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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철무한 1

2018.04.12 조회 215 추천 2


 혁철무한 1권
 인언(引言) 고백(告白)
 
 
 그는 나를 잊었을까?
 모르겠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넉 달 동안 그의 소식이 들리지 않고 있다는 것뿐!
 내가 편당림(片塘林)을 위해 그의 전기(傳記)를 쓰고자 한 일이 갑작스러운 일은 아니라는 것을 미리 말해 둔다. 그가 없는 세상은 회한(悔恨)과 같다.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걷고 있는 것과 같은 심정으로 나는 한 자씩 정성 들여 이 이야기를 적고 있다.
 그가 있었음으로 해서 나는 더욱 빛날 수 있었고 삶의 의미를 가질 수 있었지만 이제 그가 없다는 이유만으로 나는 삶의 희망을 잃어가고 있다.
 그가 다시 나타난다면 모를까!
 누군가 말하기를 그가 없는 나는 겨우살이 같다고 했다.
 틀린 이야기는 아니다.
 그가 없다면 나는 동절기(冬節期)를 지나고 봄을 맞은 겨우살이같이 언젠가는 비비꼬인 모습으로 등을 보일 수도 있기에, 이제 내 갈 길을 찾아 물러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무턱대고 물러서기에는 너무도 억울한 일이었고, 편당림에 대한 터무니없는 낭설(浪說)이 너무도 많기에 그를 잘 아는 나로서는 그의 전기형식(傳記形式)을 빌려 한마디를 남기고자 할 뿐이다.
 그가 떠났다.
 그의 전기를 쓴다고 수차례 벼르면서도 다시 돌이켜 생각해 보기를······
 내 사람됨이 변변치 못해 먼 후일까지 남의 생전에 관한 행적을 널리 알리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과, 일각에서는 편당림을 영웅이라 지칭하는 사람도 있어 그의 내면을 섣불리 드러내다 결국은 나의 변변치 못한 이름마저 안개처럼 스러질까 두려운 마음이 있기 때문이었다.
 
 -당신은 그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인데 할말이 없다면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 아닌가?
 
 나와 가까운 사람, 이제는 남편이라 불리는 사람이 그렇게 이야기했을 때, 나는 심한 죄책감과 같은 불안을 느꼈다. 편당림과 나의 관계를 아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나에 대해 비겁하다 생각하는 것 같다. 일면 나로서는 회피하고 싶은 생각이 없지 않으나 나도 그들의 생각에 공감하는 바가 적지 않다.
 사람의 일생에 대해 미사여구(美辭麗句)를 사용하고 깊이 고찰하는 것은 결국 영웅을 만들기 위한 시도이고, 불후(不朽)의 명저(名著)를 남겨 자신의 이름을 남기고자 하는 것임을 익히 아는 나로서는 심한 괴리감과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지만 넉 달이 지난 이후 결국 이 어쭙잖은 글을 쓰기 시작했다.
 물론 나에게 글재주가 있는 것도 아니다.
 더불어 붓을 뾰족하게 하여 미사여구를 다듬거나 화려하게 치장을 할 줄도 모른다.
 그래도 써야 한다면 머뭇거리지는 않을 생각이다.
 막상 붓을 들기는 했지만 첫 장의 제목을 붙이는 것에서부터 난관에 봉착했다.
 무엇이라고 제목을 붙일까?
 편당림에 대해 글을 쓰니 ‘전(傳)’이라 해야 할까?
 전이라는 것은 사람의 일생을 전달하고자 쓴 글에 붙인다는 것쯤은 알고 있지만 이 또한 내가 알고 있는 사실에 오류가 있을 것 같았고, 스스로 쓴 글을 자전(自傳)이라 부르는가 하면 내전(內傳)이니 외전(外傳), 혹은 별전(別傳)이니 소전(小傳), 기타 등등의 제목을 붙이지만 내가 판단하기에는 어느것 하나 어울리는 이름이 없다.
 외전이라 하면 내전이 있어야 하고, 별전이라 하면 정전(正傳)이 있어야 한다. 소전으로 붙이려 생각하니 대전(大傳)이 있어야 했고······ 이리 보고 저리 둘러보아도 결국 내 글재주로는 붙일 이름이 없다. 하여 선택한 것이 정전(正傳)이니, 꼭 별전의 반대라는 개념은 없다.
 다만, 편당림이라는 사람이 보여준 행적의 일부를 보고 덜도 아니고 덧붙이지도 않은 사실적인 기록이라 보아준다면 글을 쓰는 나로서는 더할 나위가 없다는 생각이다.
 편당림!
 그의 일생도 아니고 겨우 그와 생활했던 한때를 기록할 뿐이다. 그리고 나는 그의 기억을 머리 속에서 지워버리려고 한다. 어차피 내가 기록한 글이 오래도록 후세에 전해지리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예전에 그가 살아 있었다는 것만을 기억해 준다면 나로서는 그를 아는 한 사람으로서 모든 일을 다했다고 생각할 뿐이다.
 
 
 1부 자운제(慈雲劑)
 
 
 서설(序說)
 
 
 흑룡강(黑龍江) 주변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은 혁철족(赫鐵族)이다. 장악(掌握)이라고 하기보다는 발을 붙이고 살아간다고 해야 할까? 혁철족은 전부를 합쳐 보아야 오백 명을 넘지 못한다. 흑룡강을 건너가면 천 명이 넘는 혁철족이 사는 마을을 만날 수 있지만 그곳은 명조(明朝)의 땅이 아니다.
 인근에 사는 전부를 모아야 이천 명이 되지 않는다는 혁철족은 흑룡강을 사이에 두고 각각 명조의 땅과 아라사(俄羅斯 : 러시아)의 땅에 군집(群集)하여 살아가고 있다.
 흑룡강에서 목단강에 이르는 곳곳에 산재한 혁철족을 장악하고 있는 곳은 자운제(紫雲劑)!
 혈족(血族)이 적기에 일국(一國)을 건국할 정도로 힘을 모으지는 못했지만 나름대로 오랜 역사에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가는 혁철족의 정신적 지주!
 북만주는 너무도 광활하고 사람들이 드문드문 살기 때문에 명조에서는 통치라는 개념조차 없었다. 황권(皇權)보다는 여진인(女眞人)의 힘이 거칠게 밀려드는 곳.
 광활한 대지, 끊임없이 나타나는 토비들로 인해 관부(官府)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명조는 혁철족 스스로 살아가도록 했다. 부족을 이끄는 정신적인 지주에게 모든 권한과 자치를 주었다. 그 정점에는 자운제가 있었다.
 혁철족은 국한(局限)된 지역에서만 살고 있다. 주로 송화강(松花江), 흑룡강 연안에 살고 있는데 그 종족이 극히 적은 것처럼, 살아가는 방식도 중원 사람들과는 현저하게 달랐다.
 그들은 주로 어업(漁業)과 수렵(狩獵)을 생업으로 삼아 살아간다. 일 년의 반이 눈이 나리고 날씨가 조금만 추워지면 얼음이 어는 지역이기 때문에 생장기(生長期)가 긴 곡물(穀物)은 심을 수도 없다. 그래서 그들이 주업(主業)으로 선택한 것이 어업과 수렵이다.
 그들은 사냥을 할 때 말을 사용하기보다는 개를 사용한다. 눈썰매를 사용하고 개를 묶어 끌게 하여 짐승을 추적하는 수법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들은 고기를 잡아 껍데기를 벗겨 옷을 만들어 입는다. 물고기의 껍질, 즉 어피(魚皮)는 보온성이 뛰어나며 그들이 물 속 깊이 잠수(潛水)를 할 때 물과의 접촉을 극소화시켜 준다. 그래서 중원인들은 혁철족을 가리켜 어피부(魚皮夫), 혹은 사견부(使犬夫)라 불렀다. 물론 혁철족이 중원의 일부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도 극소수에 불과했다.
 
 
 1. 실수였어
 
 
 목단강(牧丹江)은 작은 물줄기가 아니다.
 해동의 땅, 장백산령(長百山嶺)과 연결되는 노야령[老爺嶺 : 목단령(牧丹嶺)이라 부르기도 한다.]에서 발원한 목단강은 수십 개의 작은 물줄기를 더하고 합쳐지면서, 흙탕물로 황토색이 나는 중원의 호수와는 달리 물이 맑기로 유명한 경박호(鏡泊湖)를 지나 천 리를 달려 산과 벌판을 지나 의란(依蘭)에서 송화강에 이른다.
 백두산 천지에서 발원한 송화강은 휘발하(輝發河), 이통하(伊通河)등과 합쳐진 뒤 삼천 리를 달려 눈강(嫩江)과 만나고 또다시 거칠게 흘러 흑룡강에 닿는다.
 눈강은 대흥안령(大興安嶺)에서 발원하여 거칠게 용틀임을 하듯 몸을 틀며 이백여 개의 지류를 받아 세를 불린 뒤 대안(大安)에서 송화강을 만나 합쳐진 뒤 다시 송화강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흑룡강은 초원의 오란파탁(烏蘭巴託)에서 발원하여 칠천 리를 달려온 후에야 송화강과 만나 북해를 향해 달려간다. 흑룡강은 초원을 출발하며 극로륜하(克魯倫河)로 불린다. 흑룡강은 굽이를 차고 오르듯 격하게 흘러 대흥안령 서쪽 지구(地溝) 내에 자리잡은 구조호(溝造浩)이며 해발 이백 장이 넘는 고지에 자리잡은 호륜지(呼倫池)를 지난다.
 호륜지는 길이가 이백오십 리나 되며 넓이만도 백 리에 이르는 거대호수이다.
 호륜지를 지난 흑룡강은 액미고납하(額美古納河)로 이름이 변해 흘러가다 수십 개의 물줄기와 만난 후 대흥안령의 뿌리에 닿은 후에야 비로소 흑룡강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다. 그 유역에 혁철족들이 살고 있었다.
 
 경박호는 혁철족에게 마음의 고향과도 같은 곳이다. 목단강 주변에 살고 있는 오백여 명의 혁철족에게는 삶의 터전이며 고향을 떠올리게 하는 말!
 경박호!
 하늘이 맑은 날이면 수면에 하늘과 더불어 안개에 싸여 멀리 보이는 노야령의 모습이 비치고 어류(魚類)와 패류(貝類)가 많아 혁철족에게 늘 풍부한 먹거리를 제공해 준다.
 사시사철 혁철족이 고기를 잡기 위해 띄워놓은 뗏목이 움직이고 그물을 던지는 어부들의 모습이 삶의 시름을 잊게 만드는 곳.
 해가 뜬 날이면 어김없이 물 속으로 들어가는 어부를 볼 수 있다.
 “하하하!”
 “어서 잡자고!”
 손가락을 다 꼽아야 셀 수 있을 것 같은 숫자의 사내들은 부지런히 물 속으로 들어갔다.
 혁철족에게 있어 고기를 잡는 행위는 생업(生業)이기 이전에 삶의 보람과도 같다. 그들에게서 물을 빼앗아간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그들 모두는 자살을 하고 말 것이다.
 사내들은 한결같이 이십 전후의 나이를 지니고 있었다.
 그들의 벌어진 어깨와 그을린 얼굴로 보아 천부적으로 신력을 타고난 역사들 같았다.
 그 중의 한 사내.
 이마가 넓고 눈썹이 짙은 그 사내의 광대뼈는 동그랗게 다듬은 듯 보였다. 코는 뭉툭했으나 낮지 않았고 턱은 각이 졌다.
 그가 유난히 시선을 끄는 이유는 또 있다.
 자상(刺傷)!
 칼로 그었는지 턱을 가르듯 길게 난 상처였다. 언뜻 보아서는 턱의 끄트머리에 가볍게 새겨진 듯 보이지만 다가가 자세히 살펴보면 목의 울대에까지 이른 상처.
 더욱이 사내에게 시선이 머물게 하는 것은 허리까지 길게 늘어진 머리카락이다.
 사내의 머리카락은 물기에 젖어 있었다.
 그도 다른 사내들과 다름없이 물고기의 비늘로 만들어진 옷을 입고 있었다. 저물어가는 석양이 몸에 부딪칠 때마다 편광을 반사시키는 옷은 어피(魚皮)로 만든 것이다.
 혁철족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어피의(魚皮衣)는 물 속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옷이다. 어피를 입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사내도 혁철족이리라.
 “당림(塘林)! 너는 어느쪽으로 갈 거냐?”
 턱에 상처가 난 사내는 들려오는 목소리에 웃음을 머금으며 뒤를 돌아다보았다. 허리까지 물에 빠져 있지만 드러난 상반신만 해도 사 척이 넘는 키!
 편당림(片塘林)!
 경박호 주변에 사는 혁철족이라면 누구나 사내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혁철족의 정신적 지주이며 유일한 무파(武派)이기도 한 자운제의 제자가 아니라도 그를 안다.
 자운제의 제자!
 자운제는 여러 가지 일을 한다.
 무인들만의 조직처럼 보이지만 농사를 지어 스스로 식량을 생산하고 고기를 잡으며 병기도 만든다. 그 중에는 주변에 주막(酒幕)을 세우고 은자를 벌거나 오고 가는 행인들을 감시하는 자들도 있다. 물론 그들의 눈에서 혁철족은 제외되지만!
 혁철족은 너무도 작은 부족이다. 인근의 부족을 전부 합쳐 봐야 오 백을 넘지 않으니 스스로 살길을 찾지 않을 수 없었고 결국은 자운제라는 무파를 만들어내기에 이르렀다.
 자운제는 혁철족의 유일한 희망이었다.
 주변에는 토비(土匪)들이 득실거리고 있으니 힘이 없는 혁철족으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그나마 자운제가 건립되기 전에는 굴러다니는 돌처럼 이리저리 채이던 족속(族屬)이었다. 자운제가 건립되어 혁철족이 힘을 모은 뒤에는 토비들의 습격도 줄었고 피신할 곳이 있어, 사소한 출혈까지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이십 년간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다.
 편당림은 자운제의 제자 중 가장 촉망받는 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것은 무공도 남에게 뒤지지 않으며 고기를 잡거나 병기를 만드는 데 뛰어난 실력을 지녔음을 의미한다.
 “우평(虞萍)······ 너는?”
 편당림은 말을 건 사내를 바라보며 되물었다.
 “난 위쪽으로 가겠어.”
 역시 어피의를 입은 또래의 사내, 긴 말상의 얼굴에 상악골(上顎骨)과 하악골(下顎骨)이 유난히 튀어나온 사내였다. 나이가 이십이 채 안 되어 보이는 사내는 서늘하게 웃으며 강물의 상류를 바라보았다. 그의 수중에는 길이가 오 척이 넘는 파수도(破水刀)가 들려 있었고 허리에는 손가락을 구부린 것처럼 굵은 경조(鯨釣 : 큰 낚시)가 감겨 있었다. 등에는 삼목(杉木)의 외피를 벗겨 촘촘히 엮어만든 그물도 보였다. 그의 모습으로 보아 큰 고기보다는 작은 고기를 낚을 생각인 것 같았다.
 복우평(福虞萍)!
 편당림과 함께 자운제의 미래로 평가받고 있는 사내. 편당림이 있는 곳에는 복우평이 있고, 복우평을 찾으면 편당림을 만날 수 있다는 말처럼 그들은 자운제의 미래를 담당하는 젊은 사내들 중에 가장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서 있는 곳은 경박호였고 이십여 장 떨어진 곳은 동류천(東流川)이 맞닿는 곳이었다.
 몸이 날랜 고기는 주로 그와 같이 하천이 유입되어 물살의 변화가 일어나는 곳에 산다. 그러나 큰 고기를 잡으려 한다면 물살이 있는 곳보다는 동류천에서 조금 떨어져 바위가 수심 깊이 들어간 곳이 제격이다.
 편당림은 바위를 따라 훑어가듯 잠수를 하기 위해 수심이 낮은 물가에서 수류(水流 : 물의 흐름)를 가늠하고 있던 참이었다.
 “난, 오늘 추어를 잡을 생각이었지. 전에 보았는데 이 밑에는 추어의 알이 타어의 정액과 수정되어 괴어(怪魚)가 만들어졌더군. 우연히 보았지. 한 마리의 길이가 이 척이 넘을 것 같았는데, 한 마리만 잡으면 수갑(手匣) 하나 분량의 어피는 충분히 나올 거야.”
 복우평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
 생물은 나름대로의 법칙에 맞추어 살아간다.
 사람과 짐승 사이에서 이세(二世)가 태어날 수 없듯이 모든 동물도 마찬가지다. 간혹 산묘, 려자(驢子 : 당나귀) 같은 별종도 나오기는 하지만 그것은 극히 드문 예일 뿐이다.
 종(種)과 종을 넘나드는 경우는 흔하지 않은 법!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간혹 종이 다른 어류가 수정되어 괴어가 나는 경우가 있었다. 대개의 경우는 알을 깨도 바로 죽지만 예측할 수 없게도 살아남는 경우가 있다.
 그러한 어족 모두를 괴어라 부르는데 연어와 타어의 수정으로 자라게 되는 괴어는 완전히 자라면 몸체의 길이가 이(二) 장(丈)에 달하며 어피가 놀랍도록 질기고 단단해 좋은 값을 받을 수가 있었다. 더불어 괴어의 뼈는 잘 다듬고 탁마(琢磨)를 한 후 병기의 손잡이에 붙이면 화려하기 이를 데 없었다. 보석이 무색하지 않으니 역시 좋은 값을 받을 수 있다.
 오래 전부터 보아온 일이었다.
 경박호의 동북에서 접근하는 동류천!
 그 입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우뚝 솟아오른 무미암(無味岩)은 겉으로 드러난 것보다 물 속으로 들어갈수록 컸고, 그 밑의 수심(水深)은 측정할 수 없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무미암을 따라 물 속으로 들어가다 보면 언젠가는 물 밑에 도달할 수 있을 테지만 누구도 들어갈 수 없다고 했다. 너무도 깊어 아무도 들어가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아직 누구도 그 석벽(石壁)을 따라 내려가지 못했어.”
 복우평이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편당림은 빙그레 웃었다. 이어 그는 허리에 둘렀던 가늘고 긴 승삭(繩索)을 꺼내 바위 모퉁이에 튼튼하게 묶었다. 단목과 유수(楡樹 : 느릅나무)의 껍질을 벗겨 꼬아만든 승삭은 가볍고 평소에도 질기지만 물을 먹으면 더욱 질겨진다. 그야말로 거칠게 반항하는 괴어와의 밀고 당기는 씨름에서 이기기에는 더할 수 없이 좋은 도구였다.
 “난 할 거야. 꼭 잡고 말 걸세.”
 말을 흘린 편당림은 오른손엔 철조(鐵釣 : 큰 낚시), 왼손에는 삼인도(三刃刀)를 들고 복우평을 바라보았다.
 삼인도!
 모양은 삼지창(三指槍)처럼 생겼지만 삼지창에 비해 삼인도는 세 개의 칼날이 창보다 넓다.
 “자네는 준비를 철저히 했군. 말리지 못하겠어.”
 복우평은 편당림의 허리를 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편당림의 허리에는 납을 뭉쳐 만든 커다란 납괴가 달려 있었다. 물 속으로 빠르게 잠수하기 위해서는 납을 뭉쳐 만든 괴(塊)가 필요했다. 납괴가 있다면 헤엄을 치는 것보다 두 배는 빠르게 물 속으로 들어갈 수 있기에.
 편당림은 입가에 미소를 베어물었다.
 오래도록 계획한 일이니 준비가 소홀할 수 없었다. 근래 고안해 낸 새로운 형태의 어피갑(魚皮甲)을 완성시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좋아. 정말로 괴어를 잡는지 보겠어.”
 복우평이 몸을 돌렸다.
 어쩐지 비꼬는 듯한 말투였다.
 
