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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구 마에스트로 1-1권

2018.04.24 조회 2,005 추천 17


 # 프롤로그
 
 “그래. 딜 넣어야지. 좀만 더! 더!”
 
 당신의 인생 최고의 순간은 언제입니까?
 
 “잡았어. 잡았다고! 내가 최초야. 최초다!”
 
 좋아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을 때.
 
 “서버 최초로 혼자서 고스트 드래곤을 잡은 남자!”
 
 원하는 결과가 나왔을 때.
 
 “내가 바로 브레이브 월드 13서버의 지배자 이우진이라고.”
 
 후회가 없을 때.
 
 “이거만 판 보람이 있어.”
 
 역경을 딛고 다시 일어났을 때.
 
 “으아! 고스트 소드다! 초레전드템이잖아.”
 
 어떤 일을 하든 행복할 때···.
 
 이우진은 어찌나 기뻤는지 허리를 뒤로 젖히며, 두 팔을 쫙 펼쳤다. 그러자 의자는 그의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중력에 이끌려 바닥으로 처박혔다.
 쿵, 둔탁한 소리와 함께 뒤통수에 강한 충격을 느꼈다. 머리가 너무 아파 앞이 흐릿하게 보일 정도인데도 환호성을 질렀다.
 
 “야호! 진짜로 최고의 순간···.”
 
 그 열기가 오래가지 못한다. 쓰러진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과거의 흔적이자 영광이었으니까.
 방 한편을 가득 메우고 있는 트로피들!
 
 ‘백석고등학교 배구부 지역 예선 우승’, ‘전국대회 준우승’, ‘최고 세터 상’, ‘대학리그 우수 세터 상’ 등등···.
 
 그는 곧바로 의자를 일으키고 다시 자리를 잡았다. 키보드와 마우스에 손을 올렸다.
 
 “나는 지금 행복해. 행복하다고···.”
 
 길드원들에게 방금 자신이 달성한 위대한 업적을 자랑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내 키보드를 두들기는 소리와 마우스를 딸깍딸깍 누르는 소리가 들렸으나 채팅창의 글은 끝맺음을 하지 못하고 중단됐다.
 방구석 폐인 생활을 오래해서 그런가···. 혼잣말이 엄청 늘었네···.
 충동적으로 컴퓨터를 껐다.
 왜 껐지? 이렇게 기분이 좋은데.
 늘어난 러닝셔츠 아래에 숨겨진 배를 긁으며 화장실로 향했다. 오랜만에 씻은 후, 밖으로 나가 제대로 된 식사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딩동!
 
 그때, 울린 벨소리.
 샤워하려고 옷 다 벗었는데··· 문 열어주기 귀찮다. 어차피 교회 나오라는 거 아니면 신문 보라는 거 아니겠어?
 무시했다.
 
 ― 탕! 탕! 탕!
 
 그러자 누군가 원룸의 현관문이 부서질 정도로 강하게 두드렸다.
 뭐야? 어떤 미친놈이야!
 
 “야! 문 열어. 나야. 왜 전화는 안 받고, 까똑은 다 씹어. 너 집에 있는 거 다 알아.”
 
 익숙한 여성의 목소리. 고등학교 동창인 박진아다.
 맞다. 게임한다고 진아한테 온 연락을 모조리 무시했었지.
 어쩔 수 없이 원룸의 문을 열었다.
 그게 변화의 시작이었다.
 그도 그렇게 될 줄 몰랐다. 전혀, 라는 단어를 아낌없이 써도 될 정도로!
 내가 백석고 여자배구부의 감독이 될 줄이야.
 
 
 # 1화 : 난데없는 면접
 
 “그래, 이렇게 차려입으니까 이제 좀 사람 새끼 같네.”
 
 박진아는 옆에서 걷고 있는 이우진의 어깨를 탁, 쳤다.
 그는 늘어진 러닝에 반바지만 입고 있던 아까와는 달리 투 버튼 재킷에 면바지를 차려입었다.
 자신의 어깨를 만지며 그녀를 흘끔 쳐다봤다.
 얘가 이렇게 예뻤나? 꾸미고 나오니까 완전 딴사람이네. 역시 여자는 화장발과 옷차림이야. 특히 저 살짝 두툼한 입술···. 고딩 때나 수험 생활을 할 때랑은 완전 다르네.
 이내 입을 삐쭉거리며 말했다.
 
 “너무 평이 박해. 겨우 그 정도가 아닐 텐데. 나 정도면 지존··· 이건 게임 용어고. 하여튼 난 많이 잘생겼어.”
 “쯧쯧···. 우진 아저씨, 망상은 게임하면서 채팅할 때나 하시고요. 빨리 가기나 합시다.”
 “내가 좀 생긴 건 객관적인 사실이잖아. 그리고 내가 왜 아저씨야! 이제 스물다섯인데.”
 “이봐요. 지금 1월이거든요.”
 “아··· 이제 스물여섯이네. 요즘 야외 액티비티를 지양했더니 시간 가는 줄 몰랐어.”
 “그냥 방구석 폐인이라고 하면 될걸···. 아니면 온라인 게임 중독자라거나.”
 “무슨 실례의 말이야. 용이 세상에 나가기 전에는 누워 있듯, 큰일을 도모하기 전에 잠시 외부 세계와 교류를 중단했을 뿐인데.”
 
 그녀가 코웃음을 쳤다. 입꼬리가 올라간다. 분명 비웃음이다.
 
 “6개월씩이나?”
 “원래 큰 그릇을 만드는 데는 시간이 걸리는 법이지.”
 “온라인 게임만 했으면서.”
 “일종의 재충전이라고 할까나···.”
 
 그는 음, 소리를 내며 볼을 긁었다. 목소리가 점점 줄어든다.
 
 “그걸 객관적으로 은둔형 외톨이나 히키코모리라고 하지 않나요? 대답해 보시죠.”
 
 그가 시선을 피했다. 딴소리를 한다.
 
 “너는 키도 큰 애가 무슨 하이힐이야.”
 
 하이힐을 신은 그녀의 키는 굽이 있는 구두를 신은 그와 비슷했다.
 그가 작아서 그런 것은 결코 아니다. 비록 엄청나게 큰 키는 아니지만 평균 이상은 되니까. 그녀의 키는 170센티미터를 가볍게 넘어선다.
 
 “남이야 힐을 신든 말든. 다리 라인 살리고 싶어서 신는다. 왜!”
 “종아리에 근육만 잔뜩 있는 다리, 라인 살려 봤자지.”
 “흥! 내가 배구 관둔 지가 벌써 5년이 넘었는데,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종아리 근육은 옛날에 다 빠졌다고.”
 
 그녀는 갑자기 허리와 골반을 살짝 틀며 각선미를 살리는 포즈를 취했다.
 그러자 이우진의 눈에 검은 스타킹을 신은 그녀의 다리가 확 꽂혔다.
 깜짝이야! 뭐지? 얘가 이렇게 섹시했나? 예전에는 그냥 땀내만 풀풀 나는 선머슴아였는데.
 언제 이렇게 성인의 매력을 갖춘 거야?
 지금 나 게임 폐인 생활을 너무 오래해서 이런 생각을 하는 거지?
 
 “야! 뭘 그렇게 침을 질질 흘리면서 쳐다봐. 내 섹시함에 반했구나? 그런데 너 그거 알아? 지금 엄청 변태 같은 거?”
 “보긴 뭘 봐. 착각하지 마. 네 근육질 다리에는 관심 없어. 저기 저 냉면집 본 거야. 맛있겠다 싶어서.”
 “좀 전까지는 춥다며···. 너 겨울옷 어디 있는지 몰라서 가볍게 입고 나온 거잖아.”
 “냉면은 원래 겨울 음식이야. 나 배고파. 냉면 먹어, 냉면. 이한치한이란 말 몰라?”
 
 그는 재빨리 냉면집을 향해 걸어갔다. 어떻게 상황을 잘 넘겼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얼어 죽겠구만, 냉면은 무슨 냉면이야. 왜 하필 보인 게 냉면 집이었던 거야. 망했네, 젠장.
 그녀가 그의 팔을 붙잡았다.
 
 “냉면은 나중에. 일단 오늘 할 일이 있어. 그거부터 끝내고 먹자.”
 
 눈이 마주쳤다. 그는 그녀의 눈동자가 미묘하게 흔들리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무언가를 알아 달라는 것 같은···.
 얘가 오늘 왜 이러지? 이게 무슨 느낌일까?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아! 그래 맞아. 애틋하다?
 얘 설마 지금 나한테 데이트 신청한 건가? 그래서 나보고 깨끗하게 씻고, 잘 차려입고 나오라고 한 거야?
 그의 망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그런데 굳이 깨끗하게 씻으라는 말은 할 필요 없잖아. 설마! 오늘 그거···.
 고개를 재빠르게 들었다. 얼굴을 넘어 몸 전체가 화끈거렸다.
 그녀가 그의 팔을 강하게 잡아끌었다.
 그는 쿵쾅거리는 뜨거운 심장을 따르느냐, 친구끼리 이래도 되나 하는 이성의 차가운 파편을 움켜쥐느냐 결정하지 못한 채 그녀를 따라갔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이런 상황에서 핵을 쏘면 김정은은 진짜 나쁜 놈이며, 장기불황이라 청년 실업이 엄청나다는데 이러고 있어도 되나, 왜 아리랑은 아라리가 났을까 하는 상념들로 뒤죽박죽이 됐다.
 
 “다 왔어. 내가 말한 대로 잘해야 돼? 알았지?”
 
 멈춰 선 그녀가 말했다. 그는 멋들어진 중저음의 목소리로 대답하려 노력했으나 성대가 덜덜 떨리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어···. 자··· 잘해야지. 그런데 너··· 너무 적극적이다. 우리가 이래도 되··· 는 거야?”
 “조금, 아니 많이 그렇긴 하지. 아무리 친하다 해도 이런 건 좀 그렇지?”
 “내 말이··· 그거야. 아직 난 마음의 준비가 안··· 됐는데.”
 “여기까지 와서 무슨 소리야. 예전에 배구 선수였을 때의 그 모습을 보여줘.”
 “그래. 내가 그때, 힘이 넘치긴 했지. 하지만 이건 힘만으로 되는 게 아닌데··· 너무 성급하면 제대로 만족도 못 시켜주고 끝날 수 있다고.”
 “그렇지. 포인트를 잘 짚었네. 만족이 중요하지. 지금 그 냉정한 판단 좋아. 난 널 믿어. 파이팅, 이우진.”
 
 그녀의 양손이 그의 재킷으로 향했다. 순간 그는 자신을 감싸고 있는 재킷이 살짝 느슨해지는 것을 느꼈다.
 여기서 이렇게 우리의 친구 관계를 종결짓는구나. 나는 정말 이래도 되는 것일까? 그런데 어? 자··· 잠깐.
 아직 마지막 이성 한 줌 정도는 남아 있는 그가 눈을 번쩍 뜨더니 주위를 둘러봤다.
 여기는··· 학교 복도? 언제 이런 곳으로 왔지? 그런데 여기서? 사람들이 지나다닐 텐데!
 그녀의 상기된 목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자! 이제 들어가자.”
 
 역시 방으로 들어가는구나. 그래, 이게 제대로 된 수순이지.
 고개를 들자 팻말이 보였다.
 교장실?
 의아하다는 목소리로 물었다.
 
 “여기서 하는 거야?”
 “그럼 어디서 해?”
 “아니, 교장실이라니··· 참 색달라서 흥분되기는 하는데, 조금 더 분위기 있는 곳이 좋지 않을까 해서.”
 
 도대체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걸까?
 
 “흥분만 하지 말고 정신을 차려. 아무리 이게 큰일이라도 그렇지.”
 “그렇지. 정말 큰일이지.”
 
 큰일이라는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분명 오래된 친구 사이인데, 갑작스럽게 육체적 관계를 나누는 것은 진지하게 고찰해볼 일이다.
 아! 정말 방구석 폐인 생활을 너무 오래했어. 그래,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는 일단 감정적 교류가 중요한 거잖아. 단호하게 이건 안 된다고 말하자.
 순간 그의 어이없는 망상을 단번에 깨버린 한마디.
 
 “그리고 면접에 무슨 분위기를 따져.”
 “그래, 면접이니까··· 뭐? 면접?”
 
 그녀는 바로 교장실의 문을 열었다. 그러자 한꺼번에 밀려 나온 공기 때문에 그의 앞머리는 이마 뒤로 넘어갔다. 창문을 통해 들어온 빛은 눈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눈을 감았다가 뜨자 보인 것은 나이가 60은 됨직한 어르신 한 분이 차를 마시고 있는 광경이었다.
 그녀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교장 선생님, 오늘 면접 볼 이우진 씨를 데려왔습니다.”
 “진아 왔구나. 그래, 자네가 이우진 군이군.”
 
 교장은 그의 얼굴을 쳐다보며 말을 이어갔다.
 
 “7년 전에 우리 백석고 남자 배구부를 처음으로 전국대회에 진출시키고, 전국대회에서는 준우승을 시킨 전설의 세터.”
 “분명 교장 선생님 마음에 드실 겁니다.”
 “그건 면접을 보면 알겠지.”
 
 그녀가 뒤돌아섰다. 한쪽 눈을 살짝 감았다가 떴다. 그를 스쳐 지나가며 귓속말을 했다.
 
 “힘내.”
 
 그는 난처했다. 뜬금없이 면접이라니! 그리고 교장 선생님?
 교장이 안경을 고쳐 쓰며 말했다.
 
 “우진 군, 면접을 시작할 테니 여기 앉게나. 일단 우리 백석고 여자배구부 감독 면접 자리에 와줘서 고맙네.”
 
 이우진의 얼굴에서 식은땀이 줄줄 흐르기 시작했다.
 뭐? 배구부 감독이라고? 내가? 아니, 갑자기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어? 그런데 여자배구부라고 했나? 남자도 아니고 여자?
 이우진은 지금 대혼란에 빠졌다. 의도치 않게 보게 된 급작스러운 면접에 대한 당혹감과 친구의 호의를 욕망으로 착각한 한 것에 대한 부끄러운 감정이 한데 뒤섞였기 때문이다.
 간신히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리자 의문 하나가 머릿속에 자리를 잡았다.
 내가 왜 여자배구부의 감독이 돼야 해?
 바로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박진아가 자길 생각해서 일부러 만들어준 자리라는 것을 알기에, 어쩔 수 없이 자세를 똑바로 잡고 진지하게 면접에 임하는 척을 했다.
 당연히 머릿속에는 면접과는 전혀 상관없는 생각만 자리를 잡는다.
 나는 도대체 왜 되지도 않은 착각을 한 거야. 나 스스로가 한심하다. 왜 쟤한테 그런 망상을 펼친 걸까?
 쪽팔리게. 진짜 집에서 온라인 게임만 너무 오래했어. 오늘의 흑역사는 나만 알고 있으리.
 
 “우진 군의 배구 이력이야 내가 진아에게 귀가 따갑도록 들었으니 그건 넘어가고···.”
 
 교장의 목소리가 그를 다시 현실 세계로 끌고 왔다. 그는 정신을 차려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이력서를 보니 보험회사에서 영업 관리직으로 1년 반을 일했는데, 나이가 스물여섯이면?”
 “군대는 무릎 부상으로 면제받았습니다.”
 “아, 그것도 진아에게 들었는데, 나이가 들다 보니 자꾸만 잊어버리게 되더라고. 이해해주게나. 자네한테는 그리 좋은 기억이 아닐 건데 말이야.”
 “괜찮습니다.”
 
 대답을 하다 떠오른 사실이 하나 있었다.
 응, 이력서? 내가 언제 이력서를 냈지? 난 전혀 기억이 없는데. 아··· 그때!
 얼마 전, 박진아가 그의 신상명세에 대한 것들을 몇 가지 물었었다. 어차피 그녀가 다 아는 것들이고, 게임을 하는 중이라 귀찮아서 이유도 묻지 않고 대답해 줬었다.
 
