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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륜백설 1

2018.04.06 조회 452 추천 3


 곤륜백설 1권
 서장 장강(長江)의 붉은 황토(黃土)
 
 
 그날, 장강에 내린 비는 수삼일 만에 모든 대지를 붉은 황토로 뒤덮이게 만들었다.
 늘 푸른 초목(草木)으로 뒤덮여 있던 분지는 붉은 흙탕물로 범벅이 되어 버렸고 관목(灌木)이 깔려 우마(牛馬)가 노닐던 분지(盆地)는 호수가 되어있었다.
 태양은 붉었다.
 초지 위에 덮인 붉은 황토보다 태양은 더욱 붉었다. 황토가 뒤덮인 대지를 태울 것 같은 붉은 편광(片光)을 쪼개 보내는 태양은 열기가 넘치고 있었다.
 사내의 품에 안긴 어린아이는 눈을 크게 떴다. 이제 두 살이나 되었을까?
 아기는 아무런 사심이 없는 눈을 들어 쏘아져 내려오는 태양을 바라보았다. 눈이 아릴 만도 하건만 아이는 느끼지 못하는 듯 태양을 마주보았다.
 사내는 망연하게 지평선(地平線)을 바라보았다.
 비가 그친 지 하루가 지나지 않았건만 땅이 말랐는지 뿌연 먼지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사내는 태양을 바라보았다. 아이도 초점이 잡히지 않은 눈을 들어 태양을 바라보았다.
 “가자꾸나. 아가야!”
 사내는 돌아섰다.
 사내의 품에 안겨있던 아이의 몸도 따라서 방향을 틀었다.
 장강의 한 모퉁이, 장강의 발원지 객십리하(喀十里河)에서 시작한 삼 개월의 긴 장마가 지나간 후, 두 사람은 그렇게 서로를 바라보고 또 그리워하는 감정을 속이며 멀어져 갔다.
 
 사내는 아이를 보듬어 안았다.
 아이는 아무 것도 모르는 천진난만(天眞爛漫)한 얼굴로 여전히 하늘을 바라보며 웅얼거렸다. 아이가 말하려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 사내는 알지 못했다.
 사내는 걸음을 옮겼다.
 그것만이 자신이 빠져있는 감정의 질곡(桎梏)에서 헤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 모습으로 걸었다.
 사내는 미친 듯 걸었다.
 품에 안긴 아기가 떨어지지 않는 것이 신기할 정도로 위태롭게 보였지만 아기는 떨어지거나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지지는 않았다.
 열흘이 지났을 때 사내는 곤륜산맥(崑崙山脈)의 어귀에 나타났다.
 “아가야! 우리는 어떤 일이 있어도 이곳을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이곳에서 모든 것을 잊고 살게 될 것이다.”
 사내는 아기를 품에 당겨 안으며 울음이 섞인 목소리를 토했다. 세상을 모르는 아기는 방그레 웃었다. 사내의 눈에 진한 슬픔이 밀려왔다.
 사내는 곤륜이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아기를 부르는 소리였다.
 사내는 저녁놀이 스미는 곤륜산으로 무작정 걸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1장 한풍(寒風)은 나무 끝에 불고
 
 
 1
 
 
 곤륜(崑崙)은 예로부터 신성한 산이었다.
 천하의 지붕이라는 희마랍아산령(喜馬拉雅山嶺)에서 발호(跋扈)하여 아미금산령(阿美金山嶺)과 갈라져 서장(西藏)의 지붕과 신강(新疆)을 달리는 곤륜산령(崑崙山嶺)을 가로 넘을 수 있는 인간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산령은 길었다.
 오 천 리를 달려 청해의 자달목분지(紫達木盆地)를 지날 때까지도 곤륜의 뿌리는 계속되고 있었다. 곤륜산령은 사천까지 이어지는 긴 산맥으로 수없이 많은 지맥을 거느리고 있어 그 시작과 끝이 불분명했다.
 신선이 사는 전설 속의 곤륜은 아니라 하더라도 사람들은 곤륜을 신성하게 여겼다. 그것은 곤륜산에 곤륜파가 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빙하연(氷河沿)
 곤륜에 몸을 묻은 수백, 수천 개 골짜기 중의 하나. 땅을 일 척만 파도 얼음이 보이는 골짜기라 해서 빙하연이라 불리는 곳에도 봄은 왔다.
 신강과 서장, 청해가 만나는 삼각지점에 위치한 골짜기 빙하연은 오래도록 사람의 발걸음을 거부한 곳이기도 했다.
 늘 새가 울고 시냇물이 흐르는 곳.
 오래도록 인적이 없는 빙하연은 전설의 곤륜산만큼이나 평화로운 골짜기였다.
 “정말, 사숙이 이곳에 사신다는 거예요?”
 가는 목소리가 울렸다.
 목소리의 주인은 여자인 것이 분명했다. 그것도 이십을 넘기지 않은 소녀의 목소리였다.
 애교가 넘치는 소녀의 목소리는 누가 들어도 정감(情感)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소녀의 목소리로만 판단하자면 그녀는 오랫동안 걸어온 것 같았다. 어딘지 모르게 허연 김이 묻어날 것 같은 땀에 젖은 목소리가 그랬다.
 곤륜산은 절기(節氣)가 늦었다.
 산아래 마을에 모를 내고 한창 춘화(春花)가 질 때 빙하연은 나무의 새싹이 나올 정도였다.
 “그건 확실해. 이십 년 동안 종적을 감춘 사숙(師叔)이 이곳 어디에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사내의 목소리는 제법 굵었다.
 들리는 것으로만 판단한다면 사내의 나이는 사십을 넘었을 것으로 느껴지는 나이였다. 걸걸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사내의 인품을 짐작하게 했다.
 이 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사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나이의 중년인은 전신에 홍포(紅布)를 걸치고 있었고 등에는 한 자루의 청강검(靑剛劍)을 메고 있었다. 얼굴 전면을 덮은 구레나룻이 인상적으로 눈을 파고드는, 한눈에 보아도 호걸(豪傑)이라는 인상을 주는 사내였다.
 “사숙이 이토록 깊은 곳에서 이십 년 동안 숨어사는 이유가 있나요?”
 산길이 제법 가팔랐는지 조금 가쁜 숨을 몰아쉬는 소녀는 사내의 일보 뒤를 따르고 있었다. 한눈에 보이도 눈에 뜨이는 소녀였다.
 전신을 두른 어울리는 홍의화복(紅衣華服)은 제쳐두더라도 허리에 잘록하게 맨 붉은 요대(腰帶)가 눈을 아리게 파고들었다. 매화가 수놓아진 붉은 요대를 찬 소녀의 허리는 한줌도 되지 않을 것 같았다.
 소녀는 등에 한 자루의 검을 메고 있었는데, 검환(劍環)에는 수실이 오색으로 묶여있었다.
 검병(劍柄)이 어깨 위에 있었다.
 간혹 불어오는 바람으로 수실이 날릴 때마다 수실이 소녀의 얼굴을 간질였다. 소녀는 수실이 얼굴을 간질여도 구태여 치울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녀의 모습은 마치 수실의 희롱을 즐기는 것 같았다.
 소녀는 한눈에 드러나는 용모를 지니고 있었다. 특히 추수(秋水)처럼 맑은 눈은 누가 보아도 빠져들 것 같았고 마치 가리듯 짙은 눈썹이 눈을 돋보이게 했다.
 볼이 붉게 달아오른 것이 잘 익은 사과를 연상하게 하는 소녀는 약간의 땀을 흘리는 것으로 보아 무공이 경지에 오르지는 않은 것 같았다.
 그들은 한결같이 등에 작은 보퉁이를 둘러메고 있었고 발에는 무릎까지 이르는 혁피화(革皮靴)를 신고 있었다. 단단히 꾸린 행장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사형?”
 “왜?”
 사내가 소녀의 물음에 뒤를 돌아보았다.
 “이곳은 우리 곤륜파와 지척의 거리인데 이십 년 동안 사숙을 찾지 못했다는 것은 믿기가 어려워요.”
 “그건 이유가 있단다. 옛말에도 등하불명(燈下不明)이라는 말이 있듯이 누구도 사숙이 이곳에 몸을 숨기고 있으리라는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소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간혹 고개를 좌우로 저어 아무래도 생각이 이어지지 않는다는 불만을 얼굴에 나타내기는 했지만 굳이 입 밖으로 토해내지는 않았다. 소녀의 입은 붉었지만 앵무새처럼 가볍지는 않은 것 같았다.
 사내는 묵묵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가 무엇을 생각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간혹 어두운 안색이 스치고 지나가는 것으로 보아 고민이 있다난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소녀는 뒤를 따르고 있었기 때문에 사내의 얼굴에 드러나는 안색의 변화를 알아 볼 수는 없었다.
 소녀는 마치 산책이라도 나온 듯 사방을 훑어보며 즐거워했다. 온 세상이 그녀의 것인 양 두 팔을 벌리고 활개를 치는 모습은 그대로 한 폭의 그림이었다.
 “대사형(大師兄)! 사숙이 우리의 부탁을 들어줄까요?”
 “그건 나도 모르는 일이다. 사숙께서 이곳에 이십 년 동안 칩거(蟄居)를 했다는 것은 세상과 인연(因緣)을 끊었다는 것이니까.”
 사내는 무감한 음성을 뱉었다.
 소녀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는지 입을 다물었다. 대사형의 목소리로 보아 희망이 있다고 말하기는 어려웠다. 그것을 느끼고 있었기에 소녀로서도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왠지 냉정하게 들리는 대사형의 목소리가 평소와 같지 않아 소녀는 얼굴이 붉어졌다.
 “옥진(玉), 어서 가자!”
 “예, 사형!”
 소녀는 조상으로부터 구(仇)라는 성을 물려받고 있었고 옥진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의 사형은 이막형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으며 곤륜이 망하지 않는 한 장문인의 자리에 오를 수 있는 입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가 바로 곤륜 장문인의 장령제자(長領弟子)였던 때문이었다.
 곤륜파의 이십이 대(二十二代) 제자인 그녀는 대사형의 재촉에 걸음을 서둘렀다.
 빙하연의 낮은 짧았다.
 워낙 깊은 골짜기에 들어있는 손바닥만한 곳이라 밤은 길고 낮은 짧았다. 서두르지 않는다면 어림짐작으로 알고 있는 사숙의 흔적도 잊어버릴 수가 있었다.
 두 개의 그림자가 걸음을 서둘렀다.
 
 
 2
 
 
 “도저히 찾을 수가 없군.”
 두 사람은 허탈했다.
 이십 년 동안 사숙의 행방을 찾은 곤륜의 제자들에게 빙하연은 너무도 험했고 낮이 섧었다. 비록 같은 산령에 자리를 잡은 곳이라 해도 곤륜산맥은 장장 만 리에 달하는 긴 산맥군(山脈群)으로 깊은 계곡과 높은 산을 골고루 가지고 있었다. 설사 눈에 익은 사냥꾼이라 해도 산맥의 요소요소(要所要所)를 쉽게 찾는다는 것은 장담(壯談)에 불과했다.
 사방은 이미 어두워졌다.
 눈에 보이는 것은 달빛에 쓰러지는 그림자뿐이었다. 간혹 키가 껑충하게 자란 나무가 보이기도 하지만 이미 산은 두터운 얼음과 만년설(萬年雪)이 눈에 드러났다. 언제부터인가 키를 넘기는 나무가 점차 멀어졌다. 드러나는 것은 빙벽(氷壁)과 빙원(氷原)이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점차 얼음과 눈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사형, 이러다가는 얼어죽겠어요.”
 구옥진은 볼을 비비며 입을 열었다. 이어 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무릎을 땅에 꿇었다.
 그녀는 등에서 작은 보퉁이를 끌렀다. 그녀뿐만이 아니라 사내도 등에 지고 있던 보퉁이를 열었다. 보퉁이는 작았지만 물건으로 빽빽하게 채워져 있었다.
 그들은 보퉁이를 열어 속에 들어있던 물건을 꺼내었다. 달빛이 만년설과 얼음에 비추어져 그들의 행동을 원활하게 해주었다.
 그들이 보퉁이에서 꺼낸 것은 짐승의 가죽으로 만든 몇 가지의 물건이었다. 그들은 보퉁이에서 꺼낸 털목도리로 목을 둘렀다. 이어 작은 보호대를 꺼내 팔목을 감았다. 일견해도 너구리나 청설모의 가죽으로 보이는 보호대는 보온성이 뛰어나 보였다. 그들은 황급하게 꺼낸 동물들의 가죽으로 만든 의류와 보호대를 몸에 감았다. 머리에도 작은 모자를 썼다. 역시 짐승의 가죽으로 만든 것으로 보이는 모자였다.
 “이러다 동상(凍傷)이 걸리고 말겠어요.”
 구옥진이 울상을 지었다.
 이막형은 자신의 보퉁이에서 가죽으로 만든 옷을 꺼내었다. 이막형의 보퉁이가 큰 이유는 속에 짐승가죽으로 만든 옷이 들어있었기 때문이었다. 짐승 가죽이 푹신하게 달려있는 옷은 밖으로 꺼내지자 부풀어올라 풍성한 모습으로 변했다.
 “이것을 입도록 해라!”
 이막형은 옷을 구옥진에게 입혀 주었다.
 구옥진은 자신이 옷을 입어야 하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거부하지 않고 옷을 몸에 걸친 이유가 그것이었다.
 이막형은 자신보다 이십 년 이상의 무공수련(武功修鍊)이 있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사형이 자신을 귀여워 해주고 아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조금만 참아라. 공격이산(公格爾山)에 거의 다 왔다.”
 조금 마음이 안정된 듯, 이막형은 손을 들어 허공을 가리켰다. 그의 손끝에 보이는 만년설이 보였다. 너무도 높은 산이었기에 허공을 가리킨 것으로 보이는 산이었다. 공격이산은 산에 사는 부족들이 콘쿨이라 부르는 신성한 곳으로 곤륜산령에서 가장 높은 산이었다.
 적어도 삼만여 척의 높이에 육박하는 산의 위용은 사람의 간장을 서늘하게 하는 위엄이 있었다.
 “이런 곳에 어떻게 사람이 살수가 있죠?”
 구옥진은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이막형은 빙그레 웃었다.
 “사숙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사숙과 나는 나이차이가 없기는 하지만 무공은 나보다 수십 배는 뛰어나셨다.”
 이막형은 말을 마치자 쑥스러움을 감추려 했는지 다시 빙그레 웃었다.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가 찾아가는 사숙은 막내 사숙이었고 그는 장문인의 장령제자였다. 장문인의 연배(年輩)를 때질 때 사숙의 나이는 그와 비슷했다.
 “이십 년 전, 사숙이 왜 갑자기 사라지신 거죠?”
 “그건 누구도 알지 못한다. 들리는 소문은 많지만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으니까.”
 이막형은 몸을 일으켰다.
 구옥진도 몸을 일으켜 사내가 걸음을 옮기는 곳으로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치 바늘과 실이 움직임이 한 방향이듯 그들은 움직이고 있었다.
 이막형은 이미 머릿속에 많은 것들이 들어있는지 망설이지 않고 일정한 방향으로 걸음을 옮겨가기 시작했다. 발 밑에 얼음이 깔려 미끄럽기는 했지만 그들은 무공을 지니고 있었기에 넘어지거나 굴러 떨어지는 경우는 없었다.
 “아직도 멀었어요?”
 “아니다. 이 골짜기를 벗어나면 바로 사숙이 있는 곳이다. 우리는 한 시진 이내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구옥진의 얼굴이 밝아졌다.
 얼음에 반사(反射)되는 달빛에 비춰지는 구옥진의 얼굴은 빨갛게 달아있었다. 그녀의 얼굴이 붉게 변한 이유가 몸에서 일어나는 열기 때문인지 추위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얼굴이 붉어졌다는 것은 그녀가 어느 쪽이던 시달림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었다.
 분명한 것은 해가 저물고 달이 뜨기 시작하며 날씨가 급격하게 차가워지기 시작했다는 사실이었다.
 “어서 서두르자. 이곳에서 어물거리다가는 얼어죽기 딱 알맞겠다.”
 두 사람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그들은 입을 다물고 빙판(氷板)을 걸었다. 몸이 기우뚱거리기는 해도 그들은 사면(斜面)을 올라가며 몸의 중심을 잃지는 않았다.
 간혹 구옥진이 비틀거리기는 했지만 이막형의 도움으로 무사히 얼음이 깔린 비탈을 전진해 갈 수 있었다.
 “어, 사형 보셨어요?”
 갑자기 구옥진이 나직하게 부르짖었다. 목소리가 가라앉아 있었다.
 이막형이 몸을 돌렸다.
 얼굴에는 의아함이 넘쳤지만 구태여 묻거나 하지는 않았다. 이미 오랜 경험이 있는 이막형으로서는 항상 조심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무리 곤륜산에 자신들의 문파(門派)가 있고 영역(領域)이 있다고 해도 어디나 적은 있기 마련이었다.
 “무엇?”
 한참을 둘러보아도 보이는 것이 없음을 알자 이막형은 사매를 돌아보았다.
 구옥진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분명 무엇인가 보기는 했지만 너무도 찰나에 일어난 일이라 반신반의(半信半疑)하는 마음이 강했기에 눈을 부릅뜨고 전방을 직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이 본 것을 확신하고 있었기에 다시 한번 목소리를 높였다.
 “사람이었어요.”
 “사람이라고?”
 이막형은 알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그의 내공은 놀라운 성취가 있어 구옥진이 보았다면 자신이 보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사매의 눈을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가 아는 사매는 영특했다.
 곤륜장문인 곤륜기노(崑崙技老) 구렴성이 나이 오십에 얻은 외동딸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녀의 제지는 뛰어난 바가 있었다. 그녀는 구렴성의 딸이며 막내제자이기도 했다. 이막형이 그녀를 특이나 귀여워하고 그녀가 가고 싶다는 곳에는 가능한 데려다 주고 보호해 주는 이유도 그런 배경이 깔려있었다.
 특히 구옥진은 근래 들어 어떤 깨달음이 있었는지 무공도 일취월장(日就月將)하고 있어 곤륜의 이백여 제자가 한결같이 흠모를 하고 있었다.
 사실 그녀의 부친보다 이막형이 그녀에 대해 더욱 애정이 많았다. 구렴성은 자신의 딸에 정성이 많다는 말을 극히 저어했다.
 자연히 자신의 딸에 대해 무공을 가르치지 않게 되었고 이막형은 장문인의 처사가 불합리(不合理)하다고 여겼다. 그래서 이막형은 그녀를 손수 가리켰다. 일면으로만 보자면 그녀는 이막형의 제자와 같았다. 그러나 배분으로 보아 그녀는 이막형과 같은 배분을 지니고 있었다.
 “분명 피 냄새가 나요.”
 구옥진의 말에 이막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말대로 은은히 흐르는 바람을 따라 혈향(血香)이 코로 스며들었다. 그것이 사람의 피인지는 불분명하지만 분명한 것은 피가 아직 식기도 전이라는 사실이었다.
 둘의 눈이 마주쳤다.
 “심상치가 않다.”
 “어서 따라가요.”
 마주본 그들은 동시에 입을 열었다.
 그들은 머리카락이 하늘로 치솟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불길한 예감(豫感)이었고 어쩐지 몸에 이는 전율과도 같은 느낌이었다. 구옥진 보다도 이막형이 느낌은 더욱 컸다. 그는 본능적(本能的)으로 몸에 진력을 끌어올려 몸의 구석구석을 진기로 감았다. 언제든지 몸을 움직이고 반격을 할 수 있는 모습으로 주위를 샅샅이 둘러보았다.
 빙하연은 그들이 찾아가는 사숙이 거처하는 곳이었다. 이십 년만에 사숙의 소제를 찾아냈지만 그들은 분명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피 냄새는 불길했다.
 빙하연에서 피를 흘리는 자가 있다면 사숙과 가까운 사람이거나 적대세력(敵對勢力)이 분명했다. 적대세력이 있다는 소리는 들은바가 없지만 어찌되었던 둘 중의 하나였다.
 두 사람은 급히 경공을 발휘했다.
 얼음 위에서 경공을 발휘한다는 것이 어려운 일이기는 했지만 다행히 곤륜파의 경공은 얼음 위에서도 능히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곤륜파가 사시사철 눈이 나리는 곤륜산에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그들이 경공을 펼치는 것은 이미 오래 전에 얼음에 익숙해진 모습이었다.
 그들이 시전하며 몸을 빠르게 전진시키고 있는 신법은 운룡대팔식(雲龍大八式)이었다. 그들이 전개한 경공은 곤륜이 자랑하는 운룡대팔식 중에서도 빠르기가 빛과도 같다는 신룡선무(神龍旋霧)였다.
 운룡대팔식은 구름 속에 용이 노니는 듯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모두 여덟 개의 신법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곤륜은 운룡대팔식으로 천하에 이름을 남길 수 있었고 강호 제일의 신법으로 추앙(推仰)받고 있었다.
 그들의 호흡이 가다듬어지고 두 개의 그림자는 비탈의 사면을 따라 혈향이 흘러드는 곳에 이를 수 있었다.
 “피가 떨어져 있어요.”
 구옥진은 급히 몸을 정지시키며 낮게 외쳤다. 낮은 음성이었지만 이막형은 귀로 스며들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이막형이 쏘아가던 몸을 뒤채었다. 경공이란 바르면 빠를수록 몸을 뒤집거나 방향을 틀기가 어려웠지만 이막형은 어렵지 않게 몸을 틀어 방향을 바꾸었다.
 두 사람은 발을 차며 급히 몸을 뒤집으며 얼음 위로 떨어져 내렸다.
 과연, 얼음 위에는 붉은 피가 점점이 뿌려져 있었다.
 처음에는 그 양이 많았고 가까웠으나 점차 간격이 벌어지고 양도 줄어들고 있었다. 그 것으로 보아 상처를 입은 사람은 경공을 발휘했거나 필사적(必死的)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사람의 피라는 것도 불분명했다.
 이막형은 급히 손가락을 얼음 위에 떨어져 있는 피에 가져다 대었다. 피는 응고(凝固)되지 않은 상태였다. 살을 에이는 추위에도 피가 얼지 않았다는 것은 채 반다경(半茶更)도 되기 전에 피가 흘렀다는 것을 의미했다.
 “네가 오래 전부터 들은 데로라면 피가 떨어진 방향은 사숙이 계시다는 방향이다.”
 이막형은 마음이 급해졌다.
 그는 사숙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었다. 피가 떨어진 방향은 분명 사숙이 머무르고 있다는 방향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 이상 그가 알고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막연한 추측으로 찾아가고 있는 그들이었다.
 사숙이 어떤 곳에서 살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곤륜산을 드나드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이십 년 간 추적한 끝에 사숙이 누구의 추측도 거부하듯 빙하연에 숨어살고 있다는 것을 종합적(綜合的)으로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아직 사실인지도 불투명했다.
 “사매, 어서 가자!”
 이막형은 급히 구옥진의 손을 잡으며 몸을 솟구쳤다. 그의 몸이 허공 일장으로 솟구쳤다. 구옥진은 놀라 입으로 비명이 솟구쳤으나 급히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두 개의 신형은 달빛을 가르며 산비탈을 날아갔다.
 이막형이 전개한 경공은 운룡대팔식의 용비구천(龍飛九天)이었다. 그의 몸은 얼음이 깔린 지면과 허공을 헤집으며 한순간에 삼십 장을 날아갔다.
 
