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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로가기버튼 이계에서 리얼 팜 [E](종료230728)

이계에서 리얼 팜 1-1권

2018.04.20 조회 10,756 추천 102


 # Chapter 1.
 
 크롭 바이러스.
 21세기 초에 발생한 이 바이러스는 전 세계 농업 생산량을 제로에 수렴하게끔 했다.
 각종 농작물의 수정과 발아를 막았고, 유실수는 말라 비틀어져 갔다. 재미있는 것은 바이러스가 오로지 인간이 먹을 수 있는 식용작물에게만 작용한다는 점이었다.
 게다가 목재를 생산하는 나무나, 독이 있어 인간이 먹을 수 없는 것들은 오히려 성장이 가속화되는 기현상이 벌어졌다.
 인류를 말살하려는 비밀 결사의 음모, 지구의 자정 작용, 외계인의 침공 또는 신의 징벌.
 말은 많았지만, 그리 큰 조명을 받지는 못했다.
 사람들에게는 그런 말보다는 당장 먹을 한 끼 식사가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한동안은 각국이 보유하고 있던 식량을 최대한 아끼면서 버텼다. 그리고 어떻게든 대안을 찾으려 했다.
 먼저 가축에서 대안을 찾아보려 했다. 사방에 넘쳐나는 나뭇잎을 뜯어 먹이고, 독초들 중에서도 그나마 독성이 적은 것을 팔팔 끓여 독성을 약하게 해 먹이면서 가축을 늘리려 했다.
 하지만 충분한 먹이를 주었음에도 가축의 숫자는 늘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줄어들었다. 번식력의 저하 때문이었다.
 이 역시 크롭 바이러스의 영향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인공수정 기술까지 최대한 동원했음에도 착상에서 실패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어렵사리 성공했다 해도 유산할 확률이 높았다.
 결국 가축에서 희망을 찾지 못한 인류가 눈을 돌린 것은 강과 바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이미 문제가 나타나고 있었다.
 해초나 수초들이 급격하게 줄어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플랑크톤 역시 감소하고 있어 바다의 생태계 파괴는 시간 문제였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위기감을 느낀 각국의 무분별한 남획으로 더욱 가속화되었다.
 곤충 역시 대안으로 떠오르기는 했지만, 독초의 영향 때문인지 벌레를 찾아보기 힘들 지경이었다.
 굶주림에 인구는 서서히 줄어갔다. 남은 사람들은 목재를 갈아 죽처럼 끓여 먹거나, 껍질, 뿌리를 먹으며 버텼다. 독초 중에서도 독성이 적은 것을 끓여 독성을 최대한 제거해 먹는 등으로 근근이 버텼다.
 하지만 말 그대로 버티는 것뿐이지, 인류의 앞길은 암울했다.
 다행히 인류는 멸종하지 않았다.
 한 박사의 연구 때문이었다.
 플랑크톤을 이용한 대체 식량 생산.
 나날이 감소하는 플랑크톤을 연구하다 개발된 기술이었는데, 복잡한 이론을 차치하고 설명하자면, 물과 햇빛만 있으면 공짜로 무한히 식량을 생산할 수 있는 기술이었다.
 예를 들어 각 가정에 흔히 있는 어항. 여기에 플랑크톤 시드라는 것을 넣고 몇 시간 정도 햇볕을 쬐기만 하면 투명하고 둥그스름한 젤리 같은 것이 둥둥 떠오른다.
 에너지 젤이라 명명된 이것은 무색, 무미, 무취지만 삼대 영양소 및 식이섬유가 풍부하고, 열량 또한 높았다. 주먹만 한 에너지 젤 한 덩이면 너끈히 한 끼가 해결될 정도였다. 즉, 곡물을 대체할 충분한 에너지원이 된다는 의미였다.
 게다가 수조 안의 플랑크톤은 계속해서 증식할 수 있었고, 그것을 나눠 다른 수조에 넣어도 에너지 젤을 생산할 수 있었다.
 그야말로 인류사에 한 획을 그을 혁명적인 기술이었다.
 더군다나, 기술을 개발한 박사는 인류를 위해 그 기술을 무상으로 풀어 누구나 사용할 수 있게 했고, 이는 인류사에 굶주림이란 단어를 지워 버리는 효과를 낳았다. 아프리카 같은 경우는 식량난이 시작되기 전보다 오히려 더 살기 좋아졌을 정도였다.
 다만, 그동안 인류가 누려온 음식문화는 크나큰 위기를 맞이했다.
 에너지 젤은 기본적으로 무색, 무미, 무취. 그리고 식감은 떠먹는 젤리와 비슷했다.
 문제는 가공이 엄청나게 까다로운 데다가 향료를 첨가해도 원하는 맛을 낼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유명 요리사들이 아무리 가공하고, 맛을 내도 결과는 항상 5% 부족한 밍밍하기 짝이 없는 맛. 게다가 거기에 곁들일 각종 야채나 과일 등이 없었으니, 음식이라고 내놓아 봐야 푸딩이나 젤리 비스 무리한 무언가가 될 따름이었다.
 고기를 먹으면 되지 않느냐고?
 물론 구할 수는 있었다. 직장인 평균 월급을 탈탈 털면 100그램 정도를. 웬만큼 사는 사람들도 선뜻 손을 대기 두려운 미친 가격이었다.
 에너지 젤로 가축의 먹이는 풍부했지만, 번식력은 여전히 회복되지 않았다.
 여러 실험실에서 새로운 인공 수정 기술을 개발하고, 배양 고기의 가격을 낮추는 등의 연구를 하고는 있었지만 아직까지 획기적인 방법은 나오지 않았다.
 돈 없는 이들은 그저 공짜에 가까운 식량을 얻을 수 있는 것에 만족하고 살아갔다. 그러나 상류층은 아니었다.
 그들은 엄청난 비용을 들여 예전의 농산물, 리얼 푸드를 얻기 위해 노력했다.
 완전히 밀폐된 온실, 정화한 공기, 정수된 물, 그리고 완전히 밀폐 보관해 크롭 바이러스에 오염되지 않은 씨앗을 어렵게 구해 재배를 시도했다.
 결과는 다행히도 성공적이었다. 다만, 그렇게 얻어진 농산물의 가격은 그야말로 어마어마했다.
 고기가 월급이었다면, 농산물은 연봉이랄까?
 그나마도 상류층의 소비를 감당하기도 벅찰 정도로 물량이 적었기에, 진짜 음식은 돈이 있어도 웬만해서는 구하지 못할 지경이었다.
 이런 이유로, 진짜 음식을 먹는 일은 어느 순간 사람들의 버킷 리스트의 1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래서일까?
 [리얼 팜! 게임을 하시면 리얼 푸드를 드립니다!]라는 캐치프레이즈로 출시된 게임은 순식간에 전 세계인의 이목을 끌어모으기에 충분했다.
 
 * * *
 
 “흠······. 오늘은 무슨 맛으로 먹을까?”
 한 청년이 냉장고 문을 붙잡고 안을 살피고 있었다.
 조각미남까지는 아니어도, 훈남 소리는 충분히 들을 수 있는 서글서글한 눈매가 매력적인 청년이었다.
 “사과 맛! 너로 정했다!”
 외침과 함께 청년은 빨갛게 익은 사과가 그려진 음료 팩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몸을 돌림과 동시에 뒷발로 냉장고 문을 밀쳤다.
 텁.
 등 뒤에서 일어나는 소리를 들으며 청년은 팩 위쪽에 자리 잡은 플라스틱 뚜껑을 돌려 연 다음, 살짝 튀어나온 원형 입구를 입에 물었다. 그리고 힘껏 빨아들였다.
 쭈우우욱!
 내용물은 200mL 남짓이지만 그 한 팩에는 성인 남성이 한 끼를 버티기에 충분한 열량은 물론, 각종 비타민과 미네랄이 풍부하게 담겨 있었다.
 “캬! 역시 에너지 믹스는 사과 맛이 최고라니까!”
 단숨에 내용물을 흡입해 버린 청년이 탄성을 터뜨리며 홀쭉해진 팩을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사실 냉장고 안에 쌓아둔 에너지 믹스는 태반이 사과 맛이었다. 이는 청년이 어렸을 적 맛보았던 사과의 맛을 결코 잊을 수 없어서였다.
 시한부 판정을 받은 할머니의 평생소원은 죽기 전에 사과 한 조각을 맛보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슬하 모든 자녀가 돈과 인맥을 총동원했고, 그런 끝에 사과 두 알을 구할 수 있었다.
 그중 한 개는 가족들의 강권으로 할머니께서 드셨고, 남은 한 알을 열 명이 넘는 사람들이 나눠 먹었다.
 당시 꼬마였던 청년에게도 얄팍하지만 한 조각이 돌아갔고, 한입 베어 무는 순간 그는 태어나 처음 느껴보는 충격적인 맛에 한동안 멍한 채로 있었다. 그동안 그에게 음식이란, 물컹하고 밍밍한 에너지 젤 가공식품뿐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곧 그 맛을 다시 볼 수 있어!”
 청년은 씩 웃으며 방 한쪽에 놓인 둥그런 관과 같은 물체를 바라보았다. 게임, 그것도 가상현실 게임을 위해 만들어진 캡슐이었다.
 이어 캡슐 위, 벽면을 바라보자 11:55라는 반투명한 숫자가 떠올라 있었다.
 리얼 팜의 오픈 시각은 오늘 정오.
 “슬슬 준비해 볼까?”
 두둑. 두두둑.
 자리에 선 채, 목과 허리를 한 바퀴 돌려 풀어준 청년이 캡슐 안에 들어가 누웠다.
 기이이잉.
 모터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뚜껑이 닫혔고, 사방에서 뻗어 나온 미세한 빛줄기들이 청년의 몸을 샅샅이 훑었다.
 [사용자 스캔 완료. 한건우 님의 접속을 환영합니다.]
 서서히 졸음이 밀려왔다.
 
