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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광사 1

2018.04.17 조회 351 추천 1


 도광사 1권
 서장 자서(自書)
 
 
 내가 누구냐고?
 귀찮으니까 묻지 마!
 누군가 나에게 고향이니, 이름 따위를 물으면 정말로 짜증이 나서 미칠 것 같아. 그래서 때로는 주먹을 휘두르게 되니까!
 너는 아마 내 머리통에 받히는 날에는 인생 하직하고 말 거야.
 무공을 할 줄 안다고?
 그게 무슨 상관이야!
 나한테는 아무것도 필요없어! 누가 빠른가 하는 것만이 중요하지. 아니, 누가 더 정확하게 깨부수는가가 중요해. 무조건 이기면 되는 거지, 방법이 중요한 것은 아니잖아? 내공(內功)이니, 신공(神功)이니 하는 어쭙잖은 이야기는 아예 집어치워!
 난 천부적으로 타고난 놈이야. 뭘 타고났느냐고 물으면 설명하기 곤란하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적이 어떻게 공격할 것이고, 어떻게 하면 살아남을 수 있을지를 알거든!
 겨뤄보자고?
 뭔 소리야!
 난 열다섯이 넘으면서 한 번도 진 적이 없어. 어깨 들썩거리지 말고 조용히 죽치고 앉아 이야기나 들어.
 아버지가 누구냐고?
 그것도 묻지 마!
 만약 또 한 번 물어보는 놈이 있으면 두 다리를 묶어서 말안장에 걸고 십 리를 돌아줄 테니까.
 사람들은 나만 보면 슬슬 피해. 왜 그런지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때로는 그게 편해.
 내가 생각할 때 나란 놈은 정말로 순진무구(純眞無垢)한 놈이야.
 나는 그렇게 생각하는데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야.
 사실 나는 다른 사람의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 남이 어떻게 생각하든 무슨 상관이야?
 내 마음이 편하고, 두 다리 쭉 뻗고 누울 수 있다면 그거야말로 상팔자지.
 당신은 그렇게 생각 안 해?
 만약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당신도 번거로운 사람이야.
 난 번거로운 것은 질색이야.
 그만 가주겠어?
 난 오늘도 어슬렁거려야 해. 움직이지 않으면 누가 밥을 주나! 떨거지들이 나만 기다리고 있을 테니 그만 나가봐야 해.
 나는 그들을 이용해 벼르고 기다렸던 일을 마무리지을 거야.
 오 년을 기다렸던 일이야.
 아니, 오 년 동안 그를 찾아다녔지. 그리고 그를 찾기는 했지만 내 목적을 이루기는 쉽지 않았어. 그래서 방법을 생각해 냈지. 마을 아이들을 내 편으로 만드는 일이었어.
 어느 정도는 성공했지.
 아이들에게 피해 줄 생각은 없어.
 난 내 가문을 멸망시킨 자에 대해서만 목적을 가지고 있을 뿐이지, 아이들에게는 목적이 없어.
 아버지를 죽인 자!
 내 가문을 풍비박산으로 몰고 간 자를 찾는 데 오 년이 걸렸고, 난 그의 턱 밑에 숨어서 육 개월을 버텼지. 칠 년이라는 세월이 너무도 길었기 때문인지 그는 나를 알아보지 못했어. 그가 아버지를 죽이고 평화롭던 장원을 초토화(焦土化)시킨 지 벌써 칠 년이나 지났으니 몰라볼 만도 하지.
 먼발치에서 보니 그도 변했더군.
 그렇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어.
 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결코 멈추지 않아.
 이제 나가볼 시간이야. 난 오늘을 위해 육 개월 간 사람 같지도 않은 짓을 해왔고 이제는 망설일 시간이 없어. 아니, 결코 멈추지 않을 생각이야.
 할말이 있으면 다음에 하자고.
 뭐!
 계속하라고?
 좋아. 지금부터 이야기할 테니까 잘 들어. 내가 어떻게 살아왔고, 어떻게 굴러먹었는지 자세히 이야기해 줄 테니까!
 
 
 1장 어미 잡아먹을 놈
 
 
 휘이이이!
 봄이라고는 하지만 습기를 머금은 강바람이 몸에 난 잔털을 거스르는 그런 날씨!
 무중만리(霧中萬里),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칙칙하게 휘감아오는 짙은 안개, 안개뿐!
 겨울의 의미를 알 수 없으리만치 사시사철 춘양(春陽)에 가까운 날씨를 지닌 하남(河南)이라 하지만, 황사(黃紗)가 날리고 아침저녁으로 안개가 끼는 이른 봄이었다. 물에서 피어올라 아침저녁으로 나뭇가지에 매달리는 날카로운 빙릉(氷楞 : 고드름) 때문일까? 불어오는 바람은 새싹조차도 나지 않아 을씨년스럽게 서 있는 나무를 더욱 떨게 만든다.
 황혼이 물들어가는 저녁.
 운해(雲海)는 산을 삼키고 강을 가렸다. 뾰족한 첨탑(尖塔)처럼 보이던 산정이 구름에 가려지고 소의 등줄기처럼 길게 뻗은 산줄기가 안개에 싸였다. 뭉게구름처럼 일어난 안개는 모든 것을 가리며 점점 확산되고 있었다.
 “근래 들어서는 안개 때문에 해를 보기조차 힘이 드는군.”
 나직한 목소리!
 안개 속에서 들리는 소리다.
 휘류류류!
 바람이 몰아가는 소리가 들리고 모래먼지가 하늘로 말려 올라갔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안개를 헤치고 하나의 물체가 언덕 위로 올라섰다.
 처음에는 희미했지만 바람이 불어 안개를 몰고 가 드러난 틈으로 보이는 것은 사람이었다. 뿌옇게 날리는 먼지를 뒤집어쓴 사람은 안개를 헤치며 가사촌(價砂村)으로 이어지는 관도를 터덜거리는 걸음으로 걷고 있었다.
 굳이 나이를 따진다면 사십은 넘었을 것 같았고 오십에는 이르지 못했으리라. 겉모습만으로는 그의 나이를 정확하게 짐작할 수 없었다. 다만 그가 드러내는 외양(外樣)으로 보아 중년에 이르렀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을 뿐!
 그의 나이를 추측하기 어려운 것은 그의 행색이 사람이 지닐 수 있는 모든 추측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머리였다.
 오래도록 감지 않았는지, 길게 자라 엉덩이까지 늘어져 심하게 엉클어진 머리카락엔 먼지가 덕지덕지 끼어 있었다. 더구나 안면을 덮으며 쏟아져 내려 얼굴을 정확하게 판별하지 못하게 했다. 그나마 때때로 바람이 불어와 그의 얼굴을 단편적으로나마 보여주었다.
 “이런! 입을 벌리면 모래가 날아들고, 눈을 뜨면 무계(霧界)라! 지옥이 따로 없군그래.”
 바람에 날린 모래먼지가 안개에 말려 눈으로 들어갔는지 그는 머리카락을 걷어 귓가에 걸치며 손으로 눈을 비볐다.
 그제야 그의 모습이 모두 들어왔다.
 거지도 그런 상거지가 없었다.
 키는 칠 척에 이르도록 커보였지만 걸치고 있는 옷은 그가 어떤 생활을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쉽게 인식하게 만들었다. 찢어지지는 않았지만 본래 회색으로 보여야 할 것 같은 옷은 때가 탔고, 아무 곳에서나 뒹굴었다는 것을 보여주듯 군데군데 흙이 묻어 있었다.
 특히 목 주변과 무릎, 복부를 가린 일부분은 아예 검은 물감을 들인 것 같았다.
 등에 지고 있는 조그만 혁낭(革囊)은 낡을 대로 낡아 곧 찢어질 것 같았다. 그나마 혁낭을 지니고 있어 그가 여행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지, 그마저도 없었다면 영락없는 걸인!
 그는 대나무로 만들어진 긴 지팡이를 짚고 있었는데, 길이가 사내의 키와 비슷해 보였다.
 쉬이이잉!
 바람이 불어 그의 머리카락을 날렸다.
 옆에서 보면 절벽처럼 보이는 각진 이마가 드러나고 힘찬 눈썹이 보였다. 날카로운 눈빛 아래 불쑥 솟아 올라온 콧등이 이중으로 보였다. 코가 두 겹으로 달린 것같이! 그의 코는 지나칠 정도로 컸다. 그러나 주먹코는 아니었다.
 각이 진 턱은 견고한 석성(石城)처럼 견실해 보였다.
 “이곳이 가사촌인가?”
 중년인은 언덕에 올라서자 안개에 가려 희미하게 보이는 마을을 바라보며 해죽 웃었다. 코를 벌름거리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는 모습이 호기심 넘치는 어린아이 같았다. 오래 전 죽마(竹馬)를 타던 고향으로 돌아온 것 같은 표정!
 “오래 있을 곳은 아니다. 정말 독한 놈을 찾기는 힘이 드는 일이야. 난 그 아이만 찾으면 된다. 중원을 돌고 돈 지 삼 년, 이제 그 아이만 찾으면 사문(師門)을 일으킬 것이다. 내가 찾아야 하는 그 한 명의 아이가 이 마을에 있다.”
 그는 코를 벌름거리며 바람이 불어 점점 희미해져 가는 안개를 바라보았다. 안개는 때때로 바람에 휩쓸려 이리 밀리기도 하고 저리 밀리기도 하며 엷어져 갔고 간혹 안개가 전혀 없는 공간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안개는 점차 바람에 밀려갔고 마을이 확연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좋아. 이제는 죽은 친구에게도 떳떳해질 수 있을 것이다. 그 아이를 찾는 것으로!”
 그는 나직하게 중얼거리고 가사촌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
 
 왕초가 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사람이 사는 곳에는 난관이 있게 마련이고 어디나 적수는 있다. 허리를 굽히지 않으려면 이겨야 한다.
 
 ***
 
 가사촌에는 꼬마들이 득실거렸다.
 개봉(開封)에서 멀지 않은 마을!
 비단을 팔기 위해 서역(西域)으로 가려 한다면 개봉에서 출발해 황하(黃河)를 거슬러 올라가다 화산(華山)이 보이는 곳에서 배를 타거나 육로를 이용해 관도를 타고 위하(渭河)를 따라가게 마련이었다.
 위하는 섬서(陝西)를 거쳐 감숙(甘肅)으로 이어져 있는데, 상인들은 개봉에서 상단을 꾸려 이 길을 가고, 교역(交易)을 마친 후에는 주머니가 두둑해져 서역에서 내려왔다.
 감숙의 고도(古都)인 난주(蘭州) 남쪽에서 흐르기 시작한 위하는 비가 많이 내려 이름을 얻은 고장 천수(天水)를 거쳐 섬서의 보계(寶鷄)와 고도 서안(西安)을 거쳐 화산이 한눈에 들어오는 풍릉도(風陵渡)를 지나면서 내몽고를 감아돌아 흘러온 황하와 만난다.
 풍릉도에서 합쳐진 물이 가사촌에 이르는 데 걸리는 시간은 사흘하고도 반나절!
 개봉에서 여섯 시진이 걸리는 거리에 위치한 마을, 그곳이 바로 가사촌이었다. 대시진(大市塵)이라 할 수 있는 천년의 고도 개봉에서 묵을 예정이라면 밤을 새워 달리기 전에 가사촌에서 쉬는 것이 상단의 공통된 노정(路程).
 작지만 풍족한 마을!
 비단장수들이 서역으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통과하는 길이었기 때문인지 마을의 크기에 비해 너무도 소란스러웠다.
 청루(靑樓)며, 홍루(紅樓)며······
 벌건 대낮에도 때때로 술에 취한 주객(酒客)들을 볼 수 있었고 그들 모두가 아이들의 주머니를 두둑하게 했다. 주객의 주머니에 든 모든 것들이 아이들의 손에 없어지기까지는 불과 반 각이 걸리지 않았다.
 누구도 말리지 않았다.
 설사 보았다 해도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야단을 치거나 돌려주라고 말하지 않는다.
 언제 몰매를 맞을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상인들도 안다.
 자신들이 가사촌에서 술을 마시면 언젠가는 그 끝이 더러원진다는 것을!
 그래도 마신다.
 이유는?
 여독(旅毒)을 풀기에는 가사촌만한 곳이 없으므로······
 그곳에는 술이 있고 계집이 있다. 원한다면 계집을 수명씩 거느리고 질펀한 정사(情事)를 즐길 수도 있고, 그녀들로 하여금 인간 이하의 행동을 하게 할 수도 있다. 죽어도 좋을 쾌락이 뒤따르니 가사촌에서 머물지 않을 수가 없다.
 창피도 모르는 계집들은 때때로 하체만 가리고 가슴을 드러낸 채로 관도를 달리기 일쑤였다. 그 뒤에는 주사기(酒邪氣)가 넘치는 사내들이 허우적거리기 일쑤였고.
 가사촌의 아이들은 날짜를 짚어보라 하면 할말이 없지만 하나같이 성숙한 계집들의 하체를 보았고, 그곳이 고추가 달린 사내들의 그것과 다르다는 것을 이미 알아버렸다.
 가사촌의 머리통 큰 아이들에게 있어 계집은 언제나 먹을 수 있는 주전부리와 같았다. 원하면 언제나 곁에 있는······
 머리통 큰 놈들은 가사촌에서 태어나는 애새끼들의 반 이상이 비단상인들이 뿌린 씨라고 했다. 또 밤을 깨우는 마차 소리에 놀라 일어난 선잠 속에서 마누라 하체를 더듬어 만들어진 아이들이 반이라고도 했다.
 가사촌에서 꼴통 짓을 하는 어린아이들이 계집들의 배꼽 밑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생각해 볼 때, 태어났다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아이들은 애물단지 취급을 당했다. 마치 자신들의 몸을 빌려 난 아이들이 아니라는 듯!
 아이들은 자란다.
 부모들이 어떤 짓을 해도 아이들은 자기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자라고, 또 크면 머리통이 자랐다고 으스댄다. 그들은 자라며 보아왔던 대로 계집들을 거느리고 오가는 상인들을 등쳐먹고 살았다.
 태어난 것이 아이들의 잘못은 아니다.
 잘못을 따지자면 하체를 함부로 껄떡거린 사내들과 허리를 들썩거리며 사내들의 거친 숨결에 맞춰 숨넘어가는 교성(嬌聲)을 터뜨렸던 여인들의 잘못일 것이다.
 그래도 모든 잘못은 아이들에게 전가되었다.
 머리가 크기도 전에 방치(放置)되었고 부모의 신음과 끈적거리는 몸짓을 보며 살았다.
 그것이 잘못인가?
 아이들은 믿었다.
 그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전부라고!
 그럼에도 여인들은 아이들이 잘못하기만 하면, 특히 지나가는 비단상인들에게 팔 과일이나 어쭙잖은 옷가지 등이 널려 있는 좌판(坐板)을 뒤엎거나 건드리기만 하면 죽일 놈이라고 소리를 지르곤 했다.
 “베에 ─ !”
 아이들은 혀를 내밀고 흔들다 여인들이 치마를 걷어 하체에 감고 달려들면 미친 듯이 도주했다.
 때로는 고추를 꺼내 오줌을 싸며 키득거리기도 했다. 특히 몸을 파는 계집들이 지나가면 노골적으로 고추를 까내리고 오줌을 갈기며 뒤를 따르기도 했다. 그때마다 계집들은 앙칼지게 욕을 했다.
 “이 껍데기를 벗길 놈들!”
 그러다 지치면 애교를 섞어 하체가 보이도록 치마를 흔들었다. 언뜻 보이는 흰 다리와 작은 조각의 천이 보이면 대가리가 크지 않은 놈들도 입술을 빨았다. 때로는 치마 속에 아무것도 걸친 것이 없어 대가리 큰 사내들의 하체를 뿌듯하게 만들기도 했다. 아이들은 계집의 사타구니에 눈을 빼앗기고 실없는 군침을 흘리다 계집들이 달려들면 발정(發情)난 암말처럼 달려 도망을 가고는 했다.
 “오지랖 넓은 년들!”
 더러운 욕설을 남기고······
 아이들을 쫓다 지친 계집들은 어쩔 수 없이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돌아섰다. 그리고 그녀들이 언제나 아이들의 등에 남기는 말이 있었다.
 “여물면 와라!”
 아이들은 오래지 않아 계집들이 하는 이야기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 알게 되었고, 머리통이 컸다고 생각하면 섣불리 다가가 계집들의 엉덩이를 만지다 잡혀 모진 매를 맞기도 했다.
 그들은 아이를 패며 한결같은 물음을 던졌다.
 “또 대두박(大頭撲)이 시켰지?”
 아이들은 도리질을 치기도 했지만 때로는 매에 못 이겨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아이들이 어떻게 반응을 해도 사람들은 누가 아이들에게 못된 짓을 시켰는지 알았다. 아니, 눈으로 보지는 못했어도 짐작은 한다고 해야 옳았다. 그러나 사람들은 보지도 않고 눈으로 보았다고 믿었다.
 그들 사이에서 대두박은 모든 일의 시발점(始發點)이었고 결과(結果)였다. 그는 언제나 나쁜 놈이었고 일을 주모(主謀)하는 놈이었다. 살아 있어서는 안 되는 놈이었고, 살아가기가 열악한 가사촌에서도 벼룩의 간을 빼먹는 놈이었다.
 누구도 그가 계집들을 등쳐먹는 것을 보지 못했지만 그렇게 생각했다.
 문제는 사람의 마음이었다.
 그는 환영받지 못했다.
 아이들이 계집들의 치마를 잡아채고 달아난다거나 뒤에서 엉덩이를 더듬거나 다리를 걸어 넘어뜨려 놓고 가슴을 만지는 것 모두 그가 시켜서 한 일이라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그와 같은 일들은 아주 사소한 일일 수도 있었다. 사람들 모두 대두박이 더욱 큰일을 저지를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으니······
 “씨도 모르는 놈!”
 사람들은 그에게 악담(惡談)을 토했다.
 어느 인간의 씨인 줄 알 수 없으니 성(姓) 따위는 애초에 없었다. 그가 언제부터 가사촌에서 살기 시작했는지 정확하게 아는 사람도 없었다. 그는 언제인가 불현듯 가사촌에 나타났고 이름도 없이 그저 대두박이라 불렸을 뿐이었다.
 대두박!
 그가 그리 불리는 것은 머리가 크고, 싸움을 하면 그 끝을 보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정확한 날짜를 기억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비가 관도를 적시고 논밭이 황톳물에 잠기던 날 대두박은 추적거리는 비와 함께 나타났다. 그는 누구의 동의(同意)도 구하지 않고 가사촌에 둥지를 틀었다. 그러나 누구 하나 그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육 개월이 지난 지금!
 가사촌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대두박을 알았다. 추악한 환경에서 좋은 인연이야 있을 것이 없지만 창녀이거나 농사를 짓는 사람이거나, 심지어 한 달에 한 번 순찰(巡察)을 나오는 포쾌(捕快)들조차 그를 알았다. 그를 모른다면 가사촌에서 산다고 할 수 없었다.
 가사촌이 좁아서만은 아니었다.
 대두박이 나타난 순간부터 가사촌의 사람들은 새로운 걱정거리를 끼고 살아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그것은 그가 지닌 성품(性品) 때문이었다. 누구도 거역할 수 없고, 누구도 말리지 못하는 개 같은 성격!
 그는 누구에게도 지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고, 자신에게 피해를 준 사람이 있다면 반드시 복수를 했다. 그러나 단 한 번도 사람들의 눈에 띄게 행동한 적이 없었다.
 무흔(無痕)!
 그의 행동은 담을 넘는 고양이처럼 은밀했고, 바람이 스쳐 지나간 후처럼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그의 행동은 단 한 번도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았다. 야심한 밤에 닭을 물어가는 살쾡이처럼!
 추측!
 오비이락(烏飛梨落)이라 했다. 사람들은 계집들의 사타구니나 뒤지는 아이들의 행동이 공교롭게도 대두박이 나타난 그날부터 거칠어지기 시작했다고 생각했다. 사실 몸 파는 계집들이 우글거리는 마을에서 아이들의 행동이 더 이상 거칠어질 것도 없었지만, 사람의 마음이 문제였다.
 간혹 대두박이 관도를 걷기라도 하면 사람들은 눈이 찢어져라 째려보고는 했다. 그러나 대두박은 사람들과 눈이 마주치면 의미없이 웃을 뿐이었다. 그와 눈이 마주치면 사람들은 갑자기 온화한 양이 되었다. 대두박의 눈이 있는 곳에서는 누구도 그를 째려보거나 험담하지 못했다.
 대두박은 말을 많이 하는 편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렁뚱땅 여인의 하체를 빌려 태어난 아이들은 대두박에게 몰려갔고, 언제부터인지 그가 하는 말 한마디에 목숨을 던질 듯 따라다녔다.
 사람들은 소문만으로 모든 것을 결정짓는 못된 속성이 있다. 눈으로 보지 않았어도 자신이 잘 아는 사람이 말을 하면 믿어버리고 의미없이 따따부따 말을 한다.
 소문이라는 것은 어느 정도의 진실성을 가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대두박에 대한 소문에는 어떤 진실도 없었다. 그저 사람을 황금으로 보는 창녀들의 더러운 욕설과 싸움에 진 머리 큰 패배자들의 험담뿐이었다. 은연중 퍼져 나가기 시작한 그의 소문은 간혹 경험을 바탕으로 하는 사람들의 입담 때문에 부풀려지고 과장되었다.
 “정말 독한 놈이야.”
 대두박을 겪어본 사람들의 말이다.
 겉으로 드러나기에는 조용한 성품이지만 싸움이 일어나기라도 하면 누구도 대두박을 이길 수 없었다. 사소한 일에서 비롯된 것이라도 일단 싸움이 시작되면 그는 두려움을 잊어버리는 것 같았다. 대가리가 터지고 팔다리가 부러져도 상대가 잘못했다고 할 때까지 물고 늘어지는 끈기는 가사촌에서 소문이 났고 누구라도 그에게 말을 함부로 할 수 없게 만들었다.
 아이들의 싸움은 싱겁다.
 어느 한 놈이 코피라도 흘리면 싸움은 끝나게 마련. 그러나 대두박에게는 그런 것이 통하지 않았다.
 독한 놈!
 사람들에게 그런 소리를 들을 정도로 대두박은 싸움에서 물러서는 법이 없었다. 코피가 나면 손바닥에 피를 바르고 땅을 짚어 모래를 묻힌 후 따귀를 올려쳤다.
 결과는?
 뻔한 일이다.
 모래에 긁힌 아이들의 얼굴은 퉁퉁 부어오르고 결국 대두박의 명령을 따르게 되었다.
 사람들은 말했다.
 
