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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사혈 1

2018.03.19 조회 193 추천 0


 투사혈 1권
 서문
 
 
 소문(所聞).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은밀하게 퍼져 나가는 두 개의 소문은 중원인의 귀를 솔깃하게 만들고 있었다.
 부자가 되어 떵떵거리며 살고 싶은가?
 그러면 지하검투장(地下劍鬪場)에서 데려가기를 기원하라! 생(生)과 사(死)는 반반이나, 만약 그대가 생의 패를 잡을 때에는 고생 끝남이며 남은 여생은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
 고수(高手)가 되고 싶은가?
 그렇다면 지하검투장의 투사(鬪士)가 되라!
 살아 돌아올 확률은 전무하지만, 만약 살아서 중원무림에 나온다면 능히 백팔 고수에 들 것이다. 그것도 사십위 안에 말이다.
 이것은 다만 소문일 뿐이었다.
 소문이라 함은 널리 떠도는 말을 일컬음이다. 또한 사실 여부가 확실치 않은 것이다.
 근원(根源)도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러나 말이다.
 이 소문이 그냥 소문으로, 흘러가는 세월 속에 파묻힐 쓰잘데기없는 말이 아님을 증명하듯이 오십 년 전부터 중원에 괴이한 일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실종!
 아무런 이유도 없이 많은 무인(武人)들이 실종되었다. 그들 중에는 백팔 고수인 자도 더러 있었다.
 그런데 실종된 자들은 대부분 돌아오지 못했다. 아니 간혹 돌아온 자가 몇 있기는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어디에 갔다 왔으며, 그 동안 무엇을 하였는지에 대해 누가 물어도 굳게 입을 다물고만 있었다. 사형제나 사부, 그리고 아내가 물어도 그들은 대답을 않고 커다란 포대를 내밀 뿐이었다.
 포대에는 놀랍게도 성(城)을 통째로 살 수 있는 금은보화가 가득 들어 있었다. 그것은 소문이 소문으로 그친다는 것이 아님을 여실히 증명해 주고 있었다.
 그들은 입을 열지 않았지만!
 지하검투장!
 그것은 실제로 존재하는 곳이었다.
 이 넓은 천하 그 어디엔가······.
 
 
 1장 이름 없는 사람들
 
 
 두청풍(杜靑風)은 이불 속에서 한껏 기지개를 켰다. 불 위에 올려진 오징어처럼 몸이 꼬였다. 절로 입이 벌어졌다.
 “우우··· 아!”
 밤새 굳어져 있던 뼈마디가 아우성을 친다. 사십도 나이라고 우두둑! 하는 소리가 귓전으로 파고들었다.
 날아갈 듯이 가뿐함을 느낀 두청풍은 눈을 감은 상태로 옆자리를 더듬거렸다.
 아내가 있어야 할 자리가 허전했다.
 “또 내가 늦잠을 잤구나.”
 그는 누운 채로 눈을 떴다. 그런데 왠지 천장이 높아 보였다. 잠이 덜 깼나? 자문하며 눈을 끔뻑거려 보았다.
 그래도 천장은 높았다. 그러고 보니 어딘가 모르게 잠자리가 몹시 불편했었다는 생각에 머물었다. 마치 밤사이 아주 먼길을 달려온 것처럼 피곤했다.
 더 누워 있을 수가 없었다. 두청풍은 벌떡 몸을 일으켜 앉았다. 다음 순간,
 “이럴 수가······!”
 입이 쩍! 벌어졌다. 얼굴도 하얗게 질려 버렸다.
 가구도 집기도 그대로이다. 심지어 방의 크기와 물주전자의 배치까지도 모두 같았다.
 그러나 같다는 것이지 그것들이 자신이 사용한 것과 일치한다는 뜻은 아니었다. 모양과 크기, 그리고 색상은 같지만, 그것들 전부는 두청풍의 손때가 묻은 것이 아니었다.
 전부 새것이었다.
 또 다른 점이 있었다. 눈높이보다 낮아 처음 발견하지 못한 그것은 벽에 촘촘히 박혀 있는 야명주(夜明株)들이었다.
 “무슨 일이야, 이게 대체······?”
 낮게 중얼거린 소리가 메아리로 되돌아왔다. 이제 분명해졌다. 이곳은 자기의 집이, 침실이 아닌 것이다. 여기는 밀폐된 공간이 분명했다.
 그는 놀란 표정으로 침상의 머리맡을 힐끗 쳐다보았다. 시선이 닿는 곳에 한 자루의 검이 걸려 있었다.
 자기의 손때가 묻은······.
 귀신도 곡할 노릇이었다.
 벌떡 일으킨 두청풍은 정신나간 사람처럼 이름을 불렀다.
 “여보! 수란―!”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는지 모른다.
 소리도 질러보고, 두드려도 보았다. 그러나 자신의 의문을 속시원히 풀어주는 사람은 고사하고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 확연히 알 수 있는 것은 하룻밤 사이 두청풍은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는 것이다.
 정말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두청풍은 분노에 몸을 떨었다. 분노에 찬 두청풍의 손에는 애검(愛劍) 단풍(丹楓)이 쥐어져 있었다. 단풍검을 쥔 그의 손등에 시퍼런 힘줄이 돋아났다.
 “개새끼들!”
 살기를 씹은 두청풍은 고함을 쳤다.
 “누구냐? 나와! 나오란 말이다! 이 새끼들아!”
 그러나 돌아오느니 웅웅거리는 벌떼의 날갯짓뿐이었다.
 또 시간이 지났다.
 배가 고팠다. 배도 고프고 온몸의 맥이 쑥 빠졌다.
 두청풍은 서서히 냉정을 되찾기 시작했다. 이 상태로는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는 생각에 두청풍은 맥없이 침상 끝에 털푸덕 앉았다.
 한데 그 순간이었다.
 “허허! 과연 무림 백팔 고수에 든 자라 빨리 안정을 되찾는군.”
 기다렸다는 듯이 들려오는 음성은 늙은이의 목소리였다. 두청풍은 침상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누구냐? 내가 누구인 줄 안다면 어서 문을 열어라. 그렇지 않다면······.”
 다음 말을 꿀꺽 삼킨 그는 이내 후회했다. 놈들은 자신을 알고 있다. 알고 있으면서 납치한 것이다. 그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감쪽같이.
 “허허, 이제야 사태 파악이 된 모양이지.”
 귀신같은 늙은이였다. 늙은이는 자신의 속을 꿰뚫어보고 있었다.
 그는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다른 것은 묻지 않겠소. 다만······.”
 “걱정 마라. 네 아내는 무사하다. 우리가 필요한 것은 두청풍이지 이수란이 아니니까.”
 늙은이는 귀신같은 게 아니라, 귀신 그 자체였다. 귀신은 아내를 건드리지 않았다고 했다. 두청풍이 다행이라고 생각할 때였다.
 “확인해 보시오.”
 늙은이의 말에 다른 음성이 들렸다.
 “지금부터 노부가 묻는 말에 예, 아니오,라고만 대답해라. 질문은 단 한 번만 한다.”
 지금 들린 음성도 늙은이의 것이나, 음흉하고 잔인할 것이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미친 늙은이, 아내가 무사하다는데 무엇이 고맙다고 존칭을 쓸 것인가 하고 두청풍은 이를 갈았다.
 “고향은 성도(成都)며 지금은 하북(河北)에 살고 있고, 나이 사십. 사부는 서열 육십이위인 섬전검(閃電劍) 담홍비(談洪飛), 맞나?”
 순간 두청풍은 너무 놀랐다. 놈들은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해서 두청풍은 재빨리 대답을 하지 못했다.
 스······.
 미세한 음향을 감지한 찰나, 그는 어깨에 무엇이 박히는 것을 느꼈다.
 “윽!”
 아픔이 전해졌다. 두청풍은 묵직한 신음을 토하며 어깨를 보았다. 한지(漢紙) 한 장이 박혀 있었다. 한지는 아직도 철판처럼 꼿꼿했다.
 ‘적엽비화!’
 두청풍은 간담이 써늘해졌다. 그도 적엽비화를 펼칠 수 있다. 그러나 지금처럼 어깨에 깊이 박을 수 없었고 또 피를 머금었는데도 이렇듯 꼿꼿하게 만들 자신은 없었다.
 이 정도의 무공이라면 적어도 서열 삼십위에 든 초일류 고수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단 한 번이라고 했다. 대답하라!”
 늙은이는 음성대로 잔인한 인간이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그가 감당하기 어려운 상대라는 판단이었다.
 “······예.”
 “다음에는 좀더 빨리 대답하도록!”
 묻고, “예.”라고 답하고 묘한 일문일답은 두청풍을 발가벗기고 있었다.
 자신의 내장까지 놈들은 다 알고 있었다. 그것은 공포로 다가왔고 그의 전신에서 소름이 돋을 때 질문은 멈추어졌다.
 “끝났소.”
 “수고했소이다.”
 처음 들은 음성이었다. 그 음성이 묻고 있었다.
 “틀림없지요?”
 “확실히 추행검수 두청풍이 맞소이다.”
 그리고 두청풍이 알아들을 수 없게 낮게 몇 마디 더 나누는 듯하다가 갑자기 잠잠해졌다.
 잠시 후, 처음 늙은이의 음성이 들려왔다.
 “여기는 지하검투장이라 불리는 지하세계다.”
 “아······!”
 두청풍의 입이 쩍 벌어졌다. 그 입속으로 노인의 음성이 파고들었다.
 “네가 선택할 것은 죽느냐? 사느냐 뿐이다.”
 살벌한 말이었다. 그리고 보니 이 노인은 귀신일 뿐 아니라 잔인한 것 같았다.
 “시합은 단 한 번, 열흘 후다! 이기면 살 것이고, 지면 죽는다. 그 동안 마음과 몸을 충분히 가다듬도록.”
 그리고는 조용해지자 다급해진 두청풍은 소리쳤다.
 “이봐요!” 다음에는, “어이!”로, 그리고 “야이··· 새끼들아!”라고.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자신의 음성뿐이었다.
 
 ***
 
 석실이다.
 길이 삼 장, 너비는 이 장인 석실은 복도를 면한 곳에 있는 문을 제외하고는 온통 화강암으로 되어 있었다. 야명주 열 알과 등잔 두 개가 어둠을 밝혀주고 있었고, 석실은 썰렁하리만치 꾸밈이 없었다.
 한 사람이 누울 수 있는 침상과 의자 하나, 그리고 한켠에는 작은 욕조가 있었다. 흐르는 지하수로 연결된 욕조였다. 욕조 옆의 벽에 부착된 동그란 구리 동경. 이것이 석실의 모든 것이었다.
 지금 구리 동경 앞에 한 사내가 서 있었다. 동경에 비친 그 모습은 이러했다.
 눈매는 날카롭다. 그러나 눈빛은 흐릿했다.
 코는 누가 보아도 잘생겼다고 할 만큼 생겼고, 그런데 문제는 광대뼈가 약간 돌출되어 있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스윽··· 슥······!
 작은칼이 지나갈 때마다 머리밑이 하얗게 드러났다. 그는 중―스님―이 아니다.
 투사(鬪士)!
 그것도 사육된, 그래서 자신의 의지와는 아무 상관없이 투사가 된 그였다.
 그런데도 그는 항상 민대머리를 좋아하였고, 또 실제로 그렇게 깎고 있는 중이었다.
 하나 그는 말이 좋아 투사지 그는 이름도 성(姓)도 없다. 또한 부모가 누군지 모른다. 부모 없이 태어난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마는 적어도 그에게는 없었다. 기억 속에 없으면 없는 것이다.
 나이 열여섯이 되던 해에 그는 첫 살인을 했다. 살인은 정당한 시합이었고, 그는 이겼을 뿐이다.
 그때 그의 싸움을 목격한 사람들이 이름을 지어 주었다.
 야수도(野獸刀)라고!
 싸울 때의 모습이 꼭 굶주린 야수를 닮았다나, 어쨌다나······.
 웃기는 소리였다. 자기는 죽지 않으려고, 정말이지 죽을 각오로 싸웠던 것인데, 슬그머니 웃음이 나왔다.
 “미친······.”
 뒤통수를 깎을 때에는 항상 생각나는 말이 있었다. 중이 제 머릴 못 깎는다는······.
 그러나 야수도는 아주 훌륭하게 그 일을 해내고 있는 것이다. 왼손으로 더듬거리면서도.
 문득 야수도의 동공이 한 점으로 축소되었다. 한 사내가 문을 열고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순간 그의 오른 손목이 움찔하였다.
 쌔액―!
 뒷머리를 깎고 있던 작은칼이 허공을 찢었다.
 “헛!”
 나타난 사내는 마파람을 들이키며 황급히 머리를 옆으로 젖혔다. 그러나 간발의 차이로 그의 귀밑 부분이 얇게 찢어졌고, 작은칼은 팍! 하고 문짝에 깊숙이 박혔다. 손잡이만 남겨 놓고서.
 “선배! 이게 무슨 짓이오?”
 조금만 늦었다면 자신의 머리가 그대로 꿰뚫렸을 거라고 생각하니 등골이 오싹하였다.
 “허락 없이 내 뒤에 서 있은 대가다, 살인군자(殺人君子).”
 빙글 몸을 돌린 야수도 앞에는 이십이 세의 사내가 서 있었다. 나이를 정확히 아는 것은 그도 자신과 같이 지하검투장(地下劍鬪場)의 투사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살인과 군자라는 양면성을 띤, 투사 중에 제일 멋진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살인을 하더라도 좀더 멋지게 상대를 죽일 줄 아는 그는 이곳에서 가장 뛰어난 미남자였다. 아니, 바깥세상에 나가더라도 미남자란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라는 게 모두의 생각이었다.
 야수도의 말을 들은 살인군자는 내심 아차! 하고 자신의 실수를 절감했다. 야수도가 자신의 뒤에 사람이든, 짐승이든 간에 서 있는 것을 병적으로 싫어한다는 사실을 기억해냈기 때문이었다.
 “그건······.”
 살인군자는 손바닥으로 뺨을 쓸었다. 따끔거리면서 피가 묻어 났다. 그러자 좀전의 위급했던 상황이 되살아났다.
 “젠장! 그렇다고··· 너무하잖소!”
 “네 잘못이다. 문이라도 두드렸다면, 이런 일이 없었지.”
 말이야 맞는 말이다. 전적으로 살인군자의 잘못인 것이다. 그는 반박할 말이 없었다.
 “흉이 안 남아야 할 텐데······.”
 그의 걱정을 들으며 야수도는 천천히 걸어가 문에 박힌 작은칼을 빼들었다. 그 동안 야수도의 동공은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어디 보자.”
 그는 살인군자의 상처를 잠깐 보았다.
 “괜찮다. 흉터가 생길 정도는 아냐.”
 “확실하오?”
 야수도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그를 안심시켰다.
 “그래. 그런데 무슨 일로 날 찾아왔지?”
 다른 사람 말은 못 믿어도 야수도의 말은 믿어도 된다.
 “교관(敎官)이 선배를 찾소.”
 “그가··· 알았다.”
 교관의 명은 곧 염라대왕의 명과 동일하다. 그런데 야수도는 대답을 하고도 꿈쩍도 않고 서 있었다. 서 있으면서 그는 연신 뒷머리를 깎고 있었다.
 ‘앞장서라는 겐가.’
 스스! 하는 소리가 살인군자의 귀에 몹시 거슬렸다. 그리고 유달리 툭! 불어진 광대뼈도 눈에 거슬렸다.
 그는 몸을 돌려 앞장을 서며 말했다.
 “광대뼈가 더 튀어나온 것 같소.”
 “그렇지?”
 뒤따르며 자신에게 묻듯 물음을 던지는 야수도는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눈의 날카로움은 동공을 풀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광대뼈만은 어쩔 수가 없었다.
 상대에게 어수룩하게 보이면, 상대는 경계심을 가지지 않는다. 그러면 이길 가능성이 한결 많아지지 않겠는가.
 머리를 길러 광대뼈를 숨길까 하다가 그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많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한때 머리칼을 길러 보았더니 여간 불편하고 시간 소모가 많은 것이 아니었다.
 감아야 하고, 다듬기도 해야 했기에······.
 