 * * *
 
 - 사아아아.
 시원한 바람이 몸을 스쳐 갔다.
 눈앞에는 지평선이 보일 정도로 넓은 황무지가 펼쳐져 있었고, 등 뒤에는 언덕인지 산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야트막한 산이 있었다. 그리고 야산에서 흘러내려 온 한 줄기 시냇물이 옆을 지나가고 있었다.
 자신의 몸을 둘러보니, 허름해 보이는 긴팔 셔츠에 두꺼운 작업복 바지 차림새였다.
 ‘흐음······. 이건 예상하고 좀 다른데?’
 한건우는 턱을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다른 게임은 조금 더 사용자 친화적이었는데 말이야.’
 리얼 팜을 목표로 삼은 후, 한건우는 고전 자료들을 뒤져 농사짓는 법을 공부했고, 농장을 운영하는 게임도 몇 가지 찾아 경험해 보았다.
 비록 리얼 팜이 진짜 식품을 내걸었다고는 해도, 실제로 그것을 얻을 확률은 지극히 낮다는 것을 상식적으로 알았기 때문이다.
 가장 정확한 것은 게임사에서 어느 정도 정보를 풀어놓는 것이겠지만, 사람들을 애태우려는 목적인지 더 큰 관심을 끌려는 목적인지 게임사는 모든 정보를 꼭꼭 틀어 잠근 채 밖으로 흘리지 않았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다른 게임이라도 하면서 농장 경영 게임이 어떤 것이구나 하고 짐작할 따름이었다.
 ‘어쨌든, 마냥 구경만 하고 있을 수는 없겠지.’
 이제부터는 경쟁이었다. 그 낮은 확률을 그나마 높이기 위해서는 남들보다 앞서 나가는 것이 중요했다.
 ‘게다가 처음에는 그 확률을 조금 더 높여 놓았을 수도 있으니까.’
 홍보를 위해서였다.
 게임사가 광고한 대로 누군가가 진짜 식품을 받아간다면, 지금껏 긴가민가했던 사람들을 더욱더 열광적으로 끌어들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메뉴.”
 한건우의 중얼거림과 함께 시야에 여러 개의 아이콘이 떠올랐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시야 왼쪽에 자리 잡은 자신의 모습이었다.
 [레벨 1] [초보 농부]
 ‘아무리 초반이라지만, 이건 너무 단출한데?’
 칸 자체는 넓었다. 즉, 여러 가지 항목을 표시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앞으로 하나씩 채워 나가는 방식이겠지.’
 어차피 이제 시작이었으니 크게 관심을 둘 필요가 없어 보였다. 이어 시야 오른쪽에는 울타리 쳐진 농장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는데, 은은하게 빛나는 캐릭터 창과 달리 회색빛을 띠고 있었다.
 ‘이건 나중에 규모를 늘리면 활성화되려나?’
 나머지 항목들은 시야 아래에 나타나 있었는데, 왼쪽부터 밭, 집, 가방, 금화, 동물, 톱과 망치, 플라스크 그림이었다.
 ‘일단은 작물부터 심어야지. 살펴보는 건 그다음이다.’
 농장 경영 게임이라고 해서 실제 농사짓는 것처럼 긴 시간이 필요치는 않았다. 짧게는 몇 분에서 길어도 몇 시간이면 작물을 심고, 기르고 수확하는 과정이 끝나게 된다.
 물론, 초반일수록 그리고 값싼 작물일수록 기르는 시간은 짧았고, 대체로 기르는 시간과 가격은 비례했다.
 밭 모양의 아이콘을 손가락으로 가리키자 땅고르기, 씨뿌리기, 물주기, 수확하기라는 세부 메뉴가 떠올랐다.
 ‘뭐, 전형적인 농장 게임 방식이네.’
 손가락으로 땅고르기 메뉴를 선택하자 냇가 옆의 땅이 은은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크기는 한 변이 5미터쯤 되는 정사각형이었다.
 ‘한 칸부터 시작해서 점차 늘려나가는 방식인가?’
 다시 손가락으로 빛나는 땅을 가리키자 ‘쓱쓱’ 하는 소리와 함께 땅거죽이 한 번 뒤집어졌다가 평탄하게 골라졌다.
 그와 동시에 눈앞에 반투명한 메시지가 떠올랐다.
 [행동력 -2]
 또한, 시야 왼쪽 위에 노란색 게이지가 나타났는데, 가운데에는 행동력 [98/100]이란 숫자가 적혀 있었고, 끝 부분 눈금이 살짝 깎여 있었다.
 ‘흐음······. 설마, 다 닳았을 때 캐시로 채우라고 하는 건 아니겠지? 이런 식이면 피곤한데······.’
 살짝 눈살을 찌푸릴 무렵, 눈앞에 작업 완료라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잔 돌멩이 하나 없이 곱게 갈린 흙은 무엇을 심어도 잘 키울 수 있다고 소리치는 듯했다. 고전 자료에나 나올 법한 전형적인 밭의 형태였다.
 “씨뿌리기.”
 한건우가 중얼거리며 밭을 가리키자 밭의 위에 여러 작물의 그림이 떠올랐는데, 그중에서 씨앗이 준비되었다는 듯 은은하게 빛나는 것은 하나뿐이었다.
 [밀을 심겠습니까?]
 “그래.”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자 후드득거리는 소리와 함께 밀알의 비가 밭 위로 떨어져 내렸다.
 [행동력 -2]
 하지만 다시금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에 한건우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행동력이 회복되는 시간도 계산해 봐야겠어.’
 가늘게 좁힌 눈매로 밀의 파종을 바라보는 사이, 작업 완료라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그리고 아직은 아무것도 없는 밭 위로 앙증맞은 물방울 아이콘이 떠올랐다.
 “물······.”
 물주기를 말하려던 한건우가 멈칫 말을 멈췄다. 그리고 손가락을 들어 가방 그림의 아이콘을 가리켰다.
 가방 그림이 확대되며 격자 모양의 인벤토리를 나타냈고, 그 안의 그림을 확인한 순간 한건우의 눈이 반짝였다.
 ‘이런 식이었군!’
 괭이를 비롯해 물뿌리개, 삽과 낫, 그리고 도끼, 망치, 톱 등의 그림이 줄줄이 그려져 있었다. 그 중 물뿌리개를 선택하자 손아귀에 묵직한 느낌이 일어났다.
 한건우는 물뿌리개를 들고 냇가로 들어가 물을 가득 담았다. 그리고 밭 위에 골고루 뿌렸다. 같은 작업을 몇 번 반복하자, 밭의 표면이 촉촉하게 젖어들었다.
 [작업 완료]
 ‘그렇지!’
 눈앞에 떠오른 완료 메시지를 바라보며 한건우가 히죽 웃었다.
 ‘기본적으로 행동력을 소모하는 시스템이지만, 직접 움직이면 행동력 소모 없이도 가능하다는 말이지. 하긴, 행동력이 다 떨어지면 그게 다시 차오를 때까지 손가락만 쪽쪽 빨아야 할 테니, 이렇게라도 만들어야겠지. 안 그러면 실제 음식이고 뭐고, 게임 자체가 너무 지루해질 테니까.’
 촉촉하게 젖은 땅 위로 파릇파릇한 싹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또한, 밭 위에 숫자가 떠올라 줄어들기 시작했다.
 [9:59] [9:58] [9:57]
 ‘순수한 성장 시간만 10분. 작업 시간을 최적화하는 게 관건이겠군.’
 한건우에게는 실제 식품을 얻겠다는 확고한 목표가 있었고, 그 확률은 지극히 낮았다. 또한, 전 세계적으로 수천만 명이 그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경쟁자라는 말이었다.
 그런 경쟁자들 사이에서 식품을 쟁취하려면 그들보다 앞서 갈 방법이 필요했다.
 ‘작전을 잘 세워야 해.’
 그리고 작전을 세우려면 먼저 현재 주어진 것들을 알아봐야 했다. 한건우는 메뉴 아이콘들을 하나씩 살펴보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별 게 없네.’
 밭 모양 아이콘은 작물의 재배와 관련된 메뉴였고, 집 모양은 농장과 관련된 건물을 지을 수 있는 메뉴였다. 여러 가지 항목 중 활성화된 것은 집이었는데, 손가락으로 선택하자 목재가 필요하다는 메시지와 함께 뒤쪽 산의 나무가 은은하게 빛났다.
 ‘설마, 도끼질도 해야 한다는 건가?’
 가방은 이미 살펴본 대로였고, 그 뒤의 금화 모양은 상점이었다. 상점에는 갖가지 종자를 비롯해 농사일에 필요한 각종 도구를 팔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한건우의 시선을 끈 것은 사과나무 묘목이었다. 비록 아직은 재배할 생각도 말라는 듯 회색빛을 띠었고, 가격 역시 100골드가 붙어 있었다.
 슬쩍 자신의 소지금을 확인해보니 10골드였다.
 ‘뭐, 당장 급한 것은 아니니까. 그것보다, 여기에서 먹어보면 맛은 있으려나?’
 가상현실 게임이라 해도 인간의 모든 감각을 완벽하게 구현할 기술은 아직 없었다. 그나마 구현율이 높은 것이 시각과 청각, 촉각 정도였다. 나머지 후각과 미각 등에 관해서도 많은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었으나, 아직 발전이 미미한 단계였다.
 한건우는 수확하면 한번 먹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농기구 항목을 마저 살폈다.
 ‘체력의 괭이에 손재주의 삽이라······. 무슨 RPG게임도 아니고······.’
 언뜻 웃음이 나왔지만, 없는 것보다는 도움이 될 것이라는 예상이었다.
 문제는 가격이었다. 능력치 1을 올려주는 최하급 도구만 해도 500골드를 호가했다.
 ‘잠깐만······. 이렇게 터무니없이 비싸다는 것은······.’
 게임사가 아무런 이유 없이 이런 가격을 붙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시 말해, 그만한 효용 가치가 있다는 의미였다.
 ‘아무래도 조금 더 알아봐야겠는데? 뭐, 일단은 수확한 밀이 얼마에 팔리는지를 살펴봐야겠지만.’
 이어 동물 그림에는 병아리를 비롯한 각종 가축의 새끼들이 나타나 있었다. 그중에서 한건우가 주목한 것은 송아지와 강아지였다.
 ‘상점에 쟁기도 있었던 걸 보면, 소를 키워 노동력으로 사용할 수도 있겠어. 그런데 개는······.’
 물론 식용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전 세계적인 주목받는 게임에서 그런 무리수를 둘 리는 없었다.
 ‘펫, 경비견. 그렇다는 말은······.’
 농작물이나 가축을 노리는 방해물이 있다는 의미도 됐다.
 ‘초반에는 기껏 해봐야 쥐나 해충 정도겠지만, 어느 정도 규모를 키운 다음에는 울타리 같은 것으로 주변을 둘러야겠군.’
 이어 톱과 망치 아이콘을 살펴보니 각종 도구를 제작하는 메뉴가 떠올랐고, 마지막 플라스크 아이콘은 종자 개량 메뉴였다. 다시 말해 각 종자를 개량해 수확량을 높일 수도 있었고, 특수한 능력을 부여할 수도 있는 기능이었다.
 ‘아하! 징표를 여기에서 찍는 거였군!’
 한건우는 징표에 관한 내용을 자세히 읽어보았다.
 ‘그러니까, 농작물을 수확하면 포인트가 쌓이고 그 포인트를 모아 원하는 종자에 징표를 부여할 수 있다는 거로군. 그 징표를 부여한 작물이 무사히 자라나면 그것에 해당하는 작물을 실제로 얻을 수 있다는 뜻이고.’
 징표는 최소 100포인트부터 부여할 수 있었는데, 포인트를 많이 소모할수록 징표가 부여된 작물이 무사히 자라날 확률이 높아지는 시스템이었다.
 ‘쯧! 말이 확률이지, 이건 거의 99.999%는 실패한다는 말이겠지.’
 하지만 확률이 지극히 낮다는 것은 한건우도 이미 참작하고 시작한 게임이었다. 게다가 다른 게임처럼 아무 의미도 없는 아이템 뽑기도 아니고, 이것은 실제 농산물을 얻을 수 있는 확률이었다.
 ‘뭐, 어차피 지금 당장에는 쓸데없는 생각이니, 일단은 최대한 효율적인 농사 계획부터 세워야겠지.’
 슬쩍 밭을 살펴보니 제법 자라난 밀이 푸르게 밭을 물들이고 있었다. 수확하기까지 남은 시간은 7분 남짓.
 ‘흐음······. 과정 중에서 가장 쉬운 것은 물주는 거야. 물뿌리개도 있고, 냇가도 바로 옆에 있으니까. 아! 씨뿌리기도 쉽겠네. 아까 보니까 대충 씨만 뿌리면 되는 것 같으니까. 그러면 땅고르기하고 수확이 문제인데······.’
 [행동력 +1]
 이런저런 생각을 할 무렵, 갑작스럽게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가 있었다. 시야 왼쪽 위의 행동력 게이지의 숫자 역시 [97/100]으로 1이 채워져 있었다.
 ‘응?’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던 한건우가 황급히 시간을 계산해 보았다.
 ‘내가 처음 행동력을 사용한 게 땅고르기를 할 때였고, 그 뒤로 씨 뿌리고, 물주고, 그런 다음 밀이 자란 시간 3분을 더하면······.’
 5분은 넘어간 것 같고, 그렇다고 10분은 안 된 것 같았다.
 ‘대략 7-8분에 1포인트 정도. 그런데 이거 너무 과한 것 아닌가?’
 땅고르기에 행동력 2포인트 그리고, 씨뿌리기에 2포인트. 비록 물주기는 직접 했지만, 앞 두 가지의 추세로 볼 때 2포인트가 들 것으로 예상되었다. 거기에 수확에도 다시 2포인트가 든다는 것을 생각하면 밭 하나에서 작물 하나를 기르는 데 총 8포인트의 행동력이 필요하다는 의미였다.
 반면 회복되는 행동력은 7분에 고작 1이었으니, 이런 추세라면 열다섯 번 남짓이면 모든 행동력을 소모한다는 계산이 나왔다.
 거기에 조금 전 상점란을 샅샅이 훑어 봤음에도 행동력을 회복하는 물품 같은 것은 없었다.
 ‘소모는 팍팍 되지만, 채우기는 어렵다. 그러나 직접 몸을 움직이면 대체할 수 있다. 이 말은 즉······.’
 무언가 냄새가 났다.
 그동안 많은 게임을 접했고, 그 대부분을 상위권까지 올랐던 한건우의 게임 감각이 그렇게 소리치고 있었다.
 ‘이 게임에서 행동력이 그만큼 중요하고, 되도록 아껴야 한다는 의미겠지.’
 비록 아직은 초반이라 모르지만, 게임을 진행하다 보면 행동력이 반드시 필요할 때가 올 것 같았다.
 ‘그때가 돼서 행동력이 차오를 때까지 발만 동동 구르는 것보다는, 시간은 조금 더 걸리더라도 몸을 움직여 행동력을 일정 수준 이상으로 유지할 필요가 있어.’
 생각을 정한 한건우는 각 과정을 되짚었다.
 ‘일단 씨뿌리기나 물주기는 쉬워. 문제는 땅고르기와 수확인데······. 뭐가 더 쉬우려나?’
 둘 다 처음 해보는 일이었기에 가늠이 되지 않았다.
 슬쩍 밭을 살펴보니 이삭이 패기 시작한 밀이 보였다. 그 위에 떠오른 시간은 5분 남짓이었다.
 ‘뭐, 한번 해보는 수밖에 없나?’
 한건우는 인벤토리에서 괭이를 꺼내 들고 밭 옆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게임에 접속하기 전 찾아본 자료를 떠올리며, 들어 올린 괭이를 땅에 내리찍고 바닥을 긁기 시작했다.
 ‘이게 맞나? 동영상에서는 이렇게 하던데······.’
 그리고 그 순간, 한건우의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새로운 땅을 개간하시겠습니까? 행동력 30포인트와 10골드를 소모합니다.]
 어리둥절한 눈으로 메시지를 바라보는 한건우.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입꼬리가 솟구쳐 오르기 시작했다.
 “그래! 바로 이거지!”
 생각보다 행동력의 용처가 일찍 발견되었다.
 ‘이걸 발견한 사람이 얼마나 될까?’
 아마 아예 없지는 않을 것이다.
 리얼 팜을 서비스하는 게임사에서 정보를 워낙 풀지 않았기 때문에, 남들은 생각지 못할 법한 특이한 행동으로 숨겨진 기능을 찾아내려는 사람들이 제법 있을 터였다.
 ‘어쨌든 재배에 들어가는 행동력 소모는 최소로 하고, 남는 행동력을 모조리 쏟아부어 땅을 늘린다. 한 주기당 걸리는 시간은 늘어나겠지만, 어차피 행동력을 팍팍 소모해 버린 사람들은 곧 후회할 테니까.’
 콱. 그륵. 콱. 그륵. 콱. 그륵.
 한건우는 말없이 괭이질을 이어 나갔고, 그러던 어느 순간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분명 처음 해보는 건데······.’
 자신이 작업한 땅을 돌아본 한건우의 얼굴에는 의아함이 떠올라 있었다. 그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어설프기 짝이 없는 괭이질이었건만, 초보자의 작업 결과라 보기엔 이상할 정도로 고르고 평탄한 땅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결과는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일종의 시스템 보정이겠지.’
 생각과 함께 다시금 괭이질을 이어 나갔다. 이번에는 곧바로 움직이지 않고, 괭이가 작업한 곳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역시.’
 괭이가 긁고 지나간 자리가 미묘하게 일그러지더니 처음 행동력을 소모해 땅고르기를 했을 때처럼 고른 땅이 만들어졌다.
 ‘뭐,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겠지. 지금 시대에 농사를 지어본 사람은 없을 테니까.’
 이어 괭이질하는 한건우의 손길은 거침이 없었고 빨라졌다. 굳이 공들여 하지 않아도 시스템 보정으로 알아서 땅고르기가 되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순식간에 각 변 5미터, 25제곱미터 넓이의 밭이 만들어졌다.
 “후우!”
 한건우가 소매로 이마를 훔치며 자신이 만든 밭을 바라보았다. 게임 캐릭터에 불과함에도 어쩐지 피로감이 느껴졌다.
 ‘잠깐! 이거, 그냥 기분이 아닌 것 같은데?’
 작업할 때에는 몰랐지만, 끝내고 나니 팔과 허벅지가 땅기고, 허리에서도 뻐근한 느낌이 일었다.
 ‘행동력을 사용하면 힘들지 않지만, 직접 몸을 움직이면 피로가 쌓인다. 아하! 그러고 보니 체력의 괭이랑 손재주의 낫 같은 게 괜히 있는 게 아니었군!’
 지금은 보이지 않지만, 캐릭터 창에는 RPG게임처럼 각종 신체 능력치도 표시될 것 같았다.
 ‘다른 건 몰라도, 체력의 괭이만큼은 돈이 모이는 대로 사야겠어.’
 심각한 피로는 아니었지만, 한건우는 앞으로 같은 노동을 끊임없이 반복해야 했다. 비록, 체력이 1 늘어나는 것이 자신의 육체에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비싼 만큼 값어치는 할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개간 완료]
 [농업기술 항목이 생성되었습니다.]
 그 사이, 메시지가 떠올랐고 반짝이는 캐릭터 창을 확인해보니 [농업기술 1]이라는 항목이 추가되어 있었다.
 ‘그래. 이렇게 하나씩 채워가는 거란 말이지?’
 한건우는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밀을 심은 밭을 바라보았다. 밭을 개간하는 데 걸린 시간을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0:10] [0:9]
 황금빛으로 익은 밀밭 위의 시간은 막 10초를 넘기고 카운트다운에 들어간 상태였다.
 ‘5분 정도. 지금은 처음이니까, 익숙해지면 더 줄일 수 있을 거야.’
 고개를 끄덕인 한건우가 밀을 심은 밭에 다가갔다. 그러자 시간은 0을 가리켰고, 그 위에 잘 익은 밀의 그림이 떠올라 있었다.
 ‘수확이 문제네. 이것도 시스템이 보정하려나?’
 땅고르기는 쉬웠지만, 수확은 또 다른 문제였다.
 밀을 베는 것은 물론, 알곡을 털어내고 적정 수준까지 말리는 과정까지 필요했기 때문이다.
 ‘일단 처음은 그냥 행동력을 사용하고 결과를 지켜보자. 그다음에 직접 해보면서 비교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작게 고개를 끄덕인 한건우가 밭을 가리키며 수확 명령을 내렸다.
 [행동력 -2]
 그러자 풀줄기가 잘리는 효과음이 들려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밭은 밀대의 그루터기만 남겨 놓은 채 텅 비어버렸다.
 ‘뭔가 좀 허전하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황금물결이 넘실거리던 곳이 황폐해지자 왠지 모를 허탈감이 들었다. 하지만 앞으로 하루에도 수십 번씩 볼 일이었다.
 [작업 완료]
 [경험치 +10] [수확 포인트 +1]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에 한건우는 슬쩍 캐릭터 창을 살펴보았다.
 [레벨 1] [10/100]
 이어 종자 개량란을 살펴보니 그곳에도 1포인트가 추가되어 있었다.
 ‘요즘 게임치고는 참 불친절하단 말이지. 처음부터 쫙 다 표시해 놓으면 어디 덧나는 것도 아니고.’
 살짝 미간을 찌푸렸던 한건우가 이내 표정을 풀었다.
 ‘하긴, 내 입장에서는 차라리 이게 더 나으려나?’
 실제 농산물을 얻겠다는 확고한 목표가 있는 한건우에게는 모든 유저가 경쟁자였다.
 ‘각 항목은 그 자체만으로도 힌트가 될 테니까.’
 어쩌면 게임사에서 과도하게 정보를 틀어막았던 이유 역시 이런 불친절한 게임 시스템과 연결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실제 농산물을 가져갈 자격이 되는지 아닌지를 게임사에서 판단하기 위한 장치일 수도 있겠지. 그리고 만약 그렇다면 남들보다 앞서 나갈수록 실제 농산물을 가져갈 확률이 높을 거야.’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밭을 한 칸 더 개발하고, 농업기술 항목을 생성한 한건우는 다른 이들보다 한 발짝 앞서 나가고 있었다.
 ‘물론 지금은 한 발짝뿐이겠지만, 이것이 두 발짝, 세 발짝이 되도록 해야겠지.’
 [밀 +1] [밀짚 +1]
 이어 떠오른 메시지를 바라본 한건우가 인벤토리를 열어 새로 생긴 자루와 밀짚을 꺼내 보았다.
 ‘생각보다 작네. 한 20kg 정도 되려나?’
 밀이 담긴 자루는 묵직했고, 한 손으로도 들어 올릴 정도의 무게였다.
 ‘하긴, 생각해 보면 작은 게 아니지. 현실에서 이 정도면, 거의 집 한 채 가격은 나올 테니까.’
 피식 웃은 한건우가 자루 주둥이를 열고, 안에 든 밀알을 한 움큼 꺼내었다. 도정은 되지 않은 듯, 겉껍질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한건우는 그중 한 알을 따로 집어 들고, 나머지를 다시 자루에 털어 넣었다. 그리고 빼둔 한 알을 입에 넣고 깨물었다.
 우두둑. 우둑. 퇫!
 씹던 밀알을 뱉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이건 뭐, 흙을 씹는 것도 아니고······.’
 불쾌한 표정을 짓던 한건우가 이내 표정을 풀었다.
 ‘이건 곡물이니까 그렇다 쳐도, 사과는 과일이니 그래도 맛이 날 거야. 어느 정도라도······.’
 소소한 바람을 담아 되뇌어 본 후, 시선을 옮겨 밀짚을 바라보았다. 밀짚은 양팔로 겨우 껴안을 정도의 부피였다.
 ‘그런데 이건 왜 딸려 나온 거지? 나중에 제작에 필요한 재료로 사용되려나?’
 지금은 알 수 없겠지만, 게임사가 아무런 이유 없이 밀짚을 수확물에 포함하지는 않았을 터였다.
 ‘이제, 가격을 확인해 봐야겠지.’
 밀 자루와 밀짚을 다시 인벤토리에 집어넣은 한건우가 상점을 열고 판매 탭으로 들어갔다.
 [판매 가능 : 밀(10골드), 밀짚(1골드)]
 ‘밀 종자가 1골드였으니, 대충 10배 남는 장사네.’
 종자 값은 밀짚을 파는 것만으로도 감당할 수 있으니, 한 번 주기가 돌 때마다 10골드씩 이득을 볼 수 있는 시스템이었다.
 한건우는 둘을 모두 팔아 11골드를 추가하고, 판매 탭을 닫았다. 그리고 종자 탭을 열어 살펴보았지만, 활성화된 것은 1골드짜리 밀 종자뿐이었다.
 ‘역시 레벨을 더 올려야 하나?’
 작게 고개를 끄덕인 한건우는 밀 종자 두 개를 구입하고는 상점창을 닫았다.
 ‘일단 새로 만든 밭에 밀을 심고, 그것이 자라는 동안 저 밭을 갈자. 그러고도 시간이 남으면 한 칸을 더 개간하고.’
 한건우는 생각과 동시에 움직이기 시작했다.
 후두둑. 후두둑.
 씨는 대충 뿌려도 골고루 밭에 흩어졌고, 밭의 범위를 벗어나는 것도 없었다.
 ‘이것도 시스템 보정인가?’
 상점에서 구입한 종자 자루가 순식간에 비었고, 작업 완료 메시지가 눈앞에 떠올랐다. 이어 인벤토리에서 물뿌리개를 꺼낸 한건우가 냇가와 밭을 왕복했다.
 [작업 완료]
 [10:00] [9:59] [9:58]
 밭 위에 떠오른 시간을 확인한 한건우는 곧장 괭이를 꺼내 들고 밀 그루터기가 남은 밭을 고르기 시작했다.
 그륵. 그르륵. 그륵.
 이전과 달리 굳이 내려찍거나 힘든 동작은 하지 않았다. 어차피 시스템 보정이 있었기에, 속도에 중점을 두었다. 그러는 사이 한건우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보정이 적용되는 폭이 있어!’
 직접 괭이질을 한 곳이 아님에도, 그 좌우로 일정 부분의 땅이 알아서 골라졌다. 좌우로 50cm, 합치면 1미터 정도의 폭이 시스템 보정을 받는 너비였다. 즉, 5번만 괭이질을 하면서 지나가면 밭 하나의 땅고르기가 끝난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너무 많이 할 필요도 없어. 두세 번만 긁고 지나가도 보정이 시작돼. 아마, 농업기술을 더 올리면 한 번만 긁고 지나가도 될 것 같은데? 폭이 더 늘어날 수도 있고.’
 처음 개간에는 5분 정도 걸리던 것이, 3분가량으로 줄어들었다. 그리고 손에 익을수록 시간은 더욱 단축될 것 같았다.
 ‘좋아. 좋아.’
 다시 종자를 뿌리고, 물을 주는 것까지 모두 마쳤음에도 처음 심은 밀을 수확하기까지는 5분가량이 남아 있었다.
 ‘하나 더!’
 괭이를 든 한건우가 냇가를 따라 늘어선 두 개의 밭 아래쪽으로 걸어갔다. 물주기의 편리함 때문에라도 당분간은 냇가를 따라 밭을 확장할 생각이었다.
 쿠직!
 힘차게 땅을 내리찍자, 메시지가 떠올랐다.
 [새로운 땅을 개간하시겠습니까? 행동력 30포인트와 10골드를 소모합니다.]
 [67/100]
 행동력 게이지를 힐끔 살핀 한건우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 * *
 