 ─ 대두박을 건드리지 마라. 겉으로는 웃고 있지만 돌아서면 칼을 갈고 있을지도 몰라.
 
 사람들의 이야기는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가사촌의 아이치고 그에게 코피가 터지지 않은 놈이 없었다. 열두 살의 소년부터 열여덟 살의 청년들까지 모두 뭉개버렸으니 왕초라고 할 만도 했다.
 그는 싸우는 법을 알았다.
 왜 대두박이겠는가?
 당연히 큰 머리를 지니고 있으니까 싸움 잘하는 대두박이 아닌가 말이다. 큰 머리는 그에게 천하에 두렵지 않은 힘을 주었다.
 박치기!
 그의 박치기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이들이 얼굴을 때리려고 주먹질을 하면 고개를 숙이고 앞으로 튀어나온 이마로 눈이고 콧구멍이고 가리지 않고 받아버렸다. 그러면 으레 코피가 터지거나 이빨이 부러졌다. 간혹 입술이 찢어지고 헤져 피가 나는 경우도 있었다. 그것으로도 부족하면 대두박은 자신이 아는 모든 방법을 사용해 상대를 피곤죽으로 만들었다.
 대두박은 죽는 한이 있어도 굴복하지 않았다. 누군가 그에게 몰매를 주어도 그가 지닌 독한 성질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늘씬하게 두들겨맞고도 몸을 움직일 수만 있다면 부엌칼을 입에 물고 달려갔고, 집에서 고기를 다질 때 쓰는 육도(肉刀)를 갈아 가지고 달려들었다. 그것으로도 부족하면 도끼를 들고 달려들어 결국은 손가락이라도 끊어놓아야 멈추었다.
 그것으로 승패는 결정되었다.
 씨를 알 수 없는 아이들은 드세고 거칠었다. 그들의 어미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사내들의 배설(排泄)을 받아내야 했다. 그나마 지나가는 상인들마저 없었다면 그들은 모두 거지새끼가 되었거나 뿔뿔이 흩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토록 거칠게 살아온 가사촌의 아이들도 대두박에게는 꽁지 물린 강아지처럼 설설 기어야 했다.
 “독한 놈이다.”
 “악귀(惡鬼) 같은 놈과 싸우느니 차라리 목을 매겠다.”
 한결같은 반응!
 대두박을 건드릴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싸우면 이겨야 했고, 또 어떻게든 이겼다. 힘으로 지면 질려서 몸살이 날 때까지 쫓아다녔고, 부하가 되는 맹약(盟約)을 받지 않으면 놓아주지 않았다.
 하루도 얼굴에서 피가 마를 날이 없었지만 하루하루가 지나면서 그의 부하는 늘어만 갔다. 그러다가 언제부터인가 가사촌의 모든 아이들이 대두박에게 맹서(盟誓)를 했고, 결국에 가서는 누구 하나 그의 권위에 도전하지 못했다. 대두박이 나타난 이후로 삼 개월 간의 지루한 전쟁은 끝나고 결국 가사촌의 모든 아이들은 그의 부하가 되었다. 그의 명령 한마디면 설령 불 속이라 할지라도 뛰어들 아이들!
 만인지상(萬人之上)! 거들먹거리는 가사촌 아이들의 우두머리.
 사람들은 그를 볼 때마다 머리를 저었고, 성질 급한 계집들은 깊게 생각하지 못하고 철없는 소리를 내뱉게 마련이었다.
 “제 어미 잡아먹을 놈!”
 여인들은 자신들의 말에 의무감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누가 뭐라 해도 대두박은 빙그레 웃음을 흘릴 뿐이었다. 사람들은 그를 볼 때마다 당연하다는 듯 욕을 했고, 대두박은 언제나 그렇듯 실없는 표정으로 웃었다.
 
 음습(陰濕)한 기류가 흐르는 좁은 초막(草幕) 안에 두 사람이 앉아 있었다. 봄을 재촉이라도 하려는지 그들 사이에는 눅눅하게 젖은 습기가 흐르고 있었다. 창으로 스며드는 가는 빛이 그들의 얼굴에 머물러 있었다.
 “풍기(風氣)!”
 “말하게. 자네가 이곳을 떠나려 한다는 것은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던 일이네.”
 마사(麻絲)로 만든 옷을 걸친 십칠팔 세의 청년은 가볍게 웃었다. 사내답지 않게 고운 콧날과 짙은 눈썹을 가진 청년, 입술은 왜 그리 붉은지······
 치마를 입히면 여자처럼 보이리라.
 대두박의 유일한 친구!
 오래 전 죽음의 위기에서 구해 준 인연으로 친구가 된 사내였다.
 가사촌에 이르는 관도에서 산적들에 의해 죽음의 위기에 몰려 있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그를 위해 대두박은 머리를 두 번이나 사용해야 했다.
 그의 박치기는 산적들의 두개골을 함몰시켰고, 문사 차림이었던 풍기는 온몸에 피칠을 했지만 다리 하나가 부러지는 것으로 목숨을 대신해 살아날 수 있었다.
 그 후 대두박이 가사촌에 둥지를 틀자 풍기 또한 엉거주춤 머물렀고, 그날부터 그들은 친구가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몸을 부대끼며 살아가면서도 서로의 신변에 대해 물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분명한 것은, 풍기는 대두박이 유일하게 마음을 주는 친구였고 같은 초막에 기거하는 동거인(同居人)이라는 사실이다.
 풍기 또한 가사촌으로 흘러 들어온 사람이었지만 대두박과는 달리 누구도 무시하지 못하는 신망(信望)을 얻고 있었다.
 사람들이 두려워하거나 쉽게 대하지 못하는 것은 같다. 대두박에 대해서는 지나친 혐오감 때문에, 풍기는 존경 때문에!
 풍기는 가사촌 사람들의 몸에 난 상처나 관도를 지나가는 사람들의 병을 치료해 주는 의생(醫生)을 업(業)으로 삼아 살아가고 있었다.
 대두박은 풍기의 의술(醫術)이 뛰어나다고 칭찬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풍기의 손을 거친 환자들은 신기할 정도로 회복이 빨랐기 때문에 풍기는 대두박과 달리 마을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있었다.
 “난 오늘 이곳을 떠나게 될 거야.”
 “오늘? 생각보다 빠르군.”
 “오래 전부터 계획했던 일이지. 내가 이곳을 떠나야 하는 이유를 알았으니 떠날 수밖에······ 그나저나 자네는 어서 집으로 돌아가게. 집을 두고 이런 곳에서 고초를 겪는 이유를 모르겠군.”
 대두박의 진중(珍重)한 말에 풍기가 얼굴을 들었다. 그의 큰 눈은 의미를 짐작하기 어려운 짙은 빛을 띠고 있었으며 풀어지듯 피식 웃는 모습이 대두박의 말에 어느 정도 공감한다는 뜻이 담겨 있었다.
 풍기는 대두박이 말하려 하는 요지가 무엇인지 알기 때문에 손을 저었다. 그리고 외면하듯 눈을 돌려 몸의 방향을 틀려 했다. 불타듯 피어오르는 대두박의 눈길이 왠지 거북하다는 표정이었다.
 몸을 돌리려던 그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정색을 하고 입을 열었다.
 “자네는?”
 대두박의 대답은 빨랐다.
 “하하! 중원제일의 의가(醫家)라는 풍천풍가(風天風家)를 모른다면 말이 되겠나? 오래 전 나는 동정호(洞庭湖)에 간 적이 있었네. 비록 어린 시절이었지만 선부(先父)는 나에게 한 장원을 가리키며 이야기를 해주셨지. 그래 자네의 의술을 보고 혹시 하는 마음을 가졌었네.”
 “자네는 나의 가문을 알고 있군. 모든 것을 알면서도 육 개월 간 나에게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는 말인가? 난 아직도 자네의 속을 모르겠어.”
 “후후후! 그럴 거야. 누구도 내 속을 알 수 없겠지. 분명한 것은 지금 떠나라는 것이지. 집은 좋은 거야. 이토록 허망하게 돌아다녀서 해결될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말이야.”
 대두박의 눈이 진지해졌다.
 “걱정하지 말게. 자네가 이 마을을 떠나면 나도 이 마을을 떠날 거야. 난 자네에게 뒷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자네가 이곳을 떠난다면 나에겐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어. 대두박이 없는 곳엔 풍기도 존재하지 않아. 언젠가 자네를 만나리라는 희망을 가져도 되겠지? 자, 이것을 받게.”
 대두박이 손바닥을 펴자 조그만 물건이 보였다.
 그것은 아주 작은 옥패(玉牌)였다.
 손바닥에 올려져 보이는 면에 새 한 마리가 음각(陰刻)으로 조각된 패!
 이건······?”
 “내 가문의 상징이네. 풍천풍가의 신물은 두 개인데······ 그 중 하나라네. 필요하면 언제든지 내 가문으로 와 이 패를 보여주고 한 가지 요구를 할 수 있네. 내 가문이 어떤 곳이라는 것은 알려주지 않아도 되리라 믿네!”
 “물론이지, 천하에서 살아 있는 자는 죽이고, 죽어 있는 자도 죽이는 가문은 오로지 한 곳뿐이니······”
 “잘 아는군.”
 “친구니까!”
 대두박은 손을 들어 풍기의 손을 잡았다. 그의 얼굴에는 희미한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풍기는 그의 눈을 바라보다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음을 머금었다.
 “고맙네.”
 대두박의 얼굴에도 안개처럼 웃음기가 흘렀다.
 오래가지 않는 웃음이었다.
 풍기도 대두박이 무엇을 할 것인지 자세히 알지 못했지만 그의 이런 행동에는 이유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후후후! 가기 전에 이 고단한 삶에 찌들려 사는 사람들에게 한 가닥의 희망은 주어야겠지.”
 대두박은 풍기의 손에서 자신의 손을 빼내며 웃었다.
 
 ***
 
 슈슈슈슛!
 수십 개의 불덩어리들이 장원으로 날아들었다.
 소나무가 죽고 오랜 시간이 지나면 날카롭고 단단한 뼈대가 남는다. 그 뼈대는 바람과 비가 몰아치는 세월이 흘러 나무의 껍질과 성숙되지 못한 각질(脚疾)을 모두 벗긴 후에야 나오는 것으로, 수십 년 이상 오랜 세월을 자란 소나무에만 있다.
 짙은 갈색을 띠는 뼈대는 송진(松津)의 집합체다. 소나무의 껍질을 긁으면 흘러나오는 송유(松油)보다 더욱 진한 기름 덩어리이고 불이 붙으면 거친 바람이 불어도 쉽게 꺼지지 않는다.
 아이들은 그 뼈대를 들고 있었는데 그곳에는 불이 붙어 있었다.
 “던져라!”
 아이들은 하나같이 겁을 잊은 것 같았다.
 가사촌에서 가장 큰 장원(莊園) 안으로 던져지는 소나무에 붙은 불은 곧 이곳저곳으로 번져 가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장원의 외곽을 둘러싼 담에 몸을 기대고 서서 무작정 불을 던졌다. 활활 타오르는 불덩어리들은 담을 넘어 장원 안으로 떨어졌고, 오래지 않아 화염(火焰)이 솟구쳤다.
 간혹 대가리가 큰 아이들은 뽕나무를 휘어 만든 장난감 같은 활에 마사(麻絲)를 걸어 시위를 당겼다. 싸리나무로 만든 화살은 멀리 날아가지는 않았지만 불이 붙은 솜뭉치가 달려 있어 장원에 불을 지르기는 더할 수 없이 좋았다.
 “불이야!”
 장원 안에서 비명과 함성이 뿜어지고 수십 명의 그림자가 날뛰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사람의 그림자가 나타나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돌을 던지기 시작했다.
 쉭! 쉭! 퍼퍽!
 “어이쿠! 이게 뭐야?”
 담을 넘어오던 사람들은 아이들이 던진 돌팔매에 나뒹굴었다.
 “무슨 일이냐?”
 “불이다! 누가 불을 낸 거야?”
 급박한 발걸음 소리가 들리고 마을사람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장원에서 타오른 불은 순식간에 번져 오르며 하늘을 붉게 물들여 처마가 게딱지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는 가사촌을 밝히고 있었다.
 “도망가자!”
 누구의 말이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고함이 들리고 난 후 아이들은 몰려온 마을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도주하기 시작했다.
 삼십육계주위상책(三十六計走爲上策)!
 어찌 두려움이 없으랴. 아이들은 어떤 때 도주를 하고 어느 순간에 멈추어야 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불을 끄기 위해 몰려온 어른들 사이를 헤집고 도망치는 아이들을 막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아이들이 바로 자신들의 자식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이놈들, 누가 시켰느냐?”
 담을 타넘은 사람들은 아이들을 찾아 미친듯이 달렸다. 그들을 쫓으며 허위허위 소리를 지르는 사람들의 귀로 아이들이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대두박이 시킨 일이에요!”
 