 ***
 
 교관.
 그도 이름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름이 있다. 그가 스스로 지은 이름은 유광(柳光)!
 그러나 지하검투장에서는 그냥 교관으로 통했고, 바깥세상에서는 광한신검(狂寒神劍)으로 불리는 그는 백팔 고수 중 서열 삼십이위였다.
 유광은 오년 전, 백승(百勝)을 올리고 바깥세상으로 나갔었다. 그런데 왜인지 그는 다시 지하검투장으로 돌아와 교관으로 주저앉았다.
 그런 경우는 유광뿐만 아니었다. 가끔씩 투사를 보러오는 또 한 선배도 나갔다가 다시 돌아왔다.
 환요비자(幻寮泌子) 요인구(堯忍驅)!
 유광의 선배인 그가 지금 여기서 무슨 일을 하는지 몰라도 그도 돌아왔다. 지하검투장이 생긴 이후, 단 세 명만이 백승 고지를 달성해 바깥세상으로 나갔고, 그 중 둘이나 돌아온 것이다.
 얼굴에 시퍼런 힘줄이 불거져 있는 유광은 혼자 술을 마시고 있다가 들어서는 야수도를 향해 무감각한 음성으로 말했다.
 “거기 앉아라.”
 “별로 앉고 싶지 않은데······.”
 그러면서도 야수도는 의자를 끌어당겼다. 등받이를 벽 쪽으로 돌린 후 앉았다.
 “한잔하겠느냐?”
 “별······.”
 “알았다.”
 “······.”
 유광은 술을 따라 마셨다. 그리고 나서 그는 탁자 위에 있는 밀봉된 봉투를 앞으로 밀었다.
 “받아라.”
 야수도의 눈이 반짝 빛났다.
 “그건? 내가 부탁한 것이오?”
 유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동영(東營) 길산가문(吉山家門)의 일도류(一刀流) 비급을 옮겨 적은 것이다.”
 길산가문은 동영 이대무가 중 하나로 그 명성이 중국 대륙에까지 알려져 있었다. 일도류는 길산가문의 가주에게만 전수되는 필살도(必殺刀)였다.
 야수도의 눈이 새까맣게 빛났다.
 “허! 그걸 구하다니, 정말 대단하군요.”
 “진본(眞本)은 아니지만, 확실할 것이다.”
 “그렇겠지요.”
 야수도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갔다. 선 채로 봉투를 부욱! 찢었다.
 그 모습을 본 유광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경망한! 저러다 책자가 상하면 어쩔려고······.’
 그러나 그는 한 가지를 모르고 있었다. 봉투를 만진 순간에 야수도는 이미 안의 내용물의 크기가 어떤지 손끝으로 느낀 후에 찢었다는 것을.
 열 장밖에 안되는 일도류 책장을 대충 넘겨 본 그는 품속에 넣으며 중얼거렸다.
 “한어(漢語)로군요.”
 그의 말처럼 일도류는 동영어가 아니라 한어로 번역이 되어 있었다.
 유광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술을 따랐다.
 쪼르르!
 순백의 액체가 잔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술잔 속에는 다음 말을 기다리는 민대머리가 들어가 있었다. 민대머리를 마신 유광은 잔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해동(海東)의 무상도법(無象刀法)은 구하기가 좀 어려운 모양이다. 그렇다고 불가능하다는 뜻은 아니다.”
 “······.”
 “두 달 후에나 손에 넣을 수 있다고 연락이 왔으니까 말이다.”
 “구할 수만 있다면, 시일은 상관이 없소.”
 야수도는 한걸음, 한걸음씩 뒷걸음을 쳤다. 등을 보이기 싫으니까.
 “할말이 없다면 이만 가보겠소, 교관.”
 이때 문득, 유광은 고개를 들었다. 그는 날카롭게 야수도를 주시하며 말했다.
 “무상도법이 마지막이라는 것을 알고 있겠지?”
 야수도는 걸음을 멈추었다. 등짝이 문에 닿았음을 느끼며 그는 힘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소.”
 지하검투장에는 서고가 있었다. 서고는 두 개로 하나는 기문진학(奇門進學)과 의학서를 비롯한 잡기들이 있는 잡학서고로 마음대로 드나들 수가 있었다.
 그러나 무공비급이 무려 일만 권이나 있는 무공서고는 교관의 감시 하에 단 열 가지만 가질 수 있다.
 그 중 마음에 드는 것이 없다고 하면 어떤 것이라도 구해 주었다.
 그것이 천년 전에 실전(失傳)된 것일지라도.
 이것은 놀라운, 하늘도 놀랄 능력이었다.
 “무상도법이 뛰어나기는 하나 중원에는 그보다 뛰어난 도법이 많다. 지금이라도 마음을 바꿀 생각이 없느냐?”
 야수도는 벙긋 웃어 보였다.
 그럴 마음이 없다는 뜻임을 유광은 알았다.
 ‘거절인가. 어리석은 놈! 저놈은 자질에 비해 너무 고집이 세.’
 저 고집 때문에 앞으로 남은 여섯 번의 대결을 넘기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흘 후에 시합이 있다. 이번 시합 상대는 백팔 고수에 들어 있는 사람이다.”
 백팔 고수!
 수백만의 무림인 중에 가장 강하다는 사람들이다.
 처음 있는 일이라 야수도는 마른침을 삼키며 물었다. 잔뜩 긴장한 음성으로.
 “누굽니까?”
 “추행검수 두청풍!”
 ‘훗, 그 정도라면······.’
 두청풍은 일류고수지만 자신이 있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이화(李花), 그녀를 볼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는 눈빛을 풀었다.
 “두청풍은 고수인데, 내가 이길 수 있겠소?”
 야수도의 풀이 죽은 목소리를 들은 유광은 돌연 짜증이 났다.
 “죽으면 돼!”
 야멸찬 음성에 야수도는 섭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내심 생각을 하였다.
 석 달이다. 정확히 석 달 동안 시합이 없어서 이화를 만나지 못했다.
 야수도는 배꽃같이 청초한 이화의 모습을 그리며 가볍게 허리를 굽혔다.
 “가서 무공 연습을······.”
 말이 끝나기 전에 유광은 손을 저었다.
 “가 봐.”
 야수도가 발뒤꿈치로 문을 열고 나간 후,
 슈우!
 기다렸다는 듯이 한 인영이 천장에서 떨어져 내렸다.
 흑의를 걸친 그의 눈은 놀랍게도 녹색을 띠고 있었고, 그 눈빛은 음악(淫樂)했다.
 “쯔쯔. 딴에는 튀어 보려고 삭발까지 하고 강한 체는 하는데··· 정말 마음에 안 드는 놈이야.”
 “그래도 아흔네 번을 이긴 놈이오, 선배.”
 환요비자 요인구는 벽에 붙은 의자를 당겨 맞은편에 앉으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나도 그게 불가사의하단 말이야. 저 실력으로 어떻게 그만큼이나 이길 수가 있었지?”
 유광은 술을 채운 잔을 밀며 말했다.
 “그래서 우리가 주시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소.”
 “시간 낭비야, 그놈보다······.”
 요인구는 단숨에 술을 마시고 말을 이었다.
 “살인군자나 혈빙화(血氷花), 독마혼(毒魔魂)이 더 나아. 그 애들은 충분히 백승을 할 능력이 있지.”
 이들 세 사람.
 그들은 지금 모두 구십승을 이룬 기재들이었다. 모든 면에서 야수도보다 더 뛰어난 투사들이었다.
 유광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수긍하였다.
 “맞는 말이오.”
 그는 심유한 눈빛으로 요인구를 응시하였다.
 “이번 대결에서 놈의 진가가 판가름날 것이니, 두고 봅시다!”
 말을 들은 요인구의 입술이 묘하게 비틀어졌다. 야수도에게 보내는 조소였다.
 “보나마나지. 내가 천장에서 기척을 냈는데도 못 알아차리는 놈이 무슨··· 살인군자와 혈빙화는 당장에 알아냈지 않은가?”
 “아무튼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백승을 이루고 중원으로 나가는 자요, 요선배.”
 그 말에는 요인구도 이의를 달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못마땅한 빛을 지우지 못했다.
 “창녀 계집을 사랑하는 것도 그렇고, 도시 마음에 안 드는 놈이야.”
 
 ***
 
 ― 네가 가진 것이 열이라면, 셋을 숨겨라!
 이것은 무림이라는 살벌한 곳에 몸을 담고 하루를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슴에 품어야 할 금(金)과 같고, 옥(玉)보다 귀한 말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이 말을 잊고 살아가고 있었다.
 그들은 이 말을 실천할 의지(意志)가 약한 사람이던가, 아니면 이를 무시해도 좋을 만한 강자일 것이다.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야수도는 문을 잠갔다. 잠근 후에 또 확인까지 하였다.
 확인을 마치고 돌아서는 그의 동공이 문득 좁아졌다.
 “난 강자가 아냐. 그래서 많이 숨길수록 좋아.”
 야수도는 얼마나 많은 것을 숨기고 있는지 그 자신도 모른다. 그저 숨길 수 있는 한도까지 숨기고 싶을 뿐이었다. 그래야 살아날 확률이 많아지는 것이다.
 그는 일도류 책자를 꺼내 읽기 시작했다.
 책자는 세 가지로 분류되어 있었다.
 칼을 잡는 법과 발도술(拔刀術), 그리고 일도류 초식을 서술하고 있었다.
 두어 번을 읽은 야수도는 눈을 감고 조용히 암송(暗誦)을 하였다. 외우고 나면 책자를 없애야 했으니까.
 “칼을 잡을 때는 마치 갓 알에서 깨어난 새를 잡듯 잡아야 한다. 너무 쥐면 아파할 것이고, 너무 느슨하게 쥐면 날아가니. 도(刀)는 검(劍)에 비해 무겁다. 또 날이 하나뿐이다. 그래서 얼마나 빨리 빼고 펼치느냐가 중요한 관건이다.”
 일도류는 필살지도였다.
 단번에 상대를 죽이지 않으면 자신이 죽어야 하는······. 그래서 최단거리를 좁혀 들어가 상대의 숨통을 단숨에 끊어야 하는 것이다.
 “정확히 암기되었군.”
 야수도는 만족한 웃음을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다시 책자를 살폈다. 확인을 하는 것이다.
 확인을 하나마나였다. 정확하게 머리에 입력이 되어 있었다. 야수도는 의자에서 일어나 일도류 책자를 태웠다.
 화락!
 책자는 금방 재로 변했고, 그는 재를 발로 비볐다. 흔적도 남지 않게······.
 일도류는 중원의 무공처럼 멋에 치우쳐 화려하지 않았다. 곡(曲)은 없고, 오직 직선뿐이었다. 선의 끝에 매달린 것은 죽음뿐이었다.
 내가 아니면 네가 죽어야 하는 직선(直線)!
 “······.”
 몸을 흩트린 야수도는 등잔을 응시하였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심지 끝의 작은 불꽃이 크게 다가왔다. 순간 그의 동공이 사라졌다. 그리고 멈추었던 호흡이 터졌다.
 “차앗!”
 바람도 없다. 살갗을 저미는 싸늘한 기세도 없었다. 다만 한 줄기 빛이 공간과 시간을 찢었다.
 그리고 그의 칼날 위에는 불꽃이 피어 있었다. 꺼질 듯이 흔들리는 불꽃은 놀랍게도 심지라는 매개체가 없이 저 혼자서 타오르고 있었다.
 그래도 불꽃은 불꽃일 뿐이었다.
 불꽃이 사그라질 즈음, 야수도의 칼날은 걷잡을 수 없게 움직이고 있었다. 덩달아 몸도 마음도 같이 움직였다.
 차 오르고, 돌고, 바닥에 닿을 듯 나르고, 뒤집고······.
 번쩍! 번쩍!
 휘익! 휙!
 순식간에 석실을 가득 메운 것은 살을 베고 뼈를 저미는 도광(刀光)이었고, 바람 소리는 옷자락이 나부끼는 소리였다.
 야수도.
 그는 미친 듯이 칼을 휘둘렀다. 옷은 땀으로 범벅이 되었다. 도광이 사라지기 전에 또 하나의 칼날이 그 뒤를 따르고, 그것들은 모두 직선이었다.
 “후우우!”
 가슴 깊이 들이켰던 숨을 토한 야수도의 칼이 돌연 급변을 보였다.
 곡선이다. 그것도 지극히 부드러운 곡선이었다. 선의 각(角)은 완만했고 느렸다. 누구라도 보고 피할 수 있을 만치.
 덩실덩실!
 이번에는 춤이었다.
 어깨까지 흔들며 화려한 군무(群舞)를 추고 있었다. 나비가 날 듯, 꽃술에 붙을 듯, 말 듯······.
 그러다 또 변했다.
 가을하늘의 고추잠자리인가.
 허공을 맴돈다, 그러다 직선으로 쏘아지고.
 멈추었다 싶으면 공기를 가르고 있었다.
 이것인가 싶으면 저것인, 곡과 직이 어우러진 도법이었다.
 후두둑.
 이것은 땀이 아니었다. 바가지로 물을 붓는 소리가 바닥에서 들렸다. 바닥이 흥건하게 젖을 무렵, 짧은 곡선 끝에 긴 직선을 그리던 야수도의 손이 멈추었다.
 이어지지 않았다. 생각도, 몸도.
 후우! 하고 숨을 가다듬은 야수도의 입이 움직였다.
 “아무래도 무리야. 무상도법이 없는 한 완성을 할 수가 없어······.”
 무엇을 완성할 수가 없다는 걸까? 혹시 그것은 야수도가 숨겨놓은 그만의 비밀이 아닐는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그는 철컹! 하는 소리가 날 정도로 칼을 집어넣고 흐트러진 기혈을 잡기 위해 가부좌를 틀고 운기를 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그의 전신은 벽옥빛 기류에 휩싸였다.
 장엄하기까지 한 벽옥 기류는 놀랍게도 도가(道家)의 선천태청심법(先天太淸心法)이었다.
 선천태청심법을 정심하게 연마하면 기(氣)로 화하고, 기를 연마하면 신(神)으로, 신은 허(虛)로.
 이쯤 되면 삼화취정, 오기조원의 경지에 이르게 되고 마침내는 우화등선(羽化登仙)을 할 수가 있다는 도인들만의 심법이었다.
 해서 익히기도 어렵다.
 또한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서 많은 도인들이 회피한다.
 일성을 연성하는데 십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하고 그것도 제법 뛰어난 자질과 부단한 노력이 없으면 안된다.
 한데 지금 야수도의 몸에서 뿜어지는 기류의 빛은 팔성에 가까운 것이었다.
 
