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역견문록 1권
서장 언덕 위의 두 사람
소년은 즐거웠다.
오늘도 할아버지를 따라 산으로 산책을 나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소년이 알기에 할아버지는 세상에서 가장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물론 자상함도 넘치지만.
자랑스러운 할아버지.
지금은 수세식(手洗式)을 하고 은퇴했지만 과거에는 검에 일가를 이루었던 무인이었다.
많은 사람은 할아버지를 알았다.
지금도 적지 않은 무인들이 할아버지를 찾아온다는 것을 소년은 알고 있었다. 그들이 청성파(靑城派)의 제자라는 것도, 그리고 그들 모두가 할아버지를 대숙(大叔)이라 부르는 것도 들은 적이 있었다.
물론 청성의 제자만 찾아오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이 청성의 제자였다. 할아버지는 간혹 청성산으로 나들이를 가기도 했다. 그때마다 소년은 청성으로 따라갔고, 얼마 후에는 청성산에 속가제자로 입문을 할 생각이었다.
오늘도 잔잔한 풀이 자라는 언덕에 올라앉아 이야기를 들려주시는데, 그 이야기들은 방바닥에 배를 깔고 군밤을 까먹는 것보다 백 배는 재미있었다.
“할아버지, 그러니까 중원의 마지막 혈사(血事)라 하면 십칠 년 전의 그 일이 되겠군요.”
열두 살의 나이는 사람이 살아가며 경험할 수 있는 많은 것을 이해할 수 있는 나이다. 물론 무인들의 이야기는 소년에게 더할 수 없는 기쁨이다.
“물론이란다. 경아(鯨兒), 십칠 년 전 이 할아버지도 무인으로 그 혈사에 참가했었단다. 나는 청성파의 속가제자로서 사부를 따라 그 혈사에 참가했지. 소림을 비롯한 중원의 구파일방과 오십여 개의 군소방파가 참가한 일이었어. 그래서 사람들은 중원무림일차결집(中原武林一次結集)이라 불렀단다. 이곳 사천(四川)에 자리잡고 있는 수많은 문파. 청성과 아미(峨嵋), 점창(點蒼)까지. 그리고 사천당문(四川唐門)도 참가했었다.”
“할아버지, 저기 있는 사람들은?”
소년이 손을 들어 한 곳을 가리키고 있었다.
노인은 소년의 손 끝을 따라가다 눈을 가늘게 떴다. 거대한 장원이 눈에 들어왔다.
수많은 사람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한결같이 푸른 옷을 입고 있는 사람들이 개미처럼 움직이는 장원은 사천의 중심이며 모든 문물이 모이는 성도부(成都府)의 한 끝, 민강(岷江)이 흐르고 있는 곳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노인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물론이지. 운몽표국(雲夢局)이 빠질 수 없지. 십칠 년 전 당시에 운몽표국은 지금보다 작고 약하기는 했지만 아미검성(峨嵋劍聖)이라는 걸출한 인재를 배출했단다. 물론 그는 아미의 제자로서 검계의 최고를 향해 달려가는 젊은 영웅이었지. 십칠 년 전에 이미, 스물 다섯 살의 나이에 그 나이에 누구도 이루지 못했던 검망(劍)을 뿌릴 정도였단다.”
“그 사람이 지금의 국주인가요?”
“물론이다. 당시에도 국주였지. 아무튼 운몽표국의 젊은 국주도 그 당시 혈사에 참가했었지.”
“그래서 어떻게 되었어요?”
소년은 할아버지 곁으로 바싹 다가앉았다.
노인은 소년이 귀여워 죽겠다는 듯 끌어당겨 가슴에 안아준 뒤 다시 입을 열었다.
“어떻게 되었느냐고? 그 서역에서 온 흡혈귀(吸血鬼), 서역불패(西域不敗)! 그렇게 불렸지. 그 흡혈귀는 중원인들의 협공으로 죽었다. 그리고 그의 원수를 갚겠노라고 서역에서 몰려왔던 다섯 명의 마인도······”
“다섯 명의 마인이라······ 그들도 죽었어요?”
“모르겠다. 이 할아비도 참가한 일이었지만 그 다섯 명의 마인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모두 말이 없었지. 아는 사람 또한 없었다. 나중에야 그들이 혼란의 와중에 홀연히 사라졌다는 것은 알 수 있었지. 나는 그들이 어떻게 사라졌는지 알 수 없었어. 누구도 몰랐을 거다. 아는 사람이 없다는 말이 맞겠지. 분명한 것은 그들이 살아 있다는 거란다.”
“죽었을 수도 있잖아요.”
소년은 반박했다.
어쩐지 할아버지의 표정이 불안해 보인다고 생각했는지 목소리가 앙칼졌다.
열두 살의 나이는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없지만 자신이 아는 것을 주장할 수는 있는 나이다. 물론 정말로 뛰어난 아이라면 이미 동시(童試)를 보아 학동(學童)이 되거나 동생(童生)으로 학문의 길을 걷고 있을 테지만 신분이 미천하고 재력을 가지지 못한 초부(樵夫)의 자식은 그렇지 못하다.
“그렇지. 그러나 그날 그들의 시체는 보이지 않았다. 모두 도망쳤지. 그러나 그들은 이미 죽었을지도 몰라. 당시만 해도 그들의 나이가 백삼십을 넘었다고 알려져 있었으니.”
“사람이 그렇게 오래 살아요?”
“있을 수도 있는 일이지. 너는 이 할아버지의 사문인 청성파의 현노자(玄露子)께서 백 세가 넘었다는 것을 모른단 말이냐?”
“그렇군요.”
소년이 고개를 끄덕였다.
할아버지의 말에 수긍을 하지만 놀랍다는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소년이 생각하기에 사람의 수명은 그리 긴 것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십의 나이가 되기 전에 죽는다.
소년의 부친도 삼십을 넘자마자 바로 죽었다. 그리고 어머니는 삼십에 이르기도 전의 나이에 죽었다. 사람들은 모두 요절이라 말했지만, 소년은 주위에서 어머니와 비슷한 나이에 죽어가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무척이나 오래 사는 사람에 속했다. 그것은 무공을 익히고 있기 때문이었다.
무공을 익힌 사람은 오래 산다.
평범한 초부들에 비해 적어도 두 배는 오래 살았다. 할아버지도 다른 사람에 비해서는 정말 오래 사신 것이지만 아직도 정정하시다. 소년은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무인인 할아버지가 익히고 있는 내공 때문이라는 것을.
“그럼······ 그걸로 끝난 것이군요.”
“그렇지는 않다. 아무도 모르지.”
“그들이 사라진 이후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건가요?”
소년이 묻자 노인은 아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많은 것을 알고 싶어하는구나. 그랬다. 적지 않은 일이 있었지. 우선은 서역불패라 불린 흡혈귀에게 죽은 사람을 조사했단다. 그 흡혈귀가 죽인 사람은 오십 명이 넘었지. 모두가 어린아이와 젊은 처녀들을 죽이고 피를 빨아먹었다는구나. 시체들은 한결같이 피골이 상접해 죽었지. 물론 서역불패는 죽었지만 그가 남긴 흔적은 적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사라졌는데 정확하게 집계되지가 않았다. 모르기는 해도 시체로 발견된 자들 외에도 수십 명은 넘을 것이다. 그들이 서역불패에게 피를 빨리고 죽었는지, 그도 아니면 모두 납치가 되었는지는 모른다. 서역불패가 왜 피를 빠는 흡혈귀가 되었는지도 밝혀지지 않았어. 다만 그가 사람의 피를 빨아먹고 기이한 무공을 익히고 있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은 난무했지. 참, 그리고 기이한 것은 당시에 사천당문의 딸도 사라졌단다.”
“정말이에요?”
“그래.”
“찾지 못했어요?”
“그럼, 어떻게 찾겠느냐? 그녀가 사라진 것은 많은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일이었지만, 그녀도 흡혈귀에게 희생된 것으로 결론이 났지. 그래서 흡혈귀가 무인들의 협공을 받아 죽고 그의 원수를 갚겠노라 분연히 소리치며 다섯 명의 마인들이 달려 내려왔을 때 가장 앞장을 섰던 무인들이 바로 사천당문의 제자들이었단다. 그러나 그들을 막을 수 있었지만 죽이지는 못했다.”
“아하!”
소년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무슨 말인지 알아듣겠다는 듯, 그러나 의문은 여전히 남아 있는 표정이었다.
휘이이!
바람이 언덕을 스치며 불어 올라왔다. 잔잔한 풀이 몸을 떨었을 때 노인과 소년의 옷자락이 격하게 펄럭였다. 그것은 저녁을 재촉하는 바람이었다.
노인의 눈에는 기울어져 가는 해가 보였다. 붉은 석양이 하늘에 피처럼 번져 있었다. 눈을 내리고 보니 멀지 않은 곳에 운몽표국의 모습이 장엄하게 들어왔다.
민강을 바라보고 타강(江)을 측면으로 돌려세우며 후면으로는 노인과 소년이 앉아 있는 작은 산을 등에 진 모습.
“할아버지?”
“왜 그러냐?”
소년의 부름에 노인은 뒤를 돌아보았다.
“흡혈귀는 이제 사라진 건가요?”
“글쎄!”
노인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낙조를 드리운 태양이 이미 서녘으로 저물고 있었다. 붉은 석양은 하늘을 채울 듯 붉은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마치 피처럼. 십칠 년 전의 그날처럼!
낙일(落日)이었다.
1장 이유를 알 수 없는 일
콰당!
문이 자빠지듯 열리며 하나의 인형이 방 안으로 달려 들어왔다. 노인은 의자에 앉아 글을 쓰다 벌떡 일어섰다. 갑자기 일어난 일이라 어안이 벙벙한 표정.
수염이 성성한 노인이었다.
“무슨 일이냐?”
노인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미 백 년 이상의 세월을 살아 하늘이 무너져도 놀라지 않을 것 같은 노인이었다. 그러나 지난 몇 달 동안 부락에 몰려온 재앙은 한 순간에 그의 나이를 먹게 만들 지경이었다. 전에도 없고 이후에도 없을 일들이 너무도 많았다.
누구도 그의 처소를 그렇게 거칠게 밀고 들어오지 못했었는데. 얼마나 급했으면.
노인은 인상을 찌푸렸다.
백발이기는 하지만 은은히 금빛이 나는 머리카락과 수염, 거기에 푸른 눈동자가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평소에는 화려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아름다움의 조화를 이루었을 것 같은 노인의 모습은 한 순간에 엉클어져 버렸다.
노인은 자리에서 일어서 들어온 청년을 바라보았다.
금발에 푸른 눈동자.
창백하게 보일 정도로 흰 피부가 중원인들의 피부와는 약간의 차이가 있었다. 중원인들이 색목인(色目人)이라 부르며 경원하는 모습을 지닌 청년이었다.
청년의 전신에 흙이 묻어 있는 것으로 보아 어느 정도로 서둘렀는지 능히 짐작이 가는 일이었다.
무공을 익힌 무인이 길을 달리며 쓰러져 옷자락에 흙을 묻힌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노인이 알기에 청년은 제법 강한 무공을 익히고 있었다. 그런데 온몸에 흙이라니!
“무슨 일이냐?”
노인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노인답지 않은 음성이었다. 만약 모습을 보지 못하고 목소리만 들었다면 사십대의 나이를 지닌 장년으로 인식했을 것이다. 그러나 노인은 백 살이 넘었다. 갈 곳이라고는 한 곳밖에 없는 노인이지만 청년보다 정정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목소리에는 힘이 넘치고······ 여인을 침상으로 끌어들여도 임신을 시킬 수 있는 힘이 넘치는 노인.
노인의 몸이 가늘게 흔들렸다.
유속(流速)이 느린 물가에 자라는 수초 같은 흔들림이었지만 그의 모습이 얼마나 경악하고 있는 것인지 아는 사람은 안다.
지난 몇 달 동안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노인이 생각하기에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지만 이미 일어난 일이고 모든 사람이 힘을 합쳐 파고들어도 그 원인을 밝히지 못하고 있었다.
또다시 재앙이 눈 앞에 다가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눈 앞이 캄캄해졌다.
“나특한이시여.”
나특한, 이는 중원인들이 알고 있기에 이미 사라진 우전국(于?國)의 신관(神官)을 일컫는 말이다. 물론 이제는 그 기억을 가지고 있는 중원인은 없다.
이미 사라진 기억들.
천 년 전만 해도 많은 사람들이 그 이름을 기억했을 것이나 지금은 그런 이름이 있다는 것도 모르리라.
모든 것은 사라지기 위해 존재한다.
사라지고 잊혀지며 새로운 것이 만들어지고 기억된다.
나특한도 다르지 않다.
우전국은 이미 오래 전 서역을 이루는 삼십육 국의 하나였지만, 한(漢)의 장수 곽거병(藿去病)이 대군을 이끌고 서역으로 진군해 서역도호부(西域都護府)를 설치하고 서역의 뿌리를 제거한 이후 사라진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무슨 일이기에 그렇게 서두르느냐?”
나특한의 목소리가 굵어졌다.
“나특한이시여.”
청년은 다시 고개를 숙였다.
너무도 공손한 모습.
몸을 가늘게 떨고 있기는 하지만 그가 보여주는 일련의 행동은 존경과 두려움을 함께 가지고 있었다.
나특한은 사람의 이름이 아니었다.
우전국의 말로는 신의 하인이 되는 말, 현재로서는 얼마 남지 않은 우전국의 후예들에게 신관이라는 말로 인식되고 있었다. 물론 그는 우전국의 후예들이 이룬 부족에서는 지혜가 넘치는 노인으로 통하고 있었다.
우전국의 후예.
나특한의 신탁(神託)만이 우전국의 후예들을 움직이게 하고 결정에 따르게 한다.
“무슨 일이냐? 숨을 가다듬고 소상히 말해라.”
청년은 격동으로 어깨를 들썩거렸다. 가슴이 더욱 심하게 들썩거리는 것으로 보아 그가 무척이나 빨리 달려온 것처럼 보였다. 마치 풀무질을 하듯 가슴이 들썩거리는 청년. 숨소리가 거칠어 바람이 스치는 것 같은 기이하고도 차가운 느낌을 주었다.
노인은 알고 있었다.
청년의 숨소리가 거친 것은 빨리 달렸기 때문이 아니고 놀람 때문이라는 것을.
“가라크! 어서 이야기를 하거라.”
청년, 삼십을 넘기지 않은 나이의 청년은 중원인들이 상상도 할 수 없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의 말로는 바람이 부는 언덕에 선 사람이라는 뜻.
천 년 전의 혈사(血事).
우전국이 무너지고 한족의 군사들이 저지른 무차별 살상으로 피의 제전이 열려 우전국의 황실이 초토화가 되었을 때 죽음을 피해 살아 나온 자들의 후인. 목숨을 걸고 도주해 나와 살아남은 우전국의 후예 중 신관을 곁에서 보호하는 무맥(武脈)으로 계곡 속의 부족을 구성하는 일파의 무인이었다.
신족(神族)이라 불리는 자들.
그들은 오직 신을 위해 살아가고, 신과 신관이며 그들의 어버이로 군림하는 나특한을 위해 피를 흘린다. 그리고 우전국의 후예들을 위해 신탁을 받는다.
가라크는 눈을 들어올렸다.
노인은 더 이상 재촉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가 말을 할 것이고 조금 더 기다린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었다.
외부의 침입이라면 이미 밖이 소란스러워졌을 것이니 적의 침입이 있었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더구나 그들에게는 적이 있을 수 없었다.
“요트칸.”
가라크의 목소리가 나무가 갈라지는 것처럼 거칠었다. 차가운 바람이 호흡기를 파고들어 목이 쉰 것 같은 목소리였다.
나특한이 몸을 숙였다.
그는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겨 가라크에게 다가갔다. 나특한이 다가가자 가라크는 잠시 어깨를 움직였지만 변함없는 모습으로 고개를 숙였다.
“요트칸이라니?”
나특한의 목소리도 굵어졌다.
“요트칸에 변괴가 일어났습니다. 악취가 풍기고 굴 속에서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나고 있습니다. 며칠 전보다 더욱 심해졌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간혹 미친 듯한 사람의 웃음 소리가 들리기도 하니······ 전과는 다른, 더욱 심한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나특한께서 직접 가보시는 것이! 더구나 바람의 부족을 다스리는 바토르 족장이 이 기괴한 일을 해결하겠다고 요트칸으로 들어갔습니다.”
“요트칸이라고? 들어가?”
“그렇습니다.”
나특한이 퉁기듯 일어섰다. 그의 흰 눈썹이 심하게 출렁였다.
황동(黃銅)같이 붉던 얼굴이 탈색되고 밭고랑처럼 파였던 이마의 주름에 이끼가 끼어 물살에 흔들리듯 마구 흔들렸다. 극도의 분노가 마음을 억압하고 있음에랴.
신전에 들어가다니.