 “실적이 아주 좋았다며, 회사는 왜 관뒀나? 거기 연봉이 꽤 센 거로 알고 있는데. 신입이 4천이 넘지 않나? 요즘 가뜩이나 취업하기도 힘든 시대인데···.”
 
 그는 대답하지 못했다. 껄끄러운 질문이니까. 자기도 모르게 그녀에게로 눈을 돌렸다.
 그러자 그녀는 입술을 움직여 소리 없이 말했다.
 솔.직.하.게.
 교장에게로 시선을 돌린 그는 잠시 입술을 깨물다 말했다.
 
 “상사를 쳤습니다.”
 
 심장이 무거워진다. 그에 맞춰 교장의 이맛살이 찌푸려지는 것이 보인다. 당연한 반응이다.
 
 “쳤다는 의미가 뭔지 자세하게 설명해주겠나?”
 “말 그대로 물리적 폭력을 의미합니다. 쉽게 말하면 주먹으로 얼굴을 날렸습니다.”
 “그 상사 나이가?”
 “마흔다섯 정도로 알고 있습니다.”
 “자네보다 스무 살이나 많은 윗사람을 주먹으로? 그것도 얼굴을? 운동했다는 사람이··· 허 참!”
 
 눈을 부리부리하게 뜬 교장은 곧바로 그녀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살포시 미소를 짓는 것으로 대답했다.
 
 “비겁해지기 싫어서, 후회할 것 같아서 쳤습니다.”
 
 교장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입술을 떼는 속도가 이전보다 느려졌다.
 
 “이번에도 자세한 설명이 필요한데.”
 “저희 지점에 계약 만료 시점이 얼마 안 남은 고졸 계약직 여사원이 있었습니다. 나이는 21살이었고요. 제 상사가 그 여사원에게 자기 말만 잘 들으면 정사원을 시켜주겠다며 접근했습니다. 물론 자기가 원하는 걸 안 들어주면 계약은 더 이상 없다는 협박도 잊지 않았고요.”
 “호오···.”
 “회식 자리에서 상사가 계약을 빌미로 그 여직원을 계속 더듬었습니다. 사실 그 여직원이 별다른 저항을 안 했다면 그냥 가만히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그런데?”
 “막 울면서 이러지 마시라고는 하는데, 나이가 어려서 그런지 계약 때문인지 경찰에 신고하거나 그럴 생각은 못 하더라고요.”
 “그 여직원도 혼란스러웠을 걸세.”
 “맞습니다. 제가 그 여사원 사정을 좀 알았는데, 계약이 만료되면 안 되거든요. 하지만 사실 이미 재계약은 없는 것으로 회사 방침이 나와 있었습니다. 당연히 정사원은 말도 안 되는 소리고요. 물론 제 상사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꾸 짐승 같은 짓을 해서···.”
 “그래서 쳤구만?”
 “그렇습니다.”
 
 교장의 이마 주름이 풀어졌다. 작게 웃고 있었다.
 
 “정의롭다고 해야 하나? 하지만 본인이 무모하다는 생각은 안 해봤나?”
 “했습니다.”
 “어차피 남의 일인데, 그냥 가만히 있는 게 현명한 행동 아닌가?”
 “그럴지도 모릅니다.”
 “더 똑똑하게 해결할 방법이 있지 않았을까?”
 “저는 모르겠습니다. 가르쳐주십시오.”
 “그때, 그 행동을 후회하지는 않나?”
 “솔직히 갈등을 많이 했습니다. 이렇게 행동해도 되나. 여기서 회사 나오면 앞으로 어떻게 살지? 더 이상 배구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이우진은 입이 타는 것이 느껴졌다. 식은땀도 흘렸다.
 
 “혼란스러웠습니다. 나는 고등학교 때도 그랬는데, 조직 사회에 적응을 못 하는 그런 종류의 사람인 걸까? 많이 무서웠습니다. 하지만···.”
 “진솔하게 말해보게.”
 “만약 그때로 돌아간다면 똑같이 행동할 거 같습니다.”
 
 짝, 소리가 울려 퍼졌다. 교장이 손바닥을 마주쳐서 난 소리다.
 
 “우리 여자배구부에 딱 맞는 사람이군. 왜 진아가 우진 군을 데려왔는지 알겠네.”
 “네? 도대체 무슨···.”
 
 의아했다. 이우진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교장을 쳐다봤다.
 상식적으로 나 같은 타입을 반겨줄 리 없잖아.
 
 “하지만 아직 우진 군의 계약을 체결해줄 수는 없네. 임무가 하나 남았거든. 자세한 내용은 진아에게 듣게나. 미안하지만 난 약속이 있어서 외출해야 하니 이만···.”
 
 옷걸이에 걸린 코트를 챙기던 교장이 말했다.
 
 “아! 궁금한 게 있었는데, 이것도 잊고 있었네. 배구할 때, 우진 군 별명이 왜 악마의 손이었나?”
 
 ***
 
 교장실에서 나오자마자 이우진은 박진아를 붙잡아 세워놓고 말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짓이야?”
 
 그녀는 여전히 웃음기를 가득 머금은 채로 대답했다.
 
 “고맙다는 말은 안 해도 돼. 우린 친구 사이니까.”
 “고맙긴 뭐가 고마워. 내가 왜 여자배구부 감독을 해야 돼?”
 “아직 확정된 건 아닌데.”
 “하여간!”
 
 그가 소리를 높이자 그녀는 일단 건물 밖으로 그를 데려갔다.
 
 “게임만 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아?”
 “그건 내가 알아서 할 일이야.”
 “아직 배구에 미련 남아 있잖아.”
 “뭐? 미련 그딴 거 없어. 되지도 않는 소리 하고 있어.”
 “내가 널 몇 년째 보고 있는데. 미련··· 많이 남아 있잖아.”
 
 차가운 겨울바람이 그의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재킷 끝자락은 그를 떠나다 말고 제자리를 찾았다.
 
 “네 선수 생활은 참 굴곡이 많았어. 감독에게 반항 문제, 180이라는 프로 선수가 되기에는 작은 키 문제, 무릎 부상, 포지션 변경, 다시 무릎 부상···.”
 
 아니라고 말하려 했다. 회사 생활하면서 배구에 대한 미련은 모두 버렸다고 자신 있게 소리치려 했다. 멋진 멘트를 생각해 반박하려 했다.
 그런데 왜 입이 전혀 움직이지 않을까?
 
 “난 보고 싶은걸.”
 “뭐가 보고 싶은데.”
 “네가 다시 정말 좋아하는 일을 하는 모습 말이야. 그거 알아? 네가 유일하게 멋있던 순간이 코트에 있을 때였던 거.”
 
 혼란스러웠다.
 원하지 않았던 면접을 끝까지 성실하게 임했던 이유가 단지 그녀의 마음 씀씀이에 대한 배려 때문만이 아니었나?
 나는 정말로 배구라는 단어에 설렌 걸까?
 하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우리 여자배구부에 딱 맞는 사람이라는 게 무슨 의미지?”
 “일단 교장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임무가 뭔지 알아야 할 거 같지 않아?”
 “대한민국 사회에서 아무리 부조리한 일이 벌어졌다고 하더라도 상사를 쳤는데, 너무 쉽게 받아들인 점. 그리고 내가 대학 4학년 때, 코치처럼 활동했다 하지만 정식 경력이 아닌데도 기회를 준 점, 면접 자체가 너무 허술하게 진행된 점들을 감안해 보면 여자배구부가 제대로 유지도 안 될 정도로 심각한 문제가 있는 거 같은데. 아니야?”
 “눈치는··· 그 와중에도 참 냉정하게 판단 잘해.”
 “교장 선생님이 말한 임무는 여자배구부가 제대로 돌아가게 하는 것과 관련이 있겠네.”
 “내가 설명할 일 줄어서 좋네. 일단 눈으로 직접 보라고. 방학이지만 오늘 연습한다고 모여 있으니까.”
 
 여기서 안 간다고 단호하게 거절해야 하는데. 나는 왜 따라가고 있는 걸까?
 그녀는 그를 체육관으로 데려갔다. 체육관의 문을 열자 확인할 수 있었다.
 단 두 명의 학생만이 배구를 하고 있는 모습을.
 
 
 # 2화 : 전국 레벨 여고생과 예비 감독님
 
 근 몇 년간, 대한민국 교육계의 가장 큰 변화라고 하면 바로 운동부가 늘었다는 것이다.
 엘리트 프로 체육 위주에서 벗어나자는 취지에서, 정부와 교육부는 십여 년 전부터 막대한 예산을 투입해 초중고의 운동부 숫자를 반강제로 늘렸다.
 덕분에 고교 스포츠가 다시 지역 사회에서 인기를 얻으며 활성화됐다. 고교 남자 스포츠 중 최고의 인기를 구가한 종목은 단연 야구다.
 그렇다면 고교 여자 스포츠 중 가장 큰 혜택을 받은 것은? 바로 배구였다.
 월드스타 김연경 세대의 등장과 맞물려 여자 배구에 관심이 커진 사람들이 많이 늘어난 덕분이었다.
 인기의 또 다른 비결이 있다면?
 실내 스포츠이며, 선수끼리 몸을 부딪칠 일이 적기 때문일까? 유독 미녀가 많다는 것이었다.
 상업주의와 외모지상주의라는 비난도 나왔지만, 인기가 폭발적으로 증가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
 백석고 여자배구부가 속한 경기도만 해도 여자배구부 숫자가 무려 80개였으며, 전국적으로는 400개가량 됐다.
 대학에도 여자배구부가 우후죽순 생겨나며, 대학 리그가 부흥했다.
 덕분에 프로 여성 배구팀의 숫자도 8개로 늘었으니 배구 팬들에게는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었다.
 그런데 백석고 여자배구부원의 숫자는 딸랑 두 명?
 이우진의 눈동자가 당황으로 물들었다.
 문제가 있을 것으로는 예상했지만, 부원이 두 명밖에 안 된다니···.
 이상한 것이 있었다. 고등학교 배구에 크게 관심을 가지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모교라고 백석고 배구부에 관한 소식은 틈틈이 확인했었다.
 백석고는 일반 고등학교로 스포츠 명문 학교는 분명 아니었다. 하지만 2년 전에 돈을 들여 유능한 감독을 영입했으며, 최근 어느 정도 괜찮은 선수들을 확보했다고 들었다.
 아! 그러고 보니 올가을대회는 완전히 망쳤다고 그랬지?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를 뒤로하고 박진아가 말을 시작했다.
 
 “얘들아 내가 오늘 감독 구해온다고 했지? 봐봐! 짜잔! 이렇게 멀쩡한 놈으로 데려왔다고.”
 
 트레이닝복 차림의 두 학생은 잠시간 멍한 얼굴로 그의 얼굴을 뚫어지도록 쳐다봤다.
 그러다 오른쪽에 있는, 180센티미터의 장신에 찰랑거리는 긴 흑발이 매력적인 여학생이 황급히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감독님. 저는 주장인, 이제 곧 3학년이 될 류선화라고 합니다. 포지션은 센터입니다. 저희 배구부 감독을 맡아주겠다는 분이 계시다니···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아! 저는 2학년이 될 세터 김온율이에요. 정말 정말 고맙습니다. 배구부··· 없어지는 줄 알았는데요.”
 
 곱슬기가 있는 머리의, 얌전하게 생긴 여학생도 따라서 인사를 했다.
 그의 미간이 좁혀졌다. 눈에서는 날카로운 빛이 뿜어져 나왔다.
 요즘 고교 여자배구부 숫자가 너무 많아져서 다른 종목과의 형평성 문제 때문에 교육부에서 더 이상 여자배구부 설립을 허가 안 해준다고 들었는데. 여기는 배구부가 없어지는 줄 알았다고?
 의문이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박진아가 팔꿈치로 그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는 그제야 자신도 인사를 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최대한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
 
 “안녕하세요. 뭐··· 뭐부터 말해야 하지? 아, 이름···.”
 
 그는 자기 머리를 흐트러트렸다.
 
 “이우진입니다. 그리고 여기 백석고 출신이고요···. 또 그러니까···.”
 
 두 소녀는 상당한 기대를 하고 있다는 눈빛으로 그를 쳐다봤다. 그는 난감해졌다.
 
 “아직 감독이 확정된 건 아닌데···.”
 “아···. 역시··· 저희 배구부를 맡아주시는 게 쉽지는 않으시겠죠.”
 
 주장이 크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푹 숙였다.
 
 “그··· 그게 아니라···.”
 
 그가 더 자세하게 설명을 하려는데 박진아가 끼어들었다.
 
 “교장 선생님께서 다시 배구 시합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인원을 모아 와야 감독직을 허락한다고 하셨어. 그래서 그래. 이 녀석이 할 마음이 없어서 그런 건 아니야.”
 
 임무가 그거였군···. 그런데 내가 할 마음이 있는지, 없는지는 왜 자기 멋대로 정하는 거야?
 얼굴을 살짝 찡그린 그와는 달리 두 소녀의 얼굴은 환해졌다.
 
 “왜 배구부원이 두 명밖에 없는 건가요?”
 
 그의 말에 주장이 대답했다. 딱 부러지는 말투와 목소리.
 
 “현재 세 명인데, 한 명은 오늘 사정상 못 나왔습니다. 부원이 저희밖에 남지 않은 이유는 설명하면 긴데···. 먼저 간단하게 말씀드리면 전 감독님과 부원들의 마찰이 있었습니다. 그 후에는 부원끼리 충돌해서···.”
 
 처음과 다르게 말을 제대로 끝맺지 못했다. 다시 표정이 어두워진다.
 그는 박진아를 째려봤다. 그녀는 고개를 홱 돌렸다.
 감독과 부원의 마찰이라고? 이 녀석이···.
 그가 말했다.
 
 “그래서 다들 배구부에서 탈퇴를 한 건가요?”
 “그렇게 보시면 됩니다. 사실 저희 부가 지금은 이렇지만 작년 가을대회에서는 4강 안에 들 거라는 평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실제로 3학년 선배님 중 한 분은 프로에 입단했습니다.”
 “그 학생 이름이?”
 “김유하 선배님이십니다.”
 “아! 이번에 2라운드 3순위로 핑크레이디에 입단한 그 선수?”
 “맞습니다.”
 
 자신의 선배를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배구부에 대한 소속감이나 자부심도 강하다는 느낌이었다. 그녀가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1학년에는 전국대회 레벨의 선수가 있었습니다.”
 “1학년인데 전국대회 레벨이라···.”
 “그것도 둘이나요! 한 명은 배구를 관둔다고 했고, 한 명은 다른 학교로 전학 갔지만요···.”
 
 ***
 
 “울트라 슈퍼 맥시멈 스파이크!”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소녀는 아주 우렁차게 외치며, 높게 비행했다.
 
 ― 펑!
 
 그녀의 손에 강타당한 배구공은 터질 듯한 소리를 내며 포탄처럼 날아갔다.
 
 “으악! 언니, 너무해요! 절 죽일 생각이에요?”
 
 그 공을 받은 다른 여학생은 뒤로 데굴데굴 구르더니 허리를 부여잡고는 원망의 소리를 냈다.
 마치 남학생 같은 강렬한 스파이크를 때린 여학생이 땅에 착지하자 포니테일로 묶은 뒷머리가 살랑거렸다.
 그녀는 한 손으로 브이자를 그리며 말했다. 입에는 큰 미소가 걸려 있다.
 
 “어때? 나 대단하지? 칭찬 좀 해줘.”
 
 다른 소녀는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그렇게 배구가 하고 싶으면 언니네 학교로 가서 하라고요. 졸업한 지가 언젠데 왜 여기 와서 이래요. 그리고 전 방학을 즐기고 싶단 말이에요. 억지로 끌고 와서는···.”
 
 조금 전, 강스파이크를 때린 그녀의 표정에는 민망함과 미안한 마음이 섞여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이곳은 중학교이며, 그녀는 고등학생이니까.
 
