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백전기 1권
서장
1. 전설
그것은 하늘의 소산이다.
그것을 얻는 자는 천하를 거머쥘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나는 눈으로 보고도 가질 수 없었다. 또한 가지고 나올 수도 없었다.
애석하다.
내 손에 쥘 수 없음을. 나는 그것, 천하를 움켜쥘 수도 있는 보물을 눈 앞에 두고도 손도 뻗어보지 못했다. 만약 내가 살아서 다시 그곳에 갈 수 있다면 허망하게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태양화제가 남긴 내공구결.
인연이 있는 자만이 가질 수 있다.
그 길을······
“이럴 수가?”
남궁옥은 튕기듯 일어났다.
침상에 누워 조상들이 남긴 서책을 읽던 그녀는 눈이 방울처럼 불거지는 구절을 보았다. 그 동안 오래 살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녀는 수천 권의 책을 읽었고 앞으로도 읽을 것이다. 그러나 가리지 않고 다독하는 그녀로서도 그토록 눈을 잡아묶는 구절을 본 적이 없었다.
조상이 남긴 책.
눈을 묶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희열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닌가?
먼지가 가득한 서고에서 쓸어온 책이었다.
침상에 누워 있었을 때, 책을 뒤적이다 놀라기 전에 그녀의 서늘한 봉목에는 수심이 깔려 있었다.
언뜻 보기에도 미인이라는 소리가 나올 것 같은 소녀였는데 수심에 잠긴 모습이어서 더욱 아름다워 보였다. 그러나 자신이 본 서책의 내용으로 인해 수심은 제법 가라앉아 있었다.
엉덩이까지 자란 칠흑같이 긴 머리가 사람의 시선을 묶기에 충분하고 넓은 이마는 메뚜기의 이마를 닮았다. 깊고 끝이 보이지 않을 것 같은 눈은 흑백이 뚜렷하기만 해서 높은 코와 조화를 이루었는데······
“이, 이럴 수가?”
남궁옥은 참을 수 없는 희열에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것은 새로운 희망과도 같았다.
언제나 명예로운 가문이었다. 더불어 영화로웠을 가문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영화롭지 못했고 그다지 화려하지도 못했다. 그것은 불행한 일이었으되 가문에서 기재라 불리는 남궁옥으로서도 막아볼 수가 없는 일이었다.
기울어진 무가.
한때는 무림 십대세가의 일원이었지만 지금은 용마루에 풀이 자랄 정도로 쇠락한 가문.
기회는 있다.
어쩌면 지난날의 명예를 되찾을 수도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참을 수가 없었다. 온몸에서 땀이 솟아나고 이마에 열이 오르는 것 같았다.
“남만이라고?”
남궁옥은 책을 덮었다.
그녀의 조상들이 남겨놓은 그 낡은 책은 남만의 경물을 기록한 내용이었다. 그런데 그 속에 천하를 경천동지로 몰아넣을 내용이 적혀 있으리라 누가 생각했겠는가?
경악이었다.
희열이기도 했다.
“유백 할아버지!”
남궁옥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남궁유백은 그녀로부터 거꾸로 거슬러 칠 대 위의 조상이다. 그녀의 가문에서 중시조로 불리는 사람이 바로 그녀가 읽은 책을 저술한 사람이다. 남궁가문에서 전설적으로 추앙받는 남궁유백이었는데······
한때는 검왕이라고 불렸던 무인으로, 남궁가문의 영화로움을 극한으로 끌어올렸던 사람이고 남궁옥이 소장주로 맥을 이어가는 남궁산장을 세운 사람이었다.
남궁옥도 들은 적이 있었다.
남궁유백은 어려서부터 방랑을 좋아해 천하를 떠돌아다녔다고 하지 않았던가?
“유백 할아지가 남긴 글인가? 그렇다면 이 글은 사실이다. 전설이 사실이었단 말인가? 물론 내가 이 책을 찾아내고 혹시나 기대를 하긴 했지만 대대로 내려오던 이야기들이 사실일 것이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었다.”
손에 힘이 들어갔다.
밤을 새워 책을 읽은 후였기 때문에 몸이 부자연스러웠고 쌓여 있는 책 때문에 침상은 한쪽으로 기울어진 기분이 들 정도였다.
“으아아아!”
절로 나는 탄성.
그것은 희열!
생각할 수도 없었던 일이었다.
그녀는 너무도 기쁜 나머지 미친 듯이 책을 집어던지며 소리를 질렀다.
우당탕!
너무 흥분했기 때문인지, 몸을 비틀자 침상이 심하게 출렁거리며 침상 위에 쌓여 있던 책들이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남궁옥은 미처 몸의 중심을 잡지 못하고 나동그라졌다.
그녀는 아픔 따위는 생각지도 못한 모습으로 튕기듯 일어났다. 발목이 접질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지만 문제가 될 것은 없었다.
“아버님께 알려야 한다.”
남궁옥은 튕기듯 몸을 세웠다.
단아한 방에는 두 사람이 앉아 있었다. 그들 사이에 놓인 것이라고는 작은 원탁밖에 없었다. 굳이 따진다면 촉루를 흘리고 있는 삼지촉을 이야기할까!
파르르르!
삼지촉이 몸서리를 쳤다.
수염이 길고 이마에 주름이 깊어 언뜻 보아서는 노인처럼 보일 한 명의 중년인과 한 명의 소녀. 그들은 오래도록 서로를 마주보고 앉아 있었다.
“옥아!”
중년인이 입을 열자 소녀가 그를 바라보았다.
“말씀하십시오, 아버님.”
중년인이 고개를 저었다.
언뜻 보아서는 조손간이라 보아야 할 것 같은데 묻고 대답하는 모습은 부녀간이다. 중년인이 정말로 소녀의 부친이라면 늦은 나이에 손을 보았을 것이다.
가문의 대를 이은 유일한 자식, 비록 딸이라고는 하지만 언제나 자랑스러웠다.
남궁옥은 고개를 숙였다.
중년인은 한참 동안 애처로운 모습으로 딸을 바라보았다. 어딘지 모르게 슬픔이 밀려오는 그런 모습이었다. 그나마 심연에서 밀려오는 아픔을 참으려고 애를 쓰는 모습.
무엇이 회한을 일으키는가?
“너는 정말로 그 험한 곳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하느냐?”
“그래요. 남궁가문은 이미 기울어졌어요. 과거의 영화는 찾아볼 수가 없지요. 제가 가지 않는다면 다시는 영화를 불러일으키지 못할 거예요. 한때는 중원의 일각을 차지했던 남궁가문의 이름은 영원히 사라지고 말겠지요.”
“간다고 해서 네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는 보장은 없지 않느냐?”
“그래도 가야 해요.”
남궁옥은 입술을 깨물었다.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만약 그녀에게 오빠가 있거나 가신들을 믿을 수 있었다면 굳이 앞서는 일 따위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에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부친은 연로하고 가신들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그들마저 남만으로 떠난다면 위태한 남궁산장은 위기에 몰릴 것이다. 어쩌면 남아 있는 식솔들이 모두 죽고 남궁산장은 한 순간에 무너지고 말 것이다.
남만은 너무도 먼 길이었다.
더욱이 남궁가문은 강한 적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그래도 가야 한다는 것이 그녀의 생각.
만약 남궁가문에 남궁옥이라는 경국지색의 미인이 없었다면, 그녀에게 지혜가 없었다면, 그녀가 뛰어난 사부를 만나지 못해 세상의 이치를 깨닫지 못했다면 남궁가문은 이미 오래 전에 초토화가 되었을 것이고 풀뿌리조차 남아 있지 않았을 것이다. 남궁산장을 노리는 적은 남궁산장을 붕괴시키기 원하면서도 가능한 한 남궁옥을 자신들의 수중에 넣으려 했다.
미모도 그러하려니와 그녀의 머리에서 나오는 지혜는 수백 명의 무인을 능가하고 있으니.
“나는 너를 보낸다는 사실에 가슴이 아프다.”
“아버님, 그래도 가야 합니다. 지금은 견디어낼 수 있지만 언젠가는 무너지게 될 것입니다. 조상이 남긴 길을 따라 천하제일의 무공을 얻는 것만이 우리 가문이 살아날 수 있는 길입니다. 더 이상 생각할 여력이 없어요.”
“그러나 너는 우리 남궁가문에 마지막 남은 혈손이다. 너까지 어찌 된다면······”
남궁옥의 부친이 얼굴에 주름을 잡았다.
남궁도백!
젊었을 때는 그 사람됨으로 칭송을 받았다.
일장검이라는 외호와는 달리 무공은 그리 강하지 않았다 해도 술을 좋아했고, 친구를 사귐에 가리지 않았다. 학문에 능해 친구가 적지 않았으며 오래 전부터 상권에 눈을 떠 가문을 부근에서 가장 부유하게 만들었다.
가세가 기울어진 지금도 황금은 넘쳐 난다.
모든 것이 변했다.
이제는 황금으로도 무인을 살 수 없었다. 황금이 있어도 무인이 없다면 무가로서의 명성을 이어갈 수 없거니와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풍전등화의 위기가 닥칠 수밖에 없었다.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그녀는 안다.
“아버님, 만에 하나 제가 조상의 기록에 남아 있는 천하제일의 무공을 얻지 못한다면 우리 가문은 다시 일어설 수 없는 길을 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를 압박하는 자가 아직은 저를 탐내고 있고, 제가 아직 일신의 결심을 하지 않은 이상 기회는 있습니다. 저는 곧 출발하겠습니다. 아버님은 제가 돌아오기 전까지 어떤 일이 있어도 버티어내야 합니다.”
남궁도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어쩔 수 없었다.
빙그레한 웃음.
남궁옥은 그렇게 웃었다. 그것 외에는 그녀가 부친에게 보여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어쩔 수 없구나. 우리에게 선택할 길이란 없으니. 가거라! 그러나 조심하거라. 그들이 노리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그들이 원하는 것을 얻고 나면 어떤 일을 벌일지 누구도 알 수 없다. 네가 아무리 조심해도 그들은 네 뒤를 밟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마음이 편치 않구나. 너에게 두 명의 가신을 붙여주겠다. 이제는 그것만이 너를 도울 수 있는 전부다.”
“알고 있어요.”
남궁옥은 고개를 끄덕였다.
겉으로야 그리 담담하게 이야기를 했지만 마음 속에서는 부글거리는 거품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 마음 속에도 참을 수 없는 욕망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숨길 수 없었다.
꾸욱!
남궁옥은 이를 깨물었다.
‘나에게도 기회는 있다. 남궁가문을 이렇게 만들어놓은 놈들을 용서할 수 없다. 그것을 목적으로 하여 먼 길을 가는 것이지만, 천하제일의 무공이 내 손에 들어온다면 네놈들을 갈가리 찢어죽일 것이다.’
남궁옥은 눈에서 한광을 발했다.
2. 음모
“흡!”
용백은 숨을 들이켰다.
심장을 파고들 듯 조마조마하는 마음으로 문설주를 잡았을 때 끈적거리며 다가와 흥건하게 묻은 이물!
그것은 피였다.
물론 눈으로 확인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몸을 돌릴 수는 없었다.
방 안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동으로 난 창이 열려 세우처럼 가는 빛줄기가 새어들고 아문의 담에 기대어진 화로에서 불이 타오르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만으로 방 안의 정경을 살피기에는 부족했다. 화로에서 타오르는 불빛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그저 손바닥만큼.
훅 하니 파고드는 냄새.
무엇일까?
마음을 안정시키려고 호흡을 가다듬었을 때 진한 혈향이 코로 스며들었다.
목덜미가 싸늘해지는 것 같았다.
누군가 목에 예리한 칼날을 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날씨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미 알고 있었던 일이고 예상했던 일이었으므로.
모르고 달려왔다면 매우 놀랐으리라. 그러나 이미 알고 달려온 일이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다.
잠을 깨우는 자의 음성에 놀라 쉬지 않고 달려온 뒤였기 때문에 등과 얼굴에는 땀이 흐르고 있었다. 손에 닿는 이물질의 감촉과 코로 스며드는 진한 혈향 때문인지 한 순간에 등을 흐르던 땀이 식어버리는 것 같았다.
“헉!”
미처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도 비명이 목을 훑고 울려나오고 있었다. 열려져 있어 희미하게 비쳐 드는 불빛에 드러나 보이는 바닥과 마구 엉클어진 침상에는 붉은 피가 만발한 장미처럼 뿌려져 있었고 바닥에는 두 개의 시체가 구르고 있었다.
제법 큰 전실이었다.
용백의 눈이 빠르게 주위를 훑었다. 희미하지만 보일 것은 보였다. 전실 안쪽으로 은은히 들여다보이는 침상에는 사건 같은 천으로 만들어진 주렴이 쳐져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내부는 어둠에 가려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다.
물컹!
발이 미끈거리며 몸이 기울어지자 코를 박고 엎어져 있는 시체가 눈에 들어왔다.
‘포두들인데······?’
쓰러져 나뒹구는 자들이 누구인지 알아보기가 그다지 어렵지는 않았다. 포방의 관인들이 입는 복장인 것으로 보아 그들은 포두들이 틀림없었다.
바닥에는 피 묻은 박도가 두 자루나 뒹굴고 있었다.
‘뭔 일이 있었나?’
주저앉을 것 같았다.
포정사사에서 오래도록 많은 사람의 죽음을 보았고 시체를 검시하는 것이 용백의 임무라 하지만, 막상 방 안 가득 뿌려진 피를 눈으로 확인하자 오금이 저리고 알몸이 뜨거운 태양 아래 노출되어 숨이 턱턱 막히는 것 같았다.
용백은 자신이 들어서자 밖을 지키고 있던 포두와 정용이 문을 닫았다는 것도 인식하지 못했다. 또한 포정사가 죽었다는데 겨우 한 명의 포교와 허드렛일을 거드는 정용이 나와 있다는 것이 기이한 일이라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포정사가 죽었다면 적지 않은 군병들과 관리들이 몰려나와 주변을 감찰하고 오고 가는 사람들을 살펴야 했다. 곳곳에 횃불이 켜지고 병기를 허리에 단 군병들이 우글거려야 옳았다.
그것이 당연한 이치임에도 용백은 다급한 마음이 들어 일의 전후를 가리지 못했다.
사실 잠자리에서 연락을 받아 허겁지겁 달려왔으므로 앞뒤를 가릴 여유가 없었다. 무작정 달려온 것은 시체를 검안하는 일이 그의 직분이었기 때문.
더군다나 포정사가 죽었다니 더욱 서두를 수밖에.
그저 방 안이 너무 어둡다는 생각만 들었다.
코로 스며드는 피냄새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사실이군.’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기는 했다.
죽은 사람이 누구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마음의 파문은 쉽게 잠재워지지 않았다. 두렵기는 하지만 자신이 온 이유, 목적을 망각할 수 없었다.
용백은 아문에 매인 내의원으로, 지부를 위시해 관리들을 치료해야 하는 임무를 지닌 의원이었다. 또한 지부에서 죽은 시체들도 그의 손을 거친 후에야 죽음으로 인정된다. 그가 죽었다고 말을 한 후에야 통판과 추관은 죽음을 사실로 인정하고 사인을 밝히기 위한 검시를 지시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관리이거나 초부이거나 그의 손을 거치지 않는 경우는 드물었다.
잠자리에 든 지 불과 반 시진이 지나지 않았을 때 용백에게 포정사가 죽었다고 알려온 사람은 장 포교였다. 아니, 죽을 것 같다고 했던가?
살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혹시 살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를 바쁘게 했고 앞뒤 가리지 않고 포정사의 방으로 달려들게 했다.
“불을 켜야지.”
갑자기 드는 생각.
어두운 방에서 불도 켜지 않고 시체를 보면 혹시 살아 있을지 모르는 사람을 살릴 수는 없었다.
용백은 끌어안고 있던 침구를 내려놓고 품을 뒤져 불을 켤 수 있는 도구를 찾아들었다. 손가락보다 가는 작은 막대가 손에 쥐여졌다. 그것은 가는 대나무 끝 사이에 자철석을 끼운 것으로 화섭자와 같은 용도로 쓰이는 것이었다. 첩혈을 위해 늘 옷깃에 꽂아놓는 작은 철침을 꺼내들고 자철석을 긁자 불똥이 일어났다.
약간의 시간이 흘렀기에 숨이 가다듬어졌다고는 하지만 경황이 없어 방 안의 정경을 자세히 살피지는 못했다. 그러나 불똥이 튀는 순간에 향촉이 세워진 곳은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향촉 앞에 이르자 자철석을 긁어 튀어오르는 불똥을 향촉에 가져다 대었다. 마음이 급해서인지 마음이 안정되지 않아서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었지만 바람을 받은 갈대처럼 손이 떨려 몇 번 동안 계속한 후에야 향촉에 불이 붙었다.