신전은 누구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그들 우전국의 후예들에게 가장 성스러운 곳.
더럽혀질 수는 없었다.
노인은 주변을 돌아보았다.
넓은 방이었다.
삼십 평이 넘을 것 같은 방 중앙에는 사람의 허리보다 굵은 돌기둥이 세워져 있었고 반원형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벽에는 고서가 빽빽하게 채워진 서가(書架)와 각종 병기가 걸려 있는 검가(劍架)가 있었다.
수많은 책이 꼽혀 있거나 각종 병기가 걸려 있었는데, 부족민들이 사는 계곡에서 가장 많은 서책과 병기를 소유한 사람이 바로 나특한이었다.
그것은 권위의 상징.
문사의 방과 무인의 방이 섞인 듯한 그곳이 나특한의 거처였고 신관으로서 행해야 할 모든 일이 결정되는 곳이었다. 모든 책과 병기는 신탁을 받기 위해 사용되는 것이었고 신탁을 받아 기록하는 일체의 서책들이었다.
방의 한 곳에는 침실로 사용되는 공간도 있었다. 은은한 휘장이 드리워진 곳에 침상이 있었고 벽에는 화려한 무늬가 수놓아진 옷이 있었다.
“급한 일이다.”
노인은 침상 곁으로 다가가 휘장을 젖히고 옷을 찾아 입었다. 그리고 침상에 걸쳐져 있는 지팡이를 들었다. 검은색이 나는 지팡이는 손때가 묻은 것처럼 보였다.
“가라크, 모든 무인들을 모아라.”
“모두 모여 있습니다.”
“모두?”
“그렇습니다. 바람의 부족과 모래의 부족들, 그들 모두 몰려와 있습니다. 바람의 부족들은 바토르를 찾아 신전으로 들어가고자 하고 있습니다. 모래의 부족은 신전의 신성함을 들춰내며 신전 안으로 난입하려는 자들을 막고 있지만······ 그들이 필사적으로 요트칸으로 들어가려 하고 있어 곧 균형이 깨질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어서 가시지요.”
“신족은?”
“일부는 바토르를 저지하기 위해 신전 안으로 들어갔고 일부는 밖에 남아 요트칸으로 들어가려는 바람의 부족을 막고 있습니다. 그러나 수적으로 열세입니다.”
“그래?”
노인의 눈이 둥그래졌다.
요트칸이 그들만의 성지는 아니었다.
흔히 혈사족(血沙族)으로 불리는 모래의 부족과 나풍족(那風族)이라 불리는 바람의 부족 공동의 성지였다. 그들 모두 우전국의 후예였기 때문에 성지는 다르지 않았다. 같은 핏줄이었으나 단지 가문을 배경으로 나누어진 부족, 그렇게 서로를 견제하고 때론 힘을 합치며 천 년을 살았다.
같은 핏줄에서 갈라져 나왔으니 성지도 같았다.
물론 신전도 같아 나특한이 그들 모두에게 신탁을 받아주고 있기도 했다. 그들 모두에게 같은 신탁을 주고 공평하게 대했건만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누가 보기에도 나특한으로서는 입맛이 쓰고 마음이 답답해지는 일이었다.
한 사람의 호승심이 일을 그르칠 수 있었다. 또한 한 사람의 야욕만으로도 계곡 내의 모든 부족을 피에 잠기게 할 수 있었다. 누구나 그것을 알고 있었다.
나특한은 그 성지를 지키는 신관이며 신탁을 받드는 지위를 지니고 있었다. 묵인할 수 없는 일이었고 용인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의 몸이 빨라지는 것은 당연했다.
나특한은 자신이 부족민들에게 무엇을 보여주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중립이라는 것은 쉽지 않았다. 두 개의 부족은 언제든지 성지로 들어가려 했고 신관은 그들을 막아야 했다. 더구나 신전에는 그들 우전국의 후예들이 모시는 신뿐 아니라 조상의 숨결이 같이 잠들어 있는 곳이기도 했으므로.
나특한은 앞으로 성큼 나섰다.
“어서 앞장을 서라.”
“예.”
가라크가 노인 앞에서 몸을 돌려 문 앞으로 다가갔다. 가라크의 몸놀림이 빨랐으므로 노인의 몸놀림도 놀랄 만큼 빨라졌다.
쾅!
드드드드!
거칠기 이를 데 없는 기파가 허공에서 충돌하는 순간, 산천이 흔들리고 초목이 몸을 떨었다.
모래먼지가 허공으로 피어올랐다.
“우우우!”
“놀랍다.”
공터는 한 순간에 아수라장이 되어버렸다.
두 개의 무리로 나누어진 무인들이 서로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고 있었고 수염이 성성한 두 명의 노인이 미친 듯 손을 휘젓고 있었다. 그들의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눈빛은 마치 먹이를 노리는 매의 눈과 같았다.
그들 사이에서 일어난 기파는 인간이 낼 수 없는 경지였기 때문에 주변을 에워싸고 있던 사람들은 물러서기에 급급했다.
바닥에서 피어오르는 모래.
서역의 한 곳에 자리잡은 곳이기 때문인지 어디에나 붉은 황토색을 지닌 모래가 깔려 있었다.
황토 사이로 보이는 푸른 잎.
버드나무였다.
땅 속으로 흐르다 갑자기 땅 위로 솟구치는 우물, 카레즈가 흐르는 곳에 녹음이 피어나는 버드나무가 있기는 하지만 제법 먼 거리였다. 만약 카레즈가 없었다면 그들이 누구의 눈에도 뜨이지 않고 천 년 동안 숨어 있지도 못했으리라.
숨겨진 땅.
그리고 그들의 신이 땅을 찢어 흐르게 했다는 카레즈.
모든 것이 기파에 휘말리고 있었다.
“또 온다. 피해라!”
“커윽!
다급한 비명이 울리고 둘러섰던 부족민들이 흩어졌다.
한결같이 병기를 들고 있는 부족민들. 겉으로 보아서는 무인 같지만 굳이 따지자면 무인이라는 말은 적합한 말도 어울리는 말도 아니었다.
달리 무공을 익히는 무인이 있는 것이 아니다. 모두가 무공을 익히는 우전국의 후예들이 아닌가? 우전국의 후예들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무공을 익히고 무기를 지니고 있었다.
바람이 몰아치고 찢겨진 기파가 흩어져 다가오기라도 할라치면 둘러섰던 부족민들은 급히 쌍수를 흔들어 자신의 몸으로 다가오는 기파를 막으려 했다. 그러나 두 노인의 손에서 뿜어지는 기파는 주변에 둘러선 누구도 막을 수가 없었다.
콰드드드!
또다시 허공에서 수십 개의 손 그림자가 난무하더니 결코 약하지 않은 강기의 충돌이 일어났다.
“피해라!”
누군가의 목소리가 울리고 주변에 몰려 있던 부족민들이 급급히 몸을 날렸다.
파아아아!
주변에 둘러섰던 부족민들이 모두 피했다고 해서 허공에 뿌려지던 장세(掌勢)가 거두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더욱 강해진 기파가 두 사람의 몸을 감싸고 돌았다.
그들의 몸 주위에서 바람이 일고, 붉은색을 띠고 있는 모래와 황토가 날아올라 사람들의 시야를 가려버렸다.
쿠앙!
천지번복(天地飜覆)의 기운이 일어나고 두 사람은 각기 오 장씩 날아가 비틀거리는 몸을 세웠다. 두 노인은 각기 자신의 몸을 둘러보았는데 상처는 없었지만 몸이 흐트러지고 옷자락이 마구 찢어진 것이 막상막하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무서운 내공.
기파를 뿌려 옷을 갈가리 찢어놓는다는 것은······
“손으로는 안 되겠군.”
두 명의 노인 중 이마에 사마귀가 달려 있는 노인이 허리에서 한 자루의 검을 뽑아들었다. 반원으로 휘어진 검은 마치 초생달 같은 모양을 지니고 있었다.
“무기를 쓸 생각인가? 나 우샤림도 거부하지 않는다.”
눈동자가 파랗고 머리가 금발인 노인이 참지 못하고 품을 뒤져 검은빛이 나는 물건을 손에 감았다. 허리에 달린 검은 사용하지 않을 생각인 것 같았다. 짐승의 가죽으로 만든 장갑이었다. 우샤림은 금발의 머리를 좌우로 흔들어 엉클어뜨리고 장갑을 손에 끼었다.
손에 끼워진 장갑은 누가 보아도 경악을 할 것 같은 모습이었다.
검은 장갑에는 뱀의 비늘 같은 철편(鐵片)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고 손가락 끝에는 가늘게 휘어진 칼날이 붙어 있었다. 칼날이 검붉은색으로 빛나는 것으로 보아 일순간에 목숨을 앗아갈 수도 있는 맹독(猛毒)이 발라져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바란, 한번 해보자는 거냐?”
우샤림이 손을 들어 검을 든 노인을 바라보았다.
바란이라 불린 노인, 초생달처럼 휘어진 검을 들고 선 노인은 중원인과 너무도 닮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검은 머리카락에 흰 피부, 검은 수염, 모든 것이 중원인과 닮았다. 그래서 바란과 우샤림은 전연 다른 이질적인 존재로 보였다.
“우샤림, 혈사족이 우리 나풍족을 요트칸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이유가 뭐냐?”
“이곳이 성지임을 모르느냐? 이곳이 나풍족의 신전만은 아니다. 우리 혈사족에게도 신성한 땅이라는 것을 모른단 말이냐? 우리는 천 년 동안 이곳에 대한 예의를 다했다. 신전에 들어가고자 하는 자는 나특한의 명을 받아야 한다. 신탁이 내려지기 전에는 누구도 들어갈 수가 없다. 더구나 신탁이 내려져도 양 가문의 수장(首長)이 함께 마음을 모아야 들어갈 수 있도록 했지 않느냐? 그런데 무작정 들어가려 하는 이유는 뭐지?”
“흥, 이곳에서 기이하기 이를 데 없는 소리가 나고 악취가 나고 있다는 것을 모르느냐? 더구나 우리 나풍족의 수장이 이 일을 해결하고자 들어가셨다는 것을 모르는 거냐?”
바란이 노해 소리를 질렀다.
그랬다.
모든 것은 나풍족의 족장인 바토르가 나특한의 동의도 없이 성지로 들어간 것이 잘못이었다. 나특한의 명령을 받지 못했음에도 그는 성지로 들어갔다.
있을 수 없는 일.
천 년의 불문율을 깨는 일이었다.
혈사족을 이끄는 수장이며 혈사족의 족장인 우샤림이 분노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율법(律法)을 깨는 일.
그가 어떤 의도를 지니고 신전 안으로 들어갔는지 중요하지 않다. 문제는 그가 나특한의 동의를 얻지 않고 신성한 땅으로 들어갔다는 것이었다. 이 일련의 행동은 결과를 예측할 수 없지만 그 파장이 적지 않았다. 혈사족으로 보아서는 나풍족이 저지른 일을 묵과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것은 우전국의 후예들이 모여 이루어진 부족들이 오랫동안 지켜왔던 율법을 나풍족이 어긴 것을 의미했다. 뻔한 일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신전에는 오래 전부터 우전국의 조상들이 남긴 무공과 그 유물들이 있었다.
나특한은 그 신전의 유물을 누구도 가지지 못하게 했다.
그것으로 그치지 않아 오백 년 전부터는 대를 이은 신관들이 나서서 누구도 조상의 유물이 남겨진 곳에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 나특한도 전대로부터 이어진 신관을 계승했는지라 조상의 성지와 유물을 지키는 일에 성심을 다했다.
바토르의 뜻이 좋았다 해도 그가 유물을 노리지 않았다고 설득할 수 없었다.
모든 것이 눈에 드러난 것이므로.
“흥, 그러니까, 이제 신전 속의 무공을 익힌 나풍족의 족장을 불러내어 모든 우전국의 후예들을 지배하겠다는 것인가? 아니, 궁극적으로는 혈사족까지 손에 넣겠다는 말이지. 있을 수 없는 일! 우리 조상들은 우리 모두가 이곳에서 마음을 맞추어 편히 살아가기를 원했다. 약속을 깬 것이 나풍족이니 모든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우리 혈사족은 이곳을 붕괴시켜 버리겠다. 영원히 동굴에서 나오지 못하도록.”
우샤림이 손을 들어 한 곳을 가리켰다.
커다란 바위산이었다.
주변이 사막으로 둘러싸여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놀라우리 만치 높은 산이었는데, 주변에는 카레즈가 있기 때문인지 나무와 풀이 자라고 있었다.
바위산에는 커다란 입구가 입을 벌리고 있었다.
사람이 서서 들어가도 머리가 닿지 않을 정도로 높은 천장을 지닌 동굴이었는데, 그곳에는 머리카락이 금발이고 눈이 푸른 혈사족의 부족민들이 병기를 쥐고 막아선 상태였다.
더구나 다른 부족과 달리 흰 옷에 여러 가지 문양이 그려진 옷을 입은 두 명의 무인도 보였는데 그들이야말로 신전을 지키는 신족의 무인들이었다.
나특한의 명령만 받는 자들.
바란은 동굴을 바라보다 몸을 돌려 우샤림을 바라보았다. 그는 손가락으로 코 끝을 올리며 분노한 표정으로 우샤림을 노려보다 한 발 다가섰다.
“흥, 그래서······ 성지를 무너뜨리겠다고? 네놈들이 감히 우전국의 후인이라 할 수 있더냐?”
바란이 소리를 질렀다.
이어 그는 발로 허공을 박차고 오르며 검을 사선으로 그어 마구 흔들었다.
슈슈!
뱀이 입에서 혀를 내밀 때 나는 소리와 비슷한 소리가 나며 눈에 보이는 유형의 기파가 뿜어져 나왔다. 곡선을 그리며 다가가는 맑은 기파는 한 순간에 우샤림의 가슴에 이르렀다.
“미친놈! 성지를 더럽힌 것은 네놈들 나풍족이다. 차라리 이곳을 무너뜨려 성전이 더 이상 더러워지지 않게 하겠다는 것이 나쁘다는 것이냐? 성지를 더럽힌 놈들이!”
우샤림이 노해 소리를 질렀을 때 바란이 뿌려낸 기파가 이미 지척에 이르고 있었다.
파파파파!
맑은 기운을 퍼뜨리는 기파가 우샤림을 향해 쏟아져 내려왔다. 모든 것이 기파 속에 가두어져 버릴 것 같았으나 우샤림은 긴장하지도 않았고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그저 가벼운 모습으로 손을 들어올리고 기다렸다.
기파가 몸에 이르는 순간 우샤림이 손을 마주 휘젓기 시작했다. 그의 모습은 그야말로 눈 앞으로 날아드는 기파를 막기 위한 것처럼 보일 뿐이었다.
그것은 착각.
파아아아!
우샤림의 손이 허공에 무수한 그림자를 그려내자 물고기의 비늘 같은 철편이 허공을 날았다. 철편은 검기를 막았을 뿐 아니라 검기를 쏘아보낸 바란의 몸을 향해 날아가기도 했다.
꽃잎이 떨어지는가?
바람에 날리는 도화 꽃잎이 하늘거리듯 허공으로 흩어지는 철편은 무기로 보이기보다는 차라리 아름다운 환상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다.
“헛!”
하지만 막상 대적하는 사람은 달랐다.
바란은 급히 몸을 뒤집고 검을 팔방풍우(八方風雨)처럼 흔들고 나서야 목을 노리고 달려드는 철편을 모두 막을 수 있었다.
차차창!
허공에 불꽃이 피었다.
철편과 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는가 했는데, 작은 철편에도 무시할 수 없는 기파가 실렸는지 바란의 몸이 연속 네 걸음이나 물러섰다.
검에 부딪친 철편은 마치 강한 자석(磁石)에 이끌리기라도 하는 듯 우샤림의 장갑으로 날아가 달라붙었다. 아무래도 장갑과 철편은 강한 자성(磁性)을 지니고 있어 서로 끌어당기는 것 같았다.
“흥, 한 수 하는구나?”
“내가 할 소리다.”
두 사람은 적의의 시선으로 노려보며 다시 손을 들어올렸다. 한결같이 얼굴에 심줄이 돋고 붉어지는 것으로 보아 지금까지 뿌린 기파와는 다른 무공을 전개하려는 것 같았다.
바람까지 얼어붙은 것 같았다.
모든 것이 잠을 자는 듯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주변에서 몸을 피하며 관전하던 무인들도 급히 물러났다.
우루루루!
그들의 몸 주위에서 강한 기파의 충돌로 인해 천둥이 몰려오는 듯한 소리가 났다.
“멈추시오.”
갑자기 들려오는 소리.
수염이 성성한 노인이 바람처럼 달려오고 있었다. 그의 뒤에는 한 명의 청년이 등에 검을 걸머지고 달려오고 있었다.
나특한이라 불렸던 노인이었다.