 
 3
 
 
 해시(亥時)라고는 하나 그리 어둡지는 않았다.
 사방이 바위로 보였지만 다가가 자세하게 살펴보면 그것은 모두 얼음 덩어리였다. 얼음이 덮이고 산곡(山谷)을 비틀어 마치 얼음이 덮여 있는 바위 같아 보였지만 수십 장 두께의 어름이었다.
 “엇!”
 정신없이 몸을 날리던 이막형은 몸을 비틀어 재주를 넘으며 지상으로 내려섰다. 그린 듯한 비룡번신(飛龍?身)의 몸놀림이었다.
 뒤를 따라 구옥진이 내려섰다.
 그들은 무릎을 꿇은 상태에서 한동안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디고 사람의 기척은 없었다.
 “놀랍도록 빠른 자다. 이토록 달려왔는데 그자의 옷깃도 보지 못하다니······.”
 이막형은 놀라 부르짖었다.
 이막형은 자신의 신법이라면 청해제일(淸海第一)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의 사부인 구렴성 마저도 신법에 관한 것이라면 일보 양보하는 형편이었다.
 “이곳에서 사라졌어요.”
 구옥진이 나직하게 말했다.
 과연 얼음 위에 점점이 떨어져 있는 피는 멈추어져 있었다. 아니, 멈추어진 것이 아니라 사라졌다. 한참을 둘러보자 그들은 자신들이 막다른 곳에 도달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피가 사라진 것이 너무나 당연한 곳이었다.
 커다란 동굴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두 개의 바위가 사람인자(人) 형식으로 기대어진 사이로 속이 들여다보이지 않는 동굴이 이어져 있었다.
 “사형?”
 “이곳 어디인가 사숙이 계시다는 곳이다. 아마도 이곳이 사냥꾼들이 선인(仙人)이 산다고 한 곳인지도 모른다.”
 이막형은 자신했다.
 그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곤륜이 그들이 말하는 사숙을 찾기 위한 이십 년의 노력은 지대했었다. 수 차례에 걸린 제자의 출도를 통해 중원천하(中原天下)를 뒤졌고 언제부터인가는 그가 죽었다면 시체라도 찾으려 노력했었다.
 이유가 있었다.
 사문에서 판단하기를 그가 오 백 년 곤륜의 사승(師承)에서 가장 뛰어난 무골(武骨)이라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그는 전대 장문이었던 일기천수(一技千手) 호풍영(胡豊)에게 비밀밀결(泌密密結)을 전수 받은 것으로 생각되고 있었다.
 비밀밀결은 오로지 한 명의 제자에게만 전수되는 것으로 그가 사라진다면 곤륜의 비기 하나가 사라지기 때문이었다. 그가 죽었다면 그가 남긴 비밀밀결이라도 회수해야 한다는 것이 곤륜의 장로회의에서 결정한 내용이었다. 당연히 그를 찾아야 했고 그의 시체라도 찾아내야 했다.
 곤륜도 여러 가지의 비밀밀결이 전해지고 있었다. 누가 전수를 받았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적지 않은 비밀밀결이 전수되고 있었다.
 곤륜의 이름 없는 제자들이 지니고 있을 수도 있지만 장문인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이막형의 사숙이 많은 비밀밀결을 지니고 있을 것이라는 것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곤륜의 비밀밀결은 적어도 이십여 가지는 될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비밀밀결을 익히게 된다면 곤륜의 무공을 익혀도 열 배의 위력으로 전개할 수 있었다.
 “이곳에 사람이 있다면 사숙일 가능성은 높다.”
 막연한 추측이었다. 그러나 이막형의 말속에는 확신이 들어있었다.
 사냥꾼들의 이야기대로라면 빙하연에 자리한 어떤 동굴에 머리가 백설(白雪)같이 센 도인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때때로 동굴을 나와 구름을 부르고 눈을 내리게 하는데 분명 신선이라는 것이었다.
 “들어가 봐요.”
 구옥진의 말에 이막형은 고개를 끄덕였다.
 창!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머리를 스치자 이막형은 등에 매어져 있던 청강검을 뽑았다. 핏자국이 동굴 안으로 이어진 것으로 보아 심상한 일은 아니었다.
 “사매, 뒤를 따라라!”
 “알았어요.”
 구옥진은 서둘러 자신의 검을 뽑았다. 검신의 중앙을 따라 반짝이는 일곱 개의 구슬이 달린 검으로 야명칠정(夜明七精)이라 불리는 검이었다. 곤륜이 소장하고 있다고 알려진 다섯 자루의 명검(名劍)중 하나였다.
 검신에 박힌 일곱 개의 팥알 만한 구슬은 묘안석(猫眼石)으로 어둠을 밝히는 효능이 있었다. 그녀가 열 여섯이 되던 해 부친이 선물해준 보검이었다.
 곤륜파가 자랑하는 수십 가지의 무공 중 제일은 검법으로 알려져 있었다. 곤륜의 제자라면 누구나 익혀야 하는 태허도룡검(太虛屠龍劍)은 강하기보다는 변화가 많은 검법이었다. 그녀의 부친은 검법의 변화를 살릴 수 있도록 기존의 명검에 일곱 개의 야명주를 박아 새로운 검을 만들었는데 그것이 야명칠정이었다.
 검이 휘둘러지면 검신에 박힌 묘안석에서 빛이 사방으로 뿜어져 나와 상대의 눈을 어지럽혀 변화를 더욱 현란하게 만드는 효력이 있었다.
 “가자!”
 몸을 곰처럼 웅크린 이막형이 빠르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구옥진의 몸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동굴은 길었다.
 어둠이 한치 앞도 보이지 않게 만들어 동굴을 더욱 길게 느끼도록 했다.
 그들은 동굴을 진입하는데 어려움을 느끼지는 않았다.
 내공이 심후한 이막형은 안력(眼力)을 돋우어 다가드는 어둠을 나름대로 완벽하지는 않아도 어느 정도는 밀어낼 수 있었다. 더구나 등뒤를 따르는 구옥진이 뽑아든 야명칠정에서 뿜어지는 묘안석의 빛이 푸르스름한 기운을 뿜어 앞을 밝혀 주었다.
 ‘이건······ 동굴이 어디까지 이어지는 거지?’
 이막형과 달리 구옥진은 마음이 답답했다. 그녀는 야명칠정이 없었다면 한치 앞도 구분할 수 없었다. 비록 내공을 익혔다고는 하지만 어둠을 꿰뚫어 버릴 정도의 안력을 지니지 못한 그녀였다.
 다행이 야명칠정이 그녀의 눈을 밝혀 주었다.
 “이십 장은 들어온 것 같아요.”
 “쉿!”
 동굴은 높았다. 그래서인지 말 한마디만 해도 울림이 일어났다.
 이막형이 구옥진의 말을 막은 것은 당연했다.
 동굴은 이리저리 구부러져 있어 밖에서 들어오는 빛은 애초부터 차단되어 있었다.
 동굴은 의외로 훈훈했다.
 막연하게 바람이 불지 않아 훈훈하다는 것과는 다른 훈훈함이었다. 온기(溫氣)라 불러야 좋을 기운이 동굴내부를 둥둥 떠다니는 것 같았다.
 마치 온돌방에 들어와 있고 불을 때는 것 같았다. 몸에 달라붙는 긴장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그들은 내심 불안을 감추지 못했다.
 “으헛!”
 앞서 나가던 이막형은 갑자기 놀람을 터트리며 이 보를 물러섰다. 그 서슬에 뒤를 따르던 구옥진도 이막형의 몸에 얼굴을 부딪치며 나뒹굴었다.
 이막형은 검을 앞으로 내밀었다.
 희미하게 보이는 인형이 동굴을 가로막고 있었다. 인형의 뒤로는 밝은 빛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눈에 뜨일 만큼 밝지는 않아도 눈에는 현격한 차이를 보이는 밝은 빛이 사내의 등뒤에 머물러 있었다.
 “그대는 누구인가?”
 인형의 목소리가 울렸다.
 어딘지 앳돼 보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어린아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목소리였다.
 “누구?”
 구옥진은 물음을 던지다 그만 입을 다물었다.
 희미한 어둠으로 자세하게 보이지는 않으나 어렴풋하게 그림자의 실체를 볼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림자의 주인은 사내였다.
 이십여 세나 되었을까? 어둠 속이라 완벽하게 보는 것은 무리가 있었지만 희미한 윤곽으로 판단할 수 있었다. 등뒤에 후광(後光)처럼 빛나는 빛의 덩어리를 지고 서있는 그림자가 한발 다가섰다.
 몸에는 짐승의 가죽으로 만든 옷을 입고 있었고 손에는 긴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 특이한 것은 사내의 등뒤에 마치 해초(海草)처럼 늘어진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머리카락이었다. 머리카락은 무릎아래까지 길게 자라있었다.
 “누구냐?”
 구옥진은 놀라 다시 물었다.
 사내는 움직이지도, 그렇다고 입을 열지도 않았다. 다만 이막형과 구옥진이 들고 있는 검을 물끄러미 쳐다보았을 뿐이었다. 아무런 느낌이 없어 보이는 눈이 야명칠정에서 뿌려지는 빛에 반사되었다.
 나타난 사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한눈에 알아볼 수는 없었다.
 사내는 들고 있던 지팡이를 앞으로 내밀었다. 무엇으로 만들어진 지팡이 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길이가 일장이나 되었고 검은빛을 뿌리고 있었다.
 “돌아가라.”
 사내의 음성은 무뚝뚝했다. 감정이 섞여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목소리가 사내치고는 미성(美聲)이라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우리는 천륜사숙(天輪師叔)을 뵙기 위해 왔소이다.”
 “천륜?”
 사내는 천륜사숙이 누구인지 모르는 것 같았다. 이막형이 이야기하는 천륜사숙이 바로 그들이 찾아온 사람이었다. 곤륜파 이십 일 대 제자로는 누구보다도 성취가 놀라웠지만 나이 이십 오 세에 홀연히 사라져 버린 천륜협성(天輪峽星)이 그가 찾는 사숙이었다.
 천륜협성은 곤륜에서도 특이하게 한 쌍의 비륜(飛輪)을 사용하는 무인이었다. 무림에서는 검을 숭상하는 곤륜에 비륜을 사용하는 그를 보고 기이하다는 눈으로 바라보는 시선도 적지 않았었다. 그러나 알고 보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어느 문파나 무림에 알려지지 않은 비기(秘技)를 지니고 있었다. 무림에 알려져 있지 않았지만 곤륜은 정파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는 것에 비교해 어울리지는 않지만 흔히 사파(邪派)라 불리는 무인들의 절예(絶藝)에 가까운 몇 가지의 무공을 지니고 있었다.
 특히 천륜협성이 익히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타륜신공(打輪神功)이나 갈미구(蝎尾鉤)와 같은 신공과 병기는 곤륜을 잘 알고 있는 동도들도 고개를 갸웃하는 무공과 병기였다.
 “네놈이 천륜사숙을 어찌한 게로구나.”
 이막형도 부르짖었다.
 무작정 자신의 앞을 막고 지팡이를 내밀어 공격하려는 모습은 어떤 말로도 변명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
 이막형은 마음이 급해졌다.
 이미 피를 보았고 앞을 막아서는 괴인의 출현으로 일의 전개가 어찌 되고 있는지는 알 것 같았다. 괴인 같은 사내를 제어해야만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흥!”
 사내는 지팡이를 앞으로 내밀어 찔러왔다. 가볍게 손을 앞으로 내민 것 같았으나 지팡이의 끝이 바람에 실린 갈대의 잎처럼 흔들렸다.
 이막형은 놀라 눈을 크게 떴다.
 “허!”
 열린 입에서 비명이 터진 것은 동시였다.
 찌이이익!
 급히 몸을 틀었지만 홍포가 길게 찢겨져 가슴이 드러났다. 한치만 깊었다면 늑골(肋骨)이 베어졌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만약 괴인이 의도적으로 가슴을 베지 않고 옷만을 찢었다면 더욱 놀라운 일이었다.
 이막형은 어이가 없었다.
 그는 분명 사내가 찔러온 지팡이가 복부를 노리고 있다고 생각하고 복부를 비틀었었다. 그런데 찢겨진 옷자락은 가슴부위였다.
 가슴에 아련한 통증이 왔다.
 눈으로 확인하지 않아도 가슴에 가벼운 상처가 생겼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무서운 자다.’
 이막형은 등을 타고 흐르는 차가운 기운을 느꼈다. 감히 상대할 수 없는 무공을 지닌 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렇다고 사내가 내공을 사용했거나 강기(剛氣)를 뿌린 것도 아니었다.
 “사매! 피해라.”
 이막형은 청강검으로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를 차단하며 외쳤다. 그의 손에 잡혀있던 검이 연속 아홉 번을 찌르며 쪼개지는 검의 잔영(殘影)을 그렸다.
 검의 그림자는 마치 꼬아지듯 비틀어지며 사내의 인중(人中)과 천돌혈(天突穴) 가슴의 중부혈(中府穴)을 찔러갔다.
 “엇! 노룡출수(怒龍出水)?”
 땅! 따당!
 놀란 사내의 목소리가 들리고 이막형은 손아귀가 찢어지는 것 같은 통증을 느끼며 검을 떨어뜨렸다. 손목을 울리고 어깨까지 올라온 진통은 아무 것도 잡을 수 없게 만들었다.
 화끈거리는 느낌이었다.
 마치 펄펄 끓는 물에 손을 담근 듯한 통증에 연거푸 일곱 걸음을 물러서서야 겨우 몸의 중심을 잡은 이막형은 미간(眉間)을 심하게 찌푸렸다.
 ‘무서운 내공이다.’
 어느 누구에게도 그토록 심하게 격퇴를 당해본 적이 없는 이막형이었다. 단 일수에 자신이 꼬리를 말게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당신이 어떻게 태허도룡검을 알고 있죠?”
 구옥진이 놀라 부르짖었다.
 분명 사내의 음성에서는 노룡출수라는 말이 나왔었다. 이막형이 전개한 초식은 태허도룡검의 노룡출수가 분명했다. 사내가 태허도룡검을 안다는 사실이 불가사의(不可思議) 한 일이었다.
 “너는 어떻게 알고있지?”
 사내는 어리석게 들리는 질문을 던졌다.
 구옥진이 생각할 때는 사내가 어리석은 질문을 던진 것으로 보이지만 사내의 입장에서는 하나도 어리석은 질문이 아니었다. 모든 것은 받아들이는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기 마련이었으므로 그들은 성왕설래(說往說來)를 할 수밖에 없었다.
 괴인의 입장에서만 본다면 그가 익힌 검법을 느닷없이 나타난 자들이 시전하고 있으니 놀라운 것도 당연했다.
 그들은 서로를 마주 보았다.
 이막형도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 되어 버렸다. 자신이 조금 전에 검을 놓쳤다는 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무인에게 병기를 놓치는 것이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인지 알고 있는 그로서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이건 우리 곤륜의 비전검공(秘傳劍功)이다. 네놈이 사숙을 죽이고 빼앗았구나?”
 구옥진이 앙칼지게 외치며 검을 치켜들었다.
 “네가 여자냐?”
 너무나 갑작스러운 말이었다.
 검을 들던 구옥진은 맥이 풀렸다. 너무도 어이가 없었다. 구옥진은 어디에서건, 누구를 만나던 아름답다는 칭찬을 들었었다. 뿐만 아니라 스스로 생각해도 상냥했고 부드럽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여자냐고 묻다니?
 어디를 보아 여자 같이 보이지 않는다는 말인가? 사내같이 무뚝뚝하게 보이는 걸까?
 ‘죽여버리겠어.’
 구옥진은 한순간에 결정을 내렸다. 그를 죽여 상처 입은 자존심을 회복하고 싶었다. 단 한번도 그런 모욕을 받아본 적이 없는 구옥진이었다.
 구옥진은 검을 들어 천중(天中)을 가리켰다.
 “네가 여자냐고 물었잖아.”
 아이의 투정이 그럴까?
 사내는 지팡이로 구옥진의 가슴을 찌르듯 다가서며 물었다. 구옥진의 얼굴이 서리가 내린 것 같이 굳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강호에서 무인이 여인의 가슴을 노리거나 사타구니를 노리면 곧바로 음적(陰敵)으로 취급을 받는 다는 것을 아는 구옥진으로서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이길 수가 없었다.
 “이, 음적! 죽여버리겠어.”
 구옥진은 급히 사문의 절기인 용형보(龍形步)를 밟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마치 술에 취한 용이 꿈틀거리듯 움직이는 그녀의 신형은 순식간에 사내의 앞으로 다가갔다.
 슈아아아악!
 구옥진의 검이 허공에서 크게 원을 그렸다.
 “네가 여자구나!”
 슈아아악!
 사내의 손이 갑자기 뻗어 나왔다. 손은 마치 독수리의 발톱처럼 날카로우며 빨랐다.
 덥석!
 “꺄아아아악!
 기세 좋게 검을 휘둘러가던 구옥진은 비명을 토하며 발끝으로 지면을 찍고 뒤로 몸을 퉁겼다. 그렇다고 끝난 것이 아니었다. 사내는 이미 구옥진의 가슴을 움켜쥔 뒤였다.
 비록 몸을 뒤로 빼어 손을 벗어났다고는 하지만 가슴에 이는 사내의 손길이 느껴지지 않을 리가 없었다. 가슴이 얼얼했다.
 “치한!”
 그것뿐이었다.
