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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절삼괴 1

2018.04.10 조회 467 추천 2


 삼절삼괴 1권
 1장 월하의 이화는 진한 혈향을 날리고······
 
 
 무창성을 지키는 망루의 불빛이 바람결에 휘날리는 옅은 안개의 흐름에 따라 깜빡거리며 달려왔다 멀어지기를 반복하고 있는 장강변의 갈대숲이었다.
 아직 싸늘한 기운이 가시지 않은 밤바람이 불어와 머리를 쓰다듬으면 한 길이 다 자라지 못한 새파란 갈대잎이 쏴아, 하는 소리와 함께 잔잔한 물결을 만들어내고, 야공을 가득 메운 교교한 월색은 수면에서 오르는 안개에 산만되어 도도히 흐르는 장강의 물줄기를 황금빛 비단폭으로 바꾸어놓는다.
 만월이 만들어낸 장강변의 야경은 인간의 모습을 멀리하고 자연의 숨소리를 극대화시키고 있었는데······
 “하아······ 하아아······”
 어디선가 턱까지 차오른 가쁜 숨소리와 함께 철벅거리며 습지를 달리는 소리가 자연의 적막을 갈랐다.
 자시를 넘긴 야심한 시각.
 대체 무슨 급한 사연이 강변을 질주하게 하는가?
 스스스스! 사사사삭!
 갈라지는 갈대의 흔적이 옅은 안개를 흩날리며 강변으로 빠르게 다가오더니 한 대한이 언덕 위로 솟아올랐다.
 칠 척이 넘는 키에 호리호리한 체형을 가졌고, 날카로운 눈매에 엷은 윤곽을 가지고 있는 자였다.
 그의 손에는 등이 곧은 직배도가 들려 있었는데, 의복은 갈가리 찢어지고 머리는 헝클어졌으며, 의복 밖으로 드러난 피부는 갈대잎에 쓸려 잔 상처가 가득했다.
 그 낭패한 모습만 보아도 그가 얼마나 다급히 쫓기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언덕에 올라선 그는 매우 두려운 표정으로 지나온 갈대밭을 돌아다보았다.
 “무창성이 보이기 시작하니 이제 이십 리만 더 가면 창천맹이다. 서두르자.”
 두어 번 큰 숨을 들이켜 호흡을 가다듬은 대한이 다시 신형을 날리려 할 때였다.
 “연환도 냉표! 아직도 살아서 창천맹에 돌아가기를 바라느냐?”
 어느새 나타났는지 그의 진행 방향을 가로막는 여인이 있었다.
 한 겹 안개에 가린 은은한 월광 아래 도도한 자세로 서 있는 여인.
 초승달 모양처럼 얇게 그려진 아미 하며 엷은 눈까풀과 맵시있는 입술선을 가졌고, 긴 목은 가냘픈 선을 따라 옷깃 안으로 들어가 동그스름한 어깨선을 만들어냈다.
 언뜻 보기에는 양가의 규수 같은 우아한 아름다움이 물씬 풍겨나오는 것 같은데, 그녀의 눈빛을 보면 소름이 좍 돋아난다. 깊이 가라앉은 듯하면서도 얼음 동굴과도 같은 한기를 줄기줄기 뻗어내고 있는 눈빛이었다.
 냉표는 저도 모르게 부르르 진저리치며 말했다.
 “수하 오십 명을 죽인 것도 모자라 끝내 나까지 해치려 드는 것이냐?”
 달빛 아래 드러난 여인의 하얀 볼에 선명한 보조개가 그려지는가 싶더니 싸늘한 말이 흘러나왔다.
 “애초에 나의 목표는 너였으니까.”
 “대체 창천맹과 무슨 원한이 있기에 이리도 악독하게 구는가?”
 “원한은 없다. 단지 일을 할 뿐이다.”
 “그렇다면 그대는 살수?”
 연환도 냉표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일개 살수에게 우리 표풍대가 전멸당했단 말인가?”
 여인의 입꼬리가 볼을 더욱 깊숙이 파고들었다.
 “살수도 살수 나름이겠지······”
 이어서 여인은 두 자루 소도를 앞으로 쭉 뻗으며 말했다.
 “자결할 생각이 아니거든 결말을 보아야 하지 않을까?”
 냉표는 다시 한 번 진저리를 쳤다.
 피할 수 없는 죽음의 그림자를 느꼈기 때문이다.
 
 냉표가 몸담고 있는 곳은 정도무림 연합인 창천맹이었다.
 강호는 원래 분쟁이 잦은 곳이고, 그들의 분쟁은 흔히 무력을 동반하는 법이다.
 그러니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분쟁 당사자보다 강력한 힘을 가진 단체가 필요했고, 그에 따라 창설된 곳이 바로 창천맹이었다.
 창천맹은 구파일방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고 기인이사들을 대거 영입해서 창설, 이십여 년을 맞는 당금에 와서는 감히 대적할 세력이 없는 거대세력이 되어 있었다.
 한데 그런 창천맹의 중요조직 중 하나인 표풍대가 한 여살수에 의해 궤멸되었고, 맹 내의 서열 십일 위에 올라 있는 냉표는 지금 스스로 죽음을 예감하고 있으니 놀랄 일이 아닌가?
 눈 앞의 여살수에게 공격을 받기 시작한 것은 지난 저녁 무렵부터였다.
 냉표는 표풍대를 이끌고 사천성 성도에서 일어난 호가장과 천검보 사이의 분쟁을 해결해 주고 오는 길이었다.
 호가장과 천검보의 분쟁은 수십 년간 계속되어 온 가문 간의 원한에 의한 것이었기 때문에 해결이 쉽지 않으리라 예상했었는데, 의외로 쉽게 해결되어 좋은 성과를 가지고 돌아오게 되니 냉표의 마음은 매우 가벼웠었다.
 창천맹으로 돌아가서 공적을 치하받을 생각으로 총단에 가까워질수록 발길은 점점 급해져 갔다.
 일정대로라면 그들은 신성 고을에서 일박을 했어야 옳았다.
 하지만 마음이 급했던 냉표는 휴식없이 창천맹 총단까지 강행군을 지시했고, 수하들은 힘들어하는 기색이 완연했다.
 그렇게 길을 재촉해서 총단까지 약 오십여 리를 남겨둔 석양 무렵이었다.
 작은 언덕을 오르고 있는데, 길 한편에 좌판을 벌여놓고 간단한 요깃거리와 차를 팔고 있는 아낙을 만나게 되었다.
 그 아낙은 장사를 마치려는지 좌판을 정리하고 있는 중이었기에 냉표는 잠시의 휴식을 원하고 있는 수하들의 눈길을 외면한 채 길을 재촉하려 하였다.
 한데 힘에 겨운 듯 허리를 펴며 흘러내린 머리칼을 쓸어올리는 여인의 옆모습을 흘긋 보는 순간 냉표는 마음을 고쳐먹어야 했다.
 촌구석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여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때 그는 거리에서 장사를 하는 여인의 피부가 어찌 그렇게 고울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았어야 했다.
 하지만 가세가 기울어 어쩔 수 없이 장사에 나섰다고 말하며 유난히 부끄러워하는 여인의 모습을 보는 순간, 수십 년간 거친 강호만 보고 살아왔던 냉표는 영혼을 송두리째 빼앗겨 버리고 말았다.
 잠깐의 방심, 그것이 그를 빠져 나올 수 없는 수렁으로 몰아넣고 말았던 것이다.
 냉표가 아무런 의심 없이 그녀가 따라주는 차를 받아마시자 수하들은 앞을 다투어 요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차와 음식에 산공독이 들어 있었고, 그 사실을 냉표가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냉표는 역위공을 일으켜 마셨던 찻물을 모두 토해 냈지만 이미 약간의 산공독이 체내로 침투한 뒤여서 내공이 감소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표풍대의 수장인 그가 이럴 정도였으니 나머지 수하야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그들이 중독된 것을 확인한 순간부터 여인의 도살극은 시작되었다.
 두 자루의 소도를 사용하는 그녀의 무공은 가공지경이었다.
 그녀가 도를 휘두르기 시작한 지 일 각이 채 못 되어 수하 오십 명은 모두 당해 버렸고, 냉표만이 겨우 목숨을 건져 도주할 수 있었다.
 한데 지금 그 여인이 앞을 가로막고 있으니 내공의 육 할밖에 끌어올릴 수 없는 냉표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자신이 없는 것이다.
 무슨 고민을 하는지 냉표의 안색은 심하게 굳어 들어갔다.
 ‘결국 그렇게 해야만 하는가? 그 방법을 사용하고 나면 다시는 무림인으로 되돌아올 수 없을 터인데······’
 깊은 고민에 빠져 있는 듯하던 냉표는 드디어 결심을 굳혔는지 직배도를 천천히 들어올리며 여인에게 물었다.
 “나는 이제 무림인으로서의 마지막 일전을 결하려고 하니 나를 이렇게 궁지로 몰아넣은 그대의 이름 정도는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여인은 대답을 않은 채 의혹의 눈초리를 빛냈다.
 “무림인으로서의 마지막?”
 냉표는 여전히 무거운 표정으로 말했다.
 “이 자리에 눕는 것은 분명 그대가 될 것이다. 그러나 나 또한 무사할 수는 없겠지. 다시는 무공을 사용하지 못하게 될 테니까.”
 말이 이어지면서 의아해 하던 여인의 눈빛은 점점 경악으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설마······”
 놀라고 있는 여인의 시선에 기이한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리고 있는 냉표의 모습이 확대되어 들어왔다.
 “이 방법만큼은 절대 쓰지 않으려 했는데······”
 냉표의 모습이 변하고 있었다.
 “끄으으으으······”
 힘에 겨운 듯 기성을 흘리고 있는 냉표의 모습.
 전신근육이 터질 듯 부풀어오르며 뼈마디가 늘어나는 듯 투둑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여인은 경악으로 부릅떴던 눈을 가늘게 만들며 침음성을 삼켰다.
 “으음······ 이미 실전된 것으로 알려진 격발신공을 오늘 보게 될 줄이야.”
 만약 냉표가 펼치고 있는 것이 정말 격발신공이라면 이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격발신공은 몸 안에 잠재되어 있는 본원진기를 격발시켜 일시지간에 두 배의 내공을 얻어내는 무서운 내공 운용술이었다.
 하지만 이 무공을 한 번 사용하고 나면 본원진기를 손상시켜서 다시는 내공을 쓸 수 없는 폐인이 될 뿐만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생명까지 잃을 수 있었다.
 이런 이유로 익히려는 자가 없어서 격발신공은 수십 년 전에 실전된 것으로 알려져 왔었다.
 한데 지금 냉표의 몸에서 그 무공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그는 창천맹 서열 십일 위에 올라 있을 만큼 강한 고수이지 않은가?
 그런 그의 내공이 두 배로 강해진다면 여인이 아무리 고강한 무공을 지니고 있다고 해도 내공에서 턱없이 밀려 싸움다운 싸움을 못할 것이 분명했다.
 격발신공이 완성된 냉표의 몸은 키가 한 자 가까이 커졌을 뿐만 아니라 근육은 평소의 두 배 가량이나 부풀어 있었다.
 그는 커진 몸에 비해 턱없이 왜소해 보이는 직배도를 들어올리며 흉측한 목소리로 외쳤다.
 “크으으으······ 나로 하여금 격발신공을 쓰게 만들었으니 그 대가를 치르게 하겠다!”
 말을 마침과 동시에 직배도가 허공을 갈랐다.
 그러자 넘쳐 나는 진기의 힘을 못 이긴 공기가 부아아악, 하는 비명을 질러대며 광풍으로 휘몰아쳐 갔다.
 정면으로 부딪쳐서는 승산이 없다고 느꼈는지, 여인은 재빨리 몸을 솟구쳐 그의 공세를 벗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진기가 증가했다는 것은 단순히 힘만 세진 것이 아니라 속도까지 빨라졌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추아앗!
 여인이 미처 발을 빼기 전에 냉표의 직배도는 그녀의 왼쪽 가슴을 사선으로 그어버리고 말았다.
 “으흑!”
 여인은 가벼운 신음을 흘리며 빠르게 뒷걸음질쳤다.
 그러나 냉표는 그어올려지던 직배도가 멈출 사이도 없이 다시 내리그으며 달려들고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이런 초식의 변화는 바로 내력의 증가가 가져다준 이점이었다.
 평소 같으면 도를 멈추기 위해 극히 짧은 시간이라도 소요했어야 했겠지만, 지금은 그런 절차를 거치지 않고 바로 방향을 틀어 내리그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어엇!”
 여인은 다급성을 다시 토해 냈지만, 그런다고 쇄도해 오는 도가 멈출 리 없었다.
 쾌애액!
 어깨를 사선으로 베어오는 도신의 시퍼런 날이 시야로 확 빨려들었다.
 도망갈 여유조차 없는 공격.
 정면으로 맞받으면 분명 심각한 내상을 입을 터였다.
 그러나 여인의 상황은 너무 다급했기 때문에 그런 걱정을 할 여유가 없었다.
 그녀는 다급히 왼손에 쥔 소도를 들어 냉표의 공격을 막아냈고 카강, 하는 금속음과 함께 손목이 부러져 나가는 듯한 충격을 받으며 뒤로 튕겨나갔다.
 여인은 기혈이 진탕되고 좌반신이 마비되어 움직이기조차 힘에 겨운 상황이었다.
 그녀가 주춤하는 사이 냉표는 마지막 공격을 퍼부을 듯 직배도를 들어올리고 있었다.
 마지막 일 도가 그어지면 이 싸움은 냉표의 승리로 끝날 것이다.
 도주해도 시원치 않을 상황이건만 여인은 기이하게도 냉표를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그녀의 얼굴에는 싸우고 있는 사람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만큼 화사한 미소가 피어나고 있었다.
 냉표는 언뜻 놀라는 표정으로 여인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누구라도 한 번 보기만 하면 빨려들고 말 것 같은 천상의 미소였다.
 마치 혼령을 빨아들이기라도 할 듯한 미소.
 냉표는 지금 그 미소에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웬일인지 번쩍 치켜든 그의 손은 천천히 떨구어지고 있었다.
 미소지은 여인의 얼굴에 고정된 냉표의 동공은 초점을 잃어가고 있었다.
 천상에서 아련히 들려오는 듯한 여인의 목소리가 흘러나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옅은 안개가 낀 달빛은 다 드러나지 않아 더욱 매혹적이지. 나는 이런 밤이 좋아.”
 여인은 어느새 냉표 앞으로 바짝 다가서 있었다.
 “도를 계속 들고 있을 건가요?”
 냉표는 혼백이 제압된 듯 초점이 완전히 풀려버린 동공으로 여인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도병을 쥐고 있던 그의 손은 스르르 풀리고 있었다.
 딸그랑!
 여인은 예의 그 아련한 목소리를 다시 흘려냈다.
 “달을 보아요,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녀의 말에 따라 냉표의 고개가 천천히 들어올려질 때였다.
 흰 빛줄기가 허공을 횡으로 긋는다 싶더니, 냉표의 목에서 붉은 선혈이 빛줄기를 따라 뻗어나갔다.
 안개를 가르며 퍼져 나가는 핏줄기.
 기이하게도 그것은 아름답게 느껴졌다.
 목이 베어진 냉표는 갑자기 움직임을 우뚝 멈추더니, 쳐들려진 고개의 무게중심에 따라 머리가 뒤로 기울어지며 갈라진 목이 시뻘건 입을 쩌억 벌렸다.
 갈라진 목에서 그르륵, 하며 피거품이 뿜어져 나오는가 싶더니 그의 신형은 힘없이 무너져 버렸다.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도 모르는 듯 희미하게 미소를 머금고 있는 냉표의 시신 위를 바람에 실린 안개가 쓸고 지나갔다.
 소도를 갈무리하며 냉표의 죽음을 확인하던 여인이 무슨 기척을 느꼈는지 갑자기 뒤를 돌아보며 외쳤다.
 “모습을 나타내라! 근처에 있는 것을 알고 있다.”
 그녀의 싸늘한 외침이 채 가라앉기도 전이었다.
 “교교월광 아래에 핀 이화를 보거든 눈을 감아라. 그렇지 않으면 월광탈혼소에 혼백을 빼앗기리라.”
 문사 차림의 한 중년인이 갈대숲을 헤치고 나오며 시를 읊조리듯 중얼거리고 있었다. 중년인을 발견한 여인은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이라는 듯 경계를 느슨히 하며 미간을 가볍게 찌푸렸다.
 “월하소 섬전도라······ 달빛 아래 미소를 보는 순간 섬전 같은 도기가 목을 가르리.”
 계속 중얼거리며 다가온 중년인은 여인 앞에 이르더니 갑자기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하하하하! 천하 최강의 살수집단, 삼화원의 이화 소저 앞에서는 아무리 격발신공을 쓰며 발악을 해도 연환도 냉표 따위는 상대가 되지 않는군.”
 이어지는 그의 말을 듣는 순간, 이화라 불린 여인의 미간이 더욱 깊이 찌푸려지더니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은 냉표가 격발신공을 연마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나요?”
 중년인은 이화의 반응에 전혀 개의치 않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물론이오.”
 싸늘히 가라앉아 있던 이화의 동공에 불길이 확 번져 나갔다. 동시에 살기 어린 표정으로 더욱 싸늘하게 말했다.
 “그러면 당신이 준 냉표의 신상내력에는 어째서 그 내용이 들어 있지 않았지요?”
 중년인은 전혀 대단치 않다는 듯 능글맞은 웃음을 흘렸다.
 “흐흣······ 이 정도의 위기는 벗어날 능력이 있어야 진정한 최고 살수라 할 수 있지 않겠소?”
 “당신이 감히 나를 시험하려 했단 말인가요?”
 “일개 총관에 지나지 않는 내가 무슨 자격으로 이화 소저를 시험할 수 있겠소? 나는 단지 주군의 명에 충실했을 뿐이오.”
 “당신의 주인은 호기심이 많은 모양이군요?”
 중년인은 더 이상 대답하지 않고 등에 매고 있던 봇짐을 풀어 이화에게 건넸다.
 “냉표에 대한 청부금 중 나머지 절반인 황금 백 냥과 다음 표적을 적은 서찰이오.”
 이화는 봇짐을 풀어 먼저 황금을 확인한 뒤 새하얀 봉투에 붉은 봉인이 선명한 서찰을 꺼내들었다.
 봉인의 훼손 여부를 날카로운 눈으로 훑어보던 이화는 손댄 흔적이 없음을 확인하고 겉봉을 뜯어냈다. 이어서 푸른빛이 감도는 한지에 빽빽이 적혀 있는 피청부인의 신상내력을 읽어 내려가고 있을 때였다.
 “이번 건은 주군께서 직접 청부하신 것으로, 그들 세 명에 대한 청부금은 모두 황금 오천 냥이오. 선수금 절반은 전표로 끊어서 서찰에 동봉하였으니 확인하시오.”
 보통 사람들은 평생을 가도 구경 한 번 해보지 못할 만한 거금이 논의되고 있는데도 이화는 전혀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그러나 청부 대상을 확인하는 순간 그녀의 두 눈은 더 이상 표현할 수 없는 경악으로 부릅떠졌다.
 “삼절삼괴! 그들을 청부한단 말인가?”
 그녀가 놀랄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중년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설마 삼화원조차 그들을 대적하기가 어렵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오?”
 이화는 뭔가 느끼는 바가 있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중년인을 바라보았다.
 “오늘 죽인 냉표는 우리 삼화원의 능력을 시험해 보는 것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군?”
 “나는 심부름꾼일 뿐이오. 주군의 생각이 어떠하신지는 알 길이 없으니 좋도록 생각하시오.”
 이어서 중년인은 돌아갈 듯 가볍게 포권하며 말을 이었다.
 “그럼, 승낙한 것으로 알고 돌아가겠소.”
 그는 이화의 대답도 듣지 않고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때 날카로운 이화의 음성이 터져 나왔다.
 “한 가지 조건이 있어요.”
 중년인은 의외라는 듯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돌아섰다.
 “조건? 금액만 맞으면 되는 것 아니오?”
 이화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중년인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금액은 이만하면 충분해요.”
 “하면 무엇이 문제란 말이오?”
 “당신의 주인께 꼭 전해 줄 것이 있어요.”
 중년인은 더욱 의아해 하는 표정이었고, 이화는 매우 비밀스러운 말을 하려는 듯 중년인에게 바짝 접근했다.
 “당신의 주인께······”
 이화의 뒷말을 기다리던 중년인은 섬뜩한 무엇이 늑골 사이를 가르며 들어오는 통증을 느끼며 눈을 부릅떴다.
 “크억! 왜······?”
 그의 왼쪽 가슴에는 이화의 소도가 자루만 남긴 채 깊숙이 박혀 있었다.
 이화는 냉랭한 미소로 말을 뱉었다.
 “당신의 주인은 삼괴 외에 또 다른 한 명을 청부했더군. 바로 당신 말이야. 그러니 당신의 죽음이야말로 당신의 주인에게 전할 선물이지.”
 중년인은 금방 쓰러지지 않고 뒤로 한 걸음 비틀 물러서며 힘겹게 중얼거렸다.
 “그분을 위해 일한 지 이십 년이건만······”
 이화는 중년인의 심장에 박혀 있던 소도를 쑥 잡아뽑으며 말했다.
 “야망이 있는 자들은 자신의 심복을 죽여야 할 때를 알지. 당신의 주인은 그날을 오늘로 잡은 것뿐이고. 삼절삼괴를 청부하는 것은 커다란 위험을 안고 하는 일이니 한 사람이라도 적게 알고 있는 것이 좋다고 판단했겠지.”
 “끄으으······”
 중년인은 눈을 허옇게 뒤집어뜨며 신형을 무너뜨렸다.
 영혼을 놓치지 않기 위해 그의 육신은 부르르 경련하고 있었지만, 얼마 가지 못해 축 늘어지고 말았다.
 그는 이제 주인의 배신을 노자삼아 먼 길을 가야 할 것이다.
 그의 죽음을 확인한 이화는 조용히 고개 들어 안개 흐릿한 달빛을 바라보았다.
 “삼절삼괴······ 우리 세 남매가 과연 그들을 죽일 수 있을까?”
 
