문화를 만들어 낼 정도로 뛰어난 머리를 가진 자가 아니었다.
다른 자가 있을 거란 생각에 계속 조사를 시켰다. 그리고 학사(學士)라는 별명을 가진 자를 끄집어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우리 대불종합개발은 회장님 영역을 침범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클럽 또한 회장님이 운영하는 업소에서 상당히 떨어져 있는 기존 업소를 인수해서 오픈을 했고요.”
“난 너희들이 오픈한 업소에 대해서는 관심 없다. 나의 관심사는 지금 이 순간에도 조금씩 사라지고 있는 내 돈이다.”
“우리 대불종합개발 회장님께서는 다툼을 바라지 않습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문화인답게 정정당당하게 경쟁을 하고 싶을 뿐입니다.”
턱!
장계상은 옆에 두었던 파일 하나를 김필도 앞으로 던졌다.
“뭡니까?”
김필도는 조금 긴장한 얼굴로 장계상을 보았다.
“리퍼블릭의 운영권이다.”
“리퍼블릭의 운영권을 왜 내게 주시는 겁니까?”
“리퍼블릭은 매월 20억의 매출이 나오는 최고 대어다.”
“1년이면 2백40억이군요.”
“마진은 30퍼센트가량 나온다. 그걸 네게 주겠다.”
“죄송합니다, 회장님. 전 정 회장님을 배신할 수 없습니다.”
“굳이 21세기 문화인이라는 말까지 들먹이지 않더라도 프로는 자기 몸값에 따라 움직인다고 들었다. 내가 내놓은 건 지금 네가 받고 있는 연봉의 3배가 넘는다.”
“아직 나에 대해서 조사를 완전하게 하지 못하신 모양이군요.”
“네가 정중수 밑에 있는 건 다른 이유가 있다는 말이냐?”
“사람이기 때문에 떠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아무튼 억류하고 있는 제 아이들은 보내주셨으면 합니다.”
“이걸 더 얹겠다.”
장계상은 파일 하나를 쌓아 올렸다.
그것은 리퍼블릭과 비슷한 규모인 리도 나이트클럽의 소유권이었다.
“무엇을 주셔도 달라질 건 없습니다.”
“못 받겠단 말이냐?”
“그렇습니다.”
“의리도 지켜야 할 때가 있고 그렇지 않을 때가 있다는 걸 깨닫지 못한 걸 보니까 아직 멀었구나.”
“죄송합니다, 회장님.”
김필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딱 한 번만 제안한다, 김필도.”
장계상의 말투가 싸늘하게 바뀌었다.
“오늘 제안 항상 마음에 담아두겠습니다. 그럼.”
김필도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고는 몸을 돌렸다.
밖으로 나온 김필도는 복도 끝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엘리베이터 주변에는 검은 양복을 입은 청년들이 늘어서 있었다.
“오랜만이구나, 사시미.”
오른편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필도는 고개를 돌렸다. 키가 170센티미터 남짓한 다부진 체격의 청년이 복도 벽에 기댄 채 바라보고 있었다.
김필도는 가볍게 손을 올려 보였다.
“그래, 오랜만이다.”
작두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윤치성이었다.
김필도와 윤치성의 인연은 다섯 살 때 체육관에서 시작됐다. 김필도는 체육관에서 먹고 자며 허드렛일을 하는 신세였고, 윤치성은 격투기를 배우러 온 회원이었다. 우연히 윤치성의 스파링 파트너가 되면서 친해져 함께 대불파로 들어갔다.
그리고 대불파에서 김필도는 사시미란 별명으로, 윤치성은 작두라는 별명으로 활약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대학에 진학하는 사이에 대불파를 나가 연안파로 갔다는 말을 들었는데 여기서 보게 된 것이다.
“회장님께서 널 좋게 보신 모양이더라.”
“그 점은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김필도는 가볍게 웃어 넘겼다.
“너와 난 환상의 콤비였다.”
“네가 나가지 않았더라면 계속 그랬겠지.”
“내가 대불파를 나온 이유를 모르는 모양이구나.”
“어쩔 수 없었다는 건 나도 알고 있다.”
“필도, 너도 나와라.”
“그럴 수 없다는 건 나보다 네가 더 잘 알잖아.”
“결국 너도 나처럼 버려질 거다.”
“그거 아냐?”
“뭘 말이냐?”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 있다는 거 말이야.”
김필도는 씁쓸하게 웃으며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럼 넌 죽어.”
“살아남기 위해 최대한 노력해야지.”
“우리 연안파로 오지 않아도 좋아. 대불파에서만이라도 나와라.”
“다음에 술이나 한잔하자.”
김필도는 으레 하는 인사말을 하고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잠시 후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서류 봉투를 든 사내가 내렸다. 사내는 장계상 회장의 비서 조성욱이었다.
조성욱이 엘리베이터를 빠져나가자 김필도는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다. 1층 버튼을 누르고 벽에 기대어 섰다.
그때까지 윤치성은 김필도를 바라보고 있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김필도가 입을 열었다.
“그 아이 기억나?”
“필녀?”
“응!”
김필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기억나지.”
윤치성의 얼굴이 붉어졌다. 벌써 11년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필녀만 생각하면 가슴이 두근거린다.
필녀를 본 것은 필도를 알고 난 3년 후였다.
녀석은 필녀라는 동생과 단둘이서 살고 있었다.
처음 필녀를 보았을 때 만화 속에서 튀어나온 요정인줄 알았다.
나이를 먹어갈수록 점점 예뻐지는 필녀를 보며 얼마나 가슴앓이를 했던지. 필녀에 대한 짝사랑은 그녀가 자살로 생을 마감한 열세 살 때까지 계속됐다.
필녀가 열세 살 되던 해 생일날 케이크를 사들고 필도와 함께 집으로 갔다. 그런데 필녀는 집 안에 없었다.
밤새도록 그녀를 찾아다녔다. 하지만 필녀는 목소리조차 들려주지 않았다.
그렇게 사흘이 흐르고, 뒷산의 작은 저수지에서 필녀의 시체를 발견했다. 경찰은 자살로 처리하고 사건을 종결지었다.
“자살이 아니었어.”
“무슨 소리냐?”
“필녀는 자살로 죽은 게 아니라 겁탈 뒤 살해당해 저수지로 던져졌던 거야.”
“다, 다시 말해 봐.”
윤치성은 황급히 엘리베이터 앞으로 걸어갔다.
“오지 마!”
김필도는 오른손을 들어 막았다.
“자, 자세히 말해 봐!”
윤치성은 굳은 얼굴로 소리쳤다.
누구보다 김필도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이 그였다. 표정으로 보건대 김필도는 필녀를 살해한 자를 찾아낸 게 분명했다.
“아무튼 그렇게만 알고 있으면 돼. 그리고 곧 기회가 올 거야.”
“무슨 기회?”
“기회를 놓치지 마! 무슨 말인지 알겠지?”
“야! 필도!”
“그 겨울 치성이 네가 나와 필녀에게 줬던 그 주먹밥 말이야.”
“필도야!”
윤치성의 눈빛이 마구 흔들렸다.
“그렇게 맛있는 음식은 아직 먹어 보지 못했어. 최고급 레스토랑에서 수십만 원짜리 스테이크를 먹어도 결코 흙이 잔뜩 묻은 그 주먹밥보다 못하더라.”
김필도는 소리 없이 웃으며 버튼을 누르고 있던 손가락을 뗐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필도야!”
윤치성은 엘리베이터 버튼을 몇 번이고 눌렀다. 하지만 엘리베이터는 빠르게 아래로 내려갔다.
윤치성은 멍한 얼굴로 엘리베이터 버튼을 바라보았다.
김필도가 대불파에 붙어 있는 이유가 필녀의 죽음 때문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리고 기회를 잡으라는 말!
윤치성은 회장실로 고개를 돌렸다.
그때 장계상은 방금 안으로 들어온 조성욱으로부터 건네받은 서류를 읽는 중이었다. A4 용지에 일목요연하게 정리돼 있는 그것은 김필도의 신상 명세서였다.
-고아원을 탈출하여 여동생과 함께 체육관에서 생활. 그곳에서 가라테를 비롯한 각종 격투기를 접하게 되었음.
체육관 관장이 대불파의 두목이었던 정중수와 친분이 있어 소개를 시켜 줌.
-열 살 때부터 대불파에서 생활함. 열다섯 살 때까지 학교에 가 본 적도 없음.
-공부를 한 적은 없지만 뛰어난 머리를 가졌다는 걸 알아차린 정중수가 공부를 시킴.
2년 만에 검정고시로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과정을 이수.
-열아홉 살 때 S대 입학.
수석 졸업.
-가라테, 유도 유단자며 특히 검도에서 강점을 보임.
“이 정도면 거의 천재구나.”
장계상은 감탄조로 말했다.
“아마 S대 나온 최초의 조폭일 겁니다.”
“그렇다면 정중수 그놈이 김필도의 머리를 알아보고 대학교육까지 시켰다는 건데··· 그동안 성과는 좀 있었느냐?”
“클럽 말고도 다방면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말해 보거라.”
“녀석이 가장 먼저 손을 댄 건 바다 이야기라는 성인 오락실이었습니다. 모두 망설이고 있을 때 50개를 차려서 거금을 벌어들였습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성인 오락실이 불법으로 판정 나기 직전에 최고가로 팔아넘겼다는 사실입니다. 그때 대불파가 보유하고 있던 오락실의 개수는 총 1백 개였습니다.”
“그럼 오락실 하나에 8억씩만 잡아도 8백 억이구나.”
“그 다음에 뛰어든 곳이 클럽 사업과 아파트 건설 그리고 주식입니다.”
“아파트와 주식은 미친 듯이 오르는 중이고, 클럽은 야금야금 우리 나이트클럽을 잡아먹고 있군.”
“그렇습니다. 놈은 전혀 불법적인 사업을 하지 않습니다. 사업을 하다가도 불법임이 밝혀지면 금세 정리해 버립니다.”
“놈을 그대로 두면 어떻게 되겠느냐?”
“몇 년 안에 우린 설 자리를 잃게 될 겁니다.”
“너 대학 어디 나왔지?”
“하버드 출신입니다.”
“정말이야?”
“전 학력위조 같은 건 하지 않습니다.”
“그럼 S대 출신이 그렇게 사업을 하는 동안 넌 뭐 했냐?”
“그놈이 하는 건 사업이 아니라 도박에 더 가깝습니다. 성공하면 큰돈을 만질 수 있지만 실패하면 모든 것을 잃게 됩니다. 그런 사업은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자들이나 하는 겁니다. 회장님처럼 연 매출이 4천 억에 육박하는 사업체를 가지고 계신 분이 할 만한 사업이 아닙니다.”
