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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도원행유 1

2018.04.25 조회 488 추천 5


 부도원행유 1권
 발서
 
 
 一
 
 
 결실(結實)!
 이 말이 누구에게나 어울리는 말이 아니라는 것은 알지만 그녀에게는 정확하게 어울리는 말이었다.
 일 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그리고 목표는 앞에 있었다.
 “배를 멈추어라.”
 그녀의 외침이 일고 배가 멈추어섰다.
 이장선(二檣船).
 배의 종류는 여러 가지이다.
 강을 거슬러 오르거나 물길을 타고 내려가는 거대한 유람선이 있는가 하면 돛을 높이 달고 거친 해류를 헤쳐 나가는 화물선도 있다. 물론 외국으로 나가는 무역선도 있다.
 이장선은 두 개의 돛을 단 배를 말하는 것이다. 희끄무레한 어둠을 뚫고 다가와 정박한 배가 바로 이장선이었다.
 갑판에는 횃불이 타오르고······
 “묘두(錨頭 : 닻)를 내려라.”
 소녀의 목소리가 울리자 바쁘게 움직이던 선부들이 이리저리 뛰어다니더니 묘두를 내렸다. 마사와 철삭을 꼬아만든 긴 줄이 풀리고 철로 만든 여러 개의 갈고리─물론 서로 맞붙어 있어 갈고리로 보이지는 않는다.─가 물 속으로 들어갔다.
 첨벙!
 물방울이 허공으로 튕겨 올라갈 때 돛이 말려 올라가기 시작했다. 사람의 허리보다 굵은 돛대에는 돛이 감기고 바삐 움직이던 선부들이 도열했다.
 “발판을 놓아라.”
 소녀의 말에 죽비제[竹飛梯 : 대나무를 이어만든 사다리. 흔히 공성전(攻城戰)에 사용한다.]처럼 생긴 발판이 선상에서 육지로 이어졌다. 준비를 마친 일단의 선부들이 갑판 안쪽으로 길게 늘어섰다.
 “이제부터 일 개 선대(船隊)를 남기고 모두 상륙한다. 총 오 개 선대로 나누어 그 중 일 개 선대는 산해관(山海關)으로 진입하고 이 개의 선대는 후금(後金)의 지역으로 진입한다. 마지막 일 개의 선대는 도처에 숨어 연락을 담당하며 만에 하나 그의 행방이 드러나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본선에 연락이 닿도록 하라. 더불어 산해관으로 진입하는 선대는 발해만(渤海灣)에서 산해관으로 진입한 선대와 호흡을 유지하라.”
 대답은 없었다.
 그녀의 말이 떨어지고 손이 들어올려지자 일단의 선부들은 일제히 옷을 벗어버렸다. 몸에 걸치고 있던 옷을 벗어버린 그들의 복장은 각양각색이었다.
 상인의 모습을 지닌 자들이 있는가 하면, 문사의 모습을 한 사람도있었고, 초부(樵夫)의 모습을 한 자도 있었다.
 “서둘러라. 촌각을 다투는 일이다.”
 소녀의 음성이 울리자 옷을 바꿔입은 선부들이 일제히 죽비제를 타고 내려가기 시작했고 그들은 끼리끼리 모여 흩어져 갔다. 일 각이 지나지 않아 그들은 모두 사라졌고 옷을 바꿔입지 않은 이십여 명만이 갑판에 남았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라.”
 그녀는 손을 저었고 선부들은 흩어져 갔다.
 소녀는 주위가 조용해지자 어둠이 잠든 하늘을 바라보았다. 별도 하나 뜨지 않은 밤이었다.
 “후······!”
 소녀의 입에서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해풍에 날리는 머리를 쓰다듬던 그녀의 입에서 이어지는 음성!
 “그를 찾아야 해.”
 
 
 二
 
 
 어둡다.
 눈에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만약 누군가가 옆에 있어도 알 수 없을 것이다.
 민감하기만 했던 코도 모든 것을 포기했는지 냄새조차 맡지 못하고 있다. 내가 원한 것이 이것이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몸을 일으킬 수 있는 여력은 남아 있지 않았다.
 
 칠 일을 굶었다.
 처음 하루는 그럭저럭 견딜 만했다. 비록 허기가 지기는 했지만 죽기 싫어서라도 밖으로 나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만약 밖으로 나간다면 그것은 죽음을 재촉하는 길이라는 것을 그 동안의 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다.
 물론 훈련이다.
 밖으로 나간다고 해서 죽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훈련을 게을리 하고 참을성이 없으면 실전에서 죽는다.
 이틀째가 되던 날 손짓하는 벽채운(璧彩雲)을 보았다. 그녀는 내가 사문(寺門)을 떠나오던 그날처럼 언덕 위에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내 정신은 미친 듯 달려갔다. 이미 죽은 그녀를 만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모든 것이 환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자꾸만 떠오르는 그녀의 얼굴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녀를 안을 수만 있다면 행복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를 잡을 수 없었다.
 상상 속의 발은 꼬여들었고 입에서는 헛구역질이 나왔다. 서너 걸음을 옮기지 않아 머리 속에서 별이 쏟아지는 듯한 현기증을 느꼈고 정신은 무기력하게 무너졌다.
 그녀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무너진 그 자리에 누워버렸다.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다.
 스무 명이나 모래를 파고 은신하고 있었지만 사람이 숨어 있다는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정확한 시간은 알 수 없지만 문득 나흘 정도의 시간이 지났다고 생각했다. 입을 열 수도 없었고 손가락 하나 까닥할 수 없었다. 몸은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다.
 그래도 움직이지 않았다. 움직이면 더 빨리 죽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훈련이라 해도 극한 상황을 체험하는 훈련은 반드시 겪어야 할 과정이었다.
 닷새째가 되던 날 발가락이 간지럽다는 느낌에 몸을 떨었다. 그러나 여전히 몸을 움직일 수는 없었다. 아니, 애를 써도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입이 말라들어 쩍쩍 갈라졌다. 가능한 한 숨도 몰아쉬지 않았다. 그것만이 살 수 있는 길이었다.
 내공을 운기(運氣)했지만 이제는 내기(內氣)도 미약해져 가고 있었다. 어쩌면 운기조차도 체력을 소비시키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들어 운공(運功)을 중지했다.
 엿새째가 되었다.
 모든 것이 귀찮아졌다. 생각하기도 싫었고 머리 속은 안개가 낀 것처럼 몽롱했다.
 신체의 모든 기능이 정지한 것 같았다.
 숨이 멈추지 않는 것이 차라리 이상하다고 느껴졌다. 이제 생리적인 신진대사도 이루어지지 않는 것 같았다. 배설의 욕구도 사라져 버렸다.
 건조한 모래 속에 만들어진 좁은 공간에 웅크리고 있는 몸에서 땀이 난다는 것은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지만 살아 있다는 증거이기도 해서 내심 반가웠다. 물을 마시지도 않는데 땀이 난다는 사실이 기이하게 느껴졌다. 몸 속의 수분이 모두 사라졌다고 생각했는데······
 하루하루가 흐른다는 것은 땅 속으로 스며드는 열기로 알 수 있었다.
 이미 폭서(暴暑)가 지난 계절이었지만 날씨는 초경을 하는 어린 계집애의 몸처럼 예측할 수가 없었고 며느리를 맞아들인 홀어미처럼 변화가 난측했다.
 낮에는 용광로처럼 뜨거웠지만 몸을 묻은 땅 속에 가득한 습기에서 피어오르는 냉기 때문인지 밤에는 모든 것을 얼려버릴 것 같았다. 그나마 일교차의 변화마저 없었다면 하루하루가 흐르는 것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칠 일째라 생각되는 날은 더욱 무더웠다.
 누운 얼굴 위로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작은 느낌이 다가왔다. 작은 벌레가 기어가는 느낌이었고 축축하게 젖어 있는 것 같았다. 작은 벌레는 입가로 기어왔다. 시큼하기도 하고 달콤하기도 한, 그래서 맛을 느낄 수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기이한 향기가 코로 스며들었다.
 ‘먹을 수 있을지도 몰라. 향기가 나는 것으로 보아 습기를 지니고 있는 거야.’
 코로 스며드는 향기만으로 판단했을 때 세상에 먹지 못할 것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것이 무엇이든 상관하지 말아야 했다. 무조건 입을 벌 렸다. 땅 속을 기어다니는 벌레는 죽음을 모르는 듯 입 속으로 기어 들어왔다. 그리고······
 칠 일!
 또 하나의 훈련이 끝나가고 있었다.
 
 
 三
 
 
 넓은 방!
 정말로 넓은 방이라 할 수 있었다.
 이십 평이 넘을 것 같아 보이는 방에는 중심을 받치는 기둥이 있었고 그것을 반으로 나누어 한쪽에는 침상이 있었다. 물론 휘장이 가려져 있어 그다지 눈에 드러나지는 않았다. 다른 반쪽에는 서재가 있었다. 긴 장방형의 탁자가 있는가 하면 서책이 빽빽하게 박혀 있는 서가(書架)도 보였다.
 언뜻 보아도 그 수를 헤아리기가 만만치 않아 보이는 양의 책이었다. 묵향이 물씬 풍겨나올 것 같은 서책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누구나 쉽게 가질 수 있는 책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문선(文選)이 있는가 하면 장중방(莊仲方)의 남송문범(南宋文範)과 같은 문집이 있고 시모씨전소(詩毛氏傳疏)나 전한삼국진육조시집(全漢三國晋六朝詩集)과 같은 시사와 희곡의 총집도 있었다.
 뿐이랴!
 백삼십 권이 넘는다는 사기(史記).
 한 시대를 풍미했고 중원을 주물렀다는 제자백가의 다양한 서적, 사주(沙州 : 돈황)에서 나왔다는 수없이 많은 서책과 갑골문이 드러나는 은허의 유물, 거북의 뼈까지 갖추고 있었다. 더불어 조식(曺植)의 조자건집(曺子建集)과 이백(李白)의 이태백집(李太白集)과 같은 전집이 있는가 하면 유림외사(儒林外事)나 연자전(燕子傳) 같은 소설까지 섞여 있다. 그야말로 삼교구류(三敎九流)와 전서(傳書), 심지어는 당금에 유행하는 잡서까지 섞여 있으니 중원에 떠도는 책의 전부는 아니라 해도 모을 만치 모았다 해야 하리라.
 일곱 개의 칸으로 만들어진 서가 때문에 방은 조금 좁아 보이기도 했고 어두워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어둡다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 같았다.
 벽에는 등롱(燈籠)이 밝혀져 있었고 그것으로도 모자란 듯 탁자에는 굵은 납촉(蠟燭)이 불길을 태우고 있었다.
 방에는 한 사람의 그림자가 미끄러지듯 움직이고 있었다. 뒷짐을 지고 움직이는 모습은 유려해 보이지만 발걸음이 어지러운 것으로 보아 심사가 개운치 않은 듯!
 “후······!”
 긴 한숨!
 거친 숨결이 밀릴 때마다 촉루(燭淚)가 흐르고 납촉의 불꽃이 심하게 요동을 일으켰다.
 중년인!
 눈썹이 유난히 짙어 보이고 머리를 단정히 묶은 중년인, 몸에 걸친 사령대금관유삼(斜領大襟寬衫)에 새겨진 등롱문금(燈籠紋錦)의 자수가 불빛에 빛을 발하는데!
 “단주!”
 밖에서 들려오는 나직한 목소리.
 중년인은 가볍게 얼굴을 돌렸다. 이어 무겁게 흘러나오는 소리!
 “알아보았느냐?”
 “그렇습니다. 아씨는 이미 두 척의 배를 띄운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알려온 전서에 의하면 아씨께서 찾으려는 자가 산해관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는······ 속히!”
 “알았다. 급히 지단(枝團)을 보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보호하도록 하고 나머지 지단은 눈치채지 않게 무오성승(戊午聖僧)의 행방을 추적하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대답 소리에 이어 멀어지는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중년인은 한참 동안 문을 바라보다 생각이 난 듯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보았다. 이어지는 음성은 땅이 가라앉을 것 같은 자조였다.
 “그때 생각을 잘못했던 거다. 차라리 모든 것을 깊게 생각하고 한 번만 더 돌아보았다면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이토록 어렵게 그를 찾지 않아도 좋았을 것을······!”
 중년인은 몸을 돌려 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손을 뻗어 창문을 열었다.
 어두운 밤하늘이 그의 가슴으로 쏟아지고 있었다.
 
 
 1장 산해관(山海關)
 
 
 一
 
 
 출정(出征)의 날이 다가왔다.
 목적을 달성할 수만 있다면 새로운 시작이 될 것이다. 일을 저지른다 해도 그 이후가 어떻게 돌아갈 것인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누구도!
 분명한 것은 있다.
 원하는 것을 얻는 날이 중원천하를 발칵 뒤집어놓을 수 있는 날이라는 사실! 그 이후에 어떤 일이 일어나리라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듯했다.
 명령!
 달리 생각해 보면 무너져 가는 국조(國祖)의 잔존세력으로서 못 먹는 감 찔러나 보자는 생각 외에는 달리 뚜렷한 목적은 없어 보였다.
 적장을 죽인다.
 그럴싸한 이야기였다.
 
 콰등!
 나무문이 요란하게 젖혀지고 차가운 바람이 몰아쳐 들어왔다. 막사 안에 누워 있던 이십 명은 일제히 몸을 일으키며 눈을 돌렸다. 습관적이라 할 수밖에 없는 행동! 벽으로 다가가 박도(朴刀)를 집는 자도 있고 보이지 않게 침상에 깔고 있던 암기를 잡는 자도 있었다.
 분명한 것은 그들 모두 잠을 자고 있었다는 사실.
 하나, 누가 보아도 그들이 잠을 자고 있었다고 생각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빠르기도 무시할 수 없을 뿐 아니라 하나같이 절제된 동작이었으니!
 일사불란!
 그들의 행동은 번개 같았다.
 일제히 병기를 잡아가는 모습이 오래도록 숙달되어 보이는 모습! 그들은 이미 모든 것이 몸에 익어 있었다.
 몸을 일으킨 모두가 문을 바라보았지만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마치 불어온 바람이 문을 열어놓은 것 같았다. 그러나 바람의 힘이 문을 열 수 없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문을 열었을 것으로 여겨지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우중충하게 가라앉은 하늘과 살을 벨 듯 불어오는 바람이 모두의 몸을 훑고 지나간다.
 쏴아!
 비가 오는 소리인가?
 “보명각(保明閣)으로 집합!”
 빌어먹을 전령! 언제나 이 모양이다. 무엇이 그리 두려운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사라져 버리니 얼굴은 구경조차 할 수 없다.
 전령은 문을 열어놓고 사라졌다.
 차가운 바람이 밀려 들어와 막사를 훑었다. 살이 베일 것 같은 칼바람이었다. 몸에 소름이 돋았다.
 누구나 이 막사를 두려워했다.
 아무리 산해관을 수비하는 수비대장(守備隊長)의 명령을 따르는 전령이라 해도 두려움은 마찬가지인 모양. 언제나 그 모양으로 코빼기도 비추지 않고 사라져 버린다.
 “이제 시작인가.”
 호등량(胡藤亮)은 몸을 일으켰다.
 막사에 드러누웠던 그들 이십 명 중 산해관에서 가장 오래도록 살아온 사람이 누구냐고 물으면 당연 호등량이다. 벌써 십이 년 동안이나 산해관을 기웃거린 사내다.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도 할 나이다. 그러나 그는 고향 따위는 잊고 사는 사람이었다. 언제나 그렇듯 누구보다 앞에 서서 달리고, 누구보다 잔인하게 적을 죽이는 사내!
 나이 사십이 넘어도 변한 것은 없다. 아니, 차라리 잔인성이 더해 간다고 할까?
 그는 호열대(昊熱隊)의 대주다.
 호열대!
 명조의 군제에는 없는 부대.
 급조해 만든 부대라는 말이 어울릴 것이다. 다른 부대와 다른 것이 있다면 군병이 없다는 것! 일반 군대는 지휘자의 역할을 맡는 장군이 있고 그를 따르는 군병이 있게 마련이지만 호열대는 다르다.
 장수는 있지만 군병은 없다.
 군병은 녹봉(祿俸)을 받지 못한다. 중원의 각처에서 군역으로 끌려온 자들이 군병이라면 장군은 무과(武科)를 거치거나 높은 직위에 오른 장수들의 추천과 등용으로 군문에 들어선다. 물론, 간혹 군병에서 장수가 되는 경우도 있기는 하다.
 녹봉도 받지 못하는, 죽지 못해 군역으로 끌려온 군병이 장수가 되기 위해서는 수없이 많은 난관을 거쳐야 하고 수를 헤아릴 수도 없는 세월을 보내야 한다. 그나마도 군병에서 장수가 되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군병이 전공(戰功)을 세우고 그 기백을 인정받으면 우선은 열 명의 군병을 이끄는 십보장(十步長)의 직위를 거친다. 그것은 수많은 장군들의 추천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십보장으로 수년간의 전과를 올리면 백 명의 군병을 지휘하는 부백호(副百戶)에 오르고 이어 정백호(正百戶)를 거친다. 부백호와 정백호는 백인호(百人戶)라는 지위로 비로소 장군이 되는 것이다.
 백인호의 위에는 천인호(千人戶)가 있으며 그들은 각각 부천호(副千戶)와 정천호(正千戶)로 나누어진다. 그들은 위지휘사사(衛指揮使司)나 도지휘사사(都指揮使司), 오군도독부(五軍都督府)에 소속된 장수로 전장을 달리거나 지방군으로 역할을 수행한다. 간혹 감찰의 기능을 지닌 황궁의 동창(東廠), 혹은 서창(西廠)의 장수가 될 수도 있지만 극히 드문 경우이다.
 황궁에 머무는 장군은 황제를 호위하는 군병들이니만치 신원이 확실해야 하고 후원도 있어야 한다. 후광이 따르지 않는다면 황궁의 장수가 된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이다.
 명조가 극한 변화를 겪으며 군제도 변했다.
 근래에는 행도사(行都司)가 조직되었다. 섬서행도사(陝西行都司)란 이름이다. 또한 변방을 지키는 군벌은 구진(九鎭)으로 통합되었다.
 호열대는 어느 곳에도 소속되지 않는다.
 굳이 따지자면 산해관을 지키는 오삼계(吳三桂) 장군 휘하의 장성수비대(長城守備隊)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지만 수비군이라 부르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들은 모두 장수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들이 이끄는 군병은 없다. 모두가 장수로 이루어진 군대였다. 그들은 나름대로의 자부심을 지니고 있을 뿐 아니라 한 가지 목적을 이루기 위해 만들어진 별동대였기 때문에 지위가 높은 장군이라 해도 그들에게 명령을 내릴 수 없었다.
 특권 같은 것!
 그것은 아니다.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은 단둘!
 명조의 병권을 휘어잡은 것이나 다름없는 오삼계 장군과 그 막하의 산해관 수비대장뿐이었다.
 “어서 서둘러라.”
 호등량이 몸을 일으키자 여기저기에서 부산한 소리가 들리며 대원들이 일어났다.
 “보명각, 마지막 목 축임이 기다리고 있는가?”
 부대주격인 다인기(多燐基)가 몸을 일으켰다. 호등량이 명령을 내리는 장군이라면 다인기는 실질적으로 호열대를 이끄는 장군이므로 나무로 만든 침상에서 뒹굴던 모든 대원들의 귀를 잡아두기에 충분했다.
 호등량과 다인기가 움직이자 나머지 사람들도 주섬주섬 몸을 일으켰다.
 