 [레벨 10] [211/1500] [어설픈 농부]
 [체력 : 12] [근력 : 11] [손재주 : 11]
 [농업기술 4] [원예기술 2] [제작기술 1]
 자신의 캐릭터 창을 바라보는 한건우의 얼굴에는 뿌듯한 감정이 떠올라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욱 그를 뿌듯하게 한 것은, 냇가를 가운데 두고 마주보는 열네 개의 밭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한건우의 바라보는 것은 밭에 자라난 나무에 주렁주렁 매달린 사과들이었다.
 ‘딱 저것만. 저것만 따서 맛본 다음에 나가자.’
 현재 한건우는 논스톱으로 26시간째 게임을 플레이하는 중이었다. 원래는 하루 18시간 게임 후, 남은 6시간은 적당한 운동을 하고 휴식을 취할 계획이었다.
 사실 조금 무리하면 그 이상도 가능했다. 가상현실 캡슐에는 모두 생명유지를 위한 장치가 내장되어 있었고, 접속하는 동안 육체는 가수면 상태에 접어들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육체의 피로와 달리 정신의 피로만큼은 어쩔 수 없었기에 정한 비율이었다.
 그러나 게임을 종료하려던 시점이 하필 9레벨이었고, 앞으로 1레벨만 더 올리면 사과나무를 심을 수 있다는 사실이 한건우를 붙들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를 외치며 10레벨에 들어섰고, 차례로 모든 밭에 사과나무를 심었다. 그런데 사과나무의 생장시간이 문제였다.
 무려 3시간.
 한건우는 [180:00]부터 줄어들기 시작한 시간을 보며 한참을 고민했다. 접속을 종료하고 나가서 잠깐 쉬고 오는가, 아니면 그냥 기다리는가 하는 문제였다.
 ‘밖으로 나가면 무조건 잠들 확률이 높아. 잘못하면 기껏 심어 놓은 사과나무가 못 쓰게 될 확률도 높고.’
 작물의 생장이 끝난 후, 수확을 하지 않은 채로 일정 시간이 지나면 카운트다운이 시작된다. 그리고 그 시간을 모두 소모하면 작물이 못쓰게 돼버린다.
 ‘돈도 문제지만, 여기에서 사과 맛은 어떨지가 궁금하기도 하고, 어차피 밭의 개수 제한도 늘었을 테니까. 개간이나 슬슬하면서 시간을 보내면 되겠지.’
 9레벨까지는 밭 10개가 한계였다. 11개째를 개간하려할 때, 밭의 숫자를 늘리려면 10레벨이 되어야 한다는 메시지가 떠올랐었다.
 한건우는 행동력을 소모해 밭을 하나씩 늘려 나가기 시작했다. 개간 제한 때문에 행동력은 거의 가득 찬 상태였기 때문에 처음 세 개는 문제없이 개간했고, 남은 하나도 조금 기다린 후에 개간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고도 시간이 남자, 한건우는 도끼를 꺼내들고 뒷산에 가득한 나무를 베어 내기 시작했다. 처음 해보는 도끼질이지만 이것에도 시스템 보정이 붙었는지 생각보다 쉽게 나무들이 쓰러져 나갔다.
 쓰러진 나무를 손질해 얻은 목재를 쌓아 두고, 상점에서 못과 밧줄 등을 구입해 집을 지었다. 그 결과, 자칫 큰 바람이라도 불면 쓰러질 것 같은 허름한 오두막이 완성되었다.
 ‘시스템 보정을 받았음에도 이 정도인데, 아니었으면 아예 지을 엄두도 못 냈을 거야.’
 등 뒤에 선 오두막을 흘깃 바라본 한건우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완성도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실제로 살 집도 아니었고, 그저 게임 상에 지어 놓은 구조물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집에 들어간 순간, 한건우는 오두막에 대한 평가를 달리 해야 했다.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 때문이었다.
 [행동력 회복 속도 상승 +1]
 오두막의 효과는 몇 분 지나지 않아 확인되었다.
 [행동력 +2]
 주기당 1씩 회복되는 행동력이 1 추가 되었다. 또한, 이것은 행동력의 회복 속도가 두 배 증가했다는 의미였다.
 ‘아예 몰랐으면 모를까, 알게 된 이상에는 최대한 활용해야겠지.’
 작게 고개를 끄덕인 한건우가 다시 시선을 밭쪽으로 돌렸다.
 [0:10] [0:09] [0:08]
 ‘드디어!’
 새로운 밭을 개간하고, 나무를 베어 오두막까지 건설했음에도 끝나지 않았던 시간이 드디어 끝나가고 있었다.
 한건우는 카운트다운에 들어간 사과나무 아래로 이동해 마른침을 꿀꺽꿀꺽 삼켜댔다. 그리고 드디어 시간이 0을 가리켰고, 밭 위에 탐스러운 사과 그림이 떠올랐다.
 “수확!”
 한건우는 망설임 없이 수확을 외쳤다.
 [행동력 -2]
 굳이 행동력을 소모한 것은 어차피 이것만 수확한 뒤, 접속을 종료할 생각이기 때문이었다.
 뚝. 뚜둑. 뚝.
 작은 무언가가 부러지는 소리가 연달아 들려오며 주렁주렁 매달려 있던 사과들이 사라지고, 앙상하게 변한 나무는 말라비틀어지다가 밑동이 잘려나갔다.
 [작업 완료]
 [사과 +1] [사과나무 목재 +1]
 ‘인벤토리!’
 인벤토리를 열어보니 사과그림이 그려진 나무상자가 보였다. 밖으로 꺼내보니 뚜껑부분은 비어 있었고, 그 너머로 탐스럽게 익은 사과가 보였다. 한건우는 그중 하나를 황급히 집어 들었다.
 “드디어!”
 마른침을 꼴깍 삼켜가며 사과를 입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막 깨물려는 순간이었다.
 - 쿠르르릉!
 지진이라도 난 듯, 땅이 흔들렸다.
 - 번쩍!
 - 콰르릉! 쾅!
 맑았던 하늘에선 날벼락이 떨어졌고, 시야가 일그러지며 그래픽이 깨지더니 각종 숫자를 비롯해 알 수 없는 특수문자들이 허공을 휙휙 날아다녔다.
 “뭐, 뭐야?”
 무언가 잘못되었다.
 지진이나 천둥번개는 모르겠지만, 허공을 휙휙 날아다니는 저 숫자와 문자는 분명 게임에 이상이 생겼음을 나타내고 있었다.
 “로, 로그!”
 한건우가 당황한 얼굴로 로그아웃을 외치려는 찰나.
 번쩍!
 무언가가 몸을 찌르르 울린다 싶더니, 시야가 하얗게 물들었다. 그리고 이내 까맣게 암전되었다.
 