 소리를 지르고 치를 떨었지만 다시 앞으로 나아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사내가 어설프게 행동하기는 해도 자신으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막형이 급히 어깨를 추스르고 앞으로 나섰다.
 “어떻게 우리 곤륜의 무공을 알고 있소?”
 이막형은 구옥진 보다는 눈이 빨랐다. 사내가 구옥진의 가슴을 잡아가던 수법이 곤륜의 비전지기중 하나인 운룡금나(雲龍擒拿)라는 것을 알아보았던 것이다.
 운룡금나는 곤륜에 단 두 개의 초식에 불과한 금나수(擒拿手)로서 운룡대구식과 함께 많이 사용하는 절기였다. 그러나 사내처럼 자유(自由)롭게 사용하는 자는 곤륜에서도 보기 드문 일이었다.
 이막형도 사내의 모습에서 처음에는 운룡금나라는 것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손을 말아 들어가는 모습이 마치 용이 헤엄을 치듯 부드럽고 힘이 넘치는 것을 보고 운룡금나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자가 사용하는 것은 한결같이 우리 곤륜의 무공이다. 혹시 사숙의 제자······?’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였다.
 만약 이 신비한 청년이 천륜협성의 제자라면 능히 가능한 일이었다.
 사내가 사용하는 무공이 모두 이해가 될 뿐만 아니라 그토록 뛰어난 무공을 펼쳐 보일 수 있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잠깐, 우리는 귀공의 사부님을 만나러 왔소이다.”
 “사부?”
 사내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렇소. 당신의 사부를 만나기 위해 곤륜의 이막형이 왔다고 알려 주시구려.”
 그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것을 알 것 같았다. 그의 추측이 맞는다면 십중팔구는 천륜협성이 있을 것이었다.
 “누구?”
 “이막형이라 하오이다.”
 물음을 던지던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들었다는 뜻이라고 이막형은 생각했다. 사내는 사심이 없는 것 같았다. 빙그레 웃더니 알아들었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 사내는 세상을 모르는 것 같은데······’
 이막형은 사내의 모든 행동이 조금씩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의아스러웠던 것들이 안개처럼 밝아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사내는 오래 동안 동굴에서 살아온 것 같았다.
 “부탁 드리오.”
 “알았다. 기다려라.”
 사내가 몸을 돌렸다. 이어 손에 들려있던 긴 지팡이를 집어 던졌다. 사내는 동굴안쪽으로 마구 달려가기 시작했다.
 이막형은 날아오는 지팡이를 잡아갔다.
 “커흑!”
 털썩!
 낮은 신음을 토한 이막형은 그만 신음을 토하며 주저앉았다.
 그가 받은 지팡이는 너무도 무거웠다. 마치 온몸을 누르는 듯한 무게 때문에 이막형은 주저앉아 일어서지 못할 지경이었다. 하체가 저려왔다.
 “왜 그래요. 사형!”
 분노로 이지러진 얼굴을 펴지 못하고 구옥진이 다가왔다. 서릿발같은 얼굴이 검에서 뿜어지는 희미한 빛을 반사시켰다.
 이막형은 얼굴을 붉혔다.
 아무리 애가 타도 지팡이 때문이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명색이 곤륜의 차기 장문지재(掌門之材)였다. 어찌 사내의 지팡이를 받다 단전이 흔들렸다고 이야기를 할 수 있겠는가?
 뎅그렁!
 지팡이는 쇠로 만들어진 덩어리였다.
 이막형은 지팡이를 밀어 던지고 몸을 일으켰다. 이마에 땀이 흘렀다.
 “그가 누구죠?”
 “글세, 그가 사숙의 제자가 아닌가 한다. 그는 단 한번도 이곳을 벗어나지 않고 제자를 키웠을 지도 모르지.”
 구옥진이 눈을 크게 떴다. 그게 어찌 가능한 일이냐는 듯한 항변이 느껴졌다.
 “그는 아마 이곳에서 세상을 모르고 살았을 거다. 모르기는 해도 그에게 인간의 모든 윤리(倫理)와 성품(性品)을 기대한다는 것은 무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
 이막형의 말을 듣던 구옥진의 얼굴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굳어갔다.
 이막형은 곧이 설명을 해주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될 것이고 모든 것은 스스로 판단할 일이었다.
 ‘재미있군.’
 이막형은 왠지 가슴이 훈훈해 지는 느낌이 들었다. 사숙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모두 들어오시오.”
 사내는 제법 의젓하게 입을 열었다. 또 다른 모습이었다. 이막형은 빙그레 실소를 흘릴 수밖에 없었다.
 
 
 2장 사문(사門)이 호응(呼應)하니
 
 
 1
 
 
 기이하게 생긴 실내에는 사인이 앉아있었다.
 실내만 기이하게 생긴 것이 아니었다. 마주앉은 사람 중에도 기이하게 생긴 자가 둘이나 있었다. 기이하다는 것이 매우 주관적(主觀的) 개념이기에 기이하다고 느끼고 있는 사람은 이막형과 구옥진 뿐이었다.
 실내는 마치 유리로 지어진 것 같았다.
 사방은 동굴의 모습이 역력했다. 마치 억겁의 세월동안 깎여진 바위가 만든 돌 벽은 인공이 가미되지 않아 신의 조화를 보여주고 있었다.
 어디선가 빛이 새어들고 있었다.
 어스름하기는 하지만 빛은 네 사람의 얼굴을 볼 수 있을 정도의 밝기를 가지고 있었다.
 빛이 새어드는 곳은 천장이었다.
 천장은 얼음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언뜻 보면 뿌우연 안개 같은 색을 지니고 있었다. 어딘지 탁해 보이는 얼음으로 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세상에 이론 곳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이막형은 기가 막혔는지 자신의 생각을 감추지 못하고 앞에 앉은 백발인(白髮人)에게 말했다.
 “허허허! 누구도 보지 못한 비경(秘境)이지!”
 백발인은 비스듬하게 몸을 꼬며 웃었다. 나이는 사순(四旬)을 겨우 넘긴 것으로 보이지만 머리가 백설처럼 바래 은빛으로 빛이 났다. 자세하게 보지 않는다면 칠순(七旬)도 넘어 보였지만 자세히 보면 이마에 주름 하나 없었다.
 그의 곁에는 나이가 이십을 넘었을 것 같은 사내가 앉아있었는데 모든 것이 심드렁하다는 기색을 애써 감추지는 않았다. 새끼손가락을 내밀어 연신 코를 후비는 모습은 일견 멍청해 보이기까지 했다.
 ‘재미있는 사나이야.’
 구옥진은 연신 사내를 바라보느라 눈알이 퉁겨져 나올 지경이었다. 구옥진은 이막형과 사숙의 말에는 관심이 없었다. 자리에 앉는 순간부터 사내에게 온통 정신이 쏠려 있었다. 사내는 그녀에게 신기하기도 했고 달리 보면 관심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한 짖을 반복하고 있었다.
 사내는 사람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용모뿐만이 아니라 그가 하는 행동이나 입은 옷, 심지어는 그가 하는 말 한마디가 모두 사람의 시선을 끌었다. 무엇보다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에 대해 관심이 없다는 투가 더욱 그랬다. 인적(人跡)이 흔하지 않은 곳에 사람이 나타났다면 의당 관심을 가져야 옳았다. 그러나 사내는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일년 내내 사람이라고는 보지도 못했을 것 같은 깊은 산 속에서 살아도 사람이 나타났다는 사실이 신기하지도 않은 것 같았다.
 ‘누구나 나를 보면 아부를 하려고 하는데······ 이 사람은 정말 이상한 사람이야.’
 구옥진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너무도 많았다.
 그녀는 항상 사람들에 둘러 쌓여 살아왔다. 누구든지 그녀 앞에서는 고분고분 했으며 자신들을 인식시키려고 애를 썼다. 곤륜의 제자들 모두가 그렇다고 해도 그녀는 틀리다고 말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사내는 달랐다.
 그것이 구옥진으로 하여금 사내에 궁금증을 가지게 했다. 사내는 구옥진이 어떤 표정을 짖던 상관 할 바 아니라는 표정이었지만 구옥진은 달랐다.
 “사매, 사람의 얼굴을 그렇게 빤히 쳐다보면 쓰겠느냐?”
 이막형의 핀잔에 조금은 자신의 행동이 어색했다는 것을 눈치채고 구옥진이 배시시 웃었다. 그러나 눈을 떼기에는 아무래도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머리가 눈이 온 것 같은 중년인이 빙그레 웃었다.
 “그냥 놔두게나. 어차피 백설(白雪)의 관심을 끌기는 어려울 것이야. 무료한 표정이군.”
 “백설이요?”
 “그 아이의 이름이 백설이네.”
 이막형의 물음에 중년인이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이막형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좋게 보아도 사내, 백설의 무료함이 드러났다.
 ‘사숙도 많이 변했군.’
 이막형이 생각하는 과거의 패도적(覇道的)이고 정의를 위해서는 살인도 마다하지 않았던 사숙이 아니었다. 불과 이십 년 전 이십 오 세의 나이로 청해를 굽어보았던 사숙이었다. 당시 사숙을 청해제일인(淸海第一人)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정도로 무공에 관한 어떤 측면에서든 기린아(麒麟兒)였다.
 천륜협성 우금진!
 오래 전, 그의 이름 앞에는 늘 피가 따라다녔다. 그의 이름이 너무도 잔인하게 알려지자 곤륜의 장로들은 그의 강호활동을 제한하자는 이야기까지 비추었었다.
 그가 홀연히 사라지지 않았다면 그는 조사동(祖師洞)이나 참회동(懺悔洞)에서 오랜 세월동안 햇빛을 보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어떻게 해서 머리카락이 그토록 희게 변하셨는지요?”
 “세월이네······ 그건 묻지 말게나.”
 이막형의 물음에 우금진은 쑥스럽다는 듯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비밀이 있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것도 잠시 우금진의 얼굴이 본색으로 되돌아왔다. 담담하고 어딘지 모르게 한 곳을 잊어버린 표정이었다. 이막형은 우금진의 표정이 시시각각(時時刻刻)으로 변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었지만 굳이 이야기의 화제를 삼고 싶지는 않았다. 그의 잔잔한 마음에 돌을 던지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막형은 굳이 알려 애쓰지는 않았다.
 우금진도 알려주고 싶은 생각은 굳이 들지 않는 모양으로 이야기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눈을 돌려 백설을 바라보다 빙그레 웃었다. 그는 웃는 낮으로 여전히 딴 생각에 젖어있는 제자를 바라보았다.
 “사질(師嫉)은 무엇이 그리도 궁금한고?”
 웃음을 머금은 우금진이 구옥진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때까지도 구옥진의 눈은 백설의 얼굴에서 떠나지 않고 있었다. 구옥진은 사숙의 목소리를 들었지만 백설의 얼굴에서 쉽게 얼굴을 떼어내지 못했다. 그러나 우금진의 눈길을 의식했는지 화들짝 놀라며 눈을 옮겼다.
 구옥진이 배시시 웃음을 뿌렸다.
 자신이 생각해도 웃음이 나는 모양이었다. 사내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생각하면 누구라도 웃을 것 같다는 생각에 그녀는 괜히 얼굴이 붉어졌다.
 “사질은 이곳이 궁금한가?”
 “그렇습니다. 사숙!”
 구옥진으로서는 기다리던 물음이었다. 구옥진은 동굴에 들어서며 무한한 궁금증을 느끼던 중이었다.
 우선 동굴에는 추위가 없었다.
 밖에서는 귀가 떨어져 나갈 것 같은 바람이 불고 몸이 얼어붙는 추위가 있었지만 동굴은 포근하다 못해 땀이 날 지경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동굴에 불길이 있거나 온기를 뿜어내는 어떤 기구도 없었다. 심지어는 음식을 만드는 어떤 도구도 갖추어져 있지 않았다. 그들이 조금 전 우금진에게 들은 바로는 음식을 익혀먹은 적이 없다고 했었다. 그의 말대로 생식(生食)만을 고집한다면 굳이 불을 피우는 기구가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동굴 속은 따듯하게 덮여야 했다.
 그녀의 얼굴을 보던 우금진은 얼굴에 넘치는 미소를 감추지 않았다.
 “백설아!”
 “예!”
 우금진은 부드럽게 불렀고 백설은 몸을 일으키며 대답했다. 어딘지 모르게 모바라 보이고 순진해 보이기는 하지만 사부에 대한 예의는 깍듯했다. 마치 오랫동안 인간의 예의에 대해 공부를 한 학동(學童)같이 단정한 모습이었다.
 “네 사제가 되는 여아니라. 이곳 저곳 구경을 시켜 주도록 하려무나.”
 “사제?”
 백설에게 사제라는 말은 생소하게 들리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 말의 뜻을 모르지는 않는 것 같았다. 더욱 얼굴이 해사한 구옥진에 대한 감정도 남다른 것 같았다. 백설은 구옥진을 바라보며 밝게 웃었다. 구옥진은 눈이 마주치자 갑자기 가슴이 덜컥하는 느낌을 받았다.
 ‘남자의 웃음이 이리 맑다니······ 임사형(任師兄)에게서도 느끼지 못했던 눈빛이야.’
 임사형은 이미 그녀와 혼약하기로 약조가 되어있는 곤륜의 속가제자였다. 구옥진은 백설의 눈을 보고 난 후 자신의 눈이 환해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어수룩하게 보이는 백설이 임사형에게서처럼 가깝게만 느껴지지는 않았다. 다만 신기하다는 감정뿐이었다.
 “사질!”
 “예, 사숙님!”
 구옥진은 우금진의 부름에 급히 몸을 돌렸다. 그녀는 이막형처럼 편안한 마음으로 우금진을 대하기는 어려웠다. 우금진이 곤륜에서 사라졌을 때 그녀는 태어나지도 않았었다. 사문에서 너무나도 그 이름이 자자한 사숙을 찾아간다는 대사형의 말에 따라 나서기는 했지만 왠지 어렵기만 했다.
 우금진의 말과 몸에서 아직 한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푸근한 감정이 느껴지기는 했지만 마음껏 응석을 부릴 처지는 아니었다. 우금진의 몸에서 느껴지는 따스함은 분명 이막형이 보여주는 따스함과는 달랐다.
 기이한 일이었다.
 겉으로 보아서는 이막형과 우금진의 연배는 비슷해 보였다. 그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것으로 보아도 그들은 비록 사숙과 사질로서 배분의 차이는 있었지만 나이차이는 없었다.
 “그 아이는 세상을 모르니······ 약간의 무례(無禮)한 점이 있어도 이해하도록 해라.”
 “예!”
 대답은 했지만 무엇을 말하고자 한 것인지는 한순간에 알아듣지는 못했다. 그러나 백설의 모습에서 이내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인지 알아듣고 얼굴을 붉힐 수밖에 없었다.
 동굴에서 자신의 젖무덤을 잡아오던 백설의 손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백설은 치한이 아니었다.
 우금진으로부터 인간세상(人間世上)에 대해 듣고 여자가 무엇인지 들었을 테지만 처음 보는 일이라 아무런 사심 없이 가슴을 잡아왔다는 것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변한 것은 없었다.
 다만 그가 사심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조금은 위안이 될 뿐이었다.
 구옥진은 몸을 일으켰다.
 대사형이 눈을 끔뻑거렸기 때문이었다. 이막형은 그렇게 하라는 것을 눈으로 알리고자 하고 있었다. 구옥진은 몸을 일으켰다. 이막형의 눈짓으로 보아 중요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 같았다. 구옥진으로서는 이막형이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알고 있었다. 이미 그녀도 곤륜을 출발하기 전에 왜 우금진을 찾아야 하는지 들은 것이 있기 때문이었다.
 “사형! 갑시다.”
 “사형?”
 백설은 놀라 뇌이며 몸을 일으켰다.
 사형이라는 말이 무척이나 생소하게 들렸기 때문인지 한참동안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나 무엇을 하고자 함인지 눈치를 채고 앞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백설은 어색한 모습으로 동굴을 나서기 시작했다.
 구옥진이 뒤를 따랐다.
 