 저규(渚閨)도 따라 일어났다.
 다른 사람들 모두는 바삐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전포(戰袍)를 입고 자신들의 직위를 나타내는 복장과 사건을 걸쳤다. 호등량과 다인기는 목에 물빛이 나는 남색 사건을 걸쳤고 나머지 십팔 인은 불타오르는 듯한 붉은 사건을 걸쳤다.
 “저규, 서둘러!”
 부지런히 사건을 매던 부순연(夫淳演)이 입을 열었다.
 저규는 고개를 끄덕였다. 몸이 퉁퉁 부운 것처럼 보이는 백인호가 서둘러 전포를 걸치고 있었다.
 호열대는 네 개의 조로 이루어져 있었다.
 저규가 소속된 조는 을조(乙組)로, 주로 암살과 척살을 임무로 하는 조였다. 부순연은 을조의 부조장으로 조장을 보좌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조장은?
 당연히 저규다.
 비록 조장과 부조장의 직위를 지니고 있지만 품작(品爵)은 같다. 그도 백인호이고 저규도 백인호였다.
 “알았다.”
 저규는 몸을 비틀어 세우고 벽으로 다가갔다.
 군막은 그리 넓지 않았다.
 직사각형의 모양을 지닌 군막의 구조는 안과 밖이 달랐다. 안은 장방형의 구조이지만 밖에서 보면 마치 땅에 뿌리가 묻힌 버섯과 같은 모양이었다.
 반은 땅에 묻히고 반은 겉으로 드러난 목옥(木屋).
 사실 옥(屋)이라는 말은 반듯한 집을 의미한다. 그래서 군막을 목옥이라 부르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러나 달리 부를 이름은 없었다. 그저 군막이라고 할 수밖에.
 군막 내부의 중앙은 맨땅이 드러나는 긴 복도, 바닥에 깔린 화려한 나무판자 따위는 생각할 수도 없었다. 비가 오면 질척거리고 발이 빠지기도 하는 곳!
 그나마 옷이라도 버리지 않고 습기로 부스럼이라도 나지 않는다면 다행이었다.
 산해관성(山海關城)으로 들어가면 그럭저럭 모양을 갖춘 누각이 있고 군병들이 머무는 막사도 지어져 있지만 호열대는 그들과 제법 떨어진 곳, 너무도 외진 곳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들이 외딴 곳에 막사를 짓고 생활하는 것은 상부의 의도이기도 하지만 그들의 존재를 가능한 한 명조의 군병들에게조차 숨기고자 하는 의도였다.
 그래서 호열대는 경이의 대상이었다.
 산해관에 머물러 군병들을 지휘하는 대다수의 장수들도 호열대가 왜 조직이 되어 있는지 알지 못했다. 극히 소수의 장군들만 알 뿐!
 다행히 막사의 바닥은 말라 있었다.
 저규는 바닥에 내려서서 오래도록 빨지 않아 발냄새가 나는 혁피화(革皮靴)를 신다 말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복도가 보였다.
 그 양 옆으로는 나무를 잘라 대충 반으로 가른 뒤 깔아놓은 침상이었다. 그나마 습기를 막을 생각인지 땅에서 한 뼘 정도를 띄워놓고 나무로 괴었는데, 백족(百足 : 노래기)이나 살을 무는 불개미 따위가 기어오르기에는 알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도 마지막인 것 같군.’
 가슴이 두근거렸다.
 침상에는 짐승가죽과 마사로 짠 천을 안팎으로 이어붙여 만든 모포가 있었다. 본시 개인에게 두 장씩 지급되어야 하나 오래 전에 보급이 끊기고 지난해부터는 겨우 한 장만으로 추운 겨울을 지내야 했다.
 산해관은 추운 곳이다.
 북으로 면해 있을 뿐 아니라 만리장성의 끝이라 바람을 막지도 못한다. 얼마나 추위에 떨었는지······
 이제는 모두 지난 일이었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보명각으로 가는 것은 이미 정해진 일이고 그 의미를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누가 불렀는지도 안다. 그들 모두!
 산해관은 멀지 않은 곳에 바다가 있기 때문인지 사시사철 차가운 바람이 불고 여름이라 해도 아침저녁으로는 쌀쌀했다. 그렇다고 눈에 보일 정도로 바다가 가까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아마도 북에서 내려오는 바람과 진황도(秦皇島) 앞바다, 발해만에서 불어오는 해풍 탓일 것이다.
 군막의 모든 벽은 나무로 되어 있었다. 나무 사이로는 맨땅이 보이고 습기가 젖어 붉은색을 드러내는 곰팡이가 보였다.
 저규는 나무가 가로막은 벽으로 다가갔다.
 벽에는 무질서하게 보이는 몇 개의 철정(鐵釘)이 박혀 있고 개인 물건들이 걸려 있었다. 각각의 병기, 각각의 옷, 각각의 혁낭(革囊), 각각의······
 저규는 철정(鐵釘)에 걸려 있던 파란색에 팔소매를 붉은색으로 두른 장의를 끄집어 걸쳤다. 하체의 경의(更衣)는 입고 뒹굴었으니 장의만 입으면 된다. 흔히 군포(軍布)라고 불리는 것이지만 갑주(甲胄)를 입을 때 속에 걸치는 전포와는 다른 것이다.
 붉은 사건을 꺼내 목에 둘렀다.
 사건은 직급과 품작을 나타낸다. 붉은색의 사건을 목에 둘렀다는 것은 정구품의 품작을 받은 정백호라는 것을 의미한다. 남색의 사건을 둘렀다는 것은 정칠품 이상, 정오품 이하의 직급이다. 결국 그들은 천인호라는 의미!
 이십 명밖에 되지 않는 호열대에서 천인호가 두 명, 나머지는 모두 백인호 장수라니······
 “서둘러라.”
 명령을 전달하고 다시 명령을 내리는 대주, 호등량은 낮은 목소리를 뿌리며 문으로 다가갔다. 그의 뒤를 다인기가 따랐고 백인호들이 어슬렁거렸다. 그들은 은연중에 두 줄로 늘어서서 밖을 바라보았다.
 콰아아아!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언제부터 오기 시작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들은 모두 잠들어 있었고 전령이 와서 문을 연 후에야 잠에서 깼으므로!
 그들에게 따로 잠을 자는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낮에도 잠을 자고 밤에도 잤다. 그러나 때로는 밤에도 잘 수 없었고 낮에도 잠을 잘 수 없었다. 그들에게 낮과 밤의 구분이 있을 수 없었다. 시간이 나면 자고 먹으며, 때로는 열흘씩 잠을 자지 못할 때도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이 원할 때 잘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었고, 잠이 올 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깨는 방법도 알고 있었다.
 번쩍! 쩌그럭!
 번개가 치고 천둥이 몰려왔다. 목옥이 환해졌다 한 순간에 다시 어두워오고 빗방울이 거칠게 밀려들었다. 땅을 파고 나무를 박아 고정시킨 계단으로 빗물이 흘러내렸다.
 그들 모두는 누가 불렀는지 안다.
 그들을 부른 사람은 오직 한 명일 뿐이고 자신들이 무엇을 위해 모여야 하는지도 알았다.
 “가자!”
 호등량이 비 속으로 달려나갔다.
 
 
 二
 
 
 풍엽진(馮燁陳)은 유난히 긴 목을 빼고 앉아 있었다.
 만 명 이상을 거느리는 장수치고는 그 품위나 위엄이 드러나지 않는 장수였다. 종삼품의 품작을 지닌 행도사로서도 어울리지 않는 모습! 더구나 그는 오삼계 장군 휘하에서는 가장 능력이 뛰어나다는 장수로 산해관의 문을 지키는 장수였다.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산해관성의 문 네 개 중 북쪽으로 향해져 있는 산해관돈(山海關敦)을 지키는 장수, 겉으로 드러나는 직책이야 그렇다고 하지만 사실 그는 산해관을 총지휘하는 장수다. 산해관성의 문 네 개 중 세 개를 지키는 장수가 그의 휘하에 있는 장수였으므로!
 만주에서 중원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한다는 산해관의 관주(關主)!
 중원과 만주, 중원과 초원은 만리장성으로 갈라져 있고 그 주변에는 아홉 개의 진(鎭)이 있다.
 진은 군사들이 주둔하는 군영을 의미하며 변방수비군의 각 지대를 의미하는 곳이기도 하다. 국운이 기울어 진의 의미가 쇠퇴하기는 했지만 아직도 군병들은 초원과 만주에서 밀려오는 외세를 막고 있었다.
 산해관은 다르다.
 진이 아니다.
 중원으로 들어오는 여러 개의 통로는 주로 관(關)이라 불리는 지명을 지니고 있다. 산해관도 그 중의 하나일 뿐이다. 다만 근래 들어 가장 중요한 곳이 되어버리기는 했지만!
 이유는 오직 하나!
 금(金)의 후예를 자처하는 애신각라씨(愛新覺羅氏)와 그 일족이 세운 후금이 강성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만주의 모든 부족을 통일하고 지방군의 할거와 내정(內政)의 문란으로 명조의 국운이 기운 틈을 이용하여 후금을 세웠다.
 그들이 중원으로 밀려오기 위해 반드시 통과해야 할 길목!
 산해관이다.
 산해관을 지키는 수장은 풍엽진, 바로 그였다.
 삼 년 동안 거친 후금의 말발굽을 막아냈다고는 믿어지지 않는 장군이었다. 몸은 빈약해 보였고 게다가 앵무새의 주둥이를 닮은 입이 그를 더욱 왜소해 보이게 만들었다.
 그의 곁에는 두 명의 장수가 보갑(保匣)을 차고 앉아 있었는데 그들이야말로 부장(副將)이라는 허울 좋은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장수라는 직책임에도 불구하고 단 한 번도 적과 조우해 보지 않은 자들! 그들은 탁자에 팔을 기대고 선을 긋거나 그럴싸한 입담으로 수많은 장군들과 군병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자들이었다. 탁상공론이나 일삼는 자들! 그들은 단 한 번도 병기를 들고 적진을 향해 달려나가 보지 못했던 장군들이었다.
 장방형의 탁자!
 그 탁자의 중앙에는 풍엽진이 앉아 있고 좌우로 도열하듯 두 줄로 정천호와 정백호들이 섰다.
 호열대의 전체!
 저규가 마지막으로 가장 끝에 가서 서는 것으로 도열은 끝났다. 저규의 행동이 재빠르지 못했으므로 풍엽진은 못마땅하다는 듯 눈을 돌리다 손을 들었다.
 “앉으시오!”
 스무 명의 호열대원은 일제히 자리에 앉았다. 자로 잰 듯 일사불란한 모습에서 그들이 지닌 힘을 느낄 수 있었다.
 호열대원이 모두 자리에 앉자 풍엽진이 일어나며 의자를 뒤로 밀고 몸을 돌렸다. 그의 등 뒤는 벽이었으며 커다란 지도가 걸려 있었다. 멀리 산서성의 하곡(河谷)에서 대동(大同)과 장가구(張家口), 산해관과 진황도를 잇는 선, 바로 만리장성을 따라 그려진 지도였다. 만리장성은 감숙(甘肅)의 가욕관(嘉關)에서 시작해 일만 리를 달려 산해관에서 뿌리를 내렸다.
 ‘만리장성! 언제나 죽음의 기운이 머무는 곳!’
 지도를 바라보던 저규는 갑자기 처량한 생각이 들었다.
 지도에는 만리장성의 시작과 끝이 모두 그려져 있었다. 물론 그 중간도 생략되거나 지워지지 않은 모습으로!
 더불어 지도는 만리장성뿐 아니라 북경(北京)의 외곽과 대흥안령(大興安嶺)이 이어지는 부근까지 세밀하게 그려져 있었다. 북경에서 가장 가까운 만리장성의 줄기까지는 불과 칠십여 리!
 춘추시대(春秋時代)부터 축조된 만리장성!
 드넓은 초원을 주름잡던 유목민족(遊牧民族), 흉노(匈奴)를 방어하기 위해 쌓기 시작한 것이 그 시작이다. 당시에는 대륙 동쪽에 자리한 요동(遼東)에서 서쪽에 자리한 임조까지 성벽을 쌓는 데 그쳤으나 그 후 진시황(秦始皇)이 중원을 한 손에 틀어잡으며 고비사막이 있는 사주까지 넓혀졌다.
 장성의 성벽을 재정비한 것은 진시황이다. 진시황은 중원을 통일하고 황제가 된 후 군데군데 세워진 성벽을 이으라는 명령을 내렸고 결국 만리장성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물론 북쪽에서 밀려오는 외세를 막기 위한 것이었다.
 처음에는 석수들로 성벽을 쌓았지만 숫자가 턱없이 모자라 병사들이 투입되었다. 당시 중원인 세 명 중 한 명이 장성의 축조에 끌려갔으며 강제노역으로 백만 명에 달하는 사람이 죽었다. 시체를 처리할 수 없어 쓸어묻고 그 위에 다시 성벽을 쌓았다. 성벽은 거대한 봉분이 되어버린 셈이었다. 그토록 공을 들였지만 중원인들이 오랑캐라 지칭하는 자들은 어렵지 않게 성벽을 타넘어 중원을 유린했다.
 징기스칸이 그랬다.
 
 ─만리장성은 우리 모두의 피를 빨아들일 것이다.
 