그가 달려오자 두 명의 노인은 각각 갈라선 모습으로 서로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섣불리 움직이지는 않았다. 나특한이 그들의 중앙에 다가와 섰기 때문이었다.
나특한이 다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그것으로 보아 나특한은 그들 모두에게 존경을 받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특한은 몸을 세우자마자 불 같은 눈으로 사람들을 쏘아보았다. 그 동안 나특한의 허락없이는 누구도 신전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나특한만이 신의 계시를 받아 부족민들을 신전 안으로 들여보낼 수 있었다.
어겨진 율법.
“무슨 일이오?”
나특한이 언성을 높였다.
어느새 두 개의 부족민들은 좌우로 갈라섰고 바란과 우샤림은 서로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고 있었다. 그에 따라 머리카락과 눈동자의 색으로 나누어지는 두 부족의 모든 사람들이 병기를 뽑아들었다. 전운(戰雲)이 감도는 것을 예상이라도 했는지 바람이 거칠게 불며 그들이 걸치고 있는 옷자락을 펄럭이게 만들었다.
일촉즉발. 곧 서로를 향해 달려들 것 같은 시간의 흐름이 이어지고 있었다.
바란이 앞으로 나섰다.
“나특한, 나는 신전 안으로 들어가고 싶소.”
“안 되오.”
나특한은 고개를 저었다.
그가 받은 신탁에 의하면 신전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날은 정해져 있었다. 그것은 조상의 혼이 잠자고 있는 성지를 보호하는 일이기도 했지만, 그 속에는 오래 전부터 우전국의 후예들을 지켜준 신의 성전(聖殿)이 같이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신전.
그도 함부로 들어설 수 없는 신전이 동굴 속에 있었다. 오래 전 우전국의 선조들은 신전과 조상들의 묘를 한 곳에 만들었다.
나특한마저도 꿈에 계시를 받거나 동굴 밖에 지어진 작은 신전에서 신탁을 받아야 동굴 안에 있는 신전에 들어갈 수 있었다. 오래 전부터 지켜진 율법이었다.
우샤림이 앞으로 나섰다.
“나특한.”
나특한은 고개를 돌리고 다가오는 우샤림을 바라보았다.
“우샤림, 무엇이 안타까워 그리도 서두르는 것이오. 바란도 다르지 않소. 당신들이 이토록 다투면 두 개의 부족에 찬바람이 분다는 것을 모른단 말이오?”
우샤림의 말소리가 격해졌다.
“그렇지만 나풍족의 수장 바토르가 이미 성전 안으로 들어갔소이다. 그를 막지 못한다면 언제 피의 바람이 불지도 모르는 일이오. 나는 혈사족의 족장으로 이 일을 묵과할 수 없소. 이는 우리 혈사족의 안위에 관한 일이오.”
나특한은 곤혹스러웠다.
우샤림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무엇을 요구하는지도 안다. 그러나 어쩌란 말인가?
반드시 아니라 말할 수 없는 것이 바토르의 행위는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던 일이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욕심이 없었다면 안으로 들어가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유없이 신전에 들어갈 우전국의 후예는 단 한 명도 없기 때문이다.
욕심!
그것은 누구나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어서 들어가 봅시다.”
“그렇소. 모두 들어가 보아야 하오.”
나특한으로서도 달리 방법이 없었다. 신전에 침입한 자를 잡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으나 무엇보다 마음이 무거웠다.
바란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알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그가 알고 있는 어떤 물건, 물론 그만이 아니고 우전국의 후예들은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소문으로, 혹은 전대의 조상들을 통해.
신전에는 오래 전부터 호풍환우(呼風喚雨)를 할 수 있는 무공이 기록된 비급이 보관되어 있다고 했다. 누구도 찾아내지 않았고 그 동안 찾으려고 하지 않았지만 소문은 무성했었다.
역혈진경(逆血眞痙)이라 했던가?
일찍이 서천(西天)에서 전해졌다고 알려진 것으로, 놀라운 무공구결이지만 결국은 피를 부른다는 소문이 있어 성전 안에 봉해진 것이었다.
소문은 누구나 안다.
나풍족도 알고 혈사족도 안다. 신전 어느 곳에 역혈진경이라 불리는 비급이 보관되어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곳이 어딘지 아는 사람은 없다.
소문에는 나특한마저 알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다만 나특한이 알고 있는 것인지, 모르는 것인지 정확하게 파악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알 만한 사람은 안다. 일찍이 신전을 주관했던 전대 신관들에 의해 소문과 다름없이 나특한이 역혈진경의 소재를 알고 있다는 것을, 추측이기는 해도.
나특한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가라크!”
뒤를 따르던 청년이 바삐 다가왔다.
“신전을 지키는 무인들은 어찌 되었느냐?”
“열두 명이 실종되었습니다. 그들은 신전으로 들어가는 바토르를 추적해 들어간 것으로 확인되었지만 그들이 나왔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나특한의 얼굴에 깊은 고랑이 파였다.
“신전의 모든 무인들을 모아라. 신전 안으로 들어가겠다.”
“예!”
가라크가 물러서자 이곳저곳에 흩어져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던 무인들이 다가왔다. 금발과 흑발, 심지어 은발까지 지니고 있는 그들은 어느 부족에도 소속되지 않은 부족으로, 나풍족과 혈사족이 신족이라 부르는 신관의 부족이었다. 그 수는 극히 적어 나풍족이나 혈사족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그들은 중립을 지키며 신전을 지키기 때문에 양 부족의 알력(軋轢)에 무너지는 일은 없었다.
두 개의 부족은 모두 신족을 조심스럽게 대했다.
아직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만에 하나 어느 부족이 신족에게 해를 입힌다면 결국 상대 부족과 신족의 연합으로 나타날 것이다. 그런 이점을 살려 신족은 천 년 동안 중립적인 위치에서 부족들을 조율하고 있었다. 물론 신전의 일을 자신들이 지켜오며 부족들이 어긋나지 않도록 조율을 하고 있기도 했다.
그것이 깨진 것이다.
나특한은 몸을 돌렸다.
“바란, 우샤림! 두 분은 부족 내에서 가장 무공이 강한 무인을 열 명씩 뽑아 대동하시오. 지금은 다툴 때가 아니오. 만에 하나 잘못이 있다면 나중에 다툴 일이고 지금은 신전과 성스러운 조상들의 유골을 살펴야 하오. 나 또한 지금으로서는 신전이 어떻게 되었는지 장담할 수가 없소.”
“알겠소이다.”
“따르겠소.”
두 부족의 수장들은 동의를 했다. 바토르가 없는 지금 나풍족의 명령권자는 바란이었고 우샤림은 애초부터 혈사족을 이끄는 족장이었다.
바란이 기울기는 하지만 그가 바토르의 아들이었으므로 결정을 내릴 권한은 가지고 있었다.
그그그그!
문이 열리자 검은 암동(巖洞)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조심히 따르도록 해라!”
나특한이 소리를 지르며 앞장을 섰다. 가라크가 커다란 장검을 뽑아들고 앞에 섰다.
두 개의 부족에서 차출된 무인들은 횃불을 들고 동굴에 어깨를 스치듯 좌우로 걸었다. 그들 사이에는 나특한과 바란, 우샤림이 걸었다. 신관을 보호하는 신족의 무인들은 각기 앞과 뒤에서 긴장한 모습으로 따르고 있었다.
그들은 말없이 걸음을 움직였다.
“윽!”
갑자기 앞서가던 가라크가 걸음을 멈추었다. 다가갔던 나특한이 급히 입을 막았다.
“뭐냐?”
바란도 다가오다 급히 입을 다물고 손으로 입을 막았다. 그것으로 시작이었다. 동굴로 들어온 모든 사람들이 입을 막았고 동작이 늦은 사람은 토악질을 하기 시작했다.
질식할 듯한 냄새.
모두의 눈이 마주쳤다.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이 심상치가 않았다. 다른 때 같았으면 청량한 기운이 느껴졌어야 하는 곳이었다. 그런데 악취라니.
마치 사람이 썩어가는 것 같지 않은가?
“불을 붙여라.”
나특한이 소리를 지르자 횃불을 들고 있던 무인들이 동굴 벽에 부착되어 있는 작은 등에 불을 붙이기 시작했다. 호등(弧燈)은 일정한 거리로 붙어 있었고 곡유(穀油)를 듬뿍 먹여놓아 쉽게 꺼질 것 같지 않았다.
동굴이 밝아졌다.
동굴은 긴 계단으로 이어져 있었고 경사가 져 있었다.
그들은 조심스럽게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삼십 명이 넘었지만 일사불란하여 마치 열을 맞추어 행군을 하는 것 같았다. 동굴은 밑으로 내려갈수록 점점 넓어졌다.
“음, 독하다. 이 냄새는 여간 불쾌한 것이 아닌데. 이곳에서 무슨 변고가 있었단 말인가?”
나특한은 옷깃을 끌어올려 입과 코를 막았다. 그의 행동을 본 모든 사람들이 같은 방법으로 입을 막았다. 그래도 냄새가 코로 스며들기 때문인지 한결같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들은 조심스럽게 계단을 내려갔다.
오래지 않아 평평한 바닥이 횃불의 불빛에 의해 드러났고 가라크는 이미 당도해 있었다.
“나특한!”
앞서 걷던 가라크가 소리를 지르며 멈추어섰다. 과연 그가 손가락질을 한 곳에는 사람의 시체가 누워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시체라 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뼈만 남은 것을 시체라 할 수 있을까?
“시체다!”
누군가 소리를 질렀다.
혈사족 무인들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신족의 무인들이 다급히 달려와 두 부족의 무인들 사이를 막아섰다.
“이 시체는 오래 전 것이오.”
나특한의 목소리가 두 부족의 싸움을 막았다.
유골(遺骨)만 남은 시체.
시체가 썩어 뼈만 남을 정도라면 일 년의 세월이 필요하다. 그런데 바토르가 동굴로 들어간 것은 불과 한 시진 전이었다.
나특한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기 때문에 혈사족은 들어올렸던 병기를 내렸다.
기이한 일.
나특한은 고개를 갸웃했다.
시체가 있다는 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 시체가 뼈만 남겼다는 것이다. 그와 각 부족민들은 신전이 열렸던 사 개월 전에는 시체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동안 이 신전은 열리지 않았었다. 그렇다면 누가 시체를 가져다놓았단 말인가! 뼈만 남긴 것으로 보아 하루이틀 전의 시체는 아니다.
바토르가 한 짓이 아니라는 말이다.
“계속 가봅시다.”
나특한의 말에 계속 발걸음을 옮겼지만 그들이 볼 수 있는 것은 유골로 변한 시체뿐이었다. 의복이 입혀져 있는 시체가 있기도 했지만 대부분 찢어져 나체가 된 모습이 더욱 많았다. 옷을 걸치고 있지 않다는 것은 죽기 전에 이미 옷을 걸치고 있지 않았다는 증거.
더구나 남겨진 유골의 골격(骨格)이나 골반(骨盤)의 구조로 보아서는 남자가 아니고 여자였는데.
누구나 쉽게 분별하지는 못한다.
죽은 자가 여자인지 남자인지 구별하기 위해서는 식별할 수 있는 눈이 필요하지만 매우 어려운 일이었기에 알아보는 사람은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없었다.
나특한만이 여자들의 골격이라는 것을 알아보았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입을 열지는 않았다.
“그 동안 사라졌던 사람들이 모두 이곳에 있었다니.”
바란이 신음을 토했다.
그 동안 두 개 부족에서는 적지 않은 부족민들이 사라졌다. 모든 사람이 미루어 짐작하기만 했었다. 그들은 속박을 떠나 다른 곳으로 떠났을 것이라고.
이제 눈 앞에 그 실체가 드러나고 있었다.
부족민들은 떠난 것이 아니고 동굴 속에 시체로 남아 있던 것이었다. 이미 뼈만 남은 채로. 물론 전부가 그들 부족의 시체라고 장담할 수는 없었다.
바란은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이 무슨 일인가? 신전으로 들어오지 않은 것은 불과 넉 달뿐인데······ 넉 달 전에도 이 신전에서 이런 일은 없었다. 모든 것이 넉 달 동안 이루어졌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그럴 리가 없다. 넉 달이라 해도 시체가 이처럼 뼈만 남아버릴 수 있는 시간이 아니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곳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바란이 고민에 잠겨 있는 사이에 나특한은 시체로 다가가 살펴보았다.
아무런 증상도 볼 수가 없었다.
상처 따위가 남아 있어야 그나마도 사인(死因)을 밝혀낼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뼈만 남아 있다면 알 수가 없다.
“응?”
유골을 살피던 나특한은 눈을 크게 떴다. 얼마나 놀랐는지 그의 경악이 목을 타넘었다.
바란과 우샤림이 눈치채지 못할 리 없다.
“나특한.”
“무슨 일이오?”
바란과 우샤림이 다가왔다.
“이걸 보시오.”
나특한이 손가락으로 한 곳을 가리켰다. 바란과 우샤림은 나특한의 손 끝을 바라보았다. 그곳은 뼈가 흩어져 있는 곳이었는데 기이하다는 느낌은 주지 않았다.
뼈가 백설처럼 희다면 이상할까?
바란과 우샤림은 나특한이 의도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무슨 일이오?”
바란이 되물었다.
“시체는 이미 뼈만 남겼소. 그들이 죽었다는 것은 기정사실이고 누구인지도 알아볼 수 없소. 그러나 한 가지 단서는 남겼소. 그 증거가 이 뼈요.”
“뼈가 무슨 증거가 될 수 있다는 거요?”
“사람은 죽으면 습기와 바람, 온도에 의해 살이 썩게 되는 것이오. 내가 모두가 아는 일을 되짚어보거나 자랑하고자 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주시기 바라오. 그럴 마음도 없으니까. 아무튼 그 과정에서 뼈는 잿빛을 띠게 되오. 비바람에 씻기고 햇빛에 탈색되었다면 흰빛을 띨 수 있지만 이 정도는 아니오. 그러나 이 뼈는 놀랍게도 백설 같은 색을 띠고 있소. 이것은 인위적인 힘이 가해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오.”
“오!”
“그렇구려!”
모두가 탄성을 발했다.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도 있었고 고개를 돌려버리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 모두는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그것은 바토르가 신전으로 들어왔다는 것 이상을 의미하고 있었다. 바토르가 신전으로 들어온 정도라면 모두의 힘으로 제압할 수 있었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바토르가 신전으로 들어갔다는 사실 이상을 지니고 있었다.
무엇보다 바토르가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지니게 되었다는 것이 그 한 가지였다.
“그렇지만 이들은?”
우샤림이 나직하게 질문했다.
나특한은 짐작이 가지만 섣불리 입을 열 수 없었다. 그것이 역혈진경을 익히고자 하는 자의 악행이라 말할 수 있는 증거 또한 없었다.
차라리 입을 다무는 것이 나을 것이다.
모든 것이 명백하게 드러나기에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는 나특한은 먼저 바토르를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는지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나풍족의 족장인 바토르도 이들처럼······?”
우샤림은 입을 열다 다물어 버렸다. 자신이 한 말이 나풍족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생각하는 신중한 태도였다.
그사이에도 나특한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서둘러야 한다.’
나특한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그가 그토록 빨리 움직이는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누가 생각해도 나특한은 역혈진경을 살피려는 행동이었다. 그가 걸음을 옮기자 뒤를 따르던 모든 사람들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그들이 옮겨가는 동굴 안쪽으로도 악취가 진동을 하고 있었고 죽어버린 시체에서 남은 뼈가 구르고 있었다. 그것은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반각을 걸었을 때 그들의 눈 앞에 커다란 석문(石門)이 나타났다. 석문은 오랜 세월의 흔적으로 희미해졌지만 양각으로 새겨진 부조(浮彫)가 있었다.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봉황의 머리와 용의 꼬리, 그리고 용의 발톱과 봉황의 날개가 보였다. 용과 얽혀 있는 봉황을 그린 것인지, 아니면 두 가지의 신령스러운 동물을 한 마리로 형상화하여 새긴 것인지 알 수 없는 조각이었다. 바닥은 직선으로 각이 진 일반 문과 같았지만 윗부분은 반월형으로 깎인 문이었다.
천장에는 전서체(篆書體)로 쓰여진 글씨가 있었는데 습기로 인해 피어난 이끼와 오랜 세월의 흐름으로 인해 거의 지워져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다.
누군가 아무도 모르게 이끼를 뜯어 입으로 가져갔다. 너무도 은밀하고 신속하게 이루어졌기 때문에 본 사람은 없었지만 이끼를 뜯어 먹은 자의 행동은 아주 재빨랐다.
“열어라!”
나특한이 소리를 질렀다.
“부족의 무인들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시오.”
그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알기 때문인지 무인들은 일제히 병기를 뽑아들었다. 그리고 횃불을 동굴의 구석진 틈에 꽂아 만약의 사태에 대비했다.
신족의 무인들이 조심스럽게 다가가 문고리를 잡았다.
그들은 서로 눈짓을 교환했다.