 한참동안 침묵이 흘렀다.
 백설과 구옥진이 동굴을 나서고 한참이 지났지만 둘은 입을 다물고 있었다. 누구도 먼저 이야기를 할 계제가 아니었다.
 그들은 이십 년만에 만났다.
 그들 사이에 변한 것은 없었다. 이십 년 전과 다름없이 그들은 사숙과 사질이었고 곤륜의 제자였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세월이 흘러 그들이 나이를 먹었다는 사실뿐이었다. 다른 것이 또 있다면 한사람은 장문인의 제자로서 영화(榮華)가 눈앞에 있었고 한사람은 세속(世俗)과 인연을 끊고 오래도록 살아왔다는 것 정도였다. 사실 그것이 그들의 가장 큰 차이점이기는 했지만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사숙, 사문과 가까이 있으며 왜 한번도 제자들을 찾지 않으셨습니까?”
 “그것은 묻지 말게!”
 이막형이 간곡한 음성으로 물음을 던졌으나 우금진은 단호했다. 이막형으로서는 전연 뜻밖의 대답이었다. 이막형이 기억하기로는 평소 온화하기만 하던 우금진이었다. 그러나 이야기를 막는 우금진의 목소리에는 완강한 거부가 들어있었다. 이막형은 입을 다물었다.
 그들은 비록 배분은 달랐지만 나이가 비슷해 사숙과 사질의 관계를 떠나 친숙했던 사이였다. 그들은 친구처럼 사이가 좋았었다. 오래 전의 일이었다.
 우금진이 그토록 단호하게 말을 하는 것을 본적이 없었던 이막형은 할말이 머릿속에서 맴을 돌았지만 입을 다물었다.
 “그건 이유가 있었네.”
 이막형이 질린 얼굴을 하자 우금진은 자신의 말이 어떤 파장(波長)을 몰고 왔는지 깨달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막형은 멍청해진 눈으로 우금진을 바라보았다.
 ‘나에게 숨기실 이야기인가?’
 이막형은 굳이 묻고 싶지는 않았다.
 “나중에 알게 될 걸세. 그렇지 않아도 이제는 사문으로 돌아가야 하리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지.”
 우금진에 얼굴에 웃음을 흘렸다.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그늘이 덮여 있다는 것을 이막형은 느끼고 있었다. 우금진은 구태여 이야기를 하려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나저나 사질이 나를 찾아온 것은 이유가 있었을 것 아닌가? 내가 이곳에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이십 년의 세월인데?”
 “사문(師門)에 문제가 있습니다.”
 “문제?”
 “그렇습니다. 문제는 심각합니다마는 산을 내려가 장문인께 직접 들으시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우금진이 눈썹을 찡그렸다.
 탈색된 듯 은색으로 빛나는 머리카락과 비교해 너무나 검은 눈썹이었기에 묘한 부조화(不調和)가 일어나고 있었다.
 우금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문에 문제가 생긴 게로군!”
 “그렇습니다.”
 이막형은 고개를 떨구었다.
 
 
 2
 
 
 구옥진은 한번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이곳에 이런 곳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어요.”
 구옥진은 감탄을 참을 수가 없었는지 연신 함성을 토하고 있었다. 백설은 놀라는 그녀가 오히려 신기했는지 입가에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구옥진은 백설의 눈길을 의식하기는 했지만 구태여 눈에 드러내지는 않았다. 그녀는 자유롭게 동굴을 휘젓고 다녔다.
 모든 것이 신비스러웠다.
 동굴은 수십 갈래로 갈라져 있었다. 마치 인간의 신경조직(神經組織)처럼 마구 이어진 동굴은 밖에서 보던 동굴이 아니었다. 만약 수 갈래로 갈라지고 다시 갈라지기를 반복하는 동굴을 들어서면 다시는 출구를 찾지 못할 것 같았다. 백설은 동굴을 알고 있기에 산등성이를 움직이듯 돌아다녔지만 구옥진은 여러 가지로 놀라고 있었다.
 무엇보다 동굴은 훈훈했다.
 곳곳에 얼음으로 뒤덮인 천장으로는 빛이 들어오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두텁게 언 얼음이 빛을 모으는 것 같았다.
 ‘이토록 두터운 얼음이 빛을 투과(透過)시킨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어.’
 구옥진은 믿을 수 없었지만 믿지 않을 수 없었다. 눈앞에 벌어진 엄연한 현실이고 보니 믿지 않는다는 것 자체가 자신을 속이는 것 같았다.
 “동굴이 몇 개나 되는 거죠?”
 “삽 십 이 개!”
 백설은 무뚝뚝하게 대답을 했다. 퉁명스럽게 들리는 목소리였지만 그것이 본성(本性)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구옥진은 굳이 신경을 쓰지 않기로 했다.
 우금진의 말대로 그것은 백설이 사람을 접해볼 기회가 없기 때문이지 그가 지닌 본성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우금진도 백설이 사람을 접하지 못하고 자랐다고 이야기를 했었다. 비록 인간을 대하는 방법을 익히기는 했지만 단숨에 바뀌어지고 몸에 익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여기는 어디죠?”
 “들어가 봐!”
 구옥진이 물음을 던졌을 때 백설은 아무런 의미 없이 대답했다. 열두 번째의 동굴이었다.
 다른 곳과는 달리 백색투명(白色透明)하게 보이는 바위로 둘러 쌓인 동굴이었다. 분명한 것은 투명한 것이 얼음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언뜻 보아서는 얼음 같았다.
 구옥진도 처음에는 얼음이라 생각했었다.
 백설을 한번 쳐다본 구옥진은 망설이지 않고 동굴로 들어갔다. 들어서자마자 마치 달걀이 썩은 듯한 냄새가 얼굴로 다가들었다.
 “흡!”
 구옥진은 발걸음을 멈추며 입을 가렸다.
 사방이 뿌연 습기로 한치 앞도 구분할 수 없었다. 마치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도 들렸다.
 “유황온천(硫黃溫泉)!”
 구옥진은 매우 놀랐다. 그녀가 본 것은 온천이었다. 놀라운 것은 수면 아래에서 솟구쳐 오르는 물이 펄펄 끓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구옥진은 한동안 멍한 표정으로 서있었다.
 온천이 있다는 사실이 놀라운 것이 아니었다. 유황온천이라 해서 놀랄 구옥진도 아니었다. 문제는 상리(常理)에서 벗어나는 일이 벌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상에는 수십 장의 두터운 얼음으로 덮인 동굴이었다. 얼음 밑에는 몇 층의 바위들이 깔려있는 그 사이에 동굴이 만들어져 있다고는 하지만 펄펄 끓는 것으로 보이는 온천의 높은 온도(溫度)가 얼음을 녹이지 않는 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몸을 다치면 이곳에서 놀면 되.”
 백설은 시큰둥하게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놀라는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구옥진이 이상하다는 뜻이었다.
 “혹시 이곳에서 무공을 익히나요?”
 “응! 이곳에서도 익히지.”
 구옥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물어본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어디에서 무공을 익혔던지 알 바가 아니었으나 온천 속에서 무공을 익힌다는 것은 매우 중요했다.
 곤륜의 문하(門下)이기 때문이었다.
 곤륜은 양강기공(陽强氣功)을 익히는 문파였다. 곤륜의 선조들이 적지 않은 무공을 창안했고 실전(失傳)되지 않고 전수되고 있었다. 곤륜의 모든 제자는 한결같이 양강기공을 내공심법(內功心法)으로 익히고 있었다.
 적양공(赤陽功)이라는 이름을 가진 곤륜의 내공심법은 무림에서도 양강지공으로는 다섯 손가락에 안에 드는 뛰어난 내공심법이었다.
 문제는 적양공이 익히기가 무척이나 어렵다는 것이었다.
 오행(五行)중 화(火)의 기운을 바탕으로 하는 적양공은 이름이 말해주듯 태양의 기운을 받아 운기토납(運氣吐納)을 하는 심법을 기초로 하고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곤륜의 문인들은 사시(巳時)부터 미시(未時)까지는 보통 내공을 익히는 중요한 시간이었다. 가장 태양의 활동이 왕성하기 때문이었다. 곤륜의 본산에서도 그 시간이 되면 모든 제자는 무공 수련을 중단하고 내공을 수련하고 있었다.
 곤륜산의 추운 지방에서 견디기 위해 적양공을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있었으나 반드시 태양을 이용해 운기를 하고 내공을 익히는 것은 아니었다.
 뜨거운 화의 기운이 있는 곳에서 항시 생활을 하게 된다면 적양공은 일취월장(日就月將)할 수 있었다. 특히 유황은 혈류(血流)의 흐름을 변화시켜 운기토납의 효능을 강화하고 혈맥을 보호하는 기능이 있었다.
 조심할 필요는 있었다.
 유황은 인간에게 치명적인 독이었다. 만약 유황을 직접 입으로 먹는다면 열 명 중 아홉 명은 죽을 수밖에 없었다. 무공을 익히는 무인에게 유황은 도움도 되지만 혈맥을 상하게 하고 간을 상하게 하는 두 가지의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온천에 섞인 유황은 달랐다.
 “놀라운 곳이다. 이곳에서 이십 년 동안 내공을 익혔다면 놀라운 성취(成就)가 있었을 거야.”
 구옥진의 놀람이 입술을 열었다. 생각으로 그친 것이지만 목소리가 되어 나오자 구옥진은 화들짝 놀랐다. 백설이 알아들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뒤를 돌아보았으나 백설은 그녀의 말 따위에는 신경조차 쓰지 않는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아까는 여자라고 반겨하더니······ 왜 갑자기 시무룩해 진 거지.’
 구옥진은 갑자기 백설의 행동이 부자연스럽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백설로서는 그녀를 대하는 가장 편한 방법일 뿐이라는 것을 그녀는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가 놀라건 말건 백설은 걸음을 옮겨 온천을 벗어나고 있었다. 구옥진은 진한 유황 냄새 때문에 머리가 어지러워지는 것을 느꼈다.
 구옥진은 백설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저건?”
 구옥진은 다시 놀람을 터트렸다. 그녀는 동굴을 구경하는 순간부터 놀라는 것 외에는 모든 것을 잊어버린 듯한 표정이었다. 하나에서 열까지 반복되는 동굴의 정경(情景)은 그녀를 경악과 경탄으로 몰아 가고 있었다.
 붉은 털을 가진 곰이 동굴 벽에 기대어 서있었다. 마치 살아있는 것 같았는데 다가가 자세히 보니 죽어있었다. 너무나 큰 곰 이었기에 구옥진은 기가 질릴 판이었다. 적어도 선 크기가 일장은 넘을 것으로 보이는 키를 가진 붉은 곰은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적어도 오 백 근은 족히 나갈 것 같았다.
 구옥진은 한참동안 곰을 바라보고 서있었다. 웅장(雄壯)한 자태가 곧 앞으로 달려들 것 같았다. 바닥에는 약간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혹시?’
 구옥진은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저······ 혹시 이 곰은 언제 잡은 것이죠?”
 “당신들이 오기 전에······ 바로!”
 구옥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과 이막형이 경공을 전개하여 핏자국을 따라왔다는 것을 생각해 냈다. 핏방울의 주인을 찾은 것 같았다.
 구옥진은 한참동안 곰을 바라보았다.
 “누가 잡았죠?”
 “내가.”
 “사형, 당신이요?”
 “그래, 식사를 준비하는 것은 내 몫이야······”
 구옥진은 놀라 널브러질 뻔했다.
 백설이 대수롭게 이야기했지만 구옥진으로서는 놀라운 일이었다. 백설의 말 대로라면 곰을 둘러메고 달렸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었다. 구옥진과 이막형이 동굴을 찾아 올 때 보았던 피가 곰의 몸에서 흘린 피가 확실하다면 백설은 그들의 앞에서 곰을 메고 산길을 달렸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었다.
 ‘대단하다.’
 구옥진은 새삼스럽다는 눈으로 백설을 바라보았다. 안계(眼界)가 넓어지는 느낌이었다. 그녀가 알기로 곤륜 본산에 머무르는 제자 이 백 문인 중 그토록 큰곰을 잡을 수 있는 제자는 드물었다.
 아무리 무공이 뛰어나다고 해도 오 백 근이나 나가는 곰은 쉽게 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더구나 백설의 몸에는 상처하나 보이지 않았다.
 핏자국을 따라온 것을 생각하면 오 백 근이나 나가는 곰을 메고 얼음 위를 바람처럼 달렸다는 것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결국 백설의 무공이 놀랍다는 이야기였다. 구옥진으로서는 추측이 불가능(不可能)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었다.
 ‘이 사람의 무공을 추측할 수 없구나.’
 구옥진은 새삼 백설을 다른 눈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겉으로 드러나는 것과는 천양지차(天壤之差)의 모습이 내면에 숨겨져 있는 것 같았다.
 “그만 가! 사부님이 기다릴 거야.”
 백설이 그녀의 손을 잡아 끌 때까지 구옥진은 멍청하게 백설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튿날 사인은 행장(行裝)을 꾸리고 빙하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막형이 앞에 서고 우금진이 뒤를 따랐다.
 우금진은 일찍이 오래 전에 입었던 것처럼 보이는 청색 무복에 붉은 요대를 매고 두 발목과 팔목에 각각 곰의 가죽으로 만든 보호대를 뒤집어 찼다. 그의 흰머리가 사방에 깔린 얼음과 눈을 압도했다.
 우금진의 뒤에는 백설이 따르고 있었다. 그의 모습은 누구하고도 어울리지 않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전신에 걸친 옷은 곰의 가죽을 벗겨 만든 옷이었고 손에는 검은 광택(光澤)이 나는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 특이한 것은 오른쪽 손목에 찬 보호대 속으로 간혹 번쩍이는 것이 보이는데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가 움직이면 엉덩이를 지나 무릎 뒤에 이르는 긴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날렸다.
 “사형의 머리는 참으로 아름답군요.”
 구옥진은 자신이 말을 하고도 참 한심했던지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 백설의 긴 머리카락은 어떤 여인의 것보다 아름다웠다. 더구나 길게 늘어지기는 했지만 단정히 묶여진 머리였다.
 백설은 뒤를 돌아다보았다. 구옥진이 노을처럼 붉어진 얼굴로 뒤를 따르고 있었다.
 “어서 가자! 오늘 안으로는 사문에 도착해야 하지 않겠느냐?”
 우금진이 재촉했다.
 우금진의 말을 알아들었는지 이막형이 서둘러 동굴을 벗어나 얼음 위를 걷기 시작했고 우금진도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백설은 뒤를 돌아보며 동굴을 주시했지만 이내 몸을 돌려 앞서가는 사람들을 따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모습은 왠지 시들해 보였고 힘이 사라진 사람 같았다. 그의 모습이 너무 처연해 보였기에 아무도 위로를 하지 못했다.
 그들은 서둘러야 했다.
 곤륜산령은 깊고 험했으며, 사방이 빙판과 눈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곤륜파가 곤륜산령에 자리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빙하연과 비교를 해 보았을 때 그 높이는 현격한 차이가 있었다. 부지런히 서둘러야 그들은 겨우 밤이 이슥해서 산문(山門)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나마도 어물거리다가는 날이 바뀐 뒤에나 곤륜파에 도착할 수도 있을지 모르는 일이었고 까딱 실수라도 하여 길을 자못 드는 날에는 산 속에서 밤을 셀 수도 있었다. 이막형과 구옥진이 이틀에 걸려 빙하연에 이르렀다는 것이 그것을 증명하고도 남았다.
 백설이 뒤를 돌아보았다.
 동굴이 시커먼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백설의 눈가에 아쉬움이 머물렀다.
 당연한 일이었다.
 두 살 때부터 살아온 동굴은 백설에게 있어 집이며 부모의 품과도 같았다. 심지어는 그가 동굴 속에서 태어났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사형, 어서 가요.”
 구옥진이 재촉했다.
 그녀가 두 명의 사형, 이막형과 백설 중에 누구에게 말을 한 것인지는 불분명했다. 백설도 배분에 따라 그녀에게는 사형이 되는 것인지라. 분명한 것은 이막형에게 한 말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이막형과 우금진은 이미 십여 장 이상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멈추어 서서 있는 사람은 백설과 구옥진 뿐이었다. 구옥진의 말이 끝나자 백설이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구옥진도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고 그들은 곧 동굴에서 멀어져 갔다. 그들이 지나간 자리에 발자국만 남았다.
 