 남에게 들키지 않으려 애쓰며 몸을 숙이고 담을 따라 걷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비록 달이 그림자를 만들어준다고는 하지만 그가 접근한 곳은 가사촌에서 가장 큰 장원이었다. 가사촌의 사람들 대부분이 그러하듯 삶에 지친 자들이 사는 곳이 아니라, 마치 그곳과는 딴 세상의 사람들처럼 삶을 즐기는 자들이 사는 곳이었다.
 내원(內院)과 후원(後園)을 나누는 담을 넘자 세상이 바뀌어 있었다.
 ‘이곳까지는 와본 적이 없군.’
 대두박은 고양이가 생선을 훔치기 위해 다가들듯 발 끝에 힘을 주어 세우고 담을 따라 돌았다. 둥글게 에워쌓여진 담은 그리 높지 않았기때문에 상체를 세우면 지나쳐 온 곳곳에 숨어 있는 보표들의 눈에 띄기 쉬웠다.
 지나온 길은 언젠가 들어와본 적이 있었지만 내원은 처음이었다.
 만전장(萬錢莊)!
 가사촌에서 만전장의 주인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가사촌에서 그의 말 한마디면 사람이 죽고 사는 터라 누구도 그의 명을 거역하지 못했다.
 호역(胡轢)!
 만전장의 주인.
 사십구 세의 그는 가사촌의 실질적인 주인이나 다름없었다. 관부(官府)에서 촌락의 치안을 맡기고 오가는 사람들을 염탐하기 위해 강압적으로 지정해 놓은 촌장(村長)이 있기는 하지만 사람들은 촌장보다 호역의 명을 더 두려워했다. 촌장 뒤에 있는 관부의 두려움도 호역을 이기지는 못했다.
 황금!
 그가 지닌 황금의 힘은 가사촌을 발 아래 깔아뭉갤 수 있으리만치 대단한 것이었다.
 가사촌에서 그보다 황금이 많은 부자는 없었다. 가사촌에 세워진 오십 채의 집 중 그의 소유는 모두 스물일곱 채!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의 땅에서, 그의 집에서 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집에 사는 사람들로부터 꼬박꼬박 집세를 걷어들여 힘들이지 않고 집을 늘려갔다. 그 집에는 다시 사람들이 차들었고, 그들로부터 집세를 걷었다. 그는 결국 자신의 집에 사는 사람들 위에서 황제처럼 군림했고, 명을 거역하면 집을 뺏고 거리로 내몰았다.
 그러니 누구라도 복종할 수밖에······
 
 바스스스!
 이슬이 내린 풀잎이 뭉개지고 이지러졌다. 발 밑은 얼음이 깔린 계곡에라도 들어선 것처럼 미끄러웠다. 대두박은 온 신경을 발 끝에 모아 걸었다. 어차피 멈출 수 없는 걸음이라면 앞으로 나가야 했다. 어떤 고난이 있다 해도 멈출 수 없었고 멈추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오래 전부터 계획했던 일.
 오늘 하루를 위해 지금까지 온갖 수모와 울분을 참고 살아왔다. 가사촌의 미덥지 않은 인간들에게 질시를 받으면서도 꿋꿋하게 견뎌온 것은 오늘을 기다렸기 때문이다.
 “반드시 죽인다!”
 그를 죽이지 못한다면 가사촌을 떠날 수 없었다.
 몸을 멈추고 담에 등을 기댄 채 눈을 들어보니 내원의 정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담으로 둘러싸인 내원은 화초가 자라는 가산(假山)으로 꾸며져 있었고 그 사이에 달빛을 반사하는 인공 호수가 펼쳐져 있었다. 호수 중앙에는 섬처럼 보이는 가산이 있고 이층으로 지어진 한 채의 별각(別閣)이 있었는데, 호수 주변과는 나무다리로 연결되어 있었다.
 “흥,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 : 연꽃이 물에 떠 있는 모양의 명당)의 지세(地勢)로군. 풍수(風水)를 아는 자가 있었는지 모르지만 오히려 명을 재촉했다. 연꽃이 핀 지형을 선택한 것은 좋았지만 사내의 처소로서는 기가 약해진다는 것을 알지 못한 모양이군.”
 그의 부친은 박학다식(博學多識)했고 풍수에도 많은 관심이 있었다. 칠 년 전에 돌아오지 못할 길을 갔다고는 하지만 부친이 남겨준 지식들 모두는 대두박의 머리 속에 남아 있었다.
 ‘함부로 움직이다가는 들킨다.’
 대두박은 한참 동안 귀를 기울였다. 한참 동안 귀에 힘을 주었지만 사람이 접근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대두박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청명하기만 한 하늘이었지만 두 무리의 구름이 달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별무리를 스쳐 지날 때 구름에 가려 점차 어둠이 내리기 시작했다.
 ‘좋아, 조금만 더!’
 대두박은 침을 삼켰다.
 오래도록 기회를 기다려온 그에게 있어 구름은 참으로 귀한 존재였다. 만약 구름이 없었다면 다리를 건너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갑자기 어두워졌다.
 흘러가던 구름이 달과 별을 가렸기 때문이었다.
 “지금이야!”
 나직한 목소리를 흘린 대두박은 미친 듯이 달렸다. 나무로 만든 다리가 발 밑에서 죽겠다고 소리를 질렀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오래 전부터 한 가지 목적을 가지고 가사촌에 온 그에게 삐걱거리는 나무의 마찰 소리는 귓가를 스치는 바람 소리와 다를 것이 없었다.
 ‘죽여야 돼!’
 대두박은 이를 악물었다.
 화르르르르!
 갑자기 바람이 말려 올라가는 소리가 들리고 붉은 화염이 내원과 외원을 가르는 담 밖에서 몰아치기 시작했다. 담을 타넘어 이글거리는 불길이 보였고, 기와가 열기를 이기지 못해 깨지는지 요란한 소리가 울려오고 있었다.
 “뭐야?”
 “무슨 소리가 났지?”
 여기저기에서 낮은 음성이 울렸다.
 그들은 모두 내원을 지키는 보표들이었지만 한 순간에 일어난 일이었고 갑자기 타오르는 불길에 정신을 빼앗겼기 때문에 달려가는 대두박의 모습을 쉽게 발견하지 못했다.
 누각에 난입하기 위한 일차 관문(關門)은 통과한 셈이었다.
 하나, 아무리 빨라도 눈이 달린 사람들 모두를 속일 수는 없는 법!
 “웬 놈이 장주(莊主)의 처소로 들어갔다!”
 장원을 지키는 자들 중 일부가 대두박의 모습을 발견했을 때, 그는 이미 다리를 건너 누각으로 다가간 뒤였다. 고함 소리가 울리고 십여 명의 그림자가 어둠 속에서 튀어나와 목교(木橋)를 향해 다가갔다.
 철퍽!
 둔한 소리가 들리고 목교가 호수 속으로 떨어졌다. 마사를 꼬아만든 마삭으로 지탱되었던 다리는 물 속으로 떨어지고 누각의 입구에는 대두박이 달빛을 받고 있었다.
 그의 손에서 번쩍하고 빛이 반사되었다.
 “누구냐?”
 “대두박이다! 그 우라질 놈 말이야.”
 대두박을 알아본 보표들이 있었던 모양! 그러나 누구 하나 호수로 뛰어들 생각은 하지 못했다. 목이 터져라 소리만 고래고래 지를 뿐이었다.
 화르르르르!
 바람을 몰아가는 듯한 화기(火氣)의 거친 소리가 들리고 뱀의 혓바닥처럼 너울거리는 불꽃이 보표들의 눈에도 들어왔다.
 “불이다!”
 “외원에 불이 났다!”
 보표들은 다급한 마음에 소리를 지르고 이리저리 날뛰었지만 뾰족한 수가 있을 리 없었다. 주인을 구하자니 인공으로 만들어진 작은 호수를 헤엄쳐야 했고, 불을 끄러 나가자니 대두박이 내원의 누각으로 뛰어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그들 모두는 마음이 안정되지 않아 불안하기 그지없다는 표정이었다.
 
