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함
뒤로가기버튼 귀환기사.

1화

2018.03.30 조회 1,766 추천 6


 어둠이 내린 비 오는 숲 속.
 
 말을 탄 여자가 수풀을 헤치며 달리고 있었다.
 
 “허억, 허억.”
 
 여기사 리이는 말을 달렸다.
 
 아무도 모르게 서둘러 영지를 빠져나가야 했다. 영토를 장악하고 있는 카몬 상단 패거리에게 들키면 어떤 해코지를 당할지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때였다.
 
 “저기다. 잡아라! 놓쳐서는 안 된다!”
 
 “······!”
 
 또 다른 말발굽 소리에 리이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를 따라 두 남자가 말을 달려오고 있었다.
 
 ‘카몬 상단!’
 
 리이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카몬 상단 패거리는 지금껏 에크룬드에게 사기를 치고 재산을 압류해 온 악질적인 고리대금업자들이었다. 리이가 영주 성을 빠져나왔다는 소리를 듣고 혹시 몰라 미행을 붙였을 것이다.
 
 ‘따돌려야겠어.’
 
 그녀는 고삐를 한쪽으로 급격하게 잡아당겼다.
 
 히히힝!
 
 리이를 태우고 있던 말이 앞발을 들곤 순간적으로 방향을 틀었다. 말 머리가 향한 곳은 정면에 높은 가시덤불이 있는 숲이었다.
 
 촤아아악.
 
 리이는 검을 뽑아 순식간에 시야를 가리는 나뭇가지들을 잘라 내며 앞으로 향했다.
 
 리이는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
 
 뒤따라오던 카몬 상단 패거리의 말이 숲 앞에서 주춤하는 바람에 어느 정도 거리를 벌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뒤를 돌아본 리이는 다시 말을 재촉하며 떠나오기 전 백작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렸다.
 
 
 
 제국의 백작가가 멸망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황제만이 내릴 수 있는 백작위(伯爵位)는 부와 명예는 물론, 전통과 위엄이 동반하는 최고의 귀족에게만 내려지는 자리이므로.
 
 에크룬드 백작가 역시 그러한 명문이었다. 그들은 대대로 제국의 서쪽을 다스려 오던 최고의 귀족 가문이었다.
 
 그러한 에크룬드 백작가가 몰락했다.
 
 100년 이상 위세를 떨치던 가문이 몰락하는 데는 2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비극이었다.
 
 어째서 이렇게 된 걸까?
 
 침상에 누운 에크룬드 백작은 슬픈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내 죽음을 지키는 사람은 이것뿐인가······.”
 
 그의 임종을 지키는 자는 단 네 명뿐.
 
 충성스러운 기사 루이스가 주먹을 불끈 쥐며 말했다.
 
 “주군, 지금이라도 카몬 상단 놈들을 모두 도륙해 버리겠습니다. 이제는 정말······.”
 
 “아서라. 나야 죽을 몸이지만 세레스가 남아 있잖느냐?”
 
 루이스 경은 눈을 질끈 감았다.
 
 카몬 상단.
 
 그들이 이 모든 일의 원흉이었다. 백작이 화병으로 눕게 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세레스야······.”
 
 백작은 힘겹게 눈을 들어 영지를 이어받을 외동딸을 보았다. 딸인 세레스 에크룬드가 백작의 손을 잡은 채로 울음을 터트렸다.
 
 “아버지, 흐흑.”
 
 “그래도 네게 믿을 만한 자가 세 명은 있구나.”
 
 “이렇게 돌아가시면 안 돼요, 아버지!”
 
 두 여인이 넘어지려는 세레스를 부축했다. 어릴 때부터 세레스와 함께 자라 온 단짝친구이자 문관인 라나 루아이텐과 여자 호위 기사인 리이 노르펜스트였다.
 
 “유언이다.”
 
 “······!”
 
 장내에 있던 네 명 모두가 에크룬드 백작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백작은 품속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며 말했다.
 
 “리이여.”
 
 “네, 네?”
 