 “미안, 미안. 집에 갈 때, 떡볶이랑 오뎅 쏠게. 그걸로 봐줘.”
 “아! 선배 한 명 잘못 만나서 이게 무슨 고생이야. 내가 왜 연습도 없는 날에 배구를 해야 돼요. 전 언니랑 다르게 배구는 그냥 부활동이라고요.”
 “으으으··· 진짜 미안하다니까.”
 “그러면 언니네 학교로 가라고요.”
 “그게··· 그러니까···. 우리 학교에서는 내가 배구를 할 수 없는 이유를 몇 번이나 설명했잖아···.”
 “저는 이해 못 하겠습니다.”
 “쳇. 내가 졸업하기 전에 널 그렇게 업어주고 먹여가며 애정으로 키웠는데, 날 이렇게 대하다니.”
 “언제 그러셨는데요. 이쯤 되면 기억 날조가 아니라 대뇌 망상 수준 아니면 정신 분열 수준인데요.”
 “뭐? 너 죽을래?”
 
 둘이 티격태격하고 있는 그때, 체육관의 문이 열렸다. 중년의 남성과 까까머리를 한 남학생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이곳 남자 배구부 감독과 부원들이다. 중년의 남성이 말했다.
 
 “이민경이 오늘도 있네.”
 “안녕하세요, 감독님. 오늘 남자애들 연습 날이군요.”
 “잘됐다. 우리 애들 연습하는 것 좀 도와줄래? 네가 스파이크 때려주는 게 애들 리시브 연습에 그렇게 도움이 많이 된다.”
 
 이 학교는 남자 배구부를 창단한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남자부원 대부분의 실력은 처참한 수준이었다.
 
 “네, 얼마든지요.”
 
 그녀의 표정이 환해진다. 이제 콧노래까지 부르며, 혀로 살짝 윗입술을 훑는다. 혀를 자주 내미는 건 그녀의 버릇.
 반면 이곳 중학 배구부 남학생들의 얼굴은 사색이 됐다. 몸을 부르르 떠는 녀석도 있다.
 
 “아··· 저 누나 또 왔어. 망했다.”
 “연습 때려치우고 집에 가고 싶다. 난 민경이 누나 스파이크 절대 못 받겠어.”
 “젠장, 민경이 누나가 때린 스파이크에 얼굴 맞고 기절하는 꿈을 꾼 적도 있어.”
 
 그러자 다른 남학생들이 방금 말한 녀석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그래도 얼굴은 예뻐서 좋은데···.”
 “예쁘면 뭐 해. 연습할 때는 악마인데.”
 “미녀지만 파워 괴물이라고 하면 되려나?”
 
 배구부 연습이 끝났다. 그러자 아까 이민경을 예쁘다고 했던 남학생이 번개같이 그녀에게로 뛰어갔다.
 
 “누··· 누나, 오늘 연습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남학생은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지 못 했다. 얼굴은 붉어졌으며, 행동은 뻣뻣하다.
 이민경의 옆에 있는 중학생 소녀, 강연정은 그를 한심한 눈으로 바라봤다.
 좋아하는 티 좀 작작 내라니까, 이 멍청한 오빠 같으니라고···.
 그녀와 그는 쌍둥이 남매 사이다.
 순수한 얼굴의 남학생이 그녀에게 물었다.
 
 “배구 계속하··· 하실 거죠?”
 “어? 어··· 어···. 그게 말이지···.”
 
 이민경은 눈동자를 다른 곳에 두더니 입술을 앞으로 쭉 빼 밀었다.
 
 “누나는 정말 멋있어요.”
 
 부끄러워 차마 예쁘다는 말은 하지 못한 그였다.
 
 “저도 내년에 누나가 다니는 백석 고등학교에 진학할 거예요. 동생이랑도 이미 그렇게 합의를 봤어요. 누나 곁에서 누나가 배구를 하는 모습을 꼭 보고 싶습니다.”
 
 동생은 어이없다는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내가 언제, 라는 얼굴이다.
 
 “그··· 그렇구나. 그래, 너희 둘 다 고등학교 때도 내 후배가 되면 좋겠네. 그런데 우리 학교는···.”
 
 과연 여자배구부가 존속될지 의문이라는 말을 하고 싶었으나 그렇게 말하기 부담스러운 상황이었다.
 눈망울이 너무 초롱초롱해···.
 
 “저는 누나처럼 강스파이크를 때리는 선수가 되고 싶어요. 그래서 요즘 열심히 연습하고 있어요. 진짜로 열심히··· 그런데 누나도 저처럼 배구를 열심히 하게 만든 그런 선수가 있나요?”
 
 그녀는 시선을 체육관의 관중석에 두었다.
 
 “있지. 어린 마음에 그냥 멋있게 보였던 선수가··· 그 사람을 보고 배구를 시작했어.”
 “프로 선수겠죠?”
 “아니, 그냥 고교 배구 선수였어.”
 “그게 누구신지···.”
 
 소년은 눈을 부릅떴다. 라이벌 의식이라도 느끼나 보다.
 
 “가슴이 뜨거워서 눈물이 뜨거운 선수였는데.”
 “네? 그게 무슨 말···.”
 
 남들이 이해할 리 없다. 그녀의 추억 속에 잠들어 있는 선수니까.
 
 “포지션은 세터였어.”
 “세터요? 근데 누나는 윙공격수잖아요.”
 “나 중학교 1학년 때까지는 세터였어. 1학년 말에 윙공격수로 전향한 거야.”
 “아··· 왜 전향을 하셨나요?”
 “감독님이 나랑 세터는 안 어울린대. 사실 내가 토스 올려야 하는데 그냥 막막 스파이크를 때려버리고 그랬거든.”
 “세터가 스파이크를 때리시다니···.”
 “응, 그래서 엄청 혼나기도 했어.”
 
 그때, 순수한 소년의 소중하고도 아름다운 시간을 깬 한마디.
 
 “언니, 떡볶이요. 오빠 놈이랑 쓸데없는 대화로 시간 낭비하지 마요. 언니 조금 있으면 학원 가야 하잖아요.”
 “아! 맞다.”
 
 그녀는 얼마 전부터 입시 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인상을 팍 쓰며 한마디를 내뱉었다.
 
 “으··· 학원은 최악이야. 다 없어져야 돼.”
 
 ***
 
 “전 감독님은 분명 실력이 좋으신 분이셨습니다. 제가 알기로 저희 학교의 시합 성적은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감독님이 부임하신 이후에 성적이 상당히 상승했습니다. 하지만···.”
 
 이우진은 주장이 말을 할 때까지 기다렸다.
 
 “선수들을 자주 때렸습니다. 욕하는 건 일상이셨고요.”
 “폭력이 교육인 줄 아는 사람들이 있어서 문제라니까.”
 “그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잠시간의 침묵. 류선화는 담담한 어투로 말을 이어갔다.
 
 “미친년, 네가 뭔데 리시브를 그 따위로 하고 지랄이야. 씨발, 그럴 거면 그냥 배구 때려치우고 시집갈 준비나 해. 하긴 네년 쌍판이나 등빨 보면 뭐, 배구 말고 답이나 있겠냐? 머리가 좋은 것도 아닌데··· 왜 내 말이 틀려? 이런 식으로 욕을 하셨습니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사실 이 정도는 양호한 편입니다. 야, 이번에 서브 성공 못 시키면 앞으로 그냥 남자들한테 다리나 벌려주면서 살아. 그게 국가에 이바지하는 일이니까. 이런 말도 하셨었습니다.”
 
 그녀는 중간중간 말하는 속도가 느려지긴 했지만, 끝까지 명료하게 이어갔다.
 이우진은 가슴을 움켜줬다.
 답답하다. 아니, 아프다.
 아직 스무 살도 안 된 여자아이가 잘 알지도 못하는 남자에게 꺼내기는 힘든 말일 거다.
 
 “그만···. 그 정도만 해도 돼요.”
 
 그녀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이제는 목이 메 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지만 멈추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 감독이 계속 감독직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성적이 나왔기 때문입니다. 대학 입시 쪽에도 영향력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 이유에선지 저희 선배님들 대다수가 감독님의 그런 행동을 싫어하면서도 옹호하셨습니다. 학부모님들의 지지도 있었고요.”
 
 머리가 어지럽다.
 왜 나 때랑 변한 것이 없을까? 그놈의 성적 지상주의와 대학 입시.
 
 “올해 가을대회가 시작하기 전에 마지막 연습 시합을 가졌습니다. 그때, 센터를 맡은 오민아라고 있습니다. 블로킹을 늦게 떠서 점수를 주자 감독님이 바로 작전 타임을 불렀습니다. 그러더니 또 욕을 시작했습니다.”
 “······.”
 “그러다 손가락으로 민아의 가슴을 찔렀습니다. 그러면서 가슴이 크다고 늦게 뜨면 되냐? 그 큰 가슴 잠자리 말고 어디 쓸데가 있다고··· 라고 하자 갑자기 민경이가 감독님의 얼굴을 주먹으로 쳤습니다.”
 “시합 중에 여고생이 감독을 쳤다고?”
 “네. 정말 제대로 쳤습니다.”
 “그러기 정말 쉽지 않았을 텐데··· 그런데 민경이?”
 “아, 이민경이라고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배구를 관둔 전국 레벨의 1학년입니다.”
 “그렇구나.”
 “그 이후에 민경이랑 또 다른 전국 레벨인 소연이가 주축이 돼서 학교에 그 감독님이 한 일을 알리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그게 저희 배구부 분열의 시작이었습니다.”
 
 ***
 
 이우진은 집으로 돌아가다 바닥에 굴러다니는 돌을 발로 찼다.
 젠장, 진아 녀석. 나를 제대로 엮었군. 감독과 싸운 후에 팀 분열이라··· 안 좋은 기억만 떠오르네.
 그의 눈앞에 배구공을 들고 있는 짧은 머리의 남학생이 서 있다. 바로 그녀들처럼 고등학생이었을 때의 이우진이다.
 그는 감독에게 외쳤었다.
 
 “감독님, 왜 저희는 맞으면서 배구를 해야 합니까?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상황에 맞게 변형된 플레이도 할 수 있잖아요. 왜 무조건 명령대로만 해야 됩니까? 저희는 기계입니까? 아니면 감독님의 노예입니까?”
 “연습 시합에서 졌다고 학교까지 뛰어가라는 건 너무한 처사입니다. 20킬로미터가 넘는 거리입니다. 다들 지친 데다 무릎이 안 좋은 애들도 많은데 이러면 부상만 심해질 뿐 아닙니까?
 
 돌아오는 대답은 항상 똑같았다.
 
 “우리 우진이 또 반항 시작이네. 지금 뭐 하는 거야? 감독이 시키면 그대로 하는 게 선수야. 그게 고교 스포츠고.”
 
 과거는 미화되기 마련이라는데, 이 기억들은 절대 그렇게 변하지 않는다.
 애처로운 얼굴을 한, 상처를 받을 대로 받은 그녀들을 떠올리자 복잡한 심경이 됐다.
 나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 진짜 감독을 맡아야 하는 걸까?
 혀를 찼다. 잘 생각해 보니 한 시간 전부터, 그가 6개월간 했던 온라인 게임에서 경험치 두 배 이벤트를 시작했다.
 며칠 전부터 기대하고 있었는데, 접속할 마음이 안 들 줄이야.
 
 “으아! 떡볶이는 왜 이렇게 맛있는 거야. 늦었잖아.”
 
 엄청나게 큰 목소리가 그를 상념에서 깨웠다. 목소리가 들린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키가 크고, 눈매가 살짝 날카롭지만 예쁘장한 여학생이 맹렬한 기세로 뛰어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언니 학원 가려면 책을 가져가야죠.”
 
 그녀의 뒤를 어리게 보이는 여학생이 쫓고 있었는데, 속도에서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는 앞선 여학생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파란색 츄리닝에 점퍼만 걸쳐 입었다.
 팔다리가 긴데. 그리고 저 스피드에 허벅지 근육. 배구하기에 딱 좋은···.
 
 “민경 언니, 이거 가져가야 한다고요.”
 
 민경? 설마 이민경?
 그녀가 스쳐 지나가기 직전, 그는 오른손에 들고 있던 봉지에서 둥그런 모카빵을 꺼냈다.
 그걸 하늘로 던졌다. 오늘 저녁으로 먹으려고 산 것인데, 자기도 모르게 한 행동.
 이민경의 눈에 모카빵이 두둥실 떠오르는 것이 들어왔다.
 어? 스파이크 때리기 딱 좋은 위치?
 그녀는 본능에 이끌린 듯 하늘로 뛰었다. 팔을 어깨 뒤로 쭉 뻗는다. 활처럼 휜 허리. 하늘을 나는 듯한 다리 동작.
 이우진의 눈동자가 한층 커졌다. 정말 멋지고 시원시원한 스파이크 자세였다.
 그녀가 모카빵을 세차게 내리쳤다. 모카빵은 땅에 내동댕이쳐지며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망가졌다.
 그녀는 모카빵을 던진 사람을 바라봤다.
 뭐야? 저 사람은? 왜 난데없이 아까운 빵을 던져? 생긴 건 멀쩡하게 생겼는데, 미친 사람인가?
 그녀는 다시 학원을 향해 질주했다. 그러다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디서 본 사람인 것 같은데.
 그는 그녀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때 들린 앙칼진 목소리.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참나, 여고생에게 작업이나 걸고. 변태 아니에요? 작업법도 정말 특이하네. 빵을 던지다니···.”
 
 
 # 3화 : 지나가던 배구 마스터
 
 이우진이 뒤를 돌아보니 그곳에는 스파이크의 그녀를 뒤따라가던 여학생이 있었다.
 키는 크지만, 상당히 앳된 얼굴. 중학생 정도로 보이는 그 여학생은 그를 찌릿, 째려보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뭔가 단단한 오해를 한 듯 보였다.
 그는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변태 아저씨라니. 응? 그런데 지금 변태에 화를 내야 하는 거야, 아저씨라는 단어에 슬퍼해야 하는 거야?
 미묘한 심정.
 이내 어떤 쪽에 더 초점을 두어야 하는지 결정할 수 있었다. 여학생이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경찰을 찾았으니까.
 
 “저기 학생 뭔가 큰 오해를 한 거 같은데. 나는 아까 그 학생에 대해 알아보고 싶은 게 있어서 쳐다본 것뿐이에요.”
 “성인이 여고생의 신체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으면 당연히 의심하는 거 아닌가요?”
 
 여학생이 목소리를 높이자 그는 순간 당황해 머뭇거렸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그를 불신의 눈길로 쳐다보고 있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인간 말종을 보는 눈빛이다.
 저 여학생의 입을 어떻게든 막아야 해. 이러다 진짜로 변태 로리타로 몰리겠어.
 
 “내가 그 여학생의 몸동작이랑 라인을 본 이유는···.”
 “라인이라고요? 머리 좋으시네요. 괜히 영어를 써서 저를 헷갈리게 하려는 의도 같은데, 결국은 몸매를 훔쳐봤다는 말이잖아요.”
 
 머리가 멍해지는 것을 느꼈다. 뒤에 하고 싶은 말은 배구 선수 같아서 스파이크를 어떤 자세로 때리는지 보고 싶었다는 거였는데. 역시 결론을 일찍 말해야 하는 시대다.
 여학생은 손가락질하며 소리쳤다.
 
 “변태 아저씨들 특유의 음흉한 얼굴로···.”
 
 기세등등했던 그녀가 갑자기 코드가 빠진 청소기처럼 조용해졌다.
 
 “음흉··· 음흉하지는 않고···. 잘생긴 오라버니가 그런 부적절한 취미를 가지시면 안 되는데요.”
 
 그로서는 천만다행인 상황. 음흉한 변태 아저씨에서 부적절한 취미를 가진 잘생긴 오라버니로 상향이 됐다.
 그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이번에는 오해받지 않도록 말하리라 다짐했다.
 대화의 기술이라고 하나? 핵심과 연관된 단어를 쓰면서도 간접적인 느낌이 들도록 말하자.
 