 저규는 콧등이 시큰해지는 것 같았다.
 아무리 애를 써도 밀려오는 적을 막기 위해서는 명조의 군병들이 피를 흘려야 가능한 것이었다.
 그의 마음을 짐작하지 못한 것인지, 알아도 무시하는 것인지 풍엽진은 지도의 한곳을 가리켰다.
 산해관이었다.
 풍엽진은 긴 목을 꼬듯 비틀어 호열대원들을 바라보며 애써 굵은 목소리를 흘렸다.
 “적은 산해관까지 밀려왔고 주력군은 대릉하(大凌河) 부근에서 머물고 있다. 그들의 주력군이 머무르는 곳은 만주인들이 득실거리는 조양성(朝陽城) 외곽이다. 이곳에서 칠 일 이내에 도달할 수 있는 거리에 불과하지!”
 풍엽진이 산해관을 가리키던 지휘봉을 지도에서 떼어 지도의 다른 곳을 다시 가리켰다. 산해관에서 오백 리는 떨어져 보이는 곳이었다. 지도의 곳곳에는 많은 표식이 그려져 있었다.
 산은 녹색 삼각형으로 그려져 있으며, 강이나 하천은 하늘과 닮은 청색으로, 시진과 인가(人家)는 검은색의 점으로 그려져 있었고 만리장성을 비롯한 곳곳의 산성과 시진을 둘러싼 토성의 성벽은 여장(女薔)을 이어붙인 듯한 모습으로, 관도는 검은 실선이었다. 지리를 잘 모르는 사람도 지도를 보면 대략적인 윤곽을 잡을 수 있으리만치 선명한 표식이었다.
 “모두가 알고 있는 것처럼 명조는 바람 앞의 등불이다. 우리는 마지막 한 수를 두기로 했다. 어차피 우리는 망해 가는 국조(國祖)를 따라 주저앉을 수밖에 없는 장수들이다. 우리가 누구인지도 후금에서 알고 있을 터이니 더 이상 피할 수도 없다. 우리는 이제 그 동안 계획했던 마지막 한 수, 장기로 말하면 장군을 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풍엽진은 말을 마치고 지휘봉으로 손바닥을 소리나도록 쳤다. 그의 손바닥은 마른 장작처럼 소리를 냈다.
 “오삼계 장군의 명이십니까?”
 다인기가 몸을 일으키며 물음을 던졌다.
 모두의 눈이 그에게 모아졌다.
 후금과 명조는 사십 년 동안이나 대립을 하고 있었다. 주된 전쟁터는 산해관이었고 마지막 남은 정예부대가 산해관에서 방어를 하고 있었다.
 풍엽진은 한때 오삼계 장군이 이끄는 여덟 명의 보장 중 한 명이었고 삼 년 전부터는 산해관을 지키는 관주의 신분에 오른 장수였다.
 다인기를 바라보던 풍엽진이 입을 열었다.
 “그렇소. 오삼계 장군께서는 마지막으로 도르곤[多爾袞]을 목표로 하고 있소이다. 후금의 지휘자는 바로 도르곤, 순치제(順治帝)가 있다고는 하나 결국 도르곤이 없다면 순치제는 종이호랑이에 불과할 뿐! 아직 약관에 이르지 못한 순치제로서는 감히 명조에 창검을 들이대지 못할 것이오. 후금의 실질적인 지휘자 도르곤을 잡을 수 있다면 명조는 다시 한 번 힘을 모을 수 있을 것이고 명조는 원기를 회복할 수 있을 것이오.”
 풍엽진의 입에서 침이 튀었고 얼굴에서는 혈관이 팽창되었다. 학의 목처럼 길게 느껴지는 가녀린 그의 목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가냘픈 목에 핏대가 서고 보니 어쩐지 안쓰러운 표정이었는지라 호열대원은 눈을 돌렸다.
 풍엽진은 본시 무관(武官)이 아니었다.
 그는 전시(殿試)를 통해 등용되어 문관으로 이름을 날린 자였다. 그러다 지략과 용맹이 뛰어나 오삼계 장군의 눈에 들었고 결국은 그를 따라 산해관에 이른 자였다.
 비록 문관 출신이라 하지만 뛰어난 용맹과 지략으로 장수들과 군병들에게 신망을 얻고 있는 장수.
 그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오삼계 장군은 마지막 발악을 하고 있었다.
 명조의 마지막 황제가 될지도 모르는 장열제(莊烈帝)로서는 오삼계 장군만 믿고 있는 상황이었다. 오삼계 장군이 없었다면, 그가 산해관을 방어하지 못했다면 이미 무너졌을 명조였다. 이십 년 전 누루하치[淸 太祖, 奴兒哈赤]가 산해관에서 일어난 접전에서 화포의 파편에 맞아 초원으로 돌아간 뒤 죽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물론 당시의 수장(首將)이 오삼계 장군은 아니었다. 그러나 오삼계 장군이 산해관을 지키는 군병들의 수장인 수비대주가 된 뒤부터 혁혁한 전과를 세웠기에 누루하치의 죽음도 그의 공적처럼 여겨지고 있었다.
 누루하치의 죽음으로 후금은 몸서리를 쳤다.
 그들의 공격은 집요했다.
 한때는 조공을 받칠 터이니 산해관을 열어 달라고 하더니 이제는 오히려 조공을 요구하고 있었다.
 의당 명조는 거절을 했다.
 이제 누루하치의 손자가 명조를 손에 넣으려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모든 국운이 오삼계 장군의 어깨에 달렸다.
 모든 정황이 피를 말리게 돌아가고 있지만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은 아니었다. 품작이 없는 군병들로서는 짐작도 하지 못하는 사실이었고 지방군의 장수들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만리장성에 몸을 맡긴 장수들은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산해관의 수장!
 풍엽진은 오늘도 자신의 역할을 잊지 않고 있었다.
 산해관은 만주와 길이 열려 있는 첩경이었고 후금의 무리들이 밀려드는 곳! 만에 하나 산해관이 무너지기라도 한다면 단 이틀 만에 북경이 함락될 수도 있었다.
 “오삼계 장군께서는?”
 호등량이 물었다.
 이토록 중대한 결정이라면 의당 오삼계 장군이 나타나야 했다. 더구나 호열대에게 마지막 명령을 내리는 것이라면!
 호열대가 무엇인가?
 그들은 오삼계가 거느리는 국경수비군에서 골라뽑은 장수들이었다. 수백 명의 장수들 중에서 젊고 가장 빠르고 날래며, 무공이 뛰어난 장수들을 모아놓은 별동대!
 목적은 하나.
 그들의 힘으로 전세를 바꾸기 위한 것이 아닌가?
 “급한 일이 있어 오지 못하셨소. 내일은 도착하셔서 여러 장군들이 출문(出門)하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니 기대해도 좋소.”
 “내일? 출문?”
 호등량의 되물음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에 한결같이 눈을 부릅떴다.
 “그렇소. 내일이오. 내일 모두 출발해야 하오. 그래서 오늘은 연회를 준비했소. 모두 오삼계 장군의 명에 따른 것.”
 결정!
 이미 나 있는 것을 결정이라 할 수 있을까? 그것은 차라리 주어진 수순(隨順)일 뿐이었다.
 날고 기는 명조의 장군들이 아닌가?
 한때는 각각 천 명에서 백 명의 군병들을 이끌고 전장을 누비기도 했고 후금국의 군병들과 목숨을 걸고 싸움을 했던 장수도 있었다. 때로는 오삼계 장군이 이끌었던 강남의 군영에서 따라온 장수도 있었고······
 “연회?”
 호등량은 낮은 목소리를 토했고 모두들 고개를 들었다.
 이미 결정된 일!
 누구도 거부할 수는 없었다.
 
 ‘가능할까?’
 저규는 불안해 참을 수가 없었다. 이미 명조의 성세가 기울었다는 것을 모르는 장수는 아무도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한 순간에 무너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더불어 마주 보이는 초원에 대치한 후금의 군병들이 애신각라씨의 명령을 받아 한 순간에 산해관을 넘을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후금국을 일으킨 애신각라씨라 하지만 군병의 숫자로는 오삼계 장군이 이끄는 수비대에 비교할 수 없었다. 명조의 군대는 후금의 군병과 비교해 병기도 뒤지지 않았고 화포도 많았다. 더구나 앞에는 오 장이 넘는 성벽이 가로막혔다.
 사십 년에 걸친 긴 전쟁이었다.
 애신각라씨가 이끄는 여진은 후금국이라는 국호를 세우고 중원을 집어삼키겠다고 야심만만하게 넘어왔다. 누루하치가 명조의 군병들에게 화포를 맞고 도주한 지 어언 이십 년! 그 후에도 그들의 야욕은 끝이 없었다. 누루하치가 화탄(火彈)에 섞여 있던 납독에 죽은 후 그의 아들 태종(太宗) 황태극(皇太極)이 십육 년의 재위를 끝으로 사망했다. 그 후 태종의 형제인 도르곤이 육 세에 불과한 세조 순치제의 섭정을 맡아 산해관 밖까지 진출해 있었다.
 “이건 너무 빨라!”
 저규는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 준비는 했었다. 스무 명의 장수를 모아 별동대를 조직했을 때부터 목적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리고 그 목적이 무엇인지도 알게 되었다.
 지난 육 개월이 주마등처럼 흘렀다.
 산을 달리는 것은 일과 중 하루도 빼놓지 않은 일이었고 물 속에서 이틀 동안 잠복하는 훈련을 하기도 했다. 잠복의 종류도 다양했다. 수를 셀 수 없으리만치!
 가장 힘든 것은 인분(人糞)에 몸을 숨기는 것이다. 인분이 쌓인 곳에 숨어 삼 일을 보내고 나면 온몸에 똥독이 올라 울긋불긋한 반점이 생기고 간지러워 참을 수가 없었다. 더구나 독한 냄새가 코를 마비시키고 심한 경우에는 기절하는 수도 있었다. 피를 말리는 훈련에서 내공의 힘도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래도 견뎠다.
 ‘이제 결실을 맺을 때가 되었는가!’
 저규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느새 비가 그치고 눈이 오고 있었다. 솜털 같은 눈송이가 얼굴이며 몸에 떨어져 내렸다.
 처음에는 포근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체온에 녹아 빗물처럼 흘러 얼굴이 시려지고 손이 어는 것 같았다. 하늘은 잿빛이었다.
 눈은 바닥에 떨어지면 순백으로 빛난다. 그러나 하늘에서 날리는 모습을 보면 잿빛으로 보인다. 그것이야말로 인간의 눈이 지닌 한계와 같은 것이었다.
 “어서 갑시다.”
 “죽을 때 죽더라도 마음껏 마셔보자고!”
 저규는 소리가 들리는 곳을 바라보았다.
 모든 장수들이 산해관성의 내부에 있는 오룡각(五龍閣)으로 몰려가고 있었다. 오룡각은 삼 층 누각으로 장수들이 회의를 하거나 주연을 베푸는 곳이었다.
 오룡각을 내주었다는 것은 모임이 커다란 의미가 있음을 의미하는 것!
 “저 장군!”
 갑자기 들려오는 소리에 걸음을 멈춘 저규가 몸을 돌렸다.
 마치 물에 불어터진 듯 몸이 두루뭉실한 젊은 장수가 다가오고 있었다. 만약에 높은 산에서 굴리기라도 한다면 멈추지 않고 굴러갈 것 같은 사내였다.
 저규는 입가에 의미없는 미소를 지으며 몸을 돌렸다.
 부순연!
 저규가 이끄는 을조의 부조장!
 언젠가 자신의 입으로 스스로를 무당(武當)의 제자라고 했던 부순연이었다. 한때 무당의 속가제자로 무림에 이름을 날렸다고 떠벌리던 그가 군문에 몸을 담은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다.
 사실, 국운이 기우는 마지막 전장에 나온 사람들 모두는 자신들의 신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저규도 소림(少林)의 속가제자였지만 한 번도 자신의 신분에 대해 이야기를 한 적은 없었다.
 상위계급의 장수들이야 북경에서 내려온 전출명령서(轉出命令書)와 신분명세서(身分明細書)를 보고 알 수도 있지만 굳이 본인이 나서서 이야기하는 경우는 없었다. 국운이 기운 상황에서는 언제 죽을지 알 수 없고 때로는 국가가 기울고 나서 일대의 혈풍이 부는 법이었다. 따라서 서로의 신변을 보장해 주기 위해 신분을 말하지 않는 것은 상식처럼 여겨지고 있었다. 그러나 유독 부순연만은 자신이 강호의 대문파 무당의 제자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었다.
 사실, 그는 입담만큼이나 뛰어난 무공을 지니고 있었고 저규도 그가 무당이 자랑하는 면장(綿掌)으로 바위를 향해 손바닥을 내리치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당시 비록 바위를 깨지는 못했지만 서너 조각의 돌 부스러기를 보았었다.
 그의 말처럼 적을 만나면 발정이 나 미친 말처럼 주저하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인 듯했다. 물론, 들리는 소문에 의거해 보았을 때의 이야기였다. 눈으로 본 것도 있으니 믿을 수 있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저규는 단 한 번도 그가 허풍쟁이라 생각한 적은 없었다. 다만 그의 떠벌리는 말이 귀찮을 뿐!
 퉁퉁한 얼굴과는 어울리지 않게 좁은 이마, 칼처럼 가는 눈썹, 뾰족한 코를 지닌 얼굴. 그와 같은 얼굴의 인상으로 보아서는 절대 입을 나불거리는 성격을 지니고 있을 것 같지 않았지만 대비가 되어 보이게 둥그런 눈과 커다란 귓불, 네모진 턱과 가벼워 보이는 얇은 입술은 그가 천부적으로 입이 가볍다는 것을 의미했다.
 “무슨 일?”
 저규는 신통치 않다는 투로 대답했다. 그리 친하다 할 수도 없지만 삭막한 관계도 아니었다. 그저 동료일 뿐이었고 육 개월 전부터 호열대에 같이 배속된 사이였다.
 굳이 따진다면 가깝다고 할 수도 있었다.
 적이 아니고 비하하는 사이도 아닌, 더불어 살아가는 호열대의 대원이 아닌가? 더구나 그들은 을조의 일원이었고 한 사람은 조장이고 한 사람은 부조장이었다.
 그들은 늘 의견을 교환했었고 같이 뒹굴었다.
 그것만 가지고도 친하다 말할 수 있다면 그들은 친한 사이였다. 겉으로 드러날 정도로 친하다고 하지 않더라도! 그러나 그들은 동료를 위해 목숨을 버릴 각오가 되어 있을 정도의 친분은 지니지 못했다.
 본시 수성대(守成隊)의 보장(步將)이었던 저규와 호위대(護衛隊)의 대주였던 부순연은 같은 군벌에 소속되어 있었으면서도 만날 기회가 없었다. 육 개월 전 호열대가 만들어지며 처음 본 사이였다.
 “자네는 성공할 수 있다고 보나?”
 눈이 발에 밟혔다.
 보명각으로 들어갈 때와 나오기까지는 불과 반 시진의 차이가 있었을 뿐이었다. 들어갈 때는 비가 오고 있었으나 나오고 보니 눈이 내리고 있었다.
 변화난측한 일기 변화!
 밟히는 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보아 제법 많은 눈이 오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발바닥 아래에서 부서지는 눈의 결정체!
 “아니!”
 저규는 짧게 대답했다.
 그 말 속에는 그가 생각하고 있는 모든 것이 함축적으로 들어 있었다. 저규는 길게 말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성공할 수 없는 일이었다. 후금국 전군을 지휘하는 장수라면 호위가 만만치 않을 것이었다. 더구나 그는 후금 황제의 숙부!
 언제부터 후금이 황제를 자처했는지 알 수 없지만 지금으로서는 그들이 명조의 황제보다 위세가 강했다.
 후금의 황제를 섭정하는 숙부라면 명조의 번왕(藩王)과는 다르다.
 도르곤도 따지고 보면 후금의 번왕과 같으나 그 힘이야말로 바로 후금 황제의 힘인 것과 진배없다. 더구나 왕을 죽인다는 것이 쉬우리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평시도 아니고 전쟁 중이었다. 평시에도 죽이기 어려울 것인즉, 전쟁 중이라면 인(人)의 장막(帳幕)으로 둘러쳐져 있어 더욱 어려울 것이었다.
 “자네는 그렇게 생각하며 갈 생각인가?”
 정곡이라는 말이 있다.
 만약 마음을 울리는 말이라면 정곡을 찔렀다는 말이 틀리지 않을 것이다.
 부순연으로서는 웃어보자고 던진 말일 수 있지만 저규로서는 가슴에 찔리는 말이었다. 부순연의 말은 저규가 그토록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던 말이었다.
 저규는 입가에 웃음을 매달았다.
 “거부할 수 없으니까. 아니, 거부하기에는 이미 늦었다고 생각했으니까!”
 부순연이 얼굴을 찡그렸다.
 하늘에서 내리는 눈이 어깨와 머리에 쌓이고 바람에 날려 눈으로 날아들었다. 그러나 부순연이 얼굴을 찡그린 것은 눈이 보기 싫다거나 차갑기 때문이 아니었다.
 “후!”
 부순연의 숨소리가 들렸다. 이미 거칠어진 숨소리!
 저규는 부순연의 무너질 것 같은 한숨을 무시하며 앞으로 걸었다.
 