 
 2장 대결전야
 
 
 이번에 상대할 자는 평범하지가 않다.
 추행검수 두청풍.
 그는 쾌검의 달인이다. 무적은 아니더라도 백팔 고수의 말단을 차지할 정도로 뛰어나다.
 준비가 필요했다. 자신의 것을 나타내지 않고도 이길 수 있는 준비가······.
 병기점(兵器店).
 병기점은 쇠를 두드리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 또 용광로의 불도 싸늘하게 꺼져 있었다.
 점주의 이름은 그냥 쉽게 철(鐵)노인으로 통한다. 철을 다루기에 그냥 철이라 하였고, 칠십은 넘은 듯한 늙은이이기에 노인이라 부르는 것이었다.
 철노인이 아니라, 석(石)노인이라 불러도 빙그레 웃으며 “아무렇게나 불러.” 할 철노인은 언제나처럼 병기점의 한 모퉁이에 누워 있었다. 몇 가닥의 머리칼만 남아 있는 머리는 야수도와 흡사했다.
 철노인은 아무것도 깔지 않은 땅바닥에 새우처럼 몸을 웅크리고 잠을 자고 있는 것이다.
 육척도 채 되지 않는 몸을 어미 자궁 속의 애기처럼 웅크리고 있었다. 그 모습은 겨울 양지녘에서 지팡이를 쥐고 병든 병아리처럼 꾸벅꾸벅 졸면 딱 어울릴 위인으로 보였다.
 그러나 이 보잘것없고, 게으른 당나귀 같은 철노인의 손은 못 만드는 것이 없는 손이었다.
 “여전하시군.”
 야수도는 혼자말로 중얼거리며 문 옆에 세워져 있는 빗자루를 들었다.
 자루가 긴, 그러나 끝이 닳아 뭉텅한 빗자루였다. 이렇게 많이 닳은 이유는 철노인이 부지런해서가 아니었다. 그는 지하세계인 이곳에서 누구보다 게으른 사람이었고, 청소를 죽기보다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쓰··· 쓰윽······.
 빗자루가 움직일 때마다 뽀얀 먼지가 자욱이 피어났다.
 “지독한 먼지야.”
 한쪽 팔로 코를 막고 비질을 하는데도 메케한 먼지 냄새가 코를 질렀다.
 삽시간에 병기점은 먼지로 가득 찼다. 누가 따귀를 때려도 모를 정도였다.
 “쿨럭! 누, 누구야? 쿨럭!”
 철노인 목소리였다. 입을 여는 순간 한 움큼의 먼지를 마셨는지 연신 기침을 해댔다.
 “나요. 철노인.”
 하자, 철노인은 부스스 몸을 일으키며 짜증스럽다는 투로 말했다.
 “또 네놈이구나. 아이고, 이놈아! 물이라도 좀 뿌리고 쓸지?”
 “언제 물 뿌리고 쓰는 것 봤소? 청소해 주는 것만도 고맙다고 하시오.”
 “뭐, 고맙? 고맙은 무슨 얼어죽을. 청소는 네가 필요한 것이 있어 그러는 것이 아니냐? 돈은 안주고 몸으로 때우려고, 순날강도 같은 놈.”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철노인은 코를 감싸고 도망치듯 밖으로 나가며 고함을 쳤다.
 “아무리 그래보았자 오늘부터 공짜는 없어!”
 야수도는 비질을 하며 이죽거렸다.
 “그 말은 오늘로 꼭 스물다섯 번째 하는 말이라는 것을 알고 있소?”
 쿨럭거리며 기침을 토한 뒤, 철노인은 투박하게 쏘아붙였다.
 “몰라! 노부가 그걸 알 필요가 있어?”
 그 말에 무어라고 하고 싶었으나, 야수도는 대꾸를 할 수가 없었다. 먼지로 인해 앞도 보이지 않을 뿐 아니라 이제는 손가락을 뚫고 먼지가 입으로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먼지도 일반 먼지가 아니었다. 먼지 속에는 다량의 철가루가 섞여 있었다.
 많은 시간이 지났다. 야수도의 어깨며 민대머리에 뽀얗게 먼지 같은 쇳가루가 앉을 무렵 그의 비질은 멈추었다. 그리고는 뒤늦게 물을 뿌리고 밖으로 나왔다.
 머리며 옷에 묻은 먼지를 탈탈 터는 야수도를 향해 철노인은 가닥을 셀 수 있는 턱수염을 소중하게 어루만지며 입을 열었다.
 “그래,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어서 왔느냐?”
 야수도는 고개를 반쯤 숙인 상태로 머리를 털며 말했다.
 “무슨 일로 왔겠소? 시합이 있어 왔지요.”
 “시합?”
 철노인의 흐릿한 눈이 반짝 빛났다.
 “언제? 누구랑?”
 묻는 철노인의 음성은 흥분되어 있었다.
 그러나 야수도는 못 들은 척 대꾸를 않고 손만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을 뿐이었다. 먼지는 털어졌다. 그러나 쇳가루는 털어지지 않았다.
 “에이! 잘 안 털어지잖아.”
 철노인은 목이 바짝 탔다. 그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것은 두 가지뿐이다.
 잠자는 것과 싸움 구경을 하는 것이었다. 철노인은 야수도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이놈아! 누구랑, 언제 싸운다는 것이냐?”
 야수도의 민대머리가 흔들렸다. 철노인의 손이 가는 방향으로 제멋대로.
 “깩! 깩! 이, 이것 좀.”
 “어?”
 그제야 자신의 과실을 깨달은 철노인은 슬그머니 손을 풀면서 이가 듬성한 입을 보이며 웃었다. 아주 조금은 미안했던 것이다.
 “흘흘, 그러게 얼른 말하지.”
 야수도는 목을 문지르며 인상을 썼다. 피부에 생채기가 났는지 쓰라렸다.
 “무슨 노인네가 밥 먹고 손아귀 힘만 키웠나?”
 “흘흘, 너도 매일 망치질을 해 봐라. 손아귀 힘이 절로 생기지.”
 맞는 말이다. 하지만 야수도는 투박하게 쏘아붙였다.
 “언제 철노인이 매일 망치질을 하오. 만날 잠이나 자면서······.”
 철노인은 손을 저었다.
 “자, 자. 객쩍은 소리 그만하고. 그래, 누구랑 싸우는지 말부터 해다오?”
 그의 말에 야수도는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며 말했다.
 “알면 무엇하오. 구경도 하지 못할 것이면서 말이오.”
 지하검투장에는 두 사람만 들어갈 수 있었다. 투사와 싸울 상대만!
 하지만 그 두 사람을 보는 눈은 있었다. 수가 얼마나 되는지 모르고 그들이 누구인지는 몰라도 분명히 지켜보는 눈들은 있었다.
 그들은 투사와 사로잡아 온 무인 중 한 사람에게 돈을 건다. 그리고 자신이 지정한 자가 이기면 그에 상응하는 돈을 받는다. 이것은 지하세계의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도박(賭博)!
 그들은 인간의 목숨을 담보로 도박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더 알고 싶은 게 아니냐? 어서 말이나 해다오. 노부도 승률이나 점치게.”
 철노인의 고집에 그는 한숨을 쉬며 은근한 어조로 말했다.
 “아무에게도 말하면 안됩니다. 상대는······.”
 철노인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래, 상대는?”
 “추······.”
 야수도가 입을 여는 그 순간이었다.
 “추행검수 두청풍.”
 얼음 가루가 풀풀 날리는 음성이었다. 그러나 아름다운 여인의 음성이기도 했다.
 ‘혈빙화!’
 야수도가 그 음성을 쫓아 눈을 돌릴 때, 그의 멱살은 또 한번 철노인의 무식한 손아귀에 잡혀 있었다.
 “뭣이! 두청풍이라고, 그게 사실이냐?”
 흥분한 손에는 좀전과는 다르게 무지막지한 힘이 들어가 있었다. 흥분한 만큼 말이다.
 “커억! 캑!”
 야수도의 얼굴이 금새 새파랗게 변했다. 대답은 고사하고 숨조차 쉴 수가 없었다.
 “미안, 미안······.”
 철노인은 손을 놓고 무척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손등을 찰싹찰싹 때렸다.
 “에이! 나쁜, 이놈의 손이 어디서 못된 버릇만 배워 가지고······.”
 웃는 얼굴에 침을 못 뱉는다고 하였다. 하물며 저렇게나 반성을 하는 데야.
 야수도는 막혔던 숨을 몰아쉬며 씁쓸하게 웃었다.
 “그만두시오.”
 “어, 그래? 그럼 그만둬야지.”
 철노인은 기다렸다는 듯이 손 때리기를 멈추고 다시 물었다.
 “정말 이번에 두청풍과 싸우는 것이냐?”
 “그렇소.”
 야수도는 고개를 끄덕이며 전면을 바라보았다.
 핏빛같이 붉은 경장 차림의 한 여인이 다가오고 있었다. 경장은 몸에 착 달라붙어 성숙한 여인의 몸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와아! 십년 만에 백팔 고수 중 한 명과 싸우네!”
 혈빙화라 불리는 여인의 정확한 나이는 알 수가 없으나 이십 정도일 것이다.
 얼음보다 더 차갑고 무표정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지하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미인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야수도가 사랑하는 이화보다도 더 미인이었다.
 “이길 자신은 있느냐? 응?”
 빨리 대답 안 하면 또 멱살을 잡을 게 뻔했다. 야수도는 건성으로 대답했다.
 “자신이 없소. 그래서 철노인을 찾아온 것이 아니오.”
 더욱이 두 여인의 신분 차이는 엄청났다.
 이화는 창녀(娼女)였다. 그녀가 순박한 배꽃이라면, 혈빙화는 서른 명의 투사 중 가장 뛰어난 자질과 승률을 자랑하는 일세의 재녀로 가시가 돋친 붉은 장미에 비유할 수가 있으리라. 또한 그녀는 야수도와 살인군자에 이어 구십승을 하고 있었다.
 이때, 철노인이 무어라고 하는 듯했으나 야수도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오랜만이구나, 혈빙화.”
 혈빙화는 고개를 미미하게 까딱여 보이며 말했다.
 “철노인이 무얼 만들려고 왔냐고 묻고 있소.”
 말투가 영락없는 사내였다.
 “아, 이런.”
 야수도는 그제야 눈을 돌렸다. 철노인은 자신의 말을 귓전으로 흘린 야수도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야수도는 또 멱살이 잡힐세라 빠르게 말을 하였다.
 “팔목에 찰 철갑(鐵甲)을 만들어 주시오.”
 “철갑을?”
 “그렇소. 가볍게, 그물처럼 만들어 주면 더 좋겠지요. 내일 시합이 있으니 아침까지 만들어 주시오.”
 “내일 아침? 바쁘겠군.”
 “힘드오?”
 철노인은 눈살을 찌푸렸다. 자존심이 상했던 것이다.
 “노부를 어찌 보고. 그런데 말씀이야······.”
 곧 그는 헤벌레 웃었다.
 “흘흘, 공짜는 안된다고 아까 말했지?”
 이번에는 야수도의 미간이 찡그려졌다. 그는 민대머리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이게 안 보이오? 청소하다가······.”
 그의 말은 거기까지였다.
 “누가 청소하라 그랬나? 네 스스로 한 것이지, 노부는 시킨 적이 없다.”
 전과 달리 단호했다. 아마 이번 상대가 백팔 고수이고, 야수도가 이길 경우에 받을 승리 수당에 대한 욕심이 생겼으리라고 생각했다.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그 액수가 만만한 돈이 아닐 것이다.
 야수도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내가 돈이 없다는 것은 모두가 다 알고 있지 않소? 그런데······.”
 “지금 달라는 것이 아니다. 또 전부를 요구하는 것도 아니고 이기면 절반만 다오.”
 순간 야수도는 흠칫 놀랐다. 확실치는 않으나 경험으로 비추어 볼 때, 절반이라면 금자 백 냥은 족히 될 것이다.
 “그렇게나 많이, 겨우 철갑 하나에 말이오?”
 그의 반응에 철노인은 눈을 희번덕거렸다.
 “아깝냐? 계집 사타구니에는 몽땅 퍼 넣으면서, 그래 전부도 아니고 반이라는데······.”
 더 두었다가는 무슨 말이 나올지 몰라 황급히 손을 저었다. 기실, 그 동안 돈 한푼 주지 않고 몸으로 때웠지 않은가. 그것은 유독 돈을 밝히는 철노인임을 감안할 때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알았소! 드리리다. 그런데······.”
 그는 눈동자를 풀고 말했다.
 “내가 지면 어떻게 하오.”
 철노인은 기이한 웃음을 입가에 머금으면서 대답했다.
 “땡이지, 어떻게 하기는 뭘 어떻게 해.”
 “그럼 손해잖소?”
 “맞아. 손해를 보면 안되지.”
 철노인은 새삼스레 깨달은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는 병기점으로 들어가며 들으라는 듯이 중얼거렸다.
 “한 달 전에 들어온 만년한철로 만들어 주지. 흘흘, 누가 만년한철의 임자가 되는가 했더니, 주인은 따로 있었구먼그래.”
 ‘만년한철이라고!’
 그 말을 들은 야수도와 혈빙화는 언뜻 놀라는 빛을 띠었다.
 만년한철!
 이것은 천하에서 가장 강한 비철(非鐵)이었다. 지하 천 장 깊이에서 생성되는 만년한철은 이름 그대로 만년이라는 시간이 흘러야 겨우 어른 주먹만한 크기가 되는 것이다.
 그 값어치는?
 무한했다.
 결코 성 한 채로도 양이 차지 않을 정도로.
 자신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병기점으로 들어가 용광로에 불을 피우고, 공구를 정리하는 등 부산하게 움직이는 철노인의 모습을 살기 어린 눈으로 보며 혈빙화가 입을 열었다.
 “선배는 무척 운이 좋은 사람이오.”
 그 말뜻을 알면서도 야수도는 능청스레 물었다.
 “무슨 뜻이냐?”
 “보름 전에 나는 철노인에게 만년한철이 있음을 알고 하나의 물건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던 적이 있었소.”
 “그런 일이······?”
 생각지도 않은 일이었다. 그래서 야수도의 눈이 보기 드물게 커졌다.
 “철노인이 만들어 주지······.”
 그는 말을 멈추었다. 혈빙화에게 만들어 주었다면 만년한철이 아직 남아 있었겠는가.
 “그래서 오늘도 찾아왔는데, 놀랍게도 선배에게 돌아갔구려.”
 혈빙화는 분명 많은 돈을 선금으로 준다고 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철노인은 거절을 하였다. 이유가 뭔지 모르나 철노인이 자신에게 무척 관대하다는 게 증명이 된 셈이었다.
 야수도는 문득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철노인에게 말해서 네게 만들어 주라고 할까? 나는 만년한철이 아니어도······.”
 “필요 없소. 이미 그것은 내 손을 떠난 물건이오.”
 혈빙화는 수려한 이마를 찡그렸다. 그녀는 누구보다 자존심이 강한 여인이었다. 아니 몸은 여인이나, 마음은 여인이 아닌 철골의 사나이였다.
 혈빙화는 불쾌한 기색을 지우지 않고 몸을 빙글 돌렸다.
 “가겠소!”
 사내 못지않게 쩍 벌어진 어깨가 보였다. 상대적으로 허리는 더욱 가늘고, 둔부는 더욱 풍만해 보였다. 산 두 개를 엎어놓으면 저만할까 하고 생각하며 야수도는 입을 열었다.
 “내일 백팔 고수와 싸움을 하는데······.”
 혈빙화의 걸음이 멈추어졌다. 그러나 말은 않고 있었다.
 “무운(武運)을 빌어 주지 않을래?”
 한솥밥을 먹고 같이 자란 처지가 아니던가. 부모의 얼굴도 모를 갓난아기 때 이곳에 와서 함께 동고동락(同苦同樂)한, 바깥세상에서는 사형제로 불릴 사이였다.
 그러나 혈빙화는 또 말이 없다. 그러다,
 “쿳쿳쿳!”
 어깨를 들썩이며 웃는 것이었다.
 비웃는 것 같은 웃음에 야수도는 마음이 상했다. 그는 얼굴을 찌푸리며 물었다.
 “왜 비웃지? 내 말이 그리 우스웠나? 그래도 우리들 모두 한때는······.”
 “그만두시오!”
 혈빙화는 몸을 돌려 야수도의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아름다운 눈속에는 차가움을 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선배는 어떨지 몰라도 난, 이곳이 싫소! 아니, 저주하오!”
 그런 말을 함부로 하면 안된다고 야수도는 말해 주고 싶었다. 그런데 말이 입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녀의 차가움에 얼어붙어 버린 것일까.
 “누가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소. 나만 이 저주받은 곳을 벗어나면 되는 것이오! 알아듣겠소?”
 인간의 정(情)이라고는 눈을 씻고도 찾을 수 없었다. 야수도는 피까지 얼어붙는 느낌에 몸을 으스스 떨며 대답했다.
 “알았다.”
 “······.”
 잠시 야수도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던 그녀는 찬바람이 휭! 불 정도로 몸을 돌리며 말했다.
 “위로는 창녀한테나 가서 받으시오!”
 멀어져 가는 혈빙화의 등을 보며 야수도는 입맛을 다셨다.
 “쩝! 기녀라는 좋은 말도 있는데, 왜들 굳이 창녀라고 하는지 모르겠어.”
 