 “저기 학생도 배구를 하나요?”
 “어? 어떻게 아셨죠?”
 “그건 학생도 키가 큰 편이고, 체형이나 근육의 생김새가···.”
 “이럴 수가. 하··· 함정이었구나.”
 
 그의 이마에 주름살이 늘어났다.
 함정? 무슨 말이지?
 여학생은 양팔을 엇갈려 자신의 상체를 가리더니 뒷걸음질을 쳤다.
 
 “처음부터 목적은 나였군요. 언니에게 관심을 두는 척하면서 나를 유인하려고···.”
 “아니, 잠깐만 그게 아니라.”
 “내가 귀여우면서도 섹시한 걸로 아무리 유명하다지만, 이제 중학생인데.”
 “학생 이상한 생각하지 말고. 진짜로 아니라고!”
 “이상한 생각은 지금 아저, 아니 부적절한 취미를 가지신 오라버니가 하고 있잖아요.”
 “나는 배···.”
 “배라···. 특정 부위만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더니 진짜였군요. 그게 뭐더라?”
 “제발 내 말 좀··· 그런 사람 아니라니까···.”
 
 그녀는 이미 자기만의 세계에 빠졌다. 이우진의 말을 귓등으로도 들을 생각이 전혀 없는 것 같았다.
 갑자기 엄지와 검지를 이용해 딱, 소리를 내며 외쳤다.
 
 “맞아, 팬티쉬!”
 “그건 페티쉬고, 잠깐 내가 이런 말을 할 때가 아니잖아.”
 
 주변에서 웅성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진짜 경찰에 신고하려는 사람들도 보였다.
 어떻게든 그녀의 입을 막고 싶었으나 그녀는 엄청난 속도로 말을 이어갔다.
 
 “팬티쉬나 페티쉬나! 하여간 제 배가 매끈해서 예쁘다는 말은 많이 듣죠. 그런데 어쩜··· 우리 엄마가 남자는 얼굴만 봐서는 안 된다고 했는데, 엄마 말이 맞았어.”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재빠르게 두뇌를 회전시켰다.
 말로 하는 건 틀렸어. 말로는 쟤를 어떻게 할 수가 없어.
 비닐봉투에서 소보로빵을 집어 들더니 위로 던졌다. 그러고는 높이 뛰었다.
 순간 여학생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엄청난 점프였기 때문.
 철퍽, 그가 소보로빵을 강하게 내려쳤다. 그녀는 넋을 놓고 그 장면을 바라봤다.
 스파이크 서브를 넣는 거 같잖아. 그런데 동작이 엄청나게 깔끔해!
 바닥으로 착지한 그는 그녀가 또 입을 열기 전에 선수를 쳤다.
 
 “저도 배구 선수 출신이에요.”
 
 그녀가 자신의 말에 관심을 기울이자 성공했다는 생각을 했으나.
 
 “뭐야, 저 사람 여중생한테 잘 보이려고 저 짓을 한 거야?”
 “엄마, 저 아저씨 아까는 빵을 던지더니 이번에는 빵을 때렸어.”
 “쳐다보지 마. 눈 마주칠라.”
 “젊은 사람이··· 쯧쯧쯧··· 취직이 안 돼서 그러나···.”
 
 ***
 
 그와 여학생은 카페의 창가 쪽에 자리 잡았다.
 소보로빵 스파이크를 보여준 후, 그녀는 의심의 눈초리를 접은 듯싶었다.
 
 “민경 언니는 백석고 배구 선수가 맞아요.”
 “하지만 요즘에는 배구를 안 한다고 들었는데···.”
 “마음에 들지만, 접점이 없는 사람을 공략하기 위해서는 공통 관심사와 주변인을 이용하라! 너무 정석적이네요. 조금 더 세련된 방법을 사용하면 좋았겠지만, 성의를 봐서 인정해줄게요.”
 
 그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쭉 들이켰다. 추운 겨울에도 차가운 음료를 시킨 이유는 화병이 날 거 같은 속을 진정시키기 위해서였다.
 정말 미치겠다. 얘랑 대화하기 정말 힘들다.
 
 “학생 그게 아니라···.”
 
 그게 아니라는 말을 오늘 도대체 몇 번이나 했는가.
 
 “에이, 됐고요. 오라버니 얼굴이 많이는 아니지만 쬐끔은 제 취향이니 이야기 해드리죠. 제 이름은 강연정이에요. 키는 173, 몸무게는 늘씬늘씬, 생일은 4월 7일이고, 에 또··· 시간 나면 하는 건 퀼트랑 음악 감상. 제가 원래 조신한 스타일이라···.”
 
 그만! 제발 그만! 이걸 듣고 싶은 게 아니라고.
 
 “세화중 여자배구부 주장이에요. 훗! 제가 이렇게 능력이 있는 여자죠. 최근에는 민경 언니에게 이끌려서 억지로 훈련을 하고 있는데···.”
 
 얼음을 와그작와그작 씹어 먹던 그가 고개를 들었다.
 
 “훈련을 하고 있다고? 그 민경이라는 학생이랑요?”
 “이제 괜히 민경 언니한테 관심 있는 척 안 하셔도 된다니까요. 사실 얼굴만 보면 제가 언니보다 낫죠. 저는 방학을 맞아 그저 집에서 홍차 한잔에 독서를 하거나 차분하게 영화나 음악 감상이나 하고 싶은데, 민경 언니가 제 선배라 어쩔 수 없이 우리 학교에서···.”
 
 ***
 
 이게 도대체 뭐 하는 짓이야.
 이우진은 선글라스를 끼고, 넥워머를 입이 안 보일 정도로 둘둘 말고 집에서 나왔다. 세화중에 가기 위해서였다.
 그는 오늘 오전 백석고에 가서 주장 류선화와 세터 김온율을 만나고 왔다.
 그 둘은 어제 다시 한번, 이민경과 오민아에게 배구부로 돌아오라고 설득했으나 단번에 거절당했다고 한다.
 하지만 아직 기가 죽지 않았는지 대안을 찾아보겠다며 의욕을 보였다.
 
 “저희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한 명 있습니다. 그 사람에 관한 건 일단 저와 온율이가 맡겠습니다.”
 
 주장은 이렇게 말하고는 꾸벅 인사를 하더니 김온율과 함께 어디론가 사라졌다.
 덕분에 할 일이 없어진 이우진은 박진아에게 밥이나 사라고 전화를 했다. 학교에 있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내가 너 밥 사주는 사람이냐? 방학이라 나 오늘 출근 안 했다고. 그리고 약속 있어.]
 
 무정하게도 바로 뚜뚜뚜, 전화가 끊어졌다. 원망의 말을 퍼부으려는 순간 온 메시지.
 
 [제대로 할 마음이 생겼나 보네. 할 일 찾은 거 축하해.]
 
 자기가 끌어들여 놓고서는 무책임하기는!
 결국 그의 관심은 백석고 배구부를 관뒀는데, 배구를 하기 위해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가지 않았으며, 희한하게도 중학교에서 연습을 하고 있다는 이민경에게로 옮겨갔다.
 전국 레벨이라는 실력과 어제 본 스파이크가 강렬하게 뇌리에 남았기 때문에 더더욱 관심이 커졌다.
 그래서 세화중으로 가기로 결정한 것.
 본인이 의식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어느새 교장이 내린 임무를 진행하고 있었다. 6개월간 심혈을 다해 진행했던 온라인 게임의 임무는 잠시 접어두게 됐고.
 선글라스를 끼고, 얼굴을 가린 이유는 정체를 드러내는 것이 왠지 쑥스러워서였다. 그리고 어제 그 착각이 심한 여학생에게 들키고 싶지 않아서이기도 했다.
 세화중 체육관의 문을 살짝 열었다.
 문틈 사이로 이민경이 날아오르는 모습에 눈에 들어왔다. 세차게 배구공을 내려친다. 그러면 들리는 기분 좋은 펑, 하는 소리.
 위력이 어마어마하잖아!
 그는 계속 쳐다봤다. 어제 그 여중생은 이민경의 스파이크를 받을 때마다 뒤로 넘어지며 우는 소리를 냈다.
 연신 감탄이 나온다.
 여자애가 저 정도 위력이라니! 정말 엄청나. 재능만 따지면 그냥 전국 레벨이라고 할 수 없겠어.
 프로에서 활약할, 아니 그 이상도 될 수 있는···.
 키가 173, 4? 윙공격수치고 키가 작은 게 아쉽긴 하다만 운동 능력으로 극복할 수 있을 거 같은데.
 그러다 자기도 모르게 문을 열고 들어갔다. 두 여학생의 시선이 그에게로 쏠렸다.
 
 “스파이크 그렇게 때리면 어깨를 다치기 쉬워요.”
 
 이민경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저씨는 누구신가요?”
 “헐 대박. 언니, 저 사람 한겨울에 그것도 실내에서 선글라스. 게다가 코트 차림···.”
 
 강연정이 잽싸게 핸드폰을 손에 쥐며 소리를 질렀다.
 
 “그거네, 그거. 자기 소시지 덜렁덜렁거리는 거 보여주고 좋아하는 변태! 112··· 112!”
 “꺅!”
 “학생들, 난 변태가 아니라.”
 
 이민경은 엄청난 위력을 담아 배구공을 때렸다.
 
 “변태는 사회악이··· 어?”
 
 그녀는 당황한 눈으로 쳐다봤다. 그가 아주 깔끔하게 그녀의 스파이크를 받아냈으니까.
 
 “나는 변태가 아니라 지나가던 배구 마스터라고나 할까나?”
 
 제정신이 아닌 사람을 보는 듯한 두 학생의 눈초리. 그는 이내 자신이 상당한 무리수를 던졌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아! 진짜 게임을 너무 많이 했어. 배구 마스터라니··· 이게 뭔 똥멍청이 같은 센스야.
 목도리로 입까지 가리고 선글라스를 써서 티가 안 날 뿐, 이우진은 얼굴은 시뻘겠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나가던 배구 마스터라는 말을 내뱉은 사실이 너무나 쪽팔렸다. 하지만 여기서 물러날 수는 없다. 그러면 진짜 그냥 변태에 이상한 사람이 되는 거니까.
 당당한 척 일부러 발걸음을 크게 내디뎠다. 배구공을 집어 들더니 하늘로 던진 후, 도약한다. 허리가 활처럼 굽어진다. 어깨 뒤로 넘어간 팔을 강하게 휘두른다.
 이민경은 그 모습을 넋 놓고 쳐다봤다. 몸에 소름이 돋았다. 부드러우면서도 탄력이 넘치는, 그녀가 이상향으로 생각하는 자세.
 
 ― 텅! 터덩···.
 
 배구공이 옆을 스쳐 지나가 땅에 튀기고 저 멀리 굴러갈 때까지 그의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는 그녀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학생의 스파이크는 분명 좋아요. 하지만 지금 허리와 어깨를 충분히 이용하지 않고 어깨에 힘만 줘서 때리는 경향이 있어요. 그러면 어깨가 다칠 위험이 있으니 조심해야 돼요.”
 
 요즘 스스로의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왜 관여를 했을까? 난 감독도 아닌데. 그리고 쟤는 일단 배구를 관둔다고 했잖아.
 고교 마지막 대회가 끝나고도 배구가 너무 하고 싶어서 아등바등했던, 필사적이었던 자신의 옛 모습이 겹쳐 보여서였을까?
 그는 바로 돌아섰다.
 
 “배구 잘하고 싶고, 더 하고 싶으면 혼자해서는 안 돼요.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발걸음을 문밖으로 옮겼다.
 다시는 못 할 줄 알았던 배구를 할 수 있었을 때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점수를 낼 때마다 동료들과 환호성을 지르고, 서로를 칭찬하고, 다음번에는 이렇게 하자고 의논을 하고···.
 
 “그게 중요하고 소중하니까···.”
 “저기, 잠깐만요.”
 
 그녀가 그를 불러 세웠다. 그가 고개를 돌리자 그녀가 말한다.
 
 “선글라스요.”
 
 그녀의 손가락 끝에는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져 다리가 휘어진 선글라스가 있었다.
 그는 순간 얼굴을 가려야 하나 선글라스를 주우러 가야 하나 결정을 내리지 못 했다.
 얼굴을 가리고 선글라스를 주우면 되잖아!
 이제 간단한 판단도 안 되는 그였다. 선글라스를 챙긴 후 재빠르게 사라졌다.
 그러자 이민경이 말했다.
 
 “요즘은 변태도 전문직의 시대인가?”
 “언니, 경제가 힘들어서 이상한 사람이 늘어났나 봐요.”
 
 그녀는 한동안 그가 있던 장소를 우두커니 바라보았다.
 왜 그리운 느낌이 드는 걸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연정아, 다시 토스 올려.”
 “연습을 또 하자고요? 이제 제발 그만해요. 제발···.”
 
 ***
 
 이우진은 오늘 이곳 카페에서 주장과 세터를 보기로 했다. 그 둘은 약속 시각에 늦지 않고 나타났다.
 그가 자신이 살 테니 주문을 하라고 하자 주장이 말했다.
 
 “아직 정식으로 감독님이 되신 것도 아닌데, 함부로 얻어먹을 수는 없습니다.”
 
 잠시 그녀를 쳐다봤다.
 확실히 말투나 행동이 고지식하지만, 책임감 있는 타입이라는 생각이 들지?
 
 “내가 어른이니까 사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냥 마셔요.”
 “그래도···.”
 “그래야 내 마음이 편하니까요.”
 “그러면 카페 모카로 마시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인사도 예의 바르게 한다.
 세터를 쳐다봤다. 세터 김온율은 주장 류선화에 비해 체구가 여리여리할 뿐만 아니라, 운동선수라기보다는 그냥 여학생 같았다.
 
 “음··· 저는···.”
 
 목소리가 기어들어간다.
 
 “캬라멜 마끼야또를···. 아! 예비 감독님이 마시는 것을 보니 시원한 게 마시고 싶기도 하고···. 하지만 추우니까 역시 달달하면서도 따뜻한 거? 오늘 단 거를 너무 많이 먹기는 했는데···.”
 
 혼잣말을 횡설수설한다.
 그가 주장을 쳐다봤다.
 
 “약간의 결정 장애가 있습니다.”
 “결정 장애라. 세터가?”
 “커피는 오늘 속이 좀 그러니까 딴 거로? 차이 티 라떼는 뭔가 부족하고···. 그린 티는 맛없고···.”
 “정말 약간인 거죠?”
 “종종 심해질 때가 있습니다.”
 
 세터는 코트의 사령관이다.
 감독의 지시를 파악해 팀의 공격을 결정하는 역할을 한다. 세터가 어떻게 공을 배분하느냐에 따라 시합이 결정된다. 오죽하면 배구는 세터놀음이라는 말까지 있겠는가.
 이우진은 김온율을 걱정스럽다는 눈으로 쳐다봤다.
 결정 장애 세터는 또 신선하군.
 주문한 음료수가 나오자 세 사람은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주장이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태블릿 PC다.
 
 “제가 어제 고민해서 짜온 계획입니다.”
 
 그는 당황했다. 태블릿 PC의 화면에는 계획의 개요도와 도표가 담겨 있었는데, 분량이 엄청나게 많았다.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 있나? 그만큼 진지한 거라고 보면 되려나?
 그녀가 설명을 시작했다.
 
 “저희는 배구부를 회생시키기 위해 2학년 이민경과 오민아가 다시 배구를 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미 몇 번에 걸쳐 거절당했기 때문에 체계적인 계획과 새로운 방법이 필요합니다.”
 
 그는 회사에서 영업 회의를 했던 때를 떠올렸다.
 얘 여고생 맞지?
 
 “제 생각에는 민경이보다는 민아를 먼저 설득하는 것이 순서가 맞다고 생각합니다. 민경이는 훨씬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면 민아는 저희 힘만으로는 설득할 수 없다는 겁니다.”
 