“그럼 무슨 사업을 하면 좋겠느냐?”
“회장님이 거느린 자원을 효율적으로 이용하면서 가장 안전하게 돈을 벌 수 있는 사업은 대부업입니다.”
“사채놀이를 하란 말이냐?”
“사채놀이는 옛말이고 지금은 합법적인 사채업이 가능한 시댑니다.”
“나보고 대부업체 대표이사 명함을 가지고 다니라는 거냐?”
“케이블 TV 보십니까?”
“난 테레비 같은 거 안 본다.”
“케이블 TV 광고 대부분이 대부업체 광곱니다. 이젠 대부업체는 음지 사업이 아닙니다. 우선 작게 시작해서······.”
“푼돈 벌 사업이면 아예 하지 않는 게 낫다. 일단 대부업체 건은 기안서 작성해서 올려라. 그리고 가서 최 회장 불러와!”
“알겠습니다, 회장님.”
조성욱이 나가고 30분 후 정장 차림의 중년 사내가 안으로 들어왔다. 각진 얼굴에 강렬한 포스를 풍기는 이자가 연안파의 보스이자 최 회장으로 불리는 최태성이었다.
“아무래도 놈을 제거해야겠네, 최 회장.”
“다짜고짜 그게 무슨 소린가?”
“김필도 말이네.”
“매수가 안 되는 모양이군.”
최태성의 미간에 내 천 자가 새겨졌다.
“리퍼블릭과 리도 운영권을 준다고 해도 싫다네.”
“연간 백 억이 넘는 돈을 버는데도 싫다고?”
“그렇네.”
“제 무덤을 파는구먼.”
“그래서 놈이 판 무덤을 그대로 사용하기로 했네.”
“놈을 그대로 두면 우리가 먹힌다는 결론을 내린 건가?”
“우리뿐만 아니라 정중수 그놈도 먹히네.”
“혹시 정 회장과도······.”
최태성은 장계상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장계상은 협상의 귀재이고 흥정의 도사다. 문득 그가 정중수와 모종의 딜을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중수 그놈이 정신이 제대로 박힌 놈이라면 내 제안을 거절하지 못할 거네. 일단 자넨 놈을 묻을 준비를 하게.”
“당장 감시를 시작해야겠군.”
“그래 주게. 그리고 이번 작전에서는 윤치성을 빼게.”
“그렇게 하지.”
최태성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참!”
막 밖으로 나가려던 최태성이 장계상을 돌아보았다.
“뭔가.”
“11년 전에 했던 맹세 아직 기억하고 있는지 그걸 알고 싶어서 말이네.”
“당연히 기억하고 있지.”
장계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잘 지내 왔던 정중수와 갈라서게 된 사건이 터진 그날. 아직도 생생하다.
장계상과 최태성, 정중수는 아가씨들을 옆에 끼고 술을 마셨다. 단순한 술이 아니었다. 술 속에는 상당량의 마약이 들어 있었다.
약에 취해 무슨 짓을 했는지도 알지 못했다.
한참 술을 마시다가 정중수가 새로운 아가씨를 데리고 들어왔다는 것까지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또다시 필름이 끊겼고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 보니 나이 어린 소녀가 발가벗겨진 채 국부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최태성은 그 여자아이를 살피고 있었고.
직감적으로 사고를 쳤다는 걸 알아차렸다. 분명 혼자 한 건 아닐 거라고 장계상은 생각했다. 하지만 최태성과 정중수가 먼저 깨어 있어 혼자 뒤집어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뒤처리는 최태성이 했다. 그런 최태성에게 절대 먼저 배신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했다.
최태성이 말한 맹세란 그 사건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앞으로도 계속 기억하고 있었으면 좋겠네.”
“물론이네, 최 회장. 자네가 날 배신하기 전까지는 기억하고 있을 거네. 그런데······.”
“말하게.”
“그 계집아이는 누구였는가?”
“김필도의 여동생이었네.”
“그런데 정중수가 그 아이를 왜 데려온 건가?”
“성공하면 자네를 파멸로 이끌 수 있고, 설사 실패한다고 해도 김필도에게 말하면 언젠가는 자네를 없애려 들 테니까.”
“그러니까 미성년자 강간 살해 혐의로 날 교도소에 처넣으려고 했단 말이구먼.”
최태성은 쓰게 웃었다.
“마약 복용 혐의에 그동안 미제로 남아 있던 사건 몇 가지까지 더하면 무기징역은 받아낼 수 있었을 거네.”
“왜 그렇게 하지 않았는가?”
“나는 내 파트너로 정중수가 아닌 자네를 선택했으니까.”
“그래서 정중수가 떠난 거였구먼.”
“아무튼 잊지 말게.”
최태성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밖으로 나오자 윤치성이 다가왔다.
“나무꾼은 어디 있지?”
최태성이 물었다.
“일 나간 걸로 알고 있습니다.”
“지금 당장 전화해서 내 사무실로 오라고 해.”
“무슨 일 있습니까?”
“윤치성!”
최태성은 윤치성을 노려보았다.
“알겠습니다. 회장님!”
윤치성은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김필도가 다녀간 뒤라 저도 모르게 질문을 던졌는데 주제넘은 짓을 하고 만 것이다.
“늘 네가 어느 위치에 있는지 생각해.”
최태성은 차갑게 말하고는 엘리베이터에 몸을 들였다. 곧 그를 태운 엘리베이터는 아래로 내려갔다.
그때까지 허리를 숙이고 있던 윤치성은 엘리베이터 1층 버튼에 불이 들어오자 비로소 상체를 들었다. 그러고는 사무실로 들어갔다.
윤치성이 팀장으로 있는 레드 팀은 장계상 회장의 경호 임무를 맡고 있기 때문에 회장실 바로 옆이 사무실이다. 사무실 안에는 레드 팀의 막내인 이동수가 서류를 정리하고 있었다.
“커피 한잔 줘.”
윤치성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알겠습니다, 형님!”
이동수는 커피 머신에 캡슐을 끼우고 스타트 버튼을 눌렀다. 잠시 후 갈색 액체가 에스프레소 잔으로 떨어졌다. 향긋한 커피 향이 피어오르고 거의 막바지에 이르자 골드 크레마가 생겨났다.
이동수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맺혔다. 모처럼 최고의 커피가 뽑아진 듯했다.
이동수는 커피 잔을 빼내 뻬르쉐 각설탕을 하나 집어넣고 커피 스푼으로 가볍게 저은 후 윤치성에게 내밀었다.
“동수 너 일 하나 해야겠다.”
윤치성은 커피 향을 맡으며 말했다.
“어떤 일입니까?”
“나무꾼 형님 근황을 알아야겠다.”
“나무꾼 형님 말입니까?”
이동수의 얼굴이 슬쩍 굳었다.
근황을 알고 싶다는 건 곧 감시를 하라는 의미다.
조직의 형님을 감시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자칫 들키기라도 하면 최소한 팔다리 힘줄 정도 잃는 건 기본이고, 심하면 이름 모를 야산에 묻힌다.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최 회장님께서 나무꾼 형님께 어떤 일을 시키는 것 같은데 우리만 배제되는 것 같아서 그래. 별다른 뜻 없으니까 슬쩍 알아봐.”
“전 공연히··· 걱정 마십시오, 형님.”
이동수는 안도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김치성은 이동수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휴대전화를 꺼냈다. 그리고 나무꾼 박두칠에게 전화를 했다.
그로부터 3시간 후.
승용차 1대와 승합차 5대가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 * *
주차장에 차를 주차한 김필도는 엘리베이터를 탔다.
맨 꼭대기 층 버튼을 누르자 엘리베이터는 빠른 속도로 올라간다.
보통 엘리베이터보다 약간 빠른 속도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그는 비밀 번호를 눌러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40평 남짓한 널따란 원룸이 그를 반겼다.
김필도는 불을 켜고 오디오 전원을 올렸다. 마크레빈슨 23.5 프리와 파워 앰프에 차례로 불이 들어오고, 와디아 850 시디플레이어가 구동 준비를 한다.
버튼을 누르고 엔야의 시디를 올렸다.
시디는 오디오를 구성해 준 업자가 주고 간 것이었다.
곧 육중한 크기의 JBL4343 스피커가 깊고 맑은 소리를 토해 낸다. 음악은 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 엔딩 장면에 삽입됐던 와일드 차일드(Wild Child)였다.
실내 곳곳에 음상이 맺히고 음악의 홀 깊숙이 갇힌다. 엔야의 음악은 마치 판타지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를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한없이 높고 푸른 하늘과, 끝없이 펼쳐진 초원. 그리고 초원 끝에 솟아 있는 눈 덮인 산. 그 사이를 흰색의 유니콘이 달려가는 듯하다.
JBL 스피커는 클래식보다는 재즈나 팝에 더 어울린다.
하지만 엔야의 음악은 클래식에 더 가깝다는 느낌이 드는데, 묘하게도 JBL이 토해 내는 소리는 엔야의 음악을 한층 잘 표현해 내고 있는 듯하다.
김필도는 음악을 들으며 옷을 벗어 걸었다.
상의를 벗고, 드레스 셔츠를 벗자 탄탄한 근육으로 뭉친 상체가 드러났다.
그런데 그의 상체는 보통 남자와 달랐다. 등에서부터 시작하여 앞쪽까지 온통 문신으로 들어차 있었다. 앞에는 백룡과 흑룡이 똬리를 틀고 승천하는 모습이고, 등에는 기왓장이나 갑옷 요대에 많이 사용됐던 귀면(鬼面)이 새겨져 있다.
근육의 움직임에 맞춰 문신을 새긴 듯 그가 동작을 취할 때마다 귀면의 얼굴 표정이 바뀐다.
활짝 웃기도 하고, 때론 지옥의 야차처럼 찡그린다.
그의 하체도 등이나 가슴과 다르지 않다. 발목 아래를 제외한 모든 부분이 문신으로 채워져 있다.
아니 그의 몸에서 문신이 없는 곳은 얼굴과, 손, 발뿐이다. 심지어 남자의 상징인 그곳까지 문신으로 채워져 있다.
김필도는 발가벗은 채로 그 자리에 가부좌를 했다. 그러고는 호흡을 골랐다. 소위 단전호흡이라고 부르는 호흡법이다.
어린 시절 체육관에 있을 때 우연히 들른 도사 스님께서 전수해 주신 호흡법이다.
감기에 걸려 고생하는 필녀가 불쌍해 전수해 주는 거라고 하면서 제대로 익히고 나면 감기나 잔병으로 고생하는 일은 없을 거라고 하였다.