 ***
 
 지하세계인 이곳에 여인들이 있었다.
 여인의 수는 무려 삼십 명.
 그녀들은 어디 내놓아도 빠지지 않을 만큼 아름다웠고 나이도 열여섯에서 스무 살 사이의 영계들이었다. 스물이 넘으면 그녀들은 여기서 쫓겨나야만 하였다.
 또한 그녀들은 모두 바깥세상에서 데려왔다. 그래서 향기가 없는 밤의 꽃들이었다.
 고된 훈련과 외로움에 지친 투사들은 몸을 탐했고, 그녀들은 대가로 돈을 받는다.
 해서, 그들은 수시로 여인들을 찾았다.
 하지만 세상 어디에도 괴상한 놈이 하나쯤은 있지 않은가. 이곳에서 괴상한 놈은 바로 야수도였다.
 과거 그러니까, 삼년 전만 하더라도 야수도 역시 똑같은 부류였으나 한 여인이 들어오면서 변했다.
 이화라 불리는 기녀를 본 그는 우습게도 단번에 사랑을 느낀 것이다. 그래서 시합이 있기 전날이 아니면 절대 여인을 찾지 않았고, 여인은 당연히 이화여야만 되었다.
 그 일은 지하세계에서 한동안 화젯거리였고, 그는 미친놈에 얼빠진 놈이 되었다.
 매춘혈(賣春穴).
 매춘은 몸을 파는 사람을 뜻함이고, 혈은 여인의 음부(陰部)를 뜻함이었다.
 그래서 매춘혈은 천연(天然)에다가 인공을 가미한 동굴에 있었다. 동굴의 양편에는 오십여 개의 방이 붙어 있었다. 은은한 홍등 아래 보이는 방문에는 여인의 이름이 새겨진 문패가 있었다.
 그 중 이화(梨花)라 쓰여진 방안에는 지금 한 쌍의 남(男)과 여(女)가 있었다.
 사내는 민대머리의 야수도였고, 여인은 이화라 불렸다.
 그들은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앉아 있었다. 탁자에는 간단한 안주와 술이 놓여져 있었다.
 한데 술잔에는 입을 댄 흔적이 없었고 안주도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눈, 그들은 서로의 눈만을 뚫어져라 쳐다만 보고 있었다. 그 속에서 무엇을 찾으려는 것처럼.
 두 사람의 눈이 얽혀 뜨거운 정(情)의 강이 흐른다.
 그러다 어느 순간 야수도의 눈이 아래로 내려졌다. 이화가 무슨 말을 하려는 낌새를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곳에는 육감적이며 도톰한, 그리고 선이 선명한 입술이 있었다.
 ‘빨고 싶다······.’
 이화의 입술에는 달콤한 꿀이 숨겨져 있을 것 같았다. 그 꿀을 훔쳐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 즈음, 이화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소녀가 여기 온 지도 벌써 삼년이 넘었어요.”
 순간 야수도의 불투명한 눈이 반짝거렸다.
 “삼년! 허, 벌써 그렇게 되었나? 세월 한번 빠르군.”
 “그래요. 세월이 참 빠르군요.”
 그녀의 음성에 왠지 짙은 슬픔이 잠겨 있다는 느낌을 야수도는 받았다.
 “왜 그래? 오늘따라 무척 슬퍼 보이는데 무슨 일이 있었냐?”
 “아뇨, 일은 무슨 일이 있겠어요.”
 이화는 활짝 웃어 보였다. 그러나 그 전에 보여 주었던 처연한 표정을 야수도는 읽었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이화의 눈을 보며 말했다.
 “아냐. 분명히 무슨 일이 있어. 그러고 보니······.”
 말을 하던 도중 불현듯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스무 살.
 이화가 스무 살이 되었다는 것이었다. 스물의 나이는 이별을 뜻한다. 그는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그래, 잊고 있었어. 네가 스무 살이라는 사실을.”
 “흑······!”
 이화의 작은 얼굴은 두 손에 파묻혔고, 그녀의 가녀린 어깨가 들썩이기 시작했다. 오열을 하고 있는 것이다.
 “······.”
 야수도는 고개를 들었다. 천장에 박힌 야명주가 아릿한 아픔으로 다가왔다. 야명주 속에 이화의 모습이 들어 있었다. 처음 보았을 때의 그 모습이······.
 그것은 충격이었다.
 희망도 절망도 없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야수도에게 그녀는 찬란한 한 줄기 빛처럼, 바람처럼 다가왔었다.
 빛은 그의 몸에서 기생하는 세균을 죽였고, 바람은 희망이라는 씨앗을 날라다 주었다.
 그때부터 그는 변했다.
 살아야 할 목적이 생긴 것이었다. 막연하게 살아남아야 한다는 동물적인 본능이 이제는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 살고파 하는 인간으로 변화되었다.
 ‘······ 이화······.’
 야수도는 저도 모르게 가슴앓이를 하였다. 그리고 내심 그 이름을 허공에다 외쳐 불렀다.
 허공을 맴돌던 그 이름이 야수도의 입끝에 맺혔다.
 “이화······.”
 무심한 음성이었다. 그래서일까, 이화는 울음을 멈추고 그를 응시하였다.
 “······.”
 눈이 마주치는 순간 야수도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웃어 보였다.
 “금릉(金陵)이 고향이라고 했지? 그곳에 노모와 어린 동생이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맞나?”
 이화는 눈물자국이 가득한 얼굴을 가만히 끄덕였다.
 “예······.”
 “그렇다면 됐다.”
 무엇이 되었다는 걸까 하고 이화는 생각했다. 그녀의 생각을 꿰뚫은 야수도는 힘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기다리고 있거라. 그러면 내가 찾아가마!”
 “아······!”
 울컥! 하고 무언가 치밀어 올랐다. 그녀는 하마터면 야수도의 품으로 뛰어들 뻔하였다. 그러나 이화는 모질게 입술을 깨물어야만 하였다.
 “그래요, 꼭 소녀를 찾아오세요. 그래야만 돼요······.”
 그래야만 된다는 그 말을 한번쯤 되새겨도 볼만하건만 야수도는 무심코 흘려버렸다. 대신 그 말 위에 그는 사랑이라는 이름을 덮어씌웠다.
 “반드시··· 반드시 찾아갈 것이다, 나는!”
 야수도의 가는 눈매는 뜨거운 열정(熱情)과 신념으로 활활 타올랐다.
 그러나 이화의 눈은 왠지 깊은 늪처럼 음울하게 가라앉았다. 야수도의 사랑이 닿지 않는 깊은 곳으로······.
 이화는 자신의 눈빛을 스스로 읽었다.
 “오늘은 특별한 날······.”
 술은 본시 투명한 색깔이었지만, 지금은 많은 빛을 담고 있었다. 등불과 야명주, 그리고 야수도의 뜨거운 마음이 어우러져 있었다.
 “오늘만이라도 술을 드실 수 없는지요?
 야수도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래, 오늘은 왠지 취하고 싶군.”
 야수도는 말을 하면서 이미 술잔을 입에 갖다 대고 있는 중이었다. 술 마시는 법이나 잊지 않았나 걱정하면서.
 이화, 그녀를 만난 후부터 술이라고는 입에 대지 않았던 그였다. 또한 그녀를 안지도 않았다.
 그러면서도 야수도는 자신이 모아 두었던 돈을 몽땅 그녀에게 주었다.
 꿀꺽!
 그의 목젖이 크게 움직였다. 다행히 술은 기도로 들어가지도 않았다. 술맛도 그때, 그대로였다.
 “그렇게 드셔야만 해요.”
 눈빛을 반짝이며 말하는 이화의 음성은 묘한 음조(音調)를 띠고 있었고, 그 느낌을 야수도는 감지했다.
 “네 말투가 이상······.”
 그 순간, 야수도는 갑자기 이화의 육체 전체에서 항거할 수 없는 도발적인 염기가 발산하는 것을 느꼈다.
 ‘윽!’
 그의 단전어림이 후끈해짐과 동시에 참을 수 없는 욕화(欲化)가 불같이 솟구쳤다.
 쨍그랑―!
 손에서 술잔이 떨어졌다. 술잔은 박살이 났고, 그의 눈은 노기로 활활 타올랐다.
 “술에 음약(淫藥)을 넣었구나. 왜지? 왜······?”
 야수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의 눈은 노기와 전신 혈맥을 따라 용솟음치는 욕망으로 삽시간에 벌겋게 달아올라있었다.
 그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이러면 안돼······.’
 하지만 그 말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주르르······.
 입술을 깨물었는지 아니면, 혀라도 깨물었는지 선명한 피가 입술을 타고 흘렀다. 덕택에 야수도는 약간 정신을 차릴 수가 있었다.
 “안······!”
 그는 안된다고 말하고 싶었을 게다. 그러나 다음 순간, 말은 연결되지 않았다.
 “미안해요··· 미안해요······.”
 이때 미안하다는 말을 수없이 반복하면서 이화가 몸을 일으켰다. 이어,
 사르륵.
 옷자락이 매미 허물벗듯 흘러내린다. 뽀얀 유백색 어깨가 노출되고, 성숙한 여인의 터질 듯한 유방을 옥죄인 상체가 드러났다.
 “으으······.”
 불에 기름을 붓는 격이었다. 짐승 같은 소리를 내며 야수도는 뒤로 물러났다.
 이화는 허리띠를 풀며 붉은 입술을 움직였다.
 “소녀의 진짜 이름은 장화영(張花暎).”
 그 이름만큼은 확실히 들을 수 있었다.
 “장··· 화영······.”
 “그래요. 잊지 말아요. 그 이름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잊으라 해도 잊지 못할 것이다.
 치마가 바닥에 떨어지고, 두 개의 매끄러운 다리가 드러났다. 신비로운 여인의 비역을 가린 고의는 아슬아슬하게 풍만한 둔부에 걸려 시선을 잡아당긴다.
 “헉! 왜 이런 짓을······.”
 야수도의 두 눈이 시뻘겋게 팽창되었다. 방금 이 말도 그에게 있는 마지막 이성(理性)이었다.
 하나 이화 아니, 장화영의 섬섬옥수는 젖가리개를 떼어내고 있었다.
 툭!
 젖가리개가 벗겨졌다. 순간 만지면 터질 듯, 익을 대로 익은 두 개의 유방이 야수도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와르르.
 야수도는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타오르는 원초적인 욕망 앞에 무기력한 자신을 처음으로 느꼈다. 그는 어흥! 하면서 장화영을 덮쳤다.
 타는 갈증을 느낀 그는 맨 먼저 입술을 빨았다.
 생각보다 더 달콤했다. 한동안 피가 날 정도로 빨은 그의 입술은 점차 밑으로 내려갔고, 살구씨만한 유두가 기다렸다는 듯이 입 속으로 파고들었다. 유두는 자줏빛이었다.
 장화영은 기녀였다.
 그래서 당연히 숫처녀가 아닌 것이었다.
 “아··· 학!.”
 장화영은 입을 한껏 벌리며 나신을 활처럼 휘었다.
 이 순간, 그녀의 둔부로 향한 야수도의 손끝에 이 물체가 걸렸다. 고의였다.
 찌익―!
 신경질적으로 고의를 찢어버린 그는 장화영을 탁자로 밀어붙였다.
 와장창―!
 누구의 손이 그랬을까? 탁자 위에 있는 그릇들이 모조리 쓸어 내려졌다.
 “아아! 아음······!”
 장화영은 비명 아닌 비명을 지르며 온몸을 파르르 떨기 시작했다.
 그런데 눈, 한 쌍의 눈이 언제부터가 두 남녀의 정사(情事) 장면을 몰래 훔쳐보고 있었다.
 그 눈은 사악했고, 음흉하였다.
 또한 그 눈은 무척 실망을 하고 있었다.
 야수도, 그는 짐승이 내는 울부짖음을 토한 뒤, 맥없이 옆으로 굴렀다. 그리고 이내 깊은 잠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잠시 후 기다렸다는 듯이 한 인영이 방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스윽!
 그는 일신에 핏빛 장포를 걸친 단신(短身)이었고, 나이는 이제 겨우 스물 정도의 청년이었다.
 한데, 그의 눈은 사악함으로 똘똘 뭉쳐 있을 뿐만 아니라, 어이없게도 이마는 주름투성이였다.
 영락없이 원숭이 형상을 하고 있는 그의 이름은 독마혼(毒魔魂)!
 “아주 잘하더군.”
 땀으로 젖은 장화영의 벌거벗은 나신을 보는 독마혼의 눈과 음성에는 진득한 음욕이 서려 있었다.
 순간 장화영은 전신에 벌레가 스물거리며 기어다니는 것 같은 느낌에 소름이 끼쳤다.
 한데도 그녀의 눈은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다만 공포와 두려움, 그리고 죽이고 싶어하는 마음이 담겨져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발치로 밀려나 아무렇게 구겨져 있는 이불을 끌어올리며 소리를 질렀다.
 “가까이 오지 말아요!”
 음성이 높았던 탓일까. 돌연 깊이 잠들어 있던 야수도의 몸이 움찔하였다.
 “왜 소리를 치지?”
 독마혼은 사악하게 웃으며 손가락을 퉁겼다. 소리 없이 날아간 지풍(指風)은 정확하게 야수도의 수혈에 명중되었다.
 “으응······.”
 야수도가 강제적인 수면 상태로 들어감을 알려주는 소리를 귓전으로 흘리며 독마혼은 침상에 걸터앉았다.
 그는 사정없이 이불을 확 걷었다.
 “악!”
 뾰족한 비명을 내지른 장화영은 벼락같이 몸을 일으켜 무릎을 세웠다.
 하지만 그런 자태가 더욱 도발적이라는 것을 그녀는 미처 모르고 있었다.
 독마혼의 눈이 무릎에 짓눌려 옆으로 삐져 나온 그녀의 유방에 잠시 머물었다가 이내 밑으로 내려왔다. 그곳에서 아직도 흥분이 가라앉지 않아 촉촉이 젖은 여인의 수풀이 있었다.
 그리고 조갯살 같은 여인의 비문이 함초로이 보였다.
 ‘이런······.’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장화영은 다급히 손을 내려 소중한 곳을 가리려 했다.
 “가리지 마.”
 독마혼의 간단한 말 한마디에 그녀의 손은 정지되었다.
 “왜 시키는 대로 안 했지?”
 육체에 대한 욕망으로 타던 그의 눈은 살기로 바뀌었고, 손은 음탕했다. 그 손은 미끄러지듯 장화영의 음부 사이로 숨어 들어갔다.
 순간 장화영의 입에서 비명인지 아니면 쾌락에 겨운 신음인지 모를 비음이 흘러 나왔다.
 “아······!”
 몸과 마음이 따로인 것이 여인인 것이다. 마음은 거부하고 있으나 몸은 뜨거워졌다.
 독마혼은 그녀 몸 안의 모든 것을 휘저으며 입을 열었다.
 “왜지. 왜 환음대법(幻陰大法)을 펼치지 않았지?”
 환음대법은 서열 이십구위에 있는 환음요희(幻陰妖姬)가 만든 채음수법이었다.
 “그··· 그건··· 아!”
 장화영은 전율했다. 은밀한 곳부터 치솟는 쾌락에 그녀는 정신이 아득해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달짝지근한 숨결이 독마혼의 콧속으로 파고들었다.
 ‘이번 경기에 놈이 이기면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지만, 한번쯤 눈감아 주는 것도 괜찮겠지. 아직은 쓸모가 많은 계집이니까.’
 독마혼은 손을 끄집어냈다. 손은 장화영의 음수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이번은 용서하겠다. 만약 다음에 또 명을 거역하면······.”
 손이 장화영의 입으로 쏙 들어갔다. 그녀는 손을 빨면서 다음 말을 기다렸고, 은근한 쾌감에 손을 맡긴 독마혼은 지그시 눈을 감으며 말했다.
 “풍운세가(風雲世家)는 지상에서 영원히 제명될 것이다. 명심하라!”
 부르르.
 장화영의 전신이 거세게 떨렸다. 그녀는 공포에 젖은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입안에 사내의 손이 들어 있었기 때문에.
 죽은 듯이 자는 사내를 구석으로 몰아붙인 남과 여는 육체의 향연을 벌이기 시작했다.
 