 세터가 입을 동그랗게 벌리고는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일반적으로 세터가 팀의 두뇌인데, 얘는 주장의 계획에 거의 관여하지 않은 거 같네.
 주장을 보며 말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죠?”
 
 화면에 새로운 인물이 떠올랐다.
 
 “작년 주장이었던 최지영 선배이십니다. 이분과 만난 후, 민아를 배구부에 돌아오도록 설득해 달라고 부탁하는 겁니다. 민아가 배구부에 나오지 않는 이유는 자기들 때문에 3학년 선배들이 스포츠 특기생으로 대학에 들어가지 못했다고 자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3학년은 전 감독을 옹호했다고 하지 않았나요?”
 “지영 선배가 입장상 우리 편을 완전히 들어줄 수는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에게 했던 말이 있습니다. 백석고 배구부를 이어주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해서 미안하다고요.”
 “흠··· 그 전 주장을 설득하면 3학년들에게 호의적인 반응을 얻을 수 있고, 그걸 이용해 민아 학생의 마음을 돌리자는 거네요.”
 
 주장은 컵을 입에 가져가다 멈췄다.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정확하십니다.”
 
 세 명이 향한 곳은 진명학원이라는 입시학원이었다. 건물 앞에서 잠시 기다리자 눈이 가는 여학생이 나왔다.
 편한 옷차림에 점퍼를 입었다. 키가 배구 선수치고는 작은 편인 세터, 김온율보다도 작았다.
 
 “우리 후배들, 오랜만··· 까지는 아니고 하여간 이렇게 보니까 반갑네.”
 
 그녀는 이우진을 쳐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말을 이어갔다.
 
 “이 바쁜 재수생을 어쩐 일로 찾아왔어? 그리고 이분은?”
 
 그는 그녀의 태도에 여유가 넘친다는 생각을 했다.
 주장이 사정을 설명했다. 모든 이야기를 들은 그녀는 다시 한번 미소를 지었다.
 
 “새로운 감독님이 되실지도 모르는 분이라··· 여기까지 이렇게 오시다니 참 특이하시네요. 보통 감독님들은 그런 행동 안 하시는데요. 게다가 정식 교사도 아니시면서.”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주장이 말했다.
 
 “하고 싶은 말이 더 많은데, 시간 되시면 자리를 옮겨도 되겠습니까?”
 “아니. 너희 말은 다 들었으니까 굳이 들을 필요 없어.”
 
 전 주장의 단호한 말에 현 주장은 당황스럽다는 얼굴을 했다. 최지영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자 그는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나는 감독님이 되실 분하고 이야기하고 싶은데. 그것도 단둘이.”
 “아니, 그건···.”
 “어··· 언니···.”
 
 주장이 버벅거리기 시작했다. 세터는 말할 것도 없고.
 전 주장은 양팔을 쭉 들어 올리며 스트레칭을 했다.
 
 “재수생이 됐더니 잘생긴 남자랑 대화할 기회가 없어서. 나 때도 이렇게 잘생긴 감독님이었다면 더 열심히 했을 텐데.”
 
 그와 눈을 마주쳤다.
 
 “저 사실 예비 감독님이 누군지 이미 알고 있어요. 실제로 보니 영광이네요. 백석고를 역사상 처음으로 전국대회까지 진출시킨 명세터, 악마의 손 이우진 선배님.”
 
 한마디를 더 했다.
 
 “동시에 백석고 남자 배구부를 파멸시킨 장본인이라고도 들었는데요.”
 
 파멸이라는 단어에 세터, 김온율은 크게 당황한 모습을 내비쳤다. 반면 주장, 류선화는 무표정한 얼굴로 이우진과 전 주장 둘만의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주장은 자리를 피하기 전에 이우진에게 말했다.
 
 “지영 선배는 분명 성격이 좋으신 분입니다. 하지만 어딘가 알 수 없는 구석이 있습니다.”
 
 그와 전 주장 최지영은 근처에 있는 벤치에 앉았다. 그녀가 말했다.
 
 “저희가 왜 이렇게 됐는지는 이미 대충 들으셨죠?”
 “네, 주장인 선화 학생에게 들었어요.”
 “솔직히 저도 민경이랑 민아, 소연이를 원망했어요. 걔네가 한 번만 참았으면 우리는 가을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냈을 테고, 저를 비롯한 몇몇 애들은 대학에 스포츠 특기생으로 추천받았을 거라는 생각을 했으니까요.”
 “그렇군요.”
 “그게 잘못된 생각이라는 거 알아요. 우리의 욕심을 위해 후배들을 희생시키려는 것과 다름없죠. 그때, 그 감독 얼굴을 민경이가 날려버리지 않았다면 우리는 이게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니까, 라고 생각하며 고교 생활을 마쳤을 거예요. 그리고 졸업식 때는 성희롱 감독한테 우리를 잘 이끌어주셔서 고맙다는 말까지 했겠죠?”
 
 그녀가 입가에는 부드러운 웃음이 걸려 있었다. 그 상태로 너무나 담담하게 말해 이우진은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고는 하늘을 봤다. 새 한 마리가 머리 위에서 빙글 돌더니 날아갔다. 시선을 재수 학원의 창문으로 돌렸다.
 
 “예비 감독님, 그런데요···. 왜인지 모르겠는데, 아직도 후배들을 원망하는 마음이 완전히 가신 건 아니에요. 참 이상하죠? 분명 잘못은 후배들이 한 게 아닌데요. 이런 생각을 해도 되는 건가요?”
 “사람이니까··· 괜찮아요.”
 
 그녀는 손가락으로 촉촉해진 눈을 누른 후 말했다.
 
 “그런데 예비 감독님은 고등학생 때, 저와 반대 입장 아니었나요? 저보다는 민경이 쪽에 가깝겠네요.”
 “그러네요.”
 “뭐, 지금 중요한 건 제가 후배들을 돕느냐 마느냐인데··· 재수생이라 시간에 여유가 있는 상황이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제가 예비 감독님께 질문을 드릴게요. 그 답을 듣고 결정하겠어요.”
 “질문이라면?”
 “왜 백석고 여자배구부 감독직을 맡으시려는 거예요?”
 
 이번에는 그가 하늘을 쳐다봤다. 그녀가 아까 쳐다봤던, 학원의 창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저 안에 있으면 정말 답답하겠구나···.
 그녀가 다시 말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대학 배구의 팬이었어요. 명문 성운 대학교의 1학년 세터를 눈여겨봤었는데, 그 사람은 고등학생 때 다쳤던 무릎 때문에 2학년부터는 시합에 안 나오더라고요.”
 “······.”
 “나중에 리베로로 포지션을 바꿨고, 4학년 때는 또 부상이 심해져서 코치나 전력분석원 같은 역할로 활동했다고 들었어요. 그런데 고등학교에 입학하니 제가 그 사람의 학교 후배가 됐더라고요. 신기하죠?”
 
 그가 천천히 입을 뗐다.
 
 “솔직히 말하면 잘 모르겠어요.”
 “네?”
 “먹고 살기는 해야 하니까 배구부 감독을 맡으려 하는 걸까요?”
 “너무 실망스러운 대답인데요.”
 “대학 졸업하고, 다니던 직장을 어쩔 수 없이 관두고··· 6개월간 온라인 게임만 했어요. 사실 백석고 감독 면접은 제가 원해서 본 게 아니에요. 친구가 저 몰래 신청했던 거였어요.”
 
 그는 이제 시선을 정면에 두고 말을 이어갔다.
 
 “이거 보니까 급여가 그리 많은 것도 아닌데, 내 의지로 시작한 일도 아니니 그냥 거절하면 되는데··· 그러질 않고 있네요.”
 “왜요?”
 “면접을 잡아 준 친구가 그러더라고요. 제가 배구에 미련이 남아 있대요. 스스로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는데요.”
 “정말 남아 있나요?”
 “미련인지 후회인지는 모르겠는데, 진짜 무언가 남아 있긴 한가 봐요. 배구에, 그 시절에···..”
 
 그가 회색빛 미소를 지었다.
 
 “고등학생 때, 끝까지 다 함께 한 팀으로 시합을 마쳤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어요. 하루하루가 설렜던 그때의 그 감정이 그리워져서··· 많이 그리워져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감독 역할을 완전히 거절하지 않은 건가 봐요.”
 “그렇군요.”
 “지영 학생, 제대로 된 각오도 없이 이러는 제가 너무 이기적인 거 같죠?”
 “사람이니까요. 이해해요.”
 
 그녀는 그를 보며 웃었다. 의자에서 일어나 그의 앞에 섰다.
 
 “후배들을 도울게요. 만약에 예비 감독님이 저희의 아름다운 고교 생활을 돕고 싶어서 감독을 맡았다, 이딴 거짓 냄새가 풀풀 풍기는 멘트를 날리셨으면 거절했을 거예요.”
 
 그녀가 손을 내밀었다. 그는 머뭇거리다 손을 잡았다.
 
 “애들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예비 감독님이 필요해요.”
 
 ***
 
 아파트 현관에서 여학생 한 명이 나오자 최지영은 반갑게 말했다.
 
 “오아연, 요즘도 집에 갇혀 있구나.”
 “그렇지 뭐. 한숨만 나온다.”
 
 여학생의 표정은 상당히 어두웠다. 그녀가 말했다.
 
 “그런데 여기까지 왜 찾아왔어? 저분은 누구셔? 그리고 애들은 왜 데리고 왔어?”
 “우리 여자배구부 예비 감독님이야.”
 “그냥 감독이 아니라 예비?”
 
 그녀는 못마땅한 눈으로 그를 위아래로 훑었다. 몸을 홱 돌렸다.
 
 “최지영, 또 엉뚱한 일 꾸미고 있구나.”
 “엉뚱한 일이 아니야.”
 “그럼 뭔데?”
 “우리 후배들이 다시 배구를 할 수 있도록 도와주자.”
 “그게 무슨 말이야?”
 “민경이랑 민아 배구 관둔 건 알지.”
 “들었어.”
 “다시 배구를 하라고 설득하자는 거지.”
 “내가 왜?”
 
 그녀는 한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최지영은 빙긋 웃었다.
 
 “그게 우리의 선배로서 마지막 의무니까.”
 “하··· 어이없네. 내가 걔네가 뭐가 예쁘다고.”
 
 오아연의 얼굴이 일그러지지 시작했다. 목소리가 높아진다.
 
 “걔네들이 가만히만 있었어도 지금 여기 갇혀서 거지 같은 공무원 시험 준비 따위는 하지 않아도 됐을 거라고. 나는 아직 배구가 더 하고 싶어!”
 “그래도 너는 나랑 달리 추천 입학 받았잖아.”
 “우리 아빠가 그딴 대학 갈 거면 배구 때려치우라는데 어떻게 해. 나한테 선택권이 있어?”
 “핑계야.”
 “뭐··· 뭐?”
 “애들 때문에 우리가 대회에서 활약하지 못했다는 것도, 어쩔 수 없다며 이렇게 배구를 관둔 것도 모두 핑계라고.”
 “함부로 말하지 마!”
 
 오아연이 손으로 최지영의 가슴을 밀었다.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이우진이 끼어들려 했다. 하지만 최지영이 제지한 후, 말했다.
 
 “우리의 배구 실력은 딱 그 정도였어. 진정으로 잘하고 싶었다면 연습을 더 열심히 했었어야지. 우리는 그러지 않았잖아. 오히려 민경이랑 소연이 득을 크게 본 게 사실 아냐? 걔네가 잘해서 우리가 강팀이 됐으니까.”
 “그건··· 나도 열심히 했다고. 배구가 더 하고 싶단 말이야.”
 “맞아. 그렇다고 우리가 또 열심히 안 한 건 아니지. 하지만 나 요즘 후회하고 있어. 왜 그때 최선을 다하지 않았을까?”
 “최선을 다한다는 건 존재하는 거야?”
 “유하나, 민경이, 소연이 같은 재능을 가졌다면 더 열심히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어. 질투도 많이 하고 있고.”
 “질투는 현재진행형이냐?”
 “그래.”
 “나··· 프로는 못 가더라도 대학에서라도 배구를 하고 싶었어.”
 “그렇다고 해서 후배들을 원망하는 건 옳지 않은 거 같아. 그리고 저 예비 감독님은 말이야···.”
 
 오아연이 이우진을 쳐다봤다. 그녀의 눈가에는 눈물방울이 살포시 맺혀 있었다.
 최지영이 말을 이었다.
 
 “그 사람이야. 내가 예전에 말했던 백석고 전설의 세터.”
 “네가 미친 듯이 덕질했던 그 사람?”
 “당사자 앞에서 그런 말을 하면 어떡해!”
 
 후배들은 최지영이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은 처음 본다고 생각했다. 최지영이 헛기침을 몇 번 했다.
 
 “쓸데없는 이야기는 더 이상 하지 말고. 하여간 예비 감독님은 나중에 백석고 남자 배구부를 나락으로 떨어트리고···.”
 “내가 나락으로 떨어트린 건 아닌데···.”
 “무릎 부상과 항명 문제, 배구 선수치고 작은 키 문제가 겹쳐 뛰어난 실력에도 불구하고 프로나 대학교에 지명받지 못했어.”
 
 오아연이 시선을 그에게로 돌렸다.
 
 “어? 그런데 어떻게 대학 배구 선수였어? 말이 안 되잖아.”
 
 최지영은 양손을 허리에 가져가며 의기양양한 태도로 대답했다.
 
 “수능 치고 일반 학생으로 대학 들어가셨어. 그 후에 선수 활동하신 거고.”
 “그게 가능해? 게다가 성운 대학교를 수능 치고 가려면 수능 성적이 어느 정도였다는 거야?”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쏠렸다. 그는 쑥스러운 듯 얼굴을 긁었다.
 
 “진짜입니다. 성적은 전과목 1등급이었고요. 백분율은 얼마였더라 자세하게 기억이···.”
 
 최지영이 손가락으로 딱, 소리를 내 시선을 다시 자기에게로 돌렸다.
 
 “성운대는 배구를 하기 위해서 가신 거죠?”
 “네. 부모님께서 괜찮은 대학 아니면 안 보내준다고 하셔서 그랬습니다. 성적은 평소에도 꽤 나왔습니다.”
 “공부를 꾸준히 하셨나 보네요.”
 “저는 배구 선수치고 체구가 작은 편이라 앞으로도 쭉 배구를 하려면 아는 게 많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수업 때 졸지 않으려고 노력했고, 연습 끝나고는 공부를 했었습니다.”
 “공부를 배구를 위해 하신 거네요.”
 “그렇습니다.”
 “고등학생 때, 무릎을 다쳤다고 들었는데요.”
 “체구를 극복하기 위해 무리하게 움직인 데다가 훈련을 너무 많이 해서 망가졌습니다.”
 “예비 감독님의 배구를 향한 집념은 이 정도였다고.”
 
 오아연이 투덜거렸다.
 
 “왜 네가 으쓱해하는 거야?”
 “우리가 배구를 위해서 이렇게까지 하지는 않았잖아? 안 그래?”
 “······.”
 “후배들 도와주자. 너만 움직이면 다른 애들도 같이해줄 테니까. 그거 기억나?”
 “뭐?”
 “그 감독 아니, 감독 새끼 둘이서 욕하던 거.”
 “엉덩이가 커서 둔하냐고 하면서 손으로 우리 엉덩이 움켜줬을 때?”
 “응.”
 “그 손모가지 정말 잘라버리고 싶었는데.”
 “민경이가 감독 새끼 얼굴 안 쳤으면, 우리 후배들 그리고 앞으로 들어올 후배들은 계속 그런 쓰레기 같은 환경에서 운동해야 됐을 거야.”
 “그건 그렇지···.”
 “우리는 이기적이고 비겁했어. 사실 애들이 아니라 우리가 감독을 날려버렸어야 했다고. 하지만 우리는 무서워서··· 많이 무서워서··· 성적을 방패 삼아 그 뒤에 숨은 거잖아. 애들은 잘한 거야.”
 