 
 2장 구무괴의 입이 열리면 개봉이 뒤집힌다
 
 
 천중에 매달린 태양이 한껏 위력을 더하고 있는 시각, 개봉의 번화가.
 아직 초여름이라고는 하지만 한낮의 더위는 사람들을 짜증나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래서인지 거리는 비교적 한산한 편이었는데, 어디선가 갑자기 커다란 고함 소리가 터져 나와 늘어진 거리를 화닥닥 놀라게 했다.
 “이놈! 이가야! 네가 나에게 이럴 수 있는 것이냐?”
 “대머리 황가야! 너야말로 내게 이럴 수 있는 것이냐?”
 다래주점이란 편액이 걸린 주점 앞에서 두 명의 중년인이 으르렁거리는 표정으로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싸울 듯 눈을 부라리고 있는 두 사람은 커다란 도를 허리에 비껴 찬 관복 차림의 인물이었는데, 이가라고 불린 자는 한쪽 눈에 시퍼런 멍자국이 있었고, 대머리 황가라고 불린 사람은 여인네의 손톱에 할퀴기라도 했는지 시뻘건 혈선이 얼굴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 주변으로 구경꾼들이 잔뜩 모여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그런 것에 전혀 개의치 않는 듯 다시 소리치기 시작했다.
 “내가 소향이 년에게 푹 빠졌다고 네놈이 우리 마누라에게 고자질하는 바람에 어젯밤에 부부싸움이 대판 벌어졌는데도 아무 잘못이 없다고 잡아떼려는 것이냐?”
 이번에는 대머리 황가가 소리쳤다.
 “네놈이야말로 내가 소향이에게 빠졌다고 쓸데없는 고자질을 하지 않았느냐? 나야말로 어젯밤에 앙탈부리는 마누라를 달래느라고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느냐?”
 이가는 기가 막힌다는 듯 콧김을 훅 뿜어내며 말했다.
 “대체 내가 언제 그랬다는 거냐?”
 “네가 어제 낮에 저자에서 집사람과 만나는 것을 봤다는 사람이 있어.”
 “어제 낮이라고? 그때는 우리 둘이 같이 당직을 서고 있었는데 무슨 말이야?”
 “어?”
 황가는 언뜻 놀라 움직임을 딱 멈추고 뭔가 생각하는 듯하더니 고개를 크게 갸웃거리기 시작했다.
 “가만······ 그러고 보니 그렇네? 그럼, 너와 우리 마누라가 대화하는 모습을 봤다는 구무괴의 말은 뭐지?”
 순간 이가도 크게 놀라며 떠들어댔다.
 “너도 구무괴에게 들은 것이냐? 나도 네가 우리 마누라에게 고자질했다는 정보를 구무괴에게 들은 것인데······”
 둘은 한동안 서로를 멍하게 쳐다보더니 동시에 말을 흘리며 거리에 연해 있는 다래주점의 창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렇다면······”
 그들의 시선이 고정된 곳에는 더벅머리 우북한 약관의 청년이 콧구멍을 열심히 파고 있었다.
 바로 코 앞에서 두 관인의 시비가 벌어진 것이니 관심을 둘 만도 하련만 전혀 개의치 않는 듯 창가에 턱을 고인 채 게슴츠레한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런 대로 뚜렷한 이목구비를 가지고 있는 얼굴이건만 얼마 동안이나 씻지를 않았는지 윤곽을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지저분했다.
 이가와 황가는 독기 어린 눈빛을 일렁이며 그 청년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분위기는 두 사람이 싸우고 있을 때보다 더욱 살벌해졌고, 구경꾼들은 서로 입을 맞춰 수군덕거리기 시작했다.
 “구무괴가 또 일을 저지른 모양이군.”
 “저 두 사람은 지부대인의 직속 호위무사들이라 그 세도가 만만치 않은데······ 구무괴가 아무리 개방의 소방주라고 해도 오늘은 쉽게 넘어가지 못하겠군.”
 “그러게 말이야. 뭐 하러 관부의 무사를 건드려서 화를 자초하는 것일까?”
 “삼괴삼절 중에서도 가장 악명 높은 구무괴의 삼절이 바로 이간질과 독설, 그리고 주색이 아니던가? 바로 그의 특기 중 하나인 주색을 저 두 관인이 방해했다지 뭔가?”
 “주색을 방해하다니?”
 “백화루라고 자네도 알고 있지 않은가?”
 “그렇지.”
 “며칠 전 그곳에 소향이라는 기녀가 새로 와서 구무괴가 점을 찍어놓았는데, 저 두 사람이 먼저 시식을 한 모양이야. 그러니 참을 구무괴인가?”
 “참는다면 구무괴가 아니지.”
 구경꾼들이 수군덕거리는 사이 이가와 황가는 구무괴의 코 앞에 당도해 있었다.
 이런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구무괴는 여전히 콧구멍을 후비며 하늘을 올려다볼 뿐이었다.
 이가와 황가는 잡아먹을 듯한 눈초리로 구무괴를 쏘아보며 허리에 걸고 있던 도를 번쩍 뽑아들었다.
 “오늘로써 네놈의 악명에 종지부를 찍어주마!”
 이가의 말에 이어 황가가 서슬이 퍼런 목소리로 외쳤다.
 “마누라에게 당한 설움을 열 배로 갚아주겠다!”
 그때서야 구무괴는 게슴츠레한 눈을 들어 두 사람을 올려다보는데, 그 표정이 그렇게 권태로울 수가 없다.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전혀 모르는 사람 대하는 듯한 그의 태도에 두 사람은 분기충천해서 버럭 고함쳤다.
 “네놈이 한 짓을 정말 몰라서 하는 소리냐?”
 잠시 생각에 잠긴 듯 고개를 갸웃거리던 구무괴는 아무래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는 거요?”
 “말로 해서 될 놈이 아니로구나!”
 이가와 황가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도를 그어댔다.
 쐐애액!
 두 자루의 도가 허공을 가르며 구무괴의 양 어깨에 쑤셔박히려는 순간이었다.
 카강!
 쇠가 부딪는 듯한 금속음이 울려퍼지며 이가와 황가가 뒤로 한 걸음씩 물러나는데 보니 구무괴의 손에는 어느새 쇠몽둥이 하나가 들려 있었다.
 손잡이가 잘록하고 적당히 각이 져 있는 길이 두 자 세 치 가량의 쇠몽둥이. 모양으로 봐서는 개방에서 주로 사용하는 타구봉임에 분명했는데, 특이한 것은 쇠로 만들어졌다는 점과 그것을 담고 다니는 가죽 주머니가 구무괴의 등에 걸려 있다는 점이었다.
 먼저 도를 휘두르고도 구무괴를 물리치기는커녕 자신들이 격퇴당하자, 이가와 황가는 수치심으로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이놈! 얼마나 대단한 무공을 지니고 있기에 관부의 무사를 건드렸는지 보겠다.”
 두 사람이 다시 한 차례 도를 휘두르려 할 때였다.
 “잠깐!”
 그 동안 권태로운 표정으로 일관하던 구무괴가 커다랗게 소리치며 벌떡 일어서지 않겠는가?
 그 목소리가 얼마나 컸던지 이가와 황가는 움찔하며 몸을 경직시켰다.
 그들의 공격이 잠시 멈추자, 구무괴는 상황과 어울리지 않게 배시시 웃으며 창문을 넘어 두 사람에게로 다가왔다.
 이가와 황가는 괜히 불안해지는 마음으로 구무괴를 바라보았다.
 이윽고 도를 번쩍 치켜든 두 사람의 앞으로 다가온 구무괴는 갑자기 표정을 심각하게 굳히며 황가를 올려다보았다.
 “혹시 황 어른 배꼽 옆에 손바닥만한 반점이 있지 않습니까?”
 실로 엉뚱한 질문이었는데, 황가는 흠칫 놀라며 되묻는 것이었다.
 “맞기는 하다만······ 그것을 네가 어떻게 알고 있지?”
 구무괴는 그러냐는 듯 크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옆에 계신 이 어른의 부인께서 친구분들과 속삭이는 것을 엿들었지요. 그 말에 따르면 황 어른의 정력이 절륜하다고 하던데 사실입니까?”
 황가의 얼굴에는 황당하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무슨 말도 안 되는······”
 그러면서 그의 시선은 곁에 있는 이가의 얼굴로 슬며시 옮겨가는 것이었다.
 구무괴가 작은 목소리로 말한다고는 했지만, 지척에 있는 이가의 귀에 들리지 않을 리 없었다.
 이가는 두 눈을 시뻘겋게 충혈시킨 채 황가를 노려보고 있었다.
 “어쩐지 그 여편네가 전에 안 하던 이상한 자세를 요구한다 했더니······”
 이어서 그는 늑대가 으르렁거리듯 이를 드러내며 황가를 향해 고개를 쭉 빼들었다.
 “이것이 어찌 된 사연인지 해명해 보아라, 대머리 황가야.”
 황가는 크게 놀라서 두 손을 홰홰 내저으며 말했다.
 “아, 아니야······ 이건 모함이야, 모함이라고.”
 “모함? 그럼, 내 마누라가 어떻게 네 배꼽 옆의 반점을 알고 있단 말이냐?”
 구무괴는 옆에서 능청맞은 표정으로 계속 떠들어댔다.
 “그 부인께서는 요즈음 황 어른 덕에 새로운 삶의 기쁨을 맛보게 됐다고 즐거워하시던데······”
 황가는 뭐라고 다시 변명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가는 이미 도를 크게 휘둘러대고 있었다.
 “죽여버리겠다!”
 “나, 나는 아니야. 저놈이 이간질하는 거라고! 제발 이성을 찾아!”
 그러나 이가는 이미 이성을 잃은 상태였고, 도를 맞고도 성할 만큼 황가의 근육은 질기지 않았으니, 이럴 때는 삼십육계 줄행랑이 최고였다.
 “으아아아아! 구무괴 다음에 보자! 절대로 살려두지 않겠다!”
 황가는 이가에 쫓겨 달아나면서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고, 이가는 도를 휘두르며 그 뒤를 바짝 쫓아가고 있었다.
 그들이 저만치 사라질 즈음 구무괴는 중요한 사실을 깜빡했다는 듯 자신의 머리를 탁 치며 중얼거렸다.
 “참! 황 어른의 배꼽 옆에 반점이 있다는 얘기는 백화루의 소향이가 해준 것이었지?”
 구경꾼들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구무괴를 바라보았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고 다래주점으로 다시 기어 들어가고 있었다. 창문을 넘어서······
 “주인장, 여기 죽엽청 한 병 가져오시오! 냉수에 담가두었던 시원한 것으로 말이오. 안주는 필요없고.”
 구무괴의 외침 소리에 부리나케 움직이는 주인의 모습이 창문 안으로 언뜻 보였다.
 황가와 이가가 달려가 버리고 구무괴마저 주점 안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자, 남아 있던 구경꾼들은 흥미를 잃고 하나 둘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 명만은 그 자리에 서서 움직이지 않고 있었는데 기이하게도 그의 얼굴에는 희로애락의 감정이 전혀 나타나 있지 않았다.
 더욱 이상한 것은 그자의 눈빛이었다.
 이지를 상실한 듯 초점을 잃은 퀭한 눈동자. 감정이 전혀 실려 있지 않은 그 눈빛은 구무괴가 들어간 주점을 주시하고 있었다.
 “구무괴를······ 죽인다······”
 그는 사람의 목소리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기괴한 음성으로 중얼거리며 주점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가와 황가를 골탕 먹이는 데 성공한 구무괴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은 채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아니, 차라리 퍼붓는다고 해야 옳았다.
 술병보다 훨씬 커서 술 한 병이 다 들어가고도 모자라는 커다란 술잔에 하나 가득 따라서 제딴은 여유있게 마신다고 천천히 들이켜고 있었지만, 그 한 잔이 구무괴의 뱃속으로 모조리 빨려 들어가는 데 걸리는 시간은 그야말로 눈 깜짝할 새였다.
 그 다음에는 영락없이 술 한 병을 더 시켰는데, 마시는 속도가 워낙 빠르니 주인은 잠시도 쉬지 못하고 계속 술을 날라와야만 했다.
 ‘제길, 차라리 동이째 마실 것이지······ 벌써 몇 번째야? 힘들어 죽겠네.’
 벌써 열여섯 번째의 병을 들고 오는 중이었으니 주인이 속으로 투덜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주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구무괴는 연신 잔을 들이켜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관부가 아니라 설사 황실의 인물들이라 해도 내가 점찍어둔 기녀를 먼저 시식하고는 무사할 수 없지!”
 “그렇고말고요, 헤헤······”
 속으로 계속 욕을 해대던 것과 달리 주인은 이렇게 맞장구를 쳐주며 술 두 병을 탁자 위에 슬며시 내려놓았다.
 이 작전(?)이 성공하면 조금은 편해지겠구나, 하고 이십 년 경력의 주인은 구무괴의 눈치를 살폈다.
 마침 새로 술을 시키려던 구무괴가 벌써 앞에 와 있는 주인을 보고는 씩 웃었다.
 ‘성공이다! 다음 번엔 아예 다섯 병쯤 가져와야겠군.’
 주인이 내심 쾌재를 부르며 다시 주방으로 가려고 몸을 돌렸을 때였다
 “으잉?”
 구무괴의 경악성이 들려왔고, 주인은 한숨을 쉬며 다시 구무괴 쪽으로 몸을 돌려야 했다.
 “주인장! 어째서 술병이 두 개나 되지?”
 “그, 그게 구무괴님의 주량이 보통이 아니니······”
 그러나 구무괴의 호통 소리에 주인은 입을 다물어야 했다.
 “군자의 주도는 술에 빠지지 않고 술을 즐기기만 하는 것임을 내 몇 번이나 말했소? 두 병씩이나 가져온 것은 나를 군자로 여기지 않는다는 말이요?”
 “아이고, 죄송합니다.”
 주인은 머리를 조아리며 얼른 한 병을 도로 들었다. 하지만 내심은 말할 수 없이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너처럼 때가 덕지덕지 낀 인간이 군자면 난 옥황상제겠다.’
 이렇게 투덜거리며 그가 막 주방에 들어서려 할 때였다.
 “주인장, 여기 술 한 병만 더 주시오!”
 정말 인내심을 시험하는 것도 아니고······ 주인은 머리에서 뿌연 김이 솟아나오는 것을 억지로 참으며 집었던 병을 다시 구무괴의 탁자에 던지듯이 내려놓았다.
 술병이 아슬아슬하게 탁자 끝에서 멈추어서자 구무괴가 놀랍다는 듯이 말했다.
 “주인장의 솜씨가 기가 막히는구려! 무공을 배웠더라면 대단한 고수가 되었겠소.”
 ‘말이나 못 하면 밉지나 않지!’
 주인은 치솟는 화를 참으며 서둘러 주방으로 들어갔다.
 구무괴는 들어가는 주인을 보며 한 번 씨익 웃더니 다시 잔에 술을 따르기 위해 술병을 들었다.
 그러나 잔에 술이 부어지지는 않았다. 웬일인지 순박한 미소를 띠고 있던 구무괴의 두 눈에선 날카로운 빛이 뿜어지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향하는 곳은 주점의 입구였다.
 문이 삐그덕 열리더니 생기라고는 하나도 없는, 아니 차라리 시체라고 해야 어울릴 듯 퀭한 눈을 가진 중년 남자가 천천히 들어섰다.
 잠시 멈추었던 그자는 마치 보지 않아도 알고 있다는 듯 구무괴가 있는 곳을 향해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의 손에는 날이 시퍼렇게 서 있는 생선 칼이 들려 있었다.
 “죽인다······ 죽인다······”
 중년인의 입에서 아무런 억양도 없고 감정도 실리지 않은 말이 흘러나왔다. 그의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구무괴의 얼굴에 놀라움이 번져 나갔다.
 “생선전 장씨 아저씨가 웬일이시오? 살벌하게 생선 칼까지 들고······”
 그러나 장씨라 불린 사내는 아무런 대꾸도 없이 구무괴를 노려볼 뿐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멍했던 그의 눈이었건만 구무괴를 노려보는 사이 점점 충혈되기 시작하더니 종내 실핏줄이 터질 듯이 도드라져 나왔다.
 무언가 이상하다고 느낀 구무괴가 중얼거렸다.
 “정상이 아니군.”
 구무괴가 다시 무슨 말인가를 하려고 입을 열려는 순간이었다.
 “죽어라─ 앗!!”
 장씨가 느닷없이 생선 칼을 구무괴에게 휘둘러왔다.
 약간 놀라기는 했지만 구무괴는 어렵지 않게 몸을 돌려 옆으로 피할 수 있었다.
 “이크! 이 아저씨가 언제 무공을 배웠지?”
 그런데 구무괴를 놓친 장씨는 도저히 꺾일 수 없는 각도로 손목을 틀며 옆구리를 공격해 들어오지 않겠는가!
 목표를 놓친 상태에서 이처럼 공격의 방향을 자유자재로 바꾸는 것은 웬만한 고수가 아니고는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일이다.
 더구나 상대가 생선이나 팔던 범부임에야······
 이런 상황을 전혀 예측하지 못하고 있던 구무괴는 일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헉!”
 구무괴는 다급성을 토해 내며 재빨리 몸을 뒤로 뺐다.
 순간 그의 옆구리로 생선 칼이 팩, 소리를 내며 지나갔다. 조금만 늦었어도 옆구리를 베일 뻔한 날카로운 공격이었다.
 구무괴는 뒤로 세 발 정도 물러났다.
 “도대체······”
 그러나 구무괴는 더 이상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장씨가 다시 그 생선 칼을 휘두르며 쇄도해 왔기 때문이다. 구무괴는 재빨리 몸을 빼며 긴장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저 초식은 혹시······”
 피하는 구무괴를 향해 계속 공격해 들어오는 장씨의 생선 칼이 하나 둘 잔영을 만들어가더니 나중에는 검푸른 검막을 피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새 생선 칼이 수십여 개로 늘어나 구무괴의 전신을 난도질할 듯이 베어 들어왔다.
 구무괴가 경악해서 외쳤다.
 “흑풍마도?”
 구무괴는 신형을 뒤로 날리며 왼손으로 등에 멘 자루의 밑부분을 쳤다.
 자루 안에서 천강묵철봉이 튀어나왔고, 구무괴는 천강묵철봉을 잡아 밀려 들어오는 장씨의 생선 칼을 막아냈다.
 카가가강!
 두 무기가 충돌하자 경력의 소용돌이가 발생하며 구무괴의 뒤에 있던 벽이 터져 나갔다.
 구무괴의 안색이 약간 굳어 들어갔다.
 “정말 장씨 아저씨 맞아? 사정 봐주다간 내가 당하겠군.”
 구무괴가 천강묵철봉을 고쳐 잡고 있는데 장씨가 또다시 공격해 들어왔다. 그러자 푸르스름한 불꽃이 일어나는 듯한 도기가 펼쳐졌다.
 “약해!”
 구무괴도 이젠 망설이지 않고 천강묵철봉에 공력을 배가시켜 정면으로 받아쳤다.
 콰지직!
 구무괴의 천강묵철봉이 장씨의 도세를 가르고 들어갔다. 장씨는 그 힘을 이기지 못하고 뒤로 튕겨져 날아갔다.
 “크어억!”
 콰쾅!
 벽에 금이 갈 정도로 강하게 부딪히고 탁자에 한 차례 더 부딪힌 뒤에야 장씨의 몸은 쓰러져 멈추었다.
 구무괴는 천강묵철봉을 거두고 걱정스러운 눈으로 장씨에게 다가갔다.
 “다급한 바람에 공격을 하긴 했는데······ 그렇게 마음 좋던 장씨 아저씨가 오늘따라 왜 이러는 거지?”
 이렇게 중얼거리며 쓰러진 장씨를 일으키기 위해 구무괴가 손을 내밀 때였다.
 “크르르······”
 신음 소리인지 짐승의 으르렁거림인지 구별이 안 되는 소리를 내며 장씨가 몸을 서서히 일으키기 시작했다.
 “육 성의 공력이 실린 공격을 정면으로 받아내고도 다시 일어난다는 것은······”
 구무괴가 흠칫 놀라 몸을 굳히고 있는 사이 장씨의 칼이 무섭게 찍어 올려졌다.
 “죽어라!”
 그때 구무괴는 장씨와 지척간에 있던 데다가 장씨를 일으키기 위해서 반쯤 몸을 숙인 상태였다. 때문에 꼼짝없이 생선 칼에 목을 맞을 수밖에 없어 보였다.
 장씨의 칼이 구무괴의 목에 푹 파고들었다고 느낀 순간, 구무괴의 신형이 흐릿해지더니 장씨의 눈 앞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렇게 사라진 구무괴의 신형은 영문을 몰라 머뭇거리는 장씨의 등 뒤에 나타났고, 동시에 빠르게 손을 놀려 등의 요혈을 연속해서 점혈해 버렸다.
 장씨가 칼을 휘두르던 자세 그대로 우뚝 굳어버리자, 구무괴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장씨의 앞으로 다가섰다.
 그를 발견한 장씨의 눈동자가 멈추어진 자신의 몸을 대신하려는 듯 마구 요동을 쳤다.
 “장씨 아저씨가 나에게 이렇게 감정이 많았나?”
 구무괴는 중얼거리며 천천히 장씨의 전신을 훑어보더니, 시선이 그의 얼굴 부근에 이르렀을 때 인상을 바짝 찌푸렸다.
 “저것이었군?”
 구무괴는 장씨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넘겼다. 그러자 장씨의 머리카락 사이로 깊숙이 박혀 있는 금침 몇 개가 드러났다.
 “상대의 혼을 제압한 뒤 시전자의 진기를 불어넣어, 무공을 모르는 자라도 잠시 동안 무공을 시전하게끔 할 수 있다는 섭혼이공술! 오래 전에 실전된 것으로 알려진 사술이 다시 모습을 드러내다니······ 기분이 좋지 않아.”
 구무괴는 손을 빠르게 움직여 장씨의 머리에 박혀 있는 금침들을 제거해 나갔다.
 이윽고 침을 모두 제거하고 막힌 혈도까지 풀어주자 장씨의 몸이 꿈틀하더니 두 눈을 서너 번 껌뻑거렸다.
 잠시 후, 제정신을 차린 듯 의아한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어라, 내가 왜 여기에 있지?”
 장씨는 머리가 어지러운 듯 좌우로 흔들더니 두 눈을 손으로 비벼댔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다가 커다란 눈에 탐구심 어린 눈을 반짝이고 있는 구무괴와 시선이 마주치자 소스라치게 놀라며 비명을 질러댔다.
 “으악!”
 무슨 괴물이라도 본 듯한 표정으로 비명을 지르는 장씨를 보며 구무괴가 말했다.
 “이제 정신이 좀 드오?”
 “무슨 말인가? 내가 언제 정신을 잃기라도 했단 말인가?”
 “흠······ 하긴, 기억을 못 하는 게 더 좋을 수도 있지.”
 구무괴의 말에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느냐는 듯 퉁명스런 표정으로 쳐다보던 장씨는 갑자기 중요한 무엇이 생각난 듯 무릎을 탁 치더니 울상을 지었다.
 “큰일이다! 마누라가 두부 사오라고 했는데.”
 장씨는 갑자기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호들갑을 떨더니 주점 밖으로 냅다 뛰기 시작했다.
 “분명히 아침에 나왔는데, 어느새 해가 중천에 걸렸으니, 이젠 두부를 사가도 나는 죽었다.”
 평상시에 부인을 얼마나 두려워하는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놀리고 있는 그의 두 다리를 보면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아이고······ 삭신은 왜 이렇게 쑤시는 거야? 칼은 또 왜 들고 있고?”
 점점 멀어지는 장씨를 바라보는 구무괴의 입가에는 씁쓸한 미소가 걸렸다.
 ‘나와 친근한 사람에게 섭혼이공술을 펼쳐 공격해 왔다는 것은······’
 구무괴는 문득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혀 서성이다 무심코 창가로 시선을 돌렸다.
 원래는 아무것도 없었던 창가에 한 송이 하얀 꽃이 피어 있는 배나무 가지가 걸려 있었다. 진짜와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로 정교하게 만들어진 조화였다.
 역설적이게도 그 하얀 배꽃은 차디찬 한기와 더불어 불현듯 예감되는 죽음의 냄새를 함께 피워내고 있었다.
 구무괴의 얼굴에 문득 긴장감이 흐르며 눈빛에도 작은 일렁임이 생겼다.
 그는 이것이 어떤 표식임을, 그리고 이 표식의 임자가 누구인지도 잘 알고 있었다.
 “내가 이화의 표적이 되었다는 것인가?”
 구무괴는 창가로 다가가 창틀에 꽂혀 있는 이화를 뽑아냈다.
 “섭혼술에 걸린 자와 실랑이를 벌이는 동안 이렇게 조용히 지옥으로 가는 초청장을 보낸다?”
 구무괴는 지그시 눈을 감고 배꽃의 향을 음미했다.
 “역시 삼화 중 가장 심기가 깊다는 이화다운 방법이군.”
 배꽃 향을 맡으며 천천히 걸음을 옮기던 구무괴는 나직한 목소리로 시를 읊듯 중얼거렸다.
 “이화라······ 달빛 아래 나타나, 아름다운 미소로 상대의 혼백을 제압한 뒤 섬전 같은 도법으로 베어버린다는 당금 무림의 최고 살수. 이름하여 월하소 섬전도라고 한다지? 그래서 그녀에게 당한 자는 하나같이 황홀한 표정을 지은 채 죽어 있고······”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던 구무괴의 얼굴에 금세 장난기 어린 웃음이 묻어나왔다.
 “게다가 천하제일을 다툴 만한 미색을 겸비해 앞치마만 두르면 최고의 현모양처 감이라는 이화가 자진해서 나를 쫓아다니다니······ 호박이 넝쿨째 굴러 들어왔군. 어서 내 앞에 나타났으면 좋겠군. 그래야 고 야들야들한 몸매를 감상해 볼 것이 아닌가? 그리고······ 흐흣······”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의 입가엔 능글맞은 미소가 가득 물려졌다.
 “하지만 천하제일의 살수가 왜 나를 노리는지는 알아봐야겠군. 도대체 누가 청부를 했는지 말이야.”
 