 
 3장 아흔다섯 번째의 대결
 
 
 지하검투장이라······.
 소문으로 떠돌던 것이 자신에게 이렇게 어느 날 갑자기 닥칠 줄은 몰랐다.
 내가 이곳에서 살아나갈 수가 있을까?
 그러다 실내를 맴돌던 두청풍은 고개를 거칠게 흔들었다.
 “방법은 하나뿐이다. 내일······.”
 두청풍은 뼈가 으스러져라 주먹을 쥐었다.
 “일단은 이기고 볼 일이다!”
 그랬다.
 무엇보다도 내일 있을 싸움에서 그는 이겨야만 했다.
 지하검투장은 이렇게 엄연히 존재했다. 그리고 무림에 떠도는 소문과 누군지 모를 노인의 말을 빌린다면 자신은 이기면 되는 것이다.
 단 한 번. 이 한 번의 승리는 자신에게 삶과 일확천금을 쥐어 줄 것이다.
 “난······.”
 두청풍은 맞은편의 벽을 뚫어져라 응시하였다. 마치 그곳에 내일 싸울 상대가 있는 것처럼.
 “기필코 이길 것이다―!”
 자신의 음성이 메아리로 돌아올 때였다. 돌연 어디선가 창노한 음성이 들려왔다.
 “잘 생각했다. 이겨야만 이곳을 나갈 수 있지. 암! 그렇고말고.”
 처음에 들었던 노인의 음성이었다.
 그런데 음성은 메아리를 만들지 않고 사방에서 들려오는 듯했다.
 순간 두청풍의 얼굴색이 싹 변했다.
 “회선전성(回線傳聲)!”
 한 번에 여러 곳으로 분사해서 음성을 보낼 수 있는 회선전성은 불문의 혜광심어(慧光心語)와 함께 이대무상음공이었다.
 두청풍이 놀라든 말든 노인의 음성은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내일 진시(辰時) 정각에 대결을 한다. 상대는 야수도라 불리는 아이다.”
 그 말에 두청풍은 불현듯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야수도(野獸刀)······. 그는 칼을 사용하오?”
 “그렇다. 그 아이의 칼은 좀 무겁다. 그리고 칼의 폭도 넓은 편이다.”
 중요한 정보였다.
 사용하는 병기를 미리 알면 상대의 무공도 짐작할 수가 있었다.
 두청풍은 폭이 넓고 무거운 칼을 쓰는 자와 많이 싸워 본 사람이다. 그들의 도법은 중후하나 빠르기와 변화가 없었다.
 그 말은 즉, 빠르고 변화가 많은 검을 쓰는 자에게 약하다는 뜻과 동일했다.
 ‘그런 자라면··· 이길 수 있다!’
 두청풍이 승리를 장담하며 웃을 때, 노인은 그의 걱정을 덜어주고 있었다.
 “노부가 공평을 원칙으로 하기에, 그 아이의 병기를 알려주는 것이다. 또한, 그 아이도 네게 대해서 그 정도밖에는 알지 못한다. 그리고 이기면 널 돌려보내 주겠다. 승리에 대한 돈과 함께······.”
 두청풍은 이곳에 온 지 구일 만에 소리내어 웃을 수가 있었다. 노인이 자신 편일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하하하, 걱정 마시오! 야수도인지 뭔가 하는 놈을 기필코 이길 테니까!”
 그의 자신만만한 말에 노인도 덩달아 웃음을 터뜨렸다.
 “허허, 오해를 하고 있구나. 노부는 네가 지기를 바라는 사람이다.”
 순간 예상이 빗나간 두청풍은 두 눈을 흡치켜 떴다.
 “그게 무슨······.”
 “노부는 네게 돈을 걸지 않았다는 뜻이다. 아무튼 무운은 빌어 주마.”
 
 ***
 
 아마 모르긴 몰라도 바깥세상이라 불리는 지상에는 해가 떠올라 있을 시간일 것이다.
 해······.
 그 태양을 야수도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또한 바람, 강, 구름, 바다.
 자연(自然)의 모든 것을 보지 못했다. 사물을 분간할 때부터 그가 본 것은 침침한 어둠과 다갈색의 동굴, 그리고 자신 또래의 아이와 무표정한 투사들의 얼굴들 뿐이었다.
 이것만이 그의 어린 시절에 남아 있는 추억들이다.
 터벅··· 터벅······.
 고요함 속에 야수도의 발자국 소리만이 메아리를 친다. 소리는 끝없이 되돌아오고 있었다. 스물네 해를 보낸 자신의 나이처럼. 사랑하는 여인을 떠나보내야 하는 아픔처럼 그렇게 돌아오고 있는 것이다.
 그게 싫어서 야수도는 발에 힘을 주었다. 흔들리는 마음을 세차게 밟듯이 바닥을 힘차게 다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드릉··· 드르릉······!
 철노인의 코고는 소리가 들려오자, 그는 짐짓 밝게 웃었다.
 “다 만든 모양이군.”
 언제나처럼 철노인은 구석에서 새우잠을 자고 있었다.
 그의 머리 위에서 하얗게 빛나는 철갑이 보였다. 한 자가 채 못되는 철갑은 망사처럼 부드러워 보였다.
 “대단한 양반이야.”
 야수도는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만년한철로 만든 철갑을 눈에 갖다 대어 보았다.
 깨알같은 작은 원 속에 철노인은 침을 흘리고 자고 있었다. 원을 통해 보이는 그 모습은 마치 벌(蜂)이 사물을 보는 듯했다. 구멍의 크기도 일정했다. 무게를 줄이기 위함일 것이다.
 소매를 걷은 야수도는 철갑을 팔목에 찼다.
 찰깍―!
 경쾌한 음향이 들리며 손목에 끼었다. 그는 손목을 한차례 비틀어 보았다.
 철갑은 옛날부터 자신의 것인 양 손목에 맞았고 무게도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자연스레 만족한 미소가 감돌았다.
 “훗, 고맙소.”
 “드릉! 쿨쿨!”
 그의 인사에 철노인은 코를 고는 것으로 대신하였다.
 