서로를 마주보던 두 명의 무인이 문고리를 당기고 네 명은 손에 들려 있던 검을 앞으로 내밀어 만에 하나 문을 통해 튀어나오는 암습자에 대비했다.
그그그그!
돌이 마찰되는 소리가 들리고 석문이 우측으로 밀려갔다.
“어서!”
나특한이 소리를 지르자 두 명의 무인이 바람처럼 안으로 날아 들어갔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들어오십시오.”
안에서 말소리가 들린 후에야 밖에 서 있던 사람들이 횃불을 들고 안으로 들어갔다.
동굴로 들어간 사람들은 벽 이곳저곳에 부착되어 있는 등에 횃불을 옮겨붙였다. 어둡던 동굴이 한 순간에 밝아졌다. 해가 중천에 떠 있는 대낮은 아니라 해도 보름달이 뜬 밤보다는 밝았다. 과연 동굴 안이 밝아졌을 때 사람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동굴은 화려했다.
곳곳에 병기며 농기구가 놓여져 있고 각양각색의 천이 드리워져 있었고 번제(燔祭)를 올리는 곳인지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긴 탁자가 놓여 있었다. 탁자의 뒤는 편편한 벽으로, 동굴치고는 놀랍도록 다듬어진 곳이었다. 그 앞은 천장에서 바닥에 이르도록 긴 천으로 막혀져 있었다.
이곳저곳을 살피고 뒤져 보던 무인들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돌아왔다.
바토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나특한은 동굴을 바라보다 눈을 동그랗게 뜨며 깊은 한숨을 불어내었다.
“역시 내 예상이 틀리지 않았다.”
보라.
동굴 안은 엉망이었다. 돌로 다듬어진 제단과 수백 구의 관은 마구 깨어져 있었다. 그 관에는 역대 조상들 중에서 이름을 날린 부족장들의 유골이 있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일찍이 우전국을 세웠던 황제들의 유골도 모두 보관되어 있었다.
한족(漢族)의 횡포에서 살아남은 우전국의 후예들이 사막 한가운데, 카레즈가 흐르는 곳으로 숨어 들어온 것은 이미 천 년 전의 일이었다.
오래도록 그들은 서역에서조차 알려지지 않을 정도의 은둔생활을 했다. 누구란 말인가? 누가 감히 신성한 성지에 들어와 난동을 부리고 조상들의 유골을 훼손했단 말인가?
“윽, 피냄새.”
누군가 코를 움켜쥐었다.
과연, 바닥에는 쓰러진 시체가 있었다. 뼈만 남긴 시체가 아니라 죽은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체였다. 바닥에는 붉은 피가 흐르고 있었고 비린내가 섞인 냄새는 그들이 흘린 피가 아직은 썩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었다.
“바토르를 찾아라!”
우샤림의 호통이 들리고 무인들이 흩어졌다. 신족의 무인들도 앞 뒤 가리지 않고 무작정 달려갔다. 그들은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신전의 물건을 살폈다.
나특한은 몸을 숙이고 쓰러져 뒹구는 무인에게 다가갔다.
쓰러져 나뒹구는 여러 구의 시체가 입고 있는 옷은 신전을 지키는 신족 무인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소매에 붉은 수실로 봉황이 그려져 있는 것을 보면.
나특한은 시체의 모습을 자세히 살폈다.
마치 눈 속에 시체의 모습을 새겨넣으려고 하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죽은 지 두 시진이 지났다.’
나특한은 한숨이 나왔다.
바토르가 신전으로 들어갔을 때 조금 더 빠르게 연락을 했더라면 모든 것이 달라졌을 것이다.
신전을 지키던 무인들은 바토르를 잡아끌고 올 생각이었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시간이 지체되어 버렸고 모든 것이 엉망이 되어버린 후였다.
시체의 죽음이 모든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피를 흘리기는 했지만 몸에 남아 있는 상흔(傷痕)은 칼로 벤 것이며 엎어진 얼굴과 배에 검은 멍처럼 보이는 것은 시반(屍斑)이었다. 시반이 나타난 것으로 보아 적어도 한 시진은 지났고 두 시진은 지나지 않은 것이었다.
칼로 그어진 시체의 상처가 어떤 것인지 파악한 나특한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어지러웠다.
바토르가 만들어놓은 상처.
‘아차.’
나특한은 생각나는 것이 있어 앞으로 달려가 어두운 벽에 다다랐다. 그리고 미친 듯 벽을 쓸었다. 오래지 않아 그의 손에 잡히는 벽이 있었다.
그는 벽에 달린 조그만 손잡이를 당겼다.
그그그그!
돌이 밀리는 소리가 들리고, 이윽고 작은 석함(石函)이 벽에서 뽑혀나왔다.
“헉!”
없었다.
그의 불안은 현실이 되었다. 그가 가장 우려했던 점은 석함에 보관되어 있던 역혈진경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행동이었다. 그것만이라도 보존되었다면 안심할 수 있겠지만.
“무슨 일이오?”
바란이 다가왔다.
나특한은 고개를 돌렸다.
“역혈진경이 없어졌소.”
바란의 몸이 바람을 맞은 갈대처럼 흔들렸다. 역혈진경에 대해 이야기를 들었던 적이 있었다. 다만 그 소재는 비밀이었다. 심지어 신족의 주인이며 신관인 나특한에게도 알려지지 않는 것으로 소문이 나 있었는데.
어느새 우샤림도 다가와 얼굴에 허망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바토르는?”
나특한이 다급하게 물었다.
이미 역혈진경이 없어졌으니 그것을 소지한 사람은 바토르뿐이었다. 그만이 범인이 될 수 있었다. 그가 아니라면 역혈진경을 탐낼 사람도 없었다.
그가 이유없이 신전으로 난입한 이유도 명백해지는 것이었다. 조상의 율법을 어겨가며.
털썩!
나특한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
삼 인은 미동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나특한과 마주앉은 두 사람. 나이는 비슷해 보였지만 두 사람은 너무도 달랐다.
나특한의 처소였다.
한 사람은 머리가 금발이며 푸른 눈을 가진 여인이었고, 한 사람은 여인보다 더 아름다운 얼굴이었지만 몸 전신에 고아한 옷을 입고 있는 남자였다.
한결같이 등에 한 자루의 검을 매고 있었다.
사내는 검은 머리와 흑백이 뚜렷한 눈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나풍족의 후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풍족과 혈사족의 후인들이 모인 것이다.
나특한은 오래도록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숨결이 심상치가 않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납촉이 일렁거리고 있었다.
“마음의 준비가 되었느냐?”
“예!”
“명을 따르겠습니다. 이미 중원으로 떠날 준비가 되었습니다. 가문의 어르신들께 나특한의 명령을 실수없이 이행하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두 명은 이구동성에 가까운 목소리를 토했다.
“그래. 지금으로서는 방법이 없다. 우리는 봉착(逢着)에 다다랐다. 풍전등화라는 말이 맞을 것이다. 방법은 하나. 역혈진경을 찾을 수 있는 자, 또는 역혈진경을 파훼할 수 있는 자를 찾는 것이다. 그러나 그 기재는 흔하지 않다. 너희들은 그 무공을 익힐 수 없다. 그것은 누구나 익힐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을 익힐 수 있는 기재를 찾아야 한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지 못한다면 우리가 죽거나 멸망하는 것은 고사하고 세상의 모든 것이 불길에 싸일 것이다. 이미 이십여 명의 부족민들이 중원과 서역으로 흩어졌다. 그들은 기재를 찾을 것이다. 너희들이 마지막이다. 기재를 찾는 일은 쉽지 않으나 기회는 있고 대신 찾아줄 사람도 있다. 역혈진경에 대해 누구보다도 자세하게 연구한 사람이 있다. 그는 오래 전 나와 만난 적이 있으며 단 한 번으로 친구가 되었으니 허락해 줄 것이다. 그는 일찍이 중원에서 난동을 부렸던 흡혈귀 서역불패를 조사하고 방비를 세웠다. 그는 사인생(四寅生)이다. 생년월일시(生年月日時)에 네 개의 인(寅)이 들어 있는 사람. 그를 데리고 오거나 그가 알려주는 사람을 데리고 오는 것은 너희들에게 달렸다. 그만 가거라.”
나특한은 품을 뒤져 한 장의 서찰을 꺼내들었다. 그것은 잘 접혀져 있었다. 남자가 서찰을 받아 품에서 작은 손수건을 꺼내 감쌌다.
지나치게 조심스러운 모습은 차라리 여인보다 더한 정숙함이 느껴졌다. 길고 흰 손가락, 더구나 그 유려한 움직임은 같은 사내의 눈이라 해도 혼란스러워질 정도였다. 여인의 몸에서나 날 것 같은 짙은 향기가 풍기는 수건에 싸인 서찰은 곧 그의 품으로 들어갔다.
“아미산(峨嵋山)으로 가거라. 그곳에서 나포대사(羅圃大師)를 찾는다면 그 방법을 일러줄 것이다. 그만이 우리를 도와줄 수 있다. 실수없이 해야만 한다. 만에 하나 이 소문이 밖으로 퍼져 나가기라도 한다면 우리 우전국의 후예들은 중원무인들의 공격을 받아 한 순간에 피바다에 처박히게 될 것이다. 나포대사는 비밀을 지켜줄 것이고 방법을 모색해 줄 것이다. 나는 그에게 기대를 걸고 있다. 그가 온다면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그도 아미의 장로로서 중책이 있으니 오기 힘들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가 누군가는 보내줄 것이다. 다른 누구보다 나는 그에게 기대를 걸고 있다. 우리 부족의 미래가 너희들의 손에 달렸다는 것을 명심하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어서 떠나도록 해라.”
나특한의 명령을 받은 두 남녀는 급히 몸을 일으켰다. 머리를 숙여 예를 올린 두 남녀는 곧 물러나 문을 열고 사라졌다. 극히 짧은 시간이었다.
그들이 사라지자 나특한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창가로 다가가 손으로 창을 열었다. 아직도 이른 시간이었다. 새벽을 재촉하는 기운이 스멀거리듯 깨어나고 있었다.
다가오는 듯 느껴지는 북극성(北極星)이 눈 앞에 있었다.
그는 한참 동안 북극성을 바라보았다. 이미 다른 별들은 모두 잠자리에 들었는지 보이지 않았다.
“곧 비가 오겠군. 봄을 재촉하는 비가 올 거야. 그 비가 이곳의 모든 슬픔과 우환을 쓸어버렸으면 좋으련만. 그렇지만 지난날의 피는 지워지지 않아.”
지난날의 피?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지 그만이 알 일이다.
나특한은 긴 숨을 뿜어내었다.
과연 하늘이 점차 어두워지고 있었다.
그의 바람대로 비가 올지도 모를 일이었다. 봄을 재촉하는 비. 그의 근심을 쓸어가 버리면 좋을 비였다.
2장 민강(岷江)의 푸른 물결
야트막한 산에는 봄꽃이 한창이었다.
막 피어오른 새순 사이로 피어나는 파릇함과 함께 연분홍 꽃잎이 아스라했다.
눈 앞으로 다가오는 듯한 봄.
계절이 살아 있는 짐승이라 한다면 아마도 품으로 파고드는 고양이의 혓바닥 같을 것이다.
푸른 하늘이 머리 위에서 홰를 치고 있었다.
유난히 날씨가 맑아서인지, 그도 아니면 청춘남녀가 봉황처럼 어우러졌기 때문인지 하늘은 더욱 파랗게 보이고, 온 산에 만발한 춘화(春花)는 정면으로 보면 눈이 부시도록 선명했다. 마치 돌이라도 던지면 퐁, 하는 소리가 나며 물이 튈 것 같았다.
가깝게 다가오는 산.
산은 한 쌍의 남녀가 앉은 등 뒤에 있었고 그 반대쪽에는 수정같이 맑은 물이 흐르는 깊은 계곡이 있었다. 계곡에 흐르는 맑은 물은 얼음 조각을 풀어놓은 듯했다.
물 속에 햇살이 파고들며 먼 길을 떠나려는 남녀의 눈을 묶으려 했다. 그 때문인지 두 명의 남녀는 물경 한 시진 이상을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굳었는가?
그도 아니면 시간의 흐름을 잊었는가?
그것 외에는 다른 어떤 일도 할 수 없다는 듯 굳어 있는 남녀의 등 뒤로 하루가 저물고 있었다.
동방기득초상우(洞房記得初相遇)
편지합장상취(便只合長相聚)
하기소회유환(何期小會幽歡)
변작이정별서(變作離情別緖)
황치난산춘색모(況値珊春色暮)
대만일란화광서(對滿日亂花狂絮)
직공호풍광(直恐好風光)
진수이귀거(盡隨伊歸去)
그대와 나 신방에서 처음 만났을 때
오래도록 같이 살자 했었거늘
이토록 잠시 꿈같이 즐기고서
갑자기 이별케 될 줄 누가 알았으랴.
더욱이 울타리에는 봄색이 완연하고
온갖 꽃들이 잔뜩 피어 흐드러져 엉키었거늘
이 좋은 풍경 역시
임 따라 돌아갈까 두렵구나.
계곡을 따라 내려와 바위를 스치는 물소리보다 더욱 청아한 여인의 목소리가 울렸다.
아련하게 울리는 목소리에는 어딘지 모르게 시드는 제비꽃 같은 아픔이 스며 있는데, 목소리에 힘이 없기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지만 왠지 처량함은 지울 수가 없었다.
후드득!
날개 소리를 흩어놓으며 산새가 날아 하늘 높이 멀어져 가고 소맷깃을 파고들 것 같은 가벼운 바람은 귀밑머리를 살랑거리게 만들었다.
여인이 그렇게 떠나가기라도 하듯.
여인은 노래를 마치고 고개를 저었다.
연미(燕尾)로 다듬어놓은 머리카락은 가볍게 일렁이고 곧 발그레한 뺨을 드러나게 만들었다.
고혹적인 입술은 이미 닫혀 있었다.
석 달하고도 열흘을 빨아도 지치지 않을 것 같은 입술은 붉었고 마냥 아름답기만 했다. 차라리 붉어 자극적이지 않다는 말은 그다지 어울리는 조사(措辭)가 아니었다.
누구의 목소리인가!
구름이 한 점도 보이지 않는 푸른 하늘에서는 따사로운 춘양(春陽)이 쏟아져 내리는데.
누가 이별이라도 한단 말인가?
여인의 노랫소리는 애처롭기만 하다.
멀리 바라보이는 민강의 수면으로 충천한 일광의 끝자락이 떨어져 내리자 은파가 일어 다시 반사되었다. 마치 은어의 비늘이 빛을 발한 듯했다.
“호! 너무도 아름다워요.”
노래를 마치고 찬사를 터뜨리는 여인.
청아하고 어딘지 쓸쓸한 음색이 깃든 목소리로 유영(柳永)의 시부(詩賦) 중 주야악(晝夜樂)을 부르던 여인은 은파를 바라보며 낮은 소리를 질렀다. 애써 소리를 질렀지만 왠지 모르게 가라앉은 듯 들리는 목소리는 그녀의 몸에 남아 있는 힘이 그다지 넘치지 못하기 때문이리라.
유영의 가사(歌辭)라.
유영은 송대의 사인(詞人)이다.
그는 송대(宋代)의 시부(詩賦)를 이끈 사람 중 한 명으로 삼변(三變)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는 한때 천재로 인정을 받았으나 시류를 타지 못해 결국 노래가 있는 곳으로 흘러다니며 술 한잔에 시를 짓고 술을 얻었다. 끝내는 꽃이나 달을 보며 값싼 술잔에 저속한 노래를 읊게 되었다. 그가 죽은 후에도 돌보는 이 없어 가기(歌妓)들이 추렴해 모은 은자로 그를 장사 지냈다.
그런 이유로 단정한 가문의 영애들이나 정숙한 여인은 유영의 가사를 부르거나 탄주(彈奏)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유영의 주야악을 부른 이 여인은?
어쩐지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음색은 노래만큼이나 슬펐다.
“쿨룩, 쿨룩!”
그것으로도 모자라 밭은기침을 토하고 있는 여인의 등을 두드려주는 사내의 손길은 어쩐지 무기력하게 느껴지는데, 그것이 사내의 마음이던가.
여인이 앉은 곳은 거칠 것 없이 흘러가는 민강과 계곡에서 흘러 내려오는 작은 물이 만나는 곳에 위치한 커다란 반석 위였다. 화강암으로 보이는 바위는 오랜 세월의 풍진(風塵)을 보여주는 듯 닦이고 다듬어져 부드러운 여인의 몸매처럼 굴곡이 졌고, 수억 년 동안 빗물을 받고 수없이 많은 풍상(風霜)을 겪었을 반석의 윗면은 평평해 십여 명은 능히 앉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여인은 아름다웠다.
얼굴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입고 있는 옷도 아름다웠다.