그다지 신뢰는 가지 않았지만 아프지 않고 살 수 있다는 말에 열심히 호흡법을 익혔다. 가진 건 몸뚱이밖에 없는 사람에게 건강이 밑천이란 도사 스님의 말 때문이었다.
그 도사 스님이 가르쳐 준 호흡법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아플 짬도 없이 살아온 삶 때문이었는지, 그건 모르지만 김필도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감기는 물론이고 잔병치레를 한 기억이 없다.
떡이 되도록 술을 마셔도 아침 6시면 어김없이 눈을 뜨고 말짱한 몸 상태로 출근을 하곤 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피트니스센터에서 웨이트 트레이닝을 통해 몸을 만들지 않아도 근육이 생겨난다는 것이었다. 김필도는 자신의 몸에서 일어나는 그런 이상 현상을 도사 스님이 전수해 준 호흡법 때문이라고 여겼다.
그러 이유 때문이었을까. 하루도 쉬지 않고 1시간 30분씩 호흡법에 몰두했다. 보통은 1시간 30분 정도에서 호흡법을 마치는데 요즘 들어서는 2시간 또는 2시간 30분을 할애한다.
그건 밤마다 꾸는 이상한 꿈 때문이었다.
“휴-우우!”
마지막 숨을 품어내며 김필도는 눈을 떴다. 그리고 욕실로 향했다.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고 나올 때까지도 엔야의 음악은 방 안에 물결쳤다.
그는 음악을 끄고 TV를 틀었다.
김필도가 보는 TV 프로그램은 뉴스가 유일했다.
“나사(NASA)에서는 또 다른 소행성 하나가 지구를 향해 접근해 오고 있지만 비켜갈 가능성이 높다고 합니다. 설사 지구와 충돌한다고 해도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대기권에서 대부분 타 버리고 영향을 미치지 못할 거라고 브리핑했습니다.”
TV 헤드라인은 소행성에 대한 이야기가 장식하고 있다. 십여 일 전부터 소행성이 지구로 떨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리라.
처음 소행성이 떨어진 곳은 미국의 뉴멕시코 주였다. 하지만 사막으로 떨어져 피해는 거의 없었다. 그로부터 이삼일에 한 번씩 소행성이 지구로 떨어졌다.
지구 멸망의 징조라며 밤샘 기도에 들어간 교회도 생겨나곤 했지만, 김필도는 웃고 말았다.
혼자 죽는 게 아닌 다 함께 죽는 거라면 아쉬울 것도 없다.
뉴스가 끝나고 다시 음악을 들으며 시간을 보내다가 침대에 몸을 뉘었다.
“꿈이여 물럿거라! 휙! 휘익! 오늘은 곱게 좀 자자.”
김필도는 신경질적으로 베개에 머리를 비비다가 어느 순간 잠에 빠져들었다.
제2장 현실과 꿈의 경계 그리고 빙의
하늘에 걸린 달은 마치 언젠가 카메라 렌즈를 통해 본 모기의 몸통 같다. 피를 잔뜩 머금어 바늘을 가까이 대기만 해도 붉은 비가 내릴 듯하다.
저 달을 레드 문(Red Moon)이라고 부르고, 블루 문(Blue Moon)과 다크 문(Dark Moon)이 있다는 사실을 김필도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떤 루트로 그 사실을 알고 있는지는 모른다.
마치 영어는 유창하게 하는데, 언제 누구로부터 배웠는지는 전혀 모르는 것과 같은 상황이었다. 과거 어느 시점의 기억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젠장!”
분명 침대로 들어와 눈을 감고 잠이 들었다. 그리고 얼마 후 눈은 달을 보고 있다. 분명 저 광경이 꿈속의 한 장면이라는 걸 김필도는 알고 있었다.
수십 번도 더 꿈을 깨야겠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가위에 눌린 것처럼 꿈에서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아스카 아스 나하 달리스, 일루나 이하 부하 니홀리!”
붉은 달빛이 비추는 거대한 광장에서 웅장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2미터 사이를 두고 그려진 2개의 원. 큰 원과 작은 원 사이의 공간에는 알 수 없는 문양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안쪽의 작은 원 내부에는 별 모양이 그려져 있는데, 그 각 모서리에는 검은 로브를 걸친 자들이 가부좌를 한 채 앉아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펜터그램, 즉 마법진이었다.
로브 후드를 깊게 눌러쓴 상태라 얼굴은 확인할 수가 없다. 하지만 가슴팍까지 내려온 수염은 그들의 나이를 대략이나마 짐작하게 한다.
다섯 명은 한 곳을 바라보며 외치고 있는데 그들의 시선이 모이는 그곳에는 가슴에 검이 꽂힌 청년이 앉아 있었다.
김필도가 가위에 눌렸다고 확신하는 이유가 바로 검을 가슴에 꽂고 있는 청년 때문이었다.
그 청년은 김필도와 판박이였다.
검은 머리, 얼굴, 체구 등 모든 것이 일란성 쌍둥이처럼 같았다. 다만 한 가지. 눈동자만 파란색이었다.
파앗!
마법진에서 푸른색 광채가 솟구쳐 올랐다.
“아스카 아스 나하 달리스, 일루나 이하 부하 니홀리!”
그리고 로브를 걸친 자들의 입에서 웅장한 외침이 흘러나왔다.
그들의 몸에서 흘러나온 기운이 그물처럼 촘촘하게 김필도를 감쌌다.
“도대체 너희들은 누구냐?”
김필도는 고함을 질렀다.
“난 루시안 아이작 프리우스네.”
“끙! 게임 끊은 지 언젠데······.”
대학 다닐 때 했던 게임의 한 장면이라고 생각하는 수밖에 없었다. 더 황당한 노릇은 처음 듣는 언어임에도 불구하고 알아듣는다는 사실이었다.
“손을 내밀게.”
그 말에 김필도는 자신도 모르게 왼손을 내밀었다.
잠시 후 마법진 안에서 손이 나와 김필도의 손을 잡았다.
“크억!”
불에 덴 듯한 통증이 손바닥에 느껴졌다.
김필도는 얼른 손바닥을 살폈다. 손바닥에는 마법진 형태의 그림이 낙인처럼 새겨져 있었다.
“스피드 업(Speed up) 할 수 있는 마법이네. 박투 마법을 펼치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마법이니까 반드시 기억해야 하네.”
“박투 마법은 뭐지?”
“지금은 말해 줘도 모르네. 아무튼 기회를 놓치지 말기 바라네. 꼭 손바닥을 펴 보이게.”
“미친놈, 그런데?”
김필도는 피식 웃었다.
방금 들은 그 말은 전날 윤치성에게 자신이 했던 말이다. 그런데 꿈속에서 루시안에게 그 말을 들은 것이다.
공연히 웃음이 나왔다.
“아무튼 명심하게.”
그 말을 끝으로 마법진을 감싼 푸른 광채가 더욱 짙어졌다. 그리고 안개가 걷힌 듯 천천히 머릿속이 맑아졌다.
문득 눈이 떠졌다. 어느새 아침이었다.
그는 침대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빌딩 숲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한동안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다가 주방으로 갔다.
집에서 식사하는 경우가 드물기 때문에 냉장고 안에는 음식이 거의 없다. 그는 냉동실 문을 열고 이틀 전에 사두었던 식빵 봉지를 꺼냈다.
봉지 안에서 식빵 두 장을 꺼내 접시에 놓고 나머지는 다시 냉동실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싱크대 구석진 곳에 놓아둔 콩을 꺼냈다. 로스팅한 지 삼 일 지난 신선한 커피다.
선반에서 핸드밀을 내려 커피콩 7그램 정도를 넣고 갈았다. 커피가 다 갈리자 여과지 안에 넣고 핸드 드립퍼에 장착했다. 그런 다음 물을 끓였다.
물이 끓는 동안에 토스터기에 식빵을 넣고 계란 프라이를 했다. 늘 그렇듯 프라이는 반숙이다.
주전자 뚜껑을 열어 김을 한 숨 빼고 커피 여과지 위에 천천히 부었다. 커피를 내리는 동안 빵에 딸기잼과 땅콩잼을 바르고, 그 위에 달걀 프라이를 얹고는 빵을 덮었다.
샌드위치를 접시에 놓고 내려진 커피를 따랐다.
커피 잔을 들어 올리던 김필도의 머릿속에 문득 어젯밤 꿈이 떠올랐다. 다른 날과 달리 꿈속의 인물이 손을 잡았다.
그는 커피 잔을 쥐고 있던 손가락을 엉거주춤 폈다. 그러고는 손바닥을 지그시 보았다.
“헉!
쨍그랑!
손에 들렸던 커피 잔이 대리석 식탁 위로 떨어져 박살났다. 커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하지만 김필도는 뜨겁다는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그는 왼손 손바닥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왼손 손바닥에는 마법진 문양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김필도는 벌떡 일어나 싱크대로 가서 물을 틀었다. 그러고는 손에 비누칠을 해 박박 문질러 씻었다. 하지만 손바닥의 마법진 문양은, 그의 전신에 새긴 문신처럼 지워지지 않았다.
“말도 안 돼.”
그는 손바닥을 노려보았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게임을 많이 한 탓에 꾼 판타지 꿈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손바닥에 루시안이 찍어 준 낙인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설마 지금도 꿈?”
김필도는 칼을 집어 들었다. 하지만 칼로 확인할 필요가 없었다. 조금 전 커피를 쏟았던 부분에 물집이 생겨나 있었다.
김필도는 다시 식탁 의자로 돌아가 앉았다.
“이건 도대체······!”
그는 다시 왼손을 보았다.
문신을 새기는 것처럼 판 것도 아니고 벌겋게 달군 인두로 찍은 것도 아니다. 마치 살 속에 물감이 스며들어 있는 것 같은 모습이다.
“박투 마법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그는 지그시 주먹을 말아 쥐었다.
루시안은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고 하면서 정작 기억하는 방법은 가르쳐 주지 않았다.
“에이, 모르겠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로 들어갔다.
답이 나오지 않는 일에 매달리는 건 체질상 맞지 않다.
그는 옷을 벗어 세탁기 안에 던져 넣고 샤워를 했다. 샤워를 마치고 나온 그는 다시 커피를 내려 천천히 식사를 마쳤다.
문득 손바닥의 낙인을 보자 밥을 굶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를 먹고도 양이 차지 않아 이번엔 굽지도 않은 마른 식빵에 잼을 발라 먹었다.
“갑자기 식탐이 강해지면 죽는다는데······.”
옷을 챙겨 입던 김필도는 중얼거렸다.
문득 옷장 안쪽으로 시선이 갔다. 그는 천으로 싼 물건을 꺼냈다. 묵직한 그것은 일본을 오가며 무역업을 하는 사람을 통해 구한 일본도다.