 오아연의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지영아, 졸업식 날 우리 배구부 하는 거 있잖아.”
 “선후배 시합?”
 “응. 그거 하고 싶어. 예전처럼 다들 모여서 함께··· 마지막이니까 웃으면서···.”
 “웃으면서 하자며 울면 어떡해.”
 “누가 지금 웃자고 했어?”
 “그래도 웃으면서 말해야 하는 거 아니야?”
 “그러는 너는 왜 우는데?”
 
 
 # 4화 : 지금 부는 건 분명 봄바람
 
 “안녕하세요, 감독님. 오민아라고 해요.”
 
 다음 날, 이우진은 새로운 배구부원을 만날 수 있었다. 배구를 관둔다고 한 두 명 중 한 명이었다.
 그녀는 주장보다 약간 작은 편이었고, 상당히 순해 보이는 인상의 소유자였다.
 최지영이 엄지손가락을 들며 말했다.
 
 “어떤가요? 제 능력이. 후후후.”
 “일단 상당히 고마운데··· 지영 학생은 학원 갈 시간 아닌가요?”
 “아··· 그게 말이에요. 당분간은 제가 진짜 좋아하는 일이 뭔가 찾아보기로 했어요.”
 
 그녀는 그에게 윙크를 했다. 그는 얘가 여기서 이러고 있어도 되나 하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주장인 류선화에게 말했다.
 
 “선화야, 시작해.”
 “네, 알겠습니다.”
 
 류선화가 태블릿 PC를 꺼냈다. 이우진은 그 둘의 모습이 신기했다.
 부장과 대리를 보는 거 같아. 명령하는 게 아주 자연스러워. 따르는 쪽도 마찬가지고.
 류선화가 브리핑을 시작했다.
 
 “이민경의 경우는 오민아보다 사정이 복잡합니다. 실제 어제 선배님들, 민아와 함께 민경이 설득에 나섰으나 실패했습니다. 화면을 주목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자 화면에는 볼살이 살짝 있는 귀여운 여학생이 나타났다. 그 이후에 몇몇 여학생들의 사진이 보였다.
 
 “민경이와 소연이가 주축이 되어 전 감독이 한 일을 학교에 알리고 나서자 팀은 분열하기 시작했습니다. 왜 대회를 코앞에 둔 이 시점에서 이런 일을 벌이느냐 하는 문제 때문이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1학년과 2, 3학년의 사이가 벌어졌습니다.”
 
 이미 들어서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그 후, 대회는 감독 없이 치렀는데, 당시 우리 팀에서 최고의 선수는 3학년 유하 선배님, 1학년 민경이와 소연이었습니다. 선수들끼리 사이가 안 좋아졌으니 성적이 잘 나올 리 없었습니다. 대회는 어이없게도 2차전에서 탈락했습니다. 그래서 민경이와 소연이는 배구부원들에게 미안해했습니다.”
 “역시 내 뒤를 물려받은 여자. 잘하고 있어.”
 
 천상 부장님이야.
 이우진은 최지영이 신나 보인다는 생각을 했다.
 
 “더 큰 문제는 대회를 마치고 나서 벌어졌습니다. 몇몇 선생님들이 전 감독이 한 일을 은폐하려고 하자 민경이와 소연이가 동기들을 모아 더욱 격렬하게 항의를 했습니다. 그때는 정말 배구부가 없어지는 줄 알았습니다. 실제로 없애자는 선생님들이 많았고요.”
 “아니, 학생들이 잘못한 것도 아닌데, 왜 배구부를 없애···.”
 
 그는 자기도 모르게 끼어들었다.
 
 “사태가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으니 1학년들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혼란에 빠졌습니다. 그러자 다른 학교에서 자기네 학교로 전학 오라고 유혹을 했습니다. 솔직히 1학년 애들의 실력은 꽤 괜찮았으니까요. 애들은 더 이상 저희 배구부에 가망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민경이와 온율이, 민아 말고는 모두 전학을 가버렸습니다.”
 “그 소연 학생도?”
 “네. 그렇습니다. 그래서 민경이는 자기가 배구부를 흩어지게 만들었다고 생각했으며, 가장 친한 친구마저 떠났다는 사실에 상처를 받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번에 우리가 할 일은 그 소연 학생을 만나는 건가요?”
 
 최지영이 씨익 웃었다.
 
 “우리 예비 감독님 척하면 척이시네. 그러면 이제 우리 술이라도 한잔하면서 구체적인 계획을 짜볼까요?”
 “학생이 무슨 술입니까.”
 “저는 이제 스무 살이라고요! 애들은 이제 늦었으니 집에 보내고 성인들끼리 대화를 나누자고요.”
 
 류선화와 김온율, 오민아는 그녀가 끈적끈적한 캐릭터로 변했다는 생각을 했다.
 언니가 어른이 됐어! 우리랑은 뭔가 달라.
 왠지 모를 묘한 기류에 김온율과 오민아는 얼굴을 붉혔다. 반면 류선화는 단호했다.
 
 “선배님, 지금은 오후 2시입니다. 성인들끼리의 대화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아직 이른 시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쳇, 고지식한 후배 같으니라고. 선배의 사정을 전혀 안 봐주네.”
 “배구부의 부활이 무엇보다 중요하니까요.”
 
 그때, 김온율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일단 소연이를 만나서 민경이가 다시 배구를 할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해야 하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도와 달라고 하죠? 다시 같이 배구를 하자고? 아니야···. 그건 이제 불가능하니 음··· 둘은 라이벌 관계이기도 했으니까 승부 근성을 자극하면··· 아니, 그건 안 될 거 같기도 하고 그러면 역시 감성을 자극해서, 어··· 그래도 운동선수니까 승부욕을··· 아니 이건 좀···.”
 
 그 모습을 본 이우진이 류선화에게 물었다.
 
 “온율 학생이 세터라고 했죠?”
 “네, 세터입니다.”
 “진짜 세터죠?”
 “진짜입니다.”
 “저렇게 뭘 결정을 못하는데, 세터를 할 수 있는 거죠?”
 “믿기시지 않겠지만 할 수는 있습니다. 온율이는 상상을 초월하는 능력의 소유자입니다.”
 
 ***
 
 “으아! 늦었잖아.”
 
 이민경은 오늘도 달렸다. 또다시 배구 연습을 하다가 학원 갈 시간에 늦었으니까.
 
 “언니, 이거 가져가야죠.”
 
 그녀의 후배 강연정 역시 어쩔 수 없이 그녀를 쫓아 달려야만 했다.
 
 “진짜 선배 하나 잘못 만나서!”
 
 집에다 배구를 관둔다고 말했기에 어쩔 수 없이 학원에 다니게 된 이민경.
 안 하던 공부를 갑자기 하려고 하니 잘될 리가 없다. 그녀는 이렇게 학원에 매일같이 지각했다.
 학원의 남학생들은 깨끗한 피부에 예쁘장한 외모를 가진 그녀에게 관심을 가졌으나.
 
 “드르렁! 흠냐···.”
 
 쉬는 시간만 되면 이렇게 깊은 잠에 빠졌으니 그녀는 다른 의미로 철벽녀가 됐으며, 잠자는 학원의 미녀라는 별명을 얻게 됐다.
 그녀가 학원 건물 입구로 들어서려는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언니, 아직 서브가 정확하게 안 들어가서 고민이에요. 그것 때문에 오늘도 감독님께 많이 혼났고···.”
 “괜찮아 소연아. 조급해하지 마. 넌 잘하고 있어. 지금 우리 학교에 네가 와서 얼마나 든든한데. 벌써 대회가 기대되는걸.”
 “네, 열심히 할게요. 빨리 언니의 블로킹을 뚫어야 하는데요.”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한때 고등학교 여자배구부 유니폼을 입은 박소연이 있었다.
 백석고 유니폼이 아닌···.
 그녀는 즐거운 표정으로 대화를 하는 박소연의 옆모습을 쳐다봤다. 학원 수업이 이미 시작해 빨리 들어가야 하는데.
 쟤가 저렇게 환하게 웃을 줄 아는 애였나? 흥! 칫!
 어느새 입을 삐쭉거린다.
 얼굴 좋아 보이네. 친구니까 나도 같이 좋아해 줘야 하는데. 왜 못 하겠지? 내가 이렇게 속이 좁았나?
 눈길이 박소연의 스포츠 백으로 갔다. 그곳에 달려 있어야 할 것이 없다.
 버렸나 보네.
 그녀는 자기 가방에서 배구공을 들고 있는 곰 모양 액세서리를 떼버렸다. 정말 아끼고 아낀 것이었다.
 이제 학원으로 들어가려는데.
 
 “민경아.”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외면할 수 없어 고개를 돌린다.
 
 “박소연, 오랜만에 보네.”
 “어··· 너 여기 학원 다녀?”
 “응. 그렇게 됐어.”
 “그렇구나.”
 
 배구부 상황은 어떠냐는 말이 목구멍으로 차올랐으나 박소연은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했다.
 
 “민경아, 연락할게.”
 “그래. 나 먼저 간다.”
 
 박소연은 그녀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우두커니 쳐다봤다. 박소연의 어깨에 누군가 손을 올렸다. 키가 190센티미터나 되는 여학생이었다.
 
 “소연아 쟤가 걔야? 네 말로는 너보다 잘했다는.”
 
 현재 경기도 최고 아니, 작년부터 이미 고교 여자 넘버 원 배구 선수이자 청소년 대표 센터인 신효희였다.
 
 “네, 언니.”
 “믿기지 않네. 너보다도 작은데···.”
 
 박소연의 키는 176센티미터이었다. 이민경은 그녀보다 작은 174. 윙공격수치고는 둘 다 큰 키는 아니었다.
 
 “스파이크가 정말 대단해요.”
 “그건 너도 마찬가지야. 지금 고교 레벨에서 너만 한 선수 거의 없어. 지금처럼만 하면 올해 전국대회의 신데렐라는 네가 될 거야.”
 “전국대회는 이미 진출한 건가요?”
 “당연하지. 우리는 최강 한대고야. 도내 우승은 당연한 거고, 올해는 전국대회 우승도 우리 거야.”
 
 ***
 
 꿈을 꾼다.
 가을대회 지역 예선 8강전 때였다.
 
 “으윽···.”
 
 시합이 시작하기 10분 전, 감독님이 갑자기 가슴을 부여잡더니 쓰러지셨다. 경기장에 구급차가 왔고, 감독님은 실려 가셨다.
 진행위원이 조금 있으면 예정대로 시합을 시작할 거라는 말을 하고 갔다. 중요한 시합을 시작하기 전에는 선수들에게서 특유의 열기가 뿜어져 나오기 마련이다.
 하지만 지금은 모두의 얼굴이 창백했다. 체육관이 후끈하게 달궈졌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팀원들에게는 한기만 맴돌았다.
 아직 경험이 많지 않은 코치님은 당황스러운 이 사태에 어쩔 줄 몰라 했다.
 답이 없네.
 내가 말했다.
 
 “자! 곧 있으면 시합 시작이야. 준비하자.”
 
 다들 아무런 반응이 없다. 사기를 당해 한순간에 모든 재산을 몽땅 날린 사람들 같았다.
 감독님은 절대 권력으로 우리 위에서 군림했다. 학생들은 그저 순종했으며, 코치님의 평소 역할은 감독님의 의견을 전달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게 우리 팀이었다. 유일하게 감독님께 목소리를 높인 사람이 나였다.
 나는 3학년이다. 오늘 여기서 지면 내 고교 생활의 배구 시합은 이것으로 끝이다. 그럴 수는 없다. 그러고 싶지 않다.
 배구를 위해 평범한 고교 생활은 진작에 포기했다.
 나도 수업이 끝나면 친구들과 PC방에 가거나 노래방에 가서 놀고 싶었다. 청순하게 생겼으면서도 몸매 좋은 여학생과 풋풋한 로맨스를 즐기고 싶었다.
 하지만 매일같이 스파이크 서브를 때리기 위해 뛰었고, 토스를 올리기 위해 움직였으며, 디그를 하러 땅을 굴렀다.
 그게 내 3년이었다. 땀투성이 고교 생활이지만 후회하지는 않는다. 만약 진짜 후회를 할 일이 생긴다면 바로 지금 아무것도 못 해보고 지는 것이리라.
 이전보다 목소리를 높였다.
 
 “생각보다 감독이 시합에 관여할 수 있는 건 많지 않아. 진짜 중요한 건 평소에 우리가 어떻게 연습했느냐야. 연습한 거 떠올려봐 정말로 열심히 했잖아. 그 이유가 뭐야? 우리가 왜 힘든데 참으면서 연습했어?”
 
 또 한 번 침묵이 찾아왔다. 여기서 물러서면 안 된다. 강하게 나가야 한다. 목에 힘을 준다. 크게 소리를 지른다.
 
 “이유가 뭐냐고. 다들 대답 안 해!”
 “전국대회에 가기 위해섭니다.”
 
 몇몇 후배가 허리를 똑바로 세우며 대답했다. 주위를 살폈다. 전투를 준비하는 자들의 기백이 느껴지기 시작한다.
 
 “우리가 겨우 여기서 무너질 수는 없어. 가자! 전국대회로. 우리가 얼마나 강한지 보여주자. 우리는 백석고 역대 최고 팀이야. 알았어?”
 “좋아! 가자.”
 “감독님 없어도 힘내 보자고.”
 “네, 알겠습니다.”
 
 나는 곧 코치님에게 말했다.
 
 “시작하자마자 선수 교체를 해주세요.”
 “뭐? 그게 무슨 말이야.”
 
 이미 선발로 나설 선수 명단을 제출했다. 그것을 바꿀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아깝지만 교체 카드를 한 장 써서 시작하자마자 선수를 바꾸자는 것이다.
 
 “영준이를 빼고, 창영이를 넣어주세요.”
 
 내 동기인 김영준. 감독님은 나에게 항상 김영준이 공격점유율을 40퍼센트 이상 차지할 수 있게 토스를 올리라고 했다. 영준이가 15점 이상 올리는 것을 목표로 하라고 했다.
 왜?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종종 반항도 하곤 했다. 하지만 감독님의 권한은 절대였다. 결국에는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감독님이 없다. 현재 이곳의 리더는 나다.
 창영이는 2학년이지만 객관적인 실력은 영준이보다 낫다. 그러니 영준이를 빼고 창영이를 넣는 것은 당연하다.
 나는 승리를 위해 최선을 다할 뿐이다.
 우리는 감독 없이 8강전을 승리했다.
 그리고 모두의 예상을 깨고 당시 전국 최강이라는 평을 받았던 한대고를 4강에서 세트 스코어 2 대 1로 물리쳤다.
 그렇게 우리는 처음으로 전국대회에 진출했다.
 
 “으악!”
 
 꿈에서 깬 이우진이 이불을 저 멀리 차내며 일어났다.
 이 꿈을 또 꾸다니. 짜증 나.
 시계를 보니 오전 6시다. 잠을 더 자려 했으나 잠이 오지 않았다. 이제 자기는 틀렸으니 간만에 런닝이나 하자고 생각했다.
 6개월간 온라인 게임에 빠져 살았으면서도 집에서 스트레칭과 웨이트는 꾸준히 했었다. 하지만 런닝은 하지 않았다.
 공원에 있는 인공 호수의 주변을 달리는데, 확실히 예전보다 힘이 들었다.
 이제 겨우 5킬로미터 뛰었는데 죽겠네. 토하겠어. 그리고 무릎도 슬슬 한계야.
 오늘은 오전에 박소연 학생을 만나기로 했다. 배구부를 정상으로 돌리는 과정이 참 복잡하다.
 그는 아침을 먹고 한대 고등학교로 출발했다. 배구부 아이들과는 한대고 정문에서 보기로 했다.
 
 “예비 감독님 안녕하세요.”
 “도대체 왜 그런 차림들로···.”
 