 
 三
 
 
 긴 장방형의 대전!
 산해관성 안에 세워진 이십이 채의 누각 중 하나인 오룡각은 내성 안쪽에 만들어진 삼 층 누각이었다.
 간혹 장수들이 연회를 베푸는 곳이기도 했고 오삼계 장군이 머물기도 하는 곳이었다. 그러나 오삼계 장군은 없었다. 그는 지금 북경에서 바삐 말을 몰아 돌아오고 있을지도 모른다.
 저규는 열려진 문을 통해 대전으로 몸을 들이밀었다.
 오십 명은 앉을 수 있는 장방형의 탁자와 열 지어진 의자가 눈을 파고들었다. 의자에는 이미 들어선 장군들이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붉어진 얼굴도 보이고!
 몸을 사르는 납촉!
 대전 좌우로는 십여 개의 방이 있었고 층계를 올라오며 눈으로 보았지만 밑층으로 내려가면 적지 않은 방이 있다. 대전은 삼층에 자리하고 있었다. 삼층은 연회를 위한 방이었고 이층과 일층의 방은 잠을 자기 위한 방이다.
 장방형의 탁자에는 술과 음식이 즐비하고 일정한 간격으로 세워진 지심촉은 거친 숨으로 인해 심하게 비틀거렸다. 어차피 꺼져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사방의 벽에 게딱지처럼 즐비하게 달라붙은 등롱의 불빛만으로 술을 마시기에는 어려움이 없었다.
 수많은 음식들!
 평소에는 듣지도 보지도 못한 음식들이었다.
 이미 일 년 전부터 군량미가 바닥났다는 것을 모르는 장수는 아무도 없었다. 그나마 변방수비대였기 때문에 강남에서 올라온 군량미가 조금은 남아 있을 뿐이었다. 황궁은 황하가 범람하고 이재민이 나도 변방수비대에만큼은 군량미를 보내주었다. 어려운 여건을 이겨내고자 하는 의지에도 불구하고 군량미는 턱없이 모자랐다. 신분의 고하를 떠나 장수이거나, 군병이거나 하루에 두 끼로 살아가고 있었고 간혹 하루 한 끼만으로 배고픔을 참아야 했다.
 탁자에 차려진 음식은 상상을 불허했다.
 군량미로는 꿈도 꾸지 못할 것이었고 군문에서는 구경조차 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군량미에는 없는 음식들!
 이름만 들어본 요리가 허다했다. 중원에서 유명하다는 요리는 모두 모은 것 같았다.
 침이 넘어가고!
 한동안 말이 나오지 않는 장군들!
 탁자에는 향긋한 냄새를 동반한 갖가지의 요리들이 안개의 나락처럼 펼쳐져 있었다.
 반해철(拌海 : 해파리 무침), 파리백채(離白菜 : 배추 삶은 요리), 부용해(芙蓉蟹 : 게와 달걀로 부쳐 부용꽃 같은 모양으로 만든 요리), 연우(蓮藕 : 연뿌리 요리), 동순(冬筍 : 겨울죽순 요리), 어시(魚翅 : 상어지느러미 요리), 안춘( : 메추라기 볶음), 용하(龍蝦 : 왕새우 요리), 탕초리어(糖醋鯉魚 : 잉어 요리 중 하나) 같은 명물요리들이 질펀하다. 그 밖에도 적지 않은 음식이 널려 있지만 이름을 알 수 없을 뿐이다. 아마도 마지막 죽음의 길로 떠나는 장수들을 위안하기 위해 주변에서 음식들을 쓸어오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독약이군.”
 저규는 나직하게 중얼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진수성찬이야.”
 다인기가 저규의 어깨를 툭 치며 곁에 앉았다.
 저규는 눈을 들어 탁자 위에 펼쳐진 음식들을 바라보았다. 생전 먹어보지 못했던 음식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배가 부르고 숨이 턱턱 막히는 것 같았다. 소문만으로 들었던 음식들! 더구나 눈에 보이는 모두가 한결같이 명요리들이었으니······
 분양현(汾陽縣) 행화촌(杏花村)에서 난다는 분주(汾酒)가 있다. 맑은 향기로 이름을 얻은 분주는 쉽게 볼 수 있는 술이 아니다. 더구나 죽엽청(竹葉淸)도 있다. 죽엽청은 중원 곳곳에서 담그는 것이지만 행화촌에서 나는 것만큼 뛰어난 것은 볼 수가 없다. 황금색에 약간의 녹색이 섞였으나 그럼에도 투명한 색을 지닌다.
 산서의 행화촌에서 산해관까지 날라오느라 여간 힘이 들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으로 보아 이 만찬은 오래 전부터 꼼꼼하게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인 듯!
 “어서 마셔라. 마음껏 마시고 모든 것을 잊어버리도록 해!”
 이미 적지 않은 술을 마셨는지 호등량의 목소리는 이미 술에 절어 있었다.
 마지막 발악인가?
 살아 있음을 확인하기 위한 것인지도 모르는 일! 모두는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운명을 숙명처럼 받아들이면서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 버리지는 못한 것 같았다. 대주인 호등량이라 해서 다른 사람보다 절제가 뛰어난 것은 아니었다.
 술이 돌고 노래가 흘렀다.
 일제히 술잔을 들어 탁자의 바닥을 내리치며 노래를 부르기도 몇 번째이던가? 모두들 몸이 풀어졌다.
 적진으로 간다는 사실! 적장의 목을 베러 간다는 사실이 몸에 경직을 주고, 죽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모두에게 두려움을 준 것 같았다.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압박감이 있기 때문인지 술은 빨리 돌았고 주기를 이기지 못해 주절거리는 말소리가 길어졌다.
 저규는 묵묵히 앉아 술을 들었다.
 누구와도 이야기하기가 싫었다.
 어차피 언제 죽을지 모르는 동료들이었다. 그들에게 정을 남기고 싶지는 않았다. 아니, 정이라 하면 동료의 정이라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저 장군은 할말이 없소?”
 다인기가 물었을 때도 그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에 술은 아무런 느낌도 주지 못하고 화기를 뿌리며 목을 타넘었다.
 모두가 객쩍은 소리를 하고 있었다.
 의미없는 물음!
 의미없는 대답!
 모두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호등량은 십 년 동안이나 만리장성을 지킨 노장이라 할 수 있었다. 다인기도 그에 버금간다. 그들이 호열대의 대부와 부대주라 그리도 경험이 많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물론 나머지 정백호들도 많게는 십 년에서 적게는 삼 년 동안 만리장성에서 찬바람을 이겨낸 사람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소리없이 밀려오는 불안감과 두려움으로 물 마시듯 술을 퍼마시고 있었다. 취하면 모두 잊어버릴 수 있다는 듯!
 그들 이십 명 중 가장 짧은 시간 동안 군문에 있었던 사람은 당연히 저규였다. 그럼에도 을조의 조장이 된 것은 그가 사려 깊고 판단이 정확하다고 알려져 있기 때문이었다.
 사람을 죽이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다. 마음만 먹으면 못 할 것이 없는 것이 적과의 접전이기 때문이다.
 늘 용기백배한 모습을 지니고 있는 장군들이라고 하지만 몰라보게 주절거리고 있었다.
 적을 죽이기 위해 초원을 달리고 성벽에서 활을 쏘는 모습이 아니었다. 지난날의 용맹하던 그들의 모습은 사라지고 술에 취한 주사기(酒邪氣) 넘치는 주객만이 남아 있었다.
 그것은 두려움을 잊기 위해 몸부림을 치는 것이었다.
 문제는 적을 죽이는 것이 아니고 적장의 목을 베는 일이다. 시시한 적장이 아니었다. 후금의 군병들과 장수들을 한 손에 쥐고 흔드는 도르곤인 것이다.
 한 순간의 판단이 흐려지면 모두 죽을 수도 있는 일이고 생사를 달리하게 된다. 물론 적장의 목을 베는 일이 쉽지는 않다. 어쩌면 뛰어난 무공보다는 경험과 판단이 중요한 일이 될지도 모른다.
 저규가 을조의 조장이 된 것은 뛰어난 무공 때문이 아니라 냉철한 판단과 차분한 성격 때문이었다. 저규로서는 아직 단 한 번도 사문(師門)의 무공을 드러낸 적이 없었으니 어느 정도의 무공을 지녔는지 동료들이 알 리가 없었다.
 오삼계 장군은 알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가 무과에 급제했다는 것을 알았다면 소림의 제자라는 것도 알 것이고 무공도 추측했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직접적으로 도르곤을 죽이는 역할을 맡은 을조의 조장을 오삼계 장군이 선택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미 어느 정도는 예측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주저앉고 싶다.’
 저규는 술잔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술잔이 출렁거리고 눈알이 다가왔다. 자세히 보니 겁에 질린 것같이 동그래진 눈은 바로 저규 자신의 눈이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싶었다.
 한때는 모든 것을 버렸다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문제는 아집이었다.
 군문에 들어 장수가 되었을 때 저규는 모든 것을 버린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새로운 희망도 있었다.
 하나, 사형제들의 질시를 피해 산문을 나섰을 때 이미 모든 것은 끝나 있었다. 모든 것은 무공 때문이었다. 불문의 고승들이 머무르는 소림사(少林寺)라고 하지만 사람이 지닌 아집은 승려의 고행으로도 어쩔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누구보다도 뛰어난 무공을 지녔다는 것이 사형제들의 부러움을 지나쳐 결국은 사문을 떠나게 만들었다. 사부는 제자를 사랑하는 마음에 길을 떠나도록 했었다. 산문을 나선 후 곧바로 무과를 치렀고 장군이 되었다.
 사문에 대한 미련을 버렸다.
 사형제에 대한 미련도, 돌아오지 말고 먼 곳으로 가서 조용히 살라고 말했던 사부도 버렸다.
 그러나 버리지 못한 것이 있었다.
 사랑이었다.
 결국은 이루지 못한 사랑!
 사매는 죽었다. 그녀가 왜, 어떻게 죽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누군가와 싸웠다는 소문도 없었고 음독(飮毒)을 했다는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 다만 그녀가 죽었다는 사실만을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죽은 후가 더욱 처참했다는 사실도······
 군문에 발이 묶여 그녀의 시신을 보러 갈 수도 없었다. 몇 날 며칠을 통곡했다. 고아였던 그에게 유일하게 잘해 주었던 사매였다. 사부보다 더욱 보고 싶었던 사매! 한때 등불이 되어주었던 그녀는 이제 세상에 없다. 사매의 죽음을 들었을 때 모든 것을 잊고 싶었다. 그래서 아무런 목적 없이 산해관으로 갈 것을 자원했다. 그리고 주청(奏請)은 받아들여져 산해관으로 와서 찬바람과 싸웠다.
 ‘그녀를 생각해 무엇 하랴······’
 저규는 고개를 저었다.
 사매의 생각에 빠져 들 때가 아니었다.
 갑자기 다인기가 자신에게 질문을 던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묵살하고 싶지만 그가 상관인지라 대답을 회피할 수 없었다. 더구나 다인기는 호열대에서 가장 인간적인 정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마치 맏형처럼······
 만약 군문이 아니고, 군대에서의 상하관계가 아니라면 형이라 불렀을 것이다.
 “무슨 말이 필요하겠소. 그저 주어진 길을 가면 그뿐! 이 모든 것이 독약일 뿐인데······”
 저규의 말에 다인기가 입술을 삐쭉거렸다.
 무언가 해주고 싶은 말이 있는 듯했지만 표정이 차돌처럼 견고해 보이는 저규를 바라보다 짐짓 냉정하게 굳은 얼굴을 돌려버렸다. 지금은 누구의 감정도 건드려서는 안 된다는 것을 다인기는 알고 있었다. 아무리 서로의 감정을 잘 알고 누구보다 친숙하게 정이 든 사이라 해도! 모두가 긴장과 두려움으로, 건드리면 터질 만치 팽창된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모두가 마지막으로 몰려가는 심정에 젖어 있으니 만에 하나 누군가가 일을 저지르기라도 한다면 모든 것이 끝장이었다.
 한 시진이나 지났을까?
 질펀한 술판이 점차 느긋해지고 있었다.
 빠르게 돌던 술잔이 느려지고 안주를 집으러 가는 손길도 느려졌다. 한결같이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들만이 서로를 바라볼 뿐이었다.
 바라라라!
 갑자기 닫혀 있던 대전이 요란한 소리를 울리며 열렸다.
 풍엽진의 얼굴이 보였다.
 그는 호열대의 모든 장수들이 취한 다음에야 나타났다. 본시 그는 같이 술을 마셨어야 할 사람이었다. 죽을지 모르는 부하들에 대한 마지막 예의로 술을 마셔주며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 도리였다.
 모두가 풍엽진을 바라보았을 때 그는 무심한 표정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와 안쪽에 비어 있던 자리를 잡고 앉았다. 처음부터 그가 앉아야 할 자리였다.
 “오삼계 장군께서 제군들에게 보낸 선물이 있다.”
 그는 웃는 얼굴로 장군들을 돌아보았다. 어쩐지 피로한 기색이었지만 애써 웃음을 잃지 않으려 애를 쓰는 듯했다. 저규는 왠지 그마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짝! 짝!
 풍엽진은 손바닥을 쳤다.
 문가에 그림자가 생기고 온몸에 등롱의 불빛을 받으며 나타난 것은 여인들이었다.
 하나같이 이십을 넘기지 않은 계집들은 사타구니의 음모가 들여다 보이는 옷자락을 날리며 대전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인지, 철저하게 훈련을 받았는지 알 수 없지만 웃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술에 절어 희미해져 가던 모두의 눈에 이채가 머물렀다. 거친 숨을 몰아쉬는 장군도 있었다.
 본시 여인들의 옷은 남자들의 옷과는 다르다.
 남자들은 경의에 삼(衫)을 걸치면 그만이다. 학문을 익히는 거인(擧人)이라면 사령대금관유삼을 걸치는 정도랄까?
 전쟁에 나서는 장수라 해도 경의에 단삼(單衫), 때로는 전포를 걸치고 그 위에 보갑을 차면 그만이다. 쇄자갑(鎖子甲) 정도나 면포갑(綿布甲) 정도만 걸치면 눈밭에서도 적과 상대하고 밤을 새기에 무리가 없었다.
 여인은 다르다.
 빈한한 여인들이라면 다르겠지만 그나마 품위가 있는 여인들이라면 늘 단장을 한다. 머리를 목단두(牧丹頭)로 하고 연미(燕尾)를 내린다. 혼례를 올리지 않은 계집이라도 얼굴에 단장은 한다. 더불어 옥잠(玉簪)까지.
 뿐이랴?
 십여 겹의 옷으로 치장을 한다. 삼군고(杉裙)는 물론이고 열두 폭의 유군(裙)과 비갑(比甲)을 걸친다.
 문제는 대전으로 들어선 계집들이었다.
 그녀들에게서는 여인들의 정숙함 따위가 없었다. 치장을 한 것으 보아서는 황금이 없어 옷을 사지 못한 것은 아닌 것 같은데······ 홑겹으로 보이는 옷은 그렇다 치더라도 한결같이 입가에 띄우는 웃음! 무엇을 의미하는 웃음인가?
 그녀들은 창녀인가?
 아니면 몸을 팔고도 슬픔을 느끼지 못하는 쓸개 빠진 계집들이라도 된다는 말인가?
 저규는 슬퍼졌다.
 자신의 처한 상황이 슬퍼졌고 죽음을 따라 달려야 하는 사내들에게 웃음을 팔고 몸을 팔아야 하는 그녀들의 모습이 애처로워 보였다.
 얻을 것이 뭐 있다고······
 죽음을 목전에 둔 사내들의 격렬한 몸부림을 즐기기라도 하겠다는 것인가?
 그 배설에 희열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어서 오너라, 이년들아!”
 입이 거칠기로 하면 다인기를 따라갈 사람이 없었다. 본시 산동(山東)에서 푸줏간을 경영하며 살았던 그는 군문에서 역량을 발휘한 사람이었다. 살도부(殺屠夫)로 군역을 나와 군병에서도 가장 천대받는 초병(哨兵)의 신분에서 천인호의 직위에 올랐다는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막판까지 몰린 그가 말을 삼갈 이유가 없다. 천한 신분으로 여겨지는 살도부가 천인호가 되었다면 누구나 놀랄 것이다. 애초부터 배우지 못했고 성격이 급한 그로서는 어쩌면 위엄을 내보이려 애를 쓰는 것보다 걸걸한 욕지거리가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계집들 중에서 제법 용모를 지닌 계집 하나가 쪼르르 달려가 그의 허벅지 위에 냉큼 올라앉았다.
 저규는 얼굴을 붉혔다.
 앉는 도중에 다리를 벌렸기 때문에 치마가 걷혀지며 사타구니가 드러났다. 다인기는 저규의 옆자리에 앉았으니 눈에 들어오는 것은 당연한 이치! 계집의 얼굴에 보이는 나이는 열일곱을 넘기지 못한 것 같은데 이미 여문 몸이다.
 사타구니는 통통하게 살이 올라 있었고 고의를 입지 않아 모든 것이 눈으로 들어왔다. 높은 언덕과 그 위에 잔 풀처럼 깔린 음모!
 저규는 어쩔 수 없이 웃음을 띄우며 눈을 돌렸다.
 “어서 가서 앉아라. 마음에 드는 장수들 곁으로 가거라.”
 풍엽진의 목소리가 울리자 계집들은 모두가 흩어져 장군들 곁으로 다가왔다. 계집들은 약속이나 한 듯 주저하지 않고 차례로 장군들 곁에 가서 앉았다. 저규의 곁에도 나이 어린 계집이 다가와 앉았다.
 훅 하니 지분 냄새가 밀려들었다.
 저규는 계집이 다가오든 말든 상관이 없다는 표정으로 술잔을 기울일 뿐이었다.
 “홍아(鴻兒)예요.”
 저규는 말없이 그녀에게 술잔을 내밀었다.
 홍아라 했다.
 그녀는 발그레하게 얼굴을 붉히고 입가에 웃음을 띄우며 손을 내밀어 술잔을 받았다. 저규는 술을 따르며 계집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열 여섯은 넘었을 것 같았지만 열일곱에는 이르지 못했을 것 같았다. 얼굴에 단장을 했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솜털이 목과 귓가에 남아 있었다.
 그럭저럭 미모를 지닌 계집이었다.
 입술이 도톰하고 눈썹이 상큼해 보였다. 주근깨가 많았지만 귀여운 표정을 가리지는 못했다.
 “들어!”
 계집은 말없이 술잔을 들이켰다.
 여기저기에서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나같이 개가 되어 있었다. 손을 계집들의 가슴에 넣고 주무르는가 하면 사타구니에 푹 박고 몸을 떤다. 성급하게 입술을 빨기도 하고 자신의 사타구니에 올려놓고 움찔거리는 자도 있었다. 숨 가쁜 호흡이 밀리고 계집들의 치마가 탁자까지 날아올라 술잔을 가리기 일쑤였다.
 계집들의 깔깔거리는 목소리가 대전을 울렸다.
 ‘이게 마지막 만찬이야.’
 저규는 갑자기 가슴에서 욱 하니 치미는 열기를 느꼈다.
 욕정이 아니었다. 모두가 불쌍하게 보였다.
 승리를 자축하거나 승전보를 듣고 마시는 술이 아니었다. 죽이기 위해 길을 떠나는, 그래서 언젠가는 죽을지도 모르는 사람들의 마지막 발악이었다.
 다인기가 고개를 돌렸다.
 하필 그가 앉은 자리는 저규의 옆자리였다.
 “저 장군.”
 저규는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다인기는 이미 질펀해져 있었다. 한 손은 계집의 가슴을 파고들어 떡 주무르듯 주물러대고 있었고 남은 한 손은 계집의 하체를 파고들고 있었다. 가슴의 옷자락이 파도를 맞은 조각배처럼 들썩이고 계집이 하체를 움찔거리다 허리를 비틀고 있었다. 다리 사이, 하체에 올라앉은 계집은 연신 상체를 들썩이며 술을 따라 입에 부어주고 자신도 마셨다.
 간혹 입을 벌리고 거친 숨을 불어내기도 했는데 그것만으로도 다인기의 손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저규는 한동안 그를 바라보다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도 사내였다.
 어찌 욕망이 없으랴마는 밀려오는 불안감과 미래에 대한 두려움으로 계집 따위에게는 손이 가지 않았다.
 ‘내가 이렇게 약한 사람이었나?’
 자괴감이 밀려왔다.
 자신만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참을 수 없는 수치가 밀려들어 얼굴이 붉어지게 만들었다.
 한 잔의 술을 털어넣은 다인기가 들릴 듯 말듯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마치 혼자말처럼 들렸지만 사실은 저규에게 들으라고 한 말이었다.
 “모든 것은 한 순간이야. 어차피 주어진 일이라면 받아들이는 마음도 필요해. 누군들 이러고 싶은 줄 아는가? 모두는 잠시 동안이라도 잊고 싶은 거야.”
 저규는 무언가 대답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굳이 머리 아프게 생각하지도 대답하지도 않았다.
 어차피 할말도 없었다. 사람은 나름대로 고통을 잊는 방법을 알고 있으며 아픔을 달래가는 방법도 달랐다.
 저규가 고민하고 고뇌하는 방법으로 고통을 잊으려 했다면 다인기는 그와 달리 계집의 가슴을 주무르는 것으로 고통을 잊고 싶은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것은 다인기의 마음일 뿐이지 저규의 마음은 아니었다.
 한참 동안의 난장판이 이루어졌을 때 얼굴이 거나해진 풍엽진이 몸을 일으켰다. 그의 손에 들린 잔에는 술이 넘치고······
 “모두 잔을 들어라.”
 계집들과 농밀한 짓거리를 하던 장수들이 몸을 세우고 자세를 바로하며 일제히 잔을 들었다. 아무리 술에 취하고 계집의 사타구니가 그립다 해도 그들은 절도가 있었고 모두가 자랑스러운 명조의 황군이었다.
 더구나 풍엽진은 그들의 상관으로 생사여탈이 그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것을 모르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사실 호열대를 조직한 사람도 풍엽진이었다. 오삼계 장군의 명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풍엽진이 아니라면 호열대를 조직할 생각을 할 장수는 없을 것이 분명했다. 아니, 그를 따르는 두 명의 부장이 머리를 굴렸다는 것을 모르는 장수는 없었다.
 결과적으로 그가 이끌던 장수들의 대부분이 호열대에 들었다. 풍엽진은 자신이 이끄는 천인호들과 백인호를 담보로 하여 출세를 노리는 사람일 수도 있었다.
 ‘죽는 사람은 우리야.’
 저규는 마음 속에서 심통이 나는 것 같았지만 어쩔 수 없이 잔을 들었다. 혼자 고민을 한다고 해서 별반 달라지는 것도 없다는 것을 아는지라 더 이상의 고민은 무의미했다.
 계집들까지 엉겁결에 잔을 들어올려 일제히 내민 손이 마치 지붕의 처마와 같은 모습이 되었다.
 “모두가 알다시피 우리는 극한으로 몰렸다. 그러나 이번 일이 성공만 한다면 명조는 새로이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본 장군은 여러 장수들에게 기대를 걸고 있다. 우리 명조의 앞날이 그대들의 어깨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잊지 마라. 자, 들자!”
 풍엽진은 분위기를 고양시키려 애쓰고 있었다.
 그로서는 당연한 임무였다.
 산해관을 지키면 그뿐, 어차피 호열대가 실패한다고 해서 목숨이 달아나는 사람은 풍엽진이 아니었다. 실패를 하면 호열대의 잘못이고 성공한다면 그것은 풍엽진이 공이었다. 어차피 마지막 가는 길에 선택한 것이 호열대의 목숨을 담보로 해서 도르곤을 죽이는 일이라면 못 할 것도 없었다.
 풍엽진으로서는 손해날 일이 아니었다.
 어차피 그는 호열대의 상관으로서 명령을 내리는 것으로 역할을 다할 뿐.
 흥청거리던 분위기가 한 순간에 비장해졌다. 누구 하나 입을 열지 않았다. 마치 꿀 먹은 벙어리들만 모인 것처럼!
 일제히 잔이 들려졌고 입으로 다가갔다.
 저규도 망설이지 않았다. 지금과 같이 비장한 분위기에서 술잔을 뺀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어이없는 일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는 그였다.
 그들 모두는 경험이 있었다.
 적이 진을 구성한 깊숙한 곳에 들어가 군량미를 탈취해 본 장수도 있었고 진군하는 적을 습격해 승전보를 올린 장군도 있었다. 모두가 혁혁한 전공을 세운 장군들이었지만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작전은 말처럼 행동하기가 쉽지 않았다.
 지난 육 개월 동안의 피나는 훈련이 있었다 해도 사람의 심장이 얼어붙기는 별반 다를 바가 없었기 때문!
 ‘모두 죽을지도 모른다.’
 죽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다면 그것은 머리에 이상이 생겼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리라.
 저규는 머리가 아팠다.
 자신도 살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없었다. 얼마의 적이 있는지, 어디에 번초(番哨)가 있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곳! 무작정이라 할 수밖에는 없었다. 물론 육 개월간 끊임없이 연습했다. 흙과 나무로 적진의 모양을 세밀하게 만들어놓고 눈에 익도록 연습했다. 눈을 감아도 적진이 자리한 조양성의 외곽이 어떻게 생겼고, 조양성 성벽의 구조와 건물이 어디에 있는지도 알고 있다. 물론 적진은 조양의 내부에 자리한 것은 아니다. 훈련을 받은 그대로가 틀림없다면 도르곤이 이끄는 후금의 중군은 조양성이 한눈에 보이는 대릉하의 강변 언저리에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은 시시때때로 변한다.
 지난 육 개월 전 변복(變服)하고 만주로 들어갔던 군병들이 알려왔던 모든 것이 오차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 또한 머리가 빈 놈일 것이다.
 “모두 살아 돌아오라. 영광이 기다릴 것이다. 그대들은 일등공신으로 황제를 알현할 것이다.”
 호등량의 말이 사실이라면 얼마나 좋으랴!
 “와······!”
 “황제 폐하! 만만세!”
 그의 말이 떨어질 때마다 함성이 울렸다. 거칠게 뿜어내는 함성과 고함, 숨결로 지심촉이 발정난 계집처럼 흔들렸다. 결국에는 꺼지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살아나 다시 대전을 밝혔다.
 저마다 자신들의 눈 앞에 죽음이 아닌 찬란한 영광이 펼쳐져 있다고 착각하는 듯했다.
 저규는 이를 악물었다.
 물론, 명조를 위해서라면 목숨을 버릴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적의 우두머리를 죽이고 분사(憤死)를 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멋있을까 하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죽음이 눈 앞으로 다가오고 있다고 생각하니 온몸이 떨릴 지경이었다.
 안타까웠다.
 저규에게는 아직도 할 일이 너무도 많이 남아 있었다.
 마음과 실천은 다르다.
 생각한 그대로 몸이 따라만 준다면, 아무런 고민이 없다면, 목숨이 두 개쯤 된다면 두려움 따위는 가지지 않아도 좋으련만!
 모든 것은 현실이었다.
 “이제 각자 계집들과 마음껏 회포를 풀어라. 계집들은 장군들을 지아비처럼 반길 것이고 몸과 마음으로 녹여줄 것이다. 내일 새벽이 되기 전에 출정한다. 각자의 짐은 막사에 준비해 놓도록 하겠다. 무운을 빈다.”
 풍엽진은 마음이 바쁜 것 같았다.
 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열다섯 살밖에 먹어 보이지 않는 새파란 계집을 겨드랑이에 끼고 나가버렸다. 그가 사라진 문에는 잠시의 정적이 흘렀다.
 한동안 침묵이 흐르자 다인기가 일어섰다.
 “마음껏 즐겨라. 내일부터는 발이 부르틀 것이다.”
 그는 자신의 하초(下焦)에 사타구니를 대고 정신없이 비비던 계집을 껴안고 밖으로 나갔다. 전포 안에 입은 경의가 반이나 흘러내린 것으로 보아 그는 이미 절정의 순간을 만끽한 것 같았다. 그는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자신이 생각해 놓았던 곳으로 갈 것이다. 그리고 밤이 새도록 계집을 농락할 것이다.
 자신을 태우듯!
 그것이 신호였다.
 대원들은 약속이나 한 듯 계집들을 이끌고 사라져 갔다. 혹은 문을 열고 나가기도 했지만 하체를 주체하지 못하는 장수들은 대전의 벽에 붙은 방으로 사라지기도 했다.
 반 각이 지났을 때 전실에 남아 있는 사람은 저규와 호등량뿐이었다. 물론 그들을 기다리는 두 명의 계집도!
 “저 장군.”
 “예, 장군!”
 호등량이 부르자 저규는 가볍게 대답하며 얼굴을 돌렸다. 호등량의 얼굴에 웃음기가 흘렀다.
 반듯한 이마, 오뚝한 코, 얼굴에 길게 그어진 검상(劍償)만 아니라면 천상 송옥(宋玉)이다. 그러나 검상은 그의 얼굴을 조금은 흉측하게 만들어 버렸다. 오른쪽 눈썹에서 시작해 왼쪽 턱까지 이어져 있어 얼굴에 표정이 떠오를 때마다 징그러운 토룡(土龍)이 움직이는 것처럼 비틀렸다. 언젠가 섬서행도사의 장수로서 가욕관에서 달단() 장수의 목을 베며 얻은 것이라는 소문이 있는 상처! 그는 자신의 얼굴에 새겨진 상처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장수였다.
 호등량이 계집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입을 열었다.
 “자네는 너무 고지식해. 아니, 삶에 대해 너무 고착하는 것 같아. 때로는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몸과 마음을 던지는 것이 필요해. 죽음도 내일이고 삶도 내일이야.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오늘에 전념하는 것이지. 그러나 너무 무겁게 생각하면 언젠가는 가벼운 것은 생각할 수가 없어. 때로는 모든 것을 잊고 미친놈처럼 행동해도 좋은 거야. 평생에 그런 기회는 그리 많이 오지 않아. 나는 자네의 심화가 두렵군.”
 호등량은 얼굴에 가벼운 웃음기를 띄운 뒤 계집을 옆구리에 끼고 토악질을 해대며 밖으로 나갔다. 아마 저규에게 말을 하기 위해 토악질을 참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저규는 자신의 몸에 기댄 계집을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그런대로 미모가 있는 계집이라 생각했었으나 자세히 보니 예쁜 얼굴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귀엽다는 말이 가장 어울리는 찬사라 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그럭저럭 미인의 축에 든다고 생각했지만 다시 보니 생각이 바뀐 것이다. 그것이 자신의 마음에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다. 그저 눈에 보이는 대로 인식하면 그뿐!
 “지지리도 못생겼구나.”
 저규는 농을 걸었다.
 그녀가 어떻게 나오든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마음이 풀린다면 계집에게 욕이라도 해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니, 생각 같아서는 그 자리에서 눕혀놓고 무작정 자신의 일부를 그녀의 몸에 들이대고 싶었다. 그리고 발정난 말처럼 그녀의 하체에 자신의 욕정을 쏟아붓고 싶었다.
 미친 듯 움직이고 싶었다.
 그녀의 거친 호흡과 자지러지는 소리를 듣고 싶었다. 그래서 마음이 풀린다면 그녀를 짓이겨 버리고 싶었다.
 갑자기 치솟는 열기!
 어차피 계집은 양가(良家)의 양녀는 아닐 것이었다.
 산해관 부근에는 적지 않은 청루(靑樓)와 홍루(紅樓)가 있다. 그들은 군벌이 옮길 때마다 쫓아다니며 계집을 팔고 술을 판다. 오랜 전쟁으로 지친 군병들과 장수들은 그녀들의 하체에 파묻혀 객고를 풀고 한 순간의 희열로 아픔을 삭인다.
 그녀의 신분이라 해서 다를 것은 없을 것이다.
 “장군님도 크게 다르지 않군요.”
 제법 대가 있는 계집이었다.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는 호열대의 대원들이 어느 정도라는 것은 이미 설명을 듣고 왔을 계집이었다. 살인을 하기 위해 밥먹듯 연습을 했다는 것도, 사람을 죽인다고 해서 달라질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도!
 감정이 메마른 사람이라는 것도!
 “허······!”
 저규는 헛웃음을 뿌렸다.
 그녀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육 척을 겨우 넘기는 키, 낮은 코, 크지만 어미(魚尾)가 찢어진 눈, 각이 진 턱. 사실 빼어난 얼굴이라 할 수는 없는 얼굴이었다. 사부만이 저규가 잘생겼다고 이야기했을 뿐! 아니, 사내답다고 했던가?
 사매도 분명 그가 잘생겼다고 말했었다.
 이미 죽은 여자!
 차라리 생각이나 말지!
 저규는 나이 여섯 살이 넘어서면서부터 단 한 번도 자신이 잘생겼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저규는 가슴에서 치밀어 오르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녀가 던진 말이 슬며시 웃음을 자아내게 만들었던 것이다.
 “너는 나하고 자고 싶은 것이냐?”
 “물론이에요.”
 “이유는?”
 “난 고고한 척하는 사람은 질색이에요. 장군은 고고한 척하려고 하지만 어차피 다른 사람과 다를 바가 없어요. 장군은 어차피 저를 짓이기고 싶을 거예요.”
 저규는 입가에 웃음기를 물었다.
 그녀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 오히려 욕망을 자극하는 말이라고 할까! 그녀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안 이상 몸을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더구나 그녀의 마음을 이해하고도 남았다.
 아마도 명령을 받았으리라.
 내일 새벽 일찍이 죽음을 향해 달려가야 하는 그들에게 몸을 주라고······ 주지 못하면 목숨을 잃어야 하는 고난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좋아. 너를 죽여주지.”
 저규는 몸을 일으켰다.
 계집도 따라 일어났다. 그들은 서로의 어깨와 허리를 부축하며 대전을 나섰다.
 지나친 술이 속을 거북하게 했지만 저규는 애써 참았다. 계집의 몸에 배설이라도 해주고 싶다는 생각으로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방을 찾아 걸어갔다.
 