 ***
 
 빙하연을 떠난 사인이 곤륜에 도착한 것은 밤이 이슥해 이미 날이 바뀌는 자시(子時)였다.
 
 ***
 
 흔들리는 향촉(香燭)을 등에 지고 육 인이 앉아있는 정실(正室)은 제법 규모가 커 보였다.
 성무원(成武院)이라 불리는 사방 삼 장의 정실은 곤륜파가 자리잡은 이만여 평의 산봉(山峰) 중 가장 후미진 곳에 위치하고 있는 전각에 들어있었다. 후미진 곳이라 해서 본원(本院)과 멀리 떨어진 이 아니었다. 성무원이 자리잡은 도성각(道聖閣)은 곤륜파의 이백여 개 대소전각(大小殿閣) 중 가장 경치가 아름다운 후원(後園)에 위치하고 있었다.
 후원은 누구나 들어올 수가 있는 곳이 아니었고 장문인의 처소라는 이유로 항시 수십 명의 제자들이 번(番)을 돌며 침입자를 감시하는 곳이었다.
 
 “사형이 저를 부르신 이유가 있을 것 같습니다만······”
 우금진은 구렴성을 바라보며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이미 수 인사를 끝낸 지는 오래였고 그간의 정황에 대해 묻기도 마친 후였다. 구렴성은 이십 년만에 만난 사제에 대한 정이 넘쳐 눈가에 붉은 기운을 지우지 못하고 있었다. 물러가는 노안(老眼)에는 눈물이 비추어지고 있기도 했다.
 구렴성은 이십 년만에 만난 사제를 바라보았다.
 그가 들어설 때부터 느끼는 것이지만 우금진은 변한 것이 없는 것 같았다. 겉모습이야 세월의 흐름을 속일 수는 없었지만 지닌바 심성(心性)은 단 한가지도 변한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사연이 길지.”
 대신 입을 연 것은 구렴성의 곁에 앉아있던 회의노인이었다. 그는 회색의 도복을 입고 있었으며 머리에는 삼태극(三太極)이 그려진 태극건(太極巾)을 단정하게 쓰고 있었다.
 사실, 곤륜에서 가장 이상적인 복장을 갖춘 자가 회의 도복인이었다.
 곤륜은 도가의 문파였다.
 무공에 치중하다보니 도복이 등한시(等閑視) 되고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곤륜이 도가를 숭상하는 문파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더구나 한때는 중원삼대 도가의 성지(聖地)로 추앙을 받기도 했던 곤륜산이었다.
 “이사형이 말씀해 주시렵니까?”
 우금진이 눈을 돌렸다.
 도복을 입은 노인은 육십은 넘어 보이는 모습이었다. 그가 우금진에게는 이사형이 되는 곤륜진인(崑崙眞人) 우학성이었다.
 전신에 탈속한 기운을 은연중 뿌려내는 우학성은 곤륜의 제자가 된 예로부터 무공보다는 도경(道經)에 심취한 제자로 무공광(武功狂)으로 알려진 구렴성을 도와 곤륜을 이끌고 있는 실질적인 지다성(智多星)이었다.
 오래 전 대사형이었던 구렴성과 이제자 우학성이 장문인이었던 호풍영의 직전제자로서 진산제자였다면 속인이었던 우금진은 속가제자였다.
 차이는 그것이었다.
 우금진이 이십 세의 젊은 나이로 무림을 횡협(橫俠)하며 악인들을 마구 주살하고 협의라는 이름아래 명성을 날리 수 있었던 것도, 이십 년 동안 자신의 모습을 감추고 살수 있었던 것도 따지고 보면 그가 속가제자였기 때문이었다.
 “청량선(淸凉扇)이 없어졌네.”
 우학성의 말에 우금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놀라지도 않았다. 아니 그는 이미 무엇인가 일어났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사문에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이십 년 동아 발을 끊은 사문에서 구태여 자신을 찾을 이유가 없다는 것도 미루어 짐작하고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지 못하고 있었으나 어느 정도는 예측하고 있었다.
 주위에 둘러앉았던 이막형과 구옥진은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한 표정이었고 백설은 관심이 없다는 표정이었다. 묘한 대치가 이루어진 형상이었다.
 “그것이 없어졌다고요?”
 우금진은 그리 놀라지 않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한동안 누구도 말을 하지 않았다.
 청량선은 곤륜파가 자랑하는 세 개의 기물 중 하나였다. 장문의 영부(靈符)는 아니라 하더라도 버금가는 효능을 가지고 있는 물건이기도 했다.
 문제는 청량선이라 불리어지는 부채에 쓰여진 한 초식의 기공(奇功)이었다.
 대안기공(大雁奇功)이라 불리는 내공심법이 기록되어 있다고 알려진 청량선은 곤륜에서 오 백 년이나 물려져 내려온 귀중한 보물이었다. 그러나 누구도 청량선에서 대안기공을 찾았다는 소문은 없었다. 역대의 장문인들도 욕심을 부렸을 것이 분명하지만 청량선에서 대안기공이라는 기예를 찾지는 못했다. 구렴성도 마찬가지였다.
 한동안 모두의 눈이 허공에서 얽혀들었다.
 
 
 3
 
 
 선천동부(善天洞府)라 불리는 산 중턱의 조그만 동굴은 이십 년만에 뜻하지 않던 방문을 받았다. 선천동부는 늘 어둠에 잠겨 있었다. 본시 사문에 죄를 지은 제자가 장문이의 명을 받아 참회를 하는 참회동 중의 하나인 선천동부는 이십 년 동안 한 사람에 의해 사용되어지고 있었다.
 “사숙! 천륜이 왔습니다.”
 선천동부는 곤륜파가 자리한 도성봉(道成峰)의 뒤쪽에 자리한 동굴이었다. 선천동부에 하나의 인형이 나타난 것은 날이 새어 가는 묘시(卯時) 무렵이었다.
 시커멓게 입을 벌린 동굴 속에서는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우금진은 한참동안 기다렸다. 아직 사숙이 죽었다는 이야기는 없었다.
 그가 곤륜에 다시 돌아와 들은 소문에 의하면 사숙은 우금진이 곤륜을 떠난 후에 단 한번도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조석(朝夕)을 공양하는 제자만이 유일하게 그의 얼굴을 볼 수 있다고 했다.
 “이미 잊혀진 사람을 부르는 자가 누구더냐?”
 땅에 깔리듯 낮은 음성이 울려왔다.
 오래 전에 관에 들어가야 했을 것 같이 늙은 목소리였지만 은은한 힘이 들어있었다. 애써 스스로 힘을 뺀 듯한 낮게 깔리는 목소리였다. 동굴에서 울려오는 소리라는 것을 모르지 않는 우금진이었다.
 우금진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가 가장 존경해 마지않는 사숙의 목소리였다. 우금진은 반색을 띄우며 동굴 앞으로 다가갔다.
 “사숙! 우금진입니다.”
 한동안 동굴에서는 말이 없었다.
 바람소리가 귓가를 스치고 새싹이 돋아나는 풀들이 가볍게 몸서리를 쳤지만 우금진은 움직이지 않고 동굴 속에서 다시 목소리가 울려나오기를 기다렸다.
 “들어 오라!”
 여전히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오자 우금진은 옷의 먼지를 털고 의관(衣冠)을 정성껏 고친 뒤 조심스럽게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드디어 그가 들어갔다.”
 어둠 속에 은신하고 있는 그림자는 이십여 장 밖에 몸을 숨기고 있었지만 달빛으로 인해 우금진이 동굴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일목요연(一目瞭然)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칙칙한 어둠으로 몸을 숨긴 자의 모습이 확연하게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가 잿빛이 도는 도복을 입고 있었고 머리에는 도관을 쓰고 있음이 그림자 속으로 드러났다.
 그는 곤륜의 제자였다.
 등에 맨 청강검의 수실이 오색이 어우러진 것으로 알 수 있었다. 곤륜의 제자들은 한결같이 병기에 오색의 수실을 매는 것이 오랜 전통이었다. 곤륜에 입문하여 무공을 익히기 시작하면 사부로부터 검을 받았다. 사부는 자신의 제자의 검에 오색으로 수실을 묶어줌으로서 곤륜의 제자이며 자신의 제자라는 것을 의식으로 행하는 전통이 있었다.
 “어서 알려야 한다.”
 곤륜의 제자는 급히 어둠 속을 벗어나 산길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어서 오너라!”
 머리가 산발(散髮)한 괴인은 우금진이 들어서자 반갑게 맞이했다.
 “사숙을 뵈옵니다.”
 우금진은 깊이 머리를 숙이고 바닥에 무릎을 꿇어 예를 올렸다. 사부에게나 하는 깊은 예의였다. 우금진을 바라보는 노인의 몸이 가볍게 떨렸다. 노인의 마음과 격동을 아는지 모르는지 한동안 우금진은 몸을 일으키지 않았다. 가볍게 떨리는 몸으로 보아 그가 오열(悟悅)을 하거나 몸을 추스르기에는 감정이 격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만 일어나거라. 그만 머리를 들도록 해라.”
 노인의 말에 우금진이 머리를 들었다. 눈가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동굴은 넓지 않았다.
 입구는 기어 들어가 듯 낮은 곳이었는데 안으로 들어가니 제법 넓어 성인 네 명 정도가 누워 잠을 잘 수 있을 것 같은 넓이였다.
 인공적으로 다듬은 동굴이었다.
 동굴 안에는 가느다란 향촉이 타오르고 있었다. 우금진이 몸을 움직이자 크게 휘청거리는 것이 평소에는 바람의 영향이 거의 없는 곳인 것 같았다.
 노인은 나무로 만든 침상에 결가부좌(結跏趺坐)를 한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앞에는 두 권의 책이 싸여 있을 뿐이었다. 그 외에는 흔한 서안(書案)하나 보이지 않았다.
 고개를 든 우금진은 노인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적어도 백살은 넘었을 것 같은 노인이었다. 나무침상에 앉은 꾸부정한 노인의 머리와 수염이 동굴바닥에 쓸리고 있었다. 앙상한 모습에 얼굴에는 죽음을 재촉하는 검버섯이 피어올라 자라고 있었다. 노인의 눈에 밝은 빛이 반짝이지 않았다면 누가 보아도 말라비틀어졌거나 죽었을 것이라 생각할 수 있는 모습을 지닌 노인이 나무침상에 앉아 있었다.
 “가까이 오너라!”
 “예, 사숙!”
 우금진은 다가가 사숙의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너를 이십 년만에 보는 것 같구나. 네가 돌아왔으니 이제는 죽어도 여한이 없구나.”
 우금진의 사숙, 한때는 오봉진인(五峰眞人)이라 불렸던 노인은 눈가에 진한 눈물을 흘렸다. 우금진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며 이십 년 동안 기다린 사람이었다. 노인은 현재 곤륜에 남아있는 가장 오랜 사람이었다. 우금진의 사부인 호풍영이 이미 십이 년 전에 죽은 것을 생각하면 명이 놀랍도록 질긴 사람이기도 했다.
 당 년의 세수 백 두 살인 오봉진인은 우금진을 기다리느라 죽을 수도 없었던 사람이었다. 목숨을 연명(延命)하기 위해 부득이 선천동부에서 기거하고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가 부득이한 사정으로 선천동부에서 기거해야 하는 이유를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우금진이기도 했다. 우금진이 곤륜을 떠나기 전에도 오봉진인은 선천동부에 들어앉아 자신을 채찍질하며 참회하고 있었다.
 “그래, 그 아이의 후손(後孫)은 찾았느냐?”
 “그렇습니다. 그 아이의 후손을 찾아 제가 제자로 키웠습니다.”
 “잘 했구나.”
 오봉진인의 얼굴에 희미한 웃음이 걸렸다. 그것이 안도(安堵)라는 것을 모르지 않는 우금진이었다. 어딘지 모르게 오봉진인의 얼굴에는 슬픔이 깃들였다. 오봉진인은 고개를 들어 의식적으로 우금진의 얼굴을 피했다. 그러나 이내 눈가에 떠오른 처연한 슬픔의 감정을 지으며 희미하게 웃었다.
 우금진도 보일 듯 말 듯한 웃음을 지었다. 비록 사숙의 목숨이 경각(頃刻)에 달했다고는 하나 그의 소원을 들어줄 수 있어 기쁘다는 표정이었다. 어느 모로 보아도 오봉진인이 오래도록 살 수 있으리라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그는 늙었고 지쳐 보였으며 눈가에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누구도 모르겠지?”
 “물론입니다. 그 아이가 백사매(白師妹)의 후인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오봉진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가에 흐르는 눈물은 쉽게 지워질 것 같지 않았다. 그것은 슬픔과 기쁨이 범벅된 눈물이었다. 우금진은 눈물이 흐르는 오봉진인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그이 얼굴에도 다시 슬픔이 안개처럼 젖어들었다.
 “언젠가 그 아이를 내게 보내주겠나?”
 “물론입니다. 내일이라도 보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고맙네.”
 오봉진인은 자신의 처지가 한심스럽다는 얼굴을 굳이 지우려 하지 않았다. 그가 왜 그런 얼굴을 지니고 있어야 하는지는 오직 두 사람만이 아는 사실이었다. 아니, 곤륜의 제자라면 모두가 아는 일이었지만 오봉진인의 일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것은 금기(禁忌)였다.
 오봉진인은 처연한 얼굴로 동굴의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천장은 아무 것도 없었다. 오로지 사람의 입김으로 오른 수증기만 동굴의 바위를 깎은 날카롭고 번들거리는 면에 구슬처럼 맺혀 있을 뿐!
 “제가 언젠가는 그 흉수(兇手)를 잡고 말 것입니다.”
 “사질이 돌아온 것은 분명 그런 목적이 있어서겠지. 나 또한 숨을 멈추기 전에 자네를 보고 싶었네.”
 오봉진인의 말을 듣던 우금진은 무릎걸음으로 다가갔다. 우금진이 손을 내밀자 오봉진인은 힘주어 손을 맞잡았다. 그들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손을 맞잡고 몸을 떠는 감격에 젖어있으면서도 오봉진인은 우금진의 눈을 마주보지 않았다. 의식적으로 피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우금진은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우금진도 마음이 바싹 타오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질에게는 할말이 없구나.”
 “아닙니다. 불가항력적(不可抗力的)으로 일어난 일입니다. 저는 누구도 원망하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 모두에게 고통을 준 흉수를 반드시 찾아낼 것입니다.”
 오봉진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봉진인으로서는 달리 어떤 표현도 할 수 없는 감정에 젖어있는 듯 한 표정이었다. 오봉진인보다는 우금진의 감정이 격해 보였다. 오봉진인은 그런 우금진을 마주 보지 못해 얼굴을 돌려 버렸다.
 오봉진인이 격정을 억누르며 가는 목소리를 뿌렸다.
 “아마도 그들 중 누군가는 사질이 이곳에 왔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네.”
 “그렇겠지요. 그들은 감히 저를 건들이지는 못할 것입니다. 백설이 백사매의 자식이라는 것도 알 리가 없지요.”
 “다행스러운 일이야.”
 오봉진인은 여전히 우금진의 손을 놓지 않았다.
 그들은 비밀을 간직하고 있었다.
 우금진이 이십 년 동안 사문에 모습을 보이지 않은 것도, 오봉진인이 선천동부에 들어가 세상과 담을 쌓은 것도 나름대로 이유가 있는 행동이었다. 누구도 모르는 일이었지만 흉수는 그들의 곁에 있었다. 그렇지만 그들도 흉수가 누구인지는 모르고 있었다.
 “사문에 일이 벌어진 듯 합니다.”
 “무슨 일인가?”
 곤륜의 담 안에 있지만 오봉진인은 우금진보다도 소식이 어두웠다. 곤륜에 돌아온 지 하루가 지나지 않은 우금진보다도 오봉진인은 아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그가 의식적으로 사문의 소식을 듣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알고자 한다면 아침저녁으로 그에게 공양(供養)을 하기 위해 다가오는 제자에게 들을 수도 있을 테지만 그는 모든 것을 잊고 사는 것 같았다.
 “청량선이 사라졌다고 합니다.”
 “누군가 헛고생을 했군.”
 “무슨 말씀이십니까?”
 “십중팔구(十中八九)는 아마 나를 번민(煩悶)의 늪으로 빠지게 만든 자가 가지고 갔을 것이다. 당시에도 나는 흉수가 노린 것은 청량선이 아니었나 생각했었다.”
 “흉수가 청량선을 노리는 이유가 있었습니까?”
 오봉진인이 그제야 우금진의 손을 놓았다. 쭈글쭈글해진 손 거죽이 새삼 세월의 흐름을 이야기 해주는 것 같았다. 우금진은 손을 끌어 다리 위에 가지런히 놓았다.
 “당시에 소문이 나기를 청량선에는 대안기공이 적혀 있다고 알려져 있었다.”
 “짐작이 가는 일입니다.”
 우금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곤륜 제일의 기재(奇才)라 했던 오봉진인을 영원히 선천동부에 가두어 버린 흉수가 노린 것이 무엇인지 이해가 가기 때문이었다.
 우금진은 사숙을 바라보았다. 너무도 가여운 사람이었다. 천하를 굽어보던 과거의 호연지기(浩然之氣)는 모두 사라져 버리고 이제는 동굴에서 세월을 죽이는 노물(老物)의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이십 년 전, 곤륜이 자랑하는 세 개의 신물은 장문인으로부터 사사를 받고 있던 사형제(師兄弟)가 각각 하나씩 보관하고 있었다.
 오봉진인은 청량선을 보관하고 있었고 누군가 그에게 청량선을 뺏어 가려 위해(危害)를 입혔던 것이었다. 그것이 오봉진인 뿐만이 아니라 우금진까지 칩거하게 만든 원인이었다. 이미 오래 전 일이었지만 그들 중 누구도 잊은 자는 없었다. 세월이 자날수록 오히려 새로워지는 생각에 그들 모두는 각각 다른 곳에서 괴로움을 겪어야 했었다.
 “장문인이 사질에게 어떤 요구를 하더라도 신중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야.”
 “알고 있습니다.”
 오봉진인의 말에 우금진은 가볍게 대답했다.
 장문인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를 의심의 선에서 제외(除外)시킬 수는 없었다. 우금진에게 백설을 제외한 모두는 의심의 대상이었다. 특히 장문인을 포함한 모든 사숙과 속가제자들을 포함하는 넓은 범위였다. 굳이 장문인을 제외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다만 다름 사람과 같은 선상에서 바라볼 뿐이었다.
 “이목이 있어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그렇게 하게나. 그 아이를 보내주는 것을 잊지 말게.”
 “명심하겠습니다.”
 우금진은 고개를 깊이 숙여 사숙에 대한 예의를 취하고 몸을 일으켰다. 우금진이 어둠 속을 걸어 동굴의 입구로 다가갔다. 오봉진인은 물러가는 우금진을 바라보았다.
 “사질?”
 빛이 밝아오는 동굴로 나가려던 우금진이 몸을 돌렸다.
 “조심하게!”
 우금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숙이 무엇을 조심하라는 것인지 구태여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우금진은 갑자기 자신의 신세가 물위에 뜬 낙엽 같다는 생각을 했다.
 한순간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돌아설 수 없는 일이었고 이마 한발을 들어놓은 상태이기도 했다. 모든 것이 사문의 일이기는 했다.
 ‘한심한 일이다.’
 우금진은 동굴을 나섰다.
 “항시 조심하게······ 그는 가까이 있네.”
 우금진은 등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들으며 동굴을 나섰다.
 