 ***
 
 다래주점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의 지붕 위에서 약간 놀란 표정으로 구무괴를 바라보고 있는 눈이 있었다.
 가녀린 팔과 다리로 몸을 지탱한 채 삼단같이 긴 머리를 지붕 바닥에 끌며 최대한 몸을 낮추어 엎드려 있는 여인이었다.
 장미에 입맞춤이라도 한 듯 붉은 입술과 밤하늘처럼 새까만 눈을 지닌 그녀는 다름 아닌 이화였다.
 그녀의 아름다운 눈이 살짝 찌푸려졌다.
 ‘역시 구무괴의 안목은 속일 수가 없군. 단번에 섭혼이공술을 알아보다니······’
 한 가닥 따스한 바람이 불어오자, 그녀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은은한 배꽃 향이 바람을 타고 흩어졌다.
 
 
 3장 자찬괴의 도색화는 승려의 아랫도리마저 일깨우고······
 
 
 하남제일미 위지염이 운영하는 개봉 최고의 기루, 소연루.
 무려 삼만여 평에 이르는 광대한 대지 위에 수많은 가산을 두어 그 위에 누각을 올리고, 골 사이로는 수로를 만들어 작은 놀잇배가 지날 수 있게 꾸며져 있다.
 각기 백여 평은 됨직한 가산은 각양각색의 괴석과 기화이초로 장식되어 있는데, 그 사이로 흐르는 수로를 따라가다 보면 커다란 인공 연못에 도착하게 된다.
 그 연못은 넓이가 오천여 평에 달해 호수라는 말이 어울릴 법하다.
 붉고 흰 수련화가 고개를 내민 채 가녀린 몸을 물결에 떠밀리고 있는 연못의 수면을 가로질러 중앙에 이르면 커다란 인공섬이 있다.
 그 위에는 화려하게 채색된 처마를 가진 칠 층 누각이 지어져 있는데······
 재미있는 일은 지금 그 누각의 칠층에서 벌어지고 있다.
 