십색(十色)을 논하자면 모자라지만, 적어도 오색은 갖추었을 것 같은 용모를 지닌 여인. 그녀는 노래를 마치자 부끄럽다는 듯 얼굴을 발그레하게 붉히며 힘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모습이 잔잔한 물에 비추어졌다.
“부용(芙蓉), 후회할 일은 하지 않아야 하겠지?”
“물론이에요. 공자.”
은은하게 들려오는 남자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아는 그녀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녀의 허벅지에 사내가 머리를 기대고 누워 있었다. 그러나 사내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머리를 돌리고 물 속을 내려다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사내의 머리카락을 더듬는 여인의 긴 손가락이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찰랑거리는 수면에는 그의 얼굴이 보였지만.
“모든 것은 유한(有限)이야.”
“알아요. 그나마도 공자를 모실 수 있었다는 것이 기쁨이었어요. 오래도록······ 아니, 죽을 때까지 가슴에 화인(火印)으로 남을지라도 후회하지는 않을 거예요.”
여인의 음색이 떨렸다.
가지런한 치아가 붉은 입술 사이로 드러났다.
아름다운 여인.
그녀가 보여주는 모든 자태는 멀리서 찾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곽박(郭撲)의 유선시(遊仙詩)에나 나올 법한 선녀의 모습이 아니던가!
“너무나 아름다워요.”
여인은 허리를 숙여 바위 위에 가지런하게 놓여져 있던 여러 개의 돌 중에서 유난히 검은 오석(烏石)을 엄지와 검지로 집어올린 뒤 허공으로 던졌다.
퐁!
삼 장을 날아간 돌이 물 속으로 빠져 들어가며 물방울이 튀어올랐다.
여러 개의 원으로 이루어진 작은 동심원이 파랑처럼 일어나며 퍼져 나갔다. 부용과 그녀의 몸에 기댄 모습으로 희미하게 투영되던 사내의 얼굴이 이지러졌다.
이십을 넘겼을까?
사내는 부용의 허벅지에 머리를 기대고 누워 그녀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육향에 취한 모습으로 시냇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죽은 듯 미동도 없었다.
시냇물 위로 비치는 햇살 때문인지 자세히 알 수 없지만 물 속의 조약돌이 더욱 동글고 말갛게 보였다. 마치 옥을 갈아 뿌려놓은 듯한 착각.
그 물 위에 붉거나 노란, 혹은 진홍색의 꽃잎들이 사뿐히 내려앉아 떠내려가고 있었다. 꽃잎에는 이슬이 맺혀 간혹 반짝, 빛을 뿌리고는 떠내려갔다.
또르르르!
사내의 맑은 눈에서 눈물이 한 방울 흘러 부용의 상군(翔裙)을 적셨다. 그녀가 입고 있는 상군의 붉은빛이 더욱 붉어졌다. 사내의 몸이 가볍게 떨렸다.
유난히 큰 눈과 가는 눈썹이 그윽해 보이지만 창백하기 이를 데 없는 얼굴을 지닌 사내였다. 만 명의 사내 중 그를 찾으라면 단 한 번에 보일 정도였지만 붉다 못해 자주색으로 보이는 입술이 그를 애처롭게 보이도록 만들었다.
추위를 타는 걸까?
몸에는 문인들이 걸치는 사령대금관유삼(斜領大襟寬衫)을 걸치고 머리에는 유건(儒巾)을 섰다. 그것으로도 모자라다는 것인지 이마에는 포룡건으로 질끈 동여매어 한껏 멋을 내보이고 있었다. 몸을 가린 의복이 화려함의 극치였으므로 어울리게 치장을 하려 했음인지 발에는 당록혜(唐鹿鞋)가 신겨져 있었다.
추위를 느낄 만큼 허술한 복장이라 할 수 없었다. 아니, 차라리 봄에 어울리는 복장이고 조금은 따듯한 옷이었다. 그러나 사내의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추워 보였다.
그것은 사내의 감정.
사내보다 부용의 모습은 더욱 추워 보였다.
“난, 추워요!”
여인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불현듯 다가온 것은 아니었다.
여인은 벌써 한 시진 동안 몸을 떨고 있었다. 강바람이 차갑다는 것을 모르지 않지만 일어서지 않고 바위에 앉아 물을 보며 시부를 나눈 것은 여인의 의지였다.
사내는 그녀가 바람에 몸을 노출시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말리지 않은 것은 그녀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들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것만이 그가 할 수 있는 일이었으니.
가인의 눈물이 두 볼을 타고 흘러 턱에 맺혔다.
한 방울 두 방울 흘러내리던 눈물이 어느새 줄줄 흐르고, 냇물에 비친 부용의 모습은 더욱 슬퍼 보였다. 그녀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더욱 슬퍼지는 격한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다시 울었다. 어깨가 들썩이며 흐느껴 우는 감정이 사내에게 전해졌다. 사내는 눈가를 찡그렸다.
감정을 속이기 어려웠을 테지만 사내는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그녀의 애틋한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는 표정이었고 생각에 잠긴 듯한 모습이었다.
부용은 허리를 숙여 사내의 몸을 껴안았다.
몸에 전해지는 작은 느낌으로 그가 격정에 떨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고마우신 분. 타인의 눈을 부끄럽다 하지 않으시고 천한 나를 위해 눈물을 흘리시다니······’
그녀의 미간에 수심이 어렸다.
기쁨인가?
사내의 눈에서 흘러내리는 눈물과는 다른 의미가 깃든 눈물이었다. 그것은 그녀조차도 주체하기가 힘드는 감정이었다.
생각하면 기가 막히는 일이었다.
춘풍이 넘치는 아지랑이 속에서 그녀는 자신의 생명이 서서히 줄어들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으니.
이미 오래 전부터.
부용은 가볍게 도리질을 쳤다.
자신이 원해 떠난 길이었다.
사내에게 어떤 아픔도 줄 수 없다는 것이 그녀의 생각이었고 의지였다.
“호! 정말 아름다워요.”
입을 열기는 했지만 스스로 생각해도 의미가 없는 말이었다.
그것도 잠시,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애써 웃음을 지으며 눈가를 소매로 닦아내었다. 허벅지에 기대 누워 있던 사내가 몸을 일으켰기 때문이었다.
“하하하! 부용, 네가 전구(前句)를 노래했으니 뒤는 내가 이어야 하겠지?”
사내는 이미 눈물을 닦은 후였다.
사내는 몸을 바로 세운 후 멀리 은파가 부서지는 민강을 바라보며 나직한 목소리로 읊조리기 시작했다.
일장적막빙수소(一場寂寞憑誰訴)
산전언총경부(算前言總輕負)
조지임지난변(早知恁地難)
회불당초유임(悔不當初留任)
기나풍류단정외(基奈風流端正外)
경별유계인심처(更別有繫人心處)
일일불사량(一日不思量)
야찬미천도(也眉千度)
이토록 외로움을 누구에게 말할 수 있으리.
전에 한 말 모두 거짓이었나.
일찍이 알았다면 이렇게 몸달지 않았을 것을······
뉘우친들 지난 일 어쩔 도리 없어라.
풍류란 걷잡을 수 없어
한층 더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으니
하루에도 저절로
이마가 천 번이나 좁혀진다.
지난날 유영의 사부(詞賦)는 우물가에서도 들을 수 있을 정도였지만 당대(當代)에 들어 그의 사부는 속되다 하여 금하고 있었다. 그러나 문사로 보이는 사내는 전혀 거리낌이 없다는 듯 결어를 지을 때까지 쉬지 않고 음을 맞추었다.
“욱!”
감정이 격했기 때문인가.
노래를 듣던 부용은 갑자기 미간을 찌푸리며 밭은기침을 토했다. 폐부의 모든 숨결을 끌어올리는 듯한 격한 토악질이었다. 부용은 황급히 품에서 목단(牧丹)이 수놓아진 사건(絲巾)을 꺼내 입을 막았다.
격한 숨결이 그녀의 등과 가슴을 들썩이게 했다.
사내는 급히 몸을 돌렸다.
“이런! 또?”
사내는 부용의 등을 두드리고 가볍게 몸을 쓰다듬어 주며 거친 숨결과 기침을 멈추게 했다. 부용이 몸을 돌리며 입에서 사건을 떼어내었다.
사건에 새겨진 목단에는 붉은 물이 들었다.
은은한 옥색의 천은 붉게 변해 본시 붉은 물감으로 염색을 한 것 같은 모양이 되었다. 부용은 귀한 사건이 피로 범벅이 되었지만 아깝다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어디······”
사내가 손을 내밀었을 때 부용은 몸을 돌리며 사건을 숨기려 했지만 사내의 완력을 어찌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이미 힘을 잃고 있었고 사내는 반드시 보아야 한다는 표정이었으니, 그녀의 손에 쥐어져 있던 사건은 너무도 쉽게 사내의 손으로 넘어가 버렸다.
“이런!”
사내는 사건에 맺힌 피를 보며 가볍게 얼굴을 찡그렸다.
안타까움이었다.
부용은 급히 품에서 손바닥보다 작은 동경을 꺼내들고 얼굴에 튄 피를 일일이 닦았다. 죽어가는 순간에도 사랑하는 님에게 추한 모습을 보이지 않겠다는 행동이 차라리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사내는 손을 들어 말리려 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피를 닦자 깨끗한 얼굴이 다시 드러났지만 더욱 창백해진 듯했다. 차라리 창백함이 화사함보다 수배는 아름다웠다.
“공자, 다시 돌아가는 것이 좋겠어요.”
사내는 눈을 들었다.
나후진(羅候眞), 그것이 사내의 이름이었다.
중원 전체는 아니라 해도 성도부(成都府)에서는 가장 영화롭다는 가문의 자식이고 학문이 하늘에 닿았다는 수재. 더구나 그와 그의 형은 사천제일의 무파라고 알려진 아미파의 제자라는 후광을 업은 사내였다.
그의 가문은 사천에서는 내노라 하는 가문이 아니던가!
사내는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아니, 너는 대설산(大雪山)의 만년빙(萬年氷)을 보고 싶다고 하지 않았느냐. 오래 전부터 준비한 일이다. 나는 네가 원했던 대설산까지 갈 생각이니 다른 말은 하지 마라.”
나후진은 고개를 저었다.
부용은 얼굴 가득 처연한 빛을 띠었다.
그의 아픔이 가슴을 후볐다.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의 아픔은 곧 자신의 아픔이었다. 비록 한때는 세상의 모든 남자를 가슴에 품어야 하는 기녀의 몸이었다고는 하나, 사랑하는 사람은 오직 하나, 나후진이 아니라면 그녀에게 사는 의미는 없어지는 것이었다.
더구나 자신의 죽음이 눈 앞에 있다는 것을 모르지도 않았다.
나후진도 모르지 않았다.
그가 부용의 병세를 걱정하면서도 길을 재촉하고자 하는 이유, 돌아가지 않으려는 이유는 죽기 전에 그녀가 원하던 대설산을 보여주고자 하는 열망이었으니.
그녀는 안다.
나후진이 자신을 위해 귀한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지도 않았다.
갈 수 있을지, 간다고 볼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
대설산에 이르기도 전에 부평초처럼 머리를 풀고 사랑하는 님의 어깨에 흑발을 드리우며 앵무새 같던 입을 다물고 반짝이던 눈을 감을지도 모른다.
굳이 대설산까지 가고자 했던 것은 죽기 전에 사랑하는 사람과 마지막을 준비하고 싶어서였다.
‘불쌍하신 분. 차라리 나를 만나지 않았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를 만났다는 것이 애초의 실수.
부용이 나후진을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 할 수 있지만 돌이켜보면 속이 타는 일이었다. 더구나 자신으로 인해 나후진이 오명을 쓰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렇지만 당신, 이렇게······ 만에 하나 죽기라도 한다면 나는······ 대설산, 추운 곳에서 죽기는 싫어요.”
부용은 말을 하다 급히 입을 막았지만 이미 늦었다. 그녀는 자신의 생명이 다 타버린 촛불처럼 꺼져 간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죽는다는 말은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나후진에게 어떤 부담을 줄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자신은 가기(歌妓)의 몸이었고 나후진은 천하가 부럽지 않은 가문의 자손. 그것만으로도 나후진은 많은 사람들에게 욕을 먹고 있었다. 가문의 위상을 깎아내리는 사람으로 인식을 받고 있는 것도 따지고 보면 부용 때문이었다.
나후진은 고개를 돌리고 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이마에 한 줄기 골이 패였다.
“음!”
나후진은 깊은 한숨을 불어내었다.
늘 조심을 하던 그녀였지만 입을 열고 나오는 말을 막을 수는 없었다. 어느 때고 죽음이라는 말은 그녀가 가능한 삼가는 말이었건만······
부용의 아픔은 나후진에게 더욱 큰 고통을 주었다.
부용은 늘 죽음을 생각하고 있었다.
부용은 자신의 죽음이 그에게 어떤 변화를 줄지 알 수 없었다. 또한 나후진에게 어떤 고통을 줄지 인식하지 못했다. 그러나 나후진이 자신 때문에 늘 괴로워한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았다. 그것이 고통이라면 나후진은 자신이 죽는 것보다 더한 고통을 느끼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언제나 나후진이 느끼는 감정의 질곡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그와 같은 말을 하는 경우는 없었지만, 갑자기 토해지는 피가 그녀를 당황하게 만들어 버렸기에 미처 깊은 생각을 할 수 없었다. 무심코 흘러나온 말이었다.
나후진은 몸을 숙이고 흐르는 물을 바라보았다.
‘어쩌면 좋지.’
그녀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커다란 바위가 머리에 부딪치며 산산조각으로 부서지는 듯한 아득함이 엄습했다.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라 해도 받아들이기엔 너무나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부용은 나후진의 표정을 바라보다 얼굴을 돌려버렸다.
갑자기 오한이 밀려왔다.
입술에서 피가 나도록 어금니에 힘을 주었지만 쉽사리 지워질 오한이 아니었다.
‘안 돼!’
그녀는 안다.
몸에 이는 오한이 추위 때문인지, 혹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피를 빨고 몸을 갉아먹는 아픔인지 파악할 수 없지만 결과는 다르지 않다는 것은 모르지 않았다.
정신이 혼미해지고 있었다.
그녀가 심한 괴리감과 참을 수 없는 비애에 젖어 몸을 파고드는 고통을 참고 있는 순간에도 나후진은 밀려오는 마음 속의 파문을 지우려 고개를 흔들었다.
그녀가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안 것이 오늘만의 일은 아니었다. 알면서도 그녀를 마차에 태우고 길을 떠난 것은 죽는 날까지 여한이 없기를 바라기 때문이었다.
‘그래, 그녀는 죽어.’
괴리감이랄까.
갑자기 밀려오는 허탈을 막을 수 없었다.
얼마나 더 오래 살 수 있을까. 하늘을 아우르는 지혜를 가지고 있다 해도 다가오는 죽음은 막을 수가 없었다.
차라리 인정하고 싶었다.
그래서 자신의 마음이 편해진다면 차라리 모든 것을 인정하고 싶었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의 아픔을,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어떤 신분이어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녀를 사랑한다.
감정만이 중요했다.
그를 아는 많은 사람들이 집착하는 그에게 질시를 보내었다. 한갓 창기에게 정을 쏟는 그에게 어리석다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부용은 그들이 느끼지 못하는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나후진만이 아는 일이었다.
이제 부용은 조금만 걸어도 숨이 차고 얼굴에 땀이 흐른다. 등골로 바람이 지나가는 듯하고 때때로 정신이 아득해지는 기분이 드니 차라리 누워 죽고만 싶은 심정이라고 지나가는 말을 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나후진도 인식하고 있었다.
언젠가는 그녀가 죽을 것이라는 걸······ 이미 가까이 왔다는 것을 모르지도 않았다.
당장 몸을 돌리다 죽을지도 모른다.
가녀(佳女)와의 만남.
그것은 결국 슬픔만을 잉태하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니,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나후진이었다.
“그래, 언젠가는 내 곁을 떠날 테지······”
나후진은 언제부터인가 현실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녀의 지혜가 하늘을 뒤덮을 수 있고 지닌 학문이 나후진을 경악시켰다 해도, 다가오는 죽음을 막을 수 없었다.
그의 목소리는 부용의 얼굴을 창백하게 물들이고도 남았다. 그것은 그녀가 느낄 수 있는 가장 큰 고통이었다. 자신의 몸에 번져 있는 아픔과 죽음의 그림자보다 나후진의 마음에 심어지는 허무가 더욱 안쓰럽고 고통스러웠다.
부용은 애써 몸을 바로 하며 그의 몸에 기대었다.
“공자.”
“그래, 언제나 난 불안했지. 언제나 이것이 꿈인가, 그도 아니면 마지막인가 하고 생각했지. 너를 생각할 때마다 난 숨이 차는 것 같았어. 받아들이기가 어려웠지. 밤마다 가위에 눌려 잠을 자기조차 마음이 놓이지 않아.”
나후진의 목소리는 차라리 독백이었다.