 
 四
 
 
 끈적거리는 신음!
 계집은 오뉴월에 늘어진 밀가루반죽처럼 질기고 끈끈이풀처럼 끈적거렸다. 문어의 빨판처럼 떨어지지 않았고 송곳처럼 가슴을 파고들었다.
 하체의 일부를 뽑아버릴 것 같은 힘을 지니고 있었고 마치 이로 잘근잘근 깨무는 것처럼 진한 욕정을 가지고 있었다. 거기에 끈적거리는 점액성의 액체로 둘러싸인 송충이처럼 온몸의 솜털을 곤두서게 만드는 계집이었다.
 욕정은 화산 같았다.
 한 순간에 무너진 이후로도 그는 쉬지 않고 입을 놀렸고 혀를 움직였다. 입술을 맞추었고 혀를 빨아들였다. 타액을 마셨고 장미수(薔薇水)를 머금었던 계집의 육체와 혀를 목구멍으로 당겼다.
 거친 손은 계집의 몸 구석구석을 핥았고 유두의 감촉에 손가락을 떨었다.
 그리고 한 순간의 무너짐!
 굴곡을 이루던 허리의 격렬함이 시든 후에도 계집은 끊임없이 그의 가슴을 파고들었고 몇 번인가 아픔이 있고 난 후에야 잠이 들었다.
 진한 여자의 향기!
 사매의 몸을 탐한 이후 처음이었다. 사매가 죽고 난 후로는 여인을 접해 볼 기회가 없었다. 아니, 그녀만을 사랑하리라 생각했던 스스로의 약속을 지켜온 그였다.
 계집의 몸에 자신의 일부를 깊숙하게 밀어넣으면서도 사매를 생각했었다. 계집의 거친 호흡이 귓가를 파고들 때에도 사매의 가녀리게 흔들리던 호흡을 생각했다. 손바닥에서 이지러지는 계집의 가슴을 느낄 때도 사매를 생각했다. 그리고 뿌리까지 파고드는 하체의 촉감을 느끼면서도 사매를 생각했다.
 유일한 여사제!
 사부가 맞아들인 여섯 명의 제자 중 유일한 여자였다. 그녀의 몸 구석구석을 더듬었던 아련함이 계집의 몸에서 느껴졌다. 그것으로 족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모두 잊고 싶었다.
 마지막으로 몸에서 모든 것이 빠져 나가는 것을 느꼈을 때 사매의 얼굴이 사라져 버렸다.
 