도를 가져다준 사람에 의하면 6백여 년 전 무로마치 시대 초기에 만들어진 도(刀)라고 하였다.
칼날의 길이만 120센티미터에 손잡이까지 합치면 170센티미터에 달하는 장도다. 더불어 단도가 있는데 단도의 길이는 칼날과 손잡이를 합쳐 70센티미터가량이다.
김필도는 도를 싼 천을 둘러맸다.
“저놈도 가져가야 하려나?”
이번에 김필도의 시선이 향한 옷은 방탄조끼였다.
방탄조끼에 눈을 맞추고 있던 그는 왼손 손바닥의 마법진을 보았다.
“가져가자.”
이내 결심을 굳힌 김필도는 침대 위에 일본도를 던져 놓고 드레스 셔츠 위에 방탄조끼를 껴입고 재킷을 걸쳤다.
다시 일본도를 집어든 그는 방을 휘둘러보다가 자동차 키를 들고 집을 나섰다.
지하 주차장에는 그의 애마인 BMW750이 기다리고 있었다. 시동을 켜자 기분 좋은 엔진음이 귀를 간질인다.
그는 글러브 박스를 열고 사각형 상자를 꺼냈다. 상자 안에는 도청장치가 들어 있었다.
도청장치를 장착해 놓은 목표물은, 정중수, 최태성, 장계상 세 사람이다.
직속상관인 정중수는 사무실, 입고 있는 옷, 그리고 차량까지 3곳에 설치했고, 최태성과 장계상은 어제 방문했을 때 지하주차장에 있던 그들의 차량에만 하나씩 설치했다.
그는 도청장치를 작동하는 스위치를 켜 조수석에 놓고는 안전벨트를 맸다.
곧 차가 스르르 미끄러져 나갔다.
지하 주차장을 나선 차는 곧바로 강북으로 향했다.
오늘은 강북, 강동, 영등포 그리고 인천의 컨테이너 터미널까지 가야 하는 강행군이다.
강북에서 업소 두 곳에 들르고 강동 두 곳, 그리고 영등포 네 곳을 들른 다음 늦은 점심을 먹고 경인고속도로로 핸들을 돌렸다.
어느새 시계는 8시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이거 가야 하나······.”
김필도는 망설였다.
어디서 사고라도 난 듯 차들이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어차피 빠져나갈 곳도 없네.”
별수 없이 시디플레이어에 시디를 끼워 넣었다.
엔야의 노래를 들으며 가다 서다를 반복하던 끝에 10시가 돼서야 목적지에 도착했다.
“너무 늦······.”
“정 회장, 나요.”
시동을 끄고 내리려는데 도청장치에서 장계상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김필도는 차 문 손잡이를 잡고 있던 손을 스르륵 풀었다.
“어쩐 일이오?”
이번엔 정중수 목소리였다.
“얼굴 좀 봤으면 해서 말이오.”
“난 볼일이 없소.”
“11년 전 그날 김필도의 여동생을 데려온 사람이 정 회장이었다는 걸 오늘 처음 알았소.”
“이미 지난 일이오.”
“내가 그 사실을 김필도에게 말하면 어떻게 하겠소?”
“난 필도를 대학까지 보내 줬소. 필도가 장 회장의 말을 믿을 거라고 보시오?”
“난 장계상을 믿어, 정 회장.”
김필도는 도청장치를 노려보며 낮게 말했다.
그가 정중수를 의심하기 시작한 건 3년 전이다.
11년 전 필녀가 죽었을 때 그녀의 입에서 단추 하나가 나왔다. 강간을 당하는 와중에 반항을 하다가 우연히 물어뜯었는지, 아니면 범인을 가르쳐 주기 위해 일부러 물어뜯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양복 단추로 보였던 그것이 필녀의 입에서 나왔고, 유일한 단서였다.
그 단추에 대해서는 경찰에도 말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반년 전 정중수의 집에 심부름을 갈 일이 있었다. 그때 그의 집 장롱 속에서 오래된 양복을 발견했다. 그 양복 오른쪽 소매 단추 세 개 중 하나가 떨어져 나가고 없었다.
지난 10년 동안 간직하고 있던 단추를 꺼내 맞춰 보았다. 남아 있는 두 개와 같은 단추였고, 뜯겨 나간 실도 같았다.
무려 10년 만에 필녀를 살해한 범인을 찾았지만 김필도는 서두르지 않았다.
정중수가 필녀를 살해한 이유를 알고 싶었다.
그런데 오늘, 그날 있었던 사건의 실마리가 풀려 가고 있다. 필녀가 그렇게 된 날 밤에는 정중수 혼자만 있었던 게 아니었다.
“물론 믿지 않을 거요. 하지만 정 회장과 최 회장이 나를 제거하기 위해 그 어린 계집을 미끼로 사용하려 했다고 하면 그 녀석도 믿을 거요.”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그 자리에 장 회장도 있었다는 걸 필도가 알아차릴 텐데?”
“그래서 대화를 하자는 거 아니오, 정 회장.”
“구체적으로 말해 보시오.”
“정 회장이 김필도를 포기하면 우린 전쟁을 하지 않고도 공생이 가능할 것 같은데······.”
“김필도에 대한 이야기를 하잔 말이오?”
“그놈 이야기도 있고, 여러 가지 할 말이 많을 것 같소.”
“좋소, 장 회장. 내일 저녁 10시 영흥관에서 보도록 합시다.”
“크큭!”
김필도의 입가에 섬뜩한 미소가 맺혔다.
도청장치를 다시 안으로 집어넣고 차에서 내렸다. 잠시 후 그는 터미널 인부들이 머무는 건물에 발을 들였다.
“누굴 찾아온 거요?”
문이 열린 사무실 안쪽을 기웃거리자 담배를 피우고 있던 노인이 물었다.
“선장을 만나러 왔소.”
김필도는 주머니에서 5만 원 지폐 한 장을 꺼내 노인에게 내밀었다. 지폐를 불빛에 비춰 보던 노인은 김필도의 얼굴을 흘금 쳐다보고는 한쪽 칸막이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잠시 후, 턱수염이 수북하게 긴 중년 사내가 나왔다.
“내가 선장이오.”
중년 사내는 얼굴을 기억하려는 듯 김필도를 빤히 바라보았다.
“요새 바다를 건너려면 얼마나 듭니까?”
“무슨 소리요?”
중년 사내는 잔뜩 경계하는 얼굴로 되물었다.
“나 이런 사람입니다.”
김필도는 오른손 팔소매를 걷었다. 그러자 문신으로 가득 찬 피부가 드러났다.
“그 정도는 얼마든지······.”
“멀쩡한 건 손과 발 그리고 얼굴뿐입니다.”
“어디에 속해 있는지 물어도 되겠소?”
“전엔 사시미라고 불렸고, 지금은 학사라고 불립니다.”
“대, 대불파의 학사셨군요.”
중년 사내의 말투가 갑자기 공손해졌다.
“대불파가 아니고 대불종합개발입니다.”
“일본까지 가는 데는 4천입니다.”
“필리핀은요?”
“필리핀 역시 같은 금액을 생각하셔야 합니다.”
“어떻게 갑니까?”
“배로 먼저 공해로 나간 다음 필리핀으로 가는 선박으로 갈아타게 됩니다. 그런데 누가 가실 겁니까?”
“아는 사람입니다. 준비는 언제쯤 되겠습니까?”
“배는 3일 후에 떠납니다. 연안부두로 오셔서 이 번호로 전화를 하십시오. 금액은 조금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4천입니다.”
사내는 전화번호가 적힌 명함 한 장을 내밀었다.
“선장께서 직접 가십니까?”
“그렇습니다.”
“그럼 먼저 계약금을 드리겠습니다.”
김필도는 품속에서 봉투를 꺼내 내밀었다.
중년 사내는 봉투를 열었다. 봉투 안에는 5만 원권 네 다발이 들어 있었다.
“시원시원하시군요.”
선장은 싱글벙글한 얼굴로 돈다발을 손바닥에 대고 툭툭 쳤다.
“그럼 부탁하겠소.”
김필도는 선장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고는 몸을 돌렸다.
벨이 울리자 박두칠은 재빨리 휴대전화를 들었다. 액정 화면에 최 회장이라고 뜬 것이었다.
“접니다, 회장님!”
“지금 어디냐?”
“인천 컨테이너 터미널입니다.”
“김필도는?”
“차는 이곳에 두고 누군가를 만나러 갔습니다.”
“정리해.”
“완전 제겁니까?”
“증거 남기지 마!”
“알겠습니다, 회장님!”
박두칠은 전화를 끊었다. 그러고는 뒤편에 앉은 자들을 돌아보았다. 두 사람은 조장들이었다.
“제거 명령입니까?”
오른편 사내가 물었다.
“증거 남기지 말랜다.”
“알겠습니다, 형님!”
두 사람은 낮게 소리치고는 차에서 내렸다.
박두칠이 타고 있던 에쿠스 뒤편 컨테이너 옆에는 승합차 5대가 대기 중이었다.
두 사람이 승합차 앞으로 가자 문이 열렸다.
“놈을 묻으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알겠습니다, 형님!”
정장을 갖춰 입은 덩치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그들의 손에는 야구방망이와 골프클럽, 체인 그리고 40센티미터가량 되는 도가 들려 있었다.
“놈은 사시미란 별명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칼을 능숙하게 다룬다는 걸 명심해라!”
덩치가 큰 조장은 조원들의 손에 들린 무기를 보며 말했다.
“네!”
덩치들은 고개를 숙였다.
“너희들은 차를 끌고 가서 놈이 도망칠 곳을 막아!”
“알겠습니다.”
조장의 말을 들은 조원들은 곧 승합차를 몰고 흩어졌다. 그들은 김필도의 차와 30미터 떨어진 곳에 승합차를 세웠다. 그러고는 조용히 기다렸다.
차를 향해 가던 김필도는 그 자리에 우뚝 멈췄다. 갑자기 머리가 쭈뼛 서며 소름이 돋았다.
살아온 세월은 얼마 되지 않지만 지금과 같은 경험은 몇 번 있다. 그때마다 어김없이 놈들이 나타났다.
‘입고 오길 잘했네.’
김필도는 손으로 가슴을 가볍게 치며 차를 향해 걸어갔다.
차를 10여 미터 남겨두고 그는 주머니를 뒤졌다. 스마트키가 만져졌다. 잠시 키를 더듬던 그는 한편을 눌렀다.
트렁크가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
김필도는 좌우를 살피며 열린 트렁크를 향해 걸어갔다.
파앗!
바로 그때였다.