 아름답다는 말로 표현이 될까?
 초생달 같은 아미는 고아한 멋을 품었고, 맑은 듯하면서도 끊임없이 일렁이고 있는 눈동자에는 타오르는 열정이 깊숙이 감추어져 있다.
 흠 하나 없이 오뚝한 콧날은 그녀의 자존심이 대단함을 말하며, 앙증맞고도 새빨간 입술은 그녀가 의외로 뜨거운 가슴을 가졌음을 나타내준다.
 붉은 금의를 화사하게 차려입은 채 고즈넉한 표정으로 창 밖을 내려다보고 있는 여인.
 그녀가 바로 소연루의 주인이자 하남제일미로 명성이 자자한 위지염이다.
 한데 그녀는 무슨 생각이 그리 많아 꼼짝도 않고 창 밖만 내려다보고 있는가?
 그 이유는 맞은편에 앉아 있는 한 사내에 기인했다.
 새하얀 피부에 여인 같은 손매를 가졌으며, 내로라하는 미남자라도 그 앞에 서면 자기 뺨을 치고 돌아설 정도로 잘생긴 용모를 가진 약관의 청년이었다.
 다만 그의 눈빛이 약간 음침하고 경망스러워 보이는 점이 문제였다.
 그는 지금 화첩을 앞에 놓고 뭔가를 열심히 그리고 있는 중이었다.
 상황으로 비추어 위지염의 자태를 화폭에 담고 있는 모양이었다. 윤곽을 잡고 있는 듯 검은 먹을 듬뿍 묻혀 열심히 그림을 그려대던 화공은 잠시 붓을 멈추며 매우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헤······ 내 그림은 역시 환상적이야. 그러니 모두들 내 그림을 얻지 못해 안달을 하지.”
 그의 입이 열리자 위지염의 미간이 가볍게 찌푸려졌다.
 ‘또 시작이군. 잠시 조용한가 했더니 제 자랑을 또 늘어놓기 시작했어.’
 화공은 원래 말이 많은 사람인 듯 위지염은 지겹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그러면서도 자세를 흐트리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의 그림 솜씨만큼은 믿고 있음이 분명했다.
 화공의 그림 솜씨는 화폭에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초승달 같은 아미, 맑은 눈동자, 오뚝한 콧날, 붉은 입술, 긴 목, 어느 것 하나 위지염의 모습을 잘못 그려놓은 것이 없었다.
 아니, 도발적인 아름다움으로 본다면 화폭 속의 위지염이 오히려 실물을 앞설 지경이었다.
 한데, 실제에는 없는 목단화 가지를 입에 물고 생긋 미소짓는 위지염이 그려져 있는 그 그림이라는 것이······
 금방이라도 꺾일 것 같은 가녀린 긴 목 밑으로 이어지는 부분부터가 문제였다.
 터질 듯 팽팽한 젖가슴 위에 도발적으로 고개를 발딱 치켜든 유실 하며, 매끈하게 휘어진 세류요와 앙증맞게 보조개 짓고 있는 배꼽, 그리고 그 아래로 이어지는 적나라한 모습이라니······
 실제로 알고 있는 것인지 상상인지는 몰라도 뽀얀 허벅지 안쪽에 찍혀 있는 콩알만한 점까지 그려져 있으니, 누가 보아도 위지염의 나체를 직접 보고 그렸다고 착각할 만한 명작(?)이었다.
 대체 이 화공은 누구이기에 하남제일미 위지염을 이렇게 농락하고 있는 것인가?
 어쨌든 윤곽을 다 잡은 화공은 붉은 물감을 풀어 화필에 듬뿍 묻히고 있었다.
 이윽고 엷은 홍색으로 위지염의 나체를 좀더 실감나게 만들어내려는 순간이었다.
 “어머멋!”
 화공의 등 뒤에서 어린 계집의 뾰족한 비명이 터짐과 동시에 쨍그랑, 하며 찻잔 깨지는 소리가 울려나왔다.
 차를 날라오던 시비가 주인의 나체화를 보고 너무 놀란 나머지 저지른 일이었다.
 그 순간, 누각 안의 모든 움직임은 완전히 정지되어 버렸다.
 시비는 아직까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지 못해 경악으로 부릅뜬 눈을 화폭에 고정시킨 채 우두커니 서 있었고, 화공은 제풀에 놀라 붓을 입에 문 채 멀뚱하게 시비를 올려다보았으며, 위지염은 무슨 일인지 몰라 시비와 화공을 번갈아 쳐다보고 있었다.
 정지된 움직임을 제일 먼저 되살린 것은 위지염이었다.
 그녀는 시비에게 시선을 고정시키며 물었다.
 “왜 그리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냐?”
 “그, 그것이······ 루주님의······”
 시비는 차마 말이 안 나오는지 답답한 듯 자기 가슴을 팡팡 쳐댔다.
 뭔가 짚이는 바가 있는 듯 위지염은 갑자기 날카로운 눈빛을 빛내며 화공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화공은 화닥닥 놀라 화첩을 얼른 접으며 품에 꼭 끌어안았다. 그리고 고개를 내두르며 한다는 말이,
 “하하······ 아무것도 아니니 신경 쓰실 필요 없소. 하, 하던 일이나 마저 합시다.”
 그가 감추려 하자 위지염의 눈초리는 더욱 매섭게 치켜 올라갔다.
 “그렇다면 왜 굳이 감추려 애쓰지요?”
 “그게······ 아직 다 그리지를 못 해서······ 하하! 어, 어서 돌아가 계시오. 완성되면 보여드리리다.”
 “그래요?”
 위지염은 뭔가 좋지 않은 낌새를 알아차렸는지, 외로 꼬인 말투를 뱉어내며 화공이 품고 있는 화첩을 와락 움켜쥐었다.
 “궁금해서 속이 탈 지경이니 잠시 보아야겠어요.”
 “지금 봐서 좋을 게 없는데······ 일단 완성시키고 보는 것이······”
 화공이 그림을 놓아주지 않으며 횡설수설 변명으로 일관하자, 위지염은 아미를 바짝 찌푸리며 파르르 떨리는 눈빛으로 쏘아보았다.
 “당신! 설마······”
 그녀도 뭔가 좋지 않은 사태를 예감한 듯했다.
 잠시 화공을 노려보고 있던 위지염은 화첩을 잡고 있던 손을 갑자기 획 뒤집으며 손 끝으로 화공의 턱을 찍어올렸다.
 화첩을 잡고 있던 그녀의 손은 원래 화공의 턱 밑에 놓여 있었으므로 손을 뒤집은 것만으로도 턱 밑에 손 끝이 닿을 지경이었다.
 그런 상태에서 손을 걷어올리니 금방이라도 화공의 턱을 쑤시고 들어갈 상황이었다.
 화공은 호들갑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쏘아 올라오는 손의 속도에 맞춰 턱을 한껏 쳐들었다.
 “아다닷! 턱에 구멍 날라!”
 그런데 놀라운 것은 과장된 몸짓을 보이는 것과 달리 화공은 매우 시기 적절한 방법으로 위지염의 공격을 피해 냈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다고, 위지염은 이미 이런 상황을 예측하고 있었다는 듯 날카로운 눈빛을 반짝 쏘아내며 쏘아올리던 손을 갑자기 직각으로 꺾으며 손목 관절을 축으로 획 돌리는 것이 아닌가!
 파팍!
 “끄압!”
 손날에 울대를 보기 좋게 가격당한 화공은 숨이 막히는 듯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나동그라졌다.
 위지염은 화공의 팔 힘이 풀어지는 것을 이용해서 화첩을 뽑아냈다.
 이윽고 화첩을 활짝 펼치는 순간, 위지염은 입을 쩌억 벌리며 두 눈을 부릅뜬 채 놀라 말도 뱉어내지 못하고 전신을 와들와들 떨어대기 시작했다.
 화공은 기도가 협착되어 숨쉬기 힘든 목을 두 손으로 주무르며 위지염에게 다가오더니 힘겹게 말을 뱉어내기 시작했다.
 그런데 미운 놈은 하는 말도 미운 말만 골라 하는 법이어서.
 “하하······ 어떻소? 가히 예술의 경지 아니오? 나의 도색화 실력은 가히 신의 경지에 이르러서, 소림의 승려들 사이에서도 내가 그린 도색화의 인기가 최고라오.”
 미안하다고 백배 사죄해도 용서가 될까 말까 한데, 한다는 말이 이따위 것이었으니 정말로 귓구멍에서 연기가 치솟을 지경이었다.
 부들부들 떨고만 있던 위지염은 도끼눈을 부릅뜬 채 눈 앞의 화공을 확 소리가 나도록 흘겨보았다.
 “자찬괴······ 당신······ 도저히 용서 못 해.”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는지 자찬괴라 불린 화공은 손을 저으며 천천히 뒷걸음질쳤다.
 “왜, 왜 그러시오? 부인······ 아니, 위지 소저.”
 위지염은 잔뜩 화가 난 표정으로 자찬괴에게 한 발 다가서며 으르렁거렸다.
 “몰라서 묻는 거예요, 지금?”
 “하하······ 나야 당신이 초상화를 그려달라고 해서 그렇게 한 것뿐인데······ 뭘 용서 않겠다는······”
 그때 위지염의 주먹이 다시 허공을 갈랐으므로 자찬괴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부아악!
 거칠게 쏘아오는 위지염의 권격엔 조금 전 자찬괴의 목을 칠 때와는 달리 살기가 담겨 있었다.
 마치 죽여버리기라도 하겠다는 기세였는데······
 “으힉!”
 자찬괴는 이번에도 호들갑스러운 표정을 지어내며 얼른 위지염의 주먹을 피해 냈다.
 위지염은 두 번째 주먹을 다시 날리며 소리쳤다.
 “내가 초상화를 그려달라고 했지, 언제 이런 도색화를 그려달라고 했어?”
 자찬괴는 엄살을 부리듯 과장된 몸짓을 섞어 공격을 피해 내며 대꾸했다.
 “내가 도색화만 그린다는 사실은 천하가 다 아는 일인데 이만한 일로 웬 살기를 그렇게 뿜어내는 거요?”
 그러자 자신도 너무했다 생각했는지 위지염은 손을 멈추었다.
 그렇다고 화가 풀린 것은 아니어서 위지염은 신경질적으로 그림을 찢어버렸다.
 “그 그림이 소림사로 가면 얼마나 비싸게 팔리는지 알고서나 찢는 거요?”
 자찬괴가 아까워 죽겠다는 듯한 표정으로 항의하자 위지염이 매서운 눈초리로 노려보며 차갑게 말했다.
 “부친의 체면을 봐서 최대한 참고 있는 거예요. 내 인내심이 한계에 이르기 전에 눈 앞에서 빨리 사라져요!”
 냉랭하게 쏘아붙이는 그녀의 말을 듣고 있던 자찬괴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 들어가더니 한마디를 툭 던져 냈다.
 “나를 아버지의 후광이나 등에 업고 설치는 졸장부로 봤다니, 자존심이 무척 상하는군.”
 자찬괴의 말에 위지염의 안색에 언뜻 놀라는 기색이 떠올랐다.
 웬일인지 자찬괴의 안색에는 싸늘함마저 감돌았다.
 “나는 아버지의 자식이기는 하되 가법에 얽매이지는 않소. 나를 죽이고 싶다면 아버지의 눈치를 보지 말고 언제든지 실행해도 좋소. 하지만 당신에게 그럴 만한 능력이 있을지 모르겠군.”
 말을 마친 자찬괴가 차갑게 웃으며 몸을 돌렸다.
 자리를 뜨려고 하는 그의 뒷모습을 보던 위지염이 물었다.
 “부친을 왜 그렇게 미워하지요?”
 자찬괴는 걸음을 우뚝 멈추더니 뒤돌아보지 않은 채 메마른 음성으로 나직이 뇌까렸다.
 “소연루에선 언제부터 개인의 사생활까지 간섭하게 되었지?”
 평소의 장난스러움은 온데간데없는 싸늘한 음성.
 위지염은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섰다.
 자찬괴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은 채 예의 싸늘한 음성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나와 아버지의 관계를 알고 있는 사람은 몇 되지 않소. 그리고 나는 그 사실이 강호에 퍼지는 것을 바라지 않소.”
 위지염의 고운 아미가 살짝 찌푸려졌다.
 “지금, 나를 협박하는 건가요?”
 자찬괴가 한숨을 쉬더니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부탁하는 것이오!”
 “그렇다면 받아들이죠.”
 그러자 자찬괴는 흘끗 돌아보며 원래의 그 익살맞은 미소를 던졌다.
 “정보를 수집하는 데만 신경 쓰지 말고 소연루의 정보나 흘러나가지 않도록 조심하시오. 특히 당신의 욕실은 경계를 강화해야 할 거요. 입을 무기로 삼는 내 친구는 여인의 목욕 장면을 특히 즐기니 말이오.”
 말을 마친 자찬괴는 발 끝에 힘을 실어 신형을 쏘아나가기 시작했다.
 “오늘은 대접을 잘 받고 가오······”
 위지염은 멀어져 가는 자찬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욕실 경계를 강화하라고?”
 그러다 위지염은 뒤통수를 한 대 맞기라도 한 듯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럼, 사흘 전에 내 욕실을 훔쳐보았던 자가 바로 구무괴?”
 
 ***
 
 방 안은 넓은 편이었지만 방 크기에 맞는 장식물이나 가구 같은 것은 거의 놓여 있지 않았다.
 조그만 탁자가 있을 뿐이었고 그 탁자 위에는 몇 권의 고서가 펼쳐져 있었다.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구무괴는 무엇이 그리 좋은지 싱글벙글 웃고 있는 얼굴이었고, 구무괴의 맞은편에는 한 노인이 인자한 미소를 띠고 앉아 있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구무괴였다.
 “사부님.”
 구무괴가 사부라 부른 그 노인은 대략 육십대 중반의 연배로 보였는데, 작달막한 키 때문인지 몰라도 구무괴와 마주보고 앉아 있자 마치 어른과 아이가 앉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 작은 노인이 바로 당금 개방의 방주였으니, 개방 창건 이래 최고의 고수라 칭송받고 있는 소면개였다.
 젊어서부터 탁월한 지도력과 뛰어난 무공으로 큰 공을 여러 번 세웠으며, 정도의 깃발 아래 사악한 집단과 싸워 오길 어언 사십여 년.
 그만큼 방 내의 절대적인 지지를 얻고 있으며, 무공수위 또한 강북 무림연합인 창천맹의 태상장로직을 겸하고 있을 정도의 실력자였다.
 항상 웃는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소면개라는 이름이 붙었으나, 사실은 얼굴 형태가 원래 웃고 있는 형상이라서 실제로는 웃고 있는 것인지 심각한 것인지 알 수가 없는 기인이었다.
 “사부님, 그 동안 못 뵌 사이에 한 오십 년은 젊어지신 것 같습니다.”
 구무괴의 능청스러운 말에 소면개는 짐짓 화난 척 야단을 쳤다.
 “예끼, 이놈. 내가 오십 년이나 젊어진다면 네녀석과 친구라도 된단 말이더냐?”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냥 호형호제하며 편하게 지내는 거지요.”
 “그게 그거지 무엇이냐.”
 소면개가 웃는 얼굴로 꿀밤을 주려고 하자 구무괴 역시 웃는 낯으로 재빨리 피했다.
 구무괴가 피한 것이 내심 괘씸했던지 소면개는 여전히 웃는 얼굴로 은근히 내력을 끌어올려 탁자에 주입하며 말했다.
 “그래, 한 방의 소방주라는 녀석이 한 달간이나 자리를 비우고 어디를 그렇게 돌아다녔는지 들어볼까?”
 구무괴는 갑자기 탁자가 천 근이나 된 듯 배를 압박해 오자 내공을 일으켜 되밀어내며 대답했다.
 “제자가 원래 강호인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는 몸이 아니겠습니까? 여기저기서 도움을 청해 오는데, 그들의 기대를 저버릴 수가 있어야지요.”
 소면개는 제자가 맞서오자, 속으로 ‘이 녀석 보게?’ 하더니 내력을 조금 더 쏟았다.
 “그게 아니라 여기저기에 나부끼는 치맛자락에 홀려 세월 가는 줄 모르고 있었던 게지?”
 구무괴도 내력을 더 돋우었다.
 “하하, 제자는 분명히 기루 같은 곳엔 얼씬도 하지 않았습니다.”
 “묻지도 않은 기루 얘기를 하는 것을 보니 찔리는 구석이 있는 모양이구나?”
 이번엔 구무괴가 두 배의 내력을 쏟아내며 말했다.
 “제자가 만약 기루에만 있었다면 삼화원의 살수가 저를 공격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탁자가 거꾸로 자신을 압박해 오자 소면개도 두 배로 내공을 돋우었다.
 그러자 원래 미소짓고 있던 소면개의 얼굴이 활짝 웃는 것처럼 보였다.
 “삼화원이라고 했느냐?”
 “삼화원의 이화가 섭혼이공술로 제자를 공격해 왔지요.”
 “섭혼이공술까지······”
 스승과 제자는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계속 내력을 높였다.
 소면개는 즐거워 견딜 수 없다는 듯이 활짝 웃고 있었고, 구무괴의 얼굴도 불그스레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누군가가 삼화원에 제자를 청부한 것 같은데······ 대체 어떤 빌어먹을 분이 그런 청부를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혹시 방 내에 입수된 정보가 없습니까?”
 소면개가 더욱 크게 웃음지으며 말했다.
 “너와 너의 두 친구 녀석들을 일컬어 무림에선 삼절삼괴라 한다지? 그 동안 소문만 무성하던 오행도 중 한 장이 너희 삼절삼괴에게 있다는 소문이 파다한데 아직 모르고 있었느냐?”
 “오행도라고 하셨습니까?”
 구무괴가 크게 놀라 외쳤다.
 그 바람에 구무괴의 내공이 크게 증폭했고, 동시에 박달나무로 만든 탁자가 산산이 부서져 사방으로 폭사되었다.
 부서진 탁자의 파편들은 섬전처럼 쏘아지며 바닥이며 천장이며 벽이고 할 것 없이 박혀 들어갔다.
 그러나 소면개와 구무괴는 자연스럽게 발출된 호신강기로 몸을 감싸고 있었기 때문에 전혀 상처를 입지 않았다.
 두 사람의 주위로 화려한 폭죽이 터진 것처럼 파편들이 날아다녔다.
 소면개가 말했다.
 “너도 오 인의 절대무적자에 대한 일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스승의 말에 구무괴가 흥분을 가라앉히고 말했다.
 “무림에 몸을 담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 오 인의 절대무적자를 모르는 자는 없을 것입니다. 비록 이십 년 전의 일이지만 천하의 그 어디에도 그들을 당할 무공은 없었다고 하니, 가히 그들의 무공이 어땠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소면개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 인의 절대무적자!
 그들은 뛰어난 무공과 타고난 지혜로 각기 검, 도, 창, 권, 각의 분야에서 최고의 달인이라는 칭송을 받았었다.
 그러나 그들은 스스로가 만족하기 위하여 고된 수련을 거듭한 끝에 마침내 무공의 극의를 깨달은 고금에 다시없을 대종사들이었다.
 
 일 검으로 천변만화의 조화를 일으킨다는 검의 달인 천검자!
 천검자와 쌍벽을 이루며, 빛보다 빠른 도법을 구사한다는 섬전쾌도!
 창 한 자루만 있으면 태산이 무너져도 두렵지 않다는 패력신창!
 일 권으로 하늘을 무너뜨린다는 붕천일권!
 하체만큼은 금강불괴의 경지에 이르러 도검에도 상하지 않았다는 추련철각!
 사람들은 그들의 성취와 업적을 기리기 위해서 이들을 일컬어 오인의 절대무적자라 칭한 것이었다.
 