 휘류류류류!
 귓가를 스치는 물살이 심장을 얼릴 것처럼 차갑게 느껴졌다.
 차갑다는 촉감이 귀로 느껴진다는 것을 길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마음을 무겁게 하는 것은 사실이었다.
 손에 들고 있던 승삭을 풀기 시작했다.
 승삭의 길이는 무려 이십 장!
 아직도 풀리지 않은 승삭은 많이 남아 있었다. 승삭이 이십 장의 길이를 지니고 있다 해도 손에 감긴 감촉은 부담스럽지 않았다. 가는 철삭과 나무의 껍질을 배열해 가늘게 짰기 때문일 것이다.
 얼마나 내려왔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물질에 익숙한 터라 대충 짐작은 할 수 있었다.
 ‘십여 장 가까이 내려왔을 것이다.’
 부지런히 발을 움직여 수심 깊이 가라앉으며 생각을 했다. 한 손으로 바위를 더듬었다. 삼인도를 허리춤에 걸고 나서야 바위의 촉감을 정확하게 느낄 수가 있었다.
 미끄러움, 그리고 차가움.
 바위에는 물 속에서 자라는 태의(苔衣 : 이끼)가 뒤덮여 있어 잡을 곳이 없었다. 마치 물이 부어진 밀가루처럼 미끈거렸고 바위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갑자기 수온(水溫)이 내려가기 시작했다.
 입술이 떨리고 귀가 아렸다.
 예상했던 일이었고 오래 전에 경험도 했었다. 그러나 오늘처럼 깊은 수심으로 내려온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괴어는 깊은 수심 바위 틈에 몸을 묻고 있을 것이다. 단 한 번에 아가미나 눈, 혹은 입술에 철조를 걸지 못하면 오히려 잡아먹힐지도 모르는 일!
 아직 눈으로 본 적은 없지만 소문에 의하면 놈의 날카로운 이는 도선(渡船 : 나룻배)을 가볍게 부술 수 있다고 했다.
 바위를 더듬었다.
 손 끝이 얼어붙는 것 같다.
 ‘괜히 미친 짓을 하는 건지도 모르지.’
 마음이 무거워졌다.
 겨울이 다가오면 고기들은 깊은 물로 스며들게 마련이어서 어피를 얻기가 어려워진다. 그렇다고 해서 어피복이나 어피갑을 조달하지 못한다면 결국 적과 겨루게 되었을 때 치명적인 피해를 입을 수도 있다. 어피갑은 적의 사병(射兵)으로부터 몸을 보호해 주는 것으로, 중요한 호신장비(護身裝備) 중의 하나다.
 쿠르르르르!
 귀에서 이명(耳鳴)이 들리는 것 같았다.
 눈알은 밖으로 튀어나가는 것 같았고 귓속으로 물이 밀려드는 것 같았다. 가슴이 눌려 피가 터져 나오는 것 같기도 하였다.
 이번 가을에는 어족(魚族)이 풍성하지 못했다. 그래서 필요한 양의 반도 만들지 못했다. 그러나 괴어의 어피로 만든 어피갑 한 벌이면 열 벌의 어피갑보다 낫다.
 괴어의 어피는 흔한 것이 아니다. 백호(白虎)의 가죽과도 바꾸지 않는다고 했으니 어떻게든 해볼 만한 일이다. 아마도 사부님도 이처럼 귀한 것을 원하고 있을 것이다.
 손에 들려 있던 승삭이 점차 풀려나가 반으로 줄어들었다. 목구멍에서 비릿한 냄새가 났지만 이를 악물었다.
 면이 부드럽기만 하던 바위가 점차 거칠어지기 시작했고 물 속은 얼음 같았다. 물이 점차 차가워지기는 했지만 따듯한 물과 차가운 물이 번갈아 층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완전히 빙수(氷水)였다.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생각이 틀리지 않는다면 곧 나타날 것이다.
 괴어라고 해서 그토록 차가운 물 속에서 오래도록 머문다고 생각되지는 않았다.
 바위에 달라붙듯 몸을 의지하며 곳곳을 더듬었다.
 군데군데 움푹 파여진 바위가 느껴졌다. 기분 좋은 일이었다. 더욱 깊이 파여진 공간이 있다면 괴어가 웅크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
 ‘이제 오래 참을 수 없어.’
 나름대로 운기토납(運氣吐納)에는 자신이 있다고 믿었었다. 그랬기에 수심을 무시하고 들어왔던 것이다. 평소의 심법(心法)이라면 백 장을 달리는 동안에도 숨을 쉬지 않을 수 있었다. 더구나 물 속에 들어올 때는 각오가 있었으니 두 배 이상은 참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문제는 수압(水壓)이었다.
 가슴을 누르는 듯한 기운에 단전에 가두어졌던 숨결이 가슴을 밀고 목구멍으로 치밀어 오르려 하고 있었다.
 
 스르르르르!
 수류(水流)가 다가오는 소리.
 ‘괴어다.’
 직감이었다.
 물을 들이마시고 뿜어내는 기척, 웬만한 크기의 물고기라면 흉내도 낼 수 없는 흐름이었다. 물살에 몸이 따라 움직일 지경이었다.
 깊은 물은 움직임을 몸으로 느낄 수 없는 법이다. 수면(水面)이 파랑(波浪)을 일으키고 장마로 인해 천지(天地)가 번복(蒜覆)하는 것 같아도 깊은 수심은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고요한 법! 마치 죽어 있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고요함이 느껴지는 곳이었는데······
 물살이 느껴졌다.
 편당림은 서두르기 시작했다. 조심스럽게 몸을 움직여 팔뚝에 감겨져 있던 승삭을 완전히 풀었다. 물에 뜬 부유물과 빛이 차단된 탓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모두 푼 승삭이 어둠 속에서 흐느적거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을 때, 그의 손에는 철조만이 들려 있었다. 승삭은 철조의 끝에 연결되어 있었다.
 허리를 더듬어 삼인도를 뽑아들었다.
 만약에 대비해야 한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괴어가 몸부림을 치기라도 하면 파도가 인다고 했다. 사람들은 과장을 좋아한다. 한 자 길이의 고기를 놓치면 팔을 벌리며 한 발이나 되는 고기를 놓쳤다고 말하는 것이 고기를 낚는 사람들의 속성이다.
 평생 동안 고기를 잡으며 살아가는 혁철족들도 입을 나불거리고 과장하기를 좋아한다. 그렇지만 아무리 과장된 소문이라도 근거는 있게 마련!
 괴어의 소문은 과장되었다 해도 실체는 있을 것이다.
 곧 거친 물살이 일 것이다.
 한 순간에 끝내야 한다.
 아무리 큰 고기라 해도 철조에 걸리면 그 한계를 드러내게 마련.
 철조는 거대한 낚시를 말한다. 나룻배가 떠내려가지 않게 물 속 깊이 던지는 것을 묘두(錨頭 : 닻)라 한다. 묘두에는 못 미치지만 그토록 큰 낚시를 철조라 부른다.
 편당림은 조심스럽게 물살이 일어나는 곳으로 접근했다.
 평소보다 더욱 가빠오는 가슴 때문에 수면으로 다시 올라가고 싶었지만 이를 악물었다. 원하는 괴어가 근처에 있다는 것을 안 이상 멈출 수 없었다.
 ‘일(一) 다경(茶頃) 안에 해치워야 한다.’
 아직은 여유가 있다.
 삼인도를 허리에 가져다대었다. 괴어의 몸에 철조를 박는 순간 허리에 달린 납괴를 떨어뜨려야 한다. 납괴가 없다면 빠르게 수면으로 솟구칠 수가 있다.
 오랜 경험으로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바위가 손에 닿았다. 손을 넣어보니 움푹 들어가 동굴처럼 느껴지는 곳이었다.
 ‘이곳이다!’
 회오리를 일으키듯 물이 도는 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갑자기 싸늘하게 식어오는 등골! 어피의를 걸쳤다고는 하지만 얼굴과 손발이 얼 듯하다. 등을 타고 흐르는 기이한 기운은 하체의 힘을 한꺼번에 빼앗아가는 듯했다.
 ‘내가 왜?’
 두려움으로 손발이 떨리는 것 같았다.
 손으로 돌벽을 더듬으며 앞으로 다가갔다. 물결이 더욱 거칠어진 것으로 보아 눈 앞에 있는 것 같았다.
 철조에 힘을 주었다.
 “헉!”
 입이 열리며 고함이 터져 나왔다. 입으로 물이 들어가며 정신이 아득해진 것은 갑자기 번갯불 같은 빛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밤에 고양이의 눈을 본 것과 같은 전율!
 소의 눈처럼 큰 동공(瞳孔)!
 카르르르르!
 갑자기 술을 마신 주객(酒客)이 코를 고는 듯한 소리가 들리며 몸이 동굴 속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번갯불 같은 불빛은 괴어의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이었다.
 굵은 밧줄같이 보이는 수염이 몸에 느껴졌다.
 수심(水深) 깊은 곳까지 내려오는 동안 눈에 보이지도 않던 물 속이 왜 그리 환하게 보이는지······ 그것이 괴어의 눈에서 나오는 빛 때문이라는 것을 알기는 하지만.
 ‘안 되는데······’
 손을 들어올렸지만 몸이 빙글빙글 돌아 정신이 나가는 것 같았다.
 이를 악물고 삼인도를 휘둘렀다.
 퍽!
 삼인도가 괴어의 이마에 깊숙하게 박혀들었다.
 몸이 마구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지만 삼인도는 오래도록 두들겨 만든 것이었기 때문에 강했고, 거치인(鋸齒刃 : 톱니 같은 칼날)이 달려 있어 괴어의 몸에 박혀 빠지지 않았다.
 휘류류류류!
 “흡!”
 물과 함께 몸이 괴어의 입으로 딸려 들어갔다. 비명이 절로 났다. 한 모금의 숨결이 폐부(肺腑)를 빠져 나갔다. 갑자기 아득해져 아무것도 눈에 보이지 않지만 물이 빨려 들어가는 곳이 괴어의 입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갑자기 물이 따듯해졌다.
 ‘입 속이다.’
 편당림은 미친 듯 허우적거리며 입을 벗어났다. 간발의 순간이었다. 만에 하나 괴어가 입을 다물었다면 빨려 들어갔거나 이에 물려 허리가 동강났을 것이다.
 불빛이 눈 앞으로 다가왔다.
 ‘다행이다.’
 편당림은 나머지 한 손에 들려 있던 철조를 휘둘러 고양이의 눈처럼 반짝이는 곳을 조준했다. 그곳은 안구(眼球) 주변으로 근육과 뼈가 있을 것이다. 그 어디에 걸려주기만 한다면 놈을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안와(眼窩 : 눈 주변의 뼈)나 내측벽에 걸리면 더욱 좋다. 안륜근(眼輪筋 : 눈을 싸고 있는 근육)이나 상순비익거근(上脣鼻翼擧筋)이라 불리는 근육에 걸린다면 더할 나위가 없다.
 퍽!
 철조가 눈을 파고들었다.
 콰아아아!
 물살이 요동을 치며 두 개의 동공 중 하나가 등롱(燈籠)이 꺼지듯 사그라졌다.
 ‘성공이다!’
 편당림은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눈이 빛을 잃었다는 것은 동공에 충격을 받았다는 것이고 철조에 연결된 승삭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은 어딘가 강하게 고정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편당림은 급히 두 발을 뻗어 돌벽을 걷어차며 몸을 틀었다. 어둠 속이라고는 하지만 방향을 가늠할 수는 있었다. 괴어의 눈과 반대 방향으로 나갈 수만 있다면 살 수 있으리라.
 콰아아아!
 수류가 격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예상했던 일이었다.
 편당림은 괴어의 입 언저리에 박혀 있던 삼인도를 뽑으려 했지만 쉽게 뽑히지 않았다.
 마음이 급해졌다.
 허리에 달려 있는 납괴를 떼어내지 못한다면 괴어의 먹이나 다름없었다. 삼인도를 이용해 허리에 걸려 있는 요대나 납괴를 잘라내야 했다.
 삼인도가 손에 있다면 한 번에 잘라낼 수 있지만 사정이 여의치가 않았다. 편당림은 급히 몸을 웅크려 다시 한 번 돌벽을 차며 손으로 허리를 더듬었다.
 납괴는 마사(麻絲)로 묶여 있었다. 그 끝은 허리를 묶고 있는 요대에 연결되어 있고.
 납괴가 쉽게 빠질 것 같지 않았다. 생각보다 더욱 단단하게 묶여 있었다. 마사가 물 속에 들어오며 수축을 했다는 것을 깊게 생각할 수 없었고 우선은 납괴를 풀어야 했다.
 ‘어서!’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한 쪽밖에 없는 눈이 다가오고 있었다.
 편당림은 온몸의 힘을 주고 혀를 입천장에 붙이고 복부에 힘을 주었다. 복부가 불룩하게 팽창되며 숨이 목을 타고 넘어오려 했다. 괴어의 수염이 발까지 다가왔다. 갑자기 물이 일으키는 소용돌이는 몸의 중심을 가눌 수 없도록 만들었다.
 ‘정신을 차리자. 호혈(虎穴)에서도 정신을 차리면 호랑이 새끼를 들고 나온다고 했지.’
 번쩍이는 눈이 다가왔다.
 엉겁결에 물을 한 모금 마셨다.
 비린 냄새가 났지만 본래 물의 맛인지 괴어의 몸에서 피가 흘렀는지는 알 수 없었다. 분명한 것은 수면에서 마시는 물맛과는 다르다는 것뿐!
 ‘피인가?’
 괴어의 몸에서 흐른 피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도 잠시뿐이다.
 비린내가 나도 안심할 수는 없다.
 수심 깊은 곳에는 물고기를 잡기 위해 뿌린 먹이와 때때로 죽은 부유물(浮游物)로 인해 생각지도 못했던 냄새가 날 수도 있다.
 몇 번인가 복부를 움직이자 허리를 묶었던 마사가 헐거워졌다. 복부를 부풀려 공격을 튕겨내는 대복공(大腹功)이 그나마 도움이 되었다. 그마저 전개할 여력이 없었다면 꼼짝없이 괴어의 밥이 될 뻔했다.
 비탈을 구르는 나무통에 담긴 것처럼 몸이 흔들리는 것으로 보아 괴어가 미친 듯 요동을 일으키는 것 같았다. 귓가로도 물이 출렁거리고 괴어의 몸이 바위에 부딪치는 소리를 들었다.
 마치 면이 넓은 노면(櫓面)이 수면에 부딪치는 것 같은 소리!
 납괴가 묶여 있던 마사가 엉덩이를 지나 발을 스치며 빠져 나갔다. 늦기는 했지만 그나마 불행중다행이었다.
 ‘생각보다는 큰 놈이다.’
 길어야 오 척이라 생각했다. 만약 운이 좋아 칠 척을 넘기면 큰 것이라 생각했었다. 마음 속으로는 오 척만 되어도 원이 없었지만 느껴지는 수류로 보아 그 역동(逆動)이 만만치 않았다.
 ‘누가 이기나 보자.’
 편당림은 바위를 박차며 몸의 방향을 틀었다. 순식간에 그의 몸은 수면을 향해 솟구치기 시작했다.
 ‘이건 위험해!’
 편당림은 자신이 어떤 고비로 가고 있는지 알았다.
 수심 깊이 잠수했다 급히 올라오면 몸에 무리가 생긴다. 그것은 수심에 느껴졌던 수압과 공기 중의 기압(汽壓)이 맞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놈의 아가리에 제사지내거나 뜯겨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멈출 수가 없었다.
 멈추면 괴어의 입 속이었다.
 슈우우우우!
 귓가로 스쳐 지나가는 수류가 느껴졌다.
 정신이 아득해지며 피가 하체로 몰려나가는 것 같았다. 이를 악물었다.
 ‘숨을 뽑으면 안 돼!’
 가슴에 가두어져 있던 숨을 뿜어내면 몸이 솟구치는 속도가 줄어들게 된다. 한시라도 빨리 수면으로 솟구치지 않는다면 뒷일은 아무도 모른다.
 몸이 설면(雪面)을 스치듯 솟구치고 오래지 않아 빛이 스며드는 수면이 나타났다.
 촤아아아!
 수면이 갈라지며 그의 몸이 허공 일 장이나 높이 솟구쳤다. 그는 혼신의 힘을 다해 허공에서 측수번(側手飜)으로 몸을 틀어 방향을 꺾었다. 바위로 날아가고 싶었지만 괴어가 발광이라도 한다면 다시 물로 쓸려갈 것 같았기 때문에 모래가 보이는 방향으로 향했다.
 철퍼덕!
 몸이 떨어진 곳은 깊이가 허리에도 이르지 못하는 지점이었다. 물에 떨어지며 한 모금의 물을 마셨다.
 미친 듯 기어 모래가 깔린 곳으로 올라갔다.
 팽!
 바위에 매여져 있던 승삭이 팽팽해졌다.
 “으하하하하!”
 편당림은 몸을 돌리고 바라보다 미친 듯 웃음을 터뜨렸다. 누구나 한 번쯤은 욕심을 냈던 괴어였지만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괴어를 보았다는 사람은 있어도 잡았다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 괴어를 낚시에 걸었다는 사실이 못내 통쾌하여 참을 수가 없었다.
 “윽!”
 갑자기 이는 현기증!
 편당림은 급히 오른손을 내밀어 왼팔의 맥문(脈門)을 잡았다. 만약 맥박이 불규칙하기라도 하다면 감압(減壓)을 해야 한다. 아무리 내공이 뛰어나다 해도 마찬가지다. 그렇지 않다면 폐로 피가 흘러들거나 공기를 가두지 못해 질식사하게 된다. 그 전에 몸에 검은 반점이 생길 것이다.
 편당림은 급히 상체의 어피복을 젖혔다. 다행히 반점 따위는 생기지 않았다. 그러나 기이하게 호흡이 가빴다. 물 속에서 오랫동안 숨을 멈추었거나 수압 때문이 아니었다.
 ‘혹시?’
 그는 급히 일어나 자신의 물건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혁철족의 어부들은 고기를 잡을 때 여러 가지 도구를 사용한다. 작은 편도(片刀)는 기본이고 장창(長槍), 심지어는 독(毒)도 사용한다. 그래서 만약의 경우를 대비하기 위해 해약도 가지고 다니게 마련이었다.
 모래 언덕 위에는 호지자(胡枝子 : 싸리나무)를 반으로 쪼개 만든 소쿠리가 있었다.
 편당림은 급히 기어가 소쿠리에서 작은 소도(小刀)를 꺼내었다. 소도는 고기를 잡았을 때 배를 가르고 어피를 벗기기 위해 사용하는 것이었다.
 아무리 싱싱하던 물고기도 배를 가르고 창자를 끄집어내지 않으면 쉽게 상하는 법이다. 더구나 소도는 생선의 비늘을 벗기기에 유용하게 사용하는 것이었다. 고기를 잡자마자 비늘이 떨어지지 않도록 벗겨야 어피복이나 어피갑을 만들 수 있었다.
 ‘독이다.’
 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
 혁철족에게는 물 속에 들어갈 때 몇 가지 철칙(鐵則)이 있다.
 누군가 깊은 물 속으로 잠수를 하면 주변의 어부들은 독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물을 이용하는데, 독을 사용할 때는 물 속으로 들어간 사람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나 사용한다.
 편당림은 다급하게 소도로 왼손의 엄지 손톱 밑을 가볍게 그었다.
 사삭!
 칼날이 밀리는 소리가 들리고 피가 나왔다.
 “이런!”
 검붉게 변한 피, 거기에 거품까지······
 독에 중독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빌어먹을······’
 절로 욕이 치밀어 올랐다. 누군가 물에다 수근채(水芹菜 : 독미나리)의 즙을 풀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수근채는 물가에 자라는 다년생 풀로 마치 미나리와 비슷한 가지와 잎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크기가 조금 더 크고 잎사귀가 윤기가 있고 뼈대가 굵을 뿐 아니라 대공이 단단했다.
 수근채는 특이한 습성을 가지고 있었다.
 당장에 수근채의 즙을 마시면 중독되어 숨이 끊어지지만 두 시진이 지나면 아무런 흔적도 남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해독약은 오로지 한 가지, 반하(半夏)뿐이었다.
 반하는 버들잎같이 긴 잎을 가지고 있으며 세 개의 잎이 한 가지에 달린다. 땅속뿌리를 사용하며 수근채의 독성을 해독하기에는 그만이었다.
 반하는 호흡기(呼吸器) 계통(系統)의 치료에 쓰이는 탕약(湯藥)에는 반드시 들어가야 하는 것으로 상백피(桑白皮)와는 잘 혼합되는 약초였다. 더구나 녹용(鹿茸)과는 더할 수 없는 짝으로 조제되며 거담(去痰), 진해, 기침, 풍해 등에는 반드시 사용되어지는 약이다.
 보통 뿌리를 말려 갈아 사용하는데 무엇보다 수근채에 중독되었을 때는 더할 수 없이 적당한 해약이었다. 더불어 깊은 물 속에서 올라와 호흡이 안정되지 않을 때는 맥문동과 상백피를 섞어 사용하면 더 큰 효력을 발휘했다. 그래서 혁철족들은 반드시 이 세 가지의 약재는 가지고 다니게 마련이었다.
 ‘누가?’
 편당림은 머뭇거리지 않았다. 수압 때문에 입은 숨가쁨은 하루 정도가 지나면 나을 수가 있다. 그렇게 해도 낫지 않는다면 감압을 하면 된다. 감압이 고통스럽기는 하지만 참을 수 있는 정도는 된다.
 감압의 절차는 복잡하다. 긴 밧줄 끝에 돌을 묶고 깊은 물 속에 던져 고정을 시킨다. 보통의 경우 배에 실려 있는 묘두(猫頭)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묘두는 본시 배가 흔들리거나 물살에 흔들리지 않게 하는 역할을 하지만 감압에서도 중요하다. 긴 마사를 걸어 던지면 물 속 깊이 들어가 박히게 마련이고 속이 뚫려 공기가 통하는 미호도수 덩굴을 입에 물고 점차적으로 깊이 들어간다.
 미호도수의 덩굴을 통해 숨을 쉬며 참을 수 없는 곳까지 내려갔다 천천히 올라오기를 반복하면 몸에 나 있던 반점이 사라지고 목을 타고 올라 입으로 솟구치던 피도 가신다. 그러나 그것보다 빠른 것은 반하가 섞인 약을 먹는 것이다. 물론 경미(輕微)한 증상에 사용되지만.
 편당림은 몸이 굳어오는 것을 느꼈다.
 독의 기운이었다.
 만약 수압에서 입은 상처 때문이라면 머리는 어지러울지 몰라도 몸이 굳지는 않는다.
 편당림은 소쿠리에서 작은 주머니를 꺼냈다. 주머니 속에서 몇 개의 환(丸)이 나왔다. 반하를 위시한 약물을 솥에 넣고 고아 엿과 함께 조제(調劑)한 것이었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약을 넘겼다. 그리고 바닥에 벌렁 드러누웠다. 날이 저물고 있었다. 석양(夕陽)이 지고.
 “와아아아!”
 그제야 여기저기에서 함성 소리가 들려왔다. 여기저기 흩어져 고기를 잡던 혁철족의 어부들이 수면에 물보라를 일으키는 괴어의 모습을 본 모양이었다. 다급하게 달려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저게 뭐야?”
 “괴어다. 길이가 삼 장은 넘겠다.”
 놀람의 소리.
 민물에 사는 어류가 삼 장에 이른다면 누구도 믿지 않을 것이다. 편당림은 안간힘을 써 상체를 일으켰다.
 모든 것이 한눈에 보였다.
 승삭은 팽팽하게 당겨져 있었고 수면 멀리에서 물보라가 일고 있었다. 등에 난 지느러미 하나가 단장선(單檣船 : 돛이 하나뿐인 배)의 돛대처럼 크게 보였다.
 “당림!”
 복우평의 목소리가 들렸다.
 편당림은 누운 채로 고개를 돌렸다.
 복우평은 머리 위, 거기에 있었다. 빙글거리는 웃음기를 감추지 못한 채!
 그의 웃음이 의미하는 것을 알 수 없었다.
 “미안해. 나는 자네가 정말로 수심 깊은 곳으로 잠수했다고 믿지는 않았어. 그래서 수근채의 즙을 뿌렸지. 실수였어.”
 정말로 미안하다는 모습이었다.
 믿음이 가지 않았다. 왠지 의도적으로 수근채의 즙을 뿌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복우평이라고 해서 편당림이 잠수를 했다는 것을 모를 리가 없다. 이미 이야기를 해준 것도 수근채의 독을 뿌리지 말라는 것이었는데······
 복우평이 몸을 돌렸다.
 한 대 쥐어박아 주고 싶었다.
 “어서 당겨라.”
 “괴어가 어떻게 생겼나 구경이나 해보자고.”
 물가로 달려온 어부들이 팽팽하게 당겨진 승삭에 각자가 가지고 있는 승삭을 걸고 당기기 시작했다. 편당림은 멍해진 정신으로 서서히 다가오고 있는 괴어를 바라볼 뿐이었다.
 