때때로 밀려드는 가위눌림은 나후진을 더욱 심한 고통으로 몰고 갔다. 이미 이 년 전부터 있어온 일이었다. 머리에 털이 난 이후 처음으로 사랑을 느낀 여인이었다. 그녀가 술을 파는 여인이라는 사실도 그의 마음을 묶지 못했다.
어느 날이던가!
갑자기 피를 토한 이후 때때로 혼수상태에 빠져 들더니 이젠 몸에 익어 아픔조차 느껴지지 않는다고 했다.
나후진이 보기에 그녀는 고통을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언제나 그렇듯 그녀는 모든 고통을 익숙하게 참을 수 있었다. 고통은 이미 습성으로 변해 있었고, 때때로 늪 속으로 빠져 드는 아늑함도 차라리 편안한 안식이 되었다.
지켜보아야 하는 나후진은 그녀가 태연할수록, 애써 웃음을 보일 수록 가위눌림은 심해졌다.
가위눌림을 당해 보지 않은 사람은 그 고통을 모른다. 잠을 자는 것도 아니고 혼미한 정신이 아닐 때에도 가위눌림이 온다. 눈을 뜨고 생각하는 중에도 가위눌림이 오면 그때는 차라리 소리라도 지르고 싶어지는 것이다.
부용도 안다.
이 년 전부터 하루의 반은 그녀와 지내고 있으니 나후진의 마음이 피폐해지는 듯한 고통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그녀라 해서 모를 리 없다.
“윽!”
부용은 또다시 밭은 신음을 뿌렸다.
마음에 아픔이 밀려오자 심장에 통증이 느껴진 것이다. 그것은 몸에 이는 통증과 달랐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깊은 생각 뒤에 밀려와 몸을 옥죄는 고통이었다. 손가락 하나라도 움직이면 마음이 놓이겠는데 까딱도 할 수 없었다.
차라리 고통을 즐겨야 한다는 것을 모르지 않지만 사람의 마음은 욕구에 팽배해지게 마련. 움직이고 싶다는 단순한 생각이 그녀를 더욱 고통스럽게 하는 것 같았다.
“부용.”
나후진이 그녀의 몸에 이는 변화를 눈치채고 몸을 숙여 부용을 껴안았다.
“어서 몸을 가릴 수 있는 것을 준비해라. 차를 끓이고 약을 준비해라!”
나후진이 소리를 지르자 멀찍이 떨어진 마차에서 사람들이 부산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부용을 따르는 시비들이었다.
마부가 서역에서 난 양털로 짠 모포를 가져와 부용의 몸에 둘러주고 시비들이 바삐 움직였다. 그녀들은 바닥에 풍로를 놓고 불을 살랐다. 참나무 숯에 불이 붙고 풍로가 달구어지자 옹기로 만든 다호(茶壺)에서는 물이 데워지고 한 곳에서는 약이 다려지는 냄새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어쩌다가······’
나후진은 멍한 시선으로 물을 바라보았다.
어느 한 순간 몸에 이는 혼란스러움이 그 자신의 혼과 몸을 분리시켰다. 몸이 허공으로 붕 뜨는 것 같았고 혼이 허공을 날아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자신의 눈에 자신의 몸이 보였다.
그것이 물에 비친 모습인지 자기의 모습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그것이 차라리 슬펐다.
문득 정신이 산란해지고 몸에 기력이 빠져 나갔을 때 나후진은 자신의 눈 앞에 다른 누군가가 허공에 부유하듯 움직이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부용이 아니었다.
백발의 노인과 아리따운 여인.
그 노인이 누구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십 년 전 돌아가신 부친이었다.
부친 곁에는 삼십이 넘어 보이지 않는 아리따운 여인이 안타까운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머니······’
머리를 구름처럼 틀어올리고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하는 여인이 그가 여섯 살이 되던 해 돌아가신 어머님이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언제나 그랬다.
불현듯 스쳐 지나가며 본 것처럼 어머니의 모습이 흐릿해졌다. 그리고 아버지의 모습도 멀어져 갔다. 안개가 흩어지는 듯한 그들의 얼굴은 눈물이 맺혀 있었다.
나후진은 고개를 돌렸다.
자신은 이미 자신의 몸 속으로 들어와 있었다. 눈에 보이는 것은 물에 비쳐 보이는 자신의 모습이었다.
‘그래, 나는 부용에게서 어머니를 보았는지도 몰라.’
갑자기 마음이 아련해졌다.
“공자.”
귀를 파고드는 음성.
고개를 숙여보니 부용이 아름다운 얼굴 가득 눈물 자국을 남기고 애처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이 창백하여 더욱 아름다웠다.
나후진은 빙그레 웃었다.
“너는 곧 죽겠지. 부용, 너는 참 철이 없구나. 죽을 것을 알면서도······ 태어날 때도 내 의지에 상관없이 태어났는데 이제 내 의지와 상관없이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가는 것을 보고 있어야 하는지 모르겠군. 어쩌면 이것이 내가 전생에 저지른 업보인지도 모르지.”
나후진은 애써 웃었다.
그의 웃음이 너무도 허탈했기 때문인지 부용의 눈가에도 그늘이 덮여들었다.
“공자.”
시비들이 약탕기를 들고 다가왔다.
옹기로 만든 탕기에는 검은 액체가 가득 들어 넘실거리고 있었다. 진한 약냄새가 코를 마비시켰다. 언제나 그렇듯 약은 그녀의 생명과 같은 것이었다.
나후진은 눈가에 가는 웃음을 머금었다.
그는 시비들로부터 약탕기를 받아 그녀의 입에 가져다대었다.
“어서······”
“알았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가라앉아 있었다.
부용은 마다하지 않고 나후진이 기울여주는 대로 약을 마셨다. 이미 익숙해진 모습이지만 그녀의 표정은 혀가 마비되고 목구멍이 막히는 것 같았다.
약을 마신 부용이 빙그레 웃었다.
“고마워요, 공자.”
나후진은 빙그레 웃었다.
그가 백방을 수소문해 구한 약이었다. 지난 이 년간 그가 구한 약은 적지 않아 그녀의 생명을 연장시켰지만 이제는 기대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당장 한 시진 후라도 그녀가 쓰러진다면 다시 일어설 수 있다고 장담할 수가 없었다.
약을 마신 부용의 얼굴에는 화색이 돌았다.
이독제독, 극약을 이용해 조제한 약은 그녀의 병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점점 나빠지는 것을 막을 뿐이었다. 그러나 효력을 발휘하던 약도 이제는 겨우 정신을 차리게 해줄 뿐이었다.
“술이 마시고 싶어요.”
부용은 나직하게 말했다.
미치도록 마시고 싶었다.
술을 마시는 일이 그녀의 생명을 갉아먹는 일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오래 전부터 그녀는 술을 삼가고 있었다. 또한 그녀와 밤이 새도록 뒹구는 일이 죽음을 앞당기는 일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도 그녀를 사랑하고 술을 마시고 싶었다.
‘부용이 원한다면······’
차라리 술을 마시다 그녀와 같이 죽고 싶었다.
술을 마시지 못한다면 그녀의 죽음조차 의미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가슴을 무겁게 했다.
부용은 한동안 그를 응시했다.
화사한 얼굴이 조금 창백해지고 눈에서 잔떨림이 일어났으나 애써 웃음을 지으며 손을 들어올렸다. 그녀의 손짓을 보고 시비들이 달려왔다.
“아씨!”
“술을 준비해라.”
나후진은 시비들에게 말하며 얼굴을 돌렸다.
시비들은 한동안 멍청한 표정으로 나후진과 부용을 바라보았지만 이내 물러갔다.
시비들도 알고 있었다.
부용이 술을 마시는 행동은 벌레가 나뭇잎을 갉아먹듯 생명을 단축시킨다는 것을. 그러나 나후진이 술을 요구함에 거부할 수가 없었다.
반석 위에 술상이 차려졌다.
마부와 호위하는 무인들, 그리고 시비들은 마차에서 평상을 가져다 반석 위에 펼쳤다. 펼쳐진 평상은 제법 넓었고 훌륭한 주탁이 되어주었다. 시비들은 옥색금라(玉色金羅)의 천을 펴고 술과 안주를 차리기 시작했다.
주호에는 나후진이 즐겨 마시는 옥미주(玉米酒)가 담겨 있었고 사천의 특산 산채가 놓여졌다. 옥수수를 여인들이 씹어 담근 옥미주에는 역시 추어(鰍魚:미꾸라지)가 제격이라. 추어를 가늘게 뜬 회가 놓여지고 대나무에 정성스레 조각을 한 술잔이 놓였다. 초두(斗:다리 셋에 손잡이가 달린 작은 냄비)에서는 유지가 타는 불빛이 번져 나오며 향긋한 내음이 밀려나왔다.
향록(香鹿)이 익는 냄새였다.
사천당문이 자리잡고 있는 당가타의 뒷산, 당가산의 당가봉에서만 잡힌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귀한 향록이 초두에서 익어가고 있었다.
나후진이 몸을 일으켜 세운 후 평상 앞에 앉자, 부용은 열두 폭 치마를 두 손으로 당겨 끌어올린 후 그의 겉으로 바싹 다가앉았다. 치마의 끝자락은 너무도 넓어 네 사람이 들어가도 모두 가려질 것 같았다.
쪼르르르!
부용은 망설임없이 술을 따랐다.
옥빛이 나는 술이 따라져 찰랑거렸다. 나후진은 말없이 술잔을 들었다.
그는 술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다만 모든 것을 잊어버리기 위해 마시다 보니 즐기는 듯 보였지만, 그저 술을 마시는 것은 자신의 괴로움을 잊기 위한 것일 뿐 즐기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술을 입으로 가져갔다.
한 모금을 마신 그는 다시 술잔을 내려놓았다.
술잔은 그리 크지 않았기 때문에 주당이라면 단숨에 들이켤 수 있는 양이었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그렇듯 술을 코에 대고 향기를 음미하며, 입에 넣고 나서는 헹구듯 입 속을 고루고루 스치도록 해 혀에 스치는 감촉을 즐기는 습관이 있었다. 그 후에야 그는 술을 목 안으로 넘겼다.
싸하는 기분이 혀를 말렸고 입천장을 훑었다. 그 후에야 술기운이 목을 타고 내려갔다.
그는 물을 바라보다 몸을 돌렸다.
“부용.”
“예, 공자.”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을까!
화들짝 놀란 부용이 목을 숙이고 그의 술잔을 바라보았다. 평소에 나후진이 술을 마시는 습관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부용이 술잔을 들여다볼 리 없었다. 그녀가 술잔을 들여다보았다는 것은 시간의 흐름을 잊고 있었다는 증거.
그녀의 얼굴이 노을처럼 붉어졌다.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던 거냐?”
“그건······”
부용은 대답하지 못했다.
나후진은 빙그레 웃었다.
“너의 병을 생각하고 있었느냐?”
나후진은 하늘을 올려보았다.
막상 물음을 던졌지만 대답을 들으려 한 말은 아니었다.
부용은 단 한 번도 그에게 자신이 겪고 있는 병명을 알려주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언제부터 그녀의 병을 알게 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알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었다. 무가의 후인으로 태어나 무공을 익히지 않았을 리 없다. 처음으로 무공에 입문했던 때가 네 살 때였다.
네 살 때 그는 가문에 전해 내려오는 심법(心法) 옥허잠밀경(玉虛蠶密經)을 익혔다. 또한 아미의 제자로 아미가 자랑하는 내공도 익혔다. 내공을 익힌 그가 인체의 혈도에 대해 모른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고 내기를 느끼지 못할 리 없다.
이미 오래 전에 그녀의 내기를 짚어본 터라 병명은 모른다 해도 증상은 알고 있었다.
무가의 자손.
누구나 인식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는 네 살 이후 학문을 익히기 시작했으며 병행하여 끊임없이 내공을 익혔다. 그리고 열한 살이 되던 해 아미산으로 들어가 아미복호사(峨嵋伏虎寺)의 제자가 되었다.
그의 내공이라면, 또한 그의 무공이라면 어떤 경우라 해도 사람이 몸에 지니고 있는 병의 증상을 모를 리 없다. 더불어 병명은 몰라도 병을 지닌 자가 느낄 아픔을 모를 리 없고 생명의 끈이 어느 정도 가늘어졌는지 모를 리도 없다.
‘그래, 인체에 있는 혈은 총 삼백육십일 개이고 십사경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 원인도 모르게 두 개의 경맥이 굳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지. 수태음폐경(手太陰肺經)과 족궐음간경(足厥陰肝經)이 굳어가는 병. 내가 불러온 수백 명의 의생들도 부용을 구하지 못했어.’
기분이 울적해졌다.
지난 이 년 동안의 고통이 그를 누구보다 뛰어난 의생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아무리 애를 써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룰 수는 없었다. 스스로 처방도 해보았고 내공으로 굳어가는 혈맥을 치유하려 애를 써보기도 했다.
어떻게든 그녀를 살리고 싶었다.
소용없는 일이었다.
나후진과 혼인할 가문, 사천당문에서 보내온 약재들도 병을 호전시키지는 못했다.
모든 것이 달라졌다.
사랑하는 여인이 죽는 것을 눈 앞에 두고 보며 인생무상을 깨달았고 무기력함을 알게 되었다. 가문이 지닌 황금도 소용없었고 지혜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단 한 번도 그녀를 사랑했다는 사실에, 아픔을 느껴야 한다는 이유에 대해 후회하지 않았다. 그것은 운명이라 생각했었다.
그는 세월을 버리기로 작정했다.
그녀를 위해 모든 것을 버렸다.
학문도 버렸다.
무공도 버렸다.
그녀가 살아 있을 때까지 곁에 있어주고 그녀가 원하는 것을 해주는 일이 자신이 할 일이라 생각했다.
가문이 지닌 명성도 그에게는 소용없는 일이었다.
술을 마시고 여인을 탐하며 산천을 유람하며 허송세월을 보내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그의 곁에는 항상 부용이 있었다.
그사이에도 그녀의 몸은 점차 말라비틀어지는 무껍질처럼 변해 가기만 했다. 이제는 누구도 그를 구할 수 없었다. 당장에 쓰러지지 않을까 조마조마한 가슴이 아예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심지어 그조차도 이제는 모든 것을 포기했다.
그는 생각을 바꾸었다.
부용이 죽기 전에 마음껏 즐기고 원하는 것을 들어주기로 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이기도 했다.
“공자, 아직은 바람이 차니 마차로 들어가심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만년빙을 보러 가는 것은 다음 기회로 미루심이 옳은 것 같습니다.”
부용은 얼굴에 처연한 빛을 지우지 못했다. 애써 웃음을 짓는다고 해서 얼굴에 어렸던 슬픔이 지워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지웠다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나후진이 보기에 어림없는 일인 것이다.
“그래, 그래야 하겠지.”
말을 마친 나후진이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의 손에는 술잔이 들려 있었으므로 부용은 주호를 들어올려 잔을 채워주었다. 향이 퍼져 나가며 옥미주가 채워졌다.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무슨 말을 하랴!
“응?”
술잔을 들이켜던 나후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멀리서 하나의 그림자가 물가를 거스르며 달려오고 있었다.
그림자는 마치 제비가 날아가듯 빠르게 다가왔는데 처음에는 그림자로 보이던 것이 사람의 형상이 되었다. 사람은 곧 여인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여인은 순식간에 그들이 앉아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나후진이 술잔을 들며 보았을 때는 무려 오십여 장의 거리였는데 술을 마시고 술잔을 내려놓았을 때는 그들의 앞에 다가와 있었다.
“어마.”
부용이 놀라 소리를 질렀다.
다가온 여인의 모습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중원의 여인으로서는 상상도 하기 힘든 의복을 걸치고 있었다.
이십에는 미치지 못했어도 십칠팔 세는 넘었을 나이였다. 전신에는 화려한 비단으로 만든 옷을 걸쳤는데 그 모습이 사내의 시선을 묶기에 충분했다.
옷을 만드는 양식이 중원과 다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그녀의 미모가 뛰어난 것은 속일 수 없었다.
키는 칠 척에 이르도록 훤칠했다.
중원의 여인이 보통의 경우 육 척에 이르지 못하는 키를 지닌 것과 비교했을 때 그녀의 키는 비정상적으로 크다고 할 수 있는 것이었다.
더구나 창백해 보이는 얼굴과 금발의 긴 머리, 하늘처럼 보이는 눈동자가 기이하도록 푸르렀다. 그 얼굴은 조화가 이루어져 있었으며 오뚝한 콧날과 붉은 입술이 차라리 처연해 보였다. 머리카락은 배꼽에 이를 정도로 길었는데 중원의 여인처럼 운두(韻頭)를 짓거나 말아올려 목단두(牧丹頭)를 하지 않았다. 길게 땋아내렸을 뿐이었지만 놀랍도록 아름다웠다. 그러나 오래도록 달렸기 때문인지 마구 엉클어져 있었다.