 
 2장 나를 용서해라
 
 
 쾅!
 “누, 누구?”
 곤한 잠을 깨우는 소리 치고는 너무도 거친 소리가 들렸기에 눈을 뜨기도 전에 호수연(胡水蓮)의 심장은 심하게 덜컥거렸다. 마치 자갈이 깔린 관도 위를 달리는 마차처럼!
 어둠 속으로 하나의 물체가 드러났다. 등 쪽으로 달빛을 받았기 때문인지 얼굴은 자세히 보이지 않았다. 후끈하게 밀려오는 땀냄새와 교미를 끝낸 암캐처럼 거친 호흡으로 다가온 자가 급하게 움직였음을 알 수 있었다.
 ‘이자는······?’
 생각은 길지 않았다.
 성큼성큼 다가오는 그림자.
 옷자락이 어둠 속에 나풀거리고 있었다. 문으로 새어든 달빛만 없다면 다가오는 그림자가 사내인지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사내의 몸보다 후끈한 땀냄새가 먼저 다가왔다.
 호수연은 몸은 비틀고 손을 짚으며 엉거주춤 몸을 일으켰다.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종잡을 수 없을 정도로 머리 속이 멍해지고 안개가 몸 구석구석을 감아도는 것 같았다.
 “다, 당신은 누구죠?”
 사내가 걸음을 멈추었다.
 그나마 용기가 있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심장이 발작이라도 일으킬 듯 격하게 뛰었지만 입을 열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새로이 마음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하나, 때로는 생각이 빗나가는 수도 있다.
 사내가 멈추어서며 입을 열었다.
 “너는 누구냐?”
 그야말로 주객전도(主客顚倒)라는 말이 가장 어울리는 순간이었다.
 호수연은 자신이 던진 물음에 사내가 대답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는 오히려 되물었다.
 호수연은 비록 몸은 떨고 있었지만 의식적으로, 자신이 다가오는 사내를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자신의 부친이 가지고 있는 힘 때문이기도 했다.
 “나는 호수연, 이 장원의 작은 주인!”
 생각보다 명쾌한 답은 아니었지만 다급한 중에도 그럭저럭 어울리는 대답이라 생각되었다.
 “호, 그래?”
 사내는 거친 숨결로 다가왔다.
 용기를 냈다고는 하지만 호수연의 마음이 편안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갑자기 난입을 한 이 사내가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장원에 머무는 하인이라면 감히 그녀가 잠을 자는 침실로 들어오지도 못했을 것이다.
 “호오, 그놈의 딸이로군.”
 그놈?
 누구를 말하는 것인가?
 설마 아버지를 말하는 것은 아닐 텐데······ 가사촌에서 그녀의 부친에게 대놓고 그놈이라고 욕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안다.
 자신의 부친이 정대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그렇다 하더라도 그녀의 침실에 함부로 들어오거나 욕설을 뱉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만약 그녀의 부친이 어떤 심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침실에 난입했다면 정신병자이거나 죽고 싶어 마차에 뛰어드는 당랑(螳螂 : 사마귀) 같은 놈일 것이다.
 하나, 가사촌에 사는 자가 아닐 수도 있다.
 외지에서 온 자라면 간덩이가 배 밖으로 나온 놈이거나 멋모르고 재물을 탐해 들어온 놈일 것이다. 그나저나 장원을 도는 보표들과 하인들의 눈을 피해 들어온 것이 가상하기는 하다.
 ‘혹시······?’
 일견 두렵기도 했다.
 만약 만전장이 지닌 위세를 모르는 놈이라면 그녀의 당당함은 목숨을 단축시키는 결정적 요인이 될 것이다.
 호수연은 상체를 세워 손으로 침상을 밀며 물러나 벽에 등을 기대었다. 그것으로 자신이 할 수 있는 대비는 끝난 셈이었다. 무작정 도주할까도 생각했지만 방을 벗어나기도 전에 잡힐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한심한 생각이 들었다. 무공을 익히지 못했다는 사실이 못내 아쉬웠다. 천성적으로 기해혈(氣海穴)이 약했고 칠 년 전 어느 날 불어온 고난으로 인해 명문혈(命門穴)에 상처를 입었던 그녀는 영영 무공을 익힐 수가 없었다.
 만약 하찮은 무공이라도 익히고 있다면 어쭙잖은 도둑 따위는 어렵지 않게 제압할 수 있었을 것이다. 숨이 가쁜 사내의 모습으로 보아 사전에 준비는 많이 했지만 특별한 재주는 지니고 있지 않은 것 같았다.
 그녀의 부친은 그녀에게 몇 번인가 무공을 가르칠 생각을 했었지만 기해혈에 내공이 모이지 않는다는 사실에 한탄을 하며 결국 포기해야 했었다.
 ‘당차게 나가는 것이 좋아.’
 그녀는 마음의 준비가 끝나자 차분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를 흘렸다.
 “물러가라. 보물을 탐내 이곳에 들어왔다면 잘못 들어온 것이다. 이 방에는 보물이 없어. 하인들이 들어와 네놈을 끌고 나가기 전에 조용히 물러나면 없던 일로 해주겠다.”
 이 정도면 충분할 것 같았다.
 어차피 가사촌에서 만전장에 칼을 들이대는 자는 없을 것이라는 것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만약 말 한마디라도 잘못하는 날에는 집마저 빼앗길 것이므로.
 사내는 잠시 움직이지 않고 서 있었다.
 그것도 잠시, 사내는 모종(某種)의 결심이 섰는지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네놈이 누구인지 모르지만 어쩔 수 없을 것이다. 호도충(糊塗蟲 : 진흙에서 나는 풀잎에 붙은 아주 작은 벌레. 바보.)보다도 못한 놈 같으니라고.’
 호수연은 그가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불어 그가 두려움에 황급히 물러갈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의 판단은 빗나갔다.
 사내가 움직인 방향!
 그녀는 어둠 때문에 얼굴이 보이지 않는 사내가 뒷걸음질 쳐 밖으로 나갈 것이라 판단했었다. 또한 그것으로 이 모든 상황이 한밤의 작은 소란으로 끝나리라 생각했다.
 “응?”
 그녀는 낮게 신음을 불었다.
 사내는 물러서지 않고 다가서고 있었다.
 한 발씩 다가설 때마다 마뇨(馬尿 : 말 오줌)같이 지린 땀냄새가 콧속으로 파고들었다.
 ‘이건 잘못되었어.’
 갑자기 몸이 식는 것 같았다. 사내의 손에서 반짝이는 물체가 눈을 파고들었다. 달빛에 은은히 드러나는 물체는 부엌에서 사용하는 식도(食刀)처럼 보였다.
 등골을 타고 차가운 땀이 흘러내렸다.
 ‘하인들을 불러야 해.’
 마음 속에서는 그렇게 부르짖고 있었지만 입이 열리지 않았다.
 평소에는 세상에 두려운 것이 없었다. 장원의 모든 사람들이 그녀를 황금이나 유리를 다루듯 소중하고 조심스럽게 대했다. 그녀는 세상의 모든 것을 손에 쥔 듯 부러운 것 없이 살았다.
 십칠 년 동안······
 이 무슨 변고인가?
 목이 메어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에 사내는 그녀에게 다가와 목에 차가운 물체를 들이밀었다. 생각했던 대로 식도였다.
 사내의 입 속에서 음식물 썩는 듯한 냄새가 나며 듣기에도 거북한 목소리가 울려나왔다.
 “후후후, 그 더러운 놈의 딸이란 말이지? 잘되었어. 그 동안 내가 겪었던 고통을 모두 물려주지.”
 사내의 손이 목으로 다가들어 거칠게 움켜쥐었다. 숨이 가빠오고 입이 벌어지는 것 같았다. 한 손은 목을 감아쥐며 울대를 빠갤 듯 조여들었고, 다른 한 손은 식도를 내밀어 턱 밑을 지향(指向)하니 숨이 막히고 머리카락이 하늘로 일어서는 것 같았다. 그러나 비명 따위는 목에 대여진 식도의 차가운 감촉에 눌려 애초부터 가슴에서 밀려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호수연은 원하지 않았지만 놀라 수축된 신경은 몸을 격하게 흔들었다. 손에서 힘이 빠지고 겨우 세운 상체가 모래로 쌓은 성처럼 허물어져 버릴 것 같았다.
 ‘이건 꿈이야.’
 호수연은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 같아 뒤로 물러서려 했다. 그러나 그녀의 등에는 벽이 닿아 있어 한 뼘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찌이이익!
 불문곡직(不問曲直)하고 손에 힘을 주며 잡아채었다. 나삼(羅衫)은 너무도 쉽게 찢어졌다. 선령(蟬翎 : 매미의 날개)처럼 가는 옷이니 손으로 잡아채면 그뿐!
 미칠 것 같았다.
 하인들이 몰려들어 맞아죽는 한이 있어도 그녀에게 고통을 줄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지 하고 싶었다.
 사람은 원하지 않아도 때로는 선택되지 않은 길을 가야 한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는 대두박은 계집이라 해서 망설일 이유는 없었다.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너무 많이 봐버린 대두박에게 있어 계집이라는 동물은 의미가 없었다.
 그녀가 침의(寢衣)로 입은 나삼은 긴 치마였다.
 탱탱하게 느껴지는 가슴이 드러난 후 힘을 준 손에 의해 찢겨진 나삼이 걷혀졌다. 나삼이 젖혀지자 하체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며 한눈에 들어왔다. 가슴을 가린 두두(가슴 가리개)와 엉덩이와 허리를 잇는 조그만 고의!
 두두는 당대(唐代) 이후 남녀를 가리지 않고 입는 내의의 한 가지로 가슴과 복부 위까지 가리는 것이다. 대개가 사각형이나 오각형으로 만들어져 두 개의 끈은 목에 묶어 고정시키고 두 개의 끈은 허리를 돌아 등에서 묶는다.
 나이가 든 사람은 흑색 두두를 착용하고 젊은 사람은 홍색(紅色) 두두를 입는 것이 일반적인 관습이었다. 여름용은 사(紗), 겨울용은 단(緞)으로 만들어 간혹 화려한 문양을 넣기도 했고, 주머니를 달아 귀중한 물건을 넣기도 했다.
 그녀가 입고 있는 두두는 남다른 것이었다. 황금이 넘치지 않는다면 감히 생각할 수도 없는 것으로, 위가 좁고 밑이 타원형(恕圓形)으로 넓게 만들어진 부채꼴 모양으로, 주홍(朱紅) 바탕에 화조문(花鳥紋)이 정성스레 수놓아져 있었다.
 ‘배반으로 이토록 행복하고 풍족하게 사는가?’
 이가 갈렸다.
 대두박은 식도를 든 손을 내려 계집의 가슴을 가린 두두의 네 귀퉁이를 잇는 가는 끈을 끊었다.
 탱!
 젖무덤이 솟구쳐 나왔다.
 달빛에 비추어지는 뽀얀 젖가슴, 분을 바른들 그처럼 탐스러울까! 그리고 검게 보이는 그······
 “당신은?”
 계집은 자신에게 닥쳐 오고 있는 불행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사내가 계집의 가슴을 가리는 천을 떼어낸다는 것은 욕을 보이거나 처참하게 난도질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 같았다.
 천진난만하게 이름이나 물어볼 생각을 하고 부끄러움조차 잊고 있다니······
 “대두박!”
 이름을 말해 주는 것은 어렵지 않다. 어차피 대두박이라는 이름은 본래의 이름이 아니니······
 계집은 대두박이라는 이름을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았다. 희미하게 스쳐 지나가는 눈빛이 대답을 대신하고 있었다. 계집은 대범한 척했지만 천상 여자라는 것을 숨기지 못했다. 손으로 가슴을 가리는 것을 보니······
 “왜?”
 궁금한 것이 많은 계집이다.
 때로는 이런 계집이 얼마나 귀찮은지 대두박은 오랜 경험으로 잘 알고 있다.
 대두박은 계집의 얼굴을 거칠게 후려쳤다. 손바닥에 기분 좋은 소리가 울리고 부드러운 몸이 침상 아래로 굴러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살려주세요.”
 다급히 몸을 추스른 계집은 애원을 했다.
 너무도 재미있는 일이다.
 “왜? 조금 전의 도도하던 모습은 어디로 갔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제법 말을 잘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다. 이 한을 쏟아내지 못하면 심장이 터져 죽어버릴 것 같았으니까.
 호수연이라 했던가?
 계집은 잘 길들여진 창녀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아 가슴 앞에서 비볐다. 그 모아진 손바닥 사이로 보름달처럼 튀어나온 젖가슴이 드러났다.
 언젠가는 사랑하는 사내의 손에서 이지러지리라. 그리고 어느 날엔가는 사랑스러운 아이들이 정신없이 더듬어 입으로 가져 가리라. 그리고 새로운 생명은 자라나리라.
 자세히 보니 미색(美色)이 보이는 계집이었다.
 짙은 눈썹이 달빛을 받아 음영(陰影)을 만들었고 깊고 큰 눈 속으로 자신의 눈동자가 투영되어 보였다. 만월(滿月)처럼 둥근 광대뼈가 눈을 잡았다. 달빛을 받아 빛나는 오뚝한 코가 마늘쪽 같았고 인중(人中)이 깊어 고집이 드러나 보였다. 오이씨처럼 갸름한 얼굴이 한눈에 미인임을 알 수 있었고 앵도(櫻桃)를 빤 듯 붉은 입술이 고왔다.
 그나마 더욱 시선을 잡기라도 하려는 듯 목이 길어 연약해 보이는 얼굴이 창백해 보였고, 찢겨진 나삼 위로 드러나는 어깨가 호선(弧線)을 그리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월하(月下)에 미인이라.
 달빛만 아니었다면 보이는 것 없이 단 한 번에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보내버렸겠지만 봉숭아 꽃잎처럼 맑은 얼굴을 보니 살의와는 다른 심한 분노가 일어났다.
 ‘내 한을 풀어야 해. 나를 이렇게 만든 놈의 자식은 호의호식(好衣好食)을 하고 난 뭐야!’
 이가 갈렸다.
 “제발 정신을 차리세요. 이성적으로 생각해야지요.”
 계집의 목소리가 가늘어졌다.
 두렵다는 건가?
 이성적 좋아하네.
 네년 같으면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죽인 놈의 자식을 보고만 있겠어?
 당연히 깨부수고 능욕을 해야지.
 식도를 내밀었다.
 파르르 떨리는 얼굴이 더욱 고와 보인다.
 계집은 천상 요물이다. 사내의 마음에 스산한 바람을 느끼게 하다니. 그녀의 눈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이 더욱 마음을 싱숭생숭하게 했다. 더구나 손으로 후려칠 때 입 속이 터졌는지 흘러내리는 피가 심장을 적시는 기분이었다.
 “그래,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았지. 죽는 것보다는 살아 있는 것이 좋겠지. 잠시라도!”
 스스로 생각해도 머리가 좋은 것 같았다. 대두박은 마음이 흡족해졌다. 그런 말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문제는 위층에 죽여야 할 놈이 있는데 쉽게 발을 옮기지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여인이 문제였다. 그냥 가자니 속에서 불이 나고, 죽이자니 어쩐지 못할 짓을 하는 것 같았다.
 “살려주세요.”
 계집의 목소리가 점차 가늘어지고 있었다.
 조금 전 그가 들어섰을 때 그녀는 대담한 행동을 했었다. 한동안은 침상에서 움직이지도 않았고 주저함도 없었다. 호원무사(護園武士)들을 부를 생각도 하지 않았고 발작적으로 소리를 지르지도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그녀가 담대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그녀도 죽음 앞에서는 보통 여인과 다를 것이 없었다.
 모든 것은 한 순간이었다.
 대두박은 그녀의 목에 식도를 들이밀고 서서히 힘을 주었다. 계집의 숨소리가 점점 격해지고 있었다.
 “나에게 이런다고 해서 당신에게 얻어지는 것이 뭐죠?”
 어이가 없었다.
 ‘대가 센 계집이군.’
 자신이 처한 상황이 어떤 것인지 안다면 계집의 행동은 정해져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보통의 계집이라면······
 우선 생각할 수 있는 것이 무릎을 꿇고 비는 것이다. 손이 발이 되도록 말이다. 물론 계집은 다른 계집과 다름없이 손을 비비고 있었다. 파리가 음식을 먹기 전 비비는 것처럼!
 그녀는 겁에 질린 창승(蒼蠅 : 파리) 이상이 아니었다. 손바닥을 비비는 것을 보면!
 두 번째는 호통을 치는 것이다. 죽을 줄 모르고 발버둥을 치는 계집들의 대부분은 이런 성격을 가졌다. 만약 그리 한다면 깨끗하게 죽여줄 용의도 있다. 어차피 눈에 보이는 자들, 만전장의 직계 식솔들은 보이는 대로 죽일 생각이다.
 그래 봐야 둘뿐이다.
 놈과 딸년!
 이미 오래 전에 놈의 계집이 죽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물론 지금 앞에 앉아 파리처럼 손바닥을 비비는 이 계집도 안면이 있다. 아니, 한때는 친했던 사이이기도 하다.
 오래 전 그들은 한 마을에서 살았고 오빠와 동생으로 불렸던 적이 있었으니까.
 그녀의 이름이 기억났다.
 과거보다는 지금의 얼굴이 더욱 곱다.
 칠 년 전에는 피부가 새까맣고 눈이 큰 아이였다. 그리고 습관적으로 말을 했었다. 오빠의 색시가 될 것이라고······
 그런데 이제는 서로 보지 말아야 할 관계가 되었다.
 “빌어! 빌면 살려주겠어.”
 왜 마음이 바뀌었는지 알 수 없었다. 스스로도 주체하지 못하는 마음이었다.
 마음 한구석으로는 조바심이 일어났다.
 ‘그들이 다가올지도 모른다.’
 그녀의 말대로 한다면,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해야 했다. 당연히 그녀를 난도질하고 위층으로 올라가 오랫동안 기다렸던 원수를 죽여야 할 것이다.
 문제는 마음이 쉽게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직 누각으로 들어오는 자의 흔적은 느껴지지 않는다.
 “난 너를 죽일 거다. 아니, 죽는 것이 좋아. 그 동안 내가 겪었던 아픔과 마음의 상처를 모두 너에게 주겠어. 그 후에 너를 죽이고 네 아비도 죽일 테다!”
 손에 힘을 주자 계집의 목에서 가는 선혈이 흘러내렸다.
 “알아요. 당신도 아버지에게 피해를 본 사람이군요. 하지만 이런 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결국 당신의 명을 재촉할 뿐이에요.”
 열이 올랐다.
 그녀의 말은 심장에 불을 지르는 것 같았고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몰고 왔다.
 알긴 뭘 알아!
 “나는 네년의 아비 때문에 칠 년 동안을 짐승처럼 살았어. 거지처럼 중원을 떠돌면서 산적들에게 쫓기기도 했지. 창녀촌에서 숨어살아야 했고 수없이 많은 죽음의 고비를 넘겨야 했지.”
 숨결이 거칠어졌다.
 거친 숨은 손을 떨리게 만들었고 그때마다 식도는 계집의 목으로 파고들었다. 식도를 따라 흐르기 시작한 피가 박달나무 손잡이에 배어들며 한 방울씩 바닥으로 떨어졌다. 식도를 타고 흐르지 않은 일부는 가는 혈선을 그으며 그녀의 배꼽으로 흘러내렸다. 시간이 흐르면 피는 그녀의 사타구니까지 붉게 물들일 것이다.
 “그런 일이······”
 계집은 몸을 부들부들 떨 뿐이었다. 식도가 점점 파고들었기 때문인지 몸은 움직이지도 못했다.
 그는 가슴으로 피어오르는 희열을 느꼈다.
 “너를 죽일 거야.”
 “살려주세요.”
 애절한 목소리가 사나이의 심금을 울렸다. 갑자기 그녀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따지고 보면 그녀에게는 죄가 없었다. 굳이 죄를 따진다면 배반으로 타인에게 고통을 준 아비를 모신 죄라고나 할까?
 하지만 그녀에게 죄가 없다고 해서 여기에서 멈춘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생각은 생각에서 끝나야 한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흥, 내가 겪었던 고통을 모두 네년에게 주겠어.”
 대두박은 그녀의 허리를 잡았다. 한줌에도 미치지 못할 것 같은 작은 천 조각이 잡혔다.
 찌이이익!
 하체를 가린 천 조각이 찢겨져 날아갔다. 물론 식도가 한 일이다. 맹세코 대두박은 계집의 속옷 따위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 손을 움직이기는 했지만 천을 찢은 것은 거짓말이 아니라 식도가 한 일이었다.
 하체를 웅크리는 계집의 몸에서 진한 냄새가 났다. 그야말로 성숙한 여체가 낼 수 있는 냄새였다. 얼굴을 숙이고 보니 거뭇한 음모(陰毛)가 눈에 들어왔다.
 죽이고 싶었다.
 죽이려고 했다.
 ‘꿀꺽!’
 침이 넘어가다니······
 갑자기 마음의 변화가 올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었다. 대두박은 그녀의 나삼을 찢은 것을 후회했다. 차라리 식도로 목을 베어버리는 건데······
 한 순간에 그의 마음에 변화가 일어났다.
 “이대로 죽이기에는 내 한이 너무 커. 그 동안 내가 당했던 수치를 한 번에 몰아주겠어. 여인으로서 죽어서도 영원히 씻을 수 없는 흔적을 남겨주겠어.”
 대두박은 이를 악물었다.
 한때는 그녀가 자신의 부인이 될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녀의 부친과 대두박의 부친은 비록 장원의 집사(執事)와 주인이라는 관계였지만 일의 관계를 떠나 호형호제(呼兄呼弟)하는 사이였다.
 그날의 배신만 없었다면······
 계집은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기 때문인지, 창으로 스며드는 빛 때문인지 투명하게 빛나 보이는 그녀의 몸이 더욱 아름답게 느껴졌다.
 ‘나를 용서해라.’
 아무리 야수의 마음을 가지고 만전장으로 스며들었다고는 하지만 그녀에 대한 감정은 나쁜 것이 아니었다.
 오래 전에는 그녀와 단둘이 손을 잡고 산으로 올라가 무늬가 고운 호접(胡蝶 : 나비)을 잡으러 다녔었다. 대두박의 부친과 그녀의 부친이 상단(商團)을 이끌고 멀리 떠나면 언덕에 올라 관도를 바라보며 선물을 기다리고는 했었다.
 ‘그래도 멈출 수는 없어.’
 대두박은 이를 악물고 자신의 옷을 벗기 시작했다.
 ‘수연의 몸이 이리도 아름다웠던가?’
 고통이었다.
 그래도 멈출 수 없는 것은 그녀가 자신을 버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왕지사(已往之事) 악마가 되기로 했다면 조금도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
 “안 돼요!”
 계집의 목소리가 자지러졌다.
 대두박은 계집의 목에 댄 식도를 거칠게 밀어붙이며 자신의 옷을 벗었다. 거추장스러운 일은 순식간에 지나가고 그의 몸은 실오라기 하나 걸쳐져 있지 않았다.
 계집은 몸을 벌벌 떨며 발버둥쳤다. 그러자 오히려 그녀의 문을 여는 데 도움이 되었다. 하체를 버둥거리자 가려 있던 몸이 개방되었고 하체에 숨겨져 있던 음모가 흐느적거리는 수초(水草)처럼 드러났다.
 “제발!”
 계집은 포기하기에 앞서 다시 한 번 애원했다. 눈에서는 굵은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흥, 죽어도 소용없어. 시체라도 간(姦)하고 말 테니까!”
 스스로 말을 하고도 부끄러워졌다.
 간단명료(簡單明瞭), 말의 의미는 확실해야 한다. 누구나 인식함에 부족함이 없는 말이 좋은 말이다. 그의 말투가 그랬다. 격하기는 했지만 말 한마디로 계집의 몸을 굳게 만드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버둥거리던 계집의 몸이 지게를 받치는 막대처럼 굳어버렸다.
 생각만으로 한다면 멈추고 싶었다.
 한때는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었던 여인. 아니, 당시에는 소녀였지만 이제는 여인이 되어 있었다.
 ‘그래도 해야 해!’
 대두박은 정신을 가다듬었다.
 언제 장원의 하인들이 박도(朴刀)를 들고 달려들지 알 수 없는 일이었기에 몸이 수축되고 손이 부자연스러웠다.
 계집은 모든 것을 포기했는지 입술을 다물고 눈을 감고 있었다. 창으로 들어온 달빛이 파르르 떨리는 눈썹을 비추었다.
 ‘이건 나를 위한 일이 아니다. 내가 입었던 마음의 상처를 너도 느껴봐야 해.’
 대두박은 이를 악물고 계집의 다리를 벌렸다. 호수연은 이를 악물고 힘을 썼지만 주먹이 얼굴에 작렬하자 한 순간에 흐느적거리며 힘이 풀어졌다. 두려움 때문일까? 거친 사내의 힘을 이길 수는 없었는지 서서히 허벅지가 벌어지며 계집의 모든 것이 드러났다.
 창백해 보이는 피부와 움푹 들어가 앙증맞은 배꼽이 보였지만 그것을 감상할 기분도 아니었고 마음은 다급하기만 했다.
 한 순간 그는 자신의 신체에 이질적인 느낌을 받았다. 그의 남성이 격렬하게 일어섰다.
 그는 서서히 몸을 숙였다.
 “흑흑흑!”
 계집의 입술이 열리고 울음 소리가 울려나오고 있었다.
 여인이 반응하지 않는다고 사내가 움직이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반응하지 않으려 해도 사내의 몸이 여인의 내부로 들어가면 자연스레 움직이게 되고 결국은 여인의 생각과는 달리 몸이 반응하는 것이다.
 대두박은 격렬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것만이 자신이 겪어온 모든 고통과 원한을 풀어버릴 수 있다는 듯!
 
 계집의 울음 소리는 사내의 가슴을 아리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는 돌아서지 않았다.
 “이제 마음이 시원해요!”
 당돌한 계집이었다.
 침상에 쪼그리고 앉은 계집의 몸은 마치 도추(짚단을 쌓아놓는 조그만 가리) 같아 보였다.
 대두박은 대답하지 않았다.
 입을 열면 미안하다는 말이 나올 것 같았다. 그나마 조금은 마음이 가라앉았다. 이왕 결심한 것이라면 절대 후회하지 않기로 했다. 이제는 돌이키려 해도 돌이킬 수 없고 흔적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당신은 후회할 거예요. 당신을 영원히 저주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거예요.”
 똑똑한 계집이었다.
 ‘시간을 끌고 싶은 건가?’
 죽여버리고 싶었다.
 아니, 죽이려고 했다. 그러나 왠지 그녀를 죽일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 지난날의 조그만 정리(情理)라 한다면 그 또한 사람이 지닌 감정의 터럭이었다.
 “네년도 평생을 고통스럽게 살아봐야 해. 그것으로 네년의 아비가 어떤 짓을 했는지 알아야 해.”
 대두박은 몸을 돌렸다. 그것으로 모든 것을 잊을 수는 없었지만 차마 그녀를 죽일 수는 없었다.
 마음먹은 대로라면 문을 나서서 달려가야 했다. 죽여야 할 인간은 바로 위층에서 장원이 소란스러워진 것도 모르고 깊은 잠을 자거나 지분 냄새가 진동하는 계집을 껴안고 뒹굴고 있을 것이다.
 생각은 굴뚝 같았지만 그는 단번에 문을 나서지 못했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 때문이었다.
 “마음이 풀렸어요? 그토록 오래도록 생각하고 당신을 기다려왔는데, 나를······ 나를!”
 대두박은 가슴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나를 알아보았단 말인가?’
 돌아서고 싶었다. 그러나 돌아설 수 없었기에 더욱 마음이 아팠다.
 “무백(武白) 오라버니가 언젠가는 나를 찾아올 것이라 생각했어요. 그런데 이렇게 내 앞에 나타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어요. 그것도 나를 죽이려고······ 흑!”
 눈 앞이 캄캄해졌다.
 ‘그녀가 아직도 나를 잊지 않고 있었다니······’
 “당신의 손목에 감겨진 가는 은삭(銀索), 그건 무백 오라버니만이 가질 수 있는 것. 어떤 말을 해도 당신은 무백 오라버니가 분명해요.”
 대두박은 손을 들어 자신의 눈으로 가져 왔다.
 있었다.
 오른 손목에 수겹으로 감겨진 가는 은삭.
 오래 전 그의 부친이 서역을 여행하고 돌아와 선물로 주었던 물건. 대두박은 당시 두 개를 받아 하나는 자신의 손목에 착용하고 다른 하나는 호수연에게 주었다.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굳이 달라진 것을 찾으라고 한다면 당시에는 손목에 다섯 겹으로 둘렀지만 지금은 손목이 굵어져 세 겹만 둘렀다는 것뿐.
 전신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전신을 난도질하는 이 고통은 아픔과는 달랐다. 그러나 피를 흘리는 고통보다도 몸을 떨게 만들었다.
 자괴감이었다.
 깊은 연못에 혼이 빠지는 듯한 두려움은 이미 그가 지닌 모든 고통을 가라앉히고 있었다. 펄펄 끓는 납처럼 복부로 밀려 들어오는 것 같은 고통!
 