 구무괴가 물었다.
 “그 오 인의 절대무적자와 제자가 삼화원의 살수에게 공격받은 것이 무슨 관계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것을 알려면 오 인의 절대무적자들 간에 있었던 치열한 싸움을 알아야 한다. 각기 다른 시대에 태어났다면 천하를 독패하고도 남았을 이들은 불행히 같은 시대를 풍미하고 있었지. 하늘에 두 개의 태양이 존재할 수 없고, 하나의 여의주로 두 마리의 용이 승천할 수 없듯이 무림에는 다섯 명이나 되는 절대자들이 동시에 존재할 수 없었기에 이들 오 인의 절대무적자는 최후의 승자를 가리기 위해 한 곳에 모여 비무를 벌이게 되었단다.”
 소면개는 마치 그 오 인의 비무를 상상하려는 듯이 두 눈을 감더니 한숨을 쉬고는 말을 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칠주야에 걸친 사투를 벌였음에도 불구하고 우열을 가릴 수가 없었지. 그 결과에 승복할 수 없었던 그들은 최후의 승자를 가리기 위해 끝없는 비무에 들어가게 되었다. 확실한 승패가 갈리기 전에는 다시는 강호에 나오지 않겠다고 말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그들이 들어간 곳이 어디인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지. 그리고 세월이 흘렀고, 많은 것들이 변했지만 그들은 다시는 강호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들을 보았다는 사람들도 없었고······ 결국 그 이후의 일은 아무도 알지 못하는 것이지.”
 소면개가 잠시 동안 말을 멈추자 가만히 듣고만 있던 구무괴가 입을 열었다.
 “그 일들은 제자도 어디선가 들은 기억이 있습니다. 그들이 비무를 벌이기 위해 들어간 곳을 세인들은 웅천무록부라고 이름 지었다고 하더군요.”
 “그뿐이 아니다. 오 인의 절대무적자는 그 웅천무록부에 들어가기 전에 자신들이 그곳에서 영원히 나오지 못하는 상황이 올 것을 염려해 각자의 후예에게 한 장씩의 지도를 남겼는데, 이것을 하나로 모으면 웅천무록부의 위치를 알 수 있다고 전해지고 있다. 사람들은 그 다섯 장의 지도를 오행도라 이름 붙였지.”
 구무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자를 비롯한 두 친구들이 남들보다 이상한 행실을 하는 것은 사실이나 오행도라는 것은 구경조차 못 했는데, 어떻게 우리에게 오행도가 있다는 헛소문이 돌게 되었는지 전혀 모르겠습니다.”
 그러자 소면개가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 강호의 소문이라는 것이 원래 그런 것이 아니더냐? 사실은 나 또한 너희 그 주변머리없는 삼절삼괴에게 오행도가 있다는 말은 믿지 않는다. 삼절삼괴 하면 한 번도 좋은 일을 한 적이 없는 괴물들인데, 설마 하늘에서 너희들에게 오행도를 찾을 홍복을 내리시겠느냐?”
 “좋게 나가다가 마지막에 가서 왜 그러십니까? 행실이 괴이한 것은 사실이나 한 번도 좋은 일을 한 적이 없다니, 내 못난 친구 선권괴만 하더라도 좀 답답하고 무식해서 탈이지 그가 돌보는 고아 아이들만 해도 몇 명이나 되는지 알고 하시는 말씀입니까? 이거 정말 섭섭합니다, 사부님.”
 “오오, 참 그렇지. 미안하구나. 선권괴를 깜빡했어.”
 소면개는 껄껄, 웃으면서 논지에서 벗어난 말장난을 가볍게 털어버리고는 차분한 어조로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삼절삼괴에게 오행도가 있다는 소문을 누가 퍼뜨렸는지는 나도 아직 밝혀내지 못했다. 그러나 왜 너희들이 공격받았는지는 짐작할 수 있다. 오 인의 무적자가 웅천무록부로 들어가고 나서 말이다, 그들이 사라지자마자 강북무림에서 활동하던 검가와 권문이 의문의 혈겁을 당하는 일이 발생했다. 그때 검가의 가주와 직계존속, 그리고 상당수의 고수가 죽었으며 권문은 아예 멸문의 화를 당하고 말았단다. 다행히 그 뒤로 검가는 다시 옛 영화를 찾았고 나머지 삼대가문도 면면히 그 힘을 유지해 오고 있지만, 검가에서는 당시 자신들을 급습했던 자들이 오행도를 탈취하려고 했을 뿐 아니라 구대문파의 무공을 썼었다고 주장하며 강북무림에 등을 돌리고 강남으로 이주해 버리고 말았다. 그 이후 강남에는 권문을 제외한 사대가문이 자리를 잡았지. 이렇게 되자 강남무림의 힘이 너무나 강해졌으며, 또한 그들이 검가의 말을 듣고 구대문파를 의심하기에 이르자 구대문파는 사대가문을 견제하기 위해 창천맹을 결성했다. 물론 외견상으로는 무림의 대소분쟁을 조용히 처리한다는 명분을 세우고 출범시키기는 하였지만, 실상은 사대가문을 견제하는 것이 주목적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다 알고 있지. 어쨌든 그 이후 사대가문과 창천맹은 큰 싸움을 벌이지는 않았으나 서로 백안시하고 있어 언제 큰 혈전이 벌어질지는 아무도 모르는 상황이다. 그런데 갑자기 권문의 오행도가 나타났다고 하니 강남북 무림 모두가 들썩거릴 것이 아니냐.”
 구무괴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대충 알겠습니다. 강남의 사대가문은 자신들의 오행도 넉 장에 권문의 것까지 합해 웅천무록부를 찾으려 할 것이고, 강북무림은 한 장의 오행도라도 손에 넣어 자신들이 웅천무록부를 찾지는 못해도 강남무림 역시 웅천무록부를 찾지 못하도록 최선을 다해 방해하겠군요. 그러던 중에 나와 내 친구들에게 권문의 오행도가 있다는 소문이 돌았으니 당연히 누군가가 우리를 노리게 되었다, 이것이군요.”
 소면개가 기특하다는 듯이 웃었다.
 “그렇지.”
 구무괴가 중얼거렸다.
 “대체 어떤 놈들이 그런 헛소문을 퍼뜨려 귀찮게 하는 것인지······”
 소면개가 그 말을 듣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말이다. 사실은 일이 그렇게 되는 바람에 나도 고민을 하던 참이란다.”
 “고민이라니, 무슨 고민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너는 삼절삼괴 중 하나이고, 나는 강북무림에서 만든 창천맹의 태상장로이니 앞으로 일어날 강남과 강북무림의 다툼에서는 사부인 나로서도 너를 크게 도와주지는 못할 것 같구나. 당분간 어려울 게야.”
 구무괴가 가슴을 펴보이며 말했다.
 “하하, 지금 제자를 걱정하시는 것입니까? 저는 오히려 사부님이 불안합니다. 앞으로는 제자가 자주 놀러오지 못할 텐데 사부님은 심심할 때 누구와 내공을 겨루시겠습니까? 또 누구를 벗삼아 한잔 술을 마시겠습니까?”
 소면개는 인자한 얼굴로 구무괴를 바라보다가 품에서 오래된 듯한 목걸이를 하나 꺼냈다.
 “그래······ 너도 많이 컸구나. 하긴 벌써 이십 년이 지났지······ 그땐 강보에 싸인 작은 아기였는데······”
 구무괴는 갑자기 사부의 얼굴이 웃고는 있지만 두 눈에 말 못 할 공허함이 담긴 것을 보고 마음이 흔들렸다.
 아무리 급한 일이 있어도 늘 웃는 스승이 아니었던가?
 그는 사부가 꺼낸 목걸이를 바라보았다.
 그 목걸이에는 정교하게 조각된 푸른 용이 살아 움직일 듯 매달려 있었다.
 일견하기에도 귀하게 보이는 목걸이였다.
 그때 소면개가 입을 열었다.
 “이 창룡항권은 너의 것이다.”
 구무괴는 뜻밖이라는 눈빛으로 사부를 바라보았다.
 “사부님, 상황이 아무리 어려워진다 해도 그저 잠깐 뵙지 못하게 될 뿐일 텐데 벌써 의발을 전수하려 하십니까? 사부님이 벌써 이렇게 약해지실 만큼 연로하셨다고 생각하니 제자는 마음이 크게 아프군요. 하지만 기왕 주시는 거라면 고맙게 잘 받겠습니다. 그리고 이왕이면 청옥으로 된 타구봉과 개방의 방주 자리와 아울러 창천맹의 태상장로직까지 주신다면 소원이 없겠습니다.”
 “이놈이?”
 소면개가 손을 들어 구무괴의 얼굴을 쥐어박았다.
 그러나 구무괴는 피하려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퍽!
 구무괴의 코에서 핏줄기가 흘러내렸다. 그렇게 되자 오히려 소면개가 더욱 놀라는 표정이었다.
 “어째서 피하지 않았느냐?”
 구무괴가 씨익 웃더니 말했다.
 “그 동안 사부님이 이 제자를 때리려 하셨으나 한 번도 그 뜻을 이루지 못하셨기에 이번에 특별히 제자가 맞아준 것입니다.”
 소면개의 눈가에 미미한 경련이 일어났다.
 “너는 비록 내 아들은 아니었으나 친아들이라 여기고 정성을 다해 키워왔다. 가슴에 검상을 입은 채 버려진 너를 거두어 들인 지 어언 이십 년······ 이 목걸이는 너를 발견했을 당시 너의 목에 걸려 있던 것이다. 분명 특별한 뜻이 담겨 있는 물건일 게다. 자, 받거라!”
 사부에게 목걸이를 받아드는 구무괴의 손이 가볍게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가슴 깊은 곳에서는 아릿한 통증이 밀려나왔다.
 
 
 4장 취한 선권괴는 주먹으로 도를 논하고
 
 
 해질 무렵이 되자 제법 땀을 식힐 만한 바람이 한 줄기씩 불어왔다.
 노을에 물든 하늘도 아름답거니와, 길을 가는 행인의 얼굴에도 활기가 흐르고, 출출한 나그네의 옷깃을 잡아끄는 객점의 간판마저 반갑다.
 평범한 일상의 모습이 이리 아름다운데, 하물며 가냘픈 몸매의 여인이 부끄러운 듯 고개를 살포시 숙이고 사뿐사뿐 걸어가는 모습이야 더 말해 무엇하랴!
 취광주루의 이층 창가에서 거리를 내려다보며 지나가는 여인들의 자태를 감상하던 자찬괴는 마침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에 취한 듯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다.
 개봉의 번화가에 위치한 취광주루는 우람한 대들보에, 멋들어진 오색 처마를 얹은 화려한 주루였다.
 자찬괴는 자신의 풍류에 걸맞는 외양과 이름이 붙은 이 주루가 꽤 마음에 드는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노랫가락을 흥얼거렸다.
 그때 한 요염한 여인이 자찬괴를 향해 생긋 웃으며 지나가자, 풍류남아의 가슴에서 참을 수 없는 시심이 솟아났던지 자찬괴의 입에서 맑고 청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오······ 그녀의 가슴엔
 백 일 동안 타도 모자랄 정열 있어라.
 내 그대에게 입맞춤하면 그대가 날 반기리
 왜냐하면 난 거물로 소문난 구무괴와 맞먹는 크기에
 천하제일의 풍류남아이므로······
 
 자찬괴는 이만한 수준의 즉흥시를 지어낸 자신의 재능이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대견하다는 듯 두 눈을 지그시 내리감으며 한참을 음미하다 다시 입을 열었다.
 물론 그에게 미소를 던졌던 여인은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며 후다닥 달아났으며 주루 안의 취객들은 한심하다는 눈초리를 보내고 있었지만 말이다.
 
 오······ 그녀의 가슴엔
 구무괴가 백 일을 애태워도
 다 모를 깊은 마음 있어라.
 왜냐하면 구무괴는 단지 크기만 할 뿐,
 나 정도의 기술은 어림없기에
 이 깊고 달 밝은 밤, 우리는 자리를 펴고······
 