 
 # Chapter 2.
 
 - 쏴아아아.
 난데없이 들려온 소나기 소리에 서서히 의식이 밝아왔다.
 “끄응······.”
 몸은 물을 잔뜩 머금은 솜처럼 무거웠고, 온몸 구석구석이 망치로 얻어맞은 것처럼 욱신거렸다.
 “뭐지······.”
 물속에 있는 것처럼 가물가물한 의식이 점차 또렷해지며, 정신을 잃기 전의 상황이 떠올랐다.
 ‘맞아. 지진. 천둥번개. 게임이 갑자기 이상해졌고, 로그아웃을 하려는 찰나 갑자기 의식이 끊겼어.’
 한건우는 점차 밝아오는 의식과 함께 상체를 살짝 일으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런데 여긴 뭐야?”
 저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왔다.
 정신을 잃기 전 주변에는 뒷산과 냇가, 오두막과 밭이 있었다. 설사 로그아웃이 되었다면 캡슐 안의 모습이 보여야 했다.
 그런데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리 주변을 둘러봐도 보이는 것이라고는 사방을 빽빽하게 메운 나무, 나무, 그리고 나무뿐. 수해라는 말을 제대로 실감하게끔 하는 풍경이었다.
 ‘아까 들었던 소나기 소리는 뭐지?’
 - 쏴아아아아.
 의문을 품자마자 마치 화답하듯 소리가 들려왔다. 이파리 무성한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며 나는 소리였다.
 무언가 속았다는 얼굴로 나무를 바라보던 한건우가 퍼뜩 정신 차린 표정을 지었다.
 “아! 그래! 로그아웃을 하면!”
 - 이상하다 싶으면, 일단 로그아웃!
 이는 가상현실이 도입되고, 그것을 이용한 게임이 개발되면서 나온 격언 비슷한 말이었다. 가상현실이 개발된 초창기에는 알 수 없는 이유로 사용자의 정신이 가상현실에 갇히는 경우가 종종 있었기 때문이다.
 개발사에서 부랴부랴 나서서 해결했고, 사용자도 멀쩡하게 빠져나오기는 했지만, 이로 인해 가상현실의 안정성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이 급격하게 떠올랐었다.
 그 후로 기술이 발전해 그런 일은 거의 사라졌지만, 한때는 무언가 조금이라도 낌새가 이상하면 사용자는 무조건 로그아웃을 사용해 가상현실에서 빠져 나오는 게 정답이었다.
 “로그아웃!”
 그런데 반응이 없었다.
 “로그아웃! 로그아웃! 로그아웃!”
 한건우는 다급하게 로그아웃을 외쳐 댔으나, 역시나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이런 썩을······.”
 당황스러움이 가득한 한건우의 머릿속에 몇 가지 가정이 스쳐 지나갔다.
 ‘게임이 맛이 가거나, 가상현실 시스템에 문제가 생겼거나, 캡슐이 고장 났거나 아니면······.’
 이어지는 생각에 한건우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가장 상상하고 싶지 않은 경우였기 때문이다.
 ‘내 신체에 무언가 심각한 문제가 생겼거나.’
 한건우는 세차게 고개를 흔들어 생각을 털어냈다. 가뜩이나 당황스러운 상황에서, 굳이 부정적인 생각을 할 필요는 없었다.
 ‘그런데, 아까부터 무슨 냄새지?’
 무언가 상큼하면서도 달달한 냄새가 코끝을 간질이고 있었다. 그동안에는 경황이 없어서 무시하고 있었지만, 이제는 확연하게 후각을 자극하는 냄새에 한건우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이내 냄새의 원인을 찾아냈다.
 “사과? 아니, 사과가 왜 여기?”
 저도 모르게 소리를 냈다. 너무나 황당했기 때문이다.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사과가 떨어졌을 것으로 보이는 나무는 없었다.
 ‘사과나무는 없는데······.’
 게다가 한건우는 게임에 앞서 조사를 한 것도 있었고, 게임에서 사과나무를 키워보았기 때문에 사과나무의 대략적인 생김새를 파악하고 있었다.
 의아한 얼굴로 바닥에 떨어진 사과를 주워들었다. 그리고 자세히 살펴보았다.
 사과가 맞았다. 분명한 사과였다.
 세상에 이런 달콤하고 새콤한 냄새를 피워 올리는 물체는 오직 사과뿐이었다.
 꿀꺽.
 한건우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이거, 먹어도 될까?’
 물음과 달리 이미 그의 입안에는 침이 흥건했고, 배는 어서 사과를 넣어 달라고 요동치고 있었다.
 ‘그래. 어차피 배도 고픈데······.’
 손에 든 사과를 대충 옷에 비벼 닦아낸 후, 입으로 가져갔다.
 와삭!
 한입 깨물자 한건우 자신이 듣기에도 경쾌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와 동시에 새콤달콤한 과즙이 입안을 가득 메웠다.
 주르륵.
 한 줄기 눈물이 흘러 나왔다.
 어릴 적의 기억. 그 평생 잊지 못할 기억이 다시금 한건우의 뇌리에 떠오르며 그에게 무한한 감동을 선사했다.
 와삭. 와삭. 와사삭.
 한건우는 두 눈 가득 눈물을 흘리면서도 연신 사과를 깨물어 삼켰다. 주먹만 했던 사과는 순식간에 남김없이 뱃속으로 사라졌다. 가운데에 있던 씨와 그것을 감싼 단단한 부분이 조금 거슬리기는 했지만, 감동에 취한 한건우는 한 조각, 아니 한 방울의 과즙도 남길 수 없었다.
 사과가 모두 사라지고, 충실했던 감동도 어느 정도 잦아들었을 무렵. 문득 한건우의 뇌리를 스친 생각이 있었다.
 ‘맞아! 그 사과! 게임에서 내가 수확한 거야.’
 정신을 잃기 직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3시간이란 긴 시간을 기다려 수확했고, 막 맛을 보려는 순간이었다.
 ‘게다가 아까의 냄새. 그리고 맛.’
 아무리 기술의 발전에 후한 점수를 준다고 한들, 조금 전 자신이 맡았던 냄새처럼 기분 좋은 향을 낼 수는 없어 보였다. 특히 그 맛은, 현재의 기술로는 결코 만들어낼 수 없는 천상의 맛이었다.
 ‘그렇다는 것은······.’
 슬쩍 주변을 둘러본 한건우가 엄지손톱으로 검지의 끝을 힘껏 눌렀다.
 찌릿한 통증이 피어올랐다.
 이어 다른 손가락의 끝도 꾹꾹 눌러본 후, 한건우는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가상현실이 아니야. 꿈은 물론 아니고.’
 가상현실은 어느 정도 통증을 재현하기는 하지만, 심각할 정도의 통증은 아니었다. 설령 생명이 위험할 정도로 심각한 상처를 입더라도, 느끼는 것은 그저 둔중한 타격감 정도였다. 즉, 지금처럼 찌릿한 통증을 느낄 수는 없다는 말이었다.
 게다가 한건우가 꿈 역시 아니라고 한 것에는, 조금 전의 행동이 어릴 적 가위에 눌릴 때 깨어나기 위해 사용하던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게 현실이라는 말인데······. 대체 누가 날 여기로 옮긴 거지? 게다가 사과까지 손에 쥐여 주고?’
 이곳이 어딘지도 감이 오지 않는데, 누구의 짓인지는 더더욱 알 수 없었다.
 ‘몰래 카메라? 신종 리얼리티 프로그램?’
 순간 떠오른 가정이 있었지만, 가능성은 희박했다.
 당사자의 동의가 전혀 없이 지금과 같은 상황이 이루어졌다면, 이는 납치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랬다가는 행위에 가담했던 이들은 사법처리가 될 것이고, 방송사 역시 큰 타격을 당할 일이었다.
 ‘아니야. 방송사가 바보도 아니고, 그런 무리수를 둘 리는 없어. 그리고 지금은.’
 한건우가 굳은 눈빛으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이유를 찾기보다는 이곳을 벗어나는 게 중요해.’
 