 ***
 
 드넓은 광장이다.
 동굴이라고 믿을 수 없게 넓은 이곳이 바로 일명 지하검투장이라 불리는 곳이었다.
 천장에는 크고 작은 석순(石筍)들이 늘어뜨려져 있었다. 그러나 십 장 아래까지 내려온 것은 없었다. 무수히 많은 대결로 그것들은 모두 부러졌기 때문이다.
 바닥은 습기와 석순의 끝에서 떨어지는 물방울로 질퍽하게 젖어 있었고, 군데군데 아직 채 마르지 않은 피가 고여 있었다. 그리고 청소가 덜 된 듯 작은 살점도 더러 보였다.
 마치 도살장같이 공포스런 분위기 속에서 지금 한 사내가 석벽에 비스듬히 기대고 서 있었다. 야명주 불빛 아래 온갖 색으로 반사되는 민대머리를 가진 야수도는 팔짱을 낀 채로 눈을 감고 있었다.
 그러기를 반각 정도.
 구르르르······.
 육중한 어떤 물체가 구르는 소리가 났다.
 “이제 시작인가.”
 그 소리의 정체를 알고 있는 야수도는 감았던 눈을 뜨고 맞은편을 쳐다보았다.
 천연의 벽으로 생각되는 곳이 서서히 열리고 있었다. 그곳은 벽이 아니었다. 벽처럼 교묘하게 위장한 문이었고, 문은 기관장치에 의해 작동되고 있었다.
 쓰윽······.
 야수도는 몸을 바로 세우고 눈을 빛내며 바라보았다.
 사십 줄로 들어선 한 사내가 왼손에 검을 들고 들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내의 몸이 완전히 문을 빠져 나오자 문은 둔중한 굉음을 토하며 다시 닫혔다.
 희끄무레한 어둠을 격하고 두 사내의 시선이 얽혔다. 두청풍을 보는 순간, 야수도는 내심 미소를 지었다.
 ‘대단한 살기와 자신감! 후, 의외로 일이 쉽게 풀리는군.’
 야수도가 보는 사내의 눈은 불타는 승부욕과 진득한 살기로 가득하였다.
 반면 야수도의 눈은 마치 썩은 동태 눈알처럼 흐릿했다.
 문득 야수도를 발견한 추행검수 두청풍의 걸음이 멈칫했다. 그러다 곧 걸음을 옮기면서 비릿한 웃음을 흘렸다.
 “괴이한 놈이군.”
 야수도의 빡빡 머리를 보고 하는 말일 게다.
 “처음 뵙겠소. 나는······.”
 허리를 굽혀 인사하는 야수도의 말을 두청풍은 비웃음으로 받아 넘겼다.
 “알고 있다. 네가 야수도라고 불리며 나와 싸워야 하는 놈이라는 것을. 그런데 괴이할 뿐만 아니라 멍청하군. 목숨을 걸고 싸울 상대에게 예의를 차리다니 말이다.”
 야수도는 이가 보일 정도로 씨익! 웃으며 머리를 긁었다.
 “무림의 백팔 고수의 한 분을 뵈니 너무 흥분해서 그만, 실례를 범했다면 용서하시오.”
 “갈수록 태산이라더니······.”
 두청풍은 피식 웃으며 걸음을 멈추었다. 야수도와의 사 장 남짓한 거리를 둔 지점이었다. 이 정도 거리면 자신의 신법과 쾌검으로 단숨에 놈의 숨통을 끊을 수 있는 거리였다. 하지만 놈에게는 먼 거리일 것이다.
 그는 자신감 넘치는 음성으로 말했다.
 “좋다! 네가 날 존경하는 태도를 보였고 또 행운을 안겨다줄 것이니, 일초를 양보하겠다!”
 그 말에 야수도는 서운한 표정을 지으며 머뭇거렸다.
 “다른 사람들은 삼초를 양보해 주었는데······.”
 ‘놈! 그래서 여태 살아 있었구나. 하지만 나는 그렇게 관대하지 못해.’
 야수도가 지금껏 목숨을 부지한 까닭을 안 두청풍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안돼! 단 일초식뿐이다.”
 야수도는 거의 우는 듯한 말로 사정했다.
 “이초식이라도······.”
 두청풍은 상대가 약하다는데 안심하면서도 은근히 짜증이 났다. 명색이 백팔 고수인 자신에게 저렇게 나사가 하나 풀린 것 같은 놈과 싸우라고 하니 자존심이 팍! 팍! 상했다.
 “안된다고 했다. 그것도 많이 봐준 거야. 중원 같으면······.”
 그는 말을 멈추었다. 잘은 몰라도 여기도 중원일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두청풍은 말을 바꾸었다.
 “지상 같으면 국물도 없어. 알았어?”
 “예.”
 어쩔 수 없음을 깨달은 야수도는 힘없이 대답한 뒤에 허공에다가 대고 말했다.
 “시작할까요?”
 그러자 어디선가 늙은 음성이 들려왔다. 두청풍이 들었던 그 목소리였다.
 “시작하라. 손님들이 지루해 하신다.”
 “예.”
 가볍게 대답한 그는 두청풍을 향해 입을 열었다.
 “시작하라고 하시는데요.”
 ‘뭐 이런 바보 같은 놈이 다 있어?’
 두청풍은 일초가 끝나는 순간에 쳐죽이리라고 굳게 다짐하며 두 발을 어깨 너비로 벌리며 소리쳤다.
 “시작하면 되잖아?!”
 휭―!
 제법 공기를 가르는 파공음이 들렸다. 그리고 백 리보다 더 먼길을 놈은 단 두 번의 도약으로 다가와 칼을 휘두르고 있는 것이다.
 저 정도면 자신보다는 못해도 그런 대로 일류라 칭할 만한 칼놀림이었다. 생각보다 빠르고.
 두청풍은 피식 웃으며 가만히 기다렸다.
 “뚝배기보다 장맛이라더니······.”
 이윽고 시퍼런 칼날이 세 치 앞으로 다가왔다. 일순 그의 허리가 버드가지처럼 유연하게 뒤로 휘어졌다. 마치 칼바람에 넘어간 듯이.
 “엇!”
 야수도가 놀람에 찬 소리를 터트릴 때다.
 “기회를 줄 때 잘 살려야지, 가랏!”
 휘어졌던 두청풍이 탄성(彈性)을 받아 제자리로 돌아옴과 동시에 붉은 섬광이 위로 솟구쳤다.
 왼손에 들려 있던 단풍검이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어어!”
 대경성을 토하며 야수도는 급히 칼을 회수한 다음, 아무렇게나 휘둘렀다. 그 모습은 마치 황소가 꼬리로 파리를 쫓는 것과 흡사하였다.
 쨍! 쨍! 채앵―!
 세 번의 부딪힘이 있었다.
 “윽! 맞았어······.”
 오른 배에서 가슴까지 길게 검상은 입은 야수도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주춤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실은 그것은 검상이라고 할 수도 없는 상처였다. 날카로운 검에 살짝 긁힌 정도였으니까.
 그런데도 그는 죽는다고 엄살을 떨었고, 그 모습을 보는 두청풍은 지그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우연이겠지. 암! 그렇고말고.’
 소 뒷발에 쥐도 밟힌다는데, 이 정도는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자존심은 상했다.
 ‘이번에는.’
 그는 허공으로 도약했다.
 “이것도 한번 막아 보아라. 섬혼(閃魂)!”
 슈슈슈―!
 검의 벼락이었다.
 야수도의 동공 깊은 곳에서 감탄하는 빛이 일렁거렸다.
 ‘백팔 고수······. 과연 명불허전이다. 하나, 내 손에 죽는다는 것은 변함이 없어.’
 야수도는 내심 새하얗게 웃으면서도 겉으로는 어어!를 연발하며 미친 듯이 칼을 휘둘렀다.
 그 모습은 너무나 급박한 상황에 어떻게 대처를 할지 몰라 본능적으로 발악하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의 발악은 교묘하게 두청풍의 검을 막아내고 있었다. 약간의 상처를 입으면서 말이다.
 그런 가운데 벌써 십 초나 지나갔다.
 한데, 허둥지둥거리면서 온몸에 피를 철철 흘리는 야수도보다 두청풍이 더욱 속이 타는 모습이었다. 끝인가 싶으면 아니고.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 아닌가.
 아무것도 아닌 놈이 재수 하나만큼은 더럽게도 좋았다. 자연 두청풍의 뚜껑이 열렸다 닫혔다 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는 결정적인 빈틈을 발견하였다.
 “네놈의 운도 이젠 끝이다!”
 두청풍은 섬전검법(閃電劍法)의 최강 절초인 섬폭(閃暴)을 빈틈으로 쑤셔 박았다.
 새애액―!
 신랄한 검광이 야수도의 가슴을 향해 쏘아졌다.
 “헉!”
 크게 놀란 야수도가 왼팔을 들어올리자, 두청풍은 어이가 없어 코방귀가 다 나올 정도였다.
 “미친놈!”
 단풍검이 야수도의 팔과 함께 놈의 가슴을 꿰뚫은 것을 그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한데,
 쨍―!
 야수도의 팔뚝과 검 끝이 부딪히는 순간, 날카로운 금속성이 들리며 단풍검은 더 이상 전진을 하지 못했다. 뜻밖의 사태에 두청풍은 해연이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때 돌연 야수도의 입가에 새하얀 미소가 얹히는 것이 보였다.
 “팔에 무얼··· 허억!”
 문득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힌 그는 황급히 단풍검을 회수하려 하였다. 그러나,
 싸악!
 이미 야수도의 육중한 칼은 믿을 수 없는 빠름을 보이며 두청풍의 목덜미에서 시작하여 가슴을 훑고 지나간 뒤였다.
 두청풍의 잘려진 상체가 스르르 분리되어 바닥에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헉헉! 겨우 이겼다.”
 죽음 직전에서 살아난 탓인가. 아니면, 피를 많이 흘린 탓인지 피칠갑을 한 야수도는 힘없이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는 연신 거친 호흡만 토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상처 입은 맹수였다. 거친 호흡만이 드넓은 지하검투장을 울리고 있었다.
 그러기를 얼마나 지났을까.
 돌연 지하검투장에 박수 소리가 터졌다.
 짝짝짝!
 “자알 했어. 야수도!”
 “하하, 정말 마음에 드는 놈이야.”
 이제 아흔다섯 번째 듣는 박수와 환호다. 그 다음에는 분통을 터트리는 소리가 들릴 차례였다.
 “우라질! 또 돈을 잃었잖아!”
 “저 자식은 어찌된 놈이, 지독히도 운이 좋아.”
 야수도.
 그는 지하검투장의 투사들 중에서 승패를 가장 점치기 어려운 투사였다.
 질 듯, 질 듯하면서도 이기는, 그래서 더욱 많은 돈이 걸렸다. 잘만 찍으면 능히 만석지기가 될 수도 있어 투자가치가 그만큼 높았다.
 ‘됐다.’
 야수도는 흐릿하게 웃으며 자리에 누웠다. 누운 것이 아니라 맘놓고 혼절을 한 것이다.
 
 ***
 
 섭위평(葉危平).
 지하세계에서 유일(唯一)하게 제대로 된 이름을 가진 그는 이곳에서 유일한 의원이었다.
 백팔 고수 삼십일, 이위에 나란히 들어 있는 생사신의(生死神醫) 수무상(洙無相)과 독심마의(毒心魔醫)와는 전혀 관련이 없지만 나름대로 의술의 발전함에 이바지했다고 큰소리 팡팡! 치는 그였다.
 일명 황금벌레로 불리는 황금충의(黃金蟲醫) 섭위평은 흐뭇한 시선으로 나무 침상에 누워 있는 야수도를 보고 있었다.
 돈!
 황금이 수줍게 웃으며 굴러 들어오고 있었다.
 섭위평은 누런 이가 보이도록 씨익 쪼갰다.
 “기특해. 정말 기특한 녀석이야, 노부에게 딸이 있었으면 사위라도 삼고 싶은데.”
 그러다 그는 자신의 말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안될 말! 누구 청상과부 만들 일이 있어.”
 딸도 없지만, 만약 있어도 사위로 삼고 싶은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이제 견적을 뽑아 볼까?”
 섭위평은 설레는 마음으로 야수도의 옷을 사정없이 찢었다. 다음 순간, 그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흐흐흐.”
 괜히 웃음이 나왔다.
 하나, 둘, 셋······.
 크고 작은 상처가 무려 열두 개나 되었다. 상처는 모두 돈이었다. 세상에서 돈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 더욱이 그에게 있어 누렇게 빛나는 황금덩이는 바로 자식이었고, 여편네였다. 어림잡아도 금자 닷 냥은 넘을 것 같았다.
 그는 상처를 먼저 치료한 적이 없는 사람이다. 환자의 생명보다 거래가 우선이기 때문이다.
 “우선 깨우고 나서······.”
 섭위평은 낮게 중얼거리며 품에서 분홍빛 자개 병을 꺼냈다. 호흡을 멈춘 그는 얼른 나무마개를 열었다. 퐁! 하는 소리를 듣는 순간, 섭위평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이거 한방이면 안 깨어날 수 없지, 암!”
 냄새를 맡을 수는 없으나, 그 냄새가 어떻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자신이 만든 것이니까.
 섭위평은 그 고약한 냄새를 기억하며 슬쩍 병을 야수도의 콧망울에 갖다 대었다.
 그러자,
 “왝―!”
 직빵이었다. 죽은 듯이 혼절해 있던 야수도가 언제 그랬냐는 듯 눈을 번쩍 뜸과 동시에 구역질을 하는 것이 아닌가.
 “뭘 그리 놀래? 처음 맡는 냄새도 아니면서.”
 그리고 나서 섭위평은 손이 보이지 않게 마개를 닫고 품에 넣으며 다시 말했다.
 “그만해라. 청소하기 어렵다.”
 뱃속에 든 똥물까지 올린 야수도는 눈알을 번뜩이며 쏘아붙였다.
 “당신도 한번 맡아보시오. 그 냄새가 얼마나 더럽고 고약한지 말이오.”
 말만 들어도 끔찍했다. 섭위평은 손을 휘휘 내저었다.
 “아서라, 노부가 할 일 없어 냄새를 맡느냐?”
 만들 때 어쩔 수 없어 맡았던 그 냄새. 시고, 맵고, 짜고, 구릿한, 마치 동물이 갓 썩기 시작할 때 나는 냄새보다 몇 십배는 더 고약한 냄새였다.
 야수도는 우거지상을 하며 입가를 닦았다.
 “젠장! 빌어먹을!”
 그는 연신 욕을 하며 섭위평을 향해 말했다.
 “얼마면 되겠소?”
 “허허, 자네는 언제 보아도 사내답게 화끈해.”
 “시답잖은 소리는 집어치우고, 가격이나 말하고 빨리 치료해 주시오.”
 견적은 이미 나온 상태였다.
 “금자 닷 냥!”
 이어 섭위평은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깎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겠지?”
 예상보다 훨씬 많은 금액이었다. 그래서 야수도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너무 많지 않소?”
 “많지 않다. 아주 적절한 금액이야.”
 고개를 저으며 말한 섭위평은 야릇한 웃음을 머금었다.
 “그리고 노부가 언제 환자를 두고 폭리를 취하는 것을 봤느냐? 사부의 말씀에 의하면 의원이란 모름지기 환자의 생명을 내 몸같이 여기라 하셨지. 그래서 노부는 충실히 그걸 이행하는 사람이다.”
 문득 그는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하늘도 알고 땅도 안다!”
 지나가던 개가 웃을 일이었다.
 “훗!”
 “왜 웃지? 상당히 기분 나쁜 웃음인데.”
 야수도는 얼른 표정을 바꾸었다.
 “너무 옳은 말을 하니까, 좋소. 모두 드리리다. 대신 조건이 있소.”
 치료를 하는데 다른 조건이 붙을 수는 없다. 조건에는 다만 돈이 따를 뿐이었다. 그러니 이를 마다할 섭위평이 절대 아니다. 그는 흔쾌히 고개를 끄떡였다.
 “얼마든지.”
 그의 속마음을 읽은 야수도는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치료 후, 나를 방으로 데려다주시오.”
 “금자 한 냥이다!”
 짐작을 못한 바는 아니었지만 야수도는 그게 무슨 말이냐는 표정으로 펄쩍 뛰었다.
 “그것도 돈을 받는다 말이오?”
 당연한 일에 엉뚱한 소리를 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섭위평은 대답을 했다.
 “싫으면 관두고.”
 야수도는 언성을 높였다.
 “가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내 발로 가겠소!”
 섭위평은 놀라지도 않는다. 오히려 껄껄 웃으며 말했다.
 “좋도록 해라.”
 이어,
 “치료도 받지 않을 것이냐? 그래도 상관없다만 청소비는 내고 가야 한다.”
 마음 같아서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보란 듯이 성큼성큼 걸어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치료해 주시오.”
 