 
 2. 그는 내 거야
 
 
 난 오늘도 하릴없이 누워 있다.
 그저 하는 일이라고는 하루 종일 옷매무시를 다듬고 차를 홀짝거리는 것뿐!
 아차, 또 있다.
 몸을 단장하는 담장(擔粧)이야말로 내가 좋아하는 일 중의 하나다. 그러나 엄밀하게 따져 그것은 두 번째에 해당될 뿐이다. 내가 정말로 좋아하는 것은 따로 있다.
 사내들의 몸을 훔쳐보는 일.
 그렇다고 해서 나를 창녀(娼女)로 보지는 마라. 내가 사내의 끈적거리는 몸을 좋아한다는 것은 아니다. 아직 침상에서 남자를 끌어안고 뒹굴 정도로 타락하지는 않았다.
 무슨 소리냐고?
 난 아직 어리다는 말이다.
 사내와 계집이 침상에서 뒹군다는 의미를 모르지 않는 나이이기는 하지만 시체말로 난 아직 여물지 않았다. 그러나 곧 여물고 꽃봉오리가 터지듯 폭발할 것이다. 그때는 날개를 펄럭이며 꽃을 찾아 떠나는 호접(胡蝶 : 나비)처럼 화려한 날만이 나를 기다릴 것이다. 사내를 받아들이기에는 아직 어리다는 말을 이렇게 할 수밖에 없는 내가 한심스럽다.
 그래도 사내를 보는 눈은 있다.
 그렇다고 해서 사내의 몸을 탐하는 여자들이 모두 타락했다는 소리는 아니다. 나도 사내들의 몸을 탐할 준비가 되어 있다. 아직은 시기가 아니라는 것만 생각할 뿐이다.
 어쩌면 나에게는 창녀의 피가 흐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정숙하다고는 말하지 않겠다. 내가 사내를 그리워하고 밤마다 질펀한 꿈을 꾸는 것은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피 때문일 것이다.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어머니의 피겠지만.
 나는 가끔 몸을 숨기고 사내들이 목욕하는 모습을 살펴보기도 한다. 이제는 남자들의 성기(性器)도 얼굴을 붉히지 않고 볼 수가 있다. 처음에는 쑥스러워 얼굴을 붉히기도 했지만 이제는 담담해졌다. 언제부터는 당연하다는 듯 눈을 마주쳐도 얼굴을 돌리지 않게 되었고.
 그래도 내숭은 있다.
 알 수 없는 긴장감에 입술을 축일 때도 있지만 의도적으로 얼굴을 돌린다. 그러면 사내들은 미치겠다는 표정으로 침을 삼키곤 한다.
 미친놈들!
 백날 침을 흘려봐라.
 나는 안다.
 내가 원하는 남자가 누구인지를······
 아참, 내가 사는 곳에는 남자들이 많다. 제법 관심을 가질 만한 여자라고는 나하고 언니뿐이다. 물론 시비들도 있고 집안일을 거드는 몇 명의 여인들도 있지만 그들 모두는 사내들의 관심을 끌지 못한다. 사내들에게 언니와 나는 좋은 바탕이 될 수 있고 신분상승(身分上昇)을 노릴 수 있는 디딤돌이 될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니를 거들떠보지도 않는 사내들이 나를 원하고 침을 흘리는 이유는 너무도 간단하다.
 아! 언니는 물론 친언니다. 그녀도 아버지의 딸이다. 그러나 언니는 조금 모자란다. 간혹 미친 듯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한밤중에 벌거벗은 몸으로 뛰어나가기도 한다. 아버지의 뛰어난 무공으로도 언니를 고치지는 못했다. 시랑(豺狼 : 승냥이)처럼 눈을 번뜩이는 사내들에게 눈요깃감은 될지 모르지만 언니를 배우자로 생각하는 사내들은 없다.
 사내들은 모두 나를 원한다.
 나를 차지하면 이 큰 장원이 자신 것이 되리라 생각하는 모양이다. 틀린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물론 내 오빠들에게 인정을 받아야 하고, 그들의 재가(再加)를 받아야 하겠지만 내 몸에 올라타는 것은 그들의 꿈이라 할 수 있다.
 장원에 머무는 삼십여 명의 사내들, 머문다고 하기에는 어감(語感)이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그들은 아버지의 제자들이었으니 어떻게 보면 나에게는 사형(師兄)이라는 말이 어울릴 것이다. 그러나 나는 무공을 익히지 않았으니 사형제(師兄弟)의 관계라 볼 수도 없다.
 그네들은 나를 부를 때 사매(師妹)라 부르지만 난 한 번도 그들과 내가 가까운 사람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오늘도 꼿꼿한 이목을 켜서 만든 판자로 가려진 측실(側室)에 앉아 사내들의 역동적인 몸짓을 보고 있다. 나무로 가렸다고 해도 그들을 바라보기에는 무리가 없다.
 그 중의 한 사람!
 내 눈을 묶는 것은 단연 편당림이다. 그보다 덜하기는 하지만 그의 뒤에 있는 복우평도 내 눈을 벗어나지 못한다.
 뭘까?
 난 둘을 모두 내 먹이로 생각하고 있는 거다.
 내가 조금만 더 커서, 지금 내 나이가 만약 언니의 나이만 되었다면 그들 중 한 명을 내 침상으로 끌어들였을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 이야기해 주었던 것처럼 몸이 저리고 사지(四肢)가 뻣뻣해지는 희열을 만끽했을지도 모른다.
 
 그날!
 편당림이 제자들의 등에 업혀 들어왔던 날!
 길이가 삼 장이나 되는 괴어를 잡은 그날부터 편당림의 위세는 매우 높아졌다고 할 수 있다. 수백 년 동안 누구도 잡지 못했던 괴어를 잡았으니까!
 다만 그가 위세를 부리지 않았을 뿐!
 괴어의 피부는 웬만한 가축이나 맹수의 가죽보다 질기다. 더구나 모래같이 우둘투둘한 외피가 쇠처럼 단단해 병기에 쉽게 상하지 않는다. 근래에 보기 드문 커다란 수확물(收穫物)이었다.
 편당림은 사흘 만에 정신을 차렸다. 부친은 그가 적어도 이십 장 깊이까지는 내려갔을 것이라 말했다.
 난 믿지 않았다.
 경박호의 수심이 그리 깊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이 내 첫 번째 생각이고, 두 번째는 그렇게 깊은 곳에 물고기가 살 수 있다는 말이 거짓처럼 들린다. 아무리 괴어라 해도 물고기가 아닌가!
 사람이 그리 깊이 내려갈 수 있다는 사실도 믿을 수가 없다. 나는 아직 물 속 깊이 몸을 맡겨본 적이 없지만 들은 이야기가 있다. 그 정도의 깊이라면 숨이 차고 심장이 터져 버릴 것이다. 부친은 아마도 편당림을 추켜세우기 위해 조금은 과장되게 이야기를 했을 것이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기는 했다.
 부친은 웬만해서 이야기를 부풀리거나 과장되게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부친은 자운제의 주인이다. 자운제의 주인이 그토록 사소한 일에 입을 열 리가 없지만 이번만은 예외였다.
 짐작은 간다.
 내 마음을 알고 계신 것은 아닐까?
 나는 다른 사람에게는 관심이 없다. 기이한 일이지만 편당림과 복우평에게서 느껴지는 만큼의 감흥이 없다는 말이다. 부친은 그들 중 누군가를 신랑감으로 고르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나에게 기회를 주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지만 나는 판단을 내리기가 어렵다.
 아마도 부친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오늘은 무료한 날이다.
 사흘 동안 괴어에 대한 이야기가 시들지 않았다. 괴어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면 끼지 못할 정도였다.
 오늘은 괴어의 가죽을 벗기는 일로 여간 소란스러운 것이 아니다. 물고기의 껍질은 비늘이나 어피라 해야 옳을 것이지만 괴어는 가죽이라 해야 옳을 것 같다. 그 질기고 두꺼운 피부는 비늘이 달린 어피와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괴어를 펼쳐 놓았다는 말에 잠깐 나가보았지만 상상도 하지 못할 정도로 컸다. 자운제의 제자 모두가 나가서 둘러메고 왔으니 그 무게도 만만치가 않을 것이다. 모두들 가죽에 상처가 나지 않도록 조심을 했다.
 삼 일 동안 괴어의 몸에 염수(鹽水 : 소금물)를 부었다. 염수는 고기를 상하지 않게 할 뿐 아니라 어피를 단단하게 한다. 적당히 삶은 뒤 온갖 약재의 즙을 발라 어피갑을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염수로 외피를 단단하게 하며 비늘이 떨어지지 않게 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염수에 전 괴어의 어피가 단단해지고 비늘이 떨어지지 않도록 모든 준비를 마쳤을 때 부친은 괴어의 가죽을 벗기도록 명했고 칼질에 능숙한 제자들이 달려들어 가죽을 벗기는 중이었다.
 난 오전 내내 진자수(榛子樹 : 개암나무)를 가지런히 세워 만든 문 뒤에 서서 괴어를 구경했다.
 괴어는 나에게도 신기한 일이었으니······
 괴어를 다듬는 일은 만만치가 않은 것 같다.
 우선 목을 잘라 머리와 몸을 분리한다. 물고기라는 것은 엄격하게 목이라 지칭할 만한 곳이 없다. 가죽을 벗기는 제자들은 사람의 턱에 해당하는 부분의 가슴지느러미 밑에서 시작하여 아가미 밑으로 돌아 칼집을 내고 등은 머리 깊숙이 밀고 들어오는 금을 그었다.
 다른 제자는 피삭도(破索刀)를 이용해 복부를 가르고 창자를 뽑아내었다. 몇 명의 제자들은 날이 선 편도를 이용해 지느러미를 잘랐다. 턱에 해당하는 곳에 자라 있는 지느러미 한 쌍, 복부에 달린 한 쌍, 그리고 등에도 길게 뻗은 지느러미가 있었고 꼬리지느러미도 그 크기가 만만치 않았다.
 턱에 달린 것처럼 보이는 긴 지느러미는 길이가 오 척이나 되었고 배지느러미는 칠 척이 넘어 보였다. 등에 난 지느러미는 창날과 같은 뾰족한 바늘이 심어져 있었고 넓이가 일 장이나 되었다. 꼬리지느러미는 너무도 컸고 뼈처럼 보이는 가시가 돌출되어 고기라고 하기보다는 차라리 한 마리의 괴물을 보는 것 같았다.
 이십여 명이나 달라붙은 큰 작업이었다.
 내원에서도 소식을 들었는지 언니들이 나와 괴어를 다듬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 언니! 그들은 내 친언니가 아니고 오빠들의 부인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녀들은 정말로 복받은 여인들이다. 혁철족을 이끌어가는 사내를 공공(公公 : 시아버지)으로 두었으니 말이다. 언젠가는 그녀들의 남편이 혁철족의 주인처럼 행사를 할지도 모르는 일이니······
 창자가 쏟아져 나오고 복우평이 가죽을 벗기기 시작했을 때가 되어서야 내 처소로 돌아왔다. 아버지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어떤 오해를 가지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그래서 나는 내 거처로 돌아온 것이다.
 “아버지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나는 걸음을 옮기며 내 입으로 새어나오는 말에 깜짝 놀랐다. 내가 말을 하고도 놀란 꼴이었다.
 아무래도 부친의 생각이 의심스러웠다. 편당림이 복우평이 뿌린 독에 중독되었다는 것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 나도 아는데 부친이 모를 리 없다. 그것이 나를 두고 벌어지는 알력(軋轢)이라는 것도 알 것이고 대책을 세우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내 나이 이제 열여섯!
 나는 모든 준비가 되어 있다. 사내를 받아들일 준비도 되어 있고 창녀처럼 꼬리를 흔들 준비도 되어 있다. 편당림도 알 것이고 눈치 빠른 복우평은 오래 전부터 나를 보며 군침을 흘리고 있다. 난 그의 끈적거리는 눈이 좋다.
 편당림은 고지식하다. 그러나 미래를 위해서는 그가 좋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지만 당장에 타오르는 불길을 잡아줄 남자도 필요하다. 몰래 내 침상으로 오를 줄 모르는 남자들! 아직 몸을 마음대로 굴릴 수 없지 않는가 말이다.
 바보 같은 놈들!
 아직도 내 마음을 모르다니······ 그들은 왜 내 거처에 침입하고 강압적으로 나를 덮치려 하지 않는 걸까? 나는 언제나 몸을 열어줄 준비가 되어 있는데. 내가 먼저 달려가볼까!
 난 누구라도 상관이 없다.
 그들 두 사람 모두 나에게는 소중하다.
 편당림은 과묵하고 사려가 깊다. 그러나 복우평이 지니고 있는 사내다움이 부족하다. 복우평은 때때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암계와 암수도 가리지 않는다. 좁은 자운제에서 딱히 암계니 암수니 할 것도 없지만······ 난 그것도 사내다움의 한 가지라 생각한다. 원하는 것이 있다면 반드시 얻어야 한다는 집념이 뭐가 나쁘단 말인가?
 세상은 불공평하다.
 왜 두 사내가 가진 모든 것을 복합시켜 놓은 사내가 없는 걸까? 다른 사내들은 그나마도 볼 것이 없으니 이래저래 가슴이 뛰는 일이다.
 난 새로운 취미를 하나 만들었다.
 연초(煙草)!
 정말 좋다.
 장죽(長竹)에 차곡차곡 재어 불을 붙이고 흠씬 빨아들이면 몸이 하늘로 날아가는 것 같다.
 사람들은 체질에 맞는다는 이야기를 종종 한다. 만약 그런 말이 사실이라면 나는 연초가 체질에 맞는다. 처음 필 때부터 기침 따위는 하지도 않았으니까.
 요즘 들어 간혹 주체할 수 없는 충동을 느낀다. 그 충동이라는 것은 그 동안 느껴보지 못했던 것이다. 그 동안은 사내들의 등에서 끈적거리는 땀을 보고 혀를 핥는 정도였지만 근래 들어서는 점차 참을 수가 없다.
 난 간혹 내 가슴을 만져 보곤 한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돌처럼 딱딱했는데 이제는 제법 물렁해졌다. 그렇다고 늘어지거나 힘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놀랄 정도로 탄력이 넘치는 내 가슴을 만지고 있노라면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하체에서 빠져 나가는 무엇이 느껴진다.
 “푸우우우!”
 나는 장죽을 물고 빨아들였다가 힘껏 뿜어내었다. 뭉클한 연기가 허공에 안개처럼 퍼져 나간다. 안개 같은 연기 속에 두 사내의 건장한 몸이 그려졌다 사라지기를 수십 번!
 몸이 움찔거린다.
 누가 나에게 가학적(加虐的)인 자극을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아니, 막 두들겨맞았으면 원이 없겠다. 우연히 시녀들이 하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사내들의 끈적거리는 육체의 이야기며 그들이 지니고 있는 동물적인 하체!
 난 간혹 누구라도 좋다는 생각을 한다.
 나의 외로움을 죽여줄 수 있다면 누구라도 거부하지 않을 생각이다. 그러나 그 누구라도라는 말에는 편당림과 복우평을 의미하는 속마음이 녹아 있다.
 오늘따라 폐부로 스며드는 연초 연기가 진하다.
 “푸우!”
 또다시 뿜어내는 연기 속에 내 한이 녹고 있다. 나는 이제 참을 수 없다. 누군가 나에게 다가와 덮쳐 준다면, 난 아무런 반항도 하지 않고 사내의 육체를 깊숙한 곳으로 인도할 것이다.
 하루하루가 지옥 같다.
 아침에 일어나 때늦은 아침을 먹고 화장을 한다. 아니, 몸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장미수(薔薇水)에 목욕을 하는 것이 먼저다. 이어 명주(明紬)를 이용해 피부의 잡털을 제거한다. 실을 이리저리 움직이면 말리며 잡털이 깎이게 마련.
 그 후에는 넓은 사건(絲巾)을 이용해 피부의 물기를 닦는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 몸은 너무나 잘 빠졌다. 둥그런 어깨, 작기는 하지만 탄력 넘치는 가슴, 오목하게 들어간 배꼽이라면 누구라도 유혹할 수 있다.
 펑퍼짐한 둔부가 조금은 균형을 깨지만 단이 긴 유군으로 가릴 수 있다. 어차피 둔부라는 것이 옷을 벗기 전에는 알 수 없으니 문제가 될 것은 없다.
 내 머리카락은 참으로 탐스럽고 길게 자라 둔부에 이른다. 그리고 머리카락과 은밀한 곳에 자란 음모(陰毛)와는 상관관계가 있다. 음모는 탐스럽고 그곳의 언덕은 높은 편이다.
 물기를 닦고 향랑(香囊)을 이용해 몸에 사향이 배게 한 다음 두두를 입는다. 내가 즐겨 입는 두두는 붉은 천에 화조(花鳥)를 수놓은 것이다. 난 항상 이런 색과 문양을 지닌 두두를 입는다.
 만약 누군가 내 옷을 벗긴다면 매우 놀랄 것이다.
 다시 고의를 입는다.
 고의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 차라리 입지 않는다면 옷을 벗길 때 편할 텐데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난 혁철족에서 가장 뼈대있는 가문의 딸이다. 생각과 같이 허술하게 차릴 수는 없다.
 두두와 고의를 입으면 잠사(蠶絲)로 짠 얇은 속옷을 입는다. 만약 누군가 나를 보았다면 게거품을 물 것이다. 내가 나를 보아도 정말 매혹적이다.
 난 때로 동경(銅鏡)이 부러울 때가 있다. 동경은 늘 내 몸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서 화대(化臺)에 앉아 치장을 시작한다.
 수모(手母)를 불러 머리를 틀어올려 목단두(牧丹頭)를 만들도록 하고 연미(燕尾)를 내린다. 본시 목단두는 중원의 한족 여인들이 치장하는 것이지만 난 목단두를 좋아한다. 속발(束髮)이라 불리는 치장이다. 대개 한족을 제외한 여러 부족들은 변발을 하지만 나는 속발을 좋아한다. 그것만 보아도 내가 얼마나 많은 것에 집착하는지 알 수 있다.
 이어 담장(擔粧)을 시작한다.
 얼굴에 쌀가루로 만든 분을 엷게 도포(塗布)시키고 홍화(紅花) 꽃잎을 간 가루를 이용해 물에 개어 연한 색으로 물들인다. 그것만으로도 요염해 보이고 남음이 있다. 또한 자극적이고 사내들의 시선을 잡을 수가 있다.
 력실목 숯으로 눈썹을 그린다.
 인당(印堂)은 넓고 칼로 베듯, 그리고 점점 가늘어져 귀 밑에 이르도록 그린다. 칼날처럼 가늘게 끝을 맺고 얇은 면도(面刀)를 이용해 눈꺼풀과 보기 싫게 자란 눈썹을 다듬는다. 그것으로 눈썹 단장은 끝이다.
 입술을 홍화로 붉게 물들이면 담장은 끝이 난다.
 나는 서두르지 않고 몸에 옷을 걸치기 시작한다. 유군을 걸치고 겉에는 비갑(比甲)을 걸친다. 비갑 또한 한족의 여인들이 즐겨 입는 옷이지만 난 목단두를 트는 것처럼 즐겨 한다. 그리고 장죽에 불을 붙여 비스듬히 누우면 내 치장은 끝난다.
 할 일이 없다는 것은 피를 말리는 일이다.
 부친은 나에게 침선(針線)이나 율두를 배울 것을 원하지만 마음이 내키지 않는 일이다. 어차피 수모가 있고 찬모(饌母)가 있는데 그까짓 것을 배워서 무엇 하느냐 말이다.
 “제주(劑主)께서 부르십니다.”
 갑자기 들려온 소리!
 한참 동안 장죽을 빨아 머리 속이 몽롱하던 참이었다. 반은 잠이 들었었는데······ 참으로 재미가 없는 일이다.
 고개를 들어보니 남쪽지방에서 가져 와 만들었다는 죽문(竹門)이 반이나 열려 있고 머리통이 제법 큰 계집이 머리만 디밀고 주둥아리를 나불거리고 있다.
 기분이 나빠졌다.
 연초의 연기를 마시며 사내들의 몸을 상상하고 있었다. 한참 벗기고 있는 중이었는데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부친이 부르신다고 하니 아니 갈 수도 없다.
 탕탕!
 몸을 일으켜 장죽의 재를 털었다. 동(銅)으로 만든 재떨이가 요란스럽게 울렸다.
 “어디에 계시느냐?”
 “혁철정(赫鐵亭)에 계십니다.”
 나는 몸을 일으켰다.
 