 
 3장 은자(隱者)는 인세(人世)에 모습을 드러내고
 
 
 1
 
 
 백설이 선천동부에 다다른 것은 이슥한 밤이었다.
 멀리 하늘에는 부스러진 별들이 서로를 잡으려 손을 내밀 듯 흩뿌려져 빙그르르 도는 듯 했다. 마치 구슬이 쟁반 위를 도는 듯한 착각에 백설은 한동안 서있었다.
 ‘세상은 넓구나.’
 선천동부로 오르며 백설은 하늘에 마구 뿌려진 별의 조각들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너무나 아름다웠다.
 빙하연에서도 늘 별을 보고 자랐지만 산의 기저(基底)에서 바라보는 별은 그 흥취가 달랐다. 그가 그 동안 보아왔던 별은 얼음의 조각들이었다. 차가운 기운이 뿌려지는 별이 늘 주위에 있었다.
 사부를 따라 곤륜에 들어 온지 이틀이 되어가고 있었다. 처음과는 달리 조금은 서먹서먹한 감정이 많이 사라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신기한 동물을 바라보듯 하던 제자들도 나름대로 잘 대해 주었고 구옥진은 세상의 이치를 가르친다는 핑계로 낮 동안 그를 졸졸 따라 다녔다. 모든 제자들이 출입구역(出入區域)이 한정되어 있었으나 여기저기 마음대로 들락거리도록 허락을 받은 터라 백설은 어디고 갈 수 있었다.
 내원과 외원, 후원을 포함하여 군륜파의 대소전각과 여러 명의 적지 않은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느라 하루가 언제 갔는지도 알 수 없었다.
 만약 구옥진이 곁에 없었다면 그는 저녁을 먹는 시간조차 알 수 없었을 것이었다. 하루종일 구옥진은 마치 사랑하는 여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를 따라다녔다. 덕분에 이것저것 곤륜파에 대해 이야기를 들을 수도 있었고 그를 반기는 여러 사람도 만날 수가 있었다.
 모두들 잘 대해 주었다.
 백설이 우금진의 제자라는 사실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오봉진인이 살아있기는 했지만 그가 일체의 행동을 중지했기에 장문인인 구렴성이 최고 배분이었다.
 백설은 구렴성과 사형제의 관계인 우금진의 제자였기에 어디에 내어놓아도 배분에서는 뒤지지 않았다. 일찍이 입문(入門)하여 나이가 사십이 된 제자들도 그에게 함부로 말을 놓거나 하대(下待)를 할 수 없었다. 사문은 나이보다 배분이 먼저였고 삼대제자인 백설의 배분은 매우 높은 것이었다.
 “누가 왔느냐?”
 동굴에 다다르자 기다렸다는 듯한 늙은 목소리가 울려나왔다.
 백설은 목소리의 주인을 알고 있었다. 그가 선천동부로 오게 된 것도 사부인 우금진 때문이었으므로 누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알고 있었다. 우금진은 백설에게 어떤 일이 있어도 선천동부를 들리라 했었던 것이다. 그것도 빠를수록 좋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백설은 흠칫하는 기색을 보였으나 곧 동굴 입구로 다가갔다.
 “사숙조(師叔祖)! 백설입니다.”
 “오, 어서 들어오너라.”
 반가움이 절절히 녹아있는 목소리를 들으며 백설은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발을 옮기면서도 가슴에 이는 궁금증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가 누구이기에 한번도 보지 못한 나를 불렀고 이토록 다정하게 대해준다는 말인가?’
 백설은 마음이 붕 드는 것 같았다.
 이미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다. 우금진이 자신을 보낼 때 그가 누구인지는 대략 이야기를 해 주었었다. 그러나 그가 자신을 보고자 한 이유는 말하지 않았었다. 다만, 오래 전에 사숙조가 사부를 좋아했었다는 말로 백설의 의아심을 피해갔던 우금진이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자신을 불렀다는 것은 의아한 일이었다. 사부의 정리가 오봉진인에 미쳤다고는 해도 백설과는 생면부지(生面不知)의 사람이었던 것이다.
 
 ***
 
 “들어가는군!”
 어둠의 그림자는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그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다. 짙은 어둠 속에 몸을 묻고 있는 그림자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은신술(隱身術)을 펼치고 있었다. 그는 자연과 동화되어 있는 것처럼 몸을 움직였다. 내공이 강한 백설도 자신을 뒤따르는 자가 있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한 듯 동굴 앞에 서서 한참동안 서 있었으나 뒤 한번 돌아보지 않았다.
 달이 뜨기는 했지만 나무와 넝쿨식물이 만들어낸 어둠은 그들 안전하게 숨겨주고 있었다. 그가 백설을 따라왔다는 것을 아는 자는 없었다.
 “무서운 내공이다. 놈은 그 동안 여섯 번이나 뒤를 돌아보았다. 그 중에 세 번은 내 인기척을 느낀 것이 분명하다.”
 어둠 속의 사내는 진정으로 놀라고 있었다.
 백설의 겉모습을 본다면 그는 분명 얼뜨기였다. 세상이 무엇인지도 모를 뿐 아니라 말을 하는 모습도 그가 이십 오 세의 나이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순진하다고 보면 좋은 표현이었으나 세상을 모른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았다. 그림자도 백설이 아직 세상의 명리(名利)와 풍진(風塵)을 모르고 살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둠의 그림자는 나무넝쿨이 만든 그림자 속에서 머리를 내밀었다. 그러나 키보다 두 배는 큰 계수나무 그림자로 인해 자세하게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가 어둠 속에 숨어있어도 희미하게 뿌려내는 달의 편광이 그가 갖추고 있는 복장은 알 수 있도록 적절하게 안배(按配)를 하고 있었다.
 머리에 도관을 쓰고 몸에는 잿빛 도복을 걸치고 있다는 정도를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러나 얼굴을 자세하게 알아보기에는 날이 너무도 어두웠다.
 “그들이 모종의 관계가 있다는 말인가?”
 어둠의 목소리에는 진한 의구심이 깔려있었다. 사내는 여전히 어둠 속에 몸을 맡기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방이 불러나 온 듯 어두워졌다.
 하늘을 밝히던 달이 검은 먹구름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먹구름은 사람의 손바닥 보다 크게 보였다. 한동안 어둠이 계속될 것 같았다.
 “그들이 어떤 관계인지 알아둘 필요가 있다.”
 그림자는 몸을 이동시키기 시작했다. 마치 구름에 달 가듯 유연한 신법이었다. 그림자는 곧 동굴의 입구에 다가갔다. 벽에 기댄 그는 귀를 세우며 동굴 입구에 가져다 대었다. 안에서는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다만 발자국 소리만 들려오고 있었다.
 백설이 걸어 들어가는 소리였다.
 “응!”
 그림자의 몸이 급하게 재주를 넘으며 물러섰다. 그림자는 순식간에 어둠 속으로 몸을 숨기고 있었다. 놀랍도록 뛰어난 신법이었다. 그가 곤륜의 제자라면 그토록 뛰어난 신법을 지닌 자는 많지 않으리라는 것을 한눈에 알 것 같았다.
 그림자가 급히 몸을 숨기고 곧 하나의 인형이 나타났다. 창백하게 빛을 발하는 머리칼이 바람에 흩날리고 있었다. 한눈에 보아도 이틀 전 곤륜에 나타난 우금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흰 머리카락으로 인해 멀리서 보아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누군가 있었던 것 같군. 두개의 체온(體溫)이라······ 하나는 백설의 체온이라면 나머지 하나는?”
 우금진은 어둠 속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그의 뛰어난 내공으로도 사람의 숨소리나 체온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한동안 어둠을 노려보던 우금진은 머리를 좌우로 흔들며 동굴 쪽으로 돌렸다.
 그림자는 이미 떠나고 없었다.
 “빠른 놈들이다. 더욱 주의하지 않는다면 결국 우리도 마수(魔手)를 피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우금진은 주먹을 굳게 쥐며 동굴 입구를 막아섰다.
 