 ***
 
 무얼 기대한 것은 아니지만 이건 정이 말라도 너무나 메말랐다. 벌써 사흘이 지났는데도 어느 누구 한 사람 찾아주는 이 없었다.
 아니 있기는 있었다. 언제나처럼 교관인 광한신검 유광이 찾아주었다. 침상에 누워 꼼짝 않고 누워 있는 야수도에게 그는 금낭을 내밀었다.
 “옜다. 이번 배당금이다.”
 철렁거리는 금낭을 침상에 던진 유광은 수고했다던가 하는 말도 없이 누가 잡으러 오기라도 하는 듯 나가려 했다.
 유광은 누가 뭐라 해도 매정한 사람이란 걸 새삼 깨우친 야수도는 황급히 입을 열었다.
 “저······.”
 눈이 빠지게 그를 기다린 까닭이 있었기 때문이다.
 “무슨 할말이라도 있나?”
 유광은 문고리를 잡은 채 물었다.
 널찍한 등판이 한눈에 보였다. 등은 무방비 상태였고, 기습을 하면 단번에 자를 수 있다는 유혹을 뿌리치며 야수도는 입을 열었다.
 “이화는······?”
 “미친놈!”
 단박에 욕부터 튀어나왔다. 명색이 최고의 승률을 자랑하는 투사라는 놈이 먼저 한다는 말이라는 게······. 저런 놈이 어떻게 여태 살아 있는지 불가사의했다.
 유광은 거칠게 문을 열었고, 거칠게 닫으며 소리쳤다.
 “떠났다.”
 꽝―!
 문짝이 자지러지는 비명을 토했다. 그리고 야수도의 마음 한구석도 무너져 내렸다.
 “떠났다고··· 그렇게 빨리······.”
 처음으로 후회가 밀물처럼 밀려왔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적당히 다치는 것인데······.”
 그건 사실이었다. 자신을 조금만 덜 숨겼어도 그는 이렇게 많이 다치지 않았을 테고, 그러면 떠나는 그녀의 얼굴을 볼 수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야수도의 후회는 짧았고 결론은 내려졌다. 빨리 백승을 이루고 바깥세상으로 나가는 길뿐이었다.
 윗통을 벗은 야수도는 구리 동경 앞에 섰다.
 징그러웠다. 상체에는 굵고 붉은 지렁이가 붙어 있는 듯했다. 지렁이는 약간 오목 튀어나와 있는 상태였고 군데군데 허리가 잘린 모습이었다.
 섭위평에게 가면 실밥을 빼는데 또 손을 벌릴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 그는 신발에 꽂은 작은칼을 꺼내 실밥을 자르기 시작했다.
 자르고, 뽑고······.
 그러기를 얼마나 했을까, 이제는 하나밖에 남지 않은 실밥에 작은칼을 갖다 대었을 때였다.
 똑! 똑!
 문 두드리는 소리에 그의 머리가 돌아감과 동시에 몸도 같이 돌아갔다.
 “누구냐?”
 “나다.”
 ‘교관! 그가 왜 왔지?’
 목소리는 틀림없이 유광이었다. 유광이 그를 찾을 경우는 단 한 가지뿐이다. 대결이 끝난 후 대전료를 지불할 때.
 야수도는 기이한 느낌이 들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문고리를 잡았다.
 “잠깐 기다리시오.”
 문고리를 벗긴 야수도는 문을 열었다.
 “어쩐 일이시오?”
 그는 성급하게 묻고 말았다.
 “좀 들어가자.”
 야수도는 고개를 끄떡였다.
 “그러시오.”
 그는 뒷걸음을 치며 유광의 손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의 손에는 두툼한 보따리가 들려 있었다. 보따리는 가벼워 보였다. 그 안에 이불이 아니면 옷이 들어 있을 것이라고 지레짐작하며 야수도는 침상에 앉았다.
 “다 나았구나.”
 ‘실밥을 뽑던 중이었소.’ 하려다가 입을 다문 그는 기이한 눈으로 유광을 쳐다보았다.
 누가 보아도 광한신검 유광은 결코 부드러운 사람이 아니었다. 그건 모든 투사들의 공통된 점이기도 하지만 그의 음성에는 유달리 찬바람이 쌩쌩 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지금 그의 음성은 봄바람같이 훈기가 담겨 있지 않은가.
 유광은 그가 아무런 말없이 의혹이 가득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보따리를 탁자 위에 올리며 말했다.
 “와서 이걸 풀어 보아라.”
 예전에는 ‘풀어 봐.’ 하였지 지금처럼 ‘······보아라.’라는 투로 말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음! 이건······?”
 보따리를 끌러 내용물을 보는 순간 야수도의 동공이 좁아졌다.
 먼저 한 권의 얇은 책자가 눈에 띄었다. 누런 기름 종이에는 용등필체로 네 자가 쓰여 있었다.
 <무상도법(無上刀法)>.
 야수도는 고개를 들어 유광을 쳐다보았다.
 두 달쯤 더 있어야 구할 수 있다는 것을 어떻게 벌써 구했소,라는 눈빛이었다.
 유광은 눈빛을 빛내며 고개를 저었다.
 “나도 모른다. 그보다······.”
 그의 눈이 아래로 향했다.
 “책자 밑에 있는 종이를 봐라. 그 안에 이번에 네가 상대할 사람이 적혀 있다고 했다.”
 의혹에 앞서 야수도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구두(口頭)로 전달하지 않고 이렇게 서신으로 상대의 이름을 밝힌 것은 그가 지하세계에 몸담고는 처음이었다.
 또한 곱게 접힌 회색 옷은 말로만 듣던 솜옷이 분명하였다. 솜옷은 이곳에서는 필요가 없는 옷이다.
 그가 고개를 숙인 채 머뭇거리고만 있자 돌연 유광이 싸늘한 어조로 말했다.
 “빨리 보지 않고 뭘해!”
 “쩝!”
 본성은 어쩔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야수도는 입맛을 다시며 서찰을 펼쳤다.
 그런데 서찰에는 콩알만한 물체가 들어 있었다. 밀랍에 싸여 있는 그것은 환약이 분명했다.
 그는 환약을 왼손에 갈무리하며 서찰로 눈을 돌렸고 다음 순간, 야수도의 입에서 절로 신음 같은 소리가 터져 나왔다.
 “음······.”
 <철검도(鐵劍刀) 나연(羅淵).
 서열 구십삼 위, 하북 중원표행(中原 行)의 행주.
 기한은 보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싸우되, 패배는 곧 죽음이다.
 지금 이 순간 나연에게도 너에 대한 정보가 알려졌다는 것을 명심할 것! 옷을 갈아입은 뒤에 동봉한 몽혼환은 오늘 중으로 먹어라!>
 야수도는 읽기를 마쳤다.
 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서찰에서 새파란 불꽃이 피어올랐다. 발광물질이 발라져 있었던 것이다.
 야수도는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에는 약간의 흥분이 담겨 있었다.
 “왜 갑자기 시합 방법을 바꾸었는지 그 이유를 아십니까?”
 유광의 눈이 반짝 빛났다.
 “방법이 바뀌었다니.”
 그러다 그는 은근한 어투로 물었다.
 “서찰에 무어라 적혀 있었지?”
 순간 야수도의 뇌리로 번개같이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교관은 모르고 있다.’
 그는 쓸데없는 말을 했다는 생각을 하며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별 내용 아니오.”
 “그래?”
 입술을 묘하게 말아 올린 유광은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러나 아무것도 발견할 수가 없었던 그는 이내 담담한 표정으로 되돌아 왔다.
 “넌······.”
 무슨 말인가 하려다가 유광은 멈추었다. 그리고는 몸을 일으켜 휑하니 밖으로 나가는 것이었다.
 의자에 앉으며 야수도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왜지? 왜 별안간 시합 방법을 바꾼 거지? 무엇 때문에?
 의문은 의문을 낳았다. 그러나 그가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하나 그런 숱한 의문 속에서도 야수도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바깥세상! 지상에 나간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곳보다 자유로울 것이다. 자유······.
 자유를 생각하자 또 의문이 생겼다. 책을 통한 중원 땅은 넓다. 그 속에서 자신을 통제(統制)하고 감시할 수가 있을까?
 