방 안을 둘러보았다.
‘아주 짓이겨놓았군.’
소름이 돋았다.
방 안은 아예 피로 도배를 해놓았고 침상에도 피가 흥건했다. 향촉이 세워진 탁자 주위의 벽에도 피가 묻어 있었다. 피가 묻은 손으로 찍은 것 같은 자국이었다.
방은 넓었고 주렴이 길게 늘어져 자세히 보이지는 않지만 하나의 인형이 침상 위에 널브러져 있었다. 연락을 받은 것이 사실이라면 침상에 누워 있는 것처럼 보이는 그림자가 포정사일 것이다. 바삐 서두르면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했으니 머뭇거릴 시간이 없었다.
“어서!”
그는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발을 옮길 때마다 발바닥에 피가 묻어 붉은 족인이 피어났다.
화르르르!
열려져 있던 창으로 바람이 불어들고 일렁이던 향촉이 꺼지며 한 순간에 모든 것이 암흑으로 물들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으니 방향을 가늠하기조차 어려웠다.
추측할 수 없는 두려움과 불안이 엄습했다.
의생으로서 시체를 한두 번 본 것도 아니고 죽음을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기이하게 몸을 말아오는 듯한 기분은 몸을 옥죄고도 모자라 심장을 덜컥거리게 만들었다.
‘기이한 일, 이건.’
백 번 생각해도 기이한 일이었다.
처음에는 그저 마음이 급해 지나쳤지만 다시 생각하니 있을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포정사가 죽었는데 오로지 한 명의 의생만을 불러다 놓고 문까지 닫아놓았다. 무엇을 하자는 건가?
의문이 아니라 위기였다.
마음이 급해졌다.
불을 켤 수 있다는 사실도, 자신의 품 속에 불을 켜는 도구가 있다는 사실도 잊어버렸다. 그보다는 죽음이 눈 앞에 있고 시체가 뒹굴고 있다는 사실에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조차도 잊어버렸다. 오로지 두려움뿐.
“누구 없소?”
용백은 밖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왈칵 두려움이 밀려들고 누군가 목줄이라도 움켜잡을 것 같은 두려움이 머리카락을 하늘로 뻗쳐 올라가게 했다.
시체를 한두 번 본 게 아니지만 이토록 어두운 밤에 시체를 만난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었고, 자신에게 닥친 일이 위기라는 것을 인식하자 간이 오그라드는 것 같았다.
갑자기 불이 꺼졌기 때문인지 두려움은 더했다.
몸을 돌렸다.
아스라한 불빛이 다가오고 다급하게 울리는 발걸음 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용백은 미친 듯이 문을 향해 달려나갔다.
미끈!
발이 미끄러지며 몸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아득해지는 기분이 일고 이어 몸에 둔기가 떨어져 내린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 몸이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으으윽!”
허리를 펼 수 없을 정도로 고통이 밀려왔다.
몸의 한 곳이 부서졌는지 움직일 수가 없었다. 팔다리가 따로 노는 것 같았고 온몸의 마디마디가 부러진 것 같았다. 온몸에서 피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옷자락에 피가 묻었는지 끈적거리는 기분이 그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용백은 고통을 참으며 몸을 일으켰다.
“어서 가라.”
“대인의 방에서 일이 벌어졌다.”
우르르 몰리는 듯한 발걸음 소리가 문 밖에서 들려오고 횃불을 든 포정사의 군병들이 나타났다.
벌컥!
문이 열리며 사람들이 안으로 밀려들었다.
그들은 손에 횃불을 들고 있었고 창을 든 자도 있었다. 그들 중에는 박도를 든 자들도 있었는데, 하나같이 포정사사에 딸린 홍의병들이었다.
“대인이 죽었다!”
“놈을 잡아라!”
창이 겨누어졌다.
용백은 엉겁결에 소리를 질렀다.
“나, 나, 나는 아니오! 살, 살려주시오.”
용백은 소리를 지르며 허우적거렸다. 몸이 말을 듣지 않았고 두려움이 가슴 속을 파고들어 혀가 꼬이는 것 같았다. 그는 미친 듯이 문을 향해 기었다.
손발이 끈적거렸다.
불빛에 몸을 비춰 보니 온통 피에 절어 있었다. 손바닥에도 피가 묻어 바닥을 길 때마다 손자국이 눈 위에 새겨진 꿩의 발자국 같았다.
“놈을 잡아라!”
갑자기 함성이 울리고 군병들이 뛰어들어왔다. 용백은 그 자리에서 멈춰 손을 들었다. 군병들은 지체없이 용백의 두 팔을 등으로 잡아 틀어 움직이지도 못하게 했다.
반가움이 사라졌다.
“나는 내의원이오.”
용백은 버둥거렸다.
몸에 관포를 걸치고 박도를 손에 움켜쥔 장 포교가 달려왔다.
용백은 반가움에 얼굴에 화색을 띠었다.
장 포교야말로 용백을 포정사의 침실로 달려가게 만든 사람이었다. 그가 달려와 용백에게 포정사의 관저로 가라 명했던 것이다. 그가 아니었다면, 그의 명령이 없었다면 용백은 지금까지 곤한 잠을 자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그가 나타났으니 오해는 풀릴 것이고 악몽 같은 이 일은 기억의 저편으로 물러갈 것이다.
장 포교는 한참 동안 용백의 얼굴을 살피고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나 그는 판단이 끝났다고 생각했는지 뒤를 돌아보며 벽력처럼 소리를 질렀다.
“놈을 압송하라!”
3. 단우병서
“정말 가야 하느냐?”
“그렇습니다. 할아버지가 말린다고 해도 저는 가고 말 것입니다. 말리지 마십시오.”
“너는?”
“할아버지, 저는 그녀를 사랑합니다. 이번 한 번만 용서를 해주십시오. 어떤 일이 있어도 남궁옥을 설득하고 제가 원하는 것을 얻도록 하겠습니다. 피를 흘리지 않고 남궁가문을 손에 넣을 수 있다면 그것이 최선입니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입니다. 저도 할아버지의 생각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녀를 따라가야 합니다. 이번에 실패하면 모두 포기하겠습니다.”
“후!”
단우형백은 깊은 한숨을 불어내었다.
하나밖에 없는 손자였다.
가문의 모든 미래가 그에게 달려 있다는 것을 아는 지금 단우형백은 무작정 손자를 말릴 수만은 없다는 것을 모르지도 않았다. 손자의 성격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뛰어난 무골은 아니라도 성격이 치밀하고 한 가지에 매달리면 끝을 보고야 마는 성격이었다.
여자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넓은 대전에 마주앉아 있었다.
그곳은 단우가문을 이끌어가는 단우형백의 집무실이기도 하고 모든 단우가문의 식솔들이 우러러보는 곳이기도 했다.
단우각.
누각의 이름은 그렇게 불렸고 단우가문의 어른들이 사용하는 삼 층 높이의 전각이다.
사방의 벽에는 수를 헤아릴 수조차 없이 많은 서책들이 쌓여 있었고 틈틈이 병가가 설치되어 있어 십팔반 병기와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외문병기가 촘촘하다.
이 모든 것이 단우가문의 번영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지나지 않아 단우병서의 것이 될 것이었다.
단우형백은 눈을 들고 손자를 바라보았다.
“정말로 마음을 접을 수 없겠느냐? 그 계집아이로 인해 네가 피폐해지고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잊었느냐? 달리 생각하거라.”
“그렇습니다. 그러나 제가 그녀를 품에 넣을 수 있다면 남궁가문은 우리 손에 들어오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냘프기는 해도 오뚝한 코가 그가 지닌 성격을 이야기해 주는 것 같다. 손자의 모습이 마치 전장에 나가는 병사처럼 결연해 보이니 단우형백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보내주겠다. 그러나 이번 한 번뿐이다. 그러나 네 뒤를 보아줄 가문의 식솔들을 딸려보내는 것을 반대하지 마라. 나도 그것만은 물러설 수 없으니. 남만수비대의 당 장군에게는 미리 연락을 해놓도록 하마.”
단우형백은 허락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어차피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 했으니 손자를 이기는 할아버지는 더욱 없을 것이다. 내리사랑이라 했던가? 단우형백은 가문의 직손인 단우병서를 누구보다도 끔찍하게 아끼는 사람이다. 하나뿐인 혈손이니 당연하기도 하다.
환해진 얼굴의 단우병서는 단우형백의 손을 잡았다.
“할아버지, 고맙습니다.”
1장 불회지처
1. 발기산
철커렁!
발이 거추장스럽다.
발목과 손, 목에 채워진 가쇄는 용백의 몸을 한없는 나락으로 빠져 들게 했다.
가쇄는 오히려 무겁지 않았다.
박달나무와 철로 만든 고리, 목과 팔을 연결한 철삭, 그리고 발에 채워진 철환이 허리를 펴지 못하게 했지만 무겁다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았다.
마음이 문제였다.
걸음을 옮기지 못하게 방해를 하고 몸으로 파고드는 나무와 차가운 쇠의 감촉.
그것만이라도 없다면 살 것 같은데.
거추장스럽다고 할까!
비록 쇠로 만들어진 철환과 철삭, 박달나무가 살갗과 비벼져서 발목과 팔목에 화농 같아 보이는 상처를 만들기는 했지만 그다지 힘들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습한 기운이 몸을 더욱 괴롭히고 있었다. 암울하게 가라앉은 마음 또한 그의 숨을 거칠어지게 만들었다.
용백은 먹구름이 낀 것과도 같은 생각과 몸을 속박하는 모든 것들이 마음을 조여오는 것만 같았다. 그는 마음에 이는 스산한 바람으로 인해 몸을 지탱하기 어려웠다.
몸을 짓누르는 가쇄의 무게와는 달리 마음은 천근보다 더 무겁다는 생각이 들었다.
손에 감긴 철삭이나 풀어주었으면······
“미안합니다. 군령이니 어쩔 수 없어요.”
열다섯은 넘었지만 이십에는 이르지 못한 나이의 소년은 여드름 자국을 비비며 말했다.
용백은 말을 건네는 군병을 보고 애처로이 웃어주었다.
그는 아직 세상의 이치를 깨닫기 전의 나이로 보이는 군병이었다. 몸에 군포를 걸치고 목에 붉은 사건을 두른 호송병은 언제나 그랬듯 미안하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가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니, 혹시 모른다.
그는 용백이 어떤 연유로 고난의 짐을 지게 되었는지 알고 있는지도.
알아도 입을 열지는 않을 것이다.
목이 하나뿐이니.
두 명의 호송병은 자신들의 잘못도 아니면서 무엇이 그리도 미안한지 그와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어쩌다가 그와 눈이 마주치면 눈을 돌리는 것이 쥐구멍을 찾는 듯하다. 그들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들은 한 달하고도 보름 동안을 용백과 같이 지냈다.
그들의 임무는 용백을 발기산까지 호송하는 것이었다. 그 동안 그들이 살았고 지금도 살고 있는 호광에서는 생각하기조차 힘든 먼 거리, 단 한 번도 접해 보지 못한 습하고 후끈한 기후가 그들을 괴롭히고 있었다.
용백은 고개를 돌리고 그를 바라보았다.
“원, 날씨도······”
나이 어린 군병은 머쓱한 표정이 되어 습관적으로 몸을 돌리며 손등으로 이마를 씻었다.
늘 그랬듯 눈이 마주치면 나타나는 머쓱함이었다.
죄수의 신분으로 끌려다니는 용백도 고생이지만 호송하느라 신경을 쓰는 군병들의 고생도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들은 용백을 호광에서부터 발기산이라 불리는 험난한 곳까지 호송하는 군병들이었다.
호광의 고도 형주부에서 출발해서 남만의 수림지역에 이르는 동안 그들은 언제나 용백 곁에 있었다. 용백이 걸을 때 그들도 걸었고 용백이 잘 때 그들도 잠을 잤다.
그들은 죄수가 도주할까 봐 감시까지 해야 했으니 고통은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더했으리라. 먼 길을 간다는 사실만으로 볼 때 호송하는 군병이나 없는 죄를 뒤집어쓰고 하염없이 걷는 용백이나 다를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몇 번인가 길을 멈춘 적도 있었다.
그것은 갈라진 길에서 나아갈 방향을 정하는 경우이기도 했고 때로는 각 아문을 거치는 의례적인 일이기도 했지만 때로는 용백을 위한 배려이기도 했다.
그들은 가능한 한 용백을 위해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그들이 어리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들의 마음 씀씀이는 나이를 먹은 사람보다 나았는데, 거기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용백이 어떤 신분의 사람이었는지 알고 있었고, 호광의 포정사사에서 병이 나거나 상처가 생기면 용백에게 도움을 받은 적도 있었으니 구태여 거칠게 굴 필요를 느끼지 못했던 것 같았다.
형주부를 출발해 장강을 거슬러 올라올 때는 그래도 비교적 길이 편했다.
장강을 따라 관도를 걷는 일은 피로하기는 했지만 간혹 차가운 강바람도 불었고, 때에 따라서는 곳곳에 서 있는 한적한 농가에서 시원한 물도 얻어먹을 수 있었다. 먼지가 날리는 먼 길을 가야 한다는 부담이 있었지만.
그러나 호광에서 사천으로 들어서는 무산십이봉을 지날 때는 관도를 따라 걷느라 발이 부르틀 지경으로 고생을 했었다.
하나, 무협이 끝나는 봉령(?)에서 배를 타고 사천의 최남단 동천부까지 올 때까지는 편했다.
뱃길로도 삼천 리가 넘는 거리를, 게다가 무산십이봉을 넘어간다는 것은 너무도 멀 뿐 아니라 험했다. 더군다나 곳곳에 토비들이 나타나고 때로는 죄수들을 빼돌려 군벌 이상의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다. 할 수 없이 관표를 내밀고 군선을 얻어탈 수밖에 없었다.
배를 타고 있는 동안에는 죄수가 도주할 염려가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늘 여유자적하며 선상의 생활을 즐겼다.
한동안 그들은 죄수와 호송병의 관계에서 벗어나 같이 술을 마시거나 담소를 나누기도 했다.
하나, 그것도 잠시뿐.
마안산이 보이는 동천부에서 배를 내리자 다시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을 걸어야 했다.
군병들과 용백은 곳곳에 서 있는 이정표를 벗삼아 하염없이 남쪽으로 내려왔다.
용백은 그들이 길을 알고 있는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운남을 지나치는 동안 그들은 곳곳의 부중이나 아문에서 묵었다. 그 행색이 누가 보아도 영락없는 패잔병 꼴이었다. 그때마다 용백은 각 아문에 설치된 뇌옥에 갇혀 잠을 자고 그들이 깨우면 이른 아침에 일어나 길을 떠나고는 했었다.
“죄송합니다.”
아직도 여드름이 붉게 핀 단풍처럼 불거진 소년 군병은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으면서도 어쩔 수 없이 마음의 무게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들은 습관적으로 그같이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용백은 형주부에서는 소문난 뛰어난 의생이었고, 어려운 사람들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의술을 베풀었기 때문에 신의라는 미명을 얻기도 했었다. 또한 아문에서 내의로 생활했었기 때문에 몸에 종기라도 난 적이 있다면 용백의 손에 상처를 맡기지 않은 군병이 없을 정도였다.
“내의원님에게 죄가 없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아요. 모두가 힘이 없기 때문이지요. 모든 것을 알고 있기는 하지만 힘없는 저희들은 어쩔 수가 없어요.”
변명 같은 말이지만 그것이 그들이 할 수 있는 말의 전부였다. 이유야 어찌 되었거나 그들은 초부로 태어나 말직의 군병으로 군역을 나온 자들이었다. 그들에게 피해를 줄 수 없다는 생각에 몇 번이고 들썩거리는 엉덩이를 주저앉혀야 했다.
도주하려고 생각했다면 어찌 기회가 없었겠는가?
“저희들도 힘이 없어서······”
“내의원님을 놓아드리고 싶지만 저희들이 그 고초를 감당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들은 용서를 구했다.
그때마다 웃어줄 수밖에.
그들에게 어떤 기대를 한다는 것은 차라리 자신의 마음을 속이는 것이었다. 그들이 무엇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 바란다는 것이 애초부터 잘못된 생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한 가지 방법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을 실행하면 소년 군병들은 채 피어보지도 못하고 시퍼런 작두에 목이 잘릴 것이다. 경중을 따져 보면 그렇다는 이야기가 된다.
살인죄.
시시한 살인죄라면 이와는 다를 것이다. 그러나 포정사를 죽였다는 죄명을 뒤집어썼으니 이 정도의 고초는 그다지 심한 것도 아니다.
죽지 않은 것이 차라리 이상할 지경.
기이한 것은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이 아닐까? 포정사사를 죽였다면 의당 참수형인데.
죄명이 뚜렷하고 만천하에 명백하니 그저 묵묵히 따라 걸음을 옮길 수밖에.