 깊이 잠든 계집의 품을 벗어난 저규는 몸에 옷을 걸치고 슬그머니 빠져 나와 성의 곳곳을 오래도록 거닐었다. 여기저기에서 달빛을 벗삼아 번초를 서는 군병들의 모습이 보였지만 누구도 그를 멈춰세우거나 산책을 방해하지는 않았다.
 성벽은 달빛을 받아 밝게 빛나고 있었다.
 돌을 쌓고 회로 반죽해 틈새를 메운 성벽, 판축성법(板築城法)에 따라 쌓여진 토성의 일부!
 화살을 막는 각둔(角遁)과 날아오는 화살로부터 몸을 피하는 여장(女薔)도 보였다. 적에게 화살을 쏘는 전루(箭樓)가 달빛을 받아 창백하게 빛을 뿜었고 망루(望樓)에서 오락가락 거니는 군병들이 줄에 걸려 움직이는 꼭두각시처럼 보였다. 곳곳에 타오르는 횃불이 아련한 환상처럼 다가오고······
 전문을 막아선 문루(門樓)가 웅크린 곰처럼 보였다.
 나성(羅城)의 일부와 담처럼 둘러쳐진 옹성(甕城)의 성벽이 소림사를 둘러친 담에 나 있던 사문(寺門)처럼 느껴지기를 수차례!
 소림사의 외원을 둘렀던 수천 장 길이의 담은 마치 대망(大)이 꿈틀거리는 것 같았다. 아련한 추억! 아련한 환상! 그리고 무너지는 모든 사념들!
 한동안 서성거렸어도 사색을 방해하거나 길을 가로막는 군병은 없었다. 성의 외부를 감시하는 번초가 있고 망루가 있지만 내부에도 수백 개의 번초들이 있고 곳곳에 세워진 망루가 있어 성 내부를 감시하고 편경(片鏡)을 울려 침입자의 통행을 제한한다. 그러나 이미 입막음이 되어 있는지 길을 막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찬바람 속으로 걷는 기분이 색달랐다.
 모든 것이 허상 같았다.
 그의 몸에 걸린 옷!
 그것은 호열대의 장수들에게만 주어지는 녹피의(鹿皮衣)였다. 그것만으로 신분을 보장받을 수 있어 성 안 곳곳 어디라도 통행할 수 있었다.
 밤이 이슥해진 후인지라 눈은 오래 전에 그쳐 있었고 하늘에는 푸른 달만이 빛을 뿌리고 있었다. 자잘하게 부서진 별빛이 달을 따라 돌며 편광을 뿌리고 있었다.
 간혹 발에 부서지는 백설의 비명!
 “후!”
 긴 한숨!
 넓은 반석!
 산해관성은 좁은 곳이 아니었다. 만리장성이 이어지는 지성(枝城)의 끝이라고 하지만 곳곳에 진(陣)이 설치되어 있는 어떤 성보다 컸다. 그래서인지 성 안에는 가산이 있고 문루가 있으며 높이 뜬 달을 조망할 수 있는 누각도 있었다.
 호수!
 산해관성 안에는 작은 호수가 두 개 있다.
 동쪽, 진황도 방향으로 치우진 호수는 반월 모양으로 이백여 장의 넓이를 지니고 있었다. 호수 주변으로는 바위로 다듬어져 있었고 먼 곳에서 캐온 풀과 나무들로 치장되어 있었다.
 풀은 모두 말라죽고 잎을 떨군 나무만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저규는 호수를 둘러싼 여러 개의 반석 중에서 유난히 넓어 보이는 바위의 한곳에 주저앉아 수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달은 이미 나체를 드러내는 계집처럼 물 속에 잠겨 흠뻑 젖어 있었다.
 “내일인가? 아니, 오늘이군.”
 무거워지는 감정을 녹일 수가 없었다.
 생각해 보면 모두가 부질없는 일이었다. 아니, 도주하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았다. 그렇게만 한다면 살아날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기운 국운이었다.
 소문이라면 그만이지만 아니 땐 굴뚝에 연기나는 법 없다. 은밀하게 퍼지는 소문은 그 꼬리만큼이나 믿을 수 없지만 거짓이라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사천(四川)에서 힘을 불리던 이자성(李自成)이 유군(遊軍)이 되어 북경으로 진격하고 있다는 소문이었다. 그와 함께 활동하던 장헌충(張獻忠)이 중원의 남서부를 장악하고 있으니 섬서(陝西)에서 달단을 막고 있는 섬서행도사의 수비군도 북경으로 진군을 하지 못한다는 소문!
 더구나 그들에게는 국경수비를 하기 위해 설치했던 아홉 개의 진 중 삼진(三鎭)의 군병이 있었다. 삼진은 모두 섬서(陝西)에 설치되어 있었는데 감숙이 심하게 위축되어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자성과 장헌충은 그 세 개의 진에 몰려 있던 군병들을 휘하로 끌어들여 세를 불린 후 중원의 일각을 손에 넣었다.
 소문이 사실이라면 북경은 풍전등화였다.
 이자성이 이끄는 유군은 북경으로 향했고 소문에는 오십만의 군병이라 했지만 중원인들은 떠벌리기를 좋아하고 과장을 좋아하니 그 숫자는 조금 줄어들리라.
 그래도 십만은 넘을 것이다.
 오삼계 장군이 북경을 지원하고 싶어도 어쩔 수 없을 것이다. 만에 하나 오삼계 장군이 산해관을 비우기라도 한다면 후금국의 기병(騎兵)들이 한 순간에 물밀듯이 밀려들 것이고 북경이 무너지는 것은 같은 이치!
 “후!”
 한숨만이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방법은 없었다.
 유일한 방법은 밤을 빌어 도주를 하는 것이라 하지만 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국운이 어떻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고 동료들을 배신하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육 개월간 훈련을 했다.
 산을 넘고 석벽을 타며 동굴 속에 은신하고 물 속에 숨는 훈련, 백 보의 거리에서 활을 당겨 정확하게 목표를 맞추는 훈련, 보름 동안 음식을 먹지 않고 견디는 훈련!
 그뿐인가?
 똥통에 숨어 사흘을 지냈다. 시저(屍 : 구더기)를 먹으며 칠 일을 견뎌보았다.
 지난 육 개월간 호열대는 혹독한 훈련을 받았다.
 애초부터 목적은 알려지지 않았었다. 훈련을 마치고 나서야 목적이 알려졌을 정도였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목적이었지만 발길을 돌리기에는 이미 늦은 시점!
 그들은 한 몸이었다.
 서로가 도와주고 밀어주어야 하는 상황, 각각은 맡은 임무가 있었고 누구도 채우지 못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만에 하나 한 사람이 빠지면 그만큼 어려워진다. 도주한다는 것은 모두에 대한 배신이었다.
 “후······!”
 또다시 긴 한숨!
 그렇게 밤이 새고 있었다.
 
 혁낭!
 그것은 호열대의 모든 대원들에게 한 개씩 지급된 것이었다. 그 동안 입고 먹고 사용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물건들이 들어 있는 혁낭!
 저규는 혁낭을 열어보았다.
 수십 가지의 물건들이 들어 있었다. 승려로 위장할 수 있는 법복(法服), 도막도막 끊겨 있지만 연결하면 지팡이가 되는 물건, 삭도(削刀), 염주, 묵주, 혁피화, 두 권의 불경, 짐승가죽으로 만든 장갑, 여러 가지 암기, 가사(袈裟)까지!
 혁낭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승려들이 등에 지고 다니는 바랑이라 해야 옳을 것이다. 물건들은 한결같이 탁발승에 어울리는 것들이었다.
 비상식량으로는 쌀가루와 곡식을 갈아섞은 미숫가루 조금에 마른 알곡이 있었다. 다른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움직이기에는 반드시 필요한 물건들! 기름 먹인 종이에 싼 어포(魚脯)와 돈육포(豚肉脯)가 있었다. 그것은 먼 길을 가거나 은밀하게 잠복하기 위해서는 극히 필요한 것이었다.
 혁낭과 같이 지급된 것은 병기들이었다. 물론 병기가 아닌 것도 있었다. 그것들은 암행을 하거나 침투를 위해서는 꼭 필요한 것들이었다.
 가늘고 긴 밧줄. 손의 관절처럼 만들어져 줄을 당기면 조여지는 비조(飛爪)! 이것은 성벽을 타고 오르거나 적의 몸에 던져 걸리게 한 후 잡아당기는 병기였다.
 철질려(鐵藜)와 비도(飛刀) 같은 네 종의 암기!
 양가죽으로 만든 물주머니도 다른 사람에게 들키지 않고 오래도록 암약하거나 먼 거리를 이동하려면 반드시 필요한 물건 중의 하나였다.
 굵은 갈대에 옻나무 칠을 한 빨대, 갈대의 대공으로 만든 것은 약한 힘으로도 쉽게 부서지거나 갈라지지만 옻칠을 해두어 발로 밟아도 쉽게 부서지지 않는 것이다. 도합 세 개. 각각 일 척의 길이를 지니고 있었으므로 연결하면 도합 삼 척의 길이!
 허리에 매는 요대.
 그 요대에 달린 세 개의 작은 주머니, 주머니에 담긴 동전과 소금!
 “하하, 마지막 선심이라도 쓰겠다는 것이로군.”
 부순연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자꾸만 가깝게 접근하려고 하는 그가 부담스러웠다.
 저규는 의미없이 웃어주었다.
 부순연이 친하지도 않은 자신을 바라보며 실없는 소리를 주절거리는 것이 마음 속에 가득 찬 두려움을 잊기 위한 것임을 아는 이상 매정하게 대할 수만은 없기 때문이었다.
 호열대원들은 서두르기 시작했다.
 아침이 밝아오기 전에 성문을 나서야 했기 때문에 조금도 주저할 수가 없었다.
 대원들은 한결같이 자신들에게 지급된 혁낭을 살피고 물건들을 집어넣기 시작했다. 부산해지는 움직임 속에 저규도 섞여 있었다.
 