 다들 검은 선글라스에 마스크를 쓰고 왔다. 모자도 푹 눌러썼고. 최지영 역시 마찬가지였다.
 뭐지? 마치 아이돌 스토킹하는 사생팬들 같잖아. 게다가 다들 키까지 크니!
 그는 세화중에 갔을 때를 떠올렸다.
 그런데 며칠 전의 내 꼴이 이랬단 말이지? 진짜 쪽팔린다. 다시는 하지 말아야지.
 주장 류선화가 말했다.
 
 “아무래도 한대고에 간다고 하니 긴장이 돼서···.”
 
 그녀가 말꼬리를 흐렸고, 목소리를 떨었다. 항상 여유만만한 최지영마저 표정이 굳어 있었다.
 
 “한대고에 가는 게 왜요?”
 “한대고는 여왕이기 때문입니다.”
 “요즘도 한대고가 최고군요. 나 때도 그랬는데.”
 
 명실상부한 경기도의 절대 패자 한대고.
 한대고 남자 배구부는 지역 예선에서 최근 10년간 봄 대회, 가을대회 합쳐 19번 우승을 했고, 여자부는 20번 모두 우승을 했다. 전국대회 우승 경험도 남녀 합쳐 9번이나 됐다.
 그때, 머리가 어깨까지 오는 아이돌처럼 예쁜 여학생이 그들 앞을 지나갔다. 주변에 있는 남자들이 모두 그녀에게 시선을 주었다.
 최지영이 류선화에게 속삭였다.
 “오현주다. 으··· 저 기집애 예쁘긴 정말 예쁘네.”
 “배구도 잘합니다.”
 “그래서 더 마음에 안 들어.”
 
 오현주는 신효희와 함께 한대고를 이끄는 에이스 선수이자 배구 미녀로 유명했다.
 백석고 학생들은 그녀를 보자 이전보다 더더욱 얼어붙었다. 그 모습을 본 그는 웃음이 나왔다.
 내가 학생 때랑 똑같네. 나도 한대고 선수들만 보면 괜히 위축되고 그랬는데.
 고교 3년간 한대고를 어떻게 하면 이길 수 있을까 고민했었다. 한대고 선수들만 보면 괜히 질투가 생기고, 부럽고 그랬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이럴 줄 알았으면 한대고 견학 신청이라도 할 걸 그랬어.”
 “끄아!”
 “끼약!”
 
 그녀들은 마치 방구석에서 기어 나온 바퀴벌레라도 본 것처럼 기겁했다.
 
 “오랜만에 봤는데··· 이런 반응은 너무한 거 아닌가요?”
 
 목소리가 들린 곳을 돌아보자 표정은 뚱하지만 귀여운 외모의 여학생이 서 있었다.
 
 “아무리 내가 다른 학교로 갔어도 그렇지··· 다들 너무해.”
 
 울상을 짓고 있는 그 여학생은 바로 박소연이었다.
 
 “좋아요.”
 
 다시 배구를 하도록 이민경을 설득해 달라는 제안을 박소연은 흔쾌히 허락했다.
 
 “하지만 조건이 있어요.”
 
 그녀는 이우진을 쳐다봤다. 아니, 째려본다고 하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이다.
 
 “왜 백석고 감독을 맡으셨죠? 저희 감독님이 그러셨어요. 만약 백석고에 감독이 새로 오면 무조건 여자 감독일 거라고요. 전 감독이 일으킨 짓 때문에 남자가 맡기는 쉽지 않으니까요. 거기에다가 젊은 남자면···.”
 “하고 싶은 말이 뭔가요?”
 “팀원들하고 사이가 조금이라도 틀어지면 바로 문제가 생길 거라고 하셨어요. 아마 배구부가 확실히 없어지겠죠? 그리고 성적이 잘 나와도 문제가 심할 거라고 들었어요. 학생들과의 관계를 의심받을 거라고···.”
 “관계는 이성 관계 말하는 건가요?”
 “네, 그래서 감독을 맡으신 의도가 의심스러워요. 분명 조금만 생각해도 알 수 있는 문제니까요.”
 
 그 말이 끝난 순간 배구부 학생들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됐다.
 온도가 갑자기 확 내려간 느낌이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코끝을 스치고 지나간다.
 
 ***
 
 학원을 마치고 나오자 하늘이 캄캄했다.
 나 도대체 학원 왜 왔지?
 이민경은 한숨을 내쉬었다. 수업 시간에 잠만 잤으니 그런 생각이 들 수밖에.
 으이구! 이게 도대체 뭐 하는 짓인지.
 그때, 누군가 그녀를 불렀다.
 
 “저기···.”
 “응? 나?”
 “어. 이름이 이민경이지. 나는 너랑 수업 같이 듣는 김상호라고 하는데.”
 
 키가 크고 훤칠한 남학생이었다. 학원의 많은 여학생들이 그에게 관심이 있었으며, 수업 시간에는 그를 힐끔힐끔 쳐다보곤 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 남학생을 지금 처음 본다는 표정을 지었다. 남학생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내일 같이 수업 듣는 애들 몇 명 모아서 노래방이라도 가려고 하는데, 어때? 같이 갈래?”
 “나 노래방 싫어하는데.”
 “근처에 드립 커피 잘하는 카페 있는데, 시간 나면···.”
 “드립 커피는 너무 써서 안 먹어.”
 
 남학생은 시종일관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일부러 튕기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을 했으니까.
 이렇게 지나치게 빼는 경우는 대부분 관심을 끌려고 일부러 하는 행동이다.
 진실인지는 모르겠으나 그의 경험상으로는 그랬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외모에 절대적인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인상을 쓰기 일보 직전이었다.
 뭐야, 이 녀석은? 왜 계속 쓸데없는 걸 물어보지?
 그가 작업을 걸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집으로 발걸음을 옮기는데, 그가 따라오며 계속 말을 걸었다. 귀찮아서 대충 대답했다.
 그렇게 한 10분쯤 지나자 이제 진짜 짜증을 내려 했다.
 
 “좋아하는 남자 배우 있어? 어떤 스타일 좋아해?”
 
 갑자기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난데없이 모카빵을 공중으로 던진 남자. 그리고 자신을 지나가던 배구 마스터라고 한 의문의 변태.
 며칠간 이상한 사람을 둘이나 만났다. 갑자기 왜 그런 사람들이 생각나는지 의문이었다. 그리고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그 사람 많이 울었어. 정말로 많이···.
 이민경이 집 앞에 도착하자 누군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안녕.”
 “오늘 무슨 날인가? 나에게 볼일 있는 사람이 많네.”
 
 박소연이 천천히 이민경에게 다가갔다.
 그러다 둘 사이를 맴돌던 세찬 바람이 자신을 밀어내는 거 같아 그 자리에서 멈춰섰다. 바람이 떠나자 말했다.
 
 “다시 배구부에 복귀하게 만들라는 부탁을 받고 왔어.”
 
 이민경이 입을 삐쭉 내밀었다.
 
 “네가 신경 쓸 일 아니잖아. 그리고 여전하네. 불쑥 할 말만 하는 거.”
 “내가 원래 말주변이 없잖아.”
 
 바람이 그녀들을 훑고 지나가자 침묵만이 텅 빈 공간을 지배했다.
 박소연이 하늘을 쳐다봤다. 별 하나 없이 그저 캄캄했다. 그녀가 말했다.
 
 “바람이 차갑다. 아직 겨울인가?”
 “무슨 생뚱맞은 소리야. 더 이상 할 말 없으면 나 들어간다.”
 “다시··· 배구해라.”
 “니 입에서 그런 말이 나와?”
 “배구가 계속하고 싶어서 한 선택이었어. 백석고에서 배구를 할 수 있는 환경이 나오지 않을 것 같아서 그랬어.”
 “좋겠네. 나 버리고 그토록 원하던 한대고에 가서.”
 “나만 떠난 거 아니잖아. 그리고 너도 한대고 스카우트 제안 받아들일 줄 알았어.”
 
 이민경의 눈에서 눈물이 핑 돌았다. 하지만 울먹이지 않으려고 애썼다. 담담하게 말하려 최대한 노력했다.
 
 “우리 부원들 모두가 함께하는 게 아니라면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팀은 분열됐어. 그건 이룰 수 없는 꿈이었잖아.”
 “차갑네.”
 “진짜 하고 싶은 게 있으니까··· 때로는 냉정해져야지.”
 “좋으시겠어. 그거 자랑하러 왔냐?”
 “나는 전국대회에 나갈 거고, 거기에서 우승할 거야. 그리고 프로 선수가 될 거야. 국가대표로 활약할 거야.”
 
 박소연과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순간 숨이 멎는 듯했다. 박소연이 한 걸음 다가갔다.
 
 “너도 도전해. 나랑 같은 꿈을 꿔.”
 “내가 왜! 날 두고 갔으면서 네 마음대로 다 정하지 말라고.”
 
 박소연은 주머니에서 작은 무언가를 꺼냈다. 배구공을 들고 있는 곰 모양의 액세서리였다. 액세서리가 한 바퀴를 돌자 은은한 달빛이 반사됐다.
 
 “나 너랑 한 약속 잊지 않았어. 함께 전국대회에 가자는 그 약속.”
 “잊지 않았으면 뭐 하는데. 이제 의미가 없잖아. 우리는 더 이상 같은 팀이 아니잖아.”
 “맞아. 미안해. 정말로 미안해.”
 
 이민경은 그저 미안하다는 한마디에 참았던 눈물을 흘렸다. 박소연은 그녀에게로 가 손으로 눈물을 닦아줬다.
 
 “같은 팀에서 뛰겠다는 약속은 못 지키겠어. 그러니까 다른 약속하는 거로 봐줘.”
 “어떤 약속?”
 “난 전국 최고의 윙공격수가 될 거야. 지역 예선 결승까지는 당연히 갈 거고. 그러니까 너도 최고가 돼서 백석고를 이끌고 결승까지 와. 최고의 무대에서 같이 시합하자.”
 “그게 무슨 약속이야.”
 
 박소연도 그녀를 따라 눈물을 흘렸다.
 
 “나한테는 이게 약속이야.”
 
 ***
 
 2월의 아침이 밝았다.
 이우진은 오늘도 일찍 일어났다. 온라인 게임으로 세월을 보낼 때만 해도 항상 점심때가 다 돼서 일어났는데.
 런닝을 하고 아침을 먹자 핸드폰이 울렸다.
 
 [안녕하세요. 저 소연이에요. 어제 민경이랑 이야기는 했어요. 하지만 확답은 받지 못했어요.]
 “고생했어요.”
 [꼭 약속 지켜주세요. 무슨 일이 있어도 최선을 다해서 감독을 맡아주겠다는 거요.]
 “알았어요. 꼭 지킬게요.”
 [민경이를 최고의 선수로 만들어주세요.]
 “노력할게요.”
 
 전화가 끊어졌음에도 한동안 핸드폰을 쳐다봤다.
 
 “부럽네···.”
 
 예선전 결승이 끝나고 난 학교의 영웅이 됐다. 절대무적 한대고를 물리치고 우리 학교가 전국대회에 진출했으니 말이다.
 그것도 감독 없이!
 지역 신문과 배구 관련 블로그들에서도 난리가 났었다. 한대고가 지역 예선에서 진 게 몇 년 만이냐며.
 주변의 모든 사람이 나를 칭찬했으나 내 동기 김영준은 그러지 않았다. 감독의 총애를 받는 그를 내가 시합에서 빼버렸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코치님 역시 마찬가지였다. 코치님이 해야 할 일을 내가 해버렸으니···.
 전국대회가 시작됐다. 그때까지 감독님은 돌아오지 못했다. 코치님이 있었지만 모든 지시는 내가 내렸다.
 우리는 승승장구했다.
 준결승에 진출했다. 준결승에서는 정말 고전했다. 마지막 세트에서 듀스에 듀스가 계속 이어지는 접전을 펼쳤다. 32 대 30으로 긴 승부의 종지부를 찍었고, 우리는 승리했다.
 결승에 진출한 것이다.
 나는 그 과정에서 영준이를 활용하지 않았다. 후배인 창영이가 우리의 에이스 공격수였다.
 그런데 결승 전날, 감독님이 복귀했다.
 
 “그간 미안했다. 나 없이 정말 잘해줬구나. 남은 한 시합도 힘내서 우승해 보자꾸나.”
 
 그렇게 나의 천하는 끝났다.
 결승전 1세트에는 주전으로 창영이가 아니라 영준이가 나왔다. 10 대 5로 뒤지고 있을 때였다. 작전 타임을 부른 감독님이 내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우리 우진이가 오늘 컨디션이 안 좋네.”
 
 무슨 말이야? 자기가 자꾸 영준이한테 올리라고 하니까 그렇지. 계속 블로킹에 막히는데도.
 
 “우진이는 이제 쉬어라.”
 
 믿을 수 없는 말이었다. 내 대신 후배 세터가 들어갔다. 감독님이 후배의 귀에 속삭이는 말이 내게 똑똑히 들렸다.
 
 “웬만하면 다 영준이한테 올려. 알았지?”
 
 얼음으로 만들어진 칼날이 내 심장을 꿰뚫고 지나갔다. 아지랑이가 피어난 듯, 시야가 울렁거렸다. 세상이 비틀거렸다.
 
 “우욱!”
 
 구토가 일어나려는 걸 간신히 참았다.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는데,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그저 앉아 있는 수밖에 없었다.
 시합은 3 대 0으로 참패했다. 경기 내용도 무기력했다. 영준이가 상대의 블로킹을 제대로 뚫지 못한 것이 컸다.
 그렇게 허무하게 시합이, 나의 3년이 끝났다.
 
 “다들 잘했다. 정말 아쉽게 됐어. 수고했다. 정말로···.”
 
 순간 머리가 뜨거워졌고, 심장은 타올랐다.
 
 “어? 이우진 지금 뭐 하는 거야?”
 
 나는 어느새 감독님의 멱살을 쥐고 있었다. 사람들이 보고 있는데도!
 우리 팀원들은 재빨리 나와 감독님을 둘러싸 방벽을 쳤다. 그리고 코치님은 나를 말렸다.
 나는 소리쳤다. 아니, 절규였다.
 
 “왜! 왜 저를 안 썼죠? 제가 여기까지 이끌고 왔잖아요.”
 
 감정 하나 없는 목소리가 들렸다.
 
 “고생했어. 그런데 전술상 어쩔 수 없었네.”
 “어떤 전술이요. 주구장창 영준이한테 스파이크 때리라는 게 전술이에요? 계속 막히는데, 그게 어떤 의미가 있는데요.”
 
 감독님이 내게 귓속말을 했다. 정말로 조용하게. 아무도 들을 수 없도록.
 
 “우리 우진이 정말 대단했어. 이 정도로 잘해줄 줄은 나도 몰랐다고. 칭찬해주마. 그런데 오늘 경기하는 거 보니까 무릎이 끝이더구나. 우리 팀에 널 대신할 수준의 세터는 없어. 그러면 딱 견적 나오지 않니? 결승은 어차피 져. 나도 전국대회 우승 감독이 해보고 싶지만···. 이기지 못할 거라면 어른의 시합을 하는 게 낫지 않겠니?”
 
 그 말을 이해했기에 몸이 얼어붙고 말았다. 그리고 짝, 소리와 함께 볼에서 통증이 일었다. 코치님이 소리치는 게 들렸다.
 
 “이우진, 지금 뭐 하는 거야. 감히 감독님께. 넌 위아래도 없어?”
 
 어른의 시합이란 영준이와 몇몇 부원들을 명문 대학에 스포츠 특기생으로 입학시켜주는 걸 말했다.
 영준이는 전국대회에서 내가 시합에 내보내지 않았기에, 관계자들에게 눈도장을 찍을 필요가 있었다.
 멋진 활약 따위는 필요 없었다. 그저 전국대회에 일정 시간 이상 출전했다는 기록만 있으면 된다.
 결승은 영준이가 나갈 수밖에 없던 것이다.
 나는 시합장의 가장 구석에 있는 화장실로 달려갔다. 사람이 없는 곳으로 가고 싶어서였다. 현기증이 나 화장실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철퍼덕, 주저앉았다.
 