 도망치고 싶었다.
 심연 깊숙이 가라앉는 모든 고통을 찢어버리고 싶었다. 그리고 무작정 도망이라도 치고 싶었다.
 입술을 깨물었다.
 붉은 피!
 선연한 피가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었지만 입술에서는 아무런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건 내가 원한 것이 아니다.’
 대두박은 참을 수 없는 분노가 밀려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몸에서 피어오르는 열 때문에 숨이 막힐 것 같았다. 그는 미친 듯이 방문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헛!”
 호역은 목에 스며드는 차가운 기운에 몸을 일으켰다. 그의 알몸을 덮고 있던 비단 자락이 흘러 내려가고, 허리를 감고 잠이 들었던 계집은 튕기듯 일어나 머리를 처박았다.
 “살려줘요.”
 “그대로 있으면 죽지는 않아. 움직이면 사타구니에 바람 구멍이 날 거다.”
 진득한 살기가 흐르는 목소리!
 계집은 거뭇한 털이 드러나는 하체를 가리지도 못하고 얼굴을 묻은 채 부들부들 떨었다. 허리의 뱃살이 움직일 때마다 만월(滿月)을 그린 계집의 하체가 방아를 찧듯 흔들렸다.
 훅!
 입으로 바람을 불어내는 소리가 나며 침상머리에서 타오르던 삼지촉(三指燭)이 꺼졌다.
 후끈한 땀냄새가 코로 스며들자 호역은 몸을 일으키지도 못하고 엉덩이를 침상에 끌며 뒤로 물러났다. 검은빛이 나는 식도가 목을 따라왔다.
 턱!
 호역의 등에서 둔한 소리가 들렸다.
 침상의 끝에 이어진 벽이 등에 닿아 더 이상 물러설 수도 없다는 것을 안 호역은 자신과 밤새도록 몸을 섞었던 계집을 바라보았다. 계집이 움직여주기라도 하면 도주를 하겠다는 생각인 듯했지만 겁에 질린 계집의 얼굴은 보이지도 않고 창으로 흘러드는 달빛에 희끄무레한 엉덩이만 드러났다.
 그리고 식도는 너무도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살려주세요.”
 머리를 처박았던 계집이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울음 섞인 목소리를 뿌렸다.
 대두박은 눈을 돌려 비명을 지르는 계집을 바라보았다.
 계집은 비단금침으로 얼굴을 싸매고 엉덩이를 하늘로 향해 들고 있었다. 반달 같은 엉덩이 사이로 갈라진 협곡이 보였고, 창으로 새어드는 달빛에 의해 음모가 보였다. 비릿한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축 늘어진 젖무덤과 젖꼭지가 보였지만 대두박에게는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했다.
 “조용히 해라.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대가리 처박고 움직이지 않으면 죽지는 않을 것이다. 한 번만 더 주둥아리를 놀린다면 사타구니에 식도를 박아줄 것이다.”
 대두박은 가능한 한 무식하게 소리를 질렀다.
 그는 말을 하면서도 식도를 앞으로 밀었다. 날이 선 식도가 삼 층으로 살이 찐 턱을 지나 호역의 목에 가 닿았다. 가는 혈흔이 식도를 타고 흘렀다.
 호역은 눈을 부릅떴다.
 “넌······ 누구냐?”
 “대두박!”
 호역도 대두박에 대한 소문은 이미 들었다는 듯 일순간에 얼굴이 차갑게 변하며 턱을 떨기 시작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정신을 가다듬었는지 입술이 열렸다.
 “이 무슨 일인가? 자네에 대한 소문은 이미 들었네. 나하고는 은원(恩怨)이 없는데 무슨 짓인가? 내 황금은 원하는 대로 줄 테니 어서 칼을 치우게.”
 대두박은 빙그레 웃었다.
 달빛이 스며들어 그들의 얼굴을 밝게 비쳤다.
 화르르르르!
 바람이 말려 올라가는 소리가 들리고 창 밖이 밝아졌다. 달빛과는 다른 밝음.
 불길이었다.
 장원의 이곳저곳에서 타오르는 불빛으로 인해 두 사람의 얼굴에는 붉은 빛이 너울거리듯 춤을 추었다. 대두박은 식도를 밑으로 그어갔다. 가볍게 긋는 것이었지만 과두(올챙이)처럼 튀어나온 배를 따라가던 식칼이 멈추었을 때는 목에서 복부에 이르는 가는 혈선이 그어져 있었다.
 처음에는 방울이 맺히듯 스며나오던 피가 시간이 지나면서 복부를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너무도 미세한 양이었기 때문에 생명에는 지장이 없을 것 같았다.
 호역은 인상을 찌푸렸다.
 비록 두려움이 얼굴 가득 배어나왔지만 대두박의 얼굴을 확인한 호역은 슬며시 얼굴에 웃음을 띄웠다.
 “나를 죽이면 너도 죽어!”
 대두박은 그의 말에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이를 악물고 식도를 밀었다.
 ‘뱃심이 대담하군. 이러니 아버지를 배반했겠지.’
 호역의 배포 따위는 깊이 생각할 여유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뻔뻔스러워 보이는 그의 얼굴을 보자 미칠 것 같은 살의가 밀려 올라왔다.
 참을 수 없는 분노!
 “대운장(大運莊)을 기억하겠지?”
 하고 싶지 않았던 말이다.
 “헛!”
 호역의 입에서 놀람을 주체하지 못하는 나직한 신음이 울리고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불길함을 감지했다는 표정이었지만 그가 움츠러들 때마다 대두박은 더욱 강하게 다가오는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넌 누구냐?”
 호역의 눈이 소의 그것처럼 동그래졌다.
 “내 얼굴을 보고도 모르다니······ 벌써 까맣게 잊은 건가? 아니면 잊으려고 노력한 건가?”
 대두박은 손에 힘을 주었다.
 주르르르!
 축 늘어진 복부로 식도의 끝이 파고들며 피가 흘렀다.
 호역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며 부들부들 떨었다. 그의 눈이 점차 커지더니 습막이 드리워졌다.
 그의 손이 허공으로 들려 올라갔다.
 “너는? 혹시 그의······ 소공자(小公子)인가? 듣기에는 모두 죽었다고 하던데······”
 생각이 난 걸까?
 호역의 눈가에 잔경련이 일고 수겹으로 보이는 목살이 심하게 요동을 치는 듯했다.
 대두박의 눈에서 한광(恨光)이 밀렸다.
 “나는 죽지 않아. 네놈을 찾아 이곳까지 왔지.”
 호역의 눈에 한 꺼풀 죽음의 기운이 드리워졌다.
 사람은 자신의 생명에 애착을 가진다. 가진 자일수록 재물에 목숨을 걸고 자신의 생명에 연연하는 법!
 호역도 다르지 않았다.
 “살려주게, 장(張) 공자(公子)! 제발!”
 대두박의 목소리가 구슬퍼졌다. 경악과 두려움으로 말이 떨릴 만도 하건만 살아야 한다는 희망이 강했기 때문인지 울부짖는 소리는 방 안을 울리게 만들었다.
 “그만! 알면 됐어. 가서 아버지를 만나면 내 손에 죽었다고 말씀드려!”
 대두박은 손에 힘을 주었다.
 푹!
 고기가 썰리는 소리!
 식도의 손잡이는 단단한 박달나무로 만들어져 있었다. 고춧가루와 마늘이 말라붙은 흔적이 보이는 식도의 면(面)을 타고 붉은 액체가 한 방울씩 스며나오기 시작했다.
 식도의 손잡이에는 뼈마디가 굵은 손이 감겨 있었다. 오래 전에는 선이 곱고 가는 손이었지만 호역을 찾아 떠돌며 무수한 난관에 굵어지고 거칠어진 손이었다. 피는 손가락에도 끈적거리는, 기분 나쁜 흔적을 남겼다.
 “으으윽!”
 호역은 아픔을 참느라 인상을 썼다.
 임신을 해서 칠 개월이나 된 임부(姙婦)의 모습처럼 보이는 복부에서 스며나오는 통증에 호역은 구인(지렁이)이 꿈틀거리듯 거칠게 몸을 비틀었다.
 스스슷!
 몸을 비틀자 더욱 날카로운 소리가 들렸다. 복부로 스며든 식도가 기름기 가득한 복부를 갈랐다. 식도의 거무튀튀한 면에 붉은 피가 스며들었다.
 열려진 반월창(半月窓)으로 스며든 달빛이 식도를 반짝거리게 만들었다. 피는 월광(月光)을 받자 수면(水面)처럼 편광(片光)을 뿌렸고, 식도를 따라 흐르다 침상 위로 떨어졌다. 침상에 깔린 비단금침은 침침한 분위기를 활기찬 모습으로 바꾸어놓고 있었다.
 “살려줘!”
 호역이 비명을 질렀다.
 “으드득!”
 대두박은 이를 갈았다.
 “네놈이 내 아버지를 배반하고도 잘 살 수 있을 것 같았냐? 네놈을 찾아 오 년 동안 중원 천하를 헤매고 돌아다녔다.”
 대두박이 무릎을 굽히며 상체를 숙였다. 땀으로 번들거리는 호역의 얼굴이 사색(死色)으로 물들어 있었다. 기름기 흐르는 얼굴에 창으로 밀려온 불빛이 번뜩였다.
 “너는 어렸는데······ 어떻게?”
 대두박은 더욱 강한 힘으로 식도를 밀었다.
 “몰라서 묻는 거냐? 네놈의 욕심 때문에 내 어머니는 돌아가시고 장원은 폐허가 되었다. 물론 그날 저녁 장원으로 난입해 불을 지르고 사람들을 죽인 복면인들도 네놈이 사주한 것이겠지?”
 “살려주게!”
 호역이 비통하게 부르짖었다.
 대두박은 움직이지 않았다. 다만 식도를 든 손에 더욱 강한 힘을 주었을 뿐이었다.
 “말하라. 왜 아버지를 죽였지?”
 “그 일이 있고 나서 나도 많이 후회했네. 당시(當時), 을축년(乙丑年)에 내가 왜 그랬는지 나도 이해가 가지 않아. 살려주게. 나에게도 자식이 있네. 당시에는 자네 부친이 지닌 황금이 욕심났을 뿐, 죽일 생각은 아니었어. 일은 내가 원하지도 않던 방향으로 전개되었네. 난 잘못이 없어. 살려줘!”
 “아니, 너는 죽어야 해!”
 대두박은 거칠게 손을 움직였다.
 그의 몸으로 피가 튀고 진한 혈향(血香)이 코로 밀려들었다.
 손이 끈적거리고 가슴에 뿌려진 피로부터 후끈한 열기가 느껴졌다. 갈라진 배에서 희끄무레한 속살이 보이는 것도 잠시, 느끼한 기름 덩어리가 밀려나오기 시작했다.
 죽은 피는 창으로 스며드는 달빛에 번뜩거렸다.
 “으아아아악! 나는 억울해!”
 호역은 죽어가면서까지 몸을 비틀었다.
 대두박은 갑자기 머리 속이 비는 것 같았다. 무심코 넘길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호역의 부르짖음이 그의 심장을 덜컥거리게 만들었다.
 ‘억울해?’
 갑자기 다가오는 싸늘함!
 “누구냐?”
 대두박은 호역의 가슴을 눌렀다.
 “컥컥! 복면······ 십면객(十面客)······ 끄으으으!”
 정신이 확 깨는 느낌이었다.
 “무슨 소리야? 십면객이라니?”
 “살려줘, 난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야.”
 “더러운 자식!”
 자신도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갔다. 호역의 눈동자가 희게 변하며 핏물이 흘러나왔다.
 ‘안 돼!’
 마음이 급했다.
 십면객이라니?
 그가 누구란 말인가?
 ‘알아내야 해.’
 대두박은 호역의 목을 잡고 눈 앞으로 끌어올렸다. 그러나 이미 호역의 몸은 축 늘어져 있었다. 자신의 식도가 그의 숨통을 끊어놓았다는 것을 의식할 사이도 없었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호역은 이미 고개를 꺾은 뒤였다.
 “누구냐? 말해, 십면객이 뭐야! 말하라니까!”
 몸을 잡아 흔들었다.
 호역의 몸은 싸늘하게 식어가며 흔들렸지만 입은 열리지 않았다. 몸을 흔들자 피가 분수처럼 뿌려지며 대두박의 몸으로 떨어져 내렸다.
 “말해, 말하란 말이다!”
 대두박은 미친 듯이 비명을 토하며 자신의 처지도 잊은 듯 소리를 질렀다. 장원을 지키는 자들이 다가올지도 모른다는 불안은 이미 잊은 뒤였다.
 “으아아아! 사람이 죽었어!”
 두려움에 머리를 처박고 궁둥이를 하늘로 쳐들었던 계집이 진한 피 냄새를 맡고 고개를 쳐들다 놀라 소리를 지르며 발광했다. 계집은 미친 듯 소리를 지르는 대두박이 자신에게 신경을 쓰지 못하는 틈을 타고 침상을 내려가 문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모두 죽여!’
 대두박은 튕기듯 몸을 일으키며 달려가는 계집의 다리를 걷어찼다. 허공으로 튕겨진 계집의 몸이 문을 부수며 나동그라졌다. 너무도 풍만해 삼태기로 쓸어담아야 할 것 같은 가슴이 하늘을 향해 출렁거렸다.
 대두박은 미친 듯 달려가 계집의 젖무덤 사이에 식도를 쑤셔박았다.
 한 번······ 두 번······ 그리고!
 붉은 피가 솟구치며 얼굴에 뿌려지자 눈알이 따끔거렸다. 그는 소매로 얼굴을 닦았다.
 “아버지에게 사죄하라.”
 대두박은 몸을 일으켰다.
 방 안에 진한 피냄새가 풍겼지만 대두박은 개의치 않는 걸음걸이로 문을 나섰다.
 
 
 3장 살아야 해
 
 
 대두박은 길도 없는 수풀을 헤쳤다.
 밤은 어두웠으나 구름에 가려진 달이 간혹 얼굴을 내밀어주었으므로 희미하게나마 길을 알아볼 수 있었다. 달빛에 어우러진 음영이 곳곳에 드리워졌다. 별이 있다는 것이 그토록 고마울 수가 없었다.
 바삐 움직이는 발에 풀뿌리와 나뭇등걸이 걸리기는 했지만 그런대로 달려갈 정도는 되었다.
 “헉헉!”
 대두박의 입에서 울려나오는 숨소리는 작은 물줄기가 돌 틈을 빠져 지나가는 것처럼 거칠었다.
 목에서 나는 소리가 사람의 숨소리 같지 않게 느껴졌기에 대두박은 간혹 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자신의 숨소리라는 것을 인식하고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심하기도 했다.
 “도망이나 하는 신세라니······”
 대두박은 이가 갈렸다.
 생각과는 전연 다르게 상황이 돌아가고 있었다.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지만 언제부터 계획이 틀어졌는지 짐작조차 할 수가 없었다.
 오래 전부터 계획했던 일이 어긋난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었다. 호역을 찾아내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고, 고심하여 계획을 짰다. 신분을 속이고 가사촌으로 들어와 고만고만한 아이들을 수중에 넣었다. 그리고 목적을 이루기 위해 아이들을 움직였다. 그네들을 움직일 수 있도록 하는 데도 육 개월이 걸렸다.
 만약 아이들이 필요하지 않았다면 호역이 만전장의 주인이라는 것을 알아냈을 때 일을 끝냈을 것이다.
 가사촌에 도착한 그날 바로 만전장으로 들어갈 수도 있었지만 육 개월 동안 시간을 끈 것은 오로지 호역을 에워싼 자들의 행동을 눈에 익히고 빈틈을 노리기 위해서였다.
 문제는 이목(耳目)을 돌리는 일이었다.
 만전장에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고, 한결같이 병기를 지니고 있었다. 죽기로 작정하지 않은 다음에야 마음먹고 담을 타넘을 수가 없었다. 더구나 호역에게 다가가기도 전에 그들에게 들켜 몸에 칼부림이라도 당한다면 그런 낭패가 따로 없었다.
 그래서 계획을 바꾸었다. 아이들을 부하로 만들어 자신의 목적에 동원해야 했다.
 오래도록 만전장에 드나드는 사람들을 살펴보았기에 두려움이 등줄기를 타고 지나간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병기를 지닌 자들은 빨랐고 몸놀림은 상상했던 이상이었다. 그들은 막연하게 농기구 대신 병기를 든 자들이 아니었다.
 그러나 기어이 아이들을 수중에 넣어 만전장을 둘러싼 보표들을 경동(驚動)시키는 데 성공했다.
 “아이들의 힘이라면 충분하리라 생각했는데······”
 바람이 불자 달을 가렸던 구름이 서둘러 도망갔다. 그러나 밝은 달은 미친 듯이 달리는 그에게 도움만 주는 것은 아니었다. 때로는 거추장스럽기도 했고 두려움과 해를 줄 수도 있었다. 도주하기에는 달이 뜬것이 칠흑처럼 어두운 것만 못했다. 숨을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차라리 어둡기라도 하면 몸을 숨기는 데 적지 않은 도움이 되련만, 밝은 달은 그의 마음은 아랑곳하지 않고 산등으로 안개를 뿌리며 올라왔다.
 대두박은 달빛에 의지해 미친 듯 팔다리를 허우적거렸다.
 ‘여기에서 머뭇거리다가는 결국 뼈를 묻을 것이다. 어떻게든 이곳을 벗어나야 해.’
 대두박은 미친 듯 달려가며 뒤를 돌아보았다. 어디선가 사람들이 날카로운 병기를 들고 달려나올 것만 같았다. 지난 겨울 생명력을 잃어버리고 거칠어진 갈대가 다가오고 스쳐 지나가며 팔뚝에 상처가 났는지 쓰리고 따끔거렸다.
 아픔을 느껴도 멈출 수는 없었다.
 가까스로 도주는 했지만 산을 오르고 바위를 타느라 몸은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뒤를 따르는 자들만 없다면 숨이라도 편히 쉴 텐데······
 “어서 도주해야 해!”
 비늘도 벗기지 않은 생선을 씹어먹은 것 같은 비린내가 목구멍으로 밀려 올라왔다. 평소보다 수십 배는 빨리 달렸고 미친 듯 도주했기 때문인지 목이 말라 따끔거렸다.
 마음이 급했다.
 만전장에서 미친 듯이 도주할 때 장원에서 웅크리고 있던 자들이 횃불을 들고 달려오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처음 그들과의 거리는 이십 장이 넘었지만 한 식경이 지난 지금은 십 장의 거리로 좁혀져 있었다.
 ‘어쩌면 이곳에서 죽게 될지도 모르겠군.’
 대두박은 자신을 추적하는 자들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생각할수록 마음이 점점 무거워졌다.
 달리기는 자신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더욱 빨랐다, 마치 말이 달리듯!
 빠르다고 믿었던 자신을 따라온다는 것은 그들이 시시한 농사꾼이나 멋으로 병기를 찬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도주하는 것이 최상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대두박이었다.
 ‘황하가 나타나는 갈대밭까지 도주해야 해!’
 물가에 가면 방법이 있을 것 같았다.
 “제길, 계획이 어긋나다니! 놈만 죽이면 모든 것이 끝나는 줄 알았다. 그런데 배후가 있었단 말인가? 그나저나 십면객이 누구일까? 얼굴이 열 개라는 뜻은 분명하지만 내가 성급히 호역을 찔러 자세히 듣지 못했으니! 사람을 의미하는 것은 분명한 것 같은데······”
 속이 타는 일이 한둘이 아니었다.
 계획대로라면 장원은 모두 불에 타고 병기를 찬 놈들도 만전장의 황금을 들고 자신들의 갈 길로 튀어야 옳았다. 오래 전부터 그들의 행동을 염두에 두었었다.
 불이 났을 때 몇 명은 아이들을 쫓아갔을 것이다.
 몇 명은 남겠지만 불을 끌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마음이 더러운 놈들은 의당 호역의 금고를 뒤져 도주를 해야 했다.
 그의 생각이 영 빗나가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어느 정도는 성공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문제는 자신의 뒤를 따르는 놈들이었다.
 호역을 죽이고 다리가 놓여 있던 곳, 누각의 뒷면으로 나온 대두박은 미친 듯 헤엄을 쳐 인공 호수를 건넌 후 담을 타넘었다. 담까지 호수가 연결되어 있어 탈출하기가 쉬울 것 같았지만 그 이후의 결과는 험난했다.
 ‘다급하게 행동했지만 다 생각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놈들은 내 생각을 깨고 주인을 구하기 위해 달려들었다.’
 황금에 몸을 파는 자들이라면 당연히 주인의 죽음을 본 순간 모든 것을 포기해야 했다. 대두박이 아는 범위에서 보면 만전장에서 밥을 먹는 대다수의 보표들과 하인들은 오로지 먹고 살기 위해서였지 애당초 충성심 따위는 없었다.
 육 개월 동안에 걸쳐 조사한 결론이었다.
 마음 한구석에서 불안이 몰려왔다.
 ‘내가 판단에 착오를 일으켰나? 그래도 상관없어. 어차피 아버지를 죽인 놈이니까.’
 대두박은 호역을 죽이는 것으로 모든 일이 끝났다고 생각했었다. 구천(九泉)에 계신 아버지도 기뻐하시리라!
 그런데 새로운 배후가 있었다니!
 처음에는 호역을 죽이는 것으로 족했다.
 도주만이 남았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눈이 빠른 자들이 따라온다 해도, 눈 밝은 포교(捕校)들이 기승을 부려도 수천 리나 되는 먼 곳으로 도주한다면 손을 쓸 수 없을 것이다.
 원이 없었다.
 아버지의 원수를 갚았으니 마음 한구석이 가벼워지기도 했다. 뒤를 따르는 자들이 두렵기는 했지만 어차피 목적은 호역을 죽이는 것이었다.
 ‘죽을 수 없어.’
 마음 한구석에서는 만족감을 느끼면서도 가슴이 아팠다. 자신은 두려움이란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갑자기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발걸음이 엉기고 손이 냉증(冷症)에 걸린 듯 차가워지는 기분이었다.
 살고 싶었다.
 목적을 이루고 보니 죽어도 좋다는 생각은 사라지고 생명에 대한 열망이 피어올랐다. 호역의 배후가 있다고 생각하니 살아야 한다는 의지가 불타올랐다.
 마음이 급해졌다.
 “날이 새기 전에 마을을 벗어나야 한다.”
 대두박은 이를 악물었다.
 설사 계획이 틀어졌다 해도 목을 내밀고 죽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어떻게든 추적자의 손을 벗어나고 볼 일이었다. 곧 아침이 밝아올 것이고 머뭇거리다가는 결국 그들의 손에 잡히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기에 마음이 급했다.
 “가야 해.”
 대두박은 다시 걷기 시작했다.
 개봉에서 달려오는 포두들은 하루가 지나야 도착하겠지만 강을 지키는 관병들은 곳곳에 있었다.
 그들이 마을사람들의 연락을 받았다면 빠르게 움직일 것이다. 호역은 부근에 주둔한 수백 명의 관병들에게 황금을 뿌렸으므로 그들이 대두박을 잡으려고 지체없이 움직이리라는 것을 생각할 수 있었다.
 밤을 새워서라도 두 개 이상의 마을을 지나가야 했다.
 ‘이곳만 지나면 황하를 타고 하류로 내려갈 것이다.’
 계획은 이미 세워져 있었다.
 대두박의 발걸음이 빨라지며 갈대와 관목(灌木)이 발 밑에서 이지러지고 몸을 뉘었다.
 