강한 빛줄기가 김필도를 덮쳤다. 어둠을 뚫고 직진하는 빛줄기의 정체는 승합차 전조등이었다.
파악!
김필도는 쏜살같이 트렁크를 향해 뛰었다.
“묻어!”
그가 트렁크 앞에 선 순간 박두칠은 차갑게 소리쳤다.
탁탁탁! 타탁탁탁!
주위에 있던 덩치들은 각자의 무기를 들고 김필도를 향해 내달렸다.
그때 김필도는 트렁크에서 기다란 물체를 꺼냈다. 그것은 집에서 가져온 일본도였다.
그는 주위를 살피며 소도를 오른편 허리띠 사이로 찔러 넣었다.
“차앗!”
날카로운 기합과 함께 서늘한 느낌이 왔다. 김필도는 재빨리 몸을 굴렸다.
콰앙!
야구방망이가 자동차의 트렁크를 후려쳤다. 상체를 일으킨 김필도는 덩치의 무릎을 향해 도를 휘둘렀다.
도를 뽑지 않고 도집째 후려쳤지만 위력은 대단했다. 아니, 어디를 쳐야 상대가 불능이 된다는 사실을 김필도는 그간의 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다.
퍼억!
덩치의 무릎에서 섬뜩한 소성이 터져 나왔다.
“악!”
덩치는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풀썩 쓰러졌다. 오른편 무릎이 박살나 버린 것이었다.
스악!
또다시 바람 소리와 더불어 차가운 기운이 머리를 향해 날아왔다. 김필도는 도를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차앙!
그의 머리를 향해 떨어지던 것은 골프클럽이었다. 김필도는 오른손을 강하게 쳐 올려 골프클럽을 밀어냈다. 그러고는 사내의 갈비뼈를 향해 도를 휘둘렀다.
도집은 검은색이었다. 표면에는 옻칠이 돼 있고, 위쪽과 아래쪽에 흰색의 매화 문양이 새겨져 있으며 재질은 쇠다.
쇠로 만든 물건이 6백여 년간 녹이 슬지 않고 원래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은 잘 만들어졌다는 방증이다. 즉 명도란 의미다.
퍼억!
우둑!
뼈 부러지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컥!”
덩치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김필도는 몸을 일으켜 세우면서 덩치의 턱을 향해 머리를 박아 넣었다.
퍼억!
“커억!”
순식간에 십여 개의 이가 나간 사내는 비명과 함께 벌러덩 넘어갔다. 사내의 입 주위는 피로 범벅이었다.
김필도는 재빨리 차를 등지고 섰다. 차가 있으면 그나마 뒤가 보호되기 때문이었다.
차앗!
또다시 강한 기합과 함께 덩치 두 명이 달려왔다. 오른편에 있는 자는 쇠파이프를, 왼편에 있는 자는 체인을 들고 있었다.
휘익!
먼저 공격해 온 무기는 체인이었다.
김필도는 오른편으로 이동했다.
퍼억!
체인은 차 측면에 깊은 자국을 남겼다.
“이런 개호로새끼! 리스가 아직 2년이나 남았는데.”
김필도의 입에서 욕설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눈동자가 가늘어지며 차가운 광채를 뿌려댔다. 그는 왼손으로 체인을 틀어쥐었다. 그러고는 덩치의 머리를 향해 도를 그대로 내리찍었다.
퍼억!
퍽!
“커억!”
동시에 두 번의 타격음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비명을 내지른 자는 머리가 깨진 덩치뿐이었다. 다른 덩치의 쇠파이프가 어깨를 찍었지만 김필도의 입에서는 신음조차 흘러나오지 않았다.
“날 찍었다 이거지!”
김필도는 미소를 베어 물며 도를 쭉쭉 찔러 넣었다. 도는 빠른 속도로 쏘아져 가더니 덩치의 턱에 꽂혔다.
퍽!
“억!”
나직한 비명과 함께 덩치의 동체가 뒤로 넘어갔다. 한순간에 기절해 버린 것이었다.
퍽!
바로 그때였다. 강한 충격이 머리에서 느껴지더니 눈앞에 별이 반짝였다. 김필도는 비틀거리며 앞으로 걸어갔다. 누군가 차 위로 올라가 공격을 한 모양이었다.
흐릿한 시야 사이로 빠르게 달려드는 덩치의 모습이 보였다. 놈의 손에서 새하얀 광채를 뿌리는 그것은 사시미라고 불리는 회칼이었다.
과거 김필도가 대학을 가기 전에 사용하던 무기이기도 했다.
김필도는 도를 번쩍 들어 올렸다.
퍼억!
바로 그때 그의 오른편 옆구리에서 강한 타격음이 흘러나왔다. 조금 전 머리를 쳤던 자가 다시 공격을 해 온 것이었다.
갈비뼈가 부러진 듯 통렬한 통증이 밀려왔다.
“썅!”
뼈가 부러지면서 오는 고통에 가물가물하던 정신이 번쩍 들었다. 김필도는 오른편으로 한 걸음 옮겼다. 그와 동시에 왼발을 뒤로 뺐다. 그러자 그는 왼편을 바라보는 모양새가 됐다.
회칼을 든 자가 빠르게 달려오고 있었지만 놈을 상대할 시간이 없었다. 김필도는 자세를 낮추면서 덩치의 무릎을 향해 도를 휘둘렀다.
빠악!
“아악!”
둔탁한 소성과 함께 사내의 입에서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사내는 그 자리에 풀썩 쓰러졌다.
스악!
그때 김필도의 왼편 허벅지에서 피가 확 솟았다.
회칼이 오른편 허벅지를 가르고 지나간 것이었다. 재빨리 오른발을 빼는 바람에 상처는 깊지 않은 듯했지만 피는 무섭게 흘러나왔다.
김필도는 도를 번쩍 들어 올렸다.
그리고 회칼을 든 자의 뒷목을 향해 도끼질하듯 내리찍었다.
퍼억!
“커억!”
회칼 사내는 그 자리에 풀썩 쓰러졌다.
푸욱!
“젠장할!”
일이 공교롭게 되려고 그랬는지, 도에 목을 가격당하고 기절한 녀석이 자신의 회칼 위로 쓰러진 듯 칼끝이 등을 뚫고 나와 있었다.
본의 아니게 살인을 저지르고 만 꼴이었다.
첫 번째 살인임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아니, 감흥을 느낄 만한 상황이 아니라고 해야 했다.
퍼억!
이번엔 등에서 강한 통증이 왔다.
김필도는 한쪽 무릎을 꿇었다.
“쓰벌!”
꿇은 무릎을 중심으로 김필도의 신형이 빙글 돌았다. 그리고 강한 바람을 머금은 도가 덩치의 무릎을 후려갈겼다.
“커억!”
오른편 무릎 뼈가 부러진 사내는 비명과 함께 풀썩 쓰러진다.
김필도는 그런 사내의 턱을 사정없이 쳐올렸다.
“컥!
급소를 가격당한 사내는 또다시 비명을 내지르며 바닥에 고개를 처박았다.
“좋아, 개자식들! 전부 와! 전부 오라······.”
푹!
고함을 내지르며 벌떡 일어나는데 배에서 섬뜩함이 끼쳤다. 김필도는 시선을 내렸다. 회칼 한 자루가 방탄조끼 바로 아래쪽으로 파고들어 가 있었다.
김필도는 왼손으로 회칼을 잡았다.
회칼을 돌리게 되면 뱃속의 내장이 조각조각 잘려나가 살아날 가능성이 희박해지기 때문이었다.
칼날을 잡자마자 손바닥이 베여 피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김필도는 왼손으로 회칼을 잡은 채 사내의 머리를 틀어쥐었다. 녀석은 회칼을 돌리면서 빼내기 위해 힘을 쓰는 중이었다.
“사시미는 나야, 호로새끼야!”
김필도는 사내의 머리를 끌어당기며 사정없이 머리를 들이박았다.
빠악!
“크아아악!”
사내의 입에서 터지는 고통스러운 비명도 김필도를 말리지 못했다. 사내의 머리를 뒤편으로 밀더니 처음보다 더 강하게 당기며 머리를 박았다.
빠악!
둔탁한 소리가 두 사람의 이마에서 터져 나왔다.
사내의 이마에서 피가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김필도의 동작이 더욱 빨라지고, 두 사람의 얼굴에서 흐르는 피의 양이 많아졌다.
김필도는 미친 듯이 팔을 폈다가 다시 끌어당겼다.
피가 사방으로 튀고, 급기야 살이 짓이겨지기 시작했다. 회칼을 들었던 사내는 이미 기절을 한 듯 흐느적거렸다. 그 상황에서도 김필도는 쉬지 않고 사내의 이마를 끌어당기며 머리를 박았다.
퍼억!
바로 그 순간이었다.
둔탁한 소리가 김필도의 목에서 흘러나왔다.
그는 동작을 우뚝 멈추고는 고개를 돌렸다.
190센티미터에 육박하는 덩치 한 명이 야구방망이를 들고 싱긋 웃고 있었다.
“개새······.”
녀석을 잡고 싶었다. 하지만 다리에 힘이 풀려 설 수가 없었다.
풀썩!
김필도의 몸이 그 자리에 쓰러졌다.
“씨팔! 이판사판인데.”
김필도는 조금 전 놓았던 도에 눈을 맞췄다.
도를 뽑는다고 해서 결과가 달라지진 않겠지만 적어도 몇 놈은 함께 저승으로 데려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뚜벅! 뚜벅! 뚜벅!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김필도는 눈에 힘을 주었다.
“괜찮은 실력을 가졌는데 아깝구나, 김필도.”
김필도 앞으로 다가간 자는 나무꾼 박두칠이었다. 박두칠의 손에는 외국인들이 통나무를 자를 때 사용하는 두께가 얇고 칼날 부분은 넓은 도끼가 들려 있었다.
“장계상이 시킨 거냐?”
김필도는 몸을 일으키려고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여전히 다리가 풀려 일어날 수가 없었다.
“넌 너무 나댔어.”
“너무 나댄 게 아니라 너희들이 생각보다 빨랐어.”
“우리가 공격할 줄 알았단 말이구나.”
“장계상이 죽은 다음일 거라고 생각했거든.”
“장 회장님을 죽일 생각이었다고?”
“장계상, 최태성, 정중수 세 놈을 전부 없앨 생각이었어.”
“허, 그거 재미있는 시추에이션이네. 장 회장이나 최 회장님은 그렇다 쳐도 정중수는 왜 없애려고 한 거냐?”
박두칠은 놀란 눈으로 김필도를 보았다.
지금껏 김필도는 정중수의 오른팔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본인 입으로 직접 정중수를 없애려 했다고 한다.
“내 동생을 죽인 놈이거든.”