 
 五
 
 
 이른 새벽!
 머리 위에는 구름이 끼어 있었고 달은 때때로 얼굴을 비추었다. 어두운 하늘 아래 나선 스무 명은 성벽의 그림자를 방패 삼아 조심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나같이 혁낭을 짊어지고 부지런히 길을 걷는 사람들!
 호열대는 그렇게 움직이고 있었다.
 누구의 눈에도 들키지 않기 위해 밤이 새기도 전에 막사를 나선 그들은 산해관의 남문을 빠져 나와 진황도가 있는 동쪽으로 이동했다. 그들이 움직이는 것은 누구에게도 알려져서는 안 되는 일이었기에 부득이 조심스럽게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오삼계 장군은 나타나지 않았다.
 귀가 베일 듯 차가운 바람이 몰려와 그들은 짐승가죽으로 만든 장갑으로 얼굴을 감싸야 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마지막 일이다.”
 호등량은 애써 신이 난 듯 말했지만 모두들 침울했다. 그의 말이 모두의 마음을 보듬지는 못했다.
 저규도 마찬가지였다.
 뼈가 휘어지도록 힘든 훈련과정을 마치고 비장한 각오를 가졌다고는 하지만 오만가지 잡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얼굴조차 알 수 없는 부모님이 보고 싶었고 숭산(崇山)을 떠날 때 중악묘(中岳廟)까지 따라나와 소실관(少室關)에 몸을 기대고 서서 손을 흔들던 벽채운이 생각났다. 그것이 그녀와의 마지막이었다.
 성공해서 그녀를 데리러 가기로 약속했건만······
 후회가 밀려왔다.
 저규는 한때 그녀의 애틋한 사랑을 알면서도 애써 무시했었다. 그리고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부터는 미친 듯 사랑을 했다. 그녀의 정성이 단순히 고아에 대한 호기심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때부터!
 그녀의 사랑은 진심이었다.
 약속을 했었다.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사랑을 배신하지 않겠다고.
 사매는 죽었다.
 누가 죽였는지는 알 수 없다. 그녀를 죽인 자를 찾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꿈일 뿐이다. 한때는 모든 것을 버리고 싶었다. 일찍이 그녀와의 보금자리를 꾸몄다면 아픔은 없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지금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어쩔 수 없이 택한 일이 군문에 드는 일이었다. 자신을 버리고 싶었기 때문에 택한 것이 군문이었다.
 모든 것이 슬픔이 되었다.
 ‘이제는 생각나지도 않는군.’
 생각하면 우습기까지 한 일이었다.
 그토록 사랑했던 사매의 얼굴이 잊혀져 가고 있었다. 그녀의 달콤했던 몸도 생각나고 아련한 목소리도 귓가에 맴돈다. 그러나 얼굴은 기억나지 않았다.
 어울리지 않는 사이라 생각했었다.
 고아로 떠돌다 우연히 상처를 입은 소림의 승인을 구해 준 인연으로 소림의 제자가 되었지만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여전히 고아였고 사형제들은 천대를 했다. 사부는 늘 고심을 했지만 저규를 바라보는 사형제들의 시선을 바꾸지는 못했다. 저규와 사형제들은 물 위에 뜬 기름처럼 따로 놀았다.
 그것이 싫었다.
 벽채운의 개봉에서도 가문은 보기 드문 토호(土豪)였다.
 수만 평의 전답을 가지고 있었고 장원이 있었으며 수십 명의 하인과 호위무사를 거느리고 있었다. 저규와 비교해 보면 그야말로 천지 차이였다.
 더구나 그녀의 가문은 다섯 개의 상단을 거느린 부호였다. 육로를 따라 이동해 서역(西域)까지 움직이는 상단, 해동(海東)까지 이르는 선단(船團), 그녀의 부모는 고아를 사위로 맞고 싶지는 않았었는지 저규를 만나주지도 않았다.
 그녀의 부친은 뛰어난 무인이었다. 가전(家傳)의 무공을 대성했다고 알려졌다. 무림에서도 무시 못 하는 제법 중요한 무인으로 알려졌다고 했건만!
 그녀의 부친은 저규가 재산을 노리고 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녀의 부모는 소림사에 적지 않은 시주를 했고 그 덕으로 사매가 소림의 제자가 될 수 있었다.
 그녀의 부모가 둘의 사랑을 반대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벽채운이 죽다니······
 “정신차려!”
 잠시 깊은 생각에 빠져 들었던 모양이다. 저규는 갑자기 들려오는 목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다인기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저규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규는 화들짝 놀라 앞을 바라보았다.
 성벽이 보였다.
 날이 밝기 전에 성벽을 넘어가야 했다. 같은 명조의 군병이라 해도, 같은 군벌의 소속이라 해도, 또한 같이 성벽을 지키는 군병들이라 해도 들키지 말라는 것이 풍엽진의 명령이었다. 그는 들키게 되면 아군이라 해도 죽이라고 명령했었다.
 멀리 뿌연 안개가 번지고 있었다.
 하루에서 가장 어두운 시간을 말한다면 당연 달이 지고 해가 뜨기 전의 시간이다. 더구나 동절기(冬節期)가 되면 달과 해가 교차되지 않고 간격이 뜨기 때문에 더욱 어두웠다.
 “성벽을 넘는다.”
 호등량의 목소리가 긴장되었는지 가볍게 떨리는 것 같았다. 모두들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저규는 자신의 곁에 선 부순연을 바라보다 허리에 차고 있는 박도를 가볍게 만졌다. 본시 검을 수련한 그였지만 군문에 들어서는 늘 박도를 사용했었다. 이제는 도를 검보다 잘 사용할 수 있었고 검법을 도법으로 변화시켜 사용하는 데도 문제가 없었다. 사실 소림의 병기술은 다양했지만 산하(山下)에 알려지기는 박투(搏鬪)와 검법뿐이었다.
 소림의 무공은 외공과 내공을 복합한 것으로 강한 기파를 흘린다. 외공은 박투로 나타나고 내공은 병기술로 나타난다. 흔히 소림의 병기술은 비발(飛鉢)이나 곤법(棍法), 창법(槍法), 검법(劍法) 등이 알려졌지만 도법도 무시하지 못한다.
 한때 소림의 승려는 계도(戒刀)라고 불리는 도를 차고 다닌 적도 있으리만치 도법을 숭상했었다. 검법보다는 도법이 소림의 무공에 어울리기도 했다. 역근경(易筋經)을 바탕으로 하는 소림의 무공은 형의권(形儀拳)과 철포삼(鐵布衫)이나 나한기공(羅漢氣功) 같은 외공, 적의 공격을 막는 강한 반탄 등과 같은 기법을 지니고 있어 날래고 변화가 많은 검보다는 묵직하고 힘을 바탕으로 하는 도법이 어울렸다.
 사부도 저규에게는 도법을 중시하라고 했었다.
 새로이 지급된 병기도 박도였다.
 “어서 움직여!”
 나직한 목소리는 다인기의 음성이었다.
 호열대는 이 열로 섰다.
 호등량이 가장 앞에 서서 지휘하고 다인기가 뒤로 물러나 후미를 맡았다.
 “저 장군은 뒤로!”
 다인기가 나직하게 소리를 질렀다. 그는 자신의 짝으로 저규를 선택한 것 같았다. 항상 이 인이 한 개의 조로 활동하는 것이 호열대의 습관이었다.
 물론 적과 조우하거나 후금의 진영에 다가가면 달라지지만 성벽을 넘어갈 때는 조의 구별이 없었다.
 저규는 뒤로 물러나 대열의 후미에 섰다.
 츄리리리리!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리고 성벽을 향해 화살이 날아갔다. 강노(剛弩)를 이용해 쏘아올린 화살의 끝에는 삼마를 꼬아만든 마승이 달려 있었다.
 철커덩!
 화살이 성벽 안으로 떨어진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화살도 흔히 적을 향해 쏘는 삼각형이나 유엽형(柳葉形)의 촉이 아니라 배의 묘두(錨頭 : 닻)처럼 갈고리가 달린 것이었다. 약속이나 한 듯 호열대의 전 대원은 성벽의 어두운 부분에 매미처럼 달라붙었다. 이미 번초를 물리고 성벽을 비워두기로 한 지역이기는 하지만 만에 하나 명령을 받지 못해 나타나는 군병이 있어 들키기라도 하면 재수없는 일이었다.
 국조는 기울고 있다.
 본시 명조의 군대는 다양한 민족들이 섞여 있었다.
 크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산해관을 수비하는 군병들 중에 말갈인이나 달단인, 여진인(女眞人)이나 고려인(高麗人)이 없으라는 법이 없었다. 특히 고려인들은 해동의 풍파를 피해 몰려왔으므로 적지 않은 수가 군병으로 산해관에 몰려 있었다.
 명군 중에도 적과 내통을 하는 자들이 있을 것이고, 소문이 난다면 결국 좋은 일이 있을 리 없었다. 명조가 든든했을 때는 그들의 발호가 없었고 의심이 가지 않았지만 막상 국조가 기울고 경각에 달한 지금 그들이 영원히 명조의 편에 서서 자신들의 동족을 도와 명조의 군병들에게 활을 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명조를 위협하는 자들은 만주를 지배하던 여진인과 초원의 황제라 자처하는 달단족이었다. 그들은 명조의 군대에 섞여 있는 이민족들과는 한 형제들이다. 팔이 안으로 굽는다는 것을 생각하면 조심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방사형으로 진형을 짜고 어둠 속을 감시하라.”
 호등량은 나직하게 입을 열어 명령을 내린 뒤 몸을 돌려 화살에 달린 마승을 당겨보았다. 팽팽하게 늘어진 마승은 성벽에 세워진 여장에 걸렸는지 움직이지 않았다.
 호등량은 몸을 굽히고 혁낭을 단단하게 몸에 묶고 물주머니도 허리와 허벅지를 두르는 천으로 묶어 고정시켰다. 그의 모습을 바라보던 전 대원이 일제히 움직였다.
 저규도 혁낭의 끈을 잡아당겨 팽팽하게 하고 물주머니의 주둥이를 단단하게 묶었다. 남은 마승으로 허리에 두르자 물주머니는 떨어지거나 풀어질 것 같지는 않았지만 출렁거리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가죽요대에 매여진 앞 주머니를 뒤져 가는 마승을 꺼냈다.
 물주머니는 양이나 사슴의 머리를 자른 뒤 배를 가르지 않고 거꾸로 뒤집어 내장과 몸체를 끄집어낸 것으로 가죽에 상처를 입히지 않은 것이다. 가죽을 뒤집어 몸체를 꺼내면 네 다리만 붙는다. 예리한 칼로 다리의 관절을 끊고 다시 뒤집어 원래의 모양대로 하면 훌륭한 물주머니가 된다. 가죽으로 만든 물주머니는 웬만한 추위에도 얼지 않을 뿐 아니라 가죽에 흐르는 유막(油幕)으로 인해 샐 염려가 없다.
 저규는 밖으로 튀어나온 네 다리에 가는 마승을 묶어 허벅지에 단단하게 묶었다.
 마지막으로 가죽으로 만든 장갑을 꺼내어 꼈다. 장갑은 마승을 잡을 때 마찰을 줄여 손바닥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만약 미끄러지기라도 한다면 손바닥은 뜨거움에 익어버릴 것이고 전력에 막대한 손실을 가져 올 수도 있었다.
 “올라간다. 내가 먼저다.”
 호등량이 앞장을 섰다.
 “나머지는 방사형으로 방어진을 짠다.”
 다인기가 나직하게 소리를 질렀다.
 처음에는 방사형의 진을 짜고 앉아 있었지만 혁낭을 다시 매고 물주머니를 몸에 부착시키느라 진형이 흐트러져 있었다.
 호등량을 제외한 모든 대원들이 반원형으로 앉았다. 성벽을 등에 지고 밖을 보는 형태로 둘러앉은 대원들은 한결같이 숨을 몰아쉬었다.
 저규도 한 손으로는 두 자루의 철질려를 움켜쥐고 앉았다. 오래도록 연습을 했고 만일의 상황에 대비한 훈련을 했으므로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타탁!
 성벽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호등량이 마승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이미 수백 번의 훈련 덕분인지 그의 몸은 빠르게 이동했다. 마치 평지를 걷는 것 같은 그의 모습은 사십을 넘긴 장군 같지 않았다.
 출렁!
 마승이 내려왔다.
 호등량이 타고 오른 마승이 아니었다. 그것은 성벽으로 올라간 호등량이 자신이 가지고 있던 밧줄을 내려보낸 것이었다. 그들 모두는 각각 십오 장의 길이에 이르는 가는 마승을 지니고 있었다.
 탁!
 다인기가 손으로 바닥을 치고 주먹을 들어올렸다. 기다렸다는 듯 두 명의 대원이 마승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하나는 강노로 쏘아올린 마승이었고 다른 하나는 호등량이 내려보낸 마승이었다.
 저규는 눈 앞을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만에 하나 접근하는 자가 있다면 아군이라 해도 죽여야 했다. 그들에게 들키기라도 한다면 착오가 일어날 것이고 결국은 죽음과 연결될 수도 있었다.
 호열대에게 아군의 개념은 없었다.
 이제 같은 명조의 군대라 해도 적으로 간주할 수밖에 없었다. 아군이라면 자신들, 호열대의 대원들뿐이었다.
 다시 두 줄의 마승이 내려왔고 네 명이 매달렸다.
 남은 대원들은 더욱 긴장해 주변을 훑었다. 저규는 간혹 눈을 감았다 다시 뜨고는 했다. 한곳을 계속해 쳐다보면 움직이지 않는 물체도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게 마련! 그것이야말로 번초를 서거나 고정된 물체를 보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한 가지였다. 긴장을 했을 때는 고정된 물체가 다가오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었다.
 추르르르르!
 성벽에 무엇인가 밀리는 소리가 들리고 다시 네 개의 마승이 내려왔다. 순식간에 마승이 여덟 개가 되었다. 여덟 명이 일어나 밧줄에 매달렸다.
 남은 사람은 다섯!
 만에 하나 누군가 다가온다면 남아 있는 다섯 명이 처리해 주어야 한다. 자신은 제쳐 두더라도 성벽에 매달린 대원들을 보호해 주어야 했다.
 타타탁! 드르르르······
 성벽 위에서 가볍게 두드리는 소리가 났고 세 개의 마승이 끌어올려졌다. 저규는 일어서서 주위를 살펴본 뒤 마승에 매달렸다. 이미 열다섯 명은 성벽으로 올라갔고 남아 있던 다섯 명이 올라갈 차례였다.
 성벽은 높았다.
 오 장을 넘을 것 같은 높이였다.
 저규로서는 내공을 운용하면 능히 삼 장을 솟구칠 수 있었다. 그러나 가능한 한 내공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몸을 날릴 때 옷자락이 펄럭이게 되고 소리가 나기 때문이었다.
 물론 다른 대원들 중에서도 내공을 지닌 동료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모두가 자신의 사문을 속이고 내심을 보이지 않지만 간혹 보여주는 모습으로 판단해 볼 수 있었다.
 성벽으로 올라가는 데는 숨 두 모금 몰아쉴 정도의 시간이 소요되었다. 성벽으로 올라가보니 이미 네 명은 반대편으로 내려가 있었다.
 마치 대망이 담을 타넘듯 일사불란하고 은밀하게 이루어지는 행동이었다.
 이미 또 다른 네 명의 대원이 성벽을 걷듯 내려가고 있었다.
 성벽을 오를 때는 매달려 벽을 차듯 올라가지만 내려갈 때는 옆구리에 마승을 끼고 스치듯 풀어주며 두 발을 벽에 붙이고 내려간다. 몸은 바깥으로 향하게 하여 다가오는 적이 없나 살펴보며 내려가야 하고 등은 성벽과 맞닿아 있어야 한다.
 저규와 나머지 네 명은 성벽에 엎드리듯 몸을 낮추고 다가오는 군병이 있는지 살펴보았다.
 만리장성은 북에서 침입해 들어오는 초원의 민족들과 여진인들을 막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진조(秦朝) 시황(始皇)이 쌓았다고는 하지만 오랜 세월이 지나며 증축을 하고 개축을 해서 그 흔적은 이미 사라지고 새로운 성벽이 되어 있었다. 성벽의 내부는 넓었다.
 마차 한 대가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넓은 성은 모두가 돌로 쌓여져 있었고 바닥까지 석판으로 깔려 있었다. 곳곳에는 흙벽으로 쌓여진 곳도 있다고 하지만 산해관은 성벽이 모두 돌로 쌓여 있었다.
 또다시 여덟 명이 내려가고 남은 사람은 다섯이었다.
 “가자!”
 다인기가 낮게 목소리를 흘렸다.
 그만 남고 네 명이 밧줄을 탔다.
 바닥으로 내려서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만약 손에 짐승의 가죽으로 만든 장갑을 끼지 않았다면 제법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저규는 땅에 내려서자마자 반원을 만든 대원들 틈바구니에 앉아 전면을 노려보았다.
 철퍼덕!
 마승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자신의 마승을 성벽에 걸어놓았던 대원들이 다가가 마승을 사려 혁낭에 걸었다. 마승은 개개인의 장비이기 이전에 공용장비였기 때문에 잊어버리기라도 한다면 임무를 수행하는 데 장애가 될 수도 있었다.
 마지막으로 다인기가 내려왔다.
 “서둘러!”
 호등량의 목소리가 울리자 대원들은 모두 몸을 일으켰다. 서둘러 혁낭의 끈을 늘였다. 성벽을 넘을 때는 몸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해야 하지만 먼 길을 가기 위해서는 적당한 여유가 필요했다. 몸에 달라붙듯 당겨놓으면 어깨를 파고들어 쉽게 지치게 될 것이고 쇄골(碎骨)과 근육에 무리가 간다. 적당하다는 것이 애매하기는 하지만 느슨한 정도가 맞아야 오래 매고 있어도 피로감을 느끼지 않게 된다.
 해가 떠오르기 전에 성벽을 넘는 데 성공했다. 호열대는 성벽을 뒤로 하고 목적지를 행해 걷기 시작했다.
 
 야트막한 야산이 호위하듯 서 있는 계곡을 따라 걸었다. 지난밤에 온 눈이 녹지 않아 발이 어는 것 같았고 계곡을 따라 불어오는 삭풍으로 입술이 얼어붙을 지경이었다. 다행스러운 것은 옷이 두껍다는 사실!
 삼산지경(三山地境)!
 산해관에서 조양성까지는 후금국의 군병들이 즐비하게 깔려 있었다. 그들은 각각 백여 명에서 오천 명까지의 숫자로 각각의 지대를 형성하고 있었고 맡은 구역이 달랐다.
 삼산지경은 산해관에서 대릉하에 이르는 수십 줄기의 산과 계곡 중 세 개의 산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대릉하는 산해관과 이백여 리 떨어진 건창산(乾蒼山)에서 발원한 줄기와 능원(陵元)에서 발원한 두 줄기의 물이 있다. 두 줄기의 물은 객라심좌익(喀喇沁左翼)에서 합쳐진 후 조양으로 흘러든다. 조양을 지난 대릉하는 부신에서 흘러내린 물줄기와 합쳐진 후 발해만의 최북단인 요동만의 영구(營口)로 흘러간다.
 그 대릉하에 이르기까지는 넓은 벌판과 낮은 구릉으로 이어지는 분지였다.
 삼산지경은 건창산에 이르는 벌판에 우뚝 솟아오른 세 개의 산 사이를 가리키는 것이다. 크고 작은 산 중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세 개의 산! 각각 건무산(乾武山), 운자산(雲姿山), 우비산(雨飛山)이라 이름붙여진 세 개의 산은 그리 높지도, 험하지도 않았지만 주변이 벌판과 논으로 이루어져 있어 유독 사람의 코처럼 두드러져 보였다.
 건무산은 후금국의 지대 중 운지대(雲指隊)라 하는 오백여 명의 군병이 지키고 있었고 운자산은 병탄(兵彈)이라 부르는 별동대가, 우비산은 비교적 험했기 때문인지 여진의 별동조직이라 할 수 있는 포룡격대(包龍擊隊)가 지키고 있었다. 포룡격대는 명조에 들어오며 급격한 발달을 이룬 화포를 지닌 부대이기도 했다.
 그들은 모두 건흥군(建興軍) 소속으로 강한 무공과 군기를 자랑하고 있지만 세 산의 경계지로 나 있는 삼산지경만큼은 경비가 심하지 않았다. 그것은 지경선(地境線)이라 부르는 것으로 서로 간에 경계를 미루기 때문이었다. 지난 육 개월간 끊임없이 정탐을 했기 때문에 오차는 있을 수 없었다.
 각각 다섯 명씩 나누어 사 개의 지조로 나눈 그들은 삼산지경을 빠져 나가기 시작했다.
 선봉격인 갑조(甲組)는 호등량이 이끌고 있었으며 그들은 척후를 맡았다. 갑조는 다시 두 개로 분리하여 두 명이 척후를 맡아 앞에 서고 호등량과 다른 두 명의 부백호가 따랐다. 그들은 실질적으로 살예를 지닌 을조(乙組)를 백여 보 앞서 나갔다. 을조 뒤로는 병조(丙組)가 따르며 뒤로 접근하는 적이 있나 후면의 척후를 담당했으며 지휘는 다인기가 맡고 있었다.
 정조(丁組) 또한 다섯 명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그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측면으로 접근하는 적을 맡았다. 정조는 임무를 마치고 도주할 때 적의 추적을 저지하며 말을 준비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만에 하나 적진에 불이 일어나기라도 한다면 그것은 정조가 한 일일 것이었다.
 저규는 을조에 소속되어 있었고 임무는 다르곤의 목을 베는 일이었다. 다른 세 개의 조가 길을 안내하고 적의 이목을 돌린다면 을조는 실질적으로 도르곤의 목을 베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세밀하게 말하자면 저규는 을조의 조장이었다. 다섯 명 중 부순연이 부조장을 맡았다.
 예측은 정확했다.
 막는 적은 나타나지 않았다.
 논과 밭 사이, 산과 밭이 만나는 좁은 물길, 산과 밭이 만나는 둑으로 달려가는 호열대를 막을 사람이 없었던 것은 은밀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날이 밝지 않았고 민가가 많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그들이 입고 있는 옷이 흰색에 가까웠기 때문에 한몫을 했다.
 속으로는 사슴의 가죽으로 만든 녹피의를 입었지만 겉은 눈이 오는 계절을 감안하여 마사로 짠 백포를 걸치고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한 시진에 이십 리 이상을 달릴 수 있었다. 만약 내공을 사용한다면 오십 리도 갈 수가 있었다. 그러나 내공을 익히지 않은대원들이 있었기 때문에 부득이 속보(速步)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삼산지경은 계곡으로 인해 흐르는 물과 엉클어진 넝쿨식물이 앞을 가렸다. 그러나 두꺼비처럼 몸을 숙이고 달려가기에 그다지 무리는 없었다.
 “놈들이 우리가 출발했다는 것을 눈치채지 않았을까?”
 부순연이 다가오며 긴장을 토로한 것은 십여 리를 달려간 뒤였다. 어슴푸레 밝아오는 먼동 사이로 그의 이마에 매달린 땀방울이 보였다.
 저규는 입을 다물고 손가락으로 뒤를 가리켰다.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라는 수신호를 알아들은 부순연은 발걸음을 멈추고 돌아갔다.
 야산과 밭이 만나는 좁은 소로를 지나가야 할 때는 매우 조심스러웠다. 겨울철이었기 때문에 불을 때기 위해 베어낸 나무로 인해 모든 것이 드러나기 때문이었다. 간혹 잡목이 있기는 했지만 모습이 모두 드러났다. 다행스러운 것은 시야를 가릴 정도로 큰 나무 또한 없다는 사실이었다. 때때로 키를 넘기는 잡풀들이 그들의 몸을 가려주었다.
 본시 은밀하게 움직일 때는 산 아래나 산등을 피해야 했다. 산 아래와 산등은 적의 가시권(可視圈)에 들 뿐 아니라 소리가 울리기에 적합하기에!
 평소 훈련받은 대로 한다면 그들이 선택한 길은 의당 산의 중턱이어야 했다. 산의 높이도 선택 조건에서 매우 중요했다. 백 장 이상 되는 산을 타야 적에게 들킬 염려가 적다. 물론 산을 임의대로 열로 잘라 산정에서 두 번째쯤 되는 높이의 측면을 타고 가야 한다.
 더불어 마을이 있거나 논밭이 있는 반대쪽 사면을 타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
 그것은 사람의 눈을 피하기에 더할 수 없는 조건을 가지고 있다. 늘 훈련을 받았고 모두가 알고 있는 일이지만 그들은 무시하고 산 아래로 걸었다.
 눈이 오면 산등과 산 아래는 녹아도 산중턱은 녹지 않기 때문이다. 만에 하나 적의 눈이 있다면 산중턱의 발자국은 결국 뒤를 따라오라는 것과 같기에!
 따다다다!
 돌로 나무를 치는 소리!
 그것은 숙영(宿營)을 하겠다는 신호였다. 그와 같은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은 호등량뿐이었다.
 모두 몰려들었다.
 저규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날이 밝았다.
 계란의 노른자위 같은 해가 안개 사이를 뚫고 불쑥 올라와 빛무리를 뿌리고 있었다.
 날은 너무도 빨리 밝았다.
 “모두 숙영 준비를 하라!”
 주변에 호열대원들 이외에는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호등량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긴장으로 목이 굳었는지, 그도 아니면 찬바람으로 울대가 상했는지 갈라지는 듯한 목소리였다.
 저규는 뒤를 돌아보았다.
 길게 이어진 발자국이 남아 있었다.
 다행히 땅바닥에 드러난 발자국은 보이지 않았다. 한결같이 눈을 밟았으므로 발자국은 마치 노루가 뛴 것 같았다. 더구나 앞서가는 사람이 밟은 곳만 디뎠기 때문에 한 사람이 밟은 것 같았다. 때때로 사람이 지나다닌다는 것을 감안하면 스무 명이나 되는 군병이 지나갔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곧 녹겠지.’
 저규는 안심이 되었다.
 바람이 불기는 했지만 그리 차갑게 느껴지지 않았고 양광이 포근한 것으로 보아 눈은 오래지 않아 녹을 것 같았다. 눈이 녹으면 사람이 걸어온 흔적도 지워질 것이었다. 바위를 타고 넘어온 지역은 그나마 눈이 녹으면 남는 희미한 흔적도 보이지 않을 것이 뻔했다.
 만에 하나 추적을 당한다고 해도 쉽사리 발견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숙영 준비!
 이동은 밤에만 하기로 되어 있었다. 만에 하나 낮에 이동하다 들키는 날에는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 버릴 수도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중원의 땅이었지만 이제는 여진의 땅이 된 곳이 아니던가!
 산해관을 건너면 모든 땅이 여진의 땅이었다. 애신각라씨가 스스로 황제임을 선포하고 만주를 손아귀에 넣었을 때부터 명조의 땅은 급격하게 위축되고 있었다.
 호열대의 전 대원은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는 은신처를 만든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조양성에서 멀지 않은 마지막 기착지에 다다를 때까지는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빈 농가가 있습니다. 아마 농사철에 사용하기 위해 지어놓은 것 같습니다.”
 척후를 나갔던 유옥(柳鈺) 장군이 다가와 보고했다. 호등량은 눈을 빛냈다.
 지난 육 개월간 끊임없이 훈련을 했지만 눈이 오는 계절에 땅을 파고 은신처를 마련한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비어 있는 집이 있다는 것은 그야말로 하늘이 돕는 일에 가까웠다.
 “어딘가?”
 “이곳에서 반 각을 걸어가면 될 것 같습니다. 농기구가 걸려 있기는 하지만 사람의 흔적은 보이지 않습니다. 마구간까지 갖추어져 있기는 하지만 사람이 올 것 같지는 않습니다. 매우 넓은 곳입니다.”
 호등량은 눈을 들어 뒤따르는 호열대원들을 바라보았다.
 한결같이 눈이 퀭하니 들어가 있었다. 아무리 고된 훈련을 받고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혹독한 전쟁터라고는 하지만 그들에게 주어진 짐은 너무도 버거웠다.
 “모두 옮긴다.”
 짤막한 말이 모두의 행동을 결정지었다.
 