이마에는 금사로 만들어진 띠를 두르고 있었고 중앙에는 홍옥처럼 보이는 붉은 보석이 박혀 있었다.
의복은 보드라운 비단으로 만들어져 어깨가 드러났고 가슴도 깊게 파여 굴곡이 드러났다. 가늘게 가슴을 가린 의복 옆으로 투실투실한 가슴이 보였다.
중원의 복장과는 너무도 달랐다.
그뿐인가?
허리에서 길게 터진 천으로 인해 허벅지가 보였다. 허리를 동여 묶기는 했지만 걸음을 옮길 때마다 사타구니 부근의 허벅지가 언뜻 드러났다. 그 의복이 본시 그런 모양으로 생긴 것인지, 또는 누군가에게 찢긴 것인지 분명하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나 단의 처리로 보아서는 찢기기도 했지만 중원과 달리 신체의 많은 부분이 드러나게 만들어진 것은 틀림없었다.
너무나 아름답고 완숙미가 보이는 여인. 그러나 여인의 모습과는 어울리지 않게 손에는 기형도(奇形刀)가 들려 있었다. 도배가 마치 톱니 같은 모습.
더구나 입가에 흐르는 피와 옷자락이 군데군데 찢어져 피가 흐르는 모습은 어쩐지 그녀의 위중함이 드러나는 것 같았다. 부용이 놀란 것은 그녀가 나타났다는 사실이 아니었다. 물론 아름다워서도 아니었다. 나타난 여인의 몸에서 흐르는 피가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무슨 일이오?”
휙!
바람이 부는 소리가 들리며 두 명의 위사가 떨어져 내렸다. 마부가 달려오고 시비들도 달려왔다.
두 명의 위사는 나후진을 따라다니는 자들로서 운몽표국의 표두였다. 무공 또한 아미의 제자답게 결코 약하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일찍이 그들의 무공이 어느 정도인지 알고 있는 나후진은 손을 저어 그들이 다가오지 못하게 했다.
“공자.”
두 명의 위사 중 한 명, 여운(呂雲)이라 불리는 위사는 관인도(寬刃刀)를 뽑아들고 달려와 나타난 여인과 마주서려다 나후진의 제지를 보고 한 발 물러섰다.
또 다른 한 명의 위사, 이름이 강항(江抗)이라는 위사는 손에 두 자루의 혈리표(穴理)를 뽑아들고 만반에 대비하며 부용의 뒤에 버티고 서서 여인을 노려보았다.
잠깐의 대치.
그사이에 마부와 시비들이 다가왔다.
“헉! 헉!”
여인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무슨 일이오?”
나후진은 담담하게 물었다.
그의 가문이 무가였기에 자신도 무공을 익히고 있었고 가문에서도 적지 않은 무인들을 보았기 때문에 여인이 제법 뛰어난 무인이라는 것을 알아보기에는 조금도 어려움이 없었다. 더구나 그녀가 심한 부상을 입었고 입에서 흐르는 피로 보아 내상도 입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더불어 그녀가 위급한 상황이며 자신이나 부용에게 해를 입히기 위해서 나타난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저를······ 저, 숨겨주세요.”
여인의 음성은 간곡했다.
나후진은 잠시 동안 그녀를 바라보다 손가락으로 주탁(酒卓)을 가리켰다.
“이곳으로······”
“고마워요.”
여인은 나후진의 눈을 응시하다 두말하지 않고 술과 안주가 놓여진 주탁 밑으로 들어갔다. 누가 보아도 주탁이니, 숨은 자가 있어도 알 수 없을 것이었다.
주탁에는 천이 덮여 있어 여인이 숨었다 해도 모를 것이다. 더구나 나후진의 가문을 아는 자라면 섣불리 행동할 수 없을 것이니 주탁이 의심스럽다 해도 뒤집어보거나 들추어보지는 않을 것이다.
여인의 모습이 주탁 밑으로 사라지자 나후진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의 눈짓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알았다는 듯 위사들과 시비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는군.”
나후진은 술잔을 들며 여인이 달려왔던 곳을 바라보았다. 과연 하나의 인형이 날 듯 달려오고 있었다. 조금 전 달려왔던 여인보다 두 배는 빠른 몸놀림이었다.
3장 귀면암(鬼面岩)에서 이루어진 인연
양광이 하늘에서 부어져 내리고 있었다.
사내는 입을 열었다.
“친구, 자네는 풍류가 지나치군. 그렇지 않은가?”
“물론이오. 아주 좋은 곳이오.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는 곳이니 말이오. 이곳은 길과 제법 멀리 떨어진 강가인데 사람이 지나갈 리 있겠소. 만약 누군가 이곳을 지나다니는 번잡한 곳이라면 주탁을 펴놓고 술을 마시지도 않았소.”
은근한 질책.
술을 마시니 방해하지 말라는 말이다.
“그랬을 거야.”
사내는 빙그레 웃었다.
여인의 뒤를 추적해 온 사내는 마치 친구처럼 친근한 목소리를 토했다.
이십하고도 이삼 세나 되었을까.
전신에는 나후진에 뒤지지 않는 화려한 복장을 갖추었으며 허리에는 보석이 박힌 검병(劍柄)이 보였다. 검갑(劍匣)의 길이가 삼 척은 넘어 보여 검의 길이가 사 척은 되어 보였다.
칠 척에 가까운 키에 이마가 넓었다.
이마의 중앙에는 부처의 이마에 찍혀 있는 백호처럼 검은 점이 보였다. 흑백이 뚜렷한 눈이 크고 코가 뾰족해 어떤 사내보다도 아름다운 사내였다.
‘멋진 사내로군. 계집을 보지 못했느냐고 물어야 하는데 술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군.’
생각하면 어이없는 일이었다.
사람의 허를 찌르는 물음이었고 어찌 보면 대답을 듣지 않겠다고 일부러 말을 돌리는 것 같았다.
의당 계집이 어디로 갔느냐 물어야 하거늘.
“좋은 술이로군. 나도 한잔 주게.”
사내는 앉으라는 말도 하지 않았는데 털썩 주저앉았다.
“술이나 받게.”
나후진은 반이나 남았던 술잔을 입 안에 털어넣은 뒤 술잔을 앞으로 내밀었다. 사내는 주저하지 않고 술을 받았다. 나후진이 고개를 돌리고 눈짓을 보내자 부용은 조마조마한 시선으로 사내를 바라보며 술을 따르기 시작했다.
“좋지. 친구가 권하는 술에 미인이 따르는 옥미주라······”
사내는 단숨에 술을 털어넣었다.
그의 모습은 완벽한 주당, 그 자체였다. 나후진이 홀짝홀짝 마시며 술을 음미하는 주도(酒道)를 가지고 있다면 사내는 술의 향기 따위는 가리지도 않는 것 같았다.
사내는 술잔을 털자 입맛을 다시며 앞으로 내밀었다. 나후진도 술잔을 받았다.
“좋은 술이로군. 나는 가리마탁이라 하네.”
이름도 중원인의 이름과 달랐다. 외양은 분명 중원인이건만. 그리고 이름에서는 탁음(濁音)이 났다.
사내는 호탕하게 말했다.
“나는······”
“말하지 않아도 아네. 성도 최고의 풍류공자이자, 나씨 가문의 이공자. 나후진이라는 소리는 사천에 들어서면서부터 들었지. 이렇게 만나다니 이는 내 복이라 할 수 있지.”
“복?”
“그렇지 않나? 이미 자네의 이름은 사천을 벗어나 서역(西域)에도 알려져 있는데.”
“서역?”
“그렇다네. 나는 서역에서 왔지.”
쪼르르르!
부용은 가리마탁이라는 사내의 말투에서 적의를 가지고 있지 않음을 느꼈는지 표정을 회복하며 담담한 표정으로 술잔을 채웠다. 그녀의 모습이 소문난 기녀의 모습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었는지라 자신의 이름을 가리마탁이라 말한 사내는 얼굴 만면에 웃음기를 띠며 그 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부용의 모습은 여염집의 참한 색시 같은 모습이었다. 그녀가 몸을 팔고 웃음을 파는 여인이라 여겨지지 않는 모습이었다. 다소곳함, 그리고 단정함.
나후진도 가리마탁의 모습에서 긴장이 풀린 얼굴이었다. 그는 평소의 음미하는 주법에 어울리지 않게 단숨에 술잔을 비웠다. 평소 그답지 않은 일이었기 때문에 부용의 눈이 등잔처럼 불거졌다.
“공자······”
“괜찮아. 흉금을 터놓아도 좋을 친구를 만났는데 술을 마시지 않을 수 없는 일 아니던가?”
부용의 말에 나후진은 가볍게 손을 저으며 저지했다. 부용은 조금 머쓱해진 표정으로, 그러나 마음 속에 자리잡은 불안감을 떨쳐 버리지 못하겠다는 듯 얼굴이 다시 창백해지며 몸을 가볍게 떨었다.
가리마탁이 얼굴에 이채를 띠었다.
“소문이 사실이군.”
“어떤 소문?”
“나씨 가문의 수재 나후진이 풍류공자라는 소문을 들었지. 또한 부용이라는 절세의 기녀가 그를 따른다는 소문도 들었지. 사천 최고의 풍류객을 이곳 귀면암(鬼面岩)에서 만나다니······”
“서역에서 왔다면서 이곳의 지리를 잘 아는군. 이곳이 귀면암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니.”
나후진은 밝게 웃었다.
의도적인 웃음이 아니라 진정으로 마음이 푸근해지는 것 같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부용의 병세에 상심하고 있었지만 가리마탁의 모습에서 마음을 열고 흉금을 터놓아도 좋으리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마음 한구석에는 주탁 밑에 숨어 있는 여인에 대한 걱정이 있기는 하지만 당장에 가리마탁이 여인을 찾기 위해 검을 뽑거나 자신이 원하는 것을 요구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것으로 족했다.
사내가 되어 자신이 숨겨준 여인은 지켜줄 책임이 있었다. 아무리 마음이 맞는 친구라 해도 자신이 숨긴 여인은 보호해 주어야 한다는 생각이었고, 그것이 지켜지지 않을 때는 자신의 능력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가리마탁은 이미 자신이 추적하던 여인의 존재마저 잊어버린 듯한 표정이었다.
“누가 모르겠는가? 사천을 흔드는 나씨 가문의 이공자가 늘 부용이라는 미인과 바위에서 시를 읊는다는 소리를 들었지. 풍류공자가 즐겨 가는 곳이 어디어디인지도 들었네. 높은 산 위에 올라가 보면 마치 귀신의 얼굴처럼 보이는 바위도 말이지.”
“그래, 이 바위가 귀면암인 건 사실이야.”
나후진은 호탕하게 말했다.
사내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그들이 앉아 있는 바위를 사람들은 귀면암이라 불렀다. 그러나 사람들의 대부분은 왜 이 커다란 바위가 귀면암이라 불리는지 알지 못했다.
아무리 살펴보아도 커다란 반석 이상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흔한 바위였다. 물가에는 으레 커다란 바위가 있게 마련이고 귀면암이라 불리는 바위도 다르지 않아 물가에 자리하고 있었다.
아는 사람은 안다.
높은 산에 올라 내려다보면 비로소 바위가 흉측한 귀면의 모양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평소에도 나후진과 부용은 귀면암을 즐겨 찾았다.
오늘은 대설산을 가기 위해 떠났지만 부용의 바람으로 귀면암에 앉아 길을 잠시 늦추고 있었던 것이었다.
나후진과 부용이 귀면암을 즐겨 찾는 이유는 주변의 경치가 한눈에 들어오고 민강의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곳에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은 달랐다.
지금은 평소처럼 노래를 부르고 시구를 외우며 술을 마시기 위해 찾은 것이 아니었다.
부용이 원한 대로 대설산을 찾아가기 위해 길을 가다 지난날의 기쁨이 서린 곳에서 잠시 바람을 쏘이고 쉬어갈까 해서 멈춘 것이었다. 물론 다른 길로 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나후진은 부용이 언제 자신의 곁을 떠나게 될지 알 수 없었다. 당장이라도 그녀는 쓰러져 다시는 오지 못할 곳으로 갈 수 있었다. 대설산에서 다시 돌아올 수 있으리라고 장담할 수 없었다.
한 달 만에 정신을 차린 부용이었다.
불과 하루 전만 해도 부용은 자리보전을 하고 누워 있었다. 창백한 얼굴로.
모든 사람이 죽을 것이라 이야기를 했지만 나후진은 믿지 않았고 성심으로 그녀를 치료하며 보살폈다. 한 달 만에 깨어난 그녀가 한 말이 대설산으로 가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어디에서 태어났는지 모르지만 대설산에서 태어났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고 말했다.
“후, 천하의 난봉꾼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곳이야. 그러나 절세가인에게는 너무나 어울리는 아름다운 곳이야. 이런 곳에 귀면암이 있는 이유를 모르겠네.”
가리마탁의 말은 어찌 들으면 빈정거리는 것 같았지만 나후진은 그 목소리가 결코 자신을 비웃는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사람은 한 번의 대면으로 서로에 대해 모든 것을 알 수는 없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때로는 단 한 번의 만남으로 서로에 대해 가까워질 수도 있고 단 한 번의 만남으로 남녀의 사랑이 이루어지기도 한다
가리마탁과 나후진이 그랬다.
그들은 단 한 번의 만남으로 서로에 대해 속마음을 터놓고 의미 없이 빈정거릴 수도 있었다.
“하하하, 틀린 말이 아니지. 내가 난봉꾼이며 파락호라는 소문은 사실이고 부용이 내 곁에 있다는 말도 사실이지. 그러나 나도 귀면암이 이 아름다운 곳의 중앙을 차지한 이유를 모르겠네. 그것이 조화라면 모를까.”
가리마탁이 다시 술잔을 받았다. 부용은 그의 얼굴과 나후진의 얼굴을 바라보다 습관적으로 술을 따랐다. 가리마탁은 다시 술을 들이켰다.
두 번 다시 생각하지 않는 성미처럼 그의 행동은 주저함이 없었다. 술을 마시는 모습만으로 보자면 그는 죽음이 눈 앞에 닥쳐 와도 주저하지 않을 것 같았다.
“자, 받게나.”
가리마탁은 술잔을 내밀었다.
나후진이 술잔을 받으려고 손을 내미는 순간, 가리마탁의 손이 뒤집어지며 번개처럼 움직였다. 술잔은 주탁 위에 떨어져 내리고 손가락이 갈고리처럼 변하며 나후진의 손목을 감았다.
“읍!”
나후진은 잠시 놀랐으니 곧 빙그레 웃었다.
“공자.”
“손을 놓아라.”
두 명의 위사가 일제히 병기를 뽑으며 다가왔다.
휘이이이!
바람이 갈라지는 듯한 소리가 들리며 대도가 허공을 갈라왔고 두 자루의 혈리표가 가리마탁의 목을 파고들었다.
“경망!”
가리마탁은 반대쪽 손, 오른손은 나후진의 완맥(脘脈)을 잡고 있었으므로 왼손이었다. 왼손이 바람처럼 허공에 휘둘러지며 몸을 젖혔다.
따당!
손과 날아든 혈리표가 부딪쳐 불똥이 튀었을 때 대도가 숙여진 머리 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파팍!
혈리표가 주탁에 박혀들었다.
“멈춰!”
나후진의 목소리가 울렸다.
두 명의 위사는 황급히 물러났다. 그러나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대도는 이미 허공으로 쳐들려져 있었고 혈리표를 던졌던 강항도 허리에서 장검를 뽑아 가슴 앞에 세웠다.
그들은 막상 일 초를 전개했지만 아무런 소득을 얻지 못했다. 더구나 나후진의 목소리가 그들을 제지했다. 그들은 나후진의 표정에서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나후진은 가리마탁의 왼손을 바라보았다.
그의 왼손에는 묵철로 만든 보호대가 채워져 있었는데 아마도 넓은 팔찌처럼 보이는 그 보호대에 혈리표가 부딪쳐 퉁겨나간 것 같았다.
“물러가시오.”
나후진은 재차 말했다.
두 명의 위사는 머뭇거리다 두 걸음 물러났다.
“장난이 지나치시군.”
나후진도 나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는 입을 열며 자신의 손목을 잡은 가리마탁의 손가락을 바라보았다. 가늘고 길어 차라리 여자의 손가락보다 긴 손가락이었다. 손가락만 보아서는 분명 여인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두 개의 손가락에 제법 면이 넓은 환을 차고 있었다. 그 환은 유난히 붉은색을 띠고 있었는데 버드나무 잎이 음각으로 새겨져 있었다.
‘여인 같은 손이로군. 얼굴이 사내답지 않게 아름답기는 해도 행동은 철담간장(鐵膽肝腸)의 호기가 넘치는 사내인데, 손가락은 옥지소완(玉指小脘)에 섬섬옥수(纖纖玉手)라······ 그것 참.’
나후진은 빙그레 웃었다.