 ***
 
 한참을 달리던 대두박은 무엇인가 날카로운 금속이 자신의 가슴을 향해 찔러오고 있는 것을 보았다. 허공에서 달빛이 반사되고 있었다.
 “안 돼!”
 대두박은 놀라 부르짖으며 허리춤에 꽂혀 있던 식도를 뽑아들었다. 아직도 붉은 피가 칠해져 있는 식도가 허공을 가로질러 날아드는 빛을 막아갔다.
 창!
 천우신조(天佑神助)란 이런 것을 말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날카로운 금속은 창이었는데, 공교롭게도 대두박의 손에 들린 식도에 부딪치며 튕겨졌다.
 창에서 느껴지는 힘은 대단했다. 힘으로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대두박이었지만 밀려드는 힘을 이기지 못해 나뭇등걸 사이로 나뒹굴어야 했다.
 ‘으으, 빌어먹을!’
 등에 돌이 박혔는지 참을 수 없는 통증이 밀려왔다. 견갑골이 깨진 듯 통증은 말로 할 수 없으리만치 심했고 어깨를 다쳤는지 팔을 펼 수 없을 정도였다. 그렇다고 ‘나죽었소.’ 하고 목을 내밀 수는 없었다.
 이판사판 아닌가.
 대두박은 식도를 앞으로 내밀었다.
 “죽여버리겠다!”
 대두박은 분을 참지 못해 입술을 마구 뒤틀었다.
 “간덩이가 부었구나. 네놈을 죽여 황금을 타야겠다. 산적(散炙)처럼 창에 꿰어주마.”
 앞을 가로막았던 사내가 장창(長槍)을 들어올렸다.
 안면이 있는 사내였다.
 대두박은 오래도록 만전장을 주시하고 있었으므로 아름은 몰라도 병기를 지닌 자들의 얼굴은 알고 있었다. 사내는 언제나 외원에서 서성거리던 자였다.
 그가 든 장창은 길이가 무려 십 척(尺)이나 되는 것으로, 보는 것만으로도 기가 질렸지만 모든 것을 도외시한 대두박에게는 새로운 두려움을 줄 수는 없었다.
 ‘벌써 목에 현상금이 걸렸나? 제길, 빠르기도 하군! 만전장에서 내건 상금이겠지.’
 차라리 호수연을 죽여버릴 것을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를 죽여 호역의 피붙이를 남기지 않았다면 추적은 없었을 테고, 자신은 살아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았을 거라 생각하니 원통해 가슴을 치고 싶었다.
 “흐흐흐······”
 사내의 누런 이가 드러나는 웃음은 징그러울 만치 냉소적이었다. 그의 웃음에는 대두박과 같은 파락호를 비웃는 업신여김이 넘쳐 흐르고 있었다.
 대두박은 이를 악물었다.
 사내가 창을 앞으로 숙였다.
 한 자는 족히 될 것 같은 창날이 별빛과 달빛을 쪼개며 다가들자 목이 도려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목을 내밀어라!”
 한 순간, 사내의 손에 들려 있던 장창이 대두박의 허리를 노리고 길게 찔러왔다.
 피할 수는 없었다.
 사내의 창이 길게 찔러오자 대두박은 무의식적으로 몸을 비틀었다. 몸이 왼쪽으로 비틀리자 날카로운 소리가 들리며 오른쪽 옆구리 옷자락이 창극(槍極)에 걸려 찢겨졌다. 칼로 손가락을 베었을 때와 같은 아픔이 밀려들었다.
 눈으로 보지 않아도 가벼운 상처를 입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대두박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옆구리를 지나친 사내의 창을 옆구리에 끼었다.
 기회는 다시 오지 않는다.
 대두박은 신속한 동작으로 상체를 숙이고 두 발을 모으며 몸을 날리듯 사내의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옆구리에 낀 창이 피부를 스치며 겨드랑이가 베어지는지 아픔이 다시 밀려왔다.
 “뭐냐?”
 사내는 갑작스러운 그의 반격에 엉거주춤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며 소리를 질렀다. 얼굴이 탈색된 사내는 찌른 창을 감아들이려 했다. 창이 움직이자 대두박은 따라가듯 몸을 이동시켰다. 사내가 다급한 표정으로 창을 놓았지만 이미 경미한 바람 소리가 사내의 왼쪽 가슴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아악!”
 사내는 숨넘어가는 듯한 비명을 토하며 창을 집어던지고 뒤로 넘어졌다. 대두박은 자신이 어떻게 하여 사내의 가슴을 찔렀는지 경황이 없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자신이 휘두른 식도에 사내가 쓰러졌다는 것이다.
 대두박은 미친 듯 달려들어 식도로 사내를 찍어대기 시작했다. 피가 튀고 뼈와 식도가 부딪치며 요란한 소리가 울렸다. 살점이 튀고 대두박의 몸은 곧 피에 물들어갔다.
 “죽여버리겠어!”
 마치 혼이 빠진 사람처럼 사내의 몸에 올라타고 식도를 찍었다. 그는 미친 듯 사내의 몸을 짓이겼다. 자신이 사람이라는 것을 잊은 것 같았다.
 “어디냐?”
 “비명 소리가 들린 것 같았는데······ 어서 추적해!”
 갑자기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사위가 붉은 노을이 지듯 밝아지며 사람의 목소리가 다가왔다. 미친 듯 식도를 내리찍던 대두박은 고개를 들고 다가오는 자들을 바라보았다.
 “놈이다!”
 “아칠(阿七)이 당했다!”
 사방에서 함성이 들리며 그의 시야에 병기와 농기구를 든 무리들이 들어왔다.
 ‘벌써? 도주해야 해!’
 대두박은 마음을 굳혔다.
 그는 사내의 몸에서 튕기듯 일어나며 몰려드는 사람들의 반대쪽으로 몸을 돌렸다.
 매우 짧은 시간에 결정한 일이었다.
 그가 몸을 돌리자 몰려드는 사람들과는 반대쪽에서 다가오던 두 명의 사내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그들은 허리에 찬 검을 뽑아들고 있었는데 이곳이 산 속임을 감안하여 사용하던 창을 포기한 것 같았다. 긴 창은 산에서 쓰기에는 무리가 따르게 마련이었다.
 ‘정면을 뚫자!’
 대두박은 정면을 향해 몸을 날렸다. 이어 자신의 머리 위로 뛰어오르는 그림자를 향해 식도를 횡으로 그었다.
 털썩!
 “크으윽······”
 둔탁한 소리가 울리고 비명보다 먼저 시체가 된 그림자가 나무 사이로 나동그라졌다. 허리가 베인 시체에서 붉은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대두박은 성난 황소처럼 뛰었다.
 그의 앞을 가로막는 잡목들이 그가 휘두른 식도에 썩은 무처럼 베여 쓰러졌다. 그의 칼은 선불 맞은 멧돼지처럼 거칠게 허공으로 휘둘려졌다.
 어느새 앞을 막아섰던 마을사람들이 미친 듯 식도를 휘두르는 그의 모습에 질려 물러섰다.
 “막지 마!”
 대두박은 미친놈처럼 소리를 지르며 그들에게 다가갔다. 그들까지 죽이고 싶지는 않았다. 마을사람들은 감히 앞으로 나서서 막아보지도 못하고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대두박은 소리를 지르며 달려나가다 걸음을 멈추며 앞을 막아선 중년인을 향해 식도를 사선으로 그어올렸다.
 손에 다가오는 섬뜩한 기운!
 푹!
 이어 다가오는 야릇한 감촉이 그의 몸을 떨리게 만들었다. 오랫동안 참았던 배설을 끝낸 후의 기분이었다. 붉은 피가 눈 앞으로 뿜어져 나오고 입 안에서 피맛이 느껴졌다.
 “나를 막으면 모두 죽어!”
 그의 식도가 허공에 휘둘려지자 파두(쇠스랑처럼 생긴 농기구)를 들고 있던 촌장이 목에서 피를 뿌리며 무너졌다.
 “피하라!”
 “무식한 놈이다!”
 그들이 주춤하는 사이에 대두박은 벌써 네 명이나 베어넘기고 있었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 대두박 앞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를 쫓아왔던 사람들은 어느새 모두 그의 뒤에 있었다. 누구도 감히 대두박의 앞을 막아서지 못했다.
 대두박은 어둠 속을 향해 미친 듯 달려갔다.
 