 “지금이 무슨 깊은 밤이라는 거냐?”
 이제 막 시의 절정 부분을 읊으려던 자찬괴는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가 시상(?)을 깨버리자 화가 치민 듯, 고개를 휙 돌리며 소리쳤다.
 “이 시에 시 자도 모르는 녀석이, 이해를 못 하겠으면 밥이나 계속 먹지, 왜 방해냐?”
 그러자 한참 쩝쩝대며 음식을 쑤셔넣고 있던 선권괴가 눈을 치켜떴다.
 “그런 것도 시라고 하냐? 운율도 맞지 않는 엉터리 음란시만 짓는 주제에 큰소리는?”
 “음란시?”
 자신의 명작(?)을 비하하는 말을 들은 자찬괴의 두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나의 예술혼을 무시하다니······”
 그러나 자찬괴는 곧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려버렸다.
 “내가 말아야지.”
 선권괴는 빈 접시를 수북이 쌓아놓고도 아직까지도 먹어대고 있었는데, 옷에 묻은 온갖 양념들 하며 입가에서 번들거리는 기름기를 보자 자신의 영롱한 시심이 모두 날아가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왜, 계속 말해 보시지.”
 말을 하면서도 연신 음식을 입에 넣는 선권괴였다.
 ‘이런 녀석과 함께 삼절삼괴라는 명호를 나누어써야 한다는 현실이 원망스럽구나!’
 자찬괴가 속으로 한탄하며 다시 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지만 좀 전의 여인은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여인이 사라진 것이 선권괴의 탓인 양 자찬괴가 선권괴를 노려보았다.
 그때 선권괴는 어느새 다 먹어치웠는지 빈 접시를 싹싹 핥고 있었다.
 자찬괴가 지겹다는 듯이 다시 고개를 돌렸다.
 “징그럽다, 정말.”
 그가 고개를 돌리고 나서도 접시 핥는 소리는 계속 들려왔다.
 그러던 어느 순간 그 속 울렁거리던 소리가 뚝, 멈추더니 갑자기 잠잠한 정적이 몰려왔다.
 자찬괴가 흘깃 바라보니 선권괴가 탐욕스러운 눈초리로 자신의 술잔을 바라보고 있었다.
 화들짝 놀란 자찬괴가 술잔과 술병을 얼른 옆으로 치웠다.
 “흐흐흐······”
 선권괴가 음흉한 웃음 소리를 내며 손가락 하나를 펴보였다.
 “딱 한 잔만 마시자.”
 자찬괴는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내둘렀다.
 “술만큼은 절대로 안 돼!”
 “먹는 음식 가지고 치사하게 이럴 거야?”
 그러자 자찬괴가 정색을 하며 말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너에게는 술이 음식이라고 절대 할 수 없지.”
 “너는 입이고, 나는 주둥이냐?”
 “어쨌든 안 돼!”
 “관둬라, 치사해서 안 마신다!”
 선권괴는 잔뜩 화가 나 외치고는 자찬괴에게 등을 돌려 앉았다.
 “안 마시는 게 여러 사람 살리는 길이지.”
 자찬괴는 선권괴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술을 한 잔 따라 마셨다.
 그리고 무료한 듯 잠시 여기저기 두리번거리다가 중얼거렸다.
 “그런데 구무괴, 이 녀석은 왜 안 오는 거지?”
 자찬괴가 주루의 계단 쪽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어느새 돌아앉았는지 선권괴의 손이 술병으로 슬며시 다가왔다. 그러자 낌새를 눈치챈 자찬괴가 갑자기 고개를 획 돌리며 끄느름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안 마신다며?”
 “어흠······ 한 잔 따라줄까 해서······”
 “됐네.”
 자찬괴는 술병을 다시 자신의 앞으로 끌어다놓았다.
 그때 계단에서 발소리가 들리며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들려왔다.
 “온다던 거지 녀석은 안 오고 웬 남녀 한 쌍?”
 선권괴가 툴툴거리자 자찬괴도 술잔을 털어넣으며 중얼거렸다.
 “그러게 말이다. 발걸음 소리로 보아 무공을 익힌 자들이구먼.”
 이윽고 선권괴의 말대로 남녀 한 쌍이 이층에 올라섰다.
 석 자 정도 길이의 직배도를 등에 교차해 맨 작달막한 키에 고집스러워 보이는 얼굴의 노인과, 얼굴에 색이 넘치다 못해 줄줄 흐르는 미부였다.
 “어라?”
 선권괴가 신기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리 적게 보아도 칠순은 되어 보이는 노인과 삼십대밖에 안 돼 보이는 요염한 여인이 마치 한 덩어리인 양 서로 부둥켜안고 있으니 이상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그 상태로 천천히 걸어와 선권괴의 옆 탁자에 앉았다. 선권괴의 눈길도 그들을 따라 움직였다.
 그 순간을 이용해 자찬괴는 술을 병째로 들이붓기 시작했다.
 선권괴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계속 그들을 바라보다가 삼십대 미부의 터진 치마 사이로 드러난 매끈한 허벅지에 시선이 이르자 얼른 고개를 돌렸다.
 그때 마침 술을 다 마신 자찬괴가 술병을 내려놓으며 뜨거운 숨을 토해 냈다.
 “크아! 독하다.”
 선권괴가 놀라 얼른 술병을 낚아챘다.
 “설마, 다 마신 것은 아니겠지?”
 아까부터 계속 술을 마셨던 자찬괴인지라 이젠 어느 정도 술기운이 오르는지 혀가 약간 꼬인 발음으로 말했다.
 “네가 마시고 주정 피우는 꼴을 보느니, 차라리 술이 좀 약하더라도 내가 마시는 것이 낫지.”
 대답에는 관심없다는 듯이 선권괴는 혓바닥을 내민 채 술병을 거꾸로 들어 떨어지는 마지막 한 방울을 받아먹었다.
 “한 모금이라도 남겨줄 것이지······ 인정머리없는 녀석.”
 선권괴가 투덜거리고 있을 때, 옆자리의 노인이 여인의 몸을 주물럭거리기 시작했다.
 노인은 여인의 어깨에 얹어놓았던 손을 끌어당겨 부드러워 보이는 여인의 몸을 살며시 끌어안았다.
 “밤에도 이리 아름다우면 얼마나 좋을꼬?”
 그러자 노인의 손길에 몸을 맡기고 있던 여인이 콧소리를 흘려냈다.
 “아이, 이러지 말아요.”
 그러나 선권괴의 귀에는 여인의 목소리가 거부의 뜻으로 비춰진 모양이었다.
 ‘칠십 노인에 삼십 요부라니······ 살다 보니 별 더러운 꼴을 다 보는군.’
 그러나 노인은 남의 이목은 아랑곳하지 않는 듯 여인을 더욱 꼭 끌어안았다.
 “이제 곧 해가 질 텐데, 왜 그래?”
 안달하는 듯한 노인의 말에 여인은 고개를 살짝 돌려 외면하며 부끄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안타까운 심정이야 이해하지만······”
 말은 이렇게 하면서도 여인은 한쪽 다리를 들어 노인의 허벅지 위에 살며시 올려놓았다.
 노인은 정염에 불타오르는 눈길로 쓸어보며 두 손으로 다리를 쓰다듬어 올라갔다.
 무슨 보물이라도 만지는 것처럼 정성스레 여인의 다리를 만지던 노인은 참을 수 없었는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허어, 정말 부드럽고 탄력있구나!”
 이렇게 탄성을 내지르며 그는 여인의 앞섶으로 손을 쑥 집어넣었다. 그리고 다른 한 손으로는 여인의 탱탱한 둔부를 꽉 움켜쥐었다.
 “아파요······”
 여인이 고운 눈으로 노인을 살짝 흘겨보았다.
 “내 심정을 안다면 가만히 있어야지.”
 노인의 숨 넘어가는 소리에 여인의 얼굴이 붉어졌다.
 “남들이 흉보잖아요.”
 “어떤 놈들이 감히 우릴 흉봐?”
 노인이 흉흉한 눈길로 주변을 쓸어보노라니 실제로 주점 안의 이목이 모두 자신에게 쏠려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림 좋은데 계속하지 왜?’
 ‘저 나이에 젊은 애인을 데리고 다니는 것을 보면 돈이 억수로 많거나, 아니면 그 기술이 죽이나 봐.’
 주루 안의 사람들은 저마다 먹고 있던 음식에서 손을 놓은 채, 노인의 손길을 따라 그들도 숨을 몰아쉬며 침을 삼키고 있었다.
 그러나 무시무시한 눈빛과 부딪친 그들은 아쉬운 표정으로 하나 둘 고개를 돌려야 했다.
 자신의 으름장이 먹혀 들어가자 노인은 “남녀가 애정 표현하는 것 처음 보냐?” 하고 소리치고는 다시 여인의 다리를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모두들 어색한 침묵 속에서 음식을 먹고 있는 가운데, 노인과 여인의 끈적이는 목소리와 흐느적거리는 소리만이 들리고 있었다.
 그러나 선권괴만은 그런 노인을 더욱 노골적으로 쏘아보고 있더니 비위가 틀리는 듯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젠장······ 더러워서 못 봐주겠네.”
 이렇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돌려보니 자찬괴는 술을 이기지 못해 탁자에 엎어져 잠이 든 상태였다. 가볍게 코까지 골며 말이다.
 ‘자식, 술이 올라 곯아떨어졌군. 그러기에 내가 좀 마셔주겠다고 했는데도 혼자 다 마시더니······’
 곁에 있던 동료가 잠들었다고 생각하니 괜히 무료한 생각이 드는 선권괴였다. 사람이란 무료해지면 뭔가 다른 유희거리를 찾게 마련이다. 그리고 지금 선권괴에게는 확실한 유희거리가 있었다. 그는 도끼 눈을 부릅뜨고 옆 자리의 노인을 쏘아보았다.
 ‘몸도 근질근질한데, 장유유서고 나발이고 저걸 그냥 한 방에 날려버려?’
 선권괴가 워낙 노골적인 눈길을 보내고 있으니 노인에게도 그 느낌이 전달될 수밖에 없었다. 노인은 고개가 아주 천천히 옆으로 돌아갔다. 물론 상대를 압도할 만한 무서운 눈길을 담은 채 말이다.
 “네놈은 아직도 우리 일에 관심이 있느냐?”
 노인이 눈에 잔뜩 힘을 주고 쏘아보았지만 이 정도에 기죽을 선권괴가 아니었다.
 “내 눈으로 내가 구경하는데 당신이 웬 상관이오?”
 “이 어린 놈이······”
 얼마나 분노했는지 탁자를 움켜쥐고 부르르 떠는 노인의 손아귀에서는 부서진 나무 가루가 우수수 쏟아지고 있었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더니······ 네놈이 노부의 명호를 듣고도 그런 소릴 할 수 있는지 보겠다. 노부가 바로······”
 노인이 자신의 별호를 늘어놓으려 하자 선권괴는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저으며 소리쳤다.
 “얼마나 대단한 명호를 지녔는지는 몰라도 내 눈에는 젊은 여자를 희롱하는 늙은 수컷으로 보일 뿐이다! 망령이 들어도 아주 더럽게 망령이 든 늙은이로 말이야.”
 엎어져 있던 자찬괴는 선권괴의 고함에 잠이 깬 듯 힘들게 눈을 뜨며 부스스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왜 이렇게 시끄러운 거야?”
 그때 주점 안 여기저기에서는 키득거리는 웃음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치솟는 노기를 참지 못해 노인의 안면근육이 흉측하게 일그러졌다.
 “함부로 놀리는 네놈의 아가리를 찢어놓고야 말겠다.”
 “흥! 내가 고대하던 바였다.”
 그때 멍청한 눈으로 노인과 요부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자찬괴가 갑자기 잠이 확 달아나 버린 듯 두 눈을 치켜떴다.
 “저들은 흉악하기로 소문난 이면요부와 추심악노 부부인데······”
 그러나 그가 말릴 겨를도 없이 선권괴는 그 별호에 어울리게도 벌써 주먹을 휘둘러내고 있었다.
 “늙으려면 곱게 늙을 일이지, 어디 할 짓이 없어 백주에 부녀자를 희롱하는 것이냐? 그러고도 잘했다고 큰소리를 쳐?”
 추심악노도 탁자를 밀어버리며 앞으로 나섰다.
 “주제를 모르고 함부로 설치는 놈!”
 말이 끝나기도 전에 노인의 등에서 쏴, 하는 소리와 함께 두 자루의 직배도가 뽑혀나왔고, 선권괴가 내지른 우권에서는 무서운 경풍이 쏟아져 나왔다. 권풍에 휘말린 탁자가 날아올랐다.
 추심악노는 코웃음치며 두 자루 직배도로 날아오는 탁자를 그대로 갈라버렸다.
 “골골대는 노인치고 힘깨나 쓰는구나!”
 선권괴가 연신 주먹을 휘두르며 놀렸다.
 “이놈! 그 아가리를 어서 이리 대거라!”
 추심악노도 더욱 화가 나 이리저리 몸을 날리며 공격을 퍼부었다.
 파직!
 그의 도기가 이르는 곳은 벽이건 바닥이건 쩍쩍 갈라지고 있어서 그의 공부 또한 만만치 않음을 보여주었다.
 부서진 탁자들이 날아다니고 권풍과 도기가 난무하자 사람들이 우르르 밖으로 몰려나갔다.
 주루의 주인은 이런 경험이 많았던지 재빨리 입구 쪽의 계산대 뒤로 몸을 숨겼다.
 선권괴와 추심악노의 주변은 이미 아수라장이 된 지 오래였지만 그들은 잠시도 멈추지 않고 서로를 공격했다.
 추심악노는 이리 날고 저리 날며 두 자루 직배도를 민첩하게 그어댔고, 선권괴는 하체를 굳건히 버티고 서서 위맹한 권격을 연속적으로 뿜어냈다.
 그렇게 이십여 초가 지나자 선권괴의 강한 권풍에 밀린 추심악노의 행동반경이 점차 좁혀들기 시작하더니 종내에는 일 장도 못 미치는 영역 안에서 매우 힘겹게 공격을 피해 다녀야 했다.
 “하하하! 나의 광풍권 맛이 어떠냐!”
 선권괴의 호탕한 웃음 소리에 추심악노의 입술이 실룩이는가 싶더니 곧 그의 도법이 눈부시게 빨라졌다.
 파파팟!
 선권괴의 위맹한 권풍에 갇혔던 추심악노의 도세가 번개처럼 돌아가며 선권괴가 보낸 내력의 칠 할 가량을 튕겨보냈다.
 숨이 턱턱 막힐 정도의 권풍과 살을 저미는 듯한 도기에 옷자락과 머리카락을 흩날리고 있는 자찬괴의 얼굴에는 한심스럽다는 표정이 드러나 있었다.
 “거, 바람이 시원하기는 한데······ 선권괴가 또 쓸데없이 참견을 해서 시끄럽게 되었군. 아무래도 구무괴가 빨리 와야 일이 해결되겠어.”
 부서진 탁자며 의자의 잔해들이 난무하는 와중에도 계산대 뒤에 숨어 있는 주인은 주판을 퉁기고 있었다.
 “그 동안 선권괴가 싸우는 모습을 수없이 보아왔지만 오늘처럼 요란하긴 처음이군. 보통은 선권괴의 주먹 한 방이면 끝나곤 했었는데······ 배상비가 적지 않겠어.”
 그때 부서진 탁자 다리가 날아와 계산대 안쪽 벽에 진열돼 있던 술병 하나를 박살냈다. 향긋한 국화 향이 그윽하게 퍼져 나왔다. 그러자 주인은 보지 않아도 알겠다는 듯 주판알을 퉁겼다.
 “십 년 묵은 국화주 한 병이면······”
 그때였다.
 “크억!”
 추심악노의 목소리가 분명한 신음성이 짧게 터져 나오더니 직배도 한 자루가 계산대를 퍽, 뚫고 날아와 주인의 코를 스치며 벽에 꽂히는 게 아닌가!
 “아다닷!”
 소스라치게 놀란 주인은 엉덩방아를 쿵 찧었다. 뒤이어 침묵이 찾아왔다.
 “끝났나?”
 주인은 계산대 위로 고개를 빠끔히 내밀고 상황을 살펴보았다.
 추심악노라 불리던 노인이 낭패한 얼굴로 오른손에만 도를 움켜쥔 채 서 있었는데, 도를 잃은 그의 왼팔은 탈골되었는지 축 늘어진 상태였다.
 추심악노의 입에서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크으······ 저런 애송이에게 당하다니······”
 선권괴가 득의만만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 선권괴 앞에서 파렴치한 행동을 하면 어떻게 되는지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가르쳐 주지.”
 그 말에 추심악노와 이면요부의 안색이 일변했다.
 ‘어쩐지 강하다 했더니 놈이 바로 선권괴였어.’
 두 사람의 눈빛은 동시에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그들이 잠시 눈빛을 교환하는 사이 선권괴의 공격이 이어졌다.
 “이제라도 잘못을 시인하면 용서할 테니 무릎을 꿇어라!”
 선권괴의 이번 일격은 더욱 강맹했고 쾌속했다.
 추심악노는 이미 대항할 힘을 잃은 듯 반격할 기미도 없이 넋을 놓은 채 그의 공격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의 주먹이 추심악노의 가슴에 꽂히려는 순간이었다. 이면요부의 팔이 가볍게 흔들리자 그녀의 소매 속에서 무언가가 튀어나와 선권괴에게 쾌속하게 쏘아져 갔다.
 쐐애액!
 공기를 가르며 날아가는 것은 낚싯바늘 세 개가 묶여 있는 듯한 모습의 갈고리였는데 그 수가 또한 세 개였다. 그것은 소매로 연결된 천잠사를 통해 조종되고 있는 듯 허공을 자유자재로 춤추며 쏘아져 왔다.
 추심악노만 염두에 두고 있던 선권괴는 의외의 공격에 흠칫 놀라 급히 몸을 틀어 갈고리 하나를 쳐냈다. 그러자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추심악노가 쾌속하게 도를 베어왔다.
 선권괴는 눈 깜짝할 사이에 삼 초를 뻗어냈다.
 팍! 팍! 팍!
 머리로 날아들던 갈고리가 튕겨나가고 추심악노의 도가 비껴나갔으나, 세 번째의 갈고리가 갑자기 밑으로 떨어지며 선권괴의 허벅지를 할퀴었다.
 선권괴는 재빨리 뒤로 일 장 정도 물러났다.
 그리고 먼지를 털 듯 바지에 묻은 핏방울들을 털어내며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
 “모기가 있나? 간지럽잖아.”
 이면요부가 앙칼진 음성으로 말했다.
 “그래, 오늘 모기한테 갈가리 찢겨봐라.”
 이면요부와 추심악노가 함께 덮쳐 오자 선권괴가 형형한 안광을 폭사하며 소용돌이가 이는 듯한 권풍을 일으켰다.
 추심악노는 부상을 입은 데다가 칼 하나를 잃는 바람에 좀 전과 같은 위력적인 공격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면요부의 갈고리들은 연이 바람을 타듯 선권괴의 권풍을 타고 들어왔고, 선권괴가 갈고리를 막기 위해 손을 빼면 기다렸다는 듯이 추심악노의 도세가 밀려들었다.
 두어 번의 위기를 넘긴 선권괴가 흘깃 보니 자찬괴는 여전히 탁자에 앉아서 하품을 하고 있었다.
 은근히 약이 오른 듯 선권괴는 이면요부의 갈고리를 쳐내 자찬괴에게 쏘아보냈다.
 그러자 자찬괴는 갈고리들이 코 앞에 이를 때까지 멀거니 보고 있더니 귀찮다는 듯 손을 한 번 쓸어냈다. 아무렇지도 않은 손짓이었지만 강력한 내력이 실려 있는 듯 갈고리들은 방향을 잃고 뿔뿔히 흩어졌다.
 이면요부가 재빨리 무기를 회수하며 놀란 얼굴로 자찬괴를 바라보았다.
 ‘저자의 내공이 선권괴보다 강하면 강했지 약하지는 않겠어. 둘이 아는 사이라면 골치 아플 것 같은데······ 혹시 삼괴 중 하나인 자찬괴가 아닐까?’
 그러나 이면요부의 걱정과는 달리 자찬괴는 관심없다는 듯 창 밖을 보며 또다시 하품을 해대고 있었다.
 이면요부는 안심하는 기색으로 선권괴에게 다시 맹공을 퍼부었다. 동시에 선권괴의 정면에 있던 추심악노가 한 손으로 도를 휘두르고 다른 손으로 일 장을 뻗어왔다.
 “죽어랏, 애송이!”
 “죽어야 할 폐물은 바로 당신이다, 늙은이!”
 선권괴는 상체를 틀어 도를 피하며 좌장으로 추심악노의 장공을 마주쳐 갔다.
 두 사람의 장이 마주치는 순간 요란한 격타음 대신 손뼉을 치는 듯한 소리가 울려나오며 장심이 찰싹 달라붙어 버렸다. 동시에 추심악노의 내력이 장심을 통해 물밀듯이 쏟아져 들어왔다.
 선권괴는 크게 놀라 손을 빼려고 했지만 이미 늦은 상태였다. 장심이 맞붙은 상태에서 상대가 내력을 뿜어내는 데 손을 빼려면 치명적인 내상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추심악노의 계략에 보기 좋게 걸려든 셈이었다. 추심악노는 징그러운 미소를 흘리며 전력을 다해 내력을 쏟아냈다. 이렇게 되자 선권괴도 단번에 그를 쓰러뜨릴 수는 없었다.
 우지직!
 두 사람의 내력을 견디지 못한 주루의 바닥이 금방이라도 갈라질 듯 요란한 비명을 질러댔다.
 이때 이면요부의 갈고리 세 개가 그물처럼 퍼지며 선권괴의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선권괴로서는 실로 난감한 일이었다. 내력 대결이란 온몸의 진기를 쏟아부어야 하는 만큼 다른 공격에는 무방비 상태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지금 만약 이면요부의 공격을 막기 위해 내력을 분산시킨다면 추심악노의 내력이 밀려들어 선권괴는 극심한 내상을 입게 될 것이 분명했다.
 그야말로 진퇴양난이었다.
 ‘악독한 계집! 저를 도우려 싸우고 있는데 오히려 나를 공격하다니.’
 속으로 투덜거려 보아도 상황이 바뀌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갈고리들이 선권괴의 두부를 찢어발길 듯 쇄도해 들어왔다. 이젠 어떻게든 결정을 내려야 할 때였다.
 선권괴는 어쩔 수 없이 내력의 일부를 우수로 보내 갈고리들을 막으려 하였다. 위험을 무릅쓰고 말이다. 그때였다.
 패애액!
 공기가 찢어질 듯한 음향이 일며 빛살 같은 속도로 날아온 물체가 갈고리를 일거에 튕겨내 버렸다.
 천잠사의 진동으로 느껴지는 내력으로 보아 범상한 능력의 소유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이면요부는 쉽게 간파할 수 있었다. 바닥에 떨어진 것은 커다란 술잔이었다.
 그 순간을 이용해 선권괴는 혼신공력을 몰아냈고, 그 힘을 이기지 못한 추심악노는 피를 토해 내며 뒤로 주르륵 물러섰다.
 앞섶을 선혈로 물들인 추심악노가 무섭게 눈을 부라리며 자찬괴를 쏘아보았다.
 “우리를 방해한 것이 네놈이냐?”
 그때 입구 쪽에서 뜻밖의 음성이 들려왔다.
 “내가 좀 늦은 건가?”
 추심악노와 이면요부, 그리고 선권괴의 시선이 동시에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언제 나타났는지 구무괴가 한 손에 술병을 든 채 빙그레 웃고 있었다.
 이미 알고 있는 사이인 듯 추심악노와 이면요부의 안색이 허옇게 탈색되었다.
 먼저 말을 건 것은 구무괴였다.
 “오랜만이외다, 두 분.”
 추심악노는 당황한 표정으로 헛기침을 연신 터뜨렸다.
 “험······ 험, 자네가 여긴 웬일인가?”
 옆에 서 있는 이면요부의 얼굴에도 못마땅하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아무래도 그들 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저 인간이 나타나면 반드시 안 좋은 일이 생기는데······’
 그들의 대화를 유심히 듣고 있던 선권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구무괴에게 물었다.
 “너와 아는 사이냐?”
 “알다뿐인가? 우리에겐 아주 깊은 사연이 있지.”
 구무괴가 다시 추심악노와 이면요부를 번갈아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지 않소?”
 구무괴의 물음에 이면요부는 샐쭉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고, 추심악노는 억지웃음을 지으며 우물거렸다.
 “그······ 그렇다고 할 수 있겠지.”
 ‘얄미운 놈, 오늘은 절대 당하지 않겠다.’
 이면요부가 속으로 이렇게 다짐하고 있자니 구무괴가 능글맞은 미소를 머금은 채 그녀의 면전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오늘은 어째 늦은 시각까지 젊음을 유지하고 계십니다?”
 “아차! 시간이······”
 웬일인지 이면요부는 매우 놀라 허둥대며 자신의 얼굴을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연유인지 몰라 멀뚱히 서 있는 선권괴의 뒤로 자찬괴가 다가왔다. 아직 술이 덜 깬 부스스한 얼굴이었다.
 “잠시 후면 무릎을 꿇고 싹싹 빌어야 할 거다.”
 “내가 왜?”
 선권괴가 되묻자 자찬괴의 입가에 조롱기 어린 미소가 번져 나갔다.
 “저 둘은 아주 정상적인 부부 사이거든. 네가 생각하고 있는 불륜 관계가 아니고 말이야.”
 “뭐야? 그런 말도 안 되는······”
 선권괴가 못 믿겠다는 듯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추심악노 부부를 바라보았다.
 추심악노는 낭패한 표정으로 서 있고 이면요부는 요염한 자신의 얼굴을 감싼 채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정상적인 부부라고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정상적인 부부라면 무슨 이유로 구무괴를 껄끄럽게 대한단 말인가? 보통 구무괴에게 꼼짝 못 하는 부류들은 뭔가 약점이 잡힌 인간들뿐이었다. 그러니 분명히 추심악노 부부도 불륜의 현장을 들킨 일이 있을 것이라고 지레짐작하는 선권괴였다. 그는 아무래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자찬괴를 바라보았다.
 “너 혹시 술 덜 깼냐? 저들이 정상적인 부부라니, 웬 헛소리야?”
 선권괴의 핀잔 섞인 말에 자찬괴가 이면요부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래도?”
 “또 무슨 헛소리를 하려는 거냐?”
 자찬괴의 말을 도무지 못 믿겠다는 듯 심드렁한 표정으로 시선을 돌리던 선권괴는 눈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괴사를 발견하고는 입을 쩍 벌렸다. 또한 두 눈은 안구가 툭 튀어나올 만큼 크게 부릅떠졌다.
 “저······ 저······”
 양손으로 감싼 이면요부의 얼굴 살이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이를 어째······ 이를 어째······”
 그 떨림이 점점 확산되더니 잠시 후에는 온몸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모두가 인상을 찌푸리고 바라보는 가운데 이면요부의 입에서 고통에 찬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우우······ 욱!”
 떨림이 점점 확산되어 나가던 이면요부의 피부가 더욱 무섭게 요동치더니 종내에는 수십 마리의 뱀이 살 속을 헤집고 다니는 듯 꿈틀거렸다.
 “끄으으어······ 꺼어어······”
 이면요부의 신음성이 괴성으로 바뀌고······ 팔다리가 기이하게 꺾이며 온몸의 혈관들이 피부 밖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토록 요염했던 얼굴은 사라지고 쭉 찢어진 메마른 두 눈 밑으로 드러난 납작한 코와 주름진 입술. 변하지 않은 것은 그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괴성뿐이었다.
 “끄르륵! 우욱······”
 목의 피부들도 말라죽은 고목처럼 변했고, 머리를 감싸쥔 고운 손도 주름이 잡히고 관절이 툭툭 불거졌다.
 “어떻게 저런 일이······”
 선권괴가 넋이 나간 듯 중얼거리자, 그의 뒤에서 자찬괴가 낮게 말했다.
 “이면요부는 주안술을 잘못 익혀서 낮에는 젊은 모습으로 있다가 해가 지면 본 모습으로 돌아오는 거야.”
 “크으으······”
 한참을 괴로워하던 이면요부가 머리에서 손을 내리며 고개를 들었다.
 노려보는 듯한 쭉 째진 두 눈, 거품 자국이 말라붙은 입술, 그리고 짙은 가래가 끓는 듯 그르렁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오는 것이 추심악노보다 더 늙고 추악해 보였다.
 “역시 여자 얼굴은 믿을 게 못 돼.”
 선권괴의 중얼거림에 자찬괴가 한마디했다.
 “그래도 여자는 예쁜 게 좋아. 너는 경험을 못 해봐서 그렇지, 은은한 불빛 아래서 코를 맞대고 있어봐. 추녀와 있는 게 얼마나 괴로운지. 더구나 저런 얼굴이라면······”
 “그건 그래. 여자는 밥과 빨래만 잘하면 그만이지만 저렇게 추악한 얼굴이라면 문제가 약간 달라지겠지. 밥맛이 떨어져 갖고야 아무리 음식을 잘해도 소용없을 테니까.”
 스윽!
 늙은 모습으로 돌아온 이면요부가 광기 어린 눈으로 선권괴를 노려보았다. 추심악노도 하나 남은 직배도를 철그렁거리며 눈을 부라렸다.
 “너, 계속 입을 함부로 놀릴 테냐? 혼이 덜 난 모양이지?”
 그 말을 듣고 가만히 있을 선권괴가 아니었다.
 “혼이 덜 난 건 영감이겠지.”
 “이놈이 그래도······”
 금방이라도 한바탕 붙을 듯이 으르렁거리는 두 사람의 말을 끊으며 구무괴가 나섰다.
 “자, 자, 진정들 하시고. 그래, 두 분께서 이곳 개봉에는 웬일이시오?”
 그러자 선권괴를 노려보던 추심악노가 구무괴에게 시선을 돌리며 야릇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자네에 관해 이상한 소문이 떠돌더군.”
 구무괴는 술병을 들어 한 모금 목을 축이며 추심악노를 힐끗 쳐다보았다.
 “두 분도 그 소문 때문에 개봉을 찾으셨소?”
 가볍게 바라보는 것이었지만 구무괴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추심악노도 이런 점을 느꼈는지 메마른 웃음을 흘려냈다.
 “클클클······ 그런 소문은 믿지도 않을 뿐더러, 사실이라 해도 천하의 그 누가 삼괴의 품 속에 든 물건을 꺼낼 수 있겠는가? 우리는 그저 개봉을 구경하기 위해 온 것뿐이니 괘념치 말게.”
 “하긴, 개봉에 볼거리가 없는 것도 아니지.”
 구무괴가 술병을 살살 흔들며 가볍게 대꾸했다.
 “방금 그 말씀 사실이길 바라겠소.”
 “클클······ 자네들의 능력을 익히 알고 있는데, 이 늙은이가 허튼 소리를 하겠는가?”
 “그럼, 구경 잘하고 가시오.”
 추심악노는 왠지 음산해 보이는 미소를 흘리며 대꾸했다.
 “소문이 심상치 않으니 조심들 해야 할 걸세.”
 이어 발길을 돌리려던 추심악노의 시선이 아직도 이면요부를 괴이한 듯 바라보고 있는 선권괴에게 향했다.
 “저 어린 녀석의 소행이 괘씸하긴 하지만, 구무괴의 얼굴을 봐서 오늘은 조용히 물러가기로 하지.”
 “감사하오. 기억해 두리다.”
 구무괴가 웃으며 대꾸하자, 추심악노가 헛기침을 한 번 하더니 이내 몸을 돌려 이면요부와 함께 계단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나 이면요부는 못내 분했던지 걸어가면서 무서운 눈으로 선권괴를 계속 노려보았다.
 선권괴가 코웃음을 치더니 고개를 잔뜩 쳐들고 가슴을 쫙 펴보였다.
 “흥, 이 선권괴가 사과하기를 원하시나 보지? 그래, 미안하외다. 흉측한 늙은이를 아름다운 미부로 착각해서······ 그냥 생긴 대로 살 것이지, 원.”
 이면요부가 소매 속에 감춰진 갈고리를 짤그랑거리며 부르르 떨리는 눈빛으로 선권괴를 쏘아보았다. 그러자 추심악노가 그녀의 소매를 살짝 잡아당겨 길을 재촉했다.
 “언젠가 네놈의 면상을 뭉개버리고 말 테다!”
 못내 분한 듯 이면요부는 독살스러운 일갈을 토해 내고는 쌩 하니 돌아섰다.
 잠시 후, 말울음 소리가 들리더니 추심악노 부부가 말을 타고 떠나는 모습이 창문 밖으로 보였다.
 자찬괴는 남아 있는 술기운을 몰아내려는 듯 크게 심호흡을 하더니 멀어져 가는 추심악노 부부를 가리키며 구무괴에게 물었다.
 “독날하기로 소문난 추심악노 부부가 순순히 물러나는 게 이상하군. 자네와 알고 있는 사이 같았는데 대체 어떤 일이 있었는가?”
 “일전에 나에게 잘못 시비를 걸었다가 내 구공에 휘말려 반 년간 별거를 한 적이 있지.”
 “독날무비한 성격을 지니기는 했어도 부부 사이만큼은 끔찍한 것으로 유명한 추심악노 부부가 반 년이나 별거를?”
 구무괴는 별거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이더니 말을 이었다.
 “둘이 다시 합치고 얼마 되지 않아 복수를 한답시고 다시 찾아왔더군.”
 “그래서?”
 자찬괴의 물음에 구무괴가 짓궂은 표정을 짓더니 말했다.
 “내가 좋은 말로 몇 마디 해주었더니 다시 일 년간 별거에 들어갔다가 사흘 전에야 겨우 합쳤다지 아마?”
 구무괴가 이내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이번엔 한 삼 년쯤 헤어지게 만들어줄까 했더니, 미리 알고 조용히 물러나는군.”
 그때 선권괴가 끼여들었다.
 “지금도 늦지 않았으니 우리도 말을 타고 쫓아가세. 그래서 그 고약한 두 노인네를 완전히 찢어지게 만들자고.”
 “이 녀석 말은 무시하게. 공연히 말썽만 피우고 말이야.”
 자찬괴의 핀잔에 멀쑥해진 선권괴는 뭔가 한마디 쏘아붙이려 했지만, 조금 전 일은 분명 자신의 잘못이 컸는지라 꾹 눌러참으며 뒤로 물러났다.
 ‘젠장, 지은 죄가 있으니 참아야지.’
 자찬괴는 웬일이냐는 듯 선권괴를 힐끗 쳐다보고는 구무괴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까 소문 운운하던데 무슨 소문을 말하는 것인가?”
 “얘기가 좀 기네. 어디 좀 앉아서 얘기하세.”
 두 사람은 곧 비교적 온전한 탁자를 골라 자리를 잡고 앉아 얘기를 시작했는데, 선권괴는 어디로 사라졌는지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자찬괴의 말에 단단히 심기가 틀린 모양이다’ 라고 생각하고 두 사람은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사이 주루 주인이 나와 어질러진 내부를 청소하기 시작했다. 한참만에야 간신히 정리를 끝낸 주인은 주방으로 뛰어 내려가더니 술과 안주를 준비해 올라와 구무괴와 자찬괴의 탁자에 내려놓았다.
 자찬괴가 술을 따르며 말했다.
 “그렇다면 추심악노와 이면요부 또한 그 오행도에 관심이 있어 개봉에 나타났을 터, 산 속에서 죽을 날이나 기다려야 할 노물들까지 기어나오다니······ 오행도의 위력이 대단하긴 대단하군.”
 구무괴가 입을 열었다.
 “우리 삼괴를 곤경에 빠뜨리려면 그 정도 미끼는 써야지. 하지만 이 음모를 꾸민 자가 누구인지는 몰라도 그는 상대를 잘못 고른 거야.”
 두 사람이 한동안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계단 아래쪽에서 우당탕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언뜻 듣기에도 탁자며 식기들이 부서져 나가고 있는 소리가 분명했다.
 “뭐야, 큰 싸움이라도 벌어진 건가?”
 구무괴와 자찬괴가 자리에서 일어서려고 하는데 아래층에서 주인이 허둥지둥 뛰어 올라왔다.
 “아이고, 나리, 소인 좀 살려주십시오!”
 사색이 되어버린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구무괴와 자찬괴는 뭔가 생각이 난 듯 무릎을 탁 치더니 쏜살같이 아래층으로 뛰어 내려갔다.
 “선권괴가 드디어 일을 벌린 모양일세.”
 “이런 망할 놈의 인간. 또 술을 퍼마신 모양이군.”
 아래층은 아예 난장판이었다. 잠깐 사이에 얼마나 때려부쉈는지 조금 전 추심악노 부부와 싸웠던 이층보다 더욱 험하게 부서져 있었다.
 “술! 술 가져오란 말이다.”
 선권괴는 유일하게 성한 탁자에 앉아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고 있었는데, 주변에 술동이가 십여 개나 뒹굴고 있었다. 반 식경도 못 되는 사이에 이만큼 퍼마셨으면 쓰러질 법도 하건만, 선권괴는 술을 마시면 더욱 힘이 솟는 특이한 체질을 지녔는지 여전히 술타령을 하고 있었다.
 “저 개떡 같은 성질 하고는······”
 구무괴가 고개를 내두르며 먼저 다가가서 탁자 한켠에 자리를 잡았다.
 “에구······ 어쩌자고 저 자식에게 술을 줘가지고······ 이제 발동이 걸렸으니 근방 십 리 안의 술이 동나기 전에는 끝내기 힘들겠군.”
 자찬괴는 혀를 끌끌 차더니 뒤에 따라붙은 주인에게 시선을 돌렸다.
 “어차피 벌어진 일이니 수레를 끌고 나가 근처의 술이나 긁어모으시오. 저 술고래가 마시는 양을 대주지 못했다가는 근방 주점들이 무사하지 못할 테니 말이오.”
 “두 분께서 어떻게 좀 해보시면 안 되겠습니까요?”
 무력을 써서라도 제지할 수 없겠느냐는 눈초리였다. 자찬괴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몰라서 물으시오? 저 인간 뱃속에 술이 한 잔이라도 들어가는 날엔 설사 황제가 나타난다 해도 그 더러운 주벽을 말릴 수 없다는 사실을 말이오.”
 “그래도 두 분은 친구니까······”
 “그러니 더 안 된단 말이오. 아무리 꼴 보기 싫은 녀석이라도 친구인 것은 분명한데 어찌 죽이란 말이오?”
 “죽이라고까지는······”
 “죽이지 않고 선권괴의 손에서 술동이를 빼앗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거요, 지금?”
 주인은 잠시 생각하는 것 같더니 이내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몸을 돌려세웠다. 주루에 남아 있는 술이 다 떨어지기 전에 술을 더 구해놓기 위해서······ 그래도 다행인 것은 선권괴의 주벽을 모르는 상인이 없는지라 그 때문이라고 하면 주저 않고 술들을 내놓을 것이란 사실이었다.
 