그의 손가락이 너무나 가늘고 길어서 부용의 손가락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가리마탁은 술잔을 들고 다시 내밀었다. 손은 이미 나후진의 완맥에서 멀어져 있었다.
가리마탁의 눈의 동그랗게 변했다.
“놀랍군. 소문이 사실이었어.”
가리마탁은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완맥을 잡았을 때는 아무런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을 것이다. 가리마탁의 눈동자가 구르는 순간 나후진은 온몸의 내기를 감추었다 가볍게 탄자결(彈字訣)로 퉁겨내었던 것이다.
“부용, 술을 따라라.”
나후진의 말에 화들짝 놀란 부용이 황급하게 잔을 채웠다. 가리마탁은 망설이지 않고 술잔을 들이켰다.
“친구는 세상을 너무 가볍게 사는군. 소문이 사실이라 믿지는 않지만 그것이 사실이라면 말일세.”
나후진이 빙그레 웃었다.
그는 가리마탁의 눈가에 가벼운 파랑이 이는 것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어차피 한번 왔다 한번 가는 것이 아닌가? 넓은 세상이네. 온갖 사람이 살고 있지. 다투거나 서로의 목숨을 위협하고, 때에 따라서 남의 재물을 탐내며 살아서 무엇 하겠는가? 오진에 쓸리기는 싫으니 이리 사는 수밖에. 차라리 풍류나 즐기고 세상의 이치를 배우며 사는 것이 내 보람일세.”
“옳은 생각이야. 내가 누구인지 궁금하지 않나?”
“궁금할 이유가 없지. 자네가 내 앞에 나타나 친구라 불렀으니 나 또한 친구로 부를 뿐, 또한 친구라는 것은 좋은 것 아닌가? 억겁의 인연이니 나 또한 친구가 있어 좋을 뿐.”
가리마탁의 눈에 서늘한 빛이 어렸다.
그는 자신의 손가락을 더듬어 지환(指環)을 잡았다.
“자네는 멋진 친구로군. 친구에게 주는 선물일세. 그리고 서역에 올 기회가 있으면, 아니······ 자네는 풍류공자이니 서역에 올 기회가 있을 것이네. 아니, 아주 가까운 시기에 사천을 떠나 유람을 시작하겠지. 그래야 마음의 상심을 달랠 수 있을 테니 말이야. 기회가 되어 서역에 오면 나를 찾게. 이게 있으면 나를 찾기가 그리 어렵지는 않을 것이네. 그곳은 요트칸이라는 곳이지. 서역남로(西域南路)를 따라 호탄[和田]에 와서 나를 찾게나. 나를 만날 수 있을 거야.”
나후진은 몸을 가볍게 떨었다.
천하를 유람하게 되리라는 말, 마음의 상심을 달랠 수 있다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짐작이 가기 때문이었다. 가리마탁은 부용에 대해 알고 있었다.
나후진의 표정이 변하는 것을 본 가리마탁은 손가락에서 지환을 뽑았다.
두 개의 지환 중에서 하나를 뽑은 그는 망설이지 않고 나후진의 손가락을 잡아당겨 끼워주려고 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노라면 불쾌할 수도 있었지만 나후진은 기이하게도 그의 행동이 불쾌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친한 친구가 된 듯싶었다. 친구라면 언제나 마음놓고 친구의 손가락을 잡을 수 있다. 그와 같은 이치로 보였다.
나후진은 원한다면 그의 손을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하는 모습을 바라보기만 했다.
가리마탁은 나후진의 손가락에 자신의 손가락에서 뺀 지환을 끼워주려다 검지에 들어가지 않자 그는 약지를 잡았다. 가리마탁에게는 검지에 끼어져 있던 것이지만 나후진에게는 겨우 약지에 맞았다. 그것만으로 나후진보다 가리마탁의 손가락이 턱없이 가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눈으로 보았던 것처럼 가리마탁의 손가락은 사내의 손가락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가늘었다.
“그만!”
가리마탁은 몸을 일으켰다.
나후진은 일어나지도 않고 그를 바라보며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입을 열었다.
“가려나?”
“가겠네.”
짧은 물음과 짧은 대답.
몸을 돌리려던 가리마탁은 의미가 있을 것 같은 눈빛을 보내며 입을 열었다.
“남의 일에 간섭하는 일이 그다지 바람직하지는 않다는 것을 알아두게. 세상을 살아가며 그나마 짧은 목숨마저 단축시킬 수 있으니 말일세. 언젠가 다시 만날 날이 있겠지. 그만 가네.”
가리마탁은 휘적거리는 걸음으로 강변으로 내려섰다. 그는 손을 한 번 들어보인 후 바람처럼 물을 차며 강을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했다.
파파팟!
물방울이 튀기 시작했다.
물에 잔잔한 파랑이 일기 시작했을 때 가리마탁의 몸이 물을 찬 제비처럼 날아올랐다. 마치 수면을 차며 달려가는 듯한 모습이었고 경공이 몸에 익었는지 놀랍도록 빨라 순식간에 그의 모습은 사라져 버렸다.
나후진은 자신의 손에 끼워진 지환을 바라보았다. 버들잎이 눈 앞으로 다가오는 것 같아 보였다. 막상 담대하게 그를 대하기는 했지만 어쩐지 꿈을 꾼 듯 몽롱하기만 했다.
“두려워서 혼났어요.”
부용이 짧은 한숨을 섞어 입을 열었다.
핏기를 잃어버린 그녀의 입술이 차라리 창호지처럼 창백하게 변해 있었다.
그뿐인가?
미간 사이에는 파란 심줄이 돋았다.
‘안 돼!’
나후진은 마음 속으로 소리를 질렀다.
그녀의 이마에 새겨지는 파란 줄, 얼마 전 그녀가 쓰러지기 전에도 그런 줄이 새겨져 있었다. 마치 살 속에서 빠져 나오는 것처럼 느껴지는 그 파란 심줄은 그녀를 한 달이라는 긴 잠 속으로 몰고 갔다. 그녀의 이야기로는 나이가 열 살이 되었을 때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했었다.
‘쉬는 것이 좋을 것 같아.’
나후진은 그녀를 말리고 마차에 눕혀주고 싶었다. 그러나 나후진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는 멋있는 사람이군요. 나는 우리를 죽일까 마음이 조마조마했었어요.”
“그는 애초에 우리에게 해를 입힐 생각이 없었다. 그리고 그가 나를 어쩔 수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세상에 두려운 것은 아무것도 없어. 그의 무공이 뛰어난 것은 사실이지만 사내로서 보여줄 수 있는 기도가 보이지 않는 것은 좀 이상하군.”
부용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기도라니요?”
“모르기는 해도 그의 무공은 형님에게 미치지는 못해도 숙부에는 미칠 거야. 언젠가 숙부가 등평도수(登坪度水)라는 말을 한 적이 있었지. 또한 숙부께서 물가에서 경공을 펼치는 것을 본 적이 있는데 가리마탁과 비슷한 경지였어. 숙부의 말씀으로는 물 위를 밟아도 빠지지 않고 지나가는 것을 등평도수라 한다는데 그건 꿈 같은 경지라 했지. 가리마탁이 물을 차며 경공을 전개하는 것을 보니 갑자기 등평도수라는 말이 생각나는군.”
“그렇군요. 그런데 공자께서는 왜 그에게 기도가 없다는 거죠?”
“그것은 이유가 있겠지. 숨겼거나 일부러 드러나지 않거나, 혹은 내가 느끼지 못했을 수도 있어. 확실한 것은 전혀 느낄 수 없었다는 거야.”
부용은 더욱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무공을 모르는 그녀가 이해할 수 없을 수밖에.
무공이 무엇인지 이야기를 들어 알고 있는 그녀라고 하지만 아는 것과 익히고 느끼는 것은 다르다. 그녀는 나후진에게 들은 것이 있어 무공에 대한 나름대로의 지식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익힌 적은 없었다.
그녀의 표정을 바라보던 나후진은 입가에 웃음기를 띠며 다시 입을 열었다.
“사람에게는 기도라는 것이 있지. 첫인상이라고나 할까? 사람은 연륜과 학식으로 인해 기도가 달라지기도 하지. 아이에게도 기도가 있어. 바로 치기가 어린아이의 기도인 거지. 그의 무공 정도라면 모르기는 해도 예리함 따위가 있어야 해. 즉, 칼날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라든지 무언가 알 수 없지만 눈 안으로 파고드는 것 같은, 무공에서 드러나는 바위 같은 상이 있어야 하는데 그에게는 그런 것이 없었어.”
“공자께서는 그것을 느끼나요? 그는 공자에게서 무엇을 느꼈을 것이라 생각하시나요?”
“글쎄, 그에게서 느끼지 못했으니 알 수 없어. 그가 숨겼거나 의도적으로 보여주지 않았을지도······ 혹은 내가 느끼지 못할 정도로 그가 완벽한 사람인지도 모르지. 그 또한······ 그가 내게서 무엇을 느꼈는지 알 수 없지. 그런데 네가 두려움을 느꼈다니 나로서는 그의 진의를 알 수 없구나.”
나후진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한때, 부용은 나후진을 만나기 전에는 많은 사내를 보았다. 그래서 자연히 사람에 대해 판단하는 능력이 생겼다. 그것은 세상을 살아오며 깨닫는 것이고 풍진에 쓸린 여인의 마음 속에 어쩔 수 없이 세워지는 분별력이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부용은 나름대로 사람을 구분하는 잣대를 가지고 있었다.
“모르겠어요. 저는 아무것도 알 수 없었어요. 다만 그의 몸에서 느껴지는 이질적인 느낌이 숨을 막히게 했을 뿐이에요. 그것은 조금 이상한 기분이었어요. 질투 같은······”
부용이 말 끝을 흐렸다.
“뭐라고? 질투, 하하하! 부용, 너는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 남자끼리 무슨 질투냐? 가리마탁이 너에게 질투를 보냈다고?”
나후진은 기분이 좋아져 웃음을 터뜨렸다.
평소의 그녀답지 않게 당황하고 있는 모습이 안쓰러우면서도 즐거웠다. 그녀의 아픔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다.
“후!”
한참 동안 웃음을 터뜨리던 나후진은 그녀의 상세(傷勢)를 생각하고 긴 숨을 불었다.
그는 스스로 사람을 볼 줄 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부용의 죽음이 가까이 왔다는 것을 알고 난 후부터는 잡학에 몰두한 그였다. 의서를 읽고 수명을 연장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천문을 익혔다. 이제 천문역학(天文易學)에 대한 상당한 경지에 이르렀지만 그녀의 생명을 연장시키는 방법은 찾을 수가 없었다.
그녀가 살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무엇이든 찾아야 한다고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이제는 아니었다.
그녀는 당장 지금이라도 쓰러진다면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모든 것을 포기한 후였다. 그는 자신의 어떤 힘도 도움이 되지 못함을 알고 있었다.
“술이 과하셨어요.”
부용은 말을 돌렸다.
그녀에게 있어 가리마탁이라는 사내의 기도는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의 생명이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었고 죽으면 나후진과의 인연도 끝난다는 두려움이었다. 가리마탁이 어떤 사람인지 물어볼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그랬나! 그래도 친구가 생겼으니 좋은 일이지.”
나후진은 빙그레 웃었다.
부용은 고개를 저었다.
느닷없이 나타나 술을 마시고 사라진 사내, 다짜고짜 친구라 불렀다고 해서 친구라 할 수 있을까? 그녀로서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묵묵히 빈 잔에 술을 채웠다.
“그만 나오시구려.”
나후진은 술을 마시려다 문득 생각이 났는지 주탁을 두드리며 입을 열었다.
숨어 있던 여인이 주탁의 천을 밀치며 모습을 드러내었다.
“나나(羅裸)가 은공께 감사를 드립니다.”
여인은 두 손을 가슴 앞에 포갠 후 삼배를 올렸다. 나후진은 인상을 찌푸렸지만 손을 저어 만류하거나 몸을 일으켜 세워 피하는 행동 따위는 하지 않았다.
일어나기조차 귀찮다는 표식이었을까.
사실 그는 여인이 나타난 후 여러 가지 일이 있었지만 단 한 번도 몸을 일으키거나 하는 행동의 변화를 주지는 않았다.
“그는 멀리 갔으니 그만 가보시오.”
나후진의 칼로 자른 듯한 말에 여인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이내 얼굴에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다가와 무릎을 꿇고 앉았다.
나후진이 얼굴을 붉혔다.
그녀가 앉자 가슴의 깊은 계곡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비록 그가 부용과 여행을 하고 밤마다 그녀를 안고 있기는 하지만 여색을 즐기는 사람은 아니었다. 더구나 처음 본 그녀가 아무리 아름답다 해도 정욕을 느낄 정도는 아니었다. 설사 그녀에게서 어떤 색감을 느꼈다 해도 드러낼 정도로 수양이 낮지도 않았으므로 여인의 가슴을 보았다는 것은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나후진은 고개를 돌렸다.
“저는 중원인들이 서역의 일족이라 부르는 우전(于)의 한 부족, 이미 사라진 것으로 알려진 우전국의 후예 혈사족(血沙族) 족장의 딸입니다.”
우전이라.
한때는 서역에서 일국을 이루었지만 이제는 그 뿌리조차 사라졌다고 알려진 부족이 아닌가?
아직도 그 뿌리가 남아 있었다니.
일찍이 감숙에 한사군(漢四郡)을 설치하고 서역으로 진군해 평정하여 서역도호부(西域都護府)를 설치한 곽거병은 서역을 분할하고 있던 모든 부족국가를 붕괴시키고 그 뿌리마저 삭초제근(朔草制根) 해 버렸다는 소문이 있었건만.
나후진은 고개를 저었다.
“그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소. 또한 나는 그다지 관계도 없는 일이고 관심도 없소.”
“그렇군요. 그래도 저를 구해 준 분이 누구인지 알아야 합니다. 이미 그의 말 속에서 공자께서 누구인지 알았습니다.”
“신경 쓰지 마시오. 우전의 혈사족이라······ 나에게는 중요한 일이 아니오. 당신이 가고자 하는 곳까지 그의 눈에 들키지 않고 돌아가는 일이나 신경 쓰시오.”
“알아요. 하지만.”
“그만 가시오. 나는 술이나 더 마셔야겠소.”
“그러나······”
자신을 나나라 밝힌 여인은 한참 동안 주저하더니 자신의 손가락을 들어올렸다. 그녀의 손가락에도 두 개의 지환이 있었는데 생긴 모양은 가리마탁이라는 사내가 준 것과 비슷했다.
다른 것이 있다면 색과 음각으로 파여진 무늬였다.
가리마탁이 손가락에 끼워준 지환은 붉은색에 버들잎 모양의 무늬였는데, 그녀가 손가락에서 빼든 지환은 은제(銀製)처럼 흰색에 붉은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무늬는 두 마리의 뱀이 몸을 꼰 모양이었는데 백색의 바탕에 혈선으로 그려져 있기 때문인지 조금은 난해하고 두려움을 줄 정도였다.
그녀는 지환은 앞으로 내밀었다.
“뭐요?”
“이것을 드리겠습니다. 이 백철(白鐵)은 피를 빨리 돌게 하고 독을 정화시키는 효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르기는 해도 언젠가 필요할지도 모르니까요.”
“나는 이곳을 가질 이유가 없소.”
“아닙니다. 이것은 억겁의 인연입니다. 공자는 저를 구해 주셨고 이는 죽음으로 갚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부족의 율법이기는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습니다. 다만 지금은 제 자신이 어쩔 수 없으니······ 이는 마음의 표식이니 공자께서는 가당타 말하지 마시고 받아주시기를······”
나나는 애써 웃음지으며 지환을 내려놓은 뒤 절을 하고 물러섰다.
그녀는 가리마탁이 사라진 반대쪽으로 멀어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경공도 만만치가 않아 곧 나후진과 부용의 시선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이상한 일이군요.”
부용이 어이없다는 투로 말했다.
일이 일어나고 해결되기까지는 불과 일 각이 걸렸을 뿐이었다. 나나가 나타나고 가리마탁이 나타났으며, 가리마탁이 사라지고 나나가 멀어졌다.
불과 일 각의 시간.
바람처럼 지나간 시간이었지만 그들이 어떤 느낌을 남겼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었다.
두 개의 지환.
그것이 그들의 표식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었다.
“그들은 서로 적이었을까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 내 생각에는 적이며 동지라는 생각이 드는군. 만약 적이었다면 가리마탁이 나나를 그냥 두지 않았을 거야.”
“그냥 두지 않았다고요?”
“부용, 너는 가리마탁이 몰랐다고 생각하느냐? 가리마탁은 주탁 밑에 나나가 숨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나 또한 암수를 펼칠 수 있는 시간은 충분했다. 그런데도 그들은 서로 조우(遭遇)를 피했다. 이는 우군이라는 뜻이지. 그러나 나나가 상처를 입은 것이 가리마탁의 손속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장담할 수 없으니 이 또한 적이라는 증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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