 * * *
 
 사박. 사박.
 최대한 조심스러운 발걸음에도 소리가 일어났다. 전문적인 훈련을 받지 않은 이상, 사방이 수풀로 가득한 곳을 걸으며 소리를 제거할 수는 없었다.
 그저, 최대한 소리가 크게 나지 않게끔 조심스럽게 움직일 따름이었다.
 ‘후우······. 야생동물이라니······.’
 한건우의 발걸음이 조심스러워 진 것은 움직인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서 발견한 동물의 배설물 때문이었다.
 일단 컸다. 그리고 나뭇가지를 주워 뒤적여 보니 군데군데 털이 섞여 있었다.
 언젠가 보았던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 따르면, 털이 섞인 배설물은 육식 동물의 것일 확률이 높았다.
 ‘응?’
 주변을 살피며 조심스레 걷던 한건우가 흠칫 놀라며 걸음을 멈췄다.
 푸스스슷!
 무언가가 등 뒤 수풀을 뒤흔들었기 때문이다.
 멈춰 선 채로 귀를 기울이자, 미세하게 수풀을 스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스스슷. 스슷.
 상당히 가까운 곳에서 들려온 소리였다.
 ‘이런 젠장!’
 한건우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수풀 속의 움직임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의 몸을 지킬 것 하나 없는 상황에서는 일단 몸을 피하는 것이 좋았다. 그리고 현 상황에서 가장 유력한 피신처는 나무 위였다.
 한건우가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나무를 타는 법은 몰랐다. 그럼에도 필사적으로 주변을 살피는 것은 그나마 오르기 편해 보이는 나무를 찾기 위함이었다.
 ‘저거다!’
 주변의 나무들 중, 껍질이 우둘투둘한 놈을 찾았다. 그리고 무작정 붙잡고 오르기 시작했다.
 - 크아아앙!
 갑작스레 터져 나온 울부짖음에 등골이 쭈뼛 솟았고, 머릿속이 하얗게 물들어갔다. 그럼에도 한건우는 필사적인 몸부림으로 나무를 타고 올랐다.
 나무를 타는 것은 처음이었지만, 다행이도 제법 높은 곳까지 올라갈 수 있었다. 껍질이 우둘투둘한 나무를 고른 것이 천행이었다.
 “후우우우······.”
 계속 기어올라, 큼지막한 가지에 몸을 올린 한건우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슬쩍 시선을 내려 나무 아래쪽을 살펴보았다.
 표범과 비슷한 생김새, 거기에 더해 무척이나 길게 뻗은 송곳니를 지닌 시커먼 맹수가 한건우를 올려다보며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날카로운 발톱을 세워 나무를 오르려는 시도를 하기도 했지만, 그에게는 다행스럽게도 나무를 오르지는 못하는 듯 보였다.
 “후우······.”
 다시금 깊은 한숨을 내쉴 때, 문득 손바닥에서 따끔한 통증이 느껴졌다. 살펴보니 군데군데 까진데다가, 나무껍질 부스러기 같은 것이 박혀 있었다.
 ‘젠장······. 약도 없는데······.’
 통증도 문제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감염의 위험이었다. 약은 고사하고, 깨끗한 물조차 없는 곳에서 상처를 그냥 두었다가는, 큰일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일단 손바닥에 박힌 나무 부스러기들을 털어낸 후, 조금 깊게 박힌 것을 조심스럽게 뽑아냈다. 대충 정리하고 보니, 처음 보았을 때만큼 심각한 상처는 아니었다. 그저 군데군데 살짝 까진 정도로 상처 범위도 좁았다.
 ‘휴우······. 그나저나 내려가는 것도 문제인데.’
 한건우가 슬슬 다른 걱정을 하는 순간이었다.
 텁!
 바로 발아래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화들짝 놀라 아래를 바라보니, 부릅뜬 맹수의 노란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표범의 주둥이. 유난히 길고 뾰족해 보이는 송곳니가 돋보이는 그것이 한건우의 바로 발아래에 다물려 있었다.
 “뭐, 뭐야?”
 의문을 품었던 한건우는 곧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이런 미친! 여기 5미터는 되는 높이인데!’
 목표를 이루지 못한 표범은 다시 떨어져 내렸고,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며 물러나기 시작했다.
 이유는 빤했다. 도움닫기를 위함이다.
 다다다닷!
 어느 정도 거리를 벌린 표범이 다시 무서운 속도로 달려들었다.
 발소리를 들은 한건우가 황급히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좁은 나뭇가지 위에서 급하게 행동하다가 오히려 위험할 수 있음을 느끼고 양 다리를 들어 나무줄기를 감쌌다.
 탓!
 들려오는 소리에 아래를 바라보니, 땅을 박찬 표범이 무시무시한 도약력으로 뛰어 올랐다. 그리고 이번에는 주둥이 대신 앞발을 휘둘렀는데, 한건우가 앉아 있는 나뭇가지 아랫부분을 스치듯 할퀴고 지나갔다.
 순간적으로 한건우의 눈에 칼날처럼 예리한 발톱의 궤적이 또렷하게 들어왔다.
 ‘가만히 있었으면······.’
 한건우는 등줄기가 쭈뼛거렸다. 그냥 그대로 있었으면, 그의 다리는 칼날처럼 예리한 발톱에 갈가리 찢겼을 터였다.
 ‘이대로는 안 돼. 좀 더 위로.’
 양팔로 나무줄기를 부여잡으며 겨우 몸을 일으켰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그사이 바닥에 떨어진 표범이 거리를 벌린 후, 다시 달려들었다.
 탓! 가각!
 ‘소리가 왜?’
 이상한 소리에 아래를 내려다보니, 뛰어오른 표범이 중간의 나무줄기를 발톱으로 할퀴며 다시금 도약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앗 하는 사이, 표범은 한건우의 눈높이까지 솟구쳐 오른 상태였다.
 흉포함이 이글거리는 맹수의 노란 눈동자와 한건우의 눈이 정면에서 마주쳤다.
 - 캬오오옹!
 표범의 입이 벌어지며 고막을 찢을 듯 울려 퍼지는 울부짖음이 터져 나왔고, 그 안에 돋아난 날카로운 이빨들을 바라보는 순간 한건우는 머릿속은 점차 하얗게 변해갔다.
 그와 더불어 한껏 젖혀진 표범의 어깨너머로 칼날 같은 발톱을 품은 앞발이 눈에 들어왔다.
 ‘도, 도끼! 아니 낫이라도 있었으면······.’
 문득 손아귀에 묵직한 느낌이 들었다.
 낫이었다.
 한건우는 왜 갑자기 낫이 생겨났는지, 파악할 겨를도 없이 눈을 질끈 감고 그것을 휘둘렀다.
 쿠직!
 천만다행으로 낫은 빗나가지 않고 표범의 목덜미에 틀어 박혔다. 그리고 뜻밖의 고통 때문인지 표범은 앞발을 채 휘두르지 못했다.
 한건우에게는 그야말로 천운이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앞발이 휘둘러졌다면, 10cm 이상 튀어나온 발톱은 그에게 치명상을 입혔을 터였다.
 “어엇!”
 문제는 정점을 찍은 후, 떨어져 내리는 표범의 무게가 목덜미에 박힌 낫에 실렸다는 점이었다.
 한건우는 손아귀가 하얗게 질리도록 자루를 부여잡고 있었고, 갑작스레 잡아당기는 힘에 의해 그의 몸 역시 균형을 잃었다.
 뒤늦게 손을 놓으려 했으나, 그의 몸은 이미 나뭇가지를 벗어나 추락하는 단계. 놓기 보다는 차라리 그대로 붙들고 표범의 몸을 쿠션 삼는 편이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가지 다행인 것은 떨어지는 표범이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한건우는 눈치채지 못했지만, 목덜미에 박힌 낫이 숨통을 끊어 놓았다.
 만약 표범의 숨이 붙어 있었다면 그는 발버둥치는 표범의 몸짓에 상처 입거나 멀리 떨어져 나갔을 터였다.
 “젠장! 빌어먹을! 썩을! 우라질!”
 한건우가 자신이 알고 있는 온갖 욕설을 내뱉는 사이, 섬뜩한 소리가 몸 아래에서 들려왔다.
 - 콰지지직!
 그와 동시에 아찔한 충격이 그의 몸을 덮쳤다. 순간적으로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였다.
 겨우 정신을 붙들고, 아래를 살펴보았다. 그의 몸은 온통 시커먼 곳에 파묻혀 있었다.
 팔, 다리 등에 힘을 줘보니 다행이 움직였다. 몸 곳곳에서 욱신거림이 느껴지기는 했지만,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운 곳도 없었다.
 한건우는 기다시피 그곳을 빠져 나왔다.
 “헐······.”
 표범은 등부터 바닥에 떨어져 있었고, 배 부분은 거의 지면에 닿을 정도로 오목하게 들어가 있었다. 또한 엉덩이 주변으로는 피 섞인 내장이 튀어나와 있었는데, 한건우는 그 덕분에 자신이 살았음을 깨달았다. 표범에게는 지독한 불행이었지만.
 표범은 움직임이 없었다.
 목덜미에 박힌 낫도 문제였지만, 저렇게 내장이 튀어나오고도 살면 맹수가 아니라 괴물일 터였다.
 “후우우우······.”
 긴 한숨을 내쉰 한건우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마음은 이 끔찍한 곳을 곧바로 벗어나고 싶었지만,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런데 왜 갑자기 낫이······.’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조금 전의 상황을 돌이켜 보았다. 위험천만한 상황에서 갑자기 손에 들린 낫이 떠올랐다.
 ‘잠깐! 설마!’
 한건우가 무언가를 떠올린 듯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인벤토리!”
 반투명한 창이 눈앞에 떠오름과 동시에 한건우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인벤토리 안에는 밀을 비롯한 보리, 콩 등의 곡물 몇 자루와 밀짚을 비롯한 부산물 등이 남아 있었다. 상점에 팔지 않고 남겨둔 것들이었다.
 또한, 괭이를 비롯한 농기구와 도끼, 망치, 톱 등이 보였고, 밧줄을 비롯한 자잘한 도구들도 있었다. 또한, 마지막 즈음에는 그동안 번 돈을 탈탈 털어 구입한 체력의 괭이와 근력의 도끼가 자리했다. 손재주의 낫도 구입했지만, 없는 걸 보니 표범의 목덜미에 박힌 것이 그것으로 보였다.
 “뭐야? 게임이었어?”
 한건우는 뛸 듯이 기쁜 표정을 짓다가 이내 표정을 굳혔다. 지금도 고스란히 느껴지는 모든 감각이 게임이 절대 아님을 알려왔기 때문이다.
 확신의 이유는 분명했다.
 모든 것을 컴퓨터 그래픽으로 만든 3D 영화와 실제 배우가 출현한 영화 사이의 미묘한 위화감이랄까?
 이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낄 수 있는 차이였다.
 “아니야. 아까 사과의 맛도 그랬고, 통증도 그렇고, 게임이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어. 게다가 농장 게임에 이런 흉악한 몬스터를 집어넣었을 리가 없어. 특히, 이 악취.”
 죽은 표범이 쏟아낸 내장에서 코가 비틀어질 정도의 악취가 풍겨지고 있었다. 이는, 게임이라면 절대 적용하지 않을 설정이었다.
 “메뉴! 로그아웃!”
 짐작대로 반응은 없었다.
 “그래도 이게 어디야? 적어도 당분간 먹을 것과, 몸을 지킬 도구가 생겼으니까.”
 아쉽긴 하지만, 되도록 긍정적인 면만 생각하기로 했다.
 설령, 자신의 짐작이 틀려 진짜 게임 속이었다고 해도 일단은 최대한 조심하는 편이 좋았다. 그저 게임이었다면 나중에 약간 후회하면 끝이지만, 그게 아니라면 그야말로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확인은 해봐야겠지. 캐릭터 창! 농장! 건설! 상점! 펫! 제작! 종자개량!”
 대부분의 메뉴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딱 하나 반응을 보인 게 있었다.
 바로 상점창이었다.
 “좋아!”
 눈앞에 떠오른 반투명한 창을 확인한 한건우가 기쁨 섞인 탄성을 터뜨렸다.
 ‘이것만 있어도 웬만한 건 다 할 수 있어!’
 상점에는 재배에 필요한 종자부터, 각종 농기구. 거기에 제작에 필요한 재료까지 갖춰져 있었다.
 그리고 이것을 이용하면 생존에 필요한 것들을 대부분 갖춰 나갈 수 있을 터였다.
 ‘화톳불만 해도 어디야? 불 피울 생각만 해도 까마득했는데.’
 화톳불은 밤에 농장 일을 할 경우 주변을 밝히기 위한 용도로 판매하는 도구였다. 별다른 기능은 없이 그저 불만 피우는 용도였기에 가격도 3골드로 저렴했다.
 다른 것은 몰라도 편히 잠들기 위한 집과 체온 유지를 위한 불은 필수였는데, 아무런 도구 없이 야외에서 불을 피우는 것을 해결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도움이 되었다.
 ‘지금 당장 필요한 것부터 정리해 보자. 일단은 물이 있는 곳을 찾아야 해. 그런 다음, 주변의 적당한 공터를 골라 오두막을 지으면 아쉬운 대로 맹수에게서는 안전해질 수 있을 거야.’
 조금 생각하는 사이, 기력이 돌아왔는지 몸에 힘이 돌기 시작했다. 한건우가 몸을 일으켰다.
 ‘되도록 이곳은 빨리 떠야지.’
 죽은 표범에게서 나는 피 냄새와 악취가 또 다른 맹수를 부를 수 있었다.
 ‘인벤토리, 근력의 도끼.’
 근력의 도끼를 꺼내 손에 들자, 묵직한 느낌과 함께 온몸의 근육이 간질거리기 시작했다. 어쩐지 힘이 부쩍 솟는 듯한 기분이었다.
 ‘설마, 능력치가 그대로 적용되는 건가?’
 이 또한 한건우에게는 희소식이었다.
 ‘여기에 더해, 만약 상점에서 구입한 종자가 게임처럼 빨리 자라나기만 한다면? 그리고 그것을 상점에 팔아 골드를 충분히 수급할 수 있다면?’
 생존에 유리함은 물론이거니와, 표범과 같은 맹수가 더 몰려와도 더는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터였다.
 ‘최우선은 안전과 생존. 그 외의 것은 일단 그것을 갖춰놓은 다음에 생각해도 충분해.’
 생각을 다잡은 한건우가 자리에 서서 몸을 풀었다. 약간 찌뿌둥하기는 했지만, 움직이기 어려울 정도는 아니었다.
 ‘가볼까?’
 막 그 자리를 벗어나려는 찰나, 문득 눈에 들어온 것이 있었다. 표범의 사체였다.
 ‘발톱은 적당히 갈면 칼 대신 쓸 만해 보이는데. 저 송곳니도 그렇고.’
 낫이 있기는 하지만, 기역자로 꺾인 자루 때문에 칼처럼 사용하는 것은 어려웠다. 물론 자루를 떼어내면 아쉬운 대로 쓸 수는 있지만, 아직 골드를 제대로 수급할 수 있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멀쩡한 낫을 분해하기는 아까웠다.
 ‘그래. 일단 챙기자.’
 조심스럽게 표범 시체로 다가간 한건우가 왼손으로 표범의 발목을 붙들고, 오른손의 도끼를 힘껏 내리 찍었다.
 퍼억!
 힘이 늘어난 덕분인지, 표범의 발목은 단번에 잘려 나갔다. 한건우는 남은 세 개의 발목을 잘라낸 후, 인벤토리를 열었다.
 ‘들어가려나?’
 긴가민가한 마음으로 들이 밀어보자, 표범의 발목이 사라졌다.
 ‘좋아!’
 한건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남은 세 개의 발목도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네 개의 발목이 겹치지 않고 따로 공간을 차지한다는 점이었다.
 ‘그래도 총 50칸이니, 당분간은 걱정 없겠어. 그나저나······.’
 한건우의 시선이 다시 표범을 향했다.
 발목이 인벤토리에 들어가니, 다른 부분도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무엇보다 고기.’
 비록 육식 동물의 고기는 노린내가 심하다고 하지만, 그래도 고기 아니겠는가? 농산물만큼은 아니지만, 고기 역시 평범한 사람들은 웬만해서는 먹기 힘든 사치품이었다.
 ‘일단 챙기자.’
 인벤토리를 연 채로 표범의 시체로 다가갔다. 하지만 표범의 시체는 들어가지 않았다.
 ‘너무 커서 그런가?’
 한건우는 다리를 붙들고 열심히 도끼질 해 다리 한 짝을 떼어 냈다. 다행이 이번에는 인벤토리가 빨아들였다.
 ‘무게나 용량 때문이겠군. 밀 한 포대가 20kg 정도였으니, 이것도 그 정도로 나누면 되겠지.’
 그렇게 발목 네 개와 다리 네 짝, 가장 긴 송곳니 두 개와 큼직하게 떼어낸 엉덩잇살 두 덩이가 인벤토리에 채워졌다.
 ‘그런데 이건 또 뭐지?’
 한건우가 유심히 바라보는 것은 지름 5cm 정도의 주황색 구슬로 엉덩잇살을 떼어내려 내장을 치우는 과정에서 발견한 것이었다.
 “무슨 내단도 아니고······. 응?”
 말을 하고 보니 옛 이야기에 나오는 영물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몸길이만 해도 키 183cm인 한건우가 누워서 팔을 쭉 펼친 것보다 길었고, 체고는 1미터 이상이었다. 거기에 10cm가 넘어가는 발톱의 길이도 예사롭지 않았고, 고작 두 번의 실패 만에 방법을 바꾸는 지능까지 갖췄다.
 ‘정말 만약의 일이지만, 귀할 수도 있으니까······.’
 더 없나 하는 생각에 내장을 샅샅이 뒤지고, 뱃가죽까지 갈라가며 뒤적거려 보았지만, 더는 나오지 않았다.
 괜히 아쉬워 입맛을 다신 한건우가 구슬을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이제 더는 없겠지?’
 조금 더 노력한다면 고기를 더 얻을 수는 있겠지만, 도축을 배우지도 않았고, 들인 노력에 비해 그리 큰 소득을 얻을 수 없을 듯싶었다. 마지막으로 한 차례 표범의 시체를 훑어본 한건우가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 * *
 