 “잠깐!”
 대두박은 걸음을 멈추었다.
 숲 사이로 어른거리는 그림자가 보였다. 대두박은 굴리듯 몸을 지면에 깔았다. 지면과 닿은 배가 가시가 찔린 듯 따가웠지만 이를 악물고 신음을 삼켰다.
 대두박은 한참 동안 나무 사이로 앞을 바라보았다. 예측이 틀림없다면 개봉과 낙양을 잇는 봉양관도(封陽官道)가 눈 앞에 펼쳐져 있어야 했다. 그는 개봉 방향을 향해 산을 넘었으니 멀지 않은 곳에 황하가 흐르고 있을 것이다.
 고개를 슬며시 쳐들어보니 달빛이 반짝이며 일렁이는 수면이 보였다. 편광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지는 것으로 보아 황하가 여울을 만들며 흐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멀지 않았어.’
 바람이 불어와 이마의 땀을 떨구었다.
 마음 한구석에서는 상쾌한 기분이 들기도 했지만 마냥 편하지만은 않았다.
 “아무래도 이상해.”
 대두박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몸을 일으켜세워 나무에 등을 기대었다. 흘러내린 땀으로 몸이 끈적거리고 긴장 때문에 뻣뻣하게 굳어왔다. 몸이 나무토막처럼 굳어와도 눈이 어둠을 뚫어볼 수 있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스러웠다.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창검(槍劍)을 든 십수명의 관병들이 보였다. 일렬로 늘어선 그들은 대두박이 숨은 숲을 바라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목에 붉은 사건(絲巾)을 돌려 묶은 십보장(十步長) 한 명이 오락가락 발걸음을 움직이며 박도(朴刀)를 흔들고 있었다.
 관병들의 머리 위로 보이는 하늘이 검게 느껴졌다.
 ‘벌써 관병들이 이곳까지 추적해 왔나?’
 머리칼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아니다. 저들은 나를 막으려 하는 것이 아닐 거야. 호역을 죽인 게 몇 시진이나 됐다고 벌써 관병들이 이곳까지 왔겠어.’
 마음이 싱숭생숭하여 어떻게 행동을 해야 할지 쉽게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분명한 것은 관병들이 있는 곳을 지나야만 목적한 곳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들이 서 있는 곳을 지나쳐 관도를 따라 달려야 한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지만 마음놓고 나갈 수는 없었다.
 대두박은 한동안 그들이 움직이기를 기다렸으나 애타는 시간만 지나갈 뿐이었다.
 “이곳으로 발자국이 나 있다!”
 갑자기 들려오는 소리!
 머리카락이 하늘로 솟구쳤다.
 멀지 않은 곳에서 추적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산 속이 밝아지는 것 같았다. 놀라 뒤를 바라보니 나뭇가지 사이로 횃불이 일렁이고 있었다.
 ‘어쩔 수 없다.’
 대두박은 몸을 일으키고 튕기듯 달려나갔다. 산비탈을 달려 내려가자 황토가 깔린 관도가 눈 앞에 있었다.
 “놈이다. 대두박이 여기 있다!”
 뒤따르던 사람들이 미친 듯 소리를 질렀다.
 숲 속에서 거친 발걸음 소리가 울리고 횃불이 다가와 관도까지 붉은 빛이 반사되었다. 뒤를 돌아보니 병기를 든 만전장의 보표들과 파두나 초자(硝子 : 곡식을 터는 농기의 일종) 같은 농기구를 든 마을사람들이 몰려오는 것이 보였다.
 대두박은 머리를 돌려 군병들을 바라보았다.
 오락가락 무게를 잡던 십보장이 고개를 쳐들고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일자로 늘어섰던 관병들이 일제히 몸을 돌렸다.
 십보장의 얼굴을 인식할 사이도 없이 누런 이빨이 보였다.
 “놈이다!”
 대두박은 침을 삼켰다.
 ‘아차!’
 목소리가 울렸을 때 대두박은 눈 앞이 캄캄해졌다. 생각과 달리 관병들은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아 발등에 불이 떨어진 듯한 기분이었다. 대두박은 입술을 깨물며 앞뒤 가리지 않고 미친 듯이 달려갔다. 그들에게 잡히기라도 한다면 좋은 결과를 가져 오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잡아라!”
 쉬이이잉!
 잠시 당황한 듯 보이던 십보장의 목소리가 울리고 가장 가까이 서 있던 군병이 몸을 돌렸다.
 대두박은 이를 악물고 군병들 앞으로 달려갔다. 늘어선 그들 사이를 뚫고 지나갈 수밖에 없었다. 뒤에서는 병기와 농기구를 든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었으니, 만약 그들과 관병들이 합세하여 그를 에워싼다면 결과가 어찌 되리라는 것은 뻔했으므로 달리 생각할 시간도, 방법도 있을 수 없었다.
 방법은 하나!
 앞을 가로막은 관병들을 밀치고 달아나는 수밖에······
 “죽여라!”
 성대가 갈라진 듯 거친 목소리가 울리고 대두박의 머리를 향해 초겸(草鎌)이 날아들었다. 달빛이 초겸의 날에 반사되고 횃불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빛을 발하는 초겸은 순식간에 목으로 다가들었다.
 풀을 베는 낫과 창을 이어 붙여놓은 것같이 보이는 초겸은 목으로 다가들며 싸늘한 기운을 흘려 혼백(魂魄)을 앗아갈 것 같았다.
 “으헛!”
 대두박은 엉겁결에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초겸이 허공으로 지나가며 한 주먹이나 될 것 같은 머리카락을 잘랐다. 시원한 바람이 허공으로 흩어지자 대두박은 눈 앞으로 날리는 머리카락을 볼 수 있었다.
 “빌어먹을 놈들!”
 욕설이 절로 튀어나왔다.
 이치적으로 따져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다. 단지 숲 속에서 튀어나왔다는 이유만으로 확인조차 하지 않고 사람을 죽이려 한다는 것은.
 휘리릭!
 갑자기 옷자락 펄럭이는 소리가 들리고 눈 앞으로 다리가 다가왔다. 주저앉았던 몸을 일으키기도 전이었다. 대두박은 날아든 혁피화(革皮靴)를 볼 수 있었다.
 대두박은 급히 몸을 비틀었다. 엉겁결에 일어난 일이라 어떻게 피해야 하는지조차도 알 수 없었다.
 퍽!
 둔탁한 소리가 들리고 아랫배에서 통증이 밀려왔다. 마치 과도한 폭음(暴飮)으로 밤새도록 설사를 하고 난 후에 느끼는 통증처럼 아랫배가 쓰리고 하체를 펼 수가 없었다.
 몸을 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몸은 펴지지 않았고 의외로 빠르게 나뒹굴었다.
 손을 바라보았지만 식도는 어디로 날아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뒹구는 그의 눈 앞에 주먹만한 돌이 보였다. 대두박은 복부를 끌어안고 남은 손으로 앞뒤 가리지 않고 돌을 집어들었다.
 휙!
 관병의 발이 빠르게 직선으로 뻗어왔다. 가슴이 활짝 열리는 느낌이었다. 몸에 맞기라도 한다면 팔이건 가슴이건 움직일 사이도 없이 그대로 부서져 버릴 것 같았다.
 대두박은 이를 악물었다. 무서운 경기(驚氣)를 담고 있는 발에 부딪치기라도 한다면······
 발에 실린 힘을 피해야 했다.
 “안 돼!”
 대두박은 놀라 소리를 지르며 손에 들린 돌로 눈 앞으로 다가오는 발등을 찍었다. 무의식적인 반응이었고 스스로를 보호해야 한다는 자기 본능적인 방어였다.
 눈 앞으로 횃불에서 뿜어진 붉은 빛이 다가왔다. 발등과 돌이 부딪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빠그작!
 요란한 소리가 들리고 대두박은 팔이 부러지는 것 같은 아픔을 느꼈다. 눈 앞으로 붉은 피가 보이고 다시 땅으로 내려가는 관병의 발이 보였다. 관병이 주저앉고 있었다.
 “으으으······!”
 입에서 비명이 뿜어져 나왔다.
 무인의 발과 돌이 허공 중에서 부딪쳤건만 그 충격은 놀라웠다. 손이 화끈거리고 팔꿈치가 울리는 것 같았다. 어깨가 탈골되었는지 팔을 들기가 어려웠다.
 “으으윽······!”
 대두박은 미친 듯 비명을 뿌렸다.
 얼굴이 불에 덴 듯 화끈거렸고 정신이 아득했다. 허공에 별이 떠다니는 것 같았고 눈 앞이 캄캄해졌다.
 돌을 든 손이 발에 부딪쳐 밀리며 얼굴을 찍었는지 입술이 터지고 붉은 피가 흘러나왔다. 입 안으로 비린내가 흘러들어 호흡을 거북하게 했다.
 “더러운 놈!”
 발에 돌을 맞아 충격을 느낀 무인이 몸을 숙여 주저앉으며 손으로 다리를 감쌌다. 숙인 무인의 머리가 눈 앞으로 다가왔다. 대두박은 눈을 돌려 자신의 손에 들린 돌을 바라보았다.
 “죽여버리겠다!”
 대두박은 평소에 어떤 일이 일어나도 마음이 심하게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생각해 왔지만 자신을 죽이려 한 자에 대한 용서는 없었다. 생각도 생각 나름이지만 그것보다는 본능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대두박은 분노에 젖어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돌을 눈 앞으로 치켜들었다. 이어 눈 앞으로 다가오는 머리를 향해 힘껏 내리찍었다.
 퍽!
 와지지지······
 “크아아악!
 돌이 살을 찍는 소리, 이어 뼈가 부러지는 듯한 소리를 뚫고 비명이 울려퍼졌다.
 대두박의 눈 앞으로 관병의 신형이 기울어졌다. 붉은 피가 솟구치는 머리는 대두박의 눈 앞에서 땅을 향해 처박혔다. 관병은 날개가 잘린 청령(잠자리)처럼 맴을 돌았다. 고통이 한계를 넘은 모양!
 다다닷!
 지면을 박차고 달려오는 소리.
 대두박은 화들짝 놀라 눈을 들었다.
 “죽일 놈! 감히 대들어!”
 쉬이이이익!
 욕설에 이어 갑자기 등에서 바람 소리가 느껴졌다. 대두박은 돌아보지 않았다. 대두박은 몸을 앞으로 숙이며 다람쥐가 구르듯 앞으로 몸을 전진시켰다.
 물컹!
 끈적거리며 물컹거리는 피가 손에 엉겨왔다. 쓰러진 관병의 시체가 몸에 걸렸다.
 써걱!
 불에 덴 것처럼 화끈한 통증이 등에 몰려왔다.
 마치 벌이 날아와 침을 박은 것 같은 통증이 일고 팔이 거북해졌다. 온몸이 당기는 것 같은 통증이었다.
 “아주 묵사발을 만들어 버려라! 개자식 같으니!”
 걸쭉한 욕설이 들리며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대두박은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를 들으며 앞으로 기었다.
 퍽!
 옆구리로 발길질이 날아왔다.
 대두박은 충격을 느끼며 속절없이 바닥으로 굴렀다. 옆구리를 걷어 채인 충격으로 숨쉬기가 거북해졌다. 대두박은 몸을 일으키려고 애썼다.
 퍼퍼퍽! 퍼퍽!
 다시 주먹이 날아들고 옆구리가 울려왔다. 숨이 막히고 눈알이 빠져 나오는 것 같았다.
 ‘죽일 놈들!’
 대두박은 눈 앞이 붉은 피로 덮이는 것 같은 착각을 느끼며 이를 악물었다. 그들은 대두박을 어린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짚으로 만든 인형인 양 마구 윽박질렀다.
 “쿠아아악!”
 대두박은 참으려 애를 썼지만 입으로 터져 나오는 비명을 참을 수가 없었다.
 온몸으로 개미가 기어다니는 듯한 충격이 밀려왔다. 잠시 후에는 망치로 후려쳐도 시원치 않을 것 같은 아픔이 뼈 속까지 아려왔다.
 ‘살아야 해.’
 마음 속에서 울부짖음이 들려왔다.
 이대로 죽을 수는 없었다.
 호역을 죽이는 것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면 이대로 죽어도 좋았다. 그러나 원수는 따로 있었다. 그를 죽이기 전에는 먼저 죽을 수 없었다. 그것이야말로 불행한 일이었고 지금까지의 고생을 모두 무위(無爲)로 돌려버리는 일이었다.
 ‘살아야 해. 십면객? 그가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원수를 갚기 전에는 죽을 수 없어.’
 어금니가 으스러져라 악다물었다.
 머리와 몸이 따로 노는 것 같았다. 멀리 숲이 보였다. 조금만 가면 될 것 같았다. 대두박은 통증으로 팔다리가 찢어지는 것 같았지만 앞을 향해 기었다.
 “이 더러운 독종(毒種) 놈! 그렇게 두들겨맞고도 기어가다니······ 아예 팔을 잘라주어라. 감히 우리 동료를 죽이고도 살려고 하면 안 되지.”
 퍽!
 다시 스미는 고통!
 대두박은 몸이 벌렁 뒤집혀지는 것을 느꼈다. 복부를 걷어찬 힘은 놀랄 만치 거센 것이었기 때문에 지친 몸을 가누거나 버틸 수가 없었다.
 다시 한 번 발길질이 다가왔을 때 대두박은 혼신의 힘으로 손을 뻗었다.
 다리가 손에 걸렸다.
 가슴이 깨지는 듯한 통증이 몰려왔지만 그는 다리를 힘껏 잡아챘다. 옆구리를 걷어차던 군병의 몸이 허공에서 비틀거리다 땅으로 나뒹굴었다.
 “으억!”
 비명이 울리는 곳을 향해 덮쳐 든 그는 손으로 얼굴을 긁으며 이빨을 들이밀었다. 땀냄새가 나는 목줄기가 물렸다. 그는 성난 개가 물어뜯듯 목줄을 물어뜯었다.
 관병의 몸에서 버둥거리는 느낌이 전해졌지만 물어뜯는 목을 놓치는 않았다.
 비릿한 냄새가 나며 피가 목을 타넘었다.
 쉬이이이익!
 바람 가르는 소리가 들리고 창에 달린 날카로운 돌기(突起)가 눈을 아리게 파고들었다. 창극은 대두박의 목을 노리고 내리꽂혔다. 대두박은 물어뜯던 목을 놓고 몸을 뒤집었다. 몸이 하늘을 향해 뒤집어지자 자신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관병들을 볼 수가 있었다. 떨어져 내린 창이 대두박의 몸을 비껴 목줄이 뜯겨 피를 뿌리는 관병의 가슴에 박혀 있었다.
 “어, 놈이 창을 피했어!”
 “전이(田二)가 죽었다. 창이 전이를 찍었어!”
 당황한 관병들이 소리를 질렀다.
 그들 뒤로 다가선 다른 관병들이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얼굴을 돌렸다. 그들도 자신들이 찌른 창에 동료가 생을 마감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중에는 동료의 죽음도 모르고 게걸스럽게 웃고 있는 자들도 섞여 있는 것이 확연하게 보였다.
 “안 돼!”
 대두박은 소리를 지르며 몸을 비틀었다. 마치 선어(뱀장어)가 물기 빠진 늪에서 꿈틀거리듯 움직였지만 다가오는 창극을 피하는 데는 적절한 대응이었다.
 팍!
 목 옆을 스친 창극이 땅에 박히며 흙을 튀게 했다. 대두박은 순간적으로 눈을 감았다.
 ‘흙?’
 머리 속에 번개가 치는 것 같았다. 대두박은 팔을 벌려 손에 잡히는 대로 흙을 집어들었다. 상체를 세웠을 때 다시 무인들과 관병들의 얼굴이 다가들었다.
 “받아라!”
 촤라라라라······
 대두박은 두 손을 부챗살처럼 벌리며 좌우로 휘둘렀다. 움직일 때마다 온몸의 근육이 따로 노는 듯 안타까운 통증이 밀려들었지만 깊게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허공으로 모래와 황토가 날아갔다.
 관병들은 자신들을 향해 날아오는 흙을 보았지만 그것이 한 순간에 뿌려졌기 때문인지 미처 피하거나 눈을 감지 못하고 멀뚱히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읍, 뭐냐?”
 “으, 더러운 자식! 흙을 뿌리다니.”
 대두박이 뿌린 흙은 적절하게 날아가 다가오는 자들의 눈에 들어간 것 같았다. 무인들은 엉겁결에 눈을 가리고 손을 휘둘렀지만 너무도 빠른 불의의 습격이었기 때문인지 미처 눈을 방어하지 못했다.
 창을 찌르려고 달려들던 관병들이 비척거리며 물러났다.
 ‘가야 돼.’
 대두박은 온몸의 힘을 모아 일어섰다. 몸이 후들거리고 비 맞은 참새처럼 떨렸지만 마냥 서서 그들이 자신을 죽일 때까지 기다릴 수는 없었다.
 생각 같아서는 그들의 몸을 마구 찢어버리고 싶었지만 무엇이 급한 지 아는지라 몸을 돌려야 했다. 대두박은 이를 악물고 앞으로 달려갔다. 허리를 펴지 못해 아무것도 보지 못했지만 황하가 흐르는 방향은 짐작할 수 있었다.
 퍽!
 앞을 가로막았던 한 관병이 대두박과 부딪쳐 나동그라졌다. 필사적으로 몸을 움직이는 대두박을 막는다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이었다.
 “어이쿠! 빌어먹을 놈이 도망간다!”
 어깨에 부딪친 자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지만 눈이 안 보이는 것은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대두박은 미친 듯이 달려갔다. 그는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관병의 얼굴을 발로 밟으며 앞으로 내달았다. 발 밑에서 뼈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허리를 숙인 채 달려가는 것은 더디고 어려웠지만 창자가 끊어지는 것 같아 펼 수가 없었다.
 “놈이 달아난다!”
 “잡아!”
 황급히 눈을 씻어낸 관병들이 달려왔으나 대두박의 몸은 비칠거리면서도 미친 듯 달려가고 있었다.
 
 철퍽! 철퍽!
 물이 튀었다.
 발걸음은 습지로 이루어진 갈대밭으로 들어서면서 현저하게 느려졌다.
 온몸의 상처에 물이 닿자 기절하리만치 따가웠다.
 ‘서둘러야 해!’
 이대로 가다가는 뒤따라오는 마을사람들에게 따라잡힐 수도 있었다.
 그가 황하를 싸고 있는 갈대밭을 잘 알고 있듯 마을사람들도 그럴 것이다. 그들이 바싹 따라왔다는 생각이 들어 불안감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고, 걸음을 멈출 때마다 자신의 숨소리가 귓속을 파고들었다.
 “벌써 두 시진을 쉬지 않고 달려왔건만!”
 온몸이 노곤해 쓰러질 것 같았다.
 생각 같아서는 모두 집어치우고 다리를 쭉 펴고 잠이라도 자고 싶었다. 평소에는 아무리 달려도 지칠 것 같지 않았는데 지금은 유난히 옷이 물에 쓸리고 한 발짝 내디디는 것이 천 근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철퍽! 철푸덕!
 어디선가 낮게 고인 물이 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대두박은 발걸음을 멈추고 들려오는 소리를 들었다.
 ‘그들이 벌써 뒤쫓아온 모양이다.’
 대두박은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의 몸을 싸고 있는 빽빽한 갈대로 인해 앞을 살핀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오로지 머리 위의 둥근 달과 푸른 천공(天空)뿐이었다.
 “여기에 흔적이 있다!”
 웅성웅성!
 물을 밟는 발걸음 소리는 등 뒤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한둘이 아닌 여러 개의 발걸음 소리였다. 희미하기는 했지만 사람의 말소리도 섞여 있었다. 달빛과는 다른 붉은 불빛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횃불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추적자가 누구이건 간에 너무 가까이 있었다.
 ‘관도를 버리고 습지로 들어온 것을 알아챘다는 말인가? 시간을 벌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대두박은 자신의 판단이 현명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뒤에서 들리는 발걸음 소리와 희미한 사람의 목소리로 보아 판단이 틀린 것 같았다.
 예상은 했었다.
 다만, 그가 갈대밭으로 스며들어 강을 거슬러가는 동안만큼은 추적을 따돌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었다.
 ‘아버지는 이제 편안하실까?’
 갑자기 드는 생각이 그의 발걸음을 잡았다.
 이미 오래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이지만 만약 자신이 하는 일을 내려다보고 계신다면 만족해 하실 것 같았다.
 “가자!”
 선택의 길은 없었다.
 “이곳에 지나간 흔적이 있다. 갈대가 밀린 것으로 보아 얼마 되지 않았다.”
 “어디냐?”
 “불과 반 각 전이다. 어서 추적하라!”
 “모두 불러라!”
 “알았다. 너희들은 어서 앞으로 전진해라. 나는 개봉에서 포교님이 오기를 기다리겠다!”
 “알았다. 자, 어서 행동에 옮겨라!”
 한동안 웅성거리듯 들리기도 했었지만 이제는 더욱 분명해진 사람들의 말소리가 등 뒤를 따라왔다.
 적어도 십여 명은 될 것 같았다. 귀에 익은 목소리인 것을 보니 마을사람들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더구나 자신을 따르던 아이들의 목소리도 섞여 있었다.
 ‘이곳에서 머뭇거리다가는 육포(肉脯)로 변하고 말 것이다.’
 대두박은 미친 듯 달리기 시작했다.
 갈대가 얼굴로 다가와 상처를 남기고 발은 수질(거머리)이라도 달라붙은 듯 따끔거렸다.
 철퍼덕! 푹!
 얕게 깔린 물에서 물방울이 튀어올랐다.
 ‘이대로 가다가는 결국 꼬리가 잡힐 것이다.’
 어떤 방법으로 움직이든지 결국 발이 지나간 자리에 남은 흐려진 물과 밀린 갈대로 인해 자신의 위치가 발각될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대두박은 가능한 한 물소리가 울리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아가며 애써 귀를 기울였다. 한참을 움직였기 때문에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조차 헷갈릴 지경이었다.
 대두박은 한동안 멈춰서서 귀를 기울이다 고개를 끄덕이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오른쪽이다. 물소리가 들린다.”
 물이라면 자신이 있었다. 오래도록 황하의 강변에 늘어선 촌락에서 살았기에 물에만 도달할 수 있다면 사로잡히거나 죽지는 않을 것 같았다.
 “강으로 가야 해!”
 발자국이 남을까 두려워 물 위에 배를 깔고 누웠다. 이미 적지 않은 물이 튀었지만 얼음처럼 차가운 기운이 복부에 느껴지자 전신에 오한이 밀려들었다. 그는 사방으로 귀를 돌려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를 확인하며 물 위에 자란 마른 갈대에 몸을 싣고 뿌리를 잡아당겨 앞으로 나갔다.
 몸이 이동한 후에는 몸을 돌리고 조심스럽게 쓰러진 갈대를 세워 추적자를 따돌리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한동안 그의 몸은 거칠 것 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빠르지는 않았지만 조금만 더 전진을 계속하면 추적자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놈이 앞에 있다!”
 첨벙!
 요란스러운 고함 소리가 들리고 물이 텀벙대는 소리가 들렸다. 생각보다 더욱 가까운 거리였다.
 오래지 않아 등 뒤에서 갈대가 쓰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대두박은 마음이 급해졌다.
 ‘잡히면 죽어!’
 대두박은 다급히 들려오는 소리와 자신과의 사이가 불과 십여 장밖에는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서두른다고 몸을 움직이기는 했지만 빠른 것은 아니었다.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는 아무리 서둘러도 빨리 나아갈 수가 없었다.
 “이곳으로 갔다!”
 “물이 아직 흐린 것으로 보아 지나간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다!”
 대두박은 심장이 조여드는 것 같았다.
 ‘서둘러야 해!’
 마음이 바빠졌다.
 대두박은 허우적거리며 앞으로 달려갔다.
 어떻게든 강에만 들어간다면 살아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문제는 관병들과 만전장의 무인들이 따라오기 전에 물가에 다다라야 한다는 것이었다.
 습지가 점점 깊어져 무릎까지 물이 차올랐다.
 종아리가 가려웠다. 습지에 산다고 알려진 수질이 피를 빨기 위해 달라붙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멈추어서서 한가하게 그것이나 떼어내고 있을 새가 없었다.
 촤아아아아!
 물살이 밀려오며 물이 엉덩이를 후려치고 물러갔다. 깊은 강이 가까워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얼마나 달렸을까?
 붉게 보이는 황하가 눈 앞으로 다가왔다.
 주저앉고 싶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었다.
 ‘아버지! 살고 싶어요. 그놈만 죽일 수 있다면 언제든 죽어도 좋다고 생각했었는데······’
 가슴이 뛰었다.
 철벅거리는 발걸음 소리가 귓가에 다가왔다. 어쩔 도리가 없다는 것을 알자 더 이상 일어설 힘도 없었다. 차라리 모든 것을 포기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졌다.
 “살고 싶나?”
 갑자기 등줄기를 시원하게 만드는 음성.
 자신을 죽이러 온 자의 목소리가 아니라는 것을 느끼기에는 어려움이 없었다. 죽일 생각이라면 말을 거는 것보다 차라리 병기를 휘두르거나 농기구를 찌르는 것이 빠를 것이다. 질문 따위는 쓸데없는 일이다.
 ‘무슨······’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놀란 음성이 입술을 열고 튀어나갔다.
 “누구냐?”
 대두박은 머리카락이 하늘로 솟구치는 것을 느끼고 튕기듯 몸을 돌렸다. 하나의 인영이 달 그림자를 만들며 서 있었다. 기이한 것은 사내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긴 머리가 바람에 흩날리고 머리에 쓴 방갓이 더욱 큰 그림자를 만들어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지는 않았지만 그가 달을 등지고 서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대두박은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없었지만 자신을 잡기 위해 가사촌에서 온 사람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만약 가사촌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대두박이 그의 목소리와 몸이 지닌 형체를 알지 못할 리 없었다.
 ‘살려줄까?’
 강한 욕구가 치밀어 올랐다. 단 한 번도 그토록 강한 삶의 희구(希求)를 바란 적이 없었다. 새로운 변화였다. 열망으로 타오르는 요원(遼遠)의 불길!
 그의 말을 믿을 수는 없었지만 애원이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살고 싶어! 잡히는 날에는 나를 죽일 거야.”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를 따라와라!”
 어둠 속에서 탁하게 가라앉은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두박은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한 순간에 대두박의 마음을 잡아버렸다.
 깊게 가라앉은 목소리!
 어딘지 모르게 믿음을 주는 소리였다. 대두박은 움직이지 않고 한동안 목소리가 울려온 곳을 바라보았다.
 ‘저자는 누구지?’
 오래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발걸음 소리는 가까이 다가왔고 머뭇거림은 결국 죽음에 가까이 가는 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어느 방법이든 선택을 해야 했다.
 대두박은 그를 바라보며 이를 드러냈다.
 “당신은······?”
 “나를 따라와라. 나를 따라오면 죽지 않을 것이다. 누구에게도 죽임을 당하지 않는 강한 사람으로 만들어주겠다.”
 정신이 확 깨는 듯했다. 사흘 동안 쉬지 않고 술을 마셨다 하더라도 정신을 차릴 수 있는 말이었다. 그가 가장 바라던 말이기도 했으니 마음이 끌릴 수밖에······
 대두박은 취한 듯 그에게 다가갔다.
 오래지 않아 사내의 얼굴이 밝아졌다. 전신에는 다 떨어진 넝마를 입고 있었고 얼굴에도 때가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손에 들린 기다란 지팡이는 결코 가벼워 보이지 않았다.
 가슴이 철렁했다.
 그러나 그가 자신을 쫓는 자들과 다르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었다. 그의 몰골이 시선을 끌지 못하는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대두박은 묘한 기대감이 어렸다.
 “당신은 누구요?”
 “나는 일도지선(一刀至善) 주유선(朱遊仙)! 너를 기다리고 있었다. 네가 원한다면 그들을 모두 죽여주마!”
 사내가 몸을 돌렸다.
 물방울을 튀기며 적지 않은 사람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사내는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다시 입을 열었다.
 “살려주는 대신 너의 목숨을 나에게 맡겨라.”
 대두박은 고개를 끄덕거릴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앞뒤를 가릴 처지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생존(生存)!
 살아만 있다면 뭐든지 할 수 있을 테니까!
 