 부친은 이층 누각에 앉아 창 밖을 내려다보고 계셨다.
 돌과 흙을 이용해 사방에 벽을 쌓고 나무를 잘라 만든 목책(木柵)으로 둘러친 자운제는 크게 두 개의 공간으로 분할되어 있다. 내원(內院)과 외원(外院)으로 불리는 두 개의 공간은 그 모습이 판이하다.
 외원은 제자들이 머물고 있었고 면적도 넓었다. 마장(馬場)과 저량고(貯糧庫), 병기고(兵器庫)까지 모두 외원에 있다.
 내원은?
 외원과 비교하면 상대도 할 수 없이 좁았다.
 키를 넘기지 않는 작은 담이 있고 인공가산(人工假山)이 두 개 있다. 그 안쪽으로 작은 호수가 있고 물이 나는 샘도 있다. 샘에서 나온 물이 호수로 들어간다. 과거에는 작은 연못이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석축(石築)을 쌓아 인공호수(人工湖水)가 되었다. 정성 들여 기르는 잉어의 비늘이 눈을 아리게 한다. 그래도 내 눈에는 차지 않는다. 흥미가 없으니!
 그 인공호수에는 작은 섬이 있고 이층 누각이 있다. 이층 누각에 이르기 위해서는 나무로 만든 현수교(懸垂橋)를 건너가야 한다. 내원에는 혁철정이라 불리는 이 누각 외에도 두 개의 누각이 더 있는데 모두가 부친과 내 가족들이 사는 곳이다.
 철혈각(鐵血閣)이라 부르는 곳에는 부친과 나, 그리고 결혼한 두 명의 오빠가 조카들과 살고 있고 다른 한곳, 운무각(雲霧閣)이라 편액이 붙은 건물에는 자운제의 운영에는 관심이 없는 내내와 숙부가 산다.
 그 앞에는 작은 가산이 있는데 백두옹(白頭翁 : 옹초, 할미꽃)이 탐스럽다.
 내원은 외원과는 감히 비교할 수도 없는 아담하고 조용한 곳이다. 뒤에는 천 장은 될 것 같아 보이는 높은 산이 있다. 나는 어렸을 때 그 산에 올라 송서(松鼠 : 다람쥐)를 쫓기도 했고 야장위(野薔薇 : 찔레나무)를 꺾어 새순을 먹어보기도 했었다.
 열두 살 이후로는 산에 올라가본 적이 없다.
 계단을 오른다는 것은 귀찮은 일이다. 숨이 차고 허리가 아프다. 차라리 누워서 잠이나 잘걸!
 문을 열고 들어가니 부친은 언제나 그렇듯 서안(書案)에 기대고 앉아 너덜거리는 고서를 뒤적이고 있다.
 “앉아라.”
 부친은 늘 무뚝뚝하다.
 내 아버지이지만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다. 긴 수염만 아니라면 토비들과 다를 바 없이 붉은 얼굴에 거친 음성이다.
 그나마 얼굴에 그어진 검상(劍償)이라니!
 큰오빠는 그 상처가 대단히 영광스러운 것이라 했다. 토비들과 싸우며 입은 상처라나······
 나는 부친을 마주보고 앉았다.
 언제나 그렇듯 사방으로 돌려가며 나 있는 창은 모두 열려 있었다. 아버지는 한설(寒雪)이 몰려오는 한겨울에도 창을 닫는 경우가 없다. 불안하기 때문이라 단정지을 수는 없다.
 부근에서 부친의 무공을 따를 자는 아무도 없다. 또한 내원에는 제자들이 나무와 가산이 만들어내는 그늘에 은신하고 있으므로 두려운 것도 아닐 것이다.
 탁탁탁!
 단조로운 소리!
 아버지는 서안에 비스듬히 기댄 채 손가락을 일정한 속도로 두드리고 있었다.
 난 안다.
 아버지가 저토록 손가락을 두드리고 있다는 것은 무언가 가슴 답답한 사연이 있다는 것이다. 나를 부른 것으로 보아 어떤 이유인지 충분히 짐작이 되고도 남는다.
 “이제 너도 마음을 가다듬을 때가 되었지 않느냐?”
 목소리가 칼날 같다.
 어느 정도는 예측하고 있었지만 단도직입적으로 물어오는 말에 하마터면 속을 뻔했다. 황급히 입을 열려다 다물었다. 아직은 마음을 숨겨야 한다.
 아버지가 어느 정도 예측을 하고 있다 해도 내가 아니라면 그만이다. 아버지도 그 동안 안팎으로 바빴으니 내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알지 못할 것이다.
 “아직 준비가 안 되었어요.”
 말은 했지만 순전히 입술에 걸린 소리다.
 난 이미 준비가 되어 있다. 옷을 벗을 준비도 되어 있고 남자를 받아들일 준비도 되어 있다. 아버지는 나를 어리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난 이미 여물었다. 누군가 나를 건드려주기만 한다면 나는 터져 버릴 수 있다.
 활화산(活火山)이 별건가?
 아버지는 알고 있을 것이다.
 듣기에 아버지가 처음 혼인(婚姻)을 한 것은 스물하나의 나이가 막 지나갈 때였다. 그리고 어머니는 열여섯, 나하고 같은 나이 때였다. 그 어머니는 내 어머니가 아니다. 내 어머니는 아버지의 두 번째 여인이었다. 물론 나를 낳다 역산(逆産)으로 출혈이 많아 돌아가시기는 했지만.
 배가 다르기는 하지만 내 모친보다 먼저 이 장원의 여주인이 된 다른 어머니는 열여덟에 처음으로 오빠를 낳았다. 그렇게 따진다면 나도 이른 것이 아니다. 몸이 준비가 되었으니 마음이 열리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아직은 숨기고 싶었다. 밤마다 사내를 그리워하고 편당림과 복우평을 바라보며 침을 흘린다는 이야기를 할 수는 없지 않는가 말이다.
 부친은 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대로 곱게 다듬어 사모(紗帽)를 쓰고 옥잠(玉簪)을 찌른 모습이 어울리는 것 같지만 가늘게 째진 눈과 두툼한 코는 영락없이 나무를 베는 초부(樵夫)다.
 내 미모가 제법인 것을 보면 어머니의 미모를 알겠다. 아마도 아버지의 얼굴을 타고 태어났다면 나는 그야말로 내 얼굴을 시궁창에 박고 싶었을 것이다.
 “네가 원하는 남자가 누구냐?”
 해라(海螺 : 소라)를 까뒤집어 놓은 것같이 두껍고 투박한 입술에서 나오는 소리는 내 가슴에 불을 질렀다.
 애써 참아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아무래도 내 얼굴이 상기된 듯한 모양이다. 아버지는 아마도 어리기만 하던 내 딸이 다 컸구나 하고 생각할 것이다.
 재미있는 일이다.
 “아직 정하지 않았어요.”
 그것이 최선의 대답이고 최후의 발악이다.
 부친은 한동안 나를 바라보았다.
 “후, 이 혜윤도(醯潤濤)가 딸자식 때문에 이리도 속을 태울 것이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었다. 하필 외나무다리를 건너가려 하는 것이냐?”
 덜컥!
 가슴이 내려앉았다.
 이미 알고 있는 거다.
 아버지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시면서도 모른 척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생각 같아서는 문을 박차며 뛰쳐 나가고 싶지만 어울리지 않는 짓이다. 나는 역공(逆攻)을 취하기로 했다. 내게 어울리는 일은 억지를 쓰는 것이다.
 “그게 어쨌다는 거지요?”
 나는 내 자신을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부친이라고 하지만 대라삼절도(大喇三切刀) 혜윤도라고 하면 만주(滿洲)에서는 알아주는 이름이다. 그렇지만 난 그가 하나도 무섭거나 두렵지 않으니 말이다. 그는 나를 어찌할 수 없을 것이다.
 언니가 아버지의 말을 따라 혼인하는 날 남편이 급살(急煞)을 맞아 죽었다. 그 후로 아버지는 많이 변했다. 그 변으로 언니는 정신이 미친년 달거리하듯 오락가락한다. 내가 보기에도 형부가 될 수 있었던 그 남자는 참으로 멋있었는데······
 만약 그런 남자가 있다면 나는 발가벗고서라도 달려갈 것이다. 더구나 그는 혁철족 최고의 가문이었던 민가(民家)의 장자(長者)였다. 아쉽게 죽었지만.
 “나는 이왕이면 네가 사내다운 녀석을 고르기 바랐다. 그런데 겨우 자운제 안에서 내분(內紛)을 일으킬 참이냐?”
 이런!
 나는 아버지가 모든 제자들에게 공정한 사랑을 가지고 있는 줄 알았다. 또한 혁철족의 후인들이라면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대하는 줄 알고 있었다. 외부로 드러나는 아버지는 늘 편견이 없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으니까!
 자식 문제는 제대로 안 되는 모양이다.
 난 대답하지 않았다.
 어차피 사내는 똑같다. 나를 충족시켜 주면 그만 아닌가? 나는 내가 원하는 남자가 어떤 남자인지 안다.
 “좋아. 돌아가라. 난 이번 중양절(重陽節)에 너의 혼인 상대를 발표할 것이다.”
 좋은 일이다.
 몇 놈 죽겠군.
 
 내 처소는 내원과 외원의 담이 맞닿는 곳에 있다. 내 스스로 정한 곳이다.
 나는 번거로운 것을 싫어한다.
 철혈각에 내 처소가 있기는 하지만 화려한 치장과 황금을 들여 만든 가구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외원이 보이는 곳에 내 처소를 잡았다. 물론 평소에는 여비(女婢)들이 머무는 곳이지만 난 그녀들의 처소 중에 가장 깊숙한 곳에 내 거처를 마련했다. 길게 이야기했지만 한마디로 외원이 한눈에 보이는 곳이다.
 “어?”
 나는 내 처소로 가다 걸음을 멈추었다.
 두 명의 사내가 걸어오고 있었다.
 앞서 걸어오고 있는 사내는 편당림이었고 뒤를 따라오는 사내는 복우평이었다. 그들은 나지막하게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말을 하는 사람은 복우평이었고 편당림은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편당림의 표정엔 약간의 짜증이 들어 있었다. 옆에서는 보이지 않을는지 모르지만 앞에서는 보인다.
 편당림은 언제나 말이 없다.
 반면, 복우평은 말이 많아 때로는 앵무(鸚鵡)처럼 지껄이는 것을 볼 수 있다. 아무튼 좋다. 그들 중 누군가 내 남자가 된다면 난 상관하지 않을 생각이다. 그러나 분명 편당림 쪽으로 약간 더 많은 신경이 쓰인다.
 그들이 곁을 스쳐 간다.
 나는 편당림을 바라보았다. 그도 내 눈길을 의식했는지 눈을 들고 나를 바라본다.
 나는 입술을 핥았다. 아무리 보아도 마음에 드는 사내다. 몸이 뜨거워지려 한다. 하체가 꼬이지 않으면 좋으련만. 난 나이를 먹고서도 너무도 오랫동안 정숙하게 참아온 것이 틀림없다.
 나는 다시 한 번 입술을 핥았다. 의도적이기는 했지만 편당림이 내 마음을 알아주기를 바랐다. 편당림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내 눈길을 느낀 모양이다.
 빌어먹을!
 복우평은 왜 웃는 거야.
 편당림!
 넌 내 거야!
 
 
 3. 나도 알아
 
 
 “당림, 그녀가 또 너를 보고 있다.”
 귀찮은 놈!
 복우평은 언제나 그렇게 말한다.
 겉으로 드러내지 않아도 그가 혜유(醯裕)에게 마음을 두고 있다는 것을 안다. 그는 병적으로 집착하고 있다. 그녀가 원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겉으로 드러나는 것으로 보아서는 우리 두 사람 모두를 원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지만.
 나는 그녀가 우리를 잡아먹을 수 있는 기회를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안다.
 웅크린 당랑(螳螂)처럼!
 “우평, 어서 일이나 하자. 머뭇거리다가는 또다시 사부님께 볼기를 맞을 것이다.”
 나는 애써 무시하는 목소리를 흘렸다. 비록 태연한 척했지만 나라고 해서 마음이 안정되는 것은 아니다. 늘 뒤통수로 다가오는 열기 담은 눈길을 알고 있을 뿐 아니라 그 눈길의 주인이 누구인지도 안다.
 “어서 일이나 해!”
 나는 핀잔하듯 말하며 작두를 내렸다.
 써걱!
 또 한 마리의 은어(銀魚)가 죽었다. 머리가 작두에 잘려나간 것이다. 은어는 머리가 잘린 후에도 연신 퍼덕거린다. 급히 피를 받을 그릇을 가져다대었지만 가슴이 철렁했다. 정신을 다른 곳에 두고 있었기 때문인지 하마터면 손가락을 자를 뻔했다. 마음 속에서 울화가 치밀었지만 애써 눌렀다.
 자운제는 뛰어난 의술을 지니고 있을 뿐 아니라 강도가 높은 쇠를 잘 다루는 기술을 가지고 있다. 특히 어피복을 만드는 기술은 누구도 흉내를 낼 수 없다. 잉어는 중요한 재료이다. 잉어의 가죽은 어피복을 만드는 데 사용하고 피는 약재를 만드는 데 사용한다. 또한 자운제는 혁철족의 재산과 생명을 보호해 주는 방파제와 같은 존재다. 그래서 부근에서는 자운제의 제자들을 제자(劑子)라 부르며 존경을 보낸다.
 “아니, 그녀는 너를 보고 있어.”
 복우평은 여전히 그녀의 눈길에서 시선을 돌리지 못하고 있는 모양이다.
 나는 손을 멈추고 그를 바라보았다.
 “어서 일이나 하란 말이야. 사부님이 돌아오시기 전에 고기를 다듬어야 하고 약초를 모두 썰어야 해. 이러다가는 무공수련에 늦을 거야.”
 핀잔하듯 말했지만 어쩐지 기분이 상쾌했다.
 나도 안다.
 단목을 세워만든 벽 너머에서 쳐다보는 한 쌍의 눈이 향한 곳이 어디라는 것을. 물론 그 눈의 초점이 얹혀 있는 곳도 안다. 따지지 않아도 나의 얼굴이라는 것을.
 ‘흠, 그녀는 아직도 나를 원하는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이기는 하다.
 며칠 전이던가?
 그녀가 갑자기 찾아온 것은 밤이었다. 몸에는 속이 다 들여다 보이는 얇은 옷을 입고 있었는데 제법 가슴이 뭉실하게 솟아 있었다. 사타구니의 음모도 환히 드러났었다.
 그녀를 가지고 싶었다.
 만약 사부님이 들어와 어깨에 죽비(竹扉)를 후려치지 않았다면 난 그녀의 몸을 탐했을 것이다. 아니, 미치도록 빠져 들어 혼백이 침몰했을지도 모른다.
 그토록 아름다운 몸매였다.
 가는 허리는 한아름에 안길 것 같았고 긴 흑발(黑髮)은 허리까지 늘어져 있었다. 그리고 벌어진 골반(骨盤), 그 사이에 자리잡은 거뭇한 음모!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몸이었다. 아무리 보아도 그녀는 다 컸다. 성숙한 몸을 가진 계집의 냄새가 났다.
 슥!
 “아얏!”
 손가락이 베어졌다.
 눈을 내리고 보니 큰 상처는 아니다. 손톱의 일부가 잘려나갔으나 손가락이 깊이 잘리지 않았으니 문제될 것은 없다. 급히 연엽초(蓮葉草)를 비벼 손에 대니 피는 멈추기 시작했다.
 “너도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지.”
 복우평이 속을 긁었다.
 야비한 놈!
 사람의 속을 떠보는 것까지는 좋다. 그러나 사람이 다친 것은 안중에도 없는 모양이다. 기껏 한다는 소리가 또다시 속이나 긁는 소리란 말인가?
 “에잉!”
 몸을 일으켰다.
 아직 잘라야 할 약초가 두 아름은 남았지만 손을 베었다는 핑계만으로도 사부의 눈을 피해 갈 수는 있을 것이다. 빨리 복우평의 입김을 벗어나고 싶다.
 