“네 동생?”
“11년 전 일이니까 너는 모를 거다.”
“그 열세 살짜리 계집애가 네 동생이었냐?”
“······!”
김필도는 박두칠을 올려다보았다.
“그 계집애를 저수지에 던진 사람이 나야. 회장들이 눈이 뒤집힐 만하더구나. 열세 살밖에 안 된 계집년이 그렇게 풍만한 몸매를 가지고 있을 줄 누가 알았겠어. 오죽했으면 저수지에 던지기 전에 내가 한 번 했겠냐.”
그때를 떠올린 듯 박두칠은 히죽 웃었다.
“그, 그럼 저수지에 던지기 전에도 살아 있었단 말이냐.”
“맞아. 마약 기운이 아직 남아 있어서 착착 감기는데 미치는 줄 알았어.”
“크큭!”
김필도의 입에서 메마른 웃음이 흘러나왔다.
“아무튼 너희 남매는 나와 인연이 있는 모양이다. 둘 다 내 손에 죽게 됐으니까 말이다.”
박두칠은 도끼를 번쩍 들어 올렸다.
하지만 김필도는 박두칠을 보지 않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향해 있는 곳은 왼손이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회칼을 쥐어 쩍 벌어진 왼손 손바닥이다.
쩍 벌어진 상처에서는 피가 줄줄 흘러나온다. 하지만 피는 바닥으로 떨어지지 않았다.
마치 동영상으로 찍은 폭포 사진을 되감을 때처럼 피는 손바닥 안으로 빨려들어 가고 있다. 그런데 부상을 당한, 쩍 갈라진 부위로 빨려들어 가는 게 아니었다. 놀랍게도 전날 밤 꿈속에서 만들어진 마법진으로였다.
마법진은 흡혈귀처럼 피를 빨아들인다.
인두로 지진 것처럼 검은색이었던 마법진이 점차 붉게 변해 갔다. 마치 간밤에 보았던 레드 문 같았다.
“잘 가라, 김필도!”
사악한 웃음이 스민 목소리가 들려왔다.
-난 너다.
그리고 머릿속으로도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는 간밤의 꿈속에서 들었던 루시안 아이작 프리우스의 목소리였다.
“나는 너다!”
김필도는 저도 모르게 따라 했다. 그러자 그의 눈동자가 옅은 파란색으로 변했다.
제3장 황혼에서 새벽까지
퍽!
박두칠은 깜짝 놀랐다.
조폭 생활 25년차인 그는, 어떤 상황에서는 설령 기적이 일어난다고 해도 움직일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김필도의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오른쪽 허벅지는 쩍 갈라졌고, 왼편 어깨와 갈비뼈 그리고 머리는 깨졌다. 그리고 배에는 회칼이 깊숙이 박힌 상태다. 설령 신이 어루만져 준다고 해도 일어설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런데 도끼가 목을 향해 떨어지는 순간 놈은 몸을 굴려 피한 것이었다.
“흐크큭!”
그때 김필도는 도를 집어 들고 일어서고 있었다.
그의 입에서 메마른 웃음이 흘러나왔다.
김필도는 천천히 도를 뽑았다. 도신(刀身) 120센티미터, 손잡이 50센티미터 총 170센티미터. 일반적인 일본도보다 길게 만들어진 이유는 기병을 상대하기 위해서라고 하였다. 120센티미터에 달하는 도신은 중간 부분에서 약간 휘어 부드러운 곡선을 이루고 있다.
베기를 극대화하기 위함이다.
김필도는 오른손으로 가드 바로 아래쪽을 잡았다.
“죽여!”
박두칠은 부하들을 향해 소리쳤다.
“차앗!”
“타앗!”
“이야압!”
기다렸다는 듯 박두칠의 부하들은 김필도를 향해 달려갔다.
척!
김필도는 도를 오른편 어깨 위로 세웠다. 그리고 왼손으로는 손잡이 아래쪽을 살짝 잡았다.
쇄액!
강한 바람 소리를 흘리며 골프클럽이 날아왔다.
김필도는 도를 내렸다. 도 끝이 땅바닥에 닿으려는 순간, 벼락처럼 사선으로 그어 올렸다.
스악!
그의 도는 덩치의 왼편 옆구리로 파고들어 가 뼈를 가르고, 오른편 어깨로 빠져나왔다.
“아아악!”
처절한 비명과 함께 피가 확 튀었다.
김필도는 오른발을 앞으로 내밀어 강하게 디디며 하늘로 향해 있던 도를 일자로 내리그었다.
스악!
또다시 섬뜩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덩치의 정수리를 파고들어 간 도는 사타구니 사이로 빠져나왔다.
곧바로 왼발을 우측으로 돌리며 그 여력을 이용해서 도를 횡으로 휘둘렀다. 도는 핏방울을 뿌리며 덕대의 목으로 파고들어 갔다.
스악!
“컥!”
나직한 비명과 함께 잘려 나간 머리가 둥실 떠올랐다.
“죽어라!”
“죽여라!”
동료의 죽음에 광분한 덩치들은 더욱 거칠게 달려들었다. 골프클럽을 휘두르고, 쇠몽둥이로 찍고, 체인을 휘둘렀다.
하지만 김필도는 침착하게 그들의 무기를 막아내며 도를 휘둘렀다.
푸르스름한 광채를 뿜어내는 도가 허공을 가를 때마다 검붉은 피가 울컥울컥 쏟아져 내렸다.
파앗!
김필도 뒤에는 경주마가 바닥을 차고 달리는 것처럼 깊은 자국이 남았다.
어느새 덕대와 마주 선 김필도는 들어 올렸던 도를 내리그었다.
덩치의 오른편 어깨로 파고들어 간 도는 오른편 옆구리로 빠져나왔다. 순식간에 울대를 베어 버린 듯 덩치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풀썩 쓰러졌다.
-박투 마법 검술이네.
“좋군. 마음에 들어!”
김필도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몸을 날렸다.
스악!
“커억!”
휙!
“크아아악!”
동에 번쩍 서에 번쩍이란 말이 이처럼 어울릴까. 김필도는 가공할 속도로 움직여 다니며 덩치들을 도륙했다.
“이야압!”
박두칠은 목이 터져라 기합을 지르며 김필도를 향해 내달렸다. 도끼를 들고 달려가는 그의 얼굴은 공포로 얼룩져 있었다.
조폭 생활 25년.
그 세월 동안 수많은 싸움을 했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처럼 엄청난 광경은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다. 패싸움을 하더라도 가급적 상대를 죽이지 않는 한도 내에서 끝냈고, 살인 또한 어쩌다가 실수로 저지르곤 했다.
그럴 경우엔 쌍방이 합의하여 조용히 끝냈다.
살인 사실이 알려지면 서로 좋을 게 없기 때문이다.
오늘도 마찬가지다.
김필도를 조용히 묻고 끝을 내려고 했다. 그 반대의 경우, 즉 김필도에게 블루팀이 당하는 경우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 물론 팀원 몇 명 정도 부상은 접고 들어갔다. 어렸을 때부터 격투기 체육관에서 살았던 녀석을 상대하면서 부상이 없을 수는 없을 테니까.
그러나 결단코 팀원의 죽음은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벌써 서른 명 이상의 팀원이 죽고 지금도 죽어나가고 있다. 박두칠 살아생전에 이런 참혹한 도살은 처음이었다.
“으아아아아!”
박두칠은 고함을 내지르며 들어 올렸던 도끼를 힘껏 내리찍었다. 바로 그 순간, 김필도의 신형이 탄환처럼 전방으로 쏘아져 갔다.
그리고 그의 왼손이 오른편 허리춤으로 향했다.
푸욱!
“컥!”
박두칠의 손에서 도끼가 떨어져 나갔다.
그는 고개를 숙여 아래를 보았다. 도 한 자루가 손잡이만 남긴 채 남성 바로 위쪽으로 파고들어 가 있었다.
도의 위치로 보건대 물건도 잘렸을 가능성이 높았다.
“개자식!”
“그 아이는 열세 살이었어. 열세 살!”
김필도는 짓씹듯 중얼거리며 왼손을 사정없이 당겼다. 그러자 박두칠의 아래쪽으로 파고들어 갔던 단도가 빠져나왔다.
“커억!”
박두칠은 비틀거리며 물러났다.
“먼저 가서 기다려!”
김필도는 들어 올렸던 도를 강하게 내리그었다.
“크아아악!”
박두칠의 입에서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우우!”
“우우우!”
팀장인 박두칠까지 죽고 나자 전의를 상실한 듯 덩치들은 얼빠진 얼굴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야아아아!”
그런 그들을 향해 김필도는 함성을 내지르며 몸을 날렸다.
“젠장······.”
이동수는 진땀을 흘렸다. 휴대전화 버튼을 누르는데 손이 심하게 떨려 자꾸만 다른 번호가 찍히는 것이었다.
열한 자리 번호를 전부 누르는 것도 아니었다. 단지 단축번호 18번만 누르면 된다. 그런데 단 두 개의 버튼이 눌러지지 않았다.
“돼, 됐다!”
간신히 18번을 누른 그는 휴대전화를 귀에 댔다.
-어머나, 어머나, 이러지 마세요.
모 트로트 가수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씨팔!”
온통 피 냄새가 진동하는 곳에서 댄스곡에 가까운 ‘어머나’를 듣자 절로 욕설이 비어져 나왔다.
“아악!”
“악!”
“으악!”
“제발 좀 받아라, 이 씨팔놈아.”
이동수는 팀장 윤치성에게 전화를 걸었다는 것도 잠시 잊고 욕설을 내뱉었다.
지금 있는 곳은 싸움 현장에서 50미터 떨어진 컨테이너 위쪽이었다. 승합차 다섯 대의 전조등이 환하게 비추는 곳에서 도살이 벌어지고 있다.
팔다리가 잘려나가는 건 기본이고, 수시로 머리도 허공으로 날아오른다.
마치 예전에 보았던 영화, 조지 클루니 주연의 ‘황혼에서 새벽까지’ 중 술집 장면을 보는 것 같았다.
연안파의 블루팀은 뱀파이어고 김필도는 조지 클루니였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는 광경이 영화 속 장면보다 백배는 더 잔인했다.
“나다!”
전화 너머에서 윤치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 죽었습니다, 형님, 아니 팀장님.”
“누가 죽어?”
“나무꾼 형님과 블루팀이 싹쓸이 당했습니다.”
“무슨 소리야?”
“김필도가 나무꾼 형님과 블루팀 전부를 죽였단 말입니다.”
“이런 썅!”
비몽사몽간에 있던 윤치성은 벌떡 일어났다.
“자세히 말해 봐.”