“알겠네. 자네들도 어쩔 수 없을 것이네. 내 걱정은 하지 말게나.”
용백은 그렇게 말해 줄 수밖에 없었다.
마음과는 다른 말이었지만 어떤 말도 그들의 행동에 변화를 줄 수는 없었다.
힘없는 자들.
그들이 아무리 용기가 있고 용백이 누군가의 흉계에 말려들었다는 것을 인식한다 해도 가쇄를 풀어주거나 모른 척 그를 놓아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만에 하나 그를 풀어주거나 놓아준다면 용백이 가야 할 곳에 그들이 가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고향에 부모와 사랑하는 형제들이 있을 뿐 아니라 언젠가는 온전히 성한 몸으로 그들에게 돌아가야 하는 입장이기도 했다.
돌이킬 수 없는 일을 할 사람들이 아니었다.
용백도 그들의 불행을 원하지 않았다.
용백이 도주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그들은 늘 우려와 근심, 그리고 만에 하나 용백의 탈주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을 두려워했다.
“나는 도망가지 않네.”
그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몇 번인가 이야기를 했다.
용백은 어떤 경우라도 도주할 생각이 없었다. 자신의 목에 씌워진 가쇄와 죄명이 어이없는 일이라는 것을 모르진 않지만 그들에게 애꿎은 피해를 주기는 싫었다.
“압니다. 그러나 저희들도······”
그들은 말을 맺지 못하고 얼굴을 돌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달라질 것이 있으리라고 기대하지도 않았던 일이었다.
형주부를 출발한 후 한 달하고도 보름 만에 운남의 최남단 서쌍반나[]에 도착했다. 구름 같은 군막이 나무로 만든 목책에 둘러싸여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남만수비대였다.
그들이 군막에 도착해서 안으로 전갈을 보낸 후 반 시진이 지나지 않아 십여 명의 군병이 나타났다. 한결같이 등에는 커다란 혁낭을 매고 있었고 팔목과 발목에 두툼한 보호대를 차고 있었다.
군막 안으로는 들어갈 수도 없었다.
“내가 인솔하겠다.”
나타난 군병들 중에서 몸에 쇄자갑을 걸치고 허리에는 장도를 찬 장수 복장의 군병이 말했다. 그의 뒤에는 박도를 차고 창을 든 십여 명의 군병들이 따랐다.
장수 복장을 한 사내는 제법 목소리가 굵었다.
“나는 만호장군 홍무전이다.”
남만을 정벌하기 위해 운남의 남부에 설치되어 있던 서쌍반나의 남만정벌대에서 나온 자는 직위가 만인호라 했다. 만 명의 군병을 거느리는 장군이 죄수를 호송하기 위해 직접 나왔다는 것이 기이했지만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오십을 바라보는 나이에 배가 불룩한 것이 영 눈에 거슬리기는 했지만 왈가왈부 논할 가치는 없었다.
죄수의 몸으로 무슨 말을 하랴?
목에는 붉은 사건을 두르고 있었고 쇄자갑 밖으로 드러나는 군포는 붉은 천이었다. 형주부에서부터 안내를 했던 군병들이 뒤로 물러서고 홍무전이 앞장을 섰다. 홍무전을 따라 나타난 십여 명의 군병도 뒤를 따랐다.
“천검대는 주위를 살펴라!”
홍무전이 소리를 지르자 박도를 든 군병들이 좌우로 벌려 섰다. 일사분란한 행동이 정말로 남만이 가깝구나 하는 생각을 주기에 충분했다.
“천검대는 남만수비대의 핵심입니다.”
무엇을 두려워하는 걸까?
형주부에서부터 호송을 해온 소년 군병이 다가와 귓속말에 가까운 소리를 흘렸다.
그의 의도를 알 수 있었다.
고난이 시작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리라.
“발기산으로 간다.”
발기산이 어딘지는 알 수 없다. 이름이 묘하기는 하지만 남자의 성기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지명이다. 나타난 장수, 홍무전과 천검대의 군병들이야말로 용백과 두 명의 호송병을 발기산이라는 곳까지 이끌 또 다른 안내자들이었다.
“따르도록 해라. 조금이라도 지체하거나 다른 생각을 하면 땅에 목이 구를 것이다.”
홍무전은 오랜 전쟁에 지친 표정이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살기가 맺혀 있어 도주하거나 머뭇거리기라도 한다면 정말로 죽일 것 같았다. 용백은 자신에게 고난이 닥쳐 오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너무도 먼 길이다.’
형주부에서 운남까지라니, 더구나 서쌍반나는 운남의 최남단이 아니던가. 이곳에서도 더 가야 한다면 그곳은 중원의 땅이 아닐 것이라 생각했다.
용백과 두 명의 군병은 그들에게 인도되어 난창강이 흐르는 곳으로 갔다.
난창강은 청해에서 발원하여 서장을 거쳐 운남으로 들어오는 긴 강줄기였다. 운남을 거친 강은 남만의 밀림으로 스며들었다. 소문에는 남만을 지난 후에도 수천 리를 달려 바다로 들어가는 물줄기라 했다.
용백은 사판이라 불리는 배에 태워져 강을 따라 흘러 내려갔다.
뗏목과 비슷한 구조를 지닌 배.
넓은 판지를 겹치고 덧대어 만든 배였다. 아무리 보아도 배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 모습이었다. 장강에서는 본 적이 없는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전후좌우가 없고 용골도 없었다.
그저 사람이 탈 수 있는 배였다.
다행히 배 위에는 바람과 태양을 피할 수 있는 작은 초막이 지어져 있었다.
용백을 포함해 열네 명은 사판을 타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알 수 없는 지형이었다.
사흘이라는 시간 동안 수림이 우거진 밀림 사이로 난 강을 따라 떠내려갔다. 그사이의 고통은 말로 형언할 수 없었다. 열기는 몸을 태울 것 같았고 수면에 반사되는 빛은 눈을 멀게 만들 것 같았다. 그나마 배 위에 지어져 있는 하나의 초막이 도움이 되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뜨거운 열기에 익어버렸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사흘이 지났을 때 붉은 강이 넘실거리는 어느 언덕에서 사판을 내려섰고 다시 밀림으로 들어온 지 사흘, 끝없는 밀림을 걸어 도착한 곳은 산과 산 사이에 고여 있는 늪지였다.
길도 없는 숲 속.
박도를 이용해 늘어진 넝쿨식물을 베고 곳곳에 연초의 잎과 명반을 뿌리며 전진한 후에야 겨우 도착한 곳이었다. 그런데 물이라니.
흐르는 물이 아니었다.
고여 있는 물.
사방을 둘러보아도 보이는 곳이라고는 산뿐이었는데 동경처럼 보이는 수면이 바람에 찰랑거리고 있었다.
“다 왔다.”
홍무전은 그렇게 말했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온통 물뿐이었다.
산을 오르는가 했는데 갑자기 나타난 늪지라니······
검게 탄 수초가 머리를 내밀고, 곳곳에 마치 물에 둥둥 떠다니는 물거품처럼 육지가 떠 있었다.
“저곳이다.”
수염이 숭숭 뻗어나와 마치 밤송이를 생각나게 하는 홍무전이 장도를 들어 한 곳을 가리켰다. 그는 자신의 임무가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말투가 퉁명스러웠다.
용백은 눈을 들어 앞을 보았다.
수면에서 뿌리가 드러난 나무들이 우거져 있었다. 수간은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고 뿌리는 수심에 잠겨 마치 위아래로 가지가 뻗어 있는 것 같았다.
중원의 나무가 밑동까지 흙에 박혀 있다면 이곳의 나무는 뿌리가 마치 가지처럼 자라 물 속으로 들어갔고 밑동처럼 보이는 곳은 허공에 떠 있었다.
수심에서 자란 수초가 수면으로 드러나 보이는 늪지는 왠지 모르게 황량하고 바라보기만 해도 거머리가 들러붙을 것 같았다. 몸이 부르르 춤을 추었다.
“형주와는 너무도 다른데요.”
호송을 했던 군병 중 한 명이 호광과는 너무도 다른 모습에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형주부는 장강 변에 위치하고 있다.
우기가 되어 일 년에 한두 번씩 장강이 불어나 흙을 파고 강둑을 허물어 드러나는 나무뿌리와 용백이 바라본 늪지는 느낌이 달랐다.
나무뿌리는 애초부터 그리 생겨먹은 듯 껑충하니 자라 있었다. 뿌리가 가지 같았고 가지가 뿌리 같은 나무들이 늪지에 떠 있는 것 같았다. 물 속으로 박힌 나무의 가랑이 사이로 부유물이 뜬 물이 흘러다니고 있었다.
“함부로 행동하면 대악의 먹이가 된다.”
홍무전이 입을 열자 형주에서부터 용백을 호송한 어린 병사들이 목을 움츠렸다.
촤르르르!
물보라가 일어나며 검은 물체가 다가왔다.
“대악이지. 놈들에게 걸리면 국물도 없어.”
홍무전이 키득거리는 말투로 그렇게 내뱉었다. 그러나 그도 두려움을 느끼는지 매우 조심스러웠다. 그는 오래 전부터 발기산을 왕복했는지 지형을 살피는 데 주저하거나 길을 여는 데 망설이지 않았다.
수면을 스치듯 다가오는 검은 악어의 행동에도 개의치 않는다는 표정이었고, 숲 속에서 엎어져 있던 세 척의 배를 찾아내는 데도 익숙했다.
굵은 통나무를 도끼로 찍어 속을 파내 만든 배는 배라 하기보다는 그저 몸을 실을 수 있는 물체에 불과했다. 용백과 호송을 맡았던 두 명의 군병, 그리고 홍무전과 남만수비대에서 나온 두 명의 군병이 한 척의 배를 타고, 남은 두 척의 배는 나머지 군병들이 타고 뒤를 따랐다.
남만수비대에서부터 따라오기 시작한 군병들은 어느 정도 익숙해졌는지 노를 젖는 데 무리가 없었다. 악어들이 다가왔다 멀어지기를 반복했다.
“어서 저어라.”
홍무전은 명령을 내리는 일 외에는 할 줄 아는 것이 없는 것 같았다. 군병들을 곤혹스럽게 하고 부하들의 공을 자신이 차지할 그런 인간으로 보여지는 허울.
용백은 입맛이 썼다.
촤르르르르!
군병들이 노를 저을 때마다 배는 앞으로 나아갔다.
용백은 물을 바라보았다.
‘돌아갈 수 있을까?
불안이 머리를 휘감았다.
두려움은 포정사사를 떠날 때부터 지니고 있던 것이지만, 지금 자신에게는 그때는 전혀 생각지 못했던 일들이 펼쳐지고 있었다.
“운남, 좋은 곳이지. 암!”
용백의 마음을 아는지 홍무전이 누런 이를 드러내고 키득거리듯 입을 열었다. 말을 하며 돌아보는 그의 얼굴에 거머리 같은 웃음기가 물려 있었다.
‘더러운 놈.’
입에서 욕설이 나오려 했지만 그것은 홍무전의 잘못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에 참았다. 그도 이러한 환경에서 살아가자니 습관이 되었을 것이다.
애초부터 길을 떠날 때 인식했어야 했다.
‘운남이라니.’
입을 벌린 악어들이 물 사이로 두 개의 눈과 초혜의 표면처럼 우둘투둘한 콧잔등이를 내밀고 유유히 떠다니고 있었다. 그들은 간혹 입을 벌렸는데 그때마다 누렇게 변색된 이가 드러났다. 송곳처럼 뾰족한 이 하나하나가 손가락보다 크게 보여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얼마나 갔을까?
“이곳이 수뢰지다.”
홍무전이 뒤를 돌아보며 웃었다.
“이곳이오? 드디어 도착했어.”
섬인지 육지인지 분간하기는 어렵지만 멀리 검은 물체가 다가오고 있었다. 형주부에서부터 용백을 호송해 온 두 명의 군병은 얼굴 가득 환호를 띠었다.
이제는 돌아갈 수 있다는 환희였으리라.
하나 그것도 잠시, 그들은 환호성을 터뜨리다 용백의 얼굴이 눈에 들어오자 다시 시무룩해졌다.
주변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그들을 두려움에 떨게 했다. 또한 죄수라고는 하지만 자신들과 오랫동안 먼 길을 걸어와야 했던 용백을 남겨놓고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이 못내 안타깝다는 모습이었다.
이제 수뢰지에 도착했으니 그들의 임무는 끝났다.
그들은 돌아갈 것이다.
물론 용백은 남는다.
가는 자는 가야 할 이유가 있고 남아야 할 자는 남아야 한다. 그것이 그들에게 주어진 운명이었다.
턱!
배가 출렁였다.
몸이 앞으로 쏠려나가는 것 같았다. 몸의 중심을 잡으며 앞을 바라보니 배가 섬에 닿아 있었다.
“내의원님, 그만 내리시지요.”
아직 얼굴에 주근깨도 가시지 않은 홍의군이 나직하게 말했다. 그는 한 달 보름이나 용백을 호송했으면서도 아직도 그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지 못했다.
차마 용백을 바라볼 수 없다는 표정이다.
용백은 오히려 그가 안타깝게 느껴졌다.
그는 아마 용백을 살려주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용백을 살려주거나 도주하게 놔두면 자신이 이 늪지에 남아야 한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만약 그것이 두려워 자신마저 도주하게 된다면 자신의 형이나 동생이 군역에 끌려갈 것이라는 것도 모르지 않을 것이다.
그는 일개 군병이었다. 용백을 도와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용백에게 죄가 없음을 항변할 용기도 가지지 못했다. 그저 군역으로 끌려왔을 뿐이다.
용백은 마음이 씁쓸해졌지만 그저 빙그레 웃어주고 배에서 내렸다.
휘청!
발을 드는 순간 배가 심하게 요동을 쳐 하마터면 그대로 물 속으로 머리를 박을 뻔했다. 만약 홍무전이 목덜미를 잡지 않았다면 악어의 주둥이에 처박힐 뻔한 순간이었다.
“이런! 허약한 놈이로군.”
홍무전은 신경질적으로 등을 밀었다.
배에서 내리는 순간 휘청거린 몸을 그렇게 밀자 결국은 나뒹굴 수밖에 없었다.
발이 저린 까닭이다.
그들이 타고 온 배는 사람의 허리보다 조금 굵은 나무를 이용해 만든 것이었다. 나무를 도끼로 잘라 대충 찍어 홈을 파고 끌이나 작기(나무를 다듬는 기구)로 속을 파낸 것이라, 배는 제법 길었지만 폭은 턱없이 좁았다.
늪을 헤쳐 나온 시간은 두 시진이 조금 넘었다.
겨우 몸을 의지할 수 있는 작은 나무배에 타고 있기에는 너무나 긴 시간이었다.
나무에 파여진 홈이 너무 좁아 엉덩이가 들어가지 않았다. 더구나 발은 가쇄로 인해 움직일 수조차 없어 두 시진 내내 무릎을 꿇고 배를 탔다.
발에 피가 몰리고 저린 것은 당연지사.
문득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보니 온통 물이었다. 처음 늪지에 다다랐을 때에도 눈으로 보았고 직감적으로 알았지만 새삼스러운 것 같았다.
그 물 속에는 포식자로서의 위치를 점하고 있는 악어가 살 것이고 독을 머금은 독충이나 독사도 우글거릴 것이다. 악어는 대악이라 불리는 것으로 이미 보았다.
‘만약 이곳에 빠진다면 뼈조차 남지 않을 것이다.’
기분이 스산하게 가라앉았다.
어쩌면 영원히 유배되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배를 타고 돌아가고만 싶었다.
미친 듯이 몸을 돌리고 싶었다.
운남과 남만의 독충은 추운 바람이 부는 북방과 달리 그 독이 여간 아니었고 이미 중원에도 적지 않게 알려져 있었다.
그들은 언제나 먹이를 노리고 있다.
“조심하십시오.”
용백을 호송해 온 어린 군병이 겨드랑이를 부축하고 나서야 겨우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눈을 들었다.
섬도 아니고 그렇다고 육지도 아닌 것 같은 땅이 눈 앞에 펼쳐져 있었다. 마치 물 속에 잠긴 나무토막에 이끼가 덮인 것처럼 물 속에서 머리를 내밀고 있는 곳이었다. 이끼가 덮여 있는 땅 위에는 사람의 흔적이 적지 않았다.
“어서 오시오.”
눈을 들어보니 한 사내가 걸어오고 있다.
배가 불러 만삭의 여인을 연상시키는 사내의 손에는 박도가 들려 있다.
‘이곳이군.’
새삼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한번 들어오면 영원히 빠져 나갈 수 없다는 발기산이 이곳인 모양이다, 하고 다시 생각하니 오금이 저리고 발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홍무전의 손은 무심했다.