 주인이 힘없이 문을 나서자 자찬괴도 자리를 잡고 앉았다.
 “술 취한 놈 주정 받기에는 같이 취하는 방법이 최고지.”
 점원들이 부지런히 술동이를 내오고 선권괴와 구무괴는 날을 받았다는 듯 입 안으로 들이붓고 있었다. 그러나 취하기는 역시 술이 약한 자찬괴가 먼저였다.
 “끄윽! 좋군. 술이란 좋은 거야. 퍼마시기만 하면 짐승이 되어버리는 인간들만 없으면 말이야.”
 곁에서 술을 마시고 있던 구무괴가 화다닥 놀라 얼른 자찬괴의 입을 막았지만 이미 때는 늦은 뒤였다.
 아직 술이 부족한 듯 조용히 술만 들이켜고 있는 선권괴의 주벽에 자찬괴의 말 한마디가 불을 지르고 만 것이다.
 “방금 나한테 한 소리냐?”
 으르렁거리며 눈을 부라리는 선권괴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다. 만약 그렇다고 하면 사생결단이라도 내자고 할 기세였다. 먼저 취하기는 했지만 아직 이성을 잃을 정도는 아니어서, 자찬괴는 얼른 도리질치며 히죽 웃어주었다.
 “내가 뭐라 그랬나? 그냥 네가 술을 멋있게 마신다고 해본 소리지. 하하······”
 “그래? 그런 뜻이었단 말이지?”
 선권괴는 별 의심을 하지 않고 다시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그렇게 다시 한 동이를 비우고 났을 때였다. 그는 술동이가 부서질 듯 쾅, 내려놓으며 분하다는 듯 고함을 질렀다.
 “주안술을 익히고 있는 늙은이일 줄 내가 어떻게 아느냔 말이야, 엉?”
 아마도 조금 전 추심악노 부부와 싸웠던 일이 생각나는 모양이었다. 그러자 자찬괴의 안색이 금방 핼쑥하게 변했다.
 ‘주사가 드디어 쏟아지기 시작하는 모양인데······’
 그의 예상대로 선권괴는 혼자서 한참을 떠들어대더니 갑자기 무섭게 눈알을 부라리며 자찬괴를 쏘아보았다.
 “너 아까 내가 이면요부의 갈고리에 당할 뻔했을 때도 하품만 하고 있었지?”
 “하하······ 그건 네가 충분히 이길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리고 어쨌든 구무괴가 도와줬었잖아······”
 자찬괴가 궁색한 변명을 해보지만 선권괴의 귀에는 전혀 들어가지 않는 것 같았다.
 “친구가 죽어가는데 하품만 해? 항상 제 자랑만 늘어놓았지, 네가 잘하는 게 도대체 뭐냐? 이 음란시인아!”
 “뭐? 음란시인?”
 어지간하면 참으려 했던 자찬괴였지만 자신의 예술이 모독받자 화가 불끈 솟아올랐다.
 “좋게 봐주려고 했더니······ 그러는 너야말로 잘하는 게 뭐 있냐? 술 마시고 행패부리는 주사가 일절이요, 남의 일에 끼여들어 말도 하기 전에 주먹부터 휘두르는 선권무언이 일절이요, 덩치는 산만한 녀석이 계집들이나 하는 요리, 빨래, 애 보기나 좋아하는 가사취미가 일절이니 네 삼절 중 써먹을 것이 뭐가 있냐?”
 “자, 자, 그만 하고 술이나 마시자. 서로 헐뜯어서 나올 게 뭐 있다고 이러냐?”
 