 
 六
 
 
 움막이 아니었다.
 빈 농가라고 하기에도 너무 큰 곳이었다. 두 칸의 방과 두 칸의 부엌, 한 칸의 마구간이 있었다. 마구간은 사방이 나무로 만든 울타리로 막혀 있어 그럭저럭 바람을 피할 수가 있었다.
 갑조는 큰 방을 차지했고 을조는 작은 방을 차지했다. 병조는 마구간을 차지했고 정조는 사방으로 흩어져 경계에 들어갔다.
 추위가 밀려오기는 했지만 불을 피울 수는 없었다. 만에 하나 불을 피워 연기라도 난다면 집의 주인이 다가올 것이고 결과적으로 피를 볼 수도 있었다.
 “마른 호지자(胡枝子 : 싸리나무)가 있습니다.”
 집안을 살펴본 유옥 장군이 호등량에게 말했다. 유옥 장군은 척후의 임무를 빈틈없이 진행하고 있었다. 본시 호열대에 들기 전 그가 이끌었던 맹호대(猛虎隊)가 척후의 임무를 하던 별동대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의 역할은 작지 않았다. 물론 그가 이끌던 별동대는 평천(平泉)에서 벌어졌던 하상전(河床戰)에서 모두 죽었다. 살아남은 사람은 그 혼자뿐이었다.
 “좋아! 불을 피워라.”
 호등량의 말이 떨어지고 나서 대원들이 나무를 부엌으로 가져 왔다.
 마른 싸리나무는 물기에 젖지만 않으면 불에 태워도 연기가 나지 않는다. 그 동안 훈련을 하며 익힌 것 중의 하나로 부득이할 때 사용하는 방법이었다.
 문제는 연기가 아니고 불이 꺼지고 난 재였다.
 재는 오래가고 추적자가 있다면 발을 밟힐 수 있었다. 무엇보다 재의 남은 상태나 남아 있는 숯을 보고 사람이 불을 피운 시각을 추적할 수가 있었다.
 방 안이 따듯해졌다.
 초막은 돌로 깐 구들이 놓여 있었고 작은 불기에도 쉽사리 더워졌다. 마당에서 물을 길어와 데워 따듯한 물을 마실 수가 있었다. 잠행을 하며 밥을 지어먹는다는 것은 꿈 같은 일이었다.
 일행은 따듯하게 데워진 물에 미숫가루를 타서 마셨고 건포를 물에 불려 먹을 수 있었다.
 오래도록 불을 땔 수는 없었다.
 연기가 나지 않는다 해도 연기의 냄새는 십 리를 가는 법! 바람의 방향이 바뀌거나 빨라지기 전에 불을 꺼야 했다.
 “병조가 번초를 서고 나머지는 모두 잔다. 각 조에서 한 명씩 교대로 일어나 병조를 지원한다.”
 호등량은 짧게 말하고 먼저 머리를 숙였다.
 그는 벽에 머리를 기대자 곧 곯아떨어졌다. 호열대의 대원들은 머리만 기대면 잠을 잘 수 있도록 훈련되어 있었고 원한다면 사흘 낮과 밤을 눈을 붙이지 않고 견딜 수 있었다.
 짧은 잠은 달콤했다.
 저규는 작은 방에서 깊은 잠을 잤다. 어차피 번초라 해도 마지막 차례였다. 조장에게는 그 정도의 특권이 주어져 있었다.
 
 얼마나 잤을까?
 탁! 타탁! 탁!
 무언가 벽을 두드리는 듯한 소리!
 저규는 튕기듯 몸을 일으키고 사방을 둘러보았다. 잠을 자던 대원들이 모두 들었는지 몸을 일으키며 병기를 들고 있었다. 저규도 망설임없이 박도를 주워들었다.
 박도는 짐승의 가죽으로 만든 도갑에 들어 있었다. 병기가 빛에 반사되는 것을 막기 위한 방편이었다. 침투를 하고 암습을 가하는 입장에서 보면 가장 두려운 것이 소리였고 그 다음이 빛이라 할 수 있었다.
 “무슨?”
 부순연이 방문으로 다가갔다.
 문에는 얇은 종이와 여인의 속치마처럼 가는 천을 붙여놓았지만 오래도록 손을 보지 않았기 때문인지 거친 바람 탓으로 구멍이 숭숭 뚫려 있었다.
 그는 한참 동안 밖을 내다보다 눈을 돌렸다.
 “사람이다.”
 모두들 긴장해 병기를 꼬나잡았다.
 저규라고 다르지 않았다. 박도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가 팔 근육이 벌떡 일어서는 기분이었다. 병기를 움켜쥔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갑조가 몸을 숨기고 잠을 자던 큰방에서도 소리가 나는 것으로 보아 모두가 정신을 차린 것 같았다.
 저규는 문으로 다가가 밖을 내다보았다.
 손에 대초자곤(大哨子棍)을 든 한 명의 중년인과 파두(頭)를 든 청년이 걸어오고 있었다. 그들은 모르지만 그 뒤에는 척후로 나간 정조의 조원들이 몸을 수그리고 들키지 않도록 몸을 움직이며 뒤따르고 있었다.
 대초자곤과 파두는 애매한 병기였다.
 병기라 할 수도 있고 농기구라 할 수도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본시 농기구에서 병기가 된 것이다. 대초자곤은 간 장봉에 철삭으로 연결된 단봉을 단 것으로 하나에서 네 개까지 달아 사용한다. 농사를 지을 때는 곡식을 탈곡하는 것이지만 병기로 사용할 때는 장병기이며 타병기로서의 위력이 있다.
 파두는 곡식을 말릴 때 뒤집거나 밭고랑을 거르는 것으로, 흔히 서유기(西遊記)의 저팔계가 들고 다니는 병기였다. 겉으로 보아서는 완연한 농기구였지만 병기로서도 더할 나위 없는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긴 장봉은 칠 척에서 일 장에 이르고 쇠로 만들어진 갈고리는 열 개에서 열다섯 개까지 달렸다. 갈고리의 끝은 뾰족하고 날카로워 사람을 찍어죽일 수 있을 뿐 아니라 옷에 걸리면 적을 잡아당겨 생포할 수도 있는 병기가 된다.
 다가오는 자들이 병기를 지녔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었다. 농기구로 사용하기 위해 지니고 있는 것일 수도 있지만 극한 상황으로 달려가는 호열대원들에게는 병기로만 보였다.
 “저것은?”
 저규는 난감했다.
 척살을 주임무로 하고 있는 을조가 나설 일은 아니지만 그들이 다가온다는 것이 불안했다.
 그들이 농부들이라 해도 살아나가기는 힘든 일이었다. 그들이 살기 위해서는 입을 다물어야 하는 조건이 있지만 사람을 믿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멈춰라!”
 갑자기 들려오는 소리!
 농부들의 뒤를 따르던 척후가 소리를 질렀다. 유옥 장군 휘하의 병조가 이미 그들을 에워싸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잠시간의 실랑이가 들렸다.
 ‘저들은 농부다.’
 저규는 그들이 농부라고 확신했다.
 입고 있는 옷은 마사로 짠 경의였다. 더구나 올이 성긴 것으로 보아 밭을 갈거나 김을 맬 때 입는 옷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으나 당장에 김을 매려는 것은 아닐 것이었다. 눈이 내리는 계절에 밭을 갈고 곡식을 심을 리는 없으니. 그러나 그들이 농부라는 것을 확신할 수는 있었다. 상체를 가린 단군(短裙) 또한 삶에 절은 자들이 아니라면 입지 않는 옷이었다.
 저규는 가슴이 아팠다.
 그들이 살아날 수 있는 확률은 없었다.
 그들이 군병이 아니라 해도 입을 막아야 하는 것이 호열대의 입장이었다.
 허공에 박도가 춤을 추고 무너지는 두 명의 그림자가 보였다. 붉은 피가 허공으로 뿜어져 올랐다. 피가 뿌려지며 허공에 짙은 색을 지닌 홍자(虹子 : 무지개)가 걸렸다.
 비명 따위는 들리지 않았다.
 단칼에 목을 베어버린 유옥 장군이 그들의 옷에 도신에 묻은 피를 닦았다.
 “어서 치워!”
 유옥 장군의 목소리가 들리고 달려나온 두 명의 대원이 시체를 끌고 사라졌다.
 저규는 피 냄새가 방 안으로 스며드는 것 같았다.
 그들에게 사람을 죽이는 일이 두렵지는 않았다. 무수한 전투에서 사람을 죽여왔고 훈련 중에도 적의 포로를 죽이는 일이 다반사였기 때문이었다.
 한 번은 그런 일도 있었다.
 제법 넓은 곳에 오십여 명의 포로들을 가두어놓았었다. 한결같이 목검을 들고는 살려 달라고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주변으로는 목책을 세워놓아 함부로 타넘을 수도 없었다.
 “저들을 죽여라.”
 풍엽진의 말에 모두가 어안이 벙벙해진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그 동안은 어쩔 수 없이 사람을 죽였었다. 전투에서 적을 죽이지 못하면 내가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가까운 곳에서 동료가 죽고 부하들이 죽는 것을 보면 미친 듯 병기를 휘둘러 적을 죽였다.
 하나, 그때와는 달랐다.
 그들은 포로였다.
 예로부터 포로를 죽이는 경우는 없었다. 간혹 악독한 장수들이 있어 포로들을 죽이기도 했지만 몰아놓고 때려죽이거나 반항할 생각도 없는 포로들을 베어죽이는 경우는 드물었다.
 간혹 포로는 골치덩어리가 되기도 했다.
 군량미가 부족할 때 포로가 많으면 그들로 인해 순식간에 배를 곯게 되는 경우가 있었다. 그래서 적의 군량미가 적다는 것을 알게 되면 군병들을 포로로 내주는 경우가 있었다. 포로가 된 군병들은 적의 소굴에서 군량미를 축내게 만들었고 어느 한 순간에 내외가 호응하여 성을 함락시키거나 적을 괴멸시키는 경우가 허다했다.
 이유없이 적을 몰아넣고 죽이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그것은 도살이었고 인간으로서 할 짓이 아니었다.
 훈련이라 하지만 호열대는 살도부가 되었다.
 “가만히 있는 대원은 아군이 쏘는 화살에 산적(散炙)처럼 꽂혀 죽을 것이다.”
 풍엽진의 말은 대원 모두를 긴장시켰다.
 저규도 뒤를 돌아보았다.
 높은 담 위에 거치되어 있는 연노(連弩)! 수십 개의 연노가 사방팔방에서 그들을 겨누고 있었다. 한 번 당기면 두 발씩 날아오는 연노는 가까운 거리에서 당기면 아무리 무공이 고강해도 막을 수 없을 정도로 강한 힘을 지고 있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연노 뒤에는 상자노(箱子弩)가 거치되어 있었다. 사람의 힘이 아닌 기계의 힘으로 당기는 상자노는 한 번에 열 개의 화살을 날릴 수 있었다. 일반 활과 달리 크기도 클 뿐 아니라 강철로 만든 화살의 길이만도 오 척에 이르므로 그 힘은 강판을 뚫고도 남았다.
 살기 위해서는 죽여야 했다.
 “할 수 없는 일! 모두 나를 따라라!”
 판단의 몫은 호등량에게 맡겨졌다. 그는 미친 듯 달려가 앞을 가로막는 여진인들의 몸을 베기 시작했다. 그가 지나간 자리에는 피와 잘린 팔다리가 남았고 바라보기만 하던 호열대는 미친 듯 달려가며 병기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저규는 고개를 돌리며 주저앉았다.
 불과 이 개월 전이었다.
 그때의 악몽이 살아나고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욕지기가 치밀어 오르는 기분이었다.
 “제길! 이거야 도살이 따로 없군.”
 부순연이 침을 뱉었다.
 그들 모두는 살인에 대해 동질감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 모두 미친 듯 도주하는 여진인의 목을 베고 팔을 베었었다. 그때의 생각은 시시때때로 그들을 죄의식 속에 몰아넣었다.
 저규는 몸을 일으켰다.
 어차피 누워 있는다고 해서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다. 그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2장 조양성(朝陽城)
 
 
 一
 
 
 날은 저물었다.
 발걸음 소리를 듣지 못한다면 동료를 잊을 것만 같았다. 척후도 필요없었고 낮은 울대 소리도 필요없었다. 나뭇가지가 스치는 소리만이 동료의 행방을 알려주고 있었다.
 나뭇가지가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탁탁!
 간혹 나무를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그것이야말로 길을 안내하는 호등량의 신호였다. 간혹 길을 벗어났던 대원들은 호등량의 손놀림으로 들려오는 소리를 따라 방향을 바꾸고는 했다.
 나무와 풀이 우거진 길에서 걸음걸이는 매우 중요하다. 관도를 따라 걷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이야기였다.
 올바른 걸음걸이란 가장 적은 힘을 들이고 편안하게 걷는 것을 의미한다. 즉, 걸음걸이가 너무 넓거나 너무 좁으면 속도가 나지 않으며 체력적인 손실을 가져 오게 된다.
 문제는 산이다.
 비탈!
 몸을 가누기가 힘들지 않다 하더라도 발이 닿는 면적이 일정하지 않으면 걸음에 힘이 들어가고, 때때로 발에 걸리는 나뭇등걸에 의해 과도한 힘이 쏠리게 마련!
 “속보!”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호등량이었다.
 그들 개개인에게는 주어진 역할이 있었다.
 저규가 척살하는 임무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면 호등량은 모두를 안내하는 역할을 지니고 있다. 그는 오래도록 지도를 통해 길을 익혔고 일정한 보폭으로 거리를 측정하는 훈련을 했다.
 적과 만나기 전까지 모든 결정은 그의 몫이었다.
 속도가 빨라지기 시작했다.
 속보는 적의 움직임이 포착되지 않거나 위급지경에 이르러 빨리 이동할 때 사용하는 방법이었다.
 다람쥐가 움직이는 것과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걸음을 걸을 때 똑바로 딛는 것과 발 끝이 안이나 바깥으로 나가도록 걷는 것은 커다란 차이가 있다. 처음 몇 보는 차이가 없고 눈에 드러나지 않지만 먼 거리에서는 커다란 차이가 날 뿐 아니라 체력에서도 차이가 난다.
 저규는 발을 정면으로 바라보도록 하며 부지런히 걸었다. 속보라는 것은 달리는 것과 걷는 것의 중간속도를 의미한다. 결국은 빨리 움직인다는 것!
 아무리 빨리 달려도 저규의 보법은 틀어지지 않았다.
 발 끝이 땅에 닿으면 뒤이어 발꿈치를 내리고, 다른 발의 끝으로 땅을 긁듯 떼어 앞으로 자연스럽고 부드럽게 미끄러지듯 움직였다. 내공과 보법을 가미한 그의 발걸음은 눈에 띄지 않을 뿐 아니라 소리마저 작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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