 
 4장 바깥세상은 흰색이다
 
 
 안탕산(雁湯山).
 호북에 자리를 잡은 안탕산은 이름 있는 봉우리만도 일백이 개였고, 그 이외도 부지기수다.
 안탕이라는 이름은, 산꼭대기에 천지(天池)가 하나 있는데 겨울이 되어도 얼어붙지가 않아 가을 기러기가 찾아든다는 데서 유래되었다.
 그래서 정월(正月) 중순인 지금, 온누리가 백설로 덮여 있는데도 유독 이곳 안탕의 천지 주변만은 훈기가 감돌고 있다.
 휘이잉―!
 안탕산은 높은 산이다. 그래서 사시사철 강풍(强風)이 불었다. 강풍에는 함박만한 눈이 섞여 있었다.
 그런데 눈은 천지에서 피어나는 아지랑이 같은 수증기에 닿는 순간 물로 변했고, 주변의 땅은 눈이 녹아 질퍽했다.
 그리고 바위, 집채만한 바위 뒤에 반달곰 한 마리가 웅크리고 있었다.
 곰의 손에는 강철로 만든 철궁(鐵弓)이 들려 있었다.
 그는 반달곰이 아니었다. 반달곰으로 착각을 일으킨 이유는 큰 덩치에 반달곰의 웅피를 입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눈빛조차 곰을 닮은 그.
 웅안뇌권(熊眼雷拳) 목단호(木端虎)―!
 스물일곱의 나이에 서열 삼십칠위에 있는 자였다. 목단호는 중원을 떠받드는 사대가문 중 하나인 뇌문세가(雷門世家)의 후계자였다.
 곰을 닮았으되 호랑이를 몹시도 좋아하는 목단호.
 그는 미련한 곰같이 바위 뒤에서 꼼짝도 않고 바위에 기대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다.
 눈은 기다림으로 충만했고 활시위를 팽팽히 당긴 그의 팔은 힘줄과 근육이 용솟음쳤다.
 목단호는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당겨진 활시위만큼이나 긴박한 시간이 흘렀다.
 그러다 문득,
 ‘왔다.’
 마른침을 꿀꺽 삼킨 목단호는 신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가만히 숨을 죽였다. 그리고 마음도 죽였다. 놈은 인간의 살기마저 파악하는 영물이니까.
 크르르르!
 산이 진저리친다.
 쌓여 있던 백설이 놀라 와르르 흘러내렸다.
 백호(白虎)!
 눈보다 희고 산보다 더 큰 백호가 낮게 으르릉거리며 나타난 것이다. 시뻘건 눈알에는 막 폭발하는 용암이 담겨 있는 백호였다.
 끔찍하게 큰 울대를 비집고 나오는 소리에 공기가 줄행랑을 놓고 있었다.
 한데 산신령이라고 신성시되는 백호의 몸에는 세 개의 화살이 박혀 있었다.
 다리를 관통한 활은 녹슬고 삭아 있었고, 엉덩이와 배를 관통한 활은 검은빛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활을 타고 이따금씩 붉은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어 얼마 전에 입은 상처임을 능히 짐작할 수가 있다.
 그리고 그 활이 지금 바위 뒤에서 청각에 의지한 채 기회를 엿보는 목단호의 철궁에 매겨진 활과 같은 것이었다.
 기실 안탕산의 천지는 온천이었다. 온천이 상처에 좋다는 것은 짐승들이 먼저 알았다.
 그래서 백호는 이곳을 찾은 것이다.
 크르르.
 낮게 으릉거리며 대가리를 치켜든 백호는 돌연 커다란 코를 벌름거렸다.
 무슨 낌새를 차린 것일까. 아니면 본능적인 행동이었을까.
 냄새를 맡고 있는 것이다.
 위잉!
 다행히 바람 속에 다른 생명체의 냄새는 섞여 있지 않았다. 강풍은 바위 쪽에서 불어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영물은 머리가 뛰어나다. 머리가 뛰어나니 의심이 많다. 그래서 백호는 시야를 가리는 거대한 바위를 의심했다.
 그러다 곧 천지로 뛰어들었다.
 첨벙!
 따뜻한 물방울이 사방으로 비산(飛散)되었다. 따뜻한 수온에 만족한 백호는 한껏 기분이 좋아져서 첨벙거리며 헤엄을 치기 시작했다.
 ‘영악한 놈!’
 백호가 본능적인 위기의식을 느낄 때, 목단호 역시도 등줄기가 후줄근하게 젖도록 긴장하였다.
 일년 전에 놈에 대한 소문을 접했다. 아니 목단호는 그 이전부터 놈을 기다려왔는지도 모른다.
 산신령이라는 백호를 잡는 꿈을 꾸었던 그는 마침내 안탕산에 백호가 나타났다는 사냥꾼들의 소문을 들었고, 해서 한달음에 이곳까지 왔었다.
 일년 동안, 오늘까지 합쳐 세 번의 만남이 있었다.
 처음에는 제깐에 아무리 영리해봐야 짐승이지 하고 만만히 보았다가 겨우 화살 한 대만을 다리에 쑤셔 박았다. 그 대가로 목단호는 죽을 뻔하였다.
 목단호는 두 달 간이나 꼼짝없이 침상 신세를 졌던 그때를 생각하며 이를 악물었다.
 이번에 그가 특별히 주문 제작한 철궁은 두 자 두께의 철문을 뚫을 정도로 강력하다.
 ‘이제 더 이상의 실패는 나 자신이 용서 못한다!’
 그는 만반의 준비를 하고 다시 안탕산을 찾았고, 석 달 만에 백호를 만날 수 있었다.
 한데 준비된 상태에도 불구하고 목단호는 또 실패했다. 두 대의 활을 백호의 몸뚱이에 꽂았으나 그도 상처를 입었다.
 그리고 지금, 백호의 움직임을 귀로 느끼며 목단호는 기회를 엿보고 있는 것이다.
 백호의 미심에 화살을 박을 기회를.
 드디어 기회가 찾아왔다.
 푸더더덕!
 온천욕을 마친 백호가 뭍으로 올라와 털에 묻은 물기를 털어 내는 소리가 들렸다. 물기를 털어 내려면 온몸을 뒤흔들어야 했고, 하면 주의력도 흩뜨려진다.
 ‘지금이다!’
 생각은 곧 대뇌를 이어 중추신경을 타고 행동으로 옮겨졌다.
 “타앗―!”
 오랜 시간 동안 참았던 호흡은 우렁찬 기합성이 되어 터져 나왔다. 생김새와 달리 순식간에 허공 사 장 높이에 도착한 그는 몸을 빙글 돌렸다.
 한데 다음 순간,
 크앙―!
 천지를 진동시키는 포효가 바로 앞에서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뿐이랴, 황소 머리를 삼키고도 남을 커다란 아가리를 쩍! 벌린 백호가 그를 덮쳐오고 있었다.
 “어헉! 어떻게 이런 일이!”
 목단호가 기회를 엿보고 있듯이 백호도 기다리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신속한 대처를 할 수 없을 터······.
 위기의 순간이었다.
 그러나 목단호는 절정고수였다. 의외의 상황에 잠깐 놀라기는 했으나 그는 곧 냉정을 찾았다.
 먼저 활시위를 놓았다.
 슈앙―!
 거리가 무척 짧다.
 백팔 고수라도 피할 수 없을 만치.
 그러나 백호는 너무나 쉽게 대가리를 틀어 그의 화살을 피했다.
 빗나간 화살은 백호의 어깻죽지 뚫고도 모자라 멀리 날아가고 있었다.
 크아앙―!
 고통을 느꼈는지 더욱 흉성이 솟구친 백호가 울부짖으며 앞발을 들어 후려치고 있었다. 날카로운 발톱을 세운 발은 천근 바위라도 가루로 만들 힘이 들어가 있었다.
 제아무리 담대한 목단호라도 이 순간만은 간담이 써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욱이 그는 두 번을 저 발톱에 살과 뼈가 찢긴 경험이 있지 않은가.
 “오옷!”
 목단호는 토했던 호흡을 거두며 팔을 치켜들었다. 그의 양팔에는 철로 만든 철궁이 들려 있었다.
 꽈― 찍!
 어이없게도 철궁이 두 동강났다. 그리고,
 “으······.”
 신음을 토하며 지상으로 떨어지는 목단호의 손아귀가 찢어져 걸레처럼 너덜거렸다.
 휘익!
 백호는 목단호의 머리를 타넘고 땅에 사뿐 착지하였고, 앞발이 지면에 닿는 순간 백호는 또 도약을 하였다. 단 한 번의 도약으로 백호는 오 장 밖을 달리고 있었다.
 피를 뿌리며 달아나는 백호를 보며 목단호는 이마를 훔쳤다. 이마에는 주인 허락도 없이 식은땀이 맺혀 있었다.
 “빌어먹을! 또 실패인가?”
 이때 문득, 그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이 아는 백호는 영악하며 잔인했다.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그 어떤 것도 용서할 줄 모를 만큼. 그런데······.
 백호가 흘린 피의 양과 색깔을 살폈다. 피의 양은 많았으며 짙었다.
 서서히 목단호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그러다 대소를 터뜨렸다.
 “으, 으, 하하!”
 기실 만약 백호가 다시 공격을 시도했다면 목단호는 죽지는 않더라도 팔 하나쯤 잃을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공격을 않고 도망을 친 것이다.
 “활이 심장을 관통했구나. 그래서 놈이 도망을 친 게야. 하하하! 이제 놈을 잡는 것은 시간 문제다!”
 이어 목단호는 백설 위에 흩뿌려진 백호의 피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
 
 차다. 그리고 춥다.
 이것은 지하세계에서 상상으로나 가능했던 느낌들이었다.
 이마와 뺨, 그리고 손에 느껴지는 것은 차가움이었고, 그러나 곧 미지근한 물이 되었다.
 이 느낌은?
 야수도는 눈을 번쩍 떴다.
 하늘.
 책에서 설명한 것처럼 맑고 푸른색은 아니다. 또한 구름도 없다. 그러나 분명히 이것은 하늘이었다.
 회색빛 하늘에서 떨어지고 있는 것은 눈이라는 놈일 것이다. 야수도는 누운 채로 고개를 돌렸다.
 나무일 것이라고 생각되는 형체 위에 눈꽃이 피어 있다.
 “아름다워······.”
 그의 첫 느낌은 아름다움이었고, 신선함이었다.
 이곳에는 야명주도, 횃불도 없었다. 퀴퀴한 냄새도 없었으며 습기 가득한 탁기(濁氣)도 없다.
 문득 야수도의 얼굴 근육이 실룩거렸다. 실룩거림은 곧,
 “으어허··· 하하하······.”
 우는 듯한 웃음이 앙천대소로 바뀌었다.
 웃음은 그칠 줄을 몰랐다.
 왜인지 이유는 몰랐다. 그냥 웃음이 나왔다.
 “하하하하!”
 야수도는 실성한 사람처럼 웃었다. 눈물이 찔끔거리도록 웃으며 그는 몸을 뒤틀었다.
 데굴데굴.
 난생처음으로 눈밭 위에서 뒹굴어 보는 것이다. 한데 상상했던 것처럼 차지 않았다. 오히려 포근했다.
 뽀드득··· 뽀득!
 온몸에 소름이 끼치도록 좋은 소리다.
 “허, 눈을 밟으면 이런 소리가 나네.”
 당연한 일에 야수도는 즐거워하고 있었다. 그는 아예 눈까지 감고 걸었다.
 소리와 발에 닿는 느낌이 사뭇 다른 듯했다.
 그런 상태로 얼마나 갔을까.
 눈을 뜸과 동시에 바람같이 몸을 돌렸다.
 “저건?”
 횃불같이 커다란 고리 눈, 눈처럼 하얀 털.
 “백호!”
 단번에 삼 장의 거리를 좁혀오고 있는 것은 분명 그의 지식 속에 들어 있는 백호였다.
 가까이 다가오는 백호의 전신은 피로 얼룩져 있었고, 도약을 할 때마다 지나온 자리에 핏물이 흘러 붉은 길을 만들고 있었다.
 “상처를 입었군, 상처 입은 맹수는 더 흉악하다던데.”
 이것 역시 책에서 본 지식일 뿐이었다. 또한 맹수들에게 등을 보인다는 것은 죽음을 자초하는 일이라는 것도 안다.
 “······.”
 어깨너비로 다리를 벌린 야수도는 허리에 있는 칼을 뽑았다. 백호를 흔히들 만수지왕(萬獸之王)이라 불렀다. 만수지왕에는 겁나는 것이 있을 수 없었다.
 크앙―!
 백호는 시뻘건 아가리를 벌리고 덮쳐오고 있었다. 그러나 백호의 동작 하나하나는 눈에 보일 정도로 느렸다.
 “지상에서 처음 만나는 놈이 백호라니, 우습군. 내 칼에 짐승의 피를 묻히기는 싫은데.”
 그렇다고 피할 수 있는 상황은 더더욱 아니었다. 야수도는 철판교(鐵板橋)를 펼쳤다.
 휘익!
 목표물을 놓친 백호가 그를 스쳐 지나갈 때, 야수도의 동공이 작아졌다.
 그는 하얗게 빛나는 백호의 배를 향해 칼을 쑤셔 박았다. 칼은 아무 저항 없이 깊숙이 백호의 살을 뚫고 들어갔다.
 크아앙··· 앙!
 칼을 꽂은 야수도는 그대로 가만히 있어도 되었다. 백호는 고통 가득한 울부짖음을 토하며 스스로 배를 가르고 있었다.
 후두둑!
 끊어진 내장과 피가 야수도의 얼굴로 쏟아졌다.
 “젠장, 이게 무슨 꼴이야.”
 야수도가 투덜거리며 얼굴에 묻은 것들을 훔치고, 백호가 백설 속에 푹 파묻힐 때였다.
 야수도의 눈썹이 하늘로 솟구쳤다.
 ‘또 뭐야?’
 그는 빙글 몸을 돌렸고, 그 순간 한 물체가 허공에서 후두둑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이번에는 곰이었다.
 “완전 짐승들 천국이군, 곰이 하늘을 나르다니.”
 비행(飛行)하는 곰이라.
 기상천외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뻗어 나가던 그의 손이 움찔 멈추었다.
 곰이 소리내어 웃고 있었다.
 “하하하! 어디 다친 데는 없소? 스님.”
 ‘스님?’
 순간 야수도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앞을 주시했다. 자신보다 머리 두어 개는 큰, 게다가 곰털로 몸을 감싼, 꼭 곰같이 생긴 사람이 그를 보고 있지 않은가.
 “젊은 스님이 무척 놀란 모양이군요. 대답을 못하는 걸 보니.”
 목단호는 사내다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무공이 대단히 뛰어나 보이시는데, 어느 사찰에 계시는지요?”
 “난······.”
 스님이 아니라고 말하려던 야수도는 멈칫했다.
 이 우람한 사내는 자신의 민대머리를 보고 스님으로 오해를 한 것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하루가 지났는지, 한 시진이 지났는지 모르지만 야수도가 본 서찰에 따르면 철검도 나연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고 했다. 그리고 모르긴 모르되 이곳은 그가 경영한다는 중원표행이 있는 하북성과 극히 가까운 곳일 것이다.
 또한 지상에서 처음 만난 이 사내는 야수도 못지않게 강해 보였고, 정체도 모르는 상태가 아닌가.
 그렇다면······.
 “얼마 전까지 소승은 천하를 떠도는 땡초였지만 지금은 파계(破契)를 했지요. 한데 시주의 이름은 어찌되시는지요?”
 그는 의식적으로 시주라는 말을 썼고, 일순 목단호는 야릇하게 웃으며 말했다.
 “과연 파계하신 지 얼마 안되는 모양이구려. 머리칼도 자라지 않은 데다 시주라는 말을 쓰는 것을 보니 말이오.”
 “허, 소승··· 이런, 또 실수를······.”
 야수도는 쑥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다시 말했다.
 “아직 습관을 버리지 못해서 입에 배었구려.”
 목단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오랜 습관을 버리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지요. 나는 뇌문세가의 목단호라 하오이다.”
 천하에서 그 이름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다른 것은 몰라도 백팔 고수의 이름만은 줄줄 외우고 있는 야수도였다.
 그는 크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웅안뇌권.”
 깜짝 놀라는 야수도를 보며 목단호는 고개를 끄떡이며 포권 자세를 취했다.
 “이 목모(木某)을 아시는 것을 보니, 내 이름도 제법 알려진 모양이군요.”
 이어,
 “그런데 어떻게 부르면 될는지?”
 그가 자신의 이름을 물을 것이라고 일찍이 짐작하였던 야수도는 생각하고 있던 것을 말했다.
 “한수(寒水)라 하지요.”
 한수.
 언젠가 천하풍물기(天下風物記)를 읽은 적이 있었다.
 천하풍물기를 읽으면서 바깥세상에 나가면 꼭 한 번 가봐야겠다고 다짐한 곳은, 방랑시인 이백(二伯)이 울고 갔다는 무산십이봉(巫山十二峰) 중 선녀봉을 끼고 도는 삼협이었다.
 그 중 가장 험악한 곳이면서도 장관은 백룡탄(白龍灘)이었고, 백룡탄의 물은 얼음보다 더 차가워 한수라고 불리고 있다고 했다. 혹자는 이수(利水)라고 부르기도 했다.
 백승을 이루고 바깥세상에 나가면 쓰겠다는 한수라는 이름을 그는 조금 빨리 가지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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