비록 장군이라 하지만 오래도록 남만의 바람을 맞았고 남만수비대라는 군벌이 정벌을 주로 하는 군사들이기 때문에 그의 감정은 메마른 듯 보였다.
“장군을 뵈오이다.”
사내, 다가온 뚱보가 홍무전을 보며 허리를 접었다.
홍무전은 어찌 보면 건방지게 보이는 모습으로 가볍게 손을 들어 보인 뒤 배에서 내렸다.
탁!
등을 미는 손.
엉겁결에 네 걸음이나 앞으로 나가 섰다. 철렁거리는 가쇄 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눈을 돌려 좌우를 훑어보았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수면으로 머리를 내민 수초, 그리고 허름한 판자로 지은 집이 있는 섬뿐.
물 속에서 불쑥 머리를 내민 섬, 분명 섬이었으나 달리 보면 수초로 싸여 섬 같지도 않은 좁은 육지와 허름하게 세워져 있는 집. 나무로 지어서인지 바닷가에 즐비하게 늘어선 염장의 창고 같아 보이는 집이었다.
“따라와!”
나타난 뚱보가 소리를 질렀다.
용백은 잠시 머뭇거렸다. 그의 말에 따라 앞으로 가다가는 영영 이 섬을 벗어나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는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그를 형주부에서부터 호송해 온 군병들은 엉거주춤 서 있었지만, 밀림을 안내한 장군 홍무전은 이미 그의 등을 밀고 그를 따랐던 열 명 정도의 군병은 겨드랑이를 압박해 걷게 만들고 있었다.
용백은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부풀어 오르는 발의 고통을 참아가며 그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2. 경우량
중년 사내의 입이 벌어지자 누런 이가 보였다.
연초를 피우고 이를 닦지 않아 구린 냄새가 나는 것 같은 목소리는 귀를 거슬리게 했다.
“좋아, 내가 알 바는 아니지. 자네가 지은 죄에 대한 형기는 십 년이야. 사실 살인에 대한 형기가 십 년이라면 짧은 것이지. 더구나 호광포정사를 죽였다고······ 요즘 중원의 형벌이 약해진 모양이야. 간덩이가 배 밖으로 나온 놈이군. 그렇지만 이곳에서는 아주 적합해.”
중년 사내는 키득거렸다.
어쩐지 그 웃음이 징그럽게 느껴지고 재수없는 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길게 늘어진 하관이라니.
“······.”
“배포가 있으니 포정사를 죽였겠지? 아마 네놈은 아니라고 강변을 하겠지. 이곳에 온 것이 억울한가? 너 같은 놈들은 늘 그렇게 이야기하는 법이지. 넌 네놈이 이곳에 올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겠지? 그렇지만 현실은 거스를 수가 없어. 후후후! 이곳에서 십 년을 썩으면 하나같이 머리가 돌지.”
사내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웃었다.
그의 앞에는 붉은 첩지가 놓여 있었다.
그 첩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는 용백은 슬며시 부아가 치밀었다. 죄수를 호송하는 군병들에게 날라져 오는 첩지는 죄수의 죄명과 중요한 사항이 기록되어 있다.
모르기는 해도 용백의 죄목은 관부의 관리를 죽인 것일 게다. 또한 중요한 상황으로는, 언제 도주할지 모르는 사람이니 늘 관심을 기울이라 적혀 있을 것이다. 더불어 의생이라는 것까지 세밀하게 적혀 있으리라.
호광의 포정사사에서부터 용백을 호송했던 두 명의 군병과 남만수비대의 장수는 돌아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의생이라······ 아주 잘 왔어. 나는 누구냐 하면······”
그는 발기산을 총괄하고 있는 장군이라 했다. 명색이 천인호라 했지만 아무리 보아도 수적 이상으로는 보이지 않는 인상을 지니고 있었다. 군대가 아니었다면 남의 주머니나 털고 죄없는 아녀자나 희롱했을 놈이었다.
‘군영이 아니고 형지 같군. 하기는 내 죄목이 살인이니 뇌옥으로 가는 것은 당연하지.’
용백은 한숨을 내쉬었다.
포정사사에서 압송되어 제형안찰사사로 이첩되었을 때 그는 포정사를 죽인 사람이 되어 있었다. 늘 그렇듯 행해지는 검시나 검안, 진술조서 따위는 없었다.
억울할 뿐이었다.
아무리 강변하고 부당함을 이야기해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힘이 있다면 그들 모두를 죽여버리고 싶었다. 포방의 쓰레기 같은 인간들과 거들먹거리는 관리들, 그리고 음과 양으로 개입한 자들을 모두 죽여버리고 싶을 뿐이었다. 아니, 그보다는 죽이지도 않은 사람을 죽였다고 하는 것이 너무 억울했다.
발기산이라니.
언젠가 들은 적이 있다.
운남의 서남쪽에 위치한 산으로, 삼십 년 동안 계속되고 있는 남만수비대와 남만의 대치가 이루어지는 곳. 불과 이 년 전에 남만으로부터 빼앗은 땅이라 했던가?
이곳에서 썩어야 한다는 말인가?
그것도 일이 년이 아닌 십 년이라니!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지만 방법이 없다.
누구의 농간이 아니라면 불가능한 일이다.
아무튼 지금의 그는 죄수다.
의문이 생기지 않을 리 없다.
발기산은 국경의 전쟁터다. 죄수가 올 곳이 아니라는 말이다. 죄수라면 뇌옥으로 가야 하는 것이 아닌가? 어찌 전쟁터에 끌려올 수 있다는 말인가?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천인호의 직위를 지녔다는 장수가 주절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한때 무인으로 천하가 좁다고 종횡무진으로 치달았지. 무림에서는 나를 모르는 사람이 없어. 비록 모든 것을 집어치우고 군문에 몸을 담아 이곳의 장수가 되었지만 변한 것은 없다. 내가 펼치는 혈영십이도는 무림의 일절로 소문이 났었다. 나는 어떤 일이 있어도 나를 거스르는 자를 용서하지 않아. 네놈도 무림에서 내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다. 나는 무림에서 독두살사라 불렸던 경우량이다. 들어보았겠지?”
웃기지도 않는 놈이었다.
무림이 어떻고 저렇고.
귀를 씻고 들어도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놈은 떠벌리기를 좋아하는 놈이었다.
설사 그가 무림의 사람이라 해도 용백은 알 수가 없었다. 애초부터 무림이라는 말을 들었다 해도 관심을 가질 리 없었고 무림에 대해서는 아예 인연조차 없는 용백이 무림인들에 대해 생각했을 리 없었다. 자연히 그들이 누구인지, 이름을 얻은 자가 누구인지 모르는 것이 당연했다.
‘아직은······’
용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생긴 것으로 보아하니 밥맛없는 놈인데 괜히 성질을 건드려 좋을 것 없었다.
아는 것도 없을 뿐 아니라 상대가 누구인지조차 알지 못하니 사태를 지켜보기로 했다. 그 동안 지나쳐 온 포정사사에서 옥리들이 내미는 눈물 젖은 밥을 먹으며 배우고 몸으로 체득해 알아낸 것이 있다면 그건 바로 관리들의 생리에 대해서였다.
무조건 고개를 숙여라.
이름이 독두살사 경우량이라 했던가?
이름 한번 더럽다. 독두살사가 뭔가? 외호에 뱀이 들어간 것은 아마도 성질이 더럽다는 것을 이야기하거나 뱀처럼 징그럽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는 대머리였다.
경우량은 훌떡 까져 향촉의 불빛이 반사되는 머리를 쓰다듬으며 한참 동안 자신의 이력을 자랑삼아 늘어놓았다. 그다지 귀로 들어오지도 않는 이력이었다.
의심스럽기도 한데······
자신이 소림의 땡중들을 상대해 한 주먹으로 이십여 명을 쓰러뜨렸다는 이야기를 할 때가 절정이었다. 소림의 무승들이 강하다는 것은 이미 소문으로 알려진 사실인데.
경험으로 미루어 그가 하는 말 중에 반은 속이 들여다보이는 거짓일 것이다.
영 밥맛없는 놈이었다.
눈은 가늘고 눈동자는 눈꺼풀에 올라붙은 듯 보인다. 백안이 많은 것을 보니 영락없는 범죄자의 관상을 지니고 있었다. 하관이 쭉 빠진 것을 보니 영락없이 치졸하고 기회에 능한 놈이다. 그런데 이런 곳에서 밥을 먹고 있는 것을 보니 줄을 잘못 탄 모양이다.
불쌍한 놈!
그런 놈을 보면 밥맛이 없다.
아마도 주둥아리만 되바라진 저 자식은 평생 이 외진 늪지에서 살아야 할 것이다.
용백은 그가 어떤 말로 자신을 포장하든 그 말을 믿지 않는다. 그것은 환자가 자신의 병세를 과장하는 것과 같다. 용백은 이미 그런 부류의 인간을 많이 보았다.
견문이 없기도 하지만 그따위로 주절거리는 놈치고 그다지 대단한 놈은 없기 때문이다.
“한 가지만 알려주지. 이곳은 운남에서 가장 험한 곳이야. 아니, 운남이라 말하지만 사실은 남만이라는 말이 맞아. 운남으로 들어왔다고 생각하고 있겠지만 서쌍반나에서도 한참을 들어온 밀림이란 말이지. 주변 십여 리가 온통 늪이야. 이곳은 제형안찰사사의 뇌옥과 달라. 이곳은 뇌옥이 아니고 군영이란 말이다. 네놈은 사형을 받아야 했지만 이곳에서 복무하도록 배려를 받았다. 이게 네놈에게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나는 모른다. 우선은 눈으로 보듯 비교적 자유롭지. 다른 뇌옥들이 담에 둘러싸이고 호병들이 지키는 것과 달리 이곳은 뇌옥이 아니니 담이나 네놈을 지키는 군병들도 없어. 그러나 누구도 내 허락 없이는 이곳을 빠져 나가지 못해. 온통 늪에 둘러싸여 있고 그 늪에는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독을 지닌 놈들이 수백 가지는 돼.”
그는 이곳의 우두머리이기는 하지만 갇히기는 마찬가지다. 죄수들은 죄를 지었으니 갇히는 것이 당연하다 할 수 있지만 그도 갇혔다고 할 수 있다.
당분간 죽을 염려는 없을 것이다.
이처럼 험한 곳이라면 남만의 군병들이 몰려올 리 없고, 언젠가는 진격을 하거나 후퇴를 하겠지만 방어하기도 어렵지 않다. 그건 반드시 입을 열고 말로 해야 알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런 곳이라면 사는 것이 재미있을 리 없다.
눈을 뜨면 매일 보는 것이 물뿐이니 새삼스런 재미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죄수는 당분간 그에게 재밋거리가 될 수도 있었다. 더구나 군병이 아니고 죄수다. 죄수라는 이름은 군병과는 의미가 다른 것이다.
“내가 받은 호송첩에 의하면 한때는 제법 이름을 날린 의생이었다고 적혀 있더군. 호광의 포정사사에서 내의원을 지냈다고 적혀 있군. 아무튼 이곳에서 의생은 아주 필요하고 요긴하지. 부상을 입는 놈도 많지만 죽는 자가 너무도 많거든······ 사실 의생을 요구한 사람은 나야. 그렇지만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는 마라. 견뎌보면 이곳은 좋은 곳이고 네놈은 죄값을 치러야 할 테니 말이다. 미리 경고해 두겠는데 내가 허락하지 않으면 누구도 이곳에서는 도망가지 못해. 그럭저럭 적응하다 보면 살아가는 재미도 있을 거다.”
용백은 마음 한구석에서 전율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하품이 나올 것만 같았다.
‘병신 같은 놈!’
한심스러운 인간이었다.
사람들은 때로 자신이 대단하고 거창한 지위에 있는 것으로 착각을 하고 산다.
이 인간도 마찬가지다.
그는 천인호 장군이라는 지위가 대단한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그 헤벌쭉한 모습이 어쩌면 자신의 일을 즐기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관이 빨아놓은 것처럼 뾰족한 것을 보니 출세하긴 그른 놈이다. 어쩌면 천인호라는 직위를 지닌 장군이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의 후손들은 그가 조상 중에 가장 뛰어났다는 것, 발기산에서 남만의 미개인들과 싸운 장군이 있었다는 것을 후손 대대로 길이 알릴 것이다. 아마도 제일이 되면 그가 장군이었다는 것을 축문에 섞어 읽을 수도 있다.
미친 새끼!
이런 인간들은 말 한 마디를 해놓고 자신이 뭐 대단한 것이라도 이야기한 것처럼 으스대게 마련이다. 밸이 꼴리는 일이지만 아직은 그를 모르니 그저 멍청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마음에 들지 않았다.
용백이 원하는 것은 이런 것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때로는 구부릴 줄도 안다. 그러나 때로는 강단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도 배웠다.
용백은 그를 노골적으로 쏘아주었다.
이런 험한 곳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면 언젠가는 당한다는 생각은 본능적이라 할 수 있다.
‘저 새끼는 어쩌면 남색을 원할지도 모른다.’
인간으로서는 말종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이기를 스스로 포기한 자들에게 뒤를 보여주거나 약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결국 굴레를 차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라 할 수 있다.
눈이 마주쳤다.
눈동자가 흐려지는 것 같더니 흰자위가 드러났다.
‘아차!’
마음이 흔들렸다.
이런 경우를 생각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지만 경우량은 너무도 빠르게 반응했다.
경우량이 일어섰다.
“난, 나를 경멸하면 참지 못해!”
퍽!
바람이 일고 얼굴에 화끈한 무엇인가가 지나간 것 같은데 입 안이 찝찔해졌다.
이미 예측했던 일이었다.
빌어먹을 새끼!
내가 자신을 째려보았다는 것이 이유인가?
용백은 안다.
그들은 자신들의 주먹에 늘 자신이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자신의 휘하에 있는 군병은 마음대로 독려하고 자신들 마음대로 주먹을 사용해도 된다고 생각한다. 그것만으로도 부족하면 사람을 죽이는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전사로 처리하면 그만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오랜 관행이 그러했으니.
“눈을 내리깔아.”
목소리가 뱀의 피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냉정함을 잃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려는 듯한 의도적인 목소리가 더욱 기분 나빴다.
‘그리 머리가 나쁜 놈은 아닌 것 같군.’
나중에 알고 보면 그런 놈들은 참 비열하다.
한결같이 그런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강한 자 앞에서는 두려움을 느낀다. 그래서 결국은 애정이 있다느니, 잘 봐주겠다느니 하며 타협을 하려 한다.
결국은 더러운 꼴을 보이는 것이다.
용백은 일부러 고통스러운 듯 나뒹굴었다.
그다지 아픈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래야 그의 주먹이 그친다는 것을 안다.
지난 두 달여가 그를 바꾸었다.
한때는 학같이 고고한 의생이라 생각했었다. 용백에게 있어 의생이란 직업은 숭고한 것이었다. 사람을 살리는 일은 보람있는 일이었고 그것만으로도 많은 사람들에게 존대를 받을 수 있었으므로. 그러나 한 순간에 모든 것이 변했다. 죽음의 공포와 시도 때도 없는 시달림이 그에게 세상을 보는 눈을 바꾸어주었다.
‘좋아. 당분간은 그가 원하는 대로 해주지.’
용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놈들이 원하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이 말을 하면 눈을 빛내주기를 바란다. 상체를 앞으로 숙이기 원하고 귀를 가져다 대기 원한다. 그리하면 그들은 기고만장, 자신들이 아는 것들을 비밀인 양 은밀하게 이야기해 준다.
그들은 누구에게나 자신들만이 아는 이야기를 자랑삼아 하기를 좋아한다. 그래서 시간이 지나면 그는 자신만이 비밀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오래지 않아 주변 모든 사람이 알게 된다. 그러나 그는 남이 알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 속성도 가지고 있으니 너절한 이야기는 오래도록 이어지는 것이다.
그들의 특징은 자신이 굉장히 친하다는 것을 나타내려 한다는 것이다.
목소리가 낮아지고 눈빛이 가늘어지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몸에서 냄새가 나는 것은 참을 수 없다.
“알겠습니다.”
용백도 포정사사에서 삼 년을 지냈으므로, 또한 나이를 먹을 만큼 먹어 지난해에 이십이라는 나이를 넘겼으므로 나름대로 그들을 다루는 방법을 터득하고 있었다. 그가 원하는 것은 아니라 해도 그들의 생리를 알면 머리를 숙이는 척하며 그들을 다룰 수도 있었다.
차라리 놈들의 비위를 맞춰주는 척하며 실속을 차릴 필요 또한 있다. 마음을 결정한 후라 그의 목소리는 그다지 가시가 돋쳤다고 할 수는 없었다.