 
 2
 
 
 “어서 오너라! 네가 백설이더냐?”
 백설이 동굴로 들어서자 앙상하게 마른 노인이 나무침상에서 상체를 세우고 얼굴에 반색을 띄우며 반겼다. 백설은 망설이지 않고 다가갔다. 그가 오봉진인이라는 것은 이미 우금진을 통해 알고 있는 백설이었다. 전신에 마치 해초(海草)처럼 자란 머리와 수염이 신기하기는 했지만 백설은 오봉진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자신의 머리카락도 엉덩이에 닿을 정도로 길어 있다는 것이 생각나자 땅에 끌리는 것도 별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거부감이 사라졌다.
 “제자가 사숙조를 뵙습니다.”
 백설은 연속으로 삼배(三拜)를 올렸다.
 그가 절을 하는 것은 사문의 규범(規範)을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니었다. 다만 우금진이 알려준 사실을 몸으로 보여주고 있을 따름이었다. 절을 하는 백설의 모습을 바라보는 오봉진인의 얼굴에 알 듯 말 듯한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어딘지 모르게 아픔이 느껴지는 그런 얼굴 표정이었다.
 오봉진인의 표정이 어떻게 변하던지 백설이 알 수는 없었다. 절이 끝났을 때, 오봉진인의 모습은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기 때문이었고 늙은 얼굴에는 반갑다는 표정만이 남아있었다. 백설로서는 오봉진인의 얼굴이 수차의 변화를 겪었다는 것을 알 리가 없었다.
 “이리 앉거라.”
 백설은 오봉진인의 말을 따라 돌로 만들어진 의자에 엉덩이를 디밀고 앉았다. 의외로 돌은 따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것으로 보아 조금 전까지 오봉진인이 앉아있었던 의자 같았다.
 오봉진인은 희미한 향촉 불 아래에서 백설의 얼굴을 요모조모 살펴보았다. 백설의 표정은 세상 물정을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이기는 했지만 얼굴에 흐르는 빛은 순진무구(純眞無垢)하여 어린아이 같았다.
 ‘이 아이는 난향(蘭香)의 모습을 빼다 박았구나. 이 아이가 세파(世波)를 이겨낼 수 있을지 걱정이구나.’
 오봉진인의 눈이 걱정을 머금었다.
 난향?
 분명 여자의 이름이 분명한데 그녀는 누구였는지······ 백설은 오봉진인의 마음속에 일고있는 우려와 염려를 알지 못했다. 오봉진인의 생각 속에서 백설의 얼굴과 대비가 되는 것은 이유가 있을 것이었다.
 “사숙조께서 저를 부르신 이유가 있을 것 같습니다.”
 백설은 불안한 심정을 참을 수 없었는지 오봉진인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오봉진인은 가벼운 상념에서 깨어났다.
 “그건 이야기가 길구나. 너를 보자고 한 것은 우금진의 제자이기 때문이란다.”
 “사부님이요?”
 “그렇다. 내 본시 우금진을 가장 사랑했었지. 분명 장문사형의 제자이기는 했지만 그는 나의 제자나 같았단다. 내가 제자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도 따지고 모면 그런 이유가 있었단다. 이 말이 답이 될는지 모르겠구나.”
 백설이 고개를 끄덕였다.
 곤륜에 들어온 지 이틀이 되었기 때문에 그는 나름대로 사문에 배분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자신만 하더라도 우금진의 수제자(首弟子)이기는 했지만 배분이 말할 수 없이 높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것이 나이에 관계없는 사문의 배분이었다.
 더구나 그의 사부인 우금진은 엄밀하게 말해 속가제자였다. 전대 장문인이 맞아들인 속가제자인 것이기에 본파의 제자들과 그 격이 다르지 않았다. 본시 속가제자는 본파의 제자들보다 경시(輕視)되는 풍조가 있었으나 누구도 우금진을 경시하지 못했다. 그 이유를 백설은 모르지만 우금진의 무공이 현존 곤륜파의 제자 중 오봉진인을 제외하고는 최강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사숙조는 곤륜 최고의 어른이겠군요?”
 “그렇게 따지자면 그렇다.”
 오봉진인은 자신이 할 말이 있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그의 눈은 단 한시도 백설의 몸에서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눈길은 어버이처럼 자애로웠다. 만약, 배분만이 아니라면 누구든 그의 눈길이 할아버지와 같다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너를 부른 것은 이유가 있어서다.”
 오봉진인의 말에 백설은 자세를 고치며 다가앉았다. 우금진은 그에게 어떤 경우라도 오봉진인의 말을 새겨들으라고 했었기 때문이었다.
 백설에게 오봉진인을 만나러 가라고 이야기했을 때 평소와는 다른 우금진의 모습을 보였었다. 그런 우금진의 모습을 보았기에 백설은 한시도 딴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우금진은 백설을 자식처럼 사랑했다. 만약 자신의 자식이라 키웠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우금진은 백설을 자식이라 하지 않고 제자로 키웠다. 그런 우금진이 오봉진인을 이야기할 때, 평소와 달랐다. 백설은 묘한 감정의 기복을 느낄 수 있었다.
 “너에게 한 초식의 무공을 전수해 주기 위해서다.”
 “감사합니다. 그러나 사손(師孫)은 사부님으로부터 무공을 전수 받고 있습니다.”
 “알고 있다. 그러나 나에게도 곤륜의 비밀밀결이 전수되고 있다. 내가 죽는다면 아마도 그것은 절전(絶傳)될 것이다.”
 백설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금진은 그에게 무공을 가리키며 곤륜의 제자라면 누구나 알고있는 무공과 비밀밀결을 구분하여 가리켰다. 우금진도 적지 않은 미밀밀결을 지니고 있었다.
 “내가 너에게 전수해 주고자 하는 비밀밀결은 일반적인 비밀밀결과는 다르다.”
 백설은 눈을 빛냈다.
 그가 기억이라는 것을 할 수 있는 모든 곳에 무공이 박혀있었다. 우금진의 품에 안겨 무공을 익히기 시작한 그였다. 세상을 모르는 그에게 무공은 희망과도 같았고 사람을 연결시켜 주는 고리와 같았다. 백설로서는 무공을 통해 우금진과 연결되고 있다고 생각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누가 전수하는 무공이라도 마다할 리가 없었다.
 “비밀밀결은 얻기가 어렵다고 알고 있습니다.”
 백설은 나직하게 말했다.
 우금진이 그에게 전수한 비밀밀결로 보아서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사숙조가 이야기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밀밀결이라 하지만 깊이 파고 들어가면 원리(原理)에 불과했다. 무공의 핵심이기는 하지만 수백 년 동안 실전을 통해 얻어진 깨달음일 수가 있었다.
 우금진의 말이 그랬다.
 뿐만이 아니라 비밀밀결을 자세하게 들여다보면 의외의 결과가 있기 마련이었다.
 “보통의 비밀밀결은 익히고 있는 무공을 같은 상황하에서 더욱 강하게 전개하는 것을 주축으로 하고 있다.”
 백설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봉진인의 말은 하나도 틀린 것이 없이 우금진의 그간 가르침과 일치했다.
 “제자들은 누구나 같은 무공을 익히기 마련이다. 다만 자질과 체질, 수련의 기간에 따라 그 능력이 달라지기는 하지만 문제는 비밀밀결을 얻을 수 있느냐, 얻지 못하는가에 따라 위력이 달라지는 것으로 알고 있을 것이다.”
 백설이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오봉진인의 말대로 곤륜의 제자들은 사문의 검법과 도법을 배웠다. 제자라면 누구나 같았다. 다만 어느 정도의 숙성(熟成)에 따라 점차 강하고 현묘(玄妙)한 무공을 익히게 되지만 그것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기회였다. 차이가 있다면 장문제자들에게 조금 더 많은 기회가 주어지는 정도였다. 곤륜의 무공은 어느 제자나 공평하게 익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부가 누구냐에 다르다. 그들은 각각 오랜 세월을 무공수련과 협행(俠行)에서 얻은 경험으로 무공에 적합한 비밀밀결을 만들기 때문이다.”
 “그건 무엇입니까?”
 “그것은 익힌 무공을 강하게 사용하는 방법과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백설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금진도 그에게 무공을 전수하며 때때로 비밀밀결을 전수했었다.
 발경(發經)의 원리라던가 하는 것은 누구나 내공을 익혔다고 해서 익혀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방법을 전수 받는 것이었다. 똑같은 무공을 익혀도 발경을 제대로 할 수 있느냐의 차이가 수십 배의 현격한 차이를 가지고 오는 것이 바로 내가기공을 바탕으로 한 상승무공(上昇武功)이었다.
 “저도 사부님으로부터 적지 않은 비밀밀결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진정한 밀결이라 할 수 없다.”
 “그렇다면 무엇이 비밀밀결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오봉진인의 부정적인 말에 백설은 의아한 표정이었다. 그가 아는 비밀밀결은 우금진이 전수해준 것으로 이미 완벽하지는 못해도 제법 높은 경지에 가까운 성취를 보이고 있었다.
 백설이 아는 바로는 곤륜에서 우금진을 능가하는 고수는 없다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구옥진이 이야기를 한 것이므로 백설은 의심하지 않았다. 곤륜에 들어와 들어본 바로도 우금진은 곤륜이 나은 기재인 것만은 확실했다. 특히 그가 지닌 살명(殺名)은 정파의 이름에 맞지는 않는 것이지만 그것으로 그가 악인이라 할 수 없다고 이야기하는 제자들이 대다수였다. 특히 젊은 제자들은 우금진을 추종하고 있었다.
 “진정한 비밀밀결은 따로 있다.”
 백설은 눈을 빛냈다.
 그가 아는 세상은 넓지 않았다. 산과 사부, 그리고 몇 일 사이에 만난 곤륜의 사람들이 전부였다. 그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공이었다. 우금진은 이십 년 동안 그에게 혹독한 수련을 시켰다. 그래서 우금진도 그의 무공 성취에 관해서는 만족한 수준이었다.
 “믿을 수 없습니다.”
 백설은 도리질을 했다.
 그가 아는 곤륜의 무공은 적지 않았다. 그도 우금진이 전수해주어 곤륜의 모든 무공을 접하고 있었다. 모든 것이 완벽하지는 못해도 한번씩은 익히고 있었다. 다만 아직은 내공이 부족한 관계로 모든 것을 완벽하게 펼쳐내기란 시간이 필요했지만 어린 나이에 비해서는 놀라운 성취를 지니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적양공은 어느 정도 성취했느냐?”
 갑작스러운 물음이었다.
 ‘내 내공을 알고자 함이신가?’
 당연한 이야기였다.
 적양공은 곤륜의 내공심법이었다. 무공을 내공과 외공(外功)으로 분류한다면 곤륜의 내공은 적양공이었다.
 “겨우 칠성에 다다랐을 뿐입니다.”
 “선재(仙才)로다. 네 나이에 칠성의 적양공을 익힌 제자는 없었다. 네 사부도 네 나이 때는 겨우 오성을 익히고 있을 뿐이었다.”
 백설의 얼굴이 밝아졌다.
 자신은 늘 무공의 성취가 느리다고 생각했었다. 우금진은 말을 하지 않았으나 백설은 그것이 자신이 무공성취가 느린 탓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내가 아주 머리가 나쁜 것은 아니구나.’
 마음의 위안이 되었다.
 “외공은 어느 정도 익혔느냐?”
 “세 가지의 검법을 익혔고 두 가지의 도법도 익혔습니다. 사부님의 말씀으로는 제가 경험하지 못한 곤륜의 무공은 없다고 하셨습니다.”
 “좋은 일이다. 병기는 무엇을 선택했느냐?”
 “사부님처럼 륜을 선택했습니다.”
 오봉진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이 어리는 밝은 웃음은 극히 만족스러워 하는 것 같았다.
 오봉진인은 오른팔을 걷었다.
 “네 왼팔에 채여진 륜은 양륜(陽輪)이겠지?”
 “그렇습니다.”
 백설은 자신의 왼팔을 내려다보았다. 팔목에 붉은 기운을 띄고 있는 팔찌가 걸려있었다. 사부가 오래 전에 그에게 준 것이었다.
 그가 차고 있는 륜은 팔찌처럼 보이는 것이지만 아주 작은 륜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 륜에 미세하게 드러나 있는 기관장치(機關裝置)를 건드리면 팔찌에서 뾰족한 톱니와 같은 칼날이 나오게 되어 있는 것이었다. 그것을 날려 적을 베는 것으로서 내공이 어느 정도의 경지에 이르게 되면 기관장치를 사용하지 않아도 마음대로 발출하고 거두어들일 수 있었다. 뿐만아니라 톱니를 사용해 적을 공격할 수도 있었고 톱니를 사용하지 않고 비륜 자체로만 적을 공격할 수 있었다.
 “그것은 본시 한 쌍이었다.”
 “한 쌍이라뇨?”
 “오래 전 나의 사부이신 곤륜풍백(崑崙風伯) 이가성(李駕) 장문께서 나에게 물려준 것이었다. 그중 하나를 네 사부에게 주었었다.”
 오봉진인은 자신의 오른팔을 걷었다.
 색이 바래 재색으로 보이는 그의 청의도복이 걷혀지자 팔목에 감긴 하나의 팔찌가 드러났다.
 백설은 놀라는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오래도록 산에 살아 인간의 감정을 숨기는 법을 알지 못했다.
 “어?”
 백설은 자신의 왼팔을 바라보았다. 이어, 다시 오봉진인의 오른팔목을 바라보았다.
 모양이 같은 팔찌가 보였다.
 다른 것이 있다면 백설이 차고 있는 팔찌는 붉은 색이라는 사실이었고 오봉진인이 차고 있는 팔찌가 백색이라는 차이 뿐이었다.
 “타륜신공(打輪神功)을 전개할 줄은 아느냐?”
 “구성에 이르렀습니다.”
 “호오! 경하할 일이로구나.”
 오봉진인은 감탄을 뿌리며 팔에서 팔찌를 끌러내었다. 팔찌는 무엇으로 만들어진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쇠도 아니었고 옥도 아니었다. 백설의 팔목에 채워진 것도 같은 재질로 만들어져 있었다. 오랫동안 팔찌가 무엇으로 만들어진 것인지 알아보려 했으나 백설은 알 수 없었다.
 오봉진인은 팔찌를 내밀었다.
 “이것이 네 몸에 있는 팔찌와 합쳐져 일월비륜(日月飛輪)이라 부르는 것이다. 네가 타륜신공을 익혔다면 아마 사용할 줄 알고 있을 것이다.”
 백설은 오봉진인이 내미는 음륜(陰輪)을 받지 못했다. 섣불리 받을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오봉진인의 흰 눈썹이 꿈틀하고 흔들리며 눈썹 끝이 가늘게 말렸다.
 분노는 아니었다.
 안타까움에 가까운 그런 반응이었다.
 “받아라. 본시 일월비륜은 한 쌍이니라. 아마도 너는 그것을 요긴하게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감사합니다. 사숙조.”
 백설은 두 손으로 음륜을 받아 자신의 손목으로 가져갔다.
 본시 일월쌍륜은 일륜(日輪)이 양을 나타내게 되어 있었고 월륜(月輪)이 음륜으로 두 개는 서로 상극과 보합을 이루고 있었다. 무엇보다 타륜신공은 두 개의 비륜을 사용하는 무공이기도 했다.
 찰카닥!
 미세한 소리가 동굴을 울리고 두 개의 비륜이 손목으로 감겨들었다.
 “내가 지니고 있는 비밀밀결을 언젠가는 너에게 전해주겠다. 지금은 시기가 아니다.”
 “감사합니다. 사숙조!”
 백설이 고개를 숙였다. 오봉진인은 자애스러운 눈길로 백설을 바라보았다. 어딘지 모르게 회한(悔恨)과 안타까움이 점철(點綴)된 눈길이었다. 그가 생각하고 있는 백난향과 백설이 묘한 관계가 있기 때문인 것 같았다. 아마도 그는 백설을 보며 백난향을 생각하는 것 같았다.
 백설은 머리를 숙이고 있어 오봉진인의 눈길을 의식할 수가 없었다. 또한 백설은 백난향이 누구인지도 알지 못하고 있었다
 당연한 일일수도 있었다.
 우금진은 백난향에 대해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고 백설도 이제껏 자신이 누구의 후손(後孫)인지 물어본 적이 없었다. 다만 언젠가는 자신이 자연히 알게 되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너는 난향과 너무 닮았구나?”
 오봉진인은 무심코 입을 열었다. 전혀 생각에 없던 말이었기에 백설은 눈을 들었다.
 백설의 눈은 스스로를 의심해야 했다.
 분명 귀에서는 오봉진인의 이야기를 들은 것 같았는데 오봉진인은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행동으로 보아서는 전혀 말을 한 것 같지 않았다.
 “난향이 누구죠?”
 백설이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오봉진인은 그의 말을 듣지 못했는지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백설은 오봉진인이 자신의 눈을 의식적으로 피한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사숙조라는 배분은 그리도 높은 것이었다.
 오봉진인은 천장에 돌려져 있던 눈을 내리며 지나가는 듯한 말투를 흘렸다.
 “이 동굴에서 가장 귀한 것이 있다면 네가 앉아있는 의자니라. 명심하거라.”
 백설은 다시 의아한 눈으로 오봉진인을 바라보았다. 그들 그들의 눈앞에 벌어진 상황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야기를 하는 오봉진인이었다.
 ‘의자 이야기는 왜 하는 거지?’
 백설은 의아함을 감추지 않았지만 굳이 되묻지는 않았다. 아마도 자신이 잘못 들었나 보다고 생각했다.
 “이미 날이 밝았구나. 내일 다시 오겠느냐?”
 “예!”
 오봉진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백설은 대답을 했다. 어딘지 모르게 오봉진인의 모습에서 자신을 끌어당기는 힘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과연, 뒤를 돌아보니 입구가 희미하게 밝아오고 있었다.
 
 
 3
 
 
 백설이 동굴을 나섰을 때는 날이 밝아 오는지 동쪽 산줄기에서 샛노란 열기(熱氣) 덩어리가 솟구치고 있었다.
 “사부님!”
 백설은 동굴입구에 서있는 우금진을 보고 놀라 소리쳤다. 우금진은 동굴 입구에서 삼십여장 떨어진 바위 위에 앉아 있었다. 마치 유람(遊覽)이라도 나왔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백설은 우금진이 오래 전에 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우금진의 어깨 우에는 희미한 물방울이 보였다. 마치 뿌연 안개의 입자처럼 생긴 물방울은 태양을 받아 편광을 다시 뿜어내고 있었다.
 이슬의 알갱이였다.
 “많이 배웠느냐?”
 백설이 나타나자 우금진은 얼굴 만면에 웃음을 띄우며 물었다. 바위에서 일어난 우금진은 백설을 향해 조용한 발걸음으로 다가왔다.
 의도적인 행동이었다.
 자신이 동굴에서 어떤 이야기가 진행되었는지 듣지 못했으며 알지도 못한다는 의도적인 몸 동작을 모를 리가 없는 백설이었다.
 “사숙조님의 고견(高見)을 들었습니다.”
 우금진은 빙그레 웃었다. 그러나 그의 눈은 계수나무와 넝쿨식물이 어우러진 곳을 노려보고 있었다. 아무 것도 느낄 수 없는 것 같았지만 그는 사람의 흔적을 느낄 수 있었다. 이미 그는 사람이 있었다는 발자국을 확인한 뒤었다.
 “그만 가자꾸나.”
 우금진이 몸을 돌렸다.
 