 단파두(斷破頭)!
 이십 년 전, 혁철족이 힘을 모아 여진족으로 구성된 토비 팔십 명의 목을 베었다고 해서 만들어진 이름!
 물론 빛나는 이름은 혜윤도!
 그 일이 있었기에 자운제가 만들어졌고, 혁철족에서 그저 그런 위치를 차지한 가문의 장자(長子)였던 혜윤도는 천중(天中)의 빛나는 해처럼 떠오르는 우상이 되었다. 물론 북만주에서 대라삼절도라 하면 누구도 고개를 저었다. 혜윤도의 무공은 그토록 놀라웠다. 물론 자운제를 만들게 된 배경도 단파두의 혈겁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단파두는 경박호와 지척의 거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자운제와도 멀지 않다. 본시부터가 단파두는 혁철족의 부락이었다. 그전에는 대혁촌(大革村)이라 불렀다던가!
 “오랜만에 나와보는 저잣거리로군.”
 복우평의 말에 나는 의미없이 웃어주었다.
 그는 말을 쉬지 않는다. 그가 입을 다문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귀찮은 놈!
 “어서 가자.”
 말은 했지만 따라오고, 따라오지 않고는 놈이 판단할 문제다. 나는 사부께서 말씀하신 대로 흑룡강에서 유입되는 철의 재질과 양을 알아보면 그만이다.
 자운제에서 사용하는 철은 대부분 송화강과 흑룡강 연안에서 캐어진 것이다. 송화강에서는 모래에서 얻어지는 철이 좋고 흑룡강 연안에서 들어오는 철은 돌에서 캐낸 철이 좋다. 모두 다 자력(磁力)을 지니고 있다.
 자운제의 제자가 문을 나서는 경우는 거의 없다.
 보통의 경우라면 제주이신 사부가 움직일 것이지만 언제부터인가 나와 복우평에게 이 일을 시키고 있다.
 한 달에 한 번은 반드시 단파두에 나와 유입되는 철을 검사해야 한다. 단파두에 들어왔던 철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알아보아야 하고 그 재질로 병기를 만들었을 때 강도(剛度)를 예측해야 한다.
 “야, 당림, 너는 이 일이 우리에게 어울린다고 생각하냐?”
 미친놈!
 어울리든 어울리지 않든 그게 무슨 상관이야. 우리는 사부가 내린 명령만 수행하면 그뿐이다. 사부님이 우리에게 명을 내린 것은 우리가 적임자라는 생각을 하셨기 때문일 것이다. 더구나 사부님은 턱없이 바쁘시다.
 “우선 광기처(鑛機處)로 가자!”
 광기처는 단파두에서 가장 큰 철물광(鐵物鑛)이다. 그렇다고 철을 캐어 제련하고 병기를 만들거나 농기구를 만드는 것은 아니다. 혁철족 마을에서 병기를 제련하는 것은 금기사항이다.
 농기구도 만들 수가 없다.
 쇠를 다루는 것은 자운제뿐이다.
 누구의 주장 때문에 그렇게 되었는지 알 수는 없다. 분명한 것은 자운제에서 나온 말이 아니라 혁철족 마을에서 나온 말이라는 사실이다. 관권(官權)이 미치지 않는 단파두에서 혁철족의 원로(元老)라는 자들이 모여 내린 결정은 곧 법이다. 누구도 거역할 수 없다. 이십 년 전 정해진 법 아닌 법은 지금도 지켜지고 있다.
 단파두는 작은 마을이다.
 전부 합쳐 봐야 백여 호밖에는 되지 않는다. 혁철족은 단파두를 지나가는 사람들을 상대로 장사를 한다. 물론 그 수는 적다. 상가(商街)가 형성되어 있는 곳에 펼쳐진 상포(商鋪)는 불과 이십여 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있을 것은 다 있다.
 병기를 파는 병기점(兵器點)이 있고 묵어갈 수 있는 빈관(賓館)과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객잔(客殘), 다점(茶店)도 있다. 의복을 살 수 있는 포목점(布木店)이 있는가 하면 마차와 말을 파는 마장(馬場)도 있다. 모두가 자운제와 긴밀한 연계를 가진 상포들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상포를 들러 지나가는 외지인들에게서 한시도 눈을 떼지 않는다. 결국 단파두를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의 인상착의(人相着衣)는 자운제에 알려지고 세세히 보고된다.
 ‘재미있는 곳이야.’
 참으로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사람이라는 것은 각자가 자의적인 사고를 가지게 되어 있고 영리를 추구하는 것이 옳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마치 줄에 매달린 꼭두각시처럼 자운제에서 내리는 명령을 따르고 있다. 자운제는 혁철족에게 황궁과도 같았다.
 물론 그들의 자식들이 자운제에 살고 있기는 하다. 어떤 자는 무인으로, 혹은 고기를 잡거나 병기를 만드는 모습으로······
 “저기로군.”
 나는 나직하게 읊조렸다.
 무슨 말인지 신경을 쓰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연신 주둥아리를 놀려대는 복우평의 신경을 돌리고 싶어서였다. 선충(蟬蟲 : 매미)이 우는 것처럼 중얼거리는 통에 신경이 분산되고 정신이 오락가락해 참을 수가 없었다.
 저잣거리로 나온다는 것은 휴식이었다.
 그 휴식을 주둥이 날랜 놈 때문에 모두 잃어버리고 싶지는 않았다.
 멀리 저잣거리가 보였다.
 “다 왔다.”
 복우평이 달려갔다.
 모래와 진흙이 깔린 바닥에서 먼지가 피어올랐다.
 
 “흑룡강에서 들어온 철광석(鐵鑛石)은 그리 많지 않아. 기껏해야 일곱 개의 마차에 실려 왔으니 예년에 비하면 겨우 삼 할에 해당하는 양인걸.”
 장노이(張老二)는 입에 침을 튀겼다.
 구부러진 허리!
 돌출된 견치(犬齒 : 송곳니)!
 그가 늙었다는 것은 누가 보아도 안다. 길게 늘어진 머리카락은 말의 꼬리 같고 하악(下顎)과 상악(上顎)에 새겨진 주름살은 나이를 짐작할 수 없게 만든다.
 그는 걸을 때마다 몸을 출렁거렸는데 그 때문인지 말의 고저장단(高低長短)이 팔일무(八佾舞)를 추는 호녀(胡女)처럼 따로 놀았다. 한족들의 제례에서 쓰이는 팔일무는 한족의 계집들이 추는 것이 옳지만, 한때는 오랑캐의 계집들을 나포(拿捕)해 노예을 만들었고 팔일무를 가르쳐 사용했던 적이 있었다. 장노이의 말투가 언젠가 들었던 그 이야기를 생각나게 했다. 물론 호녀들이 팔일무를 잘 춘다는 이야기도 그에게 들었다. 그래도 그가 어떤 말을 하고 있는지 짐작을 할 수는 있었다.
 겨우 일곱 개의 마차라!
 이것은 문제가 있다.
 아무리 양이 줄었다 해도 이 정도의 양밖에 오지 않았다는 것은 누군가 철광석을 빼돌린다는 이야기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리 적어질 수 없다.
 “송화강의 철은 어때요?”
 장노이는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하나도 없다고?
 이것은 그냥 넘길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송화강에서 철을 채취(採取)하는 자들이나 흑룡강에서 광석을 캐는 자들은 대부분의 철을 단파두에서 팔아치운다. 자운제는 무리가 있더라도 그들이 팔기 위해 단파두로 가져 오는 철광석이나 모래에서 나는 철을 사주었다. 그것은 외부로 팔려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주변에는 금(金)의 후예(後裔)들이 적지 않다. 철이 넘치면 병기를 만들게 되고, 병기의 과다(過多)는 때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피를 보게 한다. 그들은 호시탐탐(虎視耽耽) 중원을 노리고 있어 혈겁의 시발점이 될 수 있다.
 그들에게 철이 넘쳐 난다면 언젠가는 소비하려 들 것이다. 결국 혁철족도 안심할 수 없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들은 먼저 혁철족같이 작은 민족을 억압하려 들 것이다. 확신하지 못해도 그 피해가 눈 앞에 다가왔다고 생각하면.
 ‘빌어먹을!’
 걱정거리가 또 하나 늘어난 셈이다.
 “알았소. 내일 마차를 보내 철광석을 자운제로 실어가도록 하겠소. 마차 일곱 대의 분량이니 필요한 것을 말해 보시오.”
 장노이는 내부로 들어갔다 다시 나왔다. 그의 손에는 얇은 판자가 들려 있었다. 수양유수(垂楊柳樹 : 수양 버드나무)를 갈라 만든 나무판자는 가늘었고 무수한 빗금이 그어져 있었다. 때로는 기이한 문양이 그려져 있기도 했다. 한쪽으로는 매듭이 매어져 있었다. 그 매듭이 시작되는 곳에는 그림이 그려져 있고!
 손을 내밀자 장노이가 내 손에 판자를 쥐여주었다.
 “그것이 필요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혁철족은 자존심이 강한 민족이다. 그래서 한족이 만든 문자는 쓰지 않는다. 그렇다고 다른 문자가 있는 것도 아니다. 말은 중원의 말과 통하지만 문자가 없으므로 그와 같이 결승문자(結繩文字)나 빗금 같은 상형문자(象形文字)를 사용하는 것이다. 때로는 표식만으로 의미를 전달하기도 했다. 그것으로 족했다. 그들은 문자를 필요치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
 문자랄 것도 없다.
 소서(小鋤 : 호미)가 필요하면 소서를 그리고 빗금을 친다. 빗금의 수가 숫자를 나타내는 것이다.
 혁철족에서 한족의 문자를 아는 자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자운제에 머무는 사람들이 그나마 학식이 있다고 하지만 글을 아는 사람은 혁철족 전체를 통틀어 수뇌부에 해당하는 열 명 정도에 그칠 것이다. 그나마 나는 오래 전에 사부로부터 글을 익혀 동몽선습(童蒙先習)은 떼었다.
 혁철족은 대를 거슬러 내려오며 한족에게 압박을 받았기 때문에 그들의 문자를 자식에게 전수하지 않았다. 그것이 자존심이라 생각하는 모양으로!
 “적지 않은 분량이군요.”
 막상 판자에 그려진 빗금을 보니 농민들이 요구하는 농기구가 제법 많았다. 당연한 것이 추수(秋收)가 시작되고 있었다. 많은 농기구가 필요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나는 판자를 품에 집어넣고 고개를 끄덕인 후 장노이에게 인사를 하고 물러났다.
 ‘알 수 없는 일이야.’
 평소와는 달랐다.
 그 동안은 고기를 잡고 어피의를 만들며 병기를 만들거나 농기구를 만들면 그만이었다. 저잣거리를 돌아다니며 필요한 것을 조사하고 철광석의 유입이나 농민들이 필요한 농기구 따위를 조사하는 일은 어울리지 않았다.
 “곧 추수가 있겠군.”
 뒤에 치는 북이라는 말이 왜 있는지 알겠다.
 장노이와 이야기를 나누던 복우평이 달려오며 소리를 질렀다. 또 주절거리려고 하는 모양이다.
 나는 발걸음을 빨리 옮기기 시작했다.
 