 “후우······. 대체 얼마나 넓은 거냐?”
 처음 물을 찾아 나설 때만 해도 한건우는 자신 있었다. 적당히 숲을 돌아다니다보면 응당 나오겠거니 하는 생각이었다. 빠르면 몇 시간, 길어도 밤이 오기 전까지는 발견할 것으로 예상했고, 걷는 동안 그 다음의 계획을 세우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나 오산이었다.
 해가 서쪽 나뭇가지 사이로 낮게 걸릴 무렵, 한건우는 더 이상 숲을 헤매다가는 위험할 것 같은 기분에 밤을 보낼 적당한 나무를 골랐다.
 일전의 표범 일을 생각해서 대략 10미터 가량 올라갈 작정이었고, 그 높이에 체중을 버틸 만한 나뭇가지가 있으려면 나무 자체도 더 크고 두꺼워야 했다.
 한참 동안 찾아 헤맨 끝에 한건우가 선택한 것은 두 아름은 되는 줄기에 까마득한 높이, 거기에 굵은 나뭇가지가 나선형으로 빙 둘러 돋아난 나무였다.
 ‘첫 번째 가지까지만 올라가면, 나머지는 계단처럼 올라갈 수 있어.’
 문제는 5미터가량 높이에 있는 첫 번째 가지에 오르는 방법이었다.
 인벤토리를 살펴보니 오두막을 지을 때 사용하고 남은 밧줄이 보였다.
 ‘아무래도 그냥 줄을 잡고 올라가기는 무리일 것 같은데······.’
 한참을 궁리하는 도중 문득 오두막을 짓느라 넉넉하게 마련해 두었던 목재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것을 길쭉하게 쪼개 줄에 엮은 물건이 떠올랐다.
 ‘사다리!’
 생각대로 목재를 길쭉하게 쪼갠 뒤, 밧줄로 양 끝을 묶었다. 그리고 같은 작업을 반복해 길이 5미터가량의 줄사다리를 만들었다.
 문제는 줄 사이에 끼운 나무토막이 자꾸 빠져나가려 한다는 점이었는데, 끝부분에 못을 박고 머리를 휘어 줄을 단단히 붙드는 방식으로 해결했다.
 그렇게 줄사다리를 만든 후 한쪽 끝을 밧줄로 묶었다. 그리고 반대쪽 끝에는 돌을 묶어 위로 던졌다. 몇 번의 시도 끝에 돌멩이가 나뭇가지를 넘어가 줄을 걸쳤다.
 한건우는 조심스럽게 줄을 풀며, 돌멩이가 아래로 내려오도록 했다. 그리고 손에 잡을 만한 높이에 다다르자 돌멩이를 잡고, 힘차게 밧줄을 잡아 당겼다.
 스르르륵.
 줄과 나뭇가지가 마찰하는 소리가 일어나며 줄사다리가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후후! 나도 제법이란 말이지!”
 생존훈련을 받은 전문가가 보면 코웃음 칠 일이었으나, 전혀 훈련이 안 된 한건우에게는 만족스러운 결과였다.
 무사히 끌어올려진 줄사다리가 나뭇가지에 걸쳐지자 한건우는 다른 한쪽을 나무줄기에 몇 겹으로 묶었다. 그런 다음 그 위에 못을 박아 머리를 휘는 방식으로, 줄이 미끄러지지 않도록 고정했다.
 “좋아!”
 뿌듯한 표정을 지은 한건우가 줄사다리를 잡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휘청거리는 탓에 섣불리 발을 뗄 수가 없을 정도였지만, 최대한 움직임을 조심스럽게 하는 방식으로 오르자 곧, 나뭇가지에 다다를 수 있었다.
 그렇게 첫 번째 가지에 올라간 한건우는, 나선형으로 돋아난 가지들을 밟으며 10미터 높이까지 올라갔다. 그리고 상점에서 밧줄 하나를 추가로 구입해 나뭇가지 사이를 엮기 시작했다.
 모양은 ‘V’자. 즉, 중앙의 나뭇가지를 기준으로 그보다 높은 나뭇가지 두 개를 번갈아 묶고, 같은 작업을 반복하며 촘촘히 엮는 방식이었다. 그러자 자면서 뒤척여도 떨어지지 않을 만한 공간이 만들어졌고, 여기에 밀짚을 풀어헤쳐 나뭇가지 위를 덮자 안락한 잠자리가 마련되었다.
 “이것도 괜찮은데?”
 어설프기는 했지만, 이 또한 한건우의 눈에는 만족스러워 보였다.
 그렇게 잠자리를 만든 후, 한건우가 다시 아래로 내려왔다. 그리고 상점에서 화톳불을 구입해 바닥에 피웠다.
 ‘이제 73골드 남았나? 이럴 줄 알았으면 조금만 아낄 것을.’
 정신을 잃기 전, 열 개의 밭에 사과나무 묘목을 심는 데 무려 천 골드를 소모했다. 거기에 체력의 괭이와 근력의 도끼, 손재주의 낫 등을 구입하는 데에도 천 골드 이상을 소모했다.
 만약 사과나무 묘목을 조금만 적게 심었거나, 도구 중 하나만 덜 구입했어도 한동안 골드 걱정은 하지 않았을 터였다.
 ‘당분간은 괜찮겠지만, 골드를 수급할 방법을 찾거나 최소한 머물 곳을 찾을 때까지는 되도록 아껴야겠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상점의 판매 탭을 살펴보았지만, 지금 가지고 있는 물품 중, 팔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다만 한 가지, 한건우는 이곳에서 농사를 지으면 팔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했다.
 타닥. 타닥. 화르르륵.
 타오르는 화톳불에서 피어나는 장작 냄새를 맡자, 슬슬 배가 고파왔다. 그리고 이것은 한건우에게 한 가지 확신을 주었다.
 ‘역시 게임은 아니야. 공복도 시스템이 있는 RPG도 수치가 그럴 뿐이지, 진짜 허기를 느끼지는 못하니까.’
 굳은 얼굴이 된 한건우가 인벤토리를 열어 밀 자루를 꺼냈다.
 ‘그나저나 이걸 어떻게 먹지?’
 알갱이 하나를 집어 앞니로 껍질을 벗겼다. 누르스름한 알갱이가 나오자 입에 집어넣고 씹었다.
 오도독. 오독.
 솔직히 맛은 그리 없었다. 일단 밍밍했고, 풀을 씹는 것 같은 이상한 맛도 났다. 오래도록 씹자 그나마 단맛이 배어 나오기는 했지만, 취향에는 영 아니었다.
 ‘불에 구워 볼까?’
 화톳불의 숯불을 조금 끌어내 얇게 편 다음, 그 위에 밀을 올렸다.
 하얀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며 껍질이 갈색으로 변하기 시작했고, 타닥거리는 소리가 연달아 들려왔다.
 타지 않도록 나뭇가지로 이리저리 헤집기를 십여 분가량. 한줄기 고소한 냄새가 한건우의 코끝을 파고들었다.
 ‘응? 이게 무슨······.’
 저도 모르게 콧구멍을 벌름거리던 한건우의 시선이 숯불 위에서 익어가는 밀에 꽂혔다.
 ‘이게 밀 냄새라고?’
 조금 전 맛보았던 생밀의 이상한 맛을 떠올리면, 생각지도 못한 맛있는 냄새였다.
 당장 꺼내먹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마른침을 꼴깍꼴깍 삼켜가며 밀 껍질이 까맣게 변할 때까지 기다렸다. 이왕 먹을 바에는, 제대로 익은 것이 더 맛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다시 몇 분을 기다리자 고소한 냄새는 한층 진해졌고, 밀 껍질은 숯처럼 까맣게 변했다.
 한건우는 나뭇가지로 밀알을 조심스럽게 긁어냈다. 조금 식기를 기다렸다가, 손바닥 위에 올리고 살살 비볐다. 까맣게 탄 껍질이 떨어져 나가고, 연한 갈색을 띤 밀알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고 보니, 신기하단 말이지.’
 한건우의 시선이 밀알이 놓인 손바닥으로 향했다. 표범을 만났을 때, 나무를 오르느라 까졌던 상처가 보이지 않았다.
 이것을 발견한 것은, 숲을 헤매고 두어 시간가량 흘렀을 때였다. 시야를 가린 나뭇가지를 무심코 손으로 잡아 넘긴 후, 문득 이상한 느낌이 들어 손바닥을 살펴보니 까졌던 상처가 거의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뭐, 이유야 어찌됐든 좋은 일이니까.’
 싱긋 웃으며 손바닥에 놓인 밀알을 입에 털어 넣었다.
 오독. 오도독.
 생 밀 보다 훨씬 더 바삭바삭한 식감이었다. 거기에 냄새로 맡았을 때보다 몇 배는 진한 고소함이 입안을 채웠다. 게다가 어떤 영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씹으면 씹을수록 달짝지근한 맛이 침에 섞여 들었다.
 “아! 사람들이 이래서 진짜 음식을 그렇게 좋아하는 구나!”
 비록 어딘지 모르는 곳에 떨어져 맹수에게 목숨을 잃을 뻔도 했지만, 먹는 것 하나만으로도 어느 정도 고생을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숯불 근처를 싹싹 긁어내 밀알을 모았고, 그것을 비벼 입에 털어 넣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먹으면 먹을수록 더 맛있는 기분이었다.
 ‘다른 건 어떨까?’
 한 줌 남짓 되는 밀알을 순식간에 흡입한 한건우는 이번에는 밀은 물론 보리와 콩까지 꺼내 화톳불에 구웠다.
 오독. 오도독. 오독!
 “오오! 맛있어! 맛있어!”
 먹고, 먹고, 또 먹고.
 태어나서 지금껏, 모든 끼니를 에너지 믹스로 해결하던 한건우에게 진짜 음식의 위력은 그만큼 어마어마했다.
 “잠깐! 고기도 있잖아?”
 구운 곡물의 고소함도 훌륭했지만, 고기는 또 어떨지 기대가 되었다.
 통 크게 표범의 다리 하나를 꺼낸 한건우는 그것을 통째로 불 위에 올려버리는 만행을 저질렀다.
 고기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가죽 정도는 벗겼겠지만, 안타깝게도 한건우는 태어나 지금껏 고기를 먹은 적도, 구워본 적도 없었다.
 털이 타는 노린내에 한건우가 다소 미간을 찌푸렸지만, 그것은 잠깐뿐. 얼마 지나지 않아 냄새는 사그라졌고, 지글거리는 소리와 함께 고기가 익어가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가죽을 벗기지 않은 것은 되레 좋은 선택이 되었다. 새카맣게 타버린 가죽 덕분에, 안쪽의 고기는 아주 잘 익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건우는 모르는 더 큰 역할도 했다.
 어두운 숲을 환하게 밝힌 불꽃과 곡물이 익어가는 냄새에 이끌려 근처까지 다가온 짐승들. 서로 눈치를 보며 누가 먼저 덤벼들까를 고민하던 놈들을 물러가게 만드는 역할이었다.
 한건우에게 죽은 표범은 이 근처에서 최상위 포식자로 군림하던 강자였다. 털이 타면서 강렬하게 피어오른 강자의 냄새에 근처까지 다가왔던 짐승들이 혼비백산하며 물러났다.
 주변 상황이 어떻든지, 한건우의 눈에는 오로지 익어가는 통다리 구이만 보일 따름이었다.
 ‘이 정도면 다 익은 것 같은데?’
 낫을 꺼내 숯이 된 가죽을 살살 벗겨낸 한건우의 눈앞에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고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성인 남자의 허벅다리만 한 굵기에 표면에 좔좔 흐르는 육즙. 한건우는 그 모습에 압도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후우······.”
 심호흡을 한 번 크게 한 다음, 입을 한껏 벌려 한입 크게 베어 물었다.
 쭈아아압!
 고개를 돌려 베어 문 고기를 뜯어낸 후.
 와그작. 와그작.
 대차게 씹었다.
 말 그대로 환상이었다.
 야생동물 특유의 노린내는 없었고, 따로 피를 빼지 않았음에도 비린내와 같은 잡내가 나지 않았다. 거기에 더해 소금을 뿌리지 않았음에도 간이 맞았다.
 고기에 대해 좀 아는 사람이라면 의아해할 일이었지만, 한건우는 그저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길 따름이었다.
 ‘여긴······. 천국인가?’
 결국 다 먹지는 못했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도, 그것을 받아들일 위장에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걱정은 없었다. 오늘 다 못 먹은 고기는 내일 먹으면 되니까. 무엇보다 한건우에게는 인벤토리가 있었다.
 남은 고깃덩이와 구운 곡물을 인벤토리에 집어넣은 후, 한건우는 부른 배를 두드리며 나무에 올랐다.
 첫 번째 나뭇가지에 오른 후, 다른 것들이 타고 오르지 못하도록 줄사다리를 접어 올려 고정했다.
 그리고 마련한 잠자리에 올라가 드러눕자 푹신한 밀짚이 한건우의 몸을 감싸 안았다. 여기에 더해 인벤토리에서 다시 밀짚을 꺼내 몸을 덮자, 포근함마저 느껴졌다.
 