 구무괴가 둘을 뜯어말리려 했지만, 이미 술에 절은 선권괴와 화가 잔뜩 난 자찬괴의 귀에 그의 말이 들어올 리 없었다.
 약이 바짝 오른 선권괴가 질세라 자찬괴의 삼절을 잡고 늘어졌다.
 “그러는 네놈의 삼절은 어떠냐? 말이 좋아 시, 음, 화 삼절이지. 기껏 분다는 단소는 색음공이고, 그림은 그려봐야 벌거벗은 여자나 그리는 도색화에다가, 말도 되지 않는 엉터리 시나 지어서 읊조리는 주제에 말이야. 아까만 해도 그래. 그녀의 마음이 어쩌고저쩌고 하더니 ‘구무괴는 크기만 할 뿐 내 기술엔 어림없기에’ 라고? 그게 그렇게 잘난 기술이냐? 드러내놓고 자랑할 만한 기술이냐고!”
 “뭐? 구무괴가 뭐 어떻다고?”
 여태껏 둘을 말리던 구무괴도 자신의 막중대사(?)가 거론되자 금방 쌍심지를 돋우며 끼여들었다.
 “자찬괴! 네가 정말 그런 말을 했다는 말이냐?”
 그러나 자찬괴는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내가 뭐 틀린 말 했냐? 말이야 바른말이지, 기술은 내가 훨씬 좋은 게 사실이잖아?”
 “네가 감히 이 구무괴의 삼절 중 주색을 깔아뭉개려 드는 것이냐?”
 “네 삼절이 뭐 그리 대단하다고 핏대를 세우느냐? 이간질, 독설, 주색이 내세울 만한 장점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거냐?”
 이쯤 되면 구무괴도 발을 뺄 수가 없다.
 그는 도저히 못 참겠다는 듯 자신의 특기인 구공을 발휘해 자찬괴를 몰아붙였다. 자찬괴 또한 지지 않고 대들었으며, 여기에 선권괴까지 가세하니 도대체 누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반 시진 동안이나 서로에 대해 험담을 늘어놓았다. 그러는 사이에도 술들은 쉬지 않고 마시고 있어서 주루는 바야흐로 빈 술동이로 가득 들어찰 지경이었다.
 구경하는 입장에서 본다면 정말 신기한 일이었다. 보통은 이렇게 심한 입씨름을 하다 보면 주먹이 오가게 마련인데 그들은 희한하게도 그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말보다 주먹이 먼저라는 선권괴마저도 말이다.
 그렇게 한참을 떠들어대던 삼괴는 한 순간 동시에 말을 멈추며 서로를 노려보았다. 갑자기 조용해진 주루에는 정적이 감돌았다. 만약 누군가 먼저 도발하기만 한다면 주루가 통째로 날아가고도 남을 만한 팽팽한 긴장이었다.
 그 정적을 깨뜨린 것은 구무괴였다. 그는 두 사람을 계속 노려보며 한 손을 천천히 들어올렸다. 나머지 두 명도 더욱 무서운 눈빛으로 구무괴를 노려보았다. 구무괴의 손이 정점에 이르렀다고 생각되는 순간, 갑자기 아래로 내리쳐졌다.
 쾅!
 탁자가 부서질 듯한 비명을 질러내며 먼지를 물씬 피워냈다. 그러자 선권괴와 자찬괴도 동시에 탁자를 내리쳤다. 이어서 서로 머리를 들이밀며 으르렁거렸다.
 주루에 있는 점원들은 불안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저러다가 세 사람이 본격적으로 싸우기라도 한다면 자신들의 주루뿐 아니라 근방은 온통 쑥대밭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 주루 주인이 술을 한 수레 가득 구해 와서는 문 앞에 멈추어섰다. 술을 얻으러 돌아다니며 선권괴에게 왜 술을 주었냐고 핀잔을 들어서인지 후줄근한 모습이었다. 어쨌든 밤을 지샐 만한 양을 구해 왔으니 다행이었다. 그는 지친 몸을 추슬러 술 한 동이를 들고는 주루 안으로 들어섰다. 그 순간이었다.
 “파하하하!”
 주루가 떠나갈 듯한 파안대소가 삼괴의 입에서 동시에 터져 나오지 않겠는가!
 화다닥!
 그렇지 않아도 주루가 조용한 이유 때문에 불안해 하던 주인이 크게 놀라며 어렵게 구해 온 술 한 동이를 떨어뜨려 폭삭 깨뜨리고 말았다.
 웃음을 터뜨리던 삼괴는 동시에 웃음을 멈추며 소리쳤다.
 “그래서 우리가 삼절삼괴라고 불리는 것 아니겠어?”
 그 동안 잔뜩 긴장한 채 마음을 졸이고 있던 점원들로서는 황당한 일이었지만 삼괴는 이렇게 의기투합한 채 다시 자리에 앉아 술을 들이붓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정말 짜증나는 것은 주인이었다.
 ‘우라질······ 누가 삼괴 아니랄까 봐, 목소리까지 커가지고······ 아까운 술동이만 깨버렸잖아.’
 “주인장, 여기 술 더 가져오쇼!”
 구무괴가 외치는 소리였다.
 ‘빌어먹을 술 귀신들······’
 정말 무공만 배웠으면 사생결단이라도 내고 싶은 주인이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자신은 부엌칼 한 자루도 마음대로 휘두르지 못하는 처지인걸.
 그는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점원들과 함께 수레에 실려 있는 술을 날라오기 시작했다. 아마도 이 밤은 매우 길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5장 재앙을 부르는 오행도
 
 
 날이 저물면 밤이 되고, 밤이 오래되면 당연히 아침이 오는 법.
 취광주루의 오색 처마가 받치고 있는 하늘에서도 밝은 해는 솟아올랐다.
 일터로 가는 사람들의 바쁜 발걸음과 경쾌하고 활기차게 소리치는 상인들의 목소리, 그리고 귀를 간질이는 새들의 지저귐 소리.
 그러나 취광주루의 주인에게는 그런 새들의 지저귐 소리마저 그렇게 짜증날 수가 없었다. 그는 밤새도록 삼괴에게 얼마나 시달림을 당했는지 움푹 꺼진 두 눈을 감은 채 꾸벅꾸벅 졸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점 안은 온통 빈 술동이들뿐이었다.
 밤새 마시다 지쳤는지 그렇게 부어대던 선권괴도 탁자에 엎드려 자고 있었다.
 그러나 구무괴와 자찬괴는 아직까지도 게슴츠레한 눈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밤새 퍼붓더니 드디어 나가떨어졌군.”
 “술 때문에 잠든 것이 아니라, 틀림없이 잠을 이기지 못해서 술을 마시지 못하고 있는 걸 거야.”
 두 사람은 코를 골며 자고 있는 선권괴를 내려다보다가 빙그레 웃었다.
 게슴츠레하게 눈을 뜨고 있던 자찬괴가 문득 눈빛을 빛내며 말했다.
 “그렇다면 자네를 이화에게 청부한 자도 오행도를 노리고 있는 것일까?”
 “글쎄, 그거야 모를 일이지.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 세 명 모두가 표적이 되었다는 사실이네.”
 대답을 하는 구무괴의 두 눈도 어느새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삼화원에는 이화말고도 절대 살수가 두 명이나 더 있어. 내 추측이 맞는다면 그들은 아마도 자네와 선권괴를 노리고 있을 거야.”
 구무괴의 말에 자찬괴가 싱긋 웃으며 창문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창문 밖으로 수십 마리의 참새 떼가 날아가며 눈부신 아침 햇살을 사방에 반사시키고 있었다.
 그 햇살들의 틈새로 자찬괴의 차분하고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지 않아도 무료하던 참이었는데 잘된 일이군. 당분간은 긴장감을 만끽할 수 있을 테니 말이야. 삼화원의 살수들이라면 나를 심심하게 하지는 않을 것 아닌가?”
 구무괴와 자찬괴가 대화를 나누고 있는 동안에도 선권괴의 코고는 소리는 계속 들려왔다.
 자찬괴가 그런 선권괴를 보며 지겹다는 듯이 말했다.
 “그나저나 이 녀석이 일어나야 그 동안 일어났던 일들을 말해 줄 텐데 말이야. 쉬지도 않고 주정을 하는 바람에 말할 틈이 없었으니······”
 구무괴가 소리내어 웃었다.
 “하하하······ 하여간 이 녀석 뱃속에 술 한 잔이라도 들어가는 날에는 우리 이괴가 취한 일괴에게 쩔쩔맨다니까.”
 “그럴 땐 선권괴가 아니라 취괴무적이라고나 할까?”
 둘이 대화를 나누며 웃고 있자니 뭔가에 놀란 듯 선권괴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여기가 어디야?”
 한마디하고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훤히 밝아 있는 창을 발견하고는 화다닥 놀라 일어났다.
 “잠든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일어나냐? 설마 술을 또 마시려는 것은 아니겠지?”
 선권괴는 구무괴의 질문에 대꾸도 하지 않고 낭패한 표정을 지었다.
 “아이들 아침 차려줄 시간이 지났어!”
 한마디 중얼거리고는 인사도 하지 않고 창문을 훌쩍 뛰어넘어 달려가 버렸다.
 “이봐, 정작 중요한 얘기가 남아 있는데 어딜 가는 거야?”
 자찬괴의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가는 선권괴의 모습이 이내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저 녀석, 아이들 끼니만큼은 절대 그냥 넘기질 않는군.”
 기가 차다는 듯이 중얼거리는 자찬괴의 어깨를 구무괴가 툭, 치더니 빙그레 웃었다.
 “원래 아이들은 끔찍이 위하는 녀석이니까. 어쨌든 그가 가버렸으니 별수없이 우리가 가서 말해 주어야겠군.”
 구무괴가 먼저 일어서서 밖으로 나갔다.
 자찬괴도 옷을 툭툭 털며 일어나, 혹시 옷이라도 구겨지진 않았는지 꼼꼼히 살펴보고는 구무괴의 뒤를 따랐다.
 
 ***
 
 선권괴의 집은 변두리 마을에서도 한참을 더 들어가야 나오는 외딴 곳이었다.
 그곳에서 선권괴가 고아들을 키우고 있다지만 그렇다고 관청에서 지원금이 나오거나, 어느 부호가 양식을 대는 것도 아니었다.
 순수한 선권괴의 수입으로만 운영되는 곳이었고, 처음에는 그저 두세 명의 갈 곳 없는 아이를 데려다 키우던 것이 이제는 어느새 열 명이 넘어선 상태였다.
 선권괴의 아이들을 생각하는 마음은 보통이 아니어서 손수 밥을 짓고, 빨래를 해서 아이들을 먹이고 입혔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아이들이 게을러지는 것을 용서하지는 않았다.
 구김살없이 크는 것도 중요하지만 다른 아이들과 처지가 다른 만큼 더욱 부지런해야 하고, 서로 간의 의리가 더욱 강해야 한다는 것이 선권괴의 지론이었다.
 한동안 걸어 절반 정도 왔을 때 자찬괴가 문득 물었다.
 “선권괴가 관청에 고발당해 끌려갔던 일을 기억하냐?”
 구무괴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왜 기억 못 하겠어? 천하의 삼괴 중 하나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관청에 끌려간 사건이었는데······ 선권괴가 아이들에게 조각하는 기술, 주먹 쓰는 법 등 여러 가지를 가르치자, 이웃의 어떤 사람이 선권괴가 아이를 납치해 일을 시켜 돈을 벌려 한다고 관아에 고발한 것을 말하는 게 아닌가.”
 자찬괴도 히죽 웃었다.
 “그때 선권괴 녀석의 표정이라니······ 생각 같아선 관청이고 뭐고 다 때려엎고 싶었을 텐데 말이야. 아이들의 미래가 걸렸다면서 고분고분 제발로 찾아가 수령 앞에 서서는 울그락불그락한 얼굴로 ‘내가 선권괴요!’ 했다지. 그러자 선권괴의 험악한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란 그 수령이 ‘이놈이 날 죽이려 한다!’ 하고 소리를 질러대는 바람에 수백의 병사들에게 포위당하고 말았지.”
 구무괴가 말을 받았다.
 “우여곡절 끝에 자초지정을 듣게 된 수령이 오히려 장한 일을 한다고 상을 내린다는 것이 그만 선권괴에게 술을 먹이고 말았다며?”
 그때 자찬괴가 자연스럽게 손을 들어 앞쪽을 가리키며 두어 번 손짓을 했다. 아마도 뭔가 심상치 않은 낌새를 알아차린 듯했다.
 자찬괴가 가리킨 곳은 수림이 무성하게 뒤덮인 좁은 오솔길이었다.
 그 길은 선권괴가 살고 있는 마을로 들어서는 입구라 할 수 있었는데, 길 주변의 숲이 오늘따라 유난히 푸르고 짙어 보였다.
 구무괴는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 말을 이었다.
 “관아의 술을 절반이나 마셔버린 선권괴가 큰 소리로 트림을 하고는 수령을 냅다 밀쳐 내고 자신을 포위했던 수백의 병사들을 때려눕혔지. 선권괴의 괴력에 놀라 자빠졌을 수령의 몰골이라니······ 상상만 해도 웃음이 나오는걸.”
 자찬괴가 갑자기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흥, 우리가 괜히 삼괴인가? 덤비는 자 안 막고, 죽고 싶다는 놈들 소원 풀어주는 일이라면 마다 않는 싸움꾼이기 때문이 아닌가!”
 구무괴의 입가에도 비웃는 듯한 미소가 그려졌다.
 “그러게 말이다. 그런데 오늘은 죽고 싶어 환장한 하루살이가 한 두 마리가 아니군.”
 “잘됐군. 술도 깰 겸 한바탕 운동이나 해야겠어.”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사방에서 풀잎 스치는 소리와 함께 시커먼 그림자들이 빠르게 움직였다.
 사사삭!
 휙, 휙!
 나타난 그들은 신형을 빨리 움직여 일사불란하게 구무괴와 자찬괴의 주위로 둘러섰다.
 두 사람을 포위한 자들은 전신을 흑의와 복면으로 감싼 채 예리한 검을 흔들며 서서히 다가왔다. 모두 열 명이었다.
 그들 중 검은 소매에 금색 실로 화려한 무늬를 수놓은 무복을 입었으며, 다른 자들과 달리 두 개의 단창을 든 자가 음산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클클클······ 우리의 은신을 단번에 눈치채다니, 과연 삼괴라는 이름값을 하는군.”
 구무괴의 입가에 조소가 떠올랐다.
 “후훗······ 그런 것도 은신 축에 낄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지저분한 엉덩이를 들이대고 있으니 그냥 가려고 해도 냄새가 나서 도저히 모르는 척할 수가 있어야 말이지.”
 “하하하, 맞았어.”
 자찬괴가 크게 웃자 입을 열었던 흑의괴인의 드러난 두 눈에 흉폭한 살기가 감돌았다.
 “이런 찢어죽일 놈······ 소면개가 버려진 놈을 주워다 키웠다더니, 무공은 가르쳤어도 예절은 바르게 가르치지 못한 모양이구나. 역시 근본이 없는 놈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군.”
 이번에는 구무괴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지며 싸늘히 굳어 들어갔다.
 “지금 뭐라고 했지?”
 대단히 화가 난 듯 내공을 극한으로 끌어올린 구무괴의 주위로 강맹한 진기가 소용돌이치며, 바람에 휘말린 낙엽들이 하늘로 솟아올랐다. 이어서 그는 천강묵철봉을 꺼내들었다.
 자찬괴가 흠칫하고는 안됐다는 듯이 말했다.
 “네놈이 스스로 화를 자초한 것이야. 방금 네놈이 나불거린 말이 구무괴가 제일 싫어하는 말이거든. 이젠 빌어도 소용없게 됐어.”
 흑의괴인이 외쳤다.
 “흥, 곧 저승에 갈 놈들이 말이 많구나!”
 그가 손짓을 하자 주위에 서 있던 복면인들이 시퍼런 검광을 번득이며 두 패로 나뉘어 달려들었다.
 “흐음······ 난 가만히 있어도 되겠군.”
 자찬괴는 정말로 뒷짐을 지고 있겠다는 듯 한 옆으로 물러났다.
 하지만 흑의복면인들이 그를 그냥 놔둘 리 없었다. 그들 중 한 패가 자신에게 달려들자 자찬괴는 눈살을 찌푸리며 소리쳤다.
 “이놈들이? 난 상관 말고 구무괴나 조심하라니까!”
 자찬괴가 미끄러지듯 괴인들의 검세를 피하며 외쳤다.
 나머지는 곧장 구무괴에게 달려들었다.
 괴인들의 검세가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지만 구무괴는 그들을 무시하고 앞으로 미끄러지듯 나아갔다.
 구무괴가 다가오자 정면에 있던 흑의괴인이 두 개의 단창을 꼬나 잡고 대갈일성을 지르며 마주쳐 왔다.
 그의 몸이 빠르게 회전하며 구무괴의 명치를 노리고 쇄도해 왔다. 그러자 구무괴는 좌장으로 장력을 뿜으며 천강묵철봉을 곧게 찔러냈다.
 괴인은 구무괴의 무시무시한 장력이 밀려오자, 뭔가 잘못되었음을 알고 재빨리 물러서며 단창을 하나로 모아 천강묵철봉을 막아내려 했다.
 그러나 그 동안 무수한 적의 병기를 막아왔던 그의 단창은 구무괴의 천강묵철봉과 충돌하자 어이없게도 산산이 부서져 버리고 말았다.
 콰직!
 “헉!”
 단창을 부서버린 천강묵철봉은 그대로 밀려 들어와 괴인의 가슴을 격타했다.
 콰드득!
 살과 뼈가 뭉개지는 섬뜩한 소리가 터지며 괴인의 가슴과 오른팔이 단번에 으스러졌다.
 “크억!”
 고통에 찬 괴인의 신음 소리가 멎기도 전에 구무괴의 삼 초가 섬전처럼 이어졌다.
 파파팍!
 흑의괴인의 늑골이 박살나고, 안구가 튀어나오고, 이윽고 머리통이 수박처럼 터져 나갔다.
 다른 쪽에서 괴인들의 공세를 피하던 자찬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으휴······ 아무리 그렇다고 저렇게 만들다니······ 구무괴가 많이 잔인해졌군.”
 그때 괴인의 검이 번쩍이며 자찬괴의 목덜미를 파고들었다. 자찬괴가 급히 피해 냈지만 어깨 부위의 옷이 반 촌 가량 베어지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옷이 베어지자 자찬괴의 눈이 획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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