 “으아아아아!”
 
 소리를 질렀다. 주먹으로 벽을 쳤다.
 나는 알고 있었다. 내 키로 프로에서 세터로 뛰는 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그리고 무릎은 이미 무리한 대가로 한계에 달한 상황임을.
 그래서 이게 나에게는 마지막 시합이었다. 배구는 더 이상 하지 않기로 결정했었다.
 그런데 나의 마지막은 이렇게 어른의 시합이라는 명목하에 허탈하게 끝났다.
 패배한 것이 아니라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한 것이다.
 다시 한번 벽을 치려는데, 불쑥 눈앞에 손수건이 나타났다. 좋은 향기가 났다. 고개를 들었다.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아이가 있었다.
 
 “이거 써요. 그리고 너무 슬퍼하지 마요.”
 
 손수건을 받았지만 사용하지는 않고 그저 잡고만 있었다. 대답할 기운도 없었다.
 
 “오늘 시합에 거의 안 나와서 아쉬워요. 오빠가 나왔으면 어떻게 됐을지 모르는데.”
 “나를··· 알아?”
 “네. 백석고 세터 이우진. 오빠 경기 많이 봤어요.”
 
 아이는 손으로 내 눈물을 닦아주었다.
 
 “눈물이 뜨거워요. 우리 엄마가 그랬는데. 가슴이 뜨거우면 눈물도 뜨거운 법이라고.”
 
 ***
 
 과연 이게 옳은 일일까? 의미가 있나?
 이우진은 이런 의문들을 뒤로하고 세화중으로 찾아갔다. 이전과는 달리 선글라스를 쓰지도, 넥워머로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심호흡을 한 번 내쉬고는 체육관의 문을 열었다.
 오늘도 공중으로 아름답게 도약해 세차게 스파이크를 날리는 이민경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까까머리 중학생들은 남자임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공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그는 잠시 그 광경을 바라봤다.
 여전히 좋은 스파이크야···.
 
 “거기 누굽니까? 지금 애들 훈련 중입니다. 함부로 들어오지 마세요.”
 
 세화 중학교의 남자 배구부 감독이 인상을 쓰며 말했다. 갑자기 나타난 불청객을 환영할 리는 당연히 없다.
 하지만 그는 그 말을 들은 척도 안 하며, 한 걸음, 두 걸음 앞으로 나갔다.
 
 “이민경 학생.”
 
 이민경은 갑자기 나타난 젊은 남자가 자기 이름을 불렀다는 사실에 당황했다. 하지만 이내 눈을 가늘게 뜨고는 그를 살폈다.
 익숙한 얼굴이야. 그리고 어디선가 들은 적 있는 목소리?
 강연정이 소리쳤다.
 
 “어? 부적절한 오라버니다. 아무리 제가 좋아도 여기까지 찾아오면 그건 조금 그렇죠. 뭐··· 저는 과감한 남자를 좋아하긴 하지만···.”
 “로··· 로리타?”
 
 이민경이 황당한 표정을 지었고, 남자 배구부 감독은 황급히 이우진을 끌어내려 했다.
 그러자 이우진은 근처에 있는 공을 주워 하늘로 던졌다. 공중으로 뛰어 펑, 소리가 체육관에 울리도록 스파이크를 쳤다.
 그 모습을 본 학생들이 수군거렸다.
 
 “저 형 쩐다.”
 “우리 감독님보다 훨씬 잘 때리는데.”
 “우와···.”
 
 이민경의 양 눈썹이 거리를 좁혔다.
 
 “그때··· 그 지나가던 배구 마스터?”
 
 이우진은 입술을 깨물었다.
 망할··· 내가 왜 그런 거지 같은 말을 해서.
 하지만 여기서 당황하거나 머뭇거리는 모습을 보일 수는 없다. 당당하게 다음 말을 하려는 찰나.
 
 “언니, 지난번에 모카빵 던진 사람도 저 오라버니예요.”
 “아!”
 “다 이게 제 관심 끌려고 하는 행동인데··· 인기인은 참 괴롭네요.”
 
 주변 사람들의 어이없다는 시선이 따갑게 꽂혔다. 그는 얼굴에 열기가 올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감독이 다시 자신을 제지하기 위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그냥 도망치고 싶다···. 하지만 여기서 멈추면 안 돼.
 그는 이민경을 똑바로 바라봤다. 입을 연다.
 
 “정식으로 소개합니다. 이름은 이우진이고.”
 
 그녀의 눈이 커졌다.
 이우진, 아는 이름이다. 확실히 생각났다. 익숙한 얼굴. 그래, 그 사람이다.
 
 “백석고 여자배구부 감독입니다.”
 
 처음으로 그가 남들 앞에서 당당하게 자신을 감독이라고 말했다. 예비라는 단어도 넣지 않았다.
 그 말 많던 강연정이 놀라서 입만 크게 벌렸고, 세화중 감독은 동작을 멈췄다.
 이우진은 그녀에게로 걸어갔다. 계속 그녀와 똑바로 눈을 마주치려 노력했다.
 그러면 흔들리는 눈동자가 보인다.
 
 “백석고로 돌아오세요.”
 “제가 왜요?”
 
 역시 대답은 거절이다. 고개를 옆으로 돌리는 그녀의 얼굴이 보인다.
 그녀가 아직도 고집 아닌 고집을 부리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확인을 위해 질문을 하나 더 던진다.
 
 “미안한 감정이나 배신감 때문에 배구를 그만두려는 건 아니잖아요.”
 “그걸 그쪽이 어떻게 알아요.”
 “보통 정말 좋아하는 것은 그런 이유로 관두지 않아요. 아니, 관둘 수가 없어요.”
 “저에 대해서 뭘 아신다고. 감독이 아니라 심리학자신가보네요.”
 “다시 배구부 활동을 하고 싶잖아요.”
 
 대답하지 않는다.
 내가 그랬으니까, 그래서 안다. 이건 무서워서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받은 상처는 무의식에 남을 수 있다. 쉽게 지워지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사람을 미워할 수는 없기에, 그 감정은 지워져야만 하기에 자연스럽게 상처의 원인을 다른 것으로 돌린다.
 그녀에게는 그게 배구부 활동이다. 배구가 아니라···.
 
 “그때 있었던 일들은 민경 학생 잘못이 아니라는 거 이미 잘 알잖아요. 그런데 왜 본인이 하고 싶은 일을 피하나요? 고교 3년은 짧아요. 생각보다 훨씬 소중하고요. 그러니까 하고 싶은 걸 해요.”
 “그게 마음대로 안 되니까 그런 거잖아요.”
 “민경 학생 잘못이 아니에요.”
 “······.”
 “정말이에요.”
 “그치만···.”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민경 학생 잘못이 아니니까 함께해도 되는 거예요.”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눈에서 떨어진 물방울들이 바닥에서 점을 이룬다.
 
 “잘 알지도 못하는 여자 함부로 울리면 안 되는 거 모르세요?”
 “초보 감독이라 요령이 없어서 그래요. 이해해줘요.”
 “다시 한번 학교에서 배구 해도 되는 거죠?”
 “네. 제가 장담할게요.”
 “우는 거 부끄러운데, 다시는 이런 일로 안 울게 해주실 수 있나요?”
 “그건 노력해볼게요. 미래는···.”
 “확신할 수 있는 게 아니라서요? 100퍼센트는 없는 거라서요?”
 
 그는 깜짝 놀라 몸을 움찔거렸다. 그녀가 자신이 하려는 말을 정확하게 맞췄기 때문이다.
 그녀가 웅얼거린다.
 
 “오늘은 이만 가주세요. 선배들 졸업식 때는···.”
 
 ***
 
 “간만에 이렇게 보니까 좋네. 모두는 아니지만.”
 
 전 주장 최지영이 부원들을 보며 말했다. 오늘은 백석고의 졸업식 날이다. 체육관에는 여자배구부 3학년 5명과 1, 2학년 합쳐 4명이 모여 있었다.
 류선화가 고개를 숙였다.
 
 “이렇게 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다른 학교로 전학 간 애들은 연락을 해봤는데, 오늘 거기서 일정이 있다고 참석하기 어렵다고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그건 뭐, 우리 잘못이니까···. 네가 미안해할 필요는 없어. 그리고 3학년도 다 온 건 아니니까.”
 
 3학년 오아연이 말했다.
 
 “야! 우리 잘못은 무슨··· 전 감독 놈 잘못으로 하자.”
 “그러네. 네 말이 맞네.”
 “그리고 선화 너는 고개 숙이지 말고. 이제 네가 주장이니까 당당하게 행동해.”
 “알겠습니다.”
 “널 믿고 응원할 테니까···.”
 “네. 감사합니다.”
 
 눈시울이 뜨거워진 오아연은 문 쪽을 바라봤다. 짐짓 괜찮은 척을 하며 말했다.
 
 “그나저나 우리의 전통인 졸업 시합을 하려면 팀당 6명이 돼야 하는데···.”
 
 그때, 문이 열리고 바람막이를 입은 여학생이 들어왔다.
 
 “늦어서 죄송해요. 저희 학교에서도 졸업 행사가 있어서 간신히 나왔어요. 그리고 유니폼 찾아오느라···.”
 
 한대고로 전학 간 박소연이었다. 그녀는 들어오자마자 바람막이의 지퍼를 내렸다. 그 안에는 백석고의 유니폼이 있었다.
 
 “쏘연 왔구나.”
 “보고 싶었어.”
 
 다들 반가운 감정을 드러냈다. 그중에서도 오아연의 얼굴이 유독 밝아졌다. 자신이 후배들 원망을 가장 많이 했다고 생각해서였다.
 그녀는 평소와 다르게 박소연에게 다가가 손을 잡았다. 당황한 박소연이 말했다.
 
 “언니가 이런 캐릭터였어요? 항상 시크한 모습만 보여줬잖아요.”
 “그러는 너는 후배의 귀여운 모습 좀 보여주면 안 되냐?”
 “저는 오늘 선배님들에게 이 후배의 실력이 어느 정돈지 보여주려고 왔는데요. 귀여운 모습 대신요.”
 “끝까지 얄미운 년.”
 
 그렇게 말하고는 둘이 웃는데, 또 한 번 체육관의 문이 열렸다. 모두가 환호성을 질렀다.
 
 “유하야!”
 “유하 언니, 어떻게 오셨어요?”
 
 백석고에서 유일하게 프로에 간 김유하가 왔다.
 
 “지금 시즌 중이라 간신히 허락받고 왔어. 그리고 짜잔!”
 
 그녀 역시 점퍼 안에는 백석고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미안! 이거 챙겨 오느라 늦었어.”
 
 그녀는 후배들은 한 번씩 안았다.
 
 “얘들아 정말 미안해. 그때, 나도 너희들에게 힘을 보탰어야 했는데··· 프로에 가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내 몸만 챙겼어. 용서해주라.”
 “아닙니다. 그저 바쁘신데, 와주셔서 감사할 뿐입니다.”
 “선화야, 너는 주장 잘할 거야. 날라리 전 주장보다는 훨씬.”
 “야, 김유하 너 프로 갔다고 아주 그냥 말을 막 날리는구나.”
 “사실이잖아.”
 
 모두가 그 말에 동조하며 웃자 최지영이 입을 삐쭉거렸다. 김유하는 박소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쏘연아, 다른 학교에서 적응하기도 힘들 텐데, 여기 와줘서 고맙다.”
 “그 대가는 확실하게 받아가려고요. 오늘 시합 각오하세요. 언니의 블로킹 완벽하게 박살 내버릴 테니까요.”
 “귀염성 없는 후배 같으니라고. 그런데···.”
 
 그녀는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가만있어 보자 시합을 하려면··· 한 명 부족하네. 민경이는?”
 
 체육관의 분위기는 신부가 도망친 결혼식장처럼 갑자기 확 가라앉았다.
 그때, 문이 조심스레 열렸다. 누군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저··· 왔어요···. 자! 다 같이 환영의 박수를···.”
 
 그곳에는 쭈뼛쭈뼛 앞머리를 매만지며, 혀를 살짝 내민 그녀가 있었다.
 겨울의 끝자락, 아직 봄이라고 하기에는 이른 시기지만 날씨가 무척이나 포근했다.
 이우진은 박진아와 교정을 빠져나갔다. 그녀는 그의 어깨에 붙은 실오라기를 떼어주며 말했다.
 
 “애들 졸업 시합하는데, 안 가도 돼?”
 “거긴 내가 낄 곳이 아니지. 애들 나름의 마무리 자리인걸.”
 “그런 건가? 간만에 센스 있는 짓 했네.”
 “난 원래 센스가 철철 넘치는 사람이라 이 정도는 기본이거든.”
 “웃기셔. 센스가 그저 영어 단어인 줄로만 아는 주제에.”
 
 그녀가 체육관 쪽을 돌아봤다. 들릴 리 없는 배구공 튀기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녀가 말했다.
 
 “민경이는 오늘 왔을까?”
 “왔을 거야. 아니, 왔어.”
 “웬일로 단호하네. 항상 추측에 100퍼센트라는 건 없다고 말했으면서.”
 “이번에는 100퍼센트야.”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그런데 내가 미래나 추측은 확신할 수 없고, 100퍼센트는 없다는 말을 자주 했던가?”
 “많이 했지. 갑자기 왜?”
 “아··· 그냥 그럴 일이 있어.”
 “옛날 생각나네. 너 그 꼬마 팬한테도 그 말 했었잖아.”
 “꼬마 팬? 아··· 그 애. 항상 빨간 모자 푹 눌러쓰고는··· 그립네.”
 “너 한대고 이겼을 때, 그 애가 오빠, 결승전도 이겨주세요, 라고 하니까 그랬잖아. 미래는 확신할 수 없고, 100퍼센트 확률은 없는 거니까 장담할 수는 없지만 꼭 이기도록 노력할게.”
 “내가 그랬구나. 애한테··· 나도 참 멋없게 말했네. 폼을 잡을걸.”
 “멋은 원래 없었고, 그나마 폼 안 잡아서 덜 재수 없었던 거야.”
 “흥! 여자배구부는 2차전에서 탈락했으면서.”
 “벌써 7년이나 지났지만··· 기억하고 싶지 않으니 그 얘기 꺼내지 마!”
 
 그녀가 주먹을 들자, 그는 갑자기 박수를 쳤다. 불현듯 떠오른 것이 있다는 듯.
 
 “야, 그 꼬마 애 이름 아냐?”
 “내가 그거까지 어떻게 알아. 너 지금 맞기 싫어서 수 쓰는 거지?”
 “그게 아니라. 전국대회 끝나고 학교에 빨간 모자 쓴 팬이라는 이름으로 편지가 왔었어.”
 “그런데.”
 “편지에 그건 오빠 잘못이 아니에요. 저는 앞으로 오빠가 하고 싶은 배구 계속 하셨으면 좋겠어요, 라는 내용이 있었어. 마지막에는 빨간 모자를 눌러 쓴 아이 캐릭터가 그려져 있었고.”
 “엄청 귀엽잖아.”
 “그러게··· 누굴까? 한번 보고 싶네.”
 
 이우진이 웃었다. 따스한 바람이 얼굴을 매만져준다.
 아직 봄이 오지 않았지만 지금 부는 건 분명 봄바람이다.
 
 “오늘 날씨 정말 좋다.”
 
 <『배구 마에스트로』 1-2권에 계속>

댓글(6)

Friday    
좋다. 천천히 볼게요.
2018.05.28 12:32
다크라이    
먼치킨도 아니고 적당한 재미, 괜찮게 봤음.
2018.06.23 16:11
달빛야화    
네 말린고구마 맛보고 그냥 갑니다
2019.03.01 00:11
견정태    
H2 배구버전 소설 이라고 보면됨
2019.03.25 11:05
Regulars    
일본 라노벨을 들고 왔나. 전개가 기가 막히네요.
2019.08.14 23:52
JohandArc    
너무 가볍다
2020.02.18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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