 
 # Chapter 3.
 
 타닥. 타다닥.
 활활 타오르던 불꽃이 사그라지고, 빨간 숯불만 남아 고요히 타오르던 시점.
 들썩.
 숯불 옆의 흙이 불쑥 솟아오르더니 둥그런 무언가가 튀어 나왔다. 엄지손가락 한 마디 크기의 그것은 주변 흙과 같은 색깔이었는데 신기하게도 눈, 코, 입이 달려 있었다.
 마치 클레이 애니메이션에서 나오는 캐릭터의 얼굴이랄까? 그것도 큼지막한 눈에 작고 오뚝한 코, 앙증맞은 입을 갖춘 귀엽기 짝이 없는 얼굴이었다.
 슥. 스윽.
 흙 인형은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 주변을 살피더니 눈을 감고 코를 내미는 시늉을 했다.
 킁. 킁킁.
 매우 작지만 소리까지 났다.
 잠시 그러던 인형의 눈이 다시 번쩍 열렸다. 그리고 인형의 머리 옆으로 길쭉한 흙이 솟아올랐다. 길쭉한 흙이 땅을 짚고 접혔다가 펴지자 머리 아래에 있던 몸통이 딸려 올라왔다. 몸통 윗부분은 원통형이었지만, 아랫부분은 사다리꼴 모양으로 쭉 퍼져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로 다리로 보이는 것이 짧게 달려 있었다.
 슥. 스윽.
 땅 위로 올라온 인형은 몸을 쭉 편 채로 다시금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몸을 쭉 펴도 한 뼘이 채 안 되는 키였지만, 어쨌든 조심성이 매우 많아 보이는 모습이었다.
 사방에는 고요히 타오르는 숯불뿐, 어떠한 기척도 찾아볼 수 없자 인형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인형은 짧은 다리를 조심스레 움직여 숯불 근처로 다가갔다. 그리고 바닥에 엎드려 근처의 땅을 파헤쳤다.
 사삭. 사사삭.
 얼마 지나지 않아 인형의 주먹만 한 시커먼 덩어리 하나가 인형의 손에 딸려 나왔다.
 후! 후!
 숯불 지척에 묻혀 있었기에 아직 남아 있는 열기를 불어 식히는 시늉을 한 후, 인형은 그것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팔을 높이 들어 올린 다음, 눈을 질끈 감고 내리쳤다.
 파삭!
 탄화된 밀알의 겉껍질이 부서져 나가며, 연한 갈색으로 탐스럽게 익은 알맹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와 동시에 인형의 눈동자가 휘둥그레 커졌다. 동시에 입도 둥글게 벌어졌는데, 아마 사람이었다면 이런 소리를 낼 듯싶었다.
 오오오오!
 밀알을 다시 들어 올려 남은 찌꺼기를 털어낸 후, 양손으로 붙잡았다. 그리고 입가로 가져갔다. 그려진 듯한 입이 벌어지며 밀알을 베어 물었다.
 암! 냠!
 복스럽게 입을 우물거리는 모습과 함께, 오도독하는 미세한 소리가 주변으로 퍼져 나갔다.
 자신의 주먹만 한 밀알을 순식간에 해치워 버린 인형이 다시 숯불 근처로 다가갔다. 그리고 땅을 파헤쳐 밀알보다 몇 배는 더 커다란 알갱이를 찾아냈다. 콩이었다.
 인형의 입이 다시금 둥글게 벌어졌다.
 오오오오오!
 인형은 양손으로 콩을 붙잡고 방방 뛰었다. 그리고 다시금 탄화된 부분을 털어내고 한입 크게 베어 물었다.
 암! 냠!
 꾸드득. 꾸드득.
 밀알은 바삭했지만, 콩은 바삭함과 쫀득함이 어우러진 식감이었다.
 인형이 콩알을 흡수하느라 여념이 없을 무렵, 그보다 한참 위에서 그것을 바라보는 눈동자가 있었다.
 ‘이건 또 뭐야?’
 한건우였다.
 ‘생긴 건 꼭 쿠키 달리는 게임의 캐릭터 같이 보이는데. 대체 무슨 생물이지? 아니, 생물이 맞기는 한 건가?’
 한건우는 갑자기 밀려오는 요의에 잠에서 깨어났다. 나무 위에서 그냥 일을 볼까 하다가, 문득 그 냄새 때문에 맹수가 올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위험성을 따지면 모닥불을 피우고 이것저것을 구운 것이 훨씬 큰 문제였지만, 그 당시 먹는 것에 정신 팔린 한건우는 그런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어쨌든 한건우는 자신이 그런 생각을 떠올렸다는 것에 만족하며 나무 아래로 내려왔다.
 삽으로 근처를 적당히 파헤쳐 일을 본 후, 흙을 덮어 마무리 했다. 그리고 다시 돌아오는 과정에서 갑작스레 숯불 옆 땅이 솟아오르는 것을 발견한 것이었다.
 긴장한 탓에 몸을 바싹 엎드리며 경계했으나, 그곳에서 튀어나온 것은 웬 인형이었다.
 ‘헐······. 대체 어떻게 돼먹은 세상이지? 호랑이만 한 표범도 모자라, 이젠 살아 움직이는 인형도 있는 거야?’
 생소한 것의 등장에 긴장했던 한건우였지만, 이윽고 인형이 보인 행동에 그의 긴장감은 서서히 사그라졌다.
 ‘그런데 제법 귀엽게 생겼는데?’
 먼저 구멍에서 나오기 전과, 나온 후에 사방을 경계하는 행동은 영락없는 약자의 것이었다.
 ‘겁도 많아 보이고. 게다가 저 크기면······.’
 고작 한 뼘에도 미치지 못하는 인형의 키와 어린아이처럼 둥글둥글한 체형은 자신에게 아무런 위해를 끼치지 못할 듯 보였다.
 거기에 더해, 어릴 적 즐겨했던 게임 캐릭터와 비슷한 외형도 경계심을 누그러뜨리는 데 한몫했다.
 특히 압권은 인형이 복스럽게 곡물을 먹는 모습이었다.
 ‘헐······. 이건 정말······.’
 어쩌면 그리도 맛있게 먹는지, 아직 배가 꺼지지 않았음에도 배가 고파질 지경이었다.
 암! 냠!
 게다가 입을 벌릴 때마다 미세하게 들려오는 작은 소리는 또 뭔가?
 오득. 오드득.
 마치 다람쥐처럼 볼을 부풀린 채, 입을 오물거리는 인형의 모습은 한건우의 마지막 남은 경계심마저 허물어뜨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귀, 귀여운데? 키우고 싶을 정도로..’
 어릴 적 무지하게 가지고 싶었던 변신 로봇도 이 정도의 느낌을 주지는 않았을 터였다. 아니, 그보다는 친구 집에서 애완동물을 처음 보았을 때의 느낌에 더 가까울 것 같았다.
 ‘그때는 부모님을 엄청 졸랐었는데. 결국 키우지는 못했지만.’
 오득. 오드득.
 한건우는 어쩐지 흐뭇한 미소를 지은 채로 마냥 인형의 행동을 바라만 보았다.
 ‘그런데 몸통 아래 쭉 퍼진 사다리꼴은 또 뭐냐? 무슨 치마도 아니고.’
 치마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 같은 모습에 피식 웃기도 하고.
 ‘참 야무지게도 먹는다. 그게 그렇게 맛있나?’
 뭐랄까? 인형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자니 조금씩 힐링이 되는 기분이 들었다.
 이런 생소하고 위험한 세상에 떨어져 불안했던 마음이 조금이나마 해소되는 기분이었다. 어쩌면 자신보다 훨씬 약해 보이는 모습에서 오는 우월감일 수도 있었고, 같은 약자로서 느끼는 동질감일 수도 있었다.
 ‘데리고 다니면 정말 재밌을 것 같은데······. 혼자면 외롭기도 하고······.’
 이런 생각은 인형의 모습을 지켜볼수록 더욱 커져갔고, 마침내 한건우의 결심을 이끌어냈다.
 ‘일단, 말이라도 한번 걸어볼까?’
 “이봐.”
 매우 작은 소리로 부르자, 열심히 콩을 씹어대던 인형의 몸이 흠칫 떨렸다. 동시에 황급히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소리의 근원을 찾았지만, 아쉽게도 찾을 수는 없었다.
 한건우의 다리는 수북이 쌓인 숯불 건너편에 있었고, 허리를 굽혀 아래를 내려다보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야. 여기.”
 다시 한번 소리를 내자, 인형이 고개를 한껏 젖혀 위를 바라보았다.
 커다란 눈과, 티끌만 한 눈이 마주쳤다. 마주치는 순간, 티끌만 한 눈이 좁쌀만 하게 커졌다.
 “안녕?”
 나름대로 선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었지만, 인형은 혼비백산했다. 손에 든 콩을 집어 던지더니, 짧은 다리로 열심히 달려가 자신이 빠져나온 구멍을 찾아 쏙 들어갔다.
 손을 잽싸게 뻗었으면 충분히 잡을 수도 있었지만, 한건우는 그러지 않았다.
 ‘그보다는······. 일단 친해지는 게 좋겠지?’
 숯불 근처를 살살 파헤쳐 밀알을 비롯한 곡물을 찾아냈다.
 그리고 손바닥으로 살살 비벼 알맹이를 빼낸 후, 인형이 들어간 구멍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소복이 쌓아 두었다. 그리고 기다렸다.
 몇 분 후, 구멍에서 인형의 머리가 살며시 솟아올랐다.
 오오오오!
 눈앞에 소복이 쌓인 곡물의 모습에 기쁨의 탄성을 터뜨렸지만, 그 뒤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한건우의 시선에 기겁했다. 머리가 순식간에 다시 구멍 속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몇 분 후 다시 머리가 나타났다.
 “해치지 않아. 먹어도 돼.”
 매우 천천히 손을 움직여, 밀알 하나를 집었다. 그리고 인형이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곳에 살짝 떨어뜨렸다.
 인형은 흠칫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도망치려 했지만, 한건우의 손이 밀알만 떨어뜨리고 물러나자 경계심 어린 눈빛으로 바라볼 뿐, 도망치지는 않았다.
 “마음껏 먹어. 건드리지 않을 테니까.”
 한건우는 공격할 마음이 없다는 것을, 양팔로 등 뒤의 땅을 짚는 것으로 표현했다. 그러자 인형이 조심스럽게 팔을 꺼내더니 눈앞에 놓인 밀알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다시금 구멍 안으로 사라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인형이 머리를 내밀었다.
 이번에는 보리를 한 알 집어 손닿는 곳에 떨어뜨렸다.
 인형은 여전히 경계심이 남은 표정이었지만, 보리를 집어 들어 그 자리에서 먹기 시작했다.
 아까처럼 복스럽게 먹지 않고, 한건우의 눈치를 보며 야금야금 갉아 먹는 수준이었다.
 ‘그래. 점점 나아지고 있어.’
 밀보다 조금 큰 보리를 다 먹자, 콩을 한 알 집어 떨어뜨렸다.
 꾸드득. 꾸드득.
 여전히 경계심은 남아 있었지만, 보리를 먹을 때보다는 조금 더 입을 크게 벌리고 콩을 먹었다.
 한건우는 점차 인형이 곡물을 받아먹는 거리를 줄였다.
 떨어뜨리는 높이를 점차 낮추는 것에서, 손가락 끝으로 잡고 인형이 받아드는 것으로. 그런 끝에 한건우는 손바닥 위에 곡물을 올리고 인형이 그곳에 올라오도록 하는 것에 성공했다.
 암! 냠!
 이제는 경계심이 거의 풀린 듯 인형은 한건우의 손바닥에 철푸덕 주저앉아 있었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다리 모양이 W자를 그렸는데, 그 모습이 그렇게 귀여워 보일 수 없었다.
 한 가지 놀라운 점은, 몸통 아래의 사다리꼴 모양이 정말로 치마였다는 점이었다. 인형이 주저앉으면서 지금껏 보이지 않던 무릎 윗부분이 드러난 것으로 알 수 있었다.
 쩝! 쩝!
 손에 든 곡물을 복스럽게 먹어대는 인형의 모습을 한건우는 손을 눈높이까지 들어 올려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흐뭇한 미소가 그의 입가에 피어올라 있었다.
 ‘사람들이 이래서 반려동물을 키우는 거구나.’
 한건우는 평소 반려동물 키우는 사람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대화가 통하는 것도 아니고, 귀찮게 신경만 쓰이는 것을 왜 굳이 키우느냐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손바닥 위에 올라와 구운 곡물을 맛있게 먹는 인형의 모습을 바라보다 보니, 이제는 그들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쩝쩝!
 큼지막한 콩알을 다 먹어치운 인형이 입맛을 다시며 한건우를 올려다보았다.
 초롱초롱한 눈빛에 한건우는 심장 어림이 아릿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커흑! 심쿵이란 게 이런 건가?’
 말로 들었을 때에는 설마 그런 일이 있겠어? 라고 생각했건만, 심쿵이란 말을 만든 사람들의 심정을 이제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한건우는 콩알 하나를 더 집어 인형의 손에 건네주면서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그 많은 것이 대체 다 어디로 가는 거지?”
 인형은 매우 작았다. 한 뼘에도 못 미치는 키에, 몸통은 대략 엄지손가락 정도의 굵기.
 지금껏 먹어치운 곡물의 양이 모두 합하면 인형의 몸통보다 더 클 정도였다. 그렇게 먹어댔건만 정작 인형의 배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이유를 고민하기를 잠시, 궁금함보다 더욱 강한 욕구가 몰려왔다.
 “흐아아암······.”
 수면욕이다.
 하루 종일 숲속을 헤매느라 진이 빠진 상태였다. 게다가 그 전에는 표범을 만나 생사를 오가는 상황도 있었다.
 두어 시간 잤다고 해도, 피로는 아직 남아 있었다.
 한껏 벌어졌던 입을 다물고 한건우가 물었다.
 “나랑 같이, 위로 올라갈래?”
 검지로 나뭇가지 위를 가리키며 물었지만, 인형은 입에 든 곡물을 우물거리며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한건우를 바라볼 따름이었다.
 이것을 동의한 것으로 판단한 한건우가 인형을 자신의 머리 위에 올려둔 채 줄사다리에 발을 걸쳤다.
 그리고 막 땅에서 발을 뗄 때였다.
 부르르르.
 머리 위에서 급격한 떨림이 일어났다. 그와 동시에 머리카락을 쥐어뜯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뭐, 뭐야?”
 깜짝 놀라 줄사다리에서 내려선 한건우가 머리 위의 인형을 손으로 집어 들었다.
 손가락에 잡힌 채, 몸을 부들부들 떠는 인형의 모습은 한눈에 봐도 겁에 질린 모습이었다.
 “왜 그래? 뭐가 그렇게 무서운 거야?”
 묻는다 한들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인형은 그저 애처롭게 떨고 있을 따름이었다.
 하지만 한건우가 다시 한번 줄사다리에 다가가자 인형의 떨림이 한층 격렬해졌다.
 “이게 문제였어? 높은 곳을 싫어하나?”
 여전히 답은 없었지만, 한건우는 그렇게 생각하며 인형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다다다다!
 바닥에 발이 닿자마자 인형은 부리나케 달려가 구멍에 숨었다.
 “헐······. 힘들게 친해졌는데, 또 제자리인가?”
 한건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인벤토리에서 구운 곡물 몇 줌을 꺼내, 구멍 앞에 내려놓았다.
 “왜 그렇게 무서워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미안하다. 이거 먹고 기분 풀고, 아침에 보자. 난 좀 자고 내려올 테니까.”
 마음 같아서는 조금 더 달래고 싶었지만, 한번 쏟아지기 시작한 졸음을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위태롭게 휘청거리는 줄사다리를 붙잡고 나무에 올라간 한건우는 곧장 잠에 빠져 들었다.
 그리고 한건우가 나무위에 올라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구멍 위로 인형의 머리가 나타났다.
 인형은 구멍 앞에 산더미처럼 쌓인 곡물을 바라보며 눈을 둥그렇게 떴지만, 무언가를 찾는 듯 한참을 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다가 구멍을 완전히 빠져나와 숯불 주변을 돌면서 연신 무언가를 찾았다. 그러다가 다시금 구멍 앞으로 돌아왔다.
 왠지 모르지만, 어깨가 조금 처져 보였다.
 오독. 오도독.
 인형은 구멍 앞에 쌓여 있는 곡물을 다시금 먹기 시작했는데, 그 모습에서 아까만큼의 활달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 * *
 