대답을 하자마자 놈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좋아. 네놈은 그래도 어른 모실 줄 아는 모양이군. 역시 사람은 배워야 한다니까. 배우지 못한 놈은 어른도 알아보지 못하지. 암, 간이 세 개라도 어른을 보는 눈은 중요하지. 하기는 호광포정사사에서 아문의 의생까지 지냈으니 눈치는 있겠지. 이곳은 남만의 전쟁터 중에서도 가장 치열하다는 발기산이야. 포정사사의 시시한 뇌옥과는 다르지. 아차 하는 순간이면 목이 달아난다고. 네놈 하나 죽는다 해도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아. 살아나가려면 늘 그렇게 굴어.”
용백은 몸을 일으켜 그의 앞에 섰다.
가능한 한 태연하게 행동하고 고분고분한 척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면 언젠가는 원하는 대로 할 수 있게 될 테고 기회가 올 것이다. 그때까지는 기다려야 한다.
‘한 순간의 일.’
발기산에는 처음 왔으니 기다려야 했다.
아직 아무것도 파악한 것이 없었다.
“이곳에는 죄수가 없어. 자네가 어떤 죄를 지었건 나는 상관하지 않아. 다만 나는 의생이 필요했을 뿐이야. 이곳에서 십 년의 형기를 무사히 마치면 돌아갈 수 있을 걸세. 아무튼 잘 왔어. 기다린 보람이 있었군.”
경우량은 손바닥으로 탁자를 후려치며 몸을 일으켰다.
탕!
탁자가 울리자 그와 그다지 다를 것 같지 않은 사내 하나가 달려 들어왔다.
허리에는 한 자루의 박도를 찼다. 살찐 돼지를 연상시키는 뚱보였다. 머리는 삭도로 밀었는지 머리카락이 한 올도 없어 빛이 반사될 지경이었다. 그도 어지간히 꾀죄죄한 몰골이었다. 군포를 입기는 했지만 이미 낡고 헐어 그것이 넝마인지 군포인지 분간조차 힘들었다.
“부르셨습니까?”
“그래, 이 자식을 방으로 안내해 주라고!”
“예!”
뚱뚱한 사내는 용백을 바라보며 빙그레 웃었다. 오래도록 깎지 않아 마구 자란 수염 안으로 누런 치석이 한 치나 되어 보이는 이가 드러났다.
“따라와!”
그가 앞장을 섰다.
사내는 경우량에게 가볍게 허리를 굽힌 다음 몸을 돌렸다. 용백도 마음이 내키는 것은 아니었지만 고개를 숙여 보이고 뒤를 따랐다.
생각 같아서는 침이라도 뱉고 싶었지만 우선은 살아야 하고, 그러려면 그들의 시선을 자극시키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에게 강한 면과 은근히 아부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줄 필요가 있기 때문에 허리를 숙였지만 마음과는 다른 행동이었다.
그것이 몸보신의 첫째였다.
고개를 들었다.
“제길!”
푸른 하늘이 싫었다.
하늘이 머리 위에 얹혀져 있는 것 같았다.
운남과 이어지는 남만의 밀림은 고원에 자리잡은 땅이다. 더구나 발기산은 높고 하염없이 넓었다. 더구나 군막이 자리잡은 곳은 사방이 물이었다. 자세히 보면 군막은 사방을 둘러싼 높은 산자락 사이의 계곡에 자리잡고 있다. 눈으로 보면서도 사방으로 둘러싸인 산 속에 수십 리나 되는 늪지가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우리······ 아니, 이곳에 있는 군병들이 바로 남만의 토착민들이 치를 떠는 별기군이지. 우리 모두가 군대에서 배척받았지만 사실 우리는 남만수비대에서 가장 강한 군대지.”
사내가 자랑스럽게 말했다.
후텁지근한 바람.
거기에 더해 물에서 피어오르는 비릿한 냄새가 오장육부를 뒤집어놓는 것 같았다.
어쩐지 내키지 않는 마음이라니······
앞서가는 사내의 엉덩이가 출렁이고 있었다.
용백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시작되는 하루가 정말 싫었지만 달리 뾰족한 수가 없었다.
2장 천하지추
1. 무오
“이름이 뭐냐?”
나이가 사십대 초반이나 되었을까?
앞서 걸음을 옮기던 사내는 뭐가 그리도 궁금한지 한시도 쉬지 않고 입을 열었다. 마치 주절거리는 것이 입에 달라붙은 듯한 형상이었는데 그것은 오래도록 전쟁터를 돌아 참을 수 없는 답답함을 지닌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귀찮지만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용백!”
“이름은 좋군. 전에는 어디에 있었지?”
“아문.”
“누구나 아문이라고 말을 하지. 듣자 하니 정말로 어이가 없군. 누구는 아문에 없었다고 생각하는 거야? 이곳에서 버둥거리는 자들은 모두가 아문에 있었다고. 군대도 아문이지. 다를 것이 없어. 비록 이곳이 첨예한 곳이기는 해도 남만수비대에서는 난다긴다하는 군병들만 오는 곳이야. 알기나 해?”
뚱보가 고개를 돌리고 바라보다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는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이유가 있을 테지만 그가 왜 고개를 저었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의문을 가질 필요도 없었다.
궁금증은 시간이 지나면 해소될 것이고, 모른다고 해서 물을 일도 아니었다. 이런 곳에서는 그저 주둥아리 닥치고 얌전히 있는 것이 생명을 연장시키는 일이었다.
지난 한 달 반 동안의 경험이 용백에게는 그전까지 살아온 이십삼 년보다 많은 것을 알려주었다.
“어서 따라와라.”
사십은 넘겼을 것 같은 뚱보는 다시 걸음을 옮겼고 용백은 뒤를 따랐다. 한동안 휘적거리며 걷던 뚱보는 치밀어 오르는 궁금증을 참지 못했는지 다시 뒤를 돌아보며 따라오는 모습을 살펴보고는 물었다.
발 아래 풀이 이겨졌다.
“직위가 뭐였어?”
“내의!”
“그전 직업이 뭐였냐고?”
그는 내의라는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아님, 알아듣고도 모른 척 딴소리를 하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모를 가능성이 더 높기는 했다.
무식한 놈!
내의라는 말은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진다. 황제의 수발을 드는 황궁의 의원도 내의라 부르지만 아문에서 환자를 돌보는 의원도 내의라 부른다. 그런데 이 뚱보는 내의라는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용백은 갑자기 자존심이 상했다.
내의를 모르다니······
“의생이오.”
용백은 시큰둥하게 내뱉었다.
그제야 뚱보는 알아들었다는 눈치였다.
“아, 의생! 그렇다면 아문에서는 자유롭고 존대를 받으며 생활했었겠군. 모든 사람들은 늘 생각하지. 자신이 자유롭다고······ 그러나 이곳이든 세상이든 자유로운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은 법이지. 사람으로 태어나 자유롭게 살아가야 하지만 이곳은 자유롭지가 못해. 그러나 언젠가는 몸과 마음이 행운처럼 변할 날이 있겠지. 지금으로서는 이곳을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장군뿐이야.”
느닷없는 중얼거림.
뚱보의 말이 의도적이었는지 지나가는 말로 한번 해본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말에는 동감이었다. 아니, 어쩌면 그가 말한 것보다 더할지도 모른다.
알 수 없는 이질감이 느껴졌다.
‘무얼까!’
말의 의미.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은 아니었다.
그저 무심하게 들으면 그런가 보다 하고 생각할 수 있는 말이었지만 되새겨보면 의미가 깊은 말일 수도 있었다.
경우량은 이곳이 자유롭다고 했었다. 그런데 이 뚱뚱한 사내는 자유롭지 못하다고 말한다. 아마도 그의 말이 옳을 것이라 생각하니 어쩐지 웃음이 나왔다. 사람은 자유롭다는 개념에 대해 각자 달리 생각하는 모양이다.
용백은 묵묵히 뚱보의 뒤를 따랐다.
그가 어떤 말을 하든 관심이 있을 리 없었다. 차라리 말을 하지 않는 것이 나았다.
“너는 이곳을 빠져 나갈 궁리를 하고 있겠지?”
용백은 코웃음을 쳤다.
‘그걸 말이라고 해?’
누구나 그럴 것이다.
그는 발기산에 오기 전에 몇 곳의 뇌옥을 거쳤다. 물론 일정을 맞추기 위해서였다. 그 일정이라는 것이 왜 필요했는지 이제야 깨달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호광의 제형안찰사사에서 포두의 손에 오라를 받은 후 판결을 받기까지 모든 일이 일사천리였다. 하루가 지나기 전에 그는 살인자가 되었고 뇌옥에 수감되었다. 지루하게 기다리고 있어야 할 절차는 모두 생략되었다.
사흘이 지났을 때 그는 두 명의 홍의군에게 이끌려 관도를 따라 사천으로 향했다. 그리고 무산십이봉이 끝나는 봉령에서 배를 타서 운남으로 왔다.
날이 새면 출발했고 밤이 되면 잠을 잤다. 아문이 없는 곳에서는 노숙을 하거나 빈관에서 잤다. 그러나 아문이 있는 곳에서는 반드시 뇌옥에서 잠을 잤다. 어디를 가나 뇌옥은 한결같이 높은 담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성벽 같은 담 위에는 군병들이 눈을 밝히고 있었다.
이곳은 담이 없었다.
군병들도 수상에 나무로 만든 망루에 올라 마작이나 즐길 뿐, 너무도 한가했다. 죄수가 있을 곳이 아니었다.
“너는 이곳이 싫을 거야. 차라리 뇌옥에 갇혀 지내는 것이 나으리라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닌가?”
“물론이오.”
너무 속이는 것도 좋지 않다.
적당히 보여주어야 의심을 받지 않는 법이었다. 용백은 지난 몇 년간의 생활로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을 지니고 있었다. 물론 이 뚱보가 어떤 대답을 원하는지도 알고 있었다.
“북쪽 사람이군, 자네는?”
“북쪽? 그렇소. 장강 부근이오.”
뚱보는 빙그레 웃었다.
단 한 번에 말투를 알아본 것으로 보아 그는 적지 않은 사람들을 접해 본 것 같았다.
사실 장강이 있는 곳에서 왔으니 북쪽 사람이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받아들이기 나름이다. 장강은 예로부터 중원의 중심이라 불리는 곳으로 중토라 불린다. 그런데 북쪽이라니.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이해가 되는 것이, 운남에서 보면 장강에서 살던 사람은 확실히 북쪽 사람일 것이다.
중원인들은 흔히 장강을 대강이라 부르고 대강남북이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한다. 형주부가 있는 호광은 장강에 면하고 있지만 운남에서 보아 북쪽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운남과 장강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거리였다. 더구나 장강은 큰 강이니 막연하게 장강이라 하면 어딘지 알 수 없다. 혹자는 강의 하구를 생각할 수 있지만 반대로 발원지인 청해를 생각할 수도 있다. 장강의 발원지와 바다로 들어가는 하구는 물경 만여 리가 넘는다.
장강 상류의 사람과 하구의 사람은 말이 통하지 않는다.
중원은 넓으니 말이 통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뚱보는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용백이 먼 곳에서 온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본 눈치였다.
그제야 그가 처음에 내의라 말했던 것을 알아듣지 못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중원은 넓고 상상할 수조차 없으리만치 방언이 많다. 그 중에는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도 많다. 아마도 그는 남방 사람이라 처음에는 알아듣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가 내의가 의생이라는 말을 알아듣지 못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오해했던 자신이 어처구니없어졌다.
용백은 말을 하는 도중에도 이곳저곳을 훔쳐보았다. 어차피 방을 배정받고 나면 군병들과 어울릴 테지만 궁금증은 참을 수가 없었다.
군병들은 이곳저곳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습지에서 할 일이 있을 것 같지 않았지만 그들이 하는 일은 너무도 다양했다. 불을 피우는 자가 있는가 하면 나무를 다듬는 자가 있었다.
“난, 무오라고 하네.”
그저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의 이름이 어딘지 모르게 불가의 냄새를 풍기고 있었지만 깊이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그저 운남이나 남쪽지방에서는 그럭저럭 흔한 이름이겠거니 하고 지나친 것은 그의 이름 따위를 들어도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고, 그의 이름을 기억하는 것보다 생각해야 할 것이 너무도 많았기 때문이었다.
뚱보의 이름 따위에 관심이 있을 리 없었다. 그가 도움을 줄 것도 아니라는 것은 이미 알기에. 서로가 도울 수도 있지만 어차피 결정적인 도움은 될 수 없을 것이다.
“자네는 너무 깊이 생각하는군.”
뚱보는 대답을 들으려 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는 그저 묵묵히 앞으로 걸어갔고 용백도 그의 뒤를 따라걸었을 뿐이었다.
무오의 뒤를 따라가니 나무로 만든 집들이 보였다.
그 주변 역시 다른 곳과 다름없이 늪지대였는데 집이 세워진 곳과 병사들이 움직이는 곳만이 육지였다. 넓은 바다에 섬처럼 튀어나온 곳이라 해야 할까!
“이곳이다.”
무오의 말에 용백은 눈을 들었다.
허름한 한 채의 집이 있었다.
독충이 올라오는 것을 두려워했는지 지상에서 한 자 정도 띄운 집은 나무를 잘라 지은 것이었다. 더구나 어디에서 구해 왔는지 기둥에는 소나무 가지처럼 생긴 나뭇가지를 거꾸로 매달아 독충이나 설치류, 양서류의 접근을 막고 있었다.
나뭇잎으로 지붕을 얹어 겨우 비를 피할 수 있을 것 같았고 나무를 잘라 만든 벽은 듬성듬성 가려져 안이 다 보일 지경이었다. 그나마 비바람을 피할 수 있다는 사실이 다행스럽게 느껴졌다.
검은빛이 나는 깃발이 보였다. 깃발에는 제법 멋을 부리려 했는지 글자가 쓰여 있었지만 축 늘어진 탓에 글씨를 읽을 수는 없었다.
‘이곳이군.’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삐이이이!
무오가 문을 잡아당기자 거친 소리가 들리고 방 안이 눈에 들어왔다.
습한 기운이 코로 스며들었다.
방 안에는 이십여 개의 침상이 놓여 있었다.
한결같이 물가에서 자라는 나무를 잘라 삼마로 묶고 나무못을 박아 만든 침상이었다. 그리고 그 위에는 언제 보급을 받았는지 개도 물어뜯지 않을 것 같은 모포가 널려 있었다.
무오는 한 곳으로 그를 안내했다.
“이것이 네가 쓸 침상이다.”
용백은 엉덩이를 깔았다.
그럭저럭 푹신했다.
눈을 돌려 엉덩이 밑을 바라보니 침상에는 말린 수초와 자질구레한 것들이 깔려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는 못하지만 무슨 짐승의 가죽과 파충류의 껍질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 위에 깔려 있는 모포는 언제부터 사용했는지 보푸라기가 일어나고 먼지가 피어올랐다.
“빈자린가요?”
“아니다.”
“그럼······?”
“이제부터는 네 자리다.”
“주인이 없군.”
“있었다.”
“있었다고? 그럼 이제는 없다는 말이로군요. 이 자리를 사용하던 자는 형기를 마친 모양이군요.”
“아니, 죽었어.”
무오는 무감각하게 말했다.
용백은 그의 반응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무오의 표정으로 보아 죽은 자를 한두 번 본 것 같지는 않았다.
편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이곳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첨예한 곳이다. 살았다고 해서 산 것이라 할 수 없는 곳이니 죽었다고 해서 다를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용백은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무오는 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다는 듯 방 안 한구석으로 다가가 가는 철사를 가지고 왔다. 그리고 그것으로 가쇄에 난 작은 자물통을 쑤셨다.
딸칵!
둔하지도, 그렇다고 미세하지도 않은 소리가 나고 이어 자물통이 열렸다. 그렇게 해서 용백은 자유로운 몸이 되었다. 한 달 반 만의 일이었다.
몸이 자유롭다는 것이 그토록 반가울 수가 없었다.
“알려줄 말이 있다.”
“예?”
“이 말은 너에게 도움이 되고자 하는 말이야. 누구도 너에게 거칠게 대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곳에 모인 모든 사람은 서로 의지하고 도우며 살아가고 있지. 명심해라.”
“언제 나가나요?”
“언제? 언제 군역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가냐는 말인가? 하하하! 나도 죄수나 같아. 만약 내가 죄수라 한다면 종신형이야. 아니, 이곳을 나가기가 싫어! 죽은 재상보다는 살아 있는 개가 낫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지 못했나? 죽지 않기 위해서는 할 수 없었어. 그래서 차라리 이곳에 남기를 택했지. 평생 이곳에서 살아야 하는 부담이 있기는 하지만 죽는 것보다는 나아. 그러니 그들을 따를 수밖에 없었지.”
죽다니?
의미가 있는 말같이 느껴졌다. 이유가 없다면 그런 말도 하지 않을 것이다.
“죽다니?”
“아직 모르나?”