 툭!
 발 아래로 떨어져 구른 것은 당지(唐紙)와 나무껍질을 섞어만든 풍차이(風車爾 : 바람개비)였다.
 생긴 모양이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장난감으로서는 제법 값이 나가는 것으로 보인다. 누구나 가질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기에 나는 눈을 들었다. 이층 누각이 보였다.
 “좀 가져다줄래요.”
 상큼하다고 해야 할까? 아니다. 내가 잘못 들은 것이 틀림없다. 어딘지 모르게 끈적거리는 느낌, 분명 평범한 여인의 목소리는 아니다. 그런데 아이가 아니고 여인이란 말인가?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있었다.
 이층 누각에서 한 여인이 손을 흔들었다. 여인이라고 생각했지만 어찌 보면 소녀라고 하는 것이 옳을지 모르겠다. 나이를 먹었어야 겨우 혜유의 나이밖에는 되어 보이지 않았다.
 열여섯이나 일곱?
 나는 한동안 망설였다.
 그녀가 손을 흔드는 창가에 붉은 천이 나풀거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창루(娼樓)!
 그곳이 어디인지 알기 때문이었다.
 창루는 원래 계집들이 노래를 불러주고 돈을 받는 곳이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지 좋지 않은 소문이 돌았다. 그녀들이 노래를 부르는 것이 아니라 몸을 판다는 것이었다.
 “어서 가봐!”
 목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복우평의 말이었다. 어딘지 모르게 기쁨이 어려 있는 것 같기도 했고 비꼬는 듯한 음색이 물들어 있기도 했다.
 ‘제길!’
 무시할 수도 없다.
 그녀가 손을 내밀어 도움을 청했다면 당연히 은전(恩典)을 베풀어야 하는 것이 사내의 도리였으니 말이다.
 망설임은 잠시뿐!
 나는 복우평을 돌아다보았다.
 “나는 다점에 가 있을 테니 어서 갔다오게.”
 복우평은 눈치에 있어서만큼은 누구도 따라갈 수 없다. 그는 손을 저어 보인 뒤 멀어져 갔다. 나는 그가 어디에 가는지 안다. 영춘(英春)이 있는 흥기다루(興起茶樓)로 갔을 것이다. 그 전에도 그는 저잣거리에 나올 여유가 있으면 흥기다루에 갔었다. 그곳에는 그와 관계를 알 수 없는 영춘이라는 계집이 늘 그를 기다리고 있다.
 나는 바람개비를 들고 나무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어서 오세요. 당신이 편당림, 편 공자이시죠?”
 그녀는 내 이름을 알고 있었다.
 자운제에 기거하는 사람을 아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창기(娼妓)들까지 내 이름을 알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문제는 그 계집이 혁철족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혁철족은 아무리 빈한(貧寒)하여 일가족(一家族)이 아사(餓死)를 면하지 못하더라도 딸을 저잣거리에 내몰지는 않는다. 혁철족이 사는 마을에는 간혹 한족이나 다른 부족들이 끼어 살게 마련인데 그녀도 흘러 들어온 계집 중 한 명일 것이다.
 나는 바람개비를 내려놓고 나오려 했다.
 “제가 술을 한잔 대접하지요.”
 이건 생각지도 않았던 일이다. 그렇다고 고맙거나 마음이 설렌다는 것은 아니다. 왠지 늪에 빠진 듯한 기이한 기분이다. 그렇다고 도주를 하거나 무작정 달려갈 수도 없다. 허둥거리게 된다면 오고 가는 사람들의 눈에 이상하게 보일 것이다.
 ‘함정, 뭔가 있어.’
 불안했다.
 만약 금국(金國)의 후예들이나 달단족들이 혁철족에게 무엇인가 얻어내기 위해 나를 유인했다면 결과는 예측할 수 없는 일이다. 나는 자운제의 내부에 거주하고 있으니 노리는 자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알맞은 포로가 될 것이다.
 두려워졌다.
 “나를 부른 이유는?”
 “아아, 서두르지 마세요. 소녀는 비롱이라 해요. 북평(北平 : 지금의 북경)에서 왔지요. 한족이고요.”
 그녀는 반짝거리는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잘생긴 얼굴이었다.
 긴 머리가 해초처럼 일렁이고 있었고 넓은 이마가 마음을 놓이게 만든다. 긴 속눈썹이 요염하게 보이고 붉은 얼굴과 입술이 침을 흘리게 만들 지경이다.
 깊게 가라앉은 눈은 왠지 빨려드는 것 같다.
 “왜 나를 이리로 유인했소?”
 두 번째 물었다.
 참으로 이상한 것은 몸을 돌려 그녀의 방을 나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 다리가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그녀의 방을 둘러보았다.
 세 평이 넘지 않을 것 같은 아주 작은 방이다. 창가에 침상이 놓여 있고 붉은색이 감도는 금침이 깔려 있다. 창가를 가린 주렴은 구슬과 나무를 깎은 작은 구슬 모양의 목환(木丸)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그 속으로 얇은 천이 보였다.
 벽에는 책이 두 권, 침선의 재료와 눈이 나리는 풍경을 그린 민화(民畵)가 한 장 걸려 있다. 날개처럼 하늘거릴 것 같은 옷 한 벌이 벽에 걸려 있고.
 “준비되었습니다.”
 나직한 소리가 들리고 늙수그레한 여인이 목반(木盤)을 받쳐 들고 들어왔다. 맹세코 그녀가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조차 들을 수 없었다. 그녀의 몸이 귀신처럼 날래지 않았다면 내가 계집에게 정신을 빼앗겼던 것 같다.
 “이리로!”
 비롱이라 했나? 계집은 손을 저었고 노파는 목반을 침상 위에 올려놓았다. 목반에는 나무를 파서 만든 술잔 두 개와 진흙을 빚어 초벌구이를 한 주병(酒甁)이 놓여 있다.
 노파는 목반을 놓자마자 가볍게 인사를 하고 황급히 몸을 돌려 방을 나간다. 혁철족의 여인이 아니다. 지금 방 안에 있는 계집, 비롱과 같은 한족 여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는 한동안 그녀를 바라보았다.
 긴 목이 눈에 들어왔다. 분칠이라도 했는지 눈을 아리게 하는 흰 피부가 마음을 싱숭생숭하게 흔들었다.
 “이리 앉으십시오.”
 왜 그랬을까?
 나는 그 순간에도 그곳을 벗어나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아니,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다리가 다가갔고 엉덩이가 침상을 걸터앉고 있었다.
 그녀의 눈이 나를 빨아들이려 하고 있었다.
 해가 맑은 날, 물 속에 들어가다 보면 반짝거리는 돌이 있다. 막상 꺼내보면 아무것도 아닌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대개는 석영이었다.
 석영은 빛을 반사한다. 자운제의 제자들은 석영이 촘촘히 달린 차돌을 가리켜 수정석(水晶石)이라 불렀다. 물론 내 처소에도 두 개나 주워다놓았으니 난 그럭저럭 석영과는 인연이 있다. 그녀의 눈이 태양빛을 받아 반짝이는 석영 같다.
 “왜 나를 이리로 유인했소?”
 물을 것은 물어보아야 한다.
 “호호호! 당신은 생각보다 단순하군요. 이곳으로 올라오고 나서도 자신을 누가 유인했는지 물어보아야 한다는 건가요?”
 나는 아차 하는 심정이다.
 말인즉, 자신이 유혹했지만 배후(背後)가 누구인지 알지 않느냐는 이야기인데······
 사내가 일을 저지를 때는 배후의 명을 받는 경우도 있지만 대다수의 경우는 의지에 의해 행하는 법이다.
 그러나 이와 같이 여인이 일을 저지를 때는 사내의 지시를 받는다. 때로는 정에 이끌려, 혹은 약물중독(藥物中毒)으로. 그도 아니라면 배반당한 여자가 자신의 사랑을 받아달라는 호소로, 마지막의 이유는 이도 저도 아닌 내지르는 심정으로 일을 저지른다. 한결같은 것은 그 이면에는 사내가 있다는 것이다. 심한 경우에는 몸을 팔고 사내들에게 몸을 빌려주는 경우까지도, 그렇지 않을 경우도 있지만 이유없이 바람개비를 떨어뜨려 사람을 유혹할 리가 없다.
 배후는 늘 그림자에 숨어 있는 법.
 나는 기다리기로 했다.
 술을 마시다 보면 그녀는 입을 열게 될 것이다. 술을 마시면 마음이 풀어지고 오만가지 생각을 하게 된다. 결국 심경의 변화가 올 수도 있다. 생각 같아서는 뺨을 때릴 수도 있지만 억압하고 무력을 사용하는 것만이 능사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나는 아무래도 군자 축에 드는 사람인 모양이다.
 쪼르르르르!
 맑은 주향(酒香)이 코로 스며들었다. 진한 송진(松津) 냄새가 나는 것으로 보아 송화주(松花酒)가 분명하리라. 그도 아니라면 향이 비슷한 해송자주(海松子酒)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도······”
 비롱은 자신의 술잔에도 술을 채우며 혀로 입술을 핥았다. 그녀의 모습만으로 판단해 보면 목적을 위해 몸을 던지는 것은 깊이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그녀는 술잔을 채우고 손을 들어올렸다.
 ‘뭐야.’
 건배라도 하자는 이야기인가?
 미치겠군.
 나는 술잔을 들었다.
 갑자기 머리 속으로 파고든 생각 때문이었다.
 이 여자는 갑자기 나타나 나를 유혹했다. 웃음을 친 것은 아니지만 물건을 떨어뜨릴 정도로 대담하게 행동했고 치밀했다. 술잔에 독이 들어있거나 마취제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어차피 달려온 길이다.
 멈추기에는 마음이 허락지 않았다.
 “좋소. 마시겠소. 그러나 나중에 누가 나를 유혹하라 했는지 들어봅시다.”
 비롱은 빙긋이 웃었다.
 내 표정과 말하는 양이 우습다는 건가?
 나는 술잔을 들이켰다.
 그녀도 망설임없이 술잔을 들이켰다.
 진한 솔[松]향과 함께 진한 꿀맛이 났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본시 송화주는 맛이 독해 꿀을 타서 먹는 경우가 있었고 귀한 손님에게는 반드시 꿀을 탔다. 그래서 송밀주(松蜜酒)라는 말이 생겨났는지도 모른다.
 진기를 운용해 보았으나 아무런 증상도 나타나지 않았다. 만약 독이 들어 있다면 창을 부수고 날아내려 자운제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자운제에는 해독약이 많으므로!
 자운제의 약당(藥堂)까지 갈 수 있다면 시시한 독 정도는 성에도 차지 않았다.
 “당신은 멍청하군요. 당신의 일거수일투족에 대해 철저하게 아는 사람이 저에게 부탁했어요. 당신을 이곳으로 유인해 두 시진만 잡고 있으라고요.”
 비롱은 의외로 순수한 면이 있는 것 같다. 나를 유혹한 것은 어쩌면 계획된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술잔을 돌리는 것만으로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모르기는 해도 완벽한 랍권투(拉圈套 : 올가미)를 칠 것이다. 왠지 그녀의 랍권투가 어떤 것인지 경험해 보고 싶다.
 멀쩡했다.
 몸에 무리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해코지를 하려고 달려드는 것도 아니다.
 “두 시진?”
 나는 놀랐다.
 두 시진이 왜 필요한 것일까?
 한참이 지나지 않아 짐작이 왔다.
 ‘복우평!’
 나는 웃고 싶어졌다.
 “하하하하! 복우평. 그가 당신에게 부탁을 했군. 나를 두 시진만 잡아 달라고 했나? 어림없는 수작!”
 나는 깨달을 수 있었다.
 복우평이 아니라면 나를 이렇게 곤경 속으로 밀어넣을 친구가 없다. 아마도 그는 혜유를 차지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다. 그 일환으로 나를 곤경으로 몰아넣는 것이다.
 멍청한 친구!
 그는 내가 혜유 때문에 목숨을 걸 정도로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모르는 것 같다. 아니, 이따위 수작 때문에 그녀의 마음이 변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이상하다. 그녀의 마음도 중요하지만 문제는 사부의 마음이라는 것을 왜 모른단 말인가?
 곧 소문이 날 것이다.
 내가 어떤 행동을 하든 관계가 없는 일이다. 오래지 않아 자운제에서 내가 창녀와 뒹굴었다는 소문은 꼬리를 물 것이다. 복우평이라면 능히 그러고도 남을 것이다.
 난 그와 십 년 이상을 살을 맞대며 살아왔다.
 물고기를 잡을 때도 늘 곁에 있었고 쇠를 두드릴 때도 마찬가지다. 물론 무공을 익힐 때도 그는 늘 주위에 있다. 내가 철사장(鐵沙掌)을 익히면 그도 철사장을 익혔고 유성십이검(流星十二劍)을 익히면 그도 똑같은 검법을 수련했다.
 처음에는 몰랐지만 이제는 안다.
 ‘바보 같은 친구.’
 웃음이 난다.
 나에게 생명이나 명예에 비해 혜유의 존재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것을 그는 왜 모르는 걸까?
 내가 그녀를 원한다면 그것은 선택할 수 있는 여인이 많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다른 여인을 찾기에는 여력이 닿지 않거나 귀찮기 때문일 것이다. 나에게 여인이라는 존재는 별 의미가 없다. 장식물은 아니라 해도 일생에 그리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생각하진 않는다. 만약 내가 혜유를 생각한다면 그것은 그녀가 먼저 접근을 했기 때문이리라.
 난 그만 비롱의 처소에서 나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녀와 몸을 섞든지, 그냥 나오든지 상관은 없는 일이다. 소문은 날 것이지만 내 의지가 아니니 그녀와 몸을 섞고 미친개처럼 질탕한 정사를 치를 필요는 없다.
 “억?”
 몸을 돌리던 나는 몸을 휘청거렸다.
 ‘빌어먹을!’
 나는 하체에 힘이 빠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설사가 난 듯 복부에서 마구 끓어오르는 이 열기는?
 “이건?”
 나는 몸을 돌리며 웃었다.
 비롱이라 했던가?
 그녀는 몸을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제법 아름답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있고, 그것만으로 그녀가 심적 부담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는 급히 운기를 했다.
 어차피 음약이 몸의 혈맥을 따라 움직이는 것이라면 내공으로 혈도를 막을 수도 있을 것이다. 심장까지 침투하지 않았다면 때로는 발산해 버릴 수도 있다. 하찮은 쓰레기들이 사용하는 약이 무엇으로 조제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시시한 음약 같지는 않다. 산마나 사향(麝香)의 향낭에서 채취한 음약이라면 해독하기도 어렵지 않을 것이다. 만약 그 정도라면 수중에 지니고 있는 반하나 토사자, 복분자(覆盆子)로 해독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틀렸다.’
 진기를 운용하던 나는 혈맥이 터져 나가는 것 같은 충격에 놀랐다. 그리고 하체의 뿌듯함은 진기의 운용으로 막을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심장이 싸늘하게 식어왔다.
 분노 때문이 아니고 약효 때문이었다.
 ‘빌어먹을······ 여러 가지의 약재를 섞은 것이다. 꿀에 혈맥을 빠르게 움직이게 하는 부자(附子)를 탔다. 더구나 발정난 돼지의 음경(陰莖)에서 정수(精髓)를 모아 섞은 것이다. 제기랄! 이거야말로 자운제의 수법이 아닌가 말이다.’
 기가 찰 노릇이었다.
 자운제는 본시 의법(醫法)이 발달했지 독술이 발달한 것은 아니었다. 독과 의법은 많은 부분이 일치하는지라 독을 사용할 줄 알면 의술도 사용할 줄도 알게 된다. 사실 내가 중독된 음약은 엄격히 말해 독이 아니다. 굳이 독을 따지자면 부자가 되겠지만 약으로도 사용할 수가 있는 것이었다.
 꿀은 위장이 약한 사람에게는 보양식(補陽食)이 되는 것이고 부자는 많이 먹거나 다듬지 않고 먹으면 독이 되지만 적당량을 먹으면 흥분이 일어나 혈맥이 빨라지고 보음보양(補陰補陽)의 약효가 있다. 회양자(會陽者)이기도 해 쇠약한 몸을 지닌 사람에게는 더할 수 없이 좋은 영약이며 신경통(神經痛)이나 만성이질(慢性痢疾) 등에도 약효를 발휘한다. 돼지의 음경에서 채취한 정수는 발기부전(勃起不全)을 겪고있는 사람에게 적당량을 사용하면 더할 수 없는 약이 된다.
 그렇게 조목조목 따진다면 해약이라 할 수 없다.
 문제는 그 약재들이 섞이지 않았을 때는 약효로 몸에 도움을 주지만 섞이면 음약이 된다. 꿀은 모든 약효의 소화를 도울 뿐 아니라 부자는 호흡을 빠르게 한다. 돼지의 음경에서 채취한 정수는 결국 빠르게 흡수되어 거친 호흡을 타고 몸 속으로 퍼지는 것이다.
 자운제는 꿀을 얻기 위해 밀봉(蜜蜂)을 키운다.
 벌을 키워 얻는 꿀로 약재를 만들거나 먼 거리를 이동할 때 사용하는 벽곡단(酸穀丹)을 만든다. 또한 생기단(生氣丹)이라는 환제(丸劑)를 만들어 사용하기도 한다.
 문제는 그 벌꿀들을 번식시키기 위해 사용되는 것이 음약이라는 사실이다. 내가 먹은 술잔에는 그 음약이 섞여 있었다. 그제야 왜 꿀을 타야 제 맛이 나는 송화주가 들어왔는지 이해가 되었다.
 ‘재미있는 친구.’
 화가 나지도 않았다.
 나의 멍청함과 친구의 지나친 호의가 가져다준 불행이라 생각하면 그만이었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편해질 수도 있었다. 그러나 터질 듯한 욕망은 풀어야 했다. 당장 달려나간다고 해도 해약을 구할 수 없을 것이고 한 순간에 태워버리거나 밀어낼 수도 없다. 아무리 뛰어난 내공을 지닌 사람도 화기(火氣)로 몸 속의 음약을 한 순간에 태운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진기를 운용하면 더욱 빠르게 전신을 타고 돌기 때문이다.
 본시 나는 내 자신이 깨끗하거나 정조관념(貞操觀念)이 있다고는 믿지 않았다. 아니, 만약 기회가 왔다면 벌써 내 모든 것을 던져 버리는 뜨거운 정사를 벌였을 것이다.
 기회가 없었을 뿐!
 어쩌면 기회가 왔을지도 모르는 일!
 나는 망설이지 않았다.
 내가 다가서자 비롱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두려움에 젖은 눈으로 주춤거리고 물러났지만 침상이 닿은 벽에 몸을 기댔을 뿐이었다. 그녀의 모습은 그야말로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나는 호흡이 가빠지자 혈맥에 무리가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를 원했나? 나는 결코 망설이지 않아. 내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는데 찬밥과 더운밥을 가리겠어?”
 비롱은 자신이 상대를 잘못 정했다는 것을 깨달았는지도 모른다. 난 그녀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없지만 보나마나 미친 듯 덤벼들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것만이 그녀로서는 손쉬운 방법이었을 테니까!
 나는 그럭저럭 사부의 가르침에는 열심히 따른 편이었다. 그래서 내공심법(內功心法)에는 누구보다 자신이 있다. 사부가 지시하는 대로 따라하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으니까. 또한 내가 익힌 밀공(密功)은 누구도 모른다.
 그 이유를 물은 적이 있지만 사부는 말해 주지 않았다.
 내가 익힌 내공심법은 자운제에서도 나 혼자만이 익히고 있다는 것을 안다. 나는 진기를 운용해 음약을 밀어내보려 하다 생각을 바꾸고 그녀에게 다갔다.
 “옷 벗어.”
 긴말이 필요없다.
 비롱은 한참 동안 나를 바라보다 엉거주춤 몸을 일으켰다. 나는 허리춤을 더듬어 삼인도로 창(窓)에 매어진 가는 마사를 끊었다. 마사가 끊기자 가는 천으로 만든 휘장이 내려오고 대나무와 작은 구슬, 목주를 섞어 엮은 주렴도 내려왔다.
 점점 숨이 가빠왔다.
 “어서 벗어. 내가 벗겨주랴?”
 나는 열아홉의 나이를 먹었지만 여자는 처음이다. 그렇다고 여자와 잘 수 있는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혜유의 언니가 홀딱 벗은 몸으로 자운제를 달릴 때면 하체가 벌떡 일어서는 느낌에 얼굴을 붉힌 적도 있다.
 혜정(醯晶), 그녀는 혜유의 언니다.
 올해 나이가 열여덟일 거다. 그녀는 이미 익을 대로 익은 몸을 가지고 있다. 가슴의 융기(隆起)며 잘 빠진 몸매. 사타구니에 난 터럭까지도 눈여겨본 적이 있다. 그러나 난 한 번도 여인의 몸에 욕심을 낸 적이 없다.
 어차피 일이 이리 되었으니 사내의 욕망을 푼다고 해서 나쁠 것도 없다.
 비롱은 서둘러 옷을 벗었다.
 그녀는 두려운 눈빛을 지우지 않았지만 내가 자신을 죽이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는 표정이었다. 나는 그녀를 죽이지 않을 것이다.
 그녀도 안다.
 직감이 아니라 복우평이 그녀에게 이야기했을 것이다. 내가 사람을 죽여보지 않았다는 것과 자운제의 제자가 혁철족의 생명과 안위를 보장하지 않는 일에는 무공을 사용하지 못한다는 것을!
 그녀의 몸이 드러났다.
 인물에 비해 형편없는 몸매였다.
 가슴은 달걀을 부치다 만 것처럼 퍼져 있었고 복부에는 약간의 기름기가 꼈는지 부풀어 올라 있었다. 아랫배도 배꼽이 깊숙하게 들어간 것으로 보아 속살이 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의술을 베풀다 보면 신체는 자연히 알게 되는 법! 자운제의 제자들은 기초적인 의술과 약재에 대한 성분을 익히기 때문에 여인의 몸을 보면 대략적인 추측을 할 수 있다.
 ‘헉!’
 입 안으로 뜨거운 기류가 올라왔다. 음약이 심장까지 침투한 모양이다. 호흡이 가빠지고 심장이 심하게 뛰었다. 이제는 참을 수가 없다.
 계집은 모든 옷을 벗고 있었다.
 겉옷은 물론 두두와 고의까지 벗고 있어 모든 것이 적나라하게 눈을 파고들었다.
 ‘재미없군.’
 어이가 없었다.
 그 동안 몇 번인가 들었던 기억으로는 음약에 중독되면 미친 듯 여인의 몸을 탐한다고 했지만 기이하도록 정신이 맑아졌다. 계집의 사타구니를 보아도 달라지지 않았다.
 “네가 스스로 자초한 일이다.”
 나는 서두르지 않고 옷을 벗었다.
 몸에 걸치고 있던 경의(更衣)를 벗고 삼군고를 벗었다. 두두를 벗자 탄탄한 가슴이 드러났다. 하체를 가린 속옷을 벗은 나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저를 죽이지는 않을 거죠?”
 그걸 말이라 하는가?
 나는 살인자가 아니다.
 다만 참을 수 없는 욕정을 해결할 수 있으면 그것으로 족하다. 나에게는 그녀를 죽일 이유도, 그녀를 탓할 이유도 없다. 굳이 따진다면 그녀와 나를 구렁텅이로 몰고 간 복우평이 얄미울 뿐이다.
 갑자기, 너무나 갑작스럽다는 말밖에는 할 말이 없다.
 그녀의 나신이 눈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참을 수 없는 열화(熱火)가 밀려들었다.
 나는 미친 듯 달려들었다. 그리고 그녀의 몸을 할퀴고 꼬집었다. 입술을 빨았고 거칠게 주물렀다. 그리고 내가 아닌 나를 찾아내기 위해 미친 듯 허우적거렸다.
 
 “어때, 근사한 저녁이었지.”
 빌어먹을 놈!
 복우평은 입술가를 핥으며 눈을 내리깔고 빙글거리는 웃음을 터뜨렸다. 생각 같아서는 따귀라도 올려붙여 주고 싶었지만 그것이 나를 상하게 하는 일이라는 것을 아는 이상 상대하지 않기로 했다.
 난 크게 심호흡을 했다.
 끓어오르던 가슴이 조금은 안정이 되었다.
 “고맙군, 내 생에 이렇게 찬란했던 날은 없었어. 자네는 역시 내 친구야. 정말 고맙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그의 얼굴이 질리는 것을······
 
 
 4. 바보 같은 놈
 
 
 “하하하하!”
 나는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급한 웃음을 터뜨렸다. 의도적이기는 했지만 내심 참을 수 없는 희열이 밀려들었다.
 통쾌했다.
 보는 사람이 없었다면 춤이라도 추었으리라.
 ‘어림없다. 누가 뭐라 해도 혜유는 내 거다.’
 아무리 생각해도 편당림은 멍청한 놈이다.
 혜유가 그를 원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편당림이 움직이는 곳에는 언제나 혜유의 눈빛이 머물고 있다. 자운제의 제자들은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다.
 혼자만 모른 척하다니······
 나는 작두를 내리고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잘려진 은어의 비늘을 벗겨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가슴이 떨리고 웃음이 나와 참을 수 없으니 잠시 쉬는 수밖에. 지금은 행복하게 웃을 수 있지만 지난날을 생각하면 이가 갈린다. 자운제의 제자가 된 지 벌써 십 년 하고도 사 년. 아직은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다. 만약 혜유와 혼인을 할 수만 있다면 바랄 것이 없다.
 얼굴도 모르는 부모!
 잘 살아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다. 나를 버린 부모에게 보란 듯이 떳떳하게 살고 싶을 뿐이다.
 ‘아직 있군.’
 혜유의 눈은 아직 떠나지 않고 있다.
 나는 몸을 일으켰다.
 망설일 이유는 없다. 나는 작두를 내려놓고 나무로 가려져 있는 벽을 향해 다가갔다. 아무리 나무로 가렸다고 해도 언뜻 보이는 혜유를 느끼지 못할 리가 없다.
 혜유는 움직이지 않고 있다.
 “나를 보나?”
 혜유의 숨소리가 느껴졌다.
 나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어떻게 하든지 혜유가 내 품에 안기게 해야 한다는 생각이 가슴에 끓어오르는 거추장스러움과 역겨움을 떨쳐 버리게 만들었다.
 혜유는 대답하지 않았다.
 “언제나 그를 바라보는 거야? 그러다가는 목이 늘어져 죽을 거다. 이미 그에게는 사랑하는 여자가 있어.”
 혜유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그녀도 소문을 들었을지는 알 수 없다. 이미 편당림이 창기와 놀아난다는 소문은 자운제 내부에 떠돌고 있으니까. 당연한 이야기라 할 수 있지만 소문의 진원지(震源地)는 바로 나, 복우평이다.
 “알아!”
 당돌하게 들리는 목소리.
 그녀는 이미 알고 있는 거다. 내 예상은 빗나가고 있다. 그 말을 해주면 당연히 내 품으로 달려와야 한다. 아니, 그렇게 쉬우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것이 나 혼자만의 생각이라는 것을 모르지는 않는다.
 못 먹는 감 찔러나 보자고!
 그럴지도 모른다. 내 마음 속에는 편당림에 대한 감정이 돌쩌귀처럼 쌓여 있으니!
 “그래도?”
 “아직 모르겠어. 난 누군가 결정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아직은 아니라고 생각해.”
 미치겠군.
 나는 침을 삼켰다.
 아직은 아니다.
 아무것도 결정되지 않았다는 것으로 생각해도 될지 알 수 없는 대답이지만 한편으로는 힘이 솟는다. 어찌 되었든 편당림으로 결정나지는 않았다는 이야기와 동격(同格)이니까.
 