 고개를 숙이고 유언을 기다리던 여기사 리이가 고개를 들었다. 주군이 이런 순간에 일개 기사인 자신을 부를 줄은 몰랐던 것이다.
 
 “이자를 찾도록 해라.”
 
 백작은 꺼낸 종이를 리이에게 건넸다. 그러고는 끊어질 듯한 숨을 겨우 이어 가며 말을 맺었다.
 
 “그가······ 쓰러져 가는 에크룬드를 다시 세워 줄 것이다.”
 
 
 
 그녀는 홀로 빗길을 달렸다.
 
 주군이 그녀에게 주었던 마지막 사명을 위해.
 
 ‘그가 쓰러져 가는 에크룬드를 다시 세워 줄 것이다······.’
 
 그가 에크룬드의 마지막 희망.
 
 리이는 주군이 유언 대신 건넨 그 종이의 내용을 떠올렸다.
 
 그것은 ‘티르 루아이텐’이라는 남자에 대한 정보였다.
 
 
 
 대륙력 1052년, 당시 일어난 ‘대재앙’의 생존자.
 
 대륙력 1057년, 알베스 후작의 ‘대반란’, 황자의 편에서 반란군 와해 공작에 성공.
 
 대륙력 1062년, 제국군의 부관으로 칼로넨 왕국과의 ‘대전쟁’에 참전. 4년간 18번의 대전투, 140번의 소규모 전투에서 승리.
 
 대륙력 1066년, 종전 협상 사신단에 참여. 협상을 성공적으로 이끎.
 
 대륙력 1068년, 세계 최악의 범죄자 ‘카인 드보이 백작’ 추살에 결정적인 공로를 세움.
 
 대륙력 1069년, 마도 혁명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 ‘대유적’ 발굴단 참가. 생존자 세 명 중 하나.
 
 대륙력 1070년, 현 황제 즉위식 때 망토를 입혀 드리는 영예를 얻음.
 
 
 
 ‘······.’
 
 리이는 말을 달리고 있는 지금도 믿을 수 없었다.
 
 티르라는 남자의 이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리이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위대한 칠 대 사건······.”
 
 호사가들은 말한다. 새 황제가 즉위하기까지의 20년 동안을 ‘대륙의 암흑기’, 그리고 그 기간 동안 대륙을 뒤흔든 7가지 사건을 ‘위대한 7대 사건’이라고.
 
 대재앙, 대반란, 대전쟁 등의 일곱 사건.
 
 평생 하나도 겪기 힘든, 생존만 하더라도 위세를 떨칠 수 있는 사건들.
 
 그런데 일곱 사건 모두 티르의 이력에 적혀 있었다.
 
 ‘정말 이게 말이 될까?’
 
 누군가가 경력을 되는대로 위조하더라도 이렇게 양심 없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게다가 ‘티르 루아이텐’이라는 이름도 전혀 들어 본 적 없다.
 
 아무리 주군의 말이라도 믿기 힘들었다.
 
 “차앗!”
 
 리이는 의심을 떨쳐 내듯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티르라는 남자가 존재하든 안 하든, 혹은 죽은 백작의 망상 속에만 존재할지라도 지금은 그곳을 향해 갈 수밖에 없다.
 
 그녀는 말을 재촉했다.
 
 그리고 동이 터 올 무렵, 티르라는 사내가 마지막으로 발견되었다는 페른 마을의 성문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Chapter 1.
 
 
 
 페른은 임벨리아 제국 남부의 중심지에 위치해 있어 꽤 규모가 큰 편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바쁘게 오가는 풍경을 보며, 리이는 결심한 듯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티르 루아이텐, 어떻게든 찾고 말겠어!’
 
 그러나 비장한 얼굴도 잠시, 리이는 약간 당황스러운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런데······ 뭐부터 해야 하지?”
 
 사람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이런 곳에서 이름과 대강의 나이만 가지고 사람을 찾아야 한다니.
 
 “그래, 이 도시의 모든 정보가 모이는 곳······.”
 
 그러던 중 리이의 시야에 한 건물이 들어왔다. 주변에서 가장 큰 규모의 선술집이었다.
 