용백은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가 하는 말이 알쏭달쏭해졌다.
죽기 싫어 이곳에서 종신형을 자처했다는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무오는 몇 번인가 눈을 끔뻑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는 군병이 아니었으니 모르겠군. 그러나 언젠가는 알게 될 거야. 아니, 당장 내일이면 알게 되겠지. 이곳이 어떤 곳이라는 것을 말이야. 그러나 나에게 묻지는 마. 나도 이야기해 주고 싶은 생각은 없으니까.”
“나에게 해주고 싶은 말인가요?”
“그래, 아마도 너는 이유가 있어 이곳에 보내졌을 거야. 너는 언젠가 집에 갈 수 있겠지. 물론 장담할 수는 없어. 당장이라도 이곳에 있는 군병들을 따라 몸에 군복을 걸치고 달려가야 할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너무 눈에 띄게 행동하지 마. 그리고 이곳을 도망칠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마.”
“도주한 자가 있었나요.”
“있었지.”
“잘되었군요.”
“아니, 잘 안 되었어. 이곳을 도주했던 군병들은 모두 죽었어. 아무리 적이 지척에 있다 해도 죽는 것보다는 살아 있는 게 행복한 거야. 죽기 전까지라는 단서가 붙지만 말야. 언젠가는 죽겠지만. 그들도 개처럼 죽기는 싫었던 거야. 단 한 명도 이곳을 벗어나지 못했어. 사방이 늪으로 싸여 있기 때문에 누구도 도주할 수가 없어. 모두 잡혀와서 죽도록 매를 맞았지. 지금도 두 놈이 도주를 했어. 그래서 군병들이 추적 중이야. 곧 잡혀오겠지.”
무오는 안타깝다는 듯 얼굴을 찡그렸다.
그의 얼굴에 드러나는 표정이 진실인지 그저 의식적인 것인지 분간을 할 수 없었다.
빠져 나간 자가 없다는 것은 사실인 모양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굳이 몸에 차고 있는 가쇄를 모두 풀어줄 이유가 없었다. 그것이야말로 발기산을 벗어나려 하다가는 죽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그가 자꾸 죽는다고 말하는 의미를 알 수 없었다. 이곳에서 죽는다는 것이 아니고 다른 의미가 있는 것 같은데 도통 그 의미를 짐작할 수 없었다.
말이라도 해주면 속이 시원하련만.
용백은 느끼고 있었다.
발기산의 군막을 둘러싼 늪에는 중원의 북부지방과는 다른 것들이 적지 않았다. 사시사철 눈이 오지 않는 것도 달랐지만 살고 있는 동물 또한 달랐다.
찰랑거리는 늪에는 악어와 독사, 독충 따위뿐 아니라 사람을 삼키는 깊은 뻘도 많았다. 지형을 모르는 사람들은 늪에서 살아날 수 없었다.
살 수 있는 길은 하나.
배가 있어야 했다.
배를 타고 늪을 벗어나야 한다. 그러나 기이한 일이지만 그 배를 건드리는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어쩌면 그 배를 타는 사람은 모두 죽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나에게 그런 이야기를 해주는 이유는 뭡니까?”
“네가 개죽음을 당할까 봐 알려주는 것이다. 어설프게 나서지 말라는 말도 된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이 말을 해주기는 처음이다. 너는 오늘부터 죄수가 아니다. 명심해야 한다. 오늘은 힘이 들었을 테니 그만 쉬어라.”
“쉬라고?”
“오늘은 특별한 일이 없다.”
“그럼, 누워 있으란 말인가요?”
“그렇다. 이곳은 먹을 것도 우리 스스로 찾아야 한다. 음식은 모두 이곳을 지키는 자들의 것이다. 너는 오늘 왔으니 내일부터 일을 배울 것이다. 오늘은 푹 쉬는 것이 좋아.”
무오가 몸을 돌렸다.
‘에라!’
용백은 몸을 뒤로 젖히고 누웠다.
‘일엽락천하지추라고 했던가?’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짧은 시간이라 본 것이 별로 없지만, 어디 모두 먹어야 맛있는 줄 아는가?
고기를 삶았을 때 한 점만 먹어보아도 가마솥 전체의 고기맛을 알고 숯을 매달아놓아 습한 기운을 알 듯, 작은 것으로 큰 것을 아는 법이다. 이파리 하나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천하에 가을이 다가왔음을 알고 얼음을 보고 천하가 추위에 떤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가까운 것으로 천하를 논하고 소소한 것으로 천하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앞으로 재미있는 일이 적지 않겠구나.”
용백은 쓸쓸하게 중얼거렸다.
눈을 감았다.
그저 그렇게 쉬고 싶었다. 졸음이 몰려오고 있었다. 마치 죽은 것처럼 깊은 잠이었다.
쿠당!
나무문이 무슨 힘이 있나!
누군가 밀었을 것으로 짐작이 되지만 문은 되바라진 계집년의 치마가 펄럭이듯 열렸다. 그리고 부서질 것 같은 몸서리난 소리를 내었다.
“모두 모여라.”
아련하게 들리는 소리.
누군가 몸을 흔들었다.
눈을 뜨고 보니 얼굴이 넓적한 사내가 몸을 흔들고 있었다. 깜박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나무 틈으로 보이는 바깥이 온통 어둠에 물들어 있었다.
“어서 가자고. 재미없는 일이지만.”
사내는 장난스럽게 어깨를 두들겨주고는 일어섰다.
‘무슨 일이지?’
귀찮았다.
어둠이 눈으로 몰려드는 것 같았다. 그저 모든 것을 잊고 편히 누워 쉬고 싶었다.
“어서 일어나게. 이곳은 모두 같이 움직여야 해.”
사내는 다시 다가와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얼마나 힘이 센지 어깨를 잡는 순간 시큰하게 저려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왜?”
“어서.”
사내는 용백의 말에는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그저 손을 흔들어 그가 몸을 일으키도록 하는 것이 자신의 할 일이라는 표정이었다.
용백은 계속 누워 있고 싶었지만 쉽지가 않았다. 자신을 흔드는 자가 여간 힘이 세지 않았고, 멈출 것 같지도 않았다. 그는 엉거주춤 그를 따라나섰다.
문을 나서는 중에도 그의 곁으로 적지 않은 군병들이 문을 나섰는데 한결같이 몸에 병기를 지니고 있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들은 항시 병기를 지니고 다니는 것 같았다. 절로 느껴지는 것이 여기는 전쟁터라는 사실이었다.
잠을 자고 있었던 것이 아니던가? 언제나 병기를 지니다니. 어떤 상황에서도 달려나갈 준비를 하는 것이겠지.
“서둘러!”
목소리가 들리자 군병들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용백도 황급히 뒤를 따랐다.
밖을 나서니 모닥불이 피워져 있는 것이 보였다.
사람의 허리보다 굵어 보이는 나무기둥 두 개가 세워져 있었고, 그 기둥에는 두 명의 사내가 매달려 있었다.
철삭으로 두 다리가 묶이고 팔에는 굵은 밧줄이 묶여 있는 두 사내는 사십대 후반으로 보였는데 수염이 자라 있어 자세한 나이는 알 수 없었다.
“자, 모두 멈춰라.”
경우량의 목소리가 들리자 이리저리 서성이던 군병들이 몸을 멈추었다.
눈을 돌리고 보니 경우량이 두 다리를 벌리고 서 있었다.
어느새 죄수들 앞에는 이십여 명의 군병들이 박도를 꺼내든 모습으로 서성이고 있었다. 그들이 의도적으로 시위를 하는 모습으로 보아 만에 하나 움직이거나 대드는 자가 있다면 죽이겠다는 뜻으로 보였다.
“자, 자! 물러서!”
군병들은 도배로 몰려든 동료들을 밀었다.
엉거주춤 물러선 군병들은 그저 멍한 눈으로 허공에 대롱거리며 매달려 있는 동료들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들의 등과 허리에는 병기가 있었지만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그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경우량이 앞으로 나섰다.
그는 제법 예리한 눈으로 부하들을 쏘아보며 이리저리 거닐었다. 그의 모습에서는 가진 자의 거만스러움이 보였고 뒷짐을 진 모습에서는 가당치 않은 권위의식을 느낄 수 있었다.
용백은 침을 뱉고 싶어졌다.
‘무지한 자들 같으니······’
영 마음이 무거웠다.
차라리 잠이나 잘 걸 하는 생각도 들었다.
경우량이 오락가락 움직이자 유난히 두드러진 그의 광대뼈가 타오르는 불빛에 드러나기를 반복했다.
“난 늘 경고했다. 이곳을 벗어날 수 있는 놈은 아무도 없다고 말이야. 충성하라고 하지는 않았다. 동료들에게 피해를 끼치지 말라고만 당부했었다.”
그는 말을 하면서도 수시로 독사 같은 눈으로 나무에 매달린 군병들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누구도 그의 눈에 놀라거나 두려움을 느끼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는 자신의 말이 씨가 먹히지 않는다는 것을 의식했는지 더욱 목소리를 높였다.
“나는 경고했었다. 이곳을 벗어나려 하는 놈이 있다면 잘근잘근 씹어주겠다고······ 언젠가 얘기했었지. 뼈를 발라 차곡차곡 쟁여놓았다 나중에 고향으로 보내준다고 말이다. 어차피 죽을 것을 알면서도 왜 도주를 하나. 나는 너희들에게 가능한 한 자유를 주고 있지 않느냐. 한 놈이 욕심을 내면 결국 우리는 모두 죽는다는 것을 모르느냐? 누구도 이곳을 빠져 나갈 수 없다는 말을 믿지 못한다는 거냐? 결국 죽음뿐이라는 말을 믿지 못하는 것이냐? 어리석은 녀석들 같으니.”
그는 말을 마치자 손을 들어 까딱였다.
그러자 그의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두 명의 군병이 앞으로 나섰다. 그들의 손에는 긴 채찍이 들려 있었는데 길이가 일 장이나 되어 보였다.
반짝이는 것이 생선의 비늘로 싸인 것 같았다.
“악어가죽에 삼줄을 꼬아 만든 거야.”
누군가가 가는 목소리를 토했다.
고개를 돌리고 보니 용백의 어깨를 두드려 깨웠던 사내였다. 그는 원한이 깃들인 눈길을 보내고 있었는데 이를 악물고 있는지 메기처럼 벌어진 턱이 단단해 보였다.
그의 눈에 낀 원한은 의미가 있었다.
경우량에 대한 원한이라 보기에는 미진한 것이 느껴졌다. 어쩐지 느낌이 달랐다.
그들에게는 적당량의 병기가 있었다. 그들이 모여 있는 곳 한쪽에는 몇 개의 병기가 세워져 있기도 했다. 그런데 경우량에게 대들지 않는다는 것은 그들의 적개심이 경우량에게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었다.
놀라운 감정의 질곡이 밀려왔다.
‘사람을 증오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세상을 증오하는 것인가?’
기이한 감정이 몰려왔다.
‘이들은 적개심도 없나?’
그들이라고 동질의식이 없겠는가?
분노를 해야 했고 소리라도 질러야 했다.
그러나 누구도 채찍질을 하는 자에 대한 분노를 보이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바라볼 뿐이었다.
용백은 사내를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그가 그리 나쁜 사람이거나 관상학적으로 등을 칠 자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의생은 늘 사람의 뼈를 만지고 곤란을 당하는 사람을 보기 때문에 자연히 관상에 일가견이 생기게 마련이다. 그래서 공통점을 찾아내게 된다. 용백의 경험과 기준으로 보아 그자는 남을 속이거나 다른 마음을 품을 자는 아니었다.
“누군가 그 규율을 무시하면 나는 상부의 지시를 따를 수밖에 없다. 그나마 내가 너희들에게 준 마음의 여유마저 빼앗아 버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는 같은 군병이다. 너희들이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는 신분이라 하지만 나도 같은 처지다. 이곳에서 빠져 나갈 수 없는 것은 같은 이치인데 왜 도주를 해서 우리 모두를 위기로 모는 것이냐? 누군가 이곳을 도주해 나간다거나 밖에 진을 치고 있는 남만수비대의 군병에게 들킨다면 우리 모두 죽게 되리라는 것을 모른단 말이냐?”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용백으로서는 경우량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무엇을 지칭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모두 수긍을 하다니······
어쩐지 침울하게 가라앉기는 했지만 경우량을 지지해 주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막 발기산에 도착했을 때 표독스러운 경우량의 모습을 생각하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모두 경우량을 믿고 따르는 것인가?’
생각은 길어지지 못했다.
철썩!
“크아아아아!”
물기 젖은 이부자리에 몽둥이 찜질을 하는 듯한 소리가 들리고 비명이 귀를 파고들었다.
‘극악한 놈들이군.’
용백은 입술을 깨물었다.
아무리 동조를 해도 그의 눈에 보이는 경우량과 채찍을 휘두르는 자에 대해서는 분노가 피어올랐다.
“규칙이다. 한 명이 규칙을 깨면 모두 죽는다. 쳐라!”
경우량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철썩!
채찍이 허공을 갈랐다.
매달린 죄수들의 피부에 뱀이 스친 듯 자리가 남고 신경조직이 몸서리를 쳤다.
언젠가 채찍을 맞아본 적이 있으므로 들려오는 소리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알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오래 전에 맛본 그 고통도 잘 알고 있었다.
악어가죽은 아니라 해도 그가 호광의 제형안찰사사에서 고문을 당했을 때 간수장이 그를 때렸던 물건 중에는 뱀의 비늘을 씌운 짧은 채찍이 있었다.
“잘 보아두어라. 이곳을 빠져 나갈 수도 없을 테지만 이곳을 나가려다 붙잡힌 녀석들이 어떤 고통을 당하는지 말이다. 이는 우리들끼리의 약속을 무시한 대가이며 우리 스스로 정한 규칙이다. 나는 너희들이 지침으로 삼기를 바란다. 언젠가는 나간다. 그것을 참지 못하면 죽는 것이다.”
경우량의 목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채찍이 반원을 그으며 떨어져 내렸다.
철썩!
매달린 사내의 몸에서 경련이 일어났다.
“크아아악!”
용백은 경우량의 말 같지도 않은 훈계에 이어 채찍이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반복된 행동이었고 반복된 결과가 있었다. 그리고 숨이 넘어갈 것 같은 비명도 들었다.
오금이 저리는 것 같았다.
두렵기 때문이 아니었다.
오로지 인간 같지 않은 자들에 대한 분노가 그의 피를 끓게 했다. 무엇인지는 몰라도 발기산의 늪지에 쳐진 군막에서 살아가는 군병들 사이에는 약속이 있는 것 같았다.
‘뭐냐?’
생각과는 달리 그는 함부로 움직이거나 그들에게 욕설을 뿌리지 않았다.
자신이 포박을 당할 때의 울분이 생각났다.
장 포교가 이끌고 달려온 군병들이 던진 금승탈삭에 포박된 지 이미 두 달, 생각하면 약이 올랐다. 만약 장 포교만 아니었다면 포정사의 내전으로 달려가지도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포정사는 이미 죽은 후였다.
방 안에 들어간 이유만으로 살인자라니······
장 포교를 생각하면 이가 갈렸다.
‘개새끼, 언젠가 죽인다······’
지난 이 개월 동안 그는 적지 않은 경험을 했고 그 경험이 인내심을 기르게 했다. 그는 화를 내는 것보다 참아야 한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철썩!
철썩!
채찍 소리가 요란해질수록 신음은 점점 약해졌고 이윽고는 아예 끊어져 버렸다.
그가 말뚝에 매달려 있는 군병들을 바라보았을 때 다른 군병들이 축 늘어져 버린 새끼줄처럼 보이는 죄수들을 풀었다. 그들은 서둘러 죄수들을 누이고 있었다. 그들은 발에서 가쇄를 풀고 손에 묶여 있던 밧줄의 끝을 손에 감아쥐었다. 그리고 그들을 어깨에 둘러메었다.
그것도 잠시였다.
군병들은 그들을 메고 물가로 다가갔다.
섬의 한 끝, 말뚝이 세워져 있는 곳에서 물가까지는 불과 삼십여 장밖에 되지 않았다. 군병들은 이미 호흡이 끊어진 것으로 보이는 동료들을 둘러메고 물가로 다가가 물 속으로 집어던졌다.
“애초의 약속이다.”
경우량의 목소리가 울렸다.
첨벙!
물이 밀리며 물방울이 허공으로 뛰어올랐다. 매를 맞아 축 늘어진 죄수들의 몸은 물 속으로 가라앉았다 다시 떠올랐다 하기를 반복했다. 그 중의 한 명은 완전히 숨이 멎은 것은 아니었는지 손을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푸르르르르!
물방울이 일어나는 소리가 들리며 수면으로 마치 나뭇등걸 같아 보이는 물체가 다가오고 있었다.
악어였다.
“우리들은 참 독하지.”