 
 4장 혈월(血月)이 만건곤(滿乾坤)하고
 
 
 1
 
 
 쩡!
 만약 얼음이 언 강가에 이토록 뜨거운 태양이 내리 부어졌다면 녹기도 전에 깨졌을 것이다.
 태양이 모든 것을 말려 죽일 것 같은 오시(午時)가 지나고 냇가에서 목욕을 하는 발가벗은 아이들의 목을 새카맣게 태우는 미시가 다가오는 시각이었다.
 청해의 태양은 뜨거웠다.
 일교차(日較差)가 심하기로 월경에 시달리는 풋내기 계집아이처럼 밤과 낮이 예측할 수 없는 청해였다. 낮은 모든 것을 익혀 버릴 것 같지만 밤은 모든 것을 얼려버릴 것 같은 청해의 북부지방은 그야말로 지옥을 방불케 했다.
 자달목분지(紫達木盆地)는 뜨거운 태양으로 이글거렸으나 저녁이 지나고 밤이 돼도 그토록 뜨거우리라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곤륜산은 자달목 분지와 비견될 정도로 날씨가 변덕이 심했다.
 “먼지라······ 드문 일이야.”
 우금진은 손으로 목에 감긴 목도리를 끌어올리며 원망스러운 듯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보기 드믄 형상이 펼쳐져 있었다.
 자달목분지는 사방이 관목과 발목을 덥는 잔 풀로 뒤덮인 곳이었다. 곳곳에 독충(毒蟲)이 우글거리는 습지(濕地)와 소금기가 녹아있는 염호(鹽湖)로 인해 바람이 불어도 날릴 먼지가 흔치 않았다.
 웬일인지 하늘은 붉은 빛이었다.
 붉은 황사가루가 오래된 전각을 털어 내듯 사방으로 흩날리고 있었다.
 “처음 있는 일이지요? 사숙!”
 목소리가 울리며 희미한 황토바람 사이로 네 개의 사람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삼남일녀(三男一女)는 각기 가는 면사로 만들어진 목도리로 목과 얼굴을 감싸고 길을 재촉하고 있었다. 우금진의 뒤에는 이막형이 따르고 있었다.
 우금진의 흰 머리카락은 태양의 빛을 받아 동경(銅鏡)처럼 빛을 반사하고 있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머리에 덮이는 황사로 인해 점점 제 모습을 잃어가고 있었다.
 나머지 이 인은 그들보다는 십여 보 뒤를 따르고 있었다. 제법 몸에 어울리는 청의장포(靑衣長布)를 입은 백설이 얼굴을 숙이고 걷고 있었고 몸의 굴곡이 드러나는 청의 무복을 입은 구옥진이 그의 뒤를 바싹 따르고 있었다. 그녀는 아예 챙이 넓은 방갓을 쓰고 있어 얼굴이 자세히 보이지 않았지만 백설의 머리카락을 보며 걷고 있다는 것은 분명했다.
 “사형은 언제나 그 머리를 올려 묶을 거죠?”
 구옥진이 지나가는 말처럼 백설에게 물었지만 백설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백설의 머리는 제법 다듬어져 있기는 했다. 머리를 가지런히 빚어 붉은 실로 묶었을 뿐만 아니라 땅에 끌릴 것 같던 머리가 무릎 높이까지 다듬어져 있었다. 그러나 누구에건 눈에 뜨이는 모습이었다. 백설이 대답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구옥진의 눈이 샐쭉하게 변했다.
 그들은 간혹 가다 서다 하기를 반복했다.
 길을 안내하는 사람은 이막형 같았지만 자욱하게 깔린 황사로 인해 간혹 길을 잃었는지 주위를 돌아보고는 했다.
 “이 길이 맞는 것 같은가요?”
 “물론이야. 이십 년 전 내가 자랄지(紫剌池)에 가려고 길을 나섰을 때도 이 길을 갔었지.”
 이막형의 말에 우금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황사가 입으로 들어가는지 입을 막고 말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말소리는 웅얼거리는 것 같아 들렸다. 이막형은 다행히 우금진의 말투를 알고 있어 놓치지는 않고 말아듣는 것 같았다. 이막형은 우금진의 곁에 바싹 다가들어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둘은 나이가 비슷했다. 배분을 떠나 잘 통하는 사이이기도 했기에 그들의 말투도 정겨웠다.
 “어서 오너라!”
 이막형이 뒤를 돌아보며 낮게 소리쳤다.
 그의 말을 알아들었는지 백설이 빠르게 발을 움직였고 뒤를 따라 구옥진이 따라왔다. 그녀의 목에 잔뜩 낀 모래가루가 흉하게 목에 선을 따라 그어졌다.
 구옥진은 부는 바람과 황사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보였다.
 “사형, 천천히 좀 가요.”
 다가온 구옥진이 투정을 부렸다. 그녀는 달리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죽을 맛이었다. 그들 중 가장 무공이 약하기도 했지만 얼굴에 달라붙는 모래는 미칠 지경이었다. 누구하나 그녀를 위해 방법을 생각하지 않았다.
 구옥진은 그들에게 섭섭한 감정을 지울 수가 없었다.
 “미안, 어쩔 수가 없어서 그랬다.”
 이막형은 금세 뾰로통해진 구옥진을 다독거렸다. 눈에 보이지는 않아도 그녀가 제법 화가 치밀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늘 보호를 받던 그녀로서는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이막형은 언뜻 그녀가 다른 때보다 더 애교를 부린다는 생각을 했다. 다른 때와는 달리 더욱 죽는 다는 듯한 목소리였기 대문이었다. 이막형이 기억하기에 그녀는 강하지 못해도 결코 약하지 않은 무공을 지니고 있었다.
 “흥, 기억해 두겠어요. 힘들어하는 나를 두고 혼자 앞질러 가기만 하다니······”
 구옥진 쇠가 긁히는 것 같은 소리를 냈다.
 입으로는 이막형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얼굴 방향은 백설에게 돌려져 있었다. 아무래도 그녀는 백설에게 자신의 말을 전하고자 했던 것 같았다.
 불과 반다경이 지났을 때, 그들은 다시 뭉칠 수가 있었다. 우금진과 이막형은 발걸음을 조금 늦추었고 백설은 발걸음을 빨리 했던 탓이었다.
 모두 구옥진을 위한 배려(配慮)이기는 했다.
 이막형이 생각하기에 백설이 어느 정도의 무공을 지니고 있는지 알 수는 없으나 자신에게 걸음을 떨어질 정도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금진의 직전제자라면 더욱 그랬다.
 “그러니까 따라오지 말라고······ 왜 사서 고생을 하는 것이냐?”
 이막형은 구옥진을 바라보며 나직한 핀잔을 주었다. 그의 말대로 구옥진이 그들을 따라 올 이유는 없었다. 아니, 따라오지 않는 것이 그들에게는 도움이 될 수도 있었다.
 그들은 막중한 사문의 사명(師命)을 띄고 자달목으로 가는 길이기에 걱정이 앞섰다. 무인의 길이 어찌 되려는지 아무도 몰랐다. 이막형은 사랑스럽기만 한 사매에게 사소한 피해라도 닥칠까봐 마음이 두 근 반, 세 근 반 쪼개지고 있었다.
 “흥, 난 아버지께 부탁한 거란 말이에요. 누구도 내 길을 막지 못해요.”
 구옥진이 목소리를 높혔다.
 그녀의 말은 사실이었다. 구옥진은 부친인 구렴성에게 졸라 그들을 따라나선 것이었다.
 엄격하게 따지면 우금진과 구렴성은 구옥진이 그들을 따라나서는 것을 반대했다. 언제든지 위험이 닥칠 수 있는 길이었기 때문이었다. 구렴성이 이막형과 구옥진을 보내 우금진을 찾은 이유도 따지고 보면 그를 자달목으로 보내기 위한 것이었다.
 “그곳에 청량선이 있다는 말은 사실인가요?”
 구옥진은 다가서자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그녀는 묻고 싶었던 사실을 오래 동안 참고 있었으나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한편으로는 괜히 따라왔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정말 들은 데로 청량선을 찾을 수 있다면 그녀는 기쁠 것 같았다.
 “모르지, 다만 본문에 날아온 서찰이 사실이라면 이건 보통 일이 아니다. 우리 곤륜의 존폐(存廢)에 해당하는 중대한 일이다.”
 우금진은 말을 하며 황토가 날리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말과는 달리 그의 생각에는 만감(萬感)이 교차하고 있었다.
 ‘이건 함정일 가능성이 높다. 내 생각으로는 청량선을 빼돌린 자는 내부에 있다.’
 우금진은 확신하고 있었다.
 청량선은 곤륜파의 가장 심처(深處)에 있었다. 장문인의 거처에 들어올 수 있는 자는 흔하지 않았다. 청량선은 장문인의 거처에 있었다.
 장문인의 거처에는 사시사철 이십여 명의 제자가 에워싸고 있었다. 호법(護法)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들은 곤륜에서 가장 뛰어난 무공을 지니고 있었다. 누구도 그들의 이목(耳目)을 숨기고 청량선을 훔쳐간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흔적도 없었다.
 흔한 발자국하나 남기지 않고 청량선이 사라졌다는 것을 외부의 소행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을 우금진은 알고 있었다.
 ‘아마도 흉수는 내부에 있을 것이다. 그것도 제법 지위가 높은 자다. 만약 청량선이 외부에 노출되었다면 그것은 누군가 외부의 세력과 내통했다는 이야기다.’
 우금진은 가슴이 답답해져 오는 것을 느꼇다.
 이십 년 동안 그는 머리를 싸매고 과거를 되짚었고, 간혹 천하를 뒤졌지만 자신을 곤륜산의 빙하연에 머물게 한 흉수를 찾을 수 없었다. 만약 백설만 아니었다면 흉수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지만 우금진에게 흉수보다 중요한 것은 백설이었다.
 흉수는 이십 년 동안 기다린 듯 했다. 곤륜의 신물(信物)과도 같은 청량선이 이제서야 없어진 것이다. 그것이 오래 전에 일어났던 일과 일맥상통(一脈相通)하는 어떤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소리를 내며 뛰는 것 같았다.
 “놈이 누구일까요?”
 이막형도 궁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우금진을 바라보며 물음을 던졌으나 굳이 답변을 듣기 위해 물음을 던진 것은 아닌 듯 딴 곳을 바라보았다.
 우금진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마음을 알았는지 이막형도 더 이상 물음을 던지지 않았다. 더 이상 물음을 던져도 우금진이 대답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막형은 뒤를 돌아보았다.
 세상이 신기한 듯 연신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걷는 백설과 그와 붙어있는 구옥진이 눈에 들어왔다.
 “어서 가자!”
 우금진이 발을 서둘렀다. 이막형은 어깨를 으쓱하고 흔들어본 뒤 우금진의 뒤를 따라 서둘러 걷기 시작했다.
 
 네 사람이 자달목과 사막을 가로지르는 격미목하(格美木河)를 건넜을 때는 날이 이슥하게 어두워지는 시간이었다.
 갑자기 기온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제 멀지 않았다. 앞으로 두 시진만 달려가면 자랄지가 나올 것이다.”
 우금진이 이미 저물어 보이지 않는 초원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막형이 다가서며 입을 열었다.
 “자랄지에 정말 청량선을 가지고 있는 자가 있을까요?”
 “그건 모르는 일이다. 자랄지에 자리하고 있는 오룡장(五龍莊)에 오라 했으니 우리는 갈 뿐이다.”
 이막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묵묵히 앞을 보고 걸었다. 육일간의 긴 여로에서 두 시진은 짧은 시간이었다. 두 시진밖에 남지 않았다는 말에 그는 힘이 나는 듯했다. 그가 앞서 걸음을 빨리 하자 나머지 세 사람도 서둘러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2
 
 
 오룡장은 어둠에 깊이 잠겨있었다.
 달빛이 반사되는 자랄지는 그리 큰 호수가 아니었기에 장원에 의해 반은 가려져 있었다. 그러나 달빛이 반사되는 아름다운 모습은 숨길 수가 없었다.
 언덕 위에 선 네 사람은 한참동안 오룡장을 바라보았다.
 이미 약속시간을 반 시진이나 넘겼지만 우금진은 서두르지 않았다. 이미 오래 전부터 그에게 철저함이란 몸에 걸치고 있는 옷과 같았다.
 “어서 가요.”
 구옥진이 서둘러 몸을 일으켰을 때, 우금진은 묘한 기분에 사로잡히고 있었다.
 ‘이상한 일이다. 왠지 누군가 우리를 유인(誘引)해 낸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오래 전부터 생각했던 일이기는 했지만 오룡장이 눈에 보이자 더욱 기괴하게 느껴졌다.
 달빛이 비치는 장원은 어슴푸레하게 보였다. 군데군데 불이 밝혀져 있기는 했지만 밝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어둡기만 한 것도 아니었다.
 “왜 그러시는 거죠? 사숙!”
 구옥진이 참지 못하겠다는 듯 물음을 던졌다. 그녀는 무작정 달려가고 싶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녀의 얼굴에 묻어있는 피곤함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머리에 깊게 눌러썼던 방립(方笠)을 등뒤로 젖힌 후라 피곤함을 숨길 수가 없는 그녀였다. 제법 어둠이 내리기는 했지만 그녀의 지친 얼굴이 은은하게 드러났다.
 “아무래도 사람의 흔적이 없는 것 같다.”
 이막형이 다가왔다. 그도 우금진과 같은 생각인 것 같았다. 곤륜의 장령제자인 그가 무공에서 누구에게도 뒤질 리가 없었다. 눈에 보이는 장원의 인적을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들은 모두 장원에서 사람의 움직임을 찾아내려 했으나 움직이는 그림자 하나 없었다. 괴괴한 정적만이 오룡장을 휘감아 돌고 있었다.
 “사숙! 오룡장이 누구의 장원이죠?”
 구옥진이 침묵을 깼다. 우금진이 구옥진을 바라보았다. 어두워서인지 그의 얼굴이 확연하지는 않았다. 그가 얼굴을 돌린 탓이었다.
 우금진은 여전히 오룡장을 바라보았다.
 “방운영(方雲影)이라는 무인의 장원이다. 그는 인의도신(仁義刀神)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자로 예로부터 신의가 있고 피아(彼我)를 가리지 않고 자달목을 지나는 사람들에게 온정을 베푼 사람이기도 하지.”
 우금진은 몸을 일으켰다.
 그는 몸을 움직여 오룡장으로 다가갔다. 빠르지도, 그렇다고 느리지도 않은 걸음걸이였다.
 “사매, 이리 와라.”
 이막형이 구옥진을 불렀다. 구옥진은 아무래도 불안했는지 야명칠정을 뽑으며 이막형의 등뒤로 다가갔다. 그녀가 검을 뽑자 일행은 약속이나 한 듯이 모두 병기를 뽑았다. 이막형은 등에서 청강검을 뽑아 가슴 앞에 세웠고 우금진도 허리에서 사인검(四寅劍)을 뽑았다.
 사인검은 그가 오래도록 사용했던 검으로 이십 년 전에도 사인검을 지녔다는 것을 강호인들은 알고 있었다. 다만 그의 주병기(主兵器)가 검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강호에 알려진 우금진의 별호가 천륜협성이라 했듯 그의 주병기는 한 쌍의 비륜이었다.
 그의 팔목에는 여전히 천륜이라 불리는 비륜이 달려있었다.
 백설은 그들과 오보정도의 거리를 뒤따르고 있었다. 손에는 검은 광택이 흐르는 긴 지팡이를 들고 있었는데 그는 그 철저(鐵杵)를 병기로 삼는 것 같았다.
 피피피핏!
 갑자기 허공에서 밝은 빛이 반사되며 날카로운 파공성이 울렸다. 그들이 장원에서 이십 장의 거리에 다가섰을 때였다. 너무도 갑자기 일어난 일이라 강호경험이 풍부한 우금진도 놀라 몸을 비틀었다.
 “피하라. 암기다.”
 우금진은 가장 앞서서 나아가고 있었다. 갑자기 코앞으로 날아드는 암기에 놀라 경악성에 가까운 소리를 질렀지만 몸은 기민하게 움직였다.
 급히 사인검을 들어 허공에 반원을 그리며 좌로 이 보를 이동했다.
 팅! 티티팅!
 사인검에서 밝은 불꽃이 일어나고 바닥으로 몇 개의 밝은 빛이 떨어졌다. 우금진은 신속하게 오행의 방위를 밝으며 몸을 비틀었다. 좌측으로 옮긴 몸을 급히 추스르며 자세를 낮추었다. 눈이 사방을 쓸어보았다. 다행히 손에 느껴지는 감촉은 강한 것이 아니었다.
 “누구냐? 모습을 보여라.”
 우금진은 벽력같은 호통을 내질렀다. 어느새 다가왔는지 이막형과 구옥진이 동쪽과 서쪽을 막았다. 자연히 북쪽이 열리 되었고 백설이 다가들었다. 그러나 강호경험이 없는 백설은 북쪽의 사문을 막을 생각을 하지 않고 철저를 들어 화살이 날아온 곳을 찾으려 했다.
 네 명의 펼치기에 가장 좋은 검진은 사문투저진(四門鬪猪陣)이었다. 검을 익히는 사람 누구나 익히는 진법으로 가장 쉽게는 네 개의 방위를 막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어서 북쪽을 막아요.”
 백설이 구옥진의 소리를 듣고서야 달려와 북쪽을 막았다. 그는 실전경험뿐만이 아니라 무인들의 이야기도 들은 바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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