 “흐아아암!”
 늘어지는 하품과 함께 기지개를 켰다.
 아무리 밀짚을 깔고, 덮었다고 해도 불편한 잠자리. 하지만 너무 피곤했던 탓인지, 꿀잠을 잤다.
 한건우는 상체를 일으켜 허리를 몇 번 비틀어본 후,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갔나?”
 숯불 옆을 살펴보니 인형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구멍 앞에 수북이 쌓아 놓았던 곡물은 모두 사라져 있었다. 그 모습에 한건우의 입꼬리가 살짝 호선을 그렸다.
 “다 먹은 걸 보니, 부르면 나오겠지?”
 내려가기 전에 먼저 깔고 덮었던 밀짚을 거둬 인벤토리에 넣었다. 나뭇가지를 엮었던 밧줄 역시 수거했다.
 나선형으로 뻗은 나뭇가지를 밟으며 내려가, 줄사다리가 걸린 첫 번째 나뭇가지에 올라서서 주변을 살폈다. 지그시 눈을 감고 소리를 들어보기도 했다.
 딱히 보이는 움직임은 없었고, 들리는 것은 자잘한 풀벌레 소리였다.
 ‘어디서 듣기로는, 풀벌레 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그게 위험한 거라던데. 강자가 나타나서 숨죽이는 거라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줄사다리를 내려왔다. 그리고 모닥불을 뒤적여 아직 불씨가 남은 숯불 조각을 끌어 모았다.
 그 위에 밀짚을 올린 후, 몇 차례 바람을 불어넣자 하얀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더니 이내 불꽃이 살아났다. 목재 몇 개를 꺼내 다시 그 위에 올린 후, 한건우는 인형이 나왔던 구멍 쪽으로 다가갔다.
 “있니?”
 작은 소리를 구멍 안으로 흘려 넣으며, 어제 구워 놓은 곡물을 꺼냈다. 손바닥으로 비벼 껍질을 벗겨낸 후, 입에 털어 넣었다.
 오도독. 오독.
 처음 먹었을 때처럼 감동스럽지는 않았지만, 고소한 맛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아! 그렇지!”
 무언가를 떠올린 한건우가 인벤토리에서 삽을 꺼내들었다. 비록 어젯밤 흙을 파기는 했지만, 지금은 깨끗했다. 인벤토리의 또 한 가지 좋은 점은 그곳에 물건을 집어넣을 때 이물질은 걸러낸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혹시 몰라, 삽의 표면을 소매로 닦은 다음 타오르는 불 위에 올렸다. 그리고 그 위로 밀, 보리 콩을 한 줌씩 올렸다.
 ‘오늘은 볶아 먹어보는 거야.’
 구워 먹는 것도 맛은 있었지만, 겉껍질이 탄 재나 그 밖의 이물질 같은 것을 어쩔 수 없이 함께 먹어야 했다. 그런데 이렇게 볶으면 깨끗하게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곡물을 올린 삽 위에서 고소한 냄새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밀과 보리의 껍질은 점점 진한 갈색으로 물들어가고 있었고, 노란색이었던 콩도 갈색을 띠며 표면이 톡톡 터져 나가고 있었다.
 한건우는 불가에 걸터앉아 그것을 바라보며 남은 곡물을 꺼내 비벼 먹기 시작했다.
 한참을 그러는 도중, 구멍 쪽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구멍을 바라보자, 어젯밤 보았던 인형의 머리가 슬며시 솟아올랐다.
 한건우는 미소 띤 얼굴로 껍질 벗긴 곡물 몇 알을 손바닥 위에 올리고 구멍 쪽으로 가져갔다.
 다다다닥!
 부리나케 달려온 인형이 손바닥 위로 올라갔다.
 ‘어젯밤에는 그렇게 질색을 하더니······. 내가 반가운 건가? 아니면 곡물이 반가운 건가?’
 이유가 어찌됐든, 반갑기는 한건우도 마찬가지였다.
 암! 냠!
 오드득! 오드득!
 ‘참 잘 먹는단 말이지.’
 저도 모르게 인형의 머리를 쓰다듬으려던 한건우가 손을 멈칫했다.
 ‘좀 이상한데······.’
 무언가 미묘하게 달랐다. 다른 점이 무엇인지 딱 꼬집어 말할 수는 없었지만, 분명 어젯밤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어젯밤에 보았던 인형은 말 그대로 쿠키 달리기의 캐릭터였다면, 지금은 거기에서 조금 더 사람과 가까워진 모습이랄까?
 하지만 매우 미묘한 변화였기에, 한건우도 확신하지는 못했다.
 ‘어제는 어두운 곳에서 보다가, 밝은 곳에서 봐서 그럴 지도 모르겠군.’
 뭐 아무렴 어떠랴. 이렇게 귀여운 것을.
 작게 고개를 끄덕인 한건우가 삽자루를 흔들어 삽날에 놓인 곡물을 한 번 뒤적여준 후, 먹기에 여념이 없는 인형을 바라보았다.
 “나랑 같이 다닐래? 그럼, 그런 거 계속 먹을 수 있는데.”
 검지로 조심스럽게 인형의 머리를 쓰다듬던 한건우가 너무 빤해서 이제는 유괴범도 사용하지 않을 법한 멘트를 날렸다.
 “나, 나쁜 사람 아니거든? 널 잡아먹거나, 어떻게 해보겠다는 게 아니고······.”
 목소리가 들려오자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자신을 바라보는 인형의 모습에 한건우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에휴! 말도 통하지 않는 애한테. 내가 무슨.”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이자, 손바닥에서 시작된 간질거리는 느낌이 손목을 지나 점차 팔 위로 올라왔다.
 “응?”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낑낑거리며 팔 윗부분으로 기어오르려 하는 인형의 모습이 보였다. 팔을 살짝 들어 경사를 완만하게 만들자, 인형은 그의 어깨까지 올라왔다. 그리고는 팔을 들어 올려 한건우의 옆머리를 살살 쓰다듬기 시작했다.
 “푸하하핫!”
 한건우는 저도 모르게 대차게 웃었다.
 웬만하면 같이 갔으면 좋겠지만, 어제처럼 거부하면 굳이 강요하지는 않기로 했다. 물론 따라온다면 최대한 잘 대해줄 생각이지만, 이곳을 떠날 수 없는 이유가 있을 수도 있는 것 아니겠는가?
 비록 말 못하는 생물, 생김새는 생명체처럼 보이지는 않지만 어쨌든, 자신의 힐링을 위해 희생이나 고통을 주지는 않기로 했다.
 그러는 사이, 삽날에서 피어오르는 고소한 냄새가 절정에 달했다.
 어깨 위에 오른 인형이 코를 킁킁거리며 기대감 어린 눈으로 삽을 바라보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 먹자!”
 삽을 밖으로 꺼낸 후, 날 쪽에 쌓인 곡물을 후후 불었다.
 나름대로 식히기 위함이었건만, 뜻밖에도 곡물의 껍질과 부스러기 같은 것들이 날아가는 효과를 발휘했다.
 ‘넓적한 판 같은 게 있으면 좋을 텐데.’
 인벤토리를 살펴보던 한건우가 사과나무 목재 몇 개를 꺼내 바닥에 붙여 놓고, 그 위에 곡물을 쏟았다. 그리고 손바닥으로 그 위를 살살 문지른 다음 살살 불어냈다.
 후우우우.
 잘 볶아진 알곡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건, 못으로 고정해서 판처럼 만들면 되겠는데?’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어깨위에 올라간 인형을 손가락으로 집어 목재 위에 내려 주었다. 인형은 입을 크게 벌리고 방방 뛰더니 냉큼 주저앉아 볶은 곡물을 흡입하기 시작했다.
 한건우도 한 줌 집어 입에 털어 넣었다.
 ‘오호! 이게 더 맛있는데?’
 깔끔하기도 했지만, 고소함 역시 더 진한 느낌이었다.
 그렇게 몇 번을 집어 먹으니 입이 텁텁하고 목이 멨다. 어제는 조금씩 비벼가며 먹었던 터라 괜찮았지만, 한꺼번에 많은 양을 먹자 갈증이 치솟은 셈이었다.
 ‘아! 고기!’
 비록 물은 아니었지만, 버석한 구운 곡물보다는 육즙이 풍부한 고기가 그나마 괜찮을 듯싶었다.
 인벤토리에서 고기를 꺼내들었다.
 ‘그런데 얘도 좀 먹으려나?’
 그런 생각에 슬쩍 고기를 인형의 앞으로 들이밀었다.
 ‘어라? 왜 저러지?’
 인형은 바짝 얼어붙은 표정이었다. 입안 가득 든 곡물을 씹을 생각조차 못 했고, 몸만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왜 그러니? 왜 갑자기······. 엇!”
 나무토막처럼 굳은 인형의 몸이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한건우가 황급히 손을 뻗어 넘어지는 인형의 몸을 잡았지만, 인형은 정신을 잃었는지 전혀 움직임이 없었다.
 ‘설마······. 이것 때문인가?’
 한건우는 오른손에 든 고기와 빳빳하게 굳은 인형의 몸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맞아! 다큐멘터리에서 동물들은 강자의 냄새만 맡아도 경계하고, 약한 놈들은 도망친다고 했어! 잠깐! 그렇다면!’
 어쩌면 표범의 고기를 다른 방향으로도 써먹을 수 있을 듯싶었다.
 ‘얘가 겁만 좀 덜 먹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한건우는 인형을 그 자리에 눕혀둔 후, 낫을 꺼내 고기의 일부를 잘라냈다. 그것을 삽 위에 올려 적당히 데운 후, 질겅질겅 씹기 시작했다.
 고기를 거의 다 먹었을 즈음, 부르르 떠는 움직임과 함께 인형이 깨어났다. 인형은 흠칫거리며 한건우를 살피더니 그의 손에 들린 표범의 고기를 바라보며 오들오들 떨었다.
 “괜찮아. 이미 죽었으니까. 이거보다 내가 훨씬 더 세거든.”
 미소 띤 얼굴로 말하며 남은 고기를 입안에 털어 넣자, 인형은 여전히 겁먹은 얼굴로 한건우의 입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시선을 옮겨 표범의 살점이 약간 묻어 있는 삽을 바라보았다.
 “왜? 너도 먹고 싶어?”
 대답은 없었지만, 삽에 묻은 살점을 조금 떼어내 인형의 앞으로 가져갔다. 인형은 여전히 바들바들 떨면서도 자신에게 다가오는 살점을 피하지 않았다.
 팔이 닿을 만한 거리까지 가져가자 인형이 떨리는 손을 들어 올려 그것을 받았다. 그리고 눈을 질끈 감고 그것을 입에 넣고 씹기 시작했다.
 “응? 뭐지?”
 약간 커졌다. 큰 변화는 아니었지만, 인형의 키가 손톱만큼 자라났다. 또한, 연한 빛무리 같은 것이 인형의 몸에서 피어오르고 있었다.
 한건우는 살짝 놀란 얼굴로 계속해서 인형을 주시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인형을 감싼 빛무리는 사그라졌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건지······.’
 한건우는 영문을 알 수 없는 일에 어리둥절하면서도 변화된 인형의 모습을 살폈다.
 키는 이제 한 뼘을 약간 넘을 정도로 커졌고, 몸은 쿠키 달리기의 캐릭터에서 조금 더 인간에 더 가까운 모습으로 변화했다.
 곱슬곱슬해 보이는 머리카락도 생겼고, 이목구비 역시 보다 더 또렷해졌다. 팔과 다리에는 관절이 생겼고, 벙어리장갑 같던 손에도 손가락이 생겨났다. 다만 비율은 몸통에 비해 머리가 큰 어린아이에 가까운 체형이었다.
 물론 한건우의 입장에서는 그 편이 더 환영이었다. 그 작은 크기에 성인의 비율이라면 귀여움보다는 이질감을 느꼈을 터였다.
 자신을 바라보는 한건우의 시선에 눈을 마주친 인형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응? 갑자기 웬 인사? 고맙다고?”
 인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야? 너, 말 알아듣는 거야?”
 화들짝 놀란 한건우의 목소리에 인형이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헐······.”
 급격한 변화에 놀라는 한편에는 기쁨도 있었다. 그저 지켜보기만 해도 귀여운 녀석이 말까지 알아들으니, 좋은 동반자가 될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묻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한건우가 가장 먼저 꺼낸 말은 이것이었다.
 “너, 나랑 같이 갈래?”
 인형이 크게 고개를 끄덕임과 동시에 한건우의 입가에는 함박웃음이 걸렸다.
 
 * * *
 
 인형에게는 아리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무려 수십 번의 시도 끝에 겨우 인형의 허락을 받아낸 이름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건우는 아리와 동행을 선택한 것을 천만다행임을 깨닫게 되었다.
 “읏! 왜 그래?”
 어깨에 올라 있던 아리가 갑자기 한건우의 귀밑머리를 잡아당겼다.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손바닥으로 입을 틀어막은 아리의 모습이 보였다.
 “뭐야? 조용히 하라고?”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느낀 한건우가 속삭이듯 되묻자 아리가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손을 들어 한곳을 가리켰다.
 ‘뭐가 있나?’
 처음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계속해서 아리가 가리킨 곳을 유심히 살펴보자, 무언가 이질적인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수풀에 납작 엎드린 어떤 동물의 뒷모습이었다.
 거리는 대략 20여 미터쯤 앞이었고, 뒷모습은 전에 마주쳤던 표범과 비슷해 보였으나, 크기는 절반 정도로 작았다.
 ‘무, 무슨!’
 숨이 덜컥 막히는 기분. 싸늘한 한기가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느낌이 일었고, 심장은 튀어나올 것처럼 거세게 맥동했다.
 ‘보호색이라니!’
 주변 수풀과 비슷한 몸 색깔을 가지고 수풀에 바짝 엎드려 미동조차 하지 않았으니, 쉽게 알아볼 수 없었다.
 다행인 것은 놈이 등을 돌린 상태라는 점과, 맞바람이 불어와 한건우의 체취가 놈에게 닿는 것을 막아 주었다는 점이었다.
 한건우는 숨소리마저 참아가며 조용히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놈이 아예 보이지 않을 정도로 떨어진 곳에 다다라 겨우 한숨을 내쉬었다.
 ‘후아! 죽을 뻔했네.’
 
 <『이계에서 리얼 팜』 1-2권에 계속>

댓글(11)

하늘종이    
오, 설정이 참신하네요. 근데 어째 특정게임을 까는듯한 기분이 드는데
2018.05.05 23:02
박쿼카    
설정은 참신한데...재미가..
2018.10.24 04:30
플럼베리    
사과가 먹고 싶어지는 글이네요
2018.10.26 09:39
율러스    
식물이 자라지 못한다는 설정이면 의약품들은 어떻게 대체되는건가요?? 화학약품이더라도 어딘가에서 얻기 위해서는 재료가 있어야 할텐데?? 약품가격은 상승하지 않았나봐요?
2018.10.27 18:47
좋아좋아요    
여긴 댓글달게 해놨군요.. 홀릭 그의 직장성공기 보고있는데 갈수록 넘넘 재미없어져서 댓글 달려고 했더니 막아놨어요 작품에 자신이 없어서 댓글도 막아놓고.. 사기당한 기분이예요.. 이계에서 소설은 실망안됐으면 합니다
2019.09.07 14:09
PLO970    
키우고 싶어서 부모님 조른적 있다면서 왜 키우는지 이해를 못한다니 뭔 개소리지
2019.09.09 11:21
군영    
1. 4권부터는 농사보다 마계에 대한 얘기가 주를 이룸 2. 밭도 1,2개가 아닌 수십만으로 시작해서 수천만 단위까지 올라감 3. 골드 인플레 생각 없음. 나라 하나 약 3억골드. 주인공이 가진 골드 조 단위. 4. 너무나 당연한 걸 생각안하다가 상황 되고 나서야 떠올림. 시스템은 거기에 맞는 해결책을 제시해줌. 사실상 시스템에 기대는 비중이 너무 큼.
2019.09.15 08:03
다크라이    
흠.. 2권만에 시스템으로 할 수 있는걸 다해버리다니.. 뒷내용은 아직 모르지만..ㄷ
2019.09.21 18:31
타리카스    
무료부분만 재미있습니다. ㅠㅠ
2019.10.07 12:41
강포동    
사실 인류는 석유랑 광물만 있어도 에너지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냥 진짜음식을 더 좋아해서 드렇지. 인류가 설마 단백질과 탄수화물, 비타미누합성도 할 줄 모를까? 합성착향료도 있고..
2020.01.13 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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