곁에 서 있던 사내가 입을 열었다. 그는 혼자 중얼거리다 용백을 발견하고 빙그레 웃었다.
용백은 그와 얼굴이 마주치자 빙그레 웃었다. 그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사내의 얼굴에서 웃음이 흘러나온다는 사실만으로도 용백은 분노했던 마음을 안정시키고 점차 마음을 가다듬을 수가 있었다.
“이곳이 처음인 모양이군. 새로 왔나?”
용백은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가 어떤 의도로 말을 거는지 알 수 없지만 어떤 경우라도 적을 만들 필요는 없었다. 가능한 한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대해 주어야 한다는 것은 끝없이 먼 길과 수없이 많은 뇌옥을 거쳐 오며 그가 깨달은 많은 일 중의 하나였다.
“운남지방에는 악어가 살지. 특히 청해와 서장을 거쳐 남만으로 흘러내리는 난창강과 노강은 우기가 되면 붉은 물이 밀려와 밀림을 쓸고 지나가지. 그때마다 악어가 발견되고는 해. 발기산은 천연적으로 만들어진 늪지. 그래서인지 악어의 서식지로는 적격이지. 사시사철 눈이 오지 않고 따듯한 바람이 부니 알을 낳기도 좋고 부화하기도 적당해. 그래서 악어들은 때때로 뭍으로 기어 올라와 우리 군병들이 자는 건물로 들어오기도 하지. 그러나 무엇보다 무서운 건 그것들이 우리 목숨을 노린다는 거야. 사람 고기는 너무 훌륭한 맛이거든.”
사내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중얼거렸다.
혼자 하는 말인지 들으라고 하는 말인지 부정확한 목소리였다. 그러나 그가 굳이 자신이 아는 이야기를 할 일이 없으니 그것은 극히 의도적인 말이었다.
‘훌륭한 맛이 난다고?’
몸이 떨렸다.
몸살이 나 몸에 오한이 쓸고 지나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어쩐지 몸에 개미가 올라 기어다니는 것 같았다.
사람 고기가 훌륭하다고?
맛이 있다는 말.
그것은 경험해 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이었다. 갑자기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카으으으!”
악어는 미친 듯이 달려들어 저항을 잃어버린 인간의 몸을 물어뜯었다. 팔다리가 부러지며 악어의 입 속으로 들어가고 붉은 피가 흘렀다.
가뜩이나 흐려진 물이 검붉은색으로 변했다.
용백은 몸을 일으켰다.
참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차가운 이성이 그의 폭발할 것 같은 감정을 지배한다고 하지만 분노는 그의 이성을 무너뜨렸다.
“이······”
그는 몸을 일으키며 소리를 지르려 했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갑자기 몸이 마비되는 것 같았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의 목을 움켜잡은 자가 있었다.
손아귀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 머리를 돌릴 수도 없었다.
“죽고 싶나? 아니면 몰매를 맞고 싶나? 우리의 규칙을 깨거나 저버리지 말게. 자네는 아직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 이미 죽은 사람들이야. 저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가 죽어. 어쩌면 저들이 더 편안할지도 몰라. 언젠가는 우리도 죽어. 더구나 더한 고통을 느끼며 전쟁에서 죽게 될 거야. 알량한 동정은 버리는 것이 좋아. 포기하는 것이 좋아.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될 거야.”
귀를 파고드는 소리.
위압적이라 하지는 못해도 힘이 실린 목소리였다.
‘시간이 지나면이라고? 내가 이곳에 새로 온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군. 내가 죄수라는 것을 알고 하는 소리인가? 그나저나 나는 이들의 규칙이 뭔지 모르니······’
기분이 묘해졌다.
목소리의 주인은 언제부터인가 그의 곁에 서 있는 사내였다. 그가 손을 놓았다. 용백은 고개를 돌리고 그의 얼굴을 보았다. 처음으로 그의 얼굴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삼십대 중반의 나이.
용백보다는 열 살 정도 위로 보였다. 잠을 깨워준 사내였다. 유난히 덩치가 커서 용백보다는 일 척이나 커 보였다. 용백이 칠 척에 육박하는 키로 결코 작지 않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그는 거인이라 부를 수도 있었다.
사내가 말하는 규칙이 궁금해졌다.
악어는 순식간에 두 개의 시체를 처리했다.
수백 마리의 악어가 몰려와 있었다.
악어들은 두 개의 시체로는 만족하지 못했는지 고개를 좌우로 흔들다 육지로 기어올랐다. 군병들이 기다리고 있다 악어 앞에 횃불을 집어던졌다.
악어가 물러났다.
경우량이 앞으로 나섰다.
“잘 보았지. 도주하려는 놈은 이와 같다. 올해만도 벌써 네 놈이다. 우리에게 잡히지 않아도 결국은 악어밥이 될 것이다. 너무 눈에 드러나면 우리도 너희들 모두에게 한 모든 약속을 장담할 수 없게 된다. 명을 단축시킬 뿐이야. 명심해. 누구도 이곳을 떠날 수가 없다.”
그가 몸을 돌려 자신의 거처로 향했다.
경우량이 들어가자 군병들이 물러났다.
“들어가라. 가서 해골을 뉘고 잔다.”
그들이 한 말의 전부였다.
군병들이 이곳저곳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용백은 군병들이 던져진 곳으로 다가갔다. 아직 육지에는 그들의 손을 묶었던 밧줄이 있었다. 밧줄을 당기자 너덜거리는 시체가 딸려 올라왔다.
“멈춰!”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리고 군병들이 행동을 멈추었다.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군병들이 몸의 방향을 틀었다. 경우량이 얼굴 가득 웃음기를 띠고 다시 다가왔다.
그는 용백의 앞에 섰다.
“영웅이 되고 싶나?”
경우량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알 수 없어 용백은 한동안 멍청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휙!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리고 턱이 얼얼해졌다. 문득 눈에 힘을 주고 보니 그의 몸은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경우량의 발이 목을 눌렀다.
숨이 막혔다.
용백은 참았다.
더러운 놈의 발 밑에서 구걸을 하거나 버러지처럼 버둥거리기는 싫었다.
“너는 친구를 만들었다. 지켜보는 놈들이 모두 너의 친구지. 네놈의 잘난 행동이 친구를 만들었어. 그러나 나에게는 좋은 일이 아니다. 우리 모두는 친구 때문에 죽는다. 어떤 경우라도 친구를 만들지 마라.”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친구를 만들지 말라니?
사람이 사는 곳에서 어찌 정을 나누지 말라는 말인가? 친구를 만들지 말라는 것은 정을 주지 말라는 말과 동의어가 아닌가? 용백은 어이가 없었다.
이윽고 경우량이 발을 떼고는 한참 동안 주위를 둘러보았다. 들어가려던 군병들이 모두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안색을 바꾸었다.
“그렇지, 사람의 뼈라도 묻어주어야겠지.”
그는 몸을 돌렸다.
웃는 듯 말했지만 자신이 충분한 경고를 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용백은 몇 개의 뼈와 너덜거리는 살점을 모았다. 그리고 돌로 늪 옆에 작은 구덩이를 파고 뼈와 살점을 묻었다. 누구도 그를 말리지 않았다.
횃불이 꺼져서인지 이미 암흑이었다.
2. 임충
방 안은 겨우 사람의 모습을 식별할 수 있을 정도였다.
나무로 얼기설기 만든 집 중앙에 짐승의 기름으로 만든 것으로 보이는 유지가 담겨 있었고 삼마를 꼬아 만든 심지가 불꽃을 피워올리고 있었다.
십육 명!
눈에 보이는 자들은 그들이 전부였다.
그들은 용백이 들어서자 무심하지 않은 시선으로 그를 쫓았다. 마치 못 볼 것을 보았다는 눈빛 같았다. 그도 아니라면 별종을 보았다는 눈빛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호기심의 표현인가?
그들은 무엇을 바라기에 그런 눈으로 보는가? 그들의 무표정하지만 흔들리는 눈동자에는 알 수 없는 감정이 잠자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입을 열고 싶지는 않았다.
용백은 자신의 자리를 향해 한 걸음씩 옮겨갔다.
지나가는 도중에 사람들과 눈이 마주쳤다.
그들의 표정으로 보아서는 무언가 한마디할 것 같은데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굳은 모습.
자신들이 발기산에 먼저 왔다는 것을 시위하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용백은 그들을 바라보며 자신의 자리로 향했다.
그는 지난날의 경험으로 그들이 보여주는 반응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었다.
갑자기 나타난 용백에 대해 흥미를 느끼는 한편, 지난날의 경험에서 비롯된 무관심으로 외피를 두른 모습이었다. 한데 사람에게 정을 준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알고 있다는 것을 표현하려 한 것인지, 갑자기 나타난 자에 대한 적의인지는 알 수 없었다.
분명한 것은 그들이 한 꺼풀 가면을 뒤집어쓰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들은 판단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들은 새로이 나타난 자가 귀찮은 존재가 될지, 아니면 피곤함을 피하게 해주는 친구가 될 것인지 가늠하고 있을 터였다. 그것은 마치 돈 많은 놈팡이들이 황금을 주고 하룻밤 정액을 배출할 계집을 찾는 기분일 것이다.
용백은 조심스럽게 발을 옮기며 그들을 살펴보았다.
겉으로는 무심한 표정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지만 용백은 스치듯 지나가며 한 명 한 명의 표정에서 그들이 지니고 있을 법한 생각을 읽었다.
오랫동안 의생으로 살았다.
경험은 재산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사람의 골격과 혈맥, 각각의 체질이 가지고 있는 특징을 알고 있는 그가 골격과 관상으로 사람을 판단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늙은이로군.’
육십은 넘어 보이는 늙은이!
이미 세월의 잔상을 이마에 새기고 있는 늙은이는 눈이 마주치자 누런 이를 보여주었다.
늪지로 둘러싸인 발기산에서 살아가기에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노인이었다. 그러나 눈에 총기가 있고 턱이 견실한 것으로 보아서는 건강상태가 양호해 보였다.
용백은 그의 앞을 지나쳤다.
늙은이 곁에는 열여섯도 되어 보이지 않는 소년이 있었다. 겉으로 보는 것과 차이가 있을 수도 있지만 그가 어리다는 것은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도 틀림없었다.
‘불쌍한 인생이군.’
각양각색의 군상들을 지나친 그는 자신의 자리로 정해진 침상 위에 벌렁 누웠다.
“자네는 사람을 끄는 묘한 힘이 있군.”
사내!
조금 전 도망쳤던 군병들이 채찍을 맞고 물에 던져져 악어의 먹이가 되어 죽어갈 때 곁에 서 있던 자였다. 용백을 깨워 밖으로 데리고 나갔을 뿐만 아니라 함부로 움직이거나 경거망동하지 못하도록 주의를 주었던 사내. 키가 유난히 컸으며 솥뚜껑 같은 손바닥이 눈에 들어왔다. 침상에 누우면 발은 밖으로 벗어날 것 같았다.
용백은 빙그레 웃었다.
당장에 보여줄 수 있는 표정은 그것뿐이었다.
“나는 임충이라 하네. 지금은 이 모양 요 꼴이지만 한때는 남만수비대의 돌격조였던 선풍조의 조장이었지. 그래, 이제는 조장이었다는 과거형이 어울려. 나를 따르던 자들은 모두 죽었거든. 나는 오장의 지위를 가지고 있었어. 그래서 남들은 임 오장이라 부른다네. 자네도 그리 불러도 돼! 임충이라는 이름은 어디선가 들어본 이름일 거야. 전쟁터에 온 지는 이미 십 년이 넘었지.”
임충!
어디선가 들어본 이름이라는 말은 맞았다.
수호지였던가? 아님, 삼국지였던가? 뻔한 이야기였지만 중원인들이 만들어내는 중화주의에 입각해 만들어낸 잡설 속의 주인공이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골이 흔들리는 것 같았다.
‘닮았군.’
왠지 웃고 싶어졌다.
화자(라고도 하는 이야기꾼)들은 간혹 주루나 사람이 우글거리는 저잣거리에서 이야기를 해주고 밥을 빌어먹는다. 그들이 하는 이야기의 대부분은 강호의 이야기거나 누군가 썼을 것으로 보이는 잡설을 풀어 그럴싸하게 하는 이야기였는데 그 중에는 수호전이라는 이야기가 있었다.
그들의 이야기에서 임충은 대단한 사람이었다.
표자두라 했던가?
이야기 속의 사람이라 그를 본 적은 없지만 정말로 그를 보았다면 닮았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범의 얼굴을 하고 있으니.
오른쪽 뺨에 있는 커다란 반점은 정말 표범의 무늬를 닮은 것 같았다.
용백은 자신을 둘러보는 눈길이 적지 않음을 느끼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과연 많은 사람들이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자네는 왜 끌려왔나?”
누구나 그렇듯 그도 사람에 대한 궁금증을 털어버리지는 못한 것 같았다. 임충은 아마도 새로운 사람에게서 거부할 수 없는 호기심을 느낀 것 같았다.
‘관심이 있나?’
용백은 이유없이 짜증이 났지만 엉뚱한 생각을 했다. 자신이 지니고 있는 직업이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준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난, 의생이오.”
동문서답, 그는 임충의 질문 따위와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를 했다.
임충의 행동에 조용히 이야기를 듣던 사람들이 모두 눈을 돌렸다. 바라보는 눈에는 한결같이 희미한 웃음이 걸렸다. 의미가 있는 눈빛이었다.
‘뭐지?’
용백은 가슴이 덜컥했다.
눈은 사람의 마음을 대변한다.
각자가 보내고 있는 눈길의 의미를 이해할 수는 없지만 기이하다는 생각은 지울 수 없었다.
“의생? 이곳은 군병들만 끌려오는 곳인데 왜 의생이 이곳에 온단 말이지?”
임충은 불안하게도 다리를 흔들며 물었다.
“시체를 보았기 때문이오.”
그에게는 이야기를 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관상으로 보았을 때 그는 이유없이 남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이 아니었다. 사람은 겉으로 판단할 수 없지만 그가 지닌 관상은 믿어도 좋을 것 같았다.
이미 본 것이 있고, 탈주하던 군병의 죽음을 보았지만 말리지 않았다고 해서 모두 나쁜 마음을 지니고 있다 생각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더러운 세상.’
문득 밸이 꼴렸다.
생각하면 억울한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생각할 일이 아니었다.
“시체라니? 자네는 군병이 아니잖아.”
“그렇소. 나는 군병이 아니오. 그러나 내가 포정사의 시체를 보았다면 이해가 되오? 그가 죽어 있던 자리에 내가 있었다는 것이 문제였소.”
“포정사? 자네가 죽였나?”
“아니오. 난 그저 연락을 받고 검시를 위해 달려갔을 뿐이었소. 그런데 내가 갔을 때에는 아무도 없었고 피가 흥건하게 젖은 시체가 있었을 뿐이오.”
“그 시체가?”
“그렇소. 포정사였소.”
용백은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이처럼 궁벽한 곳에 사는 사람들, 자신들의 비밀을 숨기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그토록 상세하게 이야기를 했다는 사실이 왠지 우스워졌다. 숨겨야 옳은 일인데.
모두들 고개를 끄덕이고 있지만 반은 믿지 않을 것이었다. 그들의 표정이 그랬다.
“여기 오는 사람치고 억울하지 않은 놈이 없어.”
멀리서 말소리가 들렸다.
말소리가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언젠가는 입을 연 놈이 누구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고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아도 좋을 자였다. 흉중에 생각을 묻고 있는 자는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것도 경험이었다.
“잘되었군. 여기에는 아픈 사람이 많아. 허허허, 의생이라! 모르기는 해도 자네는 이곳에서 오래도록 많은 사람들에게 각광을 받을 거야. 물론 이곳을 떠나기 전까지지. 언제 떠날지 알 수 없지만. 이곳까지 오게 된 이유도 있겠지. 물론 경우량도 자네의 신세를 지려고 하겠지.”
임충이 나직한 목소리를 흘렸다. 어쩐지 자조적으로 들려 마음이 상쾌하지 않았다.
용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어떤 말을 해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분명한 것은 조금이라도 자유로워지기를 바랄 뿐이었으니······
3장 오리무중
1. 수뢰지
막상 날이 밝아 둘러보니 발기산에 지어진 막사는 좁은 곳이 아니었다. 수초가 머리를 내민 수면에는 여러 개의 섬이 혹처럼 튀어올라 있었고 그 위에는 영락없이 하나씩의 집이 서 있었다.
나무로 만든 집이었다.
그곳에도 군병들이 있었다. 섬과 섬 사이에는 나무다리가 놓여 있었다.
나무다리라 해서 별건 아니다. 그저 긴 나무 두 개를 걸쳐 놓아 다리로 이용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 다리를 타고 군병들이 이동하고 왕래를 했다.