그는 전화기에 대고 소리쳤다. 여전히 이동수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필도를 잡으러 나간 블루팀은 오십 명이다. 그런 그들이 필도에게 전부 죽었다니. 믿기지가 않는 말이었다.
“그게······.”
이동수는 방금 본 상황을 빠짐없이 자세하게 설명했다.
“정말 검으로 블루팀 전원을 없앴단 말이냐?”
윤치성은 다그치듯 물었다.
여전히 그는 믿기지 않는다는 투다.
“도대체 몇 번을 말해야 하냐. 좀 믿어라 좀만아!”
이동수는 저도 모르게 쌍욕을 내뱉었다.
“맙소사!”
윤치성은 멍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다른 때 같았으면 반말을 지껄인 이동수를 향해 죽인다고 난리를 쳤을 것이다. 하지만 윤치성은 이동수의 욕설을 문제 삼지 않았다. 아니, 그럴 경황이 없었다.
“으아악!”
그때 전화기에서 처절한 비명이 흘러나왔다.
굳이 이동수에게 물어보지 않아도 비명의 주인이 블루팀 중 한 명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빌어먹을 놈!”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서둘러 옷을 걸쳤다.
“팀장님!”
전화기에서 이동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놓치지 마.”
“알겠습니다, 팀장님!”
이동수는 전화를 끊고 전면을 바라보았다.
이미 도살장 축제는 끝나고 승자가 된 김필도만이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흐읍!”
김필도는 배를 바라보았다.
싸우는 도중에 빠져나갔는지, 배에 꽂혀 있던 회칼이 보이지 않았다. 많은 양은 아니지만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김필도는 차가 있는 곳으로 갔다.
“쿡!”
차를 바라보던 그는 피식 웃었다. 찌그러진 차체와 깨진 유리가 꼭 제 모습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트렁크를 열고 공구상자처럼 생긴 상자 하나를 꺼냈다. 무기와 더불어 조폭들에게 필수품인 구급약이 들어 있었다.
상자 뚜껑을 연 그는 재킷과 방탄조끼를 벗었다. 드레스 셔츠는 피로 범벅이라 입고 있을 수가 없었다. 드레스 셔츠를 벗어 던진 그는 구급약 상자에서 소독약을 꺼내 상처 부위에 들이부었다.
“크으윽!”
허연 거품이 부글부글 괴면서 지독한 통증이 밀려왔다. 그는 남은 소독약을 오른편 허벅지에 부었다.
“이것 때문인가?”
그는 왼손을 보았다. 피를 머금은 것처럼 붉게 빛나던 마법진은 원래의 검은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사실 지금 정도의 부상이면 이미 죽었어야 했다. 다른 부상은 차치하더라도 배를 뚫고 들어간 상처는 치명적이다. 그런데 극심한 고통과 약간의 불편을 제외하면 별다른 문제가 없는 것 같다.
어쩌면 그렇게 된 게 왼손에 있는 마법진 때문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할 일이 남았으니까.”
김필도는 구급약 상자에서 압박붕대를 꺼냈다.
“제가 해 드릴까요?”
그때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필도는 고개를 돌렸다.
“누구지?”
김필도는 날카로운 눈으로 상대를 살폈다.
“치성 형님을 모시고 있는 이동수라고 합니다.”
“치성이?”
“네.”
“날 감시했던 거냐?”
“형님이 아니고 나무꾼을 감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럼 감시 대상이 없어진 거네?”
“그렇습니다.”
“좀 감아 줄래?”
김필도는 압박붕대를 이동수에게 건네주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동수는 거즈를 칼에 찔린 자리에 대고 그 위로 압박붕대를 감았다.
배부터 시작해서 부러진 갈비뼈까지 전부 감았다. 그런 다음 허벅지도 압박붕대를 감아 주었다.
“고마워. 저기 도집 좀 가져다줄래?”
김필도는 구급약 상자를 트렁크 안으로 집어넣으며 말했다. 그러고는 뒷좌석에 걸어 두었던 드레스 셔츠를 꺼내 입고 방탄조끼를 걸쳤다.
“알겠습니다.”
이동수는 한편에 떨어진 도집을 주워 김필도에게 건넸다.
김필도는 도를 도집 안으로 밀어 넣었다.
“좋은 이름이네.”
도집을 바라보던 김필도는 미소를 지었다. 도집에 설풍(雪風)이란 이름이 적혀 있었다.
“설풍이면 일본말로는 유키카제지?”
“네?”
난데없는 질문에 이동수는 어리벙벙했다.
“아냐.”
김필도는 문을 열고 설풍과 단도를 조수석으로 놓고 차에 올랐다. 그러고는 차를 출발시켰다.
“어, 어디로 가십니까?”
“일을 마무리 지으러 가야지. 치성이 그 녀석이 널 여기까지 보낸 걸 보면 상당히 믿는 것 같은데, 맞아?”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커피는 매일 제가 타드립니다.”
“그럼 맞아. 치성이 그 녀석은 정말 믿는 녀석이 아니면 커피 심부름을 시키지 않으니까. 여기 계속 있으면 살인 사건에 휘말리게 될지도 몰라. 그러니까 되도록 빨리 이곳을 뜨도록 해.”
“알겠습니다.”
이동수는 차에서 내렸다.
“그럼 다음에 보자.”
김필도는 손을 흔들고는 가속페달을 밟았다.
BMW는 빠르게 현장을 빠져나갔다.
김필도의 차량이 사라지자 이동수는 그의 차를 향해 뛰어갔다. 그리고 잠시 후 흰색 차량이 어둠 너머로 모습을 감췄다.
잔뜩 흐렸다 싶었는데 급기야 하늘은 비를 뿌려 놓는다. 김필도는 제2경인고속도로에 들어서자 내비게이션에 영흥관을 찍었다. 영흥관이 경기도 성남에 있다는 건 알고 있지만 정확한 위치는 알지 못했다.
내비게이션이 영흥관을 찾는 동안에 헤드 업 디스플레이(HUD)를 작동시켰다. 그러자 전면 창에 단순화시킨 지도가 나타났다. 그럼 다음 오디오에 에미넴 시디를 집어넣었다. 에미넴 시디 중 김필도가 가장 좋아하는 건 1집이다.
1집을 좋아하는 건 곡에 흐르는 느낌 때문이다.
‘1’이란 숫자는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
처음 시작하는 일은 꿈과 희망, 열정, 간절한 바람이 충만하다. 곡도 마찬가지다. 1집은 그 가수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 거짓이나 가식은 전혀 없고 오직 진실만이.
오직 진실만으로 세상과 한판 승부를 벌이는 것이 바로 1집인 것이다.
에미넴 1집 중 가장 듣고 싶은 음악을 고르라면 트랙3 Stan이다.
도입부의 빗소리에서 시작하는 Stan은 끝나도 한동안 여운이 남는다. 트랙 2 Kill you가 끝나고 Stan이 시작됐다.
김필도는 가속페달을 지그시 밟았다. 그러자 차는 미끄러지듯 쏘아져 나갔다.
멀리 초원에서 들려오는 수사자 울음 같은 엔진음이 Stan 사이로 흘러든다.
볼륨을 높이듯 발에 힘을 주어 본다. 속도계는 순식간에 2백 킬로미터를 넘나든다.
김필도는 전면을 바라보았다. 빗줄기가 무섭게 전면 유리를 후려치고 있었다.
지이잉!
진동으로 맞춰 두었던 휴대전화가 울어대었다.
김필도는 조수석에 던져 놓은 휴대전화를 보았다. 윤치성의 전화였다.
팔을 뻗어 전화기를 들었다.
“지금 어디냐?”
전화기 너머에서 윤치성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동수란 녀석에게 말을 들은 듯 제법 다급하다.
“고속도로!”
“어디 가는데?”
“그건 차가 알겠지.”
“동수 그놈 말이 사실이냐?”
“이동수?”
“응!”
“내일 조간은 힘들 테고 석간 보면 자세하게 알게 될 거야.”
“필도야.”
“난 괜찮아. 언젠가는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야.”
“차 돌려서 다시 인천으로, 아니 부산으로 가라. 그리고 바로 밀항해라.”
“정중수 그놈이었다.”
“무슨 소리냐?”
“정중수 그놈이 필녀를 장계상과 최태성에게 데리고 갔다.”
“진짜냐?”
“그놈과 최태성은 필녀를 미끼로 장계상을 강간 살해 죄로 처넣을 생각이었어. 그런데 일이 끝나고 나자 최태성의 마음이 변한 거야.”
“언제 알았냐?”
“정중수가 관련이 있다는 건 반년 전에 알았고, 장계상과 최태성이 관련됐다는 건 오늘 박두칠로부터 들었어.”
“하지만 연안파는 조직원만 해도 수백 명이 넘는다. 그들에게 접근하기도 전에 죽어, 자식아.”
“네가 있잖아.”
“나보고 어떻게 하라고?”
“장계상, 최태성, 정중수가 내일 10시에 만나기로 돼 있어.”
“어디서?”
“그들에 대해서는 잊어. 대신 넌 연안파만 신경 쓰면 돼.”
“연안파?”
“내가 그랬잖아 기회를 놓치지 말라고.”
“설마 나보고 연안파 보스가 되라는 거냐?”
“필녀 말이야.”
김필도는 느닷없이 화제를 돌렸다.
“필녀가 왜?”
“내 친동생이 아니었어.”
“그게 무슨··· 서, 설마 너도 필녀를 좋아했다는······.”
윤치성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그러고 보니 필녀와 필도, 둘 다 잘생기긴 했지만 닮은 점은 거의 없었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고아원에서 만났어. 이름은 고아원에서 도망치면서 지은 거고.”
“그런데 왜 내게 주려고 했던 거냐?”
“나보다는 네가 훨씬 나을 거라고 생각했거든. 넌 부모님도 계시고, 밥은 먹고 사니까. 네게 시집가면 적어도 배는 곯고 살지 않을 거잖아.”
“김필도!”
“잘 살아!”
김필도는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김필도!”
윤치성은 전화기에 대고 고함을 내질렀다. 그러나 부질없는 신호음만 들려왔다.
그는 다시 김필도의 번호를 눌렀다.
하지만 김필도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빌어먹을!”
윤치성은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아 허공을 뚫어질 듯 바라보았다.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 * *
인천 중부서 형사 계장 강도남이 의문의 전화를 받은 건 새벽 5시였다.
쉬지 않고 울리는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그런데 발신 번호가 없었다. 받을까 말까 망설이는데, 뭔가가 잡아끄는 듯한 그런 기분에 사로잡혔다.
뭔지 모를 다급함이 전화벨 소리에 어려 있는 듯했다.
그의 손은 통화 버튼을 누르고 있었다.