 
 4장 너 바보 아니냐?
 
 
 하오(下午).
 짙푸른 하늘이 불려 나온 듯 가까이 다가오는 그런 날이었다. 하늘에 떠 있는 새털구름 몇 덩어리가 불어오는 바람을 이기지 못하고 멀어져 갔다.
 바람에 흔들리는 풀을 지그시 밟고 서 있는 사내!
 몸에 걸치고 있는 의복은 가사촌의 사람들과 다를 바 없었으나 짙은 검미(劍眉)가 유난히 시선을 묶고 깊숙해 보이는 눈에 총기를 더하는 사내였다.
 도톰한 입술이 붉어 여인보다 더 아름답게 보이는 사내, 더구나 창백한 피부.
 사내는 오랫동안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등 뒤에 서 있는 오두막의 낡은 지붕이 바람에 날리고 있었다.
 풍기!
 대두박의 유일한 친구.
 대두박을 따르는 아이들은 적지 않았지만 풍기처럼 그가 모든 것을 주고받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돌아오지 않을 거야.”
 풍기는 뒤를 돌아보았다.
 비라도 쏟아지면 한 순간에 무너질 것 같은 초막이 눈에 들어왔다. 풍기와 대두박이 육 개월 동안 함께 기거하면서 그들의 애환(哀歡)과 슬픔을 함께했던 곳이었다.
 “나도 이제는 이곳을 떠나야겠지. 나는 이제 가문으로 돌아가겠어.”
 풍기는 손을 말아쥐었다.
 비록 열일곱 살의 어린 나이라 해도 얼굴은 여물어 있었다. 가냘픈 몸이기는 해도 눈에서 뿜어지는 빛이 그의 결심을 여실히 드러내주고 있었다.
 몸을 돌리려던 풍기는 황하가 흐르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희미한 안개 속으로 드러나는 황하는 뜨거운 태양을 받아 편광을 반사시키고 있었다.
 그는 눈이 부신 듯 눈썹을 찡그리며 몸을 돌렸다. 그의 등 뒤에는 나직하게 흐르는 목소리만이 남았다.
 “언젠가는 만나겠지······”
 
 ***
 
 하남(河南)과 안휘(安徽)를 가로지르는 대별산(大別山)의 주봉(主峰) 중 하나인 구봉첨(九峰尖)에는 햇볕이 드는 날이 드물었다.
 해가 뜨지 않는다는 말은 어울리지 않았다.
 문제는 안개.
 산이 높아 구름이 끼기도 하지만 멀지 않은 곳에 장강(長江)에서 갈라져 나온 사하(史河)가 촉수를 내밀 듯 기저부(基底部)까지 밀려와 있어 사시사철 물안개가 피어오르기 때문이다.
 산줄기를 거슬러 올라가듯 골짜기마다 파고든 수십 개의 계류(溪流)와 사하에서 뿜어지는 물안개는 하루의 절반을 안개에 싸여 있게 했고, 지상에서 수백 장 높이에 이르는 구봉첨의 정상에는 구름이 흐르는 물처럼 흘러다녔다.
 안개 낀 산 속에서 물체를 판별하기는 어려웠다. 움직이는 짐승은 고사하고 사람의 흔적마저도······
 사하에서 갈라진 수십 줄기의 계류는 구봉첨을 감싸고 돌았고, 그 중 한 줄기의 계류는 아미곡(蛾眉谷)으로 스며들었다. 사하로 이어지는 물줄기 중에서는 가장 큰 물줄기!
 아미곡을 아는 사람들은 넓이가 십 장이나 되며 바위를 비껴 흐르고, 폭포를 이루며 흐르는 물줄기를 가리켜 노호계(怒虎溪)라 불렀다. 노한 호랑이와 같다는 뜻으로.
 아미곡은 구봉첨에서 가장 크고 깊은 골짜기였다. 반월처럼 휘어진 골짜기 안으로 기기묘묘(奇奇妙妙)한 바위와 울창한 수림(樹林)이 사람의 발길을 막아 오래도록 사람의 왕래가 흔하지 않았다.
 입구는 좁아 마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산의 뿌리가 협곡으로 쏟아져 내리는 모습을 지니고 있지만, 안으로 들어갈수록 넓어져 나무만 없다면 수만 평은 넘어 보이는 그런 곳이었다.
 험지(險地)와 평온(平溫)한 기류가 함께 자리하는 곳!
 아미곡은 이름에서 풍기는 것처럼, 험하기만 한 곳이 아니라 아름답고 평화로운 곳이어서 골짜기에는 계류가 흐르고 짐승이 뛰어다녔다.
 
 길게 늘어진 두 개의 그림자는 석양을 등에 지고 있었다.
 거지의 행색이 그러할까?
 두 사람은 한결같이 거친 마의를 입고 있었고 그나마도 찢기고 더러워져 사람이 입은 옷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차라리 개가 잠자는 곳에 던져 주어야 어울릴 것 같은 옷!
 중년의 나이를 지닌 사내와 십칠팔 세의 청년.
 대두박과 그를 구한 주유선이었다. 그들의 모습은 주유선이 갈대밭에서 대두박을 구했을 때와 달라진 것이 없었다.
 굳이 변화를 찾는다면 먼지가 날려 옷이 뿌옇게 보이고 대두박의 옷에 뿌려진 혈흔이 흐려졌다는 것! 옷이 더욱 더러워지고 낡아졌다는 것도 한 가지 달라진 점이라 할 수 있다면 변화라고 할 것이다.
 그들은 한동안 서서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거대한 문!
 그들이 서 있는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기울어져 곧 무너질 것처럼 보이는 산문(山門)이 서 있었다. 산문으로 이르는 길은 사람의 행적이 끊어졌음을 보여주듯 잡초가 자라고 있었고, 섣부르게 달려나온 다람쥐가 빨간 눈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어느 산의 입구에나 서 있는 흔한 산문이 아니었다.
 중원에 산재한 대부분의 산에는 중양(中陽)을 기리기 위해 산문이 있게 마련이다. 그 산문의 규모가 크고 작은 차이는 있으나 명산(名山)이라면 당연히 산문이 있었다.
 산문에는 제사(祭祀)를 지내는 작은 제실(祭室)이 있고, 산을 표하는 표문(表文)이나 표각(表閣)이 세워져 있게 마련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바라보고 있는 산문은 산의 입구를 표시하거나 출입을 막고 중양의 공덕(公德)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것과는 달라 보였다.
 산문의 입구로 들어서던 그들은 멈춰서서 한동안 골짜기를 바라보았다. 반쯤 무너진 산문 뒤로 구절양장(九折羊腸)처럼 늘어진 산길이 끝이 보이지 않게 나 있었다. 간혹 나무와 산뿌리에 숨겨지기도 한 길은 계곡을 따라 계속 이어졌고, 결국에는 산 속으로 사라졌다.
 “좋은 곳이군요. 심산유곡(深山幽谷)이라는 말은 일찍이 들어봤지만, 사람의 흔적을 느낄 수 없다니······”
 대두박은 호기심에 들뜬 목소리를 흘렸다.
 주유선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선 곳과 산문 사이의 거리가 적어도 십 장은 되었지만 발치에서 늘어지기 시작한 그림자는 산문의 기둥에 그들의 상반신을 드리우고 있었다.
 정상에서 불어내리는 바람은 더할 수 없이 시원하여 지난 열흘 이상의 긴 행보(行步) 동안 흘린 땀을 단숨에 씻어내리는 것 같았다. 마치 바람에 목욕이라도 하는 듯한 시원함이 그들의 얼굴에서 고단함을 지워버렸다.
 서쪽 산이 드리우는 긴 산 그림자가 그들의 발까지 내려와 있었다.
 등에서 부어지는 붉은 노을이 그들의 그림자를 무한정으로 자라게 만들었고, 사람의 흔적이 없는 산문에서는 아지랑이 같은 열기가 스멀거리며 피어오르고 있었다.
 “정말로 이곳이······?”
 대두박의 말에 주유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이곳이 앞으로 네가 살아갈 곳이다.”
 대두박은 눈을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 찡그린 듯 시선을 가늘게 만든 그가 산문을 바라보자 그의 전두(前頭) 부위에 가는 주름이 잡혔다. 그러다가 만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그의 모습을 바라보는 주유선도 대단히 만족한 모습이었다. 입가에 흐르는 미소로 보아······
 대두박은 조심스러운 걸음걸이로 기울어지고 무너진 산문을 향해 다가갔다. 산문은 어긋난 문계(門桂 : 문설주)와 문함(門檻 : 문지방), 기둥 사이가 벌어지기는 했지만 출입을 제한하려는 듯이 그럭저럭 굳게 닫혀 있었다. 막상 다가가보니 곧 무너질 것 같은 산문에는 만초(蔓草 : 칡) 넝쿨이 매달려 있어 쇠락(衰落)한 장원의 전문(前門)을 보는 것 같았다.
 “이곳에는 아무도 살지 않는다는 말씀인가요?”
 “그렇지는 않다. 지금까지는 나와 내 사제(師弟)만이 살았다. 그러나 이제는 네가 있으니 식구가 한 명 늘어 세 사람이 살게 되는 셈이지.”
 “사제라고요?”
 “그렇단다. 내가 알기론 사제는 외공(外功)에 관한 한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 비록 누구와 겨루어보지는 않았다 해도 강호에서 그를 이길 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을 것이다. 그의 피부는 강철처럼 단단하고 뼈는 철골(鐵骨)처럼 강하다. 다만 사제는 어떤 충격으로······”
 대두박은 몸을 돌려 주유선을 바라보았다.
 “충격?”
 “그렇다. 사제는 어릴 때 어떤 충격을 받아 마음이 성숙하지 못했다. 그러나 생각보다 답답하거나 말썽을 피우는 정도는 아니다. 그 아이는 오랫동안 아미곡에서 살아왔고 나와 함께 주식(主食)을 해결하고 있다. 아마 그 아이가 없었다면 나도 거지처럼 밥을 찾아 이곳을 떠났을지도 모른다. 비록 약간의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사제는 사고(思考) 기능을 가지고 있으며 어린아이처럼 순수하다.”
 “그렇군요.”
 대두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어떤 말을 해도 사제라는 미지(未知)의 인물에 대한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주유선이 아무리 축소하고 혹은 과장해도 대두박의 생각에 어떤 한계를 줄 수는 없었다. 그의 말은 대두박의 귓속으로 들어오고 있었지만 추측 이상의 것은 주지 못했다.
 대두박은 입을 열어 궁금증을 해결하고자 했다.
 “이곳은 왜 이렇게 되었지요? 당신은 이곳까지 오는 동안 우리가 가는 곳이 자랑스러운 곳이라 했잖아요.”
 주유선이 눈썹을 찡그렸다.
 그의 눈이 유리알처럼 투명해졌다. 오래지 않아 평소 그의 눈처럼 가라앉았지만 대두박은 그의 눈길 속에서 막연함과 불길 같은 뜨거움을 느낄 수 있었다.
 한동안 산문을 지그시 노려보던 주유선은 이윽고 입을 열기 시작했다.
 “이곳은 나의 사조(師祖)께서 이백하고도 십오 년 전에 의기로운 자들의 힘을 모아 세운 곳이다. 질시받고 배척받는 자들의 고향이지.”
 “질시? 배척? 그럼 이곳에 살았던 사람들은 모두가 세상에서 업신여김을 받거나 저처럼 쫓기던 사람들이라는 말인가요?”
 대두박은 놀라 소리쳤다.
 놀라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신경이 쓰였기 때문인지 양관골(兩觀骨)에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주름이 파였다.
 주유선의 입에서 흘러나온 ‘질시’와 ‘배척’ 같은 말들은 그에게 너무도 익숙한 말이었다. 그가 중원을 떠돌며 익힌 말이었고 치욕적으로 느끼는 말이기도 했다. 그도 열 살 이전에는 그런 말들이 사람을 피폐(疲弊)하게 만들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다.
 하나, 그는 열 살 이후로 충분히 피폐해져 있었다. 오요(五凹 : 관상학에서 말하는 귀, 눈, 코, 입)에 육신기(六神氣) 중 구진(句陳 : 관상학에서 말하는, 겉으로 드러나는 기운 중 하나로, 운이 넓게 펼쳐지지 못하고 기운다는 신기)이 덮여 있으니 그 모습이야말로 악살(惡殺)을 면한 것이 다행이었다.
 그토록 그는 고난을 겪으며 살아왔다.
 사람은 살아온 행로가 얼굴에 새겨지는 법!
 대두박은 주유선이 하는 말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잘 알고 있기에 아미곡이 어떤 곳이었는지 충분히 이해가 가고도 남았다.
 대두박은 주유선이 하는 말의 의미를 누구보다도 몸으로 체험하고 있었고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렇단다. 장원을 이곳에 세운 이유는 뛰어난 풍수지리(風水地理)와 중원무림의 중앙에 위치했다는 점 때문이었다. 또한 주변이 험해 쉽게 공격을 받지 않는다는 것도 구봉첨을 택하게 한 이유였지. 물론 산이 높고 계곡이 깊다는 경관(景觀)과 입지(立地)를 가지고 있으니 금상첨화(錦上添花)였겠지. 대별산은 높고 험해 누구도 함부로 산문을 넘을 수 없다. 그러나 그것도 이미 지난 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왜죠?”
 “우리 아미곡은 이제 마지막 후인(後人)을 남겼을 뿐이다. 나마저 쓰러진다면 이제는 영원히 재기(再起)하지 못할 것이다. 참으로 슬픈 일이다.”
 “저를 살려준 이유도······?”
 “아직은 묻지 마라. 차차 알게 될 것이다.”
 할말은 많았다.
 대두박은 입을 열려다 그만 다물어 버렸다.
 주유선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눈을 돌리고 바라보니 입술을 굳게 다문 주유선은 얼굴이 달아올라 있었다.
 평소의 그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와 가사촌을 출발해 대별산에 이르는 동안 주유선은 늘 부드러웠고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한데, 지금 갑자기 변하는 그의 표정은 대두박에게 입을 열지 못하도록 만들었고 어쩐지 그의 감정이 전달되는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대두박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움켜쥐었다.
 대두박은 고개를 끄덕이며 산문으로 다가가 이곳저곳을 만져 보았다. 불현듯 생각난 것처럼 정색을 하고 주변을 세밀하게 둘러보기도 했다.
 오래된 습관이었다.
 부친은 돌아오지 않고 장원에 불이 나던 날 이후 고아가 되어 중원을 떠돌며 스스로를 돌보며 살아야만 했다. 주변을 세밀하게 관찰하고 만약의 경우를 대비하는 것은 몸에 익은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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