 리이는 침을 한 번 꿀꺽 삼키고는 비장한 표정으로 그곳으로 향했다.
 
 
 
 리이는 주변을 경계하며 선술집 안으로 들어갔다.
 
 어렸을 때부터 기사로 착실히 살아온 그녀였다. 입구서부터 요상한 기운이 흐르는 술집 따위 냄새도 맡아 본 적 없었다.
 
 안은 어두컴컴했다.
 
 앳돼 보이는 리이가 들어서자, 남자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녀에게 쏟아졌다.
 
 호기심과 비웃음이 섞인 시선이었다.
 
 “······.”
 
 살짝 주저하던 리이는 애써 태연한 척 어깨를 폈다.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으로 보이기는 싫었다.
 
 당당한 자세로 걸어간 그녀는 카운터 앞에 앉았다.
 
 “저기······.”
 
 “뭐지?”
 
 걸걸한 목소리의 술집 주인이 고개를 들었다.
 
 애꾸눈의 털북숭이였다. 흔히 볼 수 있는 인간군상은 아니었기 때문에 리이는 살짝 기가 죽었다.
 
 “······사람 하나를 찾으려고 하는데.”
 
 “흐음.”
 
 술집 주인이 하나밖에 없는 눈으로 가소롭다는 듯이 그녀를 응시했다. 그가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누굴 찾지, 작은 아가씨?”
 
 리이는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티르······ 루아이텐.”
 
 “뭐?”
 
 순간 술집 주인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었다.
 
 “······아가씨, 정말 찾는 사람이 티르 루아이텐 맞나?”
 
 “뭔가 알고 있는 거야?”
 
 리이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언성을 높였다.
 
 술집 주인은 씩 웃는 얼굴로 말했다.
 
 “아니.”
 
 “······!”
 
 “킥킥킥킥.”
 
 “우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리이만 우습게 되었다. 그녀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빨갛게 물들었다.
 
 리이가 화를 내려 할 때였다.
 
 술집 주인이 웃으며 말했다.
 
 “돈을 내.”
 
 “돈을 내면 찾아 주는 건가?”
 
 리이가 미심쩍은 표정으로 물었다. 술집 주인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찾을 수 있는 사람을 연결해 주지.”
 
 “······직접 찾지도 않으면서 돈을 달라고?”
 
 “세상 물정 모르는 아가씨구만. 싫으면 딴 데 가 보던지.”
 
 술집 주인은 일 없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고민하던 리이는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확실한 거야?”
 
 “흐흐흐.”
 
 리이는 술집 주인이 요구하는 금액을 치렀다.
 
 안 그래도 좋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티르 루아이텐을 찾는다면 이 정도는 투자할 수 있었다.
 
 “저쪽으로 가 봐.”
 
 술집 주인은 엄지손가락으로 뒤쪽을 가리켰다.
 
 “가장 여자가 많은 남자에게로 가서 물어보면 돼.”
 
 
 
 리이는 선술집의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별안간 확 풍겨 오는 악취에 코를 막았다. 시금털털한 맥주 냄새, 무언가 태우는 냄새, 분 냄새 등 온갖 냄새들이 섞여 코를 찌르고 있었다.
 
 밤도 아닌데 남녀들이 서로 살을 부대끼고 있었다. 리이는 찌푸린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저 사람인가?”
 
 정면에 비싼 소파에 앉아 있는 남자가 보였다.
 
 “호호호.”
 
 “이것 좀 먹어 봐요.”
 
 거의 여자 속에 파묻혀 얼굴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남자는 술이든지 음식이든지 자기 손으로 먹지를 않고 있었다.
 
 “······.”
 
 멍하게 쳐다보던 리이는 남자의 앞에 섰다.
 
 나름대로 젊고, 잘생긴 얼굴이었다. 앉아서 붙어 있던 여자들과 재잘거리던 그는 대뜸 리이를 올려다보더니 말했다.
 
 “뭐야, 이건. 서비스야?”
 
 “······어?”
 
 “흐응, 뭐, 내 취향은 아니지만······.”
 
 

이용약관 유료이용약관 개인정보처리방침 청소년보호정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