 넓은 연무장엔 풀 한 포기 자라지 않았다.
 사람의 발은 무섭다.
 무성한 나무가 자란 산도 사람이 지나다니기 시작하면 순식간에 길이 생긴다. 그래서 누군가는 말했다. 본시부터 길이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사람이 다니면 자연스레 길이 열리고 왕래가 이루어지며 죽음이 밀려오게 마련이다.
 연무장에 풀이 자라지 않는 이유는 사람들이 쉬지 않고 움직이기 때문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태양이 머리 위에 뜨면 자운제의 식솔들은 하나둘 모여든다. 그들이 모여드는 이유는 오로지 하나.
 무공수련!
 자운제의 주인, 무림에서는 대라삼절도라 불린다던가? 혜윤도는 자신을 따르는 모든 제자들에게 무공을 익히게 했다. 그것만이 난세(亂世)를 살아가는 힘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가 어디에서 무공을 익혔는지는 모른다. 그의 무공은 내공과 외공을 모두 포함하는 것으로, 흔하지 않으며 외공에는 권박(拳搏)과 병기술을 모두 포함한다. 진기를 움직여 발경(發勁)하는 고금절기(古今絶技)는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무림을 뒤흔드는 대파(大派)의 제자라 해도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는 어디서 무공을 익혔을까?
 단 한 번도 자신의 무공에 대한 연혁을 밝힌 적이 없는 사부였다. 그래서였는지 혁철족들은 그의 무공이 고래(古來)로 전래되어 온 조상의 무공이라고도 했다.
 사부는 변명한 적이 없다.
 물론 시인한 적도······
 분명한 것은 사부가 가르치는 무공에는 기이하게 불가(佛家)의 냄새가 난다는 것이다.
 “모두 경찰(鏡察)을 실시한다!”
 머리를 삭도(削刀)로 밀었는지 터럭 하나 보이지 않는 사부는 쩌렁한 목소리를 토했다.
 제자들은 모두 손을 들어올렸다.
 삼십여 명의 무리 속에 끼어 있던 편당림도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손을 들어올린 다음 눈 앞에서 비비기 시작했다. 나는 그의 등을 노려보다 손을 들어올렸다.
 수장경찰(手掌鏡察)!
 손바닥을 비벼 온기를 일으키는 것으로, 모든 무공을 수련하기 이전에 거쳐야 할 기초적인 동작이다.
 나도 따라 손바닥을 비볐다.
 그에게 질 수는 없는 일이다.
 이 복우평이 편당림에게 진다면 이야기가 되지 않는 것이다. 난 그가 익히는 모든 무공을 따라익혀 결국에 가서는 그를 능가하고 말 거다.
 한참 동안 비비자 손바닥에 열이 올랐다. 참아내며 계속 비비자 피부가 델 것 같았다. 코로 노계(老鷄)의 털에서 나는 냄새가 밀려들었다.
 “실시해라.”
 이리저리 걸음을 옮기던 사부는 연무장의 한쪽에 놓인 나무의자에 앉았다. 사람의 키보다 수배나 높은 담이 있었지만 태양이 머리 위에 있어 그림자가 생기지 않아 사부의 얼굴이 뜨거워 보였다.
 나는 열이 난 손을 떼어 얼굴을 만지기 시작했다. 중지(中指)를 이용해 눈 주위를 쓰다듬고 얼굴을 비볐다. 손에서 나온 뜨거운 기운이 얼굴에 퍼졌다.
 얼굴을 비빈 손바닥이 식자 다시 비벼 열이 나도록 했다. 이어 두 손바닥으로 귓가를 비비고 머리의 혈도를 따라 눌렀다. 손가락이 아프도록 누르자 머리에서 경혈(經穴) 자극에 의한 작은 열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언뜻 눈을 돌려보니 편당림도 부지런히 경찰을 하고 있었다.
 “마보충권(馬步衝拳)!”
 사부의 목소리가 울렸다.
 나는 황급히 두 다리를 어깨넓이의 두 배로 벌리고 엉덩이를 주저앉혔다. 등을 꼿꼿하게 세우고 턱을 당겼다. 가슴을 밀고 입술을 가지런히 하여 이를 맞닿게 했다.
 순치상합(脣齒相合)!
 운기토납의 기본은 자세다. 십사 년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연마한 수련이다. 사부는 단초(單招)를 익히기 전에 반드시 마보충권을 통해 정신을 통일하게 하고 하체를 단련하게 했다. 한 시진 동안 마보충권으로 자세를 만들고 토납을 통해 내기를 단련한다. 내기가 충만해지면 진기를 움직여 혈도를 유주(留住)하게 하고 십이경락(十二經絡)과 육대맥(六大脈)을 돌게 한다. 반복된 수련으로 외기를 흡입한 다음 혈도에 진기가 충만하게 한 다음에야 도법과 권법, 검법 등의 무공을 수련한다.
 “흡(吸)!”
 오늘따라 사부의 목소리가 거칠게 느껴진다.
 그리 들리는 것은 아마도 내 기분 탓일 것이다. 나는 조금 흥분한 상태였다.
 나는 호흡을 통해 진기를 단전에 모은 뒤 한동안 머물게 했다. 이어 진기를 기해혈(氣海穴)로 뽑아내어 독맥(督脈)을 따라 흐르게 했다. 그리고 눈을 반개하고 허공을 바라보았다.
 눈을 옮기는 중에 편당림이 보였다.
 ‘우라질!’
 내기가 흔들렸다.
 편당림의 몸이 입적한 고승(高僧)처럼 보인다. 아무래도 그는 나보다 더욱 심후한 공력을 지닌 것처럼 보인다.
 자신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그는 사부님에게서 특별한 훈련을 받고 있을지도 모른다. 사부라면 그를 자식처럼 생각할 것이고 제자들이 모르는 비법(秘法)을 전수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다면 나와 같이 수련을 시작한 그가 그토록 빠르게 안정을 취하고 빈틈없는 자세를 만들 것이라는 생각을 할 수 없다.
 나는 지지 않는다. 누가 뭐라 해도.
 힘내라. 복우평!
 나는 복우평이 아니더냐.
 
 나는 정말 화가 난다.
 이 정도면 혜유가 움직일 것이라 판단했다. 편당림이 밖으로 나가 창녀와 뒹굴었다는 소문을 내면 혜유의 마음이 움직일지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녀는 어떤 행동의 변화도 보여주지 않았다.
 움직이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나만이 아는 일이다. 물론 내 마음 속으로 혼자 생각했으니까.
 내 이름은 복우평!
 나는 여섯 살이 되던 해에 자운제에 몸을 담았다. 자운제의 식솔이 된다는 것이 혁철족의 명예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갈 곳도 없었다. 내 부모는 모두 죽었다. 아무도 내 부모가 어떻게 죽었는지 말하지 않는다. 아니, 나를 버렸을지도 모른다. 나 또한 알지 못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있다. 내가 고아라는 것!
 고아에게 자운제만한 곳은 없다.
 밥 주지, 입혀주지, 재워주고 무공도 가르쳐 주는 곳이다. 세상에 이런 곳이 또 어디에 있단 말인가?
 처음에는 자운제에 들어와 살면서도 아무런 희망이 없었다. 모든 것이 암흑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내원에 들어갔다 한 가지 새로운 희망을 발견했다.
 계집애, 아니 난 그녀에게 소녀라는 말을 쓰고 싶다.
 혜유!
 성도 특이하지만 외자 이름은 나로 하여금 더욱 미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나는 그녀를 보며 살아갈 희망을 얻었다. 그녀의 눈이 있는 곳에 있고 싶어했고 그녀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누구에게도 질 수 없었다.
 나는 오래 전부터 그녀가 자라오는 것을 보았다.
 창백하기는 했지만 수려한 얼굴, 잘 빠진 몸매, 간혹 웃을 때 드러나는 뻐드렁니는 내 마음을 구름 위로 띄워올리고 새로운 희망을 가지게 했다. 그 계집아이를 본 순간부터 나는 가슴에 각인(刻印)했다.
 그녀와 결혼!
 그것이 내 꿈이다.
 그녀를 얻을 수 있다면 어떤 짓이라도 좋다. 설사 동료라 해도 죽일 수 있다. 그녀를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다면 말이다.
 나는 늘 내 머리가 똑똑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제까지 내가 생각하고 있던 일 중에 이루지 못한 일은 없다. 누구도 내 생각을 거역할 수는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비롱을 이 일에 끌어들이는 데에는 성공했다고 믿었다. 물론 겉으로 드러나고 있는 일만 본다면 성공한 셈이었다. 문제는 얄미운 편당림이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해 반성은커녕 내가 퍼뜨린 소문에 코방귀도 뀌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미칠 것 같았다.
 나는 그 일이 있은 후 조심스럽게 소문을 퍼뜨렸다. 그것으로 혜유의 생각이 바뀔 것이라 생각했다. 자운제의 제자로서 창녀와 뒹굴었다는 것은 수치일 수도 있으니까.
 놈은 너무도 태연했다.
 마치 자신이 창녀와 잠을 잤다는 사실이 자랑이라도 된다는 듯 고개를 뻣뻣하게 세우고 다닌다. 더욱 화가 나는 것은 누구도 편당림을 탓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분노가 치밀었다.
 문제는 또 있다.
 혜유라는 년이 마음의 변화를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를 쳐다보는 눈에는 불꽃이 피어오르고 있다. 언제나 변함없는 그녀의 눈빛을 보면 난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낀다.
 어떻게 해야 그녀를 내 품에 안기게 할 수 있을까?
 오늘 낮에만 해도 그렇다.
 난 작심을 하고 또 소문을 퍼뜨리기로 했다. 간단하지만 파장(波長)이 있을 수도 있는 소문이다. 그것은 편당림과 비롱이 다시 진한 정사를 나누었다는 것이다. 몇몇 동료들이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고 수긍하는 것 같았다.
 문제는 혜유였다.
 그녀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아직 그녀는 편당림과 나를 똑같은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것은 내가 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나는 근래 들어 새로운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부가 고아인 편당림을 안고 자운제로 들어왔다는 사실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나도 고아, 그도 고아다. 그러나 내 생각에 그와 난 피가 다른 것 같다. 그는 고아(古雅)한 피를 지녔고 나는 더러운 피를 지니고 태어났는지도 모른다. 짐작일 뿐이다. 아마도 편당림은 자신이 고아였는지도 모를 것이다. 알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기는 하다. 언젠가는 이야기를 해주어야겠다.
 만약 혜유의 언니, 혜정이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면 나도 몰랐을 것이다. 그녀는 간혹 정신이 돌아오는 모양인데 오늘 나에게 쓸데없는 소리를 주절거리는 거다.
 “정신차려. 아버지는 혜유와 당림을 짝지어주실 거야.”
 나는 처음에 저년이 미쳤나 하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랬더니 미친년은 갑자기 얼굴에 짙은 홍조(紅潮)를 띄우며 빙그레 웃었다. 그때의 눈빛은 미치지 않은 눈이었다.
 난 잠시 당황했다.
 그녀는 무언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난 마음이 급해져 그녀에게 다가가 이것저것을 캐묻기 시작했다. 그녀는 내 마음 속에 어떤 마음이 꿈틀거리는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는 자신이 아는 것을 이야기해 주었다.
 나는 그녀가 왜 사실대로 이야기해 주는지 안다. 자신의 부친이 편당림을 데리고 들어왔고 애초부터 사위로 점찍고 있었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난 포기하지 않는다.
 이제 쏘아진 화살이라 해도 되돌릴 생각이다. 아무리 미운 짓을 해도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있다. 나는 언제부터인가 그 기회를 노리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혜유가 눈을 번뜩일 때면!
 그녀가 붉은 입술에 침을 묻히고 혀로 핥을 때면 나는 언젠가 그녀를 가질 것이라 생각했었다.
 이제는 기다릴 수 없게 되었다.
 난 안다.
 혜정의 말을 듣고 나니 사부가 누구를 사위로 점찍고 있는지 알았을 뿐 아니라 내가 계획하고 있는 일을 가일층(加一層) 빠르게 진전시켜야 한다는 것을 알 것 같았다.
 참을 수가 없었다.
 사랑은 쟁취하는 거다.
 좋아! 누가 이기나 두고 보자.
 
 한바탕의 싸움은 우연치 않게 일어났다.
 어제였다.
 나와 편당림은 다시 저잣거리로 나갔다. 이번이 세 번째이니 이제는 모든 일이 손에 익었다.
 혁철족은 언제나 불안하게 살고 있다.
 동쪽으로는 해족(海族)들이 언제 밀려올지 알 수 없었고 북에서는 여진과 금의 후예들이 언제 밀려들지 모른다. 해동에서는 고려(高麗)의 후손들이 밀려오고 있다. 그들은 곧 단파두를 지나갈 것이다. 더구나 흑룡강까지 올라가면 적지 않은 부족들이 있다. 서쪽에서는 달단의 잔당들이 자신들이 북원(北元)의 후예들이란 기치를 내걸었다.
 그뿐이라면 다행이다.
 문제는 고려의 유민이다. 언제부터인지 고려(高麗)의 유민(流民)들이 밀려오고 있었다. 고려의 유민들은 나머지 방향에서 밀려드는 족속들과 달리 정(正)의 기치를 걸고 있었고 다른 부족에게 피해를 주지는 않지만 불안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들은 누구보다도 뛰어난 무공을 지니고 있을 뿐 아니라 단파두를 거쳐 아라사(俄羅斯 : 러시아)로 가려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도 아니라면 북해(北海) 방향으로 향해 흑룡강을 건너갈지도 모르는 일이다. 소문에는 그들이 장백산령(長百山嶺)을 넘어 내려올 때 후만주족(後滿洲族)이 습격을 했다가 고려의 무장들에게 걸려 삼천 명이 몰살을 당했다는 것이다. 들리기에는 고려의 유민들은 남녀노소가 모두 섞여 있으며 근 오천여 명이 넘을 것이라는 소문이다. 그 속에는 고려의 명장(名將)들이 섞여 있다고 하니 혁철족으로서는 감히 상대조차 할 수 없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우리는 또 외유(外遊)를 했다.
 아아! 우리라는 것은 나와 편당림이다. 우리는 보름 만에 저잣거리로 나갔다. 아니, 어제부터 연이틀 동안 계속이다.
 혁철족에게 병기를 나누어주기 위해서였다. 가을이 되면 간혹 토비들이 곡식을 약탈하기 위해 나타나는 경우가 있었다. 그래서 자운제에서는 농민들과 엽인(獵人)들에게 새로운 병기를 지급하고 있었다.
 모두에게 주는 것은 아니다.
 지니고 있는 병기가 훼손되었거나 화살이 떨어졌을 때, 새로 열다섯 살이 된 장정이 있을 때만 병기를 지급한다. 그래서 혁철족의 남녀는 열다섯 살이 되면 병기를 지닌다.
 지난날 조사한 대로 병기를 준비하다 보니 수레 하나에 가득 찼다. 그와 나는 수레를 끌고 저잣거리로 나왔다. 마을의 중앙에는 커다란 력실목이 있고 그 아래 우물이 있다. 길을 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먹을 수 있는 물이었다. 그래서 우물의 이름도 다인정(多人井)이다.
 우리는 다인정 앞에 병기를 풀어놓고 마을 사람들이 오기를 기다렸다.
 언제나 그랬듯이 기다리면 자신들이 요구한 병기를 찾으러 오게 마련, 혁철족은 어느 날짜에 병기를 지급하는지 알고 있다. 또한 자신이 어떤 병기를 요구했는지도 안다.
 오래지 않아 사람들이 나타나 자신들이 요구한 병기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검을 주문한 사람은 검을, 도를 주문한 사람은 도를 찾아갔다. 화살도 있었고 농기구와 닮은 파두나 대초자곤(大哨子棍)을 가지고 가는 사람도 있었다.
 모든 병기 지급을 마쳤을 때는 미시(未時)가 됨직한 시간이었다.
 “으아아악!”
 느닷없이 들려온 비명.
 사람들의 아우성이 들리고 미친 듯 달리는 발걸음 소리도 들려왔다.
 “가자!”
 난 소리를 지르고 앞장서서 달려갔다. 늘 허리에 차고 있던 편도(片刀)를 뽑아들었다. 비명이 들렸다는 것은 토비들이 쳐들어왔다거나 항거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혹은 살인사건이 일어났을지도 모른다.
 한참을 달리다 보니 편당림이 뒤쫓아왔다.
 ‘경공(經功)이 형편없군.’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달려갈수록 나와 편당림의 거리가 좁혀졌다. 처음에는 기고만장(氣高萬丈)한 마음이 들었지만 나는 곧 천용처럼 움츠려드는 자괴감에 몸을 떨어야 했다.
 편당림의 이마에는 땀방울 하나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느꼈다. 그뿐만이 아니라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언제?”
 믿을 수가 없었다.
 내가 알기에 놈의 무공은 나보다 뛰어날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늘 같은 시간에 토납을 하고 무공을 익혔다. 그가 검법을 익히면 나도 검법을 익혔고 도를 익히면 나도 도법을 익혔다. 차이가 있을 리 없었다.
 그런데도 놈의 발은 너무도 가벼웠다.
 한참을 달리자 쓰러져 있는 여인이 보였다.
 “누구요?”
 나는 달려가며 소리를 질렀다.
 “마숙(馬宿)의 아내요, 그들이 죽였소.”
 쓰러져 있는 여인의 주변에 몰려서 있던 사람들 중 수염이 길게 자란 노인이 소리를 질렀다. 난 그를 몇 번인가 보았기 때문에 대번에 믿음이 생겼다. 눈에 익은 노인이라면 혁철족일 것이고, 혁철족은 친구를 속이거나 곤란으로 밀어넣는 일은 하지 않는다. 만약 보지 못했다면 입을 열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들?”
 “토비들이오. 열 명은 넘을 거요.”
 노인은 손가락으로 좁은 길목을 가리켰다. 양쪽이 돌담으로 둘러싸인 좁은 골목길이었다.
 난 뒤를 돌아보다 달려갔다. 내가 달려가면 편당림은 어쩔 수 없이 따라올 것이다. 자운제에서 동료의 목숨을 자신의 목숨보다 귀하게 여기라는 계율(戒律)을 익히고 가슴에 새겼을 테니!
 내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편당림은 지체없이 내 뒤를 따라왔다.
 한참을 달리자 막다른 골목이 나타났다. 그 골목의 끝에 한결같이 둔해 보이는 곡도(曲刀)를 든 놈들이 다섯이나 서 있었다. 그들의 손에 들린 곡도는 유엽도(柳葉刀)나 박도(朴刀) 같은 것들이었는데 도를 세우고 있는 것으로 보아 한결같이 타병(打兵)으로서의 도법을 익히지 않은 것 같았다. 명문대파의 제자들이라면 도법을 통해 자병(刺兵)과 타병의 묘용을 살리는 법! 자병으로서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면 결국 도법을 배우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그저 무작정 휘두르는 정도랄까!
 한눈에 놈들이 토비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짐승가죽으로 만든 옷을 입고 있었고 등에는 들짐승의 가죽으로 만든 봇짐을 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 단파두에서 물건을 약탈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놈들을 죽이자.”
 나는 멈추어서며 소리를 질렀다.
 그런데 나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이야기를 들었다.
 “아니. 놈들을 죽일 수 없어. 마을을 벗어나도록 만들어야 해! 위협을 하는 것으로 족해.”
 이게 웬 똥 밟은 소리란 말인가?
 난 편당림이 그들의 수에 질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은 무공을 익히지 않은 토비들이다. 아주 난도질을 하고 육포(肉脯)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나는 화가 치밀었다.
 그의 말을 무시하고 편도를 휘두르며 다가갔다. 나는 내 편도를 믿는다.
 자운제에서도 나처럼 둔한 무기를 사용하는 사람은 드물다. 도신의 길이는 사 척, 도병(刀柄)은 일 척이다. 그러니까 내가 사용하는 편도의 총 길이는 오 척이다. 더구나 내가 직접 만든 편도는 단단하고 위력적이다.
 손잡이 부분에는 정성스레 만든 호수반(護手盤)을 달았고 도신의 굵기는 손에 잡힐 정도지만 끝은 한 뼘이 넘도록 벌어져 있다. 더구나 일곱 개의 환을 달았다.
 강호에서 사용하는 병기 중에 구환도(九環刀)라는 것이 있다고 들었다. 내 병기는 그 중 고리를 두 개 뺀 것으로 보면 된다. 칠환도(七環刀)가 올바른 병기의 이름이지만 나는 남보다 독특한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도극을 사선으로 잘랐다. 그래서 편도가 된 것이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억지스럽기는 하지만 칠환편도(七環片刀)가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차르르르르!
 고리가 흔들리며 요란한 소리를 뿌렸을 때 내 편도는 이미 그들의 가슴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찌이이익!
 짐승가죽이 벗겨지며 엉거주춤 곡도를 들어올리던 토비의 몸에서 붉은 피가 뿜어져 나왔다. 사부의 독문 도법이라던 파양도(破陽刀)는 과연 위력이 있었다. 겨우 한 초식만 펼쳤는데도 토비들은 움직이지 못했다.
 아마 두려웠던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어리석은 놈! 받아라.”
 차라라라라!
 갑자기 터져 나온 목소리에 이어 날카로운 바람 소리가 들리더니 머리 위가 시원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달려가던 몸을 멈추고 발 끝으로 땅바닥을 걷어차며 후퇴륜(後退輪)으로 몸을 튕겼다.
 몸이 비틀리며 하늘이 눈으로 쏘아져 들어왔다.
 맙소사!
 수를 가늠할 수 없는 무수한 암기가 쏟아지고 있었다. 막다른 골목 위에는 일 장이나 될 것 같은 높이의 담이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담이 아니라 혁철묘(赫鐵墓)였다.
 혁철묘는 혁철족의 조상으로 모시는 자어(子魚)와 백웅(白熊)을 모시는 사당이었다. 그 담의 높이가 일 장이 넘었는데 그 위에도 다섯 명의 토비들이 올라가 있다 암기를 뿌린 것이었다.
 암기의 종류도 다양했다.
 어디에서나 시시하게 볼 수 있는 우모침(牛毛針)에서 시작해 목질려와 철질려, 자오정(子午丁)과 혈리표도 보였다. 시시한 나한전(羅漢錢)도 있는 것으로 보아 그들은 만반의 준비를 한 것처럼 보였다.
 “우라질!”
 욕설이 입술을 비집었지만 몸으로 다가오는 위기를 막아주지는 못했다.
 하늘을 뒤덮은 암기의 수법은 오래 전에 들은 만천화우(滿天花雨)의 수법이 틀림없다. 중원 남서부지방의 하나인 사천성(四川省)에 가면 사천당문(四川唐門)이 있다고 했다. 그들은 독과 암기를 사용하는데 만천화우는 그들이 사용하는 암기수법 중 최고라 했다.
 ‘죽을지도 몰라.’
 갑자기 밀려드는 생각.
 나는 몸을 비틀다 멈칫하고 멈추었다. 몸을 비틀어 물러서거나 강기(剛氣)를 펼친다 해도 막아낼 수 없을 것 같았다.
 “지면으로 굴러. 측수번(側手飜)으로 구르란 말야!”
 편당림의 목소리가 들리고 갑자기 허공으로 검은 줄기가 뻗어나왔다. 검은 밧줄처럼 보였는데 허공을 쓸고 지나가며 양광을 반사시켰다.
 채찍이었다.
 “당림!”
 난 정말 그가 고마웠다.
 위기에 몰려 있는 순간에도 그가 무엇을 펼쳤는지 알 것 같았다. 편당림은 괴어의 수염으로 두 개의 편도(鞭刀)를 만들어 손목에 감고 다녔다.
 편도는 본시 가늘고 긴 도신을 지닌 자병이지만 편당림은 괴어의 수염을 잘라 가죽을 벗기고 그 안에 철삭을 넣었다. 그리고 그 끝에 두 개의 편인(片刃)을 붙였는데 그것을 사용하는 것은 처음 본 것이었다.
 파파파파!
 허공에서 불이 튀고 암기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나는 급히 지면으로 몸을 누이고 구르며 편도를 휘둘렀다. 내 도신에도 적지 않은 암기들이 튕겨져 방향을 틀었다. 몇 개의 암기를 맞기도 했지만 다행히 독 따위는 묻어 있지 않은 것 같았다. 그나마 다행이랄까.
 나는 벌떡 일어서며 뒤쫓으려 했다.
 “참아!”
 편당림이 몸을 막았다.
 “네놈들이 우리에게 입힌 해를 갚아줄 것이다!”
 그 틈을 타고 고함을 지른 토비들이 담을 넘어 사라졌다. 조금만 더 추적을 했다면 한두 놈의 목이라도 베었을 것이다. 그러나 난 편당림의 저지로 추적할 수 없었다.
 그것으로 끝이 났으면 좋으련만······
 