“컨테이너 터미널에 시체 50구가 있소.”
통화 내용은 그게 전부였다.
강도남은 한동안 멍해 있었다.
컨테이너 터미널에 시체 50구라니. 아닌 밤중에 홍두깨가 아닐 수 없었다.
“장난 전환가?”
그는 시계를 찾았다. 책상 위 디지털시계는 5시 5분을 표시하고 있었다. 이번엔 창문으로 시선을 옮겼다. 아직은 캄캄한 밤이다.
문득 장난 전화질을 하기엔 너무 이른 시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대한민국에서 형사 계장에게 장난 전화질을 할 만한 배짱을 가진 자가 있을는지.
휙!
강도남은 이불을 걷고 벌떡 일어났다.
“왜 그래요?”
자고 있던 강도남의 부인이 뒤척이며 물었다.
“그냥 자.”
강도남은 침대를 벗어나 옷을 입었다.
“벌써 나가요?”
“잠시 다녀올 곳이 있어서 그래.”
강도남은 급하게 현관을 나서서 엘리베이터를 탔다.
그가 이렇듯 바쁘게 움직이는 것은 전화 목소리 때문이었다. 전화를 받는 도중엔 비몽사몽간이라 목소리를 파악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이내 지독하게 차갑고 절제된 목소리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결코 장난 전화가 아니었다.
그는 지하 주차장에 주차된 차에 올랐다. 10년째 타고 있는 소나타는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어둠을 갈랐다.
그리고 10여 분 후 컨테이너 터미널에 도착했다.
“이 넓은 곳에서······.”
강도남은 차를 몰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시체들을 찾은 것은 20분 후였다. 터미널 북쪽, 수명이 다해 폐기 처분할 컨테이너를 쌓아둔 곳에서 시체를 발견했다.
“우욱!”
현장을 마주한 강도남은 헛구역질을 했다.
마치 수백 년 전 중세시대 전쟁을 그린 영화의 한 장면을 보고 있는 듯했다. 팔다리가 잘린 자들, 허리가 잘린 자들, 머리가 잘린 자들의 시체가 공터 전역에 흩어져 있었다.
강도남은 곧바로 휴대전화를 들었다.
가장 먼저 연락을 취한 사람은 서장이었다.
서장 또한 강도남과 같은 반응을 보였다. 그는 이른 아침부터 장난한다며 호통을 쳤다. 50명이 몰살당한다는 건 전쟁이 아니면 있을 수 없는 일이지 않은가.
“지금 제가 현장에 있습니다, 서장님!”
“제기랄!”
그로부터 두 시간 후 컨테이너 터미널 살인 사건은 경찰청장에게까지 보고됐다.
그리고 사건 현장 주위는 천막으로 가려졌다.
“왜 저러는 겁니까?”
현장을 살피던 윤두상이 물었다. 윤두상은 강도남 부하 직원이었다.
“당분간 비밀로 할 모양이야.”
“비밀이라고요?”
윤두상은 황당한 얼굴로 다시 물었다.
한두 명도 아니고 52명이나 되는 자들이 살해당한 사건이다. 진돗개보다 더 냄새를 잘 맞는 기자들이 알아차리지 못할 리가 없다. 아마 오후가 되면 드러나고 말 텐데 비밀로 한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가뜩이나 종말론자들까지 설치고 있는데, 52명이 살해당한 사건이 발표되면 어떻게 되겠냐?”
“그놈의 종말론은······.”
윤두상은 하늘을 올려보았다.
종말론을 부추기고 있는 건 지구를 향해 떨어지는 소행성 때문이다.
나사에서는 화산이 폭발하는 것 정도의 미미한 충격밖에 없을 거라고 하였고, 지금까지 떨어진 소행성들도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사람들은 나사의 발표를 믿지 않았다.
핵폭탄 수천 개에 해당하는 소행성이 지구와 충돌할 수도 있다는 소문부터, 미국 대통령을 비롯한 G7 정상들은 핵전쟁이 일어나도 끄떡없는 장소로 몸을 피했다는 말들까지 무성하게 떠돌고 있는 형국이다.
계장의 말처럼 그런 상황에서 52명이 한 장소에서 살해됐다는 사실은 큰 반향을 불러올 게 분명하다.
“냄새 맡는 덴 개보다 훨씬 뛰어난 능력을 가진 기자가 있다는 걸 잊었습니까?”
윤두상은 시니컬하게 말했다.
“밝혀질 땐 밝혀지더라도 일단은 비밀을 유지하라는 지시야.”
그때 두 사람 곁으로 남자 형사가 다가왔다. 날렵한 체격을 가진 그는 윤두상의 파트너인 김철곤이었다.
“전부 검에 당했습니다.”
김철곤은 강도남을 보며 말했다. 김철곤은 검도 유단자였다.
“검?”
“일본도 같은 무깁니다. 대부분 일검에 잘렸습니다.”
김철곤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검도의 실력자라고 해도 저렇게 잘라내는 건 쉽지 않다고 하지 않았냐?”
강도남은 허리를 기준으로 상체와 하체가 분리된 시체를 가리켰다.
“엄청난 실력자가 있는 모양이죠, 뭐.”
김철곤은 어깨를 으쓱했다.
“반장님!”
그때 장비를 싣고 있는 차량에서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사반의 꽃인 이보경 형사였다.
“왜?”
강도남은 고개를 돌렸다.
“CCTV가 나옵니다.”
“알았어.”
강도남은 장비 차량으로 향했다. 잠시 후 세 사람은 승합차 안으로 들어갔다.
“폐 컨테이너 쪽이라서 그런지 화질이 생각보다 좋지 않아요.”
이보경은 한편에 놓인 컴퓨터를 가리켰다.
“틀어 봐!”
강도남의 말에 이보경은 키보드 엔터키를 눌렀다. 그러자 아주 오래된 흑백 비디오 화면처럼 흐릿한 영상이 모니터에 나타났다.
“뭐냐, 저거?”
모니터를 바라보던 강도남이 김철곤을 보았다.
“헐!”
하지만 김철곤은 강도남의 말을 듣지 못한 듯했다.
그는 입을 쩍 벌린 채 모니터만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모니터 안을 종횡무진 움직이고 다니는 자는 단 한 명. 사내의 검이 광채를 쏟아 낼 때마다 피가 튀고 잘린 머리가 떠올랐다.
마치 영화 속 한 장면을 보고 있는 듯했다.
“김철곤!”
강도남은 버럭 소리쳤다.
그 또한 김철곤과 같은 심정이었다. 52명을 없앤 자는 단 한 명에 불과했다.
“괴물입니다.”
김철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의 상식으로는 하늘이 두 쪽이 나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검도를 배우면서 자칭 고수라고 하는 자들을 여럿 보았다. 그들 중 어떤 사람은 검의 끝을 보았노라고 큰소리치기도 했다. 하지만 그 많은 자칭, 타칭 고수들 중 화면 속 사내만큼 검을 다루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아니, 화면 속 사내에 비하면 그들은 어린애 수준이었다.
“저거 뭐야?”
“일본돕니다.”
“일본도가 저렇게 길었나?”
강도남은 검도를 전문적으로 배우진 않았지만 강력반에 있다 보니까 많은 일본도를 접했다. 하지만 저렇게 긴 일본도는 처음이었다. 화면상이지만 거의 170센티미터는 될 것 같았다.
“긴 장검은 일본의 남북조 시대와 무로마치 시대에 유행했던 방식이 섞여 있어요.”
일본도에 대한 설명은 이보경의 입에서 나왔다.
“무슨 소리야?”
“길이가 170센티미터가량이면 도신의 길이는 120센티미터 정도 되는데 그런 장도가 유행했던 시기는 남북조 시대거든요. 하지만 저렇게 많이 굽어진 형태는 아니었어요. 저런 도는 무로마치 시대 때 유행했던 방식이에요.”
“그러니까 저 도가 골동품이라는 뜻?”
“최소한 6백 년은 됐을 거예요.”
강도남의 질문에 이보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6백 년이면 명검, 아니 명도네?”
“신돕니다.”
김철곤이 말했다.
“신도?”
“보통 도로는 저렇게 많은 사람을 베지 못합니다.”
“사람이 먼저 지친다는 거야?”
“그렇습니다.”
“그럼 저놈은 뭐야?”
“조금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괴물입니다.”
김철곤은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검은색 BMW예요, 반장님.”
모니터를 살피고 있던 이보경이 말했다.
“무슨 소리야?”
“범인이 타고 간 차 말입니다.”
“아무튼 좋은 차는 죄다 나쁜 새끼들이 타고 다녀. 차량 번호는 식별 가능해?”
강도남은 투덜대며 물었다.
“번호판을 가려서 불가능해요.”
“젠장!”
“연안팝니다.”
그때 사무실의 막내인 권오근이 승합차 안으로 고개를 디밀었다.
“죽은 놈들이 조폭이라는 거야?”
강도남은 권오근을 돌아보며 물었다.
“그렇습니다, 반장님. 나무꾼 박두칠의 시체를 발견했습니다.”
“박두칠이면 연안파 중간 보스잖아.”
강도남은 윤두상을 돌아보았다.
“네.”
윤두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조폭 간의 전쟁인 거야?”
“조폭 간의 전쟁이 아니고 한 놈이 쓸어버린 일방적인 도살입니다.”
“윤두상!”
강도남은 윤두상을 노려보았다.
“식사하러 가셔야죠.”
윤두상은 히죽 웃으며 말했다.
“밥 먹을 시간이 어디 있어, 인마. 너와 이 형사는 교통관리공단으로 가서 교통 카메라를 뒤져.”
“BMW750을 찾으란 말입니까?”
“간밤에 비 왔잖아. 그런 고급 차는 흔치도 않고.”
“알겠습니다.”
윤두상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보경과 함께 승합차에서 내렸다.
“김 형사 넌 연안파 녀석들과 접촉해 봐.”
“알겠습니다.”
김철곤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밖으로 나갔다.
“젠장!”
형사들이 나가자 강도남은 의자에 깊게 몸을 묻었다.
강도남이 처한 가장 큰 문제는 범인 색출이 아니라 이번 사건을 당분간 어떻게 숨기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는 다시 테이프를 되감아 플레이시켰다. 잔인한 액션 영화 같은 장면이 쉬지 않고 지나간다.
“뱀파이어네, 뱀파이어.”
강도남은 혀를 내둘렀다.
녀석은 허벅지가 베이고 배에 검을 꽂은 채 사방을 휘젓고 다니며 조폭들을 베어 넘긴다.
그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현실성이 결여된 하드 코어 영화의 한 장면이었다.
“집엔 다 들어갔네.”
강도남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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