조금 질기기는 해도 담백한 맛이 나는 구운 고기로 아침을 먹은 뒤 그는 자신이 잠을 잤던 곳으로 들어와 누워 있었다. 마음을 정리하고 싶었다.
‘이제 어떡한다.’
찹찹해졌다.
지난날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다가왔다.
일찍이 죽은 자도 살린다는 소문이 난 호광제일의 신의, 영능선생의 제자로 받아들여진 것이 그가 여덟 살 때였다.
당시 역병이 돌아 부모가 죽고 홀로 살아남아 고아가 된 그를 도와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영능선생만이 그를 거두어주었고 제자로 삼았다.
십 년 동안 영능선생의 의술을 물려받았다.
그의 나이 열여덟이 되었을 때 영능선생이 죽었다. 그러나 이미 그는 영능선생의 의술 구 할 이상을 물려받은 후였다.
내의원에 들어간 것은 우연한 일이었다.
당시 포정사로 전근해 온 유자경의 병을 치료한 것이 일생의 전환기였다.
그리고는 행복했었다.
걱정도 없었다.
미관말직이라 하지만 의생으로서 생활함이 부족하지 않을 정도의 녹봉도 받았고 간혹 가난한 자들을 치료해 주어 명의라는 이름을 얻기도 했었다.
“휴우······!”
땅이 꺼질 듯한 한숨.
그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입술을 연 한숨이 밀려나왔다.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었다.
“누굴까?”
의문이 들었다.
누군가 자신을 모함하지 않았다면, 자신을 제거하거나 멀리 떠나보내려는 목적이 없었다면 그처럼 어이없는 누명을 뒤집어씌우지는 않았을 것이다.
장 포교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가 자신을 구렁텅이로 인도한 것은 사실이지만 정점에 그가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도 하수인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을 용백은 알고 있었다.
“무슨 고민이 그리도 많은가?”
갑자기 들려오는 소리.
깜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몸을 일으켜 세우고 보니 희미한 그림자가 어두컴컴한 방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경우량이었다.
그는 그에게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애써 웃음을 지으려는 표정이 역력히 느껴졌다.
용백은 어쩐지 못 볼 것을 본 것 같은 기분이었다.
스스로 실력이 있으며 자신이 힘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자신의 애로사항을 이야기하면서도 자존심을 찾아야 한다는 듯한 모습.
‘가여운 인간.’
어쩐지 그가 불쌍하게 느껴졌다.
경우량은 다가와 그와 마주보는 곳에 섰다.
“의생, 너는 이곳에서 해야 하는 일을 알고 있겠지?”
“물론이오.”
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면 머리 한 곳이 비었거나 앞뒤를 가리지 못하는 사람일 것이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군병들은 아침을 먹고 난 후 들어오지 않았다.
그들은 곳곳으로 흩어졌는데 용백에게 자신들이 무엇을 하는지 알려주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용백도 아직은 그들에게 마음을 열 때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시간이 필요했다.
“나는 네가 뛰어난 의생이라는 것을 믿는다. 이곳에는 병자가 많다. 그들은 모두 너에게 상처를 치료받게 될 것이다. 그 동안 많은 사람이 치료를 받지 못해 죽었다. 이제 네가 이곳에 왔으니 죽는 사람은 줄어들 것이다.”
그는 발목의 옷자락을 걷어붙이고 맞은편에 앉았다.
용백은 수긍했다.
그의 말이 틀리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운남뿐 아니라 남만은 매우 더운 곳이다.
사시사철 눈은 구경도 하지 못하는 곳이었고 후텁지근한 날씨가 밤에도 땀이 흐르게 만드는 곳이다. 자연히 낮의 날씨는 말할 수 없을 정도라 할 수 있었다.
사람의 상처는 더운 지방일수록 더욱 빠르게 퍼져 나간다.
추운 지방에서는 그저 상처가 나고 가라앉을 정도라 해도 더운 곳에서는 곧 진물이 나고 썩게 마련이다. 신속하게 조치를 하지 않으면 작은 상처만으로도 생명을 잃을 수 있다.
경우량의 경우도 그랬다.
그의 상처는 비교적 가벼운 것이었지만 날씨 탓인지 부어올랐고 살은 썩어가고 있었다.
용백은 먼저 그의 상처를 들여다보았다. 처음의 상처는 그리 크지 않았을 것으로 보이지만 오래도록 방치해 두어서인지 제법 중한 상처가 되어 있었다.
손가락으로 누르면 푹푹 들어가며 고름이 나왔다.
용백이 손가락을 댈 때마다 경우량은 몸을 움찔거렸다. 극도의 통증을 참으려 애를 쓰느라 가는 신음도 흘러나왔다.
“화농이군요.”
“흠, 나무가시에 찔린 상처가 이 정도일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지.”
용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이 자신의 생각과 일치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우려했던 대로 결국은 이곳에서 환자나 돌보며 일생을 마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더욱 강해졌다.
‘방법이 있을 거야.’
찾아야 했다.
멍청하게 앉아 있거나 그의 병을 방치한다면 두고두고 괴롭힘을 당할 수 있었다.
“누군가 나를 도와주어야 하오.”
경우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문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다 손바닥으로 탁자를 두드리며 입을 열었다.
“들어와라.”
문이 열리고 한 사람이 들어섰다.
무오였다.
“의생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도록 해. 군병들의 힘이 필요하면 그들을 동원시켜도 좋다. 의생이 마음 편하게 환자를 돌볼 수 있도록 해주어라.”
“알겠소.”
무오는 무신경하게 대답했다.
무오는 대답을 하고 나서 용백을 바라보았다. 용백은 그의 표정이 무엇을 요구하는 것인지 알 수 있었다.
“뜨거운 물과 깨끗한 천, 그릇에 불을 담아 준비해 주고 잘 드는 칼을 준비해 주시오. 혹시 이곳에 치료를 위해 사용하는 약재가 있소?”
무오는 고개를 끄덕이고 물러갔고 경우량은 고개를 저었다.
난감한 일이었다.
약재가 없다니.
그렇다면 치료를 해도 다시 악화될 수 있었다. 치료를 했다고 해서 병이 낫는 것은 아니었다. 약을 같이 써야 완치가 보다 빠르고 안전했다.
“약재로 쓸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말이오?”
“의생, 나중에 섬 주변을 돌아보아도 좋다. 그곳에서 네가 필요하다는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지 구해 주도록 하겠다. 우선은 내 다리의 고통을 없앨 방법을 찾아라.”
용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은 그를 치료해 주어야 앞으로의 전도가 편안할 일이니 가능한 한 모든 방법을 생각해 보기로 했다.
무오가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불이 타오르는 작은 사기그릇이 들려 있었고 날이 선 소도가 허리에 꽂혀 있었다. 손목에는 비교적 깨끗한 천이 둘둘 말려 있었다.
“이곳은 늪지이니 거머리가 많을 것이오. 거머리를 잡아오시오. 깨끗한 물도 있으면 좋겠소.”
무오가 눈을 크게 떴다.
거머리가 왜 필요한지 모르겠다는 듯한 눈빛이었지만 경우량이 고개를 끄덕이자 무오는 알았다는 듯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
비가 많고 날씨가 따듯한 곳에는 으레 거머리가 많게 마련이었다.
용백은 불이 타오르는 화로에 소도를 얹었다.
검은 광택이 나던 소도는 점차 달궈지고 곧 붉어지기 시작했다. 소도에 붙어 있던 불순물이 타는지 붉은 불꽃이 피어오르기도 했다.
“그건?”
“불에 달구는 것은 소독의 효과가 있습니다. 더불어 병이 침투하는 것을 막아주지요.”
경우량이 몸을 떨었다.
무오가 들어온 것은 소도가 달구어졌을 때였다. 그의 손에는 나무의 속을 파서 만든 그릇이 들려 있었고 맑은 물이 찰랑거리고 있었다.
다른 손에는 두 마리의 거머리가 매달려 꿈틀거리는 나뭇가지가 들려 있었다.
용백은 물에 소도를 담갔다.
파하하하!
물에서 김이 피어오르며 요란한 소리가 났다.
“상체를 잡으시오.”
무오가 다가와 경우량의 어깨를 눌렀다. 경우량은 이마에서 땀을 뿌리며 자신의 발을 내려다보았다.
용백은 소도를 가져가 경우량의 발목을 그었다.
“헉!”
나직한 비명이 바람이 새는 것처럼 밀려나왔을 때 경우량의 발에서 어린아이의 코에서 흘러나오는 콧물 같은 화농이 줄줄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조금 아플 거요.”
용백은 경우량의 발목을 잡고 힘주어 짰다.
누런색의 화농이 밀려나오고 곧 피가 보이기 시작했다. 경우량이 몸을 비틀었지만 덩치가 만만치 않은 무오가 몸을 누르고 있어 발광이 심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으아아악!”
연신 비명이 터져 나왔다.
용백은 경우량의 몸에서 화농을 다 뽑아낸 후 선홍색의 피가 나오자 손을 멈추었다.
무오도 손을 떼었다.
용백은 깨끗한 천을 둘로 나누었다. 천을 둘둘 말아 발목보다 한 뼘 정도 떨어진 오금 아래를 강하게 묶었다.
“거머리를 상처 부위에 놓으시오. 만약 거머리의 몸이 반 이상 파고들면 바로 뽑아야 하오.”
“알았다.”
무오가 나뭇가지에 달라붙어 있던 거머리를 떼어 경우량의 상처 부위에 놓았다.
실처럼 가늘고 길던 거머리는 곧 이리저리 기어다니기 시작했다. 늘어지면 한 뼘에 이를 것 같았던 거머리의 몸통이 점점 굵어지기 시작했다.
한눈에 보아도 거머리가 이동할 때마다 배가 불러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상한 방법이군. 난 이런 치료가 있다는 것을 들은 적이 없어.”
경우량은 발목을 파고드는 간지러움을 참으며 입을 열었다. 그는 사십이 넘은 나이였지만 이토록 기이한 치료법은 들은 적도 없었고 본 적도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사이에도 거머리는 계속해 기었다.
움직이는 사이에 점점 배가 불러지더니 급기야는 손가락처럼 굵어지고 있었다.
“거머리는 피를 빨아먹지요. 물론 그사이에 하지에 있던 썩은 피까지 모두 빨아먹는 겁니다. 거머리가 지나간 자리에는 병균이 모두 없어지니 당장에 덧나지는 않을 겁니다.”
“허, 이런 치료 방법이 있었던가? 자네는 뛰어난 의원인 모양이야.”
“그렇지는 않습니다. 다만 가난한 사람들을 치료하다 보니 돈이 들지 않는 방법을 연구했을 뿐입니다. 누구든지 거머리를 잡을 수는 있으니까요. 내일은 구더기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구더기라니?”
“구더기는 생살을 건드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썩은 부분이나 화농이 있는 부분만큼은 완벽하게 갉아먹습니다. 또한 부작용도 없지요.”
경우량이 무오를 바라보았다.
무오가 어깨를 들썩였다. 어쩐지 생각만 해도 징그럽다는 기분을 표출하는 것이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곳은 날씨가 더운지라 악어가죽을 하루만 널어두면 구더기는 얼마든지 얻을 수 있을 겁니다.”
무오의 대답은 명쾌했다.
용백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가 군병이고 더운 지방에서 오래 살았을지 모르지만 대답으로 보아 의술의 경험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던 것이다. 더구나 그는 얼굴이 평온해 보였다.
‘이상한 일이로군. 이자는 왠지 이 상황을 즐기는 것 같아. 아니, 그다지 두려워하지 않거나 이 막막함을 이기는 힘을 지닌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어떤 이유가 있기 때문일 거야.’
용백은 몇 번인가 무오를 돌아보았으나 그의 얼굴에 한 꺼풀 깔리는 웃음기 외에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고개를 숙이던 용백은 피를 빨아먹고 마치 둥근 열매처럼 변해 버린 거머리를 볼 수 있었다.
“무오, 거머리를 떼시오.”
무오는 지체없이 손을 뻗어 거머리를 떼었다.
용백은 고개를 숙이고 경우량의 상처를 샅샅이 살펴보았다. 용백은 고개를 숙이는 중에 경우량과 눈을 마주쳤을 때 그가 웃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경우량은 더할 수 없이 시원한 표정이었다.
“근본적으로 치료를 하려면 약재가 있어야 하오. 지금은 겨우 더 이상 썩는 것을 막았을 뿐이오.”
“좋아. 내일 이곳저곳을 돌며 약재를 구할 수 있도록 해주겠다. 약재가 될 것이 얼마나 있을지 모르지만······ 그리고 한 달에 한 번, 곡량이 올 때 남만수비대의 군병들에게 필요한 약을 부탁하도록 하겠다.”
“그렇게 한다면 이곳에 있는 많은 사람들의 고통을 거두어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소.”
용백은 경우량의 오금을 묶은 천을 끄르며 말했다.
경우량은 몇 번인가 발을 굴러보았다. 한결 편해졌는지 얼굴 가득 웃음기를 머금었다.
“좋군, 좋아.”
경우량은 만족스럽게 중얼거리다가 용백을 바라보았다. 그는 한참 동안 근엄한 표정을 지었지만 곧 얼굴을 풀었다. 그리고 한 발 다가들었다.
“좋아. 나는 그대가 마음놓고 사람들을 치료할 수 있도록 해주겠다.”
“난, 약재를 구할 수 있도록 이곳을 돌아보고 싶소.”
“어디든지 마음대로 다녀도 괜찮다.”
“고맙소.”
“한 가지 충고할까?”
갑작스러운 말.
용백은 눈을 들었다.
“이곳에 있는 군병들은 모두 백전의 노장들이다. 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는 말이지. 만약 공이 없다면, 지닌 실력이 없었다면 모두 사형을 당했을 놈들이다. 다시 말해 죄수들이라는 말이다. 이 수뢰지는 모두 죽었어야 할 놈들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기 위해 마련해 놓은 곳이다. 이곳이 수뢰지라는 말을 들었는지 모르겠군. 그들에게 많은 것을 배워두는 것이 좋아. 그렇지 않으면 후회를 하게 될 날이 올 거야. 그들은 살아야 하는 이유가 있기 때문에 사형을 당해 마땅한 죄를 짓고도 살아남은 거야. 명심하는 게 좋을 거다. 뭐든지 배워두면 나중에 고마움을 느낄 거야.”
용백은 고개를 갸웃했다.
수뢰지라······
언젠가 들은 적이 있었던 것 같았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수뢰지라는 이름은 이미 중원에 알려진 이름이었다. 군문에서 죄를 지은 자들을 수용하는 곳으로 소문이 나 있는 곳.
한번 들어가면 죽어 뼈가 되어도 나오지 못한다는 곳이 아니던가?
아뿔싸!
이곳이 수뢰지였단 말인가?
어쩐지 산의 모양이나 사방을 두르고 있는 늪이 마음에 들지 않았었다. 진작 생각해 내지 못한 것은 용백이 경황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고 자신이 그처럼 극악한 곳으로 끌려왔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몸이 으슬으슬 떨리는 것이 비를 맞아 몸살이 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고개를 드니 경우량이 웃고 있었다.
용백은 그가 바라는 대답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마음이 안정되지 않는 순간에도 입을 열어 대답했다.
“알겠소.”
경우량은 고개를 끄덕이고 흡족한 표정으로 사라졌다. 용백은 무오를 바라보았다.
‘죄수?’
용백의 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련만 무오는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밖으로 나가버렸다. 용백은 마음이 무거워져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모두 죄수라고?”
그의 목소리가 허탈하게 울렸다.
오리무중이란 이런 것이다.
오 리에 이르는 길에 안개가 깔렸으니 동서남북을 구분할 수 없다는 말. 행방이나 단서를 찾기 어렵다는 말이지만 마음이 어지럽다는 말이기도 하다.
용백이 그랬다.
어떻게 하나?
무엇을 해야 하나.
용백으로서는 허탈하다 못해 막막해지는 기분이었다. 무엇부터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생각할 수 없었다.
정말 더러운 기분이었다.
“살기는 틀린 것 같군.”
용백은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경우량이 사라지고 얼마 되지 않아 몇 명의 죄수들이 갖가지 물건을 들고 나타났다.
목재와 철정, 망치와 톱 등의 도구를 든 죄수들은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이곳저곳에 나무를 대고 철정을 박았다. 죄수들이 잠을 자는 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반듯한 침상이 마련되고 그럭저럭 깨끗한 천으로 휘장이 쳐졌다.
허름한 모옥 안에 그를 위한 공간이 마련되었다. 그곳은 의생이 병자를 치료할 수 있도록 한 곳이었는데 그럭저럭 깨끗하게 만들어진 셈이었다.
일찍이 준비되고 있었는지 침도 마련되었다.
쇠를 달굴 수 있는 작은 화로와 몇 개의 칼, 그리고 손을 닦을 수 있는 물그릇도 놓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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