 난 어제 일을 결코 잊을 수가 없다.
 “네가 싸움을 걸었느냐?”
 사부님은 나를 때렸다. 계화(桂花 : 물푸레나무)로 때리는 것으로 보아 어지간히 화가 난 모양이다.
 난 변명을 했다.
 “그들을 모두 죽였어야 합니다. 만약 당림이 나를 막지 않았다면 나는 그들을 모두 죽여 동족을 죽인 대가를 받아내었을 것입니다.”
 “미친놈. 제 놈이 설치는 바람에 더 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것을 모른단 말이냐?”
 사부는 미친 듯 매를 휘둘렀다.
 내 엉덩이를 까고 때렸기 때문에 난 미칠 것 같았다. 살갗이 찢어져 엉덩이에서 피가 흘렀다. 난 이를 악물고 참았다. 나를 때리는 이유가 그들을 죽이지 못했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나를 때린 후에는 편당림을 때릴 것이라 생각했다. 그것으로 참기로 했다. 내가 맞는 것은 억울했지만 편당림은 나보다 더 많이 맞을 것이라 생각하면 맞는 순간에도 기쁨이 넘쳤다. 겉으로는 죽겠다고 엄살을 부렸지만.
 빌어먹을!
 사부는 편당림을 때리지 않았다.
 난 항변(抗辯)했다.
 “사부님, 만약 당림이 나를 말리지 않았다면 난 그들 모두를 죽였을 겁니다.”
 똑같은 말을 두 번이나 한 셈이다.
 물론, 당림이 내 목숨을 구해 주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도슬(跳蝨 : 벼룩)도 낯짝이 있다. 그를 욕하고 구렁텅이로 몰아가며 구함을 받았다는 말은 할 수가 없었다.
 “바보 같은 놈! 제 잘못을 털끝만치도 모르다니······”
 사부는 더욱 심하게 때렸다.
 오늘 아침까지 난 일어날 수가 없었다. 만약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혜유의 눈길이 없었다면 나는 심장이 터지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난 참았다.
 밤새도록 끙끙 알았다.
 엉덩이에 약을 발라주는 편당림을 보노라면 물어뜯고 싶었지만 가까스로 참았다. 생각할수록 미웠고 목이라도 졸라 죽이고 싶었다. 나는 내가 참았다는 사실에 존경을 보낸다. 내 인내심이야말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이 어제 일이었다.
 난 오늘에야 알았다.
 그 토비들이 나에게 당한 분풀이를 하기 위해 네 명의 동족들을 죽였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그들이 혁철묘에 있던 두 개의 조상(彫像)을 깨부쉈다는 것을 말이다. 그들은 내가 공격하는 순간 이미 조상을 깨고 있었던 거다.
 나중에 들었지만, 토비들은 물러가며 자신들을 추적하지 않으면 누구도 죽이지는 않는다고 했다는 것이다. 마숙의 여편네도 살아났다니 할말이 없다.
 그들은 단지 곡식을 얻으러 왔을 뿐이었다. 누구도 혁철족의 부락을 업신여길 수 없다는 것을 잊은 내가 잘못이었다.
 결과가 이리 되고 보니 할말이 없었다. 다만 편당림이 괘씸할 뿐이었다.
 
 
 5. 참을 수 없어
 
 
 중양절(重陽節)!
 일 년 중 가장 즐거운 날이었다.
 혁철족은 중양절을 가장 큰 명절로 여겼다. 물론 원단(元旦)이 있지만 그리 풍족한 계절이 아니기 때문에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으로 그친다. 그러나 오곡(五穀)이 풍성하고 하늘이 높은 중양절은 다르다. 머리가 큰 아이들은 일 년 내내 중양절을 기다릴 정도로 혁철족에게는 가장 큰 명절이었다.
 중양절은 곡식을 추수한 후에 열리는 거대한 제전(祭典)이다.
 경박호 주변은 겨울철이 일찍 온다. 그래서인지 벌판에 심는 곡식이라고 해도 중양절이 다가오기 전에 이미 추수를 끝낸다. 조생종(早生種)이 아니면 심어놓고도 추수를 하지 못한다. 모두 얼어죽기 때문에!
 중양절이 되면 혁철족은 모두가 조상에 대한 제사와 축수(祝壽)를 마치고 마을 중앙에 있는 운룡판(雲龍板)에 모여서 논다. 그것으로 하루 일과가 끝나고 밤에는 자운제에서 쏘아올리는 폭죽으로 밤이 깊어가게 마련이다.
 늘 있어온 일과!
 축축하게 젖은 날씨가 펼쳐진 날이었다.
 가을을 재촉하는 비가 내리고 있었고 이미 차가운 바람은 옷깃을 파고 들어왔다.
 만추(晩秋)!
 경박호 주변은 높은 지대였기 때문에 눈이 빨리 왔다. 가을은 없는 것 같았다. 한여름이 다가왔는가 싶다가도 순식간에 눈이 내리기 일쑤였다.
 만산(萬山)에는 홍엽(紅葉)이 물들고 누렇게 뜬 력수의 잎에 아침저녁으로 이슬이 맺히고 새벽녘에 빙릉 같은 서릿발이 서던 어느 날!
 “모두 제당으로 모이랍니다.”
 자운제에 막내제자로 들어온 봉영(奉楹)이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소리를 질렀다. 나이가 어리기 때문인지 째지는 듯한 목소리다. 올해 나이가 열다섯에 불과한 봉영은 꽁지에 불이 붙은 강아지처럼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주방에서는 모든 준비가 끝났는지 제자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김이 나는 음식들을 제당으로 나르고 있었다. 일 년 중 가장 풍족하게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인지 모든 제자들이 바삐 움직였다.
 편당림은 기분이 그리 개운하지 않기 때문에 잠시 망설였지만 모든 식솔들이 모여 치르는 제례인 줄 알기 때문에 나가보지 않을 수도 없었다.
 마음이 편치 않았다.
 지난밤 질펀하게 마신 술자리 때문이기도 했지만 제례라는 것이 마음 속에 닿지를 않았다.
 누구를 위한 제사인가?
 어차피 편당림은 자운제에 몸을 맡긴 제자일 뿐이다. 제사를 지낸다고 해서 편당림의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자운제가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어 조사(祖師)가 있는 것도 아니다.
 제자라는 것과 식솔이라는 것의 의미는 다르다. 편당림은 사부를 존경하지만 제사까지 제자들이 지내야 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유쾌하게 생각할 수 없었다. 그야말로 남의 제사에 절을 하는 꼴이 아니던가.
 “제길, 나는 내 부모가 누구인지도 모르는데······”
 갑자기 울화가 치밀었다.
 부모도 모른다.
 정확한 것은 알 수 없지만 흑룡강을 넘어 아라사로 가면 많은 혁철족 부락이 있다. 소문에는 사부가 두 살이 된 그를 안고 흑룡강을 넘어왔다고 한다. 강 너머에 부모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까지는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중양절, 부모가 생각나는 절기(節氣)임에는 분명하다.
 모든 것은 불명확하다.
 사람이 사는 모든 방법이 정해진 바가 없고 흐르는 물처럼 무한한 것도 아니니 알 수 없는 일뿐이다. 한때는 사부가 부모같이 느껴졌었다. 그래서 그를 추종하기까지 했었지만 이제는 간혹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싶어졌다.
 “어서 모이랍니다. 사형, 서두르세요.”
 문 밖에서 봉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편당림은 어쩔 수 없이 몸을 추스르기 시작했다.
 자운제의 제자들은 외부에 출타할 때와 장원 내부에서 입는 옷이 다르다. 자운제의 전문(前門)을 벗어날 때는 각각의 품행(品行)에 따라 옷을 입게 마련이다. 문사의 모습을 할 때는 사령대금관유삼에 일자건(一字巾)을 쓰는 경우가 있고 때로는 옥룡관(玉龍冠)을 이용해 머리를 틀거나 옥잠을 꽂는다.
 때로는 평민 복장으로 군자(裙子)를 걸치며 오당혜(烏唐鞋)를 신고 머리에는 와릉모(瓦楞帽)를 쓰기도 한다. 상황에 따라 입고 쓰는, 그리고 갖추는 모든 입성이 경우에 따라 달랐지만 내부에서 입고, 쓰고, 신는 입성은 정해져 있었다.
 늘 마사로 만든 무복에 짚으로 만든 초혜(草鞋)! 머리에도 유수(楡樹 : 느릅나무)의 껍질을 벗겨 만든 방갓을 사용하도록 되어 있었다. 고기를 잡거나 수렵을 나가도 마찬가지였다.
 편당림은 벽으로 다가가 의가(衣架)에 걸려 있는 여러 벌의 옷 중 가장 화려한 색을 지닌 옷을 끌렀다.
 넓은 소매!
 긴 옷자락!
 무엇보다 옷 전체에 목단문(牧丹紋)이 수놓아져 있어 화려하기 그지없는 옷이었다. 군데군데 황금색으로 빛나는 팔괘(八卦)가 그려져 있었는데 일 년에 두 번 입을 수 있는 옷이었다.
 제복(祭服)!
 항상 검소한 옷을 입었고 사부로부터 절약을 교육받고 있는 자운제의 제자들이 그와 같이 화려한 옷을 입을 수 있는 경우는 일 년에 두 번, 원단과 중양절뿐이었다. 그래서 제자들은 그토록 화려한 옷을 제복이라 불렀다. 제사를 지내기 위해 입는 옷이라는 뜻이다.
 사부는 그토록 화려한 옷을 만들어주었지만 자운제의 밖으로 나서는 것은 금지하고 있었으므로 누가 보아도 제사를 지내기 위해 입는 옷에 불과했다. 사실 바쁘게 일하는 자운제의 제자들에게 화려한 옷은 그다지 필요하지도 않았다.
 제복을 걸친 편당림은 문을 밀고 밖으로 나섰다.
 봉영이 웃고 있었다.
 
 긴 대전의 끝에는 향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조망각(朝望閣)이라 불리는 이 대전은 내전에서도 한참을 벗어난 산 속에 세워져 있는 누각이었다. 단층으로 지어졌지만 제법 면적이 넓었고 노야룡에서 흘러내리는 산줄기 중의 하나인 운룡산(雲龍山) 기슭에 자리를 잡아 풍수(風水)로는 더할 나위 없다는 곳이었다.
 제자들은 조망각을 제실(祭室)이라 불렀다.
 내원의 후문을 통해 반 각을 걸어야 도달할 수 있는 조망각 앞에는 오랜만에 사람들로 벅적거리기 시작했다.
 편당림은 눈을 들고 앞을 바라보았다.
 기억이 나는 한도에서는 이미 십수 년 동안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제례에 참석했던 그였다. 너무나 눈에 익었고 제사를 지내는 순서까지도 잊은 적이 없었다.
 누각은 낮았다.
 다른 누각에 비해 청와(靑蛙 : 개구리)가 엎드린 듯 보이는 낮은 지붕이 있었고 기둥은 너무도 굵어 두 명이 껴안아야 할 것 같았다. 마치 반석이 놓여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드는 전각이었다.
 전면에는 네 개의 기둥이 있었고 돌로 만든 계단이 네 개나 있었다. 그곳에 세워진 기둥은 건물의 본체를 받치는 것이 아니라 연자(燕子 : 제비)의 꼬리처럼 휘어진 처마를 받치고 있었다.
 계단을 올라가면 다시 네 개의 기둥이 나타났다. 역시 굵기가 만만치 않았고 벽과 이어져 있어 건물의 본체를 지탱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해주었다. 그 기둥 곁으로 흙을 바른 벽이 있었고 고개를 들어보면 연목(椽木 : 서까래)이 보였다.
 네 개의 기둥 중앙에 문이 있었다.
 문을 열면 무려 사방 십 장에 이르는 정사각형의 전실(全室)이 나타났다. 바닥은 나무판자로 깔려 있고 울긋불긋한 색을 지녀 화려한, 주단이 깔린 제단이 보였다.
 제단은 두 개의 계단처럼 만들어져 있는데 앞 계단은 폭이 좁았고 작은 질그릇들이 놓여 있었다. 질그릇에는 쌀과 보리, 밀, 콩, 옥수수, 수수 등의 잡다한 곡식들이 담겨 있었다. 그것으로 조상(祖上)을 공양함을 알 수 있었다.
 두 번째 계단은 제법 넓어 다섯 자가 넘었는데 그곳에는 각종 병기가 놓여 있었다.
 흔한 것으로는 검(劍), 도(刀), 창(槍), 곤(棍), 부(斧), 편(鞭), 간, 괴(拐), 퇴(槌), 추(錘) 등의 십팔반병기(十八班兵器)를 포함한 일반 병기가 있었다. 흔히 살병(殺兵)이라 불리는 병기들은 단의 중앙을 차지하고 있었다.
 단의 오른쪽에는 파두, 대초자곤(大哨子棍), 목우(木牛), 이절곤(二節棍), 삼절곤(三節棍), 초겸(草鎌) 등의 병기가 놓여 있었는데 그것들은 모두 농기구로 쓰이는 것이기도 했다. 농기구에서 발전한 병기들은 그 가짓수도 다양했고 크기도 천차만별(千差萬別)이었다.
 왼쪽에는 잡다한 물건들이 놓여 있었다. 짐승의 뼈가 있는가 하면 물고기의 지느러미 말린 것이나 가시도 있었다. 더불어 고기의 비늘을 벗기거나 짐승의 가죽을 벗길 때 사용하는 소도, 삼인도, 면도 등의 작은 병기가 있었고 낚시와 같은 물고기를 잡는 도구와 활과 같은 수렵도구가 있었다. 그 밖에도 망치와 철침(鐵砧 : 모루), 집게 등, 쇠를 만지거나 다루는 잡다한 도구들이 섞여 있기도 했다.
 그 후면에는 손으로 그린 두 장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는데 사부의 조상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원단에 보았던 모습 그대로였다. 한 가지를 제외하면 달라진 것은 없었다. 유난히 눈에 띄는 것은 거대한 생선가시였다. 길이가 이 척이나 되는 가시로서 그것이 괴어의 몸에서 나온 것이라는 것을 알아보기는 어렵지 않았다. 새로이 괴어의 몸에서 나온 가시가 추가된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들어와라.”
 사부의 걸쭉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제자들은 대전 안으로 들어가 열을 맞추어섰다. 편당림도 자운제의 제자임에는 틀림이 없었으므로 그들과 열을 맞추었다.
 갑자기 거친 숨결이 느껴졌다.
 ‘복우평!’
 그랬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숨소리의 주인은 복우평이었다. 그가 왜 이리도 자신의 뒤를 따라다니는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습관적으로 가까이 서는 것이라는 것을 알기에 고개를 돌려버렸다.
 “향을 피워라.”
 모여선 사람들의 사부, 혜윤도의 명이 떨어지자 두 명의 제자가 향로(香爐)를 들고 왔다. 크기가 한아름이나 되어 보이는 향로는 무게만도 오백 근은 충분히 나갈 것같이 큰 것이었다. 향로를 가져 온 제자들은 단 아래에 내려놓자 황급히 물러나 오와 열을 맞춰 서 있는 제자들 뒤로 물러갔다.
 혜윤도는 향로로 다가가 긴 목향(木香)을 꽂았다. 언제 불을 붙였는지 향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정신을 맑게 하는 향기가 대전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편당림은 고개를 들고 앞을 바라보았다.
 혜윤도가 정면에 서 있었고 그의 두 아들인 혜자명(醯恣蓂)과 혜진라(醯塵蘿)가 좌우로 서 있었다. 혜진라가 혜윤도의 큰아들로 대공자(大公子)라 불렸고 혜자명이 이자(二子)로 소공자(小公子)라 불렸다. 그들 모두는 제자들에게 사형으로 불리고 있기도 했다. 그러나 지닌 성품은 달라 혜진라는 대공자임에도 심기가 빠르고 앞뒤를 재어 행동하는 반면 혜자명은 과묵하여 외전에 나오는 경우가 드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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